문장의 일

인문 2020. 6. 19. 12:02

- 케네스 코치의 시는 문장형성의 필요조건과 핵심을 포착하고 있다.
어느날 길에 모인 명사들.
형용사 하나가 지나간다. 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
명사는 충격과 감동으로 변화를 겪는다.
이튿날, 동사가 이들을 몰아 문장을 창조한다.
케네스 코치, 「영원히」(1960)
홀로 존재하는 단어는 그저 단어에 불과하며 특정범주에 속하는 품사일 뿐이다.한 단어가 연을 맺고 싶어 다른 단어들을 둘러보지만(데이트 상대를 찾는 일과 유사하다) 연을 맺을 방법이 전혀 없다. 이때 동사가 나타나 명사와 형용사를 이 어줄 방법을 제공하면서 작은 세상 하나가 돌연 출현한다. '어 여쁜 조앤은 한숨지었다. 존은 화가 났다. '나는 자랑스럽다.' '중요한 결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문장은 계속 만들어진다.
- 내용이 재미가 없을수록 연습용으로는 더 유용하다. 문장 연습을 하면서 내용에 집중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아도 되 고 (어떤 내용이건) 내용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 관계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래의 글쓰기 철학은 내용을 우선시 한다. '무언가에 관해 글을 써야 한다'라는 격언은 늘 등장하는 상투 어구다. 하지만 문장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형식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을 내용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최소한 이 책에서는 형식을 마스터하는 일이 우선이다. 형식이 없다면, 애초에 뭔가 말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나 쟁점에 관해 강력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 연습을 하는 단계에서 처음부터 문제나 내용 자체를 최우선 사항으로 놓으면, 그 문제를 언어적으로 올바르게 구사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글의 중심이 내용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사실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능력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에 관해 쓰느라 보낸 수많은 시간의 산물이다. 연주자의 실력이 음계 연습의 무한반복에 기반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장을 쉽고 유창하게 쓴다는 목적을 이루려면, 가능하면 별 의미가 없는 문장으로 연습해야 한다.
- 형식이란 무엇인가? ‘~했더라면' 이라는 문장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했더라면’ 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읽는 순간 문장에 관해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여러분은 결국 답을 구할 것이다. 대충 이런 답이 나올 것이다. '~했더라면'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 은 과거에 행해지거나 행해지지 않은 행위가 그 후나 현재에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행위와 인과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추상적인 설명이 바로 형식에 대한 설명이다. 형식으로서는 공허하지만 바로 이러한 공허함 덕분에, 즉 특정한 어떤 내용에만 잡혀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형식은 수많은 내용을 쏟아 넣을 수 있는 틀로 기능한다.
- 윌리엄 워즈워스의 유명한 소네트 한 구절을 보자. “수도자는 비좁은 수도원 방을 싫다 하지 않고, 은둔자는 좁디좁은 독방에 불평하지 않으며, 학자는 고독에 잠긴 성채를 마다하지 않는다.” 워즈워스가 하려는 말은 수도자와 은둔자와 학자가 하는 일(수도 생활과 명상과 공부)은 이들이 살고 있는 형식 구조의 제약으로 방해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과 성채로 비유되는) 구조는 자유의 폭을 제한해주기 때문에 (워즈워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나치게 큰 자유의 짐을 덜어주기 때문에) 오히려 규정된 공간 내에서 일을 더 정확히 해낼 수 있어서다. 여러분이 쓰는 글에 규정된 제약이 있다면(가령 써야 하는 시의 모든 행을 10개의 음절과 각운을 지키며 써야한다면), 문장은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오히려 쓸 수 있는 문장이 아무런 형식의 제약 없이 무수하다면, 한 단어의 의미조차 제대로 식별하기 어려워진다(이것이 정보 이론의 통찰 중 하나다). 그래서 워즈워스의 결론은 자신이 '소네트라는 아주 작은 땅덩어리에 갇혀 있어 흡족하다는 것이다. 소네트가 작은 땅덩어리라는 말은 한계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고 정해진 한계는 무한한 의미를 산출한다.
-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이 있고 형식을 갖춘(문어체) 문장과 구어체 문장이 있으며, 기대를 충족시키는 문장과 그렇지 않은 문장, 직진하는 문장이 있다. 놀라움을 안겨주는 문장이 있고, 수식어가 뒤쪽에 붙는 오른쪽 가지형 right-branching 문장과 앞쪽에 붙는 왼쪽 가지형left-branching 문장이 있다. 안심시키는 문장이 있고 불안과 동요를 유발하는 문장이 있다. 고요하고 평온한 문장이 있고 수류탄처럼 폭발하는 문장도 있다. 독자를 끌어들이는 문장과 밀어내는 문장, 독자를 어루만지는 문장과 공격하는 문장이 있다. 기교를 은폐하는 문장이 있는 반면, 독자의 박수갈채를 애원하는 문장도 있다. 언어라는 자원은 유한하지만 이를 배열하여 이룰 수 있는 효과는 무한하며, 글쓰기 기술이란 글을 쓰는 여러분이 바라는 효과를 산출하게 될 형식이라는 자원을 발굴하는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말을 보자. 포에 따르면 글쓰기에 돌입하는 모든 작가의 머릿속 최전선에 자리 잡아야 하는 내용은 이렇다.
마음이나 머리, (더 포괄적으로는) 영혼이 허락하는 수많은 효과나 인상 중에서 지금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글쓰기의 철학』(1846)
요약하자면 발휘하고 싶은 효과를 고르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그것을 실행할 방법을 알아내라는 것이다.
- 킹의 문장은 문체의 역사에서 키케로 시대식 문체라 알려진 것과 비슷한 형식을 갖고 있다. 존 홈스John R. Holmes는 키케로식 문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동사를 마지막까지 유예하는 길고 장려한 문장......... 종속절과 균형 잡힌 대구법이 사슬처럼 이어지는 문장.”(트레이시 슈발리에 편저, 『에세이 백과 사전Encyclopedia of the Essay』, 1997) 마이클 시핸Michael Sheehan은 『햄릿』에 나오는 구절을 사례로 제시한다. 햄릿의 아버지인 전국왕을 시해한 국왕의 동생 클로디어스는 이렇게 말한다. “(과인은) 그리하여 전에는 형수였고 지금은 왕비인/ 이 전쟁 중인 나라의 공동 통치권자를 그러니까 짓밟힌 기쁨이라고나 해야할까, 한 눈은 행복에 빛나고 또 한 눈은 슬픔에 젖어, 장례식에서 웃고 결혼식에서 비가를 부르듯, 기쁨과 슬픔을 고르게 저울질하며, 아내로 맞이했소.” 핵심 내용은 간단하다. 형이 죽자마자 형수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 프랑스 수필가 미셸 드 몽테뉴는 '키케로에 대한 고찰'에서 "나는 아무런 계획 없이 자연스럽게 글을 쓴다. 펜촉의 첫 움직임은 그대로 두 번째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라고 선언한다. 몽테뉴는 미리 해둔 생각이나 수사학적 설계 없이 자신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밀턴은 주장만 하지만 몽테뉴는 진심이다). “나는 (완결된) 존재를 묘사하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하루하루, 시시각각 발생하는 지나감이다...... 내 글은 다양하면서도 변화무쌍하게 발생하는 것들의 기록, 정해지지 않은 관념들, 모순 천지 로 닥치는 관념들의 기록이다.” (「후회에 관하여」)수필essay' 이라 는 말은 시도, 시험, 캐물음을 뜻한다. 수필 형식에서는 이어지는 절과 문장들이 전체를 아우르는 논리가 아니라 자유로운 연상에 의해 생산된다. 이러한 글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인상, 글의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사유의 논리적 진행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와 '그래서' 같은 접속 부사들은 그저 자리를 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와 '그리 고' 라는 접속사는 글쓴이의 경험을 앞으로 밀고 나간다. 그러 나는 생각이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그리고’는 ‘그런데 이게 내게 일어난 일이야'라는 뜻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스타일을 전문 용어로 병렬 구조Parataxis라 한다. 병렬 구조는 문장의 구조 요소들을 종속 관계로 이어놓지 않고 동등하게 배열’ 한다. 모리스 크롤Morris Croll이라는 문체 사가의 설명에 따르면 병렬 구조 형식의 문장들은 “가장 경미하거나 약한 이음줄에 의해서만 연결되며 각각의 문장 단위는 엄밀한 종속 구조 내의 단위들보다 강조하는 힘이 더 크다.”(『문체와 수사와 리듬Style, Rhetoric and Rhythm』, 1966) 몽테뉴 작품의 번역자인 도널드 프레임Donald Frame은 병렬 구조와 그 효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자유롭고, 구어체와 유사하며, 격식이 없고,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다...... 순서가 즉흥적이고, 범위도 격언부터 느린 것, 느슨한 연상까지 다양하다. 이를 통해 저자 특유의 멋과 정취가 전달
된다.”(『몽테뉴 수상록』)
- 스타인은 또 다른 병렬 형식의 대가 어니스트 헤밍 웨이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글쓰기를 바 라보는 헤밍웨이의 관점은 스타인보다 철학적인 성격이 덜했 고, 그의 문체는 젊은 시절 경험한 기자 생활에서 주로 비롯되었다. 헤밍웨이가 작가들에게 제공한 유명한 조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문장을 짧게 써라. 명료하게 써라. 영어에 어원을 둔 간단한 단어를 써라. 중복을 피해라. 형용사를 피해라(에즈라 파운드에게서 배운 교훈이다). 자신을 빼라. 헤밍웨이는 이러한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여 사실적이고 하드보일드한 문체, 장식이라고는 없는 건조한 미니멀리즘 스타일, 보석을 세공하듯 정교한 문장들을 만들어냈다. 미니멀리즘과 정교함은 헤밍웨이의 문체를 설명할 때 특히 적절한 표현이다. 문장을 세심하게 깎아 투명해질 때까지 다듬는다는 뜻이다. 별로 다듬지 않은 듯 보이는 문 체, 읽는 데 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 보이는 문체를 만드는 일은 자기를 지워버리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대상의 아름다움이 스스로 빛을 낼 때까지 층층이 깎아나가는 세공사의 작업 과 같다. 헤밍웨이의 문장은 스타인과 달리 독자에게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복잡해지는 일도 없다. 복잡함 자체가 들어설 자리가 아예 없다. 존재하는 것은 말갛게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사물 자체다(혹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 병렬 형식으로 글을 쓰는 일이 그저 질서 없이 이것저것 나열하면 되는 듯 보일 수도 있겠 지만(그게 뭐 그리 어렵겠는가?) 사실 이런 형식의 글은 능숙해지 기가 더 어렵다. 형식 제약이 비교적 적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규칙이나 방안이 애초에 전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규칙이나 방안이 없는데, 해야 할 것에 대한 규칙이나 방안이 있을 리 없지 않겠는가. (수도자는 수도원의 비좁은 방을 마다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이들은 좁은 방에 갇혔는데도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갇혔기 때문에 잘 지낸다.) 그러나 규칙이 없다는 것 자체도 이미 나름의 규칙이기는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음의 규칙' 이라고나 할까. 볼트와 너트를 끼워 넣듯 딱 맞춘 연결을 피할 것, 모든 것을 제자리에 배치하지 말 것, 일관된 시간 틀을 유지하지 말 것, 화자의 목소리 에 통일성을 기하지 말 것, 명료함을 추구하지 말 것. 결국 종속 형식의 격식을 버리는 '규칙들을 따르려면 먼저 그 격식부터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자신 있게 무엇인가를 버리려면 우선 버리려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병렬, 추가, 연상 구조를 지닌 문장 - 심지어 울프와 스타인 같은 대가가 쓴 문장도 마찬가지다 - 이면에는 탄탄한 설계와 엄밀한 조율을 거친 종속 구조의 문장 (당장 쓰이지는 않지만)이 있다. 앞에 서 제기한 질문-병렬 형식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문장도 문장 인가? - 에 대한 답은 '그렇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장들은 서 로 굳건히 엮인 구성 요소들의 논리 구조를 의식적으로 느슨히 풀어버린 문장이다.
- 첫 문장은 약속의 성격을 띤다. 플롯을 예고하거나,등장인물의 개요를 제시하거나,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논쟁을 시작하도록 유도한다. 첫 문장 앞에서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길이 환히 펼쳐진다. 최소한 지금 당장은 하지 못할 것이 없다. 반면 마지막 문장은 가능성 면에서 제약이 많다. 요약하거나 거 부하거나, 화제를 바꾸거나, 독자를 만족시키거나 더 갈망하게 만들거나, 모든 일의 미래를 점치거나 아니면 전망들을 한꺼번에 늘어놓는다. 마지막 문장에는 이점이 하나 있는데, 앞서 제공한 모든 내용이 발생시킨 흥미를 고스란히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시동을 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시동을 꺼야 한다. 이 때문에 대개 애수를 띤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독자는 정든 것을 떠나보내는 마음으로 작가의 고별사인 마지막 문장을 인심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별로 탁월할 것 없는 일부 마지막 문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유명세를 누린다.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두 도시 이야기』(1859)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을 보자.
이제 내가 하려는 일은 지금껏 해온 그 어떤 일보다 훨씬 훌륭한 행동이요, 이제 내가 가려는 길은 지금껏 가본 그 어떤 길보다 더없이 평화로운 휴식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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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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