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계질서

경제 2022. 12. 19. 20:15

- 질서가 파괴되었다가 재건되는 기간은 약자를 황폐화시키고, 진정한 강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한다. 그리고 혁명적인 새로운 접근 방법(즉 새 로운 질서)이 수립되어 번영의 시대가 도래한다. 그러나 번영의 시기가 오래되면 빈부 격차가 더 커져 부채로 인한 버블이 발생하여 다시 스트 레스 테스트의 시간을 거쳐 파괴와 재건(즉 전쟁)이 반복되고 여기서 다 시 새로운 질서가 창조돼 강자가 승리하는 사이클이 반복된다.
어려운 시기를 겪은 사람들이 이러한 질서의 파괴와 재건을 어떻게 생각할까? 독자들은 이런 시기를 겪어본 적이 없고 당시의 이야기는 무시무시하므로 실제 그런 상황에 처하는 상상만 해도 매우 불안해질 것이다. 이 시기에는 재정적인 고통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도 발생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이 더 심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누 구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가감 없이 말하면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은 고용을 유지했고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았으며 자연재해를 극복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어려운 시기가 사람들을 더욱 단결시키고 강인한 성 격을 갖도록 했으며 기본적인 것에 감사하는 소중한 경험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톰 브로카우 Tom Brokaw는 1930년부터 1945년 사이의 어려운 시절을 겪은 사람들이 강인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보았으며, 그들을 '위대한 세대 The Great Generation'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공황과 제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부모님과 부모님의 형제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 서 각자 이 시기를 겪은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니 모두 같은 의견을 가지 고 있었다. 불황과 전쟁은 대개 오래가지 않는다. 길어야 2년에서 3년이 다. 그리고 가뭄, 홍수, 전염병 같은 자연재해도 기간이나 강도가 다르기 는 하지만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고통이 감소된다. 또한 불황, 혁명/전쟁, 자연재해 등 이 3가지 어려운 위기가 동시에 닥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혁명/전쟁 같은 고난이 고통을 주기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에게는 잘 헤쳐나갈 능력이 있으며, 이를 극복해 서 보다 높은 수준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친 모든 비참한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 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인류의 적응력과 창조력을 믿고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미래에 당신과 나, 그리고 세계 질서 는 커다란 도전과 변화에 직면하겠지만 인류는 보다 영리해지고 강인해져 어려운 시간을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의 번영으로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 역사를 보면  그 어떤 정부도 개인을 재정적으로 보호해준 적이 없다. 당 신이 그 입장이 되어도 마찬가지겠지만 대부분의 정부는 통화와 신용의 창출자로서 자신들의 특권을 남용해왔다. 그 이유는 어떤 정부도 사이 클 전체를 책임질 정도로 길게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각 정부는 사이 클의 한 시점에 출범해서 주어진 여건하에서 가장 정부에 이익이 되며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정책을 편다(이 정책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행위도 포함된다. 물론 이로 인해 전체 사이클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기는 하겠지만),
사이클의 초기에는 그 어떤 주체보다 정부에 많은 자금이 필요한데 정부는 신뢰할 만하므로 대량의 부채를 발생시켜도 큰 문제가 없다. 그 런데 사이클 후반기에 집권한 새로운 지도자와 중앙은행은 부채를 상환해야 하지만 주사액이 별로 남아 있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설 상가상으로, 만일 파산하면 체제에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는 대기업까 지('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믿음이 무너지면 안 되니) 지원해야 한다. 그 결 과 정부는 개인, 기업 등 다른 경제 주체들보다 훨씬 더 심각한 현금 흐 름상의 문제에 봉착한다.
사실상 모든 경우에 있어 정부는 자신이 최대 채무자가 됨으로써 부 채가 쌓이는 원인을 제공한다. 부채 버블이 터지면 자산을 사들이고 화 폐를 찍어내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정부와 다른 경제 주체들을 위기에 서 구제한다. 부채 위기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런 경향을 보인다. 바람직 하지는 않지만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는 있다. 돈과 신용 을 창출하고 분배해서 모든 사람이 만족한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표적인 재정 정책이다. 역사적으로 지도자들은 자신의 통치 기간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상환 기간이 만 료되는 부채를 발생시켜 다음 지도자에게 짐을 떠안겼다.
정부가 돈을 찍어내 금융자산(대부분 채권)을 구입하면 금리가 낮게 형성되어 대출과 구매 활동이 활발해지고 정부는 적극적으로 투자자들 로부터 채권을 구입한다. 금리가 낮으니 투자자, 기업, 개인은 대출을 받 아 수익률이 높은 자산에 투자해서 이자를 지불하고도 수익을 얻는다. 이렇게 되면 중앙은행은 더욱 많은 양의 화폐를 발행해서 채권 및 다른 금융자산을 매입한다. 자산 가격은 올라가지만 정말 필요한 사람의 수중에 현금, 신용, 구매력이 돌아가지는 못한다. 이런 현상은 2008년 금융 위기 때 발생했고, 그 뒤로 코로나19 위기가 닥친 오늘날에도 발생 하고 있다. 돈을 찍어내 금융자산을 매입했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현금 과 신용이 돌아가지 않으면 정부는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필요한 곳에 사용한다. 미국 연준이 2020년 4월 9일에 이런 계획을 발표했다. 화폐를 찍어내 부채를 구입(부채의 화폐화)하는 방식은 돈을 가진 사람 으로부터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전하는 효과적인 조치로, 정치가들은 국민의 분노를 자극하는 세금 부과보다 이 방법을 더 선호한다. 이것이 중앙은행이 항상 화폐를 찍어내 가치를 떨어뜨리는 이유다.
- 암 치료와 마찬가지로 제일 좋은 치료는 진행을 중지시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한 결과 질서에서 혼란으 로 변하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역순도 마찬가지).
1단계는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고 참신한 지도자에게 권력이 집중되며......
2단계는 자원 배분 체계와 정부의 관료 제도가 수립되고 치밀해진다. 이 단계가 잘 진행되면...
3단계인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단계를 거쳐..
4단계가 되면 지출과 부채가 과다해지고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며...
5단계에는 금융상황이 악화되고 갈등이 심화되어...
6단계에는 혁명과 내전이 발생한 후...
1단계로 돌아가 전체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 혼란이 만연하고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강인한 성격의 지도자가 나타나 엘리트주의를 혁파하고 보통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사람들을 포퓰리스트라고 한다. 포퓰리즘은 정치적·사회적 현상으 로, 최상류층이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고 믿는 서 민들에게 인기가 있다. 이는 주로 빈부와 기회의 격차가 심할 때 나타나 서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화적 위협으로 간주되며, 권력을 쥐 고 있는 '엘리트 기득권층 Establishment elites'이 국민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을 때 더욱 인기를 얻는다. 국민의 분노가 축적되어 누군가 자신들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대변해주기를 바랄 때 포퓰리스트들이 권력 을 잡는다. 이 지도자는 좌파일 수도 있고 우파일 수도 있지만, 중도파라기보다는 극단주의적 성향이 강하며 국민의 감정에 호소한다. 또한 이들은 협조적이지 않고 대립을 추구하며 포용하기보다는 배척하려 한다. 이 때문에 우파 포퓰리스트와 좌파 포퓰리스트 간에는 타협할 수 없는 차이로 잦은 다툼이 발생한다. 극단으로 치달아 혁명이 발생할 때는 좌 냐 우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좌파의 포퓰 리즘은 공산주의의 형태로 나타났고, 우파의 포퓰리즘은 파시즘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에서는 평화적인 혁명으로 변화가 발생했다. 최근의 사례로 2016년에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우파 포퓰리즘의 표출이며, 반면에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 의 득세는 좌파 포퓰리즘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국가에서 점점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조 바이든Joe Biden 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극단주의를 경계하고 온건을 추구하는 시류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퓰리즘이 나타나면 신호로 생각하고 주의하라. 포퓰리즘과 양극화 가 심할수록 5단계가 많이 진행되었으며 혁명과 내전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라. 5단계에는 그래도 중도파가 조금 남아 있지만 6단계로 넘어 가면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 내전과 혁명의 전형적인 형태는 좌파 세력이 우파 세력으로부터 권 력을 탈취하는 것이지만, 좌파의 부와 권력이 우파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거니와 발생 배경도 다르다. 주로 기존 질 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무정부 상태에 빠져 대다수의 국민이 강력 한 지도자가 나타나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바랄 때 발생한다. 좌파 정부로부터 우파 정부로의 혁명이 발생했던 사 례는 1930년대의 독일, 스페인, 일본, 이탈리아, 그리고 해체가 진행된 1980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소비에트연방, 이사벨 페론Isabel Perón 으로부터 군사정권으로 권력이 넘어간 1976년 아르헨티나의 쿠데타, 프랑스 제2제정을 세운 1851년 프랑스의 쿠데타 등이다. 내가 연구한 모든 사례에 있어 성공이냐 실패냐는 한 가지 이유로 결정되었다. 좌파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우파의 혁명도 광범위하게 경제적 성공이 이루어지 면 성공이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다. 이런 이유로 인해 장기적으로 보면 전체적인 부가 늘어나고 분배가 잘 이루어지는 사회로 나아간다(즉 보통 사람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복지가 향상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빅 사이클 안에서 이를 경험하는 사람은 큰 그림을 볼 수 없다.
내전과 혁명을 이끄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 층 출신들이 많았다(지금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의 삼거 두는 부르주아 계급의 가정에서 자란 변호사 조르주 자크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부르주아 가문 출신의 의사, 과학자 겸 언론인이었던 장폴 마라Jean-Paul Marat, 그리고 역시 부르주아 출신의 변호사겸 정치인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an Robespierre였다. 혁명의 초창기에는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 fayette처럼 온건한 부유층 가정에서 자란 진보적인 귀족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마찬가지로 러시아혁명의 주도자인 블라 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법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레온 트로츠키 Leon Trotsky는 교육받은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국공내전을 이 끈 마오쩌둥은 온건한 부유층 출신이며 법학, 경제학, 정치 이론 등 다 양한 분야를 공부했다. 저우언라이 역시 공무원 집안의 중산층 출 신이다. 이 지도자들은 카리스마가 있었으며(오늘날의 지도자도 마찬가지 다),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협력하는 능력으로 거대 조직을 운영하여 혁 명을 가능하게 했다. 미래의 혁명가를 알고 싶다면 이런 자질을 가진 사 람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보다 공정한 세 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상주의자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 려는 잔혹한 혁명가로 변한다.
- 현명하게 힘을 사용할 때는 언제 협상하고 언제 밀어붙일지를 명확 히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어 떻게 힘이 변화할 것인지를 예상해야 한다. 가장 힘이 막강할 때 협상을 하거나 타협을 강요하거나 또는 전쟁을 해야 한다. 이는 힘이 약해지기 시작할 때는 미리 싸워야 하고 힘이 상승하기 시작할 때는 최대한 나중 에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국가와 공멸하는 관계에 빠졌을 때는 어떻게든 그 상태를 벗어 나야 한다. 관계를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잘 안 되면 전쟁이라도 해야 한다.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려면 가급적 힘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안 그러면 다른 국가들이 위협을 느껴 힘을 키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서로에게 위태로운 상호 확전으로 발전할 수 있다. 칼집 속의 칼처 럼 힘은 필요할 때만 꺼내어 휘두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때로는 힘을 보여주고 이를 사용하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협상력을 높여 전쟁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상대방에게 무엇이 제일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특히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지, 무엇을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면 양측이 공정한 해결 방식이라고 생각하 는 균형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힘을 보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불필요한 힘을 갖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힘을 유지하려면 자원, 특히 시간과 돈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권력이 없는 사람이 권력이 있는 사람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 1945년 이전 35년간 사실상 모든 부는 파괴되거나 국가에 압수되었다. 몇몇 국가에서는 자본시장과 자본주의가 기존 질서와 융합하지 못 하는 부분 때문에 발생한 분노로 인해 자본가들이 살해당하거나 투옥되 기도 했다. 우리가 시야를 몇 세기 전까지 확대시켜 보면 극단적인 호황 과 불황이 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의 2차 산업혁명이나 도금시대처럼) 자본이 넘치고 자본주의 가 꽃피는 호황기에 이어 (1900~1910년에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국 내 봉기와 국제적 갈등이 발생한 시기 같은) 과도기를 거친 후 (191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발생한 것처럼) 전쟁과 불황이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사이 클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불황과 호황을 발생하게 하는 인과 관계로 보면 현재는 사이클 초기의 호황기가 아니라 불황과 구조조정으 로 대표되는 말기에 와있음을 알 수 있다.
- 신용을 창출한다는 의미는 돈을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구매력을 창출하는 것이므로 단기적으로는 경기부양 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불황을 낳는 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사이클이 생기는 것이다. 과거부터 돈을 빌리거나 주식 발행으로 자금을 확보 하려는 노력과 돈을 빌려주거나 주식을 구입해서 이익을 보려는 욕망은 공생하는 관계였다. 이런 식으로 구매력이 상승했고 결국 상환 가능액 이상의 대출로 위기가 발생해서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금융위기와 주식 시장의 붕괴가 발생했다.
이 시기에는 비유적이건 실제건 은행가와 자본가들의 목이 달아났고, 엄청난 재산과 많은 사람의 생명이 사라졌으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법정통화(내재가치 없이 인쇄하는 화폐)를 발행한다.

- 항상 그렇듯 네덜란드도 매우 부유해지면서 경쟁력을 상실한 다. 그들의 임금은 전반적으로 유럽 다른 지역보다 높았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역시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예를 들면 차 같은 새로운 인기 품목을 제대로 취급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저조한 네덜 란드의 경제 성장 때문에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힘들어졌고 여러 곳 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로 해외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부를 지킬 여력 이 없어졌다.
이렇듯 1725년부터 1800년 사이에 전형적인 방식으로 네덜란드의 금융은 몰락했다. 다음 표는 암스테르담은행의 성장과 몰락을 잘 보여 준다.
늘 그렇듯 다른 분야에서는 네덜란드의 지위가 약해져도 길더화의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 이유는 국제적인 기업 간의 신용거래에서 환어음을 압도적으로 많이 이용하므로 네덜란드와 거래를 하고 싶은 기업은 암스테르담은행에 계좌를 개설해야 했고, 전세계 무역의 40퍼센트는 암스테르담은행을 통해 길더화로 결제가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무역과 금융 거래에서 네덜란드의 중요성, 길더화를 유 용한 교환 수단 및 부의 축적 수단으로 만든 암스테르담은행의 정책, 네 덜란드 기업과 은행이 길더화를 고집한다는 사실, 이 3가지 이유로 인해 길더화는 최초의 기축통화 지위를 굳건히 유지했다. 이로 인해 네덜란 드는 더 많은 부채를 질 수 있는 '예외적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 영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려면 1600년대 말 영국과 유럽 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7세기 초, 영국과 유럽에서 벌어진 대규모 분쟁은 이전의 모든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뒤집 어 놓았다. 9장에서 설명했듯 30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유럽에서는 대대 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30년 전쟁은 이념, 종교, 경제 계급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새로운 유럽 질서를 세우는 토대를 마련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들이 탄생 했고, 각국이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하면서 유럽은 분열했다. 영국제국은 부와 권력을 둘러싸고 여러 형태의 갈등을 겪었다. 계급 간 투쟁으로 볼 수 있는 잉글랜드 내전이 수 세기에 걸쳐 잔인하고 격렬하게 이어졌고, 네덜란드 통령을 지낸 빌렘 3세(영국의 윌리엄 3세)를 유혈 사태 없이 영국의 국왕으로 추대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내부 갈등은 공통적으로 군주제를 약화시키고 의회의 권력을 강화했으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왕국의 관계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냈다. 특히 잉글랜드 내전을 계기로 왕(찰스 1세Charles 1)은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반란을 주도한 지휘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통치 아래 군주제가 폐지되고 잉글랜드 연방commonwealth of England 이 수립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분쟁을 거치며 군주제에서 벗어나 법치주의를 확립했으며 왕과 의회 사이에 새로운 권력 균형을 이루어 훗날 제국으로 올라서는 토대를 마련했다. 영국 의회는 강력한 권력을 앞세워 실력 중심으 로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체제를 적절하게 허용했고, 총리는 왕실이 아닌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했다.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Elder와 그의 아들 월 피트Will Pitt Younger, 로버트 필 Robert Peel, 윌리엄 글래드스턴, 벤저민 디 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등 많은 정치인이 뒤를 이어 영국의 부상과 전성 기를 이끌며 국가 기틀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은 모두 지주 귀족 이 아닌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의회의 이러한 혁명적 강화는 1600년대 후반부터 유럽 전역에 퍼졌 던, 누가 어떤 권한을 가져야 하는지, 정부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계몽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것은 영국인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초기 과학 사상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새로운 인 간 중심 철학의 핵심은 사회가 이성과 과학에 근거해야 하며 정부의 권력은 신이 아닌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사고방식에 있다.
- 이 시기에는 토론과 회의가 권장되었다. 기초 교육이 개선되고(문맹률 이 감소했다), 인쇄물을 통해 사상이 보급되고(당시 최초의 백과사전과 사 전이 대량으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국경을 초월한 엘리트 계층(외국과 교류하며 교양을 쌓은 지식인)이 늘어나면서 정치·사회 사상을 논할 수 있는 새롭고 폭넓은 '공론장Public sphere'이 마련되었다. 당시 주요 사상가들은 서구권에서 오늘날까지 중요하게 여기는 주요 사상과 개념을 만들어냈다.
계몽주의 사상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the Great와 같은 독 재 군주부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채택한 대의 정부Representative gov- ernment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국가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은 특히 계몽주의의 강력한 정치 제도와 법치주의가 제공하는 이점을 누리는 동시에 계몽주의가 강조하는 과학과 그에 근거한 주요 발견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강점은 즉각적으로 번영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차 법치주의를 존중하는 영국의 체제가 강력한 교육과 결합하면서 영국은 상업과 혁신 분야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할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이는 영국제국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영국은 중앙 집권화된 강력한 재정 당국을 설립하여 재정적 으로 탄탄해졌고, 덕분에 경쟁국보다 훨씬 더 많은 세수를 거둘 수 있 었다. 18세기까지 영국의 세금 부담은 프랑스의 거의 2배에 달했다. 1694년에 설립된 영란은행은 영국 정부 부채의 유동성을 표준화하고 규모를 늘려 차입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개혁 조치와 더불어 국채 수익률은 1700년대 초반에 다른 국가들보다 급격하게 하락했다.

- 미국인들은 우주 프로그램, 빈곤과의 전쟁, 베트남 전쟁에 비용이 얼마나 들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이 매우 부유하다고 느꼈고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안전해 보였기 때문에 '총과 버터' 재정 정책, 즉 국방과 민생을 모두 챙기는 재정 정책을 무기한 감당할 수 있을 것이 라고 여겼다. 1960년대가 저물 무렵, 실질 GDP 성장률은 0퍼센트에 근 접했고, 인플레이션은 약 6퍼센트, 단기 정부 금리는 약 8퍼센트, 실업 률은 약 4퍼센트에 육박했다. 1960년대 미국 주식은 연 8퍼센트의 수익 률을 기록했고, 채권은 하락했으며, 주식 변동성과 연동된 채권은 연간 -3퍼센트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공식적인 금 가격은 달러 기준으로 계속 고정되었지만 1960년대 후반에는 시세가 소폭 상승했고, 원자재 가격은 계속 약세를 보이며 연 1퍼센트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 나는 당시의 인플레이션 심리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 돈을 빌리거나 급여를 받는 즉시 물건을 구 매하여 '인플레이션을 앞지르려 했다. 사람들은 금이나 해변에 자리한 부동산처럼 생산이 제한된 재화를 사들였다. 달러 채권에서 비롯된 공 포는 금리 상승으로 이어졌고, 금 가격은 1944년에 고정되어 공식적으 로 1971년까지 유지되었던 35달러에서 1980년에는 850달러 수준까지 치솟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통화와 신용의 역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높은 인플레이션과 금리를 경험하며 그것이 주는 고통을 처 절하게 느꼈다. 따라서 통화와 신용은 오랫동안 정치 문제로 남았고,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많은 갈등과 저항이 생겨났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 했고, 석유파동은 높은 유가 상승과 배급으로 이어졌으며, 기업과 노조는 임금과 복지를 놓고 투쟁했고, 워터게이트 사건이 벌어져 닉슨 대통령은 탄핵될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정치·사회 문제가 절정에 이른 건 1970년대 후반 이란 테헤란에 있던 미국 대사관에서 52명의 미국인이 444일 동안 인질로 잡힌 사건이 벌어진 때였다. 미국인들은 나라가 무 너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 상황이 훨씬 안 좋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1976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내 분이 일어났던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았다. 덩샤오핑의 시장 개혁을 계기로, 중국의 경제 정책은 기업의 민영화, 채 권과 주식시장의 발전, 기업가적인 기술/상업 혁신, 심지어 억만장자 자 본가의 융성 같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허용하며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물론 모든 자본주의적 요소는 중국 공산당의 엄격한 통제 아래 이루어 졌다. 이러한 지도부와 접근 방식의 변화는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을지라도 21세기를 형성하는 커다란 하나의 힘으로 작용했다.
- 통화와 신용이 크게 증가하면 통화와 신용의 가치가 떨어지고 다른 투자자산의 가치가 오른다.
2020년 연준의 통화 발행과 채권 매입은 1933년 3월 루스벨트, 1971년 8월 닉슨, 1982년 8월 볼커, 2008년 11월 벤 버냉키 Ben Bernanke, 2012년 7월 마리오 드라기가 취한 조치와 매우 흡사했다. 이제 일반적인 운영 규정으로 자리 잡은 이러한 통화 정책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 현재 빅 사이클 내 미국의 위치
내가 만든 모형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현재 빅 사이클에서 대략 70퍼 센트, ±10퍼센트 위치에 도달한 상태다. 미국은 아직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는 6단계의 내전과 혁명으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현재 내부 갈등 이 고조되고 있다. 최근 치러진 선거는 국가가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재 미국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듯 경계선을 긋고 거의 50:50으로 분열된 상태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a) 문제를 해결할 혁신적인 변화의 기회를 줄이는 정치적 교착 상태가 나타날 위험이 커지거나, b) 어떤 형태로든 내전과 혁명이 발 생할 수 있음을 지난 역사는 보여주었다.
5장에서는 빅 사이클이 5단계에서 6단계로 확대될 확률을 암시하는 전통적인 징후를 살펴보았다. 현재 내가 지켜보는 가장 중요한 3가지 징후는 1) 규칙이 무시되고, 2) 양측이 서로 감정적으로 공격하고, 3) 유혈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 1. 마오쩌둥의 시대(1949~1976년)
2. 덩샤오핑과 후임자들의 시대(1978~2012년)
3. 시진핑의 시대(2012년~현재)
각 시기에 중국은 이전 단계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장기적인 성 장그래프를 따라 움직였다.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일 어났다.
마오쩌둥은 1949년부터 사망한 해인 1976년까지 (다른 여러 장관과 특히 종신 총리였던 저우언라이와 함께) 권력을 강화하고 중국의 기관과 통치 체 제, 사회기반시설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공산당의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 다. 중국은 나머지 세계와 관계를 단절한 채 정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엄 격한 관료적 통제를 유지하는 엄격한 공산주의 체제를 따랐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직후인 1976~1978년, 강경파 4인방과 개혁파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덩샤오핑과 개혁파가 1978년에 권력을 장악하자 두 번째 시대가 열렸다.
덩샤오핑은 1997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를 지지하던 장관들과 함께 중국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했다. 이 시기에 중국은 좀 더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 고, 개방 정책을 펼치며 외부 세계와 접촉하고, 시장/자본주의 관행을 도입 하고 개발했으며, 재정적으로 훨씬 탄탄해졌다. 그 외 영역에서도 강력했으 나, 미국이나 다른 국가에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수준까지였다. 당시 미 국이 중국에서 매력적인 가격에 판매되는 품목을 사들이면서 미국과 중국 은 공생 관계로 간주되었고, 중국은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인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달러표시 부채를 지고, 중국은 달러 표시 자산을 확보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이 사망한 후에도 그의 후임자인 장쩌민과 후진타오锦(그리고 이들과 함께 중국을 이끈 지도자들)는 같은 방향으로 국가 운영을 계속 이어갔기 때문에 중국의 부와 권력은 근본적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건전한 방식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치자 미국과 여러 선진국에서 자산 가격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었고, 제조업 일자리가 중국에 쏠리는 현상에 대한 불평이 쏟아졌으며, 중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 서 부채 조달을 통한 성장이 증가했다.
2012년 시진핑이 집권했을 때 중국은 더욱 부유하고 강력해졌지만,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었고 지나치게 부패했으며 미국과 점점 대립각을 세우고 있 었다. 시진핑은 경제 개혁을 가속화하고 부채 증가를 억제하는 동시에 경제를 공격적으로 개혁하는 도전을 감행했으며, 선도 기술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지원하고 좀 더 포괄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중국의 교육 격차와 소득 불평등을 줄이고 환경을 보호하며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는 데 더욱 적극적 으로 나섰다. 중국의 국력이 증강하고 시진핑의 대담한 목표(예: 일대일로- 帶一路 구상, 중국 제조 2025 계획)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중국에 미국 제조업 일자리를 빼앗기는 상황을 저지하겠다는 공약을 내 세운 포퓰리스트이자 민족주의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미·중 분쟁은 고조 되었다. 미국과 비교했을 때 중국은 지배적인 강대국에 도전할 만큼 빠르게 힘을 기른 강국이 되었다.
-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78~2008년 중국의 고속 성장이 가능했던 이유는 1) 전 세계가 여전히 빅 사이클의 평화와 번영 국면에 있었고, 세계화와 자본주의가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널리 받아 들여졌다(당시에는 재화와 서비스를 비용 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곳에서 생산 하고, 국적에 대한 편견 없이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교류해야 하며, 민 족주의는 나쁘고 전 세계의 균등한 기회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선한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다). 동시에 2) 덩샤오핑이 끔찍한 결과를 낳은 공 산주의와 고립주의 정책에서 훨씬 효과적인 시장/국가자본주의와 개방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를 계기로 중국은 외부 세계로부터 많은 것을 습득하고 막대한 외국 자본을 유치했으며, 거대 한 수출국이자 채권국이 되었다.

- 전통적으로 무역/경제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는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에 꼭 필요한 수입을 차단할 때 발생한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이끈 미국과 일본의 연구 사례(6장 참조)는 현재 미·중 관계의 지리적 상황과 쟁점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유용한 참고 사례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석유를 비롯한 필수 원자재와 기술, 필수 수입품 등을 미국이나 다른 국가에서 수입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의 수입을 차단 하면 전쟁이 확대될 것이라는 명백한 신호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 국은 제너럴 모터스(미국보다 중국에서 더 많은 자동차를 판매하고 있다), 애플 같은 미국 기업을 차단하거나 많은 최첨단 제품, 자동차 엔진, 방어체계 생산에 필요한 미국산 희토류 원소 등을 수입하는 것을 차단함으 로써 전쟁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갈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움직임이 나 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에서 필수 수입품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의 단계적 확대 신호가 되어 훨씬 심각한 갈등을 초래 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발전 은 정상적인 과정으로 진행될 것이고, 주로 각 국가의 진화하는 경쟁력 을 기반으로 국제수지가 개선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양국은 국내 생산을 늘리며 '디커플링 decoupling (탈脫동 조화)'으로 전환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시진핑 주석이 말했듯이, 세계는 "지난 10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변화를 겪고 있으며 “보호무역주의가 늘어나고, 세계 경기 침체가 지속 되고, 국제 시장이 축소되는 외부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 (중국은) 거대한 내수 시장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중국은 지난 40년에 걸쳐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능력을 키워왔다. 앞으로 5년 동안 미국과 중국은 서로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게 될 것이다. 향후 5~10년 동안 차 단 위험이 있는 수입 의존도를 줄이는 속도는 미국보다 중국에서 훨씬 빠르게 나타날 것이다.
- 미국이 기축통화국으로서 이러한 지배적인 지위를 잃을 위기에 처한이유는 다음과 같다.
* 중앙은행 외환 보유고와 국부펀드 등 외국의 포트폴리오에 포함된 달러 표시 채권 금액은 여러 기준에 따라 책정된 적정 기축통화 보유 규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많다.
*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달러 표시 채권과 통화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늘리고 있어 연준에서 상당 부분을 화폐화하지 않고서는 미국 채권을 향한 적 절한 수요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동시에 미국 정부가 무시해도 될 정도의 매우 낮은 명목 수익률과 마이너스 실질수익률을 지불하고 있으므로, 미국 달러 표시 채권을 보유할 만한 금전적 인센티브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 전쟁 중에 교환 수단이나 부의 저장 수단으로 채권을 보유하는 것은 평상시 보다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채권 가치(법정통화로 지불받는 약속)와 법정통화의 가치는 다른 자산에 비해 하락할 것이다. 현 재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지만, 전쟁이 격화되면 문제가 될 것이다.
* 중국이 보유한 1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 채권은 전체 채권 발행 잔액인 약28조 달러(2021년 5월 기준)의 4퍼센트에 불과한 금액이므로 관리하기 힘 든 위험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 미국이 중국에 가한 조치가 그들 에게도 가해질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보유한 달러 자산에 대한 조치는 해당 자산을 보유한 다른 국가들이 인식하는 달러 채권 자산의 보유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고, 이는 해당 자산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킬 것 이다. 지금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향후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역할은 주로 국가 간 자유로운 교환에 달려 있다. 따 라서 미래에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의 이익에 반하는 방식으로 달러 흐름을 통제하거나 통화 정책을 시행한다면 달러는 이전만큼 세계를 주도하는 기축통화로 선호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이클의 다음 단계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외환 통제 가능성이 제기되면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 미국의 제재로 피해를 본 국가들은 제재를 피하거나 제재를 가하는 미국의 세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 의 제재를 받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은 제재에 직면할 위험에 처해 있다. 두 국가는 이를 대체할 결제 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으며, 중국의 중앙은행은 미국 제재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 디지털 통화를 만들었다.
- 요컨대 컴퓨터 분석 결과와 마찬가지로, 나는 가까운 미래에 중국과 미국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힐 만큼 강력해질 것이기에 위험 한 소규모 충돌은 벌어지더라도 상호 확증 파괴에 대한 기대 심리가 군 사 전쟁을 저지할 것이라고 본다. 양자 컴퓨팅 등 예상치 못한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이나 중국에 비대칭적인 이점을 제공하고 상 호 확증 파괴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교착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도로 상호 연결된 이 세계에서 미국인과 중국인의 건전한 연결과 교류는 중요도에서 떨어질지 몰라도 확실히 전쟁의 걸림돌로 작 용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위험은 증가할 것이다. 미국이 계속 쇠퇴하고 중국이 계속 성장한다면, 이제 중요한 문제는 각국이 품위를 지키며 계속 나아갈 수 있는지의 여부다. 실질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차이가 존 재하고 갈등을 해소할 상호 합의된 중재자나 절차가 없으면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중대한 위험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미국과 중국이 타협할 수 없는 가장 큰 차이는 대만에서 찾을 수 있으 며, 나는 대만의 상황을 매우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중국이 '하나의 중 국이 있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권을 놓고 싸 워야 하는 특별한 지역이 바로 대만이다. 대만은 중요한 지역이지만, 과연 미국이 방어해야 할 만큼 주요 접전지로서 가치가 있다고 여길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향후 10년 내 두 강대국 사이에 군사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촉매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분석을 종합해보면 중국이 경쟁력을 갖추고 점점 더 세계화 됨에 따라 무역/경제 전쟁, 기술 전쟁, 자본 전쟁, 지정학적 전쟁이 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레이엄 앨리슨이 그의 훌륭한 저서 《예정된 전 쟁》에서 설명했듯이, 지난 500년에 걸쳐 거의 동등한 두 강대국이 타협 할 수 없는 차이를 경험했고, 16개 사례 중 12개는 군사 전쟁이었으며, 80~90퍼센트는 주요 전쟁과 관련하여 대규모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졌 다. 나는 이러한 역사적 통찰과 전쟁 가능성을 낮추는 상호 확증 파괴 논리를 비교 평가했는데, 향후 10년 동안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약 35퍼센트에 달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위험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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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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