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수도 있다. 모든 것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의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선의 선택은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 확신하지 말라. 그러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회의론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회의론은 고대 그리스와 이후 로마시대에 걸쳐 수백년 동안 인기를 얻은 철학사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가장 극단적인 회의론자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고한 견해를 갖지 않으려 했다. 고대 그리스의 피론은 가장 유명하고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회의론자였다.
- 철학사에서는 모든 회의론자가 피론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항상 의심스러운 것처럼 사는 게 아니라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가 믿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면밀히 살펴보는 온건한 회의주의의 훌륭한 전통이 있다. 이런 종류의 회의적 문제제기는 철학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위대한 철학자는 회의론자였다. 독단론과는 반대다. 독단적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전적으로 확신한다. 철학자들은 정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증거를 갖고 있는지 묻는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일이며, 오늘날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단지 상대를 난처하게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온건한 철학적 회의론의 목적은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거나 적어도 우리가 알거나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회의론자가 되기 위해 절벽 가장자리에서 떨어지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곤란한 질문을 하고 사람들의 답변을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는 자세는 갖고 있어야 함
- 에피쿠로스에게 삶을 이해하는 열쇠는 우리 모두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었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는 되도록이면 고통을 피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삶에서 고통을 없애고 행복을 증진하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은 아주 단순한 생활방식을 택하고, 주위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친구들을 자기주변에 두는 것임. 그렇게 하면 대부분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임. 얻을 수 없을 것을 바라는 처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저택을 살 만한 돈이 없는데, 대저택을 소유하려는 절박한 욕망을 갖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삶 전체를 소모하지 말라. 단순하게 사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욕망이 단순하면 충족시키기도 쉽고 중요한 것들을 즐길 시간과 에너지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피쿠로스가 말한 행복의 비결이다
- 이 가르침은 일종의 치유법이었다. 에피쿠로스의 목적은 제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고, 과거의 쾌락을 기억함으로써 육체적 고통을 견딜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이란 그 순간에도 즐겁지만 나중에 기억할 때도 즐거우므로 우리에게 오래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음. 그 자신이 죽어가면서 다소 불안할 때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어떻게 과거에 나눈 대화의 즐거움을 되새김으로써 자신의 병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이것은 오늘알 에피쿠로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사뭇 다르다. 거의 정반대 의미다. 에피쿠로스에서 유래한 영어단어 epicure는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나 사치와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을 말함. 그는 절제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탐욕스런 욕구에 굴복하는 것은 더 많은 욕망을 만들어낼 뿐이고 결국에는 성취하지 못한 갈망의 정신적 고통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그런 삶은 피해야 한다. 에피쿠로스아 그의 추종자들은 색다른 음식보다는 빵과 물을 먹었다. 만약 비싼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면 곧 훨씬 더 비싼 와인을 마시고 싶어질 것이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덫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원 공동체에서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술잔치에서 먹고 마시고 섹스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주장. 에피쿠로스의 현대적 의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스토아학파라는 이름은 이 철학자들이 스토아라는 아테네 주랑에서 만나곤 했다는 데서 유래.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은 키프로스의 제논이었다. 초기 그리스 스토아학파는 실재부터 논리학, 윤리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들에 주목했다. 하지만 마음의 통제에 대한 견해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 스토아학파의 기본 사상은 우리가 바뿔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밖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 회의론자들처럼 스토아학파는 마음의 평정을 지향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처럼 비극적 사건을 마주할 때도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비록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우리의 통제 범위 안에 있지 않더라도 벌어지는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상이 스토아철학의 핵심. 우리는 행운과 불행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마치 날씨처럼 생각하지만, 그와 달리 스토아학파는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단순히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할 때 우리가 꼭 슬퍼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속일 때 반드시 화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감정이 추론을 흐리고 판단을 저해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감정을 통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 가장 유명한 후기 스토아학파 가운데 한 사람인 에픽테토스(55-135)는 처음에는 노예였음. 그는 많은 고초를 견뎌냈고, 고통과 굶주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심한 매질을 당한 탓에 절뚝거리며 걸었다. 육체는 노예가 되어도 정신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 그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었다. 고통과 괴로움의 대처방법에 관한 실제적인 조언을 담고 있는 그의 가르침은 이렇게 요약된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스토아철학은 베트남전쟁 중 북베트남 부근에서 격추당안 미국 전투기 조종사 제임스 B. 스톡데일에게 영감을 줌. 그는 수차례 고문을 당했고, 4년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지만, 대학에서 배운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적용해서 용케 생존. 그는 낙하산에 매달려 적지를 향해 떠밀려 가는 동안 아무리 가혹한 처사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짓에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결심. 스스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결코 상황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스토아철학은 그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너뜨렸을 고통과 고독을 견뎌내는 힘을 주었다.
- 나는 당신 말을 몹시 싫어하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는 사력을 다해 옹호할 것이다. (볼테르)
- 루소는 사회계약론 첫머리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매여있다'고 단언. 혁명가들이 이 문구를 외운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님. 프랑스 혁명을 이끈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도 이 문구에서 영감을 받음. 혁명가들은 부유한 자들이 수많은 가난한 자들에게 묶어 놓은 쇠사슬을 끊어내고 싶었다. 일부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주인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동안 굶주리고 있었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혁명가들은 가난한 자들이 충분한 먹거리를 찾을 수 없는 동안 부유한 자들이 보인 처신에 분노했다. 그들은 평등과 형제애와 더불어 진정한 자유를 원했다. 하지만 10년 전에 죽은 루소가 적들을 단두대에 보낸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찬성했을 것 같지는 않다. 반대 세력의 머리를 자르는 것은 루소보다 마키아벨리의 정신에 더 가까웠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의 천성은 선하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숲에서 살면 우리는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도시에 살게 하면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타인의 주목을 받는데 집착하게 된다. 이런 경쟁적인 삶의 방식은 심각한 심리적 영향을 미치고, 화폐의 발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질투와 탐욕은 도시에서 함께 산 결과었다. 야생에서 개개의 고귀한 야만인은 건강하고 강인하며 무엇보다 자유로울 테지만, 문명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 같다고 루소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이 성공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면서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를 조직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낙관했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제기한 문제는 모든 사람이 국가의 법은 지키면서 사회 밖에 있을 때만큼 자유롭게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이 되는 대가가 일종의 노예상태라면 너무 비싼 대가라서 치를 수 없을 것이다. 사회가 부과하는 엄격한 규칙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 규칙은 일정유형의 행동을 막는 쇠사슬 같은 것일 수 있기 때문. 하지만 루소는 해결책이 있다고 믿었다. 그의 해결책은 일반의지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일반의지는 공동체 전체, 국가전체를 위해 최선인 것이다. 사람들이 보호받기 위해 함께 모이기로 결정했다면 각자 자유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할 듯하다. 홉스와 로크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자유로운 채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알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을 견제하는 법과 일부 행동제약이 있어야 함. 하지만 루소는 국가안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동시에 국가의 법을 준수할 수 있으며, 이런 자유와 복종의 관념은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결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 만약 당신이 장밋빛 안경을 쓰고 있다면 시각적 경험의 모든 측면이 장밋빛으로 채색될 것임.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잊을수도 있지만, 안경이 당신이 보는 것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할 것이다. 칸트는 우리 모두가 이같은 필터로 세상을 이해한다고 믿음. 그 필터는 인간의 정신이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결정하고 그 경험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고,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 하지만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실재의 궁극적 존재방식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안경을 벗고 진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볼 수 도 없다. 우리는 이 필터를 떼어낼 수 없고, 그것이 없다면 결코 아무런 경험도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필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이 우리의 경험에 어떻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것뿐이다.
- 명법은 일종의 명령이다. 정언명법은 가언명법과 대조됨. 가언명법은 'x를 원하면 y를 하라'의 형식을 취함. '감옥에 가고 싶지 않으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가언명법의 예이다. 정언명법은 지시를 한다. 이 경우 정언명법은 간단히 '도둑질하지 말라'이다. 의무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명령이다. 칸트는 도덕성을 일종의 정언명법체계로 생각했다. 도덕적 의무는 그 결과나 그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의 도덕적 의무다
- 칸트는 우리에게 '절대 거짓말하지 말라'처럼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의무가 있다고 주장. 하지만 벤담은 우리가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은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로 귀결된다고 믿었다. 그 결과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거짓말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옳은 경우가 있다.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거짓말하는 것에서 더 큰 행복이 온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거짓말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다. 만약 친구가 당신에게 새로 산 청바지가 어울리는지 묻는다면 칸트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은 비록 친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이 아니라해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 반면 공리주의자는 가벼운 거짓말에서 더 큰 행복이 생겨날 것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만약 더 큰 행복이 생긴다면 거짓말은 올바른 반응이다.
- 공리주의는 18세기 말에 대두된 급진적 이론이었다. 그것이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행복을 계산하는 데 있어 모든 사람의 행복이 동등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벤담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사람은 한 명으로 간주되고, 어느 누구도 한 명 이상을 간주되지 않는다', 아무도 특별대우를 받지 않는다. 귀족의 쾌락은 가난한 노동자의 쾌락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당시 사회질서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토지사용방식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귀족들은 상원의원이 되어 영국의 법률을 결정할 권한까지 세습받았다. 당연히 일부 귀족들은 벤담이 평등을 강조한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아마도 그 당시에 훨씬 더 급진적으로 여긴 것은 동물의 행복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벤담의 믿음이었을 것임.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으므로 동물들도 벤담의 행복 방정식의 일부였다.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 이것은 헤겔의 관점이었다. 과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사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은 헤겔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헤겔의 저술이 지독히 어려운 이유는 칸트의 저술과 마찬가지로 추상적 언어로 표현되고 종종 스스로 만들어낸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 그 누구도, 어쩌면 헤겔조차 그 저술의 전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엉이에 대한 서술은 그나마 해석하기 쉬운 부분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밤이 되어서야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일어난 일들을 되돌아보고 있는 뒤늦은 단계에서야 인류 역사과정의 지혜와 이해가 온전히 나타날 것이라는 헤겔식 어법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위버멘시, 즉 초인에 대해 언급. 이는 관습적인 도덕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상상 속 미래의 인물을 묘사하고 있음. 다윈의 진화론을 이해하고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니체는 위버멘시를 인간발전의 다음단계로 보았음. 여기에는 다소 우려되는 점이 있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고, 타인의 이해는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더구나 나치가 지배민족이라는 왜곡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니체의 작품에서 가져와 사용한 개념이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니체가 말한 실제 의미를 나치가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니체가 정신이 이상해지고 나서부터 그가 죽은 뒤 35년이 될 때까지 그의 작품을 관리했다. 그 점에서 니체는 불행했다. 그의 여동생은 가장 극단적인 유형의 독일 민족주의자였으며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녀는 오빠의 노트를 뒤져서 자신이 동의하는 구절은 골라내고 독일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인종차별적 관점을 지지하지 않는 내용은 빼버렸다. 니체의 사상을 그녀 마음대로 짜깁기해서 발표한 '권력에의 의지'는 나치즘의 선전도구가 되었으며, 니체는 제3제국에서 인정받은 저술가가 되었다. 만약 니체가 더 오래 살았다면 나치즘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약자를 무너뜨리는 강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구절이 많다는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니체는 우리에게 양들이 맹금류를 싫어하는 것은 놀랄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양들을 노략질해서 잡아먹는 맹금류를 경멸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 형이상학은 우리의 감각 너머에 존재한느 실재를 탐구하는 학문을 설명할 때 쓰이는 단어이며, 칸트, 쇼펜하우어, 헤겔이 믿었던 철학사조다. 하지만 에이어에게 형이상학은 일종의 금기어였다. 그는 형이상학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에이어는 논리나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은 흔히 논리나 감각 어느 한쪽을 훨씬 뛰어넘어 과학적으로나 개념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실재들을 기술했다. 에이어에게 이런 형이상학은 전혀 쓸모가 없고 버려져야 할 뿐이었다.
- '언어, 진리, 논리'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당연했다. 에이어보다 나이가 많은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 대부분은 그 책을 몹시 싫어했고, 그 때문에 에이어는 일자리를 얻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철학사의 전통에서 철학자들이 수천년 동안 해온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몇몇 위대한 철학자의 업적들을 그렇게 드러내놓고 공격하는 책을 쓰는 것은 분명 용감한 일이었다. 의미있는 문장과 무의미한 문장을 구분하는 에이어의 방식은 이랬다. 어떤 문장이든 택해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질문을 하는 것이다.
(1) 그 문장은 정의에 의해 참인가?
(2) 그 문장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이 둘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 문장은 무의미했다. 이는 무의미함을 시험하기 위한 양면적 검사법이었다. 정의에 의해 참이거나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진술만이 철학자들에게 쓸모가 있었다. 이것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정의에 의해 참인 진술의 예는 '모든 타조는 새이다' 또는 '모든 남자형제는 남성이다'같은 것이다. 칸트의 용어로는 분석적 진술이다. 타조가 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직접 타조를 조사할 필요는 없다. 타조의 정의에 해당되는 조건이기 때문. 그리고 분명 여성인 남자형제는 가질수가 없으며, 어느 누구도 여성인 남자형제를 발견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음. 어쨌든 어느 시점에서 성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정의에 의해 참인 진술은 해당 용어에 내포된 조건을 제시한다. 그와 달리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진술(칸트의 용어로는 종합적 진술)은 진정한 진실을 전달한다. 진술이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려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보여주는 어떤 시험이나 관찰이 있어야 함. 예를 들어 누군가가 '모든 돌고래는 물고기를 먹는다'라ㄴ고 말한다면 우리는 돌고래 몇 마리를 잡아서 물고기를 던져주고 돌고래가 먹는지 확인하면 된다. 만약 물고기를 먹지 않는 돌고래를 발견했다면 우리는 그 진술이 거짓임을 알게 됨. 그것은 에이어에게 여전히 검증가능한 진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검증가능한'이라는 단어를 '검증가능한'과 '반증가능한' 두가지를 모두 망라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진술은 모두 사실에 입각한 진술이었다. 그것은 세계의 존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 진술들을 뒷받침하거나 뒤흔들 어떤 관찰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이 진술들을 살펴볼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만약 그 문장이 정의에 의해 참이지도 않고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지도 않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에이어는 단언했다.
- 실존주의는 다른 사람들이 샤르트르의 철학에 붙인 명칭이었다. 그 명칭은 우리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세계에 실존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런 다음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그와 반대일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주머니칼처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서례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샤르트르는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의 표현 방식에 따르면 우리의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데 반해 설계된 사물은 실존보다 본질이 우선한다.
- 시몬 드 보부아르는'제2의 성'에서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실존주의를 다르게 해석. 보부아르의 말은 여성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남성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었다. 남성이 기대하는 존재가 되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존재로서 여성은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여성은 본질, 즉 어떻게 존재한다고 선천적으로 주어진 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 실존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우리 존재의 부조리였다. 삶은 우리가 선택함으로써 그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다가 곧이어 죽음이 다가와 우리가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의미를 제거한다. 이에 대한 샤르트르의 해석은 이것을 인간존재를 쓸모없는 열정으로 묘사한 것이다. 즉 우리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선택을 통해 만드어내는 의미만 존재할 뿐이다. 소설가이자 실존주의와도 연관되어 있는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를 이용해서 인간의 부조리를 설명했다.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바위는 굴러 내려가고 시시포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는 이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시시포스의 노역과 같다. 아무런 의미가 없고, 모든 것을 설명해줄 답도 전혀 없다. 부조리하다. 하지만 카뮈는 우리가 절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살해서는 안된다. 대신 시시포스가 행복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왜 행복할까?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리는 무의미한 노고에는 그의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훨씬 낫다.
- 만약 한 과학자가 어떤 가설을 반박한다면, 즉 그 가설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 결과로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바로 그 가설이 거짓이라는 지식이다. 인류가 진보하는 것은 무언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가열했을 때 팽창하는 수많은 기체를 관찰한다고 해서 가설에 대한 확신이 조금 더 생기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지식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례는 실제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포퍼가 보기에 어떤 가설이든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반증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발상을 이용해서 과학과 그가 '유사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과학적 가설은 잘못이라고 입증될 수 있는 것이며, 거짓이라고 증명될 수 있는 예측을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요정들이 있어서 내가 이 문장을 타이핑하도록 시킨다'라고 말한다면 내 진술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관찰은 없다. 요정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면 요정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줄 방법이 없다. 그것은 거짓이라고 입증할 수 없으므로 전혀 과학적 진술이 아니다.
- 포퍼는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많은 진술이 이런 식으로 거짓임을 입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진술들은 시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예를들어 누군가가 모든 사람은 무의식적인 소망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고 말하면 그것을 증명할 시험은 없다. 포퍼에 따르면 무의식적인 소망에 의해 자극을 받는 것을 부인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증거 하나하나는 단지 정신분석이 타당하다는 추가 증거로만 받아들여질 뿐이다. 정신분석학자는 '무의식을 부정한다는 사실은 아버지에게 도전하고 싶은 강렬한 무의식적인 소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진술은 시험할 수가 없다. 그것이 거짓임을 보여줄 수 있는 상상가능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포퍼는 주장. 정신분석학은 과학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지식을 줄 수 없다. 포퍼는 마르크스의 역사 설명을 같은 방식으로 공격하며, 마르크르주의에서는 모든 가능한 결과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 마르크스의 설명 역시 거짓임을 입증할 수 없는 가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아주 오래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싱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공개적 발언을 할 때 위험을 감수한다. 그의 일부 강의을 두고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고, 그 자신이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음. 그럼에도 그는 철학의 가장 훌륭한 전통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끊임없이 기존의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철학은 그가 사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 싱어는 항상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공개토론을 할 각오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싱어가 자신의 결론을 충분히 조사가 이뤄진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논증으로 뒷받침한다는 것. 철학자로서 싱어의 성실함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결론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결국 철학은 토론을 바탕으로 발전한다.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논리와 증거를 이용해 논쟁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발전해나간다. 예를 들어 동물의 도덕적 위상이나 안락사가 도덕적으로 용납되는 상황에 대해 싱어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믿으며, 그 믿음을 사실이나 이유, 원칙으로 어떻게 뒷받침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여전히 있는 셈이다. 철학은 곤란한 질문과 어려운 도전으로 시작되었다. 피터 싱어처럼 등에 같은 철학자들이 건재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정신이 계속해서 철학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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