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것, 그것이 결국 행복해지는 가장 좋은 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강하지만 약하다. 노력할 수 있지만 노력한 만큼 지친다. 무리해서 미리 당겨쓴 에너지는 훗날 반드시 갚아야 할 때가 온다.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조금 더 유연하고 자유로운 내가 되기 위해 우선 어깨에 힘을 조금 빼보자. 몸의 센서를 켜고 신체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다. 불쾌한 인간관계를 피하고 예의와 매뉴얼로 내 몸을 지킨다. 이렇듯 별것 아닌 일로 행복해지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 대학생들을 앞에 두고 나는 "너희들에게는 거의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가능성은 생각만큼 무한하지 않다"고 누누이 말합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능성을 너무 믿은 나머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끊임없는 불충족감에 고민하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스트레스에 늘 시달리게 되기 때문. 어느 시점에서 자기가 가진 지적 혹은 신체적 자원의 한계를 알고, 우선순위가 높은 것부터 순서대로 잘 배분하는 법 또한 배워야 한다.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많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자원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적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자원을 분배하기에 앞서 우선순위를 정해두지 않으면 인간은 망가진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진다. 젊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혹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진다는 사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강하지만, 약하다. 노력할 수 있지만, 노력한 만큼 지친다. 무리해서 미리 당겨쓴 에너지는 훗날 반드시 갚아야 할 때가 온다.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지칠 때 솔직하게 '아, 너무 힘들다'고 말하고 적절히 넘길 줄 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태도다. 지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임.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지겹다는 것은 활동적이라는 증명이다. 그러나 '한 단계 위의 자신'에 도취되어 있으면 몸과 마음이 비명을 지를만큼 아파도 좀처럼 쉬지 못한다. 지쳐서 멈춰 서기라도 하면 나약한 자신을 탓한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도, 정신에도, 가혹한 일이다. 물론 성장하고자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애쓰는 것은 안된다. 인간은 꿈과 현실을 동시에 살아야 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매우 어렵다.
-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을 소중히 아껴야 한다. 스스로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가 탄 마차를 끄는 말고 같다. 때로는 쉬게 하고 물도 먹이고 먹이도 듬뿍 주면서 더없이 예뻐하면 말은 우리를 멀리까지 데려가준다. 그러나 끊임없이 재촉하고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면서 채찍으로 때리기만 한다면 머지 않아 피로로 죽고 말 것입니다.
- 홉스와 로크가 시민사회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면서 근대 시민들에게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을 주문한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이기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면, 결과적으로는 반드시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복리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필연적으로 가족과 친구들의 행복을 고려하고 공동체의 규범을 존중하며 세계평화를 바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최대화할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공동체의 기초라고 보았다. 문제는 이기주의가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운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를 구성하는 극히 일부의 국소적 쾌감과 환상적 욕망뿐이다. 그것들이 자기의 위치를 점유하고 독재군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기를 구성하는 다른 국소적 요소에 대해 이렇게 협소한 자기에게 온 힘을 다해 봉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짜증나서 사람을 죽이는 젊은이나 일시적 향락을 위해 매매춘과 마약에 빠지는 젊은이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자기가 축소되어 있을 따름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자기가 거의 모두 사라진 상태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들엑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란, 순간적인 정욕이나 분노나 증오를 말하는 것이 아님.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되지만, 그 외의 무수한 요소를 포괄하는 개방적 시스테을 가리킴. 그 시스템을 어떻게 균형잡힌 방법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 불쾌한 인간관계를 견디는 것은 인간이 받는 정신적 타격 가운데 가장 파괴적 요인 중 하나임. 그런 관계라면 반드시 가능한 한 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그 전까지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것, 존경받는 사회적 위치에 오르는 것,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것, 세심한 애정을 주고받는 연인을 얻는 것이 불가능했던 사람(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게을리한 사람)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다.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해 불쾌한 인간관계 속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동안, 기어코 견디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견디면서 자기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으로 굳어진다.
- 세상이 말하는 중년의 꼰대는 바로 견디는 자세가 극적으로 인격화된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함. 회사에서 상사의 욕설을 견디고, 부하의 막말을 참고, 클라이언트의 안하무인도 참고, 만원 전철을 타야 하는 장거리 출퇴근을 참고, 무뚝뚝한 아내의 얼굴을 참고, 아이들의 침묵이 주는 경멸을 참고, 거액의 대출금을 참고, 닳아버린 양복 팔꿈치를 참고, 치질의 고통을 참고, ... 이렇게 온몸이 인내로 둘러싸인 이들이 중년의 꼰대라는 존재다. 이렇게 된 데는 아마도 어느 시점에서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 인생의 어느 단게에서(아마도 상당히 일찍부터) 불쾌한 인간관계를 견디고 있는 자신을 허용했든가, 아니면 자랑스러워했든가, 어쨌든 인정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불쾌함을 견디는 것을 자신의 그릇이 크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지표 또는 인간적 성숙의 증거라는 식으로 합리화해버린 것이다. 게가 자기 등딱지에 맟줘 구멍을 파듯이 사람은 스스로 만든 패턴에 맞추 불행을 불러들인다. 불쾌함을 견디는 나를 그릇이 큰 사람이라 착각하면 그때부터 꼰대가 되는 길은 탄탄대로다. 그런 사람은 불쾌한 인간관계만을 계속 선택하게 된다.
- 사춘기 자녀와 부모 사이의 갈등이 찾아오면, '아, 드디어 이 시기가 왔구나' 하고 바로 떨어져 살면 된다. 본래 자녀들의 독립을 재촉하기 위한 본능이기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부모 자식간의 갈등을 불쾌한 인간관계라는 사회적 수준에서 바라보는 우를 범한다. 그리고 이 불쾌한 인간관계를 견디는 것이 부모와 자녀가 서로 자신의 그릇을 키우고 성숙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완전히 틀린 방향으로 생각이 나아간다. 나는 이 지점에서 단추가 처음 잘못 채워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모는 무언의 식탁, 아이의 늦은 귀가, 요란스런 음악, 마음에 안 드는 복장을 참는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아이는 부모의 화를 돋우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 일부러 부모에게 혼날 것 같은 시간에 귀가하고 일부러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장르의 음악을 틀고, 일부러 부모가 보면 졸도할 것 같은 옷만 골라 입는다. 이걸 참을 수 있다는 것은 부모가 여간 둔감하지 않고서야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부모는 이 불쾌함을 견디기 위해 의도적으로 둔감한 사람이 된다. 아이 쪽에서 보내는 '부모를 불쾌하게 하는 메시지'를 일부러 놓치고 애써 못 들은 척하면서 커뮤니케이션 경로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반격한다. 아이는 당연히 불쾌한 어필의 강도를 더욱 높일 테니, 결과적으로는 어지간히 불량한 아이와 어지간히 둔감한 부모라는 훌륭한 한 쌍이 탄생한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들의 품을 떠나려고 하는 시기가 오면 참아서는 안된다.
- 훌륭한 비즈니스맨은 리스크를 감수한다고 말하는 반면, 평범한 샐러리맨은 리스크를 짊어진다고 말한다. 리스크라는 것은 불가피하게 짊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리스크를 되도록 회피하려고 한다. 물론 리스크를 회피할 수는 있지만,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동시에 결정권까지 회피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사람들은 비즈니스에 참여할 수 없다. '내가 리스크를 감수하겠다'고 말한 사람이 그 비즈니스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리더가 되는 것이다.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감수를 기피하고 결정권을 타인에게 양도한 사람은 노동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 비즈니스와 노동의 차이는, 그러므로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의 차이도, 시급과 직위의 격차도, 자본금의 규모도 아니다. 그 사람이 리스크를 감수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 대화의 본래 목적은 유의미한 정보를 교환하는 데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이 이쪽 편에 있고, 그 말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 예를 다해 돌려보내는 사람이 저쪽 편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다.
- 극한까지 노출된 인간성의 어둠을 보아버린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은 매우 안이한 환상처럼 들리지만, 사실 인간의 진정한 어둠을 보아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그저 듣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참혹한 경험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그에 대한 보상의 마음으로, 후대에게만큼은 그런 경험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에 만들어낸 꿈이다. 전쟁이 뭔지, 기아가 뭔지, 공황상태가 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모른다. 극한 상황에서의 에고이즘이 어떤 것인지, 지휘관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얼마나 파멸적 사태가 벌어지는지, 누군가 한 사람이 임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 어느정도의 재앙을 불러오는지, 그런 것들이 주는 진짜 두려움을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
- 전후 민주주의가 허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전후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은 바로 그 사람들이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이 거의 없는 허약한 제도였기 대문에 더더욱 혼신을 다해 그것을 지키려고 했다. 우리는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낸 허구 속에서 태어나 그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 예전부터 계속 있었던 것, 그래서 어느 정도 배신하더라도, 상처 주더라도 훼손되지 않는 것이라 여기며 성장해왔다. 그래서 시야가 좁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 살며 호흡하고 있는 현재의 사회제도가 불과 얼마전에 특정 세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발판 위에서 만들어진, 고작 무대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특정 세대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취약한 제도에 불과함. 영화의 오픈 세트장처럼 앞면만 지어져 있을 뿐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트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취약한 제도라는 점을 충분히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내가 있는 세계는 어쩌다 보니 나타난 잠정적 제도일 뿐이고, 그것이 발생하기까지는 그 나름의 전사가 있었으며, 어떠한 역사적 필연성의 요청이 있었기에 출현한 것이고, 역사적 조건이 바뀌면 변화하고, 때가 되면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앞에서 말한 추태를 보인다.
- 일본이 못쓰게 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부터지만, 이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태어나 무서운 것을 보아버린 리얼리스트 세대가 사회 일선에서 물러난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 세대가 물러남과 동시에 일본에서는 진짜 의미의 엘리트 즉 위험감수자들까지 사라져버렸다.
- 취직기피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젊은 여성층에 비하면 남성들은 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음. 하지만 동년배 여성들에게 비해 스트레스에는 강한 듯 보인다. 눈앞에 흔들리는 당근을 보면서 찰싹찰싹 채찍을 맞는 경험을 어린시절부터 계속해왔기 때문일 것임. 남자아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당근에도 채찍에도 둔감해지고 있다. 맞는 데 익숙해져서 엉덩이 가죽이 두꺼워졌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런 환상에 너무 진지하게 다가결 경우 몸이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젊은 남성들이 이미 마스터해서 성공모델이라고 해봐야 리얼리티도 없고, 일단 내일 회사는 가야지 하며 절반은 열심히 절반은 대충하는, 미묘한 적당주의 기술을 훈련받은 적이 없다. '적당히 하는 것'은 훈련을 받지 않으면 몸으로 익힐 수 없는 사회적 기술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사회적 성공이라는 환상이라는 오히려 믿기 쉬운 것이 아닐까 한다.
- 미국이 가진 성적 트라우마의 기원 중 하나는 개척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7-18세기에는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대거 건너왔다. 당시 여성들은 동부에 머물러 있었고 프런티어까지 진출한 경우는 극히 소수였다. 영화 서부개척사에서 데비 레이놀즈가 "캘리포니아에 가면 남자 40명에 여자는 1명이야"라고 하는데, 그런 남녀간의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인구비율은 19세기말까지 이어진다. 당연히 남자와 결혼하거나 사귀어주는 여성들은 절망적일 만큼 드물었겠지요. 여자 하나를 놓고 남자들 수십 명이 다투다가 결국 한 사람만을 선택을 받는 것이다. 나머지 남자들은 다들 손도 못 쓰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프런티어 남녀관계의 기본구조였다.
- 19세기 프런티어에서는 한 사람의 남자가 자기 소유의 여자 한 명을 얻는 것은 생사를 건 경쟁의 승자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이 경쟁이 프런티어의 남자들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스트레스였는지는 상상조차 힘들다. 참단할 만큼 희소한 여성의 숫자를 고려할 때 자신의 DNA는 거의 학실히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 존재론적 불안이 프런티어에서의 미국 남성의 원체험인 것이다. 트라우마는 서사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다. 여기서 미국인들은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서사를 조직적으로 구성한다. 나는 그 이야기가 바로 서부극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자 별거 아니다. 남자끼리의 우정이 제일 중요하다. 여자가 고르는 남자 별 볼 일 없다, 여자는 항상 틀려먹는 남자를 고른다, 진짜 남자는 여자에게 선택받는 일 없이 생을 마친다, 라는 것이 할라우드 서부극이 선택한 스토리 라인이다.
- 인류학이 주는 교훈처럼 죽은 자들이 고이 잠재우는 일은 살아 있는 자들의 중요한 임무다. 죽은 자들이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애도의 서사를 계승하는 것. 그것이 죽은 자가 되살아나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에 화근을 불러오지 않도록 막기 위한 인류학적 비용이다. 위령제를 치르지 않으면 유령이 나타난다는 오컬트적이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구석기시대 이후 세계의 모든 사회집단이 '한을 남기고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살아 있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관점에서는 합의에 도달했다는 인류학적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을 따름이다. 유령으로 변해 나타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유령으로 변해 나타난다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집단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서부극은 그러한 진혼을 위한 서사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버림받고,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고독속에서 죽어가는 운명으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남성이 본래 가부장적이라든가 남성 중심적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특정 국가 국민들의 에토스를 형성하는 것은 그 국민이 '어떠한 배경에서 형성되었는가'에 관한 서사와 건국신화, 즉 내셔널 히스토리다. 우연찮게도 미국에는 여성들이 희소한, 다시 말해 성적으로 불균형한 지역을 두 세기에 걸쳐 유지하지 않고는 국토를 개척할 수 없었던 역사적 조건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이들이 그 후 사회에서 화근을 불러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미소지니 서사'를 망설임 없이, 거의 성무일도(카톨릭에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바치는 기도를 말함)를 올리듯이 성실하게 생산해온 것이다.
- 지금 미국 여성들은 매우 어려운 포지션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페미지즘, 차별철폐, 정치적 올바름 등을 구현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에 따라 심판자, 고발자의 위치에 놓여 있지만, 사실은 의도적으로 고안한 미움받는 포지션임. 그런 위치에 미국 여성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한편 일상생활에서는 남녀평등주의로 인해 바로 그 아메리칸 스탠더드(능력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에서 비롯된 과열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사회의 이면에서는 어마어마한 가정폭력, 강간, 살인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렇듯 현재 미국의 여성들은 아주 어려운 조건하에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고발하는 것은 고발당하는 쪽의 증오를 산다는 뜻이다. 이기는 것은 진 사람들의 질투를 산다는 뜻입니다. 성공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반목의 시선을 산다는 뜻. 이런 포지션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관점으로 보면,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까 한다. 전 세계의 여성들이 왜 그런 왜곡된 여성의 입장을 모델로 삼아야 하는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이제 그런 건 그만하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말하는 비판적 입장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이제 성공이라든가 승자라고 구분하는 거 그만하시죠? 안 그래도 피곤한데"라고,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여성들이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이다. 돈, 성공, 권력, 위신, 정보 등등 그런 건 어떻데 되든 상관없다. 부족하더라도 마음 따뜻한 행복이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발언할 수 있는 이들이 어른 여성 중에 자꾸 나타나지 않으면, 지금의 젊은 여성들이 처한 높은 스트레스 상황은 좀처럼 변하기 힘들 것이다.
- 페미니즘의 아킬레스 건은 현재 시점의 사회적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할 것을 요구하는 한 분배되는 것에는 가치가 있다는 점을 반드시 전제로 해야한다는 사실. 그런데 이른바 사회적 자원으로 불리는 것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문제는 남성들이 그런 것들에 그다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그런 것들을 위해서 그 정도로 애쓰지 않는다. 일이야 빠져서 하면 나도 모르게 즐기게 되지만, 그건 일이 즐거워서이지 그 결과로 오는 높은 지위, 높은 임금, 높은 명예가 반드시 일을 하는 첫번째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큰일을 해낸 남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지위, 임금, 명예를 좇지 않는다. 주변에서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찔끔찔끔 하는 일이거나, 사람들이 하도 그만두라고 하니까 갑자기 하고 싶어진 일이거나, 혹은 사회를 위해서, 약자를 위해서, 무언가 좋은일을 해보자는 불심을 보이기 위한 것이거나... 하는 식으로 희한한 동기에서 시작한 일이, 곧잘 눈부신 성공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있다. 원하면 손에 들어오지 않고, 원하지 않으면 찾아온다는 것을 남자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하다.
- 기업활동에 있어 최소한의 윤리는 멸사봉공이라는 시대착오적 에토스에 지배받고 있다. 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적인 배를 불릴 수 없다는 윤리성은, 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적인 일은 희생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사축의 한상과 표리일체한 결과다. 따라서 권력과 자산과 명에가 경쟁적으로 추구되는 장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공공성 환상이 불가결한 셈이다. 나라를 위해서, 윗사람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라는 왜곡이 개입되어 있지 않으면 사회는 약육강식의 야생과 다른없는 투쟁의 장이 되어버릴 것임. 시장경제는 그런 다양한 환상이 빚어내는 복합적 효과로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음. 그러므로 사회적 자원의 공평한분배라는 좋은 것만을 추출해 낼 수는 없다. 사회적 자원과 함께 그러한 환상도 반드시 포함해서 수익자에게 분배되는 것이다. 즉, 남성 중심적 환상의 일리있음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 사회에서 가치있음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보부아르가 고뇌했던 문제는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이 문제를 근본부터 돌아보려면 '일한다고? 무엇을 위해서?'라는 기본적 질문으로 다시금 돌아가야 한다.
- 내 개성을 안다는 것은 개성적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부분을 착각하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 '이게 나의 감각이라니까' 또는 '나만의 고집이라고' 하는 사람, 대부분 머리가 좋지 않다. '내 개성을 안다'는 것은 본래 '소거해가는' 작업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성립된 배경을 공브함으로써 특정 세대, 특정 지역집단 전체를 덮고 있는 대기압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대기압을 소거하고 남은 것들을 자신의 개성으로 인지할 수 있다. '위조된 공동기억'이란 이야기를 했는데, 만약 개성이라는 것이 정발로 발견되어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기억 속에서 위조되어 외부로부터 '사후에' 주입된 부분을 추려내 소거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함
- 도구를 쓰는 모든 훈련은 그것이 있다는 것을 잊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신체적 수행은 인간이 신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기 위함이다.
- 절도는, 평범하게 말하자면, 쓸데 없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는 의미. 정말 필요할 때 자신이 가진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도록, 중요하지 않은 일에 가진 자원을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사의 마음가짐이다. 품격이 높은 사람은 절도를 아는 사람이다. 자기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원(가용시간과 발휘 가능한 사회적 능력)을 쓸 우선순위와 양을 항상 의식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 자크 라캉은 '우리의 과거 기억은 전 미래형으로 말해진다' 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자기 역사'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대화가 끝났을 때 상대방이 나를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여겨주기를 바라기 때문. 나에게 유리한 내 모습을 상대방 안에 심어놓기 위해 우리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예컨대 '나는 비열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지면 얼마든지 과거로부터 비열했던 기억을 끌어올 수 있다. 친구를 배신한 일, 책임으로부터 도망친 일,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일. ... 떠올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반대로 '나는 마음이 맑은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다면 역시 얼마든지 떠올리면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일, 불행한 사람을 위해 신에게 기도한 일, 더 받은 거스름돈을 돌려준 일, ...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비열한 사람인지, 맑은 사람인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듣는 사람의 기억 속에 진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남기고 싶은지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있다면 조금 곤란할 것임. 우리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선택적 회상이 이루어졌을 뿐이기 때문.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고, 그런 것도 필요하다. 때때로 지어낸 이야기를 함으로써 과거를 리셋하지 않으면 계속 나아갈 수 없다.
-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제도 중 하나로 일부일처제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미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지만. 물론 앞으로도 일부일처제는 지속될 것임. 대세는 아니더라도 가족제도의 옵션 가운데 하나로 전락할 가능성이 꽤 클 것임. 오늘날 파리에는 주민들의 50%가 독신, 헤테로/호모 비혼동거 거플, 친구들끼리의 코뮌,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커플 등 다양한 가족형태가 등장하면서 아빠, 엄마, 자녀라는 전형적 핵가족은 이미 소수. 일부일처제는 잘 만들어진 제도라 생각한다. 아미루 생각해도 줄곧 상대를 바꾸느니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해로하는 편이 생존전략상의 코스트가 절대적으로 저렴하다. 결혼한 사람과 평생 해로하며 서로가 혼인계약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확시을 가질 수 있다면 매우 편안하겠지요. 절대 배신하지 ㅇ낳는 파트너가 있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아주 든든한 일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현재 소속이 불분명하다. 그보다는 법률적 속박 따위 없는, 사랑만을 기반으로 한 파트너십이 가장 좋다는 견해가 점점 여론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법률상 결혼은 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만으로 연결된 관계는 사랑이 사라진 순간에 끝나버린다. 끝나버린다기보다 끝내야 한다. 이는 사랑 외에 다른 어떤 지지대도 없다는 점에서 순수한 성적 관계이고, 이해득실이나 세속적 요소를 확실히 잘라내 버렸다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 따라서 사랑만으로 묶인 두 사람은 끊임없이 '나 사랑해?'라고 상대방에게 확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제법 스트레스다.
-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이 많은 사회와 적은 사회를 비교하면 이런 말을 했따. "북국은 자살자가 많고, 남국은 자살자가 적다. 자살률과 평균기온은 관계가 있다." 종교도 관련이 있다. 신교는 자살자가 많지만, 구교는자살자가 적다. 신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며 자기 내면의 신앙이 진실한지 자문하는 종교는 인간을 고독하게 한다. '공포와 경외' 안에서 신과 마주하는 자세는 정신력이 매우 강한 사람이 아니면 부담이 너무 크다. 구교처럼 나쁜 짓을 저지르더라도 고해를 통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면 신자들은 심적인 부담은 사제에게 맡기고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뒤르켐이 지적한 또 한가지는 대가족에는 자살한 사람이 적다는 점. 혼자 사는 사람이 자살할 위험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두명, 세명, 10명, 20명, ... 이렇게 가족 구성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자살률은 떨어진다. 대가족으로 함께 사는 데는 함께 있을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통 가족의 이야기라는 형태로 말해진다. 공통의 선조가 무훈을 세웠다거나 조상 중에 비범한 임눌이 있거나 하면 가족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모여 그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공통적 기원신화를 가진 가족들은 친족 의례를 소중히 보존하고, 명절이나 생일이나 제일이 올 때마다 모여서 연회를 열고, 자신들이 공통의 선조로부터 피를 이어받은 가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축하한다. 이런 공동체에 포함된 사람은 쉽게 자살하지 않는다. 고립감을 느끼는 일이 적기 때문. 긴 역사를 자랑하는 특정한 집단가 자신이 통합되어 있고, 그 시간적, 공간적 네트워크 안에 다른 사람으로는 대체되기 힘든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 피붙이만으로 굳어진 장소가 실제로는 폭력과 광기의 온상이라는 것, 구성원들의 심신에 상처를 입히는 곳이라는 것, 이런 사실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많은 가정은 이미 그 구성원들을 '치유하는 곳' 이라기보다 '해치는 곳'이 되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급선무는 어떻게 하면 가정이라는 위험한 곳에서 상처없이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정을 살리기 위한 전략은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말한 생존전략과 같다. 어쨌든 가정에서도 민낯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부모는 부모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마치 연기라도 하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서로의 내면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경박한 행동은 가정내에서는 자제하라. 그런 절도 있는 행동을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도 유지한다.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모르는 체 하는게 어떻게 가족이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분은 친숙함과 익숙함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짜 친숙함은 존경이 없는 곳에 발을 디딜 수 없다. 따뜻하고 편안한 가정이란 모두가 노골적으로 에고를 드러내고 속마음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가정이 아님. 한 사람 한 사람이 욕망을 자제하며 내면을 감추고 가정 안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구성원이 가정 밖에서 맺는 가족 외의 인간관계 속 활동을 지지하는 곳이 올바른 치유의 장으로서의 가정이다. 내가 자립하라고 대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든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생활이 멋있다든가 하는 얄팍한 교훈을 말하기 위함이 아님. 자립할 수 있는 사람,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따뜻한 가정, 친숙함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이 곁에 있을 때의 온기레 깊은 감사와 존경을 품을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따뜻한 가정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란 혼자 있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을 말함. 나를 위해 가족은 무엇을 해주는가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먼저 배려하는 사람을 말함.
- 만약 가정을 항상 따뜻하고 다정한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나는 가정 내 커뮤니케이션이 포근한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머무르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가정에서 정치적 의견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기를 바라는 건 난센스다. 그런 말을 어쩌다가 입 밖에 내더라도 '허허,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 가볍게 받아넘겨주는 것이 예의다. 타인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내버려두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다. 하지만 적절한 형태로 그냥 혼자 있는 것 만큼 사람이 마음을 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는 방치와는 다름. 혼자 있게 해준다, 혼자 있는 시간을 이해받는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런 경우는 그것이 존중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사실을 당사자간에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정말 친한 사람 사이에서는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귀중한 선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이란 주는 것이라는 기본개념을 알지 못하면 이해가 쉽지 않을 것임.
- 자본주의는 차이 속에 사는 인간의 속성을 최대한 이용한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옆 사람과 거의 똑같지만 아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그것으로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다. 참고로 인간은 아무리 작은 기호라도, 변화가 있을 때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차이 지각력이 높은 생물이다. 그러므로 미세한 차이에 민감해지는 데에 소비자의 의식을 집중시키고 그 소비자 전원을 가능한 한 좁은 니치에 가두는 전략이 자본주의가 취하는 가장 좋은 전술이다. 오후 5시 11분 01초와 02초 사이의 노을 빛깔 차이 분석에 골몰할 수 있게 된 인간은 자기가 짧은 시간 사이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함. 생산자 입장에서 보면 방한복 제품으로 모피코트부터 도롱이까지 전부 갖추어야 하는 경우와 '원단도 색도 스타일도 같고 그저 그단추 위치만 다를 뿐인' 코트를 준비하면 되는 경우는 제조단가가 다르다. 소비자들이 단추 위치가 다르다는 정도의 차별화로 충분히 열광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다양한 상품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진다. 생산라인 하나로 충분. 단추를 다는 공정에 몇 명 채용하면 된다. 심한 말이지만 제조원가를 낮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인은 색깔만 다른 유니틀로 후리스를 2천만벌씩 사는 국민이니까. 자본주의에 가장 좋은 전략은 가능한 한 좁은 니치에 가능한 한 많은 개체를 욱여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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