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의 우화

사회 2020. 12. 29. 12:07

- 우리가 옛글을 돌아보는 것은 오늘을 새로 읽어낼 수 있기를 바 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맨더빌 번역서를 통해 스미스에서 비롯된 경제학이 오늘날 왜 새삼 중요한지 - 또는 아직 무엇이 모자라는지 - 생각해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칸트 철학이 왜 중요한지는 최근 마이클 샌델이 쉽게 풀이해낸 책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09)를 보라. 칸트는 《실천이성비판》(1788) 1편 1권 1장 8절에서 존의 윤리체계를 6가지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맨더빌 체계였다.) 맨더빌은 낡은 도덕체계를 깨부순 사람이며, 그로써 그 뒤 새로 운 도덕체계가 나올 수 있게 했다는 점만 가지고서도 (그가 가진 다 른 단점들을 덮고 남을 만큼) 그 공이 아주 크다. 그런데 그 뒤에 세운 체계는 모른 채 우리는 아직도 그 폐허 위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이제 맨더빌을 읽으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 공정한 사회? 맨더빌은 돈 벌 욕심을 아예 버리라는 낡은 도덕을 비판한 사람이다. 그런 맨더빌을 따라 돈 벌 욕심을 받아들이되, 나 돈 벌자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흐르게 하는 짓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스미스의 도덕감정이고 그런 짓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칸트의 도덕원칙이다. 공정한 사회는 그 위에 세워진다.
- 맨더빌은 그저 악덕에도 좋은 점이 있다거나 또는 그 좋은 점이 나쁜 점보다 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사람들이 도덕에 대해 가지고 있던 다음 두 가 지 생각이었다. 첫째는 욕심을 나쁜 것으로 쳐서 금욕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과, 둘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에 따라야 미덕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맨더빌은 이 두 가지 기본 전제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끝끝내 고집했다. 그러고 나서 이러 한 조건에 맞는 미덕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맨더빌 의 이러한 "엄격주의” 방식은 뒷날 칸트 철학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정말로 글자 그대로 미덕만 남게 된다면 세상 경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비판자들의 말과는 달리 그는 한 번도 악덕 그 자체를 드러내 추켜세운 적이 없다. 그 대신 악덕의 효용을 보여 주며 이제 악덕을 어찌 생각해야 할 것인지 물음을 던진 것이다. | 정신병을 주로 연구한 의사였던 맨더빌에게 사람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정적이었으며, 이기심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때문에 전통적인 도덕론을 따른다면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악덕” 에 바탕을 두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풍자시 벌집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그는 이 세상에, 겉으로는 고귀하고 점잖아 보이는 사람들에서조차도, 악덕이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을 누구 못지않게 따끔하게 보여주었는데, 얼핏 봐서는 악덕을 나무란 듯싶다. 그러나 그는 그 악덕들을 - 추켜세운 것은 아니더라도 - 나무랄 생각이 없었을뿐더러, 그토록 악덕이 가득 찬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는 악덕이 있더라도 세상이 잘산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로 그 악덕 때문에 잘산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악덕을 없애려고 하는 도덕 운동은 세상을 나쁘게 만들 바보짓이었다.
- 무릇 성인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착해줄 것을 바라지 않고, 잘못되지 않도록 수단을 쓴다. 나를 위하여 착해줄 사람을 바라더라도 그런 사람은 나라 안에 열 사람도 되지 못할 것이다. 잘못되지 않도록 수단을 쓰면 온 나라를 가지런히 다스릴 수 있다. 다스리는 사람은 다수를 상대로 하고 소수를 상대 로 하지 않기 때문에 덕에 힘쓰지 않고 법에 힘쓴다........ 그러므로 제대로 다스릴 줄 아는 임금은 우연한 선행을 바라지 않으며 필연 적으로 되는 방법을 따른다. 《한비자》 (현학)
성선설에 바탕을 둔 유가의 덕치에 맞서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는 성악설에 바탕을 두고 법치를 주장했는데, 도덕 운동을 공격하며 사람본성을 제대로 보자고 한 맨더빌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유가가 법가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부른 것과 도덕가들이 맨더빌을 악마라 부른 것도 닮은꼴이다. 물론 두 사람 다 나름대로 한계가 있다.
- 세상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꿀벌의 우화》에 붙은 부제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을 두고 “개인의 악덕이 곧 사회의 이익이 된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맨더빌 자신은 동의하 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작품인 《디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개인의 악덕과 사회의 이익 사이에는 어디까지나 쉼표만 있을 뿐 동사가 빠져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부제를 이렇게 쓴 이유가 역설을 부각시켜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였다고 하였다. 다른 곳에서 맨더빌은
(포도덩굴이) 우리를 고귀한 열매로 축복해주는 것은
바로 덩굴이 묶이고 잘리고 나서이다.
악덕이 이롭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정의로 베어내고 동여맬 때이다.
라고 하였으며, 사회 맨 끝줄에서는 부제가 “개인의 악덕은, 솜씨 좋은 정치인이 잘 다룬다면 (by the dextrous management of a skilful politician), 사회의 이득이 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점을 《꿀벌의 우화》 1724년 판에 써넣은 〈반박문> 맨 끝에서 다시 강조한 바 있다.
- 가난한 노동자는 “가난하지 않으면 일 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을 덜어주는 것은 속 깊은 일이지만 가난을 없애주는 것은 바보짓이다” 라거나 “나쁜 환경에서 사회가 행복해지 고 사람들이 편안해지려면, 반드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무식 할 뿐 아니라 가난해야 한다” 라는 맨더빌의 말은 읽는 사람을 불편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맨더빌 혼자 생각이 아니라 그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었으며, 노동자의 가난이 나라에 도움이 된다는 이 른바 “가난 효용론doctrine of the utility of poverty"의 한 부분이다. (Fumiss, 1920; Rimlinger, 1976). 스미스와 비교해볼 때 맨더빌의 한계는 그 시대의 이러한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스미스의 《국부론》은 책 제목부터가 부국富國이 책을 쓴 목적임 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부국은 맨더빌을 포함한 중상주의자들이 생각한 부국과는 달랐다. 생산자 이익보다는 소비자 이익이 앞서는 것이며, 나라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자가 잘살아야 진짜 부국이 된다. 나라가 잘살면 임금이 올라가는 것은 마땅한 결과이 며, 임금이 올라가면 노동자는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한다. 돈이 많 아 게을러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쉽게 돈을 버는 지주들 이야기다. 물건 값이 올라 국제 경쟁에서 뒤진다면 그것 은 높은 임금 때문이 아니라 높은 이윤 때문이다. 스미스는 헤프게 쓰는 것은 잘사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가난한 사람들은 헤프게 쓰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 된다고 하였다. 노동자들은 이 사회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약자이며, 배운 것이 없다보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늘 이용만 당할 뿐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육이 필요하다고 한 스미스의 생각은 나중에 따로 살핀다.
- 맨더빌을 비롯한 중상주의자들 눈에는 가난한 이들은 사람이기에 고서 그저 생산수단일 뿐이었다. 이들을 쉽게 그리고 싸게 부리려면 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 좋다. 그런데 <자선> 이 그 시절에도 악명 높은 글이기는 했어도 그 까 닭은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 도덕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어른들을 상대로 한 교화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아이들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선학교로 관심을 옮겼는데, 처음부터 그것은 낮은 계급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주고자 했다기보다는 순종 을 일찍부터 가르쳐 사회불안 요소가 되지 않도록 하려 함이었다. 그러고는 그 위에 자선이라는 허울을 씌웠다. 맨더빌은 그 속마음에 들어 있는 위선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었고(자선 : 37, 38), 위선을 들춰냈다는 것이 그 시대 사람들을 격분하게 만든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 가난한 부모는 아이가 어릴 때에도 교육을 시키지 못하며 조금 크면 곧바로 일터로 보낸다(국Vi.f.53). 일 터에는 단순노동이 있을 뿐이다. 스미스는 노동 분업이 생산성을 높 이는 데 중요함을 깨달았지만, 분업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몇 가지 단순 작업만 하며 평생을 보내는 사람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잃어버리고, 사람으로서 가능한 최대한으로 멍청하고 무식하게 되기 쉽다. (국V.i.f.50)
- 3백 년 전에 맨더빌이 이기심의 순기능을 꺼내 든 것은 그것만으로도 획기적인 일이다. 나아가 엄밀히 말하면 그는 이기심이 그저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적절한 제도와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내 용이 무엇인지까지는 다 대답하지 못했으며, 아무리 천재라도 한 사 람에게서 그 모든 것을 다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해답은 스미스를 비롯하여 지난 2백여 년간 경제학이 찾고 있는 중이다. 이 뒷부 분을 무시하고 오늘날 이기심 또는 돈 벌 욕심만 내세우는 것은 위 험하다. 맨더빌의 글 곳곳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있는 그 위험한 생각들은 건전한 시장경제를 위협한다.
- 신자유주의는 원래 주류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인들과 재산가들 이 만들어낸 풍조라 할 것인데, 이는 중상주의를 타파하자던 스미스 보다는 오히려 맨더빌의 중상주의에 놀랍도록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19세기 말 강도귀족robber baron들이 설쳐대던 약육강식의 자 본주의에서도 비슷한 구석이 적지 않다. 물론 오늘날에는 신자유주 의자라도 아무도 맨더빌과 같은 노골적인 표현을 솔직하게 내뱉지 않는다. 매력적인 구호들로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그러나 그 속셈 은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스미스는 “서툰 사람은 맨더빌에게 쉽 게 빠져든다”고 경고했다. 욕심을 겉으로나마 낮춰보던 3백 년 전에 비한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아마 더 쉽게 빠져들지 모르겠다.
- 사람 사는 사회를 굳세고 힘 있게 만들려면 열정을 건드려야 한 다. 땅이 많지 않더라도 땅을 나눠놓으면 서로 갖겠다고 샘내게 될 것이다. 장난으로라도 칭찬을 해주어 게으름에서 깨어나게 해주면 뽐내는 마음 때문에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다. 장사와 공예를 가르 치면 부러움과 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살아날 것이다. 사람 수를 늘리고 싶으면, 공장을 많이 세우고 노는 땅이 없도록 하라. 재산은 확 실히 지켜주고, 권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라. 법에 어긋나는 행동은 못하게 막되, 생각은 누구나 제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어라. 일을 하면 누구나 먹고살 수 있으며 그 밖에 다른 교훈들이 지켜진 다면, 그런 나라는, 이 세상에 사람이 살고 있는 한, 늘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사람들을 용감하게 만들어 전쟁을 좋아하도록 하려면, 군사 훈련으로 눈길을 돌려 두려움을 잘 이용하고 허영심을 요령껏 부추겨라. 그러나 이에 더해서 사람들을 풍족하고 지식 있고 예의 바르게 만들려면, 다른 나라와 장사하는 법을 가르쳐라. 그리고 되 도록이면 바다로 나가야 하는데, 어떤 수고도 어떤 산업도 아껴서는 안 되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항해를 일 으키고 상인을 소중히 여겨 모든 분야에서 장사를 장려하라. 이렇게 하면 부가 굴러들어올 것이며 그 뒤로 예술과 과학이 따라올 것이 다. 내가 여태 말한 것들을 지키면서 정치인들이 잘 다스린다면, 사람들은 능력을 갖춰, 이름을 떨치며 부유하게 살 것이다.
- 그러나 검소하고 정직한 사회를 갖고 싶다면 가장 좋은 정책은 사람을 단순한 자연 상태 그대로 두고 사람 수가 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나 없어도 되는 물건은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고, 욕망을 불러일으키거나 지식을 높일 만한 것은 다 치워서 손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막대한 부와 외국의 보물에게는 탐욕과 사치가 뗄 수 없는 동반 자이어서, 탐욕과 사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부와 보물 이 우습게 보고 다가오지 않는다. 교역이 많아지면 사기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과 착실하다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지식이 많아지고 예절이 다듬어지면 사람은 욕망이 더욱 커지고 취향이 세련되어지며 악덕이 많아지게 된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조상들의 미덕과 절약 덕분에 지금처럼 잘살게 되었다고 저들 좋을 대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하찮던 곳이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도 제법 자리하게 된 것은 그들이 정치적인 지혜로 상품과 해운을 모든 것에 앞세웠고, 양심의 자유를 마음 껏 누렸으며, 효과적인 모든 수단을 다해 산업을 장려하고 키우는 일에 지치지 않고 매달렸기 때문이다.
- 사치 금지법이 쓸모가 있다면, 그것은 가난한 나라에서, 크나큰 전쟁 참화나 돌림병이나 굶주림을 겪고 난 뒤에, 일이 멈추고 가난 한 사람들이 노동하지 못할 때 그러하다. 그러나 사치 금지법을 잘 사는 나라에 들여오는 것은 나라 이익을 찾는 길로는 잘못된 길이다. <투덜대는 벌집>의 주석을 마치면서, 나는 거국적인 절약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말해두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우리 여인들로 하여금 아시아 비단을 덜 입게 한다면, 페르시아와 다른 동쪽 사람들이 고급 영국 옷감을 많이 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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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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