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이 온다

사회 2021. 6. 13. 09:07

- 적자생존이란 경쟁이 치열한 시장, 정치, 문화의 무자비함을 손쉽게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다윈이나 그 후계자들의 이론을 곡해한다. 진화를 순전히 경쟁 논리로만 본다면, 인간의 사회성 발달이라는 큰 그림을 놓치게 되고 상호 연 결된 하나의 큰 팀으로서의 인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가장 성공한 생물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생태계에서 공존한다. 우리로서는 그렇게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눈치채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생물들을 각자 고립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나무 한 그루는 나무 한 그루, 소 한 마리는 소 한 마 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무는 결코 단일한 나무 한 그루가 아니다. 나무는 숲의 작은 일부분이다. 충분히 뒤로 물러나 전체를 보면, 살아남기 위한 나무 한 그루의 투쟁은 숲의 더 큰 시스템을 지 탱하기 위한 그 나무의 역할이라는, 더 중요한 이야기와 합쳐진다. 
우리는 또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는 수면 아래에서 조용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무들이 서로 소통하는 소리나 그 모습을 쉽사리 듣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건강한 숲에서는 버섯을 비롯한 균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여러 나무들의 근계根系를 서로 이어준다. 이렇게 지하에서 이뤄지는 네트워크 덕분에 나무들은 상호작용할 수 있고 심지어 자원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여름날 키 작은 상록수들은 키 큰 나무들의 그림자에 가려진다. 빛이 닿 지 않아 광합성을 할 수 없게 된 키 작은 상록수들은 균류를 통해 필요 영양분을 얻는다. 키 큰 나무들은 나눠 줄 만큼 충분한 영양 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에 가려진 동료들에게 영양 분을 보내 준다. 겨울이 되면 키 큰 나무들은 잎이 떨어져 광합성 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때가 되면 반대로 햇빛에 노출된 상록수들 이 남는 영양분을 잎이 떨어진 공동체 일원들에게 보내 준다. 또 지하에서 활동하는 균류는 나름대로 약간의 서비스 비용을 받는데, 큰 나무들의 영양분 교환을 도와준 대가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얻는 식이다.
그러니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숲속의 나무들이 햇빛을 받 으려고 서로 경쟁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나무들은 햇빛을 받기 위해 서로 협업한다. 전략을 다양화하고 노동의 대가를 공유한다.
또한 나무들은 서로를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아카시아 나무 의 잎에 기린의 침이 닿으면 나무는 경고성 화학물질을 공기 중에 내뿜는다. 이 화학물질에 반응한 주변의 아카시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기린에게 혐오감을 주는 특별한 물질을 내뿜는다. 진화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마치 단일한 존재의 한 부분처럼 행동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키웠다.
- 인간은 마치 뇌를 공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세 서로 이어진다. 바로 대뇌 변연계 조화 limbic consonance'라는 것 덕분인데, 이 는 상대의 정서 상태에 나를 맞출 수 있는 능력이다. MRI 스캔을 해 보면 엄마와 아기의 뇌는 서로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함을 알 수 있다. 대뇌 변연계 조화는 아직 그 과정이 잘 알려져 있지는 않 지만, 행복한 사람 혹은 초조한 사람이 방에 들어왔을 때 방 안 전 체의 분위기가 달라진다거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의 뇌 상태가 화자話者의 뇌 상태와 같아지는 것 등에서 목격할 수 있다. 이때는 여러 개의 신경계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서로 동기화同期化 되고 조응照應한다. 우리는 이런 조화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행 복 호르몬과 신경 조절 과정을 갈망한다. 아이들이 부모 곁에서 잠들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이들의 신경계는 부모의 신경 계를 흉내 냄으로써 잠들고 깨는 법을 배운다.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그램에 녹음된 웃음소리를 삽입하는 이유도 이와 동일하다. 함께 시청하는 다른 사람들이 웃으면 우리도 그 웃음을 흉내 내기 쉽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히 그 자리에 모인 사람 들의 뇌 상태와 공명共鳴하려고 한다.
이렇게 어렵게 진화한 현실적인 신체, 화학적 처리 과정 덕 분에 우리는 사회 교류와 화합이 가능하다. 바로 이런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과 같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 말을 한다는 것은 기도와 식도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한 적응이었다. 성대를 사용할 때 잘못하면 음식물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진화한 덕분에 우리는 성대 주름에서 나오는 소리를 조절하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다양화해 언어를 만들 수 있었다.
언어는 더 크고 복잡한 사회 구조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에 생겨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를 개발하기 위해 언어 사용자들 사이에 얼마나 대단한 협업이 필요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라. 여러 세대에 걸쳐 그런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의 짜임새가 달라지고 협업에 대한 믿음이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수많은 초기 인류의 조상들 중에서 오직 우리만이 언어를 가 졌고 우리만이 살아남았다.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을 누르고 전설 과 같은 승리를 쟁취한 것은 우리가 힘이 더 세고 무기를 가졌고 지능이 높아서가 아니라,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발견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 어느 쪽이 되었든 사회 분위기는 훼손된다.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해 주었던 것이 이제는 우리를 갈라놓는다.
실제로 우리가 사회 교류와 철저한 소외 사이를 오가는 방식 과, 그 과정에 다양한 미디어가 이바지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는 문명의 역사를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는 새로운 소통과 교류 메커니즘을 개발한다. 책, 라디 오, 돈, 소셜 미디어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바로 그 매개체가 우리를 갈라놓는 수단이 된다. 책 은 오직 글을 아는 부자들만 접할 수 있고, 라디오는 폭동을 부추 기며, 돈은 은행가들이 독점해서 쌓아 두고, 소셜 미디어는 알고 리즘으로 벽을 쌓아 이용자들을 분리시킨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려고 개발한 미디어나 기술은 인간과는 달리, 사회성을 내재하고 있지 않다.
- 언어는 인간을 경쟁자들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로 데려갔고, 더 크고 훌륭하게 조직된 집단을 형성할 수 있게 했다. 언어는 부족을 하나로 묶고, 분쟁을 해결할 새로운 방법을 제공했으 며,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더 중요한 것은 연장자들이 후대에 자신의 지식을 전수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문명이 중시하는 사회 요소들은 생물학이 스스로를 개선하는 속 도보다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어에는 역효과도 있 었다. 언어가 생기기 전 '거짓말 따위는 없었다. 거짓말에 가장 가까운 행동이라고 해 봤자 과일 한 조각을 숨기는 정도였다. 하지만 말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현실을 호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마찬가지로 문자는 우리에게 역사를 기록하고, 시를 남기고, 계약서를 쓰고, 동맹을 맺고, 먼 곳까지 뜻을 전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문자는 시공간을 넘어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한 매체로서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어주었다.
그러나 최초의 문자 언어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주로 힘과 지배력을 휘두르는 데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문자는 메소포타 미아에서 발명된 후 최초 500년간 오직 왕과 사제들이 통제하는 곡물과 노동력을 기록할 때만 쓰였다. 글이 출현한 곳에는 언제나 전쟁과 노예 제도가 따라왔다. 문자는 수많은 혜택을 주었으나,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문화를 추상적이고 관리적인 문화로 바꾼 것도 문자였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유럽 전역에 문자 언어의 접근성과 도 달 범위를 확장시켰고, 사람들이 글을 깨치고 사상이나 감정을 표 현하는 것과 관련해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군주들 은 인쇄기를 엄격히 통제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다. 군주들은 허가되지 않은 인쇄기를 부숴 버리고 소유자를 처형했다. 인쇄기는 아이디어가 넘쳐 나는 새로운 문화를 장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고위층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 라디오 역시 그 시작은 개인들을 서로 이어주는 매체였다. 지금 우리가 아마추어 무선통신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휴대용 무 선기가 라디오의 원래 형태였다. 그런데 기업들이 일정 주파수 대 역을 독점하려고 로비를 벌이고 각국 정부가 무선통신을 통제할 방법을 찾으면서, 당초 공동의 공간이었던 라디오는 광고와 선전이 난무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 등장한 마법의 매체처럼 보이는 라디오. 를 이용해 본인이 전국 어디에나 동시에 등장하게 만들었다. 독일 사회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이토록 널리 침투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라디오는 마치 청취자와 진행자가 직접 소통하고 있 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고, 그 덕분에 히틀러는 수백만 명과 새로운 형태의 라포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전국에 7,000만 대 의 확성기를 설치해 그들이 소위 '주문형 정치 politics on dermand'라고 부르는 것을 방송했다. 르완다인들은 1993년까지도 라디오를 이 용해 적대 종족의 위치를 폭로했고, 그 라디오 방송을 들은 친정부 성향의 폭도들은 마체테를 들고 반대 종족을 학살했다.
그 어떤 새로운 매체는 일단 엘리트의 통제하에 들어가면 사 람들의 관심은 더 이상 서로를 향하지 못하고 고위 권력층을 향 하게 된다. 그 결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보다 더 못한 존 재로 인식하면서 이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했을 형태의 폭력 행위 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게 된다.
- 텔레비전 역시 처음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이상은 훌륭한 연결 매체이자 교육 매체였다. 그러나 마케팅 심리학자들은 텔레비전 속에 소비자의 심리를 반영하고 몇 가지 판타지와 함께 특정 제품까지 주입할 방법을 찾아냈다. 텔레비전 프로그래밍' 이란 말 은 채널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시청자를 프로그 래밍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됐다. 이 기발한 장치는 사람들을 사로 잡았고 인간의 숨은 본능까지 활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불가에 옹 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 소파에 앉아 스크 린을 뚫어져라 쳐다보게 됐다. 집단 내에서 형성되던 라포르는 '대량 수용'으로 대체됐다.
텔레비전은 한편으로는 가족과 소비자 천국을 묘사해 획일 적인 미국 문화를 조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못지않게 사 람들을 소외시키는 개인주의 정신을 강요했다. 텔레비전은 사람들에게 마치 드라마 속 캐릭터를 고르듯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시청자'라는 대중은 이러 한 전제를 기꺼이 받아들인 만큼 그에 따른 대가도 치러야 했다.
- 당초 월드와이드웹www은 연구문서를 찾아내고 하이퍼링크 를 걸기 쉽게 하려는 의도로 고안됐다. 하지만 월드와이드웹의 시 각적인 클릭 중심 인터페이스는 다른 인터넷보다 훨씬 더 텔레비 전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이 점이 기업들의 관심을 끌었다. 월 드와이드웹에 들어갈 때 이용자는 자판을 두드리거나 적극적으 로 사고할 필요가 없다. 그냥 클릭하고 읽으면 되고, 그냥 보고 구 매하면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가상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던 히피나 프로그 래머들로서는 경악할 일이었지만, 웹은 금세 '대화 공간'에서 '카 탈로그'가 됐다. 사람들 사이의 소통 창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개인과 브랜드 사이의 '일대일 마케팅'이 들어섰다. 닷컴붐을 타 고 수천 개의 기업이 물건을 팔러 나섰으나, 모두가 이윤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닷컴 붕괴 사태가 이어졌다.
인터넷 유토피아를 꿈꾸던 사람들은 승리를 선언했다. 인터 넷은 상업화 세력의 공격에도 살아남았으니, 이제 우리 모두를 서 로 이어준다는 본연의 미션을 재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터넷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언제나 소셜 미디어'일 거라고 공언 했다.
- 소셜 미디어가 공동체라는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내고 얼마 되지 않아 처음 보는 종류의 고립 현상이 나타났다. 광고주는 (나 중에는 알고리즘을 이용해)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개인 맞춤식 뉴스피드를 통해 이용자와 개별적으로 소통했다. 이것도 처음에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광고주들이 이런 커뮤니티 플랫폼을 금전적으로 보조해 준다면, 그들도 약간은 우리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고 어쩌면 약간의 개인정보까지도 얻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우리의 관심에 꼭 맞는 광고를 보여 주려고 열심히 노력까지 한다면 말이다.
사람들이 돈으로는 지불할 수 없거나 지불하지 않으려 하는 것들을 이제는 돈 대신 개인정보로 지불하게 됐다. 그런데 그 사이 뭔가 더 큰 변화가 일어났다. 플랫폼들은 더 이상 사람들을 서 로에게 연결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물건 파는 기업들에 연결해 주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더 이상 소셜 미디어의 '고객'이 아니었다. 우리가 '제품'이었다.
- 소셜 미디어 운동의 마지막 변신은 플랫폼들이 이용자를 광고주로 만들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은 기업이 보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퍼붓는 대신, 구전口傳 마케팅의 최신 온라인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었고 그것을 '소셜 추천social recommendation'이라고 불렀다. 어떤 기업들은 원하는 콘텐츠나 광고 링크를 사람들이 공유하게 했고, 또 어떤 기업들은 특별히 영향력 있는 이용자들을 찾아내 공짜 제품을 주며 자기네 브랜드를 선전해 달라고 했다.
- 쌍방향성이 매우 높은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함께 미디어 바이러스는 사람들이 해결되지 않은 이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방법처럼 보였다. 이 논리에 따르면,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밈은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왔어야 할 무언가였다.
문제는 목적이 언제나 해당 밈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게릴라 미디어 운동가들이 사용하는 상향식 bottom-up” 기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기업과 정치가, 선동가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그들에게 바이럴 미디어란 더 이상 불평등이나 환경 문제를 폭로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반응을 만들어 내는 효과적인 수단일 뿐이다. 그 반응이 무의식적이고, 생각 없고, 잔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논리나 진실은 바이럴 미디어와 무관하다. 밈이 작동하려면 '투쟁도주 반응fight or flight reactions'을 자극해야 하는데, 그런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고,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이런 기법은 한 번도 적절했던 적이 없고, 좋은 뜻으로 사용된 적도 없다. 바이러스가 위험한 이유는 뇌에서 사고나 감정을 담당하는 부분인 대뇌 신피질을 우회하고, 그보다 아래에 있는 보 다 원시적인 파충류 뇌로 직행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학적으 로 이미 증명된 기후 변화에 대한 밈은 '엘리트들의 음모!' 라는 밈만큼 강렬한 반응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바이럴 공격을 한다고 해서 수해를 입은 지역의 주민들이 상호 부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는 없다. 반면에 생존자들을 더 피해망상에 빠트려 자기 보호 본능 속으로 몰아붙일 수는 있을 것이다. 밈을 이용한 캠페인은 포용, 사회적 관계, 차이에 대한 인정이 왜 좋은지를 이해하는 뇌 부분에 호소하지 않는다. 밈을 이용한 캠페인은 포식자인지 먹잇감인지, 싸울 것인지 도망갈 것인지, 죽일 것인지 죽임을 당할 것인지만 생각하는 파충류 뇌에 호소한다.
-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삶을 개선한다는 미명 아래 대부분의 기술 혁신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사람들을 치워버렸다. 산업혁명기가 남긴 진짜 유산은 바로 이것이다.
토머스 제퍼슨의 유명한 발명품인 요리 운반용 승강기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이 승강기를 편리한 기술이라 생각한다. 음식과 음료를 주방에서 식당까지 나를 필요 없이 작은 승강기에 올리고 줄을 당겨 위층으로 보내면 그것들이 마법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요리 운반용 승강기의 목적은 노력을 절약하는 것과는 무관했다. 그것의 진짜 목적은 노예제라는 흉측한 범죄를 눈에 보이지 않게 숨기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기술 자체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해당 기술을 사용했던 방법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산업혁명기는 많은 기계적 혁신을 낳았지만, 그런 혁신이 실제로 생산 과정을 더 효과적으로 만든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산업혁명은 그저 인간의 기술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 오늘날 사람들은 마침내 코딩하는 법을 배우라는 권유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프로그래밍은 더 이상 미디어 지형을 좌지 우지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아니다. 개발자들은 원하는 애플리케이션은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으나, 그 가동과 배포는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 즉 클라우드 서버에 대한 접근성에 전적으로 의존 한다. 이 클라우드 서버와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각종 장치는 불과 서너 개의 기업이 철저히 장악하고 있다. 애플리케이션 자체는 이들 네트워크에서 이뤄지는 실제 활동에 대한 위장술에 불과하다. 플랫폼을 소유한 기업들이 우리 모두에 관한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 그 활동 말이다.
문자나 인쇄술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끝없는 자유가 펼쳐졌다고 믿었다. 우리에게 새로 생긴 능력은 여 전히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똑같은 세력에 의해 철저히 제한된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기껏해야 우리는 나중에 우리의 신세계를 독점할 자들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있을 뿐이다.
- 디지털이 데려온 관심 경제에 산다는 것은 자동화된 각종 조작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받는다는 뜻이다. 요즘에 많이 이야기하는 '설득형 기술persuasive technology' 이라는 것은 미국의 몇몇 일류 대학에서 개발하고 가르친 설계 원칙으로, 전자상거래 사이트나 소셜 네트워크에서부터 스마트폰과 운동용 손목 밴드 플랫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설득형 기술의 목표는 '태도 변화와 습관 형성'을 이루는 것이며, 흔히 이용자가 모르는 채로 혹은 동의하지 않은 채로 이루어진다.
행동설계이론 behavioral design theory은 사람들이 태도나 의견이 바뀌어 행동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본인의 행동에 맞게 태도를 바꾼다. 이 모형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의사를 가지고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깝 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행동하도록 조작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득형 기술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때 '논리' 라든가 최소한의 정서적 호소'조차 동원하지 않는다. 이는 전통적 의미의 광고나 세일즈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오히려 전시戰時의 심리전이나 교도소 혹은 카지노, 쇼핑몰 등에서 사용하는 시기 조종과 비슷하다. 
- 산업혁명기에 기계장치 시계가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 고 공장의 기계가 인간 노동자보다 더 빠르게 일을 해치우면서, 우리는 아주 기계적인 측면에서 스스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 리는 스스로를 시계태엽 우주 안에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인간의 신체도 하나의 기계장치라고 말이다. 우리의 언어에도 서 서히 기계화된 메타포가 나타났다. 기름칠을 해야 한다', 크랭크 업을 한다’, 깊이 판다', '회사를 잘 돌아가게 한다'와 같은 표현 이 그것이다. 일상용어에서조차 점심을 먹는 것을 '연료 공급이 라 부르고, 논리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나사가 빠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을 기계 장치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사회 전체로서 우리는 효율성과 생산성, 힘과 같은 기계의 가치를 우리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더 튼튼한 노동자가 되어 더 효과적으로 작업하려고 했고, 작업 속도나 결과물의 양, 효율 이 효과적인 작업의 기준이 됐다.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는 세상이 컴퓨터로 계산되는 것이 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데이터고, 인간은 프로세서(처 리 장치)다. 우리는 그 논리는 계산이 안 되는데?', 그 친구는 멀티 태스킹을 너무 잘해서 동시에 두 명 이상 인터페이스가 가능하다니까'라고 말한다.
- 지금의 메카노모피즘 문화는 인간의 독특함이 반영된 것은 무엇이든 지워 버리는 디지털 미학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목소리나 억양에 조금이라도 특이한 점(꺼칠꺼칠함, 흔들림, 공기, 음조 변화)이 있으면 '결함' 이라고 재해석한다. 디지털 미학은 완벽한 정확성을 추구한다. 인체가 실제로 음악을 연주하는 정도의 정확성이 아니라 점수를 표시할 때 사용하는 수학적인 정확성 말이다. 우리는 그런 표기가 음악의 근사치에 불과하다는 사실, 인간의 감정 표현을 기록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한 방법이자 다른 사 람이 재현할 수 있게 사용한 기교, 즉 상징체계에 불과하다는 사 실을 망각한다.
인간의 연주가 지각 차원에서 그리고 무의식의 차원에서 사람들을 서로 이어주는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데이터의 순수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인식된다면, 그것은 전경과 배경이 역전된 것 이다. 인간이나 인간의 기구가 만들어 낸 노이즈를 자율성의 표현 으로 보지 않고 조작이 필요한 샘플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프로세싱이나 디지털 노동을 통해 추출과 재포장을 거쳐야 할 원재료 말이다.
인간의 해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우리가 참여했다는 흔적은 모두 삭제된다. 그럴 바엔 우리가 차라리 기계라면 좋을 것이다.
- 시장 화폐는 일반인들이 서로 물건을 사고팔게 해 주었다. 시장 화폐는 마치 포커 게임을 시작할 때 칩을 나눠 주는 것처럼 아침에 발행해서 교역이 끝날 때 현금으로 바꾸기도 했다. 화폐는 단위별로 빵 한 덩어리나 양배추 하나를 뜻하기도 했는데, 그런 물건을 파는 사람이 쿠폰처럼 사용하면 그날의 거래에 마중물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빵 가게 주인은 일찍 나가서 빵 한 덩어리에 해당하는 쿠폰들을 가지고 필요한 것들을 산다. 그 쿠폰이 돌고 돌아 다시 빵 가게 주인에게 돌아오면 그는 쿠폰을 빵으로 바꿔 주었다.
무어인들은 곡물 영수증이라는 것도 발명했다. 농부는 곡물 100파운드를 곡물상에 가져와 영수증을 받아간다. 이 영수증에는 10파운드 단위로 구멍이 뚫려 있어서 농부는 일부를 찢어 그것으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살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형태의 돈이 시간이 지나면 가치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곡물상은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일부 곡물은 상해서 버려야 했다. 그래서 이 돈은 다들 빨리 사용하려고 했다. 다음 달이면 가치가 떨어질 돈을 들 고 있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 경제는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돈이 빠르 게 회전되게끔 설계된 경제였다. 부의 분배가 아주 원활했기 때문 에 많은 소작농들이 새로운 중산층 상인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누구 밑에서 일하지 않았고, 일하는 날수도 줄었 으며, 이윤은 더 많아졌고, 이전보다 그리고 먼 후대 사람들보다 더 건강해졌다.
- 귀족들은 이렇게 평등한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작농들이 자급자족하게 되면서 영주들은 소작농으로부터 경제적 가 치를 뽑아낼 수 없었다. 부유한 영주들 집안은 수백 년간 한 번도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본인들의 몰락과 부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막으려면 사업의 규칙을 바꾸는 수밖 에 없었다.
그들이 생각해 낸 획기적 아이디어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독점 허가였다. 누구든지 왕으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지 않고 사업을 하면 불법이 됐다. 이 말은 곧 왕이 선별한 구두공이나 포도주상이 아니라면 사업을 그만두고 인가를 받은 누군가의 고용 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장악하고 있 던 그런 독점권에 대한 대응이었다. 식민지 주민들이 면화를 재배 하는 것은 자유였으나 그것으로 직물을 짜거나 동인도회사(착취 수준의 가격을 매겼다)가 아닌 곳에 내다 파는 것은 금지되었다. 동 인도회사는 식민지 주민들에게 싼값으로 사들인 이 면화를 영국 으로 가져가 직물로 만든 다음, 다시 미국으로 신고 와서 그들에 게 팔았다. 이런 독점 허가는 현대적 기업의 조상으로, 일부 기업 이 시장을 장악해 수익을 독점하고 막강한 권한을 가지는 것은지금도 그대로다. 또 하나의 획기적 아이디어는 중앙 화폐였다. 시장 화폐는 불법이 됐고, 그것을 썼다가는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거래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자를 주고 중앙 금고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이렇게 하면 돈을 갖고 있던 귀족들은 돈을 빌려주는 것만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었다. 재화의 교역을 촉진하는 도구였던 돈이 상업으로부터 경제적 가치를 착취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지역 시장은 붕괴됐다.
계속해서 돈을 빌린 사람은 인가를 받은 대형 독점 회사들뿐 이었다. 물론 자신들이 빌린 돈보다 더 많은 돈을 갚으려면 어디선가 추가 자금을 확보해야 했다. 이 말은 곧 경제가 성장해야 한 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인가를 받은 회사들은 신대륙을 정벌하러 나섰고, 신대륙의 자원을 착취하고 그곳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노동력을 착취했다. 회사들의 이런 성장 의무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기업이 투자자에게 빌린 돈을 갚으려면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회사는 중 앙 화폐의 운영 체계가 계속해서 경제적 가치를 뽑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통로에 불과하다. 기업이 성장할 때마다 사람과 자원이 있는 진짜 세상으로부터 자본을 독점한 자들에게로 더 많은 돈과 가치가 전달된다. 그래서 이름이 '자본주의'인 것이다.
- 디지털 기업은 착취의 성격을 가진, 그 선조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대형 상점은 동네에 들어가 동네 가게들을 약화하고 결국에는 그 지역 단독 상점이자 고용주가 된다. 그렇게 해서 그 지역을 독점하고 나면, 이제 가격은 올리면서도 임금은 낮 출 수 있고, 노동자는 파트타임으로 지위를 낮추고, 건강보험 비 용과 저소득자 지원금은 정부에게 떠넘길 수 있다. 이 업체가 지역 사회에 끼친 효과를 따져 보면 착취적이다. 동네는 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진다. 해당 업체는 지역 경제(그 지역의 땅과 노동)에서 돈을 털어 주주에게 전달한다.
디지털 기업도 마찬가지다. 다만 속도는 더 빠르다. 디지털 기업은 택시업계나 출판업계처럼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업계를 골라서 이전 참여자의 대부분을 잘라내고 시스템을 최적 화한다. 그렇게 택시업계의 시스템을 최적화한 택시 서비스 플랫폼은 한 번 이용할 때마다 운전자와 승객 양쪽 모두에게 수수료 를 부과하고, 자동차나 도로, 교통 등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다 른 주체에게 떠넘긴다. 도서 판매 웹사이트는 저자나 출판사가 지 속 가능한 수입을 올리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단독 구매 자 혹은 수요 독점자로서의 힘을 이용해 양측 모두가 더 적은 노동 대가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그러고 나면 이 최초의 독점사업은 소매업, 영화, 클라우드 서비스 같은 다른 업종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 이런 업체들은 결국 처음에 그들이 의존했던 시장 자체를 파괴해 버린다. 대형 상점은 이렇게 하고 나면 지역 하나를 마감하고 다른 지역에서 똑같은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디지털 업체가 이렇게 할 때는 처음 시장에서 다음 시장으로 분야를 확장한다. 예를 들면 책 시장에서 장난감 시장으로, 다시 모든 소매업으로 확장하거나, 승차 공유 서비스에서 음식 배달 서비스로, 자율 자 동차로 확장하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해당 업체의 실제 상품의 가치는 상승하고, 주가도 함께 올라간다.
주주의 관점에서 이 모형이 가진 문제점은, 결국에는 더 이 상 효과가 없는 때가 온다는 점이다. 디지털 플랫폼의 부양 효과 에도 불구하고 지난 75년간 기업들의 총자산 대비 이익률은 꾸준 히 감소해 왔다. 지금도 기업들은 시스템에서 돈을 몽땅 다 빨아 들이는 데는 아주 능하지만, 그렇게 빨아들인 자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는 형편없는 솜씨를 발휘한다. 기업의 덩치는 커지지 만 이익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기업들은 쓰지 않는 돈을 그냥 깔 고 앉아 있다. 그리고 시스템으로부터 현금을 너무나 많이 빼내가서 중앙은행은 돈을 더 많이 찍어 내라는 압력을 받는다. 그렇게 새로 찍어 낸 돈은 은행에 투자되고, 은행은 그 돈을 기업에 빌려주고, 이러한 전체 순환이 다시 반복된다.
디지털 사업은 실물 자산을 주주 가치라는 추상화된 형태로 바꿔 놓는 소프트웨어에 불과하다.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하키 스틱 모양의 성장 궤도를 그릴 다음번 유니콘 에 투자했다가 망하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 고 있다. 이런 사업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결국에 가면 성장 곡선이 납작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 디지털 경제는 번영을 널리 확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자본 주의의 가장 착취적인 측면을 증폭시켰다. 연결성은 참여의 열쇠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아직 갖고 있는, 얼마 되지도 않는 가치 까지 기업들이 모조리 뽑아낼 수 있게 도와주는 측면도 있다. 디지털 경제는 P2P 시장을 복원하는 대신 부의 분배를 악화할 뿐만아니라 그런 효과를 완화해 줄 '상호 부조'라는 사회적 본능까지 마비시킨다.
디지털 플랫폼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는 지수함수적 역학 구조를 증폭시킨다. 디지털 음악 플랫폼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음악가가 자신의 음악을 판매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플랫폼의 구성 방식과 추천 엔진 때문에 지금 그들이 홍보하는 음악가의 수를 따져 보면, 이전에 음반 가게와 FM 라디오 등 다양성을 갖춘 생태계에서 홍보하던 시절보다 오히려 판매되는 음악의 수는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재생하는 음악은 한 두 명의 슈퍼스타뿐이고 나머지 모든 음악가들은 거의 아무것도 팔지 못하고 있다.
- 비트코인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컴퓨터 전력은 평균적인 미국 가정이 2년간 사용하는 전력에 맞먹는다. 이게 과연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근본적 해결책일까? 더 훌륭한 거래 내역 원장을 만드는 게?
블록체인이 해결해 주는 문제는 더 빠르고 훌륭한 회계'라고 하는 실무와 관련된 문제다. 그리고 어쩌면 온라인으로 누군가 의 신분을 검증하는 절차가 좀 더 쉬워질 수도 있다. 은행업계가 궁극적으로 블록체인을 받아들인 이유도 그것이다. 우리를 더 빨리 찾아내서 우리의 자산을 더 빨리 빼내 가기 위한 것 말이다. 한편 진보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 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기록하고 보상하는 역할을 블록체인이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마치 인간의 활동이 온통 거래뿐이어서 죄다 컴퓨터로 계산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기술이 만들어 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더 많은 기술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공유 자산은 승자가 독식하는 경제가 아니라 '모두가 승자' 인 경제다. 공동 소유권은 공동의 책임을 일깨우고, 사업 활동에 도 장기적 관점을 갖게 해 준다. 그 무엇도 '다른' 참가자에게 떠 넘길 수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한 우물을 쓰는 관계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업 활동이 다른 시장 참가자에게 피해를 준다면 시장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일이 된다. 자본주의의 신화에 도취된 사람들에게는 이게 이해하기 힘든 개념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경제가 대변貨邊’과 ‘차변借邊의 양쪽 칸으로 이루어진 대 차대조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이 들어온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돈이 빠져나간 사람도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제로섬 관계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화폐의 중앙 독점이 낳은 산물이다. 돈을 반드시 어느 사설 금고에서만 빌릴 수 있고 빌린 후 에는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한다면, 그렇게 경쟁적이고 안타까운 희 소성 모형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빌린 것보다 많은 돈을 갚아야 하므로 차액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취할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제로섬의 전제다. 하지만 경제가 꼭 그런 식으로 운영될 필요는 없다.
부채 기반의 금융이 가진 이런 파괴력은 중앙 화폐보다 더 오래되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냐면 성경에서 경계하라고 말했을 정도다. 파라오에게 풍년에 곡식을 저장해 두면 흉년에 조금씩 꺼내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은 요셉이었다. 파라오의 고용인이 된 사람들은 결국 파라오의 노예가 됐고, 400년이 흐른 후에야 그들은 포로 상태에서 풀려날 방안과 빚쟁이식 사고방식에 서 벗어날 방법을 알아냈다. 탈출 후에도 히브리인들은 사막에서 한 세대를 보낸 후에야 그들에게 쏟아진 양식 '만나'를 쌓아 두지않고 서로 공유하면서 향후에도 '만나'가 계속 생길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가 부족한 사람들처럼 행동한다면 실제로 그것이 부족해질 것이다.
- 그들이 입맛대로 짜 맞춘 인류 역사에 따르면, 모든 게 구제 불능으로 끔직해 보일 때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기술을 생각해 냈다. 그들은 1894년의 말똥 위기 사태를 자주 언급한다. 당시 영국과 미국 사람들은 교통수단으로 쓰던 말 들이 싼 똥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다 자동차가 등장 해 도로에 허리 높이까지 말똥이 쌓이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자동차가 우리를 마차가 야기한 문제에서 구해 주었듯이, 새로운 기술 혁신이 나타나 우리를 자동차로부터 구해 줄 것이다.
이런 설명의 문제점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은 상업용 교통수단으로 채택됐고, 전차에 탄 사람들은 새로 나타난 거슬리는 자동차와 도로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못마땅해했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게 만드는 데는 50년간의 홍보 활동과 로비, 도시 재계획이 필요했다. 게다가 만약 자동차가 정말로 어느 면에서 도로를 더 깨끗하게 만들었다면, 그건 환경 훼손으로 인한 비용과 석유 매장량 확보를 위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남들 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우리도 알고 있다. 순전히 양적인 측면에서 측정한 사회 진보를 찬양하는 과학 자가 너무나 많고, 그중에는 성장에 집착하는 기업들이 자금을 제 공한 경우도 많다. 그들은 기대 수명이 늘었다거나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줄었다는 것을 이유로 우리가 발전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것도 그 자체로 훌륭한 발전이지만, 문제는 그런 것들이 현대 자본주의가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마치 서구의 일부 주민이 평화롭게 살고 있고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서, 그게 서구 모델의 우월함을 증명하거나 성장 추구의 이점을 반박 불가능하게 증명하는 일인 것처럼 거론되듯이 말이다.
- 자율성을 가진 인간이 결코 부채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현 실이 결코 정보가 아닌 것처럼, 인간의 정신은 컴퓨터가 아니다. 지능은 뇌가 가진 놀라운 능력이고 현실은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 터를 축적하고 있지만, 이것들을 부릴 인간의 의식이 없다면 두 가지 모두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의식을 단순한 처리 능 력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몇 킬로그램을 들 수 있느냐로 인간의 몸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계산 속도는 슈퍼컴퓨터와 겨룰 수 없고, 우리는 결코 크레인만큼 무거운 것을 들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가치는 인간의 유용성을 훨씬 능가한다. 일과 관련된 지표 하나를 개선하자고 인간에게 기술을 개입시키거나 기술로 인간을 대체하는 것은 더 중요한 가치를 버리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은 의식 자체다.
- 우리가 알아낸 바로는, 의식은 미세소관微細小官, microtubule 이라고 하는 뇌의 아주 작은 구조물 내에서 계산되지 않는 양자 상 태에 기초를 두고 있다. 미세소관은 수십억 개가 있고, 그 하나 하나마다 진동하는 수많은 활동 부위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컴퓨터 칩을 이용하는 기계가 있다고 해도 인간의 뇌 하나의 복잡성 앞에서는 빛을 잃을 것이다. 뇌는 가능한 조합이 많아도 너무 많다.
- 예술은 우리를 참신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새로운 접근법과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종종 낯설고 불편한 심경을 유도한다. 예술은 우리를 잠들게 하는 게 아니라 흔들어 깨운다. 자칫 잊힐 수 있는 인간다움에 관해 무언가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 빠진 부분을 뭐라고 꼬집어 말하거나 즉각 관찰하거나 알고리즘으로 처리할 수는 없지만, 이름을 붙이거나 묘사하거나 해결하기 전에도 그것은 분명히 거기에 있다.
그것은 살아 있고, 역설적인, 팀 휴먼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 우리는 일찍부터 남들과 돈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 말리고 교육받았다. 개인의 연봉이나 통장 잔고는 길병 이력만큼이나 민감한 사생활로 간주된다. 왜일까? 이 습관의 뿌리를 찾르면 근원에는 소작농들의 신분 상승이 있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부상 중인 중산층보다 앞서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신분을 나타내야 했다. 이를테면 고귀한 출생 신분 같은 것 말이다. 부르주아의 옷이나 인테리어 스타일을 따라 갈 수 없었던 귀족들은 덜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수백 년 간 이어져 온 허례허식의 삶이 역전되는 과정에서 이제는 부를 과시하는 것보다 숨기는 게 더 세련된 행동이 된 것이다.
지금도 누구에게 얼마나 버냐고 묻는 것은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상황에 따라 너무 적게 버는 게 창피할 때도 있고, 너무 많이 버는 게 수치일 때도 있다. 그러나 부자인 것 혹은 가난한 것 을 숨기는 사회 관습은 서로의 감정을 보호하는 것보다는, 상사의 지배력을 보호하는 것과 더 관련이 있다.
- 상사가 내 연봉을 올려 주려면 나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말했다가는 다른 사람들 도 모두 똑같이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비밀을 유지한다면 나는 경영진과 공모 관계가 된다. 학대를 당했지만 사탕을 받고 입을 다물기로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을 한 셈이다. 이때의 뇌물은 수치심에 기초한 계약이 된다. 이 계약이 깨지는 것은 오직 피해자가 비밀을 털어놓을 사람, 똑같은 학대를 겪은 사람을 찾아냈을 때다. 그리고 진짜 힘이 생기는 것은 그들이 폭로할 준비가 되어, 학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으로 발전했을 때다.
- 마찬가지로 조합에 힘이 생기는 것은 단순히 단체 교섭력 때문이 아니라 조합의 결성이 만들어 내는 집단 감수성 덕분이다. 먹다 남은 음식을 놓고 노동자들끼리 경쟁하게 만들려고 했던 경 영진의 노력은 노동자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순간 수포로 돌 아간다. 택시 애플리케이션이나 온라인 심부름 서비스 플랫폼에 노동자들끼리 서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대화창 기능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화는 결속을 낳고, 결속은 불만을 낳는다.'

종교, 사이비집단, 정부,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모두 똑같은 술책으로 구성원들을 장악한다. 개인의 비밀이나 성적 취향, 정체 성 문제 등을 알아낸 다음, 그것을 빌미로 구성원을 협박하는 것 이다. 스타 배우들이 사이비집단을 빠져나오고 싶어도 그러지 못 하는 이유는 폭로가 두렵기 때문이다. 사이비집단 중에는 타깃으 로 삼은 사람의 가장 사적이고 수치스러운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술도 한때 교회가 부유한 교구민을 협박하거나 가난한 교구민에게 수치심 을 일으켜 착취에 순종하게 만들 때 사용했던 고해성사실의 업그 레이된 버전에 불과하다.
- 업보나 환생을 믿었다면 자신이 한 행동의 파급효과를 겁내 지 않고 그런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 든 것은 나에게 되돌아오므로 아무것도 남에게 떠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환생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내가 오늘 피해를 준 사람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신의 개입을 믿으면서 우리는 오히려 더 자유롭게 자연 을 파괴하고 하늘의 구조를 기다리게 됐다.
시간이 순환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세상의 종말과 같은 정 도를 벗어난, 단 한 번으로 끝나는 순간은 떠올릴 수 없다. 모든 것은 그냥 존재하고, 늘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진보 따위는 없다. 계절과 순환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유대교 이전의 많은 종교가 인간이 하는 일 중에 완전히 처음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 종교들은, 인간의 행위는 원형이 따로 있는 어떤 행동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누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물건을 만들든, 그게 중요성을 띠려면 현실 속에 울림을 만들어 내야 했다. 행동이 의미를 갖는 것은 신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사 랑을 나눌 때마다 사람들은 신들의 결합이라는 원형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거나 세운 것은 모두 신이 가진 창의성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현대성이라는 그물에 걸려든 사람들에게는 진보를 강조하지 않는 이런 얘기가 아무 목적 없는 따분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 다. 애당초 독창성도, 저자라는 개념도, 저작권도, 특허권도 없다. 아무 방향성이 없다.
그러나 방향성이 없더라도 이게 훨씬 더 지속 가능한 방식이다. 천연 자원을 모두 쓰레기로 바꿔 버리는 일방향 흐름보다는 말이다. 그런 일방향 흐름은 자연과 존재의 재생 원칙에 어긋난다. 사람들은 원래 순환을 믿었다. 일방향을 믿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 농경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의 전조였다. 농부들은 땅 이 내놓는 것을 채집하는 게 아니라 땅을 갈고 원하는 작물을 키웠다. 농경은 수확을 자연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업적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 아이러니를 수천 년간 알고 있었다. 성경을 보면 카인이 스스로 키우고 수확한 곡식을 제물'로 바치려 하자,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반면에 양치기 아벨은 제물로 바치는 동물을 자신이 만들지 않았다고 겸손히 인정했다. 카인은 작물을 재배했으나 오만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런 신화 속 교훈을 알면서도 우리는 농경의 독점 지향성을 떨쳐내지 못했다. 중세가 되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유 럽의 공유지까지도 왕의 인가를 받은 독점권자들이 울타리를 쳤 다. 농경이 지닌 최악의 폐단은 증폭되었다. 사유화된 농장을 기 초로 세워진 사회는 통제와 착취, 소유를 중시하게 됐고, 진정한 효율성과 인간의 건강, 환경의 지속가능성까지 희생시켰다.
- 농경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권력 을 축적하는 수단이 됐다. 미국 식민지의 공장식 면화 농장은 당 시 큰 돈벌이가 됐던 노예무역을 정당화했다. 오늘날 공장식 농업 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주로 화학회사, 농약회사, 생명공학회 사의 주주들이다. 공장식 농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유기농 농사 는 손이 너무 많이 가서 규모를 키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 한두 해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수십 년간의 화학제품 남용으로 파괴된 토양이 건강을 회복할 동안 말이다. 생물다양성 을 가진 유기농 농장을 늘리는 것은 부자들만을 위한 사치가 아 니다. 그것은 지금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길이다. 이제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히 밝혀진 사실이 있다. 바로 공장식 농업은 소규모 유기농 농업에 비해 땅에서 나는 식품의 양도 적고, 영양가도 적으며, 효율성도 떨어 지고, 비용은 더 많이 들고, 환경 파괴는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니다. 
공장식 농업이 잘나가는 이유는 진짜 비용을 타인에게 전가하기 때문이다. 공장식 농업은 사회적으로 큰 비용을 치르는 질병을 낳는다. 직접적으로는 오염된 식품과 가축을 통해, 간접적으로는 영양 부족과 비만, 당뇨병을 통해서 말이다. 한편 패스트푸드 및 식료품 업계는 운송비를 공공도로 체계에 떠넘기고, 공급자 역할을 해 줄 나라들의 정복을 군대에 맡긴다. 경쟁에 반하는 보조금까지 정부로부터 받아가면서 말이다. 국제연합UN과 세계은행에서 실시한 연구 조사는 유전 공학이 전 세계 식량 공급에 조금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언자는 “히네니Hineni"라고 대답한다. “여기 있어요”라는 뜻이다. 사람이 왜 하나님에게 여기 있다고 답해야 했는지에 관해 학자들은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 다. 분명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심을 알았을 텐데 말이다.
“히네니”를 외치는 진짜 목적은 준비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일어나 기꺼이 위대한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를 찾아주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이렇게 외쳐야 한다. 여기 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인류를 위해 일어설 때다. 어떻게 보더라도 우리는 완벽하지 않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팀 휴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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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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