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연재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칼럼은 모아 놓으면 경제 현황과 미래 전망에 대한 하나의 긴 논쟁이 된다. 이들의 칼럼은 대중이 경제를 이해하는 방식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이 서로에게 너그럽고 예의 바르지 않았다면 논쟁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둘은 사상적으로는 적이었지만, 사적으로는 친구였다. 다만 사상의 차이를 반영하듯 사고방식이나 글 쓰는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새뮤얼슨 의 글은 그의 평소 성격과는 차이가 있었다. 글에서 그는 이미 명망 이 높고 성공한 학자답게 때로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여유 있게 도전을 받아넘겼다. 반대로 프리드먼은 끄떡없는 상대방에 맞서 점수를 내기 위해 길거리 싸움꾼처럼 주먹을 날려댔다. 또, 프리드먼은 옹호나 비평을 통해 당대에 벌어진 사건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정치적 글을 쓴 반면, 새뮤얼슨은 한때의 논쟁에 일일이 개입하기보다는 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글을 썼다.
프리드먼은 뉴스위크 칼럼이 성공한 원인으로 두 사람 사이의 애정과 존경심을 꼽았다. “정책에 대한 의견은 완전히 다를 때가 많지만, 폴과 나는 좋은 친구다. 우리는 서로의 능력과 경제학에 한 기여를 존경한다.  새뮤얼슨 또한 프리드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 은 취지로 말했다. “우리가 의견이 갈리는 때가 많기는 하지만, 논리 적·실증적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근본적인 지점에서는 서로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사람들이 알게 됐으면 좋겠어. 그동안 서로를 향한 애정과 우정, 존경심을 꽤 잘 감춰 왔다는 걸 말이야."
- 1951년 새뮤얼슨은 고전 경제학과 신(케인스) 경제학을 융합한 독 창적인 이론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자연적 경기 변동에 대응해 실업률을 최소화하려면 어떤 정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 다룬 논문 「현대 재정 정책의 원칙과 규칙: 신고전파 종합Principles and Rules in Modern Fiscal Policy: A Neo-Classical Formulation」에서 그는 뉴딜 시절 공공일자리 프로그램의 효과가 과대평가된 반면 감세 정책의 경기 부양효과는 과소평가됐다고 주장했다. 경기 변동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공공 지출 정책과 조세 정책을 적절히 조합해 써야 한다는 것이 새 뮤얼슨의 결론이었다. 다만 그는 화폐의 역할이나 중앙은행의 통화 량 조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포드의 첫 번째 양산형 자동차 모델T'에 빗대어) “케인스주의 모델 T46라고 이름 붙인 이 시기의 새뮤얼슨 이론에서 통화는 중요하지 않았다. 통화 이론(경제 내 통화량이 물가 상승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을 배재하기로 한 새뮤얼슨의 결정은 그가 통화주의자 프리드먼과 의견 차이 를 보이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 새뮤얼슨은 케인스주의를 종교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맹목적으로 케인스를 신봉하는 동료들을 비판했다. 자신이 어떤 학파에 속한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제 자신을 포스트케인스주의자post-Keynesian 로 분류합니다. 1936년의 초 기 케인스주의 Model A Keynesianism는 이제 구식이 되었죠. 물론 당시 에는 최신식이었지만요.”63 새뮤얼슨은 언제든 스승인 케인스를 비 판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케임브리지 서커스 앞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1983년 그는 케인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케인스학파 모임에 참석했다. 그날 있었던 일 에 대해 새뮤얼슨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 그 자리에 참석했어요. 다 들 일어서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여전히 독실한 케인스주의자입니다. 아직도 진심으로 그를 믿습니다. 저는 좀 무례했죠. 이렇게 말했거든요. 당신들을 보니 충성 맹세를 하는 나치 당원들이 생각납니다. 케인스주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분석 방법일 뿐입니 다. 저는 여전히 케인스주의자지만, 10년 전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경제학자로서 케인스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제 생각에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를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두 명의 이름을 알려 달라는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그리고 레옹 발라스Leon Walras죠."
새뮤얼슨의 유연한 시각은 어쩌면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사고방식만을 고집했던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 같은 학자들과는 달리 새뮤얼슨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사고가 유연했다. 언젠가 그는 프리드먼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전에 했던 말을 철회해야겠어.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말을 바꾸는 걸 무척 싫어하지만, 잘못된 시각을 고집하는 게 더 싫거든.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나중에 그는 프리드먼에게 이렇게 말 하기도 했다. “내가 10년 전에 쓴 논문 중에 지금의 내 시각을 대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이런 면에서 새뮤얼슨은 케인스와 닮아 있었다. 누군가 케인스에게 의견이 왜 바뀌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들은 정보가 달라졌으니 의견을 바꿀 수밖에요. 경께 선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 1960년, 프리드먼은 안나 슈워츠와 함께 100년에 걸친 미국의 화폐 데이터를 분석하는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 결과물인 미국 화폐사는 대공황의 발생 원인에 대한 당시의 통념을 뒤집는 책이었다. 이전까지는 돈이 너무 많이 풀렸는데 상품과 주식은 너무 적다 보니 상품과 주식의 가격이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솟았고 그로 인해 주식 시장에 형성된 거품이 1929년에 꺼지면서 대공황이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금융 데이터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렸 다. 이들은 연준이 이자율을 올리면서 통화량이 감소했고 그 결과 은행이 줄줄이 도산해 금융 시스템이 얼어붙었으며 이에 주식 시장 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시장이 무너져 내렸다는 설명을 내놓 았다. 이 책은 모두가 옳다고 믿던 틀린 사실을 바로잡은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연준의 통화량 관리 실패가 경제의 향방을 가르는 데 무엇보다 더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 했다. 이는 오랫동안 부정되어 온 화폐 수량설quantity theory of money 에 기초한 주장이었다. 화폐 수량설에 따르면, 이자율을 내려 돈을 빌리기 쉽게 만들면 시중에 돈의 양이 늘면서 돈의 가치가 떨어진 다. 반대로 이자율을 올려 돈의 유통량을 줄이면 시간이 지나도 돈 의 가치가 유지된다.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미국 화폐사』를 통해 오랫동안 잊혀 있던 화폐 수량설을 '통화주의'라 불리게 될 사조로 부활시켰다.
- 프리드먼과 새뮤얼슨의 칼럼은 단순히 당대에 벌어진 사건을 각자의 관점으로 해석한 글이 아니라 더 큰 문제가 걸려 있는 싸움 이었고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이에크를 중심으로 한 고전 경제학자들과 케인스의 대결은 케인스가 『일반 이론』을 발 표하면서 케인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새뮤얼 슨과 프리드먼이 맞붙었을 때 케인스학파의 패권은 도전받고 있었 다.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했다. “비전문가의 눈에 경제학자들은 절 대 서로에게 동의하지 않고 걸핏하면 싸우기만 하는 종족으로 비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는 일리가 있다. 예를 들어 폴 새뮤얼슨과 나는 자주 공공 정책을 놓고 공개적으로 심하게 다툰다. ....... 경제학자들 사이에 서 공공 정책에 대한 의견이 나눌 때, 상대가 경제적 분석을 제대로 했는지를 놓고 다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수치의 크고 작음 을 판단하는 기준이나 추구해야 하는 목표, 고려해야 할 기간, 정치적 고려 사항 같은 경제 외적인 부분에서 의견이 갈린다.
새뮤얼슨도 이에 동의했다. 의견 대립은 지식인의 삶을 흥미롭 게 만드는 요소였고, 상대에 대한 개인적 감정과는 전혀 관련이 없 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프리드먼 교수는 능력 있는 학자이자 자유주의 보수 경제학의 강력한 대변인이다. 또, 나의 오랜 친구이기도하다. 하지만 보수주의의 주장을 꽤 많이 들었음에도 나의 진보적 성향은 변하지 않았다. 진리를 찾는 독자들에게 새뮤얼슨이 한 답 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생각하는 진리란 《뉴스위크》에 칼럼을 쓰 는 경제학자 세 명 중 두 명이 동의하는 것입니다.”6 새뮤얼슨은 자 신이나 프리드먼의 시각에 격한 반감을 드러내는 독자들에게 진정 하라고 당부했다. “오늘 《뉴스위크》에서 읽은 경제학 칼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한 주만 더 기다려 보기를 바란다. 또 다른 입장의, 어쩌면 더 좋은 글이 실릴 테니까.
- 매주 연재되는 칼럼에서 학술적인 논의를 할 수 없다는 점은 프리드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프리드먼은 어려운 경제 이론을 제쳐 두고 평범한 사람이 겪을 만한 일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었다. 일부러 쉬운 길을 택했다기보다는 화폐와 경제에 대한 그의 이론이 그만큼 직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통화량을 예로 들어 보자. 상품 은 적은데 시중에 풀린 돈의 양이 많아지면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이다. 정부가 돈을 너무 많이 풀면 잠깐은 풍족할지 몰라도 곧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거라는 프리드먼의 주장은 직관적 으로 일리 있게 들렸다. 하지만 새뮤얼슨은 국가 경제는 가정 경제 와 달라서 국가 경제를 가정 경제와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 해야만 했다.
- 새뮤얼슨은 프리드먼의 효율적이고 강력한 논쟁 기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프리드먼과 얼굴을 맞대고 논쟁할 때마다 “마음속 깊이 두려움을 느꼈다" 고 고백했다. 게다가 프리드먼에게는 논쟁의 내용이 어떻든 자신이 이긴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중에 기록을 보고 객관적으로 점수를 매기면 제가 이긴 게 확실히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청중 앞에서 저는 언제나 엘리트일 뿐이고 승자는 프리드먼이죠.” 그러니 조지 슐츠George Shultz가 이렇게 말한 것도 당연했다. “모두 밀턴 과 논쟁하고 싶어 합니다. 특히 밀턴이 그 자리에 없을 때요.” 《파이낸셜타임스》 기자 샘 브리턴sam Brittan 은 주류에 저항하는 프리 드먼의 솔직함과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그의 의견에 설득력을 더 하는 요소는 그가 많은 사람이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워하는 불편한 진실을 기꺼이 내뱉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 고 경제적 올바름을 내세우는 다수에 맞서 그 불편한 진실을 옹호 한다. "
- 케인스와의 논쟁에서 하이에크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을 강조했다. 그는 “인위적으로 수요를 창출해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왜곡” 하면 “가용 자원 중 일부가 엉뚱한 곳에 사용되면서 경제를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여 확실하고 지속적인 균 형이 달성되는 시기가 또 한 번 늦춰질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 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항구적으로 모든 가용 자원을 '동원'하는 유일한 방법은(위기 상황이든 위기가 지나고 난 뒤든) 인위적 자극을 주지 않고 시간이 생산 구조를 가용 자본에 맞춰 서서히 재편해 나가도록 둠으로써 상처가 영구적으로 아물게 하는 것이다. 
- 하이에크를 비롯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이자율을 낮추면 훗날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믿었다. 이들의 논리는 이랬다. 이자율을 낮추면 저축과 투자의 자연 균형'이 깨진다. 인위적으로 돈의 값어치를 낮추어 기계 등 불필요한 자본재가 팔리게 되면 저축과 투자의 관계가 빠르게 균형 을 벗어난다. 이자율을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는 중앙은행의 정책은 이자율 하락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해 경제를 혼란과 침체로 몰아갈 뿐이다.
- 자유 시장을 둘러싼 논쟁
프리드먼은 자신이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 시장을 옹호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유 시장이 가장 효율적 인 경제 체제라고 생각해서 자유 시장을 옹호했지만, 프리드먼에게 경제적 효율성은 그저 덤으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했다. 그는 이렇 게 적었다. “사유 재산권은 경제의 효율을 높여서가 아니라 자유를 지켜 주기 때문에 정당하다. 효율성은 우연의 산물은 아니지만, 기분 좋은 부산물일 뿐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부산물이기는 하다. 부를 창출해 내지 못했다면 자유도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새뮤얼슨은 '자유'와 제한 없는 사유 재산권을 동일시하는 프 리드먼의 생각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인권이 확장될수록 재산권은 축소된다.  새뮤얼슨은 정부의 시장 개입이 일부 집단에 손해를 입히는 것처럼 제한 없는 시장에도 승자 와 패자는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누구나 원하는 것을 살 자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가격을 기준으로 상품이 배분되는 자유 시장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물건을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시장에서 교육 서비스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형성될 경우,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시장이 개인에게 주는 '자유'는 현실에 없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프리드먼과 하이에크 같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결정한 가격(판매자들과 구매자들 사이의 상호 합의에 따라 정해 진 금액)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시장이 가 격에 모든 참여자의 의사를 반영해 최대 공동선을 달성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새뮤얼슨은 가격을 단순히 희소한 상품을 배분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보았을 뿐, 가격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의 행동이 반영되어 가격이 오르내리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가격을 올리거나 내리는 경우가 더 많다. 새뮤얼슨은 프리드먼의 말을 뒤집어 이렇게 말 했다. “자유 지상주의자들은 가격 체제도 일종의 강제일 수밖에 없 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새뮤얼슨은 거시 경제학은 미시 경제학과 다르다는 일관된 논 리로 자유 시장주의자를 비판했다. 시장 경제학자들은 주로 특정 사례를 일반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미시 경제학적 방법을 사용 해 기업이나 가계의 경험을 경제 전반의 진리로 확장했다. 하지만 새뮤얼슨은 경제학, 그중에서도 특히 거시 경제학의 근본 논리는 가계나 기업의 재무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보았다.
경제학의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학문적 특성은 개인에게는 참인 명 제가 사회에 적용하면 대부분 거짓이고, 사회 전체로 보면 참인 명제 가 개인에게 적용하면 대개 거짓이라는 것이다. 각 개인은 자신이 사 는 물건의 가격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가격을 결정하 는 것은 바로 그 개인들의 모임이다.
- 『미국 화폐사』의 마지막 장은 1920년부터 1940년까지의 미국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0년 동안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미국인들은 광란의 1920년대를 즐기며 생각 없이 사치를 누렸다. 하지만 계속된 호황 끝에 1929년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충격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경제가 멈추고 현금이 부족해지자, 은행은 대출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많은 은행이 영원히 문을 닫았고 부는 사라져 버렸다. 파산한 투자자들이 연이어 자살했다. 1930년대 대공황은 세계를 빈곤으로 몰아넣고 수많은 사 람을 실업자로 만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케인스와 그 제자들이 제시한 설명은 간단했다. 사고팔 물건은 적은데 돈은 너무 많아서 주식과 가격에 거품이 끼었고 1929년 10월 29일 그 거품이 장렬하게 터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리드먼과 슈워츠 가 내놓은 결론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지나치게 과열된 시장이 대 공황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연준이 달러를 충분히 공급하지 않아 서 대공황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연준이 이자율을 내려 고질적 유동성 부족 현상을 해결했더라면 기업과 은행의 부도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프리드먼과 슈워츠에 따르면 연준은 1920년에 할인율을 높였고 주식 시장이 붕괴하고 2년 뒤인 1931년에 다시 한번 할인율을 인상했으며, 1937년에는 지급 준비율을 높였다. 이들은 이러한 연준의 조치가 다른 연방 정부 정책과 함께 1937년 ‘루스벨트 침체Roosevelt Recession’를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이 세 번의 금리 인상이 근 100년 동안 가장 급격한 통화량 수축으 로 이어졌고, 금리가 급격하게 오를 때마다 산업 생산도 급감했다. 고 밝혔다. 세 차례 금리 인상을 하는 동안 산업 생산은 각각 30%, 24%, 34%씩 대폭 줄어들었다. 프리드먼은 대공황의 원인이 통화 량 수축에 있음을 고려하면 대공황이라는 이름보다는 대수축Great Contraction 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는 말을 덧붙였다.
『미국 화폐사는 즉시 고전이 되었다. 이 책에서 프리드먼과 슈워츠가 택한 접근 방식은 매우 과학적이었다. 이들은 화폐 수량 설이 옳다는 가설을 세운 뒤,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과거 통화량이 변할 때마다 예측대로 사건이 일어났는지 관찰하는 방식으로 가설을 검증했다. 케인스처럼 직관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큰 노력을 들여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경험적 증거를 해석해 도출한 결과였기 에 많은 경제학자와 경제사학자들은 이들이 대공황의 진짜 원인을 밝혔다고 인정했다. 이 연구로 프리드먼은 화폐 수량설을 부활시키 는 동시에 화폐 수량설이 경제의 변화를 예측하는 유효한 도구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화폐사』는 프리드먼과 새뮤얼슨이 연구할 때 사용하는 접근 방식의 차이를 잘 보여 준다. 새뮤얼슨은 케인스와 마찬가지 로 직관을 중시했다. 새뮤얼슨이 쓴 수많은 논문은 거의 다 자신이 추측한 바를 밝힌 뒤, 수식을 전개해 그 추측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반면 프리드먼은 타당해 보이는 가설을 제시한 뒤, 장기간의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과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실제 데이터를 사용해 주장을 검증하는 프리드먼의 방식에 더 신뢰를 느낄 수도 있지만, 새뮤얼슨과 케인스의 접근법 또한 물리학과 사회과학에서 매우 자주 사용된다. DNA의 이중 나선 구조부터 핵분열의 결과, 지동설, 중력까지 많은 중요한 발견은 실험이 아닌 추론의 산물이다. 과학에서 추론을 통해 이론을 확립한 지 한참이 지난 후에 실험을 통해 이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는 경우는 무척 흔하다. 새뮤얼슨은 새로운 발견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데이터와 씨름하기보다는 직관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프리드먼과 슈워츠에게 통화 연구를 제안한 인물인 아서 번스Arthur Burn32에게 새뮤얼슨은 이렇게 말했다. 경제 를 예측하는 데는 “컴퓨터가 하는 회귀분석”보다 “마음이 하는 회귀 분석"이 더 뛰어납니다. 누군가 “당신을 컴퓨터로 대체하려면 얼마 나 걸릴까요?" 라고 묻자, 새뮤얼슨은 이렇게 답했다. “100만 년 안 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 오랫동안 케인스주의자들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수요가 증가 한 결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케인스의 이론으로는 경기가 침체됐는데도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는 원인을 설명할 수 없 었다. 경기 침체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면서 케인스주의자들은 자신감을 잃었다. 한편 오랫동안 정부가 경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시장에 부자연스러운 왜곡이 발생한다고 주장해 온 비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 은 정부가 케인스의 처방에 따라 장기간 지나치게 경제에 개입한 결과로 시장 경제의 자연스러운 자기 규제 기능이 약해지면서 스태 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고 믿었다.
새뮤얼슨은 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 다. 그는 “케인스 경제학에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을 설명할 이론이 없다”고 인정했다. 전후 경제의 이론과 실제를 지배해 온 케인스주의가 처음으로 약점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나중에 새뮤얼슨 은 이렇게 회상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케인스주의의 관에 대못을 박았다."
새뮤얼슨은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한 원인이 통화량이 지나 치게 많아서가 아니라, 유권자의 상반된 요구 때문이라고 설명했 다. “스태그플레이션 문제의 근본 원인은 현대의 혼합 경제 체제가 온정적이라는 데 있다.” 케인스 이전에는 경기가 나빠질 때마다 자연스럽게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경기가 나빠지면 일자리가 줄어들고(새뮤얼슨은 이를 “고전 자본주의의 잔학 행위"로 꼽았다), 일자리가 줄어 임금이 낮아지면 고용주들이 다시 사람을 뽑으면서 경제가 다시 회복되었다. 하지만 케인스 이후 과거의 시장 경제가 '혼합 경제 체제'로 바뀌면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실업률을 최소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실업의 위협이 줄면서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자 고용주가 고객에게 임금 인상분을 전가하면서 물가가 올랐다는 것이 새뮤얼슨의 설명이었다. 
- 새뮤얼슨은 프리드먼을 외톨이 비주류 경제학자로 그리고 싶어 했지만, 프리드먼의 주장이 경제학을 바꾸고 정부가 침체기에 경기 부양을 위해 지출을 늘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새뮤얼슨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전 세계 경제 학자들이 밀턴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고 있지만(나는 그 들의 위치를 지도 위에 점으로 표시할 수도 있다), 어느 시점이 되면 누 군가는 밀턴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영향 력이라고 부른다."57 새뮤얼슨의 말대로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는 현 실에서 실패했지만, 프리드먼의 반정부적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힘을 얻었다. 경기 부양을 위해 공공 프로그램에 돈을 지출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감세가 정부 지출의 정치적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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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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