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쿡

경영 2020. 5. 19. 08:24

- 컴팩은 효율성을 높이고 생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도록 돕는 ODM 방식으로 1997년 가을 가장 인기 있는 일부 컴퓨터의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몇 달 후인 1998년 2월 컴팩이 데스크로Deskpro 제품군의 전체 가격을 18퍼센트까지 인하하자, IBM과 델을 비롯해 여 타 업체에서도 제품의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ODM을 지속적으로 가다듬어 효율성을 높인 덕분에 이제 우리는 데스크프로 플랫폼 전체에 선도적인 기술을 적용하고, 보다 높은 가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PC 제품 담당 부사장이자 그룹 총괄 본부장 이던 마이클 윙클러 Michael Winker의 말이다. 컴팩은 또한 ODM을 통해 제조 파트너들에 재고 비용을 이전할 수 있었다. 제조 파트너는 주문을 접수한 후에만 완성 제품을 배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컴팩은 팔려나갈 때까지 오랜 시간 제품 을 쌓아둬야 하는 대형 창고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피터 초Peter C. Y. Chow 와 베이츠 길Bates Gil 은 공저 『폭풍우를 헤치며 Weathering the Storm』에서 컴팩이 그렇게 절약한 돈을 보다 나은 용도에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ODM을 채택함으로써 컴팩은 연구 개발과 마케팅 같 은 핵심 역량에 집중하고, 가치사슬의 나머지는 대만의 하청업체와 각지의 판매회사들에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쿡은 나중에 본질적으로 이와 동일한 모델을 애플에 도입한다. 쿡은 컴팩의 ODM 채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런 그의 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잡스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쿡은 컴팩과 위탁생산업체들 사이에서 중재자로 뛰며 ODM 체계로의 전 환을 성공시켰다. 당시 애플은 자사의 혼란스러운 제조 공정을 정비 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잡스는 솔루션을 찾기 시작했고 얼마 후 그 일에 딱 맞는 인물을 발견했다. “팀 쿡은 조달 업무에 빠 삭했지요. 그것이 당시 우리가 필요로 하던 적합한 배경이었어요.” 잡스가 훗날 월터 아이작슨을 만나 회상한 내용이다. “나는 그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상황을 보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지요. 나 역시 전에 일본을 방문해서 JIT 공장을 둘러보고 매킨토시를 개발할 때와 넥스트NeXT에서 일할 때 그런 시스템을 구축해본 적이 있었거든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았기에 팀을 만났지요. 대화를 해보니 그 친구도 나와 생각이 같더군요.” 성격이 판이한 두 리더가 그렇게 JIT 제조 시스템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쿡은 컴팩에 있는 동안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IBM 시절 과 마찬가지로 그를 싫어하는 동료는 거의 없었다. 그는 휴스턴 교외지역에 가정을 꾸려 정착하던 대부분의 동료와 달리 시내에서 혼자 살았다. 어쨌든 주변 사람들이 그를 진정으로 알 기회를 갖기도 전에 쿡은 컴팩의 안전하고 보장된 일자리를 떠나 애플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동안 습득한 모든 기술과 지식을 총동원해 애플의 컴퓨터 제조와 판매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정비한다.
- 1998년 3월 11일 쿡이 합류할 당시 애플은 많은 사람이 일하고 싶어 하던 직장이 아니었다. 회사는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더불어 직원들의 사기도 바닥을 기고 있었다. 당시는 스티브 잡스가 임시 CEO, 즉 ICEO'로 애플에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그는 2000년에 직위에서 '임시'를 떼어낸다), 그의 복귀로 인해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이유는 생겼지만 아직 그는 어떤 것도 팔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애플에서 나온 유일하게 훌륭한 것은 그 유명한 광고 캠페인 '다르게 생각하라 Think Different 뿐이었다. 애플의 고객과 수익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가는 가운데, 잡스는 사내에서 죽은 나무를 제거하고 변화를 꾀하며 바삐 움직였다. 애플의 몰락은 실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컴퓨터 업계에서 2위를 달리며 IBM을 바짝 추격하던 회사였다. 1980년 대 중반에 태동한 데스크톱 출판 혁명을 주도하며 돈을 긁어모았던 것이다. 다채로운 서체와 다양한 편집 기능을 갖추고, 나아가 사용 하기도 쉬운 매킨토시는 출판사와 잡지사, 신문사 등 출판업계 전반 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활자와 사진식자에 의존하던 기존의 출판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면서 말이다. 이 덕분에 애플은 캘리포니아주와 아일랜드, 싱가포르에 있는 3개의 초대형 공장을 하루 24시간 연중무휴로 가동시키며 미국과 유럽, 아시아 시장에 제품을 실어 날랐다. 직원 수는 1만 3000명이 넘었고 연매출은 90억 달러 이상에 달했다.
- 문제는 1995년 8월 24일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 95를 출시하면 서 시작되었다. IBM과 호환되는 PC를 위한 OS(운영체계)인 윈도 95 는 컴퓨팅 세계에 가히 충격적인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사실상 맥 OS를 노골적으로 베낀 아류에 불과했지만, 델과 컴팩, 게이트웨이 등의 저렴한 IBM 클론 제품들을 유저 친화적으로 만드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윈도 95는 출시 첫해에만 4000만 카피가 팔려나가며 마이크로소프트에 엄청난 성공을 안겨주었다. 윈도를 탑재한 PC는 애플의 기계만큼 광이 나진 않았지만, 가격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저렴했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컴퓨터는 이제 애플 제품이 아니었다. 애플은 즉각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1995년 4억 달러가 넘는 이익을 기록하던 회사는 1996년 일사분기에 6900만 달러의 손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이사분기에는 손실이 엄청나게 불어나 7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실리콘밸리 역사상 한 분기에 기록된 최대의 손실이었다. 그 결과 애플은 직원을 정리해고하며 불운한 CEO 마이 클 스핀들러Michae Spindler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CEO로 영 입한 인물은 '회생경영의 귀재'로 명성을 날리던 길버트 아멜리오 Gilbert Amelio 박사였다. 당연히 회사를 살릴 거라는 기대감이 그를 향했 다. 하지만 애플의 내리막길은 계속 이어졌다. 이후 18개월 동안 애 플의 컴퓨팅 시장점유율은 10퍼센트에서 3퍼센트로 축소되며 활기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아멜리오가 재임한 18개월간 애플은 도합 16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이제 남은 과정은 청산 절차를 밟는 것밖에 없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아 멜리오도 한 가지만은 제대로 했으니, 바로 당시 잡스의 회사 넥스트를 4억 달러에 인수하며 그를 다시 애플로 불러들인 일이었다. 애초 에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한 목적은 그 회사의 차세대 OS를 손에 넣 기 위해서였다. 잡스를 불러들인 이유도 처음에는 아멜리오의 자문 역을 맡기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곧 아멜리오를 축출하는 작 업에 들어갔다. 결국 잡스는 오래전 그가 공동창업한 회사에 돌아와 달라는 이사회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직함을 iCEO로 정하고 애플에 복귀했다.
- 기꺼이 아웃소싱을 단행하고 경영수지를 개선하고자 애쓰는 잡스의 태도는 그를 대차대조표의 흑자보다 ‘우주에 흠집을 남기는 데 더 관심이 많은 충동적인 젊은이로 기억하던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 상을 주었다. “경영자가 된 겁니다. 경영자는 기업가나 선지자와는 다른 것이지요. 그의 그런 변화가 나를 놀라고도 기쁘게 만들었어 요.” 당시 애플 이사회의 의장으로서 잡스의 애플 복귀를 도운 에드 울러드Ed Woolard 의 말이다. 잡스는 넥스트와 픽사의 소유주 및 CEO로 활동해온 10년 사이, 애플에 몸담았던 20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경영자로 변모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도움을 필요로 했다. 특히 사업 운영 측면의 개혁을 믿고 맡겨 애플을 다시 승자 로 만들어줄 인재가 필요했다. 잡스는 그런 인물을 자신이 넥스트에서 데려온 간부들이나 애플에 남아 있던 간부들로 구성된 기존의 참모진에서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그러한 적임자가 외부에서 쉽게 발견되지도 않았다. 운영의 책임자로 처음 고용된 인물은 마찰을 피하지 않는 잡스의 스타일을 견디지 못하고 두어 달 만에 그만두었다. 하지만 잡스는 곧바로 후임을 앉히지 않고 자신이 직접 운영 업무를 수행했다. 그 자리에 구시대적인 제조 관리자'를 고용하는 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델 컴퓨터의 CEO인 마이클 델Michael Dell과 같은 수준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인물을 원했다. 1997년 델은 만약 자신에게 애플의 경영권을 준다면 “회사의 문을 닫고 주주들에게 돈을 돌려주겠다” 라는 재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잡스는 그의 '무례한 촌평을 공개적으로 나무랐지만, JIT 생산 및 공급망을 구축한 그의 능력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런 전문성을 갖춘 후보자는 인력 시장에서 그리 흔치 않았다. 애플이 직접 쿡에게 접근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었다.
- 잡스는 1998년 3월, 37세의 팀 쿡을 기본 연봉 40만 달러와 특별보너스 50만 달러에 세계 전역의 사업 운영 부문 수석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쿡에게는 제조와 유통을 총체적으로 정비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쿡의 채용은 잡스가 결정한 최상의 영입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출근 첫날부터 그가 사업 운영에 탁월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애 플에서 30년간 근무한 베테랑인 그레그 조스위악은 쿡이 입사 이전 부터 그런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스티브가 팀의 면접을 보 던 시절이 기억나는데요. 스티브는 회사로 돌아와 운영에 관해 놀라 운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어요. 팀을 면접하면서 배운 내용이라는 걸 다들 눈치챘지요.” 조스위악은 애플파크 Apple Park에서 이루어진 인터 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렇게 입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운영에 관한 기존의 사고방식을 일부 바꿔놓았어요.”
- 조스위악은 당시 애플이 파산 직전'의 위기 상황에 몰려 있던 터라 쿡이 혼돈의 도가니를 물려받은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사업 운영 부문이 최악이었다고 덧붙였다. “정말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어요. 비용관리도 안 되고 재고관리도 엉망이고 고객 계정관 리도 제때 이뤄지지 않고....” 자신이 인계받은 어처구니없는 시스템 을 되돌아보며 쿡은 이렇게 말했다. “짐작하시겠지만 비용관리 쪽이 별로 좋지 않았고 사이클 관리도 그다지 좋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런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다시 조스위악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 친구가 들어오자마자... 전형적인 스티브 스타일로 최고의 팀을 꾸리더군요. 애플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인데도 최상의 인재를 끌어들이는 능력을 보였어요. ... 아주 영리한 친구였지요.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챙기는 살림꾼이었을 뿐 아니라 일을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 줄 아는 리더이기도 했어요.” 더욱이 잡스가 애플의 모든 간 부에게 요구한 사업 감각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이렇게 시작 단계에 서부터 쿡은 맡은 역할의 완벽한 적임자로 활약했다.
- 애플의 재고가 회사의 대차대조표에 머무르는 시간은 쿡의 지휘 아래 수개월에서 수일로 단축되었다. 쿡이 애플에서 일을 시작하고 7개월 만에 재고 회전주기는 30일에서 6일로 줄어들었고, 판매되지 않은 맥의 재고량도 4억 달러어치에서 7800만 달러어치로 감소했다. 1998년 쿡은 애플이 회생 노력을 기울이기 이전부터 방치된 채 쌓아온 수만 대의 미판매 맥을 매립지로 보내 없애버렸다. 애플은 당 연히 이 일을 은밀히 진행했으며, 그래서 이 에피소드의 전말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쿡이 오늘날 애플에 주입하고 있는 환경 친화적인 원칙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조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매우 효과적인 조치였다. 1999년 애플의 재고는 단 2일치로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해당 부분에서 델을 앞지르기 시 작했다. 델이 업계의 '황금 표준'으로 통하던 시절에 이룬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사업 운영이 크게 개선되면서 쿡은 애플의 흑자 전환에 기여하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 쿡과 그의 공급관리팀은 애플의 제조를 단지 외부 공급업체에 대량으로 아웃소싱하는 데그치지 않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하이브리드 아웃소싱 모델을 추구 했다. “전통적인 아웃소싱 모델은 그저 누군가와 계약을 맺고 계획 안을 던져주거나 아니면 계획도 그들이 세우게 하고 그냥 자기네들 이름만 올리는 방식이잖아요. 우리가 취한 방식은 그게 아니었다는 얘기지요.” 애플은 아이맥을 생산하면서 처음에는 일부분만 LG전자에 아웃소싱했다. 컴퓨터의 브라운관 스크린과 몇 개의 부품만 LG전자에 위탁생산한 것이다. 하지만 1999년 애플은 아이맥의 생산공정 전체를 LG전자에 넘겼다. 이어 주문과 수요가 증가하자 당시 애플 의 경쟁사인 델의 파트너 업체로 잘 알려졌던 대만의 기업 홍하이 정밀공업 Hon Hai Precision Industry Co., Ltd. 과 위탁생산 계약을 맺었다. 폭스콘Foxconn' 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회사는 이후 팀 쿡 시대의 제조 를 정의하게 된다. 이전에도 애플은 폭스콘에 애플 I의 조립을 위탁 한 적이 있었지만, 업계의 혁신을 주도하는 두 회사의 공조 관계는 아이맥의 아웃소싱 계약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물론 그 과정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팀 쿡이었다.
- iOS 6는 설정 앱에 프라이버시 전용 메뉴를 도입했다. 그럼으로 써 앱에서 접속할 수 있는 콘텐츠와 데이터를 유저가 상당히 간단하 게 제어할 수 있게 됐다. 이 메뉴는 여섯 개의 섹션을 제공하며, 각 섹션에는 앱의 접속 허용 여부를 보다 손쉽게 제어하는 토글 스위치Toggle Switch 가 포함되었다. 위치 서비스 섹션을 예로 들자면, 유저는 설정 앱의 프라이버시 전용 메뉴에서 위치 서비스 섹션에 들어가 셀룰러 네트워크 검색이나 앱용 지니어스Genius, 아이 애즈Ads 등의 특정 서비스가 자신의 위치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차단할 수 있다. 또한 iOS 6는 기기에 광고 추적제한 기능'을 담아, 개발자들이 유저의 관심 분야와 검색 활동을 바탕으로 타깃 광고를 제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이 같은 보호책을 제공한 최초의 모바일 기기로 여타 주요한 플랫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 기능의 개선은 2013년 6월 WWDC에서 공개된 iOS 7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 업데이트의 가장 큰 목적은 조너선 아이브가 고안해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소프트웨 어를 극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이었다. 조너선 아이브는 2012년 10 월 스콧 포스톨이 퇴사한 뒤 소프트웨어의 설계 작업까지 감독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 기능은 애플에 제2바이 올린 격의 임무였지만, 또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애플은 아이폰 5S와 함께 데뷔한 새로운 지문인식 시스템인 '터치 ID'의 지원 도 추가하기로 했다. 당시 터치 ID는 보안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진 일보한 조치로 환영받았다. 암호를 입력하지 않아도 휴대전화를 잠 금 해제할 수 있게 한 터치 ID는 유저들이 자신의 아이폰과 정보를 보다 쉽고 안전하게 보호하도록 도왔다. 또한 iOS 7은 기기를 분실하거나 도난당했을 때 아이클라우드의 암호를 입력하지 않는 한 다시 활성화할 수 없게 만드는 활성화 잠금 기능'도 도입했다. 이 기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잠재적 도둑들'의 관심 대상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효과를 낳 았다. 이 도둑들은 애플의 기기가 실제 소유주의 손을 떠나는 순간 곧바로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벽돌'로 돌변한다는 걸 빠르게 깨 달았다. 달리 쓸 방도도 없고 팔 데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2014년 경찰 데이터에 따르면, 2013년 9월 애플 기기에 활성화 잠금 기능 이 도입된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아이폰 절도 사건은 34퍼센트 감소했다. 런던과 뉴욕에서도 절도 건이 각각 24퍼센트와 19퍼센트 감소했다.
- 사실 애플과 같이 성숙한 기업에서는 제품 그 자체보다 공급망과 유통 재무, 마케팅을 아우르는 효율적인 사업의 운영과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애플과 쿡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곤 했다. 쿡은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완벽하게 자 신의 재능을 입증했다. 데듀는 결과적으로 그가 애플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CEO라고 평가했다. 데듀는 자신의 이런 견해가 이단적으로 들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쿡이 잡스보다 더 훌륭한 CEO 일 수 있단 말인가? 잡스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가 지금껏 애플을 이끈 CEO 가운데 최고라고 주 장한다. 그는 회사를 창립했을 뿐 아니라 파산 직전에서 구해내기도 했다. 그는 첫 번째 PC(애플 II)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PC(맥)를 거쳐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에 이르기까 지 수년간 애플에서 획기적인 돌파구를 열며 기술 산업 전체를 이끌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스티브 잡스는 진정한 CEO가 아니었습 니다. 사실 데듀는 잡스를 끔찍한 CEO'였다고 기억한다. “그는 항 상 경영자라기보다는 제품 책임자였지요.” 그간의 이력을 자세히 들 여다보면 데듀의 말에도 분명 일리가 있다. 잡스는 기업 경영에 관한 노하우로 성공에 이른 인물이 아니다. 어찌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성공 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애플 초창기에 그는 온갖 일에 관여하며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애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책임자 위치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에 다시 돌아왔을 땐 한층 성숙해진 면모와 예지력 있는 전략으로 조직을 이끌었고 실로 대단한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 회사의 규모가 훨씬 작았고 그의 초점도 위기 탈출에만 맞춰져 있었다. 애플이 안정을 찾자 잡스는 회사 경영의 상당 부분을 국에게 맡기고, 본인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 즉 조너선 아이브와 함께 새로운 제품을 창출하는 작업에 집중했다(국이 곁에 있었기에 잡스가 그럴 수 있었 던 걸로 보인다). 잡스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 시절에도, 사실상 쿡은 이미 CEO에 가까웠다. 결국 잡스의 사망 이후 쿡은 기존에 수행하 던 역할을 그저 이어나간 셈이다. 그리고 쿡은 잡스와는 다른 측면에서 애플을 경영하기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다. “수많은 직원과 다면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갖춘 거대 기업에는 훨씬 더 다방면에 능한 CEO가 필요합니다.” 데듀의 설 명이다. “팀 쿡은 그런 면모를 보여준 인물이지요. 그가 바로 현재의 애플을 이끌기 위한 최고의 적임자입니다.” 애플의 직원들 역시 북에 대해 같은 확신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 전히 우리의 미래가 밝다고 믿습니다.” 조스위악의 말이다. “개발하 고 있는 멋진 제품도 많고, 새로운 CEO가 회사를 이끈 이후로 성장 세가 꺾인 적도 없거든요. 애플의 직원들은 현 CEO의 리더십에 무 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누구와 얘기를 나누는 그에 대한 칭찬과 존경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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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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