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하는 뇌

과학 2024. 2. 11. 21:21

- 우리 뇌에 두 개의 분리된 시스템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들리는 음의 높낮이가 '무엇인지 판 단하는 '무엇 시스템 (what system)'이고, 다른 하나는 소리가 '어디에서 들리 는지를 판단하는 '어디 시스템 (where system)'이다. '무엇 시스템'으로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를 결정할 때는 우세귀에 도달하는 음높이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비(非)우세귀가 듣고 있는 음높이에 대한 의식은 억제하 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오른손잡이는 음높이를 파악할 때, 왼쪽 귀보다는 오른 쪽 귀에 주의를 기울인다.) 반면, '어디 시스템'은 완전히 독립적인 규칙을 따르 는데, 실제로 들은 그 음이 높은지 낮은지와는 상관없이, 고음이 들리는 방향의 귀에서 지각된 음이 들린다고 판단한다.
이 모델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오른쪽 귀가 우세한 오른손잡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고음이 오른쪽 귀, 저음이 왼쪽 귀에 전달된 순간, '무엇 시스템'은 오른쪽 귀로 들은 고음을 듣고 있다고 판단 한다. 또한 이때, 고음이 오른쪽 귀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어디 시스템'은 오른쪽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느낀다. 곧이어 저음이 오른쪽 귀, 고 음이 왼쪽 귀에 전달되면, '무엇 시스템'은 우세귀인 오른쪽 귀에 들리는 저음을 듣고 있다고 판단하지만, 왼쪽 귀에 고음이 들리면서 어디 시스 템'의 주의를 끌어 지각된 음이 왼쪽 귀에서 들린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연속된 음들의 패턴을 들으면, 오른쪽 귀에서 높은 음이, 왼쪽 귀에서는 낮은 음이 교대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양쪽의 이 어폰을 바꾸어 끼어도 이 지각 패턴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음의 연 속이 단순한 하나의 음으로 상쇄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왼쪽 귀가 우세한 (주로 왼손잡이) 청자에 대한 모델을 생각해보면, 높은음이 왼쪽 귀에, 낮은 음이 오른쪽 귀에 교대로 들려야 한다. 수 많은 실험에 의해 이 모델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옥타브 착청 현상은 심리학자들이 착각적 결합이라 부르는 인지 프로세스의 확실한 예시를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패턴을 들을 때, 전형적인 오른쪽 우세귀를 가진 청자는 저음이 오른쪽 귀에 제시되고 고음이 왼쪽 귀에 제시되는 순간, 오른쪽 귀에 제시된 음높이와 왼쪽 귀 에 제시된 음의 위치를 결합하여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음을 지각과정에서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우리의 뇌는 왜 착청을 듣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걸까? 재생된 실제 소리 그대로 지각하지 않고, 굳이 새로운 착청을 만들어내 듣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리들은 대체로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 리고 우리의 청각 메커니즘은 이 질서에 부합하던 청각적 경험들을 학 습하면서 앞으로 들을 소리는 어떤 패턴일지 예측하거나 가정하며 들 을 수 있게 발달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음계 착청 같은 패턴은 일상적으 로 듣는 소리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패턴을 들은 우리 뇌는 두 위치에서 각기 따로 도약하는 음들을 지 각하는 것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결론을 거 부하는 것이다. 그 대신 현실에서 들어봄직한 소리인, 한 곳에서 비슷한 음역의 멜로디를 듣고 다른 곳에서 다른 음역의 멜로디가 들리는 것으 로 가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뇌의 해석에 따라 공간의 음들 을 지각적으로 재조직해 듣는 것이다.”
- 우리의 감각기관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파편화된 형태로 도달한다. 지각 시스템은 그러한 정보의 단편들 사이의 연속성을 유추해서 적절하 게 틈새를 메워야 한다. 가령 우리는 보통 잎에 부분적으로 가려진 나뭇 가지를 보게 되는데, 보이는 부분들 중 어떤 것이 같은 가지로 연결되는 것인지를 유추하게 된다. 이런 추론 과정에서 좋은 연속성과 폐쇄성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한 나뭇가지의 부분들 사이의 틈새를 지각적 으로 채워서 하나의 매끄러운 윤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림 3>의 카니자(Kanizsa)의 삼각형 또한 좋은 예다. 그림을 볼 때 우리의 시각적 시스템은 통합된 전체로 지각하기 위해 틈새를 채우는 과정에서 착각적 윤곽이 만들어진다. 좋은 연속성과 폐쇄성의 원리에 따라 이 그림을 아래의 물체를 가리는 '흰색 삼각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효과로, 우리의 청각 메커니즘은 놓친 정보를 지속적으 로 복구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번화가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 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나가는 교통소음들로 인해 간헐적으로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친구가 말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기 위해 귀로 들어오는 친구 말소리의 단편들 사이의 연속성을 유추해야 하고, 놓쳤던 소리의 단편들을 채워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메커니즘들이 발달되어 왔고, 그런 메커니즘에 기초하여 쉽게 착 각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실존하지 않으나 '들리는 소리에 쉽게 속을 수 있다.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는 저서 『괴델, 에서, 바흐'에서 '이상한 고리'라는 표현을 만들었는데, 이는 하나의 위계적 시스템을 이 루는 개별 수준들을 통과해서 움직일 때 처음 시작했던 지점으로 계속 해서 돌아가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는 '거짓말쟁이 패러독스를 무 한히 돌 수 있는 고리의 대표적 예로 보았다.
네덜란드 화가 M. C. 에셔는 '이상한 고리'의 원리를 여러 작품에서 사용했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그림 4.1>의 석판화 <올라가 기와 내려가기>'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도승들이 끊임없는 여정으 로 계단을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본다. 이 석판화는 <그림 4.2> 의 펜로즈와 펜로즈(Penrose & Penrose)가 고안한 <불가능한 계단>에 바탕 을 두고 변형시킨 것이다. 시계방향으로 각 계단은 한 계단씩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전체 계단은 끝없이 내려가는 것(혹은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 다. 우리의 지각 시스템은 이 그림이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면서도 이러한 해석을 고집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림 속 4개의 계단들에 대해 원근법을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면 똑바로 이해해볼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결코 이런 방식으로 지각할 수 없다. 우리의 지각 시스템은 가장 단순한 해석을 선택한다. 그것이 말도 안 된 다 할지라도 말이다.
- 영화음악 작곡가 한스 짐머(Hans Zimmer)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2017년 영화 <덩케르크>를 위해서, 셰퍼드 음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연속된 소리를 사용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상승하는 듯한 관현악 패턴 을 만들었는데, 이는 끝없이 긴장감을 고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끝없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음계는 정서적으로도 강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하강하는 음계를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다 소 우울해진다고 말한다. 한번은 대형 강의실에서 이런 음계를 재생했 는데, 들려준 지 약 10초 후에 대다수의 학생들이 반복해서 고개를 내리 고 있었다. 끝없이 상승하는 음계를 들려주었을 때는 반대의 현상이 일 어났는데, 학생들은 활기가 돌았고 대다수가 에너지를 받는다고 말했다.
덧붙이자면, 반옥타브 역설은 청각뿐 아니라 시각에서 일어나는 일 반적인 지각 원리를 보여준다. 우리가 모호한 배열을 지각할 때, 우리 는 그것을 해석하여 가장 이치에 맞는 결론을 내린다. 예술가이자 퍼 즐 제작자인 스콧 킴은 <도치들(inversions)>이라는 시각 작품 시리즈를 통 해 이 지각 원리를 보여주었다. <그림 5.5>는 그중 한 작품인 <upside down(거꾸로)>인데, 이를 똑바로 보거나 거꾸로 뒤집어 보더라도 동일한 단어로 보인다! (윗줄에서 upside, 아랫줄에서 down이 보인다.) 그의 책 『도치들에 서 문자와 단어를 사용하여 만든 다른 시각적 패러독스를 함께 볼 수 있 다. "우리는 영어문자와 단어에 관한 오랜 경험에 근거하여, 우리가 가 장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이 배열을 지각적으로 맞춘다. 이러한 이유로 평소 에 영어를 많이 사용할 일이 없던 독자라면 이미지에서 글자를 찾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 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단번에 upside down 글자를 읽어낸다_옮긴이)
같은 원리로 반옥타브 역설을 들을 때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말소 리(주로 유년기에 들었던 부모님의 말소리) 음역에 대한 사전지식과 경험이 우리 로 하여금 소리 패턴을 이 음역에 따라 방향 잡게 한다. 이처럼 킴의 작 품 '도치들'과 '반옥타브 역설' 모두 우리가 지각 세계의 방향을 잡는 방식 에 미치는 하향식 처리의 힘을 보여준다.
- 마지막으로 반옥타브 역설은 '절대음감'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제시한다. 절대음감은 음이 단독으로 제시되었을 때 음의 이름을 맞힐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이 능력은 서양에서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사람들이 반옥타브 역설을 일관성 있게 판단한다면 그들은 이미 절대음 감의 암묵적인 형태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음고류 나 음이름들에 따라 절대적으로 높거나 낮게 듣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 다. 따라서 반옥타브 역설은 사람들이 음정을 듣고 그 음이름을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절대음감의 암묵적 형태를 소 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어린 아기들이 북경어에 노출되면 자연스럽게 음고와 단어를 결합하고 이를 통해 단어에 대한 절대음감'을 발달시킨다. 따라서 아기들이 음 악교육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절대음감을 위한 뇌 회로가 이미 발달한 상태이기 때문에 성조와 함께 어휘를 습득했던 것과 유사 한 방식으로 '음에 대한 절대음감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반면, 영어 같은 비성조 언어에서 음높이를 사용하는 목적은 문법적 구조, 정서적 어조 및 운율 같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이지, 단어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비성조 언어 구사자는 절대음감 습득에 서 불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나의 기존 가설을 강하게 지지한다. 즉, 유아가 성조 언어를 습득할 때 모국어 성조에 대한 절대음감을 발달시키고 후 에 다른 성조 언어의 성조를 습득하듯이 음악적 음에 대한 절대음감을 습득한다는 가설이 좀 더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결과는 유 아기에 음높이와 단어의 뜻을 결합하는 기회를 갖지 못한 대부분의 영 어 구사자들이, 심지어 충분히 어린 나이에도 왜 음악적 음에 대한 절대 음감을 습득하는 데 훨씬 더 어려움을 겪는지를 설명해준다.
아직까진 이 가설에 관한 증거는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 음높이 가 두드러지게 관여하는 '성조 언어 구사자에 한정되어 적용된다. 하지만 일본어나 한국의 특정 지역의 방언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 언어에도 동일한 원리가 어느 정도 적용된다. 일본어는 구성하는 음절들의 음높 이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바뀌는 피치-악센트(pitch-accent) 언어이다. 예를 들어 도쿄 일본어에서 '하시라는 단어를 '고저'로 발음하면 '젓가락'을 의 미하고, '저고'로 발음하면 다리(橋)'를 뜻하며, 두 음절 사이에 음높이 차 이가 없으면 '모서리'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함경도와 경상도 방언이 성조 언어 혹은 피치악센트 언어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경상남도 방언에서 단어 '손'을 저음으로 발음하면 '손자'나 '손해'를 의미하고, 중간 음으로 발음하면 신체 일부인 '손(hand)'이 되며, 높은 음이면 '손님'이 된다. 유아기에 이러한 피치악센트 언어나 방언에 노출된 사람들은 절대 음감 발생률이 비성조 언어만을 경험한 사람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측 되지만 완전한 성조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서만큼 발생률이 높지는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비성조 언어 구사자보다 일본어 구사자 사 이에서 절대음감 발생률이 높지만 북경어 구사자들보다는 그 비율이 덜 하다고 보고되었다."
- 절대음감 습득의 '결정적 시기' 가설을 더욱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약 리학 연구를 소개한다. 동물 연구에 의하면 발프로에이트, 또는 뇌전증 치료에 사용되는 약물인 발프로산이 뇌의 가소성을 회복시켜서 늦은 연 령에도 결정적 시기를 다시 열어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버드 대학교 의 타코 헨쉬(Tako Hensch)가 이끈 국제 연구팀은 음악 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거나 전혀 받지 않은 젊은 남성들을 모집하여 음과 음이름을 연관짓는 훈련을 실시하였다. 발프로에이트를 복용한 집단은 플라시보를 복용한 대조군보다 음이름 맞히기를 더 잘 학습했다. 이 연구에서 발프 로에이트를 복용한 참여자가 11명, 플라시보 군이 12명으로, 참여자 수 는 적었지만 대규모 연구로 진행할 경우에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매 우 흥미로울 것이다.

- 종종 절대음감 소유자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음이름 식별 능력이 점 차 쇠퇴하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40~50세 즈음 시작 되고, 보통 매우 당혹스러워한다. 젊었을 때보다 음이 조금 높거나 조금 낮게 들리게 되는 것인데, 예를 들어 피아노의 C음을 누르면 B나 C# 음 으로 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 수준에서의 음고 이동 현상은 내이( 4) 조직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데, 이는 노화 과정에 따른 불가피한 변화 이다.
영국 심리학자 필립 버논(Philip Vernon)은 음고 이동에 관한 자신의 경 험에 관해 상세히 묘사했다. 52세가 되었을 때 그는 젊었을 때보다 반음 높은 조(key)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특정 조마다 특정한 기분을 연관시키는 일종의 공감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저 에게 C장조는 힘있고 씩씩한 느낌이라면, C#장조는 더 음탕하 고 연약한 느낌입니다. 이 때문에 유명한 C장조 작품인 바그너 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서곡이 C#장조로 연주되는 것으 로 들렸을 때, 듣기가 괴로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나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연주회에서 음악을 들을 때, 항상 습관적으로 조옮김을 했습니다. 즉 제 귀에 C#이나 D로 들리면 실제 음이 각각 C와 C#일 것이라 추론하는 방식이었죠. 이제 71세가 되니 음이 더 높아졌습니다. 최근에는 온음(2반음) 높은 음이나 조로 들리기 시작해서, 바그너의 C장조 서곡이 이 젠 분명한 D장조로 연주된답니다! 
-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에게 절대음감은 그가 듣고 연주하는 음악에 있어서도 필수요소였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절대음감이 변했다는 것을 알고는 충격에 빠졌다.
저는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음악이든 듣고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청력은 점차 나빠지고 있습니다. 요즘 제게는 조가 뒤죽박죽이고, 실제 음보다 온음 높게 듣거나 때로 는 두 온음 높게 듣습니다. 예외적으로 베이스 음은 원래보다 더 낮게 들립니다. 마치 뇌가 흐물흐물 해져서 제 귀와 청각 시 스템이 조율이 안 된 것 같습니다. 저 이전에도 노이하우스와 프로코피에프도 비슷한 증상으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프로 코피에프의 경우에는 말년에 모든 음을 3온음까지 더 높게 들 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문 그 자체입니다....
-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정부는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를 '모니터링 서비스' 감독으로 임명하여 친구와 적의 무선 송 신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당시의 기술을 고려했을 때, 일부 전송은 거의 들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도청된 소리로부터 메시지를 유추하는 일 은 어려웠을 것이다. 곰브리치는 “청각에 대한 공리, 사색, 그리고 힌트" 라는 제목의 내부 메모에서 이러한 도청된 소리의 해석에는 듣는 이의 지식과 예상이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Send reinforcements, am going to advance(증원군을 보내라. 전진하겠다)'라는 긴급한 메시지를 어떤 신호원이 엉뚱하게 들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한다. 'Send three and four pence, am going to a dance(3, 4펜스를 보내라. 춤추러 간다) 
- 뇌가 모호한 신호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재구성한다는 또 다른 예가 있다. 바로 '사인파 음성(sine wave speech)'으로, 심리학자 로버트 레메즈 (Robert Remez) 연구팀이 제작한 것이다. 사인파 음성은 다양한 길이의 사인파 3~4개를 합성하여 만드는데 각 사인파가 자연스럽게 문장을 말 할 때 나타나는 포먼트 주파수들의 형태와 유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음원을 문맥 없는 상황에서 재생하면 그저 수많은 휘파람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원래의 문장을 먼저 듣고 나서 이 사인파 음성 을 들으면, 청자가 그 순간 무슨 단어가 등장할지를 알고 듣게 되므로 우리의 뇌는 이런 휘파람 소리 같은 음원을 마치 문장을 말하는 것처럼 인식하도록 소리를 재구성한다. (여기서 포먼트(formant)란, 말소리에서 에너지가 크 게 두드러지는 특정 주파수 대역을 뜻하며, 보통 이 주파수 대역의 조합에 의해 모음을 인식하 게 된다. 사인파, 배음, 포먼트 주파수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이 궁금하다면, 물리학자 에릭 헬러(Eric Heller)의 저서 『왜 우리는 우리가 듣는 것을 듣는가?」를 참고하길 추천한다.
- 그렇다면 어떻게 뇌에서 이러한 재구성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고전 적 인지신경과학의 관점에 따르면 소리가 제시될 때, 소리 신호는 귀의 가장 안쪽에 있는 달팽이관에 의해 전기 신호로 변환되어 청각 경로를 구성하는 일련의 신경회로를 따라 이동하게 된다. 신경회로 각 구조의 뉴런(신경세포)들은 이 전기 신호를 이어진 상위 수준의 구조물로 전달하고 궁극적으로는 소리가 해석되는 청각피질과 연합피질로 보낸다.
하지만 재구성의 과정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상대적으로 상위 구 조인 청각피질의 뉴런은 청각회로에서 더 하위 수준의 뉴런에도 신호를 보내는데, 다시 그 뉴런들은 좀 더 하위 수준의 구조로 계속 연이어 달 팽이관까지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또한 양쪽 뇌의 뉴런들도 서로 상호 작용한다. 그래서 달팽이관에 전달된 소리에 대한 최종 해석은 정교한 피드백 루프를 포함하게 되며, 그 안에서 신호들은 수차례 변환된다. 문 제를 더 복잡하게 하기 위해 청각 뉴런들은 시각과 촉각을 비롯한 다른 종류의 감각 정보를 전달하는 뇌의 또 다른 구조로부터 신호를 받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청각피질 뉴런들은 기억, 주의, 정서와 같은 상위 인지 과정을 구성하는 뇌 영역의 신경신호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 청각 시스템은 매우 복잡한 상호 연결구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청각 경로 각 단계를 거치는 소리 신호는 특정 방식(강화되거나 약화되는 방 식)으로 조정되며, 이러한 조정은 청자의 경험, 기대, 정서 상태로부터 향을 받는다. 그 결과, 의식으로부터 지각된 최종 형태를 표상하는 신경 신호는 말 그대로 '뇌 속에서 변형된 것이지만 청자는 그 변형된 형태가 '외부 세계'로부터 도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말소리에 대한 지각은 청각뿐 아니라 시각 시스템의 입력에 강하게 영향받을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사례가 맥거크 효과(McGurk effect)'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수많은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상에서 가(ga)'를 발음하는 입모양을 보여주면서 실제 소리는 '바(ba)'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가라고 지각할까? 아니면 바라고 인식할까? 일반적으로 '바' 혹은 '가'를 듣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혼합되어 다(da)'를 듣는다.
우리는 일상에서 소음이 있는 상황에서 입 모양으로 말을 인식해야 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난청이 있는 사람들도 이 러한 인지과정을 거치는데, 맥거크 효과는 입술 움직임 같은 시각적 정 보를 통해 말소리를 추론해낼 뿐만 아니라, 시각 신호가 소리를 듣고 지 각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고 심지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가 '들리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환경이 어떠했는지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할 당시만 하더라도, 에디슨은 축음기가 음악을 위해 주 로 사용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기사 없이 대화록을 받아 적거나 웅변술의 훈련과 같은 언어 기반 활동을 위해 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축음기가 특허를 받은 후에 기업가들은 '녹음된 음악'에 엄청 난 상업적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음 악 산업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히트곡을 제작하기 위해 작곡가, 작사가, 편곡자, 출판사, 기획자가 함께 작업했다. 틴 팬 앨 리(Tin Pan Alley)라 불렸던 이 새로운 사업은 뉴욕을 중심으로 어빙 베를 린(Irving Berlin),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콜 포터(Cole Porter) 등의 작곡 가들이 참여했다. 작사·작곡을 위한 가이드북도 나왔는데, 노래를 기억 하기 쉽게, 또한 계속 귓가에 맴돌도록 단순하고 친숙하게 만들도록 권 고했다. 1920년 어빙 베를린은 성공적인 대중음악을 쓰기 위한 몇 가지 규칙을 제안했다. 그 규칙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제목은 단순하고 쉽게 기억되어야 하며 노래 안에 효과적으로 '주입해야' 한다. 벌스(verse; 절)와 코러스(후렴부) 전반에서 반복해 서 강조되어야 한다. ... 노래는 전적으로 '단순'해야 한다.
또 어빙 베를린은 "새로운 선율 같은 건 없다"라고 말하며, 효율을 아 는 작곡가들은 "옛 악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해서 새로운 곡조로 들 리도록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노래는 친숙한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 녹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대중음악에서는 반복성이 훨씬 더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힙합 디제이들은 동일한 레코드를 카피하 여 두 개의 턴테이블에 두고는 둘을 옮겨가며 특정 음악 구간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 후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는 루프 (Loops) 테크닉은 랩 음악에서 악기 반주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후에 디 지털 사운드 레코딩의 발달로 루프는 샘플링 기술을 사용하여 제작되었 고 그 결과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음악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물론 대중음악의 반복성 경향이 전적으로 기술적 진보로부터 시작되 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음악이론가 엘리자베스 마굴리스(Elizabeth Margulis)가 저서 「반복에 관하여』에서 설명하듯, 대중음악은 음악의 반복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자극했을 것이다. 사실 민족음악학자들은 수십 년 동안 반복이 모든 문화에서 나타나는 음악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 선상에서 음악에서 반복을 갈망하는 경향성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음악의 단편을 다시 재생하도록 유도하여 '맴도는 음조'를 만들 게 할 수 있다.
- 몇 년 전, 매우 기억하기 쉽고 성공적인 킷캣(KitKat) CM송 Gimme a Break(김미 어 브레이크)>의 작곡가 마이클 A. 레빈에게 CM송 성공 비법 에 관해 '외우기 쉬운 속성 외에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 (이 곡은 보통 가장 기 억에 남는 CM송 중 하나로 불리고, 여전히 그 힘이 강력하여 10대 귀벌레 중 하나로 꼽힌다.) 레빈은 탄 토스트(Burnt Toast)"라는 팟캐스트에서 그가 스폰서들과 상의 하기 위해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CM송을 작곡했던 것 대해 설명했 다. 레빈은 나에게 보낸 이메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가 피상적으로 느꼈지만 명확히 표현하지 못했던 그 무언가에 관해서, 말콤 글래드웰은 귀벌레의 고유한 속성인 '들러붙 음'이 어느 정도의 '오류(wrongness)'에 달려있다고 표현하더군요. 무언가가 올바르지 않더라도 의식 수준에서 인식될 정도가 아 니라면, 잠재의식이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을 계속해 서 반복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약간의 오류, 즉 낮은 수준의 오류를 '인식적 치아 사이에 낀 옥수수 조각 같은 것'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말콤이 자기 웹사이트에 인용할 만큼 좋아하는 문구입니다.
이는 '상위'와 '하위' 문화 모두에 해당이 됩니다. 모나리자 미소 의 감정적 모호함, 베토벤 5번 교향곡 도입부에서의 리듬적 모호함(셋잇단음표인지, 8분음표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탈출한 노예를 돕는 것이 윤리적인지에 관해 논쟁하는 허클베리 핀의 아이러니, 백여 편의 소네트에 걸쳐 자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묘사하던 셰익스피어와 그의 한 시구 "그대를 여름날에 비교할까요(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윈스턴 담배는 담배가 그렇듯 맛 이 좋습니다(Winston Tastes Good Like A Cigarette Should)”에서 “as" 대신 "like"라는 구어체를 사용해서 1950년대 문법학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
킷캣 광고음악은 켄 슐드먼(Ken Shuldman)의 “기브미어 브레이 크(Give me a break! '그만 좀, 적당히 좀 해!'라는 뜻)"라는 광고 문구가 아 니었다면 그렇게 효과적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킷캣 바는 조각내서 먹는 과자였고, 일종의 말장난을 만든 것이죠. “기브미어브레이크가 원래는 부정적인 표현이라는 중요 한 사실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짜증 섞인 경고와 같은 튕기는 듯한 짧은 어조였다가 이내 초콜릿 한 조각을 달라는 요 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약간의 음악적 부딪힘이 있는 데 선율의 첫 네 음은 상행하는 5음음계를 내포하고 뒤이어 하 행하는 첫 음은 '블루' 음인 플랫 7도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틀린 음 아냐?'라고 소리칠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라고 다시 생각해 볼 만큼 어색하거나 이상 한 소리이죠.
물론 이러한 모든 분석은 사후에 한 것입니다. 광고 대행사에서 열린 미팅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제 머릿속에서 그 음악을 작곡했는데, 사실 그때 제 손에 들고 있던 켄이 만든 가사들은 두 페이지 분량이었지만, 그중 “Give me a break!(그만좀 해!)"와 "Break me off a piece of that KitKat Bar(킷캣바 한 조각만 떼주라)"가 제가 사용한 전부입니다."

- 왜 하필 청각이 손상되었을 때 음악 환청이 시작될 확률이 높은 걸까? 정상 수준의 청력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귀에 도달한 소리는 신경 자극으로 변환되어 뇌의 청각 중추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정보를 분석, 변환, 해석해 소리가 지각된다. 뇌의 감각 영역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감각 기관으로부터 입력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입력정보가 부족하면 뇌가 스스로 심상을 만들면서 환청이나 환각을 경험한다.
이런 견해를 방출 이론(release theory)'이라고 한다. 방출 이론은 19세기 영국 신경학자 헐링스 잭슨(Hughlings Jackson)이 제안한 뇌 '조직화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잭슨에 따르면 뇌는 계층적으로 조직된 단위 (뉴런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고, 상위 계층의 단위들은 하위 계층 단위들의 활동을 억제(inhibit)한다. 하위 계층 단위들이 일반적인 억제 신호를 받지 못 하면 하위 계층 단위들의 활동이 방출된다. 환청을 설명하기 위해 이 이론이 변형되어 사용되긴 하지만, 사실 환청의 경우에는 이와 반대로 상위 중추가 억제를 담당하기보다는 보통 하위 단위인 귀로부터의 입력 이 뇌의 감각 영역의 활동을 억제한다. 귀가 입력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뇌의 활동에 대한 억제가 풀려 환청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감각 경로 가 손상될 경우에도 억제가 풀릴 수 있는데, 이것이 뇌손상 또는 약물 이 환청을 야기할 수 있는 이유라 여겨진다.

- 청각장애가 있는 노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음악 환청은, 시력을 잃은 노인들에게 일어나는 환각과 몇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다. 스위스의 박 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샤를 보네(Charles Bonnet)는 1760년 자신의 할아버지 샤를 룰린(Charles Lullin)의 시력이 떨어지고 있을 때 나타났던 현상들을 처음으로 묘사했다. 한번은 두 손녀가 방문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동안, 할아버지의 눈앞에서는 멋진 옷을 차려입은 젊은 남성 둘이 나타났다가 잠시 후 사라졌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이 노인의 눈에서는 아름답게 두건을 쓴 여인들, 작은 입자들의 무리가 비둘기 떼로 변하는 것, 공중을 떠다니는 회전하는 바퀴, 물체가 엄청나게 커지거나 극단적 으로 작아지는 환각이 보였다고 한다. 시력이 떨어진 다른 노인들은 아 름다운 풍경, 정성껏 차려입은 대규모의 남녀 무리, 건물, 차량, 기이하게 생긴 동물, 다른 특이한 물체들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환각적 반복시'는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의 환 각을 나타내는 용어로, 이 증상은 때로 뇌손상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산타클로스를 본 한 환자는 이후 또 다른 파티에 서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흰색 수염을 보았다고 한다. 또 다른 환자는 누군가가 공을 던지는 장면과 같은 일련의 동작을 구간 반 복되는 비디오 영상처럼 몇 분에 걸쳐 계속해서 봤다고 한다. 하지만 귀 에 박힌 곡조나 음악 환청과 달리, 이러한 맴도는 영상은 몇 분을 넘는 환각을 일으키지는 않고, 매우 드물게 발생한다.
- 음악 환청은 특히 측두엽(귀 윗부분의 뇌)에서 비정상적으로 뇌가 활성화할 경우 발생할 수도 있다. 신경외과의사인 와일더 펜필드(Wilder Penfield)의 기념비적인 연구를 소개한다. 그는 환자들의 두개골을 열어, 측두엽 표면 일부 지점에 미세한 전기자극을 가할 때 환자가 어떤 경험 을 하는지 연구했는데, 이러한 테스트는 뇌전증 완화를 위해 뇌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발작의 시작점을 찾아내는 데 도움 을 준다. 환자들은 완전히 의식이 있는 상태였고,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두피에 국소마취만 한 상태였다.
1차 청각피질에 전기자극을 가하자 환자들은 윙윙 소리나 휘파람 같 은 단순한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인접한 부위의 피질에 자극을 가하자 놀랍고 꿈같은 경험을 했다. 환자들은 온갖 종류의 시각적 장면을 지각 했고, 발소리, 개 짖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속 삭임, 외침, 웃음소리를 들었으며, 음악은 꽤 빈번하게 들었다. 어떤 환 자는 합창단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고 또 다른 환자는 여러 노인이 함께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다른 환 자는 <아가씨와 건달들>이 무대에서 마치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는 것처 럼 들었고, 또 다른 환자는 멘델스존의 <사제들의 전쟁 행진곡>이 마치 라디오에서 들리는 것처럼 들었다. 모든 환자들은 자신이 수술실에 있 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듣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환청들을 실제인 것처럼 느꼈다.
- 펜필드 박사는 음악을 비롯한 유사한 환상 지각들이 간질 발작이 시 작할 때 발생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환상이 뇌의 전기자극으로 유발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발되었을 것이라 가정했다. 한 환자는 발작이 일 어나기 직전에는 항상 엄마가 불러준 자장가 <잘자라, 우리 아기>를 들 었다고 한다. 또 다른 환자는 발작의 시작을 알리며 라디오나 춤에서 자 주 듣던 노래, <난 견뎌낼 거야(ill get by)> 혹은 <넌 절대 모를 거야(Youll never know)>를 목소리 없이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다른 환자는 발작 중에 라디오 광고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춘 단어들을 들었다고 했다.
- 음악 환청은 드물게 나타나는 반면, 말소리를 듣는 환청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하게 발생한다. 조현병 환자 중 약 70퍼센트는 단어와 구를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는 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환자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때론 둘, 혹은 여럿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목소리는 비판적이거나 욕설을 퍼붓기도 하며 위협 적이고, 상스러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환자들에게 다양한 행동을 '지시'하는 것은 흔하게 나타나며, 그들은 그 지시를 꼭 이행해야 한다 고 느낀다.
- 환각은 감각 기관에서 평상시보다 자극이 없어지는 상황에서도 발생 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박탈 효과라고 일컫는데, 1950년대에 시작된 존 릴리(John Lilly)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감각 박탈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부유 탱크(Hotation tank)'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부유 탱크 안에서 실험참 가자에게 얼굴을 위로하고 피부 온도와 동일한 사리염이 가득한 물에 떠 있게 한 다음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차단시켰다. 감각 자극이 부 족해지자, 잠시 후 참가자들은 환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슬픔 또한 환각을 일으킬 수 있다. 최근 사별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환각 혹은 환청을 경험했고, 종종 그들과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한 연구에서는 1년 전에 배우자가 사망한 70대 초반의 사람들이 배우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유족들은 그 목소리들로부터 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환청은 조현병과 강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정 신이상의 증상이라는 믿음이 팽배하고, 그리하여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하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될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스탠퍼드 대학 교의 교수 데이비드 로젠한(David Rosenhan)은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 표한 "정신병원에서 정상으로 살아가기"라는 논문에서 놀라운 실험에 관해 기술했다. 그를 비롯한 정신병력이 없는 7명의 가짜환자들은 "empty(빈)", "hollow(공허한)", "thud(쿵)" 등의 말소리가 들린다고 여러 병 원의 접수처에 가서 말했다. 다른 증상은 없었지만 그들 모두 정신병동 에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 직후부터는 더 이상 어떤 증상도 없다고 말하 고 매우 정상적으로 행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퇴 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최소 7일에서 52일까지의 입원기간이 소요되 었다!
환청으로 말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정신이상일 수 있다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짧게 말소리를 듣는 환청이나 유령을 보는 환시는 건강한 사 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주 나타난다. 1890년 대초, 헨리 시즈윅(Henry Sidgwick) 연구팀은 심령연구협회를 대표하여 '온 전한 정신에 깨어있는 상태의 환각을 경험하는 국제 인구조사'를 착수하였다." 응답자 대부분은 영국인이었고, 나머지는 미국, 러시아, 브라질 출신이었다. 연구자들은 설문 집단을 신중하게 검토했는데,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명백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조사에 포함하지 않았 고, 수면에 진입하는 순간 환각을 경험해본 사람 또한 배제하였다. 왜냐 하면 이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자의 2.9퍼센트는 목소리를 듣는 것을 경험했다고 보고했다. 추후 연구에 따 르면 기능상의 장애나 고통이 없는 사람들의 약 1.5퍼센트가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적 요인, 특히 종교가 목소리 환청을 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약성경에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대화했다고 씌어 있다. 또한 모세는 불타는 덤불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고, 십계명 을 받아적으라는 명령을 들었다. 아브라함,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욥, 엘리야 모두 신성한 목소리를 경험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악마와 대화했고 유혹을 거부했으며, 성 바울은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 리를 듣고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종교적 전통에 따라 많은 독실한 영적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들었다. 13세기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하나님의 목소리로 종교생활로의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15세기에 잔 다르크는 프랑스 왕이 영국 침 략자로부터 그의 왕국을 되찾는 것을 도우라는 성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목소리를 들은 다른 종교적 인물로는 성 어거스틴, 힐데 가르드 폰 빙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아빌라의 성 테레사가 있다. 오늘날 기도 등 영적 운동에 폭넓게 임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가끔 환영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곤 한다.
사람들이 환청으로 목소리를 들을 때 대부분은 음악 환청을 경험하 지는 않는다. 그리고 음악 환청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가끔 말소리 같은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대체로 웅얼거리는 듯하고 분명하지 않아서 알 아듣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음악 환청과 언어 환청을 일으키는 뇌 회로는 대체로 구별되고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 하나의 청각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특성화된 기능을 가진 모듈들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스티븐 핑커 (Steven Pinker)가 표현한 바와 유사하다.
마음은 특성화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특성화된 부분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직 천사만이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유한한 우리는 단편적인 정보로부터 불완전한 추 측을 해야 한다. 각 마음의 모듈들은, 없어서는 안 되나 또한 옹 호할 근거도 없는 가정을 하면서,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맹목적으로 풀어나간다. 옹호할 수 있 는 유일한 근거는 그 추정과 가정이 우리 조상이 살던 세계에서 는 충분히 잘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2) 2024.02.27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2) 2024.02.15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2) 2024.01.11
뇌를 읽다  (2) 2023.12.19
우리는 모두 2% 네안데르탈인이다  (1) 2023.12.05
Posted by dalai
,

- 특정 기간에 과학 천재가 무더기로 쏟아져나온 '헝가리 현상'이 당시 헝가리 사회에 만연했던 2개의 사조, 즉 '자유주의와 봉건주 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 유태인들은 주변에 있는 다른 유럽 국가의 유태인보다 자유로웠 기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기가 비교적 쉬웠지만, 권력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공무원과 군대는 헝가리의 귀족들이 거의 독점한 상태였다. 대체로 가난하면서도 상류층 의식이 유난히 강했던 전통 귀족들(흔 히 '샌들을 신은 귀족sandaled nobility'이라 불렸다)은 나날이 번성하면서 귀족사회까지 넘보는 비- 헝가리계 유태인들을 몹시 경계하고 있었 기에, 외국에서 이주해온 유태인을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금융계나 의료계에 종사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유태인들이 다른 생각을 품 지 못하도록 간간이 (믹사에게 했던 것처럼) 귀족 칭호를 하사하면서 충성심을 약속받았던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로스앨러모 스의 화성인들은 예외 없이 유태인이었고, 그중 두 명은 귀족 칭호 를 하사받은 유태계 -헝가리 가문 출신이었다.
노이만은 자신과 비슷한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헝가리 현 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것은 일부 사회적 요인들이 동시에 작용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면 도태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개인의 성취동기를 극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유태인에게 관대했던 헝가리의 분위기가 하 룻밤 사이에 바뀔 수도 있었기에, 오직 살아남기 위해 초인적인 능력 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20세기 초에 유태인 학자가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헝가리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 는 분야는 수학과 물리학뿐이었고, 이 분야에서 성공하면 출신 성분 에 상관없이 공정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예 를 들어 일반상대성이론general relativity theory의 진위 여부는 제안자가 유태인이건 기독교인이건 상관없이 오직 실험을 통해 검증될 뿐이 다(아인슈타인은 유태인이었다-옮긴이).
헝가리 사회와 학교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건, 노이만에게는 모 든 조건이 유별난 수학적 능력을 함양하기에 알맞은 조건으로 세팅 되었던 것 같다. 1914년에 루터교 재단의 파로시 김나지움에서 학교 생활을 시작한 후로, 그는 비범한 능력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 했다. 당시 수학계에서는 수학이라는 학문의 기초를 송두리째 뒤흔 드는 심각한 역설이 발견된 상태였다. 수학자들은 수백 년 전에 증 명된 정리까지 도마 위에 올려놓고 새로운 기준에 기초한 증명을 들 이대며 "이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정리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총체적 위기에 처한 상황에 서, 열일곱 살의 천재 노이만이 실력을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 베를린은 활기찬 밤문화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1920년대에 과학의 공용어는 영어가 아 닌 독일어였고, 양자역학의 초기 논문은 독일어로 써서 독일 학술지 에 게재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베를린에서는 젊은 학자들이 참석하 는 학회와 세미나가 거의 매일 개최되었으며, 카페와 술집에서도 신 변잡기보다 학술적인 대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1988년에 위그너는 한 인터뷰 자리에서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비슷했습니다. 일류 과학 교육은 찾아볼 수 없고 덩치만 큰 나라였지요. 과학 최강국은 누가 뭐라 해도 독일이었습니다."
노이만은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과도한 준비로 발표를 망치지 않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세미나 장소를 향해 기차 를 타고 가면서 자신이 발표할 내용을 곰곰 생각하다가, 정작 세미 나장에 나타나면 아무런 노트도 없이 곧바로 수식을 써내려가곤 했 다. 한참 계산을 하다가 칠판이 가득 차면 먼저 썼던 방정식의 일부 를 쓱 문질러서 지우고 그 자리에 달라진 내용을 채워 넣었다(그의 계산을 노트에 받아 적던 사람은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노이만만큼 계 산속도가 빠르지 않은 사람(즉, 모든 사람)들은 그의 독특한 강의 방 식을 지워서 증명하기 proof by erasure "라 불렀다. 강연 도중에 청중들 이 지루한 기색을 보일 때마다 노이만은 3개 언어로 음란한 농담을 구사하면서 분위기를 바꾸었고, 다른 사람이 지루한 발표를 할 때에 는 청중석에 조용히 앉아 다른 엉뚱한 수학 문제를 풀곤 했다.
- 모든 문제는 원자와 광자의 상호작용이 현미경이나 분광기, 또는 우리의 눈을 통해 관측되는 '양자물리학과 고전물리학의 경계'에서 발생한다. 양자 이론에 의하면 입자는 무수히 많은 상태가 겹쳐진 '중첩 상태 superposotion'로 존재할 수 있다. 원자에 속박되지 않은 자 유전자 1개는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 전자를 서술하는 파동함수에는 모든 가능한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누군가가 인광판phosphor screen(유리에 형광체를 칠하여 전자가 닿으면 발 광하도록 만든 판옮긴이)을 이용하여 전자 1개를 '붙잡았다고' 가 정해보자. 전자가 인광판에 닿으면 형광물질이 광자를 방출하면서 '방금 전자가 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로써 자 신의 위치를 들켜버린 전자는 여러 개의 가능성이 중첩된 상태가 아 니라, 위치가 하나의 값으로 정해진 '단 하나의 상태'에 놓이고, 관 측자는 모든 공간에 넓게 퍼져 있는 전자의 파동함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전자는 어떤 관측자도 볼 수 없는 중첩 상태 에 있거나(관측 전), 명확하게 정의된 하나의 위치에 놓여 있거나(관 측후), 둘 중 하나이다. 누군가가 실행한 관측 행위 때문에 자신의 위 치가 발각되는 순간, 전자는 곧바로 양자적 특성을 던져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전적인 모습을 태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노이만은 관측 전후에 판이하게 달라지는 이 두 가지 상태를 이 론의 기초'라고 했다. 처음에 (관측 행위가 개입되기 전) 입자는 모든 가능성이 중첩된 파동함수로 서술된다. 이 파동함수는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의 해로서 임의의 시간, 임의의 공간에서 입자의 상태를 완벽 하게 서술하고 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지구 주변을 도 는 인공위성의 운동 상태를 정확하게 계산해주듯이, 슈뢰딩거의 파 동방정식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파동함수가 변해가는 양상을 정 확하게 알려준다. 여기까지는 뉴턴의 운동 법칙만큼이나 결정론적 이다(원인을 알면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원인을 알면 입자의 파동함수를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결정론'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다-옮긴이). 그러나 입자로부터 위치나 운동량 같은 정보를 추출하 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기만 하면 파동함수가 마치 거품처럼 터지 면서, 그 많았던 가능성 중 단 하나가 무작위로 결정된다. 
- 노이만의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뛰어난 수학자가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최고의 명작으로 손색이 없다. 영국의 한 소년은 수학 경시대회에서 우승하여 이 책(독일어 버전)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단숨에 읽은 후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보냈다. "정말 재 미있게 읽었어요. 하나도 어렵지 않던데요?" 노이만의 책을 소설 읽 듯이 술술 읽었던 그 소년의 이름은 앨런 튜링 Alan Turing이었다." 그 러나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한 젊은 수학자의 거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 책이기도 했다. 독자들 중에는 "28세밖에 안 된 신출내 기 수학자가 마치 자신이 양자역학의 종결자인 양 잘난 척을 하고 있다"며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다.
- 에르빈 슈뢰딩거는 코펜하겐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노이만의 책이 출간되고 3년이 지난 후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교 환하면서 양자역학의 취약점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벌이다가, 대 상을 가리지 않고 양자역학을 마구잡이로 적용하는 추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 한 가지 사고실험 thought experiment (현실적으로 실행이 불가능하여 생각만으로 진행되는 실험-옮긴이)을 제안했다. 노이만의 주장대로 양자역학의 법칙이 큰 물체에도 적용된다면, 벌레나 쥐에게도 적용 되지 않을까? 아니, 우리와 좀 더 친한 고양이는 어떨까?
슈뢰딩거는 1935년에 발표한 논문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층 더 터무니없는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다. 고양이 한 마리를 철제 상자에 가두고, 그 안에 다음과 같은 무 시무시한 장치를 설치했다고 하자(단, 고양이가 이 장치를 망가뜨리지 않 도록 잘 단속해야 한다. 가이거 계수기 Geiger counter (입자를 탐지하여 방사 능을 측정하는장치-옮긴이) 안에 작은 방사성 물질 한 조각을 넣어둔다. 이 물질은 한 시간 안에 원자 1개가 붕괴할 확률이 50퍼센트이며, 붕괴 되지 않을 확률도 똑같이 50퍼센트이다. 만일 원자가 붕괴되면 계수기 의 눈금이 움직이면서 연결된 망치가 작동하여 시안화수소산(청산)이 들어 있는 작은 병을 깨뜨리도록 세팅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 상자의 뚜껑을 닫고 한 시간 동안 방치해두었다고 하자. 만일 그 사이에 원자 가 하나도 붕괴되지 않았다면 고양이는 한 시간 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자가 붕괴되었다면 첫 번째 붕괴가 일어나는 즉 시 고양이는 죽는다. 그렇다면 전체 시스템을 서술하는 파동함수(4)에 는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죄송!) 같은 비율로 섞여 있을 것 이다.
-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 로 통일하기 위해 몇 년 동안 노력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노이만의 머릿속에서는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 뜩였고, 오히려 너무 많이 떠올라서 주체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 1930년대에 제기된 노이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다음 한 가지뿐이 다. “노이만은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한 후 조금 있으면 그 주제에 흥 미를 잃곤 했다. 그 후에 실행해야 할 후속 계산이 산더미처럼 쌓였 는데도, 그는 모든 것을 후발 주자들에게 떠맡기고 곧바로 다음 주 제로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그는 고등연구소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이 시기에 노이만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에르고딕 가설 ergodic hypo-thesis을 증명한 것이었다. 에르고딕ergodic은 '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ergon(에르곤'과 '길'을 뜻하는 'odos(오도스)'의 합성어로, 오스트리 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이 1870년대에 처음으 로 도입한 개념이다. 볼츠만은 기체를 구성하는 입자(원자 또는 분자)의 운동으로부터 기체의 특성(온도, 압력 등)을 알아냈다. 이것을 기체 운동이론kinetic theory of gas이라 하는데, 이 이론에서 그는 기체가 에 르고딕 가설을 만족한다고 가정했다. 대충 말하자면 기체가 보유 한 임의의 특성을 시간에 대해 평균한 값은 공간에 대해 평균한 값 과 같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풍선 내부의 압력을 긴 시간에 걸쳐 측 정하건, 임의의 특정한 순간에 풍선 내부의 원자들이 내벽에 가하는 압력을 모두 더하건, 그 결과는 항상 같다."
볼츠만은 이 가설을 증명하지 못했고, 노이만은 1930년대에 증명 에 성공했다. 그는 이 증명을 곧바로 공개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소 식을 전해 들은 하버드 대학교의 저명한 수학자 조지 버코프 George Birkhoff가 노이만의 논리에 기초하여 더욱 확고한 수학 정리를 만들 어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전용 휴게실에서 마주쳤을 때 노이만은 발표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보다 스무살 연상이었던 버코프는 젊은 수학자의 요청을 무시하고 자신의 증명을 논문으로 출판했다. 노이만의 몸에 밴 유럽식 정중함이 경 쟁심에 불타는 버코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노이만은 버코프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지 않았고, 훗날 그의 아 들 개릿 Garrett과는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노이만과 개릿 버코프는 공동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논문의 주제는 고전적 논리연산이 양자역학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전 논리의 분배법칙에 의하면 'A 그리고 (B 또는 C)'는 '(A 그리고 B) 또는 (A 그리고 C)' 와동치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이런 동치 관계가 성립하지 않 는다. 상식적인 직관에 어긋나지만, 사실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로부터 파생된 결과이다. 그로부터 30년 후, 개릿 버코프 는 노이만이 1930년대에 이룬 업적의 일부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간 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노이만의 면도날 같은 영 민함을 느끼고 싶다면, 그가 했던 대로 일련의 논리를 정확하게 구 사하면 된다. 단,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거실 책상에 앉아 최소 다섯 페이지 이상 계산을 해야 한다. 물론 자신이 목욕 가운을 입고 있다 는 사실을 도중에 알아채도 안 된다.
개릿과 공동 논문을 집필하던 무렵, 노이만보다 여덟 살 아래인 추레한 외모의 영국 청년 앨런 튜링이 노이만의 눈에 띄었다. 튜링 은 노이만이 개발했던 군론group theory을 발전시켜서 1935년 4월에 첫 논문을 발표했는데, 때마침 이 시기에 노이만이 영국 케임브리지 를 방문했고 튜링은 킹스칼리지에서 군론을 강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적인 자리에서 처음 만나 얼굴을 익힌 후, 다음 해 9월에 튜 링이 프린스턴에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었을 때 다시 만났다. 튜링 이 노이만에게 방문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로부 터 5일 후, 튜링은 파인홀에 있는 연구실에서 현대 컴퓨터과학의 초 석이 될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 문제의 응용에 관하여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라는 논문의 초안을 완성했다. 프린스턴의 수학자들은 이 논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 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노이만과 함께 컴퓨터를 연구했던 헤 르만 골드스타인 Herman Goldstine은 이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서 술했다. "튜링과 노이만의 연구실은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고, 노이 만은 그런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튜링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문 제인지, 노이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이만은 튜링 에게 높은 연봉의 연구조직을 제안했지만, 튜링은 이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1938년 7월에 프린스턴을 떠났다. 자신의 조국인 영국에 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 노이만의 선견지명은 1928년과 1939년에 괴팅겐의 수학자 루돌 프 오르트베이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또 그가 1935년 에 헝가리의 수학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앞으로 10년 안에 유럽에 큰 전쟁이 터질 것입니다. 그때 영국이 위기에 처하면 미국까지 참전할지도 모릅니다.” 노이만은 전쟁 중 에 유럽의 유태인들이 대량학살을 겪을 것이며, 그 규모는 오스만제 국 치하에서 아르메니아인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했다. 당장 돗자리를 깔아도 될 것 같은 그의 예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 다. "1940년에 영국은 독일의 침공을 해안에서 막아낼 것이며(당시에는 군사 전문가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다음 해에 미국이 전쟁에 끼어 들 것이다(미국은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공격당한 직후 제2차 세계대전 참 전을 선언했다)." 미국이 곧 전쟁에 휘말릴 것을 예측한 노이만은 자신 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전쟁 준비를 돕기로 마음먹고, 참전 여부 에 영향을 행사할 만한 정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다녔다. 그가 1941년 9월에 자신의 지역구 하원 의원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히틀러에게 대항하는 것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닙니다. 문명국이라면 당연히 참전하여 그를 물리쳐야 합니다. 미국이 히틀러와 타협한다면 머지않아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 노이만을 프린스턴으로 불러들였던 오스왈드 베블런은 제1차 세 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육군 병기국 소속 대위로 복무하다 가 메릴랜드주의 애버딘 무기실험장에 새로 건설된 탄도학연구소 Ballistics Research Laboratory (BRL)에 기술감독관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 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 연구소의 주요 업무는 포사체의 궤적을 연구하여 포탄의 유효 사거리와 파괴력을 개선하는 것이었는데, 상 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당시 연합군이 사용하던 대포는 포탄을 수 천 피트 상공으로 쏘아 올려서 수 킬로미터쯤 날아가는 수준이었으 나, 독일의 악명 높은 '파리대포Paris Gun'는 사거리가 무려 110킬로 미터에 달했다. 포사체를 높은 고도로 쏘아 올리면 공기가 희박해져 서 저항을 덜 받기 때문에 사거리가 길어진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초기 계산이 아무리 정확해도 결국 포탄은 표적보다 먼 곳에 떨어지게 된다. 여기에 좀 더 복잡한 변수(움직이는 표적, 발사면의 상태 등)까지 고려하면 포탄의 운동방정식이 너무 복잡해서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데(수학 용어로 '비선형 방정식 non-linear equation'이라 한다), 이런 경우에는 정확한 답을 포기하고 근사치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근사치를 구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계산이 너무 많다는 것이 다(방정식의 정확한 해를 구하는 과정은 우아하고 간결한 수학이지만, 근사치를 구하는 것은 무식한 중노동에 가깝다-옮긴이). 일반적으로 포탄 1개의 궤 적을 계산하려면 수백 번의 곱셈을 수행해야 한다. 이럴 때 1초당 수 천 번 연산을 실행하는 기계가 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당시는 아 직 발명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이 기에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고, 그 덕분에 방 한 칸 크기의 육중한 컴퓨터가 최초로 탄생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미군의 관심사는 더 큰 대포, 더 큰 폭 탄을 만드는 쪽으로 옮겨갔다. 대포로 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탄은 폭격기나 미사일, 또는 어뢰에 장착해서 적진에 배달하면 된다. 폭 탄이 터질 때 발생하는 충격파의 수학적 특성은 초음속으로 발사된 포탄의 수학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폭탄의 파괴력을 극 대화하려면 폭발의 유체역학적 원리 및 이와 관련된 비선형 방정식 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1930년대 초에 노이만이 관심을 기울인 문제였다(미군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돈을 우려낼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1937년에 베블런의 요청에 따라 애버딘 무기실 험장의 시간제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 1939년 1월 16일, "우라늄 Uranium (U)을 쪼갤 수 있다"는 초특급 정 보가 배를 타고 미국에 전달되었다.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Otto Hahn 과 그의 조수인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이 우라늄 원자에 중 성자를 빠르게 충돌시켰을 때 우라늄의 절반보다 작은 바륨으로 쪼 개지면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당 시에는 그런 형태의 방사성붕괴가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화학 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반응의 원리를 알아낸 사람은 오토 한 의 옛 동료인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Lise Meitner와 그녀의 조카 오토 프리슈Otto Frisch였다. 이 핵반응은 훗날 '핵분열 nuclear fiss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빈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마이너는 1938년 7월에 극적으로 독일을 탈출한 후, 스톡홀름에 있는 노벨연 구소에서 약간의 급여를 받으며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직후에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의 실험 결과를 전해 들 은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우라늄 원자의 핵이 기존의 짐작처럼 단단 한 덩어리가 아니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젤리와 비슷하다고 생각 했다. 중성자가 우라늄 원자의 핵과 높은 에너지로 충돌하면 핵의 일부만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핵 전체가 분열되어 가벼운 원자핵으로 변하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이다. 1939년 새해 첫날, 프리슈는 미국행을 하루 앞둔 보어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면서 자신의 논문이 학술지에 실릴 때까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보어는 함께 승선한 동료 물리학자 레온 로 젠펠트 Léon Rosenfeld에게 금단의 지식을 털어놓았고, 두 사람이 핵분 열의 세부사항을 계산하는 동안 어느새 배는 미국 본토에 도착했다. 보어와 프리슈 사이의 약속을 전혀 몰랐던 로젠펠트는 즉시 기차를 타고 프린스턴으로 달려가서 놀라운 소식을 전했고, 핵분열에 관한 소문은 거의 광속으로 퍼져나갔다. 노이만은 1939년 2월 2일 자로 오랜 친구 오르트베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라늄 바륨 분해 과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기 프린스턴에서는 이 문제 때문에 아주 난리가났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도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몇 달 전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은 직후 이탈리아의 파시스 트 정권을 뒤로 하고 유태인 아내 라우라 카폰Laura Capon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참이었다. 핵붕괴 이론의 대가였던 페르미는 프리슈 의 이론을 듣는 즉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자 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창밖으로 맨해튼을 바라보 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주 작은 폭탄 하나로 모든 게 사라지게 생겼 군...."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모든 상황을 파 악했다. 얼마 후 그의 연구실 칠판에는 폭탄 하나가 덩그러니 그려 져 있었다.
- 몇 가지 증거에 의하면 독일은 이미 1943년 3월부터 미국의 핵폭 탄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정책 입안자들은 독일에 투하한 핵폭탄이 불발되었을 경우, 독일의 과학자들이 그것을 분해하여 그 들만의 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며 폭탄 투하를 반대해왔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당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일본의 과학기술이 독일 보다 못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심각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인종차별주 의에서 해답을 찾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인 은 일본에서 건너온 이민자를 몹시 경멸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직후 미국 정부는 수천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집단수용소에 가둬놓고 평범한 시민을 범죄자로 모는 등 인종차별과 전시 히스테리 wartime hysteria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것은 전시상황에 벌어진 비 상대책이라기보다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에 가깝다. 혹자는 핵폭 탄을 '진주만 공습의 복수'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이건 간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차출된 비미국 출신 과학자들에게 "여기서 만 든 핵폭탄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에 떨어질 것"이라고 미리 통보했 다면, 그들은 도중에 그만두거나 애초부터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이만에게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헝가리에서 벨라쿤의 횡포에 시달리고 독일에서 나치의 폭정을 목격한 그는 전체주의 정권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독일 이 항복한 후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스탈린이 이 끄는 소련이다. 그런 적을 견제하려면 핵폭탄을 하루라도 빨리 만들 어서 확실한 경고를 날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이 일본을 점령하면서 끝날 것이고, 스탈린은 태평양에서 확고 한 입지를 굳히게 된다." 이것은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 자마자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일본 제2의 섬인 홋카이도를 넘겨달라는 '소박한 부탁'을 해왔고, 트루먼은 헛웃음을 참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만일 미국에 원자폭탄이 없었다면 그토록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다.

- 노이만은 ENIAC이 단순한 폭탄 제조용 도구가 아님을 보는 즉시 간파했다. 그는 ENIAC을 처음 본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종류의 컴 퓨터를 구상하고 있었다.
ENIAC의 설계자들은 프로젝트 초기부터 기계에 단점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50킬로와트(kW)에 달하는 소비전력의 절반 이상이 진공관을 달구거나 식히는 데 소비되었고, 각 부위의 계산부하량을 고려하여 배치를 아무리 열심히 조절해도 이틀에 한 번꼴 로 진공관이 파열되었다. 연구원들은 오작동이나 연결 불량으로 발 생하는 작동 중단 사태를 최소화하기 위해, ENIAC의 부품을 신속하 게 교체할 수 있는 표준 플러그-인 단위로 바꾸었지만, 그래도 작동 하는 시간보다 작동을 멈춘 시간이 더 길었다. 1947년 12월, ENIAC 이 계약에 따라 탄도학연구소로 옮겨졌을 때, 《뉴욕타임스》에는 다 음과 같은 기사가 살렸다. "전체 가동 시간의 17퍼센트가 기계를 설 정하고 테스트하는 데 사용되고, 41퍼센트는 문제점을 찾고 해결하 는 데 소모된다. 실제로 필요한 계산을 하는 시간은 전체의 5퍼센트 에 불과하다. 즉 일주일 내내 켜놓아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건 단 2시간뿐이다.
ENIAC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전쟁 기계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다른 용도가 부각되자 기계의 존재 이유가 가장 큰 단점으로 떠올랐다. 프로젝트 팀원 중 이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간 파한 사람은 노이만이었다. 팀원뿐만 아니라, 그만큼 잘 아는 사람 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그 램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컴퓨터"의 설계도가 이미 노이만 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ENIAC 운영팀은 프로젝트 를 진행하는 동안 나름대로 기계의 단점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물색 해왔는데, 여기에 노이만이 합류하여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이들 은 ENIAC의 후속 컴퓨터 개발계획서를 빠르게 작성하여 탄도학연 구소에 제출했고, 8월 29일에 개최된 지휘부 회의에서는 골드스타 인과 노이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계획을 승인했다. 그리고 낭보를 전해 들은 무어스쿨의 연구팀은 새로운 컴퓨터 개발 계획에 '프 로젝트 PY'라는 암호명을 붙이고 곧바로 열띤 토론에 들어갔다. 이 들은 다음 해 3월까지 노이만이 토론 결과를 요약해줄 것으로 기대 했지만, 실제로 노이만은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된다.
어느덧 노이만은 자신의 전공이 아닌 전자공학 분야에서도 상당 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진공관의 형태에 따른 장단점까지 파악한 그는 새로운 기계에 사용할 전기 회로를 직접 설계하고 싶었다. 그 러나 그는 공학자가 아니라 복잡한 문제를 낱낱이 분해하여 가장 근 본적인 질문으로 바꾸는 데 능통한 수학자였기에, 자신의 재능을 십 분 발휘해서 중구난방으로 제기되는 ENIAC 팀의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쪽에 쓰기로 했다. 헤이그와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회상한다. "노이만을 심미주의자라 할 수는 없겠지만, ENIAC을 대 하는 그의 태도는 신실한 칼뱅주의자가 중세의 화려한 성당에 들어가서 프레스코화에 하얀 회칠을 하고 쓸데없이 화려한 장식을 사정 없이 지워버린 행위와 비슷하다. 이 과감한 자세는 새로운 컴퓨터 의 기본 형태를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공학자와 과학자들에 게 영감을 불어넣어 "자신이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대로" 컴퓨터를 만들도록 이끌었다.
흥미로운 것은 노이만이 20세기 초에 수학에 닥쳐온 위기를 극 복하면서 연마한 실력이 첨단 컴퓨터의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는 점이다. 현대 컴퓨터의 지적 기원이 완전하고 결정 가능한 수학 체계를 세우려는 힐베르트의 시도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힐베르트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발표한 직후에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쿠르 트 괴델은 "수학이 완전하거나 자체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악몽 같은 정리를 증명했다. 그리고 그 로부터 5년 후, 23세의 영국인 수학자 앨런 튜링은 힐베르트의 '결 정 문제'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공략하여 수학이 결정 불가능함 을 보여주는 상상 속의 기계를 소환했다. 노이만은 현대식 컴퓨터 의 개념을 구체화할 때 괴델과 튜링의 논리 체계를 가이드라인으 로 삼았는데,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컴퓨터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논문으로 꼽히는 노이만의 역작 「EDVAC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 First Draft of a Report on the EDVAC」에 잘 나와 있다." (EDVAC은 Electronic Discrete Variable Automatic Computer의 약자이다-옮긴이) 컴퓨터 공학자 볼프강 코이 Wolfgang Coy는 이 논문을 "현대식 컴퓨터의 출생증명서"로 정의했다. 완벽한 수학을 추구했던 힐베르트의 프로그램이 좌초된 지 10년 만에 엉뚱한 곳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 괴델의 증명에는 그 유명한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다시 등장하는데,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상하게도 이 명제는 거짓일 때만 참이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문법학자와 논리학자들은 이 역설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 었다. 그러나 괴델은 이것을 참, 거짓의 여부가 아닌 '증명 불가능 성'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재서술했다. "명제는 주어진 계system 안에서 증명될 수 없다."
- 문장 자체는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그러나 괴델은 문장 전체를 G라 는 명제로 표현하고 이것을 다시 g에 대입하여 재귀적인 문장으로 만들었다. 자, 이제 명제 G가 증명될 수 없다면 G는 참이다. 이와 반 대로 G가 증명될 수 있다면 G는 거짓이다. 그런데 이는 곧 "G는 증 명될 수 없다"는 원래 진술이 참이라는 뜻이므로, G는 참이기도 하 다. 그러나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진술은 수학에서 아무런 쓸모 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번째 옵션, 즉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 는 진술이 존재한다"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 결과에 담긴 의미 중 하나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괴델 도 말년에는 이 점에 동의했다). "수학적 진실은 '이곳in here'에 있지 않고 '저 너머 out there'에 존재한다. 따라서 수학은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 견된 것이다."
- 지금도 컴퓨터 설계자들은 컴퓨터의 전체적인 구성을 '폰 노이만 구조von Neumann architecture'라 부르고 있으며, 요즘 사용되는 대부분
의 컴퓨터(스마트폰, 노트북, 데스크톱 등)는 이 원칙에 따라 제작된다. 단, 여기에는 메모리에서 명령과 데이터를 찾거나 가져올 때 순차적 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 단점이 있다. 이것을 '노이만 병 목현상 von Neumann bottleneck'이라고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메시지를 앞뒤로만 전달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이것은 어 떤 연속 처리 방식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단순한 구조에 서 얻은 엄청난 장점을 생각하면, 이 정도 단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ENIAC은 더하고 빼는 모듈module(독립적인 구성 요소-옮긴이) 이 20개인 반면, EDVAC에는 단 하나밖에 없다. 회로가 단순하면 고장이 적고, 이는 곧 기계의 신뢰도가 그만큼 높아진다는 뜻이다.
-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노이만 프로젝트에 합류하기 전에 몇 년 동안 IBM에서 일했던 비글 로는 1938년에 한 인터뷰 자리에서 "IBM은 매우 기계 지향적인 회사로서 전자식 컴퓨터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노이만 이라는 인물과 그로부터 탄생한 수많은 컴퓨터에 자극받은 IBM은 회사의 방침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EDVAC에 기초한 프로그램 저 장형 디지털 기기를 생산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비글로는 IBM 701이 "우리 기계의 단순 복제품"이라며 깎아내렸지만, 1960 년대에 IBM은 전 세계 전자 컴퓨터의 70퍼센트를 생산하는 초대형 기업으로 성장했다. 텔러는 IBM이 벌어들인 돈의 절반이 노이만에 게 진 빚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노이만은 자신이 발명한 기계의 잠재적 가치를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1955년에 컴퓨터의 전체적인 능력이 1945년 이후로 매년 거의 두 배씩 향상되어왔음을 지적했고 그 후에도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노이만의 예측은 집적회로 integrated circuit에 들어가는 회로소자의 개수가 매년 두 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 Moore's law'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인텔Intel의 공동 창업주였던 고든 무어 Gordon Moore가 1965년에 했던 말인데, 연도로 보나 경험치로 보나 노이만이 원조였음은 두말할 필 요도 없다.
현대 컴퓨터의 기초인 논리학과 수학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사람이 그것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영향력, 그리고 운영 능 력을 최고 수준으로 발휘하면서 더욱 강력한 기계가 만들어지도록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갖췄다니, 인류의 역사에 이런 인물이 또 나 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노이만이 세상을 떠난 후, 비글로는 다음 과 같은 글로 그를 추모했다. “노이만은 우리 마음속에 엉켜 있는 거 미줄을 말끔하게 제거했다. 그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이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계산 능력이 과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침투하여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 틴 슈빅 Martin Shubik은 이렇게 말했다. "경제학과 교수들은 오스카(모 르겐슈테른)를 아주 싫어했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이해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는판에 오스카가 아무 데서나 귀족티를 내고 다녔으 니,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거나 다름없었다. 훗날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은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MIT에 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학자 로버트 레너드Robert Leonard를 만난 자리에서 조용히 말했다. "모르겐슈테른은 나폴레옹 같아요.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본인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게임이론』을 푸대접한 진짜 이유는 "경제 문제를 다루 는 이론”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게임이론』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느슨한 결말이 눈에 띄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3인 이상이 참여한 게임에서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제시한 '협동해 cooperative solution'였다. 『게 임이론』은 참가자가 얻은 효용성(소득)이 다른 참가자에게 항상 매 끄럽게 넘어갈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그 '소득'이 묵직한 돈다 발이 아니라 성가신 물건이라면 이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0파운드짜리 지폐 한 장은 백만장자보다 노숙자에게 더 많은 가치가 있다. 게다가 『게임이론』은 연합을 맺은 플레이어들이 수익 을 나누는 규칙도 명시하지 않았다.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경우, 공정 한 분배의 원칙은 무엇인가?
2- 게임에서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제시한 '안정적 집합'도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모든 형태의 다중 게임에서 누군가가 더 나은 거래를 위해 기존의 계약을 파기해도 피해를 입지 않는 굳건한 연합 이 존재할 것인가? 노이만은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게임이론」이 출간되고 25년이 지난 후, 수학자 윌리엄 루카스 William Lucas는 안정 적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 10인 게임을 찾아냈다.
비제로섬 게임에 대한 노이만의 접근방식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다. 수학자 제럴드 톰슨Gerald Thompson은 말한다. "노이만이 도입한 가상의 플레이어는 몇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지만 비제로섬 게임 을 완벽하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이것이 유난히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비제로섬 게임이 현실에 적용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 『게임이론』의 가장 큰 맹점은 플레이어들이 연합을 결성할 수 없 거나, 연합을 원치 않거나, 연합 자체가 금지된 경우를 고려하지 않 았다는 것이다. 『게임이론』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이기적인 개인 에게 초점을 맞춰서 대중의 인기를 끌었듯이, 책의 저자인 노이만 자신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이기적인 사람이 었다. 그러나 연합을 결성해야 유리해지는 상황에서 굳이 개인 플레 이를 선택하는 것은 노이만이 간직해온 중앙유럽인의 기질과 다소 거리감이 느껴진다. 노이만은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 생각했다. 로버트 레너드는 "노이만에게 동맹과 연합은 모든 사 회조직 이론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고 했다.
『게임이론』은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생각했던 "전략적 행동 의 완벽한 지침서"가 아니었다.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우아하면서도 즉시 적용 가능한 모형으로 알려진 '2인 제로섬 게임'은 책이 출간되기 거의 20년 전에 노이만이 증명했던 최대최소 정리에 기초한 것이고, 명의 참가자들로 진행되는 "제로섬 게임은 게임이론』을 집필하던 무렵에도 노이만의 머릿속에서 한창 개발되던 중이었다. 그러나 효용성 utility의 개념과 게임의 엄밀한 서술, 그리고 다양한 표 현법 등 노이만이 이룬 위대한 업적은 후대 수학자들이 세울 웅장한 건축물의 주춧돌이 되었다. 노이만의 손때가 잔뜩 묻은 이론은 훗날 존 내시와 로이드 섀플리Lloyd Shapley, 데이비드 게일 David Gale 등 신세 대 학자들의 연구 의욕을 사정없이 자극했고, 노이만을 계승한 이들 의 업적은 1960년대 경제학과 사회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 스스로 자신을 복제하는 기계
이 모든 시도에 영감을 불어넣은 책이 바로 노이만의 『자기복제 오 토마타 이론 Theory of Self-reproducing Automata』이다. 고등연구소에서 컴 퓨터를 만들고 정부와 산업체의 자문 역할을 하던 와중에, 그는 생 명체의 기관과 인간이 만든 기계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서 무엇을 알게 되건, 제작 중인 컴퓨터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 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1951년에 발표한 또 한 권의 저 서 오토마타의 일반적 및 논리적 이론The General and Logical Theory of Automata』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일반적으로 자연 유기체는 훨 씬 복잡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사람이 만든 기계보다 이해하기 어렵 다. 그러나 유기체에서 발견된 일부 규칙은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하 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인공신경망 artificial neural network에 대한 매컬러와 피츠의 논문을 읽 은 후로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 노이만은 졸 스피겔만Sol Spiegelman 과 막스 델브뤽 Max Delbriück 등 분자에 기초하여 생명을 연구하는 과 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항상 그래왔듯이 노이만은 이 분야를 폭넓게 파고들다가 다소 불확실하면서도 직관적인 아이 디어를 떠올렸고, 그의 아이디어는 훗날 이 분야에 투신한 학자들 에게 방대한 양의 연구 과제를 안겨주게 된다. 또한 그는 세포분열 중 염색체가 분리되는 원리를 주제로 강의를 한 적도 있으며, 미생 물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여 수학자이자 생명과학자인 노버트 위너 Norbert Wiener에게 "전자현미경으로 박테리오파지 bacteriophage (세포 안에 서 증식하는 바이러스-옮긴이)의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 후로 20년 동안 델브뤽과 살바도르 루리 아Salvador Luria의 연구팀은 노이만이 말했던 바로 그 연구를 수행하 여 DNA 복제와 유전자 암호의 특성을 알아냈고, 최초로 바이러스 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 노이만은 1944년부터 노버트 위너가 주최한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두뇌와 컴퓨터의 연관성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 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한시적으로 열린 '목적론 학회 Teleological Society'와 '인공두뇌 학술회의 Conference of Cybernetics'에서 참가자들이 "두뇌와 컴퓨터는 어떻게 '목적이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일 때에도, 회의의 중심에는 항상 노이 만이 있었다. 다른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는 회의가 시작되 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다가,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서 정보와 엔트로피, 또는 논리회로에 관한 강의를 한두 시간동안 하고는 다시 허겁지겁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하다가 회의가 끝난 후 따로 시간을 내서 노이만의 강연을 주제로 자기들끼리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회의 에 참석했던 한 과학자는 신경해부학에 관한 노이만의 강의를 듣는 것이 "연 꼬리에 매달린 채 허공에서 펄럭이는 기분"이라고 했다. 위너는 토론 중에 코를 골면서 자다가 한참 후에 깨어나서는 "자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다 듣고 있었다"면서 그동안 오갔던 이 야기를 정리하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누락된 내용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 오토마타 이론은 1948년 9월 24일에 패서디나에서 '행동의 두뇌 역학Cerebral Mechanics in Behavior'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힉슨토론회Hixon Symposium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공개된 내용을 정리하여 1951년에 책으로 출판한 것이 노이만의 『오토마타의 일반적 및 논리적 이론」이다. 노이만은 오토마타의 핵심 아이디어 를 꾸준히 생각해오다가 2년 전에 프린스턴의 비공개 강의에서 처 음으로 소개했는데, 강의가 끝나갈 무렵 노이만이 “오토마타는 자 신만큼 복잡한 또 다른 오토마타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 기하면서 관심의 초점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처음에 그는 '부모'에 해당하는 기계가 새로 만들 기계의 모든 구조를 완벽하게 알고 있 으면서 조립에 필요한 도구까지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 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내 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자연 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명백하게 모순된다"고 했다. 유기체는 자신 을 복제하여 새로운 유기체를 낳고, 새로 낳은 유기체는 원래 유기 체와 똑같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명체들은 오랜 진화를 거 치면서 점점 더 복잡한 형태로 변해왔다. 인공 및 천연 오토마타의 원리를 모두 설명하는 이론이라면, 인간이 만든 기계가 번식하고 진 화하는 방법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300년 전에 프랑스의 철학 자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인간의 몸은 기계에 불과하다"고 선언했을 때, 그의 23세 제자였던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Queen Christina이 반문했다. "나는 아기를 낳는 시계를 본 적이 없는데요?" 너무나도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300년이 지난 지금은 기계 도 사람처럼 번식할 수 있을까? 노이만은 이 질문을 최초로 떠올린 사람이 아니었지만, 답을 제시한 최초로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 게 된다.
노이만이 구축한 이론의 중심에는 범용튜링머신이 자리 잡고 있 다. 임의의 튜링머신의 세부 구조와 작동 원리가 주어지면 범용튜링 머신은 그것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다. 노이만은 주특기인 계산 을 잠시 접어두고 "튜링머신 스타일의 오토마타가 자신을 복제하려 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파고든 끝에, 세 가지 필요충분조 건(이 조건을 만족하면 복제가 가능하고, 복제할 줄 아는 머신은 이 조건을 만족 하는, 그런 조건-옮긴이)을 찾아냈다. 첫째, 자신을 닮은 복사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일련의 지침(명령)이 주어져야 한다. 이 지침은 원리적 으로 튜링의 종이테이프와 비슷하지만, 기계 자체와 동일한 재질이 어야 한다. 둘째, 기계에는 이 지침을 실행하여 새로운 오토마타를 만들 수 있는 구성 장치(조립 도구)가 있어야 한다. 셋째, 이 기계는 새 로운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지침서를 작성하여 새로 만든 기계의 어딘가에 저장해야 한다(그래야 새로 만들어진 기계도 또 다른 복사본을 만 들 수 있다).
노이만은 자신이 생각한 기계를 특유의 절제된 문체로 다음과 같 이 표현했다. "이 기계는 좀 더 매력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기계에 하달된 지침은 유전자와 거의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며, 복제 과정은 살아있는 세포의 생식(유전물질의 복제)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 이런 식으로 생명체와의 유사성을 강조하고는 기계의 오류를 생명 체의 변이에 연결시킨다. "복제 지침을 조금 수정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은 변이를 일으킨 생명체와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변이는 기능을 저하시키는 쪽으로 나타나지만, 기계는 복제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변이가 수정될 수도 있다." DNA의 구조가 밝혀지기 5년 전에, 그리고 과학자들이 세포의 복제 과정을 이해하기 한참 전에, 노이만 은 하나의 개체가 자신을 복제할 때 거쳐야 할 기본적 단계를 명확 하게 제시하여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의 이론적 기초를 다져놓았 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들었던 비유의 한계까지 정확하게 예 측했다는 점이다. 유전자에 하달된 복제 지침은 단계별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일반적인 지시(신호)만으로 이루어지며, 나머지는 유전자 가 들어 있는 세포로부터 주어진다.
- 노이만은 말년에 떠올렸던 오토마타를 인생 최고의 업적으로 여겼다(말년이라고는 하지만, 40대 후반~50대 초반이었다-옮긴이). 이론에 함축된 의미가 가장 크고 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울람도 노이만의 자기복제기계가 컴퓨터 분야에 남긴 업적과 함께 가장 영속적이 고 흥미로우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이론이라고 했다.
이 점에는 골드스타인도 동의한다. “노이만의 자기복제 이론은 그의 초기 관심사였던 논리학과 말년에 관심을 가졌던 신경생리학 및 컴퓨터를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도구로 3개의 분야에 심오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었 다. 그가 오토마타 이론을 프로그램으로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 난 것은 과학의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 사람들은 노이만이 자기 자랑과 우기기를 좋아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자랑할 만한 일을 했을 때에만 자랑을 했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들 때에만 자 기 주장을 펼쳤다. 아마도 그는 오토마타가 자신을 상징하는 이론으로 남기를 바랐을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 냉소적인 과학자와 자상한 남자, 둘 중 어느 쪽이 노이만의 참모 습이었을까? 마리나는 둘 다 진짜 모습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이만 의 내면에서 두 성격이 충돌할 때에는 마리나조차도 당혹스러웠다 고 한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상반된 두 캐릭터가 항상 치열하게 싸 움을 벌였고 그 와중에도 노이만은 가능한 한 관대하고 명예로운 모 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가 평소에 사람을 잘 믿지 않은 것은 감 정보다 이성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존폐를 좌우하게 될 위기 상황이 수십 년 안에 닥친다는 생각을 할 때, 노이만의 내면에서는 냉정한 합리주의와 관대한 박애 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다. 1955년 《포천> 6월호에 “인간은 기 술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Can We survive Technology?"라는 제목으로 실린 그의 논평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직설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우리에게는 여유가 거의 없다. 무기와 통신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지역 간, 또는 국가 간 갈등이 고조 되고 있으며, 그 규모도 날로 커져가는 추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 규모 충돌도 순식간에 지구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다. 무한히 크게 느 껴졌던 지구가 인지 가능한 수준으로 좁아진 것이다.
기후변화가 지구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한참 전에, 노이만 은 석탄과 석유를 태울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CO2)가 지구의 기 온을 높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단순한 경고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지면에 페인트를 입혀서 햇빛의 반사량과 기후를 조절한다는 새로운 지구공학적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지구의 온도 상승 과 대책을 논한 것은 아마도 모든 분야를 통틀어 노이만이 처음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미 겪은 전쟁이나 핵무기의 위협보다 기후 변화를 극복하는 문제가 국가 간의 결속력을 더욱 공고하게 다져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노이만은 핵반응로의 효율이 빠르게 높아져서 미래에는 핵 융합 에너지를 사용하게 될 것이며, 오토마타는 고체전자공학solid- state electronics의 발전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연구되어 초고속 컴퓨터 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술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교한 기 후 조절 장치를 무기로 사용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 재앙을 피하려면 새로운 정치적 형태와 절차가 필요하다(1988년에 설립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패널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은 바로 이것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였다). 노이만의 논평은 다음과 같이 계속 된다.
아무리 부작용이 심각하다 해도, 새로운 아이디어의 출현을 막을 수 는 없다. 오직 세상을 불안정하고 위험하게 만들기 위해 개발된 기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유용하게 쓸 수 있다. ... 진보의 부작용을 막 는 치료제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분야에서 폭발 적으로 이루어지는 발전의 혜택을 있는 대로 누리고 싶다면 100퍼센트 안전한 삶은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안전 한삶'이며, 안전도를 높이려면 국가 중대사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내리 는 판단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기술의 모든 폐해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만병통치약은 없지만, 다행 히도 우리는 부분적인 치료제를 갖고 있다. '인내심'과 '유연한 사고', 그 리고 지구의 생명체 중 오직 인간만 갖고 있는 '지성'이 바로 그것이다.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2) 2024.02.15
왜곡하는 뇌  (2) 2024.02.11
뇌를 읽다  (2) 2023.12.19
우리는 모두 2% 네안데르탈인이다  (1) 2023.12.05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4) 2023.12.01
Posted by dalai
,

뇌를 읽다

과학 2023. 12. 19. 06:48

- 아세틸콜린은 기저핵이라는 두뇌 영역에서 만들어진다. 영아 시기에는 아기들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세틸콜린이 분비되는데, 신경과학자들은 이렇게 두뇌가 새롭게 형성되어 신규 정보를 극도로 잘 수용하고 끊임없이 신경경로를 구축해나가는 시기를 '신경가소성의 결정적 시기'라고 부른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머제니치 Michael Merzenich는 신경가소성의 결정적 시기 동안 "학습 기계의 전원이 계속 켜져 있다” 고 표현한다." 그러나 성인인 우리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하다. 엄청난 집중력을 가능하게 하는 자동 메커니즘은 우리가 아직 어렸을 때 작동 을 멈추며, 그 이후로는 수동으로만 작동시킬 수 있다.
성인이 아세틸콜린의 스위치를 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결정적 시기가 지나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몇 가지밖에 없 다. 집중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 신체 운동을 하는 것, 도파 민 분비를 촉진하기 위해 중요하거나 놀랍거나 새로운 경험에 노출되 는 것이다.
- 누군가의 심장을 요동치게 할 만큼 강한 수준의 스트레스가 우측 성향 성과자에게는 더욱 집중하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자 극이 될 수도 있다. 이들에게는 매일 똑같이 처리해야 하는 업무나 길 고 생산성 없는 회의가 스카이다이빙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를 유발하 는 일이며, 이 견딜 수 없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새로운 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지속해서 확인할 것이다.
- 성과 그래프의 우측에 위치하는 사람들이 좌측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측성향 성과자인 기업 임원들에게 그래프 좌측 끝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직업에서 최고 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을지 추측해보라고 했더니 몇 사람이 재빨리 답 을 내놓았다. 그들은 "초등학교 교사 아닐까요?", "공무원이요"라고 말 했다. 예측가능성과 확실성을 필요로 하고, 규칙과 시스템을 좋아하며, 빡빡한 마감과 응급 상황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스트레스를 기피하는 좌측성향 성과자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그래프 좌측 끝에 있는 사람들이 낙제자일 것이라고 쉽 게 판단해버렸다.
- 현대의 갈등이 조금 더 문명화되고 복잡해졌을 수 있겠지만, 인류는 주변인들로부터 오는 작은 잠재위협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프로그램을 그대로 유지시켜왔다. 우리의 의구심은 전쟁터에서만 국 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신이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했다고 해서 다음 20년 동안은 그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 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특히나 그 20년 동안 당신 이 중요한 기념일을 잊었거나, 의미 있는 기념품을 실수로 버렸거나, "이 옷 입으면 뚱뚱해 보여?"라는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전형적인 실수를 범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 어떤 면에서 뇌의 역사는 뇌의 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두뇌의 가장 오래된 부위인 뇌간은 독자적으로 작동하며, 대체로 신뢰할 수 있는 생명 유지체계다. 반면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부위인 중뇌와 대뇌피질은 종 종 불화를 일으킨다. 감정조절의 핵심이 바로 이 관계의 역학에 있다.
우리의 과제는 원시적인 두뇌가 당신을 곤란에 빠뜨리기 전에 뇌 의 더 이성적인 체계가 개입할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문제의 상황은 보통 다음의 두 가지 전형적인 형태 중 하나로 발생한다.
1)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끄는 감정의 폭발
2) 뇌의 성난 부위가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대뇌피질이 개입해 이를 진정시켰을 때 나오는 미묘하고 억제된 반응
- 2번 접근법이 문명인에게 더 잘 어울리는 태도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당신의 신체와 뇌에 장기적인 해를 끼칠 가능성이 더 높다. 2번 반응은 당신이 동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거나 폭력 혐의 로 체포되는 일(아니면 그보다 더한 일)을 방지할 수는 있어도, 당신의 혈압을 위험 수준으로 상승시키고, 이성적 판단과 기억을 담당하는 중요한 두뇌 영역을 축소시키며, 면역체계를 위험에 빠트리고, 만성 치아질환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심장병에 이르는 다양한 질병에 당신을 노 출시킬 수 있다.
-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을 고의로 위험에 빠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간단히 대답하자면, 최소한 우리도 의식적으로는 그러기를 원치 않는다. 사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행동을 바 꾸려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두뇌 반응은 대체로 우리의 의식적 인지제어 영역 밖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감정조절의 핵심 포 인트는 더 약하지만 고차원의 의식 영역이 더 강하지만 원시적인 무의 식 영역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두뇌를 훈련시키고 스 트레스 대처능력을 강화해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 40명의 여성이 보톡스 시술 전과 후에 특정 제시문을 읽고 나타내는 반응을 관찰하는 실험에서 심리학자와 성형외과의사 모두를 미소 짓게 만드는 결과가 확인됐다. 보톡스 시술을 받은 여성들은 행복한 제 시문에 대해서는 동일한 반응을 보였지만, 슬프거나 분노를 유발하는 제시문에 대해서는 현저히 느린 반응속도를 보였다.
안면피드백가설 facial feedback hypothesis에 따르면 우리의 신체적 표현은 두뇌에 신호를 보내 그에 맞는 감정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다른 말 로 하면, 우리는 본래 행복할 때 미소를 짓지만, 어떤 때는 미소를 짓는 행위가 우리를 실제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보톡스 시술 후에 종종 생기는 '얼어붙은 미소'가 이 작용을 했을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이 실험의 결과가 너무도 흥미로웠던 나머지 우울증 치료제로서 보톡스의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다.
- 우리의 자아존중감이 저장되는 위치는 자전거를 타는 능력이 저장되는 위치와 동일한 대뇌 기저핵이라는 부위다. 기저핵의 위치가 위협 회로와 보상회로 모두에 아주 인접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을 것 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이야기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면 뇌의 의식 영역과 무의식 영역이 조화 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결국 우리 몸은 지치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인지부조화가 생긴다.
긍정적인 자아상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목표를 이루지 못 하고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 운명에 처하게 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두뇌가 그런 것처럼, 당신의 자아상도 근육과 비슷하다. 당신이 강하고 탄탄한 근육을 얻고 싶다면 해결책은 아주 단순명료하다. 당신은 운동 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기질을 아직 개 발하지 못했거나 이 능력이 퇴화되었다면,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연습이다. 감사할 거리를 찾고, 기존의 성공을 기반으로 또 다른 성공을 모색하며,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전략을 통해 당신의 자아상을 강화할 수 있다.
- 자신의 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 없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다. 자기효 능감은 당신이 자신의 인생과 성과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근본적 인 믿음을 뜻한다. 자기효능감의 상당 부분은 어린 시절에 형성되지만, 당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 모두가 이를 강화 또는 약화시킬 수 있 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새로운 성공을 거둘 때마다 자기효능 감을 끌어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실패나 좌절은 자기효능감을 손상 시키지만, 우리의 힘으로 이것을 어느 정도 막는 것이 가능하다.
- 자기효능감 점수를 확인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당신이 어려운 과제를 대하는 방식을 보는 것이다. 자기효능감이 높은 사람들은 어려운 과제를 도전으로 여기는 반면, 자기효능감이 낮은 사람들은 과제를 위협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과제를 위협이 아닌 도전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당신의 인생에 강 력한 영향을 끼친다. 긍정적 태도는 성취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한편,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대한 민감도를 감소시킨다." 긍정적 태도를 잃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룬 성공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효과 적이다.
- 당신에게 떠올릴만한 업적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지 마라. 당신이 긍정적 태도를 육성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나 있다. 첫째, 어떤 종류의 실수를 하든 바로 떨쳐내고 다음엔 더 잘할 것이라 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켜라. 둘째,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이것이 절대 극복하지 못할 문제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스크린에 떠오르는 잠시멈춤 신호라고 생각하라. 낙관주의자들은 좌절의 순간을 만날 때마다 이것 이 일시적이며 곧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활동으로 넘어갈 줄 아는 사람들이다.
- 가면 증후군이 생기는 이유 경험이 많은 리더들은 종종 자신의 전문적 직감을 바탕으로 최선의 결정을 내린다(5장 참조). 그런데 이런 지혜로운 의사결정의 과정은 두뇌의 의식 영역에 잘 저장되지 않기 때문에 나중 에 기억하기가 어렵다. 이런 특성이 가면 증후군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의사결정 과정을 기억해낼 수 없다는 불안감은 의 식적이며 논리적인 결정능력을 방해하는 편도체를 활성화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이 부적격하다는 생각이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성공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가 끔씩 들더라도 이것이 곧 당신이 사기꾼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오히려 당신이 과거에 무의식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렸었 다는 사실을 암시할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사기꾼이 아닌 전문가에게 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 '꼬리표 붙이기'는 그 명칭이 나타내는 것처럼 당신의 감정적 반응에 이름을 붙이거나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다가 오는 발표 때문에 긴장하고 있다면 그 감정을 글로 적어 언어로 표현 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 당신은 회의에 서 충분히 기량을 발휘하길 원할 것이다. 그러나 압박감을 느끼거나 감 정에 치우치게 되면 원시적 두뇌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꼬리표 붙이기를 통해 통제력을 되찾는 일이 가능하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고 확 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의했다가는 통제력 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한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다. 연구 에 따르면 스트레스의 근원을 찾아 꼬리표를 붙이는 행위는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키는 편도체의 활성화를 감소시킬 수 있다.
- 어떤 면에서 꼬리표 붙이기는 내면적 자제력을 증가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것을 인지 주짓수의 기술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신은 꼬리표 붙이기를 통해 직접적인 싸움을 피하고 감정의 영향력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감정의 힘에 맞선다. 《부동의 심리학>을 집필한 시카고대학교 심리학자 사이언 베일락은 "두뇌의 감 정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과잉 반응을 방지할 수 있는 비법은 단순히 그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 꼬리표 붙이기에는 본질적으로 카타르시스적인 속성이 있다. 당신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감정을 내면에 꼭꼭 담아두지 않고 표출하지 만, 그 행위가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꼬리표 붙이기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기만 할 뿐 아니라, 다음 장에 서 볼 수 있듯 우리의 장기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명상적 기능을 수행하 기도 한다. 당신이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할 때, 자아인식 역시 높아진 다. 불안감이나 분노 또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낄 때는 이 감정들로부터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유익하다.
- 고도의 집중력을 얻는 최고의 방법은 집중력 분산요인을 제거하는 한편 집중력에 유익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주의분산 을 억제하는 것이 적극적인 해결법처럼 보이겠지만, 이 행동은 원시적 이고 강력한 대뇌변연계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거의 효과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집중력을 발휘할 때 활용해야 하는 한정된 인식자원을 소모시켜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요인들을 무시하기보다는 가능할 때마다 그것들을 최소화시키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최선이다. 
- 멀티태스킹은 뇌를 손상시킨다
멀티태스킹은 단기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문제를 유발할 수도 있다. 지속적으로 멀티태스킹을 하게 하는 주 원인인 '다른 곳으 로 주의를 돌리고 싶은 유혹'은 차단이 쉽지 않다. 그 결과, 심지어 당 신이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고 있을 때도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 어려 워질 수 있다. 또한 멀티태스킹은 유연성이 떨어지는 두뇌기억장치를 사용하는데, 이것이 장기기억을 생산하고 회수하는 능력을 저해할 수 도 있다는 근거가 확인되었다. 추가적으로 최근 연구에서 동시에 여러 형태의 미디어를 이용하는 미디어 멀티태스킹과 오류검사능력을 담당 하는 두뇌 영역인 전대상피질 내 회색질 양의 감소에 연관성이 있을지 도 모른다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 주의분산요인은 초기에 제거하라
당신이 잠재적인 주의분산요인에 저항할 때는 전전두피질의 귀중 한 공간이 사용된다. 게다가 이 일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한다. 우 리는 규칙적으로 엄청난 양의 자극을 배제하면서 두뇌 에너지를 소모 한다. 어떤 방해요소는 당신이 통제할 수 없지만, 어떤 것들은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 그러니 자신을 속이려고 노력하는 데 사고력을 낭비 하지 마라. 주의분산요인들을 단순히 치워버리는 것이 더 쉽고 에너지 효율적이다.
- 그림, 종이, 장식품 등 잠재적으로 당신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릴 수 있는 모든 물건을 당신의 시야에서 없애라. 작업 공간에 가족사진이 있
다면, 이것을 책상 위에 두기보다는 의자 뒤 선반에 놓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또 문이 있다면 닫아두고, 그렇지 않다면 인이어 혹은 소음 차단 이어폰을 사용해볼 수도 있다.
프레젠테이션 작업을 마치기 전까지는 절대 책상 위 물건을 건들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보다 잠재적 방해요소를 서랍에 넣거나 집에 두고 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자기절제력은 칭찬할만한 자질이지 만, 이로 인해 소중한 두뇌 에너지가 무서운 속도로 고갈된다.
- 습관적으로 멀티태스킹을 하는 사람들은 단 한 가지의 일을 수행할 때 도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반면, 숙련된 명상가들은 명상 을 하지 않을 때도 마음의 방황을 더 잘 통제할 수 있다." 마음챙김 훈련은 내외부적 주의분산요인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으면서 현재 상황에 집중하는 능력을 증진시켜 당신의 두뇌 주의집중력을 강화한다.
집중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전전두피질과 두정엽의 활동을 늘 려야 한다. 전전두피질은 집중력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두정엽은 당신의 집중력을 특정 목표물에 조준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리처드 데이비슨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마음챙김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해온 사람들이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할 때, 전전두피질과 두정엽이 활성화되 는 정도는 일반인들보다 더 높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챙김은 전전두피질과 편도체의 연결성을 강화한 다. 우리는 모두 통제 불능의 상황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마련이지만, 두 영역의 연결성이 강화되었을 때는 그럴 확률이 낮아진다.
- 카이젠의 비결은 두뇌 위협 반응의 레이더망 밖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따뜻한 표면을 만졌을 때 손가락을 통해 온도를 느끼 지만 급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주 뜨거운 표면을 만진 다면 당신은 의식적인 두뇌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반 사적으로 손을 뿌리쳐 떼어낼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주변에 있는 누 군가가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할 때 당신은 보통 일을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갑자기 비명을 질러 사무실의 침묵을 깬다면 대부분은 놀라서 팔짝 뛰고 말 것이다.
카이젠은 아주 뜨거운 표면보다는 따뜻한 표면처럼, 고함보다는 속삭임처럼 작용한다. 《오늘의 한걸음이 1년 후 나를 바꾼다》의 저자 로버트 마우어는 당신이 취하는 행동이 너무 작고 점진적이며 하찮아 보여서 "편도체 바로 옆을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지나간다"라고 이야기했다.
-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저평가되고 있는 뇌 부위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무의식의 영역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막스플랑 크뇌과학연구소Max-Planck-Institute for Brain Research 전임 소장 볼프 싱어에 따르 면, 무의식 영역은 인간의 의사결정 활동 대부분을 관장한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을 가장 마지막으로 알 아차리는 것은 의식 영역일 때가 많은데, 여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 다. 우리의 무의식은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의식보다 더욱 빠른 속도 로 반응하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이다. 맹수를 맞닥뜨린 인간에게 여 러 행동의 장단점을 비교하며 최선의 대응책을 찾아 고민할 여유가 어 디 있겠는가. 우리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심박과 호흡을 유지하게 해주는 무의식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다. 또한 일반 적으로 한 번에 네 건의 정보만을 수용할 수 있는 작업기억과 달리, 무 의식 영역의 용량은 사실상 무제한이라고 할 수 있다.
- 편도체가 무의식에 의해 장악되어 우리로 하여금 상식을 버린 채 충동적이거나 심지어 파멸적인 방식으로 행동을 하게 되는, 이른바 편 도체 '납치' 상황을 기억하는가?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러한 감정조절 의 실패와 정반대 격의 상황이 바로 초킹이다. 편도체 납치 상황에서는 위협 반응이 주도권을 잡으며, 사고적이고 이성적인 의식 영역은 잠시 활동을 멈춘다.
이와 달리 초킹은 전전두피질이 무의식을 납치하는 상황이다. 프 로골퍼가 자신의 타법에 포함되는 개별 동작들을 불필요하게 분석함으 로써 평소의 순조로운 마무리동작이 방해를 받게 만든다면, 그는 갑자기 입스yips (갑자기 호흡이 빨라지며 손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는 불안 증세_옮긴이)'를 겪을지도 모른다.
- 프로골퍼들이 아마추어보다 입스를 겪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일깨워준다. 전문가와 초심자 사이의 직관력 또는 프로골퍼와 아마추어 사이의 퍼팅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초심 자들은 생각을 더 많이 함으로써 유익을 얻지만, 전문가들에게는 많은 생각이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도 이 현상의 전형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열등 한 선수가 경기에서 상대 선수의 멋진 백핸드리턴 기술을 칭찬한다. 그 녀는 감명을 받았다는 듯이 "와! 어쩌면 그렇게 잘하시죠? 라켓을 살짝 바꿔 쥔 건가요 아니면 팔꿈치를 조금 더 뺀 건가요?"라고 질문을 던진다. 설사 그녀가 상대 선수로부터 제대로 된 답변을 얻지 못한다 해도 (상대 선수가 전문가라면 아마 정확한 답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의 도했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을 확률이 높다. 이제 상대 선수는 전만큼 훌륭한 백핸드 기술을 펼치지 못할 것이다. 열등한 선수의 질문으로 인 해, 상대 선수는 자신이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을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순조로운 과정을 방해하고 선수의 리듬을 깨는 것은 보통 질문 하나로도 충분하다. 거의 모든 운동선수들이 보고하는 초킹의 불 쾌한 경험은 대부분 외부 개입 없이 일어나지만, 앞의 사례에서는 영악 한 질문이 초킹을 유발했다.
- 직관적 의사결정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직관적 의사결정이 동전 던지기와 같이 무작위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에 염려 를 표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동전 던지기는 훌륭한 의사결정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만약 당신이 거의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선택지 앞에 서 망설이고 있다면, 동전을 던져라. 동전 던지기를 통해 결정된 사항 으로 만족감이나 안도감이 든다면 그 결정을 따르라. 그러나 당신이 동전 던지기로 정해진 결과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거나, 애초에 이렇게 중요한 사안을 왜 동전 던지기 같이 임의적인 방식으로 결정하려 했는지 의문이 든다면 다른 선택지를 골라라. 당신이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 도록 '직감'이 경보를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 직관력의 해부
직관적 결정을 담당하는 두뇌의 두 영역은 기저핵과 섬엽이다. 우리가 축적한 전문성을 반영하는 저장된 행동양식 과 루틴을 관리하는 부위가 기저핵이다. 섬엽피질이라고도 불리는 섬 엽은 신체지각을 담당하며, 모든 신체상의 변화에 아주 민감하다. 이 영역은 맥박과 같은 생체기능을 관리할 뿐 아니라, 피부에 닿는 온도가 높거나 낮을 때 혹은 방광이 가득 찼거나 배가 부를 때를 알아차리는 역할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섬엽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다!
-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오면, 비록 당신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뇌의 무의식 영역은 곧바로 처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뇌는 무의식이 이미 결정한 사항과 의식이 결정한 사항을 비교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결정이 일치한다면 당신의 뇌는 미세한 보상 반응을 일으키며, 결정이 일치되지 않을 때는 위협 반응이 시작된다. 두 반응은 모두 신체상의 변화를 유도한다.
뇌가 보상을 예측하고 있는데 보상이 오지 않는다면 '놀람'의 반응이 일어난다. 이를 처리하는 것은 전대상피질이다. 도파민 뉴런이 빽빽하게 들어찬 이 영역은 오류 감지기다. 전대상피질은 예상했던 보상 이 오지 않을 때 오류감지신호라고 알려진 뇌파를 발생시킨다. (이것을 '이런 젠장!'회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섬엽 부위 덕분에 신체지각능력이 높은 우리는 변화를 감지한다. 직감을 '육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기 분 상태의 미묘한 변화를 바탕으로 어떤 결정이 좋은지 나쁜지를 감지 한다.
- 독일 심리학자 게르트 기거렌처는 직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안감에서 비롯된 부산물을 가리켜 '방어적 의사결정이라고 불렀다. 위험이 기피되는 기업 세계에서 직관적 결정에 의존하는 임원들은 종종 자신의 결정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이로 인해 그들은 직감에 따라 먼저 결정을 내린 다음, 뒷받침할 자세한 설 명을 사후에 찾아 추가한다.
이와 비슷하게, 노련한 의사들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즉각적인 판 단을 내린 이후에 값비쌀뿐더러 외과적 개입을 요구하기까지 하는 검 사를 진행하여 자신이 이미 아는 사실들을 재검증해야 한다는 압박감 을 느낀다. 더 나쁜 경우, 어떤 리더는 단지 근거자료 및 수치를 제시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최선이 아닌 차선이나 그 이하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
기거렌처 박사의 추정에 따르면 중요한 의사결정의 상황에서 이런 식의 소심하고 열등한 접근법이 채택되는 경우는 약 30~50퍼센트에 달한다. 그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서 "방어적 의사결정은 의사결정 자를 보호하지만 회사를 다치게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직관에 대한 보편적인 불신은 역사적 선입견, 편향된 분석, 직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오해라는 여러 요소에 기인한다.
- 이 책에서 우리가 직관을 말할 때는 축적된 전문성을 활용하여 더 빠르게 정보를 분석하는 '전문가의 직관'을 뜻한다. 만약 전문성이 없다 면 직관은 아무런 힘을 발하지 못한다. 우리가 말하는 직관은 어림짐작 이 아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많은 사람이 '직관'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어림짐작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주제나 사업 분야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다면, 직관력을 사용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 할 뿐 아니라 무책임한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오랜 시간 전 문지식을 축적해왔다면, 직관이 최선의 길이 될 수도 있다.
-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베스트셀러 《혁신기업의 딜레마》는 신흥 라이벌 기업들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라고 확신했던 기존 기업 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화점들은 할인점의 가능성에 관심이 없었 고, 중앙컴퓨터 기업들은 개인용 컴퓨터의 부상을 전혀 신경 쓰지 않 았다. 또한 케이블구동식 굴착기 제조업체들은 유압식 굴착기의 도입 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왜 걱정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최 선을 다해 조사를 했고, 의사결정을 뒷받침하는 수치와 자료 모두 얻 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 기업들은 이성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통 해 현상을 유지하기로 결심했고, 파멸로 이어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 았다. 
- 한때는 거대기업이었던 제록스코퍼레이션은 복사기시장을 거의 독점했으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1970년대 초 제록스파크 팔로알토연구소를 설립했다. 불행히도 당시 연구소에서 개발되고 있던 마우스, GUI, 레이저 프린터 같은 도구는 경영진을 조금 불안하게 만 들었다. 일부 혁신작이 복사기라는 기업의 핵심사업을 약화시킬 것을 염려한 제록스는 이런 아이디어들을 비밀로 묻어두었다. 그러나 빌 게 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이 연구소를 방문했던 젊은이들은 의욕을 꺾지 않았다.
몇 년 후, 잡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태도로 그 기념비적인 방문 경 험을 회상했다. “연구소는 스스로 얼마나 위대한 일을 이루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21 지금 같은 인터넷 시대에 제록스파크에서 개발 한 도구들 없이 컴퓨터를 하는 것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성적 사고는 제록스가 그것을 기회로 활용할 길을 차단해버렸다.
- 의심이 들 때는 맡겨라
직관과 이성적 의사결정 모두에 실패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상황 에서 리더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의 의사결정에도 적용 가능한 유서 깊은 경영전략이 하나 있다. 다양한 의사결정 상황에서 최적으로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큰 몫의 업무를 무의식 영역에 분 담시키고, 의식 영역은 주로 무의식적 의사결정 과정을 감시 및 점검하 게 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일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 탁월하 고, 의식은 그 과정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 재차 확인하는 일에 적격 이다. 전전두피질에서 일어나는 주요 활동이 통상적으로 집행기능이라 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 이미 살펴본 것처럼. 고도의 집중력은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아세틸콜린이라는 세 가지 주요 신경전달물질에 의존하면서 관련성 없 는 자극을 차단시켜버린다. 그러나 창의력이라는 관점에서 관련성 없 는 요소가 정말 있을까? 바로 이것이 문제다. 불행히도 문제가 발생하 는 이유는 전전두피질이 관련 없는 요소를 차단하는 일을 너무 잘 처리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해결책이 되어줄 수도 있는 잠재적 방안들이고 려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묵살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무의식적 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신은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는 사 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통 문제가 있는 팀에는 살아 숨 쉬는 버전의 전전두피질이 존재 한다. 당신은 이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들은 누군가 참신한 제안을 했을 때 반사적으로 "아니요, 그건 효과가 없을 겁니다!"라고 말하고는 그 주제에 대한 추가적 논의를 모두 차단 시킨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통찰력에서 교착이 발생하는 이유다. 전전 두피질이 너무 엄격하게 차단시켜버린 주의분산요소들 중에는 실제로 주의분산요소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 있었을지 모른다.
- 창의력은 소시지를 만들거나 나무를 패는 일과 다르다. 고기분쇄기를 더 빠르게 돌리거나 맹렬하고 강한 힘으로 도끼를 더욱 빨리 휘두 른다고 생산성이 향상되지는 않는다. 이제 뇌영상 기법 덕분에 심리학 자들은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예전부터 의심해온 한 가지 사실을 확신 할 수 있게 되었다. 창의력은 의식 영역과 무의식 영역에 동등한 비율 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 영역이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우리가 '휴식시간'이라는 단어를 '의식'에 한정했다는 사실에 주목하 라. 이것은 일을 멈춘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을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수중의 과업으로부터 당신의 의식을 전환시켜 무의식이 방해를 받지 않고 일하 도록 전임시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당신이 지시사항에 따르거나,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거나, 책 또는 잡지 기사를 끝까지 읽는 것과 같이 구체적이고 분명한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면, 최선의 처리 방법은 이 일에 전 력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리해야 하는 문제나 과제가 창의력 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집중은 어떤 경우 최악의 접근법이 되기도 한다.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집중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순이다. 집중이란 가장 관련성 있는 정보를 제외한 다른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행위다. 하지만 창의력의 목적은 처음에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정보들 로부터 독특한 관련성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창의적으 로 사고하는 동안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멍해있을 뿐이다. 지난 역사 동안 우리 본능은 제 역할을 충실히 행해왔다. 또한 전 문가의 직관, 창조적 통찰력, 창의력은 모두 대부분 강력한 무의식 두 뇌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과학적 근거를 통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진행한 연구에서는 저글링을 배움으로써 공을 잡는 데 필요한 두뇌 영역의 연결성이 향상되었다는 그리 놀랍지 않 은 결과가 확인되었다. 실험 참가자들이 6주간의 저글링 훈련을 마친 후 '눈과 손의 협응'에 필요한 영역인 두정엽 내 백색질의 증가가 관찰 되었다. 주목할만한 점은, 실력과 상관없이 모든 실험 참가자들의 백 색질 양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긍정적인 변화는 저글링이라는 활동 자체가 아니라 무언 가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글링 연구를 수 행한 함부르크대학교의 아르네 메이Arne May는 <뉴사이언티스트>에서 "자신이 이미 잘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보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 이 더 중요하다. 두뇌는 머리를 쥐어짜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좋아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 우리가 특정 뉴런을 함께 활성화시키는 활동을 수행한다면, 뉴런들이 계속 함께 활성화될 수 있도록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 특별한 단백 질인 뇌유래신경영양인자 BDNF가 분비된다. 뇌유래신경영양인자는 아 세틸콜린을 촉진하는 마이네르트 기저핵을 활성화시킨다. 최고의 성과 DNA에서 A를 담당하는 아세틸콜린은 고도의 집중력과 관련 있는 신 경전달물질이다. 또한 뇌유래신경영양인자는 각각의 뉴런을 매끄럽게 감싸는 얇은 지방질인 미엘린의 성장을 촉진한다. 미엘린은 한때 주방 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찐득거리는 식물성 쇼트닝과 유사하다. 미엘린은 당신의 신경연결망을 구축하는 지방물질로, 뉴런끼리의 연결을 더욱 효율적이고 빠르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요약하면 백색질을 희 게 만드는 물질이다.
-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같겠지만, 신경가소성은 어떤 운동을 실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신체기능이 재훈 련하게 해준다. 몇 가지 연구에서 정신적 연습은 신체적 연습과 동일하 게 두뇌 운동신경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당신 이 고등학교 때부터 재미로 기타 치는 흉내를 냈다면 정말 연습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와 관련된 여러 연구 중에서 간단한 키보드 연주 실험이 아마 가 장 잘 알려졌을 것이다. 연구에서 피실험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한 그룹은 5일간 하루에 2시간씩 주어진 선율을 연습했고, 다른 그룹 은 같은 시간 동안 키보드 앞에서 선율을 연습하는 것을 상상하기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쪽 그룹의 두뇌는 똑같이 변화되었다." 실제로 곡을 연주했을 때는 키보드로 직접 연습했던 그룹이 조금 더 나은 실력 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상상으로만 연습을 했던 참가자들이 2시간 동안 실제로 키보드를 치며 연습을 하자 이들의 실력은 직접적으로 연 습했던 그룹과 동일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빈둥빈둥하면서 좀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는 이들을 기뻐 뛰게 할 연구 결과가 하나 더 있다(물론 그들이 기뻐서 뛰어다니는 것마저도 힘 들다고 느끼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이 연구에서 4주 동안 신체 운 동을 한 참가자들은 근력이 30퍼센트 증가했는데, 운동하는 것을 상상 만 한 사람들 역시 근력이 22퍼센트나 증가했다고 한다. 우리가 운동 하는 것을 생생하게 상상할 때, 동작 명령을 결합시키는 뉴런이 활성화 되고 근육은 강화될 수 있다.
- 두뇌가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는지를 자각하고, 자각한 사실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수립했다면(이것을 심리용어로 메타인지라고 한다), 당신은 이제 앞으로 이루어질 학습을 더 수월하고 효과적이게 할 강력한 도구와 기술을 손에 얻은 것이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멀티태스킹을 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3장 참조), 그것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머제니치 박사는 고 도의 주의집중이 두뇌배선의 장기적 변화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진행한 실험에서 원숭이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기계적으로 과제를 처리했을 때는 두뇌배선이 변했지만 그 변화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신경가소성의 존속 여부는 최고의 성 과 DNA를 이루는 3인방인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아세틸콜린에 달 려있다. 노르아드레날린은 당신을 기민하게 만들 것이고, 학습에서 오 는 보람으로 도파민과 아세틸콜린이 분비되어 새로운 배선이 오래 지 속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생물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월터 프리먼은 양이 새끼를 낳을 때 옥시토신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옥시토신의 분비가 차 단된다면 양은 갓 태어난 새끼와 유대감을 형성할 수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에 있다. 양이 첫 새끼를 낳을 때는 옥시토신이 분비되지 않는다. 이 신경조절물질은 둘째 이후의 출산에만 관여를 한다. 그러나 어미 양은 아무런 문제없이 첫째 새끼와 애착을 형성한다. 이를 통해 옥시토신의 역할이 새롭게 태어난 새끼를 위해 이전에 태어난 새끼와 의 유대감을 없애는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즉, 옥시토신은 새롭게 학 습된 행동을 촉진하는 쪽이 아닌 오래된 학습 행동을 잊는 쪽에 도움을 준다. 
- 그런데 학습과 탈학습에 대한 옥시토신의 역할은 양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래된 친구들로부터 놀라움, 기쁨, 또는 혼란을 자아내는 일이겠지만 우리가 새 연인이나 배우자를 만날 때, 또는 음악, 패션, 정 치, 친구에 대한 취향이 바뀔 때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체험한다. 옥시 토신은 우리의 신경경로를 더욱 순응적으로 변화시켜서 평소보다 더 순순히 학습과 탈학습에 임하게 하는 것 같다. 우리는 더욱 영향을 잘 받는 상태가 되며, 그 결과 변화는 더욱 수월해진다.
- 두뇌에 있는 기술들은 무단거주자 같아서 비어있거나 쉬는 땅을 보면 자신이 차지해버린다. 이 말은 당신이 더 이상 농구를 하지 않거나 고교 시절에 배운 외국어를 연습하지 않는다면 다른 기술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 영역을 점령하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사용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이 현상을 '실력이 녹스는 것'이라고 표현하지만, 인지 과학자들은 '경쟁적 신경가소성'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쓴다. 우리 신체 의 여느 부위와 마찬가지로 두뇌 역시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한다 는 뜻의 '용불용설'을 신봉한다. 당신이 어떤 기술을 잃지 않고 싶다면 끊임없이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 지나친 체계는 피하라
어떤 체계는 유익하지만, 지나치게 체계적인 환경은 학습을 방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연중에 규칙을 익힐 때 효과적으로 학습을 한다. 어린아이들이 이 원칙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이들은 문법공부를 통해 말을 배우지 않는다. 아이들의 뇌는 모국어를 구성하는 패턴과 규 칙을 무의식적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수동태나 직설법 같 은 개념을 알지 못한다. 단지 어떤 것이 자연스럽게 들리는지를 알 뿐 이다.
놀랍게도 무언가의 구조가 잘 정돈되지 않고 엉성하거나 특이하며 심지어 주요 정보가 누락되었을 경우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 들이는 노 력 덕분에 그것을 기억하기가 더 쉬워질 수도 있다.
- 각각의 성격 유형은 자신의 기술 역량으로 다른 유형을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재치 있고 호기심이 많은 탐험가 유형은 창의력으로 팀에 힘을 보태며, 함께 일하는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줄 것이다. 협상가 유형은 협업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측면에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 이며, 언어적 표현과 의사소통 관련 분야에 특별히 재능이 많다. 건축가 유형은 한 업무를 끝까지 완성시킬 수 있도록 팀에 안정성과 끈기를 가 져다줄 것이다. 마감시한을 준수하고 책무의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 는 사람들이 바로 건축가 유형이다. 한편 지휘관 유형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고 어려워 보이는 문제를 헤쳐나가기 위해 자신의 논리력을 활 용함으로써 팀이 속도를 잃지 않고 원활하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  각 유형별 팀원을 위해서 유의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탐험가들은 쉽게 지루해한다. 그들은 자극 정도가 높을 때 최고의 성과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그들은 늘 새로운 도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틀에 박힌 업무로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탐험가들은 참신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빠르게 사고할 수 있으니 이런 능력이 요구되는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라.
*협상가들은 공감능력이 높고 큰 그림을 볼 줄 안다. 그들은 상사와 동료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 협상가들은 해결되지 않은 분쟁에 대해 예민하며, 당신이 신뢰를 바탕 으로 그들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성과는 악영향을 받을 것이다. 협상가들의 장점은 사람을 다루는 능력과 언어능력 같이 관련 없어 보이는 주제들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아내는 능력 이다.
*지휘관들은 의지가 강하며 고도로 분석적이다. 이들은 자신 의 뛰어난 문제해결력과 체계화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경쟁적인 환경 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지휘관들은 높은 테스토스테론 분비량 때문에 거칠며, 협상에 서투를 수 있다. 이들은 위계질서가 확고한 곳에서 더 욱 잘 적응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공개적인 갈등의 위험이 높아진다. 지휘관들은 리더의 자리와 성공을 좋아한다. 그들에게서 이 즐거움을 빼앗지 마라!
*건축가들은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 다. 당신은 그들이 언제나 업무와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리라는 것을 신 뢰할 수 있다. 건축가들은 아주 체계적이고 충실하며 미래지향적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정이나 합의안의 변화에 동요할 수 있다. 건축가 들은 스스로의 일정을 세울 수 있는 자유와 평온하고 조용한 집과 같이 정돈된 환경에서 일을 할 자유를 필요로 한다. 건축가들은 뒤에서 조용 히 일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그들의 근면성, 충실함, 팀에 더하는 가치 를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꼭 항공사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직장에서 우리는 역경의 시간을 포함한 각종 상황에서 확실성을 유지시켜줄 효과적인 절차를 도입할 수 있다. 당신은 비록 직원들이 갈망하는 내용의 안전을 제공해주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형식의 안전을 제공하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해고 시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대다수의 직원들은 '내 가 해고자 명단에 있을까?"라고 두려워하며 위협 모드에 빠져있을 것이 다. 그럴 때 당신은 각각의 단계를 자세하게 계획하고 직원들에게 공유 함으로써, 해당 절차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어느 정도의 안도감을 얻을 수 있게 유도할 수 있다. 이 정도만 해도 회사 전역에 울려 퍼지는 위협 반응의 볼륨을 낮출 수 있을 것이다.
- 1만 시간의 법칙은 매력적이지만 옳지 않은 생각이었다. 안타깝게도 무언가를 숙달하는 데 있어 연습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연습의 효과 는 분야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프린스턴대학교 심리학자 브룩 맥나마 라Brooke N. Macnamara는 메타분석 연구를 진행하며 '계획적인 연습이 중요 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까지 주장되어온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라 는 결론을 내렸다.5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맥마나라와 동료들은 연 습이 우리 성과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대략 12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 실을 발견했다. 연습으로 가장 큰 본전을 뽑을 수 있는 분야는 연습의 기여도가 약 26퍼센트인 체스 등의 게임으로 보인다. 연습은 음악 영 역에서 21퍼센트의 차이를, 스포츠에서는 18퍼센트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역설적이게도 연습이 가장 적은 효과를 미치는 영역은 직업으로, 기여도는 1퍼센트 미만이었다.
- 연습은 어떤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당신 이 무언가를 숙달하기 위해 투자한 모든 시간이 제 가치를 발휘하려면 반드시 재능이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훈련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이미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 그 영역에서 더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수준 미달의 영역을 식별하고 향상시키는 것을 주안점으로 두는 기업문화에서 훈련은 종종 실력이 저조한 직원들이 성과를 따라잡도록 돕는 기회로 오인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람들이 이미 가지 고 있는 재능을 드러내고 연마시킬 수 있을 뿐이지, 새롭게 재능을 창 조해낼 수는 없다. 개구리에게 입을 맞추고는 마술처럼 왕자로 변하길 기대할 수는 없다.
-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재능이 없는 사람의 재능을 육성하려는 시도는 거의 항상 시간과 돈의 낭비로 이어진다. 당신과 상대방에게 좌절 감을 줄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방해가 될 수 있다. 사실 당신이 팀원들의 에너지와 동기부여를 뺏어갈 확실한 수단을 찾고 있 다면, 그들이 잘하지 못하거나 즐기지 못하는 업무를 맡기면 된다. (그 런데 당신은 아마 이 두 가지가 보통 함께 다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하는 일을 더 즐기고, 잘하는 일에서 에너 지를 얻으며, 잘하지 못하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한다. 반대의 경우 는 거의 없다.)
- 우리는 가장 큰 재능을 보이는 분야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60년 도 더 전, 읽기 속도 향상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한 네브래스카대학교 연구에서는 아주 놀랍고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도출되었다. 실력이 가장 크게 성장한 참가자들은 이미 읽기 속도가 빠른 학생들이었다. 학 생들은 자신이 취약한 분야를 개선하려고 노력할 때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 프랑스 퐁텐블로 소재의 인시아드경영대학원 조직행동학 부교수 지안피에로 페트리그리리 Gianpiero Petrigleri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몰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암묵적 살 인자를 '난폭한 예의'라고 불렀다.
난폭한 예의는 팀에 속한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반대의견이나 의혹 을 표현하기보다는 입술을 깨물고 참는 상황을 묘사하는 말이다. 38 이 런 상황에서 문제해결이나 의사결정은 타격을 받는다. 그 이유는 우리 가 인지한 것을 억제하려고 시도할 때 이성적 분석에 필요한 두뇌 자원 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또한 암묵적인 불신이 존재할 경우 위협 반응이 일어나 생산적이어야 할 협력 상황이 오히려 에너지를 소진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마음의 생각을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와 의미 깊은 관계를 쌓을 능력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
- 난폭한 예의의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 사라지지 않고 곪아간다는 데 있다. 당신이 이번에 그냥 넘어간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 요한 시간을 버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예의를 지키려는 목적이었겠 지만 결과적으로 팀에 해를 끼치는 당신의 태도는 회사의 한 특성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솔직함을 기피하는 행위는 관련 신경경로를 뚜렷하게 만든다. 이제 주저하는 태도는 습관이 되어 당신은 결국 고의가 아닌 무의식적으로 점차 말을 아끼게 된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난폭한 예의를 경험하는 빈도도 증가한다. 실제로 이렇게 의도는 좋지만 부정직한 태도의 대상 중에 가장 큰 비중은 CEO가 차지할 확률이 높다. 어떤 임원은 “경찰차 앞 유리창을 통 해 동네를 보면 늘 범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 다. 스스로 이를 분간할 방법을 배우지 못한 리더들은 날씨가 따뜻하고 화창하다는 예보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싸늘하고 험악한 회사 분위기에 처해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 난폭한 예의의 악순환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기를 내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을 표현할 용기를 갖는 것과 당신에게 동일한 행동 을 할 만큼 정직하고 양심적인 동료들을 존중해주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르는 결과는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기보다 탄탄하게 만들어줄 가능성이 더 높다. 사회적 몰입을 달성할 확률 또한 훨씬 높아질 것이다. 물론 용기를 발휘하는 데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고, 사회적 몰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곡하는 뇌  (2) 2024.02.11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2) 2024.01.11
우리는 모두 2% 네안데르탈인이다  (1) 2023.12.05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4) 2023.12.01
2도가 오르기 전에  (3) 2023.11.29
Posted by dalai
,

- 네안데르탈인은 인류 진화라는 게임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우월한 현생인류와 대비되는 열등한 야수로 늘 그려져왔다.
그런 그들이 완벽하게 멸종하지 않고 우리 몸속의 유전자 안에 살아 있 다니! 한때 인류 진화의 곁가지에 불과한 종이라 치부했던 그들이 오늘날 까지 살아남아 우리의 핏속을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소 름끼치는 반전이다. 말하자면 한때 우리가 완전히 흡수했거나 우리의 우 수한 문화로 완전히 멸종시킨 줄 알았던 네안데르탈인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오늘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안데르탈인은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였을 뿐 아니라 연인이자 배우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 네안데르탈인은 우리처럼 친구가 죽으면 슬퍼했고 동료가 불구가 되면 그가 정해진 삶을 다해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보살폈다. 사냥을 나갈 땐 함께 전략을 논의했고, 무리의 일원이 죽으면 그를 매장하기도 했다. 어디 이뿐이랴. 경이롭기까지 한 기술로 돌을 떼어내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다양한 형태의 장신구로 자신의 몸을 꾸밀 줄 아는 감각도 지니 고 있었다. 이런 그들을 단지 사라졌기 때문에 불완전했던 옛 인류로 평가 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 네안데르탈인은 약 13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무렵까지 주로 유럽과 서남아시아 일대에 퍼져 살았다. 화석은 주로 독일과 벨기에, 스페인, 이탈 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었지만 근동과 중동 지역, 중앙아시아 까지 그들이 살았던 흔적이 확인된다. 또 화석들이 대부분 동굴에서 발견 되었기 때문에 주로 동굴을 근거지로 삼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몇 번의 빙하기를 거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에게 동굴보다 더 바람직한 주거환경 은 없었던 것 같다. 네안데르탈인에서 시작된 동굴 속의 원시인에 대한 이 미지 때문에 옛 인류들은 대부분 동굴 속에서 살았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동굴 속에서도 살았지만 시야가 확 트인 동굴 밖 에 집을 짓고 살기도 했다. 동굴이냐 동굴 밖이냐가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중요한 건 이들 모두 뒤로는 병풍 같은 산이, 앞으로는 시원하게 강이나 평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배 산임수는 정녕 오늘날 우리에게만 중요했던 건 아니었다. 고고학 자들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의 동굴은 주로 입구가 남쪽으로 트여 있고 앞으로 작은 평원을 굽어보는 자리에 위치했다. 그러니 우리가 저 푸른 초 원 위에 집을 짓고, 앞으로 잔잔히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도 알고 보면 아주 오래된 진화의 유산일지 모른다.
- 한편 네안데르탈인의 키는 우리보다 작았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근육 을 가졌고 주로 포유동물을 사냥하여 먹고살았다. 처한 환경에 맞춰 그때 그때 닥치는 대로 먹고살았던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네안데르탈인은 극 단적인 육식주의자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육식에 의존해 살았다. 말하 자면 그들은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삼겹살을 먹듯 오래전 그들은 순록고기를 주로 먹으며 살았다. 멧돼지와 말은 물론 심지어 들소 와 매머드까지 잡아먹었다.
네안데르탈인은 고기를 얻기 위해서 사냥을 했고, 사냥을 위해 도구를 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숙련된 도구제작자이기도 했다.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무스테리안이라는 석기제작 문화Mousterian industry는 프랑스의 르무 스티에 Le Moustier 유적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는데, 석기로 만들 몸돌core 을 잘 준비하여 거기서 떨어져 나간 돌 부스러기, 즉 격지 flakes를 수차례 잔손질해 만들어졌다. 네안데르탈인은 이 정교한 석기 제작 기술을 오랫 동안 유지하며 살았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만들어내는 석기에 비해 다양성 면에서는 많이 뒤처졌다.
- 네안데르탈인은 지구가 극악무도하게 추웠던 약 13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무렵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질연대로 치자면, 그 들은 약 18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의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에 속하는 마 지막 빙하기에 살았고, 지금 우리는 1만 년 전 무렵부터 시작된 홀로세HO- locene 라고 하는 따뜻한 시기인 간빙기에 살고 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겪는 한겨울의 추위는 아무리 추워봤자 빙하기 사이의 따뜻한 간빙기이 기 때문에 사실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따뜻 한 겨울이다.
- 플라이스토세는 10만 년을 주기로 빙하가 늘어났다가 줄어들면서 지 구의 기후가 급격하게 오르락내리락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때에는 북극 권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캐나다, 미국 대부분의 땅이 얼음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전 지구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또 이 기간에는 지구상에 거대 동물군群이 번성했는데, 2만 년 전의 빙하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화영화 <아이스 에 이지>의 주인공인 땅나무늘보, 털매머드, 검치호랑이가 바로 이때에 살 았다.
이러한 거대 동물들과 함께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은 약 200만 년 전에 가장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떠나 구대륙으로 이동한 호모 에렉투스에서 진화하여 갈라져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오늘날 우리는 약 10만 년 전에서 5만 년 전 사이에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나간 집단의 후 손이다. 따라서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진화했다. 이 때문에 우리의 몸은 네안데르탈인과 다를 수밖에 없다.
- 네안데르탈인은 떡 벌어진 어깨와 짧지만 다부진 팔다리를 가졌다. 네 안데르탈인의 몸매를 오늘날 현생인류와 비교해보자. 서로 키가 같을 때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보다 몸무게가 평균적으로 30퍼센트 정도 더 많 이 나간다. 생전의 몸무게는 허벅지뼈의 가장 윗부분 머리가 얼마나 큰지, 또는 골반뼈의 넓이가 얼마나 넓은지를 측정해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 면 이 부분의 크기와 너비가 몸무게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 남성은 대략 165~167센티미터의 키에 70~85 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여성은 158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60~75킬로 그램의 몸무게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네 안데르탈인이 우리보다 훨씬 작아서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했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 오늘날 우리가 부러워할 만한 몸매는 아 니다.
- 대부분의 포유류는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항상 자신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만약 체온이 과도하게 올라가거나 떨어지면 목숨을 잃기도 한다. 따라서 몸의 열을 유지하거나 밖으로 내보내는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와 이전에 살았던 인류를 포함해 모든 포유동물의 몸 크기와 형태는 기후 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운 기후에서는 가느다란 몸통이, 추운 기후에서는 굵은 몸통이 체온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하다. 덩치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중에 누가 추위와 더 위를 더 많이 타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추운 환경에서는 비슷하게 생긴 포유동물 가운데 몸집 작은 동물이 몸집 큰 동물에 비해 확실히 체온 을 더 빨리 잃는다.
그러니 몸집 큰 동물은 추운 기후에 더 잘 적응하고, 몸집 작은 동물은 더운 기후에 더 잘 적응한다. 이 법칙은 19세기 독일의 동물학자인 크리스티안 베르크만Christian Bergmann이 발견하여 '베르크만의 법칙'이라고 불린 다. 한편, 몸집이 비슷하다면 팔다리가 길고 가는 동물들이 팔다리가 짧고 두꺼운 동물보다 더 빨리 열을 몸 밖으로 내보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팔 다리가 긴 동물들은 더운 기후에 더 잘 적응한다. 팔다리뿐 아니라 귀와 코 를 비롯한 몸의 말단 부위도 추운 곳에 사는 항온동물일수록 더 작고, 더운 곳에 사는 동물일수록 더 크다. 이 법칙은 조엘 앨런Joel A. Allen이 정리해서 '앨런의 법칙'으로 불린다. 이제, 자신이 어느 기후에 적합한 몸매를 지녔는 지 자신의 체형을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평균 기온이 높은 지역일수록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진 체형이 적응 에 더 유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반대로 기온이 낮은 지역에서는 왜 짧고 두 꺼운 팔다리를 가진 체형이 더 유리한 것일까? 그것은 열이 몸의 부피에 비 례해 생산되고 표면적에 비례해 소실되는 원리 때문이다. 즉 팔다리가 길고 가느다랄수록 몸의 표면적은 커지고 부피는 작아지는 반면 팔다리가 짧고 굵을수록 몸의 표면적은 작아지고 부피는 커진다.
-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고위도 지역은 적도와 가까운 열대 지역에 비 해 일조량이 절대적으로 적었다. 옥스퍼드대학교 연구진이 수행한 연구 에 따르면 고위도에 사는 현대인은 저위도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빛 의 양의 적기 때문에 뇌 안의 시각과 관련된 부분이 더 발달하는 쪽으로 진화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2013년 옥스퍼드대학교의 피어스Eiluned Pearce 연구진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머리뼈에서 눈굼eye bits의 면적을 비교했다. 그 결과 네안데르탈인의 눈굼 면적은 1404제곱밀 리미터로, 1223제곱밀리미터에 불과한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훨씬 컸다. 이에 대해 피어스는 이러한 차이가 바로 뇌 구조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설 명했다.
-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뇌 크기가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네안데르탈인의 뇌 조직은 시각에 관여하는 부분이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많은 반면, 신경에 관여하는 부분의 영역은 더 적다. 우리 현대인의 뇌 는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많은 신경조직을 인지활동 처리에 사용했던 것 같다. 이는 늘 변화무쌍하여 불안정했던 환경에서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 했을 때, 그러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하며 살아가는 데에 큰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차가운 음식물이 우리 입으로 들어오면 맨 처음 입천장을 자극하고, 그다음에 뇌와 연결된 동맥을 재빨리 수축시킨다. 이러한 반응은 동맥에 피가 갑자기 차오르게 하면서 우리에게 독특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이 현상을 뇌가 어는 느낌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brain freeze'라고 한다. 이 현상은 우리 머리뼈가 입속과 콧속의 신경과 동맥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고 싶다면 추운 겨울날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 된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를 입으로 한꺼번에 들이마시면서 달리면 가슴이 금방 뻐근해진다. 이는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몸속에서 데워지지 못하고 폐로 급하게 전달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때 폐조직에 가해 지는 자극이 기도를 수축하면서 가슴에 통증이 나타나고, 마치 천식 발작 처럼 잠깐 동안 숨쉬기가 곤란해진다.
그러나 코로 숨을 쉬게 되면 이러한 고통이 훨씬 줄어든다. 코로 들어 온 공기는 콧속의 작은 혈관들과 점막으로 인해 이내 따뜻해지고 촉촉해 질 수 있다. 따라서 빙하기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에게 큰 코는 중요한 의 미를 갖는다. 즉 코가 크다는 것은 콧속의 표면적도 크다는 뜻이므로 외부 의 공기가 폐로 들어가기 전에 더 빨리 공기를 따뜻하고 습해지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 방식에는 모순되는 지점이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코가 추운 기후에 대한 적응의 결과라면, 현재 극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코 도 네안데르탈인의 코와 비슷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 다. 오늘날 춥고 건조한 기후에 사는 사람들의 콧구멍은 넓지 않고 오히려 좁다. 네안데르탈인처럼 넓고 큰 콧구멍은 극지방 사람보다는 열대지방 사람에게서 흔히 관찰된다.
현대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코의 형태, 즉 코의 길이와 너비는 기 후와 관련이 있긴 하지만 온도보다는 습도가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춥든 덥든 건조하면 길고 좁은 코 모양이 많고, 습 한 열대우림 같은 기후에서는 상대적으로 넓은 코 모양이 흔한 것으로 보 고된다. 따라서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자면 길고 좁은 코가 네안데르탈인 의 삶에 더 적합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긴 코는 정말로 추운 기후에 대한 적응의 결과일까? 아니면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이 유전자 표류를 경험하면서 진화한 형질일 까? 코가 길어진 원인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긴 코가 추운 기후 를 이겨내는 데에 상당히 유리한 형질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 네안데르탈인의 뼈 시료를 이용해 안정 동위원소를 분석한 결과는 네 안데르탈인이 늑대나 사자처럼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즉 네안데르탈인의 뼈에 남아 있는 화학적 암호는 육 식동물의 뼈에 남겨진 암호와 일치하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이 육식동물 과 같은 식단을 영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여러 원소의 안정 동위원소 중에서도 질소 값으로 뒷받침되는데, 먹이사슬의 꼭대기로 올라 갈수록 질소 값이 더 높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육식동물의 뼈에는 초식 동물의 뼈보다 질소가 더 많이 들어 있다.
- 네안데르탈인이 이처럼 다양한 고기를 육식동물이 먹어대는 수준만큼 섭취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사냥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 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네안데르탈인의 고기 편식이 후에 호모 사피엔 스와 경쟁하여 그들이 지속적으로 생존하고 더 널리 퍼지는 데에 방해요 소가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에서 나온 해부학적 현대인은 다양한 먹거리 자원을 식료로 활용해 좀 더 폭넓은 생태적 환경에 적응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호모 사피엔스 조상들은 네안데르탈인처럼 육지 포유동물을 잡아먹기도 했지만, 물고기도 잡아먹고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도 식단에 넣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수만 년 동안 고기 위주의 식단을 고수했다. 2002년 뉴욕주립대학교의 시어도어 스티그만Theodore Steegmann 등이 수 행한 연구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 남성의 경우 오늘날 하루 권장 칼로리 를 훨씬 넘는 3400~4500킬로칼로리 정도를 섭취했을 거라고 한다. 이들 은 극지방 근처에 살고 있는 오늘날 인구 집단을 관찰한 민족지적 기록을 참고하고,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시기의 기후와 그들의 형태적 특성, 수 렵 활동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였다.
-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추운 기후, 그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높은 열량의 에너지원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육식이야말로 네안데르탈인 에게는 최적의 식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안데르탈인이 채식 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음식물의 잔여 성분이 치아에 붙어서 석 회화된 치석과 석기에 남아 있는 미세 잔존물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네안 데르탈인이 때때로 녹말이 많이 함유된 대추야자, 풀씨, 야생 밀이나 보리 류 같은 식물들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탈리아와 프랑스, 지브롤터 에서 나온 네안데르탈인의 뼈를 분석한 결과는 그들이 해양 포유류, 토끼, 연체동물 들을 잡아먹었다고 말해준다. 따라서 육식 위주의 식단을 고수 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식단을 바꾸기도 했던 것 같다.
- 요즘처럼 먹을 게 풍족한 환경에 사는 우리에게 하루 3000~4000킬로 칼로리를 채우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맘만 먹으면 한 끼로도 그 정도의 열량은 충분히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사냥하고 사냥에 실패했을 경우 열매나 풀씨 따위를 채집해 먹어 야 하는 환경에서는 다르다. 아마 매일 필요한 칼로리를 채우기 위해 거의 하루 종일 뛰어다녀야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플라이스토세의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네안데르탈인은 그 들의 육중한 몸을 유지하는 데에 드는 많은 에너지를 충분히 채우지 못했 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네안데르탈인보다 훨씬 다양한 식단을 꾸리고 옷도 만들어 입으며 추위에 다양한 방법으로 적응할 수 있었던 호모 사피 엔스의 조상들은 네안데르탈인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에 충분한 존재였으리라.
- 해부학적 현대인의 경우와 비교하면 네안데르탈인 집단의 청소년기 사 망률 역시 월등히 높다. 예로 북유라시아 지역의 유적에서 출토된 네안데 르탈인 중에 43퍼센트는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개체들이었는 데에 반해, 해부학적 현대인 집단에서는 청소년의 비율이 30퍼센트 정도였다. 네안 데르탈인 유적인 크로아티아의 빈디자Vindija와 크라피나에서 유소년 개체 를 포함한 청년층의 사망률은 각각 46.2퍼센트, 43.5퍼센트에 달한다.
성장기에 해당하는 유소년층을 포함한 젊은 연령대의 사망률이 높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왜 네안데르탈인 사회에서 이들 계층의 사망률이 높 은 걸까? 이유는 네안데르탈인 사회가 유아부터 노년에 이르는 생애사적 단계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크게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주로 무슨 일을 하나? 그들에게 주어진 사 회적 역할은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사회성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 사회에서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인들과 함께 사냥 같은 위험한 활동에 참여하며 살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많은 아이 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본다. 이와 관련해 에릭 트린카우스는 네안데 르탈인 집단의 경우 신생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사망률이 증가하는 데에 반해, 호모 사피엔스 집단에서는 사망률 패턴이 이와 정반대로 나타남을 확인하였다.
사실 거의 모든 사회에서 5세 미만의 영유아 사망률이 어떤 연령대의 사 망률보다 가장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네안데르탈인의 사망률 패턴은 상당히 놀랍다. 트린카우스는 1987년에 데이비드 톰프슨David D. Thompson과 함께 152명의 네안데르탈인 중 단지 8.6퍼센트만이 35세를 넘겼고, 40~45세까 지산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발표한 바 있다. 수명이 이처럼 짧았기 때문 에 네안데르탈인의 가족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있을 수 없었다.
- 유아 사망률이 높고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 무리는 현생 인류 집단에 비해 그 규모가 훨씬 작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대부분 의 연구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대략 30명에서 140명 정도의 무리를 구성 하여 살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처럼 수만 년 전에 살았던 옛 인류 집단 의 규모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지금이야 국가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인구총조사라는 것을 하지만, 이러한 인구 조사가 시작된 역사도 따지고 보면 불과 200년 남짓이다.
고고학자들은 동물 뼈와 석기, 불 탄 자리들이 발견되면 그것들이 차지 하는 공간의 패턴과 분포로 집단의 크기를 대략적으로 추정한다. 네안데 르탈인이 근거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활동반경을 어느 정도로 사용했는지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남긴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추정한다. 네 안데르탈인은 근거지를 중심으로 5~10킬로미터까지 활동반경을 유지하 다가 주변의 자원이 고갈되면 이동하는 방식으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기후 조건이나 먹잇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의 상태를 고려하여 활동반경의 범위를 결정했던 것 같다. 서남부 유럽의 경우는 근거지에서 5~10킬로미터 정도를 활동반경으로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고, 좀 더 북쪽의 북서부 유럽에서는 근거지로부터 45~50킬로미터 떨어 진 곳까지 활동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네안데르탈인의 생활방식에 대해 미시간주립대학교 리처드 호런Richard Horan은 이들이 주로 20~30명 정도 규모의 가족 단위로 살았으며, 다른 집 단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며 살았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네안데르탈 인의 인구밀도가 낮게 유지되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해부학적 현대인 이 이주해왔을 때 오래도록 함께 살지 못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 유전자는 유전체의 기능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유전자들이다. 사람의 유전체에는 약 2만여 개의 단백질 암호화 유전자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단백 질 암호화 유전자가 유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퍼센트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양이 매우 적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때는 유전체의 98퍼센트 에 달하는 나머지 부분이 별다른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단백질 정 보가 담겨 있지 않은 부분을 '쓰레기 DNA'라고 불렀던 적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180도 바뀌었다. '쓰레기 DNA' 가 단백질을 만들지는 않지만 다양한 기능을 하는 RNA (리보핵산ribonucleic acid)를 암호화하는 수많은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RNA 유전자에는 마이크로RNA와 '긴 비암호화 RNA' 등 이 있다. 쓰레기 DNA에는 단백질 및 RNA 유전자가 언제, 어디에서, 얼마 나 활동할지를 정해주는 '조절 요소regulatory elements'들도 가득 들어 있다. 이쯤 되면 쓰레기 DNA라기보다는 보물창고 DNA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DNA의 생체정보는 겨우 네 글자(A/C/G/T)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네 글 자를 조합하여 의미를 저장하는 문법은 매우 다양하다. 같은 네 글자로 단 백질이나 RNA의 서열을 기록하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 얼마나 많은 단 백질이나 RNA를 생산할지 결정하는 조절 요소를 만들기도 한다. 언어학 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한 언어를 기록한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를 하나하나 해독했던 것처럼, 유전학자들은 지금도 DNA의 다양한 문법 을 해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 저명한 집단유전학자 기무라 모토木村生가 처음 제시한 '분자 진화의 중립 이론'에 따르면, 유전체를 구성하는 염기서열의 대부분은 개체의 생 존과 번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고 유전자 표류를 통해 중립적으로 진 화한다고 한다. 유전체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염기서열이 아무런 방향성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방랑자처럼 진화하고 있다니. 실망스러울지도 모 르겠다.
하지만 유전체의 대부분이 중립적으로 진화한다는 사실은 집단유전학 자들에게는 엄청난 희소식이다. 왜냐하면 중립진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 는 유전체의 변이 패턴을 연구함으로써 집단의 과거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집단 크기의 변화나 집단 간의 유전자 교환은 유전체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중립진화를 가정하면 이 흔적을 해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 오랫동안 서양에서는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존재 라고 생각해왔다. 즉 사람만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알고, 문화를 가 지며, 언어를 통해 정교하게 소통을 한다는 점에서 동물과는 질적으로 다 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물행동학 연구의 역사는 사람과 동물을 질적 으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어왔다. 침팬지나 뉴칼레도니아까마귀가 사냥이나 먹이를 손질할 때 여러 가지 도구를 능 숙하게 사용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학습을 통해 전파하며, 범고래 가 집단마다 독특한 노래를 통해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비록 언어가 사람만이 갖는 특징은 아닐지라도 이런 특징들이 언제 어떻게 진화했는지 연구하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다. 현대인의 공통조상이 언어를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면 여태까지 알려진 모 든 민족들은 복잡한 언어 체계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복잡한 언어 체계는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이 아 프리카를 떠난 후 진화한 것일까? 아니면 수십만 년 전에 살던 네안데르 탈인과 우리의 공통조상도 언어를 갖고 있었을까? 아프리카를 떠난 현대 인이 네안데르탈인을 만났을 때 그들은 어떻게 서로 의사소통을 했을까? 네안데르탈인의 골격 형태가 언어 능력에 대해 알려주는 바가 있을까? 목젖 바로 위에 있는 U자 모양의 목뿔뼈는 성대의 움직임과 밀접한 연관 이 있기 때문에 언어 능력이 있었는지 알려줄 가능성이 있다. 이스라엘의 케바라 동굴에서 6만 년 전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은 현대인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목뿔뼈를 갖고 있었는데, 다른 영장류의 목뿔뼈와는 형태가 전혀 다르다. 이는 네안데르탈인의 성대 구조가 언어에 필요한 여러 소리를 낼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유전자는 네안데르탈인의 언어 능력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앞서 살펴본 피부색과 ABO 혈액형은 관련된 유전자들이 비 교적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언어 능력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혈액형이나 피부색은 다양한 변이가 있어 연구가 용이하 지만, 언어 능력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어나 자라면서 모국어를 익 히고 사용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기 때문에 연구에도 제약이 따 른다. 언어 사용에 장애가 있는 경우 대부분은 언어 능력에 직접적인 장애 가 있다기보다는 청력이 손상되었거나 언어 사용에 필요한 근육에 문제 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른바 '언어 유전자'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 여 있다.
- FOXP2(Forkhead box protein 2)는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언어 유전 자인데 희귀한 언어장애를 갖고 있는 영국의 한 가족을 통해 발견되었다. KE라는 이니셜로 통칭되는 이 'KE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절반 정도가 언 어장애를 갖고 있었고, 희한하게도 장애가 있는 가족 구성원에게서만 이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다. 이 가족을 비롯하여 FOXP2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는 언어장애 환자들은 인지능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말을 하기 위해 필요한 근육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와 더불어 이들은 언어 능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뇌의 부위인 브로카 영역Broca's area이 덜 활성화된다는 것도 보고되었다.
- FOXP2 유전자는 뇌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 으며 포유류 전체에 걸쳐 진화적으로 잘 보전되어 있다. 진화적으로 잘 보 전되었다는 의미는 다른 유전자들과 비교해볼 때 종 사이의 염기서열 차 이가 매우 적다는 것을 뜻한다. 염기서열 차이가 적으려면 돌연변이가 많 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즉 이 유전자 자체가 망가지면 안 되는 매우 중 요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진화과정에서 돌연변이가 자연선택을 통 해 제거되었다고 봐야 한다. 재미있는 점은 현대인이 다른 영장류와는 달리 FOXP2 유전자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바꾸는 돌연변이를 두 개나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사람이 갖고 있는 이 돌연변이들이 사 람의 언어 능력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면 현대인이 갖고 있는 두 돌연변이는 네안데르탈인과 현대인의 조상이 갈라진 후에 생겨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은 다 른 영장류들처럼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확 인하기 위해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요하네스 크라우제Johannes Krause는 스페인에서 얻은 네안데르탈인 뼈 두 점을 분석하였다.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두 개체 모두 현대인과 같은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돌연변이들이 현대인의 언어 능력을 정교하게 한 원동력이라면 네안 데르탈인이 이 유전자 때문에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다.
- 1980년대에 이르러 분자생물학 분야의 실험기법들이 발전하면서,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을 해독하고 비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와 이대학교 마노아 캠퍼스의 생물학자 레베카 칸Rebecca Cann은 이를 이용 해 현대인의 기원과 여러 민족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선두주자 가운데 한 명이다. 칸은 1987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기니에서 수집한 147명의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의 계통수를 재구성하여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계통수상의 가지 대부분은 오직 아프리카인들로만 이루어 진 반면, 아프리카 밖의 모든 사람들은 단 하나의 가지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비아프리카인들이 속한 가지에는 일부 아프리카인들도 포함되어 있 다. 즉 모든 비아프리카인들은 비교적 최근에 존재했던 공통조상의 자손 인 반면, 아프리카인들은 훨씬 더 다양하고 오래된 미토콘드리아 계통들 을 보유하고 있다. 이 가지치기 패턴은 현대인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했고,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작은 이주민 집단이 현재 유럽과 아시아, 오스트레 일리아를 포함하는 모든 비아프리카인들의 조상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칸이 발견한 두 번째 사실은 학계를 더욱 술렁이게 만들었다. 칸은 아 프리카인과 비아프리카인을 모두 포함한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이 하나의 공통조상으로 유합 coalescence하는 시간, 즉 '가장 가까운 공통조상 the Most Recent Common Ancestor(MRCA)'의 나이를 약 29만 년 전에서 14만년 전 사이로 추정하였다. 모든 비아프리카인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 의 공통조상은 이보다도 훨씬 최근인 22만 년 전에서 6만 년 전 사이에 살 았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최신 연구들은 더욱 정확한 추정치들을 보여주 는데, 모든 현대인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의 조상은 약 15만 7000년 전, 모든 비아프리카인이 속한 가지의 공통조상은 약 7만 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현대인 미토콘드리아의 공통조상, 즉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나이가 8만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지역 기원설에 큰 타격을 준 반면에 최 근 아프리카 기원설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만약 다지역 기원설이 주장하 는 것처럼 아프리카 밖의 현대인들이 100만 년 이전부터 그 지역에 살던 고인류의 후손이라면 이들 모두의 모계 공통조상은 적어도 100만 살은 되 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나이가 8만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려면 아프리카 밖의 고인류는 최소한 모계 쪽으로는 현대인 의 유전자 풀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미토콘드리 아 연구는 모든 현대인의 모계 쪽 조상인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네안데르 탈인과는 관계없는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 그렇다면 인간 유전체 다양성 프로젝트를 포함한 다수의 상염색체 변 이 연구를 통해 과학자들은 인류의 역사에 대해 어떤 밑그림을 그리게 되 었을까? 가장 중요한 발견을 꼽자면, 상염색체 변이 자료가 앞에서 소개 한 인류의 '최근 아프리카 기원설'을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점을 들 수 있 다. 우선 사람은 다른 종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유전적 다양성 및 집단 간 분화 정도가 매우 낮은데, 이는 빠르게 영역을 확대한 젊은 종, 즉 진화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종한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지 만 진화사에서 사라져간 다른 무수한 종들에 비해 우리 종의 역사는 결코 길지 않다!
여러 민족 간의 유전적 분화 정도가 매우 낮다는 주장은 서로 확연히 외모가 다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동아시아인을 떠올려보면 언뜻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와 머리카락, 눈동자색 및 체형과 같은 형질들은 알고 보면 예외적인 형질들로, 자 연선택에 의해 빠르게 진화한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런 일부의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형질들과 유전적 변이들은 유전자 표류를 통 해 무작위적으로 느리게 진화한다. 그 결과, 현대인의 유전적 다양성 중집 단 간 차이로 돌릴 수 있는 부분은 겨우 5~7퍼센트에 불과하다. 쉽게 말하 면 한국 사람 두 명의 유전적 차이를 100이라고 했을 때, 한국 사람과 독 일 사람의 유전적 차이는 그것보다 아주 조금 더 큰 105 정도인 셈이다! 상염색체 연구가 찾아낸 '최근 아프리카 기원설'의 또 다른 강력한 근 거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멀리 떨어진 집단일수록 유전적 다양성 이 낮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을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유전적 다양성을 측정하는 중요한 척도로 이형접합도heterozygosity라는 것이 있다. 이형접합도는 한 사람의 유전체에서 어머니 쪽에서 물려받은 염기와 아버지 쪽에서 물려받은 염기가 서로 다른 비율을 나타내는 값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의 경우 이형접합도가 약 0.11퍼센트 정도인 반면, 유럽인과 동아시아인의 경우는 0.08~0.09퍼센트로 아프리카인에 비 해 낮고, 지리적으로 가장 먼 지역인 아메리카 및 오세아니아 원주민의 경 우에는 0.07퍼센트 수준으로 이형접합도가 유럽과 동아시아인보다 더 낮 다. 아프리카인의 이형접합도가 가장 높다는 것은 그 집단의 유전적 다양 성이 가장 높다는 말이며, 그 말은 곧 그 지역이 기원지일 가능성이 높다 는 의미이다.
- 전 세계 여러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통계량을 계산한 결 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은 네안 데르탈인 혈통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지만, 아프리카 이외 지역에 사는 사 람들은 아프리카인에 비해 네안데르탈인과 훨씬 더 가까웠던 것이다. 이 결과의 의미를 짚어보자면, 현대인이 아프리카를 벗어났을 때, 이미 유라 시아에 진출해 있던 네안데르탈인과 만났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네안 데르탈인의 유전자를 얻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는 우리 몸속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연구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풀이 아프리카 밖의 사람들에 기여한 비율은 약 2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2퍼센트라고 하면 아주 작은 수치라 고 생각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리 작은 값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유전체 는 부모님으로부터 각각 50퍼센트를 받아 만들어지고, 한 세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네 명의 조부모로부터 각각 25퍼센트를 받는다.
계속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다섯 세대 전에는 32명의 조상에게서 각 각 약 3.1퍼센트씩을, 여섯 세대 전에는 64명의 조상에게서 각각 약 1.6퍼 센트씩의 유전자를 물려받는 셈이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 유전체가 차지 하는 비율인 2퍼센트는 다섯 세대 내지 여섯 세대 전의 우리 조상 중에 네 안데르탈인이 있었던 것과 비슷한 비율이다. 우리의 증조할머니가 어렸을 때 네안데르탈인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있었다고 상상해보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더 와 닿지 않을까?
- 먼저 20세기로 돌아가보자. 1900년경, 세계 인구는 약 16억 명 내외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당시 인구는 현재 인구의 4분의 1이 채 되지 않는 수 준이다. 다시 100년을 더 되돌려 1800년경,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 후 기쯤의 세계 인구는 10억 명 내외였다. 이렇게 시간을 조금씩 계속 되돌려 보자.
유럽에는 로마 제국이 중국에는 한나라가 있던 1세기에 세계 인구는 약 2~3억 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더 오래된 시대의 인구를 추정하는 것은 매우 불확실한 작업이지만, 농경이 막 시작되었던 약 1만 2000년 내지 1만 년 전으로 돌아가보면 세계 인구는 겨우 500만 명 정도 였던 것 같다. 서울시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었으니, 말하자면 당시에는 서울 인구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었던 셈이다. 유전자 자료가 말해주는 것도 이러한 추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전자 자료는 과거에 실제로 몇 명의 사람들이 살았는지를 알려주지는 못하지 만, 이와 비슷한 개념인 유효집단 크기 effective population size를 추정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유효집단 크기'란 인구수가 변하지 않는 단순한 집단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집단이 실제 유전자 자료와 여러 면에서 같은 특성을 보여주려면 인구수가 얼마가 되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값 이다. 여러 가정이 만족될 경우에 유효집단 크기는 실제 인구수와 일치 한다.
- 유전자 자료를 통해 과거 인류의 유효집단 크기를 추정해보면, 농업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가장 환경조건이 좋았던 시절에도 세계 인구가 1만~2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라시아인의 조상은 아프리카 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심각한 인구 병목 현상population bottleneck을 겪었는 데, 이때의 유효집단 크기는 겨우 1000명 남짓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의 인구규모가 이 정도인데, 과거 유럽과 중동에는 대체 얼마나 되는 네안데르탈인이 살고 있었던 걸까? 여러 증거들에 따르면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네안데르탈인의 숫자도 결코 많지 않았다. 네안데르탈인 유전 체를 이용해 추정한 유효집단 크기 역시 네안데르탈인의 수가 매우 적었 음을 뒷받침한다. 알타이산맥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체에 따르 면 네안데르탈인의 무리는 현대인의 유효집단 크기 궤적에서 갈라진 이후 급격히 감소한 뒤, 꾸준히 1000명 남짓한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네안데르탈인의 이형접합도 역시 1만 염기쌍당 2개 수준인 0.02퍼센트(현대 비아프리카인의 약 22~30퍼센트 수준)에 불과하다. 앞에 서 설명했듯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두 염색체가 서로 다른 염기를 갖고 있을 확률인 이형접합도는 낮은 값을 가질수록 과거 이 집단 의 크기가 작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의 이형접합도가 현대인보다 낮다는 말은 이들의 인구가 과거 현대인의 인구보다 훨씬 적 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로 돌아오자. 6만~5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에서 네안데르탈인 이웃과 유전자를 나누었던 우리 조상들은 고작 수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현재 세상에 살고 있는 약 60억 명의 비아프리카인은 모두 이 작은 무리의 후손들인 셈이다. 당시 아프리카를 벗어나 이주라는 도박을 선택한 결과는 배당률이 높게는 100만 배나 되 는 성공적인 투자였다! 이러한 성공을 거두리라고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 는가.
네안데르탈인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세기의 도박에서 2퍼센트 정 도의 지분을 확보했다. 60억 명의 2퍼센트라면 단순히 계산해보아도 1억 2000만 명이다. 만약 60억 명 모두가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를 2퍼센트씩 가지고 있는 대신, 네안데르탈인 1억 2000만 명이 오늘날 우리와 이웃해 살아가고 있다면 어떨까? 어쩌면 네안데르탈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유전적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60억 명 의 2퍼센트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오늘날 우리 삶 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2) 2024.01.11
뇌를 읽다  (2) 2023.12.19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4) 2023.12.01
2도가 오르기 전에  (3) 2023.11.29
뇌는 왜 아름다움에 끌리는가  (4) 2023.11.26
Posted by dalai
,

- 다른 사람 종이 멸종하는 와중에 호모 사피엔스를 번성하 게 한 것은 초강력 인지능력이었는데, 바로 협력적 의사소통 능 력인 친화력이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와 하나의 공동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함께 일할 수 있다. 알다시피 침 팬지의 인지능력도 많은 면에서 우수하다. 우리와 침팬지는 수 많은 유사성을 보이지만, 크게 차이 나는 한 가지 능력이 있다. 침팬지는 하나의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의도로 의사소통을 하기 힘들어한다는 점이다. 
- 처음 동물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경쟁적 속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의사소통 능력이나 친화력이 동물뿐 아니라 우 리의 인지 발달에도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대 를 조종하는 기술, 속이는 기술의 향상이 동물계의 진화적 적 응력을 설명해주는 근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발견 한 것은 똑똑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감정은 보람차거나 고통스럽다거나 매력적이라거나 혐오스럽다 고 느낄 때 아주 큰 역할을 수행한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를 선호하는 성향은 연산능력 같은 인지를 형성하는 데 중대한 역 할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의도나 욕망, 감정 등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기억력, 전략능력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과 결합하지 않으면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친화력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수 세대에 걸친 가축화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지능을 쇠 퇴시키지 않으면서 친화력을 향상시킨다. 어떤 동물이 가축화 될 때는 서로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많은 요소가 변화를 겪는 다. 가축화징후" 라고 불리는 현상의 변화 패턴은 얼굴형, 치아 크기, 신체 부위별로 각기 다른 피부색에서 나타난다. 호르몬 과 번식주기, 신경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연구에서 발견한 것은 조건이 일정하다면 자기가축화가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 이 모든 무관해 보이는 변화는 발달과 관련이 있다. 가축화 된 종과, 이들과 조상은 같지만 야생으로 남아 있는 더 공격적 인종은 뇌와 신체가 다르게 발달한다. 놀이처럼 사회적 유대를 도모하는 행동의 경우, 야생의 친척 종보다 가축화된 종에게 더 이른 시기에 나타나고 더 오래, 대개는 성인 또는 성체가 될 때 까지 유지된다. 다른 종의 가축화 연구는 우리 종의 초강력 인지능력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사람이 책에서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를 뜻한다)은 네안데르탈인 처럼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작은 무리로 살다가 친화력이 높아 지면서 100명이 넘는 큰 규모의 무리로 전환되었다. 뇌가 더 크 지 않더라도, 협력을 잘하는 더 큰 규모의 호모 사피엔스 무리 가 다른 사람 종 무리를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타인에 대한 감수 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 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 리 좋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 할 수 있었다. 다른 인류는 가망이 없었다.
- 하지만 우리의 친화력에도 어두운 면은 존재한다. 우리 종 에게는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 낄 때, 위협이 되는 무리를 우리의 정신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 력도 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연민하고 공감하던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므로 위 협적인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 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 사람 아기의 경우에는 백이면 백이 아주 초기에, 백이면 백이 같은 월령에, 그리고 백이면 백이 말을 배우거나 간단한 도 구를 사용하기 전인 어느 순간 갑자기 손을 사용하는 능력에 번 쩍 불이 붙는다. 한쪽 팔과 집게손가락을 뻗는 이 단순한 동작 은 생후 9개월이면 시작되고, 사라진 장난감이나 머리 위로 날 아가는 아름다운 새를 가리키는 엄마의 손끝을 따라가는 능력 (침팬지는 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 시기에 시작된다
이 협력적 의사소통이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능력인 데, 침팬지의 마음이론 별자리에는 이 능력이 없다." "사람 아 기는 첫 단어를 말하거나 자기 이름을 배우기 전에 협력적 의사소통을 할 줄 안다. 우리가 기쁠 때 타인은 슬퍼할 수 있으며 역 으로 타인이 기쁠 때 우리가 슬플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전 에, 우리가 나쁜 행동을 하고 거짓말로 덮는 법을 배우기 전에, 혹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 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부터, 우리는 협력적 의사소 통 능력을 습득한다.
우리가 타인과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이 능력 덕택이다. 이 능력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통하는 관문, 수 세대를 걸쳐 쌓여온 지식을 잇는 문화적 세계로 통하는 관문이다. 호 모 사피엔스로서 우리의 모든 것이 이 능력에서 시작된다. 많은 위력적인 현상이 그러하듯이 이 능력도 일상에서부터 시작되는 데, 그 시작이 아기가 부모 손짓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 이다.
- 최근에 우리는 사람 아기의 다양한 행동 반응과 연관성이 있는 몇 개의 범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정답 컵을 향해 손 뻗는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아기들은 정답 컵을 바라보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동작도 이해했다. 가리키는 동작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아기들은 다른 유형의 손짓이나 동작도 읽어내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이 놀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고 모든 것을 다 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손짓이나 몸짓 을 잘 읽는다고 해서 어떤 물체가 넘어질지 무너질지 간파한다 거나, 어떤 문제를 푸는 데 어떤 도구가 유용할지 알아내는 감 각까지 갖춘, 물리학에 능한 아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능 력은 다른 범주에 속한다.
- 실험에서 우리는 의사소통 능력이 개들에게서 훨씬 더 밀접하게 집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가지 손짓 놀이를 잘 하는 개는 다른 손짓 놀이도 다 잘해냈다. 한 놀이를 잘 못하는 개는 나머지 다른 놀이에서도 잘하지 못했다. 사람 아기의 경우 와 마찬가지로, 이들 기술은 사회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연관되지는 않았다. 개도 우리처럼 협력적 의 사소통에 특화된 인지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개는 우리와 생존에 아주 중요한 영역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침팬지는 달랐다. 침팬지의 경우, 개나 사람 아기와는 달리, 의사소통에 사용하는 여러 가지 몸짓이 사회성과 여하한 상관 관계를 보이지 않았다. 개나 사람 아기와는 달리, 침팬지들이 사용하는 몸짓은 사회성과는 무관한 과제와 상관관계를 보였 다. 침팬지한테서는 소통에 특화된 인지능력의 단서가 나타나 지 않았다는 뜻이다. 개와 사람은 협력적 의사소통에 능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침팬지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 개는 늑대로부터 갈라져 나온 이래로 많은 면에서 우리와 더 닮도록 진화해왔다. 사람이 전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진화를 도운 유전자가 개에게도 있어서 개는 조상인 늑대와 달리 사람 이 채집하거나 경작한 양식도 거뜬히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18 또 고지대에 적응하면서 진화한 인류의 유전자가 티베탄 마스 티프종에게서도 발견되는데, 이 유전자로 인해 두 개체군 모두 산소가 희박한 높은 고도에서도 온몸에 체내 산소를 전달할 수 있다!" 또 서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에게는 말라리아에 대한 항 체 생산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있는데, 그 일대 가정에서 키우 는 개에게도 이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 인류는 5만 년 전 발사 무기를 들고 유라시아로 진입했는데 이때 사냥과 채집을 하기 위해서 빙하시대에 존재하던 거의 모 든 천적을 싹 쓸어버렸다. 늑대는 예외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수천 년 전에 농경인이 새끼 늑대를 몇 마리 주워 집으로 데려갔고 길들인 새끼 늑대들을 수 세대 에 걸쳐 번식시켜 더 길든 늑대를 얻음으로써 우리의 사랑스러 운 개가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진화의 작 용 원리를 토대로 따져보자면, 이런 추정은 불가능하다. 늑대의 가축화는 적어도 농경인이 첫 씨앗을 뿌린 1만 년 전보다 먼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개와 함께 살았던 사람은 수렵채집인들이었을 것이다."
- 빙하시대에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늑대를 가축화했다고 가 정하면 비현실적인 시나리오가 나올 뿐이다. 사람들은 사람에 게 가장 친화적이고 가장 덜 호전적인 늑대만을 골라서 10여 세대 이상을 번식시켰어야 한다. 그랬다면 적어도 수백 년이 걸 렸다는 이야기가 되고, 그랬다면 수렵채집인들은 이 덩치 크고 충동적 공격성을 지닌 늑대들과 지내면서, 고생해서 얻은 고기 의 상당 부분을 날마다 성체 늑대들과 나눠 먹으며 살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그보다는 사람이 통제하는 가축 화 이전에 하나의 가축화 단계 즉, 자기가축화 시기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사람이 무언가 창조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막대한 양의 쓰레기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수렵채집인들은 음식물 쓰레 기를 바깥에 내다버리고 천막 밖으로 나가 용변을 본다. 정착해 서 사는 인구 집단이 많아지면서 주린 늑대들에게는 밤에 즐길 맛난 먹을거리가 많아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내버린 뼈도 좋은 야식이겠지만, 조리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소화가 빠른 사람의 똥도 음식 못지않게 영양가가 풍부하다. 사람이 사는 천막에 접근할 만큼 침착하고 용감한 늑대라면 이 똥의 유혹을 뿌리치 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늑대들에게 번식상 이점이 있었을 것이고, 이들이 같이 쓰레기를 뒤져 먹고 또 이들끼리 짝짓기했 을 것이다. 친화력 좋은 늑대와 겁 많은 늑대 사이에 유전자 이 동이 일어나는 빈도는 감소했을 것이고, 사람의 의도적 선택 없 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친화력 좋은 새로운 종으로 진화했을 수 있다.
- 이렇게 친화력을 선택하고 단 몇 세대 만에 이 특별한 늑대 개체군의 겉모습은 달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십중팔구 털색 과 귀 모양, 꼬리 모양이 모두 변했을 것이다. 인류는 이 생김새 로 청소부 늑대에게 점점 관대해졌을 것이고, 머지않아서 이들, 원시 개에게 우리의 손짓을 읽을 줄 아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 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늑대에게는 다른 늑대들의 사회적 제스처를 이해하고 반응 할 능력이 있었지만, 사람을 보면 달아나기 바빠서 제스처까지 주의 깊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매력으로 대체되자 늑대의 사회적 기술은 사람과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사람의 제스처와 목소리에 반 응할 수 있는 동물은 사냥 동반자이자 안내자로 대단히 유용했 을 뿐 아니라 온기를 제공하고 늘 함께하는 반려동물로서도 소 중했을 것이다. 40, 41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천막 밖에 있던 그들 을 불 곁에 오도록 허용했을 것이다. 개는 사람이 길들이지 않 았다. 친화력 높은 늑대들이 스스로 가축화한 것이다.' 이 친화 력 좋은 늑대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현재 그들의 후예는 개체수가 수천만에 달하며 지구의 모든 대륙에서 우리의 반려동물로 살아가고 있으나, 얼마 남지 않은 야생 늑대 개체군은 슬프게도 끊임없이 멸종의 위협에 노 출되고 있다.
- 암컷 침팬지는 여러 수컷과 짝짓기하여 아버지가 누군지 혼란을 빚음으로써 영아살해의 위험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이 전략은 암컷 자신의 신체 때문에 발각되고 만다. 배란기의 암 컷 침팬지는 마치 광고라도 하듯이 엉덩이의 분홍 부위가 부풀 어 오르는데, 수컷들이 이를 보고 배란기임을 알 수 있기 때문 이다. 서열 높은 모든 수컷들은 배란기의 암컷을 공격해서 복종 하게 만든다. 다른 수컷과 짝짓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배 란기 암컷의 유일한 방어 수단은 우두머리 곁에 붙어서 떠나지 않는 것이고, 이는 곧 우두머리 수컷이 번식에서 가장 큰 성공 을 거둔다는 뜻이다. 새끼가 아직 어릴 때 우두머리 수컷이 지 위를 잃게 되면 새로운 우두머리 수컷이 그 암컷의 새끼를 공격 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영아살해는 수유기의 암컷을 빠르게 배란기로 되돌림으로써 수컷의 적합도를 높이는 수단이며, 공 격적인 수컷은 이렇게 유리한 전략을 구사하여 폭력의 악순환을 고착시킨다.
- 암컷 보노보는 배란기를 불분명하게 만들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냈다. 그들은 엉덩이가 분홍빛으로 부풀어 있는 기 간이 길어서 수컷으로서는 정확히 언제 배란을 하는지 알기 어 렵다. 또 암컷들은 침팬지 같은 행동을 보이는 수컷에게는 적대 적으로 군다. 암컷에게 강제로 짝짓기하려 드는 수컷은 반드시 맹렬한 저항에 부딪힌다. 성난 암컷들이 연대해서 공격하는 경 우도 빈번하다. 어떤 수컷이라도 아기 보노보를 좋지 않은 눈빛 으로 바라보았다가는 곧바로 암컷들의 맹렬한 반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암컷들은 함께 움직인다. 따라서 덩치는 수컷 개체 들이 클지 몰라도 수컷들은 언제나 단결한 암컷들에게 수로 제 압당한다. 
암컷 침팬지는 친척 암컷에게만 도움을 주지만 암컷 보노보 는 모든 암컷을 돕는다. 새로운 암컷이 무리에 들어오면 흥분하 거나 호의를 보이며 반기는데, 서로 앞다투어 달려들어 인사하고 털을 다듬어주고 성기를 문질러주곤 한다. 이 원주민 암컷들이 그동안 알고 지낸 수컷들에 맞서서 새내기 암컷을 지켜줄 것 이며, 자기네 아들들로부터도 지켜줄 것이다. 
랭엄은 보노보 집단이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한 이유를 이들이 서식하는 콩고강 남부가 자원이 풍부하여 식량 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생태 계에 관한 여러 연구는 보노보 서식지의 열매와 초본이 풍부함 을 시사한다. 보노보는 이러한 자원을 놓고 고릴라와 경쟁할 필 요도 없다. 고릴라가 침팬지 서식지에 사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콩고강 남부 보노보 서식지 부근에는 살지 않는다.
- 보노보 암컷은 서열과 상관없이 모두 일일 필요 열량을 충족할 수 있지만, 침팬지는 서열이 높은 암컷들에게만 매일 충분한 먹이가 보장된다. 보노보 암컷은 암컷 친구를 챙길 여력이 있지만 침팬지 암컷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다. 친화력 좋은 보노보 암컷들은 서로 돕고 살 수 있어 수컷의 공격성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또한 공격성이 가장 낮은 수컷과 짝짓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수컷 보노보에게도 친화력 은 승리의 전략이었다. 
- 암컷의 승리가 어느 정도로 완전하냐면, 수컷이 암컷을 만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어머니를 통하는 것일 정도다. 보노보 수컷은 침팬지 수컷처럼 암컷을 꺾어 누르기 위해서 뭉치는 대신 엄마에게 의지해서 암컷 친구를 소개받는다. 침팬지 수 컷은 자기네 엄마마저 복종시키는 반면 보노보 수컷은 마마보 이의 결정판이다.20 암컷과 친하게 지내는 이 방식은 성공적 번 식 전략이어서, 번식에 가장 성공한 수컷 보노보는 번식에 가 장 성공한 침팬지의 수컷 우두머리보다도 더 많은 후손을 얻는다. 이는 암컷의 다정한 수컷 선호가 다정한 사회의 진화를 야기하는 선택압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다."
- 사람에게 다가왔던 늑대들이 그러지 않았던 늑대들보다 친 화력이 강력한 선택압으로 작용할 정도의 큰 이익을 누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압력은 행동과 외모만이 아니라 심지어 인 지능력까지 진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어떤 종 안에서 관용과 친화력을 지닌 개체군이 살아남는 자연선택이 일어났는데, 그 형질 변화가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집단 내부에 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또한 자기가축화를 이끌어내 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 마음이론에서 발생하는 아주 섬세한 능력 하나가 있는데, 누군가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는 틀린 믿음 False Belief 능력이다. 이 능력은 대개 4세가 될 때까지는 완전히 활성화되지 않는다. 웰먼은 감정반응이 격한 어린이보다 감정 반응의 강도가 더 낮은 수줍음 많은 어린이일수록 틀린 믿음 능력이 빨리 발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틀린 믿음 능력을 빠 르게 갖출수록 언어 발달도 빨랐는데, 따라서 감정반응이 낮은 어린이들이 협력과 의사소통 측면 모두에서 이점이 있었다. 즉, 낮은 감정반응은 협력과 의사소통 능력이 발달하는 속도에 영 향을 미친다 
-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자연선택이 다정하게 행동하는 개 체들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유연하게 협력하고 의 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친화 력이 높아질수록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강화되는 발달 패턴 을 보이고 관련 호르몬 수치가 높은 개인들이 세대를 거듭하면 서 더욱 성공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가설은 첫째, 감정반응이 격하지 않고 관용이 높을수록 자연선택에 유리해졌고 이것이 협력적 의사소통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능력과 연관되며 둘째, 우리의 외형과 생리 작용, 인지능 력의 변화가 다른 동물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축화징후와 유사 하다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 이미 큰 뇌를 지니고 문화를 발전시 킨 사람 종 조상이 이 자연선택에 성공했다. 자기가축화는 다 른 동물 종들에게서도 일어났을 수 있지만, 자기가축화 과정 이 시작될 때부터 극도의 자제력을 지녔던 것은 우리 종뿐이었 다. 자기가축화 과정을 겪으며 감정반응을 더욱 억제함으로써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이 한층 더 강화된 것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보노보와 개의 경우처럼 관용적일 수록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얻는 보상이 커졌을 것으로 예측한 다. 동시에 이 가설은 감정반응을 억제하고 관용을 베푼 뒤 돌 아오는 보상을 계산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 어떤 종 과도 확실하게 다르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바로 이 자제력과 감정조절 능력이 결합되어 사람 고유의 사회적 인 지능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 가축화된 늑대나 유인원의 뇌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가축화 된 사람의 뇌라면, 마법에 가깝다. 극도로 문화적인 종이 탄생 하는 것이다. 우리 종 안에서 독특한 유형의 친화력이 진화함 으로써 더 큰 규모의 무리, 더 밀도 높은 인구, 이웃한 무리 사 이에서 더 우호적인 관계가 가능해졌을 것이며, 그럼으로써 더 큰 규모의 사회연결망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것이 더 많은 혁 신가 사이에서 더 많은 혁신의 전파를 촉진했을 것이다. 문화의 톱니바퀴는 느릿느릿 불규칙하게 돌기 시작해서 빠르고 맹렬해 졌을 것이다. 그 결과가 기술의 지수증식과 행동 현대화의 출현 이다.
사람의 자기가축화 가설이 옳다면, 우리 종이 번성한 것은 우리가 똑똑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친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 이다. 
- 가축화된 동물의 경우, 세로토닌이 확실히 뇌 크기 수축의 주범일 가능성이 높다. 가축화된 동물의 공격성이 하락할 때 우 리가 가장 먼저 발견한 변화는 세로토닌 유용도의 상승이었다. 포유류 동물들의 두개골 발달과 세로토닌이 관련되어 있다는 근거도 있다.
세로토닌의 효과는 엑스터시를 복용해본 사람이라면 매 우 잘 알 것이다.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시키는 물질은 MDMA (3, 4-메틸렌디옥시메탐페타민)로, 이것이 체내에서 세로토닌 유용 도를 증가시킨다. MDMA는 체내에 저장된 세로토닌의 80퍼센 트까지 분비시켜 뇌에 세로토닌 범람을 일으키며 세로토닌이 뇌에 재흡수되는 것을 막는다. 엑스터시 복용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친화력이 증가하여 눈에 띄는 사람마다 다 포옹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불행히도 엑스터시 복용자들은 세로토닌 결핍에도 시달려 야 하는데, MDMA가 새로운 세로토닌 생성을 막기 때문이다. 토요일 밤 뇌에 있던 세로토닌을 왕창 쏟아붓고 나면 대개는 흔 히들 '죽고 싶은 화요일'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경험한다. 엑스터 시 복용자들은 복용 후 며칠 뒤에 더 공격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돈이 걸린 게임에서 더 공격적으로 행동한다. 세로토닌 분비 이상은 폭력범, 충동적 방화범, 인격 장애를 겪는 사람들과도 연관이 있다."
-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 SSRI는 뇌에 세로토닌이 재흡수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세로토닌 수용을 증가시키는 항우울제다. 이 계열의 항우울제 시탈로프 람을 복용하는 사람들에게 협력적 행동이 증가하고 타인을 해 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 실험 결과도 있다. 51, 52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대목부터다. 시탈로프람을 복용한 여 성들이 두개골이 더 작은 아이를 낳을 확률이 높았다. 53 임신한 쥐에게 시탈로프람을 투약하자 두개골이 공처럼 동그랗고 주 둥이가 평균보다 짧고 뾰족한 새끼를 낳았다." 세로토닌은 동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발달 초기에 세로토닌 유용도가 상승하면 두개골과 얼굴 형태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 종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두개골과 뇌는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모양도 달랐다. 다른 모든 사람 좋은 이마가 낮고 편평했으며 두개골은 두꺼웠다.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은 미식 축구공 모양이었고, 호모 에렉투스는 샌드위치 빵 모양이 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만이 인류학자들이 구형이라고 칭 하는 풍선 같은 두개골을 지녔다. 56, 57 이는 우리 종이 발달단계 에서 세로토닌 유용도가 증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가축화 된 동물과 시탈로프람 복용자 아기의 예시에서 보았듯이 우리 종의 두개골은 수축되었으며, 시탈로프람을 투약한 쥐에게서 나타난 변화처럼 우리 종의 두개골도 공처럼 동그랗게 변화했 다. 화석 기록은 이러한 변화가 우리가 네안데르탈인과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뒤에 시작된 것임을 말해준다.
- 우리는 하얀 공막을 선호하거나 눈맞춤에 의존하는 유일한 종이다. 사람 아기는 누군가의 시선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갈 수 있는데, 눈동자만 움직여도 가능하다. 반면 침팬지와 보노 보는 누군가가 머리 전체를 움직일 때만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 사람이 눈을 막 감은 순간에도 계속 그 방향을 따라 옮긴다. 침팬지와 보노보는 상대방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보는 행위가 눈으로 하는 것이라 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 뇌에는 누군가의 눈을 볼 때 반응만을 담당하는 신경세포가 있다. 상측두이랑에 위치한 이 세포들은 편도체를 포함하여 피질하 영역의 감정중추와 연결된 마음이론 신경망의 일 부다. 이 신경망은 생후 초기에 발달한다. 생후 4개월만 되어 도 사람 아기는 이미 눈의 공막 모양에 초점을 맞추어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신경망의 신경세포들은 우리가 의식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자동으로 반응한다. 운전할 때 옆 차 선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실제로 그랬던 경험이 있는가?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은 이런 시선이 주변시에 포착될 때 상측두이랑이 무의식 속에서 편도체 로 보내는 경고다. 
대부분 동물은 공막을 숨긴다. 자기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경쟁자가 추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람 아기에게는 하얀 공막이 유리하다. 
- 하얀 공막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협력을 증진하는 데 두 루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 은 하얀 공막을 친화력 선택의 결과로 보며, 이 진화가 이루어 진 시기는 8만 년 전이었을 것으로 본다. 눈맞춤 빈도가 증가하 면서 유대와 협력적 의사소통이 촉진되어 옥시토신이 훨씬 활 발히 발현되었을 것이다. 또 하얀 공막은 속임수나 사기를 막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눈은 분명하고 유일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이기도 하 다. 사람은 피부, 머리, 심지어는 손톱까지 다양한 색을 띤다. 홍 채도 초록색, 회색, 파란색, 갈색에 검은색까지 다채로운 색이 있다. 하지만 공막은 모두 똑같이 하얀색이다. 하나의 형질이 이렇게 절대적인 단일성을 보이는 건 아주 이례적이다.
- 개와 보노보는 어릴 적 행동이 생애주기 끝까지 유지될 뿐만 아니라, 청소놀래기와 마찬가지로, 협력적 의사소통과 연관된 행동이 여타 친척 종들보다 이른 시기에 발달한다.
강아지는 눈뜬 직후에도 이미 다른 개 또는 사람과 유대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다." 같은 시기에 강아지들은 의욕에 넘쳐서 새로운 장소와 사물을 탐색한다. 발달할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습득할 시간이 더 주어진다는 뜻이다. 어 쩌다 도시에 들어온 늑대라면 감당하기 어려울 세계일 테지만, 일찌감치 경험을 쌓은 개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사람, 장소, 사물의 물결에 응할 자신감을 얻는다.
다른 종에게는 짧게 제한된 사회화 기간도 개에게는 더 오 래 열려 있다. 늑대는 몇 주면 끝나는 이 집중탐구 기간이 우 리의 개들에게는 몇 달에서 몇 년까지 간다. 다 자란 뒤에도 그 들은 새로운 사물에 새끼 강아지 못지않은 강한 호기심으로 반 응한다. 
개가 소리를 내는 방식에도 이 연장된 사회화 기간의 영향 이 있다. 개와 늑대 모두 아기 때는 엄마의 주의를 끌기 위해 짖 는다. 하지만 성체가 되어서도 다양한 맥락을 담아 계속해서 고 음으로 짖는 것은 개뿐이다.
- 신경능선
친화력 선택의 부산물로 일련의 형질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지난 세기에 이루어낸 가장 놀라운 성취 중 하나 다. 벨랴예프가 이끈 연구팀은 다른 인지기능이나 생리적 혹은 형태적 특성은 배제하고 사람과의 친화력 여부만으로 여우를 선택했다. 그 결과, 짧고 동그랗게 말린 꼬리, 여러 색의 얼룩이 섞인 털, 짧은 주둥이와 작은 이, 펄럭이는 귀를 가진 여우의 발 생 빈도가 높아졌고 해가 갈수록 이들의 생식기가 길어졌으며 세로토닌 분비 수치가 상승하고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되었다. 벨랴예프의 여우들에게서 나타났던 특성이 다른 가축화된 포유류 동물에게서 (그 가축화가 자기가축화는 아니라고 생각 되는 종들도 포함해서) 보편적으로 나타난 변화를 충실하게 반영 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변화는 한층 더 인상적이다.
랭엄과 유전학자 애덤 윌킨슨Adam Wilkinson은 친화력과 포 유류의 가축화징후를 구성하는 형질 모음의 연관성을 연구하 면서 발달에서 아주 큰 역할을 담당하는 신경능선세포에 특별 히 흥미를 갖게 됐다. 신경능선세포는 모든 척추동물의 배아 에 잠깐 나타난다. 이 세포들은 신경관 표피에서 떨어져나와 독립된 세포 집단을 형성하며, 여기에서 뇌와 척수가 형성된다. 신 경능선세포는 줄기세포로, 이는 배아가 발생할 때 신경능선세 포가 다양한 유형의 세포로 분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신경 능선세포는 이동 능력이 있어, 목적에 따라서 전신에 걸쳐 옮겨 다닐 수 있다. 줄기세포가 어떤 유형의 세포가 될지, 언제 어디 로 이동할지 결정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군의 사 서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동 능력이 있는 신경능선세포는 가축화징후와 관련된 많 은 형질을 발달시킨다. 가축화의 중심 특성은 두려움과 공격성 감소인데, 신경능선세포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부신수질 발달에 관여한다. 가축화된 동물의 부신은 야생의 친척 종들의 부신보다 작다. 부신이 더 작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이 적게 분비된다는 뜻이다. 신경능선세포는 또한 친화 력 선택과 연관된 모든 세포 조직 발달에도 아주 큰 역할을 담 당한다. 여기에는 이개연골, 피부 색소, 주둥이(또는 얼굴) 뼈와 치아가 포함된다.
신경능선세포는 뇌 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뇌 크 기의 변화뿐만 아니라 여러 뇌 부위의 세로토닌이나 옥시토신 같은 신경호르몬 수용 방식에 일어나는 변화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뇌에 발생하는 이러한 변화는 생식기의 변화와도 연관 될 가능성이 높다. 뇌 크기가 작아지면 생식기를 조절하는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 Hypothalamic Pituitary Gonadal HPG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의 기능이 제한되면 2차 성징을 앞당길 수 있으며 생식기의 빈도를 높일 수 있다.
랭엄과 윌킨스는 가축화된 포유류에게서 (어쩌면 조류도 포함 해서) 일어난 친화력 선택이, 신경능선세포 발달방식을 제어하 는 사서 유전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것이 말 그대로, 개에서 보노보까지 모든 동물에게서 가축화장 후의 일부로 나타난 변화를 야기했을 것이다. 가축화와 관련된 여타 특성들과 친화력 사이에 있을 법하지 않아 보였던 연관성 을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신경능선세포의 발 달과 이동을 제어하는 사서 유전자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가설이다." 그리스 출신 신경과학자 콘스탄티나 테오 파노풀루Constantina Theofanopoulou와 카탈로니아 출신 언어학자 세드릭 보엑스Cedric Boeckx는 고대 DNA를 활용하여 이 연관성 이 사람에게도 존재하는지 연구했다. 그들은 많은 가축화 동물 에게서 진화된 유전자와 같은 유전자의 진화를 사람에게서도 발견했다. 여기에는 우리가 다른 멸종한 사람 종에게서 갈라져 나온 이래로 변화된 신경능선세포도 포함된다. 
- 옥시토신과 공감능력의 관계를 테스트하는 실험이 있었는 데, 옥시토신을 흡입한 피험자들의 공감능력이 상승하고 타인 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인식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 호르몬은 마음이론 신경망이 위치한 내측전전두엽피질로 전달되는 것으 로 보인다." 옥시토신은 내측전전두엽 피질과 편도체의 연결을 차단함으로써 내측전전두엽 피질을 더욱 활성화시키고 두려움 과 역겨움을 느끼는 편도체의 반응을 둔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옥시토신은 위협당하는 느낌을 감소시켜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게 해준다. 옥시토신을 흡입한 피험자들은 사람들과 더 잘 협 력하고 더 후한 액수를 기부했으며 돈이 걸린 사회적 게임에서 상대방을 더 신뢰하는 경향을 보였다.
옥시토신은 아기를 분만할 때 분비량이 증가하는데, 이는 모유 생산을 촉진할 뿐 아니라 모유를 통해 아기에게도 전달된다.
- 부모와 아기의 눈맞춤은 일종의 옥시토신 순환 회로를 만들어 부모와 아기 모두 사랑을 느끼고 사랑받는 느낌을 주고받게 한 다. 우리 눈의 하얀 공막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또 보편적인 특 성으로, 이 옥시토신 순환 회로에 시동을 거는 역할을 맡는다. 이 순환 회로는 본래 부모와 아기 사이에 보살핌과 유대를 강화 "하는 기능을 수행했지만 점차 모든 사람 관계에 보편적으로 적 용되었다. 개도 이 유대를 강화하는 경로에 끼어들어 주인과의 옥시토신 순환 회로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야생 늑대는 하지 못하는 일이다."
- 8만 년 전에 일어난 사람의 자기가축화로 폭발적 인구 증가와 기술 혁명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화석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친화력이 여러 집단의 혁신가들을 하나로 연결함으로써 기술혁명을 추동한 것인데, 이는 다른 어떤 사람 종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축화가 우리 종에게 준 막강한 능력으로, 진화적 시간으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세계를 제패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종들은 하나하나 멸종되어 사라졌다
- 개와 보노보는 자기가축화를 통해서 친화력을 강화했지만, 두 종 모두 자신의 가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에 대해서는 새로 운 형태의 공격성을 발달시켰다. 개는 자기가 사는 사람의 집에 낯선 자가 다가오면 공격적으로 짖어댄다. 보노보 암컷의 경우 에는 방어적 모성이나, 암컷 간의 유대로 오히려 보노보 수컷에 게 공격적인 모습을 띠곤 하는데 이는 침팬지 암컷과 비교해보 아도 더 공격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격성의 증가가 자기가축화 중에 일어난 옥시토신 시스템의 변화에서 기인했다고 추정한다 부모의 행동에 중대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옥시토신 은 '포옹 호르몬'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나는 이를 '엄마 곰 호르몬'이라고 부르고 싶다. 옥시토신은 엄마가 아기를 분만할 때 흘러넘치기도 하지만 누군가 자기 아기를 위협한다고 느낄 때 분노를 솟구치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옥시토신을 주입한
엄마 햄스터는 위협이 되는 수컷을 더 공격적으로 물어뜯는 경 향을 보인다. 수컷의 공격성과 관련 있는 행동 양태도 옥시토 신과 연관되어 있다. 수컷 쥐는 암컷과 밀착할 때 옥시토신 분 비가 증가한다. 이 수컷 쥐는 자기 짝에게 자상할 뿐만 아니라 자기 짝을 위협하는 낯선 쥐에게는 공격적인 경향을 보인다' 이 사회적 유대, 옥시토신, 공격성 간의 연관성은 포유류 동물에게서 두루 나타난다. 이는 엄마 곰이 가장 사랑에 넘치는 순 간 즉, 아기 곰과 함께 있는 순간이 한편으로는 엄마 곰이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일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무의식적으로 아기 곰에게 위협이 되는 행동을 했다가는 엄마 곰이 악몽 속 존재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 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것이 엄마곰의 사랑이다.
-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친화력을 지닌 동시에 잔 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 종임을 설명해준 다. 외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은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으 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느끼는 친화력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펄 럭이는 귀나 얼룩이 있는 털 같은 신체적 변화와는 달리 이 부 산물은 실로 가공할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 와 다른 누군가가 위협으로 여겨질 때, 그들을 우리 정신의 신 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는 것이다. 연결감, 공감, 연민이 일어 날 수 있던 곳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정함,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메커니즘이 닫 힐 때,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소셜미디어가 우 리를 연결해주는 이 현대 사회에서 비인간화 경향은 오히려 가 파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다. 편견을 표출하던 덩치 큰 집단들 이 보복성 비인간화 행태에 동참하며 순식간에 서로를 인간 이 하 취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보복적으로 비인간화하 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 과학기술을 선한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가진 최고의 미덕과 최악의 본성을 함께 예측하고 개발해야 하는데 그 런 경우는 거의 없다. 더 다정하고 친화적인 미래를 위한 해결책 에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어두 운 본성을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야기된 문제에는 사회적 해법이 필요할 것이다.
- 가장 바람직한 도시의 모습은 다양한 국가와 민족, 인종, 성 정체성이 섞인 활기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는 공간이다. 이 다양 성이 사람들 간의 교류를 활성화시키며, 혁신과 경제적 성장을 이끌고 사회의 관용을 강화시킬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교류를 증진시키는 도시를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건 축이란, 모름지기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우리 삶의 확장이기 때 문이다. 이상적인 도시 건축이라면, 부모가 자녀들이 바깥에서 노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주민들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 볼 수 있는 중층 높이 건물(12층이 상한선인 듯하다)에, 다양한 직 업과 다양한 사회경제적 지위, 다양한 소득층이 섞여 거주하는 모습일 것이다. 또 작은 규모의 회사와 카페, 식당에 바로 접근 가능하며 지역의 상인들은 손님들과 알고 지내고 정원과 마당 이 있어 어머니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또 그 자녀들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형태가 될 것이다.
1950년대에 뉴욕의 웨스트 빌리지가 이런 유형의 도시였다. 도시계획전문가 제인 제이콥스 Jane Jacobs"는 아침마다 자신의 아파트 바깥에서 펼쳐지는 천태만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늘 이 방인들이 오가는 허드슨거리. 이들의 우정 어린 눈길은 우리 원 주민들이 거리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힘이 된다. 워낙 수가 많 으니 다 다른 사람들처럼 느껴지지만 (...) 허드슨거리에서 서너 번 마주치다 보면 저절로 고갯짓으로 인사하는 사이가 된다."94 최악은 사람들의 접촉을 막는 도시다. 고층 건물이 만들어 내는 것은 몇 년을 같은 층에 살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이웃, 사람들이 오가며 일상을 만들어내는 길가라고는 없이, 네 모반듯한 대형 체인점과 패스트푸드 레스토랑만 즐비하고, 철 통 같은 입구며 담장으로 동네에 머물거나 돌아다니는 것을 가 로막는 동네, 고속도로가 동네를 통과해서 건널목이나 녹지 한 뙈기 없는 풍경이다.
- 서식지는 바뀌었지만 우리 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 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 고 생산적인 종이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 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사 회의 건축물이 관용을 베풀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고 무례하지 않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으며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dalai
,

2도가 오르기 전에

과학 2023. 11. 29. 07:15

- 자연적 기후 변동성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보면 지구의 기후는 태양 활동의 변화, 태양과 지구의 상대적 위치 변화 등의 외적 요인 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뿐만 아니라 화산 분화에 따른 성층권 에 어로졸 농도 변화, 얼음으로 덮인 면적의 변화, 바닷속 내부에서 일 어나는 거대한 흐름의 변화 등 지구 시스템 내부 요소들의 상호 작 용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위도의 바다 표면 에서 무거워진 바닷물은 바닷속 깊이 가라앉고 저위도의 따뜻한 바 닷물이 이를 채우기 위해 고위도로 이동하며 열을 공급해 주는데, 만약 이러한 순환이 약해지면 북반구에 빙하기가 도래할 수도 있 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수십 년 동안 장기적으 로 대서양 심층에서 해류가 약해졌다는 관측 연구 결과가 발표되 었는데, 이를 모티브로 삼아 영화 <투모로우(2004, 원제: The Day After Tomorrow)>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과학자들은 영화와 같은 빙하기의 급작스러운 도래는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는 100~1000년에 걸쳐 나타나며 과거 마지막 빙하기 후 찾아온 소빙하기 (Little Ice Age)가 이러한 이유로 발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 9백여 명의 사망자와 65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1991년 6 월의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은 그 후 1년여간 지구 평균 기온 을 섭씨 0.5도 정도 낮춘 것으로 알려졌다. 화산 폭발 당시 분출된 화산가스 속 이산화황 성분이 성층권에까지 도달해 장기간 머물면 서 많은 양의 태양복사에너지를 차단해 지구를 냉각시켰기 때문인 데 이를 '피나투보 효과'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착안해 최근에는 성 층권에 이산화황을 인위적으로 살포해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 자는 아이디어가 논의되기도 했다. 
- 비열이 큰 바닷물로 채워져 있어 잘 데워지거나 식기 어려운데도 북극해에서 유독 빠르게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를 '북극 증폭(Artic amplification)'이라고 부른다. 북극해 표면을 덮고 있는 해빙 (sea ice)4이 더 많이 녹으면서 태양복사에너지를 잘 반사하지 못해 바닷물의 수온이 올라가고 이에 따라 해빙이 더욱 잘 녹아 태양복 사에너지 흡수가 강화되는 현상이 주요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또, 열대 바다에서도 빠른 온난화가 진행 중인데, 유라시아 대륙 중남 부와 북미 대륙 남부 등 아열대 지역의 온실가스 농도 증가가 대기 대순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약해진 무역풍이 저층의 차가운 바 닷물을 표층으로 퍼 올리는 용승(upwelling) 현상을 약화시키는 것이 열대 해역의 온난화가 빨라지는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 인위적 기후변화로 급격한 지구온난화가 발생하는 것과 무관하게 오랜 지구의 역사에서 태양 활동, 지구 공전 궤도, 지구 내부의 해양 순환 등의 변화에 따라 자연적 기후 변동성이 있어 왔다. 지구 온난화가 아니라 지구냉각화로 빙하기가 찾아오기도 했는데, 특히 상대적으로 유럽 등의 지역이 따뜻했던 중세 온난기 이후 찾아왔 던 소빙하기는 대표적인 지구냉각화의 예이다. 자연적 기후 변동성 이나 인류 활동에 의한 인위적인 기후변화나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지구온난화 또는 지구냉각화로 표현되는 현상이 단순히 지구 평균 기온의 오르내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 평균 기온 변화 는 다양한 지구 환경 전반의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지구 평균 온도가 약 1도 상승한 것은 기후변화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고산 지대의 만년설, 영구 동토층, 그린 란드와 남극 대륙의 거대한 빙상, 북극 해빙 등 지구상의 얼음이 빠 르게 사라지는 변화와 전 세계 바다의 평균 해수면이 오르는 변화, 전 지구적인 물 순환 변화에 따라 강수 패턴 등 전반적인 지구 환경 이 변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변화는 가뭄, 폭염(혹서 또는 무 더위), 폭우, 폭설(대설), 한파(혹한)와 같은 기상 이변과 극한 기후는 물 론이고 산불, 홍수, 산사태, 태풍, 해일 등 각종 자연재해 특성도 변화시킨다. 아울러 생태계 전반에 변화가 생겨 지구상 동식물의 생존이 위협받고 생물 다양성이 훼손되므로, 결국 인류도 전례 없는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울 중대한 위기 에 처하고 만다. 이미 지구촌 곳곳에서 심각한 기후재난으로 농업 수확량에 차질이 생기고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기 후변화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극심한 지구 환경 전반의 변화를 의미하며, 각종 경제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인류 최대의 위협 요 소인 것이다.
- 화산재가 성층권까지 이르러 태양복사에너지를 차단시켜 지구냉각화에 기여했던 것처럼 화산 활동은 기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그렇다면 반대로 기후에 의해 지진과 화산 활동이 영향을 받을 수 도 있을까? 오늘날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가 지진이나 화산 활동 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만년설과 그 린란드 대륙 빙상 등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빙하가 빠르게 녹으 면서 하중이 줄어들어 지각판의 움직임이 더 격렬해질 수 있기 때 문이다. 또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줄어들면서 빙하가 눌러 주던 압력이 낮아지는데, 빙하로 덮인 아이슬란드의 화산 같은 경우 상대 적으로 낮은 온도에서도 마그마가 활동하도록 만들어 화산 분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하나의 촉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강수 패턴의 변화도 화산 분화 를 촉진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최근 200년간 미국에서 발생한 화 산 폭발 중 가장 강력했던 2018년 하와이 킬라우에아(Kilauea) 화산 폭발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땅속 마그마 압력이 서서히 높아지는 상 황에서 하와이 일대에 평년보다 많은 비가 내린 것에 주목했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화산 표면의 구멍으로 빗물이 대량 침투하 면서 암반 압력이 이례적으로 급증하며 화산 폭발을 촉발했다고 해 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후변화는 태풍, 폭우, 폭설, 한파, 폭염과 같은 해양과 기상 재해는 물론이고 지진과 화산 활동 같은 지질 재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지구 환경 변화를 가져 온다.
- 장마는 가뭄 해갈하고 미세먼지와 산불 걱정도 줄여 준다. 또한 무더위를 식히고 토양에 과다하게 쌓인 무기염류를 씻어 내어 농경에도 도움을 주는 등 여러 모로 긍정적인 자연 서비스 기능 (natural service function)을 담당한다. 그러나 장마가 너무 오래 지속되 면 각종 산사태와 홍수 등 자연 재해가 되기도 한다. 사실 자연은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닌데, 인간 활동에 따라 자연 서비스 기능 을 담당하는 자연 현상으로부터 혜택을 입기도 하고, 반대로 피해 를 입기도 하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기후변화로 전 지구적 물 순환과 강수 패턴이 달려져서 장마 특성에도 큰 변화가 생겼고, 예측이 어려워진 만큼 대비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지역적으로도 기후변화에 따라 베링해의 해빙과 티베트고원에 쌓인 눈의 양이 줄어들면서 고기압 형 성 속도에 차이가 생겼고 장마 특성도 달라졌다. 특히 2020년 여 름에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최장 기간 동안 장마가 이어져 홍수와 산사태 등의 피해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도 피해가 적지는 않았 지만, 중국 남부 지방과 일본 규수 지방 등에서는 매우 극심한 홍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호주에서는 비가 너무 오지 않아 9개월간 산불이 이어지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림과 생태계가 파괴되었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기후재앙이라고 부를 정도로 전례 없는 기상 현상으로 인한 피해가 현실화되고 있다. 장마 특성은 물 론이고 전 지구적 물 순환과 강수 패턴 변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잘 대처하지 않으면 자연 재해로 인한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로 분출된 이산화황이 성층권에서 태양복사에너지를 차단해 지구 평균 기온을 1년 동안 0.5도 낮춘 것이다. 이렇게 미세먼지의 지구냉각화 효과로 온실효 과를 어느 정도 상쇄하지 않았다면 인류가 그동안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해 지구 평균 온도는 이미 지금의 1도 수준보다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
에어로졸은 직접적인 태양복사에너지 차단 외에도 구름 형성에 관여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기후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최근 연구 는 대기 오염을 만드는 에어로졸의 지구 냉각 효과가 예상보다 더 크다는 결과를 보여주는데, 이 때문에 온실가스에 의한 지구온난화 효과 역시 저평가되었을 수 있다. 에어로졸 입자가 많이 포함된 구 름은 많은 수분을 머금은 채로 비를 내리지 않고 오래 대기 중에 머 물며 넓은 지역을 덮어 태양복사에너지를 더 많이 차단하고 지구평균 온도를 그만큼 더 낮춘다. 에어로졸이 예상보다 지구를 냉각시키고 있음에도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는 것은 온실가스로 인한 온 실효과가 더 강력함을 시사한다. 하지만 또 다른 가설로 에어로졸 이 고도 10km 안팎의 상층운에 주로 갇혀 있을 가능성도 논의된 다. 대기 오염을 완화하기 위해 오염물질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한창인데, 에어로졸 농도가 줄어드는 만큼 온실가스 배출을 빠르게 줄이지 못하면 자칫 지구냉각화 효과만 줄어들어 더욱 심한 온난화 를 맞이할 수도 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후 모델들이 태양복사 에너지와 구름 형성에 관여하는 에어로졸의 영향을 정확하게 반영 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 그럼 이처럼 기후가 변화하면서 한파와 폭설이 빈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반구 중위도의 극심한 한파가 북극의 해빙 (sea ice) 이 사라지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이 다. 지구온난화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균일하게 일정한 온도 상승 을 보이기보다 지역적인 차이가 커서 빠른 온도 상승을 보이는 지 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대비되는 양상을 띤다. 특히 북극해(Artic Ocean)는 온난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 대표적인 곳이다. 태양복 사에너지를 반사해 주던 북극해 해빙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그대로 북극해에 흡수된 태양복사에너지가 온난화를 가속화하고 이에 따 라 더욱 빠르게 해빙이 녹아 사라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북극의 온도가 더 빠르게 상승하면서 저위도의 온도 차이가 줄 어들면 북극 주변에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상공의 제트기류로 둘 러싸인 북극 소용돌이 (polar vortex)가 약해져 그 경로가 뱀처럼 굽이치며 사행(meandering)한다. 그러면 제트기류가 남쪽으로 사행하는 지역에서는 북극 소용돌이 안에 갇혀 있는 북극 주변의 차고 건조 한 공기가 중위도로 남하해 '북극 한파'가 발생한다. 북미, 유럽, 동 아시아 지역에 종종 극심한 한파가 발생하며, 지구온난화로 과거보 다 더 추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2018년과 2019년 연이어 극 심한 한파 피해가 속출한 미국 북동부에서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얼 어붙고 미네소타는 영하 66도를, 시카고는 영하 45도를 기록하는 등 곳곳에서 최저기온을 경신하며 수억 명의 사람이 한파에 노출됐 다. 2021년 2월에는 미국 동남부의 따뜻한 지역인 텍사스까지 북 극 한파가 들이닥쳐 알래스카보다 더 추운 지역이 되었으며 전기가 끊기고 난방, 제설, 식수 등의 문제로 수많은 사람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 폭설로 도로와 공항이 마비되고 학교, 관공서, 상점 등이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몇 분 혹은 몇 초만 노출되어도 저체온증에 걸리는 살인 한파 상황에서 인명 피해도 상당했다. 한파에 잘 대비 가 되어 있지 않은 텍사스에서는 난방 시설이 거의 없어 나무를 태 우거나 차량의 히터로 버티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우리나 라에서도 종종 북극 한파로 말미암아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 겨울이 찾아오기도 한다.
지구온난화로 고위도 상공의 제트기류가 크게 사행하는 형태로 대기 순환이 변하면서 극심한 한파가 북반구 중위도에 찾아올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만일 대기 순환이 아니라 바다 내부의 움직임 즉 해양 순환이 변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닷물은 비 열이 커서 데우기도 식히기도 어렵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의 바닷물 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막대한 열 수송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지 구의 기후가 달라진다. 따라서 해양 순환이 바뀌면 일시적인 한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북반구에 빙하기까지 도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해양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이다. 실제 이러한 과학적 근거를 모티브 로 영화 <투모로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순식 간에 급격한 빙하기가 찾아오기보다는 100~1000년에 걸쳐 서서 히 찾아올 것이라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과학자 대다수는 과거 마 지막 빙하기 후 잠시 나타났던 소빙기가 바로 바닷물의 거대한 움 직임 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 지구온난화로 지구 평균 기온이 오르고 있으니 무더위가 가장 위험하다고 할 수 있을까? 평균 기온 상승 폭은 지난 수십 년간 1도 에 불과하며 그것이 곧 폭염을 의미하지는 않으므로 반드시 폭염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지구 평균 기온 상 승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폭염 외에 폭우와 폭설, 한파 등 지구 온난화로 그 특성이 변화하는 극한 기후(extreme climate events)와 악 기상의 빈도와 강도 증가라 할 수 있다. 지난 2020년부터 우리 기 상청에서는 폭염 주의보나 폭염 경보 같은 폭염 특보 발령 기준으 로 과거의 일 최고기온 대신 체감온도를 사용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주요국의 기상 당국에서는 기온 외에도 습도와 일사량 등 다양한 변수를 사용해 각국 사정에 적절한 폭염지수와 특보를 개발해 운용 중이다.
우주 비행사의 생존 가능 기온 범위를 실험한 결과, 기온이 섭 씨 70도까지 오르더라도 상대 습도가 10% 이하면 수일간 생존할 수 있으며 40%까지 증가하면 생존 한계가 섭씨 47도로 낮아지고 100%에서는 섭씨 35도 이상에서 생존이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 다. 이처럼 습도가 높으면 같은 온도에서도 불쾌지수가 높아지고 실제 생존 위협도 증가한다.
- 또 주요 도시별로 온도에 따른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임계점에 차이가 나타나는데, 고위도 혹은 북쪽(북반구 기준, 남반구에서는 반대 로 남쪽)에 위치한 도시일수록 임계 온도가 낮아 폭염에 취약하다. 예 를 들면, 2010년 러시아 폭염 당시 5만 명 넘게 사망했는데 만약 대만에서라면 같은 온도까지 올랐다 해도 사망자가 거의 없거나 매 우 적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남쪽에 있는 대구에서는 섭씨 35도에서 인구 1천만 명당 폭염 사망자 수가 5명 이내이지만, 북쪽 에 있는 인천에서는 같은 온도라도 사망자 수가 20명 정도로 월등 히 높아지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대프리카'란 별칭처럼 우리나 라에서 가장 더운 지역으로 알려진 대구는 폭염 대비도가 높지만, 인천 같은 북쪽 도시들은 폭염 취약성이 오히려 크다. 
- 해양 컨베이어 벨트로 불리는 열염분 순환이 원활하지 않고 약화되면 저위도에 남는 열이 고위도로 잘 공급되지 않아 빙하기가 도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2005년에는 대 서양 심층에서 이러한 순환이 수십 년 사이에 약화되었다는 관측결과가 발표됐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가 앞서 언급한 <투모로우>이다. 따라서 해양 순환이 약화되며 북 반구에 빙하기가 도래한다는 영화 속 설정이 완전한 공상 속 허구 는 아닌 셈이다. 다만 영화에서는 순식간에 급격한 빙하기가 오는 것으로 묘사는데, 이렇게 급격한 빙하기가 도래한다는 설정은 과장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해양 순환의 약화로 도래하는 빙하기는 100~1000년에 걸쳐 나타날 수 있으 며, 과거 소빙기는 대서양 자오면 순환의 약화로 생긴 것이라 보고 있다.
- 해양과학자들의 관측 결과, 표층의 비교적 따뜻한 바다뿐만 아 니라 심해에서도 매우 느리지만 수온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수심이 수천 미터인 심해에서는 연간 0.001도 이 하로 상승해 1000년 후에 고작 1도 이하로 오르는 정도에 불과했 다. 그런데 남빙양(남극해)에서는 심해에서도 전 세계 바다의 평균보 다 3배 이상 빠른 속도(연간 0.003도 이상)로 수온이 상승하고 있는데, 과학자들은 이를 심상치 않은 조짐으로 여기고 있다. 비열이 큰 바 닷물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처럼 매우 정밀한 수온 측정만으로 파 악한 미세한 수온 차이에 상응하는 열에너지양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 때문이다. 미세한 수온 증가로 표현되지만 이로부터 산출할 수 있는 열에너지 흡수는 1970년대 이후 2010년까지 심해에서 78.2ZJ41, 상층 해양에서는 이보다 큰 172.8ZJ로 40년 동안 해양 전체에서 250ZJ를 넘어섰다. 이것은 지구온난화로 증가한 열의 90% 이상이 바다에 흡수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며, 매년 바다에 흡수되는 열에너지 양은 지구상 모든 사람이 하루 종일 전자레인지를 100개씩 가동할 때 소모되는 에너지양과 같다. 2020년 한 해 동안 바다에 흡수된 열에너지양은 약 20ZJ로 추산되는데, 이것은 1초마다 원자 폭탄이 4개씩 폭발하는 수준의 에너지에 해당한다.
전 세계 모든 육상, 대기, 그리고 북극해, 고산 지대, 그린란드 및 남극 얼음 형태로 존재하는 바다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지구온난화 로 증가한 열에너지는 고작 7% 정도만 흡수되고 있다. 특히 대기 에 흡수된 에너지는 겨우 2.3%인데, 이 작은 비율의 열에너지만으 로도 지구 평균 기온이 1도 상승했을 정도다. 따라서 93%라는 매우 큰 비율의 열에너지가 흡수되어 내부적으로 순환하고 대기를 데 우거나 식히며 기후에 심대하게 영향을 주는 바다를 빼고는 앞으로 기후를 이야기하기가 점점 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지구온난화가 바닷물을 끓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매년 어마어마한 규모의 열에너 지가 바닷속에 저장되어 기후에 점점 더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임 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해양 순환으로 열이 어떻게 이동하 고 어떤 수온의 바닷물이 표층에 드러나 대기를 데우고 식히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와 연구가 필요하다.
- 해수면 상승 전망은 항상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지니며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라 그 전망이 바뀌 기 때문에 기존의 전망치가 점점 더 좋지 않게 수정되고 있어 해수 면이 수십 센티미터가 아니라 수 미터까지 오를 것이라는 전망에도 무게가 실리며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온과 해수면이 오르는 물리적인 변화 외에도 오늘날 기후변 화로 바닷속에서 나타나는 환경 변화는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대기 중에 증가한 이산화탄소가 바닷속으로 녹아들어가 수소 이온 농도를 증가시키고, pH를 낮춰 해양 산성화(ocean acidification)를 유발 하는 것이다. 원래 바닷물은 pH가 8.1~8.2인 약알칼리성을 띠는 데, 이산화탄소가 바닷속에 점점 더 많이 녹아 물과 반응해 탄산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소 이온이 증가해 pH가 낮아지는 것을 해양 산 성화라 한다. 현재처럼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 21세 기 말에는 pH가 0.2~0.4 정도 낮아 해양 산성화를 겪는다는 의미 이다. 산성화한 바닷물에서는 저주파 음파의 흡수율이 낮아져 선박 소음 등이 음파로 소통하는 해양 포유류에게도 지장을 준다고 한 다. 수산자원 피해만도 산호초 파괴로 2100년까지 약 1조 달러, 어패류의 피해도 약 3천억 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 처럼 전반적인 해양 생물의 생존이 위협받아 해양 생태계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 한반도 근해의 지난 50년간 어획 통계에서도 시대에 따른 수산자원의 변화가 확연히 드러난다. 동해에서는 1960년대에 오징어가 많이 잡히고 명태가 적게 잡혔지만, 1970~1980년대에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명태가 자취를 거의 감추 었으며, 반면에 오징어가 다시 증가해 동해 전체 어획량의 절반 가 까이 차지했다. 따뜻한 바닷물에 서식하는 고등어, 오징어 등의 생 물들이 우리나라 수산 어획량의 70% 이상을 차지한 반면, 전통적 으로 중요한 어업이던 동해의 명태 어업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오징어 어획량 증감은 수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1990년대에 수온이 높아지면서 동해에서 먹이가 되는 동물성 플랑크톤의 양이 급격히 증가한 것이 오징어 어획량 증가를 설명해 준다. 또 어류 산란 시기의 해양 환경이 몇 년 후 어 획량을 결정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황해의 깊은 수심 에 사는 참조기는 치어 시기에 수온이 높은 안정적 환경을 경험한 개체군이 수온이 낮고 변동이 심한 환경에서 성장한 개체군보다 어 획량이 더 많다.
- 미국은 주요 도시들이 태평양과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며 인구의 절반 정도는 해안으로부터 약 80km 이내에 살고 있다. 중남미나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도 주거 형태가 비슷해 전 세계 인구의 40~44%는 해안 지역에 거주하며 해수면 상승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당장은 가능성이 거의 없 지만 혹시라도 남극 대륙 빙상이 모두 녹으면 해수면이 73m, 그린 란드 빙상이 다 녹으면 해수면이 6.5m 상승할 것이다. 조금 더 현 실적인 시나리오에 따라 만약 100년 후 해수면이 1m 상승하면 이 탈리아 베니스, 200년 후 3m 상승하면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맨해튼 저지대, 400년 후 6m 상승하면 중국 상하이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가 바닷속에 수장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 한 것처럼 해수면 상승은 다양한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라 달라지 며 모델의 예측 불확실성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미래 해수면 상승 전망치는 계속 수정되고 있다. 점점 더 악화일로에 있는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르면 기존 전망치보다 새 연구 결과의 해수면 상승 전망치가 더 높아지면서 2050년만 되어도 호치민 등 베트남 대부 분의 국토와 중국 상하이, 인도 뭄바이, 태국 방콕 등이 잠기는 것으로 전망되어 우려를 더하고 있다.
- 바닷속 플라스틱 쓰레기는 시간이 지 나면서 태양열과 파도에 의해 부식되고 잘게 쪼개져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크기만 작아졌을 뿐 미세 플라스틱으로 여전히 남 아 있다. 바닷속 플랑크톤이 이를 먹이로 오인하고 플라스틱에 오 염된 플랑크톤을 다른 생물이 잡아먹는 등 먹이사슬을 통해 마침내 인간의 밥상에까지 오르게 된다. 미세 플라스틱은 이미 수심이 얕 은 상층 바다뿐 아니라 수심이 깊은 심해에서도 확인되었으며, 심 지어 인간의 혈액 속에서도 검출되고 있다. 
- 바닷물의 수온이 높아지면 열팽창으로 부피가 늘어나는 효과가 더해져서 평균 해수면이 지속해서 상승하는데, 여기에 빙하가 녹아 바다로 흘러가면서 해수면 상승을 더 가속화한다. 빙하가 녹는 원 인 중에는 따뜻한 바닷물의 유입도 있다. 서남극 빙하 중 현재 가장 빨리 녹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스웨이츠 빙하에서는 어는점보다 높 은 수온을 가지는 환남극 심층수라는 따뜻한 바닷물이 빙붕 하부로 유입해 빙하 자체가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 스웨이츠 빙하는 그 안쪽에 있는 거대한 서남극 빙상이 바다로 흘러가지 않 도록 막아 주는 코르크 마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탓에 붕괴하면 거대한 서남극 빙상이 모두 바다로 흘러나오며 해수면 상승을 빠르 게 가속화할 수 있다. 현재의 기후 모델에는 이러한 서남극 빙상의 붕괴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데, 이는 현재의 해수면 상승 전망이 가진 대표적인 불확실성 요소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기후 모델이 예측하는 전망치를 따르더라도 해수면 상승 으로 2050년까지 1억 5천만 명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며, 전 세계 상당 규모의 해안 지역이 침수될 위험에 처해 있다. 따라 서 단순 환경 문제를 벗어나 식량 문제, 인도주의와 군사안보 문제 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해수면 상승 외에도 인도-태평양 웜풀(warm pool) 해역이 확장하며 더욱 위력적인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을 만들며 갑자기 나타나는 고수온의 바닷물(해양 열파, marine heat waves) 이 양식장 등 어업에 큰 피해를 입히거나 대기 순환을 교란해 각종 기상이변을 일으킬 것이다. 건강한 해양 생태계에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다양한 해양 환경 변화가 이처럼 지구온난화에서 비롯한 바닷물의 수온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Posted by dalai
,

- 성적 아름다움은 유성생식 동물계 구석구석에 퍼져 있으며 어디에 나 존재한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비용을 지불하 고, 타인의 미를 평가하며, 그렇다고 판단한 상대에게 더 나은 대우를 해준다. 동물과 인간은 모두 평가자들에게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심 혈을 기울인다.
공작은 근사한 꽁지깃을 발달시켜 암컷의 마음을 매료시키며, 물 고기는 화려한 빛깔로 이성의 눈길을 끈다. 귀뚜라미는 짝을 위해 애정 섞인 목소리로 노래하며, 거미는 춤을 추고 거미줄을 흔들어 자신을 뽐 내기도 한다. 우리 인간들은 대부분의 동물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아름 다움을 피력한다. 향수, 패션, 자동차, 음악뿐 아니라 외과 의사의 칼과 약물 등도 성적 아름다움을 가꾸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왔다. 그런데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딘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든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외모 단장을 통해서든 누군가에게 자신의 매력을 알리고 싶다면, 우선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어 있어야 할 것 이다.
- 다윈이 앨프리드 월리스 Alted walace와 함께 자연선택 이론의 기틀을 잡아갈 때, 그는 이로써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든 개체의 모든 측면이 전부 생존을 위한 적응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의 사회에서도 문화가 강력 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다윈은 작은 개체군 내에서 같은 형질의 대체 형태가 고착화되면서 발생하는 무작위 변이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윈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공작의 꽁지였다. 이에 크게 낙심한 다윈은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 Asa Gray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공작의 깃털을 볼 때마다 속이 불편 해져"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윈의 몸이 허약했고 걱정이 많았다는 사 실을 고려하더라도, 이렇게 멋진 대상에 대한 불편한 반응은 조금 지나 쳐 보이기도 한다. 동물의 아름다움 연구에서 공작의 깃털은 마스코트 나 다름없지만, 다윈에게는 자신의 이론적 한계를 상기시키는 냉혹한 상징물이자 자연선택론을 보충할 새로운 이론을 찾게 할 동기부여이기 도 했다. 다윈은 그 이론을 성선택론이라고 불렀다.
- 생존은 섹스의 부차적 요소로, 섹스시장에서 한 번 더 도전할 수 있도록 목숨을 유지시켜주는 적응의 형태일 뿐이다. 성선택론의 본질 은 동물의 짝짓기 성공률을 높이는 아름다움이 생존에 다소 방해가 될 지라도 섹스에 가져다주는 유익이 더 큰 이상 진화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은 암수의 개체 수가 거의 같지만 모든 수컷이 짝짓기 를 할 수 있지는 않다. 많은 종에서 소수의 수컷들이 더 많이 짝짓기를 하는 동안 대다수의 수컷들은 한 번도 짝짓기를 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한다. 짝짓기의 성공 여부는 이성이 그로부터 얼마나 성적 매력을 느끼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꽁지가 더 긴 공작, 울음소리가 더 다양한 개구리, 체취가 더 향기로운 노랑초파리가 성적 매력을 더 많이 어필할 수 있으며 암컷의 배우자감으로 선택받는다. 생존 형질과 마찬가지로 수컷들이 발달시킨 유혹 수단인 성적 아름다움이 유전자에 기인한 것 이었다면 이 형질들은 대대로 전해질 것이다.
- 당신이 누군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당신이 바로 결정자이다. 성적 아름다움은 개체의 형질과 그 를 인식하는 감각기관 및 두뇌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의 결과물 이다. 나는 모나리자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액자 속 동일한 색상의 배합을 보더라도 그것을 서 로 다르게 처리한다. 아름다움은 감상자의 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 억하라. 암컷 퉁가라개구리가 수컷의 음성, 특히 그륵그륵 소리에 그렇 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 암컷은 복합음성을 내는 수컷 외에도 몸집이 큰 수컷을 배우자감으로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두운 밤중에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암 컷들은 어떻게 누가 더 큰지 알 수 있을까? 이들은 확실히 울음소리를 활용하는 것 같다. 그러면 울음소리만으로도 누가 몸집이 큰지 판별할 수 있다는 말일까?
동물의 발성에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개체의 신체 크기와 음성 주 파수(음높이)에는 연관성이 있으며, 그 원인은 기초 생물물리학에서 찾 을 수 있다. 몸집이 큰 개체일수록 발음기관의 크기도 더 크다. 이는 인 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알다시피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의 굵고 울리는 목소리는 왜소한 체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 소리의 구조에 영향을 주는 또 하나의 조직은 목소리의 포먼트"를 만들어내는 후두와 그 윗부분 성도의 해부학적 구조이다. 여성들은 덩 치가 큰 남성의 낮은 목소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의 후두 위치가 낮아지도록 진화한 것은 언어 기능을 촉진하기 위해서라는 오 래된 믿음과 달리, 후두가 내려가면 성도의 길이가 늘어나 발화 주파수 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말사슴은 울부짖는 소리를 낼 때 적극적으로 후두를 내려서 목소리의 음정을 낮 추고 상대에게 자신의 몸집을 더 크게 인식시킨다.
퉁가라개구리들도 자신을 진화시켜 음성을 더 낮고 매력적으로 만 들어왔다. 비슷한 몸집의 다른 개구리종과 비교하면 퉁가라개구리의 후두 크기는 그 안에 자신의 두뇌를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축에 속한다. 아무래도 성선택에서는 큰 두뇌보다도 멋진 외모나 음성 이 더 유리한 모양이다.
- 인간도 그렇지만 어떤 개체가 매력 증대를 위해 투자를 할 때는 사회적 영향에 의한 제한이 생기게 된다. 이는 7장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 할 것이다. 남성은 주변에 다른 남성들이 있을 때 여성에게 자신의 자 원을 과시할 확률이 더 높으며, 여성은 주변에 다른 여성의 수가 많을 수록 더 매력을 어필하려 한다.
퉁가라개구리가 그륵 소리를 더 많이 내게 만드는 사회적 배경은 두 가지가 있다. 수컷은 다른 수컷들이 함께 울 때 그륵그륵 소리를 더 하는데, 그 결과 대부분이 '퉁그륵' 소리를 내고 소수만이 '퉁' 소리만을 사용하는 복합음성의 합창이 시작된다. 암컷들도 수컷들로 하여금 그륵그륵 소리를 더 많이 내게 하기 위해 더 활발히 '추파를 던진다. 만 약 어떤 수컷이 퉁 소리에 그륵 소리를 더하지 않으려 한다면, 암컷은 때때로 바디슬램으로 수컷에게 몸을 내던지기까지 한다. 놀랍게도 수 컷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륵 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수컷이 그륵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 엇일까? 어떤 형질의 진화 원인을 이해하려면, 그것의 편익뿐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비용도 이해해야 한다. 다윈 경제학도 인간의 경제학과 동일하게, 일반적인 비용편익비율을 기준으로 형질의 가치 및 진화에 의해 선택되는 빈도가 결정된다. 여기서 사용되는 통화는 유로, 달러 등이 아닌 적합도로, 개체군 내에서 특정 개체가 다른 개체에 비해 얼 마나 많은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는지를 뜻한다. 한편 인간의 경제거래 와 달리 다윈 경제학의 목표는 단기간이 아닌 개체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이다.
- 단순음성에 그륵 소리를 더하는 것은 수컷의 짝짓기 성공률을 높여주지만 먹잇감이 될 위험을 높이기도 한다. 수컷은 섹스와 생존의 갈림길 사이에 서있다. 그 소리를 더하느냐 마냐에 따라 짝을 찾을 수도 있고 천적을 피할 수도 있다.
- 동물의 배우자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종의 상대를 얻는 것이다. 만일 암컷이 잘못된 종의 수컷을 택하여 동종교배가 아닌 이종교배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번식 투자에서 상당히 큰 낭비와 다름없다. 이런 종류의 짝짓기는 다윈 적합도에 불리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에서 구애자들은 선택자에게 자신 의 종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는 특징들을 선보인다.
이미 말했듯 개구리종은 약 6,000가지이다. 거의 모든 종이 짝짓 기음성을 사용하며, 전부 다른 음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암컷을 대 상으로 행동실험을 진행했을 때, 이들은 항상 다른 종보다 같은 종수 컷의 울음을 선호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음성 선호의 근원은 무엇일 까? 두뇌의 청각체계, 의사결정체계, 행동출력체계의 전체 신경회로가 암컷으로 하여금 동종의 음성을 가장 매력적이며 성적으로 아름답게 느끼도록 편향을 일으킨다. 암컷의 성적 미학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이 뉴런들이며, 개구리의 음성 관련 선호가 진화되기 위해서 바뀌어야 하 는 두뇌 영역도 바로 이곳이다.
- 진화생물학자는 절약성이라는 원칙을 토대로 과거에 발생한 일을 해석한다. 절약성 원칙은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할 경우, 가장 간단 한 설명이 가장 정확한 설명일 확률이 높다고 상정한다. 인간의 심장 을 생각해보라. 우리에게는 훌륭하게 발달한 네 개의 심실이 있어 혈 액에 산소를 잘 공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포유 류 5,500종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 멋진 적응은 각각의 종에서 한 번 씩 총 5,500번 진화해왔을까, 아니면 하나의 원시 포유동물로부터 한차례 진화한 후 새로운 포유류종이 탄생할 때 유전되어온 것일까? 정답은 명백하게 후자일 것이다.
우리는 같은 논리를 퉁가라개구리와 근연종들에게 적용하여, 개 구리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기저유두의 주파수 조율이 각 종에서 개별적으로 진화된 것이 아니라 같은 조상으로부터 공유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기저유두의 주파수 조율이 그륵그륵 소리의 발 생 이전에 먼저 존재했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퉁가라개구리에게서 저 음역대 음성에 대한 선호가 발달해온 과정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완전 히 뒤집어졌다. 큰 몸집의 수컷을 선호함으로써 얻는 유익 때문에 암컷 내이의 주파수 조율이 진화된 것이 아니라, 암컷의 귀에 이미 조율되어 있던 주파수에 맞게 수컷이 음역대를 바꾸도록 진화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감각 이용이라 부르고, 다음 장에서 소개할 조 금 더 보편적인 과정을 감각 구동sensory drive 라고 이름 지었다. 이 아이디어 는 성선택 분야에 지성적 혁명을 가져주었다. 이는 철학자 토마스 쿤의 표현을 빌자면 분명한 패러다임 시프트였다.
당신이 이 소박한 열대 개구리의 성생활을 살펴보면서 아름다움과 두뇌가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 히 알게 되길 바란다. 이로써 나는 퉁가라개구리뿐만 아니라 동물왕국 대부분의 성적 아름다움을 진화시켜온 성선택을 이해함에 있어 우리가 잃어버렸던 연결고리가 바로 두뇌였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 사물에 담긴 아름다움은 사실 그것을 감상하는 자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데이비드 흄)

- 어떤 동물의 성적 미학에서든 올바른 짝, 곧 올바른 종을 찾는 것은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는 유전자가 단독이 아닌 통합된 게놈의 일부 로서 행동하며, 같은 종 내부의 다른 유전자들과 함께 그들만의 고유한 유전적 배경에 맞게 기능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플래티 물고기는 종에 따라 서로 다른 종양억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종이 교배되는 순간 이 유전자의 기능은 중단되며, 잡종은 매년 인간 5만여 명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피부암 흑색종을 가지고 태 어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종의 유전자는 호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종교배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양한 유전적 비호환성으로 인해 거의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설사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발달이 잘못 진 행되는 경우가 많다. 배우자 선호의 오류에 따르는 대가는 이토록 값비 싸며, 특히나 난자 생산에 큰 노력을 들여야 하는 암컷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능한 두뇌 덕분에 선택자들은 다른 종이 종)보다는 자신이 속한 종(동종)이 가진 형질에 더 매력을 느낌으로써 올바른 종을 잘 구별해낼 수 있다. 뇌가 짝짓기를 성사시키는 세부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종 내부나 감각양상에서 나타나는 일반 원칙들 은 유사한 편이다.
- 빠른 섹스가 곧 안전한 섹스이다
수컷이 암컷의 감각체계를 이용한다고 해서, 즉 짝짓기에 응하게 만들 려고 암컷의 어떤 형질을 진화시켰다고 해서 암컷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수컷의 신호가 암컷의 신경 편향을 더 잘 충족시킨 다면 수컷의 신호는 더 쉽게 포착될 것이다. 그 결과 암컷은 더 신속하 고 효율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보통 번식지는 포식자와 기생동물 들이 곳곳에 도사리는 위험한 공간이므로, 빠른 선택은 곧 안전한 선택 이며 빠른 섹스가 곧 안전한 섹스이다. 그러니 수컷이 감각 이용을 위 해 진화시킨 형질에 암컷들의 감각이 '이용'당할 때 오히려 유익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암벌을 만나기가 쉽고 꽃과의 교미에 큰 손해가 따른다면, 설사 진짜 암벌을 놓칠 확률이 있더라도 배우자 선택의 문턱을 높이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난초벌의 경우처럼 짝짓기 기회가 드물고 꽃과 교미를 시도하는 것에 그리 큰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면, 이들에게는 수용문턱을 낮추는 것이 최선이 될 것이다. 어렵사리 암컷을 만났을 때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면, 꽃에게 몇 번 속는다 한들 어떻겠는가? 오프리스에 이끌리는 벌의 모습이 처음에는 부적응적으로 보이겠지만, 벌의 일생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이러한 행동은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성적 아름다움의 기준을 너무 까다롭게 잡아 진짜 암컷을 놓치는 것에 비하면, 꽃과 교미를 시도하는 것의 비용은 아주 미미한 것 에 불과하다.
-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이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도파민 보상센터 주요 영역 한 곳에 일종의 각성제인 암페타민을 주사하여 도파민 양을 증가시켰다. 이렇게 '도핑'을 한 쥐는 단 음식에 대해 정상 쥐들보다 더 높은 쾌감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간식을 위해 실험 쳇바퀴에서 더 오래 달림으로써 음식을 얻기 위해 더 노력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반면 도파 민이 부족한 쥐들은 음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려 했고 식욕이 거 의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억지로 먹이를 먹이자 쥐가 음식으로부터 쾌감을 얻었다는 것은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도파민이 '좋아함'이 아닌 '원함'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마약, 섹스, 도박, 식탐과 같은 중독에서 도파민의 역할이 설명될 수 있다.
- 나는 감각기간과 입력되는 감각을 통합하는 두뇌 영역, 그리고 그 감각 정보를 분석하는 인지 처리과정이 우리의 아름다움 인식에 어떻 게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강조해왔다. 보상 시스템은 다윈 적 합도를 향상시키는 욕구에 즉각적인 긍정적 강화"를 결부시키도록 진 화될 수 있는 또 다른 두뇌 영역이다. 이것은 또한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실제로 2015년 미국 의 제약회사 스프라우트는 미국식품의약국으로부터 플리반세린을 판 매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이 약은 도파민 분비량을 늘리고 그와 유 사하게 '원함'을 강화하는 노르에피네프린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성욕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진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을 감소시켜 여성의 성 적 욕구, 즉 성적인 '원함'을 촉진한다.

- 눈이 무언가를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존재 이유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 우리가 색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추상체가 전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추상체는 서로 다른 빛의 파장에 의해 자극을 받으며, 우 리는 그것을 서로 다른 색으로 인식한다. 또한 단순히 추상체가 있다고 색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세 가지 종류가 필요하다. 우리 추상체는 단파장·중파장·장파장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은 파랑(419nm), 초록(531nm), 빨강(558nm) 색상(파장)에 가장 민감하다. 다른 포유동물들은 대부분 이색형 색각자이기 때문에 실제 색상을 볼 수 없다. 그들에게는 장파장 추상체가 없어, 빨강과 초록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우리는 삼색형 색각자로 다른 동물들 대다수가 보지 못하는 멋지고 생생한 색상의 세계를 감지할 수 있다.
- 포유동물 사이에서 색각의 발달이 흔치 않은 이유는 우리의 먼 조상들이 지금의 많은 동물이 그렇듯 야행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색형 색각자에게 발달된 빨강과 초록을 구분하는 색각 능력에는 이 점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고함원숭이나 다른 삼색형 색각자에게 색상 구분, 구체적으로 빨강과 초록의 구분은 아주 중요한 감각도구의 역할을 해왔다.
과일을 찾아 숲속을 어슬렁거리는 원숭이들은 초록빛에 둘러싸여 있다. 고함원숭이나 다른 영장류에서 색각이 발달한 것은 녹색의 배경 속에서 보통 붉은빛을 띄는 과일을 찾는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뭇잎을 먹고 사는 원숭이 몇몇 종의 경우에 는 모든 잎이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을 분간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종 종 붉은빛으로 돋아나는 어린잎은 일반적인 잎보다 영양이 더 풍부하 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이 빨간불에 멈추고 초록불에 움직일 줄 아는 것은 모두 수렵채집을 하던 영장류 조상 덕분이다. 또한 우리가 케찰의 깃털 색이나 잭슨 폴록의 물감 범벅에서 뚝뚝 떨어지는 색상의 향연에 마음을 뺏긴다면,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조상 원숭이들이 미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과업을 처리하기 위해 광색소를 진화시킨 덕택이다.
- 이론신경과학자 마크 챙기지 Mark Changizi는 저서 《우리 눈은 왜 앞을 향해 있을까?》에서 인간이 색각을 통해 상대의 미묘한 감정 상태에 대한 '안목'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안목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자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홍조가 일어나는 동안 피부에 나타나는 색상 변화와 추상체 조절을 비교하는 분석모델을 활용했고, 이 둘에 강 한관계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의 결론은 광수용체의 조율로 인해 우리가 홍조를 아주 잘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서 챙기지는 실제로 영장류의 색각 기능이 진화한 이유가 격렬한 신체 운동 등의 생리적 활동이나 사회적 상황에서의 감정 반응으로 혈액순 환이 변화하면서 나타나는 미묘한 피부색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라 는 주장을 제기했다.
- 우리는 대부분 다리 한쪽이 나머지 한쪽보다 조금 길다. 그런데 더 긴 쪽이 왼쪽일 확률과 오른쪽일 확률은 비슷하기 때 문에 다리 길이 차이의 평균은 거의 0에 수렴하게 되며, 자연히 우리 는 미지의 인물을 떠올릴 때 그의 양쪽 다리 길이가 같을 것으로 상정 한다. 그러므로 비대칭적인 대상으로 훈련을 받고 우리가 떠올리는 마 음속 이미지 '프로토타입'은 결국 비대칭적 물체의 평균, 곧 대칭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공신경망, 찌르레기, 닭의 연구 결과를 해석해줄 수 있다. 성적 형질에 대한 대칭성 선호는 구애자의 유전자와 연관성이 있기보다는 선택자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과 더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유전적 유익'이 대칭 선호를 발달시키는 원인은 아닐지라도, 결과가 될 수는 있다. 손힐과 묄러가 제안했듯, 대칭성을 지닌 개체는 전반적 건강 상태와 활력 면에서 유전자적으로 더 우월할 수도 있다. 그러 므로 이론상으로 대칭 선호는 선택자들에게 더 건강한 자손을 번식시 킬 수 있게 하는 유전적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다. 어쨌든 대칭 선호는 배우자 선택에 유익을 주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선택자의 성적 미학의 한 가지 부수 요인으로서 대칭적인 구애 형질의 진화를 이끌어낼 것이 다. 또 다시 우리는 성적 두뇌의 일부 미학이 섹스와 관련성이 없는 영 역에서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다.
- 지난 세기 가장 중요한 과학책 중 하나인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가 불멸의 자가 복제자이고, 각 생물체는 그들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일시적 운반자일 뿐이라는 '유전자 중심적' 진화 관점을 제시한다. 또한 그는 또 다른 중요한 후속작으로 《확장된 표현 형》을 출간했는데, 그 중심 주제는 유전자가 우리의 물리적 구조인 표 현형 phenotype에 기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체 이상으로도 확장된다는 것 이다. 그 범위는 몸은 물론이고 우리가 축적하는 주화와 자원에 대한 조작도 포함된다.
그 어떤 자연의 힘도 성적 아름다움 증대를 위한 노력만큼 그들의 표현형을 확장시키지는 않는다. 이에 관한 가장 좋은 예시는 인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각각 성적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포트폴리오들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건강한 머릿결과 잘 관리된 몸매를 지닌 남 성이 람보르기니에 올라타거나 자신의 양떼를 자랑한다면 그는 더더 욱 섹시해 보일 것이다. 또 어떤 남성들은 아름다운 여성이 안경을 썼 을 때, 그녀의 외모에 지적 매력이 더해져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고 한 다. 인간은 성적 매력을 강화시키는 액세서리(주로 금전적 가치로 환산 될 수 있는 것)를 획득하고 잠재적 파트너에게 자신의 소유물을 자랑스 럽게 과시한다.
- 섹스를 위해 장식을 하는 것은 바우어새뿐만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시클리드 물고기도 모래 속에 최대 지름 3m의 화산 모양 둥지를 지 으며, 바우어새의 사례처럼 둥지의 모양은 수컷의 성적 아름다움을 어 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시클리드는 소라껍데기로 영역을 꾸미기 도 하는데, 바우어새 경우와 달리 껍데기는 암컷의 알을 보관하는 실용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수컷들은 자신의 영역에 소라껍데기가 더 많을수록 더 많은 암컷과 짝짓기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사막딱새의 사례는 조금 더 기이한데, 수컷은 암컷이 알을 낳기 전 에 나무 구멍 속 보금자리에 돌을 옮겨다 놓는다. 암컷이 그전부터 둥 지 안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돌이 유혹 수단인 것은 아니다. 몸무게가 고작 40g인 이 새가 일주일 동안 옮기는 돌의 양은 총합 1~2kg으로 자기 몸무게의 50배에 달하기도 한다. 이 돌들이 직접적으로 어떤 기 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들은 수컷들이 헬스장에서 근육 운동 을 하는 남성처럼 암컷에게 힘자랑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 측했다.
- 농게들은 큰 집게를 앞뒤로 흔드는 구애 동작에 더하여 진흙으로 기둥을 만들어 세워놓는다. 수직으로 솟은 기둥은 게 눈 속에 있는 탐지기의 구조상 특히 더 잘 포착되는 형태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에서 확장된 표현형이 성적 두뇌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러나 추측컨대, 그 것들은 선택자의 성적 미학에 기여하는 지각·인지 편향에 의해 큰 영 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 노래는 상징적 기능보다 정서적 기능을 수행하며, 다양성이 발생한 이유는 의미의 확장이 아닌 청자의 흥미를 유지시키기 위함이었다. (피터 말러)

- 이성을 유혹하는 소리에는 비용이 발생한다
확실히 인간과 동물 대부분의 배우자 선택에서 다른 종이나 다른 언어 를 쓰는 구애자보다는 동일 개체군 내 동일 종의 구애자를 고르는 일이 가장 흔하다. 암컷들은 쉽게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짝을 원하는 수컷들은 아주 일관되게 음성을 사용하여 자신을 홍보해야만 한다.
많은 명금류, 귀뚜라미, 개구리는 암컷을 설득하고 유혹하기 위한 노력 으로 하루에도 수천 번씩 노래를 한다. 이러한 행동에는 큰 비용이 따 른다. 이들이 우는 동안에는 산소 소모량과 근육의 젖산량이 크게 증가 한다. 어떤 종의 수컷은 며칠 동안 노래를 부른 후 체중 감소, 스트레스 호르몬 증가, 테스토스테론 감소 등의 이유로 에너지 비축량을 재충전 하기 위해 며칠간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울음에 필요한 정력적 비용은 건강하지 못한 수컷들이 섹스시장에 참가하지 못하게 만드는 필터 역 할을 하기도 한다.
- 네덜란드의 한스 슬래버쿤Hans Slabbekoorm과 동료들은 명금류들이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기까지 속수무책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손수 문 제를 해결할 노하우와 행동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 다. 연구팀은 도시와 시골에 서식하는 박새를 각각 비교한 후, 도심지 의 새들이 도시 소음의 주파수대를 상회하는 더 높은 음정의 노랫소리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학생 바우터 할프베르크는 음정이 높은 노래를 부르는 수컷들이 배우자감으로 선택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 이유는 아마 암컷들이 소음 속에서 이들의 신호를 더 쉽게 탐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구애자의 입장에서 소음이란 자신이 보내는 신호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구애자에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소음의 출 처는 바람소리도, 다른 종의 소리도, 심지어 도시의 소음도 아닌 근처 의 다른 수컷들이다. 구애자는 소음 속에서 제 존재감을 드러내어 선택 자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한다.
한 가지 해결책은 주변이 시끄러워질 때 자신도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이것을 롬바드 효과ombard Effect라고 부르는데, 이 현상은 바 람 소리나 도시의 소음처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음으로 간주하는 것 들에 대항할 때도 나타나지만, 구애자들이 다른 수컷과 경쟁을 할 때 쓰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 크게 노래하는 것 말고도 자신을 돋 보이게 할 방법이 있다. 2장에서 언급했듯, 다른 수컷과 경쟁을 하는 퉁가라개구리는 포식 위험도 개의치 않은 채 음성에 그륵그륵 소리를 추가했다. 또 어떤 동물들은 노래를 더 빠르게, 더 오래 부르거나 더 많 은 음을 넣어서 부르기도 한다. '사회적 소음' 속에서 자신의 음성을 돋 보이게 하는 방법은 아주 많거니와, 동물들은 그 방법을 대부분 터득한 것 같다.
- 우리는 바바리비둘기의 사례를 통해 암컷의 성적 두뇌가 성적인 생리 현상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 수컷의 성적인 관심에 부응하려는 암컷의 결정은 성호르몬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 기도 한다. 수컷은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고, 며칠 동안 포기하지 않아야 하며, 암컷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지도 말아야 한다. 그 래야만 암컷의 생리 상태가 두뇌와 교신하며 이 수컷은 충분히 매력적 이므로 그의 짝짓기 요청을 수락하는 보상을 내려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구애과정을 통해 섹스에 필요한 호르몬을 자극하는 것은 바바리비둘기만의 고유한 방식이 아니다. 명금류의 노래나 귀뚜라미와 개구리의 울음소리, 말사슴의 울부짖는 소리는 모두 암컷의 호르몬 분비에 영 향을 주어 성욕을 발생시킨다.
계속해서 강조해왔듯, 섹스가 시작되려면 한 성별이 다른 성별을 아름답다고 느껴야 한다. 또한 방금 설명한 것처럼, 각 성별이 생리적 으로 준비된 상태라면 섹스가 시작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3장에서 나는 섹스를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와 비슷 하게 암컷의 배란을 유도하고 둥지를 짓게 하며 집을 청소하고 자손을 돌보게 하는 생식호르몬은 성욕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 일이 일어나는 곳은 두뇌의 보상 시스템이다. 최근에 진행된 조류 연구에서는 새들의 노래가 어떻게 번식체계와 번식 본능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지가 밝혀지기도 했다.
도나 매니 Donna Maney 와 동료들은 흰줄무늬참새에서 이 관계성을 탐구 해왔다. 바바리비둘기나 다른 명금류와 동일하게, 수컷 참새의 노래는 소포호르몬 등의 생식호르몬 분비량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암컷이 생리적으로 번식 준비가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연구팀은 보상 시스템의 영역, 특히 노르에피네프린과 도파민이 분비 되고 '좋아함'과 '원함'이 연결되는(수컷의 노래를 들음으로써 발생한 쾌 감이 그에 대한 성적 욕구로 연결되는) 측좌핵과 복측선조체를 관찰했 다. 그 결과, 암컷이 구애 노래를 들었을 경우 이 영역의 전반적인 유전 자활동이 증가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늘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 탁월한 관찰력의 소유자였던 보스트윅은 더욱 자세한 확인을 위해 레이저를 사용했다. 수컷은 벌새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초 당 100회의 속도로 날개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방망이날개무희새의 신 체 구조는 바이올린의 기본 구조와 유사한 면이 있다. 각 날개에는 여 러 개의 굴곡이 있는 특수 깃털과 끝이 말려 올라간 빳빳한 깃털이 있 는데, 수컷이 날개를 들어 올리고 한쪽 날개 끝을 다른 날개의 굴곡 부 분에 문질러 진동을 일으키면... 숲은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로 활기가 넘치게 된다. 이것은 동물의 뇌, 신체 구조, 행동양식이 합심하여 구애 자의 감각을 만족시킬만한 섹스의 소리를 형성시킨, 동물들의 끝없는 창의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하지만 인간만큼 소리를 더 잘 다루는 동물은 없을 것이다.
- 앞에서 나는 유진 모튼의 발견을 언급했는데, 요지는 서식지 환경의 음향적 속성으로 인해 조류의 노래 구조에 진화적 영향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다양한 조류와 포유류의 소리가 어떻게 상대방 으로부터 서로 다른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는지를 예측하는 '동기-구 조 규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모튼은 여덟 가지 상세한 규칙을 한 문장 으로 간략하게 요약한다. '조류와 포유류는 적의를 표현할 때는 거세고 주파수가 낮은 소리를 사용하며, 놀랐을 때나 상대를 진정시키고 친근 하게 접근할 때는 주파수가 높고 순음에 가까운 소리를 사용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서로 다른 상황에는 서로 다른 소리가 적합하다는 것을 배웠다. '모성어motherese'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모성어는 문화적 배경을 막론하고, 엄마뿐 아니라 아기와 소통하는 사람들이 흔하게 사용하는 높은 주파수의 다정한 톤을 일컫는 다. "우쭈쭈~"의 경우와 같이 우리는 어른이든 아이든 상대를 진정시 킬 때, 발화의 시작과 끝을 길게 늘임으로써 음조 있는 조용하고 긴 소 리를 사용한다. 시작점에서 소리의 진폭을 늘리다가 끝점에서 천천히 감소시켜 듣는 이가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를 진정시 키는 말투와 대조되게, 싸우거나 논쟁을 할 때 우리는 목소리 톤을 높 인 다음, 빠르게 시작했다 끊기는 짧고 거센 말투를 쓴다. 분노에 찬 표 현을 할 때는, "저버려”와 같은 길게 늘이는 말투 대신 "꺼져버려!" 와 같이 강하게 톡 쏘아붙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 인간은 음성을 통해 동물과 소통할 때도 서로 다른 소리 구조에 상이한 기능을 부여하는 자신의 규칙을 동일하게 적용시킨다. 개를 산책 시키고 말을 몰 때 우리는 짧고 거센 흡착음을 사용하여 동물을 움직이 게 하며, 음조 있고 길게 끄는 어조로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 이것은 마 치 인간의 구조기능 규칙을 동물들에게도 강요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사용하는 어조가 마침 동물 자신의 구조기능 규칙에 유사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일 뿐이다.

- 후각수용기는 대개 신경세포이며, 그 위치가 발가락이든 코든 상관없이 같은 방식으로 냄새에 반응한다. 냄새가 수용기에 포착되면 이 세포에 일련의 생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궁극적으로 뉴런의 점화 를 유발한다. 포유동물에서 이러한 신경 방출 활동은 뇌의 후엽에 공급 되며, 후엽은 섹스는 물론이고 수많은 여타 기능과 관련되어 있는 뇌 의 여러 영역들에 이것을 재차 전달한다. 후각은 모든 감각 중에서 유일 하게 중변연계 보상 시스템이 관장하는 기억, 감정, 좋아함과 원함 등의 쾌감 관련 영역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3장 참조). 시각과 청각을 포함 한 다른 감각들은 쾌감센터로 보내지기 전에 두뇌 하부의 중계국을 거 쳐 더 많은 처리과정을 겪는 반면, 냄새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 로 쾌감센터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냄새와 감정의 직접적 관련성 으로 인해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더욱 주요한 감각으로 느껴지곤 한다.
- 주조직적합성복합체(MHC)는 우리 면역 반응에서 기능을 하는 유전자 집합이다. 이들은 병원체나 기생충과 같은 이질적 형태의 세포를 식별하고, 그것들이 확인되면 신체에 경고를 보내 T세포로 하여금 침 입에 맞서게 만든다. MHC 유전자가 엄청나게 다양한 적군과 아군(우 리 자신의 세포)을 정확하게 구분하려면, 변이를 아주 잘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모든 척추동물에서 MHC 유전자가 가장 변이를 잘하게 된 이유이다. 이 변이 덕분에 각 개체들은 부모보다 질병을 더 잘 무찌를 수 있도록 더 잘 무장된 자손을 생산하게 하는 배우자를 고를 수 있 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선택자들이 자신과 아주 상이한 MHC를 보유한 구애자와 짝짓기를 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 척추동물들은 상대가 자신의 MHC 기준을 충족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최소한 MHC의 관점에서는 유전체학을 통해 미래 배우자의 MHC 유전자를 스캔해서 자신의 것과 비교함으로써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상 대를 찾을 수 있다. 나는 곧 터무니없이 비싼 데이트 서비스 업체들이 게놈 스캔을 요구하고 첫 매칭에 MHC를 사용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 그런데 게놈 스캔 서비스, 아니 사기 행각에 지불할 돈이 없는 사람들 이나 동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MHC는 그저 배우자감의 속에 숨겨 져 있어, 변덕스러운 성질이나 음주 문제와 같이 뒤늦게 알아차릴 수 밖에 없는 속성일까? 우리 자녀의 면역체계가 손상되었다는 증거가 나타났을 때에서야 우리가 배우자를 잘못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우자감의 MHC 유전 자에 큰 관심을 기울여오고 있었다. 단지 그랬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뿐이다.
- 우리가 MHC 유전자를 볼 수 있게 하는 표현형의 창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냄새이다. 설치류의 사례에서 냄새와 유전자의 연결고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쥐 소변물'의 냄새는 MHC 변이와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연구된 종들 중에서 서로 비슷한 MHC 유전자를 지닌 설치류들은 냄새가 비슷했으며, MHC 유전자가 다른 종 들은 냄새도 서로 달랐다. MHC 유전자 자체로서는 아니나, 이것이 만 들어내는 냄새는 미학 형성의 기틀을 마련할 수도 있다. 이 성적 아름 다움의 기준은 상대적이다. MHC 유전자의 세부 특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택자와 얼마나 같거나 다른지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러 나 MHC를 기반으로 한 배우자 선택은 냄새를 중요한 자질로 고려하는 동물들에게서만 발견되는 현상이다.
- 그런데 냄새나는 티셔츠 실험에는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여성이 경구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을 때만 냄새 선호가 연구진의 예상과 들 어맞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약을 복용하면 선호도가 정반대로 뒤집어 져서, 그들은 MHC 유전자 냄새가 자신의 것과 비슷한 남성들을 더 섹 시하다고 느꼈다. 경구피임약이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생식 호르몬 주기에 영향을 주는 작은 알약이 특정 냄새의 성적 매력에 대해 편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 그렇다면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성들은 섹스보다는 친족을 찾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걸까? 피임약의 원리는 여성의 생식 호르몬을 조절 하여 임신 상태를 유도하는 것이다. 임신한 여성에게는 배란이 일어나 지 않기 때문에 약을 복용하는 여성들은 다른 문제가 없는 이상 임신을 하지 않을 것이다. 베데킨트와 동료들은 피임약을 먹은 여성들이 섹스 에 무관심하거나 최소한 잠재의식적인 목표가 번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그러므로 좋은 MHC 상대임을 알리는 냄새 신호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설득력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여성들이 그보다 더 나아가 유사한 MHC 유전자를 가진 정반대 유형의 상대를 선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여성의 호르몬 환경은 임신 상태와 동일하므로 임신 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워내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고 하는데, 그렇다면 자녀 양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타적 무리'는 누 가 될 것인가? 가까운 친척들보다 자녀 양육에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모바일 사회를 사는 현대의 우리는 가 족의 대소사를 도울 친척과 늘 가까이에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겉모습, 행동, 성적 미학 등의 생태학적 조건은 오랜 진화적 역사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현재보다 과거 환경에 더욱 잘 적응되어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연구자들은 지적했다.
프리츠 볼래스 Fitz Volrallh "와 만프레드 밀린스키 Manfred Miliniski ] "는 냄새를 토대 로 한 선호도와 경구피임약 간의 상호작용에는 의도치 않은 불행한 결 과가 따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커플이 연애 중이고 여성이 피 임약을 복용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행복 하게 살다가, 결혼생활의 기쁨에 젖어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다. 그런 데 여성이 피임약 복용을 멈추자, 같이 잠자리에 드는 남성에게 삼촌과 똑같은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제 그녀는 MHC가 자신의 것과 완전 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남성의 냄새에 노출되었으며, 배우자의 냄새 는 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이 시나리오가 실제 삶에서도 일어 나는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커플들이라면 그 가능성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나는 오프리스가 난초벌의 성욕을 이용하여 자신의 수분을 돕게 만드는 과정을 소개했다. 오프리스는 암벌의 실루엣과 향을 흉 내 내도록 꽃 부분을 진화시키는 재주를 부릴 줄 알았다. 최소 한 가지 사례에서 수벌은 처녀 벌의 향기보다 이 난의 향을 더 매력적으로 느꼈 다. 이 식물은 벌 향수시장에서 최고급 상품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진 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어떤 벌들은 이 식물의 향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함으로써 상황을 역전시켰다. 이들은 난초의 향과 자신의 지방질을 몇 방울 섞어 향수 업계에서 사용하는 냉침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기 름진 추출물을 만들어낸다. 그다음, 벌들은 그 향을 빨아들여 몸의 주 머니 속에 저장해두었다가 구애에 활용한다. 이렇게 기이하게 얽히고 설킨 복잡한 그물 속에서, 난은 수벌에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여 섹스를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형질을 발달시켰으며, 수벌은 그런 난의 향을 이 용하여 암컷들에게 더욱 매력을 어필할 수 있도록 자신의 표현형을 바 꾸었다.
수컷 벌이 구애 냄새에 난초 향료를 쓰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난초들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중앙아메리카 재래종인 초록난초벌 에게는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플로리다로 이주한 초록난초벌들 은 향료가 되어줄 난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 전히 왕성하게 번식할 수 있었다. 물론 이들도 도움이 필요했다. 벌들 은 새로운 꽃 10여 종으로부터 채취한 냄새를 사용하여 과거에 난초로 만들었던 향을 재구성했다. 심지어 그들은 오래 전 잃어버린 향수를 새 로 만들기 위해 바질을 추가해서 향을 강조하는 기지를 발휘할 줄도 알 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부 자원을 이용하여 성적인 냄새의 매력을 끌 어올리는 종이 인간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생체 시계의 움직임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큰 주목을 받는다.
여성의 몸에는 두 종류의 시계가 있으며, 생식과 결부되어 그들이 아름 다움을 가꾸고 성욕을 조절하는 데 영향을 준다. 첫 번째 시계는 생식 주기를 관장한다. 5장에서 우리는 흰줄무늬참새의 생식 호르몬 주기가 어떻게 섹스에 대한 좋아함과 원함에 영향을 주는지 탐구했는데, 여성 들에게도 매달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모든 척추동물에서 그렇듯, 생식 주기에서 난자가 배란되어 수정될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있다. 앞서 나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아름다움을 가꾸는 사례들을 소개했다. 매 력을 높이는 것이 짝짓기에 도움이 되고, 짝짓기의 기능이 배란된 난자 를 수정시키는 것이라면, 여성은 자연히 배란기 동안 자신의 외모 단장 에 더욱 신경을 쓸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진화심리학자 마티 하셀턴 Martie Haselton과 동료들의 가정이었다.
그들의 '생식장식'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한 접근법은 간단했다. 이 들은 여성들이 가임기와 비가임기에 각각 사진을 촬영하게 했다. 그런 다음 연구팀은 촬영된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같은 여성의 어떤 사진에서 여성이 자신의 매력을 더 잘 어필하고 있는지 고르게 했다. 그들이 예상했던 방향대로 생리 주기에 따른 효과는 상당했다. 사람들 은 같은 여성이 가임 기간일 때 '더 패셔너블하고 상냥하며 몸매를 더 드러냈다'고 응답했다. 생식 장식은 시각적 단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다른 연구에서 하셀턴은 여성들이 가임 기간 동안 더 톤이 높고 여성스 런 목소리를 쓴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마지막으로, 여성들은 자신에 대 한 태도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에 대한 태도도 바꾸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다른 여성의 매력을 더 비판적으로 평가했으며, 다른 여성들과 금전적 보상을 잘 공유하려 하지 않았다. 하셀턴과 팀이 지적했듯, 이러한 결과는 남성이 가임 기간의 여성에게 더 소유욕을 보인다는 결과 가 도출된 과거의 연구들과도 일맥상통한다. (동물에서 이 현상은 짝 지키기라 불린다.)
두 번째 생체 시계는 노화이다. 노화는 우리 모두의 마감 시간까 지 가차 없이 바늘을 움직인다. 번식력이라는 관점에서 이 시계는 폐경 기에 가까워올수록 더욱 급박하게 움직인다. 남성은 거의 평생 동안 욕 구가 없을 때도 생존 가능한 정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자의 유전자 변이율이 증가하고, 난자를 수정시키는 능력이 저하되기는 한다. 그러나 여성은 일단 20대에 들어서면 폐경기에 다다를 때까지 생식력이 감소되며, 폐경기 이후부터 생식은 이제 불가 능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여성들이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하는 것 은 아니다.
주디스 이스턴 Judith Easton과 동료들은 "여성들이 남아 있는 번식력을 활용하도록 설계된 심리적 적응을 촉진하는 생식 능력을 진화시켰다" 라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화려한 이름의 적응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 일까? 아주 간단하다. 중년의 여성들은 더 어린 집단보다 섹스에 대해 환상을 더 많이 가지며 실제로 섹스를 더 많이 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술집에서든 누군가의 생식 인생에서든 남은 시간이 점차 줄어 들수록 우리는 까탈을 부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식물과 섹스를 하려는 벌의 행동은 배우자 물색 전략이라는 맥락을 고려하기 전까지는 순전히 어리석고 부적응적인 성도착적 행위로만 여겨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암벌을 만날 기 회가 적은 수벌에게는 너무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서 진짜 암벌을 놓치 는 것보다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짝짓기를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심지 어 꽃과의 짝짓기를 시도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 수컷은 고노포디움이라는 생식 기관을 이 용하여 수정을 하는데, 이것의 기능은 음경과 비슷하지만 그 외에는 비 슷한 구석이 없다. 고노포디움은 표면에 홈이 있는 긴 지느러미가 변형 되어 만들어진 기관이며, 이것을 암컷에게 삽입하면 정자가 홈을 타고 내려오면서 암컷의 몸에 들어가게 된다. 수컷은 고노포디움을 제외하 고 섹스에 거의 투자를 하지 않아서, 구피의 현란한 색상이나 소드테일 의 검과 같은 성적 장식물이 결여되어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동물행동학자 짐 구드um Gould. '와 동료들이 던진 질문이었다. 이들은 29차례의 개별 실험에서 암컷에게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조작된 수컷 모기고기 본보기를 선보였다. 연구진은 그들의 꼬리지느러미를 길게 늘이거나, 상어 같은 등지느러미를 달아주거나, 검을 붙여주거 나, 검게 만들거나, 반점을 만들거나, 하얗게 바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암컷들은 거의 매번 새롭고 기이한 형질의 수컷을 선호하는 경향을 나 타냈다. 실제 수컷들은 성적 매력을 높이는 데 보수적이었을지 몰라도, 암컷들은 전혀 보수적이지 않은 파격적인 성적 매력을 갈망하고 있었 던 것이다. 암컷들의 내면 깊숙이 레이더망이 닿지 않는 곳에는 숨겨진 선호가 가득한 것이 분명했다.
퉁가라개구리 사례도 유사했다. 수컷 퉁가라개구리는 자신의 매력도를 500% 증가시키는 말도 안 되게 매력적인 그륵그륵 소리를 발달시킴으로써 가까운 친척들을 앞질렀다. 그러나 이로써 암컷들의 음향적인 욕구가 모두 충족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구드의 것과 유사한 실험을 31차례 진행하면서, 그륵그륵 소리를 백색소음이나 다른 종의 음성, 그리고 심지어 종소리나 휘파람 소리로 대체시키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수컷의 음성을 조작해보았다. 또한 구드가 그랬듯, 우리 역시 놀랍도록 들쭉날쭉한 암컷의 선호 성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암컷들은 종소리나 휘파람 소리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음향 장비를 통해 만들어낸 다양한 소리에 호감을 드러냈다. 수컷이 진화시킨 그륵 소리는 운 좋게 도 암컷의 숨겨진 선호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음 성만이 대체 불가한 매력을 지닌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수많은 다른 소리도 같은 효과를 불러올 수 있었으니, 그륵그륵 소리의 행운이 라면 그저 제일 먼저였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4) 2023.12.01
2도가 오르기 전에  (3) 2023.11.29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0) 2023.11.18
인류의 기원  (0) 2023.11.17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1) 2023.11.16
Posted by dalai
,

- RNA를 이루는 리보뉴클레오타이드 블록들의 전생물적 합성 을 이해하려는 40년에 걸친 노력들은, 리보뉴클레오타이드가 세 가지 구성요소 분자들의 조합에서 나왔다는 가정에 기초해왔다. 그 세 가지 구성요소란 핵염기(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또는 우라 실)와 리보스당, 그리고 인산이다. 이 분야에서 봉착해온 많은 난관 중 가장 좌절감을 안겨준 것은 피리미딘 계열의 염기-시 토신과 우라실-와 리보스가 어떻게 해도 딱 맞게 결합되지 않 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우너 Powner와 동료들은 공통 전 구체에서 당과 핵염기를 출현시키는 피리미딘 리보뉴클레오타 이드 합성법을 탐구함으로써 "RNA 먼저" 모형의 전망을 부활시 켰다. 이어진 일련의 혁신들과 결합된 이 핵심 통찰로 말미암아, 전생물적 리보뉴클레오타이드 합성 문제에 대한 현저하게 효율 적인 해법이 제시되었다. (Szostak 2009)
진화생물학자 그레그 메이어Greg Mayer(2009)는 이에 대해 언급하며 다음의 요점을 강조했다.
연구는 파우너의 공저자들 중 한 명인 존 서덜랜드John Sutherland 의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는데, 서덜랜드는 답을 찾기 12년 전부 터 이 문제를 연구해왔다. 만일 그가 연구를 10년만 하고 그만두 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어떠한 합성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 작업은 무지를 주 된 전제로 삼아 그에 의존하는 다양한 모든 종류의 논변들-설계 논변, 틈새의 신the God of the gaps 논변, 개인적 불신 논변-이 무용지물임을 보여준다.
- 목적론의 죽음인가, 부활인가?
다윈은 종종, 세상 모든 것에는 목적 또는 “끝”이 있다는(결과 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의미에서), 지나치게 영향력 있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교리들을 모두 타도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서 목적 이나 끝은 프랑스어로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 즉 존재의 이유라 일 컬어지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에 대해 우리가 물을 수 있 는 네 가지 질문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 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또는 그것의 질료인 material use은 무엇인가?
2. 그것의 구조는 어떠한가, 또는 그것의 형상인 formal cause은 무엇인가?
3. 그것은 어떻게 비롯되었는가, 또는 그것의 작용인 efficient cause은 무엇인가?
4. 그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또는 그것의 최종인 final cause 혹은 목적인 telic cause은 무엇인가?
네 번째 원인에 등장하는 단어 telic의 어원은 그리스어 텔로스 telos이며, 목적론이라는 영어 단어 teleology는 여기서 유래했다. 우 리는 종종, 과학이 텔로스를 추방했으며, 다윈에게 그 공을 돌리며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861)가 다윈 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을 읽고 남긴 유명한 소감처럼 말이다. "여기서 다뤄진 것은 자연과학에서 '목적론'에게 날린 최초의 치명 타일 뿐 아니라, 그 합리적 의미에 대한 경험적 설명이다."
-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마르크스의 이 말은 계속 옹호되고 있는 두 가지 견해를 뭉뚱그리며 얼버무리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두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자연과학에서 모든 목적론적 형식화를 타도해야 한다. (2) 이제 우리는 엔텔레키 entelechy" 나 지적설계자인 창조주 등 과 같은) 고대의 이데올로기 없이 자연 현상들의 "합리적 의 미"를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시대에 뒤처 진 목적론을 새로운 후기다윈주의적 post-Darwinian 목적론으로 대체할 수 있다.
- 진화 과정들은 색각(색채 지각) color vision을(그리고 이에 따라 색 Color도) 생겨나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목적들과 이유들을 생겨 나게 한다. 점진적으로 말이다. 이유들로 가득한 우리 인간의 세계가 이유가 없던 더 단순한 세계로부터 성장해나온 방식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목적들과 이유들이 색깔만큼이나, 그리고 생명만큼이나 실재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윈이 목적론을 추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과학이 색과 생명 자체의 비실재성 또한 실증해주었다고도 주장해야 한다. 생물과 색이 있는 사물은 모 두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원자는 색이 없고, 살아 있지도 않 다. 색도 없고 살아 있지도 않은 이 존재들의 커다란 집합체에 불과 한 것들이 어떻게 색을 지닐 수 있고 또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이것 은 (결국엔) 대답되어야 하고 또 대답될 수 있는 수사적 질문이다. 이 제 나는 단백질이 하는 일에 이유가 있고, 박테리아가 하는 일에 이 유가 있으며, 나무가 하는 일, 동물이 하는 일,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이유가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 로 색도 실재하고, 그렇다. 버지니아주도, 생명도, 실제로 존재한다.)
- "왜"의 서로 다른 의미들
이유들이 실재함을,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에 이유들이 편재함 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왜"의 서로 다른 의미들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일 것이다. '왜'라는 단어는 다의적인데, '왜'의 자리 를 무엇을 위해what for와 어떻게 해서 how come라는 두 가지의 익숙 한 어구로 대체해보면 주된 모호함이 잘 드러난다.
"너 왜 네 카메라를 내게 건네는 거야?"는 당신이 무엇을 위해 그 행동을 하는지 묻는 말이다.
"얼음은 왜 물에 뜨지?"는 이 현상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는가를 묻는 말이다. 얼음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기에 액체 상태의 물보다 밀도가 낮은가를 답해야 한다.
- 어떻게 해서를 묻는 질문은 그것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배제된, 그 현상을 설명할 과정 서사process narrative를 요구한다. "하늘은 왜 파란가?" "해변의 모래는 왜 크기별로 분급되 는가?" "방금 왜 땅이 흔들렸지?" "왜 우박은 뇌우를 동반할까?" "진 흙이 마르면 왜 이런 모양으로 갈라지지?" "이 터빈의 날은 왜 고장 이 났을까?" 등이 그 예다. 어떤 사람들은 얼음이 왜 물에 뜨냐는 질 문을, 무생물계의 이러한 특성이 무엇을 위해 생겨난 것인가를 묻는 질문-아마도 그 답은 신의 이유일 것이다-으로 취급하길 원할지 도 모른다. ("나는, 물고기들이 겨울에도 죽지 않기를 신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얼음 아래의 물에서 지낼 수 있게끔 하신 거지. 연 못이 밑바닥부터 얼어버리면 물고기들이 살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어떻게 해서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 즉 물리학과 화학의 언어로 된 설명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 그 답 외의 것을 더 묻는 것은 진짜로 편집증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버릴 것이다.
- 인간 반응의 중심 특성이자 우리 종에게만 고유한 특성 중 하 나는, 상대에게 스스로를 설명할 것을, 그리고 선택과 행동을 정당 화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얻은 설명과 정당화를 바탕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보증하고 반박하는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활동은 순환 적인 "왜"게임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자기 역할을 일찍 깨 치고, 종종 그 역할을 과도하게 수행하면서 부모의 인내심을 시험하 기도 한다. “널빤지를 왜 잘라요?" "문짝이 망가져서 새 문짝을 만드 는 거란다." "새 문짝은 왜 만드는데요?” “그래야 우리가 외출할 때 잠그고 나갈 수 있으니까." "왜 외출할 때 잠그고 나가야 하는데요?” “우리 "모르는 사람이 우리 물건을 가져가면 왜 안 돼요?" 한테 물건이 왜 있어요?" 이 상호 이유 점검 reason-checking에는 우리 모두 참여하며, 또 모두 능수능란하게 이것을 해낸다. 이 사실은 상 호 이유 점검이 우리 삶을 영위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증거가 된 다. 이 이유 점검 활동에서 적절히 대응하는 우리의 능력은 책임의 뿌리다. (Anscombe 1957) 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거나 타인이 제안한 이유들에 의거하여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충고자들의 설득에 "귀 막은 사람들은 책임감이 적다고 판정되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법적으로 다른 취급을 받는다.
행동의 이유들을 서로 요구하고 평가하는 행위가 인간이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활동들을 조직화하 고 청소년들이 어른의 역할을 시작하게 하는 데, 그리고 우리가 서 로를 판단할 규범을 확립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한다. 이 연습은 우리 삶의 방식에서 매우 중심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회적 종이를테면 돌고래, 늑대, 침팬지ᅳ은 어떻게 이것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 상상 하기조차 힘들 때가 종종 있다. 유년기의 비인간 동물들은 어떻게 "자기 자리를 배우는가?" 그들의 자리가 어디라고 누가 말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코끼리들은 다음 이동의 행선지와 시기에 관한 의견 불일치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승인과 비승인의 미묘한 본능적 신 호들은 충분해야 하고, 다른 그 어떤 종도 우리 인간이 성취한 것과 같은 복잡한 수준의 협동 행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 해야 한다.
-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는 어떤 면에서는 나쁜 표현인데, 의식 적인 선발 choice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 의에 조금 친숙해지면, 이 점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화학자들 이 "선택적 친화력 elective affinity"을 말하는 것에는 누구도 반대하 지 않는다. 그리고 확실히, 생명체가 새로운 형태의 선택이나 보 존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택권이 없듯이, 산이 염기와 결 합할 때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 간략함을 위해 나는 때때로 자연선택을 마치 지성적인 힘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중력 에 의한 이끌림이 행성의 운동을 지배한다고 천문학자들이 말하 는 것처럼. 또한 나는, 종종 자연Nature을 의인화하기도 한 다. 이 애매성을 거부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러나 나는 본성 nature이라는 말로는 많은 자연법칙의 산물과 집 합적인 반응만을 의미한다-그리고 법칙이라는 말로는 사건들 의 확인된 연쇄만을 가리킬 것이다.(1868, pp. 6-7)
- 따라서 이유들은, 이유 표상자 reason-representer바로 우리-가 존재하기 오래전부터 있었다. 진화에 의해 추적된 이유들을 나 는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 free-floating rationales"라 불렀는데, 이 표현 은 확실히 몇몇 사상가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그들은 내가 모 종의 유령을 불러내려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들은 수나 질량중심이 그러하듯 전혀 문제적이지도 않고 유령 같지도 않다. 사람이 산수를 표현할 방식 을 고안하기 전에도 육면체는 8개의 모서리를 지니고 있었고, 소행 성들의 질량중심은 그 개념을 생각하고 계산해낼 물리학자들이 존 재하기 전부터 존재해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유들은 이유추론자 reasoner, 즉 이유를 생각하는 존재들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며 아마 도 "불건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수긍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내가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기를, 그리고 이유-인간 탐 구자들 또는 그 어떤 마음들에 의해 표상되거나 표현되기 전에 존 재했으며, 진화에 의해 밝혀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음을 확신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1
- 어떻게 해서에서 무엇을 위해로의 진화는 생물들이 전 생명사이클들의 연쇄를 거쳐 점진적으로 출현했다고 해석하는 방식에 서 볼 수 있다.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는 왜 어떤 특성들이 존재하는 가에 대한 이유로 드러난다. 드러난 설계들이 비상하게 뛰어날 경우 라 해도, 그 특성들은 지성적 설계자를 전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흰개미 군집이 그런 특성을 가지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가우 디와 달리 흰개미는 이유를 표상하거나 가지지 않으며, 그들의 뛰어 난 설계는 지성적 설계자의 산물이 아니다.
- 이해력 없는 능력에 대한 회의론에는 원인은 있을지언정 이유, 즉 합당한 근거는 없다. 이해력 없는 능력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합당한 이유에 따른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옳은 듯 느껴지는 것일 뿐이고, 그것이 옳은 듯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렇 게 생각하도록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걸어둔 주문 을 깬 사람이 바로 다윈이고, 곧이어 등장한 튜링이 그 주문을 다시 부숨으로써 새로운 생각을 열어주었다. 그 새로운 생각이란, 전통 적인 순서를 뒤집어야 하며 능력의 연쇄로부터 이해력이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를 통해 훨씬 더 똑똑한 내부 배열과 기관과 본능 이 구축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 상의하달식 지성적 설계는 분명 작동한다. 계획을 미리 세우 고 문제를 명확히 하고 과제를 개선하고 각 단계의 이유를 분명하 게 나타낸다는 행동 수칙은 수천 년 동안 발명가들과 문제 해결자 들에게 확실해 보였던 방책이었을 뿐 아니라, 인간이 노력해온 모든 분야-과학과 공학에서부터 선거 운동과 요리, 농사, 항해에 이르 기까지에서 독창성과 선견지명이라는 무수한 승리를 통해 스스 로를 증명해 보인 전략이기도 했다. 다윈 전에는 이것이 성취 가능 한 유일한 설계 방식이라고 여겨졌다. 지성적인 설계자가 없는 설계 는 불가능하다고 간주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의하달식 설 계가 우리 세계에 기여한 바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게 다가 다시금 베벌리를 상기시키는 몇몇 "창조적 기교의 성취에 대 해 말하자면, 승리는 지금껏 그 방식을 피해 이루어져왔다. 다윈의 "기묘한 추론 뒤집기", 그리고 이와 동등하게 혁명적인 튜링의 뒤집 기는 이해력 없는 능력이라는 한 가지 발견의 두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이해력은, 모든 설계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라는 신적인 재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이해력 없는 능력을 지닌 시스템들로부 터 출현하는 결과다. 이해력 없는 능력의 한편에는 다윈의 아이디어 인 자연선택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튜링의 아이디어인 무심한(무 마음적인) 기계적 계산이 있다. 이 쌍둥이 아이디어는 합리적 의심 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증명되었다. 그러나 아직 일부에서는 이 생 각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표하고 있으며, 나는 이 챕터에서 그것 들을 축출하고자 했다. 창조론자들은 유기체 내부 작용에서 주석 달 린 코드를 찾으려 하지 않고,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비물질적인 레스 코기탄스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거기가 바로 “모든 이해가 발생하 는 곳인데도 말이다.
-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이해할 기본 틀은 일찍이 다윈이 《종 의 기원》에서 제공한 바 있다. 다윈은 《종의 기원> 각 장의 끝 부분 에 그 장의 내용을 짧게 요약해놓았는데, 지금 우리가 살펴볼 틀은 4장의 요약 부분에 기술되어 있다. 이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논란의 여지조차 없겠지만, 만약 기나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생 활 환경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가운데 생물의 조직 일부에서 어 쨌든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보자. 이 역시 논란의 여지가 없다 는 것이 확실하지만, 만약 각 종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매 우 강력한 힘으로 인해 어떤 시기, 계절 또는 어느 해에 심한 생존 투쟁을 겪었다고 해보자. 그리고 개체 상호간, 개체와 환경 간에 존재하는 극도로 복잡한 관계가 개체의 구조, 체질, 습성을 극도로 다양하게 만들어 개체들에게 이득을 주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인간에게 유용한 변이가 여러 차례 발생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개체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변이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어떤 개 체들에게 유용한 변이들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로 인해 그 개 체들은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을 좋은 기회를 가질 것이 분명하 다. 또한 대물림의 강력한 원리를 통해 그것들은 유사한 특징을 가진 자손들을 생산할 것이다. 나는 이런 보존의 원리를 간략히 자연선택이라고 불렀다."
- 내가 옹호하는 주장은 이렇다. 인간의 문화는 완전히 다윈주의적으로, 즉 이해력은 동반되지 않지만 다양한 가치 있는 구조를 낳는 능력(거칠게 말하자면 흰개미가 자신들의 성을 짓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해서 그 후 점진적으로 감다윈화되어, 더욱더 이해력을 갖추게 되고 더욱더 상의하달식 조직화가 가능해지며, 설계공간을 더욱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탐색하게 된다. 짧게 말하자면, 인간의 문화는 진화하면서 스스로의 진화로 얻은 열매를 다시 양분으로 삼 으며 훨씬 더 강력한 방식으로 정보를 활용하여 자신의 설계 위력 을 증가시킨다.
- 프로그래머들이 크고 작은 개선 작 업을 하면서 이전 세대 프로그래머들이 고되게 작업한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중에라도 그것들이 무언가에 소용 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한물간 과거의 코드를 그대 체 코드 곁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저 "주석 처리 comment out "한다. 레거시 코드를 괄호나 아스테리스크(*표시) 등의, 컴파일러 프로그 램이 인식할 수 있는 약속된 기호들로 둘러싸면, 컴파일러는 그 부 분을 처리하지 않고 지나가고, 따라서 컴퓨터가 실행할 코드 내에 드러나지 않게 된다.
- 동일한 코드 침묵화silencing가 일어날 수 있음을, 그리고 이는 조절유전자(유전자가 단백질로 "발현expression"되는 것을 조절하는 유전자) 에서의 단순한 돌연변이 덕분임을 기억하라.
동물이 길들 때, 길들이는 사람은 바람직한 특성들을 선택한 다. 무의식적으로든 체계적으로든 말이다. 한배에서 태어났거나 같 은 무리에 속하는 개체들이 보이는 가시적이고도 확연한 차이점은 비교적 사소한 유전적 차이에 의한 것일 수 있으며, 어쩌면 모두가 공유한 하나의 유전자가 다르게 발현한 결과일 수도 있다. 길들이는 사람이 자기 가축의 유전자에 미칠 영향을 이해하거나 특정하게 영 향을 미치겠다고 의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유전자를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침묵시키는 것이 교배자가 원하던 결과에 이르 게 할 공산이 있는 길이다. 그렇다면, 길든 동물의 후손이 탈출하여 야생화될 때, 레거시 코드를 둘러싸고 있던 "괄호들"을 제거하여 그 코드들이 다시 튀어 올라와 활동하게 하는 것에 해당하는 일이 일 어나기만 한다면, 그간 억눌려온 야생의 특성이 유전적으로 복원될 것이다. 이는 야생화된 생물의 계보에서 야생 형질들이 왜 그토록 신속하게 복귀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예를 들면, 야생화된 돼지들 은 몇 세대만에 외형에서뿐 아니라 행동 면에서도 그들의 사촌인 멧돼지의 많은 형질을 복원하며, 야생화된 말들 - 미국에서는 머스 탱mustang이라 불리는은 가축화된 조상들에서 떨어져 나온 지겨 우 수백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기질 면에서 그 조상들과 현저히 다르다.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2도가 오르기 전에  (3) 2023.11.29
뇌는 왜 아름다움에 끌리는가  (4) 2023.11.26
인류의 기원  (0) 2023.11.17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1) 2023.11.16
단 하나의 방정식  (2) 2023.11.07
Posted by dalai
,

인류의 기원

과학 2023. 11. 17. 06:42

- 어떻게 하면 여자가 낳은 아이가 반드시 자 신의 아이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요? 고릴라처럼 여자가 가임기 때에 다른 남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 됩니다. 계속 곁을 지키고 있으 면 됩니다.
이제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여자에겐 남자가 계속 자신에 게 고기를 가지고 오게 하는 것이 이득입니다. 하지만 가임기는 기껏 해야 한 달에 하루, 이틀입니다. 그럼 나머지 날에는 남자가 가져오는 고기를 받을 수 없는 걸까요? 여자가 내놓은 해답은 위장 전략입니다. 자신이 항상 가임기인 듯 속여서 계속해서 고기를 받으면 되죠. 가장 확실하게 속이는 방법은 남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속일 뿐 아니라, 아예 여성 자신도 자신 의 가임기를 모르게 됐습니다. 가임기를 정확히 모르는 인간은 늘 수 시로 성교를 해야 했고, 남자는 계속 같은 여자에게 되돌아오게 됐습 니다.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과 먹을거리를 매개로 짝을 맺게 돼 성별 분업, 핵가족, 직립 보행이 '패키지'로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인간 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러브조이 가설'로 불리고 있습니다. 미국 켄트주립 대학교 사회학 및 인류학과 오언 러브조이(Owen Lovejoy) 교수가 1981년 유명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해 사회적 파장을 불 러일으킨 가설입니다.
인류학자들은 러브조이 가설이 맞는지 검증해 보고 싶어 했습니 다. 러브조이 교수의 주장이 맞다면 초기 인류가 직립 보행의 흔적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수컷끼리의 경쟁이 약했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 의 몸집 차이도 적고 송곳니 역시 크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류 조상으로 거론돼 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 스(Australopithecus afarensis)'를 보면 이 예상은 반만 맞았습니다. 아파 렌시스의 송곳니는 현대인보다는 크지만 침팬지나 고릴라보다는 작 았습니다. 남녀의 몸집 차이 역시 고릴라보다는 작지만 현대인보다 는 큽니다.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면, 아파렌시스는 현생 인 류도 아니고 고릴라도 아닌, 색다른 형태의 남녀 관계를 보였을 것입 니다.
- 러브조이 가설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으며, 특히 페미 니스트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이전에 사람들은 핵가족이 자본 주의와 시장경제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러브조이 교 수의 말이 맞다면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남자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 오고 여자가 그 돈으로 집을 지키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이 태초부터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운명이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말을 조금만 바꾸면 수백만 년 전부터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여자가 자 신의 성을 제공했다는 해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러브조이 교수의 학 설은 인류의 기원에 대한 학설이 아니라, 무한한 성생활을 꿈꾸는 남 성들의 환상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 지난 30년 동안의 연구 결과를 보면 러브조이 가설이 틀렸을 가능 성이 높습니다. 먼저 가임기에 상관없이 성생활을 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멀리는 돌고래, 그리고 인간과 가장 가까운 보노보 (bonobo, Pan paniscus) 역시 언제나 성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는 핵가족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러브조이 교수의 설명과 달리 사실은 인 간의 가임기가 숨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알게 모르게 가임기 때 평소와는 달리 행동하며, 남자들도 알게 모르게 달리 반응 합니다. 인류학 연구 결과를 보면, 배란기의 여자는 목소리가 높아지 고 식욕이 줄어들며 남녀 어느 쪽이 보기에도 예쁜 옷을 입습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배란기 여자의 냄새에 끌리고 배란기 여자의 근처 에 가면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합니다(신기하게도, 이런 남자 들도 자신의 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배란기 여자에 대한 반응을 달리 합니다.). 어느 날 문득 그녀가 유달리 예뻐 보인다면 호르몬의 추파에 대한 화답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인간의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관계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믿음)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몸 역시 그에 맞춰 진화했습니다. 남자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갖게 되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듭니다. 남성 호 르몬은 생물학적인 '수컷다움'을 관장합니다. 이 말은 '수컷 노릇의 사 령부'가 아버지 노릇을 위해 퇴진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러브조이 가설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 자는 수컷과 암컷이기도 하지만, 생물학을 넘어선 사회 문화적인 존재 입니다. 아버지의 탄생은 그것을 증명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지극 히 인간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 머리는 커지고 산도는 좁아지고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새끼의 머리 크기가 산도보다 크지 않습 니다. 산도를 통해 새끼를 낳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 만 인간 태아는 다릅니다. 머리는 크고 산도는 좁아, 출산할 때 어려움 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400만~500만 년 전의 초기 인 류는 여러모로 유인원처럼 생겼습니다. 머리 크기도 침팬지 머리 크기 와 비슷한 450시시(cc) 정도였죠. 단지 직립 보행을 했다는 점만 달랐습니다(3장 '최초의 인류는 누구?' 참조). 그 후 인류의 머리 크기는 점점 커 져서 200만 년 전에는 약 2배인 900시시에 다다르고 그후 10만년전 에는 현재 우리의 머리 크기와 비슷한 1300 시시도 쉽게 볼 수 있습니 다. 하지만 몸 크기는 200만 년 전이후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요.
몸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는데 머리 크기만 커지자, 여러 가지 고민 스러운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가 큰 아기를 낳기 위해서 골반은 넓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산도도 넓어지니까요. 하지만 직 립 보행을 하기 위해서는 골반이 좁을수록 좋습니다. 다리를 앞뒤로 바삐 움직이며 걸어야 하는데 다리가 좌우로 멀리 벌어져 있으면 중 심이 흔들거리는 등 문제가 많습니다. 인류는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출산과 보행 중에서 결국 보행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골반이 커지지 않는 쪽으로 진화했으니까요. 좁은 산도를 통해 머리 큰 아기를 낳는, 유례가 없는 출산의 어려움은 그대로 감내하고 말이지요.
경이롭게도,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출산과 분만은 수도 없이 성 공적으로 이뤄져 왔습니다. 산도보다 머리가 큰 아이를 낳기 위해 여 자의 골반은 뼈와 뼈 사이가 물렁해졌고, 벌어질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됐습니다. 골반뿐 아니라 골격 전체의 관절이 벌어집니다. 물론 벌어진 다 해도 큰 아기의 머리를 쉽게 낳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어서 늘 위험 과 고통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출산 후에는 벌어졌던 관절이 다시 닫히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습니 다. 아이를 낳고 나면 옷매무새가 이전과 같지 않다는 말을 종종 하곤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비록 체중이 아이 낳기 전의 상태로 돌아와도 몸매가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의 골반에는 벌어졌다 아문 기억이 상흔이 돼 남아 있습니다.
출산은 당사자인 아기에게도 트라우마를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유 인원인 원숭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숭이 암컷은 새끼를 낳을 때 쪼그려 앉는 자세를 취합니다. 아기를 낳을 때 중력의 도움을 받기 위 해서지요. 산도에 막 들어간 태아의 얼굴은 엄마의 배꼽 쪽(몸 앞쪽)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산도를 통과해 갓 빠져나온 새끼의 얼굴은 자 연스럽게 엄마의 몸 앞쪽(얼굴)을 향하게 됩니다. 쪼그린 상태의 엄마 원숭이는 팔을 뻗어 새끼의 나머지 몸이 빠져나오도록 돕고, 새끼가 몸 밖으로 다 나오면 그대로 품으로 가져와 안습니다. 엄마의 도움으 로 세상에 처음 나온 새끼는 이제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품에 안겨 젖 을 뻽니다.
- 다른 동물들의 암컷과 달리 분만을 하는 여자는 해산의 진통을 느 끼면 혼자 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진통 중 혼자가 되면 많은 경우 스 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분비돼 진통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심하면 해산 과정이 멈추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는 여자는 믿 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 과정을 함께해 온 그들은 대개는 여자의 어 머니이거나, 여자 형제이거나, 다 큰 딸이거나, 또는 같은 집단에 사는 경험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그들은 진통 과정을 함께하고 마지막에 아 기를 효율적으로 밀어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며, 아기가 태어날 때 목 이 꺾이지 않도록 잘 받아서 엄마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리고 갓 태어난 아기와 시간을 함께 보내느라 엄마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이런저런 마무리를 대신 해 줍니다. 아기가 나온지 얼마 후 뒤 따라 나오는 태반도 받아 내야 하죠. 누군가 다른 사람의 도움이 개입 돼야 하다니,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적인 동물인 셈입니다.
- 살아 있는 동물을 잡기가 어려우면 죽어 있는 동물을 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사자는 막 죽인 사냥감의 내장을 배불리 먹고 나면 소화시 키기 위해서 한숨 자러 갑니다. 사냥감은 내장만 제외하고는 나머지 고깃살이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그걸 노리면 되겠죠.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사자가 물러가고 나면 이번에는 독수리 떼나 하 이에나 떼가 몰려듭니다. 독수리 한 마리는 선 키가 100센티미터 정도 로, 초기 인류와 비슷한 크기입니다. 두 날개를 쭉 편 길이는 180센티 미터가 넘습니다. 게다가 항상 떼 지어 몰려다닙니다. 절대로 연약한 인류가 만만히 고기를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류는 동물성 지방을 얻는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방법이랄 것도 없습니다. 사자부터 독수리, 하이 에나까지 모든 경쟁자들이 내장과 고기를 다 발라 먹고 버리고 간 찌 꺼기를 먹는 거니까요. 바로 뼈입니다. 뼈는 무시할 게 아닙니다. 팔다리의 뼈 속에는 골수가 있고 머리뼈 속에는 뇌가 있습니다. 골수와 뇌는 모두 순수한 지방 덩어리로 영양이 풍부한데, 이를 노리는 경쟁자 는 벌레와 박테리아 정도입니다. 초기 인류가 아무리 약했다 해도, 이 정도는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뼈 안의 영양분을 취하는 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 다. 뼈는 매우 단단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팔다리뼈는 먼 훗날 무기로 도 사용할 정도로 굵고 단단합니다. 이빨로는 이런 뼈를 깰 수 없습니 다. 그래서 초기 인류는 돌로 뼈를 깨서 골수를 빼 먹는 방법을 찾았습 니다. 뼈 깨는 돌은 점점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춘 '석기'가 되었습니다. 호모 하빌리스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올도완 석기는 이렇게 뼈 깨는 돌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육식이 부른 또 다른 진화
인류는 이렇게, 점점 넓어지는 초원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연명 하기 위해 사체 찌꺼기에 손을 댔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름진(고지방 식품 섭취에 힘입어 초기 인류의 두뇌가 점점 커진 것입니다. 두뇌는 빗대서 말하자면 제 작비와 유지비가 많이 필요한 기관입니다. 그에 걸맞는 영양 섭취가 필 수인데,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육식이 그 과정을 도운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확보한 고지방 고단백 식습관은 몸집도 키웠습니다.
- 초기 인류는 400만~500만 년 전 두뇌 크기가 현생 침팬지와 비슷한 400~500시시(cc) 정도였습니다. 200만~300만 년 뒤 호모 하빌리스 때는 750 시시로 커졌습니다. 하지만 몸집은 여전히 100센티미터 전후 로 작았습니다. 200만 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했습니다. 호 모 에렉투스는 두뇌가 1000시시까지 커졌고 몸집 역시 170센티미터 정도까지 자랐습니다. 몸집도 크고, 두뇌도 큰 인류 조상이 나타난 것 입니다.
인류는 이렇게 큰 두뇌와 큰 몸집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가 흔히 '원시인'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사냥은 이렇게 인류 진화의 비교적 늦은 시기에 등장한 것 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곧 뛰어난 전략과 체력, 그리고 석기 덕분에 잡 을 수 있는 짐승 수를 늘려 가며 사냥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 이제까지 초기 인류가 '울며 겨자 먹기로' 육식을 시작한 사연을 소 개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은 가시지 않습니다. 고릴라 와 침팬지가 먹을 게 없다고 해서, 혹은 고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곧바 로 고기를 많이 먹을 수 없듯, 초기 인류 역시 바로 기름진 음식을 소 화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인류는 이 마지막 문제를 진화를 통해 해결했습니다. '아포 지방 단 백질(apolipoprotein)'이라는 물질을 이용해 기름진 음식을 소화할 수 있 도록 한 것입니다. 아포 지방 단백질은 마치 세제처럼 작용하는 물질 입니다. 기름기가 지닌 지질 성분에 결합한 뒤, 이를 혈관에서 치워 피 를 깨끗하게 합니다. 특히 혈중 지방 단백질을 낮추는 데 가장 효율적인 형태의 아포 지방단백질 E엡실론 4(APOE-epsilon 4) 유전자가 우리 몸에 등장한 시기를 보면, 약 150만 년 전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호모 에렉투스가 큰 두뇌와 몸집을 하고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석재 의 양쪽 면을 가공해 다듬은 석기)를 만들어 내던 시점입니다.
KNM-ER 1808 화석의 주인공이 초기 인류로서는 엄두도 못 냈을 부위인 육식 동물의 간을 많이 먹었다면, 이것은 본격적인 육식이라 는, 인류 진화 역사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뜻합 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로 인한 뼈 출혈로 죽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아직은 풍부한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을 소화시킬 정도로는 진화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놀라운 KNM-ER 1808 화석은 바로 그 진화의 중간에 놓인 인류의 다난했던 현실을 드러내는 것 같 습니다.
- 그렇다면 언제부터, 왜 인류의 털이 솜털로 바뀌었을까요? 고기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게 된 다음부터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초식을 하던 초기 인류는 250만 년 전부터 고지방, 고단백 음식에 맛 을 들였습니다. 다른 짐승들이 먹고 난 찌꺼기인 뼈를 깨서 그 안에 있 는 골수를 먹는 정도였지만, 그 덕분에 두뇌와 몸집이 커지고 제대로 된 석기를 만들어 쓰면서 사냥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5장 '아이 러브 고 기' 참조).
털을 가진 짐승은 주로 초저녁과 아침에 사냥을 합니다. 사자를 생 각해 보세요. 수사자의 멋진 갈기와 윤기가 흐르는 털이 떠오를 겁니 다. 보기엔 폼 나지만 이런 몸으로 대낮에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요. 모피를 입고 복날 더위가 한창인 대낮에 전력으로 뛴다고 생각해 보세요. 너무 더워 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맹수들은 한 낮이면 체온을 발산하기 위해 입을 벌리고 뜨거운 호흡을 계속 내쉽 니다. 말복 더위에 축 늘어져서 혀를 내밀고 헉헉거리고 있는 개처럼 요. 이렇게 가만히 있기만 해도 힘든데, 시속 65킬로미터의 속도로 힘껏 달려 도망가는 영양을 뒤쫓아 잡는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바로 이때, 맹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대낮을 노려 사냥감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마저 온몸이 털로 덮여 있다면 어떨까요? 사자와 똑같이 대낮에는 맥도 못 추고 그늘부터 찾아 쉬어야 했을 것입니다.
- 이런 상황에서 털이 없어져서 맨몸이 되는 돌연변이가 우연히 등장 합니다. 이 돌연변이를 지닌 인간은 맨몸에 난 땀을 증발시켜서 뜨거운 체열을 발산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아프리카의 대낮을 정복했습니다. 하지만 뭐든 장점이 생기면 예기치 못한 단점도 나타나는 법입니다. 땀을 흘려 체온을 조절하게 되면서 인간은 물에 그만큼 많이 의존하 게 됐습니다. 건조화가 진행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마실 물을 구하기 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이 행동반경 내 어디에 있는지가 대단히 귀중한 정보가 됐죠. 물은 계절적으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 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정보(기억)를 저장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일도 중요해졌습니다. 또 자주 물을 마시러 물가로 나오는 일은 위험하 기 때문에 이런 위험을 피할 방법도 중요해졌습니다.
자외선도 문제였습니다. 자외선을 막아 주던 털이 없으므로, 인류 의 피부는 자외선에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자외선은 피부암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일으켜 체내의 엽산을 파 괴해 기형 태아가 생길 확률을 높입니다. 후손을 남길 확률이 줄어든 다는 뜻이기 때문에 인류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일입니다. 체내로 들어 오는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다면 진화에서 매우 유익했을 것입니다. 인류의 피부에서 이 역할을 하는 것은 멜라닌(melanin) 색소입니다. 인체의 멜라닌 색소는 특수한 세포가 생산하는데, 멜라닌 색소가 많 아지면 피부색도 검어집니다. 이게 바로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류가 검은 피부를 지녔으리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인류는 털과 땀을 맞바꾼 후에는 검은 피부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이에 반해 털이 있는 동물의 피부는 흽니다. 털이 가려 주기 때문에 굳이 색소가 필요 없고, 색을 띨 다른 이유도 없어서지요. 인간 역시 머리털로 덮여 있는 두피는 하얗습니다.).
- 빙하기 동안에는 구름 낀 날씨가 계속되기 때문에 햇 빛을 보기 힘들죠. 햇빛을 보기 힘들면 자외선을 차단할 필요가 없고, 멜라닌을 만들어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멜라닌이 필요 없 어졌기 때문에 피부가 하얗게 된 것은 아닙니다. 멜라닌이 필요 없어 졌다고 꼭 피부색이 옅어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죠. 피부색이 검어도 그만, 옅어도 그만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피부색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을 가를 정도로 중요합니다. 햇빛이 강한 곳에서는 멜라닌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듯 이, 햇빛 보기 힘든 곳에서는 오히려 멜라닌이 없어야 살아남을 수 있 습니다. 햇빛 보기 힘든 곳에서는 자외선이 부족한데, 우리 몸에는 약 간의 자외선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몸에서 유일하게 만들 어낼 수 있는 비타민 D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비타민 D는 칼슘 흡 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없으면 칼슘이 흡수되지 않아 뼈가 물 렁해지고 형태가 일그러집니다. 비타민 D가 부족한 시기가 길어지거 나 성장기의 중요한 때에 이러한 시기를 겪으면 구루병이 됩니다.
- 최근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유럽인의 흰 피부를 유발하는 돌연변이는 5000년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뜻밖입니다. 아프리카를 떠난 인류는 자외선이 급격히 감소하는 빙하 기의 유럽에 살게 되면서 비타민 D 합성을 방해하는 멜라닌 색소를 잃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흰 피부를 발생시키는 돌연변이는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에서 살기 시작한 백수십만 년, 적어도 수십만 년 전에 발생해서 퍼졌어야 합니다. 현생 인류가 새롭게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서 유럽으로 진출했다고요? 그렇다 하더라도 흰 피부의 돌연변이는 적어도 수만 년 전에는 나타났어야 합니다. 5000년은 의외로 최근입 니다. 이렇게 늦게 나타난 이유는 농경의 발생과 정착입니다. 농경 이 전 시대에는 자외선이 부족한 지역에 살아도 비타민 D를 합성하지 않 아도 되었습니다. 비타민 D가 풍부한 식물, 해산물, 고기를 충분히 섭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작물에 의존하는 식생활이 정착되면서 곡류와 전분류에 점점 의존하게 됐습니다. 먹을거리를 통하여 비타민 D를 충분히 섭취할 수 없게 되자 멜라닌을 없애고 자외선을 이용해서 비타민 D를 합성하게끔 하는 돌연변이가 유익하게 된 것입니다.
-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노년
재미있게도 우리 현생 인류가 주인공인 시대인 후기 구석기 문화는 이전까지의 인류 문화와 혁명적으로 다릅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암각화 등의 예술과 상징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노 년층의 비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일까요? 저 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예술과 상징은 추상적 사고와 연결됩니 다. 또 정보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실제적인 기능도 있지요. 예술과 상징이 늘어났다는 건 이 시기에 그만큼 정보의 전달이 중요해졌다는 뜻입니다.
노년은 바로 이렇게 정보가 늘어난 시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손주를 볼 때까지 살면 세 세대가 같은 시대를 공유하게 됩니다.
두 세대가 같은 시대를 사는 것에 비해 오랜 기간 정보를 모으고 전달 할 수 있지요. 만약 두 세대가 50년 정도를 공유한다면, 세 세대는 75 년 동안 일어난 정보를 공유할 것입니다. 이렇게 노년은 정보의 생산 과 전달, 공유가 늘어나게 된 실질적인 계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술과 상징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고 이 장을 마칩니 다. 후기 구석기 시대 이후 현대까지, 평균 수명과 노년층의 수는 계속 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 변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세대의 수'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평균 수 명이 50세이던 시대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즉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그 이후 수명이 대 폭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추세를 고려하면 평균 수명이 75세가 된 지금은 증손주가 클 때까지 증조부모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 해 4대가 공존해야 하죠.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칠순이 되도록 증손주는커녕 손주를 보기도 힘듭니다. 예 전에 비해 결혼과 출산 연령이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100세 시대가 눈앞으로 다가왔지만 인류는 여전히 세 세대가 같은 시대를 사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가족 구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 떻게 보면 우리는 과거보다 '오래' 살게 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린 그냥 '느리게' 살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슬로우 라이프'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 농경의 발달이 유전자 다양성을 늘렸다는 것은, 인류 문명에서 대 단히 큰 의미를 갖는 사건입니다. 농업이라는 '문명'이 인류의 진화에 직접 영향을 미친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문명과 문 화가 발달하면 진화는 멈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문명과 문화의 발달, 그리고 인구 증가의 영향으로 인류의 진화가 빠른 속도 로 진행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2장 '인류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참조).
오늘날, 인류는 또 하나의 문화적 현상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노령 인구의 증가'라는 전에 없던 현상입니다. 문화가 인류 진화에 영 향을 미친다면, 분명 지금의 노령 사회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진화 를 새로운 양상으로 이끌 것입니다. 인류는 과연 이 새로운 현상에 어 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계속될 인류 진화의 역사가 기대됩니다.
- 베이징인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두뇌 용량의 2배에 이를 만큼 머 리가 컸습니다(현대인의 약 3분의 2). 큰 머리를 지닌 베이징인은 인간다운 생활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실제로 저우커 우뎬 동굴에서 발굴된 동물뼈와 석기, 불을 피우고 난 둥근 흔적 등은 '추운 빙하기에 따뜻한 동굴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불을 피워 고기를 익혀 먹는 인류'라는 구체적인 상상을 가능하게 했 습니다.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게 할 만큼 문화적인 생활이 가 능했다는 것이지요(이런 상상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습니다.). 베이징인은 약 5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렇게 인간 다운 모습을 갖춘 조상 인류가 50만 년 전의 아득한 시간 전에 중국에 서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중국이 자랑거리로 삼기에 충분했습니다.
베이징인은 곧 호모 에렉투스의 대표가 됐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인류 최초의 직계 조상이 중국에서 나타났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 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다 일찍 살았던 초기 인류 조상 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고 있었습니다. 이 들이 어떻게 멀고 먼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했는지 연결이 잘 안 됐던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는 1970년대 이후 동아프리카에서 도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면서 해결되는 듯했습니다. 베이징인 만 한 머리 크기에 현생 인류와 맞먹을 만큼 몸집이 큰 이들은 무려 150만~200만 년 전에 등장했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시나리오가 탄생 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일찌감치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뒤, 나중 에 큰 머리와 몸집, 우수한 사냥 도구를 바탕으로 서서히 전 세계로 퍼 졌다는 것입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에렉투스 역시 그 중 일부였고, 따 라서 베이징인과 자바인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거대한 물줄기의 하 나였다는 설명입니다. 이 가설은 화석의 연대와 지리적 분포 등을 고 려할 때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였습니다..
- 하지만 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1990년대에 과학자들이 자바인의 연대가 180만 년 전까지 올라간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말은 아프리카 에서 호모 에렉투스가 탄생하던 시기와 거의 비슷한 때에 아시아에도 호모 에렉투스가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자바인이 아프리카의 호모 에 렉투스가 이주한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바인 화석의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 문제는 아직도 분명 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이어 보다 확실하고 강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터키 북동쪽에 있는 나라, 조지아의 드마니시(Dmanisi) 유적에서 이상한 화석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화석은 머리도 몸집도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함 께 발견된 석기 역시 그다지 세련되지 않습니다. 고인류학자들은 머리 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 밖에서 이렇게 보잘것없는 화석이 나왔다는 사실은 기존의 가설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거든요. 큰 머리와 몸집, 뛰어난 사냥 도구를 지닌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 에서 태어났고,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비로소 전 세계로 확산할 수 있 었다고 인류학자들은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예가 처음 으로 나온 것입니다.
더구나 이 화석의 연대가 측정되자 시름은 더 깊어졌습니다.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와 동시대인 180만 년 전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런 시나리오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호모 에렉 투스가 나타나기 전에, 어떤 인류 조상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습니 다. 이 인류는 작은 머리와 몸집을 지녔고, 도구도 아주 허술하게만 만 들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초라한 몸과 도구를 가지고 아프리카 를 벗어나 세계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조지아의 드마니시를 거쳐 인도 네시아 자바까지 흘러 이주했습니다. 이후 이들 집단은 모두 사라졌습 니다. 하지만 그 중 아시아에 살던 집단 중 하나가 살아남아 따로 진화 합니다. 그게 바로 호모 에렉투스입니다. 이들은 이제 다시 아시아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 역시 그 후 손입니다. 영국 셰필드 대학교의 로빈 데넬(Robin Dennell) 교수는 아시 아기원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유럽인 학자입니다.
- 아직은 시나리오입니다. 하지만 드마니시에서 화석이 나온 이상, 아 프리카 바깥에서 호모 에렉투스가 기원했다는 가설은 더 이상 황당 무계한 주장이 아닙니다. 그 중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 역시 무 시하기 어렵습니다. 이 가설이 맞을지, 우리를 포함해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 몸집은 암수 차이가 크지만 송곳니 크기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기간토피테쿠스는 수컷끼리의 경쟁이 격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그렇다면 수컷의 덩치가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인은 바로 포식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몸집이 크면 포식자를 물리칠 때 유리합니다. 특히 수컷의 덩치가 커집니다. 포식자는 암수 를 가리지 않는데 수컷만 몸집이 커지는 것은 재생산과 관계가 있습니 다. 유인원을 비롯한 영장류의 경우, 몸집을 키우려면 자라는 기간(성 장기)이 늘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성장기가 길어지면 성적으로 성숙해 지는 시기는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해야 하는 암컷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암컷은 마냥 몸집을 키우지 않아 작고, 수컷만 성장기가 길어져서 몸집이 커집니다. 나중엔 확연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게 되지요. 실제로 영장류를 연 구해 보면 암컷의 성장기와 성적 성숙기가 안정돼 있고, 개체 차이도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수컷은 환경 요인에 따라 성 장기가 변하기 쉽고 몸집 역시 개체별로 차이를 많이 보이지요.
기간토피테쿠스의 성차가 적고 크기도 작은 송곳니는, 무시무시한 천적이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무엇이 기간토피테쿠스로 하여금 큰 체구로 무장을 하게끔 만들었을까요? '킹콩'을 탄생시킨 이 무시무시한 천적은, 놀랍게도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기간토피테쿠스가 중국 남부에 살던 시기는 약 120만 년 전부터 30 만년 전까지입니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대륙 전체에 퍼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큰 짐승을 사냥해 먹었습 니다. 저우커우뎬 등 중국 지역의 호모 에렉투스 유적에서는 말뼈가 많이 발견됩니다. 사냥을 한 뒤 발라 먹고 버린 뼈입니다. 아시아에서 말이 멸종한 이유가 바로 호모 에렉투스가 잡아먹어서라는 얘기가 있 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호모 에렉투스가 기간토피테쿠스도 잡아먹었을까 요? 아직까지는 그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기간토피 테쿠스와 호모 에렉투스의 뼈가 함께 발견돼야 하는데, 그런 적조차 없습니다. 베트남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치아와 함께 기간토피테쿠스 의 이빨이 발견됐다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인류학과의 러스 시어 헌(Russ Ciochon) 교수의 연구 결과가 있긴 했습니다만, 시어헌 교수는 2009년에 호모 에렉투스의 이빨이 아니었다고 입장을 철회했습니다. 그렇다면 호모 에렉투스와 기간토피테쿠스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 이 없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학자들은 둘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기간토피테쿠스의 멸종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나무 지대에서 살던 기간토피테쿠 스는 대나무를 주식으로 하는 판다와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 데 여기에 호모 에렉투스가 끼어들며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호모에 렉투스는 대나무를 먹지 않았는데, 왜 경쟁 구도가 됐을까요? 호모 에 렉투스가 도구를 만드는 데에 대나무를 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 니다. 동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나 유럽에 비해 돌로 만 든 도구가 조잡하고, 그 수도 적습니다. 그 이유를 놓고, 일부 학자들은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가 돌 대신 당시 동남아시아에 풍부하게 자라 나던 대나무로 도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나무 도 구는 석기에 비해 지금까지 남아 있기 힘들기 때문에 도구가 없는 것 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 주장에 따르면, 호모 에렉투 스는 도구를 만들 목적으로 대나무 숲을 마구 베었고, 기간토피테쿠 스가 살 곳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 그뿐 아닙니다. 굶주림까지 겪었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는 대나무 숲에 살았지만 대나무를 주식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빨을 보면 여느 유인원처럼 다양한 먹을거리를 고루 먹고 살았죠. 특히 충치 흔 적이 많은 것으로 보아 달콤한 과일을 즐겨 먹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 습니다. 그런데 이빨을 보면 영양실조를 의미하는 에나멜 형성 부전 (enamel hypoplasia)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장기에 영양실조에 걸렸던 흔적입니다. 열대가 아무리 식물 종이 풍성하다고 해도, 킹콩 같은 기간토피테쿠스가 과일 등을 배불리 먹을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 입니다.
- 기간테피테쿠스가 살던 중기 플라이스토세는 점점 건조하고 추워 지는 추세였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는 점점 춥고 건조해지는 기후, 줄 어드는 서식지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먹을거리까 지 부족해지자 큰 몸집을 계속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 서 역사상 가장 커다란 영장류였던 킹콩은 결국 멸종하고 말았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의 이야기는 단순히 비운의 종에 대한 것만은 아 닙니다. 인간은 플라이스토세 내내 줄어드는 자원을 놓고 다른 동물 과 경쟁을 했고, 이들을 모두 제치며 세상에서 가장 우세한 종으로 살 아남았습니다. 기간토피테쿠스는 그 중 하나의 예에 불과하겠죠. 
- 뛰어난 두뇌는 큰 머리 크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류는 유난히 두 뇌 크기가 극적으로 변한 동물에 속합니다. 초기 인류의 화석을 보면, 두뇌 용량은 침팬지와 비슷한 수준인 450시시(cc) 정도밖에 안 됩니 다. 현생 인류의 3분의 1 수준이지요. 이렇게 작았던 두뇌는 약 200만 년 전 900시시로 2배 가까이 증가했고, 약 10만 년 전에는 현생 인류 평균치인 1300시시에 이르렀습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이끌었을까 요? 돌로 만든 도구는 지금부터 250만 년 전에 나타났습니다. 최초의 인류가 나타난 600만 년 전보다 200만~300만 년 더 지난 뒤의 시점입니다. 언어는 화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적어도 두뇌가 커진 다음 에 나타났을 것입니다. 두뇌 크기의 증가는 이렇게, 다른 인류의 고유 한 특징들보다 먼저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무엇보다 '지혜 로운 인간'이라는 뜻의 종명(호모 사피엔스)을 지닌 종이 아닌가요. 인류 가 지혜롭게 환경에 적응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문화와 언어를 가지게 된 기원을 뛰어난 두뇌, 그리고 큰 머리에서 찾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 였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류를 진화하게 한 최 초의 원동력까지 뛰어난 두뇌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을 인간답 게 만든 최초의 특징은 머리와 반대 방향인 다리 쪽에서 나타났습니 다(3장 '최초의 인류는 누구인가?' 참조).
- 과거에 살던 어떤 동물이 두 발로 걸었는지 혹은 네 발로 걸었는지 는 화석으로 남아 있는 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발로 걷는 동물 은 네 다리로 체중이 분산됩니다. 하지만 두 다리로 걷는 동물은 팔로 는 체중이 분산되지 않아 두 다리에 힘이 몰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체 중을 받은 관절은 크기가 커지기 때문에 쉽게 확인할 수 있지요. 따라 서 두 다리가 몸과 연결되는 엉덩관절(고관절)과 두 팔이 몸과 연결되는 어깨관절의 크기를 보면, 그 종이 생전에 몇 개의 다리를 써서 걸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초기 인류 화석으로 남아 있는 어깨관절뼈를 확인해 봤습니다. 과연 크기가 작았습니다. 체중을 지탱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반면 엉덩관절과 무릎관절이 커졌습니다. 모양도 변해서, 무릎 관절은 평평하고 튼튼해졌고, 엉덩관절은 움푹 파인 모양이 됐습니다. 웬만해서는 관절이 빠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반면 어깨관절은 그런 변화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린이의 어깨관절은 빠지기 쉽습니다. 모든 것이 체중이 두 다리로 분산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두 발로 서 있는 것과 다릅니다. 지금 일어나서 한 번 두 발로 걸어 보세요.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 다 막상 땅과 맞닿는 발은 하나뿐입니다. 그 한 발이, 정확하게 말하면 그 발의 엄지발가락이, 온몸의 체중을 모두 받습니다. 두 발로 걷는다 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한 발로 걷는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발로 서 있는 자세에서 가장 큰 문제는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다 쓰러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걸을 때와 같이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한 발로 체중을 지탱해야 한다면 몸의 중심을 안정적으로 잡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인류는 발가락, 발목, 무릎, 다리, 그리고 골반에서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엉덩뼈(골반)와 허벅다리뼈 (대퇴골) 를 연결하는 근육들을 다른 목적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는 동작에 쓰던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은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기보다는 옆으로 비틀거리는 상체를 안정적으로 잡아 주는 기능 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다리에 가해진 체중은 마지막에 엄지발가락까지 전해진 뒤에 야 다른 쪽 다리로 옮겨집니다. 체중을 온전히 견뎌야 하기 때문에, 인 간의 엄지발가락은 발가락 중에서 가장 크고 튼튼해졌을 뿐만 아니 라, 다른 발가락과 마찬가지로 몸의 앞쪽을 향하게 됐습니다. 다른 유 인원의 엄지발가락이 인간의 손가락처럼 옆을 향하고 있는 것과 대비 되지요.
- 요통의 기원, 두 발 걷기
하지만 사람이 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두 발로 걷는 일에는 대 가가 필요했는데, 말 그대로 고통이 따랐습니다. 두 발로 걸으려면 몸 통이 항상 곧추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 체중의 상당 부분이 허 리뼈와 골반뼈에 몰리게 됐습니다. 이 무게는 다시 두 다리에 몰리게 됐고, 특히 걸을 때는 한쪽 다리에 한꺼번에 몰리게 됐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허리와 무릎, 엉덩관절은 끊임없이 몸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형벌 아닌 형벌을 받게 됐습니다. 네 다리에 체중을 분산할 수 있 는 동물과는 상황이 다르지요. 인간이 유독 허리와 무릎 통증으로 고통 받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여자들의 허리는 남자에 비해 훨씬 더 무거운 짐을 평생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여자는 일생의 대부분을 임 신을 하거나 젖먹이를 안은 상태로 보내야 했습니다. 어른이 되자마자 쉴 새 없이 임신과 육아를 반복하면서 다섯이나 여섯, 많게는 열두 명 의 아이를 낳았죠. 갱년기를 지나 할머니가 된 다음에는 손주를 안아 줘야 했습니다. 허리와 다리에는 더 큰 무리가 갔습니다.
심장도 피로해졌습니다. 네 발로 걷는 짐승은 심장이 몸 위쪽에 있 습니다. 온몸 구석구석으로 피를 보낼 때 중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손쉽습니다. 예외적으로 목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기린이 있지만, 대신 머리가 몸에 비해 유별나게 작고 심장은 유별나게 커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 물론 두 발 걷기가 인류에게 고통만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류는 두 발 걷기 덕분에 다른 '인간다움'의 특성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바 로 문화입니다. 두 발 걷기는 손과 팔을 보행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자유 로워진 손과 팔은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윗몸도 함께 보행에서 해방됐습니다. 그 결과 횡격막이 자유로워졌 습니다. 숨쉬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고,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낼
수 있게 됐습니다. 목소리는 언어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구 와 언어라는, 인류 문화와 문명의 토대가 완성되었습니다.
- 두뇌가 커진 것도 역시 걷기 덕분입니다.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려 면 뛰어난 지능이 필요합니다. 언어를 사용할 만큼 복잡한 사회생활 을 하려고 해도 지능이 필요하고, 이는 곧 큰 두뇌를 의미합니다. 하지 만 두뇌는 그냥 커질 수 없습니다. 두뇌는 지방으로 이뤄진 기관입니 다. 고지방, 고단백의 식생활이 필수입니다. 이런 식생활은 도구를 이 용해 고기를 정기적으로 확보하고 섭취한 이후에야 가능했습니다. 
-  그런데 육식으로 에너지를 확보한다고 해서 머리가 바로 커질 수는 없습니다.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거든요. 우선 한정된 에너지 를 놓고 머리와 경쟁하는 다른 장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소화기 관입니다. 둘 다 커질 수는 없으니, 머리가 커지려면 소화 기관으로 가 는 에너지가 줄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국 런던 대학교 인류학과 레슬리 아이엘로(Leslie Aiello) 교수와 피터 휠러 (Peter Wheeler) 교수가 1995년 발표한 '비싼 조직 가설(expensive tissue hypothesis)'입니다. 실제 로 다양한 동물들을 비교해 보니, 과연 두뇌 크기와 소화 기관 크기는 반비례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두뇌 크기에 맞춰서 머리뼈도 자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머리뼈가 크려면 머리뼈에 연결되어 있는 근육이 먼저 작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머리뼈가 자랄 공간이 생기니까요. 머리뼈와 연 결된 근육 중 가장 큰 근육은 씹는 근육(저작근육)입니다. 이 말은, 두뇌 가 커지려면 씹는 근육이 작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흥미롭게도, 실 제로 씹는 근육에 돌연변이를 유도해서 크기를 작게 만들었더니, 동 물의 머리뼈가 지나치게 커졌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두 가지 문제를 인류 진화와 연관 지어 보겠습니다. 200만 년 전, 아 프리카에는 자연에 서로 다르게 적응한 세종의 친척 인류가 있었습니다. 바로 초식인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와, 동물들이 먹고 남은 사체찌꺼기를 먹은 호모 하빌리스, 그리고 사냥을 한 호모 에렉투스입니 다. 이 중 초식인 보이세이는 두뇌가 작은 대신(500시시) 이빨이 어마어 마하게 컸습니다. 씹는 근육도 발달해 턱뼈와 광대뼈도 엄청나게 컸습 니다. 반면 육식을 주로 한 호모 에렉투스는 상대적으로 큰 두뇌 (1000 시시)를 가진 대신, 이빨이 작고 씹는 근육 역시 작았습니다. 식습관과 두뇌 크기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유지비가 많이 드는 두뇌를 위해, 인류는 다시 동물성 단백질과 지 방을 끊임없이 확보하고 섭취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사냥과 채집 을 해야 했죠. 움직이는 동물에 대한 정보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종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류의 '무기'가 나타납니다. 바로 사회적 협동입니다. 속해 있는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서, 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정보와 그들 사이의 관계 에 대한 정보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인류의 큰 두뇌는 이런 다채로운 정보를 저장해 두고 상황에 따라 응용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큰 두뇌를 지니고 있는 진짜 이유입 니다. 두뇌 속의 뇌세포를 동시에 100퍼센트 쓰지 않더라도 많은 뇌세 포를 지니는 것, 큰 두뇌를 지니는 것이 유리합니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축적해 둬서, 유사시 빠르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동안 네안데르탈인이 말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FOXP2 유전자가 인류와는 다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들은 당 연히 게놈(유전체) 해독 결과가 나오자 FOXP2 유전자를 찾아봤지요. 연구 결과는 학자들을 한 번 더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네안데르탈인 의 FOXP2 유전자는 현생 인류와 똑같았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정 말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말을 했던 것일까요?
유전자만으로는 언어 사용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한 학자들은 다른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현 생 인류 두뇌의 핵심적인 특징은 대뇌가 좌우 비대칭이라는 점입니다. 대뇌 곳곳이 언어에 관여합니다만, 특히 중요한 부위는 좌뇌와 관련이 많습니다. 그런데 뇌가 좌우 비대칭이라면, 반드시 몸의 좌우 어느 한쪽을 더 자주 쓰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오른손잡이나 왼손잡이처럼 한손잡이가 생깁니다.
따라서 만약 네안데르탈인이 한손잡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면, 뇌가 언어를 쓸 수 있는 비대칭 구조였는지를 역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캔자스 대학교 인류학과의 데이비드 프레이어(David Frayer)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기발한 방법으로 이 아이디어를 실제 로 연구에 도입했습니다.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 화석의 이빨에 주목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이빨을 도구로 이용하기로 유명합니다. 치열을 보면 닳은 면이 울퉁불퉁 이상하게 나 있거든요. 그냥 음식물을 먹는 데에만 썼다면 위아래 이가 서로 부딪혀 닳았을 테니 닳은 면이 고르게 나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지요. 먹는 일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썼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고기나 질긴 식물 등을 자 를 때엔 한쪽을 이로 꽉 깨물고 손으로 고기나 식물의 다른 쪽을 쥡니 다. 그런 뒤에 다른 손으로 석기를 쥐고 내리 그어서 자르는 식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고기를 자르다가 석기의 방향이 조금 틀어지면 어 떨까요? 바로 옆에 있던 이빨의 표면을 긁게 되고, 이빨에 그 긁힌 흔 적이 남을 것입니다. 그 흔적의 각도를 보면 석기를 오른손으로 내리 그었는지 왼손으로 내리 그었는지 알 수 있겠지요. 기발한 연구 방법 이지요? 실제로 이 방법으로 자료를 연구한 결과, 네안데르탈인은 9 대 1로 오른손잡이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율은 현생 인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비율과 비슷합니다. 
- 결과를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8만~7만 년 전, 데니소바 지역에는 데니소바인들이 살았습니다. 이어 4만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네안데 르탈인이 진출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도구를 남기고, 적지만 인골 화석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4만 년 전에 모두 떠났고(사라졌고, 그 자리를 현생 인류가 채웠습니다. 이렇게 알타이 지역은 짧은 시간 동안 세 종의 인류가 번갈아가면서 차지했습니다.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서로 만나 자손을 남겼을까요? 현생 인류의 DNA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DNA가 포함돼 있는 것처럼, 데니소바인의 DNA에도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17퍼 센트 포함돼 있습니다. 세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관련을 맺 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인류의 이런 엄청난 다양성을 보고 나면, 현생 인류가 언젠가 한순 간에, 하나의 지역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아프리카 기원론(완전대체론, 단 일 지역 기원론)'이 과연 옳은가 되묻게 됩니다.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됐다 고 보기에는 너무나 다른, 다양한 인류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입장에 서 있습니다. 현생 인류가 한곳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홀로 세계로 진출한 게 아니라 각 지역에 존재하던 여러 인류와 만나 교류하며 동시 다발적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봅니 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광범위한 지역적 다양성의 비결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모두 현생 인류의 한 식구인 것은 물론이 고요. 이런 생각은 현생 인류가 어느 한 시점에 홀로 아프리카에서 태 어난 게 아니라 여러 지점, 여러 시점에서 다발적으로 태어났다는 생 각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아프리카 기원론의 맞수인 '다지역 연계론 (다지역 진화론)'입니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가 서로 교류하며 유전 자 이동(gene flow)을 통해 계속 하나의 종으로 진화해 왔다는 다지역 진화론은 최근의 유전학 연구 결과와도 부합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멀고 가까운 여러 친척 인류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 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자신이 속한 종의 시작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인류의 진화에 관한 여러 문제 중 가장 흥미진진하고 가장 어려운 문제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 학문과 정치
아프리카 기원론과 다지역 연계론이 한창 뜨겁게 학계를 달구고 있던 1990년대에는 급기야 개인적인 감정까지 개입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양 진영의 학 자들이 서로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은근히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프리 카기원론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최근에 기원하였다 는 점을 들어 우리 눈에 보이는 다양성이 모두 최근에 생겼으며, 우리는 모두 진 하게 피를 나눈 형제자매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불어 다지역 연계론은 인류가 서로 다른 인종으로 나뉜 지 오래되었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인종학적 인 주장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지역 연계론에 동조하는 학자 들은 인류가 서로 다른 인종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유전자 교환으로 같은 종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동포였다고 주장했습 니다. 더불어 현생 인류가 최근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전 세계로 퍼지면서 기존의 인류 집단과 피를 하나도 섞지 않고 모두 죽이거나 몰아내어 멸종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야말로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 차별적 편견과 식민주의적인 공포를 반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이 모두 정식 논문으로 발표되기보다는 세미나 장소 혹은 사석에서 오간 논쟁입니다. 서로의 경쟁 학설에 대해 논리와 자료를 벗어나 정치적인 파장이 있는 주장까지 불사하게 된 것은, 결국 당 시의 뜨거웠던 학계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논리를 근간으로 삼도록 훈련 받은 학자들도 일개 인간일 뿐임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 인류는 탄생한 뒤 가장 오랜 시간을 적도 부근의 동아프리카에서 보냈습니다. 적도 부근이므로 자외선이 강했고, 자외선을 막는 멜라 닌 색소를 많이 만들어 내는 돌연변이가 환경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원래 피부색이 검었습니다. 일부 인류는 이후 아프리카 를 떠나 전 세계로 퍼지면서 햇빛이 약한 중위도 지역에서까지 살게 됐습니다. 이때는 빙하기가 본격적으로 기세를 떨치던 때로, 구름이 많이 끼어 햇빛은 더 약해졌습니다. 멜라닌 색소가 많은 피부는 자외 선을 막아 오히려 불리해졌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자외선은 비타민 D를 합성하는 데 필수니까요. 비타민 D 합성이 안 되면 인체는 칼슘 을 흡수할 수 없게 되어서 뼈에 이상이 생기고, 생존에는 물론 자손을 낳을 때(번식)에도 큰 위험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중위도에 살던 사람들은 멜라닌 색소가 없는 돌연변이를 지니게 됐고, 피부가 하얘졌습니 다. '비타민D 가설입니다. 이 가설이 맞다면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북위권으로 진출한 200만 년 전부터 흰 피부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흰 피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화석으로 밝힐 수 없습니다. 피부는 오래된 화석에서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 해답은 유전자를 통해 알 려졌습니다.
피부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1999년에야 처음 발견돼 현재까지 10 개 이상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륙마다 분포가 다릅니 다. 피부색이 대략 비슷한 정도로 검거나 희다고 해도 그 유전적인 조 합은 다른 것이죠. 유럽인의 흰 피부는 아시아인의 흰 피부와 다른 색 깔을 띱니다. 그런데 유럽인의 흰 피부는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북쪽으로 퍼지고 나서 한참 뒤인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비로소 처음 나타났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인류가 북쪽으로 진출한 직후는 지 금으로부터 200만 년 전인데, 그보다 훨씬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비타 민D 가설이 간단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학자들은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중위도 지방에 산 이 후에도 인류는 사냥 등으로 고기와 생선을 풍부하게 먹었습니다. 이런 음식에는 비타민 D가 풍부했고, 따라서 굳이 피부로 합성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피부에 있던 멜라닌 색소를 없앨 필요도 없었기 때 문에, 흰 피부도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농경이 시작된 1 만년 전부터 이런 생활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고기와 생선 대신 곡 물을 주로 섭취하게 되면서 비타민 D를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는 상황 이 됐습니다. 그 결과, 결국 부족한 비타민을 합성하기 위해 피부로 햇빛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하게 됐습니다. 이제 자외선을 통과시켜 비 타민 D를 만들 수 있는 흰 피부가 검은 피부보다 유리해졌고, 이 사람 들의 피부는 하얘졌다는 것입니다. 농경이라는 문화적 요인이 흰 피부 의 선택을 초래한 셈입니다. 문화가 진화를 대체한 게 아니라, 반대로 진화를 촉진했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1970년대부터 뼈의 형질을 연구한 학자들을 중 심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미국 캔자스 대학교의 데이비드 프레이 어 교수는 유럽 후기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 인골을 연구한 결과 그 변화 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빠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 만 당시에는 문명과 문화의 발달로 오히려 진화가 느려진다는 생각이 주류였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런 예가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진화 사례를 주제 로 한 『1만 년의 폭발(The 10,000 Year Explosion)』이라는 책이 출판됐을 정도입니다.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뇌는 왜 아름다움에 끌리는가  (4) 2023.11.26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0) 2023.11.18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1) 2023.11.16
단 하나의 방정식  (2) 2023.11.07
나는 미생물과 산다  (3) 2023.11.05
Posted by dalai
,

- 모래 한 알 속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며,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한 시간 안에 영원을 담으라.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 생각해보라. 한때 카이사르의 폐 속에서 춤추던 분자들 중 일부가 그토록 먼 거리와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폐 속에서 춤 추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숨을 얼마나 자주 쉬는지 (대략 4초 마다 한 번씩 감안하면, 이런 일이 날마다 약 2만 번씩 일어난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다 보면, 그중 일부는 심지어 우리 몸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카이사르의 몸을 이루었던 액체나 고체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와 카이사르는 평소에 자주 만나면서 서로 키스를 나누는 친척이나 다름없다. 유명한 시인의 시에 나오는 구절을 조금 바꾸어 표현하자면, 그의 숲에 들어 있던 원자들은 당신 몸에도 들어 있다.(The atoms belonging to his breath as good as belongs to you.) [이 표현 은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의 시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에 나오는 "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내게 있는 모든 원자를 당신도 갖 고 있을 테니까.)"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옮긴이]
- 오늘날 우리가 엄청나게 높은 기압에서 살지 않는 또 한 가지 이 유는 우주에서 날아온 소행성(그리고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면서 초기 의 공기를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가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소 행성 충돌이 무조건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다주기만 했던 것은 아니 다. 게다가 작은 소행성들은 내부의 증기가 빠져나오면서 지구의 대 기에 기체를 추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큰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지구 는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충돌이 일어날 때 소행성이 가진 운동 에너지 중 상당량은 열로 변했는데, 이 열 때문에 대기 중의 기체가 끓어올라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갔다. 나머지 운동 에너지는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어내 더 많은 공기를 우주 공간으 로 빠져나가게 했다. 
- 세인트헬렌스산이 아름다운 원뿔을 쌓아올리는 데에는 2000년이 걸렸지만, 그것을 날려보내는 데에는 겨우 2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세인트헬렌스산은 순식간에 높이가 2950m에서 2550m로 낮아졌고, 그 과정에서 3억 6000만 톤의 물질을 날려보냈다. 검은 연기 기둥은 26km 높이까지 솟아올랐고, 올라가는 도중에 번개를 만들어냈다. 분 출된 먼지는 미국 전역과 대서양으로 퍼졌으며, 결국에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 17일 뒤에는 서쪽에서 세인트헬렌스산을 향해 밀려왔다. 이 분화에서 분출된 전체 에너지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2만 7000개에 해당하는 양인데, 분화가 아홉 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니 1초 마다 원자폭탄이 1개씩 폭발한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세인트헬렌스산의 분화는 화산 분화 규모치고는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분화로 약 4km2의 암석이 증발하기는 했지만, 1883년에 분화한 크라카토아 화산의 8% 에 불과하고, 1815년에 분화한 탐보라 화산의 3%에 불과하다. 또한 탐보라 화산 분화는 전 세계적으로 햇빛의 양을 15%나 감소시켜, 강 력한 아시아의 몬순을 교란시키고 기온을 크게 떨어뜨렸다. 그 결과 여름철에도 뉴잉글랜드 지방에 눈이 내리게 했던 것으로 악명 높은 1816년의 '여름 없는 해'를 초래했다. 그런데 탐보라 화산도 예컨대 210만 년 전에 일어나 와이오밍주의 암석 물질 2438km를 성층권으 로 올려보낸 옐로스톤 분화처럼 역사상 정말로 큰 분화 사건들에 비 하면 아무것도 아니다.(이 초화산은 언젠가 다시 찾아와 미국 대륙 중 상당 부분을 재 속에 파묻어버릴 것이다.)
- 지구는 탄생 후 수억 년 동안 도저히 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설사 발이 타지 않고 설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 하더라도,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체들 때문에 숨을 전혀 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산 가스는 단기적으로는 유독한 것이 었지만, 화산은 질소가 풍부한 기체를 뿜어냄으로써 결국은 경이롭게 도 지구의 공기를 구원했다.
무게로 따질 때 우리 몸의 약 93%는 세 가지 원소(산소, 수소, 탄 소)가 차지하는데, 이 비율은 다른 생명체들에서도 비슷하다. 또, 세포 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이들 외에 극소량만 필요한 몰리브데넘(몰리브 덴)을 포함해 수십 가지 원소가 더 필요하다. 뭔가 아주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동물과 식물은 이 원소들 중 대부분을 주위 환경에 서 손쉽게 얻을 수 있다.
- 그런데 질소는 예외적인 원소이다. 질소는 우리 몸에서 네 번째로 많은 원소로, 체중의 약 3%를 차지한다. 그리고 공기 중에 가장 많 이 존재하는 성분이기도 한데, 우리가 매일 숨 쉬는 공기 분자 5개 중 4개가 질소이다. 그렇다면 질소를 우리 세포에 공급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닐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질소는 아주 풍부하게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질소 원자를 얻으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을 포함해 대부분의 동물은 기체 상태의 질소를 그대로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은 다른 형태로 바뀐 질소만 섭취해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지구 역사에서 처음 수십억 년 동안 이에 필요한 재주를 터득한 생물은 몇몇 특별한 미생물뿐이었다.
- 하지만 20세기 초에 호모 사피엔스가 세균이 아닌 생물로서는 최초로 스스로 질소를 만드는 생물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위업을 이루 는 데 큰 공을 세운 두 사람은 모두 독일인이었고 공업화학자였다. 두 사람은 이 발견으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노벨상을 받았다. 그리고 둘 다 훗날 국제 전범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 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을 미워했다 하더라도, 이들은 하 늘에서 7번 원소를 끌어내려 우리 몸속으로 집어넣는 위업을 이루었 다. 프리츠 하버Fritz Haber와 카를 보슈Carl Bosch가 이룬 화학적 마술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공기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
- 대부분의 분자들은 단일 결합 (X-Y)이나 이중 결합(X=Y)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질소 분자 는 자연에서 가장 강하고 끊기가 가장 어려운 결합 중 하나인 삼중 결합(N≡N)으로 이루어져 있다.(질소 약 30g에 들어 있는 삼중결합을 모두 끊으면, 45만 kg의 아령을 바닥에서 38cm 들어올릴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에 너지가 나온다.) 이 강한 삼중 결합은 오늘날 질소가 대기에서 압도적 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질소는 대부분의 화산 분화에서 극소량만 분출되는 성분으로, 분출되 는 다른 기체들에 비해 그 양이 훨씬 적다. 하지만 화산 기체는 대부 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반면 서로 반응하거나 자외선에 분해되어), 질소의 삼중 결합은 모든 분해 시도에 꿋꿋하게 버텨낸다. 그래서 각 각의 분화에서 분출되는 질소의 비율은 아주 낮지만, 오랜 시간이 지 나는 동안 대기 중에서 질소가 차지하는 비율은 꾸준히 증가한다. (그 리고 화산 기체인 암모니아가 분해될 때에도 추가로 N가 생긴다.) 바꿔 말 하면, 질소가 오늘날의 대기에서 주요 성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화산들이 뿜어낸 나머지 모든 기체 성분보다 더 오래 지속되기 때문 이다.
- 거시적 차원에서 이것은 지구의 대기를 다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두 번째 대기가 혹독한 화산 가스로 들끓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그런데 약 20억 년 전에 이 혹독한 기체 성분들 중 충분히 많은 양이 분해되어(그리고 충분히 많은 질소가 축적되어) 새로운 대기(세 번째 대기)라고 부를 만한 것이 생겨났다. 질소를 풍부하게 포함한 이세번 째 대기가 훨씬 고요하고 편안한 성질을 지녔다는 사실은 생물에게 아주 중요한데, 질소는 다른 기체들과 달리 생명체의 분자들을 공격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공기 중의 질소는 '너무' 고요하고 너무 소극적이었다. 우리 몸에는 질소 원소가 상당량 필요하다. 우리 몸의 모든 단백질 조각의 뼈대에는 다수의 질소 원자들이 필요하며, 우리 몸의 세포 30조 개 모두에는 DNA 염기가 각각 30억 개씩 들어 있는데, 이 모든 염기에도 질소 원자가 몇 개씩 포함돼 있다. 하지만 정작 세포에 질소를 공급할 때가 되었을 때, N,는 삼중 결합 때문에 좀체 반응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로 잔인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질소 기체의 바다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머리 위에는 늘 지면 과 우주 공간 사이에 수 '톤'이나 되는 질소가 쌓여 있다. 하지만 우리 는 그것을 전혀 이용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목이 말라죽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질소는 어떻게 공기에서 빠져나와 우리 몸으로 들어갈 까? 뭔가가 질소를 '고정'해야 한다. 즉, 삼중 결합을 끊어 질소를 덜 냉담한 형태로 바꾸어야만 한다. 번개는 공기 중에서 질소-산소 화합물을 만듦으로써 질소를 약간 고정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 정 질소는 질소 고정 효소nitrogenase라는 특별한 효소가 있는 세균의 도 움으로 만들어진다. 효소는 특이한 반응이 일어나도록 돕는 생물학 적 구조인데, 질소 고정 효소 분자에서 중요한 부분은 철과 황과 몰리 브데넘 원자들로 이루어진 덩어리이다. 이 원소들은 작은 생명의 아 가리처럼 삼중 결합을 단계별로 잘라낸다. 여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또한 상당히 많은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는데, 물 분자 16개 가 희생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질소 고정 효소가 N≡N을 분해하고, 질소 원자들이 다시 합쳐지기 전에 효소가 질소 원자에 수소 원자를 몇 개 결합시킨다. 이렇게 해서 (짜잔!) 암모니아 분자가 만들어지는 데, 이 분자는 단일 결합만 가지고 있어 단백질이나 DNA로 아주 쉽 게 전환된다.
- 질소 고정 세균은 특정 식물의 뿌리에 붙어 살면서 영양분을 얻 는 대신에 자신이 만든 암모니아를 내놓는데, 이것은 가장 좋은 형태 의 공생이라고 할 수 있다. 질소를 고정하는 다른 생물들도 흙 속에서 독립적으로 일을 하고, 식물이 그 산물을 흡수해 이용한다. 동물과 균 류 같은 생물은 이 식물을 먹거나 부패한 식물 물질을 섭취함으로써 고정된 질소를 얻는다.(먹이 사슬에서 맨 꼭대기에 위치한 육식 동물도 여 기에 포함되는데, 육식 동물은 식물을 먹고 사는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다. 심 지어 파리지옥 같은 육식 식물도 주로 질소를 얻기 위해 벌레를 잡아먹는다.) 그렇다면 모든 생물의 몸속에 들어 있는 질소는 결국 이 세균들로부 터 나온 것이다. 이들이 없다면, 동물이나 식물은 단 한 종도 존재하 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생태계에서 부양할 수 있는 생물의 양은 그 생태계의 토양에 포함된 질소의 양에 제약을 받는다.
- 그렇긴 하지만, 지난 수천 년 동안 농부들은 토양의 이러한 제약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개발했다. 농부들은 뿌리에 질소 고정 세균이 많이 모여 사는 콩 같은 식물을 이용해 윤작을 했다. 또, 분해되면 고정된 질소가 생기는 노폐물인 오줌과 거름을 논밭에 뿌 렸다. 일부 똑똑한 농부들은 심지어 거름에 피나 그 밖의 썩는 물질을 섞어 그 질을 높였다. 거대한 갈색 식빵 덩어리처럼 보이는 이 두엄 더미들에서는 열이 발생했다. 농부들은 두엄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면 이제 그것을 농작물에 뿌려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가축의 분뇨만으로는 두엄을 충분히 만드는 데 한계가 있 었다. 19세기가 되자 대다수 선진국들은 질소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 해 국경 밖으로 눈길을 돌려야 했다. 영국은 인도에 크게 의존했는데, 가난하고 계급이 낮은 인도 노동자들은 소똥과 오줌을 발로 밟아 으깨 수출용 두엄을 만들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섬들에서 구아노(새똥이 바위 위에 쌓여 굳어진 덩어리)를 채굴하기 시작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제도-페루 앞바다에 있는 친차 제도". 에서 구아노 거래를 통해 얻는 이익이 아주 커지자, 남아메리카의 여 러 나라들은 이 새똥 무더기를 차지하려고 전쟁까지 벌였다. 구아노 는 미국을 대대적인 식민지 경영에 뛰어들게까지 했다. 1856년, 미국 의회는 구아노 제도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에 따라 모든 미국 시민 은 전 세계의 점유되지 않은 모든 섬 중에서 구아노가 조금이라도 있 는 섬이라면, 미국 정부를 대신해 그곳을 점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은 미국이 카리브해와 태평양의 작은 섬 100여 개를 점령하는 데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 이 중 많은 섬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황량한 바위섬에 불과했지만, 존스턴 제도와 미드웨이 제도를 비롯해 여러 섬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중한 군사 기지가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 기 100여 년 전에 구아노를 얻기 위한 미국의 탐욕이 없었더라면, 연 합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에게 승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최초의 생명체는 아마도 해저 열수 분출공 근처에서 나타나 그곳의 황을 사용해 대사를 했을 것이다. 그런 생물을 혐기성 세균"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비슷한 미생물이 살고 있다.(한 예를 들자면, 아침 입 냄새도 바로 이 세균이 원인이다.) 약 30억 년 전에 혐기성 세균 중 한 갈래가 해저의 열이 아니라 햇빛을 이용해 살아가는 남세균cyanobacteria 으로 진화했다. 남세균(남조류라고도 함)이 햇빛에서 에너지를 얻는 광합 성 과정을 맨 처음 시작한 생물은 아니었다. 사실, 햇빛을 이용한 미 생물은 여러 종류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각자 다른 파장의 빛 을 이용하기 위해 서로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 하지만 남세균의 독특한 점은 햇빛을 이용한 것 자체가 아니라, 햇빛 을 이용해 물 분자에서 전자를 떼어낸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전자 는 화학 반응을 이끈다. 남세균은 전자를 얻기 위해 황처럼 다소 희귀 한 원소에 의존하는 대신에 지구에서 가장 풍부한 분자들 중 하나에 서 전자를 실컷 얻었고, 그에 따라 번식 속도가 크게 증가했다.
햇빛을 유용한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은 생물학적 안테나처럼 하 늘에서 빛을 흡수하는 초록색 분자인 엽록소에서 시작된다. 그 후의 생화학은 다소 복잡하다. 하지만 남세균은 기본적으로 햇빛을 이용해 특정 분자들을 분해한 뒤, 에너지를 거기에 저장했다가 나중에 끄집 어내 쓸 수 있는 분자들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남세균은 물 분자를 H와 O로 분해한 뒤, 이 조각들을 CO를 비롯한 여러 분자와 결합시 켜 포도당 같은 당을 만든다.
- 산소는 오늘날에는 생물에게 이로운 물질로 보이지만, 그 당시 생물에게는 독성 물질이었다. 자외선이 O'에 충돌하면 산소 분자가 분 해되어 자유 라디칼로 변하는데, 자유 라디칼이 DNA와 단백질을 자 르면서 갈기갈기 찢어놓는 게 문제였다. 산소는 또한 많은 질소 고정 세균이 질소를 고정하는 능력도 파괴했는데, 산소가 질소 고정 효소 의 중심부에 있는 철 원자를 떼어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산소는 생 명체에게 아주 유독한 물질이었다.
그 당시의 섬세한 미생물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산소는 처음에 대기 중에 쉽게 축적되지 않았다. 산소는 물속과 공기 중에서 만나는 모든 것(질소 기체만큼은 예외)과 아주 활발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특 히 바닷속의 산소는 물속에 녹아 있는 철과 반응해 녹이 슨 침전물을 만들었다. 이 작은 조각들은 바닥으로 가라앉아 수천 년 이상 축적되 면서 호상 철광층(바닷속에서 산소와 철의 반응으로 생긴 산화철이 침전되어 생성된 띠 모양의 철광층)이 되었다. 이 불그스름한 철광층은 그 시대의 해저가 솟아올라 육지가 된 세계 각지의 노두(광맥, 암석이 나 지층 따위가 지표면에 드러난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이 철광층에는 전 세계 철 매장량의 90%가 들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미생물 덕분에 생겨났다.
물에 철이 존재하는 한, 대기의 산소 오염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 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남세균은 바다에서 철을 점점 없앴고, 철이 고갈되자 상황이 아주 심각하게 변했다. 바다에 산소가 축적되기 시 작했고, 그곳에 사는 생물들이 서서히 죽어갔다. 그러다가 산소는 거 품을 이루며 위로 솟아올라 대기로 침입했는데, 니오스호에서 솟아오 른 치명적인 기체 구름에 해당하는 사건이 미생물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수억 년에 걸쳐 일어난 이 산소 축적을 과학자들은 산소 급증 사건Great Oxygenation Event이라 부른다.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대폭발)과 달을 탄생시킨 대충돌처럼 이 이름은 절제된 표현의 극치를 보여준 다. 지구상의 생명이 이보다 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한 적은 일찍이 없 었다. 이것을 대학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 때문 에 생명의 모든 가지와 잔가지가 멸종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 미토콘드리아는 산소와 고등 생물 사이의 연결 관 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동물이 살아가는 데 산소가 필요하 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도 알지만, 동물에게 '왜' 산소가 필요한지 그 이 유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 짧게 답한다면, 미토콘드리아가 포도당 같은 당을 분해해 에너지를 추출하는 과정에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산소가 없어도 우리 세포는 포도당을 약간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포도당에서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면(그 골수까지 뽑아내려면), 미토콘드리아는 산소를 이용해 포도당을 분해 해야 한다.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배터리가 다 소모되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 높은 산소 농도 때문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동물 집단은 아마도 곤충일 것이다. 곤충은 폐가 없으며, 대부분(특히 작은 종들)은 산소를 들이마실 수 없다. 대신에 외골격에 있는 숨구멍을 통해 산소가 세포 속으로 스며든다. 이 설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곤충의 몸이 아주 크게 성장하기 전까지는 표면적이 부피보다 더 느리게 증가하는 것 은 기하학적 사실인데, 어느 시점에 이르면 작은 숨구멍으로는 산소를 충분히 빨아들일 수 없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곤충이 작은 이유 는 이걸로 설명할 수 있다. 몸집이 커지면, 질식해 죽고 말기 때문이 다. 하지만 산소 농도가 35%이던 시절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 여행자가 3억 년 전에 웜홀을 통해 지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면, 길이가 1m나 되는 노래기, 갈매기만큼 큰 잠자리, 타이어만 한 거 미 등을 보았을 것이다. 곤충 세계의 거인족에 해당하는 이들은 모두 산소 덕분에 이렇게 큰 몸집을 가질 수 있었다.
현재의 산소 농도에서 사람은 4초마다 한 번씩, 하루에 약 2만 번 숨을 쉬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24시간 동안 1024 (1,000,000,000 ,000,000,000,000,000)개나 되는 산소 분자를 들이마신다는 뜻이다. 지 구에는 70억 명이 살고 있고, 게다가 살아가는 데 산소가 필요한 다 른 생물도 엄청나게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동물 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만약 지구에서 모든 식물과 산소를 만드는 세균이 내일 사라진다면, 인류와 그 밖의 동물들은 1000년이 지나지 않아 모두 질식해 죽을 것이다. 진화하는 데 걸린 시간에 비하면 100만분의 1도 안 되는 시간에 지구에서 지적 생명체 가 사라지는 것이다.
다행히도 식물과 남세균은 매일 우리의 산소 예산을 다시 채워준 다. 서로 다른 생명체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모 든 것이 아주 아름답게 균형이 맞춰져 있다. 식물은 일반적으로 이산 화탄소와 물을 흡수해 당과 산소를 만든다. 동물은 일반적으로 당과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와 물을 만든다. 음과 양, 정과 반이 조화 롭게 작용하면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라부아지에처럼 화학적 회계를 까다롭게 따지는 사람조차 여기서 아무런 결함을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는 물리학자들이 자연의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대칭과 자 연의 아름다움을 언급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O/CO, 대칭에서 훨씬 큰 경외감을 느낀다. 이것이 진화 하기까지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훨씬 많은 부 분들이 관여했고, 자칫 일이 어그러져 모든 것이 잘못될 수 있는 길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떡갈 나무, 극락조, 남세균과 우리를 비롯해 모두가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 마취의 불가사의
일산화이질소와 에테르, 클로로포름은 모두 단일 약품이자 단일 화합물이다. 오늘날 마취제는 대개 각각 다른 생리적 기능을 겨냥한 여러 약품을 혼합해 사용한다. 어떤 것은 호흡을 느리게 하고, 어떤 것은 근육을 마비시키며, 어떤 것은 불안을 가라앉히거나 기억 형성을 방 해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약품들의 작용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셈인데, 이 약품들이 혈압과 체온과 그 밖의 십여 가 지 신체 징후에 정확하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측정할 수 있기 때 문이다.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는 이 약품들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 이 약품들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소 무서운 상황이다. 우리는 마취제 성분이 지방질 뇌 조직에 우선적으로 녹아들며, 신경세포의 기능에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는 게 별로 없다................ 마취제는 의식에 혼란을 초래하는데(기본적으로 의식을 일시
중지시킨다), 애초에 의식의 작용 방식에 대해 우리가 아는 지식이 어 렴풋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게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에 여러 연구를 통해 일부 수수께끼가 풀렸다. 한 가 지 놀라운 사실은 뇌가 마취제의 영향으로 그냥 기능을 멈추는 게 아 니라는 점이다. 마취제를 잔뜩 투여받고 수술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생각해보자. 외과의가 뭔가를 잘라내고서 "아이고!"라고 외치면, 환자 의 고막에 그 소리가 부딪치고, 뇌에서 청각을 담당하는 부분은 여전 히 활발하게 활동한다. 냄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외과의가 몸에 탈 취제를 뿌리는 걸 깜빡했다면, 환자의 뇌에서 후각 중추는 그 냄새를 감지한다. 마취 상태에서도 우리는 주변 세계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 는게 아니다.
- 그렇지만 마취는 인지 과정의 다음 단계들을 방해한다.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의 경우, 소리와 냄새는 뇌의 다른 부분들로 거침없이 나 아가 어떤 반응("끄악!" 또는 "ㅇㅇ.......")을 일으킨다. 하지만 마취 상태 에서는 이 신호들은 다른 부분들로 나아가지 못하고, 나머지 뇌 부분 들은 신호들을 전혀 듣지 못한다.(신경과학자는 환자의 뇌가 그러한 신호 를 받긴 하지만 지각하진 못한다고 표현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취제는 뇌를 완전히 정지시키진 않지만, 뇌의 각 부분들 사이의 대화를 단절 시킨다.
이 연구들은 또한 마취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밝히는 데에도 도움 을 주었다. 직관적으로는 마취가 그냥 서서히 '풀리면서' 환자가 깊 은 마취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 돌아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뇌는 약간 비정상인 단계에서 조금 더 나은 단계로 양자 도약을 하며 나아가는데, 각각 몇 분씩 지속되는 그런 단계는 모두 6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과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알까? 각 단계에서 나타나는 뇌파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마취 상태에서 기본적인 감각 신호들은 짧게 지속되는 저주파 펄스(단순한 신호)로 나타난다. 환자 가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하면, 뇌의 각 부분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늘어나면서 고주파 뇌파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 호들은 금방 사라지는 대신에 봇물 터지듯 쏟아지면서 서로 먼 지역 들 사이를 오간다. 환자가 완전히 깨어나 뇌 전체가 윙윙거릴 때까지 신호들의 복잡성은 점점 증가한다.

- 놀랍게도 방귀를 이루는 가스 중 99% 이상은 아무 냄새가 없다. 심지어 메탄조차 그 악명에도 불구하고 냄새가 없다. 방귀의 고약한 냄새는 대부분 몇몇 미량 성분에서 나온다. 썩은 달걀 냄새가 나는 황화수소 (HS), 썩은 채소 냄새가 나는 메탄티올(CH,SH), 아주 역겨울 정도로 달 콤한 냄새가 나는 다이메틸설파이드(C,HS) 등이 그런 성분이다. 뭉뚱그 려 휘발성 황화합물이라고 부르는 이 성분들 역시 포식한 세균의 배 속 에서 생겨난다. 이 성분들은 구취를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 해서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 방귀는 부분적으로는 공기이다. 우 리가 음식이나 물을 삼킬 때마다 공기도 몇 밀리리터씩 삼킨다. 이 중대 부분은 트림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일부는 위와 창자로 새어들어 가며(특히 누워 있을 경우에). 거기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방귀 성분 중 약 75%는 창자에 사는 세균이 발효라는 과정을 통해 만 든다. 발효라고 하면 흔히 맥주를 떠올리지만, 맥주 말고도 발효와 관련된 현상은 아주 많다. 탄수화물이 소화되어 더 작은 대사 산물로 분해되는 곳에는 으레 발효 과정이 관여한다. 창자에서는 방귀 발효 세균이 탄수화 물 사슬을 삼켜 이산화탄소와 수소, 메탄으로 분해한다. 그런 다음, 미생 물은 이 성분들을 토해내 우리 창자를 가스로 가득 채운다. 가스가 많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식품들은 위와 창자에서 잘 분해되지 않는 탄수화물 (예컨대 우유에 들어 있는 젖당과 양배추와 브로콜리에 들어 있는 라피노즈)을 포함하고 있어 창자에서 미생물에게 성대한 만찬을 제공한다. 평균적인 어른은 하루에 1.5L의 가스를 약 20회에 걸쳐 방귀로 내보낸다. 하지만 이 수치는 크게 변할 수 있다.
- 노벨의 건강은 늘 좋지 않았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급격히 무너졌 다. 나이트로글리세린 증기를 들이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오래전부터 두통을 앓았는데, 많은 공장 노동자들도 불평하던 질환이었다. 나이 트로글리세린이 몸속에서 대사되면 일산화질소(NO)가 생긴다. 일산 화질소는 혈관을 확장시키기 때문에 머리에 혈액이 많이 흘러들어 머 리를 때리는 듯한 두통을 야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 면 내성이 생기지만, 노벨은 그런 면역이 생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은 금요일 오후마다 모자에 두른 띠에 나이트로글리세린을 묻혀 주말 동안 그 냄새를 조금씩 맡았는데, 내성을 유지해 월요일 아침에 두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노벨은 두통 외에 관상 동맥에 플라크가 축적되어 생기는 협심증 도 있었다. 협심증에 걸리면 산소가 심장 근육에 도달하지 못해 심한 흉통을 겪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벨이 마침내 치료를 위해 병원 을 찾아가자, 의사는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처방했다. 나이트로글리세 린은 혈관을 확장시키므로, 두통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소량만 투 여하면 관상 동맥을 확장시켜 산소 부채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노 벨의 공장에서 일하던 일부 노동자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흉통이 있 는 사람들은 월요일 아침의 두통을 두려워한 사람들과 달리 얼른 작업장에 가길 원했다. 나이트로글리세린 증기는 공짜 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 벨은 처음에 나이트로글리세린 투여를 거부했다. 그러지 않아도 자신 의 생각과 사업을 지배하고 있던 그 물질을 일부러 몸속으로 집어넣 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노벨도 어쩔 수 없이 이 기묘하고 치명 적인 물질을 자신의 심장으로 집어넣었다.
- 다양한 버전의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대부분의 버전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물이 반쯤 담긴 그릇에 왕관을 집어넣고 수위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측정함으로써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다 음에는 똑같은 무게의 순금으로 동일한 과정을 반복했다. 만약 두 경 우에 물이 올라간 높이가 서로 다르다면, 대장장이가 금 일부를 빼돌 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시나리오에 이의를 제 기하는데, 전형적인 그리스 그릇을 사용했을 때 두 경우의 수위 차는 겨우 0.5mm에 불과해 맨눈으로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실제로 한번 실 험해보라)이라고 주장한다. 대신에 아르키메데스는 다음과 같은 방법 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르키메데스는 물이 물속에 잠긴 물체 에 위로 떠오르는 부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았다.(우리도 수영을 할 때 이 힘을 느낀다.) 물체의 부피가 클수록 부력은 더 커진다. 그래서 아 르키메데스는 저울을 찾아 왕관과 순금 덩어리를 양쪽에 놓고 균형 을 맞춘 뒤, 그것을 몽땅 물속에 넣었다. 왕관의 무게는 순금 덩어리 와 정확하게 똑같다.(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저울이 균형을 이룰 리가 없 다.) 하지만 만약 왕관에 은(금보다 밀도가 낮은 물질)이 섞였다면, 왕관 의 부피는 순금 덩어리의 부피보다 더 클 것이다. 부피가 더 큰 왕관 은 물속에서 부력을 더 많이 받는다. 저울에서 한쪽에 부력이 더 많이 작용하면, 저울은 더 이상 균형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저울을 물속 에 넣으면, 왕관이 있는 쪽이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유레카! 따라서 대장장이가 금을 빼돌린 게 확실하다.
- 이것과 같은 실험은 오늘날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고 부르는 원리를 낳았다. 첫째, 물속에 잠긴 물체는 부력을 받는다. 둘째, 물체의 부피가 클수록 물체가 받는 부력은 더 크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력의 크기는 그 물체가 밀어낸 액체의 무게와 똑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기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얼핏 보기에는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다. 18세기에 공기도 일종의 유체이며 따라서 물체에 부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 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부력을 느끼지 못하고 공중으로 둥둥 떠오 르지 않는 이유는 그 힘이 너무 작은 반면, 우리 몸의 밀도는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기 속에서도 분명히 부력이 작용한다. 실제 로 공기 중에서 잰 몸무게는 진공 속에서 잰 것보다 아주 약간 덜나간다. 기구처럼 부피가 크고 밀도가 작은 물체는 이 부력을 강하게 느 낀다. 물론 기구와 거기에 매달린 화물(곤돌라 같은)의 무게가 물체를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부력과 맞선다. 그리고 기체 자체의 무게도 생각해야 한다. 즉, 기구가 하늘로 날아오를 만큼 충분 한 양력이 있는지 없는지 계산할 때에는 구피에 집어넣은 기체의 무 게도 무시해선 안 된다. (이 기체는 양력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자체는 '공짜' 화물이 아니다. 기체도 전체 무게 중 일부를 차지하기 때문이 다.) 수소처럼 가벼운 기체가 기구에 유용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수소 는 무게가 아주 가벼워 중력이 큰 힘을 미칠 수 없다. 그래서 부력은 중력을 뿌리치는 데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된다.
- 20세기 초가 되자 대부분의 도시들에서 냄새가 없고 산소를 빼앗지 않으 면서 더 밝은 빛을 내는 전구가 가스등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전구는 더 현대적인 기술처럼, 즉 진행되고 있던 발전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다음 단 계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석탄 가스가 나무나 연기 없이 순 수한 불을 제공했다면, 전구는 심지어 불 없이도 순수한 빛을 제공했다.
그래도 전구 생산업체는 그 설계에서 기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 다. 대부분의 전구 안에 들어 있는 필라멘트는 가느다란 금속(주로 텅스텐)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속을 통해 전류를 흘려주면 필라멘트에서 빛이 나오지만, 그와 동시에 필라멘트가 가열된다. 그래서 전구 안에 산소가 있 으면 뜨거운 금속이 타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구 생산업체 는 전구에서 공기를 모두 빼내 그 안을 진공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 만 이 문제를 해결하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뜨거운 금속 필라멘트가 아 주 낮은 압력에서 서서히 증발하면서 전구 내부를 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용하는 전구는 대부분 먼저 그 안의 공기를 뽑아낸 뒤에 질소나 다른 비활성 기체로 채운다.
전구가 불꽃을 없앴다면, 오늘날의 일부 조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필 라멘트마저 없앴다. 노란색 나트륨 가로등의 기본 원리인 증기 조명이 그 런 예이다. 증기 조명은 19세기의 가스등과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데, 가스등은 화학 반응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스등의 경우, 메탄 분자와 수 소 분자의 내부 결합이 끊어지면서 열과 빛이 나오고 새로운 물질이 생긴다. 증기 조명의 경우에는 결합이 끊어지지도 않고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 지지도 않는다. 대신에 나트륨 원자 기체에 전기를 흘려주어 나트륨 원자 를 들뜬상태로 만든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트륨 원자에 있는 전자들 을 들뜬상태로 만든다. 그러면 전자들은 더 높은 에너지 준위로 올라갔다 가 잠시 후에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전자가 높은 에너지 준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과정에서 광자가 방출되는데, 이것이 밖 으로 퍼져나와 우리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어두운 곳의 구덩이 를 피해갈 수 있다.
네온등은 전자를 들뜬상태로 만드는 바로 이 과정을 통해 빛을 낸다. 네온등을 만들 때에는 원하는 색깔에 따라 여섯 종의 비활성 기체 중 하 나를 골라서 사용할 수 있다. 유리관에 크립톤이나 제논 혹은 다른 비활 성 기체를 채운 뒤 전류를 통해주기만 하면 된다. 프랑스의 저온화학자
- 조르주 클로드Georges Claude가 1912년에 파리의 한 이발소에 최초의 네온 사인 광고 간판을 팔았고, 그 뒤를 이어 베르무트(포도주에 향료를 넣어 우 려 만든 술) 옥상 광고판을 팔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클로드는 파리 오 페라 극장의 입구 통로를 밝히는 일도 맡았고, 그곳에서 추가로 여러 가 지 주문을 받았다. 하지만 네온등이 그 직후에 바로 크게 성공한 것은 아 니었다. 클로드는 1920년대에 파산 직전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1960년에 죽을 때에는 아주 큰 부자였다. 기묘하게도 초기의 많은 컴퓨터와 계산기 는 디스플레이에 네온등을 사용했는데, 네온등은 전통적인 전구보다 에 너지를 덜 소비하고 쉽게 과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조명이 흔하게 사용되기 이전 시절에 사람들은 인공조명을 가끔 '빌린 빛'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표현처럼 들린다. 마 치 햇빛 일부를 훔쳐와 어둠 속으로 몰래 가져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표현 이다. 물론 지금은 우리는 밤중에 빛을 좀 더 차단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광공해가 별들을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고, 창문 밖의 가로등이 수면을 방해한다고 불평한다. 어둠 자체가 현대 세계의 소중한 상품이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경이롭게 여길 만한 반전이다.
- 우리는 핵무기 시대를 돌아볼 때, 방사능 오염 우유와 책상 밑으 로 숨는 어린이를 떠올린다. 하지만 핵무기에 대한 일반적인 공포가 처음부터 곧장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전반 만 해도 사람들은 핵무기에 콧방귀를 뀌거나 심지어 웃어넘기기까지 했다. 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대신에 크로스로드 작전과 311번 돼지를 떠올렸다. 돼지가 원자폭탄 폭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원 자폭탄이 그렇게 무서울 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무사안일한 태도는 최대한의 핵무기를 최대한 빨리 시험 하려는 미국 정부의 목표와 잘 부합했다. 군부는 그 후 20년에 걸쳐 200여 회의 핵실험을 재빨리 실시했고, 우리는 아직도 그 영향을 받 으면서 살고 있다.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아직도 이들 폭탄에서 나온 방사성 원자들을 들이마시고 있다.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0) 2023.11.18
인류의 기원  (0) 2023.11.17
단 하나의 방정식  (2) 2023.11.07
나는 미생물과 산다  (3) 2023.11.05
세계 그 자체  (1) 2023.10.21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