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갈 용기

심리 2018. 10. 22. 08:09

- 아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 맨 처음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통을 예감해서일까? 플라톤은 말한다. "어떤 생물에게든 태어난다는 것은 애초에 괴로운 일이다" 그리스인에게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고 그 다음으로 행복한 일은 태어나서 하루빨리 죽는 것.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오래살면 살수록 괴로운 일 또한 겪을 수밖에 없다. 슬픔과 괴로움도 늘어난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은 일찍 죽는 게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말은 빨리 죽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나온게 아님. 오히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이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위해 나온 말일 것이다.
-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속성화나 의미부여가 지나치게 자의적인 경우가 많음. 외면당한 사람은 그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피하기 위한 이유가 되게끔, 현재의 대인관계 상태를 외면당했다고 해석.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외면당했다고 해석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자신에게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건데, 그 판단이 올바른지는 늘 검증할 필요가 있다
- 말이나 말을 만들어내는 마음은 권위나 권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유로운 것이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 말은 아들러의 다음 말과 상통. "인정받지 못하는 권위는 자기를 인정하도록 강요한다. 권위는 강제적 영향력이 아닌 공동체감성에 기초해야 한다." 하지만 타자와의 공존, 공생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혹은 패거리)만의 안정을 도모하며 권위나 권력을 성취하려는 욕구가 극도로 고조되는 경우가 있다. 이에 아들러는 경고한다. 그러한 경우 용기는 무례함으로, 공손은 비굴함으로 변할 수 있으며, 애정은 타자의 양보와 굴욕, 복종을 강요하는 책략이 될 수 있고, 우월해지려는 은밀한 욕망이 숨어 들어가기 마련이다."
- 아들러 심리학에서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동이란 의미.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을 경우, 공부하지 않은 결과는 본인에게 미칠 뿐 다른 사람이 곤란한 것은 아님.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하지 않는 것을 적절한 행동이라 할 수는 없다. 이런 행동을 부적절한 행동과 적절한 행동 사이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중성적 행동이라 함. 이같은 중성적 행동이라면 기본적으로 본인의 의지를 존중하지만, 절차를 밟으면 공동의 과제로 삼을 수 있다. "요즘 네가 공부하지 않는 것 같은데, 같이 한번 이야기해보는 게 어때?"라는 식으로 말을 꺼낸다. 이때 요청을 거절당하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언제든 상담해줄 테니까 말하고 싶을 때 말해"라며 물러설 수밖에 없다.
- 사고는 영혼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소리를 내지 않고 행하는 대화라고 한다(플라톤, 소피스테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그런 대화를 외화하고 등장인물 간의 논쟁 형태로 구조화한 것으로 대화펴이라는 형식을 이어받았다. 플라톤은 이런 대화 방식을 변증술이라고 하며, 단지 회화나 연설인 수사술(레토릭, 수사법)과 구별했다. 그것은 화자가 일방작으로 길게 이야기하는 수사를 주고받는 언명이 아니라 대화자끼리 상호적으로 예와 아니오를 확인하면서 한 단계씩 토론을 되풀이해나가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대화하면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 있다 해도 실제로는 차이점이 그다지 많지 않고, 여러면에서 생각이 일치한다는 걸 알 수 있음. 따라서 동의를 거듭하는 사이에 처음 입장을 뒤집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어도 이 방법에 따라 대화하면 처음의 입장을 포기하기 쉬워진다 (플라톤, 국가)
-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리의 탐구야 말로 중요함. 그것은 대화할 용기를 내어타자와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있다. 질문을 주저하거나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서만 질문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 화는 개인의 권력욕이나 지배욕을 상징하는 감정이다. 화를 내는 목적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무력으로 빨리 제거하는 데 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모든 힘을 다해 우월을 추구하는 자다. 인정욕구는 가끔 권력에 도취되는 태도로 변질됨.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력욕이 조금이라도 침해당하면 몹시 화를 낸다. 화는 이렇듯 사회적 감정을 완전히 소멸시키며, 거기에는 적을 제거할 만큼 강한 권력욕이 내재되어 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삶에 대해 적대적인 시각과 손상된 감정을 갖고 있음. 여기서 다시 한번 권력욕이 무력감과 열등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화를 내는 격분한 상태에서는 자신의 권력욕이 우월해지고 싶은 목표를 향해 아주 뚜렷하게 고조된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화라는 감정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대가로 우월감과 인정욕구를 높이는 값싼 수법에 불과함
- 아들러는 어떤 결과나 행위에 대해 왜라고 물을 때 결과와 행위의 원인이 아니라 그 목적에 주의한다. 인간은 특정한 원인에 의해 떠밀리며 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가치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기 때문. 그래서 아들러는 어디에서(원인)이 아니라 어디로(목적)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 가령 화가 치밀었기 때문에 화를 낸다는 시각이 원인론이라면, 이와 반대로 목적론은 불같은 성질을 부리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일으킨다는 관점. 곧 목적이나 목표가 먼저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위를 하거나 감정 혹은 사고를 만든다는 이론. 감정은 거의 자신의 말이나 행동거지를 통해 타자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할 때 사용됨. 분노를 내뿜으면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 여기므로 그 목적을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만드는 셈
- 아들러는 불안도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불안에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 단적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도중에 만나는, 그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과제에 몰입하지 않으려는 꿍꿍이, 또는 적어도 그것을 앞에 두고 제자리 걸음을 하려는 목적에서 나오는게 불안이라는 것. 사실은 불안(원인)하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과제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숱한 과제에 진지하게 몰두하지 않기 위해서(혹은 회피하기 위해) 불안이라는 감정을 우려내고 있다는 것. 불안의 목적이 인생의 과제로부터의 도피인 셈이고, 그 목적을 위하여 불안해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 지레 짐작하는 것. 삶의 과제로부터의 도피가 목적이고 불안이 원인이지, 그 반대로 삶의 과제가 원인이 되어 불안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 프로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중시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트라우마의 영향이 한정적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의 인격을 결정하는 건 과거보다도 그 사람의 희망과 미래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것임. 인격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 아들러는 아예 트라우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들러는 어떤 경험도 그 자체만으로는 성공이나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 아들러에게는 사람이 어떤 경험을 겪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 따라서 우리가 어떤 특정한 경험을 트라우마라고 보면 그것이 곧 트라우마가 되는 것일 뿐이다. 역으로 트라우마로 보지 않으면 트라우마가 아니다
- 신은 악의 원인이 아니다. 신은 선하지만 전능하지 않다. 병이나 불행은 신이 우리를 벌하기 위해 준 것도 아니고, 신의 원대한 계획의 일부도 아니다. (헤럴드 쿠시너, 왜 나만 괴로운가)
-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타자가 나를 얼마나 주목하는가, 타자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인정욕구에만 집착하는 삶이야 말로 나 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 라이프스타일이다. 인정욕구는 가끔 권력에 도취되는 태도로 변질됨.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력이 조금이라도 침해받으면 몹시 화를 내며, 꾀병에 걸려서라도 인정욕구를 채우고 싶어한다
- 회복이란 병들기 전과 똑같이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오는 일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을 되찾고, 신체가 의식을 억압하지 않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병이 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을 계기로 사람은 본래의 나가 될 수 있다. 나와 내 몸이 질병에 걸리기 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에 들어감에 따라 병이 들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게 가능하기 때문
- 인간의 운명이라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신체의 말에 귀를 막지 않으며 그 몸말에 응답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과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다. 강요받지 않고 책임을 주체적으로 다할 때 사람은 신체와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다. 설령 몸이 신체적 회복이 아니라 생으로부터의 이탈을 요청할지라도,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를 낸다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 아들러는 정신적 질환 혹은 마음의 병은, 그 발병에 목적이 있다고 본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와병중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일이지만, 마음의 병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의 증상을 택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발병의 연관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분명 뜻하지 않은 것이므로, 병을 스스로 택했다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이 있지만, 바로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회복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심리 치유과정에서 반드시 내면에 억눌러두고 외면해온 무의식의 어두운 측면, 아프고 나쁘며 억압적인 모습들이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 자신의 못나고 아픈 내면의 얼굴을 스스로 인정하고, 외면해온 아픔까지 자신의 일부로 수용하는 과정이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핵심이다
- 주위 사람은, 특히 자식은 치매에 걸린 부모가 비록 아무것도 할 수 없다손 쳐도, 나이 듦을 행위의 차원이 아미라 존재의 차원에서 인정하는 것, 부모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어함.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자기 자신도 생산성과 젊음이라는 미적 기준만이 자신의 가치를 재는 절대적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는 버릇에서 빨리 벗어나야 함. 당연히 어떤 행위로 타자에게 뭔가 기여나 공험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자신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 열등감이란 원래 수직관계에서 생김. 만약 우리가 늙음을 나를 지배하는 수직관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열등감이 생기게 됨. 반면 늙음을 자연스러운 나의 친구 즉 수평관계에서 대등하게 바라보면 열등가밍 생기지 않음. 그럼으로써 우리는 고요하고 평온하게 늙어가는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아들러 심리학이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대인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듯, 질병, 늙음, 죽음 등의 인생의 과제도 그렇게 수평관계로 바라보고자 한다.
- 120세로 타계한 이즈미 시게치요가 114세때 한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여성 타입은?" 이라는 질문을 받고, "역시 연상이..."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해학이 필요함. 나이듦이라는 그 낯선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느긋해질 용기를 갖는 것일지도 모름. 아들러는 말한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정도 간격이 피룡하다. 너무 밀착되면 마주보고 대등하게 대화할 수 없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도 관계가 힘들어진다." 이는 우리가 나이 든다는 것, 늙어 간다는 것과 마주설 때도 마찬가지다
- 키네시스는 아리스토텔레서의 목적론적 운동을 가리킨다.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 사물(위나미스, 잠재태)이 목적을 완전히 실현항 상태(엔텔레게이아, 완전실현태) 로 나아가는, 즉 정해진 목적을 향해가는 운동이다. 이에 반해 에네르게이아는 목적의 완정보다는 실현해가는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목적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목적이 실행되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완전한 가치를 지닌다
- 키네시스는 하고 있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느만큼을 얼마만의 기간에 해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키네시스적인 인생에서는 과정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빨리 목적을 이루는 게 가장 시급하다. 이에 반해 에네르게이아에서는 지금 하고 있는 거 그 자체를 그대로 해냈다고 본다.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 관점이다. 이러한 에네르게이아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움직인은 항상 완전하고 어디에서 어디까지라는 조건과도, 얼마동안이라는 조건과도 관계가 없다. 춤이 그 좋은 예다. 춤은 추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고 그 자체가 목적이지, 춤을 춤으로써 어딘가에 도착하려는 건 아니다. 춤을 추다 어딘가에 도달할지도 모르지만,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춤추는 사람은 없다. 추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된다.
- 산다는 것은 키네시스인가, 에네르게이아인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네르게이아라고 한다. 인생은 어디에 도달하지 않아도, 그것을 한없이 기다리지 않고 시시각각의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 이것이 아들러의 관점이다. '만약...이라면'이라고 하면서 그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키네시스가 산다는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앞으로의 인생에서 벌어질 일을 가슴설레며 기다릴 수가 없다. 결과가 이미 정해진 건데 뭐가 그리 가슴 뛰겠는가? 사실 그런 키네시스적 삶은 불완전하다. 오히려 어떤 결과가 실현될 때까지, 그 과정으로서의 삶이 완전하다. 곧바로 지금의 인생이 완성되고 있는 에네르게이아다. 그래서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에네르게이아적 삶의 태도야 말로 존재의 진정한 힘이다. 특히 병이나 늙음, 죽음같이 인생의 절박한 과제에 직면한 사람일수록
-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쓰나냐가 관건이다. 이는 자기수용, 즉 어떤 것을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꿀 수 없는 것은 긍정적으로 포기하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는 용기가 필요. 아들러 심리학은 그래서 소유의 심리학이 아니라 사용의 심리학이다. 반면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소유의 심리학이고 결국 결정론이다. 즉 주어진 것을 소유하는 데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몰두하는 철학이다.
- 과거는 지나가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리며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떠올리며 불안해하지 않으며, 아들러의 말처럼 지금 여기를 충만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나이가들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의 양식이다. 아들러가 추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네르게이아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이다.
- 인간은 종교를 갖고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살기 일쑤다. 불평과 신세한탄만을 일삼으며 자신의 인생과제를 신에게 떠넘기려고까지 한다. 심지어 기도나 다른 종교행위와 같은 인위적 수단으로 은밀하게 부정한 짓(신의 계율을 어기는)을 저지르면서도 신을 자기 곁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글너 사람들에게 신은 그들의 문제에만 전념하고 그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극히 편파적 존재로 돌변한다.
- 무엇을 할 수 없다라는 목적을 만들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불안, 우울, 공포 같은 감정을 지어낸다.
- 죽음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삶에 대한 사랑이다. (다나카 미치타로, 죽어야만 하는 것) 언젠가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얼마나 살지 모른다는 것(죽음의 가변성),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죽음의 편재성)이 오히려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 죽음을 응시할 때 오히려 생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죽음을 두려운 것이라 단정하지 않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타자로서의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타자와 마찬가지로 적이 아니라, 야기 세이치의 프런트 구조이론에서 보았듯이 타자로서의 죽음은 오히려 나를 완성하게 하는 친구일 수 ㅇㅆ다.
-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효율적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일에 중독된 사람은 인생의 특수한 면에만 몰입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사는 방식이 효율적이라 여기고 일 때문에 가족을 돌볼 짬이 없다고 둘러댄다. 이것을 아들러는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정의. 일을 핑계로 다른 책임과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 아들러는 인생의 과제(일, 가정, 육아, 교육, 교우관계, 취미, 자기계발, 타자공헌 등) 중에서어느 하나만을 특별하게 돌보는 라이프스타일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생을 목표 완성으로 치닫는 운동성, 곧 키네시스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며 효율적 성공에만 맞춰 살다가 죽는게 진짜 불행이라고 여겼기 때문. 도중에 한눈을 팔면서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시간을 잊은 채 놀다가 어느덧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닫는 것, 삶도 이와 마찬가지다. 삶 또한 놀이가 아니겠는가. 아들러의 방식, 즉 에네르게이아적 관점으로 삶은 늘 지금 여기서 완결되어 있다는 거승ㄹ 깨닫는 순간 행복해질 용기가 생겨나는 게 아니던가. 살아 있다는 느낌은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날아오는 비둘기에 저항하는 공기가 그 비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상의 엔진역할을 해주는 것처럼, 고통조차 삶을 살아내기 위한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 또 자기 스스로 자유와 행복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타자의 시선에 자신의 인생을 통때로 맡기지 않는 용기를 길잡이별로 삼을 필요가 있다.
- 라이프스타일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면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 아들러는 효율적인 삶만이 삶의 절대적 방식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최종 목표에서 눈을떼지 않는 이상 헛된 일을 헛되게 생각하는 일을 하며 먼 길을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저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잠만 잔다면 시시하지 않겠는가. 도중에 경치를 즐기는 것도 좋으리라. 마음을 바꿀 권리는 없다고, 이 길밖에 없다고 스스로 몰아세우는 사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고 혹은 돌이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해주어야 할 말이다. 이는 결코 안이한 변덕을 부추기는 말이 아니다. 아들러의다 다음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세계와 관계를 맺고 목적을 이루는 방법, 그리고 행동도 변한다. 나는 나인 채로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해야 한다."
- 두 마리의 개구리가 우유가 든 단지의 가장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다가 갑자기 단지 속으로 빠져버렸다. 한 마리는 '아아, 이젠 죽었어'하고 외치며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개굴개굴 울다가 우유단지 안에서 질식해 죽었다. 다른 한마리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아등바등 다리를 차면서 열심히 헤엄쳤다. 그러자 발밑이 굳었다. 우유가 치즈로 변한 것이다. 그러자 개구리는 폴짝 뛰어올라 단지 밖으로 나갔다. 비관주의자는 처음의 개구리처럼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반면 낙천주의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아,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아, 어떻게든 될거야'라고 생각하며 결국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아들러는 이런 사람을 회의론자, 방어적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공격성이 아닌 금심, 조심, 비겁함으로 보상받는 유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거나 상상을 즐기지만 실제로 이것은 위협적 현실을 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 어떤 사람은 삶의 어려움을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실거리로 삼지만 낙관적인 사람들은 이들과 달리 난관을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려움에 부딪혀도 용기있게 다가서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며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할 줄 알고 어떤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는다. 솔직하고 자유롭게 말하며 지나치게 내성적이지 않고, 두 팔을 벌려 타자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남을 의심하지 않기에 타자와 쉽게 교제하며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다. 언어는 자연스러우며 태도와 행동은 편안하다.
- 두려움과 용기, 어느 것에 전염되고 싶은가? 아들러는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이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한다. 용기는 심장을 뜻하는 프랑스어 coeur에 어원을 두고 있음. 심장은 뇌와 팔다리 등에 피를 보내 신체기관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용기도 인간 정신의 모든 미덕이 현실생활에서 제 기능을 실현하도록 하는 근원적 원동력이다. 아들러는 인간이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본질적으로 삶의 가치들을 실천하거나 이행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절망감이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과제에 도전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용기이고, 인간의 성찰과 성장은 일차적으로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말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용기에는 저돌성과 머뭇거림이 동반된다. 자기성찰적인 머뭇거림 없이 저돌적이기만 한 용기는 만용이며, 무의식적인 두려움이나 절망감을 은폐하기 위한 가짜 용기다. 그럼에도 나는 타자보다 자신이 먼저 무슨 용기든 내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한 사람의 용기는 커진다' 아들러의 이 말은 모든 용기는 전염될 수 있고 어떤 용기든 그 의미는 여러가지로 확장될 수 있다는 함의다. 타자와 대화할 용기, 평범해질 용기, 미움받을 용기, 몸말과 대화할 용기, 늙어갈 용기, 평범해질 용기, 미움받을 용기, 내려놓을 용기, 책임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은 '나 혼자만 행복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부터 행복해질 용기를 갖자. 그것이 타자에게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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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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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식탁

심리 2018. 10. 19. 12:48

- 식물이 생성하는 화학물질이 우리 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식물과 인간이 지구상에서 동일한 진화역사를 거쳐왔기 때문. 따라서 우리가 브로콜리 한 다발을 먹든 아메바 한 무더기를 섭취하던, 거기에 함유된 화학물질은 우리의 신경세포기능은 물론 우리의 감정과 생각까지도 바구어 놓을 수 있다.
- 설익은 바나나에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다량으로 함유돼 있기 때문에, 설익은 바나나를 먹으면 바나나 속 세로토닌이 장속의 세로토닌성 신경세포(세로토닌을 신경전달물질로 갖고 있는 신경세포)에 작용해 장 내벽의 근육을 자극하고 결국 설사를 일으킴. 우리 뇌에 영향을 끼치는 화학물질의 원천은 식물만이 아니다. 곤충류와 파충류 역시 인간과 동일한 진화역사를 거쳐 왔으며 독을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침. 일반적으로 독은 세로토닌을 함유하고 있어서 벌에 쏘이거나 뱀에 물릴 때처럼 불쾌한 반응을 일으킴
- 신경전달물질은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에서 원료를 얻은 후 여러단계를 거쳐 뇌에 생성됨. 우선, 우리가 먹은 음식에서 아미노산과 지방, 펩티드같은 영양소가 추출되어 흡수되고 동맥혈에 실려 뇌로 이동. 즉, 영양소가 혈액뇌장벽을 통과해 신경세포로 이동한다. 그럼 효소가 이 영양소를 각각 다른 신경전달물질로 전환하고, 이 신경전달물질 분자는 시냅스 소포라는 주머니로 이동. 시냅스 소포는 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 작은 공간을, 나중에 방출해야 할 때를 대비해 일반 신경전달물질의 분자 약 1만개를 저장할 수 있다. 그러다 전기신호가 오면 연달아 반응이 일으남. 활동전위라 부르는 이 전기신호는 작게 일어나는 전기자극으로, 세포체에서 축삭돌기를 따라 아주 빠르게 이동함. 축삭돌기는 신경세포에서 길게 뻗어 있는 연장선으로, 활동전위를 나르고 신경세포간에 신호를 연결. 활동전위가 축삭돌기 말단에 이르면 신경세포 내로 칼슘이론이 유입되면서 다음 단계가 촉발됨. 즉, 시냅스 소포가 세포막과 융합해 신경전달물질을 시냅스 간극이라는 신경세포 사이의 작은 틈새로 방출. 신경세포가 신경전달물질 분자를 방출함으로써 다음 신경세포와 신호를 주고받는 연접 부위를 시냅스라고 한다. 신경전달물질 분자는 시냅스 건너편에 있는 신경세포 표면의 단백질, 즉 수용체와 간단하게 신호를 주고 받거나 결합함. 이 결합으로 칼슘이나 나트륨 같은 일부 이온이 하류 쪽으로 신경세포로 이동해 이차적 생화학 공정을 촉발하는데, 이는 신경세포의 작용에 장기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편, 수용체에 신호를 전달한 신경전달물질은 작용을 마치고 원래 있던 신경세포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이를 재흡수라 함. 신경전달물질을 비활성화하는 이차적 방법은 국부효소를 이용해 뇌와 더이상 교류할 수 없는 화학물질로 바꾸는 것이다. 효소의 작용으로 비활성화된 신경전달물질은 뇌에서 유리되어 혈류로 들어감. 뇌의 일상적 활동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부산물은 우리 혈액 곳곳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으며, 이 정보를 활용해 우리 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약물과 음식은 이런 과정 중 어디에나 영향을 불 수 있으며, 신경전달물지의 생성을 방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촉진하기도 함. 뿐만 아니라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 소포에 저장하지 못하게 막거나 신경세포에서 분비되는 것을 방해하며 수용체 단백질과 신호를 주고받지 못하게 가로막거나 재흡수를 늦추고 어쩌면 효소에 의한 비활성화까지도 저지할 수 있음. 우리 뇌는 마음의 기관이기 때문에 이런 작용을 하는 약물과 음식은 생각과 행동, 감정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음
- 잠재적으로 뇌 기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약물이나 영양소는 연이은 장벽 때문에 뇌에 진입하기 쉽지 않음.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벽이 지용성 물질은 쉽게 통과시키고 수용성 물질은 통과하지 못하게 막는 혈액뇌장벽이다. 뇌에는 지질이 풍부하므로 약물이 지용성을 띠느냐 수용성을 띠느냐은 약물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를 말해줌. 지용성이 높은 약물은 뇌에 빠르게 흡수될 뿐만 아니라 빠르게 배출되므로 작용시간이 짧음.
- 지용성 약물의 몇가지 친숙한 예는 비타민 A, D, E, K. 니코틴과 카페인도 지용성이 높아 뇌에 쉽게 흡수되는데, 흡수율이 낮다면 남용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속성은 담배와 커피산업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 뿐만 아니라 담배와 커피나무는 발견된 이래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로 널리 재배되고 보호를 받았다.
- 약물이 뇌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대부분의 경우 그 작용점은 신경세포 표면에 떠다니는 수용체 단백질이다. 수용체와 결합해 신경세포의 반응을 일으키는 화학물질을 작용물질이라고 하고, 수용체와 결합해 신경전달물질이나 작용물질의 작용을 차단하는 화학물질을 길항물질이라고 함. 달리 표현하면, 대체로 작용물질은 신경세포의 반응을 자극하고 길항물질은 신경세포의 반응을 방지하거나 감소시킴. 우리가 섭취하는 일부 화학물질은 몸에서 완전히 대사되거나 비활성화되지 않기 때문에 뇌에 다시 흡수되어 뇌 기능에 계속 영향을 미침. 그에 반해, 일부 화학물질은 우리 몸에서 대사작용을 거쳐 강력한 향정신성 약물로 변환됨. 예를 들어 기침약에 들어 있는 소량의 코데인 성분은 보다 강력한 진통제인 모르핀으로 전환되고, 동명의 환각유발 버섯에서 추출되는 실로시빈은 사일로신이라는 환각제로 변환됨. 또한 헤로인은 뇌에서 작용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모르핀으로 전환된 후 도취감을 유발. 하지만 일반적으로 약물은 효소의 작용으로 뇌와 몸에서 비활성화되어 나중에 소변이나 대변, 땀, 모유, 허파의 날숨으로 배출됨. 간혹 일부 화학물질의 효과가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어 뇌가 그 물질에 서서히 적응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뇌는 해당 약물이나 영양소가 정상적인 뇌 기능에 꼭 필요한 것처럼 느낀다.이 물질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뇌가 보이는 적응 반응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갈망이라는 감정이다.
- 갈망은 뇌 기능을 설명하는 또 다른 흥미로운 용어, 반동현상과도 관련이 있음. 뇌에서 약물이나 화학물질이 사라지면 이 약물의 성질과는 반대되는 생물학적, 행동학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를 반동현상이라 함. 내가 볼 때 뇌는 늘 반작용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흥분제인 코카인과 암페타민이 일으키는 도취감의 반동현상은 이 물질들의 효과가 사라지고 나면 찾아오는 우울감. 재미있게도 이런 뇌 반응은 일방향성만 띤다. 즉, 흥분제가 일으키는 도취감이 지나가면 우울감이 찾아오지만, 알콜이나 비비튜레이트(중추신경계를 억제함으로써 불안과 불면을 해소하는 향정신성의약품) 같은 진정제는 사용후 반작용으로 도취감이 찾아오는 법이 없다. 밤새 폭음한 후 숙취증상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 뇌가 보내는 멈춤 신호에 대한 많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음식섭취를 줄여주는 약물이 개발됐지만, 결과는 매번 같다. 잠시 칼로리 섭취가 줄었다가 뇌가 가짜 신호를 무시하는 법을 터득한 후 다시 칼로리 섭취가 이루어짐. 왜일까? 칼로리를 충분히 섭취하지 않으면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 칼로리를 제한해 체중을 줄이는 일은 진화상 이점이 없다. 40억년에 걸친 진화는우리에게 음식에서 에너지를 섭취하고 또 섭취하라는 단순한 지령을 남겼다.
- 에너지원이 혀에 닿으면 뇌는 미뢰내에서 이루어지는 여섯가지 단순한 분자 상호작용을 통해 정보를 얻음. 그럼 이 정보를 바탕으로 신경전달물질 도파민과 엔돌핀, 엔도카나비노이드, 오렉시을 활용한 보상회로가 작동한다. 이 중에서 오렉신은 각성 수준과 음식에 대한 갈망에 영향을 줌. 오렉신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는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음식을 갈망하게 만듬. 일단 음식이 장에 들어가면 단맛과 기름진 맛, 쓴맛을 감지하는 더 많은 수용체가 기다리고 있다. 마치 장 전체가 고도로 민감한 혀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이렇듯 수용체가 활발하게 작동하면 음식의 장내 이동이 느려져 제한된 시간내에 영양분을 최대한 흡수할 수 있다.
- 세포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혈액(혈장)은 pH 7.35에서 7.45를 유지해야 함. 혈중 pH를 이 범위로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몸속에서 작용하는 모든 단백질은 특정한 기하학적 형태를 유지해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데, 이 3차원 형태는 우리 체액의 pH가 조금만 변해도 영향을 받기 때문. 사람들은 종종 몸을 알칼리화하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 몸에 알칼리성 효과를 내는 음식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흰밀가루 제품이나 당분 등 가공도가 높은 식품 대다수는 우리 몸에 산성효과를 내며, 산성을 띠는 불량한 식단을 수년간 따르면 완충계 일부가 혹사되어 건강에 달갑지 않은 변화를 가져옴.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채소와 과일은 우리 몸에 알칼리성 효과를 내는 반면, 곡물과 동물성 식품, 고가공 식품 대부분은 산성효과를 낸다. 건강에 가장 좋은 식습관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등의 영양소가 풍부하고 알칼리성뿐만 아니라 산성을 띠는 음식도 골고루 섭취하는것이다.
- 우리 뇌는 많은 당분이 필요. 당분이 없으면 사고력이 떨어지고 심하면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진화의 역사 어디쯤에서 지방을 당으로 전환하는 능력을 상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토스트나 도넛 같은 간편한 탄수화물 공급원이나 많은 당분을 찾는 것은 바로 이 때문. 설탕 덩어리인 시리얼과 도넛이 지금의 인기를 누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며, 그 책임은 시상하부의 섭십 중추에 위치한 신경세포에게 물어야 한다. 이 메커니즘은 훌륭하게 작동함.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간편하고 쉽게 소화되는 당분을 많이 섭취하고, 그럼 뇌가 그 보상으로 도파민과 내인성 아편물질을 분비해 기분 좋은 상태를 만들어준다. 뿐만 아니라 뇌가 학습과 기억에 중요한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데에도 반드시 당분이 필요. 손상된 포도당 조절 스위치는 노년의 학습능력 저하와 연관성이 있으며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이 됨. 특정 뇌 영역이 포도당을 효율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면 몇십년 후 해당영역이 퇴보한다는 사실이 밝혀짐. 하지만 당분을 섭취한다고 치매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당분을 많이 섭취한다고 치매를 예방할 수 잇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당분 섭취는 췌장이나 심혈관계 건강에 해롭다. 뇌에 이롭다고 다른 기관에도 다 이로운 것은 아니다.
- 칼로리 제한은 노화를 늦추고 전반적으로 건강을 향상시키는, 아직까지 유일하게 효과적이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방법. 이 방법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작은 이유는 모든 사람이 소식하면 이윤을 볼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
- 생선이나 알약 보충제를 통해 오메가3를 섭취해도 인지력 감퇴에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이는 무얼 의미할까? 아무리 좋은 습관이라도 그 하나만으로는 뇌를 보호하기 어려움. 오메가3 지방산은 노화에 따른 인지력 저하에 아무 효과가 없었지만, 우울장애는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오메가3 식이보충제를 장기복용할 경우 일반적인 항우울제와 비슷한 우울증 치료효과가 나타남. 오메가3 지방산과 소량의 항우울제를 결합한 치료법은 항우울제 투여에 따른 일부 부작용을 줄일 수 있으므로, 기존 치료법에 저항력이 있는 환자에게 특히 도움이 될 수 있음.
- 한 연구는 비만산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조심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생후 5년이 됐을 때 정서조절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두개 높다고 발표. 또한 산모의 비만은 아이의 섭식 행동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에도 이상을 일으키며, 이러한 변화는 남아에게 더 두드러짐. 그렇다면 산모의 비만은 어떻게 태아의 뇌 발달을 손상시키는 걸까? 이런 손상은 지방세포가 사이토카인이라는 염증 단백질을 몸과 뇌에 분비한다는 사실에 기인. 산모에게 지방세포가 많을수록 더 많은 사이토카인이 혈액에 분비된다.
- 비만은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도 높임. 우울증은 정신질환계의 감기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독감이나 세균감염으로 고생할 때 왜 우울해지는지에 대한 근본적 통찰력을 제공한다. 오늘날 우울행동은 뇌 속 사이토카인 수치가 올라가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지방세포의 수와 사이토카인은 비례관계에 있다. 우울증을 앓는 비만환자와 노인에게 효과적인 처방은 항우울제보다 운동이다. 운동은 뇌 속 사이토카인 수치를 알맞게 조절해 주므로 그들에게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아 준다. 결국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면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다.
- 지방은 왜 그리 맛있을까? 초콜릿 맛이 좋은 것은 크림같이 부드러운 식감때문이며, 이 식감은 지방에서 온다. 우리는 기름진 음식이 혀에 닿았을 때 이 부드러운 식감을 느낀다고 말하지만,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지방을 맛보는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흔히 신맛, 짠만, 단맛, 쓴맛, 감칠맛만을 느낄 수 있따고 배웠다. 그런데 최근 한 연구를 통해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혀에 지방을 감지할 수 있는 단백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짐. 지방을 맛보게 해주는 단백질이 있다면 분명 이 단백질을 담당하는 유전자도 있을 것임. 이 유전자는 실제로 확인되었으며, 이 유전자의 변화를 통해 왜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음식 속 지방에 더 민감한지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방을 감지하는 이 단백질의 양은 사람마다 다름. 이 단백질 수용체를 적게 물려받은 사람은 지방에 대한 반응이 둔감해 비만이 될 가능성이 높다. 비만인 사람은 지방 함량이 높은 음식을 선호하고 전체 칼로리 중 가장 많은 양을 지방으로 채움. 이런 특성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도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으면 이 유전자의 작용에 변화가 생겨 나중에 지방을 감지하는 단백질이 줄어들 수 있음. 안타깝게도 이렇게 되면 지방의 맛에 둔감해지기 때문에 이전과 동일한 쾌감을 얻기 위해 지방 함량이 높은 음식을 선호하게 됨. 결과적으로 더 기름진 음식을 먹지만 그 맛은 훨씬 즐기게 된다.
- 평상시 우리는 수십조의 작은 생물과 몸을 공유하며 조화롭게 살아감. 이 생물들의 수는 우리보다 훨씬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생물들이 우리 뇌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우리의 바람을 저버림. 특히, 톡소포자충으로 알려진 단세포 기생충은 조심해야 함. 이 기생충은 고양이 배변용 모래를 건드리다가 자주 감염되고 암 같은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됨. 톡소포자충은 어디에나 존재. 통계학적으로 보면, 감염이 되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톡소포자충이 뇌에 들어가면 우리의 행동에 변화가 생김. 실제로 인류의 진화는 지난 수십만년 동안 이 기생충이 우리 뇌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임. 톡소포자충은 우리 뇌가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의 생산량을 크게 늘리도록 돕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기 때문.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사람들은 뇌의 도파민 수치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과 동일한 증상을 보임. 가령,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남성은 더 외향적이고 공격적이며 의심이 많고 쉽게 질투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여성은 더 친절하고 느긋하며 질투와 의심을 잘 하지 않지만 감염되지 않은 여성보다 더 자주 자살을 시도한다. 이 기생충은 인간속이 존재한 내내 뇌에 살면서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임. 이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들은 정신병에 더쉽게 걸리거나 같은 감염자들끼리 대거 모인다면 전쟁을 일으킬수도 있다.
- 계피를 먹었을 때 몸에 생성되는 벤조산 나트륨은 신경영양인자라는 다양한 화학물질의 수치를 크게 올리는데, 이 인자들은 뇌 속 신생 신경세포의 탄생을 자극하고 기존 신경세포의 생존을 촉진함. 이 두과정은 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 지난 10년간 많은 화학적 연구를 통해 이 신경영양인자가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을 비롯해 여러가지 뇌의 퇴행성 질환을 예방하거나 진행을 늦춰준다는 사실이 밝혀짐. 또한 계피는 2평 당뇨병 환자의 혈당 수치를 내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25%까지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계피는 뇌와 몸에 이롭다.
- 플라보노이드는 신경의 가소성에 관여해 새로운 기억이 더 잘 형성되도록 돕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위해 플로보노이드는 학습과 기억에 꼭 필요한 특정 단백질 및 효소와 직접 상호작용함. 또한 플라보노이는 신생 신경세포의 탄생을 유도하는데, 이는 뇌 염증증가 같은 노화관련 질환과 상해, 독소 조출로 인한 부작용에서 벗어나는데 매우 중요한 활동이다. 또한 최근 몇몇 연구가 보여주듯이 플라보노이드는 활동하는 뇌 영역에 혈액을 더 많이 공급해준다. 그럼 폴라보노이드는 얼마만큼을 섭취해야 할까? 와인과 초콜릿을 예로 들면, 카베르네 소비뇽 약 200밀리리터에는 다크초콜릿 50그램과 거의 동일한 양의 플라보노이드가 들어 있다. 이는 최적의 건강을 위해 일반 성인에게 권장하느 일일 와인 섭취량. 만일 성년 초기 여성이 플라보노이드가 풍부한 초콜릿 음료를 마신다면 단 2시간 만에 뇌의 혈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머리를 쓰는 복잡한 과제의 수행력이 크게 향상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모든 플라보노이드가 이런 효과를 내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음.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어떤 식품에 플라보노이드가 들어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대신 최대한 자주 먹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들은 앞서 언급한 식품 외에 블랙커런트, 배, 블루베리, 딸기, 자몽에서도 효과를 얻을 수 있다
- 초콜렛에 함유된 지방성분은 우리 뇌가 헤로인과 유사한 내인성 분자를 방출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도취감을 일으킴. 초콜릿에는 아난다미드라는 마리화나 유사전달물질도 소량 들어있음. 이 분자는 혈액뇌장벽을 쉽게 통과할 수 있지만 초콜릿에 함유된 양이 너무 적어서 그 자체로는 우리 기분을 좌우하지 못함. 초콜릿은 에스트로겐 유사화합물도 함유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초콜릿을 먹은 남자들이 먹지 않은 남자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최근 발표들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에스트로겐 때문에 쇼핑충동은 일어나도 분노는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인다.
- 담배 한 개비에는 약 1-2밀리그램의 니코틴이 들어있다. 니코틴은 휘발성이 강한데다 열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단 20%만 실제로 몸속에 흡입됨. 하지만 탁월한 지용성 덕분에 흡입되는 니코틴의 최소 90%가 몸에 흡수될 뿐만 아니라 입이나 손상되지 않은 피부를 통해서도 순식간에 흡수됨. 몸에 흡입된 연기는 2-7초만에 폐에 흡수되어 뇌로 전달되기 때문에 담배연기를 마시는 것은 정맥주사만큼이나 니코틴을 뇌의 작용점에 효과적으로 전달함. 이러한 흡수속도는 니코틴이 왜 그렇게 중독성이 강한지 설명해준다. 사람에게 치사량으로 여겨지는 니코틴의 양은 60밀리그램으로, 사망까지 단 몇분밖에 걸리지 않으며 니코틴 수용체가 횡경막근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서 죽음에 이르게 됨. 니코틴은 사용량에 따라 복잡하게 대뇌피질의 기능에 영향을 미침. 소량 사용하면 좌반구를 활성화해 정신적 자극과 각성의 느낌을 유발하지만, 다량 복용하면 우반구를 더 활성화해 진정 효과를 냄. 따라서 지루한 작업을 할 때는 담배 한대로 소량의 니코틴을 섭취해 각성과 주의력을 높일 수 있다. 반대로 불안하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는 줄담배로 니코틴을 다량 섭취해 우반구를 활성화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차차 진정되면서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이 결과는 니코틴 수용체가 양쪽 반구에서 상반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양쪽 뇌가 감정, 주의력, 각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떻게 기능하는지 말해줌. 사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은 성인의 60%가 담배를 피우는 반면, 나머지 인구중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30%미만에 불과. 이 또한 니코틴성 아세틸콜린 수용체가 주의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결과다
- 엑스터시가 뇌에 일으키는 작용은 암페타민과 흡사함.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막고 이 신경전달물질들의 분비량을 늘림. 또한 급격한 체온상승, 즉 고체온증을 유발하는데, 실제로 엑스터시를 과다 복용하면 고체온증으로 죽을 수도 있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엑스터시가 우리 몸속 미토콘드리아의 에너지 생성 기능에 짝풀림 현상을 유발하기 때문. 짝풀임은 미토콘드리아가 우리 몸의 주요 에너지 형태인 ATP를 생성하지 못하게 된다는 걸 의미하고, ATP를 생성하지 못하면 미토콘드리아는 에너지를 열로 낭비하게 된다. 엑스터시를 일정량 복용할 때 이 짝풀림 현상이 가장 극적으로 일어나는 곳은 근육이다. 평균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근육량이 많기 때문에 남자가 고체온증의 급성 독성 효과에 더 민감하다
- 코카인은 뇌에 어떤 작용을 할까? 우선, 나트륨 이온 통로와 결합해 이 통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막음. 그럼 활동전위의 흐름이 차단되어 신경세포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 못하게 된다. 또한 코카인은 통증신호의 전도를 차단하는데, 이 때문에 1855년 코카나무에서 분리해낸 코카인은 눈 부위와 치통 등에 국소마취제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마취효과와 무관학 거리에서 불법적을 사용되었는데, 바로 코카인의 도취감 유발효과 때문이었다. 코카인은 시냅스에서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효과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암페타민과 비슷한 작용을 함. 코카인이 뇌에 작용하면 각성도가 높아지고 허기가 줄어들며 신체적, 정신적 지구력이 강해지고 운동신경 활동이 늘어나며 일상에서 느끼는 쾌감이 강렬해짐. 이 마지막 특징은 코카인이 기분과 성감을 끌어올려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설명해준다. 일반적으로 코카인 남용자들은 코카인이 주는 불쾌한 과자극성을 줄이기 위해 다른 뇌기능 억제물질(알콜, 헤로인, 마리화나)을 함께 사용한다
- 특정 식물을 통한 환각 체험과 강렬한 종교체험간 유사성은 종교의 생물학적 근거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줌. 즉, 우리 인간은 환각 식물과 공통의 진화를 거치며 이런 식물에 끊임없이 노출되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종교와 관련된 일부 기상천외한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환각식물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데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성경의 에스겔서 1장에는 기원전 6세기에 선지자 에스겔이 우주의 존재와 조우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체험은 뇌의 세로토닌 시스템을 바꾸어 놓는 환각식물을 먹었을 때 일어났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세로토닌성 신경세포는 환각제가 뇌에 일으키는 작용에 관여하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의 개개인이 신앙을 표현하는 일에도 관여할 수 있다.
- 우리 뇌가 특수한 환경에서 종교적 감흥을 일으키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정상적인 환경에서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함. 일반적으로 우리 뇌는 몸으로부터 감각정보를 받아 우리가 세계 어디쯤에 있고, 이 시간에 무엇을 하며 주변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대한 지각을 얻는다. 이 정보는 끊임없이 갱신되며 자기감을 형성한다. 하지만 환각제나 간질 같은 장애 때문에 감각이 손상되거나 감각정보를 해석하는 뇌의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면 뇌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영역들을 작동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서는 우주에 떠 있는 기분, 우주의 모든 존재와 연결된 느낌, 어떤 방식으로든 신과 소통하는 느낌 등 아주 특이한 감각체험을 하게 될 수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종교적 현상을 설명할 때 종종 뇌 스캐너로 뇌가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모습을 관찰하는 등의 신경생물학적 방법을 이용하는데, 종교체험을 이 이상 정확하게 객관화할 방법이 없기 때문. 실제 종교체험은 오른쪽 해마의 뒷부분이 활성화되거나 두정엽의 윗부분이 비활성화되는 현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 우리뇌는 진화과정에서 물리적 고통에만 반응하다가 서서히 정서적 고통과 괴로운 경험에도 감각을 통해 반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사회적 고립에 가슴이 아리는 고통을 느끼며, 여기에는 두통과 메스꺼움, 우울증, 식욕상실 같은 주요 신체증상이 동반됨. 최근 과학자들은 이 두시스템의 기능과 해부학적 구조가 뇌에서 서로 겹쳐 있기 때문에 신체적 통증을 완화하는 일반의약품으로 사회적 고통을 줄일 수 있을거라고 추정. 예컨대 진통제 아세트아미노펜과 이부프로펜, 상품명 타이레놀과 애드빌은 뇌자체의 마리화나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을 촉진해 이런 이중효과를 낼수 있다. 최근의 한 연구는 마리화나를 규칙적으로 사용하면 낮은 자아 존중감과 혼자 지내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주요 우울증 삽화(2주가 지나도록 우울증을 겪거나 흥미 혹은 기쁨이 상실되어 있는 상태)가 완화된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신체적 통증을 치료하는 일반의약품으로 심리적 고통도 줄일 수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일반적으로 어떻게 심리적 고통을 덜어주는 걸까? 바로 아난다미드의 작용을 촉진하는 방법을 쓴다. 아난다미드를 비롯해 뇌 자체의 마리화나 유사물질은 행복감과 도취감을 조절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난다미드는 뇌에 분비되고 나면 특정 효소들의 작용으로 빠르게 비활성화되는데, 이부프로펜과 아세트아니노펜은 이 효소들 가운데 하나인 시클로옥시게나아제의 기능을 억제함. 따라서 이런 약을 복용하면 아난다미드의 작용이 촉진되고 이로써 뇌에서 마리화나의 효과가 재현된다. 하지만 그 작용은 상당히 미미하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이 약들을 지금처럼 쉽게 구할 수 없을 것임. 결국 외로움을 유발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달래는 일은 동네 약국에 한번 다녀오는 것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 알콜은 뇌에 두가지 주요작용을 함. 우선 신경전달물질 GABA의 광범위한 억제효과를 촉진하고 중추신경계 전체에 억제 작용을 한다. 이 때문에 19세기에는 알콜이 전신마취제로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억제효과가 지속되는 시간이 너무 길어 통제하기가 쉽지 않거나 안전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수술시 통증을 느끼지 않으려면 치사량에 가까운 양을 투여해야 한다. 따라서 외과 의사가 카우보이의 다리에 박힌 화살을 빼기 위해 통증을 다스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운이 나쁘면 카우보이가 수술중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화살 때문에 죽지 않더라도 수술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물론 20세기 이전에는 대다수 약물이 이러했다. 오늘날 우리는 왜 히포크라테스가 의사는 적어도 해른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선서를 했는지 이해한다. 그만큼 옛날의 약물치료는 환자에게 득보다 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 GABA 수용체에 대한 작용 외에도 알콜은 뇌의 주요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를 억제함. 클루타메이느의 기억생성 기능을 고려할 때 이런 억제효과는 왜 술에 취하면 기억손실, 즉 전형적인 필름 끊김현상이 자주 나타나는지 말해준다. 술을 마신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부적절한 행동 또한 설명이 가능하다. 알콜을 적당량만 마시면 뇌가 자극되면서 통제가 풀리고 다양한 뇌 영역이 활개를 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알콜을 통해 통제를 벗어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어떤 걸까? 대개는 음주운전, 한밤중에 공원 피크닉 테이블에 올라가 알몸으로 춤추기 같은 처벌대상이 되는 행동들이다. 눈치했겠지만 이런 행동은 우리가 부모님이나 경찰, 신으로부터 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던 것들이다
- 뇌에서 가장 중요한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을 차단하는 약물을 섭취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흥분될까? 그러한 약물 가운데 하나인 투욘은 GABA의 주요 수용체 하나에 작용해 GABA의 기능을 억제한다. 투욘은 많은 식물에서 발견되지만, 쓴쑥과 가장 많은 관련이 있다. 쓴쑥의 추출물에 알콜을 섞으면 압생트라는 밝은 녹색술이 만들어지는데, 1800년대 중반 이 술은 유럽에서 특히 마네, 드가, 톨루즈 로트레크, 반 고흐 같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일반적으로 뚫린 숟가락에 담긴 설탕위로 에메랄드 녹색을 띠는 이 액체를 천천히 부은 후 물로 희석시켜 먹었는데, 그 맛이 매우 썼고, 의식이 또렷한 취기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다 1800년대 말 프랑스 정신과 의사 발렌틴 매그낭의 연구로 쓴쑥의 기름이 뇌 활동의 과도한 증가, 요컨대 간질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짐. 이리하여 압생트의 장기섭취에 따른 결과(얼굴 근육과 사지의 수출, 불안, 피해망상, 기력감소, 무감각, 두통, 망상, 마비, 사망 등)는 이 음료에 사용된 쓴쑥 추출액의 투욘성분 때문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1868년 한 저자는 미국 약학저널에 '이는 비열한 독이다. 숭배자를 서서히 짐승으로 탈바꿈시키고 바보천치로 만들어 삶을 파괴한다'고 썼다. 투욘을 반대하는 캠페인이 뒤따랐고 결국 20세기 초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압생트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예전방식대로 압생트를 조제할 경우 일반적인 용량에서 생성되는 투욘의 수치는 매우 낮을 거라는 것이 오늘날 지배적인 견해다. 따라서 압생트의 장기 사용자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증상들은 투욘의 영향력이라기보다 부적절한 증류주를 과도하게 섭취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투욘이 GABA 길항제이고 소량 사용시 흥분 효과를 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효과는 가벼운 수준이다. 투욘은 베르무트, 새르트뢰즈, 베네딕틴 같은 술에서도 미량 발견된다. 물론 압생트에도 투욘이 소량 섞여 있음. 현재 압생트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다시 합법 판매가 가능해졌다.
- 히드라, 가령 근본적으로 단순한 영양 보급관이라고 할 수 있는 클로로히드라 비리디시마 같은 원시 다세포 생물의 신경계는 단순 단백질만을 신경전달물질로 이용한다. 따라서 이 단백질은 원시 신경계가 사용한 최초의 신호분자였다. 만일 일반 히드라의 뇌에서 이 단백질 몇개를 추출해 사람의 신경세포에 주입한다면 이 세포에도 비슷한 신호반응이 일어날 것이다. 실제로 히드라의 신경계에서 이용하는 단백질은 우리 뇌가 생각하고 느끼는 데 이용하는 일부 단백질과 동일. 이 단백질을 신경펩티드라고 한다. 신경펩티드는 구슬을 꿰어놓은 줄과 같으며 구슬 한알 한알은 아미노산이다. 신경펩티드는 아미노산 단 몇 개 또는 수백개가 모여 만들어지며, 우리 몸에는 음식에서 흡수한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수많은 종류의 신경펩티드가 존재. 이 신경펩티드를 생성하고 분비하는 신경세포는 몸과 뇌 전체에 분포하고 있으며 호르몬 분비, 혈액 속 영양소 흡수 등 다양한 몸의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몸속에서 분비되는 신경펩티드는 무척 흥미로운 진화를 거쳤다. 이 진화 역사는 신경펩티드의 현재 기능과 신경펩티드가 몸의 특정 부위에만 발견되는 이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한 예로, 췌장에서 생성되는 인슐인은 아주 중요한 신경펩티드다. 일부 신경과학자들은 인슐린 유사 펩티드가 구조상 서로 연관된 다른 수많은 신경펩티드의 주된 조상일 것이라고 추정. 예를 들어 각각 가슴 발달과 젖 생성에 관여하는 펩티드인 성장 호르몬과 프로락틴은 약 3억 5천년 전에 공통 조상한테서 갈라져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성장과 양육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포유동물과 히드라에 관한 연구들이 입증하듯이, 진화는 분자를 이리저리 손보지 않는다. 기능에 문제가 없다면 그 속성을 그대로 유지해 수백억년이 지나도록 계속 활용하려고 한다. 아니면 일부 신경펩티드를 그때그때 조금씩 수정해 기능을 보완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동물 독은 신경펩티드와 관련된 전구체로부터 만들어지는데, 이중 일부는 최소 1억년 전에 처음 나타나 지금까지 수정과 돌연변이를 거친 뇌 펩티드에서 비롯되었다. 반면 일부 독은 혈당수치를 조절하는 인슐린 유사기능을 비롯해 진화적 부모분자가 지금까지 수행하는 기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공통이 진화 역사 덕분에 단순한 단세포 생물부터 복잡한 동식물까지 다양한 종으로부터 추출한 독은 사람의 신경펩티드 신경세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인기있는 도구가 되었다. 지난 30년간 이 연구들을 통해 우리 뇌와 몸에 100가지가 넘는 신경펩티드 신경전달물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런 신경펩티드는 아주 적은 농도로 존재하지만 무척 강력하다
- 사람들이 꺼리는 글루텐 곡물(밀, 보리, 호밀)은 장에서 글루테오모르핀이라는 관련 화합물을 생성. 또한 장관의 내벽을 손상시켜 칼슘과 철분, B복합 비타민과 비타민C, 미량 무기물의 흡수를 방해할 수 있다. 장누수증후군으로도 알려진 이 질환은 뇌와 면역체계의 건강을 크게 위협함. 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엄밀하게 글루테오모르핀이 유발하는 인지변화로 이어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 히스타민성 신경세포는 하루종일 우리의 각성 상태에 영향을 미침. 알레르기와 감기기운이 있을 때 복용하는 일반 항히스타민제는 히스타민 수용체를 차단함으로써 우리를 각성시키고 깨어있게 하는 히스타민의 기능을 방해한다
- 아데노신은 뇌 전체에서 수면과 각성주기와 관련된 다양한 기능을 하는 신경전달물질. 아데노신이 잘 알려진 데는 우리가 자주 섭취하는 어떤 물질 덕이다. 전 세계 사람들은 아데노신 수용체를 억제하는 이 물질을 뜨겁거나 차갑게, 또는 크림을 넣거나 빼서 섭취한다. 바로 커피다. 카페인은 테오필린과 함께 차에서 흔히 발견되는 성분으로, 실제 최소 63종의 식물에서 발견됨. 하지만 전세계 소비량의 54%는 단 두종, 코페아 아라비카와 코페아 로부스타에서 추출되고, 43%는 차나무 카멜리아 시넨시스에서 추출됨. 커피원두에는 트리고넬린, 퀴놀린산, 타닌산, 초성몰식자산 같은 생리활성물질이 풍부하게 들어있음. 또한 비타민 니아신이 로스팅 과정에서 트리고넬린으로부터 대량생성된다. 커피는 산화방지제의 풍부한 원천이기도 함. 뿐만 아니라 원두에 함유된 다양한 성분은 호불호가 갈리는 여러 속성을 결정짓는다. 최근 일부 커피업체들은 말레이사향고양이, 즉 파라독수스 헤르마프로디투스의 위장관을 통해 원두를 걸러내는 방법으로 커피의 쓴맛을 없앴다
- 전반적으로 매일 많은 양의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오래산다. 또한 최근에 나온 증거들은 하루 2-3잔씩 적당량의 커피를 마시면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음을 시사. 커피와 당뇨병, 뇌질환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혈중 인슐린 수치상승이 중요한 연결고리일 수 있따. 제2형 당뇨가 있으면 남녀 모두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들은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심. 카페인은 어떻게 뇌에 이런 효과를 내는걸까? 그 답을 알려면 먼저 우리의 주의력을 조절하는 아세틸콜린성 신경세포의 기능을 이해해야 함. 이 신경세포는 아데노신의 통제를 받음. 다시 말해, 아데노신이 아세틸콜린 수용체와 결합해 아세틸콜린성 신경세포의 활동을 늦춘다. 뇌 속 아데노신의 생성과 분비는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이루어지는 대사활동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우리 뇌가 활동하는 낮시간에 아데노신이 아세틸콜린 신경세포 주변에 집중포화되고 아데노신 수치가 높아지면서 아세틸콜린성 신경세포가 억제된다. 이렇게 뇌 활동이 점차 느려지면 우리는 나른함을 느끼다가 결국 잠이 든다. 이를 막아주는 물질이 바로 카페인이다. 카페인은 차의 테오필린 성분과 마찬가지로 아데노신 수용체의 강한 억제제이자 아데노신이 유발하는 나른함과 잠의 강한 방해요소다
- 보상감과 도취감을 유발하는 약물에 대해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골할 때, 커피도 어떤 식으로든 도파민성 신경세포에 영향을 미친다고 의심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커피한잔, 콜라한컵을 마실 때마다 도취감과 행복감이 밀려오는 것은 카페인이 도파민 신경세포의 활동을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 대부분 캔 콜라에는 약 40밀리그램의 카페인이 함유됨
- 도파민은 도취감과 쾌감을 일으키는데, 사람들은 주로 아침에 첫 커피를 마실 때 그렇다고 한다. 코카인과 암페타민, 엑스터시처럼 도취감을 유발하는 많은 물질은 뇌속 도파민에 작용. 커피도 그렇다. 카페인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향정신성 물질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우리 뇌가 계획적으로 설계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뇌는 그저 우리가 지금의 환경에서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는 데 필요한 만큼만 최선을 다해 일할 뿐이다. 따라서 이 익숙한 환경이 크게 또는 너무 갑작스레 변했을 때 우리 인간이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모든 종의 95% 이상이 이미 멸종을 맞았다. 어떤 환경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완전한 몸이나 뇌를 지닌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벨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생물학자 프랑수아 자코브가 남긴 '진화는 땜장이다'라는 말철머, 진화는 그때그때 생존에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뿐 그 이상을 의도적으로 창조하지 않는다. 이는 왜 지구상의 모든 종이 급격한 환경변화에 늘 취약한지 설명해준다
- 일반적으로 우리 뇌는 어떤 계획된 의지가 아닌 환경의 중립적 힘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뇌 과학자들은 성능을 끌어올릴 여지가 얼마간 존재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지만, 지금까지는 정보처리 속도를 높이는 것 외에 실질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어줄 약물요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날 시중에 판매되는 소위 기억력 촉진제가 인지력 개선제는 카페인과 당분, 일부 특수 아미노산과 몇몇 비타민을 포함하고 있지만, 우리 지갑을 비우는 일 외에는 아무 효과도 없다. 아시 말하지만 21세기를 맞이한 현 시점에 인간의 지능을 높여줄 방법은 하나도 없다.
- 재미있게도 일반적으로 건강에 나쁘다고 인식되는 일부 물질이 뇌의 노화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니코틴은 담배연기처럼 효과적인 킬레이트물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신경보호작용을 할 수 있음. 그래서인지 흡연자들 사이에서는 파킨슨병의 발병률이 낮다. 카페인 음료를 많이 마시는 것도 파킨슨병 발병률을 낮춤. 또한 알콜, 특히 맥주를 정기적으로 마시면 알츠하이머병의 발병시기가 늦춰지는데, 알콜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줄여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임.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는 노년에 치매에 걸릴 위험이 높아지는 것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더불어 마리화나는 다발성 경화증,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 헌팅턴병, 다양한 자가면역질환 등 뇌의 염증을 수반하는 노화질환 발병가능성을 줄이는 데 효과적. 최근 연구에 의하면 60년대 마리화나를 피웠던 사람들은 지금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가능성이 낮다. 이런 참혹한 병을 피하기 위해 담배와 마리화나를 피우고 맥주와 커피를 마시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물질들의 효과를 언급한 것은 한가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즉, 이런 식물기반 물질들을 규칙적으로 사용하면 일부 노화관련 뇌 질환의 발병률이 감소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지난 천년간 수백만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양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물질들이 지닌 미묘하면서도 매우 일관된 효과를 관찰할 수 있도록 비교적 근래에 진행된 연구결과들이 잘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우리가 이 물질들이 뇌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알아차린 것은 오로지 이 물질들이 널리 남용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콜리플라워나 해기스(양의 내장으로 만든 순대 비슷한 스코틀랜드 음식)에도 뇌에 긍정적 효과를 미칠 성분이 있을 수 있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지금까지 소비된 양으로는 역학자들이 그 숨은 효과를 알아차리기에 부족하다. 많은 식물은 퇴의 효율상승과 관련된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감자와 토마토, 가지에는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촉진하는 솔라닌과 알파 차코닌이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음식들을 잘 먹는다고 기억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닏. 또한 잠두에는 우리 뇌의 보상물질 도파민의 전구체인 L-도파가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의 기분개선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성분이 잠재적인 작용점에 도달해 뇌의 기능에 큰 효과를 미칠 만큼 농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잠두를 먹어도 행복한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감자나 가지를 치매 치료제로 팔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 종합비타민이 뇌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인터넷에 수없이 돌아다니는데 정말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60-90세 사이의 건장한 남녀 노인에게 일일 종합비타민 보충제를 6개월간 섭취하게 했지만 설탕 알약을 먹었을 때와 비교해 기억력이나 다른 인지력 시험에서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게다가 기억력이나 다른 인지력 시험에서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게다가 요즘은 뇌 건강을 위해 비타민 E보충제를 권하는 경우가 없다. 원래 비타민E를 다량 복용하면 노화에 따른 치매의 발병 시기가 늦춰진다고 여겨졌지만 지금은 뇌일혈의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인식된다
- 철분이 뇌의 화학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빈혈은 무감정과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철분 부족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어린이에게서도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음식으로부터 칼슘을 섭취하려고 애써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적당한 게 가장 좋다. 매일 적당한 칼로리를 섭취하고 규칙적으로 적당한 운동을 하며 천연공급원으로부터 비타민과 무기질을 얻으려고 애써야 한다. 비싼 보충제는 잊어버리고 비타민과 무기질을 얻으려고 애써야 한다. 비싼 보충제는 닞어버리고 다양한 음식에서 조금씩 보충하면 된다. 그리고 소나 돼지한테서 나오는 건 대부분 피하는 게 좋다. 비싼 식이보충제를 사지 말라는 조언은 분명 이런 제품을 파는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과 다를 것이다.
- 넘어가는 건 참 쉽다. 우리 뇌는 생각만큼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지능을 높여주고 노화의 무자비한 영향에서 벗어나게 해줄 마법의 알약이나 물약을 계속 찾아다닌다. 이 마법의 약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약을 팔러 다니는 사람은 계속 존재할 것이고 사람들은 그 약을 사려고 줄을 설 것이다. 하지만 이 약을 먹어도 더 지혜로워지거나 건강해지기는커녕 더 가난해질 뿐이다. 그렇다고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뇌의 효율을 높이고 노화과정을 늦추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돈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 그건 바로 음식을 덜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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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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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감정과 사고는 자신의 생활양식과 서로 일치해야 한다. 만일 감정이 문제를 일으켜서 개인의 행복에 역행한다면, 이런 감정을 변화시키려고 애써봤자 아무 소용없다. 감정은 개인의 생활양식에서 우러나온 표현이어서,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는 한 이런 감정을 뿌리뽑을 수 없다. 여기서 개인심리학은 교육과 치료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관련하여 특별한 힌트를 준다. 우리는 절대 어떤 사람의 성격 중 한 측면 또는 한 증상만을 다루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생활양식을 선택할 때 잘못된 가정을 발견해내야 한다. 그들의 마음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 그들이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몸과 환경으로부터 받는 느낌에 그들이 반응하는 행동에서 내리는 그릇된 추정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심리학의 진정한 과제다 (인생의 의미와 심리학, 2장 마음과 몸, 정신적 특성과 신체유형)
- 프로이트는 꿈을 과학적으로 이해가능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프로이트의 해석은 꿈을 과학영역 밖으로 데려가버린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낮 동안 마음의 활동과 밤 동안 마음의 활동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상정한다. 의식과 무의식을 반대되는 것으로 놓으며, 일상적 사고법칙과 상반되는 꿈만의 특수한 법칙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상반성을 상정하는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비과학적딘 태도를 발견한다. 원시인류와 고대 철학자의 사고에서 강력한 안티테제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설정해 개념을 다루려는 욕망과 늘 마주친다. 이런 안티테제적, 이원론적 사고는 신경증 환자에게서 아주 뚜렷이 나타남. 사람들은 흔히 왼쪽과 오른쪽, 남자와 여자, 뜨거움과 차가움, 가벼움과 무거움, 강함과 약함을 상반되는 것이라고 믿음. 과학적 견해로 볼 대, 이것은 상반성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이것은 어떤 척도의 눈금들, 허구적 이상에다 어림짐작으로 지정해놓은 지점들이다.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은 사실 전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잠과 깸, 꿈속사고와 현실 속 사고를 상반되는 것으로 취급하려는 모든 이론은 본질상 비과학적이다. (제5장 꿈, 프로이트의 견해)
- 우리는 지구라는 작은행성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지구가 가진 자원과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만 한다. 몸과 마음을 두루 발전시켜 자신과 인류의 생존이 보장되도록 공헌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행위는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우리의 답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필요하고, 적합하고,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스란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답에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지구에 거주하는 인간무리,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이다. .... 개인의 행복과 인류이 행복에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것은 공동체 감각이다. 따라서 인생 문제에 대한 모든 답은 이 조건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 답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 만약 혼자라면 멸종할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마련되어야 한다. (제1장 인생의 의미, 인생의 세가지 과제)
- 인간의 불안은 개인이 모여 공동체로서 연대했을 때만이 사라질 수 있다. 자신이 타자에게 소속되어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불안없는 인생을 살 것이다. (성격심리학)
- 어떤 경험이든 그 자체로는 성공이나 실패의 요인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 경험에서 받은 충격(트라우마)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오히려 과거 경험을 가지고 우리 목적에 들어맞는 온갖 것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과거에 경험한 사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특정 경험을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할 근거라고 간주할 경우, 필시 잘못된 판단이 되고 만다. 의미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상황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스스로 결정한다. (제1장 인생의 의미, 어린 시절의 경험)
- 곤경을 극복할 때까지 조바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곤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곤경은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아니라 거기에 맞서 정복해야 할 과제다. (삶의 과학)
- 슬픔이라는 감정도 상대방의 동정을 이끌어낸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때가 있다. 불안이란 감정 또한 마찬가지. 불안해서 바깥에 나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나가지 않으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안이라는 감정을 지어낸 것이다.
- 분노에 사로잡혀 벌컥 화를 내던 사람도 자신의 분노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는 걸 알면 더는 화가 나지 않을 것임. 분노를 억누르기보다는 분노의 목적과 분노를 대신할 방법을 알면 화를 낼 일이 없다.
- 인생과 자신에 대한 의미부여를 생활양식이라 한다.자신은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자기개념), 타인을 포함한 세계의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세계관), 자신과 세계에 대해 어떤 이상을 품고 있는가(자기이상), 이 세가지를 한데 묶은 신념체계가 생활양식이다.
- 사람들은 대부분 일부러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보다는 지금 이대로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함. 즉 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변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하고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변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데도 변하지 말자고 선택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지금의 생활양식을 바꿀 수 있을까요? 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생활양식으로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함. 한번 정한 생활양식은 말하자면 안경이나 컨택트렌즈와 같다. 늘 그것을 통해 세계를 보기 때문에 쓰고 있는 것조차 스스로 망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보여도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생활양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안경과 콘택트렌즈를 쓰고 이 세계를 보았는지 알아야 함.
- 우월성의 추구와 짝을 이루는 것이 열등감. 아들러 심리학서에서는 우월성의 추구와 열등감은 누구나 갖고 있으며 그러니 어느쪽이든 노력과 성장을 위한 자극이 된다고 함. 열등감이란 남과 자신을 비교할 때 생기는 감정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열등감이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이상속 자신과 현실속 자신의 비교에서 생기는 것. 아들러는 이 열등감이야말로 인류의 모든 진보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면 과학의 진보는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과, 장래를 위해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의식할 때만 가능하다. 즉 그것은 인간이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고, 우주 만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워서 그것을 더 잘 다루려고 노력해온 산물이다. 실제로 나는 인간문화 전무가 열등감에 기초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의미의 심리학, 제3장 열등감과 우월감, 열등 콤플렉스)"
-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유독 강조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과시하려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자신이 우월한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저 "남보다 우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쓰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들에게 기대하고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에 대한 이상을 높임. 나아가 타인이 기대하는 자신의 이미지와 현실의 자신이 너무 차이가 나면 우월해지려는 노력마저 단념하게 된다
- 일할 때는 누가 말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지에만 주목하면 된다. 상사가 틀린말을 해도 부하직원이 아무 말을 못하는 이유는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자신은 그저 상사를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 교사인 내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해서 타고 올라가 칠판 꼭대기쯤에 자리잡고 앉았다고 해보자. 누구나 나를 보면 "아들러 선생님은 미쳤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 단 한가지 점에서 나는 정상이 아닌 것이다. 바로 우월성에 대한 나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제3장 열등감과 우월감, 우월성의 목표)
- 아들러가 말하는 "인생의 문제와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우월성 추구의 진정한 의미. 그런데 문제와 맞닥뜨려 진실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우월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님. 그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하려는' 즉 행복하게 하려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 오랫동안 교육학자와 심리학자의 관심을 끌어온 한가지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다. 개인심리학에서는 더 이상 두려움의 원인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 대신에 두려움의 목적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모든 응석받이 아이들이 두려움에 시달린다. 이 아이들은 두려움을 통해 관심을 끌수 있다. 그리고 이 감정을 생활양식으로 삼는다. (제6장 가족이 미치는 영향, 주의와 무시)
- 아이가 오줌을 쌌거나 밥을 잘 안먹어도 부모가 더 이상 주목하지 않으면 아이의 의식에 변화가 생긴다. "오줌 싸지마"라든지 "더 먹어"라고 잔소리를 듣는 한, 아이는 자신이 부모에게 주목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세계(가정)의 중심이다'라고 느낌. 그런데 아무 말도 듣지 못하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짐.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고 느낀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지만 밥을 잘 안먹으면 배가 고프고 젖은 시트를 그대로 두면 다음 날도 축축한 이불에서 자야한다.
-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할 때만 용기를 낼 수 있다. 자기 스스로 가치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리킴. 인간관계는 고민의 원천도 되지만 살아가는 기쁨이나 행복 또한 준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인간은 혼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래서 아들러는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 어린아이라면 자신이 한 행동의 의미를 모를 수 있다. 그럴 땐 가르쳐 주면된다. 하지만 아이가 다 자랐는데도 부모에게 야단맞을 행동을 한다면 이는 전부 확신을 갖고 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경우는 부모의 주목을 받기 위해 부모가 화낼 행동을 고의로 하는 것. 무시당하는 것보다야 야단맞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서 말이다. 또 야단맞고 자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안색만 살피는 그릇 작은 인간이 된다. 인간이란 본래 각자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이 뽀족 튀어나온 부분이 개성이다. 그것을 단점이나 결점으로 간주하고 교정하려 들면, 또는 아무일도 없는데 미리 야단쳐서 아이의 실패를 미연에 막으려들면 어떻게 될까?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소멸되어 착한 아이로 자랄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머리를 써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뭔가를 해내는 사람으로는 자라지 못한다.
- 아들러는 야단치는 것만이 아니라 칭찬하는 것도 부정. 칭찬받고 자란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때 인정받기를 기대함. 문제는 아무도 보지 않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 더 중요한 문제는 칭찬하는 것도 야단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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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2

심리 2018. 9. 26. 14:47

- 종교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설명. 쉽게 말해 신은 세계를 설명하는 커다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에 비해 철학은 이야기를 거부함. 주인공이 없는 추상의 개념을 통해 세계를 설명
-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에리히 프롬)
- 존경이란 그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런 관계도 없다.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나'이다.
- 지금의 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려 할 때, 그 사람의 과거는 어떤 톤으로 물들게 될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 '그때 호되게 꾸짖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인사를 하는 사람. 그들은 지금의 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과거의 모든 것이 좋은 추억이 되는 것이다.
- 우리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열명이 있으면, 그 열명이 각기 다른 지금에 의해 채색된 각각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 과거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인간은 누구나 '나'라는 이야기의 편찬자이고, 그 과거는 '지금의 나'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다시 쓸 수 있다.
- 어떤 인간도 순풍에 돛 단 듯이 순탄한 인생을 살지 않는다. 누구나 슬픈 일도 겪고, 좌절도 하고, 이가 갈릴 정도로 분통 터지는 일을 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과거에 겪은 비극을 교훈이나 기억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현재까지도 그 일을 털어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이는 과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다. 그 과거를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더 가혹하게 말한다면, 비극이라는 안주에 취해 불행한 '지금'의 괴로움을 잊으려 하는 것이다.
- 설령 내가 '나쁜 그 사람'이나 '불쌍한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거 참, 힘들었겠군' 혹은 '자네는 아무 잘못도 없어'라고 동조하면 잠깐 마음은 편해질 것이다. 카운슬링 받기 잘했따. 이 사람에게 털어놓길 잘했다하고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래서 내일부터 매일이 어떻게 달라질까? 다시 상처받으면 위안받고 싶어지지 않을까? 결국 그건 의존이 아닐까? 그렇기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이다.
- 칭찬요구, 주목끌기, 그리고 권력투쟁, 전부 '나를 더 존중해달라'고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희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인간은 돌변해서 증오를 원하게 된다. 증오란 감정을 통해 나에게 주목해 달라고 생각하게 된다
- 부모나 교사에게 반항하는 것으로 권력투쟁에 나서는 아이들, 이 아이들은 반에서만큼은 영웅이 될 가능성이 있다. 권위에, 어른에 맞서는 그 용기를 칭송받으며, 하지만 복수의 단계에 돌입한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칭찬을 받은 적이 없다. 부모와 교사는 물론, 같은 반 친구들한테도 증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면서 서서히 고립된다. 그래서 더욱 증오를 받는다는 한가지 점이라도 이어가려 하는 것이다.
- 더 이상 나에게 기대하지 말라는 생각이 무능의 증명으로 이어진다. 인생에 절망하고, 자신을 마음 깊이 싫어하게 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절망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모든 과제를 회피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무능하니까 과제를 주지 마. 내게는 그걸 해결할 능력이 없어'라고 밝히는 것이다.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다. 잘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과제에 도전해서 실패할 바에야 처음부터 '잘할 리 없어'라고 포기하는 편이 속 편하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실의에 빠질 일은 없을 테니까.
- 그 아이들의 바람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내 일에 상관하지마'이다. 더 보태면 '나를 포기해'라는 뜻. 부모님과 선생님이 손을 내밀려고 할수록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무능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 외에는. 다만 무능의 증명을 시작한 아이들을 돕는 것은 전문가에게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흔히 말하는 문제행동은 대개 3단계인 권력투쟁 단계에서 그친다. 거기서 더 심해지지 않도록 아이들을 이끈다는 점에서 교육자에게 맡겨진 역할은 크다.
- 본인의 인생은, 매일의 행동은 전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줄 것. 그리고 결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예를 들어 지식과 경험)가 있으면 제공해 줄 것. 그것이 바람직한 교육자의 자세다
-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 결정을 지지해주고 도와주라. 그리고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려주되, 너무 가깝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리에서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비록 그 결정이 실패로 끝난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내 인생은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 인간에게 고립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고립된 인간은 몸의 안전뿐 아니라 마음의 안전까지도 위협받는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때문에 우리는 항상 타인과 강고한 유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는 공동체 감각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
- 타인을 구함으로써 자신을 구하고자 한다. 스스로를 일종의 구원자로 포장해서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려고 한다. 이는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한 사람이 종종 빠지는 열등 콤플렉스의 한 형태. 일반적으로 메시아 컴플렉스라 한다. 메시아, 즉 타인의 구원자가 되려는 심적 도착
- 분업에 관해 아들러는 이렇게 말함. "인간의 가치는 공동체에서 할당된 분업의 역할을 어떻게 완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치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님. 그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로 정해지는 것
- 원칙적으로 분업의 관계에서는 개개인의 능력을 중시. 예를 들어 기업에서 사원을 채용할 때도 능력이 판단 기준. 이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분업이 시작되고 나서 인물을 평가하거나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지를 따질 때에는 능력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은가'가 중요해짐. 그렇지 않으면 서로 돕기가 힘들어지지 때문. 그리고 '이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은가', '이 사람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최대요인은 그 사람의 성실함이자 일에 임하는 태도이다.
- 싸우고 헤어진 연인을 생각할 때, 한동안은 전 연인의 미운점만 떠오를 것이다. 그건 당신이 '헤어지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즉 본인의 결정에 미련이 남았다는 증거. 스스로에게 '헤어지길 잘했다'라고 타이르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으니까. 그런 단계라고 생각하라. 그런데 만약 전 연인의 좋은 면이 떠올랐다면, 그건 더 이상 일부러 싫어할 필요가 없어진, 그 사람에 대한 마음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 전부 '상대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좋아하느냐'를 묻는 것이다.
- 쌓아올리는 것이다. 빠지기만 하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 건 인생의 과제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없다. 의지력을 발판삼아 아무것도 없는 곳에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에 사랑의 과제가 어렵고 힘든 것이다.
- 아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지 못해. 우는 것, 즉 자신의 나약함을 호소함으로써 주변의 어른들을 지배하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니까. 막 태어난 아이들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혹은 성격이 제멋대로라서 우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는 '세계의 중심'으로 군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의식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무의식중에 사랑하는 것을 두려우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없이 행동에 나서고, 이쪽이 사랑을 하면 사랑을 받는 상대의 마음에도 사랑이 싹트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 사랑하는 것은 자네의 과제다. 상대가 그 사랑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는 타인의 과제다. 당신이 제어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과제를 분리하고,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것. 그것뿐이다.
- 결혼이란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 누군가와 만나서 운명을 느끼고, 그 운명에 따라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믿기'로 결심한 것일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결심이고 결단이고 약속이다" 만남의 형태는 아무래도 좋다. 진정한 사랑을 맺기로 결심하고, 두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와 마주할 수 있다면 어떤 상대와도 사랑할 수 있다.
- '편하고 싶다',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잠깐의 쾌락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행복은 얻을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오직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립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때만 공동체 감각에 도달한다
-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왔을 때 "이 사람과 만나서 함께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라고 납득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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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 자원자들은 오르가즘을 느꼈을 때에 안와전두피질이 눈에 띄게 비활성화되었다. 뇌의 이 부분은 활성화될 때 충동억제와 식용 그리고 자기감시성과 자기참조적 사고에 관여. 따라서 안와전두피질의 비활성화는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한다.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식욕을 잃으며 자기감시성과 자기참조적 사고마저 마비되어 마음이 천하태평으로 느긋해진다.
- 우리 인간은 황홀한 쾌감을 느끼는 순간에 왜 얼굴을 찌푸리고 인상을 쓰는걸까? 첫째, 얼굴표정은 지나치게 강렬한 감각적 경험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 다른말로 우리가 성관계를 맺거나 통증을 느낄 때 눈을 감는 행위는 시야를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감각적 정보의 양을 줄여 성관계와 통증의 감각적 경험을 좀더 쉽게 관리하고 다루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라는 의미. 또 다른 해석은 성관계와 통증 모두에서 관찰된 얼굴 움직임은 불수의적 운동으로, 오직 근육의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신체적 과정때문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우리가 성관계를 할때와 통증을 느낄 때 유사한 표정을 짓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미소가 행복한 감정을 표현하듯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불수의인 근육경련에 의해 만들어진 우발적 움직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 쿨리지 효과는 다양한 종에 적용되는 관찰결과를 일컫는 것으로, 성적 피로상태가 되면 수컷은 익숙한 암컷과 계속 교미할 때와는 반대로, 새로운 암컷을 만나면 성욕이 왕성해진다는 이론. 전문적 용어로 말하면, 수컷은 새 파트너를 만날 때 성적 불응기가 더 짧다. 성적 불응기는 한번의 짝짓기가 끝나고 다음 짝짓기가 가능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
- 섹스는 에너지를 소모해 우리를 지치고 피곤하게 만들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파트너와의 새로운 섹스 가능성을 약속하는 쿨리지 효과를 통해 우리에게 활기를 되찾아줄 수도 있다. 고로 성적 피로에 대한 해독제는 더 많은 섹스다.
- 성 연구저널에 실린 논문은 57~27년까지 50년간 발행된 플레이보이의 대형화보를 분석. 결과적으로 여성마다 소음부위의 색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빨간색 외음부는 생리의 징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 강미성은 배란과 관련있는 출혈, 즉 생리중에 가장 낮다. 고로 남성이 붉은색의 외음부를 선호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윤락업소 밖에는 빨간 조명이 반짝이고, 예나 지금이나 남성이 빨간 립스틱처럼 빨간색의 무언가를 몸에 두른 여성의 성적 매력을 더욱 높이 친다는 것은 모든 연구의 일관된 결과다. 성과 빨간색 사이의 깊은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작가들은 빨간색이 싸움 중 흘리는 피와 공격성과 관련할 수도 있다고 주장. 이렇게 볼 때 옷이든 화장품이든 아니면 장신구든 빨간색으로 치장한 여성이 성적매력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 이유는, 빨간색이 가임성의 징후나 여성 외음부의 색상이라는 직접적인 상징성보다는 ㅁ남성의 본능적 경쟁심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성적 흥분이 여성과 남성 모두를 더욱 충동적으로 만들고, 그 결과 당장은 적절해 보일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실질적인 손해를 부르는 의사결정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 남성들로만 구성된 집단에 여성을 한명 포함하면 미소가 집단내로 퍼지는 횟수가 9%나 증가. 그러나 여성의 매력도 보드카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남성으로만 구성된 집단에 보드카를 주자 미소가 집단내에 퍼지는 횟수가 무려 21%나 급격히 증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따라서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른 사람을 따라서 더욱 자주 미소를 짓는 사람은, 비록 부지불식간이라도 사회적 유대감을 더 깊게 느꼈다. 이것은 미소를 따라하는 행위가 가시적 혜택을 돌려주는 보람있는 활동임을 보여준다. 남성은 선천적으로 미소를 포함해 다양한 감정전염의 징후를 드러내지 않지만, 알콜은 그들이 긴장의 끈을 놓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전염되는 효과를 가져옴. 알콜은 사회적 약물로 익히 유명하고, 알콜의 사회적 증진효과를 증명하는 과학연구도 있음. 알콜이 남성 내면의 여성적 면을 끌어낸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해도, 이 연구는 남성들끼리 있을 때 적당히 술을 마시면 긴장을 풀고 일행과 더욱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된다.
- 술을 마시면 이성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 글래스고대 심리학자들은 이런 맥주안경 효과를 가장먼저 과학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유명. 실은 그들의 연구를 과학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약간 지나친 감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몇몇 연구자가 대학교 주변의 술집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술에 취한 학생들에게 몇 장의 얼굴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진 속 얼굴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점수를 매겨달라고 요청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분명 체계적이었다.
- 숙취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질문은, 어떤 것이든 숙취에도 유익한 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숙취에 대한 일반적 관점은 과음을 막는 천연의 완충제 역할을 한다는 것. 숙취를 대립과정으로 바라보는 이 관점은 숙취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이 유해한 노출에 맞서 대책을 세우게 된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 경우에는 알콜에 취하는 것이 바로 유해한 노출이다. 한편으로는 숙취가 불쾌한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술을 더 마시도록 부추길수도 있다. 이것은 숙취치료의 하나인 소위 해장술의 과학적 토대가 됨. 90년대 말 스웨덴 연구팀이 한 그룹의 병원 근무자에게 각자의 취향대로 화이트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도록 한 다음, 이후 몇 시간 동안 몇 번에 걸쳐 소변을 보도록 했다. 소변의 메탄올 농도는 이튿날 아침 첫 소면에서 가장 높았고 숙취에 따른 두통과 메스꺼움 증상도 그 시간대에서 가장 강했다. 이는 알콜음료에 소량 함유된 메탄올이 숙취의 생물학적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 인체는 메탄올을 분해해서 불쾌감과 불편함을 유발하는 독성물질을 생성한다. 흥미로운 점은, 맥주와 와인 그리고 스피리트에 함유된 알콜 성분인 에탄올과 메탄올은 인체내에서 알콜 탈수소 효소라 불리는 효소에 의해 분해된다는 점. 그러나 그 효소는 메탄올보다 에탄올을 선호하고, 다시 말해 메탄올과 에탄올이 신체 내로 동시에 유입되면 에탄올이 먼저 분해됨. 그래서 숙취 중에 술을 더 마셔 인체에 에탄올을 공급하는 것은 독성대사물질을 만들어내는 메탄올 분해를 방해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장술의 생물학적 근거다.
- 인간이 사용하는 일부 욕설은 특히 화가 났을 때 터져 나오는 감정적 욕설은, 마카크 원숭이와 다람쥐 원숭이들이 전기자극을 받았을 때 내는 감정적 소리를 닮았다.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인간의 욕은 변연계가 관장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투렛병 환자들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이런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 욕을 불쑥불쑥 내뱉는 틱 장애는 투렛병의 전형적 증상으로 강박적 외설증이라 불림. 강박적외설증을 보이는 투렛병 환자들이 꽤 많지만, 실제로는 그런 증상을 보이지 않은 환자들이 절반을 넘음. 대체로 투렛 병 환자의 25~50%가 강박적 외설증을 앓는 것으로 추정됨. 많은 연구를 보면, 투렛병 환자들은 정상인에 비해 뇌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또 다른 조직인 기저핵의 크기가 작다고 한다. 문헌조사를 실시했던 서던캘리포니아 연구자들은 이런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기저핵이 뇌희 감정적 중추인 변연계와 함께 욕의 발상지일 수 있다는 가설을 주장했다. 종합해보면 욕이 감정에 관여하는 깊은 부위의 뇌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욕이 뇌의 일상적인 언어중추와는 다른 기관이 관장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증거와 더불어 욕과 감성이 신경생물학적 면과 관련이 깊다는 것을 의미. 여기서 욕의 숨은 혜택 하나가 등장한다. 욕은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또 다른 배출구가 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느끼는 깊은 감정을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언어로 욕을 선택해도 된다.
- 욕을 함으로써 통증이 줄어드는 효과는 평소 욕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감소한다.
- 가장 필요한 순간에 최대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평소에는 욕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지 말라
- 욕의 숨은 혜택 또 하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 욕을 하는 행위가 무례하다고 느끼게 하거나 서로를 멀어지게 만들기는 커녕, 사람들 사이의 공통된 규범이라 느낄 뿐 더러 소속감의 표시라 여길 수 있다.
- 당신이 운전대를 어떻게 잡는지 말해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유형의 운전자인지 말해줄 수 있다. 만약 손의 위치가 2시 45분이나 2시와 10시 혹은 12시 55분에 있다면 당신은 제한속도를 초과하지 않고 앞차와의 거리도 더욱 넓게 유지하는 운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 몰입이론에 따르면 즐거움이라는 감정은 도전을 극복함으로써 느끼는 성취감과 신기함의 결합이다. 중요한 것은 도전의 강도. 어떤 활동이 즐거우려면 그것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가능성이 비록 100%는 아니더라도 꽤 높아야 함. 이러한 조건에서 몰입은 다른 모든 것을 잊더버릴 만큼 특정한 활동에 아주깊이 빠져들고 열중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몰입상태에서는 도전을 받아도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김. 몰입은 시간이 아주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경험하는 깊은 관여감과 즐거움의 심리상태다. 흥미롭게도 칙센트미하이의 연구에 참여한 자원자들은 종종, 경험추출을 위해 차고 있던 전자기기에서 삐 소리가 울렸을 때 우연히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몰입감을 느꼈노라고 보고했다.
- 연구자들이 자원자들에게 비밀로 하고 아드레날린을 주사한 진짜 이유는 신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을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감정과 관련하여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의 진짜 원인을 이해하고자 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랬다. 우리가 무언가에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느낄 때, 심리적 반응과 생리적 반응 중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날까? 두려움으로 위장이 꽉 조이는 것 같은 본능적 반응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먼저 정신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그 감정이 본능적으로 반응을 촉발하는 걸까? 아니면 먼저 본능적인 반응이 나타나고 그 반응을 두려움으로 해석하는 걸까? 연구자들은 후자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들의 생각은 이랬다. 먼저, 자신도 모르게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은 자원자들은 아드레날린으로 유발된 생리적 각성을 느끼기 시작할 때 비록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 나름의 감정적 해석을 찾을 거라고 예상했다. 또한 아드레날린을 주사한 이후 일어나는 생리적 반응을 통해 자원자들이 자신의 감정 상태를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연구자들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바람자이와 짝을 이루었던 자원자들은 덩달아 즐거운 기분을 느꼈고 유쾌하게 행동했다. 심지어 개중에는 종이비행기를 함께 만들어 날리는 자원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괴팍한 불평분자와 한 방에 들어갔던 자원자들은 바람잡이와 함께 화를 냈다. 이 실험은 사실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방식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라는 점을 증명한다. 감정과 관련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에서, 즉 심리적 느낌이 먼저냐 아니면 생리적 각성이 먼저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 실험은 본능적 반응 같은 생리적 면이 먼저고 행복감이나 분노 같은 심리적, 감정적 반응이 그 뒤를 따른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심리적 면은 신체의 반응과 주변의 상황을 토대로 이뤄지는 주관적 해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적 삶이 그런 식으로 조직화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다. 오히려 대부분은 감정의 심리적 측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그들의 결론대로 신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면, 이는 심리학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 사랑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은 자원자들이 아드레날린으로 유발된 신체적 각성을 기쁨 혹은 분노라는 자연적인 감정이라고 오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리 실험의 참가자들도 무서운 다리를 건넘으로써 유발된 신체적 각성을 낭만적 사랑과 관련있는 자연적 감정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만약 그 감정이 사람 사이의 강렬한 화학반응보다는 무서운 다리를 건너는 것과 더 관련이 깊다면, 그것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성에 대한 이끌림을 보여주는 명백한 신호들이 사실은 일부 남성이 자신의 감정적 각성을 오해한 데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두려움을 사랑이라고 오해했고, 그것이 사랑의 환상적 특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주었다.
- 연민적 사랑이란 공통된 가치관관 장기적 헌신이 포함되는 우정기반의 사랑을 일컫는다. 비록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흥미롭게도 장기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연민적 사랑이 일부 부작용을 유발한다.
- 노부부가 서로에게 연민적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는 희한하게도 한쪽 당사자에게만 긍정적 효과를 미쳤다. 아내가 남편에게 보여주는 연민적 사랑의 행위는 남편보다 아내의 건강상태에 좋은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다시 말해 남편이 아내에게 보여주는 연민적 사랑의 행위는 부부 모두의 건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 그 효과는 우리 문화에, 특히 노년 세대에 깊이 뿌리내린 성 역할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말해, 여성은 양육하고 보살피는 역학을 잘 수행할거라는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자녀를 양육하는 동안에는 이런 역할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다가 노년이 되어 남편을 지지하고 보살피기 위해 연민적 사랑을 보여주는 여성은 그런 행동에서 오히려 득을 본다. 여성에게 이것은 자신이 아직 쓸모가 있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증가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 보이고, 이는 다시 그들의 행복감을 강화한다. 반면 아내에게서 연민적 사랑을 받는 남편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남성들은 연민적 사랑의 행위를 자신의 건강이 쇠약해졌다는 징후로, 심지어는 결혼생활이 새로운 단계에 돌입했으며, 아내가 남편의 부양자가 되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일깨우는 신호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아내의 짐이 된다는 남편의 두려움을 심화하고 남편의 자기유능감을 갉아먹을 수 있다. 이것은 남성이 연민적 보살핌에 부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또한 남편이 아내에게 연민적 사랑을 제공하는 데에서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충족시켜야 하는 성 역할이 없다면 아무런 효과도 없기 때문. 뿐만 아니라 전통적 성역할은, 남성에게서 보살핌을 받아도 여성은 나약한 존재이고 위협적인 상황에 처했다고 느끼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전통적인 여성의 성역할에서 보면 아내가 지배적인 남편에게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 다른 말로 남편에게 연민적 사랑을 받는 여성은 불안감보다는 보살핌을 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 만약 사랑이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라면, 사랑은 틀림없이 유익하다. 실제로 이것을 입증하는 연구결과도 아주 많다. 낭만적 사랑의 혜택하나는 에너지와 활기를 북돋우는 효과다. 웨스턴온타리오대 심리학자들은 지금 연애중인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어떤 조사를 실시했다. 자원자들이 연인에 대한 감정을 생각할 때는, 철저히 플라토닉한 관계의 친구와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생각할 때보다 혈당 수치가 높아졌다고 연구결과는 전한다. 혈당수치가 증가할 때 자원자들은 활기찬 기분을 느꼈고, 이는 다시 행복감으로 이어졌다. 사랑에 빠진 자원자들의 혈액을 조사했던 어떤 연구에서는 사랑이 신경성장인자라 불리는 혈액내 물질의 수치가 증가하는 것과 관련이 있음도 밝혀졌다. 이 물질은 뉴로트로핀의 하나고, 뉴로트로핀은 우리가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함에 따라 뉴런, 즉 뇌세포가 성장하고 두터운 신경망을 형성하도록 만들어주는 분자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뉴로트로핀은 불안감을 비롯해 여타의 감정을 다스리는데도 도움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혈랙에서 이 물질의 수치가 증가한다는 점은 이탈리아 파비아대 연구팀이 밝혀냈다. 연구자들은 미칠 것 같은 진짜 사랑에 빠졌고 연애기간이 6개월을 넘지 않은 자원자들을 모집했다. 그들은 2년반 이상 평범한 연애를 하고 있던 자원자 집단과 솔로인 자원자 집단보다 NGF수치가 더 높았다. 이처럼 연애기간에 따라 NGF 수치가 달라진다는 결과는, 사랑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만 NGF 수치가 증가함을 의미한다. NGF는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열렬한 연애를 할수록 NGF 수치가 증가하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 1년 후 연구자들은 자원자들을 다시 조사했다. 그런데 1년전의 연인과 계속 사귀어온 자원자들의 경우 1년전보다 사랑이 식었을 뿐 아니라 NGF수치도 감소. 반면 솔로였던 자원자들의 경우 NGF 수치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는 무슨 뜻일까? NGF는 사랑의 초기 단계에서 분비가 촉진되면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시작하며 수반되는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심리적 혜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 사랑이라는 감정은 오해하기 십상. 즉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두려움을 구분하지 못한다. 둘째, 사랑이라는 강한 전류가 흐르게 만드는 매력적인 얼굴은, 평균적 외모나 반복적 노출 같이 전혀 낭만적이지 않아 보이는 요소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사랑은 독특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지령에 더 가깝고,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마약과 공통점이 많다. 결국 이 모든 결과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됨. 사랑은 우리의 정신건강에도 해로울 뿐더러 신체적 건강과 관련해서는 일종의 살인자다.
- 사랑이 보편적이요, 만국공통어라는 최고의 증거가 있다. 요컨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존재로 사는 것이다. 이쯤 되면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사랑을 피하고 싶어 안달이 날 수도 있겠다. 물론 사랑은 열망과 가슴앓이, 질투처럼 견디기 힘든 부정적 감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랑도 인생사의 다른 모든 것과 다르지 않다. 최고를 적절히 즐기려면 최저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테레사는 사랑의 근본적 중요성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다. 이 세상에는 빵에 굶주린 사람보다 사랑과 감사에 굶주린 사람들이 더 많다. 고로 당신은 사랑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붙잡아야 한다. 설령 때로는 입에 맞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나올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사랑이 아프다는 것을 안다. 인류가 대중가요를 발명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설문에 따르면, 감정표현 불능증이 없는 여성 스카이다이버들은 낙하하기 전이나 착지한 이후 불안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반면 감정표현 불능증을 앓는 여성 스카이다이버들은 전반적으로 불안감의 정도가 높았지만, 낙하한 직후에는 그런 감정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그들에게 스카이다이빙은, 먼저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고 그 다음 그런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스카이다이빙처럼 위험한 스포츠에 참여할 때의 숨은 혜택 하나는, 이런 활동이 리스크를 감수해볼 수 있는 체계화된 출구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감정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고위험군의 활동인 스카이다이빙을 통해 스트레스를 느끼고 그런 다름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기분을 직접 느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는 스카이다이빙이라는 위험한 활동이 감정적 자기조절력을 발휘할 기회가 된다. 스카이다이빙에 그런 숨은 혜택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리스크를 감수할 중요한 기회로 스카이다이빙을 선택할 감정표현 불능증 환자들은 전체 인구에서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감정표현 불능증 환자들말고, 극한 스포츠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떤 유형일까? 많은 연구자다 사람들이 스트레스가 많고 위험한 활동을 선택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훨씬 보편적인 특징을 발견했다.
- 출생순서라는 요인이 스트레스가 많고 위험한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에 미치는 이유는 가족역학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들은 대개 어릴 적 부모로부터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받는데, 가족을 형성하는 이 단계에서는 부모가 자원을 희석할 필요가 없는 데다가 한꺼번에 여러 자녀를 돌볼 필요도 없기 때문. 사실 어떤 연구결과를 보면, 부모는 첫째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동생이 태어나면 첫째들은 부모님을 도와 동생들은 돌볼 것으로 기대한다. 다른 말로 하면, 첫째들은 동생들에 비해 부모님이 자신에게 거는 높은 기대치와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에 더욱 익숙하다는 뜻이다. 부모가 둘째 이하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방식은, 자녀가 더욱 외향적 성격을 갖고 새로운 경험을 반기도록 만든다. 아마도 이것은, 첫째들이 유익한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이미 확립한 터라 동생들은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새롭고, 때로는 비전통적인 대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일수도 있다. 첫번째 연구를 이것과 연결해 생각해보면, 리스크를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는 대개 집단내에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준다. 이를 손위 형제자매가 있는 동생에게 적용하며, 그들은 가족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는데, 바로 더욱 위험한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런 성공적 전략을 고수하고,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첫째들보다 위험한 스포츠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결과로 이어짐. 이제, 스카이다이빙 같은 위험한 스포츠에 따라오는 스트레스의 숨은 혜택 하나가 분명해졌다. 위험에서 비롯한 흥분과 짜릿함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리스크를 감수할 출구를 제공할 수 있다.
- 심리학에서 가장 오래된 개념중 하나는, 감정과 생리적 반응의 닭과 달걀 문제와 관련있다. 어쨌든 심리학에서는 신체의 생리적 반응이 감정보다 앞선다는 개념이 지배적이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는 곰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곰을 보고 도망친 다음 두려움을 느낀다.
- 스트레스가 많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을 '웃으며 참아라'는 옛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어려운 도전에 직면하여 미소를 짓는 것은, 나쁜 디스트레스의 수준은 감소시키고 좋은 유스트레스는 끌어올릴 수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스트레스에서 회복하는 속도를 증가시킨다.
- 우리는 긍정적으로 경험하는 스트레스, 다른 말로 유스트레스의 여러 혜택에 대해 알아보았다. 유스트레스는 감정적 자기조절을 위해 사용될수 있고, 손위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체감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또한 착한 스트레스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엔돌핀을 분비해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한편 천식환자들의 경우에는 호흡곤란 증상을 완화시켜줄 수 있다. 스트레스는 정신적 개념이다. 고로 가끔은 각자가 하기에 따라서 문제를 도전으로 인지하고 또한 유해한 부정적 스트레스를 삶을 강화하는 긍정적인 유스트레스로 전환할 수 있다. 이제는 EU에 동참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지 않은가? 말인즉슨 유스트레스를 더 많이 느끼기 위해 노력하라. 유스트레스는 스카이다이버들을 비롯해 여타의 극한 스포츠 애호가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개념이다.
- 유스트레스는 삶의 따분함을 막아주는 든든한 수문장이고, 현대인의 삶에 슬그머니 똬리를 트는 반복적 일상을 이겨내는 하나의 방법이다. 출퇴근과 주말은 물론이고 우리가 먹는 것과 마주치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조롭고 뻔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죽고 싶어서 위험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되레 두려움을 극복하는 도전과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도전, 그리고 속도감이 수반된 활동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이, 판에 박힌 듯 따분한 일상에 변화를 주고 삶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아인슈타인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어지러운 책상이 어지러운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텅 빈 책상은 무엇을 보여주는 걸까?' 아인슈타인은 이 말을 통해 흥미로운 문제 하나를 제기했다. 우리는 종종 물리적 질서를 도덕성과 정확성과 연결하는 반면, 무질서는 부도덕성과 일탈과 관련시킨다.
- 정연함은 과거의 사건들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습적 사고방식을 장려하는 반면, 무질서한 환경은 새로움을 평가하는 더욱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촉진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기존의 일들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타성에 젖어 있고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실험에서 나타난 결과를 토대로 볼 때 한동안 잡다한 집안일에서 손을 떼라는 충고가 적절한 성 싶다. 그렇다면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집안이나 작업공간을 어지러운 상태로 내버려둘 때 숨은 이점은 무엇일까? 무질서한 환경이 당신의 창의성을 촉진하고 당신을 옥죄던 인습적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도록 영감을 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안일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보너스가 따라온다.
- 지루함은 세상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상태다.
- 표면상으로는 지루함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인다. 지루함은 일상적인 삶의 순조로운 흐름을 방해할 뿐이고, 지루함을 느끼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경험이다. 어쩌면 당신은 지루함이라는 감정이 왜 존재하는지 자체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예로부터 위대한 철학자들도 지루함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형편이었으니 그럼 궁금증이 들어도 이상할 것 없다.
- 런던대 실존주의 철학자인 크리스천 길리엄이 최근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지루함이란 시간낭비와는 상당히 다른 개념으로 나름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루함의 혜택을 알아보기 전에 실존주의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현대철학의 한 종류인 실존주의는 주로 실존의 문제와 더불어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다. 실존주의자들에게 이런 근본적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없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실존적 부조리라 부르는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에 부여하는 의미말고는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루함이 파고든다. 길리엄은 지루함의 중요한 목적은 삶의 긍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유인즉슨 지루함은 진실하고 진짜인 유일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란다. 길리엄은 어째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걸까? 그는 초기 실존주의 철학자 중 하나인 덴마크의 키르케고르가 '지루함은 인간의 실존적 허무에서 비롯한다'고 했던 말에 주목한다. 우리가 세상의 피상성에 주의력이 분산되는 것을 중단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실존의 근원을 파고드는 허무와 부조리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루함은 당신이 의미를 찾도록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지루함을 통해 우리는 반드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면에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천박하다고 여겨진다.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르케고르의 눈에 그들은 평민으로 보일 뿐이다. 키르케고르는 지루함과 관련하여 실제로 평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먹을거리를 구하거나 억압에 맞서는 것처럼, 생존을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때 자유로운 실존적 허무상태에 빠지고, 그런 허무상태를 우리는 지루함이라고 지각한다. 그러나 비록 고통스럽기는 해도 지루함은 진짜다. 사르트르는 이런 사고방식과 피터팬에 나오는 부모잃은 아이들의 사고방식과 비교했다. 그들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심각한 어른들의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했고, 대신에 맘껏 놀면서 즐거운 일만 할 수 있는 순진한 어린아이로 남아있다. 이 철학에 의거해서 보면,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실 삶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 재미있고 읽기 쉬운 철학서를 표방하는 길리엄의 논문에서 처절한 지루함은 적대시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포용해야 하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지루함을 느낄 때 당신은 인간에게 허락된 진실하고 참된 유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루함은 사실 기회와 가능성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 전기피부반응 수치는 세편의 동영상을 보는 내내 꾸준히 감소했고 그중에서도 지루한 동영상을 볼 때 유독 낮았다. 이 결과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자원자들이 세편의 동영상을 본 것처럼, 무언가에 대한 주의력은 시간이 기렁질수록 감소할 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할 때는 더욱 급속하게 감소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반면 심박수는 지루한 영화를 보는 내내 꾸준히 증가했지만 재미있는 동영상과 슬픈 동영상을 볼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심박수가 증가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지루함이 생리적으로 각성된 감정상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루함이 생리적으로 각성된 상태라는 것은, 지루함이 통증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아차리고 그에 따라 행동을 취해야 하는 신호라는 철학적 견해와 일치. 그러나 만약 지루함이 우리가 행동을 변화하도록 영감을 주는 가능성의 전제조건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우리가 행동을 변화할 수 있도록 지루함이 심리상태를 변화시킨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 연구자들이 의도적으로 보여준 지루한 동영상을 보고 지루함을 느꼈던 자원자들은, 세단어 문제를 더 많이 풀었고 카테고리 과제에서는 낙타와 같이 관련성이 적어 보이는 보기 단어에 더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고로 이것은 지루함이 사실상 창의성을 높여준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 실험결과는 지루함이 우리가 세상에 더욱 깊이 관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는 관점을 토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동기가 부여된 상태에서 우리는 초점화된 사고보다는 확산적 사고에 준하는 방식으로 더욱 유연하게 사고한다. 요컨대 이것은 지루함이 독특한 혜택을 제공한다는 철학적 아이디어를 뒷받침한다. 지루함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더욱 의미있는 다른 무언가를 시도할 때라고 말해주는 신호다.
- 공상은 직관적 깨달음으로, 정리정돈을 하지 않아 지저분한 환경은 창의성으로, 껌은 스트레스 완화료, 낙서는 집중력으로 이어짐. 지루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진실하고 참된 유일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또한 지루함은 행동의 촉매제로서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무언가를 중단하고 더욱 의미있는 다른 것을 시작하도록 만든다.
-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죽음의 본질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근사체험이 단 몇분간의 경험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영향력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진짜든 아니든 근사체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과 태도를 재평가하도록 만드는 등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근사체험에 관한 연구는 죽음의 순간이 유쾌한 경험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이런 점에서 커다란 용기를 얻는다.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불쾌한 경험이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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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학의 주요쟁점은 대개 적응에 관한 논의. 적응을 논의하는 이유는 인류조상이 적응하는 과정에서 번식이익을 얻었기 때문. 그중 몇가지는 이 책에서도 거론한다. 하지만 그 밖에 인간정신의 다양한 측면은 진화의 부산물일 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용어를 빌리자면 스팬드럴(건축물에서 인접한 두 아치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삼각형 모양의 공간. 어떤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을 의미)인 셈이다. 쾌락에 관해서는 특히 맞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포르노를 즐기지만 매력적인 남녀가 벌거벗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본다고 해서 번식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포르노의 유혹은 우연한 사건이다. 벌거벗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인간이 진화하면서 발생한 부산물일뿐이다. 마찬가지로 쾌락의 깊이에 관한 논의도 대개 우연한 사건과 연결된다. 본질주의가 진화해온 이유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였지만 이미 본질주의를 획득한 지금에 와서는 본질주의가 생존이나 번식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우리의 욕구를 이끌어간다.
- 사물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나 진실한 본성이 존재하고 숨은 본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개념이 본질주의다. 존 로크는 본질주의를 이렇게 정의. "모든 사물의 진정한 존재이고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다. 다라서 진실한 내면이지만 일반적으로는 ... 알려지지 않았고 겉으로 드러난 자질의 기반이 되는 성질을 본질이라 할 수 있다."
- 역겨움이라는 정서는 사람이 음식을 좋아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역할을 함. 역겨움은 상하고 오염된 음식, 특히 썩은 고기를 피하기 위해 진화해온 정서다. 참마, 애플파이, 감초, 바클라바(근동지방 가자), 건포도, 통밀파스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개, 말, 쥐와 같은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고기 이외의 음식에 대한 혐오감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치즈나 우유처럼 동물에서 나온 음식이거나, 모양이나 식감이 동물과 비슷한 음식이다.
- 족 외 식인풍습은 원래 건강한 사람을 먹는다는 이점과 더불어 적을 공포에 몰아넣는다는 부수적 이익 때문에 시작된 듯하다. 하지만 족 내 식인풍습의 기원을 달랐을 것이다. 노인을 갈아 먹으면 가시적 이점은 없다. 따라서 식인풍습을 행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는 편이 낫겠다. 사랑하는 사람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먹는 것이다.
- 신호이론은 다양한 현상에 적용됨. 현대미술작품을 구입하는 사람도 신호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쁜 그림은 누구나 구입해서 감상할 수 있지만 추상화를 수백만 불이나 들여서 구입하려면 돈도 있고 안목도 있어야 함. 신호는 찾으려고 보면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 나는 비싼 사립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이유도 신호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립학교에서는 라틴어가 힘들여서 공부할 만한 과모이라고 강조하지만 라틴어가 적당히 어렵고 권력을 연상시키는데다 써먹을 데가 전혀 없어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이상적 수단이기 때문에 많은 사립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라틴어가 다른 언어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고 지능을 개발하는 데 효과적인 과목이라고 밝혀진다면 공립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칠 것이다. 그러면 사립학교는 라틴어 수업을 없애고 하루에 한 시간씩 산스크리트어나 서예를 가르칠 것이다. 신호는 주로 남에게 보내는 것이고 신호의 전략적 역할이 바로 과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신호를 보낼 때도 있다. 우리는 특별히 물건을 살 여력이 되고 관심도 있는 부류하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페리에 탄산수를 사 마시는지 모른다. 광고 문구처럼 난 소중하니까.
- 약한 이론이 옳다면, 다시 말해 혀에 닿는 음식의 맛을 느끼고 정보가 맛에 대한 의견에 영향을 준다면 식초를 넣었다는 설명을 언제 듣는지는 중요하지 않음. 식초를 넣으면 맥주맛이 나빠진다고 생각한다면 맥주 맛에 대한 지각이 달라짐. 그러나 강한이론이 옳다면 음식에 관한 정보를 언제 습득했는지가 중요해짐. 맥주를 맛보기 전에 식초가 들어있다는 말을 들으면 맥주가 맛이 없다고 지각한다. 정보가 경험에 영향을 주기 때문. 하지만 맥주를 마신 다음에 정보를 들으면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맛을 본 뒤이므로 맛에 대한 정보가 경험 자체는 건드리지 못한다. 현실에서는 강한 이론이 승리한다. 맛없는 맥주로 기대하고 마시면 맛이 없어진다. 하지만 이미 맛을 본 다음에는 정보를 알아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 인간이 고통을 즐기는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다. 아드레날린이 분출해서 쾌락이 일어날 수 있다. 어쩌면 강인한 남성성을 드러내는 신호일 수도 있따. 고통이 일어나면서 진정제가 분비되는데 진정제에서 얻는 황홀감이 낮은 고통수준을 압도하는 것일 수 있다.
- 인간은 음식을 먹을 때도 늘 고통을 경험한다는 이론이다. 누구나 혐오식품을 즐긴다. 커피나 맥주나 담배, 고추를 처음부터 맛있게 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통에서 쾌락을 얻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다른 동물은 다른 음식이 있으면 고통을 주는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철학자들은 인간 고유의 특징을 언어, 이성, 문화에서 찾는다. 인간은 타바스코 소스를 좋아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 평범한 얼굴이 호감을 주는 이유를 정확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정상에서 벗어나면 좋지 않다는 논리에서 평범한 얼굴은 건강을 의미할 수도 있다. 평범한 얼굴은 이형접합, 곧 유전적 다양성을 의미. 역시 유전적으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평범한 얼굴이 말 그대로 보기 편해서일 수도 있다. 평범한 얼굴은 평범하지 않은 얼굴보다 시각처리 절차가 단순하고 사람은 처리하기 수월한 이미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아직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평범한 얼굴이 호감을 주긴 해도 빼어난 얼굴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가장 매력적인 얼굴은 평범하지 않다. 어쩌면 평범한 얼굴이 특출하게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평범하지 않은 얼굴이 매력적이지 않을 위험이 높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다윈은 1896년에 인간의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노래나 음악에 대한 사랑을 언급했다. 아직도 설명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인간이 물, 섹스, 온기, 휴식, 안전, 우정, 사랑을 즐기는 이유는 명확하다. 있으면 좋고 생존과 자손번식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일정한 운율로 이어지는 소리를 즐기는 이유는 무얼까? 세계 어디서든 사람들이 노래와 춤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는 이유는 무얼까? 아마존 강의 메크라노티 부족에서는 여자들이 하루에 한두 시간씩 노래하고 남자들은 밤에 두시간 이상 노래한다. 근근이 끼니를 때우면서도 노래는 몇 시간씩 부르는 것이다.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과잉행동처럼 보여서 진화생물학을 버리고 신의 존재를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커트 보네거트는 묘비에 이렇게 새겼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필요한 오직 하나의 증거는 음악이다."
- 음악은 사회적이다. 음악적 취향은 인생에서 특정한 사회집단과 어울리는 시기에 형성됨. 이때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현대 서구사회에서는 이 시기가 늦게 찾아온다. 사폴스키의 연구결과에서는 대략 십대 후바이나 이십대 초반으로 나타낫따. 젊은 이들은 최신 음악을 선호한다. 동시대 다른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기 때문이다. 타일러 코웬은 이렇게 지적한다. "흘러간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남들도 이미 좋아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남들이 바로 부모일수도 있다."
- 어떤 사건은 심리적 정화과정을 자극해서 공포와 불안과 슬픔을 일소하고 기분을 고양시키고 편안하게 만들어준다는 카타르시스 이론이다. 우리가 불쾌한 경험을 참고 견디는 이유도 결국 감정의 해소라는 긍정적 효과를 얻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컷 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로 가끔 경험하는 현상이긴 하지만 카타르시스 이론은 과학적으로 보면 허술한 이론이다. 정서적 경험에 정화기능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방대한 연구에서 제시하는 사례를 인용하자면 폭력적인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이 안정되거나 편안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흥분한다.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 편안하고 안전한 기분을 느끼면서 돌아가는 사람은 없다. 비극을 보면 복잡한 심정으로 극장을 나선다. 나쁜 감정을 경험하면 기분이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공포와 비극이 주는 쾌락을 기분 좋은 잔향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 상상력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상상력은 미래를 계획하고 타인의 생각을 짐작하기 위해 진화했지만 현재는 쾌락을 얻는 데 꼭 필요한 능력으로 자리 잡았다. 상상력을 통해 현실보다 나은 경험을 맛볼 수 있다.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면서 즐거움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의 고통을 이용하면 끔찍하지만 안전한 시나리오로 연습해서 불쾌한 현실에 대처할 수 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상상이 나올 것이다. 가상 세계의 영역이 넓어져서 인터렉티브 공상이 더욱 흥미진진해지고,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다. 언젠가는 증강현실 시뮬레이터인 홀로덱이나 오르가슴을 선사하는 오르가스마트론 같은 장치가 등장하거나 적어도 지금보다 발전한 형태의 텔레비전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상상에는 한계가 있다. 인가은 경험을 습득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마라톤 선수는 마라톤을 완주하는 경험을 상상하거나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믿음에 안주하지 않고, 직접 뛰고 싶어한다. 또 비행 시뮬레이터를 조작하기 보다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어하고, 혼자 자위하기보다 실제로 성관계를 맺고 싶어하며, 텔레비전 속 인물둘이 나누는 재치있는 대화를 듣기보다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싶어한다. 상상의 쾌락이 삶의 중요한 일부이긴 하지만 상상이 전부는 아니다.
- 사람들은 99.99달러짜리 스피커는 사도 100.00달러라고 하면 지나친다. 집안에 총이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수영장의 위험에는 무관심. 이와 같은 불완전성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은 동물이지 천사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자연선택을 거쳐 세계를 유용하게 추론하도록 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화는 최소의 필요한 조건을 추구해온 과정이지 능력을 최대로 활용해온 과정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에 적응하도록 진화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완벽하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심리학자 개리 마커스가 조심스레 주장하듯이 뇌에는 클루지(컴퓨터 속어에서 차용한 용어로 서툴게 짜 맞춰진 기구라는 뜻)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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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풀다

심리 2018. 7. 22. 08:11

- 당신에게 일어난 사건이 당신의 기대와 일치하거나 당신의 기대를 넘어서면 당신은 행복하다.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는 점. 사건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태도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 육체적 고통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겪는 감정적 고통도 생존에 유익한 역할을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 갓난아이가 혼자 오랫동안 방치되면 위험할 수 있다. 따라서 혼자 방치되는 시간이 길어지면 아기는 겁먹고 자지러직 울며 베이비시터를 찾음. 성인의 경우에도 흔히 외로움이라 일컬어지는 고통스런 고독감은 우리에게 존재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불안감도 우리에게 닥친 시험이나 프레젠테이션을 진지하게 준비하도록 자극한다는 점에서 유익할 수 있음. 죄책감이나 수치심은 신속히 사과하고 보상하게 유도함으로써 중요한 사회적 유대를 회복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익할 수 있다.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으면, 상처의 강도에 따라 그 불편함에 몇분이나 몇시간, 심지어 며칠간 지속됨. 그러나 그 상처에 대한 생각을 멈추면 불편한 느낌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희미해지면 당신은 당시에 느꼈던 거북한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끌어낸다. 육체적 고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자연스레 사라지고 소멸된다. 하지만 심리적 고통은 그렇지 않다. 심리적 고통은 지극히 사소한 것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잔존하다가, 상상 등 어떤 이유로은 당시의 고통을 되살릴 만한 이유가 제기되면 몇번이가 되풀이해서 다시 수면위로 떠오름. 결국 심리적 고통을 허용한다는 것은, 행복에 맞추어진 초기 상태에 변화를 주며, 불필요한 심리적 고통을 우선시하도록 재조정한다는 뜻. "나는 멍청하게도 친구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나는 벌을 받고 고통을 받아 마땅해." 라며 순전히 상상으로 거짓 고통을 더해도 심리적 고통이 확대된다. 이처럼 부정적 방향으로 점증되는 내적대화는 우리를 그 사건에 옭아매며 심리적 고통을 더욱더 가중하고, 그 결과 우리는 불행의 늪에 깊숙이 빠져듬. 그러나 분명히 말하자면, 이때 우리가 느끼는 불행은 우리 주변을 에워싼 세계에서 비롯된 객관적 결과물이 아니다. 문제의 사건은 이미 끝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심리적 고통에 시달린다. 한마디로 우리 뇌가 만들어낸 고통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심리적 고통은 우리가 자초하는 무익한 고통일 뿐이다.
- 우리 조상들은 가혹한 환경에서 살았던 까닭에 생존을 위해 투쟁 또는 도피반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생존을 위한 기본원칙은 뭔가를 위협이라고 인식하고 나서야 위협으로 표지하는 것보다, 위협으로 인식되기 전에 위협으로 표지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 그것도 신속하게 판단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 결과, 우리 조상의 두뇌는 현실세계가 제공하는 정보가 진실을 정확히 반영한 결과가 아니더라도 생존을 위해 충분한 방식대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길들여졌다. 인류의 뇌에 각인된 생존 프로그램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어떤 사건을 평가할 때 우리 뇌는 지나치게 조심하는 경향을 띤다.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려고 그런 경우를 머릿속에 그리며, 우리가 제한된 지력으로 신속하고 유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실을 가공하는 경향되 띤다. 이런 습관이 결국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이 모든 것이 괜찮게 여겨진다.
-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일거리인 재미와 관련해서도, 우리를 행복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엄청나게 허황된 신화가 있다. 겉으로는 행복하게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행복과 재미는 다른 것이다. 파티와 음주, 식사, 과도한 쇼핑, 강박적 섹스 등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행위들은 중요한 문제로부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는 시도에 불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생존을 기계에 비유한다면, 좋은 기분은 부품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함. 우리 뇌는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만 즉각적 위협과 관계없는 행위를 유도할 때 좋은 기분을 활용한다. 이 기능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우리 뇌는 그런 행위를 하는 동안 세로토닌과 옥시토신 등 좋은 기분과 관련된 화학물질을 분비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행위를 더욱 자주 행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생식은 우리 인간종의 생존에 필수적 부분임. 그러나 어린아이 없이 산다고 장래의 부모에게 즉각적 위험이 되지는 않음. 섹스에서 어떤 즐거움도 얻지 못한다면, 생존을 위해 무척 중요한 기능인 섹스도 이미 무시되고 간과됐을 것이다. 짝짓기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을 얻는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생식하며 자손을 퍼뜨린다. 따라서 재미는 유익한 것에 불과하지만, 적잖은 사람이 힘들고 까다로운 생각을 두려워하며 그런 생각에서 탈출하려고 재미를 필사적으로 추구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재미는 마음의 고통을 무디게 한다는 점에서 진통제와 비슷. 그래도 재미는 행복을 모방하며 우리 뇌를 압살하는 끝없는 생각의 끈을 끊어버린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진통제다. 적어도 잠깐동안은. 하지만 즉각적인 즐거움이 희미해지면 곧바로 부정적 생각이 되살아나고, 심리적 고통이 다시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재미와 즐거움을 찾아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한다.
- 생각을 멈추면 우리는 행복에 맞추어진,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초기상태로 돌아간다
- 재미를 탈출수단으로 삼는 행위는 행복방정식을 풀지 않은 채 방치하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핵심 쟁점을 모르는 체하는 짓이다. 재미는 순간적으로 큰 즐거움을 주지만, 엄격히 말하면 진정한 행복을 가로막는 방해꾼이다. 그러나 재미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재미 자체는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지혜롭게 사용된 재미는 잠깐 동안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허락해 주는 비상정지 버튼이다. 비상정지 버튼을 눌러 우리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쿵쾅거리는 목소리를 꼼짝하지 못하게 얼려놓으면 그틈에 이성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해갈 때마다 건전한 재밋거리, 이를테면 운동과 음악과 마사지 등을 즐기면, 부정적 생각의 흐름을 차잔할 수 있다. 건전한 재밋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궁극적으로 당신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재밋거리를 의미. 그런데 구체적 계획을 세워두고 건전한 재밋거리를 규칙적으로 즐긴다면, 재미를 훨씬 더 지혜롭게 활용하는 방법이 된다. 이때 재미는 감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진통제가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섭취하는 행복보조제가 된다.
-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재미와 즐거움은 일시적 탈출상태, 즉 미인식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탈출상태에서 지나치게 오랫동안 꾸물거려서는 안된다. 지속적이고 진정한 행복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면, 최대한 빨리 탈출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 6가지 환상은 우리를 혼돈상태에 빠뜨리며,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우리능력을 저해함. 이런 상태에서 삶은 투쟁이 되고, 행복방정식을 해결하려는 대부분의 시도가 실패함. 우리가 환상을 받아들이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 따라서 삶은 잔혹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됨. 이 환상들은 꿰뚫어 보는 순간, 우리 앞을 가로막던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밝아짐. 그때부터 우리는 행복을 더욱 자주 경험하게 된다.
(1) 생각_머릿속의 작은 목소리
- 당신의 머릿속에서 중얼대는 작은 목소리는 당신이 아니다
- 뇌의 임무는 당신에게 고려해야 할 논리는 제공하는 것이다. 쓸데없은 생각이 끼어들더라도 누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인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망각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대장이다.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다.
- 과제를 수행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재에 집중하는 능력이 필요. 현재에 집중하는 힘은 무척 유용한 기능이다. 객쩍은 공상에 불과한 허구적 생각, 즉 끝없이 이어지는 무의미한 생각은 엄격히 말하면 불필요한 생각이다. 더 가혹하게 말하면, 우리를 짜증나게 만들고 심리적 고통의 늪에 빠뜨리는 생각이다.
-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르지 말라. 오히려 그 생각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유심히 지켜보라. 어떤 생각이든 유심히 관찰하고, 그 생각을 그냥 내버려 두라. 다만, 그 생각이 당신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생각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다. 당신이 힘을 부여하지 않는 한 어떤 생각도 당신을 지배하지 못한다.
- 현재의 감정이 생긴 이유를 역추적하는 단순한 행위, 즉 현재의 감정을 유발한 생각이 무언지 추적하려는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숨을 돌리며 냉정을 되찾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생각과 감정의 관련성에 집중하려면, 뇌에서 문제해결과 관련된 부분을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역추적은 끝없는 목소리를 중단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현재의 감정을 유발한 생각을 정확히 찾아내는 데도 도움이 된다. 현재의 감정을 냉정히 주시하면, 감정이 종종 생각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고, 감정이란 것이 속을 계속 부글부글 끓이며 가슴앓이 할 정도로 가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훈련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뇌의 반복적 패턴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으며, 뇌의 속임수도 훤히 읽어낼 수 있다. 따라서 뇌가 속임수를 쓰면, 우리는 빙긋 웃으며 뇌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헤헤, 멍청한 짓은 그만해. 뇌야! 왜 나한테 더 나은 생각을 제시하지 않는거야?'
- 우리 뇌는 유혹을 피하지 못한다. 우리는 뇌의 이런 속성을 무척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생각함으로써 뇌가 그것에 집중하도록 유도할 수 있음. 물론 선택가능성은 무한하다. 당신이라면 뇌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명령하겠는가?
- 대부분의 명상기법이 아름다운 장미, 깜박이는 촛불, 우리 자신의 호흡 등 생각의 범위 밖에 존재하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명상은 생활방식 자체가 아니다. 명상은 어떤 생활방식을 우리에게 인도하려는 일종의 훈련이다. 그 훈련이 끝난 후에 우리가 평소처럼 온갖 생각으로 가득한 머리라는 생활방식으로 돌아간다면 명상이란 훈련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명상훈련의 궁극적 목적은 명상실 밖에서도 각성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목적이 성취되면 명상은 온종일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생활방식이 된다
- 매트릭스의 네오는 인류의 구원자로 선택받는다. 매트릭스가 그의 뇌에 심어놓은 가상의 이미지와 생각너머를 보게 되자, 그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1과 0으로 변한다. 네오는 이런 변하를 절대적인 통찰력의 형성으로 받아들였고, 그런 통찰력은 주변환경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으로 이어졌다. 그때부터 어떤 것도 네오를 해칠 수 없었다. 매트릭스의 에이전트들의 놀라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 네오의 눈에는 슬로모션으로 보였고, 따라서 네오는 힘들이지 않고 그들의 주먹을 멈추고 그들이 쏜 탄환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생각의 환상을 간파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 정도의 숙련도에 이르기를 바란다. 우리 행복은 주변세계의 조건보다, 그런 조건을 두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생각에 크게 좌우된다. 대사만이 아니라 생각에서 감정으로 발전하는 과정까지 차분히 주시하는 방법도 터득한 뒤라면 우리 눈앞의 모든 것이 1과 0의 조합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머릿속의 생각을 지켜볼 수 있으며,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힘은 결국 우리가 생각에게 부여한 힘에 불과. 네오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생각이 무척 느릿하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짐. 따라서 생각 하나하나를 주시하며, 생각의 공격을 재빨리 피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뇌에게 잔소리를 끊으라고 명령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더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힘을 향상하는 방법까지 터득한다면 우리가 완전한 통제권을 지닌 그런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뇌에게 주변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라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이다.
(2) 자아_ 당신은 누구인가
- 아이는 영리하기 때문에 질책받는 행동보다 칭찬받는 행동을 더 자주 하려고 애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뒤섞이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 즉 페르소나를 만들어가기 시작. 내면의 자아가 실제로 어떤 인물이고 어떤 존재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 이후로 죽을때까지 아이의 관심은 진짜 자아에서 겉으로 비춰지는 이미지로 옮겨간다. 대외적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욕망과 남들에게 주목받고 싶은 욕망이 뒤섞인다. 코를 후비는 행동은 남들의 관심을 끌지만, 장난감을 깔끔하게 정돈하는 행위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는 걸 아이는 재빨리 눈치챈다. 관심은 아이가 추구하며 원하는 것이다. 이즘음 방해꾼이 잉태된다. 관심파괴자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가 주목받겠어 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체로 10대에 이런 정체성 위기를 심하게 겪는다. 이때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압박감과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따라서 진짜 자아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또래집단에서 용인되는 속성에 더 가까워진다
- 나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자동차에 집착했다. 자동차의 예술적 공학기술이 내 호기심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자동차는 나의 에고를 과시할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나는 성공하고 교양있는 수집가라는 페르소나를 선택했던 것. 지금도 여전히 자동차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자동차를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는 강렬한 욕구는 떨쳐버린지 오래다. 내 에고를 충족하려는 욕심때문에 내 열정이 더럽혀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 성공하기 전까지, 내가 구입한 자동차들은 '나는 성공한 사람'인 척하고, 내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한편, 진정으로 성공한 이후로는 내 성공을 증명하기 위한 자동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든 자동차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에고의 받침대는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 당신이 선택한 이미지를 인정받으려는 노력은 승산없는 싸움. 진짜 당신은 에고가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것과 다르기 때문. 따라서 사람들에게 진짜 당신인 것처럼 믿게 하려는 바람에서 더 나은 이미지를 끊임없이 모색할 수밖에 없으니 당신의 삶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런 노력은 두가지 이유에서 필연적으로 실패함. 첫째로, 다른 사람들도 당신의 에고보다 자신의 에고를 염려하기 때문에, 또한 그들의 에고가 생존하느냐 않느냐는 당신의 에고와 비교한 결과에 좌우되기 때문에 당신의 에고가 인정받을 가능성은 무척 낮음. 그들이 옳다면 당신은 잘못된 사람이 된다. 당신이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 되면 그들은 넘치도록 중요한 사람이 된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게 우월감을 느끼기에 가장 쉬운 방법이다. 상대를 부정하고 비난하면 힘들이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상대를 하찮게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항상 실패하는 두번째 이유는, 그들이 인정하는 존재는 진짜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페르소나이기 때문. '푸키, 만세!'는 없고, '만세, 푸키와 막연히 비슷하게 생겼지만 누군지 확인할 수 없는 에고~'와 같은 것만이 기승을 부린다. 당신도 분명히 느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면 깊은 곳에서 느낄 것이다. 이 때문에 승리가 공허하게 느껴지고, 진짜 당신도 무가치한 것으로 느껴짐.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그처럼 힘겹게 노력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히려 자존감을 세우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3) 지식_ 당신은 무엇을 아는가
- 언젠가 아인슈타인은 "이론적으로 이론과 실제가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방정식들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중력효과를 조정하려고 어떤 상수를 삽입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주변의 지적을 받아들여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방정식을 수정하며 임의로 삽입한 상수, 즉 우주상수가 우주의 핵심적 진실 중 하나라는 것이 훗날 과학자들에 의해 입증 되면서 아인슈타인이 실수했다고 인정한 것이 오히려 잘못된 셈이 됐다
- 지식은 우리가 다른 모든 환상 뒤에 감춰진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환상이다. 우리가 그럭저럭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고려하면 우리 지식이 몽땅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는 6가지 큰 환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럭저럭 살아왔고 그 때문에 6가지 환상의 타당성을 따져보려는 욕구도 쉽게 사그라진다. 하지만 현명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당신이 평생 공들여 배웠던 것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즐겁게 받아들여라.
- 지식은 결코 행복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지식을 축적하기 전의 상태, 즉 우리의 초기상태는 행복에 맞춰져 있었다. 결국 잘못된 지식이 대부분의 불행을 초래하는 근원이다. 우리는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이 정확한 것이라 확신하는 까닭에, 그런 지식을 행복방정식에 입력하는 데 사용.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실제로는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즈음이면, 행복방정식은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심리적 고통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뒤다.
- 간호 당신이 삶의 행로에서 일탈하면 삶이 당신을 가혹하게 자극한다. 그 자극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4) 시간
- 범세계적으로 보면 시간을 중시하는 문화권보다 사건을 중시하는 문화권이 수적으로 더 많다.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구의 기업인에 비교하면 게을러 보일 수 있겠지만, 라틴아메리카와 중동, 남유럽과 인도, 아프리카의 기업인들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함께 협력해 일하는 데는 무척 뛰어남. 그들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성공방정식을 풀어가고 있는 셈. 그러나 성공방정식을 풀어가는 과정이 그들에게는 행복을 찾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 시계는 끊임없이 째깍거리고 사건을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불교도는 항상 현재의 순간에 완전히 집중한다. 이런 무시간의 상태는 열반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 현재의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 살아갈 수 있다면, 영원한 낙원에서 살아가는 듯한 평화로움을 얻게 됨. 특히 영원이 흔히 무척 긴 시간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부재라는 걸 깨닫는다면,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됨. 결국 영원은 시간이 없는 상태를 의미
- 우리가 과거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현실에 살지 않고 생각에 파묻혀 살아간다는 뜻이다
- 대부분의 생각에는 시간이란 딱지가 딸려 있다. 대부분의 생각이 과거나 미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런 생각들은 불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판단하려면, 현재의 관찰을 과거에 행한 관찰에 비교해야 함 미래를 지레짐작하며, 미래가 현재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고 예견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현재와는 다른 상태를 갈망하는 까닭에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순간을 다시 꾸며내려 하기 때문에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다. 지금 손안에 없는 것을 원하고 욕심내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충실하면, 신체적 고통을 제외하고 누구도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
(5) 통제
- 성공한 기업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성공은 불쾌한 현실을 무시한다고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우리 삶이 불완전하다는 걸 인정하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태도에서 시작됨. 행복은 환상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통제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절망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행복과 직결되는 현실적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 모든 것이 결국 괜찮아 질 것이다. 어떤 것이 아직 괜찮아지지 않았다면, 아직 끝에 이른 것이 아니다
(6) 두려움
- 복어는 언제 배를 최대로 부풀리는가? 부풀어 오른 배는 용기의 증거가 아니라 두려움, 그것도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증거다. 당신이 두려움을 인정하기 힘들다면, 당신은 자유로운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를 짓누르던 두려움을 하나씩 찾아내는 데 이 질문이 많은 도움이 됐다.
- 많은 사람이 심리적 고통에 반발하지 않고, 삶이란 워낙 그런 것이라 믿어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두려움에 따른 고통을 참고 견디지만, 대체 무엇에 맞서는 걸 두려워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두려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향한 첫 단계는 자신을 괴롭히는 두려움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숨거나 외면하지 말고, 두려움에 과감히 맞서야 한다.
- 두려움에는 긍정적인 면이 조금도 없다. 우리에게 활력을 주며 앞으로 나아가게 독려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지 두려움이 아니다. 두려움은 오히려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두려움은 우리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며,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걸 방해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최선의 성과를 끌어내는 게 아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불안감을 가중할 뿐이다. 우리를 성공으로 끌어내는 힘은 누가 뭐래도 근면이다. 부지런히 일하며 힘쓰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어떤 형태로든 성공을 거둬도 다음에는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내 삶에서 최고의 순간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삶의 여정에서 심지어 마음껏 축하할 시간에도 내 행복을 빼앗아 갔다.
- 삶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뭘까? 삶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경험해 보는 것이다. 삶은 우리 관심을 끌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삶을 밀어내려 애쓴다.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공하는 경험은 즐거운 것도 있고 배울 것도 있지만,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꼼짝하지 않으며 그런 경험들을 즐기지 못한다
- 미래는 당신이 기대하는 수준보다 더 좋을 것이다. 당신의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근거한 당신의 두려움에 부응했다면,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임. 이 모든 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임. 미래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런 걱정과 두려움 자체가 지금 우리가 괜찮은 상태에 있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라. 우리 뇌가 미래에 대해 걱정할 여유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 우리 뇌는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를 주로 생각하는 경향을 띤다. 뇌가 이런 식으로 위협에 대비해 계획을 세우며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를 두렵게 하는 나쁜 것보다, 우리를 기다리는 좋은 것을 생각하면 두려움으로부터 단숨에 벗어나며 크게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 죽음은 가장 큰 두려움이다. 당신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는 법의 깨달음이 두려움을 직시하는 궁극적 형태일 것이다.
- 에크하르트 톨레는 삶의 비밀은 '죽기전에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모든 것이 사라진 어느날, 당신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을 테고, 따라서 잃을 것도 전혀 없다는  걸 깨달은 상태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 7가지 맹점은 우리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치며, 현실세계를 정확히 인식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방해. 7가지 맹점이 뇌의 비관적인 성향과 결합되며 인간의 생존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7가지 맹점은 행복방정식을 풀어내려는 우리 노력에 간섭하며 우리를 쓸데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한다. (여과, 추정, 예측, 기억, 분류, 감정, 과장)
- 수천년 동안 우리 뇌는 7가지 놀라운 특성, 즉, 여과, 추정, 예측, 기억, 분류, 감정, 과장을 갖추어 왔따. 그렇다. 이런 성향 덕에 인간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극단적으로 적대적 환경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이런 특성들이 야기하는 불편함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는 게 당연한 반응이다. 문명이 발달한 후로 우리는 호랑이를 도시에서 쫓아냈고, 사냥터는 일터와 사교장과 쇼핑센터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7가지 특성에 계속 의지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달라지 환경에서도 7가지 특성이 여전히 효과적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나사못을 죄는 데 사용되는 드라이버가 우리 눈을 찌르는 데도 사용될 수 있듯이, 과거에 우리를 지켜주었던 특성들이 이제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맹점으로 바뀌었고, 특히 과거의 성향을 버리지 못한 뇌의 핵심적 특성과 결합되는 경우에는 우리를 불행의 늪에 내던져버린다.
- 편도체는 부정적 경험을 탐색하는 데 자신의 뉴런 중 대략 3분의 2를 사용. 또한 뇌가 나쁜 소식을 찾기 시작하면, 부정적 경험은 즉시 장기기억에 저장되지만 긍정적 경험은 우리 의식에서 12초 이상 정체하는 경향을 보임. 긍정적 경험의 경우 단기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전환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 행복한 사건은 생존에 어떤 이득도 주지 않으므로 우리 뇌는 행복한 사건을 무시하는 경향을 띤다. 이런 이유에서도 우리 머릿속 대화는 부정적 성향을 띠게 된다.
- 우리가 맞닥뜨리는 부정적인 것들은 항상 긍정적인 것에 몰입해야 한다는 규준을 위배한 예외적인 것도 편의상 무시하는 경향을 띤다.
- 여과 : 우리가 보는 세상의 모습은 항상 불완전하다. 우리 뇌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집중하려고 진실의 적잖은 부분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주로 여과된 것이며, 결국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은 진실의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 추정 : 뇌가 결정을 내리려면 논리정연하고 명료한 정보가 필요하다. 따라서 뇌는 진실의 대부분을 걸러낸 다음에는 빠졌을 법한 정보를 추정한다.
- 우리 뇌는 부정적 경향을 띠며 우리 생존을 우선시하도록 설계됐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우리를 슬픔이나 걱정에 몰아넣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꾸미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추정은 뇌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추정은 진실이 아니다.
- 예측 : 우리 뇌는 추정하며 빈칸을 채운다. 그런데 가장 큰 빈칸은 무엇일까?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 미래는 수많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미래는 어떤 부분도 확실하지 않지만,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 뇌가 멈추지는 않는다. 우리는 뻔뻔스럽게 빈칸을 채운다.
- 예측은 뇌가 가공하는 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예측은 아직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예측은 진실이 아니다.
- 기억 : 우리 뇌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현재 사건에 대한 인식과 과거의 기억을 뒤섞는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어떤 업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우리가 과거에도 그 일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라 추정한다. 이런 편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과거에 그 일을 시도할 때의 환경은 지금과 무척 달랐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무시한 때문이다. 과거에 힘들었다는 기억으로 현재 상황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현재 상황이라는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 결정이 내려진다.
- 우리는 기억을 과거 사건의 보관소로 생각. 물론 과거의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기억은 우리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건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우리 생각은 우리 뇌의 맹점 때문에 항상 왜곡되기 때문에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재의 사건이라는 순수한 현실에 과거의 기억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꾸민다. 과거의 기억 자체가 부정확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뒤섞기는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는 뒤섞은 결과를 진실로 여긴다.
- 분류 : 기억은 과거의 사건들을 진실에 덧붙인다. 분류도 과거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 영향력은 기억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분류는 관련된 특정한 사건을 기억하지 않고, 단순한 꼬리표의 형식을 띤다. 우리 뇌는 무엇이든 판단하고 분류하며, 맥락과 세부사항을 배제한 채 그런 분석의 결과를 간략히 부호화한다. 우리 뇌는 이런 분류를 활용해 신속히 결정내릴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정확성을 희생한다.
- 감정 : 감정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지만, 감정과 논리가 뒤섞이면 우리 판단이 흐트러진다. 대부분의 결정은 논리에 근거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우리 행동은 감정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다.
- 우리 마음에 감정이 끝없이 밀려온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만큼 이성적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파이드로스는 이성을 '말의 격분한 감정을 적절히 다스리는 마부'에 비유했다. 감정을 불신하며 이성적 합리성을 숭배하는 문화를 구축한 서구인의 성향을 반영하는 비유다. 우리는 특히 직업적 관계에서 논리를 중시하고 감정을 억누르라고, 감정이 솟구쳐 올라도 감정을 감춰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얄궂게도 우리는 여전히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무엇보다 감정에 휩쓸려 결정을 내리고, 그런 결정을 뒷받침하는 온갖 자료를 수집한다는 현실을 은폐한 채 살아간다.
- 과장 : 우리 뇌의 엄청난 고집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 우리 뇌의 가장 확고한 원칙은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임. 따라서 우리 뇌는 조치를 취하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인식을 과장하며 우리 관심을 끌어당긴다.
- 진실에 뭔가가 덧붙은 것이나, 진실에서 뭔가가 빠진 것이나, 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 우리 뇌가 우리에게 속삭이는 말이 터무니 없는 군소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그것은 진실인가?'라는 질문을 필요한 만큼 끊임없이 자신에게 제기해야 함. 우리 뇌가 어떤 사건을 사실을 토대로 서술할 때까지, 다시 말하면 진실 외에도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고 이야기할 때까지 '그것은 진실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라
- 대부분의 경우 우리 삶에서 유일하게 잘못된 것은 우리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태도다. 우리가 세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본다면 행복방정식을 정확히 해결할 수 있다. 행복방정식을 정확히 해결하는 횟수가 잦아지면, 우리가 사건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설정한 까닭에 삶의 사건들이 기대치를 거의 언제나 충족한다는 것도 알게될 것이다.

- 5가지 궁극적인 진실은 삶이 예측한 대로 항상 진행된다는 걸 깨닫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이다. 5가지 궁극적 진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행복방정식을 최종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 삶이 예측한 대로 항상 진행된다는 걸 깨닫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이다. 5가지 궁극적 진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행복방정식을 최종적으로 완전히 풀어낼 수 있다. 삶이 어떻게 진행되기를 바라지 말고, 삶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런 지혜를 갖춘다면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도 항상 우리 기대에 부응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삶의 우여곡적을 충분히 예상하며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기 때문에 그런 우여곡절이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진실에 근거한다면 생각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것도 우리행복을 방해하지 못하는, 더없이 평화로운 상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외적인 사건에 영향을 받는 행복상태를 넘어, 영원히 환희를 누리는 상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1) 지금
-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초기상태는 인식단계에 맞춰져 있다. 초기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존재와 행위를 번갈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어느 쪽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이 존재보다 행위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함. 이런 현상은 현대 세계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침마다 눈뜨기 무섭게 삶의 현장에 뛰어들며, 삶의 현장은 거의 행위로 이루어짐. 급속도로 흘러가며 행동을 재촉하는 생활방식은 인간의 초기상태와 배치됨. 비유해서 말하면, 묵직한 구두를 신고 물속에서 지내는 것과 비슷.
- 많은 명상기법이 우리의 인식공간의 범위로 네 방향을 언급함. 우리가 어느 쪽으로 관심을 쏟더라도 우리 인식을 온통 독차지할 만한 주제를 무한히 발견할 수 있을 것임. 네 방향은 다음과 같다.
* 외부세계 : 입력된 감각자극을 통해 우리는 주변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감지
* 몸의 내부 :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면 자신의 몸을 인식할 수 있다. 고통과 자극, 호흡과 심박 등을 인식하게 됨. 몸의 곳곳에 관심을 돌리며 모든 곳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껴보라
* 생각과 감정 : 인식력이 충분해지면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생각과 이야기를 관찰할 수 있다. 머릿속의 생각과 감정을 유심히 지켜볼 수 있다면 자연스레 배출해 낼 수도 있다
* 나머지 것과의 연결 : 순수한 인식력이 최고수준에 이르면, 존재의 나머지 것과 연결을 시도함. 이런 연결짓기의 결과로 파도를 향한 사랑, 나비를 향한 동경,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 등이 생겨남. 이런 연결짓기는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적 지각도 아니고, 우리 몸에 대한 느낌도 아니며, 생각이나 감정도 아니다. 우리가 커다란 공동체의 일원이며, 그 공동체는 우리가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세상 너머까지 뻗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순수한 연결짓기다
- 주의력을 방해하는 것을 없애라. 조용한 시간이 주어지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마라. 퇴근할 때는 라디오를 켜지 말고, 집에서는 텔레비전 앞에 앉지 마라. 아무것도 하지말며 시간을 보내라. 일과표에 '나만의 시간'이라는 약속을 추구하라. '나만의 시간'은 당신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짧은 휴식을 의미.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라
(2) 변화
(3) 사랑
(4) 죽음
- 좋든 싫든 간에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이미 예약돼 있다. 예약된 시간이 언제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죽음이 예약된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시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5) 설계
- 뭔가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하지는 않는다
- 우리 우주는 복잡하기 그지 없으며, 우리는 종종 세세한 것에서 허우적거린다. 아인슈타인조차 인간의 이해력 한계를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따. "창조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여러 언어로 쓰인 책들로 가득 채워진 거대한 도서관에 들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입니다. 그 아이는 누군가가 그 책들을 썼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 썼는지는 모릅니다. 또, 그 책들이 쓰인 언어들도 모릅니다. 아이는 책의 배열에 미스터리한 질서가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조차 하느님을 바라보는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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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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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칭 2

심리 2018. 7. 14. 11:12

- 휴대폰, 아이패드, 인터넷이 없는 넓은 자연 속에서 사흘이상 지내면 모든 연령층에 걸쳐 창의성이 50%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남. 그래서 예로부터 세계적인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 예술가들, 과학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넓은 공간에서 산책을 즐겼다. 공간이 넓어질수록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터득했기 때문.
- 운이 좋아지려면
* 시야를 넓혀라. 환경을 바꾸고 산책을 즐기는 등 공간을 넓혀라
* 눈과 귀를 열어라. 낯선 것에 저항하지 말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라
* 나의 범위를 국한시키지 말라. 새로운 음식, 장소, 생각에 마음을 열라
-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로움이다. 신비로움이 모든 진정한 예술과 학문의 근원이다. 신비로움에 낯선 사람이나, 경이로움에 숨을 멈춘 채 넋을 잃고 서 있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눈은 닫혀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 헨더슨 교수는 "협상하기 전에 상대가 공간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해보세요. 그럼 협상 성공률이 높아집니다." 라고 조언. 협상 전문가인 하버드대 우리 교수도 "중재자들의 가장 큰 역할은 협상하는 사람들이 시야를 넓히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문제든 마찬가지.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마음속에서 그 문제와의 시간적, 물리적 거리를 늘리는 게 좋다. "내가 만일 천 킬로 떨어져 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 "지금부터 50년 후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 "천국의 아인슈타인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만일 화성에서 외계인이 망원경을 통해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내 마음의 공간을 천 킬로 밖까지 넓히면 그만큼 많은 지혜가 쏟아져 나온다.
- 09년 미국 인구조사국 조사결과 연소득 31000불 이하에서는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상에서는 이웃들과의 소득격차가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즉 이웃들과의 소득을 비교했을 때 소득이 뒤질수록 자살률도 높았다. 이웃들의 소득이 10% 높아질수록 자살률도 7.5% 치솟았다. 파리 경제대학이 유럽의 23개국 34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역시 비슷했다. 사람들은 남들과의 소득격차에 몹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남들과 소득을 비교해보는 건 참 중요한 일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그들은 누구와의 소득격차를 가장 괴로워했을까? "가장 친한 친구와 소득격차와 벌어지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요" 그들은 가장 친한 친구와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게 직장내의 소득격차보다 두배나 더 고통스럽다고 응답했다. 시야를 가까운 친구나 이웃으로 비좁게 국한시킨 게 원인이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 비교대상을 확대할수록 고통은 점점 줄어든다
- 행복이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닫힌 문만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하나의 문밖에 보지 못하는 건 시야를 좁게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시야를 넓히면 다른 문이 보인다. 시야를 완전히 넓히면 모든 문이 보인다.
-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뭘까? 하버드의 밴필드는 가문, 교육, 지능, 연줄 등에 답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장기간 조사를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답은 '시간적 시야'였다. 시간적 시야란 지금 뭘 할지 결정할 때 시간적으로 얼마나 길게 내다보느냐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간적으로 수십년 뒤의 일을 내다보고 현재의 일을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 우리는 한꺼번에 왕창 공부하면 난 이제 할만큼 했고, 다 안다고 착각. 심리학자들은 이를 안다는 착각이라 일컫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고서도 며칠만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악순환을 되풀이. 켄트 주립대학 심리학자 로슨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벼락치기도 당장의 시험성적엔 효과가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기억에 남는 게 거의 없다. 기왕에 똑같은 시간을 투입해서 공부할 바엔 기억에 오래 남도록 미리 쪼개서 공부하는 게 훨씬 낫다." 평소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 하루에 한 단원을 전부 끝내는 것보다 며칠에 걸쳐 작게 쪼개어 공부하는 게 장기적으로 오래 기억됨. 공부하는 사이사이의 공간이 커질수록 그만큼 영구적으로 기억됨. 공간의 크기가 나의 크기다
-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하는 근원적인 이유도 역시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임. 런던대 마멋교수가 공무원들의 건강을 조사해보니 하위직일수록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이 무려 세배나 더 높았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위가 낮은 공무원들은 '난 윗사람의 감시를 받고 있어'라는 생각에 위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느꼈다. 반면 지위가 높은 공무원들일수록 '난 내맘대로야. 난 자유로워'라고 생각. 이렇게 남의 시각에서 자유롭다고 느낄수록 심장질환 발생률도 뚝 떨어짐.
- 시야가 넓어질수록 나의 공간이 커져서 지혜가 늘어난다. 반면, 시야가 좁아질수록 나의 공간이 작아져서 기계적인 일을 잘한다
- 솔제니친은 수감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교도관들이 윽박지르며 온갖 욕설을 쏟아낼 때도 내 머리엔 시와 이미지가 물밀듯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난 자유롭고 행복했지요. 어떤 죄수들은 철조망을 뚫고 탈출하려 했지만, 내겐 어떤 철조망도 없었거든요.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10년간의 경험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두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 기억을 바탕으로 '수용소의 군도'를 써서 노벨상을 받음
- 때로는 인생이 장애물로 가득한 미로처럼 이어질수도 있다. 그럴 때 육안으로 바라보면 아무 출구도 보이지 않음. 물질인 육안은 시야가 짧다. 반면, 마음의 눈은 물리적 한계를 초월해 모든 걸 다 본다. 시야가 무한하다. 위에서도 보고, 아래에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모든 방향, 모든 시점에서 다 본다. 정말 출구가 안 보일까? 만일 출구가 없다면 그건 설계가 잘못된 미로이다. 인생의 모든 시련도 마찬가지다. 벗어나지 못할 시련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 영적 성장을 위해 스스로 설계해 놓은 시련이기 때문이다.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인생의 가장 귀중한 기회가 최악의 시련을 가장해서 나를 찾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 정주영 회장은 '이 아침에도 설렘을 안고'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왜 일찍 일어나느냐 하면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의 기분은 소학교 때 소풍가는 날 아침 가슴이 설레는 것과 꼭 같습니다. 또 밤에는 항상 숙면할 준비를 갖추고 잠자리에 듭니다. 날이 밝으면 일을 즐겁고 힘차게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설레는 마음은 잡념을 품지 않는다. 오로지 문을 확짝 열어놓고 결실을 맞이하길 기다릴 뿐이다.
- 진심으로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면 근원적 진실을 이해해야 한다. 내 몸을 포함한 우주만물은 죄다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두뇌는 끊임없이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꾸만 허상에 속아 넘어간다.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현실은 허상이다. 단지 대단히 끈덕진 허상일 뿐이다"고 했따. 우주는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만들어낸 무수한 허상으로 가득하다. 무수한 평행우주, 무수한 지구, 무수한 나가 존재한다. 이론물리학자 카쿠 교수의 말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다른 우주에 펼쳐진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우주 속, 티끌만한 하나의 지구에서 고정된 생각, 고정된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고정된 현실을 살아간다. 우주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시야를 넓혀보면 넓히는 만큼 새로운 현실이 펼쳐진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보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가능성으로 잠재해있다가 관찰자가 바라보는 순간 현실로 나타난다"
- 노스웨스턴대 신경과학자 융-비만 교수도 창의성 문제를 직감으로 푼 사람들의 뇌파를 촬영해 보았다. 그 결과 직감이 떠오르기 0.3초전에 이미 두뇌에 고주파인 감마파 활동이 돌연 왕성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생각이 텅 비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영감을 얻으려면 생각부터 멈추어라"
- 스위스 과학자들이 사람들의 눈을 가린 채 음식을 먹도로 해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평소보다 25%나 덜 먹었다. 눈을 감고 먹으면 음식의 맛이나 입안에서의 감촉 등을 제대로 음미하며 먹게 되기 때문. 즉 음식을 제대로 음미하며 먹을수록 꼭 필요한 만큼 먹게 됨. 완싱크 교수도 우리가 음식을 음미하지 않고 먹으면 훨씬 더 많이 먹는다는 사실을 여러 실험으로 입중하고 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을 보거나 잡담을 하면서 먹으면 혼자서 조용히 먹을 때보다 훨씬 더 먹음. 하지만 텅빈 무한한 마음에 완전히 맡기면 몸이 스스로 필요한 만큼만 알아서 먹는다
- 심리학자 스피탈니는 이렇게 말하낟. "골프선수들은 경기시간의 86%를 생각이나 감정과 싸우는데 보낸다. 경기가 제대로 풀리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풀릴 것인지, 기쁨이나 분노를 느끼면서 경기에 집중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골프 경기 중 86%의 시간이 경기가 아닌 것에 허비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경기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골프실력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는 것. 공부나 일은 그렇지 않은가?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아 있지만 실제 공부에 완전히 집중하는 시간은 뜻밖에도 짧다
- 미시간대 프로스 교수와 오하이오 주립대 미슈포크스키 교수가 행한 실험에서 남한데 화나는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당했다고 생각하면 참기 어렵다. 하지만, 화나는 장면을 나로부터 멀찌감치 분리시켜 남의 시각에서 바라볼수록 화가 쉽게 사라짐. 미슈코프스키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처한 불행한 상황을 벽에 붙은 파리는 어떻게 바라볼까? 나를 벽에 붙은 파리라고 상상하면 내가 처한 불행한 상황에 파묻히지 않게 됩니다."
- 지구는 육신의 옷을 걸친 무수한 영혼들이 연기를 펼치는 연극무대. 모든 등장인물은 연기자들이다. 연극의 이야기도 각자의 영적 성장을 위해 짜인 각본대로 전개된다. 때로는 각본에 정해진 나의 배역이 너무 견디기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배역을 맡은 연기자는 연기자일 뿐. 진정한 나는 연극 전체를 멀리서 지켜보는 무한한 마음이다. 시야를 넓혀 멀리서 큰 눈으로 내려다보면 무수히 많은 '개체 나'들이 한 무대위에서 다 함께 연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됨. 따라서 내가 중간에 배역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반드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 연극을 무사히 마치도록 해준다. 견디지 못할 시련은 존재하지 않음. 왜냐하면, 나 스스로 써 놓은 각본이기 때문. 내가 지금 겪는 가장 힘겨운 시련이 내 인생의 가장 귀중한 선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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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냉정해 져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을 분간할 수 있다.
- 카운슬링을 시작하면서 과거의 일은 거의 묻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과거의 일을 끄집어 낸다 해도 현재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이에게 아무리 심한 행동을 했을지라도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은연중에 지금 문제의 책임을 과거의 일에서 찾으려 한다.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어서 지금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비관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한다 해도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그런데 왜 고민하는 걸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결정하지 않기 위해서다.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에서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도 결단을 늦추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하는 동안은 결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 반대로 말하면 고민을 그만하면 당장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 이제 권력싸움과 고민을 멈추고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집중하자.
- 행동의 목적을 보는 것은 아들러 심리학과 다른 심리학을 구별짓는 큰 특징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원인을 과거의 일에서 찾지 않는다. 부모의 대응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는 간단하지만 부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를 보며 느끼는 부모의 감정부터 살피고 지금 그 아이에게 어떻게 대응할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문제 때문에 절망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어떻게든 될 거이라고, 정확히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 아들러는 성격이 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다고 주장. 성격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바꾸기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생활양식(라이프스타일)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아들러에 따르면 성격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열등감과 우월감이다. 아들러는 사람이 행동하는 동기는 열등감에서 오고, 이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추구하는 과정이 성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설명. 이때 우월감의 추구는 인간에게 하나의 생활양식을 제공하는데, 이 생활양식이 성격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임
-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줄 것인가(탈무드). 자신의 개성을 억누르고 남에게 맞추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삶을 택하면 타인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을 이해해주기는커녕 욕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 자신이 자유로이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자유롭게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다
- 타인은 나와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갖고 있다고 이해하는 사람과 대인관계를 맺을 때는 아무런 마찰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도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고 느낀다고 맹신하는 사람과는 관계가 꼬이기 마련이다. 타인이 잘못 판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적어도 자신은 타인을 잘못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이다. 물론 상대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라면 이럴 것이라며 상대방의 마음을 멋대로 읽는 것보다는 안전하다. 타인의 마음을 읽다보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생긴다. 다시 말해 내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상대도 내 마음을 읽어주기 바라며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주길 원한다. 내가 남의 마음을 읽는 것이 어렵듯이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읽기도 쉽지 않다. 표정으로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그럴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내 마음을 몰라주면 불만스러울 때가 있을 지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읽으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만을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 좋다. 또한 나에 관해서도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지 말로 설명하도록 하자.
- 감정조절을 못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이다. 조용하게 있으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공격적으로 과잉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야단을 치는 사람은 타인과 관계맺는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어느 대인관계에서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요구사항이나 희망사항을 타인이 언제나 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럴 대 불같이 화를 내서 주위 사람을 벌벌 떨게 하는 사람이 있다. 어릴 때부터 항상 그렇게 자기 생각을 관철하던 습관이 배어 나온 탓. 또한 그럼으로서 남보다 우위에 서려고 한다. 직책의 차이는 인간으로서 상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사가 되면 책임이 느는 것은 사실이나 승진했다고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적 상사를 대할 때는 상사가 터무니없이 화를 내더라도 감정에 주목하지 말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만 주목하자. 이것은 간단하지 않다. 목소리 상태처럼 본래 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는 달리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 친한 사람끼리 가까운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서는 내용 자체보다도 이야기할 때의 분위기, 그때 소통하는 감정이 훨씬 중요. 하지만 직장에서는 업무수행이 가장 중요하므로 대화 내용 자체에만 집중해야 한다. 직장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중요하지, 누가 말하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 상사가 권위를 휘두르며 감정으로 부하직원을 지배하려고해도 궁극적으로 상사를 바꿀수는 없다. 홍수가 나도 비와 맞붙어 싸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갈 일이 있으면 우산을 쓰고, 걷기 어려울 만큼 비가 내릴 때는 차를 타고, 폭우가 쏟아지면 외출을 단념하고 집에 있으면 된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챙겨 쓰듯 상사가 말하는 내용에만 주목해서 상대하자
- 대인관계에서 신뢰란 근거가 있을 때만 믿는 것과 달리 조건없이, 믿을만한 근거가 없을 때조차도 믿는 것.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무조건 믿는 것을 신뢰라고 하고, 근거가 있을 때만 믿는다는 의미의 신용과 구별지음.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처음부터 믿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이 있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을 우리는 쉽게 배신할 수 없다.
- 걸핏하면 벌컥 화내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진짜가 아니다. 실은 화를 내기 위해 분노의 감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무심코 벌컥 화를 냈다는 말은 화를 낼 생각은 없었는데 화가 났다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화나게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지 않다. '지금 화내야지'라고 마음먹은 시간과 실제로 화내는 사이의 시간경과가 너무나 짧아서 스스로 선택했음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 어째서 화내는 걸까? 화내거나 짜증을 내면 주변 사람이 자신이 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는 것을 알아서다. 자신이 말하는 대로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이 화내는 목적이다. 실제로 화내는 사람이 있으면 주변 사람은 무서워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고분고분 듣는다. 말하자면 화내는 사람은 화라는 감정으로 남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화를 내서 자신이 바라는 바를 남에게 시키려는 것인데, 그런 의도로 화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화내는 사람의 말을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자발적으로 흔쾌히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화가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감정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다.
- 화는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감정이라서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 없다. 부부라면 타인에게 인정받는 좋은 점은 물론이고 나쁜면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 어떤 점이라도 받아들이는 것, 조건을 달지 않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 문제가 있더라도 원하는 바와 달라도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쁜 면이라고 했지만 실은 무엇이 좋은 점이고 무엇이 나쁜 점인지 애매한 부분이 많다. 처음에 사귈 때는 모든 것이 장점으로 보였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상대에 대한 생각이 변한다. 무엇이든 나쁘게만 보인다. 이를테면 신중하다고 생각했는데 겁쟁이로 보이고 온화한 성품은 우유부단하게 보인다. 또 꼼꼼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잘한 것까지 집착하는 좁쌀영감같고 태평한 사람은 무신경한 사람으로 보인다. 결점이 많아서 사람이 싫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싫어져서 관계를 벌리기 위해 이런저런 결점을 찾는다. 실제로 쉽사리 찾을 수 있다.
- 존경을 의미하는 영어 respect의 라틴어 어원은 '뒤돌아보다'라는 의미. 평소 무심코 잊어버리기 쉬운 것을 뒤돌아보는 것. 이 사람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나와 당신은 지금 이렇게 같이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매일매일을 소중히 하며 사이좋게 지내자고 뒤돌아보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존경하는 마음이 움튼다. 어떤 문제가 있든 내 이상형과 다르든 어찌 됐든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지낸다. 이상형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걷어내자.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이좋게 지내고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살겠노라고 매일매일 결의를 새로이 하는 것이다.
- 부부간의 대화가 적은 것이 어찌보면 이상적일수도 있다. 판에 박힌 일상적 대화가 줄어드는 정도라면 괜찮다. 하지만 상대의 기분과 생각까지 많은 말을 허비해가며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안다고 지레짐작하면 위험하다. 그래서 설령 오래 함께 생활한 부부일지라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안전함.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밥을 먹고 나면 항상 커피를 마셨지만 지금은 홍차를 마시고 싶어할지도 모르기에 항상 물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뭐 마실래?"하고 묻는 것처럼 시작해서 두 사람 사이에 말이 늘어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 부모가 당치도 않은 말을 하면 흘려들어라. 만일 합당한 지적이고 자신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비록 부모가 자신의 과제에 비집고 들어와서 불쾌했으지라도 그냥 해야할 일을 하면된다.
- 연애와 결혼은 자식 스스로 책임져야 마땅한 일이고 설령 실패해서 괴로운 일을 겪는다고 해도 자식이 곤란을 겪을 일이지 부모가 곤란을 겪지는 않는다. 온갖 대인관계의 마찰은 남의 과제에 쓸데없이 개입해서 생긴다. 연애는 안된다든가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꼬치꼬치 파악하려들면 자식이 부모에게 등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 젊은이에게는 설령 부모가 하는 일이 이상하더라도 반항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부모는 자식을 언제까지나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어린애같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둥 빨리 어른이 되라고 한다. 일관성 없이 말하고 있는 줄은 자신은 모른다.
- 부모 눈에는 자식이 위험한 결단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자식 일에 참견하고 자식 인생에 끼어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의 과제에 간섭하면 자식이 스스로 떠맡아야 할 책임이 부모에게 전가될 우려가 있다. 자식을 무책임하게 만드는 일은 그만두자
- 또한 부모는 자식을 몰아세우지 말아야 함. 자식이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결혼했는데 나중에 부모가 우려한 일이 일어났을 때 자식이 돌아올 곳이 없기 때문. 앞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려는 자식에게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만일 결혼생활이 잘못되면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다고 보듬어주는 부모가 되길 바란다. 그런 부모라면 자식도 처음부터 맞서서 대들지는 않을 것이다.
- 자칫 감정에 치우칠 수 있어서 부모와 자식간에 대화를 나누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절대 불가능하지는 않다. 자식이 부모에게 상담을 청한다는 것은 부모와 자식간에 관계가 좋다는 방증이고, 부모가 상담을 받는 무제는 자식의 과제이지 부모의 과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당장 직면한 과제에 결단을 내리는 것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최종결정은 자식의 몫이지 부모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하고 상담에 응한다면 이성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비로소 부모도 자식도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관계가 시작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상당히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역할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영어 person은 페르소나, 즉 가면이라는 의미. 부모라는 가면을 쓸 때 자식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가면을 쓰는 동안은 한 인간으로서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 가면을 못 벗겠다고 하면 친구로서 가면을 쓰면 된다. 부모와 자식간에 쓰는 가면처럼 말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부모나 자식으로 생각하면 냉정하게 말할 수 없다. 만일 이 사람이 나의 소중한 친구라고 가정하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듣고 말해야 좋을지 않다. 아마 친구라면 비판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들을 수 있을테고, 상대의 과제에 쓸데없이 개입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친구이기 때문에 내 과제가 아니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 아들러 심리학은 결코 방임을 권하지 않는다. 가끔 오해하려 무질서한 방임상태가 되버린 가정도 있다. 자식을 키우는 목표는 자식의 자립이므로 자식이 자력으로 해결하도록 지지해줄 수는 있어도 본디 자식의 과제이니만큼 스스로 해결할 일을 부모가 대신해주면 자식은 자꾸 의존하게 된다. 자식이 곤란한 일을 저질러도 그것을 부모의 책임이라 생각하며 나서서 도와주려는 생각일랑 머릿속에서 지워라
- 실제로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행동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중성행동이라 함. 중성행동은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개입할 권리는 없다. 자식이 공부하지 않고 빈둥거려도 공부하라고 말할 수 없다. 공부를 하고 안하고는 자식의 과제이고, 공부를 하지 않아서 성적이 떨어져도 부모가 곤란한 것은 아니므로 중성행동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기어이 개입하고 싶다면 본래 자식의 과제이니 자식과 부모의 공동과제로 삼아도 괜찮을지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다. "요즘 공부도 안하고 노는 것 같은데 우리 이야기좀 하자"는 식으로 말이다. 대체로 싫다는 대답이 돌아올 테지만.
- 자식이 부모를 곤혹스럽게 할 때가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칭찬받기 위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문제 행동을 해서 관심을 끌지 않아도 부모는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가정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고 느끼도록 돕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학교에 입학했다고 상상해보라. 몹시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인사하는 사람이 생기고 차차 친구가 생기면 처음엔 낯설기만 하던 학교가 편안하게 느껴짐. 이처럼 집을 편안한 곳으로 느끼면 아이의 행동은 바뀜. 어른들의 시각에서 문제행동을 보는 짓을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도록 보듬어주라.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곳에 관심을 돌리는 일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적절하다 함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자식이 현재 어떤 상황이든 어쨌든 살아 있는 것은 부모에게 기쁜 일이다. "네가 있어서 좋아"라고 말을 붙여본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 아이에게 대체 지금이 몇시냐고 닦달하지 말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길 바란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자식 입장에서 부모를 대할 때 몇살이 되었든 자식이 변할 수밖에 없다. 착한 자식일 필요는 없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도 괜찮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자식에게 부모는 커다란 존재다. 부모에게 독립해서 자유로이 살아가길 바란다. 부모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식은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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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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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러 심리학의 본질은 현재 버거운 삶의 쳇바퀴에 갇힌 우리에게 문제의 근원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바로 잡으라는 냉정한 조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자신의 실체를 바라보고 잘못을 인정하며 기꺼이 고치려는 진정한 용기다. 최근 아들러와 관련된 책 제목에 유독 용기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라 부를 만하다.
- 우리 모두의 행동은 우리의 삶이 처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답변. 따라서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고, 적합하고,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표현양식이다.
- 어떤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 나도 그만큼 힘들었어. 그런데 나는 극복했다. 왜 애들은 못한다는 거지?"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느낀다. "난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내 모든 것은 다 용서되어야 해" 이 사람들의 표현에서 그들의 해석이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해석을 바꾸지 않는 한 자신의 행동을 결코 바꾸지 않음. 바로 이곳이 개인심리학이 결정론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어떤 경험도 성공이나 실패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위 트라우마라 불리는 경험의 충격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 경험에서 우리의 목적에 맞는 것을 만들어낼 뿐이다. 우리는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경험을 미래의 삶을 위한 기반으로 선택할 때 언제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됨. 의미는 처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결정된다.
- 열등한 신체기관, 과잉보호, 방임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꿈과 연상은 그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사람의 성격은 현실에서나 꿈에서나 같다. 오히려 꿈에서 사회적 압력은 둔해지고 저항과 숨김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격이 더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아와 인생관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기억을 살펴보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기억이란 그에게 귀중한 무언가를 표상하기 때문. 그의 인생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이다. 기억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네가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경험 그 자체보다 그 경험이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 있고 나아가 삶에 부여한 의미를 구체화하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모든 기억은 일종의 기념품이다. 초기 유년시절의 기억은 그 사람의 독특한 인생관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보여주며, 특히 삶의 태도를 처음으로 형성한 환경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 우리는 분노에 대한 신체적인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며 경험을 통해 분노가 사람이나 상황을 지배하는 도구임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육체적, 정신적 표현이 유전적 특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구체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이 특성이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집중된다. 이것이야말로 단 하나의 진실한 심리적 접근법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수적인 방향과 수준으로 감정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불안, 용기, 유쾌함 또는 슬픔 등의 감정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생활양식과 일치. 따라서 우리는 그 감정의 강도와 지배력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슬픔을 통해 자신의 우월성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즐겁거나 만족할 수 없다. 비참할 때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떻게 하면 그를 도울 수 있을까? 그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으며 여전히 영웅놀이에 빠져 있다. 우선 우리는 그가 영웅 역할을 통해 얻는 만족감을 경감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의 영웅은 진짜 어린 소녀들을 쫓아다닐까? 그건 어쩌면 영웅놀이를 나쁘게 흉내낸 것은 아닐까? 만약 네가 영웅이 되려면 더 크고 강한 소녀를 쫓아다니며 상대해야 해. 그러지 못할 바에야 아예 여자아이들을 쫓아다니지 말고." 이는 치료의 한 접근법이다. 즉 우리는 그의 눈을 뜨게 하고, 자신의 생활양식을 지속하고자 하는 열망을 없애야 함. 즉 스프에 침을 뱉으면 그는 더이상 자신의 스프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치료의 또 다른 접근법은 그의 용기를 북돋아 협력하게 하고, 유용한 삶에서 중요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유용한 삶을 살아갈 때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면 결코 무의미한 삶으로 도망치지 않기 때문이다.
- 현대의 많은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이론을 아이가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는 경향이 있고, 어머니와 결혼하고 싶어하며, 아버지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가정. 하지만 우리가 아이의 발달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런 식의 설명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어머니의 관심을 독차지 하고 어머니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 싶어하는 아이에게서만 나타남. 그 욕망은 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를 복종시키고 완전히 지배하며 자신의 하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어머니가 응석받이로 키워주면 사람과 세상에 대한 동료애가 없는 아이에게서만 이 욕망이 드러난다
- 응석받이는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특히 어둠 속에 남겨지는 것을 무서워 함.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둠 그 자체가 아니다. 어머니를 다시 자기에게 불러들이려는 시도로 그 두려움을 활용한다
- 그런 아이들은 어머니와 떨어지면 자신의 모든 감정과 육체적, 정신적 힘을 총동원해 어머니가 다시 자신에게 접근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일에 몰두한다. 고함을 지르거나 큰 소시로 어머니를 부르거나 잠을 자지 않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성가신 존재로 만듦으로써 어머니를 다시 자기쪽으로 불러들이려 노력할 것임. 교육자와 심리학자의 주목을 끌어온 한가지 방식은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개인심리학에서는 두려움의 원인을 찾는 일보다 두려움의 목적을 밝히는 것에 더 집중한다.
- 아이들과의 싸움은 언제나 지는 싸움이다. 싸움으로 아이들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 이런 싸움에서는 항상 약한 쪽이 이기는 법이다. 싸움을 통해서는 아이들의 애정과 협력을 얻을 수 없다. 협력과 애정은 결코 힘으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싸움 때문에 발생하는 상당한 심리적 긴장상태와 무모한 노력을 피할 수 있다.
- 아버지가 자녀를 처벌해애 하는 일을 떠안으면 안된다. 자녀에게 미치는 아버지의 영향력은 너무 크기 때문에 많은 자녀들이 아버지를 이상적 인물 또는 최대의 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의 처벌, 특히 체벌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해롭다. 두 사람의 우정에 기반하지 않는 어떠한 가르침도 잘못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자녀를 처벌해야 하는 일을 떠안는 경우가 비일비재함. 이것은 여러 이유로 불행하다. 첫째, 어머니 스스로 여성은 진정으로 자녀를 교육시킬 수 없다는 신념을 드러낸다. 즉 자신은 너무 나약한 존재여서 자신을 도와줄 강력한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는 것. 만약 어머니가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려라" 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남자를 최고의 권위자로서 인생에서 진짜 힘을 가진 존재로 간주하도록 자녀에게 교육시키는 셈. 둘째, 처벌은 아버지와 맺는 관계를 방해하고 아버지를 좋은 친구보다는 두려운 존재로 만듬. 셋째 몇몇 여성들은 자신이 직접 자녀를 혼내면 자녀의 애정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까 두려워함. 그렇다고 처벌의 임무를 남편에게 위임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머니가 자신을 도와줄 처벌의 집행자로 아버지를 소환했다고 해서 아이들이 어머니를 덜 비난하는 것도 아님. 그럼에도 많은 여성들이 자녀의 순종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아버지에게 이르겠다는 협박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 어머니에게 등을 돌린 첫째는 아버지와의 관계개선을 통해 동생이 태어나기 전의 유리한 입장을 되찾을 기회를 노림. 즉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해 노력. 그러면서 첫째 아이는 아버지를 좋아하고 종종 아버지 편에 서려고 함. 아이가 아버지를 어머니보다 더 좋아할 때는 이것이 두번째 단계임을 확신할 수 있다. 처음에 아이는 어머니에게 애착을 보이지만 어머니의 애정을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비난의 차원에서 애착의 대상을 아버지로 바꾼 것이다. 만약 아이가 아버지를 더 좋아한다면 우리는 그 아이가 이전에 비극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시를 당했고, 그의 전체 생활양식은 이 감정을 중심으로 조직됨. 그 싸움은 오랜시간 동안 계속되며, 때로 평생에 걸쳐 지속되기도 함.
- 만약 교사가 아이의 관심을 끌고 싶다면 그 아이가 예전에 어떤 것이 관심이 있었는지 이해해야 함. 또한 그 아이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 관심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어야 함. 만약 아이가 어떤 한가지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그 아이를 자극하기가 더 쉽다. 따라서 아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리고 어떤 신체기관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그 신체기관을 최고도로 훈련하는지 살펴보아야 함. 어떤 아이는 보는 것에, 어떤 아이는 듣는 것에 또 어떤 아이는 운동에 가장 큰 관심을 둔다. 시각적 유형의 아이는 지리나 미술처럼 주로 눈을 사용해야 하는 과목에 관심을 가짐. 교사가 수업을 할때 그들은 듣지 않으려 한다. 청각을 통한 주의집중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기때문. 시각적 유형의 아이들이 눈을 통해 배울 기회가 없다면 학업에서 뒤쳐질 것임. 흔히 그들은 능력이나 재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유전을 탓하게 됨. 그러나 이는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교사와 부모의 잘못이다.
- 교육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아이의 실제 한계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가 생각하는 자신의 한계 때문에 발생. 만약 아이가 자신의 지능지수가 낮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아이는 희망을 잃고 자신은 성공할 수 없다고 믿음. 아이를 교육할 때 우리는 아이의 용기와 관심을 키우는 한편, 잘못된 해석으로 자신이 가진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정한 한계를 없애는 일에 집중해야 함
- 성적표 없이도 아이들은 서로의 현재 능력에 대해 잘 판단한다. 그들은 수학, 철자법, 그림, 운동 등에서 누가 가장 뛰어난지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자신을 매우 잘 분류할 수 있다. 그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는 자신이 더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보다 앞선 다른 아이들을 보고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고 믿는다. 만약 아이의 이 믿음이 매우 확고하다면 그 아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환경을 탓함. 그는 타인과 비교해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계산하며, 자신은 언제나 뒤처진 상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함. 대다수의 학생들도 학급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계산한다. 언제나 선두그룹, 중간그룹, 또는 하위그룹에 속하기 때문. 그러나 이것이 선천적 재능을 얼마나 타고 났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됨. 이는 오로지 아이들이 스스로 설정한 한계와 낙천성의 정도, 그리고 활동의 영역을 보여줄 뿐이다. 꼴찌하던 아이가 변모해 놀라운 발전을 보여줄지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이 스스로 한계를 정할 때 어떤 실수를 범했는지 이해해야 함. 그러면 교사와 학생 모두 정상적 지능을 가진 아이의 발달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는 미신을 없앨 수 있다. 교육현장에서 행해지는 모든 실수 중에 유전적 특성이 아이의 발달을 제한한다는 믿음보다 더 나쁜 신념은 없다. 이는 교사와 부모 모두에게 잘못과 노력부족의 책임에서 벗어날 핑계거리를 제공하기 때문. 그러면 그들은 아이들에 대한 잘못된 영향력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진다.
- 게으름이 부모와 교사를 향한 직접적 공격이 아닐 경우, 게으른 아이들은 대부분 패배를 두려워하는 야심에 찬 아이들인 경우가 많음. 성공은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용어이며, 아이들이 무엇을 패배로 간주하는지 알고 나면 놀랍기도 하다. 모든 이들을 앞지르지 못하면 스스로 실패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비록 성공을 거두더라도 더 나은 누군가가 있다면 패배로 받아들임. 게으른 아이들은 단 한번도 시험을 치른 적이 없기에 진정한 패배감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신앞에 놓인 문제를 회피하고 다른 아이들과 경재앻야 하는 결정을 미룸.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조금 덜 게으르다면 자신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함. 이때 그들은 자신만의 축복의 나라로 도망친다. "내가 노력만 했다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었어" 실패할 때마다 그들은 이런 위안의 말로 실패의 의미를 축소하고 자신의 자존감을 지킨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오직 게을렀을 뿐이다." 교사도 게으른 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한다면 우리 반에서 제일 똑똑한 학생이 될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그만한 명성을 얻을 수 있는데, 굳이 노력해서 그 명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게으름을 포기하면 숨겨진 재능에 대한 그의 명성은 끝날수도 있다. 또한 그럴 경우 그들은 가능성으로서의 성취가 아니라 실제의 성취로 평가를 받게 된다. 게으른 아이들이 얻는 또 다른 개인적 이점은 조금만 공부해도 칭찬을 받는다는 것. 행동이 개선된다는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보게 되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더 많은 자극을 주고 싶어 함. 반면 성실한 아이들이 보여주는 그만한 수준의 노력은 주목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게으른 아이들은 타인의 기대를 먹고 산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유아기 시절부터 모든 것을 타인의 노력에 기대하도록 자신을 훈련시킨 응석받이 아이들이라 할 수 있다.
- 청소년기에 가장 자주 보이는 표현들은 모두 자신은 독립적이며 어른과도 동등한 존재이고 진정한 남성 또는 여성이 되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욕구에 기인. 이런 표현들이 어떤 방향을 택하는지는 그 아이가 성인이 된다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성인이 된다는 것이 통제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면 그 아이는 구속에 맞서 싸우게 되며 이것이 그의 표현이 된다. 이 시기의 많은 청소년들은 흡연을 시작하고 욕을 하며 밤늦게까지 무리지어 밖에서 배회. 일부 청소년들은 전혀 예상치 못하던 반항아의 모습을 보이며, 그들의 부모는 그토록 고분고분 하던 자녀가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반항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 그런데 이는 태도가 변한 것이 아니다. 사실 겉보기에 순종적이던 아이는 항상 부모에게 반항을 하고 있었다. 보다 많은 자유와 힘을 얻은 지금에서야 부모에게 자신의 적대감을 선언해도 될 것 같다고 느꼈을 뿐이다.
- 대개 아이들은 청소년기에 보다 많은 자유와 독립을 보장받음. 부모들은 자녀를 항상 지켜보고 보호할 권리가 사라졌다고 느낀다. 부모가 계속 감시하려 들면 자녀는 부모의 통제를 피하려고 더 강하게 반항함. 부모가 자녀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자녀는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고 노력함. 이 싸움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적대감이 발달. 그렇게 되면 사춘기의 반항이라는 전형적 모습이 전개된다.
- 청소년기 모든 위험은 훈련과 준비가 부족해 발생한다. 때로 성인의 삶에 준비가 충분하지 않을 때 아이들은 직업, 사회생활, 사회, 사랑과 결혼 문제가 다가옴에 따라 패닉 상태를 경험함.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한다. 사회생활 관련해서는 수줍어하고 내성적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집에만 머물기도 함. 직업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의 관심을 끄는 매력적인 일을 찾지 못하고 모든 일에서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단정. 사랑과 결혼 문제에서도 이성과 함께 있으면 당황해하고 이성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함. 누군가 말을 걸면 얼굴을 붉히며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함. 결국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누구도 그를 더이상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낌. 타인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으며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일이나 공부를 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만의 공상에 사로잡혀 있다. 아울러 성적인 행위도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분열증이지만 완전히 미쳤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며, 단지 그 아이가 올바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더 나은 길을 제시할 수만 있다면 그는 완치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인생, 그리고 잘못된 훈련방식을 수정해야 하므로 이는 쉬운 일은 아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의미는 개인의 사적인 지혜가 아닌 과학의 관점으로 조망되어야 함. 청소년기의 모든 위험은 인생의 세가지 문제에 대한 적절한 훈련과 준비부족 때문에 발생. 미래를 두려워하는 청소년이 최소한의 노력만을 요구하는 방법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이 쉬운 방법은 인생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 만약 남자아이가 칭찬에만 목숨을 건다면 위험할 수 있지만, 자신감이 부족했던 여자아이는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발견하기도 함. 한편 그런 여자아이들은 아부를 잘하는 남자들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기도 함. 집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여자아이들은 단순히 자신들도 성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인정받고 관심의 중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희망하기 때문에 성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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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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