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 맨 처음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통을 예감해서일까? 플라톤은 말한다. "어떤 생물에게든 태어난다는 것은 애초에 괴로운 일이다" 그리스인에게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고 그 다음으로 행복한 일은 태어나서 하루빨리 죽는 것.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오래살면 살수록 괴로운 일 또한 겪을 수밖에 없다. 슬픔과 괴로움도 늘어난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은 일찍 죽는 게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말은 빨리 죽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나온게 아님. 오히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이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위해 나온 말일 것이다.
-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속성화나 의미부여가 지나치게 자의적인 경우가 많음. 외면당한 사람은 그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피하기 위한 이유가 되게끔, 현재의 대인관계 상태를 외면당했다고 해석.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외면당했다고 해석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자신에게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건데, 그 판단이 올바른지는 늘 검증할 필요가 있다
- 말이나 말을 만들어내는 마음은 권위나 권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유로운 것이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 말은 아들러의 다음 말과 상통. "인정받지 못하는 권위는 자기를 인정하도록 강요한다. 권위는 강제적 영향력이 아닌 공동체감성에 기초해야 한다." 하지만 타자와의 공존, 공생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혹은 패거리)만의 안정을 도모하며 권위나 권력을 성취하려는 욕구가 극도로 고조되는 경우가 있다. 이에 아들러는 경고한다. 그러한 경우 용기는 무례함으로, 공손은 비굴함으로 변할 수 있으며, 애정은 타자의 양보와 굴욕, 복종을 강요하는 책략이 될 수 있고, 우월해지려는 은밀한 욕망이 숨어 들어가기 마련이다."
- 아들러 심리학에서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동이란 의미.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을 경우, 공부하지 않은 결과는 본인에게 미칠 뿐 다른 사람이 곤란한 것은 아님.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하지 않는 것을 적절한 행동이라 할 수는 없다. 이런 행동을 부적절한 행동과 적절한 행동 사이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중성적 행동이라 함. 이같은 중성적 행동이라면 기본적으로 본인의 의지를 존중하지만, 절차를 밟으면 공동의 과제로 삼을 수 있다. "요즘 네가 공부하지 않는 것 같은데, 같이 한번 이야기해보는 게 어때?"라는 식으로 말을 꺼낸다. 이때 요청을 거절당하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언제든 상담해줄 테니까 말하고 싶을 때 말해"라며 물러설 수밖에 없다.
- 사고는 영혼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소리를 내지 않고 행하는 대화라고 한다(플라톤, 소피스테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그런 대화를 외화하고 등장인물 간의 논쟁 형태로 구조화한 것으로 대화펴이라는 형식을 이어받았다. 플라톤은 이런 대화 방식을 변증술이라고 하며, 단지 회화나 연설인 수사술(레토릭, 수사법)과 구별했다. 그것은 화자가 일방작으로 길게 이야기하는 수사를 주고받는 언명이 아니라 대화자끼리 상호적으로 예와 아니오를 확인하면서 한 단계씩 토론을 되풀이해나가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대화하면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 있다 해도 실제로는 차이점이 그다지 많지 않고, 여러면에서 생각이 일치한다는 걸 알 수 있음. 따라서 동의를 거듭하는 사이에 처음 입장을 뒤집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어도 이 방법에 따라 대화하면 처음의 입장을 포기하기 쉬워진다 (플라톤, 국가)
-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리의 탐구야 말로 중요함. 그것은 대화할 용기를 내어타자와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있다. 질문을 주저하거나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서만 질문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 화는 개인의 권력욕이나 지배욕을 상징하는 감정이다. 화를 내는 목적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무력으로 빨리 제거하는 데 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모든 힘을 다해 우월을 추구하는 자다. 인정욕구는 가끔 권력에 도취되는 태도로 변질됨.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력욕이 조금이라도 침해당하면 몹시 화를 낸다. 화는 이렇듯 사회적 감정을 완전히 소멸시키며, 거기에는 적을 제거할 만큼 강한 권력욕이 내재되어 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삶에 대해 적대적인 시각과 손상된 감정을 갖고 있음. 여기서 다시 한번 권력욕이 무력감과 열등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화를 내는 격분한 상태에서는 자신의 권력욕이 우월해지고 싶은 목표를 향해 아주 뚜렷하게 고조된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화라는 감정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대가로 우월감과 인정욕구를 높이는 값싼 수법에 불과함
- 아들러는 어떤 결과나 행위에 대해 왜라고 물을 때 결과와 행위의 원인이 아니라 그 목적에 주의한다. 인간은 특정한 원인에 의해 떠밀리며 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가치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기 때문. 그래서 아들러는 어디에서(원인)이 아니라 어디로(목적)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 가령 화가 치밀었기 때문에 화를 낸다는 시각이 원인론이라면, 이와 반대로 목적론은 불같은 성질을 부리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일으킨다는 관점. 곧 목적이나 목표가 먼저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위를 하거나 감정 혹은 사고를 만든다는 이론. 감정은 거의 자신의 말이나 행동거지를 통해 타자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할 때 사용됨. 분노를 내뿜으면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 여기므로 그 목적을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만드는 셈
- 아들러는 불안도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불안에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 단적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도중에 만나는, 그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과제에 몰입하지 않으려는 꿍꿍이, 또는 적어도 그것을 앞에 두고 제자리 걸음을 하려는 목적에서 나오는게 불안이라는 것. 사실은 불안(원인)하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과제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숱한 과제에 진지하게 몰두하지 않기 위해서(혹은 회피하기 위해) 불안이라는 감정을 우려내고 있다는 것. 불안의 목적이 인생의 과제로부터의 도피인 셈이고, 그 목적을 위하여 불안해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 지레 짐작하는 것. 삶의 과제로부터의 도피가 목적이고 불안이 원인이지, 그 반대로 삶의 과제가 원인이 되어 불안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 프로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중시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트라우마의 영향이 한정적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의 인격을 결정하는 건 과거보다도 그 사람의 희망과 미래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것임. 인격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 아들러는 아예 트라우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들러는 어떤 경험도 그 자체만으로는 성공이나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 아들러에게는 사람이 어떤 경험을 겪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 따라서 우리가 어떤 특정한 경험을 트라우마라고 보면 그것이 곧 트라우마가 되는 것일 뿐이다. 역으로 트라우마로 보지 않으면 트라우마가 아니다
- 신은 악의 원인이 아니다. 신은 선하지만 전능하지 않다. 병이나 불행은 신이 우리를 벌하기 위해 준 것도 아니고, 신의 원대한 계획의 일부도 아니다. (헤럴드 쿠시너, 왜 나만 괴로운가)
-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타자가 나를 얼마나 주목하는가, 타자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인정욕구에만 집착하는 삶이야 말로 나 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 라이프스타일이다. 인정욕구는 가끔 권력에 도취되는 태도로 변질됨.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력이 조금이라도 침해받으면 몹시 화를 내며, 꾀병에 걸려서라도 인정욕구를 채우고 싶어한다
- 회복이란 병들기 전과 똑같이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오는 일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을 되찾고, 신체가 의식을 억압하지 않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병이 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을 계기로 사람은 본래의 나가 될 수 있다. 나와 내 몸이 질병에 걸리기 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에 들어감에 따라 병이 들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게 가능하기 때문
- 인간의 운명이라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신체의 말에 귀를 막지 않으며 그 몸말에 응답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과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다. 강요받지 않고 책임을 주체적으로 다할 때 사람은 신체와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다. 설령 몸이 신체적 회복이 아니라 생으로부터의 이탈을 요청할지라도,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를 낸다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 아들러는 정신적 질환 혹은 마음의 병은, 그 발병에 목적이 있다고 본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와병중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일이지만, 마음의 병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의 증상을 택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발병의 연관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분명 뜻하지 않은 것이므로, 병을 스스로 택했다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이 있지만, 바로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회복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심리 치유과정에서 반드시 내면에 억눌러두고 외면해온 무의식의 어두운 측면, 아프고 나쁘며 억압적인 모습들이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 자신의 못나고 아픈 내면의 얼굴을 스스로 인정하고, 외면해온 아픔까지 자신의 일부로 수용하는 과정이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핵심이다
- 주위 사람은, 특히 자식은 치매에 걸린 부모가 비록 아무것도 할 수 없다손 쳐도, 나이 듦을 행위의 차원이 아미라 존재의 차원에서 인정하는 것, 부모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어함.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자기 자신도 생산성과 젊음이라는 미적 기준만이 자신의 가치를 재는 절대적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는 버릇에서 빨리 벗어나야 함. 당연히 어떤 행위로 타자에게 뭔가 기여나 공험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자신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 열등감이란 원래 수직관계에서 생김. 만약 우리가 늙음을 나를 지배하는 수직관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열등감이 생기게 됨. 반면 늙음을 자연스러운 나의 친구 즉 수평관계에서 대등하게 바라보면 열등가밍 생기지 않음. 그럼으로써 우리는 고요하고 평온하게 늙어가는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아들러 심리학이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대인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듯, 질병, 늙음, 죽음 등의 인생의 과제도 그렇게 수평관계로 바라보고자 한다.
- 120세로 타계한 이즈미 시게치요가 114세때 한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여성 타입은?" 이라는 질문을 받고, "역시 연상이..."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해학이 필요함. 나이듦이라는 그 낯선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느긋해질 용기를 갖는 것일지도 모름. 아들러는 말한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정도 간격이 피룡하다. 너무 밀착되면 마주보고 대등하게 대화할 수 없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도 관계가 힘들어진다." 이는 우리가 나이 든다는 것, 늙어 간다는 것과 마주설 때도 마찬가지다
- 키네시스는 아리스토텔레서의 목적론적 운동을 가리킨다.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 사물(위나미스, 잠재태)이 목적을 완전히 실현항 상태(엔텔레게이아, 완전실현태) 로 나아가는, 즉 정해진 목적을 향해가는 운동이다. 이에 반해 에네르게이아는 목적의 완정보다는 실현해가는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목적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목적이 실행되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완전한 가치를 지닌다
- 키네시스는 하고 있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느만큼을 얼마만의 기간에 해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키네시스적인 인생에서는 과정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빨리 목적을 이루는 게 가장 시급하다. 이에 반해 에네르게이아에서는 지금 하고 있는 거 그 자체를 그대로 해냈다고 본다.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 관점이다. 이러한 에네르게이아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움직인은 항상 완전하고 어디에서 어디까지라는 조건과도, 얼마동안이라는 조건과도 관계가 없다. 춤이 그 좋은 예다. 춤은 추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고 그 자체가 목적이지, 춤을 춤으로써 어딘가에 도착하려는 건 아니다. 춤을 추다 어딘가에 도달할지도 모르지만,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춤추는 사람은 없다. 추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된다.
- 산다는 것은 키네시스인가, 에네르게이아인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네르게이아라고 한다. 인생은 어디에 도달하지 않아도, 그것을 한없이 기다리지 않고 시시각각의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 이것이 아들러의 관점이다. '만약...이라면'이라고 하면서 그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키네시스가 산다는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앞으로의 인생에서 벌어질 일을 가슴설레며 기다릴 수가 없다. 결과가 이미 정해진 건데 뭐가 그리 가슴 뛰겠는가? 사실 그런 키네시스적 삶은 불완전하다. 오히려 어떤 결과가 실현될 때까지, 그 과정으로서의 삶이 완전하다. 곧바로 지금의 인생이 완성되고 있는 에네르게이아다. 그래서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에네르게이아적 삶의 태도야 말로 존재의 진정한 힘이다. 특히 병이나 늙음, 죽음같이 인생의 절박한 과제에 직면한 사람일수록
-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쓰나냐가 관건이다. 이는 자기수용, 즉 어떤 것을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꿀 수 없는 것은 긍정적으로 포기하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는 용기가 필요. 아들러 심리학은 그래서 소유의 심리학이 아니라 사용의 심리학이다. 반면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소유의 심리학이고 결국 결정론이다. 즉 주어진 것을 소유하는 데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몰두하는 철학이다.
- 과거는 지나가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리며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떠올리며 불안해하지 않으며, 아들러의 말처럼 지금 여기를 충만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나이가들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의 양식이다. 아들러가 추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네르게이아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이다.
- 인간은 종교를 갖고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살기 일쑤다. 불평과 신세한탄만을 일삼으며 자신의 인생과제를 신에게 떠넘기려고까지 한다. 심지어 기도나 다른 종교행위와 같은 인위적 수단으로 은밀하게 부정한 짓(신의 계율을 어기는)을 저지르면서도 신을 자기 곁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글너 사람들에게 신은 그들의 문제에만 전념하고 그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극히 편파적 존재로 돌변한다.
- 무엇을 할 수 없다라는 목적을 만들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불안, 우울, 공포 같은 감정을 지어낸다.
- 죽음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삶에 대한 사랑이다. (다나카 미치타로, 죽어야만 하는 것) 언젠가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얼마나 살지 모른다는 것(죽음의 가변성),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죽음의 편재성)이 오히려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 죽음을 응시할 때 오히려 생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죽음을 두려운 것이라 단정하지 않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타자로서의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타자와 마찬가지로 적이 아니라, 야기 세이치의 프런트 구조이론에서 보았듯이 타자로서의 죽음은 오히려 나를 완성하게 하는 친구일 수 ㅇㅆ다.
-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효율적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일에 중독된 사람은 인생의 특수한 면에만 몰입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사는 방식이 효율적이라 여기고 일 때문에 가족을 돌볼 짬이 없다고 둘러댄다. 이것을 아들러는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정의. 일을 핑계로 다른 책임과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 아들러는 인생의 과제(일, 가정, 육아, 교육, 교우관계, 취미, 자기계발, 타자공헌 등) 중에서어느 하나만을 특별하게 돌보는 라이프스타일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생을 목표 완성으로 치닫는 운동성, 곧 키네시스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며 효율적 성공에만 맞춰 살다가 죽는게 진짜 불행이라고 여겼기 때문. 도중에 한눈을 팔면서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시간을 잊은 채 놀다가 어느덧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닫는 것, 삶도 이와 마찬가지다. 삶 또한 놀이가 아니겠는가. 아들러의 방식, 즉 에네르게이아적 관점으로 삶은 늘 지금 여기서 완결되어 있다는 거승ㄹ 깨닫는 순간 행복해질 용기가 생겨나는 게 아니던가. 살아 있다는 느낌은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날아오는 비둘기에 저항하는 공기가 그 비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상의 엔진역할을 해주는 것처럼, 고통조차 삶을 살아내기 위한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 또 자기 스스로 자유와 행복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타자의 시선에 자신의 인생을 통때로 맡기지 않는 용기를 길잡이별로 삼을 필요가 있다.
- 라이프스타일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면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 아들러는 효율적인 삶만이 삶의 절대적 방식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최종 목표에서 눈을떼지 않는 이상 헛된 일을 헛되게 생각하는 일을 하며 먼 길을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저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잠만 잔다면 시시하지 않겠는가. 도중에 경치를 즐기는 것도 좋으리라. 마음을 바꿀 권리는 없다고, 이 길밖에 없다고 스스로 몰아세우는 사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고 혹은 돌이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해주어야 할 말이다. 이는 결코 안이한 변덕을 부추기는 말이 아니다. 아들러의다 다음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세계와 관계를 맺고 목적을 이루는 방법, 그리고 행동도 변한다. 나는 나인 채로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해야 한다."
- 두 마리의 개구리가 우유가 든 단지의 가장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다가 갑자기 단지 속으로 빠져버렸다. 한 마리는 '아아, 이젠 죽었어'하고 외치며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개굴개굴 울다가 우유단지 안에서 질식해 죽었다. 다른 한마리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아등바등 다리를 차면서 열심히 헤엄쳤다. 그러자 발밑이 굳었다. 우유가 치즈로 변한 것이다. 그러자 개구리는 폴짝 뛰어올라 단지 밖으로 나갔다. 비관주의자는 처음의 개구리처럼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반면 낙천주의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아,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아, 어떻게든 될거야'라고 생각하며 결국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아들러는 이런 사람을 회의론자, 방어적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공격성이 아닌 금심, 조심, 비겁함으로 보상받는 유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거나 상상을 즐기지만 실제로 이것은 위협적 현실을 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 어떤 사람은 삶의 어려움을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실거리로 삼지만 낙관적인 사람들은 이들과 달리 난관을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려움에 부딪혀도 용기있게 다가서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며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할 줄 알고 어떤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는다. 솔직하고 자유롭게 말하며 지나치게 내성적이지 않고, 두 팔을 벌려 타자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남을 의심하지 않기에 타자와 쉽게 교제하며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다. 언어는 자연스러우며 태도와 행동은 편안하다.
- 두려움과 용기, 어느 것에 전염되고 싶은가? 아들러는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이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한다. 용기는 심장을 뜻하는 프랑스어 coeur에 어원을 두고 있음. 심장은 뇌와 팔다리 등에 피를 보내 신체기관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용기도 인간 정신의 모든 미덕이 현실생활에서 제 기능을 실현하도록 하는 근원적 원동력이다. 아들러는 인간이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본질적으로 삶의 가치들을 실천하거나 이행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절망감이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과제에 도전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용기이고, 인간의 성찰과 성장은 일차적으로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말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용기에는 저돌성과 머뭇거림이 동반된다. 자기성찰적인 머뭇거림 없이 저돌적이기만 한 용기는 만용이며, 무의식적인 두려움이나 절망감을 은폐하기 위한 가짜 용기다. 그럼에도 나는 타자보다 자신이 먼저 무슨 용기든 내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한 사람의 용기는 커진다' 아들러의 이 말은 모든 용기는 전염될 수 있고 어떤 용기든 그 의미는 여러가지로 확장될 수 있다는 함의다. 타자와 대화할 용기, 평범해질 용기, 미움받을 용기, 몸말과 대화할 용기, 늙어갈 용기, 평범해질 용기, 미움받을 용기, 내려놓을 용기, 책임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은 '나 혼자만 행복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부터 행복해질 용기를 갖자. 그것이 타자에게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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