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심리 지도

심리 2017. 12. 30. 17:02

- 자신의 개성과 감정을 깨닫는 것은 개인적 어려움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고, 소망을 충족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토대가 됨
- 감정은 개인의 욕구와 밀접한 관련. 가령 불안은 기본적 욕구중 무언가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 분노는 그 욕구가 심하게 손상된 것. 슬픔은 어떤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거나 아니면 지속적으로 결핍되었다는 것을 가리킴. 이처럼 불안, 슬픔, 무기력감 같은 구체적 감정을 깨닫지 못하면 그때그때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을 뿐더러 충족할 수도 없다.
- 남성들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의식적으로 인지하기를 어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바람직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 남자아이들의 부정적 감정은 여아들만큼 보호자에게 환영받지 못함. 따라서 남아들은 부정적 감정을 자기것으로 내면화하기 어렵다. 결국 남아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부정적 감정을 파악하고 그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을 어렵게 여김
- 감정단절로 인해 남성에게 일어나는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추상화 강박. 이는 현실에서 자기행동을 추상적 이데올로기에 의지하는 것으로, 자기감정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면서 일어나는 필연적 결과임. 내면의 감정을 통해 행동을 지시받지 못하는 사람은 외부이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밖에 없음. 그렇다고 모든 이데올로기적 사고와 행동이 감정차단의 결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정치, 과학, 종교 등 모든 교조적 원칙들은 내면과 접촉하는 것이 어려워진 남성들에게 행동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남성이 어쩔 수 없이 무기력에 빠진다는 것인데, 이것이 남성 정체성 발달 3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외부의 요구에 따라 삶을 꾸려가다 보면 피로와 무력감을 느끼는 게 당연. 흥미로운 사실은 남성이 일생동안 그토록 극복하려고 노력한 이 무기력감이 매우 중요한 남성의 감정 중 하나라는 사실. 이 감정은 남성 정체성이 우회적 자기확인과 감정방어를 통해 구성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물론 감정을 억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감정을 인식하는 것도 남성들에게 무기력감을 불러일으킴. 하지만 원인이 다른 두 종류의 무력감은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냄. 슬픔, 외로움, 불안과 같은 특정한 감정을 인지하게 된 남성은 처음에는 무엇때문에 자신이 이토록 낯선 흥분에 사로잡혔는지 알지 못해 무기력해짐. 그러나 이 무기력감은 개별적으로 알맞은 대처방안을 찾고 그것을 실험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것으로 변형, 발전한다. 반면 감정을 억압해서 나타나는 무기력감은 남성성의 구조 안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무기력감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시됨. 무기력감과 나약함을 경멸하는 이런 태도는 결국 권력과 압박, 영웅주의와 지배욕이라는 독단적 이데올로기로 이어짐
- 감정을 오래 가두어 두는 것은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하지만 남성들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내면과의 소통을 포기하고 희생함. 슬픔, 무기력감, 수치심을 방어하려는 남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 이 원칙은 타인에게도 해당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남성은 타인에게 그런 감정들이 나타났을 때도 방어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내 혹은 여자친구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나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들려주면 남자들은 자꾸만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하지만 여자가 원하는 건, 그저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고 공감해주는 것. 남자가 아내나 여자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 빨리 싫증을 느끼는 이유는 이같은 엇갈림에 있따. 여자들과 이야기할 때 남자들은 대화를 해나가는 자신의 방식, 즉 문제를 깨닫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됨. 그 결과 남자들은 몇마디 채 나누기도 전에 하품을 하며 지루해한다. 이런 경향은 오래된 관계일수록 더욱 심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지루함의 이면에 무력감이 숨어 있다는 사실. 감정을 공유하는 대화라니. 남자들에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함께 느낀다는 것은 그에 따른 감정을 어느정도 공감한다는 의미. 하지만 감정의 공유는 남성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남자들이 어린시절부터 외면하도록 강요받은 것 아닌가. 남자는 여자의 감정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다. 결국 남자의 지루함은 자신의 무능력함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위장술에 지나지 않는다
-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하 남자는 강하면서도 감수성이 풍부하고 터프하면서도 섬세해야 함. 그러니까 불속에서도 끄떡없는 바위같아야하고, 여자가 기댈 수 있게 언제라도 어깨를 내주어야 하는 건 기본.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더라도 절대로 도를 넘어선 안된다.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하지만 여자보다 많이 흘리면 안된다. 재치와 유머는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소양이며, 여자가 이야기할땐 자기일처럼 진지하게 들어줘야 한다. 아내내 애인의 감정이 어떠한지,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고, 말이 통하는 부드러운 남자가 되어야 한다. 언제든지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스스로 그것을 원해야 한다. 이런 과도한 요구에 압박감을 느끼는 남자들은 술집이나 스포츠클럽 같은 그들만의 모임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 남자들끼리의 만남은 여자와의 만남보다는 덜 만족스럽긴 하지만 대신 훨씬 편하고 쉽다
- 그들은 각자의 업무를 마친후 집으로 돌아오면 자상한 아빠와 남편이 되어야 함. 이는 냉철하고 과감한 남자다운 동료를 원하는 직장의 요구와 위배되는 것으로, 집에 돌아온 남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행동양식을 따라야 함. 가장으로 권위를 보장받는 전문적 지식, 파트너십에 관한 논의, 타협능력, 감정 등등 그에게 요구되는 목록은 끝이 없다. 문제는 그 요구들이 대개 분명치 않다는 점. 직장에서와 달리 남자들은 가족이 자신에게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함. 그들은 엄청난 숙제더미 앞에 홀로 서 있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 숙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더러,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사태파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감지조차 할 수 없으니 무슨수로 해결을 기대하겠는가. 결국 남자들은 그를 둘러싼 거대한 요구의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심리적 건강은 물론 자기자신마처 잃어버림
- 남성의 침묵과 '혼자하기', 그리고 고독을 깊게 들여다보면, 결국 남성은 자기감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핵심문제와 다시 한번 만나게 됨. 침묵과 홀로 있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음악 감상이나 명상 등을 통한 일시적 침묵은 사태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 효과가 있다. 중요한 것은 혼자 있는 시간동안 내면을 들여다보는가, 자신의 내적 충동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이다. 티벳 속담에 '고독을 두려워 마라. 고독은 자기자신과 우정을 맺는 좋은 방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적극 활용하나는 충고를 덧붙인다. 혼자가 된 순간을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으로 이용하라는 이야기. 결국 남성의 소통에서 핵심문제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있다. 내면의 충동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듣는 게 어려운 일이다. 이때 몇가지 특정한 감정와 욕구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감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남자가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앞에 있는 상대만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먼저 침묵하는 것이다. 그가 특정한 감정과 욕구에 대해 입밖에 내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 대해 자기자신과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남성의 자기표현 성향은 외적으로 멋진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다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어린아이 같은 소망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엔 문제가 있음. 언뜻 끊임없는 자기계발처럼 보이는 이 행동은 결국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이기때문. 한마디로, 매일 가짜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연기를 생활화나는 남자들은 자신의 내면이 허술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
- 실패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 성향을 심리학에서는 외적귀인이라 부름. 남자들은 어떤 일에 성공하면 그 이뉴가 자신의 지식, 추진력 등 자기능력에 있다고 생각. 반대로 실패하면 거센 바람이나 심판의 오심, 아내의 변덕과 같은 외부요인을 찾음. 남자들이 종종 치명적 실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털고 일어나 또 다른 도전에 나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행동과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성향은 치욕적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권력에 도전하는 남성 정치가들에게서 유난히 많이 나타남. 남성들의 외적귀인 성향이 추진력과 자부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해보라. 테니스 시합에서 이기면 자기가 잘한 덕이고, 지면 다른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이런 태도가 습관화되면 살면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애를 먹음. 특히 문제의 핵심을 찾기 어려워짐. 부부 사이의 문제를 모두 아내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떠넘기는 남편은 부부관계를 효과적으로 개선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나아가 다른 수많은 인간관계가 실패하는 것은 물론, 인생 전반에 위기가 닥칠수도 있다
- 남성은 다른 사람 앞에서 뿐만이 아니라 종종 자기자신에게도 연극을 함. 내적 결핍을 보완하고 자신의 유약함을 가리기 위해서임. 나르시시스트들이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과장해서 연출하는 행위 뒤에는 결핍된 감정, 정서적 부재가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열등감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 바로 이때문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과 함께 있는 게 고역인 경우가 많음. 그들을 높은 자리로 밀어올린 동력은 자기과시능력이다. 자신의 강점을 과장하고 약점은 그럴듯하게 위장하거나 심지어 강점으로 보이게 만드는 능력과 의지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들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자신감을 무기로 삼아 승승장구함.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그 한계를 쉽사리 드러냄. 관계맺기에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열린 태도와 공감능력은 나르시시스트들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물샐틈 없는 방어력과 자신이나 타인의 부족함을 관대하게 수용하는 능력을 동시에 발휘한다는 것은 불가능. 남자는 동전처럼 양면을 갖고 있다는 속설이 강하게 제기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기계가 아닌 이상 남자들은 자기과시와 자기개방 사이를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오갈 수 없다.
- 정신과 의사이자 남성심리 전문가 앨런 그래치는 자신의 부족함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행위를 부당한 상사 증후군이라고 명명. 이는 부부관계와 연인관계에도 적용됨. 남자들은 아내나 여친의 외모를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걱정거리나 골칫거리에서 눈을 돌림. 직장에서의 실패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극복됨. 유약한 내면의 감정은 상대방에 대한 폄하와 공격, 자화자찬을 통해 계속해서 차단됨. 대신 소설쓰기, 세계일주, 창업 같은 소망은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겨놓는다.
- 나르시시스트는 열등감, 두려움과 같은 내밀한 감정들을 외부로 돌리려는 일에 몰두함. 나르시스즘 역시 남성의 외향화 경향중 하나. 나르시시스트적 인격장애와 불안성 인격장애가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남자들의 과도한 나르시스즘은 자아불안이 밖으로 드러난 것.
- 여자들도 남자들을 대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음. 여자는 자기의 감정에 접근하기 쉬울뿐더러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 그래서 때때로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섣불리 추축. 남자의 감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와 똑같은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요구함. 이런 감정 자기중심주의는 언제나 두갈림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남성 딜레마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 남자들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가능해짐
* 감정에 부담이 되는 생각, 느낌, 갈등 또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완화됨
* 내적 욕구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게 실마리가 되어 더 쉽게 욕구 충족 가능
* 대화하는 동안 친금감과 결속감이 생기고 그로 인해 위로와 인정, 가치평가를 받을 수 있음
* 대화하는 동안 부정적인 것으로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던 내밀한 부분에 대한 믿음과 사고체계가 분명히 드러나므로 그것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따
* 직접적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아내나 여자친구와 지내면서 느끼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결속감과 관심이 되살아날 수 있다
* 개인적 문제를 다각도에서 이야기하다보면 사태가 명확하게 밝혀지므로 행동이나 결정이 도움이 됨
- 역설적이게도 남성의 지나친 성과지향적 태도는 그들이 평소에 피하고자 했던 허약함, 무력감을 부르는 원인이 됨.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절망적 패배는 더 쉽게 찾아옴. 용맹한 전사는 전쟁터에서 죽고, 스피드를 즐기는 카레이서는 병원에 입원해 있고, 인기를 한 몸에 받던 배우와 선수는 자기비하에 빠지며, 일중독자는 알콜 중독자로 변해간다. 극단이 비극을 낳는 것이다.
- 독일 작가 율리우스 비어바움은 '유머란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는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서 핵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이는 유머가 개인적 좌절이나 적어도 직접벅 실패의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 유머는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조소나 냉소와 달리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듬. 자신의 좌절을 해학적으로 강조하여 그 상황이 안고 있는 불안요인을 약화시킴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낸다. 이때 자신의 약점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과장이나 반어를 사용할 수 있따. 위키피디아의 문장으로 표현하면 '유머는 스스로를 실제보다 멍청하게 만들고, 사람은 유머를 통해 실제보다 강해진다.' 다시 말해 유머는 어려운 상황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봄으로써 희망과 의지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비록 사건 자체에 직접벅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감정적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 남자들은 여자들의 감정적 반응을 즉각적으로 쫓아가지 못함. 때문에 남자들에게는 여자는 알 수 없고 예측불가의 존재다. 여자들이 특별히 여성적이어서가 아니라 남자가 전혀 여성적이지 않은 탓. 오히려 남자들은 여자들의 정서적 반응을 매우 놀라워 함. 그들은 그런 강렬한 감정의 동요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 그렇다고 남성에게 이런 충동이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접근이 차단되어 있을 뿐이다. 만알 남자들이 남성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충동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이런 모습은 그들 내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을 것임. 여하간 사회화된 남자들에게 여자는 일종의 요술 거울이다. 그것만으로도 여자는 남자에게 위협적이고 무서운 존재다. 여자를 통해 남자들은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무서운 감정들을 언제든 만날 수 있다.
- 어떤 남자들은 대립상황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무력감에 대해 물리적 폭력으로 반응. 그러고는 나중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고 말함. 이것은 그 순간에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는 의미. 폭력은 도피와 함께 남성의 중요한 행동방식 중 하나임. 그러나 언어적 공격에 대해서까지 폭력으로 대처하는 것은 적절치 않음. 폭력적 남성은 자존심에 대한 공격을 신체에 대한 위협으로 여김. 그들은 자신의 명예나 남성 정체성에 상처를 받았을 때 신체 공격을 받은 것과 같은 반응을 보임. 그들은 신체적 대결과 관련해서 어려서 배우고 성공적으로 실행했던 극복기제를 전혀 다른 상황에 적용함. 예컨대 그들은 배우자와의 갈등을 말대신 행동으로 해결하려 함. 그런 상황에 맞는 극복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황당할 수 있지만 그들은 정말로 당황해서 때린다. 다른 상황에서는 치고 받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 무력감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무력감을 깨닫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로 인해 긍정적 대처법을 발전시키지 못한 무능함이다
- 남편은 아내의 감정적인 말이나 질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음. 할 말을 찾지 못한 남편은 스스로 열세를 느끼고 침묵에 빠짐. 그리고 남자답지 못한 열등감을 즉각 분리하고 차단해 버림. 폭력을 휘두르거나 어설픈 대화를 시도하거나, 아니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 하지만 이런 도피는 진정한 해결방안이 될 수 없기에 문제가 유지되거나 심화될 뿐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함
- 남성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상대를 책임감을 갖춘 성인이라고 생각함. 그리고 상대가 자신에게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해결책을 제시해 달라는 의미로 믿음. 남성이 문제해결보다 공감에 초점을 맞춘 여성의 대화를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예컨대, 직장상사 때문에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여자는 자신의 처지를 남자친구가 공감해주길 원하지만, 상황파악을 못하 남자는 극단의 해결책을 제안함. '그렇게 힘들면 회사를 그만두던가' 남성은 해결책이 확실한 대화만이 진정한 소통이라 생각한다.
- 남성의 자살은 수치심에 기반한 것이 많다. 그들은 주관적으로 과장됨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경험한 것이다. 여전히 공격적이지만 자살보다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수치심을 극복할 수도 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고백이 대표적 사례. 고백은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임. 자기반어 전략도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이 방법은 문제를 솔직하게 관찰하고 논의할 수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거리두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익. 게다가 자기반어를 통해 드러나는 유머는 주제를 가볍게 만든다는 장점도 있다. 나아가 스스로를 약자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자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자기반어를 통해 남성은 자신이 처한 문제를 받아들이고, 그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주변의 인정과 따뜻한 관심을 받을 수 있음. 결국 남성은 스스로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됨. 자신의 수치심과 부족함을 인지하고 극복하는 일은 배우자와 연인의 관계는 물론이고, 모든 인간관계에 근본적 의미를 가짐
- 성불능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것이 남성성 전반의 위기를 완벽하게 상징하기 때문. 즉, 성불능은 남성의 성취불능, 성과를 이룩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 남자들에게 성불능보다 더 불행한 일은 실직, 실업, 업무적 실패와 같은 일과 관련된 위기정도임. 그러나 이런 문제는 무능한 상사, 뺀질거리는 동료, 기만적 업무 파트너 등 외부 요인으로 실패의 원인을 돌릴 수 있음. 하지만 성불능을 다르다. 신체에 관한, 개인적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기란 거의 불가능. 물론 남자들은 의학적 원인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이제 실패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당사자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남성 정체성이 위협받았으니 당신은 더 이상 완전한 남자가 아니다. 이건 모두 당신 탓이다.' 그러나 성불능과 관련한 남성 정체성의 파괴가 마냥 부정적인 일만은 아님. 이는 성과를 향한 노력과 감정방어와는 또 다른 전제 위에서 새로운 남성 정체성을 세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건 모두 내 탓이다'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남자들에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물론 그 변화는 당사자가 자신의 무기력감을 인정하고 도움을 찾을때에만 가능
- 남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신체의 감각을 체계적으로 단련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남자들이 자기는 전혀 아프지 않다고 자랑. 전설적인 남성적 갑옷을 만드는 작업은 그렇게 일찌감치 시작됨. 결국 사춘기부터 남자들에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유일한 신체접촉은 섹슈얼리티뿐이다. 페니스가 육체의 중심이 되고 나머지 부분은 누구의 영역도 아닌 것으로 남는다. 그런 방식으로 많은 남자들이 성적 접촉을 가짐. 외향화 원칙은 남성 섹슈얼리티에도 적용됨. 남성에게는 외적인 성취가 내적 만족보다 우위를 점함. 외적인 강함이 내면의 흥분과 즐거움보다 우선시된다. 그래서 보디빌딩은 좋지만 건강관리는 왠지 여성스럽다고 생각.
- 로타르 뵈니시의 비유를 인용하자면, 이 사다리는 전혀 엉뚱한 벽에 세워져 있는데 끝까지 오른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닫는다. 때로는 오르는 도중에 떨어지기도 함. 사다리에서의 이탈은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 주기도 함. 예를 들어 슈퍼맨 이지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언제나 용감하고, 강한 남자, 항상 일등만 하는 멋진 사람, 가장 위대한 사람, 최고로 강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면 인생은 분명 더 편안해질 것이다. 어차피 모든것을 통제하고 장악하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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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승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고, 더이상 강한 사람인 척하지 않고, 더 이상 시기심으로 가득차서 다른 사람들을 노리지 않을 때, 그때야 비로소 당신은 승자가 될 수 있다. (게오르크 단처)
- 남성들이 가장 흔학 느끼는 두려움은 경쟁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두려움은 사회적으로 습득한 승자의식, 부양자 의식, 보호자 의식,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과와 자존감 간의 미심쩍은 결합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있던 사실들
* 고대 로마의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거미를 볼 때마다 도망쳤다
* 알렉산더 대체는 폐쇄공포증에 시달렸다
*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크리니스는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겁에 질려 초죽음이 되었다
* 프리드리히 2세는 곤충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광적인 여성혐오주의자. 그렇지만 단 한번이라도 그가 여성을 만난 적이 있는지는 의문이다)는 여성과 단 둘이 한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완강히 거부. 심술궂은 비평가들은 그가 여성의 모습에서 악마의 화신을 보았다고 주장하기도 함
* 처칠은 젊은 시절 유세도중 아이가 실수로 던진 공에 맞았는데, 그때부터 멀리서 날아오는 공을 보기만 해도 공포에 사로잡혀 허겁지겁 도망쳤다
- 두려움을 몰아내는 행위가 남성들에게 일으키는 여러가지 부정적 결과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은 특히 여성들에게 고통이 될 수 있음
*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미친 듯이 분노를 분출하는 행위 (제정신이 아닌 상태, 사소한 일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상태)
* 온갖 종류의 중독으로 도피하는 행위 (알콜, 일, 쇼핑, 비디오, 텔레비전, 섹스, 게임, 라디오 등)
*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압력을 또 다른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행위
* 두려움이 공포에 이를 정도로 극적으로 강화되는 현상. 이것은 여러해 동안 지속적으로 두려움을 축출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을, 여기에는 현실감 상실이 동반됨
- 오늘날의 남성은 그들의 본분을 다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 어떤 때보다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단순히 침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거의 전반에 걸쳐서 그러하다. 바로 이같은 상황이 남성들을 정신적 공황상태로 밀어넣고 있다.
- 타인을 폄하하는 사람은 이런 행동을 통해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낸다.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들은 잠재의식 속에 그들의 성생활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 심층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껏 거만하고 반항적 태도로 '내겐 자유가 필요해' 혹은 '자유는 내게 아주 소중한 존재야' 같은 말을 내뱉는 남성들의 행동 배후에는 결합관계에 대한 너무나도 저주스런 공포가 숨어 있음. 이런 말들은 '나는 절대로 한 여자에게 예속당하지 않을 거야. 그것만은 확실해' 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느끼는 자유 상실의 두려움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다시 유아기의 체험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부모, 특히 어머니 때문에 자유를 박탈당한 체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아들에게 사랑을 흠뻑 퍼붓는 것과 동시에 아들의 자연적 놀이욕구와 자유에 대한 욕구를 제한한다면,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어딘지 숨막하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됨. 그리고 이를 통해서 아들은 사랑과 자유상실을 서로 연관짓게 됨. 그 결과는 아주 치명적일 수 있음. 돈주앙 현상에서부터 아예 결합관계 자체를 구축할 수 없는 만성적 무능력 상태를 거쳐, 심지어 여성혐오증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 한가지 덧붙여 말하자면, 카롤릭교회는 후자에다 독신생활이라는 그러싸해 보이는 근사한 명칭을 붙여 주었다.
-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되, 그러니까 분노, 슬픔, 두려움, 기쁨 등의 감정을 허용하되,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들을 모욕하지 않는 데 있다.
- 생존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은 주로 직업적 실패와 실직, 그리고 은퇴에 집중되어 있다. 남성들은 일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경향이 지나치리만큼 강하다.
- 일 중독자의 원동력은 직업적 실패와 사회적 퇴장에 대한 두려움이다. 늘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언제나 최고의 능률만을 기대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을 별로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자, 능력을 척도로 한 타인의 인정을 절실하게 갈구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승자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심지어 건강도)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애초에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질수도 있따. 번 아웃, 이 용어는 이런 상태를 지칭하는 새로운 표현이다.
- 질병에 대한 두려움은 대부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됨. 남자들은 몸이 아픈 것을 지극히 남자답지 못한 일로 여김.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빈틈을 보이는 것도 싫어하는데, 이 같은 사실 또한 질병에 대한 극단적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런 태도는 긴장감을 유발하고 긴장감은 다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 불안감(angst)이란 단어는 독일어 angust에서 유래. 언어사적으로 보자면 명확하지 않은 감정, 가슴이 조여오는 것 같은 답답한 느낌, 중압감, 진퇴양난, 위협감 등을 의미. 불안감이 수많은 신체질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불안감은 흔히 신체적 증상으로 곧장 이어지기도 하는데 특히 미친 듯이 심장이 뛰는 증상과 호흡곤란,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증상, 메슥거림, 구토, 설사 등이 대표적 사례. 그외에도 위암, 협심증 등 불안감에서 비롯된 부차적 질병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심리면역학 지식에 의거하여 우리는 불안한 생각이 건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시기심, 경쟁의식, 그리고 적개심은 각종 질병을 키우는 온상이 될 수 있음. 심신의 상호작용을 설명하자면, 정신적 상태가 신체적 상태를 변화시킨다. 이런 변화는 중앙신경체계(뇌, 척수)와 내분비 체계(내분비선, 호르몬), 그리고 면역체계를 통해서 유발된다. 면역체계는 뇌가 조정하느데, 뇌는 신경이나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직접적으로 면역체계를 조정하거나 아니면 혈관 속에 있는 다양한 호르몬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것을 조정함. 복잡하게 돌아가는 이 시스템은 정신적 상태나 기분에 많은 영향을 받음. 불안감으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들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증상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증상, 설사, 기관지 천식 등이 있다.
- 중년의 위기 배후에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중년의 위기를 겪는 동안 남성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두려움으로 크게 고통받음
(1) 능력상실에 대한 두려움. 특히 전적으로 혹은 주로 능력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평가하는 남성들이 이런 두려움에 시달림. 직장에서, 그리고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발정난 수컷들의 경쟁속에서 꿋꿋하게 버티면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 대다수가 이런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음
(2) 어느 날 갑자기 속수무책의 상황에 봉착하여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3) 육체적 매력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가 질질 끌고 다녔던 갖가지 파괴적 두려움들과 날마다 우리의 삶을 힘겹게 만드는 불필요한 근심걱정들의 실체를 폭로하고 약화시키면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를 좌지우지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 당신의 개성을 억압하고 당신 본연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하는 파괴적이고 강박적인 성과의식 및 경쟁의식에서 벗어나라.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전적으로 당신의 고유한 소망과 의지가 동인이 되어야 한다. 당신에게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그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활용해야 한다. 오직 성과와 물질적인 생각만 하면서 그 날들을 보내서는 안된다. 이따금 당신 자신을 향해 큰 소리로 이렇게 자기암시를 하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 남성들을 위한 5가지 기본규칙
(1) 당신의 두려움을 수용하고 그것을 한시적인 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여라. 두려움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규명하려 시도하라.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나 당신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피하라
(2) 당신의 두려움을 분석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라. 두려움을 숨기는 것은 위험하고 잘못된 자만심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처럼 그릇된 자만심은 두려움을 한층 더 막강하게 만들 뿐이다.
(3) 당신의 두려움에 맞서 단호하게 전쟁을 선포하라. 더이상 두려움이 당신을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라. 긍정적 에너지, 예컨대 낙관적 태도로 무장하고 두려움에 맞서라
(4) 한걸음씩 단계별로 두려움과 정면대결을 벌이면서 용감하고 당당한 태도로 두려움에 맞서라. 물질적으로 치우친 성과 및 경쟁중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라. 이렇게 하면 제 아무리 막강한 두려움이라 해도 오래지 않아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5) 바로 지금, 오늘부터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결심하라. 지금 시작하라. 다른 사람들이나 당신 자신에게 그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말라. 그리고 두려움과 정면대결을 벌이는 과정에서 당신 자신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요구를 해서도 안된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필연적으로 과거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다.
- 여성들을 위한 5가지 기본규칙
(1) 당신이 상대남성보다 더 우월하더라도 절대로 이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말라. 남성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월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럴 때에 한해서만 당신과 상대남성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뭔가가 시작될 수 있다
(2) 절대로 불안감을 조장하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안이나 상황을 갖고 남성들을 과도하게 몰아붙이지 말라. 이렇게 해봐야 고통을 겪는 것은 당신 자신이다
(3) 당신에게 속박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상대 남성에게 주지 말라. 남성에게 주어진 자유가 많을수록 그를 위한 심리치료사 역할을 할 필요가 그만큼 줄어든다
(4) 비록 착각일망정 남성들의 강인함을 인정해 주라. 남성들이 그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극심한 불안감과 근심걱정을 당신에게 털어놓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당신은 결코 남성들의 깊은 속내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남자들이란 원래 그렇다
(5) 많은 측면에서 남성들의 행동은 어린아이들의 행동과 닮아있다. 그러므로 어떤 구체적 상황에서 남성들에게 뭔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면, 어린 아이들을 다룰 때를 떠올려라. 다시 말해 어린아이들을 다룰 때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본 다음 그대로 행동하라. 아이들에게 먹혀들어가는 방법은 거의 예외없이 남성들에게도 그대로 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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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신 8주째부터 태아의 고환에서는 다량의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는데, 이것이 두뇌발달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방향전환을 야기. 즉, 테스토스테론은 두뇌의 의사소통 기능을 좌우하는 중추세포를 파괴. 그래서 이런 일을 겪지 않은 여자아이들이 후날 의사소통 면에서 남자아이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 인간이 타고난 천성에 맞추어 살 수 있으면 심리적, 신체적, 심신상관학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며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것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동기와 청소년기, 중년기를 거치며 사회적, 종교적 이념과 가정적인 상위규범에 의거해 생활하고, 시대적으로 올바른 원칙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을 따름. 그러다 노년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그동안 주변에 적응하느라 포기한 삶이나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회한으로 마음은 기습공격을 받게 됨.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삶과 사회적 책임 사이의 적절한 조화에 늘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함
-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삶이 스스로를 동경하는 마음에서 낳은 아들딸이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서 오지만 당신에게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비록 당신 곁에 있을지라도 당신의 것은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줄 수 있지만 당신의 생각은 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의 신체가 머물 곳은 줄수 있지만, 그들의 영혼이 머물 곳은 줄 수 없다. (칼리 지브란)
- 여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자들보다 신경세포가 더 성숙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음. 달래면 쉽게 수그러들고 어머니나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일찍부터 헤아릴 줄 안다. 여아들이 같은 또래의 남아들보다 다른 아기의 울음에 쉽게 전염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여아들은 남아들보다 생후 첫날부터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더 많은 관심을 맺으려는 적극성을 드러낸다. 여아들의 이런 특성은 평생 지속. 어머니는 아기의 감정표현을 흉내내면서 그것을 더욱 강화하고 아기의 민감한 정서를 조절. 여아들은 미소를 통해 어머니의 애정어린 태도를 더욱 부추김. 또한 커가면서 훨씬 더 다양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남아들보다 더 능숙하게 감정을 통제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서 쉽게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 남자아이들은 무관심이나 위협, 체벌의 힘을 빌려 통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주목받고 싶어서 규범을 준수. 결토 규범의 의미를 통찰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남아를 교육할 때는 이런 심리를 활용해야 함. 발달심리학에 따르면 여아들은 어릴때부터 배려하는 마음과 감정이입능력이 발달하기 때문에 규범을 익히는 것이 수월하다. 반면 남자아이들은 규범이나 규칙을 준수하는 방법을 따로 익혀야 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느낀다. 이는 도덕이나 윤리적인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천성의 문제. 남아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기보다는 현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작하여 그 가능성을 점점 높여가는 방법이 현실적으로 적절. 특히 사회적 규범에 관하여 교육을 해야할 때는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훗날 아이가 어떤 일을 실현해야 하고 바람직하고 유익할 것인지 조언해 주는 것이 좋다.
- 아이에게 세상의 보물을 볼 수 있는 시야와 가능성을 열어주고, 앞날의 기대와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중요. 모든 일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 몇가지 가능성은 열려 있게 마련. 아이에게 '네 안에 이미 모든 능력이 있어'라고 말해보자. 그것은 곧 '너에게 없는 능력을 가지려 노력할 필요는 없어.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해'라는 의미. 또는 '다른 사람의 재능이 아니라 네 재능을 활용해.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해. 그러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거야'라고 말하라
- 사춘기 소년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정상이라 생각하는 기존질서에 어깃장을 놓는 것이다. 어른들은 사춘기 소년들이 의도적으로 이런 행동을 저지르며, 본인의 의지와 노력만 있으면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음.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춘기에는 저항할 수 없는 무언가가 소년들을 덮친다. 소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체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휩쓸리고 게으름과 반항심, 공격성에 휘말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 이런 행동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시기에 분비되는 호르몬 때문. 예컨대, 여자들이 생리전 호르몬의 분비량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 생리전증후군에 심하게 시달리는 여자들은 생리전후에 다른 사람과 만남을 피하곤 하는데,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평소 친한 친구들에게까지 앞뒤 분별없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할 수도 있기 때문. 그래서 그런 여자들은 이 시기가 지나고 사회적으로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집에 머무르거나 미리 달력에 표시를 해두고 그 즈음 주변 사람들에게 일러두기도 함. 만약 사춘기에도 이런 식의 대처가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이 시기 소년들의 경우에는 호르몬 분비량을 예측할 수 없어서 대비하기 쉽지 않음. 그래서 소년들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됨.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행동까지 못 본척 넘기라는 의미는 아님. 규칙을 심하게 어기는 경우 훈계하고 제재를 가해야 함. 한편 사춘기 소년들은 자기감정을 어쩔 수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심리적 장애에 시달리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음. 사춘기 소년들에게 사춘기라고 놀리는 것은 이 시기 남아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
- 사춘기 소년들은 규범에 따라 정돈된 것들에 넌덜머리를 낸다. 정해진 학습단계에 맞추어 서서히 지식을 늘려가는 것은 그들의 성향에 맞지 않음. 일일이 정해진 규칙에 간섭받지 않고서 자유롭게 행동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곳, 전술과 해결책을 새롭게 찾아내고 생각해내는 동시에 마음껏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민하게 행동할 수 있는 곳에서 소년들은 창의력과 지성을 십분 발휘한다. 즉, 사춘기 소년들은 자신들의 조직력과 창의성, 집단의식과 용기를 자극하는 행동 지향적 학습 및 작업방식을 필요로 함
- 서구사회에서 사춘기 소년들을 과도기 상태로 방치하는 경향.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자율적 의무와 책임, 권리와 의무를 가진 소년들을 성인으로 인정하는 통과의례 제도를 다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 그들은 우울증, 게임중독, 자살, 범죄 같은 사춘기의 많은 문제점들이 나날이 증가하는 이유가 사춘기 소년들이 어른들의 세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삶에서 유리되어 있기 때문. 실제로 사춘기 소년들은 잠재력과 활력을 마음대로 펼치지 못하고 막연히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가도록 기다려야 한다. 많은 소년들이 뭐든지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토로하는 사실이 이런 논거를 뒷받침함
- 소년들은 분노와 좌절감을 해소하는 것 못지 않게 자신이 주목받고 인정받는 것을 중시. 그들이 보기에 부정적 정체성은 사회에서든 조직에서든 매스컴에서든 힘을 과시하고 겁을 주고 허세를 부리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만약 사회에서 다른 방법으로 건질 게 없다고 느끼면, 소년들은 스스로를 위험한 범죄자로 낙인찍는 경우가 많음. 이런 부정적 정체성은 긍정적으로 발전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은 이 시기 소년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 '범죄는 소년들을 시간확산에서 구해준다' 소년들은 불안감에 시달리며 미래를 설계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누구고 무언가를 보여주고 어딘가에 동참하려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단기적 목표를 추구. 그러다보면 단순하게 행동하고 원시적 충동을 발산하게 됨
- 사나이 대장부가 되려면 청춘의 꿈을 존중해야 함. 흔히 더 나은 양 칭송받는 이성이라는 치명적 벌레에게 마음을 열어서는 안된다. (돈 카를로스, 프리드리히 실러)
- 부모들은 이성적으로 현실에 대처한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부모들이 아들의 성숙기를 하나의 중요한 발달단계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음. 그러나 남자들은 성숙기를 추구하는 이상향에 앞으로 남은 인생을 일구어갈 수 있는 힘을 축적한다. 즉, 남자들이 성숙기에 상상하고 꿈꾸고 갈구하는 것은 앞으로 지을 집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 조부모들은 소년들에게 젊은 시절의 꿈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 그 꿈을 결심하기에 늦었다면 그래서 느끼는 슬픔에 대해서라도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인간은 모름지기 꿈이 있어야 하고, 또 그 꿈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쉽게 방향을 잃어버리진 않는다
- 남아들이 15~20세 일때는 직장생활과 경제적 현실에 너무 깊숙이 휘말려 대부분 젊은 날의 꿈으로부터 멀어져 있음. 그들은 자신이 현실에 실망한 경우가 많아서 아들이 그런 실망감을 맛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모들은 이런 말을 한다. '네 머릿속은 실현가능성 없는 허황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현실을 직시해야 해' 하지만 소년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어딘가에서 현실이라는 녀석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이면 정신을 바짝 차려. 현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얼른 숨어. 꼭꼭 숨어서 현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 현실은 자신을 믿는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너는 네 소원과 꿈이 있는 쪽을 바라봐야 해. 그것들을 결코 놓쳐서는 안돼. 그러면 언젠가 혹독한 현실과 맞부딪히게 되더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거야.'
- 성숙기는 소년들이 기존의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간. 소년들은 세상이 형편없으며 그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고 확신. 그리고 자신도 이 세상을 바르게 개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망함. 어린 시절에는 자신만의 생활공간 안에서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최소한 강해질 수 있다고 믿음. 그런 자부심은 성숙기에 이러러 와해됨. 특히 소년들은 많은 일들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되면, 삶이란 스쳐 지나가는 산들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모든 잘못과 단점, 실패한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결국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고, 어떤 관점에서는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 브로스트는 '남자들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는가'에서 남자들 역시 특유의 감성적 능력을 발휘한다고 주장. 정확히 말하면, 남자들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유혹하려 할 때 감성적 능력을 발휘. 남자는 유혹하고 싶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속마음을 내보이며 상처받기 쉬운 자신의 여린 면모를 드러냄. 남자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그런 척 한다. 그러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다시 말해 예술가가 탐나는 예술품을 거머쥐듯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 본래의 남성적 모습으로 돌아감. 냉정하고 과묵하고 자기중심적이고 괴팍하고 외향적이고 감정적으로 무감각하게 말이다. 남자들은 자신의 영혼에 무심하고, 이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이런 남자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남자들은 완전히 상반되는 두개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맨 처음 진실로 사랑한 사람, 즉 어머니에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두고 떠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어느 여자에게선가 다시 발견하기를 원함. 어린시절 어머니는 아들이 상처받기 쉽고 겁이 많아서 보호해주어댜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따. 동시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싸준다. 이런 비밀 탓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질투를 느끼고, 나중에 아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머니를 미워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남자들의 상처받기 쉬운 내면세계는 영원히 어머니 곁에 남아 있고, 훗날 아내는 이점에 불만을 터뜨림. 그런 어머니가 없는 경우 여자를 향한 남자들의 갈망은 더욱 고조됨. 남자들에게는 여자 곁에서 보호받고 조건없이 사랑받고 안주하고 싶은 소망이 항상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남성적 외부세계, 즉 남성 경쟁자들로 넘쳐나는 드넓은 황야에서 버텨내거나 한 발 더 나아가 영웅적 행위를 완수하고 승리하여 지도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어한다.
- 가족에게 중요한 자원, 돈, 아이들, 집은 여자들이 더 잘 다스림. 반면 사회적, 문화적으로 넓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위험하고 모험적인 활동, 세계와 우주를 주름잡는 행동은 남자의 전문. 그런 남자로서의 삶이 많은 스트레스를 야기할 수 있음. 남자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전력투구해야 하며, 그 와중에 두려움과 질투심에 시달린다. 남자로서의 삶은 절대 편안한 것이 아니다.
- 남자들은 인정받고 싶어함.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함. 그래서 남자들을 다룰 때는 가능한 한 절대로 비판하지 않아야 함. 비판은 남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고집스레 만든다. 남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정하게 말해주는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충분히 뒷받침해주고 감탄하며 칭찬해 주어야 함.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며, 행여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영원히 낙인찍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줌. 그렇지 않으면 남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숨기고 침묵을 지킨다. 또한 누구나 두려움에 떨고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두려움과 실패를 통해 필요한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 남자들에게도 괴로워하고 슬퍼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겁에 질려 도망치거나 그것도 아니면 고통과 슬픔을 여자들에게 전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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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버스는 질투라는 것이 단지 파괴적이고 무가치한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보호하고 우회적으로 경고하며, 사랑에의 헌신을 안정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진화의 결과라고 주장. 그러므로 질투는 제거대상이 아니라 질투의 속성을 정확히 알고 조절해야 함
- 아빠들은 태교에서 분만까지, 기저귀 갈이부터 분유 먹이기까지 공동육아의 대열에 기꺼이 합류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감상의 육아에서 성장의 육아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아빠들이 처한 한계라면 한계다. 전쟁터에 나가 돈을 벌어야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절대명제 앞에서 자유로운 아빠는 없다. 덕분에 아빠들은 부정을 부정하며 키워왔던 좋은 아빠의 상을 전설속에 가두고 만다. 새벽귀가후, 잠자는 아이의 불쑥 커진 궁둥이와 발바닥을 주물럭거리며 히죽 웃는 것에 만족하면서, 가족들이 외국과 한국에 떨어져 있어야만 기러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아빠들은 가족과 함께 한국안에 있어도 모두 기러기다. 그리고 늙어가는 아빠는 이 무렵부터 자신의 아버지와 와해를 시작. 아버지가 표현하지 못했던 속사랑을 이해하기 시작. 동병상련, 내 아버지도 이렇게 혼자만의 소외와 우울 속에서 삶의 버거움을 가족에게 전혀 내비치지 못했겠구나. 지금의 나처럼 아내의 표현 중에 '당신은 왜 점점 아버님을 닮아가?' 라는 말이 부쩍 늘어날 때도 이 무렵이다. 기침소리, 걸음거리, 잔소리까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 안에 들어와 있다. 거부하고 싶었으나, 그것조차도 타협한다. 어정쩡한 모습으로 겉도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이 편하다. 좋든 싫든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의 기억속에서 존재감 하나는 확실하니까.
- 부부는 안팎에서 전쟁중이다. 우아하게 늙기가 버거운 것은 소외속에 늙어가고 있는 아빠들이나 고함만 늘어가는 엄마들이나 피차일반. 전쟁 때는 전우가 내 목숨 같은 것. 그러므로 최소한 전우끼리는 총 쏘지 않기.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기. 아버지와 화해하며 닮아가더라도 나몰라 아버지는 되지 않기.
- 부부싸움을 할 때 싸움의 내용은 이혼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의 방식과 목소리가 이혼을 결정짓는 관건이다. 대화가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 등 4단계로 진행되면 이혼확률은 92%다.
- 부부싸움을 할 때는 아내쪽에서 먼저 목소리 톤을 낮추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라. 손까지 잡아준다면 금상첨화. 이럴 대 남자는 혈압이 내려가고 엔돌핀이나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안정감을 느낀다. 결국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온다
- 스트레스가 생기면 즉시 풀어라. 억제론은 인간이 외로움을 숙명처럼 끼고 살아가야 하듯이, 분노 역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것. 폭발론 대표주자 아니타 팀페의 '분노는 나의 힘'에서 분노가 가진 긍정의 힘을 강조. 분노는 건강한 감정이므로 오히려 분노를 환영하라고 주장. 분노를 억누르고 방치하면 우울증, 공격성 등의 문제가 생기고 타인의 감정은 물론 자신의 기쁨 조차 느낄 수 없게 된다고 경고함. 분노를 긍정 에너지로 만드는 방법도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가 '건강한 자기 가치의식을 세워라'이다. 이 말은 자기 안에 있는 피해의식, 열등감, 나약성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내면화했을 때, 분노할 일도 줄어들고 화내는 것도 쉽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됨. 누군가 자신에게 잘못을 했을 때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래' 가 피해의식의 반응이라면, '이 정도로 내가 꿈쩍하겠냐?' 는 강한 존재감의 확인. '내가 그렇게 만만하고 우습게 보여?' 가 열등감이라면, '이 정도에서 네 수준을 알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부디 잘먹고 잘살아라' 라고 털어버리는 것은 내적 우월감이다.
- 거절표현 잘하기
* 모호하게 거절하지 마라. 상대방은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듣는다
* 죄의식을 느끼는 듯한 표현은 하지마라. 상대가 더 집요해진다
*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거절의 이유를 대지 마라. 진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 애원의 어조로 거절하지 마라. 상대가 기고만장해진다.
* 혹시 승낙했다면 뒷말을 퍼뜨리지 마라. 주고도 욕을 먹는다
- 중년이 되면서 발현되는 남성의 여성성을 융은 아니마라고 표현. '내 안에 여자 있다' 는 의미로서의 아니마다. 아니마가 특정 대상에게 꽂히면 바람이 난다. 그런데 대부분 자신의 아니마가 투사되는 대상은 융이 말한 아니마의 첫단계, 즉 어머니상에 묶여 버리는 이브의 단계다. 예쁘고 젊은 여자를 향하는 헬레나 아니마는 이브의 아니마와 싸웠을 때 백전백패다. 즉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면 젊은 여인의 미모가 아니라, 점점 소외되는 중년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따뜻함으로 감싸주는 그 여인의 모성애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모성애가 비아그라가 되어 점점 쪼그라드는 나면의 수컷을 일으켰을 수도 있따. 마누라와 애들 앞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왜 자기에게서 느낄까? 라며 행복해했을 수도 있다.
- 42년간 하버드대 졸업생 268명의 생애연구를 집결한 그랜트 연구는 실제로 인간관계가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줌. 성공적인 노후로 이끄는 열쇠는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다. 이쯤 되면 행복의 90%는 인간관계에 달려 있다고 말한 키에르케고르의 수치는 상향조정을 해도 무리 없어 보인다
- 환경이 복잡해지면서 하나의 진정한 자아는 없다.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적인 나에의 믿음은 망상. 주인격과 보조인격을 서로 조화롭게 발전시키며 그들 각자에게 멀을 걸되, 언제 어떤 인격이 나오고 언제 어떤 인격이 들어가는지 잘 조절하는 것이 중요. 다중인격을 미숙함 또는 부도덕과 범죄의 시각으로 보느냐, 아니면 리타 카터나 영국 심리학자 존 로언이 그랬듯이 정상으로 여기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다중성은 일관성에 비해 변종의 대우를 받는 것이 현실. 신뢰했던 내 친구가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씁쓸한 배신감처럼, 타인의 다중성은 때때로 신뢰관계에 치명적 결과를 초래. 그러나 역할에 있어서 다중성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점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절하는가, 조정당하는가의 문제일수도 있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에게 부과된 아들의 역할, 아버지의 역할, 남편의 역할, 사장의 역할, 관리자의 역할, 장남의 역할, 남자의 역할 등 수많은 기대가치를 단일한 색깔로 소화하기에는 어느 누구든 우리의 그릇이 너무 작다. 밥공기더라 밥통이 되라 하니 그릇이 깨질 지경인데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자신을 찾으라 한다. 이때는 자신이 여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 믿음직한 나, 자유로운 나, 근엄한 나, 자상한 나, 보수적인 나, 진보적인 나를 뒤섞어 버리고 나면 머리는 터지고 뇌는 돌아버릴 뿐이다. 패트리샤 던빌은 자신의 다중성을 인식하는 사람이 스트레스 상황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함. 사장일 때 나는 사장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고, 퇴근 후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삶의 취향을 즐기면 그만이다.
- 종교는 인간의 유한성으로 무한성을 획득함. 인간이 불로장생했다면 종교는 결코 인간의 땅에서 부흥치 못했을 것. 여하튼 다행한 일이다. 세상 어느 한쪽 맘 붙일 곳 없을 때, 엉엉 소리내어 울어보고 싶을 때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가야할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구원은 마라톤이거나, 등산이거나, 골프거나, 혹은 대폿집이 되겠지만, 그것이 그들의 종교라면 그것들은 모두 그 자체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 청춘기를 보내고 생의 후반전을 시작한 사람들이 보이는 가장 위험한 증상은 인지부조화. 꼰대 정신도 여기서 나온다. 자신을 이미 완전한 존재라 생각하다보니 스스로를 너무 믿어버린다. 그 믿음을 거역하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것 아닌 틀린 것이 된다. 자기의 판단과 선택은 늘 옳은 것이어야 하며, 누가 봐도 잘못된 것조차 자기 합리화를 통해 옳은 것으로 조직한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어른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하기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것을 습관화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삶이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에 의해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 삶은 독선과 아집에 빠질 수밖에 없다
- 어니 젤린스키는 느리게 사는 삶에서 이렇게 말함. 걱정의 40%는 일어나지 않고, 30%는 이미 벌어졌고, 22%는 아주 사소한 것이고, 4%는 바꿀 수 없고, 단지 남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걱정이다. 결국 우리가 하는 걱정의 96%는 쓸데 없다.
- 미성숙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소유에의 욕구가 아니라, 영속적으로 지속되는 소유욕이라면 그것은 병적인 것이다. (프로이트)
- 현대 소비자들은 나는 존재한다=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내가 소비하는 것 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지고 있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많이 사랑할 수 있다. 소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두 유형의 차이점을 구분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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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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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왜 사람들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 이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다. 모든 사람은 분열되어 있기 때문.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단일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정신세계에는 수많은 '나'가 존재. 내 안에 내가 여럿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나'가 주장하는 삶을 살게 되면 다른 '나'가 반란을 일으킴. 그 반란세력 때문에 원래 '나'라고 인식했던 주체가 원하는 대로 살기 힘들어지는 것. 이 반란 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 억압하고 제거해야 하나? 이 반란세력은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어떤 점이 걸림돌인지도 알기 힘들다. 원래의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반란 세력을 다루는 방법은 하나다. 이 존재를 인정하고 품어주어야 한다. 사랑해주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야 비로소 그 세력은 수면위로 올라온다. 실체가 명확해진다.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됐으니 이제 그 존재와 대면하고 함께 가야한다. 분열된 나를 찾고 통합하는 과정이다. 정신의학자 융이 말하는 개성화란 이 수많은 나를 통합시켜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만약 영유아기에 유난히 아픔과 고통이 많았다면 분열의 강도도 더할 것이고, 분열된 나도 더 많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를 통제하는 일은 더 힘들어진다.
- 우리는 무언가를 먹으며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잊어버리려 함. 음식을 집어넣는 행위를 통해 외로움과 슬픔 또한 배 속 깊은 곳에 꼭꼭 묻어두고자 한다. 외로움이나 공허감, 불안 등이 느껴지거나 분노나 원망이 솟구칠 때 끊임없이 음식을 삼키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감정들도 느끼지 않고 삼키기를 바란다. 배가 부른데도 먹는 것은 다 이 때문이다.
- 압박감으로 긴장하고 있떤 의식 속에 술이 들어오면 심신의 긴장과 압박이 한순간 풀어짐. 이어 과도하게 타인을 의식하고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던 자기검열 시스템이 작동을 멈춘다. 그 결과 자신의 미숙한 부분이 튀어나와 숨통이 트이는 이른바 일탈의 느낌을 갖게 됨. 분위기가 좋아서 술을 마신다는 사람들은 거절과 거부를 많이 경험하고 자란 경우가 많음. 거절과 거부를 많이 경험하다 보면 거절 당하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게 됨. 나아가 자신이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늘 불안에 시달림. 이럴 때 술이 들어가면 알콜의 약리적 작용에 의해 뇌 속으로 도파민과 항불안물질인 GABA가 방출된다. 그 결과 잠재의식 속의 불안이 감소하고 긴장감이 해소되면서 술자리가 흥겹게 느껴짐. 동시에 자신이 타인에게 거절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받아들여지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자신이 괜찮은 사람, 긍정적인 사람으로 여겨져 자아가 고양되는 느낌도 가짐. 하지만 술이 깨면 그런 긍정적 느낌과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짐. 동시에 불안과 긴장은 한층 고조됨. 이때 불안과 긴장을 잠재우고 긍정적 기부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술을 찾게 됨. 술을 찾는 일이 장기적으로 반복되면 알콜 중독에 빠짐
- 하인즈 코헛에 따르면 심리/구조적 결핍으로 인해 스스로를 달래는 기능이 결여될 때 사람들은 술과 마약을 통해 자신을 달랜다. '넌 좋은 사람이야', '실수해도 괜찮아'와 같은 말로 자신을 달래고 위로하기보다 술로 자신을 달래는 쪽을 선택. 자신을 가혹하게 밀어붙이고 엄격하게 단죄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짐. 자신을 가혹하고 엄격하게 다루는 태도는 어린 시절의 양육환경과 깊은 연관. 자신을 달래는 기능은 어린시절 부모가 아이에게 대하는 태도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 어린아이가 울며 떼를 쓸 때 부모가 달래는 방식은 아이의 무의식에 내재화되어 이후 평생의 삶을 지배함.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아이가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된다.
- 화가 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화는 1차감정 이후에 따라오는 감정.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낀 다음, 그 감정 때문에 화를 내게 됨. 그래서 화는 2차감정이라 불림. 이런 이유로 화 자체를 다스리기란 불가능함. 만약 화를 다스리려 한다면 자아를 억압하거나 분열시킬 수 밖에 없음. 억압은 말 그대로 의식이 알아차리기 전에 눌러버리는 행위.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화가 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함. 하지만 화의 독은 몸속에 스며들어 병이라는 신체반응을 일으킴. 시름시름 앓거나 피부에 이상이 생기는 것도, 원인모를 자가면역질환이 발생하는 것도 모두 화 때문일 수 있음
- 결국 화를 내는 것은 화 이전에 느껴지는 선행감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 자주 화가 나는 편이라면 무조건 화를 참고 억누느려는 표면적 노력보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볼 것
- 도널드 위니켓은 도벽이 일탈이라는 경험에서 비롯한다고 지적. 쇼핑중독 역시 양육환경에서 박탈을 경험한데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박탈이란 생애초기(1-2세)에 좋은 사랑과 돌봄이 있다가 급작스레 사라지는 것. 따뜻하고 안전한 보살핌을 받던 아이는 큰 사건이나 급격한 환경변화로 인해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됨. 가령 엄마가 우울증에 걸리거나 사고로 병원에 입원할 때, 또는 둘째가 태어나면서 엄마의 관심이 온통 둘째에게 쏠릴 때 박탈경험이 발생. 박탈경험은 이혼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정서적 철수 등이 일어날 때도 발생.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집중됐던 관심과 사랑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을 빼앗겼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임. 그래서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훔치는 시도를 하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무엇을 빼앗기고 또 훔치는 것일까? 바로 사랑이다. 빼앗긴 사랑을 되찾기 위해 물건(사랑)을 빼앗아오는 것. 이것이 충동구매와 쇼핑중독에 숨겨 있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 쇼핑에 중독된 여성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분노의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음. 쇼핑을 통해 부모나 남편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려는 것. 다시 말해 돈을 마구 써버려 부모의 재정상태를 나쁘게 만들거나 남편이 벌어온 돈을 몽땅 허비해 남편의 노고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싶어함. 남편을 사랑한다면 남편이 힘들게 벌어다 준 돈을 함부로 쓰기 어려울 것. 하지만 이런 여성들은 남편이 밉고 싫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마저 싫어함. 그래서 그 노고의 열매를 무의미한데 쏟아부어 없애버리고 싶어함. 의식적으로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 치부하겠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이런 결과를 만들어냄. 부모에 대한 분노가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 돈을 마구써서 자신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동시에 자신의 힘든 삶을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숨어 있음. 부모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충동은 그 고통의 책임을 부모에게 전가하는 데 까지 나아감. 빚을 갚아달라고 하기도 하고,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부모가 자신의 짐을 대신 지게 만듬. 이처럼 쇼핑중독은 사랑의 결핍과 분노의 표현에서 시작됨.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통제하기 힘든 강한 충동의 이면에는 받지 못한 것들 또는 해결하지 못한 감정들을 향한 무의식적 욕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타인의 감정을 책임진다는 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고 불필요함. 아무리 눈치를 잘 보고 능숙하게 대처한다 해도 세상은 내가 희생하고 애쓴 만큼 나를 인정해주거나 알아주지 않음. 또 나의 감정을 소중히 보듬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에 의존하거나 휘둘린다면 나만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게 됨. 타인의 감정을 책임지기 전에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받아주는 일이 필요함.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고 안아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있다.
- 질투심은 어린 시절 생존본능에 기인. 유아기에 애정이 많이 결핍된 사람, 그래서 자신은 부족한 존재라는 내면의 결함을 지닌 사람일수록 질투심이 강하게 나타남. 자신이 지나치게 질투심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어린 시절의 환경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커왔는지, 형제간에 얼마나 심한 경쟁이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 자신이 좋은 것을 누릴만한 가치있는 존재라는 내적 확신이 있다면 질투심은 커지지 않음. 비록 지금은 갖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나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또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게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나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질투심으로 괴로워지지 않음
- 라켓 감정이란 어릴 적 느꼈던 부정적 감정을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느끼고자 하는 성향. 가량 미얀마 소수민족 바자우족은 바다에 사는 데 익숙해서 육지로 나오면 멀미가 난다고 함. 이런 일은 현실에서도 흔히 나타남. 아버지를 미워하고 싫어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남편이 아버지와 닮아 있어서 깜짝 놀라는 여성이 적지 않음. 바로 익숙함 때문이다. 의식적으로는 싫고 거부하는데도 몸이 먼저 반응해 익숙한 환경을 선택하도록 만듬
- 사랑을 향한 갈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로널드 페어베언은 '분열 방어'라 부름. 이는 나쁜 남자가 저지른 행동과 자신이 겪은 고통을 분열시킨 다음, 둘다 금세 잊어버리고자 하는 것. 마치 뜨거운 솥뚜껑을 만지고 놀란 뒤, 또 다시 솥뚜껑을 만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뜨거운 것을 반복해서 만지면 화상입은 상처는 덧나기 마련. 나쁜 남자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 역시 사라지기는 커녕 더욱 깊어짐. 그리고 무의식 깊이 아로새겨짐. 마음의 상처가 깊어짐에 따라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불신도 커져감.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부모에 대한 반항심 때문. 굉장히 보수적이고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여성들은 반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꾹꾹 참으며 부모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살아가는 경우가 많음. 그러다 뭔가 거칠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남자에게 강한 끌림을 느껴 결혼하게 됨. 겉으로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모습으로 살아왔지만, 결혼상대를 택하는 문제에서 그동안 자신을 억압해온 반항심이 충동적으로 튀어나와 좋은 남자를 만나길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깨뜨려 버림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정서적 성숙의 가장 중요한 척도.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어도 외로움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 반대의 경우 혼자서는 자신을 지키거나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을 쓸모없고 가치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경우,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불안과 외로움을 해결하려 함. 이런 사람들은 사랑받고 있을 때에만 자신이 소중한 존재이며 안전하고 행복한 상태에 있다고 느낌. 그래서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친절과 관심을 보이면 쉽게 마음을 열어버림
- 쉽게 질린다는 것은 단순히 흥미를 잃었다는 뜻이 아님. 잘 해낼 수 없다는 불안이 끝까지 해낼 수 없다는 믿음으로 바뀌면서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는 것을 의미. 이렇게 중도에 그만두게 되면 최종 결과물을 볼 필요도 없고 자신이 부족한 사람임을 확인할 필요도 없어짐. 한마디로 자존신을 다치지 않게 된다는 것.
- 위니컷은 집착의 발생원인을 중간대상의 실패에 따른 주물애착으로 설명. 흔히 아이들은 곰 인형이나 베개, 이불 등 자신에게 의미있는 물건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함. 혼자 오래지내는 아이일수록 그런 경향을 강하게 보임. 이런 물건들은 아이에게 환상과 현실이 함께 존재하는 영역임. 자신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애착대상으로 볼 수 있다. 중간대상은 양육자인 엄마의 부재로 인해 생김. 아이는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분리 불안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엄마대신 자신과 있어줄 대상을 만들어냄. 곰인형은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 줌으로써 아이에게 심리적 안정을 줌. 아이는 곰인형을 살아있는 존재처럼 여기고 그것과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써 자신이 혼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함. 중간 대상을 외부환경에 의해 빼앗기면 그것은 주물대상으로 바뀜. 아이가 주체의 위치에서 위안을 얻는 물건을 중간대상이라 한다면 주물대상은 부적이나 중독물질 등 각종 집착과 중독의 대상을 가리킴. 주물대상에 집착되어 있을 때 아이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물의 노예가 됨. 사람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도 그 대상인 사람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작용의 결과다. 이런 마음은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신념에서 비롯함. 이 신념 때문에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자연스런 충동이 일어나는데, 충동이 과해지고 심해지면 집착이 된다
- 게으른 사람은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우월의식이 있는 경우가 많음. '내가 왜 이걸 해야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작고 사소한 일을 하찮게 여김. 먼저 몸을 낮추고 상대를 돕는 마음이 없어 자신이 할 일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고 게으름을 피운다. 또 실제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침. 또 남들이 하는 일을 열등하게 여기며 무조건 깎아내림.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음. 어쩌면 우월의식이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과시적 방법인지도 모른다
- 실수는 '지금 정도를 벗어나고 있다' 또는 '지금 솔직한 마음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 현재 살아가고 있는 방식과 태도를 보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 실수는 내면의 불협화음이나 억압된 감정이 외부로 드러난 것. 자신이 어떤 실수를 자주하고 있다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떤 말이나 일에서 실수를 거듭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내면에 어떤 억압된 감정과 불협화음이 있어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끼는지 곰곰이 살펴봐야 함. 실수는 우리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실수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점검하고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노력을 한다면 큰 사고나 고통을 미리 방지할 수 있을 것임
-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함. 그런데 생애 초기의 관계에서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일에 몰두하거나 능력을 발휘하는 방식을 통해 인정과 존중을 얻고자 함. 즉 존재의 가치보다 행동의 가치를 통해, 또는 관계 자체보다 관계의 목적과 결과를 통해 인정받고자 함. 이런 사람들은 사회생활에서도 일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관계를 중요시하는 이들을 비난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여김. 일을 할 때에도 과정보다는 성과를 중요시해 일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감정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심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 시절에 반드시 뭔가를 해야만 관심과 칭찬을 받는 경우가 많음. 이런 사람들이 한 집안의 가장이 되면 집에 돈을 가져다 주었으니 가장의 역할을 다한 것으로 생각. 아이와 아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안중에 없고 그저 돈만 벌어다 주면 할일을 끝냈가고 생각한다.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물질적 필요만이 아닌 가족간의 정서적 유대와 소통이기 때문
- 일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내면엔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란 신념이 숨어 있다. 자신을 괴롭히고 질책하는 비난의 목소리를 떨쳐 버리고자 일에 몰두하고 성과에 집착. 그러다보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비난의 목쇠를 듣지 않아도 되고, 눈에 보이는 업무성과로 인해 자신이 더이상 쓸모 없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 일만 열심히 하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정반대의 결과가 발생. 일에만 몰두하다보면 가족들과의 관계는 한층 소원해져 갈등과 외로움만 남는다 결국 가족들에게 외면당하는 진짜 쓸모없는 사람이 됨. 어린 시절에 주어진 각본에 따라 지나치게 일을 하는 경우도 있음. 자신의 인생각본에 즐기지 말고 일만 하고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는 경우. 나는 죽도록 일만 하는 개미라는 각본을 갖고 있는 사람은 편히 쉬거나 여유있게 즐기도록 자신을 놔두지 않음.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전해 받은 무언의 메시지가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탓. 신나게 뛰어놀 때마다 '그만 놀고 공부나 해'라는 꾸중을 듣는 아이는 '노는 것은 나쁜 것이고,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짓'이라는 메시지를 내면에 심어 놓는다. 한술 더 떠 놀다가 망한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넌 절대 저렇게 되면 안된다'는 메시지를 부모가 끊임없이 주입시킨다면 아이는 '놀면 망한다. 절대 놀면 안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 있다
- 불안은 유아기때부터 생기는 자연스럽고 인간적 감정 중 하나. 양육자인 부모가 아기의 불안을 잘 댈래주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아기가 평온상태를 유지하고 불안을 멀리할 수 있게 됨. 반면 신체적으로 안정감을 주지 못하거나 아기의 내적 불안을 부모가 달래주지 못할 때, 아기는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불안을 조절할 수 없게 됨. 심하면 공황장애가 생기기도 함. 성인이 되면 더 이상 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주고 토닥거리는 일이 중요한 이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줄 때 불안은 점점 줄어든다. 혼자 하기 힘들다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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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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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할 권리

심리 2017. 12. 25. 09:19

- 아마 행복해지려면 상태를 분석하지 않아야 할지도 모름. 그것을 규정해보려고 시도하는 족족 행복은 죽어버릴 테니까. 의식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잃어버린 뒤 회고적으로만 인정되는 것일지도 모름. 장 자크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금시대의 행복한 삶은 인류에게는 항상 딴 세상의 것이었다. 인류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때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인류가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잃어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갖고 있다면 알아볼 수 없고, 알아본다면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 행복이란 어떤 지점이 아니라 하나의 범위, 맨 밑바닥에는 만족감이 있고, 맨 위에는 고양감이 있는 범위다. 달리 말해 행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계속 노력하는 것이다.
- 추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성공, 명성, 지위, 영향력, 재미, 즐거움 같은 행복의 대체물뿐이다. 행복범위의 가장 낮은 층위의 만족감은 직접 얻어질 수도 있다. 프로베르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이룰 수 없지만 평정은 이룰 수 있다' 이느 오히려 패배와 굴복을 인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철학자가 아니라 문인인 플로베르는 좀 변덕스러웠으므로, 빠져나갈 창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어리석음, 이기심, 건강은 행복의 세가지 선결조건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이 부족하다면 다른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 사실 이런 인용문은 플로베르의 전성기 시절의 글에서 따온 것들이다. 본질적으로 그는 그를 전후한 많은 사람들처럼 일종의 마니교 사상에 찬성. 인간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는 전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행복의 추구 그 자체가 불행의 주원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행복의 추구는 원천적으로 실패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삶과 행복을 즐기는 목표에 몰두하는 더 세련된 이유를 찾아낼수록 진정한 만족감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행복의 부조리란 그것이 규정될 수 없고 성취되지도 않으리라는 데 있다. 기껏해야 이따금씩 무의식적으로 달성된다. 직설적으로 추구한다면 정반대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도중에 예기치 않게 등장하기도 한다.
- 일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근사하게 살 수 있다. (톨스토이) 덧붙이면, 인간은 아주 근사하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철저하게 하찮은 존재라는 기분은 느끼지 않으면서 늙을 수 있다.
- 아무 처방도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처방이다. 개인과 그들이 처한 상황의 복잡성은 보편적 처방이라는 것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듬. 사실 처방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 시대를 나타내는 또 한가지 표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지 짧고 간략하게 몇가지 요점으로 정리해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조급하고 탐욕스런 시대뿐이다.
- 우울증은 하강나선형이다. 우울해지면 의욕이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우울증의 심화됨. 이런 식으로 계속 가라앉는다. 반대로 행복은 상승나선형이다. 행복해지는 것이 의욕을 고조시키고, 의욕은 또다시 다른 것을 증가시키고,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행복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그런 기분자체라기보다는 그것과 함께 오는 가능성의 전율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세계가 다시 마법을 발휘하고 자아가 새롭게 태어난다. 모든 것이 더 풍부해지고 낯설어지고 더 흥미로워진다. 눈은 더 명료하게 보고, 마음은 더 예리하게 생각하며, 심장은 더 강하게 느낀다. 이 세가지가 열광과 환희와 열정 속에서 통합된다.
- 명상이란 불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눈을 무겁게 내리깐 엄숙한 상태가 아니라 항상 깨어있음. 주의깊게 지켜보기, 사려깊음 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강렬한 정신적 활동이다. 법구경에는 이런 개념만 다루는 장이 여러개 있음. '주의 깊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 지켜보지 않는자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명상의 목표는 고요함과 무관심이 아니라 인식, 주의깊은, 예리한 합목적적 명료성이다. 부처는 칼집에서 뽑힌 칼을 해방된 마음의 은유로 삼았다. 부처는 명상의 실천을 토대로 현대 신경과학의 이론과 비슷한 의식이론을 개발. 의식은 아무런 실체나 방향성도 없고, 끝없이 깜빡거리고 요동치는, 지각과 환상과 망상과 연상과 기억의 그림자 연극과도 같다. '마음은 흔들리고 불안하고 까다롭고 변덕스럽다' 마음은 원숭이처럼 변덕스럽다. 한쪽 나뭇가지를 붙잡았다가 놓고 다른 가지를 잡느다. 그러니 통한된 자아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어떤 하나의 불변적 자아라는 것은 없다. 변화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나도 아니고 내 자아도 아니다. 이 그침없는 변화에 대한 인식이 부처의 또다른 중심통찰이었다. 모든 것은 유전한다. 모든 것은 덧업다.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 만물에 대한 대통합이론을 구축하지 않겠따는 이런 태도는 매우 현명하다. 어떤 교리도 없다면 교리논쟁도 없고, 이단 논쟁이나 분열도 없을 것이기 때문. 그러므로 종교재판도, 고문도, 화형도 없을 것이다. 불교의 두 주요계파인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항상 조화롭게 공존했다. 이를 카톨릭과 개신교의 역사와 비교해보라. 불교에는 그 어떤 초자연적 개입도, 신도, 신의 계시도, 신의 은혜나 신의 화신도 없었다. 그러므로 신앙이 필요치 않다. 사실 부처는 신앙이란 개인적 책임감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고 명확히 거부. 어떤 사람도 그저 누군가가 무슨 말을 했다는 이윰나으로 그것을 믿으면 안된다. 각자 개인적 해결책을 궁리해야 한다. 합리적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가 완전히 비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없고 터무니없기까지 한데 비해, 신비적 동양의 종교인 불교가 완전히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고 실용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것은 부조리한 영역으로의 신앙의 도약이 필요한 교의가 아니라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또 이런 매력적인 특징을 가진 불교가 오히려 그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매력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다른 주요 종교는 신자들이 늘어나는데 불교는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듯이, 인간본성은 항상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이드의 또 한가지 특징이다. 하지만 변화할 권리와 그에 대한 숭배가 뒤섞이게 되자 현대는 완전히 잠재력의 마법, 절박함의 매혹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단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림. 그리하여 보편적 수단인 화폐가 보편적 목표가 됨. 하지만 그 영향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령 인간관계에서 성적 매력이 섹스 자체에서 분리되는 경향이 생김. 원래 섹스에 도움이 되라고 성적 매력이 있는 것인데 말이다. 갈수록 매력은 만져지기보다는 찬미받고 싶어한다.
- 가능성에 대한 숭배는 항상 뭔가 더 나은 것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일종의 탐욕이다. 하지만 가능성의 마법은 미래에 마법을 거는 대가로 현재에 대한 환멸을 요구한다. 오늘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어제도 이미 일어났으니, 진정으로 흥분할 만한 유일한 일은 다음번에 있을 큰 건수이다. 다음번 연인, 다음번 직업, 프로젝트, 휴가, 행선지, 식사가 기대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가 생기면 도피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해결책이다.인간관계나 업무에서나 어려움이 닥치면 자리를 옮기고자 하는 유혹이 생긴다. 그런 태도는 상황을 직면하여 문제를 넘어서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차단하며 고난을 활용할 중요한 능력, 무슨 일이 생기든 그것을 유리하게 돌려놓는 능력을 파괴한다.
- 여가의 세계에서 쇼핑과 여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순수한 가능성의 행동이기 때문. 어떤 일이든 이루어질 수 있고, 가망이 있다. 쇼핑은 여러가지 형태의 가능성을 한데 합친 것이다. 모험의 중독성, 탐색의 신비, 도박의 위험성, 창조적 노동의 우연한 발견, 종교적 믿음의 초월성, 전희의 감성적 민감성 등등. 다들 쇼핑을 좋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가능성이 주는 흥분은 구매가 완료된 뒤까지 연장될 수 있다.
- 소유함으로써, 혹은 소유에 대한 기대만으로도 우리의 요구는 즉시 증가하며, 이것은 더 큰 소유와 더 큰 기대를 하는 우리의 능력을 증가시킨다. 뭔가 바라던 것을 얻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알게된다. (쇼펜하우어)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적응, 습관화, 쾌락주의의 쳇바퀴라 부른다.
- 인간의 자기기만 능력은 대단히 크다. 하지만 그보자 더 대단한 능력이 있다. 자기 정당화의 재능은 인간의 진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꽃임이 분명. 그것은 인간두뇌가 달성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어떤 행동을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모든 인간은 아인슈타인 수준의 지성과 셰익스피어와 같은 상상력, 예수회 신도같은 섬세함을 지니게 된다. 내가 특히 강한 인상을 받았던 사례는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 했던 변명이다. 그의 아내는 심한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였는데도, 그는 인내심 깊에 그 상처가 자기가 아니라 아내의 극악한 행위 때문에 생긴 거이라 설명. 자기처럼 온화한 영혼의 소유자가 참지 못하고 폭력에 호소할 정도라면 아내가 얼마나 심하게 도발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지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고, 정직성, 관용, 여성에 대한 사랑의 시로 유명한 시인이었다.
- 소비를 계속 밀어주는 힘은 대부분 무리보다 앞서 나가기 위한 무익한 시도이거나, 너무 뒤처지지 않기 위한 방어적 필요성이다.
- 긍정적 감정은 날갯짓하며 잠깐 내려앉았다가 곧 날아가 버리는 나비이다. 보는 자의 눈도 그에 상응하게 균형을 잃는다. 사람들은 은혜는 금방 잊고 더러운 술수는 영원히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결혼의 어려움 중 하나도 이것이다. 한번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좋은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해야 한다. 죄를 짓기는 쉽지만 그 대가를 치르기는 무척 싫다. 조너선 하이트는 돈을 따는 쾌감은 같은 액수의 돈을 잃는 고통보다 강하지 않다면서, 이 원리를 금융과 도박에도 확대 적용한다. 나쁜 것은 항상 좋은 것보다 더 강하다. 셰익스피어는 이 사실을 오래전에 다룬 바 있다. 인간의 나쁜 매너는 황동에 새겨져 있지만, 그들의 덕성은 물에 기록된다.
- 왜 불안과 우울이 그토록 쉽게 만상화되는지는 이들은 마음을 점령하여, 부정적 생각을 지배적 감정으로 만들라고 설득하기 때문. 아론 베크는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견해 세가지, 세속적 삼위일체를 밝혔다.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세상은 황량해, 앞날엔 희망이 없어. 이 일반적 견해의 삼위일체를 떠받치는 것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의 사중주, 즉 개인화, 지나친 일반화, 확대해석, 임의적 추론이다. 개인화란 불우이나 사고가 날때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이며, 지나친 일반화는 자기 자신이 항상 끔찍한 사건의 희생자라고 믿는 것, 확대해석은 나쁜 효과를 과장하는 것, 임의적 추론이란 근거도 없이 부정적 결론을 끌어내는 것. 다음으로 베크는 인지치료법을 개발.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식별하게 하고, 글로 써보고, 위의 네 악당 가운데 어느 하나가 못살게 구는 것으로 분류하도록 훈련시키는 것. 이는 불교나 프로이트 학설에서 이해에 의한 변신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로 사용되던 것의 심리학적 버전이다.
- 인간 심리에서 행복 프로그램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을 늘리녀는 것이 아니라 계속 투쟁하게 만들려는 데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힘껏 노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특히 부처, 스피노자, 쇼펜하우어는 이에 동의했다. 쇼펜하우어는 특유의 명료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따. '우리는 무엇인가를 향해 힘껏 노력할 때 외에는 존재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신경학자 안토니오 아마지오는 이 노력이 우리의 신경생물학적 구조에 근거한다고 주장. 생명조절의 내재적 장비는 이도저도 아닌 중립적 상태를 목표로 하지 않느다. 평형을 이루려는 노력의 목표는 중립적 생명상태보다 더 나은거, 우리가 사유하는 존재, 풍요로운 존재로서 행복한 삶이라고 규정하는 어떤 것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하도록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삶을 향해 노력하도록 태어난 존재다. 노력은 시간을 들이고 장애를 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과, 실패할 가능성, 매우 큰 실패의 가능성까지도 의미한다. 애쓰지 않고도 좋은 기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을 더이상 좋은 기분이라 할 수 없다. 가상현실이 발명되기 ㅈ너인 70년대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모든 면에서 실제처럼 느껴지지만 오직 즐거운 경험만 맛보는 삶을 제공하는 기계가 있다고 가정할때, 그런 삶에는 진실성이 없으므로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 하지만 그것에 정말 결여된 것은 진실성이 아니라 노력일 것이다. 결정적인 요인은 그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귀중한 것은 모두 애써 얻어야 한다.
-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내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에서 우리는 모순점을 여러가지 발견한다. 대개 삶에 대한 최고의 안내자들 본인은 모든 사람들이 생활이라고 여기는 것을 까탈스럽게 거부하고 살았다는 사실도 그중 하나다. 가령 스피노자가 렌즈 가는 일을 생업으로 살았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그가 일상에 시달린 기간은 고작 몇년이다. 부처는 가정이 있었지만 아내와 아이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밤중에 몰래 달아나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의 정직성이라는 것도 알 만하다. 소크라테스는 달아나지는 않았지만 가족을 무시한 것으로 악명이 높음. 야스퍼스는 공자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내 및 자식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샤르트르와 그를 둘러싼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보다 더 한심하다. 샤르트르의 실존주이자 연인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젊고 매력적이고 감수성 풍부한 여학생들을 유혹한 다음 그들을 샤르트르에게 넘겼고, 샤르트르는 놀만큼 놀고 나서 그들을 버렸다. 그들 중에는 이런 일을 겪고 평생 삶이 피폐해진 사람이 여럿 있었다. 심지어 축의 시대에 등장한 사상가들은 여성 혐오증의 기색도 보여으며,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특히 심했음. 그러니 이런 남자들이 처자식을 거느리고 가족을 부양하며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 3천년전 길가메시 서사시의 플롯은 주인공인 메소포타미아 왕 길가메시는 자신의 왕국과 생활에 환멸을 느껴 탐구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에서 그는 사나운 사자와 전갈 남자와 싸우며, 자신을 묶어 두려 하는 아름다운 여신을 만나 놀랄만큼 현대적 유혹을 받는다. 밤낮으로 흥겹고 즐겁게 해줄께.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씻겨주고 목욕도 시켜줄게. 하지만 주인공은 탐구여행을 계속하며, 깊은 바다속으로 들어가고, 불멸의 식물을 딴다. 그러나 결말은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버전에서든 바꾸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나쁜 쪽으로 맺어짐. 길가메시가 누워서 쉬고 있을 때 뱀이 그 식물을 훔쳐먹어 영원한 젊음을 얻는다는 결말이니 말이다. 신화에서 뱀은 항상 악당이다. 캠벨은 이런 서술구조가 본질적으로 내면의 여정을 상징한다고 주장. 영웅은 자기시대의 관습적 사유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사면적 사유의 어둠속으로 모험을 떠나고, 창조적 힘을 발견하여 자신을 변화시키고 이를 타인과 공유하기를 원한다. 수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을 겪은 뒤 얻는 상품은 인식이다. 영웅은 깨닫게 되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야기 구조에는 출발, 시련, 상, 귀환이라는 네 단계가 있다. 추상적 탐구자의 목표도 그와 마찬가지로 네 단계를 거쳐 도달됨. 그것은 거리두기, 어려움, 이해, 변형이라는 단계다. 이와 비슷한 네 단계가 원시 문화의 성년의례에도 공통적으로 들어 있음. 그것은 격리, 제례적 상처입음, 통과의례, 귀환이라는 형태이다.
- 다마지오가 발견한 내용을 토대로, 조지프 르두는 두뇌에는 결정에 이르는 두갈래 길이 있다는 설을 내놓음. 낮은 길과 높은 길. 낮은 길은 어떤 의식적 추론이나 인시깅 개입되지 않고, 두뇌이 감정중추인 편도체에서 감각지각 자료를 처리한다. 이 낮은 길은 즉각적이고 압도적으로 강력하며 통제하기가 무척 힘들다. 이것은 그레이/리벳 이론을 지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높은 길도 있다. 그것은 분석과 계획과 의식적 결정의 중추인 전전두엽 피질을 거치는 길. 이 중추는 편도체에 직결되어 있으므로, 다마지오가 깨달은 것처럼 추론에는 항상 감정적 내용이 투입됨. 하지만 르두의 말에 따르면 전전두엽 피질은 편도체의 원초적 욕구와 충동을 억누를 수 있고 또 자주 그렇게 한다고 한다. 감정적 두뇌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은 전전두엽 피질의 힘을 키운다. 다마지오도 같은 주장을 전개. 우리는 우리 두뇌에 그 기구가 여전히 남아 있고, 작동하는 맥락은 매우 달라졌는데도 반응 방식은 옛날과 동일하다는 사실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또 그런 반응을 무시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시하라고 설득할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행동에 대한 신경학적 견해는 부처/스피노자/프로이트가 제안한 자아모델과, 개인적 책임감 및 선택을 주장한 샤르트르의 입장과 완전히 맥을 같이 함
- 최근 두뇌과학 분야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발견은 우리의 행동이 유전자의 손안에 있는 것만큼이나 유전자도 우리행동에 달려 있다는 사실. 유전자는 감각을 통해 중재되는 경험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나사들이다. 그것들의 조촉매는 사건 하나하나에 따라 스위치가 켜지고 꺼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리들리의 결론은 분명함. 자유의지는 유전자에 의해 사전설정되고 그것에 의해 운영되는 두뇌와 전적으로 양립가능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유전학이 이기심과 잔인함, 야만적 힘을 옹호하는 사악한 과학이라는 생각을 물리친다
- 현대인들은 뚜렷한 이유없이 무작위적으로 가해지는 불운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런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남 탓하기라는 새로운 방법이 등장. 예전에는 부운을 신비스런 신의 처사로 설명. 고난에는 목적이 있고, 때가 되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 완전히 밝혀지리라는 식이다. 지금은 불운에 의미가 있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 잘못된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들 여긴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것은 절대로 희생자 본인의 탓은 아니다. 더러운 일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다. 제약산업이 장애를 비난하고 돈을 버는 것처럼, 법률이라는 직업도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고 돈을 받을 의사가 얼마든지 있다.
- 끊임없이 관심을 옮겨다니는 것은 두뇌에 장기적 영향을 미침. 신경과학자들은 서른 다섯에서 서른 아홉살 사이의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어 방해해도 인지과제에 집중하는 데는 거의 영향이 없지만, 열여덟에서 스물한살 사이의 사람들에게는 전기자극으로 방해하면 업무수행능력이 눈에 띄게 약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가 산만한 세대의 경우 끊임없이 방해요소를 처리해야 할 필요 때문에 전전두엽 피질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 있다. 두뇌의 매니저 역할, 에고 노릇을 한다고 알려진 전전두엽 피질이 두뇌가 성숙하는 최종단계에 속하며 사춘기가 지난 뒤에야 완전히 형성되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일이다. 이는 사춘기 아이들이 걸핏하면 이드에게 조종되며 명령적이고 충동적이며 배은망덕하고 화를 잘 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방해와 하이퍼링크가 많으면 결정적인 집행통제부는 주의가 산만해질 뿐만 아니라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 만성적 주의 산만함은 전전두엽 피질을 약화시키며, 그와 반대로 명상을 오래 하게 되면 그것이 강화된다.
- 자부심이 가진 문제점은 거기에는 어떤 가치도 원리도 없고,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과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자기존중에는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을 성취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지만, 현대에 통용되는 자부심은 자신에게는 아무 요구도 하지 않고 오직 타인들에게만 요구할 뿐이다. 자기 존중은 내면으로부터 오고 자부심은 외면으로부터 온다. 스피노자는 이 차이를 이해했다. '자기 존중은 우리 바깥의 어떤 것으로 확장되지 않으며, 자신이 완전해진다는 것의 가치를 아는자,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지 않는 냉철한 자만의 것이다.' 자부심은 세계에 비춰진 어떤 이미지이든 도로 반사되기를 요구하는 자아도취적인 것이며, 그 어떤 지속적인 이득도 없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 성공하고 싶다면 실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 일반적으로 우리의 단점에 집중하는 편이 더 현명함. 하지만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독하게 어렵다. 마음은 항상 그 자신을 소멸시키려는 전망으로부터 달아나듯이 그 자신의 무의미함으로부터도 줄기차게 물러난다. 날것 그대로, 동요하고 불안정하고 두려워하고 괴상한 것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데는 의지에 의한,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 신념에 반하는 도약이 필요하다. 내면의 거인은 알고보니 벌벌 떠는 난장이였따. 반쯤은 미쳣고 신경증에 걸렸고 탐욕스럽고 분개하고 비틀린 모습의 난쟁이인 것. 한 난쟁이와 다른 난쟁이를 구분해 주는 것은 위장하고 자기기만하는 힘과 성격이다.
- 요즘 사람들은 엄숙하고 수수께끼 같은 아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행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로, 무엇 때문에?'라고 물어보면 그 수수께끼는 금방 와해되어 짜증스러운 몰이해로 변한다. 뭔가를 특별히 보고 싶다는 열망이 없고, 그저 움직이고 싶다는, 가고 싶다는 욕구만 있기 때문이다.
- 사유는 선과 악을 구별해주는 것일 수 있다. 또 삶과 죽음을 구별해주는 것일수도 있다.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생존자들의 공통적 특징 중 하나가 지적 호기심이라고 함. 강제수용소의 극심한 고통조차도 적극적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연구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결정적 존재의 가치를 부여해줌. 지위와 소유에만 의존하여 완전히 부르주아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그런 자질을 갖지 못했으며, 가장 먼저 죽는 쪽에 속했다. 레비의 경험은 스토아 사상가들이나 실존주의자들이 조언했듯이, 이해가 곤경을 견디기 쉽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한 한가 사례다. 자기연민, 분노, 남 탓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이로운 쪽으로 돌려 놓으려고 노력할 수 있다. 배울 의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고통은 훌륭한 스승이다.
- 독서는 그것 자체로 강렬한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두뇌를 발달시키고 유지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중요. 또 경험을 고조시키기도 한다면 더욱 만족스러움. 플로베르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처럼 재미를 위해 읽지 마라. 야심가들처럼 지시를 받기 위해 읽지 마라. 그런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읽으라.'
- 주의를 집중하고 어려운 일을 해내야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요령이다. 칙센트미하이는 십대들을 관찰하여, 흐름의 활동이 가장 적은 아이들, 즉 텔레비전을 많이 보고 쇼핑몰에서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이 모든 만족감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 비해 공부를 하거나 운동경기에 참가하는 아이들의 점수는 높게 나왔다. 그런데 그들은 쇼핑모에서 시간을 때우는 아이들과 소파에 기대어 감자칩을 먹는 아이들이 재미를 더 본다고 믿고 있으며, 쿨함의 독재가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보니 축복받는 자는 자기들임을 깨닫지 못함. 이것은 일반규칙의 한 사례이다. 젊은이들이 가진 것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 문제는 노동이 그저 보수를 위한 활동만이 아니라 단순화된 페르소나를 유지하는 일, 항상적인 수행, 끝없는 연기를 포함한다는 것. 이것이 직장 밖에서 동료를 만나면 그토록 누추해보이고 왜소하고 능글맞게 보이는 이유다. 그들은 잠시 세트장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인공적인 생동감의 불이 꺼졌고, 잿불만 남은 상태다. 더욱이 우리는 연기하는 줄도 모르는 채 연기하고 있고, 심지어는 이것이 자연스런 행동이라 믿고 있다는 것. 부정적 감정은 모두 숭고화된다. 높은 연봉을 받으며 외견상 만족하고 있을 것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갑작기, 명백한 이유도 없이 우울증으로 쓰러지는 이유가 이것때문인지도 모름. 문제는 집단에 굴복하는 데서 요구되는 정체성의 상실이다. 가면이 얼굴에 녹아들어간 것이다. 조슈아 페리스의 소설에 나오는 광고회사 직원들은 모두 서로에게 열광한다. 모두 똑똑하고 창의적이고 재치있고 생기있다. 그러면서 모두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 현대 도시에서는 남녀간의 관계가 외부와의 유일한 연결고리고, 구조이고, 의미이고, 매혹일 수도 있다는 것. 전통사회에서는 의미와 마법을 안겨주는 종교가 있었고, 한해의 틀을 짜는 제례가 있었고, 뒷받침 역할을 해주는 강한 관련들과 확대가족이 되어주는 공동체가 있었다. 지금은 불쌍하게 신음하는 커플들의 관계가 그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하며, 허약해진 등이 삶의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 긴장감에 무너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 최근 신경과학 연구에서는 매혹과 사랑의 차이가 확인되었다.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각각 다른 두 단계를 낭만적 사랑과 애착이라는 용어로 부르는데, 자신이 연구한 175개 문화 모두에서 낭만적 사랑을 발견. 오래된 흑마법인 사랑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녀는 신경학자들로 팀을 구성하여 사랑의 상이한 단계에 처한 사람들의 두뇌를 스캔해 보았다. 이런 스캔 영상에서 낭만적 사랑과 애착은 완전히 다른 두뇌회로와 신경전달자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낭만적 사랑은 도파민 수위는 높아지고 세로토닌 수위는 낮아지는 현상에 관련되어 있으며, 애착은 여성의 경우 옥시토신과, 남성의 경우 바소프레신과 결부되는데, 이 두 신경전달자는 동물의 짝짓기에 관련된 호르몬임. 그리고 낭만적 연인들에게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두뇌회로와 도파민 수위는 심한 마약중독자들의 것과 비슷. 피셔는 낭만적 사랑이 정말로 중독의 한 형태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스탕달의 통찰을 확인해줌. 스탕달은 그런 사랑이 가장 비이기적인 활동처럼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대체로 이기적이라고 본다. 사랑하는 자는 상대인물이 아니라 도취상태를 사랑하는 것. 사랑받는 자는 정말 전율을 느끼지만 그것은 오직 중독자에게 코카인이 만들어내는 것과 동일한 전율일 뿐이다. 매혹이 왜 절대로 지속적이지 못한지는 이로써 설명된다. 중독되면 내성이 생긴다. 같은 정도의 효과를 맛보려면 약의 분량을 점점 더 늘려야 한다. 하지만 매혹은 그런 분량을 어느정도 이상으로는 늘릴 수 없다. 그러므로 도취감은 결국 사라진다. 또 다른 신경학자팀은 사랑의 도취감이 지속되는 기간을 조사하여, 통념이 옳다고 결론내렸다. 매혹은 대개 12개월에서 18개월 정도 지속된다.
- 누구라도 함께 살기는 쉽지 않다. 또 사랑의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단계란 없다. 행복이 그렇듯이 사랑은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며, 일종의 끝나지 않는 연합 창조력 프로젝트 비슷한 것이다. 또 행복처럼 성취를 위한 노력 그 자체가 성취가 된다. 창조적 노력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사랑은 탈진과 쇄신의 순환을 따른다. 쇄신의 기쁨을 맛보려면 탈진은 꼭 필요하다. 그 프로젝트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어떤 기술이든 가치 있는 것을 배우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 성숙한 사랑에는 거리두기가 애착을 부추긴다는 모순이 있다. 릴케가 말했듯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중대한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는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성찰하고 생각하고 자신을 추슬러 자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뭔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조언이다. 연인으로 성공하려면 혼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 과정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독립적이다.
- 늙는다는 것은 원치 않느 분리와 관련되어 있다. 직장에서 은퇴해야 하고, 자녀들이 독립하고, 성욕이 감퇴한다. 본성, 욕구, 욕망, 자아의 별난 특징들이 더 잘 이해되고, 그렇기 때문에 통제하기도 더 쉬워진다. 어떤 것이 만족스럽고 어떤 것이 그 반대인지 더 잘알게 된다. 노년의 상황이 젊은 시절에 비해 더 우울할지는 몰라도 부정적 생각을 억눌기는 더 쉬워지는 것 같다. 젊은 성인들의 두뇌를 스캔해보면 편도체가 긍정적 자극과 부정적 자극 모두에 반응하지만 연로한 성인들의 경우에는 긍정적 자극에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이는 전전두엽 피질이 편도체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됨. 에고가 마침내 이드를 길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 스릴 넘치는 섹스 모험을 떠나거나 직업적 성공을 이루기는 점점 더 불가능해짐. 그러므로 세상이 부르는 사이렌의 유혹소리에 저항하기도 쉬워짐. 다른 사람들과 같아져야 하는 필요도 줄며,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내가 그들을 좋아해야 할 필요도 줄어든다. 적응해야 한다는 강요도 적어진다. 노년이 누리는 가장 큰 영광 가운데 하나는 고집부리기인데, 의식으로 통제되는 범위내에 머무르고, 너무 완고해져서 괴팍스러움으로 변하지 않는 한 그래도 된다.
- 장수를 누리는 데 쾌활함은 상관이 없고 만성적으로 쾌활한 사람들은 평균보다 수명이 짧다. 유쾌한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은 나쁜 조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노년에 관한 또 하나의 희소식이다. 반면, 정념, 집중력, 새 기술의 습득은 수명을 연장해주며 그 품질도 개선시켜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늙었다고 해서 새롭고 힘든 일에서 움츠러 드는 성향은 문자 그대로 치명적일 수 있다. 심지어 두뇌가 꾸준히 쇠퇴하기는커녕 죽을 때까지도 계속하여 새 뉴런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증거도 있다. 이 현상은 신경발생이라는 기적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그토록 재앙처럼 느껴지던 절박함의 소멸인데, 이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가능성의 주문은 감각을 차단하고 정신을 발광시키는 악의 주문이니 말이다. 주문이 마침내 벗겨지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배우기가 더 쉬워진다. 여정이 목적지보다 더 중요하며, 활동이 성과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 말이다. 이것은 여러번 되풀이하여 얻어진 결론이다. 배우려는 노력이 배움 그 자체보다 더 귀중하며, 별 목적없는 생각은 가장 즐거운 사유형태이며, 어려운 기술에 몰이바는 것, 흐름의 경험은 그 어떤 인식보다도 더 큰 보상이 된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만족스럽다. 모든 것에는 그 자체의 보상이 있게 마련이다.
- 인간 역사에 있어 가장 대단하고 부조리한 탐구여행은 인간이 달에 내린 사건이었다. 카프카와 베케트가 힘을 합쳤다 하더라도 그런 숭고한 우화를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그 시대의 특징적 현상은 무척 많다. 이미지가 내용에 우선하는 현상(달 착륙에서는 사진외에 건진 것이 없지만, 그 사진은 월석보다 더 귀중했다), 절대적 가치보다 차이가 더 중요시 되는 현상(미국의 진짜 목적은 소련보다 먼저 달에 착륙하는 것), 수단이 목적에 앞서는 현상(인간이 달에 간 것은 그저 달에 가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출현하게 된 원천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전 세계 언론이 참여한 최초의 사건이었고, 현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신격화였다. 당시 거의 6억 인구가 그 광경을 TV로 지켜봄. 테크놀로지라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또 거의 실패할 뻔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말이다. 달착륙선은 착륙지점을 지나쳤고, 용량이 요즘 휴대폰에도 못 미치는 항법용 컴퓨터는 긴장감 때문에 탈이 났다. 즉 오작동을 일으켜 1202라는 에러 메시지를 띄운 것. 그때까지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메시지였다. 철학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메시지를 신의 유머감각이 대단하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해석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주인들은 그런 성향도, 시간도 없었다. 암스트롱은 수동식 조작으로 전환하여, 연료가 다 떨어져 가는 동안 엄청나게 울퉁불퉁한 바위투성이 표면이 휙휫 스쳐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다. 연료가 동나기 꼭 10초던에 그는 착륙할 만한 평평한 지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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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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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물건

심리 2017. 12. 23. 09:12

- 우리 삶의 재미없는 이유는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했기 때문. 그래서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이야기다. 이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기 때문. 자꾸 반복적으로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이유는 뭔가 심리적으로 막혀 있기 때문. 여자들이 모여 앉으면 시집살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 선택의 자유는 인간 존재의 근거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됨. 그래서 등산가들은 죽어라 높은 산 정상에 오른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기 때문. 심리학에서 선택의 자유와 아주 비슷하게 쓰이는 개념이 내적동기. 재미나 즐거움과 같은 내면의 욕구를 의미. 요즘 이 내적 동기 전성시대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선택해서 하라고 곳곳에서 부추긴다. 유사해 보이는 내적동기와 선택의 자유는 사실 서로 다른 개념. 이 두개념이 상충하는 경우도 많음. 돈이나 성적같은 외적동기에 의해 움직이지만, 이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부여된 경우. 이렇게 내적동기와 선택의 자유가 서로 충돌할 때 어느 요인이 강할까? 심리하자들은 선택의 자유쪽 손을 들어준다. 비록 외적동기에 의한 행동이지만 스스로 선택했을 경우, 그 행동의 몰입도가 순수한 내적동기에 의한 행동의 몰입도보다 더 높다는 것. 구태여 순서를 따지다면 선택의 자유가 먼저고 그 다음이 내적 동기라는 이야기. 재미있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면 재미있어짐. 아무리 재미없는 행동도 내가 선택하면 재미있어짐. 요즘 유행하는 행동경제학의 넛지같은 개념은 바로 이 선택의 자유에 관한 경영학적 변형이다. 방향만 은근슬쩍 제시하고 최종결정은 스스로 내리도록 해야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심리현상은 좌절. 좌절한 이 땅의 사내들은 밤마아 모여앉아 다양한 폭탄주를 제조한다. 내 돈 내고 마시는 술이라도 한번 내 맘대로 섞어보자는 거다.
- 한국남자라면 누구나 약한 정도의 신경증과 학습된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음. 어려서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 나이가 들어서는 더하다. 집안문제든, 사회문제든 도무지 내가 어떤 결정에 주체적으로 관여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 어떻게 밀려살다보니 여기까지 온거다.
-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산다. 재미있으려고 산다. 한국사회에는 행복과 재미를 이야기하면 한급 아래로 보는 어쭙잖은 엄숙주의가 존재. 자유, 민주, 평등과 같은 가치를 이야기하면 폼나 보인다. 그러나 자유, 민주, 평등은 수단적 가치다. 행복과 재미는 궁극적 가치다. 물론 수단적 가치가 확보되어야 궁극적 가치를 얻어낼 수 있다. 그러나 자유, 평등, 민주라는 조건이 이뤄진다고 자동적으로 사는게 행복하고 재미있어지는 것은 아님. 재미와 행복이라는 궁극적 가치에 대한 진지하고 꾸준한 성찰이 있어야 수단적 가치도 이뤄낼 수 있다. 행복과 재미에 관한 어떤 사회문화적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이 사회에는 감각적이고 말초적 재미만 남아 있다. 딸 같은 걸그룹 허벅지나 아들같은 아이돌 초콜릿 복근이나 이야기하는 방식으론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 삶이 재미없는 이들은 대부분 세상이 뒤집어지는 어마어마한 재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으나, 그런 재미는 없다. 행복을 거창하게 생각해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게 분명해야 설레는 삶을 살 수 있따. 방법은 간단하다. 지난 한주간 내 일상에서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내가 가슴설레며 기다렸던 일을 기억해 내면 된다. 바로 그 일들이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들이다. 그 설레는 일들을 끊임없이 계획하며 살면된다.
- '너를 바꾸라'는 문화사적 압력은 우연이 아니다. 130년 된 현대 심리학의 역사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너 자신'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기 때문. 심리학은 근대성으 총아로 나타난 학문. 근대성이란 주체적 자아의 형성을 의미. 계급 인종, 지위를 떠난 독립된 주체로서의 책임과 행위의 가능성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시기가 서구의 근대다. 이 주체적 자아를 설명하기 위한 학문이 심리학이다. 근대 심리학은 주체적 자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모든 것을 이상하다고 진단.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근대 심리학이 나타나기 전까지 정상과 이상의 구분은 그리 분명한 게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정상과 이상의 구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경계가 여전히 자의적이고, 문화적 합의의 결과에 불과. 그런데도 모든 책임을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한다. 드러난 심리적 문제가 그리 명확하지 않을 때는 무의식까지 들춰내며 '네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라며 현대인을 협박한다. 온갖 종류의 심리학적 상담 심리치료는 바로 이 인간의 결함모형에 기초함. 콤플렉스, 우울, 불안, 성격장애 등과 같은 심리학적 개념의 철학적 전제는 부정적 인간관이라는 의미. 그러니까 사방에 자꾸 자기 자신에 대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최근 결함모형에 기초한 현대 심리학에 근본적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 긍정심리학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약점과 부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해왔떤 현대 심리학의 접근방식에 대한 반성. 인간의 약점을 고치기보다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자꾸 키워나가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장점이 있다. 이 장점을 끌어올리면 약점은 저절로 개선된다. 과학적으로 엄밀한 심리학이 되기에는 아직 많은 이론적 약점이 있지만, 긍정심리학은 평생 '나 자신이 문제'라는 자괴심에 시달려온 이에겐 큰 위로가 된다.
- 안팎의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초조해하며 수면장애, 불안, 두통, 피로 등이 동반되는 증상을 신경쇠약이라고 함. 신경쇠약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비어드는 이 증상의 원인을 문화변동으로 설명. 비어드가 지적하는 신경쇠약의 가장 결정적 이유는 삶의 속도. 19세기 전신, 철도, 증기기관 등의 발전으로 인해 삶의 속도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남. 그 결과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18세기에 비해 100배나 많아짐. 빨라진 삶의 속도와 격렬해진 경쟁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부적응 현상이 바로 신경쇠약이라는 것. 비어드가 경고한 19세기 삶의 속도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속도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 삶의 속도가 급변하여 생기는 문화병의 치료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걷기다. 수백만년에 이르는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우리 몸과 마음은 걷는 속도에 적응해 발달해 왔다. 감당하기 어렵게 빠른 삶의 속도는 불과 지난 몇백년 동안의 일일 뿐이다. 인류 역사를 하루로 보면 겨우 몇 초전에 시작된 변화라는 이야기. 요즘 그래서 다들 올레길 등을 찾아다니며 걷느라 난리다.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삶의 속도를 회복하고 싶은 까닭이다.
-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삶에 감사할 줄 안다. 그래서 가끔은 외로워야 한다. 가슴저린 그리움이 있어야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기쁨, 내 가족에 대한 사랑,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생기는 까닭이다. 나이 들수록 내 삶이 허전한 이유는 그리움이 없기 때문. 도무지 그리운 게 없으니 삶에 어떤 기쁨이 있고, 무슨 고마움이 있을까. 삶에 아무런 기쁨이 없을 때는 처절하게 고독해 보는 것도 훌륭한 대처법이다. 혼자 떠나 제주도 갈대밭을,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나 골목을 헤매보는 거다.
-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건가? 때론 비굴하게, 때론 무모하게 부대끼며 정말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에 도대체 무엇이 빠져 있기에 이토록 허전한 것인가? 독일 심리학자 비요른 쥐프케는 중년의 남자들에게 불현듯 찾아와  도무지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이 무기력감의 실체를 '알렉시티미'라고 정의. 한국어로는 감정인지불능으로 번역됨.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는 의미. 자신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정신없이 앞만보고 달려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온통 변해버린 것을 깨닫는다. 더 이상 내가 설자리가 없다는 느낌에 한번 거꾸러지면 다시 일어나기 어려움. 비요른 쥐프케는 남자들이 한번 빠지면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심리적 미로를 4단계로 설명. 우선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기 시작. 이 감정부정 혹은 감정회피의 결과는 두번째 단계로 넘어가. 남성적 외향화. 고도하게 사내스러움을 지향. 술만 먹으면 욕하면서 터프함을 과장하는 이들을 자주 본다. 맛이 가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증상임. 이 상태가 극에 달하면 영웅주의와 지배욕구라는 독단적 이데올로기의 세번째 단계로 이어짐. 웬만큼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를 얻으면 다들 정치하려고 달려드는 것도 이 때문. 그러나 그 영웅주의의 실체는 무기력감이다. 자신의 무기력을 숨기려는 감정방어의 결과라는 이야기. 여기까지 온 남자들에게 남겨진 네번째 단계는 남성우울증.  이 우울증은 아내에 대한 정서적 의존으로 이어짐. 그러나 아내는결코 자신의 안식처가 아님을 알게 됨. 자신을 귀찮아하고 힘들어하는 아내의 속마음이 느껴지면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게 됨. 이런 식의 아내에 대한 애증의 모순적 감정 또한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
- 에로티시즘 혹은 섹슈얼리티가 사랑의 의미에서 빠져나가는 중년 부부에게 의사소통 장애는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결혼 25년차인 필자에게 사랑은 아침식사다. 집에서 아침을 못 얻어먹으면 더는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아내에게 사랑은 배려다.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구체적 관심과 배려가 사랑의 기준이다. 아침과 배려의 의미론적 구조는 전혀 다름. 그래서 매번 힘들다.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공유되는 것일까?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통해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곧바로 언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님. 인지적, 논리적 의미의 공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동일한 정서적 경험이다. 엄마의 품 안에서 아기는 엄마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함. 아기가 놀라면 엄마도 같이 놀라고, 아기가 기뻐하면 엄마도 함께 기뻐함.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는 이 정서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의미공유가 가능해지는 것
-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걸까? 기억할게 전혀 없기 때문. 기억속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많으면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전혀 기억할 게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회상효과다(reminiscent effect)
-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수록 긴장해야 함. 의미부여가 안되니 쉽게 좌절하고, 자주 우울해지고, 사소한 일에 서운해짐. 이런 식이라면 성격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은 순식간임. 삶의 속도와 기억의 관계에 관한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이 미친시간을 천천히 흐러게 하는 방법은 간단함. 기억할 일을 만들면 된다. 평소에 빤하게 반복되는 일들과는 다른 것들을 시도하라는 이야기. 인생과 우주 전반에 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계획은 아무 도움이 안된다.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 경험들을 시도해야 한다.
- 심리학의 창시자 빌헬름 분트는 인간이 경험하는 현재의 길이는 약 5초라고 한다. 우리는 불과 5초만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이야기. 과거나 미래를 사는게 아니라 오직 현재를 살기 때문. 그러나 이 5초의 객관적 단위는 주관적 경험에 의해 얼마든지 팽창가능. 제발 현재를 구체적으로 느끼며 살자는 이야기다.
- 리더는 훌륭한 사회자가 되는 것. 상대방을 폼나게 만들어 줘야 함.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남에게 순서를 안준다. 폼 날수록 자기만 이야기한다. 가끔 머쓱해서 썰렁한 농담을 던져보지만, 아무도 안 웃는다. 이는 설득력 없는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공토오딘 문제이기도 함. 어설픈 진보도 마찬가지. 이 경우 상대방의 반응은 대부분 이렇게 된다. '그래, 당신말이 다 맞아. 그래서?' 이해는 했지만 안 받아들이겠다는 거다. 인간은 절대 이런 식으로 설득당하지 않는다. 대화가 아니라 강요 혹은 계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스스로 옳다고 생각할수록,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할수록 친구가 없는거다.
- 도대체 우는 것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사내놈과 무슨 상관이 있는걸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능력이 애초부터 억압되어 있으니 어찌 남의 정서를 읽는 능력이 발달할 수 있을까? 남자들에게는 사회적 가치,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절차가 기초부터 꼬여 있다는 이야기. 사회적 참조가 불가능한 남자들에게 성숙한 의사소통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다. 철없는 남자들에게 남겨진 방법은 둘중 하나다. 개처럼 으르렁거리거나 애처럼 징징대거나...
-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차이에 관대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뜻한다.  8-85세까지 3280명의 일기 같은 기록과 유명작가 열명의 작품분석 결과, 일반인이 사용한 3800만 단어와 작가들의 900만 단어를 나이에 따라 분류해보니, 나이가 들수록 긍정적 정서를 더 많이 표현. 분노, 좌절, 슬픔과 같은 단어들은 젊은이들의 언어였따. 나이가 들수록 '나', '나의', '나에게'와 같은 단어들은 줄어들고 '우리'와 같은 공동체 관련 단어들이 증가. 나이가 들수록 시간과 관련한 단어들도 줄어듬. 시간에 덜 쫓긴다는 이야기다. 동사의 시제에서도 차이가 남. 동사의 과거형은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중년은 현재형을, 노년으로 갈수록 미래형을 더 많이 사용. 페네비이켜 교수는 이런 변화를 지혜라고 표현한다. 지혜롭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면의 시간이 아주 많아지는 것을 의미
- 우리의 가족이 그토록 갈등인 이유는 가족의 사회적 표상이 너무 긍정적이기 때문.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강요하는 가족의 표상은 죄다 푸른 초원 위에 웃는 얼굴로 서서 파란 하늘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웃는 모습. 그러나 함께 화장실을 쓰고 같은 이불을 덮는 가족이 어찌 매일 행복하고 즐겁기만 할 수 있을까? 남의 가족은 다 행복한데 내 가족만 문제투성이로 느껴짐. 프로이트는 이를 가족 로망스라고 정의. 지금 내 가족은 진짜가 아니고, 어딘가에 진짜 내 가족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한다는 것이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 유명인사들은 항상 '지금까지 희생해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아내는 반드시 희생해야 한다'는 사회적 표상이다. 그러니 내게 별로 희생적이지 않은 현실의 아내가 그토록 불만스러운 것. 그래도 이렇게 정적 상관이든, 부적 상관이든 연관관계가 가능한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님. 그 상관관계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 진짜 문제는 개념적 연관관계가 아예 불가능한 경우. 예를 들면 남자와 행복이다. 사회적 표상이론으로 보자면 남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음. 그런 개념적 연관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 여자의 행복은 일상에서 자주 경험한다. 실제로 행복하든 불행하든 여자와 행복은 실재하는 사회적 표상이다. 그런데 남자와 행복은 도무지 연결되지 않느다. 남자는 기껏해야 야망 또는 성공으로 연결될 뿐이다. 성공은 이미 물건너 갔고, 야망은 접은지 오래됐는데, 행복할 자격조차 없는 이 땅의 남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야할까...
- 본격적 감정 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이전, 사람들은 '가난뱅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다'와 같은 성공 내러티브에 열광했다. 빌게이츠의 스토리텔링은 이런 성공 내러티브의 전형.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고, 성공을 자선사업으로 전환해 사회적 의미를 얻어가는 방식.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빌게이츠가 잡스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함.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과 빌게이츠의 07년 하버드대 졸업식 연설을 비교해보라. 잡스의 연설은 고통, 열등감, 공격성으로 일관된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반면 게이츠의 연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빈곤퇴치, 환경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도덕저긍로 빌게이츠의 연설이 훨씬 우아하고 폼난다. 그러나 감정자본주의에서는 다르다. 빌게이츠의 스토리텔링은 오래된 록펠러 방식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음. 내면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내면에는 우리와 똑같은 문제로 좌절하고, 고민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 성공으로 인해 보통사람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다는 내러티브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한국기업에 빠져 있는 것은 바로 이 감정 자본주의적 특징. 독거노인을 찾아가고, 연탄을 나르고,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주는 구태의연한 사회공헌 방식으로 감정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란 그리 쉽지 않다. 기업의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기업경영에 정서적 스토리텔링이 존재하지 않으니, 느낌이 있는 물건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는 것처럼 거짓말은 없는 것 같아. 자신이 행복한가, 불행한가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부터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거야. 시간, 공간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 시간, 공간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지. 물건에 헌신하다 보면 내가 사라지지. 행복과 불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는 거야. 빠지고 몰입하는 거라고. 자아라는 주체로 서는 게 아니라 대상에 함몰되는거지. 돈이나 밥이 아닌 다른 것에 함몰되는 것은 참 근사한 거야.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플로우 이론)
- 여자의 욕구와 남자의 욕구 차이를 시간과 공간으로 대비해 설명하면 남녀 욕구차이는 소유하는 물건의 차이에 그대로 반영됨. 여자의 물건은 시간의 소유와 관계된 반면, 남자의 물건은 공간의 소유와 연관. 남녀 차이를 상자와 책상으로 비교하면 여자의 물건은 대부분 상자다. 상자는 여자의 자궁과 같은 것. 생명을 잉태해 시간을 소유하는 것처럼, 여자는 상자안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보석을 담는다.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남자는 시간을 소유하는 대신 공간을 정복하려 한다. 그래서 옛날 남자들은 달리는 말에 그토록 집착. 오늘날도 마찬가지. 금전적 여유가 생기면 남자들은 자동차 전시장을 기웃댄다. 보다 빠르고 폼나는 차를 타고 달리는 만큼 그 공간이 자기것이 된다는 환상 때문. 더운 여름날 위아래 꽉 끼는 가죽옷을 입고, 뒤에는 살이 삐져나온는 풍만한 여인을 태우고 할리를 몰고 싶은 욕망도 마찬가지. 공간이 생기면 남자들은 성을 쌓는다. 독일의 라인강변을 지나다 보면 지나치게 많은 성들이 있다. 산봉우리마다 정말 지겹게 성을 쌓았다. 내 공간을 확인하고 싶은 철없는 남자들의 욕심이 남긴 흔적들이다. 한국 남자도 마찬가지다. 돈이 생기면 집을 넓힌다. 집이 더이상 넓어질 수 없으면, 별장을 산다. 또는 정원을 만든다. 정치인이 되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대표하는 지역의 넓이만큼 권력이 생기는 까닭이다.
- 유기수에게는 출소라는 정해진 목적이 있따. 따라서 교도소의 삶이란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무기수는 출소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교도소에서 버틸 수 있는 한 버텨야 한다. 즉, 그곳이 무기수에게는 삶의 전부. 어찌 충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 현재'를 사는 거다.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는 통찰이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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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스트레스를 관리하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 논쟁중에 실제로 의도하지 않는 말을 하는 자신을 발견
* 누군가와 한 약속을 잊어버려서 그들의 실망과 자시의 죄책감을 처리
* 괴롭힘이나 학대를 당할때 주장하느 대신 굽힘
* 경쟁으로 열 받아 제대로 생각할 수 없거나 불안해 숨이 막힘
*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잘못이라고 인지하는 일도 함
* 책임져야 할 때 누군가를 비난하는 자신을 발견
*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과거에 집착
* 자기 자신이나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고 느낌
* 마감시간이 되어서 지체하거나 포기
* 가장 사소한 일조차 실패함
- 뇌에서 경보가 갖는 문제점은, 특정 종류의 스트레스가 경보를 잘못 울리게 만든다는 점 누군가의 편도체는 각성하거나 경계를 하도록 유용한 독촉신호를 제공하거나 과잉반응하도록 만들 수 있음. 좀더 문제가 되는 것은 위기가 없을 때 혹은 위기가 지나가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도 경보가 생존모드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삶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는 경보가 알려주는 심각성과 실제 위험수준에 맞지 않을 때 발생
- 뇌의 경보기가 생존의 위협과 일상적 사건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할 때, 기본 선택지는 그 경보가 중요한 위기를 알려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 어떻게 건강한 뇌가 진정으로 생존에 필요하지도 않을 때도 다른 인간에게 학대를 가하는 미친 짓을 할 수 있는가? 스트레스가 오랜 시간 쌓일 때 혹은 외상적 사고, 폭력, 학대와 같은 극단적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에, 뇌의 경보기는 지나치게 과민해지고 과잉반응을 하는 경향을 보임.
- 뇌의 경보가 일으킬 수 있는 다른 유형의 스트레스 반응은 거의 반대 형태를 취함. 때때로 신체가 아드레날린으로 넘쳐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초인적 힘을 얻는 대신 동작을 멈춤. 이런 동결 스트레스 반응은 신체의 신경계가 잠재적 위협에 대처하려고 준비하는 방식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을 때 발생. 발각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는 동물처럼, 경보기는 자동반응을 한다. 우리가 단순히 뇌의 원시영역이 안전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나서야, 그 반응은 비로소 의미가 있다. 동결반응은 싸움 혹은 도망반응 보다 더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님. 우리는 동요, 불안, 분노를 느끼게 하는 아드레날린 쇄도를 경험하는 대신 탈진을 느끼고 너무 지쳐 대항하거나 도피할 수 없다. 단기적으로 동결은 아주 적응적일 수가 있는데, 예를 들면 당신이 멈추어서 잠재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훑어볼 필요가 있을 때 그렇다. 그러나 당신이 동결을 풀 수 없을 때는 마비를 느낄 수 있다. 당신은 일시 정지할 뿐만 아니라 완전정지 될 수도 있따. 이때에는 동결을 마치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데, 당신이 정말로 원할 때 조차도 너무 탈진되어 도망가거나 방어할 수 없다.
- 우리는 스트레스를 교사처럼 활용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대신에 스트레스로부터 숨는다. 경보를 멈추거나 둔감화하는, 다음의 수천년된 방법은 스트레스 만큼이나 친숙하다
* 경보를 부정 : 어떤 것도 잘못되지 않았고, 나는 이완을 해서 과잉반응을 멈추어야 한다
*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둔감화 기법들 : 술, 약물, 음식, 쇼핑, 섹스, 과로 등
* 계속 경계를 하여 우리가 안전하기만을 원하는 경보기에서 오는 정상적인 감정에 대해, 우리는 자신 혹은 주변 사람을 비난 : '모두 내 잘못이다.', '모두 그들의 잘못이다'
- 스트레스의 반대는 완전한 이완 혹은 수면이 아니라 통제를 하고 있다는 적극적인 느낌. 개인적 통제는 고요함을 느끼는 것과 유쾌한 활력감을 느끼는 것 같은 형식을 취할 수 있음. 그것은 당신이 즐기는 것에 깊은 흥미를 느낄 때 경험하는 것이다. 통제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일 뿐만 아니라, 매우 특별한 능력이다. 개인적 통제는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현재 발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당신이 그것을 최대로 활용하게 한다. 개인적 통제는 신체적 강점, 재정적 부유함 혹은 사회적 인기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님.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통제하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발생하는 일 혹은 상황이 흘러가는 방식을 좌우할 수 없으나, 그래도 삶이 자신에게 던지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주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음.
- 우리 대다수에게 새로운 사실은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 통제를 못한다는 느낌은 항상 분명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의 결과지, 더 깊은 심각한 문제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충동적이 되고, 절망하기도 함. 그것이 진짜 문제인데, 무기력하게 느끼는 것은 뇌의 경보기에 과잉반응을 하도록 만들수 있고, 이것은 통제밖의 행위를 초래함
- 스트레스를 관리할 때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경보기를 켜는 일을 함. 우리는 사소한 것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것까지의 범위에서 문제를 찾고, 방지하고, 교정하려고 노력하는 일로 시간을 보냄. 우리는 그것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방법이라고 배워 왔으므로, 생존모드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추구는 스트레스를 유발. 우리가 자신에게 이완하라고 말할 때, 그 명령이 경보기에 전하는 것은 실제로 스트레스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효과가 없다. 우리 자신에게 '이겨내, 너무 당황하지마, 걱정하지마'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자신이 현재의 스트레스 요인을 처리할 수가 없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므로 경보기는 더 큰소리를 낸다. 경보는 우리의 신체통제가 학습뇌로 돌아가서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혹은 어떤 위험 또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거나 제거될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만 스트레스 화학물질 발산을 멈춤. 우리가 불평을 하는 사람이 되지말자고 말하면 말할수록, 경보기는 더욱 우리가 실제로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지각함. 우리가 스스로 철좀 들자고 말하면 경보기는 스트레스 반응을 계속하며 조금씩 강도를 증가시킴
- 당신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출 때, 실용적 문제해결이나 자기 생각을 단순히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사고중추를 활성화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뇌의 핵심적이고 숨겨진 능력에 다가가고 있다. 그것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때, 전전두 피질은 당신의 경보기에 자신이 어떤 일을 통제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사고중추는 경보기에 걱정을 일으키거나 당황하게 만든 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내부에 있는 어린아이를 달랜다. 의도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역량은 스트레스 관리에 있어서 우리중 어떤 사람도 배운바가 없는 상실된 단계다
- 기억을 요청하고 있는 것은 꼭 뇌의 사고중추만은 아니다. 경보기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요청하다, 비교적 미성숙한 정서적 천성에 따라 이런 요구는 보통 강요나 명령에 더 가까움. 사고중추가 '나는 현재의 순간에 좋은 선택을 하는 것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에서 학습한 것을 수집하는 것에 흥미가 있다'고 말을 하지만, 경보기는 '나는 현재와 같은 경험을 할 때 나를 생존하도록 도울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나쁜 경험을 지금 당장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외칠 것이다.
- 편도체가 심한 외상적 스트레스 혹은 지속적 스트레스에 자동반응을 하면서 통제를 벗어날 때, 해마도 곧 과부하가 걸려 붕괴됨. 실제로 우리의 경보기는 기억을 잘못된 곳에 보관하게 만들 수 있따. 신체적 학대를 받거나 자동차가 정면충돌해서 거의 죽을 뻔한 것과 같이, 드물게 사용되는 파일에 저장되어야만 하는 끔찍한 외상적 경험이 매일 어떤 순간에도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관될 수 있따. 그것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문제점 중 대부분을 차지. 혼돈이나 혼란을 겪을 때의 기억은 기억중추가 아주 가끔씩 접근하는 위치에 저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정보의 위치에 자동적으로 보관됨. 예를 들어 가족의 복잡한 언쟁처럼 완전히 해결이 불가능했던 어떤 문제에 잘 대처했던 경험에 관한 기억이 경보반응에 의해 잘못 보관될 수 있음. 경보기는 경험을 재난 혹은 완전한 실패로 인식. 우리가 장차 유사한 문제에 직면할 때, 기억중추는 어려운 상황을 잘 처리한 것을 기억하는 대신 폭발적 자기의심을 동반하는 불안, 좌절 혹은 우울의 감정을 찾는다. 잘못 보관된 기억을 상기하는 것은 경보를 더 증폭시켜 스트레스가 절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감정을 초래. 우리의 뇌는 그 기억을 잘못 보관하면서 계속 스트레스를 상승시켜 완전히 통제가 상실된 것처럼 느끼도록 만든다
- 생존모드에 있는 뇌의 원시체계를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첫째, 마땅히 하기를 없앤다. 당신이 우리 대부분과 같다면, 하루 상당부분을 좌절을 주는 것, 압박을 주는 것 혹은 걱정거리와 관련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생각의 홍수에 빠져서 보낼 것이다. 우리가 단순히 긍정적이거나 안심을 시키는 생각을 하라고 충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당신이 현재 상황에 관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종합적인 해결책이나 행동계획을 찾도록 노력하라고 제안하지도 않느다. 우리는 또한 당신에게 바로 심호흡이나 이완하락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이중 어떤 노력도 사고중추를 활성화하여 뇌의 경보기를 안심시키거나 낮출 수 없다. 긍정적 생각, 깊고 편안한 호흡, 이완하기는 경보가 욕구를 충족한 결과지, 경보기에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뇌의경보기는 원하는 관심을 얻었을 때 조용한 상태로 돌아가고 당신이 해야할 것을 마음껏 하도록 놔둔다. 당신은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떤 기분인지 알 것이다. 신체는 이완되고, 스트레스를 덜 느끼고,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 당신은 아마도 얼마간의 심호흡이나, 어떤 긍정적 생각이나, 문제를 해결한것 때문에 기분이 더 좋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당신은 학습뇌를 활용하여 뇌의 경보기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선택하였으므로 기분좋아지는 것. 그런 다음에야 당신은 심호흡을 하게 되고, 하는 일을 즐길 수 있게 됨. 그러면서 당신은 실제로 긍정적으로 느끼게 되므로 긍정적 생각을 할 수 있고, 그후 당신은 다시 분명히 생각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잘못된 순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음. 우리는 먼저 이완을 하고, 문제를 고치고, 이후에 스트레스를 덜 느낄 것으로 생각함.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먼저 경보기의 욕구에 주의를 기울인 다음에야 이완을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느라고 시간을 보냄. 이제 당신에게 그런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그만두라고 하고 싶다. 당신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직장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자녀를 대통령 혹은 슈퍼스타로 만들 필요도 없다.
- 우리는 어떤 순간에 자신이 다음과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정도로 적절한 수준의 경보기 활동을 유지하고 있으며, 학습 뇌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행동을 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생각할 수 있다
* 이완되었을 때나 압박을 받을 때도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다
* 도전을 즐기고 받아들였으므로, 보다 잘 끝마칠 수 있다
* 자극을 찾을 필요 없이 조용한 순간을 음미할 수 있다
* 우리가 벗어나고 싶은 경험에 관해 성찰할 수 있다
* 친구나 가족과 조용한 대화를 즐길 수 있다
* 어떤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 고통없이 당면한 욕구에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다
* 모든 단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어떤 기술을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연습할 수 있다
* 수업이나 책에서 핵심 메시지를 뽑아낼 수 있다
*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 흥미를 갖고, 경청하고, 그들의 관점을 존중할 수 있다
* 걱정을 모든 사람의 상황을 더 좋게 하는 계획으로 바꿀 수 있다.
* 사실과 가정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 정서는 두가지 책임을 갖고 있다
(1) 뇌의 경보중추를 포함하는데, 우리가 경계하도록 하고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 중앙부위에 있는 경보기들은 생존을 위해 아래에 있는 파충류와 팀을 이룬다.
(2) 우리에게 생존 다음으로 우선권을 가진 것(쾌락)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들 수 있다. 뇌의 보상중추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나 활동, 사람에 주의를 기울이게 함으로써 삶을 즐겁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중독이나 모험과 같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경우에도 보상을 쫓도록 압박을 가함으로써 삶을 재앙으로 만들 수 있다. 보상중추는 경보중추 옆에 있고 종종 서로 정보통 정보를 소통하기 때문에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다. 그것이 협동을 잘할 때, 삶은 보다 풍요롭고 풍성하다. 그러나 그것이 반대 목적을 갖고 일을 할 때, 정서뇌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 진정한 초점 맞추기는 중요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지 상승된 경보반응을 생각으로 대체하는 것은 아님. 당신이 스스로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마음에 떠오르는 첫번째 대답이 문제인가? 당신은 가장 원하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을 거라고 걱정하는가? 혹은 당신은 자신을 화나게 만든 상황 혹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가? 이것은 정상적인 생각이지만, 당신의 정점수행이나 당신이 원하는 삶을 성취하는 일을 돕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성취할 수 없게 막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뇌의 경보기에서 온 메시지를 바탕으로 한 자동반응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알아내거나 문제를 회피하거나 일이 기적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것 외에,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뇌의 경보기에게 당신이 경보기의 염려를 인식하고 그 상황을 다룰 수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초점의 변경이 필요. 그 변경은 당신이 문제의 메시지에 이끌려 가는 것에서 학습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초점을 바꾸는 것. 최상의 뇌에서 경보기가 울릴 때 생각해야 하는 첫번째 핵심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 정서(사랑, 신뢰, 확신 등)
* 사고(자신의 기본적 가치 등)
* 목표(자신의 가치에 따라 살기 위해 성취하려는 목표 등)
* 선택(논쟁하거나 방어적이기보다는 공감하건 존중하기)
- 우리는 자신의 경보가 울릴 때 친구, 가족, 교사, 코치, 치료자로부터 학습뇌를 항상 빌릴 수 있음. 자신을 두렵게 하는 새로운 것을 학습하기 원하든지 바쁜 삶에서 스트레스의 고통을 없애기 원하든지 간에, 우리는 홀로 초점을 맞추도록 뇌의 능력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 모든 분야(종교, 스포츠, 사업)에서 훌륭한 스승이나 전문가는 바쁘게 돌아갈 때 경쟁에서 탈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한 걸음 물러서는 기술은 인간의 문명만큼이나 오래됨. 명상의 역사가들은 명상 자체의 첫 발견이 불 앞에서 며칠 밤을 보내는 호주 원주민 사회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불꽃이 깜빡거리는 것을 보는 것 자체로 마음을 비울 수 있고, 우리의 몸을 초월적 장소로 이동시킬 수 있다. 한걸음 물러설 필요성은 세계의 종교적 전통에서 가르치는 위대한 진리. 부처와 예수오 한걸음 물러서기를 했다. 부처는 정좌로써 마음을 비워서 그렇게 했고, 예수는 가르침과 치유를 베푼 후에 조용한 장소로 이동함으로써 한걸음 물러났다. 고대 유대교의 고행자는 군중의 혼란을 벗어나서 사막으로 갔다. 이슬람교에서 살라, 즉 예배의 행동강령은 하루 다섯번 기도를 하는 것인데, 기도자는 가장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의 한 예지만, 그들이 깔개를 내려놓아 의도적으로 공간을 만드는 것은 한걸음 물러서기의 완전한 예
- 매번 당신이 당면한 압력이나 삶의 쾌락에서 한걸음 물러서는 순간은 마음을 가다듬고 활기를 되찾을 뿐 아니라 생각의 초점을 다시 맞출 기회. 당신이 생각의 초점을 다시 맞출 때, 어떤 환경을 직면할지라도 개인적 통제를 얻음. 그것은 생각에 초점을 두는 행위가 사고중추를 활성화하고, 사고중추가 경보기와 동등한 파트너로소 힘을 갖도록 해줌. 마침매 이것은 뇌의 경보기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 생각하는 방식은 많다. 당신은 상상하거나 자신의 기억중추에서 영상을 끄집어낼 수 있다. 당신은 단어 혹은 구를 구성할 수 있다. 당신은 그야말로 아직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시각화할 수 있고, 비디오를 되돌려 감는 것처럼 기억에서 파일을 찾을 수 있다. 당신은 경험하고 싶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은 어떤 가치가 삶을 인도할 것인가를 점검할 수 있다. 당신은 목표에 관해 꿈을 꿀수도 있따. 이들 각각은 일종의 생각이지만 한 생각에 초점 두기는 온 마음을 한가지의 강력한 생각, 즉 무어이라도 바로 이 순간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초점을 두는 것
- 자극을 받는다고 잘못되는 것은 없다. 보통 놓치는 것은 자극 그 자체는 스트레스 반응을 처리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극되었다고 느낄 때, 무엇을 해야할지 알고 싶어함. 즉각적인 안도감을 바라는 것도 가능하다, 자극에 자동반응하는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의해서는 찾을 수 없다. 대신, 안도감과 평온은 우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을 때 나타남. 무엇이 자극인가?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경보기를 작동시킬 수 있는가? 우리가 통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 분명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경보반응을 시작하게 하는 자극을 다루기 위해서 해야할 필요가 있다. 자극의 실체는 경보기가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다. 자극을 인식하는 기술은 다음과 같다. 자극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한 걸음 물러섬으로써 당신은 사고중추를 개입시켜 경보기의 작동을 낮추기 시작. 즉, 당신이 자극을 일찍 알아차리기 시작함으로써 당신의 경보기는 맹목적이 되지 않는다
- 정서는 사고중추가 몸의 반응을 즉각 요약한 것. 우리 대부분은 정서가 몸과 마음 사이의 어떤 알 수 없는 곳에서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음. 정서는 사고중추가 몸의 느낌을 생각으로 바꾸어 놓은 것. 예를 들어 당신이 무서워할 때는 그것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 사고중추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그런 느낌을 정보로 활용. 자극을 찾기 위해 주변환경을 살펴본 후, 사고중추가 다음으로 할 일은 경보기가 신체적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킨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심적 표제(헤드라인)을 작성하는 일이다. 경보기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종종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경보기는 항상 당신을 보호하고 있다. 다음 목록은 경보기가 지각하는 정서 및 그것이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당신에게 원하는 행위다
* 공포 : 당신은 위험하다. 망을 보라
* 불안 : 어떤 것이 잘못될 수 있다. 잠재적 문제점을 검사하라
* 슬픔 :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나 물건이 사라진다. 새로운 행복을 찾아라
* 죄책감 : 당신은 뭔가 잘못했다. 그것을 찾아 고쳐라
* 난처함 : 당신은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다. 좀더 열심히 일하거나 잘해라
* 수치심 : 당신은 기본적 신념이나 가치를 위반하고 있따.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
* 분노 : 무엇 또는 누군가가 당신이나 당신이 좋아하는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고 있다. 당신 자신 또는 그들을 보호하라
* 혐오 : 어떤 것이 그야말로, 혹은 비유적으로, 뭔가 역겨운 냄새가 난다. 그것을 제거하라
* 경악 : 너무 끔찍해서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벗어나라
* 극심한 공포 : 뭔가 너무 끔찍해서 생존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다. 도망가라
* 권태 :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일을 찾아라
* 성가심 : 사소한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또 다른 새로운 방법을 찾아라
* 불안정 : 아무도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당신에게 중요한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최적의 뇌가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하라
- 이런 메시지들이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보통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려 애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스스로 설득하여 그만두게 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단지 그런 정서를 느끼는 것을 멈추고 싶어 함. 이것의 공통적 반응은 말 그대로 자동반응하는 것. 그것들은 짧은 순환고리를 따르고, 정서뇌의 메시지에 따라 행동함. 만약 정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어떻게 그러한 메시지가 스트레스 요인과 문제들을 다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정서가 삶을 관장하도록 놔두는 대신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게 될 것임. 정서역량을 강화한다는 것은 당신이 느끼고 싶은 것의 선택을 의미. 어떤 사람이 화가 치밀어 올라오려고 하거나 너무 우울해져서 꼼짝하고 싶지도 않을 때, 정서로부터 오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것을 과연 기억해 낼 수가 있겠는가? 정서역량을 강화한다는 것은 바로 몸이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사고중추를 사용한다는 의미
- 정서는 우리 마음의 계기판에서 색깔이 있는 불빛과 아이콘. 정서는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몸에서 오는 메시지이며,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요청이자 권고임. 정서가 취하는 정확한 형태는 경보기가 그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결정됨. 반응적 정서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으며, 고치거나 보다 안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줌.
- 최상의 정서는 경보기의 반응적 메시징와 함께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에 초점을 둘 때 느끼는 정서. 그것은 즐거움, 평화, 만족감 같은 정서인데, 이것은 사고중추와 경보기가 공동작업한 결과물. 그러나 사고중추는 그 위협(실제적이건 가상적이건)을 실제로 다루어 보지도 않고 경보기에 일방적으로 최상의 정서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수는 없다. 경보기가 활성화되면 긍정적 느낌을 떠올려 즐기기보다 고통의 신호를 더욱 증가시킬 것. 그러나 뇌가 최상으로 작동될 때는, 우리는 먼저 자신의 사고중추가 경보기의 정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상기함. 그 다음엔 우리가 경험하기 원하는 것을 반영하는 정서(더 높은 가치나 목표에 뿌리를 둔 감정)을 추가. 이런 조합은 경보를 낮추고 자동반응적 감정을 더 넓은 관점에서 보게 함
- 자극처럼 우리가 경보기의 경고신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서도 경보기에 의해서 우리를 심각한 위기나 재앙속으로 말려들어가게 할 수 있음. 반면, 사고중추가 경보기에 의해 만들어진 정서를 존중하면서 반응을 할 때 경보기는 스트레스 화학물질의 양을 낮춘다. 이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어 붕괴에 이르게 하기보다는 평화스럽다고 느끼게 함. 외부상황에 여전히 스트레스를 많이 주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고 할지라도 경보기는 우리가 사고중추를 사용하여 느끼고 싶은 기억을 꺼낼 때 조용해지고 협조를 한다. 그런 다음 뇌의 메시지는 정서가 전달하는 것을 느낄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뇌의 사고중추를 활용하여 그것을 이해할 기회도 된다. 우리의 사고중추는 정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정서가 만들어내는 극도로 분명한 메시지를 활용해서 우리삶을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명한 사고는 우리가 다시 평온해지고 자신감을 가질수 있도록 도와줌
- 우울이나 불안같은 심각한 정서적 장애는 사람의 마음을 부정적 생각의 감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 수많은 사람이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선택할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치료가 되었다.
- 단어는 몸이 감각으로 느끼는 것과 정서뇌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마음의 방식. 단어는 뇌의 사고중추에서 나오지 않고, 정서뇌와 학습뇌의 많은 부분이 함께 노력하여 결합한 결과. 그리고 뇌의 기억중추가 주장선수 역할을 함. 기억중추는 서가에서 책을 골라내는 사서처럼 피질의 전체 영역과 소통함. 이런 정보는 아직 단어의 형태는 아님. 차라리 완전한 철자로 쓰이지 않은 기억에 가까움. 자신의 뇌에서 언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당신은 자신이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직관적 감각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전혀 찾을 수 없음. 뇌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을 찾을 때 기억중추가 뇌의 여기저기에 저장된 파일의 조각들을 인출하면서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한다는 사실. 우리가 아직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때, 이런 검색은 경보기와 보상중추의 지시에 의해 진행됨. 그것은 기억중추에게 있을 법한 문제나 쾌락에 관한 정보를 얻으라고 말해줌. 우리가 사고를 정리하기 전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할 때 기억중추가 가져오는 파일은 경보기와 보상중추에 의해 만들어진 정서를 기초로 선택됨. 만약 당신의 경보기가 당신에게 짜증이 난다거나 따분하다거나 슬프다거나 초조하다거나 화가 난다는 신호를 보내면 당신은 과거에 당신을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일이나 사람 또는 상황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보상중추가 긍정적 정보를 받아 당신이 행복이나 만족을 느낀다면, 당신은 자신이 더 즐거운 정서와 연합한 다른 경험이나 사고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자신의 뇌에게 모든 것은 괜찮다고 말하려고 애쓸 때 지금 곤란에 처해있다는 분명한 신호에 정면으로 저항하면, 경보기는 우리의 안전을 지키려고 더 강하게 작동함. 경보기는 우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를 보호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보호하려고도 함. 그 결과 부정적 경험을 겪으면서도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나쁘게 느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긍정적 생각이 핵심가치의 내용과 일치할 때만 효과가 있다. 당신의 핵심가치를 발휘하는 과정을 밟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스트레스 반응을 갖고 있다는 신호이자 자신의 경보기로부터 나온 자극이기도 한 경보기 정서와 사고를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긍정적 사고는 그저 단순한 소망이나 막연한 희망과는 달라야 함. 긍정적 사고는 종종 우리를 보다 행복하고 평온하며 상황을 통제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지 못함. 왜냐하면 그것이 위장된 부정적 경보기 사고이기 때문.
- 최상의 목표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추구하는 희망이며 꿈이다.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는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방출되지 않음. 그것은 당신이 등산을 하거나 자동차 경주를 할 때 그 활동 자체가 당신의 생존뇌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할 때, 최상의 목표는 높은 수준의 개인적 통제를 이룰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은 당신의 몸에 아드레날린이 방출될 때조차도 당신이 마음의 중심을 잡도록 해준다.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당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비록 불편하다할지라도 경험할 가치가 있음을 아는 것
- 어떤 것을 가져야만 한다는, 혹은 누군가로부터 또는 무엇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감정은 경보기 목표가 항상 만들어내는 회전문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결정해주는 첫번째 단서. 그것은 경보기가 우리의 목표를 지시하고 있고, 우리가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많은 스트레스를 느끼며, 경보기 목표를 달성해도 가끔은 불만족 스럽게 느끼는 이윧. 그것들은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삶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갖지 못한 것을 가지려 하거나 혹은 두려워하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경보기 목표와 최상의 목표에 관해 생각해 보는 한가지 방법은 '~로부터의 자유'와 '~할 자유'의 차이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목표가 무엇으로부터 안전하거나 벗어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항상 방어적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의미.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자유로이 진정한 가치를 추구할 때 진정으로 자유롭다. 이런 때 바로 우리가 단순히 고통의 회피를 넘어서 즐거움을 찾는 양식으로 옮겨갈 수 있다.
- 경보기에게 어떤 지연은 너무 길게 느껴져서 도저히 기다릴 수 없다. 경보기는 과거, 현재와 미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므로 영원한 현재에서 작동한다. 만약 보상중추가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확인하면, 경보기에게 몸을 깨우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것이 경보기를 평온하게 만드는 보상이라면, 경보기는 우리가 하려는 것이 최상의 목표와 충돌한다 할지라도 필사적이고 즉각적으로 그것을 원함. 대안은 최상의 목표를 선택하고 그것에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 최상의 목표에 초점을 맞춘 뇌는 보상중추와 경보기에서 나오는 충동적 메시지를 낮추어줌. 사고중추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때, 그것은 당신의 머리 위에서 불빛을 비추는 전구와 같다. 당신이 자동반응적으로 즉흥적으로 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게 된다
- 마음을 깨끗이 비우라. 그리고 당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 중에서 당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라. 최상의 목표는 행복, 자존감, 자신감 및 희망의 느낌이 들게 해준다. 최상의 목표는 당신이 갖고 있는 것 중에 이미 당신의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당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 중에서 당신에게 더 필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라. 잠시 여유를 갖고 더욱 천천히 연습을 하라. 그리고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한가지를 뽑아라
* 당신이 깊은 사랑, 우정, 혹은 존중을 느끼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
* 당신이 그것을 하는 동안 흥미롭고 빠져드는 느낌이 들고, 마치고 난 후에는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에 하고 싶어 하는것
* 당신이 예술, 자연 혹은 스포츠에서 어떤 것을 보거나 들을 때 깊은 즐거움과 완성감을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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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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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질 용기

심리 2017. 12. 12. 19:25

- 아들러는 자신이 창시한 독자적 이론을 개인심리학이라 불렀음. 개인심리학은 분할되지 않는 통일된 전체로서의 개인을 고찰하는 심리학. 그래서 아들러는 인간을 정신과 신체, 감정과 이성,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는 다양한 형태의 이원론에 반대.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상반된 판단을 하는 두가지 부분이 갈등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아님. 예를 들어,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마음과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마음이 인간의 내부에서 서로 다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평소에 얌전한 사람이 느닷없이 아이를 심하게 혼내거나 남을 때러서 다치게 했을 때, 순간적으로 화를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들러는 전체로서의 나 자신이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므로 그 선택을 나 자신이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 아들런느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마음속의 갈등 탓이라거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얼렁뚱땅 넘기려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
- 목적론. 아들러는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서의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면 그런 행동을 야기하는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원인을 찾으려 하기 마련인데, 아들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화를 주체하지 못해 큰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를 지르기 위해 화를 내는 것이다. 불안해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불안이라는 감정을 만드는 것. 무언가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목적을 먼저 세우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을 생각해낸다는 의미. 분노라는 감정이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남들에게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는 것. 또한 남들에게서 동정을 유발하기 위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기도 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사후에 생각해날 수도 있다. 학교나 회사에 가기 싫은 사람은 물론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는 핑계를 생각해내곤 한다. 전날 밤에 잠을 설쳤다, 감기기운이 있다 같은 핑계가 대표적
- 어떤 경우에서든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존재하고, 그 이유는 나중에 생각해낸다. 이것이 아들러가 말하는 목적론. 그러므로 아들러파 카운슬러에게 '할 수 없어요'라고 하면 '하고 싶지 않은 거겠죠'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열쇠는 원인론적 발상을 목적론적 발상으로 바꾸는 데 있다. 우리는 원인론적으로 생각하는데만 익숙해져 있기에 행동이나 감정의 목적이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훈련이 필요. 다음 두가지 개념을 숙지할 필요.
* 분노나 불안에 관해 언급할 때 이야기했듯이 감정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스스로 감정에 대해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감정에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은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지금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과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불행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한, 과거에 존재하는 원인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
-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고 자각하고,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 변화하기로 결심했다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알아야 함.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가 목적이 된다. 하나하나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런 행동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행복이다.
- 인생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행복한 삶을 방해한다. 인생에 대한 의미부여(라이프스타일)를 바꾸면 세상은 믿을 수 없을만큼 단순해진다
- 아들러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라고 말함. 이는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님. 지금의 자신을 다른 자신으로 바꿀 수 없다면, 이런 자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을 달라 보이도록 해야함. 이는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 아무런 이유없이 어느날 문득 누군가가 이전과는 다르게 보일리는 없다.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을 바꾸는 궁극적 목적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일수 있다. 그때까지 좋아했던 사람을 갑자기 좋아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상대방이 변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겠다고 결심한 자기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자기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자신의 장점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단점만 눈에 들어옴. 자기자신을 좋아하지 않기 위해 장점을 보지 않고 단점만 보려하기 때문. 그러면 왜 자기자신을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할까?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남들과 관계를 맺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남들과 부대끼다 보면 상대방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도 종종 발생. 그래서 상대에게 미움을 받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타남. 그런 사람은 상대에게 미움받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기 자신이 미움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서 스스로를 정당화함
-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며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남들의 평가를 두려워해서 그들의 기대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면, 자기 자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자신의 진정한 본모습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유대교 격언이 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결코 다른 사람의 인생무대에 서는 조연배우가 아니다. 남들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그 평가에 맞추려는 행동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걸맞지 않다.
- 부모를 비롯한 제3자로부터 듣는 속성 여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여겨도 괜찮다. 남들의 기대에 맞추거나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갈수는 없기 때문이다.
- 부모를 비롯한 제3자의 말에 따르지 않고 본인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산다면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사게 되고,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길지도 모름. 하지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자유롭게 살기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반대로 말해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증거
- 아이 스스로가 부모의 기대를 거역하지 않는 착한아이가 되고자 하는 것은 처음에는 부모의 요청에 부응하려는 행동이었겠지만, 어느샌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내적 규범으로 변해 자신을 옭하맨다. 부모는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버저리는 행동을 하면 아이가 반항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것은 반항이 아니라 주장이다. 젊은 사람은 주장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문제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일을 저지르거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건, 자학하는 것 말고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방법을 모른다
- 지금 이대로의 자기 모습을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가 아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 부모가 됐든, 사회가 됐든 제3자가 자신에게 넌지시 강요하는 기대 혹은 명령을 거부하려면 용기가 필요. 그리고 이처럼 용기를 내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결심하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또한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자신을 실제 이상으로 잘 보이려고 할 필요도 없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따른 용기가 필요. 남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겠따고 결심하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짐.
- 있는 그대로가 좋다는 것은 자신을 실제보다 과장하거나 남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 남에게 맞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진정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자신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찾는 일은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위안. 자식이 아무리 부모의 속을 썩이더라도, 혹은 큰 병에 걸리더라도, 자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에게 공헌하는 셈. 자식뿐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 남들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용기가 필요
- 열등감과 콤플렉스는 의미가 다름. 열등감은 자신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 한편 열등 컴플렉스는 A이므로 B를 할수 없다는 논리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 여기서 A는 남들이 봤을 때나 스스로 생각했을 때나 그런 이유가 있으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길만한 그럴듯한 핑계다
- 과제를 앞에 두고 용기가 꺾인 사람은 매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이라고 핑계를 댄다. 분명 달성하기 어려운 일도 있겠지만, 그 일에 착수하기도 전에 실패했을 때를 먼저 생각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며 망설이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이 '네,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할지 안할지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대부분 처음부터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핑계를 나중에 얼마든지 생각해낸다
- 아들러는 어떤 경험에 의해 지금의 자신이 결정된다는 의미의 결정론을 부정. '모든 경험은 그 자체로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쇼크(이른바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목적에 맞는 것을 찾아낸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거이 아니라,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 대인관계에서의 갈등은 쓸데없이 남의 과제에 간섭할 때 일어나기 마련. 그러므로 특별히 부탁을 받지 않는 한 아무거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남의 과제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면 먼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까?'하고 물어보고, 도움을 사양한다면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현명함
- 공부가 어려워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스스로 한계를 그어버리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 이런 한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 피아니스트든, 공부하는 학생이든, 매일 업무에 매진하는 회사원이든, 남들에게 공헌하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힘을 낼 수 있음. 만일 남들과 경쟁하는데만 관심이 있다면 공부든 일이든 괴로우면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만다. 일은 영어로 calliing, 독일어로 beruf라고 하는데, 이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천직이라는 의미. 외부에서 강요받거나 남들과 경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에서 촉발되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음.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당신의 밤 가운데 가장 고요한 시간에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오'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시를 쓴다는 필연성에 따라 생활계획을 세우시오'라고 말했다
- 누구나 말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실천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남에게서 미움받기를 두려워해서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주장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양보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다른 상대방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다. 이때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따르는 책임은 남에게서 미움받을 각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남들의 평가에 신경쓰지 않고 미움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유롭게 살기위한 핵심요소다
- 자식의 과제는 자식이 해결해야 하며, 자신의 판단으로 선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함. 아무리 자식의 선택이 부모의 감정을 거스른다고 해도 그것은 부모로서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몫일 뿐, 자식은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거도 없다. 자식의 결단으로 부모가 슬픔에 빠져도, 그 슬픔은 부모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부모를 슬프게 하고 싶지않다는 이유로 자식이 자신의 결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키케로도 이렇게 말했다. '지금 청년같은 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청년에게 소나 코끼리 같은 힘이 ㅣ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체력을 잘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년의 한계 내에서라도 무언가 일단 시작해야만 비로소 나이를 핑계로 포기하는 일이 사라짐. 세토우치 자쿠초, 도널드 킨, 츠루미 슌스케가 81세에 벌인 대담이 '동시대를 살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에서 벌어지는 지의 향안은 젊은 사람의 추종을 불허한다
- 정말로 건강한 사람은 병에 걸리기 쉬운 몸을 갖고 있고, 그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네덜란드 정신병리학자 판덴베르흐)
- 병에 걸린 몸이 들러주는 이야기에 응답(response)할 수 있는 것(ability)이 책임(responsibility)이다. 몸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다.
- 아들의 불치병과 선한 신의 전능함이 양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물음에 쿠쉬너는 신은 선하지만 전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병이나 불행은 신이 인간을 벌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신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도 아니라고 생각. 또한 병이나 불행은 신이 인간을 벌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신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도 아님. 그리고 '현실은 이렇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현실을 긍정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고통이나 과거에 초점을 맞춘 물음, 즉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는 물음에서 탈피하고 시선을 미래로 돌리려는 물음을 내놓아야 한다고 쿠쉬너는 말했다
- 신도 비참한 사건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을 극복하는 용기와 인내력을 줄 수 있다. 이런 힘이 신 말고 누구에게서 얻을 수 있겠냐고 쿠쉬너는 묻는다. 신을 내세우는 것은 쿠쉬너가 랍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병, 사고, 재난으로부터 재기하는 사람의 모습에서는 감동마저 느껴진다.
- 산다는 것은 시작점과 끝점이 있는 운동이 아니라, 춤을 추는 것 같은 에네르기아의 운동, 즉 어딘가에 도달한다는 목적이 없는 운동이다. 매순간 지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삶이다
- 생전에 천벌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모든 계산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죽음 뒤의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추론을 정당화한다.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 벌을 받지 않거나 착한 사람이 보상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세가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증명할 수 없는 생각에 희망을 걸고 싶지 않다. 사람이 굳이 보상받기를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죽은 후에도 보상받기를 꼭 원할 필요는 없다
- 인생은 유한하지만,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데는 충분히 길다.
- 인생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지 말고 또한 내일을 오늘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만족스럽게 산다면 지금 이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 아침에 냉장고를 열고서 오늘밤에 무얼 만들어 먹을지 고민하는 자신을 깨닫고 쓴웃음을 짓는 경우가 있따. 준비가 철저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제 겨우 하루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미리 결정할 필요가 없다. 저녁식사 메뉴는 아침에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업무도 반드시 끝까지 해내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완성해내지 못한닥만 생각한다면 어떤 일에도 착수하지 못할 것이다.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감을 갖고 인생의 과제와 대결하려는 사람은 초조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인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생의 과제에 임하지 않겠다는 핑계로 이용한다고 할 수 있다. 아들러의 말을 뒤집어 말하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초조해하고, 그 초조함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핑계로 내세운다
- 앞을 응시하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이중의 삶이 요구된다. 즉, 현실이 어떻든 간에 이상을 잃지 않는 것과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을 양립시켜야 한다는 의미. 언제든 우리를 좌절로 몰아넣을 위험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나아야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면 남을 동료로 파악하고 공헌하라는 아들러의 말은 현실성이 없어보일지도 모름. 그러나 이상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인 것이다. 앞을 응시해야만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동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사건과 맞닥뜨려도, 넓은 눈으로 보면 그 사건은 인생의 커다란 에피소드이기는 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 인생의 마지막날을 기다리지 말고, 또한 내일을 오늘의 연장선이라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만족스럽게 산다면 지금 이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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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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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고민에 빠뜨리는 인간관계
* 자기자신 : 자신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 상대 :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 관계 : 상사와 부하, 선배와 후배 등
* 환경 : 직장과 학교 등의 생활환경
- 괴로운 인간관계를 해소하고 싶으면 우리는 이 네가지 요소중 하나를 바꿔야 함. 이중 가장 바꾸기 쉬운 것은 자기자신. 자기자신이라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원하는대로 바꿀 수 있기 때문. 자신의 마음가짐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이 가장 쉬우면서 인간관계를 크게 변화시키는 수단. 그래서 아들러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 바로 자신의 행동은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는 자기결정성이. 어떠한 동일한 상황, 어떠한 상대든 간에 우선 자신은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상대방, 관계, 환경을 바꾸지는 못해도 자신만큼은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상대를 판단. '이 사람은 싫어하던 선생님과 닮아서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 이렇게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에 따라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결정됨. 마음속 분류상자가 있어 무의식중에 싫다, 좋다, 보통이다, 이렇게 세개의 상자로 나누는 작업을 함.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그런 주관적 관점을 인지론이라는 말로 설명. 인지론이란 같은 것을 보거나 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사고방식. 그러므로 우리는 설령 같은 사람을 만나도 '저 사람은 느낌이 좋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저 사람은 싫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즉, 항상 자신만의 주관적 잣대로 사물을 분류한다는 의미.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한순간에 '싫다'라는 상자에 넣으면 의식하지 않는 이상 다른 상자에 새로 옮겨놓지 못함. 그러면 싫은 사람은 언제까지나 싫어하게 됨. 그러한 행동과 사고유형을 생활양식이라고 함
- 우리는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고민을 할 때도 일정한 경향을 나타냄. 그중 하나가 매사를 필요으로 과장하는 일.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모두가', '모든 것이', '언제나'라는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
- 못 하는 이유로 늘 고민이 많은 듯 하지만 실제로는 행동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핑계에 불과. 못하는 이유 뒤로 숨는 것은 그만하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라고 물어보자. 그것이 아들러가 말하는 '목적'이다. 당신이 진짜로 못하는 이유는 당신이 핑계의 방패로 써먹던 '못 하는 이유'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다
- 아들러는 '사람은 목표달성의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인간심리를 해독. 바로 '목적론'이라 불리는 사고다. 목적론에서는 미래에 목표가 있음으로써 현재의 상황이나 행위가 결정된다고 본다. 즉, 앞의 예에서 '학교를 그만둔다'가 목적이고, '인간관계가 싫다'는 것은 나중에 붙여진 이유에 불과. 그러나 자신의 목표가 언제나 적절하지는 않다. 어느 틈엔가 그릇된 목표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아들러는 사람은 자신의 의사로 목표를 다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 즉, 목표달성을 위해 무엇이 가능한지를 추구. 학교를 그만둔다는 목표대신 학교에 간다는 목표를 가지면 학교에 가기 위해 장차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됨. 즉, 자신의 의사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가 되면, 자연스레 생각의 방향과 행동이 달라짐. 중요한 것은 '과거 사실보다는 장차 미래를 위해 무엇이 가능한가?'이다. 목표달성이라고 하면 비즈니스가 연상되기 쉬우나, 인간관계에서도 전혀 다를바 없다. 싫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인간관계에서 고민하지 않기 위해 무엇이 가능한가'라는 미래지향적 사고를 하는 일이 중요. 그러면 지금 이순간부터라도 싫은 사람과의 관계는 변화할 것이다
-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기분이 나쁜 것에도 목적이 있다고 생각. 그것은 바로 타인의 접근을 저지하고 싶다는 목적이다. 즉, 기분이 안 좋은 그에게는 그 당시 자신의 의사대로 '기분나쁜 상태로 있고 싶었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그러므로 상대의 기분이 나쁠 때는 '내 탓이야'라고 생각하지 말고, 단지 '아, 이 사람은 오늘 기분이 안 좋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그날은 일찍 헤어지고, 기분이 풀렸을 때로 다시 날을 잡아 만난다. 비슷한 예로, 당신도 부모에게 '공부해라', '하는 일은 잘 되냐'등의 말을 듣고 발끈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때는 '부모의 접근을 막고 싶다'는 목적이 있어서 불쾌해진 것. 하지만 그 불쾌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날이 바뀌면 기분좋게 부모와 대화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분이 안 좋은 상대를 봤을 때, 가끔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할 수 있어야 함
- 인간관계에 특히 민감한 사람들이 잇다. 인간관계에 너무 부담감을 가져서는 안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인간관계라는 건 당연히 생겨나게 마련. 여러 사정상 반드시 어울려야 하느 사람은 어디서든 생긴다. 하지만 모든 일이 24시간 온종일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가끔은 인간관계는 업무라고 받아들일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싫은 사람과도 업무로 엮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 그럴 때는 관계를 업무로 받아들이고 대응할 것. 다만 업무일 경우, 일단 보고와 연락만큼은 소홀해서는 안된다. 최소한의 정보를 사무적으로 전달하면 더 이상 관계가 악화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상대방이 싫다는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업무면에서는 경의를 표하고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상대방에게 말려들지 않을 정도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래도 문제가 발생하면 신이 당신에게 단련할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자. 고행을 견디고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그에게 하루중 아주 짧은 시간을 내어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곧 다가올 즐거운 일에 관심을 기울이면 된다
-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좋고 싫음을 대신한느 판단기준으로 건설적이냐, 비건설적이냐를 제시. 이는 자신과 상대방의 공통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한 두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 좋고 싫음을 인간관계의 판단기준으로 삼으면 최종적으로 상대방 판단에 맡기게 됨. 그러면 자신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컨트롤하지 못하게 됨.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하면 할수록 보람없는 헛된 노력만 반복하게 됨. 이보다는 직장동료, 가족, 애인을 위해서 자신은 정말 공헌하고 있는가, 건설적 행동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편이 스스로 컨트롤 가능한 일을 하는데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음
-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네가지 규칙
(1) 목적지향으로 산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는 원인지향이 아니라, 목적지향적으로 인간관계를 이해.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목표나 목적을 따른 결과라는 것. 목적지향으로 생각하면 과거에 발생한 여러 문제도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할지 스스로 결정 가능. 과거는 바꾸지 못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미래는 바꿀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 올바른 목표를 선택하는 일이 자신에게 용기를 주게 됨
(2) 건설적인 사람을 목표로 한다. 좋은 사람이란, 사실 상대방이나 주변 사람들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 편리한 사람이다.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려는 노력은 결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상대방의 뜻대로 움직이는 습관이 들면, 진심으로 우러난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지치게 된다. 무조건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지치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편리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 만약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 있다면 이제는 그만둘 결심을 해야한다. 더이상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부당한 일이 생기니는 않느다. 사람들은 당신 생각처럼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그만두더라도 인간관계가 약화될 걱정은 안해도 된다. 사실은 당신 혼자서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바를 지레짐작하여 거기에 부응하려고 했던 것일수 있다. 좋은 사람이기를 그만두려면 결단력이 필요. 이제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건설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보자. 서로의 공통목표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여 실행하자.
(3) 웃음을 받아들인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웃음의 효과를 중시. 아들러는 '기쁨은 자신과 타인을 이어주는 정서이고, 슬픔은 배반시키는 정서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웃음으로써 마음이 열리고, 여유도 생긴다. 그러면 매사에 객관적이 되기 때문에 '내가 왜 이처럼 시시한 일이 얽매였을까?'하고 깨닫는다. 이로써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미래지향으로 상대방과 어울리게 됨. 아들러의 제자인 베란 울프는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라는 명언을 이용하여 '웃음과 유머감각을 기르는 것은 좋은 세상을 위한 멋진 연습이다. 자기 자신과 동료들의 유대관계를 위해서는 온화하고 유머러스한 인격양성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도 그의 말대로 의식적으로 웃기 위해 노력하고, 상담할 때도 상대방이 웃게끔 애쓰고 있다. 웃음의 효과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4) 낙천주의가 아니라, 낙관주의가 된다. 낙천주의자들은 무턱대로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어 의심치 않음. 나쁘게 말하면 그저 속편한 사람이다. 한편, 낙관주의는 세상에 나쁜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최선의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안 좋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럴수 있다며 사태를 냉정하게 받아들임. 그리고 지금은 마이너스상황이지만, 만회할 수 있다, 잘만 대처하면 반드시 좋아질 거야 등 현실을 고려하면서 낙관적으로 생각.
- 오델로 게임에서는 양쪽 끝에 흰색말을 놓으면, 그 사이에 있는 검은 말들을 모두 하얗게 뒤집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침과 밤에 자신에게 용기만 불어넣어도 하루에 있었던 모든 일을 긍정하고 자신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 칭찬은 한마디로 외발적 동기부여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을 조정하기 위한 행위. 직장에서는 상사가 부하직원의 뛰어난 점을 평가하고 칭찬한다. 그러면 부하직원은 의욕이 생겨서 생산성을 높이려고 노력. 칭찬은 일종의 평가다. 따라서 반드시 칭찬하는 사람은 상사, 칭찬받는 사람은 부하라는, 상하관계를 전제로 함. 나쁘게 말하면 당근과 채찍의 당근으로써 칭찬을 활용하는 것. 사람은 칭찬을 받으면 기뻐서 더 칭찬받기를 원함. 그리고 늘 칭찬을 듣기 위해 행동하려 함. 역으로 말하면, 칭찬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 행동도 멈춤. 어린아이에게 '정리도 잘하고, 참 착하구나'라고 말하면 얼른 정리를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정리해도 칭찬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더이상 정리하려 들지 않는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간관계를 상하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건전한 정신을 해친다고 본다. 아들러는 상사와 부하이든, 부모와 자식이든간에 대등한 수평적 관계를 최고로 여김. 만약 대등함을 전제로 한 인간관계에서 칭찬을 건네면 그 순간 칭찬하는 사람과 칭찬받는 사람이라는 상하관계가 생겨남.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지나친 칭찬은 자제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 용기를 주는 것은 내발적 동기부여다. 상대가 자립해서 스스로 자신에게 용기를 주게끔 어려움을 극복하는 활력을 부여하는 것. 여기에는 평가하다/평가받다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서로 공감하는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함. 설령 다른 사람이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이것을 하면 모두에게 좋고, 나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하자'라는 생각으로 자발적으로 행동하면 용기부여가 된다. 그러면 인간관계에 위아래가 생기지 않고, 대등한 일체감이 생겨난다
- 칭찬의 문제점
* 한번 칭찬하면 계속해야 한다
* 칭찬할 때마다 칭찬하는 정도가 커지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짐
* 끊임없는 지시나 관리가 필요
- 용기꺽기를 하는 사람의 특징
* 상대방의 단점을 지적
* 감점주의로 사물을 파악
*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설정
* 실패를 철저하게 비판
* '다 너때문에 망쳤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지음
- 인간관계가 순탄하지 않다고 느꼈을 때를 살펴보면, 상대방이 용기를 꺾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실 용기를 꺾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용기가 없는 사람,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다.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할 활력이 없기에 남에게 용기를 주지 못하고 공격을 하는 것
- 공격적인 사람은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다. 남을 공격하는 사람, 용기를 꺾는 사람은 나약한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두려워함.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공격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용기꺾기를 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상대가 아님. 따라서 용기를 꺾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일일이 대꾸하거나 다투는 건 어리석음.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말에 일희일우하기 전에 '이 사람은 용기가 없구나'하고 생각해보자. 그러기만 해도 상대방에게 좌지우지되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 인간관계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위, 기분, 감정, 고민, 문제, 성격 등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음. 그렇지만 사실 상대방은 전날까지 야근이 이어졌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혀 다른 일로 기분이 상했을수도 있다. 상대방 기분과 당신의 문제는 대체로 아무 관계가 없다. 자신과 관계가 없는데 혼자 고민을 한다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감정에는 목적이 있다. 아들러는 분노와 기대, 불안은 모두 어떤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고 생각. 그리고 그는 감정은 조절이 가능하다고 주장. 왜냐하면 감정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감정을 이용한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 우리는 감정을 목적과 TPO에 따라 나누어 사용한다. 싫다는 의식, 호불호라는 감정에 절대로 지배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뜻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 같은 감정도 반드시 자신의 의사로 조절이 가능하다.
- 불안이라는 감정은 자신을 지키거나 행동을 촉구하는 역할을 함. 자신을 위해 공부하고, 가족을 위해 상속준비를 하는 등 더 잘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이용하며 살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불안감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신호. 그 사람과 대화를 잘 나누기 위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 그리고 실제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어떻게 대할까'를 생각함으로써 그 사람과 어색해지지 않게끔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분노)가 난다면, 화(분노)의 근원이 되는 1차감정을 파헤쳐 보자. 분노는 2차감정으로, 그 바탕에는 다른 감정(1차감정)이 있다
- 중요한 것은 화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화의 목적을 확인함으로써 화가 아닌 커뮤니케이션으로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음. 화를 그대로 표출해서 상대방과 다투면 점차 분노가 확대되어 수습이 불가능해짐. 시간낭비가 되고, 급기야 재판까지 이르게 되면 금전적 손해도 발생. 그런데 다툼이라는 선택지는 자신의 의사로 피할 수 있는 것. 당신은 자신의 의사로 공동과제를 해결하는 건설적 대응을 할지, 아니면 분노라는 감정에 맡긴채 비건설대응을 할지 선택할 수 있다.
- 돈을 잃은 것은 적게 잃은 것이다. 그러나 명예를 잃은 것은 크게 잃은 것이다. 더더욱 용기를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다.
- 죄책감에 휩싸였을 때에는 벗어나려 하지 말고 죄책감에 직면하는 과정이 필요. 그리고 한껏 빠져든 뒤에 다른 감정으로 뛰어오르면 된다. 사람이 점프를 하려면 몸을 먼저 움츠리듯이 일단 마이너스 감정에 빠지는 일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가 된다.
- 상대방이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은 원래 답이 없다.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 상대방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라
- 습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따라서 습관을 바꾸는 것도 자신이 할 수 있다. 아들러는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그리는 화가다'라는 말을 남김. 아들러 심리학의 매력은 모든 행동을 환경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바꿀 수 있다는 점. 습관으로 인간관계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습관은 바뿔 수 있다. 바로 아들러가 가르쳐준 심리학의 지혜다
- 누군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사람이 협력적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 관계가 없다. 당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협력적이든, 그렇든 상관말고.
-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이자. 행복하게 사는 가정의 삶은 단순하지만, 불행해지는 삶을 사는 가정은 굳이 사물을 복잡하게 받아들이고, 그 결과로 불행을 초래한다. 이 말은 인간관계에도 적용됨. 인간관계를 단순하게 보고 협력할 수 있으면 행복이 찾아온다. 하지만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만들면 사람들은 악행 정도를 서로 비난하고, 협력이 곤란한 불행한 삶을 선택하게 된다.
- 인생이 복잡한게 아니라 내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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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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