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빠져 고통받고 있을 때 그저 아무 말 없이 안아주고, 쓸쓸한 밤에 곁에 있어 주고, 참을 수 없는 눈물을 닦아 주어라. 이런 작은 일들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 그런 뒤 이렇게 말해주자. 이 병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어떤 치료를 받은, 얼마나 많은 돈이 들든, 회복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렵든 아무 상관없다고. 왜냐하면 당신과 함께 있어 줄테니까. 언제나
-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 내게는 책들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 그러면 나는 곧 책에 빨려들고 내 마음의 먹구름도 이내 사라진다. 르네상스 시대 위대한 사상가 몽테뉴이 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테베의 도시관을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 불렀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입구에는 영혼을 위한 약상자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렇듯 아주 오래전부터 책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치유해주는 힘이 있었따.
- 우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에 대한 무감각이며, 우리의 육체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있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슬픔을 경험하는 능력이 없는 것일뿐만 아니라 기쁨을 경험하는 능력도 없는 것이다. 우울한 사람은 만일 그가 슬픔을 느낄수만 있어도 크게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
- 우울증, 약만으로 쉽게 낫는 병이 아니다. 이 문제는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말하는 의도 가운데 매우 악의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감기정도의 병이기 때문에 약만 먹으면 쉽게 낫는다는 이야기는 병의 깊은 본질을 은폐하려는 의도 말고도 약만으로 우울증에 대처하겠다는 서양 정신의학의 정치적 계산과 제약사의 상업전력이 맞물린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강용원, 안녕, 우울증)
-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머릿속에 온갖 소음이 울리는 것 같은 고통스런 삶을 살기보다 죽음이라는 평화로운 환상 속의 별에 편승하기를 원할만큼 그 고통이 지독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워첼, 프로작 네이션)
- 슬플 때는 울고, 기쁠때는 웃고, 화가 날 때는 소리칠 수 있었다. 두려움을 느낄 때는 두렵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무도 그런 우리를 두고 나쁘다, 미쳤다, 혹은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대신 우리는 슬플 때 쥐죽은 듯이 있고, 화가 날 때는 조용히 꾹 참고, 무서움을 느낄 때는 멀리 밀쳐내도록 배워왔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거나 혹은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숨기라고 교육받아 왔다. (미리암 그린스팬, 감정공부)
- 우울증은 단지 슬픔 감정의 정도가 아니라 극심한 고통의 감정을 겪는 상태. 우울증에 빠졌을 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집 문을 열고, 전철을 타고, 물을 마시고, 인사를 하고, 일을 하고, 회의를 하고, 전화를 하고, 밥을 먹고, ... 이런 일상적인 사소한 일들조차 고통스러웠고 힘들었따. 우울증은 슬프고 괴로운 감정 탓에 정상적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도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상태임. 인생의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을 때도 극도의 슬픔을 느낌. 심지어 자살충동까지 이어지는 극심한 고통의 우울상태다. 통계상 우울증으로 매 30초마다 세계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 급격한 기분변화에 중점을 두는 의사와 만나면 양극성 장애로 진단받고, 리튬이나 발프로에이드 같은 약을 처방받음. 의사가 환자가 나타내는 절망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으면 주요 우울증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항우울제가 제공됨.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주의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의사들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로 분류하고 리탈린이나 다른 자극제로 치료한다. 그러다 병원관계자 중 누군가 우연히 그 환자가 트라우마를 경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환자가 자진애서 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면 비로소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진단을 받는다. (벨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 다리가 부러지면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감염이 의심되면 피검사로 확인하고, 암에 걸린 듯하면 조직을 검사해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과 진단은 객관적 데이터 없이 환자의 증상위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진단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한 환자를 두고도 어느 의사는 양극성 장애로, 또 다른 의사는 우울증으로, 또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다른 진단을 받을 수 있다. 정신과 진단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단에 따라 치료가 정해지기 때문. 잘못된 치료는 환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확한 진단은 사람을 살리지만, 부정확한 진단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 무기력한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한 상태다. 그들은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고 지인과 사회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려 하며, 감정적 허탈감에서 수반되는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증상이 타인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대하게 만든다. 누군가 나서서 도와주려고 해도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고집을 부리며, 결국 혼자 고립되고 만다.
- 우울증 환자의 주위 사람들은 환자 스스로 자신을 다스려주기를 바람. 우리 사회는 침울해할 여지를 여간해서는 주지 않는다. 환자의 배우자, 부모, 자녀들, 친구들은 자신도 의기소침해지기 쉬우므로 우울증에 가까이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에 질겁한다. 우울증 환자에게 공감과 이타주의를 표시하는 사람들도 잇지만 반감과 혐오감을 보이는 이들이 더 많다. 우울증에 걸린 후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으며, 사실 그것은 차라리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진실이다. (앤드류 솔로몬, 한낮의 우울)
- 만약 지금 당신이 우울증으로 인해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다면, 조바심 내지 말고 지금의 고통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점은, 동굴 속으로 피신해 머물러 있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것. 그리고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동안에도 순간순간 괜찮아질 때가 있다. 개그 프로를 보면서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따. "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 맞아?" 이런 식의 죄책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전혀 없다. 일상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고 있는데, 이렇게 즐거워해도 되는걸까라는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
- 우울증이라는 강을 한번 넘어갔다 온 사람은 작은 자극과 스트레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이거 또다시 시작되는 거 아니야?'하고 가슴 철렁 내려앉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다. 지난 세월의 고통스런 아픔과 메마른 감정의 가뭄으로 그 강의 폭은 이미 좁아져 있는 상태다. 그래서 두번째, 세번째 강을 건너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우울증이란 병에 걸리고 회복기에 들어서면, 수행하듯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면, 고통의 시간을 똑같이 반복될 것이다. 이젠 자기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돌아볼 때다. 지금까지의 습관적 부정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지녀온 조급한 습관, 잘못된 자신의 신념 등을 인식하고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남에게 의존하기 않고 혼자의 힘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음공부를 통해 나의 감정을 이해하고 타인들의 마음까지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젠 정말 바뀌어야 한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왜냐하면 작은 자극과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마음이 쉽게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 지금은 고통에서 잠시 벗어났을 뿐. 아직도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들은 그대로 고스란이 남아, 언제 우울증이 또 다시 덮칠지 모른다.
- 역경과 어려움을 딛고 성장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경험과 사랑과 존중으로 유지되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는 단 한사람의 존재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의 원동력 역할을 한다.
-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 처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아가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극복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웠나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견디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도 말아야지. 하지만 결코 이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지. '가슴 검은 도요새'처럼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단 한사람이라도...
-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은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의 대양위에 뜬 섬일 뿐이다. 감정이 곧 인간이다.' 라고 말했다. 당신은 감정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 그리고 감정조절을 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감정조졸이란 모든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국내외에서 활동중인 심리치료사 권혜경은 저서 감정조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지 않고 참는 것이 감정조절이라고 오해"한다며,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 이 감정을 바로 없애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이 감정이 무엇인지 연구"하여 결국 감정이 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정을 가지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기쁨이조차 '도대체 얘는 왜 있는 거지'라며 슬픔이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픔은 타인과의 공감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더 깊은 유대관계를 맺게 해준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슬픔을 통해 더 풍성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고, 가족간의 사랑이 더 단단해졌다. 미국 임상심리학자 조지 보나노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연구해 '슬픔뒤에 오는 것들'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슬픔의 역할에 대해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슬픔은 사실상 분노와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싸울 태세를 취하게 하지만, 슬픔은 생물학적 체계를 둔화시킴으로써 뒤로 물러설 수 있게 한다.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속도를 늦추게 하여 세상마저 천천히 돌아가게 하는 듯하다. 사별한 이들은 종종 상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마치 슬로모션으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이야기한다. 세상사에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적어지면, 우리는 일상의 관심사를 잠시 잊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깊이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웃음을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우울한 동물이 당연히 가장 쾌활한 동물인 것이다.
- 나태가 죄였을 때는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기능을 할 수 없거나 망상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자신의 병을 인정했었다. 그런데 멜랑콜리가 심오함, 정신적 충문함, 복잡성, 심지어 천재성까지를 의미하게 되자 사람들은 의학적인 이유도 없이 우울증 환자의 행동을 흉내내게 되었고, 진짜 우울증은 고통스럽지만 우울한 행동은 즐거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긴 소파에 몇시간씩 늘어져 있고, 달을 바라보고, 실존적 질문들을 던지고, 어려운 일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고,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는 등 나태라는 금기가 막았던 행동들을 했따. (한낮의 우울)
- 이처럼 모든 창조력과 상상력은 멜랑콜리, 즉 우울감에서 시작되며 슬픈 감정에 대한 숭배는 이때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래서 진정한 인간의 존재로 개발되기 위해 멜랑콜리는 예술가들의 필수조건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 예술가들의 우울한 성향을 미화하는 것은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새로운 일은 아니다. 창의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우울 성향은, 현대에도 종종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예술가적 기질로 설명되기도 한다. 캘리포니아 얼바인대 신경생물학자 제임스 펄린은 감정에 따라 활성화되는 뇌 활동 변화를 살펴본 결과,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깊은 우울감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심리과학자 폴 앤드류와 앤더슨 톰슨은 논문을 통해서 우울증은 정신질환이 아니라 수십만년 동안 인간의 생존을 도와온 정신적 적응현상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코페르니쿠스, 구텐베르크, 보티첼리, 모차르트, 베토벤, 고갱, 고흐,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우울증으로 고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별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성과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부추겨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것은 곧 자기착취로 이어진다. 자기 착취는 주체가 스스로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성과사회, 즉 피로사회에서 개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것이다.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에서 '미래사회에서 인간은 자유와 기회를 획득한 대신 피로와 우울감을 얻을 것이다.'라며 이미 70년에 경고의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은 지금 우울증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정신의학은 과학이라기보다 예술에 가깝다. 정상과 비정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예술에서처럼 개성적이고, 다중적이고, 다의적이기 때문. 정상과 정신장애를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진단을 내릴 때 정신과 의사의 느낌은 물론이고 때로는 도덕적 판단에 의존할 때도 있다. 그래서 정신의학은 유사과학에 불과하다고 폄훼당하기도 한다. 정신장애를 정의하는 이론적 기준은 있지만, 현실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경계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회색지대가 매우 넓다. 인간의 행동과 경험 중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판단하는데는 언제나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마음의 사생활, 김병수)
-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아주 사소한 스트레스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싸우기 방어기제가 반사적으로 또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사람들의 뇌는 일반 사람들의 뇌와 해부학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다. 대개 이들은 오랫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온 경우가 많다보니 위협을 감지하는 뉴로셉션이 지나치게 작동하고, 그 결과 편도체가 과잉 활성화되고, 지나친 스트레스 호르몬 방출의 결과로 해마의 크기가 줄어들어 경험을 처리하고 소화하는 것이 남들보다 힘들어진다. 그러면 남들보다 더 민감하게 위협을 감지하게 되고, 또 이에 과하게 반응하는 악순환이 계속됨. 이렇게 행동의 신경생물학적인 배경을 알게 되면 사람을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하게 되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나쁜 사람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치유해줄 수 있게 된다. (권혜경, 감정조절)
- 정신질환의 원인이 뇌의 질환이라는 학파와 마음의 병이라는 학파가 오랫동안 대립해왔다. 정신의학자들은 뇌의 문제로, 심리치료사들은 마음의 문제로 설명.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고, 서로 다르다는 데서 기인. 그런데 2천5백년전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질환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크게 잘못된 것은,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와 정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말은 현대에 와서 뇌과학의 발전으로 증명되고 있다.
- 요즘 뇌과학의 눈부신 발달로 이전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신체적, 정신적 반응들이 이해되고 설명되고 있다. 이런 연구들을 통해 이제는 몸과 마음은 둘로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한 현상에 대한 두가지 다른 측면이라는 설명이 주를 이룬다. 신경세포인 뉴런이나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심장과 내장에도 있다. 몸이 단지 정신의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똑똑하게 상황에 대처하고 또 우리 저인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든 육체와 정신이 각각 자신이 아는 방법으로 이 경험을 처리하면서 계속해서 정보를 주고받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 우리 주변에는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홍보문구가 넘친다. '마음의 병은 누구나 걸립니다. 하지만 약물로 치료할 수 있어요. 그러니 정신과에 가서 의사와 상의하세요' 라는 교묘한 캠페인이다. 하지만 약물치료를 쉽게 봐서는 안된다. 정신의학자 사이토 다마키는 저서 '사회적 우울증'에서 우려를 표현한다. 약으로 마음을 다스리겠다는 대중의 요구에 의료산업도 열심히 부응하고 있다. 일부 악덕 클리닉은 자비진료 형태로 의사면허를 가진 판매원이 각종 향정신성 의약품을 판매한다. 제약회사들은 광고를 통해 가벼운 증상에도 항우울제를 복용하라고 부추긴다. 이들의 대의명분은 약을 통해 증상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신질환의 종류에 따라 너무 빨리 치료하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 특히 가벼운 질환에 다짜고짜 약물치료를 시작하면 오히려 증상이 악화되거나 약물에 대한 의존증이 생길 수 있다. 과거의 우울증 치료는 자살을 시도할 만큼 심한 우울증 환자를 죽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미국에서 프로작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가져온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대단했다. 언론에서는 이 약을 먹기만 하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기적의 알략, 즉 해피메이커라고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누구나 별 부담없이 복용해도 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를 계기로 심리적 불안을 없애고, 조금 더 밝게 해주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면, 일상새오할에 어려움을 겪을 만큼의 증상이 아니더라도 약 복용을 꺼리지 않게 됨.
- 슬픔이 질병과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된다. 모든 낙담을 병으로 진단할 수는 없고, 모든 문제를 약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살면서 겪는 어려움, 가령 이혼, 질병, 실직, 금전적 곤란, 대인 갈등은 금지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어려움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 가령 슬픔, 불만, 낙담을 죄다 정신장애로 질병화하여 약으로 치료해서도 안된다. 우리에게는 회복력이 있다. 우리는 상처를 스스로 핥고, 자신이 가진 자원과 친구들을 동원하여 그럭저럭 견딘다. 감정적 통증을 느끼는 능력은 육체적 통증 못지 않게 크나큰 적응적 가치가 있다.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그런 감정적 통증을 모조리 정신장애로 바꿔버린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극적으로 달라질 것이고, 우리가 겪는 다채로운 경험이 칙칙해질 것이다. 슬픔을 견디지 않으면 기쁨도 겪을 수 없다. 헉슬리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멋진 신세계에서 고통없는 상태는 금세 머리가 멎은 상태로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 의사나 제조업체들은 약에 부작용이나 중독성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부작용을 경험하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다. 하다못해 두통이나 생리통에 먹는 진통제에도 부작용은 다 있다. 우울증 약의 복용은 성욕감퇴, 식욕저하, 위장장애, 졸음, 구역질 등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울증이 심하다면,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약을 먹어야 함. 증상이 경미한 사람이 우울증 약을 함부로 오남용하면 안 되겠지만, 중증 환자가 부작용 때문에 약을 안 먹고 버티는 건 훨씬 위험. 약을 복용할 때 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본인만 한다. 좋은 약과 나쁜 약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과 잘 맞는 약과 맞지 않는 약이 있는 것이다. 약의 종류와 복용량, 그리고 본인 외에는 알 수 없는 정서적 기분과 약의 신체적 부작용 등의 증상들을 정확히 메모해두자. 약의 부작용이 심하면 혼자서 판단하지 말고, 의사에게 전하고 상의해서 다른 약으로 바꾸거나 용량을 조절해야 한다.
- 심한 우울증에 빠지면 자신의 생각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짐. 생각하면 할수록 부정적 생각과 자책감만 늘어남. 이때는 부정적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 즉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육체적 운동과 산책, 정신적 독서와 대화 등의 활동을 통해, 부정적이고 불행한 생각에 잠기는 것을 차단시켜야 한다. 이것이 전문가들이 햇볕을 쬐라 하고, 산책과 운동을 하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다. 물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고 마음먹은대로 잘 되지 않는다. 상당히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고, 계획을 세워 조금씩 움직여야 한다.
- 심한 우울증 환자의 경우 활동 수준의 감소로 인해 자신을 비효율적인 사람으로 보는 악순환에 말려든다. 이런 시각으로 결국 자신감을 잃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비활동의 상태에 빠지게 됨. 또한 추론이나 계획 등의 지적인 기능들과 특정한 기술이나 훈련이 요구되는 활동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걷고 말하는 것에 이르는 신체적 활동도 수행하기 어려움. 이때 행동요법은 무기력을 없애고 환자를 움직여서 건설적 행동을 하도록 하는 데 상대적으로 효과적이다. 뿐만 아니라, 행동목표의 성취를 통해 성공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인지요법을 적용한 것보다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식의 잘못된 신념을 반박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우울증의 인지치료, 아론 벡)
-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은 꼭 해야 할 창조적인 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어떤 화가가 자살하려고 가스 스위치를 틀려는 순간, 조금 더 손을 대야 하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는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을 그냥 놓아둘 수 없어서 자살하려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그림의 마지막 손질을 했다고 한다."
- 우울증은 계층을 초월하지만 우울증 치료는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의 가난한 우울증 환자는 계속해서 가난한 우울증 환자로 남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우울증과 가는은 오래 방치될수록 그만큼 더 심각해진다. 가난은 우울증을 악화시키고, 우울증은 장애와 고립으로 가난을 심화시킨다. 가난은 사람을 운명에 수동적이게 만든다.
- 좋아하는 취미생활하기, 음악듣기, 영화보기, 수다떨기, ... 이런 것들이 단순히 기분이 조금 우울하고 침체되어 있는 가벼운 우울증에 도움이 됨. 그러나 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에 접어든 상태에서 기분전환만으로는 극복이 안된다. 차라리 빨리 집에 가서, 그냥 이불 속에서 꼼짝 않고 누워있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우울증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휴식이다. 우울증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견디는 것이지, 정신력이나 의지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 마음만 먹으면 된다고? 정신력만 있으면 어떤 난관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안 그래도 아픈 사람에게 정신력과 의지력을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 이건 마치 고혈압이나 당뇨환자에게 "의지력으로 혈압 좀 내려봐. 정신력으로 혈당 좀 떨어드려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는 아무도 밖에 나가서 운동좀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는 마음의 뼈가 부러진 상태라는 점을 기억하자. 의지력과 정신력이 약해서 그런 거라는 세상의 편견 탓에, 우울증을 겪고 있는 본인조차 우울증을 의지력과 정신력으로만 극복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난 정말 정신력도 약하고 쓸데 없구나"라는 자책감이 들어 병이 낫기는 커녕 더 악화되기도 한다.
'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러에게 인간관계를 묻다 (0) | 2018.06.17 |
---|---|
위대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가족이란 무엇인가 (0) | 2018.06.17 |
끌림의 과학 (0) | 2018.04.08 |
불을 훔친 사람들 (0) | 2018.04.04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뇌 (0) | 2018.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