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빠져 고통받고 있을 때 그저 아무 말 없이 안아주고, 쓸쓸한 밤에 곁에 있어 주고, 참을 수 없는 눈물을 닦아 주어라. 이런 작은 일들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 그런 뒤 이렇게 말해주자. 이 병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어떤 치료를 받은, 얼마나 많은 돈이 들든, 회복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렵든 아무 상관없다고. 왜냐하면 당신과 함께 있어 줄테니까. 언제나
-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 내게는 책들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 그러면 나는 곧 책에 빨려들고 내 마음의 먹구름도 이내 사라진다. 르네상스 시대 위대한 사상가 몽테뉴이 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테베의 도시관을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 불렀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입구에는 영혼을 위한 약상자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렇듯 아주 오래전부터 책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치유해주는 힘이 있었따.
- 우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에 대한 무감각이며, 우리의 육체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있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슬픔을 경험하는 능력이 없는 것일뿐만 아니라 기쁨을 경험하는 능력도 없는 것이다. 우울한 사람은 만일 그가 슬픔을 느낄수만 있어도 크게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
- 우울증, 약만으로 쉽게 낫는 병이 아니다. 이 문제는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말하는 의도 가운데 매우 악의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감기정도의 병이기 때문에 약만 먹으면 쉽게 낫는다는 이야기는 병의 깊은 본질을 은폐하려는 의도 말고도 약만으로 우울증에 대처하겠다는 서양 정신의학의 정치적 계산과 제약사의 상업전력이 맞물린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강용원, 안녕, 우울증)
-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머릿속에 온갖 소음이 울리는 것 같은 고통스런 삶을 살기보다 죽음이라는 평화로운 환상 속의 별에 편승하기를 원할만큼 그 고통이 지독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워첼, 프로작 네이션)
- 슬플 때는 울고, 기쁠때는 웃고, 화가 날 때는 소리칠 수 있었다. 두려움을 느낄 때는 두렵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무도 그런 우리를 두고 나쁘다, 미쳤다, 혹은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대신 우리는 슬플 때 쥐죽은 듯이 있고, 화가 날 때는 조용히 꾹 참고, 무서움을 느낄 때는 멀리 밀쳐내도록 배워왔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거나 혹은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숨기라고 교육받아 왔다. (미리암 그린스팬, 감정공부)
- 우울증은 단지 슬픔 감정의 정도가 아니라 극심한 고통의 감정을 겪는 상태. 우울증에 빠졌을 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집 문을 열고, 전철을 타고, 물을 마시고, 인사를 하고, 일을 하고, 회의를 하고, 전화를 하고, 밥을 먹고, ... 이런 일상적인 사소한 일들조차 고통스러웠고 힘들었따. 우울증은 슬프고 괴로운 감정 탓에 정상적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도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상태임. 인생의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을 때도 극도의 슬픔을 느낌. 심지어 자살충동까지 이어지는 극심한 고통의 우울상태다. 통계상 우울증으로 매 30초마다 세계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 급격한 기분변화에 중점을 두는 의사와 만나면 양극성 장애로 진단받고, 리튬이나 발프로에이드 같은 약을 처방받음. 의사가 환자가 나타내는 절망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으면 주요 우울증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항우울제가 제공됨.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주의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의사들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로 분류하고 리탈린이나 다른 자극제로 치료한다. 그러다 병원관계자 중 누군가 우연히 그 환자가 트라우마를 경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환자가 자진애서 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면 비로소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진단을 받는다.  (벨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 다리가 부러지면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감염이 의심되면 피검사로 확인하고, 암에 걸린 듯하면 조직을 검사해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과 진단은 객관적 데이터 없이 환자의 증상위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진단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한 환자를 두고도 어느 의사는 양극성 장애로, 또 다른 의사는 우울증으로, 또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다른 진단을 받을 수 있다. 정신과 진단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단에 따라 치료가 정해지기 때문. 잘못된 치료는 환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확한 진단은 사람을 살리지만, 부정확한 진단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 무기력한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한 상태다. 그들은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고 지인과 사회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려 하며, 감정적 허탈감에서 수반되는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증상이 타인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대하게 만든다. 누군가 나서서 도와주려고 해도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고집을 부리며, 결국 혼자 고립되고 만다.
- 우울증 환자의 주위 사람들은 환자 스스로 자신을 다스려주기를 바람. 우리 사회는 침울해할 여지를 여간해서는 주지 않는다. 환자의 배우자, 부모, 자녀들, 친구들은 자신도 의기소침해지기 쉬우므로 우울증에 가까이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에 질겁한다. 우울증 환자에게 공감과 이타주의를 표시하는 사람들도 잇지만 반감과 혐오감을 보이는 이들이 더 많다. 우울증에 걸린 후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으며, 사실 그것은 차라리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진실이다. (앤드류 솔로몬, 한낮의 우울)
- 만약 지금 당신이 우울증으로 인해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다면, 조바심 내지 말고 지금의 고통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점은, 동굴 속으로 피신해 머물러 있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것. 그리고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동안에도 순간순간 괜찮아질 때가 있다. 개그 프로를 보면서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따. "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 맞아?" 이런 식의 죄책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전혀 없다. 일상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고 있는데, 이렇게 즐거워해도 되는걸까라는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
- 우울증이라는 강을 한번 넘어갔다 온 사람은 작은 자극과 스트레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이거 또다시 시작되는 거 아니야?'하고 가슴 철렁 내려앉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다. 지난 세월의 고통스런 아픔과 메마른 감정의 가뭄으로 그 강의 폭은 이미 좁아져 있는 상태다. 그래서 두번째, 세번째 강을 건너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우울증이란 병에 걸리고 회복기에 들어서면, 수행하듯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면, 고통의 시간을 똑같이 반복될 것이다. 이젠 자기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돌아볼 때다. 지금까지의 습관적 부정적 사고방식과 평생 동안 지녀온 조급한 습관, 잘못된 자신의 신념 등을 인식하고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남에게 의존하기 않고 혼자의 힘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음공부를 통해 나의 감정을 이해하고 타인들의 마음까지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젠 정말 바뀌어야 한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왜냐하면 작은 자극과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마음이 쉽게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 지금은 고통에서 잠시 벗어났을 뿐. 아직도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들은 그대로 고스란이 남아, 언제 우울증이 또 다시 덮칠지 모른다.
- 역경과 어려움을 딛고 성장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경험과 사랑과 존중으로 유지되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는 단 한사람의 존재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의 원동력 역할을 한다.
-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 처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아가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극복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웠나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견디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도 말아야지. 하지만 결코 이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지. '가슴 검은 도요새'처럼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단 한사람이라도...
-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은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의 대양위에 뜬 섬일 뿐이다. 감정이 곧 인간이다.' 라고 말했다. 당신은 감정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 그리고 감정조절을 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감정조졸이란 모든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국내외에서 활동중인 심리치료사 권혜경은 저서 감정조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지 않고 참는 것이 감정조절이라고 오해"한다며,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 이 감정을 바로 없애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이 감정이 무엇인지 연구"하여 결국 감정이 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정을 가지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기쁨이조차 '도대체 얘는 왜 있는 거지'라며 슬픔이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픔은 타인과의 공감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더 깊은 유대관계를 맺게 해준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슬픔을 통해 더 풍성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고, 가족간의 사랑이 더 단단해졌다. 미국 임상심리학자 조지 보나노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연구해 '슬픔뒤에 오는 것들'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슬픔의 역할에 대해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슬픔은 사실상 분노와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싸울 태세를 취하게 하지만, 슬픔은 생물학적 체계를 둔화시킴으로써 뒤로 물러설 수 있게 한다.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속도를 늦추게 하여 세상마저 천천히 돌아가게 하는 듯하다. 사별한 이들은 종종 상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마치 슬로모션으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이야기한다. 세상사에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적어지면, 우리는 일상의 관심사를 잠시 잊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깊이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웃음을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우울한 동물이 당연히 가장 쾌활한 동물인 것이다.
- 나태가 죄였을 때는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기능을 할 수 없거나 망상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자신의 병을 인정했었다. 그런데 멜랑콜리가 심오함, 정신적 충문함, 복잡성, 심지어 천재성까지를 의미하게 되자 사람들은 의학적인 이유도 없이 우울증 환자의 행동을 흉내내게 되었고, 진짜 우울증은 고통스럽지만 우울한 행동은 즐거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긴 소파에 몇시간씩 늘어져 있고, 달을 바라보고, 실존적 질문들을 던지고, 어려운 일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고,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는 등 나태라는 금기가 막았던 행동들을 했따. (한낮의 우울)
- 이처럼 모든 창조력과 상상력은 멜랑콜리, 즉 우울감에서 시작되며 슬픈 감정에 대한 숭배는 이때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래서 진정한 인간의 존재로 개발되기 위해 멜랑콜리는 예술가들의 필수조건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 예술가들의 우울한 성향을 미화하는 것은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새로운 일은 아니다. 창의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우울 성향은, 현대에도 종종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예술가적 기질로 설명되기도 한다. 캘리포니아 얼바인대 신경생물학자 제임스 펄린은 감정에 따라 활성화되는 뇌 활동 변화를 살펴본 결과,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깊은 우울감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심리과학자 폴 앤드류와 앤더슨 톰슨은 논문을 통해서 우울증은 정신질환이 아니라 수십만년 동안 인간의 생존을 도와온 정신적 적응현상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코페르니쿠스, 구텐베르크, 보티첼리, 모차르트, 베토벤, 고갱, 고흐,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우울증으로 고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별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성과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부추겨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것은 곧 자기착취로 이어진다. 자기 착취는 주체가 스스로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성과사회, 즉 피로사회에서 개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것이다.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에서 '미래사회에서 인간은 자유와 기회를 획득한 대신 피로와 우울감을 얻을 것이다.'라며 이미 70년에 경고의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은 지금 우울증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정신의학은 과학이라기보다 예술에 가깝다. 정상과 비정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예술에서처럼 개성적이고, 다중적이고, 다의적이기 때문. 정상과 정신장애를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진단을 내릴 때 정신과 의사의 느낌은 물론이고 때로는 도덕적 판단에 의존할 때도 있다. 그래서 정신의학은 유사과학에 불과하다고 폄훼당하기도 한다. 정신장애를 정의하는 이론적 기준은 있지만, 현실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경계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회색지대가 매우 넓다. 인간의 행동과 경험 중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판단하는데는 언제나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마음의 사생활, 김병수)
-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아주 사소한 스트레스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싸우기 방어기제가 반사적으로 또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사람들의 뇌는 일반 사람들의 뇌와 해부학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다. 대개 이들은 오랫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온 경우가 많다보니 위협을 감지하는 뉴로셉션이 지나치게 작동하고, 그 결과 편도체가 과잉 활성화되고, 지나친 스트레스 호르몬 방출의 결과로 해마의 크기가 줄어들어 경험을 처리하고 소화하는 것이 남들보다 힘들어진다. 그러면 남들보다 더 민감하게 위협을 감지하게 되고, 또 이에 과하게 반응하는 악순환이 계속됨. 이렇게 행동의 신경생물학적인 배경을 알게 되면 사람을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하게 되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나쁜 사람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치유해줄 수 있게 된다. (권혜경, 감정조절)
- 정신질환의 원인이 뇌의 질환이라는 학파와 마음의 병이라는 학파가 오랫동안 대립해왔다. 정신의학자들은 뇌의 문제로, 심리치료사들은 마음의 문제로 설명.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고, 서로 다르다는 데서 기인. 그런데 2천5백년전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질환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크게 잘못된 것은,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와 정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말은 현대에 와서 뇌과학의 발전으로 증명되고 있다.
- 요즘 뇌과학의 눈부신 발달로 이전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신체적, 정신적 반응들이 이해되고 설명되고 있다. 이런 연구들을 통해 이제는 몸과 마음은 둘로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한 현상에 대한 두가지 다른 측면이라는 설명이 주를 이룬다. 신경세포인 뉴런이나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심장과 내장에도 있다. 몸이 단지 정신의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똑똑하게 상황에 대처하고 또 우리 저인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든 육체와 정신이 각각 자신이 아는 방법으로 이 경험을 처리하면서 계속해서 정보를 주고받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 우리 주변에는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홍보문구가 넘친다. '마음의 병은 누구나 걸립니다. 하지만 약물로 치료할 수 있어요. 그러니 정신과에 가서 의사와 상의하세요' 라는 교묘한 캠페인이다. 하지만 약물치료를 쉽게 봐서는 안된다. 정신의학자 사이토 다마키는 저서 '사회적 우울증'에서 우려를 표현한다. 약으로 마음을 다스리겠다는 대중의 요구에 의료산업도 열심히 부응하고 있다. 일부 악덕 클리닉은 자비진료 형태로 의사면허를 가진 판매원이 각종 향정신성 의약품을 판매한다. 제약회사들은 광고를 통해 가벼운 증상에도 항우울제를 복용하라고 부추긴다. 이들의 대의명분은 약을 통해 증상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신질환의 종류에 따라 너무 빨리 치료하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 특히 가벼운 질환에 다짜고짜 약물치료를 시작하면 오히려 증상이 악화되거나 약물에 대한 의존증이 생길 수 있다. 과거의 우울증 치료는 자살을 시도할 만큼 심한 우울증 환자를 죽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미국에서 프로작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가져온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대단했다. 언론에서는 이 약을 먹기만 하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기적의 알략, 즉 해피메이커라고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누구나 별 부담없이 복용해도 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를 계기로 심리적 불안을 없애고, 조금 더 밝게 해주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면, 일상새오할에 어려움을 겪을 만큼의 증상이 아니더라도 약 복용을 꺼리지 않게 됨.
- 슬픔이 질병과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된다. 모든 낙담을 병으로 진단할 수는 없고, 모든 문제를 약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살면서 겪는 어려움, 가령 이혼, 질병, 실직, 금전적 곤란, 대인 갈등은 금지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어려움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 가령 슬픔, 불만, 낙담을 죄다 정신장애로 질병화하여 약으로 치료해서도 안된다. 우리에게는 회복력이 있다. 우리는 상처를 스스로 핥고, 자신이 가진 자원과 친구들을 동원하여 그럭저럭 견딘다. 감정적 통증을 느끼는 능력은 육체적 통증 못지 않게 크나큰 적응적 가치가 있다.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그런 감정적 통증을 모조리 정신장애로 바꿔버린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극적으로 달라질 것이고, 우리가 겪는 다채로운 경험이 칙칙해질 것이다. 슬픔을 견디지 않으면 기쁨도 겪을 수 없다. 헉슬리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멋진 신세계에서 고통없는 상태는 금세 머리가 멎은 상태로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 의사나 제조업체들은 약에 부작용이나 중독성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부작용을 경험하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다. 하다못해 두통이나 생리통에 먹는 진통제에도 부작용은 다 있다. 우울증 약의 복용은 성욕감퇴, 식욕저하, 위장장애, 졸음, 구역질 등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울증이 심하다면,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약을 먹어야 함. 증상이 경미한 사람이 우울증 약을 함부로 오남용하면 안 되겠지만, 중증 환자가 부작용 때문에 약을 안 먹고 버티는 건 훨씬 위험. 약을 복용할 때 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본인만 한다. 좋은 약과 나쁜 약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과 잘 맞는 약과 맞지 않는 약이 있는 것이다. 약의 종류와 복용량, 그리고 본인 외에는 알 수 없는 정서적 기분과 약의 신체적 부작용 등의 증상들을 정확히 메모해두자. 약의 부작용이 심하면 혼자서 판단하지 말고, 의사에게 전하고 상의해서 다른 약으로 바꾸거나 용량을 조절해야 한다.
- 심한 우울증에 빠지면 자신의 생각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짐. 생각하면 할수록 부정적 생각과 자책감만 늘어남. 이때는 부정적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 즉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육체적 운동과 산책, 정신적 독서와 대화 등의 활동을 통해, 부정적이고 불행한 생각에 잠기는 것을 차단시켜야 한다. 이것이 전문가들이 햇볕을 쬐라 하고, 산책과 운동을 하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다. 물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고 마음먹은대로 잘 되지 않는다. 상당히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고, 계획을 세워 조금씩 움직여야 한다.
- 심한 우울증 환자의 경우 활동 수준의 감소로 인해 자신을 비효율적인 사람으로 보는 악순환에 말려든다. 이런 시각으로 결국 자신감을 잃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비활동의 상태에 빠지게 됨. 또한 추론이나 계획 등의 지적인 기능들과 특정한 기술이나 훈련이 요구되는 활동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걷고 말하는 것에 이르는 신체적 활동도 수행하기 어려움. 이때 행동요법은 무기력을 없애고 환자를 움직여서 건설적 행동을 하도록 하는 데 상대적으로 효과적이다. 뿐만 아니라, 행동목표의 성취를 통해 성공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인지요법을 적용한 것보다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식의 잘못된 신념을 반박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우울증의 인지치료, 아론 벡)
-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은 꼭 해야 할 창조적인 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어떤 화가가 자살하려고 가스 스위치를 틀려는 순간, 조금 더 손을 대야 하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는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을 그냥 놓아둘 수 없어서 자살하려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그림의 마지막 손질을 했다고 한다."
- 우울증은 계층을 초월하지만 우울증 치료는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의 가난한 우울증 환자는 계속해서 가난한 우울증 환자로 남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우울증과 가는은 오래 방치될수록 그만큼 더 심각해진다. 가난은 우울증을 악화시키고, 우울증은 장애와 고립으로 가난을 심화시킨다. 가난은 사람을 운명에 수동적이게 만든다.
- 좋아하는 취미생활하기, 음악듣기, 영화보기, 수다떨기, ... 이런 것들이 단순히 기분이 조금 우울하고 침체되어 있는 가벼운 우울증에 도움이 됨. 그러나 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에 접어든 상태에서 기분전환만으로는 극복이 안된다. 차라리 빨리 집에 가서, 그냥 이불 속에서 꼼짝 않고 누워있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우울증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휴식이다. 우울증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견디는 것이지, 정신력이나 의지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 마음만 먹으면 된다고? 정신력만 있으면 어떤 난관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안 그래도 아픈 사람에게 정신력과 의지력을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 이건 마치 고혈압이나 당뇨환자에게 "의지력으로 혈압 좀 내려봐. 정신력으로 혈당 좀 떨어드려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는 아무도 밖에 나가서 운동좀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는 마음의 뼈가 부러진 상태라는 점을 기억하자. 의지력과 정신력이 약해서 그런 거라는 세상의 편견 탓에, 우울증을 겪고 있는 본인조차 우울증을 의지력과 정신력으로만 극복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난 정말 정신력도 약하고 쓸데 없구나"라는 자책감이 들어 병이 낫기는 커녕 더 악화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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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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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의 과학

심리 2018. 4. 8. 16:44

- 성 정체성과 성적 취향은 둘다 성호르몬과 발달 중인 뇌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됨. 고이가 입증한 것처럼 생식기 형성을 촉발하는 호르몬은 임신초기에 발생. 뇌 구조에 영향을 주는 호르몬 작용은 임신후기에 일어남. 두 사건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 때 트랜스젠더가 태어나는 것이다. 스왑은 세부사항들을 제쳐놓더라도, 페니스가 있다고 남자인 것은 아니고 질이 있다고 여자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생식기만 보고 뇌가 택한 방향을 정확히 알수는 없다. 짐작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스왑과 로셀리의 의견을 달가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뇌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완전 안드로겐 불감성 증후군 인간은 여성이다. 페니스와 수염이 있고 근육질인 사람이 자기가 여자라도 확신하고 여성처럼 행동하고 싶어하며 남성에게 매력을 느낀다면, 이 사람은 동성애자 남성이 아니라 이성애자 여성이다. 다른 남성에게 성적으로 끌리지만 남자처럼 행동하고 자신을 남자로 인식하는 사람은 남성이다. 다만 어쩌다 보니 동성애자의 뇌를 지녔을 뿐이다. 조직가설, 스왑의 연구, 로셀리의 연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생식기, 심지어 염색체조차 성행동과 무관할수 있다는 점이다. 이성애자 소년들이 향수 스프레이 통을 화염방사기로 개조하는 것은 페니스가 있거나 아버지와 뒤뜰에서 캐치볼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소년처럼 행동하는 것은 소년의 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소녀들은 이성애자 소년들과 비교했을 때 일반적으로 성 정체성에 조금 더 융통성이 있다. 하지만 평범한 이성애자 소녀는 인형놀이를 즐기고 가짜 티파티를 열고 변장하며 놀기를 좋아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또한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도 높다. 소녀의 뇌가 그렇게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 배란기는 월경주기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오로지 배란기에만 임신가능. 여성의 뇌는 이를 익히 안다. 여성호르몬은 생리적 변화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뇌에도 영향을 주어 난자가 낭비되지 않고 수정될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한다.
- 고급 속옷가게에 가지 않는 한, 사람들은 쇼핑을 성욕의 표현으로 생각하지 않음. 그런데 성욕은 유혹하거나 구애하는 행동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돈을 쓰고 옷을 고르는 데에도 은근히 영향을 미침. 우리는 성욕의 영향을 곧잘 부인한다. 예를 들어 배란일에 가까워지면 성욕이 강해지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여성이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하지만 배란기 여성에게 지난 며칠간 성관계를 가진 횟수를 물어보면 임신가능성이 낮을 때보다 많다. 배란기 여성은 다른 때보다 포르노를 훨씬 자주 본다. 순해 보이는 착한남자보다 거칠고 남자다운 유형을 훨씬 좋아한다. 아버지를 피해다니고 열량 섭취가 줄어들고 음식 대신 옷과 섹시한 신발을 사는데 돈을 쓴다. 그리고 현재 사귀는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성관계하는 환상에 자주 빠진다.
- 생쥐든 여성인든 이 욕망의 문이 열리면 몇가지 일이 벌어짐. 발정기의 생쥐나 배란기 여성은 갑자기 이성개체를 엄청나게 긍정적으로 인식. 통증처럼 부정적 감각은 줄어든다. 위험을 덜 경계하고 기꺼이 모험하려 든다. 설치류 암컷은 수컷 앞에서 깡충거리고 마구 뛰어다닌다. 여자는 남자에게 추파를 던진다. 듀랜트는 수전의 뇌가 바람둥이 청년이 다소 못된 남자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했다. "배란기에는 바람둥이 유형이 좋은 남자라고 과장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요. 단,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때만 그렇죠" 배란기 여성은 '저 멋진 남자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을리가 없더'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어떤 이들은 성관계할 때 여자가 칼자루를 쥐기 위해 남자가 발정기를 알 수 없게 진화했다고 주장. 어던 이들은 여자가 언제 임신가능한지 알 수 없게 해야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키울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곁에 머무르고 다른 남자로부터 보호해주기 때문이라고 주장. 그러면서 이것이 일부일처제가 나타난 경위라고 주장. 그러면서 이것이 일부일처제가 나타난 경위라고 설명. 그런데 두 사람이 행동을 통해 성관계하고 싶다는 신호를 서로 보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두 사람은 적절한 타이밍을 어떻게 알아차릴까? 실제로 여성에게 발정기가 있고 남성은 그것을 감지한다는 증거가 많이 발견되었다. 새로운 증거들에 따르면 남자는 인간 발정기를 암시하는 미묘한 단서들을 너무 좋아해서 돈을 내서라도 발정기인 여자 옆에 붙어 있으려 한다.
- 배란기가 아닌 여성에게서 채취한 냄새를 맡은 남성과 비교했을 때 배란기 여성에게서 채취한 냄새를 맡은 남성들은 원숭이처럼 테스토스테론이 솟구쳤다. 남자는 시끌벅적한 클럽에서 스트리퍼와 대화할 때도 몸을 밀착하면서 후각신호를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밀러는 여러 요소가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연구결과들을 보면 배란기에 여성의 목소리가 매력적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메커니즘으로 피부도 조금 좋아지고 얼굴도 예버집니다. 몸매도 약간 달라집니다. 엉덩이에 비해 허리가 가늘어지는 거죠. 여성이 배란기에 말도 더 잘하고 창의적이라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밀러는 남자들이 이런 단서를 알아차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배란기 여성의 행동 또한 달라진다고 추측. 배란기에 불안감과 경계심이 줄어들기에 남자에게 먼저 접근할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성적 매력과 몸매에 대한 자신감이 강해져 춤출 때도 한층 관능적으로 몸을 놀릴 가능성이 있음. 다르게 표현하면 배란기를 맞은 스트리퍼는 더 효과적으로 구애하고, 남자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같이 테스토스테론 양이 늘어나 더욱 집중하며 목표를 향해 돌진. 그래서 결국 지갑을 연 것이다.
- 스트리퍼들이 배란기의 위력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을 이용한 것. 남자들이 거리를 산책하며 마주친 여자들 중 누가 배란기이고 누가 아닌지 알아낼 수 없는 이유는 여자들이 영장류 암컷처럼 발그레한 엉덩이를 쳐들며 소문내고 싶지 않고, 성추행을 당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 그보다는 모자란 남자친구 몰래, 또는 유혹하려는 남자 옆에 있는 여자가 알아채지 못하게 특별히 호감이 가는 뛰어난 남자 몇명에게만 신호를 보내고 싶어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름. 그래서 젊은 여성은 모범생 청년에게 선을 긋고 바람둥이 청년에게만 마음을 연다. 아마 진화경쟁이 치열했을 것이다. 자연선택을 통해 임신가능성을 비교적 정확히 알아낸 남자의 후손들이 살아남고, 엄선된 잠재적 교미상대 몇명에게만 신호를 보낸 여자의 후손들이 살아남은 것.
- 성욕은 뇌에 에스트로겐이나 안드로겐이 많아질 때(배란기) 내부에서 시작되어 외부로 발산될 수 있음(몸이 흥분하여 섹스하고 싶어짐), 아니면 생식기를 자극하거나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환경(제복입은 남자, 속옷 매장 등)을 맞닥뜨렸을 때 외부에서 시작되어 내부로 들어올 수 있음. 인간은 전반적으로 각성된 상태에서 성욕을 잘 느낌. 꼭 성적 각성이 아니더라도 교감신경계가 흥분하면 된다. 번지점프나 스카이다이빙을 해봤다면 몇시간씩, 며칠씩 계속되는 들뜬 기분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고교물리 수업에서 낙제했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십대 소년이 묶어준 신축성 있는 밧줄을 두르고 다리에서 뛰어내리면 노르아드레날인이 쏟아져 나옴. 심박이 빨라지고 입이 마르고 주변을 경계한다. 위험해지면 싸우거나 도망갈 준비가 된 것. 그리고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마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짐. 그렇다고 다리에서 뛰어내릴 필요는 없다. 유능한 코미디언 쇼를 보거나, 에스프레소 몇잔을 마시거나, 운동을 하거나, 엉덩이를 때리는 것도 같은 효과를 낸다. 웃음, 카페인, 피로, 경미한 통증 때문에 흥분하는 것이다. 낯선 환경도 효과가 있다. 결혼한지 오래되어 서로와의 잠자리를 지루해하는 부부도 휴가를 가면 아침을 먹다 말고 서로 몸을 더듬곤 한다. 색다른 음식을 먹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생경한 거리를 거닐 때 산뜻하고 가벼운 불안감이 유도된다.
- 성욕에 대한 보상은 코카인과 암페타민에 취했을 때 얻는 보상과 정확히 같다.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암페타민을 숫쥐의 측좌핵에 직접 투여하면 숫쥐는 짝짓기 하고 싶어 어쩔줄 모른다. 피험자가 뇌에 전기자극이 오면 암페타민에 취했을 때처럼 성적 쾌감을 느낀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 코카인과 암페타민 상습복용자들을 뇌기능 자기공명영상 장치에 넣고 특징이 없는 사진, 야한 사진, 빨대나 면도날이나 흰 가루 등 마약투여를 암시하는 사진을 보여주면, 그들이 야한사진과 마약관련 사진을 볼 때 변연계가 같은 방식으로 활성화됨. 이것이 바로 휴 헤프너가 부자가 된 비결이다. 헤프너는 자기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여자의 가슴과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남자들의 타고난 욕망을 이해했다.
- 사정과 오르가즘을 경험하면 성인조차 뇌가 변화. 측좌핵과 소뇌에서 시냅스 증식이 활발해지고, 흥미로운 것은 측좌핵이 성욕보상과 관련된 신호에 민감해진다는 것. 그리고 뉴런도 변화. 유전자가 전사될 때도 장기적 변화가 일어나고 시냅스에도 영구적 변화가 일어남. 그러면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버린다.
- 낯선 새끼들을 무서워하던 암컷에게 어떻게 새끼들을 돌보려는 욕구가 생기게 했을까? 뇌의 보상체계는 욕구행동을 유발함. 에스트로겐의 작용으로 프로락틴과 옥시토신에 민감해진 내측시각교차앞구역은 태어난 새끼에게서 신호를 받아 활성화됨. 활성화된 내측시각교차앞구역은 복측피개부로 신호를 보내고, 복측피개부에서 도파민을 합성하여 측좌핵으로 분비. 그러면 어미가 된 암쥐는 새끼의 울음소리와 냄새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나머지 새끼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라면 전기가 흐르는 바닥도 거리낌없이 기어간다. 암쥐는 새끼를 곁에 두고 핥아주고 젖을 먹여 욕구를 완전히 충족하고 나면 보상이 생기므로 어미노릇이 참 즐겁고 멋진 일이라 느낌. 쥐의 경우 에스트로겐, 프로락틴, 옥시토신이 초반에 급격히 늘어나는 순간에 갑자기 어미로서 행동하기 시작. 그 순간 호르몬 증가를 막으면 쥐의 모성행동을 억누를 수 있음. 래리 영은 일본 과학자들과 함께 생쥐 암컷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옥시토신 수용체에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그랬더니 이 생쥐들은 어미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피더슨은 복측피개부의 옥시토신 수용체를 차단했을 때 모성행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이처럼 어미로서 행동하게 하는 것은 호르몬이지만 지속적으로 어미노릇을 하게 하는 것은 보상이다.
- 생물체가 환경과 상호작용할 때 유전자는 메틸화라는 화학반응을 통해 기능이 차단될 수 있다. 마치 보디가드가 파파라치를 따돌리기 위해 할리우드 나이트클럽을 빠져간가는 연예인 옆에 꼭 붙어 있듯이, 유전자가 메틸화되면 메틸기가 유전자의 특정 부위에 달라 붙는다. 이러게 되면 유전자를 켜고 끄는 스위치 역할을 하느 프로모터에 유전자의 내용(단백질 합성정보)을 복제하는 RNA중합효소가 접근하기 어려워짐. 유전자는 존재하지만 꺼져 있어서 기능이 차단되는 상황이다. 이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를 후성유전학이라 부름. 우리는 부모로부터 유전자라는 유산도 물려받고, 부모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후성유전적 유산도 물려받음. 자주 핥아주지 않는 어미에게서 새끼들이 태어나자마자 자주 핥아주는 어미에게 맡기면 맡겨진 새끼들은 커서 자기가 낳은 새끼를 자주 핥아준다. 자주 핥아주지 않는 어미가 키운 새끼들은 나중에 커서 자기도 똑같이 행동. 따라서 유전자가 달라서 차이가 난 것은 아니다. 유전자가 환경에 반응하여 일으킨 변화 때문에 차이가 난 것이다. 새끼에 대한 태도의 후성유전적 대물림은 설치류의 경우 생애 첫 주에 결정됨. 그 시기가 지나면 그대로 자리잡는다. 자주 핥아주지 않는 어미의 새끼는 나중에 어미가 되었을 때 똑같이 행동하고, 같은 태도가 대를 이어 되풀이됨
- 인간이 성교할 때 혈관으로 옥시토신이 분비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산파들은 수백년전부터 삽입성교를 하면 분만을 앞당길 수 있다고 말해왔다. 요즘 산부인과 의사들은 자궁경부 확장기와 물풍선 장치로 같은 효과를 냄. 이 장치들이 효과를 내고 성교를 통해 분만을 앞당길 수 있는 것은 들쥐가 짝짓기 할때나 암양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처럼 질과 자궁경부를 자극하기 때문. 이때 머피의 설치류 연구에서도 그랬듯이 뇌에서도 옥시토신이 분비될 가능성이 높음. 뇌에서 옥시토신을 분비하는 부위와 생식기는 신경으로 직접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진화과정에서도 원래 있는 도구를 새로운 용도로 사용한다.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은 진화생물학 용어로 굴절적응(선택적 진화)의 예이다. 굴절적응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이나 회로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는 현상을 가리킴. 거머리는 인간처럼 여분의 물과 노폐물을 몸밖으로 배출하려고 오줌을 눈다. 그런데 오줌에서 많은 정보를 얻기도 한다. 이를테면 옆에 있는 거머리가 짝짓기를 원하는지 않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포유류도 오줌을 의사소통에 이용.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하면 개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기가 좋아하는 지형마다 오줌을 조금씩 뿌리느라 바쁘다. 오줌을 통해 신호를 보내는 것. 포유류는 오줌에서 제법 많은 정보를 얻음. 포유류 가운데 몇몇 종은 오줌으로 짝짓기에 관심이 있는 개체를 알아본다. 많은 생물종이 오줌으로 영역을 표시하여 그 장소가 자기것임을 온 세상에 알림. 어떤 종은 영역을 표시하는데 오줌말고 냄새샘을 이용. 78년과 84년에 과학자들은 햄스터 수컷의 내측시각교차앞구역과 시상하부 전엽에 바소프레신을 주자. 그러자 햄스터 수컷은 엉덩이의 냄새샘을 미친듯이 발동시켜 영역을 표시했다. 개구리는 오줌이나 냄새샘을 사용하지 않고 소리를 낸다. 개구리 수컷은 개골개골 울면서 암컷에게 자신이 존재를 알리고, 몇몇 개구리종은 울음소리로 영역을 표시하기도 한다. 울음을 유발하는 것은 개구리 뇌에 작용하는 바소토신(바로프레신과 비슷)이다. 바소토신이 수분배출을 막음으로써 체내압력을 높여 개구리가 우렁차게 운다는 증거들이 있다. 따라서 바소토신은 개구리의 짝짓기 관련 의사소통과 영역표시에 매우 중요함
- 바소프레신은 부정적 표정의 얼굴을 잘 기억하게 해줌. 하지만 당신이 배우자나 영역을 지키느라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상대의 감정을 파악하느라 너무 신경쓰지 않는 편이 낫다. 상대에게 지나치게 깊게 공감하게 되면 도리어 자기 목숨이 위험해진다. 초원들쥐든, 원숭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 사랑은 중독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사랑을 중독장애라 불렀다. 물론 사항은 진화과정에서의 적절하고 건강한 적응기제이기도 하므로 사랑이 장애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마약처럼 우리를 사로잡고 마약을 복용할 때와 같은 뇌회로를 작동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강도의 차이가 유일하게 다른 점이다. 마약은 사람사이의 유대보다 훨씬 강력하다. 성적 황홀감을 느끼는 동안, 페티시와 배우자 선호가 발달하는 동안 활성화되는 뇌회로는 마약을 복용할 때 기분좋아지게 하는 회로와 겹친다. 사랑과 마약은 대체로 뇌의 같은 구조물, 같은 신경화학물질에 작용하고 같은 변화를 일으킴. 개별세포 차원에서도 사랑과 마약은 같은 현상이다. 예를 들어 쥐에 메스암페타민을 투여할 때 자극되는 뉴런은 짝짓기 할 때 자극되는 바로 그 뉴런이다.
- 뇌는 마약에 적응하며, 보상체계가 오작동할 수 있다. 상습적으로 마약을 남용하면 중간변연계의 도파민 회로가 재구성되어 특히 측좌핵에서으 도파민 작용이 달라짐. 마치 스위치를 켜듯이 마약에 대한 욕구가 좋아하는 마음에서 갈구하는 상태로 변화. 처음에는 도파민 작용이 중독자가 기분좋은 욕구를 느끼는 동기를 제공해줌. 그러면 뇌에 맥락적 신호를 긍정적으로 새겨 욕구를 완료하고픈 마음이 강해짐. 그러나 중독자는 나중에 쿱이 말하는 부정적 동기부여현상을 겪음. 마약을 향한 욕구 때문에 예전처럼 간절한 기대와 황홀감, 충동에 휩싸이는 대신에 불안과 불쾌감, 의무감이 차오름. 중독자는 마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울며겨자먹기로 복용하는 지경에 이름.
- 부정적 동기부여가 주로 휘두르는 무기는 부신피질자극호르몬방출인자. 이는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에 작용. 편도체와 부신피질자극호르몬 방출인자 체계가 미친듯이 돌아간다. 그래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둘중 하나다. 마약에 중독되면 이중으로 얻어맞는 셈이다. 보상도 잃고 뇌의 스트레스 반응이 활성화된다. 곰에 쫓겨 나무위로 올라가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달려오는 곰을 본 사람의 뇌에서는 부신피질자극호르몬 방출인자가 서둘러 수용체에 결합하고 HPA축이 활성화된다. 갑자기 에너지가 솟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냅다 나무위로 올라간다. 나무 위에서 곰이 올라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복측피개부에서 오피오이드가 분비됨. 그러면 차분해지면서 이 난관을 어떻게 벗어날까 생각할 수 있게 됨. 운이 좋으면 곰이 떠나고 땅으로 다시 내려감.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며 저녁 때 와인을 마시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까 궁리한다. 그런데 복측피개부에서 오피오이드가 나오지 않으면, 곰이 떠나고 나서도 겁에 질려 땅으로 내려오지 못한다. 이것이 중독자에게 벌어지는 현상. 보상회로가 망가져 부신피질자극호르몬 방출인자와 HPA축이 쉬지 않고 활성화됨. 그래서 초조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동을 하라고 강력히 요구한다. 중독자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려면 자연적 보상은 아무 효과가 없다. 마약을 더 복용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 실험결과 유대를 형성한 초원들쥐 수컷에게서 암컷을 앗아가면 수컷은 기운이 다 빠져버리고 상실로 인한 압도적 불안을 처리하기 위해 스트레스에 수동적을 대응. 암컷과 헤어졌을 때 이것 때문에 수컷의 기분이 그토록 나빠진 것. 심히 우울하게 행동해서 기분이 영 좋지 않게 된다.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부정적 감정에 휩싸여 비참해지는 것이다.
- 헤어진 직후의 스트레스와 그 이후의 만성 스트레스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심하다. 이혼 중에는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짐. 막 이혼한 사람은 병원에 자주가고 기혼자보다 급성질병이나 만성질병이 자주 걸리며 감염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더 높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갓 결별한 남자는 같이 잘 여자를 찾아 나이트클럽을 얼쩡거림 자유를 만끽하는 대신, 오히려 여자보다 더 괴로워함. 어쩜녀 남자는 감정을 모조리 배우자에게 쏟는 반면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도 감성적, 사회적 지지를 주고받기 때문.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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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훔친 사람들

심리 2018. 4. 4. 20:20

- 플라톤은 엑스타시스를 일반적인 각성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강렬한 희열과 함께 더 큰 지성과 강력하게 연계되는 변성상태로 설명. 현대 과학자들은 약간 다른 용어로 설명하는데, 그들은 이 경험을 집단몰입이라고 부름. 그룹 지니어스에서는 이렇게 설명함. '한 집단이 최고수준의 능력을 발휘하고...빠른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행동과 인식을 통일해 임기응변으로 즉각 맞춰나가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하다.'
- 의식적 사고는 강력한 도구지만 느리고 한번에 아주 적은 양의 정보만 처리할 수 있다. 반대로 짧은 시간내에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무의식은 대단히 효율적임. 엑스타시스에 이르면 의식은 휴식을 취하고 무의식이 주도권을 쥔다. 이때 노르에피네프린과 도파민을 비롯해 성과를 높여주는 여러 신경화학물질이 분비됨. 이 두 물질은 집중력과 근육반응시간, 패턴인식능력을 개선함. 무의식이 주도하는 가운데 이들 신경화학물질이 작용하면 어두운 방에서도 빠른 속도로 미세한 표정을 읽을 수 있다.
- 스탠퍼드의 사회학자 프레드 터너는 버닝맨 축제가 실리콘밸리 사람들에게 주는 매력은 많은 사람이 집단의식을 경험하게 만든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집단의식은 공학적 작업을 일종의 공동체 내 직업적 무아지경으로 바꿔놓는다. 터너가 조사대상으로 삼은 한 구글인은 항공우주 부문 발화팀에서 경험한 일을 설명했다. "완전히 집중한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 자아는 끼어들 틈이 없었지요. 우리는 긴밀하게 협력했습니다. ... 팀이 발산하는 몰입의 느낌이 좋았어요. 그것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함께 몰두할 때 맛보는 엄청나게 황홀한 느낌입니다."
- 네이비실의 스위치처럼 구글인의 이 공동체내 직업적 무아지경은 뇌 기능 변화에 의존. 옥스퍼드 신경심리학과 몰리 크로켓은 "버닝맨 같은 축제에 참가해 명상을 하거나 무언가에 몰입하거나 환각제를 섭취하는 것은 공통의 신경적 기질에 의존한다. 이 경로중 다수에 세로토닌 계통을 활성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라고 설명. 세로토닌만 이런 협력적 경험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아님.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엔돌핀, 아난다미드, 옥시토신 등 몰입상태에서 분비되는 모든 신경화학물질은 대개 낭만적 사랑을 뒷받침하고, 엔돌핀과 옥시토신은 어머니와 자녀 혹은 친구와 친구를 이어줌. 그리고 아난다미드와 세로토닌은 신뢰, 개방성, 친밀성을 심화함. 이들 화학물질이 집단구성원 사이에서 동시에 작용하면 결속이 긴밀해지고 협력이 잘 이루어짐. 페이지와 브린, 그 밖에 구글의 다른 많은 엔지니어는 사막에서 이러한 협력과 공동체 내 직업적 무아지경을 발견. 이는 함께 일하는 더 나은 방식을 제안한느 변성의식 상태이자 예비리더가 직접 체험해야 하는 느낌이었다. 슈미트가 뜨거운 열기, 모래폭풍, 잠들지 않는 밤, 상대가 누구든 신경쓰지 않는 버닝맨 축제의 이상한 분위기를 견뎌냈다면 꿈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 엑스타시스는 비일상적 의식상태의 구체적 성역을 의미. 존스 홉킨스 대학의 정신병리학자 스타니슬라브 그로프는 이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함. "극심한 공포부터 황홀감까지 심신의 다양한 징후가 드러내는 극적인 감각변화, 강렬하고 종종 특이한 감정, 사고과정 및 행동의 심대한 변화가 특징이다.  비일상적 의식상태는 형태가 다양하며 일상생활중에 여러 기법으로 유도되거나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이렇듯 폭넓은 영역에서 3가지 특정범주에 초점을 맞췄다. 첫번째는 몰입상태, 집단몰입 절정에 오른 순간, 네이비실이 알 와주를 생포한 경험, 그리고 구글이 사막에서 활용한 것이다. 두번째는, 주문, 춤, 명상, 성, 착용하는 기기로 자아를 차단하는 사색적이고 신비한 상태. 세번째는 최근 수십년만에 흥미로운 약리학적 발견을 이룬 환각상태다. 이 세가지 범주가 여기서 다루는 엑스타시스의 영역이다
- 정상적인 정체성의 한계에서 벗어나면 삶과 간혹 반복되는 삶의 이야기를 신선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월요일 아침이면 여전히 부모, 배우자, 직원, 상사, 이웃 등 일상적 역할의 제복으로 돌아가겠지만 무아성 상태에서는 그것이 단지 지퍼가 달린 의상일 뿐임을 깨닫는다. 하버드대학 로버트 케건은 이 지퍼를 여는 일을 가리키는 말을 만들었다. 그는 이를 '주체-객체 전환'이라 부르면서, 자기계발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 그의 관점에서 주체는 한마디로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이다. 객체는 우리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채 바라보고 이름붙이고, 이야기하는 대상이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귀속되지 않고 어느정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 삶과 역경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 시간이 흐르면서 실바는 이 변화를 정확히 인식했다. "저 자신을 잊을 때마다 좀더 객관적인 관점에 서게 되더군요.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매번 세상이 약간 더 넓어 보이고 신경증은 약해졌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진정한 차이가 생겼지요." 이 말에는 케건이 제시한 요점이 담겨 있다. 그는 '벅찬 삶 속에서'라는 책에서 주체-객체 전환을 잘할수록 모순과 상반석, 복수의 사고체계를 훨씬 잘 받아들이는 세상을 구추갛기 시작한ㄷ. 이는 자아가 특정한 의식형태를 보호하고 동일시하기 보다 여러 의식상태를 거친다는 것을 의미. 자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관점을 얻는다. 즉, 우리가 입은 의상에 주관적으로 동화하지 않고 그 의상을 객관적으로 인식. 이 경우 더는 맞지 않는 의상을 버리거나 심지어 새 의상을 만들 수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에 무아성의 역설이 있다. 주기적으로 자아를 버리면 자신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 우리가 의식상태에서 몰입을 하면 6가지 강력한 신경전달물질인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 엔돌핀, 세로토닌, 아난다미드, 옥시토신이 다양한 순서와 농도로 분비됨. 반면 변성상태에서는 뇌가 만들어내는 이들 6대 쾌락 물질이 동시에 분비됨. 이는 수월성을 뒷받침하는 생리적 토대로 어떤 일로 변성상태에 이르면 기분이 좋아져 가급적 빨리 다시하고 싶어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몰입을 연구하던 초기에 피실험자들은 몰입상태가 중독적이라고 했고, 그것을 다시 경험하려 특별히 애쓴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몰입'에서 이렇게 썼다. 몰입경험은 삶의 경로를 다른 차원으로 높여준다. 소외는 참여에 길을 내주고 즐거움이 권태를 대체하며 무력감은 통제감으로 바뀐다. 본질적으로 보상을 받는 경험을 하면 삶이 정당성을 얻는다. 해야 할 일을 억지로 할때와 달리 쾌락물질이 분비되는 경험을 하면 달력이나 코치가 없어도 계속 해낸다. 이 경험이 주는 본질적 보상이 우리를 이끌기 때문
- 심리학자 매슬로는 '종교, 가치관 그리고 절정경험'에서 아주 많은 사람이 대단하고 지고하게 받아들이는 이 경험은 그 자체뿐 아니라 삶 자체를 정당화한다고 썼다. 이 사실은 실바가 '그런 상태에 이르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어서' 커런트 TV를 그만두고 동영상을 만드는 불확실한 일에 뛰어든 이유를 말해준다. 또한 이것은 액션 스포츠 및 모험스포츠 선수가 목숨과 온몸을 거는 이유이자, 영적 구도자가 신과 접하기 위해 기꺼이 의식주를 포기하는 이유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기술에서 '돈과 권력, 위신, 쾌락추구가 지배적인 문화에서 특별한 이유없이 이 모든 목표를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들이 기쁨을 주는 모호한 경험을 하려고 물질적 보상을 포기하는 이유를 밝혀내면 일상생활을 더 의미있게 해줄 교훈을 얻을 수 있다'라고 썼다.
- 엑스타시스에 이르는 경험은 간혹 뇌가 노르에피네프린과 도파민을 체내에 분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 신경화학물질은 심박수를 높이고 집중력을 강화해 주의를 기울이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경우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보통 무시하거나 간과하던 정볼ㄹ 더 쉽게 얻음. 또한 이 신경화학물질들은 집중력을 높이는 한편 뇌의 패턴인식 능력을 강화해 입력된 모든 정보가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도록 도움. 이런 변화가 일어날 때 뇌파는 불안정한 베타에서 안정된 알파로 바뀌어 마치 꿈꾸는 듯한 상태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러면 우리는 느긋하면서도 기민한 상태로 별다른 내적 저항없이 여러 관념 사이를 오갈 수 있다. 뒤이어 전전두피질의 일부가 차단되기 시작. 이때 우리는 일시적 전두엽 기능저하에 따른 무아성, 탈시간성, 수월성을 경험. 즉, 내면의 비평가가 말하는 '이미 알고 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목소리가 잠잠해지고 과거와 미래의 방해요소가 힘을 잃음. 이 모든 변화는 우리가 입력된 데이터에 적용하는 필터를 치워 신선한 관점과 보다 강력한 관념의 조화에 접근하도록 해준다.
- 엑스타시스로 더 깊이 들어갈 경우 뇌에서 엔돌핀과 아난다미드가 분비됨. 두 물질은 통증을 줄여 육체적 고통에 따른 주의 분산을 막으며 현재 일어나는 일에 더 집중하게 해줌. 특히 아난다미드는 개별적 관념 사이에서 먼 연관성을 파악하는 병렬적 사고를 강화하는 역할도 맡는다. 포스트잇, 무지개링, 고무찰흙, 초강력접착제를 비롯한 다른 획기적 제품은 모두 생각지도 않던 새로운 용도를 적용함으로써 탄생. 이는 부분적으로 아난다미드의 작품이다. 뒤어어 정말로 깊이 몰입하면 뇌파가 다시 변하면서 최면에 걸린 듯 세타 영역으로 접어든다. 이 뇌파는 대개 휴식과 직관에 도움을 주는 렘수면 상태에서만 생긴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의 여운속에서 방금 드러난 정보를 종합하며 평화, 안녕, 신뢰, 사회성을 만끽한다.
- 90년대 티벳불교를 연구한 연구자들은 오랜 명상수련이 감마 영역에 속하는 뇌파를 생성한다는 사실을 밝힘. 감마파는 새 아이디어를 처음 조합하거나 새로운 신경회로가 열릴 때처럼 주로 결합하는 동안 드물게 생김.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아하!하고 깨닫는 순간과 유레카를 외칠 때 우리는 결합을 경험함. 이는 명상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 문제는 이 능력을 얻으려면 무려 3만 4000시간(약 30년)이상의 수련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단기적 명상이 정신적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기 시작. 무엇보다 그들은 구도적 측면을 제거해도 비슷한 결과를 얻는 지 연구했는데, 일단 기간을 대폭 줄여도 무방한 것으로 나타남. 초기 연구는 8주에 걸친 명상수련으로 집중력과 인지능력이 상당히 개선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연구에서는 수련기간이 5주로 줄었다. 뒤이어 09년 노스캐롤라이나대 심리학자드링 4일만 명상을 해도 주의력, 기억력, 각성, 창의성, 인지적 유연성이 상당히 개선된다는 사실을 발견
- 사악한 문제에는 쉬운 해답이 없다. 그런 탓에 이성적이고 이원적 논리는 무너지기 십상이고 일반적 도구로는 실패함. 반면 비일상적 상태가 안겨주는 정보의 풍부성은 특별한 관점을 제공하며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연결관계를 파악하게 해준다. 어떤 수단을 활용하든 상관없다. 마음챙김 수련이든 장치를 이용한 자극이든 약물이 일으키는 점화든 최종결과든 하나같이 상당하다. 그 이득을 생각해보라. 창의성은 200%, 학습능력은 490%, 생산성은 500%가 향상된다
- 육체의 장벽은 본질적으로 금욕적이다. 그래서 고통이 없으면 성취도 없다고 말한다. 기도와 명상 같은 내면적 촉매로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변성상태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겨딤. 몰입이나 환각처럼 일시적이고 쾌락적인 상태는 오랜 세월에 걸친 기도아 명상을 대체할 수 없음. 저술가 햄 해리스는 최근 발표한 베스트셀러 '나는 착각일 뿐이다'에서 무엇이든 깨달음에 따른 궁극적 지혜는 일시적 경험과 거리가 멀다. 절정을 경험하는 것은 좋지만 진정한 자유는 깨어있는 삶과 일치해야 한다'고 강조
- 카페인, 니코틴, 알콜처럼 국가의 장벽안에 안착한 3가지 약물을 생각해보자. 커피타임, 담배타임, 해피아워(할인 또는 무료로 술을 제공하는 시간)는 현대인이 문화적으로 가장 신봉하는 약물의식이다. 3가지중 2가지는 너트의 순위에서 톱 10에 들어가는데도 말이다. 서구세게에서 이 3가지 의식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직장은 거의 없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시장경제가 최적으로 돌아가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 가능한 오래, 열심히 일할 직원이 필요함. 그래서 자극제를 즑는 별도의 휴식을 제도적으로 승인하고 사회적으로도 지원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칵테일이 등장한다. 마음을 달래주는 알콜 효과 없이 담배와 커피에만 의존하는 일꾼들은 2주안에 지치고 말 것이다. 가끔 술을 마시게 하면 폭넓은 경제목표과 맞물리도록 세심하게 조정한 자극-집중-완화 주기가 완성됨. 멜리사 그렉은 '애틀랜틱'에 실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쟁이 심한 비즈니스 환경에서 회사원들이 성과개선 약물에 의지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자리를 유지하려면 인맥관리가 필요한 오늘날, 기분좋게 해주는 약물은 오후 5시 이후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자연스런 보완물이다. 언제나 네트워크에 연결된 세상에서 직업적 신뢰를 얻으려면 매력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기분고양제와 신경안정제를 신중하게 섞어서 활용해야 한다"
- 표정은 감정에 내장되어 있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보톡스는 슬픈 표정을 짓지 못하게 만들어 우울증을 완화하지만 주위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저해하기도 함. 사람은 서로의 표정을 흉내내면서 공감하기 때문. 보톡스를 맞으면 흉내를 내지 못해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약간의 주름을 되찾은 니콜 키드먼이 오히려 안도할만하다. 더 중대한 사실은 이들 연구가 생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 다시 말해 탈체화된 인지, 즉 생각이 두 귀 사이의 1300그램짜리 회백질에서만 이뤄진다는 관념을 체화된 인지, 즉 생각을 신체전반에 걸친 통합적 경험으로 보는 관념으로 옮겨버린다. 가이 글랙스턴은 뉴욕지와의 인터뷰에서 "몸, 내장, 감각, 면역계, 림프계는 즉각적이고도 복잡한 상호작용을 하므로 목에 선을 긋고 이 위는 똑똑하고 아래는 하찮다고 말할 수 없다"고 지적. 실제로 똑똑함과 몸이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있기에 똑똑한 것이다. 심장에는 감정, 지각,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뉴런이 4만개나 있다. 위장과 내장은 5억개가 넘는 신경세포, 1억개의 뉴런, 30종의 신경전달물질, 몸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90%로 이 네트워크를 완성한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이 두번째 뇌는 육감이라는 오랜 개념을 실증적으로 뒷받침. 이 전신 지각은 쉽게 영향을 받음. 예를 들어 피실험자들에게 차가운 얼음물이 든 잔을 준 다음 낯선 사람을 소개하면 소개받은 사람에게 의혹을 보내며 차갑고 냉담할 거라고 평가. 반면 뜨거운 커피를 주면 쉽게 신뢰함. 몸에 전해지는 온기가 인지적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 경우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상대를 따뜻하게 받아들임
- 정신약리학자들은 지난 수십년간 야생동물들이 활용하는 변성의식 기법목록을 작성했는데 그 수치가 상당함. 개는 두꺼비를 핥고, 말은 로코초(독성이 있는 콩과 식물)에 열광하며, 염소는 환각 버섯을 먹는다. 새는 대마씨를 씹고, 고양이는 캣닙(박하류에 속하는 허브)을 즐기며, 왈라비는 양귀비 밭을 유린한다. 사슴은 광대버섯을 탐닉하고, 개코원숭이는 이보가(나무뿌리에 환각성분이 있음)를 선호하며, 양은 환각성 이끼를 즐김. 그리고 코끼리는 발효한 과일에 취한다.(양조장을 습격하기도 함)
- 흥분제를 찾고 섭취하는 것은 생리적으로 일반적 행동이다. 어떤 의미에서 동물들이 환각성 흥분제를 찾는 것은 예외가 아닌 규칙이다. 이 사실을 토대로 시걸은 "흥분제로 도취상태에 빠지려 하는 것은 유기체가 지닌 원초적 동기다'라느 결론을 내림. 자아를 벗어나려는 욕구는 아주 강력해서 음식, 물, 섹스에 이어 행동을 좌우하는 네번째 욕구로 작용. 중요한 무제는 그 이유다. 인간의 경우처럼 동물에게도 도취는 생존을 위한 최선의 전략이 아니다. "고속도로에는 취한 새의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다. 또한 고양이는 캣닙 중독의 대가로 뇌 손상을 입는다. 대마에 중독된 소는 결국 죽을수도 있다. 흥분제에 취한 원숭이는 새끼를 무시하고 안전한 무리를 벗어나 떠돈다.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엑스타시스는 현재의 순간에 완전히 집중할 때만 나타남. 예를 들어 명상을 할 때 호흡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 리듬을 타고 현재로 들어가기 위해서임. 환각제는 감각을 데이터로 압도해 매초 많은 정보를 쏟아붓기 때문에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기가 불가능함. 몰입을 추구하는 액션 혹은 모험 스포츠 선수에게는 위험이 같은 기능을 함. 영국의 비평가 새뮤얼 존슨은 '아침에 목이 매달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놀라운 집중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 최근 과학자들은 세계에 있는 오랜 성지 중에 특별한 음향 효과를 내는 곳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 예를 들면 파리대학의 음악인류학자 이에고르 레즈니코프는 프랑스 아르시 쉬르 퀴르 동굴을 조사하다가 1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지점에서 다수의 신석기 시대 그림을 발견. 그림은 음향적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 바로 반향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지점에 그려져 있었다. 저수락 스티븐 존슨은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에서 레즈니코프의 이론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은 이 그림주위에 모여 음향을 마술적으로 증폭시키는 동굴의 반향을 이용해 일종의 주술적 의식을 치르며 주문을 읊거나 노래를 불렀다고 밝힘. 역사 전반에서 이런 추세를 조사한 음악학자들은 선사시대에 동굴에서 있었던 일이 중세 교회에서도 이뤄졌다는 사실을 발견. 가령 그리스인은 교회에 좁은 벽을 만들어 슬랩 에코 효과가 나도록 설계. 그러면 소리의 3중반사가 일어나 천사가 날갯짓하는 소리를 재현할 수 있음.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과 샤르트르 대성당의 고딕 아치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증폭시키는 거대한 서브우퍼 역할을 함. 이처럼 인간은 수천년 동안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음향을 조작해 왔다.
-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브레인'지에서 이렇게 밝힘. "모든 사회에서 음악은 사람들을 집단이나 공동체로 한데 묶는 기능을 한다. 음악이 발휘하는 힘 중에서 가장 극적인 효과는 무아지경을 유도하는 일이다. 열광적 노래와 춤, 격렬한 동작과 절규, 리듬에 맞춘 반복적 행동, 긴장한 듯 굳은 몸짓이나 고정된 자세로 드러나는 무아지경은 심오한 변성상태다. 이 상태에서 혼자 이를수도 있으나 집단으로 이르는 경우가 더 많다. 신경음악학이라는 신생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강력한 영상기술로 이 효과를 해독하기 시작. 음악을 들을 때 우리의 뇌파는 일반적 각성의식에 해당하는 높은 베타영역에서 명상적인 알파 및 세타 영역으로 내려감. 동시에 노르에피네프린과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는 내려가는 반면 도파민, 엔돌핀, 세로토닌, 옥시토신처럼 사회적 연대나 보상과 관련된 수치는 올라감. 여기에 박자, 주위 사람들과의 동화로 얻는 오락을 더하면 강력한 코뮤니타스 조합이 완성됨
- 수월성에는 다른 부작용이 있다. 그것은 보상과 관련된 모든 신경화학물질과 넘치는 영감이 결합하면 사람을 도취시킨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엑스타시스의 일시적 수월성을 맛본 후 삶은 항상 그래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쉬워야 한다고 생각. 그래서 환희 중독자나 몰입상태 추적자가 되어 뭐든 물 흐르듯 할 수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함. 가령 당신이 음식의 물기를 빼는 구멍난 그릇이라고 상상해보자. 절정상태에 들어서면 수도꼭지를 틀어 그릇에 물이 넘치는 상태에 놓인다. 물이 충분히 많은 경우 구멍으로 새도 그릇에 물이 찬다. 물이 넘치는 한 잠시라도 그릇이 된 기분을 느낌. 즉 완전한 존재가 된 듯 영감을 얻고 경건해진다. 그러다가 절정상태가 끝나 수도꼭지를 잠그면 물은 전부 구멍으로 빠짐. 짧은 시간내에 다시 처음상태로 돌아가고 넘치던 정보도 줄어든다. 조금전만 해도 쉽게 손에 넣었던 영감은 금세 사라진다. 그러면 새는 부분을 막는 지루하고 반복적 일을 할지, 아니면 다시 무아지경을 선사할 수도꼭지를 찾으러 나설지 결정해야 함
- 사랑은 내가 모든 것이라 말한다. 지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두 둑 사이로 내 삶의 강이 흐른다. (인도 철학자 니사르가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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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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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부터 줄곧, 데카르트주의는 마음이 몸과 떨어져 존재한다는 믿음을 고수.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윌리엄 제임스 같은 심리학자들인 성격과 감정을 신체의 상태와 연관지었다. 제임스는 감정은 다양한 내부기관의 물리적 변화, 즉 위의 수축, 심박수, 호흡률, 혈관 확장과 수축, 달리 말해 자율신경계에 의해 조절되는 신체변화에 대한 지각에서 일어난다고 제안.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의 정신상태가 이러한 신체변화의 결과라고 주장. 우리는 울기 때문에 유감스러운 것이지, 유감스러워서 우는 것이 아니다.
- 나이가 들수록 일생에 걸쳐 축적해놓은 정보도 많아짐. 그래서 심리학자들이 순행간섭이라 부르는 현상이 생긴다. 순행간섭은 과거의 기억들이 새로운 기억을 보유하려는 능력을 방해하는 현상. 오래 살수록 우리 기억속에 새로운 정보의 수립을 방해하는 항목들이 더 많아짐. 늙은 개에게는 새로운 재주를 가르칠 수 없다는 속담이 이 현상에 해당. 순행간섭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당신이 기억하길 원하는 새로운 정보를 반복적으로 검토하는 것. 여러번 반복하면 새 전화번호가 당신이 수년간 사용했던 오래된 전화번호를 결국 대체하게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정보가 오래된 정보를 대체할 것이다.
- 파스콸 레온같은 신경과학자들이 공감각을 더 많이 관찰해,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것처럼 감각들이 서로 엄격하게 경계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한 실험에서 그는 정상적 시력을 가진 사람들의 눈을 5일간 가렸다. 5일은 피험자들이 일차 시각겉질이 소리와 촉감을 처리하기 시작하도록 유도하기 충분한 시간. 이 변화의 속도 때문에 파스쿠알 레온은 '겉질의 연결이 새로 수립되는 일은 상당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몸감각과 청각, 뒤통수겉질 사이의 연결은 이미 존재했으며 아마도 이 실험 조건하에서 드러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대뇌겉질의 모든 영역이 다양한 감각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계산기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제시.
- 인정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 우리 모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조차, 공감적인 반응성에 있어 정서적 한계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결혼의 조화나 부조화가 두 동반자의 공감능력이 적절하게 맞는 정도로 종종 결정되는 모습을 나는 여러해 동안 관찰해 왔다. 만약 한명이 지나치게 공감적이면, 다른 한명은 감정적으로 옭죄는 느낌, 숨이 막히거나 사로잡힌 느낌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다른쪽 극단에서, 동반자중 한 명이 선천적으로 공감자원이 빈약하면 다른 동반자는 사랑받고 있지 않다거나 거절당한다고 느낌. 공감은 자력처럼, 딱 적당한 거리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두개의 자석은 너무 가깝게 놓이면 하나로 붙어버린다. 또 너무 멀리 떼어놓으면 자력이 전혀 작용하지 못한다. 자석은 동반자들 사이의 정서적 균형에서처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딱 적당한 양의 인력을 유지할 때에야 그 목적을 발현할 수 있다.
- 공감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개인적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느낄지 너무도 잘 상상한다. 갇혀 있다고, 질식해 죽을 것 같다고 느낀 그들은 탈출구를 찾는다. 탈출이 불가능하면 조바심과 분노가 솟구친다. 상대와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도록, 공감은 특정한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여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타심은 공감대상에 동질감을 느끼지만 통합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나타난다.
- 짝을 선택할 때 어떤 짝을 선택하는 것이 유전적으로 가장 이익이 될지 고민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진화이론가들은 우리가 항상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한다고 주장. 따라서 정신적인 특성이든 신체적 특성이든, 특정한 자질을 지닌 배우자를 끝까지 요구하는 여성 혹은 남성은 생존과 성공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유리한 유전형질들을 자신도 모르게 선택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 진화적인 원리로 짝 선택을 설명하는 것의 또 다른 약점은 삶의 단계에 따라 선호되는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젊을 때 우리는 사랑의 열병과 낭만적 사랑, 섹스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지도 모른다. 좀더 나이가 들면, 경력에 도움이 될 만한 시간을 얻고, 돈을 모으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다 안정적 관계를 원함. 이보다 더 뒤에는 동료의식과 지적인 흥미를 공유하는 데 가장 흥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서두른 결혼은 두고두고 후회한다는 격언은 열정이 사그러들었을 때, 배우자가 자신의 경력을 향상시키는 데나 아이들을 함께 양육하는 일, 지적이고 감정적으로 만족스러운 동행을 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충고해준다. 그러므로 짝 선택에 영향을 주는 인자들은 생애 단계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이 인자들은 단기간의 동반과계를 수립할때와 장기간의 동반관계를 수립할 때에 반드시 동일한 가치를 지니지도 않을 것이다
- 비록 몇몇 사랑에서는 정반대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끌린다가 맞는 이야기지만, 차이는 종종 결국 갈등, 적개심, 그리고 극단적 경우에는 투쟁 끝의 도피(이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달리 말하면 연인들 사이의 공통점이 많을수록, 그들이 서로를 안전하고 도움이 되며, 이해심이 많다고 지각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부교감 신경계가 확고히 장악해야만 한다. 그래야 정상적인 심박수를 유지하고 그에 동반해 마음의 평정을 낳을 수 있다.
- 분노는 독특한 얼굴 표정을 동반한다. 얼굴이 붉어지고 이마의 근육은 수축하며, 콧구멍은 벌름거리고, 턱은 앙다물어진다. 생리적 반응을 측정해 보면, 혈압은 상승하고, 맥박과 호흡은 증가한다. 화난 사람에서 이런 흥분의 고조는 뇌하수체 호르몬과 부신에서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증가한데서 연유. 이 호르몬들은 함께 작용하면서 투쟁-도피 반응의 화학적 토대를 이룸. 신체는 즉각적으로 행동할 준비상태가 된다. 이 소위 투쟁-도피 반응은 교감신경계가 작용하여 일어남 항상 분노와 불안 같은 다른 어두운 감정들과 연루됨. 반대로 긍정적 감정들은 부교감 신경계의 작용과 더 관련이 많다. 이러한 구분 때문에 특정한 감정들은 서로 동시에 경함할 수 없다. 당신은 화가 나면서 동시에 느긋해질수가 없다. 화가 나면 근육이 긴장되고 혈압이 높아지며 맥박이 증가해, 근육을 이완시키고 혈압과 맥박을 정상화시키는 부교감 신경계의 느긋하게 진정시키는 효과를 상쇄한다.
-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충동에 휘둘리게 되고, 반대로 지나치게 생각하면 사고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강박적 사고와 행동, 다른 사고장애들에 매이게 됨
- 우리는 뇌 속에 두가지 상보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첫째는 주의 네트워크로, 우리가 주변 환경에 집중하길 요구하는 정신적 과제들을 수행. 두번째는 몽상이나 자전적 기억, 미래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를 그려보는 일 같은 내부에 초점을 맞춘 과정들에 관여할 때 가장 활성화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다. 발달상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부위는 일곱살에서 아홉살 사이의 취학연령까지는 미성숙한 상태로 가장 기본적 수준에서 기능. 그뒤 몇년에 걸쳐서 이 영역은 보다 매끄럽게 응집된 상호 연관된 네트워크로 통합됨. 이 변형이 일어나는 시기에 정보, 특히 특정 경험에 대한 기억을 부호화하고 인출하는 아이의 능력이 발달한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성숙에 힘입어 아이들은 점점 자기 성찰과 스스로에 대한 정신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로 자기투사를 하는 일에 관여하는 소위 자전적 자아가 완성된다. 시간적 측면에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아이가 자기행동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인식하는 것과 평행하게 발달함. 일곱살과 아홉살 사이의 어느 지점에선가 그러한 책임을 인식하게 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도 기능적으로 성숙하게 발달하기 시작한다. 대략 다섯살이 되기전에 아이는 처음으로 의식을 느끼고, 사춘기 무렵까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기능은 성인수준으로 발달. 의식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의식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네트워크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다.
- 사람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자주 딴 생각에 잠김. 표본의 46.9%가 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두번째, 사람들은 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렇지 않을 때와 비교해 덜 행복하다고 보고했다. 잡념에 빠져 있을 때, 불쾌한 주제나 중립적 주제보다 즐거운 주제를 더 빈번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딴 생각에 잠겨 즐거운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가 자신의 현재 활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와 비교했을 때 더 행복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 발견은 또 다른 질문을 제기. 어느 쪽이 먼저인가? 현재의 불행이 딴 생각을 일으키는가? 아니면 딴 생각이 불행의 결과가 아닌 원인인가? 그 해답을 발견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자료를 시차분석 했다. 그 결과 딴 생각은 불행의 결과라기보다 촉진요인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인간의 마음은 딴생각에 잠기며, 딴생각에 잠긴 마음은 불행하다. 현재 일어나고 있지 않은 일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은 정서적 대가를 치르고 얻은 인지적 성취다. 이 결론이 당신에게 다소 놀랍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사람이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다면 그는 현자와 전문가들이 수세기 동안 지지헤온 격언, 지금 여기 있어라, 즉 '현재 자신이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도록 스스로를 단련하라'를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 격언은 전 세계 많은 사람의 삶에 대한 기본적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 뿌리를 내리면 가난과 질병, 개인적 문제와 가족의 문제 등 삶의 여건상 행복은 매우 얻기 힘든 것이 되어버려서 그들은 행복하지 않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백일몽의 형태로 딴생각에 잠기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현실로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단계들을 밟을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을 마음에 그릴 수 있게 도와준다.
- 딴 생각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활성은 뇌기능에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모두 준다. 과거의 경험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현재 상태와 연결시키면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진취적인 태도를 얻을 수 있따. 그러므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우리의 삶에 창조성과 혁신의 회로를 제공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불쾌한 경험을 했을 때 활용할 수 있는 해결책이며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감당할 수 없어 보일 때 달아날 수 있는 도피처이기도 하다. 동시에 하버드 연구가 제시하듯이, 불행한 마음의 틀을 키우지 않으려면 마음이 너무 멀리 헤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 그러므로 우리는 아마도 전반적으로는 딴 생각에 빠지려는 경향에 저항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에게, 행복해질 최고의 기회는 현재에 완전히 몰두하는 데서 온다고 수세기 이상 충고해왔떤 현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실제로 가장 현명한 일인지도 모른다
- 쉬고 있을 때조차, 손의 자세는 우리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특히 두가지 자세가 보편적이다. 첫번째, 움켜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손가락이 무언가를 움켜쥔 듯이 약간 구부러져 있으며 손이 대체로 신체의 다른 부위와 접촉하지 않는다. 두번째, 이완된 상태에서는 손가락과 손바닥이 무릎이나 신체 다른 부위 위에 반듯이 놓여 있다. 우리는 막 무언가를 집거나 움켜쥐려고 할 때 첫번째 자세의 손 모양을 취한다. 두번째 자세는 동작을 완료했을 때 취한다. 구두로 의사소통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손을 비슷하게 사용. 사람들은 무언가를 주장하고 싶을 때 손을 움켜쥔다. 움켜쥔 자세는 '의견을 말하고 마무리할 시간을 내게 조금 더 달라'는 의미. 말을 마치고 언쟁이 끝났을 때, 손은 천천히 펴지며 이완된 자세로 전환됨. 그러므로 쉬고 있을 때의 손 모양은 다른 사람들에게 지금은 말을 시작할 때인지 좀더 오래 기다리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미묘한 신호를 제공하며 예민한 관찰자에게는 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전달함
- 주관적 관점에서는 마음이 동시에 두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임. 두 생각이 1000분의 1초 간격으로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경험함. 그러나 전기생리학 연구들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어떤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의 빠른 전환이라는 것을 보여줌. 주관적인 경험은 두뇌의 인지처리 과정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표가 될 수 없다.
- 멀티태스킹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던 밴더빌트 대학교 연구진에 따르면, 이마엽 내부의 신경 네트워크는 우리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정보처리의 중앙병목 역할을 함. 뇌는 실제로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기 보다 순차적으로 처리하므로 멀티태스킹은 항상 부정적 수행결과를 낸다.
- 일련의 의식적 사고의 흐름 중에서 현재의 사고를 억제하려고 생각할 때 사고억제는 힘들어진다. 억제에 대한 메타사고가 이 시점에서 일어나지만 사고도 동시에 일어남. 사고(곰)와 메타사고(곰에 대한 생각을 없애려는 욕망)는 의식을 서로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충돌을 일으키며 함께 나타남. 그러므로 의식은 역설에 빠진다.
- 억제하지 않는 것이 마음속에서 원치 않는 생각을 몰아내고 한번에 한가지만 생각하는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궁극적인 기술이다. 베그네르에 따르면 '원치 않는 생각을 포용할 때, 억제가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는 압제에서 탈출한다', '우리는 더 이상 고민거리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 하고 생각을 떨쳐 내길 희망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제압할 수 없는 이미지들 때문에 괴롭하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 사항들을 향해 돌아서서 가까이 들여다볼 때, 그들은 사라질 수 있다.'
- 페이스북과 링크드인같은 소셜네트워킹 사이트는 우리의 구매습관, 구매패턴, 정치적 성향에 대한 프로필을 축적하여 사생활의 전통적 개념에 도전하고 있다. 이 프로필들은 모두 우리가 자유롭게 제출한 정보에 기초함. 전통적 방식처럼 자기 자신을 별개의 사적인 독립체로 생각하는 대신에 일종의 벌집형 사고(하나된 마음)의 일부가 되도록 고무되는 것이다. 벌집형 사고에서, 개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를 조사하여 얻은 즉각적인 인상들에 주로 기초해 자신의 의견을 형성한다. 즉 '내 생각을 결정할 수 있게 네 생각을 말해줘'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원래 SNS는 온라인에서 친구들의 네트워크를 수립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친구들의 근황이 궁금할 때 당신은 페이스북이나 유사한 사이트에 방문했다. 그러나 점점 SNS의 구성원들이 보고 듣고 읽고 구매하느 바를 형성하는 존재로 특성이 변하고 있다. 이러한 공유는 광고인에게 유용하다. 그러나 사용자에게는 덜 이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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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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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로 올라오는 불청객을 환영하자. 고통, 슬픔, 화, 절망의 응어리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여차하면 의식속으로 즉 우리의 거실로 올라오려 한다. 응어리의 크기가 커져서 이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청객이 올라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보면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의 진입로를 막으려 한다. 우리는 그들이 계속 지하실에서 잠들어 있기를 바란다. 그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거실에 늘 다른 손님들을 가득 채워 놓는다. 10~15분이라도 여유시간이 생기면 거실을 채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책을 집어든다. 텔레비전을 켠다.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한다. 거실에 손님들이 차 있으면 이 불쾌한 심리현상이 올라오지 않으리라 믿으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심리현상은 순환해야 한다. 그들이 올라오는 것을 차단하면 마음에 순환장애가 일어나서 몸과 마음에 정신질환과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 서양심리학은 안정되고 건전한 자아를 만들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서양의 정신치료는 아직 자아개념에 매여 있기 때문에 내면의 변화나 치유를 조금밖에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독립된 자아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다.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이해할 때, 무지는 치유되고 고통, 화, 질투, 두려움도 사라진다. 내가 홀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진실로 이해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그런 질문들을 넘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생명흐름의 연속체일 뿐이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 존재를 감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조상은 우리가 태어나기를 원했다. 사실 우리의 조상들은 늘 우리가 자신들의 뒤를 잇기를 바랐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 수만 있다면 부모의 행동 때문에 그렇게까지 상처받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은 때론 사랑으로 가득하고, 때론 화로 가득하다. 이 사랑과 화는 단지 그분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이전의 모든 세대들에게서도 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볼 수 있을 때 우리가 받는 고통에 대해 더 이상 부모님 탓을 하지 않을 것이다.
- 원칙상 과거는 지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이미지는 여전히 거기 남아 있고, 우리는 꿈속이나 깨어 있는 동안 가끔씩 과거로 돌아가 당시의 고통을 다시 체험하곤 한다. 우리는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 버리는 경향이 있다. 원리상 과거는 더 이상 여기 없으며 기억은 단지 과거를 담은 영화나 그림일 뿐임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은 연속상영되고 있고, 그 화면을 볼 때마다 고통이 엄습해온다.
- 내 안의 아이가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거기 있음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그 아이를 구출해 내야 한다. 자, 자리에 편히 앉으라. 그리고 자신을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두고는 내 안의 아이와 대화를 시도하라. '사랑하는 어린 동생아, 이제 우리가 다 자랐다는 것을 너도 알아야 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보호할수도 있고 자신을 지킬수도 있단다'
- 우리는 고통에서 달아나려 한다.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이 때로는 도움이 되는 유용한 존재라고 마음에게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심지어 고통의 장점에 대해 말을 할수도 있다. 고통 덕분에 이해심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 이해와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행복도 없다. 그러므로 고통은 행복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통을 안아주고 깊이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고통에서 배워야 한다. 사실 고통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고통을 받는 방법을 안다면 고통을 받아들여라. 당신이 그런 마음자세를 갖는 순간 당시은 이전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그리고 고통에서 행복이라는 연꽃이 피어날 수 있다.
- 마음이 다쳤을 때 가능한 두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하나는 우리를 더 화나게 하고 상대에 대한 보복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고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진정시키고 내면의 자비 및 이해와 접촉하여 평화로운 마음을 되찾는 사고방식이다. 후자를 선택할 때 상대방 역시 고통받고 있음을 볼 수 있고, 그때 우리의 화는 사그라진다
- 얼굴에는 수백개의 근육이 있는데, 우리가 화를 내거나 두려워할 때 그 근육들에는 많은 긴장이 쌓인다. 하지만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그 숨을 알아차리며, 숨을 내쉬고 그 숨에 미소지을 줄 아낟면, 이 근육들에 쌓인 긴장을 풀 수 있다. 우리 얼굴은 그런 호흡 한번으로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미소는 기적을 가져온다. 나는 내 눈에서 긴장이 풀리도록 한 후 나의 눈에 미소를 보낸다. 당신의 눈이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눈에 사랑이 담긴 미소를 보내보라.
- 연방죽을 보면 우리는 진흙이 없이는 연이 자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리석 위에 연을 심을수는 없다. 연꽃을 피우는 데 진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이해와 자비를 기르는 데는 고통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고통을 보듬어 안고 깊이 바라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저장식 깊숙한 곳에 들어 있는 두려움의 씨앗이 의식의 표면위로 떠오를 때 우리는 깨어있음의 씨앗도 함께 자라나도록 해야 한다. 깨어있음은 우리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고통이 거기 있음을 인식하고 감싸 안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 고통을 다루는 일은 독사를 다루는 일과 흡사. 독사에게 물리지 않고 잘 다루려면 우리는 뱀에 대해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스스로 더 강해지고 안정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독사와 대면할 준비를 마친다. 만약 독사를 계속 외면한다면, 어느날 예기치 않게 출현한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아픔도 마찬가지. 그것이 점점 커져 어느날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을 때만 고통을 초대해야 한다. 그리하면 고통이 왔을 때 안전하게 다룰 수 있다. 고통을 변화시키려면 그것과 싸워서도 안되고 그것을 없애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저 깨어있음의 빛으로 고통을 씻어 주면 된다.
- 지금 이 순간 머무는 것은 하나의 수행이고 훈련이다. 지금 이 순간 머무는 사람은 과거의 트라우마로 고통받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속에 신비하고 긍정적인 일들이 너무 많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놀며 삶의 경이와 깊이 접하는 것은 진정한 수행이다. 때로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기도 한데, 이는 우리에게 과거로 되돌아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 모든 욕망은 안전을 갈구하는 원초적 욕망의 연장성상에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아이는 늘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문제도 위협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의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계속 걱정하고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이 깨달음을 내 안의 아이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우리는 내 안의 아이에게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 홀로 산길을 걷거나 자두나무 숲과 포도밭 주변을 산책할 때 내 안의 아이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보라. '사랑하는 동생아. 너의 고통을 나는 알아. 너는 내안의 아이야. 내가 바로 너란다. 하지만 이제 우린 어른이 되었어, 그러니 이젠 더이상 두려워하지마. 우린 안전하단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 자, 내 손을 잡고 따라와 봐. 지금 이순간에 함께 머물지 않으련? 이제 과거라는 감옥에 갇히지 마. 자, 내 손을 잡고 함께 걸어보자. 한걸음 한걸음 즐겁게 걸어보자.'
- 깊이 보기 수행만이 우리 마음을 광대한 우주처럼 키울 수 있다. 크기를 잴 수 있는 마음은 크다고 할 수 없다. 참사랑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네가지가 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네가지 마음이라 하는데, 사랑하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 기뻐하는 마음, 똑같이 대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마음을 크기를 잴 수 없을만큼 크게 키우기 위해 우리는 이 네가지 마음을 수행한다. 마음이 커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어떤 고통도 마음에 담고 견딜 수 있다. 내면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더이상 고통받지 않게 된다.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마음을 강물에 비유 만약 흙 한저이 한잔의 물에 떨어진다면 우리는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물이 거대한 강물에 떨어진다면 우리는 그 강물을 아무 상관없이 쓸 수 있다. 강은 크다. 강은 흙을 받아들일 수 있고, 우리는 그 물을 마실 수 있다. 우리 마음이 작으면 다른 사람이나 사회적 불합리에서 오는 고통을 감내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음이 크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감싸안고 받아들이며, 그래서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 깨달음은 설거지나 상추를 기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깨어있음과 집중을 통해 살아가는 모든 순간 깊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구상하고 창작하는 일이 바로 삶의 이런 순간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음악을 작곡하고 시를 쓰기 시작하는 시간은 단지 아기를 낳는 시간일 뿐이다. 아기를 낳기 전에 먼저 아기가 우리 내부에 있어야 한다. 만약 아기가 우리 안에 없다면 아무리 오래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낳을 것이 없다.
- 지난 시간 동안 당신이 고통스러웠던 것을 알아. 그 고통에 나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어. 내가 깨어있음을 유지하지 못했어. 당신의 고통과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어. 내가 그런 상황을 악화시키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거야. 미안해. 나도 그런 걸 원하지는 않았어. 나는 당신이 행복하고 안전하기를 원해. 당신이 자유롭고 기쁘게 살기를 바래. 당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의 고통도 충분히 모르기 때문에 때로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했어. 당신이 더 고통받기를 바란다는 인상을 준 적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게 당신의 고통에 대해 말해줘. 나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당신의 행복은 나의 행복에 매우 중요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당신의 두려움, 당신의 근심, 당신의 어려움을 내게 말해줘. 내가 당신을 더 잘 도울수 있도록
- 우리는 수련회에 참석중이거나 수행센터에 있는 동안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문제에 부딛히곤 한다.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방이 집에 있기 때문. 우리는 과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 우리가 숨도 제대로 못쉬고 수선화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은 집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순간을 항상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들숨과 날숨을 진정으로 즐길 수 없다.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자리는 오직 지금 여기뿐이다.
-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가? 당신의 겉모습, 감정, 생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라.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안다면 과거의 유령이 우리를 좌지우지하도록 두어선 안된다. 과거 혹은 미래의 환영이 우리를 부숴버리도록 두어선 곤란하다. 그것들은 단지 유령이고 허깨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수행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그것이 길이다. 화해로 가는 안전한 길이다.
- 집중은 번뇌를 불태우는 힘이 있다. 마치 태양빛을 모아 종이를 태우는 돋보기와 같다. 집중이 번뇌를 태우고 나면 통찰이 남는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집중을 닦을 수 있는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무상(한결같은 것이 없음), 무아(자아가 없음), 공(나와 세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음)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닦을 수 있는 집중수행이다. 우리는 낮 동안 접하는 모든 것들, 예를 들어 친구와 꽃과 구름같은 것에서 무상과 연기(세상 만물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음) 등을 볼 수 있도록 수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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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스트레스

심리 2018. 1. 21. 14:00

- 자기계발서 1년 매출액은 10억불이며, 지구촌 항우울제 시장은 170억불에 육박. 행복은 이제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소화제나 감기약처럼 취급받고 있다. 행복상인의 주장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음. 우선 그들은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주장. 즉 행복이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얻는 거라고 강조. 또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배워서 의도적으로 노력을 해야 행복해질수 있다고 한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는 방법도 가르쳐준다. 이렇게 열심히 전국민을 상대로 행복을 강의하는데, 행복은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는데, 왜 행복하다는 사람은 드문걸까? 사람들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런 방법이 별로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소화제가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여전히 소화제가 잘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 소화는 단순히 약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 하다. 행복상인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노력해서 되지 않는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다른 하나의 특징은 심리학자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차원으로 행복을 다룬다는 것. 행복상인들이 비정규직을 철폐해야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든가 노동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를 개선해야 한다든가 하는 사회적 주장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마도 전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개인적 차원으로 다루어진다. 불행하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는 것. 마음먹기에 달린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깨달았다 해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 혹은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 우리가 심리학자와 행복상인이 내놓는 치료제를 먹고도 행복하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행복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 혼합되어 있으며 그 혼합은 쉽게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세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음. 그동안의 행복론은 이 혼합에 주의하지 않았다. 행복을 개인적 차원으로 여겼고 마침내는 마음의 문제로 환원해 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환원하려 해도 사회적 차원은 환원되지 않고 남는다.
-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내가 마음을 아주 깊이 파헤쳐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그들의 충고다. 자기계발산업의 이 가르침이 너무나 깊이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이제는 당연한 이치처럼 보일 지경이다. 문제는 하나뿐이다. 이 가르침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 행복은 우리 내면이 아니라 저 바깥쪽에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 바깥과 이 안쪽을 가르는 선은 우리 생각만큼 선명하지 않다 (에릭 와이너)
- 행복이라는 말을 지금처럼 사용한 것은 서양의 역사에서도 2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음. 인류의 긴 역사를 생각해보면 행복은 비교적 낯선 단어라고 할 수 있음.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 행복이란 말은 동양 고전에 으레 등장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음. 행복은 명치유신 때 일본이 만들어낸 신조어. 다시 말해, 그 전에는 한, 중, 일에 행복이란 말은 없었다.
- 요즘에는 hapiness라는 말을 즐거운 마음이라든가 만족한 상태라든가 하는 뜻으로 사용하지 운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 행복, 만족, 기쁨 (2) 행운 이라고 나옴. 즉 만족, 기쁨이라는 뜻과 함께 행운이란 의미도 있다. 원래 행복은 행운이란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 이런 사실은 오랫동안 행복을 운이나 운명과 연결시키는 생각에 일조했다. 이런 연계는 기원전 5세기 이후 급속히 퍼졌으며,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모든 인도-유럽계 언어에서는 오늘날의 행복이라는 단어가 운, 행운, 운명이라는 말들과 어원이 같다. 예를 들면 행복의 어원은 올드 잉글리시와 미들 잉글리시의 해프(happ)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회와 행운을 의미. 여기서 파생되는 단어들이 우연한 일, 우연, 불운한, 그리고 아마도 등이다. 프랑스어의 행복(bonheur)이라는 단어도 이와 비슷하게 좋은(bon)이라는 단어와 옛 프랑스어의 행운 또는 운(heur)이라는 단어에서 기원. 이는 중세 고지독일어의 글뤽의 어원 설명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행복과 운을 뜻하는 독일어이다. 인도-유럽어 계통에서는 행복은 기회라는 토양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 행복은 행운이라는 의미가 지금처럼 바뀌게 된 것은 벤덤이 1789년 출간한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설에서 그 유명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면서 부터. 이 책에서 그는 최대행복이라는 표현에서 행복을 쾌락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 이런 의미전환은 당시 당연히 매우 낯선 것이기에 프랑스 혁명 말기에 활약한 정치가인 생쥐스뜨도 유럽의 새로운 사상이라 말한 바 있다.
- 벤덤에 의해 행복은 이제 쾌락을 의미하게 되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핵심으로 하는 공리주의가 탄생. 즉 벤덤은 한 단어가 이런 뜻 저런 뜻으로 쓰인다는 차원이 아니라 핵심단어를 통해 전혀 새로운 사상을 등장시킨 것.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표현을 옛날 식으로 해석하자면 최대다수의 최대행운이 될 것임.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는 쾌락과 고통이 원리와 함께 공리성을 제시함으로써 행복이 행운이 아니라 쾌락임을 분명히 했다.
- 공리주의는 홀로 강해진 것이 아님. 공리주의는 민주주의, 개인주의, 시장주의 등과 결합해서 작동.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을 뿐더러 서로가 영향을 끼치면서 얽혀 있기에 그 위력도 대단하다. 행복이 세속종교가 된 것은 현대를 규정짓는 여러 사조와 결합한 결과
- 계몽주의자들은 우리의 불행은 뭔가 잘못된 것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고치면 된다고 말함. 신념이나 정부형태, 삶의 조건, 관습이나 또는 다른 어디에서든 잘못된 것들이 이에 해당. 이제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불행의 원인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정부형태를 결정짓는 정치, 삶의 조건에 관여하는 경제, 관습을 지배하는 사회, 신념을 이끄는 철학 등 모든 분야를 샅샅이 조사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면 제거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이 있다면 북돋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계몽주의는 행복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관계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내부 신념이든 외부 정부형태든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과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즉 계몽주의가 행복이라는 세속종교의 기반을 놓았다
- 공리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시장주의는 우리의 행복을 둘러싸고 있는 외면,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렇다. 우리의 현대적 삶이 행복이란 개념이 없었던 옛날과는 얼마나 크게 다른지 안다면 우리의 상황을 보다 잘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중세말(1294-1324) 남부 프랑스 마을 몽따유에서의 삶을 보자.
시장에서의 거래에는 돈보다 신앙의 공유가 더 고려됨. 카톨릭 신자 고객에게 밀을 팔고 있던 한 카타르파 여신도는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정당화했다. '저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그러니까 너한테는 팔고 싶지 않다.), 가정경제의 목표는 화폐의 축적이나 농업자본의 확대재생산보다는 음식과 옷 같은 사용가능한 가치들의 생산에 있었다. 풍요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핍은 피하거나 해결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게으르지는 않았지만 과도한 노동을 자극하는 요인도 없었다. 그들은 잉여의 매력에도 자본축적의 달콤함에도 자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자신을 자랑스레 여기는 감정과 함께 평등은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킴. 개인이 무력하거나 무가치하다는 감정이다. 예전에는 기술자연맹같은 길드가 있었다. 어떤 개인도 개인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어떤 집안의 누구 혹은 어느지방의 누구 아니면 어떤 계급의 누구였다. 계급제도와 신분제도 안에서 같은 계급이 속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만으로도 서로 도왔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평등한 개인이기에 홀로 모든 것에 맞서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개인은 무력감을 느끼게 됨. 이런 무력감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신경을 쓰도록, 즉 여론에 민감하도록 반응하게 만듬.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여론을 좇는 편이 더 안도감을 주기도 함.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해도 괜찮다는 정당화가 이루어진다. 토크빌은 이런 두가지 감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전혀 아무런 생각도 못하게 하는 것.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해서 민주주의가 여러 법률에 의해 민주사회의 조건으로 적합하게 된 정신의 자유를 오히려 제약하게 되는가를 알고 있다. 즉 계급이나 인간에 의해 과해졌던 모든 속박을 타파한 인류는 최대다수의 일반의지에 의한 속박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 부자가 되고 싶지만, 부자가 되기 어려움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일반적 개념에 의지. 앞서 언급한 토크빌의 말에 따르면 '이 일반적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그들이 별로 수고하지 않고도 거대한 사물을 파악할 수 있으며, 동시에 큰 어려움 없이 대중의 관심을 끌수 있다고 우쭐댄다.' 일반적 개념이란 추상명사를 말함. 장미보다 꽃이, 꽃보다 식물이, 식물보다 자연이 일반적 개념.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화될수록 일반적 개념이 되는 것이다. 왜 토크빌은 즉각 거대한 성공을 거두고 싶어하면서도 힘든 노력은 피하고 싶어하는, 상충된 성향이 일반적 개념에 의지하여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을까? 일반적 개념이 좁은 범위 안에 많은 것을 담으며, 짧은 시간에 많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
- 민주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바빠서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지만 추상화된 말에 의존해서 자신이 그것을 안다거나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짐. 말로써 존재를 규정하는 느낌이 드는 것임. 이름을 만복이라 지으면 온갖 복이 들어올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 명품백을 갖고 싶은 사람은 관련 잡지를 사본다. 거기에서 얻은 정보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 자신은 명품백과 매우 가까워진 것 같다. 물론 현실에서는 돈이 없어 명품백을 사지 못한다. 명품백에 대한 지식과 정보 그리고 사진은 그런 괴리를 메워준다
-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을 읽는다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추상명사는 내용이 아주 많거나 텅 비어 있기 때문. 하지만 추상명사는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 안성맞춤이다. 정의의 경우도 그렇다. 그래도 정의에 대해 알 것 같고 말할 것이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정리해보면 만족스럽지 않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행복은 민주주의 시대에 잘 어울린다. 모두 평등하므로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쉽기 때문이다.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로 행복해지지 않는 현실과의 괴리를 바로 행복이란 추상명사가 메워주고 있는 것이다.
- 행복이 널리 유통되는 이유는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일반적 개념중 행복만큼 대중적인 것이 없기 때문. 성공을 바라고 또 노력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적음. 정치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리고 정치를 하고자하는 욕망이 있어도 국회의원이 되는 사람은 극소수다. 성공이나 정치에 비해 행복은 어떤 사람이라도 누릴 수 있는 일반적 개념이므로 훨씬 더 대중적이다. 잡다한 행복상인들이 존립하고 번창할 수 있는 이유다. 행복상인들은 알고 있다. 성공보다는 행복의 시장이 더 넓다는 것을
-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힌두교는 그대가 해야할 일을 바삐 수행하라, 불교는 깨달은 자, 기독교는 천국에 존재하는 행복, 이슬람교는 행복의 연금술,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은 선이다, 스토아학파는 모든 것은 정신속에 있다, 유대교는 신의 숨겨진 얼굴, 공리주의자는 쾌락의 최대화를 추구. 이 목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시대마다 종교마다, 혹은 학파에 따라 추구의 대상이 달랐다는 점.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이고 민주주의 시대는 행복을 추구함. 하지만 그것이 현실일지 몰라도 행복의 세부사항 중 어느것도 실감나지 않는다. 비록 때때로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끼고 또 여기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부사항은 살아있지 않다. 그것은 행복이 일반적 개념이기 때문. 우리는 종종 행복이 구체적 내용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적 개념이란 것을 잊고 산다. 그래서 파랑새는 있다,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원래 일반적 개념은 만족되지 않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시대에는 행복이 모든 것을 휩쓴다. 그것은 현실일지 몰라도 세부사항들 중 그 어느것도 그다지 살아있지 않아서 실감은 없다
- 진실은 내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삐걱거리는 딱딱한 의자에 혼자 앉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발목에 땀이 밴채로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내가 어떤 상상을 하더라도 진실은 내가 혼자 있다는 것이다. 내 몸을 만질 것은 내 손이지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몸말고는 그 어느 누구의 몸도 이 장면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거짓된 진실, 데릭 젠슨)
- 토지, 노동, 화폐는 분명 상품이 아니다. 매매되는 것들은 모두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가정은 이 세가지에 관한 한 결코 적용될 수 없다. 노동이란 인간활동이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활동은 생명의 다른 영역과 분리할 수 없으며, 비축할수도 사람자신과 분리하여 동원할수도 없다. 그리고 토지란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의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 토지, 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다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 노동에 집중해 보면, 폴라니는 노동이란 분명 상품이 아니라 한다. 즉 돈을 받고 사고팔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중세에는 돈을 받고 노동을 제공한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즉 역사저긍로 볼 때 계급사회에서의 노동은 계급의 의무이거나 다른 이유에서 행해졌을 뿐 전혀 상품이 아니었다는 것. 그는 시장이라는 것도 고대에는 없었다고 한다.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시장대신 포틀래치가 있었다고 주장. 이 제도는 언뜻 물물교환처럼 보이지만 시장으로서 기능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체제, 즉 선물을 주고받는 체제의 일부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 폴라니에 의하면 상품일 수 없는 노동이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는 데에서 우리의 비극이 시작됨. 노동자 개인에게서 노동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인데, 시장은 노동을 자신과 분리할 수 있다고 세뇌시켰다. 하루 8시간 노동, 주 5일 근무 등의 말은 듣기에는 좋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하게 되면 하루 24시간 전부 일에 잡혀 있기 십상이다
- 문제는 창고는 한정되어 있지만 통장의 숫자는 무한대라는 것.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무한이란 숫자를 채울 수 없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만족이란 개념이 없다. 부자라 할지라도 만족하지 않고 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으며, 노력에 따라 숫자를 크게 늘릴 수는 있어도 항상 더 큰 숫자가 있기에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이 비극의 원천이다.
- 우리 경제의 기초는 추상화다. 우리 경제체제의 보상은 돈으로 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단지 어떤 가치가 있다고 사회전체가 동의하는 숫자일 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은 아님. 그러한 추상화에 기초하므로, 우리 문화의 보상으로는 소유욕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함. 아귀처럼, 우리는 세상을 먹어치우지만 배부른 줄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우리가 평생 쓸쑤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쌓아둘 수 있다. 그러나 은행통장에 얼마나 높은 수까지 기록될 수 있는지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부를 축적하는 사람은 더욱더 많이 축적하는 것으로 계속해서 보상을 받음. 추상화는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한 행복이론이 아니라 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일러주는 것. 힌두교도 마찬가지다. 이 가름침 자체가 종착점이 아니다.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더 높은 세계, 더 고귀한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공리주의에는 그런 낭비나 사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리주의는 행복이자 종착점이다. 공리주의는 밀 자신이 밝힌대로 행복이론인 것이다. 이것이 공리주의의 한계이고 공리주의가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주요한 원인중 하나. 인간은 행복을 넘어서 훨씬 더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공리주의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있다.
- 자신이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면 자신의 의지대로 마음을 바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별로 가능해 보이지 않음. 아무리 건강에 신경을 써도 어느날 암 진단을 받는 것과 비슷함. 차라리 유학자들처럼 외부의 변화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름. 게다가 학살자들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개인적인 것도 아님. 아무리 마음을 다스린다고 해도 권위에 대한 복종, 동조 압박감은 개인의 영역을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세상은 거대한 시장이다. 모든 것을 사고팔고 가격을 매기고 자신의 더 큰 이익을 위해 애쓰는 시대. 개인이 이런 흐름을 저버리고 마치 외부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마음을 다스려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꾀하는 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나치 학살의 집행자들이 놓인 환경과 지금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들이 권위에 복종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여론에 순종하고 있고, 그들이 동조 압박감에 눌려 있었다면 우리는 돈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마음의 주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손님도 아니다. 따라서 마음을 바꿔서 인생을 바꿔야 한다거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받아들인다고 해도 조건이 아니다
- 세상이 실제로 행복하다고 하자. 그럴 경우 있는 그대로 보면 마음도 행복질 것임. 세상은 불행으로 넘쳐난다. 그렇다면 불행하지 않도록 고쳐야 한다. 불행을 그대로 두고 긍정적으로 보라고 하는 것은 더위가 40도까지 치솟았는데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으니 덥지 않다고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물이 반이 있는 것에서 출발해야지 반밖에 없다거나 반이나 남았다는 것에서 출발해서는 외부를 개선할 수 없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물은 반이 있는 것이다. 물이 더 필요하다고 더 부으면 된다. 물이 필요없다면 그만큼 버리면 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우리가 필요한 대로 바꾸도록 노력해야 한다. 단순히 마음의 자세를 바꾸고 관점을 바꾼다고 해서 물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은 아님. 관점을 바꾸어도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님. 행복을 원한다면 행복한 사회를 만들면 되고, 좋은 삶을 원한다면 좋은 사회를 만들면 된다. 그것이 전제조건임. 행복한 사회, 좋은 사회가 이루어졌는데도 행복한 삶도 좋은 삶도 아니라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다. 개인의 관점의 변화만으로도, 즉 마음먹기만으로 행복이나 좋은 삶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인을 둘러산 사회의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우리가 관점을 바꾼다고 알고 있는 것은 흔히 말하듯 부정에서 긍정으로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목하지 못했거나 안 했던 면을 끄집어낸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관점의 변화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고 그 안에서 발견한 여러 사실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와 관련된 문제라는 의미. 관점을 바꾸는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야지, 마음 밖의 세계에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관점의 발견이 놀라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못 봤던 것을 다시 보게 된 것을 관점의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관점의 변화와 상관없이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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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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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즐기기

심리 2018. 1. 15. 19:14

- 멜랑콜리라는 것은 우리 영혼의 떨림 혹은 흔들림에 다름 아닌데, 그것이 완전히 멸종된다면 인간이 추구해온 장대한 소망이라는 탑은 어느날 갑자기 휘청거리며 무너지지 않을까.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과 아름다움이 함께 교차하는 인간 삶의 교향곡은 어느날 갑자기 멈춰버리지 않을까
- 현재 압도적 주류를 이루는 미국적 행복이란 너무도 빤하고 사실 겁쟁이의 행복이므로 슬픔과 상실이 갖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무시해버리낟. 다분히 미국적 상상 속에 그려지고 추구되는 행복이란 삶에 깃들기 마련인 세상과 우주를 이루는 두가지 상반된 요소에 눈을 감는 것이다. 두가지 상반된 요소란 고통 혹은 체념이라는 극, 그리고 짜릿한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또 다른 극을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 생각 이상으로 힘이 세며, 결정적 요소임. 슬픔과 상실을 애써 잊으려 하는 것이란, 그래서 그것이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위대한 리듬 속에서 매우 중요하며 전체적인 모습의 한 계기임을 애써 무시하는 태도란 결국 아주 잘못된 확신을 은근히 심어주게 됨. 멜랑콜리 혹은 우울함이란 정상적 상태가 아니며, 모종의 사악한 것으로 보고 저주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생겨난다. 멜랑콜리 혹은 우울함이란 프로작 같은 항우울제의 도움으로 물리쳐야 할 대상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 메이플라워 호의 지도자 브래드퍼드가 종교적 유토피아를 향한 17세기의 열정을 상징하는 경건주의파적 인물이라면, 재정적 안전을 통한 일확천금의 꿈을 키우던 18세기 미국의 신중한 비즈니스맨의 유형을 대변하는 인물은 벤저민 프랭클린다. 굉장히 부지런했던 그는 수많은 단행본과 짧은 글들, 그리고 편지들을 남겼는데, 그 자료들에서 일관된 프랭클린의 이미지는 간단히 요약됨. 끊임없이 부를 일구어나가는 불도저형 자본가의 모습이다. 프랭클린에게 시간은 돈이었따. 시간을 쪼개씀으로써 재산과 행복을 함께 추구하는 것으로, 이것은 미국인들의 또 다른 원형이다.
- 하늘 저편의 하느님 품에 안기거나, 은행에 쌓아둔 현금이라는 창문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려는 사람은 결국 자기도취의 포로가됨. 인간세상과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함. 단지 구원의 전략, 재산취득의 기회만이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다. 나만을 위한 완벽한 행복과 안전, 그리고 자기만족이라는 창문으로 들어온 세상풍경만을 받아들이려는 속좁은 태도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다른말로 하면, 그것은 내 마음의 붓대롱 안에 들어온 것이자, 나만의 네트워크로 세상을 바라보는 행위이므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생생한 현실을 차단함. 즉, 세상에 존재하는 숱한 물질들을 변화시켜 나의 자아를 강화하는 쪽에만 관심을 둔다. 밖에 있는 사물을 보고 경험하는 척하지만, 결국 내 모습을 반복해서 보고 또 보는 동어반복이 전부다. 광대한 세계와 우주는 본래의 크기를 잃고 납작해져 버리며, 그 위태위태한 공간에 행복을 위한 환상만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것이다. 당신이 서 있는 곳이 거대한 산이나 넓은 바다이더라도 막상 당신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얼굴을 찡그린 채 웃는 척하는, 엽기적 자기얼굴 뿐이다
- 멜랑콜리, 즉 상실과 슬픔의 정서를 팽개친 해 고통없는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위험하다. 왜 위험한가? 우선 눈앞의 현실에 눈을 감기 때문이고,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대극적 요소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끔찍하면서도 풍부한 삶의 드라마에 등돌린 채 살기 때문이다.
- 슬픔과 상실 등 인생의 반대편을 외면한 채 행복만을 찾아 나서는 것은 일단 부자연스럽다. 그것은 세상과 우주가 돌아가는, 서로 다른 양극적 요소의 주고받음이란 패턴을 모르기 때문에 나온 외곬의 자세인데, 비유하자면 길가의 강아지가 제풀에 혼자서 뱅뱅 돌기만 하는 것처럼 맥빠진 춤이자, 세상은 화려한 꽃들만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이어야 한다고 믿는 어리석은 기대와 다를바 앖다. 또한 1년 내내 하루종일 햇볕만 쨍쨍 내리쬐게 해달라는 황당한 기도와 같지 않을까?
- 결정적 문제는 따로 있으니, 본래 세상과 우주는 인간만의 행복과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 존재하는, 친절하고 따뜻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 그런데도 우주란 나를 위해 돌아간다는 오만함, 그리고 이기적 욕망에 갇혀 살 경우 이질적이고 풍부한 뉘앙스를 가진 채 굽이쳐 돌아가는 거대한 우주는 아주 작은 미니어처로 변하거나, 아니면 증발될 것이다. 그 안에서는 어떤 것을 보거나 경험할지라도 내 눈의 안경으로 해석하거나, 아전인수 격으로 판단하려 노력할 것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쳇바퀴 같은 삶에 집착할 것이다. 세상은 본래 낯설거나 슬픔에 찬 것이어서 말라비틀어진 채소 따위는 아주 흔하며 상처 입은 사슴들도 많은데, 그런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덮쳐 오면서 빚어지는 우연, 그리고 결코 작지 않은 행운도 결코 만날 수 없다. 그것이 행운인 이유는 바로 그런 만남과 충돌 속에서 우리는 판박이 삶에서 벗어나 속 깊은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명상에 젖거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제3의 결정을 취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 있는 행복신앙은 바로 이런 풍부한 상호작용을 가볍게 여겨 생략한다. 제 눈을 가려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를 재촉하는 것도 당연하다.
- 주인의 지시를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조련된 말 대신 가슴에 분노를 담은 호랑이가 되어라 (윌리엄 블레이크)
- 완벽한 통제를 꿈꾸는 사람들은 좋았던 경험과 기억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데 에너지를 무진장 쏟아붓지만, 그것은 옛날을 붙들어 매어 박제화하려는 노력에 불과. 그들이 미처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경험과 기억이 사랑스러운 이유가 카멜레온처럼 자꾸만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스런 체험은 도처에 널려 있다. 장미가 지고 피는 것, 혹은 성장하는 자녀들을 지켜보는 재미 등이 그것인데, 그것들은 애써 붙잡으려 할수록 틈이 생긴다. 소중한 것일수록 도리어 멀어지는 것이다. 그 반대로 억지스런 노력을 일찌감치 포기할수록 심리적 안정이 찾아든다. 행복이나 다른 쪽의 상실감 혹은 멜랑콜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우주의 리듬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는 행위다. 핏기 없는 행복을 기를 쓰고 추구하는 것이 '저 땅위에 세워진 지옥'을 일부러 찾아들어가는 바보짓이라면, 멜랑콜리와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은 '땅위에 세워진 천국'에서 노닐며 즐기는 태도다
- 행복의 가치를 중시하는 나라의 국민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국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고한 성품을 갖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떨어진다. 06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원들에 비해 행복지수가 높았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가? 공화당원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며 해외에서의 전쟁을 지지하는 편. 최근 미국은 개입할 필요가 없는 전쟁(이라크 전쟁)에 뛰어들어 내출혈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는 행복지수가 높은 공화당원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의 미래 예측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 행복이란 어떤 이상적 형태나 추상적 목표가 아니다. 행복이란 한없는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서부터 상실과 슬픔에 이르는 또 다른 순간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마련인 삶의 모든 과정을 커다란 하나로 인식하는 것. 그 결과 엄청난 행복과 함께 행복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을 어느순간 버리는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원데인 '진정한 행복에 반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소박한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몸짓이다.
- 노이로제는 인간이 저지르곤 하는 바보스러운 결정을 스스로 접도록 도와주며, 때때로 새로운 잠재력을 계발하도록 삶의 양식을 바꾸는 계기가 됨. 그 점에서 에너지의 덩어리인 노이로제란 무의식의 영역에서 보내주는 메시지다. 그 메시지란 '당신은 지금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잃었다'라든가 '건강과 균형을 되찾고 싶다면 생각과 행동의 방향을 재조정하라' 같은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노이로제는 심리의 심층에서 통찰을 이끌어주는 통로다. 그런가하면 제어와 조정의 힘도 갖고 있다. 지금 순간 낙담에 빠져 있다면, 외곬으로 가지 말고 또 다른 통로를 개척해 보라고 암시해줌. 혹시 바보같은외곬 행복에만 매달려 살고 있다면, 이 기회에 지적, 정신적 균형을 잡아보라는 조정의 힘인 것이다. 균형이란 나락에 빠져 있는 음울함, 싱글벙글거리기만 하는 행복 사이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 정형화된 쇼핑몰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미국인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모델을 비판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대형 쇼핑몰과 미국식 행복, 이 둘 사이에는 일치하는 어떤 것이 있다. 행복추구파 사람들은 간단한 공식을 대입해서 세상을 보려하고, 손쉬운 만족만을 챙기는 선에서 딱 멈추는 경향이 많다. 그들이 추구하는 도시생활도 그렇다. 그들은 도심의 활력이나 시끌벅적함 대신 손쉬운 해결책만을 원함. 자신만의 테마파크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빈약하고 쓸쓸한 내면의 세계를 만지작거리며 산다. 반면 멜랑콜리파 사람들은 다르다. 한때 영광스러웠던 도시의 풍광이 어느순간 사라져버렸다는 것, 그와 함께 수풀과 늪지대 등 자연 역시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이들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친 나이먹은 건축물이 풍기는 고유한 분위기를 사랑한다. 노화란 낡아가는 마이너스의 과정만이 아니라, 나이듦의 플러스 과정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 철학적 사유를 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기존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 낡은 패러다임은 현재의 상태를 온존시키므로 이미 진부해진 세계를 떠받친다. 멜랑콜리 철학자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외부세계의 사람들에게 질린 나머지 고독한 숨어듦, 혹은 자발적 은둔을 선호. 시끄러운 광장에서 한적한 밀실로, 햇볕 환한 양지에서 숲 속의 그늘로...사람들은 세상이라는 무가치한 것을 앞에 두고 왁자지껄한 홍소와 함께 박장대소하지만, 철학자들은 다르다. 그들이 들여다보는 것은 겉이 아니라 내면이다. 존재의 밑바작을 성찰하려 한다. 복잡하면서도 풍요로운 그 영역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는 우주와 세상에 대한 탐구에도 도움이 된다
- 탄생, 결혼, 사망에 이르는 이 모든 경험들보다 더 심오하고 생생한 것은 없는데, 이들이 알려주는 비밀은 자명하다. 즐거움과 슬픔이란 이인삼각처럼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깨우칠 때 탄생, 결혼, 사망에 이르는 드라마는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아니,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즐거움이라는 기묘한 쌍은 어느 한쪽이 없으면 나머지도 아예 존재할 수 없다.
- 안타깝게도 행복추구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에 대한 담담한 통찰력이 아닐까. 때로 그것을 무시하거나 겁을 먹어 회피하더라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요, 진실이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잠시, 단 1분이라도 세상과 우주의 실체를 꿰뚫어보면 깨우칠만한 사실은, 세상 모든 것은 소멸을 향한 행진을 거듭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둘중 하나다. 우선 괜한 흥청망청과 게으름이 뒤섞여 있는 지금의 거품 같은 세상에 젖어사는 것이다. 어울렁더울렁하면 살 경우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좋게 보인다. 그와 다른 선택이 있는데, 이것은 무척 진지하다. 마치 구름이 피어나듯 솟아오르는 각종 걱정, 근심, 불안을 끌어안은 채 일단 좌정한다. 그렇게 걱정, 근심, 불안이 우리 몸과 마음을 덮더록 놓아둔다. 그 순간 내가 언젠가는 이 지상의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대긍정의 자세로 돌아설 수 있다.
- 멜랑콜리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손쉬운 선택이 아닌, 여기에서 한걸음을 더 내딛으려는 노력이다. 현재의 주어진 상황에 만족해 머물러 있기보다 적극적으로 타개해나가려 한다. 그들이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지대란 중간영역이다. 양극을 모두 끌어안으려는 노력이다. 멜랑콜리맨들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이루는 절묘한 상호보완에 대해 훌륭한 통찰을 보여준다. 특히 삶과 죽음 사이의 커넥션에도 관심이 많다. 이런 통찰과 관심이란 상호 모순되는 것 사이에 숨어 있는 조화를 인식해야 가능하며, 이를 토대로 제3의 선택을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 결국 이들이 도달하려는 목표란 우리에게 순수와 아이러니의 감각을 되돌려주는 것이고, 주어진 상황에 구애받지 않은 채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용감한 놀이정신을 되찾게 해주는 것. 아이러니의 감각을 유지하고, 놀이정신을 즐기는 과정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우연의 요소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허허로운 태도, 집착에서 벗어난 느긋한 여유란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설정하느 데 있어서 결정적 자산이 아닐 수 있다. 진정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며, 가슴의 피를 덥혀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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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행복을 훨씬 덜 느끼는 이유는 세월이 흐르면서 일상행활에 얽매여 새로운 일을 시도하지 않기 때문. 인생은 새로움을 필요로 함. 지난주 매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해 보라.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을 것. 그러면 당신이 구체적인 일들을 기억해 내는데 어려움을 느낌. 새로운 경험과 이에 대한 기억이 행복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면, 이처럼 안타까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무얼까. 우리가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떤 새로운 경험을 시험하도록 장려하는 앱을 깔아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앱은 우리가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 혹은 가보지 않았떤 장소를 알려줄 것임. 이런 앱이라면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자극하여 우리 삶을 다채롭게 해주고 세월이 흘러가는 속도를 줄여 행복을 증진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앱이 시판될 때까지, 새로운 경험을 일주일에 적어도 한가지씩 해보는 것은 어떨까
-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 :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결정에 비해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려는 결정을 아주 다르게 여기는 경향. 실제 전투기 조종사들은 매초마다 진로를 변경할 것인가,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결정해야 함. 이때 공군사령관들은 조종사들에게 이 두가지 결정을 다르게 여기지 않도록 가르침. 이 두가지 결정 모두가 능동적 선택이라는 것
- 실험에 따르면, 미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더라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있음.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상대 역시 여러분이 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더라도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상대방이 화를 계속 내기 어렵다는 것. 물론 자존심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딸, 사위, 손자와의 관계를 장기판에 비유해보자. 우리는 장군(손자와의 만남)을 지켜야 한다. 자존심은 졸에 불과하다. 우리가 지켜야할 장군을 위해 졸을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 부모님께서는 설사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걸 부모님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다는 점 때문에 으쓱해 지실거야.
- 하이힐 효과
* 여성의자세를 바꾸어줌. 여성들이 꼿꼿한 자세를 취하게 하여, 엉덩이를 밀어넣고, 가슴이 약간 나오게 함
* 가로와 세로의 비율을 바꾸어 여성들이 날씬하고 키가 커 보이게 함
* 다리 모양을 바꾸어줌. 다리가 더욱 가늘어 보이고 다리 근육이 더욱 돋보이게 함.
- 진화론적으로 남성들은 무의식적으로 여성이 하이힐을 신으면 자기한테서 도망가지 못할 것이라 믿기에, 하이힐을 신은 여성에게 눈길이 감
- 시끌벅적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데이트하기엔 별난 곳으로 여겨질 수 있음.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환경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음. 첫째, 주변이 시끄러우면 서로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어색한 분위기가 생기지 않음. 둘째, 가끔은 화젯거리가 바닥이 났을 때 두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게 됨. 그러면 두 사람은 이런 침묵이 그들의 대화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음악이 시끄러워서 혹은 음악에 심취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음. 셋째, 이처럼 시끄러운 환경이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신체적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핑계를 만들 수 있음. 아주 시끄러운 술집이라면, 직접 상대방의 귀에 대고 이야기할수도 잇음. 마지막으로 음악과 군중은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효과. 데이트하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고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이면, 성적으로 훨씬 더 흥분하기 쉬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이런 감정 상태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착각. 사람들이 주변환경에 의해 발생하는 감정을 옆에 있는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기에 시끌벅적한 장소에서 데이트하는 것이 성공전략임
- 우리가 비슷한 가치를 지닌 선택 중에서 결정을 해야하는 경우 시간의 기회비용을 생각해야 함. 이런 경우 우리가 결정을 하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도록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함. 이것이 바로 동전던지기의 본질이다. 우리는 동전이 공중으로 올라갈 때에, 어느면이 나타나기를 원하는지, 즉 어떤 결정을 원하는지 깨달을 것이다.
- 컨설턴트들은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세가지를 제시한다. 컨설턴트들이 해결방안을 제시할 때는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어야 하는 요구와 완벽하게 보이도록 하는 요구에서 미묘한 균형을 추구하며, 세가지를 제시하는 것이 가장 적절함.
- 유혹에 빠져들지 않는 능력은 근육과도 같다. 우리는 근육을 사용하면 할수록 피로감을 느낌. 일정한 때가 되면, 유혹을 견뎌내는 의지력이 약해짐. 이것이 바로 술집과 클럽과 같은 향락산업이 주로 밤에 성행하는 이유중 하나. 우리는 하루종일 유혹에 견뎌냈지만, 결국 자제력이 고갈되어 술집이나 클럽을 찾음
- 자신의 의사결정을 주의깊에 살펴보면 사고과정이 더욱 신중해지고, 이럴 때에 의사결정의 함정도 어느정도 피해갈 수 있다. 한편, 습관의 중요성을 이해하면 의사결정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습관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행동하는 것. 이는 우리가 좋은 습관을 지니면 좋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따라서 가장 힘든 의사결정(과식, 지나친 지출 등)의 일부는 원칙과 습관에 위임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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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수업

심리 2018. 1. 14. 18:52

- 영웅이란 보통사람보다 엄청나게 용기가 많은 것이 아니라 5분쯤 더 용기를 지속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용기란 견디는 힘으로, 견디는 힘이 5분쯤 더 많다는 말은 재미있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 5분이 운명을 바꾸기 때문이다. 결국 영웅이란 조금 더 버티는 힘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 미국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 모든 일 가운데 끈기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재능은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스토리가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천재성도 안된다. 얼마나 많은 천재들이 자기 능력을 제대로 꽃 치우지 못하고 사라졌던가. 교육만으로도 안된다. 이 세상은 충분히 교육받았으면서도 실패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끈기야말로 성취를 위해 가장 필요한 보석이다
- 인간은 항상 무엇을 채우면서 살아간다. 식욕이나 성욕같은 생리적 욕구부터 명예욕이나 소유욕 같은 정신적 욕구에 이르기까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원하고 채우는 일의 연속이다. 따라서 미지의 세계에 도전한다는 것은 크든 작든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욕구를 채우려는 행위가 결국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 중요한 점은, 조금 낮은 목표를 설정해서 하나하나 이뤄감으로써 성취감을 자주 맛볼 필요가 있다는 것. 뼈를 깎는 고생을 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취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조금 낮은 목표치를 설정해서 한계단씩 밟아 올라가도 성취감의 맛은 뒤지지 않는다
- 행복이란 무언가에 갈증을 느껴오던 마음이 어느 순간 충족된 상태. 예를 들어 배가 고프면 음식이 마음을 충족시켜 행복을 느끼게 하고, 피곤하면 잠이, 사랑을 원하면 사람이 행복을 불러올 것이다. 행복감은 요구조건과 응답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져야 제모습을 찾게 된다. 몹시 피곤할 때는 최고로 맛난 요리를 먹어도 별로 행복하지 않고, 사랑을 간절히 원하는 젊은이에게는 멋진 휴가도 쓸모없는 일이 될 수 있다. 성취감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노력을 한 뒤에 그 노력을 인정받는 일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이는 노력의 결과를 직접 손에 넣지 못한다면 성취감을 얻을 수 없다는 말고 이어진다. 바로 이것이 성취감의 본질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성취까지의 접근방식이 행복감에서 매우 중요. 성취감을 얻는 사람이 주변에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력했던 과정이 다시금 떠올라 성취했을 때의 기쁨을 곱씹을 수 있으니 말이다
-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거운 짐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회피하지 마라. 그 짐은 살아있는 한 당신이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의무이자 사명이다. 당신이 질멍지고 있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최선을 다해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에머슨)
- 의무감이 행복감을 낳기 위해서는 그 자체로 건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하지 않으면 안되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기쁨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행하는 의무만이 흔쾌한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 죄책감이란 나쁜 일을 저질렀을 때 맛보는 후회의 감정. 따라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죄책감이 행복감으로 전환될 리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쁜 짓을 저지르고 나서 마음 깊이 반성했을 때는 어떨까? 이때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되고, 그러면 거듭난다는 기쁨으로 인해 행복감으로 이어질 수 있음. 죄책감이 반성을 동반하면 새로운 삶을 여는 기쁜이 뒤따른다
- 모든 사물은 적절한 장소에 있을 때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반대로 적절한 장소나 시간을 떠나면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다시 말하는데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은 없다 (밀레)
- 고슴도치들은 떨어져 있을 때의 추위와 붙어 있을 때의 가시에 찔리는 아픔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마침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쇼펜하우어)
- 철학의 세계에서는 자기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사고법을 에고이즘이라 부르고, 그런 사람을 에고이스트라 부름. 이기주의자라고 하면 자기 생각만 앞세우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집착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해석이 좀 다름. 이기주의는 자기애와 자기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 존재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마련
- 칸트는 에고이즘을 세가지로 분류
* 논리적 에고이즘 : 자신의 생각을 절대시하는 태도
* 미적 에고이즘 : 자신의 미적 감각에 사로잡혀 있는 태도
* 도덕적 에고이즘 :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만 인정하는 태도
- 과거의 일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 해서, 모두 헛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 파편들이 하나하나 물위로 떠오를 때, 우리는 거기서 진정으로 값진 것을 취할 수 있는 법이다. (롱펠로우)
- 예전에 어떤 일에 힘들어했던 경험이 있으면, 다시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저절로 뒷걸음치게 된다. 싫어하는 대상과 맞닥뜨리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심리가 발동하는 이유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회피하는 심리, 이것이 바로 혐오감의 출발이다
- 세상엔 좋아하던 것도 싫어할 이유가 생기고, 싫어하던 사람도 어떤 계기로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모두 감정에 강하고 약함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로, 우리가 싫다거나 좋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 혐오감의 해결책은 받아들임에 있다. 혐오감은 성격이 나빠서 치솟는 감정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연스레 생성되고 표현되는 감정.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싫은 사람이나 싫다고 생각하는 수물에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이유는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그려냈듯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놓아두려 하지 않음. 그렇게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심인데, 싫은 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기에 방어적 습성으로 혐오감이라는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다.
- 결국 행복이란 이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나서, 그 위에 나만의 삶을 새롭게 세우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 혐오감 뒤에 행복이 있다고 믿고 상대하기 싫은 것들을 따뜻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
- 누가 똑똑한 사람인가? 모든 사물로부터 배우는 사람을 말한다. 누가 굳센 사람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을 말한다. 누가 넉넉한 사람인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을 말한다 (탈무드)
- 만약 우리가 삶이 주는 모든 것들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면, 심지어 시련까지도 감추어진 선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 행복이란 단어인 hapiness는 마음속에서 계속 일어난다는 뜻의 happen에서 파생된 말. 그렇듯이 행복이란 그 사람의 올바른 성과를 말하는 것이지, 우연히 외부에서 찾아온 운명의 힘은 아니다
- 알랭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예의, 관용, 배려, 친절 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미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 이에 반해 러셀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집중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조언했고, 힐티는 기독교에 바탕을 둔 마음의 안정이 행복의 시작이라고 말함. 똑같이 힘든 상황이라고 전제할 때 알랭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러셀은 현실적이 되라고, 힐티는 신에게 몸을 맡기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다른 듯 보이는 그들의 말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행복이란 마음의 문제다. 이같은 조언은 행복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내포. 이런 말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룰 수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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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론적으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 동기는 어린 시절 경험한 최초의 한계이자 부적절감, 즉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성 또는 완전성을 추구해나가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와 환경적 제약을 극복하고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창조할 수 있느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아들러 자신은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훗날 성인으로 성장해 의사로 활동하며 신체결함이 개인의 성격과 자기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아들러는 신체적 한계와 환경적 제약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창조적 삶을 실현한 사람이었다
- 인간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꽤 긴 시간을 보내며 살아감. 이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을 것이다. 즉 정말 행복했을 때 너무 힘들과 좌절했을 때 등 여러 사건과 상황을 돌이켜보면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알아간다면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때마다 자신에 대해 파악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된다. 더 나아가 일상에서 진정으로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할 수 있고, 특정 사건이나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한 개인의 유년시절이나 청소년 시절에는 당연이 자신의 강점을 찾기 위해 분주할 수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강점이 무언지 잘 몰라서 여전히 분주하게 찾고 있는 경우도 보게 됨.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 대해 늦었다고 단정지어서는 안됨. 우리의 인생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자기 자신을 찬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지향점을 정하는 것은 내가 가야하는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고, 이렇게 목적지를 정하는 것만으로도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동기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으로, 목적지를 정하는 것만으로도 움직이는 힘이 생긴다. 꿈은 목적지라는 점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꿈을 가진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꿈을 갖는다는 것은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 아들러는 개인을 하나의 큰 단위라고 설명. 즉 사고와 감정, 그리고 행동의 통일성을 의미. 인간의 모든 표현과 행위에는 통일성이 필요. 가령 한 개인이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이 따로 움직이고 있다면 상당히 불안하고 괴로워하며 괴리감을 느끼게 될 것임. 이런 부정적인 불안, 괴로움, 괴리감을 줄이기 위해서 자신의 사고와 감정, 그리고 행동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통일성을 위한 통합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아들러는 유기체의 통합을 자신의 기본적 원리 중 하나로 설명했다. 모든 인간은 자체적으로 통합체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다. 한 개인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전체적 성격을 파악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어떤 한 환자가 불안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면 아들러는 안정제를 처방하기 보다는 왜 이 증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그 개인의 전체 성격구조와 관련해 이해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 아들러는 각 개인을 완전한 통합체, 즉 독특하고 개성적이지만 완전하고 통합된 존재로 보았다. 아들러는 이를 전체주의라고 설명했다.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은 독특하면서 독립적인 존재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개인의 독특성과 통일성을 강조한 점에서 아들러의 개념을 개인심리학이라고 부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체주의한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말하는 것이지 각각의 부분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님. 그렇기에 아들러는 한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전체적 존재이자 총체적 존재로, 즉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
- 결국 한 개인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에 따라서 능동적이고 적응하는 존재가 될지 아닐지가 결정됨. 또한 자신의 잠재력을 크게 발전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 또한 결정됨. 어떠한 사건이나 상황이든 간에 개인이 그 사건과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짐
-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은 프로이트와 달리 낙관주의적이다. 사람이 변화할 수 있고 또한 변하기도 하듯 세상도 변화할 수 있고 변하기도 한다. 아들러는 이런 변화의 과정 안에서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고 책임지기도 하며 협력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설명. 또한 아들러는 인간본성에 대해 좋거나 나쁘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본성 자체가 중립적이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하다고 설명
- 사람들에게 어릴적 꿈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다양한 꿈들을 이야기함. 그러나 그것을 모두 다 이루었다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 꿈은 말 그대로 꿈이기 때문.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꿈을 가상적 목표로 설정할 수 있어야 함. 가령 한 아이가 힘과 우월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상적 목표로 설정했따고 하자. 그러면 그 아이는 자신이 한 행동을 타인이 알아줄 때 정말 가치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 목표를 가진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임.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니요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주장한다. 자신이 힘이 있고 우월하다는 것을 남들에게 드러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성을 성취하며 완전에 도달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에게 열등감은 진보적 발전의 원동력. 아들러는 열등감 자체는 부정적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며 열등감을 극복하고 보상함으로써 자기성장과 발전으 기회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 아들러는 심리치료와 예방적 활동을 강조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 역시 심리치료와 예방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어린 시절에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버지의 도움과 지지 덕분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개인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다.
- 아들러는 개인의 문제는 집단 안에서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설명. 그래서 아들러는 신경증, 정신병, 우울증 등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그들에게는공동체감이 부족하다고 설명. 즉 타인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존재가치는 누군가에게 공헌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 우정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관계가 대등한 대인관계여야 하고, 순수한 인간지향적관계여야 하고, 자유롭고 편안한 관계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정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유사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 아들러는 어린시절 경험 중 구체적이며 특수한 기억을 초기기억이라고 했다. 이 초기기억이 그 사람의 자아관, 타인관, 인생관, 세계관을 말해준다고 함. 초기기억은 한 개인의 성격파악의 열쇠이자 최초의 결단, 초기 삶의 목표, 생활양식 등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보고다. 아들러에 의하면 초기기억은 여러 기능을 하는데 먼저 초기기억은 개인의 행동에 대한 지침을 반영. 현재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지금까지 자신이 어떻게 해왔는지를 토대로 결정하게 됨. 결정에 있어 지금까지 만족할 만큼 좋았던 기억이 많다면 이번에도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비스한 결정을 할 것임. 그러나 좋지 않았던 기억이 많았던 결정이었다면 결정하는 데 있어 불안을 야기할 것이고 신중함을 기하게 될 것. 둘째, 초기기억은 그 사람의 허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 허상은 개인의 잘못된 신념과 논리를 포함. 초기기억을 통해 잘못된 신념과 논리를 파악할 수 있다면 변화의 가능성이 높아짐. 셋째, 목표를 향해 움직이도로 함. 초기기억은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모습이 무엇인가를 찾아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 꿈, 목표 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 자신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목표가 있었던가?'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순간 바쁘다는 핑계로 목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초기기억은 이러한 자신의 꿈이나 목표를 되찾게 해주는 데 유용함. 마지막으로 개인이 품고 있는 가치와 없애기를 원하는 위험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고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줄수도 있음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데 유용함
- 아들러의 스프에 침뱉기 기법은 상담자가 개인의 자기패배적 행동의 숨겨진 목적을 드러낼 때 그것을 생생한 말로 기술하는 것. 숨기고 싶어하는 의도를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짚어서 말해줌으로써 내담자가 이에 민망함을 느끼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더이상 그 행동을 하지 않게 유도하는 것이다. 내담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직접적으로 날카롭게 설명하는 것이 직면하기에 있어 중요한 관건이다. 이것이 바로 개인이 자신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다가가도록 하는 방법이다. 아들러의 상담기법에서 말하는 직면이란 정밀한 검토를 한 후에 개인이 자신의 주관적 논리 혹은 신념에 도전하도록 통찰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 직면은 해석과 함께 개인이 잘못 가지고 있는 기본가정과 목표를 깨닫게 해 보다 건설적 신념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의 의도에 직접적으로 직면하는 것은 개인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행동의 숨겨진 목적과 그로 인해 초래될 결과까지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고 바라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면,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마주하거나 드러내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꺼려한다. 겉으로 보이는 포장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마주한다고 상상하면 자신이 숨기고 있던 치부를 들키는 것 같아 부끄러울 것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만나야 한다. 그 이유는 숨기거나 포장된 모습이 아닌 순수한 그 자체의 모습을 적어도 본인은 알아야 하기 때문. 부끄러운 부분까지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힘 또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에 생각틀을 만들어내는데 이런 생각틀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의 안내자로서 기능. 그런에 이런 생각틀은 사실 허구다. 즉 실제 세계와 닮을수도 있고 닮지 않을 수도 있는 구성된 개념일 뿐. 그러나 사람들은 이 생각틀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여기며 그에 따라 행동함. 아들러는 부정적 생각틀에 대해서 조심, 불안, 우울로 구분해 설명. 조심은 두려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불안은 마치 두려운 일이 생길 것처럼 행동하는 것. 우울은 마치 두려운 일이 벌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 조심-불안-우울로 갈수록 경직도의 정도가 커지는데 이는 모두 허구다.
-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속담이 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조심하다 보면 도전해야 할 일이 생겨도 도전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될 것이다. 이처럼 지나친 조심은 불안을 야기. 불안해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이 찾아옴. 이런 우울로 인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 한탄하게 되고, 이런 반복적 과정은 악순환으로 이어져 자신을 힘들게 하고 억누를 것이다.
- 우리는 이런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격려해 마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as if 기법을 통해 자신이 평소에 힘들어했거나 두려워했던 일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커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또한 as if기법이 좀더 효과적이라면 자신의 삶에 적용할 때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이 선행되도록 해야 하며, 행동으로 옮길 때는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
- 꿈에 날짜를 붙이면 목표가 된다. 목표를 시간으로 쪼개면 계획이 되고, 꿈은 그 계획을 실행했을 때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산을 옮기는 사람은 돌멩이부터 옮긴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지금의 성공은 지난날 차근차근 옮긴 돌멩이의 결과임을 명심하라.
- 부정적 감정을 일으켰던 상황을 떠올려보면 그것을 왜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신만 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내가 만든 것이기 때문. 그래서 자신에게 짜증나고 화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그것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문제가 잘 풀릴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방향으로 생각이 바뀔 수 있다. 아들러의 상담기법 중 단추누르기 기법은 자신의 감정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내가 부정단추를 누르면 부정적 감정이 되는 것이고, 긍정단추를 누르면 긍정적 감정이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우울한 감정의 희생자가 아니다.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울한 감정을 다가오게 할 수도 잇고, 멀리 보낼수도 있다. 단지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결정함으로써 우울에 갇혀 지내거나 반대로 우울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또한 절망스럽거나 무기력하지도 않다. 언제든 나 자신이 원한다면 바꿀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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