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한 마음을 갖고 행복감을 표현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기술이다.
감사와 불행을 동시에 느낄 수는 없다.
- 스콧 월하이트, ‘일상의 행복을 위한 7가지 핵심기술’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신비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존 헨리 조웻은 “감사하는 마음은 백신이며, 해독제이며, 소독제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가장 효과적인 투자입니다.
감사하는데 돈이 들지 않는데 반해, 돌아오는 것은 엄청납니다.
사소한 일에 감사를 표할 때 그 순간부터 인생은 천국이 됩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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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번 뿐이고, 너의 인생도 끝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너는 네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마치 너의 행복이 달려있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너의 행복을 찾고 있구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일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너의 남은 생애를 허비하지 말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너는 네 자신을 학대하고 또 학대하고 있구나. 그것은
네 자신을 존귀하게 할 기회를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이다.
너는 왜 너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냐?
그럴 시간이 있으면 네게 유익이 되는 좋은 것들을 더 배우는 일에
시간을 활용하고,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일들에
쓸데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을 멈추라.”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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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인더게임

인문 2019. 12. 20. 17:40

-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파테마타 마테마타'라는 말을 즐겨 했다. 이 말은 '아픔을 통해 배운다'는 의미로, 이는 유기체들이 진정한 의미의 학습을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특히 세상사라는 것이 그렇다. 세상일에 관여할 때 당연히 그에 수반된 위험에 노출되기 마련. 따라서 자신이 관여한 일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수용할줄 알아야 함. 사람은 위험에 노출되어 살갗이 까지는 경험을 하면서 배우고 성장한다.
- 대학에서 탄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지식은 대부분 과거에 수많은 사람이 경험적으로 발견한 것이며, 대학에서 이뤄진 일은 그 발견을 형식화하고 정맇나 것에 불과함. 여기서 과거의 사람들이 경험저긍로 발견했다는 말은 실제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즉 몸으로 직접 부딪쳐서 배웠다는 것을 의미. 이런 식의 배움은 논리나 고찰을 통한 배움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대학교나 연구소들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지금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는 정책결정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 우리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이 세계를 파멸시킬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다.
- 책임지는 행동이 신뢰를 만든다. 사회 지도층에서 전사들이 빠지는 것이 문명화고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음 글을 보라. 지도층이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때 관료주의가 생겨난다. 한편 지금처럼 중앙화된 정치체제에서는 일선 현장에 직접 나서는 일이 없이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래서 분권화 혹은 지방화가 반드시 필요. 이는 책임이 면제된 의사 분권화의 필요성은 국가적 규모의 선동이 소규모 선동보다 더 쉽다는 단순한 관념에 기초를 둔다. 분권화는 대규모의 구조적 불균형을 준다. 책임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분권화를 추진하고 책임을 분산시키지 않으면 그 사회는 결국 쪼개지고 만다. 행동과 책임이 따로 가는 메커니즘을 가진 사회는 구조적으로 유발되는 불균형으로 큰 파열음을 일으키며 아주 힘든 방식으로 분권화의 길을 걷게 될 것임. 다행히 붕괴에까지 이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 간섭주의자들은 자기의 실수 혹은 타인의 실수에서 무언가를 배우지 못함.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시스템 학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스템 학습이란 중대한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은 시스템의 본질적 특성에 따라 소멸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 남게 되는 방식을 말함.
시스템 학습은 비아 네가티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부적합한 부분을 소거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 부적합한 항공기 조종사 중 상당수는 이미 대서양 바닥에 잠들어 있다. 위험을 초래하는 부적합한 운전자 중 상당수는 이미 지역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운송 시스템은 사람들의 학습능력 때문에 점점 더 안전해지는 게 아니라 시스템 학습 덕분에 안전해짐. 시스템 학습은 인간의 학습과는 다르다. 시스템 학습은 부접합한 부분을 소거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논한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큰 판돈을 걸고 게임에 임하면 절대로 자만심을 가질 수 없다.
- 말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실제 삶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행동을 통해서만이 정확히 알 수 있다
- 과학주의는 간단히 말해 의심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과학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으로 인식하는 관념. 굳이 수학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수학을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가 아니라 과학주의다. 정교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의 멀쩡한 두 손이 있는데도 굳이 인공지능이 적용된 기계손을 활용하려는 것 역시 과학적 사고가 아니라 과학주의다. 수천만년에 걸쳐 온갖 위협요소들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천연식품들을 뒤로 밀어내고, 위험성이 경고된 유전자 조작식품을 자꾸 생산해내는 것은 결코 좋은 행태가 아니다. 오늘날 과학계는 마가린이나 유전자 조작 식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기업들에 장악된 상태임. 이 기업들은 유전자 조작 식품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의심스러운 과학단체들의 자료를 인용하기 일쑤다.
- 말을 하는 사람은 행동을 해야 한다. 오직 행동하는 사람만이 말을 해야 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 강단을 향하는 조명은 강연자의 눈을 자극하면서 집중력을 흐트러뜨림. 흔히 경찰들이 용의자를 취조할 때 용의자의 얼굴 쪽으로 강한 조명을 비추는 것 역시 용의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심리상태를 불안하게 만들기 위함. 사람들은 조명 때문에 강연할 때 불안감이 드는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그저 강단에 올라 많은 사람 앞에 섰기 때문에 불안해 지는 것임. 왜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까? 강연을 하는 사람들은 조명작업을 하지 않고, 조명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하지 않기 때문
-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해법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 이스라엘 출신 사업가 요시 바르디가 조언해 준 말이 있다. 내 일을 대신해 줄 보조인력을 두지 말라는 것. 그는 보조인력을 두면 본능적으로 여유시간에 흥밋거리를 찾게 되고, 그러면 인생 전체가 흥미위주로 돌아가게 된다고 지적. 여기서 말하는 보조인력은 내가 해야 하는 본질적 업무를 대신 해 주는 사람을 의미. 내 수업의 시험채점을 도와주는 대학원생, 회계사, 정원사, 그 외에 내 삶의 여러 측면에서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그가 말한 보조인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더 많은 업무시간이 아니라 더 많은 자유시간이다. 더 많은 자유시간은 한 사람의 성공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 하지만 보조인력을 잘못 다루면 보조인력을 보조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됨. 보조인력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느라 오히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기 때문. 내 경우, 불필요한 회의나 연락을 최대한 배제하면 더 집중해서 일할 수 있고 일 처리에 대한 기준이 높은 데다 이미 상당한 자유시간을 누리고 있으므로 보조인력을 두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닌 것이 분명함.
- 정말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조인력에게 대신 일을 시키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일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없다.
- 암치료를 담당하는 병원이나 의사를 평가할 때,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기준은 암환자 5년 생존율이다. 이 기준에 따라 좋게 평가받기 위해 의사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암 치료를 위한 절제술과 방사선치료를 떠올려 보라. 통계적으로 절제술을 받은 암환자의 5년 생존율은 방사선 치료를 받은 환자의 경우보다 낮다. 하지만 방사선 치료는 암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건강을 전반적으로 악화시키는 부작용을 수반. 실제로 방사선 치료를 받은 환자가 20년 넘도록 생존하는 확률은 상당히 낮음. 암 치료에 대한 평가가 20년 생존율이 아닌 5년 생존율을 기준으로 판단되는 상황에서 의사들은, 암 환자에게 방사선 치료를 우선적으로 제안할 수 밖에 없음. 즉 의료규정 때문에 의사들은 차선의 대안을 제시하는 식으로 자신의 불확실성을 환자들에게 전가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 국가의 평가 시스템 때문에 의사들은 자신의 리스크를 환자들에게 전가하고, 현재의 리스크를 미래로 전가하고, 가까운 미래의 리스크를 더 먼 미래로 전가한다
- 이슬람 종교법에 따르면 비이슬람교도 남자가 이슬람교도 여자와 결혼하려면 이슬람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여야 함. 그리고 태어난 아이의 부모 가운데 한 명이라도 이슬람교도라면 그 아이 역시 이슬람교도가 된다. 일단 이슬람 교도가 되면 다른 종교로 개종할 수 없다. 배교는 이슬람 종교법에서 가장 큰 범죄로, 배교자는 죽음으로 죗값을 치러야 함. 오마 샤리프는 레바논 출신으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이집트 국적을 갖고 있었는데, 이슬람 교도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 그는 나중에 이혼했지만, 자기 조상들의 종교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집트에는 원래 기독교도의 수가 훨씬 더 많았으나 이 같은 불균형의 법칙이 몇 세기에 걸쳐 적용된 결과, 이집트 기독교 종파 중 가장 큰 종파인 콥트교는 소수파가 됐고 이슬람교가 다수파가 됐다. 이집트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든 이슬람교도가 다른 동교의 신자들과 결혼하면서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 반면 유대교에서는 태어난 아이가 유대교도가 되려면 그 어머니가 유대교도여야 했다. 이처럼 확장성이 떨어지는 종교법 때문에 유대교도는 여전히 소수파에 불과. 확장성이 극히 떨어지는 종교법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종교가 근동 지역의 그노시스파 종교다. 드루즈의 야지디, 만다야 이 세 종교가 이에 속함. 일단 그노시스파 종교들은 부족의 소수 원로들 외에는 그 누구도 자기 종교의 지식이나 신비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 이슬람교는 부모 가운데 아무나 한 명이라도 이슬람교도이면 태어나는 자녀가 이슬람교도가 되고, 유대교는 어머니가 유대교도라면 자녀가 유대교도가 되지만, 드루즈, 야지니, 만다야는 부모 모두 신자가 아니면 자녀 역시 신자가 되지 못하고 부족에서 배척당함
- 레바논, 갈릴리, 시리아 북부 등 높은 산이 많은 지역에서는 순니파가 아닌 이슬람 교파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접촉 없이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돼 았다. 하지만 평지가 대부분인 이집트에서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결혼이 비교적 빈번하게 이뤄졌고, 이렇게 몇 세기가 지나면서 종교의 재규격화가 일어남. 쉽게 말해 결혼을 통해 점점 더 많은 기독교도가 이슬람교로 개종 일단 이슬람교로 개종한 콥트교도는 예전 종교로 돌아갈 수 없다. 게다가 이집트 통치세력이 이슬함화됐을 때 많은 콥트교도가 이슬람교로 개종. 그 편이 직업을 구하거나 행정판결을 받을 때 유리했기 때문. 이슬람교와 정통 기독교의 율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종교를 바꾼다 해도 생활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이집트의 수많은 기독교도와 유대교도가 살면서 이슬람교로 개종. 이렇게 몇 세대가 흐르는 동안, 그들의 후손은 조상이 어떤 이유에서 개종했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이슬람교도였다고 생각하며 살게 됨. 이런 불균형으로 근동지역의 종교경쟁에서 이슬람교가 승리한 것임. 이슬람교가 발생하기 이전에 근동지역의 종교경쟁에서 기독교가 승리한 것도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개종정책을 펼쳤기 때문. 기독교가 발생한 초기에 지중해 지역과 근동지역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은 제국령 내 여러 종교들에 포용적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기독교도들은 로마의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로서는 그런 기독교도를 좋게 바라볼 수 없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도 박해는 그 원인이 상당부분 기독교의 배타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로마제국의 기독교도 박해 역사는 대부분 기독교도의 입장에서 기술된 것이다.
- 일단 어떤 도덕률이 형성되면, 지리적으로 고르게 분산되어 있으면서 절대적으로 양보하지 않는 소수의 존재만으로 그 도덕률을 사회 전체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음. 어떤 사람들은 우리 인류가 더 도덕적이고, 더 선하고, 더 예의바르고, 더 상냥해질 수 있다고 믿지만 선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한 사회의 도덕률을 장악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런 믿음이 실현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알렉산더 대왕은 양이 이끄는 사자군단보다는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양 군단을 갖는 편이 더 낫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소수의 힘을 잘 이해했던 셈.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용병위주로 구성된 소수의 군대만으로 십수년 동안 로마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는 로마를 상대로 스물두번 전투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단 한번도 한니발의 군대가 전력상 우위에 있었던 적은 없었다. 한니발 역시 물러서지 않는 소수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인물. 일례로 칸나 전투에서 한니발 휘하의 지휘관 기스코가 로마군의 군세가 너무 큰 것에 우려를 표하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숫자는 중요한 게 아니야. 저렇게 숫자만 많으면 뭐하나. 기스코라는 한 사람의 지휘관이 있는데."
-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소수의 힘은 전쟁터에서만 의미있는 것이 아님. 마거릿 미드는 이런 글을 썼다. "생각하는 시민들의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세상을 바꿔 온 것은 전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혁명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소수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한 사회의 경제적, 도덕적 성장 역시 그런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됨
- 고대 아시리아의 아히카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중 개와 늑대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이솝과 프랑스 작가 라 퐁텐에게 차용되기도함. 이야기속 에 개가 굶주린 늑대에게 자신이 누리는 안락함과 풍요를 자랑하는 대목이 나온다. 늑대는 처음엔 부러워하지만, 개의 목에 걸려 있는 개 목걸이를 보고는 이렇게 말하며 도망간다. "개 목걸이에 묶여서 그렇게 많은 음식을 먹느니, 아무것도 먹지 않겠어"
- 과감하게 리스크를 감수하고 도전하는 유형의 사람에게 고분고분한 사회적 태도까지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역사를 돌아보라. 인류역사를 돌아봐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늑대 같은 사람들이 더 큰 성취를 이뤄냈다. 의지가 있다면 과감하게 도전하라.
- 누군가로부터 평가받아야 하는 사람들과 실패에 대한 손실을 온전하게 떠안아야 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판단내리는지를 기회가 된다면 서로 비교해 보라. 여러분은 이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흉터는 진짜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사람들은 뒤에서 분석만 하는 사람과 앞에서 진짜로 일하는 사람을 구분해 낼 줄 안다.
- 대통령 후보시절 트럼프를 비방하던 사람들은 그의 결점을 결격사유로 보고, 그가 파산에 이르렀던 일과 10억불에 이르는 개인자산을 잃었던 일 등을 널리 퍼뜨리려고 했지만, 정작 그 일을 알게 된 유권자들은 트럼프에게 화를 내는 일을 멈췄다. 트럼프가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책임을 지고 재산을 잃기도 하는 사람으로 비쳐지면서 그에게 느끼던 용인하기 어려운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사라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 높은 소득을 취하면서도 책임지는 일에서 면제된 사람들은 자신이 이끄는 기업의 경영성과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음. 월급쟁이 경영자들이 그 대표적 사례. 이들은 리스크를 뒤로 미루고, 영업성과를 조작하고, 연봉과 보너스를 챙기고, 은퇴하거나 이직한 후에 뒤로 미룬 리스크가 드러나면서 영업성과가 나빠지면 자신의 후임자들을 비난한다.
- 구두장이는 구두장이를 질투하고, 목수는 목수를 질투한다. (아리스토텔레스)
- 질투는 같은 직업 사이에서, 같은 능력 사이에서, 같은 처지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장 드 라 브뤼에르, 프랑스 철학자)
- 미셰 라몬트는 논문을 쓰기 위해 미국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심층면담을 진행했지만, 피케티는 프랑스의 블루컬러 노동자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직접 확인한 적이 없다. 아마도 직접 물어봤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더 맛있는 맥주, 새로운 식기세척기, 더 빠른 통근열차라고 대답했을 것임. 생전 마주칠 일 없는 부자들을 그들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을 원한다고 답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지식인들이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 약탈이라는 프레임을 씌울수도 있으며, 노동자들이 이에 호응해 부자들을 죽이자고 나설수도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고위 공직자들은 산업계에 유리한 방향으로 규정을 만드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함. 그래서 JP모건 같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기존 연봉의 몇 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위 공직자들은 산업계에 적용되는 규정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려는 경향을 보임. 그래야 규정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액 연봉을 받으며 민간부문으로 이직할 수 있기 때문. 공직에 있을 때 산업계에 유리한 방향으로 규정을 만들고, 나중에 민간 부문 대기업으로 이직해 고액연봉을 받는 것이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방식으로 민간부문의 상납고리가 형성돼 있다. 일단 상납 고리에 들어간 공직자는 공직자로서의 사명감보다는 이 고리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시하게 마련이며, 후임자들이 이 고리를 부수지 않도록 관리하는데 온 신경을 쓰게 된다. 바보 지식인이자 인맥을 중시하는 관료로 대표할 수 있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낸 티모시 가이트너는 재직 당시 금융업계에 퍼 준 막대한 구제금융의 대가로 현재 금융업계에서 큰 보상을 받고 있다.
-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사상가인 코린트의 페리안드로스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도 더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음식은 신선한 것을 먹고, 법은 오래된 것을 활용하라." 그런가하면 현자라 불린 스페인의 알폰소 10세는 다음과 같은 신조를 갖고 있었다. "장작은 오래된 것을 때라. 와인은 오래된 것을 마셔라. 책은 오래된 것을 읽어라. 친구는 오래된 친구와 어울려라"
- 넓은 시야와 통찰력을 가진 영국 역사가 톰 홀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로마인들에게 관해 가장 감탄하는 것은 최신의 것을 숭배하는 경향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그는 또한 이런 글을 썼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때 명분보다 실효성을 기준으로 했다."
- 확신에 모든 것을 잃었고, 경계심에 모든 것을 지켜냈다. (테오그니스, 고대 그리스 시인)
- 예쁜 사과가 맛이 더 좋은 것은 아니다. (라틴어 속담)
- 독일의 저명한 인지심리학자 게르트 기거렌처와 영국 인지과학자 헨리 브라이튼은 인간의 이지적 능력에 관해 리처드 도킨스와 다른 견해를 밝힘. 이들은 야구선수가 공을 어떻게 잡는지에 관한 리처드 도킨스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반박.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야구선수는 공의 궤적을 토대로 낙하지점을 계산해 내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인다. 잠재의식 속에서 일종의 수학적 계산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실험결과에 따르면 야구선수는 훈련을 토대로 공을 잡는 능력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시각훈련이 필요하다. 시각훈련은 가장 쉬운 단계로, 공이 가장 높은 점을 찍고 내려오는 순간이 언제인지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다음에는 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공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공을 바라보는 각도가 계속 상수를 유지하도록 달리는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도킨스의 주장대로라면 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처음부터 계산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야 함.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음. 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각각의 목적에 적합한 방식의 훈련을 통해 만들어짐. 야구선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어떻게 해야 공을 잡을 수 있는가는 캐치볼을 해 보기도 전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님. 직접 훈련이나 체험을 함으로써 알게 됨. 직접적 훈련이 아니라 상상을 하거나 계산만 하는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됨
-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복잡한 해법을 제안하도록 훈련받았고, 또 복잡한 해법을 제안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 그런데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대부분 이들이 제안하는 복잡한 해법 때문에 생겨났음. 지식인들은 결과를 기반으로 보상받는 게 아니라 대중의 인식을 기반으로 보상받으므로 쉽고 단순한 해법을 제안하는 일이 이들에게 유리할 리 없다. 게다가 복잡한 해법을 제안하더라도 그에 따른 여러 부작용을 책임질 필요가 없음. 기술분야를 보더라도 고객에게 복잡한 해법을 제안하는 것이 기업의 수익성을 높이는 데 더 유리함.
- 어떤 미신이 그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거나 도움이 된다면,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면, 미신을 비판하는 것은 불합리함. 인간의 과학은 신앙이나 미신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을 정도까지 발전하지 않았다. 어떤 믿음에 대해 "비합리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지금의 과학은 행동의 합리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도다. 우리가 신앙이나 믿음이라고 부르는 관념은 마음이라는 방에 놓여 있는 가구 정도로 생각하면 적절할 것임. 말하자면 목적에 따라 어떤 용도로 쓰이거나 치료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 행해지는 모든 행동이 합리적 근거가 있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모든 것은 합리적 근거가 있어서 살아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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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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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끄기의 기술

인문 2019. 12. 20. 17:39

- 소위 인생의 목적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모른다고 불평함. 하지만 진짜 문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뭘 포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
- 모든 걸 가지려는 사람, 즉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모두 채우려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부족함도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 모든 걸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 인생을 지옥의 무한궤도에 빠지게 만든다.
- 실용적 깨달음이란, 삶이 늘 어느정도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을 의미. 즉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든 인생은 실패, 상실, 후회를 수반하고 마지막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엄청난 고난들을 순탄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천하무적이 된다. 단언컨대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군요. 이곳(우체국)에 남아서 돌아버리거나, 나가서 작가놀이를 하며 굶거나. 전 굶기로 했습니다. (찰스 부코스키, 작가)
- 부코스키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애쓰지 마"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명성을 얻었음에도 부코스키는 루저였고, 스스로도 그걸 알았다. 그가 성공한 건 위너가 되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루저임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숨김없이 글로 풀어내 성공할 수 있었던 것. 부코스키는 한평생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 살았다. 그의 천재성은 엄청난 역경을 극복했다거나 출세해서 당대의 문호가 되었다는 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임. 부코스키는 자신을, 특히 가장 못난 모습을 숨김없이 오롯이 드러냈으며, 결점을 태연하게 세상과 나누었다. 그의 천재성은 이런 단순한 능력 안에 있다. 부코스키가 성공한 진짜 이유는 자신의 실패에 초연했기 때문. 그는 성공 따위에는 신경을 끄고 살았다. 유명해진 뒤에도 시 낭송회에 만취한 채로 나타나 독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공공장소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치근덕거렸다. 유명해지고 성공했다고 해서 부코스키가 훌륭한 인간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훌륭한 인간이 됐기 때문에 유명해지고 성공한 것도 물론 아니었다.
- 인생에 관해 사람들이 흔히 떠들어내는 조언(긍정과 행복으로 가득 찬 자기계발 요령)은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따. 이런 조언은 개개인이 이미 자신의 결점과 실패로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파고 들어, 그것에 몰두하게 함. 우리가 부자가 되는 비법을 배우는 건, 나는 돈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거울 앞에 서서 나는 예쁘다고 주문을 거는 건, 내가 못났다고 여기기 때문. 연애아 인간관계에 관한 조언을 따르는 건, 사람들이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 웃기지도 않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건, 내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최고와 최상을 부르짖다보면, 우리는 반대되는 것들만을 떠올리게 된다. 나와 어긋나는 것, 내게 없는 것, 내가 이루지 못한 것, 이런 일들만 머릿속으로 무한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거울 앞에서 서서 '난 행복하다'고 되뇌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행복한데 뭐하러 그런 행동을 하겠는가?
-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하려는 욕망 자체가 부정적 경험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부정적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긍정적 경험이다.
-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결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알베르 카뮈, 실존주의 철학자)
- 옛말에 "네가 어디로 가든, 그곳에 네가 있다"고 했다. 고난과 실패도 그렇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 그곳에 200킬로짜리 똥덩어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중요한 건 똥덩어리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다. 당신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똥덩어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
- 문제 없는 삶을 꿈꾸지마. 그런 건 없어. 그 대신 좋은 문제로 가득한 삶을 꿈꾸도록 해
- 내 꿈은 거대한 산과 같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난 그 산을 오를 마음이 별로 없다는 것을. 그저 정상을 상상하는 걸 좋아했을 뿐이다. 우리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어쨌든 난 실패했고, 낙오자이거나 루저다. 난 이기지 못했고 꿈을 포기했으며, 사회의 압력에 굴복했다. 하지만 진실은 이런 설명보다 훨씬 시시하다. 진실은, 내가 뭔가를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보상은 원했지만 투쟁은 원하지 않았다. 결과는 원했지만 과정은 원하지 않았다. 투쟁을 미워하고 오직 승리만을 사랑했다. 그런데 삶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투쟁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당신이라는 존재를 규정한다. 체육관에서의 투쟁을 즐기는 사람은 철인 3종 경기를 뛰고, 탄탄한 복근을 가지고, 집채만한 바벨도 들어올릴 수 있다. 야근과 사내정치를 즐기는 워커홀릭은 초고속 승진을 한다. 배고픈 예술가 생활에 따라오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즐기는 사람은 결국 예술로 성공할 확률이 높다.
-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똥덩어리와 치욕이 널려 있다.
-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진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오로지 가지지 못한 것으로만 만족하게 되어 있음. 이런 끊임없는 불만족이 인간이라는 종을 싸우고 분투하며, 번성하고 승리하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아픔과 괴로움은 인간진화의 오류가 아니라 특징이다.
-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이유는 단순함.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쉽고 즐겁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는 힘들고 대체로 불쾌하기 때문이다. 비난과 부정이라는 방식을 선택하면 즉각적인 쾌감을 얻는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길이며, 이런 회피의 길을 택하면 곧바로 짜릿한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쾌감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남. 이를테면 알콜 같은 물질로 인한 취기, 타인을 비난할 때 생기는 정의감, 위험한 일에 도전할 때 느끼는 전율 등. 그러나 어느 것이건 간에 쾌감은 인생의 지표로 삼기에는 얄팍하고 비생산적임. 자기계발의 기본 수법이 문제를 제대로 골라 해결하는 대신, 사람들에게 쾌감을 퍼뜨리는 것이다. 수많은 자기계발 전도사가 새로운 형태의 부정을 가르치고, 단기적으로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운동을 바람을 잡지만, 정작 근본적인 문제에는 고개를 돌린다. 명심하라. 실제로 행복한 사람은 절대 거울앞에 서서 '나는 행복하다'고 주문을 걸지 않는다.
- 우리 모두가 특별하며,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말은 사실 허튼소리다. 맛은 좋고 술술 넘어가지만, 실제로는 영양가 하나 없어서 먹어봐야 감정에 헛바람만 들게 하는, 정크푸드일 뿐이다. 육체 건강에는 역시 채소다. 그렇다면 감정 건강을 위한 채소는 뭘까? 바로 무미건조하고 일상적인 삶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임. 이를테면 '이 넓은 세상을 고려하면, 내 행동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호근 '내 인생 대부분이 지루하고 평범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와 같은 자세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채식이 도무지 입에 맞지 않아 고개를 돌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삼기면, 몸에 힘과 활력이 넘칠 것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차세대 거물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매일 같이 능력을 증명하려는 욕구 그리고 무력감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가실 것이다. 자신이 평범한 존재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어떤 평가나 거창한 기대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이루게 될 것임. 다시 말해, 소소한 우정을 나눈다거나, 무언가를 창작한다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거나, 좋은 책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웃는 일 등에서 즐거움을 찾게 될 것임. 따분한 소리 같은가? 그건 이런 일들이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이 괜히 일상인가. 중요하니까 일상이다.
- 40-50년전에 자존감 높이기가 심리학에서 맹위를 떨쳤다. 당시의 연구에 따르면,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일을 더 잘하고, 문제를 더 적게 만들었다. 따라서 당시의 많은 연구자와 정책 입안자가 사람들의 자존감을 높이면 눈에 띄는 사회적 이익을 얻을 것으로 믿었다. 이를테면 범죄가 줄어들고, 학업성적이 올라가며, 취업이 잘되고, 재정적자가 감소하리라고 예상. 그 결과, 부모들이 자존감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심리치료사와 정치인, 교사가 가세하면서 자존감 높인기는 교육정책의 일환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학교에서는 학업 성취도가 낮은 아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학점 부풀리기를 시행했다. 갖가지 평범하고 뻔한 활동에 대한 참가상과 엉터리 트로피를 만들었다. 과제랍시고 아이들에게 자신이 특별한 이유나 자기에게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 5가지를 적어오게 했다. 또 교회에서는 목사가 신도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신의 눈에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특별하며, 모두가 평범함을 넘어 탁월함을 얻을 운명이다.' 사업과 동기부여 세미나에서도 이런 역설적 주문을 구호로 삼았다. '우리 모두가 특별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하지만 다음 세대에 이르러 우리모두가 특별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상식이 됐다. 그동안 드러난 바에 의하면, 그럴듯한 이유 없이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끼는 건 사실 아무 소용이 없다. 다부지고 출세한 성인이 되는 데는 역경과 실패가 실제로 도움이 되며 심지어 필수적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고 자기에게 만족감을 느끼게 해봐야, 빌게이츠와 마틴루터킹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는다.
-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아란 각자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며,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함. 다른 말로 하면, 자의적 기준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행위는 사실상 자승자박이나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편이 낫다는 의미. 어떻게 보면, 신경끄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좀 삐딱하게 들리지만,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는 심리적 이점이 있다. 머릿속에 담고 있는 자아상을 버리면, 자유롭게 행동하고 실패하며 성장할 수 있다. '난 인간곤계에 서툰 것 같아'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순간 당신의 에너지를 갉아먹던 수많은 관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회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신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 난 반항아가 아니라 샌님인가바'라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생은 속박에서 벗어나 열정을 되찾을 수 있다.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좇다가 실패해도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 여기 어찌 보면 좋기도 하고 어찌 보면 나쁘기도 한 소식이 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당신의 문제는 특별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놓아버리면, 크나큰 자유를 맛볼 수 있다.
-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남다르다는 생각을 버려라. 삶의 기준을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다시 정하라. 자신을 유망주나 재야의 천재로 보지 말라. 비참한 피해자나 형편없는 실패자로도 여기지 말라. 그보다 훨씬 평범한 정체성인 학생, 배우자, 친구, 창작자와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라. 자기 정체성을 좁고 희귀한 것으로 규정할수록, 더 많은 삶의 요소들이 위협적으로 ㅂ일 것이다. 그러므로 되도록 단순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규정하라. 이렇게 살아가려면 거창한 자아상을 버려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유별나게 똑똑하거나, 재능이 넘친다거나, 엄청나게 매력있다거나, 상상을 초월할 만큼 괴롭게 산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 덕에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거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는 엉뚱한 믿음도 버려야 한다. 오랫동안 의존해 온 감정적 쾌락도 끊어야 한다.
-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멋진 몸을 갖고, 워커홀릭은 초고속 승진을 하며, 고된 연습을 견딘 아티스트는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한다. 당신이 선택한 고통이 당신을 만든다
- 우리는 가치관에 따라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을 정한다. 오노다는 일본 제국에 대한 충성에 가치를 둔 덕에 루방에서 30년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가치 탓에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비참함을 느꼈다. 메탈리카보다 잘나가야 한다는 기준은 머스테인이 록스타로 우뚝 서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이 기준이 결국 성공을 성공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역시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면, 어디에 가치를 둘 것인지,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실패와 성공을 가를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 프로이트는 말했다. "어느날 문득 돌아보면, 투쟁했던 나날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 물질적 성공, 나는 다 안다는 태도, 무한긍정과 같은 가치는 삶의 이상으로 삼기에 적절하지 않다.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쾌락, 성공, 지식, 긍정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것은 좋은 가치와 기준을 못 박아 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즐거움과 성공은 그 결과로 자연히 따라온다. 즐거움과 성공은 좋은 가치관의 부산물로, 그 자체로는 공허한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 사실 우리는 어떤 경험이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그 순간에는 모른다는 점. 때로 인생에서 가장 힘겹고 심했던 순간이 결국 인생을 결정짓고 동기를 부여하는 순간이 된다. 반대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기쁜 경험이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의욕을 떨어뜨리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긍정적 경험과 부정적 경험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믿지 말라.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그 경험이 당시에 고통스러웠는지 아닌지 뿐이다. 그런건 별 가치가 없다.
- 우리는 뭔가를 경험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그걸 약간 다르게 기억한다. 귓속말을 들을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내용을 전달할 때 이야기에 있는 몇몇 허점을 메우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래야 모든 게 말이 되고 자기가 제정신인 게 되니가, 그러고는 그렇게 상상으로 채워 놓은 내용을 사실로 믿어버린 채 그걸 다시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사실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그러다가 1년 뒤 어느날 밤에 술에 취해 그 이야기를 떠들 때는 급기야 내용의 3분의 1을 꾸며낸다. 그런데 다음주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자기가 뻔뻔한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다. 그래서 새로 개정되고 확장된 술고래 비전을 받아들인다. 5년 뒤, 하늘에 맹세코 사실인, 사실보다 더 사실이라고 믿는 우리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50%만이 사실이다. 우리는 다 그렇다. 제 아무리 정직하고 선하다고 해도 사람은 늘 자신과 타인을 속이며 산다.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우리 두뇌가 정확성이 아니라 효율성 위주로 기능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은 믿을 수가 없다. 너무 형편없어서 법정에서 목격자 증언이 증거로 채택되리라는 보장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우리의 두뇌는 지곧하게 편향된 방식으로 작동한다.
- 왜 그럴까? 두뇌는 언제나 자기가 갖고 있는 기존의 믿음과 경험에 바탕을 두고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려 한다. 새로운 정보는 모조리 일단 기존 가치와 결론에 무게를 두고 저울질 한다. 그 결과, 두뇌는 항상 우리가 그 순간에 참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치우친다. 그래서 동생과 관계가 좋을 때는 동생에 관한 기억이 좋게만 보이지만, 관계가 나빠지면 같은 기억이 달리 보이고 심지어 동생에게 화를 낼 수 있는 방식으로 기억이 바뀌게 되는 거다
- 경험을 처리할 때 우리 두뇌가 제일 우선시하는 건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경험, 느낌, 믿음과 일관되게 해석하는 것임. 하지만 살다보면 과거와 현재가 일관되지 않는 상황을 겪기 마련. 다시 말해,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이 과거에 이미 참으로 받아들인 것과 완전히 어긋날 때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 마음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 기억을 만들어냄. 현재의 경험을 상상을 통해 만든 과거와 짜 맟줘서 이미 확립된 의미를 유지하는 것이다.
- '너 자신을 믿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 우리는 이런 달콤한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듣는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히려 자신을 덜 믿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더 많이 의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란 항상 틀리기 마련이라면, 자신의 믿음과 가정을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을 의심하는 것 외에 발전하기 위한 논리적 방법이 달리 있겠는가? 무섭고 자기 파괴적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이쪽 길을 택하면 더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 문제는 확신은 닿을 수 없는 목표일 뿐 아니라, 확신을 추구하다 보면 대개는 불안이 더 커지고 심각해진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나는 직장에서 이 정도 능력이 있다거나 이 정도 연봉을 받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평가한 뒤 그걸 굳게 믿는다. 그러나 이런 확신은 약이 아니라 독이다. 이런 사람들은 동료가 먼저 승진하는 꼴을 지켜보며 자괴감, 모멸감, 모욕감을 느낀다. 아주 사소한 행동, 그러니까 남친의 문자 메시지를 훔쳐보거나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친구에게 물어보는 것조차도 확신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불안의 결과다. 남친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는데 없으면 그걸로 끝일까? 그다음엔 다른 휴대전화가 있는지 의심할 것이다.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직장에서 내가 왜 승진에서 탈락했냐고 따질 수도 있지만, 그래봐야 직장 동료를 불신하고 그들의 설명과 태도를 두고두고 곱씹게 될 뿐이다. 그 결과 승진기회는 더욱더 멀어질 것임. 천생연분을 찾아 헤매봤자 퇴짜가 거듭되고, 홀로 지내는 밤이 길어지다가 결국엔 내가 뭘 잘못한 걸까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다.
- 불확실성과 무지를 받아들일수록, 자기가 뭘 모른다는 사실을 더욱 개의치 않게 된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며 타인을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TV나 사무실, 거리에서 누군가를 볼 때, 그에 대해 고정관념과 편견을 형성할 필요가 더는 없어진다. 또한 자신을 평가해야 할 필요도 사라진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스러운지 아닌지 모른다.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열고 내가 그런 걸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뒤 경험을 알아가는 것이다. 불확실성은 모든 진보와 성장의 뿌리다. 옛말에 이르길,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고 했다. 먼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무지를 인정할수록 배울 기회가 더 많아진다.
- 우리의 가치관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가치관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천만한 독단적 사고방식에 빠져 허세를 부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십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먼저 여태까지의 행동과 믿음이 잘못되고 비효율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임. 자신의 잘못을 흔쾌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인생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검토하고 그걸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반드시 현재의 가치관을 의심해봐야 한다. 심혈을 기울여 현재의 가치관을 분석하고, 그 안에 있는 오류와 편견을 들춰내고, 그것이 어째서 세상과 조화되지 않는지 밝혀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걸 인정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의 무지가 우리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감. 우리는 그걸 지키고 정당화하고 고집하면 살아감. 일부러 그러지 않더라도 우리 뇌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앞서 말했듯이, 불합리하게도 우리는 기존 지식과 믿음에 크게 좌우된다. 자기가 착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과 모순되는 상황을 피하게 됨. 자기가 요리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기회를 자꾸만 찾게 됨. 우위를 점하는 건 언제나 믿음이다. 먼저 자신을 보는 관점과 자신에 관한 믿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회피와 불안을 극복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변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를 찾아라와 같은 말을 따르는 건 위험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스스로를 특정한 역할이나 쓸데 없는 기대에 옭아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잠재력과 기회를 자기발로 차버릴 수도 있다. 너 자신을 절대 알지 말라. 그래야 끊임없이 노력해 깨달음을 얻게 되며,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 교육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다른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검토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느력은 삶의 의미있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핵심기술임.
- 피카소는 평생 왕성하게 활동했음. 그는 90세가 넘어서까지 죽는 날 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의 기준이 유명해지기나 예술계의 부호되기 혹은 그림 1000장 그리기였다면 어느 순간 열정을 잃고 불안과 회의감에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수십년에 걸쳐 그림을 그리며 작품 세계를 넓혀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피카소가 노년에도 카페에 앉아 냅킨에 그림을 휘갈기며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이 바로 그가 성공한 이유다. 피카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끝이 없는 것이었다. 그 가치는 바로 꾸밈없는 표현이었다. 그가 냅킨에 휘갈겨 그린 그림조차 가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이 선택한 고통을 견디는 법이다. 새로운 가치관을 선택한다는 건 새로운 고통을 자신의 삶에 들여오는 것이다. 그 고통을 즐기고 음미하라. 두 팔을 활짝 벌려 환영하라. 그리고 고통스러워도 당신이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라
- '뭐라도 해' 원리를 따르면 실패가 하찮게 느껴진다. 모든 결과가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공의 기준은 그저 행동하는 것이며, 자극은 전제조건이 아니라 보상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실패하고, 실패는 또 다시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뭐라도 해' 원리는 우물쭈물하는 버릇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만약 당신이 실존적 똥폭풍의 한가운데 있어서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담면, 그러니까 이제껏 자신을 평가해온 방법이 모조리 기대에 미치지 못해 더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또는 여태 거짓 꿈을 좇느라 자신을 괴롭혀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아니면 자신을 평가할 더 나은 기준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답은 같다. 뭐라도 하라. 다른 행동을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라도 좋다.
- 당신의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 길은 수많은 선택지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가지에 몰입하라. 자유를 얻을 것이다.
- 허세꾼들이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건, 자신을 끊임없이 피해자로 꾸미다 보면 결국엔 누군가가 나타나 자기를 구원하고 그토록 원하던 사랑을 줄 거라고 믿기 때문. 또 이들이 타인의 감정과 행동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건, 자기가 상대를 고치고, 구원하면 그토록 원하던 사랑과 존중을 받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치명적 관계의 음과 양이 바로 피해자와 구원자다. 주목받기 위해 불을 지르는 사람과 주목받기 위해 불을 끄는 사람 말이다. 이런 두가지 유형의 사람들은 서로 강하게 끌리기 때문에 결국 함께 하게 된다. 이들은 병적인 측면에서 서로 딱 들어맞는다. 부모 역시 그런 유형의 사람인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이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관계는 허세와 흐릿한 경계에 기초하게 됨. 슬프게도, 이들은 상대의 실제욕구를 만족하지 못함. 이들의 과도한 남 탓과 자기 탓은, 애초에 이들이 감정적 욕구를 만족하지 못하게 해 온 허세와 엉터리 자존감을 영속시킬 뿐이다. 피해자는 계속해서 문제를 만들어내는데, 실제로 문제가 그만큼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를 만들면 자신이 갈망하는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 구원자는 계속해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제로 문제를 신경쓰기 때문이 아니라, 관심과 애정을 받을 자격을 갖추려면 다른 사람의 문제를 고쳐야 한다고 믿기 때문. 어느 쪽이건, 이들의 의도는 조건적이며 자기파괴적이다. 여기에 진정한 사랑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피해자가 구원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건 내 문제야. 직접 해결할 테니 옆에서 응원해줘" 자기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고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게 진정한 사랑이다." 구원자가 피해자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지 마. 네 문제는 네가 책임져야 해" 삐딱하게 들리겠지만, 이처럼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도록 돕는 게 진짜 사랑이다.
- 갈등이 없다면 신뢰도 있을 수 없다. 갈등은 조건 없이 내 옆에 있는 게 누구인지, 그저 이익 때문에 내 옆에 있는 게 누구인지를 보여줌. 예스맨을 신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망 판다가 여기 있었다면, 인간관계에서 신리를 다지고 친밀감을 높이는 데는 고통이 필수라고 말했을 것이다. 건전한 관계를 지속하려면, 두 사람 모두가 아니 또는 안돼라는 말을 주고받을 줄 알아야 함. 이런 부정이 없다면, 즉 가끔씩 거절을 하지 않는다면, 경계가 무너져서 한 사람의 문제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갈등을 겪는 건 정상일 뿐만 아니라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서로의 차이점에 대해 거리낌 없이 논쟁할 수 없다면, 그런 관계는 밑바탕에 감언이설과 사탕발림이 깔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서서히 치명적 관계로 치닫게 된다.
- 몰입할 때 자유를 얻는 이유는 더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 몰입하면 자유로운 이유는, 중요한 일에 집중해 정신을 가다듬는 게 건강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 몰입하면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고 좋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다. 지금 내게 있는 게 충분히 좋다는 걸 안다면 무엇 때문에 마냥 더 좋은 것을 쫓아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몰입하면 아주 중요한 몇가지 목표에 집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대단한 성공을 이뤄낼 수 있다. 이처럼 대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얻음. 다시 말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자신이 선택한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거부할 때, 깊이 없이 폭넓은 경험만을 추구하기를 거부할 대,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래, 어린 시절에는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게 바람직함. 아마 필수일 것임. 결국엔 세상을 폭넓게 경험하면서 내모든 걸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게 무언지 알아내야 함. 하지만 황김이 묻혀 있는 곳은 깊다. 뭔가에 끊임없이 몰입해 깊이 파고들어 그걸 캐내야 한다. 관계, 직업, 훌륭한 생활방식 만들기를 비롯한 모든 일에서 마찬가지다.
-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다.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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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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