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케티는 불평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제시해왔던 두가지 통찰을 재발견한 듯하다. 첫번째 통찰은 한 사회의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 가령 미국의 산업자본가들은 다른 이들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한다는 거이다. 그리고 착취당하는 이들은 스스로 착취자가 되지 않는 한 절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옛말마따나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고, 그들에게 그 노동보다 헐값으로 임금을 지급한느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비법인 것이다. 두번째 통찰은 부가 전체 인구에서 점점 더 적은 비중의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고, 또한 부는 권력의 원천 중 하나이기에 매우 부유한 이들은 점점 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정부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가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약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피케티가 재발견하고 설득력 있는 글로 써내려간 바를 달리 표현해보자면, 자본주의는 야바위 게임이며 통상적으로 자본가들이 꾸준히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 불평등은 종종 정당하지 못한 행동(절도, 약탈, 착취)에 근원을 두고 있기에,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이들이 그러한 행동을 은폐하려 드는 것은 합리적 행동이다. 실로 그렇다.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그러한 행동을 눈에 띄지 않게 숨기거나 말로 정당화해서 덮어버리는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자 한다. 불평등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또한 권력도 틀어쥐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권력은 그들의 정체를 감추는 데 활용될 수 있기 때ㅜㅁㄴ이다. 그러니 어떻게 불평등이 재생산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다. 또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제시하는 일이 어려울 수 있는 만큼, 무언가 꺼림칙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설득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일 것이다
- 문화자본은 직업시장에 진입할 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직장 안팎에서 승진과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고자 할 때에도 관건이 된다. 어떤 사회적 집단에 선별되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집단에 유용하고 그들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지식, 습관, 가치관, 기술, 취향 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이에게 보여 주어야 함. 그러지 못할 경우 문은 여전히 닫혀 있을 것이며, 그 집단이 가진 자원가 기회에 접근할 길은 차단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사회체제의 가장 높고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엘리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재생산하는지, 즉 어떻게 그들과 같은 외모, 사고방식, 행동양식을 가진 이들을 다음 세대의 엘리트로 선별하는지에 대한 부분적 설명을 제공. 또한 세상을 바꾸고자 할지도 모르는 문제아들을 어떻게 솎아내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 주석이란 페다클레스라 알려진 고대 그리스 학자가 만들어냄. 그는 두루마기 끄트머리에 나중에 다시 읽기를 위한 필기를 해두는 이상한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스승 중 몇몇은 그가 값비싼 두루마기에 낙서를 한다고 혼을 냈지만, 다른 이들은 그 기록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림. 그리하여 결국 페다클레스의 스승들은 페다클레스가 끄적거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을 접고, 그가 하는 행동을 일컬어 페다클레스의 기록, 줄여서 페다의 기록(Ped notes)라 부르기 시작.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주석(foot notes)인데, 이 용어가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 게임을 조작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게임도구를 손봐놓는다거나, 상대편을 방해한다거나, 심판을 매수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규칙자체를 불공정하게 만드는 거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지 않고 스스로 조심해가며 규칙을 다르는 것만으로도, 불평등은 자동적으로 발생하게 됨. 어떤 사회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불평등의 재생산이 제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음.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경우, 우리는 불평등의 재생산이 정상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화된, 즉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정착되어버린 행동양식들은 비유하자면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 왜 조작된 게임을 계속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누군가 던질 수 있다. 자기 입맛에 맞게 게임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게임을 계속하고자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하지만 계속 잃는 사람들이 왜 게임판을 떠나지 않을까? 게임이 조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탓에, 계속되는 패배가 자기 탓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름. 혹은 자신에게는 게임의 규칙을 바꿀 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 있음. 어쩌면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그것 외에는 다른 게임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름
- 태스트 하틀리 법은 직접적으로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게임의 규칙을 설정함. 그러나 간접적 방식으로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다른 규칙들도 존재. 90년대 체결된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자본가들은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재화를 미국으로 가져오면서도 높은 관세를 내지 않을 수 있게 됨. 이것은 미국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게임의 규칙을 바꿈. 만약 미국 노동자들이 더 높은 임금가 보다 나은 근로조건을 요구할 경우, 사용자 측은 생산기지를 멕시코나 동남아로 옮겨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대기업들은 1860-65년 사이, 즉 남북전쟁 시절부터 생겨나기 시작.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기업의 힘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했는데, 오늘날 이는 예언처럼 들리낟. "머지 않은 미래에 조국에 닥쳐올 위기를 생각하면 제 신경은 곤두서고 몸은 떨려 옵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십시오. 기업들이 권좌에 앉아 높은 곳에서부터 부패의 시대가 오고 있으며, 돈의 힘은 사람들의 무지 위에서 치세를 이어가기 위해 애를 쓸 것입니다." 링컨의 시대 이후 이 예언은 많은 부분 실현되고 말았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기 때문. 비록 법에 따라 등록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제 기업들은 최초의 설립취지와는 무관하게 영원히 존속할 수 있고 무슨 종류의 사업이건 추진 가능. 관리자와 투자자들은 더 이상 기업의 부채와 벌금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지지 않음. 이제 기업은 다른 기업을 소유할 수 있고, 정치적 목적의 후원을 할 수 있으며, 경영에 관련된 정보의 공개를 거부할 수 있고, 사업을 실제 수행하는 장소와 다른 곳에 법인 설립을 할 수도 있음. 게다가 오늘날 사람들은 기업이 영원히 존속할 권리, 거대하고 막강한 존재가 될 권리, 정부와 대학과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권리, 우리의 문화를 형성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다
- 빨간 줄 긋기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게임을 조작하고 있지 않았던 이들 또한 규칙의 변화에 따른 불평등으로 이익을 볼 수 있음을 잘 보여줌. 연방주택관리청과 재향군인관리국이 운영하던 차등대출 규칙은 일차적으로 은행가, 부동산개발업자, 중개업자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이차적으로 백인 주택구입자들에게 이익을 안겨줌. 오늘날 그러한 주택보유가구에서 자란 백인자녀들은 학자금 대출없이 대학을 다니고, 어쩌면 결혼선물조로 부모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그 집을 구입할 수도 있을 것이며, 결국 기꺼이 부를 상속받는 결과를 낳을 것임. 오늘날 성인이 된 자녀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게임을 조작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본질적으로 차별을 내포하고 있는 게임의 규칙에 따라, 대부분은 인식하지도 못한 채 이득을 취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 복잡한 조세규칙과 그 규칙을 악용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로 인해, 명목상의 세율과 실효세율간에는 큰 차이가 발생. 실효세율이란 누군가가 모든 허점, 이점, 소득은폐, 공제, 맹점 등을 활용하고 난 후 실제로 내게 되는 세금. 이 중요한 차이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가령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연방 소득세율처럼 종이에 적힌 것만 본다면, 오늘날 벌어지는 게임을 현실보다 훨씬 공정하다고 착각할 우려가 있다.
- 규칙을 만드는 의사결정체로부터 배제된 이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구걸하고, 탄원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됨. 앉을 자리를 허락하지도 않는 체제 속에서 점잖은 태도로 묵묵히 일하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물론 규칙을 만드는 이들은 모든 것이 순리되로 되어가고 있으며 큰 변화를 가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할 것임. 결국 그들은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이들이 입법자로서의 권위를 갖고 모든 이에게 최선의 결과가 돌아가도록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게임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나면, 이러한 주장의 정당성은 물거품이 된다
- 공정함이란 그저 모든 이에게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란 주장에 현혹되지 말아야 함. 불평등의 재생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규칙이 각기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함. 그렇게 바라볼 때, 우리는 규칙이 정당한 이유 없이 특정한 이들에게만 더 유리한 결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됨. 때로는 대학입학의 사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이들이 경쟁에 참여할 수 있을만큼 준비되어 있다고 전제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조작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함. 규칙은 그 규칙이 만들어지고 적용되는 조건으로 인해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여러 인종이 사는 지역에서 백인가구가 이사해 나가도록 부추기고 흑인가구가 교회의 주택단지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했던 원인인 인종차별이 없다고 상상해보자. 산업생산기지가 도시지역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없었다고 상상해보자. 흑인들이 안정되고 높은 소득을 올리는 직업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차별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흑인과 백인의 결혼이 같은 인종끼리의 결혼과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이런 조건하에서라면 감정평가 지도위에 그어진 빨간 줄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임.
- 불평등을 만들어내려면 다른 무엇보다 우선 몇몇 지점에서 차별되는 집단을 정의하는 일이 필요. 그러고 나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도둑질당하고, 약탈당하고, 착취당해도 마땅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됨. 저들로부터, 우리가 아닌 타자들로부터 빼앗아오는 것은 괜찮다는 생각이 근간에 깔리게 됨.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를 구성하려면, 집단 내에 속하는 사람들은 우월하며 집단 밖의 사람들은 열등하다는 관념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을 일컬어 '이데올로기적 날조'라 부름
- 어떤 이들을 다른 존재로, 대부분의 경우 열등한 존재로 규정짓는 것이 언제나 불평등의 전제조건이다. 그러한 차이가 아무리 과장되거나 망상으로 지어낸 것이라 해도, 일단 사람들이 공유하는 현실에 대한 정의의 일부로 편입되고 나면, 차별대우를 보다 복잡하게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게 됨. 이런 정당화를 통해 착취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림. 만약 그러한 정당화의 논리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제도화된 착취에 대한 도전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 미국의 모든 어린이에게는 노력과 지능과 판단의 결과에 따라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사람은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인정받고 공정한 보상을 얻으리라 믿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을 통틀어 성취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성취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눈에는 조작된 게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해내지 못했지, 그러니 나는 내 수준에 맞는 대접을 받아야 해" 성취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남들보다 앞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자신을 탓해야 한다. 미국은 성취 이데올로기에 푹 빠져 있는 나라다. 거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부모, 선생, 대중매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성취 이데올로기를 배우게 됨. 게임이 조작되어 있지 않으며 충분히 똑똑한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남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다고 믿는, 혹은 적어도 그런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 사람들이 세대마다 수백만 명씩 새롭게 등장한다는 뜻이다
- 그들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동등한 자원을 가지고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선수들은 최고의 코치에게 교육을 받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훈련을 하며 영양 넘치는 음식을 먹고 가장 좋은 신발을 신지만, 다른 이들은 코치도 없고 훈련받을 시간도 없으며 50걸음 뒤에서 맨발로 시작해야 하는 육상경기를 떠올려 보라. 아무도 이런 경기가 공정하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 성취 이데올로기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유능하고 열심히 일하며 규칙을 따른다고 해도 그 모든 사람들이 딛고 올라갈 자리는 없다는 것. 설령 모든 사람들이 야심만만하며 자긍심이 높고,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고, 박사학위를 따고, 값진 기술을 익히고, 문제가 될 일은 하지 않으며, 열심히 일하고,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남보다 앞서 나갈 순 없다. 그만큼 일자리가 충분치 않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면 남보다 앞서 나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남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을 해나가고 있더라도 말이다
- 성취 이데올로기가 조작된 게임과 결합하면 사람들은 패배했을 때 자신을 탓하게 되고, 무력감과 자격지심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이들은 일종의 내재화된 억압을 경험하고 있는 셈. 이러한 자기비하적 관점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지배자 집단은 타자화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타자화된 이들은 자신에게는 더 나은 삶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혹은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느끼며, 이는 흔히 자신이 착취당하는 상황을 수긍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짐
- 대안은 없다는 세계관은 무기력한 기분을 통해 더욱 강화됨.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누군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가리키는 순간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좌절감을 들쑤시는 결과를 낳기 때문. 이러한 불편함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는 현실적인, 혹은 보다 나은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대안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편함을 느낄 필요도 없어짐. 누군가는 대안을 찾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 스스로의 현명함에 대해 뿌듯함을 느낄지도 모름. 동시에 조작된 게임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계속 이득을 볼 수 있다.
- 기원후 1세기,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는 로마인들이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는 정치인들에게 쉽게 매수된다고 풍자. 곡식을 주고 대중적인 오락거리를 보여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대중에게 필수적인 식량과 하찮은 싸구려 오락물을 주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을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자면 빵에는 식량뿐 아니라 에너지, 수도, 그밖에 아이팟, 아이패드, 스마트폰 같은 소비재들이 포함될 수 있을 것임. 서커스로는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대중적 경기들 뿐만 아니라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놀이동산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빵과 서커스라는 개념을 꺼내든 이유는 어떤 이들을 힐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움직임이 오늘날 불평등의 재생산에 있어서도 유사하게 관찰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임. 정치적 상상력은 구속받는다기보다 차라리 잠들어버린다고 해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주의가 산만할 뿐더러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어 있기 때문
- 기후변화와 흡연은 알기 쉬운 사례에 속함. 과학적 합의가 명백한 가운데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의도가 분명하니 말이다. 다른 사안에서는 선동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와 사실을 구별하는 일이 더 어려울수도 있다. 그 모든 경우 핵심은 권력을 가진 행위자나 그들의 하수격인 싱크탱크들이 의혹, 혼란, 분열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것이다. 그들의 시도는 눈에 잘 띄지 않을수도 있다. 그럴듯한 연구와 해당주제의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발언을 겹겹이 두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럴 때는 돈을 따라가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이 심어놓는 조작된 의심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 아닐까 싶다
- 1600년대 말 대부분 토지 소유자였고 일부는 산업자본가였던 북아메리카의 자본가들은 유럽계 이민자들과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노동자로서 연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백인이라는 정체성을 사용했음. 전자에 속하는 노동자들은 백인으로 정의되어 추가적인 경제적 이득 및 정치적 특혜를 받았다. 후자는 흑인으로 정의되어 그런 특혜를 받지 못했으며, 법에 따라 평생 노예생활을 하고 자손마저 노예가 되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유럽계 조상을 둔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노동자이기에 앞서 백인이라고 규정짓도록 유도되었던 것. 이렇듯 노동자들은 백인과 흑인으로 분할되면서 강력한 대중적 저항을 벌이지 못하게 되었다. 노예제가 존속했던 기간동안 미국에서는 증조부모 대체 아프리카계 이주민 혈통이 섞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법적으로 흑인으로 간주되었음. 흑인의 정체성을 이와 같이 규정한 것은 백인노예 소유주와 흑인 여성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흑인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을 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을 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예제가 종식된 후에도 그러한 규칙은 살아남았는데, 그것은 흑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가운데 백인의 경제,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말하자면 누가 합법적으로 자신은 백인이며 백인의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게임의 규칙을 발명해낸 것은 유럽계 혈통을 지닌 경제 엘리트들이었던 셈이다. 이후 18-19세기에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가 더 정교해지면서, 백인노동자들 또한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설령 농장, 공장, 광산에서 여전히 착취당하는 처지였다고 해도 말이다. 유럽계 조상을 둔 스스로 백인이라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받는 보상은 경제적인 동시에 정서적이었다. 낮은 임금을 받는 백인 노동자들이 자신을 흑인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럿이 백인 자본가들이 그들에게 지불해온 심리적 임금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인종주의를 이용해 백인과 흑인 노동자들이 서로 갈라서게 한 결과로 노동자의 힘은 위축되었다
- 모든 불평등한 체제는 지배집단에 속하지만 엘리트는 아닌 자들의 지지를 필요로 함. 착취체제의 최상층에 앉아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지배 집단의 일원으로 취급되기는 하는 사람들 말이다. 앞서 우리는 백인 노동계급을 그러한 집단의 사례로 제시한 바 있다. 그들은 백인 우월성에 대한 주장을 통해 혜택을 입고 있으니 말이다. 가부장제의 위계질서 내에서 최하층에 위치한 남성들, 가령 유색인종이나 노동자 혹은 동성애자 남성들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같은 원칙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자신을 착취하거나 폄하하는 자들에게 상대적 우위를 제공하면서 스스로를 종속적 위치에 고정시키는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이미 살펴보았듯이 오늘날의 체제는 엘리트가 아닌 비 백인 남성들에게 여성에 비해 특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치 가난한 백인들이 흑인에 비해 여전히 특권을 누리고 있듯이 말이다. 특히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이라면, 남성으로서의 특권을 약간이나마 누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기에, 그들은 자신을 지배집단의 일부로 여길 수 있게 해주는 아주 사소한 정체성의 징표에소 매달리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사회는 늘 나타나고 또 사라졌다. 그 몰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사회가 생존을 위해 의지하고 있는 자연환경을 근시안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몰락의 주요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사회의 지도자들이 유연성을 잃고 문제해결에 있어서 오래된 방법에 집착함으로써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는 일에 실패할 때 사회가 몰락한다고 주장. 또 다른 역사가 조지프 테인터는 보다 복잡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투자를 하지 않거나 할 수 없을 때, 그렇게 한 사회가 조직으로서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몰락하거나 이전에 비해 단순한 형태로 줄어든다고 주장. 어떤 가설을 택하건 두가지 의문이 남는다. 번영하는 듯 보이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몰락이 임박해온다는 전조를 어느정도까지 느끼는가? 그리고 지난 사회의 바람직한 요소들을 보면서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 예측은 어렵다. 특히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닐스 보어)
- 다이아몬드, 토인비, 테인터가 내놓은 해답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자면 경직성일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제기되는 도전과 압력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 말읻. 그렇다면 이러한 경직성을 불러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변화하는 환경에 사회가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원인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불평등이다. 한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점점 더 불평등해질수록, 경제와 정치 분야의 엘리트들은 변화를 가로막고 방지하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이게 될 테니 말이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이 발견됨. 만약 변화가 자신의 부나 권력을 포기를 의미한다면, 엘리트들은 차라리 사회가 악화되는 쪽을 택할 것이다.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은 무기력한 기분에 사로잡혀 변화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지속가능성이 없는 상황 속에 고착되어 버리며 최악의 결말로 향하는 것이다.
- 불평등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논리 중 하나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에 그들이 불평등한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행동하게 만들 방법도 없다는 것. 그들은 인간이 본성상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존재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타인을 희생시켜가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다고도 주장. 물론 대부분의 인간사회에는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사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관용을 베풀고, 동정심을 표출하는 사례 역시 수없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상대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지 않은 다음에야,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바로 그렇게 대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면모가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고 겨루는 것만을 강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불평등을 줄여나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로 호의적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관건은 그러한 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달렸다 할 수 있다.
- 점령운동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사회변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됨.
(1)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대중을 끌어들여 시위를 벌이는 등 사람들을 동원해 내는 것과,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운동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후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고가 필요. 인종주의, 성차별, 엘리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분열을 극복하고, 같은 목표를 향한 인식을 공유하고 반복되는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민주적으로 책임을 지는 리더십을 형성하고, 계획을 세우며,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물질적 기반을 베공하는 가운데, 정부의 공적인 수단을 통제하고 있는 이들과 실제로 맞서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불만을 드러내고 공동체에 대한 상상의 물고를 텄다는 점에서 월가 점령운동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 주었음. 하지만 점령운동이 벌어지던 캠핑장 밖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만한 조직을 형성해내는 과제는 그다지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지 못했다. 두번째 교훈은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거나 불만을 확산시킬만한 일이 벌어지려 할때, 단지 불평등을 확산시키는 규칙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문을 던지며 사회변화가 시작되려는 조짐만 보이더라도, 엘리트들은 격렬하게 반격한다는 것이다. 점령운동 참여자들은 일상적 업무에 지장을 거의 초래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트들은 월가 점령운동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전달하고 있던 메시지도 문제였지만, 더 많은 이들을 향해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라고 촉구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월가 점령운동이 엘리트들의 권력에 즉각적으로 끼친 위협은 보잘것 없는 수준이었지만, 엘리트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경한 태도로 그 운동을 제압하려 들었따. 하지만 엘리트들의 관점에서 보면, 월가 전령운동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활기를 띠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사회를 어지럽힐 수 있을 만큼 갈등의 수위가 높아지지 않도록 조절해야만 했던 것이다. 엘리트들이 갈등의 조짐을 느끼고 대응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월가 점령운동의 세번째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발언을 하고,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내고, 사람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고, 서로를 교육해나가는 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말이다. 월가점령운동은 곧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불평등과 엘리트들의 정부지배라는 문제를 전국적인 의제로 끌어올리는 일에는 성공했다.
- 불평등은 만들어진 것이다. 그냥 벌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의 것을 훔치고, 약탈하고, 착취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방식을 제도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자원의 배분이 불평등한 방향으로 제도화된 상황을 일컬어 조작된 게임이라고 해왔다. 바로 그 조작된 게임으로 인해 불평등이 영구히 고착되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분석이 그럴듯하게 여겨진다면, 조작된 게임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 보일 것이다. 아예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과정이란 조석간만의 차를 만들어내는 만유인력과도 같이, 너무도 크고 강력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능 일은 없을 지경이라는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평등이 만들어진 것이든, 우리는 평등한 사회 혹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공정하고 덜 불평등한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내고, 연대의 문화를 창출하며,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상식적 도덕규범과 일상적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실천가능한 일이다
-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1번 테제)
- 야바위게임이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만약 우리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로잡혀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재생산하고 있는 조작된 게임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다음 단계는 그것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뿐이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1번 테제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이다. 혹은 그 유명한 마르크스의 문장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까지 명확하게 바로잡고 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보다 변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변혁하는 것은 사실상 동일하며, 세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와 실천의 개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 1845년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는 사회적 구성물인데 그 점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다. 둘째,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종교를 온전히 이해한다면, 그 종교를 믿고 따르는 개개인의 종교적 심성 혹은 영성 등에 부여되고 있던 특권적 지위 역시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 가능. 셋째, 이와 같이 종교와 신자, 신앙행위 등을 끝까지 분석하는 행위는 제도화된 종교뿐 아니라 개별적인 신자들로부터도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그것은 가장 급진적인 변혁 운동과 불가문의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 불평등은 만들어진다. 자원을 공정하지 않게 분배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들이 존재함.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일종의 게임에 비유한다면, 그 게임의 규칙은 조작되어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기존의 게임을 뒤집어 엎기는커녕 지속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조작하는 자들, 쉽게 말해 엘리트들은 사람들이 착취하면서도 게임판에서 떨어져 나가지는 않도록 개평을 던져주는 식으로 관리하기 때문. 또한 엘리트뿐 아니라 게임판에서 착취당하는 이들 스스로가 정체성의 근본을 해당 게임에서 찾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게 짜인 책임의 그물이 이 사람들을 옭아맨다. 조작된 게임을 조작된 채로 남아 있거나, 설령 변화의 기회가 열린다 해도 더 나쁜 방향으로 바뀌기 일쑤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당연히 환영받기 어렵다. 사람마다 자신의 일에 대한 평가는 다르겠지만, 어쨌건 고된 노동을 통해 얼마간의 돈을 벌어들이면서 우리는 뿌듯함을 느낀다. 자신이 돈을 벌고 있다는 이유로 본인이 참여한 일, 다니고 있는 회사를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음. 하지만 마이클 슈월비는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고생하셨겠지만, 당신은 조작된 게임판에서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하고 그저 개평이나 받아 챙기는 신세라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공무원에 임용되고, 자영업자로서 자리를 잡는 등 남부끄럽지 않은 위치를 점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직업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