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과 투자

경제 2019. 4. 20. 08:06

- 만일 어느 기업이 좋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미 주가에도 반영되었을 공산이 크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나쁜 기업에서 좋은 주식이 나오는 게 현실. 그런데 투자자들은 대개 나쁜 기업에 투자하기를 두려워함. 그 기업의 펀더멘털이 개선되어도 사실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임. 그들은 흔히 나쁜 기업이 좋은 기업으로 바뀌었다는 월스트리트의 컨센서스가 나온 뒤에야 그 기업에 관심을 보인다
- 닷컴 버블로 대변되는 90년대 후반의 강세장에서 개인 투자자들은 자기가 월스트리트보다 투자를 훨씬 잘한다고 착각. 당시 여러 투자포럼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청중이 포럼에 참석한 전문가들을 향해, 일부 펀드매니저들은 지금의 시장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지금은 기술주에 투자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라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허다했음. 언론사, 투자 웹사이트 등은 그런 개인투자자들의 생각에 재빨리 편승해 그 흐름을 더욱 키웠다. 하지만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온다는 말이 있듯이, 훗날 개인 투자자들은 한 업종에 과도하게 투자했던 대가를 혹독히 치렀다. 99년 한 해 동안의 엄청난 수익률은 2000년에 들어서면서 처참히 무너짐. 반면 심한 조롱과 모욕을 당했떤 펀드매니저들은 손실을 거의 입지 않음.
- 인터넷이 포문을 연 정보화 시대에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이것이 꼭 투자에 유리한 것은 아님. 단순히 정보를 많이 얻는 것보다 투자성과를 극대화할 유용한 정보를 얻는 것이 투자자들에게 이상적임. 그러나 애석하게도 신경제로 불리는 이 시대는 정보의 양만 늘어났다. 일각에서는 인터넷 때문에 어설픈 투자정보와 조언 등 소음이 늘어났을 뿐, 정보의 질은 낮아졌다고 비판한다. 질은 개선되지 않은 채 양만 늘어난 정보에 탐닉하는 행위는 시간낭비일 뿐 아니라 어리석은 투자로 이어짐. 게다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치있는 정보를 걸러내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깔끔하게 정리된 보고서 하나만 읽고 투자해 큰 수익을 내고 싶지, 이리 저리 소음에 휩쓸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정보화 시대인 지금, 개인 투자자들의 환경은 더욱 악화됐을 공산이 크다
- 내가 일간지를 구독하지 않는 이유는 두가지다. 먼저, 일간지가 통찰을 주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 당신이 만일 여러 일간지와 투자레터를 구독하는 가운데 거기서 제공하는 정보가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경험과 식견이 뛰어난 조언자를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직접 투자를 중단하라. 당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보 판독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주식시장에서 호구가 되기 쉽기 때문. 다른 이유는 나는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사건을 따라다니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 시장의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투자할 때 소음에 더 민감해짐. 나는 시장의 중요한 사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상적 사건들을 따라다닐 생각이 없다. 세부사항에 집착하지 말고 큰 그림을 보는 편이 투자에는 더 유리함
- 소음을 걸러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자기가 잘 이해하는 투자원칙을 따르는 것. 원칙없이 월스트리트의 소음을 좇는 행위는 앞에서 언급한 랜덤 모델을 흉내내는 것과 같다. 그런 전략으로도 단기간은 초과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그런 성과는 단지 운에 불과. 운은 라스베이거스에서나 기대하고, 투자할 때는 치밀한 투자원칙을 따르기 바란다.
- 뛰어난 투자자는 소음이 없을 때 매수하고, 소음이 넘쳐날 때 매도한다
- 흔히 광고에서는 기존 포트폴리오에 새로운 자산을 추가해 분산투자하라고 권유. 예컨대, 대형주 포트폴리오에는 소형주를 추가하고, 100% 주식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에는 채권과 현금성 자산을 추가함, 자국 주식 포트폴리오에는 해외주식을 추가하라는 식이다. 대개 이런 광고는 자산을 추가하면 포트폴리오의 수익률도 높아진다고 주장. 그러나 이런 주장이 나오는 시점에 주목해야 함. 이런 주장은 흔히 특정 자산이 매우 높은 실적을 달성한 다음에 나온다. 일반적으로 분산투자를 하면 위험이 감소하지만 수익률도 감소한다
- 일부 투자자는 집이나 직장 근처에 있는 기업의 주식을 즐겨 매수. 내가 사는 지역신문에는 지역기업들의 주가목록이 매일 게재된다. 그러나 집 근처 기업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음. 특정 지역에 경기에 민감한 기업들이 집중되었다고 가정하자. 그 지역 경기가 침체해 기업들이 적자로 돌아사면 십중팔구 직원을 해고할 것임. 그러면 지역 부동산 가격도 하락함
- 우리사주제도나 퇴직연금을 이용해 단기투자 목적으로 자사주를 매수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는 분산투자에 역행하므로 현명하지 못함. 이미 자신의 인적자본이 묶여 있는 회사에 주식까지 투자하면 달걀을 모두 한바구니에 담는 셈. 회사가 역경에 처하면 당신은 해고당할 것이고, 당신이 가진 회사 주식의 가격도 하락할 것임
- 분산투자가 아무리 중요해도, 단지 상관관계가 낮다는 이유로 장기간 계속 가치가 하락하는 자산에 투자해서는 안된다. 금은 주식과의 상관관계가 거의 최저수준인 자산이다. 이른바 금 애호가들은 지금도 금을 이용해 주식 포트폴리오의 위험을 분산하려 함. 그러나 이런 헤지전략은 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간 거의 효과가 없었다. 상관관계가 낮을수록 분산투자 효과가 높아지긴 해도, 금이 초과실적을 나타낸 것은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기간뿐이었음. 그러나 위의 20년간 대부분, 미국은 디스인플레이션을 경험. 상관관계가 낮더라도 금을 분산투자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 만일 마차용 채찍 제조사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이 회사 주식과 시장지수의 상관관계도 매우 낮을 것임. 그러나 이런 주식에서 장기적으로 좋은 실적을 기대하기는 어려움. 분산투자의 실적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기적으로 가치가 상승하는 자산만을 분산투자 수단으로 사용해야 함. 미국경제가 장기 인플레이션에 진입한다고 생각한다면 금 역시 적절한 분산투자 수단이 될 수 있음. 지금까지 미국에서도 인플레이션 기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장기 디스인플레이션 추세 속에서 주기적으로 단기간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임. 이런 추세가 바뀐다면 금도 타당한 분산투자 수단이 됨. 최근 중앙은행들의 금 매각을 그 반대 신호로 해석하는 금 애호가도 있음. 중앙은행들의 금 매각 가격이 80년대는 온스당 800불이었지만, 2000년에는 이보다 훨씬 낮아졌다. 그래서 일부 금 애호가는 금 가격이 곧 반등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예컨대 에너지 가격 급등 등 심각한 인플레 위협이 닥치지 않는다면 금 시장 강세는 장기간 이어지기 어려울 것
- 국제 분산투자를 논할 때, 대중매체는 오로지 거대 다국적 기업에게만 초점을 맞춤. 일부 분석가는 세계 다국적기업 지수까지 계산한다. 이 또한 소음이다. 정말로 국제 분산투자를 원한다면 소기업에 투자해야 한다. 미국 투자자는 소니나 토요타에 투자할 때보다 일본 소기업에 투자할 때 분산투자 효과가 더 높아진다
- 일상적으로 금융시장에 돌아다니는 소음이 투자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투자자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든다는 것. 자칭 장기투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놀라운 결론일 수 있겠다. 날마다 경제신문을 읽고 경제텔레비전을 보며 포트폴리오를 평가하면, 처음에 장기 투자를 계획했더라도 결국 장기투자를 포기하게 되기가 쉽다. 투자기간이 아주 길다면, 날마나 경제신문과 경제TV를 보고 포트폴리오를 평가할 필요가 없다. 분기 어닝 서프라이즈 등 온갖 분석은 5-10년 뒤 주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진정한 장기투자자는 시장을 매일 접할 필요가 없다.
- 일부 학자들은 투자자들이 나쁜 기업을 회피하는 다른 이유를 제시. 학자들의 가설에 의하면, 포트폴리오 매니저, 주식중개인, 재무상담사 등은 위험보다 후회를 더 회피함. 고객에게 사과하게 되는 상황을 더 두려워함. 좋은 기업의 주식을 추천했는데 실적이 부진하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음. 원래 유명하고 좋은 기업이지만 외부 영향 탓에 수익률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변명이 통할 수 있다. 예컨대 회사 경영진이 의사결정을 잘못했다거나, 시장에서 다른 업종이 인기를 끌었다고 해명함. 반면, 나쁜 기업의 주식을 추천했는데 실적이 부진하면 해고당하기 쉬움. 그 회사가 부실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아는데 그들만 몰랐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래서 후회를 회피하고 좋은 기업의 주식을 추천하느 경향이 있다
- 흔히 애널리스트들은 "이 회사는 좋은 기업이므로 저라면 지금 사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들어야 할 말은 "이 주식은 좋은 주식이 될 것이므로 저라면 지금 사겠습니다."라는 말이다.
- 듀레이션은 금리에 대한 채권가격의 민감도를 나타내는 척도로, 이자규모와 이자수령 시점에 따라 결정됨. 30년만기 할인채는 원리금을 모두 30년 후에 받게 되므로 듀레이션이 30년이다. 30년만기 이표채는 만기까지 정기적으로 이자를 지급받으므로 듀레이션이 30년보다 짧다. 다른 요소도 채권의 듀레이션에 영향을 미침. 표면금리가 높은 이표채는 표면금리가 낮은 이표채보다 듀레이션이 짧다. 중간에 지급받는 이자가 더 많기에 그렇다. 장기금리가 상승할 때는 듀레이션이 짧은 채권이 듀레이션이 긴 채권보다 유리. 그러나 금리가 하락할 때는 듀레이션이 긴 채권이 듀레이션이 짧은 채권보다 유리. 인플레이션에 의해 금리가 상승할 때는 원리금을 최대한 빨리 회수해 더 높은 금리로 재투자하는 편이 유리함. 금리가 상승하면 미래에 받는 돈의 현재가치가 감소한다. 1년만기 채권은 금리가 1% 상승하더라도 손실이 크지 않다. 남은 만기에 대해서만 1% 손실이 발생하기에 그렇다. 그러나 30년 만기 채권이라며 금리가 1% 상승할 때 큰 손실을 보게 된다. 남은 ㅁ나기 30년에 대해 1%의 복리로 손실이 발생하기에 그렇다. 따라서 듀레이션이 길수록 채권의 가격은 금리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 채권 듀레이션 개념을 적용해보면 성장주가 가치주보다 금리변화에 민감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성장주는 배당수익률이 낮은 고PER주와 비슷. 성장주는 대개 배당이 적고 먼 미래에 기대되는 이익까지 주가에 반영하는 탓에 PER가 높아서 그렇다. 가치주는 배당수익률이 높은 저PER주와 비슷 대개 배당지급액이 많고, 가까운 미래에 기대되는 이익만 주가에 반영하는 탓에 PER가 낮아서 그렇다. 결국, 성장주는 듀레이션이 긴 채권과 비슷하고, 가치주는 듀레이션이 짧은 채권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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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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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산업이 주도하는 오늘날의 데이터뱅크는 우리에 관해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데이터뱅크가 개인에 관해 기록하면 할수록 개인의 존재는 감소한다. (마셜 매클루언)
- 모든 혁명은 한 사람이 품은 생각에서 시작되었으며, 다른 사람이 같은 생각을 품었을 때 이 생각은 그 시대를 설명하는 열쇠가 된ㄷ. (랠프 왈도 에머슨)
- 200년 전에는 매일 폐점시간에 진열대에 남아 있는 상품의 목록과 서랍 안에 든 돈을 만년필로 종이 장부에 기록한 것이 상점 주인이 보유한 데이터의 대부분을 차지. 별 차이 없는 제품이 비슷비슷한 가격에 제공되었기에, 소비자는 제품이 약속하는 바가 얼마나 그럴듯한지와 포장의 매력도, 그리고 이웃, 가족, 친구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무엇을 구매할지 결정했다. 150년 전, 몽고메리 워드와 시어스 로벅앤 컴퍼니 등 몇몇 회사가 총 1개가 남는 제품이 실린 우편주문 카탈로그를 발행하여 미국 전역의 소도시 고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어느 고객이 어떤 물품을 어디로 주문했는지 알 수 있었으며, 지역별로 판매된 제품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음. 100년 전, 우편주문 카탈로그 회사들은 번화가에 쇼룸과 매장을 열고, 재고관리를 위해 판매데이터를 샅샅이 뒤져 소비자 수요를 예측하는 일군의 분석 전문가를 동원. 50년전, 유통업계에 다시 한번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새로 도입된 우편번호 덕에 고개관리가 한결 수월해짐. 이후 수십년간 기업은 지리적 단위로 구분된 고객에 관한 상세한 인구통계학적 정보를 수집했다. 60년대 중반에 도입된 신용카드 제도로 고객별 거래 데이터 수집이 한층 쉬워졌다. 웹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고객이 사는 곳과 어디서 얼마나 지출했는지가 데이터 개인화의 최대치였다.
- 69년 설립된 액시엄을 비롯한 데이터 브로커 기업들은 고객을 애플파이 가정(교육수준이 높은 상위 중산층), 상류층 부자, 샷건과 픽업(사냥총과 픽업트럭 소유. 주로 소규모주택이나 조립식 주택 또는 이동주택을 소유. 하이를 가진 청장년층 노동자 계층), 교외축구맘 등 수십개 소비자 그룹으로 묶어 관리. 사회적 고정관념을 반영하는 이런 꼬리표는 데이터 브로커가 공공기록이나 우편주문기록에서 추출한 제한적 정보만 갖고 있던 시절에 고안된 것. 브로커들은 부동산 정보를 조회하여 어느 집이 수영장을 갖추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세분화마케팅은 소비자 데이터가 드물었던 시대에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과 같았다. 20세기 말 액시엄의 연매출은 10억불 규모로 성장.
- 02년 합류당시 아마존은 우편번호 단위수준의 분석을 넘어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호작용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음. 우리 팀은 몇가지 질문에서 출발하여 개별 사용자에 관한 500가지 개인적 속성을 찾아냄. 고객의 배송지 주소와 가장 가까운 서점 또는 쇼핑몰까지의 거리가 고객의 아마존 쇼핑빈도나 지출액에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지가 향후 구매패턴을 예측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가? 2개 이상의 카테고리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이 책만 구매하는 사람보다 연간 매출 측면에서 아마존에 더 가치있는 고객인가? 고객별로 낮과 밤에 구매하는 물품이 다른가? 분석결과는 1달러를 마케팅에 투입할지, 가격인하에 투입할지와 같은 수많은 결정의 토대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아마존은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쇼핑 중인 고객에게 어떤 정보를 보여줄지 결정. 구매가능성을 예상할 때, 고객이 과거에 어떤 제품을 구매했는지보다는 제품사이의 관계가 더 효과적인 척도인 것으로 나타남. 제품의 관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측정가능. 이를테면 제품사양을 비교하거나 제품설명에 등장하는 어휘가 얼마나 겹치는지 분석하여 유사한 상품을 추출할 수 있음. 하지만 가장 중요한 데이터는 두 제품이 함께 구매 또는 검색되는 빈도였다. 아마존은 종종 함께 구매되는 두가지 제품을 보완품으로 연결하고, 함께 클릭되는 두 유사제품을 대체품으로 연결했다. 과거에 그것을 구매한 사람들의 검색어, 클릭, 구매목록을 모두 분석하여 고객이 제품을 클릭하면 대체품과 보완품을 함께 제시. 마찬가지로 제품을 클릭한 다음 실제로 그것을 구매한 사람의 비율을 제공하는 등 소비자의 의사결정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방법도 유용했다.
- 아마조은 이렇게 클릭과 구매 데이터의 총합을 바탕으로 제품추천 시스템을 개발. 또한 제3자가 아마존 사이트에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고, 물품을 보관할 수 있도록 창고공간을 제공하면서 분석대상의 범위가 대폭 확장됨. 아마존은 교외 축구맘이나 샷건과 픽업 같은 수십개의 전형적 소비자 그룹을 만들어 고객을 분류하는 대신, 개인별 맞춤서비스를 뛰어넘어 1명의 고객을 10분의 1명 단위로 구분하여 각 개인의 변화하는 필요와 관심사까지 반영할 수 있었다.
- 데이터 저장 자체는 혁신이 아니다. 아마존을 독보적 기업으로 만든 것은 고객의 관심사와 선호하는 바, 그리고 현재 상황에 맞는 물건을 추천하기 위해 데이터를 가공하는 노력이다.
- 데이터 오류율은 수집되는 데이터의 양과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100배 더 많은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다면 부정확한 데이터 포인트도 100배 증가한다고 예상해야 함. 그러나 데이터 규모가 방대해져 더 이상 오류와 실수를 일일이 찾아내 제거하는 작업은 불가능함. 다른 한편으로 데이터의 기하급수적 증가자체가 오류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데이터 정제소의 산출물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생성하는 새로운 데이터 덕분에 알고리즘은 어떤 입력이 오류일 가능성이 높은지 식별하는 방법을 배운다.
- 데이터 정제소는 복수의 출처로부터 데이터를 취합하여 입력오류를 감지해냄. 12년 7월 구글나우라는 신규 서비스가 등장했다. 구글나우는 지메일 수신함의 전자항공권을 스캔하여 예약한 항공편 정보를 종종 항공사보다 더 빨리 업데이트해준다
- 어떤 사람이냐가 행위를 결정하고, 행위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결정한다. (로베르트 무질)
- 많은 이가 프라이버시를 신성불가침의 가치로 여기면서, 데이터 악용의 위협에 맞서 반사적으로 더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를 요구하곤 함. 하지만 개인정보 보호정책 중 다수는 사실상 책임을 묻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듬. 책임의 결여는 데이터로부터 혜택을 얻는데 필요한 투명성과 주체성 원칙과 대치됨. 과거의 규칙은 소셜 데이터의 세상에 어울리지 않음. 언제 어디서나 데이터가 생성, 전파되는 사회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체계와 이상이 필요.
- 96년 웹페이지 링크 구조를 분석하여 웹 검색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공개된 데이터에 의존. 구글이 크롤링한 웹페이지는 모두 공개문서였다. 누군가 웹페이지를 작성하여 다른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인터넷에 올리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링크했다.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서버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래리와 세르게이는 비용을 충당할 최선의 방법은 사용자 검색에 기반한 광고 공간을 판매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 광고주는 잠재고객의 관심사와 매치될 것으로 기대되는 키워드, 문구, 카테고리를 구매했다. 검색기반 광고는 즉각적 성공을 거둠. 구글의 개인화 광고를 구매한 광고주는 평균대비 4배 높은 클릭률을 얻음. 사용자 검색 데이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상품이었다. 04년 4월에 지메일 서비스를 개시한 구글은 사용자의 관심사를 수집할 또 다른 데이터 원천을 확보. 지메일은 개인의 이메일 내용을 분석하여 어떤 광고를 보여줄지 결정. 이때까지 사람들은 이메일이 마치 편지처럼 수신자만 볼 수 있게 봉인되어 있다고 여겼다. 프라이버시 옹호론자들은 지메일에 가입하면 사적인 대화내용을 구글에 넘겨주게 될 것이라 경고. 오늘날 지메일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이메일 서비스로, 매달 10억명 가량 사용. 대부분의 사용자는 자신이 무료 이메일 서비스를 제공받는 대신 구글의 컴퓨터가 이메일 내용을 읽는다는 사실을 안다. 사용자는 개인화된 광고노출 등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 인류의 역사는 불을 중심으로 하는, 프라이버시의 경험이나 기대가 거의 없는 삶을 살던 때로부터 침실과 투표소 커튼이 가져오는 개인적, 정치적 프라이버시 권리를 신성시하는 시대로 발전. 인터넷이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오늘날에는 가족, 친구, 낯선 이들과 자유롭고 즉각적으로 접촉하는 대가로 우리의 일상을 기꺼이 공개하게 되었다. 프라이버시 개념의 구축과 해체는 인류 역사에서 눈 깜박할 사이에 불과한 단 두 세기만에 이루어졌다.
* 동네 가십 : 프라이버시의 부재
* 굴뚝과 도시이주(1600년대) : 익명성과 프라이버시의 발명
* 미국 수정헌법 제4조(1792)과 비밀투표제 도입(1856-96) : 프라이버시의 정치화
* 프라이버시권 (1890) : 프라이버시의 법제화
* 구글, 페이스북 등 : 프라이버시는 환상이다
- 페북 뉴스피드는 개인별 관심사에 따라 소셜 컨텐츠를 배포하고 보여주기 때문에 긍정적 피드백 루프를 형성. 사용자와 잘 맞는 콘텐츠를 보여주면 좋아요가 더 많이 달리고, 원글 게시자나 어쩐면 게시물을 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사한 콘텐츠를 더 많이 공유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 이와 대조적으로 부정적 반응은 오직 콘텐츠를 보는 사람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 페북은 두번의 클릭으로 '이 게시물 유형 적게 표시'를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주지만, 원글을 쓴 사람에게 누가 그걸 눌렀다고 알려주지는 않음. 뉴스피드는 우리가 지속적인 주의력 분산상태로 살아가도록 만든. 테크놀로지 분야의 선구자 린다 스톤이 고안한 이 용어는 끊임없이 친구들을 관찰하고, 또한 그들에게 자신이 관찰당한다고 느끼는 상태를 의미. 린다는 지속적인 주의력 분산상태가 인위적인 위기의식을 끊임없이 수반한다고 말한다. 뉴스피드에 올라오는 내용을 비롯하여 끝도 없이 업데이트되는 데이터를 스캔하면서 뇌는 영구적 경계모드를 유지한다. 뉴스피드 내용이 친구들이 올리는 게시물의 일부에 불과한데도 그러한데, 만일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게시하는 모든 내용을 다 보여준다면 일상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페북은 사용자의 상호작용을 극히 미시적 수준으로 분석. 예컨대 상태 업데이트와 사진처럼 상이한 미디어 유형은 두사람 사이의 에지 두께에 미치는 영향력이 다르게 설정됨. 페북에서 기술팀장을 담당했떤 딩 저우에 따르면, 페북은 화제의 관계망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작용을 분류한다. 나는 의학적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는 의사를 찾아가겠지만, 그에게 컴퓨터 수리법을 묻지는 않느다. 마찬가지로 페북 사용자들도 현재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 누군가가 특별히 흥미롭거나 전문가나 권위자로 보이는 견해를 가졌는지 판단하여 그의 게시물에 반응한다.
- 관계를 구축하는 최악의 시점은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다. 그것은 거래에 해당하며, 관계와 거래는 다른 문제다. 관계를 구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숨은 동기가 없을 때 상대를 돕는 것이다.
- 위챗의 설계는 찰나적 커뮤니케이션에 역점을 둔다. 메시지는 일단 읽히고 나면 회사 서버에서 지워지고 사용자의 기기에만 남음. 휴대폰을 분실하면 커뮤니케이션 내역도 함께 잃음. 두 플랫폼의 또 다른 중요한 설계 차이는 사용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 이름이나 프로필 사진만 봐서는 누군지 가물가물한 사람에게 친구요청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의 친구목록을 볼 수 있어야할까? 최소한 공통된 친구목록은 볼 수 있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신이 어디에서 자랐느냐다. 미국의 페북 사용자는 당연히 그 사람의 친구목록을 보고 싶지, 친구요청을 수락할지 말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 라고 생각할 것임. 공통의 친구목록을 살펴보면 같은 학교에 다녔는지, 같은 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지, 아니면 친구로 수락할 어떤 다른 관계가 있는지가 대개 밝혀짐. 위챗은 친구목록을 다른 사용자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소셜 그래프는 숨겨져 있다. 중국인 위챗 사용자라면 당연히 내 친구목록이 보이지 않는 게 좋지, 알리고 싶지 않은 나에 관한 정보가 드러날지도 모르잖아 라고 생각할 것임. 위챗 사용자는 허가 없이 다른 사람의 친구목록을 살펴볼 수 없고, 그들에게 연락할 길도 없다. 친구목록보기 기능이 부재한 가운데 위챗은 앱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기발한 방법들을 고안. 예를 들어, 오프라인에서 만난 사람의 휴대폰에 있는 위챗 개인식별 코드를 스캔하면 친구추가화면으로 이동. 또 사용자는 즉석에서 그룹채팅방을 생성할 수 있음. 사적인 친구든 업무적 동료든 여러 명이 함께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할 때 애용되는 방법이다. 그룹 채팅방에 들어가려면 멤버에게 초대를 받아야 하므로 이것은 개인적 소개기능을 하며, 새로운 인맥을 발견하는 지름길. 초대된 이후에는 채팅방 멤버들을 볼 수 있고, 계속 연락하고 싶은 사람에게 친구요청을 보낼수도 있다. 위챗은 비공개인 소셜 그래프를 신원확인도구로 사용. 비번을 잊어버려 계정이 차단되었을 때 위챗은 보안코드와 함께 일련의 사용자 이름과 사진을 보여줌. 사용자는 목록상의 친구들에게 어떻게든 연락하여 코드를 보내달라 요청해야 함. 최소 두 사람의 친구가 코드를 보내주면 즉시 계정이 풀림. 본인의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지식으로 신원을 증명하는 질의응답 인증방식은 어머니의 결혼 전 성, 첫 직장, 애완동물 이름 등 편지함을 뒤지거나 인터넷을 검색해서 답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는 통상적 질문보다 훨씬 안전함. 사용자는 빨리 응답해줄 친구를 선택하고 싶어할 것이기에 잠긴계정을 푸는 과정에서 위챗에 인맥정보를 드러냄. 그러나 다른 사용자들에게 친구목록을 보여주지 않기로 한 위챗의 결정은 중국 사회와 비즈니스가 인맥에 부여하는 가치와 더 큰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임. 중국에서 위챗은 업무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인맥공개를 꺼리는 것이다. 경쟁자가 최근 당신이 누구를 친구로 추가했는지 살펴보고 비즈니스 전략을 추론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맥이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면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지로 당신이 재단당할 염려도 없다.
- 사람들이 센서로 뒤덮인 세상을 두려워하는 이유, 센서가 어떤 식으로 사회적 관습에 반하거나 관습의 변화를 강요할지 우려하는 이유는 다음 세가지
(1) 정보불균형 우려. 어느 한쪽만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다면 상호작용의 결과가 뒤집힐 수도 있다는 걱정이다. 내게 없는 정보를 상대방이 갖고 있을 때 경험하는 힘의 불균형은 때로 불쾌하기 그지 없다. 중고차 세일즈맨이 정보를 숨기고 악성재고를 판매하는 고전적 예에서 보듯, 비대칭적 정보접근은 금전적 손해로 이어질 수 있음. 그뿐 아니라 대화상대가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면 불안감이 고조됨.
(2) 정보전파 우려. 허락없이 다른 사람이나 회사, 인터넷에 데이터가 공유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새로운 사람이 대화에 합류하면 기존 멤버들은 그에 대한 반응으로 화제를 전환할 수 있다. 내가 하는 말을 누가 듣는지도 투명하게 드러난다. 카메라는 자동으로 이런 투명성을 제공하지 않기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기관에서는 촬영중이란 경고문을 붙임. 자신의 행동이 카메라 소유주나 관계자에 의해 촬영되고 분석될 때를 감안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는 것. 구글 글라스는 그 자체로 경고문의 역할을 하지만, 사람들은 늘, 심지어 피드가 켜져 있지 않을 때도 방심할 수 없는 상태가 됨.
(3) 데이터 영속성의 우려. 타인이 기록해서 어딘가에 저장해둔 데이터가 향후 어떻게 분석되고 이용될지 알 수 없다. 기록이 호의적으로 이용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차라리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으 아늘지도 모름.
- 위치정보를 알려주는 또 한가지 매우 다른 종류의 데이터 원천이 있으니, 바로 당신이 찍은 사진과 찍힌 사진이다. 온라인으로 공유되는 사진은 대부분 카메라폰으로 찍은 것이고, 대다수 카메라폰에는 GPS가 장착되어 있음. 사진에 기본적으로 포함되는 메타데이터는 사진이 찍힌 위도와 경도를 포함. 직접 찍은 사진에서 메타데이터를 삭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다른 사람이 찍은 이미지의 메타데이터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 매일 수십억장의 사진이 촬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신의 위치는 지금까지 계속 기록되었을 확률이 높다. 사진 속에는 위치정보와 관련된 메타데이터 외에 다른 단서도 포함. 사진의 배경으로 보이는 잘 알려진 지형지물, 표지판, 식당 메뉴는 위치를 노출시킴. 땅에 드리운 그림자의 길이로 대략의 시간을 추정가능. 저해상도 감시 카메라로 찍은 흐릿한 영상이라도 동영상 분석 알고리즘을 사용하면 개인을 특유의 걸음걸이로 식별하여 계속 추적하는 것이 가능함
- 카메라가 사람, 장소, 사물의 고유한 특성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센서는 아님. 휴대폰의 내장 마이크에 잡힌 주변 소음은 엔진의 진동, 차체 흔들림, 타이어에서 나는 소리를 바타응로 당신이 어떤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판별하기에 충분한 데이터를 제공한다. 만일 오디오 분석 소프트웨어가 당신의 차를 구분해낼 만큼 똑똑하다면 GPA가 켜져 있는지와 상관없이 당신이 한 곳에 정지해있는지 아니면 움직이고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 11년 설립되어 14년 구글에 인수된 젯팩은 사진 콘텐츠를 식별하고 분류하여 특성별로 검색가능한 비즈니스 디렉터리를 구축. 젯팩의 소프트웨어는 전 세계 6000개 도시에서 공개로 게시된, 많은 경우 지오태그, 해시태그, 캡션이 달린 1억 5000만개에 달하는 인스타그램 사진을 분석. 만일 특정 장소에서 찍힌 사진들이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면 앱은 그 장소를 잘 차려입고 가는 곳으로 규정. 이런 정보는 사람들이 그 장소가 자신들과 어울리는 곳인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젯팩은 사물인식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인기 힙스터바 목록을 만들기로 했다. 젯팩의 데이터 과학자들은 사진 속에 콧수염이 많이 등장하는 곳이 힙스터들이 모이는 핫한 장소라는 가설을 세움. 그런데 결과를 보니 힙스터가 많은 도시는 다 터키에 있었다. 젯팩의 과학자들은 터키 남성이 미국남성보다 콧수염을 훨씬 많이 기르는 경향이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역별로 다른 기준선을 세우고 현지 관습에 따라 데이터를 정상화하는 작업이 필요함. 컴퓨터와 인간의 피드백 루프가 데이터 분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 젯팩의 인스타그램 사진분석을 통해 발견된 일부 카테고리는 좀더 민감한 문제를 제기했다. 예를 들어 젯팩은 순전히 자사가 보유한 사진만으로도 테헤란의 게이바 목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친구나 낯선 이에게 게이바의 위치를 물어보다가 본의 아니게 커밍아웃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이란인 게이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서비스일지 몰라도 그 목록이 물라(이슬람 성직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이란 게이 공동체에 끔찍한 파급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하지만 젯팩이 이 정도의 데이터 가공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정부라고 불가하겠는가
-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의 심리학과 명예교수 폴 에크만은 분노, 슬픔, 공포, 경멸, 놀람, 행복이란 6가지 기본 감정이 미치는 생리적 영향을 측정하는 연구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음. 연구의 시작은 크게 다른 5개국 미국, 브라질, 아르헨, 일본, 칠레에서 감정을 유발하는 상황을 찍은 다양한 사진을 보여주고 반응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문화적 배경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다를 것이라 가정했으나 이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거듭된 실험에서 분노를 의미하는 눈썹 사이의 고랑, 슬플 때 내려가는 눈썹과 입 모서리, 혐오를 나타내는 코의 주름, 진심으로 웃을 때 생기는 눈가의 주름 등 사진을 본 사람들의 얼굴에 누가 봐도 같은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목격. 78년 에크만과 윌리스 프리슨은 관찰된 모든 표정을 집약하여 얼굴 움직임 부호화 시스템을 개발. 이후 머신 러닝 연구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안면인식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 에크만은 감정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이유가 인간의 심리적 상태와 관계정보를 전달하는 정직한 신호이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움. 현장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는 심박, 호흡, 혈류, 전반적 근육긴장 등 각각의 기본감정과 연관괸 생리적 지표를 발견. 인간은 때로 여러가지 감정을 잇달아 경험하며,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감정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다. 이런 미세표정은 다른 사람에게 숨기고 싶은 감정이나 자신고 미처 의식하지 못한 감정인 경우가 많다. 미세표정은 너무나 순식간에, 구체적으로는 0.2초 이하에 사라지기 때문에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맨눈으로 관찰할 때보다 영상으로 찍어 다시 돌려볼 때 감지될 확률이 더 높음. 에크만은 카메라 피드로부터 실시간으로 감정을 포착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샌디에고의 이모션트라는 기업의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이모션트가 최초로 상용화한 기술 중 하나는 07년 출시되 소니 디지털카메라의 스마일 셔터로 프레임 내의 얼굴이 미소를 즉시 사진이 찍히는 기능이다. 이모션트의 알고리즘은 400명 가량이 모인 공간, 이를테면 강의실이나 쇼핑몰을 고해상도 카메라 한대로 모니터링하면서 미세한 감정표현이 얼굴에 드러나는 즉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진화. 또한 이모션트는 어린이 환자의 얼굴에 드러나는 고통을 감지하기 위해 자사 소프트웨어를 병원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신체적고통을 드러내는 정직한 신호를 포착하는 데 컴퓨터가 인간보다 더 나았다. 초기 이모션트-구글 글라스 앱은 매장 직원의 사기를 측정하거나 감정이 고객의 구매여부 및 누구에게서 구매하는지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로 소매업계 관리자들에게 홍보되었다. 이모션트는 16년 1월 애플에 인수되었다.
- 미래에는 표정이나 울음소리의 음색 및 성량 외에 좀더 감지하기 어려운 단서로부터 감정을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임. 핏빗, 위딩스 펄스, 가민 비보 시리즈 같은 활동 추적기는 안정 시 심박수와 운동시 심박수를 비롯한 활력 징후를 기록한다. 활력징후는 개인이 특정한 감정상태에 접어들었다거나 감정상태가 고조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심박수는 애플 워치의 뒤판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적외선 센서를 통해 신체에 피가 돌 때 피부의 홍보가 강해지는 정도를 측정하여 판독한다. 많은 병원에서 환자의 심박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적외선 카메라를 사용한다. 신체에 부착된 장치는 환자가 뒤척거릴 때 느슨해질 수 있으니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정확하기 때문. 엑스박스는 적외선으로 신체활동 수준을 추적하여 실시간으로 사용자가 느끼는 즐거움이나 지루함의 정도를 분류한다. 이 정보는 사용자의 기분에 부합하는 새로운 게임을 선별하여 제시하는 데 사용된다. 감정을 드러내는 생화학적 신호는 감추기가 훨씬 더 어렵다. 혈액검사를 통해 공포, 스트레스, 피로와 관련된 생화학 물질을 판별할 수 있으며, 발한 검사로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제너럴일렉트릭은 미국 국방성의 지원을 받아 반창고처럼 피부에 부착할 수 있는 무선센서 피어빗을 개발. 피부에 붙는 면에는 특정한 생화학 물질을 유인하고 그 물질의 밀도가 올라가면 컴퓨터에 알리도록 설계된 나노 구조물이 들어 있다. 공기중에 떠도는 화합물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센서는 휴대폰 내부에 장착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다. 그래핀으로 제조된 버전은 이미 십억분의 몇 개 수준의 분자를 검출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민감성을 자랑한다. 한 초기 연구는 입김을 통해서도 스트레스 상태를 감지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 폴 에크만은 감정을 해석할 때 오셀로의 오류를 저지를 수 있음을 경고.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오셀로는 아내 데스데모나가 카시오에게 마음을 줬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카시오를 죽였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아내의 얼굴이 공포와 비통함으로 뒤덮이는 것을 본다. 그는 데스데모나의 감정을 유죄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오셀로는 아내가 애정행각을 들켰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데스데모나의 공포와 비통함은 오셀로의 추정과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비이성적인 질투심을 두려워하고 결백을 증명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슬픔을 느끼며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비통해하고 있었다. 오셀로의 유감스러운 판단오류가 증명하듯이, 특정한 감정의 생리적 신호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감정 데이터를 사용할 때 오셀로의 오류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해석하든 기계가 해석하든 마찬가지다.
- 오스트리아 태생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것을 보지 못한다. 데이터 정제소를 이해하고 상호작용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한다.
- 센서로 수집된 데이터까지 고려대상에 포함하면 당신의 데이터를 정의하는 것이 더욱 까다로워진다. 사회통념상 공공장소에서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 프레임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 촬영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사진 찍은 사람은 사진 안의 모든 사람의 신원을 다 알지 못하겠지만 페이스북의 딥 페이스 안면 인식 시스템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딥페이스는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태그한 방대한 사진 라이브러리를 이용하여 개인을 식별한다.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새로 업로드된 사진의 얼굴에 자동으로 태그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현재 이런 자동태그는 태그된 사람의 친구만 볼 수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자동 태그를 프라이버시 침해로 규정한다. 유럽연하빙 이미지 자동태그에 이의를 제기하자 페이스북은 자발적으로 유럽국가에서 해당 서비스를 중단했다. 그런데 기계가 제안한 태그는 금지하면서 인간이 제안한 태그는 허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 다 태그된 사람이 원치 않을 경우 태그를 해제할 수 있다. 인간이 생성한 태그도 자동으로 생성된 태그와 똑같이 개인에게 도움을 주거나 피해를 끼칠 수 있다. 페이스북은 게시자가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업로드된 모든 사진 속 얼굴을 식별하여 자동태그를 생성할까?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얼굴을 인식하기도 전에 특정 사진을 알고리즘에서 제외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 따라서 태그가 악용될 가능성에 대란 울를 어떻게 불식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부상한다. 정부가 기업의 자동태그 사용을 금지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의 전면 규제는 우리가 데이터 정제소와 데이터를 공유해 얻을 수 있는 혜택을 제한한다. 더 나은 방법은 사람들에게 태그를 보여줘서 자동태그의 위험과 예택을 직접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일정한 프라이버시 유실범위 내에서 더 나은 정확도를 제공하는 기술은 무엇인가? 일정한 정확도 내에서 더 나은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는 기술은 무엇인가? 데이터 정제소는 사용자가 데이터를 공유하여 얻은 이익에 비해 얼마만큼의 프라이버시를 잃게 되는지를 관리할 수 있게 설계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데이터 정제소를 특정 개인이 아니라 전체 생태계의 건강함에 주의를 기울일 때 가장 잘 유지되는 하나의 생태게라고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정확성과 프라이버시의 절충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용자는 어떤 정제소를 사용할 지 결정할 때 그곳에서 프라이버시가 얼마만큼 빠르게 또는 천천히, 비효율적으로 또는 효율적으로 소모되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 동영상이나 음성파일의 배경 잡음에는 전류의 주파수를 판별할 수 있는 소음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 캐나다, 중국에서는 교류 주파수 표준이 초당 50사이클이고 영국과 유럽은 60사이클. 그러나 두 경우 다 실제 주파수는 전력망에 가해지는 부하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보이므로, 이를 바탕으로 주파수별 장소는 물론 시간까지 분 단위로 알아낼 수 있다. 북미에는 총 4개의 주요 전력망이 있고, 각각은 요구되는 전력부하량에 따라 고유한 주파수 시그니처를 갖는다. 동영상과 음성파일의 배경에 깔린 주파수 노이즈의 변동을 전력망 전반의 주파수 변동과 대도하면 어느날, 어느 시각에, 대락 어느 지역에서 촬영 또는 녹음되었는지 알 수 있다.
- 우리는 데이터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지 결정하는 중요한 기점에 서 있다. 쇼핑몰이 개인화된 할인 코드를 보내줄 때 어떤 종류의 개인정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할까? 대출기관이 대출신청서를 검토할 때 신청자의 페이스북 친구들을 볼 수 있게 허용해야 할까, 아니면 이것은 대출 신청자의 주거지에 근거하여 차별적 서비스를 제공했던 레드라이닝(미국 빈곤층 거주지역에만 붉은 선을 그어 경계를 짓고, 대출, 보험 등 금융서비스를 받는 데 제한을 두었던 행위)의 21세기 버전일까? 고용주가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업체의 건강검진 데이터가 업무능력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나? 광범위하게 수집되는 학생들에 관한 데이터를 이용하여 실제로 어떤 아이도 뒤처지지 않도록 교실설계를 최적화할 수 있을까? 데이터 공유는 더 나은 결정을 보다 현명하게 내릴 수 있게 해주지만, 데이터 공유의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고 투명성과 주체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 투명성과 주체성의 권리가 그저 고객이 기업에 기꺼이 데이터를 내놓도록 만드는 수단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고객관계관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사고의 대전환이다. 고객에게 신제품과 서비스를 좀더 유연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창의적 기업도 혜택을 받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위한 데이터가 힘의 균형을 소비자에게로 옮겨놓는다는 점이다.
- 알리바바는 자사 결제 시스템인 알리페이를 통해 15년 11월 11일 하루동안 140억불의 결제를 처리하여 사상 최대의 쇼핑일을 기록. 판매량의 70% 가량이 스마트폰에서 발생했다. 알리바바는 알리페이 앱이 기록하는 위치정보를 보고 고객들이 어디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파악한다. 알리페이 모바일앱은 레스토랑 청구서를 더치페이할 수 있는 결제옵션을 제공. 따라서 알리바바는 사람들이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지뿐만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었는지까지 세서미 크레딧 점수를 산출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거래 데이터와 소셜 그래프가 데이터가 대출 승인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 만큼 일반인들도 같은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함. 청구서를 제때 납부했는지가 파이코 스코어의 몇 %를 차지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데이터 원천이 어떻게 분석되고 신용점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직장에서 잘릴까 봐 걱정하고 있다는 게 드러날 수 있는 트윗 의미 분석이 신용점수 계산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가? 당신이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지를 드러내는 위치 데이터가 평가기준에 포함되어, 만일 사무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면 가산점을 주고 동네 술집에 너무 자주 간다면 감점하는 식으로 점수가 매겨지고 있을가? 허위로 보험 청구서를 제출한 적이 있는 사람을 친구로 둔 사람의 보험청구서를 따로 면밀히 조사하는 올스테이트처럼, 데이터 정제소가 당신의 친구 중에 신용이 나쁜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소셜 그래프를 분석하고 있을까? 만일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나의 대출가능성을 낮춘다면 누가 내 발목을 잡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페이스북이 당신이 포함된 사진을 보여주어야 하듯이, 은행은 대출결정을 내릴 때 반영하는 데이터를 보여주어야 한다.
- 고개를 돌리도록 허용된 적이 없다며 어떻게 그림자 외에 다른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플라톤)
-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전한 것은 2000년 전이다. 오늘날 우리는 놀랍도록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페이스북, 구글 같은 데이터 정제소들은 타임라인과 웹페이지에 그림자를 투영하여 우리로 하여금 해석하게 한다. 비유 속 동굴의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디지털 흔적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구글은 검색결과의 웹체이지들을 직접 만들어내지 않으며, 페이스북은 게시물을 직접 작성하여 뉴스피드를 채우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는 매일 생성되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 즉 플라톤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그리고 우리가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상호작용과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데이터 정제소들에 의존함.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이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벽에 반영하는 그림자만을 현실로 받아들일 위험에 처해 있다. 새로운 데이터 정보원에 적응하고, 그것들을 보고 이용하고 심지어 만끽할 도구의 활용법을 배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투명성의 권리는 눈이 멀 위험 없이 빛을 바라보고 그림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주체성은 광원을 조절하고 이동시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방향을 비춰줄 것이다. 어둠속에 앉아 있는 것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우리의 머리는 플라톤의 수인들과는 달리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수고와 노력을 들여야 하더라도 그리고 처음에는 빛에 눈이 멀 것 같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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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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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시장

경제 2019. 4. 14. 15:27

-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냈다. 고대 금송아지 숭배가... 돈에 대한 맹목적 숭배로 돌아왔다. ... 이런 체제에서는 환경같이 허약한 것은 무엇이든지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
- 중세에 십자군이 성지를 정복해야 한다는 요구는 "하느님이 원하신다"는 외침과 장단이 맞았다. 십자군은 정말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을까? 이 모험이 결국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면, 그들은 분명히 알지 못했다. 이제 십자군은 오래전의 일이며, 내가 글을 쓰는 영역에서는 하느님의 의지로 추정되는 뜻에 기원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정책 십자군을 목도하며, 이 사람들은 종종 "Mercatus vult!" 즉 시장이 원한다는 은연중의 외침으로 정당성을 얻는다. 시장의 의지에 호소하는 이들은 정말로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까? (폴 크루그먼)
- 삼위일체 세 위격의 정확한 관계에 관해 신학자들이 내리는 결정은 대다수 사람에게 죽음을 야기하지 않거나, 심지어 큰 관심도 끌지 못함.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내리는 결정은 말 그대로 생사를 좌우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결국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는 사태를 낳은 일부 재정 정책과 무역정책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을 위반하는 죄라고 할 때, 이는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다.
- 08년 경제위기 직후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전에 런던 정경대를 방문했을 때 한 교수에게 왜 위기의 조짐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느냐고 물었다고 보도했다. 여왕은 모호하고 완고한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칼런더의 논문에서 우리는 여왕의 의문에 마땅한 대답인 '내 탓이오'라는 말을 발견한다. 칼런더는 말한다. "우리는 실제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는 척한다. 학계 경제학자들의 주류는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 그리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는 척했고, 일부는 실제로 자신이 이해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사고와 주장을 겸손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 역사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신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신화도 그런 특징을 보여줌. 이 신화를 활용하는 이들이 종종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 주장하기에, 인류학과 역사학 연구를 통해 최초의 인간에게 시장이 없었음을 밝혀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중요함. 초기 인류가 만든 것은 시장이 아니라 사회집단내부의 선물문화였다. 물론 누구든 선물을 받으면 결국 보답해야 했지만, 곧바로 교환해야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면 주고받는 거래가 되기 때문이다. 물물교환은 오직 외부인을 상대로 한 것이라서 신뢰, 상호성, 공동체의 중요성 등이 더 근본적이고, 이경우에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면 더 자연스럽다. 시장 이전에, 심지어 물물교환이 등장하기 전에 이런 것들이 존재했다.
- 가장 원시적 교환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둘은 갈등뿐만 아니라 관계에서도 중첩되는 사회적, 상징적 세계의 층위에 속했다. 두 사람은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을 테고, 나중에소도 만나기 쉬웠다. 부족간 연계가 확대됨에 따라 한때 주변적이던 상인의 역할도 커졌다. 하지만 조개껍데기나 구슬처럼 단순한 형태가 등장했을 때도 구매자와 판매자와 모두 자기가 일정한 공통된 가정에 의존하는, 얽히고 설킨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을 알았다. 창끝과 고기조각의 교환이나 유사한 어떤 형태의 교환은 모두 몰역사적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유용한 허구일지 모른다. 시장신 종교에서 신학자들이 말하는 기원 신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 신화는 시장가치가 근본적이며, 심지어 인간 영혼에 깊이 박혔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티셔츠에 적힌 문구처럼 '쇼핑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시장경제는 영원한 것이 아님. 시장경제가 오랫동안 존재해왔다고 영구한 것은 아니며, 앞으로 우리와 함께할 것임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 예수가 환전상에게 채찍을 휘두른 것은 그들이 하는 장사나 희생의례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수수료가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 그들은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 예수는 그들의 가난하고 무방비 상태인 순례자를 속이고 신전의 사제들이 환전상이 버는 수입에서 자기몫을 쏠쏠히 챙긴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는 유서깊지만 종종 위반되는 종교관행을 지키라고 강요한 것임. 타산적 이윤추구자의 약탈에 맞서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 책에서 우리가 추적하는 가난한 이를 편드는 성서 속 하느님과 시장신의 기나긴 투쟁에서 한 일화를 보여주었다.
- 우리가 물건을 산 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습관은 (완전경쟁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면 거래하는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푸는 게 아니라고 보는 경제세계에서는 불필요하겠지만) 이런 넓은 맥락을 상기시핀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서로 어떻게 신세를 지는지에 관한 일정한 가정"을 공유하는 맥락 말이다. 그레이버는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묻고, 상대가 아무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자기 지식을 공유해주기 바라는 단순하고 흔한 행위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금전적 거래의 밑바탕이 되는 상호의존과 사회적 평화에 대한 약속을 기본적으로 인정한다.
- 우리는 이제 시장이 신전의 제약을 받고 사람들이 탐욕을 의심하던 쇼베 동굴이나 샤르트르대성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중세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정신이 퍼져 나갔다. 루이스 멈퍼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매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 화폐와 신용의 도움으로 상당한 투기이윤을 추구하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성장했다. 금욕적인 규칙성과 투기적 사업, 체계적 탐욕과 뻔뻔한 자부심이 결합된 것이다. 중세를 지배한 주제가 보호와 안전이라면, 새로운 경제는 계산된 위험의 원칙에 토대를 두었다."
- 피케티는 부는 스스로 축적되고 영속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도 보여준다. 히브리인은 이 점을 인식했고, 권유 이상의 행동이 필요하다고 봄. 그들은 부의 정기적 재분배를 달성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했음. 결국 희년이 이런 재분배를 위한 주요수단이 됨
- 희년은 서판을 깨끗이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요즘말로 평평한 운동장에서 새롭게 경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도가 우리가 보통 가난한 이의 주된 옹호자로 보는 예언자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의 성스러운 율법에 한 층위로 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 희년은 기본적인 것이다. 그런데 희년이 제대로 지켜졌을까, 아니면 노력해야 마땅하지만 실현된 적이 없는 일종의 이상으로 여겨졌을까? 학자들은 수백년 동안 이 질문 때문에 골치를 썩였다. 회의론자들은 이런 전면적 채무탕감정책이 있었다면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관행이 어떻게 유지되었겠느냐고 묻는다. 희년이 다가오면 대부잗들이 왜 돈을 빌려주는 위험을 무릅썼겠는가? 희년이 어느정도 지켜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세히 빚 탕감 정책이 설명된 사실을 지적. 예컨대 성곽 안에 있는 땅과 성곽 밖에 텅 빈 땅을 각각 다르게 처리하라고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성곽 안에 있는 당은 재분배에서 제외되지만, 성곽 밖에 있는 땅은 제외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농경과 방목지역은 분명히 하느님의 것인 반면, 성읍의 땅은 조금 의문이 있기 때문일까? 정답은 없다. 희년은 예수시대에 실행되지 않은 것 같다. 로마 점령자의 가혹한 과세 정책과 억압적 토지 규제상황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임.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희년에 대해 알았다.
- 16세기 초의 많은 예술가와 여관주인, 교회 재정 담당자에게 희년은 눈부신 성공처럼 보였다. 그 순간 한 도시에서는 기독교의 신과 시장신이 짝을 이뤄 이익을 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깔끔한 결합은 어그러졌다. 젊은 수사시절, 루터는 성도 예루살렘을 찾았다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외설적 모습에 넌더리를 냈다. 고향으로 돌아온 루터는 순례를 호되게 비난하며 사람들에게 로마나 팔레스타인 성지, 유럽에서 번성한 수많은 순례지로 여행하는 대신 자기 집에서 성서를 읽으라 조언했음. 아이러니하게도 루터가 교회 문에 항의문을 붙인 해에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인의 스카이라인에 자기 흔적을 남기는 산피에트로대성당을 완공하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 후 교황은 맥도날드나 세븐일레븐, 슈퍼커츠(미국 남성 미용실 프랜차이즈) 등 익숙해진 사업모델에 따라 사실상 프랜차이즈 영업권을 판매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덕분에 사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면벌부 판매자는 끌어모은 돈의 절반을 로마에 보내는 대가로 나머지 절반을 챙겼다. 교황은 이 돈을 야심적인 성당 건축 사업에 쏟아부었다.
- 그러나 많은 인가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프랜차이즈 사업에는 부정적 면이 있다. 일단 제품을 다른 사람 손에 넘기면 품질관리가 어렵기 때문. 이런 프랜차이즈 영업권자 중 한명인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이트는 모든 죄를 사해주어 연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면벌부를 광고해서 경쟁자들을 앞지르려고 했다. 알브레히트는 가족의 가치를 호소해서 더 매력적인 제안을 하며, 자기가 판매하는 면벌부를 사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랑하는 사람이 연옥에서 당하는 고통을 깨끗이 덜어줄 수 있다고 주장. 이런 떠들썩한 호객행위는 잠재적 고객의 심금을 울렸다. 돌아가신 아버지나 어머니가 불길 속에서 애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망자를 이런 고통에서 구해주는 일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알브레이트는 차등요금도 적용했다. 면벌부 판매가는 신분에 따라 왕과 여왕, 주교는 25플로린, 상인은 3플로린, 가장 가난한 신자는 0.25플로린이었다. 미국 광고업계에서 파워포인트로 만드는 광고전략에 맞먹는 판촉활동이지만, 결국 아주 많은 비용이 발생. 무절제한 면벌부 거래가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유럽의 절반이 종교개혁에 가담했고, 카톨릭교회는 오늘날 적당한 표현으로 하면 일부를 제외하고 고객기반을 상실했다.
- 모름지기 권력은 기업권력이든, 종교권력이든 부패하기 쉽다. 절대권력에 가까워질수록 부패도 심해짐. 마치 운명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비뇽과 르네상스 교회의 끝없는 부패는 결국 종말을 고함. 오늘날 종교가 모든 부패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현 교황은 작은 아파트에 살며 다른 손님들과 함께 소박한 식사를 한다. 그렇다. 대불황은 가라앉기 일보 직전인 금융산업의 뱃머리 위로 경고사격을 했다. 제너럴일렉트릭에 관한 뉴스가 어떤 의미라도 있다면, 금융의 중앙제단에서 신을 섬기는 고위 사제들은 내키지 않을지언정 그 교훈을 배울 것이다.
- 15년 초, 경제학자 스티븐 체케티와 에니스 카루비는 명망높은 국제결제은행과 함께 세계 곳곳의 선진국에서 점증하는 금융부문이 실물생산부문과 비교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측정하려는 야심찬 연구에 관한 논문을 발표. 지배력이 점점 커지는 이 부문은 자국경제에 이득을 주는가, 훼방을 놓는가? 체케티와 카루비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15개 선진국 경제의 33개 제조업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대형 은행경영자와 옹호자의 주장과 정반대로 점증하는 금융부문은 전반적인 생산성 향상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 초대형 교회와 대기업이 공유하는 핵심요소는 양자의 규모가 단지 우연한 것은 아니라는 점. 오히려 규모는 본질이 되는 부분이다. 초대형 교회에 다니는 신자에 대한 연구를 보면, 이들은 종종 처음에 규모에 끌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지나다가 건물의 크기 자체에 눈길이 간다. 신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간혹 그 교회에 다니는 지인을 안다. 인지도라는 요인도 있다. 사람들은 이 교회에 다니면, 대화 중에 교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상대가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을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지인들 모두 그 큰 교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테니까. 이는 기업의 세계에서 브랜드 가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대규모 기관에 익숙해졌다. 많은 사람이 고층 건물에서 일한다. 진료받을 일이 생기면 작은 개인병원보다 종합병원에 간다. 수천명이 모이는 스포츠나 콘서트를 보러 간다. 교실 하나짜리 소규모 학교는 사라지건 통합되었다. 대형교회는 이런 상황에 잘 들어맞는다. 예배 참석자들이 성공에 대한 시장의 긍정적 태도를 공유한다는 점이 더 중요. 규모와 성장은 당연히 그런 태도를 수반함.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많은 사람이 종종 교회의 수적 성장을 자신의 영적인 성장과 융합한다. 초대형 교회가 인상적인 성공을 거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음. 이런 교회는 대부분 자신이 예비 신자 친화적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라 주장. 이런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와 가지 않는 이유를 정밀하게 조사하고, 그에 따라 예배를 바꾼다. 편리한 주차장을 충분히 제공하고, 전통적이고 위압적인 붉은색 문을 없애는 등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쉽게 만들려고 노력함. 브라질 사우바도르에 있는 초대형 교회는 아예 문을 전부 없앴다.
- 기업이나 종교가 과연 크기가 중요한가? 내 결론은 크기가 중요하지만, 상이하고 때로는 모순적 방식으로 중요하다는 것. 너무 커서 파산시킬 수 없거나 너무 커서 투옥할 수 없는 은행을 해체하면 최근 최근 일어난 금융붕괴가 재발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금융계에서 목소리가 커지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일부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 틈새로 분할된 사회에서 초대형 교회가 지역 회중의 사업을 문닫게 하기보다는, 여럿 중에서 또 다른 영적 선택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거대 주식회사와 초대형 교회가 성장염이라는 열광정 정신상태를 부추기는 한, 양자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유한한 지구에 커다란 위협을 제기한다. 어느 것도 영원히 커질 수는 없는 것, 사방이 초대형으로 뒤덮인 시대에도, 아니 그런 시대야말로 작은 것이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현재 경제학과 신학이라 부르는 학문이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 전에 살면서 글을 썼다. 그의 저작은 21세기 경제학자나 신학작 출간하는 저술과 닮은 점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 하지만 스미스의 저술은 많은 고전적 신학자나 당대 신학자와 비슷한 추론패턴을 따름. 그는 당대 스코틀랜드 지식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종교와 철학전통의 흐름에 의지. 여기에는 성서연구도 포함됨. 예를 들어 이 장에 붙인 제사를 보면, 스미스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서 국부론의 제목을 성서에서 빌렸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저자들이 아무런 신학적 의도 없이 성서구절에서 자기 저서의 제목을 따왔다. 하지만 스미스는 분명 신학적 의도가 있었다. 이런 사실이 신학의 역사에 익숙지 못한 사람보다 그 역사를 공부해본 사람에게 분명 보일 것이다. 스미스가 조물주 혹은 간단히 신을 계속 언급하는 사실을 놓치려면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그의 책을 읽어야 한다. 신학자들은 19세기 내내 스미스를 동료로 생각하며 그의 책을 읽었고, 칼뱅주의 섭리교의가 그의 사유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음. 예컨대 다음 문장을 보자. "주의해서 보면 자연의 모든 부분에 조물주의 섭리가 골고루 나타나므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에서도 신의 지혜와 인자함에 감탄한다."
- 스미스 시대 신학자들은 성서 외에 교의의 역사를 탐구했지만, 당대에 이름 붙인 자연신학과 계시신학, 종교철학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철학적 신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하위 학문분과로 갈라진 이 모든 탐구에 정통하고자 노력. 스미스 시대에 원래 그랬듯이, 그들은 신학이라 불리는 분야를 구성했다. 이 명칭은 우리의 청교도 창시자들과 함께 북아메리카로 옮겨왔고, 지금도 하버드, 예일, 시카고, 듀크 등 이런 학문분야를 탐구하는 대학원에서 사용됨. 스미스는 신학에 포함되는 모든 분야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그 흐름에서 헤엄쳤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기 전인 1759년 도덕감정론을 출간한 사실이 중요함. 이 책은 심리학이나, 신학, 윤리학 혹은 이 모든 학문의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전작의 후속편으로 보지 않고는 국부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 전과 후의 모든 신학자가 그렇듯, 스미스 역시 18세기 신학자로서 그 시대에 접할 수 있는 고전적 경향과 당대의 경향을 모두 연구. 그런데 18세기 개신교 신학자가 왜 스토아학파에 몰두했을까? 몇몇 동료처럼 스미스가 고대운동에 끌린 한가지 이유는 소박함과 자제력을 강조한다는 점. 스토아학파 철학자는 스미스에게 평생 허튼짓 하지않고 견실히 하는 에든버러와 애버딘, 던디 시민의 선조로 보였음이 분명. 그는 당시 카톨릭 교도에게 무척 인기를 끈 귀족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 대한 혐오 때문에 스토아학파에 끌렸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스미스가 신학자라면 굳이 왜 비기독교 철학을 탐구했을까? 물론 그 답은 신학자는 항상 이런 분야를 탐구한다는 것. 신학자는 당대의 지적, 문화적 경향과 대화하면서 기독교를 재해석하려고 노력.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얼마전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정교하게 가공한 것. 그리고 아퀴나스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의 공식 철학자다. 19세기 독일 개신교 신학은 헤겔과 칸트 등이 정립한 범주를 활용했다. 20세기를 보면 실존주의의 도전에 대응한 종교 사상가 중에 개신교(폴 틸리히), 카톨릭(가브리엘 마르셀), 유대인(마르틴 부버)이 있고, 다른 이들은 다윈주의 진화사상을 다루었다. 해방신학자들은 마르크스 주의의 다양한 표현을 놓고 고심. 스토아학파의 경우 많은 역사학자들은 기독교와 유사성이 있다고 언급했으며, 성서학자는 성 바울의 저술에서 이런 유사성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스미스가 결코 이상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스미스의 신학에 미친 두번째 영향은 당대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온건한 칼뱅주의다. 16세기 제네바의 완고한 종교개혁가 혹은 존 윈스럽이나 후대의 조너선 에드워즈처럼 신학적으로 엄격한 뉴잉그랜드 칼뱅주의 창시자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는 사람에게 온건한 칼뱅주의란 형용모순처럼 들릴지 모름. 하지만 스미스는 칼뱅보다 200년 뒤에 살았고, 그의 시대에 군림한 칼뱅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지 않았다. 앞서 주목한 것처럼 당대 칼뱅주의는 오히려 칼뱅에게 중요한 다른 개념, 즉 세상에서 신의 섭리적 존재, 사회에 대한 종교의 유익한 기여, 신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서 이성의 중요한 역할, 신의 자애로운 인도 아래 인류의 축복받은 미래 등을 강조했다. 스미스가 인간 본성에 대해 순진하거나 감상적 견해를 품었다는 말은 아님. 그는 인간의 죄와 어리석음을 익히 알았고, 만물의 복잡한 연관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부정하려는 우리의 무능이나 거부에서 이런 죄와 어리석음을 분명히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말하는 "자애롭고 전지한 존재는 ... 자신이 관할하는 체계 속에 우주적 신에 대해서는 필요가 없는 악을 한 조각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
- 스미스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원천은 당시 명칭으로 하면 자연신학으로, 신이 인간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썼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하나는 성서, 다른 하나는 자연인데 보통 대문자로 nATURE라고 썼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학자는 뉴턴.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펼쳐 보이겠다고 약속. 오늘날 뉴턴이 성서에 관한 주석서도 몇권 쓰고, 요한계시록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스미스의 사고에 미친 지배적 영향은 그가 특히 독일식 표현으로 익숙한 자연법 전통이다. 이 학파는 보통 말하는 자연의 우주보다 윤리와 도덕에 관심이 많았다. 이 학파는 스미스가 글래스고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자연법 신봉자는 인간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타고난다고 주장. 그 신학적 함의를 명시적으로 다루는 이들은 이 능력이 신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친다. 간혹 이런 견해는 인간의 이성이 죄로 인해 크게 왜곡되어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런 도덕적 식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에 위배된다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스미스는 이런 뚜렷한 모순과 싸워야 했다. 신학자는 이런 활발한 지적 흐름에 관여하기를 원하게 마련이라는 통념에 놀라서는 안된다. 20-21세기에도 철학자와 신학자는 이런저런 자연법을 놓고 씨름한다. 로마 카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대부분 자연법에 근거를 둔다.
- 시장은 초기단계부터 영적 영역에서 단어와 상징을 빌려옴.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처음 등장한 어스레한 과거부터 언제나 앞선 종교의 여러 양상을 빌리고 훔치고 개조했다. 예컨대 성서 저자들은 천지창조와 태곳적 대홍수 이야기를 끌어와서 자기 목적에 맞게 개작. 기독교의 세례는 고대 유대의 미크바라는 관습을 각색한 것. 히브리 성서와 신약성서의 이야기는 겹쳐져서 코란에 나온다. 불교는 기원전 500년에 처음 등장할 때 밑바탕이 된 힌두교 환경의 요소를 담고 있음. 시장 종교는 이런 관행을 되풀이할 뿐이다.
- 시장은 왜 욕망을 창조할 필요가 있을까? 광고 산업의 최근역사를 잠깐 훑어보면 이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문화 연구자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현대광고의 출발점을 신기술이 발명되고 독점체가 형성되면서 기업들이 생산을 늘리는 방법이 아니라 과잉생산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도전에 직면한 19세기 말로 추적. 어떻게 하면 만들어내는 모든 제품을 판매할 수 있을까? 이 도전은 2차대전 이후 극심해짐. 전투기, 탱크, 대포를 건조하던 공장들이 전례없는 수준으로 자유롭게 소비재를 생산. 이 생산물을 전부 흡수할 소비자가 있었을까? 사람들이 더 많은 물건을 사지 않으면 경제가 심각한 곤란을 겪었을 것. 이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뒷날 대통령경제자문위 초대 위원장에 오르는 에드윈 너스는 34년, 브루킹스 연구소의 한 연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함. 그 보고서인 '미국의 생산능력'은 시장침투와 과잉생산능력을 심각한 도전으로 꼽음. 이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몇가지 기제가 고안됨. 먼저 예약할부제, 할부구매, 장기담보대출, 최종적으로 신용카드 같은 광범위한 신용도구를 창조하는 것. 이 모든 수단은 사람들에게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물건을 사도록 부추겼고, 사람들은 부추김에 넘어감. 종교영역에서 이런 변화는 이전 시기에 장려된 검약과 소박함, 만족의 유예 같은 일부 도적적 미덕이 이제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장의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되었음을 의미. 교회는 사람들에게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고,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마음을 편하게 먹아라"라고 장려할 것이 기대됨. 많은 종교기관이 이런 기대에 부응. 소비자 채무는 급증했고, 저축예금은 감소. 어떤 이들은 이 과정을 저축에 맞서 소비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82-90년 미국 소비자 평균 부채는 30% 증가했지만, 기업이윤은 급등했다. 판매를 확대하기 위한 또 다른 전술은 진부화 속도를 높이는 것. 가정용품은 더 빨리 닳도록 설계됨. 그래야 물건을 새로 사기 때문. 스타일의 변화, 특히 여성복의 변화속도가 빨라짐. 맵시 있는 모델이 활보하는 밀라노와 파리의 런웨이가 텔레비전과 컬러잡지를 통해 가정에 들어옴. 자동차 업체는 해마다 포드나 닷지의 신모델을 출시. 기업은 제품개선보다 포장을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 점점 더 많은 예술적 재능과 상상력을 쏟아부음. 금융부문의 확대는 파생상품인 부채담보부 증권 같은 수많은 신제품 발명으로 귀결됨. 냉전은 미국과 광범위한 동맹국을 위해 다시 한번 무기를 대량생산하는 군수공장의 장기적 성장을 부추김. 하지만 쇠약해진 수요와 시장의 포화상태에 대응하려는 이런 고안물 가운데 광고업계에 의한 욕망의 창조와 주입이 가장 강력해짐. 욕망을 창출해서 판매를 확대하기 위한 혁신적 기법은 텔레비전이 그 범위와 침투력을 확대하면서 무대에 등장. 그것은 시장의 초대형 폭풍과도 같았고 거대한 성공이었다. 언젠가 잡스가 말했듯이 "여러분이 말해주기까지 많은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번 말을 듣자 확실히 한입 베어 문 사과모양 로고를 좋아하는 취향이 생겼다.
- 라틴어로 restoratio humani(인간의 회복)이라 불리는 구절은 인간을 만물의 질서에서 적합한 자리, 즉 신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 이 교의는 안셀무스의 유명한 질문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에 답하고자 한다. 몇몇 이론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생명으로 화신한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임. 신화라는 이 개념은 초기의 일부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 로마 종교이 일부 경향으로 들어갔다. 후자의 경향에서는 인간이 때로 신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에 대해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의 모습대로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을 취하셨다" 하느님의 목적이 인간을 신성화하는 것이라는 이런 사고는 지금도 기독교 신학, 특히 동방정교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함. 결국 등장한 지배적 모티브는 약간 다르다. 신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온 것은 인간을 신성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되어야 하는 모습, 즉 진정으로 인간적 모습이 되도록 돕기 위함이라는 것. 인간의 회복이란 말에 담긴 의미가 이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는 취지와 관련하여 restoratio는 비대한 시장에 관한 핵심적 질문을 제기함. 시장은 단순한 시장이 될 수 있을까? 만물의 질서 속에서 중요하지만 신성하지 않은 자기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시장은 과대망상증, 그 상피병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시장은 폐지가 아니라 철저한 개조, 즉 restoratio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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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케티는 불평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제시해왔던 두가지 통찰을 재발견한 듯하다. 첫번째 통찰은 한 사회의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 가령 미국의 산업자본가들은 다른 이들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한다는 거이다. 그리고 착취당하는 이들은 스스로 착취자가 되지 않는 한 절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옛말마따나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고, 그들에게 그 노동보다 헐값으로 임금을 지급한느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비법인 것이다. 두번째 통찰은 부가 전체 인구에서 점점 더 적은 비중의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고, 또한 부는 권력의 원천 중 하나이기에 매우 부유한 이들은 점점 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정부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가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약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피케티가 재발견하고 설득력 있는 글로 써내려간 바를 달리 표현해보자면, 자본주의는 야바위 게임이며 통상적으로 자본가들이 꾸준히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 불평등은 종종 정당하지 못한 행동(절도, 약탈, 착취)에 근원을 두고 있기에,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이들이 그러한 행동을 은폐하려 드는 것은 합리적 행동이다. 실로 그렇다.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그러한 행동을 눈에 띄지 않게 숨기거나 말로 정당화해서 덮어버리는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자 한다. 불평등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또한 권력도 틀어쥐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권력은 그들의 정체를 감추는 데 활용될 수 있기 때ㅜㅁㄴ이다. 그러니 어떻게 불평등이 재생산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다. 또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제시하는 일이 어려울 수 있는 만큼, 무언가 꺼림칙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설득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일 것이다
- 문화자본은 직업시장에 진입할 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직장 안팎에서 승진과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고자 할 때에도 관건이 된다. 어떤 사회적 집단에 선별되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집단에 유용하고 그들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지식, 습관, 가치관, 기술, 취향 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이에게 보여 주어야 함. 그러지 못할 경우 문은 여전히 닫혀 있을 것이며, 그 집단이 가진 자원가 기회에 접근할 길은 차단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사회체제의 가장 높고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엘리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재생산하는지, 즉 어떻게 그들과 같은 외모, 사고방식, 행동양식을 가진 이들을 다음 세대의 엘리트로 선별하는지에 대한 부분적 설명을 제공. 또한 세상을 바꾸고자 할지도 모르는 문제아들을 어떻게 솎아내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 주석이란 페다클레스라 알려진 고대 그리스 학자가 만들어냄. 그는 두루마기 끄트머리에 나중에 다시 읽기를 위한 필기를 해두는 이상한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스승 중 몇몇은 그가 값비싼 두루마기에 낙서를 한다고 혼을 냈지만, 다른 이들은 그 기록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림. 그리하여 결국 페다클레스의 스승들은 페다클레스가 끄적거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을 접고, 그가 하는 행동을 일컬어 페다클레스의 기록, 줄여서 페다의 기록(Ped notes)라 부르기 시작.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주석(foot notes)인데, 이 용어가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 게임을 조작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게임도구를 손봐놓는다거나, 상대편을 방해한다거나, 심판을 매수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규칙자체를 불공정하게 만드는 거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지 않고 스스로 조심해가며 규칙을 다르는 것만으로도, 불평등은 자동적으로 발생하게 됨. 어떤 사회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불평등의 재생산이 제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음.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경우, 우리는 불평등의 재생산이 정상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화된, 즉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정착되어버린 행동양식들은 비유하자면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 왜 조작된 게임을 계속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누군가 던질 수 있다. 자기 입맛에 맞게 게임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게임을 계속하고자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하지만 계속 잃는 사람들이 왜 게임판을 떠나지 않을까? 게임이 조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탓에, 계속되는 패배가 자기 탓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름. 혹은 자신에게는 게임의 규칙을 바꿀 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 있음. 어쩌면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그것 외에는 다른 게임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름
- 태스트 하틀리 법은 직접적으로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게임의 규칙을 설정함. 그러나 간접적 방식으로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다른 규칙들도 존재. 90년대 체결된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자본가들은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재화를 미국으로 가져오면서도 높은 관세를 내지 않을 수 있게 됨. 이것은 미국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게임의 규칙을 바꿈. 만약 미국 노동자들이 더 높은 임금가 보다 나은 근로조건을 요구할 경우, 사용자 측은 생산기지를 멕시코나 동남아로 옮겨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대기업들은 1860-65년 사이, 즉 남북전쟁 시절부터 생겨나기 시작.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기업의 힘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했는데, 오늘날 이는 예언처럼 들리낟. "머지 않은 미래에 조국에 닥쳐올 위기를 생각하면 제 신경은 곤두서고 몸은 떨려 옵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십시오. 기업들이 권좌에 앉아 높은 곳에서부터 부패의 시대가 오고 있으며, 돈의 힘은 사람들의 무지 위에서 치세를 이어가기 위해 애를 쓸 것입니다." 링컨의 시대 이후 이 예언은 많은 부분 실현되고 말았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기 때문. 비록 법에 따라 등록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제 기업들은 최초의 설립취지와는 무관하게 영원히 존속할 수 있고 무슨 종류의 사업이건 추진 가능. 관리자와 투자자들은 더 이상 기업의 부채와 벌금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지지 않음. 이제 기업은 다른 기업을 소유할 수 있고, 정치적 목적의 후원을 할 수 있으며, 경영에 관련된 정보의 공개를 거부할 수 있고, 사업을 실제 수행하는 장소와 다른 곳에 법인 설립을 할 수도 있음. 게다가 오늘날 사람들은 기업이 영원히 존속할 권리, 거대하고 막강한 존재가 될 권리, 정부와 대학과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권리, 우리의 문화를 형성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다
- 빨간 줄 긋기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게임을 조작하고 있지 않았던 이들 또한 규칙의 변화에 따른 불평등으로 이익을 볼 수 있음을 잘 보여줌. 연방주택관리청과 재향군인관리국이 운영하던 차등대출 규칙은 일차적으로 은행가, 부동산개발업자, 중개업자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이차적으로 백인 주택구입자들에게 이익을 안겨줌. 오늘날 그러한 주택보유가구에서 자란 백인자녀들은 학자금 대출없이 대학을 다니고, 어쩌면 결혼선물조로 부모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그 집을 구입할 수도 있을 것이며, 결국 기꺼이 부를 상속받는 결과를 낳을 것임. 오늘날 성인이 된 자녀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게임을 조작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본질적으로 차별을 내포하고 있는 게임의 규칙에 따라, 대부분은 인식하지도 못한 채 이득을 취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 복잡한 조세규칙과 그 규칙을 악용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로 인해, 명목상의 세율과 실효세율간에는 큰 차이가 발생. 실효세율이란 누군가가 모든 허점, 이점, 소득은폐, 공제, 맹점 등을 활용하고 난 후 실제로 내게 되는 세금. 이 중요한 차이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가령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연방 소득세율처럼 종이에 적힌 것만 본다면, 오늘날 벌어지는 게임을 현실보다 훨씬 공정하다고 착각할 우려가 있다.
- 규칙을 만드는 의사결정체로부터 배제된 이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구걸하고, 탄원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됨. 앉을 자리를 허락하지도 않는 체제 속에서 점잖은 태도로 묵묵히 일하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물론 규칙을 만드는 이들은 모든 것이 순리되로 되어가고 있으며 큰 변화를 가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할 것임. 결국 그들은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이들이 입법자로서의 권위를 갖고 모든 이에게 최선의 결과가 돌아가도록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게임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나면, 이러한 주장의 정당성은 물거품이 된다
- 공정함이란 그저 모든 이에게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란 주장에 현혹되지 말아야 함. 불평등의 재생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규칙이 각기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함. 그렇게 바라볼 때, 우리는 규칙이 정당한 이유 없이 특정한 이들에게만 더 유리한 결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됨. 때로는 대학입학의 사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이들이 경쟁에 참여할 수 있을만큼 준비되어 있다고 전제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조작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함. 규칙은 그 규칙이 만들어지고 적용되는 조건으로 인해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여러 인종이 사는 지역에서 백인가구가 이사해 나가도록 부추기고 흑인가구가 교회의 주택단지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했던 원인인 인종차별이 없다고 상상해보자. 산업생산기지가 도시지역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없었다고 상상해보자. 흑인들이 안정되고 높은 소득을 올리는 직업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차별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흑인과 백인의 결혼이 같은 인종끼리의 결혼과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이런 조건하에서라면 감정평가 지도위에 그어진 빨간 줄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임.
- 불평등을 만들어내려면 다른 무엇보다 우선 몇몇 지점에서 차별되는 집단을 정의하는 일이 필요. 그러고 나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도둑질당하고, 약탈당하고, 착취당해도 마땅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됨. 저들로부터, 우리가 아닌 타자들로부터 빼앗아오는 것은 괜찮다는 생각이 근간에 깔리게 됨.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를 구성하려면, 집단 내에 속하는 사람들은 우월하며 집단 밖의 사람들은 열등하다는 관념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을 일컬어 '이데올로기적 날조'라 부름
- 어떤 이들을 다른 존재로, 대부분의 경우 열등한 존재로 규정짓는 것이 언제나 불평등의 전제조건이다. 그러한 차이가 아무리 과장되거나 망상으로 지어낸 것이라 해도, 일단 사람들이 공유하는 현실에 대한 정의의 일부로 편입되고 나면, 차별대우를 보다 복잡하게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게 됨. 이런 정당화를 통해 착취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림. 만약 그러한 정당화의 논리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제도화된 착취에 대한 도전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 미국의 모든 어린이에게는 노력과 지능과 판단의 결과에 따라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사람은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인정받고 공정한 보상을 얻으리라 믿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을 통틀어 성취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성취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눈에는 조작된 게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해내지 못했지, 그러니 나는 내 수준에 맞는 대접을 받아야 해" 성취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남들보다 앞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자신을 탓해야 한다. 미국은 성취 이데올로기에 푹 빠져 있는 나라다. 거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부모, 선생, 대중매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성취 이데올로기를 배우게 됨. 게임이 조작되어 있지 않으며 충분히 똑똑한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남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다고 믿는, 혹은 적어도 그런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 사람들이 세대마다 수백만 명씩 새롭게 등장한다는 뜻이다
- 그들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동등한 자원을 가지고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선수들은 최고의 코치에게 교육을 받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훈련을 하며 영양 넘치는 음식을 먹고 가장 좋은 신발을 신지만, 다른 이들은 코치도 없고 훈련받을 시간도 없으며 50걸음 뒤에서 맨발로 시작해야 하는 육상경기를 떠올려 보라. 아무도 이런 경기가 공정하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 성취 이데올로기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유능하고 열심히 일하며 규칙을 따른다고 해도 그 모든 사람들이 딛고 올라갈 자리는 없다는 것. 설령 모든 사람들이 야심만만하며 자긍심이 높고,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고, 박사학위를 따고, 값진 기술을 익히고, 문제가 될 일은 하지 않으며, 열심히 일하고,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남보다 앞서 나갈 순 없다. 그만큼 일자리가 충분치 않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면 남보다 앞서 나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남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을 해나가고 있더라도 말이다
- 성취 이데올로기가 조작된 게임과 결합하면 사람들은 패배했을 때 자신을 탓하게 되고, 무력감과 자격지심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이들은 일종의 내재화된 억압을 경험하고 있는 셈. 이러한 자기비하적 관점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지배자 집단은 타자화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타자화된 이들은 자신에게는 더 나은 삶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혹은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느끼며, 이는 흔히 자신이 착취당하는 상황을 수긍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짐
- 대안은 없다는 세계관은 무기력한 기분을 통해 더욱 강화됨.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누군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가리키는 순간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좌절감을 들쑤시는 결과를 낳기 때문. 이러한 불편함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는 현실적인, 혹은 보다 나은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대안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편함을 느낄 필요도 없어짐. 누군가는 대안을 찾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 스스로의 현명함에 대해 뿌듯함을 느낄지도 모름. 동시에 조작된 게임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계속 이득을 볼 수 있다.
- 기원후 1세기,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는 로마인들이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는 정치인들에게 쉽게 매수된다고 풍자. 곡식을 주고 대중적인 오락거리를 보여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대중에게 필수적인 식량과 하찮은 싸구려 오락물을 주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을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자면 빵에는 식량뿐 아니라 에너지, 수도, 그밖에 아이팟, 아이패드, 스마트폰 같은 소비재들이 포함될 수 있을 것임. 서커스로는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대중적 경기들 뿐만 아니라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놀이동산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빵과 서커스라는 개념을 꺼내든 이유는 어떤 이들을 힐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움직임이 오늘날 불평등의 재생산에 있어서도 유사하게 관찰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임. 정치적 상상력은 구속받는다기보다 차라리 잠들어버린다고 해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주의가 산만할 뿐더러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어 있기 때문
- 기후변화와 흡연은 알기 쉬운 사례에 속함. 과학적 합의가 명백한 가운데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의도가 분명하니 말이다. 다른 사안에서는 선동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와 사실을 구별하는 일이 더 어려울수도 있다. 그 모든 경우 핵심은 권력을 가진 행위자나 그들의 하수격인 싱크탱크들이 의혹, 혼란, 분열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것이다. 그들의 시도는 눈에 잘 띄지 않을수도 있다. 그럴듯한 연구와 해당주제의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발언을 겹겹이 두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럴 때는 돈을 따라가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이 심어놓는 조작된 의심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 아닐까 싶다
- 1600년대 말 대부분 토지 소유자였고 일부는 산업자본가였던 북아메리카의 자본가들은 유럽계 이민자들과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노동자로서 연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백인이라는 정체성을 사용했음. 전자에 속하는 노동자들은 백인으로 정의되어 추가적인 경제적 이득 및 정치적 특혜를 받았다. 후자는 흑인으로 정의되어 그런 특혜를 받지 못했으며, 법에 따라 평생 노예생활을 하고 자손마저 노예가 되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유럽계 조상을 둔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노동자이기에 앞서 백인이라고 규정짓도록 유도되었던 것. 이렇듯 노동자들은 백인과 흑인으로 분할되면서 강력한 대중적 저항을 벌이지 못하게 되었다. 노예제가 존속했던 기간동안 미국에서는 증조부모 대체 아프리카계 이주민 혈통이 섞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법적으로 흑인으로 간주되었음. 흑인의 정체성을 이와 같이 규정한 것은 백인노예 소유주와 흑인 여성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흑인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을 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을 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예제가 종식된 후에도 그러한 규칙은 살아남았는데, 그것은 흑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가운데 백인의 경제,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말하자면 누가 합법적으로 자신은 백인이며 백인의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게임의 규칙을 발명해낸 것은 유럽계 혈통을 지닌 경제 엘리트들이었던 셈이다. 이후 18-19세기에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가 더 정교해지면서, 백인노동자들 또한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설령 농장, 공장, 광산에서 여전히 착취당하는 처지였다고 해도 말이다. 유럽계 조상을 둔 스스로 백인이라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받는 보상은 경제적인 동시에 정서적이었다. 낮은 임금을 받는 백인 노동자들이 자신을 흑인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럿이 백인 자본가들이 그들에게 지불해온 심리적 임금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인종주의를 이용해 백인과 흑인 노동자들이 서로 갈라서게 한 결과로 노동자의 힘은 위축되었다
- 모든 불평등한 체제는 지배집단에 속하지만 엘리트는 아닌 자들의 지지를 필요로 함. 착취체제의 최상층에 앉아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지배 집단의 일원으로 취급되기는 하는 사람들 말이다. 앞서 우리는 백인 노동계급을 그러한 집단의 사례로 제시한 바 있다. 그들은 백인 우월성에 대한 주장을 통해 혜택을 입고 있으니 말이다. 가부장제의 위계질서 내에서 최하층에 위치한 남성들, 가령 유색인종이나 노동자 혹은 동성애자 남성들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같은 원칙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자신을 착취하거나 폄하하는 자들에게 상대적 우위를 제공하면서 스스로를 종속적 위치에 고정시키는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이미 살펴보았듯이 오늘날의 체제는 엘리트가 아닌 비 백인 남성들에게 여성에 비해 특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치 가난한 백인들이 흑인에 비해 여전히 특권을 누리고 있듯이 말이다. 특히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이라면, 남성으로서의 특권을 약간이나마 누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기에, 그들은 자신을 지배집단의 일부로 여길 수 있게 해주는 아주 사소한 정체성의 징표에소 매달리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사회는 늘 나타나고 또 사라졌다. 그 몰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사회가 생존을 위해 의지하고 있는 자연환경을 근시안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몰락의 주요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사회의 지도자들이 유연성을 잃고 문제해결에 있어서 오래된 방법에 집착함으로써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는 일에 실패할 때 사회가 몰락한다고 주장. 또 다른 역사가 조지프 테인터는 보다 복잡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투자를 하지 않거나 할 수 없을 때, 그렇게 한 사회가 조직으로서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몰락하거나 이전에 비해 단순한 형태로 줄어든다고 주장. 어떤 가설을 택하건 두가지 의문이 남는다. 번영하는 듯 보이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몰락이 임박해온다는 전조를 어느정도까지 느끼는가? 그리고 지난 사회의 바람직한 요소들을 보면서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 예측은 어렵다. 특히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닐스 보어)
- 다이아몬드, 토인비, 테인터가 내놓은 해답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자면 경직성일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제기되는 도전과 압력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 말읻. 그렇다면 이러한 경직성을 불러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변화하는 환경에 사회가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원인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불평등이다. 한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점점 더 불평등해질수록, 경제와 정치 분야의 엘리트들은 변화를 가로막고 방지하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이게 될 테니 말이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이 발견됨. 만약 변화가 자신의 부나 권력을 포기를 의미한다면, 엘리트들은 차라리 사회가 악화되는 쪽을 택할 것이다.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은 무기력한 기분에 사로잡혀 변화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지속가능성이 없는 상황 속에 고착되어 버리며 최악의 결말로 향하는 것이다.
- 불평등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논리 중 하나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에 그들이 불평등한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행동하게 만들 방법도 없다는 것. 그들은 인간이 본성상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존재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타인을 희생시켜가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다고도 주장. 물론 대부분의 인간사회에는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사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관용을 베풀고, 동정심을 표출하는 사례 역시 수없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상대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지 않은 다음에야,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바로 그렇게 대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면모가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고 겨루는 것만을 강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불평등을 줄여나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로 호의적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관건은 그러한 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달렸다 할 수 있다.
- 점령운동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사회변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됨.
(1)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대중을 끌어들여 시위를 벌이는 등 사람들을 동원해 내는 것과,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운동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후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고가 필요. 인종주의, 성차별, 엘리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분열을 극복하고, 같은 목표를 향한 인식을 공유하고 반복되는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민주적으로 책임을 지는 리더십을 형성하고, 계획을 세우며,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물질적 기반을 베공하는 가운데, 정부의 공적인 수단을 통제하고 있는 이들과 실제로 맞서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불만을 드러내고 공동체에 대한 상상의 물고를 텄다는 점에서 월가 점령운동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 주었음. 하지만 점령운동이 벌어지던 캠핑장 밖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만한 조직을 형성해내는 과제는 그다지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지 못했다. 두번째 교훈은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거나 불만을 확산시킬만한 일이 벌어지려 할때, 단지 불평등을 확산시키는 규칙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문을 던지며 사회변화가 시작되려는 조짐만 보이더라도, 엘리트들은 격렬하게 반격한다는 것이다. 점령운동 참여자들은 일상적 업무에 지장을 거의 초래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트들은 월가 점령운동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전달하고 있던 메시지도 문제였지만, 더 많은 이들을 향해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라고 촉구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월가 점령운동이 엘리트들의 권력에 즉각적으로 끼친 위협은 보잘것 없는 수준이었지만, 엘리트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경한 태도로 그 운동을 제압하려 들었따. 하지만 엘리트들의 관점에서 보면, 월가 전령운동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활기를 띠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사회를 어지럽힐 수 있을 만큼 갈등의 수위가 높아지지 않도록 조절해야만 했던 것이다. 엘리트들이 갈등의 조짐을 느끼고 대응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월가 점령운동의 세번째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발언을 하고,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내고, 사람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고, 서로를 교육해나가는 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말이다. 월가점령운동은 곧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불평등과 엘리트들의 정부지배라는 문제를 전국적인 의제로 끌어올리는 일에는 성공했다.
- 불평등은 만들어진 것이다. 그냥 벌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의 것을 훔치고, 약탈하고, 착취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방식을 제도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자원의 배분이 불평등한 방향으로 제도화된 상황을 일컬어 조작된 게임이라고 해왔다. 바로 그 조작된 게임으로 인해 불평등이 영구히 고착되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분석이 그럴듯하게 여겨진다면, 조작된 게임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 보일 것이다. 아예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과정이란 조석간만의 차를 만들어내는 만유인력과도 같이, 너무도 크고 강력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능 일은 없을 지경이라는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평등이 만들어진 것이든, 우리는 평등한 사회 혹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공정하고 덜 불평등한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내고, 연대의 문화를 창출하며,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상식적 도덕규범과 일상적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실천가능한 일이다
-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1번 테제)
- 야바위게임이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만약 우리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로잡혀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재생산하고 있는 조작된 게임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다음 단계는 그것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뿐이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1번 테제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이다. 혹은 그 유명한 마르크스의 문장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까지 명확하게 바로잡고 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보다 변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변혁하는 것은 사실상 동일하며, 세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와 실천의 개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 1845년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는 사회적 구성물인데 그 점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다. 둘째,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종교를 온전히 이해한다면, 그 종교를 믿고 따르는 개개인의 종교적 심성 혹은 영성 등에 부여되고 있던 특권적 지위 역시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 가능. 셋째, 이와 같이 종교와 신자, 신앙행위 등을 끝까지 분석하는 행위는 제도화된 종교뿐 아니라 개별적인 신자들로부터도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그것은 가장 급진적인 변혁 운동과 불가문의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 불평등은 만들어진다. 자원을 공정하지 않게 분배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들이 존재함.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일종의 게임에 비유한다면, 그 게임의 규칙은 조작되어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기존의 게임을 뒤집어 엎기는커녕 지속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조작하는 자들, 쉽게 말해 엘리트들은 사람들이 착취하면서도 게임판에서 떨어져 나가지는 않도록 개평을 던져주는 식으로 관리하기 때문. 또한 엘리트뿐 아니라 게임판에서 착취당하는 이들 스스로가 정체성의 근본을 해당 게임에서 찾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게 짜인 책임의 그물이 이 사람들을 옭아맨다. 조작된 게임을 조작된 채로 남아 있거나, 설령 변화의 기회가 열린다 해도 더 나쁜 방향으로 바뀌기 일쑤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당연히 환영받기 어렵다. 사람마다 자신의 일에 대한 평가는 다르겠지만, 어쨌건 고된 노동을 통해 얼마간의 돈을 벌어들이면서 우리는 뿌듯함을 느낀다. 자신이 돈을 벌고 있다는 이유로 본인이 참여한 일, 다니고 있는 회사를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음. 하지만 마이클 슈월비는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고생하셨겠지만, 당신은 조작된 게임판에서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하고 그저 개평이나 받아 챙기는 신세라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공무원에 임용되고, 자영업자로서 자리를 잡는 등 남부끄럽지 않은 위치를 점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직업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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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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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없는 자본주의

경제 2019. 3. 19. 12:27

- 도시화의 수수께기 중 하나는 매우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는 다른 사람들 옆에 살기 위해 매우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증가했다는 점. 이는 근접성의 중요도가 확실히 하락했을 우리의 접속된 세상에서는 특히 수수께끼로 보임. 한가지 해답은 도시생활의 스필오버 혜택이 증대해왔다는 것이다. 사실 의심할 여지 없는 불이익(혼잡, 물가, 대기오염)의 증가를 고려할 때 틀림없이 그것을 상쇄하는 이익이 있을테고, 그 이익은 분명 더 많은 상호작용와 협업의 기회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 무형투자는 또한 특정 정보기술, 특히 컴퓨터 네트워크와 스마트폰의 경우 유형자산과의 시너지를 보여준다. 이런 대표적 사례가 90년대 미국경제를 구한 월마트의 역할임. 80년대에 미국경제는 실질 생산성 증가의 침체를 겪고 있었음. 사람들은 이것이 새 표준이 되고 있으며 생산성을 절대 회복되지 않을 거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90년대로 접어들자 생산성이 상승. 2000년에 매킨지글로벌연구소는 이 생산성 증가의 원인을 분석한다. 예상외로 그들은 생산성 증가의 대부분이 대기업 체인의 소매점들, 특히 월마트가 공급망을 재정비하고, 업무효율을 향상시키고, 단가를 낮추기 위해 컴퓨터아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방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찾아냄. 어떤 점에서 그것은 기술혁명이었다. 그러나 이득은 저차원 기술부문의 조직 및 영업관행을 바꿈으로써 실현됐다. 아니, 바꾸말하면, 그것은 월마트의 컴퓨터 및 과정들에 대한 투자와 그것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공급망 개발 사이에서 일아난 커다란 시너지였다. 이는 MIT 경제학자이자 디지털 경제학의 권위자인 에릭 브린욜프손이 상술해온 관계다. 브린욜프손의 연구는 조직투자와 기술투자가 대단히 보완적임을 밝혀냄. 다시 말해 최신 기술로 만든 소프트웨어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은 기업들은 조직변화에도 투자했던 곳들이었다는 것. 연구자들은 IT에 투자한 미국과 유럽기업들의 생산성을 비교한 뒤 유럽업체들이 미국과 동일한 수준의 이익을 컴퓨터로부터 얻지 못했음을 발견했는데, 그만큼 조직 및 경영의 관행을 변화시키려 들지 않았고 그럴 역량도 없었기 때문이다.
- 장기불황은 수많은 징후로 특징지어짐. 첫번째는 투자저하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 투자는 70년대에 하락했고, 80년대 중반에 약간 회복된 다음, 금융위기때 가파르게 떨어짐. 그때 이후로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것은 두번째 징후가 없었다면 그다지 놀랍지 않을 것이다. 바로 낮은 금리다. 80년대 중반 이래 장기적 실질이자율은 하락해왔고 금융위기 이후로는 특히 낮아짐. 그러나 이렇게 투자비용이 굉장히 낮은데도 불구하고 그때 이후로는 투자회복이 없었다. 낮은 투자와 낮은 이자율의 동시적 발생은 경제학자들에게는 수수께끼다. 옛날에 중앙은행 총재들은 투자 저하의 대응책을 알고 있다고 생각. 이따금 그랬듯이 기업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투자를 줄이면,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인하하여 대응하고는 했고, 이것이 금리를 저렴하게 만듬. 저리자금은 기업이 융자를 늘리고 소비자들이 대출을 하는 비용이 덜 들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기업과 소비자들은 돈을 빌렸고, 투자와 소비는 다시 상승. 그러나 이 전략이 먹히지 않는 듯했다. 중앙은행 총재들에게 이것은 바위투성이의 여울을 향해 가다가 조타기가 말을 안 들어 더 이상 배를 돌리지 못하는 선장이 된 격. 매우 저렴한 대출과 명백히 투자를 꺼리는 기업들의 이러한 동시발생은 2013년 국제통화기금 강연에서 래리 서머스가 '장기 경기불황'이라는 말을 대중화했을 때 말하고자 한 바였다.
- 이 저리자금과 투자저하의 괴상한 혼합에 대한 즉각적인 한가지 설명은 그냥 투자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이라는 것.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은 '거대한 침체'에서 선진국들은 새로운 땅에 정착하거나 아동들이 학교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 같은 좋은 투자의 손쉬운 출처들을 다 써먹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그는 기술의 진보가 둔화되었을 수도 있고, 또는 좀더 구체적으로 새로운 발견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효익이 과거보다 줄었따고 주장. 경제학자이자 경제사가인 로버트 고든은 자신의 저서 '미국 성장의 흥망성쇠'에서 이 주제를 발전시켜, 전기, 실내 화장실 등 20세기 발명품들은 반복되지 않을 혁신의 큰 물결의 일부였다고 주장
- 현재의 장기불황과 연관된 징후 3가지
(1) 미국 및 다른 나라들의 기업 이익이 평균 수십년간 그래왔던 것보다 더 높고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듯 하다는 사실. 회사의 수익은 압박을 받기는 커녕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이 없다. 가장 즉각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측정치는 평균자본수익으로, 90년대 이래 가파르게 증가해왔다. 그렇다고 투자할만한 대상이 없어서 투자가 하락한 납의 시대를 시사하지는 않는다. 얼핏봐도 좋은 투자기회가 거의 없어서라는 생각과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반대로 만일 수익성이 높다면 기업들은 고수익을 내고 있는 모든 매력적인 사업기회에 투자하려고 저리자금을 이용해 더 많이 투자하려고 들 것으로 예상 가능
(2) 수익성에 관한한 기업들이 동등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점점 더 불평등해지고 있다는 것. 상위권 회사들의 수익은 호황을 맞고 있음. 상위권 회사들은 투자기회가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임. 이는 경쟁 (우리는 보통 경쟁으로 인해 선두그룹의 이윤폭이 평균으로 회귀하고 후발기업들은 파산함에 따라 선두 및 후발기업들의 각축장이 공평해 질것으로 예상하곤 한다) 이 줄어들었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켜왔다. 수익성 그림이나 생산성 그림이나 비슷해 보인다. 언제가 격차는 존재하지만 그 격차가 금융위기 이전부터 시작해 상당히 벌어져 온 것 같다.
(3) 선진국들에 나타난 지속적인 생산성 증가의 부진이 단지 투자 저하 탓만은 아닌 것 같다는 점. 노동생산성증대는 일반적으로 두가지 이유 때문에 하락할 수 있다. 그것은 투자감소 때문에 하락할 수 있으며, 이로써 노동자들의 과업에 필요한 자본은 감소함. 아니면 자본의 양과는 무관하게 노동자들의 작업효율성이 떨어져 투자가 하락할 수도 있는데, 이를 다요소 생산성 또는 총요소 생산성의 하락이라고 한다. 자, 금융위기 이후 투자는 하락세였지만, 노동생산성의 모든 손실을 설명할 만큼 떨어진 것은 아님. 사실 생산성 증가 둔화는 대부분 총요소 생산성의 하락이었다. 대략 2000년대 중반 이후 OECD 다요소 생산성 증가가 하락했다
- 최근 화제가 된 두 기업 밀란과 우버를 생각해보자. 에피펜의 성공은 서로 맞물려 있는 한 세트의 무형자산 투자에 달려 있었다. 설게는 의약품 규제기관의 승인을 받았고, 이름은 외우기 쉬우며, 응급처치 요원들은 사용법을 숙지했고, 중요 고객들에게 시판할 학교같은 채널이 있다. 에피펜의 성공에는 또한 좀더 어두운 측면도 존재. 에피펜 제조사들은 경쟁제품 제조사를 고발하여 그들의 시장접근을 늦추거나 가로막음. 에피페을 수익성 있게 만드는 것은 개인수익만큼이나 사회적 이익을 창출함. 응급처치 요원들이 에피펜 사용법을 안다는 사실 혹은 많은 과민반응 환자들이 에피펜 브랜드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소비자들과 밀란사 양측에 유리. 그러나 경젱제품들에 대한 소송이나 까다로운 자기주사기 신제품의 승인과정이 밀란사를 제외하면 누구에게 이득을 주는지는 확실치 않음. 우버 또한 유사한 질문을 제기한다. 소프트웨어 및 브랜드와 더불어 우버에 수익의 원천이 되는 소중한 무형자산 중 하나는 운전기사 파트너들의 대규모 네트워크다. 품질을 보증받은 운전기사 네트워크의 정보망 구축은 우버의 고객들에게 가치있는 서비스임. 그러나 비평가들은 우버의 운전기사 네트워크 투자는 최소한 어느정도까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았다면 최저임금 등의 혜택을 얻을) 운전자들로부터 가치를 빼냄으로써 가치를 갖는다. 밀란과 우버에 제기된 혐의은 그들의 무형투자 일부가 전체 경제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기존의 경제 파이를 쪼개 무형 투자자가 수익을 독점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 장기불황은 잠재적 원인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복잡한 현상이다. 우리는 유형에서 무형투자로의 장기적 전환이 어떻게 불황을 초래하거나 악화할 수 있는지 네가지 가능한 방식을 알아봤다.
(1) 측정오류는 이 수수께끼의 일부를 설명해줌. 상승세에 있는 무형투자를 포함하자 투자가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또한 GDP 성장을 조금씩 향상시킨다. 그러나 장기불황 문제의 대부분은 여전히 남는다
(2) 무형자산의 확장성은 거대한 고수익 기업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 회사들은 아울러 다른 회사들의 무형투자에서 스필오버를 전용하기에 더 유리한 위치에 있기도 하다. 그것이 선도기업들과 뒤처진 기업들 사이의 생산성 및 이윤격차를 키우며, 동시에 후발기업에게는 투자 인센티브를 감소시킴. 이것은 어떻게 투자 저하가 실제 이루어지는 투자의 고수익률과 공존하는지를 설명해줌
(3) 무형자본의 구축속도는 대침체 이후 느려졌다. 이것은 스필오버 발생을 감소시킬 수 있는데, 이로 인해 회사들은 예전보다 규모를 덜 확장하게 되고 총요소 생산성은 둔화됨.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있다. 총요소 생산성 증가가 거의 최고로 둔화된 곳은 연구개발 및 무형자본 증가가 가장 둔화된 나라라는 사실
(4) 후발기업들은 선도기업들로부터 스필오버를 흡수할 능력이 떨어짐. 아마 선도기업들이 후발기업들보다 다양한 종류의 무형자산들 사이에서 시너지를 훨씬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 아니 어쩌면 경제가 무형자산에 내재된 논쟁성을 해결할 새로운 제도들을 필요로 하는 무형경제로의 이행단계에 접어들었고 그것이 투자를 로비활동, 법적 공방 및 제도적 재부팅 쪽으로 편향되게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중 어느것도 즉각적으로 생산성을 높이지는 않는다
- 뮬방적공 이야기가 주은 교훈은 과학기술 증대가 꼭 일자리 축소나 임금인하와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 은행의 ATM기 도입도 같은 교훈을 준다. 제임스 베슨이 지적했듯이 현금인출기계의 도입으로 실제 미국에서는 은행원 수가 증가. 지점 비용이 줄고 직원들에게는 고객들과 대화하며 금융상품을 판매할 시간적 여유가 증가했다는 것은 은행들이 더 많은 지점을 개설한다는 의미였다. 사실 과학기술이 고용의 종말을 불러와 사회적 위기가 이어질 거라는 이야기는 한 세기가 넘도록 경제 전문가들의 견해에서 주류를 차지해왔다. 적극적인 기자였던 루이스 앤슬로는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런 효과를 일으키는 뉴스 기사들을 엄청나게 수집했느데, 거기에는 대공황을 기계 탓으로 돌리는 아인슈타인의 31년 연설과 대처에 의해 축출되기 직전 제임스 캘러헌 총리가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위협을 검토하라고 다우닝가 공무원들에게 요청했떤 일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과학기술이 일자리를 대체하고 불평등을 창출할 잠재력이 있긴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 회사들간의 임금격차는 소득 불평등의 놀라운 원천이 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최근 들어서야 고용주와 고용인 양쪽의 데이터를 결합시킨 새롭고 풍부한 데이터 세트들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재 송, 니컬러스 블룸, 데이비드 프라이스, 파티흐 구베넌, 틸 폰 바흐터가 수행한 최신 연구는 미국 회사의 노동자들의 소득이 81년과 2013년 사이에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았다. 만일 관리직과 청소부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면, 당신은 모든 회사에서 격차확대를 관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즉, 국제 법률회사에서의 격차도 커지고, 당신 나라의 현지 법률회사의 격차도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님일 드러남. 오히려 선도기업들은 관리자와 청소부 양쪽에 다른 회사들에 비해 높은 급료를 지불하고 있다. 직종들 간의 격차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에 덧붙여 이 선도기업들과 그 외 기업들 간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사실 필자들은 "81년부터 13년까지 소득불평등 증가의 3분의 2 이상은 회사들 간의 소득증가 변동량으로 설명가능하며, 회사내 증가 변동량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지 3분의 1뿐"임을 발견. 그들은 여기서 한 가지 예외에 주목했다. 바로 대기업 최고경영자 및 기타 고위간부들이 회사의 주가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훨씬 더 많은 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우리에게는 무형경제의 부상이 소득의 불평등뿐 아니라 부의 불평등의 장기적 확대도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발생하는 두가지 주요방식이 있다. 우선 무형자산은 부동산 가격의 인상을 부추기는 데 일조해왔는데, 이는 세계 최고 갑부들의 부가 왜 대폭 증가했는지를 설명. 두번째 무형자본이 지리적으로 이동하기 쉽다는 사실은 50년대와 60년대, 70년대에 정부가 했던 방식대로 조세를 통해 부를 재분배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왔다.
- 우선 부동산 가격을 생각해보자. 물론 주택이나 아파트는 철저한 유형자산임. 부동산이 그런 이르을 갖게 된 것도 본래 움직이지 않기 때문. 그것은 진짜 거기에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실 부동산의 가치는, 특히 지난 30년간 가장 극적으로 가치가 증가해왔던 종류의 부동산 가치는 대부분 무형자산들로부터 생김. 다수의 피케티 연구해설자들은 미국 최고부자들의 증대된 부의 상당부분은 그들이 소유한 부동산의 인상된 가치에서 생겼다고 지적해 왔음. 그들이 더 많은 땅을 사들이고 있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그들이 소유한 집과 아파트의 값이 지난 30년간 꾸준하고 강력하게 올랐기 때문이다.
- 정치학자 에릭 카우프만은 어떤 사람이 EU탈퇴에 찬성표를 던질지 아닐지를 예견하게 해주는 것은 계층과 부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보수주의 및 권위주의를 향한 태도라 지적. 그의 표현대로 "물질적 상황이 아닌 문화와 성격이 유권자들을 잔류 또는 탈퇴로 가른다. 이것은 계층갈등이라기보다는 연령, 소득, 학력 및 심지어 정당의 구분을 넘어서는 가치관의 분열이다." 카우프만은 탈퇴 쪽 유권자들은 탈퇴하고 싶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들, 이를테면 체벌 옹호 같은 것을 고수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피력. 애슈크로프트 경이 수행한 여론조사는 이런 결론을 뒷받침했다. 심리학자 바스티안 예거는 EU 잔류쪽에 표를 던진 지역들과 심리적 특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들여다봄으로써 이 문제를 탐구. 심리학자들은 인간본성의 차원을 포착한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 심리적 특성을 결정. 예거는 세계주의와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관련있는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특성을 살펴봄. 새로운 경험에 개방적인 사람은 잔류쪽에 투표하고, 좀더 전통주의적인 사람은 소득이나 계층과는 무관하게 탈퇴쪽에 투표한 듯했다.
- 무형자산이 더 풍부해지고 중요해진 경제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이 이익을 얻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무형경제에서 스필오버를 전용하고 시너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능력이 보상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새로운 경험에 좀더 개방적인 사람은 이 방면에 더 능하다. 아마도 이는 에드워드 글레이저와 제인 제이컵스가 지적한 대로 그들이 도시에서 지속되고 있는 경제의 마술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더욱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창의성과 혁신에는 아마도 아이디어에 대한 개방성이 요구되는 것 같다.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일에 유용하다는 증거가 있다. 이는 트럼프, 브렉시트 및 비슷한 경향의 지지자들과 그 각각을 지지하지 않는 자들 간의 분열이 왜 심화되고 있는지에 관해 새로운 설명을 제기함. 지지자들은 전통주의와 경험에 대한 낮은 개방성같은 특정한 기본태도를 공통적으로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형자산의 중요도가 커지는 바람에 점점 더 자기들과는 다른 심리적 특성들과 가치체계를 가진 사람들을 선호하는 경제 속에 자신들이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됨. 브렉시트와 트럼프 현상의 문화적 원인은 경제적 원인 (무형경제 등장에서 비롯되는 원인)으로 인해 악화된다
- 무형경제가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
(1) 소득의 불평등. 무형자산이 창출하는 시너지와 스필오버는 경쟁관계에 있는 회사들간의 불평등을 키우고, 이 불평등은 직원 급여의 격차확대로 이어짐. 게다가 무형자산을 관리하는 데는 특별한 능력과 교육이 필요한데, 이런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무형집약적 회사들의 고연봉 일자리로 몰리고 있다. 결국 무형자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특히 최고 경영자들의 과다한 연봉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신화들이 출현하는 분위기가 조성됨.
(2) 부의 불평등. 번영하는 도시들은 스필오버와 시너지가 풍부한 공간임. 무형자산의 증가는 도시를 더 거주하고 싶은 매력적인 장소로 만들며, 그것이 주요 부동산 가격을 치솟게 함. 이런 종류의 물가상승이 최상층 부자들의 부가 증대된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이 입증됨. 덧붙여 무형자산은 흔히 유동적임. 그것은 회사와 국경을 넘어 이동 가능. 이는 자본을 더욱 유동적으로 만들고 이로써 과세는 더욱 어려워진다. 자본의 소유가 부자들에게 편중되어 있으므로 부의 불평등을 감소할 재분배 과세가 더욱 힘들어지는 것이다.
(3) 존경의 불평등. 포퓰리즌 움직임(영국의 브렉시트, 미국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전통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고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심리적 특성검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들이 있다. 무형자산이 더욱 보편화되면서 급증하고 있는 상징 분석가 유형의 직업들에서는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 중요할 듯하다. 그렇게 무형자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현대의 포퓰리즘 움직임을 주도하는 정치적 분열이 부각되고 그것은 경제적 압박으로 이어진다.
- 벤처캐피탈을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은 그것이 어떤 분야에 효과가 있고 어떤 분야에 없는지 살펴보는 것. 생명공학에는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여러 벤처캐피탈 회사가 있다. 즉,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자본시장으로 계속해서 되돌아가야 하고 단계별로 판매할 수 있는 자산이나 제품이 없는 산업의 경우에는 비용매몰이론 때문에 금융위험이 더 높다. 그러나 생명공학에서 이 과정은 여러 단계로 확실히 구분되며, 공정의 단계마다 부분 승인된 특허 등을 판매할 수 있는 제도가 개발되어 왔다. 게다가 여러 단계의 지식을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시판할 수 있게 하는 지식재산권들도 발달했다. 반면 그린에너지는 벤처캐피탈 활동이 훨씬 적다. 하지만 이것은 불확실성은 아주 큰데, 별도의 진행단계는 거의 없고, 재산권도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영역이다.
- 좋은 조직이란 약속과 관련이 있다. 톱니표과 사례에서 미래의 목표치를 지나치게 확장하느라 현재의 우수한 실적에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을 때 좋은 조직이 된다. 이를 실행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일상적 실적에 근거해 높은 보상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장기간 꾸준한 보상의 궤적을 약속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활동을 감소시키는 방법은 계약 조건을 순간순간 조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역시 장기간에 걸쳐 실적을 검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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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역사학자들에게는 모든 사건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경제학에서는 사회와 자연에 작용하는 힘들이 매번 똑같이 작용한다고 간주한다. (찰스 킨들버거)
- 케인스는 한때 화폐를 현재와 미래의 연결고리라 불렀다. 지금 우리가 화폐를 이용하는 방식을 보면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이었따. 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전까지 우리가 화폐를 가지고 했던 일은 그 양을 엄청나게 부풀린 것이었다. 리먼 사태 전의 7년 동안 전 세계 화페 유동성은 25달러에서 70조달러로 증가. 실물경제의 성장속도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였다. 일반적으로 화페가 이렇게 빠르게 팽창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보다 훨씬 풍요로운 미래를 예상한다는 징표여야 한다. 08년 사태는 미래가 우리에게 보낸 피드백이었다. "당신들은 틀렸어"
- 신자유주의를 파괴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성공요인
(1) 명목화폐 : 실질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법률적 약속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는 화폐. 명목화폐가 있어서 경기가 둔화할 때마다 돈을 풀 수 있었고, 선진국이 빚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2) 경제의 금융화 : 선진국 노동자들의 소득이 늘어나지 않을 때 대출로 이를 메울 수 있었음
(3) 국가간 불균형 : 불균형 자체도 문제지만 선진국들의 막대한 부채와 외환보유고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4) 정보기술 : 지금가지 정보기술은 온갖 일을 가능케 했지만, 앞으로 성장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는 미지수
신자유주의의 운명은 위 네가지 요인이 계속 존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음. 자본주의의 장기적 운명 역시 위 네가지 요인이 없어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달려 있음
- 60년대 후반, 장차 미국 연준의장이 될 앨런 그린스펀은 달러듸 금 태환을 정지하는 계획은 복지국가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비난했음. 국민의 돈을 갈취해 정부지출을 충당하려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얼마뒤 그린스펀은 미국 다른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금 태환을 정지하면 미국이 다른 나라들의 부를 손쉽게 몰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 이렇게 해서 미국이 30년 동안이나 통화를 조작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짐. 그 결과 15년 기준 미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무려 6조달러를 빚지며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 달러의 금 태환과 고정환율제를 폐기하면서 생긴 세가지 반사작용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을 가능케 했따. 세가지 반사작용은 다음과 같음
(1) 은행이 신용을 팽창시킬 수 있게 됨
(2) 모든 위기는 해소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김
(3) 투기로 얻은 이윤이 영원히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가갛게 됐다
이 세가지 변화는 수백만 대중의 머릿속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이런 개념들이 유효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무기력에 젖기도 한다
- 명목화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종말론과 비슷한 결론으로 흐름. JP모건의 전직 임원 디틀레브 슐리히테르는 앞으로 은행계정이든 연금이든 펀드든 간에 종이로 된 자산을 보유한 사람들에게서 실물자산(금)을 보유한 사람들에게로 역사적 부의 전이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예측에 따르면 폐허로부터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다. 돈을 빌려줄 때마다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보유해야 하는 이른바 100% 안전은행이 설립되고 새로운 금본위제가 시행될 것이다. 그러려면 금값이 단번에 엄청난 비율로 상승해서 세상의 모든 금의 가치가 세상 모든 실물재화의 가치와 일치해야 한다 (디지털 통화인 비트코인을 뒷받침하는 논리도 이와 유사. 비트코인은 어떤 정부의 보증도 받지 않고 한정된 수량만큼만 통용됨)
- 만약 실물화폐가 통용되는 새로운 세상이 온다면 그 경제적 비용은 엄청날 것임. 은행이 대출금과 똑같은 액수의 현금을 보유해야 한다면 신용을 통한 경기부양은 불가능해지고 파생상품 시장은 존재하기 힘들어질 것임
-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금융화는 80년대 시작된 네가지 주된 변화를 가리킴
(1) 기업들이 은행에게 등을 돌렸다. 기업들은 자금확충을 위해 활짝 열린 금융시장으로 나아갔다
(2) 은행들은 소비자를 새로운 수익원으로 설정하고 우리가 투자라 부르는 복잡하고 위험도가 높은 활동에 뛰어들었다
(3) 소비자들이 금융시장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 마이너스 통장, 모기지론, 학자금 대출, 자동차 구입자금 대출 등이 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옴. 이제 임금노동자들이 만들거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노동자들이 임금으로 그것을 구매하면서 창출되는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대출을 해줌으로써 창출되는 이윤의 비중이 점점 커진다
(4) 매우 단순한 금융상품들이 먹이사슬의 위쪽으로 가면 복잡한 금융상품 시장을 형성. 차를 구입한 사람이나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스템의 어딘가에서 그 유명한 투자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휴대전화 계약, 헬스장 회원권, 전기요금 등 당신이 정기적으로 지불하는 모든 돈이 하나로 묶여 금융상품으로 만들어지고, 당신이 그 상품을 구입하겠다고 결정하기도 전에 투자자에게 꼬박꼬박 이윤을 안겨준다. 나중에는 당신이 한번도 만나지 못한 어떤 사람이 당신을 전기요금을 제대로 납부할 것인지 여부에 베팅을 한다
이 시스템은 의도적으로 임금을 낮게 유지하고 생산성 투자를 줄이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닐지도 모름.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항상 고부가가치 노동을 늘리고 생산성을 높이자고 주장하니 말이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금융화와 저임금의 관계는 불안정 노동과 푸드뱅크의 관계와 같다. 늘 붙어다니기 때문이다
-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모든 경제대국의 쇠퇴는 금융업으로 화려하게 전환하면서 시작된다고 주장. 17세기에 무역업으로 제국을 건설했던 네덜란드의 몰락을 분석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주의 국가가 발전하다가 금융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이 끝났다는 표식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가을이다." 금융은 가을이라는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중세시대의 금융업 중심지였던 제노바공화국, 네덜란드, 대영제국 말기의 런던에서 똑같은 패턴이 나타났다고 주장. 하지만 이 모든 사례는 경제력이 가장 큰 나라가 세계의 대부업자가 되는 패턴을 보였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이것이 정반대로 나타난다.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대부업자가 아니라 채무자가 됐다. 오랫동안 유지된 패턴이 깨졌다
- 자본주의를 위한 탈출구를 상상해보자. 앞으로 10년 동안 중앙은행들은 질서있게 양적완화를 종료한다. 자국의 정부부채를 줄이기 위해 통화량을 늘리는 행위도 중단한다. 지난 10년간 제한을 받았던 정부채권에 대한 시장거래가 되살아난다. 그리고 각국 정부는 금융의 광기를 상시적으로 제어하기로 합의한다. 앞으로 버블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해 이자율을 올리기로 약속한다. 금융기관에 구제금융을 제공한다는 암묵적 보증은 영구적으로 폐지한다. 다음으로는 금융자본주의의 위험이 증대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예금, 주식, 파생상품을 거래하는 모든 시장을 정상화한다. 자본은 다시 생산적 투자에 투입되고 투기적 금융으로부터 멀어짐
- OECD 보고서는 글로벌 경제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서방 국가들은 침체를 면치 못하고, 신흥국들은 성장세가 둔화하고, 여러 나라에서 정부가 파산할 것으로 내다본다.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 하나 이상의 나라가 세계화 체제를 벗어나 보호주의를 채택하고, 부채를 축소하고, 환율을 조작할 가능성이 높다. 또는 외교적, 군사적 충돌에서 비롯된 탈세계화 사태가 세계 경제로 확산되어 똑같은 결과를 낳을지도 모름. OECD 보고서의 교훈은 체제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지식을 습득한 세대이자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대는 극심한 불평등과 저성장의 미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슘페터는 50년 주기로 일어나는 순환의 원인에서 신용주기, 외부충격, 취향변화, 성장이라는 요인을 배제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음.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혁신이다. 얼핏보기에 다른 요인들 때문이라고 여겨지는 일들도 대부분은 혁신이 그 원인이다." 슘페터는 콘드라티예프가 제시한 파동들을 하나식 살피면서 그것이 혁신의 순환이었던 이유를 상세히 설명. 첫번째 순환은 1780년대 공장제의 도입으로 발생했고, 두번째 순환은 1842년 철도부설에 따른 것이었으며, 세번째 순환은 우리가 2차산업혁명이라 부르는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수많은 혁신에서 비롯됐다는 주장. 슘페터는 콘드라티예프의 장기순환 이론을 받아들여 자본주의 신봉자들이 좋아할만한 이론으로 바꿔 놓았다. 슘페터의 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순환을 일으키는 사람은 혁신하는 기업가들이다. 반대로 어떤 시기에 경기가 하락하는 이유는 혁신이 소멸되고 자본이 금융 시스템 안에 갇혀 있기 때문. 슘페터의 관점에서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필수적 한 부분이며, 위기가 발생하면 낡고 비효율적인 모델의 창조적 파괴가 진행된다
- 우리가 벨 에포크(정치적 격동기를 지나 짧은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1890-1914년) 또는 미국 역사의 혁신주의 시대라 부르는 시가, 고속으로 성장하면서 자유와 문화를 꽃피우던 그 시기에 세계는 시장의 힘으로 버낭한 것이 아니라 시장을 억누르는 규제의 힘에 의해 번창. 당시에는 보수주의자들도 이 점을 별로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 금융위기는 어떻게 볼 것인가? 장기순환의 상승기(예컨대 1907년 미국의 공황)에도 언제든지 금융위기가 발생할 수 있지만, 하강국면에서는 거의 확실히 금융위기가 발생함. 자본은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서 빠져나와 금융으로 흘러감. 그러면 금융부문이 불안정해지고, 투기가 개입된 호황과 불황의 순환이 만들어짐. 1차에서 3차까지 장기순환이 진행되는 동안 금융은 점점 복잡해졌음.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본이 체제의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찾고 새로운 노동력을 공급받아야 한다고 주장. 이것은 시스템 이론의 기본적 가정이지만, 폐쇄적이고 추상적 모델에 근거한 마르크스주의 위기이론에서는 소홀히 다뤄진 부분이다. 19세기 대다수 자본주의 국가들은 농촌이 불황의 충격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개척할 수 있는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력의 공급도 충분했다. 하지만 1848년 이후로는 체제의 생존을 위해 외부에서 시장을 찾아야 했다. 20세기 초반에 이르자 국내의 노동력 공급은 한계에 도달. 그것은 아동노동과 여성노동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저항 때문이기도 하고 출산율이 낮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새로운 시장개척도 쉽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전 세계가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하는 폐쇄적 무역블록 안으로 숨었다. 4차파동이 시작될 무렵에는 외부세계의 상당부분이 폐쇄된 영역이었다. 냉전시기에 세계 GDP의 약 20퍼센트는 시장 외부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1989년에 갑자기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새로운 노동력이 공급되자 파동은 연장됐다. 또 서구 국가들은 그전까지 접근할 수 없었던 중립국에서도 시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됐다. 다시 말하면 1917년과 1989년 사이에 자본주의는 복잡한 적응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으며, 1989년 이후에야 그 잠재력이 폭발. 노동력과 시장이 확대되고, 기업은 자유를 획득하고, 경제의 규모는 전례없이 커졌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국면의 왜곡이라는 나의 주장은 1989년의 상황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 설명된다. 물론 그것이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장기순환의 패턴은 이미 깨졌다. 4차 장기순환은 예상보다 길어지고, 왜곡되고,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요인들에 의해 망가졌다. 그 요인들은 바로 노동운동의 패배와 후퇴, 정보기술의 눈부신 발달, 그리고 장기간 공짜로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초강대국의 성립이다.
- 오늘날 젊은 세대의 눈에는 신자유주의의 결과만 보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협상력 파괴와 신자유주의의 핵심목표라는 사실을 놓치기 쉬움. 협상력 파괴는 다른 모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신자유즈의의 핵심교리는 자유시장이 아니다. 긴축재정도 아니고, 화폐의 건전성도 아니고, 민영화와 생산시지 이전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신자유주의 가 중요시하는 목표의 부산물 또는 무기일 따름이다. 그 목표는 조직된 노동자들을 방정식에서 빼버리는 것이다
- 드러커는 산업자본주의의 역사를 4단계로 나눔. 거의 19세기 내내 지속된 기계화 혁명, 1890년대에 과학적 관리기법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생산성 혁명, 1945년 이후 비즈니스 과정에 관한 지식을 응용하게 되면서 속도가 붙은 기업경영의 혁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식을 지식에 적용하는 것을 토대로 하는 정보혁명. 슘페터의 제자 드러커는 콘드라티예프의 장기순환 이론을 의식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그는 1차순환과 2차순환을 합쳐서 논하며, 개별기업의 관점을 취함. 여기서 드러커의 가장 심오한 통찰이 탄생한다. 노동의 경제학을 알지 못하면, 그 어떤 전환점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지식인 베르질리우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경제학자도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실제로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에 관해 연구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자본가들이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주의를 돌리고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노동의 역사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드러커는 이렇게 불평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도 노동의 역사는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다. 노동경제학은 여전히 실업률과 시간당 임금에 중점을 두며 학계에서 중요한 분야로 대접받지 못한다. 하지만 정보가 노동에, 노동과 자유시간의 경계에, 그리고 임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해하고 나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의 규모를 실감할 것이다.
- 기계에 대한 단상(이하 단상). 단상은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가 바뀐다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초기 산업사회에는 노동자가 있었고 손으로 작동하는 도구가 있었고, 상품이 있었다 이제 도구의 역할을 노동자가 한다. 노동자는 자연의 운동을 산업적 공정으로 변형해서 삽입한다. 그는 자기 자신과 비유기적 자연을 연결하는 수단으로서 그 기술을 습득한다. 그는 생산과정의 주연배우 역할을 하지 않고 측면으로 물러난다. 마르크스는 기계의 주된 역할이 생산이고 사람들의 주된 역할은 기계를 감독하는 것이 되는 경제를 상상했다. 그런 경제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는 정보일 것이라고 그는 밝혔다. 저절로 작동하는 방직기, 전신, 증기기관차와 같은 기계류의 생산력은 생산에 직접적으로 소요되는 노동시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전반적 수준과 기술의 진보수준, 또는 그 학문을 생산에 응용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됨. 다시 말하면 기계를 만들고 작동시키는 노동보다 조직과 정보가 생산력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가 나중에 착취이론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것은 혁명적 서술이다. 지식이 생산력의 한 요소가 되고, 기계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실제 노동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가 되고 나면, 핵심문제는 임금과 이윤의 관계가 아니라 누가 지식의 힘을 통제하는가가 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폭탄 하나를 떨어뜨린다. 대부분의 노동을 기계가 수행하는 경제체제에서 사람의 노동은 기계를 감독하고, 수리하고, 설계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기계 안에 갇힌 지식은 본질상 사회적이어야 한다
- 마르크스 논리에 따르면 지식기반 자본주의는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 사이의 모순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릴 물질적 조건이 최고조에 이른다. 그리고 지식기반 자본주의에서는 필수적으로 노동자의 지적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노동시간을 단죽해서 노동자들이 일터 바깥에서 예술적, 학문적 소양을 쌓을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소양이 경제모델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그의 다른 어떤 저작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일반지성이다. 기술의 발전수준을 알아보려면, 일반지성의 통제 아래 일반적인 사회적 지식이 생산에 얼마나 기여하는가를 측정하면 된다고 그는 말했다. 60년대 학자들은 단상에 제시된 개념들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완전히 이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에 좌파는 국가의 계획이야 말로 자본주읭서 탈출하는 경로라고 판단. 그들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시장의 혼란을 야기하며, 자본주의는 인간의 필요를 다 채워주지 못하므로 재앙처럼 무너질 것이라고 가정했다. 하지만 1858년에 작성된 단상에서 우리는 다른 전환의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지식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에서 탈출하는 모델이다. 이 모델에서 자본주의의 주된 모순은 기술과 시장 메커니즘의 모순이다. 1858년 마르크스가 종이에 휘갈겨 썼지만 100년 이상 좌파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이 모델에서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이유는 자본주의는 공유된 지식과 함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은 이제 우리가 자유시간을 인간답게 보내고 교양을 쌓기 위한 투쟁으로 바뀐다.
- 노동시간을 최소로 줄이면 사횡 축적된 모든 지식을 활용할 줄 아는 새로운 인류가 탄생한다. 사회적으로 축적된 방대한 지식에 의해 변화한 사람, 역사상 최초로 노동시간보다 자유시간을 많이 갖게 된 사람, 단상에 등장하는 상상속의 노동자는 피터드러커가 예언한 보통교육을 받은 보통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가 이 실험적 주장을 폐기한 이유는 그가 살았던 사회와 유사성이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상상했던 사회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매우 흡사하다.
- 주류경제학 교과서에는 스미스가 자신의 노동가치설은 원시사회에만 적용되며 자본주의가 성립한 뒤에는 임금, 자본, 토지가 생산물의 가치를 구성한다고 생각했다고 나온다. 이것은 틀린 설명이다.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은 일관성이 부족하긴 하지만 국부론에 정리된 그의 주장은 모호하지 않다. 노동은 가치의 원천이지만 시장은 그것을 완전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흥정과 절충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가치 법칙은 자본주의 경제의 표면이 아닌 심층에서 작동한다. 이윤과지대는 노동으로 창출한 가치를 갉아먹는다
-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 어떤 기계를 한대 만드는 데 100일치의 노동이 소요되는데 그 기계의 수명이 100일이라면 생산성은 높아지지 않음. 기계 제작에 100일이 소요되지만 수명은 1000일인 기계가 있다면 생산성은 한결 높아짐. 기계의 사용기한이 길어질수록 그 기계가 각각의 상품으로 이전하는 가치는 작아짐. 이것을 논리적 극한까지 밀고가면,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 기계는 감가상각이 없거나 대체하는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 기계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적 의미에서 이 두가지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자본이 생산비가 전혀 들지 않는, 다시 말해 비용이 0인 도구를 획득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자본은 그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잉여가치를 획득한다. 더구나 그 잉여가치는 점점 늘어난다. 당시는 19세기였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공짜로 이윤을 얻는 두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작업흐름을 재조직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의 발전이다. 그러고 나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영원히 쓸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만약 그 기계가 수명이 짧아서 재생산되어야 하는 부품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런 기계야말로 공짜 이윤이라는 개념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1858년 가스등 아래서 쓴 글에 이렇게 비범한 통찰이 담겨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상적인 기계는 닳거나 부식되지 않는 재료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유지비가 들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비물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이야기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화가 없는,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물질이었다. 노동가치설에서 사회적 지식과 학문의 힘으로 가치의 일부가 무료로 투입돼 만들어진 기계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사실 그런 기계는 노동가치설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만약 그런 기계가 대량으로 존재한다면 그 기계들이 노동가치에 기초한 시스템을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 실제로 단상에는 그런 '하늘 높이 날려버린다'는 표현이 나온다
-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단 자본의 이동이 가능해야 했다. 어느 한 분야에서 기술혁신으로 비용이 낮아지면 자본은 임금이 더 높고, 이윤이 더 높고, 생산요소의 비용이 더 높은 분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비용이 0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자본주의는 이런 방식의 자기복제를 계속할 가 없다. 이 단순한 모델은 생산비용 0인 사회의 경제는 곧 에너지와 원자재에 집중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에너지와 원자재는 여전히 희소성이 지배하는 영역임
- 정보자본주의가 꽃피는 시대에 벌어질 일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보상품의 가격이 하락하는 사태를 막아야 함. 그래서 자본이 독점적으로 가격을 결정한다. 스테로이드제에 의존해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니콘, 캐논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자본주의는 기업이 만드는 외부효과를 최대한 포착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 소비자와 소비자, 친구와 친구 사이의 모든 상호작용에서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 노동가치설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의 노동이 아닌 활동들이 기업에 기여하는 활동을 전화해야 한다. 그것도 공짜로. 정보자본주의가 번창하려면 에너지와 원자재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해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평균 노동시간을 늘려야 함. 그 방법은 매점매석을 비롯한 독점적 행위일 것이다. 결정적으로 정보자본주의는 제조업의 테두리를 벗어나 서비스산업 부문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함. 250년 동안 자본주의 역사는 시장의 힘을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영역으로 밀어넣는 과정이었다. 정보자본주의는 그 과정을 극한까지 진행시켜 새로운 형태의 맞춤형 마이크로서비스를 만들어내야 함. 이 마이크로서비스는 비용이 소액단위로 지불되며 주로 사적 영역에 존재함. 마지막으로 정보자본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찾아 주어야 함. 저임금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자본주의 위기탈출 메커니즘은 노동의 비용을 상승시키는 것이기 때문. 사람들의 생활은 더 복잡해져야 하고, 더 적은 노동이 아니라 더 많은 노동을 투입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함. 장기순환 이론에서 제시된 4차례의 상승기에는 늘 그런 일이 벌어졌다. 만약 이런 일들이 모두 실현된다면 정보자본주의는 순조롭게 출발 가능. 이런 해법의 요소들은 현대경제의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 애플은 전형적 가격독점기업이며, 아마존의 사업모델은 외부효과를 포착하는 고전적 전략이다. 상품에 대한 투기는 언제나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을 실제 가치보다 높게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맞춤형 마이크로 서비스(애완견 관리, 네일 살롱, 개인 컨시어지 등)의 등장은 자본주의가 과거에는 친구들 사이에 비공식적으로 주고받던 활동들을 상업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성공하려면 다음과 같은 구조적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1) 정상적 탈출경로 (혁신을 통해 정보기술보다 더 새롭고 값비싼 기술을 개발)가 막혀 있다. 정보는 증기엔진처럼 반짝 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기술이 아니다. 정보기술은 앞으로의 모든 혁신에 들어가는 비용을 0으로 만들지도 모름. 바이오테크, 우주여행, 뇌의 재구성, 나노기술, 그리고 지금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획기적 기술들의 비용이 0이 된다. 정보가 미래의 기술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하려면 프랭크 허버트의 공상과학소설 사구에 나오는 것처럼 컴퓨터를 전면 금지하고 인건비가 많이 드는 계산 전문가에게 계산을 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
(2) 노동인구 구성변화. 마르크스 시대에는 미국에 8.2만명의 사무직 노동자가 있었다. 이는 전체 노동자의 0.6%. 그런데 정보기술 혁명을 앞두고 있던 70년에는 그 숫자가 1400만명으로 증가. 노동자의 20%에 해당한다. 자동화가 진척되고 두뇌를 쓰는 갖가지 직업들(은행원, 속기사, 대형 계산기 조작 담당자 등)이 사라지는 오늘날에도 사무직과 관리직은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직업군으로서 전체 노동자의 16%에 해당. 두번째로 큰 직업군은 11%를 차지하는 영업직이다.
(3) 경제적 합리성의 한계. 인구의 다수가 서로를 위해 소규모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를 생각해보자. 그런 사회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적 기준에 비춰보면 매우 비효율저이고 부가가치가 낮은 사회다. 가사 노동에 임금을 지불하고, 모든 성관계를 유급노동으로 바꾸고, 아기를 데리고 공원에 나온 엄마들이 번갈아 그네를 밀어주며 서로에게 동전 하나씩을 건넬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술의 진보에 역행하는 경제다. 초기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공장에 강제로 밀어넣을 때, 체제는 비시장적 생활방식의 상당부분을 심각한 범죄로 바꾸어야 했다. 당싱는 실업자가 된 사람을 부랑자로 취급해서 체포했다. 선조들이 늘 하던 대로 밀렵을 통해 새를 잡으면 교수형 감이었다. 오늘날 이것과 비슷한 현상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 상업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업화에 저항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19세기에 밀렵꾼들을 대했떤 것처럼 돈을 받지 않고 서로 키스하는 사람들을 범죄자 취급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로봇의 도입에 내재하는 진짜 위험은 대량실업을 능가한다. 250년 동안 과거의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를 때마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던 자본주의의 능력이 고갈된 것임.
(4) 지식재산권. 자본은 정보주도 경제의 외부효과를 포착하기 위해 새로운 영역에서도 자신의 소유권을 강화해야 함. 자본은 우리의 사진, 우리의 재생목록, 우리가 공식적으로 출판한 논문은 물론 우리가 그 논문을 쓰기 위해 조사했던 내용까지도 소유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기술은 그런 횡포에 저항할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소유권 강화는 장기간 유지될 수가 없다.
- 이론상 방직공은 대부분 남성 노동자여야 했다. 노새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방직기의 굴대들을 1분에 네번이나 앞뒤로 밀었다 당길면 팔의 힘이 세야 했다. 하지만 사실은 여자들도 그 정도 힘은 있었다. 공장주들의 진짜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공장에서 규율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여자와 아이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거친 남자 노동자들을 사이사이에 배치하는 것이 더 쉬웠다. 하지만 1820년대 초에 숙련된 남성 노동자들이 군에 징집되자 자본가들의 유일한 해결책은 자동화를 통해 노동자들을 아예 없애는 것이었다. 1824년에 특허를 취득한 자동 노새가 수천대씩 공장에 도입됐다. 자본가들은 앞으로 여자와 아이들만 방적기를 다룰 것이라고 선언했다. "기계의 움직임을 보는 것 말고는 직공들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반대 상황이 펼쳐짐. 1819년이 지나자 여성 채용에 항의하는 남성 방직공들의 파업이 반복적으로 발생. 남성노동자들은 여자들을 훈련시켜 더 어려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자리에 앉히는 것에 반대하면서 그 자리에는 자신들의 아들들을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 1820년대와 30년대 방직공의 지위를 끝까지 유지하던 소수의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쫓겨남. 1840년대가 되자 남성의 주도권이 확고해짐. 그리고 역사학자 메리 프라이펠드가 논증한 대로, 새로운 기계가 도입된다고 해서 고급기술이 필요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기술 대신 새로운 기술이 생겨났을 뿐이다. 매우 복잡한 하나의 작업이 매우 복잡한 다른 작업으로 대체됐고, 품질관리와 감독업무를 변하지 않았다. 방직공장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다음 200년 동안 이런 일들이 여러번 되풀이 되었기 때문. 노동의 진짜 역사는 경제학 더하기 기술로만 쓸 수 없다. 노동의 진정한 역사에는 노동자들이 창조한 조직과 기술의 상호작용, 그리고 연령, 성별, 민족에 기초한 권력관계의 형성이 포함돼야 함.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사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한 단락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1850년대 책을 집필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해 노동에 필요한 기술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증거로 자동 방적기를 들었기 때문. "기계는 파업을 진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예가 자동 노새일 것이다." 마르크스가 혼동을 일으킨 원인은 그의 동료 엥겔스와 관련이 있다. 1842년 엥겔스가 맨체스터에 도착했을 때는 그곳의 모든 노동자가 총파업에 나섰다가 패배한 직후였다. 엥겔스는 자신의 연인이자 노동자였던 22세의 메리 번즈와 함께 공장, 빈민가, 면화거래소를 돌아보면서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탄생한 세계 최초의 유물론적 사회학 서적이 바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다. 인류학자였던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 계급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빈민가의 환경, 종교적 신념의 부재,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노동자들, 술과 아편에 중독되고 방탕한 성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가 잘못 알았던 것은 자동노새의 영향이었다. 그가 쓴 글은 다음과 같다
"기계의 성능이 좋아질 때마다 성인 남자들의 노동은 단순한 감독업무로 바뀐다. 감독은 연약한 여자 또는 어린이도 할 수 있는 일이며, 기존의 절반 또는 3분의 1의 임금을 받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기계가 늘어날 수록 성인 남자들은 일자리에서 밀려나고 재취업의 기회도 얻지 못한다."
엥겔스를 위한 변명을 덧붙이자면, 그가 자료를 수집하려고 만난 사람들은 당대의 급진적인 방직공들이었다. 그들은 1842년 파업이 실패한 이후 운동이 침체되자 공장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자동화는 숙련된 남성 방직공들의 역할을 강화하고 남성 방직공의 숫자를 늘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매사추세츠 대학교의 윌리엄 라조닉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술, 남성의 우월한 지위, 그리고 남성 노동자들 사이의 복잡한 권력구조는 기계화가 진행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와 조직된 노동계급의 첫 만남은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기술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그 기술이 만들어내는 정치의식의 종류에 관해서도 잘못 이해했다.
- 리처드 세넷은 하이테크 노동자들의 새로운 특징을 연구. 노동이 소외와 외견상의 순응에 후한 보상을 하고 기술보다 적응력을, 충성도보다 네트워크 형성 능력을 높게 평가할 경우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가 탄생. 새로운 노동자는 일에서는 물론이고 삶에서도 단기적 사고를 하고, 노동에서는 물론이고 투쟁에서도 위계질서와 조직에 헌신하지 않는다. 세넷과 웰먼은 이런 네트워크형 생활에 적응한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온라인에서나 복수의 인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는 인격과 경험의 충돌을 낳았다. 뒤죽박죽이 된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을 장기적 이야기속에 녹여내기가 어려워진다."
- 봉건제는 의무를 토대로 하는 체제였다. 농노들은 생산물의 일부를 지주에게 바치고 지주의 군대에 들어가서 봉사해야 했다. 지주는 왕에게 세금을 납부하고 왕이 요구할 때마다 군대를 보낼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사극의 무대가 되는 잉글랜드에서는 그 체제의 커다란 태엽 하나가 부러져 있다. 현실에서 리처드 3세가 자신의 경쟁자들을 살해할 무렵에는 의무를 토대로 하는 권력의 네트워크가 돈에 오염된 상태였다. 지대는 돈으로 지불하고, 군역의 의무도 돈으로 대신했으며, 전쟁을 벌이려면 국경을 넘어 피렌체와 암스테르담까지 뻗어 있는 은행 네트워크의 지원을 얻어야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왕들과 귀족들이 서로를 죽인 이유는 결국 돈 때문. 돈 앞에서 의무에 기초한 모든 권력은 언제라도 전복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 셰익스피어는 봉건제와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기 한참 전부터 그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의 역사극과 희극, 비극의 결정적 차이는 희극가 비극은 그의 관객들이 살던 시대의 사회를 묘사했다는 점이다. 그의 희극과 비극에는 불현듯 은행가, 상인, 회사, 월급을 받는 병사, 공화국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런 연극의 전형적 배경은 영주의 성이 아니라 부유한 상업도시다. 전형적 주인공은 용기(오셀로), 인도주의 철학(프로스페로), 법률지식(베니스 상인에 나오는 포르샤)을 이용해 자수성가한 부르주아 남성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런 변화의 끝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대신 그는 그 새로운 경제가 사람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 사람들은 지식을 얻어 더 강한 존재가 됐지만, 일찍이 없었던 큰 욕심, 정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 권력을 향한 갈망에 취약해졌다.
- 가장 최근의 전환이 어떻게 진행됐는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살펴보고 그와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자. 봉건제의 농업모델은 먼저 환경적 제약과 충돌하고, 다음으로는 흑사병이라는 강력한 외부충격을 맞이한다. 흑사병이 지나가고 나서는 인구구성에 큰 변화가 발생. 토지의 양에 비해 노동자가 너무 적었고, 그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자 의무로 유지되는 봉건주의 체제는 더 이상 강요될 수 없었다. 한편으로 노동력 부족은 기술혁신을 유발. 상업자본주의 출현 배경이 된 신기술들은 상업을 발전시키고(인쇄술과 회계법), 무역을 용이하게 하고(광업, 나침반, 빠른 선박), 생산성을 높였다(수학, 과학적 방법) 변화의 전 과정에는 화폐와 신용이 있었다. 화폐와 신용은 구체제에서는 부차적으로 보였지만 새로운 체제의 토대가 될 운명이었다. 기존의 법과 관습은 화폐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봉건주의 전성기에는 빚을 죄악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래서 화폐와 신용이 기존의 경계를 넘어 시장 시스템을 만들어내자 그것은 하나의 혁명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시스템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공짜 재화의 무한한 원천을 발견함으로써 더 큰 동력을 얻었다. 이 모든 요인들의 결합은 봉건주의 사회에서 박해를 받거나 주변부로 밀려났던 사람들(인본주의자, 과학자, 기능공, 법률가, 급진적 성직자, 셰익스피어와 같은 보헤미안 극작가들)을 데려와서 사회변화의 선두에 세운다. 국가는 처음에는 주저하며 변화를 가로막으려 했지만 결정적 순간이 되자 변화를 지원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포스트 자본주의로의 전환에도 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은 아니겠지만 약간의 유사성은 존재.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지금 자본주의를 잠식하고 있는 것은 정보다. 과거에 인쇄술이나 과학적 관리법이 수행했던 역할을 현대사회에서는 정보기술 및 그것과 접목된 유전공학, 보건, 농업, 영화 등 다른 분야가 수행한다
- 공짜 재화의 새로운 원천을 현대사회에서 찾는다면 무얼까?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재화가 아니라 외부효과다. 네트워크를 통한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는 공짜 상품과 행복이다. 그것은 비시장 생산, 소유할 수 없는 정보, 동료 네트워크, 관리자 없는 기업의 출현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얀 물리에부탕의 이론에 따르면, 현대의 신세계 정복에서 인터넷은 배와 바다의 역할을 한꺼번에 수행, 사실 인터넷은 배, 나침반, 바다, 금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 현대의 외부충격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에너지 고갈, 기후변화, 고령화, 이민문제와 같은 외부충격은 자본주의의 역하관계를 변화시키고 체제의 수명을 단축함. 이런 문제들은 아직 흑사병가 똑같은 결과를 낳지 않았다. 하지만 금융공황은 우리가 창조한 매우 위태로운 도시사회에 순식간에 재앙을 몰고 올 가능성이 있음. 05년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휩쓸었던 것처럼, 현대의 도시에서는 페스트균이 없어도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하부구조를 파괴할 수 있다.
- 역사의 종언까지는 아닐지라도, 신자유주의 질서를 만든 세대에게는 역사가 마치 통제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금융위기는 통화팽창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고, 군사적 위협은 무인기 폭격으로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힘을 잃은 노동운동은 정치의 독자적 변수가 되지 못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엘리트의 머릿속에는 세상에 대처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심리가 자리잡았다. 그들은 언제나 선택지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때로는 강경한 방법을 써야 할 수도 있었다. 해결책은 항상 있고, 대개의 경우 그 해결책은 시장이었다. 그러나 원래 외부의 충격들은 경각심을 일깨우는 신호다. 기후변화는 우리에게 시장을 통해 탄수 목표치를 맞출지, 아니면 시장을 벗어난 경로를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하지를 선택하게 해주지 않음. 기후변화는 시장경제를 질서있게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갑자기 위기가 닥쳐 엉망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인구 고령화는 세계 금융시장을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이 있고, 일부 국가들은 지불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국민과 사회적 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2010년 그리스에서 일어났던 사태는 그저 몇몇 안 좋은 기억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나라들에게 인구증가, 권력의 부패, 불균형 성장, 기후변화의 충격이 한꺼번에 닥칠 경우는 더욱 심각함. 토지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천만 단위로 생겨날 것임. 그들에게는 이민이 합리적 선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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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 해야한다는 압박은 우리가 실질적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어떤 과정을 목도하고 있을 때 뭔가 제스터를 취하려고 하는 미신적 강박과도 같음. 우리 행위는 종종 그러한 제스처가 아닌가? 말만 하지 말고 뭔가 행하라는 옛말은 상식의 낮은 기준에 비추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말에 속함. 오히려 근래의 문제는 아마도 우리가 자연에 개입하거나 환경을 파괴하거나 하는 등의 너무나 많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마도 이제는 뒤로 물러서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말할 때다. 물론 우리는 종종 무엇을 행하는 대신 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어떤 것들에 관해 말하고 생각하기를 회피하려고 그것을 행하기도 한다. 어떤 문제가 애초에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따져보는 대신 그 문제에 7천억불을 쏟아붓는 것처럼
- 위기들은 사람들을 뒤흔들어 자족성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삶의 근본원리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강제하는 게 사실이나 가장 자발적인 최초의 반응은 패닉이며 이는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이어진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전제들은 의문에 붙여지기는 커녕 훨씬 더 극렬하게 재언명된다. 그러므로 위험스러운 점은 현재 진행되는 붕괴가 나오미 클라인이 말한 충격원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용될 것이라는 데 있다
- 닷컴 거품이 터져버린 후 초당적으로 내려진 결정은 경제를 살리고 불황을 막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용이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붕괴는 수년전 미국에서 불황을 막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에 따르는 대가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진정한 위험은 우리를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대신 우리가 계속해서 꿈꾸는 것을 가능하게 할 서사가 그 붕괴에 관한 지배적 서사가 되리라는 데 있다. 우리가 염려한 것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붕괴의 경제적 결과들뿐만 아니라, 경제의 모터가 계속 돌아가게 하기 위해, 아니면 적어도 위기를 이용해 구조조정의 가혹한 조치들을 더 밀어붙이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과 미국의 개입주의에 다시 불을 지피고자 하는 명백한 유혹이 문제인 것이다.
- 범상치 않은 폭도인 녹색당원들은 자연을 인류보다 상위에 놓는 새로운 종교의 사제들이다. 생태운동은 사랑과 평화의 점잖은 압력단체가 아니라 하나의 혁명세력이다. 많은 현대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신이 지정하는 악, 즉 지구온난화, 동식물의 멸종, 생물다양성의 소실, 슈퍼잡초 등을 과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비난하는 모양새를 취함. 이런 모든 위협들은 사실상 녹색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다. 녹색당원들은 자기들의 용어를 과학에서 빌려오면서 과학의 합리성을 자기들 것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방법은 새롭지 않다. 맑스와 엥겔스 역시 당대의 과학인 다윈주의를 자기들 세계관의 원천으로 삼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쏘르망은 생태운동이 21세기의 공산주의라는 친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의 주장을 수용한다. "생태주의는 공산주의의 재창조이자 반자본주의의 실제(형태)라는 점은 분명하다. ... 그러나 생태주의의 다른 반쪽, 거기서 다시 반은 맑스주의보다 훨씬 오래된 이교도적 유토피아 혹은 자연숭배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주의와 이교도 전통을 지닌 독일에서 생태주의가 그토록 강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태주의는 반기독교적 운동이다. 자연이 인간에 우선한다. 생태주의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4분의 1은 합리적인 부분으로서 여기에는 진짜 문제들이 있고 그에 대해서는 기술적 해결책들이 있다.
-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이는 그것의 성공자체가 충분한 정당화가 되기 때문.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매뉴얼이 있는 사회주의와는 정반대다." "자본주의는 철학의 시늉을 내지 않는 체제, 행복을 찾아나서지 않는 체제다. 자본주의가 하는 말은 오로지 이것이다. 자 이건 제대로 작동한답니다. 만일 사람들이 더 잘 살기를 원한다면 이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편이 나을텐데 이는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기준은 효율성이다."
- 동료 과학자가 보어의 시골집 문 위쪽으로 말의 편자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쳐 말하기를, 편자가 집에 악령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준다는 미신을 자신은 믿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보어는 대꾸했다. "나도 믿지 않는다네. 내가 그걸 거기 둔 까닭은 사람이 그걸 믿지 않아도 그게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일세" 실로 이것이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아무도 민주주의나 정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런 것들의 본질은 썩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민주주의나 정의를 믿지 않아도 그것들은 작동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 참여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 유기농 사과를 살 때 우리는 구매하고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즉 우리에게 있는 배려의 능력과 세계의식을 보여주며 집단적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정신의 최신의 과학적 표현은 행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과의 등장이다. 그러나 삶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정의되는 우리의 정신화된 쾌락주의의 시대에 불안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프로이트의 메시지를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적실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과 쾌감의 이러한 자기파괴라는 수수께끼다
- 냉소주의자는 속지 않으나 오류를 범하는 자로서, 그들이 인식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환각의 상징적 효능, 환각이 사회적 현실을 생성하는 활동을 규제하는 방식이다. 냉소주의는 대중적 지혜의 입장을 취한다. 전형적 냉소주의자가 당신을 따로 불러 비밀스러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모르겠어? 결국에는 다 (돈, 권력, 섹스...) 문제라는 것을, 고매한 원칙이나 가치라는 건 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들은 실제로 이념의 힘을 믿는다. 그들은 이념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는다. 그리고 냉소주의자가 그들은 이러한 죄를 짓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냉소주의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의 순진성이다. 진짜 현실주의자는 철학자들이다. 철학자들은 냉소적 입장은 불가능하고 모순적이라는 것, 냉소주의자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원칙을 실제로는 따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금융붕괴는 세계자본주의의 뻔뻔한 비합리성을 모른 척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은행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에서만 7천억불이 지출된 것을, 부자나라들이 현 식량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가난한 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원조하는 데 쓰겠다고 약속한 220억불 가운데 지금까지 겨우 22억불만 내놓았다는 사실과 견주어보라. 식량위기의 책임은 제3세계 국가의 부패, 비효율성, 국가개입주의 같은 통상적 혐의자에 돌릴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개입주의 같은 통상적 혐의자에게 돌릴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농업의 세계화에 직적접으로 의존하는데, 이 점은 다름 아닌 빌 클린턴 자신이 세계 식량의 날을 기념하는 유엔행사에서 "세계 식량문제에 있어, 우리는 일을 그르쳤다는 시사적 제목하에 식량위기에 대해 논평하는 가운데 분명히 한 바 있다. 클린턴 연설의 골자는 현재의 위기가 식량소출을 세계의 빈자들에게 명백히 필수적 자원으로서보다 상품으로서 다룸으로써 대통령 재임시절의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일을 그르쳤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분명한 목소리로 클린턴은 개별국가나 정부가 아니라, 미국과 유럽연합이 강요한, 그리고 수십년간 세계은행, IMF, 그밖의 국제기관들이 실행에 옮긴 서구의 장기적 정책들에 책임을 돌렸다. 이 정책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나라들이 비료와 개량종자, 그밖의 농장 투입물에 대한 정부 보조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그리하여 최상의 토지가 수출농작물의 재배에 이용될 수 있는 길을 열고 그럼으로써 이 나라들이 식량생산에 있어서의 자급자족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결과는 지역농업의 세계경제로의 통합이었음. 자국농산물이 더 많이 수출될수록 나라들은 점점 더 수입식량에 의존해야 했으며, 한편 토지를 잃고 쫓겨난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슬럼가로 흘러들었는데 그곳에서는 열악한 하청업체에서밖에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나라들이 탈식민지적 의존의 상태에 묶여 있으며 점점 더 시장변동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있음. 지난 수년간의 곡물가격 급등은 이미 아이티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나라들에게서 기아를 초래해 왔다. 근년에 그런 전략은 더욱 체계화되고 광범위해졌다. 주요한 국제적 기업과 정부들은 이제 자기 나라의 경지부족 사태를 해외에 거대한 기업형 농장을 건설함으로써 해결하기를 기대하고 있음. 가령 08년 11월에 한국의 대우 로지스틱스는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약 320만 에이커의 농지를 99년간 임차하기로 협정을 맺었다고 발표. 이 농지는 마다가스카르 총 경지의 절반에 육박. 대우는 농지 3분의 1정도는 옥수수 재배에, 나머지는 세계 생물연료 시장의 주요상품인 야자유의 생산에 이용할 계획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 지난 2년간 유럽의 몇몇 기업들은 싱걍과 생물연료로 쓰일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땅을 임차해왔는데, 가령 영국기업 썬바이오퓨얼즈는 에티오피아와 모잠비크, 탄자니아에서 생물연료 농작물을 키우고 있다. 아프리카의 비옥한 토지는 거대한 사막으로 인해 식량 대부분을 수입해야 한느 페르시아만 석유부국들에게도 매력적이다. 이 부유한 국가들로서는 돈을 주고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세계 식량시장의 동요는 자체 식량공급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들의 동기를 증대시키는 쪽으로만 작용했다
- 말리와 관련하여 지적듯이, 제3세계 나라들에 농업의 세계화를 강요하는 사이에 서구의 발전된 나라들은 자기네 농부들에게 재정지원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식량자급자족을 유지하는 데는 대단한 신경을 쓰고 있다. 유럽연합 전체 예산에서 절반이상이 농부즐에 대한 재정지원에 할당된다. 서구 자신은 최대한의 자급자족 정책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 식량처럼 다른 것들과 같은 상품이 아닌 생산물과 서비스의 목록은 훨씬 더 길게 이어지는데, 거기에는 국방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물, 에너지, 환경 그 자체, 문화, 교육, 건강 등이 포함됨. 여기서 무엇이 우선인지를(만일 그 결정을 시장에 맡겨둘 수 없다면) 누가, 그리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공산주의의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야 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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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구하라

경제 2019. 2. 5. 20:45

-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존재는 더 이상 공산주의도 파시즘도 아님. 바로 현대사회가 성장과 안정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신뢰의 지속적 쇠퇴다. 성공할 기회를 자녀가 공정학 누리리라고 대부분의 부모가 믿지 못하는 순간에 구성원의 자발적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는 와해되기 시작한ㄷ. 이때 사소한 절도, 사기, 부정, 반동, 부패 등 파멸을 불러오는 크고 작은 요소들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경제자원의 구심점은 서서히 생산에서 보호쪽으로 이동.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현상을 반전시켜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가동하도록 경제를 재창출할 힘이 있다. 마르크스의 생각과 달리 자본주의에는 가차없이 경제안정을 추구하며 불평등을 확대하는 요소가 없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기본규칙은 영구적이지 않으며 사람이 결정하고 실행한다. 하지만 무엇을 바꾸고 달성해야 하는지 결정하려면 먼저 어떤 현상이 어째서 발생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 아마존은 소비자에게 돈을 절약해주고 온라인 쇼핑의 편리성을 누리게 해줌. 아마존의 플랫폼을 사용하면 더욱 많은 저자가 독자에게 책을 직접 판매가능. 하지만 아마존은 서적 판매상과 아마도 출판사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데 기여하므로 저자를 포함해 출판계 관계자 모두에게 경제적 영향력을 미침. 아마존이 요구하는 가격에 저자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자신의 작품을 잠재 고객에게 판매할 다른 경로가 거의 사라질 수 있음. 이렇게 아마존은 구글과 페북이 뉴스시장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아이디어 시장을 제한할 것이고, 이것은 몬산토가 생산하는 씨앗이 식푸 공급의 생물적 다양성을 감소시킨 것과 같다. 더욱이 아마존의 경제적 힘이 증가할수록 정치적 영향력도 증가. 따라서 아마존은 정부가 시장 형성 방식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자사에 유리하게 영향력을 행사함. 12년 아마존은 법무부에 은밀하게 압력을 넣어, 불법으로 전자책 가격 인상에 공모했다는 혐의를 들어 애플과 5개 주요 출판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14년 법무부는 아마존이 출판사로부터 더욱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고 술책을 쓸때는 함구했다.
- 프랑스에서는 서적판매상은 신간을 정가에서 5% 이상 할인해 판매할 수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전국 어디에서 사든 온라인에서 사든 책값은 거의 같다. 프랑스 정부는 책을 전기, 빵, 물과 함께 생필품으로 분류. 하지만 미국은 아마존이 형성한 매우 다른 종류의 시장을 향해 돌진. 아마존의 연간 로비 지출액은 08년 130만불에서 12년 250만불로 증가했고, 14년 400만불로 증가. 13년에는 자사의 존재감을 정부에 더욱 부각시키면서 급기야 제프 베조스가 워싱턴 포스트를 인수하기에 이름. 과거 독점기업은 생산을 통제했지만 신흥 독점기업은 네트워크를 통제함. 과거 독점기업은 반독점법에 발목이 잡혀 무릎을 꿇을 때가 많았지만, 신흥 독점기업은 반독점법을 무력화시킬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소유했다.
- 경제적 힘이 집중되어 생겨난 정치적 영향력은 의회가 미국 최초로 반독점법을 제정했떤 19세기말에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에 해당분야는 정치경제로 불렸고 과도한 권력은 정치와 경제를 모두 훼손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앤드류 카네기, 존 록펠러, 밴더빌트를 포함한 강도귀족이 주름잡던 시대로 그들이 운영하는 제강공장, 석유 굴착장치와 정제공장, 철도 등이 미국 공업력의 토대를 쌓음. 강도귀족들은 자신의 지배적 위치를 위협하는 경쟁상대를 업계에서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공직에 앉힐 후보자 명단을 나름대로 작성하고 뻔뻔스럽게 공직자들을 매수했으며 심지어 심복을 시켜 돈 자루를 고분고분한 의원들의 책상에 올려다놓기까지 했다. 밴더빌트는 "내가 법을 신경쓸 필요가 있겠는가? 내게 권력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라고 호령하며 악명을 떨쳤다. 1868년부터 1896년까지 내각각료를 역임했던 73명 중 48명은 철도기업에서 일했거나, 로비활동을 벌였거나, 철도기업 이사회에 속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친척이 철도기업과 연루되어 있었다. 대중은 당시에 트러스트라고 불렀던 합병을 통해 강도 귀족들이 막대한 경제적 정치적 힘을 획득하는 현상을 깊이 우려했따. 위스콘신주 대법원의 수석 재판관 에드워드 라이언은 1873년 위스콘신 주립대 졸업생들에게 이렇게 경고. "이 나라의 기업은 경제를 정복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힘을 장악할 목적으로 전례없이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방대한 기업합병을 추진하며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에서는 전적으로 불거지지 않더라도 여러분 세대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것입니다. '무엇이 사회를 지배할 것인가, 부인가 사람인가? 무엇이 사회를 이끌 것인가, 돈인가 이성인가? 누가 공직을 채울 것인가, 교육받고 애국적인 자유인인가 아니면 기업자본에 의존하는 중세시대 농노같은 존재인가?"
- 자유는 부를 창출하고 부는 자유를 파괴한다. 새로운 경제발전의 불길이 주위에서 타오르고, 경쟁이 경쟁을 죽이고 기업은 국가보다 커졌다. ... 우리 시대의 적나라한 문제는 재산이 하인이 아닌 주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부와 민주체제의 대립, 1894, 헨리 데마레스트 로이드)
- 일부 국가가 신체부위, 혈액, 자궁, 성행위 등의 매매를 금지하는 주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빈곤층이 위험하고 모멸적인 방식으로 부유층에게 착취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 부유층이 자신의 신장이나 혈액을 파는 경우는 거의 없고 부유층 여성은 대부분 자신의 자궁을 빌려주거나 매춘 행위를 하지 않는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매춘부는 대개 빈곤층 가정 출신이고, 십대 초반에 성인 남성에 의해 성 행위 거래를 강요당함. 여기에는 취약성도 개입한다. 또한 미국은 합법적 약품이라도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없을지 모르는 구매자에게 판매되는 것을 우려한다. 12년 거대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벌금으로 30억불을 지불하는 동시에 성인용으로만 승인받은 항우울제를 18세 이하 아동에게 선전하는 행위를 중단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법무부와 합의했다. 또한 성기능 장애를 개선하는 것을 포함해 애당초 허가받지 않은 목적으로 다른 두 항우울제를 강매하는 행위, 처방약품의 매상을 끌어올리려는 행위, 의사에게 선물, 자문계약, 강연료를 제공하거나 스포츠 행사 티켓을 선사하는 행위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 훨씬 조용하게 법을 폐지시키는 방법은 구멍과 예외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거의 시행할 수 없을 정도까지 몰아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시행기관이 하부규칙을 제정해 법의 의미나 금지하상을 규정하려 할 때 구멍이 생긴다. 예를 들어 도드-프랭크 법에서 상품의 미래가치에 대한 베팅을 제한하려고 만든 규정을 생각해보라. 몇 년 동안 월스트리트는 식품, 구리, 석유, 기타 상품을 취급하는 선물 시장에 투기해 수익을 거둬왔다. 이러한 투기 행위로 상품 가격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월스트리트는 가격의 향방을 대개는 정확하게 점쳐서 베팅하며 큰돈을 벌지만 결과적으로는 소비자들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증가시킨다. 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가 중산층과 빈곤층에서 부유층으로 재분배되는 과정이다. 도드-프랭크 법에서 따라 상품선물거래위원회는 이러한 베팅을 억제하는 규칙을 구체적으로 고안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그 후 위원회는 주로 월가에서 나온 1만 5천건의 의견을 참고했다. 또한 수많은 경제적, 정책적 분석을 실시해 이 같은 규제가 월가에 초래하는 비용에 대비해 대중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주의깊게 측정했다. 몇년 후 상품선물거래위원회는 월가가 원했던 세제구멍과 예외를 포함한 규칙을 제안. 그래도 월가가 만족하지 않자 새 규칙의 시행시기를 최소 1년 동안 연기해서 월가가 새 규칙에 반대할 여지를 주었다. 거대은행들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해당 규칙을 번복하려고 소속 변호사들을 동원해 위원회의 손익분석이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며 연방법원에 제소. 손해와 수익은 산출하기가 어려우므로 이것은 영리한 책략이었다. 월가는 해당 문제에 대한 판단을 연방판사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전술적으로 상당히 커다란 이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는 월가가 이른바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는 막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고용된 전문가들은 상품선물거래위원회가 수익을 과장하고 손해를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정교한 방법으로 밝혀냈다. 거대 은행들이 이런 책략을 사용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2010년 증권관리위원회는 도드-프랭크법에 따라 주주가 기업이사들을 임명하기 쉽게 만들려고 제정한 규칙을 시행하려다가 월가에 의해 고소당했따. 월가는 새 규칙을 시행하려는 증권관리위원회의 손익분석이 적절하다고 주장. 은행이 고용한 변호사와 전문가들이 들끓었고 연방 항소법원은 월가의 손을 들어줌. 이로써 기업 이사를 임명할 때 주주에게 좀더 큰 힘을 실어주려던 의회의 노력은 최소한 일시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분명히 정부는 법 시행에 필요한 모든 중요한 조치의 손익을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때도 대기업과 거대은행은 근본적으로 유리하다. 틀림없이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손익을 측정하는 방법을 진술해줄 전문가와 컨설턴트를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제를 시행하려면 연구를 지원하고 자기 관점을 뒷받침할 만큼 충분히 자금을 댈 수 있어야 한다
- 급여가 자기가치를 결정한다는 개념이 대중의 인식에 매우 깊이 박혀 있어서 흔히들 소득이 매우 적은 것은 전부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머리가 좋지 않거나 성격에 결함이 있는 등 개인의 실패라고 생각해 수치를 느낀다. 엄청난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특별히 현명하고 매력적이고 우월하다고 믿음.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유능하게 일을 처리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듯 고소득층의 기운을 북돋우는 확신은 겉보기에는 엄청난 부를 벌어들일 뿐 아니라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 연구자들은 CEO가 최그급여를 받는 150개 기업이 주주에게 안기는 이익금은 업계 동료기업보다 약 10% 적다는 사실을 밝힘. 실제로 CEO에게 돌아가는 보수가 많을수록 기업의 실적은 저조했다. CEO에게 가장 후한 기업들은 CEO에게 고액의 급여 뿐 아니라 스톡옵션으로 그 이상을 보상하면서도 평균적으로 동료기업보다 실적은 15% 저조했다. 쿠퍼는 "CEO에게 많은 급여를 지불하는 기업은 낮은 급여를 지불하는 기업보다 수익이 거의 3배 낮다. 이렇게 비경제적인 소비는 주주의 이익을 파괴한다."고 주장. 훨씬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로서 연구자들은 많은 급여를 받는 CEO가 재직하는 기간일 길수록 기업의 실적은 더욱 낮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실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 법의 취지는 좋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다. 기업은 법을 피하기가 쉽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법은 스위스 치즈보다 구멍이 많고 게다가 옵션 산업을 부추겨온 것 같다. 교묘한 작자들이 스위스 치즈 같은 규칙을 가지고 게임을 하려고 스위스 시계 같은 책략을 휘두른다. (공화당 의장 찰스 그래슬리 상원의원)
- 월가 금융 전문가들은 그토록 거액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정의상 누구든 시장에서 자신이 벌어들이는 수입만큼 가치가 있다는 진부한 주장은 제쳐놓고, 내부정보를 이용하는 것과 덩치가 너무 커서 망하게 할 수 없다는 논리에 따라 숨은 지원금을 받는 것을 포함해 월가가 소득을 올리는 특정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면 소득의 많은 부분이 납세자와 소액 투자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게임 규칙에 영향을 미칠만큼 부를 쥐고 있지만 본질적 의미에서 막대한 급여를 받을만한 가치는 없다.
- 중산층의 협상력이 줄어들면 경제변화에 따른 위험성을 중산층에 전가하는 결과를 낳음. 뉴딜 정책을 실행하고 2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수립된 공공정책들은 사회보장 제도, 근로자의 보상, 주당 40시간 근로, 1.5배 초과 근무수당, 고용주의 건강보험료 제공을 실시하는 등 대부분의 위험요소를 곧장 대기업에 전가시켰다. 대다수의 대기업 직원은 평생 자사에 남았고 급여는 연공서열, 생산성, 생활비, 기업이익과 더불어 꾸준히 올랐따. 50년대에 이런 고용관계는 매우 흔해서 실질적으로 직원이 자기 직업과 회사에 재산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80년대 정크본드와 기업인수와 활개를 치면서 이러한 고용관계를 막을 내렸다. 이제 한 기업에 수십년 동안 근무한 풀타임 직원조차 퇴직금도 의료보험도 없이 다른 직장을 구하는 데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쫓겨날 수 있다. 현재 미국인 근로자 5명 중 거의 한 명이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많은 근로자가 임시직 근로자, 프리랜서, 독립 계약자, 컨설턴트로 일하고 소득과 근로일정은 주마다 다르거나 날마다 다르다. 14년 전체 미국 근로자의 66%는 그날 벌어 그날 생활하기에 바빴다.
- 근본적 문제는 일반 근로자가 과거보다 가치가 떨어지거나 분수에 넘치게 생활하기 때문이 아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처음 30년 동안 협상력을 꾸준히 상실했으므로 자신이 기여한 만큼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득으로는 경제가 제공하는 혜택을 따라잡기 못하기 때문. 해당문제를 자유시장의 비인격적 작용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80년대 이후 시장을 재조직한 주체와 방식을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힘을 소유한 덕에 좀 더 큰 몫의 경제적 이익을 꾸준히 받아온 부유한 이해당사자와 영향력을 가볍게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유한 이해당사자가 누리는 경제적 이익이 지속적으로 더욱 많이 축적되어야 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현대 정치경제체제에서 대항적 세력이 현저하게 쇠퇴하는 현상을 무시하는 것이다.
- 최저임금이 인상되면(또는 68년 수준으로 회복되면) 고용주가 고용을 줄이리라는 사회통념은 흔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최저임금을 없애고 고용주가 직원의 가치만큼 급여를 지불하게 해주면 실업을 줄이거나 심지어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전직 하원의원 미셸 바크먼이 주장했듯 최저임금 제도를 폐지하면 "어떤 수준이든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으므로 실업을 잠재적이고 실질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바크먼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그 핵심은 부적절하다. 매우 낮은 급여를 받는 근로자를 양산하는 것은 결코 경제의 위대한 성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노예제도도 완전고용제도가 아닌가? 사실상 최저임금이 인플레를 감안해 최소한 68년 수준으로 인상되기만 하더라도 직업이 거의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증거가 있다. 산업계 일자리와 달리 최저임금을 받는 소매서비스 직종은 외국에 외주를 줄 수 없다. 게다가 근로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개인적이고 직접적이므로 자동화 기계와 컴퓨터로 대체할 가능성도 없다. 더욱 중요하게는 최저임금을 인상하면서 발생한 이익은 최저임금을 직접 받는 근로자 너머로 확대된다. 저임금 근로자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이 많아지면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에서 제품판매가 증가한다는 뜻이고 결과적으로 경제가 더욱 빨리 성장하고 일자리가 더욱 많아짐. 아린드라지트 듀브, 윌리머 레스터, 마리클 라이시가 연구를 실시해 이 사실을 증명. 연구자들은 주 경계의 반대쪽에 있으면서 최저임금이 각기 다른 인근 카운티를 짝지어 수백쌍의 고용사례를 뽑아 조사하고 4년이 지나고 나서도 최저임금이 더 높은 카운티의 실업률이 통계학적으로 의미있게 증가했다느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밝힘. 이들은 최저임금이 더 높은 직장에서 직원 이직률이 낮기 때문에 고용주는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훈련시키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힘
- 미국은 역사상 최대규모의 부가 세대에서 세대로 이동하는 절정기. 보스턴대 산하 부와 박애주의 센터는 2061년까지 반세기 동안 36조달러가 상속되리라는 연구결과를 발표. 한 신탁회사가 투자가능한 재산이 300만불 이상인 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세대간 중요한 경계가 드러났다. 69세 이상 시민의 거의 75%와 그들 바로 밑에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대다수는 자신의 세대 들어 처음으로 막대한 재산을 형성. 이는 토마 피케티가 상기시켰듯 수세기 동안 유럽 귀족계층의 주요한 소득원천이었던 왕조적 형태의 부로서 앞으로 미국의 새 귀족계층의 주요한 소득 원천이 될 것이다.
- 시장이냐 정부냐를 둘러싼 오랜 논쟁은 이면에 숨은 결정을 무시함으로써 결정방식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키고 대기업, 월가, 부자가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의 점차 증가한다는 사실을 가린다. 소득 상위층이 경제적 힘을 획득하면서 경제게임의 기본규칙에 미치는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힘이 더욱 커졌다 매우 큰 목소리로 자유시장을 열렬하게 찬양하는 많은 사람은 이처럼 경제의 물밑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최대 수혜자들이다. 그들은 대중이 이해하는 경제기능의 방식에서 힘의 실체를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편리하게 감춘다. 결과적으로 밖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현상은 정부가 세금과 이전지출을 통해 부유층에서 빈곤층으로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상위층과 하위층의 소득격차가 벌어지면서 최근 수십년 동안 확대됨. 결과적으로 세금과 이전지출 이후에 관찰할 수 있는 불평등의 폭은 그 이전만큼 크지 않다. 하지만 소득의 하향재분배는 전체 그림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소득의 재분배가 소비자, 근로자, 소기업, 소형 투자자에서 고위기업임원, 월가 트레이더와 포트폴리오 매니저, 자본자산의 주요 소유주로 상향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상향 재분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주요 통로는 상당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형성하는 시장규칙안에 숨어 있따. 따라서 시장구조 안에서 상향 분배가 먼저 이루어지고 난 후에 정부가 나머지 소득을 세금과 이전지출을 통해 빈곤층에게 하향재분배하는 것이다.
- 체제가 불공정하고 임의적이며 힘들게 일해도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는 국민모두가 패배하는 것이다. 속임수나 절도행위가 만연하고, 불신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잘사는 사람이 더욱 잘 살게 되는 현상을 막으려고 자진해서 공동 이득을 포기하는 등 서로 관련이 있는 몇가지 부정적 결과 때문. 그런데도 보안요원, 회계사, 감사, 변호사를 고용하고 선별장비와 감시도구 등을 갖추는 데 추가로 돈이 지출되므로 국민 총생산은 증가하지만 이러한 방어적 지출로는 일반 근로자가 누리는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없다. 다른 부정적 결과는 구매력이 충분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서 발생하는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만성적 수요부족이다. 이러한 반응들이 모두 합쳐져 경제체제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경제와 사회를 수학자가 가리키는 네거티브 섬 게임으로 바꿈. 자본주의가 대다수 국민에게 경제적 이득을 안기지 않으며 언젠가는 소수의 상위 부유층에게도 더 이상 경제적 이득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근본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상위층에 거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 80년대부터 심각한 변화가 발생. 대기업, 월가, 부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막강해진 것만은 아님. 대항적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 시장을 움직이는 규칙을 지배하는 부유한 거대이익 집단의 지배력이 점점 커지면서 규칙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떤 목소리 뿐 아니라 대항력도 약해짐. 미국인에게 집단에 속해 활동할 시간이 부족해지면서 미국 재향군인회 같은 민초집단의 규모가 감소. 근로자들은 임금이 제자리 걸음을 하자 대개 먹고 살기 위해 노동시간을 늘려야 했따. 70년대 남성 급여가 불안정해지면서 가계소득이 위협을 받자 여성이 노동전선에 뛰어듬.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이 밝혔듯 미국은 더이상 가입자의 나라가 아니었다.
- 부유한 이익집단은 자유시장의 가면이 벗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자본주의 게임의 규칙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는 잠재적 연합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 부유한 이익집단은 소득 하위 90%가 공동의 경제적 명분을 찾기보다는 끊임없이 정부크기를 놓고 과격한 다툼을 벌이거나 동성결혼, 낙태, 총기소지, 인종, 종교 같은 비경제적 문제를 놓고 싸우는 데 급급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시장의 가면을 벗겨야 한다. 국민의 다수는 더욱 가난해지는 반면 특권을 부여받은 소수는 어느때보다 부유해지고, 게임의 규칙에 따라 경제이득이 상향재분배되면서 새 연합과 새 정치가 생겨날 수 있음. 예컨대 개인투자자, 가족사업체 소유주, 사업가, 지방 지역사회 거주자, 백인 근로자 계급 등 전형적 정치 우파는 일반적으로 좌파라 생각했던 근로여성, 소수민족, 대도시 전문가들과 자신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름. 무엇보다 모든 국민은 대기업이 시장의 규칙을 형성하지 않았을 때보다 약품, 광대역 연결, 식량, 신용카드 부채, 의료보험 등에 더욱 큰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 지금 우리는 60년전 미국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한 형태가 복귀하기 시작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부 경제학자들은 주주 자본주의가 더욱 효율적이라고 주장. 그러면서 기업은 주주들에게 압박을 받을 때 매우 생산적인 방향으로 경제자원을 움직여 경제 전체를 더욱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역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는 비생산적 방식으로 자원을 폐쇄하고 CEO를 지나치게 현실에 안주시키고, 기업에 불필요한 근로자를 고용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급여를 지불하고 지역사회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다. 하지만 80년대 뿌리를 내린 주주 자본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 불안정성과 업무의 외부하청이 늘어나고, 버려지는 지역사회가 증가했으며, CEO의 급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음. 기업은 분기별 수입에만 근시안적으로 집중했고, 08년 거의 붕괴될 뻔했던 금융부문은 카지노와 흡사해 국민 대부분에게 부수적 손해를 입혔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인이 받는 급여는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쇠퇴. 이런 결과를 고려하면 주주 자본주의가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국민의 일부만 기업의 주주이고, 부자 중에서도 극히 소수가 증권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이해당사자인 일반국민이 주식시장에서 누리는 혜택은 정작 별로 없다. 아마 주주자본주의가 사회에 자리잡을수록 주주의 다양성은 축소될 것이다.
- 독일의 기업 거버넌스를 규정한 법과 규칙을 살펴보자. 독일 법인법은 공동결정 조항을 포함시켜 경영 이사회에는 일일업무를 감독하고, 감사회엔 좀더 높은 차원의 결정을 내리는 임무를 부여. 기업의 규모에 따라 감사회 이사의 절반까지 주주가 아닌 직원을 대표한다. 또한 노동자 협의체도 현장 직원을 대표한다. 폭스바겐을 포함한 주요 독일 기업은 이런 체제로 운영되며 근로자의 권리를 미국보다 훨씬 민감하게 보장한다. 또한 독일은 CEO의 급여를 제한하고 많은 숙련직 직업을 보존한 덕택에 중사능에게 미국보다 높은 중간급여와 훨씬 안정된 번영을 안기고 있다.
- 정치경제학자 비터 반스에 따르면, 이자, 배당, 자본소득, 상속은 미국인이 받은 소득 3불당 1불에 해당. 전체 인구중 최상위 부유층 1%에 거의 전부가 돌아갔다. 하지만 법은 부부의 유산이 1068만불을 초과하지 않으면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고, 꽤나 영리한 상속 담당 변호사가 신탁펀드로 훨씬 많은 재산을 묶어둘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 게다가 주택, 주식, 채권, 보석, 그림, 골동품, 땅처럼 평생 가치가 증가하는 자산은 가치증가분에 대해 자본소득세를 내지 않고 상속가능. 따라서 상속인은 사는 동안 해당 자산에서 소득을 얻고 다시 상속인에게 물려줄 수 있으며 그래도 자본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음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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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학자들이 정의하는 효율적 정책은 무얼까? 정책 덕에 이익을 얻는 사람이 정책 탓에 손해를 입는 사람에게 보상을 하고도 최종적으로 이익을 거두는 정책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다음 3가지 중요한 현실을 묵과한다
(1) 불평등의 지속적 증가. 불평등이 확상되는 사회에선 대개 승자가 패자보다 부유하다. 승자는 부의 기반을 더욱 넓힐 수 있으므로 패자는 충분히 보상을 받더라도 예전보다 훨씬 더 궁핍하다고 느낄 수 있다.
(2) 안전망이 계속 느슨해짐. 사실상 승자는 패자에게 보상하지 않는다. 자유무역에서 패자, 즉 좋은 일자리를 잃은 수백만의 근로자는 실업보험조차 받지 못한다. 무역조정 지원제도(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손해를 입은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제도)는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다. 게다가 경제규모에 대비해서 미국이 직업훈련에 투자하는 비율은 대부분 의 다른 선진국보다 낮다
(3) 중간임금이 계속 감소. 자유무역 탓에 임금이 계속 줄어도 감소분을 보상받지 못함. 외국에서 들어오는 값싼 재화와 서비스에 접근하기 때문. 물론 값싼 재화가 들어오면 이익이지만 인플레를 고려할 때, 미국 생산직 근로자의 중근 시급은 74년보다 여전히 낮다
따라서 대중이 자유무역을 지지하기를 원한다면 누구나 자유무역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함. 그러려면 실업보험뿐 아니라 소득보장을 포함해서 진정한 의미의 재고용제도를 갖추어야 함. 따라서 실직을 하고, 임금이 더 적은 일자리를 잡아야 하는 근로자에게는 1년까지 임금 차이의 일정부분을 보전해 주어야 함. 좀더 근본적으로는 자유무역에 따른 이익을 더욱 광범위하게 분배해야 한다
- 현재 미국 연방정부는 매년 수천억불에 이르는 세금을 쏟아부어서 가장 부유한 계층의 재산을 더욱 불려주고 있다. 어떤 방법을 쓸까? 정부 지원금 형태인 세금지출을 통해 가능하다. 부유층의 과세소득에서 거액의 고용주 지불 의료보험, 퇴직적금, 주택담보 대출이자를 공제하거나 감면해주는 것이다. 이 3가지 세금지출은 다음 이유로 개혁해야 함.
(1) 3가지 세금지출은 불공정하다. 중저 소득층 근로자는 기업임원만큼 많은 건강보험 혜택과 퇴직소득을 받지 못할뿐더러 전혀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도 많다. 그들의 주택담보대출액은 혹시 있더라도 개개 부유층보다 훨씬 더 적다. 가격이 부유층만큼 높지 않은 주택에서 살기 때문
(2) 이런 형태의 세금공제와 감면은 터무니 없다. 세금공제와 감면을 세법에 포함시킨 원래 취지는 재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해서 건강보험을 유지하고, 퇴직을 대비해서 저축을 하고, 집을 사도록 장려하는 것. 하지만 부유층에게는 이러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부유하기 때문이다.
(3) 이런 형태의 세금공제와 감면을 실시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 연간 수천억불에 이름. 15년만 해도 3480억불이 들었는데, 최대혜택을 받는 것은 고소득 가정이었다. 부유층을 훨씬 부유하게 만드는 데에 이 돈을 쓰지 말고, 현재 계속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유색인종 가구를 포함해서 중저 소득 가구에게 더욱 나은 건강보험을 제공하고, 퇴직소득을 보장하며, 적절한 수준의 주택을 제공하는 데에 써야 한다. 한마디로 미국 부유층 과세소득에서 고용주 지불 의료보험, 퇴직적금, 주택담보대출 이자 등을 해마다, 예를 들어 2만 5천불 이상을 공제하거나 감면해줄 이유는 전혀 없다. 이런 종류의 세액공제와 감면을 제한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재정적으로 책임감 있으면서, 공정한 정책이다.
- 의회가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국채, 채무한계 등의 현안을 놓고 다툴 때, 재정적자 우선론자들은 무시무시한 수치들을 휘두르며 목청을 돋운다. 다음에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속지 마라. 알고 넘어가야 할 기본적 원칙 3가지가 있다
(1) 재정적자액과 부채액은 그 자체마으로는 무의미하다. 재정적자와 채무 규모는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측정되므로 비율이 결정적으로 중요.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줄곧 그랬듯이 국가 경제에서 연간 재정적자액이 차지하는 비율이 계속 떨어지면 채무를 더욱 쉽게 변제할 수 있다.
(2) 지금도 그렇듯이 많은 국민이 실직하거나 자기 능력 이하의 일을 할 때에 국가가 감수해야 하는 재정적자는 늘어남. 너무 낙담해서 일자리를 찾지 않는 수백만의 사람이 노동인구에서 이탈해 있고, 그 밖에도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근로자 수백만에게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함. 여러 해 동안 목격해 왔듯이 경제가 침체할 때마다, 경제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할 때마다 정부지출을 늘리며, 교사, 소방관, 경찰관, 사회복지사, 도로, 다리 및 공원 건설자 등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에 유용함. 또 경제가 성장하면서 일자리와 정부지출은 증가. 그러나 의회가 자동예산 삭감제도를 가동해왔듯이, 그리고 많은 유럽 국가가 그래왔듯이, 실업률이 여전히 놓은 데에도 반대로 지출을 줄이는 정책을 실시하면 경제가 둔화되거나 심지어 위축되어서 재정적자 비율은 더욱 커짐. 그리스가 그랬듯이 긴축경제는 재앙으로 치닫는 지름길을 열 수 있다. 채무를 걱정한 채권자들과 기관들은 그리스 정부를 압박해서 지출을 줄이게 했다. 그러자 그리스에 거대한 경제침체가 닥쳤고, 결과적으로 조세수입이 감소하면서 채무위기가 전보다 훨씬 다 악화됨.
(3) 교육과 사회기반시설 등에 투자하느라 발생한 적자지출은 다른 형태의 지출과 다름. 생산성과 미래경제성장을 구축하는 투자이기 때문. 마치 가정에서 돈을 빌려서 자녀에게 학비나 사업자금을 대주는 것과 같음. 예상되는 미래 투자수익이 빌리는 비용보다 크면 투자해야 한다.
위 세가지 원칙을 염두에 두면 재정적자 우선론자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구사하는 전술에 말려들지 않을 것임. 그리고 어째서 자동예산 삭감제도를 중단하고, 일자리를 더욱 늘리고, 교육과 사회기반시설 같은 중요한 공공투자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늘려야 하는지 납득하게 될 것이다.
- 오바마케어를 폐기하고 대체하겠다는 트럼프와 공화당의 공약에 속지 마라. 폐기할 수는 있겠지만 대체할 수 없고 대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건강보험 가입자수를 최소한 유지라도 할 수 있는 대체 계획을 생각해내려고 몇 년동안 노력해왔지만 허사였다. 그렇다면 공화당은 어째서 오바마케어를 폐기하고 국민 수백만을 건강보험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려고 할까? 부유층에 막대한 세금 혜택을 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케어를 폐기하면 첫해에 발생하는 감세 혜택만 따져보더라도 평균 3만3천불이 상위 1% 부유층에, 평균 19만 7천물이 상위 0.01%인 최상위 부유층에 돌아간다. 평균소득 3억불이상인 상위 고소득 납세자 400명은 연평균 약 700만불의 세금을 각각 감면받을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에게 투표한 노동자계급의 유권자 거의 전부를 포함해서 연간 소득이 1만~7만5천불인 가정에 부과되는 세금은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공화당이 오바마케어를 폐기하면 어떤 결과가 생겨날까?
* 3200만명이 건강보험을 잃는다
*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수만명이 사망한다
* 메디케어의 재정상태가 악화된다
* 부자가 훨씬 더 부유해진다
오바마케어를 폐기하고 대체하는 것은 정신나간 계획이다.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 트럼프는 이민에 관해 거짓말을 쏟아내고 있다. 무엇이 신화이고 사실일까
(1) 이민자는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틀린 말이다. 이민자는 전반적인 경제수요를 증가시키므로 결과적으로 더욱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기업을 압박하는 역할을 한다
(2) 이민자는 더 이상 필요없다. 헛소리다. 미국 인구는 고령화되고 있다. 25년 전에는 미국 퇴직자 1명당 근로자수가 5명이었지만, 지금은 3명에 불과. 이민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비율은 15년 안에 2명으로 떨어질 것이고 이는 퇴직인구를 부양하기에 턱없이 부족함
(3) 이민자는 공공예산을 고갈시킨다. 엉터리다. 이민자들은 세금을 낸다. 과세 및 경제정책 연구소가 15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2년 불법체류 이민자들은 국세와 지방세를 합해서 118억불을 납부했고, 포괄적 이민개혁안이 시행되면 22억불을 추가로 낼 것이다.
(4) 합법이민과 불법이민 모두 증가하고 있다. 틀린 말이다. 순수 불법이민의 증가율은 0% 미만, 퓨 연구소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는 불법체류 이민자수는 07년 1220만명에서 현재 1130만명으로 감소세
- 중산층과 빈곤층이 겪는 경제문제의 책임을 합법으로든 불법으로든 새로 유입되는 이민자에게 뒤집어씌우고 싶어하는 선동자들의 주장을 듣지 말라. 진짜 문제는 경제게임이 상위 소수, 즉 게임을 좌우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작되는 것이다. 포괄적 개혁안을 통과시키고 불법체류이민자를 포함해서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다. 게다가 순전히 옳지 않은 처사이기도 하다
- 미국은 이민자에게 적어도 관용과 평등한 기회를 베풀려고 노력해왔다. 이민자의 선거권과 시민권을 법으로 보장하고, 인종, 민족, 국적을 근거로 하는 차별을 금지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임금이 제자리에 머물고 경제요인 때문에 많은 미국인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자, 일부 정치인은 이러한 두려움을 외국인 혐오증,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 멕시코인, 이슬람 교도를 향한 두려움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세계 역사에서 낯설지 않은 현상이지만 위험하다. 국민을 분열시키고, 고통과 집단 따돌림을 불러들이기 때문. 또 국민을 관용과 공감의 태도에서 끌어내기 위해서 경멸과 증오를 품게 한다. 딕셔너리닷컴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것은 옳지만 외국인 혐오증은 미국이 직면한 최대 위협의 하나이기도 하다. 외국인 혐오증은 기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감정이다.
- 독재자가 민주주의 국가를 통치하면 일반적으로 다음 7가지 행동을 보인다
(1) 일반투표에서 패배하고 나서도 선거에서 압도적 득표로 승리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획득한 권한을 과장한다. 자신이나 공모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모든 주장을 비난한다. 다음 선거에서 상대 후보의 득표를 제한할 구실을 만들 목적으로, 아무 증거가 없는데에도 대량투표 부정행위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2) 자신들을 비판하는 대중매체와 기자들을 부정직하고, 쓰레기같다고 말하면서, 언론을 공공의 적으로 지칭해서 대중이 등을 돌리게 만든다. 기자회견을 거의 열지 않고,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여과되지 않은 발언을 올리고 군중대회를 통해서 대중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을 선호
(3) 심지어 사실과 마주했을 때에도 대중에게 거짓말을 되풀이한다. 거짓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일부 대중은 진실을 의심하고 독재자의 목적을 뒷받침하는 허구를 믿기 시작
(4) 경제적 긴장이 이민자나 인종, 종교 소수자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집단을 향한 대중의 편견이나 폭력까지고 선동함. 대량 국외추방, 종교 소수자 등록, 난민 추방 등을 실시하겠다고 위협함
(5) 판사를 포함해서 자신들에게 대항하면 누구의 동기이든 공격함. 국내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내부의 적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이런 사건을 국내 치안을 보강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빌미로 삼음
(6) 가족을 힘 있는 높은 자리에 임명. 대중이 수긍할 수 있는 타당한 경호조직이 아니라 개인경호 조직을 임명함. 군대장성들을 고위 민간인 지위에 임명
(7) 개인재산상태를 비닐에 부치고, 사적 재산과 공적 재산의 경계를 긋지 않고 공직에서 이익을 취함
- 트럼프 계획의 불필요하고 냉혹한 공통점
(1) 빈곤층에게 특히 가혹함. 그는 저소득자 주택, 직업훈련, 식량지원, 법률서비스, 곤경에 처한 농촌에 대한 지원, 산모와 신생아의 영양, 빈곤층 가정에 대한 난방지원, 식사배달 서비스를 지원하는 예산을 유례없는 규모로 삭감하고 있음. 게다가 이런 예산삭감은 아동 5명중 1명을 포함해서 어느 때보다 빈곤층 가정이 늘어난 시기에 실시되고 있다. 80년대 이후 최대로 인상된 국방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미국의 국방비 지출은 이미 세계 국방비 지출을 상위 8개국 나머지 7개국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다.
(2) 부담적정보험법을 폐지하고 대체하려는 트럼프의 계획대로라면, 18년에 1400만명, 26명이면 2400만명이 건강보험을 잃을 것이다. 앞으로 10여년 동안 부자들에게 세금우대 형태로 6000억불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그가 계획한 대로라면 부유층은 미국 역사상 어느 때보다 커다란 부를 축적하고 있는 시기에 뜻밖에 횡재까지 맞게 된다.
(3) 트럼프는 시리아 난민의 수용을 거부하고 미국이 받아들이는 총난민의 수를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주장. 이렇게 주장하는 시기는 세계가 2차대전이후 최악의 난민위기를 겪고 있는 때와 일치함. 난민 거부정책은 미국을 테러리즘에서 보호하는 데에 거의 또는 전혀 기여하지 않음. 지금까지 미국에서 발생한 어떤 테러도 시리아인이나 현재 미국에 입국하는 것을 거부당하고 있는 6개국 국민이 저지르지 않았다. 이민자 테러리스트에게 공격을 당해서 사망할 확률은 번개에 맞아서 사망할 확률보도 낮다.
(4) 불법체류자들을 마구잡이로 검거당하고 있다. 일제 검거대상에는 수십년 동안 미국 사회에서 생산적으로 활동해온 사람들과 어릴 때부터 미국에 거주해온 젊은이들도 포함된다. 트럼프에게는 설득력을 갖춘 정당한 이유가 없다. 실업률과 범죄율이 떨어지고 있으며, 불법체류 근로자수는 5년전보다 감소했다. 트럼프는 절대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냉혹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윤리적으로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이 나라가 지금까지 소중히 지켜온 모든 이상에 역행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행위를 중단시켜야 할 윤리적 책임이 있다.
- 2010년 의회를 통과한 도드-프랭크 법의 목적은 대형은행이 파산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이 너무 커서 결국 구제금융으로 살려야 하는 사태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도드-프랭크법을 포함해서 월가에 가하는 규제를 폐지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트럼프는 월가가 경제를 거대한 카지노로 바꾸었고, 08년 월가의 도박이 틀어졌을 때에 엄청난 파장이 발생했으며, 결국 자신이 납부한 세금으로 월가를 구제해야 했던 사실을 국민이 망각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당시 사태 여파로 일자리, 집, 저축금을 잃어버렸던 일을 국민이 잊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트럼프에게 투표한 많은 유권자들은 그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다. 자신이 고통을 겪는 동안 단 한명의 은행 중역도 수감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시 유권자들이 망각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이것은 특정 정당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민주당과 진보주의자들과 힘을 합해서 트럼프를 책임감 있는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 대형 은행 규모는 08년보다 훨씬 크다. 08년 당시 최대 5대은행 자산은 미국 은행 자산의 25%였지만 지금은 44%다. 당시 대형 은행들이 망할 수 없을 만큼 컸다면, 지금은 커도 너무 크다. 도드-프랭크법을 폐지하면 다시 금융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급증. 게다가 트럼프는 과거 어느 행정부보다 많은 은행없계 인사들을 행정부로 불러들이고 있으며, 그들은 대부분 골드만삭스 출신이다. 골드만삭스 사장 게리콘이 국가경제위원장으로 임명됨. 이밖에 행정부에 진출한 골드만 삭스 출신으로는 트럼프의 오른팔 스티브 배넌, 재무부장관 스티브 므누신, 증권거래위원회 회장 제이 클레이턴, 백악관 보좌관 디나 파월 등이 있다. 10년 전 상황을 기억하는가? 골드만삭스는 투자자들을 사취하고, 고객들을 기만하여 자신들의 지갑을 부풀려서 정부에 거의 90억불의 벌금을 납부해야 했다. 현재 트럼프가 행정부에 기용한 은행업 종사자들의 다수가 그 자리에 있었다. 트럼프와 공화당이 미국 경제를 다시 위기에 빠뜨리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같은 실수를 두번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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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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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가 종언을 고하면 당연히 주식회사에 미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현금배당을 하는 주식회사의 미래가 없는 것이다. 더 많은 배당을 원하는 주주의 요청에 충실히 부응하기 위해 현금배당을 높이고자 하는 주식회사는 머지 않아 시대에 뒤처지고 말 것임. 이는 마치 기나긴 16세기에 네덜란드의 풍차를 향해 죽창을 들고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앞으로 찾아올 시대는 거대한 풍차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세의 기사도를 상징하는 죽창으로 풍창 도전함으로써 허무한 저항을 계속하는 구세계의 패권자 스페인제국을 풍자했다
- 본원통화를 두배로 늘리면 2년만에 소비자물가가 2% 상승한다는 사고방식은 물건이 부족한 폐쇄경제에서만 성립하는 것. 일본은행은 본원통화를 두배로 늘리면 왜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2%가 되는 것인지 그 메커니즘을 잘 설명하지 않음. 아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가 되지 않는 것은 본원통화를 늘리면 소비자 물가가 상승한다는 공식이 무너졌기 때문. 왜일까? 이유는 세계화. 세계화는 세계를 실물경제 우위 시대에서 금융경제 우위의 시대로 바꿈. 본원통화와 소비자 물가와의 안정적 관계는 실물경제 우위의 시대, 즉 국내경제가 중심이고 수출입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의 산물. 이에 비해 금융경제 우위의 시대에는 돈이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들어 세계의 금융경제가 하나가 되고, 그 규모는 실물경제를 훨씬 능가하고, 국내경제는 종속변수에 불과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비자는 일본은행이 본원통화를 늘려도 물가가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음.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공급력 과잉인 상황에서 소매업자가 전 세계에서 물품을 수입하므로 일본에서 물품부족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남아도는 돈은 물건으로 향하지 않고 토지, 주식, 그림 등 자산시장으로 향하게 되어 자산가격을 올림. 투자가나 투기꾼이ㅡ 경우에는 돈이 자산으로 몰리면 단기간에 자본을 늘릴 수 있으므로 크게 환영할 일이다.
- 공급과잉에 처한 세계의 시장. 이는 결코 일본 특유의 현상이 아님. 일본, 독일, 중국의 자본계수를 비교하면 독일이나 중국도 일본과 거의 대등하게 상승. 각국의 자본계수를 공정하게 비교하려면 공적자본이나 주택자본을 더한 총고정 자본형성을 살펴봐야 함. 2014년 일본의 자본계수는 3.9, 독일 3.74, 중국은 3.96이었다. 중국의자본계수는 이미 일본은 웃도는 수치. 게다가 02년 이후 중국의 자본스톡 증가율은 연평균 11.8%로 실질 GDP 9.0%를 상회하기 때문에 자본계수는 앞으로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됨. 세계적으로 자본이 과잉될 때가지 쌓아두는 것은 자본주의의 숙명이자 필연. 마르크스는 자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함. "자본은 물건이 아니다. 화폐가 더욱 많은 화폐를 추구하면서 영속적으로 순환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자본은 영속적으로 순환하기 때문에 반드시 과잉된다. 수요자가 물건과 서비스를 무한히 원하지 않으면 자본의 자기증식이 끝날 듯도 싶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자본은 근대 사회에서 권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어떤 제약을 가하지 않는 한 화폐를 자본화하는 과정에는 영속성이 있고 자본은 '과잉, 포만, 과다'로 치닫는다
- 엔데의 유언에 따르면, 유럽에서 1150년부터 1350년에 걸친 중세시대에 비즈니스 황금시대로 일컬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유럽 각지에 대성당이 세워졌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대성당을 방문. 당시 멀리 떨어진 지역과의 거래에는 주로 금과 은이 이용됐는데, 봉건영주들은 보다 일상적인 거래와 매매에 사용할 수 있는 독자적 통화를 만들어 영내에 유통시킴. 이 통화는 은판에 각인한 화폐인데, 6-8개월 정도 유통한 후 다시 회수하고 신화폐를 재발행. 수중에 구화폐를 남겨두면 가치가 없어져 버리므로, 영내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기한내에 수중의 화폐를 모두 신화폐로 교환. 그런데 신화폐의 가치는 구화폐의 가치와 동일하지 않았따. 가령 100원어치 구화폐를 가져다주면 2-3원을 뺀 97-98원어치의 신화폐를 받음. 이는 마이너스 2-3%의 금리로 돈을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며, 그 기산은 6-8개월이기 때문에 1년으로 환산하면 마이너스 3-6% 금리. 봉건영주들은 이렇게 모은 돈으로 각지에 대성당을 지음. 대성당을 건설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과 자재가 동원되었고, 대성당을 완성한 후에는 전 유럽에서 순례자들이 영내를 방문해 식사와 숙박을 했다. 대성당 건설은 그 지역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는 문화유산을 만들어 물려주는 동시에, 사람과 물건과 돈을 움직여 소비를 확대하고, 영내의 신규고용을 창출하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럽 중세의 마이너스 금리는 다른 시각에서 보면 연 3-6%의 지방소득세라고 할 수 있음. 지금으로 치면 지방정부가 공공투자를 위해 소득세라는 보이지 않는 세금을 부과한 셈
- 2차대전 후의 영국과 미국에서는 전쟁비용으로 불어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금융억압 정책인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실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수요가 공급을 훨씬 웃돌았기 때문. 또한 중세 유럽의 화폐 재발행 시스템에서는 공공시설 건설을 통해 지역주민에게 '보이지 않는 세금'을 환원했다. 두 경우 모두 현재의 공급과잉 경제와는 사정이 다름. 일본은 조세법률주의라는 개념을 토대로 의회에 징세권을 부여. 민주주의 국가로서 헌법 제84조에 따라 법률적 근거가 없으면 그 누구도 조세를 부과하거나 징수당하지 않음. 그런 까닭에 소비세든 소득세든 세금은 국회에서 논의하고 법률로 정한 후 정부가 집행함. 그러나 일본은행은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제멋대로 실질적인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이너스 금리가 지니는 여러 문제들 중에서도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가장 심각한 문제임. 일본은행에는 징세권이 없기 때문에 마이너스 금리정책은 월권행위라고 밖에 할 수 없다.
-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이 줄기차게 강조하는 디플레 탈피라는 슬로건도 의문스럽다.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은 디플레 때문에 기업을 꾸려나가기가 힘들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지표로는 주로 소비자물가지수를 사용. 소비자 물가가 하락세로 돌아선 98년 7월부터 2016년 6월까지 소비자물가 하락률은 겨우 연평균 0.1%다.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기업경영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는 흔히 디플레이션 스파이럴, 즉 물가하락과 경기악화의 악순환을 든다. 이는 경제가 수축을 거듭하는 현상인데, 가령 물가가 연 3%씩 4년 연속 하락한다면 일본 주식회사는 3년 연속 적자를 볼 것이다. 그러면 금융기관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 주식회사의 절반이 불량채권 거래처가 된다. 일본 주식회사의 운전자금이 막히고 파산으로 치닫는 것이다. 실업률도 큰 폭으로 오르고 경제는 대혼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디플레이션 스파이럴이 닥치지 않았다.
- 레이건 정권은 소련과 치열한 군비확장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그로인해 거액의 재정적자가 발생했고, 달러위기와 미국채 폭락 우려가 확산됨. 그리고 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와 마르크화를 절상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달러를 대폭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본 생보사는 미국 국채를 구입함으로써 미국의 적자를 메움. 다시 말해 일본 국민의 저축이 생보사를 통해 월가와 재무부로 흘러 들어간 것. 물론 최종적으로는 미국 군수산업으로도 흘러 갔다. 그러나 플라자 합의에 의해 달러가 약세로 돌아섬으로써 일본 생보사가 거액의 외환차손을 입고 미국 국채를 구입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미국 국채가 인상되기라도 한다면, 미국 혹은 더 나아가 서방 진영이 엄청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국가정책을 통해 토지와 주식에 버블을 일으켜 생보사의 주식을 포함한 이익을 높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미국의 요청에 따른 일본 관제버블의 진상이다.
- 주식회사는 근대국가 초기에는 전쟁수행을 위해, 철도와 운하의 시대에는 국민생활의 향상을 위해 존재했지만, 21세기에는 자본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함. 이처럼 주식회사의 목적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달라짐. 이익 극대화가 주식회사의 목적이 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 기독교 세계에서는 이자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표면상의 이유는 시간과 지식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에 가치를 매기거나(시간에 가치를 매기는 것이 이자다) 스스로 지식을 얻으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자를 금지한 진짜 이유는 교회, 봉건영주, 국왕 등의 지배층이 부를 독접하기 위해서, 즉 지금으로 치면 자본의 독점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이자를 인정하면 자본의 축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 파트너십은 11세기 경의 이탈리아에서 탄생. 농업생산성이 높아지고 잉여 농산물이 생기기 시작한 무렵이었음. 처음에 그 잉여 농산물은 도시에서 물물교환으로 거래됐지만, 여러 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 화폐가 사용되기 시작. 결국 13세기가 되자 화폐경제는 농촌에도 침투하기 시작해 요역을 활성화했고, 점차 화폐의 자본화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져 갔다. 그러자 로마 카톨릭 교회도 현 상황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따. 결국 교회는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고 조건부로 이자를 공인. 공의회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자가 지불지연에 대한 보상 혹은 환전상이나 회계사의 노동에 대한 임금, 나아가 대부 자본의 손실 위험에 대한 대가로 간주될 때는 화폐대부에 보수를 지급하는 것을 제한적으로 용인한다. 다만 지나치게 높은 이자는 인정할 수 없다." 결국 교회는 33%가 화폐의 정당한 최대가격이라고 인정. 이는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가 경제적인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권력의 상징이 토지에서 화폐로 이행하는 것을 교회가 승인한 것이라 할 수 있음. 또 이는 프랑스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가 역사가 자크 르 고프의 말을 인용해 지적했듯, 교회가 봉건제와의 타협에서 자본주이와의 타협으로 이행함으로써 자본주의 안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교회는 새로운 질서를 끝내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스스로 탈바꿈 하지 않으면 권력을 대부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교회조차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러면 반대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었다.
- 이사는 자신의 자금이 아니라 남의 돈을 관리하므로 파트너가 파트너십의 자금을 관리할 때처럼 열심히 회사 자금을 관리할 것으로 기대하기 힘들다. 작은 일에 신경 쓰는 것은 주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부잣집 집사처럼, 자그마한 부분에 집착하는 것은 대기업답지 않다고 생각하므로 세부적인 부분까지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하는 의무를 태연하게 저버린다. 결국 주식회사 경영에는 태만과 낭비가 어느정도는 반드시 만연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해외무역에서 모험적 상인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힘들다. 배타적 특권의 유무와 상관없이 특허회사는 무역에 실패할 운명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결론 내렸다.
- 피케티는 예전부터 자본의 증가율은 5%라고 주장. 일본도 그와 동일한 추이를 보임. 그러나 가구당 금융자산이 산술평균으로는 증가했지만 중앙값으로 본 가구당 저축액은 감소. 더구나 무산계급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쇼크 독트린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참사에 편승해 부를 집중시키는 것은 결코 글로벌 자본주의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특허회사 주식 자본주의 시대에 벌어진 미시시피 버블 사건이 일어난 후에 프랑스 정치가 생 시몽은 "극히 소수의 사람이 그 외의 모든 인민의 완전한 파멸에 의해 큰 돈을 벌었다"고 지적했다. 하나의 시스템이 소멸하고 새로운 질서가 생길 때까지는 이러한 부의 집중현상이 나타난다.
- 타일러 코웬은 거대한 침체에서 조너선 휴브너의 연구를 소개하면서 1873년에 기술혁신이 절정에 달한 것에 관해 "이는 전기와 자동차의 시대로 이행하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고 설명. 연간 기술혁신건수(인구 10억명당)를 살펴보면 18세기 초부터 증가추세였고, 1950년대까지는 정체상태, 1955년 전후부터 급격히 하락. 기술혁신 감속의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휴브너는 그 이유로 기술혁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전보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할 뿐 아니라, 투자회수율도 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상의 밑바탕에 있는 사실은 최근 기술혁신의 대부분이 공공재산이 아니라 사적재산의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기술혁신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런 기술혁신을 활용해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 사람들만 이용하는 상품을 만들어낸다. 인공지능이 전형적 사례. 인공지능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 이처럼 특정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의 매출에는 한계가 있다. 사업에 필요한 연구개발비가 급등하고, 그 결과 매출에서 경비를 뺀 기업이익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로 인해 경비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를 삭감하게 됨. 이것이 바로 현재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 성장 그 자체가 수축을 낳는다. 성장하려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 수축을 초래하는 것이다. 슈미트는 근대라고 불리는 19세기와 20세기를 각각 경제주의 시대, 기술에 대한 종교적 신앙의 시대라고 명명. 이 두세기를 하나로 합쳐 경제와 기술의 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근대는 기술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시대다. 성장에는 한계가 있고 한계에 부딪힌 후에는 수축할 수밖에 없다. 성장이 곧 근대라고 본다면 근대가 스스로 경제수축(디플레와 마이너스 금리)을 낳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역사를 돌이켜보면 20세기 기술의 시대는 17세기 과학의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슈미트가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각 세기를 특징지은 것처럼 지금은 21세기가 어떤 시대인지를 우선 고민해봐야 한다. 정신없이 달리면서 고민하면 과거 4세기 동안의 관성, 즉 '더 빠르게, 더 멀리, 더 합리적으로'가 작동해 IT를 비장의 카드로 삼는 4차 산업혁명에만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21세기는 '더 빠르게, 더 멀리, 더 합리적으로'를 추구하는 기술의 시대가 아니다. 21세기가 여전히 기술의 시대라고 믿는다면 적어도 '더 여유롭게, 더 가까이, 더 관용적으로'를 목표로 삼는 기술을 추구해야 한다. 마이너스 금리는 잠깐 멈춰서서 현 상황을 냉정하게 생각해보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  출자(주식)와 융자(채권)를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한 것도 중세의 특징. 당시에는 원래 이자 안에 이윤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21세기 일본에서도 나타났다. 대표적 예가 도요타의 신형주식이다. 도요타는 15년 7월 신형주식을 발행. 발행 후 5년 동안 양도나 환금을 할 수 없지만, 그 후에는 발행가격으로 되살 것을 청구할 수 있는 이른바 원금보장형 주식이다. 배당 연이율은 1년마다 0.5%씩 단계적으로 오르는데 첫해에는 0.5%다. 5년 동안 전체적으로 보면 연이율 1.5%가 된다. (도요타의 경우 보통주의 배당은 2% 이상임) 5년이 지나도 신형 주식으로 계속 보유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2.5%의 배당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보통주와 1대 1로 교환 가능. 사실상 채권에 가깝지만 의결권이 있다는 점은 보통주와 동일. 신형 주식을 처음으로 발표했을 때 미국의 대형 기관투자가들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원금을 보장한다는 점이 인기를 끌어 도요타는 발행매수의 5배가 넘는 구매신청을 받았다.
- 1543년 코페르니쿠스 혁명으로 우주와 지구의 공간이 무한함을 깨달은 이후, 과학과 기술을 활용해 무한히 넓은 지구를 개발하려는 철도와 운하의 시대가 찾아옴. 그 무한 공간을 맹렬한 속도로 질주한(경제성장을 우선한) 결과, 국민 각자의 생활수준은 비약적으로 향상됨. 그러나 20세기말이 되자 지구가 유한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성장이 멈춤. 특히 2012년 이후 자연이자율(균형 실질금리)이 마이너스가 되고 잠재성장률 역시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높아짐
- 잠재성장률을 결정하는 기술진보, 자본량, 노동량은 이제 성장에 공헌하지 않게 되었다. 기술진보가 성장에 기여하지 않는 이유는 매출증가분 이상으로 연구개발비가 급등했기 때문. 노동량, 즉 인구가 감소하는 이유는 가계의 수입증가분 이상으로 교육비가 급등했기 때문. 자본량의 경우도 마찬가지 자본계수가 세계1위인 일본에서 새로이 공장을 건설하거나 인수합병을 시도해 자본을 늘리면 그것은 장래에 불량채권이 된다. 이는 최근의 패널산업이나 원자력 산업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자본을 늘리는 것은 많은 기업에게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21세기의 시스템은 과거의 연장선상에서가 아니라 잠재성장률이 제로라는 사실을 전제로 구축되어야 함. 이를 대전제로 삼아 회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해보자.
(1) 초기 : 거시경제가 제로성장이라면 그 내역이라 할 수 있는 기업이윤, 노동자 보수, 감가상각비가 작년과 같은 액수라도 괜찮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그 다음으로 초기시점의 전 단계에서 생긴 왜곡을 시정해야 한다. 과거와의 대화를 미래에 반영하는 것이다.
(2) 1단계 : 99년 이후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왜곡된 노동과 자본의 분배를 재검토. 기업이윤은 전년대비 마이너스가 됨
(3) 2단계 : 일본이 겪는 문제는 자본과 노동의 분배비율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98년 이전부터 일본은 자본을 '과잉, 포만, 과다'하게 떠안고 있다. 이를 시정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실질 GDP단위를 산출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내부유보금을 줄여나가는 것이 바람직함. 98년 이전의 과잉자본에 대응하는 과잉 내부유보금을 일단 국고로 되돌려놓고 재분배해야 함. 과잉으로 쌓아둔 내부유보금은 자산과세로 시정하는 것이 옳다.
- 시간벌기의 저자 볼프강 소트렉은 서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제를 문제라고 기술하는 사람에게, 분석과 동시에 해결책도 제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해결책을 못 찾거나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실현할 수 있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대체 미래지향적인 것은 어디에 있느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야말로 아도르노는 물론 나보다 훨씬 세련된 표현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할 것이 틀림없다. 미래지향적인 것이 전혀 없다고 해서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라고
- 역사의 위기에서 가장 의심해봐야 할 것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개념이다. 근대의 지배적 개념은 베이컨이 말하는 진보와 데카르트가 말하는 합리성이다. 근대는 진보와 합리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진보와 합리성은 성장을 의미. 성장은 작년보다 무언가 많아지고 늘어나는 것이므로 미래지향적임.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미래지향적인 것이 전혀 없다고 해서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라는 말은 "기성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시 질문해달라"는 뜻으로 해석 가능. 코페르니쿠스도 미래지향적 해결책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음. 고대와 중세를 지배하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닫힌 우주, 코스모스)에 홀로 반기를 든 사람은 경건한 카톨릭 신자 코페르니쿠스였다. 첫번째 근대인이라는 명예를 얻은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부정하면 로마카톨릭이 지배하는 중세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뒤집어질 것임을 깨달았다. 실제로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루터도 코페르니쿠스를 얼간이라 폄하. 기성개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코페르니쿠스야말로 과거지향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을 죽기 직전까지 망설였다. 그리고 1543년 막 인쇄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서문을 읽고 숨을 거둠. 그는 앞으로 다가올 세계는 이래야 한다는 식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일단 우주는 무한하다는 사실을 발표하는 데만 집중했을 뿐이다.
-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고의 토대를 근대 시스템의 토대인 '더 빠르게, 더 멀리, 더 합리적으로'에서 '더 여유롭게, 더 가까이, 더 관용적으로'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 이를 주식회사에 적용하면 해마다 이익증가 계획이 아닌 이익감축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자본을 과잉축적하고 더 빠르게 행동하는 것은 장래의 불량채권을 쌓아올리는 것과 마찬가지. 기업이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비자가 온갖 물건을 빠른 속도로 손에 넣기를 원했기 때문. 그래서 기업은 더 많은 이익을 계상하고 큰 공장을 건설했다. 온갖 상품을 대량생산하고 대규모 매장에 진열해 놓자 소비자는 행복해했다. 히자민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상품에 덤덤해졌다. 더 이상 온갖 상품을 이것저것 원하지 않게 되었다. 
- 프랑스 혁명 직후 장바티스트 세는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러한 세의 법칙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상류층에게만 허락되었던 욕망이 프랑스 혁명 이후 만인에게 개방됨으로써 비로소 성립. 하지만 지금은 온갖 상품과 자본이 '과잉, 포만, 과다'가 되었기 때문에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량채권을 만든다. '더 가까이'를 주식회사에 적용한다는 것은 더 이상 현금배당을 하지 않는 것. 그러면 지구반대편에서 더 이상 주주가 찾아오지 않는다. 경영자는 더 많은 배당을 원하는 주주의 요구에 무리하게 부응하고자 단기적 수익방안을 짜낼 필요가 없다. 이로써 앞으로 100년간의 경영계획을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서비스 배당에 착수하면 주식회사는 지역사회에 더 가까워짐. 회사가 지역사회에 가까워지기로 결심하면 지역주주도 단기 주식매매를 그만둘 것이다. 공간이 무한해짐으로써 주식회사가 탄생했기 때문에 공간이 닫히면 주식회사도 함께 닫히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이다. 더 관용적으로는 과잉 내부유보금을 국고로 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근대 성장 종교의 신자들에게는 과거 지향적이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톱니바퀴를 반대로 돌리면 과거 지향적인 생각이 미래지향적으로 바뀜. 이미 중세적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제로금리는 이자가 금지되었던 1215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 것과 같다. 그 당시에는 화폐는 씨앗이 아니라 이익을 산출하지 않는 돌과 같았다. 또한 일본의 인구는 2008년 증가를 멈추고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아프리카를 제외한 세계 인구 역시 2050년 이후로 줄어들 것이 거의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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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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