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사

경제 2020. 2. 17. 12:10

- 금융의 기본요소
* 시간을 넘나들며 경제적 가치를 재할당한다
* 위험을 재할당
* 자본을 재할당
* 이러한 재할당 과정을 접근하기 용이하고 정교하게 만듬
- 가족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 가치를 서로 다른 시점으로 옮기는 제도 중 가장 기본적인 것. 예컨대 부모가 늙으면 자녀가 돌본다는 사회적 약속은 퇴직연금과 마찬가지. 동일하게 가족, 친구,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선물을 받으며 보답한다는 약속은 금융대출과 같은 기능을 함. 하지만 대출과는 달리 미래에 받는 보상이 이자가 아니라 사회적 의무이므로 사회 연결망을 느슨하게가 아니라 탄탄하게 만든다. 이런 약속은 정식 금융계약보다 훨씬 전에 나타났다. 금융은 시점같은 기능을 한다. 하지만 대출과는 달리 미래에 받는 보상이 이자가 아니라 사회적 의무이므로 사회 연결망을 느슨하게가 아니라 탄탄하게 만든다. 이러한 약속은 정식 금융계약보다 훨씬 전에 나타났다. 금융은 시점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한 문화에서 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금융계약은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시점문제를 해결하는 전통방식을 대체하거나 개선하면서 등장하여 기존 균형상태에 도전했다.
- 드레헴 서판은 고대 서남아에서 발견된 금융문서 가운데 가장 흥미로움. 금융 사고방식이 발전한 과정을 거의 모두 보여주기 때문. 이 서판을 보면 늦어도 기원전 제3천년기에는 사업을 상상하고 계량하며 미래가치를 평가하는 기본도구가 전부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구체적 숫자로 예측해야 할 필요가 절박하지 않았다면 드레헴 서판되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 자체에도 가격이 매겨지는데, 그 가격의 근본은 동물의 번식에 기초를 둔 경제라는 근본 통찰이 서판에 담겨 있음. 이 서판은 추상적 금융 사고방식이 낳은 놀라운 결과물이다. 드레헴 서판에 숨은 사업계획에는 소 떼뿐 아니라 소 떼가 떠받치고 있는 사회의 성장과 변화를 예상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 소가 번식할수록 속 지탱하는 사회 역시 성장할 수 있다
- 이웃간의 협동은 공동체에 닥친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인 반면, 대출은 선물에 이자가 붙어 돌아오는 것으로서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빌려준 것을 되돌려 받아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다. 이처럼 암묵적 계약과 명시적 계약이 이루는 대조에는 문명이 대출을 보는 양면적 감정이 숨어 있다. 도시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상호 협동으로 위기에 대응했기 때문에 친구나 이웃에게 이자를 청구하는 행동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인류는 에덴동산이 지척인 곳에서 이자를 발명하면서부터 타락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명시적 계약, 장부기록, 노동력/배급량의 문서화는 공동체를 기본으로 생활하던 이상적 세계와 고대 도시국가를 확실히 구분하는 특징. 도시와 국가의 규모를 키운 것도 이러한 도구임이 분명함.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개인끼리도 금융계약을 했다. 수메르에서 기원전 24세기 중반에 작성된 기록 중 하나는 개인과 신전이 아니라 최초로 개인끼리 맺은 대출계약으로 보임. 문서 내용은 이렇다. "우르가리마는 푸주르에시타르에게 은 40그램과 보리 900리터를 받아야 한다."
- 고대 수메르인은 서로 이자를 매긴다는 발상을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언어학적 근거에 실마리가 있다. 수메르어로 이자를 가리키는 단어인 마시는 송아지를 의미하기도 함. 고대 그리스에서 이자를 가리키는 토코스는 소 떼에서 태어난 새끼를 가리키기도 함. 라틴어로 짐승 데를 일컫는 페쿠스는 '돈과 관련한' 이라는 영단어 피큐니어리의 어원이다. 이집트어로 이자는 수메르어와 비슷하게 므스인데 출산한다는 의미. 이 모든 용어를 살펴보면 이자개념은 가축이 자연히 번식하는 데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소 서른 마리를 1년 동안 빌려준다면 서른 마리보다 많은 소를 돌려받으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소는 번식한다. 따라서 소 떼 주인의 재산은 소 떼가 번식하는 속도와 같은 비율로 자연히 늘어난다. 소가 표준화폐 역할을 했다면 가치가 비슷한 물건을 대여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새끼를 칠 것이라 기대했을 법하다. 수렵, 채집사회와 달리 농경, 목축 사회에서는 이자라는 발상이 자연스레 출현했던 듯하다. 고대 수메르 사회는, 특히 그중에서도 양떼의 도시라 불리기도 했던 우르크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는 관습이 진화할 만한 환경을 완벽하게 갖추었던 셈이다. 드레헴 서판이 바로 그러한 발상을 자세하게 표현한 것이다.
- 밀 문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치가가 될 자격이 없다. (소크라테스)
- 고전 시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서는 금융경제가 화폐와 시장에 기초를 두고 정교하게 발전. 그리스인은 은행, 화폐, 상사법정을 발명했음. 로마인은 이러한 혁신을 토대로 금융을 발달시키는 한편 주식회사, 유한책임 투자와 일종의 중앙은행을 덧붙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는 인근에서 생산한 물건을 재분배하는 데 중심을 두고 이를 장거리 교역으로 보조했지만, 아테네와 로마는 인근의 농업 생산력만으로 뒷받침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하여 주로 해외무역에 의지하게 됨. 아테네는 필요한 밀 대부분을 멀리는 흑해에서까지 수입. 로마는 필요한 곡식을 나일 삼각주의 비옥한 농지에서 얻었다. 이처럼 대담하게 경제를 운영하려면 새로운 금융구조가 필요했음. 아테네와 로마는 곡식이 중앙으로 흘러오게 만들어야 했다. 두 국가의 경제는 해외의 농부들이 곡식을 재배하고 선원과 선장이 목숨을 걸고 곡식을 실어 오며 투자자가 배와 교역품에 투자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한편, 국제무역에 수반되는 불확실성에도 견딜만큼 확고한 결제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해결책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예측 불가한 바다에 대응할 금융기술, 어디서나 통용되는 가치 기준에 기반을 둔 화폐경제였따.
- 고대 우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세계에서도 대출과 해상무역 자금조달로부터 금융이 발전. 그런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코언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에서는 언어와 세계관 모두에 만연한 특유의 이분법 사고방식 덕분에 새로운 금융제도가 출현했다. 예컨대 토지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 가시적 재산은 실제 세계의 일부다. 반면 예치금, 장부, 계약은 추상적 재산이다. 이러한 자산은 법적 권리, 쌍방간 계약, 은행가가 수탁하는 계좌 형태로 존재했다. 코언은 추상적 재산은 고대 우르에서 금융업자가 대출 서판을 보관했던 것처럼 그리스인이 등장하기 전에도 존재했지만, 금융을 개념적으로 사업과 분리하여 가깝게는 장거리 해상교역에 적절하도록, 멀게는 제국의 요구에 부응할 만큼 유연하게 만든 것은 아테네 은행이었다.
- 곡식교역을 위해 흑해로 향하는 항해는 위험했고, 갤리선을 노잡이, 상인, 선장, 선원으로 채우는 비용은 비쌌다.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항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항해비용을 댈 만큼 부유한 사람은 바다 건너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모험을 떠나기보다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아테네에 머무르는 편을 선호했을 것임. 교역에서 20-30%의 이익을 얻으려고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수천 드라크마를 건네주도록 투자자를 유도해 낸 금융제도는 놀라운 발명품이었다. 이는 아테네 경제의 기반 자체였다. 한편 아테네 정부는 재산권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할당하는 수단과 분쟁해결 방법을 이용하여, 항해나 다름없이 위험한 탐사, 채굴 사업에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이러한 유인책 덕에 투자자는 해양항해뿐 아니라 제조사업이나 채굴사업에까지 다양하게 분산투자할 수 있었다. 아테네가 보유한 금융제도는 투자를 촉진하고 위험을 분산했으며, 위대한 도시에 필요했던 복자한 수입기반 경제를 뒷받침했음
- 아테네 민주주의와 금융이 함께 발전하면서 역설적 측면도 나타남. 교역경제는 자본투자를 분산하고, 보이지 않는 손이 곡식교역에 자본을 배분하도록 함으로써 움직였다. 아테네 민주주의에도 통치력을 분산하는 구조가 필요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기꺼이 세금을 내고 공공봉사를 제공할 추상적 기구 앞에 시민을 하나로 묶는 수단도 필요했다. 민주주의는 정치구조일 뿐 아니라 경제구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운영하려면 종교적 상징까지도 포함한 여러 기술이 다양한 계층에서 작동해야 함. 아테네의 화폐제도는 시민이 충성하는 대상을 가문이나 부족 같은 기존 집단으로부터 새로운 구조, 즉 국가로 옮겨냄. 아테네는 아테나를 국가의 상징으로, 돈을 사람들이 국가를 끊임없이 경험할 매개체로 활용. 돈은 보상체계이고 측정체계이자 공동의 부를 저장하는 수단이었다.
- 군주국에서 공화정을 거쳐 제국으로 변하는 내내 로마를 지배한 것은 혈통과 재산으로 획득한 후 계속 존속한 소규모 과두집단이었다. 6천만명이 사는 제국을 지배한 집단은 많아야 약 1만명이었다. 로마를 통치하는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25만 데나리우스를 넘는 재산을 보유하고, 기존 원로원 의원의 표결을 통과해야 했으며, 제정 시절에는 황제에게도 승인받아야 했다. 공화정 시절 로마는 주기적으로 인구조사를 하며 가문의 지위와 부를 평가하고 기록하여 시민의 서열을 매겼다. 재산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원로원 의원 자격이 박탈됨. 원로원 의석을 확보한 가문들은 매년 나오는 빈자리를 자기 가문 사람으로 채우려고 경쟁했다. 원로원 의원이 될 자격을 갖춘 사회계급은 두가지였다. 그중 로마에서 가장 유서깊은 지배가문의 후손인 귀족계급은 가장 배타적인 특권층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기사계급. 이들은 대대로 로마군에 기병을 공급하여 높은 지위를 얻음. 기사계급에 들려면 재산이 10만 데나리우스 이상 있어야 했다. 기사계급이라는 용어대로 말을 소유하거나, 말과 병사 유지비를 내기에 충분한 재원이 있어야 이 정도 재산요건을 맞출 수 있었다. 기사계급에 들려면 처음에는 혈통을 이어받아야 했지만, 나중에는 재산을 모아서도 가능해짐. 로마 사회의 하층에는 평민과 해방노예가 있었다. 이처럼 재산과 계급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금융분야에서 벌어지는 협력, 경쟁, 음모는 정치전략을 이루는 차원 중에서도 특히 중요했음. 그렇다 보니 정치가가 사업을 할 때는 법에 따라 제한을 받았다. 예를 들어 기원전 218년 원로원에서 통과된 클라우디아 법안은 원로원 의원이 소유한 상선이 실어나를 수 있는 물량을 제한. 법안의 의도는 원로원 의원이 정치력을 활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하게 막는 데 있었다. 원로원 의원이 돈을 벌어도 좋은 곳은 땅이었음. 다시 말해 원로원 의원은 넓은 땅에서 밀, 포도, 올리브를 길러 주변에 팔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리고 땅에서 농작물을 거두어도 큰 배가 없기 때문에 수출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기사계급이 일단 원로원 의원이 되면 이론적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교역에 참여하여 큰 이익을 내지 못하게 되지만 대출 같은 간접투자는 할 수 있었다. 원로원 의원은 부유해야 했지만 한편 자본을 굴리는 데도 심한 제약을 받았다. 이는 명시적 자격요건이었다.
- 요약하면 원로원 의원은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재산을 소유해야 했다. 따라서 사업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기위해 금융행위를 위임하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능력이 중요했음. 바로 그러한 기회를 원로원 의원에게 제공하는 제도가 로마 금융체계에서 발달했다.
- 타키투스에 따르면 원로원 의원은 사실상 모두 대부업자였다. 법 때문에 교역을 하지 못하게 된 원로원 의원에게 대부업은 재산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음. 로마사 연구자 네이선 로젠스타인이 원로원 의원의 재산상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농업만으로 재산을 유지할 만큼 큰 이익을 올린 원로원 의원은 많지 않았다.
- 33년 위기를 다룬 역사기록은 비록 짧지만 로마 금융의 일상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처럼 주요 대부자가 서로 관계를 맺은 결과 체계적 위험이 나타났다. 33년에 로마는 이미 여러번 신용위축과 부동산담보대출 채무불이행 때문에 일어난 금융위기를 겪은 경험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상태였다. 위기가 새로 나타나면 통치자는 앞선 위기에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살펴 지침을 얻었다. 그러면 로마 재무 담당자는 미국이 금융위기를 맞을 때 재무부가 해온 방식대로 움직였다. 즉, 대출을 통해 신용부족을 경감하고, 중개기관을 사용하여 해결책을 실행했다. 33년 위기는 고대로마에서 정치와 금융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보여주기도 함. 위기는 정치 불안기에 뒤이어 발생했다. 정치 박해에 이어진 금융박해라는 특징도 엿보임. 그렇다면 복수는 원래 의도한 범위를 넘었던 셈이다. 티베리우스는 위기를 원로원을 공격하는 무기로 썼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국고를 열어 금융이 더 이상 무너지거나 정치까지 붕괴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 고대경제 연구 권위자인 윌리엄 해리스는 서기 33년 위기를 분석하여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을 짚어냄. 엄청난 금액이 오갈 때 은화를 주고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돈은 금융중개인, 즉 은행업자로 이루어진 정교한 체계 안에서 오갔다. 황제가 은행을 통하여 구제금융을 공급했다는 타키투스의 말을 생각해보자. 정부는 여러 은행을 사용하여, 만기 3년에 무이자로 자산가치의 150퍼센트까지 담보대출을 제공했다.
- 투자자가 노예에게 사업자금을 대고 재량권을 주었다면 페쿨리움이라는 계좌를 통해 노예에게 투자한 자본금까지만 책임을 졌다. 채권자는 페쿨리움에서 추심할 수는 있어도, 해당 대출이 주인의 지시에 따라 발생했다고 입증하지 못한다면 노예 소유주의 자산에서 추심할 수 없었다. 로마의 법과 금융에서 나타난 혁신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이러한 제도구조이다. 개별투자에서 발생할 잠재적 피해가 페쿨리움으로만 한정된다면 투자자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 징세인 조합은 왜 사라졌을까? 공화정 시절 로마법은 유연하고 적응력도 뛰어난 체계였으리라고 말멘디어는 주장. 하지만 로마가 빠르게 확장하며 제국으로 변모하자 경제적 수요는 제도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이때 국가가 관료제를 갖추지 않고 필수 서비스를 외주하는 수단이 징세인 조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징세인 조합은 결국 쇠퇴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에서는 관료조직이 징세인 조합을 대체한 것이다. 징세회사는 제국 초기에는 로마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 몰라도 도급계약의 공개입찰이 줄어들면서 점점 사라져갔다. 심지어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가 야심차게 만든 법전에서는 징세인 조합을 관장하는 법이 빠졌다. 법은 금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만, 금융기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면 법으로 뒷받침해 봤자 소용없다. 로마의 법과 금융은 모두 정치, 경제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고대 주식회사를 다룬 울리케 말멘디어의 연구결과를 보면, 금융이 발전해야 했을 때 로마법은 금융발달에 필요한 요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 해리스는 로마경제에 화폐 공급량을 물리적 한계 이상으로 팽창시킨 주체는 은행업과 대부업이었다고 말한다. 계좌통화가 없었다면, 그리고 투자와 장거리 교역을 뒷받침하는 금융제도가 없었다면 로마는 대병력을 주둔시키지도, 바다를 가로질러 상품을 운송해야 할 만큼 광활하게 확장된 제국을 유지하지도 못했을 것임. 한마디로 로마는 화폐제도나 투자, 신용제도 같은 금융기술 덕분에 제국이 되었다. 금융은 로마의 곁가지가 아니라 생명선이었다.
- 로마는 조폐제도, 은행, 해상계약, 담보, 부동산담보대출, 공공금고, 중앙은행 등 이미 존재했던 금융도구를 도입했음. 하지만 이를 사용한 로마의 상황은 독특했다. 재산이 지배계층에 속하기 위한 명시적 조건으로 제시된 로마에서는 부를 창출하고 기록하며 보여주기 위하여 금융체계가 발전. 통치와 직접적 경제 이해관계를 애초부터 법으로 분리했기 때문에 정교한 신용장이 탄생. 원로원 의원도 돈을 빌려줄 수는 있었지만 직접 사업에 관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금융중개분야에는 투자사실을 숨기거나 독립적 관계로 운영하는 등 방법이 다양했다. 문제를 해결할 수많은 방법 중에는 페쿨리움이라는 법적 형식이 있었다. 최근 학계는 특히 금융중개분야에서 로마경제가 얼마나 정교했는지 입증했다. 로마 금융체계는 오늘날 시각에서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친숙해보일 때가 많다. 은행 같은 현대적 기관과 로마시대 기관이 얼마나 유사하냐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계속 일어난다. 하지만 기관의 이름보다는 기능이 중요. 로마처럼 거대한 제국이 상업을 장려하고 수입을 안정시키녀 위기에 대응하려면 화폐, 공공부채, 구제금융, 징세대리 같은 금융도구를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금융구조가 유연했음은 로마의 오랜 역사로 증명됨. 금융경제 실패를 해결하기 위한 금융수단은 채무탕감 칙령에서 화폐가치 절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징세인 조합의 출현은 로마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특히 눈에 띈다. 로마의 부는 대부분 민간에 속했다. 지배계층은 정복활동 덕분에 부유해졌다. 이렇게 얻은 재산은 어디에든 투자되어야 했고, 실제로도 신용체계를 통해 아래로 흘러갔다. 하지만 신용만으로는 차이자와 대부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 채무 불이행과 분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불황이 오면 정치가들은 채무를 탕감하여 안정을 유지하려 했다. 반면 주식회사 구조에서는 모든 주주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이윤을 주식수에 따라 배분한다면 회사의 이익이 늘어나는 데 비례하여 투자자의 재산도 증가. 주식이 공공연히 거래된다면, 특히 무기명으로 소유할 수 있다면 주식은 이해당사자 사이에 벌어질지도 모를 분쟁을 중재하는 도구가 됨. 로마 정치와 연관하여 보면 징세인 조합주식은 원로원 의원, 기사, 황제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황제가 모든 권력을 쥐게 되자 당연히 징세인회사도 쓸모를 잃음. 따라서 주식회사라는 형식이 정치, 경제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처음 등장했다는 결론을 낼 만한 것이다.

- 중국이 최소한 현대 유럽 관점에서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더 일찍부터 발전하지 못한 데는 이처럼 민간부문을 몰아낸 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음. 국가가 약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강했기 때문. 중요한 금융혁신 중에서 국채는 중국보다 서양에서 훨씬 빨리 나타났다. 유럽에서 서로 끊임없이 싸우던 약소 도시국가들은 투자자들에게 돈을 빌리고 나중에 갚기로 약속하는 방법을 터득했음. 12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국채가 등장했고, 13세기에는 온전한 채권시장이 등장. 같은 시기에 중국에는 지폐가 있었지만 채권은 없었다. 이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전에는 각국별로 돈을 빌려 전쟁비용을 조달하곤 했다. 중국에서는 다양한 금융계약을 다루는 기술이 오래전부터 확립되어 있었고, 서기 1000년 전부터 상업분쟁이나 금융재산권 문제를 재판으로 해결했다. 따라서 중국은 국채시장을 운영할만한 기술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가 될 때까지 중국 정부가 국채를 발행한 적은 없었음. 반대로 정부가 신용을 공급한 사례는 가끔씩 나온다. 중국의 정부는 민간 신용기관을 이용하여 국영사업에 돈을 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간 신용기관과 경쟁했던 것이다.
- 인류학자 벤저민 리 워프는 사고가 언어에 영향을 끼치는 것 못지 않게 언어도 사고에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표현방식과 내용은 서로 뗄 수 없다는 이론을 처음 세운 학자이다. 언어라는 기술은 마치 금융과 같이 개념체계로서 기능함. 언어마다 모두 다른 구조를 지니는데, 이러한 구조 안에서 살다 보면 관점도 영향을 받음. 부호가 과연 자기 부장품이 상징하는 새 경제 매체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후에 쓰인 문헌을 보면 중국 지배자들은 돈과 시장이 지닌 잠재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조개껍데기를 나타내는 기호를 한자에 내포했다는 말은 이후 중국식 사고의 구조에 금융이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관자'의 저자는 정부가 상품가격을 통제하는 편을 지지하면서도, 시장가격체계가 엄청난 사회적 이익을 준다는 사실 역시 잘 알았다. 자유롭게 거래하면 모두 더 잘 살게 되기 때문. '관자'에는 '만물이 유통돼야 비로소 변화가 있고, 변화가 있어야 비로소 가격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옴. 다시 말하면, 시장이 있다면 거래가 일어날 것이고, 거래가 자유로워지면 가격은 내려가고, 그 이익은 모든 지역이 나누어 가지게 된다. 오늘날 세계무역기구 고위층도 시장과 가격의 원리를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 고대도시 중에서도 진시황의 중국통일에 맞서 마지막까지 버틴 임치를 살펴보자. 그는 지배자가 편 실용적 경제정책 때문에 흥미를 끈다. 수공업과 교역에 기반을 두고 경제발전을 도모하 임치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사상가로 꼽히는 관중이 활동했다. 관자를 한사람이 썼는지 한 학파가 썼는지는 중요치 않음. 이 책은 돈이 경제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인식하고 보기 드문 수준까지 상징적 가치를 추상화했다. 관자는 돈이란 재화의 공급과 수요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 위한 기본도구라고 파악. 그리고 돈을 국가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라고 인식했음. 관자가 제시한 통화정책은 아마 실제로도 실행되었을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관자는 이윤추구라는 동기가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강조하기도 햇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것은 이윤이라는 동기 때문. 관자가 제시하는 절묘한 도구는 대부분 이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활용한 것이었다.
- 송나라 지폐는 오늘날에도 천연색 책을 인쇄할 때 쓰인느 4색 동판인쇄술로 찍어낸 최초의 인쇄물. 닥종이는 뽕나무를 비단 생산에 사용한 사천 지역에서 발전하고 완성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유통되어도 버틸만큼 튼튼한 최초의 지폐용지였다. 금융혁신이 일어나려면 문서화, 기록, 계약기술이라는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점토 서판을 발명하고 유라시아 대륙 이곳저곳에서 금속화폐가 탄생한 것처럼, 중국은 내구성이 좋은 종이에 금속판으로 인쇄함으로써 금융혁신의 역사에 유산을 길이 남겼다.
- 중국 과학자들은 수력공학을 연구하여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운하망을 만들어냈고, 또한 철광채광과 금속공학에서도 세계 최고였다. 증기력도 알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중국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대체 뭘까? 제임스 와트, 로버트 풀턴,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왜 중국인이 아니었을까? 중국은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하여 그토록 앞선 기술을 보유했으면서, 또한 관료제 역시 그토록 발달했으면서 세계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기술변혁인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비틀거렸던 것일까? 단순하게 답한다면 우연 때문이다. 와트, 풀턴, 벨 같은 천재는 드물다. 어쩌면 산업혁명은 특정한 역사의 순간에 천재성이 우연히 한데 모여 생긴 유전자의 장난일 것이다. 이러한 우연이론에 반론들 제기한 사람은 대만 경제학자 저스틴 린(린이푸)이다. 린은 유전자 변이만큼 확률규칙이 잘 들어맞는 것도 드물다고 지적. 엄청난 천재가 태어날 가능성은 인구의 함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송나라 시절에 세계에서 중국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 주장을 확장하여 천재가 태어났더라도 흥미로운 문제에 노출시키며 육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 교육제도는 오로지 평등을 추구했으니, 에디슨이 중국 고전을 외우느라 6년을 보내야 했다면 전기를 갖고 놀 시간이 있었겠느냐는 의문도 품을만 하다. 어쨌든 송나라 시절 중국 도시의 밀도는 창조적 지식이 흘러넘쳐 혁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린은 우연만으로는 차이를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소위 니덤 수수께끼에 매달린 명석한 학자는 수도 없이 많다. 린은 서양의 과학적 실험방법론이 우연에 따른 발견과정을 체계적으로 가속하고 조직하며 최적으로 활용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차이를 만들어낸 요소는 과학적 방법론이다. 중국 문명이 계속 달성했던 성공자체도 또 다른 요소다. 금융해법을 보면 중국은 계획, 자원배분, 위험 최소화 등 수없이 많은 복잡한 문제를 잘 풀어왔다. 자기 나름대로 경로를 밟으며, 화폐를 발행하고, 시장을 발달시키기도 했다. 역사학자 마크 엘빈은 송나라가 높은 균형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 제1 천년기의 농업을 살펴보면 중국은 더 혁신할 필요가 없어 보일만큼 성공적으로 발전. 반면 유럽은 낮은 수준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술을 급격히 바꿔야 할 필요가 더 컸다. 캘리포니아대 케네스 포메란츠 교수는 지리결정론이라는 급진적 사상을 제시. 그에 따르면 중국의 천연자원은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광석은 운송이 편리한 하천과 거리가 먼 곳에 주로 매장되어 있었다. 중국의 집약적 산업화를 막은 것은 바로 지형이었다. 그런데 이런 설명에는 기술발전을 뒷받침하는 금융의 역할이 무시되고 있다. 기술에는 천재성이 필요하지만 도한 자본도 필요함. 철도가 존재하려면 철로를 깔고 열차를 살 자금이 필요. 하지만 투자에 성공하면 수익이 난다. 그리고 사업가에게는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는 대신 모험을 계속할 동기가 있어야 한다. 사업가가 혁신으로 돈을 벌려면 특허 같은 법적 보호수단이 있어야 함. 사업가가 이룬 혁신을 국가가 빼앗아 간다면 인적자본을 투자할 이유가 없어짐. 자본시장과 지식재산권 보호는 사업가의 동기와 자본투자를 지탱하는 보조요인. 중앙집권화한 중구 정부는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는 개인에게 보상할 여력을 갖췄지만, 한편 시장이 새로운 발상에 자금을 대지는 못하게 했다.
- 산업혁명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 중에도 19세기 유럽의 금융제도가 필수적 보조요소였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유럽에서는 소득불균형이 심화하고 소득이 투자자에게 집중됨. 손꼽히는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은 기술을 전문으로 연구함. 그는 영국 산업혁명 시기의 소득 불평등을 연구한 2005년 논문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공장방식을 도입하는 데 드는 자금을 공급하려면 소득이 자본가에게 이전되어야 한다. 이윤배분 폭이 커졌기 때문에 자본수요를 충족하고 산출을 늘리는 데 드는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불평등 심화라는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투자자에게 이윤으로 보상하는 금융체계가 투자를 촉진하고 기술발전을 뒷받침했다. 투자에 보상하는 체계를 개발하는 과정은 주로 유업에서 오랫동안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중국과 서양의 차이는 기술발전에서 벌어지기 전에 금융 발달에서 먼저 벌어졌다는 것이 가장 강력한 근거임. 유럽 금융시장은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생산공정이 기계화될 때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님. 상업은행과 조직화한 증권시장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최소한 2세기전부터 유럽에 존재했음. 19세기에 철도회사가 철로를 깔고 기차를 만들어 자본을 얻으려고 접촉한 폭넓은 투자자 층은 거액을 내고 미래에 돌려받기로 하는 방식에 익숙했다. 당시 서양에는 투자기회를 얻으려는 수요와, 이 수료를 충족하는 상품을 개발할 구조화된 노하우가 존재했다. 반면 중국에는 기술 우위를 지닌 사업체와 자본을 지닌 민간 투자자를 한데 모아 줄 체계적 수단이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중국에는 재화와 상품을 거래할 거대하고 체계적 시장이 있었지만, 자본시장의 발달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 유럽의 금융발달을 핵심단계별로 나누면, 첫째는 금융제도의 출현, 둘째는 증권시장의 발달, 셋째는 주식회사의 출현, 넷째는 주식시장의 갑작스런 폭발, 다섯째는 위험의 수량화, 마지막은 전 세계를 향한 제도전파다. 서기 1000년 이후 유럽 금융구조가 이처럼 급격하게 재편되자 여러 문제가 놀라울 정도로 신기하게 해결되었지만, 이 해결책은 미묘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때때로 사회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 결과 새로운 혁신과 변화가 이어졌다. 제2천년기 동안 유럽은 금융을 시험하는 거대한 실험장이 되었다. 현대금융기술이 발달한 과정은 절대 일직선이 아니었음. 새로운 발상은 제대로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대실패를 겪기도 했다.
- 은행이라는 조직은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하고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함. 그리고 다른 일도 한다. 영업하는 지역의 법적 환경에 적합하다면 지분투자를 하기도 하고, 증권발행을 주선하기도 하며, 회사 경영에 참여하기도 함. 이러한 기준으로 본다면 성전기사단은 어엿한 은행이었음. 성전기사단의 자사을 다른 기사단으로 이전하거나, 기사단을 해산하라고 명령할 권리는 교황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 은행을 최종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카톨릭교회였다. 하지만 이런 소유권에 의미가 있으려면 일단 기사단이 종말을 맞아야 한다. 기사단은 존재했던 대부분의 기간동안 입단과 운영구조 승계규칙을 세심하게 정해 둔 일종의 조합으로 운영되었다. 조직의 사명을 확장하려는 수단으로 기사단의 자산은 기사단원만이 관리할 수 있었다. 성전기사단은 교황에게 조직설립을 인가받았으며, 그리하여 통합된 기관으로서 움직일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음. 이 말은 예컨대 파리 지부가 진 채무는 런던지부의 채무로도 취급되었다는 이야기다. 은행은 공립이든 사립이든 비영리든 두 가지 이점을 누림. 금융전문성이 첫째이고 자본이 둘째다. 금융 전문성은 차입자를 평가하고 채무불이행이 위험을 통제하며,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예금, 출금, 수입, 지출을 평가, 나열, 문서화, 기록하는 능력을 포함함. 이러한 기술을 성전기사단은 처음에 순례자 금융에 진출하며 발달시키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의 사실상 재무담당자로 일하며 완벽하게 갈고 닦았다. 게다가 기사단에는 자본도 있었다. 성전기사단의 최종 자산상태를 기록한 장부는 없지만 서유럽 전역에 소유한 재산이 엄청나게 많다는 말은 돌았다. 이러한 재산은 어떻게 얻은 것일까? 재산 중 일부는 기부형식으로 들어왔다. 독실한 신자가 돈, 땅, 보물을 기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 수도자가 기사단에 입단하면서 가져온 개인재산에서 얻기도 했음. 놀랄만큼 많은 재산이 유산 형태로 들어오기도 했다.
- 양도가능한 봉건적 권리는 이후 유럽 금융구조 전체의 기반이 되었다. 12세기초 국가와 도시는 지대, 농산물, 통행료, 세금, 해상관세, 광업권, 전통적 노역 등 봉건시대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현금화하여 재정을 마련했음. 이런 금융 시스템 덕에 봉건제적 채무를 사용하여 통치자와 지주는 돈을 빌리고, 투자자는 이익을 받고 재투자했다. 성전기사단은 관할권의 제도와 센서스 계약이 출현한 지 오랜 후에야 등장했음에도 이를 다른 진취적 대부자와 마찬가지로 자기자본을 굴리는 데 이용했다. 이러한 계약에는 이를 부여하는 나라나 통치자의 권력을 잠식한다는 위험한 문제가 있었다. 백작, 공작, 도시, 공화국이 이러한 금융방식으로 필요한 현금을 조달하자 국가의 통제력이 감소했을 뿐 아니라 채무불이행 또는 몰수 위험도 커졌다. 대략 1세기 동안 성전기사단은 토지 수천 곳과 복잡하게 얽힌 계약권리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유럽의 주요한 경제세력이 된 동시에 돈이 필요한 군주가 기회를 엿보는 표적이 되었다.
- 돈이 필요했던 유럽 통치자들은 성전기사단의 자산을 분할하고 금융의무(압류하거나 재양도한 재산, 센서스 계약, 왕실 대여금 등)에서 해방되어 잠시나마 한숨 돌렸지만, 성전기사단이 만들어낸 국제적 예치 및 결제체계가 파괴됨으로써 손실을 입은 것은 결국 유럽 전체였다. 성전기사단이 몰락하며 초래된 제도의 진공상태를 메꾼 사람들은 종국에는 이탈리아 은행업자들이었다.
-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성전기사단이 처음부터 은행업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염두에 두고 설립된 것은 아니다. 필요와 기회에 따라 그렇게 발전한 것이다. 역사가 다르게 굴러갔다면 예치와 중개라는 역할은 예컨대 에드워드 1세에게 돈을 빌려준 루카(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민간은행업자가 맡았을지도 모름. 또 역사가 달리 흘러갔다면 신성로마제국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되어, 중국에서처럼 황제가 권력과 재정관리의 중심에 있으면서 유럽 전역을 장악하고 예치와 중개역할을 맡았을 수도 있다. 금융기술은 중복되고 적응하며 때로 변덕스러움. 어떤 제도를 두고 사람들은 절대 침해하면 안되고 필연적이며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역사적 사건이 우연에 따라 귀결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같은 금융문제를 해결하는 제도가 지금과 달리 발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금융혁신이라 시간, 장소, 기회의 변덕이 연속적으로 빚어낸 역사적 우연이다.
- 성전기사단은 안정적이고 수명이 긴 체계를 제공함으로써 미래에 이렁날 결제를 두고 체결한 계약을 신뢰할 수 있게 했다. 기사단은 청빈을 서약한 윤리적 개인을 선별하여 받아들였기에 부정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았다. 게다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영업망 덕분에 시간뿐 아니라 공간을 넘나들며 돈을 송금할 방법도 제공. 하지만 성전기사단을 이상적 금융기관으로 만든 이러한 특징은 동시에 기사단이 실패한 원인이기도 함. 기사단은 소유한 부 때문에 정치적 표적이 되었고, 원래 사명이 없어지자 14세기 초반부터는 카톨릭교회에조차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성지를 잃었으니 성지의 수호자도 불필요해진 것이다. 사실 성전기사단이 지닌 부는 교회 전체가 지닌 재산규모에 버금갈 정도였음. 성전기사단 이야기는 한동안 안정적으로 발달했던 대안기관 금융구조 사례이기에 중요하다. 기사단은 오늘날 중앙은행과 달리 특정 국가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특징 때문에 결국 몰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중앙은행을 성전기사단에 비추어 보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13세기에 고리대금업 금지가 더더욱 강조된 데는 종교뿐 아니라 법과 사상의 영향도 있다. 사상 쪽 뿌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다. 중세 후반에 다시 학문적 주목을 받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따르면 고리대금의 폐해는 다음과 같다.
그 중에서도 고리대금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 되는데, 지당한 일이다. 화폐의 본래 기능인 교역과정이 아니라 화폐 자체에서 이득을 취하기 때문. 화폐는 교역에 쓰라고 만든 것이지 이자를 낳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돈의 증식을 '돈이 낳은 돈'이라는 용어로 가리키는 것은 새끼가 어미를 닮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리대금은 어떠한 재산 획득 기술보다도 자연에 어긋난다.
이 글을 보면 금융의 악덕 중에서도 가장 악한 것은 차입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금융업자가 오만하게도 생명을 창조하여 신에게 도전한다는 것. 금융업자가 지닌 돈은 돈을 낳는다. 돈은 무생물이면서도 자손을 만드는 일좆의 자동인형이자 인간이 신의 특권에 손을 뻗어 만든 괴물이다. 돈은 '죽은 것'이므로 번식하게 두어서는 안된다. 이처럼 금융이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석한 소위 스콜라 철학자들은 금융의 악덕 목록에 한 가지 죄를 덧붙였다. 바로 시간 자체를 도둑질한다는 죄목이다. 기욤 도세르는 1220년에 "고리대금업자는 모든 생명에 주어진 시간을 팔기 때문에 자연법칙을 위배한다"라고 썼다. 금융계약은 주기적으로 이자를 매김으로써 시간에 가격을 매기고, 존재의 흐름을 현금의 흐름으로 전락시킨다. 그러고 보면 베네치아 영구채의 만기는 정말로 신에게만 허용된 시간인 영원이었다.
- 새로 등장한 베네치아 채권과 이를 거래하는 리알토의 2차시장은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중요한 금융기술이었다. 국가에는 미래에서 현재로 자원을 옮겨 자본을 집중하고 군사적 목적에 사용하는 수단이었음. 전략적 위협과 기회에 자원이동으로 대응할 만하게 된 것임. 그리고 미래에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 베네치아에 있는지 채권보유자가 확인할 유인이 생겼다는 부산물도 발생. 베네치아는 국가부채를 늘리고 유지하는 데 시민이 발언권을 가진 자치공화국이었으므로 시간을 넘나들며 돈을 움직이고 궁극적으로 국가자웡늘 유지하고 성장시킬 책임을 공유하는 합작회사이기도 했다. 이처럼 새로운 자본이 등장하자 마찬가지로 새로운 관점에 따라, 즉 시간 자체가 세상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이라 재정의하고 시간을 세속화하게 되었음. 베네치아 리알토의 금융구조는 이탈리아 전체로, 그리고 유럽 각지에 있는 금융중심지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시간에 가격이 매겨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새로 등장한 재산과 투자방식으로 돈을 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리알코의 산자코모 성당에 이상하리만치 큰 시계를 건 것은 의미 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옛날 이탈리아 금융업자는 시계를 보고 시간이 중요한 차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중국에서는 중앙정부가 방대하고 복잡한 관료체제를 통제하려다 보니 회계혁명이 일어난 반면, 유럽에서는 사업이 시간흐름에 따라 어떻게 발전해나갔는지 계산하기 위해 수량화하고 기록하는 수단으로 회계가 출현. 기록수단이 불라에서 서판으로, 파피루스에서 죽간으로, 다시 양피지에서 종이로 변해가는 와중에도 사업과 금융의 근본은 언제나 숫자를 세고 기록하며 특정 시점의 경제가치를 검증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은 절차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결정하다고 정언한 바, 현실이 기술을 만드는 한편 기술도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올바르게 파악했다.
- 민간 소유대 공공 소유 쟁점을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과연 제분회사 소유주가 경영책임을 온전히 위임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 주식회사에서 드러나는 천재성고 동시에 문제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경영자가 제분소에서 나오는 이익을 대부분 가져가고 주주에게 성과를 왜곡해서 보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사상가와 회계 담당자가 옛날부터 제기한 대리인 문제는 공기업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툴루즈 회사는 위임, 경영, 감독 문제를 푸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오늘날 바자클 회사는 현대적 주식회사의 시조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로 시조가 아니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해 시조가 아니라고도 하기 어렵다. 제분소는 중세 후기 유럽 어디에나 있었다. 수력을 활용한 것은 당시 가장 중요한 기술진보였고, 제분소를 제대로 지으려면 상당한 자본을 투자해야 했다. 프랑스 남부에 있던 다른 회사도 틀림없이 주주자본주의, 유한책임, 환금성 같은 발상을 툴루즈에서 빌려왔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툴루즈 회사가 그러한 발상을 빌려왔을지도 모른다. 툴루즈 회사가 알려진 것은 역사기록이 우연히 남았고, 학자들이 이를 근거로 분석하는 데 기여한 덕분임. 사실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여러 사업을 가까이서 관찰하다 보면, 현대 주식회사의 조상일지도 모를 유사한 사업체가 있었다는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독일 광업회사들은 쿡센이라는 주식을 발행했다. 스웨덴의 유서 깊은 회사 스토라엔소는 기원이 13세기까지 올라가는데, 1347년에 받은 칙허장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지분을 나눈 합작 채광회사로 설립된 스토라엔소의 형태은 아마 툴루즈 최초의 제분회사와 비슷했을 것임. 카사 디 산조르조 역시 현대적 주식회사의 특징을 여럿 지녔다는 사실도 앞에서 살펴보았다. 유럽 중세 후기는 사업체의 형태를 다양하게 만들고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실험한 시기였던 듯 하다.
- 이처럼 중세 유럽 이곳저곳에서 주식투자를 통해 자본을 출자받은 제분회사와 채광회사를 살펴보면 자본주의란 역사에 반복하여 출현하는 경제적 해결책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계보는 단선적이지도 유일하지도 않다. 오히려 경제적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고도 흔히 나타나는 돌연변이에 가까움. 앞에서 본대로 로마 공화정 시절에도 등장했다가 황실의 후원제도에 희생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경제를 압돟며 지배한 것이 아니라, 등장했다가 사라지면서도 미약하게 살아남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사실 주주자본주의는 제대로 된 주변환경과 정치적 조건을 갖추어야만 번영 가능한 연약한 제도일지도 모른다. 모택동은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라 보았지만 자본주의 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등장할 수 있는 만큼 사라질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수많은 균형상태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 영국이 탐험 항해를 시작한 초기에는 재정확충이 시급했던 왕실이 사업기회를 제공하여 탐사가 시작된 사례가 대부분이었음.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버지니아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골칫거리였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가 반란에 실패한 후 왕권을 강화하는 등 영국이 강력한 힘을 떨쳤던 시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 재임기 영국의 금융은 취약했다. 국내 자본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는 신용장을 개설하려고 벨기에 안트베르펜 은행업자에게 사절을 보내고, 정부 세수와 왕실의 재산을 담보로 잡히며, 단기 차입금을 만기마다 연장하고, 영국이 채무를 불이행할지도 모른다는 매우 그럴듯한 가능성을 반영하여 점점 높아지는 이자를 물면서도 끊임없이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려가며 연명해야 했다. 영국의 신용도는 형편없었다. 차입금을 새로 들여오려면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는데, 제노바의 카사 디 산조르조 같이 신용도가 좋은 회사 주식의 배당률이 3-4%에 불과하던 시절에 영국 정부는 이자로 14%를 내야 했다. 유럽 대륙에 있는 도시국가와는 달리 영국 도시에는 채권을 발행하던 전통도 없었고, 증권을 사서 거래하려는 투자자층이 국내에 폭넓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영국은 금융발달이 더딘 탓에 전략적 열위에 처했다. 영국 정부에는 대안이 없다시피했다. 세금을 매기거나 차입하거나 혹은 권리를 파는 수밖에 없었는데, 팔 수 있는 권리라면 이미 대부분 팔린 뒤였다. 예컨대 해외무역 대부분을 독점할 권리는 오래전부터 상업모험가 회사 소유였음. 이 회사는 지분을 나눈 회사라기보다는 무역권을 독점하려고 서로 연합한 상인조합에 가까웠으며 따라서 길드 기능을 했다. 회사 구성원은 영국과 저지대 국가 사이 직물교역을 장악하고, 다른 북유럽 항구에서는 독일의 한자동맹과 경쟁하면 무역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상업모험가 회사에 부여한 무역권을 재조정하려다가는 영국의 국제경쟁력에 문제가 생길 위험이 었었다.
- '상업모험가'가 독점한 무역권에는 흥미로운 허점이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까지 영국 상인이 자주 접촉하지 않던 새로운 지역, 사람 항구와 교역할 권리를 다른 회사에 줄 수 있었다. 원한다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역과 독점적으로 교역할 권리를 허가할 수도 있었다. 만약 어떤 영국인이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땅이나, '상업모험가'가 아직 장악하거나 그러려고 시도하지 않은 무력로 또는 항구를 발견했다면 그는 새로 독점권을 가질 수 있었다.
- 캐세이 회사는 모험회사로서 실패했지만, 탐험을 위해 설립된 영국 회사가 살아남아 번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식회사라는 형태는 자본을 사업체로 끌어올 유연한 사업구조를 제공했다. 영국은 비록 캐세이 회사에 실망했어도 계속하여 탐사와 해외무역을 전담하는 회사에 칙허를 내주었음. 예컨대 버지니아 회사는 미국 대서양 해안 중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유명하고, 허드슨만 회사는 지금의 캐나다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영업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동인도 회사는 1600년에 칙허를 받은 후 남아시아 교역에서 영국의 교두보를 마련했고 인도에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데도 앞장섰다. 이 회사들은 모두 설립될 때부터 위험한 사업을 영위했고,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다. 투자자들은 품질이 의심스러운 금광석, 신대륙에서 살아남지 못할 확률, 태평양에서 스페인인과 마주치면 일어날 싸움,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을 상대로 벌이는 경쟁 등 심각한 불확실성과 마주하면서 돈을 쏟아부었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오노르 델 바자클이 설립될 때와 흡사한 방식으로 몇몇 네덜란드 도시의 상인들에게 후원을 받은 여러 무역회사가 합병하여 1602년 탄생. 1600년에 상인들이 한 회사 아래 연합하여 설립된 영국 동인도 회사 사례를 따른 것. 두 회사는 포르투갈과 경쟁하여 이윤이 많이 남는 아시아 향신료 무역에 참여하려고 했고, 마침내 성공. 그 후 2세기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무역을 장악했고,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와 중국무역을 지배. 아시아로 통하는 해양항로과 신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지만 이를 지배한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 VOC와 오늘날 주식회사의 모든 특징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암스테르담에 자본을 거래하는 주식시장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금융혁신이다. VOC는 주식을 거래하는 공개시장 덕에 여러가지가 달성되었다.
(1) 투자자는 주식을 샀다면 팔 수도 있다는 구체적 증거를 시장에서 얻었다. 이제 베네치아 프레스티티 이래 유럽에 존재했던 채권과 마찬가지 권리를 주식도 지니게 되었기 때문에 유동성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2) 시장은 도박하고 투기하려는 인간 고유의 경향을 활용했다. 어떤 매매자는 천성부터 비관적인 반면 어떤 매매자는 천성부터 낙관적이라 묘사한 드 라 베가는, 몇 년 동안 배당을 지급하지 못한 회사의 재산을 두고 자연스레 거래가 이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VOC 주식이 공개발행되자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는 미래 향신료 무역을 예상하는 여론 측정기가 되었음. 바자클 회사 주식은 15세기에도 자유롭게 거래가능했고, 툴루즈 곡식시장은 분명 투기가 벌어지는 장소였지만, 결국 이때까지는 낙관론자와 비관론자가 광란을 벌이는 주식시장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암스테르담 투기꾼들로부터 탐욕을 이끌어 낸 요소는 엄청난 부를 가져올 잠재력과 심각한 재앙을 맞을 위협이 공존하던 사업체, 바로 VOC의 불확실성과 위험 자체였을 것이다.
- 주식회사가 해외교역,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식민지 확장에 적합한 형태였느냐는 문제는 지금도 논쟁 대상임.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우월한 금융기술 덕분에 비교적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목표가 지나치게 많은 (그리고 이를 달성할 자금이 없는) 왕실보다는 카사 디 산조르조와 마찬가지로 상인들이 장악한 통치기관이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전략적 판단을 내리기에 적합했을 것임. 하지만 금을 찾으로 배핀섬 탐험대를 조직하거나, 부유한 부르주아가 지갑을 열 만큼 독특한 향이 나는 씨앗을 가지고 오기 위해 배를 아프리카 너머로 왕복시켜야 하는 회사 주식에 큰 돈을 들이려는 사람들은 무모하리만큼 낙관적이었다. 두번째로 탄생한 주식회사와 주식시장은 신중함과는 거리가 매우 멀어보인다.
- 네덜란드공화국의 국력이 절정에 달한 1687년 11월, 공화국 통령이던 오라녜공 빌럼 3세(윌리엄 3세)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4배 규모에 이르는 함대를 편성하고 영국해협을 건너 데본에 상륙했다. 항해자금은 암스테르담에서 손꼽히던 상인 은행업자들에게 빌려 마련했음. 독일, 스코틀랜드, 스위서, 스칸디나비아 출신 용병으로 조직한 침략군은 저항다운 저항을 겪지 않았다. 사실은 환영하는 이도 많았다. 심지어 영국 육해군이 속속 네덜란드군에 합류하기도 했는데, 이는 카톨릭교도인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민심을 크게 잃었기 때문이다. 여러 도시에서 카톨릭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해 말이 되자 영국 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사실상 증발해 버렸다. 심지어 상류층에 속한 지주조차도 싸워봐야 손해만 보리라고 생각했다. 제임스 2세는 빌럼이 합법적 권력의 마지막 상징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하려고 영국 옥새를 템즈강에 던져버리고 프랑스로 도주했고, 빌럼과 메리 2세는 공동왕으로서 영국을 다스리게 됨. 대부분 개신교도였던 영국 대중은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침략을 환영했고, 정권은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바뀌었지만, 어쨌든 1688년 네덜란드가 영국을 정복한 사건은 두 나라 모두에 깊고 오래가는 충격을 남겼다. 정치사에서는 이를 영국 왕권이 축소되고 의회민주주의가 완전히 자리잡도록 자극한 중요한 단계라 평가한다.
- 금융사에서 1688년은 대영제국이 국제적 금융강국으로 떠오르는 분수령이다. 네덜란드에서 왕을따라 온 은행업자와 금융업자는 개방된 자본시장으로 가는 지침, 채권을 사용하여 정부 운영자금을 대는 방법, 투기심리를 자극할 복권, 불로소득자 계층에게 제공할 종신임차료와 종신연금, 그리고 재정정책 도구로 쓸 만한 중앙은행 등을 망라하는 네덜란드 금융의 유전자정보를 가져왔다. 그리고 영국인은 이런 도구에 넘쳐나는 상상력을 더하여 1688년 이전 영국 사회가 감히 상상하지 못하던 방식으로 적용. 명예혁명은 영국인의 금융 상상력을 해방했다. 대영제국이 들어선 새로운 금융시대를 가리켜 작가이자 사업가인 대니얼 디포는 '기획의 시대'(projecting age)'라 명명
- 영국에서 새로 등장한 회사를 산업별로 보면 광업, 인양, 어업, 임업, 농업, 직조 등 기계를 이용한 제조업, 해외교역, 기반시설 건설업, 부동산, 대여, 금융 등으로 나뉨. 영국이 독점법을 도입한 1623년 이후에는 새로운 발명을 통해 이익을 얻을 독점권이 발명자 몫으로 돌아갔다. 1688년 이후 새로 등장한 금융시장은 창의력과 지식재산권을 자본과 혼인시킨 것이다. 혁신동력이었을 주식회사가 경제에서 지닌 중요성은 다른 구성요소에 비하여 극적으로 커졌다. 역사가 윌리엄 로빈슨 스코트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주식회사는 1695년에 대영제국 국부 중 1.3%를 차지했지만 1720년에는 13%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 주식회사는 무역독점 특권에 의존하는 소수상인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회사 모임에서, 서로 무관한 투기꾼들이 부자가 될 꿈을 꾸며 새로운 발상이나 특허에 열광적으로 투자한 자본이 가벼운 규제만을 받으며 한데 모인 장소로 바뀌었다.
- 일반적 시각에 따르면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중반에 생산공정 기계화와 공업의 분업으로 경제적 전환이 완료되며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윌리엄 로빈슨 스코트는 세 권에 달하는 대규모 연구결과에서, 산업혁명의 씨앗은 그보다 훨씬 앞서 1720년까지 이어진 기획의 시대에 뿌려졌다고 주장. 명예혁명 이후 설립된 회사목록을 살펴본 후라면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기계화, 혁신, 재산권, 자본 등 모든 요소가 그때 존재했다. 기획의 시대에는 이렇게 새로운 회사들이 폭발하듯 출현하는 사건이 왜 네덜란드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17세기가 저물무렵 암스테르담에는 런던이상으로 세련된 금융기법이 있었음. 17세기 초 런던 시장이 등장하는 데는 명예혁명과 함께 들어온 네덜란드 금융업자도 공헌했다. 영국 증권과 은행제도의 기본구조 및 작동방식은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빌려온 것이다. 채권시장, 연금 및 기타 저축 수단이 발달한 네덜란드 등 유럽 대륙 경제권에서는 자본이 공급되면 투자증서 시장이 움직인다는 사실도 이미 입증되었다. 네덜란드인은 VOC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주식시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왜 다이빙벨 계획, 종이회사, 제련사업이 거래되는 주식시장은 없었을까? 아마 명예혁명 자체가 변화의 정신에 촉매역할을 했을 것임. 마찬가지로 왜 90년대에 유럽이나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만 기술주 거품이 일었는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임. 세 시장 모두 금융제도와 활발하게 돌아가는 기술연구 프로그램을 갖추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변혁을 일으킬 가능성, 새로운 마케팅 모형과 통신수단, 옛 기술의 죽음, 이익보다는 클릭수와 판매량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새 시대의 금융 등을 논하며 진정한 열기가 시작된 곳은 분명 미국이었음
-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잇는 그 유명한 삼각무역은 1711년에야 시작됨. 삼각무역은 18세기 서양사회에서 경쟁력이 순환하는 주된 방식이었다. 공업화된 영국 북서부 도시의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은 아프리카로 실려 가 노예와 교환되고, 노예는 악명놓은 중간항로(아프리카 서해안과 서인도제도를 잇는 항로)를 통해 카리브해 섬으로 실려와 조직적으로 억압받으며 본토에 팔 작물을 생산. 그리고 노예를 팔아 남은 이윤으로 구입한 설탕과 사탕수수 같은 상품이 유럽으로 실려왔다.
- 노예무역 분야에서 손꼽히는 역사가 조지프 이니코리는 삼각무역이 활성화된 덕분에 대영제국이 18세기에 기계화, 공업화가 발생했고, 재화와 사람이 멕시코만류를 따라 크게 순환하며 간접적으로 현대 유럽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함. 그 말이 맞을 것이다. 1711년에 남해회사에 투자한 투자자는 이 회삭 교역하여 세계경제를 바꾸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임. 하지만 금과 은과 남아메리카 플랜테이션 농업 이미지를 덧칠하며 맹목적 자국중심주의를 주장한 대니얼 디포의 글은, 영국 정부에 받을 돈이 있는 채권자가 연체되는 채권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누구도 아닌 총리가 설립하고 운영하며 아시엔토까지 소유한 새 회사에 기꺼이 운을 걸게 만들 만했다
- 금융시장의 실수를 기록한 '어리석음을 비추는 위대한 거울'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지혜를 실었다. 여기에 실린 묘사가 서브프라임 위기가 일어난 08년에도 딱 들어맞아 보이는 것도 사실. 하지만 책의 분석결과에는 우의의 언어라는 한계가 있음. 존 로가 낙낙한 옷을 걸치고 하늘에 떠 있는 신들로 묘사될 뿐 상세한 통화정책을 나타낼 수 없었듯이, '어리석음을 비추는 위대한 거울'을 그린 화가들이 쓴 우의의 언어로는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에서 새로 발전하던 주식시장이 대표하는 복잡한 혁신, 도구, 시장, 계약, 그리고 정보흐름을 나타낼 수 없었다. 이 형상들이 그토록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이유는 원형에 호소하기 때문. 우의라는 언어는 수학과 시장의 논리에 비하여 의식의 훨씬 깊은 곳에 박혀 있음. 이성적인 존 로와 그가 만든 시스템이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었듯이 수학적 사고가 저지른 명백한 실수에 맞닥뜨리자 사회는 붕괴를 이해하기 위하여 더 오래된 언어로 되돌아갔다. 지금도 같은 실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최근에 붕괴한 일 주택저당대출 유동화는 손쓸 수 없이 복잡하여 결국 실패한 금융혁신으로 일축되고, 사회는 현대에 일어난 위기를 유명 금융업자가 악당으로 출연하는 단순한 도덕극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원형은 무의식에 보편적으로 호소력이 있기 때문에 위험다. 선출된 공무원들이 유권자와 소통해야 할 민주주의 사회에선 더욱 그러함. 두뇌를 이루는 여러 부분 중에서도 신화와 이야기를 통해 사고하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마치 오래전부터 인간의 행동을 점점 더 많이 장악한 이성적 사고에 불만을 품고 질투하다가 이성이 실패를 겪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 유럽은 1720년에 대규모 주식 거품 붕괴를 겪고 움츠러들었고, 그 후 수십년 동안 금융기술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 거품방지법은 영국에서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지분을 거래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제외한 주식거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스타트 로테르담과 같이 성공을 거둔 회사주식조차 현금화하기 어려웠다. 주식거래는 18세기 말까지 사실상 중단되었다가 1820년대가 되어서야 시장이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주식금융이 죽은 한 세기를 보냈다. 18세기 내내 인가를 받은 회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프랑스에서는 미시시피회사 주식이 계속 거래되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눈에 띌 만큼 활발하게 대중을 상대로 발행되는 주식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주식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법적 규제로 심했던 18세기와 19세기 초반에 산업혁명에 일어나는 사실은 굉장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 미국 독립전쟁 지도자 중 다수는 토지투기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됨. 오하이오 회사를 설립한 버니지아 부자 중에는 조지 워싱턴의 아버지와 형제 두 명이 끼어 있다. 회사는 1748년에 왕에게 인가받고 오하이오 계곡 땅 800제곱킬로미터를 할당받았다. 프렌치-인디언 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이 버지니아 연대를 지휘하여 이름을 알리게 된 듀케인 전투의 전장이었던 지금의 피츠버그가 바로 오하이오 회사가 얻은 부지이다. 프랑스는 이 땅의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써 영국의 지배력뿐 아니라 유명한 버지니아 땅투기꾼의 토지 소유권에도 도전하는 셈이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서부개발에 관심있던 투자자들은 불쾌해했다. 전쟁이 끝난 후 1763년에 의회는 앨러게니산맥 서쪽 땅을 원주민 소유지로 보존한다고 선언한다. 오하이오 회사는 서부지역 토지에 투기하기 위해 설립된 수많은 회사 중 하나였다. 1749년 설립된 로열 컴퍼니 오브 버지니아에는 앞으로 대통령의 아버지가 될 피터 제퍼슨이 연관된다. 이 회사는 1763년 선언문 때문에 프렌치-인디언 전쟁 이후 인허가를 갱신받지 못한다. 서부지역 토지에 관심 있던 식민지인은 버지니아 사람들 말고도 많았다. 1773년에는 저명한 필라델피아 상인들이 원주민의 당을 매입하여 개발하려고 일리노이 회사와 워배시 회사를 설립. 벤데일리아 회사는 현재 웨스터버지니아에 속한 땅을 요구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아들도 이 회사 이사였다. 버지니아인과 펜실베니아인들은 서부 소유권을 두고 험악하게 대립했지만, 서쪽으로 팽창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영국의 정책이 걸림돌이기는 둘다 마찬가지였다.
- 조지워싱턴은 아메리카 토지회사가 설립되던 초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역사학자 바버라 라스무센에 따르면 워싱턴의 월폴 주식회사, 미시시피 회사, 군사모험회사, 디즈밀 습지회사 주식을 통해 보유한 땅은 총 250제곱킬로미터가 넘었다. 이러한 토지회사가 제시한 사업계획은 비옥하고 넓은 땅을 취득하고 여러 구획으로 분할하여 기본 기반시설을 개발한 다음 여기에 정착할 미국인 또는 외국인에게 파는 것이었다. 사실 오하이오 회사의 토지소유권에는 일정 기일 안에 토지에 정착할 의무가 명시적으로 못 박혀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가 소유권 분쟁을 벌여야 하고, 개발에 투자할 경화가 부족하며, 정착민 입장에서도 땅을 취득할 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달성하기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자금제공은 필수였다. 오하이오 지역 정착민에게는 부동산을 담보로 하는 금융조건이 필요했을 것이다. 토지회사가 세운 계획이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신용뿐이었다. 결국 식민지의 부동산담보대출은 토지은행과 마찬가지로 제약을 받았고, 초창기 아메리카 토지회사가 설립될 당시 품었던 희망은 서부개척에 걸린 제약 때문에 꺾였다. 그러니 워싱턴, 애덤스, 제퍼슨, 프랭클린 가문이 왜 독립을 지지할 마음을 먹었는지 이해가 한다.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하면 서부 토지개방, 부동산담보대출, 최적통화정책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었다. 금융은 주식회사를 통한 담보대출이나 부동산 투기와 관계가 밀접하므로 독립을 추진할 중요 요인이 되었다.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의 금융 역시 거품방지법이나 1763년 포고령에서 자유롭게 풀려나 해방된다.
- 마르크스나 엥겔스라면 자본시장이 만들어낸 이 엄청난 숫자를 어떻게 보았을지 잠시 생각해 보자. 1870년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시세를 발표하던 금융자산 가치는 대략 36억 파운드로, 당시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2파운드씩 나누어줄 수 있는 금액이다. 마르크스가 가치평가 척도로 선호한 노동단위로 환산해보면 더 충격적이다. 1860년대 런던에 보통 노동자는 한 주에 20실링, 즉 1파운드를 받았으니 1년에는 52파운드를 번 셈이다. 노동가능기간이 50년이라고치면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던 자본은 노동자 140만명이 평생 일한 만큼과 동일하다.
- 1870년 당시 마르크스는 런던 자본시장이 우선은 노동자에게 노예와 같은 임금을 지급하여 가치를 빨아들인 후 초과이윤으로 바꾸고, 마지막으로는 실체가 없지만 증권거래소에서 매일 가치가 매겨지는 자본증서로 저장하여 엄청나게 많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착취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라면 이러한 가격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인베스터 먼슬리 매뉴얼에 나오는 숫자는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을 법하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현실이란 그 숫자로 들어간 노동이다. 1870년 새해 첫날에 빈에 있는 노면전차 회사 주식을 살지 러시아 철도 대기업 주식을 살지 고민하던 우리의 갑부 친구들은 여러 세대에 걸친 노동자를 착취하여 살아가는 악당일까, 아니면 자신의 경제적 미래를 기꺼이 위험에 빠뜨려 가며 전 세계 기반시설을 현대화하려던 투자자일까? 둘 다 아닐까? 아니면 둘 다 일까?
- 이번에는36억 파운드란 영국 및 기타 국가의 투자자들이 1870년까지 소비하지 않고 아껴 확보한 순저축액이라고 생각해보자. 이 자본은 다른 사람을 착취해서가 아니라 투자자 자신이 노동한 데서 나왔다고 상상하자. 그렇다면 이 금액은 엄청나게 큰 노동의 가치가 시간을 뛰어넘어 전달된 것인 셈이다. 비축한 자본은 런던의 일용직 노동자 임금으로 생각하면 140만명을 50년 동안 부양햘 만한 양이다. 영국 인구는 1870년에 대략 2000만명이었으니 1인당 금융시장 규모는 180파운드가 된다. 동일한 주식과 채권이 암스테르담, 파리, 베를린, 브뤼셀 같은 자본시장에서도 거래되었고, 1870년 유럽 인구는 모두 3억명 쯤 되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숫자에는 속임수가 약간 들어 있다. 그래도 어떤 기준에서 보든, 런던 자본시장이라는 기술은 엄청나게 많이 저장된 인간의 에너지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중개하고 있었다. 주식과 채권을 발행한 나라와 주시고히사는 결국 이렇게 비축한 자본의 현재가치를 증권 소유자에게 약속한 셈이다. 투자자는 자신의 생애주기가 흐름에 따라 그 가치 이상을 소비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자본은 도둑맞은 노동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라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막대하게 모아 둔 비축물자였다. 1870년 런던 증권거래소는 현재에 심은 받침대 위에 올라 과거의 저축과 미래의 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거대한 경제 지렛대였다.
- 17세기와 18세기에 벌어진 무역대국이 국가차원에서 국제무역을 보호하려던 결과이다. 반면 19세기에 주권을 잃게 되는 과정은 차츰 계약 위반의 결과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투자자 권리보호라는 명목은 주권침해를 정당화했다. 금융계약은 역사의 임계점에 도달하여, 이제 정치권력을 재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1차 아편전쟁 전 중국에서 유일한 개항장이던 광저우에서 처음 설립된 서양회사들은 공식허가를 받은 공행을 써야만 했다. 이는 1843년부터 필수요건에서 제외되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국에 있는 무역회사를 크게 좌지우지한 이들 중국인 관리자를 가리키는 역사용어가 매판(comprador)이다. 매판은 무역회사가 속한 중국인 대리인이자, 아편, 비단, 차, 면화 같은 상품교역을 처리하고 수수료를 받는 중개인이기도 했다. 이들은 외국 회사의 핵심 고용인으로 치외법권을 누리는 한편, 중개자라는 처지를 이용하여 스스로 무역하기도 했다. 조약항이 늘어나자 매판자리도 많아졌는데, 이 자리를 채운 사람은 광저우 상인들이었다. 매판의 핵심성격은 신뢰보증, 가문에 기반한 인맥으로 중국 국내 사업체와 접촉하는 접점이었다. 바로 이 인맥에 서양회사가 신뢰할 만하다고 보증해주는 것이 매판의 일이다. 어느 한쪽이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피래를 보는 사람은 매판이기 때문에 보통 높은 보수를 받았다. 매판 중 매우 많은 사람이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금융 노하우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매판은 언어구사에서 두 가지 또는 그 이상 능한 전문가일 뿐 아니라, 두 금융제도에 익숙한 전문가이기도 했다. 이들은 상품과 제조품뿐 아니라 금융기술로도 동양과 서양을 중개했다. 그 형태는 은행업 참여와 중국 자체 증권거래소 설립이었다.
- 중국은 매판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특히 금융 및 기술 근대화를 배우려고 학생을 유학시켜 단 40여년 만에 주식회사 자본주의의 교훈을 흡수했다. 중국 상인과 관리는 주식을 발행하고 은행을 설립하며 철도를 부설하고 국제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하는 방법을 빠르게 배워 나갔다. 외국이 아편전쟁을 개시하고 배상금을 부과하며 치외법권과 조약을 통해 중국 영토와 중국 상업에 대한 주권을 침해하는 와중이었는데도 말이다. 이 이야기는 금융혁신이란 정치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나타나는 결과라고 해석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비교적 보수적인 관점에 따라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중국에서 급격하게 일어난 금융혁신이 놀랍고도 예기치 않은 결과를 불러 왔다고 해석해도 충분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과 18세기 미국 독립전쟁은 예상보다 공통점이 많다. 미국에서도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경제발전을 보던 식민지 관리들이 중앙정부의 통제에 반발했다. 미국에서는 세금, 토지회사, 해외무역 규제가 촉매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는 발전에 깊이 개입하던 중앙정부가 중요 요소였다.
- 공화국이 새로 들어선 후 중국 금융시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 시기에는 장점과 약점이 모두 드러났다.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는 중국 철도권을 국내 투자자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부족한 정부재정을 회복하려면 외국 자본시장에서 돈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13년에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연합체로부터 선후대차관을 도입했다. 미국은 원칙에 따라 참여하지 않았다. 차관조건은 중국 신정부에 매우 가혹했다. 한 마디로 자금을 빌려준 나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과 같았다. 혁명 이후 중국은 소위 군벌시대에 만연한 정치불안에 신음했다. 국채는 대부분 1921년에 채무불이행이 선언되었으나 해상무역 관세로 보증받은 국채의 원리금은 계속 납부되었다. 1939년에는 사실상 모든중국 국채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이 시점에 중국 금융이 죽어가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사람도 있을텐데 그렇지 않다. 39년 당시 상하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금융중심지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하이 와이탄 지역 강변에 금융사 건물로 이룬 위풍당당한 벽이 건설된 시기가 바로 20세기 초이다. 그리고 이때 중국의 주식시장도 번영했다. 중국의 정치와 경제는 혼란에 빠졌어도 상업과 금융기반은 호황을 누렸다. HSBC가 1865년에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얻었고, 룬촨자오상쥐가 설립되면서 1872년 중국인 전용 주식시장이 출범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보자. 중국 회사와 외국 회사의 주식이 모두 활발히 거래되고 영어신문과 중국어신문을 가리지 않고 주가가 실리기 시작한 때가 그 시점이다.
-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1720년 전후에 회사를 만드는 실험을 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한 시기는 1704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1830년까지는 지나친 투기를 우려할 정도로 주식이 거래되었다. 투기열풍은 1869년과 1893년에 불었는데, 이 중 1893년에는 주식담보대출 규제가 완화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따라서 러시아 시장의 역사는 미국 주식시장 발전가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 IMF의 중요한 특징은 국가채무를 보증받는 옛 방식을 없앴다는 데 있다. 예컨대 이제는 채무를 상환받기 위하여 루르 지역을 담보로 잡힐 필요가 없다. 원리금을 직접 상환받기 위하여 채무국 관세나 운하 사용료 징수권을 차압하지도 않는다. 이제 IMF는 거시경제지표를 미래 대출조건으로 설정했고, 부채수준이 심각하다면 체계적인 경제조정을 요구했다. 그 수단은 이기적인 채권보유자 또는 대출은행이 아니라 거시경제학자가 설계한 해결책인데, 재정긴축, 화폐가치 절하, 수출증대, 무역자유화 정책 및 민영화 도입 등 다양했다. 이처럼 IMF로부터 조건을 부여받은 국가들은 조건이 가혹하다거나 처방이 잘못되었다면 불평하기도 했다. 예컨대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 사례를 보자. IMF와 유럽연합이 요구한 대로 재정을 긴축한 그리스 경제는 호전되기는 커녕 실업률 악화 등 고통을 겪었음. 그런데 최근 그리스 채무 불이행 사태를 1898년 그리스 채무재조정 사태와 비교해 보자. 당시 그리스는 크레타섬 영유권을 두고 벌인 전쟁에서 오스만제국에 패하여 지금과 마찬가지로 국제채무를 상환할 수 없었다. 그리스 정부는 IMF와 협상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영국 채권자협의회아 협상했다. 그리하여 구제금융을 얻은 대가로 마치 1878년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했듯 각국이 참여한 위원회가 그리스 금융을 장악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정부수입을 대신 가져가 채권을 상환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패전으로 오스만제국에 지급해야 할 전쟁배상금 재원도 가져가는 결과를 낳았따. IMF는 최소한 국가의 주권은 보전해 준다. 이처럼 새로 등장한 구조를 케인스가 혼자 설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주요 참여자라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 이유는 일찍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경험한 데 있었다. 현대 그리스는 케인스에게 어느 정도 고마워해야 한다. 비록 구제금융을 제공하며 온갖 불쾌한 일을 일으켰지만 최소한 국가로서의 주권은 보전해 준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만약 언제나 순현재가치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투자여부를 결정하다면 새로운 것은 절대 나타날 수 없다. 기술진보가 진행되는 것은어리석게 도박하는 사업가 덕이다. 케인스가 존 로를 얼마나 깊이 알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1720년에 대중의 마음과 자본을 사로잡은 새 기술과 새로운 회사의 꿈과 희망 때문에 거품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이 특별한 해에 투기의 밀도가 높아지자 그동안 잠재해 있던 자연력이 새로 나타나 자본시장이 금융의 관심을 순식간에 극복하고 모든 가능성을 움직였다. 케인스는 이를 경제의 강력한 잠재력으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이 힘을 정부가 길들여 거시경제 균형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경제정책이 대중의 기대를 관리할 수 있다고 통찰했다. 미래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 주면, 사람들은 현재에 지갑을 열고 소비한다. 시장 심리는 사람들이 비이성적 공포를 느낄 경우 경제를 억누를 수 있지만, 제대로 관리되면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올 힘이 된다. 케인스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정부는 호황을 없애는 방식으로 불황을 공격하지 말고, 거품이 절정에 달할 때 개입하고 시장심리를 자극하며 관리함으로써 하방 나선을 멈추게 해야 한다. 케인스의 계획은 경제를 호황 비슷한 상태로 영구히 유지하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투자수익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주가가 하락하며, 투기꾼이 별 도리 없이 판돈을 회수할 수밖에 없고 공장에 주문이 끊기기 시작할 바로 그때, 정부는 당나귀가 척박한 상황을 곱씹고 있지 말고 보상에 눈을 돌리도록 막대기 끝에 매단 당근을 눈앞에 두면 된다는 영리한 생각을 했다.
- 29년 시장붕괴가 미국인에게 금융시장이 불확실하다고 경고했다면, 대공황은 거시경제의 엄청난 위험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위험에 대응할 금융해법이 필요했음. 30년대에 실업가 빈곤이 만연하자 미국이 저축과 사회보장에서 절박한 위기에 직면했따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대공황이 닥치기 전 미국에는 민영보험, 다양한 개인저축상품, 연방/주/시/회사 차원의 퇴직연금제도가 모두 존재했지만, 경제위기가 닥쳐 체계적 충격에 노출되자 이들 모두 취약하다는 사실이 밝혀짐. 20세기 초 미국은 주식회사에 희망을 걸었지만 불황이 오자 수많은 회사가 실패하면서 일자리와 퇴직연금도 같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사를 대신하여 현재와 미래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까? 바로 정부가 그 답이다.
- 후손에게 엄청난 빚을 물려주는 것이 옳으냐는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됨. 반면 할아버지 세대가 현대 인구추세를 무시한 결과를 빤히 내다보면서도 그런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보장 제도의 결손금을 떠넘긴 사람들은 할아버지 세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와 친척이 최소한도로나마 부양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사회보장제도는 보기 드문 금융혁신이다. 그리고 정부가 약속한 배분액보다 부채가 커질 미래가 되면 정부세입을 사용해야 파산을 막을 수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미래 입법자에게는 구조를 수정하여 계속 유지할 책임이 있다. 35년에 설립된 사회보장제도를 살펴보면 금융사의 교훈이 절묘하게 부각된다. 가격을 잘못 산정한 채 종신연금을 발행하여 재정을 충당했떤 18세기 유럽 각국 정부를 떠올려보자. 보험통게는 앞으로 등장할 민족국가의 존속에 그토록 중요한데도 어떻게 철저히 무시당했을까? 20세기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설계과정을 살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가격책정 오류가 일어난 것은 장기비용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치구조 때문에 단기 분쟁 해결에 가중치를 두었던 때문이라고 할 만하다.
- 노동자와 은퇴자 비율이 변하면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연금이 돈줄을 완전히 쥔 상황이라면, 점점 더 많은 세계의 자본은 노년층의 소유가 되어 노년층을 위해 투자되거나 또는 그렇게 약속될 것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다시 말해 자본을 가진 노인과 자본을 가지지 못한 젊은이 사이에 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엄청난 연금 지급준비금을 뒷받침하는 자산이 그저 정부의 약속일 따름인 상황이 더 그럴듯하다. 미국 사회의 보장제도는 운천징수방식을 기본으로 30년대에 설립되었거, 1770년대 프랑스 종신연금제도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기 때문에 파산했다. 역사는 미래를 거의 똑같이 찍어내는 틀이다 수학과 통계로 아물 세세하게 예측한다 한들 제대로 된 연금저축과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맬서스의 예언은 통렬할 정도로 옳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은 금융이 소용없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지금 돈을 받고 미래에 돈을 주겠다는, 금융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계약은 5천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발명된 이래 지금껏 쓰이고 있다. 하지만 퇴직 이후를 관리하는 방법을 전 세계 차원에서 만들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08년 금융위기와 제도구조 재건에 지난 10년 동안 많은 관심이 쏟아졌지만, 세계가 직면한 도전 중 가장 근본에 있는 것은 저축에 관련한 금융 그리고 정치다. 미국에서는 금융실패라는 미래가 이미 다가왔다. 디트로이트시가 파산하자 은퇴자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경찰, 소방관, 교사, 미화원 등 퇴직한 시 공무원은 돈이 가장 필요할 때 디트로이트시가 약속을 파기할 가능성에 맞닥뜨렸다. 프랑스혁명은 기억하는 편이 현명하다. 가장 기본적인 저축기구를 둘러싸고 정부와 시민이 맺은 사회협약을 위반한다면, 정치제도 전체가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금융채무 재조정으로 비칠 행동이 벌어진다면 현재 수혜자인 은퇴자는, 그리고 정부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젊은이는 깊이 영향을 받고, 다양한 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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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니스가 야프섬 화폐 시스템의 이런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했을 때 안내인은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가까운 마을에 누구나 엄청난 재산가라고 인정하는 엄청난 집이 있지만, 아무도, 심지어 재산가 본인조차 그 재산을 만진 적도 본 적도 없다. 엄청나게 크다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기만 할 뿐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상태 그대로 있는 페이가 그 재산의 근원이다."
알고 보니 그 페이는 아주 오래전 바벨투아프섬에서 야프섬으로 옮기던 중 폭풍우를 만나 바다게 가라앉은 것이었다.
"굉장히 큰 페이가 바다로 떨어져 사라진 사건은 시시한 일이라 입에 올릴 이유가 없다는 생각, 그것이 해저 수백 미터 아래에 있더라도 시장성에는 아무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 보편적이었다. ... 돌 화폐의 구매력은 바닷속에 있어 보이지 않을 때도 소유주로 추정되는 사람의 집 한구석에 놓여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효했다. 중세시대 수전노가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쌓아놓은 황금 덩어리가 그랬듯이 부를 상징하는 의미만 담긴 듯했다. 어쩌면 워싱턴 재무무 금고를 꽉 채우고 있다는 은덩이와도 비슷했다. 우리는 그것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지만, 그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증명서의 힘에 기대어 거래한다."
퍼니스의 유별난 여행기는 1910년에 출간되었지만, 경제학계의 눈길을 끌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 한 권이 어쩌다 영국 왕립경제학회 기관지 이코노믹 저널 편집부로 흘러들어갔다. 편집부는 켐브리지 대학교 출신 젊은 경제학자 케인스에게 이를 읽어보라고 주었다. 20년 뒤 화폐와 금융에 관한 세상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으나, 그 당시만 해도 영국 전시 내각의 신출내기 관료에 지나지 않았던 케인스는 퍼니스의 여행기를 읽는 내내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퍼니스의 여행기 덕에 화폐에 관해서라면 세계 어느 나라 국민과 견줘도 철학적으로 훨씬 심오한 생각을 만들어낸 야프섬 원주민을 알게 되었다. 현대의 금 보유 관행은, 논리적으로 더 뛰어난 야프섬 관행에서 배울 점이 많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가 어째서 야프섬의 화폐 시스템이 굉장히 중요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을 준다고 생각했는지 밝혀내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 야프섬의 돌 화폐 이야기는 화폐의 기원에 관한 전통 이론의 설명에 도전장을 내민다. 더 나아가 화폐는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개념에도 심각한 의문을 제기함 전통이론에 따르면 화폐란 교환의 매개체로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상품들 중에서 선정된 물건이며, 화폐교환의 본질은 재화와 서비스를 이 교환수단을 통해 맞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야프섬의 돌 화폐는 이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다.
첫째, 누군가를 지름 30센티미터에서 360센티미터에 이르는 굉장이 크고 단단하며 무거운 돌 바퀴를 교환수단으로 선택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대부분 사례에서 돌 바퀴를 옮기는 것은 거래대상인 재화를 옮기는 것보다 훨씬 힘들기 때문
둘째, 페이는 다른 모든 것과 교환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의미에서의 교환수단도 아니었다. 페이가 교환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운반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페이가 바다에 빠진 사례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문제의 페이를 교환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고사하고 실물을 본 적도 없었다. 야프섬 주민이 이상하게도 페이가 어찌 되건 무관심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화폐 시스템에서 핵심은 교환수단으로 사용되는 돌 화폐가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
- 교환수단으로 선정된 상품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야프섬 주민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애덤 스미스는 다양한 시대 다양한 장소에서 당야한 상품이 화폐로 선정되었다고 주장했음. 다시 말해 뉴펀들랜드섬에서는 말린 대구, 버지니아에서는 담배, 서인도제도에서는 설탕, 스코틀랜드에서는 못이 화폐로 쓰였음. 그러나 국부론이 나오고 나서 한두 세대 지난 뒤 거기 실린 사례가 과연 타당한지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미국인 은행가 토머스 스미스는 1832년 '통화와 은행에 관한 소고'에서 애덤 스미스는 이들 사례를 두고 특정 상품이 교환수단으로 사용된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 그 모든 사례는 알고 보면 근대 영국에서 그랬듯 파운드, 실링, 펜스 단위로 계산된 거래와 다르지 않았다. 판매자는 자신의 장부에 화폐단위로 채권을 기재했고, 구매자도 자신의 장부에 화폐단위로 채무를 기재했음. 판매자와 구매자가 누적 채권과 채무를 서로 상계하고 남은 채무의 순 잔액을 그 가치에 해당하는 이런저런 상품을 털어버렸다는 사실은 그 상품이 화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는 신용 시스템 및 신용 시스템 이면의 정산 시스템이 아니라 상품 지불에만 주목한 바람에 상황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 상품 자체가 화폐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논리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헛소리로 귀결되고 만다 화폐의 본질을 다룬 뛰어난 논문을 두편이나 썼지만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경제학자 앨프리드 미첼 이니스는, 뉴펀들랜드섬에서 말린 대구가 화폐로 사용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이야기에 담긴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직설적인 말로 정확하게 정리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주산물이 화폐로 사용되는 건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가설에 따르면 교환수단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똑같이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부가 말린 대구로 물품 대금을 지급했다면, 어부와 버래한 상인은 똑같이 말린 대구를 구입한 대금을 말린 대구로 지급해야 한다. 누가 봐도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야프섬의 페이가 교환수단이 아니었다면, 페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더 중요하게는 야프섬의 화폐가 아니었다면, 무엇이 야프섬의 화폐였을까? 이 두가지 물음에 대한 답은 굉장히 간단하다. 야프섬의 화폐는 페이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근원적 신용거래 및 정산 시스템이었고, 페이는 이 시스템을 추적, 기록하는 보존수단이었다. 페이는 이들 신용거래를 나타내는 증거물에 불과했다. 뉴펀들랜드섬 주민이 그랬듯이 야프섬 주민이 물고기, 코코넛, 돼지, 해삼을 거래하는 과정에서도 채권과 채무가 발생해 쌓였다. 이들 채권과 채무는 사후정산을 통해 서로 상쇄되었다. 즉, 일회성 거래가 끝난 뒤나 하루 단위, 혹은 일주일 단위 거래가 끝난 뒤 거래 당사자는 서로 원한다면 적절한 가치의 통화, 즉 페이를 교환해 이월된 미결제 잔애을 정산했던 것이다. 페이는 야프섬 주민 사이의 매매거래에서 발생한 미결제 신용 잔액이 기록된,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였다. 다시 말해, 주화와 통화는 근원적 신용거래 시스템을 기록하고, 근원적 정산과정을 이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증거물이다. 주화가 바다에 떨어져 밑바닥에 놓여 있어도 그것이 그 소요주의 재산이라는 데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야프섬보다 경제규모가 더 큰 곳에서도 통화와 주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통화 그 자체는 화폐가 아니다. 화폐는 통화의 의미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신용 정산의 체계다.
- 화폐는 하나의 상품이고, 화폐교환은 재화와 교환수단을 맞바꾸는 것이며, 신용은 화폐상품을 빌려주는 것이라는 전통적 관점은 지난 수백 년간 이론가와 철학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그리하여 경제사상과 경제정책을 지배해왔다. 전통적 화폐이론이 분명히 틀렸다면, 그렇게 유명한 경제학자와 철학자가 그것을 믿었던 이유는 뭘까? 왜 오늘날 유명한 경제학자 대부분이 전통적 화폐이론에 담긴 근본적 이념을 현대 경제사상의 주춧돌로 삼기를 고집했을까? 간단히 말해 왜 전통적 화폐이론은 생명력이 강한 걸까? 여기에는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가 두가지 있다.
첫번째 이유는 화폐에 관한 역사적 증거와 관련 있다. 오래된 화폐가 적잖이 남아 있지만, 문제는 그 모두가 사실상 단 하나의 유형, 즉 주화라는 점이다. 전 세계 박물관은 고대와 현대의 주화를 잔뜩 쌓아두고 있다. 주화 및 주화에 새겨진 명문은 고대문화, 사회, 역사를 이해하려 할 때 꼭 필요한 주요 고고학적 자료다. 재능있는 학자가 해독한 주화 속 이미지와 짧은 문구는 고대 신의 위계서열, 고대 공화국의 이념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알려준다. 고대 주화를 연구하는 학문이 고전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전학은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도 해볼만한 우표수집과는 다름. 가장 성과 높은 역사 연구분야의 하나다. 물론 주화가 고대 역사 연구에서 굉장이 중요한 이유, 무엇보다 화폐 역사의 연구를 지배해온 이유는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은 것이 주화밖에 없기 때문이다.
- 12세기에서 18세기까지 600년 이상 영국 재정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독창적인 회계기술, 즉 재무무 엄대 시스템에 따라 운영되었다. 엄대는 웨스트민스터궁 인근 템스 강변에서 자라는 버드나무로 만든 막대기. 엄대에는 재무부의 수입과 지출내역이 눈금으로 새겨졌고, 대로는 글씨로도 적혔음. 지주가 국왕에게 납부한 세금의 영수증으로 쓰인 엄대가 있는가 하면, 국왕이 유력한 신하에게 빌린 돈을 만기에 갚았다는 기록이 담긴 엄대도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한 엄대를 보면 "풀크 바셋에게서 받은 위컴 농장지대 9파운드 4실링 4페니"라고 적혀 있다. 13세기 런던 주교 풀크 바셋이 헨리 3세에게 진 빚과 관련 있는 듯하다. 뇌물 수수를 기록한 것 같은 엄대도 있음. 민간인이 소장한 한 엄대에는 "국왕의 은전에 대한 대가로 윌리엄 드 툴레위크에게서 13실링 4페니를 받음"이라는 수상쩍은 글이 적혀 있다. 양쪽 거래 당사자는 엄대에 거래 세부내역을 기록한 뒤 엄대를 가로로 쪼개 하나씩 나눠 가졌다 채권자가 보관하는 것은 스톡이라 불렸고, 채무자가 보관하는 것은 포일이라 불렸다. 스톡이라는 말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영국의 국채를 가리킨다. 버드나무는 나뭇결이 독특하기 때문에 사실상 위조하기가 불가능하다. 또 엄대에 새겨두는 것이 웨스트민스터궁의 장부에 기록해두는 것보다 이동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엄대 보유자는 거기에 기록된 재무부 채권으로 제삼자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현대 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엄대는 채권, 주권, 은행권처럼 보유자에게 액면 금액을 수령할 권리를 보장해주는 무기명 채권증서였던 셈이다.
- 영국의 엄대 시스템이 보여주듯 주화는 거대한 빙산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음. 주화만으로 화폐와 금융의 방대한 역사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함. 한마디로 화폐의 존재와 운용을 알려주는 물리적 증거가 더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 자연재해가 발생해 현대 금융 시스템의 실상이 담긴 디지털 기록이 파괴되었다고 가정할대, 미래의 역사가가 무엇에 의지해 오늘알 화폐의 역사를 복원할 지 생각해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의 추론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파괴되지 않고 남은 파운드와 유로 동전덜, 5센트와 10센트 주화만이 오늘날 화폐의 전부라고 가정한다면, 현대 경제 생활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전통적 화폐이론이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두번째 이유는 사회과학 고유의 문제점과 직접 관련 있다. 자연과학과 달리 사회과학은 연구대상을 객관적 관점에서 바라보기가 굉장히 어려움. 어떤 제도가 우리 일상적 삶의 핵심부와 가까워질수록 한걸음 비켜서서 그 제도를 분석하기란 굉장히 까다로워진다. 한걸음 비켜서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화폐의 보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우며 화폐가 예나 지금이나 논쟁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는 두번째 이유는 화폐가 경제의 불가결한 일부이기 때문. 우리가 화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중국 속담의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며 물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야프섬 사례는 지난 수백년간 경제학자의 골머리를 썩이던 화폐의 본질, 즉 교환수단으로 기능하는 통화, 상품화폐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관한 그릇된 선입견을 벗겨냈다. 야프섬 같은 원시경제에서도 오늘날 경제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통화는 잠깐 사용하다 마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용거래 뒤 정산하는 메커니즘의 기초를 이루는 시스템이 화폐의 본질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전통이론이 그리는 것과 전혀 다른 화폐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그림을 마주하게 되었다. 화폐를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의 핵심은 신용이다. 화폐는 상품교환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본요소로 이루어진 사회적 기술이다.
첫번째는 화폐의 액면금액으로 표현되는 추상적 가치.
두번째는 개인이나 기관이 서로 거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채권과 채무의 잔액을 기록하는 신용거래 시스템
세번째는 원래 채권자가 그 채권과 아무 상관없는 채무를 정산하기 위해 제삼자에게 채무자의 채무상환 의무를 양도할 가능성.
이 세번째 기본요소가 매우 중요함. 모든 화폐는 신용이지만, 모든 신용이 화폐인 것은 아님. 양도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 차이가 남.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금전소비대차계약만 나타나는 한 차용증서는 신용이지만, 화폐는 아니다. 차용증서를 제삼자에게 양도할때 신용이 생겨나고, 이는 화폐로 양도가능한 신용이다. 신용이 생겨나 화폐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화폐는 단순한 신용이 아니라 양도가능한 신용이다. 19세기 경제학자 겸 변호사 헨리 더닝 매클라우드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화폐의 근본적 성격이 들날 것이다. 분명히 말해 화폐의 주요 용도는 채무를 측정하고 기록하는데, 이 사람에서 저 사라으로 채무의 양도를 쉽게 하는 데 있다. 금, 은, 종이 등 그 무엇으로 만들어졌던 이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은 화폐인 것이다. 그래서 화폐라는 말과 양도가능한 채무라는 말은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종류가 무엇이든 양도가능한 채무를 나타내는 것은 화폐다. 또 화폐는 그 소재가 무엇이든 다름 아닌 양도가능한 채무를 나타낸다."
채권은 양도가능하다는 혁신적 생각 덕분에 화폐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전이 일어났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사용해 거래하면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채권을 양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경제와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 누가 인류의 운명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발견을 했는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부채도 판매 가능한 상품이라는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아일랜드 은행 폐쇄 사례는 은행과 신용카드, 위조방지 표식이 새겨진 지폐 같은 공식적 장치는 화폐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 이들 장치는 사라질 수 있지만, 화폐는 살아남는다. 신용거래 및 정산 시스템으로서 팽창과 수축을 한없이 반복하며 거래의 원활한 순환을 도움. 화폐가 신용거래 및 정산 시스템으로 기능하려면 신용도가 높은 채무자가 존재하고, 제삼자가 채무자의 채무를 인수할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어야 함. 경험에 비춰볼 때 정부와 은행이 나서면 이 두가지 기준이 쉽게 충족되지만, 개인은 물론이고 기업은 그러기가 쉽지 않음. 그러나 아일랜드의 은행 폐쇄사례가 보여주듯이 이 경험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님. 공식적 화폐 유통질서가 해체되더라도 사회는 효과적 대안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 우리는 형체와 내구성을 겸비한 주화를 비롯한 모든 통화는 화폐이고, 그 위에 신용과 채무라는 마법과 같은 무형의 장치가 놓여 있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다. 양도가능한 신용이라는 사회적 기술이 자본적 힘이나 화폐의 원초적 실체다. 야프섬의 돌 화폐 페이, 중세 영국의 버드나무 엄대는 물론 은행권, 대용화폐,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벌어진 통화 혼란사태 때마다 작성된 차용증서, 오늘날 선진국 은행이 널리 사용하는 전자 데이터 등은 모두 무수한 채권, 채무관계의 근저에서 수시로 변화하는 잔액을 기록한 증거물이다. 뉴턴 역학이 양자역학으로 바뀌면서 물리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극적으로 달라졌듯이, 화폐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경제현실을 이해하는 방식도 극적으로 달라진다.
- 구소련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이 계획이나 계획을 조율하는 계획가가 없어도 경제가 작동할 수있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듯이, 시장경제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는 사회가 시장이나 화폐 없이도 작동할 수 있다는 생각에 놀랄 것이다. 화폐와 시장이 존재하기 전에 무엇이 사회를 조직했을까?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이에 대해 풍부하고 자세한 대답을 들려준다.
- 화폐가 없던 암흑시대 그리스사회는 어떻게 작동했을까? 의식주 같은 인간의 기본욕구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부족원이 자기 땅에서 생산한 농산물로 근근이 먹고사는 자급자족 경제였기 때문이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공동체를 조직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가지 사회제도도 강조한다. 일리아드는 특히 전쟁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전쟁에서 도시를 점령하거나 적을 물리친 뒤 전리품을 나눠 갖는 것은 그중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이는 일종의 소득분배 시스템으로서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분배규칙부터 빈번하게 논란이 된다. 사실 일리아드의 줄거리는 그리스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와 그리스 동맹군 사령관 아가멤논이 누가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해야 하는지를 놓고 벌이는 말다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오딧세이의 시대에 이르러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오딧세이는 트로이에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여정과, 아버지를 찾아 에게해를 떠도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오디세이 시대에는 일리아드 시대와 전혀 다른 제도가 장면을 지배함. 다시 말해 부족장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이 등장한 것. 동료 귀족과 만나거나 헤어질 때 선물을 주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이 선물은 다음번 찾아가면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 원시적 형태의 교환경제는 사회적으로 동등한 사람과의 유대를 가시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미래에 대비한 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전리품 분배규칙이 그랬듯이 교환경제 규칙도 종종 분란을 일으키곤 했다. 트로이 전쟁 자체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규칙을 어기고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신부인 헬레네를 데리고 달아났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암흑시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전쟁중일 때를 제외하면 교환경제가 가장 중요한 경제적 상호작용 시스템이었다. 사실 교환경제는 그 당시 세게관에 비춰볼 때 핵심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호메로스보다 200년 뒤에 활동한 어떤 시인은 행복한 삶의 본질을 포착해 이렇게 읊었다. "아들, 사냥개, 말 그리고 외국에서 돌아온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리니."
- 거의 모든 면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암흑시대 그리스 사회와 달라도 아주 달랐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에는 원시적이고 평등한 부족사회가 있었지만,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만명의 주민이 반신반인 왕의 지배를 받으면 다층적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된 도시가 있었다. 또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에서는 부족장이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두르며 평민을 지배했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는 신전관료가 운영하는 회계 시스템에 의한 정교한 지배가 뿌리를 내렸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 경제는 호혜성 원리와 희생의식이 지배하는 단순한 경제였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 경제는 세련된 경제계획 시스템이 지배하는 복잡한 경제였다. 호혜성 원리와 희생의식이 수천년간 무수한 원시부족에게 낯익은 것이었다면, 경제계획 시스템은 현대 다국적 기업 경영자에게 낯익은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었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 경제와 암흑시대 그리스 경제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똑같았다. 신전 관료의 계획경제건, 암흑시대 그리스의 원시부족 제도건 화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대단히 뛰어난 상업문명이 발달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경제를 뽐냈으며 문자, 숫자, 회계를 발명한 사회로 꼽힌 고대 메소포타미아가 왜 화폐를 발명하지 못했을까?
- 전통적 도량형 개념은 구체적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 아래에서부터 만들어진 것, 눈앞에서 진행되는 활동과 가장 관련깊은 측면을 포착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는 경작지의 둘레를 재서 그 넓이를 알아낸다. 그러나 중세 촌뜨기 농부에게 밭의 넓이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톨트 쿨라의 설명을 들어보자. "밭의 두가지 질적 측면이 대단히 중요하다. 첫째가 밭을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고, 둘째가 밭에서 거둘 수 있는 수확물의 양이다." 그 결과 밭을 측정하는 전통적 단위는 한 사람이 하루에 쟁기질할 수 있는 넓이나 일정한 양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이를 기준으로 정의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넓이의 단위를 정하면, 밭의 질적 수준에 따라 넓이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음. 현대인이 보기에 일반성 없는 단위였지만,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이 사례는 모든 도량형 개념의 적절성 정도와 표준화 여부는 그 용도가 무엇인가에 좌우된다는 일반적 사실을 보여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량형학은 정적인 학문이 아니다. 측정용도가 바뀌면 측정단위와 측정기준도 바뀐다. 게다가 측정용도가 측정단위, 기준은 서로 기줌은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한다. 즉, 관습이 바뀌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측정단위가 새로 등장하는가 하면, 범위가 더 넓은 도량형 개념이 발명되고 더 일관된 기준이 적용됨에 따라 새로운 방식의 기술적, 경제적 협력이 활기를 띠기도 한다. 고립된 자작농 위주의 경제에서는 마을마다 다르고 일관성 없는 여러 측정 시스템과 기준 시스템으로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의 시대, 즉 기계의 시대이자 대량생산의 시대는 표준화를 요구했고, 국제무역과 산업의 급성장은 효율성이라는 명분하에 공통의 단위를 필요로 했다. 오늘날에는 공통의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보편적 단위의 필요성이 한층 더 높아지고 있다.
- 고도의 기술과 세련된 문화가 반드시 발전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역사를 보면 새로운 사상의 흡수를 거려했거나 흡수할 능력이 아예 없었던 선진적 문명이, 기존 성취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후진적 민족에게 따라잡힌 사례가 풍부하다. 고대 세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혁신적인 사회 시스템, 즉 관료제에 의해 운영되는 대도시와 복잡한 경제가 있었다. 관료제는 문자, 수, 회계 같은 최첨단 사회적 기술을 이용해 최적의 효율과 성과를 발휘했다. 인류 문명의 정점을 찍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서방 미개민족에게서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들 미개민족은 1000여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미 사라진 투박한 부족제도를 기반으로 소규모 사회를 조직해서 살았다. 그러나 그리스는 달랐다. 그리스인은 문자와 숫자를 받아들이면 편익이 엄청나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들은 동방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적절한 관계를 맺자 마자 새로운 기술을 철저하게 받아들여 전 그리스 세계로 퍼뜨렸다.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서 문명을 전파한 민족은 레반트 지방의 페니키아인이었다. 그리스 인이 암흑시대 말기부터 광범위하게 관계를 맺은 페니키아인은 항해술과 장사수완이 뛰어난 민족이었다. 그리스 문자에 관한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로 글귀 세줄이 간명하게 새겨진 유명한 술잔이 꼽힌다. 1954년 이스키아섬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이 술잔의 제작연대는 기원전 750년에서 700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감. 불과 몇 십년 사이 문자와 숫자를 사용하는 능력이 동으로는 흑해 연안에서 서로는 시칠리아섬과 티레니아해 연안 식민지까지, 그리스 세계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문자와 숫자라는 새로운 기술은 그리스 문화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650년 이후 100년간 전례 없는 지적 혁명이 일어났다. 수량화하는 능력, 기록하는 능력, 반성하는 능력, 비판하는 능력 덕에 사고의 행방이 일어난 것이다.
- 메소포타미아는 화폐의 세가지 요소 중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자와 숫자의 발견을 기반으로 발전한 회계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정교한 관료경제, 통제경제에는 보편적 경제적 가치라는 개념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제각각 독자적 기준이 있는 제한적 용도의 가치개념만 필요했고, 그들은 이를 완성시켰다. 화폐의 첫번째 구성요소인 추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경제적 가치의 단위를 개발하지 않았다. 반면에 암흑시대 그리스에는 비록 원시적 형태이긴 했지만, 보편적 가치개념과 보편적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있었다. 그리스 암흑시대에는 회계 시스템은 고사하고 문자도 숫자도 없었음. 화폐의 첫번째 구성요소가 발생 초기 형태로 존재했지만, 두번째 구성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의 최신기술인 문자, 숫자, 회계가 야만적 서방에서 싹튼 보편적 가치의 척도라는 개념과 결합하자 비로소 화폐의 전제조건이 형성될 수 있었다.
- 화폐의 두가지 구성요소, 즉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가치 단위개념과 화폐를 단위로 삼아 장부에 기록하는 관습이 널리 확산됨에 따라 세번째 구성요소인 탈중앙적 양도원리도 나타남. 보편적 경제적 가치라는 새로운 개념이 싹트면서 중앙 통제기관의 승인을 받지 않고 의무를 상쇄하는 것이 가능해짐. 또 객관적인 경제적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 즉 시장개념은 그 가능성이 부단히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남. 시장이 있을 때 사람들은 중앙 통제기관에 무엇을 선호하는지 알려 행동지침이 받는 대신, 시장에서 가격을 흥정하고 임금에 합의할 수 있다. 이때 흥정이 성공하려면 공통의 언어가 있어야 함. 흥정하며 주고받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서로 공유해야 함. 그래서 가치개념과 표준화한 가치측정 단위의 공유는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임. 다시 말해 흥정이 일어나려면 어떤 재화와 서비스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경제적 가치의 단위도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달러화는 무엇인가에 관한 일반적 합의가 없다면, 시장바닥에서 달러화로 표시된 가격을 놓고 흥정하는 것은 새와 벌에게 말을 거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최초의 혁명적 화폐화 경험은 사회와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경제 중앙통제기관과, 고착화된 사회계층을 특징으로 하던 전통사회 시대는 끝났다. 대신 화폐사회시대, 시장이 거래를 조직하는 원리로 기능하는 시대, 가격이 인간의 행동지침으로 작동하는 시대, 그리고 야망과 기업가 정신, 혁신이 지배하는 시대가 새로 열림. 낡은 우주론은 죽어갔고, 그와 더불어 공정한 사회질서는 우주질서의 지상 축소판이라는 낡은 생각도 사라져갔다. 대신 돈 버는 능력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는 경제중심적, 화폐중심적 생각이 발전했음. 낡은 제도 아래서는 사회적 지위가 절대적이었음. 농부로 태어나면 농부로 살다 죽었고 부족장으로 태어나면 부족장으로 살다 죽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었다.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는 돈이었다. 그리고 돈의 축적에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없다. 재산도 잃고 친구도 잃은 아르고스의 귀족 아리스토데모스는 새로 자리잡은 질서에 넌더리를 내며 "아, 돈! 돈 나고 사람 나는 세상이야"라는 유명한 말을 내뱉었다. 이제 돈이 사회적 지위, 가문, 명예를 좌우했고, 전통은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누구든 돈이 없으면 별 볼 일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 아르헨티나 외에도 통화 레지스탕스가 정부의 경제적책에 맞선 게릴라전을 벌인 사례는 더 있음. 90년대 초 구소련이 붕괴할 무렵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음. 러시아 정부는 수십 년간 보조금에 의지해 유지되어온 기업을 겨냥해 예산을 매섭게 줄이는 충격요법을 취했다. 그 바탕에는,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기업을 대거 청산하는 창조적 파괴를 거쳐 살아남은 기업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기업경영자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경영하던 기업이 공식 금융부문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는 꽉 막히고 경영자들은 조용히 퇴직하라는 압력에 직면했지만 그들은 묘책을 생각해냄. 독자적 통화 네트워크를 만들어 거래를 정산한 것. 공급사슬로 연결되어 장기간 거래신용을 쌓아온 덕분에 국정통화를 사용하지 않아도 채권, 애무를 상쇄할 수 있는 기업이 모인 네트워크였다. 97년에 이렇게 통화 네트워크를 통해 정산된 기업간 거래규모는 러시아 전체 거래규모의 4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됨. 노동자는 대용화폐나 바우처러 급여를 받음. 우크라이나의 한 애널리스트는 그 발행규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약. "이들 사적 화폐, 독립회계 화폐의 종류가 우크라이나는 수백가지, 러시아는 수천가지에 이른다."
- 제정 초기 로마 상류층이 농장 경영으로 부를 쌓던 시절은 한참 전에 끝남.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농장을 경영해 부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부자가 된 사람도 있다."라고 당시의 로마인을 노래했다. 그는 "전 재산을 국채에 쏟아부었다."는 이유를 대며 청구서에 지불하지 못해도 봐달라고 간청한 금리생활자가 드물지 않았던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 살았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시대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부동산은 거들떠보지 않고 화폐 형태로만 부를 쌓기로 선택한 부자가 있었다. 로마의 은행가도 예금을 받고 대출을 일으키며 국제거래를 정산. 그때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금융 엘리트는 복잡한 금융기법으로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을 현혹했다. 금융 엘리트의 행태에 신물이 난 키케로는 신랄하게 비꼬는 글을 썼다. "야누스 신전 부근 영업소에서 일하는 어떤 영악한 친구들은 어디서 돈을 벌고 어디에 돈을 맡겨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그 어떤 학파의 철학자보다 말을 잘한다." 이렇듯 화페화가 널리 진행되었으므로, 로마인이 현대 금융의 낯익은 또 하나의 특징인 신용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님. 로마 사회가 현대 사회와 닮은 점이 많아 가끔 기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원후 33년 로마 황베 티베리우스의 재무관은 최근 몇 년간의 사적 대출업 붐이 과도하다고 판단. 비정상적 과열양상을 보인 사적 대출업을 진정시키려면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결정 내리고 선행법령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수십 년 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시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부유한 세습귀족이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이자를 엄격히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짐. 카이사르는 한마디로 대출업자의 자기자본요건을 엄격하게 정하는 법을 제정했던 것. 이 법이 알려주는 바는 명백했다. 아무리 사적 대출업을 규제해도 부지런한 대출업자는 매번 규제를 피하는 방법을 용케 알아낸다는 것이었다. 역사가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끊임없이 새로운 규제조치를 취하며 사적 대출업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대출업자는 희한한 수법을 개발해 되살아났다."고 썼다.
- 화폐사외에서 전통사회로 전면적으로 후퇴했으나 완전하게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대형 금융거래의 정교한 기법부터 자그마한 주화를 사용할 때의 소박한 편리함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금융기술의 파노라마는 잊혔지만, 로마 화폐사회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보편적인 경제적 가치개념이 그것이다. 유동적 사회구조가 다시 딱딱하게 굳어감에 따라 확고한 부족관계와 봉건관계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화폐사회의 전형적 징표인 보편적인 경제적 가치개념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훗날 유럽 사회의 재화폐사회화를 널리 촉진시키는 지적 고정자본이 되었다. 8세기 말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을 제패한 뒤 화폐사회는 부활했다. 샤를마뉴 대체 치하에서 파운드, 실링, 펜스 등의 화폐단위가 되었고, 유럽 전역에서 일관된 기준에 따라 화폐가 발행되었음. 그러나 이 첫번째 화폐 르네상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12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야 2000년 전 에게해에서 확립된 논리에 따른 재화폐사회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됨. 12세기말부터 서유럽 저지대나라(벨, 네, 룩 일대)를 시작으로 전 유럽에 걸쳐 전통적인 현물지대가 화폐지대로 바뀌어감. 농노가 1년 중 일정기간 동안 봉건영주에게 노역을 마치던 부역제도도 임금노동으로 대체됨. 가난한 사람이 보기에 세습귀족과 다르지 않았던 민간 관료는 봉급을 받으며 전문적 일을 하는 집단이 되기 시작. 이거은 민간관료를 부릴만한 경제력이 있는 지역에서는 로마시대 이후 처음으로 조세의 금납화가 재도입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 12세기말에서 14세기 중반에 거린 이른바 장기 13세기에 벌어진 유럽의 재화폐사회화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현상을 초래. 첫째, 화폐로 거래하며 부를 쌓아가는 개인과 기관이 출현. 그들은 군주 이상으로 화폐에 대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화폐 사용이 늘어날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기적이었다. 경제활동의 화폐화가 더욱 심해지고 화폐경제에 말려드는 사람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시뇨리지를 부과하는 대상도 확대됨. 그러나 군주는 국고를 채워주는 시뇨리지의 마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술적 한계까 아니라 정치적 한계였다. 새로 등장한 화폐 이익집단은 때가 되면 군주의 도를 넘는 시뇨리지 추구행위에 반대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 리옹 같은 대도시에서 시장이 서면 유럽의 대상인은 대륙 곳곳의 마을과 도시에서 매주 열리는 장을 크게 키울 기회로 생각해 모여들었다. 이런 시장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고가의 사치품 거래가 일어나는 주요 공간으로, 거기서 중세 경제의 역동성이 크게 발휘되었다. 그것은 물론 지역에서 생산되는 변하기 쉬운 다양한 농수산물이 소규모로 거래되는 공간이기도 했음. 그러나 장기 13세기 동안 국경을 넘나드는 무역을 조직하는 방식이 바뀜. 무엇보다 무역업에서 노동의 분화가 일어남. 상인 가문의 수장은 이제 더는 상품을 갖고 돌아다니지 않았다. 본국에 머물면서 대리인을 주요 수출시장에 보내 상주시켰고, 계약에 따라 육지나 행상으로 상품을 운송하는 전문 운송인을 두었다. 상인은 상품이나 상품거래대금의 명의변경 같은 국제거래의 법적, 재무적 측면이나 전화 한 통화로 받은 수입과 다른 통화로 나간 지출을 조정하는 재무적 계산에 주로 관심을 기울임. 상품을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넘기는 지루한 작업은 상인보다 더 낮은 계급에게 넘어갔다. 이처럼 무역을 조직하는 방식이 바뀜에 따라 시장의 본질도 서서히 바뀌어감. 본래 리옹 같은 대도시의 시장은 지역 소매상인의 거래가 맨 밑에 위치하고, 도매상인과 국제상인의 거래가 중간에 위치하며, 낮은 수준에서 누적된 신용거래의 상계처리가 맨 꼭대기에 위치하는 피라미드 모양.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럽 상인계급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페르낭 브로델이 말했듯이, "피라미드 밑바닥이 아닌 꼭대기에 상품이 아닌 신용이 집중되었다." 상품을 물리적으로 교환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반면 지난 몇 달 동안 국제거래에서 누적된 채권과 채무 잔액을 정산하고 결제할 기회는 날로 늘어갔다. 한 시장이 문을 닫고 다른 시장이 문을 여는 사이 국제거래는 주화가 아니라 환어음에 바탕을 둔 신용으로 결제되었다. 환어음은 범유럽 상인가문이 고객에게 발행한 크레디트노트였다. 그러면 고객은 해외도시의 공급자에게 상품대신 크레디트노트를 건네주었음. 결국 1555년 무렵 리옹 시장은 유럽의 상인가문이 거래대금을 조달하기 위해 환어음을 발행함에 따라 상호 누적 채권과 채무잔액을 정산하는 정산소 역할을 주로 했다. 상품이 아니라 화폐를 교환하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이 됨. 온종일 문서작업에 매달리던 이탈리아 상인도 이 시장 시스템의 일부였음
- 유럽의 대상인 가문은 영업활동이 복잡해지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거래 사슬의 중간에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음. 신용을 계층적으로 조직화할 가능성을 재발견 한 것. 지역 소매상인의 지불약속은 고객과 공급자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면 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지역 소매상인보다 거래규모가 훨씬 크고, 보유자금이 아주 많으며, 오랜 성공의 역사를 누려온 국제적 대상인의 지불약속은 달랐다. 대상인이 자신의 지급약속으로 지역 소매상인의 지불약속을 대체하면 그 전에는 고작 지역경제 테두리 안에서만 유통되던 차용증서가 대상인의 명성이 자자한 곳이라면 어디서나 유통되는 차용증서로 바뀔 수 있었다. 결국 지역 소매상인의 신용이 맨 아래에 놓이고, 도매상인의 신용이 중간에 놓이며, 배타적이고 유명하며 결속력이 강한 국제적 대상인 집단의 신용이 맨 꼭대기에 놓이는 신용 피라미드가 세워졌다. 다시 말해 국제적 상인 가문이 지역 상인가 지역상인의 거래상대에 끼어들어, 유동성 없는 쌍방향 지불약속을 이 채권자에게서 저 채권자에게로 쉽게 양도가능한, 그래서 대상인 가문의 신용이 통하는 곳에서는 화폐처럼 유통할 수 있는 유동성 있는 부채로 바꿔 놓았다. 달리 말해 아주 영세한 지역상인조차 국제적 대상인의 이름 아래서, 지역의 테두리를 벗어나 원래 채무자가 누구이고 무슨 사업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유럽 다른 지역의 상인과 거래하고 대금을 결제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즉 사적 결제 시스템의 창출에서 근대 은행의 발명이 싹틈. 근대 은행의 기원이 보잘것 없어서 의외라 생각할 수도 있다. 흔히 생각하기에 은행 부문의 지급 서비스는 틀에 박힌 지루한 업무이고 대출이나 증권, 채권거래는 역동적인 업무일 것 같다. 그러나 자금조달 및 지급결제 활동은 은행의 기본활동이다. 이 활동 덕분에 은행은 통화 역할을 하며 특별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 은행은 한편으로는 차용증서(은행이 예치한 예금, 은행이 발행한 채권과 어음 등 은행입장에서 부채)를 발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용증서(은행의 대출금과 보유유가증권 포트폴리오 등 은행 입장에서 자산)를 모아둔다. 모든 기업은 공급자에게 미지급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고객에게서는 대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놓는다. 대부분 기업에서는 이들 재무적 자산과 부채의 가치가 설비자산, 업무용 부지와 시설, 재고자산 등 실물자산의 가치보다 작다. 그러나 은행은 정반대다. 리옹 시장의 수수께끼에 싸인 이탈리아 상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올리면 짐작가능함. 은행의 실물자산은 예나 지금이나 무시할 만한 것으로 평가받음. 현대 은행의 대차대조표에 적힌 금액을 보면 어마어마하다. 07년 영국 스코틀랜드 왕립은행의 대차대조표에 적힌 자산규모는 영국 전체 GDP보다 더 컸다. 제조업 기업도 그만한 규모의 자산을 쌓아둘 수 없다. 은행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대차대조표에 적어둘 수 있는 것은 거의 모든 자산이 지불약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 거의 모든 부채도 마찬가지다.
- 환은행가가 유럽 대도시 간 무역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환어음을 지속적으로 발행하고 인수함에 따라 채권과 채무잔액이 쌓여갔음. 환은행가 집단의 결속력이 끈끈해, 미결제 잔고가 쌓여도 기꺼이 용인했음. 그렇지만 누가 누구에게 얼마나 빚졌는지 분명하게 파악하려면 채권과 채무를 정기적으로 상쇄해야 했다. 누적 채권과 채무는 쌍방이 합의하면 즉석에서 상쇄할 수 있었지만,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채권과 채무를 덩어리로 정산할 기회가 점차 자연스레 열렸다. 대상인 가문은 분기마다 리옹시장에서 모임을 갖고 서로의 장부를 맞추며 정산했다. 시장이 열리고 나서 처음 이틀 동안은 열심히 채권과 채무를 사고팔고 새 환어음을 발행하며 오래된 환어음을 취소했다. 일과가 끝날 무렵에는 대상인 가문 대리인이 일제히 분기별 장부를 마감해 대상인 가문 사이의 채권과 채무잔약을 확정지었다. 셋째날은 가장 중요한 환율의 날이었다. 환은행가 집단의 고위 간부는 따로 모여 콘토, 즉 에퀴 드 마르와 유럽의 다양한 법정화폐 사이의 환율 명세서를 작성. 환율명세서는 전체 금융 시스템의 중추였다. 시장 마지막날인 결제의 날에 환율명세서에 적힌 환율로 미결제 잔액을 다음 정산일까지 이월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현금으로 결제할 것인지 합의해야 했다. 리옹의 비밀스러운 이탈리아 상인 같은 신중한 환은행가의 임무는 시장이 열린 첫째 날 채권과 채무의 거래를 성사시켜 결제의 날까지 잔액을 완벽하게 털어내고 이익을 올리는 것이었음. 그러나 환은행가가 경이로운 부와 권력을 누리는 실제 원천은 갓 생겨난 외환시장이 요동치는 틈을 파고들어 투기할 줄 아는 능력 하나만이 아니었다. 환어음 시스템은 국제무역이나 외환거래는 촉진하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지만, 그 수단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는 훨씬 포괄적이고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시스템이었다. 환은행가는 유럽 곳곳에서 사적 신용이 화폐로서 유통될 수 있게 하는 거대한 기계의 가동부를 차근차근 조립해나갔다. 거기에는 화폐의 세가지 기본적 구성요소가 담겼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크레디토와 마찬가지로 고유의 추상적 가치단위, 에퀴 드 마르가 있었다. 또 독자적 회계 시스템도 갖췄다. 파치올리가 산술집성에서 정리한 부기규칙가 대상인 가문이 부기규칙을 적용하기 위해 합의한 표준규약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환어음과 주요 시장의 어음교환소를 이용해 채권과 채무잔액을 이전하고 정산하는 시스템도 마련. 환어음은 국가 내부의 공적 화폐와 상호작용하는 초국적 사적 화폐가 되었다. 환은행가는 국제적이고 자율적이며 결속력이 강한 네트워크로 범유럽 신용 위계체계의 최정점에 올라섬으로써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 성공. 환어음 시스템을 완성함으로써 유럽 전역에서 유통될 수 있는 사적 화폐를 만들어냄. 환은행가가 만든 사적 화폐의 경제적 의미는 분명했다. 상업혁명을 촉진했고 환은행가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줌. 뿐만 아니라 이는 획기적 정치변화, 금융의 면모를 영원히 바꿔 놓는 변화의 조짐이기도 했다.
- 잉글랜드 은행설립으로 화폐 이익집단과 군주는 역사적 타협에 도달. 화폐 레지스탕스가 마침내 권력을 잡았고, 그 보답으로 그림자 군대가 비록 부분적이긴하지만 정부를 지지했다. 이 타협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화폐 시스템의 직계 선조다. 화폐를 창조하고 관리하는 일은 사적 은행에 거의 전적으로 위임되지만, 법정화폐가 최종정산자산으로 남아 있는 시스템 말이다. 여기서 최종정산자산은 피라미드 맨 위에서 두번째 층에 있는 은행간, 혹은 이들 은행과 국가 사이에 얽히고 설킨 채권, 채무 잔액을 정산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신용잔액을 말함. 현금은 군주가 지켜야 할 신용의 징표라는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유통중인 화폐 대부분은 사적 은행계좌에 기록된 신용잔액이다. 1694년의 정치적 타협을 모태로 탄생한 군주의 화폐와 사적 화폐의 융합은 아직도 현대 화폐 시스템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 맨더빌은 비록 가볍게 툭 던지듯 우화를 발표했지만 그 우화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심오한 생각을 담았다고 생각했다. 탐욕스러운 말버러 공작의 특별한 사례는 일반화될 수 있었다. 언뜻 사악해 보이는 모든 행동이 의도와 달리 실제로는 최상의 결과를 낳음. 맨더빌은 1714년 이 풍자시의 증보판을 새로 펴냈다. 증보판의 제목 '꿀벌의 우화: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은 사회의 역설적 면을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인간 사회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우호적 자질과 속 깊은 애정이 아니다. 이성과 자기부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도덕성도 아니다. 선천적인 악에서 도덕적인 악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 세상의 악이라 부르는 모든 것 덕분에 인간사회는 존재할 수 있다." 자칫 악을 장려하는 말로 들리겠지만, "인간의 모든 예술과 과학의 진정한 기원은 악이다. ... 악이 멈추는 순간 사회는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더라도 심하게 망가질 것이다." 사회 차원에서 최적의 결과를 낳는 최상의 방법이자 사실상 유일한 방법은 야망, 탐욕, 원초적 이기심을 추구하는 개인차원의 행동을 장려하는 것이다. 당파성 짙은 풍자시인이 진지한 정치경제학자가 되었다. 맨더빌의 시집은 심한 분노를 샀다. 철학자와 성직자가 앞다퉈 그의 끔찍한 주장을 반박했다. 그가 쓴 시집과 수필집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금융혁명이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이라는 날개를 달고 탄력을 받았듯이, 맨더빌의 역설적 주장은 분명 시대정신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음. 화폐는 어디서나 유통되엇다. 해마다 새로운 회사가 세워졌다. 시골 아낙네조차 주식투자에 대한 수다를 떨었다. 기업혁명과 금융혁명이 빚어낸 새로운 세상은 설명과 정당화가 필요했다. 바로 이때 물의를 일으키며 등장한 맨더빌의 주장은 그 두가지를 동시에 달성해낸 것처럼 보였다. 계몽시대의 떠오르는 샛별 중 한 명이던 스코틀랜드인 애덤 스미스가 받아들인 맨더빌의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통할 만한 화폐사회이론의 밑거름이 되었다.
-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조직적 경제활동과 개인의 행동을 연관시키는 체계적 이론을 최초로 정립. 금융혁명이 전통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살핀 초기 사상가들의 생각을 최초로 일관성 있게 종합. 그는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질서와 좋은 정부가 자리를 잡았고, 개인의 자유와 안전도 향상되었다'고 주장. 애덤스미스는 이 같은 금융혁명의 정치적 배당이 축적되고 지급되는 이전의 역사적 역설도 깨달았다. 전통사회의 최대 수혜자였던 봉건영주는 화폐의 마력에 푹 빠졌다. 그들은 사치품을 무척 좋아했고, 그로 인해 봉건지대의 화폐화가 촉진됨. "봉건영주는 유치하고 천박하며 추잡한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내동댕이쳤다." 맨더빌이 읊은 역설적 과정을 애덤 스미스가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행동이 의도와 달리 사회의 이익을 효율적으로 증진할 수 있게 보장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은 대단히 유명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또한 이 만족스러운 결과가 개인이 내린 자기결정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시스템 자체의 특징이라는 점을 강조. 개인은 '사실 사회의 이익을 증진할 의도가 없다. 심지어 자신이 어떻게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지 알지 못한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 가치가 만물의 척도가 되고 화폐사회의 동적 관계가 전통사회의 정적 관계를 대신할 것이라는 전망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것은 정치적 균형과 경제적 균형을 지향하는 객관적 시스템으로서의 화폐사회에 대한 전망이기도 했다. 전통사회가 전복되면, '임차농이 독립자영농이 되고 지대가 사라지면, ... 도시는 물론 농촌에도 정상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어느 누구도 그 정부가 작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화폐사상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업적을 남겼음. 경제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 양쪽에서 화폐사회를 철저하게 정당화했던 것이다. 화폐사회는 실천적 차원에서의 화폐 대타협에 어울리는 지적, 도덕적 차원에서의 역사적 타협이었음. 잉글랜드 은행 설립자는 사적 은행과 국정화폐를 결합시키면 역사속에서 경제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를 향한 힘이 용솟음칠 것으로 믿었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아버지 로크는 누구나 화폐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리고 화폐에 수반되는 자연스럽고 변치 않는 경제적 가치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화폐는 새로운 복음인 입헌정부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선언. 화폐는 절정기에 도달했다
- 화폐는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전통사회는 엄두도 내지 못할 방법으로 사회적 안정과 사회적 이동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독특한 약속을 했다. 화폐가 혁신적이고 매력적인 발명품이 된 것은 이 약속 덕분이었음. 화폐사회가 확산됨에 따라 사회와 경제가 전통에 얽매여 옴짝달싹 못하는 곳에서 야망과 혁신이 굉장치 효과적으로 싹텄다. 화폐는 은행과 더불어 정치혁명의 분위기를 조성했을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규모로 사회 구석구석을 활발하게 변화시켰다. 화폐의 장점을 의심어린 눈으로 바라본 유명한 회의주의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9세기 중반의 고도로 발전한 화폐사회를 두고 다음과 같이 불평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모든 고정된 관계, 빠르게 굳어진 관계는 유서깊은 오랜 편견 및 견해와 함께 사라져갔다. 새로 형성된 모든 관계역시 미처 자리잡기 전에 낡은 것이 되고 만다. 견고한 것은 아무 흔적없이 사라진다. 신성한 모든 것이 모독당한다.
- 늑대 사이에서 살아가려면 늑대처럼 울어야 한다.
- 로의 시스템은 믿기지 않는 성공을 거두었다가 한순간에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탓에 금융사기극의 전형으로 매도당했고, 로는 18세기 버니 메이도프로서 금융사기극의 주연을 맡았다는 비난을 샀음. 영국 작가 대니얼 디표는 로가 한 일을 놓고 일확천금을 좇는 젊은이의 본보기라고 비꼬았다. "로의 사례가 말해주는 바는 간단하다. 할 수만 있다면, 검을 차고 다니다 애인의 남자친구 한두 놈 죽여 교도소에 갇혔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탈옥하라. 낯선 나라로 건너가 주식 투기꾼으로 변신한 다음, 국채를 발행해 나라 전체를 거품경제속으로 몰아넣어라. 그러면 당신은 금방 대단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포의 평가는 너무 피상적이다. 로의 시스템은 화폐의 힘을 활용하려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실험이었다. 화폐사회의 장점은 살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결점은 피하기 위한 제3전략의 원형이었다. 스파르타 전략과 소비에트 전략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믿지 않았고, 화폐의 이용을 억제하거나 제한하려고 시도했음. 반면에 존 로는 야망과 기업가 정신을 촉발시킬 수 있는 힘이 화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믿었다. 로의 회의론은 화폐의 두번째 약속, 즉 고정된 금융적 의무가 제공하는 안전성과 안정성을 사회적 유동성과 결합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약속과 관련이 깊었다. 그래서 로의 전략은 보편적 경제적 가치라는 개념의 사용을 막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다. 대신 겨제적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을 유연하게 함으로써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만들어내는 것을 지향했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로의 시스템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그는 이행 불가능한 군주의 지급약속이라는 베일로 화폐의 모순적 약속에 담긴 위험을 가리는 대신 모든 화폐 사용자가 그 위험을 명시적 전면적으로 부담하게 하는 새로운 타협을 이뤄내려 했다. 로는 국가 소유 단일회사와 국가소유 단일은행을 합병시킴으로써 불산된 화폐 시스템과 금융 시스템에 숨어 있던 것을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었음. 모든 소득과 부는 따지고 보면 생산적 경제에서 흘러나온다. 화폐가 궁극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이 소득에 대한 청구권이다. 그러나 소득은 불확실하다. 세계는 불확실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소득에 대한 청구권의 가치도 불확실하다. 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일반적으로 화폐로 이용되고, 다른 말로는 부채라고도 하는, 고정적인 금융적 청구권을 가변적인 금융적 청구권, 달리 말하면 주식으로 바꾸는 것임. 그러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나 잉글랜드에 전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후에도 존재한 적 없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조세징수권을 비롯한 국가의 모든 자산을 소유하는 기업이다. 이 지분-화폐는 관습적 화폐보다 안정성이 떨어졌다. 1720년 로가 만든 시스템에 투자한 사람들이 깨달았던 대로 주식-화폐의 가치는 하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에서 지분-화폐의 이동성은 더 높았다. 로의 시스템은 이렇게 철저한 투명성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덜 강력한 대안도 내놓았다. 왕립은행이 발행하는 지폐, 즉 은행권이 그것이다. 이 은행권은 화폐본위의 단위를 잣대로 고정된 가치가 매겨졌다. 그러나 화폐본위 그 자체는 국왕평의회가 경제적, 재정적 관점에서 가장 적절할 것 같은 수준에서 결정했기 때문에 변동이 심했다. 달리 말하자면, 지분-화폐와 은행권의 유일한 차이는 지분-화폐는 시장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지만, 은행권은 군주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는 점이었다. 로의 시스템은 독창적이고 혁신적이었으며, 시대를 수백년 앞서갔다. 1973년 국제 금환본위제가 무너지고 명목화폐본위제가 전 세계 규범이 되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250년 앞을 내다본 것이었다. 그러나 로의 시스템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어디에 결함이 있었을까? 당연히 온갖 부수적 문제가 로의 야심만만한 계획을 방해했다. 로는 자신의 능력은 과대평가했지만, 자신의 시스템 때문에 특권을 빼앗긴 기득권 집단의 힘은 과소평가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는 계획을 세웠다. 게다가 공적 정부부채가 아니라 공적 정부지분을 제공한다는 로의 독특한 생각자체도 시대를 너무 앞선 것이었다. 이후 시대에 로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로의 해법에는 이들 부수적 문제를 압도하는 근본적 오류가 있었다.
- 메소포타미아인은 이렇듯 부채의 문제점을 꿰뚫어보고, 자신의 전통과 종교적 우주론에 바탕을 둔 해법도 마련해 놓았다. 부채의 일부나 전부를 탕감해 사회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하늘의 신을 대리해 지상을 다스리는 국왕의 책임이라 보았음.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채로 인한 부담이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도달하면, 부채를 전액 탕감해주는 전통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이자부부채가 존재했다는 증거만큼 역사가 길다. 이 전통은 도시국가 라가슈의 국왕 엔테메나가 통치하던 기원전 24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통은 고대 근동세계로 전해져 성서시대 희년의 관습으로 살아남았다. 성경의 레위기를 보면 히브리인은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고 즐겼다.
- 그린스펀이 사용하던 모형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결함이 그린스펀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문제, 말 그대로 수조 달러짜리 문제였다. 경제학은 역사가 짧은 학문이 아니다. 중앙은행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난 200년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회과학의 여왕 경제학은 왜 파멸적 오류를 범했을까? 세계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재무장관을 지낸 미국 최고의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는 오바마 정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2011년 4월 세번째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금융위기로 인해 정통 거시경제학과 금융이론이 경제현실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놀랍게도 그렇다고 인정. 서머스의 설명에 따르면, 정통 거시경제학이 2차대전 이후 쌓아올린 방대한 이론체계는 금융위기가 닥치자 아무 소용 없었다. 왜 경제가 휘청거리는지, 휘청거리는 경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말도 못했던 것이다. 서머스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경제학 전통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미국 금융시스템이 심하게 흔들리며 혼수상태 일보직전에 이른 08년 말과 09년 초 백악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정책을 수립하는 동안 그는 세명의 경제학자 월터 배젓, 하이먼 민스키, 찰스 킨들버거를 스승으로 지목. 서머스는 스스로 인정했듯이 정통 경제학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오래전 경제사상가를 스승으로 골랐다. 먼저 하이먼민스키는 화폑ㅇ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한 파격적 이론을 내놓았지만, 주류 경제학계의 냉대에 시달리다 96년 사망한 경제학자였다. 찰스 킨들버거는 78년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를 쓴 경제사학자. 대학 강단의 경제학자는 경제사를 별 볼 일 없는 경제학의 방계 학문쯤으로 취급함. 1877년 사망한 영국 금융언론이 월터 배젓은 1873년 명저 '롬바드 스트리트'를 썼다. 그는 당시 근대 경제학계에서 경제학자로 대접받지 못했다. 서머스는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 은행과 금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했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물 간 경제사상가를 스승으로 삼고 의지. 그리고 금융위기의 가장 심각한 국면이 지나 중기 정책대응 방안을 모색할 때가 되자 케인스에게 눈을 돌림. 서머스는 이런 말을 했다. 현대 강단 거시경제학의 핵심연구 프로그램은 "정책입안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나는 기본적인 케인스주의 경제학 체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이 대안적 경제사상 전통의 어떤 점이 2차대전 이후 많은 사람이 정성을 쏟았떤 방대한 체계보다 훨씬 쓸모 있고, 훨씬 현실적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최대 규모의 금융붕괴가 한창 진행되던 때 1870년대 초의 런던 금융시장을 설명한 월터 배젓의 롬바드 스트리트가 빼어난 21세기 경제학자의 최신 연구성과가 담긴 학문적 성취도 높은 무수한 책을 제쳐두고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서머스의 말을 빌리자면 "경제학은 아는 것은 많다. 잊은 것도 많다. 그리고 한눈 판 것도 많다."
- 근대 화폐 시스템은 잉글랜드 은행이 세워진 뒤로 확장을 거듭했지만, 그 작동원리는 언제나 똑같았다. 잉글랜드 은행은 특권을 누리는 사적 은행가 집단의 상업적 감각과 화폐에 신용과 보편적 양도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는 군주의 공적권한을 결합시켰음. 설립 이후 150년 동안 잉글랜드 은행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적 은행가는 꾸준히 증가. 군주가 자신의 고유권한을 잉그랜드 은행에 빌려주었듯이, 잉글랜드 은행도 자신의 고유 권한을 수많은 은행에 빌려주었다. 오버렌드거니주식회사의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음중개인에게 알리며 정책을 전환할 때까지 줄곧 그랬다. 그 결과 근대 화폐 경제는 영국이 부도나느냐, 마느냐가 일개 합자회사 이사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고, 모든 은행이 잉글랜드 은행에 의지하며, 모든 상인이 은행가에 의지하는 상황에 빠졌다.
- 배젓에 따르면, 롬바드가가 글로벌 경제의 화폐시장인 이유, 세계 역사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은행이 많은 화폐를 발행하는 공간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잉글랜드 은행이 군주와의 대합의를 통해 화폐 유통권을 얻어냈듯이, 롬바드가의 은행과 어음중개인도 잉글랜드 은행으로부터 화폐유통권을 얻어내고, 이어 지방은행도 롬바드가의 은행과 어음중개인으로부터 화폐 유통권을 얻어냈다. 지방과 런던의 은행은 기업가와 지주가 저축한 돈을 예금으로 유치했다. 상인은행과 어음중개인은 기업 발기인으로부터 투자기회를 제공받았다. 피라미드 맨꼭대기의 대어음중개인, 즉 최초의 근대식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은 한 예금자와 기업가에게서 다른 예금자와 기업가에게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음할인과 인수를 가능하게 했고, 그 흐름을 조절했다. 위기 상황에서 잉글랜드 은행이 해야 할 핵심역랑은 분명했다. 잉글랜드 은행은 졸지에 최후에 기댈 최종 어음중개인이자 최종 은행가가 되었다. 아무도 어음을 할인해주겠다고 나서지 못할 때 잉글랜드 은행만이 어음을 할인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젓의 설명에 따르면, 이 놀라운 화폐의 기반시설, 즉 잉글랜드 은행은 산업혁명의 운영시스템이었다. 잉글랜드 은행이 있었기에 영국은 세계 다른 나라를 제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잉글랜드 은행의 좋은 면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에서 잉글랜드 은행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파국적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다. 엄청난 유혹, 고전파의 추상적 경제학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라고 밝혀낸 유혹이 일었다. 군주의 대리인인 중앙은행만이 화폐 시스템의 존립을 좌우하는 신용과 신뢰를 지탱할 수 있으므로, 평상시건 위기시건 경제전반의 건전성은 물론 시티 오프 런던의 건전성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싶은 유혹 말이다. "우리는 어려운 과제에 매달리다보면 쉬운 과제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부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살다보면 자연스러운 상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롬바드가에는 관리해야 할 화폐가 너무 많다." 1866년 위기당시 잉글랜드 은행은 세계 최대 금융중심지 한복판에서 관리능력과 정책 능력면에서의 시대착오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 유동성을 신용의 명백한 한 속성으로 생각하며 중시한 배젓의 통찰이나 배젓보다 앞선 시대의 조플린과 손턴의 통찰도 결정적으로 놓치고 말았다. 이들 세사람은 유동성이란 존재할 때는 신용을 화폐로 만들어 놓지만, 존재하지 않을 때는 신용을 무기력한 쌍방신용으로 바꿔놓는 속성으로 바라보았다. 유동성은 배젓과 케인스가 그토록 강조하고 싶어했던 금융과 실물경제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거시경제정책의 근거였다. 법정화폐는 어떤 사적화폐 발행자도 감히 바라기 힘든 유동성을 어느정도 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 후 강단 금융학은 국가가 유동성을 지원할 필요가 있는가, 필요가 있다면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가 하는 신학적으로 고민스러운 주제를 거시경제학자에게 흔쾌히 떠넘긴 채, 사적 시장에서 거래되는 금융 청구권을 신용도가 가격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다. 유동성이라는 추가적 수준까지 살피며 상황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 지난 10여년 간 통화안정을 헌신적으로 숭배한 해악은 심했다. 외곩으로 낮고 안정적인 인플레이션만 추구했기 때문에 08년 글로벌 경제를 무릎꿇게 만든 여타 통화요인과 금융요인에는 관심을 쏟지 못했다. 아니, 이들 요인을 더 악화시키시만 했다. 이단적 예지자 하이먼 민스키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외곬으로 통화안정을 추구할 때의 해악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음. 중앙은행이 낮고 안정적인 인플레이션을 달성함으로써 한가지 유형의 위험을 완화하는 데 성공할수록, 투자자는 더욱 자신감을 갖고 불확실하고 비유동적인 증권에 투자함으로써 다른 유형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할 것이다. 풍선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오른다. 바꿔 말하면, 높고 변동이 심한 인플레이션을 제거하면, 자산시장의 파국적 불안정을 초래함. 통화안정이 금융불안정을 야기하는 것이다. 모든 정책입안자가 정통 이론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왜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는지 알았다. 01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시경제학자이자 훗날 잉글랜드 은행 총재자리에 오른 머빈 킹은 "많은 사람이 경제학은 화폐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대부분 경제학자의 대화에는 화폐라는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설명한 다음, "경제학자가 사용하는 표준모형에 화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앞으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 추측하건대 경제학자의 대화에서 다시 화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그의 믿음은 적중했지만, 추측은 빗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화폐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제학을 확립하려고 했던 배젓과 케인스의 꿈을 무너뜨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궁극적 대답은 화폐에 관한 로크의 교리가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배젓은 화폐에 관한 로크의 교리를 공격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화폐가 거울나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화폐는 상품교환 수단이라는 마법에 걸린 사람은 정반대되는 증거나 논거를 아무리 많이 접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1866년의 위기 및 배젓이 이 위기에 보인 반응은 화폐와 경제를 이해하는 두가지 방식이 수렴하는 지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두가지 방식이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고전파의 화폐 없는 경제학에서 현대의 정통 거시경제학, 즉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중앙은행이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화폐사회에 관한 과학이 발전했다. 한편 배젓의 현장 전문가 경제학에서는 금융학, 즉 경영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은행가와 증권거래인이 사용하는 거래방법이 발전했다. 거시경제학은 화폐, 은행, 금융없이 경제를 이해하는 지적 틀이었고, 금융학은 경제없이 화폐, 은행, 금융을 이해하는 지적 틀이었다. 이렇게 경제학과 금융학이 지적으로 갈라진 결과 08년 금융부문에서 발생한 위기로 거시경제학이 역사상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 그리고 이후 은행 부문의 파탄 때문에 경제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현대 겨시경제학과 현대 금융학 둘 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래리 서머스가 지적했듯이 의지할 만한 대안 전통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물음, 즉 왜 경제학자는 위기가 닥치는 것을 몰랐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경제학자가 거시경제를 이해하는 틀에는 화폐가 없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수많은 사람이 은행가와 규제당국에 묻고 싶었던 물음, 즉 왜 당신들은 위험한 짓을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 역시 간단하다. 금융을 이해하는 틀에 거시경제학이 없었다는 것이다.
- 07년에서 12년 사이 25개국의 대규모 은행이 위기를 겪었는데, 그중 3분의 2는 자국 은행에 신용을 지원했다. 몇몇은 위기에 전례 없는 규모로 개입했다. 미국은 GDP의 4.5%를 은행 자본재구조화에 쏟아부었다. 대규모 전쟁이 한창일 때 지출하는 1년치 국방예산과 맞먹는 규모였다. 1816년 토머스 제퍼슨은 "은행 제도는 상비군 제도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경고. 제퍼슨의 경고는 놀라우리만큼 진실에 가까웠다. 영국은 GDP의 8.8%를 은행 자본재구조화에 지출했다. 이는 영국이 해마다 국민건강보험에 지출하는 예산규모보다 더 컸다. 아일랜드는 GDP의 40%를 썼다. 정부 각 부처의 1년 예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정부는 은행가를 철저히 돌봐주었다.
-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고 대침체가 시작되자 대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은행과 은행투자자는 일방적 정책만 펴왔다. 언제나 그렇듯 은행이 하는 일은 유동성 위험과 신용위험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만약 자산가 부채의 만기를 일치시키지 못하면, 중앙은행이 개입해 유동성을 지원했다. 대출이 악성으로 변하고 자기자본이 부족해지면 납세자가 신용손실을 메워주었다. 되돌아보면 그 결과는 얼마든지 예측가능했다. 전 세계 숱한 은행이 규모를 늘렸고 완충자본을 줄였다. 서슴지 않고 위험한 대출을 했고 자산의 유동성을 낮췄다. 덩치가 아주 커져서 쉽게 망하지 않을 은행이 늘어갔다. 그 결과 정부가 암암리에 제공하는 신용보험의 수준은 높이 치솟았다. 위기가 엄습하고 도덕적 해이를 억제하려는 정책입안자의 노력이 실패로 엄습하고 도덕적 해이를 억제하려는 정책입안자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야 정부가 은행에 퍼준 보조금의 진짜 규모가 드러났다. 리먼브러더스가 망하고 1년이 지난 09년 11월 전 세계 각국 정부가 은행부문에 지원한 자금 총액은 약 14조 달러로 추정됨. 전 세계 GDP의 25%를 웃돌았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납세자가 줄곧 들은 손실 예상액의 규모였다. 이에 반해 수익 예상액은 오롯이 은행의 주주, 은행 투자자, 직원의 차지였다.
- 2000년대 들어 수많은 소액 채무증권을 묶어서 거액의 새로운 채무증권을 만들어내는 증권화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주택담보대출, 자동차 대출, 기업대출, 신용카드 부채 등 온갖 종류의 신용은 하나로 묶인 다음 잘게 나뉘어 새로운 채권으로 발행되었다. 이들 채권은 신용평가기관의 평가를 받고 새로운 투자자에게 팔려나갔다. 신용시장을 통해 돈을 빌리는 것이 전에는 간단한 거래였다. 은행의 도움을 받아 회사가 발행한 채권을 개인이나 기관이 매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엔 그 과정에 굉장히 복잡해졌다. 회사는 여전히 채권을 발행하지만 최종투자자가 채권을 직접 매입하지 않는다. 채권 매입 목적으로 다른 회사가 취득해 보관하다가 자산 유동화 기업어음을 특수목적회사 앞으로 발행한다. 특수목적회사의 부채로 잡히는 자산유동화 기업어음은 제4의 회사가 매입해 보관한다. 이 제4의 회사의 채무증권은 또다른 특수목적회사가 매입해 부채담보부증권을 배서하는 데 사용한다. 헤지펀드는 다시 이 부채담보부증권을 매입해 머니마켓 뮤추얼펀드에서 대출을 받기 위한 담보로 사용한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최종투자자가 등장해 머니마켓 뮤추을펀드 지분을 매입함으로써 처음 채권을 발행한 회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슬에 현금을 공급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슬 맨 앞의 회사가 채권을 발행하는 수수료는 옛날보다 덜 든다.
- 20세기를 지나며 미국과 영국 은행의 보호적 완충자본의 규모는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포트폴리오 내 현금과 고유동성 증권의 비율 역시 불과 50년 사이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바젤위원회는 보호적 완충자본의 유지 및 포트폴리오 내 현금가 고유동성 증권비율 확대는 검증이 끝난 아무 문제 없는 무기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보다 화력이 더 강한 무기라고 진단을 내렸다. 2010년 12월 바젤위원회는 은행에 더 많은 자본을 보유하고 포트폴리오 내 유동자산의 보유를 늘리라는 요구는 위험한 행동에 큰 부담을 안겨준다. 밑바탕에 깔린 기본 주장은, 그렇게 함으로써 은행이 위험한 행동을 한 대가를 비싸게 치르게 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는 판의 크기를 제한함으로써 건전한 균형이 회복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규제는 틀이 정해져 있고, 이는 사적 편익과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그 어떤 산업에도 낯익은 것이다. 예를 들어 화학공장은 주주에게 줄 이윤을 창출하고 직원에게 줄 월급을 벌어들일 뿐 아니라 환경에 해로운 폐기물도 배출한다. 화학공장이 환경오염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무임승차를 즐기려 하면, 폐기물은 경제적으로 정당화되는 수준 이상으로 생산된다. 해법은 오염 유발자가 오염을 생산한 경제적 비용을 전부 지불하도록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규제기관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은 위기에서 드러난 심각한 문제를 이 같은 재래전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그들은 금융부문이 일으키는 오염은 화학공장이 일으키는 오염과 두가지 이유에서 다르다고 경고한다. 첫째는 문제의 규모다. 금융 시스템의 현재구조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운영할 때 잠재적인 사회적 비용은 너무 커서 조세시스템으로 억제할 수 없다. 은행에 부담금을 부과하면 유동성 지원과 신용지원이라는 직접적 재정비용을 거의 환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은행이 거둔 이윤 대부분을 빼앗아갈 테지만 말이다. 07년 이후 자업자득인 금융불안정으로 GDP 감소, 대량실업, 생산능력 상실 등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수십조 달러에 달한다. 엄청난 액수다. 바꿔 말해 재래전 방식을 고집한다면, 지구를 파괴할 정도로 위력이 큰 원자폭탄을 사용해야 겨우 이긴다는 이야기다. 세금부과가 아무 효과 없는 두번째 이유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은행 시스템의 성격상 개별 은행의 활동도 시스템 전체의 비상한 위험을 초래한다는 데 있다.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오염을 일으키는 화학공장 사례와 달리 추가세금을 부과해 위험을 불러오는 활동을 억제해야 함. 그러나 은행 시스템은 국제적이다. 세금을 부과할 정당성을 갖춘 다자가 정치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재래전을 고집한다면 좋은 무기로 무장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유엔군을 투입해야 이길 수 있다.
-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제도를 단순한 사회적 고안물이 아니라 자연계의 필연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것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건 불가능해져 제 아무리 그릇된 것이라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한다. 역사에는 그런 사례가 즐비함. 19세기에는 신체적 특징으로 흉악범을 식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실증범죄학이 크게 유행. 귀 모양으로 부정부주의자를 알아볼 수 있고 코 모양으로 절도범을 판별할 수 있다고 했음. 기괴하게 들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실증 범죄학을 믿은 사람은 얼굴이 특이하게 생긴 사람을 잡아 가두는 데 별 이해관계가 없었다는 점. 그들은 단지 범죄행위는 생리적 요인의 산물이라는 자연주의적 설명을 믿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인종주의도 19세기 미국에서 받아들여졌다. 신체적 차이로 유색인종이 열등함을 입증할 수 있다는 이론. 이 과학적 인종주의는 보수적 세계관이 아니라 진보적 세계관의 특징이었다. 사회과학에서의 자연주의적 추론, 즉 사회적 현상을 자연의 객관적 진실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자기강화적 특징이 있다. 사회적, 정치적 편견이라는 실을 갖고 가짜 사실이라는 그물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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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전 노후 대비가 어려운 이유
* OECD 보건통게 2019에 따르면 17년 기준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82.7년(남자 79.7년, 여자 85.7년)이다. 그러나 이는 전체 연령을 고려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현재 50세 남성은 81.45세, 여성은 86.84세까지 살 수 있다. 또 60세까지 생존해 있다면 기대수명은 더 늘어난다. 남성은 82.76세, 여성은 87.83세까지 살 수 있다. 기대수명은 연령에 따라 달라지는데, 현재 40대 여성의 기대수명은 90세 이상이다. 이처럼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생계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 건강이 악화되면 돈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60세 이후에 생애 의료비의 절반 이상을 쓰게 된다. 생애 의료비는 영유아기에 10%, 청년기에 10%, 중장년기에 30%, 60세 이상 노년기에 50% 가량 지출됨. 건강을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 노후에 대비해 돈이 필요하지만 은퇴 전에 충분한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 50-60세대 중 정년퇴직을 하는 사람은 절반도 안된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는 예고없이 퇴사를 강요한다. 운 좋게 정년퇴직을 했다 하더라도 충분한 돈을 모으기도 힘들다. 월급을 받기 무섭게 빠져나가는 생활비는 물론 주거비와 자녀양육비 등으로 허리가 휜다. 주변에서 재테크로 인생역전해야 한다고 하지만 갈수록 빚만 늘어간다. 어쩔 수 없이 은퇴 후에도 일해야만 한다.
- 일반적으로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원화의 가치가 떨어지니 우리나라의 수출경쟁력은 상승한다. 수출경쟁력이 높아지면 수출이 늘어나므로 경기가 좋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일반론이 통용되지 않고 있다. 19년 9월 23일 기준 원달러 환율은 1194원으로 올랐다. 그렇다면 수출에 청신호가 들어왔을까? 자본시장연구원의 '환율이 수출 및 내수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재고찰'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수출에는 환율상승보다 글로벌 경기가 더 큰 영향을 미쳤다.' 90년 이후부터 외환위기 직후까지 원달러 환율이 크게 상승했고, 수출도 증가했음. 하지만 이후에는 환율이 하락해도 수출이 줄지 않고, 환율이 상승해도 수츨이 늘지 않았음. 금융위기 직전(99-07)까지는 환율이 크게 하락했지만 글로벌 경기호조로 오히려 수출이 증가. 금융위기 이후(08-17)에는 환율이 상승했지만 오히려 수출은 줄어들었음. 다시 말하면 환율이 하락한 금융위기 직전에 수출이 연평균 12.7%로 가장 많이 증가했다. 금융위기 이후에 환율이 연평균 1.6% 상승했는데도 수출증가율은 5.2%에 그쳤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수출에 환율상승보다는 글로벌 경기가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 기업이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3가지
* CEO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직접 주도하라
* CEO부터 말단직원까지 모두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라
* 팀워크를 갖춰라. 아마존의 베조스는 최고의 팀워크를 만드는 노하우로 피자 두판의 법칙을 정립했다. 피자 두 판의 법칙은 팀원이 피자 두 판 이상을 먹을 인원보다 적어야 한다는 것. 17년 12월 기준 아마존 직원은 566,000명이나 되는데, 아마존은 회사 내부를 작은 팀들로 구성해 민첩하게 움직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 현재 센서 산업은 글로벌 하드웨어업체가 독과점하고 있다. 소자설계부터 부품생산까지 밸류체인을 통합한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업체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데, 이들 업체들은 시장에서 강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일례로 GE는 GE센싱, 보쉬는 보쉬 센서텍이라는 자회사를 통해 설비 및 자동차용 센서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센서 시장에 기존 하드웨어업체는 물론 소프트웨어업체와 사용자그룹이 새롭게 진입할 것이다. 기존 강자인 하드웨어업체는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거나 전문생산업체와 제휴 등을 통해 왕좌를 유지하려 할 것이고, 소프트웨어업체 또는 사용자 그룹은 사물인터넷 기기업체들과 제휴해 정보를 수집하고 기존 서비스 플랫폼의 방대한 정보와 접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일례료 17년 4월 구글은 슈퍼센서 역할을 하는 구글렌즈를 공개했다. 구글 렌즈는 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렌즈를 통해 인식한 정보를 스스로 학습해 사용자가 카메라가 담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이를 이해한다. 예를 들면 사용자가 와이파이를 연결하기 위해 와이파이 비번을 카메라로 찍으며, 구글렌즈는 그것이 와이파이 비번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와이파이에 연결시킨다. 강아지를 비추면 강아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식당 간판을 찍으면 해당 식당에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센서업계는 경쟁력이 낮은 편이고, 대부분의 센서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음. 현재 국내 생사업체의 85%가 매출액 300억 미만의 중소기업이고, 설계역량은 있지만 생산 인프라가 부실해 경쟁력이 낮은 편이다. 또 국내 센서 수요 규모는 약 70억불이나 되는데, 그중 90%를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다.
- 자동차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영국에서는 1865년 '붉은 깃발법'을 만들었다. 붉은 깃발법은 자동차를 도심에서 시속 3.2킬로 이상으로 못 달리게 하고, 한 대의 자동차에는 반드시 운전사, 기관원, 기수 등 3명이 있도록 제한하는 법. 당시 자동차는 증기기관차였기에 크기와 중량도 엄청나서 도로를 막기 일쑤였고, 소음도 굉장했다. 당시에는 도로에 말과 마차가 주로 다녔는데, 이 법은 마차협회 등 기득권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국은 가장 먼저 자동차산업을 출발시켰지만 이 법을 1896년까지 시행했다. 결국 후발주자인 독일과 미국에 뒤쳐지는 결과를 낳았다.
- 뉴트로열풍은 10년후까지는 아니겠지만, 3-5년 후까지 이어질 것임. 현재 유행하는 뉴트로 트렌드는 10-30대가 이끌고 있는데, 이들 세대는 과거의 문화를 경험한 적이 없어서 역설적으로 새롭고 신선하게 느끼고 있다. 왜 젊은이들은 과거의 문화에 매력을 느끼는 걸까? 1030세대는 어려서부터 디지털 기기를 접하며 자라왔다. IT기술 덕분에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게 되었지만 사실 디지털 기기는 우리에게 단조로운 삶을 강요한다. 다양한 취미를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화면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디지털 기기로 이것저것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 또 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트렌드는 자주 변한다. 1030세대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삶에 권태감을 느낀다.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한 미 제너레이션인 이들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함. 단조로운 일상에서 소확행을 느끼기 위해서는 무언가 자극적이고 새로워야 한다.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유행하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80-90년대에 유행하던 것들이 오히려 화려해 보인다. 또 옛거들에서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유행하는 뉴트로열풍은 일시적인 트렌드로 끝나지 않을 듯 싶다.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트렌드를 만들어내는데,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입장에서 뉴트로열풍은 큰 이익이 된다. 기업들은 비용대비 효율성이 높기 때문에 뉴트로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할 것이다. 일례로 신제품의 인지도를 1% 높이려면 막대한 개발비와 마케팅 비용이 필요한데, 소비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과거의 제품을 활용하면 적은 비용으로도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업은 잇스토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다. 잇스토리란 상품이 가진 이야기와 역사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가치 중심 소비를 하므로 잇스토리가 있는 상품을 선호할 수 밖에 없다. 기업입장에서 마케팅 비용도 줄이고 좋은 반응도 얻을 수 있으므로, 뉴트로 트렌드가 오래도록 유지되도록 힘쓸 것이다.
- 불황일수록 레트로가 유행하는데, 현재 유행하는 뉴트로는 몇년 전부터 유행한 레트로 트렌드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 심리학의 회고절정(reminescene bump) 이론에 따르면 노인들에게 전 생애의 기억을 회고하게 하면, 청소년에게서 청년기의 기억을 가장 많이 떠올린다. 이 시절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함. 경제지표가 안 좋을 때 사람들은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해 과거를 회상함. 현재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선진국 역시 저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서 해외에서도 뉴트로 트렌드가 유행하고 있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재규어 랜드로버는 뉴트로 트렌드에 부합한 신차를 출시할 계획이다. 재규어 랜드로버는 70년대에 유행한 E-타입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E-타입 전기차를 20년에 출시 예정. 이 자동차는 원래 6기통 엔진이 탑재되어 있었지만 신차는 미래형 전기차로 출시될 것이다. 또 외관은 예전모델의 이미지를 살리면서 실내는 최첨단 디스플레이를 갖춘 센터페시이와 신소재인 탄소섬유 강화 플라스틱을 적용한 대시보드로 꾸밀 것임. 국내외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 경제는 앞으로 10년간 연평균 2%이하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듯 싶다. 이런 상황에서 40대 이상 세대는 한국경제가 고성잗하던 80-90년대를 회상할 것이고, 그 시대 이후에 태어난 1030세대는 지금보다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체념 때문에 여전의 것들에 매력을 느낄 것임. 따라서 현재 유행하는 뉴트로 트렌드는 기성세대는 물론 1030세대를 당분간 사로잡을 것이다.
- 트렌드를 안다고 해서 100%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트렌드를 모르면 100% 실패를 장담할 수 있다. (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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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78년 개혁개방 이전에는 구소련으로부터 계획경제의 불완전성을 경험적으로 학습했으며, 이후에는 서구 자본주의 제도의 선택적 접근과 점진적 적용을 통해 시장경제의 중국화를 이행해 왔음. 지금까지 중국은 90년대의 아시아 국가들의 성장을 국제적 분업화를 통해 설명할 때 안행모델(Flying geese model) 대열의 후위에 위치해 왔으나 2000년대에 와서 고부가 기술을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고 있음. 이는 중국이 안행대열의 선두로 이동하여 아시아 경제를 주도하며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아시아 국가들이 기존의 중국의 위치를 대체하게 되는 것을 의미.
- 중국 중산층은 급증하는 가계부채와 실업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의 가계부채는 주택담보대출과 카드대출을 합하여, 08년 이후 빠르게 늘어나 중국 국내총생산의 52%에 달하는 수준으로 높아졌다고 프랑스 한 투자은행이 밝힘. 중국 가계부채 증가속도는 기업부채나 정부부채의 증가속도보다 빠르게 나타나고 있음. 특히 개인의 급증하는 카드대출로 인한 가계불안정은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음. 카드부채는 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미국의 카드대출비중보다 높은 수준. 현재 중국에서는 산업구조조정을 진행해 오는 과정에서 전통 제조업을 중심으로 인력의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있음. 제조업뿐만 아니라 최근 급성장한 IT기업들도 인력감축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어서 청년 취업 부문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 중국의 가계부채 문제와 함께 더욱 심각한 것은 미중무역전쟁으로 인해 경기침체가 장기적 양상을 보이며 수출중심 제조업에서 고용인력 창출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 중국 정부는 천만개 이상의 신규 일자리 창출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19년 경제성장률을 지난해 6.6%보다 낮은 6.0-6.5%로 제시하고 있음. 나아가 수출 채산성 악화에 따른 손실을 보전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미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이 달러대비 7.0 이상 오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음. 이는 미국의 중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율 인상을 대응하기 위한 전향적 조치다. 중국은 관리변동환율제라는 환율조정정책을 시행하고 있는데, 미국은 중국의 이같은 환율개입에 대해 환율조작국으로 규정했다.
- 중국의 도시발전은 주로 세 지역으로 나뉨
(1) 연안지역 : 대도시와 도시에 인접한 농촌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광역 도시권을 형성
(2) 중앙내륙지역 : 지역자원으로 경제적 자생력이 강한 중규모 도시가 주를 이룸
(3) 북서부지역 : 외부의 제한적 투자로 인해 농촌소득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 도시가 산재된 형태
농업부문이 고부가가치화된 스위스, 핀란드, 일본 같은 나라의 경우, 세계 국가중에서 GNI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도시화율이 선진국 중에서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남. 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비도시 지역의 소득수준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의미. 따라서 도시화가 경제성장에 정의 관계를 갖지만 일정수준의 도시화가 진행되면 도시화를 확대하거나 혹은 제한하는 것은 나라별로 선택적 고려사항이 될 수 있음. 예를 들어 일정수준의 도시화 이후 도시화를 제한하고 비도시 지역의 성장요소를 중점적으로 개발하는 도농간 균형성장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전국적인 도시화 추진으로 인프라 건설에 매진하기보다는 기존 도시의 산업기반을 강화하여 거주민의 수익확대를 통해 고부가가치화된 1차 생산물의 상품가격을 높이는 것이 비도시 지역의 소득향상에 기여하는 하나의 방안일 수 있음. 한편, 도시화율이 높게 진전되었지만 국민소득이 낮은 경우는 러시아, 멕시코, 터키와 같이 도시의 경제활동 기반의 취약으로 도시민 소득이 기타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경우를 의미.
- 현재 중국이 우려하는 것은 경기침체로 인해 주택가격하락이 가져올 내수시장의 구매력 저하와 금융권 부실채권 증가로 인한 금융시장 교란이다. 중국의 산업 가운데 금융분야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지만 주택담보대출의 실행을 위한 개인의 신용평가와 대출금 회수 등 대출행위가 매우 견실하게 이루어져 왔다. 만약 향후 경기침체와 더불어 주택가격이 급락할 경우 도시 중위층 이하의 가계를 중심으로 주택담보대출 부실이 증가할 것임. 2010년 초까지 중국의 거시경제 흐름이 호조를 보이는 가운데 주택가격이 급등. 중국 정부는 2010년 4월 '일부 도시의 주택가격 급등 문제에 관련 통지'를 통해 주택시장 개입을 본격화. 이 통지로 북경시는 한 가정당 신규로 하나의 상품방만을 구입할 수 있도록 주택구입제한 명령을 발표. 2010년 10월, 상해, 광주, 대련 등지에서 주택구입제한명령이 발표되어 주요 도시로 파급됨. 국내 부동산 경기의 안정 기조로 자금의 해외 부동산에 대한 투자관심이 상승하고 있음. 중국 정부는 국내 유동성 과잉으로 인한 물가상승 요인이 생길 경우 금리인상으로 대응해 옴. 그러나 금리인상이 지속될 경우 경기위축이 우려되어 국내 자금의 해외투자 승인을 통해 자연스러운 국내 유동성 감소효과를 이끌어냄.
- 중국 정부는 수요억제 정책 위주의 제한정책을 유지하되 한편으로 택지개발 공급확대 등 공급측면의 정책을 병행해 나갈 것이다. 향후 도심의 건축면적을 확보하고 택지공급을 활성화하기 위해 고층 아파트의 건축허가와 주거형 오피스텔에 대한 수요자 감세혜택 등 새로운 정책들이 등장할 것으로 보임. 만약 글로벌 무역분쟁으로 인한 경기하강 국면이 장기화될 경우 중국 중대 도시에서 아파트를 중심으로 주택가격 하락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 시진핑은 집단 지도체제에서 몇몇 인사를 중심으로 핵심 지도체제를 가져가면서 다수의 정적을 제거해 옴. 현 상황에서는 대적할 만한 인물을 찾기 어려움. 아이러니칼하게도 가장 큰 정적은 경기침체라는 복병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민생경제 도탄과 정부부패에 따른 민심이반으로 왕조 멸망을 초래해 왔다. 그래서 동일하게 지금 공산장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도 안정적 지속성장과 반부패 활동이다.
- 중국 정부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향후 30년간 위안화 국제화를 3단계 전략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임
(1) 주변 국가에서 위안화 사용을 활성화하는 것. 예를 들어 한국, 일본, 러시아 등 중국 국경과 가까운 곳을 변경무역을 통해 위안화 사용을 늘리는 것.
(2) 아시아 전체 지역으로 위안화 사용을 확대하는 것. 이를 통해 위안화 블록을 형성하여 아시아 지역통화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
(3) 위안화의 글로벌화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한편으로 위안화의 기능적 측면에서는 먼저, 무역결제통화가 된 다음 금융투자수단이 되고, 마지막으로 국제적으로 보유할 가치가 있는 화폐가 되어 진정한 위안화 국제화 목표를 달성.
향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위안화 국제화의 증거는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전 세계 중앙은행에서 위안화를 달러화에 버금가는 필수 외환보유화폐로서 비축하고 외국기업과 외국인이 위안화를 보유하고 저축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 될 때 이를 위안화 국제화의 도착점으로 봐야할 것임. 따라서 현시점에서 위안화 국제화를 앞당기기 위한 해법은 글로벌 금융시장에 있기보다 보호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국 금융산업에서 찾아야 할 것임.
- 중국 정부의 모든 정책은 방향성과 속도를 중요시. 그러나 속도가 느리더라도 방향이 맞으면 OK다. 중국 정부는 앞으로는 경제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동시에 인민을 옆으로 바라보고 있다. 경제성장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모든 인민의 문제는 점차 해결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성장 만능주의는 개혁개방 초기부터 있어 왔다. 빈부격차 문제의 해결책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 선부론을 내세워 여론을 달랬다. 선부론은 먼저 부자가 되자가 아님. 동시에 부자가 될 수 없으니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용인하자는 것.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서는 부자에 대한 시기와 그로 인한 감정적 테러 같은 사건이 드물다. 문제는 빈부격차의 해결책이 뽀족하게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 분배를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제도에서조차 묘책이 없는 것임.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경제가 계속 성장하면 언젠가 해결될 문제다"라고. 틀린 말은 아닌데 성장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고 경제성장이 둔화되면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부류는 더욱 불만이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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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영이 반드시 행복으로 직결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국민이 얼마나 불행한지는 역사가 가르쳐 준다. 국민 스스로가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는 제일 먼저 외국인(이민자)을 공격함.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고 종교도 음식도 다른 외국인에게 역겨운 냄새가 난다. 그들이 먹는 음식에도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말이다. 반대로 번영하는 나라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외국인(이민자)을 받아들임. 번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타인에게 관대해지기 때문. 그래서 외국인을 받아들이면 이와 함께 다양성과 새로운 아이디어, 자본이 들어와서 그 나라는 더욱더 번영할 것이다.
- 미연준, 유럽중앙은행 등의 중앙은행이 금융완화 정책에 제동을 걸고 금리인상이나 출구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착률을 할테니 걱정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연착륙을 유도해서 성공한 사례는 단 한건도 없었다. 지난 10년 사이에 자금의 흐름은 꽤나 달라졌다. 리먼 사태후, 전 세계 나라들이 함부로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 일본은행이 무제한으로 찍어낼 거라 말했고 영국은행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필요한 일은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미국도 찍어내야 될 양은 찍어낼 거라고 말했다. 그 결과 시장은 바야흐로 사상 최악의 하락세에 접어들려고 한다. 요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머지 않아 엄청난 경제문제가 닥칠 것이라는 징후로 볼 수 있다. 리먼 사태 이후 10여년이 지난 지금,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미국의 주식시장은 09년 3월 바닥을 친 이후 10년 가까이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것은 사상 두번째로 긴 기간이다. 역사를 공부하면 현재 미국의 상승세가 언젠가 반드시 멈추리라는 걸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음. 미 연준 전 의장 재닛 옐런은 "경제문제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언.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그녀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다음에 올 경제위기는 우리의 인생에서 최악의 경제위기가 될 전망. 그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 심각하고 파괴적 위기가 지금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것이다.
- 나라에 인구가 감소하고 이민자를 받지 않으면 장차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역사도 말해주는 사실이다. 가령, 서아프리카 가나공화국. 57년 당시, 가나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중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 콰메은크루마가 "외국인이 배제된 가나인만을 위한 가나를 만들겠다"며 국경을 폐쇄. 그 결과 가나는 고작 7년 후 와해되었고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며 은크루마는 추방당함. 버마도 좋은 사례. 62년, 버마는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음. 하지만 버마정부도 "외국인을 추방하라"고 명령하고 국경을 폐쇄. 그후 나라이름도 미얀마로 바꾸었는데, 50년 후인 지금은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도 마찬가지. 200-300년 전에는 아주 번영했던 에티오피아는 대다수 지역이 15세기 이전에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이곳만은 기독교가 살아남았다. 즉, 외부세계에 열려 있어서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국인은 필요없다며 문을 닫아걸자마자 완전히 붕괴됨. 지금은 GDP가 세계 평균의 5%에도 미치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됨
-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플레이션으로 갑자기 경기가 살아나는 나라는 없다. 국민이 열심히 일하고 저축률과 투자율을 높여서 돈을 벌어들여야 경제가 발전한다. 경제가 활발한 나라에서는 그곳이 어디든 간에 인플레이션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플레이션은 빚을 줄이는 방법이 될지는 모르지만 빚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좋은 방법은 아님. 아니, 최악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빚이 줄어들 테니 문제없다"고 말하는 경제학자는 틀렸다.
- 러디어드 키플링이라는 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있다. 그가 지은 '영국의 깃발'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What shoud they know of England who only England know?
(영국밖에 모르는 사람이 영국의 무어을 알고 있단 말이냐?)
영국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영국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다는 의미. 이 말은 물론 영국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 사람에게 해당됨. 해외에 나가려면 다소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이것이 인생 최고의 결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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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불황탈출

경제 2019. 12. 2. 08:11

- 2010년은 중국이 G3에서 G2가 되던 해. 2018년 일본경제는 완전고용을 달성했다. 일본인들으니 아베의 인격에 회의를 표하면서도 그를 지지함. 경제가 좋아졌기 때문. 자살률과 범죄율이 버블붕괴 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고, 기업의 인건비 총액도 지난 4년 동안 매년 증가. 한국을 향한 아베의 도발 이면에는 자국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 91년까지는 일본인들도 부동산불패의 신화를 믿었다. 주식시장의 버블은 90년 초에 끝났지만 대도시의 지가는 91년까지, 지방의 지가는 92년까지도 오르고 있었다. 주식은 망해도 부동산은 망하지 않느다는 오래된 믿음 때문. 그러나 그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끝없이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자, 일본인들 사이에는 부동산 필패가 새로운 신화로 자리잡음. 그러다 2000년대 중반 동경 부동산 가격 반등은 일본인의 사회심리에 변화를 일으킴. 경기상황과 인구변화에 따라 부동산은 오를수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그럼에도 집을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주거의 대상으로, 즉 실수요자의 입장에서 보는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다. 일본인들은 드디어 부동산 불패와 부동산 필패라는 두가지 낡은 신화 모두에서 벗어난 것이다.
- 80년대 후반 일본의 버블은 형성과 붕괴과정이 2000년대 중반의 미국과 흡사함. 그러나 버블 붕괴후 부동산 시장의 판도는 판이하게 다르다. 앞선 그래프를 보면, 미국은 붕괴전의 가격을 회복하였지만 일본은 예전가격을 회복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1) 미국의 경우 부동산 이외의 시장에서는 자산 가치의 버블이 부동산 버블만큼 심각하지 않았음. 일본에서는 주식, 부동산은 물론이고 반 고흐의 작품까지 버블을 경험. 해외 유명 미술품을 매집한 일본기업들은 버블이 꺼진 뒤 매수가격의 10%도 안되는 가격에 소장품을 처분해야 했다.
(2) 자산가치가 폭락하기 시작하자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부터 파산하기 시작했고, 일본기업의 최우선과제는 부채비율을 줄이는 것이 됨. 버블기 일본기업의 부채비율은 400%에 육박했다. IMF 사태 직전의 한국기업과 비슷한 수준. 보유자산을 처분하고 영업이익을 부채상환에 우선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토지를 새로 구매할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보유하고 있던 토지마저 처분할 형편이었다. 일본 전역에서 상업지 지가는 주택지 지가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하락했다.
(3) 90년대 중반부터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기 시작. 주택을 구입하는 인구가 감소한 것
(4) 저성장이 지속되면서 디플레가 발생. 부동산 가격을 비롯한 물가의 지속적 하락은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킴. 버블 붕괴후 한동안은 부동산 가격이 다시 오를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집을 구매한 사람은 예상과 다르게 계속해서 떨어지는 집값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내 집을 장만하기 보다는 월세를 택하는 젊은 층이 늘기 시작. 내일이면 값이 더 떨어질 텐데, 굳이 오늘 사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5) 실업률 증가, 임금/고용/노후에 대한 불안은 소비와 부동산 투자를 더욱 위축시킴
- 버블 붕괴 후 미국에서는 생산가능인구가 여전히 증가하고 있었고, 대규모 양적완화를 발판으로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 미국기업은 버블기에도 부채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의 경험은 미국의 정책가들에게 좋은 참고서였다. 연준은 실업률이 목표치만큼 내려올 때까지 양적완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실업률이 떨어지고 임금이 상승하자 부동산 시장도 회복되었다.
- 현재 한국 사정은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반 일본과는 확연히 다름. 자산 투기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일어나지 않았고, 기업이 300-400%에 달하는 부채비율로 고통받고 있지도 않다. 그래프가 잘 보여주듯이 버블의 규모도 비교괴지 않을 정도로 작음. 따라서 90년대 초반 일본과 같은 부동산 시장 붕괴는 없을 것임. 그러나 90년대 후반, 2000년대 일본과는 유사한 면이 많다. 2000년대 이후 일본 기업의 부채비율은 100%대로 안정되었고, 생산가능인구가 해마다 줄면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인구자체가 줄고 있는데, 가까운 미래 한국의 모습이다. 인구가 줄면 주택수요도 줄 텐데 부동산 가격이 오를 수 있을까? 경제가 성장하면 가능하다. 일본의 경험은 인구가 감소한느 나라일수록 부동산 시장은 경제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줌
- 처음 버블이 붕괴되었을 때, 일본인들은 그것을 일시적 현상으로, 경기가 잠시 후퇴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90년대 중반에 잠시 경기가 회복하는 듯하자 일본은행은 정책금리를 인상했는데 이제와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정책 실패다. 97년에는 소비세를 3%에서 5%로 올리고 재정건전화를 위해 정부지출을 억제했는데, 정부부채 증가의 근본적 원인을 도외시한 무모한 정책이었다. 10년의 불황을 겪은 후, 2000년이 되어서야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었고, 2001년 성역없는 개혁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고이즈미가 총리로 선출됨. 그리고 동시에 일본은행에 의해 세계최초의 양적완화 정책이 시행됨. 처음 2년 동안은 청년 실업률이 8%를 넘는 등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어 일본사회에 충격을 주었지만, 03년부터 양적완화의 효과가 엔저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 부실채권 처리로 금융이 안정되고, 기업부채비율이 감소하는 등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 전 세계의 경기호조로 수출실적까지 덩달아 개선되자 2000년대 중반에는 드디어 일본이 길고 긴 불황의 터널에서 벗어났다는 낙관론이 퍼지기 시작. 덕분에 06년 퇴임시 고이즈미 내각의 지지율은 51%를 기록. 지난 20년간 퇴임시 50% 이상의 지지율을 얻은 수상은 고이즈미가 유일함
- 80-90년대의 워크맨, 2000년대의 플레이스테이션 등으로 유명한 일본 대표 전자기업 소니는 휴대폰, TV, 컴퓨터 등 주력사업에서 삼성전자 등에게 쫓기면서 추락을 거듭하여, 09년에는 2000억엔의 적자를 보임. 일본이 망해가는 분위기였던 98년에도 5200억엔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던 회사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그러나 소니는 18년 3월 결산에서 7300억엔이라는 역사상 최고의 실적을 보고함으로써 화려한 부활을 알림. 최근 몇 년, 사상 최고의 영업이익을 달성한 것은 히타치나 토요타도 마찬가지. 모두 일본 최대의 상장기업이고 한때 마이너스 영업이익으로 충격을 준 기업이기도 함. 소니는 게임기, 영상매체, 로봇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히타치는 빌딩과 기차, 도시 시스템 분야에서 상당한 실적을 내고 있음. 토요타 역시 미래형 자동차 시장에서 여타 첨단기업들에게 밀리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
- 망해가는 기업의 특징
(1) 두려움은 있지만 긴장감이 없다. 회사 실적이 저조해서 장래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자리는 어찌어찌 보전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이 전 사원에게 퍼져 있다
(2) 실적 저조의 원인은 늘 타부서에 있다. 개발팀은 영업팀에 문제가 있다고 하고 영업팀은 개발팀이 문제라고 한다.
- 다른 연령에 비해 20대 실업률이 높은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한국은 특히 더 높음. 2017년 한국의 20대 초반 실업률은 15-64세 실업률의 2.8배인데, 일본은 1.6배, OECD 평균은 1.8배에 불과. 20대 후반 실업률은 11년까지만 해도 15-64세 실업률의 2배가 넘지 않았는데, 17년에는 2.5배나 되었다. 일본과 OECD는 겨우 1.4배, 1.3배인 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20대 후반 청년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딱한 처지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음. 그런데 실업률이 3.8%라거나 청년실업률이 10%에 가깝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임. 주위를 보면 실업자가 그보다 더 많아 보이기 때문.
- 18년 한국 20대 초반과 후반 실업률은 각각 10.7%, 8.8%로 프랑스보다 낮다. 그러나 취업률을 보면 사정이 달라짐. 17년 프랑스 20대 초반 청년은 100명중 50명이 취업자다. 반면 한국은 45명에 불과. OECD 평균은 58명, 일본은 68명이다. 한국 청년의 취업률이 낮은 것은 20대 후반도 마찬가지. 한국 20대 후반 청년은 100명중 69명이 취업자인데 반해, 프랑스는 75명, 일본은 84명, OECD 평균은 75명이 취업자다. 실업률이 프랑스보다 낮은데, 취업률도 프랑스보다 낮은 것은 실업자도 취업자도 아닌 비경제활동인구가 많기 때문. 학생이나 군인, 자발적 실업자, 구직 단념자는 비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됨. 취업률이 낮다는 것은 돈은 버는 인구가 적다는 것을 의미. 한국의 20대 청년은 그래서 경제적으로 궁핍하다.
- 현재 한국 정부부채는 약 700조, GDP대비 40% 규모다. 버블이 붕괴한 91년 일본 정부부채는 GDP대비 약 50%였음. 그러나 불과 9년후인 2000년에 100%를 넘었고, 100%에서 200%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도 11년에 불과.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가 여러번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난 것은 경기가 나쁠 때는 어떤 수단을 써도 정부지출을 초과하는 조세수입을 얻는 것이 불가능했기 대문. 일본정부의 조세수입은 14년까지 97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아마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고자 97년에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했는데, 소비세가 증가하는 대신 법인세와 소득세가 감소. 경기가 악화되었기 때문. 그러나 2014년 소비세율을 5%에서 8%로 인상한 후에는 소비세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법인세와 소득세 역시 증가하거나 최소한 감소하지는 않았다. 경기가 좋았기 때문. 일본의 경험은 재정건전성도 경기가 회복되어야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줌. 한국도 당분간은 재정건전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일본의 정부부채는 지난 20년간 왜 걷잡을 수 없이 증가했던 걸까? 일본 재무성은 사회보장 지출의 증가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음. 경제성장은 예상보다 저조했지만 고령화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됐기 때문에 사회보장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사회보장기금의 적자를 정부예산으로 메우다 보니 부채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성장과 고령화는 지금 한국이 당면한 문제이기도 함. 노인의 거의 절반이 빈곤에 시달리고 젊은 여성들이 출상늘 극도로 꺼리며 청년의 20%가 자신을 실업자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복지예산을 줄일수는 없다. 다만 같은 예산으로도 최대의 효과를 얻을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일본보다 훨씬 제약적이기 때문. 일본정부가 그동안 GDP대비 200%가 넘는 부채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정부 부채 대부분을 일본 국내 금융기관이 매입했기 때문. 그리고 정부채 매입에 동원된 금융기관 자금의 원천은 평범한 일본인들의 예금이다. 일본 가계의 순금융자산은 일본 GDP의 250%를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일본은행이 개입하면서 사정이 조금 복잡해지는 했지만, 가계의 순금융자산이야말로 정부부채를 지탱하는 주춧돌이었다. 즉, 일본정부는 가계가 금융기관에 묻어둔 저금을 빌려쓰고 있었던 셈. 반면 한국가계의 순금융자산은 GDP대비 100%를 겨우 넘는 정도. 만일 정부부채가 GDP대비 70%만 되어도 한국 정부 채권의 안전성에는 빨간불이 켜질 것이다. 한국은 일본처럼 20년을 허송할 여유가 없다. 20년은 고사하고 10년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최대한 지혜를 모아서 가장 효율적으로 정부예산을 집행해야 한다.
- 일본이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기업이 불황에 빠진 일본을 떠나 해외에서 성공했기 때문. 즉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지 않은 덕분이다. 그리고 그 이면엔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한 일본기업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은 도태되고, 경쟁력을 유지하거나 회복한 기업이 살아남았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해외에서 발생한 일본인의 순소득은 일본 GDP대비 3-4%로 선진국 중에 가장 높은 수준
- 일본인들은 해외에 많이 나가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해외에서 그렇게 많은 소득이 발생하는 걸까? 해외에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고, 그 재산에서 소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해외에 가지고 있는 부동산, 주식, 채권, 예금도 물론 적지 않겠지만, 일본은 해외에 수많은 생산시설을 갖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만든 제품을 인근 국가에 판매하여 수익을 올린다. 전 세계에서 대외순자산이 가장 많은 나라가 일본이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2017년 일본 대외순자산은 4조 달러로 추정됨. 2위인 중국의 2.8조불, 3위인 독일의 1.8조불을 합한 것과 거의 맞먹음. 한국은 2000년대 초반까지 대외순자산이 마이너스였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플러스가 되었고, 2017년 한국의 대외순자산은 5200억불로 추정됨. GDP 에서는 일본이 한국의 3배정도지만, 대외순자산은 한국의 8배. 대외자산을 많이 갖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거래에서 흑자를 보아야 함. 그 흑자의 일부가 해외에 투자되면 대외자산이 늘어난다.
- 1980년대 중반이후, 일본기업은 무서운 속도로 해외로 진출. 특히 엔화가 절상될 때마다 일본의 해외직접투자 규모가 증가했다. 게다가 버블이 붕괴된 이후 일본 국내시장은 오랜 침체를 겪었다. 환율 변동성에 더해, 일본 기업이 해욀 나가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 한국에서 기업의 해외투자는 "임금이 비싼 한국을 떠나 임금이 싼 곳에 공장을 짓는다"는 이미지. 그러나 일본기업이 일본을 떠난 주된 이유는 임금문제가 아님. 일본기업은 시장을 찾아 해외로 떠난 경우가 많다. 즉, 북미에서 팔 물건은 북미에서 생산하고, 유럽에서 팔 물건은 유럽에서 생산한다는 식이다.
- 기업의 해외진출은 결코 매국적 행위가 아님. 기업이 살아남아야 일자리도 지킬 수 있다. 삼성전자가 해외로 적극 진출하지 않았다면 갤럭시가 아이폰과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 없었을 것. 만일 애플이 해외에 생산기지를 두지 않았다면, 아이폰은 갤럭시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임. 따라서 해외로 떠나는 기업을 못마땅한 눈으로 볼 일이 아니다. 어디 가든 살아남아야 국내 일자리도 지킬 수 있다. 일본기업의 해외진출로 국내 일자리가 감소했다는 과학적 근거를 나는 어느 자료에서도 본 적이 없다. 반면 기업이 살아남고 기업의 실적이 개선되면 일자리도 증가함. 현재 일본은 고령자 고용안정법에 따라 60세 정년이 보장되고, 더 일하기 원하는 고령자에 대해서는 65세까지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 기업의 의무. 일본정부는 현재 이 법을 개정하여 기업의 고용의무를 65세가 아니라 70세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중
- 아베노믹스가 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경제회복을 가능하게 한 기본동력은 일본기업의 경쟁력임. 그리고 한국과 일본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문제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베노믹스에서 참고할 만한 점은 있어도 베낄 점은 별로 없음. 우선,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양적완화에 있지만, 양적완화는 디플레이션에 빠진 경제, 그리고 국민이 자국통화에 대해 강한 신뢰를 갖고 있는 경제에서 가능한 정책이다. 일본에는 해당되는 조건이지만 한국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다만 일본은행이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할 때까지 양적완화를 멈추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여러번 그리고 일관적으로 밝힘으로써, 디플레이션 기대를 약화시킨 점과 (혹은 인플레이션 기대를 일으킨 점과) 균형값보다 과대평가되어 있던 엔화의 가치를 정상수준으로 낮추는 데 성공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 2000년대 중반 삼성과 LG가 소니나 파나소익의 아성을 차례로 허물고 있을 때, 한국기업이 강한 이유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화두였음. 당시 대두된 해석 중 하나는 한국 기업에는 오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오너는 책임을 전적으로 질 수 있기 때문에 과감한 투자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일 수 있지만, 일본기업에는 오너가 없고 CEO역시 보수를 받는 직원에 불과하므로 과감한 투자에 몸을 사리게 됨. 그러나 소니의 히라이 사장이나 히타치의 카와무라 사장의 예를 보면 그 말이 옳다고 볼 수 없다. 2000년대 중반의 소니와 히타치는 파괴적 혁신에서 한국기업에 밀렸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 히라이 사장 체제에서 소니가 보여준 과감한 개혁과 속도감을 오히려 2019년 한국기업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 스트링거-히라이-요시다를 이으면서 소니는 잡음없이 경영권을 이어갔고, 스피디한 개혁에 성공. 오너가 있어야 그리고 오너가 경영권을 지배하고 있어야 회사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일부의 주장과 배치되는 모습이다. 오히려 일본에는 전문경영인이 한국기업의 오너처럼 행동하다 시장의 외면을 받는 케이스가 있다. 세븐앤아이홀딩스의 스즈키 토시후미 회장이 그렇다.
- 일본의 기업 창업주들은 기업규모가 커지고 상장까지 하게 되면, 자녀에게 주식을 상속할 뿐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완전히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살아있는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나모리 카즈오가 좋은 예. 32년에 태어난 이나모리 카즈오는 직장생활 3년만에 그리고 스물일곱에 교세라를 창업했고, 56세가 된 88년에 KDDI를 창업. 2019년 초, 교세라는 시총 기준 일본 53위, KDDI는 10위임. 2010년 2월에는 파산기업인 일본항공의 무보수 회장에 취임해 3년도 되기 전인 12년 9월에 일본항공을 주식시장에 상장시킴. 그에게는 3명의 딸이 있지만, 이나모리는 그들 중 누구도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13년 10월 인터뷰에서 주간 아사히는 그 이유를 물었다.
"저도 원래 경영자의 자질이 있었다기보다 필사적으로 회사 경영을 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 덕에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경영자로서의 기량과 사람을 이끌어가는 힘을 체득했다고 생각합니다. 경영자에게는 선천적인 능력보다 삶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피어나는 후천적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회사가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자기 아이에게 힘든 경험을 시키는 것은 사실 어렵습니다. 그런 상태로는 경영을 잘할 리 없고, 도리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세습하지 않았습니다."
- 루마다는 히타치가 제공하는 디지털 솔루션 사업의 주축을 이루는 사무인터넷 플랫폼의 명칭이다. 예를 들면 공장에서 쓰이는 부품, 부품의 조달, 생산량, 일정, 전기사용량 등 가능한 모든 데이터를 루마다에서 축적, 분석해서 그 공장에서 적절한 생산방식이나 업무방식, 서플라이 체인의 운영방식 등을제안함. 개별 업무 최적화, 효율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제조현장의 모든 시설과 업무를 최적화하는 것을 목표로 함. 그리고 고객의 공장에서 축적된 빅데이터를 루마다가 갖고 있는 관련 업계의 데이터와 비교, 분석함으로써 고객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과제나, 새로운 사업의 발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도 가능함. 사물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업으로 가정이나 공장, 기업과 공공기관은 물론 도시 전체의 운용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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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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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축사회

경제 2019. 10. 27. 12:57

- 4차산업혁명은 많은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양극화를 촉진함. 서울공대 교수들의 연구에 따르면, 70여년 후 미래의 도시 시민들은 3개의 계급으로 분화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 한다. 인류를 지배하는 최상층부에는 플랫폼 소유주라는 계급이 자리잡는데 현재의 구글, 시스코,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세계적 차원에서 플랫폼을 장악한 기업가와 투자자들이 여기 해당. 또한 이 연구에서는 이들이 전체 인구의 0.001%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의 인류가 연결되어 있는 플랫폼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할 것이라고 예상함.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플랫폼 스타(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정치 엘리트, 예체능 스타, 로봇 설계자같은 창의적 전문가)라는 새로운 계급이 생겨나서 0.002%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따. 나머지 99.997%의 일반 시민들은 불안정한과 프롤레타리아트를 합성한 신조어 프레카리아트로 바뀌는데, 이들은 최하위 노동자 계급으로 사실상 로봇보다 못한 취급을 받을 것
- 10년부터 17년까지 노르웨이 1인당 국민소득은 9만불에서 7만불로 감소.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도 비슷. 지상낙원에도 수축사회의 공포가 밀려오면서 공포의 배출구로 외국인 혐오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자리를 두고 이민자나 난민과 경쟁해야 하는 유럽의 젊은 층이 언제든지 이들을 공격할 수 있음을 보여줌
- 카카오톡, 밴드, 페이스북 등 SNS 활용이 일상화되면서 학연, 지연, 혈연은 상시접속 상태가 됨. 자주 접촉하자 조직의 결속력이 과거보다 더 강화됨. 결속력이 높아지면서 동창회 같은 연구중심의 조직들은 상호 지원군이 되어 자신들만의 이해를 추구하는 배타적 조직으로 변모하고 있음. 그러나 현재와 같이 인연을 중시하는 풍조는 특정 집단의 배타적 이해만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를 퇴보시킴. 특히 사회의 리더그룹이 인연을 강조하면 사회 양극화를 고착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하게 됨.
- 혈연은 경제개발세대 후손들이 부모세대의 권력과 부를 물려받으면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기업인들은 창업 1세대의 퇴진으로 2,3세대가 전면에 나서고 있는데 이들 사이에서 중세시대에나 있을 법한 결혼동맹이 흔하게 발견됨. 사회적으로 성공한 공직자, 전문 경영인, 종교인, 교육자, 법조인 자제들이 이 사회의 중심을 이루면서 소위 가문을 형성. 최근의 채용비리나 입시비리는 사회적 인연으로 얽힌 부모세대들이 다시 혈연으로 뭉쳐 자신들만의 팽창사회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음. 오죽하면 세습자본주의라는 말이 나올가
- WHO는 2020년이 되면 우울증이 모든 질병 가운데 래킹 1위가 될 것이라 예측. 한국의 경우도 전체 국민의 25%가 평생에 한 번 이상 정신관련 질병에 걸릴 정도임. 자살률도 OECD선진국 중 부동의 1위다. 요즘 유행어가 된 자연인, 먹방, 소확행의 이면에는 치열한 전투를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음. 자기계발서 중 심리학자의 책이 크게 늘어난 것도 이제 마음을 치유해야 할 정도로 제로섬 전쟁을 치르면서 정신적 상처가 깊어졌다는 의미. 수축사회에 진입하면서 패배한 사람이나 전투 자체를 회피하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적 추세를 보여줌
- 08년 전환형 복합위기로 유로화는 약세를 보이기 시작. 통상 환율이 약세를 보이면 가격경쟁력이 높아져서 수출이 증가. 그러나 변변한 수출상품이 없는 남유럽 국가들은 유로화 약세로 수출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입물가만 오르며 애를 먹고 있음. 반면 제조강국 독일은 유로화 약세로 수출이 더 크게 증가. 결과적으로 보면 남유럽 국가의 부가 독일로 이동하고 있는 것임. 이 위기로 현재 유럽에서는 오직 독일만 건재함. 프랑스는 마크롱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엄청난 정치개혁과 경제구조개혁에 힘을 쏟고 있지만, 점점 경제성장률이 하강 중. 동유럽도 여건은 그리 좋지 않다. 마땅한 산업이 없는 상태에서 빠른 고령화 등으로 성장 잠재력이 낮아지고 있음. 수축사회가 더 진전된다면 서유럽 생산기지 역할을 했던 동유럽은 무역장벽에 봉착할 가능성도 있음. 재정의 상당부분을 EU에 의존하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 등도 서서히 경제위기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 국제정치적으로는 인접한 러시아와 패권국인 미국으로부터 종속을 강요받는 난감한 상황도 예상해볼 수 있음. 북유럽 국가들도 구조적 문제가 쌓이고 있음. 가장 이상적인 사회복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지만 복지재정의 기반이 되는 경제성장률이 점점 하강중. 사회주의형 복지체계는 점점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있음. 휴대전화 제조업체 노키아의 몰락 이후 핀란드는 잊혀가고 있음. 스웨덴의 주요기업들도 경영난을 겪으면서 성장기반이 흔들리고 있음. 세계적 명차였던 볼보의 소유권이 끝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 상징적. 북유럽 선진국들이 형성되고 발전하던 시기는 기본적으로 팽창사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축사회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팽창을 전제로 한 사회 시스템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조만간 근본적 사회구조 전환을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임
- 우리가 흔히 금융위기라 부르는 08년 위기는 금융위기 이상으로 판단해야 함. 사실은 사회 시스템 전체를 바구는 대전환이었다. 현재 우리사회가 겪는 대전환은 20세기부터 잉태되었다가 08년 위기가 발생하면서 가시화된 것으로 판단해야 함. 따라서 나는 이 위기를 전환형 복합위기라 부르고, 세계가 수축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수축사회는 08년에 이미 시작된 것. 전투의 원칙은 없지만 세계가 상호연결되었고, 이데올로기 없이 현재의 이해에만 집착했으며, 모든 영역에서 가해자 겸 피해자가 되었던 것. 전환형 복합위기가 발생하면서 국가, 기업, 그리고 개인의 삶에도 엄청난 고통이 시작되었음.
- 30년대 대공황 이후 각국은 금리를 낮추고, 국가재정을 강력하게 투여하고, 부채를 늘리면서 경기침체에서 탈출. 한국의 IMF 외환위기 탈출방식도 유사했다. 08년부터 3-4년간은 이 조치가 효과를 거둠. 대부분의 국가에서 경제가 상승전환한 것. 유럽의 문제아였던 그리스조차 18년 중반 구제금융에서 벗어남. 그러나 결국 이 정책들은 경제에 마약을 처방하는 식이어서 단기성과에 그칠 것임. 미국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래리 서비스는 18년 전미경제학회 연례총회에서 현재의 세계를 슈퍼하이라 비꼬며넛 30년대 대공황의 교훈을 되새기자고 제안. 경제가 가장 좋은 미국조차 저금리와 부채중심 성장에 젖어 있다는 경고다
- 지금은 생산비용을 낮추기 위해 해외로 탈출했던 선진국 기업이 리쇼어링하는 단계지만, 4차산업 혁명이 더 발전하면, 선진국 기업들은 애초부터 해외에 나갈 필요성이 사라질 수 있다. 또한 한국, 일본, 중국 등 수출대국의 기업들이 신제품 공장을 본국이 아닌 미국 등 주요 수요시장에 먼저 건설할 수도 있다. 소비지에 공장을 건설하면 해당 지역의 트렌드를 반영한 디자인을 개발할 수 있고 물류비도 절약됨. 이렇게 되면 내수시장이 약한 국가의 경쟁력은 더 약화되고, 소비시장이 큰 국가만 생존할지 모름. 결국 세계의 부가 거대한 선진국으로 집중되면서 후발국과의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 수출중심 국가들의 수축사회 진입이 빨라질 수 있다는 의미
- 경제학 이론에 루이스 전환점이라는 것이 있다. 통상 개발도상국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농촌 잉여노동력이 고갈될 때, 임금이 급등하면서 경제성장이 꺾이는 현상. 루이스 전환점에 이르면 인력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노동자의 임금이 급등하면서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정착됨. 중국은 지금 루이스 전환점을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임금이 오르는 것은 당연함. 그러나 중국의 임금상승 속도는 거의 세계 최고수준인 데 반해, 사회적 자본부족으로 생산성은 여전히 답보상태. 상황이 이러하자, 고임금에 따른 위기로 대기업들은 공장자동화에 총력전을 펼치면서,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기 시작하는 모습. 또한 일부지만 임금이 산 동남아 등지로 공장을 옮기고 있다. 그런데 기계사용을 늘리거나 해외로 공장이 이주하면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 중국 기업들은 홍통을 통해 해외에서 자본을 조달한다. 최근과 같이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중국의 자본조달 창구인 홍콩의 금리가 오름. 홍콩달러는 미국 달러화에 환율이 거의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과 금리가 비슷. 홍콩의 금리가 오르면 홍콩에서 투자금을 빌린 중국기업들은 이자부담이 늘어남. 혹시 자금회수라도 요구받으면 부도위기. 결국 이자부담이 늘어나면서 이익을 줄어듬. 이런 연결성 때문에 미-중 G2 패권대결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미국의 기준금리를 높은 수준까지 올려야 된다는 견해도 있다. 물론 미국이 금리를 크게 올리면 미국도 자산가격이 폭락하고 경기가 냉각되는 피해를 입을 것임. 그러나 과도한 부채에 싸인 중국의 심리는 미국보다 두세배 더 오를 것이다. 이때 부채비율이 높거나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은 집단적으로 부도를 맞을 수도 있다. 그만큼 중국의 부채, 특히 기업의 부채문제는 심각하다
-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시스템의 문제(리비아, 이집트)
(1)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은 경제가 어려워지면 늘 발생했다. 역사상 거의 ㅁ든 혁명의 출발은 서민들의 생활고에서 시작.
(2) 장기간 집권한 독재자의 퇴출은 쿠데타와 같은 경쟁자의 도전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자발적 저항으로 야기되는 경우가 더 많음. 정권에 도전하는 쿠데타 세력도 경제적 어려움을 주요 명분으로 내세움. 한국의 촛불혁명은 무능한 통치자를 선거가 아닌 시민의 힘으로 제거한 전형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3) 사회적 자본이 중요하다. 혁명으로 독재자를 제거한 리비아,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는 혁명 후 8년이 지난 현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제대로 가동되고 있을까? 지금 북아프리카 전역은 혁명이전보다 더 심한 무질서 상태에 빠져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가동시킬 사회적 자본이 전혀 없기 때문. 이런 이유로 나는 사회적 자본이 부족한 북아프리크에서 또다시 독재자가 집권할 가능성을 높게 본다. 따라서 향후 중국의 경제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은 파국을 맞을 것임
- 중국 전문가 데이비드 샴보는 최근 저서 중국의 미래에서 향후 예상되는 중국의 정체성을 4가지로 분류. 샴보는 정부와 공산당의 역할을 기준으로 중국의 미래가 다음 4가지 정치형태 중 하나가 될 것이라 전망
(1) 철권통치와 유사한 신전체주의. 89년 천안문 사태 당시와 비슷하게 국가통치에 군대를 투입할 정도로 무력통치를 가오하
(2) 지금과 유사한 경성 권위주의체제. 샴보는 현재의 경성 권위주의도 중국의 발전을 저해할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비판
(3) 연성 권위주의. 시진핑 집권 이전 다소 평온했던 시기와 비슷.
(4) 현재 싱가폴과 유사한 준민주주의 체제
- 샴보는 중국이 장기적으로 연성권위주의나 준민주주의 체제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 그래야만 세계와 중국이 파국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중국의 모순적 이데올로기와 다양한 문제 때문에 중국의 대붕괴를 예상하는 학자도 매우 많음. 중국 붕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서구형 교육을 받았고, 특히 사회과학 분야를 전공했다는 특징이 있다. 나는 중국이 곧 붕괴하거나, 싱가포르형 체제로 가기보다는 오히려 더 강력한 신전체주의 체제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현재 통치기반인 경성 권위주의보다 더 강력한 개발독재가 실행 될 것으로 예상. 또한 중국 비관론을 제시하는 학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길게 공산당과 시진핑 정권의 개발독재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 향후 수축사회가 심화되어 양극화에 대한 농민공의 저항이 커질 경우, 공산당에게는 매우 큰 위협. 그러나 아직은 도시화 속도 조절을 통해 농민공을 달랠 수 있는 수준이다. 대부분 선진국에서 도시화율이 80-90%에 달하는 것을 감안할 때, 향후 도시로 이주할 수 있는 인구는 5억명 이상 되지 않을까. 앞으로 대규모 도시화가 이어질 경우 엄청난 투자와 일자리가 탄생하리라는 것을 예상 가능.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 성향으로 농촌지역 사람들의 최대열망은 돈이 있는 도시로 이주하는 것임. 중국은 도시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정책을 펴면서 당분간 경제성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임. 수축사회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농민공들은 조직화되어 정치투쟁에 나서는 것보다 비농업호구를 가지는 것을 더 선호할 것임. 아직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은 국토가 거대하고 인구가 많다는 중국만의 특수성에 기인함.
중국은 일당독재 국가이기 때문에 정권교체가 없다. 따라서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름. 독재 시스템이 유지되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 전문관료그룹은 정권이 영구적이라고 판단될 경우 부패하지 않고 더 근면하다. 한국에서도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 엘리트 계층이 상대적으로 근면했던 것은, 정치를 잘해서가 아니라 엘리트들이 그 정권을 영구적이라 생각했기 때문.
- 서구 전문가들은 별로 인정하지 않지만, 중국은 상당기간 체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당분간일 뿐 영구적이란 의미는 아님. 중국이 수축사회에 진입할 경우 많은 전문가가 예상하는 중국 고유의 문제들이 서서히 불거질 것으로 예상됨. 다만 서구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된 시민혁명과 같은 사회불안은 예상보다 더 늦게 나타날 것으로 판단됨
- 중국 공산당과 시진핑 체제는 이런 중국의 미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반면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면서, 결국 폭력에 의존하는 비중이 커질 것임. 18년 이후 확연해진 시진핑의 영구집권 시도는 중국이 신전체주의 체제로 가겠다는 선언으로 봐야 함. 정권안보와 지속적 경제성장을 위해 공산당과 시진핑이 폭력으로 저항을 누를 것임을 공식화한 것. 최근에는 터키오 같이 수축사회가 본격화되면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후발개도국에서 신전체주의 성향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대외적 비난도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중국은 신전체주의로 향할 것이다. 거대한 시민혁명의 가능성을 잉태한 채...
- 미국 정책안보 전문가 그레이엄 앨리슨은 '예정된 전쟁'이란 책에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미-중 G2 패권대결을 전망.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2500년전 그리스와 아테네 대결에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패권전쟁은 도전세력의 부상과 이에 따른 기존 패권세력의 두려움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 투키디데스 함정으로 미-중 G2 패권대결을 해석하면 중국의 급부상으로 미국이 두려움을 느끼면서 전쟁이 불가피해졌다는 분석. 이런 해석이라면 중국보다 미국이 더 떨 수도 있다. 미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의 패권을 잃으면 일거에 무너질 수 있음. 미국 사회는 세계의 패권을 보유했다는 전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도 생존을 걸고 벌이는 대결이다. 따라서 미-중 G2 패권대결 과정에서 전면적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논외로 두어야 함. 혹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국지전 형태로 제한될 것임. 대신 다양한 영역에서 복잡한 형태의 갈등과 충돌이 예상됨. 나는 이 전선을 크게 두가지로 압축하고 싶다. 하나는 과학기술 전쟁이고, 또 하나는 무역과 통화가 중심이 되는 통합경제전쟁이다.
- 중국의 인터넷 통제로 고전중인 구글 전 회장 에릭 슈미츠는 28년쯤 되면 인터넷이 두개로 쪼개질 것으로 전망. 기존 인터넷은 미국 중심으로 유지되고, 중국은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60여객국을 묶어 새로운 인터넷 세상을 만들 것으로 내다봤다. 그만큼 정보전쟁이 치열해질 것이라는 의미
- 글로벌 불균형은 미국이 경제력 이상으로 과소비를 하면서 제조업을 조기에 포기한 것이 원인. 미국은 인구나 경제규모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소비함. OECD 국가중 미국경제 비중은 34%, 내수소비는 36%를 차지. 수치로 계산해보면 미국은 경제력이 비해 약 1조 달러를 더 소비하고 있는 셈. 그러나 미국은 제조업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생필품을 거의 생산하지 않음. 다라서 자연스레 해외에서 제품을 사와야 함. 부족한 구입비용은 달러를 찍어서 지불하면 된다. 2차 대전이후 정확히는 미국이 금태환을 금지시킨 71년 닉슨쇼크 이후, 미국은 전 세계에 달러를 뿌려대기 시작.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달러는 미국이 보장하는 안전한 세계의 화폐가 된 것이다. 반대로 미국과의 무역에서 무역흑자가 발생한 동아시아 국가는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그냥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무역수지 흑자만큼 해외로 자금을 보내지 않으면 환율이 크게 절상되어 수출경쟁력이 약화되기 때문. 결국 수출로 벌어들인 자금을 자국 화폐가 아닌 다른 화폐로 바꿔놓는 것이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유일한 방책인 것이다. 이때 선택가능한 화폐 중 가장 안전한 것이 바로 달러다. 함축해서 보면 미국의 자금은 해외로 나가 글로벌 금융시장을 지배하고, 미국 내에서 부족하 자금은 미국에 공산품이나 원자재를 수출하는 국가가 메꿔주는 구조가 바로 글로벌 불균형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꿩먹고(과잉소비), 알먹는(글로벌 금융시장 지배) 상황인데, 금융패권을 가진 국가만 가능한 신비로운 현상이다. 이렇게 미국과 미국에 수출하는 국가의 관계는 글로벌 불균형을 통해 상호의존적이면서 동시에 제로섬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때 환율은 미국과 미국에 수출하는 국가 간 상호이해를 규정함. 예를 들어 달러가 약세면 중국 위안화는 당연히 강세가 됨. 이런 상황이 되면 미국은 수입물가가 오르면서 경기가 하강하고 상품수입이 줄어듬. 이대 중국은 수출물량이 줄어들면서 기업 이익이 감소. 환율이 양국간 경제를 자동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역전쟁과 통화전쟁은 분리되어 진행되지 않음. 통화전쟁을 이야기할 때 글로벌 불균형을 감안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이유이기도 함
- 현재의 중국보다 사회적 자본이 풍부했던 일본이나 독일은 플라자 합의 5년 후 문제가 발생했지만, 중국에서는 더 빨리, 그리고 강하게 경제구조가 붕괴될 수 있다고 여기는 눈치다. 그리고 당시 일본과 독일의 기업들은 환율절상에 맞춰 기술개발, 선진형 기업문화 등을 마련했지만 중국 기업들은 여전히 저가물량 중심의 수출비중이 높음. 수출품의 기술력과 부가가치 창출이 낮기 때문에 위안화가 절상되어 수출가격이 올라가면 중국제품의 경쟁력이 낮아짐.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을 대체 수입시장으로 활용할 수도 있음. 물론 아직 이들 국가 제품은 조악한 수준이지만, 5년 이상 장기적으로 생각해보면 생활용품은 중국제품을 충부닣 따라갈 것임. 미국으로서는 이런 상황을 전혀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수시로 통화전쟁을 거론하면서 중국을 위협하고 있는 것임. 길게 보면 통화전쟁의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음. 그러나 짧게 보면 통화전쟁은 쉽게 점화되기 어려움. 17년을 고비로 중국 비관론이 확산되면서 글로벌 자금은 위안화를 기피하고 미-중 무역갈등이 심화될 경우 대부분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반면 미국경제가 2차대전 후 거의 최장기간 호황을 보이자, 달러가치가 강세를 보이면서 미국 이외 지역에 투자했던 글로벌 자금이 미국으로 집중되고 있다. 여전히 달러를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여긴다는 의미. 더군다나 미국의 경기호조로 금리마저 오르니 달러자산에 투자하면 이자도 많이 받을 수 있다. 바로 이점이 플라자 합의 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 당시 미국은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달러약세가 가능했다. 반대로 지금은 미국이 여타 국가에 비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통화전쟁이 불발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또한 통화전쟁은 상대방이 받아들여야만 가능함. 플라자 합의 당시 세계 경제는 2차 오일쇼크가 끝나고 상승전환하던 팽창사회였다. 일본과 독일이 미국의 요구로 환율을 절상시킨 것은 팽창사회 기반하에서 미국경제를 구하려는 동맹국의 노력이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음. 또한 소련의 몰락과 미국의 독주가 예상되던 시기여서 미국의 요구를 무시할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과 독일은 경제력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점
-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의 쇠퇴는 거대함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번영이 쇠퇴의 원리를 무르익게 한 것이다. 쇠퇴하는 제국의 재정문제는 흥미롭다"라면서 국가재정을 강조. 정치학자 폴 케네디도 군사와 재정적 과잉팽창이 경제적 패권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경제철학자 니얼 퍽거슨은 재정악화가 미국 패권종결의 트리거가 될 것이라 예언. 이들의 예상과 같이 미국 재정적자 누계는 GDP의 103%에 이를 정도로 심각. 하지만 미국은 패권국가이고 기축통화인 달러를 사용하므로 앞으로도 상당기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60년대 말 월남점의 전쟁비용으로 재정이 어려워졌을 때, 80년대 중반 군비경쟁과 미국산업의 쇠토로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가 쌓였을 때,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면서 사회전체가 위기를 겪은 경험이 있음. 현재 트럼프 정부는 재정수지를 악화시키는 정책을 강력하게 실행. 80년대 미국은 래퍼이론을 기반으로, 세금을 내리면 경제가 활성화되어 재차 세수가 늘어난다는 낙수효과를 기초 경제정책으로 사용했음. 이 이론에 따라 레이건 정부는 80년대 최대 40%포인트에 달하는 대규모 감세정책을 실시했지만, 미국 재정은 개선되지 않음. 오히려 90년대 초 부시정부가 증세를 선택하면서 래퍼이론은 거의 폐기되었다.
- 자크 아탈리는 최근 저서 '미래 대예측'에서 "이 세상의 모든 이타주의적 주체들, 즉 다음 세대의 행복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번영하고, 이들이 우세를 점하지 않는다면, 그러기 위해 필요한 세계적 차원의 법규가 수립되지 않는다면, 결국 인류는 파괴적 폭발을 거듭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바로 이 폭발의 작은 전조일 뿐이다"라면서 자신의 행복이 다른 이들의 행복에 달려 있음을 강조. 미국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사회적 부가 축소되는 시기에는 소유와 성취를 일정 부분 제한할 필요가 있다면서 욕망과 탐욕을 줄이자는 행복방정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유발 하라리도 최근 저서 21세기를 위한 21사지 제언에서 거의 유사한 주장을 한다
- 한국 재벌은 이제 지주회사가 여러 자회사를 거느리는 지배구조로 경영됨. 이 결과 자회사간 공동출자와 순환출자가 어려워짐. 이런 상태에서 사업영역을 확대하면 지주회사의 재무적 부담이 너무 커짐. 지주회사제도는 재벌의 팽창을 어렵게 만들어 경제력 집중현상을 완화하려는 정책인데, 이런 성격의 정책은 향후에도 계속 유지될 것임. 따라서 이제는 재벌이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가 어려워졌다. 또한 투자를 하더라도 수축사회 진입으로 과거보다 성공확률이 크게 낮아졌다. 따라서 재벌이 가진 자원의 한계성을 감안하면 선택과 집중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은 과거에도 중요했지만 수축사회에서는 기업의 생사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해질 것임.
-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로사다 교수팀은 미국 60개 기업의 회의록을 분석. 이때 긍정적 단어와 부정적 단어의 비율이 2.9대 1 이상인 기업은 성장했지만, 2.9대 1 미만인 기업은 쇠퇴. 이를 로사다 비율이라고 한다. 조직의 성과와 긍정적 조직문화 사이에 높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후 97년 외환위기까지, 한국은 소득분배가 상당히 안정적인 국가였다. 경제개발 초기라는 시간적 특성과 개발독재 정권이 정권안정을 위해 누진세, 공정거래법 등을 도입해 소득분배를 관리했기 때문.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며 당시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중심 이데올로기로 떠올랐고, 동시에 국내시장을 해외에 완전개방하는 세계화 현상이 사회의 기초여건으로 자리잡음. 신자유주의 기반의 세계화와 한국의 압축성장을 이끌던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결합되자 부가 대기업과 상류층으로 집중되는 양극화가 본격화됨. 그나마 08년까지 중국 등 브릭스 국가의 성장으로 수출중심 경제가 유지되면서 전반적 상황은 여전히 팽창사회에 가까웠다. 그러나 08년 전환형 복합위기가 닥치자 한국은 수축사회로 향하기 시작. 경제적 차원에서만 문제가 되었던 양극화는 이명박 정부의 팽창형 보수주의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양극화로 확산됨.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이때부터 양극화 문제뿐 아니라 고령화 문제가 본격화되었지만, 정부와 사회 주류층의 무관심으로 양극화가 다양한 영역에서 확대재생산되기 시작한 점. 이후 수축사회가 진전되면서 양극화는 소득, 세대, 지역, 기업과 중소상공인,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으로 확산되었다.
- 계급이 고착화되기 시작하자 중산층은 다음과 같은 3가지 행태를 보인다. 먼저, 성공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해 본인도 늑대가 되는 것. 기업을 창업하거나 자영업에 나서는 방식. 그러나 수축사회에서는 주류 사회로 진출하기 어려움. 오히려 중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자녀들을 상류층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자녀교육에 올인하는 것. 이를 위해 개인적 삶을 포기하고 직장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것이다. 아마 중장년층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이런 삶을 살아갈 것임. 조직의 부속품에 만족하면서 눈앞의 작은 이해에만 연연해서 살아가는 방법. 셋째, 소확행으로 상층부로의 신분상승을 포기하고 눈앞의 행복만 추구하는것. 주로 젊은 세대에서 많이 발견됨. 이 세가지 행태가 겹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 서강대 전상진 교수는 '세대전쟁'에서 한국의 세대갈등은 계급갈등을 덮고 세대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라고 강조. 또한 세대갈등의 프레임에 갇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실향민이거나 인지부조화나 과거시대에 대한 강력한 향수에 빠진 사람으로 봐야한다고 주장. 기득권 쟁탈전을 세대갈등으로 포장하고 이용하고 있다는 것. 또한 세대갈등으로 포장된 많은 사안의 본질은 세대갈등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준비부족에서 나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 63년 똥파리라는 말이 있다. 63년에 태어나 82년에 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인원이 매우 많다. 이들은 5공화국 졸정제 혜택을 받아 대학진학률이 높았음. 그리고 80년대발 사회에 나와 승승장구. 외환위기 때는 기업의 중간관리자 위치여서 희망퇴직을 비켜갔다. 이들의 대학시절, 학교는 온통 반독재 투쟁의 장이었다. 대부분 독재반대 데모에 심정적으로는 동의했지만, 직접 행동에 옮긴 사람은 소수. 그리고 취직해서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일했음. 그러나 이들은 학창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이후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뒤에서 지원. 즉 한국 민주화 운동의 숨은 조력자였다. 이들은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오며 가족과 자신이 몸담은 기업을 위해 나름 열심히 일했다. 같은 베이비부머지만 똥파리 세대와 그 유명한 58년 개띠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58년 개띠와 그 이전 세대들은 경제성장 과실을 그런대로 취할 수 있었다. 부동산을 통해 어느 정도 재산도 모았고 자녀들도 거의 취업을 했거나 결혼했다. 그러나 불과 5년 늦은 똥파리 이후 세대들은 돈을 벌 기회가 별로 없었다. 자식들이 취업에 나서는 시점에서 수축사회에 진입하자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 오직 경제성장에만 주력한 결과, 경제를 떠받치는 사회적 자본 축적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이런 과거 때문에 한국은 10여년전부터 서서히 수축사회에 진입하면서 더 이상 성장이 어려운 국면에 처함. 정치-관료-재벌의 삼각편대가 이끈 한국의 성장은 출발부터 양극화를 전제로 했음. 또한 이들이 주도한 성장시대는 팽창사회였다. 고령화는 문제될 것이 없었고, 노사문제는 기업이 성장해서 보너스를 지급하면 해결되었다. 부족한 생산성은 근로시간을 늘려 보충했다. 효율성이 사회의 중심인 상태에서 팽창사회라는 시대적 특성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성장으로 덮을 수 있었음.
- 우리는 터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이들 국가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한대 세계의 주목을 받음. 그러나 경제성장과 사회적 수준의 격차가 심화되자 스스로 붕괴하고 있다. 이 국가들은 풍부한 노동력과 천연자원, 광대한 국토와 폭넓은 내수경제 등 경제성장을 위한 기초 환경이 한북보다 매우 우수.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엉망이다. 정치적 무능과 부패, 양극화, 취약한 치안과 후진적 인프라, 낮은 교육수준은 수십 년째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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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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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는 인간의 사악한 면이 모두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는 일을 가장 나쁜 방식으로 이행할 것이라는 데 대한 놀라운 믿음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 정부가 개인의 재산을 보호해줘야 한다면 그 비용을 충당할 재원이 필요함로, 시민들을 통해 강제적으로 그 재원을 마련해야 함. 이것이 조세제도다. 그런데 과세란 시민들이 가진 재산의 일부를 강제로 징수하는 정부이 권리다. 결국 재산권을 정의하고 보호하는 수단은 기본적으로 재산권을 일부 제한한다. 그러므로 절대적 재산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동안 출현한 모든 인간사회에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 케인스가 자본축적속도가 노동력 증가속도보다 빠를수록 자본수익률은 떨어지고 노동자가 가져가는 몫은 자본가의 희생을 통해 증가할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이것을 이자소득자의 안락사라 불렀다. 누가 옳았을까?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최저 생계비와 비슷한 수준의 임금을 지불할 것이고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서 임금이 자연스레 상승하지는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철저히 논박당했다. 물론 노동자의 형편이 전반적으로 나아진 것은 정치와 사회가 발전한 덕분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마르크스의 공이라고 많은 이들이 주장한다. 많은 자본주의 사회들이 마르크스가 제기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노조를 허용하고 사회안전망을 마련했으며, 정부의 역할을 크게 확대하면서 시스템을 수정했음. 하지만 이런 제도가 잘 갖춰져 있지 않고 산업예비군이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이는 사회에서도 노동시장이 여전히 임금협상을 주도하는 것 같다는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중국의 도시들에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노조가 없는데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창출한 가치에 대해 더 많은 몫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제공한 서비스의 경쟁력을 고려할 때 더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최근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 노동은 최초의 가격이자 본원적 구매화폐(모든 물건의 값을 치를 수 있는 돈)였다. 본래 국부를 취득하는 수단은 금이나 은이 아닌 노동이었다. (애덤 스미스)
- 과거가 반드시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만은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 사상보다는 신고전주의 이념속에서 성장한 나 같은 사람들조차도) 향후 수십 년간 선진국 노동자들의 형편이 좋아질 거라고 확신하지 못함. 세계화가 확대되고 노조의 영향력이 감소하면, 선진국 노동자들은 다른 나라 저임금 노동자들(마르크스가 말한 산업예비군)과 경쟁해야 한다. 미래를 생각하면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 과학기술의 진보와 자동화는 오늘날 기술 수준이 낮거나 보통인 노동자들에 대한 필요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함. 달리 말해, 자본의 한계생산력(주로 다양한 형태의 소프트웨어를 의미함)은 증가하지만, 노동력의 한계생산력은 감소할 것임. 따라서 미래의 성장수익은 자본가에게 더 많이, 노동자에게는 더 적게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 승자는 마르크스다
- 2차대전 이후, 산업화된 경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노동자의 몫'이 대체로 3분의 2정도를 유지했다는 점. 즉 전체 경제에서 창출된 가치의 약 3분의 2가 노동자에게, 3분의 1은 자본가에게 돌아갔음. 따라서 어쨌든 케인스가 말한 이자소득자의 안락사는 일어나지 않았고, 노동자들도 전후 성장으로 획득한 이익에서 자신들의 몫을 가져갔다. 이것이 과거 수십년간 많은 나라에서 불평등이 심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더라도 (노동자들의 몫이 일정하면 일부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들보다 훨씬 잘 일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가설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최근 많은 나라에서 노동자의 몫이 줄어들고 있다. 이것이 그저 일시적 현상인지 아니면 장기화될 현상인지가 관건이다.
- 귀금속을 화폐로 사용하는 방식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조달가능한 귀금속의 양에 갑작스럽게 변동이 생기면 호황을 누리다가도 곧바로 부로항에 빠졌다. 예를 들어 스페인 제국이 유럽에서 치르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배로 실어온 탓에 스페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지출과다로 적자가 계속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19세기에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이거싱 전세계적인 붐으로 이어져 처음에는 인플레이션이, 나중에는 경기후퇴와 디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더구나 민간은행들이 보유한 금의 양이 항상 일정하지가 않았다. 경기가 호황일 때 보유한 금의 양보다 더 많은 돈을 빌려주었으므로, 경기가 위축되면 불가피하게 부실채권이 발생했고, 사람들이 맡겼던 금을 회수하려 들어 일부 은행들이 파산했다. 금본위 제도는 호황을 과대포장하고 불황도 악화시켰다. 그 최악의 사건이 30년대에 일어난 대공황이며, 당시 금본위제도가 대공황의 핵심원이이었다. 이는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을 늘리거나 은행 시스템을 구제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비교적 일찍 금본위제도에서 벗어난 영국 같은 나라들은 금본위 제도를 고수하던 미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보다 훨씬 빠르게 경제가 회복되었다.
-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처럼 비교우위는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고 강력해보디는 개념이다. 하지만 경제학이라는 좁은 학문의 영역을 벗어나 국제무역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해본 사람이라면, 비교우위가 어떠 면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개념임을 곧 깨닫게 된다. (폴 크루그먼)
- 그것은 정부가 끊임없이 성장을 향해 경제를 재설계 했던 미국의 경제사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다. 그렇다. 미국에는 보이지 않는 손과 수많은 경영혁신 그리고 에너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손을 반복해서 들어올린 것은 새로운 경제활동 영역을 개척해 손이 새로운 자리에서 계속 마법을 부리도록 한 정부다. (브래드 들롱)
- 오늘날 연구자들은 기업의 창조와 파괴가 실제로 선진국의 주된 성장동인이라는 사실을 발견. 생산성 향상은 기존 회사들이 효율적으로 바뀔 때보다 신규기업이 시장에 진입하고 낡은 기업이 퇴출당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일자리 역시 소수의 신규기업들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이 늘어난다. 거기다 이 과정이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 좀더 논쟁적인 이야기지만, 마르크스와 슘페터는 개별기업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창조적 파괴가 자본주의 경제성장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가끔은 그런 파괴현상이 좀 더 광범위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생산성을 향상하거나 신상품을 개발하지 않고도 기업들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쉽다. 반면 경제위기는 부진하고 비생산적인 기업들을 정리해서 자본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자원들을 풀어준다. 바꿔 말하면, 경기후퇴 또는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과 케인스가 주장했듯이 자본주의의 오류가 아니라 하나의 특징이다.
- 많은 미국인이 남는 방을 빌려주거나 웹 사이트를 디자인하거나 심지어 자기 차를 이용해 부업을 하고 있다. 이런 온디맨드 경제 혹은 소위 기그 경제는 흥미진진한 기회를 만들고 혁신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근로 현장을 어떻게 보호할지, 미래에 좋은 직업이란 어떤 모습일지 등 어려운 문제들도 제기한다. (힐러리 클린턴)
- 나는 금융기관이 상비군보다 훨씬 위험하며, 후손이 갚을 돈으로 지출하는 원리는 자금조달이라는 핑계로 후손에게 벌이는 대규모 사기극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한다 (토머스 제퍼슨)
- 나는 주식시장이 어디로 가고 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만약 주가가 계속 올라가면,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든 것보다 경제를 더 많이 자극할 것이다. (앨런 그린스펀)
- 오늘날 현명한 투자자가 되려면 효율적 시장가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실질적 증거가 있다. 기술분석(과거의 패넡과 가격동향을 살펴서 미래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방법)은 거의 쓸모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일관되게 시장보다 앞서 나가려는 공격적 투자자들도 거의 사라져가는 것 같다 경제학자 버튼 킬이 정리한, "눈을 가린 원숭이가 신문경제면에 다트를 던지든 전문가가 신중하게 고르든, 선택되는 포트폴리오는 같다"는 이론은 대체로 정확해 보인다. 이런 점에서 효율적 시장가설은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 이 가설은 시장을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시장의 흐름을 좇는 저비용 인덱스펀드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현상의 확실한 이유가 된다
- 그 가설은 시장가격이 항상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시장가격은 주로 틀리지만 어느 시점에 그것이 너무 높은지 혹은 너무 낮은지가 알기 무척 어렵다는 점을 넌지지 알려준다. 월가에서 가장 유능하고 영리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시장을 이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준다. (제러미 시걸)
- 인덱스 펀드의 확산은 효율적 시장가설에 내재하는 역설을 보여줌. 만약 모든 투자자들이 이 가설을 믿는다면 시장은 효율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텐데, 그 이유는 아무도 새로운 정보를 찾으려고 애쓰거나 그 정보에 기초해 거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 만약 우리가 모두 인덱스 펀드에만 투자한다면, 인덱스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효율적 시장가설은 모순되지만 시장보다 앞서가려는 투자자가 적어도 몇 사람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주식시장에 나타나는 수많은 이례적 현상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요일이나 월과 관련된 캘린더 효과에는 "5월에 팔고 떠나라"는 오랜 격언과 1월효과가 있다. 그런가 하면, 소위 작은 회사효과는 회사규모가 작을수록 시장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는 것보다 보인다는 것인데, 그래서 오히려 위험을 초래한다. 이런 현상들이 정말 사실인지 모르지만, 보통은 이런 효과가 확인되면 일부 투자자들이 이용하려고 하므로, 그 효과가 거의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이것은 효율적 시장가설에 모순된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효율적 시장가설에 대한 훨씬 큰 도전은 로버트 실러의 주장으로, 그는 인간의 심리를 고려할 때 시장은 트릴ㄹ 수 있을 뿐 아니라 일관되고 예측가능하게 틀린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이 거품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즉 효율적 시장가설과 반대로, 시장가격은 대중이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모두 반영된 가격에서 체계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이다. 실러는 05년 미국 주택시장에 거품이 끼어 있어서 앞으로 붕괴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해서 유명해졌다. 또한 그는 주가수익률은 장기적으로 평균에 수렴한다고 주장했다. 바꿔 말하면, 투자자는 주가가 낮을 때 주식을 사서 높은 가격에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다. 노벨상 수상자의 사례에서 분명히 밝혀졌듯이, 이런 상반된 견해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를 매우 묘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 수준에서 시장을 이기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하면서, 그와 동시에 시장은 비합리적이므로 거품이 생겼다 꺼질 때 경제가 막대한 손실을 본다고 생각한다.
- 남해포말사건. "막대한 이익을 약속했지만, 아무도 그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알지 못했다." 이는1720년 대영제국에서 주식시장을 한 공동자본회사가 불명예스럽게도 역사상 최악의 투기회사로 기록된 사건을 솔직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남해쇠사는 1711년에 설립되었고 영국 식민지와 남미 사이의 급증하는 무역을 독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미가 스페인 제국에 편입되어, 남해쇠사가 실제로 돈을 벌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남해회사는 영국 정부의 채권거래를 두고 잉글랜드은행과 경쟁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 뇌물공여와 사기, 실질적인 다단계 판매등이 횡행했다. 남해쇠사의 주가가 폭등하자 주식을 사는 사람들이 급증했고, 이 회사와 비슷한 수상쩍은 회사들이 난립. 1720년에 당연히 남해회사는 파산했고, 그 고정에서 재무장관이 투옥되는 등 여러 사람이 몰락. 오늘날 우리는 이렇듯 18세기 초에 금품에 매수된 정치인들과 쉽게 속아넘어간 투자자들을 비웃을지 모르지만, 06년부터 08년까지 미국의 비유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조사해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본성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임
- 매년 20파운드를 벌어 19파은드 19실링 6펜스를 쓰면 결과는 행복이다. 하지만 매년 20파운드를 벌어 20파운드 6펜스를 쓰면 결과는 불행이다.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파커필드 중)
- 만약 당신이 은행애 100파운드의 빚이 있다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 하지만 당신의 은행 빚이 100만 파운드라면, 은행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케인즈)
- 부채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특별히 미래를 위협하는 이유는 어쩌면 저금리 때문일 수도 있다. 낮은 금리는 가계와 기업이 빚을 더 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그것은 이미 부채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부채를 줄이길 원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잉채무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투자자와 그로 인한 성장은 계속 낮게 유지될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가계와 기업이 빚을 지면서까지 투자할만한 매력적인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두가지 이유가 결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둘 모두 미래의 성장전망이 어둡ㄷ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글로벌 경제가 금융위기 및 뒤이은 경기후퇴의 여파에서 열심히 회복해야 하는 시기에는 부정적 소식이 된다. 그러면 정부와 중앙은행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들은 기준금리를 매우 낮게 유지하고, 대출을 늘리기 위해 양적완화와 같은 특별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대책은 효과가 없었고, 이런 불안요소를 계속 쌓아둔다면 아마도 역효과가 날 것이다. 정부는 저금리를 활용해 공공투자를 늘리고 수요를 진작시키기 위해 여전히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이 방법이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민과 정치권이 공공부채 증가를 두려워한 탓에 지금까지 이 방법은 거의 활용되지 못했다. 과잉부채를 줄이기 위해 희년제와 같은 좀 더 과격한 대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과거의 너무 많은 빚에 눌려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1848년 유럽전역에서 일련의 혁명들이 실패하고 뒤이어 잔인한 진압이 이루어진 후에 사회주의 사회건설은 완전히 불가능해보였으므로, 노동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정치권으로 이동했음. 1864년에 마르크스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국제노동자협회 혹은 제1인터내셔널이라 불리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의 목적은 평화적이든 폭력적이든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국가로부터 통제권을 가져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 사회주의자는 우리가 비참하고 헛된 수고를 끊임없이 하며 살다 죽는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테리 이글턴, 랭커스터대 영문학 교수)
-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2차대전이 끝난 직후에는 계획경제가 신뢰할 만하고, 심지어 자본주의보다 더 훌륭한 대안처럼 보였다. 이는 러시아 정치와 스탈린의 리더십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공유된 견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악의 진정한 원인은 무정부상태에 빠진 자본주의 경제이다. 이 지독한 악을 제거하려면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제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사회전체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계획한 대로 이용한다.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생산을 조정하는 계획경제는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나누어주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생황르 보장할 것이다. 교육은 개인의 타고난 재능을 살려줄 뿐 아니라 사회에서 권력과 성공을 추구하고 싶음 마음 대신 동료에 대한 책임감을 길러주고자 노력할 것이다." (아인슈타인)
- 우리가 마르크시즘을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의 판단과 도덕의 범주들, 미래의 계획과 현재에 대한 생각, 정의와 평과, 전쟁 등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의견에는 마르크시즘이 잔뜩 스며 있다. (옥타비오 파스)
- 왜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까?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1707년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합하면서 영국은 오랜기간 평화와 안정을 누렸고 내부의 무역장벽이 사라져 비교적 규모가 큰 국내시장이 형성되었다. 상당히 안정적이고 신뢰할만하며 변화하는 경제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법률제도를 갖추고 있었던 점 등도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다른 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환경이 조성되었지만 영국처럼 극적인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식민지가 영국의 산업혁명에 기여했다는 설명도 있다. 식민지가 수입원(특히 카리브해 연안에서 노예를 활용해 지은 플랜테이션 농업), 원자재 공급처, 제조품을 사주는 전속시장(특히 영국이 의도적으로 섬유생산을 억제했던 인도)역할을 해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특별히 자본주의적일까? 20세기 전반부에 활동한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사회의 문화규범은 이념적으로 중립적이지 않고,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지배계급에 의해 강요된다고 주장. 정치적, 경제적 지배 혹은 헤게모니가 문화적 지배로 강화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현대 자본주의에는 영어를 사용하고 주로 미국에서 생산되는 매우 특별한 문화가 있는 것 같다. 이는 영화 스타워즈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 같은 몇몇 문화현상이 전에 없던 방식으로 세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공통문화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므로 유익하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공통문화라는 이름으로 지역의 특색이 있는 오래된 문화를 희생시키고 표준화하며, 지나치게 단순화한 미국문화를 시장을 통해 강요한다는 비판이 더 많음.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가 영국에서 피시앤칩스를 파는 가게와 술집을 밀어내는 것임. 미국의 대중영화가 영국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사실은 프랑스 영화가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 그리고 그람시가 주장했듯이, 미국의 지배적 문화는 확실히 강력한 친자본주의적 메시지를 품고 있다. 고의적이든 아니든, 그런 현상은 앤디워홀의 팝아트부터 비욘세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자기계발 사어벵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구현된다. 실제로 성공한 대중음악가들은 현대 자본주의의 거의 완벽한 예이다.
- 자본주의 문화는 좀더 광범위한 경제 시스츰의 일부로, 그것이 계속 유지되도록 도움을 줌. 하지만 대안이 없을까? 경제가 성장하면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문화를 누릴 수 있다는 케인스의 이상은 순진해 보임. 그러나 자주적인 노동계층의 문화가 만들어지면 시간이 흐른 뒤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으리라는 그람시의 희망 역시 순진하기는 마찬가지임. 경제가 성장할수록 삶에서 문화가 점점 중요해지겠지만, 자본주의가 경제의 주류인 환경에서는 문화 역시 이윤추구의 원리에 따라 시장에 의해 형성될 것임.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문화도 창조적 파괴를 거쳐 끊임없이 진화할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르게 느껴질 것임.
- 자본주의 무노하는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촉진하는 데 헌신한다. 문화는 자본가를 위해 이윤축적을, 노동자를 위해 임금상승을, 소비자를 위해 상품축적을 장려함.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습득한 원칙들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명확하게 밝신다. (리처드 로빈스)
-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욕망이 있으면 그것을 채워라. 너에게도 부자나 권력자와 똑같은 권리가 있다. 너의 욕망을 채우기를 주저하지 마라. 오히려 욕망을 키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해라. 이것이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이 자유라고 믿는다. 부자의 결말은 고독과 자살이며, 빈민의 결말은 시기와 살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가장 위대한 나라는 ... 자본가와 독점기업, 엄청난 이권과 막대한 재산을 가지 나라가 아니라...(재산이 귀천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는) 자작농가와 자유보장권이 있는 나라이다. (월트 휘트먼)
- 자본수익률이 생산증가율과 소득증가율을 초과할 때 ... 자본주의는 민주사회가 기반으로 삼는 능력중심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독단적이고 근거없는 불평등을 저절로 발생시킨다. (토마 피케티)
- 빈곤은 생산량의 문제가 아니라 소득과 부를 분배하는 방식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해당 국가의 경제구조와 정치제도에 좌우됨. 2차대전 이후 복지국가가 건설되고 각국에 사회보장제도와 연금제도가 만들어짐에 따라,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빈곤은 상당히 감소. 하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적어도 남성들의 경우 거의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고 강력한 노조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임금수준이 중간이하인 사람의 수가 증가했다는 의미였다.
- 가난은 두려움과 스트레스, 그리고 때로는 절망을 동반한다. 가난은 수많은 굴욕과 고통을 의미한다. 혼자 힘으로 노력해서 가난에서 벗어난다면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일이지만, 가난을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할 행동이다. (J.K 롤링)
- 자본주의는 개도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사실상 가장 훌륭하고 어떠면 유일한 제도임. 하지만 밀물 때라고 모든 배가 떠오르는 것은 아님. 자본주의만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을만큼 의 경제력을 마련해주지 못함. 그러려면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몇 가지 제도가 추가로 필요함. 개발도상국의 경우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소외되는 사람들을 보호해 줄 의료서비스와 복지제도가 필요함. 또한 부유한 엘리트들이 성장의 열매를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적절한 정치, 경제적 규제가 모든 나라에 필요하다. 인류는 지난 수십 년간 눈부신 발전을 해왔으므로, 빈곤을 없애는데 과학기술적 문제는 전혀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 이민자들이 자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크게 떨어뜨린다거나 일자리를 줄인다는 최근의 이민증가 영국 노동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90년대 이스라엘과 최근 터키처럼 난민이 대거 유입한다 해도 그 영향은 별로 크지 않은 것 같다
- 이민자들이 나라를 더욱 역동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든다는 주장이 오히려 더 타당해 보임. 이민은 특히 첨단기술 산업에서 혁신과 국제거래, 지식교류가 늘어나는 현상과 관련이 깊다. 또한 이미자는 자기사업을 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좀 더 사업가적 기질을 보일 것임. 이것은 아무래도 진취적인 사람들이 기회를 찾아 이민을 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거나 이민자들이 대기업이나 전통적인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임. 애플이나 구글처럼 최근 가장 성공한 대기업중 일부는 이민자 출신이 설립한 회사다.
- 경제학자 엘빈 한센은 전 세계가 장기적으로 경기침체를 겪는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게 될 거라고 예측한 적이 있다. "구조적 장기침체의 핵심논리는 이렇다. 약한 회복세는 초기에 사라지고, 불황이 저절로 심화되면서 겉으로 보기에도 고질적인 실업문제를 남긴다." 한센은 일부 국가의 재무장 덕분에 미국의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완전고용 상태를 회복하던 즈음인 38년에 위의 글을 썼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케인스식 해법을 통해 꾸준하고 안정된 성장이 가능해진 덕에 구조적 장기침체라는 개념은 거의 잊혔다. 그리고 케인스의 거시경제적 관리방식이 구식이 된 후에도, 정부와 중앙은행이 경제를 확실하게 안정시킨다면 성장과 고용은 거의 저절로 해결될 거라는 견해가 계속 남아 있었다.
- 과거에는 전쟁이 끝나면 생산량과 생산성은 빠르게 회복됐지만, 최근 선진 7개국가의 연평균 생산증가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함. 영국과 이탈리아는 거의 성장을 멈췄다. 래리 서머스는 13년 구조적 장기침체라는 개념을 환기하며 "정상적 경제상황과 정책환경이 언젠가는 회복되리라는 추측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정상을 회복하지 못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여기에는 서로 별개인 두 가지 이슈가 있다. 첫째, 우리가 성장이 점점 낮아지는 시기로 자연스레 진입하고 있다는 가설. 한센은 이것이 인구통계학적 변화와 더딘 인구증가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맞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당히 타당해 보이는 견해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지난 10년간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고 있고, 미국과 영국같은 나라는 이민자가 늘어남에도 인구가 더디게 증가하고 있다. 생산성 향상 속도가 자연스레 느려진다는 주장도 있다. 전후 몇 십년간 생산성이 급속히 향상된 것은 여러 환경(급속한 기술발전, 평균교육수준의 가파른 상승, 유리한 인구통계학적 환경)이 특이하게 조합된 결과라는 것. 하지만 이런 주장이 계속 유지되기는 어려워보임. 기술은 결코 천천히 발전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 그리고 좀 더 광범위한 관점에서 이 주장이 맞는다면, 생산성은 서서히 완만하게 줄어들어야 한다. 이 주장은 08년과 09년의 갑작스런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 기계가 창출한 부를 공유하면 모든 사람이 호사스러운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지만, 기계 주인이 부를 재분배하지 못하도록 로비에 성공한다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끔찍하게 가난해질 것이다. 과학기술이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는 사회가 후자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븐 호킹)
- 자동화로 인해 자본력과 노동력 사이의 균형추가 자본에 유리한 쪽으로 영원히 옮겨갈 위험이 있다. 지금 우리는 자본소유주가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그 보상을 가져가는 사회로 가고 있음. 노동자들은 계속 일할 테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아니 어쩌면 대부분이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고 덜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것임. 이런 일자리는 경제가 작동하는 데 핵심이 되지 못하므로 보수가 좋지 않다. 이런 불균형을 줄이려면 소득과 부의 분배를 더욱 확대하거나 사회가 복지와 자선사업에 지출을 늘려야 할 것이다. 상당히 암울한 전망이지만 노동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이런 광범위한 경제적 힘이 역사의 진행방향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함. 러다이트 운동은 실패했지만, 그 계승자들은 대체로 성공했다. 그러므로 진짜 시험은 우리의 정치 및 사회제도가 그 도전에 응할 것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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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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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는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달. 해상과 하천교통의 중심에 위치해서 중세말부터 국제무역의 중심지였음. 지금도 네덜란드는 기업하기 좋은 최고의 나라로 꼽히며, 세계인들을 상대함. 그러다보니 일반인들도 2-3개의 외국어를 구사할만큼 인적자원도 우수함. 네덜란드가 바다를 주름잡은 이유는 청어와 대구, 고래를 잡기 위해 오랜시간 험한 바다를 헤치며 살아왔고, 무역이 아니면 달리 살 방도가 없었기 때문. 또한 일찍부터 개신교의 영향으로 상업활동이 자유로웠고, 조선업과 해운업이 고도로 발달했음. 17세기 중엽에는 수도 암스테르담이 지금의 뉴욕 월스트리트 같은 금융의 중심지였다. 19세기에는 라인강을 잇는 운하가 뚫리고 북해와 최단거리로 연결되는 북해운하까지 뚫리며 내륙수운의 중심지가 됨. 제2의 도시 로테르담은 유럽의 관문으로 불리는 국제항구도시로 1930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준설항인 발항만이 건설되었음. 이곳도 해운업이 핵심이며, 석유가 모여드는 위치여서 석유화학 산업이 발전했다.
- 영국은 2차대전 후 인도를 비롯한 많은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쇠퇴함. 1970년대만 해도 영국의 경제사정은 형편없었고, 1976년에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까지 받아야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북해유전임. 67년 덴마크 앞바다에서 유전이 발견되고, 69년에는 노르웨이, 70년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근해에서 유전이 발견됨. 북해유전으로 가장 이익을 본 나라는 영국과 노르웨이다. 영국은 거대 해양유전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엄청난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며 경제가 회복됨. 노르웨이는 석유와 가스판매 수익을 해외에 투자해서 국가경제를 튼튼히 했다. 반면에 덴마크는 석유자금이 밀려들면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등 경제침체에 빠지기도 했음. 이렇듯 자원이 풍부하더라도 국가의 관리능력에 따라 경제는 달라질 수 있음
- 대공황과 경제불황이 민족주의와 나치즘과 파시즘을 불러왔듯이, 08년 경제위기 이후 EU국가들은 똘똘 뭉쳐 협력하기보다 자국민 보호를 우선시하고 경쟁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모양새. 몰려오는 이민자와 테러로 외국인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도 번지고 있음. 게다가 서유럽은 2000년대 이후 EU에 가입한 동유럽국가들과의 경제격차로 인해 그들에게 수십억 유로를 지원하는 데 대한 불만이 높다. 반면 동유럽국가들은 EU의 지원을 받으며 경제성장을 혜택을 누림. 그뿐 아니라 EU는 남부유럽의 재정문제로 위기에 처해 있음. 또한 난민 문제로 우익세력이 급성장하며 EU를 이끄는 프랑스와 독일마저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임. 영국의 브렉시트로 인해 재정부담이 가중될테니 EU의 균열은 점점 더 가속화될 전망. EU가 유지된다고 해도 곳곳에서 분리주의 운동은 계속 이어질테고, 어느 한 곳이 독립에 성공하면 아마 그 기운은 더욱 거세게 퍼져나갈 것임. 결국 유럽의 통합은 장점만큼이나 수많은 약점을 드러냄. 유럽이 분열될수록 유로화의 힘도 약해질 것이며, 미국 달러와 중국 위안화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질 전망. 이를 증명하듯 EU의 미래를 어둡게 예측하기도 했다. 영국 이후 다른 회원국이 꼬리를 물고 탈퇴하면 결국 EU는 붕괴할 것이고, EU가 붕괴해서 발칸반도를 방치하게 되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름.
-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세계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 또한 자국 우선주의로 돌아서려 EU에 더 많은 방위비 지출을 요구하는 형편임. 러시아의 재부상과 테러의 위협 등으로 인해 유럽은 군대를 늘이려고 기존 모병제에서 우리나라처럼 징병제로 돌아서는 추세. 지금까지 유럽은 미국의 우산하래 군사적으로 러시아와 대항하는 나토를 통해 안전을 보장받음. 미국의 비호속에서 정치, 경제적으로는 EU를 통해 번영해온 유럽통합이건만, 어쩐지 그 미래가 그리 밝게 보이지만은 않다.
- 미국은 과거부터 유럽 이외의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정채적으로 규제해옴. 지금은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불법이민을 막겠다면 멕시코 국경을 높게 쌓으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 이민자들은 오히려 미국의 경쟁력을 높여주고 있다. 미국이 서유럽처럼 복지에 투자를 많이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중남미계 이민자같은 저임금 계층이 많기 때문. 미국 내에는 백인과 백인들의 세금으로 이믽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싫다는 여론이 높다.
- 미국은 국제사회에 민주주의 독립혁명을 외치며 등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카리브해와 태평양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 다만 처음 의도했던 중국시장 진출은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해군력이 약했기 때문. 이후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철갑군함을 건조하며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한 해군력을 키워나감
- 저널리스트 카플란은 그의 저서 '지리의 복수'에서 장벽은 실패한다고 단언. 국가와 제국이 아무리 인위적 경계선을 설정해도 그 힘이 약해지면 지리의 힘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임. 만리장성과 베를린 장벽처럼 모든 장벽은 무너졌고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함. 미국은 백인 민족주의로는 국가를 통합하지 못할 것이고, 미국과 캐나다의 관계처럼 멕시코와 미국은 인구와 지리적으로 통합될 것으로 전망. 그리고 향후 미국은 북극의 캐나다에서 아열대 멕시코까지 남북으로 연결된 새로운 다인종문명으로 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카플란의 말처럼 세계 최대 마약 소비국인 미국이 남미의 마약 카르텔을 방치한 채 멕시코 국경에 장벽만 쌓으려 한다면 아마 미국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 이미 중남미 마약 카르텔은 미국의 범죄조직과도 깊이 연계되어 있음. 마약은 카리브해 연안국가들의 경제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어서 정부의 통제수준을 넘어선 상태. 게다가 탈출구를 찾지 못함 빈곤한 젊은이들이 범죄에 빠져드는 것을 무작정 막기에도 어려운 형편임. 미국이 멕시코에서 벌인 마약과의 전쟁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니까요. 미국의 마약소비를 줄여 마약 카르텔의 자금줄을 끊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임. 또 다른 효가적 해결책은 뭘까? 미국의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겠지만,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인들이 범죄조직에 가담하지 않고 자립해서 살 수 있는 경제환경을 만들도록 적극 지원해주는 것임. 그렇게 된다면 캐나다, 미국, 멕시코로 이어지는 지역이 안정적으로 통합될 것이고, 미국은 앞으로도 가장 강력한 해양세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임. 무턱대고 높은 장벽만 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
- 미국은 이전보다는 중동문제에 소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시리아에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임. 그렇게 되면 수니파 중심인 사우디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대결은 더욱 심화될 것임. 미국은 호르무즈해협에 있는 함대와 군대의 규모를 줄이거나 미국 군사력의 혜택을 보는 동맹국과 주변국에게 비용분담을 요구할 것임. 거대 소비시장인 일본과 한국도 원유와 가스를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고, 북미관계에 따라 시베리아의 가스오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중동의 헤게모니도 약해질 것임. 만약 미국이 유럽의 나토군에서 발을 빼버리면 유럽은 호시탐탐 세력을 확장하려는 러시아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자체 군사력을 높여야 함. 그럴 경우 군사력 증강에 대한 부담이 늘어날 테니 유럽경제는 지금보다 더욱 어려워 질 것임. 예상컨대 미국이 고립주의로 가더라도 1차대전 이전처럼 국제분쟁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형태는 아닐 것임. 미국은 국방비를 증강하고 있지만, 태평양-대서양 라인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동맹과 본토 방위선 국가만 지원하는 정도로 영향력을 축소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손을 놓는다면 세계는 과거처럼 보호무역과 자원경쟁으로 다시 혼란스러워질 것임.
- 세계무역기구 체제는 사실 미국에 유리하도록 만든 것임. 관세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와 달리 미국은 자국의 경쟁력 있는 농산물과 서비스 산업 등 모든 분야로 자유무역을 확대. 미국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자국의 힘을 총동원해 어떻게 해서든 국제 역학관계를 바꾸려 한다. 우선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미국, 멕시코, 캐나다 자유무역협정으로 미국에 유리하게 개정. 특히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못하게 했다. 미국은 미/멕/캐 자유무역협정으로 무역협정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음. 국제경제에는 미국, 중국, 일본, EU라는 핵심세력이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 EU, 중국과 각각 양자협상을 함으로써 굴복시키고 다자협상의 판을 새로이 짤 기세. EU는 앞으로 러시아 제재, 시리아 문제, 예루살렘 수도 이전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미국과 외교적으로 충돌할 것임. 사실 미국은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영국이 EU를 탈퇴하면 EU의 단합은 약해질 것이고, 그럴수록 미국의 뜻대로 끌고 나가기 용이해지기 때문. 현재 미국은 중국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는 모양새. 앞으로도 미중 양국 간에는 무역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전략 등 세계 패권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될 것임. 과거에 미국은 일본의 기세를 누를 때 플라자 합의을 하고 나서 10년간 일본이 합의를 잘 지키는지 주도면밀히 감시. 그럼에도 일본은 미국의 조치에 그 어떤 보복성 대응도 하지 못함. 하지만 중국은 과거 일본과는 입장이 많이 다름. 일본처럼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미중 간의 문제는 장기적으로 10년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단기적으로는 타협이 이루어지면 미국이 얻는 게 많을 것임. 하지만 중국에서는 장기전에 대비해 시진핑이 20년 이상 장기집권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현 시점에서 미국의 목표는 중국의 금융시장 개방이며, WTO를 넘어서는 새로운 무역질서를 구축하는 것임.
- 중국은 중국 국유은행이 저개발국에 차관을 제공하고 중국기업이 건설과 운영을 맡으면서 투자금을 고스란히 뽑아내는 방식으로 일대일로 사업을 벌이고 있음. 향후 시설이 완공되면 얻는 수익으로 부채를 상환해야 하지만, 아시아 저개발국들은 무리한 투자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음. 만약 빚을 갚지 못하면 자연스레 중국의 경제식민지가 된다. 스리랑카, 몰디브, 파키스탄, 미얀마, 라오스, 네팔, 몽골, 지부티, 몬테네그로 등 중국발 부채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국가가 여럿임.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들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도 미국은 중국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간다며 구제금융을 거부하고 있음. 미국은 과거 소련에 써먹은 봉쇄전략처럼 중국이 진출하려는 지역의 자금줄을 꽁꽁 틀어막고 있는 것
- 중국이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지배하고 인도양을 장악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태평양과 대서양의 지배자인 미국과 거의 대등한 해양세력을 이룰 것임.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 때부터 중동의 군사력을 아시아로 돌려 아시아에 60%의 군대를 주둔하는 아시아우선정책을 내세웠음. 문제는 미국에게는 IS, 시리아, 이란, 이스라엘 문제 등이 산적해 있어 전력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와 달리 인도, 태평양 전략으로 대응하려 한다. 경제력이 급성장하는 인도를 중심에 놓고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봉쇄선을 강화하겠다는 전략. 아직인 미국의 해군력이 중국을 압도하지만, 동남아 해양에 집중하고 있는 중국 해군력의 성장세가 만만치 않은 만큼 미국에게는 큰 도전이 되고 있음. 앞으로 육상으로 자유로운 에너지와 물자수송이 가능해지고 아시아의 바다마저 통제하게 되면 중국은 미국의 압력에서 거의 자유로워질 것임. 아마 그때가 되면 중국은 우리나라와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 미중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선택을 강요할 것임. 사드 사태 당시 사드 배치를 막으려고 중국은 경제보복을 포함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했고, 한국에서는 중국을 믿기 어렵다는 분위기였다. 현재 우리는 미국산 셰일가스와 셰일원유 수입을 대폭 늘리고 있음. 하지만 중국이 기존 에너지 수입항로마저 장악하고 우리를 압박한다면 아마도 중국의 지배력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임.
- 60년대와 70년대는 소련의 전성기. 유가상승으로 소련의 국력은 더욱 강해졌다. 소련은 사우디에 이은 최대 산유국이며, 국가수출의 약 3분의 2가 석유와 천연가스. 73년 중동전쟁으로 인한 1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4배이상 뛰었고, 79년 이란혁명과 이란, 이라크 전쟁으로 유가가 급등하며 2차 오일쇼크가 발생. 고유가의 수혜로 경제적 여유가 생긴 소련은 군비를 증강해 79년 아프간을 침공함. 소련은 이 전쟁을 통해 아라비아해로 가는 부동항을 연결하려 했다. 문제는 당시 중국과의 관계였음. 러시아, 몽골에 이어 공산화된 중국은 형제국가였지만, 60년대에 소련과 노선갈등을 빚음. 특히 69년 우수리강을 사이에 둔 영토분쟁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짐. 미국도 베트남 전쟁 실패로 중국과 손을 잡고 싶어했다. 72년 미중수교로 소련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고립됨. 이에 소련은 중국과 국경인 아프간을 영향권 안에 두고 파키스탄까지 지배력을 떨쳐서 이슬람세력의 확산을 막고 아라비아해로 진출하려고 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강대국 경제도 파탄날 수 밖에 없다. 소련판 베트남전이라 불리는 아프간전은 10년 가까이 이어지며 소련경제를 무너뜨림. 여기에 베트남 원조까지 더해져 GNP의 20% 가까이를 국방비로 지출하게 됨. 심지어 86년에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로가 폭발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마저 증폭됨. 무엇보다 소련이 흔들린 원인은 80년대 유가하락임. 배럴당 70불이던 유가가 80년대말 20불 이하로 하락하는데,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사우디와의 밀약을 통해 석유공급량으 4배로 증가시켰고 서유럽, 일본과 함께 손잡고 석유 비축유를 방출. 그 결과 국제유가가 폭락하자 소련의 외화보유액은 빠르게 고갈됨. 81년부터 8년간 미국을 이끈 레이건 대통령은 현재의 트럼프와 비슷한 정책을 펼침. 그는 위대한 미국을 외치며 소련을 이기자며 국방비를 늘림. 계속되는 군사적 압박에 소련되 별 수 없이 군비를 늘려야 햇고, 이는 가뜩이나 어렵던 소련경제를 거덜냄. 결국 소련은 외국에 대한 재정지원을 포기. 소련 중앙정부의 지원에 기대서 생활하던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위성국가들이 경제사정도 연쇄적으로 악화되는데, 이러한 경제난은 소련 내 연합국들이 15개 독립국가로 쪼개지는 소련 해체의 주요 원인이 됨. 동유럽의 독립에는 소련의 군대철수도 한몫했다. 미국과 서독은 소련군대가 동유럽에서 철수해도 나토는 동유럽을 차지하지 않겠다며 서면약속을 했음.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그 약속을 믿고 군대를 철수. 물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89년 11월 동독이 무너지고 다음해 독일은 통일은 맞이하게 되는데, 이후 마치 도미노처럼 동유럽은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로 빠르게 돌아섬. 결국 소련내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고르바초프는 실각했고 소련도 해체됨. 혼란한 상황에서 쿠데타 세력을 물리친 옐친이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름. 하지만 옐친이 이끌던 91-99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도입되는 과도기의 러시아는 치안과 경제가 모두 무너지며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로써 미국은 경쟁자 없는 세계 최강국이 된다
- 유럽의 에너지 안보는 러시아와 직결된 문제. EU는 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이어 남유럽 경제위기까지 겪고있는 상황. 이 와중에 러시아의 천연가스마저 끊어지면 큰일이기 때문에 EU가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제재하지 못하는 것. 실제 러시아는 서유럽이 소비하는 천연가스의 30%를 공급. 더구나 EU 북해유전 가스생산량은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이고, 핀란드, 체코, 불가리아, 우크라이나는 가스 대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음
- 러시아 입장에서도 가장 큰 수익을 내고 있는 가스와 원유수출은 매우 중요. 러시아의 천연가스 중 절반 이상이 우크라이나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공급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러시아 제조업 교역도 우크라이나를 통과함. 러시아와의 분쟁이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송유관을 전부 국유하해버림. 이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거치지 않는 가스망을 구상하고 건설해왔다. 발트해를 거쳐 독일로 연결하는 가스관과 흑해를 통과해 터키로 바로 연결하는 가스관을 건설해 유럽으로 가스를 공급하는 방안. 만약 러시아의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러시아의 유럽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화될 것임.
- 06년 1월과 09년 1월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가스 가격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공급되는 러시아 가스관이 처름으로 차단됨. 때마침 겨울이라 동사자가 발생하는 등 유럽의 피해는 막대했다. 특히 발전가 주거용 난방을 러시아 가스에 크게 의존해온 남동부 유럽의 피해가 컸다. 통과세 문제로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등이 러시아와 자주 갈등을 빚자 유럽국가들은 러시아오 직통으로 연결된 가스관 건설을 추진. 11년 러시아에서 발트해를 통과해 독일로 바로 연결되는 세계 최장 해저가스관이 완공됨. 비슷한 길이의 노르드 스트림도 19년말 완공예정. 러시아의 가스생산지도 서부 시베리아에서 세계 최대매장량을 자랑하는 북극해 인근의 북부지역으로 이전되고 있음. 북부 러시아로 가스망이 연결되면 EU의 에너지 수요를 안정적으로 충족시켜 줄 것임. 게다가 새로운 가스관은 50년 이상 낡은 가스관보다 운송비도 절반 정도이므로 가스 가격도 낮아질 것임. 또한 러시아 남부에서 흑해 해저를 통해 터키 서부로 연결하는 투르크 스트림 가스관도 건설중. 러시아 대규모 가스 매장지를 터키의 가스운송 네트워크에 직접 연결하면 터키와 유럽에 대한 안정적 에너지 공급에 큰 도움이 될 것임. 이 가스관이 연결되면 그리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다양한 노선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 러시아 경제의 문제는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 유가가 높을 때는 호황을 누리지만, 14년부터 배럴당 100불을 넘던 유가가 30불 아래로 떨어지고 경제제재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음. 미국 셰일혁명으로 장기적으로 고유가 시대는 저물고 있다. 수입의 상당부분을 천연가스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 경제도 타격을 받을 것임. 그렇게 되면 군사력 강화를 위해 군의 현대화를 추진하는 비용도 감당하기 힘들 것임. 미국이 본격적으로 LNG 가스를 수출하고 유럽과 독립국가연합 국가들 역시 본격적으로 셰일가스를 생산하면 자원을 무기로 유럽을 압박하는 기존 외교방식도 힘을 잃을 것임. 두번째는 부의 불평등.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국가의 부를 소수가 독점하고, 마피아가 경제를 장악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함. 푸틴은 부당하게 분배된 일부 에너지 기업드을 국유화하면서 국가재정을 강화하고, 정상적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높은 인기를 누림. 그럼에도 여전히 러시아의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극심함. CS가 발표한 글로벌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상위 1%가 국부의 74.5%를, 인구 중 단 110명이 국부의 35%를 차지. 18년 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10%가 지닌 자산이 무려 82%로 역시 빈부격차가 극심한 미국의 76%에 비해서도 심각함
- 폴 케네디는 저서 강대국의 흥망에서 한 국가나 제국이 쇠퇴하는 것은 국제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사력과 그에 걸맞는 경제력이 불균형을 이룰 때 발생한다고 언급. 러시아는 여전히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강대국이지만, 거대한 영토를 운영할 힘이 부족. 인구와 경제력에 걸맞지 않는 거대한 영토는 자칫 러시아를 위험에 빠뜨리는 덫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러시아 극동지역은 인구부족과 재정부족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울러 밀려오는 중국 자본과 중국인들로 인해 중국에게 이 땅을 다시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중.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와 연계할 수 있는 길을 모색 중. 러시아가 15년 발효한 블라디보스톡 자유항법에는 비자발급 간소화, 24시간 통관업무, 거주자와 외국기업에 대한 각종 세금혜택 등 파격적 내용을 담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을 완전히 개방해 홍콩 같은 자유지대로 만들어보겠다는 구상. 이곳은 러시아에서 외국인에 대한 세금혜택이 가장 좋은 도시다.
- 과거 중동은 셀주크투르크 뒤에 등장한 오스만제국(1299-1922)이 통치하던 곳. 오스만제국은 터키 부근의 오스만이라는 소규모 부족들이 점차 발전하며 형성되었고, 14-15세기 크게 성장했는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며 지중해와 흑해의 패권을 거머쥠. 오스만 제국은 중동과 발칸반도까지 차지하며 유럽을 능가하는 거대세력을 이루는데, 인도와 중국의 향료와 비단을 구하려면 오스만 제국을 꼭 거쳐야 했다.
- 영국은 어떻게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렸나? 1869년 프랑스와 영국의 자본으로 수에즈운하가 건설되자, 이전까지 아프리카를 돌아가야 했던 항로가 단축되면서 서구열강은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을 놓치지 않으려 애씀. 이때부터 유럽열강들은 중동지역의 석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 오스만제국은 산업혁명도 받아들여 20세기 초까지도 군사대국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로 힘을 합친 연합군과 독일, 오스트리아로 뭉친 동맹국은 오스만 제국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할 정도. 그런데 러시아가 전쟁을 걸어오자 오스만제국은 결국 독일과 손을 잡음. 오스만제국과 적이 된 영국과 프랑스는 해결책을 고민했고, 영국은 프랑스에게 중동을 분열시켜 오스만제국을 없애고 함께 나누어갖자고 제안. 영국은 600년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많은 아랍 부족에게 오스만 제국을 같이 흔들어주면 독립을 지원하겠다며 유혹. 1915년 영국은 맥마흔 선언을 통해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고, 아랍의 부족세력들도 오스만제국에 저항하면서 오스만제국은 내부부터 무너짐. 전쟁규모가 커질수록 막대한 자금이 필요함. 영국과 독일은 전쟁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유대인 자본이 필요했음. 당시 유럽에서는 금융을 장악한 유대인만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 특히 미국이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할 때 자본을 지원할 만큼 부유한 로스차일드 가문을 영국과 독일 양측에서 찾아감. 원래 로스차일드는 1차대전 까지는 러시아가 유대인을 가장 박해했기 때문에 러시아가 속한 연합군 측인 영국보다는 독일에 자금을 대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성서를 근거로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이곳에 유대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즈이라는 유대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때였다. 돈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영국은 이를 돕겠다고 약속. 1차대전 중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가 과거 유대인들이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영토를 돌려주겠다며 유대인 지도자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벨푸어 선언(1917). 여기에는 미국계 유대인의 여론을 연합국편으로 끌어들이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로 접근하는 통로를 지키는 데도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 아라비아반도의 수많은 부족들은 20세기 초, 서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싸웠는데, 특히 알-사우드 부족은 영국군의 지원하에 오스만제국을 몰아내고 아라비아반도를 정복했고, 32년 사우디아라비아왕국으로 승인받음. 강대국들도 유전이 없는 사우디에 관대했음. 하지만 6년 후 돌연 대규모 유전이 터지며 사우디는 부자가 됨. 사우디는 사막지대에 도로와 거대도시를 건설하고, 이후 미국의 동맹국으로 성장. 사우디왕족은 국가통합을 위해 와하비즘이라는 이슬람 원리주의 사상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움. 알케아다, 탈레반, 하마스 등은 모두 수니파인데 극단적 이슬람 보수세력들은 모두 와하비즘에 뿌리를 둠. 오사마 빈라덴도 사우디 출신이며, 파키스탄 탈레반을 교육시킨 것도 사우디임. 사우디는 지금도 전 세계의 원리주의 단체를 지원하고 있는 가장 보수주의 국가임. 사우디는 18년에야 여성의 운전을 허용했고, 이슬람 국가로서 종교경찰을 두고 있다. 한편 이란은 인도-유럽어족의 페르시아인이 61%이고, 알제리인, 쿠르드인 등 다양한 민족이 분포함. 8200만 인구로 외국인 노동자 없이도 국가를 운영할 수 있음. 이란은 절반이 산이고, 경작지와 사막이 각각 4분의 1로 농업이 발달해 식량자급이 가능. 카스피해 연안은 아열대지만, 산악지대에는 스키장도 있고, 중동지역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지역임. 페르시아 제국 후예인 페르시아인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아리아인으로 백인가 뿌리가 같음. 과거에는 아케메네스 제국건설 등 화려한 고대문명을 꽃피웠지만, 651년 미개하다고 여기던 아랍의 이슬람 세력에게 무력으로 굴복을 당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실을 항상 굴욕적으로 느껴왔다. 이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으나 세금혜택을 이유로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 이후 아랍제국은 페르시아인을 행정관료로 채용하고 그들의 통치술을 도입해 더욱 성장. 페르시아인은 아랍세력 이후에도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 몽골, 티무르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지만, 나름의 문화를 발달시키며 민족성을 지켜왔음. 지금도 이란은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꿈을 간직한 채, 아랍인으로 싸잡아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함. 그들은 경쟁국인 사우디에 대해 석유가 고갈되면 사라져버릴 신기루 같은 나라라고 여김
- 미국은 1차대전 이후 20년대와 30년대에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미국 석유기업들을 중동으로 진출시킴. 28년 7월 이라크의 석유자원 채굴권을 획득한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중동의 실력자로 부상. 미국은 중동의 석유산업 장악에 초점을 맞춤. 이란의 팔레비 정권도 과거에는 미국의 최대우방이었으며 미국 무기의 최대구매자였음. 하지만 이란 혁명 이후에 이란의 석유산업에 대한 미국의 진출이 불가능해지자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것. 냉전시대에 미국은 소련이 중동으로 남하하는 것을 적극 견제. 중동과 카스피해 지역을 연결하는 에너지벨트(아프간, 이란, 이라크, 시리아) 구축은 미국에 중요했다. 미국은 안정적으로 석유를 확보하고, 막강한 해군력으로 태평양 및 대서양 석유 수송로를 관리하려 했다. 아프간은 중동과 카스피해 석유를 감시하고 러시아와 중국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여서 지금도 특별관리중. 특히 미국은 수십년간 사우디, 이라크, 이란내 석유산업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가 이들 나라들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저지해옴. 미국은 전통적으로 이란의 시아파와 대적할 중동국가들을 지원해옴. 상황에 따라 사우디, 이라크, 이스라엘을 이용해왔고, 때로는 과격 수니파 단체를 재정지원을 미끼로 끌어들여 시아파에 대적하게 했다. 미국은 탈레반을 중동 및 아프간 지역에서 소련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원해 옴. 하지만 이후 탈레반은 알카에다 테러그룹과 연계해 반미세력으로 성장했고 IS의 뿌리도 여기에 있다. 또한 미국은 중동국가들을 설득해서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중앙아시아 국가 등에 자국의 군사기지를 주둔시키려고 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다른 중동국가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써옴.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면 중동의 질서가 무너져서 유가가 폭등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 유가폭등은 셰일혁명 이전의 미국에는 큰 타격이었다. 실제로 미국을 휘청거리게 했던 70년대 오일쇼크도 중동지역의 지정학적 불안정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 미국은 2차대전 이후에 세계 패권을 차지하며 석유와 가스의 통제권을 쥐려고 노력. 미국이 중동에 오랜 세월 군사개입을 해온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함. 당시 세계 최대 원유수입국이던 미국은 사우디 등 아랍 산유국들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대가로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옴. 일본, 한국 등 동맹국들도 그 혜택을 누려온 것이 사실임. 하지만 셰일혁명을 이룬 미국의 최우선 목표는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견제. 중국은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 등 여러 지역에서 전쟁을 치르며 힘을 빼는 틈에 아프리카, 남미, 중앙아시아 등 전 세계로 진출. 게다가 2000년대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이라크, 사우디, 이란 등지에서도 전 방위 에너지 외교를 펼치고 있음. 중국은 이란 및 이라크 내의 반미감정을 적극 이용하고, UN의 제재까지 위반해가면서 적극적으로 투자해옴. 중국은 아덴만 근처에 군사기지가 있지만, 아직 중동에서 미국과 같은 군사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 반면 미국은 언제든 중국에 대항해 군사력을 개입할 수 있음. 미국은 셰일혁명 이후 중동지역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감소. 이제 미국은 석유 생산 1위 국가이므로 국제유가가 상승해도 예전처럼 타격을 받을 걱정이 없다. 더 이상 중동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 따라서 이라크전쟁 때처럼 무리하게 중동문제에 개입할 가능성은 낮음. 미국이 아랍의 봄이나 시리아내전 사태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전면적 군사개입을 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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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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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몇십 년 동안 전력을 집약적으로 사용하는 산업들이 해외로 이전했음. 대량의 에너지가 생산되거나 정부에서 전기료에 대해 보조금을 대폭지원하는 지역으로 말이다. 정유산업은 베네수엘라, 화학산업은 사우디, 판지산업은 캐나다. 고무제조업은 말레이시아, 플라스틱 제조업은 중국, 알루미늄 제련산업은 러시아, 메탄올 합성산업은 카타르로 이전했음. 셰일 천연가스 덕에 미국에서는 전기료가 저렴해졌고 그 기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음. 정부 보조금 없이 말이다. 따라서 해외로 이전했던 이 산업들이 대부분 미국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전력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산업들, 특히 식품가공업, 식수처리와 유통과 같이 인간이 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산업들도 가장 중요한 투입재로 손꼽히는 에너지비용이 저렴한 수준에서 요지부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1000세제곱 피트 당 4달러가 마법의 숫자다. 이 지점에서 화학제품 제조업체와 정유업체들이 나프타 분해시설을 천연가스 분해시설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셰일 덕에 2011년 말부터 천연가스 가격이 4달러를 넘지 못한 기간이 거의 중단없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천연가스와 이와 연관된 액체물질들이 미국의 화학산업에 대거 침투해 소화기에서부터 냉각제, 세제, 비료, 유리, 여행용 가방, 타이어, 접착제, 섬유, 가구, 페인트,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을 만드는데 재료로 사용되고 있음. 그게 다가 아니다. 미국과 물리적으로 연결된 체계는 무엇이든 폐기물로 나오는 셰일 천연가스에 접근 가능. 텍사스 셰일 천연가스를 멕시코에 보내기 위해서 대대적인 송유관 확장사업이 진행중인데, 이를 통해 멕시코의 전력체계는 완전히 탈바꿈하게 됨
- 북미지역의 석유매장지가 지닌 뛰어난 특징은 해양 셰일 석유를 만들어내기에 거의 완벽한 구조와 지질학적 연대가 아니라 무려 네 개의 서로 다른 연대에 걸쳐 형성되었다는 점. 대부분의 경우 서로 다른 연대에 생긴, 석유를 함유한 암석이 층층이 쌓였다. 동일한 지표면 작업대에서 여러 셰일층을 채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시추작업대 덕분이다) 다각수평 시추 같은 신기술 덕분에 동일한 시추공에서 서로 다른 여러 층의 셰일을 채취하게 되었다. 어떤 사업적 기술을 동원했다고 해도 이처럼 절묘한 지리적 여건은 모방하기 불가능하다.
- 지구상에 민간인이 토지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 땅 밑에 있는 광물권까지 소유하는 곳이 딱 한군데 있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에서 셰일 개발이 속도를 내온 주요 이유를 손꼽는다면, 셰일 산업 덕분에 지방정부가 벌어들이는 소득이 두배가 되었기 때문. 첫째로 지방세 형태로 직접적 소득이 늘어나고, 둘째로 광물권을 임대해준 지방 지주들이 벌어들인 소득에 과세해서 벌어들이는 간접적 소득이 있다. 이러한 소득은 지방정부를 다독이기에 충분하고 지주들이 셰일 산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함. 또한 지방정부가 셰일 산업이 야기하는 영향을 완화할(규제시행) 뿐만 아니라 셰일산업이 성장하도록 지원하는(도로건설)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줌. 사유재산권이 보장되지 않고 지방정부가 과세할 권한이 없다면, 지역 주민들은 셰일 산업에서 혜택은 누리지 못하고 부저적 영향만 온통 떠안게 됨. 이와 같이 지주와 지방정부가 금전적 이득을 보면서 셰일 매장지 개발이 속도를 내게 됨. 미국에서 민간 소유 토지에서의 셰일개발과 공유지에서의 셰일개발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자. 텍사스 주에서는 지주와 지방정부가 셰일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시추허가를 신청한 지 이틀만에 허가증이 발급됨. (관공서 휴일을 뺀 이틀이 아니라 휴일까지 포함해서 이틀, 텍사스에서는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도 시추작업을 함) 지주도 없고 허가절차를 밀어붙이는 지방정부도 없는 연방정부 소유지의 경우, 15년 시추허가가 나오는 데 평균 220일(휴일을 뺀 220일)이 걸렸다. 따라서 공유지에서 생산되는 셰일 석유비율은 미국 전체 생산량의 1%도 채 미치지 못함
- 북미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최적의 셰일이 매장되어 있는 지역을 보유하고 있음. 그러나 오직 미국만이 지질, 법적 규제여건, 가용자본, 대대적 규모로 셰일을 채굴할 기술과 경험을 갖춘 인력 등 여러 요건이 환상적으로 조합된 환경을 갖추고 있음. 셰일 개발기술이 미국에서 유출되어 세계로 확산될까? 물론이다.그러나 미국에서 일어난 셰일 혁명은 그 어느 곳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음.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셰일 혁명은 순전히 미국적 사건이다. 셰일혁명이 야기한 경제활황, 재산업화, 에너지 자급자족은순전히 미국적 사건전개라는 의미. 이제는 셰일이 미국 에너지 산업의 핵심이 될지(이미 되었다) 여부가 관건이 아니라 미국이 더 이상 세계 에너지 시장과 엮여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가 관건이다.
- 지정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칙은 운송체계의 중요성. 물길로 물건을 이동시키기는 쉽다. (도로에 비해 비용이 12분이 1) 광역 미시시피 운송체계는 상호연결된 물길의 길이가 12000마일 이상. 나머지 세계의 물길을 다 합한 것보다 길다. 이게 사실이라면 미국은 대부분의 나라들이 국내에서 운송하는데 드는 비용과 비교해볼 때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은 비용으로 화물과 곡물과 사람을 실어나를 수 있음.
- 운송비용이 저렴하면 다른 모든 것의 비용도 덩달아 준다. 식량에 쓸 돈이 절약되면 자녀교육에 쓸 돈이 더 생김. 건축자재에 쓸 돈이 절약되면 휴가때 여행갈 여유가 생긴다. 물길을 통한 운송비용이 줄어들면 다른 운송수단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용을 줄여야 함. 수로는 유통지대의 역할도 함. 특히 두 강이 만나는 지점, 운항로의 물목, 강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지점 등에서 유통 중심지가 생김. 볼티모어, 시카고, 캔자스시티, 미니애폴리스, 세인트폴, 멤피스 등과 같은 도시들은 물길을 통한 저렴한 운송수단 덕에 존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덕에 부도 축적하게 됨. 이 도시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하나같이 금융중심지다. 이 도시들을 통과하는 화물 물동량을 처리하려면 재고관리, 재포장, 매매 등 화물 유통을 뒷받침해자는 산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24시간 쉬지 않고 상품과 자본을 처리하는 역량이 필요. 따라서 수로운송을 토대로 건설된 도시는 예외없이 매우 튼튼한 지역금융체제를 갖추고 있음.
- 2차대전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살육과 참화로 초토화된 세계를 보고 세가지 생각을 했다.
(1) 미국은 이 전쟁에서 크게 상처 입지 않은 상태였음. 단지 41년 12월 뒤늦게 전쟁에 끌려들어갔기 때문만은 아님. 중서부 대평원, 광역 미시시피 운하체계, 그리고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애팔래치아와 로키산맥 덕에 미국은 필요한 것을 거의 모두 자국 내에서 구했다. 미국은 제국이 필요 없었음. 대륙이 자기 영토였기 때문. 본토에서 전투가 없었기에 직접적 피해를 입지도 않았음. 미국은 남의 영토에 폭탄을 투하했지만 미국의 영토 핵심부에는 폭탄 한발 떨어지지 않았다.
(2) 전쟁으로 초토화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서 미국은 세계를 재건할 기회를 얻음. 따라서 미국은 동맹국들을 뉴햄프셔 주에 있는 스키 휴양지 브레튼우즈로 초청했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경제 체제를 강요. 미국이 탄생시킨 새로운 체제는 자유무역이었다. 미국 해군(전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해군력)이 모든 동맹국들을 위해 바닷길을 순찰하고 모든 상선을 보호해 주는 체제. 미국과 손을 잡는 나라는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어느 나라에나 어떤 물건이든 팔게 됨. 게다가 미국은 미국이 정한 규칙을 따르는 나라라면 어떤 나라에게든 기꺼이 미국시장을 개방. 종전 무렵 미국 경제는 세계 총 경제규모의 3분의 1을 차지. 그리고 미국 소비시장은 다른 모든 나라의 소비시장을 합한 것보다 규모가 컸음. 융단폭격을 받거나 광산이 탈탈 털리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 다른 나라들이 거절하기 어려운 달콤한 제안이었음.
(3) 미국은 이 모든 달콤한 제안에 단 하나지 조건을 내걸어야 겠다고 생각. 안보 정책은 미국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라는 조건. 미국이 이러한 전략을 통해 달성하려는 핵심적 목표는 이러한 군사동맹으로 새로운 시대를 지배하는 일이었다. 이 전략은 곧 소련봉쇄정책으로 진화. 그 후 반세기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과 전략은 냉전 수행의 수단으로서 세계 자유무역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고, 확대하는데 집중. 간단한 원리였다. 미국이 아무리 막강해도 소련은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과 더 가까이 있었고, 더 많은 탱크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럽동맹국들은 2차대전 동안 나라가 거덜났다. 이들이 소련과 정면대결에서 이길 승산은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동맹을 구축해야 했음. 비용도 안 들고 미군이 소련군에게 직접 노출되지도 않는 그런 동맹을 말이다. 그리고 전선 역할을 할 동맹을 구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돈으로 매수하는 방법이었다. 미국이 둔 이 수는 먹혔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북대서양조약기구는 군사동맹이지만 그 동맹을 유지해준 주인공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경제적 측면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동맹은 패전한 추축국들에게까지 확대되었고, 후에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일컬어지게 된 나라들과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을 비롯해 개도국 대부분에게까지 확대됨.
- 미국이 지배하는 자유무역체제 덕에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가 왔다. 세계 GDP는 열 배로 확장되었고 세계 인구는 세 배로 증가. 과거에 문명을 붕괴시킬 뻔한 대규모 전쟁(프-독, 러-터키, 일-중, 제국의 침략)은 모두 멈췄고,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 체제하에서 안보가 확보되고 부가 창출되면서 중단됨. 소련은 승산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련이 붕괴됨.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중부 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손아귀에서 벗어남. 그로부터 3년이 지나지 않아 소련 자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목표를 달성했고 이제 미국이 기존 전략을 재고할 때가 되었다.
-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미국 역사상 가장 머릿수가 많은 인구연령층이다. 7500만명이나 됨. 이 집단은 그 수가 너무 많아서 평생 미국의 체제를 왜곡하면 살았다. 이들이 노동력에 합류하자 모든 직업을 다 빨아들였고 자기가 보유한 기술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받아들인 사람도 많다. 노동시장에 인력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20년 동안 임금이 오르지 못했고, 어떻게든 가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맞벌이 하는 가구가 증가.
- 2000년 무렵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대다수가 장년층에 접들었다. 이는 미국경제에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었다. 머릿수가 많은 세대가 은퇴를 준비하느라 대량의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는 게 긍정적인 면이다. 그 결과 미국 금융시장에는 투자처를 찾는 자본이 흘러넘쳤고, 저리로 융자를 받게 되면서 배우자에게 새 차를 장만해주고, 자녀에게 새 스마트폰을 사주고, 새 도로를 깔고, 해군에 새 항공모함을 장만해주고, 대통령은 새로운 보편적인 의료보험 정책까지 내놓게 됨. 50년 이후로 이처럼 대출이자가 쌌던 적이 없다. 그러나 근로자 수가 많으면 임금이 오르지 않듯이 자본이 너무 많으면 수익률이 오르지 않음. 낮은 수익률 때문에 베이비붐 세대는 점점 더 위험한 투자처를 찾아 나섬.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금융계에서 이는 전형적인 묻지마 투자 사례임. 베이비붐 세대 투자자들은 더 나은 수익률을 찾아 더 위험한 투자결정을 내림. 위험한 산업부문, 기업, 지역에 점점 더 많은 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수익률은 더 하락. 베이비붐 세대 집단은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미국은 그들이 창출한 자본을 다 소화하지 못했고, 따라서 이들의 자본은 미국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흘러들어감. 르완다의 지방채와 카자흐스탄 에너지 부문에 투자하는 게 유행이 됨. 결국 개발도상 지역은 2000년부터 2015년 사이의 기간동안 기록적인 성장률을 보임. 건강하지도 않고 지속가능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베이비붐 세대의 투자결정으로 온 사방에서 거품이 생겼고, 곧 이 거품들은 꺼졌다. 지난 20년 동안 발생한 (닷컴에서부터 엔론, 서브프라임, 브라질, 러시아, 인도차이나에 이르기까지) 금융거품은 대부분 베이비붐 세대에게 책임이 있고, 이 모든 사태는 오직 베이비붐 세대가 1%라도 수익률을 더 올리려고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묻지마 투자를 했기에 벌어진 것. 그러나 여기에는 투자 이상의 내막이 있다. 고소득에 높은 투자가 더해지면 세수가 증가함. 같은 기간 동안 베이비붐 세대가 여전히 서서히 나이들어감에 따라 정부의 곳간은 차고 넘쳤다. 조지 부시와 오바마는 베이비붐 세대가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시대에 미국을 통치했음. 그러나 추가로 들어온 세수를 미국의 세가지 은퇴관련 정책 (사회보장, 메디케어, 메이케이드) 의 재정을 확충하고 베이비붐 세대가 급격히 고령화되었을 때를 대비하는 데 사용하기 보다는 이 두 대통령은 정반대의 정책을 편다. 이 두 대통령 임기 동안 워싱턴은 흥청망청 돈을 써댔고, 국가부채는 6조 달러에서 20조 달러 턱밑까지 치솟음.
- 16년 현재 베이비붐 세대 가운데 가장 고령인 집단은 은퇴한 지 10년째 접어듬. 세수가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정부가 흥청망청 돈을 써대던 호시절은 지났고, 정부가 은퇴연금과 의료비를 대거 지출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음. 그 여파는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음. 베이비붐 세대가 투자에서 은퇴모드로 전환하면서 이들이 (실리콘밸리든, 디트로이트든, 볼리비아든, 터키든, 인도든) 온갖 투자상품에 넣어두었던 그 모든 자본을 회수하면서 이 자본으로 가능했던 경제성장이 와해됨
- 16년 현재 평균적인 미국인은 이미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사이프러스, 아이슬란드를 제외하고 모든 선진국 평균 국민보다 젊다. 19년 무렵이면 평균적 미국인은 평균적인 중국인보다 젊어진다. 2040년 무렵이며 평균적인 브라질인보다 젊어지고, 21세기 중반에 접어들면 평균적인 멕시코인의 나이가 평균적인 미국인 나이를 추월하게 됨
- 브레튼우즈 체제의 범위는 차치하고, 미국에게 이득이 없었던 것은 아님. 단지 냉전이 한창이었고 동맹체제가 절실했기 때문만은 아님. 미국도 경제가 성장하면서 국내 석유생산량이 하락. 미국 유전은 2차대전 당시 연합군에게연료를 공급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73년 무렵이 되자 미국은 원유 순수입국이 되었고 08년 무렵에는 15mpbd를 수입해 와야 했는데, 이는 제2석유 수입국이 수입하는 양의 세배로서 미국 GDP의 2.8%를 석유수입에 소비했음. 그 해에 4000억불이 넘었다. 미국은 알제리와 사우디에서 끔찍한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미국은 75-02년 앙골라에서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앙골라 정부에 대해 반감이 컸지만 앙골라의 원유생산에 도움을 줌. 79년 이란 혁명 이후 미국은 한 세대 동안 이란과 정면으로 맞서게 되면서 항공모함 전투단을 페르시아만에 주둔시키고, 이 지역의 국가들이 서로 도발하거나, 석유 유통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했다. 간단히 말해 미국이 이 나라들이나 이 나라들의 국내정치상황을 따지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미국이 외부에 에너지를 의존했기 때문에 폭이 좁았다. 그리고 외부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외부정세에 관여해야 했다.
- 오늘날의 세계는 직간접적으로 미국이 관리하고 미국이 보호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미국이 과거에 구축했고 현재 관리하고 있는 체제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이를 대체할 체제를 마련할 역량이 부족함. 현재 미국이 관리하고 보호하는 체제를 제거하면 대부분의 나라들은 경제와 안보를 지킬 방법을 잃어버리게 됨. 에너지 수출국은 자국상품을 수출할 시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에너지 수입국은 물량확보를 위해 싸워야 할지 모름. 대부분의 나라가 자국의 경제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없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많은 나라들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전쟁뿐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질서가 깨지는 상황이 정상인 시대가 온다.
- 에너지 시장을 서로 차지하려고 하다 보면 북미 역외 어딘가에서 공급에 차질이 생김. 그런 일이 발생하면 북미 유가는 요동치게 되고 생산된 셰일은 신속히 시장에 나오게 됨. 미국이 일단 원유 자급자족을 달성하면 유가는 배럴당 70불이 상한가가 되고, 이 가격에서는 미국의 셰일 매장지는 모조리 수익을 내게 됨. 바깥세계는 전혀 이야기가 다름.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총탄이 오가고 유조선이 납치당할 때마다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급격히 요동치게 됨.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 셰일이 이미 미국의 경제에 부여한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 더 유리해질 뿐만 아니라 미국 바깥 세계와 비교해볼 때 안정적인 공급과 가격수준과 가격안정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해지기까지 한다.
- 지구상에서 반항적인 소수민족들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러시아보다 더 경험을 축적한 나라는 없다. 모스크바 대공국 초기부터 러시아는 안보를 달성하려면 주변지역들과 주변지역 너머 지역까지 점령해서 이들 지역을 전략적 완충지도로 바꾸고 이 지역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는 늘 세계에서 가장 침투력이 강한 정보망을 보유하면서 점령지 주민들을 평정해옴.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일인 듯하지만, 방어가 불가능한 국경 수천 마일을 방어하는 데 드는 인력에 비하면 훨씬 적은 물자와 인력으로 가능. 무엇보다도 물자부족에 시달리는 러시아로서는 선전선동을 활발하게 이용하면 러시아 국민들에게 이러한 전략이 먹혀들어간다는 점이 중요함
- 미국이 보기에 미국의 동맹관계는 대부분 이제 그 수명을 다했고, 미국은 중동의 석유가 필요하지도 않으며, 석유의 원활한 수급으로 가능했던 세계 무역체제도 애초에 미국이 직접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미국을 페르시아만과 엮어두었던 논리를 구성하는 연결고리들이 모조리 거의 동시에 끊어지고 있다. 미군의 점진적 철수도 이미 많이 진전된 상태임. 07년 이후로모로코에서 아프간까지 연결하는 지역에 위치한 나라들 전역에 걸쳐 주둔하던 미군은 최고 25만에서 15000명 이하로 줄어듬.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이 지역에서 미군이 철수한 이유는 미국 정치가 이념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가 아님.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미군 철수가 대부분 오바마 정권에서 이루어진 것은 맞다. 하지만 오바마 전임자인 조지 부시 정권하에서 미군철수 계획이 수립되고 실제로 철수가 시작됨. 16년이 저물무렴렵 페르시아만 지역에 남아 있는 미군은 대부분 카타르에 위치한 미 중부사령부의 지역본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중부사령부는 이라크와 아프간에서의 작전을 감독하기 위해 카타르에 기지를 설치했다. 이제 이 두직에서의 작전이 대부분 마무리되었으므로 미 중부사령부는 머지않은 장래에 이 지역 작전사령부를 미국 본토로 귀환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장 중요한 초대형 항모의 경우, 15년에 페르시아 만에 머물렀떤 기간은 다섯달이 채 되지 않음. 이러한 새로운 패턴이 이제 일상적 패턴이 된 것은 아님. 새롭게 일상적 패턴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바로 무질서로 가는 전환기일 뿐이다. 많은 국가들이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해 여전히 관심을 보일 이유는 많을지 모르지만, 그런 나라들 가운데 세계적 초강대국은 없기 때문에 지난 40년 동안 이 지역에 존재해온 전략적 평형상태는 봄날에 강 표면 얼음 갈라지듯이 깨지고 있다. 이 지역의 나라들은 앞으로 지역의 지정학적 여건을 스스로 파악해야 함. 그리고 그 지정학적 여건은 한마디로 말해서 험악하다.
- 사우드 왕가는 사막 한가운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20세기 전에 아라비아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오아시스가 있는 마을들을 습격하고 이따금 훨씬 문명화된 히자즈 지역까지도 약탈했다. 바로 이 지역이 현재 간간이 비가 내리고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현재 사우디의 서부 변방 지역이다. 사막에서의 삶은 혹독하고, 사막에서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일은 더욱 힘겹다. 사우드 부족이 이러한 환경을 헤쳐 나가는 수많은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아주 엄격하게 해석한 이슬람을 채택해 전투를 미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강력히 규제하는 것이었다. 현지인들은 이를 살라피트 이슬람이라고 일컫는 반면, 역외에서는 와하비즘이라 부름. 이 운동의 창시자 시크 이븐 압둘 와하브의 이름을 딴 명칭이다.
- 1차 대전 동안 사우디인들은 영국에게 절실히 필요한 대상이었다. 치고 빠지는 사막전투에 능란한 현지 세력으로서 뇌물을 줘서 오스만투르크를 공겨갛게 만들 수 있었음. 영국-사우디 동맹이 형성되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 사우디인들은 조직화된 세력과 무기를 갖추게 되었고, 영국의 지원까지도 받으면서 해당지역의 안보 통제권을 장악하려고 시도. 와하브의 후손들과 정략적 동맹관계를 맺으면서 주요 권력 브로커들이 하나로 뭉침.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국가가 탄생. 그로부터 채 10년이 못 돼 석유가 발견되었고 신생국 사우디는 다른 신생독립국이 밟았던 발전과정을 따르게 됨. 새로 배출된 지도자들은 석유 말고는 자원이 거의 없는 왕국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간시설 구축에 돈을 쏟아붓기 시작. 유목민 출신인 사우디인들은 매우 도시적이고 안락한 생활방식에 곧 익숙해짐. 석유를 기반으로 한 경제는 엄청난 소득을 창출할지는 몰라도 말 등에 올라타 사람머리나 동강내는 기술이 주특기인 사람들을 고용할 만한 일자리를 창출하지는 못했음. 당시는 아타리, 플레이스테이션, 인터넷이 등장하기 훨씬 전이라 남아돌아가는 여가시간을 채울만한 활동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원초적 본능에 충실했다. 그러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 그러자 이념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생김. 지하드와 약탈에 바탕을 둔 문화를 유지한 채, 지금은 전부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었다면, 총체적으로는 폭력, 구체적으로는 군사행동이 바람직하다고 평생 배워온 실업자 청년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사우디는 영토를 확장하려 했지만 영국군이나 영국의 대리자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통상적인 영토팽창의 꿈은 물거품이 됨. 사우디는 정력이 넘치는 폭력적 청년들을 나라 안에 꼼짝 못하게 묶어 두었고 이 때문에 끊임없이 국민들을 다잡아야 했다. 잔혹하기로 치자면 한술 더 뜨는 부족들은 국경수비대나 군대에 입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사람들은 종교경찰에 투입됨. 폭력적 성향이 덜한 이들은 관료집단을 팽창시킴. 한편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돈은 온갖 보조금으로 뿌려 국민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든다. 누구든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교도소에 집어넣음. 사우디의 교도소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도록 설계됨.
- 사우디는 곧 새로운 국민관리 정책을 생각해냄. 바로 인력수출이었다. 사우디는 특히 폭력적 성향이 강한 청년들을 해외로 내보내 사우드, 아니 사우디아라비아, 아니 이슬람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 투쟁하도록 했다. 청년들이 나라 바깥 어딘가에서 사람들 목을 치고 건물을 폭파시키는 한 나라 안에서 말썽을 부릴 일은 없었다.
- 이란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잠재적 핵 균형이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는 무수히 말이 많았지만, 이란이 핵무기 보유국이 되면 얻는 현실적 이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름. 이란은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 재래식 군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월등하고, 정당하게 싸운다면 이라크, 사우디, 페르시아만의 모든 나라들이 합심해서 달려들어도 쉽게 패배시킬 수 있다.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맹주가 되는 데 핵무기는 필요 없다. 오히려 핵무기 실험을 하면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역효과를 낳게 됨. 따라서 이란은 미국과의 협상을 핵개발과 맞바꿀 용의가 충분히 있다. 미국과 이란이 서로를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 데 동의하면 (그리고 미국이 페르시아만에서 손을 떼면) 역사의 물결은 이란에게 유리하게 흐르게 됨. 경제와 정치와 인구구조도 이란에게 유리함. 그렇다고 해서 이란이 핵무기가 쓸모없다고 여긴다는 뜻이 아님. 이란에게는 핵무기보다 미국이 없는 중동이 훨씬 쓸모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다시 사우디-파키스탄 동맹으로 이야기가 귀결됨. 파키스탄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란의 악몽은 파키스탄과의 전쟁이 핵전쟁으로 확산되는 상황이 아니라 파키스탄과 사우디의 동맹이 너무나도 확고하고 사우디의 재정이 너무나도 튼튼해서 사우디가 이란을 저지하기 위해 파키스탄으로부터 핵무기를 사들이게 되는 상황이다.
- 미국은 이제 페르시아만 역내 질서에는 관심이 없다. 역내 갈등은 사우디에게 처리하도록 맡김. 그러나 사우디도 역내 안정에 관심이 없다. 사우디는 오로지 이란의 힘을 뿌리뽑는데 관심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 이란과 마찬가지로 폭동을 부추기는 전략을 이용하고 있다. 이제는 숫자놀이다. 이란의 대리자들은 모두 수니파 아랍인들 사이에 섞여 사는 소수파인 반면, 사우디는 다수파인 수니파 아랍인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사우디는 그 지역이 초토화되어도 상관하지 않음. 이란은 재정과 인력싸움에서 승산이 없다. 반체제 폭도들이 또 다른 반체제 폭도들과 대결하는 상황에서 역내에 질서가 유지될 리 만무함. 그리고 역내 질서가 파괴되면 이란이 역내에서 행사하는 영향력도 사라지게 됨. 이란이 자그로스 산맥을 요새처럼 두른 고지대에 고립된 가난한 왕국에서 벗어나려면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 언젠가 이란은 사우디가 이란에 맞서는 장기적 전략을 구사해왔다는 사실과 이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 이란은 백만대군을 자랑하고 이란공군은 사우디의 공군보다 규모가 훨씬 크며, 사우디 군인들이 책에서조차 읽기 싫어가는 혹독한 참화를 이란 국민들은 견뎌낼 의지가 있다. 서류상으로 볼 때, 이란은 공정한 싸움에서라면 사우디를 쉽게 이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싸움이 공정할 리가 없다. 이란이 대비해온 전쟁은 이란이 피치 못하게 치러야 하는 전쟁과는 전혀 다름. 따라서 이 충돌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대단히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세계 석유공급에 미칠 영향도 훨씬 끔찍하리라 예상됨
-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면서 얻게 된 부작용들 가운데 하나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장거리 원정이 가능한 해군을 구축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감당하기 꺼리게 되었다는 점. 미국이 무료로 화물을 보호해주는 데, 뭣 땜에 자기 생돈 들여 화물을 엄호할 해군력을 구축하겠는가? 독자적으로 장거리 원정이 가능한 해군을 구축하기로 한 나라는 몇 나라뿐이다. 해군의 역량이 높은 순서대로 나열해보자면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호주, 한국, 타이완이다. 이게 다인데, 이 나라들이 모두 중동에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있거나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님.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자국과 가까운 지역에서 필요한 만큼의 석유를 확보할 수있고, 영국 해군과 러시아 해군은 이미 지구전에 가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페르시아만에까지 원정을 갈 여유가 없다. 호주는 전통적인 동맹국들이 정치적으로 엄호를 해주지 않는 한 페르시아만 전쟁에 가담하기보다는 동남아나 남미에서 필요한 석유를 확보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오로지 일본, 중국, 한국, 타이완만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필요도 느끼고, 그럴 역량도 있는 나라들이다. 페르시아만에 있는 나라는 (사우디를 포함해) 하나같이 국기를 바꿔 단 자국의 유조선을 엄호해줄 세력을 확보하려 하려면 동시에 반대편 나라는 그들의 화물을 엄호해줄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방해할 가능성이 크다. 누가 누구와 맞붙든 상관없이, 전쟁이 발발하고 며칠 안에 세계는 만성적 석유부족에 돌입하게 되고, 역외에서 참가한 국가들은 이미 누구편을 들지 결정한 상태에 놓이게 됨. 이와 같이 페르시아만에서 에너지 공급물량을 확보하려는 투쟁에 개입하는 유일한 역외 세력은 동아시아 국가들이다.
- 셰일 덕분에 미국은 이미 거의 석유를 자급자족하는 단계에 도달. 몇 달 동안 유가가 계속 상승하면 셰일 업자들은 생산량을 늘려서 북미지역을 완전한 석유자급상태로 만들게 됨. 페르시아만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는 예전의 브레튼우즈 체제 동맹인 중국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미국이 중국경제를 온전히 보존하고 건전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사우디-이란의 혈투에 끌려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 전략적으로 볼 때, 사막에서 교착상태가 지루하게 계속되는 상황이 미국에게 최상의 결과다. 이란과 사우디 사이에 충돌이 몇 년이고 계속되는 교착상태에 빠지면, 둘 중 어느 나라도 이 지역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러한 교착상태에 빠져 있으면, 이 두나라는 중동 밖의 그 어느 나라에도 자국이 생각하는 도덕을 강요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에게 최고의 국가안보 정책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일지도 모름.
- 1차대전의 여파로, 유럽국가들은 머리를 맞대고 지도 위에 선을 그어서 이 지역을 여러 구역으로 나눠 각기 자기 영향권 하에 두었다. 이 협정(협정문을 작성한 인물의 이름을 따 사익스-피콧이라고 불린다.)은 인구밀집 지역이라든가 각 민족의 정착지역 등은 무시한 채, 대규모 석유 매장지가 발견되기 전에 체결되었다. 그 결과 페르시아만 전역에 걸쳐 국경은 모두 일직서으로 그어졌다. 다가올 무질서 시대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지역의 안정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나라가 없고, 세계 무역도 과거의 질서가 되어버렸으며, 지도상에 직선으로 그어진 국경이 제구실을 하도록 보장할 외부세력이 없으며, 이 지역에서 가장 역량이 있는 두 나라가 장군멍군하며 반란을 부추기는 상황에서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단순히 와해되는 데 그치는 게 아님. 산업기반, 전력공급시설, 농업기반이 거의 손실되어 문명이 붕괴된다.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예멘, 레바논 (대략 이 순서대로)은 현재 자국의 인구규모의 3분의 1도 지탱하지 못하게 됨. 쿠웨이트도 다시 한 번 금전적 대가를 주고 동맹을 구하지 못한다면, 붕괴되는 나라들 명단에 합류하게 됨. 대략 6천만명이 이란, 터키, 유럽에서 난민이되든가 기아와 갈증으로 사망하게 됨
- 일본은 거의 전적으로 수입한 액화천연가스만으로 전기를 생산함. 그러나 현재의 소비패턴을 에너지 의존성과 혼동하지 말라. 일본은 수십년 전부터 단일한 에너지원이나 형태에 의존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나라 전체에서 도시 단위에 이르기까지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을 이용해 전력을 생산하지만 가동을 중지한 시설들이 많이 있다. 일본이 얼마나 신속하고 철저하게 에너지원을 전환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11년 3월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하고다. 해양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믹 원자력 발전소를 삼켜버리면서 세계 최악의 원전사고가 발생했다. 일본 원전시설의 안정성에 대한 정당한 우려와 단순한 공포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본당국은 일본 원전시설 전체를 폐쇄했다. 쓰나미가 강타하기 전날 51개 원자력 발전시설이 일본의 전기수요의 30%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한 달 후 15개를 제외하고 모든 원전시설이 완전히 가동을 중지했고, 나머지도 12년 5월 모두 가동을 중지. 일본이 아니라 세계 여느나라 같았으면 이런 사태는 나라의 안정이 흔들릴만한 사태였겠지만, 일본에서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일본은 천연가스, 석탄, 석유를 사용하는 발전소들을 가동해서 원전시설 전체를 대체했고, 그렇게 하는데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해야 한 것(예컨대 산업시설의 가동은 임시로 전력수요가 낮은 야간으로 돌린다든가) 외에 일본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큰 원전사고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전력시설에 타격을 받았지만 몇몇 경미한 사건 외에는 충격을 흡수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 중국은 세계정세가 어수선해지면 에너지 공급경로를 강제로 열어둘 해군역량(그리고 다른 나라의 협력을 이끌어낼 만큼 좋은 평파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이 없다. 중국은 전쟁이 임박하면 해외에서 수입하는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감히 높일 엄두를 내지 못함. 중국은 가능한 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발전연료나 비교적 중국 가까운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연료에 의존해야 함. 중국에게는 석탄이 유일한 해답이다.
- 동북아 4개국이 바닷길과 에너지 공급원 확보문제와 관련해 각자도생하게 되면서 이들은 공해상에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됨. 브레튼우즈 시대에는 해상에서 절대적 자유를 보장하는 게 미국의 전략이었다. 동맹국과 경쟁국 가릴 것 없이 그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상황이 오면 미국은 이 지역에서 손을 떼게 된다. 결국 미국의 해군력만 뒤로 물러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은 전략적으로 한국을 엄호하지 않게 되고,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도 끝나게 된다. 한국은 이 지역의 혼란스러운 정세에 너무 깊이 발을 담그고 있으므로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수입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미국의 지속적 개입을 납득시키기 어려움. 뒤집어보면, 미국이 유조선 전쟁에서 한국이 누구와 손을 잡기를 바라는 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님.
- 경제적으로, 인구구조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큰 걱정거리를 안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이 중국과 손을 잡든 일본과 손을 잡든 상관없이 한국이 에너지와 원자재를 수입하고 시장 접근을 위해 이용하는 바닷길과 접해 있는 모든 나라들과 사실상 동맹을 맺게 되는 나라는 일본이다. 한국이 패를 잘못 내놓으면 동아시아 유조선 전쟁은 일본이 중국에 이어 한국의 꿈을 짓밟는 짤막한 후속편으로 마무리된다. 한국이 움찔할 만한 이러한 예상조차도 북한에서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하는추측이다.
- 중국 주식회사와 아시아 공장의 시대는 끝난다. 일본, 한국, 타이완, 중국이 이룩한 기적적 경제성장은 값싼 자본, 바닷길의 자유로운 통행, 개방된 시장 덕분에 가능했다. 특히 미국이 시장을 개방했기 때문. 이 모든 요인들은 유조선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붕괴되고 있다. 동북아 4개국은 곧 공급량이 급격히 줄어든 수입석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자본과 군사력을 동원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지금까지는 한푼도 들지 않았던 일이다. 그러나 동북아 국가들이 모두 성공하지는 못함. 모두에게 돌아갈만큼 원유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 무능력해서든, 불안정해서든, 적대감 때문이든, 동북아 성공의 마지막 시도(수출극대화를 위한 상호통합)는 무산된다. 동북아 바깥의 세계는 세계 제조업 시장의 규모가 갑자기 대폭 축소되고 동북아 시장에서 모든 것이 수요가 대폭 감소하면서 고통을 겪게 됨. 시멘트, 철강원석, 구리, 아연, 알미늄 등 모든 원자재 수요가 붕괴됨. 산출재 측면에서 빚어지는 차질은 더욱 심하다. 2차대전 이전에 대부분의 제조품목은 거대한 산업단지에서 생산되었다. 투입재를 수입해 역내 노동력과 기간시설로 거대한 산업단지에서 생산되었다. 투입재를 수입해 역내 노동력과 기간시설로 가공해 최종상품으로 만들고 다른 소비시장에 수출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국제운송을 안전하고 저렴하게 만듦으로써 이 모두를 바꾸어 놓았다. 거대한 산업단지에서 모든 공정이 이루어지던 통합적 생산방식에서 전체적 공정을 쪼개어 각 공정부분마다 가장 월등한 시설에서 그 공정이 이루어지는 생산방식으로 바뀌었다. 일괄제조방식이 사라지고 수십, 수천가지 단계를 거치는 공급사슬이 형성됨. 세계 제조업 공급사슬의 절반이 동아시아에 있다. 유조선 전쟁에서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을 운명을 맞게 되는 것은 세계 에너지 시장뿐만이 아니다.
- 에너지 부문에서 널리 통용되는 금언이 있다. 고유가의 해결책은 고유가이고, 저유가의 해결책은 저유가다. 이 금언에 담긴 개념은 간단한. 고유가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기업들이 신기술에 투자하고 새로운 유전을 발굴하고 기간시설에 투자해 새로 생산되는 원유가 늘어남. 신규생산 원유가 늘면 수요를 압도해 가격이 폭락하게 됨. 저유가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기업들은 기술, 유전, 기간시설 투자를 중단. 그러면 원유생산이 급격히 줄면서 결국 수요보다 적게 생산되는 지경에 이름. 공급이 수요보다 많던 수급불균형은 공급이 딸리는 불균형으로 전환되면서 가격이 폭등하게 됨.
- 미국은 그동안 에너지 수급 때문에 세계문제에 관여할 필요를 느꼈는데, 셰일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짐. 미국에서 정치성향을 불문하고, 미국이 온갖 종류의 세계문제에 관여하고 자유무역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데 대해 분노하는 정서가 팽배하게 되었다. 서로 크게 연관은 없는 여러 이유로 인해 미국을 세계와 연결하는 경제적, 전략적 연결고리들이 제거됨.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10여년 동안 몇 가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1) 미국이 세계에서 손을 떼겠다는 정서는 매우 깊고 폭넓게 만연해 있고, 이러한 정서 때문에 세계 질서를 유지해주는 구조가 사라지게 된다. 지구전, 페르시아만 전쟁, 유조선 전쟁은 미래의 세계에서 세계 체제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줄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함. 무질서 시대에 이러한 전쟁들이 발생하면 기근과 국가붕괴의 광풍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상당부분을 휩쓸게 된다.
(2) 미국은 총체적 철수를 실행하겠지만, 이는 잠정적 철수다. 20-30년 동안 모험을 자제한 후 미국은 다시 바깥 세상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사이에 세계가 붕괴되기 때문에 미래에 세계로 진출할 미국은 16년의 미국보다 훨씬 더 막강한 존재가된다. 이러한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미국은 혼돈에 빠진 세계에 새로운 안보질서를 강요하게 될지도 모름. 그러나 그 사이에 경제적, 정치적, 안보적으로 세계가 후퇴할 시간은 충분하다.
(3) 미국은 분명히 힘을 행사할 역량이 있다. 다만 의지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이 도발을 당하면 맞대응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누가 행위의 주체가 될지가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세계에서 철수하는 주체는 미국정부다. 미국의 민간부문은 넓은 세계에 관여할 역량이 있고 관여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미국이 세계무대에서 사라진다기보다는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행위주체와 그들이 사용하는 방편들이 45년 이후의 규범과는 아주 달라지게 된다.
- 1890년대는 미국이 남북전쟁 후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재건이라는 과업을 막 완수한 직후였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도가 작동하고 중서부로의 이주행렬이 잦아들면서 정착이 마무리되고, 남부지역이 다시 경제에 기여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여러 다양한 사업에 쓸 여유자금이 엄청나게 축적되었음. 따라서 미국은 해군을 구축하고 탐험에 나섬. 미국은 군사력과 군사력과 도달범위를 기업 이익과 결합하고 정부로부터 융자지원을 받아 외국경제에 침투했다. 국가, 기업, 군사, 금융이 혼연일체가 된 형태는 2차대전 직전까지 존재했다. 역사학자들은 제국주의 전쟁, 세계대전, 경제적 풍요와 자신감이 넘치던 20년대, 대공황 등을 포함하는 어느 시기에 하나의 명칭을 붙이기 꺼리는데, 수단의 측면에서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용어는 "달러 외교"다. 이는 태프트 정부(1909-13)의 공식적 외교정책이었다. 경제력과 국력의 관점에서 보면 달러외교는 대성공이었따. 미국은 찾아가는 나라마다 미국의 국익을 각인시켰다. 미국의 투자로 기간시설과 산업시설을 구축해 지역 노동력을 흡수했고, 미국뿐만 아니라 투자대상국에서 소비할 상품도 만들어냄. 마찬가지로 미국의 외교력과 민간부문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결합하면서 미국상품은 미국이 낙점한 시장에 접근하는 혜택을 누렸다. 이와 같이 국력을 민간기업과 결합하는 방식은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다. 브레튼우즈 체제 이전에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런 식으로 했다. 그리고 중국과 프랑스 같은 닐부 브레튼우즈 체제 참가국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식으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이런 방식을 쓰기 쉽다는 뜻은 아님. 또 수많은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민간의 이익과 정부의 이익이 얽히게 되면, 보통 아주 단순한 작전도 완전히 새로운 수단을 활용할 수 있다. 정부가 내리는 외교지침에 따라 민간기업이 메시지를 전달할수도 있다. 위협도 민간기업을 시켜 전달가능함. 민간 융자 제공자들은 자국 정부부처의 입을 통해 외국의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할 수 있다. 군사역량은 국가의 보조기구일 뿐만 아니라 기업의 보조기구도 된다. 과거에 달러외교를 할 때, 자국기업이 외국에 진입하도록 하고 미국 국적이 아닌 경쟁사들의 진입을 막고, 필요하다면 주권국가의 정부에게 계약을 체결하라고 강요하려고 다른 나라 내정에 직접 간섭하는 데 미국의 군사력을 이용한 사례가 수십 건 있다. 다가올 무질서의 시대에 미국은 이러한 달러외교가 펼쳐지는 새 시대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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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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