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러를 겨눈 위협이 점점 거세지고 미국 정부채가 해마다 세계 대부분 국가 국내총생산보다 많은 1조 달러이상 늘어나고 있던 09년말과 10년 초, 미국 정부와 월가의 골드만삭스, JP모건체이스 등에 포진한 그 동맹세력은 사실상 부상중인 유로를 상대로 화폐전쟁에 들어감. 그 결과 촉발된 것이 이른바 그리스 위기다. 나중에 유럽의 일부 매체가 폭로한 기사에 따르면, 02년 그리스정부와 골드만삭스는 그리스가 적자 요구조건이나 부채 수준을 충족하지 않았는데도 불법적으로 유로존에 진입하게끔 계략을 꾸밈. 이것이 바로 유로위기의 서막이었따. 그 위기가 노린 바는 2차대전이 일어나기 한차 전부터 주도적인 세계 준비통화였던 미국 달러를 위협하면서 서서히 대안으로 떠오르는 유로에 치명상을 안겨주자는 것이다. 그러한 미국 정부의 공격을 조지 소로스의 헤지펀드를 비롯한 뉴욕의 헤지펀드들이 거들었다
- 국제 금융가들이 노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각국의 정치체제와 세계 경제 전반을 통제할 수 있는 세계적인 금융통제체제를 구축하고 그것을 자기들 손안에 넣는 것이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세계 중앙은행들은 빈번하고 은밀한 회동과 회합을 거쳐 비밀협약을 이끌어내고 그에 따라 마치 봉건주의적 방식으로 그 체제를 통제한다. (캐럴 퀴글리)
- 석유를 장악하라. 그러면 전 세계 국가를 장악할 것이다. 식량을 장악하라. 그러면 전 세계 인민을 장악할 것이다. 화폐를 장악하라. 그러면 전 세계를 장악할 것이다. (헨리 키신저)
- 증권화란 은행이 안고 있게 마련인 채무불이행의 리스크를 궁극적으로 은행의 대차대조표에서 들어내고 그 리스크가 널리 확산되도록 조정함으로써, 31년에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이 도산한 후 맞게 된것과 같은 위기에 두번다시 빠지지 않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됨. 그런데 이것은 미국 권력의 향방에 관한 몇가지 근본적인 가정에 기초한 일종의 환상이다. 그 가정은 남북전쟁이 끝난 1860년대 말 미국이 독일제국의 맞수인 주요 산업국가로 부상했다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음.
- 링컨은 런던의 주요 은행가들과 뉴욕의 그 동맹군들이 장악하게 될 3차 미합중국은행을 창립할 뜻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대신 헌법의 권한을 이용해 미 정부의 전적인 신뢰와 신용을 바탕으로 당시로소는 어마어마한 액수인 1억 5천만불의 법정화폐를 발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의회를 설득. 링컨 치하에서 그 법정화폐는 미 재무부가 발행. 그 법정화폐는 이자가 붙지 않고 "수입관세와 공공채무에 대한 이자를뺀, 공적, 사적채무에 모두" 쓰였다. 뒷면이 초록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하여 이 법정통화에는 그린백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는 의회가 법정화폐로 인정한 그린백이 4.5억불이나 유통됨. 그린백은 발행 장시에는 금으로 교환해줄 수 없었다. 그것은 미 정부가 발행하는 법정지폐였다. 그 지폐 소유자에게 정화로 교환해 주겠다고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구체적으로 기약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 지폐 소유자는 미국이 앞으로도 계속 존속하고 번영하리라 믿으며 베팅한 것이다. 그린백 덕에 링컨은 24-36%라는 얼토당토 않은 이자를 요구하는 런던과 뉴욕의 은행가를 따돌리고 전쟁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음. 전쟁에 돈을 대준 그린백의 도움으로 북부연합은 민간은행가들에게 전쟁부채를 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일로 그는 런던과 뉴욕 금융세력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
- 타임즈는 링컨의 그린백 발행에 민감한 반응을 보임. 시티오브런던 은행가를 대변하고 있었던 게 분명한 사설에게 그 신문은 이렇게 선언했다. "북미공화국에서 시작된 유해한 재정정책이 그 길로 영영 굳어진다면 미국 정부는 아무 비용도 들이지 않고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것이다. 그리고 빚을 모두 청산하여 부채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미국 정부는 통상에 필요한 화폐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역사상 그 어느 문명화한 국가보다 부강해지는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의 지식과 부가 북미로 몰릴 것이다. 미국 정부를 타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미국 정부가 지상의 모든 제국을 집어삼킬 것이다."
- 악명높은 1893년 공황은 실로 미국에서 은을 줄이고 금에 대한 통제권을 뉴욕의 민간은행에 넘겨주기 위해 모건세력이 어거스트 벨몬트와 작당해 조작한 작품. 몇 차례의 금융공황을 꾸며대는 과정에서 그들은 경제의 구심이랄 수 있는 철강과 철도에 대한 통제력을 확실하게 틀어쥐었다. 모건과 모건은행의 창구역할을 한 것은 민주당 대통령 그로버 클리브랜드 밑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존 칼라일이었다. 모건과 친구들은 그저 평범한 뉴욕 시 정객에 불과한 클리블랜드를 뒷돈을 대주면서 대통령직에까지 올려 놓음. 클리블랜드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걸핏하면 백악관에 사적인 손님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둘 있었다. 바로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런던 로스차일드 은행을 대리한 어거스트 벨몬트 1세의 아들 벨몬트 2세와 J.P 모건이었음. 런던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어거스트 벨몬트 1세는 칼 메이어 로스차일드 남작의 숨겨둔 아들이었다고 함. 어쨌거나 로스차일드는 어린 벨몬트를 양자로 삼아 훗날 미국에 파견했던 것. 벨몬트라는 덜 시끄러운 이름으로 미국에서 로스차일드의 사업을 챙기려는 속셈이었다
- 사업의 속성상 국제은행가들은 어느 특정 국가에만 충성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상황을 주물러 치부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제 세상이었음. 따라서 기밀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경쟁자를 제치고 우위를 차지하거나 성공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했음. 멀리 베네치아 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 때부터 수세기를 거치면서, 그들은 개인에게 돈을 빌려줄 때보다 정부나 국왕에게 돈을 빌려줄 때 훨씬 더 많은 이익이 난다는 사실을 깨달음. 무엇보다 채무를 차질없이 상환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국가권력이 보증하는 대부라는 점이 매력이었음. 권력의 세계에 들어서는 입장권을 따내는 데서 화폐보다 더 잘 먹히는 것은 없다. 신용대출은 각 나라의 지역을 통제하는 데 쓰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세계대전 이전에 런던과 파리의 은행가들이 신용대출을 중단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린 것처럼 말이다. 화폐, 좀더 정확하게 말해 화폐의 통제가 그들이 겨냥하는 전략적 목적이었음. 중앙은행이나 국책은행을 틀어쥠으로써 그 나라를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부리는 권력의 핵심이었다. 70년대에 헨리 키신저가 말한 대로, 국제은행가 엘리트 집단은 다름 아니라 전 세계 석권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화폐를 장악하라. 그러면 전 세계를 장악할 것이다!
- 베어링스, 로스차일드, 슈뢰더, 모건, 와버그, 시프, 맬릿, 셀리그먼 같은 국제은행가들은 자국 정부 외국정부 가리지 않고 그들과 은밀하면서도 막역한 유대관계를 맺으려 애썼다. 빚을 얻어 쓰는 주체가 바로 정부였던 것. 그들은 정부보증채를 고가에 거래. 그 과정은 극도로 은밀하게 진행됨. 그들의 돈이 전쟁을 벌일지 아니면 평화를 계속 유지할지 따위의 정치적 결정을 막후에서 어떻게 조작하는지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몸에 밴 관례였음. 자연히 그들은 음모나 정치조작, 정객이나 법조인을 매수하는 짓 따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름. 또한 은행가들의 명령에 고분고분한 인물을 내세우기 위해 비협조적인 국가나 주의 통치자를 처치하는 쿠데타에 돈을 대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 부분지급준비제도의 본질은 은행이 최대한의 이익을 내기 위해 최대한의 돈을 빌려주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결국 신용과잉으로 시장이 붕괴함. 은행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 돈을 빌려주는 것이기에, 신용기제는 펜대를 몇 번 굴리는 것만으로 없는 돈을 만들어내는 식이 됨. 이것이 바로 연방준비제도가 창립되기 전 1세기 동안 되풀이된 은행공황의 배경. 모건 등 엘리트 은행가들은 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중앙은행을 원했음. 신용제도의 감독기관으로 기능할 그 중앙은행은 금융제도 전반의 이해에 맞게 개별은행들을 줄 세우는 중앙경찰 노릇을 할 판이었다. 이 제도를 통제하려면, 즉 신용대출을 늘리거나 줄이려면 부분지급대출에 요구되는 은행의 지급준비금 수준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연준은 뉴욕의 머니트러스트에게 국가 신용대출에 관한 준독점적 권한을 허용해줌. 그 권한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지킬 섬에 결집한 이들은 이른바 와버그안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와버그안에는 올드리치안이라는 이름을 붙임. 마치 공화당 출신 상원의원의 독창적 고민의 산물인 양 보이게 하려는 정치적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의 화폐를 장악하고자 하는 계획을 밀어붙이기에 앞서, 화폐권력이 집중되는 데 대한 대중의 반발 등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 영국이 심각한 쇠락의 징후를 보이고 있을 무렵, 처음에는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저력 있는 두 국가가 서서히 대영제국의 역할을 가로채로 나섬. 그중 하나는 독일제국이었다. 1900년만 해도 독일 엘리트들 가운데 감히 영국을 넘보는 이는 없었음. 그러나 독일의 산어발전, 교육제도, 과학은 벌써 영국을 성금 앞지르고 있었다. 오로지 금융중심지인 시티오브런던만이 세계무역을 선도하는 역할을 간심히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독보적 세계대국으로서 대영제국이 누리는 역할에 도전장을 던지며 등장한 또 하나의 국가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1898년에서 1899년 사이 필리핀과 쿠바를 차지하기 위해 에스파냐를 상대로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을 벌인 나라다. 영국, 독일, 미국이 선전포고조차 없이 펼친 이 다툼의 승패가 마침내 명백하게 드러나기까지는 30년의 세월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필요했다.
- 1차대전은 실은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살해당하자 진지한 국제조약을 어긴 데 따른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전쟁은 화이트홀과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일찌감치 내린 전략적 결정에 따른 것이다. 영국은 1904년 프랑스와 화친협상을 맺었으며,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고 난 이태 뒤인 1907년에는 러시아, 프랑스와 3국협상을 체결했다. 이 협상들이 노린 것은 공동의 적인 독일을 군사적으로 포위하고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다
-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하고 있었는데도 1916년 한 해에만 미국 업계는 무려 12억 9천만불어치나 되는 군수품을 영국과 프랑스에 수출했다. 미국이 전쟁에 발을 들여놓기 직적 JP모건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나중에 이탈리아 정부를 상대로 50억불어치의 군수물자 수출을 성사시켰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는 모두 JP모건에서 신용대출을 받아 군수물자를 사들임. 50억불은 오늘날 시세로 환산하면 약 900억불에 해당. 그때까지 어느 민간은행도 만져보지 못한 큰 돈이다.
- 17년 4월 미국이 공식적으로 1차 세계대전에 발을 들여놓은 때부터 18년 11월 11일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은 때까지, 미정부는 유럽의 연합국에 모두 94억 8631만 1178달러를 대출해줌. 모건맨 토머스 러몬트가 1915년 연설에서 실로 엄청난 규모라고 표현한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큰 몫은 41억 3600만불로 영국에, 그 다음은 22억 9300만불로 프랑스에 돌아감. 독일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연준이 후원하는 미국의 전적인 신뢰와 신용이 동원됨. 그러나 사실 영국정부나 프랑스 정부는 그 90억불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 돈은 연합국에 공급되는 전쟁물자 대금으로 미국 재계가 부리나케 쓸어감. 미국 재계는 대부분 모건그룹, 쿤롭, 아니면 록펠러가와 연결되어 있었음
- 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증권화의 거품이 터진 것과 마찬가지로, 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한 것은 그저 세계 금융이 앓고 있는 훨씬 더 심각한 질환의 한가지 징후에 지나지 않았다. 잉글랜드 은행의 노먼은 스트롱에게 미국금리를 낮추라고 촉구. 그래야 영국이나 전후 영국의 전반적 금융안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유럽 각국의 금리도 낮게 유지되고, 영국과 유럽에서 경기후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저금리정책을 실시하자 할부신용의 조건이 한결 완화되어 저리자금이 풀리면서 미국의 소비붐이 살아나고 뉴욕증시가 활성화되었다. 포효하는 20년대엣 미국에서 과시소비가 횡행한 거은 미국시민 대다수가 마치 살림이 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결과임. 그런데 국구분배의 심각한 불균형이야말로 29년 미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이었따. 29년경 미국인들은 무려 총 승용차의 60%, 총 주택의 80%를 할부신용으로 사들임. 20년대에 대다수 미국인들은 소득이 비교적 낮았던 터라 외상으로 물건을 구매했다
- 미국의 기득권세력 내에서 모건 세력이 퇴조하자 록펠러 세력이 그 공백을 차고 앉았다. 그들은 미국의 정치, 경제 정책에 전대미문의 지배력을 행사했음. 모건이 세계적 달러권력을 구축하기위해 노력하던 20년대에 록펠러 집단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중동, 라틴아메리카, 유럽 등지에서 스탠더드오일의 권력을 구축하고, 냉전시대에 보게되는 군산복합체의 전신이라 할 만한 세계적 화학군수산업체를 일구는 데 힘을 쏟았다. 30년대 말, 막강한 록펠러 제국은 사실상 네 명의 형제가 꾸려갔듬. 존 D. 록펠러 2세의 아들인 데이비드 록펠러, 넬슨 록펠러, 존 D. 록펠러 3세 그리고 로런스 록펠러였다. 다섯째인 윈스럽은 록펠러제국의 정치활동에서 담당한 역할이 상대적으로 보잘것 없었음. 네 형재는 내셔널시티뱅크와 체이스내셔널뱅크를 둘러싼 미국 최상위 권력층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감. 내셔널시티뱅크는 스탠더드 오일 제국의 은행으로 총재는 제임스 스틸먼이며, 존 D. 록펠러의 남동생 윌리엄 록펠러가 이사로 있었음. 스탠더드오일의 주거래은행인 체이스내셔널뱅크는 33년경 세계최대 은행으로 떠올랐으며, 록펠러가의 에퀴터블트러스트와 합병한 뒤 이제 록펠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음
- 월가에 포진한 록펠러 세력, 버나드 바루크, 그리고 내로라하는 거대기업 총수들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파쇼적 조합주의 모델에 따라 미국경제를 재편했음. 대놓고 떠들어대지 않을 만큼 정치적 분별력은 있었음. 31년에 바루크는 제너럴일렉트릭과 내셔널시티뱅크의 이사인 절친한 친구 제러드 스워프와 함께, 산업을 안정화하려면 긴급안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후버 대통령을 꼬드겼음. 그 안의 골자는 거대기업에 대한 셔면 반독점법의 제약을 풀어줌으로써 그들이 합병을 통해 힘을 모으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가가 형편없는 터라 현금이 두둑한 록펠러세력은 다른 기업을 헐값에 가뿐하게 집어삼킬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국가의 개입에 반대하는 후버는 바루크와 스워프의 안에 퇴짜를 놓았음. 32년에 민주당 출신인 루스벨트의 입장이 후버와 다르다는 사실이 확연해지자, 바루크와 월가에 포진한 그 친구들은 바로 마음을 바꿔 루스벨트 쪽으로 돌아섰다. 바루크 일당은 루스벨트 측근집단의 환심을 사려고 돈을 뿌려가면서 그들에게 갖은 아양을 떨었음. 신중하게 조작된 선전덕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언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성전에서 환전상을 몰아낼 태세가 되어 있는 서민의 영웅이라 치켜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부유한 동부연안 권력계급의 후손이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친척뻘로 어느 모로 보나 월가의 사람, 특히 바루크와 록펠러 집단의 사람이었다.
- 은행이나 기업의 지분에만 국한하지 않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면세재단에 부를 숨기는 것, J.PJ모건은 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 그런데 존 D. 록펠러는 달랐다. 콜로라도 광부들이 파업을 벌였는데, 그의 사설 보안요원들이 광부가 묵는 텐트에 총격을 가해 무장하지 않은 노동자와 아이들 11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 그 일을 둘러싸고 악성소문이 나돌자, 주변에서 면세재단을 통해 부를 관리하는 것이 홍보차원에서 이롭다고 존 D. 록펠러를 설득했다. 13년 이후 록펠러의 사업고문 프레더릭 게이츠는 록펠러에게 면세기금을 활용하는 식으로 면세재단을 통해 부를 관리하라 제의. 문화적 소양 따위는 없지만, 어쨌거나 박애주의라는 외피를 쓰고 미국판 메디치 가문처럼 록펠러 가문의 권력과 위세를 키우라는 것이었다
- 39년말 록펠러가는 매우 위력적 정책집단을 하나 꾸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지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때이자 미국이 2차대전에 직접 참전하는 계기가 되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두 해나 앞둔 시점이었다. 록펠러 세력이 설정한 그 비밀집단의 임무는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며, 미국이 그 전쟁의 그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지배적 세계권력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 전후 미국의 정치경제적 목적을 정하는 일이었다. 뉴욕 외교협회 산하의 전재오가 평화연구 집단은 일손이 부족한 미 국무부를 대신하여 중요한 전후계획을 도맡아 짰다. 42년 이후 이 집단의 회원 대부분은 슬그머니 미 국무부 고위직에 기용되어 연구를 이어나감. 39년 11월부터 42년말까지, 록펠러재단은 전쟁과평화연구 집단에 35만불이나 되는 거액을 기부해 전후에 경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게 했다. 그것은 록펠러가가 실행한 대부분의 박애주의적 투자나 마찬가지로 나중에 수천배로 거두어들일 수지맞는 투자였다. 그 연구는 전후 미국이 산업제국을 일국 차원을 넘어 세계차원에서 정의했다. 그들이 주창한 미국의 세기란 기실 록펠러제국이나 다름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다수 미국인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 록펠러가 자금을 댄 전쟁과평화연구집단이 전후 세계와 관련해서 정한 목적은 결코 감상적인 것이 아니었음. 경제와 금융 소위원회가 외교협회와 국무부에 제출한 비망록 '메모 E-B19'는 이렇게 단호히 말하고 있음.
"우리가 확실하게 권력을 틀어쥘 전후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한시바삐 완벽한 재무장 계획을 완료하는 것이다. ... 미국과 서구 국가의 경제번영과 안정에 반드시 필요한 최소영역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탓에, 다른 나라들이 어떤 식으로든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확실하게 제한하기 위해서이다."
그때부터 60년뒤인 02년 9월 , 부시 행정부는 이것을 거의 토씨 하나 고치치 않고 고스란히 미국의 국가안보정책으로 채택
- 히틀러뿐 아니라 영국의 라운드테이블 소속 엘리트들도 그들의 상대적 권력방정식을 오판했음. 그러나 록펠러 형제와 그들이 주도한 외교협회의 전쟁과평화연구 집단을 중심으로 떠오르는 권력집단만은 달랐다. 그들은 만약 영국이 어떤 식으로든 크게 상처받지 않고 전쟁에서 이긴다면 미국의 헤게모니는 몇십년 동안 발목이 잡힐 것이라고 정확히 판단. 그것만큼은 그들이 반드시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전후에 헤게모니를 놓고 다투게될 경쟁국 독일 역시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독일이 적어도 처음에는 충분한 연료를 가지고 전쟁에 뛰어들 수 있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스탠더드오일 집단이나 록펠러 은행가들이 무슨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세력균형을 판단한 결과이자 미국 기득권세력 스스로 지정학적 과제가 무엇인지 이해한 결과였음.
- 외교협회의 전쟁과평화연구 집단을 이끈 이사야 보면은 어떤 유럽국가의 육군도 러시아 중심지역으로 파고들기를 꺼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 그러므로 독일과 러시아가 파괴적 소모전을 치르면서 서로 싸우게 만들려면, 독일의 루스트바페와 전차부대가 안심하고 전쟁에 임할만큼 충분한 연료를 확보할 수 있어야 했다.
- 록펠러가문, 해리먼가문, 부시가문이 히틀러의 병력증강을 전략적으로 적극지원한 것은 훨씬 더 야심찬 음모의 일환이었음. 그들이 노린 목적은 결코 독일이 승리하도록 밀어주자는 것이 아니었음. 세계를 초토화한 뒤 그 잿더미 속에서 미국의 세기, 좀 더 분명히 말하면 록펠러의 세기가 떠오르게 해줄 세계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것이었음. 부시, 록펠러, 해리먼, 듀폰, 딜런은 모두 초이게 그들의 웅대한 지정학 구상을 실현하려고 발벗고 나서서 제3제국을 밀어주었다. 그 구상이란 유럽의 강대국, 특히 독일과 러시아가 동시에 자멸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음. 어느 영국 전략가의 지적대로, '서로 죽을 때까지 피 터지게 싸우도록' 유도해 결국에 가서 미국의 세기에 헤게모니를 내주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록펠러가 전쟁과평화연구에서 얻은 진짜 결론이었다.
- 전쟁이 끝나고 루스벨트가 사망한 뒤 의회의 기밀기록과 문서들이 공개됨. 그것을 살펴보면 루스벨트와 그의 전쟁관 헨리 스팀슨이 일본으로의 석유공급을 봉쇄하고 일본의 팽창에 맞서 태평양에서 군사행동을 준비함으로써 일부러 일본의 참전을 자극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 자료들은 루스벨트가 진주만 폭격이 있기 며칠전부터 이미 일본해군 선발부대의 소상한 세부사항이며 정해진 공습시각까지 샅샅이 알고 있었음을 말해줌. 또한 루스벨트가 일본의 침략을 부추기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2차대전이 끝난 46년에 켄터키주 상원의원 앨번 바클리가 이끄는 미 의회의 진주만 공격에 관한 진상조사위원회는 미육군진주만위원회에서 보고서 한 부를 건네받았다. 일급기밀로 분류되어 있다 몇년이 지난 뒤 기밀이 해제된 문건이다. 그 보고서는 루스벨트 대통령, 루스벨트 행정부, 그리고 전쟁장관 스팀슨을 신랄하게 비난. 41년 1월, 미 해군제독 제임스 리처드슨과 허즈번드 E. 킴멜은 미 해군 참모총장에게 공동으로 작성해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 그 일이 실제 일어나기 열한 달 전의 일이었다. '일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격해올지 모릅니다. 그 공격은 어떤 형태든 띨 수 있습니다. ... 일본은 운송중인 선박, 외따로 떨어진 미국의 해외기지나 해군부대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진주만을 기습공격한다거나 해협을 봉쇄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배경은 루스벨트가 41년 7월 26일 대통령령을 발표해 미국내에 있는 일본의 자산을 동결한 일이었다. 이 대통령령은 모든 금융거래와 수출입 무역거래를 미국 정부의 지배아래 두었는데, 거기에는 일본의 이해도 걸려 있었다. 이로써 미국과 일본의 무역은 사실상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는 이 대통령령을 일본에 대한 도발행위로 간주했다.
- 41년 일본이 진주만과 미 육군항복대의 부머(핵추진 대륙간 탄도미사일 잠수함) 함대를 공격한 결과, 2403명의 미국인이 죽고, 1178명이 다쳤으며, 함선이 18척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전투기 188대가 손상을 입거나 격추되었음. 그 일이 일어나기 2주전인 41년 11월 26일, 루스벨트는 일찌감치 처칠에게서 진주만 공격이 임박했느니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긴박한 정보를 직접 전해들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루스벨트는 도리어 진주만 함대의 대공방어능력을 제거하는 식으로 대응. 이것은 일본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려 고의적으로 취한 조치였음. 41년 11월 26일 처칠이 루스벨트에 보낸 문건은 그들이 주고받은 문서들 가운데 지금까지 국가안보를 이유로 공개되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처칠의 워싱턴 대사 핼리팩스 경의 비망록에 따르면, 그 문건에는 처칠이 루스벨트에게 12월 7일에, 정확한 도쿄 시간으로는 12월 8일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계획이라고 분명히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루스벨트와 그의 고문들은 일부러 일본이 하와이의 미 해군기지를 공격하도록 충동질. 미국의 세기를 구축하기 위한 전쟁에 아무 영문도 모르는 평범한 미국 시미들을 저항없이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은 전쟁과평화연구 집단이 마련해놓은 전후의제를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는 수단이었다. 역사가들이 2차대전이라 부르게 되는 바로 그 전쟁이다.
- 록펠러 일가와 선견지명 있는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보기에 2차대전 이후이 세계권력은 더이상 식민지에 대한 군사적 지배로 판단할 수 없었다. 대영제국과 유럽제국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비효율적 체제임이 드러났다. 세계권력은 이제 경제적 차원으로 정의되었다. 즉 세계 권력은 하버드 조지프 나이가 훗날 소프트파워라 표현한 것, 그것에 기초했음. 그 소프트파워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와 세계에서 가장 우세한 금융권력이 단단히 뒤를 봐주었다.
- 외교협회의 주도세력과 록펠러 집단을 축으로 하는 국제주의자들이 떠안은 역할은 전쟁과평화연구(전후 미국의 세계패권, 즉 미국의 세기를 위한 소상한 청사진을 마련하고자 했다)에 자금이나 인력을 대준 방침과는 분명 앞뒤가 맞지 않았음. 록펠러 일가, 스탠더드 오일, 다우케미컬이나 듀폰 같은 기업은 사업과는 비교도 안 될 공을 들여가며 제3제국의 군비증강을 드러내놓고 도왔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려면 외교협회의 이사야 보먼이나 예일대학의 니컬러스 스파이크먼 같은 이들의 시각으로 미국의 지정학 전략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들은 영국인 매킨더의 지정학을 미제국의 지정학과 버무려 그들만의 고유한 견해를 개발해냈음. 그들은 미국이 전후에 세계적 패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즉 미제국을 건설할 수 있도록 거들어줄 주요 국가를 골라냈음. 외교협회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엘리트에게 전쟁이란 그저 전후세계에서 그들의 금융제국을 널리 확장하려는 정책을 실현하는 도구요, 대영제국뿐만 아니라 독일제국, 아니 그 어떤 유럽의 잠재적 강국이든 간에 아무튼 그네들의 경제생활권을 빼앗아 새로운 미국 경제생활권을 창출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스파이크먼이 말했다시피, 전쟁을 치르고 난뒤 새로운 시장을 정복함으로써 더 넓은 미국 경제생활권을 확보하고자 한 그들은 세상이 말하는 평화란 그저 잠정적 휴전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 그들이 어떤 해당 영역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해당 영역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깨닫고 새로운 정복전쟁을 일으킬 때까지만 지속되는 휴전상태 말이다
- 결국 역사가 2차대전이라고 기록하게 되는 이 비극은 세계패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상호모순된 지정학 전략들이 거대하게 충돌한 결과. 영국인들은 유럽대륙을 분할하고 바다를 통제한다는 전통적 지정학 전략을 고수했음. 처칠은 독일에 맞서기 위해 주요 경쟁국 가운데 강국인 미국과 연대한다는 이례적 결정을 내렸다. 그것만이 대영제국을 주도적인 세계권력으로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계산에 따른 것임. 이처럼 영국이 약한 적국에 맞서기 위해 강한 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은 영국의 세력균형 외교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은 큰 위험이 따르는 결정이기도 했음. 그러나 처칠과 라운드테이블을 중심으로 한 그의 동지들은 현실주의자였음. 그들은 대영제국은 이미 끝났으며, 오직 워싱턴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간접적 방식으로만 그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서서히 부상하고 있는 처칠과 부스벨트 간의 특별한 관계는,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다소 복잡해졌음. 록펠러 일가와 월가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핵심세력은 세계권력을 노릴 법한 유럽국가들이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다 한꺼번에 공멸하도록 몰아갈 작정이었음. 특히나 그들은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이 무너지면서 생긴 중유럽의 세력공백을 독일제국이 차지하러 나설지 모를 싹을 잘라버리고자 했다.
- 처칠이 반히틀러 세력을 지지하기는커녕 격려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그 전쟁과 수많은 패러독스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것은 영국 지정학의 핵심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체임벌린이나 처칠이나 가장 기본적 전략적 요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같았다. 그들이 판단한 대로, 영국의 지정학적 이해는 히틀러 자체에 의해서도 위협받았으나, 그보다 더하다고 말할 것까지는 없지만 꼭 그만큼이나, 군부/관료집단/산업계 내의 반히틀러 세력에 의해서도 위협받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반히틀러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파괴적인 전쟁을 피하려 들 테고 독일이 유럽 대륙에서 가장 주도적인 경제강국으로 부상할 것이기 때문. 이것이 바로 처칠의 판단이었다.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의 영국 담당 고문역 헤세가 아주 예리하게 지적했듯, 유라시아 대륙을 차리하려고 나대는 한 독일은 영국 지정학의 첫째가는 적국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을 비롯한 그 어느 유럽국가도 경제적 수단을 통해서든 군사적 수단을 통해서든 유라시아 대륙을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막는 거, 그것이 1904년 핼포드 매킨더 경이 세계의 심장(소련과 동유럽지역)에 관한 논문을쓰기 훨씬 전부터 영국 지정학이 추구해온 세력균형론의 기본원리였음. 처칠과 영국 수뇌부의 판단에 따르면 독일국방군이나 독일 대기업내의 히틀러 반대파(이를테면 크루프, 티센, 도이체방크를 필두로 한 독일은행들) 역시 영국에게는 동일한 지정학적 현실의 좀더 부드러운 판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경제를 통한 평화적 침투라는 점만 다를 뿐 중유럽에 독일 경제생활권을 확보하겠다는 목적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처칠을 위시한 영국세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라시아의 경제생활권을 지배하는 좋은 독일은 나치 독일보다 대영제국에 한층 더 큰 위협이었다. 영국의 지정학은 결코 감상적이지 않았다. 파머스턴 경은 100년도 전에 영국 의회의 어느 토론장에서 이렇게 설파했음. "우리에게 영원한 친구는 없다. 마찬가지로 항구적인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은 영원하고 항구적이지만, 우리의 임무는 그 이익을 따르는 것이다. 영국에는 오직 이익만 있을 뿐 친구는 없다."
- 2차대전이 낳은 가장 극적인 결과는 150년 동안이나 세계를 지배해온 대영제국의 몰락이었다. 좀 더 넓은 지정학 관점에서 보자면, 1차대전이 시작된 14년부터 2차대전이 끝난 45년까지, 매킨더에게 지정학을 배운 영국인 피터 테일러의 말대로, "독일과 미국이 영국을 승계하기 위해 다툰" 시기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옳다.
- 미 정부는 9월 2일 적잖은 생필품이 이미 영국에 당도해 수송 중일 때 갑작스레 렌드리스를 중단. 영국은 전쟁 직후 물자가 절실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이자까지 2% 물리는 등 몇 가지 조건으로 40억불을 대출해주겠다고 제의했음. 이로써 영국이 영연방국가들과 해온 특혜관세 무역은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전후 세계무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역할은 크게 약화되었다. 영국은 미국의 전후 재정원조에 기대고 있는 신세였다. 동부연안 권력계급 중에서도 국제주의자 집단이 주도하는 미국은 전후 세계를 이끌어가자면 전 세계를 주름잡던 시티오브런던의 전문적 식견과 협조가 반드시 필요다가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음. 45년 이후 영국은 세계적인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몇몇 관측자가 이미 미국의 세기, 즉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부르고 있는 그 체제에서 명백한 하위 파트너로서 미국가 특별한 관계를 발전, 심화시키는 식으로만, 즉 오로지 간접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후 미국의 헤게모니를 떠받치는 양대기둥인 금융과 화폐는 45년 이후 미국의 세계지배를 보장해주는 데서 그 두가지 못지 않게 중요한 군사력에 기대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새로 동맹을 맺어 부상하는 미국의 세기를 위협하지 못하게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45년에 미국의 동맹국이던 나라들이 10년이나 20년뒤 치명적 적국으로 돌변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워시언은 영국의 렌드리스 원조를 포기하기 불과 4주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었다. 미국은 그 사이 전쟁사상 가장 위력적인 무기를 몰래 개발해왔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적을 박살내기 위해서는 가공할 무기의 사용도 마다하지 않을만큼 무모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게 된다.
- 워싱턴 당국이 가공할 신형무기를 투하한 뒤, 트루먼은 "10만명의 미국 젊은이의 생명을 지키려고" 군 수뇌부의 제언에 따라 결정한 일이라고 우겼다. 그러나 실상은 미국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무자비하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특히 러시아의 스탈린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는 속셈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떨어뜨린 것은 일본을 공포에 떨게 해 항복하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음. 일본은 이미 무릎을 꿇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미국의 군사력을 확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소련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원폭투하는 소련과 미국이 이른바 냉전에 들어서게 한 도화선이었다
- 권력관계가 재편되었음을 부각하려고 45년 11월 트루먼은 영국 수상 클레먼트 애틀리에게 워싱턴 당국은 영국이 전쟁으로 파탄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요청한 60억불의 무이자대출을 거부한다고 밝힘. 트루먼은 대신 금리 2%에 37억 5천만 달러만 대출해주기로 했음. 뿐만 아니라 워싱턴은 원자력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힘. 전시에 캐나다, 영국과 원자력 개발에 협조하기로 한 퀘벡협정을 번복한 것. 퀘벡 협정은 개발된 폭탄을 사용하기 전에 미리 협의하도록 규정. 미국정부는 심지어 가장 가까운 동맹국과도 원자력 관련 정보를 공유하지 않겠노로가 선언했음
- 일본에 폭탄을 투하했지만 스탈린의 러시아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누그러지는 기색이 없었다. 스탈린은 미국 정부 최고위층 내에 KGB 스파이를 심어두었고, 그들을 통해 미국의 원폭 프로젝트에 대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소련 스파이들은 소련 과학자들에게 원폭 제조에 필요한 세밀한 계획서를 비밀리에 넘겨주었다. 러시아는 그때부터 불과 4년만인 49년에 자체 개발한 원폭을 터뜨림으로써 미국과 세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바야흐로 냉전이라 불리는 핵 대치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 미제국, 즉 미국의 세기는 1815년 이후의 대영제국과 매우 흡사한 제국이었다. 다만 자유기업, 민족자결, 민주주의를 보급한다는 그럴싸한 허울 아래 본색을 숨기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그들은 용의주도하게도 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피했다. 미 국무부, 백악관, 그리고 대외정책 기관에 속한 미제국의 설계자들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제국이라고 볼 수 없다고 교묘하게 사기를 쳤음.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이론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비록 비공식적 제국이기는 해도 오갈 데 없는 제국이었다. 그것은 전후체제의 기둥인 달러를 통해 세계금융에서 수행하는 미국의 역할에 기반을 두고 압도적 군사우위에 의해 뒷받침되는 제국이었다. 그들의 사기는 정말이지 잘 먹혀들었다. 그것은 일면 미국의 기득원 세력이 자기네가 정복하려는 나라(시장)의 부호나 타락한 엘리트들에게 섭섭잖은 떡고물을 흘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간파했기 때문이기도 함. 아무튼 45년 이후 전개된 체제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과 성장일로의 수많은 속국으로 이뤄진 체제였다. 속국의 주요 부호계급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러저러하게 미국 정부와 미 국방부의 아량에 기대고 있는 체제 말이다. 그 아량으로는 흔히 미국에서 훈련받은 비밀경찰, 암살단, 적시의 쿠데타 따위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식민지를 점령하는 체제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효율적인 지배방식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의 세기는 식민지 점령국이 아니라 종속적 속국을 거느린 비공식적인 제국이 될 판이었다. 지난 100년의 미국역사는 점점 더 막강해지는 금융엘리트 카르텔과 그들이 꽉 쥐고 있는 거대 산업트러스트가 이끌어왔다. 국가의 이익이나 전 국민의 이익보다 그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전략적 우선순위가 매겨졌다. 그들은 미국의 언론매체를 완벽하게 틀어쥐었으며, 선전 전문가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이 바로 국익인 양 그렸다. 국가가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 대다수 미국인은 그 선전에 속아 넘어갔다.
- 브레턴우즈 체제는 세 기둥을 축으로 구축될 계획이었다. 첫째, 국제수지가 악화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긴급준비금을 회원국 분담금으로 조성하는 국제통화기금, 둘째, 회원국 정부가 대규모 공고읖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차관을 공여하는 등장한 것으로, 다국적 관세 인하 회담을 개최함으로써 자유무역이라는 의제를 확산시키기 위해 고안한 관세무역일반협정이다. IMF는 기금을 충당하기 위해 회원국에 통화로든 금으로든 분담금을 내라고 요구. 각 회원국은 IMF 전체 기금에 기여한 몫에 따라 이사회에서 비례적 표결권을 얻는다. 이것은 처음부터 미국이 주도하는 게임이었다. 최대의 금 준비금을 보유한 경제 최강국 미국은 전체 표결권의 28%, 영국은 13%를 확보했다. 반면 프랑스의 표결권은 5%에 그쳤다. 새로운 IMF는 어디까지나 미국이 자기네 구도대로 전후 세계의 경제발전을 이끌어가기 위한 도구였다. 결국 미국 정부는 영국의 반대를 물리치고 IMF나 세계은행 같은 새로운 제도와 관련한 투표권, 규정, 그밖의 주요 측면에서 자기 뜻을 관철했음. 미 재무부가 사실상 새로운 IMF를 좌우하게 되었음. 투표권은 각 나라가 IMF에 얼마나 기부했는가에 비례. 최초의 29개 창립회원국 가운데 최대 경제부국인 미국은 단연 IMF의 최대 기금출연국이었고, 이사회 최대의 투표권 군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던 것. 새로운 IMF규약에 따라, 미국은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이 반대하는 결정이라면 무엇이든 저지할 수 있었다. 미 정부는 막강한 투표권을 이용해 중요한 IMF 이사회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그에 따라 전반적인 정책을 미 재무부와 월가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갔다. 미국이 새로운 전후 통화게임의 규정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IMF본부는 워싱턴 내 미 재무부와 지척 거리에 들어섰다. 스탈린이 45년 이후 IMF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 브레턴우즈에서 미국 협상단이 얼마나 솜씨 좋게 전후 달러제국을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다졌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미국의 국제통화 전문가를 제외하면 극소수에 그쳤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국제통화제도를 미국에 우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따라서 미국에게 브레턴우즈는 초창기의 금본위에 견주면 한결 개선된 체제다.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다른 모든 회원국은 자국의 통화가치를 금이 아니라 미 달러에 연계했다. 미국이 달러를 세계에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는 미 정부, 즉 미 재무부와 연준이 자기들 편한 대로 결정했다. 한 세기 전에는 파운드가 금 못지 않게 좋았는데, 45년에는 달러가 금 못지 않게 좋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뒤에는 이 국제금융의 원칙이 비극적인 착각이었던 것으로 드러남. 어쨌거나 45년 당시에는 달러가 금 못지 않게 좋았던 게 엄연한 현실. 유럽 각국은 망가진 하부구조를 재건하기 위해 달러 신용대출에 목말랐다. 그 나라의 통화는 타국 통화와 교환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경제는 피폐해짐. 13년 창설된 이래 월가 머니트러스트가 장악해온 뉴욕 연준은 비공산권국가의 화폐용 금 대다수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명실상부한 브레턴우즈 체제의 구심이었음. 브레턴우즈 통화제도는 특히나 미국에 이로웠다. 실제로 미 달러가 정식으로 준비통화로 떠오르자, 다른 나라들은 자국 통화를 미 달러에 연계시켜야 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타국 통화와 교환할 수 있게 된 나라들은 IMF 규정에 따라 환율변동폭을 45년 현재 미 달러에 대한 환율의 +-1% 내로 유지하기 위해 달러를 매매해야 했다. 세계 금융제도에서 미 달러는 전전의 금본위제 아래 금이 맡던 역할을 대신. 이것은 실제로 세계무역이 거의 전적으로 미 달러로 거래된다는 것을 의미. 새로운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무제한적 권한을 쥐고 있으며, 달러를 새로 발행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구속에서도 자유로운 미국은 그 덕에 어마어마한 이득을 보게 됨. 45년 이후 영국은 미국 정부와 월가가 세계 화폐에 행사하던 그 같은 일방적 권력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 한국전쟁은 냉전이라는 워싱턴 정부의 의제에 훌륭하게 기여했음. 미국 국방예산을 한국전쟁이 시작될 무렵 연간 130억불에도 못 미쳤지만, 그 전쟁이 끝난 53년에는 600억불을 웃돌았음. 장제스가 이끄는 타이완정권, 이승만의 남한정권, 맥아더(당시 그의 보좌관은 존 D. 록펠러 3세)가 이끄는 미군정은 냉전시대에 동아시아에서 미군이 주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일본산업은 아시아에 공산주의를 막는 요새를 제공한다는 명분아래 거대 재벌그룹으로 재편될 수 있었다. 연간예산이 600억불에 이르는 미 국방부는 방위 준비태세를 위해 일본과 일부 선별된 유럽, 일본의 산업체에 수십억불어치를 발주하는 세계 최대의 도급자로 부상. 50년대에 군산복합체가 대규모로 성장. 냉전의 최대 수혜자는 한껏 기세를 떨친 스탠더드 오일이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국방부의 항공기, 탱크, 지프 따위에 연료를 공급. 미국 정치인들은 미국의 국가안보나 신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에 맞선 국가방위만 들먹이면 의회가 거의 어떤 안도 무사 통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했다.
- 전시에 대영제국의 자리를 빼앗아 세계적인 헤게모니를 차지하려고 미국가 열띤 쟁탈전을 벌이던 독일은 45년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면서 한껏 몸을 움츠린 상태였음. 그리하여 워싱턴 정부와 월가가 전후에 맨 먼저 주력한 것은, 잔뜩 기운이 빠지긴 했으나 여전히 가공할만한 적국으로 부상할 소지가 있는 영국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음. 그들은 겉으로는 줄곧 영미의 우정과 특별한 관계를 내세우면서도 천연덕스레 그 일을 해냈다. 미 정부는 전시에 둘도 없는 우방이던 영국을 운이 다하면 내쳐라는 식의 마피아식 관례에 따라 대했다.
-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사건은 미국이 전통적으로 영국의 영향권에 놓여 있던 중동지역을 공략한 일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집단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석유를 보장해주려고 처칠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킨 바 있음. 그런데 미 정보당국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영국-이란의 석유합작회사와 민족주의적 이란 수상 모사데크간의 갈등을 통해 어부지리를 얻고자 했다. 자국의 석유를 국유화하려던 이란과 이란 유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던 영국을 동시에 훼방놓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
- 미국이 자유세계의 화폐제도와 경제제도를 지배하던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음. 정확히 10년만에 브레턴우즈 체제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아이젠하워의 집권기이던 57년 발생한 경기후퇴는 달러체제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최초의 신호탄이었다. 실제로 57년에는 20년전에 구축된 미국의 전시산업이 쇠락의 기미를 보였다. 그런가하면 50년대 말에는 서유럽국가 대부분, 특히 서독, 그리고 그만은 못하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현대산업과 설비에서 위협적인 미국의 경쟁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서유럽은 더 이상 경제재건을 위해 미국 공산품을 수입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더러 57년 경에는 수출을 재개하면서 미국기업의 직접적 경쟁자로 떠오름. 미국 산업계나 금융계의 대기업들은 국내투자에 힘쓰기보다 강세인 달러로 이덕을 보려고 해외에 눈을 돌림. 57년 10월 소련이 미국보다 한발 앞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의 기술이 다른 산업국가에 뒤져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짐
- 케네디는 암살(몇 십년이 흐른 뒤 그의 암살은 CIA 요인암살단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짐) 당하기 다섯 달 전에,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중대선어을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 때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런던은행에서 차관을 빌어오는 대신 이자 없는 미 재무부 채권, 즉 그린백을 발행한 바 있다. 꼭 그때의 링컨처럼 케네디 대통령도 63년 6월 4일 대통령령 11110을 발표했다. 의회표결이 필요없는 케네디의 대통령령 11110은 "재무부의 은 달러, 은괴, 은을 본위로 은증서를 발행하라"고 재무부에 지시했다. 이는 정부가 신규화폐를 유통시키려면 그에 상당하는 은을 재무부 금고에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 케네디는 액면가 2달러와 5달러짜리 국채를 모두 43억불 쯤 유통시킴. 액면가 10달러와 20달러짜리는 유통되지 않음. 하지만 케네디가 암살당할 무렵 재무부는 10달러와 20달러짜리 국채를 인쇄하고 있었음. 대통령이 이자없는 화폐를 발행한 것은 링컨이래 초유의 일이었고, 대통령이 민간 연방준비제도의 독점적 화폐권력에 도전한 것도 처음이었다
- 닉슨은 세계 달러 보유자들에게 달러를 더 이상 금으로 태환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세계를 뒤흔들 일련의 사건에 착수. 몇 주 안에 스미스소니언 협정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짐. 금 자체는 내재적 가치가 별로 없다. 금은 산업용으로 사용되며 보석으로서 가치가 있음. 그렇지만 각 나라는 금의 희소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금을 무역조건이나 그에 따른 각국 통화관계를 결정하는 가치기준 내지 가치 저장체로 삼아왔다. 닉슨은 달러를 더 이상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역사상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라스베가스식 투기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71년 8월 이후, 세계 무역은 고정환율제라는 장기적 경제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대신, 다양한 통화가 저마다 변동하는 또 하나의 투기장으로 변모. 미국은 새로 달러를 찍을 때마다 이제 더이상 금으로 뒷받침할 필요 없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달러를 발행할 수 있었다. 세계 나머지 국가들이 미국의 지폐 달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경기는 계속되는 것이다. 미국이 서방세계의 주요 군사대국으로 남아 있는 한, 세계는 인플레이션 된 미국의 달러를 받아들였다. 냉전 기간 동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미국과 연계된 나라들이 가끔 가다 잊어버리면, 미국 정부와 월가의 사절단은 무례한 방식으로 그 점을 일깨워 주었다. 그 결과 세계에 유통되는 미 달러의 총액은 60년대 말만 해도 꽤 안정세를 유지하다가 90년대 말에는 약 2500퍼센트라는 기하급수적 팽창률을 보임. 달러를 마구 찍어내다 보니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화됨. 뉴욕 은행가들은 달러시장을 장악해야만 방대한 권력과 이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70년대 초의 금태환 중지와 그에 따른 변동환율제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미국 금융권력에 앞으로 대책을 세울 때까지 약간의 시간말미를 준 데 그쳤다. 비효과적인 스미스소니언 협정으로 말미암아 72년경 대규모 자본이 달러를 떠나 일본과 유럽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상황은 더욱 꼬였다. 금 대비 달러 평가를 순금 1온스당 38불에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42.22불로 10% 평가절하한 것. 이같은 평가절하로도 달러의 매각행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음. 그러던 차에 73년 5월, 스톡홀롬에서 조금 떨어진 휴양지에서 일급 비밀회동이 열림. 세계의 산업발전에 타격을 입히면서 달러의 수명을 다소 연장해주게 되는 모임이었다. 사실상의 대통령 권한대행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록펠러 세력과 팽생 돈독한 친분을 유지)와 월가를 축으로 하는 워싱턴의 권력 엘리트들은 세계 무역과 금융의 구심이자 미 경제제국주의 전략의 핵인 달러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세계 경제에 놀라운 충격파를 던지기로 했다
- 빌더버그 연례회의는 본래 54년 5월, 데이비드 록펠러, 조지 볼, 조지프 레팅거 박사, 네덜란드 왕자 베른하르트, 조지 C.맥기(미 국무부 외교가였으며, 나중에 록펠러의 모빌오일에서 최고 중역자리에 오르게 됨)를 비롯한 미국과 유럽의 엘리트집단이 극비리에 만나면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 첫 모임이 열린, 네덜란드 아른험 부근의 빌더버그 호텔 이름을 딴 연례회의에서는 유럽과 미국의 최고 엘리트들이 모여 비밀리에 정책을 논의. 그렇게 해서 합의를 본 뒤 언론이나 매체에 조심스레 그 내용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은 빌더버그 회의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로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빌더버그 회의는 전후 영미가 정책을 추진하는 데서 가장 효율적 수단이었다.
- 빌더버그 회의에서 미국의 연사로 나온 사람은 록펠러스탠다드 오일의 고문으로 록펠러가와 가까운 월터 레비였다. 그는 대서양 연안국가와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주제로 향후 전개될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래에는 세계 석유를 소수 중동산유국이 공급하게 될 거라면서 그가 마치 예언자처럼 말했다.
"석유수입비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석유소비국의 국제수지가 크게 악화될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부다비 같은 나라의 외환이 전례없는 수준으로 쌓이면서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 "
"그리고 국제 석유회사들의 모국(영, 미)과 산유국, 석유수입국이 정치관계, 전략관계, 권력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런 다음 월터 레비는 OPEC의 석유수입이 400% 이상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머지않아 키신저가 이란 국왕에게 요구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수치였다. 잘츠요바덴에서 빌더버그 회의가 열리기 한 해 전이 72년 5월, 이란국왕은 테헤란에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를 만났음. 닉슨과 키신저는 원한다면 미국이 보유한 무기 가운데 핵무기 빼고는 어떤 군사장비도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미 의회의 동의도 받지 않도록 면제해주겠다고 이란 국왕에게 약속했다. 이란국왕은 막대한 군사장비를 사달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석유수입을 확보해야 했다. 물론 이란의 은행이자, 국왕의 개인은행이자, 국린이란석유회사의 은행이자, 팔레비 일가의 은행이자, 팔레비재단의 은행은 바로 체이스맨해튼뱅크였다. 팔레비 정권의 금융제국은 속속들이 록펠러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 73년 5월 빌더버그 회의에 모인 유력인사들은 미국 금융세력과 달러에 유리하도록 세력균형을 되돌려놓기 위해 세계 산업발전을 거스르는 대대적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들은 가장 소중한 전략무기를 선택. 바로 세계의 석유흐름을 장악하겠다는 것이었다. 빌더버그의 정책이란 놀랍게도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73년 10월 국제유가를 대폭 끌어올리기 위해 미국이 외교력을 써서 세게적인 석유수출금지를 선언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석유사들이 전후이 석유시장을 석권함에 따라 45년 이후 세계 석유무역은 국제관례에 의거해 달러로 거래됨. 따라서 국제유가가 갑작스레 치솟는다는 것은 유가를 지불하는 데 필요한 미 달러의 수요도 덩달아 늘어난다는 것을 뜻했음. 그렇게 되면 엑슨오일, 모빌오일같은 록펠러의 석유사들이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떠오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쥐고 있는 은행(체이스맨하탄뱅크와 시티뱅크 등)도 세계 최대의 은행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록펠러가 주도하는 미국 금융 기득권 세력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석유권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의 터무니없는 계획은 장차 그들에게 커다란 이익을 안겨주게 된다. 어느 누구도 그 같은 일이 고의적으로 진행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었다.
- 달러체제의 첫 단계는 석유달러 통화라 부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달러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거래되는 세계시장에서 유가를 400% 인상하고, 유로달러의 국외 피난처인 시티오브런던에 있는 미국 은행, 영국 은행, 그 밖의 소수은행이 그 석유달러를 재순환하는 고수익사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 단계는 70년대 말까지 이어졌음.
달러체제의 두번째 단계는 79년 10월의 볼커 금리쿠데타에서 시작되어 대략 89년까지 지속됨. 8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대략 89년까지 지속됨. 8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월가 은행들이 자산을 빼앗아 달러화할 여지가 드넓게 열린 시기다. 더불어 세계무역기구의 회원국인 중국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세계경제 전반이 대폭적인 임금삭감 물결에 휩싸임. 그 여파는 특히 산업국가 전반에 기세좋게 번졌음.
달러체제의 세번째 단계는 97년 정치적으로 구동되는 헤지펀드가 고도성장중인 동아시아 호랑이 경제(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 시작해 대한민국에 이르는 신흥중진국)의 취약한 통화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대체로 이 단계는 새로 있을지 모를 투기성 공격에 대비해 달러 준비금을 마련해두려고 아시아의 아시아의 중앙은행들이 달러를 미국에 대거 유입시킨 것과 관련이 있었다. 98년 이후 아시아 자본 수천억 달러가 미국으로 흘러들어가자 99-02년에 미국의 IT 주식시장이 거품에 휩싸였다. 달러체제의 마지막 단계는 앨런 그린스펀의 금융혁명에서 시작되었다. 그린스펀은 01년에서 02년 사이 IT 주식시장의 거품이 붕괴된 뒤, 신규채를 발행하기 위해 금융자산, 모기지자산과 다른 증권자산에서의 혁명을 적극 밀어붙였다. 그린스펀이 이끈 이른바 증권화 혁명은 07년 부동산증권화 거품이 꺼지면서 막을 내렸다.
- 카터 행정부의 요직을 삼각위원회 회원들이 쓸어가는 바람에 일부 주요 언론은 카터의 대통령직을 삼각위원회의 대통령직이라 부르곤 했다. 그러나 좀 더 정화갛게는 데이비즈 록펠러의 대통령직이라고 해야 옳았을 것이다. 카터의 후임자 레이건은 재직기간 내내 탈규제와 민영화를 국정의 기치로 내걸었는데, 탈규제와 민영화라는 그 기나긴 과정을 처음 시작한 것이 바로 카터였다. 일설에 따르면 제럴드 포드는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던 도널드 럼스펠드의 조언에 따라 넬슨 록펠러를 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삼지 않기로 했다. 주목할 만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즈 록펠러는 일본 교토 회의에서 삼각위원회의 동료 회원들에게 민주당의 지미 카터를 차기 대통령이라고 소개했다.
- 79년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쿠데타가 일어난 해다. 록펠러 일가, 볼커, 머니트러스트의 부호들은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을 몰아내는 통화 충격요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은 본디 그들이 73년 빌더버그 유가 인플레이션 결정을 내린 데 원인이 있었다)을 구실로 내걸었다. 사실 고금리 정책은 부유한 기득권층이 추진한 것이다. 고금리 정책은 대공황기에 그들이 케인스식의 사회복지국가 건설, 사회보장, 정부의 노조지지 등에 의해 정부에 빼앗긴 자기네 이익을 되찾고자 한 장기전략의 일환이었다.
- 볼커의 고금리 정책은 선진국과 발전도상국에 치명적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초에는 전 세계적으로 철도, 고속도로, 교량, 하수도, 발전소 같은 인프라에 대한 정부자금의 장기지출이나 자본투자가 크게 줄어듬. 국제철강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75년 첫 오일쇼크 때부터 85년까지 주요 산업국가가 공공인프라 건설에 쓴 정부지출은 70년 중반의 절반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세계 철강생산, 톤마일 단위로 측정된 총 해상운송량 같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경제흐름 지표를 보면, 영, 미의 통화 충격정책이 산업발전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알 수 있음. 세계 철강업은 30년대 이래 최악의 불황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볼커의 통화 충격요법과 그에 따른 미국 경제의 퇴조는 카터의 이란인질협상에 대한 공화당원들의 사보타주와 함께 카터 대통령이 80년 11월 대통령선거에서 패하는 요인이 되었다
- 정확히 의도한 바대로, 미국 금융세력은 볼커의 충격요법을 통해 다시 한번 헤게모니를 잡음. 볼커가 82년부터 고금리정책을 확실하게 밀고 나가자, 높은 이자소득을 노리고 미국의 채권과 자산에 투자하려는 해외자본이 속속 유입되면서 달러의 위세가 살아났다.
- 벌커가 실시한 통화충격요법의 결과로 리보금리가 몇 달 새 3배쯤 오르자 뉴욕이나 런던의 국제은행에서 변동금리로 달러를 빌린 채무국들은 더 이상 채무를 이행할 수 없었다. 이것이 정확히 2000년 이후 뉴욕은행들이 유인금리니 변동금리모기지니 하는 속임수로 주택 모기지 증권화거품을 일으키며 고스란히 되풀이한 시나리오다. 그러자 주요 뉴욕은행들과 미 재무부는 IMF를 개입시켜 채무국에 대처하게 했음. 제3세계 부채위기라는 잘못된 이름 아래 희대의 약탈극이 펼쳐짐. 80년대에 거대은행들이 거기서 벌어들인 이득은 00-07년 모기지증권화 사기극에서 챙긴 이득 다음으로 컸음. 볼커의 통화 충격정책이 그 위기를 촉발한 장본인이었으며, 뉴욕과 런던의 주요 은행들은 그 부채위기를 통해 큰 이득을 챙김
- 86년경, 미국 국내경제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볼커의 연준이 귀 얇은 국민들에게 미국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라며 7년 동안이나 무자비한 고금리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임. 미국 대부분 지역이 제3세계나 다를 바 없이 슬럼가 확산, 두자릿수 실업, 범죄율 급증, 마약중독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연준이 실시한 어떤 연구에 따르면, 미국 가정의 55%가 순채무상태였음. 연방예산 적자는 그때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수치인 매년 2000억 달러씩 늘고 있었다. 데이비드 록펠러의 추종자 볼커가 워싱턴에 파견된 것은 단 한가지 목정. 세계 준비통화로서의 역할을 위협받는 자유낙하하는 달러를 구제하고, 미국 엘리트 사회 상부에 포진한 부호들의 채권시장을 보호할 것. 이것은 소수 과두체제가 대공황기와 그 이후 하류층에게 넘겨준 이권을 탈환해오기 위해 일으킨 혁명이었다.
- 미국 금리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해외투자자들이 미국 채권을 매입해 이득을 보려고 물밀듯이 몰려듬. 채권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금융제도의 핵이었음. 볼커가 경제에 도입한 충격요법은 뉴욕의 금융계에만큼은 크나큰 이득을 안겨줌. 볼커는 기대이상으로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 79년부터 85년말까지 달러의 가치는 독일, 일본, 캐나다 등의 통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상 최고수준으로 치솟음. 미 달러가 과대평가되자 세계시장에서 미국 제품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싸졌고, 미국 공산품 수출은 큰 타격을 입음. 79년 10월 이후 볼커가 실시한 고금리정책의 여파로 미국 국내 건설은 크게 퇴조. 미국 제조업자들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해외에서 외주생산을 하면서 국내 자동차산업과 철강산업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음
- 워싱턴, 뉴욕, 캘리포니아에서 후기산업사회라는 새로운 도그마가 번지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번영은 더 이상 최신식 산업능력을 키우는 투자와 상관이 없어짐. 철강산업이 녹슬어가고 용광로가 사실상 폐쇄되면서 철강은 사양산업 선고를 받음. 쇼핑센터, 호화찬란한 애틀랜틱시티나 라스베가스 도박장, 고급 휴양호텔 등지로 돈이 몰림. 투기광풍이 몰아친 레이건 집권기의 대부분 해에 흥청거리는 이 광란 속으로 외국돈이 흘러들어옴. 80년대 중반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에서 14년 이래 처음으로 순채무국으로 돌아섬. 부채는 저렴했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미국 가정들은 주택, 자동차, 전자제품 따위를 구매하느라 기록적인 빚을 졌다. 미국 정부 역시 막대한 세수손실과 레이건의 방위증강에 돈을 대느라 부채의 수렁속으로 빠져들음. 83년 미국 정부의 연간 재정적자는 2000억불이라는 공전의 수치를 기록. 기록적 적자행진이 지속되자 국가부채도 덩달아 증가. 그 돈은 고스란히 월가의 채권거래자와 그들 고객의 이자수입으로 돌아감. 미 정부가 총 부채에 지급한 이자는 80년 520억불에서 86년 1420억불로, 6년만에 3배 가까이 증가. 정부세입의 20%에 해당하는 액수다. 부동산이나 주식같은 투기성 이득을 노리거나 가치가 오른 달러의 덕을 보려고 독일, 영국, 네덜란드, 일본 등지의 돈이 대거 미국으로 흘러감
- 87년 10월 19일 주가폭락에서 주목할 점은 그 낙폭의 규모가 엄청났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연준이 파생상품이라는 새로운 금융도구를 갖고 주식시장을 살리기 위해 이튿날, JP 모건 등 뉴욕은행의 신임하는 동지들을 통해 국민들 모르게 개입했다는 사실. 당시 주식시장이 회복되는 듯한 가시적 조짐이 나타난 것은 다우존스 시장이 잇따라 거래를 종료하고 있던 10월 20일 정오, 시카고의 파생금융상품인 뉴욕 증권거래소 우량주식의 MMI 지수선물이 프리미엄 가격으로 거래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스마트머니가 회복되는 조짐이라 해석. 증권업자들이 조심스레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했음. 주식시장은 거꾸로 반등하기 시작. 차익거래자들이 기초주식에 대한 거래를 재개하면서 그것들을 사들였고, 프리미엄 가격에 MMI 지수선물을 매도. 뉴욕주식시장은 마치 마술처럼 아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극적으로 회복.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과 달리, 이것은 시키고 MMI 선물거래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린스펀과 그의 뉴욕 금융동지들은 똑같은 파생상품 거래모형을 써서 이번에는 거꾸로 주식시장이 회복되도록 일을 꾸몄다. 즉 그들이 불과 며칠전에 주식시세를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처럼 이번에는 주가를 가파르게 상승시킨 것이다. 바야흐로 파생금융상품의 시대가 열렸음.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조작의 세계였다.
- 아시아 위기는 달러에 강력하고도 긍정적 영향을 끼침. 국제결제은행의 앤드루 크로킷이 말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96년에 모두 330억 불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는데, 투기성 핫머니가 유입되자 98-99년에는 경상수지가 870억불이나 흑자로 돌아섰다." 02년께 경상수지 흑자는 인상적인 수치인 2000억불로 증가. 아시아의 중앙은행들은 그 흑자분을 미 재무부 채권을 사들이는 데 썼다. 그 돈은 고스란히 미국으로 흘러들어가 미국 정부의 정책에 자금을 대주고, 미국의 금리를 끌어내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닷컴 나스탁 IT 거품을 부채질했다.
- 99년 글래스-스티걸법이 폐기되고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신용시장은 규제받지 않는 세계 최대의 사채창출기구로 완전히 탈바꿈했음. 신금융은 비록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서로 긴밀하게 결탁한 경기 참가자들의 카르텔 위에 구축되었다. 그들은 그린서픈이나 JP 모건, 시티그룹, 골드만삭스 등 뉴욕 주요 금융사에 있는 그의 동지들이 짠 각본대로 움직였다. 증권화를 고안해낸 이들은 다가오는 세기를 앞두고 그 증권화가 새로운 미국의 세기와 미국의 금융지배를 더욱 공고히 해주리라 확신. 그린스펀의 노골적 지원과 함께 이 금융혁명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바로 미정부를 구성하는 입법, 사법, 행정부가 대법원가 공모하고 있다는 점. 더욱이 그 게임을 흠잡을 데 없도록 만들려면 무디스와 스탠더드앤푸어스의 도움이 절실했다. 행정부와 의회의 도움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행정부와 의회가 장외파생상품, 은행이 소유하거나 돈을 댄 헤지펀드, 지난 세기에 애써 마련해놓은 감독, 통제, 투명성을 없애려는 수작들, 이 모든 것을 규제해달라는 이성적 호소를 거듭 묵살해주어야 했던 것. 또한 금융혁명이 성공하려면 정부의 인가를 받은 신용평가기관이 모노라인이라 불리는, 대개 뉴욕에 본사를 둔 거의 규제받지 않는 소수 보험사들에 AAA 등급을 매겨주어야 했다. 모노라인은 신금융에서 또 하나의 주요축이었다. 이들 기관에서 활약하는 주자들은 증권화와 대대적인 확산에 어찌나 분명하고도 광범위한 의견일치를 보았던지, 아마 잘만 했으면 미국신금융주식회사가 건립되고 그 기업의 주식이 나스닥에 상장되는 식으로 구체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JP모건 같은 새로운 증권화 은행들은 채무증권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패키지화한 뒤, 채무불이행 확률에 기초한 트랑슈를 팔기 시작. 이 새로운 게임의 이름은 잘게 조각내기로, 증권을 발행, 인수하는 은행에는 수익을 안겨주고, 투자자에게는 수익에 상당하는 리스크를 안겨주려는 것. 곧 자산담보부증권, 부채담보부증권, 심지어 신흥시장 채무도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뒤 잘게 쪼개져 연금펀드, 대학기부금, 해외은행, 그리고 수익에 눈먼 투자자에게 팔려나감. 투자자들은 무디스, S&P의 AAA 신용등급 또는 모노라인 보험, 더 흔하게는 둘다 믿을만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이끌렸다.
- 그린스펀이 재직한 18년은 금융시장의 위기를 점점 더 심화시킴으로써 그의 어젠다. 즉 세계통화제도를 장악하기 위한 권력확장을 지휘하는 머니트러스트의 주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역사라 할 수 있다. 09년 초, 세상사람들은 그린스펀의 증권화혁명이 달러와 미국금융기관의 세계지배에 종지부를 찍는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 그린스펀이 증권화혁명을 통해 달성하려던 목적은 다음과 같이 분명했다.
* 그는 의회가 은행 간에 거래되는 장외 파생금융상품에 관해 최소한의 규제를 부과하려는 모든 시도를 대담히 거부
* 빌린 돈으로 주식을 살 때 지불해야하는 증거금의 비율을 올리지 않겠다고 버팀
* 리스크가 큰 불량한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증권화를 적극 지지
* 10년간 꾸준히 압력을 넣어, 은행이 투자은행과 보험사를 소유하지 못하게 한 글래스-스티걸법을 서서히 약화시킨 끝에 마침내 폐기시킴
* 01년 이후 연방예산적자를 폭발적으로 불어나게 만든 부시의 대대적 감세정책을 지지
* 수조달러의 현금이 월가의 금융계 친구들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소셜시큐리티트러스트펀드를 민영화하라고 주장
이 모두가 치밀하게 계획된 증권화 혁명을 위한 것이었다. 증권화 혁명이란 다름 아니라 리스크를 은행에서 분리하여 (어디에 존재하는지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게끔) 세계 전역에 고루 분산하는 새로운 금융세계를 창출하려는 것이었다
- 부채담보부증권의 문제는 일단 발행되면 좀처럼 매매가 되지 않는다는 점. 그것은 새로운 것이며 그때까지 아무도 그것을 압류, 매각해 본 적이 없다. 이 증권의 가치는 시장에 의해 좌우된다기보다 복잡한 이론적 모델에 기초. 07년 8월, 세계 전역의 부채담보부증권 소유자들은 그 시장의 급락에 맞서기 위해 갑자기 유동성을 필요로했는데, 그제야 그 증권의 시장가격이 장부가격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을 깨달음. 그래서 손실분을 보전하는 데 필요한 현금을 급히 마련하기 위해 부채담보부증권을 팔아 유동성을 만드는 대신, 유동적인 우량주식, 정부채, 보석따위를 팔아치움. 이것은 부채담보부증권의 위기가 비단 부채담보부증권의 자체만이 아니라 주식가치에 손해를 입혔음을 의미. 자기자본의 가치가 하락하자 그 불똥이 헤지펀드에도 튀었다. 정량적인 헤지펀드가 채택한 이론적 모델은 하나같이 헤지펀드 가격의 그같은 급락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헤지펀드 가격이 곤두박질치자 베어스턴스의 두 헤지펀드가 이끌어가는 시장이 큰 타격을 입었다. 주요 헤지펀드가 막대한 손실을 입자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위기가 증폭되었다. 그로인해 전례없는 부의 파괴라는 엄청난 피해가 뒤따랐다. 은행들이 채택한 리스크모델은 완전히 붕괴됨. 결국 07년 중반 어쩌지 못하고 폭발한 그 위기의 기저에는 투명성 결여라는 문제가 드리워져 있었다. 투명성 결여는 시장 운용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제이론이 기대하는 것처럼 투명한 방법으로 리스크를 분산하는 대신 위험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은 채 고수익 고리스크 자산을 증권화한 데 원인이 있었음. 더군다나 신용평가기관은 그 상품에 내포된 리스크를 보고도 못 본체 했다. 신용평가기관은 증권을 평가하는 데에도 동일한 결함이 있는 리스크 모델을 사용. 그 채권이 거의 매매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구조화한 그 금융상품의 가치가 대략적으로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음을 의미
- 80년대 저축대부조합 위기때 미국 은행 규제기관에서 근무한 윌리엄 블랙은 미국이 지난 수십년 동안 개인의 부에 따라 권리가 주어지는 사실상의 금융과두제로 변모한 정황을 이렇게 묘사.
"40년 전 금융부문이 낸 이윤은 오늘날 금융부문이 거둬들이는 총이윤(40%)의 20분의 1에 불과했지만, 그때 경제는 지금보다 형편이 한결 나았다. 상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비대한 금융부문이 우리 실물경제에 얼마나 많은 타격을 입히는지 과소평가한 결과, 금융부문의 기생성 탓에 총 국가수입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액수가 허비되었다. 그런데 금융부문은 단지 기생적이기만 한게 아니다. 금융부문은 침략국이 표적국을 물어뜯을 때 쓰는 날카로운 이빨 구실까지 한다. 금융부문은 자기배를 채우기 위해 자본을 몽땅 쓸어갈 뿐만 아니라, 그러잖아도 충분히 부유한 금융 엘리트들을 보상해주기 위해 실물경제에 타격을 입히면서까지 나머지 자본을 그릇되게 배분한다. ... 최근 몇 년동안 기업이 매입한 자사주나 임원들에게 부여한 주식은 미국 자본시장이 조성한 신규자본보다 많았다. 이것은 자본시장이 실물경제를 탈자본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부패한 기업중역을 살찌우기 위해 회계부정이나 스톡옵션 백데이팅 따위를 써서 너무도 쉽게 그런 일을 저질렀다. 미국 실물경제는 탄탄한 수학, 공학, 과학지식을 갖춘 인재가 크게 부족해 애를 먹고 있다. 이 세분야의 졸업생이 실물경제보다는 경제적 보상이 훨신 큰 금융계에서 일자리를 잡는 탓이다. 금융부문은 회계이익에 주력하면서 미국 제조업체와 서비스업체에 외국에서 일손을 구하도록 압박을 넣었으며, 노조가 있는 기업에는 자본을 제공하지 않았고, 무과세국가에서 사업하는 기업이 미국의 과세까지 회피하도록 조장했다."
블랙은 금융계에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맞게 되는 결과를 연구한 뒤, 그 체제는 속성상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거대한 금융거품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으며, 그 거품은 반드시 터지게 마련이라고 결론내림
- 1600년전 로마제국이 몰락한 경제적 이유를 간단히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당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던 로마제국이 쇠락한 끝에 마침내 멸망한 원인은 지배귀족,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호 과두체제가 내린 정치적 결정 때문이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개인적 부와 사적인 권력을 키우기 위해 정복전쟁을 일삼고 해외토지를 약탈함으로써 제국의 국경을 확대했다. 제국이 커지자 그들은 통제력을 유지하고자 멀리 주둔군을 배치했고, 그 군을 관리하기 위해 점차 외국용병에 의존. 군사적으로 제국을 확장하는 동안 그 제국의 주축인 농부들은 점점 더 피폐해졌다. 그들은 몇 년 동안 해외 정복전쟁에 동원되느라 농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 남부는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돈이 좀 있는 이들은 안정적 투자처인 토지를 구매해 결국 대지주가 되었다. 그 결과 소수의 손에 땅이 집중되었고, 정복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노예가 그 땅에서 일했다. 파산한 소농은 로마로 도망쳐 프롤레타리아, 즉 임노동자로 살아가야 했다. 그들에겐 투표권을 비롯한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없었다. 부자들이 보기에 그들은 그저 매수나 조작이 가능하고, 적을 공격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폭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저 평범한 대중이었다. 로마의 민주주의란 제국에 봉사하는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로마제국 정부는 알맞은 예산제도를 갖추지 못했으며, 가치 있는 것은 거의 생산하지 않고 그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고 있던 자원을 탕진하기만 했다. 정복한 영토에서 약탈해온 물품만으로는 더 이상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로마제국 정부는 높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방대한 군사조직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시민에게 떠넘김. 세금을 인상하자 많은 소농이 점차 땅을 경작하지 않고 방치하기에 이름. 험악한 상황에 놓인 시민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밀을 공짜로 나눠주었고 서커스와 전차 경주, 기독교인 사자우리에 던지기 같은 오락거리로 그들을 현혹. 이른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악명 높은 빵과 서커스 전략이었다.
- 행정관직은 점점 더 돈 있는 이들에게 팔려나갔다. 한편 대중은 호의를 베풀어주는 다양한 정치인에게 자기네 투표권을 팔았따. 투표는 민주주의체제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였다. 게다가 로마제국에 치명상을 안겨준 근원적 변화는 원정전쟁이 점점 인기가 없어지자 농민으로 구성된 징집군을 유급의 전문직업군으로 대체한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 대중의 반전시위가 군의 장래를 위협하자 닉슨이 징병제를 폐지하고 지원제를 채택했었는데, 옛 로마제국은 그 무럽 미국의 상황과 다름없었다. 로마병사를 원정전쟁에 내보내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군대를 충원하기 위한 유인책이 늘어남. 군복무 대상자를 시민권자로만 제한하던 제약이 사라지고, 군복무의 대가로 로마시민권이 부여됨. 이것은 마치 오늘날 미국에 이민 온 10대가 아프간, 이라크 전쟁에 참전 하면 미국시민권을 부여해주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어느 때부터인가 로마병사는 로마제국이 아니라 사령관에게 충성해야 했다. 노획물로 구매한 대농장이 소농장을 서기 2세기에 부유한 원로원 의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농업개혁을 도입해 빈부격차를 해소하려 한 그라쿠스 형제는 바로 그 부자들 손에 암살당했다. 로마과두제는 서서히 타락해갔다. 로마 왕정이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무렵, 과음, 과식한 이들이 토하고 돌아와 다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보미토리엄을 지었을 정도로 부자들은 흥청거렸음. 언젠가 네로 황제는 이렇게 선언했음. "다시 세금을 걷고 또 걷자. 어느 누구도 아무것오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 동양에서 이국적인 향신로와 실크를 비롯한 사치품을 구입하자 로마의 금이 빠져나갔고, 그 금은 두 번 다시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다. 곧 로마는 주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금마저 모자랄 지경이었다. 로마는 마침내 금이 고갈될 때까지 계속 주화의 순도를 떨어뜨렸다. 또 다른 황제는 포두주 생산을 줄여서 값을 올리기 위해 로마가 지배하는 포도원을 절반이나 없애라는 명령을 내림. 시간이 흐르면서 이 세계적 군사제국을 유지하는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남. 3세기 경 사람들은 군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과된 버거운 세금을 피하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군대 자체는 아우구스투스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를 지나면서 규모가 두배로 불었다. 그 사이 로마 통화를 구성하는 금과 은의 순도가 자꾸만 떨어지면서 빚어진 결과로 인플레이션이 급등.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는 황제가 하나가 아니라 넷이나 되었다. 이것은 황제를 위한 황실, 근위대, 왕궁, 참모진이 각각 네 벌씩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의 치안을 유지하는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증가. 로마 관료주의의 유지비는 71년 이후 미국 연방관료제의 행정부서와 맞먹는 규모였다. 마침내 로마의 영토확장이 주춤해지자, 로마의 국내경제뿐 아니라 로마제국의 국제적 야심을 밀어주기 위한 노획물도 차차 줄었다. 외부위탁된 군은 무기력, 자족, 타락에 빠져들었다. 로마제국은 차츰 힘을 잃어갔다. 북부의 야만인들이 분열된 로마제국을 침략하는 일이 잦아짐. 황제들이 군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려고 기를 쓰는 바람에 로마제국의 부채는 가파르게 불어났고, 국민의 도덕성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로마는 국경에 대한 장악력을 계속 잃어갔으며, 도로와 교량이 제대로 유지, 보수되지 않아 무역과 운송이 타격을 입음. 로마에서는 연일 폭동이 그치지 않았음. 빚더미에 올라앉은 정부는 세금을 인상. 군대는 필요한 물품을 지역민에게서 빼앗아갔다. 식량은 점차 중요한 상품이 되었고, 수백 년만에 처음으로 많은 국민들이 배를 곯았음. 정복전쟁이 거듭될수록 로마제국 내부는 혼돈에 휩싸임. 로마의 전쟁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로까지 이어졌으며, 정치 지배층의 부정부패는 더욱 기승을 부림. 돈이 최고였다. 로마는 돈이 곧 권력인 금권국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