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화폐전쟁

경제 2020. 8. 23. 14:35

- 사용한 것만큼 지불한다는 결제세계는 이미 중국에서 추진되 는 것과 똑같이 그에 필요한 총체적인 감시체제에 의해 작동될 것이 다. 이 세계에서 개인은 육체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처분 할 권리는 전무하며 회계장부를 통제하는 자들에게 종속된다. 통제권자가 보기에, 타인의 소유물을 임대하기 위해 디지털 화폐를 입금 할 만큼 재정 상태나 권한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그 개인은 완전히 행동 불능 상태가 된다. 필립 딕 Philip K. Dick 의 미래 소설 《유 빅 Ubik》에 등장하는 조 칩Joe Chip 처럼, 누군가 문을 열 비용을 지불할 때까지 집 밖으로 못 나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 인터넷에서 포용 관련 주제를 찾다보면 그런 성공사례를 연속해 서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르완다 중앙은행이 '현금 없는 경제'라 는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시민과 상인, 기업들에게 디지털결제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이런 정책의 결 과, 동맹의 파트너를 위한 아름다운 거래가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런 의도에서 2013년 마스터카드는 나이지리아 기업이 1,300만 장의 '국민 ID 스마트카드'를 위한 1차 추가지원금을 받았다고 공표했는 지도 모른다. 이 카드는 생체인식 기반의 신분증임과 동시에 마스터 카드의 신용카드로도 사용할 수 있다. 즉, 억지로 카드를 발급받은 1,300만 고객이 갑자기 다음 단계에서는 다시 적어도 1억 명의 억지 고객으로 확대될 전망을 제공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미개척지의 성공적인 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이지리아 당국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마스터카드를 공급사로 선정한 것 은, 그 기업이 현금 퇴출 방법으로 금융포용을 촉진하는 데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 말은 게이츠 진영으로부터 모종의 압력을 받았음을 슬쩍 암시하는 것 같다. 그 밖에 마스터카드에 따 르면, 카드 공급사로서 관련 경험을 보여준 것이 주효했다. 이집트 에서도 이미 마스터카드 신분증을 사용하고 있다. 마스터카드는 케냐에서도 금융포용을 통해 '현금 없는 세계를 향 한 우리의 꿈이 전 대륙에 도달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마스터카드 경영진은 이른바 후두마Huduma 카드 발행을 위한 정부의 파트너로서 이와 같은 목표 달성을 장담했다. 후두마는 사회보장 수급자를 위한 카드인 동시에 마스터카드의 선불카드 기능도 한다. 따라서 카드 소지자는 정부로부터 현금 없이 지원금을 받을 수 있고, 또 마땅히 현금 없이 받아야 한다. 그렇게 되 면 마스터카드는 양쪽에서 디지털 비율을 늘릴 수 있고, 다시 수백만의 억지 고객이 생겨난다. 브라질에서는 경쟁사인 비자가 국민에 대한 정부 지출 부문에서 큰 사업을 따냈다. 국영은행 카이샤 에코 노미카는 1,240만 명의 보우사 파밀리아 Bolsa-Familia 지원금 수급자 계좌를 비자 직불카드가 포함된 기능으로 바꾸었다.83 이처럼 금융 포용동맹' 이라는 허울 아래 자행되는 현금 퇴출의 상업적 이익 사례 는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은 비단 카드 공급사뿐만이 아니다. 이동전 화 기반의 이체 시스템인 엠페사를 사용하는 케냐도 의심할 여지없 이 이에 속한다.
- 케냐에서는 1달러 50 센트를 이체하는 비용이 30센트로, 이는 탄자니아에서 같은 공급업체가 요구하는 것의 10배에 달한다. 90 그런데 빌 게이츠는 재단에서 이 내용을 확인하고도 2015년 워싱턴에서 열린 금융포용포럼에서는 사실과 달리 소개했다. 그는 금융포용이 유익한 효과를 가져다주는 사례로 케냐의 경우를 들면서, 이곳에서는 빈민에게 저렴한 금융서비스가 제공된다고 서슴없이 말 한 것이다. 91 이 밖에도 주목할 것은, 거의 독점적인 기업 엠페사가 이익을 창출할 때, 게이츠 재단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시설이나 협력파트너로서 케냐 은행의 핵심역할을 빼먹는다는 것이다. 그 역할을 살펴보기 전에 언급할 것은, 엠페사의 이익은 대부분 영국으로 간다는 사실이다. 사파리컴의 모기업은 영국의 이동통신사인 보다폰이다. 엠페사 홍보기사에서 왜 런던과 워싱턴의 역할을 애써 감추 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영국의 개발원조부와 게이츠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인도에서 진행중인 현금퇴출로 큰 이익을 얻을 주식으로 아마존과 비자, 마스터카드를 꼽음. 아닐아가왈 아시아 리서치 소장은 연구 성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결제의 디지털화는 인도를 국제적 대기업의 주요 시장으로 만들 것이 다”라고 소개하면서 수십억 달러의 기회'라고 했다. 아마존은 인 도에서 온라인 거래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하는 플립카트 Flipkart 다음 으로 시장 점유율 2위에 해당하는 기업이다. 2018년 4월, 미국의 백 화점 기업인 월마트는 플립카트의 지분 77퍼센트를 160억 달러에 사들였는데 너무 고전을 하는 바람에 아마존에 좋은 기회가 왔다. 나머지 지분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중국의 텐센트가 보유하게 될 것 이다.44 인도의 온라인 거래는 이제 절반 이상이 미국의 손에 넘어갔 음이 분명하다.
- 2016년 9월, 통용 폐지 두 달 전에 미국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는인도 중앙은행의 감사이자 신설 인도 게이츠 재단 대표인 나치케트 모르의 도움을 받아 게이츠 재단과 공동으로 보고서를 발표했다. 완벽한 디지털결제는 인도의 경제를 10퍼센트 이상 성장시킬 것이라 고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10월에는 USAID와 인도 정부가 공동으로 '무현금 결제를 위한 포용 협력체'라는 공동프로젝트 촉진사업을 시작했다. 59 미국 대사 조너선 애들턴은 출범식에서 “인도는 경제 디지털화라는 세계적인 노력의 선봉에 섰다” 라고 주목할 만한 발언 을 했다. USAID는 3년간 재정 지원의 기폭제가 되겠다고 확약했다. 한 달 뒤, 모디는 통용 폐지라는 폭탄선언을 발표한다. 이 터무니 없는 조치가 알려지자 전 세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미국 에서만은 분명한 지지자들이 있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게이츠와 마찬가지로 칭찬 일색이었다. 이 조치가 많은 인도인과 미국 방문자 들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은 자명했지만, 불법 행위에 단호히 대처하 기 위해서는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디의 보좌관 아르빈드 굽타는 조지 메이슨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 필립 오스월드와 공동 으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통용 폐지를 정 부 주도의 유일한 디지털 분열' 이라고 찬양하는 글을 썼다. 게이츠 재단과 시티뱅크로부터 전폭 지원을 받는 터프츠 대학교 '세계 상황 속의 경영 연구소IBGC'의 전무이사 바스카르 차크라보티 는 통용 폐지가 부패 추방에 성과가 없었음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별 문제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디가 확연히 실패했음에도 유권자로부터 지탄받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 러한 결과는 '문제는 달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지, 엄격한 증거 제시가 아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금융포용과 테러 추방을 구실로 세계적으로 현금 퇴치 운동을 벌이는 이들에겐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 아닐 수 없음. 이런 의미에서 가는 곳마다 이야기만 무성할 뿐, 내세운 목표와 관련해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음.
-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중앙은행의 단합이 아름답지 못한 경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80년 전 히틀러 치하의 은행가인 제국은행 총재 햘마르 샤흐트와 잉글랜드은행 총재 몬태규 노먼 사 이에 맺어진 끈끈한 우정에서 드러난 바 있다. 두 사람은 BIS의 설 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39년 노먼이 이끌던 잉글랜드은행은 히틀러의 침입을 받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금 보유분이 제국은행에 넘어가는 와중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더구나 영국 정부가 영 국 내 모든 체코인의 재산을 동결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말이다. 미 대통령 휘하에 있는 BIS는 히틀러의 독일과 외환거래를 했다. 그중 특이하게도 히틀러가 스탈린에게 달러를 이체한 것이 있는데, 바로 스탈린이 서방연합군에게 봉쇄된 독일로 보낸 물자 대금이어 다. 유대인에게서 강탈한 금은 출처를 핑계로 수입국이 거부하지 못 하도록 BIS를 통해 수출되었다. 《슈피겔》 지의 보도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핵심을 찌른다. 안락한 중립국 밖의 전선 곳곳에서 각국 병사들이 무자비한 살육전을 벌이는 동안, 바젤에서 고액의 보수를 받 는 은행 임원들은 희희낙락하며 서로 사치를 즐겼다. 288 | BIS 산하 바젤은행감독위원회는 전 세계 은행을 감독하는 규칙 을 정의한다. 이 위원회의 '헌장'에는 모든 결정은 합의에 따라 내려지며 위원회는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FATF에서보다 좀 더 과감한 표현을 쓴다. 분명히 권고만 할 수 있는 이 비공식 위원회에 대표를 파견한 국가는 불과 25개국뿐지만, 위원회는 '은행을 규제하고 감독하기 위한 세계적 표준을 설정하고 (....) 뿐만 아니라 회원국들이 이런 규정을 시행하는지 조사하는 위임 사무를 양보하지 않는다. 인구가 1,000만 명이 조금 넘는 벨기 에와 스웨덴은 표준을 설정하고 세계적으로 표준을 이행하는 나라에 속한다. 나이지리아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같이 합치면 EU 전 체보다도 인구가 많은 나라는 이런 표준을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지 켜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세계은행과 IMF의 분노를 유발할 것 이다. 회원국 대표는 은행감독관청과 정치적으로 독립된 중앙은행 의 고위임원들이다. 헌장에 따르면, 이들은 자국을 위해 약속한 규 정을 정확히 시행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말 그대로' 자국법이나 EU 법에 반영할 것을 다짐한다. 대신 자국 의회의 권위는 전혀 존중 하는 기색이 없다.
- 왜 현금이용을 계속 범죄시하고 억압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 거액의 조세회피를 뿌리 뽑는 데는 현금이 쓸모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 국민을 상대로 일정 소득이나 재산상 한계를 넘지 않는지, 어디에 돈을 쓰는지 당국이 알려고 할 때, 현금은 그런 의도에 방해가 된다는 점에서 꽤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아마존 쿠폰은 무엇보다 아마존이 미국 경찰의 감시업무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므로 매우 흥미롭다. 아마존에 따르면 아마존 고 매장 을 위해 개발한 감시기술을 이용하는데, 다른 방식으로 개발한 것도 있다고 한다. 2017년부터 이 회사는 클라우드 서비스인 아마존 웹 서비스를 통해 '레커그니션' 이라는 얼굴인식 소프트웨어를 출시하 고 있다. 2018년 5월, 미국자유인권협회ACLU와 기타 기구는 아마존 회장 제프 베조스에게 레커그니션 서비스 중지를 요구했다. 그들은 전 시민을 상대로 저인망식 감시를 위해 경찰이 그 프로그램을 공공 연하게 이용할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다. 아무튼 평가에 따르면, 경찰이 샅샅이 검색하는 사진 데이터베이스에서 미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파악된다고 한다. 또한 이 절차는 갈수록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경찰이 책임의식을 갖고 이 기술을 활용할 것이라 약속해도 시 민들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 게다가 인권협회에서 입수한 경찰 당국의 이메일에 따르면, 경찰은 신체 및 감시카메라 혹은 무인정찰기를 통해 얻은 촬영정보를 이 데이터베이스와 연결하는 방법을 드러내놓고 모색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레커그니션'은 단 한 번 사용하는 데 400달러의 비용이 들며, 그다음부터는 매월 몇 달러밖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이 분야에서도 아마존은 약탈적인 가격으로 전체 시장을 잠식 하려는 듯 보인다. 훗날 아마존 클라우드를 독점적 지배구조로 또 전 세계 최대의 사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기 위함이다. TV 방송국과 《뉴욕타임스》도 이미 2018년 5월,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 식 참석자 전원을 자동 식별하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했다. 시위 혹은 그 밖의 공적 행사에서 참석자 확인을 위해 혹은 특정인을 찾아 내기 위해 누가 이 값싼 기술을 이용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지는 각 자의 상상에 맡긴다. 아마존은 모든 사업파트너에게 법을 준수하겠 다고 보증하는 조건을 붙였다고 강조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모든 사 람을 안심시키지 못할 것이다.
- 누가 페이팔을 통해 정보를 얻고, 그것은 다시 누구에게 가는가? 우리가 이 연쇄정보를 알게 된 것은,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페이팔이 고객 데이터를 제공하는 기업 및 기타 기관에 대한 독일어 리스트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리스트는 데이터의 종류와 전달 목적에 따라 분류된다. 수십 쪽으로 인쇄된 이 리스트는 매우 인상적이다. 여기서는 조금만 발췌해도 충분하다. 신원확인 데이터와 계좌잔고, 거래 자료가 포함된 고객정보는 전 세계의 아웃소싱 고객서비스를 위해 약 30개의 기업으로 넘어가는 데, 이 중에 아르바토 폰 베르텔스만도 있다. 사람들의 프로필을 작 성해 마케팅이나 기타의 목적으로 판매하는 기업이다. 해당 데이터는 또 국내법상 정보기관과 형사소추 당국의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는 미국의 여러 기업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 사실상 모든 데이터는 온갖 목적으로 신용평가기관들 수십 곳을 비롯한 여러 기업으로 흘러가는데, 그중 다수는 영국이나 미국에 있다. 여기서 페이팔은 신용평가기관과 그 밖의 기업이 이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저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고객정보는 사기 방지와 신제품 실험이라는 기이한 목적이 결합돼 미국 기업 세 곳과 영국 의 이동통신사인 텔레포니카로 넘어간다. 방대한 데이터 세트는 아쿠미오금융서비스 Accumio Finance Services와 CEG신용혁신보니버줌CEGCreditreform Boniversum, 뷔르겔경제정보Burgel Wirtschaftsinformationen, 인포스코어컨슈머 Infoscore Consumer, 인포르마솔루션 Informa Solutions, 슈파Schufa같은 신용평가기관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전세계로 전달될 것이다. 이런 전달권한을 용도에 따라 구속하거나 제한하 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인적정보 수집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앞선 액시엄Acxiom은 지구촌 주민 다수를 대상으로 방대한 서류를 관리하는데 여기로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생년월일 같은 것이 흘러들어간다. 또 미국의 스레트메트릭스ThreatMetrix Inc. 라는 기관은 우리의 기기 아이디와 IP 주소, 쿠키나 이메일 주소 등, 서비스를 신청할 때 파악되는 온갖 정보를 확보한다. 여기서 정 보는 리스크 관련 정보를 만들어내고 다시 기이한 조합으로 신제품 테스트에 도움을 준다. 미텍 시스템Mitek Systems Inc. 은 신원확인 서류의 타당성 검토와 신제품 및 서비스 테스트를 위해 미국에 들어온 신원확인 서류와 그밖의 개인정보, 신용검증용 온갖 데이터를 받는다. 똑같은 자료는 또 문서자료 자동판독 전문회사인 키프로스의 오텐틱스 Autotix Limited로 들어간다. 세계적으로 앞선 또 다른 미국의 데이터 수집업체 주 트 엔터프라이즈 Zoot Enterprises는 '사기 및 신용조사소와 교환하기 위 해' 우리의 온갖 문서와 사실상 모든 정보를 받는다. 미국의 퍼스트 데이터코퍼레이션 First Data Corporation 으로는 '모든 계좌정보와 관계서 류가 각각의 목적으로 '저장하기 위해 흘러들어간다. 그 밖에 ‘계 좌정보와 IP 주소, 신용카드 정보가 미국의 맥스 마인드 Max Mind Inc. 라는 회사로 넘어가며 사기 방지라는 목적으로 저장되지만, 전 세계 제3자에게 넘어갈 가능성도 농후하다.
- 미국의 법학자 프랭크 파스쿠알레의 해석에 따르면, 위챗이나 아마존 같은 초대형 플랫폼 운영업체는 더 이상 정상적인 시장참여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조성한 시장에서 타 기업이 어떻게 사고팔지를 규정하는 막강 권력을 휘두르는 시장조성자다. 그들은 이제 분 쟁조정에까지 개입하며 전통적으로 국가가 맡아온 과제를 수용한다. 아마존과 우버, 에어비앤비 덕분에 사람과 기업이 어떻게 거래하고 여행하고 거주할지를 국가가 아닌 플랫폼 대기업이 결정하는 현상이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다. 플랫폼 운영업체는 특정시장에서 정부 행세를 한다. 하지만 아마존은 국가와 달리 시장참여자로 등장 해, 시장조성자로서 얻은 경쟁업체와 고객에 대한 지극히 상세하고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이용한다. 방송사 프로지벤자트아인스의 사장 콘라트 알베르트 는 구글과 아마존, 페이스북을 가리켜 독점욕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집어삼키거나 쫓아낼 의지와 돈을 가진 '인터넷 제국주의 자'라고 일컫는다. 주간지 《디 차이트 Die Zeit》의 CEO인 라이너 에 서는 아마존 회장과 그의 기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아마존 회장은 성장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제는 ‘빨간 모자의 할머니처럼 갑자기 눈과 귀가 커졌다 (독일 동화 <빨간 모자에서 소녀의 할머니를 잡아먹고 할머니로 변장한 늑대를 가리킴 ― 옮긴이). 이런 눈과 귀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 요즘 아마존 에서는 스마트폰에서부터 여드름 제거기에 이르기까지 구하지 못할 것 이 없다. 여기서 이 기업은 어마어마한 정보를 얻는다. 그동안 아마존의 눈과 귀는 에코와 알렉사라는 무기를 통해 우리의 안방까지 쳐들어와 사 적인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 이런 기업은 민주주의 사회에 심각한 위협 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매일 매시간 또 어느 곳에서든 우리를 관 찰한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정보가 그 윤리적 수준을 알 수 없는 소 수의 손아귀에 있다.
- 거대 IT 기업들은 결제사업을 인수하는 데 최대 관심을 기울인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특히 대형 플랫폼 운영업체가 그를 위한 최선의 전제조건을 갖추고 있다. 은행업을 위해서는 이제 원칙적으로 데이 터 분석이나 신용 및 고객유치 이상의 것이 필요 없다. 신용 문제에 서 자본력은 아주 중요한 요인이다. 초대형 기술기업은 움츠릴 필요 가 없다. 이들에 비하면 대형은행조차 왜소하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기술기업은 고객 수에 있어서도 한참을 앞섰다. 결국 데이터 및 데이터 처리에 관해서는, 은행은 IT 기업 앞에 완 전히 열세일 수밖에 없다. 상대는 바로 그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독일과 미국의 경제학자 4명으로 꾸려진 연구팀은, 보통 모든 웹사이트 운영업체가 방문자에 관해 접근할 수 있는 몇몇 데이터는 (전통적인 흥신소의 평가와 유사하게) 고객의 신용 관련 정보를 제공한 다고 말했다. 이런 데이터는 방문자가 직접 방문하는지 아니면 검색 엔진이나 가격비교 사이트를 경유했는지 등의 사용기기나 운영체제 방식과 관련된 것이거나, 대문자와 소문자 중 무엇을 좋아하는지, 타 자에 익숙한지 아닌지, 이메일 주소에 성을 쓰는지 이름을 쓰는지 등 이메일 공급업자와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연구팀은 '핀테크 회사는 디지털 족적에 대한 월등한 접근기술과 그 데이터를 처리하는 출중 한 능력을 바탕으로 은행의 사업모델을 해친다'라고 결론지었다.
- 컨설팅사인 BFA도 마스터카드의 의뢰로 실시한 아마존, 페이스북, 알리바바 같은 초대형 플랫폼의 역할에 관한 연구에서, 은행의 경쟁력 유지와 관련해 전망이 매우 어둡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부 은행의 경우, 의기양양한 콧대를 낮추고 도매금융 펀드매니저로 전업할 각오를 한다면 아마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고 객에 대한 지식 방면에서 은행의 불리한 입장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 이라고 BFA 연구진은 강조한다. 슈퍼플랫폼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거대한 고객층을 가졌고, 사업영역도 계속 확대되고 있다. 이를 바 탕으로 한 분야에서만 활동하는 은행보다 훨씬 더 다양한 영역에서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취합한다. 슈퍼플랫폼이 결제시장 에서 왕성히 활동하는 중국에서 은행의 매매차익은 이미 된서리를 맞았고, 그 결과 고객은 은행을 떠나고 있다. 이베이의 자회사인 페이팔은 불과 몇 년 만에 온라인쇼핑 처리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두주자로 발돋움했다. 애플페이는 2018년 5월 에 골드만삭스와 협업을 발표하고 여기서 애플의 상징이 새겨진 신용카드를 발행토록 했다. 협업의 자세한 형식에 대해 아직까지 알려진 것은 없다. 구글페이와 페이스북 메신저도 몇 년 전부터 결제 라는 파이의 더 큰 몫을 떼어먹으려고 애쓰는 중이며 왓츠앱도 똑같이 발을 들여놓으려는 참이다. 아마존페이는 아직까지 직접결제 처리는 하지 않고, 고객이 다시 입장하지 않고도 쇼핑할 수 있도록 계 좌정보와 신용카드 데이터만 맡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업계 관찰 자들은 이것을 보고 아마존이 언젠가는 고전적인 은행업에도 손을 뻗칠 것이라고 확신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아마존은 이미 대형은 행 JP 모건과 협력방법을 논의 중이다. 이 계약이 체결되면 은행면허 없이도 고객에게 일종의 당좌계좌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한 델스블라트 Handelsblatt》 지는 이 관계의 동기와 관련해 이렇게 기술하 고 있다. 거대 기술기업들은 무엇보다 전반적인 결제과정을 더 많 이 통제하고 그와 관련된 데이터를 얻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데이터 외에도 결제시장을 지배함으로써 얻는 큼직한 추가소득이 또 있다. 바로 통화 창출에서 나오는 이익이다. 새로 창출한 통화 대 부분을 자체 고객의 계좌네트워크에서 관리할 수 있는 아마존 같은 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마존이 은행처럼 사업하면서 공급업자들이 아마존 계좌를 갖게 되면, 아마존은 그들 에게 줄 계산서 총액을 단순히 아마존 계좌 대변에 기입함으로써 결제를 하는 것이다. 공급업자들이 아마존에서 쇼핑하기 위해 이 예금 을 이용하면, 이 대변의 금액은 그대로 남은 채 단지 아마존의 다른계좌로 이체될 뿐이다. 공급업자들의 고용주가 아마존 계좌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급여를 이 계좌에서 지급할 때도 똑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단지 공급업자가 아마존 계좌 예금을 다른 은행 계좌를 사용하는 누군가에게 이체하려고 할 때만, 아마존은 그것을 시행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돈이 필요해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은행 간의 이체는 중앙은행의 돈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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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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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경제 2020. 3. 29. 14:14

- 1980년대의 아파트 열풍 : 규제 완화와 부동산 투기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이 열렸던 흥분의 1980년대에는 대형화되고 고층화된 건물 건설에 대한 규제가 전반적으로 더욱 완화되었 다. 아파트 지구 이외의 주거지역에서 건물의 높이와 용적률을 제한했 던 종래 〈도시계획법〉의 핵심 내용이 달라진 것이다. 이로써 또 한 번의 도시 밀집화가 가능해졌다. 주거전용지역의 용적률이 15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올라 연립주택의 건설이 허용됐다. 결국 주도 대도시 특히 서울의 주택난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이미 10년 전 시작된 대규모 주택 건설 정책은 더욱 확대되었고, 건설부는 1981년부터 1005년까지 15년간 주택 5백만 세대 건설 계획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전반적으로 이 기간은 건설 시장과 부동산 시장의 활황기였다. 국제 구도의 스포츠 제전을 앞두고 도시 미화를 위해 대형 건물과 대규모 주 택의 건설이 장려되었다. 그리고 이는 중동지역 전쟁으로 사업 침체를 겪고 있던 재벌기업 계열의 건설 회사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부동산 부문에서는 시기적으로 조금 앞선 일본의 경우처럼 시세가 폭등 했다. Aveline 1995, 90-91), 서울에서는 올림픽 시설물 건설 바람을 타고 강남 구와 송파구를 중심으로 부동산 투기가 활기를 띠었다. 더욱이 강남의 교통망을 확대시키는 지하철 순환선이 테헤란로를 따라 지나면서 잠실 과 반포 사이에 제3의 업무 지구가 형성됐다. 코엑스빌딩 같이 화려한 마천루 건설에 연이은 사무용 건물의 건설은 이 지역의 지가와 부동산 가격을 급상승시키는 요인이 됐다.
- 한국에는 두 가지의 도시재개발 형태가 존재한다. 첫째가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1970년대 업무 지구 현대화를 위한 주상 복합 지역의 개발이 그 예다. 둘째는 '달동네' 라는 문학적인 이름의, 무허가 주택과 저소득층 주기 지역에 대한 주택 재개발사업' 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형태는 1990년대의 산물이 아니라 '불도저 김' 식의 대대적인 재개발사업이 있 었던 1960년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정부는 강력 한 재개발의 주역이었다. 철거민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1983년 합동 재개발사업' 이라는 도시재개발의 새로운 형태가 도입 되는데, 이는 재개발구역 주민들의 참여와 민영 회사의 개입을 부추겼 다. 이 절차는 주도자가, 정부가 아닌 해당 지역의 주택 소유주로 구성된 '재개발조합 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1970년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과 크 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재개발구역의 무허가 주택 거주민들은 그들이 불법 점기한 토지에 대하여 선매권을 갖게 되어 시세보다 낮은 공시지가로 다시 사들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권한을 획득한 지역주민들은 주택 재개발 권고를 받고 민영 회사와 협의하여 필요한 자본의 일부와 자재, 기술력을 충당한다. 주민들은 이렇게 건설 예정 아파트단지의 새 아파트 에 대한 소유권을 누리게 되는데 건축 기간이 끝나면 원래 소유 주택보다 가격이 대폭 상승한 아파트를 소유하며 그 가격은 토지 재매입, 건축비 등 재개발에 투자한 비용을 웃돌게 된다. 민영 건설 회사의 경우, 가능 한 많은 아파트를 분양하기 위해 고층 초고층 건물의 건축으로 이익을 극대화한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이윤을 남기는 이 사업은, 재개발조합 창립에 대한 찬성이 거의 자동적으로 80퍼센트를 넘게된 이유를 설 명해 준다. 물론 옛 달동네의 주민들이 아파트에 입주하는 경우는 드물 다. 지역의 물질적 변모는 중산층의 유입과 함께 하층이 밀려나는 사회 계층적 변화를 수반하고, 애초의 주민들이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제도는 1980년대 말까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나자 강남지역의 아파트단지 개발이 수그러들었고 아파트단 지 건설이 가능한 택지가 줄어들었으며 아파트단지는 점점 도시 외곽으 로 자리를 이동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기존의 도시 개발 지역 가운데, 평 균 3~5헥타르에 이르는 재개발지구는 상대적으로 이점을 누리게 되었 다. 1983년에 시행된 합동 재개발사업이 민간 자본의 참여를 독려하는 조세경감이나 공공지원 등 다양한 조건들을 내세웠기 때문에 대기업들의 부담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 아파트단지 개발의 역사는 끊임없이 건축되고 재건축된 한 도시의 역사이다.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건축가, 주민 등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던 것처럼 '맨주먹으로 일으켜야 했던 대도시 서울의 끊임없는 변화는 이를 잘 보여 주고 남는다. 한국 도시경관의 불안정성은,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불안정성은 우선 도시의 변화 속도 에 있어서 과격함을 의미한다(Lee Eun 1997, 124-125). 국토의 빠른 개발과 변모를 경험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적 특징은 '새 것에 대한 맹목적 중 배'로 나타난다. 최신형 아파트단지와 최신형 건물들의 경합은 일상화되 다시피 했다. 1970년대 이후 '새로운 도시'의 창궐은 '신'이나 '뉴'라는 접두사를 무한대로 사용케 했다. 이 책에서 쪽마다 쏟아 낼 수밖에 없는 '신도시', '뉴타운' 의 홍수는 필자로서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오늘의 서울은 이렇듯 도시 유행의 첨단을 보여 준다. 서울의 가옥 갱신 주기는 서구 도시보다 훨씬 짧다. 델리상은 도시 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한국인 대다수의 '무심함'을 지적한다(Delissen 1993). 베르크는 일본에서 도시의 의미 내지 일본의 도시성에 대한 조사에 서 유사한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일본에서 도시의 의미는 일본 사회 내 시·공간 조직의 핵심이라 할, ‘유동의 문화 (culture de flux)에 기초 한다고 보았다. 서울 주거 공간의 계속적인 변모 역시 '유동의 문화'로 해석될 수 있을지 모른다. 유동의 문화' 에는 시간의 순환적 개념이 배어 있으며 서구인들이 발전시킨 '축적의 문화 (culture de stock)와는 그 의미 가 매우 다르다. 축적의 문화'는 직선적인 시간성에 뿌리를 두면서도 이 미 지어진 가옥의 영속성에 더 집착한다. 여기서 필자는 문화 발전이냐 하는 논쟁에 대해 섣부른 결론을 내 리지는 않으려 한다. 분명 서울은 20세기 유럽 사회에서 발전된 가옥의 이데올로기와는 상충되는 관점을 갖는다.(Choay 1992). 한국에서 주택의 끊임없는 변모는 서구가 보여 주고 있는 도심의 박물관화와는 근본적으 로 대립된다. 서울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 나가고 변화하고 있으 며 현재에 멈춰 설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듯하다. 확실히 서울은 지리학에 저항하는 도시이다.
- 1970년대와 1980년대 건설된 성격이 다른 여러 아파트단지를 대상으로 한 조사는 아파트단지를 사회계층 구성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홍두 승· 이동원 1993). 이미 언급한 대로 반포주공단지나 압구정동 현대단지 등 은 부유층과 최상류계층을 겨냥한 반면, 잠실 등은 그보다 낮은 소득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파트 면적과 사회계층 구성 간 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타당하다. 1977년 완공된 잠실단지는 평수가 19평을 넘지 않는데, 일반적으로 이 면적은 최소형 평수에 해당 된다. 1980년대 이후 건설된 대다수의 아파트는 주로 30평에서 40평대 이다. 1990년대 중반 필자가 수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잠실의 월평균 가계소득은 15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다른 여섯 개 아파트단지의 300만원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64평 복층이 있는 반포단지나, 압구정 현대의 80평형 이상 아파트단지는 소득 수준이 더 높았고, 삼익단지 또 한 그러했다. 이 세 개 단지 주거 세대 중 35퍼센트 이상이 월수입 300만 원을 넘어섰다. 잠실의 경우,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봉급생활자인 경우 가 35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회사 사장은 없었으며 자유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6퍼센트로, 압구정의 13퍼센트, 삼익의 12퍼센트보다 낮았다. 또한 잠실단지는 가장 젊은 세대로 구성되어 있어 대다수 가장의 연령이 40세 이하인 반면, 다른 아파트단지는 그 이상이었다.
- 한국의 아파트가 갖는 유형적 특징은 프랑스와의 비교를 통해 보다 잘 드러난다. 그렁덩성블(grand ensemble)이나 씨테(cite)라는 프랑스어 용어 는 한국어의 '단지'를 표현할 때 쓰이는 프랑스 말이지만, 그 의미는 한국의 아파트단지와 매우 다르다. 프랑스의 아파트단지는 1950년에서 1980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는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다음과 같은 용어 설명의 예가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렁떵성블: 1960~70년대 프랑스 대도시의 근린지역에 건설된 대규모 건물군을 지칭하며 종종 '씨테'라고도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심각한 주택난을 해소 하기 위해 ZUP(우선시가화지구)의 절차에 따라 지정된 토지 위에 급조됐다. 대개 이 건물들은 지방자치단체 소유의 주변 지역, 즉 도심이나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 지역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빠른 쇠락으로 점차 무기력하게 고립된 빈민 층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높은 실업률을 보이는 청년들과 이민자들의 거 주지가 된 것이 특징이다. 그 일부는 '문제 지역' 혹은 '민감한 지역'으로 불리며 청년들의 폭동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수년 전부터 도시 정책의 특별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으나 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Guglielmo 1996, 265).
- '문제 지역이니 '민감한 지역 이니 하는 용어들은 폭력과 도시문제로 얼룩진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어두운 현황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들 중 일부는 1990년대 초반 이후 발생한 폭동사건 4의 오명을 쓰지 않은 곳도 있다. 사르셀(Sarcelles)이나 라 쿠르뇌브(La Courneuve)처럼 프랑스 근 린지역 문제의 상징적인 아파트단지와는 달리 이블린(Yvelines) 지역의 파를리2(Parly II)와 벨리지2(Velizy II)단지는 대규모 건설의 표본적 사례이다. 전형적인 도시 중산층의 거주 지역인 지프-쉬르- 이베트(Gif-sur-Yvete)도 있다. 분명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이미지를 과도하게 단순화시키면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아파트단지에 대한 전반적인 관찰에 충실하다면, 어떤 의미에서건 프랑 스의 아파트단지는 도시의 소외를 상징하며, 서울의 아파트단지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프랑스의 아파트단지와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서로 상반된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플라망(Flamand 1989, 242-249)과 레제(Leger 1990, 39)에 따르 면 초창기 프랑스의 아파트단지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더 나은 거주환경을 원하는 청년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들이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대거 개인주택으로 이동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오늘날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사회계층 구성은 20년 전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 아파트단지의 성장 과정은 이와는 정반대의 유형을 보여 준다. 1970년대 초반까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주던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그 이후로 오히 려 중간계급이나 부유층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ZUP'나 '그렁평성블'로 번역하는 것은 한국적 현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명성블' 이라는 표현이 반포, 잠실, 압구정단지를 지칭한다면 프랑스어에 스며있는 부정적인 의미 를 지우기 힘들 것이다. 프랑스 독자들로서는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 지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필자는 내 주제가 한국 의 영구임대주택이나 위험지역 문제도 아닌,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중산 층의 공간에 관한 것임을 프랑스 동료들에게 수도 없이 설명해야 했다. 프랑스 동료들과 독자들에게, 한국의 아파트단지가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의 그렁덩성블이나 '씨테'와는 정반대의 개념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도시 형태는 운명적인 것 이 아니며, 모든 것은 주어진 사회, 문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장소의 가치가 갖는 의미에 따라 좌우된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 60년에서 90년 사이 농경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의 빠른 전환, 군대식 선전구호, 독재정권에 의한 외적 정제성장 등은 한국적 모델을 특징짓는다. 프랑스에서처럼 부의 이전이나 연대의식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국민주 이 건설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특징이다. 재분배의 측면보다는 양적 성장 그 자체에 과도하게 집착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기에는 개인의 행복이 아닌 사회의 행복' 이라는 특별한 비전에 접목 된 한국적 태도가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짓은 한국의 경우 개인적인 부의 재분배를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프랑스와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보다 훨 씬 덜 느낀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서울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아파트단지들은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재벌과 손을 잡고 급격한 성장을 추구하면서 만들어 낸 한국형 발전 모델의 '압축적 표상'인 셈이다.
- 1998년까지 2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을 짓는 건설 회사는 시세를 밑도는 분양 상한가를 준수해야 했다. 이 가격은 도시별, 서울의 경우 지역 별로 서로 다른 해당 지구의 지가와 건설부가 지정한 표준 건축비를 고 려하여 결정된다. 또한 건설 회사는 주택은행이 관리하는 분양 제도에 따라야 하는 제약이 있어 수요자들에게 직접 주택을 매매할 수 없었다. 아파트 분양제도는 시행 초기부터 계속해서 수정·보완되어 왔다. 1983년 정착된 투기 억제책의 일환으로, 정부는 분양 제도에 이어 채권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주택 청약자는 추첨시, 서 울시가 정한 채권 상한액에 따라 채권을 매입해야 하며 이는 아파트단지마다 서로 다르다. 사실상 주택 구매에 대한 일종의 중과세에 해당하는 이러한 조처는 정부의 공공 유동자산을 증식시키는 동시에 투기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졌다. 주택 청약자들은 액면금액의 내림차순으로 명단에 등록된다. 즉 액면 금액이 높을수록 분양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한편 이 제도에 따라, 주택을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취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고 특히 주택보급률이 낮은 서울의 경우 수요를 급증시켰 다. 1990년, 300만 명 이상이 주택 청약 계좌를 신청한 반면, 같은 시기에 연간 주택 건설은 50만 호가 예정되어 있었다. 1994년, 서울의 경우 청약 자의 숫자는 약 50만 명을 기록했던 반면 연간 주택 건설은 약 6만 5천 호 뿐이었다(서울통계연보 1995). 이 두 사례는 정부의 가격 통제 방식과 함께 1998년까지 주택 시장의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보여 준다. 이상과 같은 가격 통제 방식은 1995년부터 점차 사라져 1998년 2월 부터는 완전히 자율화되었다. 그 결과 신규 건설 주택가는 시세에 맞춰지 게 되었고 점차 시장 상황에 영향을 받는 주택 상품으로 변화했다.
- 주택정책을 다룬 한 논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의 주택정책은 오랫동안 부유층에 유리한 방향으로 시행되어 왔다. 이러한 방향은 ‘주택 여과 과정(Hiltering Process)'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하위 계층은 부 유증이 더 값비싼 최신 주택으로 옮기 가면서 남기고 간 주택을 저렴한 비 용으로 구입해 옮겨 간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chung, 1995, 3.20 321). 대다수가 개인적 주기사의 진보에 따라 거주지를 이동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하위 계층도 주택을 소유하게 된다는 주택 여과 과정' 의 원리 는, 사실 모든 지역의 집값이 똑같은 도시 공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즉 중심도 주변도 없이 미분화된 도시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 원리는 도시의 진동기들이 남지도 변형되지도 않는다는 전제에 입각 한 것이다. 따라서 이미 끊임없는 쇄신을 거듭하면서 중심과 주변의 문화가 갈수록 심화되이 온 서울의 변천 과정에서는 의미가 없다. 실제로 한국의 주택정책은 소형 아파트를 희생시키 대형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하위 계층을 주변 지역으로 내몰고 도심을 상층 계층이 차지하는 젠트리피케이션(sentulication)을 가져왔을 뿐이다. 이후 세대당 가족 수의 비율과 주택당 가구 수의 비율이 아파트에서는 낮아지고 개인주택에서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 서울의 세 대당 평균 가족 수는 개인주택이 9.5명, 아파트가 5.9명이었고 1995년에 는 각각 9.8과 3.7로 벌어졌다. 주택당 가구 수의 비율도 비슷한 곡선을 보여, 1970년과 1995년을 비교해 보면 개인주택이 1.9가구에서 3가구, 아파트에서는 13가구에서 1가구를 기록했다(RPL 1970; 1995). 아파트의 인 구밀도 저하와 개인주택의 인구밀도 증가는, 아파트단지 건설 정책이 주 로 중간계급이나 주택 구입 능력이 있는 계층을 위주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결국 전혀 수혜를 입지 못한 최하위 계층은 별 수 없이 개인주택의 일부나 영세한 연립주택 등 다른 형태의 주택으로 옮겨 가야 했다.
- 한국에서 정부의 직접 투자가 빈약했던 주택 부문은 산업 발전의 희생양이었다. 범국가적 차원에서 수립됐던 주택 부문의 계획이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수렴되고 국민총생산이 꾸준히 증가했지만, 주택 부문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인 노력은 미미했다. 아파트의 대규모 건설 공약은 계속되었다. 분명 대규모 주택의 공급 은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발전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뿐이었다. 공공 재정의 역할은 미미했지만, 한국인들은 정부 정책에 부응해 주택 구입의 재정적 부담을 받아들였다. 이 역시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전 국민 이 수락했던 수많은 물질적 희생의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커밍스 (Bruce Cumings)에 따르면, 이것은 한국의 경제 기적을 가능케 했던 중요한 요인이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 발전은 엄밀히 말해 '기적'이 아니라 1960년대 성인 계층의 고된 노동의 결과이자 그들의 희생에 바탕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북한과의 적대적 경쟁 관계와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북한을 능가해야 한다는 총량주의적 목표를 추구해 왔다. 1960년대에는 공장의 벽보나 방송에서 ‘경제 우선!’, ‘수출 목표 10억 달러!' 등의 구호가 난무했다. 단순화된 경제 발전 목표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슬로건으로 만들어졌고 주택 분야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주택 건설 2백만 호!'라는 구호는 1970년대에 그 전성기를 구가했다. 가장 충격적인 구호는 '주택 건설 180일 작전’ 으로, 잠실의 초창기 네 개 아파트단지가 이 기록적인 기간 안에 건설됐다. 군대 용어에서 빌려 온 '작전' 이라는 용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정부 선전 구호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국민적 동원이 이루어졌다. 앞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서울 시장 김현옥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개발 시대 고위 관리들의 전형적인 특성 을 지적했는데, 이를 잘 보여 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서울에서 김현옥 의 과격한 정책 추진 때문에 문화재 파괴를 우려하는 견해가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지금 100미터를 달리고 있다. 오직 속도만이 나의 무기다. 격려도 비판도 생각할 시간이 없다. 꼴찌로 도착한다면 무슨 소용 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Jung 1997, 32), 대단지 아파트는 '기적'의 시대를 풍미했던 대량 생산체제의 직접적 산물이자 한국 사회가 '양과 속도' 의 신조를 따르는 성장의 이데올로기에 완벽하게 통합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최평두 1991, 227-264).
- 주거의 공간적 특성과 생활양식은 도시화되고 산업 화된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결정 요인 중 하나이다. 인류학자 알타베는 프랑스의 사례연구를 통하여 유사한 결론을 끌어낸다. Althatbe 1985). 그에 따 르면 주택(가구, 설비 등)이 자신의 실제 계층보다 더 상위 계층에 속해 있음 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거주 장소는 자신의 계층을 정의 하기 위한 하나의 목표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도시 중산층을 의미하는 가 장 함축적인 상징으로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분명 특이한 점 이다. 이는 한국과 프랑스에서 주택에 결부된 상징 내지 표상을 구별 짓 는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작고 소박한 것이라도 단독주택 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 한국에서 아파트는 경제 발전의 주역이자 가장 큰 수혜자인 중간계 급에 일반화된 주거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사례 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아파트단지의 형태는 다양하며 그것은 중간계급 내 부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렛은 아파트의 이미지가 실제의 지리학적 현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아파트는 도시 주민의 의식 속에서만, 마치 그 안에서는 사회계층적 차이가 존재하 지 않는 듯이, 과도하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향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외형적 관점에서 아파트는 여러 계층과 범주로 이루어진 중간계급 일반의 주거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상류사회적 형태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 런 이유로 아파트단지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은 이들이 전체적으로 도 시 중산층의 가치에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 라고 할 수 있다(Lett 1998, 227).
- 크게 보아 1970년까지는 주민들의 거부감을 없애 줄 만한 아파트 모델이 만들어지지 못했고 아파트는 하위 계층의 전유물이라는 이미지 가 여전히 강했다. 그러나 부유층과 상류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물질적 · 비물질적 장려책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학교 이전 등을 포함하는 거주 환경에 대한 총체적인 개선책이 뒤따르면서, 이들 계층이 아파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아파트단지의 성공은 또한 면적이나 설비 등 주택 조건의 개선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도 아파트단지가 중간계급 을 끌어들이던 때에는 이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잠실의 아파트단지는 1950년대 사르셀의 아파트단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원천은 상층의 도시 중산층들이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또 프랑스의 아파트단지와 한국의 아파트단지의 진화 과정에 있어 중 대한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1950~60년대 아파트단지는 젊은 세대의 중간계급이 거주했고 얼마 후 이 계층이 단독주택으로 옮겨 가면서 가차 없이 버려졌다. 그와 반대로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상위 계 층에서 시작되었고 중간계급 일반과 하위 계층으로 확산됐다. 아파트가 한국인 전체에게 표본이 된 것이다. 요컨대 정부가 주도하고 재벌이 공 급한 대단지 아파트를 상층의 도시 중산층이 수용하게 되었을 때 한국에서 아파트 신화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 아파트단지는 도시 형태의 측면에서 한국 경제의 '기적'을 낳게 한 과정과, 30년에 걸친 농경토지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을 반영한다. 건설 회사와 분양 희망자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남겨준 분양가 통제제도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주택을 양산하는 도시계획 안에서 하나의 집합적 세력으로 고려되고 움직였던 존재였다. 처음에 서울 주민들은 아파트에 대한 저항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새로운 주택 형태를 전파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이 도시 역동성을 강남으로 재분배하면서 대규모로 시행되자 여론은 급선회했다. 이러한 여론의 급선회가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사회적 지위를 주장하는 방법에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말만 해도 하위 계층의 주택 유 형으로 간주되던 아파트가 왜 점차로 도시 중산층을 대표하는 특성적 기 호의 하나가 됐는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주택 시장과 임대 시장에 각 개 인의 접근 방법을 결정하는 경제적·물질적 조건들은, 어떻게 중간계급 대다수가 아파트단지의 대규모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하는 구조를 밝혀 준다. 결국 아파트'는 상품이 되고, 재테크의 수단이 되었다. 권위 주의 국가는 인구 성장을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이 경제 발전에 헌신하, 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을 대단지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 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의 구조 때문에 한국의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단 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주거 공간의 획일화를 너무도 쉽게 수용하는 한국인들의 문화적 무관심 은 이렇게 해서 허용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권위주의 산업화의 구조와 특성, 여기서 비롯된 계층적 차별 구조와 획일화된 문화양식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이자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에서는 인구 규모와 토지 면적 간의 단순 비율 혹은 인구밀도에 대 한 잘못된 논리가 아파트단지 건설을 정당화하는 주요 논거로 동원된다. 김주철과 최상철의 지적대로 “대규모단지의 체계적 건설의 주된 이유는 서울의 지속적인 인구증가에 비해 건축 가능 용지는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Kim et Choe 1997, 200)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서울에 관한 도시계획이나 지리학에 관련된 모든 문헌에 스며들어 있다.13 그러나 서 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은 아파트가 가장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 아니라 연립주택 지구나 달동네이다.
- 1980년대 혹은 1990년대 이전의 단독 주택들도 개량되어 이제는 매우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다. 서울에 지어진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 어디라도 이제는 화장실이나 수도 등 최 소한의 편의시설이 실내에 있다. 새로 짓는 집들은 연탄 난방이 아닌 가 스보일러를 설치한다. 이러한 변화는 잠실단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서, 1996년에는 이미 13평에서 15평의 주택에 사는 주민의 80퍼센트가 연탄 난방을 가스보일러로 교체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아파트의 성공 요인 은 현실로서의 아파트가 인기를 끌었다기보다는 한국인들이 '현대적 주 택'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가 인기를 끈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 다. 기술의 진보는 순수하게 한국적인 산물이었음에도 서구적인 것으로 이미지화된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도식 안에서 서구식 모델' 이 누리는 권위는 아파트를 현대성의 유일한 상징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 현대적인 아파트에서는 어느 정도 마루와 방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 다. 한옥에서 마루는 온돌 난방이 들어오는 바닥에 콩기름을 입힌 한지 를 바른 다른 방들과 달리 나무판을 깔고 난방이 되지 않는다. 아파트에 서 전통적 의미의 방과 마루의 구분은 사라졌으나 어떤 이들은 되살리려 하기도 한다. 방바닥은 전통 한지 장판의 실오라기 문양과 황토색을 모 조한 리놀륨 장판을 깔고 거실에는 원목 마루판을 깐 집도 있었다. 아파 트에서 한옥의 공간 분리는 단순화되어, 마당의 기능을 대신하는 다용도실, 발코니, 현관 등과 나머지 공간들 사이의 대비로 요약된다. 이 대비는 높이를 달리 한다든가 바닥재의 차이 등으로 구체화된다. 현관은 다른 공간의 높이보다 10여 센티미터 바닥을 낮추고 타일을 깐다. 다용도실 과 발코니도 타일을 깔며 높이는 다른 공간과 차이는 없으나, 문턱이 있 어 다른 공간과 분리된다. 바닥재의 차이에 따라 신발 사용 습관이 생겨 나다. 아파트에 들어올 때는 거리의 먼지로 덮인 외출용 신발을 벗고 아 파트 안에서는 양말이나 실내화를 신는다. 다용도실이나 발코니로 나갈 때는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는다. 신발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이렇게, 안과 바깥 사이에 놓인 전환적 장소로서 한옥이 갖고 있는 한국 고유의 가정 공간 구조를 보여 준다. 이처럼 한국 아파트의 특별한 구성 은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토로했던 한옥의 특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전통적인 움직임(특히 음식을 준비할 때 신을 끊임없이 벗고 신는 것)을 그 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의 공간 구성과 각 장소의 용도는 한옥 구조를 재구성한 것임을 확인시킨다. 넉넉한 저장 공간을 갖춘 가정 공간은 구심성을 띠며 마루를 향해 열려 있다. 반면 늘 안주인이 차지하는 큰방은 은밀하고 엄숙한 '중심' 으로 남는다. 외부 세계에 대해서 굳게 닫혀 있기는 하나, 아파트는 바깥과 '안' 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가지 형태의 공간을 갖는다. 이 차이는, 바깥은 가정경제 관리의 공간, 안은 일상생활 공간이라는 기능적 구 분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며, 신발을 신고 벗는 특별한 통행 방법으로 나타난다. 한옥의 트집거리가 되는 이 통행 방법은 아파트 구조 안에 체계적으 로 옮겨졌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현대' 혹은 '전통 가옥을 규정하는 문 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실제의 공간 구조와 생활양식이 아니라 한국인들 자신이 그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나 가치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한강의 기적'을 낳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자 한 강의 기적이 만들어 낸 가장 분명한 결과이다. 아파트단지의 건설은 건설 산업 발전에 중요한 계기로 작동했으며 한국의 산업구조 안에서 그중 요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971년에서 1996년 사이, 건설 산업의 생산은 국민 총생산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Kim Jaeyoung et al 1998). 건축, 도시계획, 국토 개발 등 이 분야의 산업은 중간계급에게 많은 일자 리와 아파트라는 형태의 주택을 제공했다. 1998년까지 분양제도에 따른 가격 통제로 지불능력이 있는 계층에게 부의 축적을 가져다준 아파트는 한국의 중간계급을 형성시킨 진정한 공장이었다. 결국 아파트단지는 농촌공동체로부터 도시로의 이주와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적 정체 성의 기준들이 무너지는 가운데에도 이들 신흥 중간계급에게 사회적 인정이라는 상징을 제공했다.
- 1997년에서 199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이후, 경제 위기에 타격을 입은 건축 부문과, 주택 시장의 상황은 중대한 도전이었다. 2000년 11월 현대건설의 심각한 재정난이 야기한 충격과 한국 재벌기업을 대표하던 이 회사의 파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기울였던 노력이 이를 입증한다. 그 러면서 주택 시장을 지원하는 대책들이 줄지어 강구됐다. 특히, 수입이 줄어들어 중도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된 주택 취득자들을 위해, 저금리의 융자 제도가 마련되기도 했다(윤주현 1998; 2000). 주택 시장 위기에 뒤따른 사태와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한국에서 아 파트의 성공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1994년에서 1999년 사이, 주택 가격 지수의 변화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체 도시에서(1995년을 100으로 했을 때) 모든 형태의 주택을 포괄하는 주택가격지수는 1997년에서 1998년 103.5에서 91 이하로 하락했으나, 1999년과 2000년을 거치면서 곧바로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이러한 상황의 호조는 서울과 중간 규모의 도시에서 가장 현저했다. 대한주택공사 1999, 162), 이후 조사에 따르면, 건축 부문의 중 소기업들이 잇달아 파산하면서 한국의 주택 구입자들이 중소기업에 대 한 신뢰를 잃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대기업의 아파트 시장이라는 것이며 여기서 현대건설의 에피소드가 빚어졌다. 따 라서 경제 위기는 건설 분야 대기업들이 건설한 아파트단지의 품위를 더 욱 확고하게 유지시켜 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과 2001년 주택정 책의 목표를 통해 표현됐다. 50만 호 건설 목표 중 3/4이 아파트였고, 2002년 주택보급률 100퍼센트를 겨냥했다(장성수 2000).
-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프랑스인들은 대단지 아파트에 흥미를 잃 었다. 물론 1960년대 처음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될 당시에는 중간 계층 의 젊은 부부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거 환경이 진정으로 개선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아파트단지 입주자들과 건축가, 도시계획 전문가들에게 대단지 아파트는, 오늘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삶의 상징이었다. 대단지 아파트의 지위가 실추되기 시작한 것 은 1970년대(1974년 1차 오일쇼크)에 들어서면서였다. 결국 1960년대 그곳에 이주한 젊은 부부들에게 대단지의 장기임대아파트(HLM)는 개인 소유의 단독주택이라는 목표를 위해 거쳐가는 하나의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중간계급이 대단지 아파트를 떠났고, 주로 이민 자 출신의 하층민들이 유입되었다. 이 시기부터 도시근린지역의 대단지 아파트는 점점 주변화되었고 생활 시설이 낙후되고 잠재적인 사회문제 를 안고 있는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이렇듯 2005년 가을 이 지역에서 발 생한 폭력 사태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 새로운 초고층 아파트단지 건설에 따른 건폐율의 감소는 지역의 조밀화를 수반하며 용적률의 경우 거의 세 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밀화가 도시 형태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가구 수 는 12퍼센트 정도 증가할 것이지만, 가구당 가족 수의 감소로 인해 단지 전체 인구수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 평수의 증대는 재건축 사업이 가져오는 사회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잠실 3단지의 경우 구단지에 거주하던 주민의 25퍼센트만이 소유주였고 75퍼센트는 세입자 였던 만큼, 아파트 평수가 커지고 전세가가 급등하면 그중 극히 적은 세 대만이 단지에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이 지역을 더욱 상층 중산층화하는 것이다. 전세가의 상승이 재건축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3~4년에 걸쳐 진행 되는 재건축 사업은 그 과정을 통해 사실상 해당 지역의 주택 시장에 엄청난 압력이 된다. 주민의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전세 수요는 그대로 있는 반면 전세 주택의 공급량은 재건축으 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해당 지역뿐 아니라 송파구 전체와 인접 구의 전세가는 전체적으로 상승했다. 광범위한 재개발계획과 대규모의 주택 수요가 연동되는 이러한 메커니즘은 좀 더 부유한 계층이 이주해 오 고 빈곤한 계층이 이 지역을 떠나게 됨으로써 고전적인 사회 변화의 경 로를 밟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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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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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금융위기는 버블의 생성과 붕괴에서 시작된다. 버블은 특히 부채에 의해 조 달된 자금으로 지탱될 때 무너지기 쉽다. 부채로 조달한 자금으로 자산을 구매한 경우, 자산가격에 변화가 없다면 자산과 부채는 균형을 이룬다. 물론 이자를 지급 해야 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해진다. 자산가격이 상승하면 수지균형 상 여분의 부가 창출된다. 그러나 자산가격이 금리의 상승이나 외부 충격에 의해 급격하게 붕괴하면 이전에 창출된 부는 사라지고 수지균형상 손실만 남게 된다. 자 산가격은 하락하더라도 부채는 줄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차입으로 자산을 사들인 사람은 채무불이행에 빠질 수밖에 없다. 주식시장, 부동산 시장 전체가 커다란 가격붕괴를 경험하면 이런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들 의 채무불이행은 곧 은행들의 손실로 이어진다. 은행들이 손실을 보게 되면 금융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은행 간에 신용이 경색되고 이것은 실물 경제로 전염된다. 실물 경제에 자금이 돌지 않으면 기업들이 도산하고, 기업들 은 살아남으려고 고용을 축소한다. 축소된 고용에 의해 실업률이 올라간다. 실직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욱 많은 채무불이행이 발생하고, 이것은 다시 은행들의 손실을 키운다. 이와 같은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이 같은 악순환이 극단적으로 반 복된 결과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이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경우도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이처럼 금융위기의 근간에는 버블의 생성과 붕괴가 먼저 존재한다. 버블의 생성 과 붕괴가 없다면 금융위기가 시작될 이유가 없다. 아시아 위기 당시 한국은 특별한 자산가격의 버블은 없었으나 기업들의 과잉 설비투자로 말미암은 생산시설의 버블이 있었다. 금융위기의 제1막은 버블의 붕괴이고, 제2막은 금융 시스템의 붕괴다.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역시 그러했다.
- CDS의 진정한 문제점은 채권을 보유하지 않은 투기자도 거래에 간단하게 참여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종래부터 CDS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 의해 지적된 문제점은 시장에서 채권 발행액보다 훨씬 많은 CDS가 거래되고 있으며, 그 본질이 채권 보유에 대한 헤지가 아닌 순수하게 '도박'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 판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회사들이 채권만 발행하는 것이 아니며 은행들에 의한 직접금융도 매우 크다. 회사들에 대출해준 금융기관이라면 그 대출에 대한 헤지로 충분히 CDS를 거래 할 유인이 있을 것이다. 이들 회사에 매출 채권 등을 보유한 다른 회사들 역시 마찬가지의 유인을 가질 것이다. 한편 어떤 회사의 도산에 돈을 걸고 싶은 사람이 있 다고 할 때 CDS가 그에 대한 유일한 수단을 제공하느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주식시장에서 그 회사의 주식을 공매도 할 수 있다. 아니면 레포시장에서 해당 채권을 빌린 다음 공매도를 할 수도 있다. 진정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전술한 바와 같이 서브프라임 차입자 전체와 같은 리스크를 AIG와 같은 한 주체가 과도하게 보증을 했고, 그에 따라 AIG와 거래 관계에 있는 금융권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가 일개 보험회사인 AIG에 집중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문제점은 역시 규제의 부재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CDS가 채권투자자들에게 제공하는 신용위험의 헤지라는 순기능조차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다. CDS에 대해서 태산명동 서일필山鳴動 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 요란을 떨더니, 튀어나온 것은 쥐새끼 한 마리뿐이다' 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유겠으나 시장이 CDS에 과민 반 응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CDS의 거래금액=CDS의 위험'이라는 거짓 정보에 현 혹된 투자자들은 미국 증시가 3월 이후 크게 반등하는 국면에서도 여전히 금융 시 스템 붕괴를 확신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또한,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 경제의 크기는 GDP로 측정하는데 GDP란 결국 경제 전체의 총지출에 지나지 않 는다. 따라서 모든 주체가 부채를 변제하려고 지출을 급격하게 줄이면 그 결과 경 제 규모는 급격하게 수축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대차대조표 불황이다. 리처드 쿠가 이야기하는 대차대조표 불황이란 채무초과에 의한 불황이다. 경제 주체가 채무초과가 되는 상태를 피하거나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가능한 모든 지출을 줄이고 오직 변제에 몰두하게 되면 그 결과 경제는 심한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는 말이다. 쿠는 기업이나 가계의 차입 하고자 하는 의사가 없는 상황을 강조하지 만, 대출기관이 차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대출을 꺼리는 상황도 결과는 같을 것이 다. 기업으로 말하면 설비투자도 줄이고 고용도 늘리지 않게 되고, 가계는 소비 지출을 억제하고 오직 빚을 갚는 데 몰두하는 상태다. 대차대조표 불황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통상의 순환적인 불황과는 달리 구조 적인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다. 불황이 끝날 때는 경제 주체들의 대차대조표가 다시 건전성을 회복했을 때다. 이때 건전성을 회복하 기 위해 지출을 줄이는 행위가 경제를 더욱더 위축시키면서 자산가격의 추가하락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 때문에 대차대조표 불황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끝없는 경제 규모의 수축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 대차대조표 불황이 선진국 경제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힌 사례가 1930년대의 대 공황이고, 1990년대 일본의 장기침체다.
- 리처드 쿠에 의하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대차대조표 불황의 전형이었다. 1990년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붕괴로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자산가치는 1천5 백조 엔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 GDP를 평균해 5백조 엔으로 잡는다면 무려 려 GDP의 300퍼센트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러한 자산가치의 붕괴에 의해 일본 기업들의 대차대조표는 심각하게 손상됐다. 자산가치는 하락한 반면 부 채는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업이 채무초과에 빠질 우려에 시달렸다. 그들은 채무초과에 빠지게 되면 금융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설비투자를 통한 새로운 수요의 창출보다 기존의 부채를 청산하는 데 열중했다. 부채 청산은 차입 측의 사정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 금융기관 역시 버블 붕괴 후에는 그동안의 무분별한 신용공급을 반성하고 더욱 엄격한 관리에 나서게 됐다. 금융기관들이 이러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기간은 얼마나 구조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금융구조조정에 10년이 넘는 세월 을 허비함으로써 경기 회복을 지연시킨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통화주의자들은 재정지출에 의한 경기부양을 극렬히 반대한다. 재정지출은 필요가 없으며 오직 통화량만 늘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논리다. 그렇지만 위에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는 물론이고,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봐도 유동성 함정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다. 현대의 일본과 미국의 사례로 볼 때 프리드먼의 이 론이 틀리고 케인스가 옳았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케인스의 유동성 함정과 재정지출의 필요성에 관한 논의는 상식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다.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시장원리주의 경제학자들이 케인스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경제학과 수학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수학이 아니라 상식적인 추론을 통해 경제 이론을 이야기했기 때문 에 수학적으로 정합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만약 인간들이 집합적으로 모여서 행하는 경제 활동 모두를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시장원리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한 것은 미국의 우파 정치세력인 공화당이었다. 이들은 시장원리주의자들처럼 기업의 자유를 최우선시하고 정부 개입의 최소화를 선호했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할 때면 이들은 언제나 정부에 의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에 대해 겉으로는 투덜대면서도 속으로는 환영했다. 표결에 지장이 없는 범위 에서만 국회에서 냉소적 의견을 피력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대안도 없고 이 데올로기를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싫어도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세력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정부주의와 같은 입장으로 중앙은행의 최후의 대부자'로서의 역할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정부에 의한 모든 정책에 사사건 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버블이 붕괴한 후에도 모든 것을 내버려두라는 주장을 한다. 이들의 이론은 공황을 받아들이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시장원리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한 것은 미국의 우파 정치세력인 공화당이었다. 이들은 시장원리주의자들처럼 기업의 자유를 최우선시하고 정부 개입의 최소화를 선호했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할 때면 이들은 언제나 정부에 의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에 대해 겉으로는 투덜대면서도 속으로는 환영했다. 표결에 지장이 없는 범위 에서만 국회에서 냉소적 의견을 피력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대안도 없고 이 데올로기를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싫어도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세력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정부주의와 같은 입장으로 중앙은행의 최후의 대부자'로서의 역할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정부에 의한 모든 정책에 사사건 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버블이 붕괴한 후에도 모든 것을 내버려두라는 주장을 한다. 이들의 이론은 공황을 받아들이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있으나 인터넷에서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리고 그 추종자 중 대부분이 진보주의자들이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학파는 어떻게 보면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배제하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현대적 극 우사상이기 때문이다.
- 투자은행, 헤지펀드, SIV와 같은 감독규제에서 비켜간 금융기관들과 ARS나 머니마켓펀드와 같은 신상품들에 의한 금융이 은행여신이나 회사채시장과 같은 정규 금융의 총액을 한때 웃도는 규모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그림자금융이 현재는 붕괴한 채로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 금액만 해도 10조 달러를 웃돈다. 여기에 더해 자산 역시 담보로서 중요한 금융의 기능을 담당해 왔다. 금융위기 전 과거 수년간 미국의 소비자는 주택을 은행에 설치된 ATM 기계처럼 사용했는데, 모기지에퀴티인출이라는 형태로 많은 돈을 차입했었다. 현재는 주택가격 하락으로 작동하지 않고 끊긴 상태다.
- 마찬가지로 헤지펀드들은 과거 포트폴리오에 있는 CDO를 담보로 프라임 브로커로부터 CDO 액면의 약 85퍼센트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은행들이 자산을 담보로 현금을 빌려줄 때 소위 헤어커트Haircu라는 안전이윤 Safety Margin을 제외한 나머지만을 현금으로 빌려준다. 그런데 CDO는 대략 헤어커트가 15퍼센트 정도였지만 금융위기 이후 이 헤어커트는 거의 80퍼센트 수준으로 올라갔다. 헤지펀드 처지에 서는 더는 자산을 담보로 현금을 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림자금융의 붕괴와 자산을 담보로 한 차입이 어려워진 데 따른 신용의 축소는 어느 통계에도 공식적으로 잡히지 않는다. 이것은 애초부터 M1, M2 등의 통화량을 나타내는 통계에서 빠진 것이다. 그렇기에 그림자금융이다. 이렇게 해서 사라진 신 용은 적어도 수조 달러를 웃돌 것이다
- 백악관 경제자문인 로렌스 서머스 Lawrence Henry Summers는 2009년 여름 영국의 파이낸 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미국 경제는 수출지향적이고 환경친화적이며 소비와 에너지 소비에 도 덜 의존하게 될 것이다. 금융산업보다는 생명공학과 소프트웨어 그리고 토목공학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미국 경제는 부가 편중된 상위 몇 퍼센트의 계층에 의한 성장보다는 중산층에 기반을 둔 경제 가 될 것이다. ... 글로벌 불균형은 해소되어야 한다. 미국이 최후의 소비자 로서의 역할을 그만두게 된다면 다른 나라들도 그에 따라 입장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최근 몇 년처럼 세계가 외환보유액을 쌓아 올리는 데 골몰하는 일은 향후 십 년 동안 점차 축소될 것이다.
미국 정부의 인사로서 무역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서머스만이 아니다. 티모시 가이스너 재무장관도 틈나는 대로 무역 불균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들 모두가 무언중에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라 생각한다.
- 미국은 과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왕성한 소비를 통해 세계 경제 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높은 성장률을 누리고 미국의 소 비자는 값싼 수입품을 소비하는 풍요로움을 누렸다. 그 대가로 중국에서는 3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파티 를 끝내야 할 때가 됐다. 그렇게 해서 쌓인 불균형에 의해 미국이 파괴될 지 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하버드 대학의 경제사학자인 니얼 퍼거슨 Nial Ferguson은 미국과 중국의 공생관계를 차이메리카 himerica 라는 신조어로 비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최근 그는 차이메리카의 이혼이 임박했다고 선언했다. 이제 과거와 같이 경상적자를 키우면서 소비에 의한 경제 성장을 계속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미국의 상식이 됐다. 미국은 경기가 어 느 정도 회생국면에 접어들면 1980년대에 그랬듯이 국제 시스템을 손대는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 표적은 물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수출국일 것이다.
- 19세기 말에서 대공황까지는 금본위제에 의해 통화 시스템이 유지됐다. 금본위 제하에서 각국의 통화는 금과의 교환비율이 정해져 있었다. 또한, 통화의 발행은 그 나라가 보유하는 금의 양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됐다. 금본위제하에서 각국은 무 역에 의해 벌어들인 타국의 통화를 금과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금으로 하는 무역결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금본위제하에서는 이론적으로 어느 나라도 지속적인 무역흑자나 무역적자를 기 록할 수 없다. 만일 어느 나라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누적시키게 되면 그 나라의 금 보유고는 급격하게 불어나게 된다. 금이 불어나면 그만큼 통화량을 늘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통화량의 증가는 호황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부르게 된다. 인플레이션에 의해 그 나라의 상품가격이 상승하면 경쟁력을 상실하 게 된다. 그에 따라 무역에서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유입됐던 금은 다시 국외로 유출되게 된다. 금본위제하에서는 세계 경제가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메 커니즘에 의해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 실제로는 이론과 달리 무역적자를 기록한 나라들은 지속적인 무역적자 탓에 금 의 유출이 지속했다. 그에 따라 경기 부진과 디플레이션을 경험해야 했다. 정부의 불개입이 지속적인 불경기를 불러왔던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부의 시장 개 입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금리 인하나 정부의 지출은 생각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 다. 이때는 아직 케인스가 역사에 등장하기 전이다. 금본위제는 대공황에 의해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금본위제에서 이탈해 버렸다. 미국도 교환비율을 20달러에서 35달러로 바꾸면서 통화량을 대폭 늘리는 조치를 했다. 대공황으로 피폐해진 자국 경제를 살리려고 각 국은 수출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물론 그 수단은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 이었다. 모두가 근린궁핍화정책 Beggar Tity Neighbor Polity 으로 달아난 결과는 세계 무역의 붕괴였다. 한 가지 언급할 사항은 금본위제를 일찍 폐기해 버린 나라일수록 경기 회복이 빨랐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통화체제는 대안을 찾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의 변동환율에 의해 무역 시스템이 망가졌던 교훈에서 고정환율과 같은 금본위제의 장점은 승계하고 단점은 버리는 새로운 제도가 모색됐다. 동시에 국제금융을 촉진 하기 위해 IMF와 세계은행이 탄생했다. 새로운 환율은 세계의 금 70퍼센트를 보유 하고 있던 미국이 달러와 금의 태환비율을 온스당 35달러로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다른 나라들은 자국통화와 달러의 교환비율을 정하고 상하 1퍼센트 안의 범위에서 환율을 유지하기로 했다. 무역의 결제통화는 달러지만, 각국은 원한다면 미국 정부 에 달러를 제공하고 금으로 교환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1971년까지 지속한 이른 바 국제통화의 '브레튼우즈Breton wood 체제'였다. 브레튼우즈는 말하자면 금본위제에 가까운 금환본위제였던 것이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 등으로 재정적자가 누적되고 무역적자에 의한 금의 국외 유출이 계속되자 달러와 금의 태환을 정지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것 이 닉슨쇼크'다. 이때부터 세계는 변동환율체제로 전환됐다. 이후 미국은 금의 보 유량과 무관하게 마음대로 통화를 찍어낼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국제통화는 실질적인 달러본위제가 시작된 것이다.
- 1980년대 초반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과 싸고자 취한 고금리정책은 달러 가치 의 급등을 가져왔다. 그 결과 미국은 경상적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동시에 심각 한 불황에 빠지게 됐다. 그럼에도 달러 가치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플라자호텔에서 미국과 일본, 독일 그리고 이들의 들러리로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5개국의 재무장관이 모인 회합이 있었다. 이 회의에서 일 본의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를 절상시키는 시장 개입을 공동으로 단행한다는 합 의를 했다. 당시 참석한 일본의 재무상인 미야자와 키이치는 훗날 총만 머리에 갖다 대지 않았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고 술회했다. 이로써 엔화는 달러에 대해 50퍼 센트 이상 절상됐다. 일본의 대미 수출은 많이 줄어들지 않았으나 미국의 경상수지 는 흑자로 전환됐다. 그것은 대일 수출이 늘었기 때문이 아닌 유럽에 대한 수출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일본의 버블을 일으키는 간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본은 통화의 강세로 수출의 급격한 하락을 걱정했다. 내수경기를 일으켜 불황을 막고자 저금리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일본은 내수를 활성화하려면 금융정책보다 구조조 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고용안정을 최우선의 정책으로 삼는 일본 정부는 구조조정보다는 저금리를 유지해 내수를 부양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 결과 국외에서 유입되는 엄청난 양의 달러에 의해 국내 유동성이 폭발하기에 이르렀고 주식과 부 동산의 트윈버블이 발생하게 됐다.
- 트리핀의 딜레마란 로버트 트리핀 교수가 1960년대에 지적한 내용이다. 브레튼 우즈체제에서 미국은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달러를 국외에 공급해야 한다. 그래 야 다른 나라들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하고 그 달러로 결제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달러를 외국에 공급한다는 의미는 바로 미국이 경상적자를 기록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경상적자가 누적되면 미국 내에서 외국으로 금이 유출되고 달러의 신인도가 추락한다. 그러므로 달러의 유출과 유입을 동시에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 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미국이 그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결과 브레튼우즈체제는 붕괴했다. 그 후 미국은 막대한 경상적자를 기록했지만 달러의 폭락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달러가 폭락하고 미국의 시대는 끝난다는 예언은 무성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폴 케네디는 1980년대 말 자신의 저서 《대국의 흥망》에서 미국은 몰락하고 일본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예언했다. 그는 일본에서는 아직도 영웅이지만 미국 내에서는 바보취급 당하고 있다.
- 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 주장이 1930년대부터 1970년 전후까지 전 세계의 경제사조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것이 주목할 만한 경제사상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나 유일 하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케인스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주목할 만한 경제학자로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요셉 슘페터를 빼놓을 수 없다. 하이에크는 경제사상적으로 케인스와는 정확하게 대척되는 인물이다. 하이에크 와 케인스의 차이는 결국은 시장에 대한 신뢰의 차이로 귀결된다. 이것은 현대의 신케인스주의와 신고전주의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학파의 대 표격인 사람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경제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유방임주의 Laissez faire라 해도 무방하다. 하이에크는 학문적 업적보다도 《노예의 길 The Road to selfdlom》 이라는 책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집권한 이후에는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됐으나 정작 하이에크 자신은 스스로 보수주 의자로 인식되는 것을 싫어했다. 더불어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글을 통해 보수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 하이에크가 동시대인으로서 케인스의 이론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소원하지 않았다. 《노예의 길》을 읽은 케인스는 그 책의 모 든 내용에 동의하며 그것도 가슴 깊이 동의한다는 편지를 하이에크에게 보냈다. 하 이에크 역시 훗날 케인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은 케인스이며, 그에 대해서는 언제나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이에크는 시카고대학에서 밀턴 프리드먼 Milton Freedman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들은 케인스의 사상이 전 세계를 석권하던 시절에는 세상의 관심밖에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점차 이들 자유시장주의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작은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플레이션이 창궐하면서부터였다.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억 제하기 위해 시장가격에 대해 규제를 도입했지만,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 를 가져왔다. 그러는 와중에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을 중시하는 케인스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정부에 의한 시장 규제를 혁파하자는 운동도 일어나게 됐다. 이 무렵 하이에크는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고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됐다. 하이 에크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면 밀턴 프리드먼은 경제 이론에서 집요하게 케인스 이론을 비판하고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프리드먼은 한때 중앙은행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훗날 중앙은행은 통화량을 경제 성장률과 같은 정도로 늘리는 소극적인 역할만을 해야 한다는 선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경제의 운영을 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기고 정 부는 경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감세를 주장하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집권을 하게 되면서부터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사조를 낳게 됐다. 이 때문에 케인스주의는 퇴조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케인스주의가 완전히 패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한 자유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시장원 리주의자들은 정부의 완전한 무간섭을 주장했고, 실제로 정부의 재정지출이 줄어 들기는 했으나 중앙은행에 의한 금융정책은 오히려 그 강도를 더해갔기 때문이다. 각국은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재정지출로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책에 대해서는 소극적이 됐으나 적극적인 금리정책으로 경기순환에 대처하게 됐다. 그리하여 중앙 은행 특히 미국의 중앙은행인 FRB의 힘은 갈수록 커지고 FRB 총재인 그린스펀은 재직 당시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게 됐다. 상아탑에서는 1970년대 이후에도 거시경제학은 신케인스주의와 신고전주의의 대립이 지속했다. 이러한 대립은 최근 폴 크루그먼이 기고한 거시경제학의 역할에 대한 반성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고문은 현재의 경제위기를 거시경제학자들이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 같은 것인데 내용은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한 시장원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의 역할을 제한하고 규제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며 시장의 완전한 자유를 존중하는 신고전주의적 흐름이 1980년대 이후의 거시경제학의 대세가 됐다는 점에서 크루그먼의 이 같은 거시경 제학 비판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할 수 있다.
- 호황이 장기간 지속하면 기업들이든 금융기관들이든 미래의 경기에 대해 낙관론 이 만연하게 된다. 이에 따라 투자 수익에 대한 낙관적인 환상이 생기며, 그 결과 투자가 왕성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어떤 투자든 간에 더 많은 사람이 투자에 나서 게 됨으로써 자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 이 수요가 자산가격을 더욱 끌어올리는 작용을 한다. 지속적인 자산가격의 상승은 많은 사람에게 부채에 대한 태도를 변화 시켜 머니게임에 참가하는 수가 점점 더 늘어나게 한다. 이윽고 경제 전체의 시스 템 속에 상당한 양의 부채가 축적되게 된다. 이때가 되면 아주 작은 기폭성을 가진 사건일지라도 경천동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너무 많은 주체가 투자를 하고 자 부채라는 계약상의 의무를 부담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자산가격의 하락이 보 이는 상황에서 부채 상환이라는 의무를 이행하려면 자산을 청산하는 수밖에 없다. 자산가격의 하락이 계속되면 너도나도 앞을 다퉈 일제히 포트폴리오를 청산하는 쪽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 경천동지의 결과를 가져오는 순간을 '민스키모멘트 Minsky Momen' 라 부른다. 이 말은 민스키가 아닌 세계 최대의 채권펀드인 PIMCO의 이코노미스트인 폴 매콜리 가 1998년의 러시아 위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명명한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과정에서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기 위한 민스키모멘트는 서브프라임모기지 대출업 체인 뉴센츄리파이낸셜의 도산이고,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기 위한 민스키모멘트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투자를 경기 변동의 주원인으로 본다. 이에 반해 민스키 는 투자를 일으키려고 조달한 부채의 건전성 그리고 사회 전체의 부채 축적과 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투자 자체가 불안정성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투자를 위해 부채가 얼마나 동원됐는가를 불안정성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헤지금융, 투기금융, 폰지금융: 민스키는 경제 주체가 부채를 얼마나 쌓아 올렸는가에 따라 그 차입 구조를 헤지 금융(Hedge Finance), - 투기금융(speculative Finance), 폰지금융(Ponzi Finance) 의 3단계로 구분한다. 헤지 금융 단계에 있는 채무자는 본업에서 발생한 현금흐름으로 원리금을 지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다. 투기금융의 단계는 본업에서 이자 지급은 가능하지만 원금을 갚으려면 대출을 연장 하거나 다른 곳에서 다시 차입을 일으켜야 하는 상태 다. 폰지금융이란 본업에서 원금은 물론 이자도 지급할 수 없는 상태로 필연적으로 자산의 가격이 올라야만 파산을 면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 민스키에 의하면 금융기관은 전형적인 투기금융의 상태에 있다. 금융기관은 근본적으로 헤지금융의 상태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금융기관은 구조적으로 단기부채인 예금의 비중이 높고 대출은 상대적으로 기간이 길며, 따라서 장단기 미스매치에 의해 필연적으로 롤오버에 의한 재차입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 금융에서 투기금융 그리고 마지막에는 폰지금융의 상태로 위험을 높여가게 된다. 금리가 높아지거나 실물 경제에 타격이 와서 본업에서 들어온 현금흐름으로 이자 나 원금을 지급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헤지금융의 상태에서 투기금융의 상태로 내 몰리게 된다. 붐이 오랜 기간 지속하면 투자에 나서는 주체들이 점점 늘어나고 투자 자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돼 결과적으로는 이자율의 상승을 불러온다. 붐의 지속이 투자를 늘리고 투자 수요가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는 이것이 시스템에 내재한 메커니즘임을 보여준다.
이자가 상승하면 투기금융 상태의 채무자는 이제 폰지금융의 단계로 진입한다. 폰지금융의 상태에서는 원리금을 갚을 수 없는 상태가 지속하면 문제 해결 방법으로 포트폴리오 처분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포트폴리오 청산 때문에 자산가격은 크게 하락한다. 자산가격의 하락은 채무자들을 더욱 곤경에 빠트리고 채무불 이행에 빠지게 한다. 이로써 재무자의 손실유 금융기관의 채무가 되고 이러한 손실 의 누적으로 금융기관 또한 타격을 입게 된다. 금융기관이 살아남으려고 대출심사를 강화하고 신용제공을 거부하기 시작하면 자금의 순환이 막히게 된다. 결국 경제 전체가 신용경색이라는, 일종의 질식상태에 놓이게 된다. 언제나 투기금융이나 폰지금융의 상태에 놓인 채무자들이 자산가격의 붕괴를 가 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산가격의 하락에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이윤을 확보하지 못한 채무자는 자산가격이 조금만 하락해도 파국을 맞이할 수밖 에 없다. 이 안전이윤은 호황이 지속함에 따라 스스로 붕괴하는 경향이 있다. 낙관 이 만연하면 채무자는 기존에 확보한 안전이윤조차 너무 보수적이라고 판단해 스스로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 민스키는 금융 기법의 발전이 버블의 형성과 붕괴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수익을 위해 중개기능을 늘리고자 하는 금융기관의 속성에 따른 것이라 한다. 장기간에 걸쳐 자산가격이 상승하면 사회 전체가 일종의 자기도취에 빠지는 상황이 도래하는데, 그럴 경우 사람들은 가격 하락의 위험에 거 의 무감각해진다. 이때 사람들의 낙관론에 편승하는 위험한 금융상품이 출현하게 되고, 이 상품은 그 자체로 유동성을 늘리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고 버블 형성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민스키의 말을 빌자면 금융기관은 호황기에 접어들어 시장이 경쟁의 격화에 의 해 수익의 기회가 줄어듦을 우려하게 된다. 금융기관들은 수익의 기회를 늘리려고 언제나 금융 혁신으로 신상품을 개발하게 된다. 금융 혁신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현상인데 그것은 금융기관의 수익 기회를 늘리기 위함일 뿐이다. 금융 혁신은 호황 에 이은 안정적인 흐름과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월가를 비롯한 금융시장이 언제나 커다란 베팅에 나서는 시기도 바로 이때다.
- 금융위기의 결과로서 공항이나 부채 디플레이션이 될 것이냐, 아니면 통상의 경기 침체로 끝날 것이냐는 경제 전체의 유동성이나 정부부문의 크기 그리고 중앙은 행의 최후의 내부자'로서의 역할에 달렸다. 즉, 중앙은행에 의한 충분한 유동성 공 급, 정부의 재정지출을 통한 민간 수요의 대체, 중앙은행의 파탄한 금융기관들에 대한 구제 등이 실행된다면 공황은 피할 수 있다. 민스키가 케인스주의자로 불리는 이유는 이처럼 중앙은행과 정부의 적극적인 역 할을 주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스키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자본주의의 제 도적 약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금융의 공기업화를 주장했다. 이점이 그를 통화주의자로 가득한 당시의 경제학계에서 더더욱 비주류 에 자리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민스키의 팽창과 수축 사이클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명하면서도 강력하다. 부 채로 이루어진 투자는 불안정하고 그와 같은 투자를 지탱하는 금융 시스템은 불안 정하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민스키의 독특한 점은 금융에 의한 시스템적 불안정성을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의 내재적 특성으로 자리 매김한 데 있다.
- 민스키는 새로운 금융 기법의 출현을 자본주의 경제에서 호황기에 나타나는 전 형적인 특징으로 묘사했다. 경제가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장기간 호황이 지속하면 서도 안정적인 흐름을 보일 때 금융기관들은 수익을 확대하기 위해 레버리지를 늘 린다. 또한, 새로운 금융 기법을 창안해 내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탄생한 새로운 금융상품은 종국에는 버블의 형성에 이바지하고 금융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킨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경제는 비록 중앙은행에 의해 안정적인 경제흐름을 달성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팽창수축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불안정한 움직 임을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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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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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파산하는 날

경제 2020. 3. 27. 07:29

- 서구의 실질적인 우위가 침식되고 해가 갈수록 그 침식의 속도가 빨라지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서구(특히 미국)는 오늘날 경쟁상대로 떠오른 신흥국가들을 정치적·군사적 선택에서 배제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따돌려왔다. 이들 국가는 여전히 서구국가와 교역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선 이를 갈면서 불신감을 키워왔다. 그 결과는 자연히 든든한 동맹관계보다는 분열을 촉진했다. 이윤동기가 없다면 신흥국들이 서구와 교역할 필요가 없거나, 아예 교역하려 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둘째 이유는 토머스 프리드먼이 설명했듯이 세계가 평평해졌기 때문. 운송과 통신, 제조비용이 낮아지면서 기술의 이전이 한층 쉬워졌 다. 바로 서구의 기술적 · 경제적 우위가 이를 가능케 했고, 그 결과 자 연스럽게 세계가 최선의 기술과 지배구조의 표준을 채택하게 됐다. 그 러나 과거 한때 서구가 독점적으로 가졌던 이러한 이점은 시간이 가면 서 전 세계로 흩어졌고,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셋째 원인이야말로 이 책 『미국이 파산하는 날』이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 과거 50년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됐고 가장 유리한 위 치에 있었던 나라들이 일련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경제정책을 통해 한때 그토록 견고했던 지위를 송두리째 잃게 되었다는 점이다.
- 비록 1930년대의 경제위기를 끝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은 미국 자본주의를 재건하고 정부의 '보이는 손 에 새롭고 역동적인 역할을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자유기업을 지지했지만 '뉴딜정책' 은 정부로 하여금 휘청대는 경제를 종합적으로 조율 · 감독 지도하게 했다. 민간기업을 추종하기보다는 이끌어나가며, 대규모 공공사업을 집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미국으로 하여금 서유럽을 붕괴시킨 전쟁에서 활 약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실제로 가능하게 한 밑바탕이 됐다. 따라서 미국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제2 차 세계대전을 통해 자신의 산업·군사 분야의 역량을 최상의 경제적 이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2 차 세계대전은 미국에 단순히 정치 · 군사적으로 필요했다기보다는 만 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맞이한 경제적 기회였다. 예를 들어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무기 대여법(Lend-Lease Act)에 서명했는데, 이 법은 미국의 동맹국에 필요한 모든 군사 장비를 판매 · 교환 · 대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이 프로그램을 통해 50억 달러(2007년 가격으로 7,000억 달러에 해당)어치의 군수물자(전함, 기관총, 어뢰정, 잠수함부터 군화에 이르기까지)가 대서양을 건너 피폐한 유럽의 동맹국으로 수송됐다. 유럽은 무기대여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 막대한 부채상환부담을 지게 됐다. 영국은 50년이 지난 2006년 마지막 날 83억8,400만 달러의 무기대여 부채를 최종 상환했다. 미국은 그 결과 전쟁이 끝난 후 1950년대에 경제적 정점에 오르게 된다. 무기대여 덕에(물 론 마셜플랜은 전혀 다른 구상이었다) 미국은 최고의 제조업 국가가 됐다. 당시 미국이 취한 행동은 정치적 필요성과 경제적 실용성이 결합된 것이었다. 해외로 선적될 재화의 제조는 단지 동맹국을 돕기 위한 정치 적 행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미국경제를 부양하는 데 큰힘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위대한 개입 의 결과는 거의 모든 수준에서 압 도적이었다. 미국산 제품에 대한 세계적인 수요 덕에 완만하게 성장하던 미국 경제는 세계의 제조업 공장으로 변모했다. 1944년 말 미국의 실업률은 민간 노동력의 단 12%로 줄어들었다. 미국 경제사상 최저기록인 이 수치는 그 후에도 결코 깨진 적이 없 었다. 대공황이 최악에 이른 시점에는 당시 미국 노동력의 4분의 1에 해 당하는 1,500만 명이 실직 상태였다.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은 1939년 880억 달러에서 1944년 1,350억 달러로 5년 동안 연평균 8.8퍼센트씩 증가했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국가의 모든 자원이 제조업에 총 동원됐다는 것이다. 특히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됐다. 전쟁이 끝 IS 났을 때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는 파산상태였다. 일본은 모든 것이 자원전쟁 결핍돼 있었고 유럽은 재정적으로 파산했으며, 영국은 국고에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미국만이 의문의 여지없는 유일한 경제적 강자로 남았다.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유일하 게 잃은 것은 인명 손실뿐이었다.
- 매디슨의 통계는 신세계와 대비한 구세계 유럽으로부터 중국과 인도, 그리고 그 후 미국에 이르기까지 성장과 인구, 인프라스트럭처(사회기반 시설)의 규모에 대한 추정치를 담고 있다. 매디슨의 통계자료가 가지는 독특한 장점은 16세기 이후 세계의 각 경제권이 개별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각 경제권의 상호관계가 시간의 경과 에 따라 어떻게 확장되거나 축소됐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가장 흥미로운 수치 가운데 하나는 1820년 세계 GDP에서 각 경제권 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그 당시 중국이 차지한 GDP 비중은 32.4퍼센트 로 그 어떤 지역보다도 컸음은 물론 유럽(26.6퍼센트)과 미국(1.8퍼센트), 일본 (3퍼센트)을 합친 것보다도 컸다. 이런 중국의 우위는 중국산 자기와 비단, 목면, 그리고 차에 대한 일견 탐욕스러워 보일 정도로 왕성한 서 구의 수요에 의해 유지되었다. 특히 미국의 중국산 차 수입 규모는 1822 년 전체 수입액의 36퍼센트에서 1800년에는 전체 수입액의 무려 65퍼센트까지 늘어났다. 1800년대 초 인도경제 역시 놀라울 정도의 호조를 보였다. 인도경제가 세계 GDP에서 점한 비중은 비록 중국이나 유럽(약 23퍼센트)과 맞먹었던 1700년대보다는 줄어들었지만, 1820년까지만 해도 16퍼센트로 여 전히 세계경제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인도경제의 호조는 차와 면화의 꾸준한 수출과 급속하게 확대되던 아편 무역에 힘 입은 바 크다. 그리고 인도에는 1870년부터 1913년 사이 약 5만km(3만 1,250마일)의 철도가 신설됐는데, 이 길이는 뉴욕에서 캘리포니아 해안까지 거리의 거의 10배에 이른다. 1820년부터 1890년까지 70년 동안 세계 GDP에서 점하는 중국의 비중은 거의 40퍼센트나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의 비중은 13.8퍼센트로 거의 14배나 늘었다. 1890년 무렵에는 지난 100년간 이어진 서구 의 경제적 지배라는 구도가 확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한다. 산업혁명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아 일어서기 시작한 유럽(주로 영국)은 세계 GDP 비 중이 40퍼센트에 이를 만큼 선도적 위치로 뛰어오른다. 이 시기에 중국 과 미국은 똑같이 세계 GDP의 13퍼센트씩을 차지했는데, 물론 둘 사이의 차이는 중국이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었던 데 반해 미국은 뚜렷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1950년이 되자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른바 '전후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활황기에 접어들었고, 두 지역을 합친 GDP가 세계 GDP의 무 려 60퍼센트(미국의 몫이 30퍼센트에 근접)를 차지하면서 세계경제를 이끄 는 주도적 위치에 우뚝 섰다. 이 무렵 하락세를 막을 길이 없었던 중국 은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2퍼센트로 거의 바닥까지 추락했 고, 그 후 25년간 GDP 비중이 5퍼센트 언저리에서 허우적거리는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도 역시 GDP 비중이 3.8퍼센트로 보잘것없 는 수준에 머물렀다. 오로지 핵폭탄을 맞은 일본만이 GDP 비중 3.4퍼 센트로 인도보다 뒤처졌을 뿐이다. 1949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이 패퇴한 뒤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의회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다. 그는 중국은 근대적인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며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이전의 정권들이 겪었던 것만큼이나 많은 통치의 어려움을 겪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런 세계관은 미국과 유럽이 세계경제를 이끄는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1978 년까지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도 역시 파국적인 경제 파탄을 겪은 끝에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사상 최저 수준 인 3.4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러나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유럽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꾸준하게 27.9퍼센트를 유지한 반면, 미국 의 비중은 기술혁신을 통해 제조업 호황을 이룬 일본의 재기에 밀려 7 퍼센트포인트나 떨어졌다. 미국에서는 소비자 시대가 막 시작됐고, 일 본의 기술혁신은 이 같은 수요 증가에 부응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세계경제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서구의 시대였다. 중국과 인도, 그리고 여타 국가들은 아직 세계경제 무대에 등장하기에는 일렀다.
- 기업의 소유주(주식청구권자) 입장에선 위험을 더 많이 무릅쓸수록 잠 재적인 기대이익은 더 커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산가치의 변동성 이나 부채 수준으로 측정되는 위험과 기대수익 사이에는 직접적인 정 (正)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주식청구권자는 더 많은 변동 성과 더 많은 부채 수준을 선호하기 마련이고, 결국 더 큰 위험을 무릅 쓰기 쉽다. 대개 기업세계에서는 주식청구권 소유자(주주)가 일상적인 경영을 책임지고 기업의 장래에 대한 핵심적인 결정을 하는 것이 표준 적인 관행이다. 물론 주식청구권자와 부채청구권자는 다 같이 기업가치 가 더 높아지기를 바란다. 부연하자면, 어떤 회사의 주어진 기대 기업가치에 대해 주식청구권자는 부채청구권자보다 기대 기업가치의 변동성 또는 변화폭이 커지기를 더 선호한다. 지금부터 이 점을 자세히 살펴본다.
- 주식보유자와 부채보유자는 다 같이 기업가치가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하고, 이 점에서는 상호 협력관계에 있다. 그러나 주식청구권자는 기업가치의 변동성이 커지는 것(더 모험적인 선택)을 받아들일 용의 가 훨씬 더 크다. 특정한 자산 가치에 대한 기대수익이 주어졌을 때 주식청구권자는 기업가치의 변동성이 커질 경우에 기댓값이 올라간다. 그 리고 앞서 보여준 것처럼 부채청구권자의 기댓값은 기대 기업가치에서 기대 주식청구권을 뺀 것이다. 물론 앞에서의 예와 같이 주식청구권자는 선택권(옵션)을 매입하는 입장(포지션)인 반면 부채청구권자는 옵션을 매도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변동성에 대한 부채청구권자의 욕구는 주식청구권자와 정반대다.
- 변동성과 위험, 부채수준과 관련해 분명한 것은 두 청구권자(주식보유자와 부채보유자)는 입장이 확연히 다르며, 서로에 대해 경쟁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식청구권자가 변동성을 환영하고 부채의 증가를 선호함으로써 스스로 위험 추구형 (Riskdoving)이 되는 반면, 상대방인 부채청구권자는 정반대의 입장이 된다. 즉 부채청구권자는 변동성을 극도로 싫어하고, 부채가 쌓이는 것을 꺼리는 위험 회 피형 (Risk-averse) 인간이 되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에서 부채청구권자가 주식청구권자의 무분별한 야심을 제어하는 브레이크나 자동 경고장치 역할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부채청구권자가 그런 역할을 하는 동기는 주식청구권자의 과도한 욕심을 엄격하게 감시함으로써 자신의 돈을 되돌려 받 겠다는 것이다. 야구 용어를 빌리자면, 부채청구권자는 홈런보다는 단 타를 치는 것을 더 선호하는 셈이다. 따라서 바니 프랭크 같은 정부관리가 경영진은 주주에 대해 회사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주의를 다할 의무를 진다' 고 말하는 경우, 위험 추 구야말로 정확하게 주식보유자가 경영진에게 기대하는 일이라는 본질적인 요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위험 추구는 경영진이 그 대가로 보수를 받는 이유이자, 더 많은 위험을 무릅쓰는 경영진에게 성과급이 주어지는 이유다. 위험은 경영진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 1930년대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 내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하 주택소유정책을 공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을 때, 미국 정부는 과연 무 엇을 위해 그런 정책을 폈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모든 사람에게 내 집을 마련해 주자는 그럴듯한 명분에 현혹된 정책입안자들은 뜻하지 않 게 지난 50년간 계속된 빚 권하는 문화' 를 시작했고, 경제적 몰락의 길로 확실하게 들어선 세대를 양산해냈다. 미국의 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의 자가소유 비율은 1930년 47.8퍼센트에서 1960년 61.9퍼센트, 2000년에 66.2퍼센트로 높아져 왔다. 서구 각국의 정부는 우리 안에 있는 거주목적의 주택보유자를 완전히 무시하는 대신, 투자목적의 주택소 유자만을 부추김으로써 모르는 사이 부채의존형 (레버리지) 문화가 만연하도록 조장해 왔다. 그로 인해 이제는 서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이 감당할 능력을 훨씬 넘어선 방만한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구 국가의 정부와 가계는 모두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만큼 불어난 빚더미 에 파묻혔다. 유일한 탈출구는 인플레를 통해 부채의 부담을 덜어내는 것밖에는 없어 보인다. 서구 정부들은 보조금 지원을 통해 광범위하게 주택소유를 장려하는 전략을 추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서구세계에 득 이 되기보다는 해악을 끼쳤고, 사실상 서구경제 전체의 몰락에 기여한 꼴이 됐다. 이러한 전략은 다음 두 가지 형태로 주도면밀하게 실행됐다.
(1)담보 대출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담보대출 이자에 대해 세금을 감면해줌으로써 개인들이 차입하도록 유인을 제공했다.
(2)담보대출 금융기관에 보증을 제공함으로써 이들 금융기관이 담보대출을 취급할 동기를 부여했다. 두 번째의 경우, 여기서 문제는 미국의 담보대출 취급기관인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 맥(Freddie Mac)이 묵시적으로 정부의 보증을 받는 한편 동시에 영리목적의 사기업이라는 점이다.
- 경제가 취약한 상태에 있을 때 부채를 늘리는 것이 단기적으로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런 정책은 위기 이후 이행기에 쓰이는 전통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부채의존도가 작은 사회가 바람직스럽 기는 하지만, 정부 개입이 없는 위기상황에서처럼 부채 상환(디레버리 징)이 너무 빠르게 일어날 경우 경제가 침체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 때 문에 각국 정부는 이행과정이 점진적이고 질서 있게 이루어지도록 부채 를 통한 자금조달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이번 위기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은 민간 차입이 공공 차입으로 대체된 것뿐이다. 이로 인해 공적자금 지원을 통한 부채 축소 과정이 결국은 채권보유자와 주식보유자들의 배만 채워주는 불행한 결과를 빚고 말았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선진국에서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정책대응은 이자율을 낮추거나(개인들이 더 많은 빚을 통해 파산을 모면할 수 있도록 은행이 개인에 대한 대출 수준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기대 속에), 정부 스스로가 더 많은 부채를 떠안는 것 등 두 가지 정책의 조합으로 거의 일관해 왔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소비를 대폭 줄이며, 자신의 재력 범위 내에서 생활할 것을 장려하는 등 근본적이고, 보다 지속가능하며, 경제체질을 강 화시키는 다른 정책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입에 맞지 않았고, 그 후에도 내내 그랬다. 2009년 6월 몇몇 영국 은행이 대담하게도 담보비율이 무 려 125퍼센트에 이르는 대출상품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그동안 위기에서 얼마나 배운 게 없었으며, 서구 사회가 빚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에 얼마나 홀려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상기시켜줬다.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은 영국의 은행들이 생애 최초 주택구입자들에게 생활비는 신용카드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권했다는 것이다.
- 은행의 소유구조는 부채에 대한 지급의무를 소유자가 지는 동업형태의 구조에서, 일이 잘못되면 정부가 부채와 예금의 지급을 보증하는 주식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상업은행으로 바뀌어왔다. 이에 따라 은행 들은 잘 알려지지 않고 구조가 매우 복잡한 금융수단을 통해 위험을 추구하는 성향이 꾸준히 높아졌다. 국제결제은행(BIS) 자료에 따르면 2000년대 초 파생상품 계약의 잔액은 직전 10년간보다 5배나 불어난 약 100조 달러에 달했다. 무엇보다 잘 운영되는 동업회사라면 자신의 자금을 태생적으로 위험 성이 높고 구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CDO나 MBO, ABS 등 알파벳 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파생상품에 남김없이 투자하는 위험을 무릅썼겠는가.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실을 부채에 대한 보증으로 보전받는 은행이라면 위험 추구의 향연에 빠지기 십상이었을 것이고 실 제로 그랬다. 은행의 경영진은 부채에 대해 정부의 보증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위험을 회피한 가운데 주주들의 수익을 늘리기 위해 매진할 수 있었다. 은행의 이런 행태가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하게 된 원인이다.
- 주택가격의 급속한 상승을 촉진하는 정부 보증제도 하에서, 유일한 승자는 주택 규모를 줄이거나 (수준을 낮추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더 작은(싼) 집을 살 수 있 는 사람들뿐이다.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손해를 본다. 이제 대학 기숙 사를 떠나 부동산 사다리에 첫발을 내딛기 위해(생애 최초로 작은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 열심히 저축을 하고, 나중에 아내와 자녀들이 살 수 있을 만큼 더 크고 더 비싼 집으로 옮기려는 한 젊은이를 생각해 보자. 그는 각 단계마다 돈을 더 지불해야 한다. 물론 처음 구입한 작은 아파트 값 이 구입 당시(T1이라고 하자) 보다 큰 집을 장만하기 위해 파는 시점(T2라고 하자)에 더 오를 수 있다. 그러나 T2에는 침실 네 개짜리 아파트 값 역시 올랐을 터이므로 그는 작은 아파트 매각대금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해 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이러한 에스컬레이터 효과(주택구입비용 상승 효과)는 자녀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 계속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택가 격이 더 오르게 되면 젊은 세대로부터 나이 든 세대로 부가 이전되는 효 과를 낳는다. 주택소유자는 은퇴 시점에 이르러 큰 집을 처분하고 작고 싼 집으로 옮기면서 현금차액을 챙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주택시장에서 승자가 될 수 있다. 주택시장의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흡사 은퇴하거나 죽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주택시장 붕괴와 금융위기를 예고 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실러가 주택에서 얻는 실질수익은 장기적으로 제로(0)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주택가격이 본질 적으로 인구통계학적 분포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 서구 세계 전역의 연령대별 인구분포는 젊은 사람보다 노년층의 인구가 많아지는 쪽으로 꾸준히 이동하고 있다. 따라서 더 많은 사람이 은퇴 시점에 도달하는 가운데 갈수록 집을 사려는 사람이 적어지는 시기가 조만간 닥칠 수 있다. 팔려고 내놓은 집은 더욱 많아지고 살 사람은 더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택가격의 폭락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 아닐 수 없다.
-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고 싶은 곳이 아니라 여러분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
- 부채에 대한 수요가 폭증한 사이 부채의 공급 또한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크게 늘었다. 첫째는 누군가가 주로 중국이 게걸스러운 부채 수요에 대해 기꺼이 자금을 대주겠다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전략은 처음부터 서구와의 관계에서 중상주의적 접근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즉 이윤과 가격 책정을 신성시하는 이윤 최대화보다는 가격에 별로 상관하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이 파는 외형 극대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미국의 무기대여 프로그램이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 시장에 돈을 빌려줌으로써 미국인들이 그 돈으로 중국 상품을 사도록 할 수 있다면, 기 꺼이 손해를 볼 용의가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이번에는 출연자가 바뀌었을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은 유럽에 총과 탄약을 팔고, 유럽이 필요로 한 생 필품을 제공했다. 중국도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세계가 원하는 모든 것 을 전 세계에 내다 판다. 2차 대전 이후의 미국과 오늘날의 중국의 유사 성은 단지 두 나라가 모두 세계 최대의 상품 생산 및 판매국이 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부를 이루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들의 유사성은 그보다는 훨씬 깊이 들어간다. 오늘날의 중국과 당시의 미국은 모두 자신들의 생산물을 사주는 나라를 채무국으로 만들었다. 중국은 아주 능란하게 전 세계에 역설적이지만 특히 미국에 소비재를 공급하는 한편 돈을 적극적으로 빌려주고 그런 의존 상태가 유지되도록 한다.
- 시간이 가면서 미국의 가계와 기업, 개인들의 재무구조(특히 재무제표상의 자산 구성)는 지속적으로 현금흐름을 산출하는 자산이 많은 포지티브 캐리(Positive Carry)에서 네거티브 캐리 (Negative Carry)로 바뀌었다. 여기서 네거티브 캐리는 서비스나 주택처럼 현금흐름을 산출하지 않거나 무 형의 편의성만을 낳는 자산이 많은 상태를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사회 전반에서 대차대조표상의 자산구성이 포지티브 캐리에서 네거티브 캐리로 조직적으로 변경되었다. 포지 티브 캐리인 대차대조표에서는 자산에 의해 창출된 현금흐름이 부채에 대한 이자지급에 필요한 금액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이고, 누적으로 발생하는 이익이 시간이 가면서 지속적으로 대차대조표상의 자기자본 으로 축적된다. 반면에 네거티브 캐리의 대차대조표에서는 부채에 대한 이자지급을 위해 필요한 현금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자산을 매각해서 생 긴 (최초 취득가격보다 매각가격이 높을 경우에 한해) 자본이득이 있어야 하고, 이 수익이 부채의 원리금 상환에 쓰인다. 물론 매각할 수 있는 자산의 가격이 떨어져서 최초의 취득가격보다 낮아지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불가피하게 버블이 생길 수밖에 없다면,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발생한 생산적인 버블이 그나마 최선이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계 속된 IT 호황이 좋은 예다. 버블이 터진 후에 주식가치는 증발해 버렸지만 금융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신용 수축을 부르는 악성 디레버리징(자산 매각을 통한 부채감축)은 일어나지 않았다. 손실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더욱이 사태가 진정됐을 때에는 생산적인 자산이 마침내 적정한 제 가 치를 회복했고, 다시 정상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생산적인 용도로 쓰이기 시작했다. 최악의 버블은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해 발생하는 자산 버블이다. 1986년부터 90년까지 일어난 일본의 부동산 버블이 바로 그러한 예다. 닛케이 225지수(일본의 주가지수)는 1989년 12월 38,915로 정점에 도달했 다. 버블이 꺼지자 금융시스템은 작동을 멈췄고, 그 여파로 아무런 잘못 이 없는 우량 기업들이 자금을 구하지 못해 무너졌다. 토지가격과 주가 는 대혼란 속에 가치의 60퍼센트가 날아갔고, 은행의 자본 확충을 위해 일본 GDP의 6.5퍼센트에 해당하는 2,500억 달러 이상이 들었다.
- 서구에서 자본이 잘못 배분되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노동 역시 배분이 왜곡돼 왔고, 그것이 서구에 해를 끼치는 원인이 됐다. 서구 선진국 전반에 걸쳐 성장의 핵심 요소의 하나인 노동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잘못 배분되고 있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금 계획이 급속히 도입됨에 따라 뜻하지 않게 노동계약의 가격이 광범위하게 왜곡됐고, 그로 인해 노동비용이 실제보다 싼 것처럼 보이게 됐다. 숨겨진 연금비용을 미래로 이연시킨 것(본질적으로는 임금 지급을 미룬 것)이 오늘날 서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둘째, 생산적인 산업보다 서비스 부문에 더 유리한 방향으로 사회적 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운동선수나 CEO, 헤지펀드 매니저 등 사회적 편익이 비교적 협소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연봉과 보상이 돌아간 반면, 의사나 간호사, 교사와 같이 사회적 이득이 넓게 퍼지는 부문에는 덜 돌아갔다. 이처럼 노동 가격의 신호가 왜곡되면서 인력의 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셋째, 노동의 국제적인 이동을 규제하는 법령이 갈수록 더 엄격해지 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취업 전망이 밝아 인재이동의 최고 목적지로 알려졌지만, 오늘날 미국의 정책은 미국이 글로벌 인재집단을 자기 나라로 끌어들이기가 훨씬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럴수록 미국에 손해가 되는데도 말이다.
- 서구에서 공학은 이제 구식이 돼 버렸다. 1950년 대와 196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 가장 뛰어나고 촉망받는 인재들은 대 부분 물건을 만들어내는 거칠고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발명하는 현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상위 10퍼센트의 인재들이 모두 서비스 산업, 특히 선망되는 금융업과 컨설팅업에 몰려들었다. 과거에 대학 졸업자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석유회사의 엔지니어나 국무부의 외교관처럼 무언가 실질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었다. 그러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석유회사나 IBM 같은 기술기 업에서 관리자가 되었다. 대졸자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투자은행가나 경영 컨설턴트처럼 떠드는 사람'이 되더니, 급기야 헤지펀드나 사모투자펀드의 펀드 매니저 같은 투기꾼이 됐다.
- 스티븐 레빗과 스티븐 더브너는 2005년에 발간한 베스트셀러 『괴짜 경제학』에서 시카고 남부지역 마약 판매상들의 수입 구조를 분석했다. 이곳에서는 마약조직의 최상위 계급이 수백만 달러를 버는 반면, 말단 조직원들은 주당 몇 백 달러밖에 챙기지 못한다. 말단 조직원들은 언젠 가 운이 좋으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란 믿음 속에 적은 돈을 받고도 기꺼이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무지개의 끝에 걸린 잠재적 거금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에게 그것은 결코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처럼 환상에 불과하다. 수백 명의 말단 조직원들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수입 구조는 다음 과 같다. 큰돈을 벌 수 있을 작은 확률에 잠재적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금액을 곱한 것이 큰돈을 벌지 못할 큰 가능성에 실패 즉, 체포되거나 부상당하거나, 죽는 경우의 비용을 곱한 것보다 크다는 계산이다. 그러 나 이것은 헛된 꿈이 불러온 로또 효과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이것이 마약세계의 보수체계가 작동하는 원리라는 것을 이해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런 원리가 합법적인 영역에도 똑같이 적용되 고 있다는 것은 잘 모른다. 마약세계의 말단 조직원들처럼 서구의 수많 은 청소년들이, 때로는 부모들의 진지한 격려까지 받아가며 최고의 농 구선수나 축구선수, 또는 테니스선수가 되기를 열망한다. 재능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말이다. 결국 극소수만이 빅 리그까지 갈 수 있을 뿐인데도 그들이 한사코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 중 대부분이 결코 거 기까지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데이비드 베컴이나 마이클 조던 같은 슈 퍼스타들의 이면에는 슈퍼스타가 되기를 열망했으나 좌절한 수많은 지 망생들이 가려져 있다. 슈퍼스타가 되려는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는 바 람에 유용한 다른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분명히 사회에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초래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채택할 만한 좋은 정책이 있을 법 하다. 스포츠 스타 등 고소득자에게 '특별' 세금을 물리고, 여기서 거둬 들인 돈을 빅리그까지 가지 못한 수많은 탈락자들을 지원하는 보조금 의 재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이 '고소득자 특별세' 는 기업에 부과되는 환경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세금의 상당 부분이 최상위 스 포츠 스타의 연봉으로부터 공동체 기금으로 이전됨에 따라, 스포츠 스 타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이런 분야에 몰리는 사람들의 수도 줄 어들게 될 것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로널드 H. 코즈의 정리를 적용한다. 면, 사회적 외부효과의 비용을 행위자에게 부담시키고, 외부효과의 비용이 거래되도록 허용해야 마땅하다. 다른 대안으론 이러한 고소득자를 만들어 내는 국제축구연맹(FIFA)이나 미 대학체육협회(NCAA) 같은 기구에 특별세를 물리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경제활동은 단순히 잘 산다는 것뿐만 아니라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경제력은 아마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일 것이다. 주요 국가 사이에서 군 사적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세상에서 경제력은 국가 간의 우위를 결정하는 데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미국 인들은 현재의 도전에 대해 우려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새뮤얼 헌팅턴이 왜 국제적 패권이 문제가 되는가』라는 책에서 일본의 도전에 대해 언급한 말이다. 1989년 일본 기업이 뉴욕 록펠러그룹 빌 딩을 8억 4,600만 달러에 매입한 사건은 당시 일본의 상승세를 상징했다. 헌팅턴이 10년만 늦게 통찰력을 발휘해 책을 썼다면 미국이 아마 아주 다른 경쟁자와 맞서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 중국은 부채에 대한 서구의 끝없는 탐식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자신이 생산한 제품을 살 돈을 대출의 형태로 서구에 대주었다. 중국은 서구를 부채의 성채에 가두고, 도저히 빠져나오기 어려운 의존성을 고착시켰다. 미국은 중국제품에 대해 대출이라는 형태의 입장료를 매기는 것을 두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근시안적인 생각 임이 드러났다. 결국 흥청망청 소비에 사로잡혀 빚더미 속에 허우적거 리는 것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국내에서 돈을 빌리고, 그 돈을 중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의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제품의 생산에 사용했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중국이 문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마치 낙타를 천막 안에 들여놓고 자신은 쫓겨났다는 아랍 상인에 관한 오래된 우화처럼, 미국은 어느덧 문 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그 사이에도 중국인들은 계속 밀려들어오고 있다.
- 미국 정부가 인프라스트럭처를 깔아줌으로써 기업가 정신과 경제성장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 것은 멀리 카우보이 시절까지 거슬러 올 라간다. 펠릭스 로하틴은 『대담한 노력 정부는 어떻게 미국을 건설했으며, 왜 지금 다시 재건에 나서야 하는가』라는 책에서 인프라스트럭처를 제공하는 데 있어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선명하고 설득력 있게 피력한다. 그는 당시에 정부의 정책이 어떻게 장차 미국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될 공공사업의 길을 열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가 언급한 주요 공공사업은 대륙횡단철도 건설과 이리 운 하의 건설, 재건금융법 제정, 테네시 계곡 개발청 설립, 그리고 미국 현 대화의 초석을 놓은 주간 고속도로 건설 등이 포함된다. 또 19세기에 인 프라스트럭처를 까는 인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 육군이 배치됐다는 사례도 소개한다. 로하틴이 지적한 대로 미국의 도로와 교량, 학교와 병원, 공항과 철 도, 항구와 댐, 송수관과 항공관제 시스템 등 전체 인프라스트럭처가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많은 사람이 받아들 이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제기되어야 할 질문은 이런 상황을 이른 시일 내에 바로잡기 위한 자금을 어디서 조달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인프라스트럭처 건설에 쓰이는 자금, 특히 민간 자금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사 업에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많은 뉴요커들에게 맨해튼이나 뉴욕시의 다른 5개 구가 마지막으로 새로운 다리나 운하를 건설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반면에 뉴욕 메츠와 뉴욕 자이언츠, 뉴욕 양키스 등 프로 운동경기 구단들은 모두 최근에 전용 스타디움을 지었다. 노후화되고 약화되는 인프라스트럭처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미국만은 아니다. 『블레어 이후의 영국-자유당의 과제에 따르면, 영국 기업들은 영국의 운송 인프라스트럭처의 상태가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 는 주요 걸림돌일 뿐만 아니라 기업의 투자를 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산업협회(CBI)를 위한 조사에서 응답한 기업의 51퍼 센트는 사업하기 좋은 곳이라는 영국의 명성이 수송 문제 때문에 심각 하게 손상되고 있다고 말했다
- 서구는 정치적 자유, 특히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말로 표현된 정치모델과 합리적이고 완전하며 비교적 확실한 세계에 기초한 경제 체제를 신봉하고 또 그에 의존해 왔다. 이 세계에서는 개인적 자유 가 사람들을 이기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게 하고, 이러한 이기적 행동이 거꾸로 자율적 규제를 낳아 시장을 견제한다. 2008년까지 이러한 체제 가 최선인 것처럼 보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1992년에 출간한 논쟁적인 책 『역사의 종언은 이러한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즉 서구의 모델은 충분히 검증되었으며 더 나은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 이외의 여타 국가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약 간 냉소적이지만 보다 현실적인 견해를 취했다. 그들의 정치 · 경제 체제는 국가에 대한 완강한 믿음과 개인의 행동과 동기에 대한 의심스러 운 우려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방치된 개인들의 인간적인 탐욕은 항상 다수 또는 사회 전체의 희생을 대가로 소수만 혜택을 보는 균형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서구의 소득 불균형 과 함께 자신들 내부의 정실인사와 기득권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자신 들의 태도 역시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낀다. 그들은 이 세계의 불합리성 과 불완전성, 불확실성을 목격한다. 그러면서 위기 상황에서 경제를 파 탄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오직 정부뿐이며, 그것도 오직 강한 정부만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더욱 굳혔다. 2008년 위기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국유화와 정부개입 강화, 엄격한 규제의 요청이 이들의 견해를 더욱 강화시켰을지 모른다. 개인주의에 그토록 집착해 온 서구가 인간 본성의 위험성과 변덕스러 움을 무시한 반면, 거대한 단일사회로만 알아온 중국이 오히려 그러한 불안 요소들을 감지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물론 최종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우리는 중국이 서구 의 생활수준을 성취했을 때 어떻게 할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신흥국에는 발생 가능성은 낮지만 일단 벌어지면 충격이 매우 큰 위험, 즉 팻 테일(Fat Tail)의 위험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그들의 정치제도는 매 우 불안정하고, 통치 방식은 아직 충분히 오랜 기간에 걸쳐 검증되지 않 았기 때문이다. 서구식 제도와 경제체제, 정치 기구와 보상체계에는 분 명히 내재적인 문제가 많다. 그 문제의 대부분은 대리인 위험과 불충분한 정보에 의존한 의사결정이라는 문제로 귀착된다. 그러나 신흥국에서는 이런 것들이 반드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 미국의 민간투자는 민간소비와 마찬가지로 1997년부터 2008년 사이 1조3,890억 달러에서 2조1,360억 달러로 증가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겉으로 드러난 이러한 수치들은 실상을 가리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실은 투자의 상당 부분이 주택건설 부문에 몰림으로써 주택시장 버블에 기여했다. 사실 소비가 민간투자를 희생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투자의 질이 나빴다는 것이다. 투자의 너무 많은 부분이 비생산적인 부문을 대상으로 삼았다. 현금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사업에 투자가 집중된 것은 미국의 추락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도로나 철도, 공장, 기계처럼 현금을 창출하는 자산에 대한 투자는 경제 전체에 부가가치를 더한다. 반면에 그림이나 휴가, 주택 같은 편의성 자산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산이야말로 경제성장의 모든 것이다. 논평가들과 정책당국자들은 GDP의 일부로서의 소비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래서는 사태의 본질을 볼 수 없다. 단지 미국 소비자들이 물건을 너무 많이 산다는 사실에만 주목해서는 진정한 문제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GDP의 일부로서 소비의 증가는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소비와 함께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한 사람의 소비는 다른 사람의 소득이기 때문이다. 이를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미국 정부가 의료보장 시스템을 만드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그러면 현재의 의료비 지출은 소비의 일부를 구성 하고 있으므로, 정부가 이를 대신 지출한다면 개인의 소비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GDP에서 차지하는 정부의 몫 즉, 정부 지출은 달 라진다. 의료보장 비용이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보다 많으면 정부지출 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재정적자도 늘어난다. 거꾸로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공공의료 서비스가 의료보장 명목으로 물리는 세금보다 싸다면 정부 지출은 줄어들 것이다. 물론 정부가 민간부문과 같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회계적 관점에서 차이는 없다. 같은 방식으로 미국 정부가 국방 업무를 모두 중단하고, 미국의 육해 공군 병력이 즉각 민간보안회사에 고용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상 상해 보자. 정부의 급여 지급이 급작스럽게 중단되면 정부지출이 크게 줄어들고 민간 소비가 크게 증가할 것이다. 어느 경우나 GDP의 일부로 서 소비가 갖는 의미는 거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GDP 구성 요 소 간의 상대적 비중의 변화일 뿐이다. 사실 소비가 늘어나고 투자가 줄어든다면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상황 이다. 2000년대 영국 경제가 바로 그와 같은 사례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는 소비가 상당한 기간에 걸쳐 늘어난 반면, 투자는 대체로 정체되거나 때때로 늘어나기도 했다. 미국이 직면한 문제는 GDP의 일부로서 소비의 증가가 투자나 정부 지출의 비중 변화로 상쇄되지 않고 무역수지 적자의 증가로 상쇄됐다는 점이다. 소비증가에 따른 소득 증가의 대부분이 해외로 새나가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국의 소비문제 그 자체만을 해결하는 것은 문제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고, 정작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할 더 큰 과제는 무역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이다.
- 최근 몇 년간 미국인들은 매년 자신들이 번 것보다 8,000억 달러를 더 썼다. 가계부채는 1974년 6,800억 달러에서 2008년에는 14조 달러(미국 경제 전체의 규모와 같다)로 늘었다. 미국의 가계부채가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에 130퍼센트로 그 이전 10년간의 100퍼센트에 비해 대 폭 증가했고, 1952년의 36퍼센트에 비해서는 거의 네 배로 늘었다. 평 균적인 미국 가계는 13장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으며 이 가운데 40퍼센 트는 빚을 지고 있다. 1970년 6퍼센트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오명은 오래전에 없어졌 다. 사람들은 19세기 중반 영국인들이 그 정도 빚을 지고 있으면 감옥에 갇히고, 빚을 다 갚기 전에는 풀려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 중국이 미국에 돈을 빌려주는 것은 판매업자가 구매자에게 물 건을 살 돈을 대주는 것과 같은 일종의 판매자 금융이나 마찬가지다. 중 국은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미국에 보조금 성격의 대출을 기꺼이 제공했다. 이 대출은 미국인들이 신용카드 빚과 소비자 대출, 자동차 대출, 학자금 대출 등 온갖 부채를 통해 소비를 늘리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이 중국을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었겠 지만, 중국 입장에선 적어도 단기적으로 얻을 게 훨씬 많았다. 중국이 미국의 흥청망청한 소비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미국의 소비자들은 중국 에 있는 공장의 생산라인이 계속 돌아가게 하고 수백만 명의 중국인들 이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은 수백만 명의 국민에게 계속 일자리를 만들어 줘야 할 중국 정부에게는 커다란 정치적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엄청난 인구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외 형 극대화를 추구하는 전략을 택했다. 더 많은 상품을 해외로 내다 팔수 록 중국 전체로는 이득이기 때문이다. 상품이 시장가격 아래로 팔리거 나 수출에서 이윤이 남지 않아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런 방식은 중국에는 맞지만,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서구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방식이다. 간단히 말하면, 중국은 미국과의 교역과 대출에서 매우 가치 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기에 미국을 비난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역사상 가장 크고 비생산적인 버블이 된 것(주택) 을 사기 위해 돈을 빌렸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돈을 빌려준 중국 과 그 밖의 나라들에 무슨 일이 있어도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확 실한 보증을 해줬다.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이 거의 파산 지경에 몰린 것처럼 정말 예상치 못한 '무슨 일 이 벌어졌을 때조차 중국인들은 이 들 기관더러 위험을 줄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미국 정부 를 불러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를 상기시킨 후 중국의 대출에 대해 보증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로써 미국은 중국에 더 많은 빚을 지게 됐 다. 그러나 보증을 요구한 중국이 불공정하다고 비난하기에 앞서, 대부 분의 미국인들 역시 개인 차원에서 중국과 유사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이 2005년이나 2006년에 이미 주택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 주택부동산투자신탁과 주택건설업 주식을 내다판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 어떻게 했는가? 이들은 현금화한 돈을 은행에 맡겼으나 은행이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선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이들의 예금은 정부의 보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중에 드러난 것은 사실상 모든 은행이 예금자들이 빠져나오려고 애쓴 바로 그 시장(주택시장)에 끌려들어갔다는 사실이다.
- 2009년 8월 중국 하이난성 칭하이현의 인구 1만 명인 소도시 지카텐에서 매우 치명적이고도 희귀한 형태의 흑사병인 폐렴흑사병이 발생했다. 중국당국은 즉각 도시를 봉쇄하고 주민들에게 방역조치를 취 했다. 중국이 나라 전체에 영향을 주는 사안에 대해 항상 취해 온 방식 그대로 일사분란하고 단호하게 대응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사회의 더 큰 이익이 개인적 욕구에 우선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한편 같은 달 영국 당국은 신종플루의 발병에 대처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의료전문가들은 신종플루 치료제를 너무 함부로 나눠주지 말라고 정부에 경고했으나 유권자들의 반발을 두려워한 영국 정부는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도 치료제를 나눠주는 편을 선택했다. 이 치료제 는 불필요한 경우에 잘못 사용하면 바이러스의 돌연변이를 촉진시켜 더 욱 치명적인 형태로 되돌아올 위험성을 갖고 있었다. 유행성 인플루엔자의 윤리적 측면을 다루는 한 위원회의 위원인 로버트 딩월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영국 국민들에게 우리가 충분한 치료제를 갖고 있지만 아무나 손쉽게 갖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 봐야 받아들여질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신흥국들의 사고방식과 서구의 사고방식 간에 핵심적인 차이 가 있다. 중국과 같은 곳에서는 국가가 가장 중요하고 정부는 필요하다면 개인을 희생해서라도 중국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서구 정부 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인의 권리가 모든 것을 능가한다는 사고방식이 처음부터 각인되어 있다. 개발도상국들은 정치적 하부조직과 전술을 통해 서구 정부들보다 짧 은 시간 내에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또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어떤 법안이 빛을 보기 위해서 는 반드시 하원과 상원, 백악관을 거치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밟아 야 한다.
- 미국이 채무불이행을 선언해 외국 투자자들이 미국을 버릴 경우 예를들면, 장기금리가 가파르게 치솟고 그에 따라 주택금융과 회사채시장의 비용이 급증함으로써 미국경제 스스로도 큰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국의 채무불이행은 경제를 일시적으로 재조정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미국이 유일한 패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은 자신이 보유한 미 국 채권의 가치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채무불이행으로 인해 단 박에 중국 스스로의 발전전략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중국의 발전전략은 미국(정부와 가계)이 중국의 돈을 빌려 중국제품을 사줌으로써 중국의 고 용을 유지하는 구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국은 이런 상 황을 예상하고 국내 수요의 증대를 장려함(중국의 국내 수요 증가율은 15퍼센 트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과 동시에 미국 이외의 다른 국가들에 대한 수출 을 밀어붙여 왔다. 물론 미국의 평판은 타격을 받겠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과거 러시아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금융시장은 6개월 이내에 미국에 다 시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설 공산이 크다. 어쨌든 1998년 러시아가 국내 부채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한 후 불과 3년 만에 국제금융시장은 러시아의 채권 발행을 환영했다. 모스크바시는 2001년 11월 4억 유로(약 6억 달러)어치의 채권을 발행했다. 채무불이행 전략이 없다면 많은 사람이 미국이 부채의 덫에 걸려 빠 져나오지 못할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확실히 미국도 다른 많은 나라가 해 왔던 대로 인플레를 통해 부채를 희석시킬 수 있다. 많은 나라가 인 플레이션을 통해 부채의 가치를 잠식함으로써 은밀하게 채무불이행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미온적인 접근방식을 채택하면 궁극적으로 그 결과도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 경제적 벼랑 끝 전술을 채택하는 것이 미국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전면전이 발발하는 경우를 제외한 최악의 시나, 리오는 가장 공격적인 보호주의 정책을 통해 선진 세계의 주요 국가들 이 각자의 진영으로 후퇴하는 경우다. 이 경우 대략 세 개의 강력한 경제 블록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첫째, 미국 경제권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캐나다가 합류할 가능성 이 크다. 이 블록은 일인당 소득을 기준으로 최상의 구매력을 갖춘 현재 의 인구통계 기준에서 5억 명의 인구를 가지게 돼 강력한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북미 지역은 손쉽게 자급자족할 수 있을 것이다. 교역과 이민에 거대한 장벽이 세워지더라도 북미 블록은 식량과 에너지를 자급할 수 있다. 북미지역은 셰일 가스의 개발과 생산을 주도해 왔고, 미국에서 셰일 가스는 갈수록 중요한 천연가스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북미지역은 지리적으로 볼 때 어느 경우에도 침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다음엔 유럽이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냉정하고 엄격하게 보자면, 유럽의 장래는 특별히 장밋빛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지역은 구조적인 쇠퇴에 직면하고 있다. 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등 PIGS 국 가에 대한 심각한 재정적자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사회적 화합을 목적으로 한 정책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럽은 보유자본 이 부족하고 노동의 활력과 기술 혁신이 미흡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 다. 이 때문에 유럽이 장기적으로 경제적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은 낮다.
마지막으로 중국이 있다. 중국은 막대한 인구를 가지고 2017년에는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예측되는 나라다. 그러나 1인당 소득을 기준으로 평균적인 중국인이 미국 소비자와 대등한 수준에 오르기 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여기다 중국은 13억 명에 이르는 인구가 세계 경작지의 7퍼센트를 가지고 먹고살아야 한다. 경제적으로 중국과 연결 된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자원부국들이 중국의 숨통을 약간 틔워 줄 수 있겠지만, 중국 아프리카와 중국 라틴아메리카 관계는 항상 불확 실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 경제블록은 이런 불확실성을 갖 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유리하고, 누가 가장 취약한가? 보호주의적 벼랑 끝 전술이 누구에게 더 나쁜 영향을 미치겠는가? 확실히 미국은 아니다. 이 포커게임에서 미국은 아직 패를 쥐고 있고, 그것도 아주 유리한 패를 들고 있다.
- 중국은 그럴 수 없다. 중국 지도부가 더 잘살고 싶다는 수억 명의 중국인들에게 경제적 성공의 기대를 상당히 낮춰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중국에서는 13억 명 가운데 3억 명 정도만 서구의 평균적인 경제수준과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 중국을 성장궤도에서 탈선시키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까? 어쨌든 미국의 전면적인 채무불이행은 중국의 성장궤도 이탈을 부를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채무불이행 직후에는 그렇다. 국제경쟁력이 없는 중국의 엄청난 인구와 전면적이고 급격한 생활수준의 하락 앞에서 중국 정부의 성장계획이 차질을 빚고 결국 좌초하는 것은 부차적인 관심사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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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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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의 반격

경제 2020. 3. 18. 08:27

- 일본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경제학자인 리처드 구는 『대침체의 교훈Lesson's From Japan's Great Recession」에서 1990년 이후 일본 경제가 직면했던 심각한 인플레이션 현상과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 모두 기업의 대 차대조표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일약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일본인들은 불황에 진입한 1990년부터 2009년까지 20년 동안 일본경제가 '냉전 프리미엄(냉전 후 버블 경제 붕괴로 침체)’과 ‘제조업 프리미엄' 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88년 5월, 구소련은 아프간 주둔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했고, 1989년 말 4만 포인트에 육박했던 닛케이지수는 20년 후인 지금은1만 포인트로 곤두박질쳤다.
1995년 한 미국 젊은이가 인터넷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사업 아이템은 인터넷을 통해 미국 초등학생들에게 연필을 판매하는 것이 었다. 며칠 후 이 인터넷 회사는 수십억 달러의 사업 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
1995년 아세안 지역과 한국, 타이완의 전자제품이 일본 업체들의 생존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일본의 전자제품 제조업체는 미국의 슈퍼 301조와 엔고 현상, 아시아의 유사제품 생산에 따른 최 악의 경쟁에 직면해 있었다.
1997년 전 세계 전자제품의 생산량 과잉으로 대량의 자본이 아세안을 떠났고, 결국 1997년 여름부터 이 지역 화폐 가치는 급속히 떨어졌다. 1997년 말에는 일본의 많은 금융기관들이 자국과 아세안 지 역의 대규모 악성 부채를 견디지 못해 줄줄이 도산했다. 그러나 이 와는 반대로 1997년 이후 미국의 나스닥지수는 전 세계 자본이 몰려들어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 그린스펀 시대는 글로벌화를 고속 추진하던 시기였다. 우리는 여기 서 ‘고속' 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그린스펀이 이임할 때 미국의 부채는 GDP의 350퍼센트에 달했다. 이에 반해 1930년대 대공황이 극에 달했던 1933년에는 부채가 GDP의 290 퍼센트를 기록했다. 그린스펀을 비 난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떠안고 있는 천문학적 부채를 보고 전 세계의 학 계가 신뢰하던 그린스펀의 통화 정책이 무책임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 차렸다. 그린스펀 재임 당시 소련이 해체되고 일본 경제가 무너졌으며, 아세안 지역의 경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린스펀이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가 일으킨 두 차례의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 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후 아들 부시는 반테러 전쟁을 시작했고,2003년 미군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미군은 이라크 지역을 전면 통제하기 시작했지만 이라크에서 화학무기 제조공장을 찾지 못했고, 부시와 미국 언론은 더 이상 반테러의 기치를 높일 수가 없었다. 미국이 1970년 베트남전에서 실패한 중요한 이유는 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잔인한 이 세상에서는 때로 돈으로 위안을 받아야 할 때가 있다. 2002년 11월 미국의 경제대통령인 그린스펀은 연방기금금리iederal fund rate를 1.25 퍼센트 인하했고, 이 금리를 1년 이상 꾸준히 유지했다. 금리 인하로 세계적 인 달러 축제가 시작되어 미국에 사는 많은 흑인들과 라틴계 사람들은 집을 얻을 수 있었다.
- 2003년 미국의 집값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미국은 주택보유율이 70퍼센트에 달하기 때문에 사람들 대부분이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부자가 되었다. 미친 듯이 돈을 써대는 미국 덕분에 세계 역시 소비가 증가했다. 2006년 그린스펀 퇴임 시 미국의 경상수지적자는 GDP의 7퍼센트 에 달하는 8천억 달러를 기록했다. 그린스펀은 FRB를 떠나던 마지막 날, 1년에 8천억 달러라는 거액의 돈을 전 세계와 미국 각 계층에 지불했다. 미국의 장기전략을 확고히 해서 세계 2대 산유국인 이라크의 석유공급을 독점하기 위한 입막음의 대가였다. 그린스펀이 남긴 '재산'은 다음과 같다.
1. 전 세계 부자들이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량 구입,
2. 미국 주택 공급 과잉 사태.
3. 세계 2대 산유국인 이라크의 석유자원 분배권을 미국 석유업체에 분할.
4. 미국의 농장주들이 세계 곡물 공급 독점.
5. 미국 때문에 외국인들은 거액의 달러화 채무를 지게 됨.
9·11 테러로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급속한 글로벌화 과 정에서 무수한 이익계층이 능동적 혹은 수동적으로 재분배를 통해 막대 한 부를 누렸다. 1950년부터 1989년까지 계속된 서방 국가들과 소련의 '냉전' 에서 일본이 '냉전 프리미엄'과 '제조업 프리미엄'을 특징으로 하는 재화 재분배의 권리를 얻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 2008년 들어 버냉키는 미 연방기금 금리를 제로 금리 수준까지 낮췄다. 이 과정에서 엔화 차익거래자들이 미국과 영국, 아일랜드, 호주, 러시아, 아이슬란드, 브라질, 한국, 중국 등의 국가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엔화 차익거래자가 일본에서 빌린 단기차입금 규모는 줄잡아 5천억 달러에 이른다. 레버리지 비율을 최고로 낮춰 잡을 경우에도 글로벌 시장 규모는 역시 5~10조 달러가 된다. 버냉키는 전 세 계 최대의 중앙은행을 이끌고 있지만, 설사 전 세계 모든 중앙은행이 신속하게 반응해서 시장에 자금을 유입했다고 해도 엔화 차익거래자가 시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생긴 5~10조 달러의 공백이 불러온 메가톤급 폭풍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 1929년 미국 증권거래소의 통계에 따르면 150만 개 이상의 고객계좌가 개설되었다. 그 중 60만 개가 보증금 거래 계좌였고, 95만 개는 현금거래 계좌였다. 당시 연간소득 5천 달러 이상인 부유층 수는 100만 명 이상이었다. 1929년 주식 시장의 호황과 1933년 이후 중산층의 파산 상황을 고려해보면, 1929년 미국 중산층의 대부분이 주식거래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중산층의 번영은 종종 한 사회가 고도의 문명 발달을 이룩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대규모 중산층이 리스크가 큰 자산거래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곧 거대한 재난에 직면할 것임을 의미한다.
1929년 10월 설립된 지 112년 된 뉴욕 증권거래소는 장장 3년 동안 모든 투자자가 자살식 투매 행위를 하는 죽음의 장소가 되었다. 10월 21 일 월요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는 600만 주가 거래되었다. 그날은 역사 상세 번째로 거래량이 많았다. 거래량 폭등에는 별로 큰 의미가 없는 증 시 하락이 뒤따랐다. 그때 월스트리트의 중요 인물이었던 어빙 피셔 Irving Fisher 교수와 미첼 내셔널씨티은행 회장은 모두 “기본적인 경제 상황은 매우 양호하며, 주식 시장은 미국 경제의 실제 가치를 반영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이해가 안 되는 것은 2009년 9월 중국 증시에서 가장 유행 하던 말이 “기본적인 경제 상황은 매우 양호하며, 주식 시장은 중국 경제의 실제 가치를 반영하지 않는다” 였다는 것이다.)
- 왜 인류의 역사에서는 부가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도 있고 반대로 부 가 급속하게 줄어드는 시기도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에서 강자는 항상 강하고, 약자는 항상 약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의 생존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은 강자로 독주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즉 시대적인 부를 창출하게 되고 그 시기에는 부가 급속하게 늘어나는 것이다. 시장과 부, 개인 이 삼자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균형 있는 체계를 형성할 수가 없다. 한 개인이 독점적인 부를 축적하면 그는 본능적으로 시장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시장에는 거대한구조적인 불균형이 발생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부가 급속하게 줄어드는 시기가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전 세계 선진국 정부의 주요 임무는 독점과 과두제를 막는 것이다. 20세기 구소련은 여러 복잡 한 이유로 해체됐지만 사실 진정한 문제는 소련 정부가 중소기업이 아닌 대형 국유기업에만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 미국 시장에서 첨단 기술을 가진 개체는 아주 쉽게 독점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개방성과 융통성, 창조성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 문화는 공업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전환하는 데 충분한 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독점 기술을 가진 개체는 미국 시장에서 자신을 위한 최적의 생존 공간을 신속 하게 찾을 수 있었다. 미국 연방정부와 대규모 자선단체는 미국 대학에 끊임없이 자금을 제공했다. 효율적인 자본시장과 법률 체계를 통해 미국 은 최고의 ‘창조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 평가한다면 미국은 언제든지 창조 기술을 가진 개체를 독점 기술을 가진 개체로 변신시킬 수 있는 천국이다. 2차 산업혁명과 3차 산업혁명의 리더는 미국이었다. 앞으로 반드시 도래할 제4차 산업혁명의 시각에서 평가한다면, 2009년 미국 GM의 파산은 단순히 미국이 낙후된 자동차 산업으로부터 대량의 자본 및 노동력을 해방시켜 여전히 미국이 주도할 4차 산업혁명에 도전하고, 창조하는 과정을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미국 자본시장의 유전자는 기세 등등한 활황세 이후에는 폭락식 하락장이 오도록 결정해 놓았다. 1970년대 초, 미국은 독일과 일본에게 졌지만, 이후 20년 간 노력한 끝에 1990년대에는 호황을 맞았다. 21세기 초 미국 인터넷 기술시장이 무너지고 2008년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지만, 미국의 진정 한 자산인 개방성과 융통성, 창조력에는 변함이 없다. 오바마는 미국 최 초의 흑인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이는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상상하기 힘 든 일일 것이다. 1900년 대규모 자동차 생산라인을 창조했던 '자동차 왕' 헨리 포드와 지금의 정보화 혁명을 이룩한 ‘컴퓨터의 황제' 빌 게이츠가 독일이나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포드는 기껏해야 소형 자동차 제조사 게이츠는 우수한 기술연구원 정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개방성과 융통성은 미국인의 창조력을 키운 근본적인 요인이다. 4차 산업혁명 중 기술인력에는 중국인과 러시아인 혹은 인도인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크 투자자의 90퍼센트는 미국인일 것이다. 포드의 모델 T와 월마트, 코카콜라, MS, 델, 보잉사, 예일대, MIT대, 미국 신용카드, 할리우드 영화, 총기문화, 월스트리트............ 이는 사상 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미국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미국인과 중국인, 인도 인으로 구성된 기술 인재, 미국 월스트리트와 화폐주조세로 구성된 리스 크 자본(미국이 매년 전 세계적으로 거둬들이는 화폐주조세는 200억 달러 이상이다), 미국 신용카드 사용자로 구성된 제품 판매기지는 오늘날 창조력을 가진 미국인의 독점적인 경쟁 지위를 보장해줄 것이다. 현재 미국 시장에 서 1위를 하는 기술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는 분명 전 세계 1위일 것이다. 이는 유럽인과 일본인, 중국인, 인도인이 평생 가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미국을 뛰어 넘으려면 반드시 미국의 장점을 능가해야 하며, 미국보 다 더욱 강력한 개방성과 더 높은 융통성, 더욱 우수한 창조력을 갖춰야 한다.
- 현대 유럽은 단순화, 이성과 책임, 절약을 비롯한 글로벌화 이데올로기를 가치관 으로 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독일이나 프랑스에 가서 부동산 투기 를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임이 증명되었다. 유럽의 문화는 유럽경 제가 앞으로 ‘지역적 선수'로 자리매김하여 전 세계에 우수한 제품과 수준 높은 기술 인력을 확실히 제공할 것을 결정지었다. 강한 전통과 역사적 책임감은 유럽문화의 중요한 자산이다. 앞으로 유럽의 경제 강국은 세 계 환경보호 문제의 주요 책임자이자 동아시아 경제의 주된 조력자의 역 할을 맡게 될 것이다. 앞으로 유럽은 세계의 화원이 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계 자본이 자유롭게 숨쉬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유로화는 미래에 세계 기축통화가 아닌 달러의 부속품이 될 것이다. 화폐는 문화로부터 생겨나고, 문화는 최종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결정한다.
- 1840년 미국의 핵심계층 사이에서는 하늘이 내린 문화가 유행했다. 그 배후에는 미국이 반드시 어떤 형식으로든 모든 사물에 대한 통제를 완성해야하며 이것은 하늘이 미국에 내린 책임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바로 이런 핵심 사상의 지지를 받아 미국은 당시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알래스카를 비롯한 대량의 토지를 사들였고, 또한 인디언들에게 '인클로저 운동(토지의 사유화' 을 일으켰다. 그 당시 미국 언론은 이런 문화를 매우 숭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런 문화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문화는 한 민족의 천성이다. 그것은 해당 민족의 유전자로 결정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현재 부국의 많은 사람들은 빈국에게 쓰레기를 쏟아 버리는 것을 비인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량의 옥수수와 대두를 바이오 연료로 전환하는 것이 아프리카의 기아 난민에게 있어 비인도적이라는 생각도 역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족의 천성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제품 역시 그 민족적인 천성을 나타낸다. 코카콜라와 마이크로소프트, 미키마우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 세계의 기축통화 지위를 얻는 것은 한 국가의 전략에 있어 핵심이라고 할 것이다. 이 전략적 핵심은 한 국가의 각 계층과 집단이 오랫동안 큰 책임감을 가지고 그 대가를 치러야 실현할 수 있다. 세계 기축통화 지위를 획득하려는 전략 역시 오랫동안 은폐나 위장의 방식으로 상대방의 계층과 자산 및 체계 과정을 와해시키는 방법이다. 세계 통화의 지위는 그것을 차지한 국가에게는 최대의 자산이며, 미국이 제기한 글로벌화 전략의 진정한 목표이다. 사실 미국은 그리 강대하지는 않다. 그저 '무엇을 약하게 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 무엇을 강하게 하라' 는 노자의 사상을 강력하게 보여준 것뿐이다. 세계 통화지위에는 세계 인재들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 지위가 최종적으로 창조한 가치는 단순히 통화만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다. 우리는 미국이 하늘이 내린 문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 1998년 일본의 깃카와 모토타다吉川元교수가 쓴 『금융 패전 이라는 책에서는 1985~1989년 미국이 '유동성 과잉'을 어떻게 이용해서 일본 경제를 구렁에 빠트렸는지 서술하고 있다. 당시 일본 경제에는 부동산과 증시의 가격이 치솟고 생산성이 지나치게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 책의 중문 역자는 책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진짜 실탄이 오고가는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이익을 제 손으로 적에게 주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형의 전쟁에서 실패자는 종종 자신의 아름다운 강산을 기꺼이 적수에게 내어주는 실수를 하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패배는 더욱 뼈아픈 법이다. 이와 같은 패배를 총결산하는 동시에 금융패전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국제 금융전쟁에서의 이해득실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이상은 책의 역자가 1999년에 쓴 글이다. 글을 보니 정말 슬프기 그지없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운 유일한 것은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헤겔의 말을 빌려 이렇게 슬프고 처량한 심정을 달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 늑대는 중국 소비자 물가지수 중 식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30퍼센트로 가장 크며, 식품 가격 중에서는 돼지고기 가격이 가장 점유율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중국의 돼지고기 가격을통제하면, 그들은 특정 시기 중국의 통화정책을 통제할 수 있다. 2004년 미국 대두 가격이 두 배 폭등함에 따라 중국 농민은 신속하게 대두 재배 량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2005년에는 미국 대두 가격이 50퍼센트나 폭락해서 중국 농민들은 대두를 심느라 들인 투자금에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중국의 통화주의자들은 한 나라의 국내경제 중 효율이 떨어진 분야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일종의 재화 낭비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전해진 통화주의 학설은 대학에서라면 활발한 학술적인 연구를 기대할 수 있지만, 한 나라의 실질적인 정책에 적용한다면 대규모 공공재의 사유화 현상 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글로벌화 중에서 이런 사유화 현상이 나타난다면 국가 이익이 미국 손에 통제당할 수도 있다. 이는 아주 간단한 법률 시스템과 연관되어 있다. 중국의 법률전문가가 중국의 경제정책을 제정한다면, 그들은 대두와 중국의 국가 이익, 중국 공공자산 간의 관계를 명확하 게 지적할 것이다. 구미 국가의 경제정책 제정자들은 반드시 법률적인 학술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국가이익과 공공자산, 개인 투자자간의 관계 형성과 균형은 사회의 경제체계를 제약하거나 위협할 수 없다. 중국 경제학자들은 2005년 중국 대두 산업을 성공적으로 파괴했고, 중국의 이익 역시 성공적으로 미국의 농업기업과 월스트리트의 전략집단군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 1868년 일본 정부는 신도를 사상적인 기반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비록 에도 막부가 멸망하고 메이지유신에서 표면적으로 법적인 특권을 가진 무사 계층이 소멸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메이지유신 자체는 일본 무사계층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에는 두 개의 계층이 생겨났다. 수많은 엘리트들이 만든 중산계층 및 민족 종교 신도 와 '허구의 진실'에 동화된 일본 빈곤층이 그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일어난 뒤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중국의 낙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일본이 해전과 지상전에서 모두 중국을 대파하자 전 세계는 그 결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시작되어 1895년 3월 막을 내렸다. 전쟁의 결과는 아주 명백했다. 일본군의 무기는 청군보다 못했지만 통솔능력에 있어서 는 현대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이 오랫동안 '신도' 에 세뇌 당 했기 때문이다. 청군은 뛰어난 무기를 갖추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파벌 갈등과 직권남용, 부패에 시달렸고, 고대 기병을 통솔하는 방식으로 우수 한 해군을 지휘한 것이 패전의 원인이었다. 청일전쟁은 단지 '이미 승리 한 자가 이미 패한 자'에 대해 형식상의 행동을 완수한 것에 지나지 않 았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인류 사회는 대규모 군사 충돌을 다시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승리한 자'가 '이미 패한 자' 를 공격하는 패턴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문화적 원칙이다.
- 1979년 3월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미국 백악관에서 정식으로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30년간 이어오던 적대 관계와 전쟁 상태를 종결했다. 평화조약에서 이스라엘은 한 발 크게 양보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다. 이 조약은 워싱턴의 글로벌화 전략에 딱 들어맞았고 미국은 아랍 국가들 과 중요한 전략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1985년 구소련의 석유 수입은 220억 달러, 순외채는 180억 달러였다. 같은 해 사우디아라비아는 모든 유정을 풀가동해서 석유를 채굴했다. 이로써 세계에 공급되는 석유 생산량은 2배로 늘어났고, 전 세계 석유 가격은 폭락했다. 1989년 구소련의 순외채는 510억 달러까지 늘어났지만 석유 수입은 110억 달러로 떨어졌다. 게다가 전 세계 채권자들은 구소련에 채권을 상환하라고 한 목소리로 요 구했다. 결국 경제가 붕괴되고 구소련 사회는 해체되었다.
- 2008년 말, 미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약 9조 달러의 통화가 미국으로 유입되었다. 이는 미국이 만든 세계적인 게임 규칙이다. 군사와 법률, 문화, 기술, 복지를 종합한 미국의 세계적인 역량을 나타낸 다. 가령 어느 날 중국의 집값이 폭락해 경제 문제를 야기한다면, 2008년 말 상하이 최고 백화점에서 미친 듯이 명품을 사들이던 중국의 부자는 어 떻게 될까? 그들이 대량의 돈을 미국으로 흘려보낸다면 중국 경제는 붕괴할 것이고 미국은 부를 그러모으게 될 것이다. 미국은 2008년 말 금융위기 때 미국의 많은 부자와 세계의 거래자들이 끝까지 달러를 움켜쥐고 있었던 사실을 직접 목격했다. 그러나 중국은 2008년 말 중국 부자들이 눈 깜짝할 새에 돈을 쓰는 소비문화의 주체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다. 제일 황당한 것은 중국 역사상 중요한 시기에는 종종 부를 과시하는 시대를 마지막으로 종말을 맞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타고난 유전자이고 사회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아마도 문자로는 해석이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의 전쟁은 부의 재분배권을 구현한다. 1989년 강대한 경제제국 일본은 경제적 실패로 엄청난 부의 손실을 입었다. 그것은 2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일본이 입은 손실보다 훨씬 더 큰 규모였다. 그러나 일본 경 제의 심각한 침체는 미국에게는 거대한 발전 공간을 가져다 주었다. 대량의 세계 자본과 인재가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미국은 유사 이래 가장 오 랜 성장 신화를 창조했다. 또한 세계 언론은 하나같이 일본 경제의 침체 가 일본에 존재하던 심각한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떠들어 댔다. 오늘날 우리는 아직도 국지전을 목격하거나 직접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거대한 전쟁 머신에 불과하다. 환율 전쟁을 위한 수단 말이다. 양 국의 교전을 위해서 대규모 전투기와 전차, 전함, 해커가 필요할까? 사실 진짜 전장은 환율 전쟁이 치러지는 곳이다. 한 나라의 전쟁 이데올로기가 아직까지 전투기, 전차, 전함, 대공전에 머물러 있다면, 1895년 청일 전쟁 중 고대 기마병 대열을 이용해서 우수한 장비를 갖춘 청의 해군을 지휘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미국의 전형적인 국가주의자인 그린스펀은 미국이 2010년 환율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중요한 보장을 제공해준 핵심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 경제학자들로부터 무책임한 FRB 의장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렇다면 그린스펀을 비난하는 경제학자 중에서는 대체 몇 명이나 2008 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리 예측했을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행위, 혹은 사건이 발생한 후 탁상공론만 늘어놓는 방식은 인류 문명에 있어서 아주 추악한 문화다. 결국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식의 대중 사유체 계인 '허구적인 진실' 인 것이다. 이는 그린스펀 계층만을 위해 이익을 제공한다.
- 1973년부터 1974년 단 1년 사이에 석유 가격은 4배나 폭등했다. 중국의 주류 경제학자 들에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그들은 '중동 지역에서 제4차 중동전쟁이 발 생했기 때문 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면 미국거시전략 제정자에게 설명을 부탁한다면 그들은 2차 대전 후 구축된 세계적인 통화체제인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와 금본위 제가 당시 미국이 만든 세계 화폐권력과 자원 권력의 패권 목표를 심각하게 제약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즉 당시 금본위제'는 금이 없을 경우 미국이 달러를 찍지 못하게 했다. 1971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금태환 정지조치를 선 언했고 이로써 브레튼우즈 체제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화폐권력 과 자원권력, 월스트리트 불로소득자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헌법'을 제안했다. 그것이 바로 변동환율제가 도입된 오늘날의 달러본위 체제이다. 1971년 닉슨이 전 세계에 달러본위 체제를 제안하자 그 즉시 유럽과 일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따라서 미국과 유럽, 일본은 달러본위 체제와 특별인출권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1973년 까지 계속되었고 이스라엘은 돌연 석유 가격을 4배나 올렸다. 유럽과 일 본은 달러로 값비싼 석유를 사면서 사실은 수중에 달러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두 나라는 냉전을 위해 고통을 참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전 세계 통화 역사상 미국 과 미국의 불로소득자들의 입맛에 가장 부합하는 달러본위 체제는 석유 인상의 압박 속에서 탄생했다. 이것은 유럽이 냉전 종식 후 모든 방해 물을 극복하고 유로화를 구축한 원인이며, 또한 코소보 지역이 유로화 체 제 구축 이전 미국의 군사적인 수술을 받은 원인이기도 하다. 유로화는 온갖 협박과 위협을 견뎌낸 뒤 탄생한 산물이다. 화폐권력과 자원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진정한 부를 쥘 수 있다는 사실을 유럽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제대국인 일본 역시 냉전 후 소리 없이 '일본 아세안 통화존'을 구축했다. 마지막으로 1997년 아세안에서 엔화 대출이 달러를 넘어섰을 때, 아세안은 미국 헤지펀드의 맹공을 받았다. 1997년 당시 아세안에 위기가 촉발된 후 일본은 1천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원조 기금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기금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출자한다는 계 획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미국 재무부와 IMF가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나 섰다. 일본인은 결국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기축통화 지위를 둘러싼 경쟁은 치열했고, 많은 사건을 불러왔 다. 최종 목적은 그 배후에 있는 막대한 파워를 얻기 위한 것이다.
- 문제는 석유가격이 치솟을 때 미국이 갑작스럽게 고금리 정책과 거액의 적자 정책을 끌어들인다면 중국은 철저히 붕괴되고 말 것이다. 1979년 레이건과 볼커가 돌연 고금리 및 대 규모 적자 정책을 실시하자 라틴아메리카 지역이 하룻밤 사이에 달러 제 국의 오랜 금융 노예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린스펀이 펴낸 책에 나온 생각은 나와 일치한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앞으로 고금리 정책을 실시할 거라는 예상이다. 1980년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미국의 금융 노예로 변했다. 1991년 소련은 미국과의 냉전 중에 와해되었으며, 1990 년 일본은 미국 달러화 환율 상승으로 오랜 악성 인플레에 시달려야 했 다. 1997년 아세안은 미국의 해지펀드 때문에 줄줄이 마비되었다. 오늘 날 미국의 전략목표가 중국에 석유, 식량, 달러 위기를 안겨주는 것이라 면 중국은 부의 손실 뿐 아니라 대량의 하이테크 인재가 다른 나라로 유 출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중국의 개인 이익집단과 달러 판매상 집단은 중국의 거대한 부를 미국으로 옮길 것이다. 미국의 최종목적은 결국 돈도 사람도 모두 얻는 것이다.
- 중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최첨단 이론인 시장경제이론을 중국에 팔았고, 이익이 일원화 된 계획경제와는 달리 시장경제를 추진하 면 이익이 다원화되어 어떤 이익집단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미 국인과 영국인은 물론 중국인에게 시장경제와 전 세계 무역 시스템을 구 축하고 개방적인 금융 체제를 건설하라고 정성스럽게 가르칠 것이다. 하 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0년부터 영국 내의 풍부한 석탄자원 채굴을 포기하고 민족 모두가 한 방울의 석유라도 찾기 위해 전 세계로 눈을 돌린 그들의 전략에 대해 영국이 알려줄까? 2차 대전이 끝난 뒤 중동 국가인 이스라엘과 끈끈한 동맹관계를 맺고 군사 수단으로 석유기지를 건설한 사실을 미국이 알려줄까? 미국 알래스카에 매장된 석유는 그 값으로 따지면 수조 달러 상당이다. 미국은 그 석유를 채굴했는가? 당연히 미국은 고상하게 중국 주류경제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 국인은 환경지상주의자라서 알래스카의 환경자원을 보호할 거라고 말이 다. 그렇다면 중국 경제학자들은 즉시 중국인에게 ‘자원을 시장화하자, 모든 것을 시장화하자' 라고 말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공업 강국들은 자국의 자원을 보장하고 세계 자원의 공유권에 대해 군사적인 안전보장을 획득한 후에야 공평한 세계 무역과시장화를 거론한다. 하지만 중국은 자원 권력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서방 의 이론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 시장은 시장이론을 판 주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익집단이 없는가? 물론 미국에도 이익집 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글로벌화 이익집단이다. 중국에는 중국 본토의 이익집단이 존재한다. 나는 계획경제에 반대한다. 또한 시장경제 추진 강 행으로 중국 본토에 개인 이익집단이 만들어지는 것도 반대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중국은 반드시 자원권력을 가진 시장경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 권력이 보장되어야만 모든 중국인은 공평하고 공정해질 것이다.
- 아이슈타인은 인류가 3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할 병기가 무엇일지는 모르나, 4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할 병기는 돌과 나무방망이일 것이라고 했었다. 아쉽게도 이 과학천재는 수천 년 전 중국 진나라의 공격 전략은 몰랐던 것 같다. 나는 이 화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얘기했었다. 오늘날 우 리 모두는 월스트리트의 자본과 중국 내 달러상들과 개인 이익집단들에 게 깊숙이 포위되어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인가? 군사전략의 목적은 무 엇인가? 바로 부의 재통제이다. 지금 세계는 이미 군사전략을 쓸 필요도 없이 고급문화 · 이데올로기를 통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부를 재통제하 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 진나라의 전략에선 상대의 주류 경제시 스템 안에서 선뜻 거액을 들여 확고부동한 달러시스템 지지자 몇 명을 만들고, 높은 에너지 소모와 오염을 유발하는 로 엔드 제조업 왕국 건설자 들과 자원을 팔고 또 파는 전략을 결연히 밀어붙이는 집행자들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일들이 실행 가능하다면 세계 초강대국이 다른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지역을 상대로 군사력을 동원해서 부의 재분배를 통제할 필요가 있겠는가? 앞으로 세계는 아주, 아주 커질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자본 파워, 이 슬람 세력, 유럽 보수파 및 극우파 세력이 존재하며 러시아가 대국을 꿈 꾸며 기지개를 펼 것이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지역 민족에서 보수 세력이 일어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중국에 신흥 자본 군단이 라는 세력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신흥 자본 군단은 중국이 고생고생해서 자원과 바꿔 얻은 것이다. 앞으로 자원으로 인해 야기될 자본의 재분배라는 강도 높은 글로벌 금융 전략전에서 중국의 신흥 자본 군단이 발언권과 자원 통제권을 가질 수 있을까? 만약 가지지 못한다면 부유해졌다가 다시 난관에 봉착하고 마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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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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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부자수업

경제 2020. 3. 18. 08:25

-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실수가 아니다.
그러나 죽을 때도 가난한 것은 당신의 실수다. (빌 게이츠)
- 다 쓰고 남은 걸 저축하는 게 아니라, 저축하고 남은 게 있으면 써라. (워렌 버핏)
- 사람들은 언제나 돈을 저축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충고다. 모든 돈을 저축하지는 말라. 자신에게 투자하라. (헨리 포드)
- 잠자는 동안에도 돈이 들어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당신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워렌 버핏)
-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 속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윈스턴 처칠)
- 홀로 모든 것을 이뤄낼 수는 없다. 주변에 잇는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야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앤드류 카네기)
- 돈이 없는게 문제가 아니다. 비전이 없는 게 문제다. (샘 월튼)

- 일본의 미래학자 오마에 겐이치는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중간 계 층의 인구 중 아주 극소수만 부유층으로 편입되고, 나머지 대다수는 저소득 혹은 중·저소득층으로 떨어질 수 있다.”라고 미래경제를 예측 했다. 중간 계층의 급격한 감소와 파괴로 소위 M형 사회가 형성된다 는 것이다. | M형 사회가 도래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준비해야 한다. 제때 움직 이지 않으면 통화팽창에 자신의 정기 저축을 먹이로 헌납할 수밖에 없 는 '신빈민족'으로 전락하고 만다. 현대사회에서 근검절약으로 돈을 모아야 한다는 개념은 이미 낙오. 된 지 오래다. 생활의 '질'과 '양'을 희생하지 않는 전제하에 이성적인 투자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제대로 인정하는 '자산관리'다. 공부하지 않거나 전략 없이 임의로 투자하는 주먹구구식 방법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 하버드에서는 개인의 자산관리 방법을 가르친다. 단기간 내에 자신이 가진 돈의 가치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법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가 확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자산관리 첫 시간은 두 가지 개념만 가르친다.
첫째는 '투자' 행위와 '소비' 행위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매달 월급의 30%를 먼저 저축하고 남은 돈으로 소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하버드 자산관리 비법’ 이다. 하버드가 키운 청년들이 미래의 삶 속에서 부유함을 누리며 사는 이유는 이 두 개념을 머리에 각인했기 때문이다.
- 자산관리는 새로운 재원을 창출하는 것이 우선이다. “사람에게는 두 개의 다 리가 있고, 돈에는 네 개의 다리가 있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는 사람이 돈을 따 르는 것보다 돈이 돈을 따르게 하는 것이 빠르다는 의미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돈이 자산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산을 가지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 자산관리를 시작할 때는 먼저 위험률을 생각해야 한다. 위험을 피해가야만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합리적인 기대를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작년에 펀드로 두 배의 수익을 얻었다면, 절대 올해에도 두 배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냉정하고 철저한 분석으로 기대치를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산관리는 절대 충동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기분을 극복하고 정서를 잘 관리해야 한다. 투자의 과정도 사실은 정서관리의 과정이다. 손해를 보는 이유는 거의 충동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투자나 자산관리의 본래의 의미는 자산에 대해 합리적인 계획을 세 우고, 자산의 가치를 높여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때 문에 투자나 자산관리는 비상식적일 만큼 진지해야 한다. 어떤 자산관리 상품이나 도구를 통해 벼락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투자나 자산관 리 본연의 개념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는다. 투자나 자산관리의 참뜻을 알면 시장의 격렬한 파동과 변덕을 맞닥 뜨렸을 때, 고인 물처럼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시장상황이 좋 아지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가 시장상황이 나빠지면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대처할 수 있다. 또한 시장변동에 대해 특 수한 면역력이 생기고, 확고하고 냉정한 입장을 고수할 수 있게 된다.
- "내일의 돈으로 오늘의 꿈을 이루자.”라는 말을 듣는다면, 부채가 우리로부터 앗아가는 것은 무엇일까를 반문해야 한다. 돈, 자유, 시간, 신용, 건강,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창업의 용기를 날려버리는 일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부채의 대가는 매우 가혹하다. 오늘날의 소비는 대부분 부채소비다. 집을 사거나 차를 살 때 은행 에 대출을 신청할 수 있고, 쇼핑을 할 때는 신용카드를 사용한다. 인터 넷 쇼핑에서조차도 할부결제를 즐긴다. 하지만 '내일의 돈'을 그렇게 쉽게 사용하면 안 된다. 빚진 돈은 결국 갚아야 하고, 부채는 우리의 삶에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 어느 회사 사장은 “말을 잘 듣지 않고 말썽을 피우는 직원들이 말을 듣게 하는 가 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집을 사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일단 하우스 푸어가 되고 나면 그 직원은 더 이상 말썽을 피우지 못한다. 또한 당신 이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할 것이다. 대출이 그 직원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빚이 생기고 나면 모든 면에서 자유롭지 못하 다. 빚을 진 사람은 집을 이용하는 대가로 자신의 자유를 지불했다고 봐야 한다. 빚을 갚기 전까지 그의 시간은 ‘저당잡힌 것이다. 과도한 채무는 소중한 힘과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더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해 야 하는 시간을 빼앗는다는 사실을 새겨야 한다
- 우리에게 언제나 100% 만족이란 없다. 늘 자신의 집은 다른 사람의 집보다 작고, 자신의 차는 다른 사람의 차보다 안 좋고, 자신의 월급은 다른 사람보다 적 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은 감정이다. 돈이 많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적당한 때에 자신의 마음에 방학을 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빚 을 짊어지고 앞만 보고 달리느라 삶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 투자의 대가 워렌 버핏은 “나쁜 소식은 투자자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됩니다. 그로 인해 당신은 전례 없는 헐값에 미래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따라서 각종 투자자들은 반드시 자산관리 사고방식을 적극적으로 바꾸고 효과적 인 투자방식으로 마이너스 금리에 대항해야 한다. 마이너스 금리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해 무감각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 당신이 시장의 옷 가게에서 옷을 사려고 하는데 셔츠 가격이 380달러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80달러면 살 수 있는 옷이었다. 그렇다면 왜 가격을 저렇게 높게 붙인 것일까? 이는 판매자가 당신의 소비자잉여로 이윤을 얻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이 그 옷을 특별히 좋아해서 80달러보다 조금 높은 금액으로 심지어는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의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소비자잉여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마음에 드는 옷을 봤을 때는 최대한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 경제학자 마셜은 "모든 수요를 최종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소비자의 수요다. 우리는 물건을 구매할 때 반드시 어떤 물건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이 물건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점만 기억한다면 자 신의 소비자잉여 심리에 속아 돈을 허투로 소비해 진짜로 가치 있는 물건을 사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베블렌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우리의 소비는 타인을 모방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야 다른 사람과의 격차로 인해 난감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광고 산업은 우리의 소비습관을 바꿔놓았다. 소비를 모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동료나 이웃이 어떤 상품으로 부러움을 사면 당신도 이 상품을 사게 될 확률이 높다. 당신의 낭비성 소비심리가 자극되는 것이다.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물질적 만족을 얻고 누리는 것보다 심리적 만족을 채우려는 것이다. 이렇게 모방과 경쟁이 유발시킨 소비행위를 전시효과' 라고도 부른다. 최초의 전시효과는 인류의 행위에 대한 심리학 연구결론이었지만, 지금은 경제학에서 소비행위를 연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 이를테면 소비자는 수입과 소비를 인식하고 처리할 때 다른 소비자 와 비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입은 입은 옷이 예쁘다. 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입었을 때 예쁠지 여부와 상관없이 어떤 방법 을 써서라도 그 옷을 사고 만다. 또한 다른 사람이 고급 소비품을 사는 것을 보면 자신의 수입에 변화가 없는 데도 이를 모방해 자신의 소비를 늘린다. 심지어는 수입이 줄어들어도 지출을 줄일 수 없다고 생각 한다. 그 결과 시장의 공급과 수요에도 영향을 주고, 시장은 이를 반영하여 소비의 전시효과는 더욱더 선명해지는 것이다
- 하버드 경제학자 게리 베커는 모든 경제행위는 이성적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것이 이성적인가?”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생활방식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서로 다른 소비관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전시효과는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소비관을 모방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생활방식과 실제로 처한 상황에 부합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 하버드의 유명 경제학자 그레고리 멘큐는 “격려는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든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본과 이익을 비교하고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격려를 자신의 이익으로 받아들여 그에 대해 반응하게 된다. 그러므로 격려가 경제학 연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라고 했다. 모든 경제학의 내용은 격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으며, 그 외 내용은 이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 18세기에 발표된 네덜란드 맨버빌의 《꿀벌의 우화》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무리의 꿀벌이 호화로운 삶을 위해 멋대로 흥청망 청 살았더니 아주 빠르게 번성하였는데, 이 꿀벌들이 마음을 바꿔 사치스러운 생활을 포기하고 절약했더니 무리 전체가 쇠퇴했다고 한다. 이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경제학자 케인스는 소비를 자극하고 총 수 요를 늘리는 것이 경제발전에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는 이론을 발표했 다. 이 이론은 '절약의 역설' 또는 '절약의 모순'이라고 불린다. 우리는 절약과 절제를 일종의 미덕으로 알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 로 개인이 부를 쌓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방식이다. 만약 어떤 사람 이 근검절약하여 저축을 늘리면 부유해질 것이다. 하지만 케인스의 총 수요의 수익결정이론에 따르면 절약은 경제성장에 그다지 좋은 점이 없다고 한다.
- 사람들의 수입은 소비와 저축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소비와 저축은 서로 역방향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소비가 증가하면 저축이 줄고, 소비가 줄면 저축이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축만 하고 소비를 하지 않으면 폭넓은 재생산에 불리하게 작용된다고 했다. 생산이 축소되고 실업자가 늘어 경제가 위축되는 것이다.
- 우리에게 학습은 매우 중요하다. 서양에서는 “1년을 공부하 지 않으면, 당신이 가진 지식에서 80%가 감가상각된다. 당신이 오늘 모르는 것이 내일 아침이면 철이 지난다. 지금 절대 다수의 관념이 2 년도 채 지나기 전에 영원한 과거가 될 수도 있다.” 라는 말이 있다. 세계경제협력기구의 지식경제에 대한 보고 중에 “지식경제에서 학습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는 개인, 기업 및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라고 나와 있다. 지식경제 시대에서 지식의 양은 개인의 학습능력에 의해 결정되고, 미래의 문맹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지식과 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이 시대에서 끊임없는 학습과 끊임없는 자기 보강만이 탄탄한 기초 위에 서 있을 수 있게 한다. 경쟁이 과열되면 개개인의 실력과 능력의 비교는 갈수록 격렬해질 것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능력을 키울 수 없고 곧 뒤처지게 된다.
- 중국 경제학자 우징렌吳散蓮은 “주식을 사는 것이 곧장 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부를 재분배하여 이 사람의 주머니에서 저 사람의 주머니로 돈을 옮기는 일에 불과하다. 주식으로 부를 늘리려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지구로부터 멀어지려는 것과 같이 황당한 일이다.” 라고 말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투자하는 종목에서 다른 사람의 돈을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면 당연히 돈이 벌리지 않는다.
- 80%의 주식투자자는 돈을 벌 생각을 하지만, 20%의 투자자는 손 해가 생겼을 때의 대응책을 마련한다. 투자자는 주식거래 전에는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공격만 논하고 수비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 발생 가능한 불리한 상황을 예측해 유 비무환의 자세를 갖춰야 위기가 왔을 때 신속하게 반응하고 손실을 줄 일 수 있다. 돈 벌 생각만 하는 투자자는 영원히 돈에만 시선을 고정하기 때문에 쉽게 과열 양상에 빠지기 쉽고 잠재적인 위협을 간과하게 된다. 하지만 리스크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관련된 전략을 설정할 수 있다면 성공 기회도 커진다. 워렌 버핏은 주식을 선택할 때 발전 잠재력이 있고 자신이 쉽게 장 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선택한다. 그는 장기투자를 선호했다. 잠재력 우수한 주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더 많은 이윤 구간을 만들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한 투자자는 80%의 시간으로 거래를 진행하고, 20%의 시간을 후회한다. 그러나 성공한 투자자는 80%의 시간을 들여 주식을 연구하고, 20%의 시간으로 실제 거래를 진행한다. 이것이 현명한 투자자의 비결이다.
- 일본 주식의 신 고레카와 긴조는 주식투자자들에게 “주식을 선택할 때는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한 후에 선택해라.” 라고 충고했다. 주식투자는 눈먼 고양이가 죽은 쥐를 만나는 것 같은 우연이란 절대 없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철두철미하게 주식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만이 주식시장의 20 대 80 법칙을 충분히 이해하고 효과적인 게임 전략을 세울 수 있는 길이다. 그렇게 했을 때 당 신도 주식시장에서 수익 얻는 20%의 투자자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 워렌 버핏은 “다른 사람이 욕심을 낼 때는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할 때는 욕심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라는 투자비결을 갖고 있다. 그는 분명하게 “나는 보통 사람들이 주식시장에 믿음을 잃을 때 주식을 사들인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신중할 것을 조언한다. 어느 때나, 어느 것이나 대폭으로 상승하는 시기가 있다. 사람들은 드러나는 것에 미혹된다. 나는 주식시장이 내후년에도 계속 오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가격이 높아질수록 더 조심한다. 경솔 하게 생각하면 안 되고 더욱 신중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조언한다. 워렌 버핏의 말을 종합해보면 용감한 '역방향 투자자'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분석하면 전통적인 역방향 투자전략이 아 닌 '선택적 역방향 투자전략'을 말한다. 전통적인 역방향 투자전략은 최근 성적이 좋지 않거나 대다수의 투자자가 관심을 갖지 않은 주식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워렌 버핏의 선택적 역방향 투자전략은 다음 경우에 시행된다.
(1) 회사가 장기적 경쟁에 우세를 가지고 있지만 주식가격이 떨어져 있는 경우
(2) 회사 전체를 사는 것이 사업하는 사람을 더욱 안목 있어 보이게 하는 경우
- 투자의 대가 워렌 버핏이 “만약 당신이 어떤 주식을 10년 동안 보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주식을 10분도 보유하지 마라.” 라고 주식투자의 기본 태도에 대 해 말했다. 이외에도 그는 저평가된 주식을 분별하기 위해 애쓰고 최대한 회사의 정 보를 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현재 펀드관리자들이 주식을 고르는 필수 조건이다.
- 부모는 매우 진지하게 용돈에 대해 아이와 상의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용돈이 가정생활 속의 한 제도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용돈을 부모의 감정에 따라 맘대로 늘리거나 줄이는 금액이 아니고, 필요하다고 해서 무한정 줄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야 한다. 용돈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지면 쌍방은 이를 잘 준수하는 것 또한 교육이다. 용돈의 유무, 금액은 부모와 아이의 사랑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부모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그 둘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요즘 너의 태도가 아주 좋지 않고, 나는 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계속 그러면 다음 주에 용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라는 식이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의 크기에 따라 용돈도 변한다 는 잘못된 인식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 가정의 재산 관리에는 유동, 분배, 조합 3단계가 있다. 유동이라는 것은 화폐 간의 유동과 화폐의 국제적 유동성이다. 분배는 서로 다른 종류의 자산의 비율 분배다. 금, 부동산, 유가 증권, 예술 소장품 등이 있다. 조합은 증권과 채권의 조합, 펀드와 주식 의 조합 등이다. 가정의 자산관리는 고수가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 가장 핵심사항은 가정의 재산을 경제적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다.
- 젊은 사람들은 소비를 할 때, 부지런히 말하고, 부지런히 계산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부지런히 보고, 부지런히 달리는 절약 기능을 마스터해야 한다. 부지런 히 말하는 것은 값을 깎는 것이고, 부지런히 계산하는 것은 계산을 잘해서 판매자 의 숫자 놀음에 놀아나지 않는 것이다.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아는 사람, 인터넷, 잡지 등의 수많은 경로를 통해 새로운 소비 기술이나 자산관리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부지런히 보는 것은 할인, 판촉 정보나 각종 상품의 발전 추세를 많이 보고 들어서 자신이 상품을 살 때 비교적 낮은 가격과 정확한 방향으로 사는 것을 말한 다. 부지런히 달리는 것은 쇼핑할 때는 여러 곳에 발품을 팔아 비교하는 것이다.
- 러시아의 유명 생리학자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는 “즐거움은 양생의 유일한 비결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3명의 의사가 있다고 말했는데 첫째는 고요함, 둘째는 즐거움, 셋째는 절식이라고 했다. 즐거움과 건강은 원래부터 서로 연관되어 있다. 즐거움은 반드 시 건강을 촉진시킨다. 즐거움 자체가 심리적으로 유쾌함과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이 각 연령 단계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각각 다르다. 노인의 즐 거움은 몸이 건강하고, 경제적인 안정감이 있으며, 사회로부터 인정받 는 것이다. 또한 적막함을 느끼지 않고, 자신이 아직도 쓸모 있다고 느 끼며, 신앙이 있고, 만족감을 느끼면 살이 유쾌해진다. 그래서 우리의 부모이자 선배가 점차 나이를 먹어 갈수록, 경제적인 보조 외에 그들의 심신 건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즐거운 노년기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 금융위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반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하나 는 재산성 수입의 변화다. 주식, 채권, 투자성 부동산 자산, 보석, 소 장품 등이 포함되고 그 가치에 변화가 생기는 것들이다. 다른 부분은 급여의 변화다. 예를 들어 직원의 급여 수입이 기업의 생산성 수요로 인해 조정되고, 급여 및 상여금 수입이 변동을 통해 오르거나 떨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일수록 신중한 자산관리를 지속해야 생활의 질이 안정적 으로 상승하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경제위기시에도 두려워할 것은 없다. 침착하게 생활을 지속할 방법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먼저다. 그럼 경제위기가 피할 수 없이 도래한다면 개인이나 가정은 어떻게 이를 대처해야 할까?
(1) 경제위기가 찾아오면 부동산, 차와 같은 자산을 사지 않아야 한 다. 경제 상황의 하락세에서는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없다. 개인이나 가정의 몇 안 되는 자산은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과정에서 남김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2) 자신의 직장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경제위기가 왔을 때 소득과 지출이 정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 회사도 지탱하는 힘을 받아야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고, 나뭇잎 위에 매달린 한 마리의 개미처럼 파도에 따라 흘러갈 수 있다.
(3) 여유 자금이 있다면 경제위기시에 토지나 석유, 강철, 식품 등 재생 불가 제품이나 광물 자원, 생활필수품을 구입한다. 식품은 배고 프지 않게 할 수 있으며, 재생 불가 제품이나 광물 자원은 어떤 시기에도 계속 소모해야 하는 것이자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산이 가치를 유지하거나 증가하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4) 주식, 금 투자 등을 멀리하라. 경제위기에서 주식은 휴지 조각으 로 전락할 수 있다. 절대 욕심내서 구매하면 안 된다. 언제 회사가 파 산하고 주식거래가 멈출지 알 수 없다. 금은 비록 가치가 유지된다고 하지만 어쨌든 일반 등가물일 뿐 생필품은 아니다. 금 한두 돈이 밀가루 몇십 그램보다 못할 수도 있다.
(5) 그림이나 골동품류를 사지 말아야 한다. 이런 물건들은 그 자체 의 가치와 가격에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물건이 가치를 유지하길 바라는 것은 독이든 술을 마셔 갈증을 푸는 것과 같다.
- 금융위기 시에는 사람들의 수입은 떨어지고 재원 개발이 어려워지면서 절약이 중요해진다. 경제위기는 추운 겨울과 같다. 하지만 그 시기가 도래했더라도 “그럼 그 뒤에는 봄이 오겠구나.”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경제위기 속에서 비관하고 절망하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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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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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대담한 도전

경제 2020. 3. 13. 12:12

- 큰 변화의 시기에는 위기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위기의 본질은 과거의 판과 미래의 판의 충돌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현상을 뒤쫓 지 말고 그 현상 중에서 과거의 판에 속한 것은 무엇이고, 미래의 판 에 속한 것은 무엇인지를 통찰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판에 올라탈 수 있도록 결단하고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리더의 역할이다. 미래를 만드는 변화의 흐름을 읽고 그 속에서 생기는 기회를 통찰해야 한다. 그래서 밀려오는 파도를 타듯이 흐름을 타며 다음 기회로 순간순간 빠르게 옮겨가야 한다. 빨리 올라 탈수록 기회를 선점할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 커진다. 늦게 올라탈수록 많은 것을 잃을 것이며, 열심히 노력해도 겨우 기회의 부스러기만 얻을 뿐이다.
- 현재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은 '선제 안내 Forward Guidane'와 '점진적 인상' 방식을 취하고 있다. 미국의 점진적이고 신중하게 올리겠다는 말은 1994년과 2004년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먼저 1994년 2월 기준금리 인상 때와 비교해 보자. 당시에는 선제 안내도 하지 않고 급진적 인상을 단행했다. 곧바로 시장 충격이 시작되었다. 2월에 전격 인상된 기준금리는 그해 11월까지 6차례 더 인상 되면서 3%에서 6%로 2배 상승했다. 10년물 미국채 금리가 2.3%P 오르면서 10년물 미국채 원금 손실액이 23%, 30년물 미국채 금리는 1.9%P 오르면서 원금 손실액이 17%를 기록하면서 일명 '미국채 대학살 loodbat’ 충격이 발생했다. 1994년 금리 인상 이후 아시아는 외환위기에 빠졌다. 2004년 중순부터 시작된 기준금리 인상은 급진적이지는 않았지지 만, 선제 안내가 부족했다. 대략 2년 동안 4.25%P를 올렸다. 후폭풍 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 2015년 12월에 연준은 이런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인상 시점, 인상 기간과 폭 등을 선제 안내 하면서, 금리 인상 후 경기 움직 임을 최대한 살피며 신중한 속도로 완만하고 점진적으로 금 리를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점진적이라는 말은 최소 9개월에서 최대 2년 정도는 속도를 내기보다는 느리고 신중하게 인상하겠다는 말이다. 2015년 9월에, 연준은 2016년 12월에 예상되는 기준금리 (중간값)를 1.375%, 2017년 말은 2,625%로 선제 안내했다. 2016년에 4번, 2017년에 5번, 2018년에 5~6번 올릴 것도 선제 안내했다. 이 정도가 점진적이고 신중한 속도다. 그런데 이 정도의 속도도 느린 것은 아니다. 점진적이고 신중하게 기준금리를 인상해도 신흥국의 통화 가치는 하락할 것이 뻔하다. 신흥국의 위기는 해결되지 않는다. 차라리 빨리 부채 디레버리징을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신흥국 위기가 길어지 면 길어질수록 세계 경제에는 도움이 안 된다. 2015년 들어 시장이, 처음에는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이 늦춰지는 것을 호재로 받아들였지만, 2015년 말에는 더 늦춰지는 것을 악재로 인식하는 상황으로 전환되었음을 기억하라.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매라면 빨리 맞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신흥국의 위기에 대한 생각도 비슷하게 전환될 수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가 더 빨라질 가능성도 상존한다. 기준금리 인상 후 미국의 경기 움직임(고용, 물가지표, 투자심리 등)이 예상보다 좋 다면 연준은 2017~2018년의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빠르게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 만약, 미국 연준이 양적 완화로 풀린 돈을 흡수한다면 어떻게 할까? 전문가들은 크게 3가지 방법을 말한다. 첫째는 만기 채권에 대 해 원금과 이자를 받고 채권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기 이전의 채권을 시중에 파는 방식이다. 연준이 재매입 조건을 달아 시 중 금융기관에 판매하는 '역레포 Reverse Rep' 방식이다. 시중 금융기관 의 일정한 양의 자금을 연준에 일정 기간 예치하는 기간제 예금rerm Deposit 규모의 확대도 거론되는 방식이다. 미국이 이런 정도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더라도 한국경제에 큰 충 격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여전히 있다.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다. 과거에 그런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4년 6월 미국 연준은 부동산 버블 등 자산시장 인플레이션을 우려해서 24개월간 17차례에 걸쳐 금리를 1,00%에서 5.25%까지 급격하게 인상했다. 이 사이 신흥국의 주가는 69%나 올랐다. 한국의 주가도 3배 상승했다. 서울의 아파트 가격도 18.93%나 올랐다. 미국이 금리를 올렸어도 돈 풀리는 효과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신흥국 등에서 거의 동시 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도 견고하게 성장했다. 원자재 가격은 여전히 상승했고, 글로벌 무역도 계속 확대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2008년 금융위기 전의 버블 호황기였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이유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중국의 상황도, 신흥국과 유럽의 상황도 완전히 다르다. 거기에 당시 에는 없었던 석유전쟁으로 인한 초저유가 사태, IS 테러의 위험 등 심 각한 문제가 추가되었다. 한국의 경우도 당시와 비교해 제조업 경쟁력, 가계부채 수준, 인구 구조, 내수 시장 여력, 기업부채 수준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2004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고 있다. 2004년과 비교해서 낫다고 평가할만한 점은 외환보유액이 좀 더 많아졌다는 점, 그리고 무디스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Aa2로 올렸다는 점뿐이다.
- 일본은 지난 '잃어버린 20년 기간에 강제적인 구조조정을 거쳤고, 자산가치도 1/4로 줄었고, 초고령화 충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양적 완화를 좀 더 하고, 자산 버블이 좀 더 부풀어 올라도 생각보다 큰 타격이 없다. 실업률도 3%대로 안정적이다. 인플레이션율은 여전히 제로에 가깝다. 타격이 일어나더라도 신흥국과 동아시아, 중국의 위기를 지난 이후로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일본은 시간을 벌 수 있다. 일본은 환율이 오르거나 인플레이션율이 오르는 것은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기준금리가 오르는 것은 감당할 수 없다. GDP 대비 250%를 넘은 부채 때문에 금리가 오르면 이자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이자를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추가로 국채를 발행해야 하고, 이는 다시 국가 부채의 급격한 증가를 초래하는 악순환을 만들어 일본 파산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 일본은 지금도 한 해에 23조 엔을 이자로 낸다. 지난 3년간 이자로 나간 돈이 일본 연간 예산의 40% 정도이다. 일본은 2009년이 이미 실질적인 채무불이행 상황에 진입했다. 2014년 일본 GDP는 4조 7,700억 달러, 일본의 부채는 11조 5천억 달러 정도다. 부채를 다 갚으려면 300년 이상 걸린다. 금리가 1% 인 상되면 이자 부담액이 1,500억 달러 늘어난다. 일본 정부 재정수지는 1992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적자다. 일본은 미국과 밀착외교를 펼치고 있어서,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 상하는 과정에서도 최대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이 아시아 대위기 국면을 지나면서 미국 국채를 매각하면 일본이 다 받아 서 사들일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밀착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다가올 아시아 대위기 구간을 지날 때 도 한국, 중국, 일본 3국 중에서 가장 여유가 있고 사용할 카드가 많 은 나라가 일본이다.
- 일부에서는 가계부채를 평가하며 소득 상위 20% 가구가 전체 가 계부채의 46.5%를 가지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 논리에는 함정이 있다. 첫째, 소득 상위 20% 대출자의 상당수가 베이비붐 세대로서 앞으로 5년 안에 은퇴하거나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 이들은 은퇴 후 소득이 절반 이하로 줄어도 계속해서 이자와 원금을 갚아야 한다. 둘째, 소득 상위 20% 중에서 일부는 부채 레버리지를 사용해서 3채 이상의 주택을 보유한 사람들이어서 기준금리 인상과 집값 하락에 취약하다. 미국의 경우 저소득층이 무리하게 집을 사서 문제가 발생했다. 때문에 한국은 안전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저소득층은 집을 살 수 없다. 고소득층이 무리해서 집을 샀다. 국민건 강보험공단의 분석에 의하면, 2015년 기준으로 2채 이상의 주택 보 유자는 137만 1,352명이고, 3채 이상의 주택보유자는 67만 9,501명 이며, 5채 이상의 주택보유자는 16만 1,463명이다. 서울시로 한정해 서 보면 가장 많은 집을 보유한 한 명이 277 채를 보유하고 있고, 상위 100명이 9,314 채를 가지고 있다. 셋째, 2015년 한국은행이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2014년 소득 5분위(상위 20%) 367만 9천 가구 가운데 265만 가구 (72.0%)가 부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소득 상위 20% 가구가 전체 가계빚의 46.5%(500조 원 정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국정감사에서 지적된 것처럼, 고소득층이라도 빚을 내서 집을 산 사람들은 소유 자 산의 76%가 부동산이어서 금융자산이 평균 1억 7,298만 원으로 부 채가 없는 가구의 평균 금융자산 2억 8천 666만 원보다 오히려 1억 원 정도가 적었다. 그래서 5분위 계층이라도 빚을 내서 부동산을 구 입한 가구는 금융자산 대비 부채비율이 74.7%에 달했다. 5분위 전 체 계층의 자산 대비 부채비율이 45.5%로 안정적이라는 해석도 빚내서 부동산을 구입하지 않은 가구들까지 합산하여 평가할 때의 해 석에 불과하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분석에 따르면 금융위기 발발 전 인 2007년 미국의 경우, 소득 5분위 부채 집중도는 50.2%로 한국의 46.5%와 비슷했다. 넷째, 신흥국 퍼펙트 스톰과 아시아 대위기가 발발하여 한국 내수경제와 기업 경영 상황에 직접적인 위기가 발생하면, 일부 기업이 파산하고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 상위 20% 중 일부는 직장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이 보유한 주택담보대출은 곧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된다.
- 달러의 순환이 만들어내는 세계경제의 7가지 변화 패턴
1단계: 달러의 탈 미국단계.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추가 인하, 양적 완화 정책 실시로 달러가 미국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미국 내 인플레이션 상쇄 작용. 미국 자산 버블(인플레이션)의 해외 수출 본격화. 미국 핫머니, 헤지펀드 활동 본격화.
2단계: 세계 경제 호황기 단계. 미국 외의 국가들의 기준금리 인하, 양적 완화 정책 실시 추종으로 세계경제 호황기 시작. 전 세계 자산 버블 형성 시작. 제1 기축통화 국가인 미국의 무역수지 및 재정수지 적자 확대.
3단계: 전 세계 인플레이션 단계. 달러 유동성 증가로 미국 내에서는 인플레이션 위험 직면, 미국 밖에서는 약달러 현상 발생. (달러 가치 하락과 세계 경제 호황으로 인한 수요증가 때문에) 달러로 결제되는 유가 및 원자재 가격 상승, 전 세계 인플레이션율 증가.
4단계: 달러화 위기 단계. 달러 가치 하락으로 인한 달러화 위기 시작.
5단계: 미국 기준금리 인상 단계. 달러 가치 수호와 인플레이션 통제를 위해 미국 연준 기준금리 인상 시작.
6단계: 세계 경제 대위기 단계. 강달러와 각국의 기준금리 인상 추종 현상으로 미국 내 경제 충격 발생.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 경제 대충격 발생(금융위기, 외환위기), (달러 가치 상승과 세계 경제 불황으로 인한 수요 감소 때문에) 달러로 결제되는 유가 및 원자재 가격 하락. 기준금리 인상으로 체감 경기 급락. 미국 보호무역주의 정책 실시.
7단계: 미국 및 세계 경제 회복 단계. (경제 회복을 위한 유동성 공급을 위해)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약달 러로 추세 전환 시도) 시작, 미국 정부의 강력한 경기 부양책 실시(기술 버블 유도), 저유가로 물가 안정,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미국 외 국가들의 위기로 상대적 강달러 현상 지속으로 인해) 미국으로의 자 본 회귀가 일어나면서 고금리 상황에서도 미국 내 자산 가격 상승 시작, 경제 충격 이후 회복 기대심리 상승으로 자산시장 회복 시작, 소비심리 개선, 미국 경제 회복 시작.(다시 1단계로 전환)
- 많은 사람이 중국만은 역사상 예외적으로 한계가 없는 성장을 할 것이라고 착 각한다. 심지어 전문가들조차도 중국은 영원히 성장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제부터 중국에게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성장 의 속도다. 성장률이 하락하면서 속도가 예전만 못하거나 급히 낮아지면 중국 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관건은 중국의 성장률이 선진국 직전 수준의 안정기 단계로 하락하는 시기가 언제일지의 문제이다. 성장률 하락 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인구구조의 변화, 수출 둔화, 정부 부채의 증가. 금음의기의 반복적인 발상 등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생산가능인구 하락이 장기화하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경제성장률이 15% 하락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전문가들은 도시화율이 608 를 넘어서고 저축률이 15%대 밑으로 떨어지면 고도성장이 끝나고 안정기 단기에 접어들 것이라고 평가한다. 현재 중국의 도시화 추세와 소비 진작 정책을 감안하면 아무리 늦게 잡아도 2020년경이면 고도성장이 끝나고 4~5%대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것으 로 예측된다.
- 1970년대 미국의 상황을 보자. 1970년대에 미국은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스테그플레이션과 달러 초약세로 고전 을 면치 못했다. 견디다 못한 미국 연준은 어쩔 수 없이 1980년 기준 금리 인상을 단행한다. 강력하고 빠른 금리 인상이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고금리가 경제성장을 가로막을 것이 라는 예측과는 달리 1981~1985년 사이에 미국 GDP는 44% 성장했 다. 미국을 따라 기준금리를 올렸던 다른 나라들은 같은 기간 GDP 가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앞으로 4~5년 동안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강달러 현상이 나타나면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자국 통화 표시 자산을 투매한다. 반대로 미 으로는 달러 표시 자산을 구매하기 위해 외국 자본이 유입된다. 달러의 제1 기축통화 지위가 발휘하는 힘 때문이다. 제1 기축통화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전 세계 경제가 위축되기 시작하면 상대적 으로 좀 더 안전한 자산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달 러 강세가 부담스럽기는 하나 달러나 달러화 자산을 투매하기보다 는 상대적 안정성이 높은 달러가 더 오를 것으로 예측하고 추격 매수 에 나선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미국 내에서 당장은 대출이 줄어들 어 자산가격이 하락하는 리스크가 발생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리스크는 강달러를 추격 매수하는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상쇄된다. 이런 현상이 확인된 다음부터는 기준금리가 추가로 인상되어도 미국 내에서 대출이 늘어나면서 시중 통화량이 증가한다. 이런 마법이 가능한 또 하나의 이유는 5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유로달러(미국 이외의 은행, 주로 유럽의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달러 자금)가 저렴한 비용으로 미국 은행을 거쳐 시중으로 통화를 공급하 기 때문이다. 유로달러는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분보다 저렴한 이자 율로 미국 안으로 통화를 공급할 수 있다. 그 결과 기준금리 인상분 을 어느 정도 상쇄해서 금리 인하 효과를 만들어 준다. 기준금리가 인상되는 국면에서 이런 일은 미국 내에서만 일어난다. 유로달러는 무국적이어서 어느 나라의 통제도 받지 않는 특혜를 받는다. 통제를 받지 않기에 유로달러의 예치와 대출은 전 세계 국경 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이런 특성 때문에 유로달러는 유 럽 각지의 금리 차나 환차익을 쫓아다니는 핫머니의 성격을 띤다. 유 로달러 거래의 중심지는 런던과 금융거래가 활발한 유럽의 주요 도 시들이다. 유로달러는 1950년대 초 미-소간 냉전이 격화될 시절에, 공산권 은행이 미국 은행에 예금해 놓은 미국 달러가 미국 정부에 의해 동결되거나 몰수될 것을 우려해 서유럽 은행에 맡긴 데서 기원한다. 그 후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커지자 대량의 달러가 유럽에 누적되면서 유로달러 시장이 급속히 발전했다. 자금 보유자 측에서는 미국 시장보다 고리로 운용되고, 유로 자금을 빌리려는 사람 입장에 서는 시장금리보다 저리로 대규모 자금 조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매 력적이다. 1973년 이후에는 대량의 달러를 보유한 중동산유국 자금도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미국 기준금리가 인상되고 강달러 추세가 시작되면 유로달러도 역외城外, Offshore 달러 대출 방식으로 미국으로 움직인다. 역외 달러 대 출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미국에서 미국 밖으로 하는 대출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밖에 있는 유로달러가 역으로 미국 본토에 통화를 공급하는 것이다. 유로화가 이런 방식으로 미국 본토에 대출을 시행하면 어떤 이득을 볼까?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유로 달러는 국적이 없다. 미국 연준이나 미국 역내 금융기관의 관리 감독 에서 벗어나 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것에 직접적 영향을 받 지 않는다. 미국 본토의 은행이 유로달러를 빌려다 기업과 개인에 대 출을 해주더라도 지급 준비금 제약에서 자유롭다. 미국 기준금리보다 낮게, 지급 준비율 규제에서 벗어나서, 더 많이 대출할 수 있다. 이 런 이득 때문에 달러 금리가 올라갈수록 미국 본토로 들어오는 유로 달러의 규모는 더 커진다." 미국 시장으로서는 강달러, 높은 기준금 리가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부작용을 상쇄시켜주는 훌륭한 도구다. 유로달러가 움직이는 구조를 고려할 때 이런 효과가 나타나려면 2가지 조건이 나빠져야 한다. 다른 하나는 강달러 추세가 일어나야 한다. 앞으로 4~5년은 이 두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는 기간이다. 유럽이 디플레이션 국면을 지나고 있고, 신흥국과 동아시아에 곧 퍼펙트 스톰 이 발생할 것이며, 한국과 중국 경제도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 만으로도 달러는 강세다. 여기에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마저 인상한다. 달러의 상대적 가치는 초강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유로달러로서는 최대의 수익 기회다. 이를 놓칠 이유가 없다.
- 물론 위안화의 SDR 편입은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위상을 높여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위안화의 SDR 통화 바스켓 편입이 앞으로 4~5년은 양날의 검이 될 것이라고 본다. 과잉생산과 높은 부채 레버리지, 그림자금융에 의존하는 중국경제는 현재 멈출 수 없는 자전거 와 같다. 중국이 앞으로도 6~7% 성장률을 유지하려면 부동산과 제 조업, 금융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늦출 수 없다. 중국 정부가 고삐를 쥐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러나 SDR 통화 바스켓 편입 때 문에 중국은 5년 동안 과거에는 없던 부담을 안게 되었다. 중국의 SDR 통화 바스켓 편입은 영구적 편입이 아니라서 5년마다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제까지의 성과로 바스켓에 들어갔지만 5년후에 다시 편입을 유지하려면 앞으로 5년 동안 중국 금융 시스템의 추가적 개혁과 개방이라는 성과를 보여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 연출한 성과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SDR 편입 직후 금융 개혁 시범 지역을 선정하고 추가 금융 개혁과 개방을 시작했다.
- 신용창조에 의한 경제성장 시스템의 부작용이 커지는 상황에서 금융은 의외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금융위기는 몇 개의 이질적 원인이 동시에 혹은 도미노처 럼 순치적으로 일어나면서 금융회사의 신뢰가 무너질 때 발생한다. 금융위기 는 경제위기의 일부다. 그래서 금융위기는 밑바탕에서 무언가 경제적 취약성 이 오랫동안 고착된 상태에서 위기를 촉발하는 방아쇠를 당기는 사건이 발생할 때 일어난다. 경제위기는 크게 3가지로 나눈다. 금융위기, 재정위기, 실물경제위기다. 이 중에서 금융위기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금융거래에서 발생하는 위기다. 금융위 기는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금융거래가 갑자기 크게 위축되는 단계다. 이유는 이자비용 감당 불능이나, 만기 연장 불가능 상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원금 손실과 담보로 잡힌 자산 가격의 급락이 발생한다. 2단계는 금융거래 자체가 중단되는 위험이 시작되고 금융기관의 금융 중개 기 등의 일부나 전체가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상황으로 치닫는 단계다. 금융시장 과 시스템에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지는 단계로서 자산시장 전체의 가격 하락과 금융회사의 파산이 일어나기도 한다. 2단계까지 진행되면 금융권의 위기가 실물경제로 전이轉移된다. 기업의 자금 조달에 일시적 문제가 발생하고, 실물 경기가 침체하면서 기업 파산이 추가로 일어나고, 실업률이 증가한다. 금융위 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세수 감소분, 금융권과 기업 부실의 일부를 국가가 떠 안고, 금리 상승으로 인한 국가채무 이자 부담도 증가해서 국가부채가 증가한다. 참고로 IMF는 금융위기를 은행위기, 외환위기, 외채위기 , 체계적 금융위기 로 나눈다. 은행위기는 뱅크런 (예금 인출 사태)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위기이고, 외환위기는 통화가치 폭락 등 이 발생하는 위기이고, 외채위기는 외국에서 빌린 채무를 갚지 못하는 위기이 고, 체계적 금융위기는 금융 중개 기능에 일시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서 실물경제까지 위기가 파급되는 상황이다.
- 2022년 중국 역사상 최악의 권력투쟁이 일어날 수 있다. 중국 인민들이 바라는 시진핑의 반부패 개혁은 성공하기 힘들다. 첫째, 부패가 최고위층에서 하급관료까지, 중앙에서 지방까지 만연 해 있다. 심지어 시진핑의 친적들이 희토류 생산 회사의 주식, 부동 산 등으로 보유한 재산이 4억 달러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둘째, 부패가 이렇게 만연한 상황에서 부패자들을 숙청하면 정치 보복으 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시진핑의 서슬퍼런 칼날에 잠시 엎드 려 있지만, 임기 말이나 임기가 끝난 후 반대파의 정치 보복이 발생할 수 있다. 세력 간의 정치 투쟁이 과열되면 공산당이 공멸할 수도 있 다. 중국 경제의 상당 부분이 덩샤오핑의 후예들인 태자당-상하이 방의 교집합 세력이 소유한 기업에 의존한다. 이들이 무너지면 중국 경제가 무너진다. 파벌투쟁에 의한 공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반부패는 성공하지 못한다. 마지 막으로 부패 척결에 성공해서 OECD 국가 수준의 투명성과 청렴한 공직사회를 만들면, 그것은 중국을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철저하게 할 수 없다. 시진핑은 “서양의 일곱 가지 가치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강조. 일곱 가지 가치는 서구 시민사회, 자유시장, 민주주의, 독립된 미 디어, 언론자유, 인권, 사법부 독립 요구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 체제 를 위협하는 일곱 가지 가치가 바로 천안문 민주화운동에서 요구했던 가치다. 만약 공산당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면 민주화 세력에게 명분을 줄 것이다. 높은 실업률과 극심한 부의 불평등을 경험하고, 사 회복지 혜택의 사각지대에 있는 농민공과 대졸 실업자들의 불만이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경제 개혁에 무능한 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개혁 요구가 민주화 세력과 만나게 될 수 있다. 만약,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 민주화 요구 시위에 가담하면 전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다. 여기에 이슬람 지하드 세력 과 연계된 소수 민족이 반체제 운동 연합전선을 형성하면 사태는 걷 잡을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세력을 묶는 구심점이 경제적, 정치적으 로 중국이 약한 시기에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불과 100년 안에 두 개의 중국 정부가 무너졌다. 1911년에 청 왕조, 1949년에 국민당 정부가 무너졌다. 2022년 중국 역사상 최악의 권력투쟁이 일어난다. 면 중국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한편 3개 파벌을 육성하여 정치 적 견제와 균형을 꾀했다. 공청단파靑團脈, 태자당파太子黨派, 상하이 방파上海派의 3개 파벌이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각각 3명씩 차지 하여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게 했다. 공청단파는 1922년 중국사 회주의청년단으로 출발했고 중국 공산 혁명의 전위대 역할을 하는 최대 파벌이다. 후진타오가 대표 인물이다. 태자당파는 공산 혁명을 주도한 세대의 자녀들이 주축을 이룬다. 시진핑이 대표 인물이다. 상 하이방은 이념보다는 경제를 중시하는 파벌이다. 상하이에서 시장, 당 총서기를 지냈던 장쩌민 주석의 후광으로 급성장했다. 1981년에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주석직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고, 현 주 석이 한 단계 건너서 차차기 주석을 지명하는 격세간택 제도를 도입하고, 자신은 후진타오錦濤를 미리 선택했다. 장쩌민은 시진핑 을 선택했다. 현재 주석이 한 대를 걸러 미래 주석을 임명하여 정치보복 가능성을 낮추려는 의도였다. 격세간택을 하면 정치보복이 쉽지 않다. 하지만 현재 주석이 다음 주석을 임명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퇴임 후를 보호받을 수 없다는 약점이 생긴다. 그리고 다음 주석이 정치보복을 하고, 격세간택제를 폐지할 수도 있다.
- 영국의 최대 무기는 함대도 아니고 잘 조련된 군인도 아니었다. 최 대 무기는 대담한 전략이었다. 무적의 스페인 육군이 영국 땅에 발을 딛기 전에 바다에서 승부를 걸었다. 함대함 전략도 수정했다. 당 시 함포들은 무겁고 컸다. 포탄이 클수록 파괴력이 컸지만, 사정거리 는 짧았다. 영국 해군은 다르게 생각했다. 포탄의 크기는 줄이고 사정거리를 늘렸다. 파괴력은 줄어들어도 먼 거리에서부터 적선에 포 격을 가해 무적함대의 대형을 분쇄하고 함선을 한 척씩 공격해서 침몰시키는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을 바다에서 궤멸시켰던 전략과 비슷하다
- 대포와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칼레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영국의 주철 대포다. 16세기의 대포는 주로 청동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폭발해도 부서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초기의 주철 대포는 쉽게 폭발해서 포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부유한 대륙 국가들은 청동 대포를 선호했다. 하지만 영국은 청동 제련 기술이 떨어지는 데다 가난한 영국 왕실이 감당하기에는 청동이 너무 비쌌다.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는 결국 주철 대포에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다.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철 대포는 청동 의 4분의 1 정도의 가격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대포 제작자들과 영국 의 제철 장인을 고용해 성능이 뛰어난 주철 대포를 제작하기 시작했 다. 1588년, 영국은 성능이 좋고 믿을만한 주철 대포를 만드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전략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전략이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서 가지고 있는 자원, 역량, 조직을 최고의 성과를 내도록, 재조정할 수 있다. 시스템도 바뀐다. 영국 함대는 자신들의 전략에 맞게 주력이었던 갈레온선을 개조해서 쾌속형 갈레온선을 만들었다. 항 해 속도를 높이고 방향 전환도 빠르고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갑판과 뱃머리를 낮추었다. 배의 선체를 좁고 긴 유선형으로 개조하여 더 빠른 속도를 얻을 수 있게 만들었다. 노를 젓는 갤리의 장점을 갈레온선에 접목한 것이다. 갤리의 장점과 갈레온선의 장점만을 결합한 결과로 스페인의 갈레온선보다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고, 항해 속도도 빨라졌으며, 기동성이 우수해졌다. 배의 중심이 더 낮아져서 동급의 배보다 2배 많은(혹은 더 크고 무거운 함포를) 실을 수 있게 되었 다. 전략에 맞도록 배를 최적화시킨 것이다. 드레이크는 해군 병력의 구성도 전략에 따라 재정비했다. 배 위에 서의 백병전은 포기했다. 스페인 배가 나타나면 빠른 속도로 배를 이리저리 기동하며 대포를 쏘고, 스페인 배보다 빠른 속도로 도망을 가는 전략을 준비했다. 병사들도 이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정확하고 빠르게 함포를 쏠 수 있고 작은 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선원들로 구성했다. 34척의 쾌속형 갈레온선을 제외한 나머지 배들도 기동 및 관리가 손쉬운 소형 배로 구성했다. 1588년 7월 29일, 스페인 무적함대는 레판토 해전에서 사용했던 초승달 대형으로 도버해협(프랑스에서는 칼레 해렵으로 부른다)으로 진입하면서 '칼레 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함대는 영국에서 불과 35.4km 떨어진 프랑스 칼레Calais에서 파르마 공이 이끄는 18,000명의 육군부대를 싣고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하려는 작전이었다.(칼레 해전은 살라미스 해전, 한산도 대첩, 트라팔가 해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海戰으로 꼽힘) 7월 31일, 스페인 무적함대가 칼레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 함대는 플리머스 항구를 나와서 무적함대의 후미를 공격했다. 영 국 해군은 스페인 함포의 사정거리 밖에서 계속 함포만 쏘았다. 스페 인 함대는 레판토 전투에서처럼 영국 함대를 초승달 대형에 가두고, 크고 무거운 함포를 쏘아 돛을 부러뜨리거나 함대를 대파한 후 갈고리로 배를 걸고 넘어가 백병전으로 영국 함대를 궤멸시키려 했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상대적으로 사정거리가 긴 함포를 이용해서 스페인 함대의 사정권 밖에서 함포를 쏘아 접근을 막았다. 이렇게 영국은, 초승달 대형 안에 가두어 갈고리 걸 기회만을 노리는 스페인의 전술을 무력화시켰다. 결국 무적함대는 후퇴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 이 쏜 2천 발이 넘는 포탄은 작은 구멍만 내는 가벼운 쉿 덩어리에 불과했기에 스페인 함선은 단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영국군은 4개의 소함대로 나누어 스페인 함대의 후미를 집요하게 따 라다니며 함포 공격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영국 함대로서는 스페인의 견고한 초승달 대형을 깨뜨릴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다. 8월 7일 밤, 스페인 함대는 칼레에 정박하여 파르마 공의 육군부대 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스페인이 영국군을 도와 신교(프로테스 탄트)를 지킨 바람이라는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트 바람'이라고 이름붙인 남서풍이 정박 중인 스페인 함대를 향해 불기 시작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영국 함대는 8척의 화공선火攻船으로 신속하고 강력한 화공을 전개했다. 조류도 해안 쪽으로 강하게 흘렀다. 화공에 스페인 함대는 우왕좌왕했다. 사실 이 화공으로 스페인 함선은 한 척도 침 몰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함대는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며 공포 에 휩싸여 닻줄을 끊고 사방으로 도망갔다. 마침내 초승달 대형이 깨진 것이다. 1년 전, 스페인군은 벨기에 안트베르펜을 포위하고 네덜란 드 독립군과 전투를 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군은 스페인 함대를 향해 이탈리아 기술자인 지암벨리가 설계한 폭발하는 화공선을 보 냈다. 화공선이 다리에 충돌하여 폭발하면서 스페인군 3천 명이 죽 었다. 이것이 스페인 함대가 화공선을 보고 도망친 이유였다. 스페인 함선들은 닻줄을 끊고 도망가기 바빴다. 승기를 잡은 영국 함대는 한 번 더 과감한 전략을 시도한다.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근접 포격으로 전환한 것이다. 드레이크는 도망가는 스페인 함대를 쫓으며 남아 있는 모든 포탄 을 퍼부었다. 근접 포격을 당한 스페인 배들은 구멍이 뚫려 벌집이 되고, 배에 타고있던 스페인 육군은 겁에 질렸다. 결국, 스페인 무적함 대 사령관 시도니아는 육군을 영국에 상륙시키는 전쟁의 목표를 포 기하고, 부서진 배들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북쪽으로 도주했다. 스페 인으로 귀국하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결정적 참변을 당한다. 스페인으로 겨우 살아서 돌아간 함선은 절반도 안 되는 53척이었다. 그것도 심하게 부서진 상태로 말이다. 1571년의 레판토 해전과 1588년의 칼레 해전 사이에는 불과 17년 의 간격이 있었을 뿐이다. 그 17년 사이에 스페인 무적함대는 이미 낡은 함대가 되었다. 스페인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자 신이 이미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낡은 사고를 비웃는 것처럼 혁신의 속도는 항상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칼레 해전 이후 스페인은 기울기 시작했고, 영국은 350년 동안 세 계의 바다를 지배했다. 영국은 대담한 전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 수 세에 몰린 전세의 판을 뒤집었다. 해전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을 향한 대담한 도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다와 해외에 영국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것을 통찰했기 때 문이다. 펠리페 2세는 과거에 집착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미래에 투 자했다. 미래를 향한 대담한 도전이 승부가 뻔해 보이는 두 나라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칼레 해전의 교훈을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때이다. 판이 바뀌는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패러다임 전환기에는 주저할수록 몰락의 속도가 가속화된다. 앞으로 5년, 판을 바꾸는 주체가 되어야 살아남 는다. 생존을 넘어 판을 바꾸는 주도자가 되고 싶은가? 대담한 전략 을 세우고 대담하게 행동하라.
- 경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고, 업을 재설정하라. 마케 팅 천재인 세스 고딘seth Godin 은 연결을 가로막는 장벽들이 점점 사라 지고, 연결이 많아질수록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으로 예측했다. 이러한 시대에 중요한 것은 '지금 얼마만큼의 자산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과감해질 수 있느냐'라고 했다.
- 구글이 자율주행자동차에서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는 것 중의 하 나는 '3D 지도다. 3D 지도 기술은 자율주행자동차에 매우 중요하 다. 3D 지도가 사람의 눈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3D 지도의 정밀성 과 정확성은 2.0의 시력을 가지고 운전하느냐, 흐릿한 시력으로 운전 하느냐의 차이를 가른다. 구글은 자동차 시력을 확보하기 위해 4가 지 데이터를 덧씌워 3D 지도를 만든다. 첫째, GPS Global Positioning System 로 오차범위 5m 내외의 위치를 측정한다. 위성위치측정 시스템이라 불리는 GPS의 본래 이름은 GNSSGlobal Navigation Satelite System(글로벌위성항법 시스템)다. 1960년대부터 미국은 군사용 위성위치측정 시스템을 거의 독점적으로 개발해 왔다. 1993년 12월에 빌 클린턴 대통령은 국 민의 세금으로 연구 개발한 GPS 기술을 민간에서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보고, 민간 이용을 허가했다. 그 후로 2010년 러시아, 2012년 중국 2014년 유럽연합이 독자적인 GNSS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위성위치측정의 정밀도가 한층 높아진 '멀티 GNSS'인데, 민간 기업의 GNSS 사용의 대부분은 자동차와 스마트폰 용이다. 스마트폰이나 자동차에 장착된 GPS 수신 장치는 최소 4기 의 위성으로부터 신호를 받는데, 정밀도가 5~10m 정도인 저가형 기 기이다. 만약 정밀도를 더 높이려면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 중국, 일 본이 운용하고 있는 SBAS(Satelite Based Augmentation System)이라 불리는 정지 위성형 위성항법 보강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측량이나 건설 기기용은 1cm 정도까지 오차범위를 줄인 정밀도를 자랑한다. 자동 차나 스마트폰을 만드는 회사들은 앞으로 10cm 정도의 오차 범위 를 갖는 정밀한 수신기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글의 GPS는 스마트폰이나 일반 자동차에 달린 수신기보다 훨씬 더 정밀한 측정 범 위를 갖는다. 여기에 구글 지도와 구글 어스에 화상 처리 프로그램인 피카사를 결합시켜 기본적인 3D 지도를 만든다. 그 다음으로 교통 표식, 신호등, 노면 표시 등의 도로 인프라 정보를 입력한 데 이터를 덮어씌운다. 마지막으로 구글 자동차에 부착된 각종 탐지 장치에서 수집한 3D 자료를 보강하여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아주 정밀 한 3D 지도를 만든다. 구글의 자동차 지붕에는 1분에 300~900번 회전하는 '라이다'라는 장치가 달려 있다. 이 장치는 미국 벨로다인velodyne Inc. 사가 만든 것으로, 음파 기술을 사용해서 자동차 주위에 있는 건물과 자동차 같은 사물은 120m, 노면 상황은 50m를 360도 측정하여 3D 지도를 만든다. 이외에도 자동차의 앞뒤에 밀리파 레이 더, 차 안에는 단안 렌즈 카메라를 부착하여 내외부의 정보를 수집 한다. 여기에 추가적인 데이터를 덧붙일 수 있다. 구글은 운전자가 도로 를 달릴 때 진입 속도, 브레이크를 밟는 지점, 코너링의 속도 변화, 커브길을 돌아 나갈 때의 가속도 변화 같은 자동차의 운동 상황을 판단하면서 도로의 기울기, 커 길의 곡률과 높이 차이, 차선폭 등의 미묘한 도로 상황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데이터화하여 클라우드에 저장, 분석, 예측하게 하는 똑똑한 3D 지도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는 엔진, 서스펜션, 브레이크, 타이어 등의 차량 내부 정보와 실시간 날씨와 시간별로 변하는 노면의 상태까지도 포 함하고 운전자의 운전 특성까지도 연결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든 지도는 자율주행자동차의 성능 향상에 직결된다. "정밀한 지도 데이터는 O2O 서비스와 연결하기 쉽다. 지도 데이터 에 주변의 상점, 건물, 각종 서비스 등을 연결해서 소비자가 움직이는 동선에서 실시간으로 물건을 구매하고 광고 및 각종 서비스를 소 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루에 2~4시간씩 매일 고정적으 로 자동차 안에 머물러야 하는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O2O 서비 스는 인터넷 쇼핑이나 홈쇼핑을 능가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다. 자율주행자동차에서 '3D 지도 정보와 위치 정보 해석 기 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BMW, 다임러, 아우디 컨소시엄이 약 3조 2,000억 원에 노키아의 지도서비스인 '히어HERE'를 인수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른 영국의 대담한 전략을 상기 해 보자. 엘리자베스 여왕은 큰 공을 세운 해적왕 드레이크를 영국 해군 중장으로 임명하고 함대 사령관에 앉히는 대담한 선택을 했다. 드레이크는 여왕의 대담한 도전을 승리로 끝내기 위해 대담한 전략 을 구상했다. 먼저 스페인 후방에 있는 보급기지인 카디즈 항구를 선 제 공격할 것을 여왕에게 제안했다. 1588년 4월 29일, 드레이크는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을 주력으로 한 영국 함대를 이끌고 스페인 카디즈 항구에 정박한 보급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37척의 적선을 침몰시 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성과는 본격적인 전투에 필요한 막대한 보급품을 빼앗은 것이다.
- 성공한 사람들은 기회를 포착하는 매와 같은 눈과 공포를 견뎌내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 급변하는 상황을 통찰하는 시선, 패닉과 아우성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 역사상 수없이 반복된 금융위기, 외환위기에서도 큰돈을 번 투자자들도 그렇 다. 그리스 신화에서 '기회'를 담당하는 신은 카이로스Kairo다. 시간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는 두 개다.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다. 그리스 신화에서 태초신太初 중의 하나인 크로노스는 과거부터 미래로 일정한 속도와 방향을 가지고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적인 시간, 자연적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 생로병사의 일반적 시간을 의미한다. 흔히 시간관리를 잘한다고 할 때 말하는 시간이 바로 크로노스 시간이다. 반면에 기회의 신이라 불리는 카이로스는 일생을 좌우하는 한순간의 시간, 인간의 결단이나 느낌과 생각이 반영된 주관적 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 신의 가장 독특한 점은 두 발이다. 올림피아의 카이로스 제단에 있는 조각상을 보면, 어깨에 큰 날개가 달려 있지만 양다리에도 작은 날개가 달렸다. 앞머리는 길게 늘어지고 뒷머리는 대머리다. 기회의 신은 앞머리밖에 없어서 빨리 간파하여 잡아채지 못하면, 뒤늦게 잡으려 해도 뒷머리가 없어서 헛손질만 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순간임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카이로스는 양손에 칼과 저울을 들 고 있다. 신중함과 날카로운 판단력을 의미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주관적이다. 신중함과 날카로운 판단력을 발휘해서 같은 시기를 남과 다른 나의 시간으로 만들어 활용하면 위기를 기회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다. 시간이란 말이 두 개인 것처럼, 큰 변화의 시기도 두 개다. 하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큰 변화의 시기다. 커다란 금융 충격이 만들어 내는 위기 속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의 기회다. 다른 하나는 크로노스 시간에서 큰 변화의 시기다. 기존 산업이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고, 새로운 산업과 비즈니스가 태동하는 시간이다. 컴퓨터, 인터넷 혁명, 모바일 혁명, 신기술 혁명은 크로노스 시간 관점에서 큰 변화를 초래 한다. 이 변화를 날카로운 판단력과 균형잡힌 신중함으로 통찰하면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 두개를 다 잡아야 한다. 매의 눈과 공포를 견뎌내는 심장을 가지고 대담한 전략을 구사하라. 현명한 사람, 미래를 준비한 사람에게 는 다가오는 아시아 대위기가 위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사업과 투자의 새로운 토대를 튼튼히 닦는 기회가 될 것이다. 새로운 부의 기회, 성공의 전략적 기회를 발판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큰 성공을 거두고,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위치에 올라서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자가 될 수 있다.
- 1981~1984년까지 미국의 기준금리는 10~20% 사이를 움직이는 초고금리였다. 하지만 금리가 폭등해도 GDP에서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육박할 정도로 대출이 증가했다. 강달러로 해외 자 본이 대규모로 미국 내로 유입되면서 초고금리 부작용이 상쇄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경제는 세출의 삭감, 소득세의 대폭 감세, 기업 에 대한 정부 규제의 완화를 특징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가 바탕 이 되고, 고금리와 대규모 해외 자본의 유입이란 날개를 달면서 유동성 증가, 인플레이션 억제, 경기부양, 고용창출의 호황을 맞았다. 1980~1985년 사이에 미국 GDP는 44%나 증가했다. 레이건 정 부 시절 미국은 경기 침체가 없는 사상 최장의 평화 시기 호황을 기 록했다. 반대로 강달러의 영향으로 서유럽과 개발도상국 대부분은 1980~1985년에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경제위기로 새로 집권한 유럽 각국의 정권은 강달러 압력에 굴복하여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잇달아 포기했다. 금리를 인상하고 긴축 통화 정책을 펼치고, 부채 디레버리징을 실시했다. 대대적 민영화도 이루어졌다.
- 미국의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항하는 국가도 있었지만 그 결과는 비참했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으로 14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프랑스 역사상 나폴 레옹 3세 이후로 가장 오래 집권했던 지도자이기도 했다. 사회주의자 미테랑은 1981년 첫 집권에 성공하자 르노 자동차, 에어 프랑스, 은행 등 기간산업을 국유화했다. 또한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사회보 장의 혜택을 확대하는 강력한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단행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의 심화, 실업률 상승, 경제 침체, 기타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했다. 그러자 미국은 프랑스 경제를 살릴 해법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권했다. 대대적인 민영화, 정부 재정 지출 축소, 시장 자유화 등을 요구했다. 미테랑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무시하며 공공기관의 민영화를 거 부하고, 대규모 통화 확장 정책을 펼치며 경제 성장을 꾀했다. 그러자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미국의 언론이 일제히 프랑스 정부가 사회 주의로 가려 한다며 맹공격을 퍼부었다. 뉴욕타임즈, 월스트리트 저널이 앞장섰다. 언론의 집중포화가 시작되고 이어서 미국 자본이 프랑스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국제 자본도 미국 자본을 따라 프랑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프랑화의 가치는 1주일 사이에 20% 급락 했다. 프랑스의 부자들도 자산을 국외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1983년, 미테랑 대통령은 항복을 선언하고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경제 정책도 미국의 요구대로 통화 긴축, 대규모 민영화 실시로 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 1985~1995년에는 비슷한 일이 일본과 동아시아, 남미에서 잇달아 일어났다. 미국이 일본 엔화를 절상시키고, 일본, 동아시아, 남미에서 자산버블이 일어났다. 미국도 기준금리를 계속 내렸다. 1988~1994년까지 달러지수가 85~100 사이를 오가며 약달러를 유지했다. 1979~1985년의 고유가 시기가 지난 뒤에는 걸프전으로 국제 유가가 잠시 치솟았던 것을 걸프전으로 국제유가가 잠시 치솟았던 것을 제외하면 저유가 시기가 이어졌다. 그 후 미국 경제가 되살아나고 인플레이션 조짐이 보이자 1994년부터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했다. 강달러 추세가 다시 시작되 어 달러지수가 1995년부터 오르기 시작해서 2002년에 120까지 상 승했다. 폴 볼커의 1980년대 1차 달러 강세기 이후 1995~2002년까 지 2차 달러 강세기가 왔다. 2차 강세기는 미국 경제 호황이 만들어 낸 강세기였다. 이 과정에서 1997년에 한국도 외환위기를 맞으며 미 국식 해결책을 그대로 수용해야 했다. 금융위기가 일본, 동아시아, 남미를 훑고 지나간 후 미국 연준은 다시 기준금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로는 역사상 최저점인 1%까 지 빠르게 내렸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전 세계 분위기가 달아오 르고 자산 버블이 부풀기 시작했다. 중국의 수요 증가와 전 세계 경 제의 호황으로 국제 유가도 역사상 최고 가격을 경신해 나갔다. 이렇게 모두가 약달러에 취해 있을 때, 2004년부터 미국이 전격적으로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한다. 그 다음 상황은 우리가 아는 대로 이다.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과정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다. 1980년 폴 볼커가 금리를 인상했을 때 부채가 많은 기업이 파산하고 농민들이 빚더미에 앉았듯이, 2008년에도 미국 경제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충격이 지나간 뒤 미국의 위상은 더 높아졌 다. 반복되는 패턴이다.
- 미래 대응 전략 7가지
1. 테슬라 전략이다.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리는 전략이다. 엘론 머스크는 전기자동차에서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태양광사업 을 전기자동차의 먹이로 주었다. 테슬라 자동차를 구매한 사람은 전기 충전이 평생 공짜다. 그 전기는 태양광발전소에서 얻는다. 테 슬라는 태양광발전 자체로 수익을 얻으려는 대신, 전기자동차의 수익을 위해 태양광사업의 수익을 버린 것이다. 이 승부수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 장인 기업 전략이다. 글로벌 기업이 100년을 가기는 힘들다. 하지만 장인 기업으로 변신하면 100년을 충분히 갈 수 있다. 수백 년도 갈 수 있다. 한국의 중소기업이 생각해볼 만한 전략이다. 장인 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술 혁신에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3. 터미네이터 전략이다. 이 전략은 주력 제품이라는 개념을 아예 없애는 것이다. 기업이 무너지는 결정적 이유는 주력 사업의 붕괴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은 수많은 사업을 한다. 하지만 스마트폰이나 반도체라는 주력 사업이 무너지면 그룹 전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 황당한 발상이지만, 주력 사업이 없으면 이런 식의 붕괴는 없다.
4. 칭기즈칸 전략이다. 유목민처럼 끊임없이 불필요한 것은 버리면서 빠르게 미래형 제품으로의 전환을 위해 달리는 전략이다. 이 전략을 구사하려면 자기 역량은 최소화하고 M&A를 통해 끊임없이 스 스로를 재창조하면서 변신을 계속해야 한다. 세계 화학업계 1위인 바스프가 좋은 예다
5. 클라우드 기업 전략이다. 신생산의 3요소(가상토지, 노동, 자본)를 활용하고 외부에서 자원을 얻으며 발전하는 전략이다. 내부에 자원을 집중하기보다는, 외부와의 연결을 강화하고 안티 고객까지도 활용하여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중국의 하이얼이 좋은 사례다. 하이얼은 2013~2014년에 전체 직원의 30%인 26,000명을 해고한 후 하이얼그룹 자회사인 샤오웨이공사小敬公司 직원으로 재고용 했다. 그리고 '작고 미세하다'라는 뜻의 샤오웨이小微 운동을 시작 했다. 26,000명의 직원 한 명 한 명이 창업자가 되어 하이얼과 협력하거나 계약관계를 맺고 1인 벤처로 움직이는 내부 혁신 운동이다. 하이얼그룹은 하이얼 브랜드를 이용하는 1인 벤처, 협력사, 소비자 등을 연결하는 플랫폼과 생태계를 관리한다. 또한 샤오웨이에 창업 플랫폼을 제공하고 창업에 필요한 다양한 지원도 실행한다. 2015년 현재 하이얼은 21개 플랫폼, 183개의 생태계, 3,914개의 샤오웨이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로는 2014년 1월 온라인 쇼핑몰에 출시된 지 20분 만에 3,000대가 팔린 기록을 가진 라이 진 게이밍북雷神遊?本이다. 이 사업은 하이얼이 75%의 지분을 가지 고 창업자 3명이 25%를 지분을 가지고 있다. 도요타도 수직계열 화, 규모의 경제 전략에서 벗어나 1,000개의 기업이 각각 5,000억 원씩 매출을 올려 전체 매출 500조 원을 달성하는 기업 전략으로 가고 있다.
6. 비즈니스 혁신 전략이다. 이 전략은 기술 혁신보다는 시장이 원하는 적정 기술을 목표로 한다. 비즈니스 혁신 전략을 구사하는 기업은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컨셉'을 개발하는 것을 더 중시한다. 기술 혁신은 성능을 개선하는 것이다. 기술 혁신은 장인 기업 전략에 어울린다. 반면에, 비즈니스 혁신은 전혀 새로운 컨셉으로 현재와 미래의 문제가 되는 이슈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전략에서 기술은 도구다. 기술 혁신은 최고의 기술이란 명예를 얻고, 그 분야에서만 1등이 되는 전략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혁신은 시장을 지배하는 기술, 상황에 필요한 최적의 기술을 지향한다. 시 장을 지배하는 기술을 가지려면 상황을 예측하고, 경쟁자를 예측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장 지배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비즈니스 혁신 제품은 한글, 거북선, 이순신 장군의 해상전술, 첨성대 등이다.
7. 규모의 경제 전략이다. 몸집을 최대로 키워 생존을 모색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서는 2가지 역량이 필요하다. 하나는 막강한 자본이다. 막강한 자본으로 투자를 계속해서 추격자의 기세를 꺾는다. 삼성의 반도체 전략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의 역량은 미래 예측력이다. 막강한 자본을 투자할 때의 위험성은 더 많은 자본을 투자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반복되는 경제위기다.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투자 리스크가 커지고, 투자가 독이 되어 돌아온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미래 예측력을 키워야 한다. 이 전략을 가장 잘 활 용하는 회사는 석유 기업 이다. 쉘은 오일쇼크의 가능성을 미리 예측해서 선제적으로 위기에 대응함으로써, 치명적 위기의 시기를 비약적 성장의 시기로 전환시켰다. | 또한 미래 예측을 통해 기회가 언제 올지, 언제 시장이 형성될지를 간파하고 미래에 먹거리가 되고 무기가 될만한 기술과 회사를 선제적으로 사들이는 과감한 배팅을 하는 것도 이 전략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미래자동차 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테슬라를 전격적으로 인수하는 대담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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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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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이 균형을 찾아간다는 기존의 패러다임은 잘못되었다. 시장은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틀린다. 하지만 시장은 스스로를 바로잡을 수 있고 때로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재귀적 과정을 통해 오류를 진실처럼 보이게끔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시장은 항상 옳게 보인다.
- 사회적 현상에 내재된 불확실성은 재귀성 개념과 진리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재귀성은 어떤 사물과 그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에 사용되어왔다. 나는 이 개념을 활용해 사람들의 생각과 그들이 맞닥트리고 있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양방향의 연관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지식이란 참인 명제를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명제는 사실과 일치할 경우에만 참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대응설에서 말하는 논리다. 명제와 사실이 일치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서로 독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세상의 일부인 상태에서 명제와 사실의 독립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사 람들이 지식에 기반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 다. 사람들은 지식이 결핍된 부분을 경험과 본능, 감정, 그리고 사회적 관습과 오해를 기초로 한 추측으로 채워야 한다. 불확실성을 세상사의 흐름에 개입시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선입견과 오해인 것이다.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재귀성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지 않았을까. 금융시장에 대해서라면 그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 재 귀성으로 인해 경제학자들은 자연과학자들이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방식으로 금융시장의 움직임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은 하나의 과학으로서 경제학의 입지를 확립하고 지키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귀성이론을 연구에서 배제시켜야 하는 입장이다.
* 진리대용설_corresportience theory of truth, 사람의 인식은 외부세계의 사물인 대상이 마음에 비춰짐으로써 성립한다는 이론이다. 즉 인간의 믿음과 인식이 참인지 거지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 믿 음과 인식에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 브렌트포드Brentford에서 수영장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런던정경대학의 합격통보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생각했다. 이때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었다. 이 책은 나를 충격에 빠뜨릴 만큼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했다. 포퍼는 나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공통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두 가지 모두 궁극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궁극적인 진 리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두 가지 이데올 로기는 현실에 대한 편향적이고 왜곡된 해석에 토대를 둘 수밖 에 없고, 현실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억압적인 수단을 동원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포퍼는 사회조직에 관한 다른 원칙을 제시했다. 그 원칙은, 궁극적인 진리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영역이고, 서로 다른 생 각과 다른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평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포퍼는 이 원칙을 '열린사회The open society' 라는 개념으로 표현 했다. 나치와 소비에트 점령기 동안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했던 나는 열린사회에 내포된 이상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나는 포퍼의 철학을 더 깊이 탐독했다. 포퍼는 최초이자 최 고의 과학철학자다. 그는 과학적인 이론들은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과학적 이론은 반론을 통해 허위 여부를 가려야 하는 가설로 취급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이라는 것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을 때에 한해서 임의의 가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입증과 허위 입증의 비대칭은 풀기 힘들었을 난해한 귀납적 문제에 해답을 제시했다. 사리에 맞는 소견을 아무리 들이댄다 한들 보편타당성을 내세우는 이론을 입증한다는 것이 어디 가능하겠는가. 포퍼는 입증 대신 허위 입증을 채택함으로써 귀납적 논리를 사용할 필요를 없앴다. 나는 이것이 포퍼가 과학철학에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 인지적 기능의 목적은 지식을 생산하는 데 있다. 지식은 사실과 부합하는 명제를 요구한다. 둘 사이의 일치가 성립되려면 명제와 사실은 서로 별개의 범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식의 추구는 곧 인식과 현실의 분리로 이어진다. 여기서 나 타나는 이원성은 본래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계 몽주의 시대에 사람들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을 믿었다. 그들은 현실이 이성과 분리되어 있으며, 독립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성이 완전하고 정확한 현실의 모습을 그려줄 것으로 믿었다. 이성을, 저쪽 편에서 발견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현실을 조명해주는, 일종의 탐조등처럼 작동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생각하는 행위자의 결정이 상황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가능성이 사고와 대상의 분리에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계몽주의는 재귀성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 계몽주의는 조작적 기능이 인지적 기능에 간섭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를 설정했다. 이는 조작적 기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계몽주의는 인식의 유일한 목적을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가정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이성' 이라고 지칭했던 것, 즉 내가 조작적 기능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무시하고, 이론이성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서 분리되었다. 이 때문에 현실에 대한 왜곡된 관점이 발생했지만, 당시 시대상에는 어울리는 세계관이었다.
- 내 학창 시절 이후로 경제학자들은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예측의 역할을 완전경쟁이론과 일치시키려고 했고, 결국 합리적 기대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나는 이 내용에 대해 연구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한 듯한 포 즈를 취할 수 없다. 다만, 내 이해가 정확하다면 이 이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시장 참여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다른 참여자들도 똑같이 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해 결정을 내린 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참여자들은 실제 최고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이 최고의 이익이라고 인식하는 것에 기초해 행동하며, 이 두 가 지는 반드시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는 행동경제학자들의 실험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시장 참여자들은 완전하지 않은 이해를 근거로 행동하며, 그들의 행동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기대와 결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둘 사이 에 차이점이 없다는 가정을 근거로 행동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합리적 기대이론은 전체 시장이 항상 개인투자자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주장으로 이런 난제를 극복하려고 한다. 합리적 기대이론에서도 참여자가 어떤 대상을 잘못 이해할 수 있고, 오해가 때때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시장 참여자들이 시장 움직임에 대 해 똑같은 모델을 사용하며,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경험으로부터 배워 결국에는 같은 모델로 모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해석으로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연 구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모델을 이용해 연구를 했고, 내 모델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덕분에 합 리적 기대이론이 터무니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내 연구 성과는 랜덤워크 이론 The theory of random walk 에서 허용되는 균형 이탈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 시장은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틀린다. 하지만 시장은 스스로를 바로잡을 수 있고, 때로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재귀적 과정을 통해 오류를 진실처럼 보이게도 한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시장은 항상 옳게 보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융시장은 경기둔화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둔화를 유발한다. 참여자들은 불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지 식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불완전하고, 편향되고, 잘못된 이해 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며, 따라서 결과물은 기대치에서 빗나 가기 마련이다. 불일치는 참여자들이 행동을 조정할 수 있게 만드는 유용한 피드백을 제공한다. 이런 과정에서 매번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시장은 이론적 균형을 향해 움직이는 것만큼 균형에서 멀어지며, 초기에 자기 강화를 하다가 결국 자멸하는 과정에 말려들 수도 있다. 거품은 종종 금융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위기는 금융시장 에 규제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금융시스템이 발전해온 과정이다. 즉 주기적인 위기가 규제의 형성으로 이어진 셈이 다. 금융시장을 하나의 역사적 과정으로 해석하기에 가장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감독 당국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 으면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감독 당국이 없으면 금융시장은 분명 붕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일관성 있는 감독을 받으며 움직이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실제 붕 괴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또 일상적인 상황에서 감독 당국이 규제를 완화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라면 위기상 황에서 기민하게 조치를 취할 수 있다.
- 2007년 봄 뉴센트리파이낸셜이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문제로 파산위기에 몰렸을 때 이른바 진실의 순간이 찾아왔고, 이어 주택 가격이 하락했지만 사람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명기가 펼쳐진 것이다. 씨티은행의 최고경영자인 척 프린스Chuck Prince는 이렇게 말했 다. “유동성이라는 음악이 멈추면 결국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흘러나오는 한 당신은 일어나 리듬을 타며 춤을 춰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춤을 즐기고 있다.” 마침내 분기점은 찾아왔다. 2007년 8월 이후, 한 분야의 시 장에서 다른 시장으로 도미노처럼 퍼져나간 부실로 인해 가히 재난이라 할 만한 가격 폭락이 현실화되었다. 이는 1997년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번졌던 이머징마켓의 위기를 연상케 했다. 급박함 속에서도 주식시장은 2007년 8월부터 10월 사이 급락을 멈추고 상승세를 회복했다. 내 모델로는 예측할 수 없 는 움직임이었다. 모델에서 나타난 바에 의하면, 주식시장이 단시간에 급격하게 붕괴되었다가 더디고 힘겹게 균형을 되찾 아가는 흐름이 펼쳐져야 했다. 모델이 제시했던 예측이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은 것은, 2007년 8월과 2008년 1월 사이 예견된 붕괴를 완벽하게 저지 하지는 못했지만 위기에 굴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위기의 순간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시장에 개입해 연방기금 금리를 인하했고, 주식시장은 과거에 그랬던 것 처럼 이번에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융위기의 여파로부터 경제를 보호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력을 회복했던 것이다. 하 . 지만 이런 믿음은 위험한 것이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이미 시장 개입이라는 카드를 과도하게 꺼내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경제를 보호하지 못했다. 이번 금융위기는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 애덤 스미스가 처음 도입하고,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발전시킨 완전경쟁이론이 바로 시장근본주의의 뿌리다. 제2차 세 계대전 후 시장근본주의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그 밖에 정부 의 개입에 근간을 둔 여러 정치사조가 몰락함에 따라 커다란 반사이익을 얻게 된다. 하지만 시장근본주의는 잘못된 전제를 갖고 발전했다. 정부의 개입에 항상 결함이 있다고 해서 시장이 완벽하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재귀성 이론에서 주장하는 기본적인 내용은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결과물에는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또 금융시장이 반드시 균형을 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도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금융시장은 극단적인 활황과 패닉으로 치닫는다. 이 때문에 금융시장은 자율에 맡겨지는 일이 없다. 시장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의무를 가진 금융 당국자들의 손에 맡겨진다. 대공황 이후 줄곧 금융 당국은 국제금융시스템이 붕괴되지 않도록 대처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실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 게도 시장근본주의가 되살아나게 된 주요인이 바로 그들의 훌 륭한 시장 통제였다. 내가 런던정경대학에서 공부하던 1950년대만 해도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았던 자유방임 주의는 1980년대에 다시 부활했다. 이 때문에 금융 당국자들 은 시장통제력을 잃었고, 그 틈을 타고 슈퍼 버블이 세력을 확장했다
- 재귀성 이론은 성격 면에서 균형 이론과 상이하다. 균형 이론 칼 포퍼의 과학적 방법 모델에 들어맞는 과학적 이론임을 표방한다. 또 자연과학 이론과 유사하게 결정적인 예측과 설명을 제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일반화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반면 재귀성 이론에서는 이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 재귀성 이론이 주장하는 것은 재귀성이 언제 발생하는 사건의 전개에 불확실성 요소를 개입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예측을 제공하는 이론을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 나는 재귀성 이론이 기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보다 현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해줄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과거의 패러다임이 수행했던 일을 재귀성 이론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즉 재귀성 이론은 자연과학처럼 일반화를 제공하지 못한다. 사회적 사건은 자연현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재귀성 이론의 기본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사건 속 에는 생각하는 참여자가 존재하며 이들의 편향된 관점과 오해 가 사건의 흐름 속에 불확실성을 개입시킨다. 결과적으로, 사 회적 사건은 자연과학의 보편타당한 법칙을 따르지 않고, 미리 예측하지 못하는 일방향의 경로를 따른다. 하지만 재귀성의 출 현이 참여자의 관점과 사건의 실제 상황 사이에 상호작용을 일 으킨다. 따라서 재귀성 이론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는 기존 의 사건을 보다 확실하게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 이는 과학적 이론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부분이다.
- 과거에는 신용위기가 발생하면 문제의 근원에 대해 보다 엄격한 규제를 가함으로써 위기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 시절 지배적인 사조가 되었던 시장근본주의의 영향력 아래 국제 금융위기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즉 미국의 은행은 수익을 올리는 데 더 큰 자율을 얻었다. 실제로 대공황 당시 은행에 부과되었던 모든 규제는 점 진적으로 사라졌다. 은행은 자유롭게 지점을 늘릴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지역으로 영업망을 늘리는 것도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수도 있게 되었다.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경계선은 점차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졌다. 집단대출제도로 인해 한 차례 곤욕을 치렀던 은행업 계는 채권 내역을 재무제표에서 덜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들은 대출채권을 모아 금융 당국의 규제를 받지 않는 투자자들 에게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보다 교묘한 형태의 금융상품이 새롭게 개발되었고, 보유 자산에 대한 기록을 재무제표에서 남 기지 않는 새로운 회계기법도 창안되었다. 그리고 슈퍼 버블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응집하기 시작했다.
- 은행의 리스크모델은 시스템 자체가 안정적이라는 가정 위 에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시장근본주의자들의 믿음과 반대로 금융시장의 안정성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문제다. 시장의 안정은 정책 당국자가 적극적으로 나서 관리해야 할 사안인 것이다. 그러나 실상 정책 당국자들은 시장 참여자들이 고안한 리스크 산출법에 의존한 채 업무를 추진했고, 통제할 수 없이 신용이 팽창하도록 길을 내주었다. 일례로, VaR 모형을 이용 한 리스크 산출법은 과거의 수치를 근간으로 한다. 신용팽창이 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과거 수치는 현재 상황을 판단하기에 적절치 않은 잣대다. VaR 모형에서는 두세 가지의 표준편차를 고려하는데, 아주 드물게 나타나야 할 높은 표준편차가 여기서는 너무도 자주 발생했다. 이는 분명한 경고신호였지만 시장 참여자와 마찬가지로 정책 당국자들도 이 신호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위기상황분석(stress test을 모형에 추가해 예기치 못한 일에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는가를 측정한 것이 전부였다. 다양한 형태의 합성 모기지 증권 역시 잘못된 전제, 즉 미국의 주택가치가 개별 지역에서는 등락을 보일 수 있지만 시장전체적으로는 안정을 이룬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이런 가정은 각각의 주택담보대출채권보다 여러 지역별로 광범위하게 리스크를 분산하는 구조화 파생증권이 더 안전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가정은 현실로 드러난 것처럼 온 나라에 엄청난 규모의 주택 버블이 형성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 정책 당국자들은 보다 현명하게 대처했어야 했다. 결국 정책 당국자들은 때때로 시장에 개입해야 했고, 그 개입으로 인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덕적 해이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조치 없이 입에 발린 말로 경고하는 데 그쳤던 정책 당국자들은 막상 위기가 닥치자 파산시키기에는 덩치가 너무 큰 금융회사들을 구제하느라 정신없었다. 정책 당 국자들도 자신들의 개입이 끊임없이 몸집을 키우는 신용팽창 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지 배적인 시장근본주의 풍조와 자신들의 성과에 심취한 나머지 시장이 자동으로 통제된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신용팽창이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된 경위다.
- 이 글을 작성하는 2008년 4월 현재, 미국의 경기침체는 불 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침체가 전 세계적인 경 기침체로 이어질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강력한 경기확장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경기침체 및 유럽과 일본의 성장둔화를 상쇄해 훌륭하게 균형을 맞춰줄 것이다. 물론 이들 지역의 경제성장이 세계 경제를 어지럽힐 만한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슈퍼 버블의 종결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버블의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버블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 달러화 기피 현상으로 인한 원자재와 에너지 시장의 거품이 이미 형성되기 시작했고 “바이오 연료 관련 정 책은 농산물시장의 거품을 조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상은 일반적으로 자산 버블을 일으키는 마이 너스 실질금리를 야기했다. 그렇다면 한 시대의 종결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 판단으로는 미국의 지배력과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장기간에 걸쳐 형성됐던 상대적 안정성이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 신용팽창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에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나 금융시장에서나 불안정한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바라는 바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계 질서가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 보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서브프라임 위기를 파헤친 조지 소 로스의 방법론은 2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태동한 ‘아날학파 Annates School' 의 역사관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흥미 롭다. 아날학파라는 명칭은 1세대 인물 뤼시앵 페브르 Lucien Febvre와 마크 블로그Marc Bloch 가 1929년 창간한 역사잡지 〈사회경제사연보 Annales d'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에서 유래했다. 아날학파는 기존 사학의 특징인 일직선적인 시간관과 영웅주의적, 사건중심적 세계관에서 탈피, 3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다층구조의 시간관과 인간사의 일상에 주목하는 미시사, 사건사를 넘어선 '망딸리떼Mentality' 의 역사를 정립시켰다. 즉 이들은 역 사학의 기본 골격을 기존의 연대 · 개인 · 정치에서 구조 · 집단·사회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아날학파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 중 하나는 망딸리떼다. 통상 망딸리떼를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념 또는 사람들이 어떤 현상이나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성향으로 해석하는데, 소로스의 관점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대표적인 예로, 여러 직간접적 요인이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기존의 권위와 사회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는 망딸리떼가 혁명의 토양을 형성했다고 본다. 그래서 아날학파는 1789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 100년간의 유언장을 분석해 사람들의 망 딸리떼 변화를 추적하기도 했다. 소로스가 주장하는 재귀성 이론을 이루는 축은 현실과 그 현실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식이다. 인식과 현실 사이의 재귀성 때문에 불확실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로스는 사람들이 가 진 편향과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자산 가격과 경제에 영향을 미 친다고 말한다. 주택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와 대출 실적 을 올리려는 금융회사의 의도가 주택시장의 거품을 만들었고, 더 이상 현실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거품이 붕괴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는 한 사회를 특징짓는 관념, 인간의 집단적인 사고방식이야말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결과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아날학파의 관점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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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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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 고갈 이론을 처음 발표한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심리학과 로이 바우마이스터 Roy Baumeister 교수는 자아 고갈 이론의 네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 자기통제력은 무한정 존재하지 않는 한정된 에너지 자원이다.
(2) 자기통제력을 사용하면 이 자원은 고갈된다.
(3) 자기통제를 위한 에너지는 다시 보충된다. 다만 보충되는 속도는 고갈되는 속도보다 느리다. 그래서 종종 바닥을 드러낸다.
(4) 자기통제 능력은 근육과 비슷해서 반복적으로 훈련하면 능력치를높일 수 있다.
- 물건을 파는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자아 고갈 현상을 집요하게 노린다. 같은 광고를 반복해서 보여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광고를 보고도 그 제품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도 존재 한다. 하지만 기업의 광고는 그런 고객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제품을 사고는 싶은데, 돈이 부족해서 참고 있는 예비 고객의 마음을 뒤흔들기 위해 광고를 계속한다. 자아 고갈 이론에 따르면, 참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인내를 거듭하던 사람들은 결국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유혹을 참지 못한 채 지갑을 열어 '지름신'을 맞이한다. 2002년 노벨경제 학상 수상자이자 행동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대니얼 카너먼 Daniel Kahneman 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옷을 입고 싶은 유혹에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가질 만한 돈이 없는 경우, 사람은 그 유혹을 계속해서 참아야 한다. 하지만 인내의 상 황이 수없이 반복되면, 유혹을 피하려는 결정을 하느라 뇌가 많은 수고를 한다. 이런 수고가 반복되면 의지력은 점점 소진된다. 이런 상태를 자아 고갈'이라고 한다.”
- “인간의 뇌는 완벽하게 끝낸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 다. 그러나 끝내지 못한 일은 계속해서 뇌리에 남아 잘 기억할 수 있다.”
자이가르닉에 따르면, 웨이터가 손님의 복잡한 주문을 잘 기 억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웨이터의 임무는 음식을 주문받은 뒤 이를 주방까지 전달하는 것이다. 즉 주문받는 일이 웨이터로서의 임무 완수가 아니라는 의미다. 인간은 끝내지 못한 일'을 더 잘 기억한다. 웨이터는 주문을 주방에 전달해야 그 일을 마치는 셈이므로, 일을 마치기 전까지 주 문을 거뜬히 암기한다. 하지만 주문이 주방에 전달되면 상황은 완 전히 달라진다. 이제는 웨이터의 임무가 끝났기 때문에 뇌는 그 '끝낸 일'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불과 30분 전까지 완벽히 기억한 주문을 웨이터가 완전히 지워 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미완성 효과를 이용해 마케팅하라!
자이가르닉의 이 논문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심리학에 서는 자이가르닉의 이론을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 혹은 '미완성 효과'라고 불렀다. 미완성 효과의 요지는 이렇다. 사람 의 뇌는 일을 끝마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일을 마치지 못하면 뇌는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그 일을 보다 잘 기억 한다. 반면에 일을 마치면 뇌는 긴장 상태를 잃어버리면서 그 일을 곧잘 잊어버린다.
- 인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농부들은 1년에 한 번 사탕수수를 수확한 시기에만 돈을 번다. 즉 작물이 팔린 직후에 농부들은 꽤 많은 현금을 보유한다. 그러나 돈은 곧 사라지고 다음 해 수확기가 다가오면 농부들은 대부분 빈곤한 상태가 된다. 멀레이너선과 샤퍼는 수확을 앞둔 한 달 전과 수확을 마친 한 달 뒤 농부들의 아이큐를 측정했다. 그 결과 수확 한 달 전, 즉 가장 빈곤했을 때 농부들의 아이큐는 수확 한 달 뒤, 즉 가장 풍요웠을 때의 아이큐보다 9~10%나 낮았다. 사람은 가난이라는 결핍 상황에 빠질수록 '먹고살아야 해!’, '내일 뭘 먹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남지?'와 같은 생존 문제 에만 집중한다. 뇌가 완벽히 생존을 위협하는 터널 안에 갇힌 것 이다. 이러니 뇌가 정상적으로 가동될 리 없다. 아이큐에서 반드시 필요한 수리 능력이나 인지 능력은 거의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일수록 투표율이 낮다. 먹고살기 바빠 죽 겠는데 투표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과연 있을까. 가난할수록 생존 분야에서 효율은 높아지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창의적 재능을 잊어버린다. 결국 빈곤은 사회 전체적으로 심각한 비효율을 유발하는 셈이다. '결핍이 효율을 낳는다는 멀레이너선과 샤퍼의 연구는 사람 을 더 결핍 상황으로 몰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사람은 결핍 상태에 놓일수록 그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인간이 발휘할 수 있 는 다양한 분야의 창의성을 상실한다. 작가가 마감 시간을 앞두고 건강을 잃는 것도 바로 그런 문제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왜 중간고사 때 벼락치기를 하는 게 효율 적인지 그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어!'라고 깨닫지 말길 바란다. 결핍의 경제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그런 것이 아니다. 벼락치기가 효율적이긴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의 수많은 창의성이 사 라지고 건강과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점이다. 인류의 진화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본다. 미국 럿거스대학 인류학 과 라이어널 타이거 Lionel Tiger 교수는 “인간이 진화할 수 있었던 이 유는 낙관적인 환상 덕분”이라고 단언했다. 생각해 보자. '내가 하는 일이 모두 잘될 것'으로 믿는 낙관주 의가 없다면 3월에 씨를 뿌려 10월에 곡물을 수확하는 일이 어떻 게 가능할까? 7개월 동안 홍수도 닥칠 것이고 가뭄도 닥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래도 내가 뿌린 씨는 잘 자라서 곡식을 만들어 낼 거야.'라고 낙관한다. 그러니까 그 무모한 일을 한다. 분노한 들소 떼 사이에 뛰어들어 사냥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일은 너무나 위험해서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꿋꿋이 사냥을 나간다. 우 리는 오늘 사냥을 성공해서 맛있는 쇠고기를 잔뜩 먹을 거야.'라는 낙관적 생각에, 분노한 들소 떼 사이로 기꺼이 몸을 던지는 것이다. 낙관적 생각이 무모한 도전을 가능케 하고, 그 무모한 도전이 다시 인류의 진화를 이끌어 낸다. 그런데 낙관 편향이 반드시 사람에게 이로운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뇌가 낙관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안 좋은 일도 있다. 가장중요한 오류는 인간이 오만해진다는 사실이다.
- 스톡데일은 달랐다. 물론 그도 동료들처럼 나는 석방될 수 있어.'라고 생각하며 미래를 낙관했다. 하지만 스톡데일은 '시간이 지나면 석방될 거야.'라는 근거 없는 생각을 품지 않았다.그는 현실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절대로 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혹한 현실에 맞서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에 차분히 대응했다. 스톡데일은 수용소에서 미군들을 조직해 시위를 벌였다. 일부 동료는 적군의 회유에 넘어갔지만, 스톡데일은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버텼다. 고문당할 때도 '이번 고문은 더 고통스러울 것 이다. 잘 참아야 한다.'라며 스스로 다짐해 나갔다. 부하 포로들의 고립감을 덜어 주기 위해 자기들끼리만 소통할 수 있는 정교한 내부 통신체계를 만들기도 했다. 스톡데일은 치밀하게 준비하고 대응하면서, 당장 원하는 결과 가 나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았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며 닥칠 고난을 의연하게 대비했다.
- 낙관은 인류를 진화시키고 도전을 감행하게 한다. 그래서 낙관 에는 분명히 좋은 면이 있다. 하지만 낙관이 과해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흐르면, 이는 오히려 사람을 파멸시킨다. 잔뜩 기대하며 희망을 품었다가 결과가 나쁘면 사람은 절망에 빠져서 자포자기의 길을 걷게 된다. 그래서 정말로 좋은 낙관주의는 무조건 잘될 거야.'라는 자기 중심적인 희망이 아니라, 현실이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더 나은 미 래를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낙관주의다. 이런 낙관주의는 자기가 원하는 세상이 오늘 오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엄혹한 현실에 맞서 싸우기 위해 또 준비한다.
- UC버클리대 경영대학원 캐머런 앤더스Cameron Anderson 교수가 흥미로운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연구 팀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학생들을 모아 네 명씩 한 팀으로 묶었다. 그리고 매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팀별로 풀도록 지시했다. 미국 사람들은 팀별 과제를 받으면 먼저 리더를 뽑아 리더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앤더슨 교수는 몰래카메라 로 팀원들이 어떤 사람을 리더로 뽑는지 관찰했다. 네 명의 팀원중에는 수학 성적이 매우 뛰어난 사람도 있었고 인화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관찰 결과 리더가 된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넘 치는 사람이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제였으니 수학 실력이 뛰어 난 사람을 리더로 뽑아야 마땅한데, 사람들은 “나만 믿어. 내 말대 로 하면 풀 수 있어!”라며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게 나서는 사람을 리더로 뽑았다. 실로 비합리적인 신뢰지만, 사람들은 목소리만 커도 그 사람을 쉽게 믿는다.
-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로더릭 크레이머 Roderick Kramer 교수의 실험은 더 적나라하다. 크레이머 교수는 그룹을 만든 뒤 그들에게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뽑으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 그 과정을 살펴보니, 신뢰를 얻는 사람은 절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대화를 하면서 상대의 등을 토닥 여 준다거나 악수를 할 때 손을 꼬~옥 잡는 식으로 매너 있는 행동 만 해도 신뢰도가 엄청 높아진다는 것이다. 크레이머 교수는 농담 삼아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 중 하나가 학생들한테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교수로서 학생에 게 신뢰를 얻으려면 그저 수업 시간에 목소리를 차분하게 하면 된 다. 그리고 학생들을 만나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 된다.
- 수직 폭력이란 말 그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폭 력'이다. 그런데 파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수직 폭력을 극 심하게 당할수록 수평 폭력 심리에 의존한다. 강한 자에게 얻어터지고 나면, 정작 그 일을 당한 민중들은 그 분노를 자기와 같거나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두들겨 패면서 풀려고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착취를 심하게 당할수록 자신보다 더 못살고 힘없는 이들에 게 폭력을 휘두른다. 샌더스와 트럼프는 각각 파농의 수직 폭력과 수평 폭력을 정 확히 대변하는 존재였다. 샌더스는 “민중이 못사는 이유는 월가 (Wall Street) 금융자본이 우리를 착취했기 때문”이라며 수직 폭력에 대항했다. 국민에게 진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국민의 절반은 그에게 열광했다. 반면에 트럼프는 “우리가 못사는 이유는 멕시코 사람들이 우 리의 일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힘을 합쳐 멕시코인을 몰아내자!”라고 선동했다.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수평 폭력 심리를 자극한 것이다. 그래서 국민의 절 반이 그에게 열광했다. 트럼프는 이 전략으로 마침내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 트럼프는 왜 미치광이처럼 행동할까?
수평 폭력을 이용해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당선 이후 경제학 게임이론에 등장하는 '치킨 게임'을 발판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줄곧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전략을 고수했다. 그는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인 미국에서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리고 멀쩡히 무역을 잘해 오던 독일과 중국, 일본 등 3개 나라를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국을 상대로도 한미 FTA를 재협상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트럼프는 “유럽의 부자 나라인 독일은 환율을 조작해 미국을 착취했고, 아시아의 부자 나라인 한국은 불평등한 무역협정으로 미국을 착취했다”고 주장했다. 상식적으로 이런 주장이 말이 될리 없다. 세계 유일의 강대국인 미국이 한국과 무역협정을 맺었는 데, 그 무역협정이 미국 쪽에 불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힘의 차이가 수백 배에 이르는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착취를 당했 다”고 주장하는 것은 코미디에 가깝다. 그래서 트럼프의 이런 주장은 미친 헛소리처럼 들린다. 하지 만 트럼프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그의 막무가내 행동은 게임이론 에 따르면 계산된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즉 트럼프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미치광이인 척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영리한 전술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비즈니스맨 출신인 트럼프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호혜 평등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이 익을 서로 빼앗아야 하는 경쟁 상대로 본다.
- 상대의 미치광이 전략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미치광이가 될 각오를 하고 함께 충돌을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리 고 핸들을 꺾어야 한다면 최후의 순간에 꺾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먼저 핸들을 꺾을 수도 있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핸들을 꺾더라도 최소한 상대도 나와 동시에 꺾을 수 있다. 어떤 경우도 내가 먼저 핸들을 자발적으로 꺾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다. 트럼프가 미치광이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치킨 게임에 등장한 이 희대의 전략가에게 국제사회가 어떻게 대응할지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강준만 교수의 책 『감정 독재: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해서 통제감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결국 세상사 모든 일 이 순전히 우연한 것은 없고 당사자들에게 책임이 어느 정도는 있 는 걸로 믿는 경향이 있다.” 교통사고를 당한 행인을 두고 부주의 해서 그랬겠거니 여기고,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그럴 만한 여지를줬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멍청하거나 게을러서 그렇게 되었고, 부자인 사람은 똑똑하거나 부지런해서 그런 결과를 얻게 되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통 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세상에는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인간 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해 야 불평등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 사는 이완배 씨는 왜 소말리아에 사는 바레 씨보다 잘살까? 이완배 씨가 바레 씨보다 훨씬 똑똑하거나, 이완배 씨가 바레 씨보다 훨씬 부지런하기 때문 일까? 그렇지 않다.
- 심리학에는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범죄의 전염 성을 밝혀낸 이론인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필립 짐바르도 Philip G. Zimbardo 스탠퍼드대 심리학 교수가 실험을 진행했다. 짐바르도 교 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차를 한 대 주차하고 트렁크를 열어 두었다. 그는 이 차를 무려 일주일이나 방치했는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거다. 누군가 차에 손을 댔다면 그건 범죄다. 이후 짐바르도 교수는 같은 골목에 똑같이 차를 주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트렁크를 열어 둔 것이 아니라 유리창을 하나 박살 냈다. 일주일 뒤 이 차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사람들은 이 차에서 배터리나 타이어 등 각종 부품을 모조리 훔쳐 가 버렸다. 나중 에 더 훔쳐 갈 것이 없어지자 군중은 차를 부쉈다. 같은 골목에 주차했는데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바로 범죄 의 전염성 때문이다. 트렁크가 열린 차를 보면 사람들은 주인이 트렁크를 열어 둔 모양이네.'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친다. 하지 만 유리창이 깨진 차를 보면 사람들은 '누군가 유리창을 깨고 뭘 훔쳐 간 모양이네.'라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어 차피 누군가 저 차에서 뭘 훔쳐 갔다면, 나도 좀 훔치면 어때?'라는 유혹이 범죄 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생각으로 첫 번째 절도범이 차에서 내비게이션을 훔친다. 두 번째 절도범은 대담하게 타이어를 빼 간다. 세 번째 절도범 은 아예 자동차 내부 부품을 훔쳐 간다. '남도 훔쳤는데, 나도 좀 훔치면 어때?'라는 심리가 전염병처럼 확산된다. 애리얼리 교수는 여러 실험을 통해서 범죄나 부정부패는 나쁜놈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 심지어 도덕적인 사람들도 빠질 수 있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환경만 조성되면 나약한 인간은 범죄의 유혹에 빠진다.
- 프랑스 사람은 알제리 국민을 두고 '선천적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이며, 이유 없이 살인하고 범죄 성향이 강하다'고 떠들어 댔다. 깜둥이들은 원래 폭력적'이라는 인종차별적 선전이 난무했다. 파농은 이때 정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1954~1959년 자신이 직접 치료한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악선전에 치열한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알제리 국민이 폭력적인 이유 는 바로 프랑스인이 가하는 수직 폭력 탓이라고 주장했다. 파농은 폭력을 수평 폭력’과 ‘수직 폭력’으로 구분했다. 수직 폭력이란 위에서 가해지는 폭력, 즉 지배자가 행하는 폭력이다. 수 평 폭력은 서민들끼리 휘두르는 폭력, 즉 피지배자끼리 치고받는 폭력이다. 파농에 따르면 서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로부터 받는 수직 폭력 탓에 곤궁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그 곤궁이 서민을 더 폭력적으로 만들어 수평 폭력을 휘두르게 한다.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서민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죽이고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수직 폭력의 한과 고통을 푼다. 알제리 서민은 원래 썩은 사과가 아니었고, 그들을 둘러싼 사과 상자가 썩었기 때문에 오염됐다는 이야기다.
- 애리얼리는 이스라엘의 한 반도체 공장을 찾아 직원 207명을 3개 그룹으로 나눴다. 그리고 이 세 그룹에 각기 다른 내용의 이메일을 발송했다. 첫 번째 그룹에는 “평소보다 생산 실적이 좋으면 30달러(약 3만 6,000원)의 성과급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을, 두 번째 그룹에는 “평소보다 생산 실적이 좋으면 피자 한 판을 주겠다”는 내용을 각각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에는 엉뚱하게도 “평소보다 생산 실적이 좋으면 직속 상사로부터 격려 메시지를 받게 해주겠다”고 알렸다. 이렇게 한 뒤 다음 날 그는 어떤 그룹의 실적이 가장 좋은지를 살폈다. 애리얼리를 초청한 반도체 공장 측에서는 당연히 첫 번째 그룹의 실적이 가장 높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노동자들은 현금 받 는 것을 가장 좋아하며, 그 보상을 따내기 위해 열심히 일할 수밖 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가장 높은 성과를 올린 쪽 은 피자를 받기로 한 두 번째 그룹이었다. 이 그룹의 생산성은 평 소보다 6.7%나 향상됐다. 더 놀라운 사실은 2위를 한 그룹이 상사 로부터 칭찬을 받기로 한 세번째 그룹이었다는 점이다. 이 그룹의 생산성 향상률은 6.6%로 피자를 받기로 한 그룹과 거의 차이가 없 었다. 놀랍게도 30달러를 받기로 한 그룹의 생산성 향상률은 4.9%에 그쳐 꼴찌를 기록했다. 결과가 다소 뜻밖이긴 했지만, 이 실험으로 반도체 공장 경영진은 “아무튼 돈이건, 피자건, 칭찬이건 성과에 대해 보상을 늘리 면 성과도 올라간다는 이야기지?”라고 결론을 내리려 했다. 하지 만 애리얼리의 생각은 달랐다. 애리얼리는 같은 실험을 여러 번 반 복한 뒤 또 다른 의외의 결과를 도출했다. 같은 실험을 다음 날 다시 해 보니 30달러 또는 피자를 받은 직원들의 생산성이 뚝 떨어졌다. 30달러를 받은 그룹의 생산성은 무려 13.2%나 폭락했고, 피자를 받은 그룹의 생산성도 5.7%나 낮아겼다. 실험을 반복할수록 이 같은 경향은 더 뚜렷해졌다. 결국 5주동안 같은 실험을 반복한 결과 현금 30달러를 받은 그룹의 생산성은 평소보다 되레 6.5%나 하락했다. 피자를 받은 그룹의 생산성도 평소와 비교하면 2.1% 떨어졌다. 유일하게 생산성이 높아진 그룹은 칭찬을 들은 그룹이었다. 이들의 생산성은 평소에 비해 0.64% 향상됐다.
- 애리얼리는 “직원들이 성과급을 받기 위해 애태우는 것보다. 기업은 업무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연봉을 기본급 80%, 성과급 20%로 나눈다면 직원 들에게 이 20%는 엄청난 스트레스 요인이에요. 이 20%의 걱정을 덜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라고 지적한다. 애리얼리는 성과급에 대해 이런 충고도 곁들인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성과급을 주겠다”는 제안은 “너는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어!” 라는 질타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안은 결국 노동자를 무시하고 불신하는 사고를 내포한다.
- 불신은 일의 효율을 떨어뜨린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 누군가로부터 신뢰받는다고 생각할 때 일할 맛이 난다. 즉 사람은 30달러를 받을 때보다, 칭찬을 받을 때 더 열심히 일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애리얼리는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또 다른 실험을 시 도했다. 벨기에의 한 대형 제약 회사의 의뢰를 받은 뒤, 이 회사서 일하는 영업 사원들에게 15유로(약 1만 9,000원)씩 더 주고, 그들 이 더 열심히 일하는지 지켜봤다. | 다행히(!) 영업 사원들은 돈을 받고 조금 더 열심히 일하기는 했다. 그런데 얼마나 더 열심히 했나 봤더니, 이들이 추가로 쌓은 실적은 한 사람당 5유로(약 6,300원)에 불과했다. 일은 고작 5유로어치 더 했는데 성과급은 15유로나 지불한 셈이었다. 이번에 애리얼리는 다른 영업 사원들에게 똑같이 15유로씩을 주는 대신 색다른 제안을 했다. “이 돈은 당신을 위해서는 쓸 수 없 어요. 오로지 당신이 좋아하는 동료에게 선물을 사 주는 데에만 쓸쓸 수 있습니다.” 라는 전제를 붙였다. 과연 이런 제안에 영업사원들은 열심히 일했을까? 놀랍게도 이번에는 영업 사원들의 생산성이 무려 1인당 17유 로로 뛰었다. 15유로를 지불하고 17유로를 벌었으니 회사 입장에 서는 분명 성공을 거둔 셈이다.
- 경제학과 신경과학이라는 완전히 달라 보이는 두 학문을 접목 시켜 탄생한 것이 신경경제학이다. 이 분야의 대가(大家)는 미국 클 레어몬트대학원의 폴 잭Paul J.Zak 교수다. 잭 교수는 인간이 돈에 다양한 반응을 보일 때 신경과학적으로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지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는 앞서 살펴본 신뢰 게임을 진행한 뒤 참가자들의 피를 뽑아 호르몬의 변화를 살펴봤다. (피를 직접 분석하는 방법때문에 잭 교수는 뱀파이어 경제학자로 불린다!) 신뢰 게임에 따르면, 인간은 의외로 모르는 사람을 굳게 믿는 편이고, 상대방은 그 믿음에 보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실 험 참가자들의 피를 뽑아 분석했더니 놀랍게도 서로를 믿은 참가 가의 피에서 옥시토신(oxytocin)'이라는 호르몬이 대거 검출됐다.
- 피프 교수는 이외에도 부자와 빈자가 어떤 행동의 차이를 보 이는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했다. 피프 교수는 부유층이 대거 모여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해안가의 횡단보도를 관찰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차량이 횡단보도를 만나면 무조건 정지하는 것이 법이다. 관찰 결과 소형 차량일수록 이 법을 잘 지키는 반면, 최고급 차량일수록 규칙을 무시하고 보행자 앞을 당당히 지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실험에 따르면 부자들은 준법정신도 낮았다. 피프 교수는 '독재자 테스트'라는 유명한 실험도 진행했다. 그 는 이 실험에서 참가자를 일단 A와 B 두 그룹으로 나눴다. 그리고 A 그룹 참가자에게는 10달러를 줬고, B 그룹 참가자에게는 땡전 한 푼 주지 않았다. 피프 교수는 A 그룹 참가자에게 “자, 보세요. 저쪽 B 그룹 참가자는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받은 10달러를 저쪽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습니다. 얼마를 나누 느냐는 순전히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아, 물론 한 푼도 안 줘도 됩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A 그룹 참가자는 B 그룹 참가자와 일면식 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만날 일이 절대 없었다. 어떤 결과가 나타 났을까? 이 실험 결과도 충격적이었다. A 그룹 참가자 가운데 연 소득 이 2,400만 원 이하인 빈곤층은 연 소득 1억 8,0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보다 평균 44%나 많은 돈을 나눠 줬다. 부자가 더 많이 나눌 것 같지만, 그들이 훨씬 구두쇠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다.
- 실험에서 알 수 있듯 대다수의 금수저는 오만하며, 법을 지키 지 않고, 심지어 나눔의 정신도 부족하다.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은 다 자기보다 못난 사람들이며, 멸시받고 천대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프 교수는 이 실험 결과를 발표할 때 강연 제목을 '돈이 당신을 사악하게 만드나(Does money make you mean?)?'라고 지었다. 금수저가 판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금수 저의 문제는 단지 그들이 재산을 불공정한 방식으로 차지한다는 대목에서 끝나지 않는다. 금수저는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이용해서 계속 승승장구한다. 결국 그들은 사회 고위층이 된다. 그렇게 금수저가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올라서면 이 나라는 어떤 모습이 될까? 그들은 무례하고, 동정심이 없으며, 가혹하고, 거만하다. 한국 사회는 이런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사회가 과연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이웃과 협동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협동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 상대가 씌운 프레임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전략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마케팅 사례가 있다. 1978년 미국 패스트푸드 업계의 선두 주자 맥도날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괴소문 으로 큰 곤욕을 치렀다. 맥도날드가 지렁이 고기로 햄버거 패티를 만든다는 소문이었다. 지렁이 햄버거를 먹고 싶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맥 도날드의 매출액은 폭락했다. 당황한 맥도날드는 동원 가능한 모 든 홍보 채널을 통해 “햄버거 패티에 결코 지렁이 고기를 쓰지 않는다”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지렁이 고기를 쓰면 오히려 쇠고기를 쓸 때보다 원가가 더 높아져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는 반론도 덧붙였다. 그리고 모든 맥도날드 매장 앞에는 다음 과 같은 커다란 안내문을 붙였다. "Our hamburger meat does not contain earthworms (우리 햄버거에는 지렁이가 들어 있지 않아요.).” 하지만 이 멍청한 마케팅 전략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상황을 악화시켰다. 사람들은 “지렁이 패티가 쇠고기 패티보다 더 비싸대.”,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햄버거와 지렁이를 연상했다.매장 앞에 붙은 안내문 또한 지렁이를 떠올리는 도구 노릇을 할 뿐이었다. 고객들은 안내문을 보고 햄버거에 지렁이가 안 들어있다고? 아 맞다. 맥도날드 햄버거에 지렁이가 들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라고 상기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맥도날드 매출액은 폭락 을 거듭했다. 맥도날드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프레임에 걸려든 것이다. 맥도날드는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연구를 거듭했다. 맥도날드가 찾아낸 해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다른 고급 레스토랑 햄버그스테이크에도 지렁이 고기가 들어 있다'는 헛소문을 내는 것이었다. 만약 헛소문을 냈다면 사람들의 머릿속 에서 맥도날드 지렁이 햄버거는 사라지고, 다른 대형 레스토랑 지렁이 스테이크가 더 강력하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물론 맥도날드가 이 전략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일단 이런 행동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맥도날드가 사용한 실제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맥도날드는 지렁이 햄버거를 설명하는 태도를 멈추고, 새로 개발한 밀크셰이크와 감자튀김을 집중적으로 홍보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물론 이 전략은 헛소문을 내는 첫 번째 전략보다는 강도가 약했다. 하지만 어쨌든 맥도날드는 이런 홍보 전략을 통해 지렁이 햄버거 라는 '코끼리 이미지'를 소비자의 머릿속에서 지우는 데 성공했다. | 이 사례가 전해 주는 교훈은 하나였다. 특정 프레임에 갇힐 위 험에 처했을 때 제일 훌륭한 전략은 자신만의 언어로 새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다. 반면에 가장 바보 같은 전략은 그 프레임이 사용하는 언어로 반복해서 해명하는 행위다. 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명해서는 안 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아예 '코끼리'라는 단어를 싹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프레임을 세워야 한다
- 상대가 씌운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프레임으로 승리를 거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첫 번째는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 최초로 4선 대통령에 오른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lin Roosevelt의 사례다. 루스벨트는 1936년 재선(再選) 도전 선거에서 큰 곤경에 빠졌다. 거의 모든 언론이 반(反)루스벨트를 선언했고, 자신이 속한 민주당 내부에서도 그를 공격하고 나섰다.
- 그가 펼친 여러 복지 정책이 사회주의 정책과 비슷하다는 것이 루스벨트에 대한 공격의 요지였다. 심지어 연방 대법원조차도 "루스벨트의 뉴딜(New Deal) 정책(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적 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국민의 소득을 높이는 루스벨트의 정책)이 사회주의적 정책이어서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공화당에서 는 아예 ‘루스벨트는 사회주의자'라는 프레임을 들고나왔다. 이때 루스벨트는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며 뉴딜 정책도 사 회주의 정책이 아니라는 해명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사회주의라는 프레임에 걸려든다. 그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모는 프레임에 일절 반응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독점기업이 경제적 특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독점과 수구 세 력들이 변화와 개혁을 막는다'는 프레임을 앞세웠다. 이 강력한 새로운 프레임이 선거 판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자 사회주의 프레임으로 공격한 공화당이 되레 '독점기업의 폐해가 크지 않다'며 해명하고 나섰다. 하지만 해명할수록 국민들에게 독 점기업이라는 말은 더 강하게 각인됐다. 이 선거에서 루스벨트는 압승을 거뒀다. 상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프레임으로 선거 판을 옮겨 온 전략이 멋지게 적중한 것이다.
- 프레임을 바꿔 선거를 승리로 이끈 또 다른 사례는 1992년 미 국 대선 때 나타났다. 그 당시 공화당 출신의 현역 대통령인 조지 부시 George H. W. Bush는 전쟁과 범죄에 대한 공포를 퍼뜨려 선거에서 표를 모으려 했다. 하지만 민주당 후보인 빌 클린턴 Bill Clinton은 이런 공포 조장 시도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클린턴은 미국 대선 역사상 길이 남을 구호로 프레임을 단숨에 바꿔 버렸다. It's the economy, stupid(문제는 경제야, 바보야!)!"가 바로 그것이다.실제로 당시 미국 경제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 의 유권자가 경제난에 신물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클린턴이 “문 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경제를 물고 늘어지 면서 선거 프레임은 삽시간에 뒤집혔다. “바보야!” 한마디는 부시가 그토록 프레임으로 만들기를 원한 전쟁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경제난에 대한 공포를 사람들에게 심어 줬다. 그리고 클린턴은 그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선거이건 마 케팅이건 레이코프가 프레임 이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 의 핵심은 이것이다.
'상대가 가두려고 하는 프레임에서 싸우지 말라. 이기고 싶다면 자신만의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라!’
- 적절한 보복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든다. '보복'이라는 단어의 끔찍함만 잠시 잊을 수 있다면, 경제학적
으로 보복 전략은 사회를 정의롭고 협동적으로 만드는 데 매우 유용하다. 왜냐하면 '내가 배신하면 반드시 보복을 당하는구나.' 하는 두려움이 있어야, 사람은 배신을 멈추고 협동에 나서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살펴봐도 분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 어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협력한 부역자들을 색출 해 엄중히 죄를 물었다. 지은 죄에 대해 독일 사회가 분명한 보복 을 가한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독일은 나치스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고,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도 얻었다. 더 이상 독일에 서 나치스 어쩌고 말하면서 다니는 사람들은 사회에 발을 붙일 구석이 없게 되었다. 반면에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같은 전범 국가인 일본은 제대로 된 반성은커녕 제국주의 부역자들을 오히려 전쟁 영웅으 로 취급했다. 죄를 단죄하지 않았기에 일본은 아직도 욱일기의 망 령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여전히 전쟁을 꿈꾸는 제국주의자의 후 손이 사회 요직에 앉아 있다. 일본이 독일과 달리 아시아권 여러 국가로부터 지금도 정서적인 견제를 받는 이유는 이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비슷한 딜레마를 겪었다. 한국은 역사에 죄를 지은 사람들을 단죄하지 못했다. 친일파 청산 문제만 해도 그렇다. 약 70년 동안 이 문제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친일파를 단죄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자'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살기 위해 친일 좀 한 걸 갖고 뭘 단죄씩이나 해?”라거나, "아니 언제 적 이야기를 또 들먹이고 있어?”라거나, “미래를 위해 화합을 해야지, 왜 자꾸 과거에 매달리는 거야?”라는 식의 물음표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 결과 친일파에 대한 보복적 단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런 보복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우리 사회에는 정의 를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친일파가 해방 이후 버젓이 사회 고위층으로 자리 잡아 기득권이 된 것이다. 심지어 조상이 친일로 모은 재산을 더 많이 물려받겠다며 그 자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 '상대가 죄를 지었어도 미래를 위해 서로 협력하고 용서하자'는 말은, 일견 사랑이 넘쳐 보일지 모르지만 행동경제학적으로는옳은 전략이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단죄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의 반복을 멈출 수 있다. 루쉰이 “페어플레이는 이르다”고 단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뒤집어진 마시멜로 테스트의 결론
마시멜로 테스트는 결국 잘 인내하면 성공한다' 혹은 '인내력 을 키우기 위해 노력을 하면 성공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하지지 만 이런 결론은 빈곤을 연구하는 경제학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부당하다. 빈곤과 결핍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하버드대 경제학과 센 딜 멀레이너선 교수에 따르면 인내력은 노력이나 훈련보다 경제 적 풍요나 빈곤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훈련을 못 받아서 인내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일수록 인내심이 약하다는 이야기다. 눈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1시간 동안 참으면 10만 원을 준다”고 했을 때, 누가 더 잘 참을까? 당연히 평소 배고픔을 몰랐던 부유층이 더 잘 참는다. 이들은 언제든지 내 돈 내고 음식을 사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며칠 쫄쫄 굶은 빈곤층은 그 인내력을 발휘하기가 훨씬 어렵다. 이성적으로는 1시간 참고 10만 원 받는 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마시멜로 테스트의 결론처럼 과연 열심히 노력해서 인내심을 기르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이 실험 결과를 뒤집는 새로운 연구가 2018년 6월에 등장했다. 영국의 사회과학 학술지 〈세이지 저널(SAGE journals)》에 실린 뉴욕대와 UC어바인대 심리학과 연구 팀의 공동 연구가 그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마시멜로 테스트가 정확한 결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일단 표본 숫자가 너무 작았고(90여 명) 그 표본 또한 모두 유명 대학교 부설 유치원에 소속된 부유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 팀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표본 숫자를 900명으로 늘렸고, 표본 대상도 인종, 민족, 부모의 교육 수준 등을 고려 해 골고루 배치했다. 연구 팀은 이들에게 마시멜로 테스트를 실시한 뒤 같은 방식 으로 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성공 여부를 조사했다. 그런데 결과가 놀라웠다. 기존의 마시멜로 테스트와 달리 아이들의 성공 여부는 네 살 때 이들이 보여 준 만족지연 능력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 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의 사회적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 을까? 그 답은 바로 부모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이었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력이고, 인내고, 만족지연이고 다 필요 없고, 그냥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다.
- 이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희 들이 못사는 이유는 인내심이 없고 노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고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새로운 마시멜로 테스 트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아무리 만족지연 능력을 길러도, 아무리 인내심을 높여도, 아무리 노오오오~~력을 해도, 성공은 결국 금수 저의 몫이다. 유력 일간지 사주 가문의 10살짜리 아이가 보여 준 갑질은 그래서 슬프다. 저 아이가 저런 성격으로 성인이 돼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현실이 우리를 더 슬프게 만든다.
- 므두셀라 증후군은 특히 경영학 마케팅 분야에서 많이 사용된다. 기업들이 물건을 팔 때 복고풍 물건을 집중적으로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빅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나 〈무한도전>에서 시도했던 프로젝트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 수다)〉가 대표적 사례다. 사람들은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경향 이 있어서, 방송사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면 매우 잘 팔린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심리학자들은 이유를 두 가지로 분석 한다.
첫째는 뇌의 특징 때문이다. 뇌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기억 을 저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뇌는 그 기억을 최대한 오랫동안 간직 하려 한다. 그런데 기억해야 하는 대상이 매우 불쾌하다면? 당연 히 그런 기억들을 오래 남겨 두고 싶을 리가 없다. 그래서 뇌는 나 쁜 기억들을 최대한 신속하게 제거하고 좋은 기억만 남겨 둔다. 그래야 그 기억을 행복하게 오래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1988년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긴 했지만 여전히 군인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고, 사회적인 혼란도 계속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지금보 다 전혀 풍요롭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때를 아름다운 추 억으로 간직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그리는 그 무렵의 우리는 매우 따뜻했고 무척 행복했다. 현실과 추억은 이처럼 괴리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뇌는 과거의 기억 중 아름다운 추억만 남겨 두려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캐나다 워털루대 심리학과 교수인 리처 드 아이바흐 Richard Eibach 는 사실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 인데,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예를 들 어 나이 지긋한 분들은 매일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어.” 라고 푸념하는데, 사실 버릇없는 젊은이 타령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 라지지 않는 노인들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럼 그 말을 하는 노인들은 젊었을 때 예의 바른 청년이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 청소년기란 시대를 막론하고 질풍노도의 시기다. 그분들도 젊었을 때 껌 씹고, 침 뱉고, 욕도 하고 분명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철도 든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힘든 일을 겪어도 참는 방법을 터득해 간다. 당연히 욕도 덜하게 되고, 욱하는 성질도 많이 사그라든다. 심지어 반사 신경이 무뎌져서 운전도 얌전하게 하게 된다. 이렇게 순화된 성격의 노인이 청년들을 보면 심하게 버릇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래서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어!" 라는 오래된 레퍼토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세상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나쁘게 변했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예전이훨씬 좋았어!'라는 고정관념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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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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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없는 세계

경제 2020. 2. 20. 08:32

- 1차대전까지 국제금융의 중심지는 런던. 17세기말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세워진 영란은행은 약 2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영국의 무역금융에 있어 신용의 최종 대부자 역할 수행이라는 다른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음. 그리고, 그 중앙은행 역할의 중심에는 프라이빗 뱅크의 대표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다. 로스차일드에 관한 자세한 서술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니, 두 가지 측면에서 필요한 요점만 살펴보자.
(1)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을 제패했던 시기는 유럽 대륙의 전쟁시기였음. 유럽은 영란은행이 세워진 1694년부터 워털루 전투가 있었던 1815년까지의 약 120년 기간중 약 60년은 전쟁을, 나머지 60년은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음. 로스차일드가는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각국 왕실에 접근해 프라이빗 뱅크의 자금을 채권인수 형태로 공급해주고 다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여 자금을 회수한 후, 전쟁이 끝난 후에 여러 방식으로 인수한 채권을 되파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금융권력을 장악.
(2) 로스차일드 가문이 런던, 파리, 빈, 나폴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대륙 산업의 중심지에 어음인수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증가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이전의 시대에 비해 무역규모가 커졌고 신용거래 규모 역시 이에 비례해 커졌다는 점에서 유럽 시장 전역을 아우르는 어음인수 은행의 운영은 시대의 흐름에 부합했음. 이전까지의 은행이 왕실과 귀족들의 자금을 관리하는 규모에 불과했다면, 무역이 발달하고 민간의 자본이 축적되면서 신용공급자로서의 은행 필요성이 커졌던 것
- 위 두가지 측면의 결과로 로스차일드하는 유럽 왕가들의 자금을 관리ㅎ주면서 쌓인 신용을 바탕으로 유럽대륙의 중심지를 아우르는 규모로 상거래 어음을 인수하고 수금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은행을 운영하면서, 각국의 전쟁자금에 대한 신용을 공급할 수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815년 워털루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이 전비조달을 위해 발행한 국채의 약 60%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후 아예 영란은행 주식을 대부분 사들임. 19세기 초반에 드디어 그들은 영란은행의 채권발행과 인수를 주도하는 중앙은행의 실질적 주인이 됨
- 미국은 연방 국가라는 특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중앙정부, 즉 연방정부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각 주 정부가 견 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남북전쟁 이후 1900년대 초까지 경제에 있 어서 독점의 규제나 중앙은행 같은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경기의 변동에 따라 대출이 급증했다가 경기가 하강하면 급속히 유동성이 부족해 지면서 금융위기가 닥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100년의 기간 동안 14번의 금융위기를 겪었는데, 평균적으로 7년에 한 번씩 위기를 겪었다는 얘기다. 사실 이것이 바로 고도로 집중된 대형 자본이 탄 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위기를 조장하고 위기에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부풀려 탄생한 것이 당시 미국의 신흥 재벌들로 지금도 잘 알려진 모건, 카네기, 록펠러 등이었던 것이다.
- 1907년 미국에 금융위기가 터지고 급속한 유동성 고갈의 위기 상황이 되 어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 닥치자, 신흥 재벌이었던 존 모건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최종 신용 공여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정부와 독점 재벌 모두에게 변화와 타협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 규모를 키울 만큼 키운 미국의 독점 자본들은 서서히 해외 진출을 위해 중앙은행과 같은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대서양 너머 영국은 민간은행들이 상업어음을 거래할 수 있는 충분한 시장-투자자들이 있었고, 그 투자자들 덕분에 시장에 풍부한 유동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일시적으로 자금이 부족해지면 어음을 할인해서 팔아 자금을 마 련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어음을 거래할 수 있는 충분한 규모의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물론 그때까지는 위기를 통해 약육강식의 논리, 즉 독점 자본을 일굴 수 있었다-해외의 투자자들이 자신 들이 축적한 달러 자산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의 입장에서는 너무 거대해진 독점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정부의 영향력하에 있는 중앙은행이라는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 국가의 특성상 독점 자본이 좌지우지하는 경제에 중앙정부가 간섭을 하려고 하는 것조차 주 정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달성되기 어려운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1915년이 되면서 전쟁이 길어질 듯한 기미를 보이자 국채를 발행하고 지폐를 찍어서 전비를 감당하고 있던 영국 금융시장에서 금 대비 파운드의 가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쟁이 1916년까지 이어지자 영국 정부는 미국 정부가 제공한 달러 신용에 점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1918년 전쟁이 끝 나고 나자 파운드화는 달러 대비 30% 이상 평가 절하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런던에서 파운드로 무역 결제를 해왔던 제3국, 즉 남미와 아시아의 무역 업자들은 이제 금에 대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미국 달러가 점점 매력적으 로 보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편 미국이 주로 연합국을 지원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비 조달에서 한계에 봉착한 동맹국은 결국 패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전의 전쟁과는 달 리 수십 년 예산을 단기간에 사용할 정도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 이 세 계대전은 패전국만이 아니라 승전국에서도 기존의 질서를 바꿔 놓았다. 그 들은 모두 미국과 달러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 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질서의 중요한 의미는 바로 사적 금융권력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세기 유럽 대륙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대였다.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빈, 나폴리에 다섯 아들이 은행 지점을 설립하여 한편으로는 독자적으로, 한편으로는 서로 돕는 방식으로 유럽 각국에 가문의 자금을 조달하고 운용했던 이 가문의 방식을 칼 폴라니는 고도금융(Haute Finance / High Finance)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강력한 정부인 영국과 프랑스의 정부조차 로스차일드의 유럽 대륙 금융 네트워크의 독립성을 해칠 수 없고, 어떤 특정 정부에도 종속되는 일없이 모든 정부와 접촉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 고도금융의 특징이었다. 어떤나라의 중앙은행도 이것의 독자성을 해칠 수는 없었으며 동시에 모든 중앙은행은 이것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건과 록펠러가 연방준비제도의 계획을 입안할 때 로스차일드의 고도금융을 모델로 했던 것임은 명백했다. 즉, 중앙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중앙정부가 연방준비은행의 독자성을 해칠 수 없는 형태 말이다. 결과적으로 연방준비제도법은 비록 동상이몽이었을망정 모건과 록펠러가 원했던 바가 충실히 반영된 결과였다는 말이다.
- 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들이 연합국에 패배한 배경에는 전비 조달능력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영국에서 연합국으로 약 100억 달러에 달 하는 자금이 이전된 사실도 포함되었다. 이미 연합국의 전쟁 수행 능력은미국의 신용에 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전시 재정의 핵심 중 개인은 모건 주니어-잭 모건 였다.길어지는 전쟁으로 자금 조달에 차질이 생긴 영국 정부는 1915년 초 J.P. 모건을 전시 자금 조달 및 무기매입 대리인으로 지정했고, 프랑스도 곧 그 뒤를 따랐다. 잭 모건은 남북전쟁 때부터 무기공급 사업을 같이했던 미국 최대의 화학독점기업 듀퐁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공장을 세워 화약류를 대량생산해 유럽에 공급했다. 동시에 미국에서는 전시공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 연합군에 자금을 빌려주고 높은 수수료를 벌어들이는 한편, 이 기 간 중 자신이 조성한 자금으로 연합국의 무기매입 대리인 자격으로 동업자 인 듀퐁 및 계열사였던 US 스틸 등으로부터 화약과 대포 등 각종 군수물자를 독점가격으로 고가에 사들여 연합국에 비싸게 공급하는 등의 방법으로전쟁 특수를 누렸다. 이는 이전에 유럽 대륙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했던 일을 파운드에서 달러로 통화만 바꿔서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 결과적으로 1차 세계대전이 미국과 유럽의 경제에 미친 중요한 영향은 두가지였다. 유럽의 부가 미국으로 이전되면서 유럽의 가문 형태의 사적 금융 권력이 저물고 미국의 합자회사 형태의 사적 금융권력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것과 이전까지 세계 무역금융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달러가 공식적으로 세계 무대에 데뷔했다는 것이 바로 그 두 가지였다.
- 1942년,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니 콜라스 스피크만(Nicholas J. Spykman)은 『세계 정치에서 미국의 전략(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미국이 고립주의를 고 집한다면 반드시 실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는데, 당시 CFR 에서 주도하던 '전쟁과 평화에 관한 연구의 영토분과 위원장이었던 보우먼 (Isaiah Bowman)이 이 책에 대해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들은 향후 20년간 이 책을 1년에 한 번 이상 읽어야 한다”고 높게 평가한 이 유는 굳이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스피크만의 사망 1년 후인 1944년 그의 이론을 통합한 책 『평화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Peace)』이 출간되는데, 여기서 그는 마한의 해양세력론과 맥킨더의 심장부 이론을 종합 하여 미국의 향후 전략적 방향성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 그는 2차 대전 중 미국이 연간 수천 대의 전투기와 전함을 생산하고 운용한 것을 분석한 결과, 전후의 세계는 해양과 항공 수송체계가 맥킨더가 상상했던 것보다 비약적으로 발달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심장 부의 중요성 감소를 의미한다는 것도 말이다. 즉, 해운의 비용효율이 맥킨 더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급격하게 높아지기 때문에 해양세력의 자원과 시장 확보는 맥킨더가 지적한 것만큼 대륙세력보다 불리하지 않다 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도 맥킨더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떨어져 있는 섬으로 유라시아의 자원과 인구는 미국의 그것을 상회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도 맥킨더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 에서 떨어져 있는 섬으로 유라시아의 자원과 인구는 미국의 그것을 상회 며, 따라서 유럽이나 아시아 중 한 세력에 의한 유라시아 대륙의 지배는 경 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미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주어진 조건을 미국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심 장부-구소련-와 주변 해양세력-미국-의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지역을 주 변지역(Rimland)이라고 칭하고, 이들 주변지역이 심장부 (Heartland)가 해운의 중 요한 부동항으로 접근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가 제시한 결론은 이 지역(Rimland)에서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여 대륙세력의 해양으로의 진출을 막고, 해양세력이 우위에 있는 해운과 항공운송 능력을 활용해 자원과 시장을 효율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향후 미국의 이익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주변지역(Rimland)이 향후 오랜 기간 동 안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각축의 공간으로 작동할 것이며, 이 지역을 통 제하는 자가 결국 세계를 통제할 것이라는 것 말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의 전략가들이 지정학적으로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전략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겼다는 것은 실제 역사의 진행 과정을 통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라도 원조를 보낼 것이 라는 백지 수표를 발행하겠다는 선언이 트루먼 독트린이라면, 마셜플랜은 서 유럽을 수취인으로 그 수표에 금액을 써넣은 것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육군참모총장으로 1차,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해 유럽의 상황에 밝았던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경제적으로 강하고 안정된 유럽이 곧 미국의이익에도 부합한다면서 유럽에 대한 원조 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미국은 생산수단이 거의 파괴된 유럽에 수입 대비 거의 7배에 달하는수출을 하고 있었다. 유럽은 당연히 수입 대금을 지불하기 위한 달러가 턱없이 부족했고, 원조된 달러는 어차피 미국의 상품을 수입하는데 사용될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를 공급하지 않으면 미국의 수출 시장 역시 고갈될 것이고, 그것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경기 침체와 공황의 기억을 상기시킬 것이었다. 결국 1948년 4월 우여곡절 끝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서독 · 벨기에 등 서유럽 총 16개국에 원조가 집행됐는데, 대부분의 원조는 미국으로부터의 직접 보조금 형태였다.
- 봉쇄정책의 마지막 단계는 직접적 재군비 정책으로 주변지역 (Pimlant) 전 역에 걸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의 시작이 바로 1949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캐나다, 그리고 여타 서유럽 8개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설립한 것이었다. 마셜플랜을 시작한 미국이, 1940년대 말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달러 부족이 유럽을 미국의 수출 시장으로 삼으려는 미국의 목표에 심각한 장애물임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화폐 경 제적 측면은 그 자체로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달러 유동성 부족이라는 근본적 문제 앞에서 마셜플랜이나 다른 원조 계획은 언 발 에 오줌 누기에 불과했다. 훨씬 포괄적으로 세계에 달러 유동성을 순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이미 CFR을 통해 미국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고 확실한 이윤을 보장하는 군수 산업을 계속해서 성장시키고 싶어 하던 미국의 대기업 집단의 존재, 전쟁이 끝나고 군수물자 생산이 감소하면서 다시 실업률이 상승하고 경제가 불황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국민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의 민주정부에 대한 위협이라는 세 가지 요인은 이 상황에서 세계역사상 평화 시에 가장 대대적으로 무장을 추진하는 정책을 가능하게 만든 삼박자였다. 미국 의회는 1949년 당시만 해도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봉쇄정책의 최초 입안자인 조지 케넌은 유럽에서의 소련 봉쇄는 유럽의 국가들이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마셜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이 된 딘 애치슨(Dean Acheson)-CFR 회원이며 군수업체인 듀퐁의 고문 변호사였던과 국무부 정책실장 폴 니츠(Paul Nitze)-록펠러 가문 산하기업인 스텐다드 오일 집안의 사위는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액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9년 9월 애치슨과 니츠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일이 일 어났다. 미국의 핵무기 독검을 깨트린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그 며칠 후 중 국에서 이뤄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 를 물리치고 중국 본토를 장악한 일이었다. 이들은 이 일들을 계기로 미국이 위기에 처했음을 강조하고, 국방예산 증액의 필요성을 건의하는 NSC68 (National Security Council Report 68)'로 알려진 국가 안보정책 재검토 보고서를
트루먼에게 제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보고서에서 건의한 서독의 NATO 가입과 미군의 유럽 주둔, 국방예산의 증액이 이루어지게 된 직접적 계기는 다름 아닌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훗날 애치슨은 “한국이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고 밝혔다. 미국으로서는 하늘에서 연이어 동아 줄이 내려온 셈이었다. 사실 그들이 NSC-68에서 제안한 정책 노선, 즉 미국과 유럽의 대대적 재무장은 미국 경제 정책의 주요 문제에 대해 뛰어난 해결책을 제공했다. 한국전쟁 중, 그리고 그 후의 대대적인 재무장이 전후 세계 경제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일단 빗장이 풀리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일본이 중국과 소련의 영향 력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1951년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같은 1951년 호주, 뉴질랜드와는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했고, 1954년엔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를 만들어 태국, 필리핀과 반공 군사동맹을 맺어 미국의 동맹국 범위에 포함시켰다. 당시 동남아시아에는 유럽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하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세력이 있었는데, 소련의 자금 지원을 받은 공산당이 이들을 이끄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이 군사, 경제적 지원을 통해 그 지역에 거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를 지지한 미국과 서방세계의 최종적인 합의의 군사적 형태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 되고, 미국의 동맹국은 미국의 군사 활동에 필요한 기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 재건이 시급했던 동맹국에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할 테니, 동맹국은 빠르게 경제를 재건해 함께 공산주의 세력이 넘볼 수 없는 안정된 세계를 건설하자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바뀐 것은 아니었을지는 역사가 평가하는 것을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쨌든 미국은 당시 이 체제에 참여하는 국가들에 미국이라는 큰 시장도 제공할 것이고, 그 시장에 팔 수 있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산업화와 경제 재건에 필요 한 달러 자금도 지원할 것이고, 거기에 더해 다른 동맹국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용을 부담하여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적 보호 활동까지 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이 사실이다. 서유럽의 연합국은 말할 것도 없고, 패전국이었던 서독과 일본은 두 팔을 벌려 환영해도 모자랄 제안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의 원인이 결국 잉여생산물을 판매할 시장과 생산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원 확보 때문이었는데 미국이 판매 시장도, 자원도 모두 확보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보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과 같은 군비 경쟁을 하지 말라는 조건이 붙 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할 필요 자체 가 없었다는 점에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미국의 대기업, 유럽과 아시아의 정부 모두 윈-윈 하는 상황이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런 체제의 성립은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 주변부의 주요 조임목(Choke Point)'에서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석유를 포함한 해운의 안전을 단독으로 책임지는 상황이 수십 년간, 현재까지 지속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마한, 맥킨더, 스피크만의 지정학적 이론의 결정판이 현실에 적용된 것이었다.
- 1950년부터 1971년까지의 약 20년간의 기간은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형태에 서유럽과 아시아 국가 일부가 적응하는 기간이었다. 말 이 좋아 적응이지 사실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더듬어 가보면서 갈 수 있는 길인지,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야 하는지 불안한 상태에서 어둠 속을 헤쳐 나가는 시기였다.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는 것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비록 미국이 주도하긴 했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유럽, 일본 등의 국가들에 있어 사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보이지도 않았던 기간이었다.
- 1950년부터 1971년까지 세계는 자본주의의 황금기(Golden Age)를맞이했다. 비록 미국과 서유럽, 일본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유례없는 장기 호황이었다. 이 시기가 자본주의의 황금기인 이유는 특히 경제 성장이 노동 소득의 높은 분배로 이어져 인류 역사상 최초로 소비력이 있는 중산층의 형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71년 미국의 중산층이 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에 달했는데 이는 대공황 이전대비로는 거의 2배 증가한 것 이었으며, 2015년 대비로도 약 11%가 더 높은 것이었다. 하지만,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군산복합 대기업과 미 국의 CFR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계층이 고안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황금기를 누리는 동안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수혜를 입은 중산층은 증가하고, 그 시스템의 고안에 깊이 관여한 군산복합 대기업을 비롯한 자본가들은 오히려 자본 이동을 통제받고 높은 세율 등 악조건을 그대 로 감수하고 있었다는 것이 뭔가 앞뒤가 안 맞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들은 그 시스템의 A to Z를 다 이해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 그렇다. 사실 그들은 이전 시대와는 달라진 환경에 맞춰 민주주의와 복지 국가라는 겉으로 드러난 체제의 그림자 속에서 충분한 이익을 누리면서 자 본을 키우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 동안 군산복 합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민간 자본이 충분한 이익을 통해 잉여 자본을 축 적할 수 있었던 구조적 이유가 크게 네 가지나 있었다.
첫째는 풍부한 저임금 노동자의 공급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 에 동원된 군인들이 전역하면서 저임금의 노동력이 풍부하게 공급되었고, 산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일자리와 고임금을 찾아 농 촌을 떠난 농민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대기업들은 충분한 저임 금 노동자를 쉽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기술 혁신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2차 대전 동안 각종 군수물자를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충분한 자금 지원을 받은 대기업들 은 이미 기술력과 생산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 레튼우즈 체제에서 유동성 공급을 위해 군수 산업에 대한 지출이 증가하 자 그들의 기술 혁신을 더 가속화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1970년까지 약 20년의 기간 동안 미국의 기술 개발 예산의 절반이 군수 산업과 우주개발산업에 투여되었는데, 이는 산업 전 분야의 기술 혁신을 자극해 내구소비재와 중화학공업의 기술 혁신으로 이어졌다. 냉장고, 세탁 기, TV 등의 가전제품부터 자동차, 항공기, 선박 등 수송기기, 그리고 철강 산업과 석유화학 제품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전 분야에 걸쳐 급속한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론에 기반한 중산층의 확대다. 높은 세 율, 각종 연금제도의 정착 등 사회 안전망의 확보와 함께 성장한 두터운 중 산층 덕분에 민간 소비가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1960년대 말이 되자 전체 가구의 약 87%가 TV를 소유했고, 75%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중산층은 베이비붐 세대를 낳았고 이렇게 형성된 가족은 새로운 소비문화 를 만들어 냈다. 1955년 7월,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는 어린이와 가족을타깃으로 한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다.
네 번째는 이 기간 동안 꾸준하게 유지된 낮은 에너지 가격이다.
- 1950년대 말 미국 의회는 메이저 회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벌어들 이는 이익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 주는 대신, 그 면제분만큼을 사우디아라 비아에 추가 이익금으로 지불하도록 한 협정을 통과시켰다. 사우디의 이익 은 증가하고, 메이저 회사들의 이익은 보존해 주면서 미국의 세수는 감소하 게 되는 이 협정이 통과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미국 정부가 산유국 정부와 메이저 석유 회사들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보조 금으로 서유럽과 일본은 중동산 석유를 저가에 수입해 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고, 중동 국가들과 메이저 석유 회사는 달러를 손쉽게 벌어들일 수 있 었다. 이런 경향은 대체로 1960년대 말까지 유지된다. 국민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소련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오랜 세 월이 지난 지금 그것이 진실이었는지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국민들만이 아 니라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행정부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을 가능 성이 높을 테니 말이다.
- 브레튼우즈 체제가 근본적으로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로 시작했던 이 유는 누차 언급했듯이 2차 대전 직후가 무역불균형을 고민할 상황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오직 미국만이 시장이 될 수 있었고, 오직 미국만이 자본 을 공급할 능력이 있었다. 여타 국가들은 일단 원조를 받아 재건을 해야 그 다음에 무역흑자가 나든 말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년도 되기 전에 이미 무역불균형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미국이 계속해서 과도한 양의 달러를 공급하자 결국 1960년대에 들어서 면서 미국의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물가가 올라가자 환율이 고 정되어 있는 서독, 일본과 같은 수출국의 물건들은 그 덕분에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다. 이는 수출국들의 경상수지 흑자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의 동반 증가로 이어졌다. 그런데, 환율의 고정이라는 요인이 수출국들에 인플레이션을 전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환율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경상수지 흑자가 증가하면서 달러가 유입되고 자국 통화가치가 상승해 국내 금리는 상승하고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은 하락해야 했는데, 고정환율이 그 메커니즘의 작동을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환율을 고정하기 위해 각국의 중앙은행이 나서서 시장에서 달러를 매입하고 자국 화폐를 발행하면 국내 물가가 상승하여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수입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불태화 조치를 취해야 했는데, 이는 국고에서 불필요한 이자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래도 저래도, 미국은 미국대로, 수출국은 수출국대로 불만이 쌓이는 상황이었다.
- 미국은 오랜 기간 전 세계에 과도한 달러 유동성을 공급했고, 그 결과 나타날 국내의 인플레이션을 서유럽과 일본에 수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은 국내 물가 상승을 막을 수 없었고 달러 가치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달러 유동성 공급을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서유럽과 일본은 미국이 공급한 달러 유동성에 기대어 산업을 재건하고 미국 시장에 수출함으로써 경제를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인플레이션의 수입해야 했지만 달러 유동성과 미국이라는 수출 시장을 대체할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닉슨 행정부의 선택은 각자도생'이었다. “달러는 우리의 통화지만 당신들의 문제야” 라는 재무장관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달러 유동 성 공급은 축소하고,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물가를 통제하고 수입을 억제하겠다는 것이 닉슨 행정부의 선택이었다. 서유럽과 일본이 이런 결정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서유럽(서독), 일본의 삼자는 달러 유동성의 공급, 미국으로의 수출은 유 지하면서 미국의 인플레이션 수입은 줄일 필요가 있었다. 반면 미국은 국내 물가의 안정이 달성되어야 달러 유동성의 공급과 수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의 수출은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 내 물가의 안정을 위해서는 공급하는 달러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달러 가치가 하락하지 않을 방법이 필요했다. 마법이 필요했다. 마법을 찾지 못한 닉슨은 결국물러났다. 1973년 삼각위원회를 설립한 록펠러와 브레진스키는 닉슨 행정부의 국무 장관이던 헨리 키신저, 1976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카터를 삼각위원회 창립 멤버로 참여시켰다. 그리고, 1973년 10월 패러다임의 본격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4차 중동전쟁 이 발발했다. 10월 12일 닉슨 행정부는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결정하자 이 에 반발한 중동 국가들은 10월 16일 유가를 17% 인상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0월 19일 닉슨 행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긴급 구호자금 지원 을 의회에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아랍 국가들은 한 발 더 나가 석유 수출 금지 조치(Oil Embargo)를 취했다. 전쟁 시작 전 배럴 당 3달러 선이던 유가는 단 3개월 사이 11달러를 넘었고 1974년 봄이 되어서는 12달러 선을 돌파했다. 이 전쟁은 삼각위원회가 필요로 했던 한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즉각 제공했다. 유가가 수개월 사이에 4배나 폭등하자 서유럽 각국의 달러 보유 고가 산유국으로 급격하게 흡수되면서 고갈된 것이다. 유럽은 필요한 원유 를 수입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다. 비싸진 유가를 감당하기 위해 달러에 대한 수요도 덩달아 높아졌다. 금과 결별하면서 폭락이 예상되었던 달러에 회생의 동아줄이 내려온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후의 결과를 고려해 봤을 때 그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후의 결과를 고려해 봤을 때 그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삼각위원회가 중심에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 그 림은 대략 이렇다. 미국은 계속해서 서유럽과 일본에 대해 수출 시장 역할 을 유지하고, 달러는 서유럽과 일본을 거쳐 원유 수출국으로 유입된다. 원 유 수출국에 달러가 쌓이면 그들이 인플레이션 수입국이 되므로 이는 다시 원유 가격의 상승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원유 수출국이 달러를 다시 역외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원유 수출 국이 만족할 만한 잉여 달러의 투자 방법을 제공해 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러면 원유 가격의 안정, 달러 유동성의 공급, 서유럽과 일본의 수출과 미국의 수입이 모두 달성되는 만족스러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다. 1974년 삼각위원회가 그린 이런 그림을 바탕으로 미국은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상대로 설득에 나섰다. 그해 6월 키신저는 사우디 를 상대로 양국 간 경제와 군사분야의 광범위한 협력에 대한 동의를 이끌 어 냈고, 그로부터 한 달 뒤 닉슨이 직접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결국 1975년 석유의 수출 대금은 달러로만 받는 대신 미국이 무기와 안보, 인프 라 건설 등을 제공한다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합의에 이르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OPEC이 석유 수출 대금을 달러만으로 받기로 하게 된 것이다. 이를 키신저는 페트로달러 재활용(Petrodollar Recycling)이라고 불렀다.
- 금융위기 즈음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쑹홍빙, 윌리엄 엥달의 책들은 '페트로달러라는 말이 대중들에게 널리 익숙해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핵심적인 논리는 이렇다.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있을 무렵 사우디가 석유 수출의 결제를 달러만으로 하기로 합의하는 대신 미국은 사우디에 무기를 제공수출하고 안보를 보장해 주기로 했다. 이 과정은 미국이 패권을 추구하기 위 한 음모의 일환이고 이를 설계하고 추진한 것이 데이비드 록펠러와 헨리 키신저를 중심으로 한 삼각위원회, 빌더버그 회의의 세력들이라는 것이다. 앞장을 모두 읽었다면 이런 음모론적 사건의 구성이 사실 상상과 사실이 취약한 조합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닉슨이 사우디의 국왕과 1975년 조약을 맺을 당시에는 이란과 이라크가 사우디보다 더 친미 성향 국가였다는 점, 닉슨은 삼각위원회 입장에서는 제 거하고 싶은 대상이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은 그들에게 한창 공격당하고 있었다는 점, 정작 사우디아라비아가 스윙프로듀서 역할을 하 게 된 것은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이 미국과 단교하고 이라그와 전쟁을 한 1980년대에 들어서라는 점 등의 사실만으로도 모두 위의 음모론이 제시하 는 가설을 반박할 수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라는 점 등의 사실만으로도 모두 위의 음모론이 제시하 는 가설을 반박할 수 있다. | 이런 정황 외에 유로화 출범의 과정만으로도 음모론이 얼마나 허황된 것 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닉슨의 금태환 정지 선언이 있기 1년 전 인 1970년 이미 유럽에서는 유럽의 단일 통화를 출범시키기 위한 베르너보 고서(Werner Report가 만들어졌다. 달러에 대항할 수 있는 유럽의 단일 통화 에 대한 구상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2차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상승하며 달러가 다시 신뢰를 잃고 금값이 급등하던 1979년에는 유럽통화체제(European Monetary System)가 출범했다. 이것이 말해 주는 바는 독일(서독), 프랑스 등 삼각위원회의 서유럽 회원들이 결코 자발적으로 달러 기축통화 시스템의 구축에 참여했을 리 없다는 점이다. 유로화는 달러의 대항마란 말이다!
- 레이건 시대는 사실상 금에 고정되지 않은 불환지폐, 즉 화폐를 발행하 는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인 신용화폐(Fiat Currency) 시대가 처음으로 시작된 시기다. 항상 처음이 그렇듯이 레이건의 재임기간은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물가와 실업률이 잡힌 것은 실제 임기 후반이나 되어서였고, 복지 를 축소하고 법인세를 낮추면서 재정은 확장하는 것은 정적들의 공격대상 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마침 이를 돌파하기 위한 훌륭한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소련이었다. 소련의 핵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적자 재정을 감수할만한 그럴듯한 이유 가 될 수 있었고, 레이건은 1983년 3월 소위 스타워즈 계획을 발표했다. 요지는 소련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우주 공간 또는 대륙의 상공에서 요격하는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미사일, 레이저, 인공위성 등 첨단 우주 장비를 개발이 필요한 계획에 군수 산업계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국방예산은 다시 한번 급격히 증대되었고 이에 맞춰 본원통화도 술술 풀려나갔다. | 신용화폐를 찍어 내야 할 그럴듯한 이유와 방법은 갖추었지만 이렇게 찍 어 낸 화폐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게 만들 방법도 역시 필요했다. 인 플레이션을 수출할 수 없다면 화폐 가치의 급변동이 나타나고 더 이상 화폐 공급을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브레튼우즈 체제 동안 인플레이 션을 수입했던 유럽과 일본은 삼각위원회를 통해 함께 인플레이션을 수출할 곳을 찾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각국 정부의 지원하에 인 플레이션을 수출할 곳을 찾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닐 민간 거간꾼 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었다. 이 사기 진작의 방법이 바로 감세와 규제철폐라는 공급주의 경제였다. 민 간 거간꾼들은 인플레이션을 수출할만한 인구가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 고 세계 방방곡곡 달러를 침투시켰다. 신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개척이 만만치 않을 경우 정부의 도움을 요청하면, 정부는 주저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보탰다. 브레튼우즈 체제 동안은 국가의 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가 있었지만, 이제 공산권을 제외하면 어느 곳이라도 화수 분에서 막 꺼낸 달러를 아무런 제한 없이 투입할 수 있었다. 화수분 경제와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때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화수분 경제는 애초에 돈을 찍어 내지 않으면 어떤 혼란이 닥칠지 모르던 상황에서 해결책으로 제시된 방안이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시 작될 때부터 이어진 흐름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30여 년간 지속된
방향을 더 확대하는 것에 해당했다. 마치 정지하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자 전거 타기와 같이 끊임없이 돈을 찍어 내서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무게로 붕괴될, 샘솟는 지하수와 같아서 어딘가로 계속 흘려보내지 않으면 스 스로를 서서히 물에 잠기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시작한 것이었다. 여 기서 통화주의는 화수분에서 돈을 꺼내는 속도를 관리하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했고, 규제철폐와 금리인하는 찍어 낸 돈이 흘러갈 곳을 찾아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 수익률 곡선의 역전이 일어났다가 급격한 정상화(Steepening)가 일어난 사례가 1989년, 2000년, 2006년 이렇게 세 차례 있었다. 그런데 위의 그림을 보면 스티프닝(Steepening)에 대한 재밌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수익률 곡선의 역전 후 일어난 스티프닝은 모두 장단기 금리가 함께 하락하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스티프닝이 일어날 때는 단기 금리뿐만 아니라 장기 금리 역시 하락했다는 것이다. 수익률 곡선이 평탄화되는 현상은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고 했다. 돈이 너무 많아서 빌리기가 너무 쉽거나 아니면 빌려봤자 수익을 내기 어려울 정도로 경기가 침체되어 있거나. 그런데, 그린스펀은 평탄화나 역전이 나타날 때마 다 어김없이 금리를 인하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연 침체된 경기를 살린 행위였냐는 것이다. 경기가 살아나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수익 이 크다고 기대할 만한 프로젝트에 자금이 공급되면서 금리가 높은 장기 채권에도 수요가 생긴다. 그런데, 이제까지 스티프닝이라고 불렀던 현상들은 모 두 인위적으로 단기 쪽 수요의 증가를 장기쪽 수요의 증가보다 더 크게 만들 어 생긴 현상이었다.
- 은행들은 예금액이 증가하거나 자본금이 증가하지 않는 한 대출 한도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신용 부도스왑(CDS)이라는 마법의 도구는 은행들이 같은 대출한도 내에서 기업이나 정부와 같은 자금 수요자들에게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을 조달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었다. 시장에 훨씬 많은 채권이 공급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린스펀의 미소가 보이는가? CDS는 보호매수자 입장에서는 보험과 흡사한 구조이지만 신용 위험의 회피 대상이 되는 대출채권에 해당하는 기초 자산을 직접 인수하지 않고도 위험만 인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험과는 구분되었다. 그렇다고 대출이 나 채권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적용할 수 있는 법의 테 두리가 모호했다. 기초 자산을 직접 인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레버리지 효과는 컸고, 유동성이 낮은 채권을 기초 자산으로 할 경우에도 CDS 자체 의 유동성은 컸기 때문에 채권 시장과 투자은행에는 신천지가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갑자기 오랜 친구라며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미 1970년대부터 모기지 채권을 담보로 한 자산유동화 증권은 시장에등장했고, 1980년대에는 다시 이들 유동화 증권을 시장에서 소화하기 쉽 도록 위험 수준에 따라 트렌치(Tranche)를 나눠 만든 신용 구조화 채권(CMO, CDO)이 등장했다. 1990년대에 CDS와 이런 신용 구조화 채권들이 만나 합성 구조화 채권까지 등장하자, 이제 사실상 어디의 무엇이라도 현금흐름만 있다면 이를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 돈을 만들수 있는 방법이 만들어졌다. 물론, 장외파생상품을 돈을 찍는 수단으로만 이해한다면 말도 안 되는 오류다. 이것이 신용 리스크의 효과적 관리 수단의 개발이기도 했던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아시아, 러시아와 남미의 외환위기를 거 치면서 합성 구조화 채권의 운용 경험이 쌓이고,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의 붕괴, 엔론(Enron)과 월드컴(MCI WorldCom)의 파산 등의 사태가 일어났음에 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았던 것은 이런 파생상품들의 공도 컸다. 문제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시장의 시각이 너무 한 방향으로 치우쳤다는 것이다.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는 2002년 CDO, CLO, CDS 등의 신용 파생 상품의 빠른 성장과 적절한 가격 결정이 신용 위험을 잘 분산시켜 닷컴 버 블의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어찌 보면 단 몇 년 후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조금의 단서도 가지고 있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돌아봤을 때, 당시 이들 합성 구조화 채 권의 급격한 성장은 신용 리스크의 관리도구와 신용 창출의 기폭제 역할 중 후자에 더 충실했던 결과였음이 맞아 보인다.
- 중국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자본(Capital)과 기술(Technology)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모두 이를 충분히 이해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소 련이라는 체제 경쟁자에 대한 유용한 펀치라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잉여 자본을 수출할 수 있는 큰 영토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시작해 볼 만한 거래였다. 중국 역시 마오쩌둥의 실패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개혁개방에 대해 더 이상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의 문제로 인식이 변화한 상태였다.
- 클린턴이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간 것은 그들이 미국 내의 여론을 유리하게 바꾸는 데 활동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대규모 사절단은 클린턴의 의도에 맞게 정관계를 설득하는데 적극적으
로 나섰고 여론은 건설적 관여 정책에 점점 호의적이 되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클린턴은 중국의 WTO 가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중국의 상황은 이미 살펴보았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와 장쩌민의 권력 공고화 이후 중국의 보수파의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개혁론자들은 경제 선 진화 전략으로 WTO 가입을 적극 추진했다. 저임금을 활용해 제조업을 키 우고, 수출길을 열기 위해선 중국산 상품의 판로를 개척하고 기술과 자본을 투자받아야 했다. WTO 가입이 지름길이라는 결론이었다.
-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 세대-침묵의 세대(Silent Generation-는 1, 2차 세계 대전을 겪었고 큰 빈부격차, 농촌에서 도시의 교외로 이주한 공업화 1세대 에 해당했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와는 달리 2차 대전이 끝난 후 대공 황, 전쟁과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대가족을 이루는 기쁨 을 맛보았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늘어난 가족, 특히 자녀 세대-베이비 붐 세대에게 안전한 삶, 안정적인 삶, 더 나은 삶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이들 침묵의 세대들은 자녀들인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기본적으로 안정 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대전의 참상을 몸으로 겪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대공황을 직접 겪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침묵 의 세대와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이들의 부모 세대가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1970년대까지는 미국 유권자들의 요구는 '일자리와 복지' 로 요약할 수 있었다. 대공황과 실업의 공포와 공업화의 혜택을 모두 느껴 본 이들 세대는 자녀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가 실업이라는 문제로 고통받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설사 경제 위기가 닥치더라도 말이다. 이런 욕구 는 정부에 대한 복지 증대’ 요구로 이어졌고, 스스로도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높은 저축률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어질 베이비붐 세대와 비교하면 소비 성향은 현저히 낮았고, 저축 성향이 높았으며 확장적 재정정책에 대해 서는 비판적인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1960년대 히피즘의 자유(Freedom)라는 용어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의미했다. 마약, 섹스, 반전 등은 기성세대에겐 금기시되어 있던 것들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 행위였다. 하지만, 이런 탐구를 통해 얻은 결과물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대는 물질적 편안함에 대한 거대한 욕구가 있었다. 부모 세대는 2차 대전 이후 점점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 해도 한 번 형성 된 가치관을 바꾸기 어려웠다. '절약' 말이다. 실제 2013년 영국에서 발행된 영국 베이비붐 세대의 소비 성향과 관련된 연구에는 이것이 잘 요약되어 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직접 만들거나 (Make Do) 고쳐서(Mend) 쓰는 세대였다면 베이비붐 세대는 사서 쓰는 세대였다. 압축적이지만 위의 비교는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자신들이 당장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지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당장 감당할 수 없다면 신용-부채-을 동원해서라도 지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대였다. 절약과 저축에서 소비와 투자'로 사고의 관점이 이동한 것 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저축은 절약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 반면 투자는 소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부모 세대는 죽어 서 상속을 하는 순간까지도 내일을 대비했다. 생존 그 자체를 중시했던 것 이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달랐다. 그들에게 '투자'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 큰 편안함, 편리함을 추구하는 과정이 '투자'였다. 그들의 부모세대는 먹고살기 위해 소비했다면, 베이비붐 세대는 소비-투자를 위해 부채를 일으키는 것을 합리적인 행동으로 여기게 된 세대였다.
- 부모 세대와 아주 큰 사고방식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그들은 겉보기가 어떠했든 부모 세대와 비교해서 근본적으로 미래가 더 밝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지금보다 미래가 더 밝을 것이므로 부채는 미래에 갚을 수 있을 것이며, 적절한 소비는 밝은 미래를 위한 투자로 간주되었다. 자녀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것은 교육에 지출한 비용보다 그 결과 얻게 되 는 소득이 더 높을 것이라는 기대에 기초한 투자, 큰 자동차를 사는 것은 자동차를 타고 더 먼 곳으로 출퇴근하고 더 많은 물건을 실어 나름으로써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투자, 더 크고 좋은 TV를 사는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접해 스스로를 개발하는 투자라는 사고방식에 의해 합리화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다이너스 클럽을 필두로 좁은 지역에서만 사용되면서 나 타난 신용카드업체들이 1970년대가 되면서 미국 전역으로, 그 뒤로 전 세계 로 확장되어 나간 것은 세대의 사고방식의 변화와 때를 같이했던 것이다. 존 레논의 「Imagine」에 열광했던 세대는 처음엔 미래는 더 밝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탐구'로서의 자유(Freedom)'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히피즘이 추구하는 추상적인 밝은 미래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눈치 빠른 젊은이들은 부유한 부모에게 다시 돌아가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최신 지식에 대한 교육을 받고 도시에서 지적인 직업 에 종사하는 것이 진정한 밝은 미래라는 것을 곧 알아챘다. 히피들은 여피 (Yuppie)로 대대적으로 전향했다. 여피족이 추구하는 '자유(Freedom)'는 '자 유로운 자본주의의 자유였다. 어쩌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물질적 풍요의 혜택을 세대 전체가 받았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었던 현상이었다. 이 세대가 부모 세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아 시대의 주류로 나서기 시 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1970년대 후반 무렵부터였다. 1976년 아칸소 주 의 법무부 장관으로 선출되었다가 2년 뒤 불과 32세의 나이로 주지사가 된 이 세대의 선두주자가 1946년생인 빌 클린턴이었다. 1975년 불과 26세에 상품 (Commodity) 선물 트레이딩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자 회사를 설립했던 레이 달리오는 1949년생이다. 1955년생인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가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설립한 것은 각각 1975년과 1976년이었다. 레이 거노믹스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들 세대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다. ERISA는 부모 세대와 이들의 합작품이었지만, 확정기여형(DC) 퇴직연 금은 바로 그들 스스로를 위한 자작품이었던 것이다. | 레이건의 선거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화수분의 돈을 소 비와 투자라는 형태로 흐르게 만들 베이비붐 세대를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 다. 망설이지 말고 풍요를 추구해라. 그것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길이다.
- 본원통화를 공급하고 신용을 창출해도 이로 인한 총수요의 증가가 총공급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금리를 인하해서 신용을 더 창출해서 총 수요를 더 자극해야 했다. 실제로 20여 년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예상대 로 인플레이션이 달성되면 우주는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는 통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필립 스 곡선에 의하면 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지면 실업률이 증가하게 되고 이는 경기가 침체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를 방치하면? 이제까지 발행한 어마어마한 양의 통화가 수축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엄청난 질량이 한 점에 모여 생긴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더 수축하듯이, 멈출 수
없는 디플레이션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할 것이 예상되었다. 디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가 생겨 소비가 감소하고 저축이 증가하면, 이제까지 꾸준히 공급 한 통화에 의해 높아진 자산의 가치가 하 락하고, 이는 신용을 축소시켜 다시 경기를 침체시키고, 다시 물가가 더 하락하는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악 순환 말이다. 좌냐 우냐, 통화정책이냐 재정정책이냐는 사실 오바마의 불평처럼 진정한 쟁점이 아니었다. 지고의 가치는 어떻게든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 었다. 버냉키도, 옐런도, 서머스도, 크루그먼도, 숨 고르고 있는 과거의 탈규제 시장만능주의자들도 이 점에서는 모두 한 팀이었다. 크루그먼은 그런 점에서 특히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신케인스주의자들 중에서도 가장 왼쪽에 가까운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돈도 풀고 이자율도 낮추고, 거기에 더해서 미래에 소비할 여력 까지 다 끌어와서라도 소비를 자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 1980년대 이후로 중산층이 감소하고 소비 여력은 감소했는데 그 원인 중 첫 번째는 바로 통화 공급의 증가와 낮은 이자율로 자본을 조달하기가 쉬워진 상태에서 기술(Technology)이 자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는 것 이다. 공급망을 관리하거나, 신기술을 개발하는 등 반복적이지 않은 숙련 된 기술을 요하는 고숙련 근로자들은 오히려 숙련 프리미엄(Skill Premium)을 인정받아 소득이 더 증가한 반면, 기술의 발달에 의해 추가적인 자본 투입 으로 대체되기 쉬운 반복성이 높은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일자리는 로봇이나 정보통신 기술에 의해 대체되어 오히려 감소했다. 분명한 것은 기술과 자본의 도움으로 근로자 1인당 생산성은 전 영역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는 것이다. 노동 생산성의 증가에 비해 근로자 의 임금이 적게 증가한 것은 자본과 기술의 몫이 투자자와 기업의 몫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급 측면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난 논리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중산층은 감소했고 덕분에 수요의 측면에서 소비 여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 2004년 마이클 둘리와 그의 동료들은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지원으로 '재건된 브레튼우즈 시스템’이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브레튼우즈 시스템은 미국이라는 중심부(Center)와 서유럽과 일본이라는 주변부(Peripheral)를 구조의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중심부 미국이 금에 고정된 기축통화 달러를 주변부로 공급하면 주변부에서 공급받은 달러를 바탕으로 미국이 수출하는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달러가 순환되는 구조였다. 이 구조는 주변부 국가인 일본과 독일의 수출 경쟁력이 미국을 앞서기 시작하면서 흔들리게 되었다. 금에 고정된 달러의 가치가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는 WTO 체제는 어떤 면에서 변형된 브레튼우즈 체제와 흡사했다. 일단, WTO 체제 역시 군사적 측면에서는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경찰 역 할을 하고 있었고 군산 복합 기업들이 건재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체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측면은 어떠했을까? 기본적으로 새롭게 되살아난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경제적 측면 역시 중심부에는 여전히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있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주변부 역할을 해줄 국가가 있어야 했다. 이 보고서에서 지적한 주변부 국가들은 무역수지 흑자국들, 그 러니까 동아시아의 외환 보유고 축적국들이었다. 바로, 중국, 한국 대만 등의 국가들 말이다. 중심부 국가인 미국은 여전히 달러를 주변부로 공급하고, 주변부 국가들은 이 달러로 생산시설에 투자하고 다시 미국으로 달러 를 순환시켰다. 과거에는 미국이 무역 적자국이 되면서 달러를 회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스템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 새로운 체제는 달러를 회수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미국은 소비를 부추기고 있었고 동아시아 국가들은 수출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고 있었다. 양측의 이해관계는 미국 국채라는 매개체를 통해 맞아 들어갈 수 있었다. 주변부 국가들은 달러를 생산능력 확대에 투자했고 이 를 통해 재화를 미국이라는 시장에 수출했다. 주변부 국가들은 수출 경쟁 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급망의 분화를 통한 생산성의 향상 역시 수출 경쟁력 향상 과정에서 벌어진 결과물이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수출 경쟁력 유지를 위해 자국 통화가치가 상승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주변부 의 각국 중앙은행들은 계속해서 기업이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를 사 들이고 자국 통화를 발행해야 했다. WTO 체제하에서 수출 중심의 동아시아 국가가 통화가 절상될 경우 낙오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사들인 달러는 최대한 안전하게 투자되어야 했다. 상상해 보라. 한 차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의 지휘로 피눈물 나는 강제 구조조정을 당하며 알짜 자산을 해외 자본에 빼앗기다시피 했던 경험이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과연 위험 자산에 투자할 배포가 있었겠는지 말이다. 미국 국채는 수출국들에 달러의 유일한, 궁극의 투자처였다.
-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주요 수출국들이 자국의 화폐 가치 절상을 막기 위해 달러를 매입한 것은 결코 룰을 무시하거나 깨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미국 국채에 대한 투 자가 최고의 옵션이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단지 그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주도한 WTO가 구축한 자유무역 시스템은 그렇게 돌아가는 바퀴였다. 바퀴의 축은 중심부 국가였 고, 바큇살은 주변부의 수출국들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에 충실했기 때문에 바퀴가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이다. 화폐 가치의 절상을 막기 위해 달러를 사들이는 만큼 자국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은 자국 물가 상승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미국이 인플레를 주변부로 수출했던 것은 이때도 변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재건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주변부 국가들이 어떻게 자국 물가 의 상승을 억제할 수 있었을까? 뼈를 깎는 공급 측면의 생산성 향상의 노 력이 있었다. 수출국의 국민들은 뼈를 깎아가며 생산성을 향상시켜서 더 싼 달러로 표시했을 때- 값에 물건을 생산했고 미국의 국민들은 수출국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대가로 가만히 앉아서 더 싼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출국들이 미국의 국채에 끊임없이 투자하니 미국은 중동에서의 전쟁 수행이나 복지제도의 개혁에 들어가는 비용을 조달하기 가 수월했다. 정부의 재정을 해외에서 조달할 때 얻어지는 효과는 바로 민 간의 투자 여력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민간 부문은 자금시장에서 정부와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FANNG과 같은 기업들이 모험적인 도전을 시도할 때, 그들은 주변부 국가들과 비교해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가 용이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본받아야 한다는 논리의 한계가 여기 있다. 실리콘 밸리는 정부와 자금을 놓고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전제 조건이 달랐던 것이다. 중국은 조립생산을 담당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경쟁력이었다. 농촌의 유휴 노동력을 도시로 계속 끌어들여 임금 상승을 억제한 것이 바로 뼈를 깎는 노력이었다. 한국이나 대만의 경우 자본 투입을 통해 이룬 기술의 발 달이 노동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뼈를 깎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외환 보유고를 축적 한 수출국들은 미국이 주도한 자유무역 질서가 작동할 수 있게 자국민들의 뼈를 깎는 노력을 제공한 쪽이라고 볼 수 있었다.
- 금융위기 이전까지 중국의 입장은 어땠을까?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와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직접 투자는 명백하게 중국이 재건된 브레튼 우즈 체제로부터 얻고 있는 이득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지불하는 대가 도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첫 번째 대가는 국내적으로 불균형이 쌓여 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생산 공장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낮은 생산비용을 유지해야 했 다. 임금 상승은 억제하면서도 중앙은행이 달러를 흡수하고 시장에 통화를 공급하는 고난이도 곡예 비행을 해야 했다.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거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일본이나 한국이 그러했듯이 공급된 통화를 주로 수출 산업 발달의 자본으로 공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영기업이나 수 출 기업들에 특혜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결과적으로 국내적인 불균형 이 커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과거 산업화 시절에 우리나라의 수출 중심 의 대기업 육성 정책의 결과와 유사했다.
두 번째 대가는 무역을 통해 벌어들여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고로 쌓은 막대한 달러준비금을 미국에 헐값으로 빌려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이렇게 수출국들이 저리로 빌려준 달러가 미국의 거품 생 성에 일조했다는 입장이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 가 있었다. 만약 미국의 국채가치가 하락하거나, 달러 가치가 폭락하는 경 우 공든 탑이 무너져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전까지 후진타오의 중국은 재건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미국 이 중심부, 중국이 주변부 역할에 충실한 것이 서로 호혜적 106 관계라고 받 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위기의 발생 직전까지 중국은 국내적으로 저 두 가지 문제를 감수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공산당 지도부에 부패-미국 기 업자본과의 결탁-가 만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금융위기가 없었다면 중국이 언제까지 저 문제들을 감수하 고 이 체제의 주변부 역할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을까? 수출주도 성장전략이 한계에 도달하게 될 때, 즉 낮은 생산비용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까지 이어갔을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의 추가 공급의 한계점, 그러니까 동쪽 해안의 도시에서 점점 내륙의 도시로 개발을 이어가면서 내륙의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때를 그때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근로자들의 임금 수준이 어느 수준 이상에 도달하여 수출 주도에서 내수 중심으로 경제 성장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 위안화의 가치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개입할 필요성이 없어져 달러를 중앙은행이 흡수해서 미국채에 투자할 이유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그 시기가 오기 전에 산업구조를 안정적으로, 주변국들의 견제를 덜 받으면서, 고부가 가치 산업 중심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간재를 수입하여 조립한 후 최종 수출하는 위치에서 중간재를 수출하는 위치 로 전환시키는 것 말이다. 그런데,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집권하면서 리쇼어링 정책을 천명 하자 중국은 즉각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 미국이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중국도 바빠질 수밖에 없었 다. 새로운 판을 준비해야 했다. 2009년 오바마가 3박 4일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맞이하는 중국의 태도는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클린턴 과 부시가 방중했던 1998년과 2001년에는 구속 중이던 반체제 인사를 석방 하는 유화 제스처가 있었는데, 오바마 방중 당시에는 오히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유혈 사태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전격 단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 2011년 오바마가 실리콘밸리의 주 요 기업인들을 초대해 가진 만찬 자리에서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미국 에서 생산할 수 없겠냐고 요청했을 때 스티브 잡스가 그건 어려울 것 같다. 고 거절을 표시한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트럼프에 앞서 리쇼어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바로 친노동자 성향의 오바마였던 것이다. 하지 만 오바마는 최종적인 문제가 소비’라면 어떤 형태로든 해외에서 수출을 통 해 이익을 잘 내고 있는 미국의 기업들이, 더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미국으로의 회귀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지적을 인정할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헷갈린다면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중국에 하부 공급망을 두고 있는 미 국의 기업들이 미국으로 공급망을 옮기게 되면 미국 노동자의 파이가 커지 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미국이 벌던 파이 전체가 작아지는 것일 뿐임을 오바 마는 부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친기업적이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공화당 소속의 트럼프는, 사실 미국 기업의 이익을 깎아 먹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빼앗긴 노동자들의 몫을 되찾아 오겠다며 과감하게 다자간 자유무역 협정의 틀을 깰 것을 선언했다. 역시 오 바마의 실패를 부각시키고 지지자들에게 세일즈할 수 있는 모양의 행동이었다.
- 2016년 1월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와 카일 배스(Kyle Bass) 등 서양의 헤지 펀드 매니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위안화가 과대 평가되어 있다며 위안화 평가 절하에 베팅하는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 헤지 펀드들이 중국의 내부 권력 투쟁의 결과 자본의 대규모 유출이 일어날 것을 파악했 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상해방은 오랜 기간 서구의 투자자들과 이해관계를공유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해 놓았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사실 이들 헤 지 펀드 공격의 자금이 사실 상해방 그들 자신이 제공한 것이라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시진핑 정부는 2015년 홍콩을 통해 빠져나가는 자본을 급하게 틀어막는데는 성공했지만, 이어서 해외 세력들의 위안화에 대한 공격적인 매도가 지속되자 딜레마에 빠졌다. 당시 중국은 수년에 걸쳐 위안화의 국제화 작업에 공을 들여 왔고, 한창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에 위안화를 포함시키 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위안화의 가치가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국제 거래에서 광범위하고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따라서, 자유로운 거래는 보장하면서도 위안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막아야 했기에 위안화를 직접 매수하는 시장 개입을 무리해서라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2014년 최대 4조 달러를 기록했던 중국 의 외환 보유고(FX Reserves)는 이 과정에서 상해방의 주식 매도 공격 이후인 2015년 말에는 3조 3천억 달러까지 감소했고, 헤지 펀드들의 공격이 이어진 후인 2016년 말에는 결국 마지노선이라 여겨지던 3조 달러 선마저 위협받는수준까지 도달했다.
시진핑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 유출을 억제하 는 통제정책의 시행 말이다. 자유로운 위안화 거래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중국 정부의 목표에는 부합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야장천 위안화 를 매입하는 것은 중국 내부의 부패한 세력들이 합법적으로 자금을 해외 로 빼돌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은 중국 내 비금융기업의 역외기업대출액을 자기자본의 30%로 제한하고, 중 국에서 사업 중인 외국 기업들이 해외송금을 할 경우 당국의 승인을 받도 록 한 규제의 기준을 기존의 5,0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로 낮췄다. 중국 자국 기업은 100억 달러 이상의 해외 투자를 금지하는 한편, 모기업의 주력 사업과 관계없는 10억 달러 이상의 해외 인수합병을 금지하고, 유니온페이 신용 및 직불카드를 통해 홍콩 보험 상품에 가입하는 것을 제한하여 위안화의 홍콩 유출 역시 통제했다.중국 당국의 목표가 어떤 목적을 가진 세력의 의도된 자금 유출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중국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 해외의 투기적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는지는 아마 앞으로도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위안화 환율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헤지 펀드들은 조용히 손을 뗐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헤지 펀드들은 굿만 본 것이 아니라 떡도 충분히 먹었을 것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수십 년간 미국 달러는 기축통화 역할을 해왔다. 송금을 달러로 해야한 다는 규정은 없었지만 가장 많은 송금 거래는 역시 달러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이란을 제재한다는 명목으로 스위프트에서 이란의 은행들을 배제 한다는 것은 이란과 무역을 하는 국가나 기업은 돈, 즉 달러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앞 장에서 언급했던 국가 간 자유무역에 있어 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나 상기해보자. 언어나 문화의 차이 따위는 얼마 든지 극복 가능하다. 하지만 무역을 위해 주고받을 돈의 가치가 안정적이지 못하면 무역은 활성화될 수 없다. 이것은 과거에나 앞으로나 변함없을, 근 본적인 부분이다. 그러니까, 미국이 스위프트에서 이란의 은행을 배제하는 제제가 의미하는 것은 미국이 안정적인 화폐, 즉 기축통화인 달러의 사용에 제한을 둠으로써 전 세계 무역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 줬다는 것이다. 아니 왜 달러 사용을 못 하냐고? 계좌에 달러를 충분히 쌓아 두고 있는 중국이 제재를 무시하고 이란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자. 쿤룬 은 행의 계좌에 쌓아 둔 달러를 스위프트를 거치지 않고 이란 은행에 송금하려 고 한다고 했을 때, 만약 두 은행 간에 서로 계좌 이체를 완료했다고 선언한 들 국제 은행네트워크는 그들의 장부가 바뀐 것을 인정할 수 없다. 달러를 발권하는 중앙은행, 즉 미국의 연준이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은행들 이 인정하려고 한들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은행 간 거래는 단지 장부의 숫자를 동시에 바꾸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장부들의 기 록을 전 세계 모든 은행들이 신뢰할 수 있어야 국제간 결제가 작동하는 것이 다. 그래야 어떤 돈이 생기거나 이동할 수 있다. 바로 스위프트와 국제결제은 행,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그 장부의 신뢰를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중국과 이란 간의 양자 간 거래는 그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스위프트를 거치지 않고 달러로 거래하고자 한다면 가능한 방법은 제3국에 있는 차명 계좌를 이용해 양국이 거래하거나, 아니면 달러 현찰을 물리적으 로 비행기나 선박을 이용해 옮기는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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