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말 데이턴 근교의 GM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았고 이듬해에는 NCR이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GM 자동차가 이전 한 후 비어 있던 공장은 결국 중국 푸저우福州의 푸야오 사 에 매각되었다. 중국의 자동차 부품 제조기업인 푸야오 사는 미국에 진출해 GM 자동차의 공장을 개조하고 자동차 유리를 제조하여 미국에 공급했다. 현지 신문은 종일 푸야오 사에 관 한 부정적인 뉴스를 내보냈다. 작업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임금이 지나치게 낮다는 식의 보도였다. 이에 대해 푸야오 사 는 “시급 15달러를 주고 있으며, 이는 인도나 멕시코보다 높은 수준”이라고 항변했다.과거 GM 자동차에서 시급 35달러를 받던 데이턴 시민들은 이제 중국 기업으로부터 시급 15달러를 받으며 일주일에 두 번 자선단체에서 음식을 받아가야 자녀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 다. 이것이 민주당 텃밭이던 미국의 내륙 지대가 공화당과 트 럼프를 지지하게 된 이유다. 트럼프 본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이 어떻게 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 "나는 전쟁의 진정한 기원이 아테네의 부상으로 두려움을 느낀 스파르타가 전쟁을 일으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31년))
- 미국의 전임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 James N. Matis'는 2017년 상원에서 열린 임명 청 문회에서 미국과 중국의 미래가 충돌 추세로 갈 것인가 하는 질 문을 받았다. 그는 국가와 국가 간 적대적 추세의 원인으로 '공 포, 명예, 이익fear, honor and interest 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인용하여 대답했다. 제임스 매티스는 미중관계를 비적대적 방식으로 처 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예로 든 세 가지 요소는 고대 그 리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가 자신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언급한 것이다. 스파르타와 아테네(Athens 사이에서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양측은 전력이 크게 손실되었다. 아테네 문명은 이때부터 쇠퇴의 길을 걸으며, 아테네가 이끌던 델로스 동맹pelian League 도 해산하게 된다. 얼마 후 스파르타도 그 뒤를 이어 멸망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결정적 전쟁을 일으 킨 배경을 주제로 다루었다. 근세의 학자들은 이 책에서 묘사 한 전쟁 발발의 기원을 국가와 국가간 '투키디데스의 함정The Thueydides Trap' 이라고 명명했다. 전쟁 발발의 세 가지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공포'다. 사 실상 제임스 매티스가 언급한 세 요소는 스파르타 공민대회The Appela 에서 참관인 자격으로 발언한 아테네가 부상하게 된 원동력을 투키디데스가 인용한 것이며, 투키디데스 자신이 관찰한 전쟁의 기원은 아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제1장 23절에 이런 말이 나온다. “진정한 기원은 아테네의 부상으로 두려움을 느낀 스파르 타가 전쟁을 일으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따라서 저자 는 이 전쟁의 기원을 단 하나로 설명했다. 즉 한쪽의 세력이 강해지면 상대방의 공포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 2018년 10월 10일 연방조사국 크리스토퍼 레이 국장은 상원 의 미국 국토안보와 정부사무 의제에 관한 증언에서 러시아가 여전히 주요 문제인 것은 사실이나 중국은 미국에게 “가장 광 범위하고 가장 복잡한 정보보호 분야에서 장기적인 위협”이라 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의 목표는 국 제 사회에서 수행할 모종의 역할을 쟁취하는 것뿐이며, 그들이 '오늘'의 전쟁을 하고 있다면 중국은 '내일'의 전쟁을 하고 있다. (...) 이는 앞으로 장기전이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위에서 언급된 발언들은 일부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과 관련한 공청회의 모든 내용을 추가하고 연방 상원의원들이 공개 장소에서 매체에 발언한 내용까지 추가한다면, 중국의 굴기에 공포를 느끼고, 이에 따라 더 많은 방위비를 요구하는 것이 미국의 당파를 초월한 공동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 2018년 6월,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 보고서
이 보고서에서는 중국의 경제 침략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 의했다. “중국 정부는 전면적인 장기 산업 전략을 실시하여 세계에서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한다. 베이징의 최종 목표는 자국 기업이 국내에서 우선 외국 기업을 대체하여 핵심기술 및 제품의 설계자와 제조자가 되고, 이어서 해외에 이를 판매하게 하는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빠른 경제 성장을 거쳐 세계 2대 경제 주체가 되었으며, 동시에 공업화와 글로벌 가치사슬의 향상을 실현했다. 그러나 그 성장은 많은 면에서 글로벌 규범과 규칙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 정책, 방법을 통해 실현되었다(경제 침략 Economic Aggression으로 통칭).” 중국의 경제 규모와 시장왜곡 정책 정도에 기반해 판단할 때, 중국의 경제 침략은 현재 미국 경제를 위협할 뿐 아니라 글 로벌 경제까지 위협하고 있다. 어떤 방면에서 중국은 그 침략행위, 정책, 방법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있다. 중국의 정부 문건, 간부급 관리의 행동을 비롯해 기업과 싱크탱크, 정부 기관이 작성한 보고서에 그 사실이 드러난다. 중국의 경제 침략에는 4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자국시장 보호 조치로 수입품과 경쟁하지 않게 해준 다. 이 유형에는 높은 관세, 비관세장벽, 기타 법규 등의 수입 장벽이 포함된다.
둘째,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 제품의 시장 점유율을 확대한다. 수출융자 외에도 국유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과 합병을 단행하여 국가 챔피언'으로 키우고, 이들이 국내시장과 국제시장에서 외국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산업정책에 포함된다. 중국 기업도 우대정책과 자금지원을 받아 자국시장에서 생산과잉을 초래했는데 그 결과 글로벌 시장에서 자사 상품의 가격을 낮추고 외국 경쟁자들을 글로벌 시장에서 몰아냈다.
셋째, 전 세계에서 안전한 핵심 천연자원을 공급받는다. 중 국은 약탈적인 '채무 함정Debt Trap 이라는 경제 발전 및 금융 모 델을 이용해 개발도상국에 대량의 자금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해당 국가의 천연자원을 통제하고 시장에 진입한다. 이러한 천연자원에는 보크사이트, 동, 니켈, 그리고 베릴륨, 티타늄 등의 희토류가 있다. 이러한 약탈적 모델은 법치 수준이 취약하고 권위적 정치가 득세하는 국가에 특히 효과적이다.
넷째, 전통 제조업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은 이미 각종 전통 제조업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대출우대, 시장 가격 보다 낮은 공공사업비율, 상부의 명령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느슨한 환경, 느슨한 건강 및 안전 기준을 통해 이 목표를 실현 했다. 유럽 상공회의소협회에서 “이 세대 사람들에게 중국은 줄곧 세계의 공장이다.” 라고 밝혔듯이, 2015년에 중국은 이미 전 세계 자동차 생산량의 28퍼센트, 전 세계 조선의 41퍼센트 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 냉장고 생산량의 50퍼센트 이상, 전세계 컬러 텔레비전 생산의 60퍼센트 이상, 전 세계 에어컨과 컴퓨터 생산량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이외에도 중국은 두 가지 유형의 경제 침략을 추구하고 있으 며, 이는 본 보고서의 중점이기도 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로부터 핵심기술과 지적재 산권을 획득한다.
둘째, 미래의 경제성장동력을 창출할 신흥 하이테크 산업과 국방산업의 신기술을 장악한다. 이 보고서는 중국 산업정책의 주요 법령, 조치, 행동을 상세 히 살펴 이 두 가지 정책이 어떻게 이행되는지 설명한다. 중국 정부는 이 정책들을 통해 미국의 기술과 지적재산권이라는 왕관의 보석을 빼가려고 한다.
- 국가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제 사조는 오늘날 자유학파의 경제학 주류가 아니다. 그러나 당시 각 대국이 부상하는 과정에서는 주류 중의 주류를 차지했다. 국가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자들 중 중량급 인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한국 학자 장하준 張夏準, Ha-Joon Chang 이 있다. 장하준이 저술한 책 중 《사다리 걷어차기》는 중국어로 《부국의 함정: 선진국은 왜 사다리를 걷어차는가》로 번역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산업혁명을 최초로 일으킨 영국을 포함한 모든 서구 국가들이 산업정책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 입하는 방법을 통해 신흥산업을 육성하고 성장을 촉진함으로 써 신흥산업이 일정 규모의 수익을 내고 경쟁력을 갖추게 한 후 세계 시장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사다리 걷어차기 kicking away the ladder'는 사실 독일의 경제학자 프 리드리히 리스트 Friedrich List, 1789~184%가 가장 먼저 사용한 용어다. 영국은 발전 초기에 네덜란드 등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수 많은 산업보호정책을 사용했는데, 이런 정책들이 곧 사다리였다. 영국은 이 사다리를 이용하여 꼭대기에 올라 산업혁명을 일으켰으며, 영국의 제품이 세계에서 무적의 수준에 이르자 세계를 향해 이렇게 선포한다. “과거에 행한 모든 것은 잘못되었 으며, 자유무역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모든 국가는 보호정책을 버리고 자유무역을 시행해야 한다." 당시 독일은 영국에 비하면 낙후된 편이었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선진국 영국이 보호주의를 사용했으며, 경제 발 전에 성공한 후에는 사다리를 치워버려 다른 국가들이 자신들과 같은 방법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을 막았다고 표현했다. 후발주자 독일은 당시 많은 산업정책을 채택했다. 특히 국가 역량으로 은행을 연합하여 전략 산업에 거액의 대출을 제공하게 했으며, 이는 당시 독일 경제를 일으킨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 독일의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지적했듯이 영국은 유치산업 보호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첫 번째 국가다. 그러나 이 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사용한 나라는 미국이다. 유명한 경제 역사학자 폴 베이로크 가 미국을 “현대 보호무역주의의 본산이자 철옹성” 이라고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상 보호주의 전략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사람은 미국 헌법 초안인 중 한 명이며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ton 이다. 그는 '유치산업'이라는 용어를 고안했으 며, 1791년에 '제조업에 관한 재무부 보고서'를 발표하여 보호 주의를 분명히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유치산업 보호 를 최초로 제창한 사람이 아니다. 첫 주자는 당연히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장하준의 책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원래 자유무역을 주장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기간(1825~1830년)에 비로소 유치산업을 보호하는 학자로 변신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미국에 있을 때 알렉산더 해밀턴과 미국 정치경제학의 시조인 다니엘 레이몬드Daniel Raymond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자신의 보고서에서 초기 손실을 정부가 보완해주지 않으면 미국이 미래에 국제 경쟁력을 갖춘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손실을 보상하는 방법 은 관세를 부과하거나 심지어 수입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제조업 위주의 북부는 관세를 통해 자신들의 산업을 보호해주기를 희망했고, 농업위주의 남부는 농산물을 수출하고 제조업 제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관세에 반대했다. 북부와 남부가 서로 다른 입장차로 갈등하던 상황에서 1789년에 최초로 전국적 관세정책이 시행되 었다. 당시 세율을 5퍼센트로 일괄 부과했으며 상당히 낮은 편 이었다. 1812년 미국은 영국과 전쟁을 벌일 때 평균 관세율을 12.5퍼센트로 인상했다. 그러나 상황은 1816년에 중대한 변화를 맞는다. 거의 모든 제조업 제품의 수입 관세를 35퍼센트로 인상함으로써 알렉산더 해밀턴의 제안이 이때부터 비로소 실행되기 시작했다. 농업 위주의 남부는 이 조치가 자신들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반대했으나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24년, 미국은 심지어 해당 관세를 추가로 인상했다. 1832년 제조업 제품의 평균 관세는 이미 40퍼센트에 달했으며, 양모제품에 대한 관세는 40~45퍼센트, 기타 방직품은 약 50퍼센트에 달했다. 남부와 북부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할 때마다 관세의 인상과 인하가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변화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장하준은 사실 관세가 미국 남북전쟁을 초래한 중요한 요소였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노예해방 여부가 중요한 요소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상 링컨 자신은 노예제도의 강제성 폐지를 내세운 적이 없으며, 그 역시 흑인'의 투표권에 반대했다고 장하준은 지적했다. 남북전쟁 이전에 링컨은 남부를 미국 영토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노예제도를 유지해도 무방하다는 뜻을 밝혔다.
- 남북전쟁(1861~1865년)이 발발한 후 재정 수입이 필요해지자 관세는 더욱 인상되었다. 1864년이 되자 미국의 관세는 신기록 을 돌파했다. 북부가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 관세는 대부 분 유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호관세정책의 시행 국가가 되었다. 관세 보호가 가장 강 력한 그 시기에 미국은 세계에서 성장이 가장 빠른 국가가 되었으며, 19세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이런 정책이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산업 경쟁력이 세계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우위를 차지했을때, 미국은 비로소 자유무역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영국이 1860년부터 1932년까지 실시한 것과 같은 자유무역정책은 실시하지 않았으며, 수입품이 국내 산업 을 위협할 때 보호조치를 취했다. 가령 일본 및 기타 국가의 방직품과 경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은 수입 할당제를 추진했으며, 수입 자동차가 국내 자동차 산업을 위협하자 상대 국가에 자발 적인 수출 제한을 촉구하는 보호정책을 실시했다. 한편으로는 국가 역량을 이용해 산업 발전을 지지하기도 했다. 1862년 제정한 토지공여대학법 Morrill Land-Grant Colleges Acts 부터 시작해서 미국은 정부의 역량을 이용해 농업과 기술 연구를 지지했다. 19세기 하반기부터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여 공공교육정책을 추진했다. 이밖에 교통 인프라 건설을 추진하여 철도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토지를 무상으로 기여함으로써 그들이 미국에서 철도망을 건설하도록 했다. 국방산업을 육성할 때도 민간산업 부양의 목적이 있어서 많은 국방산업 계획을 민간에 이전함으로써 민간 기업의 경쟁력을 갖추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미국의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은 국가 예산으로 약물과 바이오 기술 분야의 연구를 지원했다.
- 유럽 통합의 모델을 볼 때, 미중 양국이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더욱 활발한 교류와 무역을 진행함으로써 양국이 전쟁을 할 마 음이 없어질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류'에 관해서는 미국의 전임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의 말이 눈길을 끈다. 그는 2017년 상원에서 열린 임명 청문회에 서 미중관계에 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외교적으로 교류하고 연합의 관점 에서 교류하고 경제적으로 교류하면서 아주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함으로써, 신흥 세력을 상대할 때 우리 외교관이 항상 유리한 위치에서 교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제임스 매티스는 지혜로운 장군으로 많은 면에서 깊이 있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 며, 2018년 말 그를 해고했다. 트럼프의 내각에서 지식과 이성 을 겸비한 관리가 또 한 명 줄어든 것이다. 제임스 매티스 외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저서에 서 미국과 중국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구동존이求同存異(서로 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자성어)하며 충돌을 화해로 풀어가고 협력과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이 국제 사회에 융화하려고 시도하는 마당에 그들의 민족주의는 과도하게 해석되었다(Zheng, 1999).
둘째,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중국과 군사적 충돌을 피하여 세계대전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Bandow, 2018).
셋째, 미중 양국이 상호 이해와 협력을 증진함으로써 양국의 이익을 창조할 수 있으며, 충돌이 벌어지면 각자 피해만 입을 것이다(Paulson, 2015, 전임 재무장관).
넷째, 미중관계는 결코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미국은 중국의 굴기를 저지해서는 안 되며, 협조하여 중국의 발전 방향을 이끌어야 하고, 지역적 혼란을 피하여 양국에게 유리한 국제협력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Christensen, 2015).
다섯째, 중국은 미국이 정한 규칙에 따라 경제를 발전하는 중이다. 따라서 중국이 발전할수록 상업 분야에서 미국의 리더로서의 지위는 오히려 강화될 것이다(Steinfeld, 2012).
여섯째, 중국 위협론은 잘못 보도된 것이다. 중국은 자본주 의하에서 앞으로 15년 후 중산층 인구가 8억 명에 도달할 것이며, 미국 상품에 대해 큰 수요가 생길 것이다(Wang, 2010)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주요 군수물자를 공급하 는 기업은 '군수기업'으로 지정되었다. 1945년까지 대략 600개 의 기업이 군수기업으로 지정되었다. 이 기업들에 운영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대장성大藏省은 한두 개의 은행과 협력하여 그들에게 특별 융자를 제공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는 주거래은 행제도'가 탄생하게 된다. 즉 모든 기업은 한두 개의 주거래은 행과 연계해 평소 거래하며 대출을 받을 수 있다. 1945년 3월에는 주거래은행제도'를 확대하여 군수업체가 아닌 기업도 포함하여 2,000개의 기업이 이 제도에 편입되었다. 자본시장의 자금 모집처가 거의 막힌 상황에서 주거래 은행의 대출은 기업들의 유일한 자금줄이 되었다. 이밖에 모든 명령이 체제 안에서 더욱 완벽하게 관철될 수 있도록 정부는 모든 산업에 산업협회와 유사한 '통제회統制會'를 설치했다. 통 제회의 장점은 명령체계를 관철하는 데 있었다. 가령 정부가 내년에 철강업에서 몇 톤의 철강을 생산하기로 계획한다고 하자. 정부는 그 목표를 통제회에 전달한다. 통제회 간부는 기업으로 구성된 회원들을 모아놓고 정부가 정한 생산목표를 전달하고, 각 기업과 협의하여 할당량을 배분하여 기업의 개별목표로 삼는다. 이는 마치 군대의 지휘체계처럼 위에서 아래로 하달되는 방식이었다.이런 체제가 가동되면서 1937~1945년 일본 경제는 혁명적 인 변화가 일어나 국가동원 체제로 변했으며, 기업과 노동자 는 국가의 목표를 위해 존재했다. 이런 체제하에서 정부는 생 산 방향을 통제했고, 그 결과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1937년 방 직업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 29.3퍼센트에서 1941년에는 14.7퍼센트로 떨어진 반면, 같은 기간 기계 공업은 14.4퍼센트 에서 30.2퍼센트로 늘어났다. 중공업 위주로 발전시키는 일본의 군사적 목적을 엿볼 수 있다. 군수물자 생산량은 1937~1945년 무려 2배가 성장했으며, 노 동자 전원이 동원되어 실업이 자취를 감췄다. 산업구조는 농업 에서 공업으로 이전하면서 일본은 공업화 국가로 거듭났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상당히 짧은 시간에 일본이 성공 적으로 제도를 완벽하게 운영하며 빠르게 실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일본의 동북3성(만주국) 지배와 매우 큰 관계가 있다. 일본은 1937년에 동북3성을 점령한 후 군대를 파견하여 이 지역을 직접 통치했다. 통치계층은 '만주국'에 위 에서 아래로 하달되는 통제체제를 구축했다(독일을 모방한 것). 따라서 '만주국'에서 실험 단계를 거치면서 완벽하게 적응한 체제를 본국에 직접 접목함으로써 일본의 자유경제체제를 전시동원 체제로 바꿨는데 이를 '일본식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 미국은 일본에 엔화절상을 압박하는 절묘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1985년 9월 22일,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즉 G5 그룹) 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행장들이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를 체결했다. 인플레이 션 억제, 내수 확대, 무역개입 감소와 더불어 각국 중앙은행이 협력하여 외환시장에 개입함으로써 달러의 주요 통화에 대한 가치를 '질서 있게 절하한다는 내용이었다. 플라자 합의를 체결하기 전부터 엔화는 이미 상승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엔화 대 달러 환율은 1975년 12월 10일 최고점 306.01:1에서 시작하여 플라자 합의 당시(1985년 9월) 242:1로 상승했다. 플라자 합의 이후 1986년 5월 엔화 환율은 160엔을 돌파했으며, 1987년 말에는 120엔에 달했다. 그 후에도 엔화의 절상은 계속되어 1995년 5월 3일에는 83.25 엔까지 상승했다. 독일 마르크화도 큰 폭으로 절상하여 각 주요 화폐에 대한 달 러의 가치는 큰 폭으로 절하했다. 1985년 미화 1달러로 250엔을 환전하던 수준에서 1987년 말 120엔을 환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미국에 수출하 는 모든 일본 상품에 108퍼센트의 추가관세가 붙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일본에 수출하는 모든 미국 제품의 가격을 절반으로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1975년 엔화의 최저점에서 1995년 최고점까지 상승폭은 무려 3.68배에 달했으며, 이는 268퍼센트의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플라자 합의에서 보여준 미국의 초강수는 경악할 수준이었다. 다른 4개국(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는 미국의 처분에 따랐으며 아무도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 거품경제는 어떻게 해서 출현했을까? 특히 중앙은행이 통화 공급을 그토록 빠른 속도로 늘려가며 조절하지 않은 이유는 무 엇이었을까? 자료를 찾아보면 두 가지의 각각 다른 해답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공황론'이다. 일본은 플라자 합의로 인한 큰 폭의 엔화 절상을 겪으면서 경제 후퇴를 두려워했다. 이에 따라 통화완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여 지나치게 빠르게 진행되는데도 경각심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자산가치 상승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부풀 대로 부푼 거품이 마침내 꺼지게 된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음모론'으로, 이는 미국과 관련이 있다. 음모론을 주장한 사람은 독일 출신의 경제학자 리하르트 베르너 교수다.
- “개혁을 일으키는 가장 직접적 방법은 한 차례의 위 기를 조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 제도에 불만을 느끼고 개 혁을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기존 제도의 기득권자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쫓아내서 개혁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개혁 방식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남 미에서 출현했다. 시카고 학파 출신의 경제 자유주의자들이 잇달아 칠레, 우루과이, 러시아에서 '충격 요법'을 실시하여 경제 위기를 일으키고 기존 제도를 변화시켰다. 이 일본 은행 출신의 총재들은 그들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우선 경제거품을 형성한 후 거품을 터뜨림으로써 사람들을바닥에서 살게 만든다." 따라서 이 일본은행 간부들은 대출한도를 위험한 수준까지 고의로 확대. 그런 후에 대대적 긴축경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일본경제를 붕괴에 직면하게 했으며, 이를 통해 각계각층이 기존 제도를 돌아보고 근본적변화를 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미일 무역마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지정학적으로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무역 문제에서 미국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일본에 대해 혹독한 조치를 취했다. 여기서 설명한 일본 거품경제 음모론이 사실이라면, 미일 무역마찰을 해결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미국에 투항한 일본의 지도자와 정부는 미국보다 더 악랄하게 자국민을 대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 일본의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일본은 업그레이드와 우회진출을 통해 역경을 헤쳐나갔으며, 가공과 조립라인을 일본에서 한국, 대만, 동남아 국가와 중국으로 이전했음. 이것이 우회진출이다. 최종 조립상품 수출에서 중간원료와 부품 및 기기설비 수출로 발전한거이 업그레이드에 해당함. 중국 본토와 중국에 진출한 대만업체들도 미들스트림과 업스트림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고, 이어서 다운스트림 라인을 일대이로 국가로 옮기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이 방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중국의 대미무역흑자가 감소하여 동남아, 인도, 아프리카 등지의 대미 무역흑자로 전환될 것이다. 일부 업체는 주문 이전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가령 볼보volvo 자동차는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SUV차량 'XC60'을 청두成都 공장에서 수출하고 있었고, 얼마 전 S60 인 스크립션 Inscription 전장 추가 버전도 같은 공장에서 수출했다. 그러나 이번 관세 폭탄의 영향으로 볼보 자동차는 스웨덴 공장 의 XC60 모델을 수출하는 것으로 변경했으며, 청두 공장에서 미국으로 수출하기로 되어 있던 생산분은 미국 이외의 지역으로 수출함으로써 타격을 줄였다. 외국자본이 철수할 가능성이 있지만 철수하지 않거나 일부만 철수할 수도 있다. 후자를 택하는 것은 어차피 대미수출이 중국의 총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8.5% 인데다 지금도 계속하락하고 있기 때문. 이는 중국이 시장을 분산하고 있으며, 다른나라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음을 말해줌. 중국은 국내 소비시장 자체의 성장도 빠르기 때문에 외국자본이 중국에서 철수한다고 해도 나머지 81.5%는 중국에서 생산하게 될 것이다. 다른 나라는 아무래도 중국보다 생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았다면 외국 자본은 진작 철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 자본의 대부분, 또는 전체가 철수할 수도 있는데, 이는 불확실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 자체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밖에 중국의 노동 비용이 최근 큰 폭으로 올랐으며, 다른 생산기지(가령 베트남) 측이 충분한 우대혜택을 제공한다면 '우회진출'을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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