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제학

인문 2020. 7. 29. 08:26

- 정치 저술가들이 하나의 금언처럼 받아들이는 명제는 어떤 형태의 정부 체계를 모색하더라도 (...) 사람들은 모두 부정직하며 그들의 행동 목적은 오로지 사익의 추구에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익을 수단으로 삼 아 사람들을 통치해야 하며, 이익을 수단으로 삼아 그칠 줄 모르는 탐욕과 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공익을 위해 협력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 따라서 모든 사람이 부정직하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은 단지 일 종의 정치적 금언일 뿐이다. 실제로는 거짓인 이 금언이 정치에서는 참이 어야 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데이비드 흄, 《에세이: 도덕, 정치 그리고 문학》(1742))
- 내가 주장하려는 바는 법을 설계하거나 정책을 수립하거나 사업체를 조직하려고 할 때,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시민·피고용인·학생·채무자의 행위 모델로 삼는 것은 결코 신중한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패러다임에 따라 정책을 펴면 도덕적 무관심과 이기심이라는 가정을 점점 더 사실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유인이 없을 때보다 유인이 있을 때 훨씬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둘째, 벌금이나 보상 같은 물질적 인센티브가 때로는 잘 작동 하지 않기 때문이다. 흄이 주장하는 대로 부정직한 사람의 탐욕을 이 용할 수 있도록 아무리 정교하게 인센티브를 설계하더라도, 인센티 브만으로는 좋은 거버넌스가 확립될 수 없다. 내 주장이 맞다면, 광범위하고 잘 정의된 사적 재산권의 확립, 시장경쟁의 강화, 금전적 인센티브를 통한 개인 행동의 유도 등 경제학자들이 선호하는 정책은 좋은 거버넌스에 필요한 윤리적 동기나 그 밖의 사회적 동기를 해치는 의도치 않은 문화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 나는 시장경제가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런 정책들이 이기심을 부추길 뿐 아니라, 협력적이고 관대한 시민문화를 견고하게 유지해주는 사회적 수단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 을 보이려고 한다. 이런 정책들은 시장이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 규범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대출을 신청할 때 자기 자산과 부채 상황을 정직하게 적어내는 것, 약속을 잘 지키는 것,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 일상적인 미덕도 이른바 몰아냄 효과 crowding-out라 불리는 문화적 재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장과 같 은 경제제도는 이런저런 규범이 부재하거나 위태로울 경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같은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회규범이라는 문화적 토대가 필요하다. 이런 규범 중 하나가 '악수는 말 그대로 악수handshake is indeed handshake 라는, 즉 약 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확신이다. 누군가 이를 의심하는 순간, 그 불신 때문에 교환을 통한 상호 이득의 창출은 제한될 수 있다.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완벽한 작동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는 정 책이 오히려 시장의 작동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역설은 시장을 넘어 서는 곳에서도 적용된다. 이런 정책을 편 결과, 시민의식이나 사회규 범을 준수하려는 사람들의 내적 욕구가 고갈되어 미래에 더 나은 정 책을 수립할 여지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축소될 수 있다. 일부 경 제학자들은 아주 먼 과거에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시장을 창조한 것 으로 상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도덕적 무관심과 이기심의 확산은 경제학자들이 이상적이라고 말할 법한 그 런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 정책입안자는 몰아냄 효과와는 정반대 효과를 가져오는 정책을 찾아낼 수 있을지 도 모른다. 어떤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에서라면 인센티브와 처벌이라는 전통적인 정책 수단이 시민들의 윤리적이거나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고, 그 결과 법적 제약과 물질적 유인의 효과를 높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법과 도덕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의 기원은 적어도 2000년 전 호라티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법적 처벌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죄책감을 토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도덕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송가》 3권 24번) 호라티 우스는 법과 도덕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 질서 잡힌 사회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 경제학자들의 일반적인 가정과 달리 사람들은 의사결정을 할 때 먼 미래까지 고려하지 않으며 계산에 능하지도 않고 일관적이지도 않다. 나아가 사람들은 현상유지 편향을 보이며 미래의 서로 다른 시점에 놓인 대안들 간의 선택에서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편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교육받은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경제학자들이 계산 착오라 할 법한 행위를 지속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일어날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0보다 크면 그 사건을 확실히 일어나지 않을 사건과 전 혀 다른 것으로 취급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만큼 경제학자들의 존경을 받는 심리학자 카너먼은 “사람들은 의사결정을 할 때 근시안 적이며, 미래 자신의 취향을 예측하는 데 서툴고, 기억의 오류와 과 거 경험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평가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 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은 선택 행위를 모든 인간 행위의 중심에 놓는데, 이제 경제학자들도 사람들이 그다지 선택에 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보스턴 시 소방청장은 소방대원들의 병가가 이상하게도 월요일과 금요일에 몰려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는 2001년 12월 1일자로 무 제한 유급 병가제도를 폐지했다. 그리고 연간 유급 병가 일수를 최대 15일로 제한하고 이를 초과하면 그만큼 급여에서 삭감하도록 했다. 소방대원들은 이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병 가 신청 건수는 전해보다 열 배 증가했다. 소방청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보복조치로 소방대원들에게 지급하 던 휴가 보너스를 폐지했다. 소방대원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듬해 소방대원들이 신청한 병가 일수는 총 1만 3431일로 아무런 제한이 없던 전해의 6432 일보다 늘어났다. 많은 소방대원이 새로운 제도에 모욕감을 느꼈고, 이에 제도를 남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들은 앞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윤리의식, 즉 부상을 당하거나 몸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공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는 것이 입법자의 임무라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으로부터, '악한 사람'을 가정하며 경제적 거버넌스와 법을 강조하는 시스템적 사고로 초점이 전환되는 긴여정은 16세기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부패'라 부 른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사회 관습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었 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2세기 뒤에 등장할, 사람의 부정직함에 대 한 흄의 언급(이 책의 앞머리 인용글)을 예고하는 듯한 문장에서 아리스 토텔레스와는 다르게 권고한다. “공화국을 수립하고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악하며,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결코 좋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배고픔과 가난이 부지런한 사람을 만들며, 법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들 한 다.” 11 ‘법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입법자가 대 중에게 습관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언뜻 비 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모든 사람이 악하다'는 표현에서, 선하다 ‘buoni'라는 말과 사악하다 ‘rei’라는 말을 사람의 됨됨이가 아닌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20세기 경제학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이런 사고의 기원을 16세기 피렌체에서 찾는다. “경제주의 economism는 발전한 마키아벨리즘이다. 스트라우스가 경제주의라고 지칭한 사고의 기원을 마키아벨 리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키아벨리는 이기적(“부패한) 시민들로는 좋은 거버넌스가 형성될 수 없다고 본 점에서 대부분의 현대 경제학자들과 거리가 있고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가까웠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했다. “법이나 명령만으로는 부패가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좋은 관습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한 것처럼, 법이 준수되기 위해서는 좋은 관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법이 두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개인의 이기심이 공공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활용될 수 있도록 인센티브와 제약을 제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데 필 요한 좋은 관습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덕성의] 좋은 사례들은 좋은 교육으로부터 나오고, 좋은 교육은 다시 좋은 법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정확히 이 책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려 하는, 좋은 법과 좋은 관습이 서로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가 되도록 할 수 있는 시너지 지향적 정책 패러다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버나드 맨더빌 Bernard Mandeville 의 《꿀벌의 우화》가 전달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는 바로 이 런 사고의 급진적인 형태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이 괴짜 런던 의사 는 자신의 책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미덕은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맨더빌의 벌집은 부도덕한 탐욕과 시샘 어린 경쟁 위에서 번성했고, 꿀벌들이 도덕적으로 변하자 붕괴 와 무질서가 뒤따랐다. (물론 당시 맨더빌은 지구상에서 가장 협력적인 꿀벌 종의 개체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다는 사실 을 알았을 리 없다.) 절약의 미덕이 상품 수요를 줄여 경제적 붕괴를 초 래할 수 있다는 맨더빌의 통찰은 케인스 경제학의 기초였던 절약의 역설을 예고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꿀벌의 우화》 1714년도 판 표지에는 이 저서가 “인간의 약점들이 시민사회의 장점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도덕적 덕성을 대신하도록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담론"을 포함한다고 쓰여 있다. 맨더빌은 결론부에 “무리 중에서 가장 악한 놈마저도 공공선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적었다. 맨더빌은 《꿀벌의 우화》가 전하는 교훈을 독자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산문체 주석까지 달았다. “굶주림이나 갈증, 헐벗음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첫 번째 폭군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자부심, 게으름, 관능적 욕구, 변덕스러움은 모든 예술과 과학, 무역, 수공예 그리고 소명을 발전시키는 위대한 후원자들이다. 또한 필요, 탐욕, 질투, 야망이라는 위대한 감독관은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끊 임없이 노동하게 하고, 그들 대부분이 기꺼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역 을 받아들이게끔 한다. 여기서는 왕과 왕자도 예외가 아니다. 맨더빌이 보기에 마키아벨리가 말한 것과 달리 “일상적인 기질이 이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일은 인간 사회에서 결코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마키아벨리가 좋은 정부의 기초를 법을 집행하는 인간의 능력에서 찾았던 것처럼, 맨더빌은 좋은 정부의 기초를 “사적인 악”을 “공적인 이익” 으로 전환할 수 있는 “숙련된 정치가의 능수능란한 관리" 에서 찾았다. 좋은 법이 좋은 시민을 만든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대조적으로, 맨더빌은 우화를 통해 올바른 제도가 비천한 동기를 잘 활용함으로써 고상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연금술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은 애덤 스미스의 몫으로 남겨졌다.
- 고전학파 경제학자들(그리고 이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간과한 사실은 이기심을 이용하고자 설계한 인센티브 제도가 도덕적 행위를 비롯한 친사회적 행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아마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케네스 애로 Kenneth Arrow 는 리처드 티트머스Richard Titmuss의 저서 《선물관계: 헌혈부터 사회정책까지 The Git Relationship: Froma Human Blood to social Polic)》에 대한 비평 논문에서 “혈액이 거래되는 시장이 형성된다고 해서 왜 헌혈 행위에 내재한 이타 주의가 감소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이 질문의 답이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굳이 대답할 필요 도 없다고 생각했다. 애로에게 이 문제는 “경험상의 문제일 뿐 경제학의 제1원리를 재검토해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첫 번째 원리는 인센티브와 도덕이 가산적이며 분리 가능하다는 가정이다. 가산적이며 분리 가능하다는 것은 원래 수학 용어로 한 요소의 변화에 따른효과가 다른 요소의 수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요소가 가산적이며 분리 가능하면 두 요소 간에는 시너지 효과(각 파트별로 분리되어 노래하는 것보다 듀엣이 더 나은 것처럼, 각 요소가 다른 요소의 효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효과)도 발생하지 않고 그 반대의, 즉 역의 시너지 효과도 발생하지 않는다. 분리 가능성 가정에 대해서는 이후 장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우리는 이미 이 가정이 성립하지 않는 사례를 살펴보았다. 보스턴 시민에 대한 소방관의 의무감과 그들의 급여에 대한 이기적 관심은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후자만을 고려한 정책이 전자를 약화시켰다. 이 경우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작았다. 이 기심을 가정한 정책 패러다임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가능성이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다 보면, 앨리스가 경제학자의 메시지를 가슴 깊이 새기는 장면이 나온다. 공작부인이 “오, 사랑이여! 이 사랑이야말로 세상이 돌아가도록 하는구나"라고 외쳤을 때, 앨리스는 혼잣말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지” 라고 했다. 어떻게 자기 일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대신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법질서를 고민할 때 벤담이나 흄, 스미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던진 고전적인 질문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정책 당국자들이 떠받드는 성배에 담긴 내용이기도 하다. 이때 문제는 사람들 이 개인적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적절하게 고려하게끔 하는 법과 공공정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 20세기 초 앨프리드 마셜 Alfred Marshall과 아서 피구 Arthur Pigou는 시장이 실패하는 경우에도 가격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내부화하도록 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 쳤다. 계약이 불완전할 경우, 다른 사람에게 환경상 피해(외부불경제) 를 입히는 산업에는 조세를 부과하고, 노동자에게 직업훈련을 제공 하는 기업에는 그곳 노동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직할 때 다른 기업이 이로부터 혜택을 얻게 될 것이므로 이를 반영해 보조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존스 씨는 브라운 씨에게 제공한 꿀벌의 수정 서비스 가치만큼 보조금을 받을 것이고, 이렇게 받은 보조금 수입을 합하면 이제 존스 씨는 벌꿀 생산이 창출하는 사회적 총편익만큼 수입을 얻는 셈이다. 최적 조세와 최적 보조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경제행위자의 행동으로 타인에게 초래되는 편익과 비용이 그 행위자 의 사적 수입이나 비용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 그 행동이 타인에게 혜택을 주면 그만큼 행위자에게 보상해주고, 반대로 타인에게 비용 을 초래하면 그만큼 세금 형태로 행위자가 부담하게 하는 것을 의미 한다. 한 가지 사례로 환경세를 들 수 있다. 환경세는 오염물질을 배출 한 사람에게 환경적 파급효과를 초래한 만큼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세금이다. 이런 정밀한 인센티브를 실현할 수 있다면 정확하게 벤담이 말한 “의무와 이해의 결합 원리”를 실행하는 것이 된다. 결국 이기심과 공적 목표가 일치하도록, 개인의 행동에 따르는 물질적 인 센티브를 변화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셜이나 피구 그리고 이후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최적 조세와 보조금은 말하자면 완전한 계약의 대체재라 할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손이 미치는 범위를 보이지 않는 손 정리의 가정이 어긋나는 경우로까지 확장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적으로는 조세와 보조금을 통해 모든 중요한 것에 가격을 매길 수 있으며 또한 그 가격이 적정하도록 만
들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정책입안자 입장에서 시민들이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개인이 자기만 고려하더라도 자기 행동에 영향받는 상대방을 고려하는 것처럼 행동하도 록 인센티브와 제약을 제공하는 것을 정책수립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현명한 정책입안자란 사람들의 도덕심을 고양하는 역할을 맡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라기보다는, 시민들이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적절한 법을 시행하는 역할을 맡은 마키아벨리적 공화주의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존스 씨의 꿀벌과 브라운 씨의 사과나무 꽃 같은 목가적인 사례는 경제학자들이 불완전 계약에 대해 강의할 때 자주 인용하는 사례다. 교과서는 공공재의 대표적 사례로 등대를 든다. 등대의 불빛은 어느 한 사람이 볼 수 있다면 모두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완전계약이라는 문제는 그저 경제 영역의 주변부에서나 발견되는 현상 은 아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 문제는 노동시장이나 신용시장 그리고 정보시장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의 주요 영역에 만연해 있다.
- 애로는 '보이지 않는 손 정리'를 설명하는 논문에 이렇게 적었다. “신뢰가 부족하면 협력을 통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을 포함한 사회 적 행위 규범은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사회적 대응일지도 모른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계약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격이 도덕을 대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도덕이 가격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때가 있다. 애로가 주장한 핵심은 사회규범이나 도덕 규칙을 통해, 개인 행동 이 타인에게 초래하는 편익이나 비용을 내부화하는 효과가 있다면 시장실패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경제를 구성하는 주요 시 장, 즉 노동시장 · 신용시장 · 지식시장 등이 계약의 불완전함 속에서 도 비교적 잘 작동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사회규범이나 타인을 고 려하는 동기가 긍정적인 노동윤리, 자신이 추진하려는 프로젝트 내용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 약속을 지키려는 책임감 등을 장려하기 때문이다. '도덕경제'라는 말은 결코 형용모순이 아니다.
-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적 입법자들이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기 ”을 가진 사람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공화국이 되도록 거버넌스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가 정해야 한다는 루소의 권유(그리고 그로부터 4세기 후의 메커니즘 디자인)를 두 세기 이상 앞서 예고한 것이다. 이런 주장이 어떻게 정책이 수립되고 법이 집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이해의 지평을 넓혀준건 사실이다. 하지만 맨더빌을 시작으로 이후 경제학자들에 의해 이런 생각이 급진적으로 확장된 데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다. 오늘날에도 내가 속한 학문 분과의 학자들은 개인의 선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인센티브 제도를 영리하게 설계하면 도덕에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시민이 공익에 이바지하도록 행동하게 할 수 있다고 과신한다.
-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윤리적이고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는 사 회가 잘 유지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아니, 그 역할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한 채,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선호가 어떤지를 고려하지 않고 정책을 수립한다면 인간이 가진 소중한 성향을 훼손할 수 있다. 따라서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들은 소방청장이 처벌이라는 인센티브를 제공했을 때 소방관들의 대응이라든지, 하이파의 어린이집에서 벌금을 부과했을 때 어린이집에 더 늦게 도착한 부모들의 행동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 강의실 칠판에 펼쳐진 경제학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도 있다. 백악관에서 초과그무 수당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정책은 셸링을 비롯한 보좌관들이 토요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에서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응시해 통과하면 상당한 지원금을 제공하는 정책'을 실시했을 때에도 남학생에게는 정책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여학생에게도 거의 효과가 없었다. 학업 성적이 좋은 일부 여학생에 게만 효과가 있었는데, 이들은 이미 성적이 좋아서 시험만 치른다면통과할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이었다. 미국 도시에 소재한 250개 학교를 대상으로 학업성취도 시험 성적에 따라 대규모 현금 지급 정책을 실시했을 때도 정책 효과는 거의 없었다. 학생들이 예컨대 독서 같은 자기학습을 더 열심히 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정책 역시 그 효과가 미미했다. 흔치 않은 자연실험 사례가 하나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병원이 불필요하게 입원 기간을 늘리지 못하도록 일종의 벌금을 부과한 적이 있는데, 이 제도는 기대에 반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영국에서는 병원의 이윤과 손실 계산에 영향을 미치도록 인센티브를 설계하는 대신, 병원 경영자의 수치심이나 자부심을 일깨우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환자들의 입원 기간이 대폭 감소했다.
- 인센티브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사실 자체가 체험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그 효과를 '몰아냄의 범주적 효과 categorical crowding Out'라고 한다. 그리고 인센티브의 크기가 체험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그 효과를 '몰아냄의 한계적 효과marginal crowding out'라고 한다. 앞으로 보겠지만, 인센티브가 개인의 체험가치를 증가시키는 '끌어들임 효과'도 마찬가지로 범주적 효과와 한계적 효과로 구분할 수 있다.
- 마키아벨리는 이기적인 사람도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정책을 고안하려 했다. 흄은 부정직한 자들의 '그칠 줄 모 르는 탐욕'을 잘 인도해서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하고 싶어 했다. 이런 주장은 여전히 훌륭한 아이디어로 간주된다. 하지만 부정직한 자들을 전제로 법을 만들면, 그 법이 사람들을 부정직하게 만든다. 그래서 선한 사람도 '나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될 수 있다. 이런 경고는 데이비드 패커드 David Packard 같은 성공한 기업인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1930년대 후반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일했다. 회사는 공장 보안에 엄청나게 신경 썼다. (...) 노동자들이 도구나 부품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보안 장치를 설치해 도구와 부품 창고 경비를 강화했다. (...) 기업 측이 이렇게 노동자에 대한 불신을 공공연히 드러내자, 노동자들은 마치 회사의 불신이 사실임을 입증하려는 듯 감시가 소홀한 틈을타 도구와 부품을 슬쩍 빼돌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휴렛팩커드를 창립했을 때,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공장의 부품 창고를 언제나 열어놓기로 했다. 이 조치는 두 가 지 면에서 회사에 도움이 됐다. 상품 개발자나 노동자가 도구와 부품 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집에서 혹은 주말에 회사에 나와 자신 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해볼 수 있었다. (...) 그리고 부품 창고를 열어놓는다는 사실 자체가 신뢰의 상징이 됐는데, 신뢰야말로 휴렛팩 커드 경영의 핵심 요소였다.”
-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보상 없이도 행동 자체로부터 만 족을 얻고 있을 때 인센티브의 도입이 행동을 과잉 정당화할 수 있 으며, 인센티브가 부여됨에 따라 개인들은 스스로를 더 이상 자율적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될 수 있다고 한다. 1장에서 언급한 실험 사례를 떠올려보자.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의 경우, 어른이 손을 뻗어 닿지 않는 물건을 집는 것을 도와줬다고 장난감을 상으로 주면, 상을 받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이후 어른을 덜 돕게 되더라는 이야기 말이다. 이 연구를 진행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 다. “보상이 주어지고 나면, 아이들은 예전에는 그 자체로 충분한 목적일 수 있었던 행동을 단지 더 가치 있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돕고자 하는 내재적 동기가 감소한다. 그리고 이제 보상 자체가 충분치 않다고 느끼면 도움주기를 그만둘지도 모른다.
- 인센티브가 때때로 의도치 않게 메시지 역할을 한다는 이론이 말하듯, 팔크와 코스펠트의 실험에서 주인의 하한선 부과는 대리인에게 주인이 대리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달해주는 정확한 정보였다. 실험 후 참가자들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대리인 역할을 맡았던 이 들 중 다수가 하한선 부과가 주인이 자신을 불신한다는 신호였다는 데 동의했다. 또한 주인 역할을 맡았던 참가자들 중 하한선을 부과하 기로 결정한 이들의 경우 실제로 대리인에 대한 기대감이 낮았다. 주 인이 이렇게 대리인을 불신하여 대리인의 선택을 통제하려고 시도 한 경우 (하한선 수준이 상·중·하로 각각 결정되어 있던 조건 모두에서) 절반 이상의 대리인들이 부과된 하한선에 딱 맞춰 노력 수준을 선택했다. 대리인들은 이렇게 대응함으로써 주인들이 가졌던 최초의 비관주의를 실제로 확인시켜준 셈이다.
- 이렇게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 향으로 전개되었다. 통제 기피를 확인해주는 실험의 구체적이고 세 세한 결과들을 살펴봄으로써 사회 전반에 대해 갖는 함의를 찾아보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는 이제 골치 아픈 고민거리를 하나 갖게 되었다. 만일 현실 경제에서도 대부분의 고용주가 자신의 노동자를 믿지 못한다면, 그런 고용주는 실험에서 하한선을 부과했던 것처럼 보상과 감시 위주의 정책을 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실험에서 그랬듯이 최소 요구 조건만을 가까스로 충족시키는 식의 노동자들 반응에 직면할 것이다. 그리고 고용주들은 작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태만함을 지켜보며 그들이 최초에 갖고 있던 암울한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그린은 옳고 그름 Moral Tibes: Encotion, Reason, and the Gap Between US and Then》이라는 책에서 인센티브와 도덕을 이해할 수 있는 이론 틀을 제공했다. 첫째, 숙고의 과정은 결과에 기반하고(철학자들 용어에 따르자면 '결과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반면, 정서적 과정은 의무나 일련의 규칙에 순응하는 등 비결과주의적(철학자들 용어에 따르자면 '의무론적 판단을 관장한다. 둘째, 이런 행위 방식들은 각각 상이한 뇌 영역, 즉 하나는 (숙고적인) 전두엽 prefrontal cortex의 활성화와 관련 있 고, 다른 하나는 (정서적인) 변연엽limbic system의 활성화와 관련 있다. 뇌과학적 증거들을 두고, 경제적 인센티브가 결과주의적 추론을 전면에 나서게 하며(전두엽의 활성화), 의무론적 판단을 뒷전으로 밀 어낸다는(변연엽의 비활성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그동안 많은 실험에서 확인되어온 몰아냄 효과란 덜 친사회 적인 결과주의적 추론이 때로는(항상은 아니더라도) 친사회적인 의무론적 판단을 몰아내는 효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중과정 이론이 신뢰 게임뿐 아니라 다른 여러 실험에서 나타나는 행동의 근접인을 식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몇몇 증거가 있다. 앨런 산페이 Alan Sanfey 연구팀은 자신들의 이전 실험 결과들을 다음 과 같이 해석한 바 있다.
“최후통첩 게임에 대한 신경 촬영 연구를 통해, 실험 참가자가 불공정 한 제안에 직면할 때 뇌에서 특별히 활성화되는 두 영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앞뇌섬anterior insula 이고 다른 하나는 배외측 전두엽 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dIPFC)이다. 앞뇌섬의 활성화는 감정적 처 리 과정과 연관되고, 배외측 전두엽의 활성화는 숙고적 처리 과정과 연관된다. 섬 부위가 배외측 전두엽보다 활성화되면 그 실험 참가자 는 제안자의 제안을 거부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제안을 수락했다. 이 런 발견은 최후통첩 게임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이중 시스템이 작동한 다는 뇌과학적 증거가 된다.”
- 사회적 선호를 둘러싼 이중과정 이론을 신경과학을 통해 규명하려는 시도는 이제 막 발전을 시작한 초기 단계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중요한 언급이 하나 있는데, 바로 로웬스타인과 오도 너휴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숙고적 시스템은 안정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데, 이런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도덕적·윤리적 원칙에 의해 추동된다. 반면 정서적 시스템은 촉발되는 공감의 정도에 따라, 순수한 이기심과 극 단적 이타성 사이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향할 수 있다. 인센티브가 숙고적 과정을 부각시킨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숙고가 관대한 행동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에이즈 환자들에 대 한 진보주의자들의 태도처럼 말이다. 반면 가난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자아이 사진을 보여주는 것과 그 아이의 처지에 대한 통계수치를 제시하는 것의 효과 차이가 보여주듯, 숙고가 덜 관대한 행동으 로 이어지기도 한다. 숙고가 더 관대한 행동으로 이어질지 덜 관대한 행동으로 이어질지는, 숙고에서 유래하는 관대함이라는 도덕적 명 령(예컨대 벤담식 공리주의 계산)이 정서적 과정에서 관대함을 이끌어내는 감정(공감의 경우)보다 더 강력한지 여부에 달려 있다.
- 시장과 여타 경제제도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 (예컨대 누구와 만나 무엇을 하는지, 그럼으로써 무엇을 얻는지 등)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사회규범과 선호가 형성되고, 이렇게 형성된 규범과 선 호는 삶의 비경제적 영역으로까지 보편화된다. 이런 인식은 오래전 부터 존재해왔고, 이런 관점을 견지한 사람은 마르크스만이 아니다. 왕정주의자였던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이 “궤변가들과 경제학자들의 시대를 열었다는 사실을 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 다. “정서적 유대와 관련된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 사랑, 존경, 칭송, 유대를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해졌다. 삶을 멋지게 치장해줄 휘장이 모조리 찢겨나갔다.” 반면 시장이 가져온 문화적 결과를 한층 우호적인 눈으로 바라 본 이들도 있었다. 몽테스키외 Montesquieu 남작은 “상업이 있는 곳 에서는 사람들이 신사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어느 쪽도 경제가 재화·서비스를 생산할 뿐 아니라 사람도 만들어낸다는 생각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선호에 대한 시장의 장기적인 효과에 대해 마르크스, 버크, 몽테 스키외 등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앞 장에서 본 인센티브의 효과와는 상당히 다르다. 앞서 인센티브의 효과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벌금과 보조금이 선호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인센티브가 사람들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그 결과 일부 선호에 주목하며 나머지는 외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센티브가 사람들이 새로운 취향, 습관, 윤리적 약속, 그 밖의 다른 행위 동기를 습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르크스나 버크 혹은 몽테스키외의 주장은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워진다.
- 식량 저장이 보편화된 사회의 부모들은 그렇지 않은 사회의 부모들에 비해, 아이의 독립성보다 순종적 태도를 훨씬 더 강조했다. 배리 연구팀은 “경제에 대한 정보만으로도 한 사회의 사회화 압력이 순응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루어지는지 자기주장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꽤 정확히 예측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인과관계 의 화살이 반대 방향으로, 즉 자녀 양육에서 출발해 경제적 유형으로 나아갈 리는 없을 것이다. 경제적 유형은 연구 대상이 되는 사회들이 놓인 지리적 여건 속에서 수렵·채취, 목축, 농경을 어떻게 결합해야 생계에 필요한 자원을 가장 잘 조달할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
- 수렵·채취 부족, 목축 부족, 전통적 농법(예컨대 원예농법)에 기초해 농경하는 부족을 대상으로 한 우리 연구에서, 시장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 집단일수록 제안자가 더 관대한 제안을 했고, 응답자는 적은 몫의 제안을 더 자주 거절하 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집단의 구성원들은 파이를 극도로 불평등하 게 나누겠다는 제안이 왔을 때 수락하기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받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시장에 가장 덜 노출된 두 집단인 탄자니아의 하드자 수렵·채취 부족과 아마존 유역의 케추아 원예농 부족의 경우, 각각 주어진 파이의 4분의 1과 3분의 1만을 상대 방 몫으로 제안했다. 시장에 상당한 정도로 통합된 인도네시아 라말 레라의 고래 사냥 부족의 경우 주어진 파이의 절반 이상을 상대에게 주겠다고 평균적으로 제안했다. 모든 부족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고 안한 시장 노출 지표가 1표준편차만큼 증가하면 최후통첩 게임에서 제안자들의 평균 제안액은 대략 2분의 1표준편차 정도 증가하는 것 으로 나타났다. 인류학자들과 경제학 이외의 사회과학자들이 보기에는 눈살을 찌 푸릴 결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시장이란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 에르탄 연구팀이 실험을 통해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어떤 집단도 높은 기여율을 보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집단이 기여율이 낮은 사람에게 처벌을 가하는 것을 허용하 는 쪽으로 투표했다. 그 결과 높은 기여율과 높은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었다.” 처벌 시스템을 다수결로 채택하도록 함으로써, 무임승차자에 대한 처벌이 인센티브로서만이 아니라 집단 규범의 신호로 도 기능했음이 분명하다. 이 결과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모집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 험에서, 실험 참가자들 사이에서 처벌이 가능할 때 협력 수준이 높아지는 이유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된다. 인류학자들이 “가문으로 분절된 사회”라고 부르는 사회구조를 생각해보자. 가문은 근본적인 사 회적 단위이며, 공통의 (때로는 매우 먼) 조상을 갖는 가족들로 구성된다. 이런 사회에서 가족은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서로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줌으로써, 닥친 위험을 완화한다. 위험 공유와 재배분에 덧붙 여, 가문은 구성원들의 도덕 교육을 담당하고, 구성원의 행동에 책임을 지며,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이나 외부인을 향해 위반행위를 저질 렀을 때 (필요하다면 처벌과 보상을 통해) 그를 교정할 책임을 진다. 그런데 외부인이 내부 구성원의 잘못된 행동을 처벌하려 한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어서, 그러한 시도 자체가 교정이나 보복을 해 야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에른스트 겔너ernst Gelliner가 유목민들을 “상호 신뢰하는 친족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이라고 묘사했던 것이 한 예다. 이들에게 가문이란 “강력하고, 자기규제적이며, 자기방어적인, 그러면서도 정치적 참여를 보장하는 집단이다. (...) 이들은 침입 자에 대한 무차별 보복이라는 수단을 통해 스스로를 방어한다. 그리고 내부 구성원들을 스스로 규제한다. 내부적으로는 보복이 일어나 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도덕 교육이나 질서 유지 등 업무를 맡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교육받거나 규칙 준수 여부를 감시당 하고 이에 의거해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서로 혈연관계 가 전혀 없거나 적어도 처음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다. 가문으로 분절 된 사회의 도덕적 코드와는 반대로, 교사, 경찰, 재판관들의 정당성 은 익명적일 때 그리고 이들이 업무상 접하는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 가 없을 때 확보된다. 이들의 정당성은 제복, 학위, 공식 직함에 의해 더 강화되곤 하는데, 이런 지위는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혈연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정한 경쟁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이것이 왜 공공재 게임에서 보스턴 실험 참가자들은 평균보다 낮게 기여해 처벌받으면 곧바로 기여를 올리는지, 그리고 왜 같은 조건에서 드네프로페트롭스크 실험 참가자들은 오히려 기여를 줄이는지 (물론 유의미한 정도는 아니지만)를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두 집단 모두 에 더 많이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가 존재하더라도 인센티 브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다를 수 있다. 벌금이 부여되면 보스턴 실험 참가자들은 이를 자신이 동료 시민들에게 승인받지 못한 것으로 해석하는 반면, 드네프로페트롭스크 실험 참가자들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가설은 자유주의 사회와 가문 기반 사회에서 사회질서가 유지 되는 방식이 각각 다른데, 그 차이가 실험에서 관찰되는 문화권간 차이를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실증적으로 검증되지 못했 지만, 내 가설이 맞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적 시민 덕성의 열쇠를 시장 의 문화적 결과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정치·법·비시장 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내 가설은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문화 를 설명하기 위해 교환 과정 자체에 주목하는 이른바 '달콤한 상업 doux commerce’ 가설이라 불리는 통상적인 설명과는 다르다.
- 사람들은 무임승차를 하면 누구라도 제3자에 의해 처벌될 것이라고 확신할 때, 자신의 희생을 발판 삼아 무임승차자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두려움을 줄일 수 있다. 현실에서도 이와 유사한 시너지 효과가 존재한다. 사회규범은 교통법규를 준수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노골적인 위반행위를 정부가 제재하지 않으면 법질서는 쉽게 와해될 수 있다. 이런 시너지 효과는 물질적 인센티브와 도덕적 동기가 대체적이기보다 보완적인 것처럼 나타난 몇몇 실험 결과를 설명해준다. 이때 물질적 인센티브는 도덕적 동기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또한 법치의 등장은, 친인척 혹은 특정 개인들 사이에만 존재하던 신뢰가 일반적 신뢰로 전환된 과정과 동시에 일어났으며 이 두 과정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신뢰의 전환은 야마기시의 신뢰의 해방' 이론과도 맥을 같이한다. 예를 들어 귀도 타벨리니 Guido Tabellini는 일반화된 신뢰가 자유주의적 정치제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들에서 번성하고 있음을 보인 바 있다. 유럽 으로 건너간 이민자들로 구성된 대규모 샘플에서 청원 서명이나 시 위, 보이콧 등 정치적 참여와, 자식과 부모를 돌보고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감 정도가 음의 상관관계를 강하게 보인다는 사실도 이런 견해에 부합한다. 일반화된 신뢰가 가족 혹은 교구 단위의 규범을 대체해나가는 과 정은 17세기 지중해 무역 시스템의 확장기 동안에도 일어났던 것 같 다. 지중해 무역 시스템에서 가족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소규모 집단 을 중심으로 작동하던 이른바 집단적 계약 강제 시스템은, 점차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보편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시스템으로 대체되어갔다. 이는 시장에 기초한 사회가 왜 사회규범을 정의하고 적용하는 데에 높은 수준의 보편주의를 보여주는지를 말해준다. 시장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이런 '문명화 과정'을 도왔다. 시장 의 확장은 법치에 기초한 국민국가의 등장에 기여했고, 내 주장이 옳 다면 이러한 동학은 일반화된 신뢰의 진화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시장의 확대는 겔너가 '외적 사회화'라고 부른 국가 교육 시스템의 확립을 촉진함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사회규범이 번성하도록 했다. 겔너는 시장이 국가적 수준에서 분업을 규제할 수 있으려면 교구 단위의 전통적 문화가 시장이라는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확대된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더 보편적인 가치들로 대체되어야 했다고 적고 있다. 그 결과 언어와 문화가 국가 차원에서 표준화되고, 직업적 · 지역적 이동이 용이해졌으며, 개인들의 소득의 원천인 자산은 장소와 기술에 점점 덜 얽매이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여타 자유주의적 제도가 제공하는 문자 그대로의 사실상의 보험 형태를 보완해준다.
- 메커니즘 디자인이 직면한 어려움은, 시장실패의 해결책이라면 반드시 충족해야 할 세 가지 조건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첫째, 고안된 메커니즘을 통해 이루어진 자원배분이 파레토 효율 적이어야 한다.
둘째, 정책 결정은 개인들이 자신의 경제행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개인들이 어떤 상호작용이 나 교환에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까지 포함하여 자신의 선호가 이끄 는 대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학 용어 를 빌리자면, 결과가 모든 개인들의 참여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메커니즘에 참여하는 게 그러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해야 하고, 참여는 자발적인 결정이어야 한다. 또한 결과가 인센티브에 부합해야 한다. 즉 메커니즘에 참여한 상태에서 얻 어진 결과는 개인의 극대화의 산물이어야 한다.
셋째, 사람들이 어떤 선호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제한도 있 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사람들이 전적으로 자기 이익만을 바라보고 도덕에 무관심한 경우에도 메커니즘은 작동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차례대로 효율성 조건, 자발적 참여 조건, 선호 중립성 조건이라고 부르자. 첫 번째 조건은 최소한의 집단적 합리성 조건 을 부여하는 것이다. 최소한인 이유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등의 다른 요소들에 대한 고려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조건은 교 환에 강제로 참여시키거나 재산을 징발하는 경우를 배제하는 것이 다. 세 번째 조건은 두 번째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자유 그리고 개인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자유주의적 사고를 반영한다. 세 번째 조건은 최근에는 자유주의적 중립성이라고 불리기 시작 했는데, “정치적 결정은 (...) 좋은 삶이란 무엇이며,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특정한 관념과도 무관해야 한다”는 로널드 드워킨 Ronald Dworkin의 금언에서 잘 드러난다. 유사한 뜻 에서 피터 존스Peter Jones는 “특정한 목표들을 정해 시민들이 이를 추구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 아니다” 라고 썼다.
- 실험에 참가한 농부들은 브로텐의 공공재 게임과 파에나스 간의 유사성을 즉시 알아차렸다. 공공재 게임에서 공동소유권 마을 출신 남성들은 다른 여러 개인적·공동체적 변수를 고려한 뒤에도, 사적공동체 출신들보다 공공재 생산에 3분의 1 이상 더 많은 기여를 했
다(여성들의 경우 공동소유 공동체 출신과 사적 소유 공동체 출신 간 차이가 없었는데, 브로텐은 공동체의 운영제도나 파에나/아이니 작업 모두 거의 전적으로 남성이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브로텐은 “최근 개인적인 토지소유권이 형성되면서 (...) 전통적인 형태의 협력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개별 토지소유권과 마찬가지로, 페루 고원지대에서 근대적 노동시장이 발달한 것도 전통적인 공동체 노동을 바보들이나 하는 일처럼 보이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지역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퇴출 옵 션이 생기자, 이직 가능성이 가져다준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사 람들은 공동체 규범을 무시함으로써 자기 이익을 챙겼다. 인도와 (이미 언급한) 중세 지중해 연안의 무역업자, 멕시코와 브라질의 신발 장인 등에 기초한 많은 인류학 · 역사학 연구는 브로텐의 결론이 광 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브로텐의 연구나 다른 사례에 보이는 증거를 가지고, 계약을 더 완전하게 하기 위해 토지나 다른 재산을 사유화하고 재산권을 명확 히 하는 것이 해당 공동체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추론한 다면 오해일 것이다. 하지만 시장을 더 잘 작동시키려는 노력이 때로 는 원치 않던 방향으로 이어져 문화적 부작용, 즉 교환 기반의 사회 규범이나 공동체에 필수적인 다른 가치를 사람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집단적으로 아테네폴리스는 유능한 메커니즘 디자이너였고, 물 질적 인센티브와 도덕감정이 단순히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비웃 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제공한 인센티브가 아테네인의 시민적 덕성을 몰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는 실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배를 가장 먼저 준비한 책임자에게 그들이 약속한 '왕관'은 상이 지 서비스에 대한 보수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격려와 인센티브는 보완재이지 대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최초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입 법자들이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드리아해 원정이 시작되고 3년 뒤에 죽었다.)
- 몰아냄 효과는 다음과 같을 때 발생한다. 인센티브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 때문에 사람 들이 그 인센티브를 부과하는 사람을 싫어하게 될 때, 인센티브가 사람들에게 이기적인 동기를 용인하거나 심지어 장려한다는 프레임을 제공할 때, 혹은 인센티브가 그 대상의 자율성을 침해할 때 말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문제는 인센티브 자체가 아니라 인센티브와 함께 전달되는 정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인센티브가 전달하는 정보가 더 긍 정적일 수 있도록 할 방법이 있다. 타인을 돕는 일 같은 관대한 행동도, 인센티브가 있으면 이기적인 유인 때문에 그렇게 한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인센티브가 없을 때보다 인센티브가 있을 때 이기적인 선호 체계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았다. 하지만 인센티브가 가끔은 이런 역정보를 제공하듯이, 이 문제도 아테네 시민의회가 한 것처럼 시민적 덕성을 보여줄 기회를 충분히 제공함으로써 약화시킬 수 있다. 입법자는 인센티브가 그 자체로 문제인 것인지, 그리고 몰아냄 효 과는 인센티브를 부과하는 사람과 그 대상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 인지 아니면 인센티브의 의미로부터 발생하는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만약 입법자가 정책입안자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강령을 만들고자 한다면, 인센티브와 사회적 선호가 상충하지 않 고 상보적으로 작동하는 사례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입법 자는 부정직한 자들을 위한 법질서에 관한 흄의 격언을 업데이트할 준비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2002년 아일랜드에서 비닐봉투에 소액 의 세금을 부과한 일은 하이파의 어린이집에서 지각에 벌금을 부과 한 일과 유사해 보인다. 두 사례 모두 인센티브를 통해, 줄이고자 하 는 행동의 비용을 조금 높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극단적으로 달랐 다. 세금이 도입된 지 2주 만에 비닐봉투 사용은 96퍼센트나 감소했다. 즉 세금이 사회적 선호를 끌어들인 것이다. 많은 아일랜드 사람 들에게 비닐봉투를 사용하는 것은 모피 코트를 입는 것만큼이나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분류됐다. 지각에 부과한 벌금과 비닐봉투에 매긴 세금의 차이를 통해 우리 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이파 어린이집의 경우 벌금을 공 표하면서 내린 처벌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도덕적 교훈'은 없었다. 벌금에 대한 명시적인 규범적 정당화가 없었기 때문에 기본 프레이 밍이 작동되었다. 말하자면, 지각을 팝니다! 벌금이 낮았다는 점도 부모들에게 지각이 학교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한 요인이었다. 더욱이 부모들 눈에는 어떤 부모가 늦는다고 해도 그 일 이 선생님들에게 초래하는 불편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일이라기보다 는, 어쩔 수 없던 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벌금을 부과하겠다는 공 지문에서 “일부 부모님들” 이 지각한다고 했을 때, 부모들은 자신들 이 지각을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예외적인 문제는 아니며 시간 약속을 준수하라는 사회규범을 특별히 심각하게 위배한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았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적어도 부모들 사이에서 지각한 부모를 보게 되는 사람은 같이 늦게 도착한 부모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아일랜드 비닐봉투세의 경우 오랜 기간 공적인 숙의 과정을 거쳤다. 또한 비닐이 환경 훼손에 미치는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효과적인 공공캠페인이 선행되었다. 어린이집에서 지각은 가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비닐봉투 사 용은 쇼핑객의 의도적이면서도 매우 공개적인 행위다. 아일랜드의 비닐봉투세는 금전적 인센티브가 명시적으로 사회적 의무라는 메시지와 결합되었고, 비닐봉투를 사용하고 처분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했다. 하이파의 벌금 부과가 '돈만 내면 지각해도 괜찮다'는 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아일랜드 의 비닐봉투세가 전달한 메시지는 에메랄드 섬을 쓰레기로 뒤덮지 마!'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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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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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자서전

인문 2020. 7. 29. 08:25

1. 알렉산더의 솔선수범
- 알렉산더 대왕이 '불패의 신화를 쓸 수 있었던 밑거름에는 그가 전 장의 선봉에서 보여준 모범의 리더십이 있었다. 알렉산더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기에 전사戰史에 두드러지는 탁월함을 남길 수 있었다. 알 렉산더는 천부적인 행동인' 이었다. 그는 결코 탁상공론만 일삼는 '의 자에 앉아만 있는 장군Armchair General'이 아니었다. 전투를 말하기' 보 단 '행동' 했고, 병사들과 함께 뛰고 험한 곳에서 자며 거친 음식을 먹 었다. 알렉산더의 솔선수범은 그가 후대의 다른 주요 지도자들과 대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군대의 사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알렉산더는 늘 전투에서 선두에 섰다. 그 결과 알렉산더는 그라니쿠스 전투에서 도끼에 찍혀 죽을 뻔했고, 인더스 계곡에서 벌어진 말리족과의 전투에서는 폐에 부상을 입어 사망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옥수스강을 건넌 직후에는 더러운 물을 잘못 마신 탓에 매우 아픈 상태였음에도 마케도니아군을 공격 해온 유목민 부대를 직접 격퇴하고 추격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알렉 산더가 유일하게 최전방에 서지 않은 전투는 기원전 327년의 소그드 요새 공방전뿐이다. 성벽을 올라타는 전문 기술을 지닌 정예병 300명을 총동원했지만 병력의 10분의 1을 잃을 정도로 치열한 공성전이 벌 어졌던 전투였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알렉산더가 최전선의 육탄전을 마다하지 않 았기에 일반 병사보다 더 많은 부상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 로 알렉산더는 생전에 최소 스물한 번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지 며 학자들은 그가 수하의 장교보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더 많이 겪 었을 거라고 설명한다.
- 모든 것이 공개된 개활지에서 알렉산더가 다리우스와의 정면 대결 끝에 승리했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정신적 측면 모두에서 중요했다. 이는 알렉산더가 다리우스를 대신해 아시아의 합법적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모든 것이 조직화, 서열화되었고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가진 페르시아에서 권력의 중심인 다리우스가 제거된 일은 상징적, 실질적 의미가 상당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중과부적인 페르시아 대군의 규모에 부담을 느낀 마케도니아군의 참모들은 알렉산더에게 야밤의 기습 공격을 제안 했다. 이에 알렉산더는 "나는 승리를 도둑질하지 않겠다”고 호언하며 다음날 아침 정면 대결을 선택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이란인들에게 그는 승리를 도둑질한 침략자로 수천 년간 각인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에게서 유래한 이란어 이스칸더iskander'는 도둑을 의미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과의 결전에서 마케도니아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렉산더의 빠른 결단력과 페르시아의 지연된 의사 결정 체제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미국의 장군 조지 패튼은 "좋은 계획을 빨리 실행하는 것이 완벽한 계획을 나중에 시행하는 것 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알렉산더의 리더십을 그대로 표현 해준다. 또 19세기 군사전략가 앙투안 앙리 조미니가 “집단지도체제 에서 지도부의 결정은 구성원의 최저 수준에 맞춰 이뤄진다”며 “전쟁 의 천재가 중앙 집중 방식으로 부대를 지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 데 부합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전투다.
- 알렉산더의 리더십은 한계가 분명하다. 그는 사익과 공익을 구분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이를 두고 독일의 역사학자 한스 요아힘 게르케는 "알렉산더의 제국은 항상 알렉산더 개인이 중요했다”며 제국의 정체성을 '에고크라티Egokratie'로 평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중 요하게 여기는 명분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단정했 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례로 그가 처음 페르시아를 침공하며 “페르시아에게 억압받는 그리스인의 자유를 회복해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페 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실익을 챙기며 살았던 많은 그리스인은 알렉산더의 주장에 시큰둥했다. 알렉산더가 수많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구축했던 부하들과의 '신뢰'도 결국 자신의 사익을 앞세우다가 금이 갔다. 그가 세계의 끝 까지 가겠다며 인도 갠지스강을 건너려 하자 병사들이 항명 조짐을 벌였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알렉산더는 세계가 우랄산맥과 인도의 벵골 지방 사이쯤에서 끝난 다고 믿었다. 게다가 인도까지의 정확한 거리 정보도 모르고 있었다. 이탈리아반도에서 시리아 해변까지 선박으로 50일, 육로로 125일 소요되었던 것에 근거하여 몇 년 안에 세계 정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부하들은 고난이 이어지고, 위험이 계속 커지는 것을 보면서 알렉산더에게 한없이 동의하기가 어려워졌다. 디오도로스는 “끝없는 행진으로 말발굽이 닳아 없어지고 무기는 무뎌졌으며, 옷감은 다 해져서 타향의 의복으로 기운 누더기를 입어야만 했을 때 알렉산더와 군대 공동의 이해관계는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했다. 더 이상 알렉산더의 사익과 마케도니아군의 공익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여기서 되돌아간다면 그동안의 노고는 헛된 것이 되고 모두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는 알렉산더의 연설에 원정군의 핵심이었던 마케도니아 엘리트 군단의 베테랑 장병들은 침묵으로 항의했다. 알렉산더와 군대의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하면서 유대감은 급속도로 약해졌고 더 이상의 제국 확장이 불가능해졌다. 그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대제국이 허망하게 붕괴된 이유는 조직의 운영을 시스템이 아닌 알렉산더 개인에게 맞추었던 측면 때문이기도 하다. 알렉산더의 솔선수범 리더십이 창업創業’에는 효율적이었는지 몰라도 수성成에는 부적합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알렉산더가 살아 있을 당시 그의 제국에 이미 반란과 분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알렉산더 리더십의 장점은 두드러진다. 오늘 날에도 어떤 조직에서든 솔선수범하는 리더의 마력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대다수의 지도자가 알렉산더 대왕이 가졌던 확고한 결단력과 솔선수범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는 상사, 책임을 회피하고 불명확한 지시를 내리는 리더, 지시만 하고 행동 하지 않는 지도자,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상관 등이 현실에서 접하는 리더들이다. 잭 웰치 전 GE 최고경영자는 “리더란 길을 아는 자이고, 길을 가는 자이며, 길을 보여주는 자다”라고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솔선수범 의 리더십을 보여줬던 알렉산더야말로 역사에서 '길을 알고, 길을 가고, 길을 보여줬던 인물이다.

2. 공자의 비전
- 중국학을 연구해온 학자 아사노 유이치는 공자가 쇠퇴해가는 주 왕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고 스스로 천자天子(임금)가 되려 는 야망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상천上天(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 지는 신)이 자신에게 명령할 날을 꿈꿨다는 것이다. 아사노 유이치는 가난하고 천한 필부였던 공자가 왕이 되려는 망상을 품었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교주의 좌절과 원한을 풀기 위해 후학들이 만든 '복수심 의 종교가 유교라고 설명했다. 공자는 “봉황이 날아오지 않고 황하에 서 상서로운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는 끝났구나鳳鳥不至 河不出圖 音已矣夫”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공자가 야망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을 한탄한 것으로 해석한다
- 이렇듯 현실적으로 세습군주제를 없애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공자는 군주들에게 “덕德이 있고 유능하며 적절한 교육을 받은 대신들에게 정부의 기능을 위임하라”고 설득했다. 군주의 권력을 공적 기준으 로 선발된 대신들에게 부여하라는 주장은 무혈혁명無革命이나 다름 없었다. 공자는 정치를 하는 인물이 반드시 군주일 필요는 없으며 관 리들이 정치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처럼 정부의 기능을 소수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에서 백성의 행복 과 복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꾸려고 한 것은 혁명적인 사고였다. 서 구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군주정, 과두정, 참주정, 민주정 등 다양한 정치 형태를 목격한 뒤 이상 사회를 꿈꿨던 것에 비하면 군주정 외에는 다른 정치 형태를 상상할 수 없었던 환경의 공자가 전혀 다른 사회를 꿈꿨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모습을 보면 동년배보다 젊은 세대와의 관계가 더 좋았던 듯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 사명감을 가진 개혁가의 독선적 태도는 젊은이의 감탄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는 개혁적 인사를 바라보는 당대의 시선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의 혁신적 주장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인보다는 원칙에 충실할 것과 폭력이 아닌 설득을 통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런 까닭으로 당대의 군주들은 공자의 제자에게 권력을 위임하더라도 유혈혁명의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유교의 내용이 혁명적이었음에도 지도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카이사르의 행운
- 몽테스키외는 카이사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행운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이 비범한 인물이 뛰어난 자질을 지녔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결점이 전혀 없 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는 어떤 군대를 지휘했어도 승리자가 됐 을 것이고,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자신감과 행운에 대한 확신은 결국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돌아왔다. 고대 사료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죽음을 앞두고 불 길한 전조가 이어졌다. 플루타르코스는 기록에 “며칠 동안 하늘에서 불덩이가 보였고 피의 비가 쏟아졌다”고 남겼다. 이는 모두 죽음과 파괴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점술가는 카이사르에게 "3월 15일을 조심하라"고 직설적으로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 마에서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그는 파르티아 제국과 전쟁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게 하라. 나는 나의 길을 가 겠다”라며 일관된 입장을 보였다. 카이사르는 끝까지 자신의 행운을 믿었던 것이다. 최후의 날 카이사르는 호위병 없이 24명의 릭토르ictor(파스케스를 들고 행정관을 위해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는 수행원)만을 대동했다. 측근 히르티우스 아울루스 등이 스페인 군단 출신 경호원들을 대동할 것 을 권했지만 “영원히 경호원을 두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그것은 공포의 상징일 뿐이다”라며 거절했다. 일설에 의하면 “죽음을 예상하고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답했다고도 한다. 카이사르는 죽기 전날 진행된 만찬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은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죽음"이라는 말을 남겼다. 고대 사료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던 당일에 그의 행운이 힘을 다 했다는 징조가 이어졌다고 전한다.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 또한 남편이 살해당하는 꿈을 꿨다. 당시 로마에는 원로원 회의 전에 염소 를 제물로 잡아 그 내장으로 길흉을 점치는 절차가 이뤄졌다. 아피아 노스에 따르면 카이사르 역시 원로원으로 가다가 길을 멈추고 점을 쳤는데 점괘가 나쁘게 나오자 다시 제물을 잡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재고하라”는 점괘의 경고를 무시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카이사르가 3월 15일을 조심하라는 점괘를 낸 점술가에게 오늘이 3월 15일이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네자 점술가가 “그렇군요. 하지만 아직 날이 다 지나지 않았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결국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 들어선 카이사르는 그 자 리에서 23번의 공격을 받고 생을 마쳤다. 사료에 따르면 암살자 세르 빌리우스 카스카를 향해 “이런 무례한 짓을, 이 악당 같은 놈”이라고 외쳤으며, 암살을 주모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는 "아들아, 너마저!”라며 분노했다고 한다.

4. 살라딘의 신뢰
- 살라딘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88년 전인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을 정복한 프랑크족이 희생자들의 피로 도시를 채운 반면 살라딘은 예루 살렘의 건물 하나 파괴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위병들에게 거리와 관문을 순찰하게 했으며 기독교도를 위협하지 못하게 했다. 여러 교회의 십자가를 제거했지만 시리아의 기독교 성직자들이 성 무덤 근처에서 계속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동방의 기독교 신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었다. 멜크 수도원 출신 수사들이 맡았던 성 무덤holy sepulcher 관리는 시리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위탁됐다. 이들은 살라딘에게 인두세를 지불한 사람들이었다. 몸값을 내면 프랑크인도 안전하게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은 40일 안에 몸값을 내야 했는데 성인 남자는 10디나르, 성인 여자는 5디나르, 어린아이는 2디나르를 내면 포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성안의 기독교도들은 몸값을 마련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지배자 살라딘의 자비를 믿고 의지했다. 이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몸 값을 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안전하게 해안가까지 대피할 수 있었는 데 살라딘은 아이를 등에 업고 나이 많은 부모와 함께 떠나는 프랑 크인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짐과 노부모를 실을 동물을 살 돈을 나눠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가난하거나 몸이 아픈 사람들은 몸값을 내지 않고도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당대의 사료들은 프랑크인의 몸 값으로 받은 돈이 살라딘의 금고에 10만 디나르나 쌓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살라딘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관대한 군주의 표상으로 그려졌다. 기 독교 왕국들이 그에 의해 큰 시련을 겪었기 때문인지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살라딘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이슬람 군주는 없다. 1732년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바하드 웃 딘의 살라딘 전기가 라틴어로 번역됐고 1758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랑수아 루이 클로드 마랭이 근대 최초 의 살라딘 전기를 저술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는 살라딘을 관대함과 관용의 상징 적인 인물로 삼았다. 실제로 살라딘은 유대교와 기독교 출신 의사를 자신의 주치의로 고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각지에 거주하는 동방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군과 결탁할 위험이 상존했음에도 그의 치세 중 기독교도를 박해하는 일은 없었다. 극단적인 종교 대립이 있던 시기에 '종교적 관용을 베푼 셈이다. 독일의 작가 고트홀트 레싱은 살라딘을 1799년 극작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의 모델로 그렸다. 영국의 시인 월터 스콧 역시 가장 모범적인 기사상으로 살라딘을 꼽았다. 1898년, 살라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쌓이자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의 무덤을 방문해 수많은 무슬림 앞에서 화환을 바쳤다. 거기에는 한 위대한 황제가 다른 황제에게'라는 글귀 가 적혀 있었다. “위대한 술탄 살라딘은 시대를 초월한, 용맹하고 완전 무결한 기사이며 적에게조차 기사도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인물”이라는 평도 남겼다. 1950년대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대립이 거세지자 자신을 살라딘에 비견했다. 살라딘이 태어났던 티크리트에서 태어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도 자신과 살라딘의 공통점을 찾고자 노력했다. 살라딘이 지켰던 신뢰의 힘은 오랜 시간에 걸쳐 큰 성과를 이끌었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역사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5. 칭기즈칸의 개방
- 칭기즈칸의 군대는 군사 기술의 혁신이나 마법 같은 신무기로 전투 에서 이긴 것이 아니었다. 몽골군이 불패의 신화를 쌓을 수 있었던 것 은 결정적으로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유연하고 개방적으로 생 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칭기즈칸을 잔혹하고, 피에 굶주린 야만인이며, 전쟁과 선전술에 능하고, 승리를 위해 외교적·경제적·무력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여겨왔지만 그는 누구보다 배 움에 열성적인 인물이었다. 칭기즈칸은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반 백성이든 단순한 방문 자든 상관없이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대했다. 1206년, 몽골의 정책결정 최고기관인 쿠릴타이를 열고 테무친remuchin 이라는 이름 대신 '칭기즈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대칸大汗에 취임했을 때도 “게르에 사는 모든 이의 칸을 표방했다. 몽골족뿐 아니라 몽골 평원에 사는 모든 유목 부족이 그의 휘하라고 선포한 것이다. 당시 몽골어에서 '국가'를 의미하는 '울루스ulus'라는 단어는 오늘날에 비해 사람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몽골의 백성'에는 혈연이나 언어적 측면에서 몽골족과 가까운 사람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편입된 사람도 있었다. 마치 다양한 인종이 모여 역량을 발휘해 '용광로라 불리는 오늘날의 미국과 비슷하다. 비록 원래의 몽골 부족은 몽골 초원에서 활동하는 부족 중 일부에 불과했지만 이후에 모든 몽골고원의 부족이 몽골족이라 불리며 칭기즈칸의 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각 부족의 강점과 인재는 통합된 몽골족을 위해 활용됐다. 칭기즈칸이 가진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는 후대에게 전승되어 이후 몽골족이 타민족을 대할 때도 적용됐는데, 이는 그들이 대제국을 건설한뒤 피지배 지역의 자치권을 상당히 인정한 사실로 보아 알 수있다. 동쪽의 고려부터 서쪽 러시아의 공국들, 아나톨리아고원 지대의 키르기스·아르메니아 왕국, 캅카스산맥의 조지아 왕국 등이 몽골 치하에서 독자성을 유지하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칭기즈칸은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몽골족에게 부족 하거나 필요한 기술을 외부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몽골 초원을 활동 공간으로 삼을 때만 하더라도 유목민에겐 초원에서 생존하기 위한 각종 지식이 중요했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기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 칭기즈칸은 전통적인 전술 중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차 없이 버렸고 유용한 전술은 언제 어디서든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교활하면서도 효율적으로 군대를 지휘했던 그는 실효성 없는 과거의 전술에 얽매이지 않았다. 호레즘을 정복할 당시에도 유목민의 주특기인 평야 전투를 하지 않았고, 견고한 성벽 밑에서 적이 지치기 를 기다렸다가 승리를 낚아챘다. 초창기의 칭기즈칸은 여느 유목민족 지도자들과 달리 강력한 적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 퇴각 같은 전술을 활용할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 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된 1170년부터 몽골 전역을 통일해 칭기즈칸으 로 즉위한 1206년까지 목숨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고 주변 유목 부족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그럴수록 더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했고 이것은 그가 전략적이며 유연하게 사 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외부에서 받아들인 생각을 발전시켜 새로운 전술을 만들어낸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말 꼬리에 나뭇가지를 묶고 먼지를 일으키거나 수천 명의 주민을 군대 앞에 두고 행군하여 군 사가 더 많아 보이도록 하는 전술은 몽골군이 정주 지역의 군대로부터 배운 전략을 활용한 것이었다.

6. 이성계의 야성

7. 마키아벨리의 학습
- 지난 500년 동안 마키아벨리의 이름은 '교활함'과 '이중인격' '불신'의 대명사로 통했다. 악마, 전제 군주, 독재자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악의 교사' 혹은 '악마의 인도를 받으며 사람을 파멸에 빠뜨리는 존재'였다. 또 '이아고(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등장하는 악인) 의 원형’ ‘악랄한 박사Le docteur de la sceleratesse'로 불렸다. 셰익스피어가 잔혹한 마키아벨리 murderous Machiavel'라고 언급한 뒤 이 표현은 엘리 자베스 시대 이후 400년 동안 영국 문학사에서 관용적으로 마키아벨 리를 수식하거나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사람들은 도덕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급진적 혁명가를 가리지 않고 마키아벨리를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에게 미움을 받은 인물도 드물다. 플라톤이나 루소, 헤겔, 마르크스처럼 마키아벨리도 수없는 오해와 오독誤讀을 낳은 사상가다. 하지만 그는 플라톤 처럼 먼 옛날에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헤겔이나 마르크스처럼 방대한 분량의 난해한 작품을 남긴 인물도 아니다(오히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분량이 많지 않고 문장이 명료하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분명하다). 이를 고려하면 마키아벨리에 대해 많은 오해가 빚어진 것은 분명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 피사와 나폴리 같은 도시국가들도 피렌체를 호시탐탐 노리며 끊임없이 위협을 가했다. 피렌체를 노리는 도시국가들의 위협은 사실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위상은 매우 허약 했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주제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마키아 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인들을 비열하고 궁색하며 허파에 바람만 든 사람들”로 묘사했다. 반면 마키아벨리의 주요 외교 대상이었던 프랑스 는 유럽 최강국으로 군사력, 외교력, 경제력 모두 상당한 수준을 보유 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상대했던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교황 율리우스 2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 등의 각국의 지도자 모두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주변엔 잔인한 정책 조언을 마다하지 않는 똑똑한 참모들이 득시글거렸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아마추어적 활동이 강대국들의 숙련된 외교 정책과 대 비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목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보며 “샤를에게 유린되고, 루이에게 약탈당하고, 페르난도에게 짓밟히고, 스 위스에게 모욕받은 것이 바로 이탈리아" 라고 요약했다. 이런 배경 속 에서 마키아벨리는 유럽 강국들과 대적할 수 있는 '통일 이탈리아를 갈구했고, 강력하면서도 교활한 군주가 등장하기를 꿈꿨다.
- 마키아벨리는 당시의 무자비하고 비도덕적이며 불신 가득한 외교 현실에서 배운 것을 『군주론』의 교훈으로 정했다. 약소국의 이해관계 와 명분이 철저히 무시당하는 것을 보면서 국가는 강력해야 하고 이 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배운 것이다. 마키 아벨리는 근대 세계에선 오직 군대와 돈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직시 했다. 생사를 걸고 투쟁할 때 약자는 '벨트 아래를 때려야 한다'는 교 훈도 얻었다. 1500년 외교사절로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나 1502년 체 사레 보르자를 만났을 때 똑같이 반복되던 상황들이 마키아벨리에게 이런 교훈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무장하지 않은 도시국가는 멸 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배웠다. '행운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명제와 '행운의 여신은 여성이기 때문에 과단성 있고 공격적인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러므로 행운을 얻고자 한다면 거칠게 다뤄야 한다(『군주론』)는 표현은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이어서 치러진 몇 차례 외교사절 임무를 통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가 강해져야 한다는 명제를 다시 명확하게 인식했다. 국가는 부도덕한 존재'가 아니라 '탈도덕적인 존재'라는 생각도 이때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철과 독약, 살인과 배신의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에 자신을 한번 살펴보고 중용해달라며 『군주론』을 집필했다. 마키아벨리 전문 연구가인 크리스티안 가우스 는 『군주론』을 '정치권력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과서'라고 명명하기도 했는데 1513년에 집필을 시작해 오랜 인고의 기간 끝에 1532년 출간된 이 작품은 마키아벨리의 인생처럼 행복과 불행, 꿈과 현실, 저열함과 위대함이 뒤섞여 있다. 그가 평생 온몸으로 배운 교훈 이 이 책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메디치가에 바친 헌정사에서 마키아벨리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시 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운명의 여신은 저항할 수 없는 큰 적의를 악의 에 담아 갑작스럽게 내리찍었다.” 그는 메디치가에게 자신이 충성스러운 신민이며 쓸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했지만 큰 효과는 볼 수 없었다.
- 가혹했던 고문은 마키아벨리에게 '권력의 본질은 끝없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 그리고 고문은 어쩌면 마키아벨리의 숨어있던 권력 본능을 일깨우는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평생 동안 그는 직접 경험한 것을 학습하여 거기에서 배운 교훈을 뽑아냈다. 14년이 넘는 공직 생활과 이후의 고난 그리고 유배 생활에서 배운 것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 교훈은 마키아벨리를 당장 관직으로 복귀시켜주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치유' 역할을 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군 주론』 서문에 적은 말년의 심경과 일화가 그 증거다. 마키아벨리는 선술집에서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술 마시는 일 을 낙으로 삼았다. 과거 각국의 원수와 저명한 정치가, 귀족, 장군들 을 상대하다 낙향한 그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제 나무꾼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외교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도 오후 늦게 집으로 돌 아가면 의관을 정제하고 독서를 하며 고대의 현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삶과 행동에서 가르침을 구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포르투나를 받아들였다. 책을 읽으며 가난과 굴욕을 잊고 죽음을 두려워하 지 않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그 결과 마키아벨리는 리더들의 스승으 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당시에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그 실패의 결과물이 응축된 『군주론』은 쓰디쓴 책으로 남았지만 그 고난의 눈물이 담긴 군주론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각종 교훈을 담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원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군주론』의 유명한 표현처럼 이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8. 펠리페 2세의 근면
- 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소탈했던 통치자는 성실하고 합리적으로 국 정에 임했지만 제국은 너무나도 방대했고, 다뤄야 할 일 또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만 갔다. 관료 조직은 점점 정교해지고 동시에 비 대해졌다. 관료화의 부작용이 나타났던 것이다. 1560년대에는 1500여 명의 인력이 왕을 보좌했고 그 외 수백 명이 각종 정부 조직에서 세분 화된 업무를 수행했다. 예를 들어 특수 정무를 전담하는 100명 이상 의 전문 관료가 있었고, 79명이 프랑스 관련 업무를 보는 식이었다. 또 53명은 카스티야를 맡았고 39명은 아라곤과 관련된 업무를 전담했다. 이탈리아 전문가는 25명, 기타 분야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력이 배치됐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보좌하는 인력까지 합치면 4000명 이상의 관료 조직이 존재했던 셈이다. 그리고 이들이 생산해내는 산더미 같은 현안 자료를 처리하느라 펠리페 2세는 움직일 시간조차 없었다. 관료 제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심각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는 당시 흔한 일이었다.
- '공무원의 수와 일은 필요도와 중요도에 관계없이 늘어난다'는 파킨슨의 법칙은 펠리페 2세의 관료 조직에도 예외 없이 적용됐다. 일의 양과 관료의 수는 비례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증가했다. 역사상 책임감이 가장 강했고 열심히 일했던 왕 펠리페 2세는 '책상에 앉아서' 제국을 통치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는 유럽 각지에 흩어 져 있는 수많은 영지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편지들을 읽고 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영지에 있는 신하에게 행정과 사법, 재정 문제를 비롯한 각종 일상 업무, 개개인의 사면이나 승진, 평 가, 포상 같은 자질구레한 일까지 직접 지시하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줄지어 있는 외교사절들은 펠리페 2세의 시간을 끊임없이 잡아먹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이유는 사실 알바 공작이나 산타 크루스 백작,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같은 '힘 있는 부하들을 펠리페 2세가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 다(펠리페 2세는 유순하고 자신의 말을 잘 들었던 루이 고메스, 메디나 시도 니아 공작, 비서였던 마테오 바스케스 같은, 상대적으로 하위직 인사들을 더 총애했다). 또 과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치적 · 개인적 걱정에서 탈출시켰던, 문서 더미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펠 리페 2세를 사람들은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수행한 군주라는 수식어로 불렀다.
- 결과적으로 펠리페 2세에 대한 모든 평가는 “유럽에서 가장 큰 두뇌를 직간접적으로 가졌던 황제” 혹은 “유럽의 '서류왕'”이라는 표현 으로 귀결된다. 그의 업무 효율성에 대해서는 역사가마다 평가가 다르 겠지만 부지런함에 대해서만큼은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펠리페 2세는 엄청나게 유능한 인물도, 비범한 인물도 아니었지만 무능하고, 게으른 인물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 경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물려받아 통치해야 하는 제국은 너무 컸고 당시의 제도와 인력, 기술 수준에서 다뤄야 했던 문제 는 지나치게 복합적이었다. 결국 그의 재위 기간에 합스부르크 스페 인 대제국은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잃고 쇠퇴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게 좋은 것이 가톨릭교회에도 좋은 것이란 생각에 강고한 종교 정책을 폈지만 이는 적만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는 여 전히 독립적이며 잠재적으로 위협이 되는 존재였고 영국에게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배권을 되찾지 못했고 오스만튀 르크는 여전히 동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스페인 정부는 막 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제국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부담이 너무 커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고백했다. 재위 기간 내내 누구 보다 쉴 틈 없이 열심히 일했던 펠리페 2세였지만 결과는 의도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꽤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모든 것을 결과로 냉정하게 평가받는 거대한 조직의 지도자였고 그렇기에 역사의 평가는 가혹했다. 리더의 자질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가 아니라 성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훌륭한 리더는 부하들을 바쁘게 하는 사람이고, 최악의 리더는 본인의 몸이 고달픈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펠리페 2세는 정확히 후자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9. 발렌슈타인의 공포
- '악마'라 불린 사내가 있었다. 이름은 알브레히트 벤젤 에우세비우스 폰 발렌슈타인 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1583~1634). 당대에는 발트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는 프리틀란트 공작이자 근세 초 독일을 휩쓴 30년 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 총사령관을 맡았 던 인물이다. 크고 작은 전장에서 아군과 적군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공포의 대 상이었던 발렌슈타인은 '전쟁의 신'으로 불렸다. 당대인들은 그를 '전쟁의 천재'라고 부르는 데 이견이 없었다. 발렌슈타인은 “병사 없이도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무서운) 영웅”으로 평가되었고, 사람들은 황폐화 된 유럽 각지의 상황을 특정 인물로 형상화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이는 적군이었던 신교와 한때 우군이었던 구교가 ‘흑색선전'을 퍼부은 탓이기도 했다. 이렇듯 같은 편이든 상대편이든 모두 발렌슈타인을 '운명처럼 잔인한 존재'로 여겼다. 18세기의 한 역사학자는 “주변이 모두 폐허가 되고 공기가 연기와 먼지로 가득 찼을 때, 부상당한 사람의 신음과 죽은 자의 고통이 귓전을 울리며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비로소 그는 말없이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다”라고 표현했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 러는 발렌슈타인을 주인공으로 한 극『발렌슈타인』을 집필하며 이렇 게 묘사했다. “프리틀란트의 별은 오직 한밤중에만 빛을 내비쳤다.” '어 둠은 발렌슈타인을 표현하는 핵심 요소였으며 '공포'는 그를 설명하 는 유용한 도구였다.
- 결론적으로 발렌슈타인 등장 이전의 유럽에선 어려운 물품 보급과 용병에게 지불하는 대가에 대한 부담, 부족한 주거지, 고단한 병참 지원 탓에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군 병력의 최대치가 3만 명 정도였다. 발렌슈타인은 이 고정관념을 깨버린 최초의 인물이다. 그리고 시스템 을 유지하기 위해 군율 유지가 중요했던 발렌슈타인은 1625년 북부 독일 지역에서 도적질을 했다는 이유로 병사 15명을 공개 교수형에 처 했다. 같은 해 할버슈타트와 마그데부르크로 진군했을 때는 도시의 지 배층과 시민들에게 병사들이 먹을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한다면 건드리 지 않겠다고 포고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발렌 슈타인의 잔혹함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의 주 변에 폭력과 파괴 본능이 맴돈다고 여겼다. 이후 수세에 몰리고 30년 전쟁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그가 참혹한 황폐화 전략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발렌슈타인을 둘 러싼 공포 이미지는 오랜 세월을 거쳐 누적된 것이었다.
- 그의 사후, 황제 측이 펴낸 각종 선전 팸플릿에서 발렌슈타인은 거칠고 무례하며 항상 앙심을 품고 살았던 미친 사람으로 묘사됐다. 그는 점성술에 의존해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고, 비교할 수 없이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재판 없이 죽이는 게 당연하다는 주장이 제 기되었다. 한때 대중은 발렌슈타인이 어둠의 힘'과 계약을 맺고 불패의 존재가 됐다고 믿었다. “승리를 그의 군기에 묶어버렸다”는 표현도 널리 퍼졌다. 불사의 존재, 공격당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졌던 발렌슈타인의 이미지는 뤼첸 전투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싸웠다는 소문이 돌면서 증폭됐다. 발렌슈타인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악마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그려졌기에 그가 일개 병사의 창에 찔려 허망하게 죽었다는 사 실을 많은 사람이 믿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사체는 썩지 않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게 발렌슈타인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공포를 상징하는 존재였지만 막상 그가 죽자 공포는 연기 처럼 사라져버렸다. 조직원을 윽박지르고 겁박해 목표를 달성하는 리더십은 단기간의 효험은 있을지 모르지만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발렌슈타인의 사례가 그 길지 않은 공포의 유효기간을 잘 보여준다.

10. 그루시의 맹목
- 유명한 워털루 전투의 승패를 결정한 것은 '전 쟁의 신' 나폴레옹의 지략이나 영국의 용장 웰링턴의 전술이 아니었다. 그 결과를 좌우한 인물은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 에마뉘엘 드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1766~1847) 원수였다. 그루시는 성실하고 충성심이 강했으며 용맹했지만 융통성과 본능적인 판단력, 자율성은 거 의 찾아볼 수 없는 맹목적이고 시야가 좁은 인물이었다. 충실함과 옹 고집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루시를 두고 “오스트리아의 총탄, 이집트의 폭염, 아랍의 단도, 러시아의 혹한으로 유능한 선임자들이 제거된 덕에 원수로 승진했다”고 비꼬았다. 19세기의 군사작가 찰스 체스니 콘월리스도 “나폴레옹 황제가 웰링턴에 대항하여 사력을 다해 싸울 동안 (그루시는 수많은 병사를 데리고 엉뚱한 곳만 헤매고 다녔다”고 평가했다. 우매함과 옹고집이 결합된 그루시의 단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조직의 생존에 부담이 되었고, 나폴레옹을 최후의 대결 에서 패배자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왜 별 볼일 없는 그루시를 중용했을까? 그루시는 능력이 출중한 것만으로 승진한 것이 아니었다. 유능했던 그의 선임자들이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목숨을 잃거나 군을 떠났기에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던 시점에 과거 나폴레옹을 보좌했던 원수 중 절반은 지하에 묻혀 있었다. 특히 1812~1813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 고 라이프치히 등에서 뒤이어 패전하여 유능한 장군 상당수가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야영 생활에 지쳐 진절머리를 치며 살거나, 나폴레옹을 배신한 전력이 있었다. 나폴레옹 밑에서 출세했던 장군 중 적지 않은 인물이 러시아 원정 실패 후 파리에 입성한 적들을 호화롭게 대 접했다. 모두 나폴레옹이 준 직위와 부를 바탕으로 살길을 찾아 나섰 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루시 이외에 원수 직위를 맡길 만한 장군은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대로 그루시는 “최고의 길을 공략해서 높은 지위에 오른 것 이 아니라 20년간의 전쟁 경험 덕에 저절로 길이 열린 셈이었다. 수동적이고 자율성이 부족한 점은 그루시 혼자만의 단점이 아니었다. 1804~1814년의 소위 '대제국의 시대에 나폴레옹은 총사령관부터 참모장, 외무대신, 일선부대 사령관의 역할까지 도맡았다. 그런 체 제 아래서 프랑스군 장교들은 독자적인 판단 능력과 자율성을 상실해갔다. 게다가 대다수는 구식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이 시계를 보고 시 간을 파악해 작전을 짤 때 장교들은 여전히 '동틀 무렵' 같은 구시대 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추측했다. 반면 그루시가 믿음직하고 충직하 며, 용감하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나폴레옹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었다. 그에게서 영웅적인 면모나 전략가적 기질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11. 로스차일드의 혁신
- 나탄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가를 일으킨 암셀 메이어 로스차일 드Amschel Mayer Rothschild의 셋째 아들이다. 훗날 로스차일드가가 금력 金力으로 유럽 각지의 경제력을 장악하자, 암셸 메이어가 '선견지명'으 로 런던, 파리, 빈 등 유럽 주요 요충지에 아들들을 보내 미리 자리 잡도록 했다는 신화가 생겨났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들의 생각과 거리 가 있었다. 아버지와 형의 '보수적 경영 행보에 불만이 있었던 삼남 男 나탄은 가출하여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경제 중심지 영국에서 비약적으로 사업을 키웠다. 다시 말해 로스차일드 가문을 거물로 성장시킨 사람은 바로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던 나탄이었다. 그야 말로 그는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세계 최대의 거대 금융회사를 세우고 일군 주인공이었다. 나탄의 아버지 암셸 메이어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ghetto(유대인 거주 지역)의 가난한 유대인 금융가였다. “돈이야말로 유대인을 구원하는 단 하나의 무기”라는 좌우명을 가졌던 그는 유럽 금융계의 큰 '돈 줄' 중 한 명이던 헤센카셀 대공국의 백작 빌헬름 9세와 거래를 하며 사업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그때까진 국제적인 금융 거물이 되기에 크게 모자란 수준이었다. 가문의 위상은 암셸 메이어의 자식대에 이르러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자식 중에서도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와 크게 다른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 있었다. 외향적이고 성공적인 해외 진출을 하는 전 형적인 최고경영자상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썼던 장남 암셸은 신앙심이 깊고 평생 프랑크푸르트를 벗어나지 않았 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그저 선대의 수준을 유지할 뿐 혁신이나 발전을 일으키진 못했다. 넷째 아들 카를은 일찍이 이탈리아 나폴리에 보내졌지만 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 프랑크 푸르트를 자주 드나들었다. 나탄의 형 살로몬과 막내 제임스는 아버 지의 사업을 일찍부터 도왔지만 장사 솜씨가 특출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반면 나탄의 '독립성'과 '넓은 시야'는 형제 중에서 단연 두드러졌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한마디로 '타고난 반항아'였다. 그는 키가 작고, 붉은 얼굴에 뚱뚱했으며 늘 활력이 넘치고 성질이 급했다. 야망과 상 상력이 굉장해서 좁고 제약이 많은 게토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집 중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이었던 나탄은 프랑스 대혁명 등으로 야기된 18세기 말 유럽의 혼란이야말로 사업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12. 스탈린의 변신
- 스탈린은 1878년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1898년에는 이상주의적 신학생으로 생활했다. 1907년에는 은행 강도, 1914년에는 사람들의 뇌 리에서 잊힌 시베리아의 사냥꾼에 불과했지만 1917년엔 그루지야에 민족적 뿌리를 두고 러시아에 충성하는 국제주의자로 살았다. 그러다 스탈린은 소비에트에 속한 4중 국적자의 특징을 가진 혁명 지도자로 거듭났다. 1930년대에는 광신적 마르크스주의 대량 학살자로 사람들 의 머릿속에 각인되었으며 1945년에는 히틀러의 침공을 물리치고 독 일을 정복하는 주역이 됐다.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를 “세상에서 가장 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나라지만 통치하기는 가장 어렵 다"고 평했는데 스탈린은 이런 러시아를 30년 가까이 홀로 지배했다. 한편에서는 그를 인간적 품성이 결여된 무자비하고 잔혹한 폭군 이 미지로 인식했고, 다른 쪽에선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앉고 싶은 무릎 을 지닌 인자한 사람"(미국 특사 조지프 데이비스)으로 평가했다. 전 세 계를 공산화시키려는 야욕에 사로잡힌 '악마'로 보는 이도 있고, 세계혁명'을 단지 과거의 슬로건으로 격하시키고 소련의 국가적 이익에 사 회주의 혁명의 대의를 종속시킨 '혁명의 배반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빛나는 약속을 화석화시킨 장본인이라는 것 이다. 스탈린은 조심성 있는 사람이었으나 불안정하고, 잔인하며, 끊임없이 의심했다. 사람들은 이런 그의 모습이 현대의 정치인이라기보다 로마 시대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의 『열두 명의 카이사르 The Twelve Caesars』에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인물과 가깝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혁 명을 기록한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스탈린을 '형체가 흐릿한 회색의' 사람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시시각각으로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그의 변신에 쉽게 속아 넘어가곤 했다. 신봉자들에게 스탈린은 '오류 하나 없는 완벽한 인간이었고, 모든 잘못은 부패하고 사악한 측근 탓으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1945년과 1948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스탈린의 정적들은 그를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평가절하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인스턴트 볼셰비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인물(레온 트로츠키)'이라며 경멸을 담아 비아냥거렸던 인물 대부분은 훗날 스탈린의 칼날 아래 숙청의 희생양이 되었다. 레닌조차 한동안 스탈린의 진면모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1917년 10월, 레닌은 그를 정부요직에 앉히면서 “(이 일을 하는 데에는) 지성이 필요 없기 때문"이라는 말로 임명을 정당화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당내에서 서류 정리함 동지'라는 별명을 얻는 등 시류에 편승한 '우둔한 관료 이미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스탈린은 레닌이 "스탈린을 주의 깊게 경계하시오. 그는 언제든 당신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주변에 자주 얘기할 정도로 변모했다고 한다.
- 스탈린의 끊임없는 변신의 배경에는 냉혹한' 마인드 컨트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제정 러시아 정보 당국에 9번 체포됐다. 그리고 8번 이나 탈출했다.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감옥 생활 중 동료 수감자들은 그에 대해 “냉담한 스핑크스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시베 리아 유형지에서 스탈린은 '빈틈없는 유혹자' '사생아 생산자' '연쇄적 싸움꾼' '강박적인 말썽꾼'이라는 평을 들으며 최악의 인물로 평가받았다. 혁명 동료가 약탈 행위 중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쩌겠어?? 가시에 찔리지 않고 장미를 꺾을 수는 없잖아?”라고 무심하게 내뱉었다.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라" 라는 발언도 했다. 이런 냉혹함을 바탕으로 그는 권력을 확고하게 다져나갔다. 스탈린의 궁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10년 넘게 살펴본 소련의 정치가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들은 “스탈린은 모든 사람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누구나 쇠막대기로 다스렸 다고 요약했다. 몰로토프는 훗날 회고록을 통해 “스탈린 앞에서 우리는 모두 10대 같았다"고 인정했다. 스탈린은 자신이 '암살' 당할 가능성을 인식하고 철저하게 대비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뒤에 누가 서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커트 끝 항상 잘라놓았다.
- 스탈린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전 러시아 사회를 공포에 몰아 넣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혁명의 성공과 집권에 대한 확신이었다. 권력에 대한 의지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러시아 혁명 지도자 레닌이 아내 크루프스카야에게 “우리 가 살아 있는 동안 혁명을 볼 수 있을까”라며 혁명을 의심할 때조차 스탈린은 “혁명은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 해가 떠오르지 않게 막을 수 있는 것인가"라며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17년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했던 사회주의 정당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당과의 관 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1930년대가 되어서는 『프라브다』에 “하나의 공통된 의견, 하나의 공동 목적, 하나의 공동의 길”을 요구하는 글을 실을 정도로 '혁명'의 성공과 집권욕에 대해 변 함없는 집착을 드러냈다. 스탈린은 “나는 오직 인간의 의지력만을 믿는다”라고 말했다. 변신 을 거듭하면서도 변함없이 본질을 유지하던 그에게는 이 같은 '강철'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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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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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인생에 불행이 닥치거나
어떠한 방해물을 만날지라도 내적인 기쁨을 잃지 않는다.
비록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딘가에 열려있을 새로운 문을 찾을 수 있다.
보다 넓고 환한 길로 연결된 문을 - 안셀름 그륀

 

감사는 걱정, 불안, 두려움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감사야말로 시련을 견디는 힘이자,
내 안에 행운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닥칠수록 감사할 일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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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느끼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자신과 닮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대립하여 살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 사랑이다.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사한 사람들이 뭉치면 처음엔 편하지만, 발전을 저해하게 됩니다.
사고와 생각이 똑같은 사람들끼리만 뭉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다른 관점,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해야 조직의 외연이 넓어지고,
그만큼 조직은 더 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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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과정이다.
겨우 네 번째 계단에 이르러서 제일 높은 곳에 왔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더 높이 올라갈 기회를 잃은 것이다.
다섯 번째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네 번째 계단을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 틱낫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 가진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기존 지식이 새로운 지식에 이르는 길의 장애물이 되기 십상입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기존에 알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기꺼이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더 큰 것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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