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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로 산다는 것

경영 2020. 7. 22. 20:56

- 그리스 신화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자 순간의 신이다. 그는 앞머리를 주렁주렁 길게 늘어뜨린 반면, 뒤통수에는 숱이 하나도 없다. 이는 기회를 앞에서 잡아야지, 뒤에서 잡으려고 해서는 소용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회는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 능력은 있는데 기회가 없다라는 한탄은 무의미하다. 기회를 알아볼 안목이 없 고, 기회를 낚아챌 준비가 없을 뿐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기회는 준비가 행운을 만났을 때 생긴다”라고 말했다. 아무 준비 없이 기회만 기다려서는 미래가 없다. 충분히 준비하고 행운을 기다릴 때만 기회가 만들어진다.
- 가동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제한적인 중소기업은 정말 잘할 수 있는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인이자 살아 있는 경영 교과서라고 불리는 잭 웰치Jack Welch는 “회사에 그 사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전에는 절대 지갑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일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시 장과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만들 수는 없다. 사업을 제대로 이해하는 인재가 없는 사업은 포기하고, 인재가 사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싶다. 그래야 회사도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율보다 공정별 직행률을 들여다봐야 한다. 하나의 완제품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단계의 중간품 공정이 필요하다. 단계마다. 중간품의 일부에서는 불량품이 나온다. 불량품은 수리와 조정으로 되살려 다음공정에 투입한다. 중간품 공정에서 불량이 계속 발생해도 수리 조정을 열심히하면 수율은 높아진다. 그러니까 중간 단계에 얼마나 많은 수리 조정이 발생했는지 반영하지 않은 총수율은 사실상 허수에 불과하다.
- 품질은 성실성이 아니라 불량인자를 분석하여 JIG*로, 시스템으로, 프로세스로 재발 방지 대책을 구축해야 할 문제다.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어야 품질이 향상되고, 안정적인 품질이 뒷받침되어야 제조업체의 경쟁력이 확보된다. 성실성으로 접근해서는 품질을 안정화할 수 없다. 품질부서의 관리도 문제다. 꽤 많은 중소기업에서 생산본부장이 품질부서까지 관리한다. 나는 품질 문제를 경영자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산과 품질은 설립 목적 자체가 완전히 다르므로 하나의 부서로 묶일 수 없다.
생산부서의 본질 업무는 생산성 향상이다. 작은 문제는 임기응변으로 처리해서라도 생산을 지속시키는 게 그들의 일이다. 생산부서는 바늘의 허리에 실을 묶어서라도 바느질이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제조라인이 어떻게든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 중소기업 대표로 합류할 당시 그 회사는 창고에 무려 15억 원 정도의 재고를 직접 보관하면서 출하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제품을 직접 보관하고 출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제품은 안성의 공장에서 외주로 생산했다. 완성된 다음에는 회사가 있는 대전의 창고로 내려왔다가 주요 고객사인 수도권 공장으로 납품되었다. 일단 만들어지면 남하했다가 주문을 받으면 북쪽으로 올라가는 식이었다. 위아래를 오가는 운송비도 불합리했지만, 창고에 쌓아두었을 때의 비용도 부담스러웠다. 창고 임대료는 기본이고, 도난과 화재보험 에 가입하고 적정 온도와 습도를 맞추기 위한 비용까지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나는 경기도 안성의, 반도체 전용 창고를 가진 외주 협력사와 VMI Vendor Management Inventory, 공급자 재고관리 계약을 체결했다. 그 회사 창고의 여유 공간을 임대해서 보관하고, 출하할 때 재고를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출하 시점에서 위탁가공제품을 매입하다 보니 재고비용이 눈에 띄게 줄었다. 1년 내내 작동시켜야 했던 냉방시설을 가동하지 않으니 전력비도 절감되었다. 이후 고객사의 요청이 있으 면 제품은 안성에서 바로 출고되었다. 쓸데없이 도로를 오가며 운송비를 낭비할 필요도 없었고, 반도체 전용 창고였으므로 온도와 습도 문제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물류비와 관리비는 물론 시간까지 절감되는 효과가 발생했다.
- 결론적으로, 나는 중소기업에는 하이브리드 ERP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설비 자동화가 원가절감을 불러온다고 하지만, 저렴한 인건비 등 가격경쟁력을 가진 중국 기업은 완전 자동화가 오히려 비용 증가의 원인이라고 경계한다. 인건비가 싼 부분은 매뉴얼로 관리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자동화해서 잘 조합되어야 효율이 극대화된다. 중국의 하이브리드 설비 자동화처럼 중소기업도 ERP 시스템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삭제해야 한다. 나는 ERP 시스템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데이터에는 서명하지 않는다. 처음 얼 마 동안은 나나 직원 모두 불편했지만, 안정화되기 시작하면서 스피드와 데이터의 투명성이 달라져 갔다. ERP 시스템을 구축해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성패는 CEO와 부서 리더의 강력한 톱다운 방식의 의지에 달려 있다.
- 페널티킥 상황에서 골키퍼는 슛 이전에 몸을 날려야 한다고 한다. 키커가 어디로 찰지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두지 않고, 공을 차는 순간 움직여서는 이미 늦다 는 것이다. CEO도 항상 촉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잡고, 문제가 생겼을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생각이 많으면 악수를 남긴다라는 말처럼 장고 끝에 시장과 소비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 번지점프를 잘하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그냥 뛰는 것이다. 생각이 많을수록 시간만 가고, 그 시간이 번지점프의 질을 높여주지는 않는다.
- 중소기업의 CEO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군분투해 어느 정도 기업을 성장시 키고 난 뒤 초심을 잃는 것을 종종 본다. 이들은 경영을 임원에게 맡겨두고 바깥으로 나돌거나 감투에 매료되어 교만해지고, 사치를 부리고, 나태해져 힘들게 성공시킨 기업을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이는 좋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새벽시장 까지 쫓아다니며 맛집으로 유명해진 식당주가 돈을 원 없이 벌게 되면 어느 순간 재료 장만과 음식을 종업원에게 맡기고, 자신은 최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골 프나 치러 다니다 망하는 케이스와 같다. 이런 사람들은 애당초 기업가정신, 즉 음식에 승부를 건 것이 아니라 돈이 목적이었을 뿐이다.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니 목표마저 없어진 것이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식구와 그들의 미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잘 나갈 때일수록 초심을 잃지 않고 조직의 긴장감을 가지고 지속가능한 성장기업을 만들어야 한다.
- 맥도날드는 철저한 기획과 시험을 거쳐 햄버거의 맛을 결정한다. 맥도날드의 햄버거 패티는 지방이 19% 이하인 쇠고기를 지름 3.875인치의 1,6온스 크기로 뭉쳐 만든다. 양파도 0.25온스로 규격화되어 있다. 이런 디테일이 맥도날 드처럼 아주 큰 기업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스시로지 라는 회전 초밥 프랜차이즈도 아주 섬세하게 상품을 기획했다. 이들은 소비자가 원하는 회전초밥 컨베이어의 회전 방향, 속도, 메뉴별 접시의 연속성 등을 철저히 연구했다. 먼저 회전초밥은 소비자의 수렵본능과 경쟁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에 고정식에 비해 1.5배 많이 소비된다. 회전 방향은 오른손잡이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는 시계 방향이 유리하다. 컨베이어 벨트는 실험 결과 소비자의 먹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데 가장 적당한 초당 4cm의 속도로 회전한 다. 이런 디테일에 힘입어 스시로는 맥도날드의 평균인 5~6달러보다 높은 10달 러 이상의 객단가를 올리고 있다. 500개 이상의 프랜차이즈에서 올리는 연매출 은 2조 원 이상으로 우리나라 대기업 수준이다.
- 해외 공장에 얼마나 많은 주재원을 배치했는지 살펴보면 현지 공장에 대한 관리능력이나 원가경쟁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업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제조업 해외 공장의 현지 주재원은 7인 정도가 알맞다고 본다. 내가 맡을 당시 우리 회사의 베트남 공장에는 14인의 주재원이 있었다. 나는 이 숫자를 6으로 줄였다. 인건비 절감이 표면적이고 직접적인 이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층적인 이유가 있다. 과도한 주재원의 수는 업무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이다. 일단 직접적인 비용 문제부터 살펴보자. 직원 한 명을 주재원으로 파견하면 교육과 주거 지원 등으로 인건비보다 훨씬 높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대략 국내 에서 지급하던 임금의 3배 정도가 필요한 것 같다. 저렴한 현지 물가와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커진다. 주재원 한 명에 소요되는 비용은 현지 고급 간부 10인 이상 의 인건비에 맞먹는다. 국내에서의 같은 직급 직원이나 현지 고급 간부 어느 쪽의 임금과 비교해도 어마어마한 지출이다. 문제는 이렇게 투입한 지출이 현지에 뿌리내리지 않을 비용이라는 데 있다.
- 내 기준으로 바람직한 주재원의 수는 7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지에서 관리해야 할 업무가 7가지인 까닭이다. 먼저, 현지 법인의 대외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필요하다. 본사와의 방향성을 조율하며 현지의 세무, 노무, 통관, 대정부 업무는 물론 현지 인맥과의 교류도 책임질 법인장이 첫 번째 주재원이다. 다음으로는 생산을 총괄하여 전체적인 안살림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 공장장이 두 번째 주재원이다. 그리고 구매, 품질, 수주관리, 생산, 재무관리의 다섯 기능을 책임질 주재원들이 있어야 한다. 그 외에는 모두 현지인 간부에게 권한을 이양해야 한다고 본다.
- 성공적인 팀의 주기는 4년 정도라고 보고 끊임없이 선수들을 관찰하고 측정하 면서 조직을 재구성해야 한다. 때로는 잘하는 선수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지 만, 다른 선수의 성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퍼거슨 감독)
- “경영관리 부서는 CEO의 귀가 되어야지 입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나는 늘 강조해 왔다. 그런데 경영관리 부서가 꼭 집단주의 사회의 비밀경찰처럼 구는 경우가 있다. 동독과 소련의 비밀경찰이 전화를 도청해서 정보를 독점하듯, 사업 기획과 인사 정보를 무기처럼 휘두른다. 월급과 상여금에 대한 정보와 알량한 예산을 가지고 동료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 이들이 고압적이고 사무적으로 나서면 회사 안에서 소통은 사라진다. 완전히 결정되지도 않은 인사 정보가 미리 새어 나가서 분열이 조장되기도 한다. 사람이 많지도 않은 중소기업에 파벌까지 만들어져서 구성원들이 따로 놀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조직의 미래가 예측가능한 상태일 때 직원들은 신뢰감을 갖고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몰입이 가능하다”고 했 다. 리더는 조직의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때 우리 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려줘야 한다. 개혁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직원들의 희생만 강요하는 것이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회사와 개인의 이익에 어떻게 부응하는지 공감대를 먼저 형성해야 하는 것 같다. 매출과 손익이 늘고, 회사가 유명해져도 회사에 관련된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지 않고 억지로 끌고 가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진심어린 소통, 그리고 기준과 결과에 대한 믿음이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시간을 두고 쌓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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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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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경제사

역사 2020. 7. 22. 08:18

- "식물은 흙과 물과 돌과 바람과 빛으로 스스로를 만들고, 나아가 흙을 모든 동물이 생명을 의존하는 음식으로 변형시킨다. 식물은 이후 자신을 보호하고 친구를 피기 위해서 색깔과 맛과 향을 가졌다. 우리가 채소와 과일과 곡식과 향신료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 존재를 가능케 만든 음식, 우리 인생 앞 에 감각과 쾌락의 만화경 세상을 열어젖힌 그 음식 들을 먹는 것이다.” (해럴드 맥기 Harold McGee)
- 애덤 스미스는 중국을 한심하게 보았다. “중국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것 같다. 그들이 법률과 제도적 본질에 어울리는 부를 갖춘 것은 아마 오래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법률과 제도 때문에 이러한 부는 가능한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반면 유럽은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해운으로 국가 간 교류를 해 왔다. 기후와 토양을 가리는 밀의 속성 때문에 유럽의 먹거리는 동양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특히 단단한 밀의 씨앗을 고운 가루로 만들기까지는 상당한 기술 발전이 필요했다. 완벽한 제 분은 시계 공업이 발달한 스위스인이 증기기관을 이용하기 시작한 1800년대에나 가능했다.
- 동양의 곡창지대에 견주어 한참 북쪽에 있는 유럽은 편서풍 의 영향으로 연중 비가 내리는 서안해양성기후를 보인다. 이런 기후에서는 풀이 잘 자라므로 유럽은 목축으로 곡식 부족을 충 당했다. 그러나 밀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쌀에 견주어 낮기 에 강력한 왕권 국가를 설립하기 어려웠으며 백성들의 국가 개 념도 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은 프랑스에 있는 영국 귀족의 땅 때문에 시작된 것인데, 프랑스 백성은 누가 자 기가 사는 땅을 다스리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농노였기 때문이다.
- 수천 년 동안 동양의 국가들은 너무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역사의 흐름이 멈추어 버렸다. (마르크스)
- 비가 내리지 않아도 잘 자라는 밀과 보리가 주식인 유럽과 중동에 견주어 동양은 우기와 장마 때 내리는 비로 한 해 농사가 좌우된다. 동양과 서양이 신 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뭇 달랐다. 동양의 지배층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에게 투사되도록 많은 장치를 고안했다. 계급이 처음 등장한 청동기시대에 통치자와 제사장이 일치한 것도 이런 이유다. 왕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황금 장신구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피지배 층을 세뇌했다.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농사에는 물이 필요하므로 모든 문명은 강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관개는 지금도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대규모 사업이다. 인간의 노동에 의존하던 때 관개 사업은 강력한 왕권에서 비롯되었다. 곡식농사는 채집이나 수렵과 달리 강제 혹은 착취가 동원되었다. 사유재산과 노예제도도 여기서 나온다. 고대의 왕은 여러 씨족공동체를 무력으로 통합한 뒤 이들을 노예로 부려, 원가가 거의 들지 않는 많은 양의 곡식을 생산했다. 이렇게 축적한 자본은 피라미드 건설 같은 일에 퍼부어졌다. 황허강과 양쯔강 사이에 있는 중국은 놀라운 자본축적에 성 공했다. 황허강 위로는 밀을, 아래에서는 쌀을 재배했으며, 쟁기 · 시비법 · 이앙법 등 첨단 기술을 재빠르게 도입했다. 7세기 초반 건설한 중국의 대운하는 유럽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진시황 이후 중국 황제들이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 로, 그리고 자신을 '왕 중의 왕'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벼농사의 높은 생산력 덕분이었다.
- 20세기 이전까지 질소를 농작물에 공급하는 방법은 뿌리혹박테리아로 질소를 공급받는 콩과 식물을 길러서 썩혀 퇴비로 주는 것과 번개가 치는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번개는 삼중결합으로 단단히 밀착되어 있는 공기 중의 질소 분자를 질소원자로 분리해 질소화합물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질소비료가 나오기 전부터 질소를 공급받을 수 있었던 쌀은 천혜의 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동양의 농부는 씨앗을 파종해 묘판에서 모를 키우는 이앙법을 도입했다. 이앙법은 풀을 뽑는 데 들어가는 노동력의 80퍼센트를 절감해 수확을 2배로 늘려주는 혁신적인 기술이었 다. 이앙법은 당나라 때 고안되어 송나라 때 정착되었다. 게다. 가 중국 남부의 아열대몬순기후에서는 1년에 2번 벼를 재배할 수 있다. 1,000년 전 중국에서는 이런 농업혁명이 차근차근 진 행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서양은 1200년경 시비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휴경 지로 지력을 살리는 방법이 고작이었다. 쌀의 우월한 생산력 때문에 동양 국가들은 안정적인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로마가 지주들의 토지 독점과 토지 황폐화 때 문에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쌀은 밀이나 보리에 견주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쌀은 1헥타르당 생산량이 밀(820킬로그램)에 견주어 1.7배나 많 은 1,440킬로그램이다. 옥수수의 생산량인 860킬로그램보다 도 많다. 인류가 보리와 함께 가장 먼저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 수수의 생산량(1헥타르당 400킬로그램)에 견주면 무려 3.6배나 차이가 난다. 쌀을 키우는 민족은 빠르게 고대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 한반도의 쌀 생산력은 아열대몬순기후부터 냉대기후대에 퍼져 있는 중국과 비교하면 정말 작은 규모다. 통계청 국제통계연감 2017년 자료를 보면, 중국의 쌀 생산량은 전 세계 쌀 생산량의 28.5퍼센트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생산량은 0.8퍼센트로, 무려 35.6배 차이가 난다. 이런 낮은 생산량 때문에 우리 조상은 쌀 가운데 찰기가 있는 단립형 자포니카japonica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쌀의 전분은 퍼석한 느낌을 주는 아밀로스amylose와 찰기가 많은 아밀로펙틴 amylopectin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밀로스가 많은 쌀이 장립형 인디카(일명 안남미)다. 떡을 만드는 찹쌀은 아밀로스가 아예 없다. 아밀로스를 만드는 유전자가 우성이다. 3대 1로 인디카 쌀이 많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아밀로스가 없는 열성유 전자 쌀을 고른 것이다. 우리 조상이 찰기 있는 쌀을 선택한 이유는 밥이 주는 포만감 때문이다. 자포니카와 인디카 2가지 쌀을 모두 재배해온 중국인들이 이름도 알기 힘든 수많은 요리와 함께 인디카 쌀을 먹는 것은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뜻이다. 향신료로 만드는 인도의 카레나 볶음 요리가 많은 동남아시아 요리에는 인디카 쌀이 잘 어울린다. 반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식단이 유독 밥 중심인 것은 낮은 쌀 생산량을 고려한 조상의 선택으로 보아야 한다.
-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밀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장 앙리 파브르)
- 역사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열쇠는 신이나 '보이지 않는 손'같은 형이상학적 힘,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이었고 사회 시스템이 이런 욕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 서양은 동양보다 훨씬 빠른 중세 때 이미 이런 욕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반면 동양의 지배층은 이 욕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일부 이슬람 세력과 북한 등은 지금도 이를 인정하길 꺼리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신념이나 영도력은 초기 확산 속도는 빠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지속력이 떨어진다. 진秦나라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불과 15년 만 에 망했다. 스페인의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했 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잊고 노예무역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반면 자기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경제활동에 대한 상공인의 자유의지는 꾸준한 방향성으로 역사를 움직였다. 농민들은 늘 배가 고팠던 까닭이다. 개인의 생각을 만드는 기초는 먹거리다. 우리가 황혼 녘 밥짓는 냄새를 맡으면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하고 뭉클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우리 민족이 1만 년 가까이 한반도에서 쌀을 먹으면서 삶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곡식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한다. 밀도 마찬가지다. 호메로스Homeros는 『오디세이아Odysseia』 에서 밀과 보리를 '인간의 골수'에 비유하기도 했다.
- 배고픈 유럽인의 살길은 땅을 떠나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 다. 물고기를 잡거나 무역을 해야 했다. 이렇게 살길을 찾은 대표적인 나라가 고대 그리스다. 그리스는 빙하가 깎아놓은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바위가 많다. 게다가 석회암이 많아서 흙이 기름지지 않다. 그리스인의 주식은 보리였다. 보리에는 탄성을 만드는 단백질인 글루텐이 없어 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죽 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에게는 바다밖에 없었다. 뱃사람은 농사짓는 사람 에 견주어 거칠 수밖에 없다. 땅의 가혹함은 굶주림이지만 바 다의 가혹함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거칠었고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셈에 밝았다. 보리죽을 먹던 그리스 인에게 새의 얼굴을 한 이집트의 신과 종교는 우스꽝스러웠겠지만, 그들이 만드는 기기묘묘한 모양의 빵은 기적처럼 보였을 것임.
- 기원전 6세기 솔론Solon의 개혁으로 평 민의 참정권이 보장되었으며, 이후 모든 시민이 참석하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시민들이 재판에 참석하는 배심원 제도도 이때 도입되었다. 하지만 로마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농사꾼들로 이루어진 평민회의 대표에게 최고 권력 자리인 호민관을 내주었다. 로마 가 이 같은 혁신을 채택한 것은 귀족과 평민의 화합으로 번영 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로마가 번영하려면 빵이 필요했고 이 빵은 이탈리아의 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지중해 무역을 로마보다 앞서 개척한 이웃 나라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페니키아와 맞서야 했다.
- 밀 외에 보리와 귀리도 있지만 이미 빵 맛을 알게 된 로마인은 보리를 가축이나 노예가 먹는 음식쯤으로 여겼다. 검투사를 로마에서는 호르데아리 hordearii라고 불렀는데 이는 ‘보리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검투사는 보리죽에 고수를 띄워서 먹었다. 로마에서는 문제가 있는 군인과 관리에게는 밀 대신 보리를 급여로 지급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근대까지 유럽에 남아 있었다. 로마는 지중해의 밀 생산 지대를 차지해야 했고 그러려면 다른 나라와 경쟁이 불가피했다. 살아남으려고 로마식 정치 혁신을 선택한 것이다. 로마의 선택은 옳았다. 로마는 주변 나라를 차례차례 격파하고 100여 년이 넘는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두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로마가 얼마나 카르타고에 이를 갈았는지는 카르타고를 정복 이후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다. 로마는 카르타고 남자를 모두 학살하고 카르타고의 곡창지대에 소금을 뿌려 영원히 밀을 키우지 못하도록 했다. 그만큼 밀은 로마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제 북아프리카와 이스파니아의 곡창지대도 로마의 것이었다. 로마는 로마 시민을 먹여 살릴 빵 창고인 이집트마저 정복했다. 그러고는 이집트의 화학책을 모두 불살랐다. 로마인이 보기에는 마법 같던 이집트 빵 기술을 독점하려는 생각이었다. 로마는 드디어 서양 세계의 빵을 독점했다.
- 유럽에서 경쟁의 주체는 귀족이나 왕족처럼 권력과 토지를 독점한 자가 아니라 상인과 장인이었다. 12세기 유럽은 낮은 농업생산력을 무역과 기술 혁신으로 메워나가고 있었다. 유럽의 상인과 장인은 동업조합인 길드를 만들어 지배 세력에 맞서 자치권을 확보했다. 이들은 영주가 갖고 있던 경제행위에 대한 통제권은 물론이고 사법권 행사와 행정관리 선출에도 직접 개 입했다. 길드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로 유럽의 작은 도시들에는 활력이 생겨났고, 농노들은 종교 공동체인 장 원을 빠져나와 도시에서 자유인으로 살기 시작했다. 영주와 종교인도 일부 권리를 상공인에게 넘기면 훨씬 사치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13세기에는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 같은 대대적인 혁명은 아니었지만, '연성 원시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에너지 혁명의 전조가 감지되었다. 1185년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발명된 풍 차는 영주와 교회의 소유이던 수력 장치와 경쟁하는 평민의 에너지'였다. 풍차 설비 1대는 20명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방아의 가장 중요한 기술적 진전은 회전운동을 왕복운동으 로 바꾸어주는 캠cam이었다. 방아 덕분에 양모를 천으로 바꾸는 가공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유럽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간파한 상공인들은 풍차와 수력 장치를 소유했고 어느덧 평민의 에너지 총량은 기득권층의 에너지 총량을 넘어섰다. 중세 기사도를 숭배한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중세의 풍차와 수차에 대해 연구한 역사학자 린 화이트 Lynn White는 중세에 이미 산업혁명이 준비되었다고 진단했다. “15세기 후반 유럽은 그 이전의 어떤 문화권보다 훨씬 다양한 동력원 뿐만 아니라 그 에너지를 포착하고 전달하고 이용하는 데 필요 한 일단의 기술 수단까지 갖추었다. 1492년(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전개된 유럽의 확장은 상당 부분 에너지 소비의 증가와 그에 따른 생산성 향상, 경제력 · 군사력 증강에 기초한다.” 에너지와 기술 수단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 역시 혁신적으로 진화 중이었다. 이는 중세 도시가 서로를 의식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던 탓인데 그리스와 로마,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밀을 비롯한 무역권을 놓고 경쟁하던 것과 비슷하다. 13세기 이탈리 아의 피렌체 · 피사 · 베네치아 · 제노바는 부와 권력을 키우려고 이웃 도시와 전혀 다른 정책을 채택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각종 창의적인 정책의 풀pool이 형성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이 실험 끝에 내린 결론은 제조업과 무역 이 번영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 1112년 세워진 피렌체공화국은 은행업과 양모업 등 21개 길드의 대표 자가 운영하는 시뇨리아signoria를 통해 다스려졌다. 1532년 메 디치가가 세습군주제로 피렌체를 다스리기 전까지 이 대의 기구는 계속 운영되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화정을 만든 점은 로마와 닮았 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피렌체는 로마와 달랐다. 피렌체는 귀족을 혁신의 걸림돌로 보고 대주주와 귀족이 정치 세력이 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견제했다. 심지어 피렌체는 지주를 영구적인 위협 세력 혹은 적과 내통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지주를 견제하는 대신 비봉건 사회의 특징인 예술인을 우 대해 예술의 번영을 일구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이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 밀은 유럽인을 배고프게 만든 대신 그들에게 분석력이라는 눈을 선사했다. 서양인은 작은 개체를 낱낱이 파헤친 뒤 원칙을 세워 나머지를 묶어내는 분석 능력이 동양인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관찰과 경험을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야말로 진정한 실체다”라고 말했다. 서양인에게 집단은 개체가 모인 것인 반면 동양은 개체보다 관계와 전체를 중요시했다. 서양의 면도날 같은 분석 전통은 학문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정치가는 사회를 이루는 주체들을 각각의 변수로 놓고 이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제도와 법규 같은 시스템을 조율했다. 동양의 세계관이 부모와 왕과 국가(혹은 신)의 관계를 강조해 선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것이었다면 서양의 세계관은 입체적이고 역동적이었다는 분석을 하는 이유다. 어쩌면 이런 차이는 쌀보다 훨씬 제분이 어려운 밀의 속성에서 온 것인지 모른다. 밀은 쌀에 견주어 껍질은 단단하지만 속살(배젖)은 부드럽다. 껍질을 까면 밀은 쉽게 깨져버린다. 따라서 밀은 쌀과 보리와 달리 도정精 대신 분쇄를 해야 했다. 속도 차를 이용해 고운 가루를 내는 3중 분쇄 기술은 1800년에나 개발되었을 정도로 밀의 분쇄는 까다로운 일이었다. 서양인이 생산력의 열악함을 뛰어넘어 자본주의와 함께 그 대안인 사회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저력은 작지만 쉽게 제 몸을 내어 주지 않는 밀알을 좀더 치밀하게 깨려는 그들의 오랜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 유라시아인들이 식칼을 만들어 서로의 땅을 빼앗으려고 혈 안일 때 농업생산력이 높은 아즈텍인과 잉카인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왜 이들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을까? 학자들은 옥수수의 기적적인 생산 조건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옥수수는 밀이나 쌀처럼 노동 집약적 곡식이 아니다. 심지 어 쟁기질도 타작도 도정도 필요 없다. 심는 법도 단순하기 그 지없다. 남자 농민이 큰 막대기로 땅에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에 부인이 씨앗을 심는다. 1년에 2번 씨앗을 심으면 50일 안에 열매가 열린다. 옥수수는 빨리 익을 뿐 아니라 익기 전에도 낱알을 먹을 수 있다. 1알을 심으면 보통 150알 이상을 거둘 수 있으며 심지어 800알을 얻기도 한다. 이것은 계절에 따라 7~8일 정도만 일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약적 노동의 자유로움이 결국 지나치게 전제적인 신정국가에 이르게 한 것이다.
- 아메리카의 옥수수는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전혀 다른 역사를 일구었다. 호기심 많은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간 옥 수수는 감자와 함께 근대적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두 식물의 가장 큰 공은 빠른 식량화를 통한 인구 팽창이었다. 페스트 확산으로 급감했던 유럽 인구는 17세기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이후 2억 명가량이던 인구는 1650년 약 5억 명으로 2배가량 늘었고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 1850년 에는 10억 명을 기록했다. 중국의 인구 증가도 옥수수가 전파 되었던 17세기 청나라 때부터였다. 유럽에서 최초로 옥수수에 주목한 나라는 전쟁광 스페인이 아니라 전통의 부호 이탈리아였다. 중남미의 인신 공양 행위를 유럽 최초로 지켜보고 기록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불길한 음식으로 취급해 아예 먹지 않으 려 했다. 그러나 무역으로 부를 일군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달랐다.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노동력 대비 높은 옥수수의 생산성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시칠리아에 옥수수를 키워 식량으로 삼고 대신 옥수수에 견주어 2배 이상 비싼 밀을 시장에 팔았다. 17세기 베네치아는 생산된 곡물의 15~20퍼센트를 수출한 반면 프랑스는 2퍼센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곡물을 소비했다.
- 아즈텍제국 멸망 후 멕시코로 건너온 스페인 사람들은 현지에서 앓던 설사와 고열 등의 병을 목테수마의 복수'라고 불렀다. 목테수마는 아즈텍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아직 GM 농산 물의 폐해가 구체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보건기구 WHO가 2015년 10월 가공육을 석면과 같은 1급 발암물질로, 붉 은 살코기를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판 목테수마의 복수는 옥수수를 통해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 그리스인은 기원전 8세기부터 페니키아인에게 배운 대로 식 민지의 광산을 개발해 화폐를 만들었고 곡물을 비롯해 특산품 을 본국으로 나르거나 다른 나라에 파는 삼각무역에 눈을 떴다. 따지기 좋아하고 매사 삐딱한 그리스인은 적성에 꼭 맞는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들은 보리로 된 빵 마자maza가 아니라 밀로 된 빵 아르토스artos를 먹을 수 있었 다. 기원전 6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르토스는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우리나라 서민들이 평소 보리밥을 먹다가 명 절 때 소고기 국에 쌀밥을 먹던 것과 비슷했다. 폴리스 가운데 아테네는 상업 활동이 가장 활발한 도시였다. 특히 아테네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하던 폴리스였다. 인류 최초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사유재산을 인정한 덕분이었다. 2,000여 년 뒤 로크가 비로소 정리하고 옹호한 사유재산의 개념을 아테네가 이렇게 빨리 도입했던 것은 게오르고스georgo' 로 불리던 소농들 덕분이다. 소농들은 땅 부자인 귀족이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아테네 외곽 아티카 언덕의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거기에 보리를 키워 가족을 부양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와 땅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프로테스탄트처럼 끊임없이 참정권과 재산권을 요구했다. 미국이 1776년 독립전쟁으로 세계 최초로 귀족을 배제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한 헌법을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테네의 소농은 진정한 혁신가였다. 그리스 공동체들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중동의 패권 국가 아시리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중장 보병 밀집 전술을 도입해 발전시켰다.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어깨를 맞댈정도로 밀집한 뒤 원형 방패로 몸을 최대한 가리고 3미터에 이르는 긴 창과 긴 칼을 들고 전진하는 방식이다. 팔랑크스phalanx 로 불린 전투 대형은 등껍질이 단단한 거북이가 긴 창을 꽂고 전진하는 모양새다. 팔랑크스는 전진 속도가 느렸지만 앞에 있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지나갔다. 그게 적이건 귀족이건 말이다. 팔랑크스는 『일리아스(lias』에 묘사되었던, 귀족이 주도하고 평민은 시종으로 따라나서던 전쟁을 평민 주도의 전쟁으로 바꾼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스 폴리스들은 이 전술을 앞다투어 도입했다. 그만큼 죽거나 다치는 병사도 많았다. 전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폴리 스를 위해 목숨을 건 대가로 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폴리스 간 의 경쟁이 치열했던 상황이어서 귀족은 이를 들어줄 수밖에 없 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것은 고된 노동과 목숨을 건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소농을 포함한 시민들이었던 그리스 보리밭에서 자라난 민주주의 셈이다.
- 17세기 유럽에는 1,000개의 국가가 존재했으나 200년이 지난 뒤에는 40~50개로 통합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 기 지중해 인근의 정세와 비슷하다. 영국은 이 시기 아테네식 의 정치·경제개혁으로 유럽에서 가장 앞서 나갔다. 그러나 영국인은 아테네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스파르타의 정신을 이식했다. 기숙학교를 만들고 학생에게 럭비를 시켜 진 흙탕에서 뒹굴게 했다. 그들이 먹던 음식은 스파르타처럼 맛이 없었다. 지금도 유럽에는 “지옥의 요리사는 영국인" 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실제 영국은 스파르타처럼 쾌락보다는 절제 와 명예를 존중하는 전통을 강조해왔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 가는 물론 중국과 같은 반봉건 국가들에도 영국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낯선 여러 국가는 스파르타의 전통에 경도되었다.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가 대표적이다. 사회주의국가인 스탈린 시대 소련과 지금의 북한도 스파르타와 닮았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식 자본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도 스파르타의 전통이 강하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획일화된 학교 교육, 고루한 서열 문화 등은 찬란한 아테네보 다는 칙칙한 스파르타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수능이나 토익 따위에 청춘을 소진하는 젊은이들은 전사가 되기 위해 집단생활에 내몰린 스파르타 젊은이들과 닮았다. 먹는 것도 비슷하다. 잡코리아 등이 취업 준비생 1,147명을 대상으로 2017년 6월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취업 준비생은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들이 가장 자주 사 먹는 식사 메뉴는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 김밥(23.7퍼센트)이었다. 조모스와 딱딱한 보리 빵을 먹던 스파르타 전사의 한 끼를 떠올리게 한다.
- 나는 폴리비우스가 조영관(로마 지방의회 관리)으로 뽑혔으면 좋겠다. 그는 우리에게 맛있는 빵을 공급해준다. (폼페이 유적 낙서)
- 로마의 실체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전재 국가였 다. 전쟁에 승리해 전리품과 노예가 확보되면 노예의 노동력을 토대로 다시 전쟁을 벌였다. 대부분 농민이던 로마의 시민군은 수백 년 동안 이 지겨운 무한 반복을 묵묵히 따랐다. 동맹국과 속주屬州의 시민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은 애국심으로 무 장한 '전쟁 기계'였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황당한 현실이 었다. 시민이 전쟁에 나간 사이 귀족이 시민의 토지를 독점했다. 토지 독점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민회와 원로원이 절대왕정을 견제하기 위한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가던 기원전 2세기 공화정 때였다. '강성 대국'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토지를 잃은 농민들 이 로마로 밀려들었다. 로마 시민의 99퍼센트는 빈민이었고 굶 주림을 걱정해야 했다. 이게 로마제국의 민낯이다.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불안해지는 것이 로마의 숙명이었다. 노예제와 귀 족정, 군사독재라는 최악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로마 정부는 개혁에 나서지 않고 시민에게 공짜 빵을 돌렸다. 시민들은 정치인이 던져준 공짜 빵을 짜고 냄새나는 생선젓인 가룸garum에 찍어 먹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해 전갱이 · 고등어 등 지중해에서 흔히 잡히는 생선으로 만들었다. 가룸은 오늘날 이탈리아 지역에서 즐겨 먹는 올리브유와 소 금에 절인 안초비anchovy와는 다르다. 오히려 냄새가 짙은 동남아시아의 생선젓과 비슷했다. 가룸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값싼 음식의 하나로, 서민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 말기부터 공짜 빵에 값싼 가룸을 찍어 먹으며 영광스럽던 로마의 붕괴를 지켜보아야 했다. 빵과 가룸은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라 로마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러나 구수한 빵과 냄새나는 가룸의 역할은 묘하게 달랐다. 빵은 무상이었지만 가룸은 돈을 내고 사먹어야 했다.
- 서양의 식탁에 단백질 공급원인 가축의 살과 우유가 풍족하게 공급된 시기는 유럽에서조차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세 기 말일 정도로 고기와 우유는 귀한 음식이었다. 게다가 척박 한 석회암 토양의 지중해 인근에서는 염소나 양처럼 작고 생명력 강한 가축을 키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배고픈 로마인은 자신보다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 빛나는 문 명을 만든 그리스인의 식탁에서 영감을 얻었다. 보리의 나라 그리스는 밀을 대부분 수입했다. 그리고 바다에 무궁무진한 어패류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선은 쉽게 상한다. 그리스인은 생선을 소금에 절인 액젓 가로스garos를 만들었다. 가로스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로마인은 그리스 신화에 기초해 로마 신화를 만들었듯이 가로스를 토대로 가룸을 만들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한 각종 생선에 소금을 넣어 만들었다. 주로 여름철에 3개월 정도 햇빛 에 노출해 발효시켰는데, 엄청난 냄새로 악명이 높았다. 발효 뒤 맨 위에 뜬 맑은 갈색 액체를 걸러낸 것이 가룸이다. 가룸을 따르고 남은 생선 찌꺼기를 알렉allec이라고 불렀는데, 알렉으 가장 값싼 서민 음식이었다. 가룸은 지중해 사람들의 지혜가 만든 지중해 경제의 산물이었다.
- 영어 케첩의 어원은 중국 푸젠성 방언으로 '생선으로 만든 소스'를 의미하는 꿰짭姓에서 유래했다. 17세기에 등장한 케첩은 굴·생선·계란 흰자 등을 넣고 발효시킨 일종의 생선젓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버섯 · 호두 등을 이용한 새로운 소스가 등장했고 이 소스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실용적인 영국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이 소스를 발견하고는 이를 이용하면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 다. 그래서 이 소스를 유럽에 전파했다. 유럽에서는 토마토를 이용한 새로운 케첩이 만들어졌다. 기름진 요리를 즐겨 먹던 19세기 미국에서 토마토케첩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지금은 마치 케첩이 미국의 소스인 것처럼 생각할 정도다. 중국에서 는 미국이 표준화시킨 토마토케첩을 양가장洋書·번가장語市書 이라는 별도의 말로 부른다. 토마토케첩의 재료는 제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토마토 과육에 정향clove · 계피·후추·고추·마늘·육두구 등을 넣고 조린다. 제품에 따라 많게는 17종이나 되는 향신료를 쓰기도도한다. 서양인에게 이런 향신료는 대항해시대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토마토 역시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케첩은 소아시아의 생선젓에 취향대로 허브와 향신료를 넣 고 참치와 고등어로 만든 로마의 가룸과 많이 닮았다. 로마는 지중해를 통해 얻은 빵과 가룸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지중해는 로마의 젖줄이었다. 서양인들은 로마가 어디서 어떻게 젖과 꿀을 얻었는지 잊지 않았고, 가룸을 부활시켰다.
- 수도원에는 중세에 보기 드문 잉여생산물이 쌓이기 시작했 다. 로마 시대에는 콜로세움보다 큰 식량 창고를 능수능란하게 만들었으나 그런 건축 기술이 없었던 중세 수도원은 잉여생산물이 변질되거나 손실되기 전에 가공해 팔아야 했다. 그들의 선택은 맥주였다. 그러나 빵을 액체로 만든 맥주는 보름도 안 되어 변질되기 일쑤였다. 중세의 도로 환경을 고려하면 그들은 맥주의 보존 기간을 늘려야 했다.수도사들은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다가 늪지대에서 자라 는 뽕나뭇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홉을 찾아냈다. 9세기 수도사 들은 홉을 넣으면 맥주의 맛이 상큼해질 뿐 아니라 보존 기간도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수도원은 홉을 넣은 맥주를 유럽의 방방곡곡에 팔기 시작했다. 로마 시대 이후 흔적만 남았 던 유럽의 길이 수도원 맥주를 실은 수레를 따라 다시 모습을드러냈다.
- 봉건제가 정착되고 이민족 침입이 잦아들면서 11세기에는 배 고픔에 대한 공포가 현저하게 누그러졌다. 넉넉해진 먹거리 덕 분에 인구도 급등했다. 볼로냐 ·케임브리지 · 파리 · 마인츠 등 에 대학이 생겨났다. 대학은 아랍인들만 읽었던 그리스·로마 의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500여 년간의 암흑 끝에 빛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교회는 암흑을 택했다. 중세 초기에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설파했던 교회가 변심했다. 중세 교회가 누려온 열매가 너무 달콤했던 탓이다. 교회는 1077년 이탈리아 카노사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굴복시키며 유럽 최고의 정치권 력임을 증명했다. 그들의 욕심은 정치에만 미치지 않았다. 교 회는 왕보다 넓은 토지를 가진 대지주이자 유럽에서 보기 드문 지속 발전 가능한 상공인이었다. 중세 교회는 규모가 작을 뿐이지 20세기 등장한 스탠더드오일이나 포드자동차 같은 독점기업과 유사했다. 수도원은 청빈의 삶을 버리고 농노들과 소작 계약을 맺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곡식을 빻고 빵을 만들고 술을 빚는 일도 교회가 독점하기 시작했다. 로마법에 따라서 물레방아는 토지를 가진 사람의 소유였다. 방앗간 주인은 물레방아를 교회나 영주에게 바친 뒤 고용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재산을 빼앗긴 방앗간 주인은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곡식의 양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모래를 섞기도 했다. 종교가 앞장서서 지역 사회에 뿌리 깊은 불신을 조장한 셈이다. 장터를 여는 이권 역시 교회가 영주와 함께 독점했으며 다리나 성문을 지나는 사람 에게 통행세를 걷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전리품으로 타락했다가 결국 이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갈취로 돈을 벌던 중세 교 회도 비슷했다. 외부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페스트가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것이다.
- 유럽인이 청어를 많이 먹은 데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양인이 고기를 손쉽게 접하게 된 것은 19세기 냉동선이 발명되면서다. 그전까지 붉은 고기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게다가 유럽은 후추 등 향신료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 요리는 지금과는 다 른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염장 육류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염 장 생선은 위도 탓에 낮부터 컴컴해지는 북유럽의 겨울철을 지 탱해주는 긴요한 음식이었다. 발효를 하면 원래보다 풍부한 맛 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염장하면 맛이 없어지는 육류와 큰 차 이였다. 지금도 스웨덴에서는 수르스트뢰밍 sutstromming이라는 염장 발효 청어를 즐겨 먹는다. 이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냄새가 고 약한 음식으로 선정되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발효 가스의 폭 발 위험 때문에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의 비행기 반입을 금지하 기도 했다. 그래도 스웨덴 사람들은 빵에 수르스트뢰밍을 올려 별미로 즐겨 먹는다.
- 청어의 수요 증가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다. 부활절 등 각종 종교적 행사를 앞두고 소고기나 가축의 육식을 금지하던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통 탓에 염장 청어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청어의 수요 증가는 필연적으로 소금 거래량을 늘렸다. '배 위에 올라오면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등 푸른 생선을 오래 두고 먹으려면 염장이 필수기 때문이다. 청어 염장에 사용된 최초의 소금은 폴란드 등 동유럽 내륙지역에서 나는 암염이었다. 이 암염을 나르면서 북유럽의 교역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교역로는 남유럽의 해상 무역로와 함께 유럽의 주요한 상업 루트가 되었다. 이 상업 루트는 이슬람 제국의 무역로와 연 결되면서 북유럽 국가에 중국·인도 등 다른 대륙의 상품을 전 달했다. 암염의 무역로를 따라 북유럽의 핵심 상품인 모피·목재·구 리 등이 유럽 시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금과 청어가 생존 필수품이라면 모피는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동양의 비단이나 도자기에 견줄 수 있는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이 때문에 모피 는 유럽 왕과 귀족의 주요 자금원으로 사용되었다. 유럽의 시장은 이슬람 시장과 연계되었다. 바그다드 시장에서 북유럽의 모피를 살 수 있었고 북유럽에서도 아랍의 향신료와 설탕, 동 양의 도자기와 비단을 구입할 수 있었다.
- 초기 자본주의 네트워킹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영국인은 자국 상품을 사지 않던 중국에 마약을 팔았고 영국보다 면사를 잘 만들던 인도 기술자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피해 국가가 항 의하면 전쟁을 선포했다. 은행이 후원하고 국회가 인준하는 전 쟁에서 영국을 비롯해 유럽은 승승장구였다. 18세기까지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었던 중국과 인도조차 이들을 당해낼 수 없 었다. 중국과 인도가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유럽 국가를 제외 하면 유럽 국가의 오만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는 이 야기다. 세계대전으로 불린 유럽 국가 간의 엄청난 전쟁은 자본주의 초기부터 예정되어 있던 셈이다.
- 중세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변곡점은 스페인의 1492년 아메리카의 발견이었다(인류사 혹은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페인의 침략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는 경제사의 관점에서 발견이라고 쓰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 품 시장이라는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전 지 구적인 경제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인은 본의 아니게 몇몇 권역별로 운영되던 세계경제를 하나로 묶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발생한 상공업 혁명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그 계기는 우연처럼 보인다. 포르투갈의 형님 격인 스페인 역시 새로운 무역로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기꾼처 럼 보이는 벤처 사업가 한 명이 찾아왔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 스페인 왕실에서 투자를 해달라고 했 다. 그는 영국 왕 헨리8세Henry III에게도 투자 설명회를 열었는 데 거절당했다. 그래서 스페인에 온 것이다.
- 영국은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경제를 선보이고 19세기에는 세계의 공장' 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업이 발달했지만 경제 구조는 스페인의 노예무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은 1807년 인권을 이유로 세계 최초로 노예무역을 철폐했다. 흑인 인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서구 열강이 너도나도 플랜테이션 농업에 나서면서 설탕 가격이 떨어진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에서 나오는 설탕 · 향신료·차·고무·면화를 독점으로 싼값에 확보해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기계로 가공해 공급하는 식민지 의존 경제 시스템이었다. 말이 공업 국가였지 영국 경제의 기초는 식민지형 플랜테이션 농업 생산물이었다. 바다를 지배한다는 자만감은 16세기 스페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눈을 가렸고 영국의 자본가들은 혁신을 등한시하는 부자의 저주에 빠졌다. 반면 미국과 독일 같은 후발 국가들은 식민지가 거의 없었 다. 그들은 영국처럼 식민지 플랜테이션에 의존한 경공업 대신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석유 기반 내연 기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쫓아낸 넓은 국토에 미친 듯이 철도를 깔았다. 영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미국 철도에 투자했고 미국은 철강과 기계 산업을 발 전시켰다. 중공업 중심으로 발전한 미국의 공업 생산량은 19세기 말 이미 영국을 초월했다. | 미국과 독일이 유럽 귀족들이 장난감 취급했던 내연기관 자 동차를 만들려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국은 자동차는 마차보다 빨라서는 안 된다는 '붉은 깃발법Locomotiv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말도 안 되는 법은 무려 30년간 지속되었다. 이 법안은 내연 기관 분야에서 영국이 미국이나 독일에 비해 뒤처지게 했다. 후추와 설탕 같은 아열대 식민지 농업에 의존한 초기 자본주 의경제는 대량생산 · 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자본주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유럽 국가들이 깨달은 것은 두 차례 의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영국·프랑스·스페인 · 네덜란드 등 의 지배에 신음하던 제3세계 식민지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뒤 대부분 해방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국가가 폭력으로 이식된 자본주의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저개발국가로 남아 있다. 후추와 설탕이 밀고 끈 자본주의가 마냥 달콤하지 않은 이유다.
- 광고는 미국 노동자 계층에게 자동차와 집을 소비하기만 하면 중산층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19세기 싱어 재봉틀이 최초로 고안한 할부 제도는 이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환상의 최전선에 있 던 전위부대는 코카콜라였다. 코카콜라 역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1920년대 미디어에 의해 탄생한 스타들과 비슷한 존재였다. 코카콜라는 남아메리카의 코카잎과 아프리카의 콜라잎으로 만 든 미국 남부 지역의 민간 약품 중 하나였다. 코카잎에 든 마약성분이 진통이나 피로 해소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의약품에 매기는 세금을 음료수에 매기는 세금보다 높 이자 코카콜라는 코카잎 성분을 빼버렸다. 그리고 '진통’, ‘강장' 대신 '상쾌함', '행복'이라는 단어로 슬로건을 바꾸었다. 본질은 가고 거죽만 남은 셈인데 미국 대중은 본질과 상관없 이 코카콜라에 열광했다. 광고 덕분에 물로도 풀 수 없는 갈증을 콜라가 풀어준다고 소비자가 '욕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가치가 없는 코카콜라에 다른 소다수에 없는 상쾌함이 있다는 신화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기업이 코카콜라의 마케팅 기법을 바이블로 삼게 된 이유다. 코카콜라의 광고에 대한 집착은 오랜 전통이었다. 1886년 코카콜라를 만든 존 펨버턴 John Pemberton은 한 해 뒤 동업자와 상의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한 뒤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2만 5,000달러가 있다면 2만 4,000달러를 광고비로 쓰고 나머지로 콜라 원액을 생산할 거야. 그렇게 하면 부자가될 수 있어.”
- 다이아몬드가 영원한 사랑을 뜻하게 된 것은 1947년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의 광고 때문이다. 미국 청년이 1,500만 명 이나 파병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적으로 결혼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드비어스는 그런 예비부부에게 다이아몬드를 판매하고 싶었다. 광고를 맡은 회사는 '다이아몬드 영원한 사랑의 증표'라고 콘셉트를 잡았고, 이 광고는 미국 젊은이뿐 아니라 전세계의 젊은이에게 기존에 없던 욕망을 만들어냈다. 다이아몬드 반 지가 결혼식에 쓰인 유래는 1477년 오스트리아 막시밀리안 대 공(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다)이 부르고뉴의 마리 공주에게 청혼하면서부터였다. 마리는 프랑스 일부와 벨기에·네덜란 드·룩셈부르크에 이르는 영토의 상속인이었다. 미모도 상당 해 당시 유럽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다. 이런 세기의 결혼식을 후원했던 사람은 유럽 광산업의 큰손이었던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이었다. 500년 동안 대중은 전혀 몰랐던 유럽 왕족의 결혼 관습을 미국의 광고가 확산시킨 것이었다.
- 지금 우리는 과학의 초기 성공이 가져다준 기분 좋은 술기운이 아니라 다음 날 아침에 찾아온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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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세대유감

사회 2020. 7. 22. 08:14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마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니체)
- 우리는 사실 두 종류의 도덕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하나는 입으로는 외치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하지만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 너도나도 힘들었던 IMF 체제 시기를 나름의 능력과 운으로 헤쳐간 게 386세대다. 나라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 이들은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단이나 그 바로 위의 대리급이어서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했다. 회사마다 연봉 높은 선배, 임원들은 잘려나가고 신입직원은 뽑지 않으며 허리띠를 졸라 매던 시절에 386세대는 수년간 큰 어려움 없이 조직 내 위상을 키워갔다. 그 무렵 386 벤처 키즈도 대거 등장했다. 1996년 코스닥시장 개설과 1997년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 여기에 1980년대 벤처 1세대 선배들이 닦아놓은 토양 위에 이른바 '군단' 을 이뤄 등장했다고 당시 언론은 설명한다. 김범수(카카오, 66년생), 김정주(넥슨, 68년생), 김택진(엔씨소프트, 67년생), 안철수(안랩, 62년생), 이동형(싸이월드, 65년생), 이재웅(다음, 68년생), 전제완(프리챌, 63년생) 등이 대표선수로, 지금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 1990년 전후 과외 및 학원 허용, 수능시험 도입 바람을 타고 논술이나 입시학원, 유학원 등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거머쥔 이들도 대체로 386세대다. 널리 알려진 이들만 꼽 아도 손주은(메가스터디, 61년생), 이범(메가스터디, 69년생), 박정(박정 어학원, 62년생), 정봉주(외대어학원, 60년생), 정청래(길잡이학원, 65년 생) 등 적지 않다. | 심지어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Sports Screen Sex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독재정권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기 위해 쓴 우민화 정책) 중 하나로 프로스포츠가 태동(프로야구 82년, 프로축구 83년, 농구대잔 치 83년)한 덕을 본 스포츠 선수들 대부분도 386세대에 속한다. 선동열(63년생), 황선홍(68년생), 허재(65년생)와 같은 ‘전설’들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선수로, 감독으로 30년 넘게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음
- 문제는 30대, 40대의 그들에게 주어졌던 자리가 지금의 30대, 40대에게는 대물림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력 중의 권력 이라 할 수 있는 청와대를 살펴보자. 2003년 출범한 참여정부의 국정상황실장은 37세의 이광재(65년생)였다. 눈여겨봐야 할 것 은 참여정부에서 비서관, 행정관을 했던 인사들이 15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다시 비서관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에서 첫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을 지낸 백원우 (66년생)는 참여 정부에서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재직한 바 있다. 두 번의 청와 대 경력 사이에는 17, 18대 국회의원 경력도 있다. 2007년 참여 정부 대통령비서실 행사기획비서관으로 청와대를 나와 8년 동안 서울시 성북구청장을 지낸 김영배 (67년생)도 현재 백원우 후임인 민정비서관직에 있다.
- 386세대가 오롯이 자신들의 희생만으로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쟁취했다고 믿는 것은 오만한 채권자적 태도다. 1987년 거리에는 80년대 학번을 가진 20대 대학생만 있지 않았다. 명동 성당에 갇힌 시위대를 위해 도시락을 모아 건넨 계성여고 학생들 이 있었고, 시위대를 물심양면 도운 사제들이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행진을 벌인 아저씨들이 있었으며,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동참한 택시기사들과 흰 손수건을 흔드는 시민의 물결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김대중, 김영삼과 같은 정치계 거물도 있었다. 무엇보다 목숨을 빼앗긴 박종철과 이한열이 있었다. 민주화는 살아남아서 현재의 사회 중심 세력이 된 386만의 전 리품이 아니다. 기성세대의 지원과 시민들의 저항, 죽음으로써 역사가 된 적지 않은 386 동료들이 함께 모여 거둔 성공이다. 그러므로 20대가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눈감는다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왜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연봉 높은 대기업 정규직 취직에 열을 올리는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아직 386세대는 먼저 나서서 보여주거나 손을 잡 아주지 않았다. 그저 '청년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거나 '청년들이 교육을 잘못 받았다'고 말할 뿐이다. '청년을 위한 정치'는 정치 적 수사일 뿐이다. 청년을 위한 예산은 이름만 거창하게 붙었다. 결국 쪼그라들고, 정치 신인조차 키우지 않고 있다.
- 망탈리테란 사회를 특징짓는 신념이나 관념, 관습의 총체 또는 한 인간 집단의 습관적 사고 양식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집단 심성을 통해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행동을 꿰뚫어 볼 수 있다. 386세대가 강렬한 경험을 공유하며 망탈리테와 같은 공통의 성질을 타고난 듯 지니게 됐다면, 이를 '386 DNA'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386세대에게 DNA와 같이 새겨진 집단적 심성은 80년대 주류 트렌드가 되어, 당시 20대의 나이로 세상을 익혔던 모두에게 유행처럼 퍼졌다. 그저 30여 년 전, 돌아가는 나라 꼴에 한마디씩 섞었던 그들이라면 '민주화'를 입에 올리지 않 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그들 모두는 자칭 타칭 민주화 세력이 되어버렸다.
- 연령대에 따라 생각과 행동은 유사한 패턴을 밟는다. 10대 때 는 부모의 잔소리가 싫어 어떻게든 집을 떠나고 싶고, 30~40대 에는 성공에 급급해 가정을 돌보지 못하다가, 다시 50~60대에 는 자식들에게 잔소리하는 낙으로 하루를 보낸다. 젊어서는 혁명 을 꿈꾸는 진보주의자였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변화가 두려운 보수주의자로 바뀌곤 한다.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나이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이면 머리가 없는 것”이라는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의 지적은 예나 지금이나 들어맞는다. 나이가 듦에 따라 특정한 경향성을 보이는데, 이를 연령 효과 (age effect)라 한다.
- 이와 다른 코호트(cohort: 동년배) 효과도 있다. 코호트는 고대 로마 군대의 세부 조직 단위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들이 함께 훈련하고 생활하고 전쟁하는 과정에서 높은 내부적 동질성을 가졌 듯이 같은 시기를 살아가며 특정 사건을 함께 겪은 사람들의 집합을 뜻한다. 젊은 시절 특수한 경험을 공유한 세대는 그만의 고 유한 특징을 평생 안고 간다. 한창 정체성이 형성되던 때에 일제 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세대는 일본에 대한 반감과 익숙함을 동 시에 품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게 된다. 한국전쟁을 치렀던 세대 라면 누구라도 전쟁과 가난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386세대에게 그런 코호트 효과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이뤘다는 자부심을 꼽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배양된 조직화 능력, 함께 어깨를 걸고 밀어붙이면 끝내 이뤄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도 빠뜨릴 수 없다. 반면에 괴물과 싸우면서 닮아간 권위주의, 자부심이 변질돼 나타난 우쭐함과 함께, 실행보다 말이 앞서는 공허함도 386세대 안에서 풍겨 난다. 앞서 말한 교조적 성향도 코호트 효과에 따라 드러난 특징이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따로 있다.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오랜 기간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20세의 나이 로 대학생이 돼서 한국 사회의 한 축이 된 이들이 현재는 50대가 되었다. 그러한 386세대에겐 198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또 2000년대에 와서도 늘 스피커가 쥐어져 있다. 사회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낸 것을 넘어 사실상 오늘의 한국 사회를 설계해왔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386에 의한, 386을 위한, 386의 나라임. 도무지 늙지 않는 불로세대의 최장기 집권, 이것이 코호트 효과 관점에서본 386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 386세대에 대한 견제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점은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이들의 선배 격으로, '58년 개띠'로 상징되던 한국판 베이비붐 세대가 정년을 넘겨 사회에서 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눈치를 볼 대상마저 없어진 상황에서 386세대는 명실공히 한국 사회의 좌장이 되었다. 한데 안타깝게도, 이들에게는 반갑게도, 386세대의 퇴장을 채근할 후배 세대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들의 바로 아랫세대가 X세대쯤인데, 이 세대명이 된 'X'가 뭐라 정의하기 어렵다는 뜻일 정 도로 세대 존재감이 없다. 그 후는 1포, 2포, 3포로 이어지며 포기를 거듭하다가 이제는 N포가 된 세대로, 이들 세대의 영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어 있다. 세상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386세대를 위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1930년에 태어났으니까요. 태어난 그 순간에 나는 복권에 당첨된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워렌 버핏)
-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가 앞선 세대보다 더 많이 알고, 다음 세대보다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 (조지 오웰)
- 박정희 정권 아래서 보릿고개를 청산한 산업화세대에게 나름의 자부심이 있듯이 386세대에겐 '혁명적 낙관주의'가 있다. 전 쟁 피난민이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고군분투하여 끝내 가정의 번영을 이루었다는 영화 <국제시장)의 감동 코드와, 평범한 시민 들이 압제에 맞서 혁명을 이뤄냈다는 영화 〈1987>의 감동 코드 는 맞닿은 측면이 있다. 반면에 확연히 차이 나는 점 또한 있다. 바로 조직화다. 386세 대는 개인의 근면이 아닌 결집을 이룬 조직의 힘으로 승리감을 맛보았다. 특히 전쟁과도 비견될 만한 반정부 투쟁에서 대열을 정비해온 조직은 군대를 방불케 했다. 최루탄이나 쇠파이프 같은 무기가 서로를 겨누는 가운데 상대 진영의 정보를 빼오려는 프락치들의 첩보전조차 일상적이었다. 처음 접하는 상대에게는 경 계를 풀기 어려웠고, 같은 편으로 엮이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어 떻게 연결되는지 확인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러한 습성은 이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는데, 386세대의 인사법은 대개 “몇 학번이세요?”로 시작한다. 그렇게 상대방과 나 사이의 족보가 완성되면 이후엔 복잡한 일도 전화 몇 통화로 해결되고 만다. 오죽하면 학번이 없는 이에게도 그래 도 몇 학번쯤 되지 않겠느냐'며 있지도 않는 연결고리를 만들려 할 정도다.
- 1991년쯤부터 학생운동은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 운동을 주도했던 청년 학생들의 DNA는 분명 386세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90년대 이후 학생들은 승리의 경험을 맛보지 못했고 선배 세대가 구축했던 조직도 유지해내지 못했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이제는 존재감도 없이 대학을 다닌 이들의 미약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바꿔 말하면, 학생운동의 몰 락을 비껴간 386세대에게 비춰진 후배 세대는 '지질한 무리일뿐이다. 만약 누군가 1981년에 대학에 입학해 1990년 전후에 졸업했다면 그는 전형적인 386이다. 여유 있게 대학에 들어와보니 선 배들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기세등등하게 조직을 갖춰 학교 밖으로 영향력을 키웠으며, 마침내 민주화까지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새로 마련된 헌법에 따른 대통령 직선을 경험하고 우리 나라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을 관람하고 나니 대학생활이 끝나갔다. 바통을 넘겨받은 후배들이 판판이 깨지며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우리 땐 말이야...”로 시작하는 잔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386세대의 우월감은 그 어떤 세대와도 비교할 수 없다.
-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386에 묶인 이들은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로 함께 접어들며 동질감을 높여왔다. 젊었을 때는 경험을 공유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이가 들면서는 이익까지 공유 했기 때문이다. 이익을 공유하게 되자 세대 안의 차이는 시야 밖 으로 사라졌고 다른 세대와의 차이점은 눈에 띄게 부각됐다. 다 른 세대와 견줘보면 '우린 결국 한 배'라는 배타적 공동체성은 더욱 강화되어갔다. 모두가 한통속이라는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 는다. 눈앞의 불의에 항거하느라 젊음을 바치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 속에 고통스러워하는 386세대의 일원도 분명 있다. 민주화 과정에 한 획을 긋고도 잊힌 채 그때의 뜻을 반추해 살아가는 영웅들이 있는가 하면, 한껏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대학생 대열에 끼지 않았어도 묵묵히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수많 은 이들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80년대 뜨거운 젊음을 보낸 대개의 60년대 출생자에게는 그 차이를 상쇄하는 공통의 DNA가 넓게 퍼져 있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는 말이다. 자부심을 넘어 우월감 짙은 눈빛 속에 386 DNA가 담겨 있다. 수시로 편 가르기를 하다가도 끼리끼리 붙어다니는 그들의 문화 속에도, 능력에 상관없이 너무나 오랫동 안 자리를 보전하는 그들의 수완에도, 386 DNA는 숨어 있다.
- 사회운동이론의 대가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사회운동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대중의 동의(동원)'를 든 다(Tilly, 1978/1995).27 대중적 동의나 동원 없이 운동에 나서면 백전백패라는 설명이다. 틸리가 말하는 '동원의 역량'을 1987년 한국 상황에 대입해보면, 민주화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수파를 형성할 만큼 저항 세력의 자원 동원력이 향상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70년대 재야 운동가들이나 80년대 학생운동권의 힘, 혹은 몇몇 단체의 연합만으로는 6월항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뼈아프게 기억하는 이 들이 '밀면 종국에는 밀린다'는 확신으로 '전진'만 외칠 수도 없 었던 상황이다. 결국 또 다른 비극을 막고 형식적이나마 독재에 종언을 고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동의가 광범 위하게 형성된 데 기인한다.
- 경제 호황 속에서도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던 대학 졸업자들은 학원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반 (反)체제 정서를 품었던 대학 졸업생 중 일부는 정부나 공공기관에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 공무원이 되거나 민간 회사에 입사해 회사원이 되는 것을 좀처럼 내켜 하지 않았고, 그러한 기관들 역 시 이들을 맞기 거북해했다. 그런 이들에게 후학을 가르칠 수 있는 '학원'이라는 곳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춘 직장이 돼주었다. 전교조의 해직 교사들에게도 학원은 피난처였다. 1989년 전교조가 창립한 뒤 이듬해까지 파면이나 해임 등의 이유로 학교에서 등 떠밀린 전국 교사들 수는 1,519명에 이르렀다. 전교조 는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합법 노조가 됐지만 그사이 많은 해직교사들이 자의든 타의든 사교육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80년 7·30 교육개혁조치 이래 10년 만에 다시 문을 연 학원들은, 체제를 정비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유능하고도 준비된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도 학원 성행에 일조했다. 88서 울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너머 넓은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어 해이 자유한되자 미국이나 동남아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하나둘 생겼다. 시장에 돈까지 풍족했던 때 아닌가. 문제는 언어였다. 세계 공통어라는 영어만 해도, 그저 쓰기와 읽기로 구성된 학문 정도로 알던 이들에게 회화(會話)는 생소하기만 했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머리가 아파질 무렵, 다행히 이들의 두통을 진정시켜줄 곳들이 생겨났다. 영어회화 학원이었다. 지금에야 시골학교에도 원어민 선생님들이 있다지만 당시에는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름도 생소한 동아시아 반도의 나라 강단에 설 다른 피부색의 강사가 존재할 리 없었고, 역시나 대학을 졸업 한 사회 초년생들이 학원에서 환영받았다. 학원이 동네 공부방 수준을 벗어나던 그때를 기점으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사교육은 점차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사교육시장은 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 사교육 시장에 투신했던 일부 386세대의 반성도 있었지만 항 변의 목소리 또한 작지 않았다. 개인의 안위를 위해 학원에 발을 담근 게 아니라고 했고, 사교육 시장은 자신들이 키운 게 아니라 의도치 않게 '커진 것이라고도 했다. 또 공교육에서 찾지 못 한 희망을 사교육에서 일군 측면도 있지 않느냐고 변명했다. 하 지만 386세대와 종종 비교되는 프랑스의 68세대가 대학 서열 화를 혁파해 보편적 교육 기회를 넓힌 것을 떠올려보자. 사교육 시장의 성장에 발맞춰 병세가 깊어진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에 386세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 자식의 혀를 절제하고, 우리말도 서투른 아이를 해외로 돌리 며, 부른 배를 잡고 출산에 임박해 아예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이 들의 연령대를 헤아려보니 공교롭게도 386세대다. 1980년대 대 학생활을 하고 1990년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뒤 수년이 흘러 가정을 일구고 아이를 낳고 기른 이들의 새로운 목표는 '더 잘난 자식 만들기'로 수렴된 것이다. 조기유학의 유행 속에 부인과 자녀를 해외로 보내고 홀로 남아 돈을 버는 '기러기 아빠'도 이때부터 하나둘씩 등장했다. 2004년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그해 4월까지 해외의 가족이나 친척에 게 보낸 증여성 송금 등의 규모는 5조 원을 넘겼는데, 이는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20% 이상 늘어난 수치다. 조기유학과 기러기 아빠 현상은 더는 경제력이 있는 일부 특권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 파란 눈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한 프랑스인 지리학자 발레리 줄 레조(Valerie Gelezeau)의 『아파트 공화국』(2007)에는 아파트를 통해 부를 축적한 표준적인 한국인의 방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터뷰 대상자 중 누구도 본인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고 증언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이 재산을 불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는 사실에 모두들 깊이 공감한다. 물론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386세대 이전에도 있었다. 40~50 년대생 역시 서울 강남과 목동, 상계동 등의 신시가지 개발을 자 산 증식의 호재로 활용했다. 하지만 그 기회는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개발 정보가 권력과 그 주변부 위주로 돌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세대 내 양극화를 심화하는 한 원인이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가 가운데 최고의 노인 빈곤율, 그리고 최고의 노인 자살률이 이를 방증한다.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운 좋게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바로 386세대다. 그들은 균질화한 부동산 개발 정보를 이용해 앞선 세대보다 더욱 기민하고 대담하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추월차선에 올라탔다. 다른 세대와 달리 386세대 구성원들은 차별 없이 아파트 구입에 나설 수 있었다. 점차 투자와 투기의 경계도 모호 해졌다. 386세대가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 때쯤 시장은 이미 과 열되어 있었지만 아직은 베팅을 해볼 만한 게임판이었다. 이들의 생애 주기에 맞춰 정권은 사탕발림을 하듯 이들에게 게임판의 VIP 입장권을 선물 꾸러미로 안겨줬기 때문이다. 이 200만 호의 주인을 가릴 '아파트 게임'에 새로 입장한 386 세대는 선배 세대들과 비교해 유리한 두 가지 무기를 손에 쥐었 다. 바로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주택청약제도(아파트 분양제)와 주택금융규제 완화정책이다. 청약제도는 1977년 도입된 이후 현재까지 4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나라 아파트 정책의 근간이 돼왔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 에서 서울의 과밀화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주택 문제 해소는 정권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딱 관심까지였다. 저소득층의 주택문제를 해소하려면 대규모 공공임대주택 건 설이 정공법이지만 여기에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 다른 꾀가 필요했다. 정권은 민간의 주머닛돈을 눈여겨봤다. 우선 집을 사고 싶은 국민들에게 매달 일정한 액수의 청약저 초을 강제했다. 정부와 주택은행은 그 청약저축액을 모아 국민주택기금을 만들고 기금 일부는 토지공사 (토공)에게 건네져 개발용지의 기초 공사를 하는 데 쓰인다. 또 나머지 기금의 일부는 주 택공사(주공)와 건설사가 저금리로 빌려 아파트를 짓는 자금으로 사용한다. 국민들은 청약통장으로 아파트 분양을 신청해 당첨을 받는다. 무주택자일수록 당첨 확률은 높다. 당첨자는 계약금, 중도금, 잔금이란 명목으로 아파트 건설 비용을 연이어 지불한다. 건설사는 그 돈으로 차례차례 아파트를 올린다. 아파트 실물은 한참이 지나야 보인다. 국민들로선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집에 적지 않은 목돈을 오랜 시간 주기적으로 태 워야 한다. 불안할 수도 있지만 분양가가 주변의 시세보다 저렴 하다면, 주판알 튕길 필요도 없이 무조건 남는 장사다. 이것은 분 양가 상한제가 베풀어준 은전이었다. 도시연구자 이은은 “한국인 들이 아파트에 열광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순전히 경제적 이유" 라면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아파트를 분양받은 가구는 중간 계급으로 편입되고 체제의 수호자가 된다”고 설명한다. 1990년대 중반, 386세대는 정부로부터 두 번째 선물을 받았 다. 주택금융규제의 완화다. 분양가 상한제가 있다 해도 아파트 는 여전히 종잣돈이 있어야만 덤벼들 수 있는 대상이었다. 밑천 이 변변치 못한 이가 아파트를 장만하고 싶다면, 미래의 소득을 당겨야 하는 수밖에 없다. 빚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미래 소득을 당겨 땅과 아파트에 묻을 수만 있다면, 빚의 부담을 상쇄 하고도 남을 열매가 맺혔다. 이를 가능케 할 부동산 담보대출규제 완화는 외환위기를 1년 앞둔 1996년에 이뤄진다.
- 386 세대의 부동산 불패 신화가 독재정권의 정책 덕분이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박정희 정권이 만든 청약제도와 분양가 상한제, 그리고 노태우 정권의 주택 200만 호 건설정책과 1기 신도시 계획의 합작품이 386세대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제적토대가 되었다. 그 과정에 누군가 돈이 부족하다면, 주택금융규제의 완화 흐름이 이를 보완해주기도 했다. 부동산 정책의 3종 세트인 공급과 금융, 세제 가운데 세제를 제외한 나머지 2개는 특혜에 가까웠다.
- 전세는 공적 주택금융시장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적 주택금융시장이 먼저 발달해 나온 결과물이다. 전세는 임대인에게 주택가격 상승에 따른 이익과 인플레이션에 따른 위험 감소라는 이득을 준다. 임차인으로서는 보증금을 손실할 위험이 적고 높은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점이 매력적이다. 이 때문에 소득 대비 주택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이 안정돼 있고, 시중금리가 매우 높았던 시절에는 장점이 부각되는 상품으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주택가격이 고공행진하면서 전세가격이 매매가의 50~70% 수준으로 형성되는 요즘은 상황이 다르다. 임차인은 전세금마저 구하기 어려워 아등바등하는데, 임대인은 임차인이 가까스로 마련한 돈을 0%의 이자율로 빌려 그 집을 산 격인 까닭이다. 결과적으로 윗세대가 아랫세대로부터 공짜로 돈을 빌려 부동산 시세차익을 보고 있는 셈이다. 젊은 세대는 평생 주택시장의 주변부만 맴돌지 모른다. 이른바 '세대 간 젠트리피케이션’이다.
- 고용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년층과 청년층은 동병상련의 처지 다. 그럼에도 '질 낮은 일자리라도...’가 공통의 목표가 되어버린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분노의 총구가 맞춰져 있다. 자기가 처한 여건이 열악하니 만만한 상대만을 골라 얼마 안 되는 몫이라도 더 챙겨보려는 심산과 다르지 않다. 이 아귀다툼에서 386세대는 비교적 한 발 떨어져 있었다. 취업시장에 나왔을 때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있지도 않았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취업을 시작했고 다른 세대와 비교해보면 IMF 외환위기 때도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 다. 현재까지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는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거나 현 시점에서 봐도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 노동자를 쉽게 쓰고 버릴 수 있게 된 건 IMF 외환 위기 당시의 고육지책 때문이었다. 이후 경제 사정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했지만 노동시장 유연화의 흐름만은 한 방향으로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다. 불가역적이다. 이 정도로 노동시장 이 유연해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사회안전망이 갖춰져야 하지 만, 그러지 못했다. 결과는 질 낮은 일자리의 양산, 그리고 더 나 은 계층으로 올려주는 사다리의 붕괴로 이어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비정규직 비중은 법과 제도의 둑이 뚫린 뒤 2001년 26.8% 2003년 32.6%, 2005년 36.6%로 차오른 뒤 현 재도 30%대 중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엔 이른바 ‘중'규직이라고 불리는 무기계약직은 빠져 있다. 쉽게 잘리지 는 않으나 급여와 복지혜택, 승진에서 기존 정규직 직원에 비해 크게 차별을 받고 있어,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이들이다. 민 간은 물론 공공기관까지 무기계약직 채용을 확대하고 있어, 이 들까지 포함할 경우 '질 낮은 일자리'의 실제 비중은 훨씬 늘어 난다. 이러한 현실은 각 세대에게 공평하게 적용됐을까. 한국노동연 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3년 당시 50대의 비정규직 비 율은 40%였다. 그러나 2018년 현재 386세대가 중심이 된 50대 의 비정규직 비율은 34%로 떨어졌다. 반면 그 윗세대나 사회 초년생의 비정규직 비율은 과거보다 더 높아졌다. 60대 비정규 직 비율은 2003년 65.9%에서 2018년 67.8%로 올랐고, 30세 미만의 비정규직 비율 또한 2003년 31.8%에서 2018년 34.6%로 오른 것이다. 귀천이 나뉜 노동의 비뚤어진 그림자는 스멀스멀 바닥을 넓혀왔지만 세대에 따라 그 짙음의 정도는 달랐다. 여기에 더해 2009년 공공기관 개혁 바람 속에 오로지 신입사원들 초임만 깎인 사례, 그리고 최근 불붙은 정년 연장 논의까지 떠올린다면 386세 대가 누린 '다행은 단지 우연히 주어진 것만은 아닌 듯하다.
- 인생은 선도 악도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선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악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미셀 드 몽테뉴)
-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 (율리우스 카이스르)
- IMF로부터 금융지원을 받은 1997년을 기점으로 기존 체제에 올라탄 자들과 체제에서 떨궈진 자, 올라타보지 못한 자들이 나뉜다. 체제에서 떨궈진 어떤 자들은 직장을 잃고, 집을 담보 잡혀 빼앗기고, 가정을 잃었다. 주로 베이비부머라 불리는 1950년대생이 큰 타격을 입었다. 올라타보지 못한 자들은 바로 이들의 자 식 세대인 1980년 언저리에 태어난 이들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여름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은 역대 최악의 청년 실업률 앞에서 좌절했다. 고등학생 10명 중 7명이 대학에 가던 이 당시 '대졸 실업자' 이슈는 2000년대 초반까지 언론의 단골 소재였다. 수년 만에 기존 체제에 올라탄 이들의 후배가 되기는 했지만 기업들의 허리띠 졸라매기는 채용 규모 대폭 축소와 비정규직 확대로 이어졌다. 우석훈과 박권일은 2000년대 중반에 비정규 직을 전전하는 20대들을 가리켜 '88만원 세대'라 명명했다. 이들 의 문제제기에 한국 사회는 '88만원 세대 동정론'으로 응답했지 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나쁜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의 몫을 갉아먹는다.
- 행안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19년 현재 386 세대에 해당하는 50대가 865만 명가량으로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비대하다. 50대를 꼭짓점으로 40대 843만, 30대 719만, 20대 681만으로 줄고 있으며, 60대 인구도 한국전쟁과 전후 보 릿고개의 영향으로 607만 수준이다. 1960년도에 태어나 1980년대 대학 학번을 얻은 이들은 865 만 가운데 293만가량이며, 이 가운데 187만 명은 4년제 대학을 나왔다. 1970년대 학번을 가진 사람들이 4년제 종합대학과 2년 제 전문대학을 통틀어 89만에 불과한 것에 비교해볼 때 3배나 많은 수의 대졸자가 386세대의 중심부를 차지했다. 이들은 자연 스럽게 1970~1980년대 경제호황기를 거치며 늘어난 일자리의 일부분을 차지했다. 꼭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던 곳을 서서히 대졸 386세대가 채워갔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은행에 들어가던 시절이 막을 내린 게 바로 386세대가 사회로 나오 던 1980년대 중후반부터다. 이때부터 시작된 대졸자 중심 경제는 이후 세대가 대학을 통 한 '개천의 용'을 꿈꾸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학은 사실상 '필수재'가 되다시피 해 2005년에는 대학진학률이 82% 까지 올랐다. 2005년을 정점으로 서서히 내림세를 보여 2018 년에는 69.7%까지 내려왔으나 60% 초반대의 캐나다, 일본이나 45% 이하의 독일, 프랑스 등에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대학이 취업을 보장하고, 취업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되는 인 생 공식이 무너지자 대학진학률도 함께 떨어지고 있다. 취업이라는 고리가 약해진 까닭이다. 대학진학률이 30%대에서 80%대에이르는 20년 사이 취업준비생들의 능력과 욕구는 상향 평준화됐지만 이른바 화이트칼라 직장,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져 능력과 보상 간 괴리가 커지고 있다.
- 털끝만큼의 권력이라도 있다면 한 톨도 낭비할 수 없다는 집 착,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경계가 흐릿한 지대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염치, 결국 불의보다 불이익에 민감해진 우리 사회 양심의 모습을 386세대는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정도쯤이야' 하는 허술한 양심의 벽은 지난 30년간 시대가 부여해준 호의와 그 속에서 이룬 성공스토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건 반칙이야 라고 외치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 역사적 성공의 반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에서 비롯되었고, 역사적 실패의 반은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아놀드 토인비)
- 10년간의 처절한 사회적 전쟁의 결과, 한국의 60대 주류는 태 극기로 상징되는 극우파 세력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30대에 이미 여러 사회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금의 50대, 그리고 그 핵심에 있는 386은 바야흐로 인생의 절정을 맞고 있다. 한국이 50대에서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맞도록 설계된 사회라서 그런 가? 젊은 세대는 누리지 못하는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제가 결합한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준 절정이다. 연공서열제의 효과를 온전히 누린 집단은 지금의 50대와 60대 정도다. 그 뒤로는 종신고용이 보장되는 직장 자체가 줄고, 임금피크제가 도입되면서 클라이맥스 시점 자체가 다르다. 게다가 비정규직의 전면화 때문에 20~30대가 살아가야 하는 경제 여건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르다. 지금까지 경제 발전의 수혜를 본 유신세대와 386이 서로 경쟁 하며 견제하던 시기였다면, 이제 그 축 가운데 하나가 사실상 붕 괴한 상태다. 좁은 의미든 넓은 의미든, 80년대 대학을 다녔고, 운동권이었고, '엘리트' 역할을 했던 386은 위쪽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라고 말하는 것의 상당 부 분은 이념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박정희를 좋아하거나 전두환을 싫어하는 것이 정치적 성향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엄청나게 이념적이고 정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문화적인 속성이 강하다. 그러나 위쪽에서 생겨나던 견제가 사실상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지금, 아래쪽에서 견제의 힘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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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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