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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29 권력이동
  2. 2020.03.29 아파트 공화국
  3. 2020.03.29 매크로 스윙 트레이딩

권력이동

사회 2020. 3. 29. 14:15

- 미래 쇼크는 변화의 「과정」 - 즉 변화가 인간과 조직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본다. 「제3물결」은 변화의 「방향」 - 즉 오늘날 의 변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권력이 동은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통제」- 즉 누가 어떻게 변화를 통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래 쇼크」(이 책에서는 「미래 쇼크를 너무나 짧은 기간 동안에 너무나 많은 변화에 대처하고자 노력함에 따라 유발되는 방향감각 상실과 스트레스라고 정의했다)는 역사의 가속화가 변화의 실제 방향과 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결과들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사건과 반응시 간의 단순한 가속화는 변화가 선 또는 악으로 인식되는지의 여부와 상. 관없이 독자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 책은 또한 개인이나 조직은 물론이고 국가조차도 단기간의 너무 나 빠른 변화로 과부하(過負荷) 상태에 빠져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지 성적인 적응적 결정을 내리는 능력에 파탄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 다. 요컨대 개인·조직 및 국가도 미래 쇼크 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미래 쇼크는 핵가족이 곧 「균열을 일으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유전자 혁명, 일회용 사회 (throw-away society)의 등장과 교육혁명 등을 예견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지금 마침내 시작되고 있다. 뒤이어 1980년에 출판된 「제3물결』은 초점을 달리했다. 이 책은 기 술 및 사회분야에서 일어난 최근의 혁명적 변화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이 변화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면서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될 미래의 모 습을 묘사했다.이 책은 1만년 전의 농업혁명을 인류역사를 변모시키는 변화의 「제1 물결」, 그리고 산업혁명을 「제2물결」이라고 부르면서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된 거대한 기술·사회적 변화들을 인류변화의 거대한 「제3물결」 - 새로운 공장굴뚝 이후의 문명의 시작 - 이라고 설명했다. 그 책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산업들, 즉 컴퓨터 · 전자 공학·정보·생물공학 등에 기초한 산업들을 지적하면서 이것들을 경제의 새로운 사령탑이라고 불렀다. 그 책은 융통성있는 생산, 특정분야를 목표로 한 시장, 파트타임제 노동의 확산, 미디어의 탈대중화 등을 예견했다. 그 책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새로운 융합에 관해 설명 하면서 생산소비자(prosumer)라는 용어를 소개했으며, 또한 앞으로 전개될 일부 작업의 가정으로의 복귀와 함께 정치 및 국민국가 체제에 서 일어날 그밖의 여러 가지 변화들도 논했다. 제3물결은 일부 국가에서는 금지되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한동안 중국의 개혁파 지식인들간에 「성서」로 꼽히기 도 했다. 이 책은 처음에는 서방의 「오염된 정신」을 퍼뜨린다고 비난 받았다가 해금된 후 대량으로 출판됨으로써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덩샤오핑 연설문에 이어 두번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당시 중국의 총리였던 자오쯔양은 특별회의를 열고 정책입안자들에게 이 책을 공부하라고 촉구했었다.
- 부의 창출을 위한 혁명적인 새로운 체제가 확산되려면 반드시 개인적 · 정치적 · 국제적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부가 만들어지는 방법 이 바뀌면 우리는 즉각 종전의 부 창출체제에서 권력을 얻은 기존의 모든 이해당사자들과 충돌하게 된다. 격렬한 분쟁이 일어나 쌍방이 미 래를 장악하기 위해 싸우게 된다. 오늘날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이 투쟁이야말로 현재의 권력개편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 하기 위해서는 최근에 있었던 그같은 범세계적 투쟁을 잠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300년 전의 산업혁명도 역시 새로운 부 창출체제를 생성시켰었다. 경작지였던 들판에 공장굴뚝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공장들이 늘 어났다. 이 음침한 악마의 공장들이 전혀 새로운 생활방식 - 새로운 권력체제를 가져다 주었다.
- 농민은 땅에 묶인 준(準)노예상태에서 풀려나 공적 또는 사적인 사 용자들에게 종속된 도시 노동자로 되었다. 이 변화와 함께 가정에도 권력관계의 변화가 찾아왔다. 한지붕 밑에서 여러 세대가 살면서 모두 가 턱수염을 기른 한 사람의 가부장에 의해 통치받던 농업가족들은 붕 괴되어 단출한 핵가족으로 바뀌고 노인들은 곧 축출되거나 아니면 명 망과 영향력이 축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직체로서의 가족 그 자체 는 사회적 권력의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여러가지 기능은 다른 조직체로 - 예컨대 교육기능은 학교로 - 이전되었다. 또한 증기기관과 공장굴뚝이 늘어남에 따라 방대한 정치적 변화가 수반되었다. 군주국들은 붕괴되거나 관광명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새 로운 정치형식이 도입되었다. 한때 자기 지방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던 농촌 지주들 중 약삭빠르고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은 도시로 이주하여 공업발전의 물결을 탔으며 그 자손들은 증권업자가 되거나 실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본래 의 농촌 생활방식에 집착한 대부분의 토지소유 향신(鄕紳)들은 초라한 상류계급으로 몰락했고, 그들의 대저택은 결국 박물관이나 돈벌이를 위한 공원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이 쇠퇴한 대신에 새로운 엘리트들 - 기업지도자·관료·언론계 거물 - 이 등장했다. 대량생산 ㆍ대량분배·대중교 육 및 대중매체에 수반하여 대중 민주주의 또는 「민주적임을 자처하 는 독재정권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국내적 변화에 수반하여 세계권력에서도 거대한 이동이 일어 났다. 공업화된 나라들이 세계 다른 지역의 대부분을 식민지화하거나 정복 또는 지배함으로써 지금까지도 부분적으로 존속하고 있는 세계권력의 위계체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 요컨대 새로운 부 창출체제가 출현함으로써 낡은 권력체제의 기둥이 모두 붕괴되어 결국 가족생활·기업·정치 · 국민국가 그리고 세계권 력의 구조 자체를 변형시키게 되었다. 미래를 장악하고자 싸운 사람들은 폭력·부(富) 또는 지식을 사용했다. 오늘날 훨씬 더 가속적이기는 하지만 이와 유사한 대변동이 시작 되고 있다. 우리가 요즈음 기업·경제·정치 그리고 세계 차원에서 목 격하고 있는 변화들은 훨씬 더 큰 권력투쟁을 앞둔 최초의 작은 전투 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인류역사상 가장 격렬한 「권력이동』을 목 전에 두고 있다.
- 권력 스타일의 변동은 변화된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다. 초기호경제 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개별회사들과 전체 산업을 개편하는 과제는 하 찮은 흠이나 잡고 체면치레나 하고 미주알 고주알 까다롭기만 한 관료 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실 이 과제는 개인주의자 · 과격파· 배짱파나 심지어 괴짜들, 말하자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해안에라도 상륙할 태세를 갖춘 기업 특공대(business commandos)에 게나 적합한 일이다. 오늘날의 모험적 기업가와 거래 메이커들은 당초 공장굴뚝 경제를 건설했던 「강도 귀족(악덕 자본가를 말함)들과 닮았다고들 말한다. 사실 오늘날의 「섬광시대」는 미국 남북전쟁 직후의 「겉치레 시대 (Gilded Age)」와 닮은 점이 많다. 그 당시는 농업노예제도가 북부의 신흥 산 업화 세력에 패배한 후 근본적인 경제구조 개편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그 당시는 또한 「사령관,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다이어몬드 짐」 브래디(Brady), 「100만 달러의 사나이」 게이츠(John Warne Gates)와 같이 실물보다 과장된 인물들이 살던 과소비, 정치적 부패, 과다지출, 금전착복 및 투기의 시대였다. 반노조주의(反勞組主 義)와 빈민층 멸시로 특징지어지는 그 시대를 벗어나면서 갑작스러운 경제개발이 추진되어 미국이 근대적인 산업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종 인간들은 관료라기보다는 해적에 가까우므로 이들을 「전자 해적(electronic pirate)」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들이 장악한 권력은 단지 돈자루만이 아니라 복잡한 데이터·정보 및 노하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금융업자 와인가튼(Robert I. Weingarten)은 기업매 수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컴퓨터 스 크린에 매수기준을 열거해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여러가지 데이터 베이스를 사용하여 이 기준을 점검하고 목표 회사를 선정한다. 그럼 마지막에 할 일은 무엇인가? 맨 나중에 할 일은 기자회견을 갖는 것 이다. 컴퓨터로 시작해서 미디어로 끝낸다. 』
- 공장굴뚝 혁명이 일어나기 전, 우리 조상들이 땅에 얽매어 살고 있을 당시에는 전세계가 오늘날의 가장 빈곤하고 자본이 부족한 나라를 못지 않게 경제적으로 후진 상태에 있었다. 수십억 달러의 차관이나 대외원조를 제공해 줄 「선진국」도 없었다. 그렇다면 초기의 굴뚝산업을 뒷받침해 준 최초의 재산은 어디서 온 것일까? - 그 재산의 대부분은 직접·간접으로 약탈 · 노략질 · 해적행위에서 ... 도예 주인의 채찍에서 ... 토지 정복에서 .... 산적 행위 ... 강탈 ... 귀족들 의 농민 협박에서 ... 군주가 자신의 무사와 장군들에게 하사한 방대한 면적의 토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붉게 물든 이 부(富)의 연못이 여러 세대에 걸쳐 아버지에게서 아 들·손자로 전해지면서 차츰 핑크빛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눈송이처럼 희어지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태어난 최초 의 철공소·방직공장·해운항로·시계공장 등에 자금을 대주게 되었 던 것이다. 이 초기의 공장들에서도 폭력은 여전히 부의 생산에서 중요한 역할 을 담당했다. 아이들은 기계에 족쇄를 채운 채 구타당했고, 여성 광원 들은 학대받고 강간당했으며, 남자들은 몽둥이로 다스려졌다.
- 물리력의 독점 : 지금 법인체나 기업의 공공연한 폭력이 드물어진 한 가지 이유는 그 동안 여러 해에 걸쳐 폭력을 외부에 하청했기 때문이다. 기업은 자체 적으로 폭력을 생산하는 대신 사실상 정부의 서비스를 매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모든 산업국가에서는 국가폭력이 민간폭력을 대체하고 있다.어떤 정부이건 정부가 구성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도하는 첫번째 일은 폭력을 독점하는 것이다. 군대와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도록 법적 으로 허용한 집단이다.
- 일상적 기업활동에서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두번째 이유는 폭력이 법으로 순화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모든 기업은 법에 따라 운영된다. 모든 계약 · 약속어음·주식·채권·저당권·단체협약 · 보험증권 · 신용과 외상은 궁극적으로 법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리고 선·악을 불문하고 모든 법의 배후에는 총자루가 숨겨져 있 다. 프랑스의 전 대통령 드골(Charles de Gaulle)이 간결하게 지적한 것처럼 『법은 물리력을 갖춰야만 한다.』법은 순화된 폭력이다. | 그러므로 한 회사가 다른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때 그 회사는 정부에 대해 법의 물리력(효력)을 적용하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 회사는 정부가 상대방 회사의 옆구리에 총(여러 겹의 애매한 행정, 사법적인 까다로운 절차 속에 숨겨져 있는)을 들이대고 특정한 행동을 강요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기업전문 변호사를 흔히 「고용된 총」이라고 부르는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다.
- 기업계에 아직도 권력이, 그리고 심지어 폭력이 남아 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정작 놀라운 것은 물리력을 적용하는 「방법」에 주목 할 만한 변화가 있다는 점이다. | 옛 노예상인이나 봉건영주를 오늘날의 세계에 옮겨다 놓으면 그들은 우리가 지금 노동자들을 덜 때리면서도 더 많이 생산하고 있음을 좀처 럼 믿지 못하고 깜짝 놀랄 것이다. | 옛 선장은 지금 선원들이 신체적으로 학대받지 않는 데도 순순히 일 하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심지어 18세기에서 온 장인(匠人) 목수나 무두장이까지도 지금은 건 방진 도제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갈기지 못하게 법적으로 되어 있음을 알고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예컨대 1796년 영국에서 인쇄된 호가스 (William Hogarth)의 채색 판화 「근면과 게으름을 보자. 이 판화에 는 도제 두 명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직조기 앞에서 즐겁게 일하고 다 른 한 사람은 졸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주인이 게으른 자를 때리려고 화난 얼굴로 막대기를 휘두르며 다가오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관습과 법이 모두 이같은 공공연한 물리력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부문에서의 이같은 폭력의 퇴화는 기독교적 사랑이나 너그러운 애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진상은 이렇다. 폭력이 만들어내는 저품질 권력에 1차적으로 의존하 던 사회적 엘리트 집단이 산업혁명 기간 중에 돈이 만들어내는 중품질 권력으로 이행했던 것이다.
- 돈은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거나 총부리를 옆구리에 갖다대는 것과 같은 당장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은 상·벌 「양면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 특히 궁극적인 폭력 위협이 아직 효과가 있는 경우에는 ? 훨씬 더 융통성있는 권력의 도구가 된다. 종전에 돈이 사회통제의 주된 도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인류의 대 다수가 아직 화폐제도에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산업화 이전 시대의 농민들은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자급자족했다. 그러나 공장이 농장을 대신하게 되자 사람들은 이제 자기 소비를 위해 식량을 재배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돈에 매달리게 되었다. 자가생산이 아닌 화폐제도에 대한 이같은 총체적 의존은 모든 권력 관계를 변형시켰다. 전술한 바와 같이 폭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업화 3세 기 동안에 돈이 노동력의 주된 동기요인이 되고 사회통제의 주된 도구 가 되면서 폭력은 그 형태와 기능이 바뀌었다.
-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굴뚝사회가 그보다 훨씬 더 가난한 산업화 이전의 문화들보다 더욱 더 돈을 얻으려고 갈망하고 집착하는 것은 바 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주의는 돈을 권력의 주된 도구로 만들었 다. 요컨대 산업주의적 국민국가의 등장은 폭력의 체계적인 독점화, 폭 력의 법으로의 순화, 그리고 인간의 돈에 대한 의존도를 증대시켰다. 이 세 가지 변화는 산업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자기들의 의지를 역사에 강요하는 데 있어서 공공연한 물리력 대신에 더욱 더 부(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것이 권력이동」의 참 의미이다. 그것은 권력이 단순히 한 개인이 나 집단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될 뿐 아니라 엘리트 집단이 지배력 유 지를 위해 사용하는 폭력·부·지식의 혼합물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 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산업혁명이 폭력을 법률로 변형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돈을 - 사실 부(富) 일반을 - 어떤 새로운 것으로 변형시켜 가 고 있다. 그리고 공장굴뚝 시대에 돈이 권력을 획득·유지하는 데 주 된 역할을 떠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날 우리는 권력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환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지금 새로 운「권력이동」의 문턱에 서 있다
- 모건처럼 자본의 문호를 제한하여 이를 지배하고자 했던 사람들과 밀큰처럼 문호개방을 위해 싸운 사람들 간의 싸움은 모든 나라에서 오 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뉴욕주립대학의 야고(Glenn Yago)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미국 자본시장을 개혁하여 문호를 개방하기 위한 오랜 투쟁이 계속되어 왔 다. 19세기에는 농민들이 대출을 받기 위해 싸웠으며 ... 그 결과 농업 생산성이 증대했다. 1930년대에는 은행 신용창구에서 배척받았던 군소 기업들이 구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근로자와 소비자들이 주택소유와 대학교육을 위한 신용대출을 요구했다. 신용 문호를 제한하 고자 하는 사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은 수요에 응답했고 그 결과 국가는 번영했다. 』 신용 과잉이 인플레를 부채질하는 경우가 있지만 과잉(excess)과 문호(access)는 다르다. 밀큰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브루크(Connie Bruck)도 시인하듯이 밀큰의 업체는 문호를 확대함으로써 『자기 회사 가 「자본 민주화를 진전시켰다는 주장을 ... 무리없이 입증했다.』 요컨대 모건과 밀큰은 정반대의 방법으로 미국 금융업계를 변모시켰 던 것이다.
- 물론 화폐는 그것이 금속형태이건 종이(또는 금속으로 뒷받침되는 종이) 형태이건간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핵 파멸이나 기 술상의 대변혁이 없다면, 전자통화는 앞으로 더욱 확산되어 대부분의 다른 대안들을 몰아낼 것이다. 그것은 전자통화가 교환을 실시간(實時 間) 기록작성과 결합시킴으로써 전통적 통화제도로 야기된 여러 가지 손해와 비능률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한 가지 놀라운 패턴이 밝혀진다. 자본(생산 증대를 위해 투입한 부)은 화폐와 함께 변화하고 있으며, 이 두 가지는 사회가 중요한 변혁을 겪을 때마다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본과 화폐의 지식내용(knowledge content)이 변화한 다. 금속(또는 그밖의 특정한 상품)으로 이루어진 농업시대의 화폐는 지식내용이 제로에 가까웠다. 실제로 이 「제1물결, 통화는 유형적이고 내구적이었으며, 또한 그 가액이 겉면에 표시된 숫자가 아니라 중량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의미에서 지식 이전(pre-literate)의 통화였다. 오늘날의 「제2물결」통화는 인쇄된 종이로서 상품의 뒷받침이 있기 도 하고 없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종이에 인쇄된 내용이다. 통화는 상징적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유형적이다. 이 형태의 통화는 대중교육과 함께 등장한다. 「제3물결, 통화는 날이 갈수록 전자 펄스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통화는 덧없이 사라지고 ... 순간적으로 송금되며 ... 비디오 스크린에서 모니터된다. 실제로 이 통화는 비디오 현상 그 자체이다. 지구를 가로 질러 깜빡거리고 번쩍이고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는 이 「제3물결, 통화는 그 자체가 바로 정보 - 즉 지식의 기초이다. 날이 갈수록 물질적 형상을 버리고 있는 자본과 화폐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변화를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완전히 유형적인 형태에서 상징적 인 형태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초기호적인 형태로 옮 겨가고 있다. 이 거대한 연속적인 변혁의 수반하에 거의 종교적 개종과 맞먹는 폭 넓은 신념의 변화 ? 황금·종이 등 영구적이고 유형적인 물체에 대한 신뢰에서 극히 무형적이고 덧없는 전자적 순간영상조차도 상품 및 서 비스와 교환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의 변화 ? 가 일어나고 있다. 현재의 부는 수많은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에 기초한 권력 또한 놀라울 정도로 그러하다.
- 그러나 바 코드가 수백만 소비자를 위해 계산대 앞에서의 대기를 줄 여주고 계산착오를 줄여주는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바 코드는 권력 을 이전시켰다. | 미국의 평균적인 슈퍼마켓은 지금 2만 2,000종의 각종 품목을 진열 해 놓고 있는데, 수천 종류의 새 제품들이 계속 옛 제품들을 대체하게 되면서 권력은 이 모든 품목의 정보를 - 제품의 매상고 · 수익성 · 광고시기 ·원가·가격·할인가격·소재지 · 특별판촉·운송 흐름 등과 함께 - 계속 파악하고 있는 소매상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127 랠프 (127 Ralph) 슈퍼마켓 사장인 콜 린스(Pat Collins)는 『이젠 우리도 제품에 대해 메이커 못지 않게 압니다」라고 말한다. 랠프 슈퍼마켓의 광학주사기들이 방대한 데이터를 모아서 관리자들이 언제 어떤 제품에 어느 정도의 진열대를 배정해야 할지 결정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투어 찾아와 자사 제품에 진열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배정해 달라고 간청하는 경쟁 메이커에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다. 이제는 메이커가 상점측에 장소를 어느 정도 배정할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상점측이 메이커측에 매장 공간을 얻으려면 이른바 「판촉보상금」 이라는 것을, 그리고 특히 좋은 장소를 얻으려면 엄청난 돈을 더 내야만 하게 되었다.
- 권력이 이동함에 따라 소매점들은 점점 더 공격적인 요구를 한다. 미국에서 네번째로 큰 체인점인 월마트(Wal-Mart)사는 10만에 달하 는 이 나라의 독립적 메이커 대리상들을 따돌리고 납품업체들과 직접 거래하면서, 질레트와 같은 회사들은 물건을 보내는 방법을 바꿔야 한 다고 강력히 요구한다. 일단 납품업체가 고분고분해지면, 월마트사는 이번에는 모든 주문을 100% 정확하게 - 제품의 수량 · 규격·모델 등 에 이르기까지 ? 이행할 것과 제품을 납품업체측의 일정이 아니라 자 기 회사의 일정에 맞추어 인도할 것을 요구한다. 주문과 인도의 조건을 제때 정확하게 이행하지 못하면 배상금을 요구하거나 납품업체에 지불할 금액 중에서 「처리비를 공제하는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메이커들은 재고를 늘리거나 아니면 생산의 탈대량화를 위한 새로운 첨단기술의 도입으로 공장의 단기 가동과 제품변경 속도의 가속화를 추진해야만 하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두 가지 모두 비용이 많이 드는 선택이다. 소매상은 또한 보다 엄격한 품질기준 ? 포장 인쇄의 질에 이르기까지 - 을 요구한다. 이것은 사소한 일 같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소 매상 세력이 날로 더욱 의존하고 있는 정보가 바 코드에 들어 있으며, 따라서 인쇄상태가 나쁘면 광학주사 장치로 부호를 정확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소매상은 주사장치가 제품의 바코드를 제대로 판독하지 못하게 되면 납품업자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계산대 앞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은 소비자에게도 - 그리고 경제 전 반에 대해서도 ㅡ 중요한 함축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이 싸움은 생산자 와 소비자의 역할에 관한 시대에 뒤떨어진 가정들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 예를 들어 통화가 「정보화」하고 정보가 통화화(monetized)한 세상 에서는 소비자는 물건을 살 때마다 두번 되풀이해서 값을 치르게 된다. 첫번째로는 돈을 내고, 두번째로는 금전적 가치가 있는 정보를 제 공해 준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보통 이 정보를 거저 내버린다. 그러나 소매상·메이 커·은행·크레디트 카드 회사들 (그리고 그밖의 여러 업체들)은 지금 바로 이 값진 정보를 장악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플로리다주와 캘리 포니아주에서는 소매 연쇄점들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은행과 맹렬한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양측 변호인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묻는 핵심적인 질문은 『소비자 데이터가 누구 소유이냐?』하는 것이다.
- 아직 법률적 해답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 도 소비자에게는 이 질문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론적으로 소비자들이 데이터를 제공하고 받는 보상은 제도의 능률 제고에 따른 가격인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이 비용절감의 일부라도 넘겨받게 되리라는 아무런 보장이 없으며, 또한 소비자야말로 이 중요한 정보의 원천이기 때문에 사실 그것은 장래의 환불을 기 대하고 소매상에 무이자로 「정보 대여를 제공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비자에게서 나오는 데이터가 재화 및 서비스의 설계와 생산(그리 고 유통) 과정에서 날로 더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소비자는 생산공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기여하도록 되어가고 있다. 어느 의미에서 소비자는 자기가 구매하는 물건의 공동생산자인 셈이다.
- 요컨대 정보전쟁이 기업의 외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동안 - 전술한 것처럼 소매업자와 제조업자가 대결하고 업종별 또는 심지어 국가별로 서로 싸우는 등 기업 내부에서도 소규모의 정보전쟁이 벌어지고 있 는 것이다. CIO와 그 직원들은 스스로 인식하고 있건 않건간에 정보전사(情報 戰士)들이다. 스스로는 자기들의 기능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알게 모르게 권력을 재분배하는 일을 (물론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성장하는 전자 고속도로에서 도로건설 기술자 겸 주(州)경찰관의 역할을 (도로를 건설하고 시스템도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맡고 있는 CIO들은 비록 그들 자신은 듣기가 거북하겠지만 기업체의 「중역급 사상경찰(executive thought police)」인 것이다.
- 오늘날 정보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은 새로운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식이 다른 자원에 적용되는 모든 기준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증하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식은 무진장하다. 우리는 강괴(鋼塊)나 직물에 가치를 부가하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에 가치를 부가하는 방법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렵 다. 우리는 지금 초기호적 현실을 다루는 데 필요한 새로운 회계·경영이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아직까지 판매 가능하지만 그 대부분이 고객들 자신에 의해 - 또는 의도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경쟁사에 의해 - 공급되는(때로는 무료로) 자원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또한 아직까지 기업 전 체가 어떻게 지식강화에 기여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모든 관료체제는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징을 갖는다. 즉 관료체제는 「칸막이방」이고 또 「채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매일매일의 권력, 일상적인 통제권은 두 종류의 간부, 즉 전문가와 관리자가 장악하고 있다. 전문직 간부는 칸막이방 안에서의 정보통제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다. 관리자는 채널을 통과하는 정보 흐름을 통제함으로써 권력을 장악 한다. 현재 세계 각국의 대기업에서 공격받고 있는 것은 바로 관료체 제의 대들보인 이 권력체제인 것이다. 흔히들 관료제도는 사람들을 「묶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실들을 묶는 방법이기도 하다. 기능·시장·지역·제품 등에 따라 여러 부서로 명확하게 구분된 회사는 말하자면 전문화된 정보와 개인적 경험이 축적된 여러 칸막이방들의 집합체인 셈이다. 기술분야의 데이터는 기술자에게 가고, 판매에 관한 데이터는 판매부서로 간다. 컴퓨터가 등장하기까지는 이 「칸막이체제」가 부(富)의 생산을 위해 지식을 조직화하는 주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체제는 처음에는 무한 히 확대할 수 있다는 데 그 놀라운 장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론적으로 무수한 칸막이방을 둘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실제로 기업과 정부기관들은 지금 이런 식의 전문화에 절대 적인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있다. 이 한계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각종 정부기관들이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여 돌이킬 수 없는 한계점에 도 달한 공공부문에서였다. 예를 들어 최근에 미국 해군장관을 지낸 레만 (John F. Lehman)의 탄식을 들어 보자. 국방성에서 레만은 동료들에게 이렇게 실토했다. 즉 전문화된 칸막 이 부서가 너무나 많이 생겨난 탓으로 지금은 『나나 또는 이 테이블에 앉은 그 누구도 우리가 어떤 시스템을 운영해야 할지 또는 어떤 시스템 안에서 운영해야 할지 ... 정확히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민간회사도 거대한 규모로 성장하면서 역시 조직상 전문화의 한계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 회사 저 회사에서 칸막이 체제가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붕괴되고 있다. 이 체제가 작동할 수 없게 된 것은 비단 그 규모 때문만이 아니다.
- 관료체제는 기존의 칸막이제도에 적합한 문제를 다루어야 할 상황에 처하면 특정한 틀에 박힌 방법으로 행동한다. 처음에는 일을 좀 처리해 보다가 누군가가 새로운 부서를(자신을 책임자로 하여) 설치하자고 제안하고 나서게 마련이다. 이 제안은 금방 기존 부서나 다름없이 예 산이나 축내게 될 조직을 만들자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아무도 원치 않기 때문에 타협이 이루어진다. 이 타협이란 부서간 위원회나 기동 대책반(task-force)과 같은 그 진부한 관료적 카멜리펀트가 되고 만다. 미국 정부에 이런 것이 많다. 대기업에도 마찬가지이다.코끼리의 느린 걸음과 낙타의 IQ를 결합시킨 이 새로운 조직은 사 실상 또 하나의 칸막이 부서로서 상설 부서에서 파견한 하급 직원으로 충원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새로운 조직이 기존의 관할권이나 예산배정을 잠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때로는 새로운 문제가 귀찮게 여겨진다. 커다란 위험이 수반되기 때 문에 아무도 취급하지 않으려 한다. 문제가 경험없고 불운한 어떤 젊은 직원에게 내던져지거나 아니면 주인없는 고아신세가 되어 결국 위기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 이 모든 내분에 직면하여 분통이 터진 최고경영자는 「관료주의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를 위해 이론적으로 모든 관계 부서의 협 조를 얻게 될 「전제군주」를 임명한다. 그러나 이 전제군주도 역시 문 제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기존의 칸막이 체제에 의존하게 된다. 이제 최고경영자는 부하 관료들을 정면 공격해 봐야 별 도움이 안된 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다른 한 가지 상투적인 방법을 시도한다. 굼뜨 고 말 안듣는 관료기구가 움직여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신 자기가 신임하는 간부직원 중 한 명을 해결사로 선정하여 은밀하게 문제를 맡기는 것이다. 기존 부서를 따돌리는 이같은 시도는 그들을 더욱 분노케 할 뿐이며, 여기서 기분이 뒤틀린 부서들은 그 담당 직원이 실패 하도록 부단한 공작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 지금은 소기업도 월 스트리트에서 거액의 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 소기업은 언제나 정보도 입수할 수 있다. 그리고 소기업은 비관료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보의 이용도 용이하다. 반대로 방만한 대기업 중에는 「규모의 비경제(diseconomies of scale)」에 말려들고 있는 기업들이 많다. 더구나 내일의 경제에서는 대기 업이 작으면서도 매우 활동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납품업체로 구성된 광범위한 하청구조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업체는 대부분 가족경영 회사일 것이다. 오늘날의 군소기업 및 가족회사의 부활은 매우 반관료적(反官儀的) 인 이데올로기 · 윤리 및 정보시스템을 불러들이고 있다. 가족내에서는 모든 것이 이해된다. 반면에 관료체제는 아무 것도 이 해되지 못한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이 때문에 모든 것을 운영지 침서에 명시해야 하고 종업원은 「규칙대로, 일해야 한다.) 「이해」되는 것이 많을수록 말이 줄어들고 메모에 의한 전달도 줄어든다. 지식이나 정보를 많이 공유할수록 조직내의 칸막이체제나 채널의 필요성이 줄어 든다. 관료적 회사에서는 「누구」를 아느냐 하는 것은 중요시되지 않고, 그대신 피상적으로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지위와 급여수준이 결정되었 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구를 아느냐가 중요하며, 세상에 진출함에 따라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누구를 아느냐에 따라 매우 중요한 지식 - 즉 누가 누구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가, 누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의 정보가 신뢰성이 있는 가)에 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가족회사에서는 아무도 남을 골탕먹이지 않는다. 모두가 모두를 너 무나 잘 알며 「연줄을 통해 아들이나 딸이 성공하도록 돕는 것은 당 연시된다. 관료적 회사의 경우 연줄은 「정실주의」로 불리며, 회사를 지배하는 이른바 실적평가제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가족제도에서는 주관·직관력·정감(情感)이 사랑과 다툼을 모두 지 배한다. 관료체제에서는 비록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요한 결정은 교 과서에 나와 있는 냉정하고 명철한 합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 력투쟁에 의해 좌우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끝으로 관료체제에서는 공식적인 위계체계와 직책에도 불구하고 누 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 때가 많다. 반면에 가족기업에 서는 직책이나 형식절차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 다. 권력은 가부장, 그리고 때로는 가모장(家母長)이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실권자가 물러나면 그가 직접 선정하는 친척에게 권력을 넘겨 주는 것이 보통이다. 요컨대 사업에서 가족관계가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에는 관료적 가치 관과 규칙이 파괴되고 이와 함께 관료체제의 권력구조도 파괴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가족기업의 부활은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관료주의 이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여기서 가족회사는 관료체제와 그것이 구현하는 권력에 대신할 여러가지 대안 중 하나일 뿐이다.
- 오늘날까지 잔존해 있는 봉건적 조직체의 가장 좋은 예는 대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학에서는 각 학과가 하나의 영지(領地)를 이루고 교수들은 서열이 정해져 있으며 농노집단을 이루고 있는 조교들을 통 치한다. 이 봉건적 잔재는 대학의 관료적 행정구조 속에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 행정구조와 싸우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예로 535명의 선출된 「귀족이 거대한 관료조직체를 통치하는 미국 의회를 들 수 있다. 산업주의적 관료체제가 봉건영지와 결합된 이와 유사한 예는 미국의 8대 회계사무소, 대규모 법률사무소, 중개회사, 그리고 군대에서도 찾 아볼 수 있다. 군대에서는 육·해·공 3군이 각기 매우 독립적인 봉토 (封土)를 이루고 있다. 이 봉토를 맡고 있는 장군이나 제독은 휘하 부 대를 갖지 못한 채 참모직을 맡고 있는 상급 장성보다 더 큰 실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이 「관료 귀족체제」에서는 귀족이 서로 싸우면서, 때로는 중앙의 통 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동맹을 맺기도 한다. 이같은 봉건적 요소는 이른바 「퇴화한 봉신」과 함께 아직까지도 기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장기판 조직체 : 제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에서 양대 정당이 협약을 맺어 어느 한 당이 윗자리를 차지하면 야당 당원을 두번째 자리에 앉히며 이같은 방 법을 공장의 작업현장에 이르기까지 적용하기로 했다. 이 프로파르츠 (proparz) 체제는 국영회사 · 은행·보험회사 그리고 심지어 각급 학교 와 대학에서도 모든 핵심적 직책을 사회당의 붉은 말과 보수당의 검은 말이 서로 교차하여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도 이같은 방식을 응용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일본 은행은 위계체계의 각 단계마다 일 본인과 미국인을 순차적으로 배치하여 비단 위에서 내려오는 정보뿐 아니라 조직내의 여러 단계에서 보내는 정보의 흐름을 일본인의 검토 를 거쳐 도쿄의 본점이 받아볼 수 있도록 보장해 주고 있다. 여러 단 계에서 동시에 보내오는 끊임없는 통찰력의 흐름에 의해 정상부의 권 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기업이 국제화함에 따라 이같은 오스트리아 및 일본식 접근방법을 시도하는 회사가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 인민위원 조직체 : 소련의 군부대에는 전통적으로 군사 지휘관 외에도 정치장교가 배속 되어 있다. 군사 장교는 군지휘계통을 통해 상부에 보고한다. 그러나 정치장교도 공산당에 보고서를 보낸다. 그 목적은 군을 당에 종속시키 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기업에서도 종종 위에서 「인민위원(commissar)」들을 선임, 하부 단위에 배치하여 업무를 감시하고 정상적 위계 체계와 다른 별도의 채널을 통해 보고하도록 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
다. 이 경우 하나의 정보채널이 아니라 두 개의 주요 정보채널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것은 관료체제의 엄격한 단일 채널적 특징에 반하는 것 이다. 그것은 또한 최고경영층이 통상적 채널을 통해 올라오는 정보에 관해 갖고 있는 뿌리깊은 불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변화가 가속화하고 예측 가능성이 감소함에 따라 최고경영자들은 통 제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으로 「인민위원」을 활용하여 관료체제를 따돌리게 될 것이다.
- 탄력회사는 명확한 권한 계통이 없는 대신 훨씬 더 복잡하고 과도적이고 애매한 모습을 드러낸다. 최고경영자는 오늘날의 관료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부족(部族)의 족장(族長), 인민위원, 이기적인 프리마돈 나, 민첩하고 잘난 체 하는 귀족, 응원단원, 말없는 테크너크랫 (technocrat), 광신적인 설교자, 그리고 가족회사의 가부장이나 가모 장(家母長)을 조금씩 따서 모은 혼합체와 같은 인물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맥박치는 조직체는 작은 조직과 큰 조직을 모두 이끌어갈 수 있는 중역을 필요로 할 것이며 ... 아니면 조직체가 처하게 되는 국면에 따라 통제권을 다른 종류의 역량을 가진 지도자에게 넘겨줄 질서 정연한 승계체계를 필요로 할 것이다. 장기판 원리나 인민위원 원리를 함께 채택하는 회사에서는 이원 적인 의사전달 계통이 맞서게 된다. 장기판 제도에서는 두 계통이 모두 최고경영자의 사무실로 이어진다. 인민위원 제도에서는 두 의사전달 계통의 종점이 다르다. 한 계통은 최고경영자에게 보고를 보내고, 다른 한 계통은 예를 들어 직접 임원회의에 보고하는 것이다. 정보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모든 제도는 권력을 배정 또는 재배정한다. 귀족 조직체의 경우에 최고경영자는 계속적으로 중역 귀족들 과 협상하면서 귀족 연합체에 의해 거세되거나 축출되지 않도록 그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의 지도자는 비인격적인 모습과 짐짓 과학적인 체 하는 모습을 탈피하고, 그대신 책략·배짱·구태의연한 감격과 함께 직관적 감수성과 감정이입(感情移入)에 더 한층 의존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구성요소를 관리한다는 것이 정치적이라는 의미에서 탄력회 사는 더욱더 정치성을 띠게 된다. 권력의 의식(意識的)인 행사가 정치적이라는 의미에서도 탄력회사는 정치적이다. 권력 - 법률의 힘으로 뒷받침되는 회사 자금 및 정보의 장악은 법적 또는 공식적 지위를 가진 자로부터 떠나서 지식과 특정한 정신적·정치적 수완에 기초한 자연스러운 권위를 가진 자에게로 이동한다.
- 경제학자와 기업이론가들은 오랫동안 이같은 네트워크의 역할과 구 조를 무시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기업구조의 잠재적 모델로서 이 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의 이같은 관심은 여러가지 사회적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전술한 바 있는 기업내 공식 의사전달 체제의 붕괴이다. 기업의 관료적 채널과 칸막이체제가 정체되어 부(富) 를 창출하는 데 필요한 대량의 정보 및 통신량을 전달할 수 없게 되 면, 전과는 달리 알맞은 사람에게 알맞은 정보가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종업원은 그 정보량을 운반해 주는 비공식 네트워 크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의 탈대량화도 기업체와 사업부서들이 종전보다 더 많고 다양한 상대방과 상호작용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것은 낯선 사람과의 대인관계와 전자적 접촉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말이 정확한 것인지의 여부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이런 의문을 품는 관리자는 방법만 있다면 자신의 개인적 네트워크 -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내거나 함께 일해 본 사람들 - 에 조회하여 공식 채널을 통해 얻은 지식을 보완하고 검증하게 된다. 끝으로 오늘날 학제적(學際的,interdisciplinary) 정보를 요구하는 기업문제가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도 칸막이 및 채널 시스템이 방해가 되고 있기 때문에, 종업원들은 친구에게 의존하게 되고 또한 구성원이 여러 부서와 조직단위에 걸쳐 흩어져 있는 네트워크내에서의 접촉에 의존하게 된다. 공식 또는 비공식적인 이 네트워크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다. 이들은 수직적이라기보다는 수평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위 계체계가 수평적이거나 아니면 아예 위계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을 의미한다. 이들은 적응적이어서 스스로를 신속하게 변형시켜 상황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 이런 네트워크내의 리더십은 사회적 또는 조 직상의 서열이 아니라 능력과 퍼스낼리티에 바탕을 두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권력은 관료체제의 경우보다 빈번하게, 그리고 더욱 손쉽게 무 너지며 새로운 역량을 요구하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권력자 가 바뀐다.
- 이같은 권력 이동의 장래를 조망해 보는 데는 영국과 서유럽의 초기 산업혁명의 역사, 그리고 초기 공장노동력의 공급 원천이었던 농촌 주민들의 무기력 · 무책임성·술주정 및 무지를 탓한 초기 경영자들의 불 평에 관한 기록을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각 사회는 특유의 노동규범이나 관리방식」을 부과한다. 노동자들은 이심전심으로 특정한 규칙에 복종하도록 요구된다. 노동자들의 직무성 과가 감시·단속되고 규칙시행을 위한 권력구조가 들어 앉는다. 제1물결, 사회, 즉 농업사회에서 대부분의 농민들은 끊임없이 일해 도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가족단위 생산팀으로 조직화된 이 농업노동 력은 계절변화와 일출 및 일몰의 리듬에 의해 정해진 노동규범을 따랐다. 어떤 농부가 일터에 나타나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친척들이 그를 훈계했다. 친척들은 그를 추방하거나 구타하기도 하고 식량배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가족 자체가 사회의 지배적 조직체였으며,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노동규범을 부과하는 것도 가족이었다. 개별 가족 구성 원에 대한 가족의 지배력은 부락민들의 사회적 압력에 의해 강화되었다. 지역 엘리트들이 농민에 대해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장악하는 수도 있었다. 전통이 사회적 · 성적 · 종교적 행동을 제한하기도 했다. 농민들은 몹시 심한 굶주림과 빈곤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일 상적 노동생활에서 그들이 받는 규제는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점증하고 있던 산업 노동력에 비해 덜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농업사회의 노동규범은 수천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불과 1~2세 기 전까지만 해도 인류의 대다수는 다른 규범을 알지 못한 채 이 노동규범만이 노동을 조직하는 논리적이고 불변적인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 최초의 공장이 나타나면서 이와는 전혀 다른 노동규범이 형성되어 우선 인구의 작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고, 이어 농업노동이 쇠퇴하고 산업노동이 확대되면서 더욱 광범하게 확산되어 갔다. 「제2물결」사회의 도시 산업노동자는 사람들이 우글거려 신분을 감 출 수 있는 거대한 도시 빈민굴에 파묻힘으로써 사회적으로 보다 자유 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장 자체에서의 생활은 보다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문맹자(우리 선조의 대부분이 문맹이었다)를 상대로 한 잔인한 기술이 고안되었다. 인간의 완력을 확대하기 위한 이 기술은 힘들고 엄격하고 자본집약적이었다. 소형 전동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모든 기 계들을 일렬로 배열해 놓고 공장 전체를 차지하는 고가(高架) 벨트에 의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중에 기계식 컨베이어 라 인이 등장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시에 움직이도록 만듦으로써 그들을 생산시스템에 묶어 놓았다.
- 오늘날 초기호경제가 전개되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노동규범이 낡은 규범을 대체해 가고 있다. 오늘날 아직까지 남아 있는 굴뚝식 공장과 사무실의 상황은 대체로 수십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 전세계에 걸쳐, 그리고 특히 신생공업국 에서는 아직까지 수억의 노동자가 「제2물결」적 산업규율에 얽매어 있다. 또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혁명을 과소평가하는 경영자를 목격하고 있다. 이들은 컴퓨터 등 여러 가지 제3물결적 기술을 도입하고 있지만 - 그래도 여전히 지난 날의 제2 물결적 노동규칙과 권력관계를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은 종업원들을 오웰(George Orwell)식 표현으로, 「전자 프롤레 타리아(electronic proletaria)」로 전환시키고자 애쓰는 나머지 키보드 를 두드리는 횟수를 계산하고, 휴식시간을 감시하며, 종업원의 전화를 도청한다. 그들은 작업과정을 아주 세부사항까지 통제하려고 한다. 산 업노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이같은 방법들은 특히 보험청구의 서식처리 라든가 그밖의 다른 업종에서의 일상적인 데이터 기재작업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보다 높은 수준의 작업에도 적용 될 수 있다. | 미국 의회 기술평가국의 보고에 따르면 이같은 방법은 『.... 날이 갈 수록 보다 숙련된 기술직·전문직·관리직 요원을 대상으로 삼고 있 다. 상품거래 브로커, 컴퓨터 프로그래머, 은행 대출담당자들의 직무 도 ... 감시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방법이 과연 얼마 동안이나 성과를 올릴지는 역시 의문이다. 과거의 노동규칙은 첨단기술에 수반되는 새로운 가능성과 모 순되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새 기술과 낡은 작업체제가 병존하는 경우 에는 기술이 잘못 적용되고, 그 진정한 장점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진정한 선진기술은 참다운 선진 작업방법과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역사는 거듭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전자적 프롤레타리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영자들은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공장을 축력(畜力)에 맞추어 만들어진 낡은 방법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동적인 제철업자나 방직업자들을 방불케 한다. 그들은 이같은 잘못을 재빨리 시정하거나 작업과정 자체의 개편방법을 터득하여 그 당시의 가장 선진적 기술에 알맞는 노동규범을 도입했던 보다 민첩한 경쟁자들에 의해 업계에서 밀려났다. 오늘날 자동차공장에서 각종 사무실에 이르는 수많은 사업장에서도 기민한 회사들은 새로운 규범을 시험하거나 이를 실제로 실시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특징은 지식과 권력 양자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 있다. 과거에는 근로자가 어떤 문제에 부딪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나는 경우 상급자를 제쳐 놓으면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가속화는 종업원으로 하여금 위계체계를 건너 뛰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종업원들 은 현재 실제로 필요한 경우 서열을 무시하도록 권장받고 있다. 일본 나고야에 있는 브라더 인더스트리즈사 본사에서는 이같은 일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 회사의 어떤 인사관리자는 이렇게 말한다. 『부하직원이 허가없이 자기를 건너 뛰었다고 모욕을 느끼는 중간관리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즉시 위·아래 모두에게서 존경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가속화와 기술혁신 두 가지는 모두 과거의 공장굴뚝식 권력 위계체 계를 파탄시키고, 선진적인 제3물결 노동규범의 보급을 촉진시키고 있다.
- 사실 회사내에서는 위계체계의 성격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1980년 대에는 이윤 센터들의 창설과 함께 이른바 「위계체계의 수평화」 또는 중간관리자의 학살이라 불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윤 센터들로의 권 력의 이동과 마찬가지로 이같은 변화도 역시 기업내에서 지식체계를 재장악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촉진되었다. 대기업이 중간층 직원을 감축하게 되면서 전에 큰 것이 좋다고 합창했던 관리자 · 학자 · 경제 전문가들이 이제는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갑자기 규모의 비경제에 눈을 뜬 것이다.
규모의 비경제는 주로 낡은 지식체계 - 부서별 칸막이방과 공식적 인 의사전달 채널로의 관료적인 정보 배정 - 가 붕괴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업내 중간관리층의 업무는 대부분이 하급자로 부터 정보를 수집 · 종합하여 이를 계통에 따라 상급자에게 전달하는 업무이다. 그러나 사업운영이 가속화하고 보다 복잡해져 칸막이방과 채널의 부담이 과중해짐에 따라 업무보고 체제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각종 실수와 오해가 늘어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늘 어나 고객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 카프카적(Kafkaesque) 체제를 무시 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업무비용이 급증했다. 종업원들이 열심히 일했지만 성과는 적었다. 종업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는 관리자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최고경영 자는 공장 현장의 부품 결함이나 기계 고장에 관해 보고하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지 안다. 그러나 그들은 지식체제가 낡고 고장났다고 보고해 주어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최고경영자가 지식이 밑으로부터 단계적으로 종합되어 메 시지가 지휘계통을 따라 서서히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는 것 이다. 더구나 지식이 공식적 칸막이방을 벗어나 공식적 채널 바깥에서 전달되는 경우가 늘어날수록, 그리고 지식이 컴퓨터에서 컴퓨터로 순간적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수많은 중간관리자들은 더욱 더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 필요한 보조자가 아닌 장애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당초부터 지식 하부구조가 뒤떨어지도록 방치했던 관리자들은 경쟁 압력과 기업매수 협박에 직면하게 되자 이제는 필사적으로 원가절감안 을 찾아 나섰다. 빈번하게 나타난 최초의 반응은 원가절감이 회사의 지식체계를 손질 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 채, 공장 문을 닫고 말단 근로자들을 길거리로 내쫓음으로써 이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종업원 감원문제에 관한 전문가인 페이스대학의 오클랜더(Harold Oaklander) 교수는 이같은 이유 때문에 원가절감을 위한 해고가 실 제로는 생산성에 역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단체협 약이 일시해고시에 선임 근로자가 신참 근로자를 밀어내도록 규정 하는 경우에는 연속적인 직종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 경우에는 실제로 해고되는 근로자가 1명이더라도 필요한 지식을 갖지 못한 다른 근로자 3~4명이 하급 직종으로 배치된다. 장기간 유지되어 온 의사전달 관계가 단절된다. 그 결과 해고 후의 생산성은 생각대로 늘지 않고 오히려 떨어지게 된다. 최고 간부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는 정보 홍수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증원해 온 중간관리자를 표적으로 삼는다. 미국의 사장들은 감원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을 생각하지도, 그것이 회사의 지식체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군살을 뺐다는 칭찬을 받고 있다. (감원을 사업실패라고 생각하는 일본 경 영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노조대표를 이사회에 참석시켜 가능한 다른 모든 조치를 취했음을 납득시켜야만 하는 유럽 여러 나라들의 경 우도 사정이 다르다.) 살을 깎는 이 중간관리층 해고는 회사의 정보 하부구조를 개편하여 의사전달을 촉진시키기 위한 때늦은, 그리고 대개 무의식적으로 취해 지는 조치이다.
- 중간관리층의 비창의적인 업무 중 다수가 이제는 컴퓨터와 전기통신 네트워크에 의해 더욱 훌륭하게, 그리고 보다 빨리 수행될 수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IBM은 사내 전자 네트워크의 일부 PROFS 네트워크 만으로도 중간관리자와 화이트칼라 근로자 4만 명이 소요되는 작 업을 대신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매일처럼 새로운 네트워크가 설치됨에 따라 정보는 이제 옆으로 또는 대각선으로 흘러가면서 직급을 무시한 채 상·하 단계를 건너 뛰고 있다. 최고경영자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건간에 이같은 감축이 가져온 한 가지 결과는 회사내의 정보 하부구조를 - 그리고 이와 함께 권력구 조를 ―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윤 센터들을 설치하고, 위계체계를 평면화하고, 컴퓨터 본체를 탁 상용 컴퓨터로 대체하여 이들을 네트워크를 통해 본체와 그리고 상호 간에 연결시키게 되면 회사내의 권력은 단일체적인 특징이 줄고 보다 「모자이크」적인 것으로 된다.
- 어떤 체제, 특히 경제체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그 체제의 「클록-타임 (clock-time).. 즉 체제가 운영되는 속도이다. 모든 체제는 - 인체의 순환계통에서 사회의 부 창출체제에 이르기 까지 - 특정한 속도로만 운영될 수 있다. 너무 느리면 고장나고 너무 빠르면 산산조각이 난다. 모든 체제는 역시 특정한 속도 범위내에서만 운영되는 여러 하부체제로 이루어진다. 전체 체제의 「속도」는 각 부분 의 평균 변화속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각 국민경제와 부 창출체제는 각기 특유의 속도로 운영된다. 말하자 면 각각 특유의 신진대사율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부 창출체제가 갖는 속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다. 기 계공정의 속도를 측정하거나 사업거래나 의사전달 흐름의 속도, 연구 실의 지식이 상업적으로 제품화되는 속도, 또는 특정한 의사결정에 소 요되는 시간, 제품 인도까지의 리드 타임을 측정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 내일의 富
지금까지 이 새로운 부 창출체제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대충 살펴보 았다. 이제는 이 모든 단편들을 함께 묶어 하나의 일관성있는 틀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새로운 부 창출방법이 과연 얼마나 혁명적인가, 그리고 과거에 부를 생산하던 방법과 얼마나 판이한가가 분명해질 것이다.
1. 새로운 가속적 부 창출체제는 더욱 더 데이터·정보 및 지식의 교환에 의존한다. 그것은 「초기호적이다. 지식의 교환없이는 새로운 부가 창출되지 못한다.
2. 새 체제는 대량생산을 탈피하여 탄력적인 주문생산, 즉 「탈대량 화」 생산으로 나아간다. 이 체제는 새로운 정보기술 덕분에 고도로 다 양한 제품, 심지어 주문화 제품을 대량생산 비용에 근접한 원가로 단 기간에 생산해 낼 수 있다.
3. 종전의 생산요소 - 토지·노동·원료 및 자본 -는 기호화된 지 식이 이를 대체함에 따라 그 중요성이 감소한다.
4. 금속화폐나 지폐 대신에 전자적 정보가 참다운 교환수단이 된다.. 자본의 유동성이 극히 높아져 하룻밤 사이에 거액의 자본 풀(pool)을 만들었다가 분산시킬 수 있다. 오늘날의 엄청난 자본집중화에도 불구 하고 자본 공급원천의 수는 늘어난다.
5. 재화 및 서비스는 모듈화하여 표준의 증식과 끊임없는 수정이 요 구되는 시스템을 구성한다. 이로 인해 표준의 기초가 되는 정보를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 일어난다.
6. 움직임이 완만한 관료체제는 탈대량화한 소규모의 작업단위, 임시적 또는 「애드호크러시」적 팀, 더욱 더 복잡해지는 기업 협력체와 컨소시엄에 의해 대체된다. 위계체계는 의사결정을 신속히 하기 위해 더 면화되거나 폐지된다. 지식의 관료적 조직화는 흐름이 자유로운 정비 체제로 대체된다.
7. 조직단위의 수와 다양성이 늘어난다. 이러한 단위들이 늘어나고 그들간의 업무처리가 많아질수록 더 많은 정보가 생성되고 전달되어야 한다.
8. 근로자의 상호교환성이 더욱 더 줄어든다. 과거에는 산업노동자 가 소유하는 생산수단이 별로 없었다. 오늘날에는 가장 강력한 부(富) 의 증식도구가 근로자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기호(symbol)이다. 그러므로 지금 근로자들은 「생산수단」중에서 극히 중요한, 그리고 때로 는 대체할 수 없는 부문을 소유하고 있다.
9. 이제 새로운 주역은 블루칼라 근로자도, 자본가도, 관리자도 아 니며 창의적 지식을 행동과 결합시키는 혁신자(대규모 조직의 안팎에 있는)이다.
10. 부의 창출은 폐기물이 다음번 생산 사이클을 위한 투입물로 재 생되는 하나의 순환과정이라고 보는 인식이 늘어나고 있다. 이 방법은 컴퓨터화한 모니터 체제와 더욱 심오한 차원의 과학적·환경적 지식을 전제로 한다.
11. 산업혁명에 의해 분리되었던 생산자와 소비자가 부의 창출 사이 클에서 재결합하여 고객은 비단 돈으로만 기여할 뿐 아니라 생산공정 에 필수적인 시장 및 설계상의 정보를 제공해 준다. 구매자와 공급자 가 데이터 · 정보 및 지식을 공유한다. 언젠가는 고객들이 단추를 눌러 원격지에 있는 생산공정을 작동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소비자와 생산 자가 「생산소비자로 융합되는 것이다.
12. 새로운 부 창출체제는 지역적이기도 하고 세계적이기도 하다. 강력한 마이크로테크놀러지는 이 체제가 종전에는 전국적 규모에서만 경제성이 있었던 일을 지역적으로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여러가 지 기능이 국경선 밖으로 넘쳐 흘러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하나의 생산적 노력으로 통합할 수 있도록 해준다.
가속적 경제가 갖는 이상의 12가지 요소는 상호 관련되어 있어 경제 전반에 걸쳐 데이터·정보 및 지식의 역할을 서로 강화해 준다. 이 요 소들이 하이테크적 부를 창출하는 혁명적인 새 체제를 규정한다. 이 체제의 단편적 요소들이 합쳐지면서 산업주의시대의 부 창출체제를 뒷받침하도록 고안된 권력구조를 붕괴시킨다. 지금까지 요약해서 설명한 새로운 부 창출체제는 지금 전체 지구상에 확산되고 있는 엄청난 격변 - 부 창출체제들이 미증유의 규모로 충돌하리라고 알려주는 예고적 전율 - 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민주체제이건 아니건 모든 체제에서는 사람들이 부를 창출하는 방법 과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법 사이에는 어느 정도 조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크게 다르다면 언젠가는 어느 한 쪽 이 다른 한 쪽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역사상 우리 인류가 전적으로 새로운 부 창출방법을 만들어낸 적은 두 번밖에 없었다. 그 때마다 인류는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통치형태 를 만들어냈다. 농업의 확산은 부족집단 · 수렵부족 등의 사회적·정치적 제도들을 일소하여 이들을 도시국가 · 세습왕국 · 봉건제국 등으로 대체시켰다. 산업혁명은 다시 이들의 대부분을 일소해 버렸다. 그 결과 대량생산 · 대량소비 · 대중매체와 함께 여러 나라에서 이에 상응하는 체제, 즉 「대중민주주의」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대중민주주의는 심한 저항에 봉착했다. 봉건적 농업 체제 이 낡은 세력 - 토지를 소유한 상류계급, 위계체계하의 교회, 그리고 이들의 지적·문화적 옹호자 - 이 새로 등장하는 산업주의와 여기에 종 종 수반되는 대중 민주주의를 상대로 저항하고 제휴하고 싸웠던 것이 이다. 사실 모든 공장굴뚝 사회의 중심적인 정치투쟁은 흔히들 생각하듯 좌익과 우익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1물결」농업체제와 「전통주의, 찬미자를 한편으로 하고 「제2물결, 산업체제 또는 「근대주의」 옹호자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투쟁이었다. | 그같은 권력투쟁은 다른 깃발 - 예를 들어 민족주의·종교 또는 민 권을 내걸고 싸우는 경우가 많다. 이 투쟁은 정치뿐 아니라 가정생 활·남녀관계 · 학교·전문직업·예술 등에까지 파급된다. 지금도 진 행되고 있는 이 역사적 투쟁은 오늘날 하나의 새로운 투쟁 「제3물 결」, 즉 근대 이후의 문명이 근대주의와 전통주의 모두를 상대로 벌이 는 투쟁에 의해 그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다. 그리고 만일 지식에 기반을 둔 새로운 경제가 지금 공장굴뚝 생산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 조하여 이를 대량생산 이후의 혁명적 경제체제와 조화시키기 위한 역사적 투쟁이 전개되리라고 예상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산업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집중적인 위기 - 도시체제 · 보 건체제 · 복지체제 · 수송체제 · 환경체계 등 모든 기본체제에서 일어나 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공장굴뚝형 정치가는 여전히 이러한 위 기에 대해 한 번에 하나씩 여러가지 낡은 접근방법으로 대응하고 있 다. 그러나 대중사회에 맞도록 만들어진 현존 체제하에서 그러한 위기 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현재 등장하고 있는 경제체제는 전혀 새로운 문제와 위기를 제기함으로써 종전의 가설과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제휴관계를 분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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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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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경제 2020. 3. 29. 14:14

- 1980년대의 아파트 열풍 : 규제 완화와 부동산 투기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이 열렸던 흥분의 1980년대에는 대형화되고 고층화된 건물 건설에 대한 규제가 전반적으로 더욱 완화되었 다. 아파트 지구 이외의 주거지역에서 건물의 높이와 용적률을 제한했 던 종래 〈도시계획법〉의 핵심 내용이 달라진 것이다. 이로써 또 한 번의 도시 밀집화가 가능해졌다. 주거전용지역의 용적률이 15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올라 연립주택의 건설이 허용됐다. 결국 주도 대도시 특히 서울의 주택난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이미 10년 전 시작된 대규모 주택 건설 정책은 더욱 확대되었고, 건설부는 1981년부터 1005년까지 15년간 주택 5백만 세대 건설 계획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전반적으로 이 기간은 건설 시장과 부동산 시장의 활황기였다. 국제 구도의 스포츠 제전을 앞두고 도시 미화를 위해 대형 건물과 대규모 주 택의 건설이 장려되었다. 그리고 이는 중동지역 전쟁으로 사업 침체를 겪고 있던 재벌기업 계열의 건설 회사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부동산 부문에서는 시기적으로 조금 앞선 일본의 경우처럼 시세가 폭등 했다. Aveline 1995, 90-91), 서울에서는 올림픽 시설물 건설 바람을 타고 강남 구와 송파구를 중심으로 부동산 투기가 활기를 띠었다. 더욱이 강남의 교통망을 확대시키는 지하철 순환선이 테헤란로를 따라 지나면서 잠실 과 반포 사이에 제3의 업무 지구가 형성됐다. 코엑스빌딩 같이 화려한 마천루 건설에 연이은 사무용 건물의 건설은 이 지역의 지가와 부동산 가격을 급상승시키는 요인이 됐다.
- 한국에는 두 가지의 도시재개발 형태가 존재한다. 첫째가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1970년대 업무 지구 현대화를 위한 주상 복합 지역의 개발이 그 예다. 둘째는 '달동네' 라는 문학적인 이름의, 무허가 주택과 저소득층 주기 지역에 대한 주택 재개발사업' 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형태는 1990년대의 산물이 아니라 '불도저 김' 식의 대대적인 재개발사업이 있 었던 1960년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정부는 강력 한 재개발의 주역이었다. 철거민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1983년 합동 재개발사업' 이라는 도시재개발의 새로운 형태가 도입 되는데, 이는 재개발구역 주민들의 참여와 민영 회사의 개입을 부추겼 다. 이 절차는 주도자가, 정부가 아닌 해당 지역의 주택 소유주로 구성된 '재개발조합 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1970년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과 크 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재개발구역의 무허가 주택 거주민들은 그들이 불법 점기한 토지에 대하여 선매권을 갖게 되어 시세보다 낮은 공시지가로 다시 사들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권한을 획득한 지역주민들은 주택 재개발 권고를 받고 민영 회사와 협의하여 필요한 자본의 일부와 자재, 기술력을 충당한다. 주민들은 이렇게 건설 예정 아파트단지의 새 아파트 에 대한 소유권을 누리게 되는데 건축 기간이 끝나면 원래 소유 주택보다 가격이 대폭 상승한 아파트를 소유하며 그 가격은 토지 재매입, 건축비 등 재개발에 투자한 비용을 웃돌게 된다. 민영 건설 회사의 경우, 가능 한 많은 아파트를 분양하기 위해 고층 초고층 건물의 건축으로 이익을 극대화한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이윤을 남기는 이 사업은, 재개발조합 창립에 대한 찬성이 거의 자동적으로 80퍼센트를 넘게된 이유를 설 명해 준다. 물론 옛 달동네의 주민들이 아파트에 입주하는 경우는 드물 다. 지역의 물질적 변모는 중산층의 유입과 함께 하층이 밀려나는 사회 계층적 변화를 수반하고, 애초의 주민들이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제도는 1980년대 말까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나자 강남지역의 아파트단지 개발이 수그러들었고 아파트단 지 건설이 가능한 택지가 줄어들었으며 아파트단지는 점점 도시 외곽으 로 자리를 이동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기존의 도시 개발 지역 가운데, 평 균 3~5헥타르에 이르는 재개발지구는 상대적으로 이점을 누리게 되었 다. 1983년에 시행된 합동 재개발사업이 민간 자본의 참여를 독려하는 조세경감이나 공공지원 등 다양한 조건들을 내세웠기 때문에 대기업들의 부담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 아파트단지 개발의 역사는 끊임없이 건축되고 재건축된 한 도시의 역사이다.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건축가, 주민 등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던 것처럼 '맨주먹으로 일으켜야 했던 대도시 서울의 끊임없는 변화는 이를 잘 보여 주고 남는다. 한국 도시경관의 불안정성은,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불안정성은 우선 도시의 변화 속도 에 있어서 과격함을 의미한다(Lee Eun 1997, 124-125). 국토의 빠른 개발과 변모를 경험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적 특징은 '새 것에 대한 맹목적 중 배'로 나타난다. 최신형 아파트단지와 최신형 건물들의 경합은 일상화되 다시피 했다. 1970년대 이후 '새로운 도시'의 창궐은 '신'이나 '뉴'라는 접두사를 무한대로 사용케 했다. 이 책에서 쪽마다 쏟아 낼 수밖에 없는 '신도시', '뉴타운' 의 홍수는 필자로서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오늘의 서울은 이렇듯 도시 유행의 첨단을 보여 준다. 서울의 가옥 갱신 주기는 서구 도시보다 훨씬 짧다. 델리상은 도시 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한국인 대다수의 '무심함'을 지적한다(Delissen 1993). 베르크는 일본에서 도시의 의미 내지 일본의 도시성에 대한 조사에 서 유사한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일본에서 도시의 의미는 일본 사회 내 시·공간 조직의 핵심이라 할, ‘유동의 문화 (culture de flux)에 기초 한다고 보았다. 서울 주거 공간의 계속적인 변모 역시 '유동의 문화'로 해석될 수 있을지 모른다. 유동의 문화' 에는 시간의 순환적 개념이 배어 있으며 서구인들이 발전시킨 '축적의 문화 (culture de stock)와는 그 의미 가 매우 다르다. 축적의 문화'는 직선적인 시간성에 뿌리를 두면서도 이 미 지어진 가옥의 영속성에 더 집착한다. 여기서 필자는 문화 발전이냐 하는 논쟁에 대해 섣부른 결론을 내 리지는 않으려 한다. 분명 서울은 20세기 유럽 사회에서 발전된 가옥의 이데올로기와는 상충되는 관점을 갖는다.(Choay 1992). 한국에서 주택의 끊임없는 변모는 서구가 보여 주고 있는 도심의 박물관화와는 근본적으 로 대립된다. 서울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 나가고 변화하고 있으 며 현재에 멈춰 설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듯하다. 확실히 서울은 지리학에 저항하는 도시이다.
- 1970년대와 1980년대 건설된 성격이 다른 여러 아파트단지를 대상으로 한 조사는 아파트단지를 사회계층 구성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홍두 승· 이동원 1993). 이미 언급한 대로 반포주공단지나 압구정동 현대단지 등 은 부유층과 최상류계층을 겨냥한 반면, 잠실 등은 그보다 낮은 소득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파트 면적과 사회계층 구성 간 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타당하다. 1977년 완공된 잠실단지는 평수가 19평을 넘지 않는데, 일반적으로 이 면적은 최소형 평수에 해당 된다. 1980년대 이후 건설된 대다수의 아파트는 주로 30평에서 40평대 이다. 1990년대 중반 필자가 수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잠실의 월평균 가계소득은 15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다른 여섯 개 아파트단지의 300만원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64평 복층이 있는 반포단지나, 압구정 현대의 80평형 이상 아파트단지는 소득 수준이 더 높았고, 삼익단지 또 한 그러했다. 이 세 개 단지 주거 세대 중 35퍼센트 이상이 월수입 300만 원을 넘어섰다. 잠실의 경우,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봉급생활자인 경우 가 35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회사 사장은 없었으며 자유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6퍼센트로, 압구정의 13퍼센트, 삼익의 12퍼센트보다 낮았다. 또한 잠실단지는 가장 젊은 세대로 구성되어 있어 대다수 가장의 연령이 40세 이하인 반면, 다른 아파트단지는 그 이상이었다.
- 한국의 아파트가 갖는 유형적 특징은 프랑스와의 비교를 통해 보다 잘 드러난다. 그렁덩성블(grand ensemble)이나 씨테(cite)라는 프랑스어 용어 는 한국어의 '단지'를 표현할 때 쓰이는 프랑스 말이지만, 그 의미는 한국의 아파트단지와 매우 다르다. 프랑스의 아파트단지는 1950년에서 1980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는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다음과 같은 용어 설명의 예가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렁떵성블: 1960~70년대 프랑스 대도시의 근린지역에 건설된 대규모 건물군을 지칭하며 종종 '씨테'라고도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심각한 주택난을 해소 하기 위해 ZUP(우선시가화지구)의 절차에 따라 지정된 토지 위에 급조됐다. 대개 이 건물들은 지방자치단체 소유의 주변 지역, 즉 도심이나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 지역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빠른 쇠락으로 점차 무기력하게 고립된 빈민 층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높은 실업률을 보이는 청년들과 이민자들의 거 주지가 된 것이 특징이다. 그 일부는 '문제 지역' 혹은 '민감한 지역'으로 불리며 청년들의 폭동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수년 전부터 도시 정책의 특별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으나 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Guglielmo 1996, 265).
- '문제 지역이니 '민감한 지역 이니 하는 용어들은 폭력과 도시문제로 얼룩진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어두운 현황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들 중 일부는 1990년대 초반 이후 발생한 폭동사건 4의 오명을 쓰지 않은 곳도 있다. 사르셀(Sarcelles)이나 라 쿠르뇌브(La Courneuve)처럼 프랑스 근 린지역 문제의 상징적인 아파트단지와는 달리 이블린(Yvelines) 지역의 파를리2(Parly II)와 벨리지2(Velizy II)단지는 대규모 건설의 표본적 사례이다. 전형적인 도시 중산층의 거주 지역인 지프-쉬르- 이베트(Gif-sur-Yvete)도 있다. 분명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이미지를 과도하게 단순화시키면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아파트단지에 대한 전반적인 관찰에 충실하다면, 어떤 의미에서건 프랑 스의 아파트단지는 도시의 소외를 상징하며, 서울의 아파트단지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프랑스의 아파트단지와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서로 상반된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플라망(Flamand 1989, 242-249)과 레제(Leger 1990, 39)에 따르 면 초창기 프랑스의 아파트단지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더 나은 거주환경을 원하는 청년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들이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대거 개인주택으로 이동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오늘날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사회계층 구성은 20년 전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 아파트단지의 성장 과정은 이와는 정반대의 유형을 보여 준다. 1970년대 초반까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주던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그 이후로 오히 려 중간계급이나 부유층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ZUP'나 '그렁평성블'로 번역하는 것은 한국적 현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명성블' 이라는 표현이 반포, 잠실, 압구정단지를 지칭한다면 프랑스어에 스며있는 부정적인 의미 를 지우기 힘들 것이다. 프랑스 독자들로서는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 지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필자는 내 주제가 한국 의 영구임대주택이나 위험지역 문제도 아닌,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중산 층의 공간에 관한 것임을 프랑스 동료들에게 수도 없이 설명해야 했다. 프랑스 동료들과 독자들에게, 한국의 아파트단지가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의 그렁덩성블이나 '씨테'와는 정반대의 개념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도시 형태는 운명적인 것 이 아니며, 모든 것은 주어진 사회, 문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장소의 가치가 갖는 의미에 따라 좌우된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 60년에서 90년 사이 농경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의 빠른 전환, 군대식 선전구호, 독재정권에 의한 외적 정제성장 등은 한국적 모델을 특징짓는다. 프랑스에서처럼 부의 이전이나 연대의식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국민주 이 건설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특징이다. 재분배의 측면보다는 양적 성장 그 자체에 과도하게 집착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기에는 개인의 행복이 아닌 사회의 행복' 이라는 특별한 비전에 접목 된 한국적 태도가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짓은 한국의 경우 개인적인 부의 재분배를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프랑스와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보다 훨 씬 덜 느낀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서울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아파트단지들은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재벌과 손을 잡고 급격한 성장을 추구하면서 만들어 낸 한국형 발전 모델의 '압축적 표상'인 셈이다.
- 1998년까지 2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을 짓는 건설 회사는 시세를 밑도는 분양 상한가를 준수해야 했다. 이 가격은 도시별, 서울의 경우 지역 별로 서로 다른 해당 지구의 지가와 건설부가 지정한 표준 건축비를 고 려하여 결정된다. 또한 건설 회사는 주택은행이 관리하는 분양 제도에 따라야 하는 제약이 있어 수요자들에게 직접 주택을 매매할 수 없었다. 아파트 분양제도는 시행 초기부터 계속해서 수정·보완되어 왔다. 1983년 정착된 투기 억제책의 일환으로, 정부는 분양 제도에 이어 채권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주택 청약자는 추첨시, 서 울시가 정한 채권 상한액에 따라 채권을 매입해야 하며 이는 아파트단지마다 서로 다르다. 사실상 주택 구매에 대한 일종의 중과세에 해당하는 이러한 조처는 정부의 공공 유동자산을 증식시키는 동시에 투기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졌다. 주택 청약자들은 액면금액의 내림차순으로 명단에 등록된다. 즉 액면 금액이 높을수록 분양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한편 이 제도에 따라, 주택을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취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고 특히 주택보급률이 낮은 서울의 경우 수요를 급증시켰 다. 1990년, 300만 명 이상이 주택 청약 계좌를 신청한 반면, 같은 시기에 연간 주택 건설은 50만 호가 예정되어 있었다. 1994년, 서울의 경우 청약 자의 숫자는 약 50만 명을 기록했던 반면 연간 주택 건설은 약 6만 5천 호 뿐이었다(서울통계연보 1995). 이 두 사례는 정부의 가격 통제 방식과 함께 1998년까지 주택 시장의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보여 준다. 이상과 같은 가격 통제 방식은 1995년부터 점차 사라져 1998년 2월 부터는 완전히 자율화되었다. 그 결과 신규 건설 주택가는 시세에 맞춰지 게 되었고 점차 시장 상황에 영향을 받는 주택 상품으로 변화했다.
- 주택정책을 다룬 한 논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의 주택정책은 오랫동안 부유층에 유리한 방향으로 시행되어 왔다. 이러한 방향은 ‘주택 여과 과정(Hiltering Process)'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하위 계층은 부 유증이 더 값비싼 최신 주택으로 옮기 가면서 남기고 간 주택을 저렴한 비 용으로 구입해 옮겨 간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chung, 1995, 3.20 321). 대다수가 개인적 주기사의 진보에 따라 거주지를 이동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하위 계층도 주택을 소유하게 된다는 주택 여과 과정' 의 원리 는, 사실 모든 지역의 집값이 똑같은 도시 공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즉 중심도 주변도 없이 미분화된 도시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 원리는 도시의 진동기들이 남지도 변형되지도 않는다는 전제에 입각 한 것이다. 따라서 이미 끊임없는 쇄신을 거듭하면서 중심과 주변의 문화가 갈수록 심화되이 온 서울의 변천 과정에서는 의미가 없다. 실제로 한국의 주택정책은 소형 아파트를 희생시키 대형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하위 계층을 주변 지역으로 내몰고 도심을 상층 계층이 차지하는 젠트리피케이션(sentulication)을 가져왔을 뿐이다. 이후 세대당 가족 수의 비율과 주택당 가구 수의 비율이 아파트에서는 낮아지고 개인주택에서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 서울의 세 대당 평균 가족 수는 개인주택이 9.5명, 아파트가 5.9명이었고 1995년에 는 각각 9.8과 3.7로 벌어졌다. 주택당 가구 수의 비율도 비슷한 곡선을 보여, 1970년과 1995년을 비교해 보면 개인주택이 1.9가구에서 3가구, 아파트에서는 13가구에서 1가구를 기록했다(RPL 1970; 1995). 아파트의 인 구밀도 저하와 개인주택의 인구밀도 증가는, 아파트단지 건설 정책이 주 로 중간계급이나 주택 구입 능력이 있는 계층을 위주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결국 전혀 수혜를 입지 못한 최하위 계층은 별 수 없이 개인주택의 일부나 영세한 연립주택 등 다른 형태의 주택으로 옮겨 가야 했다.
- 한국에서 정부의 직접 투자가 빈약했던 주택 부문은 산업 발전의 희생양이었다. 범국가적 차원에서 수립됐던 주택 부문의 계획이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수렴되고 국민총생산이 꾸준히 증가했지만, 주택 부문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인 노력은 미미했다. 아파트의 대규모 건설 공약은 계속되었다. 분명 대규모 주택의 공급 은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발전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뿐이었다. 공공 재정의 역할은 미미했지만, 한국인들은 정부 정책에 부응해 주택 구입의 재정적 부담을 받아들였다. 이 역시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전 국민 이 수락했던 수많은 물질적 희생의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커밍스 (Bruce Cumings)에 따르면, 이것은 한국의 경제 기적을 가능케 했던 중요한 요인이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 발전은 엄밀히 말해 '기적'이 아니라 1960년대 성인 계층의 고된 노동의 결과이자 그들의 희생에 바탕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북한과의 적대적 경쟁 관계와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북한을 능가해야 한다는 총량주의적 목표를 추구해 왔다. 1960년대에는 공장의 벽보나 방송에서 ‘경제 우선!’, ‘수출 목표 10억 달러!' 등의 구호가 난무했다. 단순화된 경제 발전 목표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슬로건으로 만들어졌고 주택 분야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주택 건설 2백만 호!'라는 구호는 1970년대에 그 전성기를 구가했다. 가장 충격적인 구호는 '주택 건설 180일 작전’ 으로, 잠실의 초창기 네 개 아파트단지가 이 기록적인 기간 안에 건설됐다. 군대 용어에서 빌려 온 '작전' 이라는 용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정부 선전 구호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국민적 동원이 이루어졌다. 앞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서울 시장 김현옥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개발 시대 고위 관리들의 전형적인 특성 을 지적했는데, 이를 잘 보여 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서울에서 김현옥 의 과격한 정책 추진 때문에 문화재 파괴를 우려하는 견해가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지금 100미터를 달리고 있다. 오직 속도만이 나의 무기다. 격려도 비판도 생각할 시간이 없다. 꼴찌로 도착한다면 무슨 소용 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Jung 1997, 32), 대단지 아파트는 '기적'의 시대를 풍미했던 대량 생산체제의 직접적 산물이자 한국 사회가 '양과 속도' 의 신조를 따르는 성장의 이데올로기에 완벽하게 통합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최평두 1991, 227-264).
- 주거의 공간적 특성과 생활양식은 도시화되고 산업 화된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결정 요인 중 하나이다. 인류학자 알타베는 프랑스의 사례연구를 통하여 유사한 결론을 끌어낸다. Althatbe 1985). 그에 따 르면 주택(가구, 설비 등)이 자신의 실제 계층보다 더 상위 계층에 속해 있음 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거주 장소는 자신의 계층을 정의 하기 위한 하나의 목표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도시 중산층을 의미하는 가 장 함축적인 상징으로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분명 특이한 점 이다. 이는 한국과 프랑스에서 주택에 결부된 상징 내지 표상을 구별 짓 는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작고 소박한 것이라도 단독주택 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 한국에서 아파트는 경제 발전의 주역이자 가장 큰 수혜자인 중간계 급에 일반화된 주거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사례 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아파트단지의 형태는 다양하며 그것은 중간계급 내 부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렛은 아파트의 이미지가 실제의 지리학적 현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아파트는 도시 주민의 의식 속에서만, 마치 그 안에서는 사회계층적 차이가 존재하 지 않는 듯이, 과도하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향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외형적 관점에서 아파트는 여러 계층과 범주로 이루어진 중간계급 일반의 주거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상류사회적 형태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 런 이유로 아파트단지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은 이들이 전체적으로 도 시 중산층의 가치에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 라고 할 수 있다(Lett 1998, 227).
- 크게 보아 1970년까지는 주민들의 거부감을 없애 줄 만한 아파트 모델이 만들어지지 못했고 아파트는 하위 계층의 전유물이라는 이미지 가 여전히 강했다. 그러나 부유층과 상류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물질적 · 비물질적 장려책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학교 이전 등을 포함하는 거주 환경에 대한 총체적인 개선책이 뒤따르면서, 이들 계층이 아파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아파트단지의 성공은 또한 면적이나 설비 등 주택 조건의 개선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도 아파트단지가 중간계급 을 끌어들이던 때에는 이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잠실의 아파트단지는 1950년대 사르셀의 아파트단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원천은 상층의 도시 중산층들이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또 프랑스의 아파트단지와 한국의 아파트단지의 진화 과정에 있어 중 대한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1950~60년대 아파트단지는 젊은 세대의 중간계급이 거주했고 얼마 후 이 계층이 단독주택으로 옮겨 가면서 가차 없이 버려졌다. 그와 반대로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상위 계 층에서 시작되었고 중간계급 일반과 하위 계층으로 확산됐다. 아파트가 한국인 전체에게 표본이 된 것이다. 요컨대 정부가 주도하고 재벌이 공 급한 대단지 아파트를 상층의 도시 중산층이 수용하게 되었을 때 한국에서 아파트 신화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 아파트단지는 도시 형태의 측면에서 한국 경제의 '기적'을 낳게 한 과정과, 30년에 걸친 농경토지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을 반영한다. 건설 회사와 분양 희망자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남겨준 분양가 통제제도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주택을 양산하는 도시계획 안에서 하나의 집합적 세력으로 고려되고 움직였던 존재였다. 처음에 서울 주민들은 아파트에 대한 저항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새로운 주택 형태를 전파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이 도시 역동성을 강남으로 재분배하면서 대규모로 시행되자 여론은 급선회했다. 이러한 여론의 급선회가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사회적 지위를 주장하는 방법에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말만 해도 하위 계층의 주택 유 형으로 간주되던 아파트가 왜 점차로 도시 중산층을 대표하는 특성적 기 호의 하나가 됐는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주택 시장과 임대 시장에 각 개 인의 접근 방법을 결정하는 경제적·물질적 조건들은, 어떻게 중간계급 대다수가 아파트단지의 대규모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하는 구조를 밝혀 준다. 결국 아파트'는 상품이 되고, 재테크의 수단이 되었다. 권위 주의 국가는 인구 성장을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이 경제 발전에 헌신하, 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을 대단지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 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의 구조 때문에 한국의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단 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주거 공간의 획일화를 너무도 쉽게 수용하는 한국인들의 문화적 무관심 은 이렇게 해서 허용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권위주의 산업화의 구조와 특성, 여기서 비롯된 계층적 차별 구조와 획일화된 문화양식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이자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에서는 인구 규모와 토지 면적 간의 단순 비율 혹은 인구밀도에 대 한 잘못된 논리가 아파트단지 건설을 정당화하는 주요 논거로 동원된다. 김주철과 최상철의 지적대로 “대규모단지의 체계적 건설의 주된 이유는 서울의 지속적인 인구증가에 비해 건축 가능 용지는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Kim et Choe 1997, 200)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서울에 관한 도시계획이나 지리학에 관련된 모든 문헌에 스며들어 있다.13 그러나 서 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은 아파트가 가장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 아니라 연립주택 지구나 달동네이다.
- 1980년대 혹은 1990년대 이전의 단독 주택들도 개량되어 이제는 매우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다. 서울에 지어진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 어디라도 이제는 화장실이나 수도 등 최 소한의 편의시설이 실내에 있다. 새로 짓는 집들은 연탄 난방이 아닌 가 스보일러를 설치한다. 이러한 변화는 잠실단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서, 1996년에는 이미 13평에서 15평의 주택에 사는 주민의 80퍼센트가 연탄 난방을 가스보일러로 교체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아파트의 성공 요인 은 현실로서의 아파트가 인기를 끌었다기보다는 한국인들이 '현대적 주 택'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가 인기를 끈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 다. 기술의 진보는 순수하게 한국적인 산물이었음에도 서구적인 것으로 이미지화된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도식 안에서 서구식 모델' 이 누리는 권위는 아파트를 현대성의 유일한 상징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 현대적인 아파트에서는 어느 정도 마루와 방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 다. 한옥에서 마루는 온돌 난방이 들어오는 바닥에 콩기름을 입힌 한지 를 바른 다른 방들과 달리 나무판을 깔고 난방이 되지 않는다. 아파트에 서 전통적 의미의 방과 마루의 구분은 사라졌으나 어떤 이들은 되살리려 하기도 한다. 방바닥은 전통 한지 장판의 실오라기 문양과 황토색을 모 조한 리놀륨 장판을 깔고 거실에는 원목 마루판을 깐 집도 있었다. 아파 트에서 한옥의 공간 분리는 단순화되어, 마당의 기능을 대신하는 다용도실, 발코니, 현관 등과 나머지 공간들 사이의 대비로 요약된다. 이 대비는 높이를 달리 한다든가 바닥재의 차이 등으로 구체화된다. 현관은 다른 공간의 높이보다 10여 센티미터 바닥을 낮추고 타일을 깐다. 다용도실 과 발코니도 타일을 깔며 높이는 다른 공간과 차이는 없으나, 문턱이 있 어 다른 공간과 분리된다. 바닥재의 차이에 따라 신발 사용 습관이 생겨 나다. 아파트에 들어올 때는 거리의 먼지로 덮인 외출용 신발을 벗고 아 파트 안에서는 양말이나 실내화를 신는다. 다용도실이나 발코니로 나갈 때는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는다. 신발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이렇게, 안과 바깥 사이에 놓인 전환적 장소로서 한옥이 갖고 있는 한국 고유의 가정 공간 구조를 보여 준다. 이처럼 한국 아파트의 특별한 구성 은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토로했던 한옥의 특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전통적인 움직임(특히 음식을 준비할 때 신을 끊임없이 벗고 신는 것)을 그 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의 공간 구성과 각 장소의 용도는 한옥 구조를 재구성한 것임을 확인시킨다. 넉넉한 저장 공간을 갖춘 가정 공간은 구심성을 띠며 마루를 향해 열려 있다. 반면 늘 안주인이 차지하는 큰방은 은밀하고 엄숙한 '중심' 으로 남는다. 외부 세계에 대해서 굳게 닫혀 있기는 하나, 아파트는 바깥과 '안' 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가지 형태의 공간을 갖는다. 이 차이는, 바깥은 가정경제 관리의 공간, 안은 일상생활 공간이라는 기능적 구 분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며, 신발을 신고 벗는 특별한 통행 방법으로 나타난다. 한옥의 트집거리가 되는 이 통행 방법은 아파트 구조 안에 체계적으 로 옮겨졌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현대' 혹은 '전통 가옥을 규정하는 문 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실제의 공간 구조와 생활양식이 아니라 한국인들 자신이 그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나 가치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한강의 기적'을 낳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자 한 강의 기적이 만들어 낸 가장 분명한 결과이다. 아파트단지의 건설은 건설 산업 발전에 중요한 계기로 작동했으며 한국의 산업구조 안에서 그중 요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971년에서 1996년 사이, 건설 산업의 생산은 국민 총생산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Kim Jaeyoung et al 1998). 건축, 도시계획, 국토 개발 등 이 분야의 산업은 중간계급에게 많은 일자 리와 아파트라는 형태의 주택을 제공했다. 1998년까지 분양제도에 따른 가격 통제로 지불능력이 있는 계층에게 부의 축적을 가져다준 아파트는 한국의 중간계급을 형성시킨 진정한 공장이었다. 결국 아파트단지는 농촌공동체로부터 도시로의 이주와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적 정체 성의 기준들이 무너지는 가운데에도 이들 신흥 중간계급에게 사회적 인정이라는 상징을 제공했다.
- 1997년에서 199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이후, 경제 위기에 타격을 입은 건축 부문과, 주택 시장의 상황은 중대한 도전이었다. 2000년 11월 현대건설의 심각한 재정난이 야기한 충격과 한국 재벌기업을 대표하던 이 회사의 파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기울였던 노력이 이를 입증한다. 그 러면서 주택 시장을 지원하는 대책들이 줄지어 강구됐다. 특히, 수입이 줄어들어 중도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된 주택 취득자들을 위해, 저금리의 융자 제도가 마련되기도 했다(윤주현 1998; 2000). 주택 시장 위기에 뒤따른 사태와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한국에서 아 파트의 성공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1994년에서 1999년 사이, 주택 가격 지수의 변화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체 도시에서(1995년을 100으로 했을 때) 모든 형태의 주택을 포괄하는 주택가격지수는 1997년에서 1998년 103.5에서 91 이하로 하락했으나, 1999년과 2000년을 거치면서 곧바로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이러한 상황의 호조는 서울과 중간 규모의 도시에서 가장 현저했다. 대한주택공사 1999, 162), 이후 조사에 따르면, 건축 부문의 중 소기업들이 잇달아 파산하면서 한국의 주택 구입자들이 중소기업에 대 한 신뢰를 잃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대기업의 아파트 시장이라는 것이며 여기서 현대건설의 에피소드가 빚어졌다. 따 라서 경제 위기는 건설 분야 대기업들이 건설한 아파트단지의 품위를 더 욱 확고하게 유지시켜 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과 2001년 주택정 책의 목표를 통해 표현됐다. 50만 호 건설 목표 중 3/4이 아파트였고, 2002년 주택보급률 100퍼센트를 겨냥했다(장성수 2000).
-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프랑스인들은 대단지 아파트에 흥미를 잃 었다. 물론 1960년대 처음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될 당시에는 중간 계층 의 젊은 부부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거 환경이 진정으로 개선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아파트단지 입주자들과 건축가, 도시계획 전문가들에게 대단지 아파트는, 오늘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삶의 상징이었다. 대단지 아파트의 지위가 실추되기 시작한 것 은 1970년대(1974년 1차 오일쇼크)에 들어서면서였다. 결국 1960년대 그곳에 이주한 젊은 부부들에게 대단지의 장기임대아파트(HLM)는 개인 소유의 단독주택이라는 목표를 위해 거쳐가는 하나의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중간계급이 대단지 아파트를 떠났고, 주로 이민 자 출신의 하층민들이 유입되었다. 이 시기부터 도시근린지역의 대단지 아파트는 점점 주변화되었고 생활 시설이 낙후되고 잠재적인 사회문제 를 안고 있는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이렇듯 2005년 가을 이 지역에서 발 생한 폭력 사태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 새로운 초고층 아파트단지 건설에 따른 건폐율의 감소는 지역의 조밀화를 수반하며 용적률의 경우 거의 세 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밀화가 도시 형태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가구 수 는 12퍼센트 정도 증가할 것이지만, 가구당 가족 수의 감소로 인해 단지 전체 인구수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 평수의 증대는 재건축 사업이 가져오는 사회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잠실 3단지의 경우 구단지에 거주하던 주민의 25퍼센트만이 소유주였고 75퍼센트는 세입자 였던 만큼, 아파트 평수가 커지고 전세가가 급등하면 그중 극히 적은 세 대만이 단지에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이 지역을 더욱 상층 중산층화하는 것이다. 전세가의 상승이 재건축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3~4년에 걸쳐 진행 되는 재건축 사업은 그 과정을 통해 사실상 해당 지역의 주택 시장에 엄청난 압력이 된다. 주민의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전세 수요는 그대로 있는 반면 전세 주택의 공급량은 재건축으 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해당 지역뿐 아니라 송파구 전체와 인접 구의 전세가는 전체적으로 상승했다. 광범위한 재개발계획과 대규모의 주택 수요가 연동되는 이러한 메커니즘은 좀 더 부유한 계층이 이주해 오 고 빈곤한 계층이 이 지역을 떠나게 됨으로써 고전적인 사회 변화의 경 로를 밟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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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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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금융위기는 버블의 생성과 붕괴에서 시작된다. 버블은 특히 부채에 의해 조 달된 자금으로 지탱될 때 무너지기 쉽다. 부채로 조달한 자금으로 자산을 구매한 경우, 자산가격에 변화가 없다면 자산과 부채는 균형을 이룬다. 물론 이자를 지급 해야 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해진다. 자산가격이 상승하면 수지균형 상 여분의 부가 창출된다. 그러나 자산가격이 금리의 상승이나 외부 충격에 의해 급격하게 붕괴하면 이전에 창출된 부는 사라지고 수지균형상 손실만 남게 된다. 자 산가격은 하락하더라도 부채는 줄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차입으로 자산을 사들인 사람은 채무불이행에 빠질 수밖에 없다. 주식시장, 부동산 시장 전체가 커다란 가격붕괴를 경험하면 이런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들 의 채무불이행은 곧 은행들의 손실로 이어진다. 은행들이 손실을 보게 되면 금융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은행 간에 신용이 경색되고 이것은 실물 경제로 전염된다. 실물 경제에 자금이 돌지 않으면 기업들이 도산하고, 기업들 은 살아남으려고 고용을 축소한다. 축소된 고용에 의해 실업률이 올라간다. 실직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욱 많은 채무불이행이 발생하고, 이것은 다시 은행들의 손실을 키운다. 이와 같은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이 같은 악순환이 극단적으로 반 복된 결과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이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경우도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이처럼 금융위기의 근간에는 버블의 생성과 붕괴가 먼저 존재한다. 버블의 생성 과 붕괴가 없다면 금융위기가 시작될 이유가 없다. 아시아 위기 당시 한국은 특별한 자산가격의 버블은 없었으나 기업들의 과잉 설비투자로 말미암은 생산시설의 버블이 있었다. 금융위기의 제1막은 버블의 붕괴이고, 제2막은 금융 시스템의 붕괴다.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역시 그러했다.
- CDS의 진정한 문제점은 채권을 보유하지 않은 투기자도 거래에 간단하게 참여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종래부터 CDS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 의해 지적된 문제점은 시장에서 채권 발행액보다 훨씬 많은 CDS가 거래되고 있으며, 그 본질이 채권 보유에 대한 헤지가 아닌 순수하게 '도박'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 판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회사들이 채권만 발행하는 것이 아니며 은행들에 의한 직접금융도 매우 크다. 회사들에 대출해준 금융기관이라면 그 대출에 대한 헤지로 충분히 CDS를 거래 할 유인이 있을 것이다. 이들 회사에 매출 채권 등을 보유한 다른 회사들 역시 마찬가지의 유인을 가질 것이다. 한편 어떤 회사의 도산에 돈을 걸고 싶은 사람이 있 다고 할 때 CDS가 그에 대한 유일한 수단을 제공하느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주식시장에서 그 회사의 주식을 공매도 할 수 있다. 아니면 레포시장에서 해당 채권을 빌린 다음 공매도를 할 수도 있다. 진정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전술한 바와 같이 서브프라임 차입자 전체와 같은 리스크를 AIG와 같은 한 주체가 과도하게 보증을 했고, 그에 따라 AIG와 거래 관계에 있는 금융권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가 일개 보험회사인 AIG에 집중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문제점은 역시 규제의 부재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CDS가 채권투자자들에게 제공하는 신용위험의 헤지라는 순기능조차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다. CDS에 대해서 태산명동 서일필山鳴動 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 요란을 떨더니, 튀어나온 것은 쥐새끼 한 마리뿐이다' 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유겠으나 시장이 CDS에 과민 반 응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CDS의 거래금액=CDS의 위험'이라는 거짓 정보에 현 혹된 투자자들은 미국 증시가 3월 이후 크게 반등하는 국면에서도 여전히 금융 시 스템 붕괴를 확신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또한,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 경제의 크기는 GDP로 측정하는데 GDP란 결국 경제 전체의 총지출에 지나지 않 는다. 따라서 모든 주체가 부채를 변제하려고 지출을 급격하게 줄이면 그 결과 경 제 규모는 급격하게 수축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대차대조표 불황이다. 리처드 쿠가 이야기하는 대차대조표 불황이란 채무초과에 의한 불황이다. 경제 주체가 채무초과가 되는 상태를 피하거나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가능한 모든 지출을 줄이고 오직 변제에 몰두하게 되면 그 결과 경제는 심한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는 말이다. 쿠는 기업이나 가계의 차입 하고자 하는 의사가 없는 상황을 강조하지 만, 대출기관이 차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대출을 꺼리는 상황도 결과는 같을 것이 다. 기업으로 말하면 설비투자도 줄이고 고용도 늘리지 않게 되고, 가계는 소비 지출을 억제하고 오직 빚을 갚는 데 몰두하는 상태다. 대차대조표 불황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통상의 순환적인 불황과는 달리 구조 적인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다. 불황이 끝날 때는 경제 주체들의 대차대조표가 다시 건전성을 회복했을 때다. 이때 건전성을 회복하 기 위해 지출을 줄이는 행위가 경제를 더욱더 위축시키면서 자산가격의 추가하락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 때문에 대차대조표 불황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끝없는 경제 규모의 수축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 대차대조표 불황이 선진국 경제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힌 사례가 1930년대의 대 공황이고, 1990년대 일본의 장기침체다.
- 리처드 쿠에 의하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대차대조표 불황의 전형이었다. 1990년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붕괴로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자산가치는 1천5 백조 엔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 GDP를 평균해 5백조 엔으로 잡는다면 무려 려 GDP의 300퍼센트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러한 자산가치의 붕괴에 의해 일본 기업들의 대차대조표는 심각하게 손상됐다. 자산가치는 하락한 반면 부 채는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업이 채무초과에 빠질 우려에 시달렸다. 그들은 채무초과에 빠지게 되면 금융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설비투자를 통한 새로운 수요의 창출보다 기존의 부채를 청산하는 데 열중했다. 부채 청산은 차입 측의 사정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 금융기관 역시 버블 붕괴 후에는 그동안의 무분별한 신용공급을 반성하고 더욱 엄격한 관리에 나서게 됐다. 금융기관들이 이러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기간은 얼마나 구조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금융구조조정에 10년이 넘는 세월 을 허비함으로써 경기 회복을 지연시킨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통화주의자들은 재정지출에 의한 경기부양을 극렬히 반대한다. 재정지출은 필요가 없으며 오직 통화량만 늘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논리다. 그렇지만 위에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는 물론이고,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봐도 유동성 함정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다. 현대의 일본과 미국의 사례로 볼 때 프리드먼의 이 론이 틀리고 케인스가 옳았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케인스의 유동성 함정과 재정지출의 필요성에 관한 논의는 상식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다.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시장원리주의 경제학자들이 케인스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경제학과 수학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수학이 아니라 상식적인 추론을 통해 경제 이론을 이야기했기 때문 에 수학적으로 정합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만약 인간들이 집합적으로 모여서 행하는 경제 활동 모두를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시장원리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한 것은 미국의 우파 정치세력인 공화당이었다. 이들은 시장원리주의자들처럼 기업의 자유를 최우선시하고 정부 개입의 최소화를 선호했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할 때면 이들은 언제나 정부에 의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에 대해 겉으로는 투덜대면서도 속으로는 환영했다. 표결에 지장이 없는 범위 에서만 국회에서 냉소적 의견을 피력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대안도 없고 이 데올로기를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싫어도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세력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정부주의와 같은 입장으로 중앙은행의 최후의 대부자'로서의 역할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정부에 의한 모든 정책에 사사건 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버블이 붕괴한 후에도 모든 것을 내버려두라는 주장을 한다. 이들의 이론은 공황을 받아들이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시장원리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한 것은 미국의 우파 정치세력인 공화당이었다. 이들은 시장원리주의자들처럼 기업의 자유를 최우선시하고 정부 개입의 최소화를 선호했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할 때면 이들은 언제나 정부에 의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에 대해 겉으로는 투덜대면서도 속으로는 환영했다. 표결에 지장이 없는 범위 에서만 국회에서 냉소적 의견을 피력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대안도 없고 이 데올로기를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싫어도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세력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정부주의와 같은 입장으로 중앙은행의 최후의 대부자'로서의 역할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정부에 의한 모든 정책에 사사건 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버블이 붕괴한 후에도 모든 것을 내버려두라는 주장을 한다. 이들의 이론은 공황을 받아들이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있으나 인터넷에서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리고 그 추종자 중 대부분이 진보주의자들이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학파는 어떻게 보면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배제하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현대적 극 우사상이기 때문이다.
- 투자은행, 헤지펀드, SIV와 같은 감독규제에서 비켜간 금융기관들과 ARS나 머니마켓펀드와 같은 신상품들에 의한 금융이 은행여신이나 회사채시장과 같은 정규 금융의 총액을 한때 웃도는 규모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그림자금융이 현재는 붕괴한 채로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 금액만 해도 10조 달러를 웃돈다. 여기에 더해 자산 역시 담보로서 중요한 금융의 기능을 담당해 왔다. 금융위기 전 과거 수년간 미국의 소비자는 주택을 은행에 설치된 ATM 기계처럼 사용했는데, 모기지에퀴티인출이라는 형태로 많은 돈을 차입했었다. 현재는 주택가격 하락으로 작동하지 않고 끊긴 상태다.
- 마찬가지로 헤지펀드들은 과거 포트폴리오에 있는 CDO를 담보로 프라임 브로커로부터 CDO 액면의 약 85퍼센트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은행들이 자산을 담보로 현금을 빌려줄 때 소위 헤어커트Haircu라는 안전이윤 Safety Margin을 제외한 나머지만을 현금으로 빌려준다. 그런데 CDO는 대략 헤어커트가 15퍼센트 정도였지만 금융위기 이후 이 헤어커트는 거의 80퍼센트 수준으로 올라갔다. 헤지펀드 처지에 서는 더는 자산을 담보로 현금을 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림자금융의 붕괴와 자산을 담보로 한 차입이 어려워진 데 따른 신용의 축소는 어느 통계에도 공식적으로 잡히지 않는다. 이것은 애초부터 M1, M2 등의 통화량을 나타내는 통계에서 빠진 것이다. 그렇기에 그림자금융이다. 이렇게 해서 사라진 신 용은 적어도 수조 달러를 웃돌 것이다
- 백악관 경제자문인 로렌스 서머스 Lawrence Henry Summers는 2009년 여름 영국의 파이낸 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미국 경제는 수출지향적이고 환경친화적이며 소비와 에너지 소비에 도 덜 의존하게 될 것이다. 금융산업보다는 생명공학과 소프트웨어 그리고 토목공학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미국 경제는 부가 편중된 상위 몇 퍼센트의 계층에 의한 성장보다는 중산층에 기반을 둔 경제 가 될 것이다. ... 글로벌 불균형은 해소되어야 한다. 미국이 최후의 소비자 로서의 역할을 그만두게 된다면 다른 나라들도 그에 따라 입장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최근 몇 년처럼 세계가 외환보유액을 쌓아 올리는 데 골몰하는 일은 향후 십 년 동안 점차 축소될 것이다.
미국 정부의 인사로서 무역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서머스만이 아니다. 티모시 가이스너 재무장관도 틈나는 대로 무역 불균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들 모두가 무언중에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라 생각한다.
- 미국은 과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왕성한 소비를 통해 세계 경제 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높은 성장률을 누리고 미국의 소 비자는 값싼 수입품을 소비하는 풍요로움을 누렸다. 그 대가로 중국에서는 3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파티 를 끝내야 할 때가 됐다. 그렇게 해서 쌓인 불균형에 의해 미국이 파괴될 지 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하버드 대학의 경제사학자인 니얼 퍼거슨 Nial Ferguson은 미국과 중국의 공생관계를 차이메리카 himerica 라는 신조어로 비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최근 그는 차이메리카의 이혼이 임박했다고 선언했다. 이제 과거와 같이 경상적자를 키우면서 소비에 의한 경제 성장을 계속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미국의 상식이 됐다. 미국은 경기가 어 느 정도 회생국면에 접어들면 1980년대에 그랬듯이 국제 시스템을 손대는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 표적은 물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수출국일 것이다.
- 19세기 말에서 대공황까지는 금본위제에 의해 통화 시스템이 유지됐다. 금본위 제하에서 각국의 통화는 금과의 교환비율이 정해져 있었다. 또한, 통화의 발행은 그 나라가 보유하는 금의 양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됐다. 금본위제하에서 각국은 무 역에 의해 벌어들인 타국의 통화를 금과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금으로 하는 무역결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금본위제하에서는 이론적으로 어느 나라도 지속적인 무역흑자나 무역적자를 기 록할 수 없다. 만일 어느 나라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누적시키게 되면 그 나라의 금 보유고는 급격하게 불어나게 된다. 금이 불어나면 그만큼 통화량을 늘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통화량의 증가는 호황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부르게 된다. 인플레이션에 의해 그 나라의 상품가격이 상승하면 경쟁력을 상실하 게 된다. 그에 따라 무역에서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유입됐던 금은 다시 국외로 유출되게 된다. 금본위제하에서는 세계 경제가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메 커니즘에 의해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 실제로는 이론과 달리 무역적자를 기록한 나라들은 지속적인 무역적자 탓에 금 의 유출이 지속했다. 그에 따라 경기 부진과 디플레이션을 경험해야 했다. 정부의 불개입이 지속적인 불경기를 불러왔던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부의 시장 개 입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금리 인하나 정부의 지출은 생각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 다. 이때는 아직 케인스가 역사에 등장하기 전이다. 금본위제는 대공황에 의해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금본위제에서 이탈해 버렸다. 미국도 교환비율을 20달러에서 35달러로 바꾸면서 통화량을 대폭 늘리는 조치를 했다. 대공황으로 피폐해진 자국 경제를 살리려고 각 국은 수출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물론 그 수단은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 이었다. 모두가 근린궁핍화정책 Beggar Tity Neighbor Polity 으로 달아난 결과는 세계 무역의 붕괴였다. 한 가지 언급할 사항은 금본위제를 일찍 폐기해 버린 나라일수록 경기 회복이 빨랐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통화체제는 대안을 찾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의 변동환율에 의해 무역 시스템이 망가졌던 교훈에서 고정환율과 같은 금본위제의 장점은 승계하고 단점은 버리는 새로운 제도가 모색됐다. 동시에 국제금융을 촉진 하기 위해 IMF와 세계은행이 탄생했다. 새로운 환율은 세계의 금 70퍼센트를 보유 하고 있던 미국이 달러와 금의 태환비율을 온스당 35달러로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다른 나라들은 자국통화와 달러의 교환비율을 정하고 상하 1퍼센트 안의 범위에서 환율을 유지하기로 했다. 무역의 결제통화는 달러지만, 각국은 원한다면 미국 정부 에 달러를 제공하고 금으로 교환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1971년까지 지속한 이른 바 국제통화의 '브레튼우즈Breton wood 체제'였다. 브레튼우즈는 말하자면 금본위제에 가까운 금환본위제였던 것이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 등으로 재정적자가 누적되고 무역적자에 의한 금의 국외 유출이 계속되자 달러와 금의 태환을 정지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것 이 닉슨쇼크'다. 이때부터 세계는 변동환율체제로 전환됐다. 이후 미국은 금의 보 유량과 무관하게 마음대로 통화를 찍어낼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국제통화는 실질적인 달러본위제가 시작된 것이다.
- 1980년대 초반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과 싸고자 취한 고금리정책은 달러 가치 의 급등을 가져왔다. 그 결과 미국은 경상적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동시에 심각 한 불황에 빠지게 됐다. 그럼에도 달러 가치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플라자호텔에서 미국과 일본, 독일 그리고 이들의 들러리로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5개국의 재무장관이 모인 회합이 있었다. 이 회의에서 일 본의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를 절상시키는 시장 개입을 공동으로 단행한다는 합 의를 했다. 당시 참석한 일본의 재무상인 미야자와 키이치는 훗날 총만 머리에 갖다 대지 않았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고 술회했다. 이로써 엔화는 달러에 대해 50퍼 센트 이상 절상됐다. 일본의 대미 수출은 많이 줄어들지 않았으나 미국의 경상수지 는 흑자로 전환됐다. 그것은 대일 수출이 늘었기 때문이 아닌 유럽에 대한 수출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일본의 버블을 일으키는 간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본은 통화의 강세로 수출의 급격한 하락을 걱정했다. 내수경기를 일으켜 불황을 막고자 저금리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일본은 내수를 활성화하려면 금융정책보다 구조조 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고용안정을 최우선의 정책으로 삼는 일본 정부는 구조조정보다는 저금리를 유지해 내수를 부양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 결과 국외에서 유입되는 엄청난 양의 달러에 의해 국내 유동성이 폭발하기에 이르렀고 주식과 부 동산의 트윈버블이 발생하게 됐다.
- 트리핀의 딜레마란 로버트 트리핀 교수가 1960년대에 지적한 내용이다. 브레튼 우즈체제에서 미국은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달러를 국외에 공급해야 한다. 그래 야 다른 나라들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하고 그 달러로 결제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달러를 외국에 공급한다는 의미는 바로 미국이 경상적자를 기록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경상적자가 누적되면 미국 내에서 외국으로 금이 유출되고 달러의 신인도가 추락한다. 그러므로 달러의 유출과 유입을 동시에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 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미국이 그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결과 브레튼우즈체제는 붕괴했다. 그 후 미국은 막대한 경상적자를 기록했지만 달러의 폭락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달러가 폭락하고 미국의 시대는 끝난다는 예언은 무성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폴 케네디는 1980년대 말 자신의 저서 《대국의 흥망》에서 미국은 몰락하고 일본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예언했다. 그는 일본에서는 아직도 영웅이지만 미국 내에서는 바보취급 당하고 있다.
- 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 주장이 1930년대부터 1970년 전후까지 전 세계의 경제사조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것이 주목할 만한 경제사상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나 유일 하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케인스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주목할 만한 경제학자로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요셉 슘페터를 빼놓을 수 없다. 하이에크는 경제사상적으로 케인스와는 정확하게 대척되는 인물이다. 하이에크 와 케인스의 차이는 결국은 시장에 대한 신뢰의 차이로 귀결된다. 이것은 현대의 신케인스주의와 신고전주의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학파의 대 표격인 사람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경제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유방임주의 Laissez faire라 해도 무방하다. 하이에크는 학문적 업적보다도 《노예의 길 The Road to selfdlom》 이라는 책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집권한 이후에는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됐으나 정작 하이에크 자신은 스스로 보수주 의자로 인식되는 것을 싫어했다. 더불어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글을 통해 보수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 하이에크가 동시대인으로서 케인스의 이론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소원하지 않았다. 《노예의 길》을 읽은 케인스는 그 책의 모 든 내용에 동의하며 그것도 가슴 깊이 동의한다는 편지를 하이에크에게 보냈다. 하 이에크 역시 훗날 케인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은 케인스이며, 그에 대해서는 언제나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이에크는 시카고대학에서 밀턴 프리드먼 Milton Freedman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들은 케인스의 사상이 전 세계를 석권하던 시절에는 세상의 관심밖에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점차 이들 자유시장주의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작은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플레이션이 창궐하면서부터였다.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억 제하기 위해 시장가격에 대해 규제를 도입했지만,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 를 가져왔다. 그러는 와중에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을 중시하는 케인스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정부에 의한 시장 규제를 혁파하자는 운동도 일어나게 됐다. 이 무렵 하이에크는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고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됐다. 하이 에크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면 밀턴 프리드먼은 경제 이론에서 집요하게 케인스 이론을 비판하고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프리드먼은 한때 중앙은행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훗날 중앙은행은 통화량을 경제 성장률과 같은 정도로 늘리는 소극적인 역할만을 해야 한다는 선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경제의 운영을 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기고 정 부는 경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감세를 주장하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집권을 하게 되면서부터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사조를 낳게 됐다. 이 때문에 케인스주의는 퇴조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케인스주의가 완전히 패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한 자유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시장원 리주의자들은 정부의 완전한 무간섭을 주장했고, 실제로 정부의 재정지출이 줄어 들기는 했으나 중앙은행에 의한 금융정책은 오히려 그 강도를 더해갔기 때문이다. 각국은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재정지출로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책에 대해서는 소극적이 됐으나 적극적인 금리정책으로 경기순환에 대처하게 됐다. 그리하여 중앙 은행 특히 미국의 중앙은행인 FRB의 힘은 갈수록 커지고 FRB 총재인 그린스펀은 재직 당시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게 됐다. 상아탑에서는 1970년대 이후에도 거시경제학은 신케인스주의와 신고전주의의 대립이 지속했다. 이러한 대립은 최근 폴 크루그먼이 기고한 거시경제학의 역할에 대한 반성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고문은 현재의 경제위기를 거시경제학자들이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 같은 것인데 내용은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한 시장원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의 역할을 제한하고 규제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며 시장의 완전한 자유를 존중하는 신고전주의적 흐름이 1980년대 이후의 거시경제학의 대세가 됐다는 점에서 크루그먼의 이 같은 거시경 제학 비판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할 수 있다.
- 호황이 장기간 지속하면 기업들이든 금융기관들이든 미래의 경기에 대해 낙관론 이 만연하게 된다. 이에 따라 투자 수익에 대한 낙관적인 환상이 생기며, 그 결과 투자가 왕성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어떤 투자든 간에 더 많은 사람이 투자에 나서 게 됨으로써 자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 이 수요가 자산가격을 더욱 끌어올리는 작용을 한다. 지속적인 자산가격의 상승은 많은 사람에게 부채에 대한 태도를 변화 시켜 머니게임에 참가하는 수가 점점 더 늘어나게 한다. 이윽고 경제 전체의 시스 템 속에 상당한 양의 부채가 축적되게 된다. 이때가 되면 아주 작은 기폭성을 가진 사건일지라도 경천동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너무 많은 주체가 투자를 하고 자 부채라는 계약상의 의무를 부담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자산가격의 하락이 보 이는 상황에서 부채 상환이라는 의무를 이행하려면 자산을 청산하는 수밖에 없다. 자산가격의 하락이 계속되면 너도나도 앞을 다퉈 일제히 포트폴리오를 청산하는 쪽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 경천동지의 결과를 가져오는 순간을 '민스키모멘트 Minsky Momen' 라 부른다. 이 말은 민스키가 아닌 세계 최대의 채권펀드인 PIMCO의 이코노미스트인 폴 매콜리 가 1998년의 러시아 위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명명한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과정에서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기 위한 민스키모멘트는 서브프라임모기지 대출업 체인 뉴센츄리파이낸셜의 도산이고,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기 위한 민스키모멘트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투자를 경기 변동의 주원인으로 본다. 이에 반해 민스키 는 투자를 일으키려고 조달한 부채의 건전성 그리고 사회 전체의 부채 축적과 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투자 자체가 불안정성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투자를 위해 부채가 얼마나 동원됐는가를 불안정성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헤지금융, 투기금융, 폰지금융: 민스키는 경제 주체가 부채를 얼마나 쌓아 올렸는가에 따라 그 차입 구조를 헤지 금융(Hedge Finance), - 투기금융(speculative Finance), 폰지금융(Ponzi Finance) 의 3단계로 구분한다. 헤지 금융 단계에 있는 채무자는 본업에서 발생한 현금흐름으로 원리금을 지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다. 투기금융의 단계는 본업에서 이자 지급은 가능하지만 원금을 갚으려면 대출을 연장 하거나 다른 곳에서 다시 차입을 일으켜야 하는 상태 다. 폰지금융이란 본업에서 원금은 물론 이자도 지급할 수 없는 상태로 필연적으로 자산의 가격이 올라야만 파산을 면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 민스키에 의하면 금융기관은 전형적인 투기금융의 상태에 있다. 금융기관은 근본적으로 헤지금융의 상태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금융기관은 구조적으로 단기부채인 예금의 비중이 높고 대출은 상대적으로 기간이 길며, 따라서 장단기 미스매치에 의해 필연적으로 롤오버에 의한 재차입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 금융에서 투기금융 그리고 마지막에는 폰지금융의 상태로 위험을 높여가게 된다. 금리가 높아지거나 실물 경제에 타격이 와서 본업에서 들어온 현금흐름으로 이자 나 원금을 지급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헤지금융의 상태에서 투기금융의 상태로 내 몰리게 된다. 붐이 오랜 기간 지속하면 투자에 나서는 주체들이 점점 늘어나고 투자 자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돼 결과적으로는 이자율의 상승을 불러온다. 붐의 지속이 투자를 늘리고 투자 수요가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는 이것이 시스템에 내재한 메커니즘임을 보여준다.
이자가 상승하면 투기금융 상태의 채무자는 이제 폰지금융의 단계로 진입한다. 폰지금융의 상태에서는 원리금을 갚을 수 없는 상태가 지속하면 문제 해결 방법으로 포트폴리오 처분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포트폴리오 청산 때문에 자산가격은 크게 하락한다. 자산가격의 하락은 채무자들을 더욱 곤경에 빠트리고 채무불 이행에 빠지게 한다. 이로써 재무자의 손실유 금융기관의 채무가 되고 이러한 손실 의 누적으로 금융기관 또한 타격을 입게 된다. 금융기관이 살아남으려고 대출심사를 강화하고 신용제공을 거부하기 시작하면 자금의 순환이 막히게 된다. 결국 경제 전체가 신용경색이라는, 일종의 질식상태에 놓이게 된다. 언제나 투기금융이나 폰지금융의 상태에 놓인 채무자들이 자산가격의 붕괴를 가 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산가격의 하락에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이윤을 확보하지 못한 채무자는 자산가격이 조금만 하락해도 파국을 맞이할 수밖 에 없다. 이 안전이윤은 호황이 지속함에 따라 스스로 붕괴하는 경향이 있다. 낙관 이 만연하면 채무자는 기존에 확보한 안전이윤조차 너무 보수적이라고 판단해 스스로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 민스키는 금융 기법의 발전이 버블의 형성과 붕괴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수익을 위해 중개기능을 늘리고자 하는 금융기관의 속성에 따른 것이라 한다. 장기간에 걸쳐 자산가격이 상승하면 사회 전체가 일종의 자기도취에 빠지는 상황이 도래하는데, 그럴 경우 사람들은 가격 하락의 위험에 거 의 무감각해진다. 이때 사람들의 낙관론에 편승하는 위험한 금융상품이 출현하게 되고, 이 상품은 그 자체로 유동성을 늘리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고 버블 형성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민스키의 말을 빌자면 금융기관은 호황기에 접어들어 시장이 경쟁의 격화에 의 해 수익의 기회가 줄어듦을 우려하게 된다. 금융기관들은 수익의 기회를 늘리려고 언제나 금융 혁신으로 신상품을 개발하게 된다. 금융 혁신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현상인데 그것은 금융기관의 수익 기회를 늘리기 위함일 뿐이다. 금융 혁신은 호황 에 이은 안정적인 흐름과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월가를 비롯한 금융시장이 언제나 커다란 베팅에 나서는 시기도 바로 이때다.
- 금융위기의 결과로서 공항이나 부채 디플레이션이 될 것이냐, 아니면 통상의 경기 침체로 끝날 것이냐는 경제 전체의 유동성이나 정부부문의 크기 그리고 중앙은 행의 최후의 내부자'로서의 역할에 달렸다. 즉, 중앙은행에 의한 충분한 유동성 공 급, 정부의 재정지출을 통한 민간 수요의 대체, 중앙은행의 파탄한 금융기관들에 대한 구제 등이 실행된다면 공황은 피할 수 있다. 민스키가 케인스주의자로 불리는 이유는 이처럼 중앙은행과 정부의 적극적인 역 할을 주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스키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자본주의의 제 도적 약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금융의 공기업화를 주장했다. 이점이 그를 통화주의자로 가득한 당시의 경제학계에서 더더욱 비주류 에 자리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민스키의 팽창과 수축 사이클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명하면서도 강력하다. 부 채로 이루어진 투자는 불안정하고 그와 같은 투자를 지탱하는 금융 시스템은 불안 정하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민스키의 독특한 점은 금융에 의한 시스템적 불안정성을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의 내재적 특성으로 자리 매김한 데 있다.
- 민스키는 새로운 금융 기법의 출현을 자본주의 경제에서 호황기에 나타나는 전 형적인 특징으로 묘사했다. 경제가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장기간 호황이 지속하면 서도 안정적인 흐름을 보일 때 금융기관들은 수익을 확대하기 위해 레버리지를 늘 린다. 또한, 새로운 금융 기법을 창안해 내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탄생한 새로운 금융상품은 종국에는 버블의 형성에 이바지하고 금융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킨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경제는 비록 중앙은행에 의해 안정적인 경제흐름을 달성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팽창수축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불안정한 움직 임을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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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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