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장자수업1

인문 2023. 11. 12. 15:54

-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나 지혜 혹은 덕도 없는 것들에 의해 감시되고, 사찰되고, 염탐되고, 지시받고, 법 적 통제를 받고, 번호를 받고, 규제되고, 등록되고, 세뇌되고, 설 교를 듣고, 통제되고, 제약되고, 평가되고, 가치가 매겨지고, 검열 되고, 명령받는 것이다.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19세기 혁명의 일반 관념(Idée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au XIXe siècle)』
- 장자에 등장하는 '거목 이야기'는 말합니다. 쓸모 있는 나무는 베여 대들보나 서까래로 사용되지만, 쓸모없는 나무 는 베이지 않고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국가나 사 회에 내가 어떻게 하면 쓸모가 있을지 고민하지 말고, 나 자신 에게 국가나 사회가 쓸모가 있는지 고민하라는 장자의 도전인 셈입니다. 인재, 즉 체제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격렬 히 거부하자는 것!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향유하자는 것! 크게는 국가나 사회, 작게는 회사나 가정에서 정의를 추구하지 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몸담고 있는 곳에서 쿨하게 떠나자는 것! 2,500년 전도 그렇지만 지금 시대에도 『장 자』가 반체제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는 이유, 체제를 위한 교재 가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책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 습니다.
-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인류학적 스케일에서의 안목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장자가 대붕(鵬)이라는 거대한 새를 이야기한 이유입니다. 대붕은 천하를 벗어나 저 까마득한 북쪽에서 출발해 천하를 벗어난 저 멀리 아득한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여기서 대 붕은 주인-인간과 노예 인간이 구분되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꿈,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다른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삶에 대한 꿈을 상징합니다.

-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가 말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에 관해 함 께 말할 수 있네. 세상이 넓고도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 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발을 디딜 만큼의 땅이네. 그렇다면 발 을 디디고 있는 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땅을 모조리 파고들어 가 황천에까지 이른다면, 그 밟고 있는 땅이 사람에게 쓸모가 있겠는가?"
혜시가 "쓸모가 없지"라고 대답했다.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이 쓸모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네." 「외물」

- 또한 너만 들어보지 못했는가?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 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지락」
- 상대방의 코나투스를 증진 시켜주지 못하면 상대방은 나를 떠나가거나 죽어갈 겁니다. 그 렇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를 보기 싫어하는 것까지도 받아 들이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가 사라지는 것일지라도 기꺼 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각오가 없으면 사랑은 비극으로 귀 결될 테니까요. 그럴 각오까지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버리는 것쯤 못 할까요? 나 자신이 송두리째 죽고, 내가 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것을 유지하고 내가 강하게 유지되는 것은 사랑 의 속성이 아닙니다. 바닷새가 사흘 만에 죽자 노나라 임금은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이 그리 아껴주었는데 왜 죽었을까를 생 각하며 슬피 울었겠죠. 여기에 기괴함이 있습니다. 자신이 죽게 만들고서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라고 탄식할 테니까요.

-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가고 있는데 빈 배가 떠내려와 부딪 힌다면, 아무리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 해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 배에 누군가 타고 있다면, 그 타고 있는 이에게 저리 비키라고 소리칠 것이다. 처음에 소리를 질렀는데 듣지 못 하고, 두 번째 소리를 질러도 듣지 못한다면, 세 번째 소리를 지 를 때는 틀림없이 험악한 소리가 뒤따르게 될 것이다. 전에는 화 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화를 내는 것은, 전에는 배가 비어 있 었고 지금은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산목」
- 이제 공식처럼 외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 것이라는 의식 은 나라는 의식과 함께한다"고 말이죠. 이제야 우리는 "배를 붙 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그 군주가 왜 자신의 배에 부딪힌 다른 배에 분노하는지 알게 됩니다. 배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거 대한 배는 바로 자신의 소유물이자, 나아가 군주로서 자기 자신 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빈 배가 와서 부딪힌 경우 화 를 삭이거나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소유물 을 훼손하는, 혹은 빼앗을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가 없기 때문 일 겁니다. 이제야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어야 한다"는 장 자의 가르침 중 "자신을 비운다"는 말의 의미가 우리 눈에 드러 납니다. '실'이 가득 채운다는 의미라면 '허'는 텅 비운다 는 뜻입니다. 이미 '비운다'는 말에는 어떤 소유 의식의 부정이 전제되어 있죠. 자신을 비운다고 해서 멍하니 의식을 버린다거나 무언가 신비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층간 소음이 들리면 윗집 아이들이 아파트에서도 건강하게 자란다고 생각하고, 내 가 앉아 있는 벤치에 누군가 앉으려 하면 그가 편히 앉도록 엉 덩이를 옮겨주고, 누군가 파스타를 가져가 먹으면 그가 얼마나 배고팠을지 걱정하는 것이니까요. 결국 "자신을 비우자" 놀랍게 도 그 자리에 타자가 들어섭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자 연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비운 사람은 극도로 타자 에 민감한 상태에 있게 되니까요.
- 아이들에게서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지 않 습니다. 불장난은 그냥 불장난이고, 곤충 껍질을 모으는 것도 그 냥 모으는 것이니 목적이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죠. 하 루하루, 순간순간이 행복한 아이들을 질투하는 걸까요. 어른들 은 지혜로운 척하면서 아이들을 훈계합니다. "그걸 하면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매 순간 행복을 뒤로 미루며 행복의 꽁무 니만 좇고 있는 사람들, 불행이 생활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훈계를 하는 걸까요.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결국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은 유위나 노동의 화신이었 던 겁니다. 작은 배가 충돌했을 때 그가 화를 내기 쉬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반대편 땅에 닿으려는 목적을 빨리 달성하는 걸 방해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물을 끓여야 하는데, 가스 불이 잘 켜지지 않아 짜증을 내듯 말입니다.
이제 빈 배 이야기의 의미, 혹은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니 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 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뿐만 아니라, 주어진 순간을 부정하는 목 적의식을 비운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빈 배는 바로 이를 상징합 니다. 빈 배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도 없고 황하를 건너겠다는 목적의식도 없으니까요. 빈 배는 그저 황하의 물결과 즐거운 놀이를 할 뿐이죠. 이 점에서 세상에 노닌다로 번역된 유세(世) 라는 말이 그 은은한 빛을 드러냅니다. '유'라는 동사는 '논 다' 혹은 '여행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여행은 출발과 귀 가의 시간이 정해진, 일정이 미리 잡힌 관광과 같은 것은 아닙 니다. 여행은 즐거우면 지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만두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장자』 편집자는 장자가 제안한 여행에 '소 요(逍遙)'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입니다. 진짜로 한가로운 여행, 목적 없는 여행, 그래서 즐거운 곳이 있으면 머물고 그렇지 않 으면 떠나는 놀이와 같은 여행이 바로 소요유이기 때문이죠. 그 래서 노니는 세상은, 노닐고 있다면, 절대적인 긍정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순간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세계는 무엇과 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니까요. 세상에 노니는 사람은 머 물고 싶으면 머물고, 가고 싶으면 떠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자 유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 모든 사람들이 이 빈 배처 럼 되는 사회가 장자가 꿈꿨던 사회일 겁니다. 빈 배와 빈 배가 떠다니는 세계! 육지에 빨리 이르려는 생각이 없기에 속도도 그 리 빠르지 않은 배들입니다. 물결을 타고 여유롭게 움직일 뿐이 니 충돌할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간혹 부딪혀도 쿵 소리가 아니라 통 소리가 날 겁니다. 그러면 까르르 웃음소리가 이어질 겁니다. 재미난 해프닝이 벌어졌으니까요.

-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 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도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 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 바다 방향으로 여행하 려고 마음먹는다. (...)
물이 두껍게 쌓이지 않으면, 그 물은 큰 배를 실어 나를 수 있 는 힘이 부족하게 된다. 한 사발의 물을 바닥의 움푹한 곳에 부 으면, 갈대는 그곳에서 배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에 큰 사 발을 띄우려 한다면, 그것은 바닥에 붙어버릴 것이다. 물은 얕 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충분히 쌓이지 않으면, 그 바람은 커다란 양 날개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 다. 그래서 그 새는 구만리를 날아올라 자신의 밑에 바람을 두었 을 때에만 자신의 무게를 바람에 얹을 수 있고, 등에 푸른 하늘 을 지고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없게 된 다음에야 남쪽으로 향 하는 자신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
메추라기가 그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는가? 나는 위로 날아오르지만 얼마 오르지 않고 곧 다시 내 려오며, 대부분 수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며 지낸다. 이것 또한 '완전한 날기(飛)'인데, 그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 는가?" 「소요유」
- 대붕 이야기는 자유를 말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그런 데 대붕의 자유에는 묘한 데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날지 못하 고 바람을 기다리는 대붕의 모습에 무언가 한계와 제약이 느껴 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떠받치는 바람이 옅어지면 대 붕은 언제고 추락할 수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물론 이 경우 대 붕은 비행고도를 유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대붕 은 이전보다 더 힘차게 날갯짓을 해야 할 겁니다. 바람이 금방 두꺼워지지 않으면 대붕은 언제고 다시 추락할 수 있습니다. 대 붕이 날갯짓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대붕 의 이미지는 뭐든 할 수 있고 거침이 없어야 자유로운 것이라는 통념과는 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대봉 이야기가 메추라 기를 등장인물로 캐스팅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메추라기는 말합니다. "나는 위로 날아오르지만 얼마 오르지 않고 곧 다시 내려오며, 대부분 수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퍼덕거 린다"고 말이죠. 메추라기는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날갯 짓에 의지하여 납니다. 세속적 통념에 따르면 메추라기야말로 자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날고 싶으면 날고 날기 싫으면 날 지 않기 때문이고, 올라가고 싶으면 날아오르고 내려가고 싶으 면 하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추라기는 자신이 자유롭다 고 당당히 선포합니다. 자신의 비행도 '완전한 날기]', 즉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말입니다. 대붕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메추라기가 자유로운 것일까요? 대붕과 메추라기의 자 유를 구별할 때, 곤이나 붕이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는 표현이 그 실마리가 됩니다. 여기서 수천 리의 크기는 상징적으로 독해해야 합니다. 내가 크다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협소하다는 의미입니다.
- 이제야 우리는 대붕 이야기의 진정한 신스틸러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람입니다. 철학적으로 바람은 내 세계의 협소 함을 폭로하는 타자를 상징합니다. 타자와 함께하면 나의 세계 는 커지고 그만큼 나도 커질 겁니다. 사랑이 아니어도 타자나 타자적 사건과 마주친 사람이 얼마나 커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 과거의 나나 협소했던 세계로는 다시 돌아 갈 수 없죠. 아니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겁니다. 곤으로 있 던 그 갑갑한 곳으로 대붕이 어떻게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바람을 느꼈고 바람을 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대붕 이야기가 사실 바람 이야기이고, 장자가 바람의 철학자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자는 바람의 이미지로 사유했던 거의 유일한 철학자입니다. 그래서 아마 장자 편집자는 장 자』를 여는 첫 번째 이야기로 대붕 이야기를 선정했을 겁니다. 반면 기존 체제와 기존 질서를 옹호했던 철학자들은 바람 이미 지보다는 다른 안정적인 이미지를 선호합니다. 대표적으로 논 의 「야 편에서 공자는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산만큼 바람에 동요되지 않는 것도 없으니까요. 심지어 동양 의서 『황제내경(黃帝內經)』마저도 풍(風), 즉 바 람을 모든 병의 시작이라고 저주합니다. 그래서 찬바람을 맞아 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죠. 한마디로, 풍을 맞지 않으려면 집 밖 으로 함부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학이란 항 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장자라면 다르게 이야 기하겠지요. 겨울에 따뜻한 방에만 머물면 몸은 약해질 거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긍정하며 뛰어놀라는 거죠. 그럼 우리 몸은 더 강건해지리라는 겁니다. 물론 한두 번의 감기나 몸살은 각오해야만 하죠.

- 환공이 회당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당 낮은 곳에서 수레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나무망치와 끌을 밀쳐두고 올라와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말했다.
윤편이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라고 묻자 환공은 "그는
죽었다"라고 대답했다.
윤편은 반문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가 아닙니까?"
환공이 말했다. "수레바퀴 깎는 장인인 네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논의하려 하는가! 만일 네가 자신의 행위를 해명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일 그러지 못하면 너는 죽을 것이다."
윤편은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저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겁 니다. 바퀴를 깎을 때 끌질이 느리면 끌은 나무에서 미끄러져 제 대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빠르면 끌은 나무에 박혀 빠지지 않습니다.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 는 것을 저는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 입이 있어도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끌질하는 동안 몇몇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제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제 아들도 또한 제 게서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이 일흔이 되도록 제가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천도」

- 남백자기가 상의 언덕에서 노닐다 거대한 나무와 마주쳤는데, 그 나무는 특별한 데가 있었다. 말 네 필이 끄는 수레 천 대를 매어놓아도 그 나무의 그늘은 수레들 모두를 가릴 만했으 니까.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나무인가? 이것은 반드시 특별한 재목일 것이다!"
가느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구부러져 있어서 들보나 서까래로 만들 수 없고, 그 거대한 뿌리를 내려다보니 속이 푸석 푸석해서 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잎사귀들을 혀로 핥으면 입 안이 헐어 상처가 생기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람들을 사흘 동안 이나 미쳐 날뛰게 할 것 같았다.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재목이 아닌 나무여서 이렇 게 거대한 나무로 자랐구나. 아! 신인(神人)도 그래서 재목이 아 니었던 거구나!" 「인간세」
-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먹고살 길이 있기에 주인의 감시를 피해 탈출하려는 노예가 그나마 나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도망가지 않습니다. 물 론 특정 자본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지만, 임금노동자는 생계 를 위해 반드시 제 발로 다른 자본가를 찾아가야 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새로운 자본가에게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어필 할 겁니다. 먹이를 얻으려고 "저는 튼튼하고 일을 잘하니 부려 주세요" 하며 찾아온 기묘한 말이 바로 임금노동자인 셈입니다. 과거의 노예나 말에게 임금노동자는 미친 노예나 혹은 미친 말 로 보일 겁니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특정 회 사는 떠날 수 있다고, 그래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 책과 교재, 즉 북(book)과 텍스트(text)의 차이를 생각하면 인 재의 논리가 우리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내가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이 책이라면, 남이 읽어야 한다고 강 요해서 읽는 것이 바로 교재입니다. 책은 하품을 유발하지 않지 만 교재는 하품을 넘어 졸음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 다. 책은 읽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반면 교재 는 읽기 싫어도 봐야 합니다. 시험도 봐야 하고, 그 결과가 진학 이나 취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니까요. 교재는 나의 재능을 입 증하는 관문인 셈이죠. 그러니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가깝게는 성적과 스펙, 최종적으로는 취업을 위한 수단 입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읽는 책과 자신을 통제하는 혹은 통제할 타인을 위해 읽는 교재는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거리만큼 다릅니다. 책이 사라지고 교재만 남았다면, 이제 정말 주인의 삶은 꿈꾸기 어렵게 된 겁니다. 남에게 쓸모 있는 길을 가느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돌볼 여력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과거 중국의 전국시대도 현재 자본주의 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 재가 되지 않으면 굶어 죽고, 인재가 되면 살아도 죽은 것과 진 배가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도 죽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해도 죽은 것이라면, 같은 말이지만 쓸모가 없어도 베이고 쓸모가 있어도 베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체제를 떠나서도 살 여지가 있었던 시절, 아니 그럴 용기가 있었던 장 자의 시절, 신인이 아직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한 날입니 다. 쓸모없어 좋은 날, 그날은 언제쯤 올까요?

- 양주가 송나라로 갈 때 어느 객사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객사 주인에게는 부인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아름답고 한 명은 못생겼다. 그런데 못생긴 부인은 귀한 대접을 받고, 아름 다운 부인은 홀대를 받았다.
양주가 그 이유를 묻자 객사의 어린아이가 말했다. “아름다 운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아름 다운 줄 모르겠습니다. 못생긴 여자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못생긴 줄 모르겠습니다."
양주는 말했다. "제자들은 명심하라!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자신이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어디에 간들 아 낌을 받지 않겠는가!"  「산목」
- 사실 미인 이야기는 '객사 이야기'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객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허영의 세계, 혹은 허영이 지 배하는 세계를 상징하니까요. 미녀뿐만 아니라 나머지 객사 식 구들, 심지어 추녀까지도 모두 자신의 허영을 충족하기 위한 투 쟁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장자는 객사 전체를 인정 투쟁의 장이 자 허영의 감옥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철학자이기 에 앞서 장자가 일급 소설가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이 야기의 기본 모티브가 미인과 관련되었기에 기억하기 쉽게 미 인 이야기라고 부르지만,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 게 이야기할 때 객사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어쨌 든 이제야 우리는 미인 이야기가 표면적으로 왜 겸손을 강조하 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비 교우위에 서려는 욕망을 가진 인간, 즉 허영의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고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인간은 허영의 존재가 되어 타인들에 대해 비교우위에 서려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비교 우 위에 서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비교 개념과는 무관한 삶에 들어가려는 장자의 분투하는 모습이 분명해질 겁니다. 다 행스럽게도 우리는 루소라는 철학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 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자신의 진정한 주저 『인 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에서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우리 인간을 허영의 존재 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죠. "각자의 지위와 운명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거나 해가 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정신 이나 미모, 체력이나 재주, 장기나 재능 등에 의해서도 결정되 었다. 그리고 이런 자질을 지닌 사람들이라야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실제로 갖추든지 적어도 갖고 있는 척이 라도 해야만 했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실제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고 이 차이에서 엄숙한 겉치장과 기만적인 책략과 이 에 따른 모든 악덕이 나왔다." 여기서 각자의 지위와 운명'이라 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미 지배/피지배라는 위계질서, 그 사 이에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복잡한 신분 질서가 구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서러운 일이지만, 이제 대부분의 인간은 파란만장한 자유보다는 평온한 굴종에 적응하고 만 것입니다. 도망쳐서는 살 수 없어서 도망치지 않는 노예와 같은 신세죠.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등장하는 가장 유 명한 말,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능가능하다"는 말 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루소의 말이 서늘한 이유는, 지금 현재 우리 대부분이 다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는 취업을 하든 무엇을 하든 돈을 주는 사람을 떠나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도망을 생각하지도 못했던 과거 노예나 지금 우리나 자신의 필요를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억압체제는 우리에게 먹이를 주지 않을 테니까요. 자신이 쓸모 가 없더라도 쓸모 있는 척이라도 해야만 합니다.

-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준 큰 박 씨를 심었더 니 거기서 다섯 섬이나 담을 수 있는 박이 열렸다네. 거기다 물을 채웠더니 너무 무거워 들 수가 없었지. 쪼개서 바가지를 만들었더 니, 깊이가 얕고 납작해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네. 박이 놀랄 정도로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무용하다고 생각해 깨뜨려버렸네."
장자가 말했다. "여보게, 자네는 큰 것을 쓸 줄 모르는군. 송나 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약을 손에 바르고 무명을 빨아서 탈색하는 일을 대대로 해왔다네. 어떤 이방인이 그 말을 듣고, 금 일백 냥을 줄 터이니 약 만드는 비방을 팔라고 했지. 그 사람은 가족을 다 모아놓고 의논하기를 '우리가 대대로 무명을 빨아 탈색시키는 일을 했지만 기껏해야 금 몇 냥밖 에 만져보지 못했는데, 이제 이 약의 비방을 금 일백 냥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팝시다'라고 했다네. 그 이방인은 오나라 임금 에게 가서 그 비방을 가지고 유세를 했지. 마침 월나라 임금이 싸 움을 걸어오자, 오나라 임금은 그 이방인을 수군의 대장으로 삼았 다네. 결국 그 이방인은 겨울에 수전을 벌여 월나라 군대를 대패 시켰다네. 오나라 임금은 그 사람에게 땅을 떼어주고 영주로 삼았 지.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동일했는데, 한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었고 다른 쪽은 그것으로 무명 빠는 일을 면하지 못한 것은 사 용한 바가 달랐기 때문이지. 자네는 어찌하여 다섯 섬을 담을 수 있는 박으로 큰 술통을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놓고 즐길 생각 을 못 하고, 깊이가 너무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만 걱정 하는가? 자네는 아직도 '쑥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 「소요유」
- 손약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장자 사유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문맥주의 혹은 맥락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 콘텍스트주의(contextualism)입니다.
제자백가 대부분이 텍스트(text)에 집중했을 때, 장자만이 콘텍 스트(context)에 주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20세기에 들 어서야 서양은 본격적으로 콘텍스트주의를 숙고하게 되죠. 모 두 비트겐슈타인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젊은 시절의 주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의 의미는 세 계를 지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강력한 텍스트주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 성숙해지면서 그는 콘텍 스트주의자로 변합니다. 이때의 주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라는 책에서 그는 "언어의 의미는 쓰임 [use]에 있 다"고 말하니까요. 동일한 말이라도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따 라, 혹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며 소를 잡는데, 설컹설컹, 썩둑썩둑, 칼 쓰는 동작이 리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소 잡 는 것이 무곡 <상림(林)>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 <경수( >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다.
이에 문혜군이 말했다. "참 훌륭하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 에 이를 수 있을까?"
포정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이고, 이는 기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 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온전한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神)으로 조우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소의 고유한 결을 '따르기()'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푸주한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푸주한이 달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뼈 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간 이 칼로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 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 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곳처럼,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하지 만 매번 근육과 뼈가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 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삶의 기름'이 무엇인지 터득했노라." 「양생주」
- 중요한 것은, 이론적 지식은 실천적 지식과는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실천적 지식을 방해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든 문자와 숫자로 기억하고 분류하고 통제하며 예측하려 하니, 현실을 체험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배우기 힘든 법입니다. 삶 에서 만나는 타자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혹은 타자와 '같이하면 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삶도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육체노동 자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것이 타인이든, 소이든, 나무이든, 물고기든, 철이든 티타늄이든, 혹은 땅이든 물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죠. 반면 상명하복에 포획된 정신노동은 삶의 세계에서 조우하는 타자와 제대로 관계하기 어렵습니다. 지배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타자는 우리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이제 사무실에 서 나와 햇빛이 찬란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 영상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내비게이션에서 눈을 떼고 창가로 불어들어오는 바람과 꽃 내음을 느껴야 합니 다.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는 '표상된 상황들(vorgestellte Situationen)'과 '체험된 상황들(erlebte Situationen)'을 구별한 적이 있 습니다. 이제 우리는 체험된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 상황은 나만이 아니라 타자와 어울려야 만들 수 있습니다. '포 정해우(解)'라는 고사의 기원인 포정 이야기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입니다. 체험된 상황이 좌절감을 안기지 않도록 만 드는 팁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 남곽자기가 탁자에 기대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듯 보였다. 그 앞에 시 중들며 서 있던 안성자유가 물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몸은 진 실로 시든 나무처럼, 마음은 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오 늘 탁자에 기대 앉아 있는 사람은 어제 탁자에 기대 앉았던 사람 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곽자기가 말했다. "자유, 현명하게도 너는 그것을 질문하 는구나!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었는데, 너는 그것을 아느냐? 너 는 사람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직 땅의 피리 소리를 들 어보지 못했을 수 있다. 너는 땅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 직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안성자유가 물었다. "감히 그 의미를 묻고 싶습니다." 남곽자기가 말했다. “대지가 기운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구멍이 성난 듯이 울부짖는다. 너는 무섭게 부는 바람 소리 를 듣지 못했는가? 높고 깊은 산이 심하게 움직이면 백 아름이 나 되는 큰 나무의 구멍들, 마치 코처럼, 입처럼, 귀처럼, 병처 럼, 술잔처럼, 절구처럼, 깊은 웅덩이처럼, 좁은 웅덩이처럼 생 긴 구멍들이 각각 물 흐르는 소리, 화살 나는 소리, 꾸짖는 소리,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탁하게 울리는 소리, 맑게 울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낸다. 앞의 것들 이 '우우' 하고 소리를 내면 뒤의 것들은 '오오' 하고 소리를 낸 다. 산들바람에는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 거센 바람에는 큰 소리 로 대답한다. 그러다 사나운 바람이 가라앉으면 모든 구멍들은 고요해진다. 너만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하거나 살랑살랑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가?"
안성자유가 말했다. “땅의 피리가 온갖 구멍들이라면, 사람의 피리는 대나무관들을 붙여 만든 악기들이군요. 감히 하늘의 피 리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남곽자기가 말했다. “만 가지로 다르게 소리를 내지만 자신으로부터 나오도록 해서 모두 자신이 취한 것이다. 그렇게 소리 나도록 한 것은 그 누구인가!" 「제물론」

-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요임금이 천하의 사람들을 다스리고 바다 안의 정치를 평정했 다. 그런데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만나고 나서, 그는 멍하니 천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소요유」
- 네 선생 이야기의 후반부 요임금 이야기는 송나라 상인 이야 기만큼 짧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을 다스리고 바다 안의 정치 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 요임금은 중국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 니다. 하지만 요임금은 "막고야라는 산, 분수 북쪽에 살던 네 명 의 선생을 만나고 나서 멍하게 천하를 잃어버리게 되죠." 이 짧 은 이야기를 맛보려면 '천하'와 '네 선생'이라는 단어가 그 실마 리가 될 수 있습니다. 천하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하늘 아래'라 는 뜻입니다. '하늘하늘의 아들-정신노동자-육체노동자, 즉 '천(天)-천자(天子)-대인(大人)-소인(小人)'으로 이루어진 국가질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천하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국가 질서가 지상(地上)의 모든 곳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물론 요임금은 처음에는 국가질서가 모든 곳에 통용된다고 믿었습 니다. 설령 자신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도 국가질서 는 작동하리라 확신했던 것입니다. 마치 월나라도 모자를 쓰리 라 믿었던 송나라 상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막고야라는 산, 분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만나면서 국가질서가 미치지 않는 외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수(水)는 황하 북쪽에 서 황하로 흘러들어오는 지류입니다. 유목민들이 살았던 중국 북쪽 초원지대였죠. 그곳 네 명의 선생은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 았던 월나라 사람들처럼 국가질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죠. 바로 여기서 요임금은 '천천자대인 소인'이라는 피라미드 지배 구 조가 우물 안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이 제 '네 선생'이라는 표현, 구체적으로는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생각해보죠.
국가질서든 종교 질서든 일자와 다자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 습니다. 신은 하나이거나 최고신이 존재합니다. 이 일자가 만물 을 관장하는 것이죠. 국가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자는 한 명 입니다. 이 한 명이 모든 피지배자를 지배할 때 인간 사회가 질서와 조화를 달성했다고 하죠. 그런데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은 일자와 다자의 구조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 생이라 생각하고 서로를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네 선생이 있었 으니까요. 한 명의 천자와 네 명의 선생의 만남! 이는 상명하복 의 국가질서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와의 마주침을 상징합 니다. 월나라라는 외부성과 마주쳤을 때, 송나라 상인에게는 세 가지 행동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송나라로 되돌아오는 것, 폭력 적으로 월나라를 송나라로 개조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 나라를 버리고 월나라에 몸을 던지는 것! 마찬가지로 요임금도 세 가지 행동이 가능합니다. 중국으로 돌아오는 것,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을 정복하는 것, 그리고 그곳에 머물며 '다섯 선 생' 중 한 사람이 되는 것! 역사적으로 보아 요임금은 첫 번째나 두 번째를 선택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네 선생 옆에 머문 것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요임금은 천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상천하(天下)! 천하를 잃어 땅에 매장한 겁니다. 천하라는 관념 자체가 죽은 셈이죠. 다섯 번째 선생이 된 요임금을 따라 국가질서에 포획된 모든 이 들이 차례차례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선생이 되어가는 것! 어느 송나라 철학자의 꿈은 바로 이것입니다.

- 설결이 스승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외물에서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 측면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면 외물이란 알 수 없다는 겁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모르는 것 이 아니라고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사 실 아는 것이 아니라고 알 수 있겠는가? 이제 시험 삼아 자네에 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 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이 '올바른 거주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 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 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이나 여희는 사 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버리고, 사슴은 보자마 자급히 도망가버린다네. 이 넷 중 어느 쪽이 '올바른 아름다움' 을 안다고 하겠는가?" 「제물론」

-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 도 계속 앎을 추구하려는 자는 더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 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그러 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 버이를 기를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양생주」
- 집과 학교를 떠나면 원칙적으로 우리는 타자와 무관하게 내 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미성숙한 아 이가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라캉의 표현을 빌리 자면, 이제 "나는 나의 욕망을 욕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불행히도 국가로 상징되는 억압체제가 탄생한 뒤로 어 른으로 가는 길은 무한히 멀어지고, 심지어 막히게 됩니다. 강 력한 상명하복체제와 경쟁체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으니까요. 집이나 학교보다 더 냉혹한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 니다. 19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폐까지 스 며들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고 맙니다. 인류학적 차원의 구조적 상처가 치유되기는커녕 이제 골수까지 새겨지는 형국이죠 
- 오히려 유년 시절이나 학창 시절이 그리워질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어른이 되는 길은 생각 이상으로 단순합니다. 집이나 학교 를 떠나듯 국가나 자본주의를 떠나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국 가나 자본의 질서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믿는다는 데 있습 니다. 심지어 국가나 자본의 질서를 강화하고 타인에게 강요하 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마보이나 마마보다 무서운 국가보이 나 국가 혹은 자본보이나 자본걸이라는 괴물이 되고 마는 겁 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유년 시절이나 학창 시절 우리는 부모나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한 적이 있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반항함으로써 부모나 선생님의 관심을 받으려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나 선생님이 원하지 않지만 자신이 원해서 몰래 무언가를 하는 행동도 가능합니다. 부모나 선생님 이 원하는 것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팽팽하게 맞서던 경험입 니다. 이 경우 우리는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게 됩니다. 부모의 왕국이나 선생님의 왕국이 아닌 나만의 왕국은 이렇게 자라게 됩니다.
- 내경(黄帝內經)』등 동양의학 전통에 따르면, 독맥(督脈)은 생식 기에서 등 뒤로 척추를 거쳐 뇌까지 흐르는 맥으로 양기(陽氣) 를 관장합니다. 그래서 독맥적인 것을 따른다(督]"는 것은 척 추로 상징되는 당당함과 양기로 상징되는 경쾌함을 기준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당하고 경쾌한 삶! 억압체 제를 떠나거나 극복하지 못해도, 아니 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 복할 때까지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가치입니다.

- '큰 앎은 여유로워 보이고 작은 앎은 분별적이네. 큰 말은 담백하고 작은 말은 수다스럽네.'
그것이 잠잘 때는 혼들과 교류하고, 그것이 깨어날 때는 몸이 열린다. 함께 접촉하는 것과 얽혀 날마다 마음은 다툰다. 느린 마음, 깊은 마음, 내밀한 마음.
'작은 공포는 겁먹어 보이고, 큰 공포는 넋을 잃어 보이네.' 그것이 쇠뇌를 발사하듯 표현된다는 것은 그것이 옳고 그름 을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맹세하듯 머문다는 것 은 그것이 우월한 것()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가을과 겨울처럼 쇠락해진다는 것은 그것이 나날이 쇠약해진다 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자신이 하는 일에 빠져들면 더 이상 회복시킬 수 없다네.'
그것이 밀봉한 것처럼 막힌다는 것은 그것이 늙어 새어나간 다는 것을 말한다.
'죽음을 가까이하는 마음은 다시 활기차게 만들 수 없다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한탄, 변덕과 고집, 성 급함과 자만, 불손함과 가식 등등은, 음악이 빈 곳에서 나오고 이슬이 버섯에서 맺히는 것처럼, 밤낮으로 우리 앞에서 교차되 지만 그것이 싹트는 곳을 알지 못하겠구나! 그만 되었다! 이제 충분하다! 아침저녁으로 이것들을 얻어서 살아가고 있구나! 「제물론」
- 보라색 꽃을 경험 하면서 느끼는 풍성한 감정과 삶을 외부로는 400나노미터 파장 의 전자파와 같은 것으로 환원하거나 안으로는 뇌의 신경생리 학적 작용으로 환원하는 것도 동일한 문제를 낳습니다. 기쁨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강화를, 슬픔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경 감을, 행복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지속을, 고통은 마주침의 자 리에서 그 완화를 모색해야만 합니다. 핑크빛 무드 등은 우리에 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결별의 쓸 쓸함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뇌의 특정 표면을 자 극해서 생기는 행복도 늙고 병듦의 고통에 대한 최종 치료제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쓸쓸함이 싹트는 곳, 그 마주침의 장소 에서 새로운 마주침을 꿈꾸며 따뜻함을 싹틔워야 합니다. 마찬 가지로 고통이 싹튼 곳, 그 마주침의 장소에서 새로운 마주침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싹틔워야 하죠.
장자는 인간과 무관한 사물 자체와 마찬가지로 사물과 무관 한 마음 자체도 일종의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라는 것을 알고 있던 철학자였습니다. 마음과 무관한 세계 자체 도 문제지만, 세계와 무관한 마음 자체도 그만큼 문제라는 것입 니다. 그래서 장자는 바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멍도 아닌, 바 람과 구멍이 마주쳐서 생긴 바람 소리에 서고자 했던 것입니 다. 이 점에서 장자는 6세기 말 불교 최고 이론가 다르마키르티 (Dharmakirti, ?~?)의 통찰을 선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르마키르티는 보라색 꽃이라는 의식 대상과 꽃이 보라색이라 는 의식은 필연적으로 함께 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호파람바 니야마 (sahopalambhaniyama)라고 불리는 주장입니다. '동시'나 '함 께'를 뜻하는 사하(saha), '지각'이나 '의식'을 뜻하는 우파람바 (upalambha), 그리고 '필연성'이나 '제약'을 뜻하는 니야마(niyama) 라는 산스크리트어로 구성된 말입니다. 이 주장이 중요한 것은 다르마키르티가 의식 대상을 떠난 마음 자체나 의식을 떠난 사 물 자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집요하게 주장하기 때문입 니다. 절대적 객관주의나 절대적 주관주의를 모두 벗어나려는 그의 의지가 번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 객관주의나 절 대적 주관주의라는 쉬운 길을 걷기 쉽습니다. 핑크빛 무드 등을 켜면 일순간적으로나마 따뜻함을 얻을 수 있고, 뇌의 신경을 약이나 의료 장치로 자극하면 고통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니까 요. 결별이 주는 쓸쓸함을 껴안고 따뜻함을 싹틔운다는 것, 병듦 과 노쇠함이 주는 고통과 공존하며 행복을 싹틔운다는 것! 장자 가 주저하며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입니다. 쓸쓸함에 무드 등 을 켜거나 고통을 달래려 뇌를 자극하는 것보다 힘든 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인 간의 삶이니까요.

- 설결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하니, 지극한 사람은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지극한 사람은 신비스럽지! 넓은 습지가 불타올라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그를 춥게 할 수 없고, 벼락이 산을 쪼개고 폭풍이 바다를 뒤흔 들어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다네. 이와 같은 사람은 구름의 기 운을 타고 해와 달을 몰고 사면의 바다 밖에서 노닌다네. 죽고 사는 일도 그에게 어떤 변화도 줄 수 없는데, 하물며 이익과 손해라는 작은 실마리에 대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제물론」

- 반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그대는 걷다가 지금은 그대는 멈추었소. 조금 전 그대는 앉았다가 지금은 일어 났소. 어찌 그대는 이렇게 무언가를 잡지 못하고 있는 거요?" 그림자가 말했다. “내가 무언가에 의존해서 그런 것일까? 또 내가 의존하는 것 또한 다른 무언가에 의존해서 그런 것일까? 나는 뱀의 비늘과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일까? 왜 그런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왜 그렇지 않은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제물론」

- 지리소라는 사람은 턱이 배꼽 아래로 내려와 있고 어깨가 정 수리보다 높으며 목덜미의 뼈가 하늘을 가리키고 오장의 경혈이 위로 향했으며 두 넓적다리의 뼈가 갈비뼈에 이어져 있었다. 하 지만 그는 바느질과 빨래를 해서 자기 밥벌이를 충분히 했고, 산 가지를 흔들고 쌀을 뿌리며 점을 쳐서 열 사람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었다. 국가가 징병하려 할 때도 이 불구자는 소맷자락을 휘 날리며 징집관들 사이에서 노닐 수 있었다. 국가가 부역을 강제 할 때에도 그는 만성질환으로 부역을 면했다. 심지어 국가가 병 든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줄 때도 그는 세포대의 쌀과 열 묶음의 땔나무를 받았다. 무릇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든 사람' 조차 충분히 자신의 몸을 기르고 천수를 다하는데, 하물며 '자신 의 덕을 불구로 만든 사람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인간세」
- 누군가의 쓸모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쓸모를 사용하는 삶! 바로 이것이 지리소의 삶입니다. 체제에 쓰이지 않으면 못 사는 삶이 아니라, 체제가 없어도 자신의 삶뿐 아니 라 타인의 삶도 돌볼 수 있는 힘! 지리소의 힘입니다. 여기서 중 요한 것은 지리소가 가진 긍정의 정신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 은 그가 불구라고, 다른 사람에 비해 무언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전국시대 때는 노역이나 전쟁으로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팔이나 다리가 있던 때와 현재 상태를 비교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에 절망하며 살 아갔을 겁니다. 배우자와 포옹하기도 힘들고 아이와 산책을 가 기도 힘듭니다. 심지어 불구라는 쑥덕거림과 동정이 싫어 대인 기피증에 빠지거나 술로 나날을 지새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만 지리는 자기 몸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꼽추처럼 허리가 굽었으니 그는 허리 굽혀 하는 일이 편합니다. 바느질과 빨래의 고수가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허리가 곧은 정 상인들은 지리소만큼 오랜 시간 허리를 굽혀 일하기 힘들 겁니 다. 혐오감을 줄 만큼 기이한 외모는 지리소에게 종교적 아우라 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다른 외모는 종교적 아 우라만 얻으면 일상적 삶을 넘어가는 영역, 즉 성스러운 영역에 맞닿아 있는 느낌을 줍니다. 지리소가 주역(周易) 점을 쳐서 복 채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지리는 진정한 삶의 요리사 였습니다. 진짜 요리사는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최대한 근사한 요리를 만듭니다. 반면 미숙한 요리사는 말합니다. 당근이 없어 서, 소고기가 없어서 요리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절망합니다.

- '타자가 아니라면 나도 없고, 내가 아니라면 취할 것도 없다.' 이것도 근사한 말이지만 그렇게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만일 참된 주재자가 있다 해도 그 징후를 알 수 없다. 작 용한다는 것은 이미 믿을 수 있지만 그 형체를 볼 수 없고, 실정 은 있지만 그 형체가 없다. 백 개의 관절,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장기가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나는 어느 것과 더 가까울 까? 당신은 그것들 모두를 좋아하는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들은 신하나 첩이 되는 것일까? 혹은 신하나 첩들은 서로 다스리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혹 은 그것들은 차례로 서로 군주와 신하가 되는 것일까? 혹은 거 기에 참된 군주가 있는 것일까? 실정을 파악하든 파악할 수 없 든, 그 참됨에 대해 보태거나 덜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물론」

- 대저 '이루어진 마음(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 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 을 스스로 선택한 자만이 스승이 있겠는가? 우매한 자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스승을 가지고 있다. 아직 마음에서 이루어 진 것이 없는데도 시비가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 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과 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이 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어서,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여기면 설령 신비한 우임금이라도 알 수 없는 일일 텐데, 나 또한 어찌하겠는가! 「제물론」
- 결국 모든 시비는 가볍게 떠나지 못해서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 다. 국가를 떠나지 못하니 같은 국적의 사람들과 시비가 벌어집 니다. 학교를 떠나지 못하니 급우들과 시비가 벌어집니다. 회사 를 떠나지 못하니 동료들과 시비가 생깁니다. 간단히 비유하자 면, 결혼을 했기에 남녀가 갈등에 빠진다는 겁니다. 연애할 때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상대를 떠나버리면 그만일 겁니 다. 떠나면 살 수 없거나 사는 것이 힘들어질 때, 그리고 내가 머 무는 곳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함께 있을 때 시비는 불가피합니다. 자신은 옳고 상대방이 그르다는 것을 스 스로나 타자 혹은 제삼자에게 입증해 상대방을 쫓아내려는 정 착민의 무의식적 의지입니다.
- 정착민의 삶과 '성심'의 탄생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영토국가로 상징되는 정착생활이 확장되고 심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시기에 중 국 대륙은 극렬한 시비 문제에 빠져들고 맙니다. 부국강병의 패권 다툼이 정착생활의 안정성을 위기 상태로 내몰았기 때문입 니다. '성심 이야기'에 등장하는 '성심(心)' 개념은 이런 문맥 에서 읽어야 합니다. 사실 성심은 장자』에서도 제일 유명한 말 중 하나입니다. "성심을 버려라"라는 말을 아마 들어본 적이 있 을 겁니다. "선입견을 버려라" 혹은 "편견을 버려라"와 같은 뜻 으로 쓰이죠. 불행히도 성심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 습니다. 성심은 '이루어진 마음'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것 이 무엇이든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어떤 삶의 조건에서 이루어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인간 가축화, 영토국가 그리고 신분 질서의 확립으로 완성되는 정착 생활이 문제입니다. 기원전 2000년 전후 무력으로 농경지를 점 령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이미 기원전 6000년 전후 농경생활을 하던 농경인들은 이제 점령자들에게 토지 사용료를 내게 됩니다. 토지를 떠나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농경인들로서 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죠. 이렇게 노동을 안 해도 먹고사는, 아니 더 많이 먹고사는 지배자가 탄생하면서 중국 대륙에 국가가 탄 생한 겁니다. 『시경(詩經)』 「북산(北山)」편은 당시 상황을 노래 합니다.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것 없고, 모든 땅 바닷가 까지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네[溥天之下莫非王土, 率土之濱莫非王 臣]." 바로 이것이 중국 대륙에서 발생한 가축화의 전말입니다. 농경인들은 왕의 신하, 즉 왕신(臣)이라는 이름으로 토지 사용 료는 물론 병역과 부역의 의무도 감당하게 된 겁니다. 자기 마 음에 안 들면 떠나는 유목민과 달리 농경인들은 토지를 떠나서 는 살 수 없기에 벌어진 비극이죠.
- 정착민적 마음, 즉 성심은 내 집, 내 땅, 나아가 내 것이라는 강력한 소유욕과 함께합니다. 반면 유목민은 마음에 들지 않으 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들에게는 내 가 살고 있는 곳이 중심이고 그 바깥은 주변이라는 의식이 없습 니다. 모든 곳이 중심이자 동시에 모든 곳이 주변입니다. 그래서 유목민은 정착민보다 부유합니다. 수십, 수백 킬로미터 반경이 자기 삶의 영역이니까요. 동시에 유목민은 정착민보다 가난함 니다. 어떤 곳도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죠. 내외, 빈부, 생사 등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마음, 바로 이것이 유목민의 마음입니 다. 시비가 유목민에게 낯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그래서 장자 는 "아직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도 시비가 있을 수 있 다”는 주장을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 판했던 겁니다. 성심이 없다면 시비도 없다는 통찰, 혹은 정착 생활이 시비를 낳는다는 통찰입니다. 

- 대개 술에 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질 때, 설령 부상을 입 을지라도 죽는 경우는 없다. 뼈와 관절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만 해로운 일을 당한 결과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그의 신(神)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수레를 탈 때도 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수레에서 떨어져도 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죽 음과 삶 그리고 놀라움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 기에, 외부 사물과 마주쳐도 위축되지 않는다.
술에서 온전함을 얻은 저 사람도 이와 같은데, 자연에서 온 전함을 얻는 경우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성인(聖人)은 자연에 품어져 있기에, 그를 해칠 수 있는 것은 없다. 「달생」
- 자연에서 온전함을 얻다
취객 이야기의 핵심은, 자신의 몸이 있는 곳을 다른 곳과 비 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마음은 몸이 있는 곳을 비교 불가능한 것으로 긍정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달리는 수레 위도, 낭떠러지를 30센티미터 앞둔 곳도, 암벽 중간 매달려 있는 돌출부도, 혹은 어떤 곳이라도 몸이 있다면 마음도 그곳을 편하게 여겨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몸과 교차하는 마음, 즉 신이 가능합니다. 취객 비유를 마치면서 장자는 말합니다. "죽음과 삶 그리고 놀 라움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기에, 외부 사물과 마주쳐도 위축되지 않는다."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나 살아야 만 한다는 갈망이 마음에 가득 차면 우리 몸은 굳어버립니다. 당연히 자신이 직면하는 상황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수 레가 조금만 흔들려도,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발이 조금만 미끄 러져도 우리는 수레에서, 낭떠러지에서 그리고 암벽에서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수레 위를 수레 아래와 낭떠러지를 평지와, 암벽을 땅바닥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수 레에 탄 취객은 저절로 자기 몸과 수레의 운동에 마음을 모읍니 다. 당연히 그는 수레의 운동, 나아가 지표면의 요철을 리드미컬 하게 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레는 뒤집힐 만한 턱을 만나 휘청거릴 수도 있고, 취객이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몸이 공중에 던져질 때도 그는 두려움이 없고, 땅 에 닿는 순간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날아서 편 안하게 땅에 닿을 겁니다. 술로 인해 "그의 신이 온전하기 때문 이죠."

- '세계의 어떤 것도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은 작다고 여길 수 있다. 세계의 그 누구도 일찍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없으니, 팽조는 요절했다고 여길 수 있다. 세 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으니,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
이미 하나라고 여긴다면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이미 하나라 고 말했다면, 말이 없을 수 있을까? 하나와 하나라는 말은 둘이 라 여겨야 하고, 또 그 둘과 하나는 셋이라 여겨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무리 숙련되게 계산 잘하는 사람도 그 끝을 잡을 수 없는데, 평범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없음' 으로부터 '있음'으로 나아가는 경우에도 셋에 이르게 되는데, 만일 우리가 '있음'에서부터 '있음'으로 나아간다면 상황은 얼 마나 나쁘겠는가! 그 이상 나아가지 말고 이것에 따를 뿐이다. 「제물론」

- 안회가 말했다. “저로서는 이제 더 생각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부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공자가 말했다. "재계하라!"(...)
안회가 말했다. "저는 가난하여 여러 달 동안 술을 못 마시고 양념한 음식도 못 먹었습니다. 이 경우 재계라 할 수 있지 않겠 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런 것은 '제사 지낼 때의 재계이지, '심재齋)'가 아니다."
안회가 말했다. "부디 심재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다. "너의 '마음 방향(志)'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 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부합되는 것을 알 뿐이다. 기는 비어서 타자와 조우하는 것이다. 길은 오로지 비움에서만 깃들 수 있다. 이렇게 비움이 바로 심재이니라."
안회가 말했다. “제가 심재를 실천하기 전에는 안회라는 자 의식이 실재처럼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심재를 실천하자 자의 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움이라 하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이제 되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 이 있구나! 위나라에 들어가 그 울타리 안에 노닐 때, 너는 명성 같은 것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들어오면 울고 들어오지 않으면 멈추어라.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애라. 너의 집(宅)을 하 나로 만들어 부득이不得已에 깃들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인간세」
- 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투톱은 유가(儒家)와 묵가(家)입니다. 실제 정치에 영향을 깊이 미쳤던 상앙(BC?~BC 338), 신불해 (申, BC ?~BC 337), 신도(愼, ?~?) 그리고 한비(韓非, BC 280?~BC 233) 등은 자신들이 법가(家)라는 학파에 속한다는 의식은 없 었습니다. 그들은 부국강병의 기술과 논리를 고민했던 현실 정 치가였을 뿐입니다. 반면 유가와 묵가들은 확고한 학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가가 대인(大人)을 정당화하는 사유를 전 개했다면, 묵가는 소인(小人)을 위한 사유를 표방했습니다. 아니 나 다를까,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묵가보다는 유가가 더 권위 있었나 봅니다. 아무래도 소인의 육체노동을 긍정하던 묵가의 입장은 고급 관료를 꿈꾸던 대부분 지식인들과 어울리지 않았 으니까요. 총력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도모하던 당 시 시대 분위기도 묵가의 쇠퇴를 재촉하게 됩니다. 전국시대 중엽, 묵가들은 국가주의나 관료주의를 강하게 표방하면서 당 시 시대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 학파의 창시 자묵적(墨)의 '비(非)', 즉 전쟁 반대론을 포기할 수는 없 었습니다. 소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묵가들은 전쟁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대인이 아니라 소인이었기 때문이죠. 전국시대 중엽 묵가가 점점 지적 헤게모니를 잃어감에 따라 유가는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게 됩니다. 

- 그대와 내가 논변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대가 나를 이기 고 내가 그대를 이기지 못했다면, 그대가 정말로 옳고 나는 정 말 그른 것일까? 반대로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가 나를 이기 지 못했다면, 내가 정말로 옳고 그대는 정말 그른 것일까? 아 니면 그대와 나 둘 중 하나는 옳고 나머지 하나는 그른 것일까? 아니면 그대와 나 모두 옳거나 혹은 그대와 나 모두 그른 것일 까? 나나 그대가 살펴 알 수가 없다면 다른 제삼자도 깜깜하기 만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불러 옳고 그름을 판정하도록 해 야 할까? 그대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하라고 해야 할까? 이미 그대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그가 판정할 수 있겠는가?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하라고 해야 할까? 이미 나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그가 판정할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정하라고 해야 할까? 이미 나나 그대 와 의견이 다른데, 그가 어떻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 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하라고 해야 할까? 이미 나나 그 대와 의견이 같은데, 그가 어떻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면 나나 그대나 제삼자가 모두 살펴 알 수가 없으니, 다른 누군 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제물론」

- 그런 일이 있은 뒤 열자는 스스로 아직 배우지도 못했다 생각 하고 집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마침내 그 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부엌일을 하고 사람을 먹이듯 돼지를 먹 였으며, 모든 일에 특별히 편애하는 일도 없었다. 세련된 나무 조각품이 다시 온전한 나무로 돌아가듯, 그는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섰다. 그의 행동은 어지러워 보이지만 흐트러지지는 않 았다. 열자는 한결같이 이렇게 살다가 자신의 일생을 마쳤다. 「응제왕」
- 열자는 대들보나 세련된 나무 조 각품처럼 체제가 필요로 하는, 혹은 남들이 인정하는 삶을 부정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 의 삶을 죽여야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이제 열자는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자신의 자유를 구 가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냅니다. 그래서 장자는 열자가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섰다"고 덧붙이는 겁니다. 괴연(塊然)을 번 역한 '우뚝'이라는 말이 당당함을 의미한다면, 독()을 번역한 '홀로'라는 말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해보지 않는 단독성을 뜻합 니다. 그래서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선다”는 표 현입니다. 자신의 몸으로 서지 못하면 무언가에 기대고 살아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열자는 자신 의 몸으로 서고자 합니다. 대인이 되어 소인을 착취하지 않겠다 는 의지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힘으로 먹이겠다는 의지이 기도 합니다. "우뚝 홀로"라는 부사는 바로 이 의지가 관철되었 다는 것을 의미했던 겁니다.
- 누군가에게 명령하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 려 하기에, 열자의 삶은 번잡하고 장자의 표현처럼 "어지러워 보일 겁니다. 하긴 밥을 하고 돼지를 기르고 집도 수리하고 빨 래도 하며 의식주와 관련된 일을 몸소 행하는 열자로서는 불가 피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내나 하인 혹은 노예에게 육체노동 을 시키는 대인이 어떻게 열자의 마음을, 메추라기가 어떻게 대 붕의 속내를 알겠습니까. 타인을 지배하지도 않고 타인에 복종 하지 않으려는 자유에의 의지, 혹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타인 을 업겠다는 사랑에의 의지는 "흐트러지지 않은" 열자의 원칙 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허심이 자유와 사랑의 삶, 혹은 타자 와 소통하는 삶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 다. 마음을 비웠다고 밥이 저절로 되고, 돼지가 먹지 않아도 자 라고, 옷이 스스로 깨끗해지는 일은 없으니까요. 마음을 비우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는 즐겁게 밥을 하고 행복하게 돼지를 기르고 개운하게 빨래를 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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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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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뇌 속에는 '망상 활성계 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라는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이는 포유류 뇌의 뇌줄기 뇌간에 있으며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기 능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RAS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이 있습니다. 바로 '잠재의식'입니다. 이는 인간만이 보유하고 있는 고도의 기능입니다.
- 침팬지의 RAS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원시적인 컴퓨터라 면, 인간의 RAS는 최신식 슈퍼 컴퓨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나타난 의식은 '수동 모드'이고, 잠 재된 의식은 '자동 모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RAS의 훌륭한 기능 중 하나는 GPS 시스템입니다. 당신이 잠재의식에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입력하면, 그 다음은 GPS 시스템이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면서 목적지에 데려다줍니다.
오타니 선수는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다!”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잠재의식에 입력하고 피를 말리는 노력을 거듭했 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메이저리거가 된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그 꿈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RAS의 GPS 시스템은 내가 원하는 것을 자주 입력하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그러니 '원하지 않는 것'이나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 저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기준 삼아 꿈을 계속 떠올리고,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RAS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당신의 꿈을 현실로 바꾸어 줄 것입니다.
- 우리의 뇌는 생존을 위한 다양한 리미터'를 가지고 있습 니다. 전형적인 예는 '생명의 리미터입니다. 예컨대 마라톤 에 도전할 때 심장에 무리가 와서 멈출 것 같은 위험을 감지 하면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 명의 리미터입니다. 이 리미터가 없으면 심장이 멈출 때까지 계속 달리게 되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가 잘못 적용되어 생겨난 리미터도 있 습니다. '꿈의 리미터'입니다. 어릴 때 장대한 꿈을 그렸다고 해도,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런 꿈은 절대 실 현될 수 없어!"라는 반응이 돌아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껏 꾸었던 꿈을 쉽게 포기합니다.
아무리 큰 꿈을 그렸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 뒤 '그래, 그런 꿈이 실현될 리 없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뇌는 그 꿈을 이루어야 할 목록'에서 지워버립니다. 오타니 같은 최고의 선수들이 가진 공통점을 하나만 꼽으 라고 하면 저는 망설임 없이 “그들에겐 꿈의 리미터가 존재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합니다. 

- 머릿속에서 바로 '이건 안 돼'라고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 기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타니 선수처럼 '행동하는 것 자체 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선택은 현명하기 는커녕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겁쟁이의 선택일 뿐입 니다.
나아가 그런 삶의 방식으로는 '살아 있다'는 느낌은 도저히 얻을 수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무기로 자 신의 꿈을 이룰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이 성공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입니다.
- 설령 인생을 마칠 때까지 그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도전 하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즉 잘된 '결과'에서 쾌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진정 한 사람의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생이 식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식사의 목적 은 식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식사하는 시간을 즐기는 것 입니다. 슬프게도 인생에서 꿈을 이루는 것에서만 의미를 찾 고,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가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의 만족감도 중요하지만, 식사를 마칠 때까지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그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하다는 이치를 자신의 인생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 무엇보다 자신의 무기를 연마하는 시간을 최우선적으로 확보합시다. 이에 대해 오타니 선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일류 투수가 되겠다거나 일류 타자가 되 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던 것은 아니에요. 좋은 타격을 하고 싶다. 좋은 투구를 하고 싶다, 늘 같은 걸 바라왔죠." 《오오타니 쇼헤이 이도류의 궤적》, 타쓰미출판

- '존'은 스포츠 심리학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신비로운 주제 중 하나입니다. 운동선수에게 '존'이란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미있고 플레이가 잘 된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최고로 쾌적한 심리 상태를 유지하며 플레이할 수 있다.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은 몽롱한 느낌이 든다.
*당시의 내 플레이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 당신도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고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날이 1년에 몇 번은 있을 겁니다. 바로 그날 당신의 '존', 즉 최고의 순간을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찰스 가필드 박사는 '존'에 대 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일상생활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선수들은 마치 자동 조종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그 순간'을 완벽하게 연기하기 시작한다. 선수들은 그 시점의 모든 것에 집중한다. 집중력은 매우 강하고, 행동은 일어나기 전에 예상 할 수 있다.... 선수는 모든 감각으로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행동에 완전히 집중하게 되고, 결국 감각과 행동은 하나가 된다." <피크 퍼포먼스ᄂᄎᄌ>, 베이스볼 매거진사

- 많은 사람들이 '루틴'반복적 일을 과소평가합니다. 하지만 루틴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 간에 같은 일을 하는 것', 당신이 아무리 원대한 꿈을 꾸고 목표를 세웠다고 해도, 이러한 루틴을 무시하면 목표를 달성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같은 일을 3주 정도 지속하면 '습관'으로 굳어 집니다. 자기실현을 위한 습관 기술과 리더십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로빈 샤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하루하루를 사는 대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앞으로 며칠 이 남았으니 오늘은 상관없다는 생각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 이다. 멋진 인생은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처럼 만족스러운 하루하 루의 연속이다. 모든 하루가 중요하고 최종 결과의 퀄리티에 영향 을 미친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상상의 산물일 뿐 이며, 오늘이라는 하루가 있을 뿐이다. 현명하게 써야 한다.”

- 생각과 행동의 관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즉각적으로 작동을 멈출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즉,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컴퓨터의 전원을 강제로 끄는 것과 같은 현 상이 뇌에서 일어납니다.
'이건 불가능해', '이런 꿈같은 이야기는 그만하고 좀 현실 적으로 생각하자'와 같은 부정적인 메시지 또한 말하는 사 람의 방어기제를 작동시켜, 결국 실제로 행동하지 않게 됩 니다.
하기도 전에 '할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그 자체에 문제 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고 패턴이 행동력을 떨어뜨리고, 그 것이 결과적으로 집념을 약화시키고 없애버려 꿈을 이루지 못하게 만듭니다.

- 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원인을 선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메시지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뇌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 '동기 부여 호르몬'인 도파민이라는 신경 물질이 혈액 속에 다량 분비됩 니다.
또한 행복감을 주는 베타 엔도르핀이라는 '쾌감 호르몬'도 점점 뇌 안에 넘쳐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행동력과 집념이 높아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반대로 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발산하면 불안 호르몬인 아드레날린과 공포 호르몬인 노르아드레날린이 뇌 안에 넘 쳐나게 됩니다.
이런 호르몬이 분비되면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발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분비되면 그 독성이 킬러 세포를 손상시켜 몸의 면역력을 떨어뜨립니다. 그 결과 불쾌한 심리적 상황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질병에 걸릴 위험도 높아집니다. '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철저히 없애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짜증이 가라앉습니다.

- 만다라를 자기계발 및 경영 기법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은 일본의 한 컴퓨터 제조사 직장인이었던 마쓰무라 야 스오이다. 마쓰무라는 불교를 공부하다가 만다라를 응용한 만다라트 기법을 고안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만다라트를 이 용한 경영 컨설팅을 시작한 그는 1984년에 지금도 시중에 판매되는 만다라트 수첩을 내놨고, 2008년에는 만다라트 학 회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이론을 정립해 왔다.
이를 스포츠에 도입한 지도자가 있었으니, 바로 오타니 쇼 헤이의 출신 학교 하나마키히가시 고교 야구팀 감독 사사 키 히로시였다. 사사키는 훗날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스스로 꿈을 키우고 그걸 이루는 방법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만다라 트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사사키는 선수들이 저마다 자신의 만다라트를 직접 작성하게 했다.
- 오타니 쇼헤이도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2010년 12월 사사 키의 만다라트 수첩 한 장을 받아서 자필로 빼곡히 채웠다. 책의 처음에서 잠시 소개한 것처럼, 오타니의 '최종 목표는 프로야구 여덟 개 구단으로부터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을 받 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시속 160km', '몸 만들기', '제구', '구 위', '멘탈', '인간성', '운' 등을 '세부 목표로 잡았다. 여덟 개 의 세부 목표는 다시 그걸 위한 실천 사항'으로 둘러졌다. 실 천 사항 중에는 오타니의 그 유명한 '쓰레기 줍기'도 포함돼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타니의 만다라트는 사사키 감독과 오 타니 사이의 중요한 약속이 됐다.

- '사실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오타니 선수의 놀라운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는 에 너지의 원천입니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바버라 프레드릭슨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긍정적 사고' 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애초에 긍정성이란 무엇일까요. 긍정성은 '웃으면서 견뎌내자', '걱 정하지 말자. 항상 기분 좋게 지내자'와 같은 표어가 아닙니다. 그 런 것들은 그저 피상적인 이상일 뿐입니다. 긍정성은 인간 심리의 더 깊은 곳에 흐르는 것으로 감사, 애정, 즐거움, 기쁨, 희망, 감동 등 다양한 감정입니다." 바버라 프레드릭슨, 《내 안의 긍정을 춤추게 하라 Positivity》

- 사실 '운'은 오타니 선수가 말하는 '설렘'과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집니다. 오타니 선수는 '자신에 대한 기대감'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행운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운'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배분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마다의 긴 인생에서 행운이 연속적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불운이 겹쳐서 찾아오 기도 할 것입니다.
운에 관한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리처드 와이즈먼 박사 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운이 좋은 사람의 꿈과 목표는 신기할 정도로 실현된다. 운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는 정반대다. 그들의 꿈과 목표는 허황된 공상과 거 의 다를 바 없다. 운이 좋은 사람에게는 불운을 행운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하지만 불운한 사람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불운은 혼란과 파멸을 가져다 줄 뿐이다.” 《운 좋은 사람의 법칙>, 카도카와 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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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심리학

인문 2023. 10. 27. 11:35

- 융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 교사로 활동했던 리하르트 빌헬름과 친교가 깊었다. 선교 당시 빌헬름은 《주역》이 중국 사람들의 사상과 문화에 얼마나 큰 영 향력을 미쳤는지 깨달았다. 그는 《주역》을 독일어로 번역했을 뿐 아니라, 《주역》이라는 학문을 서양에 널리 알리려고 애썼다. 당연히 융도 친구를 통해 《주역》을 알게 되었고, 곧 누구보다도 흠뻑 그 사상에 매혹되었다.
융이 정립한 정신의학 이론인 내향성과 외향성, 아니마와 아니무스, 공시時性, 페르소나와 그림자 등은 《주역》에 뿌리 를 두고 있고, 이 이론들은 오늘날 일반인도 널리 사용하는 정 신의학 용어가 되었다. 특히 요즘 많은 사람이 몰두하는 MBTI 도 융의 내향성과 외향성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마음의 기능을 사고, 감정, 감각, 직관으로 분류해놓은 이론을 참고한 것이다.
더욱이 융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괘를 뽑아 자신이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할지 결정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쉰 살에 떠난 아프리카 여행 중에도 융은 괘를 뽑았다. 5개월에 걸친 여행 동안 그는 《주역》의 마지막 64번째 괘인 화수미제괘 火未濟卦를 늘 생각했다고 한다. 화수미제괘는 63번째 괘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의미의 수화기제괘旣濟卦 다 음에 나오는 마지막 괘이다. 즉, 인생은 늘 다 이루었다고 생각 할 때 다시 새로운 일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 여행이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행 도중 에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자 다시 괘를 벌였다고 한다. 그가 이 여행에서 괘를 뽑을 동전을 구하지 못하자 나뭇잎을 사용했다 는 일화는 유명하다.
융은 《주역》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와 인도의 요가, 선禪, 명상 등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집단 무의식을 찾는 과정에 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공시성이론대로 서로 통하는 사상이어서 동양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 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의 많은 이론이 《주역》과 중용의 이론을 취한 것은 분명하다. 그에게 프로이트만큼 많은 추종자 가 있는 이유도 동양과 서양의 학문을 접목하면서 사상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한 데서 온 것이다. 융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공자와 노자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을 간단히 물리칠 수가 없다. 그들이 가르치는 높은 경지의 사상을 알게 되면 더욱 그러 하다. 더욱이 우리는 《주역》이 그들에게 영감을 준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나는 이제 나이가 여든 고개에 들어섰다. 사람들의 변화무쌍한 의견은 나에게 아무런 감명도 주지 못한다. (・・・) 내게는 노대가의 사상이 서구인의 철학적 편견보다 더 가치가 있다.

- 《주역》에는 시초草라는 풀로 괘를 뽑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공자는 3천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 다니며 지냈는데, 매일 아침에는 단정하게 몸을 가다듬고 점을 쳐서 괘를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 그날 하루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공자가 역을 좋아한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덕을 좋아한 것이지 점을 좋아 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덕을 닦지 않은 채로 모든 결정을 점 에 맡긴다면 차라리 점을 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는 아 마도 《주역》이 점서로만 쓰이게 될 것을 경계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는 하나 점서로서의 《주역》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며, 이는 적지 않은 학자들이 줄곧 이야기하는 바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역》이 상과 수와 사로 이루어진 이유도 애초에 점서로 그 쓰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주역》이 진시황 때 분서갱유焚書坑儒에서 살아남기 위 해 점서로서의 측면이 부각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진시황 이 자신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유학자들을 생매장하고 그들 의 책을 불태우자 《주역》의 소실을 걱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실제 생활에 필요한 점서라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그 덕분에 분 서갱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대 에 이르러 유가 사상이 크게 숭상되면서 《주역》의 위상 또한 경전의 맨 앞에 놓일 정도로 높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인간은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할 때 누군가에게 물어보 거나 의지하고 싶어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것이 델포이 신 전이었을 것이고, 성경에서는 하느님에게 드리는 기도였을 것 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는 점괘를 보고 자기 이성으로 해 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관해 그 답을 찾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단순히 점을 떠나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철학적으로 알려주는 책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기가 앞으로 나아가 야 할 지혜를 역시 자연에서 얻는 과정을 정리한 책이자, 그 지 혜를 양과 음의 부호로 이루어진 괘로 형상화한 학문인 것이다.
- 그렇다면 그 괘가 과연 맞는 답일까? 여기서 필요한 것은 자 기 확신이다. 자기가 뽑은 괘가 맞는 답이라는 데 분명한 신뢰 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직관을 믿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융은 이성, 사고, 합리성으로는 볼 수 없는 것도 우리 내면의 영혼의 눈으로 보면 볼 수 있다고 역설한다. 즉, 내가 이 런 행동을 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우리는 이미 무의식적 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주 재미있는 실험도 있다. 1980년대에 벤저 민 리벳이라는 심리학자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가' 하는 주 제로 실험을 했다. 그는 실험 대상자가 어떤 버튼을 누를지 선택하도록 하면서 그 순간의 피실험자의 뇌를 관찰했다. 그런데 피실험자가 어떤 버튼을 누를지 결정하기도 전에 뇌의 특정 부 위가 먼저 활성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이 실험 결과를 보 고 우리의 결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며 자유의지는 별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2007년 독일의 뇌과학자인 존딜런 헤인즈 교수에 의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그 역시 인간의 의식이 결정하기 전에 이미 무의식적으로 10초 전에 결정을 내린다는 결과를 얻 은 것이다. 헤인즈 교수는 그 연구 결과를 보고 '우리가 스스로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미 그 이전에 결정된 것'이라고 주 장했다. 즉, 뇌가 먼저 결정하고 나는 나중에 인식한다는 것이 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 렸다.
- 하지만 나는 반대로 그들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미치는 무의식의 힘을 간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무의식에서 결정 을 내리는 것조차 우리의 자유의지에 속하는데, 그 부분은 말 그대로 무의식이니 내가 단지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괘를 뽑아 그 괘의 해석을 믿고 자기가 나아갈 길을 정하는 것은 우리의 직관, 무의식, 그리고 그 괘를 믿는 나 의 자유의지까지 모두 통합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주역》에는 거의 시에 가 까운 온갖 은유가 넘쳐난다. 《주역》의 은유는 읽는 사람의 마음 에 따라 달라진다. 돈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단지 내가 언제 돈 을 구할 수 있는지만 보일 수 있고, 지위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언제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지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겸 허히 자연 앞에서 제 갈 길을 묻는 사람들은 자연의 은유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알 수 있다. 그러한 면은 정신의학과도 통한다. 정신의학은 말 또는 글이라 는 언어를 통해 자기를 알아가는 학문이다. 굳이 라캉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언어 역시 은유이다. 물론 여기에는 단순히 음성과 문자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신체라는 언어도 포함된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서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 기미를 살피는 것이 나의 몸이라는 은유에서 나를 찾는 것이라 면, 그보다 더 먼 길을 갈 때 내 주위에 있는 자연, 궁극적으로 는 자기의 원형, 자기의 근본에서 기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주역》이다. 그리고 나의 원형을 찾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성장과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상담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보다는 당장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더 알고 싶어 한다. 물론 그것이 인지상정이기는 하다. 인생의 고달픈 문제에 대해 당장 해법을 구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여야 한 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모습인지만 알면 나아갈 방향을 더욱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경영의 기본이다.
내가 이 책을 《주역》의 맨 마지막 두 괘인 수화기제괘와 화 수미제괘로 시작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두 괘를 통해 쓸데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오는 완벽주의에 대한 환상을 일깨 우고 온전히 '나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나머지 괘들 역시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서든 자기 경영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로 구성했다.

- 《주역》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미제 앞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뜻의 기제괘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기제괘는 물을 상징하는 감괘와 불을 상징하는 이괘 로 이루어져 있는데, 물을 상징하는 괘가 위에 있고 불을 상징 하는 괘가 아래에 있어서 수화기제괘水火旣濟卦이다. 속성상 물 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불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니 물이 불을 끄는 형상이다. 인간의 마음에서는 흔히 냉철한 사고로 비 유되는 물이 열정과 욕망으로 비유되는 불을 다스리는 형상이 라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 측면에서 풀이하면 서로 소통하는 모습이고 상생하는 관계이다. 그래서 괘의 이름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기제이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이 층에 사 는 물이라는 형이 아랫집에 사는 동생의 집에 물이 있는지 살 피러 가고, 아래층에 사는 분이라는 동생은 윗집에 사는 형이 춥지 않은지 올라가서 살피는 형상인 것이다.
- 미제괘(흔히 영구미제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이 괘의 이름에서 유래했 다)는 기제괘와는 반대로 불을 상징하는 괘가 위에 있고 물을 상징하는 괘는 아래에 있다. 그래서 화수미제水未濟卦이다. 불은 위로 올라가고 물은 아래로 흐르니 둘은 전혀 만날 수 없 다. 그러니 인간관계에서는 불통이 되고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 제는 풀리지 않는 것이다. 역시 비유하자면, 이 층에 사는 불(동 생)은 잘났다고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고 아래층에 사는 물(형)은 늘지하도로 다니니 못 만나는 형상이다.
그런데 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기제괘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다는 미제괘가 한 쌍일까? 사실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제와 미제의 연속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를 마치고(기제) 나면 중학교에 진학해서 새로운 삶이 시작(미제)된다. 임산부에 게 출산은 지난 10개월간의 완성이니 기제이다. 하지만 이제부 터는 새 생명을 키워내야 하니 미제이다. 더욱이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니 더더욱 미제일 수밖에 없다. 학창 시절 을 끝내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결국은 기제와 미제의 반 복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 완성된 것 같을 때 새로운 변화가 시 작되고 그동안 숨어 있던 문제들이 나타나는 것이 인생이기 때 문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 미제괘는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임을 역설한다. 즉,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완벽한 마무리는 불가능하다는 깨달음. 우리가 영원한 미완성의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미완성 속에 서 변화가 싹터 나와 형통함에 이른다고 알리는 일도 잊지 않 는다. 그 가르침이야말로 《주역》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희망 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 《주역》의 첫 번째 괘는 여섯 개의 효가 모두 양효인 건과 로서 하늘과 아버지를 상징하고, 두 번째 괘는 여섯 개의 효가 모두 음효인 곤괘로서 땅과 어머니를 상징한다(건괘와 곤괘는 리 더십을 상징하는 괘이므로 5부에서 살펴볼 예정이다). 그 뒤에 나오는 세 번째 괘가 바로 생성의 혼돈, 시작의 험난함을 상징하는 둔 괘이다. 여기에는 자녀의 탄생도 포함된다.
둔은 새싹이 흙을 뚫고 나오는 형상을 나타낸다. 이른 봄, 막 풀린 땅 위로 고개를 내민 새싹을 보고 살짝 눈시울이 뜨거 워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둔괘가 왜 시작의 험난함을 상징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역》에서는 왜 시작의 고난을 논하는 둔괘를 자녀의 탄생에 비유했을까.
둔괘는 물을 상징하는 감괘와 우레를 상징하는 진괘 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뢰둔屯卦이다. 우리는 수태되는 순 간 엄마의 배 속에 자리 잡고, 양수라는 물에 의해 보호받으며 태아로 자라난다. 즉, 물속에서 진동하고 움직여서 세상 밖으로 나오면 그것이 생명의 탄생이다. 그러나 그렇게 열 달을 기다려서 세상에 나오면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혼돈이다.
태아는 지금까지는 모든 영양이 공급되는 엄마 배 속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온 다음에는 자력으로 모든 것을 해 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첫울음은 아기가 처음으로 스스로 호 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첫 호흡이 성공해야 비로소 우리는 삶이라는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여정을 떠나기 위해서 우리는 걷는 것, 먹는 것부터 시작해 말하는 법, 공부하 는 법, 돈 버는 법, 인간관계를 맺는 법 등을 배워나가야 한다. 태어남을 상징하는 수뢰둔괘 다음에 배움의 도리를 논하는 산수몽괘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늘 아래 산이 있다는 것은 물러나서 피함을 나타낸다. 군자는 소인을 멀리하되, 미움을 드러내지 않고 존엄을 지킨다天下有 君子以遠小人不惡而嚴.

- 상대를 향해 쉽게 분노하거나 지적하는 행동은 삼가는 편이 좋다. 상대 역시 분노하고 나에 대한 험담을 마구잡이로 퍼뜨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동시다발적인 반발만을 불러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 터무니없 는 일을 겪게 되더라도 맞서 대응하기보다는 한발 물러나 스스 로 존엄을 지켜나가는 편이 훨씬 중요하다. 이것이 상전이 역설 하고 있는 지혜이고, 이를 실천한 사람이 주희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동안 지켜온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면 미련과 집착이 생기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 이 우물쭈물하다가 타이밍을 놓치곤 한다. 정치권에서, 기업 현 장에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사사로운 모임에서도 마찬가 지다. 쥐꼬리만 한 힘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놓지 않으려 고 애면글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 《주역》에서 치욕을 견디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괘가 명이괘이다. 명이괘는 상괘가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이고 하괘는 불을 상징하는 이괘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화명이 괘地夷이다. 이 괘는 땅속에 불이 들어 있는 형상으로서, 해가 져 땅으로 들어간 형국이며 밝음이 어둠에 묻힌 상태를 나타낸다.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런 상황에 놓이면 크나 큰 험난함이 예고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당당하 고 바른 사람일지라도 일단은 몸을 낮추고 자신의 정체를 경솔 하게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하 게 정도를 지켜나가는 것은 필요하다.

- 지나치게 신중하기만 해서도 곤란하다. 언젠가 보고서 의 양식과 글자 수에 집착하는 총리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 이 있는데, 그런 정도라면 다소 곤란하다. 이런 집착은 신중함 에서 나왔다기보다 대체로 불안과 두려움에서 비롯한 경우로 보인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사소한 일 에 매달리고 지나칠 정도도 꼼꼼히 살피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영어의 '꼼꼼한meticulous'이라는 단어는 '두렵다'는 의 미의 라틴어 '메티쿨로수스meticulosus'에 어원을 두고 있다. 공 자도 지나친 신중함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있다. <논어> <야 장편>에 보면 계문자라는 인물이 세 번 생각한 후에 행하였다는 말을 들은 뒤 공자가 말한다.
두 번이면 되느니라再斯可矣.

- 어찌 됐든 신속한 판단력과 결단력은 누구에게나 대단히 중 요한 자질이다. 구오의 효사 "결단코 이행하되 정도를 지켜 위 험을 막아야 한다履貞”라는 구절이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다. 결단력을 가지고 앞으로 나갈 필요가 있을 때는 과감하게 행동하되, 정도를 넘어서지 않으면 형통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되 늘 존재하는 위험에 도 대비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신중함이 필요한 순간에는 마치 호랑이 꼬리를 밟듯이 삼가고, 과감함이 필요할 때는 또 단번에 치고 나가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

- 대부분의 《주역》 해석서에서는 이 겸괘가 풍성한 부를 가졌 다는 의미를 지닌 화천대유괘天大有 다음에 나오는 것에 주 목하라고 말한다. 내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오만해 지기 쉽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쉬웠으면 그런 말도 진즉 사라졌을 것이다. 오죽하면 성바오로 수도회 창 립자 알베리오네 신부님도 '교만은 인간이 죽은 뒤에도 세 시간 은 지나야 죽는다'고 말했을까.
그에 대해서는 괴테도 한마디 했다. 그의 소설 《친화력》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의 우월한 점을 가끔 잔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될까?

- 육사의 효사에 "겸허한 사람이라는 허명을 물리치라无不利謙"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겸허함이 지나쳐서도 안 되 므로 정도를 지키라는 주문으로 해석한다.
허명에 대해서는 맹자도 말했다. <맹자> <이루장구離婁章句〉 하편에 보면 서자가 공자께서 물을 칭찬했는데, 무엇 때문 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맹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졸졸 흘러 구덩이를 채운 뒤에 앞으로 나아가 바다에 이른다.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으 니 이를 취하신 것이다. 진실로 근본이 없다면 칠팔월 사이에 빗물이 모여 크고 작은 도랑을 모두 채우나 그 물이 말라버리는 것 을 서서 기다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명성이 실제보다 지 나친 것을 군자는 수치로 여긴다原泉 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 進放

- 손괘는 일차적으로 뇌수해괘雷解 다음에 이어지는 괘라 는 데 의미가 있다. 해괘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살면서 일어나 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 과 협력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해괘에는 해 결되는 것도 있지만 완전하지는 않고 누그러진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이 경우에는 잃는 것도 생기므로 손괘로 이어진다고 보 기도 한다.
손괘는 상괘가 산을 뜻하는 간괘, 하괘가 연못을 뜻하는 태괘로 이루어져 있어서 산택손괘山澤損卦이다. 산이 위에 있고 못이 아래에 있다는 것은 산의 몸체는 높고 못의 몸체는 깊다는 뜻이다. 그처럼 아래가 깊으면 위가 더욱 높아지므로 아래를 덜어서 위를 보태준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김석진 선생은 "윤택한 못의 기운이 산속의 초목과 금수를 생장 활동하게 함과 같이 안을 덜어 밖에 더해주는 것이다. (...) 손괘는 안으로는 기뻐하고 밖으로는 후중히 그치는 덕이 있어 나의 것을 덜어 남에게 보태는 괘"라고 설명하고 있다.

- 곤괘는 하괘가 물을 상징하는 감괘이고 상괘는 연못을 상징하는 태괘로 이루어져 있어서 택수澤水困卦이다. 곤을 파자하면, 사방이 막힌 울타리 안[]에 나무[]가 갇힌 형상이다. 나무는 울타리 밖으로 뻗어나가려고 하지만 사방이 막혀 있으므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는 괘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물이 가득 차 있어야 할 연 못이 위에 있고 그 아래로 물이 있다는 것은 곧 연못에 물이 없 어 메마르고 황폐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괘사는 오 히려 희망을 말하고 있다.
곤은 형통하게 됨을 이른다. 정도를 지켜야 한다. 그러한 대인이라면 길하고 허물이 없다. 다만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貞大人无咎 有言不信.
마지막에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매우 현실 적인 조언이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딱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 진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믿어주겠는가. 그럴 때는 차 라리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전열을 가다듬는 편이 낫다. 그런 자세로 정도를 지켜나간다면 마침내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내고 형통의 문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주저앉지 않는 굳건한 의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강건함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에 불어오는 작은 비바람에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곤괘는 마지막 상육의 효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가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거의 고르게(?) 묘사하고 있다. 먼저 육삼의 효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돌에 막혀 곤란하여 가시 돋친 찔레 풀에 의지한다. 집에 들어가도 아내를 볼 수 없으니 흉하다據于蒺藜 入于其宮 不見其妻 凶.
이 구절에 대해 공자는 《계사전》 하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한다.
갇히면 안 될 곳에 갇혀 있으니 이름이 욕되고, 머물러서는 안 될 곳에 머물러 있으니 몸이 위험하다. 이미 욕되고 위험한 상태에서 죽기에 이르렀는데 아내인들 어찌 볼 수 있겠는가非所困而焉 名 必辱 非所據而據焉身必危 既辱且危 死期至妻其可得見邪.
그런 욕됨은 계속되어 구사에서는 "천천히 내려오다가 쇠수 레에 곤란을 당하며", 구오에서는 "코를 베이고 발을 잘려서 붉은 인끈'을 멘 신하에게서 곤란을 당하는가"라고 하는가 하면상육에서는 "위태로운 곳에서 칡덩굴에 의해 곤란을 당한다"라 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일종의 고난의 전시장 같 은 느낌이 아닌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처럼 힘겨운 상황 뒤에는 반드시 상서 롭고 형통한 길이 기다리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점이다. 그것은 모든 효사가 마찬가지다. 단, 서둘러 뉘우치고 인내심과 성실함 으로 정도를 지키고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 물론 고난을 품위 있게 감당하고 극복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시련의 불길을 통과 한 사람은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소설가 폴 오스터의 책에서 미국은 '돌아온 영웅'에 더 열광 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단번에 영웅이 된 사람도 대 단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으로 인해 바닥까지 떨어졌 던 영웅이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을 때 더 큰 환영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 그런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다만 자기 인생을 제 대로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고난을 극복하고 적어도 지금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도전 끝에 이윽고 형통의 문이 열릴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 공자도 소송은 피하라고 당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소송을 듣고, 판결하는 일은 나도 남처럼 할 수 있지만, 반드시 송 사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訟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논어》 <안연편顔淵>에 나오는 문장이다. 송사에 뛰어드는 것이 얼마나 삶을 힘들게 하는지 공자 역시 잘 알고 있었던 것 이다.
송괘는 상괘가 하늘을 뜻하는 건괘乾卦이고, 하괘는 물을 뜻하는 감괘로 이루어져 있어서 천수송訟이다. 괘의 모습을 보면 하늘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물은 아래로만 내려 가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어긋나는 형상이다. 송訟을 파자하 면 공공公公한 말씀[]이 된다. 서로 다툼이 있을 때는 사사로 움을 배제하고 엄중한 말로 그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는 뜻이 겠다.
실제로 송괘는 소송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괘는 그 앞에 나오는 수천수괘天需와 도전괘의 관계이다. 앞서 살펴봤듯 이 수는 기다린다는 뜻이다. 즉, 인생에서 위험이 앞에 놓여 있을 때 강건한 사람은 "잠시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므로 쓸데없 이 내달리지도 않고 곤란한 일을 당하지도 않는다"라는 것이다.
수괘는 인간의 일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수괘 다음 에 도전괘로 송괘가 놓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인생살이에 는 다툼과 싸움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결국 인생이라는 의미 이다. 즉, 그런 다툼을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해결해나갈 수 있 는지 보여주는 괘가 송괘이다.
송괘의 괘사 또한 공자의 당부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수괘의 괘사를 보면 "성실함이 있으니 빛나고 형통하며 바르고 길하 다
구절로 시작한다. 반면에 송괘의 괘사는 "라는 첫 문장이 "성실함이 있으나 크게 막힌다"라고 되어있다.
똑같이 성실함이 있지만 한쪽은 길하고 한쪽은 막힌다는 상 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두 괘는 앞뒤로 나란히 놓일 수 밖에 없었지 않나 싶다. 양쪽 괘를 자세히 살펴서 어떻게 처신 하는 것이 내게 더 도움이 되는지 판단하라는 뜻에서 그렇다. 첫 문장에서 이어지는 송괘의 괘사를 보면 이 점이 더욱 분 명해진다.
중도에 멈추면 길할 것이나 끝까지 가면 흉하다. 대인을 만나면 이롭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은 이롭지 않다中吉利見大人不利 大川.
한마디로 흉사로 이어지므로 송사는 끝까지 가지 말라는 뜻이다.
- 송괘는 이어지는 모든 효사에서도 송사를 벌일지 말지를 조언하고 있다. 설령 송사가 일어났어도 반드시 중간에서 멈추는 것이 모두를 위해 가장 나은 해결 방법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 어 초육의 효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소송을 오래 끌지 않으면 말은 조금 듣겠지만 마침내 길할 것이다所有言 終吉.
구사의 효사 역시 비슷하다.
송사를 해결할 수 없다. 돌아와 명에 따르고 태도를 바꾸어 편안한 마음으로 참고 있으면 길하다不克訟 復卽命 逾安貞 吉.
- 해결할 수 없는 싸움에서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구설을 듣더라도 적절한 타이밍에 멈추는 것도 일종의 용기다. 그럴 때는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와 마음을 비우고 순리를 따르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데도 아집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가 는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상구의 효사다.
혹 반대를 하사하더라도 아침이 끝날 때까지 세 번 빼앗길 것 이다或以帶 終朝三禰之.
- 반대란 관복을 입을 때 두르는 띠로서 여기서는 관직을 상징 한다. 혹여 관직에 나가는 명예를 얻더라도 아침이 채 지나기도 전에 무려 세 번씩이나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분쟁을 개의치 않고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한들 오래가는 일은 결코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살다보면 누구나 길을 잘못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푸념하고 원망하면서 계속 잘못된 길로 가고, 다른 부류는 곧바로 되돌아와 표지판을 다시 읽고 새롭게 올바른 길로 나아간다.
송괘는 두 번째 길로 인생의 방향을 잡으라고 당부한다. 당장 은 그편이 훨씬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은 다 지나가는 때가 온다. 힘든 과정이 끝난 뒤에는 내가 내린 결정이 잘한 것 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그것이 지고도 이기는 길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그 비결을 깨우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송괘가 주는 최종적인 조언이라고 하겠다.

-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 사이에 태어났 다. 이를 질투한 헤라의 눈을 피해 그는 동방의 한 산에 사는 요 정들의 손에 양육된다. 그는 동방의 여러 곳을 떠돌며 포도를 재배하는 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을 배운 다음 그리스로 귀향한 다. 실제로 그가 동방에서 시작해 펠레폰네소스반도로 이동하 는 여정은 포도와 포도주가 들어온 경로와 일치한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포도 재배와 포도주 만드는 법을 가르치면서 방 랑자로서 떠도는 동안 그는 점차 술의 신이자 광기의 순례자로 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당시 억압이 심했던 여자 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여자들은 집을 떠나 무리를 지어다니며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광란의 야간 집회를 열었다. 당시 그들은 미친 여자들이란 뜻의 '마이나데스Mainades'라고 불렸는데, 이는 영어에서 광기 Madness의 어원이 되었다는 이야 기도 있다. 그런 광기 덕분에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차갑고 합리적인 이성을 대표하는 아폴론을 사랑하는 그들에게 디오니소스는 당혹감을 안기는 존재였다. 이 디오니소스의 원형을 지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이성적 이고 논리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썩 환영받지 못한다. 그들은 일단 규칙적이거나 지속적인 일은 잘해내지 못한다. 변덕스럽 고 충동적이며 다소 미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 더욱이 그들은 때때로 혼자 있기를 고집한다. 안으로 침잠해 서 자신과 싸우다 보면 그들의 내면에서는 대개 놀라운 상상력 이 피어나곤 한다. 그들의 본성 안에는 디오니소스적인 창조성 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확실히 예술가 유형이다.
따라서 그들이 만약 조금만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 하고 처신한다면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 앞서 여괘의 괘사에서 언급한 대로 조금만 더 정도를 지 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부 아폴론적인 면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으 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 물론 디오니소스적인 유형이 아니더라도 때때로 홀로 있으 면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꼭 필요하다. 그렇게 하는 편이 오히려 인간관계에도 더 큰 도움을 준다. 나를 이해함으로써 타 인에 대한 이해와 수용도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 서 고독은 때때로 인간관계에 오히려 좋은 영향을 주는 훌륭한 파트너이다. 요즘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홀로 즐기는 '조용한 즐거움 Quiet Enjoyment'을 강조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벤저민 프랭클린은 "못 하나가 없어서 편자를 잃었고, 편자가 없어서 말을 잃었고, 말이 없어서 기수를 못 보냈고, 기수가 없 어서 전쟁에서 졌다"라는 의미의 말을 했다. 그의 경우 함부로 말하는 습관이 부족한 '못'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자칫하면 그 것이 복병이 되어 자신의 앞날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 게 보기 시작했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 지금은 유튜브와 SNS와 부캐의 시대이다. 일찍이 그것을 예견 한 제러미 리프킨은 "미래는 새로운 시대가 될 것이다. 모호하 고 다양하고, 재미와 유머를 추구하고, 어수선하고 너그러우며, 절충을 중요하게 여기고 권위를 우습게 여기며, 이데올로기나 만고불변의 진리나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철칙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고, 그 대신 그 자리에서 온갖 유형의 공연이 펼쳐 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어느새 그 '새로운 시 대'를 살아가고 있다.

- 요즘 우린 어디서든지 일등만 주장하는 것을 자주 본다. 많은 사람이 일등을 하기 위해 때로는 무모함도 불사한다. 그러나 만약 세상에 하늘만 있고 땅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므로 일 등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덕도 필요하다. 그것이 곤괘가 상징하는 리더십이다. 그런 점에서 곤괘는 리더가 갖춰야 할 처 신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그중에서도 곤괘 초육의 효사인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履霜堅"라는 구절은 리더가 어떻게 행동을 삼가야 하는지에 대한 최고의 문장 중 하나로 꼽힌다. 곤괘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이기도 한 이 효사에는 일단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자연현상으로 보면 앞으로 다가올 혹독한 추위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괘는 계절로는 음력 10월을 상징한다. 이달을 기점으로 겨울이 깊어진다. 입동, 소설, 대설을 거쳐 동 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땅의 성격으로 볼 수도 있다. 얼핏 얇아 보이는 땅도 그 속을 파보면 깊다. 우리는 아직도 지구 안에 무엇이 있 는지 다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리더는 작은 것도 우습게 보지 말아야 한다. 사사로운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아야 하며 가능한 한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고 애써야 한다.

- 공자는 문언전에서 이 효사에 대해서 다음처럼 언급하고 있다.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악행을 쌓은 집은 반 드시 남은 재앙이 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며 자식이 그 아비 를 죽임이 하루아침 하룻저녁의 연고가 아니다. 그로 말미암은 것 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분별할 것을 일찍 분별치 못했기 때문이 다. 역에서 말하길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라고 하는 것은 대개 삼감을 이른다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 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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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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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차 문제'는 우리가 '이식수술'에 관해 나눴던 이야기를 다시 생 각해보게 만든다. 우리는 팔을 다친 남자에게도 삶에 대한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선로에서 혼자 일하던 그 노동자에게도 삶에 대한 권리가 있는데, '스위치 앞의 방관자' 실험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별다른 가책 없 이 그를 살해했다. 때때로 다수의 생명이 위태롭다면 한 사람의 삶 에 대한 권리는 뒷전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식 수술'과 '뚱뚱한 남자'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이 유를 다시 찾아봐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이식수술'과 '뚱뚱한 남자'에서는 침해되었지만 '스위치 앞의 방관자'에서는 침해당하지 않은 권리를 찾는 것이다. 그런 권리가 있을까? 그런 것 같다. 
- '전차 문제'를 해결하는 데 칸트가 도움이 될까? 어떤 사람들은 도 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에게 유의미한 권리는 단순히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받지 않고 사람으로 대우 받을 권리다.
우리가 다뤘던 일화들을 다시 들여다보자. '이식수술' 일화에서 팔이 부러진 남자를 죽인다면 당신은 그의 유의미한 권리를 침해하 게 된다. 당신은 그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의사가 있느냐 고 물었고,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그를 죽인다면, 당신 은 그를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신체 기관들의 집합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뚱뚱한 남자' 일화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만약 당신이 뚱뚱 한 남자를 난간 너머로 밀어버린다면, 그를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 남자가 목표 달성에 필요한 몸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럼 '스위치 앞의 방관자는 어떨까? 얼핏 봐서는 당신의 행동은 잘못된 것 같다. 당신은 현장에 있었던 한 명의 노동자에게 허락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잠깐. 당신은 그 노동자를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도 아니다. 그는 당 신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도 당 신은 전차의 방향을 바꿨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단지 전차를 다른 선로로 돌려서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한다는 계획에서 파생된, 불행한 결과일 따름이다. 만약 그가 운 좋게 탈출했다면, 당신은 펄쩍 뛰며 기뻐할 것이다.
- 철학에서 전차 문제가 처음 다뤄진 것은 필리파 풋Philippa Foot이 라는 영국 철학자의 낙태에 관한 논문이었다. 그리고 전차 문제를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톰슨이다. 그는 풋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다듬 어 대중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전차가 고장 났을 때 데릭 윌슨, 또는 실제로 전차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철학자들에게 전차는 도덕의 구조에 관해 생각해보기 위한 도구였다. 우리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그 권리를 양보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보기 위한 도구였 다. 전차 문제는 낙태라든가............... 전시의 법률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 을 고민하는 데 활용되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잠시 당신이 해리 트루먼이라고 상상하라. 당신은 일본의 나가사 키에 원자폭탄 '뚱뚱한 남자'라는 이름의)을 떨어뜨릴 것인지 말 것인지 를 결정해야 한다. 원자폭탄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하 지만 원자폭탄을 투하하면 전쟁을 일찍 끝낼 수 있으므로 그보다 훨 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도 되는 때는 언제인 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전차 문제'는 우리가 이 문제 를 고민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이 질문이 어리석게 보인다면, 그건 전차 문제가 진지한 질문들이 빠진 채 대 중문화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전차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권리는 정말 중요하다.
- 복수가 그렇게 무의미한 행위라면 우리는 왜 복수를 원할까? 하나의 가설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잘못을 할 때마다 복수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이 복 수를 하려는 성향이 특별히 강하다는 증거가 있다. 한 연구에서는 만 4세에서 8세 사이의 아이들에게 컴퓨터게임을 시키고, 상대방(연구자들이 조작했다)이 아이들의 스티커를 훔치거나 아이들에게 스티커를 선물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아이들은 복수의 기회가 생기자 마자 스티커를 슬쩍한 상대에게 복수를 감행했다. 다른 참가자들의 스티커보다 상대방의 스티커를 훨씬 많이 훔친 것이다. 하지만 아이 들은 친절을 베푼 상대에게는 똑같은 친절을 보이지 않았다. 선물을 받은 아이가 상대에게 선물을 줄 확률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 확률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실험 결과를 보면 나쁜 행동에 복수하 는 행동이 호의를 되갚는 행동보다 본능에 더 가까운 듯하다.
그리고 ‘복수는 인간의 본성이다'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또 있다. 과학자들은 모욕이 문자 그대로 복수하려는 마음을 불러일 으킨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욕을 당할 때 뇌에서 활성화하는 부위 는 사람들이 배고픔이나 다른 갈망을 충족하려 할 때 활성화하는 부위와 동일하다. 그 부위는 바로 좌측 전전두피질left prefrontal cortex 이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시인 호머Homer가 "복수는 달콤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호머도 복수 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 최근에 나는 "복수가 섹스보다 낫다”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봤다.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그런 주장을 극단까지 밀고 가서 "복수는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섹스는 정말 즐거운 일이고, 스탈린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 아닌가. 물론 실제로 복수는 만족감을 선사할 수 있고, 우리가 복수에서 얻는 즐거움은 인류의 뇌 안 깊숙이 파묻 혀 있는 어떤 회로의 기능인지도 모른다. 설령 우리가 동물적 본성 에 따라 원래 복수를 추구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는 복수로 얻 는 게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보고 복수의 충동에 따라 행동해야 할지 아니면 충동을 억제해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 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복수는 정말 겉으로 보이 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인가?
- 케이든의 눈이 그 자체로 행크에게 도움이 될 건 없다. 하지만 케이든의 눈을 뽑는 행위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 만약 사람들이 행크가 반드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한다면, 그 들은 행크를 공격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복수로 명성을 얻는 것은 일종의 보험이다. 복수는 우리가 다치지 않도록 해준다. 그리고 복수는 일반적인 보험보다 훨씬 낫다. 복수는 당신이 부상을 당하고 나서 그 상처를 치료하는 비용을 지급하는 대신, 부상 자체 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수는 합리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냉정한 계산만 으로는 사람들이 복수에서 얻는 즐거움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성적 수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도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복수의 기쁨은 다른 사람의 불 행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감정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의 일종 이다. 이 경우에는 당신에게 고통을 안긴 사람의 고통을 보며 기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거기서 기쁨을 얻을까? 흔히 나오는 대답은 '그 사람은 그런 고통을 당해 마땅하니까'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응보적 정의 retributive justice'라는 특별한 정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 을 (부당하게)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도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고통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고통이 가해지기 전까지는, 세상의 어떤 섭리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 런 논리에 따르면 복수의 기쁨은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목격하는 즐거움이다.
이런 논리는 조금 비인간적인 것 같다. 복수를 원하는 사람들은 단지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손으로 상대에 게 고통을 가하고 싶어 한다. 작동하지 않는 건 세상의 섭리가 아니 다. 작동하지 않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우 리는 '이제 갚아줄 때가 왔다'라든가 '그 사람은 자기 행동의 대가를 치 러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런 말들은 복수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인데, 채무자와 채권자의 역할이 정반대라는 점에서는 모순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너와 나 사이에 계산이 맞지 않으니까 이제 공평하게 맞춰야 한다.'
- 우습게도 동해 복수법의 본질은 공감이다. 동해 복수법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도록 강제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다치게 한다 면 당신은 그것과 정확히 똑같은 부상을 입을 처지에 놓인다. 그래 서 당신은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 전에, 그 상처로 자신이 고생할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희망적인 결과는 당신이 타인을 다 치게 하는 행동을 멈추고, 그래서 아무도 부상을 당하지 않는 것이 다. 만약 당신이 끝내 누군가를 다치게 만든다면, 동해 복수법은 당 신에게 당신이 입힌 손해를 배상할 이유를 준다. 돈으로 배상하지 않는다면 곧 당신도 똑같은 고통을 겪을 테니까
- 우리는 복수가 일상이었던 시대의 사람들보다 우리 자신이 점잖 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 시대의 삶은 "아주 폭력적인 사 람들 속에서 저속하고, 불결하고, 잔인하게" 사는 거였다고 상상한 다.58 밀러의 주장에 따르면 그건 착각이다. 동해 복수법을 따르는 마을에서는 생명의 가치가 높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생명과 사람의 팔다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다."
그런 전제 아래 이야기하자면 나는 동해 복수법에 따라 살고 싶 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현대적 생활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우리 가 배심원들이 신체 기관을 값싸게 취급하도록 놔두기 때문이다. 밀 러가 지적하는 대로 "교통사고가 날 때마다 피해자의 친척에게 가 해자를 살해할 권리를 준다면" 우리는 아예 운전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포기하게 될 것은 자동차만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모든 기계장치들을 전부 포기해야 한다. 비행기, 기차, 트럭, 중장비 .......... 모터가 달린 장비는 거의 다 여기에 포함된다. 이 기계 장치들을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눈에는 눈' 원칙을 기꺼이 포기하고 보잘것없는 보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처벌은 그 사람에게 '당신은 사회적 지위를 상실했다'는 신호를 보낸다. 여기서 사회적 지위의 상실이란, 그 사람이 평소에는 감내할 이유가 없는 가혹한 처우를 이제는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다.
- 철학자들은 권력과 권위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권총 강도의 예를 든다. 당신이 길을 가는데 권총을 든 괴한이 나타나서 가진 돈을 다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는 당신에게 권력을 행사하는가? 그 렇다. 당신은 틀림없이 가진 돈을 전부 내놓을 것이다. 그는 당신에 게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다. 그가 돈을 요구하기 전에 당신은 그에게 돈을 줄 의무가 없었고, 지금도 당신은 그에게 돈을 줄 의무가 없다. 사실 당신은 그에게 '꺼져'라고 말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그걸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권총강도와 매년 날아오는 세금 고지서를 비교해보라. 정부도 당 신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한다. 만약 정부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 으면 정부는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에게는 권 력이 있다. 정부에게는 권위가 있는가? 음, 정부는 그렇다고 말할 것 이다. 정부의 관점에서 당신에게는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다. 당 신에게는 정말로 그런 의무가 있는가? 민주주의 사회에는 '그렇다' 라고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정부가 요구하는 세금을 낼 의무가 있다.
- 라즈의 견해에 의하면, 권위의 핵심은 대상자들에게 서비스를 제 공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라즈는 자신의 이론에 '봉사로서의 권위service conception of authority'라는 이름을 붙였다.'0' 라즈는 권위자가 대상자들 이 가진 모든 이유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고 나서는 그 들이 그 이유들이 요구하는 일을 더 잘하도록 만드는 지시를 해야 한다. 만약 대상자들이 스스로 결정할 때보다 명령을 따를 때 일을 더 잘하게 된다면, 그 지시는 구속력을 가지고 대상자들에게는 그것 을 좇을 의무가 생긴다.
권위자가 그런 종류의 봉사를 제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 며, 지금까지 우리는 두 가지 방법을 살펴봤다.
첫째는 권위자가 대상자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경우다. 103 다 시 말하면 권위자가 전문 지식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일 수 있다. 당신 이 만난 일류 제빵사는 바로 그 이유에서 권위를 가진다. 선임 의사가 신입 의사에게 지시를 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선임 의사는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어떤 치료가 필요할지에 관해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둘째, 권위자는 어떤 집단을 움직여 개인들이 각자 성취하기는 어 려운 목표를 다 같이 달성하도록 해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권위자 는 구성원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성과를 낸다. 철학자들 은 이런 상황을 '조정 문제coordination problem'라고 부른다. 104 전형적인 사례는 당신의 차 안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도로에서 다른 모든 운 전자들과 같은 방향으로 차를 몰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차 들과 충돌할 테니까. 이때 우리가 왼쪽에서 운전하느냐 오른쪽에서 운전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한쪽을 고르면 된다. 교통 당국은 도로의 규칙을 정해 모든 사람의 행동을 조율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행동을 결정할 경우에 발생할 혼란을 피하도록 해준다.
- 금기로 여겨지는 단어들은 어느 언어에나 있다. 그런 단어들은 나 라마다 다르지만 공통적 요소를 지닌다. 어떤 단어들은 섹스, 배변, 질병처럼 금기시되는 주제와 관련이 있고, 또 어떤 단어들은 신성모 독의 위험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욕을 하지 않고도 이런 주제에 관 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왜 특정한 단어들만 입에 담으면 안 되 는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리베카 로치 Rebecca Roache는 욕이 되는 단어의 소리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언어철학자(다른 분야의 연구도 한다)로서 욕을 연구하는 로치 의 관찰에 따르면, 욕이 되는 단어들은 그 단어들이 표현하는 감정 과 똑같이 거친 느낌을 준다. 그녀는 그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다. whiffy(역하다)나 slush(질퍽거리다) 같은 부드러운 단어로는 분노 를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런 단어들을 사용해서 욕을 하는 일은 "공기 압축식 경첩이 달린 문을 쾅 닫으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로치는 말한다. 
더불어 로치는 단어의 소리가 전부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 말이 옳다. 짧고 거친 느낌을 주지만, 아무도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단어 도 정말 많다. cat(고양이), cut(자르다), kit(조립 용품 세트)와 같은 단 어들이 그렇다. 그리고 욕으로 사용되는 어떤 단어들에는 동음이의 어가 있는데, 그 동음이의어는 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prick('찌르 다'라는 뜻과 '멍청한 놈'이라는 뜻이 둘 다 있음-옮긴이), cock('수탉'이라는 뜻과 '음경'이라는 뜻이 있음-옮긴이), Dick(사람 이름으로도 쓰이고 '음경'이 라는 뜻도 있고 '재수 없는 놈'이라는 뜻으로도 쓰임 - 옮긴이)을 보라. (이 단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공격적 의미를 지닌 단어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화한다. 즉 우리에게는 사회적 설명이 필요하다.
로치의 주장에 따르면 욕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은 공격성의 점 증offense escalation 이라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128 이유야 어떻든 간에 사람들이 shit 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누군가 가 그 단어를 말할 때 불쾌해질 것이다. 그런 불쾌감이 널리 퍼지고 잘 알려진다면 shit 이라고 말하는 행동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것 이다. 이런 순환이 거듭되는 동안 shit은 점점 공격적인 단어로 변한 다. 어떤 단어가 공격적이라고 정해지고 나면,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행동은 더욱 폭력적으로 보인다.
- 리처드 스티븐스Richard Stevens의 유명한 연구를 보자. 스티븐스는 대학생들에게 얼음물이 든 양동이에 한쪽 손을 담그라고 했다. 두 번이나. 한 번은 욕을 해도 된다고 했고, 한 번은 욕을 허용하지 않았 다. 대학생들이 욕을 했을 때는 손을 담그는 시간이 50퍼센트 가까 이 길어졌고, 고통도 덜 느꼈다. 131 게다가 후속 연구들에 따르면 센 욕설(shit이 아니라 fuck을 생각하면 된다)을 하면 욕에 수반되는 위안이 커졌다. 132 나는 욕을 큰 소리로 하는 것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장담한다.
더 중요한 사실. 욕은 육체적 통증만 완화하는 게 아니다. 마이클 필립Michael Phillip과 로라 롬바르도Laura Lombardo는 욕을 하는 행위가 사회적 배제의 고통도 완화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필립과 롬바 르도는 사람들에게 소외당했다고 느꼈던 일을 떠올려보라고 주문 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회상을 하고 나서 욕을 하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욕이 아닌 일반적 언어로 이야기하라고 했다. 욕을 했 던 사람들은 욕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사회적 고통을 적게 느꼈 다고 답했다. 
- 나는 이 연구를 에마 번Emma Byrne의 《Swearing is Good for You: The Amazing Science of Bad Language (욕설의 과학)》라는 책에서 처 음 발견했다. 욕에 관한 훌륭한 과학적 설명이었다. (몸짓언어를 배우 는 침팬지들은 자기만의 욕을 만들어낸다. 당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 을.) 134 번은 욕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를 몇 가지로 추론한다. 그 이유는 감정이 실린 언어를 처리하는 뇌 부위들과 관련이 있을 것 으로 짐작된다.  다만 욕에 관한 과학적 설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사실 세부적인 사항들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욕을 하는 행동이 스트레스 완화에 아주 좋다는 것이다.
- 우리는 단지 누가 제일 빨리 달리는지 또는 누가 제일 높이 뛰는 지를 알아보려고 스포츠를 관람하지 않는다. 슈나이더의 말처럼 스 포츠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 어디까지인 지에 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을 정의하고 결정한다".  우리가 운동 선수들을 추켜세우면 그 대가로 그들도 우리를 추켜올린다. 운동선 수들은 끈기와 단호함과 인내를 몸소 보여준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 싸운다. 그들은 성공한다. 그리고 실패한다. 우아한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고, 별로 우아하지 못할 때도 있다. 우리는 스포츠를 보면서 그걸 배운다. 그래서 우리는 남자 선수들만이 아니라 여자 선수들도 볼 수 있어야 한다.
- 교도소 수감자 비율의 차이는 경찰이 '백인'보다 '흑인'을 더 함부로 다루고 쉽게 처벌한다는 의식적인 결정을 반영한다. 예를 하나만 들면, '백인'과 '흑인'이 약물을 복용하는 비율은 거의 동일하다. 그 런데 마약사범으로 체포될 확률은 흑인이 네 배 가까이 높다. 247
우리는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이런 통계를 알려주지 않았다. 다 만 우리 사회가 오래전부터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우했 다는 이야기는 해줬다. 또 우리는 아이들에게 부당한 대우는 과거 가 아니라고 말해줬다. 우리의 현재에도 부당한 대우는 있다고.
우리는 인종을 넘어설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건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 인종이 중요하지 않은 세상에 살기를 원 한다면 인종 간의 격차부터 없애야 한다. 행동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나는 피부색을 따지지 않아"라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 1980년대 엑 손Exxon은 "과학적 결론의 불확실성을 강조하기로 결정했다. 엑손 에 소속된 과학자들 역시 인류가 자초한 기후변화가 심각한 위협이 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도. 315 하지만 그 각본을 최초로 작성한 것 은 엑손이 아니었다. 담배 회사들은 자사에 소속된 과학자들이 흡연 과 암 발병의 상관관계를 입증했는데도 그 상관관계에 의문을 제기 했다. 언젠가 브라운&윌리엄슨Brown & Williamson의 내부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담겼다. "우리의 상품은 의심이다."
우리는 의심을 조장하는 사람들doubtmongers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까다로운 질문이다. 철학자로서 나는 마치 데카르트가 모든 것 을 의심했던 것처럼 직업적으로 의심을 한다." 나는 당신이 아는 것 을 꼬치꼬치 따져보고, 당신이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지점들을 찾아보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공통적으로 그 런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런 경향이 워낙 강해서 과학자들은 자신 들의 불확실성을 수량화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의심을 조장하는 사람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 사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점은 우리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방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서로의 마 음에 접근하지 못하는 덕분에 나는 약간의 사생활을 보장받는다. 그 덕분에 내 생각을 혼자만 간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마 음에 접근하지 못하는 덕분에 나는 사람들에게 놀라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을 항상 알아차리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대개 의 경우 그건 좋은 일이지만, 당연히 좋지 않은 면도 있다. 우리는 서 로의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서로의 고통을 간과하기가 쉽다.
- 철학자들이 과학의 첨단을 걷는 때가 종종 있었다. 특히 아리스토 텔레스가 그랬다. 사실은 과학이 철학과 별개의 학문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과학은 도덕철학이나 미학과 같은 철학의 다른 갈래와 구별하기 위 해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가 철학과 과학을 별개의 학문으로 인식하는 주된 이유는 사용하는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이 다. 물론 과학자들도 철저한 사색을 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세상 을 탐색하기 위해 관찰과 실험이라는 방법도 사용한다.
철학자들의 도구 상자에도 관찰과 실험이 들어 있긴 하지만, 철학 자들은 관찰과 실험이라는 도구를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한다. 철학 자들의 관심을 끄는 질문들은 대개 실험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 다. 어떤 실험도 우리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사랑도 그렇고, 아름다움도 그렇다. 어떤 실험도 우리에게 처벌이 정 당화되는 경우가 언제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복수가 정당화되는 경우가 언제인지,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도 가르쳐주지 않는 다. 어떤 실험도 지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지식 을 획득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실험으로 알아낼 수가 없다. 우리 철학자들이 이런 종류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 는 도구는 철저한 사색과 대화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철학이 지식의 원천이라는 것을 의심하기도 한다.  어떤 과학자들은 철학 은 말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만 약 철학이 지식의 원천이 아니라면 과학도 지식의 원천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실험은 하나의 논증에 의존한다. '이것이 세상에 관 해 알아내는 방법이다'라는 논증이다. 그리고 모든 결과는 해석을 요구한다.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과학자들도 철학자들과 똑같이 철 저한 사색을 해야 한다. 만약 과학자들의 논증이 탄탄하지 않다면, 그들이 실험을 진행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연구가 유의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사색과 대화 를 토대로 삼는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과학과 철학은 동일한 학문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그 목표에 걸맞은 도 구라면 뭐든지 사용한다. 우리가 서로 다른 분야라고 생각하는 수 학, 과학, 철학은 모두 한 그루의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다. 어 떤 문제를 해결하기에 다른 학문들이 더 적합한 경우 철학자들은 문 제를 그 학문으로 넘긴다. 우주의 크기에 관한 아르키타스의 의문도 그런 경우였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우주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과거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세계의 한계에 관해 배운다. 제논의 운동 역설을 둘러싸고도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수학의 힘을 빌려 무한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과학이 공간의 구조를 밝혀내는 중이다.
- 어떻게 하면 아이를 철학자로 키울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고, 아이들의 대답에 대해 또 질문을 하라. 질문은 복잡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당신이 철학을 몰라도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상황에 적용 가능한 일련의 
*넌 어떻게 생각하니?
*왜 그렇게 생각하니?
*네가 틀렸다면 그 이유는 뭘까?
*......라고 네가 말한 건 무슨 뜻이야?
*.....이란 뭘까?
- 목표는 아이가 논증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반 대쪽 주장도 접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가 이야기를 많 이 하도록 놓아두되, 아이들이 생각하다가 막힐 때는 주저 없이 도 와주라. 가장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가 하는 말에 동의할 수 없거나 그 게 어리석은 소리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진지하게 들어라. 아이와이 성적인 태도로 대화를 나누라."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지 알려주고 싶은 충동에 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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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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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걷기수업

인문 2023. 9. 20. 12:00

- "지혜로운wise" 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글에 서 가장 처음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무언가를 잘 아는'이라는 뜻이었다. 호메로스는 배를 건조하는 장인의 기술을 묘사하는 데에 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지혜롭기 위해 많은 책을 읽을 필 요는 없다. 삶의 모든 측면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 운다면 어디에서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플라톤이 7명의 현자 중 한 사람으로 꼽는 뮈손은 순박한 농부였으며 글을 읽거나 쓰 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 열자는 "어딘가를 걷는 일의 즐거움은 바로 목적 없음을 향유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걷기의 본질적인 특징은 바로 일상을 잠시 멈출 수 있다는 점이 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목적 지향적 활동으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하고, 종종 우리의 생각과 감각마저도 잠식해버리는 일상 말이다. 잠시 시간을 내 공원이나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계와 같은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속으로 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조직하고 처리하고 준비하는 삶에서 는, 쉬는 시간이나 여가 시간에도 일거리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릿 속에 맴돌기에 제대로 쉴 수가 없다.
- 자연 속에서 걷는 일은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소풍이면서 자신만의 은신처를 소유하는 것과도 같다. 외로움에 힘겨울 때라면 오롯이 홀로 있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탄탄한 사회적 유대감에 기반한 채로 자기 자신을 숙고하고 성찰하고자 의식적으로 홀로 있음을 추구한 다면, 이는 풍부한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고대 중국의 경서인 《예기》에 이렇게 나온다. "홀로 있음은 내면이 안온한 상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늘 혼자만이 간직한 것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자기 혼자만 간직한 것이 무엇인지 걷는 가운데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 베트남의 불교 승려 틱낫한은 걷기가 주는 명상적인 힘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걸으면 몸과 마음이 하나로 모인다. 이렇게 될 때만 이 우리는 진정으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 걷는 자는 집으로 가는 것이요,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서 안식하기에 어디에서나 집에 있 는 듯 편안함을 느낀다.
- 걷기, 방랑하기, 앞으로 나아가기. 이것은 우리 몸에는 균형과 힘을, 마음에는 의미와 방향을 선사한다. 또한 우리를 더 만족스럽게, 더 명랑하 게, 더 저항력 있게, 더 명확하게, 더 평온하게,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몸과 마음은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우리는 걷기로써 이 두 영역 모두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 관점, 전망 을 바꾸고, 지평을 확장한다. 우리는 하나에서 떠나 새로운 것으로 향한 다. 매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모든 여정의 궁극적 목적은 스스로 만족함을 느끼며, 내면의 안정을 찾고, 내적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속 응어리는 정화되어 갈등은 차차 해소된다. 비로소 우리는 자신과 하나가 된다.
외면과 내면이 일치와 조화를 이루며 마침내 자기 자신과 타인, 운명 과 화해한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세상의 불공평이나 불의 앞에서까 지 초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내면의 평화와 강인한 태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결연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마음의 평화는 고대 사상가들에게 모든 지혜의 궁극적 목표 였으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도보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다.
- 끊임없는 분주함은 겉보기에는 생동감이 넘쳐 보여도 실상은 산만함, 도피, 헛수고에 불과할 때가 많다. 오히려 삶의 본질은 내면 의 평온, 진정성, 영혼의 안식, 좋은 인간관계 같은 몇 안 되는 근본적인 것들에 있다. 이것들이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물질적인 것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 쾌락주의 철학 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 지 않고, 추위에 얼어붙지 않는 것. 이런 상태를 유지하거나 바라는 자는 제우스와 행복을 겨룰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안에서 행복을 찾고 일궈나가야 한다. 하지만 외부의 사물과 재화에서 행복을 헛되이 찾는다. 부와 소유물은 삶을 더 쉽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듯 보인다. 그러나 때때로 삶을 더 힘들고 걱정스럽고 복잡하게 만들 때도 있 다. 재산의 필요성과 효용을 긍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재산이 행복한 삶에 도움되기는커녕 방해가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본질 적인 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내면에서 여러 가 지힘, 충동, 저항이 올바른 균형을 이루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외 적 소유와 외적 관계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 우리는 내면의 균형 과 평온, 마음의 평화를 진정 동경한다.
- 타인을 아는 자는 영리하고, 자신을 아는 자는 지혜롭다. -노자
- 인격 성장과 자기 인식에서도 질문이 우리를 더 멀리 나아가게 한다. "좋은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좋은 여행자와 완전한 여행자의 차이점은 완전한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국 도가의 경전인 《열자》에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구절이 있다. 지고의 목표를 향해 방랑하라! 방랑의 목표에 이른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더 는 알지 못한다. 경탄의 목표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보는 지 더는 알지 못한다. 그는 방랑하며 모든 것을 만난다. 이런 식으 로 모든 것을 본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방랑과 '봄'이다. 그리하여 말하노니, 지고의 목표를 향해 걸으라!"
- 고대 철학자들에게 행복에 이르는 열쇠는 바로 주의 깊은 자기 인 식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 자는 행복을 아는 자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 말은 자신의 마음을 아는 자에 게 행복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통찰을 철학자이자 황제 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약간 다르게 표현했다. "자신의 영혼 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탐구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 치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 인식의 가치를 가장 분명하게 표명 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자신의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 걷기는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고요를 허락해준다. 특히 혼자 걸을 때 이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그러나 "시체들이 누워 있는" 영혼의 어두운 지하실로 내려갈 용기와 솔직함이 필요하다. 마음 한편에 덮어둔 문제나 어두운 일을 그저 외면하고 싶은 유혹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지 않는다는 뜻이다"라는 《예기》의 구절처럼,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걸을 때 스스로를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마음의 집을 깨끗이 정돈하면 "내면의 안도감에 이른다. 여유 있게 사색하며 걷는 일은 우리를 그와 같은 상태로 인도한다. 걷 는 동안 우리는 신체적으로 생기를 되찾고 원기를 회복할 뿐 아니 라, 마음의 질서를 되찾고 내적인 일치와 조화에 도달한다. 나아 가, 삶의 가치들을 재발견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 를 찾아 우리는 다시금 자기 자신이 된다. 니체는 말한다. "이제 내 가 어떤 운명에 처하고 어떤 체험을 하든 방랑과 등산은 그 안에 포 함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경험할 뿐이니. (...) 다만 돌 아갈 뿐이며, 결국 스스로에게 올 뿐이니. 나 자신에게로, 오랫동안 낯설고 소원해졌으며, 모든 일들과 우연 가운데 흩어져 있던 것에 게로. "
- 물 한 잔이 갈증을 해소하고, 한입의 채소가 심장을 튼튼하게 한다. 하나의 좋은 것이 모든 좋은 것을 보여주고, 아주 작은 것이 전체를 보여준다.  -고대 이집트의 격언
- 고대 인도와 중국의 현자들은 매우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다. 부처는 "그대는 정신력의 균형을 추구하고, 이를 목표로 삼으라"고 제자들에게 권한다. 고대 인도의 힌두교 경전 중 하나인 《바가바드 기타》에는 계속해서 내적 욕구에서 우러나와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되, 그 결과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권유가 나와 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그대의 사명 일진대,
그 성패에는 신경을 쓰지 말라.
결코 행동의 열매를 탐내지 말라.
하지만 게으름에 빠지지는 말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세속적인 욕심에서 벗어나라.
일이 잘되든 안 되든
늘 침착함을 유지하라. 
물론 우리는 추구하는 외부의 목표를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고대의 현자들도 이와 같이 소망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이 외부의 목표 실현 여부에 따라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유유히 거닐 때처럼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목표이지,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 는 안 된다. 우리는 정상에 도달하는 것보다 정상에 오르는 길 자체를 더 사랑하기에,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오르는 대신 때로는 몇 시간에 걸쳐 힘든 길을 걸어간다. 또한 이를 악물고 아등바등 나아가 는 사람보다는 초연하고 침착하게 한 발 두 발 내딛는 사람이 목표 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목표를 못 이루면 어쩌지?' 하고 불안 해하며 힘을 낭비하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태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성실하고 적극적이지만, 이루고자 하는 성 공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공자는 말한다. "적절한 정도를 지킬 줄 아는 사람. (...) 그의 마음은 자기 자신으로 가득하지 않다. 그리 하여 그는 꾸준히 제 할 일을 할 수 있다."
- 고대 그리스와 인도의 철학자들과 중국의 공자가 강조한 자기 교육의 목표는 내면의 조화를 이루고, 중용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지혜로운 사람의 길은 그 자신의 인격에 뿌리를 둔다.” 중국의 한 문헌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길을 하늘과 땅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추니, 걸림돌을 보지 못한다." "희로애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중용이라 하고, 이런 감정이 일어났 더라도 모두 절도에 맞는 정도일 때를 조화라 칭한다. 중용은 천하 만물의 뿌리이고, 조화는 천하 만물의 공통된 바른 길이다. 중용이 조화에 이르면, 하늘과 땅은 그에 합당한 자리를 찾고, 만물이 꽃핀다.
- 장자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탄생과 소멸,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가난 과 부유함, 격이 높음과 격이 낮음, 상과 벌, 배고픔과 목마름, 더위 와 추위는 운명의 흐름에 따라 서로 번갈아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런 것들이 내면의 조화를 무너뜨리게 내버려두는 것은 참으로 무가 치한 일이다. 이런 것들이 영혼의 집을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내면의 조화를 망가뜨리지 않고, 늘 기쁨으로 봄날 같은 온화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품성을 가진 자다."
- 쾌락과 기쁨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을 이루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부재와 마음의 평안이다. "이러한 것들을 명확하게 고려하면 모든 행위와 무위가 몸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최종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면 여정의 일부라도 기운차게 걸어가라!"라고 했다. 가이바라 에키켄은 말한다. "지고의 목표를 추구하면 그 목표의 중간까지 도달할 수 있지만, 중간까지만을 목표로 삼으면 결국 아무 데에도 이르 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멀리 방랑할수록 삶에 더 만족하게 된다. 목표는 곧 길이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인간 역시 살아 있는 한 길을 간다. 길을 걷는다.
- 세네카는 "도시의 성벽을 뒤로하고, 숲을 사랑하는 삶보다 더 아름답고 악덕에 물들지 않은 삶은 없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행복이 사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며, 자연과 간소한 삶의 방식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경험한다. 걷는 동안에는 그저 걸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크나큰 행복이 깃든다. 걷기의 즐거움을 "목적 없음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본 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족하기를 배우는 것, 그것은 도보 여행의 가장 높은 단계다. 이를 경험하고 배우고 내면화한 사람은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고, 외부의 상황이 힘들다고 해도 일상을 즐길 수 있다. "삶의 단순한 것들에 기뻐하는 것이 곧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고 가이바라 에키켄은 말한다. 
- 자연은 우리에게 겸손의 덕을 가르쳐주는데, 바 로 이럴 때, 자연스럽게 평정심이 생기며, 이와 함께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물의 흐름에 복종할 수 있는 상태가 가능해진다. 걸을 때 는 지나온 것이나 앞으로 다가올 것을 보지 말고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당신의 생명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다"라 고 열자는 말한다. 《장자》에 나오는 노나라의 현인 자래는 죽기 전. 문병을 온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하늘과 땅은 커다란 용광로요, 조물주는 위대한 주물공으로 생각한다면 나야 어떤 형태로 변하든 좋지 않겠는가. 나는 편안히 잠들고, 고요히 다시 깨어날 것일세."
- 우리는 걷다가 힘든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이를 타개해나가는 연습 을 통해 인생의 힘든 시절에도 "견딤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운명의 타격을 참을성 있게 견디는 "치료법"을 말해준다. "불행을 당했을 때 가능한 한 침착함을 유지 하고 자제력을 발휘하여 아픔을 지나치게 내비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그런 불행이 결국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전전긍긍하는 행동은 모든 면에서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인간적인 손실이란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네 번째는 계속해서 탄식하고 비애에 잠겨 있으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 단하는 정신 능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정신 능력이냐 하 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스스로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이성이 최선의 조치를 취하게끔 하 는 능력이다. (...)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 가능하면 빨리 치유와 회 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늘 마음을 준비해둬야 한다."
이런 인식은 우리 눈에 '불행'으로 다가오는 일을 만났을 때 더 초연하게 견디게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 불행으로 여겼던 일이 훗날 긍정적인 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 탄식만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 침착성을 유지할 때 불행에 최선의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심지어 "화를 복으로 바꿀수도 있다는 생각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많은 도움이 된다
- 죽음을 경멸하지 말고, 그와 친구가 되라. 죽음 역시 본질적으로 자연이 의도한 것이니. 그대는 그대를 만들어낸 것 안에서 사라지리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고대인들도 인생의 덧없음을 절절히 경험했다. 기원전 2000년경,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 실린 하프 연주가의 노래는 이 러하다. "태양신이 아침 일찍 모습을 드러내고 저녁에 대양으로 지는 것처럼, 조상의 대부터 한 세대는 지나가고 다음 세대가 그 자리 를 차지한다. 남자들은 만들고, 여자들은 잉태한다."
무상과 관련한 조언에는 종종 그로 인해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가 따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영영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게 슬퍼하지는 말아야 한다. 열자는 이에 대해 인상 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나라에 동문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들이 죽었는데도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동문오의 집사가 그에게 물었다. '천하에서 자신의 아들 사랑하기를 나리처럼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드님이 세상을 떠났는데, 나리는 왜 슬퍼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동문오가 말했다. '내게는 일찍이 아들이 없었던 때가 있었네. 아들이 없었던 그때, 나는 슬퍼하지 않았네. 이제 아들이 죽고 다시 예전처럼 아들 없이 살게 된 걸세. 그러니 내가 어찌 슬퍼해야 한다는 말인가?"
- 기원전 2000년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우리에게 덧없음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권면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삶의 모든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덧없음 속에서 삶을 즐기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도와준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신들은 인간을 죽는 존재로 정하고, [영원한] 삶은 자신들의 것으로 취했다. 그러므로 길가메시여, 그 대는 먹고 마시고, 몸을 채우고, 밤낮으로 그저 기뻐하라! 매일을 기쁨의 축제로 만들라! 수금과 피리를 연주하고, 춤추며 밤낮으로 기뻐하라! (...) 그대의 손을 잡는 자녀들을 즐겁게 볼지어다! 아내의 품을 즐거워하라!"
지혜로운 사람들은 무상을 우울하게 인식하지 않았다. 세네카가 말했듯, "무자비한 삶의 충동"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해방으로 여겼다.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은 삶이 주는 즐거움을 좀처럼 흐리 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좀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심 없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세네카는 그의 비극 중 하나에서 죽을 수 있는 능력, 죽음을 견디는 능력을 변덕스러운 운명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과 동일하게 본다. 만물이 덧없다는 사실을 알면, 외적인 행복이나 재물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 즉 본능적인 생의 충동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다. 세네카에 따르면, 이런 상태가 되면 걱정, 두려움, 시기, 탐욕, 적대감과 같은 수많은 악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런 악은 자신의 유한을 의식하지 못하는 무절제한 삶의 충동과 과시욕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 앞서 《길가메시 서사시》가 넌지시 보여주듯이, 죽음은 삶의 경이로움에 우리를 열려 있게 하고, 삶이 주는 선물을 감사하며 누릴 수 있게 한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는 죽음을 관조하고 "죽음을 연습" 하여 친숙해지는 것이 기쁨의 원천이며 유쾌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 라고 믿었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죽음을 연습하고 나면, 그 연습은 그대가 여기에서 그리로 거처를 옮겨야 할 때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야 할 때, 즉 죽어야 할 때] 당신을 동반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선은 당신의 삶이 즐거워질 것이다. [육체적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속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살 아가게 될 것이며, 곧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을 떨쳐버리게 될 것이 다. (...) 그러면 전체의 조화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침묵하는 가운데, 신들이 게으르고 거친 삶을 경계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 을 준비해놓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 무상을 깨달아 외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고대 인도, 특히 불교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틱낫한은 이렇게 말했다. "무상을 깨 달으면 욕망, 집착, 절망의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런 깨달음 을 바탕으로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을 바라봐야 한다."
유한과 무상, 죽음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운 집착이 줄어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에 부치는 일을 무리하게 도모하거나 스스로를 과도하게 몰아붙이거나 압박하는 일을 피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의 삶은 덧없고 짧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그러니 너무 많이 소유하려고 애쓰지 말 것이며, 필요한 정도로만 수고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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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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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인지의 힘

인문 2023. 9. 20. 11:57

- 메타인지는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별하는 능력으로, 지 각의 저울이나 계기판, 나침반 기능을 한다. 특정 사안에 대해 잘 못 알고 있거나 모른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은 일종의 인지 실패 를 의미한다. 무지와 직면하게 되는 인지적 실패의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메타인지 능력의 방향이 결정된다.
- 실베이니아대학의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대상이 물건일 때 사람들은 열정을 다해 업데이트한다. 그러나 대상이 지식이나 견해일 때는 기존의 것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토플러가 일깨운 것처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21세기 에는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의도적으로 망각하고unlearn 새로이 학 습하는releam 방식으로 적응해야 하지만 이는 인지적·심리적 부담 이 큰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하는 지식과 사회 환경을 외면하 고 과거의 지식에 머물러 있는 배경이다. 하지만 지식정보 사회에 서 변화의 폭과 속도는 인간 본능과 인지적 구두쇠 성향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점점 커져갈 따름이다. 지식정보 사회에서는 새로운 상 황에 적응하는 태도와 능력을 지녔는지에 따라 개인 간, 집단 간격 차가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
- 독일의 과학 저술가 크리스티아네 취른트는 모든 실패의 공통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실패의 결과는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꿔버린다." 취른트는 '실패'가 모 든 사람에게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근대 이후 시민권이 확립되면서 부터라고 말한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오로지 영웅만이 '실패의 특 권'을 지녔다. 관객은 영웅인 주인공이 몰락하며 실패하는 것을 지 켜볼 따름이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와 같은 메타인지, 자아성찰과 직결되는 질문은 그러한 결정권과 책임을 지닌 영웅에게만 허용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에세》를 통 해 자신을 향한 성찰과 글쓰기를 개척하며 근대적 인간상을 만들어 낸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 또한 실패를 자기인식의 수단으로 파악했다.
- 실패는 인간에게만 허용된 세계이기도 하다. 본능대로 행동하는 동물은 실패할 일도 없고, 후회하거나 실패에서 배움을 얻을 수도 없다.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만이 선택을 하고 실패할 수 있다. 실패와 좌절을 통해 사람은 후회와 깨달음을 경험하고, 깊은 내면 을 돌아보게 된다. 난관과 실패가 불러온 내면으로의 침잠과 성찰 은 메타인지로 이어지는 경로가 된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2008년 하버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실패가 주는 이점'에 대해 말했다.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전 에 롤링은 이혼한 뒤 실업수당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던 싱글맘 이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이 아는 가장 큰 실패자'였다고 고백했다. 출판사 열두 곳에 원고를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한 상태였다. 롤링 은 하버드대학 졸업생들에게 자신이 맛본 실패의 비밀을 들려줬다. “실패의 이점은 실패가 비본질적인 것을 모조리 벗겨내는 걸 의 미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닌 다 른 존재인 척하지 않았고 나에게 중요한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자유로워졌습니다. 내가 품었던 가장 큰 두려 움이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뒤였으니까요. 실패는 내가 시험들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을 때는 한 번도 얻지 못했던 내적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고통스럽게 얻긴 했지만, 그런 깨달음은 진정한 선물입니다. "
- 제17대 미국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존 로버츠 대법관은 2017년 6월 뉴햄프셔의 한 중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실패와 불운이 가져오 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학교는 주로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 는 명문 사립학교로 로버츠 대법원장의 아들도 재학 중이었다. "나는 때때로 여러분이 부당하게 대우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의의 가치를 알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배신으로 고통받기를 바랍니다. 신의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여러분이 가끔 외로워지길 바랍니다. 그래야 친구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에게 이따금 불행이 찾아오기 바랍니다. 그래야 인생에서 기회의 역할을 알게 되고 여러 분의 성공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실패 역시 당연한 것 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실패는 자유를 지닌 인간이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과제다. 실패를 어떻게 다루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운명의 방향이 달라진다. 실패는 메타인지를 불붙이는 불씨다.
- 해리슨은 독학으로 40년간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1759년 '크로노미터 H4'라는 정교한 해상 시계를 이용한 경도 측정에 성공 했다. 경도가 시간의 경계인 만큼, 항해에서 경도를 측정하려면 두 지점의 정확한 시각을 알아내고 그 차이를 지리적 거리로 환산하면 된다. 현재 배가 위치한 곳의 시각과 출항한 항구(모항)의 시각을 파 악해 비교하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배가 바다 어느 곳에 있더 라도, 그리고 선상의 조건이 어떠하더라도 정확한 시각을 표시해주 는 시계가 필요했다. 이는 곧 거센 파도와 침수, 급변하는 온도, 높 은 습도와 염분, 흔들림이 끝없이 이어지는 장기간 항해 속에서도 오차가 거의 없는 정밀시계를 개발하는 작업이었다. 당시 시계는 시계추가 왕복운동을 하며 톱니바퀴를 회전시키는 방식이었는데, 이런 시계추 달린 시계는 바다에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해리슨은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시계추를 없애고 정밀 한 태엽을 이용한 혁신적 구조의 시계를 제작했다. '크로노미터 H4' 는 경도위원회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했고, 마침내 해리슨은 경도 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더불어 영국은 해상 경도 측정법을 최초 로 손에 넣은 국가가 됐다.

- 길 찾기 능력은 길을 잃어버린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미국의 사회비평가 리베카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에서 "절대 길을 잃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길을 잃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파멸의 길로 가게 된다"라며 길을 잃는 경험이 자신을 발견하는 출발 지점이라고 말한다."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산업화로 급속하게 팽창하는 도시를 떠나 월 든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2년여 동안 자립 생활을 했다. “삶 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보기 위해서,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만을 마 주하면서 삶이 가르쳐주는 것들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삶의 본질 적인 모습을 만나게 해준 소로의 오두막살이에는 '숲에서 길 잃기' 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고전이 된 에세이 《월든》에서 길 잃기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길을 잃고 세상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삶 에서 길을 찾는 일과 자연에서 길을 찾는 일과 의미에서 길을 찾는 일이 다 같은 일이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보금자리와 무리로 부터 떨어져 있는 상황은 그때까지 깊이 생각하거나 걱정해본 적이 없던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만드는 실존적 경험이다. '나는 어떻 게 해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내가 있는 여기는 도대체 어디일까?' '끝내 길을 찾지 못하고 산속에서 밤을 맞게 될 경우, 나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몸은 낯선 숲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구체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어쩌 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나는 어디에서부터 길을 벗어난 것 일까?' 모두 자신을 향한 물음이자 메타인지를 요구하는 질문이다. 길을 잃고 나서 스스로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동안 우리는 비로소 소로와 솔닛이 길 잃기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말한 까닭을 알게 된다.
- 우리는 풍요로운 초연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사고와 감 정, 행동을 결정하는 뇌는 식량과 정보가 부족했던 수만 년 전 구석 기 환경에 알맞게 설계되어 있다. 하버드대학의 사회생물학자 에드 워드 윌슨은 "인류의 진짜 문제는 인간 정서는 구석기시대에, 제도 는 중세에 머물러 있는데 기술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다. 그 기술은 황홀할 정도로 위험하고 현재 전면적 위기의 문턱에 다가가고 있다"라고 경고했다."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부분의 순간 우리는 본능과 직관의 지배를 받는데,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라고 과신하는 데서 거대한 착각이 생겨난다. 한발 물러나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비로 소 자신이 무엇의 영향을 받는지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메타인지 능 력이다. 메타인지는 저절로 갖게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윌리스가 예로 든 이야기처럼 물속에 살면서도 물을 알지 못하는 물고기와 비슷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게 출발점이다.
- 뇌의 '인지적 구두쇠' 성향 못지않게 합리적 판단을 방해하는 요인이 또 있다. 우리의 뇌는 인지적으로 불편함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정보나사실이 기존의 신념이 나 가치와 충돌해서 긴장과 불편이 생길 것으로 예상되면 뇌는 아 예 해당 정보를 외면하거나 스스로를 속이려고 한다. '인지부조화 회피' 심리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는 알면서도 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자 할 때 느끼는 불편함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로 인해 불편한 상황이 되면 이성을 동원해 객관적이고 합리적 인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뇌를 속여 기존 신념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왜곡해 받아들인다. 신념과 행동이 충돌할 때 우 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가서 이미 저지른 행동을 취소 할 수 없으므로, 행동과 일치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프랑스의 인지신경학자 알베르 무케베르는 인지부조화 현상을 생명체의 항상성 유지 노력으로 설명한다. 모든 생명체는 최상의 운동 기능과 뇌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성이라고 불리는 내부 균형 상태를 이루려고 하는데, 인간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달 리기나 더위로 체온이 높아지면 땀을 흘리고 추우면 몸을 떨어 체 온을 유지하는 것도 신체 항상성의 기능이다. 뇌에서도 비슷한 일 이 일어난다. 무케베르는 "만약 어떤 정보가 당신의 기호, 신념, 믿 음, 행동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당신은 '항상성이 깨진 긴장 상태'를 느끼게 된다"라며, 이 상태를 인지부조화로 설명했다."
인지부조화는 미네소타대학의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의 실험과 연구를 통해 알려진 심리학의 주요 개념이다. 페스팅거는 1950년대 시한부 종말론을 신봉하는 집단을 참여관찰하는 흥미로 운 실험을 진행했다. 종말론 신자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지구 종말 의 순간이 왔을 때 예언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였다."
- 시카고에 살던 가정주부 도러시 마틴은 "1954년 12월 21일에 대 홍수가 나서 지구의 종말이 닥칠 것"이라는 외계인의 메시지를 전 파하며 '구도자들 The Seekers' 이라는 종교집단을 이끌었다. "그녀는 대홍수가 일어나 북극에서 칠레에 이르는 서부 해안을 집어삼킬 것 이며, 종말의 순간 직전에 외계인이 UFO를 보내 예언을 믿는 소수 의 사람들만을 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론 보도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접한 페스팅거와 조교들은 신자로 위장해 그 집단에 잠입했다. 오늘날과 같은 연구 윤리가 확립되기 이전이라 가능한 방법 이었다. 종말론을 신봉하는 수십 명의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집 을 파는 등 신변을 정리한 뒤 종말론을 전파하는 활동에 적극 나섰 다. 신자들은 '최후의 날'에 한자리에 모여서 외계인이 보낸 UFO를 기다렸지만, 홍수도 UFO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강한 믿 음과 실제 세계가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행 동했을까?
종말은 오지 않았지만, 신도들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 다. 신도들은 예정된 시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잠시 심한 인 지부조화를 겪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희 작은 집단이 기도를 통해 많은 빛을 퍼뜨렸기 때문에 신은 홍수를 연기했다. 너희들의 믿음이 세상을 파괴에서 구했다"라는 도러시 마틴의 새로운 메시지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예언이 틀렸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 지만 사람들은 기존의 믿음과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거꾸로 달라 진 현실에 맞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조정했다. 종말론 신자들은 오히려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이 어갔다.
페스팅거는 이후에도 인지부조화 실험을 계속했다. 1959년 대학 생들을 대상으로 다이얼 손잡이를 계속 바꾸게 하는 지루한 작업을 지시한 뒤 과제를 마치면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여학생에게 "그 과제가 재미있는 일"이라고 말하게 했다. 그런 다음 과제에 관한 느낌을 묻는 설문에 솔직하게 응답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학생들을 둘로 나눠 한 집단에게는 1달러씩을, 다른 집단에게는 20달러씩 을 수고비로 지급했다.
설문 결과 20달러를 받은 집단은 "지루했다"고 응답한 반면, 1달 러를 받은 집단은 "과제가 정말로 재미있었다"라고 응답했다. 똑같 이 지루한 일을 수행했지만 두 집단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20달 러라는 큰 보상을 받은 이들은 솔직하게 말했지만, 1달러를 받은 사 람들은 대기실 여학생에게 설명한 대로 "정말로 과제가 재미있었 다"라고 응답했다. '고작 1달러를 받기 위해 그런 지루한 일을 했다' 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아예 그 일이 재미있었다고 생각을 바꿔 버렸다는 게 페스팅거의 해석이다. 즉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행동과 조화시키는 쪽으로 인지를 왜곡한 것이다.

- 인간은 합리적 사고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인지부조화 이론은 인지부조화를 회피하기 위한 합리화에 논리와 이성이 동원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지 왜곡에 의한 합리화는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 로 일어난다. 인지적 조화 혹은 마음의 평화를 위해 사람들은 상황 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솝우화 중 하나인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도 불편한 현실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 리화하기 위해 생각을 바꾸는 얘기다.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대니 얼 길버트는 "우리는 사실을 조작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하고 그 결 과를 즐길 때는 의식적으로 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무의식적으 로 사실을 조작하는 행위는 우리 뇌에 잘 작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에 대해 더욱 모르게 된 다. 이처럼 머릿속에서 인지적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일어나는 인 식의 조작을 알아차리려면 메타인지 능력이 필요하다.
- 합리적 사고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이성이 일종의 임시 가설 물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성은 사고와 행동체계를 통제하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생겨난 행운의 부산물에 가깝다. 생명체의 진화는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설 계도에 따라 차근차근 진행되지 않는다. 변화하는 환경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생명체의 진 화는 기계 설계나 작동 방식과 기본적으로 다르다.
인체는 직립보행을 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진화 과정에서 양손 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 직립보행을 하면서 척추가 전체 몸무게를 지탱하게 됐는데 이후 인류는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생명체 는 쓸모없어진 옛 구조를 폐기하고 새 기능과 구조를 만들어 넣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몸에는 꼬리뼈, 피부의 솜털, 사랑니, 맹장 충수처럼 진화 과정에서 용도를 잃어버린 흔적기 관들도 여럿 남아 있다. 인간은 기존 구조에 새로운 구조와 기능을 덕지덕지 붙이고 새 구조에 옛 구조를 제압할 수 있는 역량을 어느 정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진화의 산물이 완벽하거나 세 련되지 않더라도 작동하기만 하면 자연에서 살아남아 전승된다. 이 러한 진화의 불완전한 과정은 인간의 뇌와 사고체계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 뉴욕대학의 심리학자 개리 마커스는 인간의 이성이 오랜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그때그때 문제 를 해결해온 임시변통의 성격을 띤다고 말했다." 진화 과정에서 최 적화를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은 기존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그 위에 덧붙이는 식으로 추가되었다. 특정한 상황에서 효과가 있지만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마커스는 이를 클루지kluge라고 불렀다.
클루지는 프로그래머와 기계공학자들이 주로 써오던 '임시 해결 책'을 일컫는 용어다. 본질적인 문제를 대대적으로 수정하거나 재 설계해서 바로잡는 게 아니라 문제가 노출되지 않고 그럭저럭 피해 가도록 하는 대책을 의미한다. 임시변통, 땜질, 응급조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와 같은 대응 방법이다.
1970년 4월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13호가 달 착륙을 목표로 발사 되었다. 그런데 비행 사흘째 산소탱크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 다. 이 때문에 세 명의 우주 비행사는 이산화탄소에 중독될 절체절 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산화탄소 제거 필터를 가동시켜야 하는데 문제는 사령선에 있는 사각형 필터가 달 착륙선의 원통형 기기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우주선 안에서 사용 가능한 모든 물품을 갖고 밤새 실험해 양말, 테이프, 비닐봉지, 마분지 상자 등을 이용해 임시 여과장치를 만들었다. 투박하지만 임시방편을 찾아낸 덕에 세 명의 우주비행사는 지구로 무사히 귀환 할 수 있었다. 위대한 클루지의 사례다.
- 인간의 뇌는 위의 프로그램 수정 사례처럼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 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효과가 있는 클루지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이런 까닭에 나중에 생긴 능력인 이성(시스템 2)이 뇌의 기본적 구조인 본능과 직관(시스템1)을 강력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근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성의 힘을 믿고 편견 과 미신을 추방하면 자연스럽게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 이성의 특징을 잘못 이해하는 정도 가 아니라 과신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성은 본능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그 힘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게 진정한 과제이자, 메타인지의 출발점이다.

- 가장 효과적인 배움은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벤저민 프랭클 린은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우려 하지 않는 게 부끄러운 일 이다"라고 말했다. 무지가 아니라 무지한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인지적 게으름과 오만이 문제다. 오만은 무지와 확신의 결합이 다. 그래서 메타인지 능력을 높이려면 지적 오만에서 벗어나 겸허 하고 개방적인 마음가짐을 갖추는 게 필수적이다.
- 메타인지는 본능적인 생존 능력이 아니라 나중에 발달한 고등 인지 능력이다. 앞서의 실험들이 보여주듯, 메타인지 능력 이 부족해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지각과 사고는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사고의 작동 과 그로 인한 영향을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인지적 부담을 느낀다. 또한 특정한 사안에 대해 모른다는 자각은 잠재적 위험에 노출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심리적 불안과 무기력을 야기할 수 있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본능적으로 기피하게 되는 이유다. 무지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류는 다양한 설명 체계와 세계관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의존해왔다. 오랫동안 공동체에서 전승되어온 신화와 설화, 그 리고 관습과 종교가 그 기능을 했고, 오늘날에는 사회제도와 과학 그리고 인터넷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생명체의 기본 속 성으로, 인체도 신체적·정신적 항상성을 추구한다. 뇌가 불안을 회 피하고 안정과 낙관을 유지하려는 것도 항상성 유지 활동이다. 무 지 상태가 주는 불안을 피하기 위해 뇌는 속임수도 동원한다. 무지 를 인정하지 않고, 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생명체의 항상 성 유지 차원에서 보면 자신을 속이는 행위는 심리적 불안을 없애 주는 이점이 있다. 자기합리화, 즉 '정신승리'에 능한 사람은 사실 인식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 상태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무엇보다 심리적 평온을 우선시하는 사람이다.
-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확실성 추구가 의미 추구를 가로막는다고 보았다. 그는 불확실성이야말 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추진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보았 다." 복잡한 문제를 만났을 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인지 적 종결 욕구를 억누르고 대신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공존하려는 인지적 태도는 과학적 인식과 풍부한 상상력의 원동력 이 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불멸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설명이 있겠지만,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 황과 갈등을 생생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해낸 문학적 기량 때문만은 아니다. 각 등장인물이 내면 깊은 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인 간과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과, 결론 없이 열려 있는 이야기 의 전개 구조야말로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관통하는 핵심적 특징이 자 탁월함이다.
19세기 초반에 짧은 생을 살다 간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 (1795~1821)는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셰익스피어가 이룬 위대 한 성취의 비결은 '부정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이라고 썼다. 키츠는 부정적 수용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능력, 특히 셰익스피 어가 풍부하게 지녔던 이 특징을 나는 '부정적 수용력'이라고 부르 겠어. 사실과 이성을 추구하려고 안달복달하지 않고 불확실성, 미스 터리, 의심을 품은 채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거지."
키츠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불확실하고 이해할 수 없으며 의심 스러운 상황에서 성급하게 사실과 설명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대신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논리적으로 따지거나 결론을 향해서 바로 달려가지 않고 불확실성을 수용한다. 그 결과 주인공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펼쳐나간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등장 하는 주인공들의 공통점이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자신을 파멸로 몰 고 가는 오셀로, 충직한 왕의 신하였으나 마녀들의 말을 믿고 야심에 사로잡혀 살인 반역자와 폭군으로 변해가는 맥베스, 왕위의 화려함과 번드르르한 아첨에 취해 진실을 보지 못하고 거듭되는 배신으로 파멸하면서 회오에 빠지는 리어왕, 왕실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복수 속에서 삶과 죽음, 선과 악에 대한 근원적 고민과 갈등에 빠지는 햄릿. 이들은 모두 피할 길 없는 인생의 모순과 비극의 심연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은 전형적인 인물과 극적인 줄거리를 만들 어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상황과 성격의 영향을 받지만 결코 그 환경에 사로잡히거나 머무 르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모호하고 미스터리한 현실 속에 등장인 물들을 풀어놓았고, 그들의 선택과 운명이 어느 방향으로 치닫다가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독자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셰익스피어는 작 중 인물이 된 것처럼 각자가 처한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복잡한 마음속을 자유롭게 오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400년 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해석되고 있다. 그의 작품과 작 중 인물들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사랑받으며 다양한 형식으로 리메이크되는 불멸의 생명력을 지니게 됐다.

- 디지털과 인터넷 기술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를 불러왔다. '정보홍수'는 인간의 인지적 본능과 정보의 본질적 가치에 중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첫째, '인지 과부하'로 인한 부작용이다. 정보가 넘치는 디지털 세 상은 편리하고 유익한 환경이자 현대의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사실 개인과 사회는 정보홍수 상황에 익숙하지 않다. 정보홍수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고,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상태 다.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최근 몇십 년을 빼고 정보는 항상 희소한 자원이었다. 정보가 희소한 환경에서 남보다 먼저 정보를 획득하는 것은 생존율을 높이는 중요한 능력이었다. 호수 어느 곳에 물고기 가 많은지, 맹수가 어디에 자주 출몰하는지를 남보다 먼저 아는 능력은 생존에 매우 중요했고, 인간은 더 많은 정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진화했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 뇌에서 쾌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되어 쾌감을 느끼도록 만들 어졌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 연구진의 2019년 논문에 따르면,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코카인을 흡입할 때와 동일한 신경회로가 활 성화된다고 한다. 둘 다 도파민의 분비를 유발한다. 우리가 천둥소리에 놀라고 스마트폰 알람에 저절로 눈과 손이 가는 이유는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 도파민이 분비되도록 우리 뇌의 신경이 짜여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정보가 희소한 상황을 살아오면서 더 많은 정 보를 추구하는 쪽으로 적응해, 반사적으로 뇌가 새로운 정보에 반 응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최근 몇십 년 사이에 정보가 넘쳐나게 된 상황은 인간 본 능 측면에서 보면 매우 이례적이다. 사람은 본능에 따라 여전히 새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문제는 정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방치하면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중요하 지 않지만 자극적인 정보에 주의력과 시간을 할당하게 되어 지적 능력이 고갈되거나 접촉하는 정보에 의해 생각이 좌우되는 병리적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둘째, 정보홍수는 개별 정보 및 지식의 가치와 쓸모를 지극히 짧 고 일시적인 것으로 바꾸고 있다. 하버드대학의 복잡계 물리학자 새뮤얼 아브스만은 '지식의 반감기'라는 개념을 통해, 현대사회에 서 지식과 정보의 유효기간이 갈수록 단축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대륙의 숫자', '태양계 행성의 수', '컴퓨터의 평균 작동 속도' 등 우 리가 접하는 지식은 대부분 불변의 절대 지식이 아니다. 시간에 따 라 변화하는 가변적 지식이다. 가변적 지식은 신선식품처럼 유효기 간이 있는데, 디지털 인터넷 환경에서 정보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유효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아브스만은 지식의 유효기간 또한 방사능 물질처럼 '반감기가 계속 짧아지는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지식 생산과 유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에 따라 지식의 유효기 간이 단축되면 인간의 한정된 주의력과 인지 능력이 그 변화를 따 라잡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지식의 유효기간이 점점 단축되는 환 경에서 '가변적 지식'을 '지식의 반감기 개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 할 수 없다. 마치 '현재 한국의 총인구'처럼 지식으로 확립되자마자 부정확해져 이내 업데이트 대상이 되어버리는, '유동지식動知 현상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 디지털 정보 폭발은 빅데이터 환경으로 이어졌다. 빅데이터는 규 모가 방대해 사람이 인지하거나 다룰 수 없고, 기계와 알고리즘에 의한 처리가 불가피하다. 지식의 폭발적 증가와 유효기간 단축은 미래의 변화와 예측 불가능성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지식의 유효기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것은 방대한 규모의 정보가 생산돼 변 화가 빨라지고 광범위해지면서 복잡도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 다. 갈수록 복잡도와 예측 불가능성은 커진다.
- 미국의 미디어 연구자인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현재의 충격》에 서 오늘날을 "현재라는 순간을 향해 모든 게 재배열된 상태"라고 규 정했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방금 발생한 '찰나적 사 건'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강력한 신호가 외부에서 쉴 새 없이 주어 진다. TV를 시청할 때도 현재 날씨, 도로교통 정보, 금융시장 등락 과 같은 '긴급 속보 자막이 수시로 지나간다. 스마트폰으로는 미세 먼지 경보, 감염병 환자 발생 정보를 비롯해 마감 할인 상품, 이메일 도착과 소셜미디어 댓글 등 방금 발생한 일들이 '알림'의 형태로 깜 빡거리며 "즉각 대응하라"고 압박한다. 러시코프는 "이런 방해물들은 단순히 우리 인지 능력을 소진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 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따라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현재로부터 이 탈된다는 느낌을 우리 안에 심어 넣는다. 데이터 흐름의 변화에 뒤 처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비상한 노력은 결국 그 변화가 보내는 신호의 중요성을 실제보다 훨씬 과대평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현재에 대한 정보가 눈앞에 제공되면 우리 뇌는 굶주린 동물이 먹잇감을 만난 것처럼 무조건 덤벼든다. 기술의 강력함은 점점 더 기다림을 없애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실시간으로 처리하고 즉시 그 결과를 제공한다. 미래의 불확실한 이익보다 눈앞의 욕구 충족 을 선호하는 것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본성이다. 당장의 쾌 락과 고통은 상상할 필요 없이 너무 생생하지만, 멀리 있는 미래의 이익과 손실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에서는 대 부분의 사람이 미래의 고통을 현재의 쾌락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다. 높은 이자의 장기 할부, 월부 판매, 신용카드 결제 등이 '현재가 치선호 편향'을 활용한 상품들이다.
-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정보기술 기업들이 알고 리즘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용시간 연장을 통한 기업 이윤의 극대화다. 뉴욕대학교 스턴경영대학원의 스콧 갤러웨이 교수는 "현재 거대 IT 기업 입장에서는 클릭과 중독을 유발하는 알고 리즘을 만드는 것 이외의 일을 할 동기가 없다"라고 말했다." 무한 정보 세상에서 알고리즘이라는 도구 없이는 항해가 불가능하지만 알고리즘은 이용자를 위한 나침반이 아니다. 알고리즘의 지향점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이윤 극대화이고, 이는 정보화 세상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 행동경제학과 심리학을 연구하고 구글에서 디자인 윤리학자로 일해온 트리스탄 해리스는 이용자들의 주의력을 붙잡기 위한 인터넷 서비스의 비윤리적 디자인을 지적해왔다. 그는 구글을 떠나 2018년에 비영리단체 '인도적 기술 센터Center for Humane Technology를 설립했다. 해리스는 뉴스피드 · 이메일 등의 서비스가 카지노 슬롯 머신과 비슷하게 디자인됐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메일이나 콘텐 츠를 확인하기 위해 조작 버튼 없이 화면을 아래로 밀어서 갱신하 는 기능과 무한 스크롤 기능은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겼다 놓으면서 당첨 여부를 확인하는 동작을 모방한 것이라고 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나면 겨울이 오듯 우리는 자연에서 직관적인 정지신호가 명확하게 주어지는 활동을 통해 세계에 대한 감각과 인 지를 발달시켜왔다. 오늘날 플랫폼 기업들이 이용자에게 들이미는 설득형 기술들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감각과 인지에 혼란을 가져오도록 만든다. 스콧 갤러웨이도 무한 스크롤의 인터넷 서비스가 중 단 없는 이용을 요구하는 카지노 설계를 닮았다고 말한다. 갤러웨 이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은 정지신호를 없애버렸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음 도박 테이블로 이동할 수 있 도록 실내에 모서리진 부분을 만들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연속적 인 공간으로 꾸며놓은 카지노와 비슷하다"라고 지적했다." 현재 존 재하는 가장 정교한 소프트웨어는 이용자가 사이트를 떠나지 못하 게 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임무를 띠고 있으며25, 세상에서 가장 똑똑 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의력을 최대한 빼앗으려는 의도로 스마트폰과 앱들을 설계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증언과 고발이 잇따르고 있다. 
-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교묘한 속임수 장치와 기만적 설계로 이용자들의 주의력과 시간을 노리는 마케팅인 '다크 패턴dark pattern'과 같은 설득형 기술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사회적 차 원의 노력과 함께 이용자들의 적극적인 시도도 필수적이다." 기술 기업이 이용자의 주의력을 빼앗아가는 디지털 세상에서 나의 주의 력을 되찾기 위한 실질적 동기는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손해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용자로서 나의 목표와 이익은 대개 주의력 사업가의 목표와 상충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뉴욕대학의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사실이 우리의 가치와 충돌할 경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고수할 수 있고, 반대 증거를 무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른 생각과 지식을 가진 사 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다양한 견해를 접하고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토론과 소통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경제적 체제로 기능하는 배경이다. 그런데 인터넷 환경에서 사람은 자기 생각과 반대되거나 충돌하는 견해 및 지식으로부터 자신을 방 어하기가 더 쉬워졌다. 미국의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오늘날 사람들에겐 상호작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 어떤 정치적 신념을 갖고도 뉴스 사일로 속을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한다. 정보기술은 필터링과 추천을 통해 이용자가 좋아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으며, 소셜미디어에 서 개인은 친구 맺기와 삭제, '좋아요'를 통해 정보를 거르고 편집한 다. 이러한 정보기술의 알고리즘과 플랫폼, 그리고 이용자들의 선 택 편향은 모두에게 자신만의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가상세계 안에 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전문가는 아주 좁은 범위에서 일어날 법한 실수란 실수는 모두 경험해본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하이젠베르크 또한 "전문가 는 자신이 다루는 주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실수들과 그 실 수를 피하는 법에 대해 웬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한계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직면하고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깨 닫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는 부단한 시도를 통해 해당 분야의 최전 선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한 모든 실수를 경험한 사 람이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가장 정확하게 아는 전 문가다.
- 모든 것이 선택의 문제라는 것은 선택하는 능력이 우리가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하고 강력한 도구임을 알려준다. 현명한 선택은 어떻게 가능한 가? 스워스모어대학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는 선택 과부하로 인한 문제를 연구하며 현명한 선택의 조건을 모색했다.'
슈워츠에 따르면, 선택 과잉 상황은 세 가지 부정적 효과를 가져 온다. 
첫째, 의사결정에 더 많은 인지적 자원과 노력이 요구된다. 
둘째, 고를 게 많으므로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셋째,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 심리적으로 더 큰 타격을 입는다. 선택할 게 몇 개 없으면 그중 하나가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만 족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지가 많으면 어딘가에 더 나은 답안이 있 을 것 같고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이에 대 해 슈워츠는 현명한 선택을 위한 첫걸음은 목표를 명확히 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선택'을 할 것인지, 아니면 '적당히 만족스 러운 선택'을 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최고의 선택을 추구하다 보면 끝없이 모색하고 비교하느라 인지적 노력을 과도하게 투입하게 되 고, 결국 웬만해서는 선택 결과에 만족할 수 없다. 선택의 횡포에 시 달리게 되는 상황이다. 슈워츠는 선택 과잉으로 인한 부작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최고의 만족' 대신 '적당한 만족'을 추구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고 추천한다.
- 《월든》에는 자유의 본질에 대한 역설적 통찰이 담겨 있다. 소로는 "우리 읍내에 사는 젊은이들이 농장과 집, 헛간과 가축, 농기구를 물려받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런 것들은 얻기는 수월해도 버리 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1~2세기 고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그것이 무엇 이든 간에 그것을 얻거나 버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가 바로 그것 의 주인이다"라고 말했다." 에픽테토스의 관점으로 보면 현대인은 많은 것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 버릴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소유물의 주인이 아니다.
- 청빈한 구도자로 살며 진정한 자유로움을 설파하고 실천한 법정 스님은 에세이집 《무소유》에서 진정한 자유와 소유 여부를 판별하 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 는 말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무소유가 아니다"라 고 말했다. 그가 제시한 소유와 무소유의 기준은 물리적인 점유여 부가 아니다. 그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냐"가 기준이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는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좀 더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라는 역설을 다시금 일깨웠다.
- 개인의 의지력은 성격적 특성이라기보다 일종의 근육처럼 작동한다는 게 인지과학의 연구 결과다. 근육을 장시간 사용하면 피로 가 쌓여 어느 순간 한계에 부닥치는 것처럼 의지력은 금세 고갈되 는 유한한 자원이다. 의지력은 굳센 각오와 결심에 의해 생기고 유 지되는 게 아니라 유한한 자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의지력을 대 하는 관점도 달라진다. '하면 된다'라는 태도로 무작정 '정신승리' 에 호소하기보다 좀 더 신중하고 절제하며 의지력을 발휘하게 된다. 불필요하게 의지력을 고갈시키는 수고를 하기보다 처음부터 굳이 의지력을 쓸 필요가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 자기 통제력이 강한 사람은 의지력이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실은 굳이 엄청난 의지력을 발동시킬 필요가 없도록 주변 환경을 잘 설정해놓은 경우가 많다.' 5장에서 소개한 마시멜로 실험에서도 마시멜로를 먹고 싶은 욕망에 의지력으로 맞서는 것보다 마시멜로에 뚜껑을 덮어놓거나 눈에 띄지 않게 치우는 게 효과적이라는 게 확인됐다. 자신이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를 자각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하는 메타인지를 갖추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효율적인 접근과 통제가 가능해진다.
- 최신 과학 연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얼마나 다양하고 심각한 편향과 인지적 오류에 빠지곤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행동경제학과 인지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뛰어들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다양한 선천적 편향과 인지적 오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사고와 판단에서 그 영향을 받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력을 구현할 수 있는 존엄하고 강력한 존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취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와 나의 인지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힘의 존재와 위력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대응책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메타인지의 첫걸음은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를 발견하고 그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 인생에서 가장 확실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 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바로 죽음이다. 스티브 잡스 는 2005년에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인생의 가장 위대한 발명은 죽음"이라고 말했다. 죽음은 누구도 바라지 않지만 결코 피 해갈 수 없는 사건이다. 죽음에 직면해서는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 치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이 모두 별것 아닌 게 되고 진실로 중요 한 것만이 남게 된다. 그래서 죽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잡스는 말했다. 삶을 관조하며 정념과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상태인 아파테이아apatheia를 추구한 고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 도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은 행운이다"라고 주장했다. 모든 종교와 인생관의 출발점도 죽음에 대한 사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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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계속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고 대가를 비교한다. 당신을 매일 화나게 하는 사장한테 사표를 내는 대가가 무엇일 까? 마침내 꿈을 실현하고 뉴질랜드로 이민 갈 것인가? 그러면 직장에 계속 다니는 대가가 무엇일까? 모든 결단은 냉정한 대가 비교로 수렴된다. 당신이 하나의 대안을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 릴 때 당연히 나머지는 포기해야 한다. 슈프렝어는 이러한 사고 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밀고 나간다. 자기 자녀에 대한 책 임을 근거로 내세우며 아버지나 어머니의 입장에서 스트레스를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슈프렝어는 "책임은 선택 가능하므로 원 하지 않는 책임은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라 말한다.
- '파이프라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직장생활에서 즐겨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다. 사람들은 갖가지 파이프라인에 접속된 상태로 다중 작업을 하며 일하고 있다. 누구나 혹은 무언가와 계속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없고 성공을 거둘 수 도 없다.
- 예전에는 사무실에서 전화 통화를 할 동안에는 통화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일하는 사람을 보면 사람 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보통은 통화를 하면서 이메 일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손짓으로 동료와 대화를 나누고, 자료 를 분류하고, 책상 서랍을 정리한다. 사무실에서 다른 일을 하면 서 통화하기에 용이한 핸즈프리 장치는 필수다. 각자 자신이 얼 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같은 층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머리에 헤드세트를 착용하고 통화하며 커피를 타 러 주방으로 간다. 동료들과 아웃룩 달력에 스케줄을 공유함으 로써 서로의 스트레스와 압박도 공유한다.
- 점심시간은 네트워크 구축에 잘 활용할 수 있다. 출근길도 활 용도가 높다. 몇몇 사람들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출근 길을 이용해 훈련한다. 그들은 스톱워치를 착용하고 조깅을 하 며 사무실에 출근해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일단 사무 실에 들어가서 노력의 흔적인 땀을 씻는 것,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에 탁월한 포 인트다! 그렇게 역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분명히 성공할 테니 까. 부득이한 경우, 출근길에 서류를 검토하고 지하철에 앉아 휴 대폰을 통해 큰 소리로 지시를 내리고, 시간 관리와 업무 효율에 관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일할 수 있다.
- 오히려 일의 부담에서 벗어난 은퇴자들도 한가 해 보여서는 안 된다. 주중에는 모임에서 포도주 특산지로 나들 이를 가고 운동을 한다. 주말에는 손자 손녀들과 수영장에 가고 교회의 성가대 연습에 참석하고, 집안일을 돕는다. 월요일에는 정원사와 새로 심을 정원 식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심지어 여가 시간 스트레스는 은퇴 연령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증가하 는데, 그 나이가 되면 스트레스가 정점에 달한다. 예전 연금생활 자들은 "난 시간이 있어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오늘 날 그런 말을 하면 동정 어린 눈길을 받는다.
- 여가의 목적은 더 이상 푹 쉬는 것이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 써버린 에너지를 충전하고, 어떤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 고, 일할 수 있는 상태나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을 여가의 목적으 로 여긴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목적을 겨냥하는 행위다. 유 럽인들은 요가, 명상, 기공, 태극권과 같은 아시아적 기예를 통 해서만 긴장 완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들은 스트레 스를 받는 여가생활에서 대단한 주목을 끌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에 사람들은 휴가에 대해 자율적이라는 개념밖에 몰랐다.
「슈피겔」지는 '디지털 시대의 빈둥거리는 기술에 대해 보도하고, 「포커스」지는 "긴장 완화의 생물학,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충전하는 기술에 대해 조언한다. 두 가지 모두 10페이지가 넘 는 지면으로 구성된 머리기사였다.
첫째, 디지털 시대 사람들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휴 식을 취한다. 둘째, 이처럼 휴식을 취하는 것도 배워서 익혀야 할 기술이지, 가벼이 생각하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휴식은 자신의 사생활에 약간 더 스트레스를 받더라 도, 주도면밀하게 계산하고 실행하고 의사소통을 하고 성취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 성서에서 지구가 만들어지던 첫날에만 일이 벌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자진해서 벌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이란 그 후에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처벌로 인식되었다. 엄밀 히 말하자면 일이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찬미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수십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수렵채집 생활을 할 때 사람들은 일주일에 몇 시간만, 먹고사 는 데 필요한 만큼만 일했다. 사회학자 마샬 샐린즈는 석기시 대 경제학이라는 연구 논문에서, 당시에 일이란 기껏해야 아르 바이트 정도의 파트 타임 잡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아무도 일 그 자체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 아무도 일이 행복이나 자기실현, 삶 의미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일이란 무언가 지저분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노예와 농노는 일을 해야 했다. 돈이 있는 자, 사회의 엘리트계층에 속하는 자는 일할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일하지 않으려 고 했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하지 않는 것으 로 자신의 지위를 드러냈다. 그렇게 사람들은 일을 나쁜 것으로 간주했다.
일이 사람을 무디게 하고 타락시킨다고 단정 짓던 시기도 있 었다. 곰곰이 사색하며 토론할 시간이 있는 한가로운 삶을 누구 나 추구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이러한 삶의 본보 기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육체노동으로 자신을 혹사하는 대신 물질적 요구 수준을 낮추고 통속에서 살았다. 그는 어떤 아이가 맨손으로도 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물컵을 내던져 버렸다.
중세에도 일은 여전히 인간에게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수도원 의 승려들은 일을 무엇보다도 속죄로 간주했으므로, 여전히 일 을 추구할 만한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16세기에 들어서야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의 전체 역사를 살펴본다면 좀 늦은 감이 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인 마르틴 루터는 갑자기 일에 대해 직업 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직업이라는 표현으로 일은 신이 인 간에게 내린 의무의 이행이라는 고상한 의미를 부여했다. 갑자 기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아담과 이브에게는,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신이 내린 형벌이었다면 이제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괴로 운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늘 짐과 의무로 여겨졌던 일이 갑자기 특별한 아우라를 얻게 되었다.
산업화는 인간을 시계에 맞춰 움직이게 만들었고, 매일 더 효 율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특별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 오늘날에는 일하지 않는 사람, 일에 삶의 의미를 두지 않는 사 람, 일이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은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전에는 실업이 유일하게 사회적으 로 허용 가능한 삶의 방식이었다면, 오늘날은 이로 인하여 사회 의 여타 구성원들에게 낙인 찍혀 특히 시달린다. 다음의 이야기 가 그런 사실을 알려준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 실업자 줄이기, 은퇴 연령 늦추기 등 사람들을 일하게 하는 것이 수십 년 동안 모든 정부기관의 목표이다. 선거 때마다 정당에서 온갖 공약으로 내세우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많은 정치적 결단에 영향력 을 끼치는 사화적 이슈다. 모든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실업자를 언제 어디서나 해결해야 하는 문제점 으로 명백하게 규정할수록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 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곧 일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답지 못하다'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굳어졌다.
독특하게도 현대 사회는 실업자를 일자리를 찾는 사람, 정확 히 '구직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반드시 일을 찾아야 하고, 일자리를 찾는 사람만이 일을 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반면에 일자리가 있는 사람은 직위를 갖고 품위 있게 살 아간다. 직위와 품위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 전에는 사람들이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당연히 모든 인간 은 유일무이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모두 개성 경쟁에 빠져 있다. 그 경쟁에 합류하지 않으면 금방 그렇고 그런 대중의 일원이 되고 만다. 요즘 어디서나 통용되는 '창조적 으로 생각하라'는 강제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이 말은 모두가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런 다음 쉽게 떠오르는 일을 결정하지 말고 깜짝 놀랄 만한 일을 결정해야 한 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어떤 작가를 좋아하더라도 작품을 구하 기 어렵고, 주문을 통해서나 현대의 고서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누구나 좋아하는 그런 취 향을 갖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평균적인 대중의 일원이 되는 지름길이다.

- 오늘날 사람들은 집을 사는 것도, 결혼식도, 아이를 낳는 것도 몇 년 후로 연기한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일하는 데 얽매여 제대 로 된 판단이나 결정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좋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시간은 흘러간다. 나중에는 그것이 달라질 거라고 희망한다.
이때 문제는 '성과 강박'이 이것과 연관된다는 점이다. 잘해야 하기 때문에, 완벽해야 하기 때문에 결정을 미룬다. 그리하여 강 박들은 서루 다투면서 당신의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든다.
- 고통이 한편으로 불쾌하고 힘든 것임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것이 다른 한편으로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었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회가 되었음을 인정하자.
갈등은 모든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이다. 갈등은 영양가가 높 으며, 우리가 살아가고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해준다. 갈등은 당신에게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당신을 힘껏 밀어 줄 수 있다. 당신이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비롯한 기회를 잡을 용의가 있다면 말이다.

- "내가 야근하고 와서 두 시간을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틈새 를 깨끗이 닦고 있을 때, 당신은 인사도 하지 않고 집에 들어와 말 그대로 '여긴 돼지우리 같아'라고 하면(관찰), 나는 기분이 나 쁘고 실망하게 돼(감정). 나도 내가 한 일에 대해 인정과 가치평 가를 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야(욕구).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집안일을 더 잘할 수 있을지, 오늘밤 당신과 같이 곰곰 생 각해보고 싶어(소망)."
이러한 종류의 의사소통의 명백한 장점은 이렇다.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일반화하므로 반격당할 위험이 없다.
*진정한 감정을 알림으로써 상대방이 이런 감정을 앗아 갈 수 없게 된다.
*욕구는 상대방에게 현 상황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해심을 불러일으킨다.
*다시금 이러한 이해심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당신의 구체적인 소망을 쉽게 실현해주게 한다.
*그리고 당신이 아무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고, 아무에 게도 부당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욕구를 알림으로써 상대방은 바로 또 다른 욕구인 명확함을 얻게 된다. 사람들이 명확하게 파악하고,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 일에 관여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준비가 된다. 이로써 자기 보고는 다른 이들이 당신의 문 제를 지각할 수 있도록 돕고, 당신의 세계에 한 걸음 더 다가와 욕구를 알게 하는, 상대방에게 보내는 일종의 초대장인 셈이다.

- 1970년대부터 독일어권에서 자아실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자아실현은 누구에게나 바람직하고, 누구나 그것을 일구어 내야 하며, 자아실현이 이루어져야 지상 에서의 행복이 증가한다고 한다. 사실 그 말은 잘못된 것이다. 1928년 카를 융의 저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자아실현이라는 용 어가 유행어가 된 것은 1949년 에리히 프롬에 의해서였다. 그는 『정신분석과 윤리』에서 인간의 핵심적인 과제란 "자신의 본질 이 터져 나오도록 하고, 자신 속에 잠재된 것을 실현하는 것"이 라고 주장했다. 프롬의 이러한 주장은 '세계혁명'과 자유로운 사 랑을 주장하는 '68세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귄터 그라스 는 개인적인 것과 자아실현을 지나치게 강조한 그들이 "사회를 좀더 투명하게 만들고 인습과 관습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분적으로 사회를 보다 무책임한 풍조로 이끌었다”라 고 비판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 려는 사람들은 통계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아주 높고, 너무나 많 은 자아들과의 경쟁에서 탈진한 사람들은 대체로 우울증에 시달 리기 쉽다.
2009년 독일에서 일찍 연금 생활에 들어간 사람들의 삼분의 일이 훨씬 넘는 비율이 정신질환자였다. 1993년에는 그런 사람이 13퍼센트에 불과했다. 독일 근로자의 약 70퍼센트가 성과 능력의 한계 지점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들이 일상적인 직장 생활에서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인 위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이는 정상적인 정도를 넘어서 는 일이고, 사실 인간적인 한도를 넘어서는 일이다.
또한 독일에서 집중력 강화제인 리탈린의 소비가 1990년대 이래로 50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약제로 점점 더 많은 성과를 내려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과 한계를 잘못 파악하게 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하다가 일 때문에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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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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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행복할 것인가

인문 2023. 9. 15. 07:14

-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려고 운명이 가혹하게 그들을 채찍질하는 것을 정녕 모르는가? 바람이 세차게 흔들 때 비로소 나무는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 바람의 흔듦은 나무를 안으로 조이고 그 뿌리를 더욱 깊숙이 땅에 내리게 한다." 세네카
- "마음이 항상 바람직한 길을 걷고, 스스로 만족하며, 있는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 세네카
- "그대는 자신을 신뢰하고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사방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의 무수한 발자취를 따라가며 흔들리지 말고." - 세네카
- 고대 사회의 링구아 프랑카 lingua franca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려고 공통으로 사용하는 제3의 언어-옮 긴이)이자 문화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그리스 사회의 사상은 세 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다른 문화와 국가들과 이루어진 활발 한 교류와 접촉은 그리스의 문화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 같은 현상 속에서 그리스의 문화와 상업 권력은 그 시대의 가장 자유롭고 존경받는 문명 중 하나로 발 전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4대 철학 학파가 그 시대에 등장 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1. 소크라테스가 사망한 후, 플라톤은 기원전 387년 아테네에 자신의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2.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34년 페리파토스에서 연구와 교수 활동을 시작했다. 
3. 기원전 306년경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교외에 유명 한정원(그리스어로 케포스)을 개장했다.
4. 기원전 300년경 스토아학파는 '울긋불긋한 강당'이라는 뜻의 '스토아 포이킬레'에 처음 등장한다. 이 학파의 이름은 강당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스토아'는 그리스어로 '기 둥이 있는 강당'을 의미한다.
- 스토아의 창시자인 키티온의 제논(기원전 333~기원전 261년)은 20권 이상의 책을 썼는데 그중 한 권도 전해지지 않는다. 따 라서 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 만 관련하여 전해지는 여러 이야기는 당시의 그리스 사회상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유명한 일화에 의하면 제논은 항해 중에 난파당하여 전 재산을 잃고 철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애초에 아테네로 여행을 간 이유는 다른 동시대인들과 마 찬가지로 그리스 교육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쓴 저서 중 하나인 《국가》에서 그는 당대의 사회적 관 습에 대해 급진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고 전해진다. 정치적 유토피아를 묘사한 이 책에서 그는 이상적 국가에 대한 생각을 제시하고 돈과 결혼식, 사원과 학교, 성별에 따라 구분되는 옷 차림을 폐지할 것을 호소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제논이 자신 의 세대에서도 자유주의적이고 세계주의적인 엘리트에 속했다 고 추측할 수 있다. 초기부터 스토아학파는 세계주의 사상을 업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옹호해왔다. 다른 대부분의 철학 학 파들과 마찬가지로 스토아학파는 여성과 노예에게도 우호적 인 입장을 취했다.
- "자신의 본성이 지닌 힘에 눈을 돌려 고고한 태도에 맞서고, 매우 강인한 영혼을 품은 사람이 실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위대한 계획을 대담하게 구상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귀한 일이다." - 세네카
- 로마 역사에서 스토아 철학과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두 가지 종말점을 의미한다. 우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에 축복받은 전성기를 가져다준 소위 '5명의 선량한 황제' 중 마지막 황제다. 반면 그의 후계자이자 아들인 코모두 스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것처럼 잔인함과 폭정, 독재의 상징이 되었다. 게다가 스토아의 위대하고 활동적인 마지막 대표자 중 한 명인 마크쿠스 아우렐 리우스도 세상을 떠나면서, 500년 이상 지속된 전통은 끝났고 서구의 운명은 기독교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스토아 사상의 영향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 음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스토아주의가 지난 1,800년 동안 철 학계 내부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원래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였다. 올바른 세계 관(자연철학), 참된 판단(논리학), 올바른 행동(윤리학)이 바 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이 우주란 무엇인지,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와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를 깨닫는 '자각'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연결된다. 배경에는 우주의 모든 것이 '공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연결된다는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이 있다. 이 조화로운 질서 속에서 이성은 모든 것에 스며드는 물리적 힘이다.
- "우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삶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우주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당신이라는 존재가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이 자연 전체, 오로지 찰나의 작은 부분만 당신에게 주어지는 시간 전체, 그리고 당신의 것이라고는 그저 극히 일부에 불과한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당신의 삶, 당신의 상황, 당신의 내면에 대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평가를 내리지 마라. 종종 큰 그림을 보는 시 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탐구하려고 노 력하고,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계속 상기해야 한다. 자신 또한 이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연 속을 산책하고 낯선 사람들과 몇 마디라도 친근한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당신의 삶에 지식과 경험을 위한 공간을 만 들어보라. 수시로 명상을 하고 일상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 나 휴식을 취해보라.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하 고 모순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덧없는 자아에만 집중하지 마 라. 어차피 누구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으며, 자기 인식은 결코 완전하거나 최종적일 수 없다.
- "창조된 모든 것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생각해보고, 자연만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바꾼 다음 새로이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내일의 싹이 자라고 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자기 인식의 요령
*자기 안의 이야기꾼을 믿지 마라. 완전한 자기 인식은 환상 이며, 축약된 자기 이미지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단순화와 눈가림에 능숙한 인간의 속성을 간파해야 하고, 당신 자신 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믿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 스토아적 의미의 자기 인식은 자 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 모든 것이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나조차도 그 전체의 일부라는 진 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 대한 탐색은 큰 전 체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할 일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자신을 뛰어넘어 성장하라. 자기 인식에 이르는 길은 자아상을 열어놓고 삶의 목적을 깨닫는 일을 통해 한층 선명해 진다. 이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며 발전할 수 있다.
*어두운 면을 받아들여라. 자신에게 가는 길은 여러 오류와 성격적 단점이라는 길을 통과해야 한다. 자신을 향한 솔직 하고 아낌없는 응시가 필요하다. 자신을 더 현실적으로 볼 수록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 자신을 단련해온 사람은 한결같은 고요함과 심연에서 솟아나는 기쁨으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누리며, 결코 자신보다 위대한 무엇을 갈망하지도 않는다.  -세네카
- "모든 일을 원하는 대로 일어나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라고 소망한다면, 그대의 삶은 평온하게 흘러갈 것이다.” - 에픽테토스
-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의 머리를 두고 새 둥지와 같다고 묘사한 적이 있다. 수수하거나 화려한 깃털을 가진 크고 작은 온갖 종 류의 새들이 새 둥지 주위를 항상 날아다닌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부드럽게, 어떨 때는 큰 소리로 지저귀는 새소리에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플라톤 의 묘사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생 각과 내면적 불안이 빚어낸 동그라미의 모습이다.
이 새 둥지와 반대되는 이미지로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은 '영원의 고요한 바다'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내면의 평 화와 정신적 평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에피쿠로스 는 '마음의 평화'를 모든 철학의 목표라고 선언했는데, 이 같은 이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 나쁜 소식을 먼저 전하자면 내면의 평화란 일단 성취하기만하면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버튼 하나만 누르 거나 클릭 한 번으로 찾아오는 내면의 평화 스위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 내면의 평화로 가는 길이 하나뿐인 것도, 모든 사람 에게 똑같이 작용하는 만병통치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내면의 불안은 우리가 받아들이건 말건 우리 삶 의 일부다. 세네카는 "언제나 행복하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 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자연의 한쪽 측면만을 아는 것을 의미 한다"라고 썼다. 마지막으로 이 '나쁜 소식'은 끊임없이 행복 해야 하고 내면의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 우 리를 놓아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스토아적 원칙으로 꼽고 싶은 것은 내 면의 평화와 행복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휴식을 위한 휴식이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행복과 마 찬가지로 내면의 평화란 좋은 삶의 부산물일 뿐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좋은 삶이란 스토아 철학의 원칙에 따라 살며 삶의 모든 순간과 모든 영역에서 네 가지 중요한 덕목인 용기, 정의, 지혜, 평정을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그날까지 앉아서 무작정 명상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내면의 평화와 행복은 우리가 알맞은 조건을 만들어낼 때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내면의 평화는 역설적인 측면도 있다. 한편으로 스토아 철학자들에 게 이는 우리와 항상 함께해야 하는 가장 높은 선이며 그것 없 이는 생각과 실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이를 얻 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삶의 환희와 즐거움은 우리가 내면의 평화와 평정을 습관으로 삼을 때 거둘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실 중 하나다.
- 아타락시아Ataraxia는 그리스어로 '마음의 평화'를 의미하며, '동요하지 않는 마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보다 더 적절하게 스토아인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 이다. 이는 스토아 철학자들뿐 아니라 에피쿠로스도 전파 한 이상이다. 마음의 평화란 무엇보다도 괴로움 없이 자신 의 욕구나 감정을 지혜롭게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아파테이아Apatheia는 '욕구에서 해방된 상태'를 의미하며, 욕구를 넘어서려는 스토아적 이상을 묘사한 표현이다. 아파테이아 상태에서 스토아 현자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자신의 감정에 의심이 들 때는 돌아설 줄 안다. 파도를 맞이 하는 바위처럼 가장 험난한 조건에도 맞설 줄 안다. 이처럼 외부의 영향에 맞서 자신을 조절하는 모습이 때로는 무관심과 감정적 냉담함, 무심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 제로는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로부터 내적 해방을 이루려는 태도이며, 그 안에서 온화함, 즐거움, 친근함이 수행과 일관 된 조절, 강한 에너지만큼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한다.
-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결정, 욕망과 혐오 등 우리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것을 통제한다. 반면 우리의 몸이나 소유물, 명성, 지위 등 외부에서 생겨난 것들은 통제하지 못한다.” - 에픽테토스

- 세네카는 어린 시절부터 천식과 만성 기관지염을 앓았다. 특히 이로 인해 유리한 기후 조건에서 병을 고치기 위해 그는 이집 트에서 10년을 보냈다. 이후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로마로 돌아 와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허약한 폐로 인한 각종 증상은 평 생 세네카를 따라다녔고, 이는 또한 그의 생각과 글쓰기에 영 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호흡이 자유롭지 않을 때 우리는 답답함과 구속감을 느낀 다. 한두 번이라도 독감에 걸려본 사람이라면 호흡곤란 증세를 겪어보았을 것이다. 만약 이 상태가 오래가거나 평생 지속된다 면 우리는 자신의 유한성을 더 예민하게 느낄 것이다. 가령 세 네카는 천식 발작을 겪은 후에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 생각했 다. 이 경험은 그가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끊임 없이 사유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사유는 그의 가르침 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 모든 스토아 철학자들이 성찰한 명제를 세네카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즉 우리의 신체는 우리의 통 제 밖에 있으며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이 다. 그러므로 에픽테토스는 우리의 몸을 한시적으로 빌려 쓰는 것으로 간주하라고 조언했다.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자신의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호흡운동이나 신체 단련을 통해 호흡을 편안하게 하고 건강을 향상할 수 있다. 또한 의식적인 동작을 통해 근육을 단련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신경계나 유전적 성향, 타고난 신체적 약점 등을 생각해보라. 우리의 신진대사 능력이나 어린 시절의 병력, 성별이나 성적 지향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그것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가?
임신 중에 겪는 신체적 변화나 자녀의 외모와 성격 같은 것 은 말할 것도 없다. 삶의 많은 것들이 사실 우리 손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고(스토아학파에서 선 택사항으로 보는 자살은 예외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없으며, 자연재해나 유행병을 통제할 수도 없다.

- "분노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유예다. 무조건 용서하라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우선 차분히 생각을 해보라.” 세네카

개에게 배울 점
두 마리의 개가 만나면, 보통 처음에는 극도로 천천히 다가 가며 서로에게 온통 관심을 집중한다. 속도를 늦추는 이 전략 은 무엇보다 상대 개를 자극하는 것을 피하고 두 번째로 자신 의 스트레스 수준을 낮추기 위한 것이다.
다음번에 당신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허둥거린다는 느낌이 들면 일단 속도를 줄여보기 바란다. 얼마간 훨씬 느리게 행동 해보라. 하던 일을 계속하되 급속도로 속도를 줄여보라.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말해보라.
"나는 서두르지 않고 느림의 힘으로 내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 “다가올 모든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세네카

- 고통에 대한 기억의 결함
노벨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최고점 규칙'이라는 이론 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가장 높거나 낮은 강 렬한 경험 혹은 경험의 끝만 기억한다. 우리가 휴가나 과거의 한정된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우리의 머릿속에 주로 떠 오르는 것은 가장 강렬한 순간과 끝이다. 비행기에서 보낸 몇 시간보다는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 마음속에 더 많이 남는 까닭이다.
한 연구에서 지원자들은 4분에서 70분 사이의 다양한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치료 도중과 치료 후에, 참가자들은 검사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느껴졌는지를 진술했다. 결과 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실제로는 거의 통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매우 심한 통증으로 끝난 5분간의 검사는 비교적 통증이 지속한 45분간의 검사 과정보다 훨씬 더 나쁜 기억으 로 평가되었다. 카너먼에 따르면, 이것은 최고점 규칙을 입증해 줄 뿐 아니라 행복을 평가하는 우리의 기억 자체를 전혀 신뢰 할 수 없다는 추가 증거이기도 하다.
- 기억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하나의 전략은 심리적 충동에 직면하고 아름다운 결말과 강렬한 절정을 만들어내는 우 리의 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을 기억 할 뿐 아니라 더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다.
이보다 더 힘이 센 방법은 현재의 순간을 경험하는 데 보다 근본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 순간이 경험하는 나의 정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특별한 하이라이트와 영광의 순간을 찾아 헤매는 굴레로부터 자유 로워질 수 있다.

- "어째서 그대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휘둘리고 있는가? 시간을 들여서 유익한 것들을 배우고, 목적없이 돌아다니는 일은 멈춰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모든 노력이 목표를 향하도록 하고 그 목표를 명심하라.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잘못된 인식이다.”  -세네카
- "우리가 대담한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감히 시도하지 않는 한 그것은 도달 불가능한 상태로 남을 것이다."   -세네카

- 바츨라비크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향한 삶의 목표 가 "천살 먹은 아내들의 이야기”와 같다고 말한다 (오래된 목표 이지만 실현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옮긴이). 이어서 바츨 라비크는 풍부한 유머와 세심한 시각으로 우리가 어떻게 자체 적으로 불행을 만들어내는지를 명석하게 보여준다. 스토아학 파의 정신을 이어받아 바츨라비크는 우리가 느끼는 개인적인 불행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1. 일방적이고 어긋난 행복 추구
2. 최선의 지식과 믿음으로 스스로 불행을 창조해내는 우리의 기막힌 능력
- 자신의 욕구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이든, 완고한 비관주의든, 스스로 완성하고야 마는 부정적인 예언을 떠올리고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든 이 세상에는 자신을 불행에 빠뜨 리는 방법이 수없이 많다.
《불행으로의 안내》는 우리가 어떤 실수를 피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불행 예방 안내서다. 이 책은 행복을 찾는 방법이 아 니라 불행을 피하는 법을 알려준다. 거기에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좋은 삶을 위한 부정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깊은 지혜가 깃들어 있다.
- 심지어 스토아학파도 행복에 대한 부정적 접근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좋은 삶이란 나쁜 것들을 피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불행의 원인을 피함으로써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짜증이나 만성 스트레스, 질투와 반복되는 자기 비난, 우울한 기분이나 수면 부족, 부정적인 뉴스나 과도한 음주, 심각한 편견과 타인 과의 비교, 너무 높은 기대와 지나친 완벽주의, 나약한 자아와 타인의 인정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 이런 부정적인 측면 중 에서 당신에게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 불행의 목록은 이외에도 끝없이 늘어날 수 있는데 이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보통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지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것보다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지를 훨씬 더 잘 설명한다. 미니멀리즘의 깊은 지혜는 바로 이 배제의 원칙에 있다. 한 행복에서 다른 행복으로 서둘러 옮겨 다니는 대신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제거하 는 것이다. 어쨌든 스토아학파는 지나치게 열렬한 행복감에 대 해 회의적이었다. 세네카는 말했다.
"측정할 수 없는 모든 것은 해롭지만, 지나친 행복은 무엇 보다도 해롭다.”

- "처음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는 데 익숙해져라. 사용하지 않아서 힘이 약한 왼손도 오른손보다 고삐를 더 단단히 잡을 수 있다. 잡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변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라. 이를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반복해서 떠올려라.
"새로운 상태에 머무르는 것에 좋은 것이 없듯이, 상황이 변하는 것에 나쁜 것은 없다."
우리는 새롭게 닥치는 장애물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세네카는 말했다.
"지상에서 별로 이어지는 쉬운 길이란 없다."
-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대부분 불필요한 것이므로 이를 삼가면 더 많은 여가와 내면의 평온을 얻을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그 길이 옳은 길이라면 당신은 길의 한가운데서도 매일 자신이 얼마만큼 왔으며, 자연스러운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목표에 얼마나 더 가까워졌는지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세네카
- "당신이 성취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도 불가능할 것이라 속단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적절한 일이라면 당신 또한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2,000년 전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 결정과 평등의 필요성을 요약했다.
"그대가 가진 명성과 돈 또는 지위를 믿지 말고, 그대 안의 내적인 힘을 믿어라.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믿어라. 그것만이 우리를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해주며 우리를 바닥에서 끌어올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과 같은 눈높이로 서 있게 한다."
- "나는 부가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나쁜 것들 틈에 끼어 있는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그것이 유용하고 인생에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점은 인정한다." 세네카
- "우주에서 가장 강한 힘을 존경하라. 그것은 모든 것을 사용하고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하지만 그대 안에 있는 가장 강한 힘 또한 존경하라. 그대 안에 있는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필요로 하며 그대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사람들은 시골의 들판과 바닷가, 산에서 고독을 찾는다. 하지만 이 갈망에서 솟아나는 풍경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그대는 원하는 만큼 자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의 영혼보다 더 고요하고 방해받지 않는 피난처는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깊이 들어가라. 충분히 깊이 파고들면 결코 파괴되지 않는 선한 근원이 그대 안에 있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또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다른 사람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을 몰라서 불행한 사람 은 거의 없다. 하지만 자기 영혼의 충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내면의 욕구, 그리고 진정으로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과 접촉하는 순간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깊은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경험한다. 이 경험 속에는 깊은 만족감과 성취감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 우 리가 본연의 모습과 자신의 성격에 순응하는 삶을 산다면 조화 로운 삶을 넘어서는 다른 무엇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은 스토 아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우리 자아의 가치를 강화하고 우리 안에 있는 '선'을 깨닫는 힘을 얻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다.
-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과 단둘이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을 잘 부축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얼 마나 자신을 잘 지지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가? 침묵 속에 들 어가보라. 가령 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구체적 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그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묵 묵히 견디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혹은 어려운지 알 수 있을 것 이다. 그런 다음 매일 15분에서 20분 정도 이를 위한 시간을 비워둬라.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점차 내면의 고요함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 "외부의 도움 없이, 다른 사람 없이도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영혼의 고요함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누구의 부축을 받지 않고도 똑바로 설 수 있어야 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타인을 기쁘게 하려 하지 말고 내면의 신념을 따르자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그대가 바깥세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대의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누군가의 판단이나 의견으로 인해 상처받거나 짜증이 나 는 순간, 바로 그 느낌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타 인을 기쁘게 하려는 욕구에 굴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 고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을수록, 역으로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받지 못할 때는 더 쉽게 실망하고 속상해하 고 상처받는다. 그러므로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요구하는 대신 어째서 자신의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는지, 진정 자신이 제대로 된 기준을 세웠는지 자문해야 한다.
- 물론 타인에게 기쁨을 주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첫 번째 이 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타인을 기쁘게 하 려는 욕망을 누르는 것을 내면의 확신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에 픽테토스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기대하는 칭송을 스스로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에서 철학자가 되기에 충분한 삶을 살 아야 한다. 그대가 보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스스로를 그렇 게 보고 만족하라.”
이 접근법은 상당히 강해 보이지만 매우 효과적이다. 일단 자신에게 존중을 보일 때 다른 사람의 존중이 필요한지를 판 단하기가 훨씬 쉬워지며 그다음에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존중 을 얻고 싶은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의견에 너무 사로잡히게 되면 타인 의 기준을 내면화하기 쉽다. 이는 혼자 있을 때조차 그 기준으 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상처 주는 말 을 들었을 때 그런 경향이 심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모욕하거나 공격하는 사람들의 평가 기준을 받아들이고 자신 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이를 피하려면 타인의 판단과 기대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필요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썼다.
"그대를 모욕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들이 그대에게 원하는 판단대로 그들을 평가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그들을 바라보라."

- 이는 단순히 어떤 모욕이나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 자신의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타인의 어떤 말이 우리에게 상처 가 되는지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불필 요하게 연장시키거나 고착시키는 일은 막아야 한다. 스토아 철 학자들은 타인의 의견이나 말, 판단으로부터 내면적 독립을 이 루는 것을 좋은 삶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세네카는 말했다.
"그러므로 군중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 마지막으로 더 조용한 안식처로 물러나라.”

- "어쨌든 인간은 모든 외부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를 즐기고,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고, 타인에게서 가능한 한 멀어져서 자신에게 충실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분노하지 아니하며, 역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야 한다." - 세네카
- 스토아적 자기 연민은 세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1. 자신의 고통을 인정한다.
2. 모든 사람이 힘든 시기를 겪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3. 자신을 자애롭게 대하고 사랑으로 돌본다.
- 고통을 받아들이자
"유능한 사람에게 적합한 것은 무엇인가? 운명에 직면하는 것이다."
세네카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외로움이나 슬픔, 수치심, 절 망, 혼자라는 두려움 같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숨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감정들은 어떻게든 우리에게 따라붙기 마련이다. 우리의 운명과 불행을 받아들이라는 스토아 철학자의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슬픔을 배반하는 것보다 극복하는 것 이 낫다'고 세네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에 썼다. 자기 연민은 고통스러운 감정과 경험을 인정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자기 최적화와 전 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대에 부정적 인 감정은 금기 사항이 되고 있다. 특히 외로움에 대한 감정이 그러한데 이는 우리가 현대 삶의 요구에 따르지 못한다는 확실 한 실패의 신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 는 외로움이 아니라 철학자 오도 마쿼드가 말한 것처럼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이다. 외로움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 법은 다른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감정과 마찬가지로 외로움을 인정하고 자신을 연민으로 대하며 관찰하는 것이다. 그럴 때 외로움은 긍정적인 고독으로 바뀔 수 있다.

- 유배 중에 세네카는 수많은 슬픔에 직면했다. 하지만 그는 슬픔을 억압하거나 슬픔에 짓눌리기보다는 자신의 비통한 삶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자신을 위로했다. 세네카는 이렇게 썼다. "징징거리지 말고 울어라.”
눈물은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통곡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건강에 유익하다. 슬픔을 치유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위로하고 이해하며 연민할 뿐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새로운 관점과 행동의 범위를 만들기도 한다. 세네카는 불의에 화를 내고 불 행을 한탄하는 대신 코르시카에서 자신의 열정을 추구했다. 즉 철학적인 글을 쓰고 스토아 철학의 원칙에 따라 살려고 노 력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연민으로 대하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으로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세네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스스로를 대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세네카의 말대로라면 '자신에 게 만족하고 자신의 처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만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경 험을 위한 최고의 예방법은 스스로를 위하고 자기 안에서 긍정 적인 요소들을 보는 것이다.

- 스스로를 위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부끄러워하지 마라. 전장에서 병사가 성벽을 공격해야 하듯이 그대에게도 반드시 완수해야 할 임무 가 있다. 만약 그대가 부상을 입은 상태라면 요새를 습격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도움을 받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친절하고 자애롭게 바라 본다는 믿음직한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로 자신을 스스 로 도우며 외부의 도움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통찰력은 고독을 잘 견디고 즐길 수 있게 해준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영혼은 생각의 빛깔로 물들어간다”라고 말했다. 우리 의 지식은 또한 우리가 주변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는지에 영 향을 미친다. 이런 깨달음은 내가 그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오 면서 얻은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기대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기분까지도 바꿀 수 있다. 새로 운 관점으로 인해 나는 외로움을 덜 느꼈고, 더 개방적으로 변했으며, 내 주변 환경에 더 큰 호기심을 느꼈다. 내 고독의 질이 근본적으로 향상되었다.

- "당신을 위하는 친구의 마음은 얼마나 보배인가. 위험을 느끼지 않고 그에게 모든 비밀을 맡길 수 있고, 그가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의 말은 당신의 슬픔을 덜어주고, 그의 충고는 당신의 계획을 촉진하며, 그의 쾌활함은 당신의 우울을 쫓아내고,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힘을 낼 수 있다." - 세네카
- 에피쿠로스는 심지어 우정의 가치를 철학의 가치보다 위에 놓았다.
"고귀한 사람은 주로 철학과 우정에 관심을 기울인다. 전자 는 사라질 수 있는 미덕이며 후자는 불멸의 미덕이다."
실제로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 공 생의 가장 첫 번째이자 중요한 규칙이다. 우정에 대한 이 후한 평가는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스토아인들이 외친 우정의 불 멸성에 대한 송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으니 말 이다.
"사랑은 왔다 가지만 우정은 지속된다."
- "헤카톤은 말했다. '마약이나 허브, 특별한 마법 없이 만들어진 사랑의 묘약을 알려주겠다.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을 줘라."  -세네카

- "운명이 묶어놓은 것에 적응하라. 그리고 운명이 그대에게 데려온 사람들도 진심을 다해 사랑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운명은 누구에게나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들이닥친다. 늘 무장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운명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세네카

-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또 상황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세네카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신이 깃든 다음의 좌우명을 기억하라.
"앞으로는 그대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일에 대해 다음 원칙을 고수하라. 이 일은 불운이 아니라 오히려 품위 있게 대처할 기회를 주는 행운이다.”

- "그대가 모든 근심을 떨쳐버리겠다면, 반드시 일어날거라 두려워하는 일에 대해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악이 무엇이든 모든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대의 두려움을 가늠해보라." - 세네카
- 스토아학파의 가장 잘 알려진 사색 훈련 중 하나는 '최악의 상황 예상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때로 '사전 부검' 혹은 '부정적 시각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네카는 이 명상을 장애 와 역경에 대한 정신적 예측 수행이라고 설명했다. 스토아인들은 이런 훈련을 통해 자신의 죽음이나 유배, 심각한 질병에 걸 릴 가능성, 가난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같은 부정적 가 능성을 다루었다. 에픽테토스는 조언했다.
"매일 죽음이나 유배 등 그대에게 끔찍한 괴로움을 주는 가능성들을 상상하라. 그렇게 하면 그대는 결코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지도, 과도한 욕망을 품지도 못할 것이다."
- 사전 부검 훈련은 주어진 삶을 보다 감사하게 하고 두려움 을 최소화한다. 자신의 삶과 소중한 고향, 자유, 사랑하는 이들 혹은 건강을 상실하는 상상을 함으로써 그것들의 소중한 가치 와 중요성에 다시 한번 감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또한 공 포의 감정을 깊이 파고들어 두려움이 진정되고 그것에 익숙해 질 때까지 그 이미지를 반복한다. 세네카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효과였다.
"따라서 현자는 미래의 불행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이 오래 참으면서 받아들이는 것을 오래 생각하면서 쉽 게 받아들인다."
이는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리 익숙해짐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불운이나 위기에 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 미에서 스토아식 사전 부검은 평정심을 위한 훈련이다. 최악의 시나리오 혹은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경우를 미리 상상하 는 것이다.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들의 이런 태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다가올 모든 것을 실제로 일어날 일처럼 예견함으로써 현자는 운명의 거센 힘을 약화할 수 있다."

- 부정적인 결과와 장애물, 자신의 한계를 탐색함으로써 비로소 긍정적인 전략을 설계할 수 있고, 실제로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것을 하려는 동기부여를 얻을 수 있다. 에픽테토스 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전제와 그 결과를 고려한 다음 일을 시작하라.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시작하더 라도 나중에 작은 어려움이라도 닥치면 불명예스럽게 포기하게 될 것이다."

- "예상치 못한 장난에도 꿋꿋이 제 갈 길을 가려면 우리 삶에 필요한 기술은 춤보다는 검술에 가깝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스토아학파는 상상이나 시각화의 과정 외에 좌절을 예방 하는 매우 실용적인 수행법을 설계하기도 했다. 가령 빈곤에 대한 두려움을 예방하기 위한 접근법을 예로 들어보자. "그나 저나 영혼의 힘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라고 세네 카는 썼다.
“며칠 동안 가장 적은 양의 간단한 음식과 가장 거칠고 낡 은 옷으로만 만족하는 생활을 해보라. 그런 다음 자신에게 물 어보라. 이것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인가?"
세네카는 호화스러운 삶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딱딱한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잤다. 고기와 기름진 음식도 삼갔다. 당시 세네카는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스페인과 이집트, 이탈리아에 여러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네로 황제의 후한 기부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도 그는 종종 마른 빵과 개밥 그릇에 담은 물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의식적인 쾌락의 포기와 안락한 삶의 영역을 벗어나는 식이 요법은 스토아인들에게는 실용적인 수행법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스토아인이자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었던 소카토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는 거리가 먼 자발적 불편 을 자청했다. 그는 덥고 비 오는 날씨에 종종 모자도 쓰지 않고 맨발로 거리를 거닐었다. 때로는 계급에 걸맞지 않은 옷을 입고 일부러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에 자신을 노출시키곤 했다. 스토아인들의 수행법에는 운명의 화살에 맞는 상황이나 질병이나 지위 상실, 유배나 수형과 같은 예외 상황에 대비하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한 수행법을 한 달에 며칠씩이라도 실천한다면 앞으로 닥쳐올 곤란을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 "곧 삶을 끝내야 할 때 인생을 시작하기란 너무 늦다. 쉰이나 예순 살이 될 때까지도 마치 결심을 미루듯 자신의 유한함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세네카

- "죽는 것은 우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존재하면서 변화하고 우주의 구성요소가 되어 용해된다. 그러나 그 또한 변화하므로 불평할 일이 아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아무튼 우리 삶을 작동시키는 많은 것들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요소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생 각하지 말고, 존재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 아야 한다. 에픽테토스가 저서에 스토아 성자에 대해 쓴 말을 기억하라.
"한마디로 그는 교활한 적을 대하듯 자신을 경계하고 있 다.”
스토아학파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모 든 일이 맹목적인 우연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 점을 깨우치는 일은 매우 유익하고 해방감을 줄 뿐 아니라 삶의 무상함을 잘 견딜 수 있게 해준다.

- 만약 당신이 어려움을 겪거나, 실패를 겪거나, 어떤 일 혹은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 문제가 1 년 후에도 여전히 나에게 중요한가? 그런 다음 한 세기가 지 난 후의 당신의 삶과 당신 자신을 상상해보라. 솔직히 말해 보자. 당신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생각해보자.
"곧 당신은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고, 곧 모든 사람도 당신을 잊을 것이다."

-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과 운명이 정하는 것만 사랑하라. 그보다 더 적절한 게 있겠는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멋진 삶을 살기에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시기란 결코 없다. "젊었을 때 철학하는 것을 주저하지도 말고, 나이 들어 철 학하는 것을 피곤해하지도 마라.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너 무 이른 때도 너무 늦은 때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적 생각과 질문을 하기에 걸맞거나 어울리지 않는 나이란 없다. 철학, 특 히 스토아 철학은 삶의 모든 단계에서 더 많은 평온함과 행복 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삶을 사는 일에는 나이만이 무관한 것이 아니다. 하 루 중 어떤 시간인지도, 어떤 상황에서 철학을 하는지도 중요 하지 않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생에 지금처럼 철학을 하기에 적합한 상황이란 없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분명하게 깨달았던가!"

-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므로 직업 생활에서나 사생활에서나 끊임없는 교정이나 조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교정의 기술에 대해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이루어진 결정에 자신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구속하지 않는 융통성이 필요하다. 눈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계획이나 상황을 바꾸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삶의 모든 순간이란 자신의 내적 태도를 외부 상황에 맞게 조정하는 시간이므로, 그동안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한 의식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 삶을 평가절하하지 않기
좋은 삶과 완벽한 삶을 혼동한다면,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궁리할 위험에 빠지기 쉽다. 게다가 이미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도 잃기 쉽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변의 사물들과 사람들을 평가절하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의 무가치함을 경험하게 된다. 완벽을 향한 내면의 충동이 자리를 차지할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의 말을 떠올려보라.
"거기에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거기에 있는 최고의 것을 떠올려보고 그것이 없다면 얼마나 아쉬울지를 생각해보라.”
- 아무리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며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자급자족하는 것을 배우더라도, 우리 모두의 삶에는 균열과 취약 점, 틈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인생은 항상 일직선으로만 이어지 지 않고, 상처 하나 없는 멋진 인생이란 것도 없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틈 속의 아름다움을 보라고 재촉한다.
"가령 빵을 굽다 보면 여기저기 균열이 생기는데 빵을 만드 는 목적과는 거리가 먼 그 틈새가 이상하게도 우리의 눈길을 끌며 빵의 맛을 증가시킨다. 무화과도 완전히 익으면 껍질이 터 진다. 또 완숙된 올리브의 썩기 직전의 상태는 고유한 향과 아 름다움을 풍긴다."

- 우리는 삶의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연과 외부 요인에 훨씬 더 많 이 의존한다. 이 통찰력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사실 모든 것 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삶이 불필요하게 어려워진다.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 자신과 자신의 삶에 이상적인 계획이란 없다. 완벽한 나와 완벽한 인생 계획에 대한 생각은 불만을 낳고 자신의 발전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역동적인 자아상이 운명에 대한 사랑과 마음의 평온을 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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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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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청한 인간은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많이 아는 사람은 의심한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세르주 시코티)

- 무지하다고 멍청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지는 지식을 흡수하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단, 우리가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정보처리 오류 혹은 사고의 오류를 대부분 눈치 채지 못한다. 이런 오류는 밝혀진다고 해도 계속 작동한다. 그러나 자신이 충분히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멍청 한 인간이다. 해리 프랑크푸르트 Harry Frankfurt가 《헛소리에 대하여 On Bullshit》에서 상세히 설명한 것처럼, 멍청함은 거짓말보다 끔찍하다.
멍청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진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 이다.
멍청함과 맞서려면 멍청함을 비난하고, 멍청한 것을 향해 멍청 하다고 해야 한다. 자신에 대해서도 멍청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함이 창피하다 고 고백해야 스스로 말과 행동을 절제하게 된다. 상대방이 멍청한 말과 행동을 하면 멍청하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멍청하다고 할 때는 반드시 농담조로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이 경고의 역할을 하고, 우리의 결함을 알아보게 해주며, 행동을 조심하게 해줄 테니까.

- 민주주의에서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신화가 여전히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완벽한 합리주의가 없어도 민주주의는 작동합니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 는 것을 위해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들만 있으면 충분하니까요.
그러나 추상적이고 위험 확률이 애매한 분야에서는 민주주의 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 문제가 대표적이지요. 시스템 1은 추상적인 위협 앞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위협이 구체적 이지 않으면 감정을 일으킬 수 없고, 감정이 없으면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현재는 잘 와 닿지 않는 위협도 심각하게 인식하려 면 시스템 2가 작동해야 합니다. 따라서 시스템 2를 자극하는 적절 한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멍청함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렇지 않다면 멍청함이라는 낙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한다! 멍청한 인간은 토끼보다 빨리 번식하고 늘어난다. 일반적으로 그렇다. 그렇다면 약한 인간이 자연선택설에 따라 도태되지 않으려면 멍청함이 필요한 것일까? 여기서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멍청한 인간이 위험하기는 해도 사회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가 멍청한 인간에 관대한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사회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를 멍청한 인 간으로 취급하는 순간, 그 사람을 멍청한 인간이라는 틀에 가두게 된다. 그러나 멍청이라는 낙인은 바로 찍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멍청한 인간을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본다. 그래서 낙인을 찍어도 죄책감이 들기는커녕 멍청한 인간에게 멍청하다고 지적했다는 사실 에 뿌듯하다. 그리고 멍청한 인간에 대해 우월의식을 느낀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이처럼 지지해주는 사람들 덕에 멍청한 인간을 알아본 여러분은 으쓱해진다. 이때는 두뇌도 괜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분위기를 따라간다. 여러분과 동조자들은 멍청이로 낙인찍힌 사람을 가리키며 시시덕거린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멍청한 인간을 알아본 우월한 리더로 집단 내에서 자리를 잡는다. 

- 당신이 멍청하든 멍청하지 않든, 언제나 누군가에게는 멍청이일 것이다. (피에르 페레)

- "민주주의 사회마다 교육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만 정작 지식에서 중요한 비판 정신 교육은 빠져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교육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비판 정신이 길러지지 않으면 쉽게 맹신에 빠질 수 있다. 의심을 하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심이 지나치면 주체적인 정신이 키워지기보다는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제럴드 브로네르 Gérald Bronner, 맹신자들의 민주주의 La Démocratie des crédules,

- 날카로운 비판이 돋보이는 책 《육식을 즐기면서 지적인 척하는 사기꾼L'Imposture intellectuelle des carnivores》에서 저자 토마 르플티에 Thomas Lepeltier는 인간의 모순 앞에서 당황하는 척하며 순진하게 구는 자신의 심리를 밝힌다. “새끼 고양이들을 믹서에 갈거나 개를 마취 없이 거세하거나 말을 햇빛도 들지 않는 작은 우리에 평생 가둬놓는 것을 즐긴다면 동물학대죄로 2년 형을 구형받는다. 그런데 왜 정부는 수평아리들이 분쇄기에 갈리고 암탉들이 좁은 닭장에 평생 갇혀 있으며 수백만 마리의 토끼, 어린 양, 돼지가 칼로 목을 베여 죽는 데도 그대로 보고만 있을까?" 르플티에는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당황한다. 동물들도 감정이 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 “동물보호법에 따라 동물이 사용된다"라는 프랑스 민 법 515조 15항의 내용을 소개한다. 예를 들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토끼들을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 용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모순 뒤에는 또 다른 차원의 합리성이 숨어 있다. 실제로 동물은 도구로 사용되느냐 인간과 함께 사느냐에 따라 가격 이 매겨진다. 동물의 가격은 인간이 해당 동물에 대해 느끼는 이미 지에 따라 매겨진다. 동물보호 운동가들 역시 모든 동물을 똑같이 대하지 않는다. 어느 수의사가 관찰한 내용에 따르면, 동물 실험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쥐보다는 영장류나 개를 실험하는 연구실과 연구원을 더욱 비난한다. 동물보호 운동이 초점을 맞춰야 하는 활 동에 '모피 의류 사용 금지'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약 3분의 2가 가죽옷이나 가죽신발을 착용하고 있다. 동물 의 가치를 인간의 이익에 따라 매기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우리는 동물의 서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 인간이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무지함 중에 의도적인 무지함도 있다. 고기를 먹지만 고기로 소비되는 동물들의 생전 모습을 떠올 리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동물들의 이미지를 바꿔버리는 손쉬 운 방법을 선택한다. 이를 가리켜 인지부조화 이론이라고 한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능의 높낮이에 따라 먹어도 되 는 동물들을 분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암소나 돼지는 고양이, 사 자, 영양보다는 지능이 낮기 때문에 '식육'으로 분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이 두 가지 정보 중 하나를 듣는다. 하 나는 양이 목초지를 바꾸어 이동할 수 있다는 정보, 또 하나는 양고기 메뉴가 나올 것이라는 정보다. 그 다음에 참가자들은 양의 지능을 예측했는데, 양고기가 메뉴로 나올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참가 자들이 양의 지능을 더 낮게 평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 번째 연구는 인간이란 미뢰로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 러낸다. 참가자들은 뉴기니에서 마주치는 포유류가 베네트 나무에 사는 캥거루라는 설명을 간단하게 들었다. 이 외에도 참가자들은 캥거루에 대한 여러 정보를 들었다. 예를 들어 뉴기니 주민들이 캥 거루 고기를 먹는다는 정보다. 반대로 캥거루 고기에 대한 정보를 전혀 듣지 않은 참가자들도 있었다. 이어서 참가자들에게 캥거루가 다치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캥거루는 윤리 기준에 따라 대해야 하는지 생각한 대로 대답해달라고 했다. 그 결과 캥거루 고기도 먹 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들은 참가자들은 캥거루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보지 않았고, 반대로 캥거루 고기에 대해 듣지 못한 참가자들은 캥거루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인간은 육류 소비를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생각을 바꿀 수 있다(“식물은 동물을 위해서, 동물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아리스토텔레스). 동물에 대한 동정심을 차단하기도 한다("동물들에게 죽음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의 고통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성 오귀스탱Saint Augustin). 동물이 동의한 것처럼 미화하기도 한다(인간이 잘 돌봐준 대신 동물은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동물의 고통을 부정하기도 한다 (동물은 무의식 상태보다는 의식 있는 상태에서 목을 베어야 고통을 덜 느낀다). 동물의 희생은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라고 주장하거나(동물은 인간의 식 량, 혹은 암환자 어린이를 위한 의학 연구를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생존을 위 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인간은 채식만 해서는 살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기도 하고(당근도 비명을 지를 수 있다), 채식주의를 나쁘게 묘 사하기도 한다(채식주의를 인간 혐오 행동으로 의심하거나 나치즘과 연결시킨다). 이외에도 많다.

- "멍청한 인간들이 무슨 말을 하냐고? 그들은 스스 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 다. 멍청한 인간의 말은 의미도 없고 부정확하다. 멍 청한 인간의 말은 수다에 가깝다. 멍청한 인간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멍청한 인간은 마치 아슬아슬 하게 밧줄을 타는 술 취한 곡예사처럼 진부한 말에 매달린다. 멍청이는 이미 만들어진 문장을 난간처럼 꽉 잡으며 의지한다." 조르주 피카르, 《멍청함에 관하여>

- 독자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 미디어가 사용하는 미끼는 지금이나 50년 전 혹은 100년 전과 똑같다. 신문을 팔거나 기사의 클릭 수 를 늘리기 위해 미디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야 광고 주나 사이트 인수자의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런데 홀리데이에 따 르면 생각보다 그럴 방법은 쉽고 아직까지 변하지 않았다. 진짜 정 보지만 독자들을 낚기 위한 다음의 제목들을 보고 판단해보자.
[과거의 신문 기사 제목들 1898년에서 1903년 사이]
15분 만에 선포될 전쟁
애송이, 도박가, 불량배, 과한 화장을 한 여성들 집단
집단 술주정, 끝없는 싸움, 악덕의 카니발
권총 한 발로 자살 시도한 노인: 귀를 팔지 못하다
부엉이 때문에 병원에서 공포에 질려 사망한 여성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죽이려고 달려든 불독
한밤중에 세입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고양이
[요즘 온라인 뉴스 제목들]
마약과 비혼을 주제로 나체쇼를 벌인 레이디 가가 Lady Gaga
휴 헤프너 Hugh Hefner: "더러운 맨션에 사는 성노예를 폭행한적은 없다."
방귀를 뀌거나 아기 고양이들과 장난치는 아기들의 베스트영상9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가 매독에 걸렸다는 소문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영상: 동굴 안에서 첼시 핸들러Chelsea Handler에게 옷을 벗으라고한 퍼프 대디 Puff Daddy
피자 조각으로 어머니의 따귀를 때려 목숨을 구한 딸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펭귄 똥이 발견되다

- 우선 우리는 멍청함에 지나치게 자비를 베푸는 것 같다. 누군가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우리는 먼저 그 말에 의미를 찾으려 하고, 그 상황에서는 이 말이 어떻게 타당한지 생각해보는 등 필요한 해 석을 하려고 한다. 멍청한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처럼 대부분 멍청 이가 한 말을 꼼꼼히 분석하느라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멍청이는 주변의 문화를 이용한다. 명확하고 옳은 말을 하는 것보다 뻔뻔하고 자신감 있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는 문화 환경이라면 멍청한 말을 해도 그대로 넘어간다. 심하면 멍청한 말을 하는 사람이 더 늘어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는 분석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진짜라고 믿어 달라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감정에 호소하 는 것, 열정을 갖고 자기표현을 하는 것,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 로 말하는 것,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하는 것, 당당하게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현대사회에서 정확함과 신중함보다 높이 평가되 는 가치다.
팩트보다는 감성이 우선인 시대다. 진짜라고 믿어달라며 감성에 호소하며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이에 대해 '자비를 베풀며 들어 주는 사람들이 합심해, 엄청난 멍청이들도 공개적으로 쉽게 발언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 분석이 옳다면 옥스퍼드 사전에 나 온 '탈진실Post-truth'이 왜 도래했는지 알 것 같다. '객관적인 사실보 다 감성적인 호소와 개인의 믿음이 여론 형성에 더 영향을 끼친다' 는 의미의 '탈진실'은 2016년에 '올해의 단어'로 꼽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말만 옳고 상대방의 의견은 틀 렸다 생각한다. 누구든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 하고 상대방의 믿 음은 진실이 아니라며 존중하지 않는다. 아비규환 같은 토론 분위 기 속에서 각자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틀렸으며 자기 의 견만 옳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같은 진영에서도 각자 자신의 결심과 윤리 가치만이 맞는다고 주장한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자연히 진실과 사실은 무시당하고 의심까지 받는다.
공정한 관찰자가 이 상황을 보면 정말로 멍청하다고 생각할 것 이다. 아무렇게나 하는 말, 왜곡된 사실, 가짜 뉴스, 음모론 등은 그 저 멍청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 로제는 멍청함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멍청함은 합리성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반대로 논리를 과도하게 내세우는 상태라고 결론을 지었다. 멍청함이란 '돈은 돈', '어쨌든 종교는 종교', '다른 사람이 나보다 멍청하지'처럼 단정적으로 하는 생각이다. 멍청함을 샅샅이 해부해보면 특이한 원칙이 성립한다. 'AA'. 이미 이야기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다.
멍청한 인간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생각 한다. 멍청한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말과 생각만이 중요하다. 멍청 한 인간은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 거나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멍청한 인간은 자신과 관계된 말,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만을 이해한다. 멍청한 인간은 자신의 말과 생각에 반박하는 사람을 적이라고 생각하며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멍청이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자기만족 이 중요하며 매우 주관적인 입장을 견지해 틀에 박힌 생각이나 편 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멍청한 인간에게 이성은 박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멍청한 인간은 'AA'라고 단정적으로 확신하는데, 여기 에는 논리적인 요점도 없다. 그저 생각 없이 "아무리 그래도 유대인은 유대인이지"라고 내뱉을 뿐 이다.
멍청한 인간은 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자기중심적이기에 오직 자신의 증언, 경험과 느낌만 중요시한다. 멍청한 인간은 감성에 호소하고 주관적인 판단을 주로 하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상태에 만족한다.

- 멍청한 인간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착 각일 뿐이다. 멍청한 인간은 아무리 증거가 나와도 자신이 확신하 는 것은 계속 밀고 나가며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멍청한 인간 은 필요한 지식이 있어도 배울 생각 없이 그저 확증 편향에 빠져 살 뿐이다.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을 무시하거나 교묘하게 재해석 하며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는 것 말이다. 멍청 한 인간은 웬만해서는 생각과 환경을 바꾸지 않는다. 멍청함과 적 게으름, 자기만족, 자기도취는 함께 나타나며 직감의 역할이 커 진다. '나의 생각과 반응은 무조건 옳아 멍청한 인간의 생각이다. 그러나 멍청한 인간도 제대로 우기지 못하거나 뻔뻔하게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가지 못하면 갑자기 자신감을 잃는다. 이때 멍청한 인간은 진실에 신경 쓰고 정확함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말이 아니라 사실과 논리만 내세우는 사람은 쉽게 주변 사람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포퓰리즘이 통한다. 거짓말을 하는 후보도 우리와 공감하면 지지하 거나 뽑는 것이다. 멍청이는 멍청이를 알아본다. 그리고 이것이 널 리 퍼져나간다.
멍청함은 머리가 얼마나 똑똑하냐와 별 관계가 없다. 전반적 으로 교육 수준은 낮아지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점점 집단적으로 멍청해지는 이유다. 오히려 이제는 좋은 머리가 멍청한 시스템을 받쳐주는 데 이용된다. 특히 자기중심적인 시각이 강해지면서 멍청 한 시스템이 작동한다. 자기중심적인 시각은 지혜가 아니라 직감을 중시한다. 내가 믿는 것은 무조건 진실이라고 본능적으로 확신하며 믿는다는 의미다.

- 멍청한 인간은 자아도취와 자기맹신에 빠져 있다. 이 때문에 멍청한 인간들이 쉽게 늘어난다. 이들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치 며 신중함과 정확성을 중시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감정에 호소하며 이야기해야 주목받는다 고 믿는다.
그런데 멍청한 인간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다. 이 분야도 경쟁 이 치열하다. 멍청이라도 다른 멍청이들과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당혹스러운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바로 멍청한 인간이 지적인 사람으로 위장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멍청한 인간은 자신감이 지나치다 못해 자신이 하는 멍청한 짓을 지혜, 통찰력, 깊은 생각의 결실이라고 소개하며 진지한 척을 한다.
이를 위해 멍청한 인간이 생각해낸 것이 '그럴듯한 논리'다. 어 떤 결론을 내리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자기방어 논리다. "멍청한 인간은 결론을 내고 싶어 한다." 플로베르가 했던 말이다. 플로베르의 희극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et Pecuchet》에 등장하는 부바르와 페퀴 셰도 멍청한 인간은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보았다. 특이하게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심지어 자신을 천재이자 철학과 신경과학의 대가로 생각하는 멍청이도 있다.

- 무늬만 과학인 가짜 학문이 그럴듯한 옷을 입고 과학 행세를하기도 한다. 가짜 뉴스는 되레 공식 언론을 비판하며 자신들이 믿 을 만하고 검증된 뉴스인 척한다. 음모론은 진실을 밝히려는 진지 한 조사로 둔갑하지만 실제로는 진실 탐구에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멍청함도 이성, 지식, 진실 같은 거짓 모습으로 둔갑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모방술이 필요하다. 즉 멍청한 인간이 만 든 논리가 진정한 철학으로 보여야 한다. 그리고 멍청한 인간은 스 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며 내세울 수 있다. 멍 청한 인간이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혹은 생각한 것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독설가가 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식인이 되기도 한다. 최악으로 이 모든 모습이 한꺼번 에 나타나기도 한다. 거만함과 속물주의가 멍청함의 실체다.

- 멍청함은 비겁한 모방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놓은 미덕, 인간의 이성에 대한 기대를 멋대로 사용하는 것이 멍청함이다. 멍청함은 가짜 합리성으로 무장한다. 로베르트 무질이 이야 기한 것처럼 멍청함이란 지능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다. 목적 때문에 지성을 포기하는 상태, 감성과 이성이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멍청함과 맞서려면 어느 정도 지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할 말이 없으면 그럴듯한 말을 지어낸다. 이런 말들이 사회에서 통할 때 탈진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 메타 규칙은 본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갈 때가 많아서 흥미롭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본능적으로 지휘관 혹은 조종사를 믿는다. 조종사는 기내의 유일한 지배자다. "만일 비행기를 탔는데 위험한 상 황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도 우리는 즉각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조종실에서 하라는 대로 무조 건 해야죠!" 아니, 틀렸다! 지나치게 권위에 순종하면 오히려 위험 할 수 있다.
대한항공이 좋은 예다. 1990년대 대한항공에서는 연속된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사 결과 조종실 내의 지나친 권위의식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조종사는 부하 직원들을 무시하며 군림했다. 부조종자도, 정비사도 조종사의 실수를 감히 지적하며 고칠 수 없었다.
그런데 2000년대 초에 새로 부임한 대한항공의 대표는 1990년 대 일어났던 사고에서 교훈을 얻어 한국식 전통과 문화를 완전히 깨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소통이 권위보다 우선시되었고 승진은 연공서열이 아니라 능력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실수 방지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실수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원칙이 도 입된다. 그 결과 대한항공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항공사 반 열에 올랐다.
실수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원칙은 언뜻 일반적인 의견과 반대되기도 한다. 보통 사고가 일어나면 '누구 책임이야?' 하면서 책임 추궁을 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의 항공을 관장하는 항공행정연맹도 대한항공과 마찬가지로 승무원들에게 실수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익명으로 세세하게 보고 하도록 하고 있다.
여러 의료 시스템도 같은 원칙을 도입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실수를 처벌하지 않는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면서 실수를 쉽게 잡아내 재발을 방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은 어른은 멍청한 인간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네 살짜리 어린이처럼 행동한다고 비판하는 <뉴욕 타임스>의 기사를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유는 진짜 네 살짜리 어 린이들에게는 모욕입니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모든 가능성과 새로움을 받아들일 정도로 매우 개방적입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시각이 좁아지고 세계관도 막 히게 되지요. 불교 전통을 생각해보세요. 불교 전통은 인간이 얼마 나 자신의 생각, 순간적인 욕망, 자신의 고집에 빠져 바깥세상을 포 용하지 못하는지 지적합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필요해, 나는 저것이 갖고 싶어.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당장 손에 넣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지?" 정확히 어른들이 이 이유로 아이들을 비판했지요!
그런데 정작 어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멍청한 인간은 자아도취가 심하고 자기목표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반대입니다. 아이들은 멍청함을 치유하는 약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시험에 관한 악몽을 꾼 의대생들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시험 점수를 봤을 때 악몽은 오히려 반대 결과를 낳는 것 같다. 시험 꿈을 꾼 학생일수록 시험을 잘 봤다!
이혼 소송 중인 여성들에 관한 예전 연구 결과도 비슷하다. 이 혼에 관한 꿈을 많이 꾼 여성일수록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했고 우 울증도 적었다. 어느 이론에 따르면 위협적인 상황이나 걱정스러운 상황이 나타나는 꿈은 현실에서의 삶을 잘 헤쳐 나갈 방어막 역할을 한다. 앞으로 걸릴지 모르는 바이러스를 예방해주는 항체를 만들어내는 백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꿈은 가상현실이자 행동을 준비할 수 있게 돕는 방어막이다. 뿐만 아니라 꿈을 통해 감정을 잘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꿈속에서 는 감정적인 찌꺼기가 걷히고 중요한 정보만 남은 기억이 재현되 기 때문이다(감정에서 해방된 기억). 캐나다의 정신의학자 토어 닐슨Tore Nielsen은 꿈을 꾸면 불안한 경험이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경험에 서 부정적인 감정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꿈속에서는 경험이 중 립적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 이 과정에서 작동하는 두뇌의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두뇌의 깊은 곳에 위치하는 편도체이고, 또 하나는 두뇌의 앞부분에 위 치한 중간 전뇌 피질이다. 불안한 내용이 꿈에 나오면 두려움이라 는 감정이 생긴다. 이때 중간 전뇌 피질로 감정적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데(그 불안한 이야기가 다른 상황, 즉 좀 더 중립적인 상황에서 일어났다면 지 금처럼 불안하지는 않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은 억제된다.
이 같은 모델에 따르면 감정이 지나치게 격하거나 심리적으로 약해지면 잠을 자다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깬다. 악몽이 이런 경 우다. 따라서 잠을 자는 동안 감정 치유 과정이 실패하면 악몽을 꾼다고 할 수 있다.

- 휴스턴대학교의 브르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취약함의 힘에 관한 연구에서 불편함, 죄책감, 수치심 사이의 차이점을 다루었다. 이 세 가지는 멍청한 실수를 했을 때 우리가 전형적으로 느끼는 감정 이다.
불편함은 쉽게 해소될 때가 있다. 불편함이 지나가면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멍청한 실수를 생각하며 웃을 수 있다. 죄책감은 좀 더 오래간다. 실수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 멍청한 실수를 하는 바 람에 민폐를 끼친 것이다. 따라서 죄책감을 통해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불편함과 죄책감은 상대적으로 해소가 되는 감정이다.
그러나 수치심은 극복이 힘들고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다. 수 치심은 감정적, 인지적, 심리적으로 감당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자 존감에 타격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오래간다. 심지가 굳은 사람은 수치심이 생겨도 꿋꿋하게 이겨나간다. 이것이 여러 단계로 발전한 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해 수치심을 느낄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태도다. 그다음에 자기 자신은 받 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수치심을 통해 우리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극복하며 우리의 약점과 실수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 무조건적 자기수용, 즉 자신을 무조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 가지고 있는 믿음과 충돌할 수 있다. 자신이 이룬 성과의 가치와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동일시 할 때 그렇다.
때로는 무조건적 자기수용이 자존심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결 코 그렇지 않다. 자존심은 성과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시간에 따 라 변할 수 있는 불안한 개념이다.' 성과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 도 충분히 나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조건적 자기 수용은 언제나 일정하다.
더불어 무조건적 자기수용은 체념, 수동적인 태도, 자기만족, 이기주의, 중요한 목표 앞에서 느끼는 권태와 혼동되기도 한다. 그 러나 무조건적 자기수용은 우리의 부족한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 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더 나은 자기 자신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따뜻한 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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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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