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의 덫

과학 2020. 6. 1. 08:21

- 테크놀로지의 모든 변화는 거의 필연적으로 어떤 이들의 복지는 개선하고 어떤 이들의 복지는 악화시키고 만다. 파레토 우위(Pareto superior)인 생산 기술의 변화를 확실히 떠올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든 개인이 시장의 성과라는 평결을 수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혁신을 채택할지의 결정은 비(非)시장적 메커니즘과 정치적 행동주의를 통한 패자들의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산업혁명 동안 영국의 우위는 기술 변동에 맞선 저항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부가 혁신을 위해 계속 적극적으로 혁신 관계자의 편을 들어준 데 있었다. ........프랑스에서 기술 진보에 대한 저항은 영국에서보다 성공적이었던 듯한데, 아마도 이런 차이가 영국의 산업혁명이 왜 최초였는지에 대한 또 다른 이유를 제공하는 듯하다.
- 질문의 핵심은 왜 이런 기술적 독창성이 경제 발전으로 변환된 게 별로 없는가이다. 어쩌면 노예제가 노동 대체 기술을 도입하는 데 방해 요인이었다는 데 답변의 일부가 있을 듯하다. 역사가 베르트랑질 (Bertrand Gille)이 과학기술이 고대에 번성했다는 이 논지를 비판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풍족한 노예는 과학기술적 통찰이 생산에 거의 응용되지 않은 까닭을 밝혀줄 수 있다. 게다가 노예제의 존속은 곧 고대 문명의 인구 중 대부분이 산업 활동을 추구하기에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과학자이자 역사가 존 버널(John Bernal)이 제기한 설명은 산업혁명의 기계들을 고대에 생산하지 못한 이유가 경제적 인센티브의 결여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자들은 수제품에 돈을 낼 수 있었고, 노 예들은 필수품이 아닌 것은 무엇도 살 형편이 안 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술 발전은 가끔 차단당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플리니는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치하 때 어떤 남자가 깨지지 않는 유리를 발명한 일 화를 들려준다. 티베리우스는 그 발명가에게 독창성에 대한 보상을 해준 게 아니라, 성난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 남자를 처형했 다. 정부가 기술 발전을 통제하려 했던 좀더 직접적인 증거는 수에토니우 스(Suetonius)가 제시하는데, 그는 69~79년에 통치한 베스파시아누스 황 제가 노동 대체 기술의 도입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술한다. 카피톨리 누스 언덕으로 돌기둥을 운반할 장치를 발명한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 오자 베스파시아누스는 그 기술의 사용을 거부하며 분명하게 말한다. “나 보고 어떻게 백성을 먹여 살리라는 말이냐?" 돌기둥은 크고 무겁기 때 문에 광산에서 로마까지 운반하려면 수천 명의 인부가 필요했다. 이는 정 부에 어마어마한 부담이었지만, 로마인에게서 일감을 빼앗으면 정치적 불안을 초래할 거라는 우려 때문에 기술적으로 현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일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매력적인 선택이 되었다. 돌기 등 운반은 노동자들에게 생계를 제공했고, 그들을 계속 바쁘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사회 불안의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 1801년 영국의 소득자 중 상위 5퍼센트는 (실질적으로) 전체 가구 소득의 3분의 1 이상을 점유했고, 1867년 에는 약간 늘어나기까지 했다. 그해에 역사학자 이폴리트 텐 (Hippolyte Taine)은 상원의사당을 방문한 뒤 “그 자리에 있던 주요 귀족들은 내가 지명하자 자신들의 막대한 재산의 세부 사항을 댔다. 최대 재산은 연간 30만 파운드에 달했다. 베드퍼드(Bedford) 공작은 토지로 연간 22만 파운드를 번다. 리치먼드 공작은 단일 보유 자산으로 30만 에이커를 갖고 있 다. 런던의 한 구역 전체의 지주인 웨스트민스터 후작은 현재의 장기 임 대 기간이 다 차면 1년에 100만 파운드의 소득을 얻을 것이다”라고 언급 했다. 이런 불평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데번셔 공 작과 웨스트민스터 후작처럼 부유한 귀족의 소득은 노동이 아닌 자본에 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자본은 제인 오스틴의 영국에서 소득 격차의 기저에 있는 지배적 요인이다. 경제사학자 피터 린더트(Peter Lindert)의 추정에 따르면, 1810년 인구의 상위 10퍼센트가 영국 부의 80퍼센트 이상을 갖 고 있었다. 이 부의 대부분은 땅에서 나왔다. 국부는 대개 국민소득 가치의 7배였고, 농경지는 국부의 절반가량이었다. 바꿔 말하면, 지주 계급 의 재산은 한 가지 중요한 기술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 로 농업이다. 농업이 없었다면 18세기 영국의 지주 계급은 절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석기 혁명의 선물이 무려 1만 년이 지난 18세기에도 여 전히 사회를 결정했다는 사실은 수천 년간의 기술 변동에도 불구하고 경 제생활은 아직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사람들 대부분 은 아직도 가내공업제의 농장에서 일했고, 이는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 진보가 거의 없었음을 가리킨다. 떠오르는 중산층이 있긴 했지만, 사회적 지위와 부는 여전히 땅에서 나왔다.
- 농업의 도래로 생활 환경이 악화했다는 사실은 수렵채집인이 무엇 때 문에 자신들의 삶을 공산당 선언에서 “농촌 생활의 어리석음”이라고 부른 것과 자진해서 맞바꿨는지를 고민하던 많은 경제학자, 인류학자, 고 고학자를 당혹감에 빠뜨렸다. 물론 한 가지 가능성은 개체군 압력, 그리고 수렵채집인의 인구 밀도가 빙하 시대 말기에 점차 높아짐에 따라 식량 채집의 어려움이 증대한 결과 농업의 채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가령 생태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인구를 줄이느냐 아니 면 식량 생산을 늘리려 노력하느냐 사이에서 택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인류는 후자를 선택했고, 결국 기아·전쟁·폭정을 겪게 됐다”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정반대 방향으로도 작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은 생산성 증대가 1인당 소득 증대는 전혀 없이 단지 인구 증가만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농업은 애초 대다수 인구에게 소득 증대 를 발생시키는 더 나은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에 채택됐다. 그런데도 농업의 도래로 자녀를 많이 낳는 데 드는 비용은 줄었다. 엄마들이 아기를 데 리고 더 이상 음식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아진 소득이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으므로 인구 증가는 치솟았고, 그리하여 1인당 소득의 증가분을 모조리 상쇄시켰다. 물론 인과관계가 어느 쪽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양쪽의 설명 모두가 필시 어느 정도 장점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농업의 채택으로 인구가 급증했다는 점이다. 수렵채집인의 인구 밀도는 1제곱마일당 1명을 좀처럼 넘지 않 았고 사실상 그보다 낮을 때도 많았던 반면, 농부는 평균적으로 그 밀도의 40~60배였다.
- 산업화 이전 시대의 비교적 값싼 노동이 노동력 대체 기술을 널 리 사용하게끔 하는 인센티브를 덜 창출했다는 생각은 꽤 타당하다. 실제 로 로버트 앨런은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된 이유가 애초에 다른 곳에 서는 그것이 경제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앨런은 영 국에서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은 흑사병에서 비롯됐는데, 이것이 장기간 인구 감소를 유발했고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인 노동력 부족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소작농이 농노제 대신 자유를 요구함에 따라 인건비 인상을 억제하는 법안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임금은 상승하기 시작했 다. 발견의 시대에 영국이 무역에서 성공을 거두자 임금은 더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공에는 새로운 도전 과제도 따라왔다. 높은 인건비를 고려할 때 영국은 어떻게 무역에서 계속 경쟁력을 가질 것인가? 앨런은 영국 기업가들이 정말 운 좋게도 석탄산(石炭山)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이른 석탄 산업의 출현은 영국을 네덜란드 공화국 같은 다른 고임금 경제국들과 차별화시켰다. 낮은 에너지 비용과 높은 인건비에 직면해 영국 산업은 다른 곳에서라면 비용 효과가 높지 않았을 기계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매력적으로 보이긴 해도 새로 수집한 데이터에 의하면 영국의 임금은 예전에 생각했 던 것만큼 빠르게 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의 임금이 비교적 높았다. 고 가정한다 해도 윌리엄 리의 메리야스 편직기와 기모기 같은 초창기의 노동력 절감 기술은 산업혁명 한참 전에 개발됐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 사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언뜻 보기에 필요성 때문에 등장한 기술 발 전 사례가 거의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조엘 모키르는 산업화 이전 세계의 기술 발전에 대한 권위 있는 논평에서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라는 문구 가 산업화 이전의 발명 활동을 더 정확하게 기술한다고 표현한다. 기존 의 수요에 대응해 기술이 개발된 게 아니라 산발적인 기술 발전이 예전에 는 인식하지 못했던 욕구와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기술 진보는 거기서 이따금 출현한 수요가 그랬듯이 흔히 무작위인 데다 예측 불가 능했다. 예를 들어 책에 대한 수요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으로 이어 진 게 아니라 인쇄기가 책, 교육, 문해력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발명들은 그저 뜻하지 않은 우연한 발견의 결과였다. 빙 하기의 수렵채집인이 처음 석회석의 잔여물을 알아보고 난로에서 모래를 태웠을 때, 수천 년간의 우연한 발견이 로마의 창유리 탄생으로 이어지리라고는 도저히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도 공기에 무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증기 기관 발명에서 정 점을 찍을 연쇄적인 사건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 영국 정부 역시 오랫동안 대체 기술의 확산을 막으 려 했다. 17세기에도 찰스 1세는 기모기 보급을 반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예혁명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이 썼듯이 “튜더 왕조나 스튜어트 왕조의 영국이었다면 파팽(풀다의 선원들이 그의 증기 찜통을 박살냈다)은 비슷하게 적대적인 대접을 받았겠지만, 이 모든 것이 1688년 이후에는 달라졌다. 사실 파팽은 그것이 파괴되기 전에 자신 의 배를 타고 런던까지 갈 작정이었다.” 1688년 이전에는 노동자 대체 기술을 차단하는 영국 국왕의 사례가 많았지만, 이후로는 그런 예를 찾 기 힘들다는 사실도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부분적 이유는 의회와 명예 혁명 이후 강화된 경쟁으로 말미암아 길드가 약화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길드는 1835년 지방자치단체법(Municipal Corporation Act)이 나오고 나 서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한참 전부터 회원도 힘도 잃기 시작한 상 태였다. 앞서 논의한 대로 길드는 기술 발전이 회원들의 기능을 향상시킬 때는 그러지 않았지만, 회원들을 쓸모없게 만들 위험이 있을 때는 저항했 다. 따라서 길드 세력의 약화는 노동자 대체 기계에 의존하는 산업혁명의 전제 조건이었다.
- 이것은 시장이 더욱 통합되면서 자연스레 일어났다. 길드의 영향력 은 자신들의 도시 너머로 확대되지 않았고, 따라서 도 간 경쟁이 커짐 에 따라 그들의 정치력은 작아졌다. 가령 전모공(shearer: 모직물 표면에 있는 잔털을 깎아 올을 뚜렷하게 만드는 사람 옮긴이) 길드는 모직 산업에서 가장 힘 이 센 곳 중 하나로 회원들의 괜찮은 급료를 보장하는 데 성공해왔다. 청 원과 폭력 행위를 통해 그들은 수십 년간 영국 서부의 기모기 도입을 용케도 차단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경쟁이 게임의 법칙을 바꿔놓았다. 길 드들이 오랫동안 기모기에 맹렬하게 반발해온 윌트셔(Wiltshire)와 서머싯 (Somerset)에서는 글로스터(Gloucester)에 주문을 빼앗기기 시작하면서 저 항이 끝났다. 그곳의 전모공들이 기계를 사용하면 생산비가 줄어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겠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과거 농촌이었던 지역에 출현한 버밍엄과 맨체스터 같은 신도시 또한 길드의 규제로부터 자유로웠 고 자연스럽게 산업혁명의 엔진이 되었다.
- 1780~1850년 세 세대도 안 되어 인류 역사상 전례 없이 지대한 영향을 미칠 혁명이 영 국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그때 이후 세상은 더 이상 같지 않았다. (어떤 혁명도 신석 기 혁명 정도를 제외하면 산업혁명만큼 획기적으로 혁명적이지 않았다. (카를로 치폴라(Carlo M. Cipolla), 《폰타나 유럽 경제사(The Fontana Economic History of Europe)》)
- 다수의 인구가 이 증대된 부를 생산하는 데 들인 노력에 비해 그들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두 계급은 대립한다. 한쪽은 수가 늘어난 데 반해, 다른 한쪽은 재산이 늘 어났다. 한쪽은 더 많은 노동으로 겨우 불안정한 최저 생계비를 버는 데 반해, 다른 한쪽 은 고상한 문명의 혜택을 있는 대로 누린다. 이런 상황이 어디서나 속출하고, 어디서나 똑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진 운동이 뒤따르고 있다. (폴 망투(Paul Mantoux), 《18세기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 in the Eighteenth Century)》)
- 산업혁명의 거시경제적 영향은 경제적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크지 않 았지만, 1750년 이후 테크놀로지의 혁명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변인(變因) 이 있다. 1760년대에 연평균 특허 출원 수가 이전 10년에 비해 2배가 넘 었고 이후로 계속해서 증가했다.4 분명 일부 특허의 경제 관련성에 의문 을 제기할 사람이 있겠지만, 특허가 급증한 타이밍은 역사학자 애슈턴(T. S. Ashton)의 인상적인 다음 구절을 뒷받침한다. “1760년경 도구의 물결이 영국을 휩쓸었다. 그때쯤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와 와트의 증기 기 관용 분리 콘덴서를 비롯한 산업혁명의 결정적 발명품이 다수 등장했고, 두 사람 모두 1769년에 특허를 냈다. 경제적 혁명의 부재는 절대 수수께끼가 아니다. 단순히 더 나은 기술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 성장이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폭넓은 채택이 필요한데, 산업혁명은 처음에는 집합적으로 전체 경제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소수의 부문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초기의 산업혁명은 종합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경제사학자 마이클 플린(Michael Flinn)이 설명했듯이 “통계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대단히 역동적인 소수의 부문들이 꾸준히 성장세에 있는 경제의 중첩 중 하나일 듯하다. 통계 학상으로 이 부문들은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국민 생산에서 지극히 적 은 비중을 차지할 뿐이었지만, 그것들의 성장은 기존의 전체 경제 성장률 을 2배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산업혁명은 직물 공업에서 시작됐고, 그 것은 노동자들이 가장 예민하게 기계화한 공장의 위력을 느꼈던 부문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기계화는 경제사학자들이 서구가 나머지 세 계보다 훨씬 더 부유해졌던 산업혁명 이후를 일컫는 대분기의 수레바퀴를 굴러가게 했다. 그런데 산업화 초기에 영국에서도 대분기가 일어났다. 임금은 정체하고, 수익은 급증하고, 소득 불평등은 하늘로 치솟았다.
- 방적기가 물레를 몰아내자 수작업을 하던 방적공들도 축출됐다. 따라서 그것을 반긴 노동자들이 거의 없었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하그리 브스가 이 기계를 개발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블랙번(Blackburn) 주민들 은 그의 집에 침입해 그것을 때려 부쉈다. 사실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는 사건은 영국의 고전적인 산업화 시기에 자주 일어났다. 그러니까 기계 화로 이익을 보는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권력이 넘어가기는 했지만, 발명가들이 자신의 기술이 노동자를 대체한다거나 심지어 노동력을 절감한다고 설명할 가능성은 아직 없었다. 경제사학자 제인 험프리스(Jane Humphries)는 이렇게 설명한다. 18세기 초의 발명가들은 자신의 혁신이 노동력을 절감했다고 좀처럼 주장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지역의 고용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고 홍보하는 게 현명하 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고용 창출, 특히 여성과 아동 고용을 약속할 공산이 컸는데, 이들이 없었다면 암암리에 고용률이 부담스러 울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발명품이 노동을 대체한다고 말하는 것 이 좀더 용인되었고, 1790년대에 들어서면 직물, 금속 및 가죽 사업, 농업, 밧 줄 제조, 입거(docking), 양조 분야의 발명가들이 모두 그런 장점을 내세우면 서 특허권자를 억제하는 모든 요인이 사라졌다. 그렇다 해도 절감은 모든 노동 력이 아니라 주로 숙련된 성인의 노동력에 관한 것이었다. 발명품은 흔히 체력과 어린이로 쉽게 대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홍보했다. 자신의 (그리고 루이스 폴의) 방적기를 변호하면서 존 와이어트가 했던 계산에서는 배울 게 많다. 특히 여성과 아동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 형편없는 관계 당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였던 주도면밀함이 그렇다. 와이어트는 노동자 100명을 고용한 직물상이 그들 중 최고 30명을 해고하더라도 10명의 어린이나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35퍼센트 더 부유해지는 한편 교구에서도 과거의 빈민 구제 비용 에서 5파운드를 절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노동 대체가 신기술에 대한 노 동자 반란의 핵심이었던 만큼 이런 말을 하려면 상당한 배짱이 필요했다. 그리 고 이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많은 발명품이 이러한 목적을 겨냥했을 것임을 시사한다.
- 경제학자라면 산업화 과정이 본인들의 효용성을 감소시키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왜 거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동의하려 했는 지 의아할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설명은 공장 일을 갖는 데 따른 기회 비 용이 가내수공업에서 꾸준히 줄고 있던 사람들의 소득 잠재력에 의해 감소했다는 것이다. 산업화는 제조품의 가격을 가차 없이 떨어뜨렸고, 농 촌의 공업을 경쟁력 없게 만들었고, 농촌 노동자의 소득을 끌어내려 어 쩔 수 없이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게끔 했다. 이런데도 그들에게 어떤 다 른 선택이 있었다고 믿는다면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 다 사람들이 왜 가내공업제에서 공장제로 갈아탔는지는 그저 수수께끼 일 뿐이다. 일부 노동자는 점점 더 기계화해가는 공장에 맞서 반란을 일 으켰다. 그러나 기계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영국 정부가 산 업의 선구자들 편에 서면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폴 망투가 썼듯이 “(노동자들의 저항이 본능적이었든 심사숙고한 것이었든, 평화적이었든 폭력적이었든 그것은 확실히 성공할 가망이 없었다. 사건의 모든 흐름이 거기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 1850년대 어린이들의 노동 참여는 극적으로 줄어들었 다. 인과관계가 반대 방향으로 흘렀을 가능성도 있지만, 근로 시간을 규 제하고 공장 아동들의 여건을 개선한 1830년대의 공장법으로 아동의 인 건비가 올랐고, 그로 인해 증기 동력의 채택에 박차를 가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어쨌거나 1830년대 이후로 더욱 확대된 증기 기관 채택, 그리 고 그 뒤로 이어진 더 큰 기계의 도입은 더욱 숙련된 직공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기계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공장 설비와 그것을 작동하는 데 필 요한 인적 자본 사이의 상보성이 커졌다. 피터 개스켈 같은 동시대인들은 1830년대에 이미 이런 추세를 관찰한 터였다. 개스켈은 “증기 직조기가 수직기를 넘어설 만큼 대단히 일반화한 이후로는 공장에 종사하는 성인 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증기 직조기를 담당할 만큼 더 이상 유능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 전력화의 결과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나가고 있었을까? 8장에서 이 문 제를 다시 짚어보겠지만, 앞서 기술했던 건강이라는 혜택 외에 미국 노 동자들의 소득이 급속히 상승하고 있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대 량 생산은 일반 미국인 가정의 손이 닿는 곳에 신제품을 진열해놓은 것만 이 아니었다. 제조업의 폭발적 성장으로 더 많은 자본이 기계에 묶일수록 더 가치가 높아지는 기능을 갖춘 오퍼레이터들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지 는 선순환 주기에 노동을 공급하기도 했다. 공장 일은 오늘날 첨단 산업 에서 부상하는 일자리와 비교하면 단순했고, 노동자는 현장에서 대부분 의 업무를 신속하게 배울 수 있었다. 역사가 데이비드 나이(David Nye)가 지적한 것처럼 “업무 단순화의 한 가지 장점은 모든 일을 빨리 습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포드에서는 사실 누구나 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노 동자들이 부서를 옮겨 다닐 수도 있었다". 22 7장에서 논의하겠지만, 물론 노동 시장의 급작스러운 혼란은 일부 적응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전반 적으로 197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임금 상승을 기대할 수 있었다. 경제학자 프레더릭 밀스(Frederick C. Mills)가 1930년대에 관찰했듯이 “기계 화의 압박 아래서 인간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제롬은 가령 유리 산업에서 “입으로 불어서 유리를 만드는 공 예가들의 잠재적 실업은 ......... 유리병 공예가들이 기계의 영향을 받지 않 는 다른 유형의 제품을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쪽으로 전환하거나, 아니면 기계 노동자의 자리에 배치됨으로써 용케도 충족됐다”고 언급했다. 유리뿐 아니라 많은 산업에서 수작업은 기계 보조 작업으로 전환됐다. 공장이 전력화함에 따라 일부 노동자는 정비와 운송 업무에 배치됐지만, 기계 업무의 확대는 더욱 생산적이고 나은 보수의 일자리가 그들을 위해 나타 났다는 뜻이다 (8장). 2차 산업혁명의 최대 장점은 보통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함과 동시에 그들이 구입할 수 있는 신제품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미국 가정에 밀려든 전기용품의 홍수는 소비자와 생산 자로서 지위 양면에서 사람들에게 혜택을 줬다.
- 전력화는 대개 노동자에게 축복이었고, 공장을 더 밝고 더 쾌적하고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 전기가 쇼크와 감전사도 공장에 가져오긴 했지만 말 이다. 난생처음 전기의 힘과 접촉한 이민자들이 주요 희생자였다. “갓 도 착한 17세의 크로아티아 청년이 젖은 장갑을 낀 채 불꽃이 튀는 것을 바 라보며 스위치를 갖고 장난을 치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전 력화는 안전과 관련이 있었다. 공장 사고의 주요 원인은 벨트와 기어와 축으로 노동자들의 손가락, 팔, 목숨에 끊임없이 위협을 가했다. 유닛 구동 스위치는 정글처럼 얽힌 벨트와 축 및 그것들과 연관된 사고를 없앴 다. 전기 기기는 또한 먼지를 덜 일으켜 더 깨끗한 공기와 더 건강한 근로 환경을 만들기도 했다. 가스를 전기 조명으로 교체한 것은 공장의 습기를 줄이고 산소를 늘리는 동시에 산성 연기를 과거의 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점점 더 자동화한 기계는 궁극적으로 수고를 덜어줬다. 그러므로 공장 전 력화가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환영받았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6장). 실제로 산재 빈도율에 관해 최초의 종합 통계를 취합한 1926~1956년에 는 제조업에서 장애를 초래한 부상의 평균 횟수가 광산업에서 그랬듯 절 반으로 줄었다.17 1955년 포드의 리버루지 공장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가 경탄했듯이 말이다. “자동화는 나를 구해줬다. ...... 만일 그 무거운 물건들을 전에 내가 운반하곤 했던 위치까지 날라야 한다면 나는 65세까지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는 80세까지 일하기를 바란다.” 그의 유일한 불만은 기계의 도움을 받은 이래 몸무게가 33파운드 늘어난 것이었다.
- 농촌에서 일이 사라짐에 따라, 특히 대공황 당시 일부 농장 노 동자들이 고통을 겪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체로 농 장 노동자들은 대량 생산이 제공하는 일자리 기회에 이끌려 도시로 향했 다. 남부의 시골에서 시카고와 디트로이트 같은 산업 도시로의 흑인 대이 동(Great Migration)은 미국 경제사의 중대 사건이었다. 제조업의 노동자 수 요를 증대시킨 동시에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차단한 제1차 세계대전에 힘입어 많은 사람이 농장을 떠나 공장으로 갔다. 50 결과적으로 이것은 농 장의 기계화를 자극했다. 아이오와주 농무부의 아이반호 휘티드(Ivanhoe Whitted)가 1919년 <뉴욕타임스>에 “아이오와주 농부들은 농장 노동력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의 해결책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트랙터로 전환하는 중이다”라고 썼듯이 말이다. 그는 40년 전에는 대도시가 거의 없었고, 농 초의 노동력은 풍부하고 저렴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제조업 덕분에 대 도시가 농촌 지역을 희생시키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여분의 농장 노동력은 남지 않게 됐다. 그는 트랙터가 궁지를 벗어나게 해줬다고 덧 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값싼 노동력이 고갈되고 난 후에야 열광적으로 채택됐다. 거의 한 세기 동안 미국의 성장 원동력이었던 2차 산업혁명의 굴뚝 산 업 도시들은 반숙련 노동자에게 더 안정적이고 보수가 나은 일자리를 잇 달아 쏟아냈다. 사람들이 도시에 매료되었다는 가장 좋은 증거는 아마도 1879년 이후 기계화에 대한 반란의 부재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2차 산업혁명 이전에는 농업의 기계화에 대한 일자리 공포 때문에 발생한 소요 사건이 여럿 있었지만, 그 이후 농업 기계에 대한 반발은 사실상 사라졌다.
- 산업혁명은 중산층을 창출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들의 성장을 용이 하게 해줬다. 공장제의 확산은 산업 자본주의의 부상을, 아울러 그와 함 께 상업·산업 부르주아의 팽창을 촉발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역사는 자본의 승리만은 아니었다. '화이트칼라'라는 용어가 19세기 상반기에 처 음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산업화가 속도를 높임에 따 라 노동 시장이 급속한 변화를 겪었음을 말해준다. 19세기 중반에 가면 화이트칼라 직업은 우리가 중산층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비교적 유복한 가정을 뒷받침했다. 기계화한 산업의 부상은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생 산직 노동자의 소득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임금 양극화를 수반했 다. 앞서 논의했듯이 고전적 산업혁명기의 기계화는 비교적 숙련된 장인 기능공을 미숙련 노동자가 가동하는 기계로 대체했다. 중간 소득 기능공 의 일자리는 기계화한 공장 생산이 장악하면서 사라졌다. 장식장 제작자, 시계공, 제화공 등 모든 종류의 장인은 공장이 점점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함에 따라 가게 문을 닫았다. 그러나 시설 규모가 커지고 전문직 관리자 들이 더 많이 필요해지면서 1850년부터는 화이트칼라 일자리가 팽창했 다. 더욱 미묘한 그림은 장인 기능공에게는 불이익을, 화이트칼라 중산층 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준 노동 시장의 공동화를 드러낸다. 미국에서 새로 수집한 데이터에 의하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임금은 이미 독립전쟁 이전에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미국 노동자들은 단지 소비자 역량의 측면에서만 기술 변동에서 이득 을 얻은 게 아니었다. 아마도 더욱 중요한 것은 20세기의 기계화는 주로 증강의 성격을 띠었고, 기계로 실직한 소수의 앞에는 대부분 선택할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 대안이 놓여 있었고, 이것이 블루칼라 미국인이 집 에 가져간 전례 없는 임금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일 터이다. “산업 노동자의 임금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간 상승함에 따라, 남편들은 점점 더 좋은 집, 자동차, 넉넉한 음식과 옷, 그리고 어쩌면 진입로에 주차한 캠핑 카를 이용한 휴가 여행까지 포함될지 모를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뒷받 침할 수 있었다. 점점 더 많은 노동 계급 가정이 폭넓은 미국 중간 계급 의 하위층에 도달할 만큼 충분히 벌었고 충분히 소비했다.”89 베이비붐은 부분적으로는 젊은 가족의 낙관주의 확대를 반영한 것이었고, 이는 제품 과 서비스의 추가 수요를 창출하고 제조업의 지속적 팽창과 새로운 노동 집약적 서비스의 창출을 촉발했다. 이 시기에 고졸 청년은 임금이 괜찮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미국 경제는 블루칼 라 노동자가 오로지 자신의 임금만으로도 중산층의 생활 양식을 영위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정점에 이른 중산층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다양한 혼합이었다. 그 결과는 소득 분배의 압착 에 반영되어 있으며, 이것이 존 F. 케네디로 하여금 “밀물은 모든 배를 들 어 올린다”고 말하게끔 만들었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구성원들은 중산층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이는 기계화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이 아득 한 추억이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미국의 반기계 반란이 2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종식됐다는 사실 을 무심결에 보여준다. 19세기에 당대 노동자들은 기계화에 맞서 저항했다. 그러나 20세기에는 그런 사건을 목격할 수 없었다. 테크놀로지 말고 다른 요인도 부차적일지언정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다.
- 2004년 선구적 저서 《신(新)분업(The New Division of Labor)》을 집필한 매사추세츠 공대의 두 경제학자 프랭크 레비(Frank Levy)와 리처드 머네인(Richard Murnane)은 아우터와 더불어 이 패턴을 처음으로 언급한 이들이다.
컴퓨터가 경제 성장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주는 사이, 전혀 다른 임금을 받 는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직업이 수적으로 증가해 있었다. 근로 빈곤층이 차지 한 건물 관리인, 구내식당 직원, 경비원 같은 직업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커 졌다. 그러나 더 큰 일자리 증가는 경영자,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교사, 기술자 등의 임금 분포 상위권에서 일어났다. 후자의 직종과 관련해 세 가지 사실 이 눈에 띈다. 보수가 좋고, 폭넓은 전문 기술이 필요하며, 종사자 대부분이 생 산성을 높이기 위해 컴퓨터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늘어난 건물 관리인과 늘어난 경영자라는 이 직업 구조의 공동화는 업무의 컴퓨터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 오늘날 만일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살아 있다면, 컴퓨터 시대에 관해 뭐 라고 썼을까? 산업화한 서구의 근로 환경은 확실히 어둡고 사악한 공장들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1인당 생산량과 사람들의 임금의 궤 적은 극도로 유사하다. 1979년 이래 미국에서 노동 생산성은 시간당 보상 보다 8배 더 빨리 증가해왔다. 37 미국 경제의 생산성은 훨씬 더 높아졌음 에도 불구하고, 실질 임금은 정체했고 실업자는 늘어났다. 그 결과 소득 에서 노동의 비중이 떨어졌다. 기업의 수익은 국민소득에서 갈수록 더 큰 몫을 쓸어가는 반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이렇게 작았던 적은 좀처럼 없었다. 그리고 노동 보상의 공식 측정 안에는 CEO와 음악·스포츠 · 미디어계 슈퍼스타들의 급료가 포함됐으므로, 이는 곧 일반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퍼센티지가 훨씬 더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고전적 산업혁명기에 그랬듯이 경제 성장의 이득은 소득 분포의 하위에서 상위로, 노동자에 게서 자본가에게로 옮겨갔다. 전후 시기에 노동의 비중은 64퍼센트 주변 을 맴돌았지만, 1980년대 이래로는 대침체 이후의 전후(戰後) 최저 수준까 지 꾸준히 하락해 최근에는 평균 58퍼센트 정도였다. 이는 그림 9에 나타난 추세와 일치하는데, 여기서 노동 생산성과 1980년대에 다시 떠오르 던 노동자 보상 사이의 격차 확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가령 경제학자 루카스 카라바르보니스(Loukas Karabarbounis) 와 브렌트 니먼(Brent Neiman)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민소득 중 노동에 돌아가는 몫이 1980년대 이후 극적으로 줄었다고 기록했는데, 그들의 주 장에 따르면 이는 값싸진 컴퓨터 덕분이다.
- 수익 증가와 노동자가 받는 몫의 하락은 틀에 박힌 중간 소득 직종(가령 기계 조작원, 회계, 모기지 보험업자)의 자동화와 저소득 서비스직(가령 건물 관 리인, 웨이터, 안내원)으로의 노동력 이동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2017년 국제통화기금(IMF)은 “장기적인 투자 상품의 상대적 가격 변동으로 측정한 기술 진보는 업무의 관례화에 대한 초기 노출과 더불어 선진 경제국에서 노동 소득의 비중이 하락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해왔다”고 밝히는 보고서를 발간했다.40 컴퓨터 제어 기계가 중산층의 일자리를 대 체한 데 따른 노동 시장의 공동화와 일맥상통하게 국제통화기금은 특히 중간 숙련 노동자들한테서 노동자 몫의 하락이 급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고 나면 그래픽 디자이너의 평균 시급은 최근 정체 상태였다. 모든 종류의 디자이너의 평균 임금은 1970년대 이래 사실상 하락해왔다. 디자이너가 식자공보다 평균적으로 약간 더 받기는 하지만, 2007년의 평균 디자이너는 1976년의 평균 식자공보다 시간당 1달러가량을 더 번다. 디자이너 는 이 기술의 혜택을 거의 공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상당한 새 기능과 직무 책임을 습득했는데도 왜 디자이너는 평균적으로 더 많이 벌지 못하는 걸까? 디자이너를 위한 테크놀로지와 직장 구조가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인 듯하 다. 식자공을 대체한 인쇄 디자이너는 웹디자이너로 일부 교체되었고, 그중 일부는 모바일 디자이너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다. 첨단 기술은 계속해서 출판의 정의와 방식을 재규정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매번 일어날 때마다 새롭고 전문화한 기능 - 학교에서보다는 주로 경험을 통해서나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익 히는 기능을 요구한다. 변화를 따라잡으려면 디자이너는 매년 새로운 소프 트웨어와 표준을 배워야 한다. 몇 년 전에는 플래시(Flash)를 배웠는데 이제는 HTML5이다. 다음 해에는 아마 또 다른 걸 배워야 할 것이다.
- 《일자리의 신지리학(The New Geography of Jobs)》에서 경제학자 엔리코 모레티(Enrico Moreti)는 캘리포니아의 두 곳, 즉 멘로파크(Menlo Park)와 비 세일리아(Visalia)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는 1969년 멘로파크에 있는 휴렛팩커드(실리콘밸리의 중심에 있다)의 일자리 제안을 거절하고 자동차로 세 시간 떨어진 비세일리아라는 중소도시로 옮겨간 한 젊은 엔 지니어로 시작된다. 당시 많은 전문가는 도시를 떠나 더 작은 지역사회로 이주하는 중이었고, 그곳은 가족의 삶을 위해 더 나은 장소로 여겨졌 다. 그때 캘리포니아의 두 곳은 번영하는 중산층, 유사한 범죄율, 비슷한 학교 수준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멘로파크의 소득이 더 높기는 했지만, 미국은 평등화의 경로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멘로파크와 비세일리아는 서로 다른 우주에 있다. 실리콘밸리는 성장해서 세계의 혁신 허브가 된 반면, 비세일리아는 낙후 지역 이 되었다. 이곳은 미국에서 대졸 노동자의 비중이 두 번째로 낮고 높은 범죄율은 상승세에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소득은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비세일리아만의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전반적인 국가적 추세다. 미국의 신경제 지도는 사람들 사이뿐 아니라 지역 사이의 격차도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적절한' 산업과 인적 자본의 탄 탄한 기초가 있는 소수의 도시는 계속해서 우수한 회사를 끌어들이며 고임금 을 제공하고 있는 반면, 반대편 극단의 '부적절한' 산업과 한정된 인적 자본을 가진 도시는 장래성 없는 일자리와 낮은 평균 임금에 쩔쩔매고 있다. 이런 격차 나는 이를 대분기라 부르고자 한다는 미국의 도시를 점점 더 거주자의 학력 수준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1980년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 미국의 지역 사회는 인종 차별을 철폐하고 있는 동시에 학력과 소득의 측면에서는 점점분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 사회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중산층이 위축되기 시작하면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될까? 빈부 격차가 심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과두정치와 포퓰리 즘 혁명에 더욱 취약했었다. 많은 정치과학자가 지적했듯이 두터운 중산 층은 안정적인 민주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기둥이다. 사실 장기간 지속 된 극심한 불평등은 자유민주주의가 왜 더 일찍 도래하지 않았는지를 설 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서 지주 엘리트는 선거권 확대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빈민은 굶주림을 면하는 게 주된 관심사였다. 다양한 기대를 가진 중산층이 없었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도 거 의 없었다.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의 고전적 저서 《독재와 민주주 의의 사회적 기원(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은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직설적인 발언으로 아마 가장 많이 알려져 있을 것이다. 비록 이 주장에는 많은 비난이 쏟아졌지만, 무어의 요점은 부르주아가 언제나 꼭 민주주의를 만들어낸다는 게 아니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영국 산업화가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장을 마련한 곳-에서 그랬듯이 지주 엘리트의 교체가 민주주의를 불러오는 데 필수라는 것이었다. 사회과학자들은 오랫동안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 계가 있다고 말해왔지만, 무엇이 그 관계를 촉발하는지는 즉각 알아차리 기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유력한 설명은 산업화가 더욱 잘 살게 되자 더 많은 정치권력을 요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 집단을 파생시킨다는 것이다. 《정치 질서와 정치적 부패》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산업혁명 이 어떻게 과거의 독재적 질서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근본 성격을 변화시켰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민주주의의 부상은 평등을 선호하 는 가치의 확산과 확실히 많은 관계가 있지만, 이런 생각은 진공 상태에 서 생겨난 게 아니었다. 산업혁명으로 시동이 걸린 심오한 변화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운 집단의 사람들, 특히 부르주아와 공장 노동 계급을 만들어내고 동원함으로써 사회 구성을 급격히 바 꿔놓았다. 이렇게 후쿠야마의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 계급 이론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낡은 봉건 질서로 부터 등장한 최초의 신흥 사회 계급은 부르주아였다. 이 계급에는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되고 공장제에, 즉 산업혁명에 엄청나게 투자한 상인 시민들 이 속했다. 산업화는 결과적으로 떠오르는 공업 도시를 찾아 농촌 지역을 떠난 마르크스의 두 번째 신흥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를 집결시켰다. 이들 집단은 봉건 질서 내에서는 정치적 참여로부터 배제됐지만, 더욱 부유해 지고 조직화하면서 더 많은 정치권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것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압력을 만들어냈다. 후쿠야마는 이렇게 썼다. 산업화의 확대는 소작농이 농촌을 떠나 노동자 계급으로 유입되도록 유도했고, 20세기 초에 그들은 최대의 사회 집단이 되었다. 무역 팽창의 영향 아래 중산층의 수는 처음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그다음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그리고 19세기 말에는 독일과 일본 및 기타 ‘후발 개발도상국에서 불어나기 시작했 다. 이는 그 후 20세기 초의 주요 사회적·정치적 대립의 기초를 닦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민주주의는 사회의 한 특정 집단, 바로 중산층이 가장 강력하게 원했던 체제라는 것이다.
- 대량 생산 시대에 집단 구동에서 유닛 구동으로 전환했던 것처럼 컴퓨 터화와 조직 재편은 어떻게 회사가 돌아가는지를 재고해야만 하는 점진 적 과정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말의 생산성 수수께끼가 모든 사람에게 수수께끼였던 것은 아니다. 경제사학자들은 예전에 이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장 전력화의 진화를 연구한 옥스퍼드 대 학의 폴 데이비드는 1882년 토머스 에디슨이 최초로 발전소를 건설한 이 후 전기가 생산성 통계에 등장하기까지 대략 40년이 걸렸다고 썼다. 6장 에서 논의했듯이 전기의 신비스러운 힘을 활용하려면 조직의 원칙에 많 은 실험이 필요하므로 공장의 완전한 재편과 유닛 구동으로의 전환이 필 요했다. 그래서 전력화의 생산성 향상이 1920년대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이어서 컴퓨터 주도의 생산성 증대와 관련한 유사한 궤적을 예측했다. 그리고 그는 정곡을 찔렀다. 1920년대와 1990년대 사이의 유사성은 흥미를 돋우었다. 양쪽의 10년간 생산성은 꽃을 피웠고 범용 기술(1920년대의 전기와 1990년대의 컴퓨터)의 적용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경제학자들은 전자가 후자의 결과라는 데 동의한다. 1991~1995년 과 비교하면 1996~1999년의 생산성 가속화의 약 70퍼센트는 컴퓨터 기술 덕분이었다. 그리고 생산성 반등은 단지 몇 부문에 국한해 집중된 게 아니라 도매 무역, 소매업, 서비스업이 상당한 이익을 보이는 가운데 대 단히 광범위했다. 이는 범용 기술이 작동 중이라는 암시였다.
- 자동화로 인한 승자와 패자 간 격차 확대는 만일 미해결 상태로 내버려둘 경우 직접적으로 일자리에 영향을 받은 개개인이 감당할 수준을 한 참 넘어서는 심각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10장 참조). 이미 경제 적 격차의 확대는 자유민주주의 조직 자체를 시험대에 올리는 정치적 분 열의 심화로 옮겨왔다(11장 참조), 20세기에 꾸준한 소득 상승은 기정사실 로 받아들여졌고,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물질적 수준이 향상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자동화 시대에 정부가 그 약속을 이행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중산층의 임금 인상이 생산성 증가보다 뒤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포 퓰리즘 역풍은 대부분 경제 성장으로 발생한 이득을 더 많은 이들에게 배분되도록 하지 못한 정부의 실패를 반영한다. 사실 비대졸자 노동자의 임 금은 30년이 넘도록 하락세였다. 대침체로 인해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 던 지난한 과정이었다 (11장 참조),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했듯이 “선진국 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는 사라져가고 있는 중산층의 문제를 다루는 능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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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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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본인은 자신의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승리는 정치경제사상에서 근본적으로 상이하고 대척적인 두 개의 접근법 사이에 그를 위치시켰다. 하나는 뷰캐넌이 연구를 시 작했을 때 정점에 올랐던 접근법으로, 대표적인 경제학자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다. 케인스는 현대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체제가 번성하려면 한 나라의 경제에서 발생된 이득을 국민 모두가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경제가 규율되는 방식에 국민 모두가 발언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케인스에 따르면, 시장 시스템에는 매우 많은 장점이 있지만 내재적인 오류도 적지 않으며 이것을 고칠 역량이 있는 것은 정부뿐이었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어서 케인스의 이론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수 있 는 입장에 있지 않다. 케인스의 견해에 대한 상세한 논쟁은 다른 이들에 게 맡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학자로서 나는 케인스의 사고방식이 대공황 시기에 대중에게 선출된 공직자들에 의해 정책으로 실행되었고, 그 럼으로써 재앙에 직면한 미국의 자본주의를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력한 두 대안이었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 지켜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나는 전후에도 경제적·사회적 질서가 케 인스주의에 기초해 구성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집단으로서 힘을 모아 행동하고 정부가 조세를 거둬 공동의 목적에 필요한 일들을 진행함으로 써 모든 이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전에 없이 광범위한 사람들이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 케인스주의와 두드러지게 대척점에 위치한 접근법은 뷰캐넌이 창시한 버지니아 정치경제학파의 접근법이다. 이에 따르면, 공공재 운운하는 그 모든 이야기는 “탈취자”가 “창출자를 착취하는 것을 가리는 데 쓰는 연 막에 불과하다. 탈취자들은 더 나은 삶을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 라 “투표를 통해서 얻기 위해” 정치적인 결탁과 연합을 이용한다. 방법에 서는 이견이 있었어도 밀턴 프리드먼과 F. A. 하이에크 모두 시민의 압력으로 정부 당국자들이 옳은 일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 었던 데 반해, 뷰캐넌은 정부가 행위자들의 부정직함 때문에 실패하게 된 다고 보았다. 활동가든 유권자든 공직자든, '공익'이니 '공공의 이해'니 하는 것을 운운할 때는 진정으로 공공의 이해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남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기 위해서일 뿐이기 때문이다.30 뷰캐넌의 냉소주의는 너무나 독성이 강해서 이것이 널리 믿어지면 염산처럼 시민적 삶을 부식시켜버릴 수 있었다. 게다가 뷰캐넌은 1970년대 이후로 한술 더 떠 국민과 국민의 대표자들이 공적인 권력을 민주사회에 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영구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민간의 재산을 갈취해가려는 정부의 손에 영구적으로 수갑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 오늘날 미국 정치 시스템을 뒤엎으려 하는 사람들은 두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군의 사상의 후예다. 그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주의 에 대한 부유한 지배층의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이 사상이 처음 일관된 형태로 개진된 것은 1820년대 말과 1830년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존 C. 칼훈John C. Calhoun에 의해서였다. 지배계급의 전략가로 서 너무나 명민하고 수완이 좋아서,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는 칼훈을 “지배계급의 마르크스”라고 불렀다. 역설적인 위트가 담긴 호프스태터의 명명은 칼훈의 전략이 가진 혁명적 속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칼훈의 전략은, 어떻게 하면 당대의 가장 부유한 1%(사실 1%도안 되었을 것이다)가 입헌공화제 국가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것인가와 관련이 있었다. 부통령을 지냈고 그 전략을 세우던 당시에 상원 의원이었던 칼훈은 미국 최초의 조세저항 운동 전략가였고, 아마도 극단 주의자 중에서 미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일 것이다. 이것은 비밀스러운 기원이 아니다. 제임스 M. 뷰캐넌의 몇몇 학문적 후 예도 뷰캐넌의 정치경제학파가 존 C. 칼훈의 사상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찰스 코크가 돈을 대고 진두지휘한 급진우파 공작의 핵심인물인 조지 메이슨 대학의 경제학자 알렉산더 타바록Alexander Tabarrok과 타일러 코언은 남북전쟁 이전 시기의 상원의원이었던 칼훈이 “현대 공공선택이론의 전조”라고 말했다. 공공선택이론은 뷰캐넌 이 창시한 정치경제학파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다. 타바록과 코언에 따 르면, 뷰캐넌과 칼훈 모두 “민주주의가 자유를 지키는 데 실패한 것”을 몹시 우려했고 “세금 생산자와 세금 소비자 사이에 일종의 계급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또 둘 다 정치를 착취와 강압의 영역으로, 경제를 자 유로운 교환의 영역으로 보았고 이미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수많은 재산권 보호 조항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소수자(수적으로 소수인 부유층]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창의적인 방법들을 고안했다. 칼훈과 뷰캐넌 모두 소수의 경제적 지배계층을 다수 시민의 착취로부터 영구히 보호하 기 위한 헌법체제를 고안했고 (타바록과 코언이 정확하게 짚었듯이) “그것과 동일한 목적과 효과를 갖는 소수자(부유층의 거부권을 옹호했다. 또한 칼훈과 뷰캐넌 모두 민주사회에서 유권자들이 집합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가장 부유한 계층도 동의할 수 있을 법한 것들로만 제한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 실제로 오늘날 부유한 소수가 밀어붙이고 있는 급진우파 운동은 칼 훈 시절부터 죽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다. 1865년 4월 (남군을 이끄는 로버트 E. 리 Robert E. Lee 장군의 북버지니아 군대가 애퍼매톡스에서 패배한 이후, 칼훈의 개념은 한 세기 가까이 심연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남부의 식자층 엘리트 중 일부는 언제나 칼훈의 개 념이 갖는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주들 사이의 전쟁War Between the States"(남부에서는 남북전쟁을 이렇게 불렀다)에 대해 신화화된 버전의 이야기 를 소중히 여겼고, 남부가 노예제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지키 기 위해서 전쟁에 나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칼훈 및 이후의 추종자들이 생각한 남부는 실제의 남부가 아니었다. 실제의 남부에는 백인뿐 아니라 흑인 인구도 존재하고 수백만 명의 저소득층과 중산계층 백인도 존재했 으며, 이들은 이제까지 민주사회에서 조세를 통해 제공된 공공 서비스로 혜택을 보았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미국에서, 역사에 대해 관심이 가장 많다는 이 지역에서, 부유한 백인 지배층은 극단적인 부와 불평등이 야기하는 위험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반민주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통치 전 략을 사용했다. 남부의 자산 소유자들은 인종차별에 기반한, 그리고 고 도로 착취적인 이 지역 특유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지키겠노라 결연하게 결심했고, 따라서 이들은 민주주의를 억누르기 위한 계획을 고안하는 데서 최전선에 나섰다. 칼훈을 비롯한 대농장주들이 성립에 크게 기여한 그 정치경제 체제는, 처음에는 속박 노예에 기초한 체제였고 나중에는 투 표권이 박탈된 저임금 노동력, 인종분리제도, 그리고 매우 빈약한 공공 영역에 기초한 체제였다. 미국에서 독립선언문에 대한 표면적인 지지와 경제적·정치적 권력의 현실이 이렇게 극명히 벌어진 곳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불의를 막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연방 정부뿐이었다. 물론, 이는 널리 합의된 미국의 이상이 침해되는 것에 맞서 연방 정부가 나서게 할 만큼 강한 대중의 압력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따 .라서 남부의 백인 지배층은 전국적인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자신의 지배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 어느 곳의 그 누구보다도 전략적이고 의식적으로 고민했다.
- 1950년대 무렵이면 소수 지배층이 다수 대중 위에 군림할 수 있게 할 정교한 규칙들을 만들어내는 일의 실험실은 버지니아 주가 담당하고 있 었다. 올드 도미니언Old Dominion'(버지니아 주의 속칭 - 옮긴이)은 정치적 리더십에서 존중받을 만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첫 다섯 대통령 중 네명을 배출했고, 남부 연맹의 수도가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상원의원 해 리 F. 버드 시니어 Harry F. Byrd Sr의 고향이었다.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와 뉴딜의 주적수인 버드는, 20세기 중반의 버지니아 주에서 마치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버 드의 동료들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맞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칼훈의 정부 이론을 재발굴하고 있던 바로 그때, 경제학 박사 제임스 뷰 캐넌이 버지니아 주를 대표하는 대학에 경제학과장으로 부임했다.
- 예속의 길은 경종을 울리기 위한 책이었다. 하이에크는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상은 그보다 앞선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적 경향의 필연적인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주 장했다.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특징은 중앙 정부에 의존한 다는 점이었다. 하이에크는 파시즘과 사회주의를 추종한 사람들이 개인 의 자립과 자기 의존이라는 개념에서 결별한 것이 이 막대한 질병을 일으 킨 병균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치즘을 혐오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것이 실현되면 곧바로 그들이 혐오해 마지않던 압제로 이어질 또 다른 이상을 위해 맹렬히 나서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 사회가 이 방향으로 가고 있는 이유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스스로에 게 기망되어, 실상은 완전히 대척적인 두 개념인 "사회주의와 자유가 결 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이에크는 정부가 커지면 곧 모든 자유를 갉아먹고 전체주의적인 사회를 낳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에 의존하는 것이 예속의 길이라면, 구원의 길은 고전적인 자유주 의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이 길을 “버려진 길”이라고 불렀다. 멸망의 운명에서 스스로를 구하려면 서구 세계는 개인의 자유, 특히 경 제적 자유를 사람들이 다시 존중하게 해야 했다. 하이에크는 자유시장이 단지 경제 발전에 효과적인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자유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되는 가격이라는 신호는 “자생져 인 질서를 통해서 수백만 수천만 개인들이 정부의 강압 없이 자신의 열 망과 행동을 조절하게 하는, 현재까지 인류가 알아온 유일한 방법이었다. "경제적 자유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도 유지될 수 없 었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사회주의는 노예제를 의미할 뿐 이었다" 당연하게도 예속의 길은 학계의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우파 기업인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다. 이들은 오래 유지되어온 자산가 계급의 특권이 상실된 것에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노조와 협상을 하고 새로운 규제 당국의 기준에 맞추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도입된 일련의 개혁은 부당하고 비합법적인 “혁명을 의미했다. 뉴딜에 맞서기 위해 설립된 미국자유연맹American Liberty League 의 설립자 중 한 명은 뉴딜을 “사회주의 원칙을 일컫는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 책에서 하이에크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언급했지만 그 선 을 어디에,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것은 동료 경제학자이자 학문적인 호적수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가이 책에 대해 지적한 핵심적인 취약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이면 하이에크는 도금시대의 자유방임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또 하이에크를 비롯해 스위스의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수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에 발끈했다. 예속의 에서 하이 에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단지 기존의 것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코먼웰스 클럽에서 한 유명한 연설에서 '경제적 입헌질서economic constitutional order'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시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조직적·집합적 노력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미국인들에게 다시 설명해주기 위해서였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이 “경 제적 과두제”를 향해 가던 구조적인 변화의 정점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입헌적인 개혁으로 경제 안정성을 보장 해 대공황과 같은 "아나키 상태”를 사전에 막지 못한다면 거대 기업의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스스로와 사회 전체를 파괴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뷰캐넌은, 대의제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다수의 유권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입헌적인 개혁으로 경제적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하지 않는다면 대의제는 자산가 계층(의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자본주의를 파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 64년 남부경제학회 회장으로 선출된 뷰캐넌은 자신의 견해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취임연설 기회를 '경제학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의 처방을 설파하는 데 사 용했다. 경제학자들은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이른바 배분 allocation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불평등이 나쁜 것이 라는 개념 자체가 불평등을 고치고자 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이끌게 되 고, 이는 경제학이 “사회공학이라는 (응용) 수학이 되게 만든다는 것이었 다. 뷰캐넌은 경제학자들이 모든 연구에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급진적으 로 적용해 경제에서나 정치에서나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다는 가정에서 분석을 수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와 동시에, 뷰캐넌은 시장은 선하고 정치는 악하다고 보았다. 경제 영역에서는 개인 이 자발적으로 교환에 참여하지만 정치 영역은 정부의 권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스템 전체가 “강압적인, 혹은 잠재적으로 강압적인 관계”라는 것이었다. 뷰캐넌은 그의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방법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배분allocation과 분배distribution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자원 “배분”의 문제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생산에서 “효율적”으로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로, “분배의 문제는 생산된 것을 어떻게 형평성 있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이 연설문에서 뷰캐넌이 말한 것은 “자원 배분의 문제”이며, 뷰캐넌은 이렇게 배분의 “문제”로 경제학을 접근하면 “최적화 혹은 "극대화"의 해법을 고르는 “기술적인” 차원으로만 범위가 협소해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뷰캐넌은 이렇게 최적의 것을 “선택”하는 데 집중하는 접근법보다 인간들 사이의 자발적인 “교환관계에 천착하는 접근법을 취하자고 제안하고 있으며, 이는 사회계약을 통한 집합적 규칙의 구성도 포함한다. 이 논의는 “재분배”나 “불평등 문제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입헌경제학의 개념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보인다. 옮긴이)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시장'이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지적인 추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데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많은 노력이 필 요했다(실제 시장은 자연발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 내내 사람들은 시 장을 만들어왔고, 정부는 그 시장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해왔으며, 거기에서 늘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이득을 얻었다. 역사에서, 또 일상에서 날마다 보게 되는 것들 모두가, 막대하게 부가 불평등하면 사람 들이 시장에서 상호 만족스러운 해법에 도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의 실상을 알려면 찰스 디킨스 Charles Dickens의 소설만 읽어봐도 충분했다. 제약 없는 경제권력은 일부 사 람들이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뷰캐넌이 하고 있었던 일은 경제학의 과학적 권위를 지렛대 삼아 사회과학, 인문학, 법학 분야에서 수세대의 학자들이 드러내온 사실, 즉 19세기의 순수한 시장이라는 개념은 허구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일이었 다. 과거에 이 허구는 떠오르는 기업 지배층이 법과 규칙을 자기에게 유리 하게 기울이고 막대한 부와 그 덕분에 갖게 된 권력을 통해 다른 이들 위 에 군림하면서 사회를 황폐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 터 현대경제학의 창시자들은 사회적 권력이 시장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이와 다르게 시장의 자생성을 주장하던 학자들(가령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을 논박했다.
- 뷰캐넌과 데블리토글로의 처방은 마치 오늘날 우파가 대학을 급진적 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추진하는 조치들의 청사진처럼 보인다. 주립대학 을 경영진의 엄격한 관리하에 놓고, 교수진의 의견은 거의 반영하지 않으며, 납세자에게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해서, 저항적인 학생들이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 훈련소로 만드는 것이다. 뷰캐넌과 데블리 토글로의 주장은, 주립대학을 학생들이 거의 공짜로 다닐 수 있게 해주 는 지원을 멈추고 전체 비용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만큼의 학비를 책 정하면, 학생들이 대학 개혁이니 사회 개혁이니 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 고 공부에만 관심을 쏟을 경제적 인센티브가 생기리라는 것이었다. 그런 데 이들의 논의가 담고 있는 주장이 하나 더 있었다. 사실상 대학 교육을 훨씬 더 적은 수의 학생만 받게 하자는 것이다.
- 뷰캐넌은 뮌헨에서 열리는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 모임에서 교육 문제에 대해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는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 다. 학자, 기업인, 후원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뷰캐넌은, 부가 널리 퍼진 현대사회는 이제 그 부를 쌓는데 기여는 하지 않았으면서 그것을 뽑아 먹 으려고만 하는 “기생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기꺼이 허용하는 지경이 되 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학생 계층이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간단한 해법이 있다고 말했다. “기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닫는 것”이었다. 1970 년대가 지나기 전에, 뷰캐넌은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보조를 받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이와 동일한 주장을 펴게 된다.
- 그의 계획에서 또 한 가지 핵심적인 부분은 10명 정도의 설립자 그룹Founders Group'을 만들고 다시 이들의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200명에게 접근할 수 있는 블루 북Blue Book'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작 업의 핵심은 학자들뿐 아니라 정치인과 잠재적 후원자들도 참석하는 펠 로우 소사이어티Society of Fellows'라는 모임을 꾸리는 것이었다(그가 개인 용도로 적어놓은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격식 있고 공식적으로 들리는 준학술용어를 사용하되 모임에 들어올 사람을 뽑는 데 학문적인 기준을 적용하지는 않는다). 인센티브 구조를 연구하는 학자답게, 뷰캐넌은 “개인의 자유를 촉 진하기 위한 연구에 학자들이 관심을 갖도록 노벨상에 맞먹는 큰 상금을 주는 상도 만들 계획이었다. 당시 노벨 경제학상은 생긴 지 한두 해밖에 안 된 상이었고,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 사람들 중에는 받은 사람이 없었다(그의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쓰여 있다. “여기에 닉슨이 후원하게 할 것.” 그 외에 “존중받을 만하다는 평판을 어떻게 만들고 유지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가식이 필요할 것인가?”, “내부 비판을 어느 정도나 허용할 것인가?” 등과 같은 전략적인 문제들도 적혀 있다). 이 일을 진전시키는 데는 비밀 유지가 꼭 필요 했다. 외부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어야 했다. 리치몬드 연설을 하고서 얼마 후, 뷰캐넌의 팀은 향후 40년간, 아니 그 보다 더 오래 거대한 전략을 진전시킬 인맥을 다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레이건 주지사의 내부 인사들도 초대해 LA에서 더 큰 모임을 조직했다. 뷰캐넌의 학문적 동지들과 스카이프의 리처드 래리 외에, 레이건 주지사 의 참모 네 명이 참석했는데, 레이건이 가장 신뢰하는 참모인 에드윈 미즈 3 세도 있었다.
- 찰스 코크는 엔지니어와 기업인으로서는 똑똑했지만 사회성 면에서는 그런 편이 못 되었다. 결혼도 마흔 하나가 되어서야 했다. 사업도 순조롭 게 번창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자 하는 “강박”(코크 본인의 표 현이다)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쓸 데도 없어서, 그는 "번영과 사회 진보로 이 끌 원칙들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책과 논문을 읽는 데 점점 더 시간을 쏟았다. 하지만 그의 공부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치우쳐 있었다. 번영과 사회 진보의 토대는 제약 없는 자본주의여야 한다고 믿은 사상가들이 그 의 공부 대상이었고, 그 역시 그렇게 믿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에게 영 향을 많이 끼친 책은 1957년에 F. A. 하퍼F.A. Harper가 출간한 자유시장 찬가 ‘임금은 왜 오르는가’Why Wages Rise)였다.'발디 Baldy'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하퍼는 급진우파 사상가 중 그리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 하지만 더없이 중요한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의 창립멤버였고 찰스가 매우 소중히 여기던 스승이었다. 전공은 농업경제학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어떻게 임금에, 그리고 “통치받는 것의 비용'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물론 그의 결론은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하퍼는 노조를 “은행 강도에 비유했다. 노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특권을 누리며 단기적인 이익을 얻는 반면, 나머 지 노동 대중은 피해를 보는 상황이 초래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왜곡이 없는 진정한 시장이라면 임금은 오로지 생산성이 증가할 때만 올라야 한 다고 주장했다. 하퍼는 노조의 요구로 노동계약에 의료보험이나 연금 같은 부가급부가 포함되면서 생겨난 작은 기업 복지국가에도 반대했다. “작은 복지국가가 큰 복지국가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해악적”이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것이 “공산주의-사회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그런 부가급부가 “노동자들을 현재의 일자리에 고착되게 만들어서” 일자리 사이에 노동력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음으로써 “우리의 진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개개인 각자가 자신의 보수에 대한 협상과 자신의 지출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필요한 서비스는 정치 시스템이 공급해주기를 기대할 게 아니라 시장 참여자로서 각자가 시장에서 구매해야 했다.
- 코크를 그 스스로 선택한 평생의 사명에 나서게 만든 요인이 또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될 정도로 사업에서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자유지상주의 운동의 지도자 가 되고 이 운동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갈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는 증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성공이 곧 자신의 지적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적합성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일찍이 루트비히 폰 미제스로의 저 술을 읽으면서, 코크는 기업인들이 인류 역사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칭송을 받지 못한 천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 청교도인들이 현 세에서의 성공을 신에게 선택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겼듯이, 성공 한 기업인들도 그와 비슷한 의미에서 존중을 받아야 마땅했다.
- 본인의 성취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그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자선의 행동이나 동정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노동자는 물론이고 그와 생각이 다른 기업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장기업 경영자들, 특히 현재 공화당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온건 성향 의 경영자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커다란 고층건물에 화려한 사무실을 갖고 있다고 마치 자기가 코크와 동급인 줄 알지만, 잘못 생각하는 것이었 다. 코크가 보기에 이들은 주주들에게 기대고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알 지 못하는 '고용된 경영인'일 뿐이었다. 코크는 자신 같은 사람들이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중서부, 서부, 남부 출신에 자신의 사업을 스스로 일군 사람들, 그리고 회사를 상장하지 않고 사기업으로 유지하면서 무엇에도 전혀 타협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말이다. 코크는 실패한 기업인은 더 경멸했다. 그는 기업의 실패는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증거이며, 구매자를 잘못 가늠했거나 경쟁자 대비 자신의 역량을 잘못 가능한 기업을 시장이 잘 솎아냈다는 증거라고 보았 다. 코크는 저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창조적 파괴”라고 부른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건강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공감이나 동정은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미래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또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상상하라”며, “창조적 파괴를 추동하기 위해” “원칙”과 “절박성”을 가지
고 나서라고 촉구했다.25 고객에게 서비스를 잘 제공할 능력이 없는 기업인은 “수위나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코크의 세 계관에서, 노동자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거나 본인의 실패 탓에 임노동 이라는 예속의 형태를 선고받은 사람을 의미했다.
- 로스바드는 카토 연구소의 목표와 행동계획을 담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 변화를 위한 전략Toward a Strategy for Libertarian Social Change' 이라는 글을 썼는데(책 한 권 분량이나 되는 긴 글이었다) 레닌의 저술을 아주 많이 인용하고 있었고 이전의 혁명들과 권위주의 정권들에 대한 내용도 너무 많이 담고 있어서, 내부자들을 넘어서서 회람시키기에는 지나치게 “과격해 보일 정도였다. 어쨌든 로스바드가 이 글에서 제시한 방법론에 따르면, 레닌이 볼셰비키를 이끌면서 보여주었듯이 간부단이 핵심역할을 해야 했다. 이 들은 이 일에만 전념하면서 운동의 보병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주입할 소 수정예의 전위팀이 될 것이었다. 그러면 외부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저변을 넓히면서도 운동의 순수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을 터였다.
- 오늘날 미국을 대대적으로 변모시키는 데 이들의 은밀한 운동이 끼친 영향을 파악하려면, 이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로스바드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과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깨달 았듯이, 우리는 조직과 지속적인 내부자 교육 및 강화 프로그램이 없는 군단은 더 강한 연합세력에 흡수되거나 원칙을 저버리게 될 수밖에 없다. 는 것을 깨달았다.” 흡수되거나 넘어가버릴 우려 없이 현재의 더 강한 세력하고도 단단하고 유익한 연대를 할 수 있으려면 교육과 훈련이 결정 적으로 중요했다. 2008년 이후에 공화당 주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이 모델이 성공했 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전통 있는 주요 정당인 공화당의 주류 지 도자들은 명백하게 코크의 군단보다 더 강한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 지만, 영향력 면에서 결국 당을 접수한 쪽은 그들이 아니라 원칙과 규율로 무장한 코크의 군단이었다.
-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렇다. 뷰캐넌의 접근방식이 가진 사악한 천재성은, '민중의 자기 통치'라는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게 민주주의를 꽁꽁 속박한다는 목적을 대개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 나쳐버렸을 아주 세부적인 규칙들을 가지고 달성했다는 데 있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도록 길게 이어지는 세세한 사항들을 통해 사람들이 인식하
지 못하는 사이에 점진적으로 변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뷰캐넌은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부사항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에 그리 인내심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뷰캐넌의 조언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다 른 사람들을 고용해서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세부사항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새로운 헌법이 담고 있는 세세하고 복잡한 변화가 종합적으로 일으킨 순영향은, 대통령에게 전에 없이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의회를 대폭 약화시키고, 선출직이 아닌 장교들이 선출직인 의원들에게 제동을 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또 교활한 새 선거제도는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응결된 체제를 만들기 위해 우파 소수정당이 영구적으로 의회에서 과다. 대표되도록 고안되어 있었다(이 선거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쓰인 적이 없으며, 분명히 뷰캐넌의 조언에 따라 생겨난 제도일 것이다). 또한 지배층의 통 제를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 새 헌법은 노조 지도자들이 정당에 가입하 는 것을 금지했고 “노조가 구체적인 목적과 상관없는 활동에 개입하는 것”도 금지했다. “구체적인 목적”이란 해당 작업장의 임금과 노동시간만 을 의미한다. 또 새 헌법은 “계급 간 분쟁을 조장하거나 “가족제도를 공 격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금지했다. "반가족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마르크스주의자” 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항소나 기타 이의제기 절차를 밟을 기회 없이 추방당할 수 있었다.
- 최종안이 나오기 전에 피노체트는 손수 개헌안을 검토하고 100군데도 넘는 수정을 가했다. 개헌안은 대중에게 공개된 지 한 달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부쳐지게 되어 있었는데, 투표에서 사람들은 개헌안 전체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로만 답할 수 있었다. 또한 투표는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시행될 것이었다. 모든 정당은 불법화되었고, 부정선거를 막기 위한 선거 인명부도 존재하지 않았으며(피노체트가 불태워버렸다), 외국인 참관인이 개표를 참관하거나 득표 숫자를 확인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일부 온건과 법조인들과 시민 지도자들이 별도의 민주 헌법안을 마련했지만 정권은 그 것의 공개를 막았다. 그리고 투표와 개표를 진행해야 하는 시장들은 피노 체트 덕분에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었다. 선거 규정은 '반대' 표를 조직하려는 선거운동을 금지했다. 전 기독민 주당 대통령 에두아르도 프레이의 연설에 사람들이 오도록 독려하거나 리플렛을 뿌리는 것도 선거법 위반이었는데, 이런 일로 60명가량이 체포 되었다.
- 영구적인 자물쇠와 빗장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뷰캐넌이 칠레의 동료들에게 그들의 통치를 보장하고, 설령 독재자가 권좌에서 내려오더라도 그들의 지배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촉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물쇠와 빗장은 오늘날까지도 효력을 발휘해 시민들에게서 정치적 참여를 통해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갉아먹고 있다. 투표로 피노체트를 몰아낸 지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도 독재 자의 경제 모델이 견고하게 남아 있다는 것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아 예 정치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특히 다른 시스템을 알지 못하는 젊은 이들이 더욱 그렇다. 몇몇 법학자들은 기업권력에 너무나 크게 좌우되고, 근본적인 변화는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다수의 이해관계에 너무나 적대적이었던 시스템에 대한 혐오가 퍼지면서 대의제 정부 자체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한편, 칠레에 자문을 하고 돌아온 뷰캐넌은 미국에서도 그것과 비슷 한 급격한 변화가 이뤄지기를 원하게 되었고 그것의 효과에 대해 확신도 갖게 되었다. 그는 “미국의 고질병인 점진주의와 실용주의"를 버리기 로 했다. 이제는 “사회적·경제적 제도의 전체 구조를 바꾸어야 할 때였다. 문제는, 작동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 과업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였다.
- 자유지상주의적 우파에게 사회보장제도 민영화는 가장 인기 있고 가
장 성공적이던 연방 정부 프로그램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거둔다.
는 것 외에도 매우 영리한 삼중의 승리를 의미했다. 첫째, 사회보장제도 민영화는 정부와 시민들의 유대를 끊고 사람들이 정부가 나의 삶에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는 존재라고 믿는 습관을 없앨 것이었다. 둘째, 공동의 문제에 대해 정부에 해법을 구하는 집단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켜 집합적 인 조직화의 호소력을 떨어뜨릴 것이었다. 셋째, (앞의 두 가지보다 결코 중 요성이 덜하지 않은데) 자본가의 손에 아주 많은 돈이 흘러들어가게 해 그 들이 부유해지게 함으로써, 이들이 더 많은 변화를 위한 로비에, 또 변화 를 이끄는 단체 · 재단 · 싱크탱크 등에 후원을 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 게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우파의 정책 기획 및 옹호 네트워크가 더 강력해진다면 더 힘있는 파트너들과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 고, 자유지상주의 혁명을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미국의 권력관계를 변화
- 가차 없고 영민한 프로파간다 전문가였던 나치의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는 이렇게 말했다. “엄청난 거짓말도 충분히 반복해서 하면 사람들은 곧 그것을 믿게 된다.” 오늘날 코크가 돈을 대는 급진우파가 하 는 엄청난 거짓말은 우리 사회가 생산자와 탈취자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생산자가 자신의 것을 빼앗아가는 탈취자에 대해 선악 이 분법적인 투쟁을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티파티 집회에 가보면 “부랑자 계급”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들을 수 있다.11 부유한 후원자들이 돈을 댄 자유지상주의 저술에서도 이 말의 여러 변종을 볼 수 있다. 일례로, 카토 연구소의 데이비드 보아즈David Boaz는 경제 행위자가 약탈자와 희생자로 나뉘어 있는 “기생경제에 대해 언급했다.12 또한 1인당 5만 달러 이상을 후원한 고액 후원자들 대상의 연회에서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 미트 롬니 가 유권자의 47%”는 “생산적인” 미국인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라고 라고 언급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조세제도를 통해 부유한 사람들을 등쳐 먹으 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이들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으면 서 집단으로 모여서 정부를 압박해 아무런 방어수단이 없는, 그리고 온 전히 자신의 노력으로만 부를 창출한 소수층을 착취한다는 증거가 있는 가? 가장 부유한 계층을 정부가 불공정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 공중보건 면에서 이들 재산권 지상주의 세력이 사람들이 정부로부터 의료 보조나 금연 상담 지원을 받게 하기보다 죽게 내버려두는 편을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 문제 면에서도 이들은 규제가 도입되어 경제적 자유가 침해되게 하기보다 전 지구적인 생태적·사회적 재앙이 오 게 내버려두는 편을 선호한다. 코크 사단은 일찍이 대중이 환경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큰 문제라고 보았다.
- 시민들은 미국인의 76%가 스스로를 환경주의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우려해야 한다고 기업들에 경고했다. 그리고 “더 심각하게도”, 미국인들의 65%가 기업들이 오염을 막기 위한 조치를 스스로 취하 리라고 “믿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유권자의 79%는 현재의 환경 규 제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으로 나타났다”고도 경고했다.27 이 조사 결과에서 코크 사단이 취한 교훈은 자신들의 진짜 목표에 대해 다수 대중의 지지를 얻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지 메이슨 대학의 경제학과장 도널드 J. 부드로Donald J. Boudreaux는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겠 지만, 공공선택이론에 따르면 정부가 문제를 고치려 드는 것은 되레 일을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지구온난화도 “그냥 내버려두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의 흑인 역사학자 존 호프 프랭클린John Hope Franklin 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믿음의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 믿음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종결되었을 때 우리가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제임스 뷰캐넌이 노벨상을 받았을 때 한 비판적인 학자가 현명하게 지적했듯이, 공공선택이론은 단순히 “묘사가 부정확한 것”(이 이론은 정치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끔찍하게 왜곡하고 있다)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 이론은 좋은 정부 정책, 그리고 공적인 삶에서의 윤리적 행동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공직자 의 정신적 규범에 대한 믿음을 은밀히 공격한다는 데서 더 큰 문제가 있다. 즉, 공공선택이론은 학술적인 설명력과 관련해서도 잘못된 이론이지 만, 사람들이나 의원들이 이 이론을 믿게 되면 사회에 매우 큰 악영향을 발휘하게 되리라는 데서도 문제 있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언이 맞았음을 계속해서 목격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은 1860년대, 1930년대, 1960년대에 못지않은 역사의 분 기점에 또다시 서 있다. 지금 어느 경로를 가느냐는 앞으로의 운명에 결 정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부유한 소수의 자유를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이것을 아예 국가의 통치 원칙 자체에 새겨 넣는 것 은, 껍데기만 대의제인 과두제에 동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칼훈과 뷰캐 년이 바로 이것을 촉구했고, 이제 코크의 네트워크가 이것을 한 판씩, 한 판씩 달성해가고 있다. 어느 면에서 이들의 은밀한 계획이 미국인들에게 제기하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20세기 중반의 버지니아 주를 조금 더 치장해놓은 것 같 은 세상에 살고 싶은가? 재산권을 지고의 가치로 상정한 나머지, 민주적 으로 선출된 정부가 시민의 필요에 맞게 그 외의 목적들을 추구하는 것 이 원천적으로 마비되어버리는 세상에 살고 싶은가? “정치세력으로서의 우리가 종말을 고한 세상에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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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이 갖고 있는 첫 번째 중요한 특징은 낙천주의다.
그 누구도 당신의 목표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리 높은 목표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퍼져간다. 접근 방식이 보다 헌신적으로 변하고,
동기부여도 더 잘되게 되며, 회복력 또한 강해진다.
- 밥 로텔라, 스포츠 심리학자

 

낙천주의는 놀랍도록 강력한 성과 예측 변수로 밝혀졌습니다.
각종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낙천주의자들은 비관주의자들에 비해 더 많은,
그리고 더 어려운 목표들을 세우며,
그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그 목표들에 더 집중하며,
각종 장애물도 쉽게 극복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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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가 현장에 전화를 걸어
매출이 얼마나 되는지 등의 데이터를 달라고 하는지,
아니면 현장에서 ‘도와달라, 지원해달라’는 전화가
상사한테 오는지를 살펴보라.
만약 전자면 그 사람의 자리는 위험하다.
그 상사는 부하직원을 통제하려는 사람이다.
두 번째 사람이라면 안심해도 좋다.
관리직의 유일한 목적은 현장을 지원하고
게임에서 이길 수 있도록 제반 도움을 주는 것이다.
- 잭 웰치 회장, KBS 대담 프로에서

 

높은 성과를 보이는 기업은 통제 대신 지원 분위기가 지배하는 조직입니다.
이런 조직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상관이 그들의 승리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조직의 가치와 목적 달성에 헌신과 몰입으로 응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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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게임에선 늘 지게 돼 있다.
비교는 자기 회의감을 확대시키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이 없다.
비교는 절대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 삶에 가치를 더해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우리에게서 행복과 충만감을 앗아간다.
우리가 스스로를 비교해야 하는 건 단 하나,
과거의 나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뿐이다.
그럴 때 비로소 당신은 성공할 수 있다.
- 엘렌 스테인 주니어, ‘승리하는 습관’에서

 

타인과 비교하지도 말고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삶에서든 사업에서든 우리는 다른 누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자신과 경쟁하는 것입니다.
남과 경쟁하는 대신 어제의 나와 경쟁하고, 나의 잠재력과 나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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