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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6.21 좋은 전략 나쁜 전략
  2. 2020.06.21 인간의 흑역사

좋은 전략 나쁜 전략

경영 2020. 6. 21. 14:05

- 전략을 야심, 리더십, 비전, 기획, 경제적 경쟁 논리와 동일시하는 관점들이 있다. 그러나 전략은 이러한 것들과 다르다. 전략적 작업의 핵심은 주어진 상황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찾아내고 거기에 대응하는 행동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파악하 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일관된 접근법을 세우는 것이다. 전략은 기업 경영에서 국가 안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중요한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전략을 단순한 구호의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너무 많다
- 좋은 전략은 일련의 일관된 행동을 포함한다. 구체적인 행동 계획은 전략의 세부사항이 아니라 핵심이다. 즉각적으로 취할 수 있는 타당한 행동들을 정의하지 않는 전략은 중요한 요소를 빠트린 것이다
- 좋은 전략은 내가 '중핵kernel'이라고 부르는 논리적 구조를 가져 야 한다. 전략의 중핵은 진단, 추진 방침, 일관된 행동이라는 세 가 지 요소를 지닌다. 추진 방침은 진단을 통해 밝혀진 문제를 극복 하기 위한 접근법을 제시한다. 추진 방침은 교통 표지판처럼 나아 갈 방향을 가리키지만 세부적인 여정을 말해주지 않는다. 이 일은 타당한 방법론과 자원 할당을 결정하는 일관된 행동이 맡는다.좋은 전략의 구조와 요점을 알면 나쁜 전략을 가려낼 수 있다. 감독이 아니어도 나쁜 영화를 가려낼 수 있듯이 경제나 금융 혹 은 다른 분야에 대한 난해한 지식이 없어도 나쁜 전략을 가려낼 수 있다. 가령 2008년에 발생한 금융위기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 응 전략을 보면 핵심적인 요소가 빠졌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잠복한 질병에 대한 공식적인 진단이 없었다. 그래서 치료에 필요한 행동의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단지 금융계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자원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판단은 거시경제학 박사가 아니어도 좋은 전략의 속성을 이해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나쁜 전략은 단지 좋은 전략의 부재가 아니다. 나쁜 전략은 고유한 논리에 따라 잘못된 토대 위에 세워진다. 부정적인 생각이들까 봐 문제에 대한 분석을 의도적으로 피할 때 나쁜 전략이 나온다. 전략을 문제 해결이 아닌 목표 설정으로 오해할 때도 나쁜전략이 나온다. 또한 자원과 행동을 집중하지 않고 모든 면을 두루 만족시키려고 어려운 선택을 피할 때도 나쁜 전략이 나온다. 나쁜 전략이 확산되면 모든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 정부는 목표와 구호만 내세우고, 기업계는 희망사항에 불과한 계획을 수립하며, 교육계는 기준만 높이 잡을 뿐 효율을 개선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리더들에게 카리스마와 비전이 아닌 좋은 전략을 요구하는 것이다.
- 좋은 전략이 주는 첫 번째 이점은 다른 조직들이 갖지 않았고, 예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좋은 전략은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 방침, 자원을 조율하는 일관성을 지닌다. 많은 조직은 이러한 일관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들은 더 많이 투자하고, 더 열심히 노력한다'는 피상적인 방법론에 의존하여 복수의 목표를 추구한다.
- 잡스는 애플이 망하면 마이크로소프트가 독과점 문제에 시달릴 것이라는 빌 게이츠의 우려를 잘 알았다. 그래서 애플에 1억 5 천만 달러를 투자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모든 데스크톱 모델과 휴대용 모델을 각각 하나로 줄이고, 프린터와 부속기기 라인업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러한 제품 라인업 정리와 함께 개발 인력 및 유통망에 대한 정리도 이루어졌다. 모든 생산은 외주로 전환되었다. 단순화된 제품 라인업을 외주로 생산한 결과 재고를 80퍼센트 이상 줄일 수 있었다. 새로 만든 인터넷 매장은 유통망을 거치지 않고 제품을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했다.
- 잡스의 애플 살리기 전략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예상을 뛰어 넘는 성격을 지녔다. 자금 사정이 악화되면 조직을 축소하고 핵심 역량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했다. 잡스는 애플 컴퓨터에서 최신 마 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돌아가게 만들었고, 아시아 지역으로의 외주를 통해 효율적으로 공급사슬을 운용하는 델의 모델을 차용 했으며, 새로운 운영체제의 개발을 중단하고 넥스트NeXT가 개발한 업계 최고의 운영체제를 가져다 썼다. 이러한 전략의 힘은 일련의 일관된 행동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에 직접 대응한 데서 나왔다. 잡스는 야심 찬 수익 목표도,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시도 제시하지 않았음으며, 맹목적인 구조조정에 몰두하지도 않았음. 그는 단순화된 제품 라인업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사업논리를 재구성했다.
- 회생 전략은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기는 했지만 애플을 미래로 전진시킬 수는 없었다. 당시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4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사실상 개인용 컴퓨터의 표준은 윈도우-인텔 체제로 굳어지고 있었다. 애플로서는 틈새시 장에 매달리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1998년 여름에 나는 다시 잡스와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나는 “스티브, 애플의 회생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PC 산업의 현실을 보면 애플이 틈새시장을 벗어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윈도우 인텔 표준을 바꾸기에는 네트워크 효과가 너무 강력해요. 이 문제에 대한 장기적인 대응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나의 주장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았 다. 그는 그저 웃음을 지으며 “다음에 올 대박을 기다릴 겁니다”라고 말했다. 잡스는 단순한 성장률이나 시장점유율 목표를 제시하지 않았고, 다각도로 노력하면 언젠가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성공의 원천인 새로운 기회의 문을 파악하고, 능숙한 포식자처럼 신속하고 영리하게 덤벼들 준비를 하는 데 집중했다. 새로운 기회의 문은 해마다 열 리는 것도 아니었고, 경영 수완을 통해 억지로 열 수 있는 것도 아 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과거 그는 애플 II와 매킨토시 그리고 픽사를 통해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넥스트를 통해 억지로 열려고 했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실제로 애플이 아이팟과 아이폰으로 재도약하기까지 2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다음에 올 대박을 기다린다는 잡스의 대답은 일반적인 성공의 공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양한 신기술의 출현을 앞둔 당시 애플과 업계의 상황을 감안하면 현명한 접근법이었다.
- 포위 작전의 핵심은 적에게 전면 공격에 대한 착각을 심어주는 동시에 대규모 우회 기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전 내용은 25달러만 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야전 교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현재 버전은 FM 3-0이다) 그렇다면 왜 이라크군과 미국의 전문가들 그리고 의회는 연합 군이 대표적인 공격 작전을 추진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을까? 이 수수께끼에 대한 최선의 해답은 단순하고 집중적인 전략을 실제로 실행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외성이 나왔다는 것이다. 대 부분의 복잡한 조직은 내외부의 이해관계를 두루 만족시키기 위 해 자원을 집중하기보다 분산하는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애플이나 미 육군 같은 조직이 실제로 행동을 집중하면 놀랍게 느껴진다. 좋은 전략은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이 아니라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다. 사막 폭풍 작전에서 초점을 맞추는 일은 대단히 어려웠다. 슈와츠코프 장군은 공군, 해병대, 육군, 연합군, 정치인들의 야심과 욕 망을 억눌러야 했다. 미 육군의 정예병력인 82 공수부대는 부대 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야 했다. 또한 8천 명의 해병대는 쿠웨이트 시 인근 해안에서 적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상륙 대기만 해야 했다. 그리고 공군 사령부는 전략 폭격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했지만 지상군을 지원하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게다가 딕 체니 국방부 장관은 보다 적은 병력을 투입하는 구체적인 대안 공격 계획까지 수립하기도 했다. 심 지어 사우디군을 지휘하는 칼리드Khalid 왕자는 파흐드Fahd 왕이 작 전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슈와츠코프 장군은 미 중 부군이 통제권을 보장받도록 부시 대통령을 설득했다. 서로 부딪치는 목표를 추구하고, 연관성이 없는 사업에 자원을 분할하며, 양립할 수 없는 이해관계를 수용하는 일은 결국 나쁜 전략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조직은 집중화 된 전략을 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자원을 통합하고 집중하는 진정 한 역량에 대한 필요성을 무시하고 잡다한 목표를 늘어놓는다. 좋 은 전략을 세우려면 사소한 이해관계에 따른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 전략 수립에 있어서 조직이 하는 일만큼 하지 않는 일도 중요하다.
- 핵심은 매장이 아니라 150개 매장으로 구 성된 네트워크였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물류와 관리가 총체적으 로 이루어졌다. 월마트는 통념 속의 매장을 네트워크로 대체했다. 150개 매장으로 구성된 지역 네트워크는 100만 명이라는 인구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월튼은 통념을 깨트린 것이 아니 라 매장의 개념을 네트워크로 확대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월마트의 정책들이 맞물리는 방식에 대한 시각도 바뀌었다. 이제는 지역적 결정 사이의 상호의존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매장의 입지는 단순한 수요뿐만 아니라 네트 워크의 경제학을 반영했다. 또한 월마트 내에 존재하는 힘의 균형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개별 매장은 협상력을 거의 지니지 않았다. 개별 매장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제한되어 있었다. 월마트의 기본적인 경영 단위는 매장이 아니라 네트워크였다. 월튼은 통합적 네트워크를 기본적인 운영단위로 만들기 위해 분산화를 지향하는 보다 깊은 통념까지 깨트렸다. 오랫동안 분산화 원칙을 고수해온 케이마트는 각 지점장에게 제품 라인과 공급 업체 그리고 가격까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분산화는 대개 좋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분산화는 구성단위의 분열 이라는 비용을 초래했다. 별도로 공급업체와 협상하고, 학습 결과를 공유하지 않는 매장들은 통합적 네트워크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 모든 경쟁자가 분산화된 시스템을 운영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월튼의 통찰력이 분산화된 구조를 약점으로 만들어 버리자 케이마트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다. 새로운 기술이 라면 다소 주춤거리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경영 철학을 바꾸는 일은 파산 위기에 몰리지 않는 한 일어나기 어려웠다. 월마트 전략의 숨겨진 힘은 관점의 전환에서 나왔다. 이러한 관점을 얻지 못한 케이마트는 다윗을 깔보는 골리앗처럼 월마트를 작고 미숙한 상대로만 보았다. 그러나 월마트가 확보한 경쟁우위는 규모나 역사가 아니라 할인 유통업에 대한 관점의 전환에서 나온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할인 유통업은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와 연계되었다. 그러나 월튼은 네트워크를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현재 공급사슬 관리로 널리 알려진 이 방법은 1984년에는 예상을 뛰어넘는 전략으로서 다윗의 돌팔매와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 나쁜 전략은 단지 좋은 전략의 부재가 아니다. 나쁜 전략은 상 황에 대한 오판과 리더십의 실패에서 나온다. 좋은 전략을 세우려 면 나쁜 전략을 인식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다음은 나쁜 전략의 네 가지 속성이다.
? 미사여구 :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전략일수록 쓸데없이 어렵고 추상적인 용어들을 늘어놓아서 고차원적인 사고의 결과물인 듯한 착각을 심어주려고 한다.
? 문제 회피: 나쁜 전략은 문제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문제를 정의하지 않으면 전략을 평가하거나 개선할 수 없다.
? 목표와 전략의 혼동: 나쁜 전략은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없이 희망사항만 제시한다.
? 잘못된 전략적 목표 : 나쁜 전략은 중요한 사안을 간과하거나 비현실적 목표를 추구한다.
- 나쁜 전략은 목표를 내세우고 행동을 무시한다. 나쁜 전략을 수립하는 사람들은 목표만 제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관성과 현실성이 부족한 전략적 목표를 나열한다. 그리고 이러 한 문제를 감추려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 1914년에 전쟁이 터지자 많은 젊은이들이 기꺼이 군에 입대했다. 그들은 의지와 용기만 있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 다. 그러나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적의 방어진지를 향해 무모하게 달려들던 젊은 병사들은 아무 의미없이 목숨을 잃었다. 때로 1마 일의 땅을 빼앗기 위해 수만 명이 죽어갔다. 1917년에 영국군의 더글라스 헤이그Douglas Haig 장군은 플랑드 르 지방의 파스샹달이라는 마을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독일군 의 방어선을 뚫고 바다로 이어지는 진로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참모들은 포격으로 제방이 무너지면 해수면 아래에 위치한 지역이 침수될 것이라고 만류했다. 그래도 그는 독일군의 방어진지를 향해 포격을 감행했다. 결국 제방이 무너지면서 전장은 온통 허리까지 빠지는 진흙탕으로 변했다. 탱크와 말 그리고 부상자들 은 속절없이 진흙탕에 파묻히고 말았다. 1년 전에 솜 전투에서 10만 명의 병사를 잃은 헤이그 장군은 작전에 차질이 생길 경우 진격을 멈추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쉽 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엄청난 인명 손실에도 불구하고 3개월 동안 공격을 밀어붙였다. 최후의 10일 동안 방어진지를 한해 정면으로 돌격한 캐나다군은 작은 언덕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무려 1만 6천 명을 잃었다. 3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5마일을 진 격하기 위해 7만 명이 전사하고, 25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처칠은 파스샹달 전투에 대해 “너무나 헛되이 생명과 용기를 낭비했다.”라고 탄식했다. 헤이그는 솜과 파스샹달에서 영국의 한 세대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베르됭verdun 전투에서 독일의 에리 히 폰 팔켄하인 Erich von Falkenhayn 장군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 이러한 경험 때문에 유럽의 경영학 강의에서는 동기 부여를 중 시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에서는 여전히 리더십의 원칙 중 하나로 동기 부여가 강조되고 있다. 가령 로스 페로 Ross Perot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 직전에 포기해 버린다. 마지막 1야드만 밀어붙이면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데 도중에 멈추고 만다.”라고 말했다. 많 은 미국인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만 유럽인들은 파스샹달 전투를 떠올린다. 파스샹달 전투에서 결여된 것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 지가 아니라 유능한 전략적 리더십이었다. 물론 의지는 성공의 핵심적인 요소이며, 리더는 마지막 안간힘 을 쓰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리더의 역할은 동기 부여에 국한되지 않는다. 리더는 추진할 가치가 있는 전략을 수립하고, 효율적으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 좋은 전략은 연쇄적 효과를 안겨줄 핵심 목표에 자원과 노력을 집중한다. 반면 나쁜 전략은 잡다한 목표에 자원과 노력을 분산시킨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전략으로 잘못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목록은 광범위한 이해관계자들이 저마다 바라는 사항을 제기할 때 만들어진다. 소수의 중요한 목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모든 희망사항을 포함한 목록은 전략이 될 수 없다. 거기에 '장기’라는 명칭까지 부여하면 그 어느 것도 당장 이룰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목록이 된다.
- 나쁜 전략적 목표의 두 번째 유형은 비현실적인 목표다. 좋은 전략은 핵심적인 문제를 정의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제시한다. 좋은 전략에 따른 목표는 주어진 자원과 역량을 활용하 여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비현실적인 목표는 구체적인 방 법론 없이 희망사항만을 밝힐 뿐이다. 핵심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전반적인 접 근법을 제시했더라도 수반되는 전략적 목표가 비현실적이면 달 성하기가 어렵다. 좋은 전략은 잠재적으로 가능한 방법론을 고려 한다.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 만큼 어렵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 누구나 전략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왜 나쁜 전략이 만연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경쟁, 자원, 과 거의 교훈, 변화와 혁신으로 인한 기회와 위기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나쁜 전략이 계산 착오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랜 기간에 걸친 강의와 컨 설팅을 통해 기술적 훈련이 나쁜 전략을 만드는 경향을 거의 줄이 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까다로운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응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헛된 희망이 분석, 논리, 선택을 간과하는 나 쁜 전략을 초래한다. 나쁜 전략은 대개 계산 착오가 아니라 좋은 전략을 수립하는 어려운 작업을 회피하는 데서 나온다. 이러한 회 피의 주된 이유는 선택에 수반되는 고통이다. 리더가 상충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거나 내리지 않으려고 할 때 나 쁜 전략이 나온다. 나쁜 전략으로 이어지는 두 번째 길은 틀에 박힌 형식적 전략이 다. 이러한 전략은 비전, 사명, 가치, 전략이라는 정해진 틀에 빈칸 을 채우는 식으로 수립된다. 이 방식은 분석과 조정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만능 양식으로 대체한다. 세 번째 길은 긍정적인 마음가짐만 있으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 다는 일종의 영적 믿음이다.
- 전략은 자원과 주의 그리고 에너지를 특정한 목표에 집중시킨다. 전략 변화는 반드시 기존 전략과 관계된 사람들의 손해를 초래한다. 그래서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특히 대규모 조직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저런 시도에 대한 논의는 이루 어지지만 결국 누구도 현재 하는 일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조직 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지 못할 때 모두가 동의하는 두루뭉술한 목표가 나온다. 이러한 목표는 어려운 선택을 이끌어내지 못하는리더십의 무능을 드러낸다. 두루뭉술한 목표는 대개 선택의 부재를 의미한다.
- 피터 센게는 '공동의 비전'을 대단히 중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동 의 비전 없이 AT&T, 포드, 애플을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점은 개인의 비전을 조직 전체가 공유하여 집단적 자 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말은 언뜻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명백한 오류를 안고 있다. AT&T, 포드, 애플의 성공을 뛰어난 역량의 통합이 아니라 공동의 비전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애플은 개인 용 컴퓨터라는 개념을 발명하지 않았다. 애플 외에도 많은 기업들 이 '만인을 위한 컴퓨터'를 설계하려고 노력했다. 애플이 성공을 거둔 데에는 CPU를 통해 입출력부를 직접 제어하는 방법을 고안 한 스티브 워즈니악의 공이 컸다. 또한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인 비지캘크visiCalc가 인기를 끌면서 애플 II가 일반인들에게도 팔리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만인을 위한 차'라는 포드의 비전도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당 5달러를 받는 조립라인의 조립공들은 이 비전을 공유하지 않았다. 디트로이트는 1900년대 초에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자동차를 만드는 방법을 궁리하던 일종의 실리콘 밸리였다. 포드는 소재, 산업공학, 홍보 측면에서 강점을 지녔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음.
- 신사고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내 라고 말하듯이, 공동의 비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전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마크 립턴 Mark Lipton은 『Guiding Growtb』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성장에 대한 비전을 만드는 사람들은 불신을 보류해야 한다. 경영진은 오랜 기간에 걸친 훈련과 경험을 통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전을 뒷받침하려면 가능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는 비실용적이기는 하지만 리더십에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리더는 꿈을 믿을 뿐만 아니라 꿈을 이룰 자신의 능력도 믿어야 한다.
센게는 최근작인 『미래, 살아있는 시스템』에서 롱아일랜드 대학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는 스리쿠마 라오Srkumar Rao의 말을 인용했다.
의도를 오래 유지하면 현실이 됩니다. 의도를 오래 살피면 원하는 것을 대단히 명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 정화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 의도를 전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의도를 전파하고 나면 당신이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전파된 의도는 저절로 변화를 일으킵니다. 당신의 역할은 깨어있는 의식과 인내심 을 가지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 신사고 운동의 놀라운 점은 언제나 새로운 사상인 양 소개된다. 는 것이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미 수차례 반복된 이야기를 새롭 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의식적인 암송은 강한 열망을 품으면 마술처럼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명상이나 내적 성찰이 영혼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생각이 물리적 세계를 바꾸며, 성공만 을 생각하면 실제로 성공한다는 주장은 전략적 토대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분석은 부정적인 결과를 포함한 현실적인 가 능성에 대한 고려로 시작된다. 나는 사고의 가능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긍정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설계한 비행기를 절대 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의 힘을 통해 비전을 세상에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이러한 믿음은 좋은 전략을 세우는 데 필요한 현실적인 분석을 가로막는다.
- 좋은 전략은 중핵이라는 내재적 구조를 지닌다. 중핵이 빠지거 나 잘못 형성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중핵을 제대로 이해하면 전략을 만들고 설명하며 평가하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 중핵은 경 쟁우위라는 한 가지 개념에 국한되지 않고, 비전, 사명, 목표, 전략 의 차이에 대한 형식적인 설명도 요구하지 않으며, 전략을 기업, 사업부문, 제품 수준으로 구분하지도 않는다. 중핵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지닌다.
1. 진단: 진단은 문제의 속성을 정의한다. 뛰어난 진단은 결정적인 측면을 파악하여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시킨다.
2. 추진 방침 : 추진 방침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행동의 지침이다.
3. 일관된 행동: 일관된 행동은 추진 방침에 따라 기획된 일련의 행동이다. 각단계의 행동은 서로 맞물리면서 추진 방침을 따른다.
- 기업의 경우에도 진단의 변화는 전략의 변화로 이어졌다. 가령 1993년에 루 거스트너가 CEO에 올랐을 때 IBM은 심각한 침체 상태에 빠져있었다. IBM은 기업과 정부기관에 통합 솔루션을 제 공하는 전략을 기반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의 발전 때문에 상황이 바뀌었다. 컴퓨터 산업은 칩, 메모리, 하드 디스크, 키보드, 소프트웨어, 모니터, 운용체제 등의 분야로 분화되었다. 데스크탑 컴퓨터가 보편화되고 윈도우 인텔 시스템 이 표준으로 자리잡 는 상황에서 IBM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당시 IBM 내부와 월가 애널리스트들의 지배적인 시각은 산업 지형의 변화에 맞추어 사업 부문을 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 거스트너가 부임할 무렵에 이미 분사를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거스트너는 상황을 분석한 후 다른 진단을 내렸다. IBM이 모든 분야에 전문성을 갖추었다는 점은 오히려 경쟁력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경쟁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거스트너는 하드웨어 플랫폼이 아니라 고객 솔루션에 초점을 맞추어 통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심적인 장애물은 내부 조율과 유연성의 부족이었다. 새로운 진단에 따른 추진 방침은 IBM 의 고유한 역량을 활용하여 고객에게 맞춤식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초점을 고객 솔루션에 두었기 때문에 하드웨어와 소프 트웨어는 필요에 따라 다른 회사의 제품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IBM의 핵심적인 부가가치활동은 시스템 엔지니어링 에서 IT 컨설팅으로,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전환되었다. - “통합 서비스는 낡은 것이다.”나 “IT의 모든 면을 아는 것은 고 유한 역량이다”라는 진단은 그 자체로 전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상반된 진단은 회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 소수의 목표에 대한 집중적인 노력은 다수의 목표에 대한 분산 된 노력보다 더 큰 성과를 안겨준다. 집중에 따른 추가적인 성과는 현실적 제약과 문턱 효과에서 나온다. 자원이 무제한이라면 목표의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리더의 주의력이 무제한 이라면 우선적인 목표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문턱 효과는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데 필요한 노력의 임계점에서 발생한다. 이 임 계점보다 낮은 수준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안겨주지 않는다. 따라서 소수의 목표를 한정하여 자원 투입의 효과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 가령 광고도 문턱 효과의 영향을 받는다. 즉, 노출 횟수가 적은 광고는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소비자의 반응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노출 횟수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이 점을 감안하 면 장기간에 걸쳐 일정한 간격으로 광고를 내보내기보다 단기간 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또한 신제품을 지역별로 차례로 출시하여 광고를 집중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기업들은 세분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선호하고, 정치인들은 한정 된 계층에 확실한 효과를 전달하는 정책을 선호한다. 이처럼 경영 진이 가진 주의력의 한계와 성과에 영향을 끼치는 문턱 효과 때문에 집중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 "현재 소련이 대형 로켓 부문에서 우리보다 크게 앞섰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먼저 달 궤도에 유인 우주선을 띄우거나 무인 우주선을 착륙시킬 수도 있습니 다. 우리가 먼저 달 궤도에 유인 우주선을 띄울 확률은 반반입니다. 그러나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경쟁은 훨씬 승산이 높습니다. 이 일을 실현하려면 현재보다 로켓의 성능을 10배로 높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운 박사의 지적에 따르면 소련이 우주 탐사 경쟁에서 확보한 우위는 단기적인 것이었다. 달 착륙을 위해서는 훨씬 큰 로켓 이 필요하기 때문에 향후 경쟁에서는 자원이 많은 미국이 유리했다. 그래서 브라운 박사는 선제적으로 야심에 찬 목표를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소련을 이길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었음. 백악관이 이 서신을 접수한 지 한 달 후에 케네디의 연설이 발 표되었다. 일반인이 보기에 대단히 과감했던 달 착륙 목표는 사실 충분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단지 자원과 정치적 의지를 집중 하는 일이 필요할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케네디 이후로 실현 방법을 모르는 목표를 내걸고 타당성을 지닌 것처럼 꾸미는 경향이 강해졌다. 마약과 전쟁이 그 러한 예다. 마약 근절에 대한 의지의 강도에 상관없이 이 목표는 근접 목표가 되지 못한다. 현재의 법 집행 구도에서 실현 가능성 이 낮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이루어진 단속은 오히려 거리에서 거래되는 가격을 올려서 마약 조직의 이익만 늘려주었다.
- 사다리를 타고 더 높은 단에 오르려면 낮은 단을 먼저 지나야 한다. 이 사실은 미숙한 조 직들이 특정한 사안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나는 이 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객들에게 조언을 제공한다. 가령 작은 신 생기업과 일할 때는 엔지니어링, 마케팅, 유통 사이의 조율에 중 점을 둔다. 신생기업에게 해외 영업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직 기초적인 조종술'에 숙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기초적인 조종술을 익혀야 해외로 눈을 돌릴 수 있 다. 또한 해외에 갓 진출한 기업에게 P&G 같은 베테랑 기업처럼 세계적인 차원에서 지식과 기술을 통합적으로 활용하라고 주문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 속에서 조직을 운영하는 복잡한 기술을 익히는 일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 진정한 성장은 덩치를 키운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성장을 이루려면 효율적인 혁신을 통해 고유한 역량과 뛰어난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성장은 업계 전반의 수요 증가에 편승하는 것과 달리 시장점유율과 이익률을 늘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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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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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흑역사

역사 2020. 6. 21. 14:04

- 인류가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무리 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해도, 파국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역사 속에서 예를 찾아보자. 9세 기 북유럽의 장수였던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적장 뻐드렁니 마엘 브릭테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마엘 브릭테의 뻐드렁니가 말 타고 달리던 시구르드의 다 리를 계속 긁었고, 그 상처의 감염으로 시구르드는 며칠 만에 죽고 만다.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자기가 이미 죽인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불 명예스런 주인공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두 가진다. 첫째 자만은 금물이다. 둘째, 적의 치아 위생에 유의하자. 이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자만과 그로 인한 파멸이니, 옛사람들의 구강 위생에 더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간다면, 두 사람이 맞붙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시구르드가 마엘 브릭테에게 각자 병사 40명씩 데리고 싸우자고 도전했기 때 문이다. 도전을 수락한 마엘 브릭테 앞에, 시구르드는 병사 80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러니 이 이야기의 또 한 가지 교훈은 철저하게 나쁜 놈은 되지 말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이 또한 이 책에서 반복되는 주제이 기도 하다.
- 우리 머리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내지만, 가게에서 포테이토칩 하나를 살 때도 무슨 종류를 살지 족히 5분은 고민해야 기우 결정할 수 있다.
- 진화라는 과정은 영리함과 거리가 멀다. 멍청 할 뿐 아니라 아주 고집스럽게 멍청하다. 진화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래저래 죽을 수 있는 수천 가지 시나리오를 피하고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잘 넘어갈 때까지만 죽지 않고 사는 것, 그것 뿐이다. 그렇게만 되면 성공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다시 말해 진화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 당장' 이익이 되는 특성 은 무조건 선택된다. 그 결과 훗날 9대손쯤에서 너무 구닥다리 특성으로 고생하지 않을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미래를 내다보고 반영한다든지 하는 것도 물론 전혀 없다. 이를테면 “아, 이 특성은 지금은 좀 거추장스러워도 100만 년 후에는 후손들한테 진짜 유용 하겠군. 좋아, 선택하자”, 그런 경우는 없다. 진화의 원리는 앞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먹을 것과 짝짓기에 굶주린 개체들을 인 정사정없는 세상에 무진장 많이 풀어놓고 누가 제일 덜 망하나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뇌는 최고의 사고 기계를 목표로 세심하게 설계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저 요령과 땜질과 편법을 덕지덕지 모아놓은 것 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은 예컨대 우리의 먼 조상이 먹을 것을 찾는 데 2퍼센트 더 유리했거나, 아니면 '앗, 조심해, 사자야!'라는 개념 을 전달하는 데 3퍼센트 더 유리했기에 선택된 요령들이다.
- 기준점 휴리스틱이란 뭔가를 결정할 때, 특히 사전 정보가 부족할 수록 제일 처음 얻은 정보에 따라 결정이 크게 좌우되는 것을 가리킨다.
- 한편 가용성 휴리스틱은, 우리가 모든 정보를 신중히 따지기보다. 는 무엇이든 제일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든지 더 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사실을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엄청난 편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할 만한 평범하고 시시한 정보는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끔찍한 범죄를 보도하는 자극적인 뉴스를 보고 나면 범죄율이 실제보다 높다고 생각하게 되는 반면, 범죄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무미건조한 뉴스는 봐도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다. 이는 (더 찾고 상대적으로 덜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보다 (드물고 더 충격적인) 비행기사고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대중도 정치인도 테러라고 하면 즉각적, 반사적으로 반응하지만, 훨씬 더 치 명적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위험 요소는 뒷전으로 취급하는 이유다. 2007년에서 2017년까지 10년 동안 미국에서는 테러보다 잔디 깎는 기계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지만, 아직까지 미국 정부가 '잔디 깎는 기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 기준점 휴리스틱과 가용성 휴리스틱을 함께 쓰면 위급한 순간에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든가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결정을 내리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복잡한 특성을 다 고려해 좀 현명한 결정을 내릴라치면 이 두 휴리스틱이 골칫거리가 된다. 우리 뇌는 가장 먼저 들은 것이나 가장 빨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에 자꾸 이끌리면서 늘 안전지대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하는 유명한 인지 편향 현상이 있는데, 이 책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이는 심리학자 데이비 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가 무능에 대한 무지Unskilled and Unaware of It」라는 논문에서 제안한 효과로, 우리가 살면서 익히 알던 현상을 입증한 것이다. 즉,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 가하는 경향이 있고, 잘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엄청나게 과 대평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점을 말 그대로 잘 모르니, 그 결점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마냥 낙관하고 과신하다가 사고를 치고 일을 그르치기를 끝없이 반복한다(이 책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우리 뇌가 저지르는 온갖 실수 중에서도 ‘과신’과 ‘낙관'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 우리는 군중에 편승하려는 욕구 때문에 각종 유행과 열풍과 광풍에 까딱하면 휩쓸린다. 한 사회 전체가 이성을 내동댕이치고 광란의 집착에 일시적으로 휘몰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순수하게 신체적인 형태로는 중세에 약 700년에 걸쳐 주기적으로 유럽을 덮쳤던 불가해한 춤바람, '무도 광'을 예로 들 수 있다. 갑자기 춤을 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수십 만 명에게 전염병처럼 확산된 현상으로, 춤추다가 탈진해 죽는 사람 들까지 있었다. 돈과 관련된 형태도 많았다. 군중 편승 욕구와 일확천금 기회라면 믿고 보는 습성이 돈 욕심과 결합해 벌어진 일들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 실제 가치보다 평가 가치가 훨씬 높아지는 금융 거품 이다. 본래 가치가 높지 않은 대상이라 해도 남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돈을 벌 수 있으니 너도나도 투자한다. 물론 거품은 꺼 지기 마련이고, 많은 사람이 큰돈을 잃고 경제 전체가 몰락해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집단적 공황이라는 형태도 있다. 그 시발점은 주로 우리의 공포를 조장하는 헛소문이다. 전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건 역사적으로 마녀사냥 비슷한 광풍이 꼭 벌어졌다(유럽에서는 16세기에 서 18세기까지 벌어진 마녀사냥에 약 5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인간은 발길 닿는 곳마다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존재다
- 농경이 지속된 것은 농경으로 모든 이들의 삶이 더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농경사회가 이전 사회 보다 생존 경쟁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농경사회는 자손 번식 속도가 빠른 데다가(농경은 더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고, 한곳에 머물러 살면 아이가 걸음마를 하기 전에 다음 아이를 또 낳을 수 있다), 집단적으 로 점점 더 넓은 땅을 차지하면서 농사짓지 않는 이들을 다 밀어내 게 된다. '농경은 끔찍한 실수였다' 설의 지지자인 저술가 재러드 다 이아몬드가 1987년 「디스커버」에 쓴 표현을 빌면, 인구 제한이냐 식량 증산이냐, 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후자를 선택했고, 그 결과 기아, 전쟁, 폭정을 떠안았다. 한마디로 우리는 질보다 양을 선 택한 것이다. 역시 인간답다. 세상이 이 꼴이 된 게 '다 농경 때문이다!'라고 막연히 사방에 손 가락질을 하고 싶지만, 농경의 시작은 그 밖에도 더 직접적이고 스 펙터클한 각종 참사를 빚어냈다. 농경에 착수하면서 인간은 주변 환 경을 마음대로 바꾸기 시작했으니, 농사라는 게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 식물을 가져다가 본래 있을 곳이 아닌 어디 다른 곳에 꽂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주변 풍광을 변화시키게 된다. 필요 없는 것은 없 애고, 그 자리에 필요한 것을 더 채워넣으려고 궁리하게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인간이란 그런 일이 낳을 여파를 잘 따져볼 줄 모른다는 게 확실하다.
- 라파누이인들은 운이 나빴던 데다가 바보짓을 벌여 자멸하고 만 것. 일단 운이 나빴던 것이 라파누이섬은 지리적, 생태적으로 삼림 파괴에 유달리 취약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앞서 등장했던 '농업은 인류 최악의 실수' 설의 주창자)가 라파누이 문명을 집중 조명한 저서 『문명의 붕괴 Collapse』에서 설명하듯, 이스터섬은 폴리네시아 지역 의 다른 섬들에 비해 후미진 곳에 위치한 데다가 좁고 평탄한 지형 에 춥고 건조한 기후였다. 한마디로 나무를 베면 자연적으로 보충되 기 힘든 조건이었던 것이다.
- 그리고 바보짓을 했던 것이, 라파누이인들은 더 좋은 집을 짓고 더 좋은 카누를 만들고 석상을 운반하는 설비를 더 좋게 개선하려고 열을 올린 나머지 나무를 계속 베어내기만 하고 나무가 다시 자라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나무가 한 그루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공유지의 비극' 이었다. 나무 한 그루를 벤 한 사람은 잘못이 없었을지라도, 결국 모든 사람의 잘 못으로 상황은 회복 불능이 되어버렸다. 숲이 사라지자 라파누이 사회는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나무가 없 으니 고기잡이할 카누도 만들 수 없었고, 토양이 비바람에 깎여나가 황폐해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 마을이 파묻혔으며, 추운 겨울을 나 려니 그나마 남은 초목마저 긁어모아 불을 때야 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날로 희소해지는 자원을 놓고 집단 간에 경쟁이 거세졌다. 이는 비극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수순으로 이어진 듯하다. 절박한 인간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거나 사기충천이 필요하거나 자신이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위안이 필요할 때, 왕왕 그 러는 습성이 있으니까. 즉,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오히려 더 강 하게 밀어붙였다. 라파누이인들은 점점 더 큰 석상을 만드는 데 사 활을 건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느냐고? 그러게 말이다. 인간이란 해 결이 난망해 보이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원래 잘 그런다. 섬에서 최 후로 제작된 석상은 아예 채석장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다른 석 상들도 놓일 자리까지 가다 말고 길가에 나뒹굴었다. 일이 갑자기 엎어진 것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절대 필자나 독자보다 덜 똑똑한 사람들이 아 니었다. 미개하지도 않았고 환경에 무지하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와, 환경이 파탄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문제를 외면하고 문제의 발단이 된 일을 더 벌였다니, 바보 아냐?' 하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 다면....... 음, 주변을 좀 둘러보시죠? 실내 난방 온도 좀 적당히 맞추고 쓰레기 재활용도 좀 잘 하시고요. 『문명의 붕괴』에서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야자수를 벤 이스터섬 주민은 뭐라고 하면서 그 나무를 베었을 까?” 정말 좋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 이다. 아마 “인생 뭐 있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더 좋은 질문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나무나 마지막에서 세 번째, 네 번째 나무를 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베었느냐가 아 닐까? 우리 인류사 전반을 예리하게 통찰해볼 때, 그 정답은 '내 문 제도 아닌데 뭐'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 10억 마리의 천적이 갑자기 사라지자 중국의 메뚜기들은 매일매 일이 잔칫날이었다. 여기저기서 곡식을 조금씩 쪼아 먹는 참새와 달리 메뚜기 떼는 거대한 공포의 구름을 이루어 중국의 논밭을 통째로 싹쓸이했다. 1959년 마침내 전문가(참새 소탕 작전은 위험하다고 일찍 이 경고했던 조류학자 정줘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공식 유해 동 물 명단에서 참새가 빠지고 대신 빈대가 들어갔다. 그러나 때는 이 미 늦었으니, 참새 10억 마리를 박멸하고 나서 '어, 이게 아니네, 취 소' 하고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물론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을 덮친 대기근은 참새 소탕 뿐 아니라 여러 잘못된 결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원인이 었다. 당의 주도에 따른 전통적 자급 농업에서 고부가가치 상품작물 재배로의 전환, 소련 생물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유사 과학 이론에 기반한 파괴적 농경 기법 도입, 농산물을 몰수해 지역사회 내에서의 소비를 막은 중앙정부의 정책 등이 모두 제각기 몫을 했다. 게다. 가 고위직이든 하위직이든 우수한 실적을 보고한 공무원들에게 포 상이 주어지다 보니 국가 지도자들은 모든 게 잘되고 있고 식량 수 급이 넉넉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홍수와 가뭄 등 기상 악조건이 몇 년간 이어지던 끝에 별안간 식량 비축분이 바닥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참새 박멸과 그로 인한 메뚜기 떼의 창궐이 대재앙을 낳 은 주요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당시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 는 적게는 1,500만 명에서 많게는 3,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무려 1,500만 명의 인간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니 더 오싹해질 따름이다.이 참사가 남긴 교훈은 자명하다. 뒷일을 아주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다면 자연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장담할 수 있어도 웬만하 면 건드리지 말자. 앞으로라도 명심하면 좋겠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 2004년, 중국 정부는 사스SARS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자 사향고양이에서 오소리까지 각종 포유동물을 집단 살처분하라고 명령했다. 역시 인간은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일까.
- 나서서 남에게 명령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 절대 권력자들이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막장짓을 벌이곤 했기 때문에 역사상 여러나라에서 그 폐단을 줄이고자 민주주의라는 것을 시도하곤 했다.
- `절대 권력자들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막장짓을 벌이곤 했 기에, 역사상 여러 나라에서 그 폐단을 줄여보고자 이따금씩 '민주 주의'라는 것을 시도하곤 했다. 그리고 그 성패 여부는 다양했다. 민주주의가 처음 어디서 시도되었느냐 하는 것은 논란이 있다. 먼 옛날 소규모 사회에서도 틀림없이 다양한 형태로 집단적 의사 결정 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 2,500년 전 인도에도 민주주의에 근접 한 제도가 존재했다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와 비슷 한 시기인 기원전 508년,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민주정치를 처음으로 도입하고 법제화한 것으로 본다. 물론 민주주의의 주요 요건은 (요컨대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 시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를 교체할 권리 등) 누구까지를 '시민' 으로 보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역사를 통틀어 여러 나라에서 여성, 빈민, 소수민족 등 보잘것없는 약자들은 시민으로 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권력을 아무한테나 줄 수야 없지 않았겠는가? 민주주의의 또 한 가지 문제는, 누구든 민주적 절차에 의해 권력 을 잡는 것은 좋아하지만 권력을 빼앗길 것 같으면 갑자기 영 달가 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계속 유지하는 데만도 참으로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다. 예컨대 로마에서는 민주주의가 전제정치로 퇴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종 묘책을 시도한 바 있다. 한 가지 방법은 행정과 군사를 모 두 관할하는 선출직 최고 통치자 집정관의 역할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맡기는 것이었다. 임기는 1년이었고, 두 사람이 한 달마다 번 갈아 주요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로마군 4개 군단을 한 사람이 2개 군단씩 맡아 지휘했다. 이는 어느 한 사람도 절대 권력을 손에 쥐지 못하게 하는 꽤 영리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4개 군단을 모두 전투에 투입해야 할 때는 이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가령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때가 그랬으니, 로마 군은 코끼리 애호가였다는 한니발 장군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결 전을 벌여야 했다. 이 전투에서 두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군 지휘권을 '하루마다' 번갈아 행사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전술적 견해가 충돌한다는 게 문제였다. 하루는 신중한 파울루스가 지휘를 맡고, 또 하루는 과감 한 바로가 지휘를 맡았으니 말이다. 로마군을 전장으로 끌어들이고 자 했던 한니발은 바로가 지휘권을 잡을 때까지 그냥 하루를 기다렸 고, 간단히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전투는 로마군의 전멸에 가까운 참 패로 끝났다. 사실 로마는 이런 내분을 막기 위해 마련해둔 방책이 있었다. 비상시에 전권을 위임받는 '독재관'을 임명해두는 것. 독재관은 일단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공교롭 게도 로마 원로원은 칸나이 전투 직전에 독재관이 쓰는 전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독재관을 해임해버렸다). 이 역시 원론적으로는 좋은 생각이었지 만, 절대 권력에다가 대군의 지휘권까지 손에 넣은 사람이 인간적으 로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나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독재관들 대다수는 별 탈 없이 물러났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야망가가 '권력 맛을 보니 참 괜찮은데 불만 없으시면 제가 좀 갖고 있겠다'라고 했다. 카이사르의 끝은 결국 좋지 않았지만, 그의 후계 자들 역시 절대 권력을 맛보고는 절대 놓지 않으려 했으니, 로마 공 화국'은 금방 '로마 제국'으로 변해버렸다.
- 히틀러는 집단 학살광이라는 점 외에도 우리가 흔히 간과 하기 쉬운 일면이 있었다. 대중문화 속에서 히틀러는 오랫동안 조롱 거리로 묘사되어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나치의 조직은 무자비하 리만치 능률적이었으며 독재자 히틀러는 자기 일, 즉 독재에는 밤낮 으로 열심히 임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히틀러는 무능하고 게으르고 병적으로 자기중심 주의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정부는 완전히 코미디였다는 사실을 알 아둘 만하지 않을까. 사실 오히려 그 덕분에 그가 득세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독일 지도층은 그를 시종일관 과소평가했다. 그가 총리가 되 기 전, 정적들은 그의 투박한 연설과 유치한 유세를 들어 그를 한낱 웃음거리로 치부했다. 어느 잡지에 따르면 그는 한심한 얼간이'였다. 또 어느 잡지는 그의 당이 '무능력자 집단'이며 '어중이떠중이 들 잔치를 과대평가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선거를 통해 나치가 독일 의회 최대 정당이 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히틀러가 허세에 찬 바보이고 호구이니 똑똑한 사람들에게 쉽게 조종당하리라 생각했다. 당시 독일 총리 자리에서 밀려난 프란츠 폰 파펜은 권력을 되찾으려고 칼을 갈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를 봉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와 함께 연립내각을 수립하기 위 한 논의에 들어갔다. 마침내 1933년 1월, 협상이 성공해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가 되고 내각은 파펜에 우호적인 보수 관료들로 채워졌다. 파펜은 승리를 확신했다. 자기에게 실수했다고 경고하는 지인에게 ‘그자는 우리 하수인'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다른 지인에게는 두 달이면 히틀러는 구석에 몰려 찍소리 못 하게 될 것이 라고 자신했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달 만에 히틀러는 오히려 나라를 완전히 장악했고, 자신에게 초헌법적 권한과 대통령직에다 의회까지 통째로 넘겨주게 될 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의회를 설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가 순식간에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 독일의 지도적 인사들은 왜 그렇게 시종일관 히틀러를 얕잡아 보 았을까? 히틀러의 무능함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능함도 히틀러의 야욕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실제 로 히틀러는 정부를 운영하는 능력이 형편없었다. 그의 공보 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훗날 회고록 『내가 알던 히틀러』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12년간 통치하면서 문명국가에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정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다.”
- 히틀러는 문서 읽기를 질색했다. 보좌관들이 올린 문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잦았다. 부하들과는 정책을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으로 일장 연설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았다.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 했으므로,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늘 난장판이었다. 관료들은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몰랐고, 누가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잘 몰랐다. 히틀러는 어려운 결 정을 해달라고 하면 결정을 한없이 미뤘고, 결국 느낌대로 결정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측근들도 그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에른스트 한프슈팅글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어찌나 종잡을 수 없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렇다 보니 관료들은 나랏일 수행은 뒷전이고 종일 서로 갈라져 싸우고 헐뜯기에 바빴고, 그날그날 히틀러의 기분 상태에 따라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거나 그의 눈을 피할 생각뿐이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히틀러가 매사를 제 뜻대로 하려고 일부러 수를 쓴 것이냐, 아니면 그냥 업무 지휘 능력이 형편없이 떨 어졌던 것이냐, 하는 논란이 좀 있다. 디트리히는 이것이 분열과 혼 돈을 조장하기 위한 계책이었다는 입장이다. 히틀러가 그 방면의 선수였던 건 맞다. 하지만 히틀러의 개인적인 습관을 볼 때, 그냥 일하기 싫어하는 자아도취증 환자에게 나라를 맡겨놓으니 그리 될 수밖 에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 히틀러는 엄청나게 게을렀다. 그의 보좌관 프리츠 비데만에 따르 면, 그는 베를린에 있을 때도 11시가 넘어서야 일어났고, 점심 전까 지 하는 일이라고는 신문에 실린 자기 기사를 읽는 것 정도가 고작 이었다(디트리히가 꼬박꼬박 기사 스크랩을 가져다주었다). 그래도 사람 들이 자꾸 자기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하니까 베를린에 있기를 좋아 하지 않았다. 기회만 되면 집무실을 떠나 오버잘츠베르크의 개인 별 장에 갔고, 거기서는 당연히 일을 더 안 했다. 그곳에서는 아예 오후 2시까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하는 일은 산책 아니면 새벽까 지 영화 보기가 거의 전부였다. 그는 대중매체와 유명인에 집착했으며, 그러한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종종 바라보았던 것 같다. 스스로를 가리켜 “유럽 최고의 배 우”라 하기도 했고, 한번은 친구에게 쓴 편지에 “내 인생은 세계사를 통틀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네”라고 했다. 그의 개인적 습관은 특이하거나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것이 많았다. 낮에는 꼭 낮 잠을 잤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단 것을 엄청 나게 좋아해 “케이크를 엄청나게 많이 먹었으며 “찻잔에 설탕 덩어리를 어찌나 많이 집어 넣는지 차를 부을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 였다. 자신의 무식함에 콤플렉스가 심했기에, 자기 선입견에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이 식견을 말할 때면 폭언을 퍼붓곤 했다. 누가 자기에게 반박하면 “호랑이처럼 격노했다”고 한다. “사 실을 말해줘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화부터 내고 보는 사람에게 누 가 사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데만은 개탄했다. 히틀러는 남 들이 자기를 비웃는 것을 질색했지만, 남을 놀림감으로 삼는 것은 좋아했다(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조소하곤 했다). 그러 면서도 자기가 멸시하는 대상이 자기를 인정해주기를 갈망했으며, 신문에 자기를 칭찬하는 글이 실리면 기분이 금방 좋아지곤 했다.
-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인재人災들은 대개 천재 악당의 소행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와 광인들 이 줄지어 등장해 이랬다저랬다 아무렇게나 일을 벌인 결과다. 그리 고 그 공범은 그들을 뜻대로 부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 자신감이 넘쳤던 사람들이다.
- 역사상 러시아를 대규모로 침공해 성공한 주인공은 몽골이 유일하다(당시는 러시아가 아니라 키예프 공국이었다.), 폴란드는 잠깐 성공해 모스크바를 몇 년간 점령하기까 지 했지만 결국 쫓겨났고, 스웨덴은 한 번 시도했다가 참패한 후 사 실상 스웨덴 제국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엄청난 화를 입었다. 그러니 '러시아는 웬만하면 쳐들어가지 말자'라는 교훈을 새길 만하다. 두 사람 중에서는 나폴레옹이 히틀러보다 그나마 조금 더 합리적 인 이유에서 계획을 단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선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실패'라는 참고 사례가 없었다. 휘하의 육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으니 승리를 자신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유럽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 아직 버티고 있는 유일한 적수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는 데 러시아가 협조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므로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충분히 불만을 품을 만했다. 물론 무역 봉쇄에 협조 하지 않는다고 대국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생각이라고 보기 어렵다. 나폴레옹의 가장 큰 실수라면, 매사에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거의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는 점. 나폴레옹은 외 교와 협상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누군가를 공격하긴 해야겠다고 일단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러시아가 그나마 영국처럼 섬은 아니니 만만하다고 생각했 을 것이다. 그리고 기후를 고려했을 때 러시아를 침공할 시간이 사실상 석 달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전략을 이렇게 짰다. '모스크바로 곧장 쳐들어가 그곳에서 러시아와 총력전을 벌인다. 러시아 군대는 귀족들이 부리는 용병 무리에 지나지 않으니 우리처럼 사기가 드높 고 전투력이 월등한 군대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적이 예상대로 나오지 않으면 실제로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계획도 그런 경우였 다. 러시아군은 예상과 달리 나폴레옹 군대의 진격에 별 저항을 하 지 않았다. 계속 후퇴를 거듭하면서 큰 전투를 가급적 피하고, 동시 에 초토화 전술로 프랑스군이 물자를 확보할 수 없도록 하면서 겨울 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수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빠져나오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이제 지칠대로 지친 프랑스군 앞에 놓인 운명은 이역만리에서 고국까지 다시 돌아가는 죽음의 행군뿐이었다. 나폴레옹의 철옹성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이로써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1941년 히틀러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히틀러도 섬나라인 영국 침 공의 어려움을 깨닫고, 대신 소련을 침공하되 여름이 지나가기 전에 신속히 해치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당시 히틀러는 소련 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자기는 나치이고 소련은 공산주의 자들이니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히틀러는 사실 나폴레옹의 전략을 연구했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피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해두었다. 병력을 모조리 모스크바로 보내지 않고 셋으로 나누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과 달리 겨울이 다가와도 바로 퇴각하지 않고 버티며 싸울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두 선택 모두 파멸을 자초하고 말았다. 히틀러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나폴레옹 때와 전술이 조금 달랐다고 해도 결국 기본 작전은 똑같았다는 것이다(신속 과감하게 적을 치고, 큰 전투를 가뿐히 이기면, 적은 금방 무너진다는 것). 그러니 문제점도 똑같았다(적이 예상대로 행동하리라 철석같이 믿었고, 러시아 겨울의 위력을 여전히 무시함). 독일 수뇌부에는 이러한 문제점을 히틀러에게 지적해줄 수 있을 만한 참모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반대하거나 회의 하는 낌새만 있으면 작전 내용을 참모들에게 꽁꽁 숨기거나 철저히 거짓말로 둘러댔다. 이는 ‘자만심', '소망적 사고', '현실 회피' 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의사 결정 방식이었다.
- 미국이 피그스만에 상륙해 쿠바를 침공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집단 사고의 전형적 사례일 뿐 아니라, 집단 사고groupthink'라는 말 자체의 기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가 케네디 행정부의 이 대실패 사례를 연구하고 나서 만들어낸 말이 바로 집단 사고다.미국은 바로 지척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쿠바의 정부를 전복시키 려고 오랜 세월 온갖 삽질을 했지만, 피그스만 작전은 그중에서도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만하다 (단, 가장 '엽기적' 이었던 사건 은 따로 있는데, CIA가 조개에 폭발물을 장착, 스쿠버다이빙하는 피델 카스트로를 유인해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조개를 대량 구입했던 일을 꼽아야 할 것이다). 기본 계획은 이랬다. 카스트로에 반대하는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 시켜, 이들로 하여금 미국의 공중 지원하에 침공에 나서게 한다는 것. 이들은 오합지졸 쿠바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기를 잡을 것이 고, 이를 본 쿠바 주민들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며 공산주의 정권에 맞서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아주 간단했다. 미국은 이미 과테말라도 그런 식으로 처리한 적이 있었다.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존 F. 케네디가 리처드 닉슨을 이기고 대통령이 되면서였다. 이 작전은 애초에 부통령이던 닉슨이 지지했고 그가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되리라는 전제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그리 호방한 기질이 아니었고, 자칫 소련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했다(실제로 우려할 만했다). 그 래서 작전의 일부 변경을 주장했다. 미국의 작전 지원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즉 공중 지원 불가), 또 상륙 지점도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바꿀 것을 요구 했는데, 그렇다면 '민중 봉기 유도' 시나리오는 실현이 어려워질 게 뻔했다. 원래부터도 상당히 낙관적인 작전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누가 봐도 폐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전혀 그럴듯한 작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국자들은, 마치 그럴듯한 작전이라는 듯 일을 계속 진행해나갔다. 질문하는 사람도 없었고 따지고 드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고문이었고 이 계획을 반대했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누구나 동의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묘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열렸고, 자신은 어이없는 계획 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의 석상에서는 왠지 잠자코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때 내가 소심하게 질문 몇 개를 던지는 것 이상으로 나서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그 허튼짓을 고발하고 싶은 충동이 당시의 회의 분위기에 눌려버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살다 보면 그런 회의를 경험하게 되니,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 케네디는 이 의사결정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톡톡히 얻었다. 그 덕분에 그다음 해에 찾아온 쿠바 미사일 위 기에서 수뇌부가 더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었고, 이로써 전 세계가 파국을 모면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사건의 충격이 워낙 컸기에, 미국은 다시는 집단 사고에 빠져 부실한 침공 작전 을 허술한 정보에 기대어 뚜렷한 계획도 출구 전략도 없이 밀어붙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은 자기가 직접 구한 두 계산값에 전적으 로 기반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지구의 크기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 의 크기였다. 그런데 두 계산값 다 오차가 심했다. 일단 아시아가 실제보다 훨씬 길다고 계산해서(실제도 무척 길지만), 순풍만 불면 일본 을 실제보다 수천 킬로미터 더 동쪽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했다. 더 큰 실수는 지구 둘레의 계산에 9세기 페르시아 천문학자 알파르가니의 연구를 참고했다는 것. 그건 좋은 참고 자료가 아니었 다. 일찍이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도 제대 로 구해냈고, 그 밖에도 꽤 정확한 추정값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는 따로 있었다.
- 콜럼버스의 가장 큰 실수는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마일'이 당연히 로마 마일(약 1,500미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알파르가니가 사용한 단위는 아랍 마일(약 2,000~2,100미터)이었다. 즉, 알파르가니가 언급한 거리들은 콜럼버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길었다. 콜럼버스는 세상의 크기를 실제의 약 4분의 3으로 착각했다. 게 다가 일본의 위치를 실제보다 수천 킬로미터 더 가깝다고 착각했으 니, 결과적으로 항해 일정을 실제 필요한 일정보다 훨씬 짧게 잡고 그에 맞추어 식량과 물자를 준비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 네 세상 크기를 잘못 안 것 같은데” 하며 의문을 표했지만 콜럼버스 는 자기 계산을 꿋꿋이 믿었다. 그러니 콜럼버스가 카리브 제도를 덜컥 맞닥뜨린 건 사실 천만다행이었다(아시아까지 가기 전에 웬 다른 대륙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여기서 콜럼버스가 알파르가니가 쓴 단위를 오해한 것은 퍽이나 유럽 중심적 사고였음을 짚고 넘어갈 만하다. 그러나 그가 그 지독 한 유럽 중심적 사고로 그 후에 벌인 일들에 비하면 이건 잘못 축에 도 들지 않는다. | 만약 콜럼버스가 계산을 좀 제대로 해서 항해를 포기했더라면 세 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포르투갈어 사용 인구는 좀 더 늘었을지 몰라도 포르투갈인들은 당 시 유럽 최고의 항해 기술자들이었고, 콜럼버스보다 몇 년 늦게 아 메리카 대륙 곳곳에 도달했다
- 오늘날까지도 다리엔 사건은 스코틀랜드를 양분하고 있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 때는 양편 모두 다리엔을 상징 적 사건으로 거론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다리엔을 잉글랜드가 스코 틀랜드를 항상 훼방 놓고 탄압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우화로 삼았고, 통합주의자들은 안정을 버리고 비현실적 야망을 좇는 위험성을 보 여준 교훈으로 삼았다. 다리엔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것은 한 나라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교역 상대국과의 정치적 연합을 외면하고 무한한 세계적 영향력이라는 환상을 찾는 한편, 이를 부추긴 제국주의적 자유 무역 광신자들이 막연한 계획을 애국적 피해 의식으로 포장하면서 현실 상황에 대한 전문가들의 경고를 시종일관 무시한 이야기다.그렇다면 오늘날의 상황을 상징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문제다.
- 외교란 한마디로, 대규모 인간집단끼리 서로 개자식처럼 굴지 않는 기술이다.
- 우리는 외교적 선택이란 어찌 보면 세력 판도 변화를 예 측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걸 정확히 예측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니, 오판이 잦은 것도 놀랍지 않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늦봄의 스위스,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독일 정부에 제안을 해왔다. 러시아인인 그는 정변에 휩싸인 고국으 로 돌아가고자 간절히 원했지만, 전쟁 통이라 유럽을 가로질러 이동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최선의 귀국 경로는 독일을 통과해 북쪽 으로 도달하는 길이었지만, 그러려면 독일의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 만 독일 정부는 그의 정치 이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그가 주장한 논리는 간단했다. 자신과 독일은 여러모로 다르지만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 적은 그가 타도하고자 하는 현 러 시아 정부였다. 현재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고 있던 독일은, 러시아가 뭔가 소요를 겪어 최전선에 자원을 집중하지 못한다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독일은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 사내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거느린 러시아인 30명을 열차에 태워 북쪽 항 구로 보내주었고, 일행은 그곳에서 스웨덴과 핀란드를 경유하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대단해 보이는 반군 무리는 아니었지만 없 는 것보다는 나을 듯 보였다. 독일 당국은 그들에게 돈까지 쥐어주 었고, 이후 몇 달에 걸쳐 계속 자금을 지원한다. 독일은 특이한 이념 을 가진 이 정치인이 소란을 좀 피우도록 지원하면 러시아가 한동안 교란되고, 결국 세상에서 조용히 잊히리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내가 레닌이었다. 독일의 계책은 여러모로 완벽히 먹혀들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큰 성공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러시아 당국을 괴롭히고 교란하기 만 한 게 아니라,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6개월 남짓 후, 러시아 임시 정부는 전복되었고, 레닌은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했다. 독일은 휴전을 얻어냈다. 레닌을 열차에 실어 보냈던 4월까지만 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던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계책은 대성공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일단 동부 전선에서 얻어낸 휴전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았다. 또 그 후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린 소련 과 독일과의 관계는 급속히 틀어졌다. 그리고 수십 년 뒤 또 한 차례 세계대전이 지나간 후, 독일 땅의 절반은 소련이 점령하고 만다.독일은 '적의 적은 동지'라는 흔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동지애의 유효기간이 엄청 짧을 뿐이다.
- 국제정치라는 게 참 어렵다. 숭고한 이상이 설 자리는 별로 없고, 실리를 생각하면 마음에 꼭 드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아쉬운 대로 손을 잡아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도 번번이 곤경을 자초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의 적도 대개는 처음 적 못지않게 나쁜 놈이라는 것.
- 몽골 제국은 몇 세대 후에 파벌 싸움과 내분에 휘말려 분열됨으로써 제국의 전형적 말로를 맞았지만, 그 유산은 일부 지역에서 계승 되어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통치하던 부하라 토후국이 1920년 볼셰비키에게 정복되면서, 칸 왕조는 마침내 막을 내린다.(1838년, 찰스 스토더트라는 영국 군인이 부하라 토후국을 영국 제국의 우방으로 포섭하려고 외교사절로 방문했다가 공교롭게도 무함마드의 바보짓을 축소판으로 재현하고 만다. 나스룰라 칸을 별 이유 없이 무심코 모욕하는 바람에, '벌레 구덩이'로 알려진 대단히 불쾌한 곳에 던져진 것. 그곳에서 그는 곤충 떼에 살을 뜯어먹히는 끔찍한 형벌을 몇 년 동안 받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이름에 '칸'이 붙은 사람에게 허튼짓하지 말자.)
- 몽골이 정복했던 많은 지역은 문화와 역사와 문헌이 모두 파괴되었고, 주민들이 송두리째 추방되었으며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그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되었던 교역로가 통합되고 안정화되면서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 교류를 가능케 했고, 이는 유라시아 전역에 근대 문명기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부정적인 면이라면 그 교역로를 통해 문화뿐 아니라 질병도 옮겨졌다는 것이며, 특히 흑사병은 또 한 차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모든 사달은 콤플렉스 덩어리인 한 사내가 외교는 애송이들이 나 하는 짓이라 여기고 단순한 통상 요청을 사악한 계략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 과학, 기술, 산업시대의 태동은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제 우리는 우주에서도 사고를 칠 수 있게 되었다.
-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세계는 토머스 미즐리가 남 긴 유산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두 주요 발명품이 모두 전 세계 대다수의 나라에서 금지되거나 퇴출되었다. 환경 속에 이 미 엄청난 양으로 퍼진 납은 현재 그대로다. 납은 분해되지도 사라 지지도 않으며, 제거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작업이다. 하지 만 좋은 소식은 적어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아이들이 예전처 럼 납을 많이 들이마시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혈중 납 농도가 이제 대부분 중독 수준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만세다. 한편 오존층은 CFC가 널리 금지된 이후로 서서히 회복되어가고 있 다. 앞으로 별 문제 없으면, 오존층이 미즐리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 는 시점은 아마도, 음, 2050년쯤일 것으로 보인다. 인류 파이팅! 어쨌거나 미즐리는 확고한 명성을 남겼다. 「뉴 사이언티스트」에 따르면 그는 “그 자체가 환경 재앙이 된 인간" 이었다. 역사학자 J. R. 맥닐은 저서 『20세기 환경의 역사Something New Under the Sun」에서 그를 “지구 역사상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일 생명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그가 현대 세계의 모습을 예기치 못한 여러 면으로 바꾸어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노킹 방지 연료의 보급으로 자동차는 세계적으로 주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단순한 이 동 수단을 넘어 지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 과 개성을 강력히 드러내는 심볼 역할을 하게 되었다. CFC는 우리 가 집에서 쓰는 냉장고뿐 아니라 에어컨이란 물건을 가능하게 했으 니, 그것이 없었더라면 세계의 대도시들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두 발명품은 서로 결합해 시너지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강력한 파워의 자동차와 차량용 에어컨이 결합하면서, 일상적인 장거리 운전이 어렵지 않고 즐겁기까지 한 일이 되었다. 예컨대 광활한 미국 서부와 중동 지역 대부분의 땅만 생각해보아도, 토머스 미즐리의 발명이 없었다면 세상의 모습은 아마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또 문화 전반적으로도 파급 효과가 있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영 화관이 냉방 시설을 초창기부터 도입한 덕분에 대공황 시절 여가 활 동으로 영화가 인기를 누릴 수 있었고, 영화 산업은 황금기를 맞으 며 문화적 영향력을 굳혔고 실로 20세기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엔 터테인먼트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토머스 미 즐리는 LA를 통째로 발명해낸 것이다. 자동차와 에어컨으로 돌아가는 도시, 영화 산업의 중심지 LA 말이다. 그러니 다음에 영화관에 앉아 범죄 조직과 맞서 독불장군처럼 싸우는 경찰 이야기가 나오는 심심풀이 땅콩용 할리우드 영화를 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토머스 미즐리가 자기가 발견한 화학물질이 별 탈 없을 것이며 갤런당 3센트를 더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 덕분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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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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