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 전 노후 대비가 어려운 이유
* OECD 보건통게 2019에 따르면 17년 기준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82.7년(남자 79.7년, 여자 85.7년)이다. 그러나 이는 전체 연령을 고려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현재 50세 남성은 81.45세, 여성은 86.84세까지 살 수 있다. 또 60세까지 생존해 있다면 기대수명은 더 늘어난다. 남성은 82.76세, 여성은 87.83세까지 살 수 있다. 기대수명은 연령에 따라 달라지는데, 현재 40대 여성의 기대수명은 90세 이상이다. 이처럼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생계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 건강이 악화되면 돈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60세 이후에 생애 의료비의 절반 이상을 쓰게 된다. 생애 의료비는 영유아기에 10%, 청년기에 10%, 중장년기에 30%, 60세 이상 노년기에 50% 가량 지출됨. 건강을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 노후에 대비해 돈이 필요하지만 은퇴 전에 충분한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 50-60세대 중 정년퇴직을 하는 사람은 절반도 안된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는 예고없이 퇴사를 강요한다. 운 좋게 정년퇴직을 했다 하더라도 충분한 돈을 모으기도 힘들다. 월급을 받기 무섭게 빠져나가는 생활비는 물론 주거비와 자녀양육비 등으로 허리가 휜다. 주변에서 재테크로 인생역전해야 한다고 하지만 갈수록 빚만 늘어간다. 어쩔 수 없이 은퇴 후에도 일해야만 한다.
- 일반적으로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원화의 가치가 떨어지니 우리나라의 수출경쟁력은 상승한다. 수출경쟁력이 높아지면 수출이 늘어나므로 경기가 좋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일반론이 통용되지 않고 있다. 19년 9월 23일 기준 원달러 환율은 1194원으로 올랐다. 그렇다면 수출에 청신호가 들어왔을까? 자본시장연구원의 '환율이 수출 및 내수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재고찰'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수출에는 환율상승보다 글로벌 경기가 더 큰 영향을 미쳤다.' 90년 이후부터 외환위기 직후까지 원달러 환율이 크게 상승했고, 수출도 증가했음. 하지만 이후에는 환율이 하락해도 수출이 줄지 않고, 환율이 상승해도 수츨이 늘지 않았음. 금융위기 직전(99-07)까지는 환율이 크게 하락했지만 글로벌 경기호조로 오히려 수출이 증가. 금융위기 이후(08-17)에는 환율이 상승했지만 오히려 수출은 줄어들었음. 다시 말하면 환율이 하락한 금융위기 직전에 수출이 연평균 12.7%로 가장 많이 증가했다. 금융위기 이후에 환율이 연평균 1.6% 상승했는데도 수출증가율은 5.2%에 그쳤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수출에 환율상승보다는 글로벌 경기가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 기업이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3가지
* CEO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직접 주도하라
* CEO부터 말단직원까지 모두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라
* 팀워크를 갖춰라. 아마존의 베조스는 최고의 팀워크를 만드는 노하우로 피자 두판의 법칙을 정립했다. 피자 두 판의 법칙은 팀원이 피자 두 판 이상을 먹을 인원보다 적어야 한다는 것. 17년 12월 기준 아마존 직원은 566,000명이나 되는데, 아마존은 회사 내부를 작은 팀들로 구성해 민첩하게 움직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 현재 센서 산업은 글로벌 하드웨어업체가 독과점하고 있다. 소자설계부터 부품생산까지 밸류체인을 통합한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업체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데, 이들 업체들은 시장에서 강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일례로 GE는 GE센싱, 보쉬는 보쉬 센서텍이라는 자회사를 통해 설비 및 자동차용 센서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센서 시장에 기존 하드웨어업체는 물론 소프트웨어업체와 사용자그룹이 새롭게 진입할 것이다. 기존 강자인 하드웨어업체는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거나 전문생산업체와 제휴 등을 통해 왕좌를 유지하려 할 것이고, 소프트웨어업체 또는 사용자 그룹은 사물인터넷 기기업체들과 제휴해 정보를 수집하고 기존 서비스 플랫폼의 방대한 정보와 접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일례료 17년 4월 구글은 슈퍼센서 역할을 하는 구글렌즈를 공개했다. 구글 렌즈는 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렌즈를 통해 인식한 정보를 스스로 학습해 사용자가 카메라가 담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이를 이해한다. 예를 들면 사용자가 와이파이를 연결하기 위해 와이파이 비번을 카메라로 찍으며, 구글렌즈는 그것이 와이파이 비번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와이파이에 연결시킨다. 강아지를 비추면 강아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식당 간판을 찍으면 해당 식당에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센서업계는 경쟁력이 낮은 편이고, 대부분의 센서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음. 현재 국내 생사업체의 85%가 매출액 300억 미만의 중소기업이고, 설계역량은 있지만 생산 인프라가 부실해 경쟁력이 낮은 편이다. 또 국내 센서 수요 규모는 약 70억불이나 되는데, 그중 90%를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다.
- 자동차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영국에서는 1865년 '붉은 깃발법'을 만들었다. 붉은 깃발법은 자동차를 도심에서 시속 3.2킬로 이상으로 못 달리게 하고, 한 대의 자동차에는 반드시 운전사, 기관원, 기수 등 3명이 있도록 제한하는 법. 당시 자동차는 증기기관차였기에 크기와 중량도 엄청나서 도로를 막기 일쑤였고, 소음도 굉장했다. 당시에는 도로에 말과 마차가 주로 다녔는데, 이 법은 마차협회 등 기득권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국은 가장 먼저 자동차산업을 출발시켰지만 이 법을 1896년까지 시행했다. 결국 후발주자인 독일과 미국에 뒤쳐지는 결과를 낳았다.
- 뉴트로열풍은 10년후까지는 아니겠지만, 3-5년 후까지 이어질 것임. 현재 유행하는 뉴트로 트렌드는 10-30대가 이끌고 있는데, 이들 세대는 과거의 문화를 경험한 적이 없어서 역설적으로 새롭고 신선하게 느끼고 있다. 왜 젊은이들은 과거의 문화에 매력을 느끼는 걸까? 1030세대는 어려서부터 디지털 기기를 접하며 자라왔다. IT기술 덕분에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게 되었지만 사실 디지털 기기는 우리에게 단조로운 삶을 강요한다. 다양한 취미를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화면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디지털 기기로 이것저것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 또 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트렌드는 자주 변한다. 1030세대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삶에 권태감을 느낀다.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한 미 제너레이션인 이들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함. 단조로운 일상에서 소확행을 느끼기 위해서는 무언가 자극적이고 새로워야 한다.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유행하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80-90년대에 유행하던 것들이 오히려 화려해 보인다. 또 옛거들에서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유행하는 뉴트로열풍은 일시적인 트렌드로 끝나지 않을 듯 싶다.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트렌드를 만들어내는데,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입장에서 뉴트로열풍은 큰 이익이 된다. 기업들은 비용대비 효율성이 높기 때문에 뉴트로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할 것이다. 일례로 신제품의 인지도를 1% 높이려면 막대한 개발비와 마케팅 비용이 필요한데, 소비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과거의 제품을 활용하면 적은 비용으로도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업은 잇스토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다. 잇스토리란 상품이 가진 이야기와 역사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가치 중심 소비를 하므로 잇스토리가 있는 상품을 선호할 수 밖에 없다. 기업입장에서 마케팅 비용도 줄이고 좋은 반응도 얻을 수 있으므로, 뉴트로 트렌드가 오래도록 유지되도록 힘쓸 것이다.
- 불황일수록 레트로가 유행하는데, 현재 유행하는 뉴트로는 몇년 전부터 유행한 레트로 트렌드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 심리학의 회고절정(reminescene bump) 이론에 따르면 노인들에게 전 생애의 기억을 회고하게 하면, 청소년에게서 청년기의 기억을 가장 많이 떠올린다. 이 시절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함. 경제지표가 안 좋을 때 사람들은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해 과거를 회상함. 현재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선진국 역시 저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서 해외에서도 뉴트로 트렌드가 유행하고 있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재규어 랜드로버는 뉴트로 트렌드에 부합한 신차를 출시할 계획이다. 재규어 랜드로버는 70년대에 유행한 E-타입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E-타입 전기차를 20년에 출시 예정. 이 자동차는 원래 6기통 엔진이 탑재되어 있었지만 신차는 미래형 전기차로 출시될 것이다. 또 외관은 예전모델의 이미지를 살리면서 실내는 최첨단 디스플레이를 갖춘 센터페시이와 신소재인 탄소섬유 강화 플라스틱을 적용한 대시보드로 꾸밀 것임. 국내외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 경제는 앞으로 10년간 연평균 2%이하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듯 싶다. 이런 상황에서 40대 이상 세대는 한국경제가 고성잗하던 80-90년대를 회상할 것이고, 그 시대 이후에 태어난 1030세대는 지금보다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체념 때문에 여전의 것들에 매력을 느낄 것임. 따라서 현재 유행하는 뉴트로 트렌드는 기성세대는 물론 1030세대를 당분간 사로잡을 것이다.
- 트렌드를 안다고 해서 100%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트렌드를 모르면 100% 실패를 장담할 수 있다. (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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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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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것, 그것이 결국 행복해지는 가장 좋은 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강하지만 약하다. 노력할 수 있지만 노력한 만큼 지친다. 무리해서 미리 당겨쓴 에너지는 훗날 반드시 갚아야 할 때가 온다.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조금 더 유연하고 자유로운 내가 되기 위해 우선 어깨에 힘을 조금 빼보자. 몸의 센서를 켜고 신체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다. 불쾌한 인간관계를 피하고 예의와 매뉴얼로 내 몸을 지킨다. 이렇듯 별것 아닌 일로 행복해지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 대학생들을 앞에 두고 나는 "너희들에게는 거의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가능성은 생각만큼 무한하지 않다"고 누누이 말합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능성을 너무 믿은 나머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끊임없는 불충족감에 고민하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스트레스에 늘 시달리게 되기 때문. 어느 시점에서 자기가 가진 지적 혹은 신체적 자원의 한계를 알고, 우선순위가 높은 것부터 순서대로 잘 배분하는 법 또한 배워야 한다.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많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자원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적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자원을 분배하기에 앞서 우선순위를 정해두지 않으면 인간은 망가진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진다. 젊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혹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진다는 사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강하지만, 약하다. 노력할 수 있지만, 노력한 만큼 지친다. 무리해서 미리 당겨쓴 에너지는 훗날 반드시 갚아야 할 때가 온다.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지칠 때 솔직하게 '아, 너무 힘들다'고 말하고 적절히 넘길 줄 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태도다. 지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임.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지겹다는 것은 활동적이라는 증명이다. 그러나 '한 단계 위의 자신'에 도취되어 있으면 몸과 마음이 비명을 지를만큼 아파도 좀처럼 쉬지 못한다. 지쳐서 멈춰 서기라도 하면 나약한 자신을 탓한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도, 정신에도, 가혹한 일이다. 물론 성장하고자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애쓰는 것은 안된다. 인간은 꿈과 현실을 동시에 살아야 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매우 어렵다.
-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을 소중히 아껴야 한다. 스스로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가 탄 마차를 끄는 말고 같다. 때로는 쉬게 하고 물도 먹이고 먹이도 듬뿍 주면서 더없이 예뻐하면 말은 우리를 멀리까지 데려가준다. 그러나 끊임없이 재촉하고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면서 채찍으로 때리기만 한다면 머지 않아 피로로 죽고 말 것입니다.
- 홉스와 로크가 시민사회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면서 근대 시민들에게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을 주문한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이기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면, 결과적으로는 반드시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복리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필연적으로 가족과 친구들의 행복을 고려하고 공동체의 규범을 존중하며 세계평화를 바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최대화할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공동체의 기초라고 보았다. 문제는 이기주의가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운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를 구성하는 극히 일부의 국소적 쾌감과 환상적 욕망뿐이다. 그것들이 자기의 위치를 점유하고 독재군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기를 구성하는 다른 국소적 요소에 대해 이렇게 협소한 자기에게 온 힘을 다해 봉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짜증나서 사람을 죽이는 젊은이나 일시적 향락을 위해 매매춘과 마약에 빠지는 젊은이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자기가 축소되어 있을 따름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자기가 거의 모두 사라진 상태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들엑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란, 순간적인 정욕이나 분노나 증오를 말하는 것이 아님.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되지만, 그 외의 무수한 요소를 포괄하는 개방적 시스테을 가리킴. 그 시스템을 어떻게 균형잡힌 방법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 불쾌한 인간관계를 견디는 것은 인간이 받는 정신적 타격 가운데 가장 파괴적 요인 중 하나임. 그런 관계라면 반드시 가능한 한 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그 전까지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것, 존경받는 사회적 위치에 오르는 것,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것, 세심한 애정을 주고받는 연인을 얻는 것이 불가능했던 사람(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게을리한 사람)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다.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해 불쾌한 인간관계 속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동안, 기어코 견디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견디면서 자기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으로 굳어진다.
- 세상이 말하는 중년의 꼰대는 바로 견디는 자세가 극적으로 인격화된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함. 회사에서 상사의 욕설을 견디고, 부하의 막말을 참고, 클라이언트의 안하무인도 참고, 만원 전철을 타야 하는 장거리 출퇴근을 참고, 무뚝뚝한 아내의 얼굴을 참고, 아이들의 침묵이 주는 경멸을 참고, 거액의 대출금을 참고, 닳아버린 양복 팔꿈치를 참고, 치질의 고통을 참고, ... 이렇게 온몸이 인내로 둘러싸인 이들이 중년의 꼰대라는 존재다. 이렇게 된 데는 아마도 어느 시점에서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 인생의 어느 단게에서(아마도 상당히 일찍부터) 불쾌한 인간관계를 견디고 있는 자신을 허용했든가, 아니면 자랑스러워했든가, 어쨌든 인정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불쾌함을 견디는 것을 자신의 그릇이 크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지표 또는 인간적 성숙의 증거라는 식으로 합리화해버린 것이다. 게가 자기 등딱지에 맟줘 구멍을 파듯이 사람은 스스로 만든 패턴에 맞추 불행을 불러들인다. 불쾌함을 견디는 나를 그릇이 큰 사람이라 착각하면 그때부터 꼰대가 되는 길은 탄탄대로다. 그런 사람은 불쾌한 인간관계만을 계속 선택하게 된다.
- 사춘기 자녀와 부모 사이의 갈등이 찾아오면, '아, 드디어 이 시기가 왔구나' 하고 바로 떨어져 살면 된다. 본래 자녀들의 독립을 재촉하기 위한 본능이기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부모 자식간의 갈등을 불쾌한 인간관계라는 사회적 수준에서 바라보는 우를 범한다. 그리고 이 불쾌한 인간관계를 견디는 것이 부모와 자녀가 서로 자신의 그릇을 키우고 성숙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완전히 틀린 방향으로 생각이 나아간다. 나는 이 지점에서 단추가 처음 잘못 채워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모는 무언의 식탁, 아이의 늦은 귀가, 요란스런 음악, 마음에 안 드는 복장을 참는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아이는 부모의 화를 돋우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 일부러 부모에게 혼날 것 같은 시간에 귀가하고 일부러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장르의 음악을 틀고, 일부러 부모가 보면 졸도할 것 같은 옷만 골라 입는다. 이걸 참을 수 있다는 것은 부모가 여간 둔감하지 않고서야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부모는 이 불쾌함을 견디기 위해 의도적으로 둔감한 사람이 된다. 아이 쪽에서 보내는 '부모를 불쾌하게 하는 메시지'를 일부러 놓치고 애써 못 들은 척하면서 커뮤니케이션 경로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반격한다. 아이는 당연히 불쾌한 어필의 강도를 더욱 높일 테니, 결과적으로는 어지간히 불량한 아이와 어지간히 둔감한 부모라는 훌륭한 한 쌍이 탄생한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들의 품을 떠나려고 하는 시기가 오면 참아서는 안된다.
- 훌륭한 비즈니스맨은 리스크를 감수한다고 말하는 반면, 평범한 샐러리맨은 리스크를 짊어진다고 말한다. 리스크라는 것은 불가피하게 짊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리스크를 되도록 회피하려고 한다. 물론 리스크를 회피할 수는 있지만,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동시에 결정권까지 회피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사람들은 비즈니스에 참여할 수 없다. '내가 리스크를 감수하겠다'고 말한 사람이 그 비즈니스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리더가 되는 것이다.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감수를 기피하고 결정권을 타인에게 양도한 사람은 노동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 비즈니스와 노동의 차이는, 그러므로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의 차이도, 시급과 직위의 격차도, 자본금의 규모도 아니다. 그 사람이 리스크를 감수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 대화의 본래 목적은 유의미한 정보를 교환하는 데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이 이쪽 편에 있고, 그 말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 예를 다해 돌려보내는 사람이 저쪽 편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다.
- 극한까지 노출된 인간성의 어둠을 보아버린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은 매우 안이한 환상처럼 들리지만, 사실 인간의 진정한 어둠을 보아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그저 듣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참혹한 경험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그에 대한 보상의 마음으로, 후대에게만큼은 그런 경험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에 만들어낸 꿈이다. 전쟁이 뭔지, 기아가 뭔지, 공황상태가 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모른다. 극한 상황에서의 에고이즘이 어떤 것인지, 지휘관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얼마나 파멸적 사태가 벌어지는지, 누군가 한 사람이 임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 어느정도의 재앙을 불러오는지, 그런 것들이 주는 진짜 두려움을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
- 전후 민주주의가 허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전후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은 바로 그 사람들이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이 거의 없는 허약한 제도였기 대문에 더더욱 혼신을 다해 그것을 지키려고 했다. 우리는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낸 허구 속에서 태어나 그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 예전부터 계속 있었던 것, 그래서 어느 정도 배신하더라도, 상처 주더라도 훼손되지 않는 것이라 여기며 성장해왔다. 그래서 시야가 좁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 살며 호흡하고 있는 현재의 사회제도가 불과 얼마전에 특정 세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발판 위에서 만들어진, 고작 무대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특정 세대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취약한 제도에 불과함. 영화의 오픈 세트장처럼 앞면만 지어져 있을 뿐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트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취약한 제도라는 점을 충분히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내가 있는 세계는 어쩌다 보니 나타난 잠정적 제도일 뿐이고, 그것이 발생하기까지는 그 나름의 전사가 있었으며, 어떠한 역사적 필연성의 요청이 있었기에 출현한 것이고, 역사적 조건이 바뀌면 변화하고, 때가 되면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앞에서 말한 추태를 보인다.
- 일본이 못쓰게 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부터지만, 이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태어나 무서운 것을 보아버린 리얼리스트 세대가 사회 일선에서 물러난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 세대가 물러남과 동시에 일본에서는 진짜 의미의 엘리트 즉 위험감수자들까지 사라져버렸다.
- 취직기피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젊은 여성층에 비하면 남성들은 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음. 하지만 동년배 여성들에게 비해 스트레스에는 강한 듯 보인다. 눈앞에 흔들리는 당근을 보면서 찰싹찰싹 채찍을 맞는 경험을 어린시절부터 계속해왔기 때문일 것임. 남자아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당근에도 채찍에도 둔감해지고 있다. 맞는 데 익숙해져서 엉덩이 가죽이 두꺼워졌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런 환상에 너무 진지하게 다가결 경우 몸이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젊은 남성들이 이미 마스터해서 성공모델이라고 해봐야 리얼리티도 없고, 일단 내일 회사는 가야지 하며 절반은 열심히 절반은 대충하는, 미묘한 적당주의 기술을 훈련받은 적이 없다. '적당히 하는 것'은 훈련을 받지 않으면 몸으로 익힐 수 없는 사회적 기술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사회적 성공이라는 환상이라는 오히려 믿기 쉬운 것이 아닐까 한다.
- 미국이 가진 성적 트라우마의 기원 중 하나는 개척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7-18세기에는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대거 건너왔다. 당시 여성들은 동부에 머물러 있었고 프런티어까지 진출한 경우는 극히 소수였다. 영화 서부개척사에서 데비 레이놀즈가 "캘리포니아에 가면 남자 40명에 여자는 1명이야"라고 하는데, 그런 남녀간의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인구비율은 19세기말까지 이어진다. 당연히 남자와 결혼하거나 사귀어주는 여성들은 절망적일 만큼 드물었겠지요. 여자 하나를 놓고 남자들 수십 명이 다투다가 결국 한 사람만을 선택을 받는 것이다. 나머지 남자들은 다들 손도 못 쓰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프런티어 남녀관계의 기본구조였다.
- 19세기 프런티어에서는 한 사람의 남자가 자기 소유의 여자 한 명을 얻는 것은 생사를 건 경쟁의 승자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이 경쟁이 프런티어의 남자들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스트레스였는지는 상상조차 힘들다. 참단할 만큼 희소한 여성의 숫자를 고려할 때 자신의 DNA는 거의 학실히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 존재론적 불안이 프런티어에서의 미국 남성의 원체험인 것이다. 트라우마는 서사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다. 여기서 미국인들은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서사를 조직적으로 구성한다. 나는 그 이야기가 바로 서부극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자 별거 아니다. 남자끼리의 우정이 제일 중요하다. 여자가 고르는 남자 별 볼 일 없다, 여자는 항상 틀려먹는 남자를 고른다, 진짜 남자는 여자에게 선택받는 일 없이 생을 마친다, 라는 것이 할라우드 서부극이 선택한 스토리 라인이다.
- 인류학이 주는 교훈처럼 죽은 자들이 고이 잠재우는 일은 살아 있는 자들의 중요한 임무다. 죽은 자들이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애도의 서사를 계승하는 것. 그것이 죽은 자가 되살아나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에 화근을 불러오지 않도록 막기 위한 인류학적 비용이다. 위령제를 치르지 않으면 유령이 나타난다는 오컬트적이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구석기시대 이후 세계의 모든 사회집단이 '한을 남기고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살아 있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관점에서는 합의에 도달했다는 인류학적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을 따름이다. 유령으로 변해 나타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유령으로 변해 나타난다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집단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서부극은 그러한 진혼을 위한 서사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버림받고,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고독속에서 죽어가는 운명으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남성이 본래 가부장적이라든가 남성 중심적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특정 국가 국민들의 에토스를 형성하는 것은 그 국민이 '어떠한 배경에서 형성되었는가'에 관한 서사와 건국신화, 즉 내셔널 히스토리다. 우연찮게도 미국에는 여성들이 희소한, 다시 말해 성적으로 불균형한 지역을 두 세기에 걸쳐 유지하지 않고는 국토를 개척할 수 없었던 역사적 조건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이들이 그 후 사회에서 화근을 불러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미소지니 서사'를 망설임 없이, 거의 성무일도(카톨릭에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바치는 기도를 말함)를 올리듯이 성실하게 생산해온 것이다.
- 지금 미국 여성들은 매우 어려운 포지션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페미지즘, 차별철폐, 정치적 올바름 등을 구현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에 따라 심판자, 고발자의 위치에 놓여 있지만, 사실은 의도적으로 고안한 미움받는 포지션임. 그런 위치에 미국 여성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한편 일상생활에서는 남녀평등주의로 인해 바로 그 아메리칸 스탠더드(능력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에서 비롯된 과열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사회의 이면에서는 어마어마한 가정폭력, 강간, 살인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렇듯 현재 미국의 여성들은 아주 어려운 조건하에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고발하는 것은 고발당하는 쪽의 증오를 산다는 뜻이다. 이기는 것은 진 사람들의 질투를 산다는 뜻입니다. 성공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반목의 시선을 산다는 뜻. 이런 포지션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관점으로 보면,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까 한다. 전 세계의 여성들이 왜 그런 왜곡된 여성의 입장을 모델로 삼아야 하는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이제 그런 건 그만하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말하는 비판적 입장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이제 성공이라든가 승자라고 구분하는 거 그만하시죠? 안 그래도 피곤한데"라고,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여성들이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이다. 돈, 성공, 권력, 위신, 정보 등등 그런 건 어떻데 되든 상관없다. 부족하더라도 마음 따뜻한 행복이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발언할 수 있는 이들이 어른 여성 중에 자꾸 나타나지 않으면, 지금의 젊은 여성들이 처한 높은 스트레스 상황은 좀처럼 변하기 힘들 것이다.
- 페미니즘의 아킬레스 건은 현재 시점의 사회적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할 것을 요구하는 한 분배되는 것에는 가치가 있다는 점을 반드시 전제로 해야한다는 사실. 그런데 이른바 사회적 자원으로 불리는 것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문제는 남성들이 그런 것들에 그다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그런 것들을 위해서 그 정도로 애쓰지 않는다. 일이야 빠져서 하면 나도 모르게 즐기게 되지만, 그건 일이 즐거워서이지 그 결과로 오는 높은 지위, 높은 임금, 높은 명예가 반드시 일을 하는 첫번째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큰일을 해낸 남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지위, 임금, 명예를 좇지 않는다. 주변에서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찔끔찔끔 하는 일이거나, 사람들이 하도 그만두라고 하니까 갑자기 하고 싶어진 일이거나, 혹은 사회를 위해서, 약자를 위해서, 무언가 좋은일을 해보자는 불심을 보이기 위한 것이거나... 하는 식으로 희한한 동기에서 시작한 일이, 곧잘 눈부신 성공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있다. 원하면 손에 들어오지 않고, 원하지 않으면 찾아온다는 것을 남자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하다.
- 기업활동에 있어 최소한의 윤리는 멸사봉공이라는 시대착오적 에토스에 지배받고 있다. 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적인 배를 불릴 수 없다는 윤리성은, 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적인 일은 희생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사축의 한상과 표리일체한 결과다. 따라서 권력과 자산과 명에가 경쟁적으로 추구되는 장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공공성 환상이 불가결한 셈이다. 나라를 위해서, 윗사람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라는 왜곡이 개입되어 있지 않으면 사회는 약육강식의 야생과 다른없는 투쟁의 장이 되어버릴 것임. 시장경제는 그런 다양한 환상이 빚어내는 복합적 효과로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음. 그러므로 사회적 자원의 공평한분배라는 좋은 것만을 추출해 낼 수는 없다. 사회적 자원과 함께 그러한 환상도 반드시 포함해서 수익자에게 분배되는 것이다. 즉, 남성 중심적 환상의 일리있음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 사회에서 가치있음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보부아르가 고뇌했던 문제는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이 문제를 근본부터 돌아보려면 '일한다고? 무엇을 위해서?'라는 기본적 질문으로 다시금 돌아가야 한다.
- 내 개성을 안다는 것은 개성적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부분을 착각하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 '이게 나의 감각이라니까' 또는 '나만의 고집이라고' 하는 사람, 대부분 머리가 좋지 않다. '내 개성을 안다'는 것은 본래 '소거해가는' 작업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성립된 배경을 공브함으로써 특정 세대, 특정 지역집단 전체를 덮고 있는 대기압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대기압을 소거하고 남은 것들을 자신의 개성으로 인지할 수 있다. '위조된 공동기억'이란 이야기를 했는데, 만약 개성이라는 것이 정발로 발견되어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기억 속에서 위조되어 외부로부터 '사후에' 주입된 부분을 추려내 소거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함
- 도구를 쓰는 모든 훈련은 그것이 있다는 것을 잊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신체적 수행은 인간이 신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기 위함이다.
- 절도는, 평범하게 말하자면, 쓸데 없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는 의미. 정말 필요할 때 자신이 가진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도록, 중요하지 않은 일에 가진 자원을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사의 마음가짐이다. 품격이 높은 사람은 절도를 아는 사람이다. 자기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원(가용시간과 발휘 가능한 사회적 능력)을 쓸 우선순위와 양을 항상 의식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 자크 라캉은 '우리의 과거 기억은 전 미래형으로 말해진다' 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자기 역사'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대화가 끝났을 때 상대방이 나를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여겨주기를 바라기 때문. 나에게 유리한 내 모습을 상대방 안에 심어놓기 위해 우리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예컨대 '나는 비열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지면 얼마든지 과거로부터 비열했던 기억을 끌어올 수 있다. 친구를 배신한 일, 책임으로부터 도망친 일,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일. ... 떠올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반대로 '나는 마음이 맑은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다면 역시 얼마든지 떠올리면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일, 불행한 사람을 위해 신에게 기도한 일, 더 받은 거스름돈을 돌려준 일, ...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비열한 사람인지, 맑은 사람인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듣는 사람의 기억 속에 진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남기고 싶은지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있다면 조금 곤란할 것임. 우리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선택적 회상이 이루어졌을 뿐이기 때문.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고, 그런 것도 필요하다. 때때로 지어낸 이야기를 함으로써 과거를 리셋하지 않으면 계속 나아갈 수 없다.
-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제도 중 하나로 일부일처제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미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지만. 물론 앞으로도 일부일처제는 지속될 것임. 대세는 아니더라도 가족제도의 옵션 가운데 하나로 전락할 가능성이 꽤 클 것임. 오늘날 파리에는 주민들의 50%가 독신, 헤테로/호모 비혼동거 거플, 친구들끼리의 코뮌,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커플 등 다양한 가족형태가 등장하면서 아빠, 엄마, 자녀라는 전형적 핵가족은 이미 소수. 일부일처제는 잘 만들어진 제도라 생각한다. 아미루 생각해도 줄곧 상대를 바꾸느니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해로하는 편이 생존전략상의 코스트가 절대적으로 저렴하다. 결혼한 사람과 평생 해로하며 서로가 혼인계약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확시을 가질 수 있다면 매우 편안하겠지요. 절대 배신하지 ㅇ낳는 파트너가 있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아주 든든한 일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현재 소속이 불분명하다. 그보다는 법률적 속박 따위 없는, 사랑만을 기반으로 한 파트너십이 가장 좋다는 견해가 점점 여론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법률상 결혼은 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만으로 연결된 관계는 사랑이 사라진 순간에 끝나버린다. 끝나버린다기보다 끝내야 한다. 이는 사랑 외에 다른 어떤 지지대도 없다는 점에서 순수한 성적 관계이고, 이해득실이나 세속적 요소를 확실히 잘라내 버렸다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 따라서 사랑만으로 묶인 두 사람은 끊임없이 '나 사랑해?'라고 상대방에게 확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제법 스트레스다.
-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이 많은 사회와 적은 사회를 비교하면 이런 말을 했따. "북국은 자살자가 많고, 남국은 자살자가 적다. 자살률과 평균기온은 관계가 있다." 종교도 관련이 있다. 신교는 자살자가 많지만, 구교는자살자가 적다. 신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며 자기 내면의 신앙이 진실한지 자문하는 종교는 인간을 고독하게 한다. '공포와 경외' 안에서 신과 마주하는 자세는 정신력이 매우 강한 사람이 아니면 부담이 너무 크다. 구교처럼 나쁜 짓을 저지르더라도 고해를 통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면 신자들은 심적인 부담은 사제에게 맡기고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뒤르켐이 지적한 또 한가지는 대가족에는 자살한 사람이 적다는 점. 혼자 사는 사람이 자살할 위험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두명, 세명, 10명, 20명, ... 이렇게 가족 구성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자살률은 떨어진다. 대가족으로 함께 사는 데는 함께 있을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통 가족의 이야기라는 형태로 말해진다. 공통의 선조가 무훈을 세웠다거나 조상 중에 비범한 임눌이 있거나 하면 가족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모여 그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공통적 기원신화를 가진 가족들은 친족 의례를 소중히 보존하고, 명절이나 생일이나 제일이 올 때마다 모여서 연회를 열고, 자신들이 공통의 선조로부터 피를 이어받은 가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축하한다. 이런 공동체에 포함된 사람은 쉽게 자살하지 않는다. 고립감을 느끼는 일이 적기 때문. 긴 역사를 자랑하는 특정한 집단가 자신이 통합되어 있고, 그 시간적, 공간적 네트워크 안에 다른 사람으로는 대체되기 힘든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 피붙이만으로 굳어진 장소가 실제로는 폭력과 광기의 온상이라는 것, 구성원들의 심신에 상처를 입히는 곳이라는 것, 이런 사실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많은 가정은 이미 그 구성원들을 '치유하는 곳' 이라기보다 '해치는 곳'이 되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급선무는 어떻게 하면 가정이라는 위험한 곳에서 상처없이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정을 살리기 위한 전략은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말한 생존전략과 같다. 어쨌든 가정에서도 민낯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부모는 부모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마치 연기라도 하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서로의 내면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경박한 행동은 가정내에서는 자제하라. 그런 절도 있는 행동을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도 유지한다.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모르는 체 하는게 어떻게 가족이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분은 친숙함과 익숙함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짜 친숙함은 존경이 없는 곳에 발을 디딜 수 없다. 따뜻하고 편안한 가정이란 모두가 노골적으로 에고를 드러내고 속마음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가정이 아님. 한 사람 한 사람이 욕망을 자제하며 내면을 감추고 가정 안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구성원이 가정 밖에서 맺는 가족 외의 인간관계 속 활동을 지지하는 곳이 올바른 치유의 장으로서의 가정이다. 내가 자립하라고 대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든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생활이 멋있다든가 하는 얄팍한 교훈을 말하기 위함이 아님. 자립할 수 있는 사람,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따뜻한 가정, 친숙함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이 곁에 있을 때의 온기레 깊은 감사와 존경을 품을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따뜻한 가정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란 혼자 있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을 말함. 나를 위해 가족은 무엇을 해주는가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먼저 배려하는 사람을 말함.
- 만약 가정을 항상 따뜻하고 다정한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나는 가정 내 커뮤니케이션이 포근한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머무르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가정에서 정치적 의견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기를 바라는 건 난센스다. 그런 말을 어쩌다가 입 밖에 내더라도 '허허,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 가볍게 받아넘겨주는 것이 예의다. 타인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내버려두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다. 하지만 적절한 형태로 그냥 혼자 있는 것 만큼 사람이 마음을 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는 방치와는 다름. 혼자 있게 해준다, 혼자 있는 시간을 이해받는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런 경우는 그것이 존중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사실을 당사자간에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정말 친한 사람 사이에서는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귀중한 선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이란 주는 것이라는 기본개념을 알지 못하면 이해가 쉽지 않을 것임.
- 자본주의는 차이 속에 사는 인간의 속성을 최대한 이용한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옆 사람과 거의 똑같지만 아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그것으로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다. 참고로 인간은 아무리 작은 기호라도, 변화가 있을 때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차이 지각력이 높은 생물이다. 그러므로 미세한 차이에 민감해지는 데에 소비자의 의식을 집중시키고 그 소비자 전원을 가능한 한 좁은 니치에 가두는 전략이 자본주의가 취하는 가장 좋은 전술이다. 오후 5시 11분 01초와 02초 사이의 노을 빛깔 차이 분석에 골몰할 수 있게 된 인간은 자기가 짧은 시간 사이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함. 생산자 입장에서 보면 방한복 제품으로 모피코트부터 도롱이까지 전부 갖추어야 하는 경우와 '원단도 색도 스타일도 같고 그저 그단추 위치만 다를 뿐인' 코트를 준비하면 되는 경우는 제조단가가 다르다. 소비자들이 단추 위치가 다르다는 정도의 차별화로 충분히 열광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다양한 상품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진다. 생산라인 하나로 충분. 단추를 다는 공정에 몇 명 채용하면 된다. 심한 말이지만 제조원가를 낮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인은 색깔만 다른 유니틀로 후리스를 2천만벌씩 사는 국민이니까. 자본주의에 가장 좋은 전략은 가능한 한 좁은 니치에 가능한 한 많은 개체를 욱여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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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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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역사

인문 2020. 1. 15. 12:45

-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수도 있다. 모든 것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의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선의 선택은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 확신하지 말라. 그러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회의론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회의론은 고대 그리스와 이후 로마시대에 걸쳐 수백년 동안 인기를 얻은 철학사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가장 극단적인 회의론자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고한 견해를 갖지 않으려 했다. 고대 그리스의 피론은 가장 유명하고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회의론자였다.
- 철학사에서는 모든 회의론자가 피론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항상 의심스러운 것처럼 사는 게 아니라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가 믿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면밀히 살펴보는 온건한 회의주의의 훌륭한 전통이 있다. 이런 종류의 회의적 문제제기는 철학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위대한 철학자는 회의론자였다. 독단론과는 반대다. 독단적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전적으로 확신한다. 철학자들은 정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증거를 갖고 있는지 묻는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일이며, 오늘날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단지 상대를 난처하게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온건한 철학적 회의론의 목적은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거나 적어도 우리가 알거나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회의론자가 되기 위해 절벽 가장자리에서 떨어지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곤란한 질문을 하고 사람들의 답변을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는 자세는 갖고 있어야 함
- 에피쿠로스에게 삶을 이해하는 열쇠는 우리 모두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었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는 되도록이면 고통을 피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삶에서 고통을 없애고 행복을 증진하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은 아주 단순한 생활방식을 택하고, 주위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친구들을 자기주변에 두는 것임. 그렇게 하면 대부분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임. 얻을 수 없을 것을 바라는 처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저택을 살 만한 돈이 없는데, 대저택을 소유하려는 절박한 욕망을 갖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삶 전체를 소모하지 말라. 단순하게 사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욕망이 단순하면 충족시키기도 쉽고 중요한 것들을 즐길 시간과 에너지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피쿠로스가 말한 행복의 비결이다
- 이 가르침은 일종의 치유법이었다. 에피쿠로스의 목적은 제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고, 과거의 쾌락을 기억함으로써 육체적 고통을 견딜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이란 그 순간에도 즐겁지만 나중에 기억할 때도 즐거우므로 우리에게 오래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음. 그 자신이 죽어가면서 다소 불안할 때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어떻게 과거에 나눈 대화의 즐거움을 되새김으로써 자신의 병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이것은 오늘알 에피쿠로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사뭇 다르다. 거의 정반대 의미다. 에피쿠로스에서 유래한 영어단어 epicure는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나 사치와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을 말함. 그는 절제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탐욕스런 욕구에 굴복하는 것은 더 많은 욕망을 만들어낼 뿐이고 결국에는 성취하지 못한 갈망의 정신적 고통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그런 삶은 피해야 한다. 에피쿠로스아 그의 추종자들은 색다른 음식보다는 빵과 물을 먹었다. 만약 비싼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면 곧 훨씬 더 비싼 와인을 마시고 싶어질 것이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덫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원 공동체에서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술잔치에서 먹고 마시고 섹스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주장. 에피쿠로스의 현대적 의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스토아학파라는 이름은 이 철학자들이 스토아라는 아테네 주랑에서 만나곤 했다는 데서 유래.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은 키프로스의 제논이었다. 초기 그리스 스토아학파는 실재부터 논리학, 윤리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들에 주목했다. 하지만 마음의 통제에 대한 견해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 스토아학파의 기본 사상은 우리가 바뿔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밖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 회의론자들처럼 스토아학파는 마음의 평정을 지향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처럼 비극적 사건을 마주할 때도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비록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우리의 통제 범위 안에 있지 않더라도 벌어지는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상이 스토아철학의 핵심. 우리는 행운과 불행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마치 날씨처럼 생각하지만, 그와 달리 스토아학파는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단순히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할 때 우리가 꼭 슬퍼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속일 때 반드시 화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감정이 추론을 흐리고 판단을 저해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감정을 통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 가장 유명한 후기 스토아학파 가운데 한 사람인 에픽테토스(55-135)는 처음에는 노예였음. 그는 많은 고초를 견뎌냈고, 고통과 굶주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심한 매질을 당한 탓에 절뚝거리며 걸었다. 육체는 노예가 되어도 정신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 그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었다. 고통과 괴로움의 대처방법에 관한 실제적인 조언을 담고 있는 그의 가르침은 이렇게 요약된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스토아철학은 베트남전쟁 중 북베트남 부근에서 격추당안 미국 전투기 조종사 제임스 B. 스톡데일에게 영감을 줌. 그는 수차례 고문을 당했고, 4년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지만, 대학에서 배운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적용해서 용케 생존. 그는 낙하산에 매달려 적지를 향해 떠밀려 가는 동안 아무리 가혹한 처사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짓에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결심. 스스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결코 상황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스토아철학은 그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너뜨렸을 고통과 고독을 견뎌내는 힘을 주었다.
- 나는 당신 말을 몹시 싫어하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는 사력을 다해 옹호할 것이다. (볼테르)
- 루소는 사회계약론 첫머리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매여있다'고 단언. 혁명가들이 이 문구를 외운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님. 프랑스 혁명을 이끈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도 이 문구에서 영감을 받음. 혁명가들은 부유한 자들이 수많은 가난한 자들에게 묶어 놓은 쇠사슬을 끊어내고 싶었다. 일부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주인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동안 굶주리고 있었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혁명가들은 가난한 자들이 충분한 먹거리를 찾을 수 없는 동안 부유한 자들이 보인 처신에 분노했다. 그들은 평등과 형제애와 더불어 진정한 자유를 원했다. 하지만 10년 전에 죽은 루소가 적들을 단두대에 보낸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찬성했을 것 같지는 않다. 반대 세력의 머리를 자르는 것은 루소보다 마키아벨리의 정신에 더 가까웠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의 천성은 선하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숲에서 살면 우리는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도시에 살게 하면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타인의 주목을 받는데 집착하게 된다. 이런 경쟁적인 삶의 방식은 심각한 심리적 영향을 미치고, 화폐의 발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질투와 탐욕은 도시에서 함께 산 결과었다. 야생에서 개개의 고귀한 야만인은 건강하고 강인하며 무엇보다 자유로울 테지만, 문명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 같다고 루소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이 성공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면서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를 조직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낙관했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제기한 문제는 모든 사람이 국가의 법은 지키면서 사회 밖에 있을 때만큼 자유롭게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이 되는 대가가 일종의 노예상태라면 너무 비싼 대가라서 치를 수 없을 것이다. 사회가 부과하는 엄격한 규칙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 규칙은 일정유형의 행동을 막는 쇠사슬 같은 것일 수 있기 때문. 하지만 루소는 해결책이 있다고 믿었다. 그의 해결책은 일반의지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일반의지는 공동체 전체, 국가전체를 위해 최선인 것이다. 사람들이 보호받기 위해 함께 모이기로 결정했다면 각자 자유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할 듯하다. 홉스와 로크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자유로운 채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알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을 견제하는 법과 일부 행동제약이 있어야 함. 하지만 루소는 국가안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동시에 국가의 법을 준수할 수 있으며, 이런 자유와 복종의 관념은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결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 만약 당신이 장밋빛 안경을 쓰고 있다면 시각적 경험의 모든 측면이 장밋빛으로 채색될 것임.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잊을수도 있지만, 안경이 당신이 보는 것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할 것이다. 칸트는 우리 모두가 이같은 필터로 세상을 이해한다고 믿음. 그 필터는 인간의 정신이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결정하고 그 경험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고,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 하지만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실재의 궁극적 존재방식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안경을 벗고 진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볼 수 도 없다. 우리는 이 필터를 떼어낼 수 없고, 그것이 없다면 결코 아무런 경험도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필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이 우리의 경험에 어떻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것뿐이다.
- 명법은 일종의 명령이다. 정언명법은 가언명법과 대조됨. 가언명법은 'x를 원하면 y를 하라'의 형식을 취함. '감옥에 가고 싶지 않으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가언명법의 예이다. 정언명법은 지시를 한다. 이 경우 정언명법은 간단히 '도둑질하지 말라'이다. 의무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명령이다. 칸트는 도덕성을 일종의 정언명법체계로 생각했다. 도덕적 의무는 그 결과나 그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의 도덕적 의무다
- 칸트는 우리에게 '절대 거짓말하지 말라'처럼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의무가 있다고 주장. 하지만 벤담은 우리가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은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로 귀결된다고 믿었다. 그 결과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거짓말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옳은 경우가 있다.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거짓말하는 것에서 더 큰 행복이 온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거짓말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다. 만약 친구가 당신에게 새로 산 청바지가 어울리는지 묻는다면 칸트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은 비록 친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이 아니라해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 반면 공리주의자는 가벼운 거짓말에서 더 큰 행복이 생겨날 것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만약 더 큰 행복이 생긴다면 거짓말은 올바른 반응이다.
- 공리주의는 18세기 말에 대두된 급진적 이론이었다. 그것이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행복을 계산하는 데 있어 모든 사람의 행복이 동등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벤담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사람은 한 명으로 간주되고, 어느 누구도 한 명 이상을 간주되지 않는다', 아무도 특별대우를 받지 않는다. 귀족의 쾌락은 가난한 노동자의 쾌락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당시 사회질서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토지사용방식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귀족들은 상원의원이 되어 영국의 법률을 결정할 권한까지 세습받았다. 당연히 일부 귀족들은 벤담이 평등을 강조한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아마도 그 당시에 훨씬 더 급진적으로 여긴 것은 동물의 행복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벤담의 믿음이었을 것임.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으므로 동물들도 벤담의 행복 방정식의 일부였다.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 이것은 헤겔의 관점이었다. 과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사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은 헤겔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헤겔의 저술이 지독히 어려운 이유는 칸트의 저술과 마찬가지로 추상적 언어로 표현되고 종종 스스로 만들어낸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 그 누구도, 어쩌면 헤겔조차 그 저술의 전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엉이에 대한 서술은 그나마 해석하기 쉬운 부분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밤이 되어서야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일어난 일들을 되돌아보고 있는 뒤늦은 단계에서야 인류 역사과정의 지혜와 이해가 온전히 나타날 것이라는 헤겔식 어법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위버멘시, 즉 초인에 대해 언급. 이는 관습적인 도덕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상상 속 미래의 인물을 묘사하고 있음. 다윈의 진화론을 이해하고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니체는 위버멘시를 인간발전의 다음단계로 보았음. 여기에는 다소 우려되는 점이 있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고, 타인의 이해는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더구나 나치가 지배민족이라는 왜곡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니체의 작품에서 가져와 사용한 개념이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니체가 말한 실제 의미를 나치가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니체가 정신이 이상해지고 나서부터 그가 죽은 뒤 35년이 될 때까지 그의 작품을 관리했다. 그 점에서 니체는 불행했다. 그의 여동생은 가장 극단적인 유형의 독일 민족주의자였으며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녀는 오빠의 노트를 뒤져서 자신이 동의하는 구절은 골라내고 독일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인종차별적 관점을 지지하지 않는 내용은 빼버렸다. 니체의 사상을 그녀 마음대로 짜깁기해서 발표한 '권력에의 의지'는 나치즘의 선전도구가 되었으며, 니체는 제3제국에서 인정받은 저술가가 되었다. 만약 니체가 더 오래 살았다면 나치즘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약자를 무너뜨리는 강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구절이 많다는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니체는 우리에게 양들이 맹금류를 싫어하는 것은 놀랄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양들을 노략질해서 잡아먹는 맹금류를 경멸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 형이상학은 우리의 감각 너머에 존재한느 실재를 탐구하는 학문을 설명할 때 쓰이는 단어이며, 칸트, 쇼펜하우어, 헤겔이 믿었던 철학사조다. 하지만 에이어에게 형이상학은 일종의 금기어였다. 그는 형이상학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에이어는 논리나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은 흔히 논리나 감각 어느 한쪽을 훨씬 뛰어넘어 과학적으로나 개념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실재들을 기술했다. 에이어에게 이런 형이상학은 전혀 쓸모가 없고 버려져야 할 뿐이었다.
- '언어, 진리, 논리'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당연했다. 에이어보다 나이가 많은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 대부분은 그 책을 몹시 싫어했고, 그 때문에 에이어는 일자리를 얻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철학사의 전통에서 철학자들이 수천년 동안 해온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몇몇 위대한 철학자의 업적들을 그렇게 드러내놓고 공격하는 책을 쓰는 것은 분명 용감한 일이었다. 의미있는 문장과 무의미한 문장을 구분하는 에이어의 방식은 이랬다. 어떤 문장이든 택해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질문을 하는 것이다.
(1) 그 문장은 정의에 의해 참인가?
(2) 그 문장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이 둘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 문장은 무의미했다. 이는 무의미함을 시험하기 위한 양면적 검사법이었다. 정의에 의해 참이거나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진술만이 철학자들에게 쓸모가 있었다. 이것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정의에 의해 참인 진술의 예는 '모든 타조는 새이다' 또는 '모든 남자형제는 남성이다'같은 것이다. 칸트의 용어로는 분석적 진술이다. 타조가 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직접 타조를 조사할 필요는 없다. 타조의 정의에 해당되는 조건이기 때문. 그리고 분명 여성인 남자형제는 가질수가 없으며, 어느 누구도 여성인 남자형제를 발견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음. 어쨌든 어느 시점에서 성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정의에 의해 참인 진술은 해당 용어에 내포된 조건을 제시한다. 그와 달리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진술(칸트의 용어로는 종합적 진술)은 진정한 진실을 전달한다. 진술이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려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보여주는 어떤 시험이나 관찰이 있어야 함. 예를 들어 누군가가 '모든 돌고래는 물고기를 먹는다'라ㄴ고 말한다면 우리는 돌고래 몇 마리를 잡아서 물고기를 던져주고 돌고래가 먹는지 확인하면 된다. 만약 물고기를 먹지 않는 돌고래를 발견했다면 우리는 그 진술이 거짓임을 알게 됨. 그것은 에이어에게 여전히 검증가능한 진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검증가능한'이라는 단어를 '검증가능한'과 '반증가능한' 두가지를 모두 망라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진술은 모두 사실에 입각한 진술이었다. 그것은 세계의 존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 진술들을 뒷받침하거나 뒤흔들 어떤 관찰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이 진술들을 살펴볼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만약 그 문장이 정의에 의해 참이지도 않고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지도 않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에이어는 단언했다.
- 실존주의는 다른 사람들이 샤르트르의 철학에 붙인 명칭이었다. 그 명칭은 우리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세계에 실존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런 다음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그와 반대일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주머니칼처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서례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샤르트르는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의 표현 방식에 따르면 우리의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데 반해 설계된 사물은 실존보다 본질이 우선한다.
- 시몬 드 보부아르는'제2의 성'에서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실존주의를 다르게 해석. 보부아르의 말은 여성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남성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었다. 남성이 기대하는 존재가 되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존재로서 여성은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여성은 본질, 즉 어떻게 존재한다고 선천적으로 주어진 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 실존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우리 존재의 부조리였다. 삶은 우리가 선택함으로써 그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다가 곧이어 죽음이 다가와 우리가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의미를 제거한다. 이에 대한 샤르트르의 해석은 이것을 인간존재를 쓸모없는 열정으로 묘사한 것이다. 즉 우리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선택을 통해 만드어내는 의미만 존재할 뿐이다. 소설가이자 실존주의와도 연관되어 있는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를 이용해서 인간의 부조리를 설명했다.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바위는 굴러 내려가고 시시포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는 이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시시포스의 노역과 같다. 아무런 의미가 없고, 모든 것을 설명해줄 답도 전혀 없다. 부조리하다. 하지만 카뮈는 우리가 절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살해서는 안된다. 대신 시시포스가 행복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왜 행복할까?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리는 무의미한 노고에는 그의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훨씬 낫다.
- 만약 한 과학자가 어떤 가설을 반박한다면, 즉 그 가설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 결과로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바로 그 가설이 거짓이라는 지식이다. 인류가 진보하는 것은 무언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가열했을 때 팽창하는 수많은 기체를 관찰한다고 해서 가설에 대한 확신이 조금 더 생기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지식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례는 실제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포퍼가 보기에 어떤 가설이든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반증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발상을 이용해서 과학과 그가 '유사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과학적 가설은 잘못이라고 입증될 수 있는 것이며, 거짓이라고 증명될 수 있는 예측을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요정들이 있어서 내가 이 문장을 타이핑하도록 시킨다'라고 말한다면 내 진술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관찰은 없다. 요정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면 요정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줄 방법이 없다. 그것은 거짓이라고 입증할 수 없으므로 전혀 과학적 진술이 아니다.
- 포퍼는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많은 진술이 이런 식으로 거짓임을 입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진술들은 시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예를들어 누군가가 모든 사람은 무의식적인 소망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고 말하면 그것을 증명할 시험은 없다. 포퍼에 따르면 무의식적인 소망에 의해 자극을 받는 것을 부인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증거 하나하나는 단지 정신분석이 타당하다는 추가 증거로만 받아들여질 뿐이다. 정신분석학자는 '무의식을 부정한다는 사실은 아버지에게 도전하고 싶은 강렬한 무의식적인 소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진술은 시험할 수가 없다. 그것이 거짓임을 보여줄 수 있는 상상가능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포퍼는 주장. 정신분석학은 과학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지식을 줄 수 없다. 포퍼는 마르크스의 역사 설명을 같은 방식으로 공격하며, 마르크르주의에서는 모든 가능한 결과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 마르크스의 설명 역시 거짓임을 입증할 수 없는 가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아주 오래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싱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공개적 발언을 할 때 위험을 감수한다. 그의 일부 강의을 두고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고, 그 자신이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음. 그럼에도 그는 철학의 가장 훌륭한 전통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끊임없이 기존의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철학은 그가 사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 싱어는 항상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공개토론을 할 각오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싱어가 자신의 결론을 충분히 조사가 이뤄진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논증으로 뒷받침한다는 것. 철학자로서 싱어의 성실함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결론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결국 철학은 토론을 바탕으로 발전한다.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논리와 증거를 이용해 논쟁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발전해나간다. 예를 들어 동물의 도덕적 위상이나 안락사가 도덕적으로 용납되는 상황에 대해 싱어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믿으며, 그 믿음을 사실이나 이유, 원칙으로 어떻게 뒷받침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여전히 있는 셈이다. 철학은 곤란한 질문과 어려운 도전으로 시작되었다. 피터 싱어처럼 등에 같은 철학자들이 건재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정신이 계속해서 철학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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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부모가 헤어지면서 새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14 집을 나와 무작정 런던에 갔고,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알아차렸고, 놓치지 않았습니다. 영국 출판사업가 펠릭스 데니스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난과 무학(無學) 설움을 딛고영국의 100 부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10일자 A26 기사 사업 성공을 위한 최고 자질은 끈기>는 데니스가 들려주는진짜 버는 방법 소개했습니다. “당신이 법치주의 국가에서 평균 수준의 지성을 갖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면, 어떤 것도 당신이 버는 일을 막을 수는 없다. 정말 돈을 벌고 싶은지, 성공하기 실패를 기꺼이 받아들일 있는지가 관건이다.”

돈을 버는 데는 여러 갈래 길이 있지만, 혼자 힘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나은 방법입니다. 거의 모든 부자가 기업을 일궈 사업을 성공시킨 사람들인 이유입니다. “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요구되는 능력은 한가지뿐이다. 인재를 알아보고, 고용하고, 키우는 능력이다.”

인재를 영입했으면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하고, 회사를 나가게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회사를 떠나지 않게 하려면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 급여가 우선순위는 아니다. 유능한 직원은 당연히 돈의 가치를 알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런 사람은 돈보다는 새로운 기회나 도전에 끌리는 경우가 많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뜻이 명료해집니다. “인재들은 그렇게 왔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만든 누구인가? 파라오일까, 기술자들일까? 생각해보라. 그리고 찾을 있는 최고의 인재를 찾아 고용하라. 파라오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의 중요성도 놓쳐서는 대목입니다. “건강, (), 심지어 사랑과 애정도 상황이 좋아지면 되찾을 있다. 하지만 시간은 절대 되돌릴 없다. 소중한 자원인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죄다.” 흔히()’이라고 부르는 것을 노력 없이는 만날 없다는 사실도 일깨워줍니다. “운이란 준비와 기회가 만나면 생기는 것이다.” 유명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연습을 많이 할수록 점점 운도 따랐다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끈기입니다. “자신감과 통찰력, 집중력, 절제력 성공의 기반이 되는 자질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어떤 자질도 끈기를 이길 수는 없다. 타고났든, 습득했든, 흉내를 냈든, 끈기가 다른 모든 자질을 뛰어넘는다.” 끈기 앞에서는 실패하는 것도 실패일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면서 실패한다. 하지만 실패는 포기했을 때의 일이다. 실패의 다른 이름은 경험이다.”

데니스의 성찰은 돈이 아닌삶의 성취 이루는데도 울림을 줍니다. “ 가지는 확실하다. 돈을 벌기 위해 행운을 바라는 소용없는 짓이다. 행운의 여신은 매우 비뚤어진 성격을 가진 같다. 행운의 여신은 행운을 별로 바라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고, 간절히 행운을 바라는 사람은 무시한다.” 그러므로행운의 여신을 무시하는 그녀를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랍니다. “요즘 말로밀당 필요하다. 행운에 의존하지 말라.”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이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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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계속 감사를 하면 상대가 기분이 좋아질 테지만
그로 말미암아 내 기분이 더 좋아진다.
더 큰 혜택을 보는 쪽은 다름 아닌 감사를 표현한 사람이다.
감사란 정말이지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낫다.
내가 감사를 표현한다면 그 이익이 곧장 나에게 돌아온다.
- 제니스 캐플런,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에서

 

남에게 베풀면 기분이 좋아지고 이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됩니다. 자주 감사해 하면 긍정적인 기분이 형성되고
그러면서 뇌경로가 강화되어 다시 더 긍정적인 기분이 생겨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최고의 미덕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미덕의 아버지다.”
키케로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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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강하다는 뜻이다.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하려고 한다면 성공을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하는 과정에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똑똑한 사람을 발굴해서 권한을 위임하고, 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끔 내버려둔다.
직원들을 더 많이 지원할수록 기업은 점점 더 건강하고 행복해진다.
- 리차드 브랜슨 버진 회장, ‘버진 다움을 찾아서’에서

 

리차드 브랜슨 회장은 난독증을 오히려 강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대신 남의 말을 경청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일을 처리하는 대신 자기보다 뛰어난 재능 있는 사람을 찾아
업무를 위임하고, 본인이 꼭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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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주제에 대해 토론이 끝나고,
‘반대 의견이 없이 모두 동의한다’고 대답하면 저는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 제 말에 집중하지 않으셨군요.
모두가 찬성하는 의견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모두 처음으로 돌아가 제 의견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라고 말이죠.
- 채널 MTV 설립자 밥 피트먼

 

반대의견 없이 만장일치로 빨리 토론이 끝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반대되는 의견들이 많이 나와 격하게 충돌될 때
더 나은 결론이 도출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탁월한 결과를 위해선 건설적 갈등은 필수조건입니다.
물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고
감정적 대응을 자제해야 함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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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검소함

etc 2020. 1. 15. 12:33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6일, 정조는 자신이 등극하기 전에 궁중에 있던 내시와 액정서 소속의 인원 108명과 궁녀들을 줄이라는 뜻밖의 하교를 하였다. 군주가 자신을 도와주는 내시와 액정서 소속의 인원, 여기에 더해 궁녀를 줄이라고 명령하는 것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매우 특별한일이다. 군주가 이런 일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와주는 내시와 궁녀는 많을수록 편한 것인데, 이들을 궁에서 대거 내보낸 것이다. 이때 정조가 내보낸 궁녀가 무려 300여 명이었으니 이는 왕실 궁녀의 반 가까이 해당되는 인원이었다. 내시와 궁녀의 수를 줄이다 정조가 이렇게 내시와 궁녀를 많이 내보낸 이유는 다름 아닌 국가 재정 때문이었다. 숙종대부터 시작된 기후 이상이 영조대까지 이어졌고, 그래서 영조는 재위 52년 중 40년을 금주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이 먹을 쌀도 부족한데 그 귀한 쌀로 술을 빚어 먹으면 안된다는 것이영조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영조는 잔혹하리만치 조정의 명을 어기고 술을 빚어 먹은 이들을 사형죄로 다스리기도 하였다. 이런 모습을 보았던 정조는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국가 전체로 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분명히 있었다. 정조가 즉위하고 국가 재정에 대한 전반적인 보고를 받았는데, 당시 호조 예산의 56%가 국방비로 사용되고 있었다. 쓸모없는 군대의 장수들 급여로 나가는 것을 정조는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양 일대의 군대 통폐합을 단행하는 구조조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가지고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는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적인 것은 공적인 것대로 해야 하지만 군주가 스스로 모범을 보여 재정 낭비를 막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국가 재정을 줄이는 검소함을 보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번째 지시한 것이 바로 내시와 궁녀를 대궐 밖으로 내보내 이들에게 지출되는 경비를 줄인 것이다. 내시와 궁녀들은 거의 정3품에 해당되는 관원들의 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을 대폭 감축하는 것은 국왕에게는불편한 일이지만 재정적 측면에서는 효과를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정조는 얼마 뒤에 하루에 2끼, 그리고 한 끼에 반찬을 5가지만 먹겠다고 선언하였다. 국왕의 아침과 저녁 수라는 고기와 반찬 11가지 이상이 들어가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소주방(燒廚房)에서 국왕의 건강을 생각해서 최고의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상례인데, 정조는 이를 거절하고 최소한의 식사만을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정조가 국왕으로 있는 24년간 내내 지켜졌다. 정조는 여기에 더해 비단옷을 입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 비단옷이 곤룡포와 강사포 말고는 없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정조는 무명옷을 입고 살았다. 뿐 만 아니라 옷이 해지거나 버선에 구멍이 나면 이를 버리지 않고 실로 꿰매 입었다. 한 나라의 군주가 옷과 버선을 꿰매 입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회 지도층이 검소하게 살아야 정조의 검소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거처하는 작은 방을 화려하게 하지 않고, 냇가에서 나는 부들로 만든 돗자리를 깔고 살았다. 창경궁 안에 있는 영춘헌이 하도 오래되어 비가 오면 빗물이 방안으로 스며들어 곰팡이까지 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를 개의치 않고, 신하들에게 “나는 천성이 검소한 것을 좋아한다”라고 하며 새로 도배를 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국왕이 검소하게 생활하니 자연스럽게 궁중의 모든 이들이 검소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이렇게 모은 돈은 궁중 재산으로 두지 않고 이를 모두 호조로 보내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게 하였다. 왕실 재산을 고리로 조정에 대여하여 이익을 얻은 한말의 군주 고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행동이다. 정조의 검소함을 가까이서 늘 눈으로 지켜본 정약용은 훗날 자신의 자식들에게 “거친 음식과 해진 옷을 부끄러워 하는 이들과 친구를 맺지 말라”고 하였다. 2020년 새해가 밝았지만 경제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사실 그러한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는 것도 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사치가 만연하면 국가와 사회는 올바르게 발전할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사회 지도층이 정조처럼 더욱 검소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검소함을 통해 얻은 이익을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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