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전문가인 사람은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모른다’고 말하라.
‘모른다’는 말은
솔직한 사람과 전 세계에서 꾸준히 높은 성과를 거두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암호나 경구라 할 수 있다.
- 마크 C. 톰프슨, ‘일은 사랑이다’에서

 

심리학자에 따르면 “난 알고 있어”라고 자주 말하는 사람들은
사교성이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반면 망설임 없이 “잘 모르겠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지닌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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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류의 자원 봉사는 훌륭하다.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봉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한 일은 무엇이든 열 배로 돌아온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백 번 돌아온다.
- 마셜 골드스미스

 

‘사람은 베푸는 만큼 부유하다.
훌륭하게 봉사하는 사람은 훌륭하게 보상 받는다.’
앨버트 하버드의 글 함께 보내드립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더 많이 줄수록 더 행복해집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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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다.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용서다.
용서의 결과는 타인이 아니라 늘 나를 향한다.
용서하지 않는 한 내 몸과 마음은 분노와 상처에 꼼짝없이 갇혀 있게 된다.
우리는 받은 상처 때문에 그토록 수많은 시간을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몸부림으로 숱한 밤을 뒤척이고 있을 뿐이다.
- 웨인 다이어,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에서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말해집니다.
그만큼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모든 미덕의 왕후다’라는 말처럼,
용서를 하면 내 자신이 먼저 치유됩니다.
결국 용서는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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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감사표시를 받게 되면
남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려는 확률이 두 배로 늘어난다.
훌륭한 리더는 기꺼이 감사할 줄 안다.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누군가가 내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한다.
직장인의 81%는 감사를 잘 표현하는 상사 밑이라면
일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응답했다.
- 애덤 그랜트 교수

 

감사하고 베풀면 결국 큰 인물이 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가치 있다고 느끼고 싶어하며,
자신이 한 노력에 타인이 감사를 표현하면
더 창의적이고 적극적이며 끈기 있게 일합니다.
감사 표현은 직장에서 유일하게 오래 지속하는 동기부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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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ㅈ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 원시공동체의 경우, 농부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얼마 안되는 잉여를 전사와 사제들에게 나눠주기보다 차라리 잉여가 생기지 않도록 생산을 줄이거나 소비를 늘렸을 것이다. 처음에, 전사와 사제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농부들을 생산케 하고 잉여를 내놓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한 대가의 일부가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로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농부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방법을 쓰게 되자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지고 따라서 지배에 드는 비용도 줄어들었다. 오늘날까지도 왕이 근로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려선 안된다고 주장하면 영국의 임금생활자의 99%가 아마 큰 충격을 받을 것임.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남자의 평일 근로시간이 15시간이었다. 아이들도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 게 보통이었고 어른만큼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동시간이 약간 긴 것 같다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제넘게 제의했을 때 되돌아온 대답은, 일이 어른들에겐 술을 덜 먹게 하고 아이들에겐 못된 장난을 덜 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도시 근로자들이 막 투표권을 따낸 직후였는데 몇몇 공휴일이 법으로 정해지자 상류층에서 대단히 분개했다. 나는 한 늙은 공작부인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가난뱅이들이 휴일에 뭘 한다는 거지? 그 사람들은 일을 해야만 한다구"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보단 덜 노골적이지만 그 정서는 그대로 남아 경제적 혼란의 뿌리가 되고 있다.
- 모든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노동의 결과물을 일정량 소비하게 되어 있다. 노동이란 것을 전반적으로 불쾌한 것을 여긴다면, 자신이 생산하는 것 이상으로 소비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물론 의료인치럼 상품대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먹고 자는 데 따르는 대가로 뭔가를 제공해야만 한다. 이 정도 선이라면 근로의 의무를 받아들여 마땅하다. 그러나 오직 이정도까지만이다.
- 농부들의 무도회는 외진 시골지역들을 제외하곤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을 도야시켜주던 그 충동은 여전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남아 있음에 틀림없다.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은 대체로 수도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영화를 보고, 축구시합을 관전하고, 라디오를 듣고 하는 식이다. 여기가 더 있다면, 그들은 과거 적극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맛보았던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 과거에는 여가를 즐기는 계층은 소수였고 일하는 계층은 다수였다. 유한계층이 누리는 편의는 사회정의란 측면에서 볼 때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 결과 유한계층은 압제적으로 되어갔고 자기들만의 공감대 내로 좁혀지고,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들을 만들어 내야 했음. 이 같은 점들은 이 계층의 우수성을 상당히 위축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 계층은 이른바 문명이란 것을 담당하가는 공헌을 했다. 예술을 발전시키고 과학적 발견들을 이루었다. 책을 쓰고, 철학을 탄생시키고, 사회적 관계들을 세련시켰다.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 운동조차도 흔히 위로부터 일어난 것이었다. 유한계층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결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의무를 지우지 않은 채 유한계층을 대대로 세습하는 것은 엄청난 낭비다. 이 계층의 구성원 그 누구도 근면하라고 가르쳐지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이 계층이 전바적으로 유별나게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이 계층에서 어쩌다 다윈 같은 사람이 하나 나왔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여우 사냥이나 하고 밀렵자를 벌 주는 일 이상의 지적인 일에 대해서 생각조차 해본 적도 없는 시골 신사들이 수만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 현대의 생산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왔다. 지금가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 짜증들이 많은 사람의 좋은 성격과 즐거운 인생을 망쳐 놓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순간의 문젯거리와 약간의 연관이 있을 뿐인 동 떨어진 지식에서 의외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설사 그 문제와 아무 연관이 없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골칫거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격분해서 안색이 하얗게 된 사람이 마구 공격해 올 때는, 데카르트의 '열정에 관한 논문'에 나오는, '분노로 안색이 하얘지는 사람이 안색이 빨개지는 사람보다 두려움을 더 많이 타는 이유'란 제목의 장을 돌이켜보면 즐거워질 것이다. 국제적 협조를 확보하기 어려워 초조해질 때는, 성인 대접을 받는 국왕 루이 9세를 떠올리면 초조감이 줄어들 것이다. 루이 9세가 십자군 성전에 들어가기 전, 세상 사악함의 절반들 대표하는 어두운 배경인물로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산노인과 제휴했던 일 말이다. 자본가의 약탈이 자꾸 심해져 압박감을 느낄 때는 브루투스를 생각하라. 지조있는 공화주의자의 본보기로 알려진 부루투스가 한번은 한 도시에 40%의 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는데 이자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자 그는 돈을 풀어 사병들을 고용해 그 도시를 포위했던 것이다. 진기한 지식은 불쾌한 일을 덜 불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즐거운 일을 더 즐겁게 만들어 준다. 나는 복숭아와 살구를 즐기는 데 그것들이 맨 처음 중국에서 한 왕조 초기에 재배되었다는 것, 카니스카 대왕에게 볼모로 잡혀온 중국인들이 그 과실을 이녿에 소개한 이후 페르시아로 퍼져나갔으며 기원 후 1세기에 로마제국에까지 당도했다는 것, 살구가 일찍 익는다고 해서 apricot이란 말이 precocious(조숙한)란 말과 동일한 라틴어 어원에서 파생됐다는 것, 그런데 어원을 잘못 아는 바람에 실수로 a자가 맨 앞에 덧붙여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 현재의 세계는 상난 자기 중심적 집단들로 꽉 차 있다. 이들은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할 뿐 아니라 한발 양보하는니 차라리 문명을 파괴시키고 말겠다는 태세들이다. 이 같은 편협증에는 아무리 많은 과학기술적 지식으로도 해독제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개인 심리에 국한된 편협증이라면 역사, 생물학, 천문학 및 자존심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당한 시각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해줄 수 있는 모든 학문들에서 해독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여기에는 예술, 역사, 영웅적인 사람들의 인생 접하기, 우주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한심할 정도로 우연적이고 하루살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 특유의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해하고 아는 힘, 도량있게 느끼는 힘, 올바르게 사고하는 힘을 키워준다. 비개인적인 감정과 결합된 폭넓은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지혜가 솟아나오는 것이다. 어느 시대든 인생은 고통으로 차 있었지만 앞선 두 세기보다 우리 시대의 인생이 더 고통스럽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면 인간은 하찮아지고, 자기기만에 빠지게 되고, 엄청난 집단 신화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적인 완화책은 장기적인 고통의 근원만 증가시키는 꼴이다. 개인적 불행이든 공적인 불행이든, 의지와 지성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극복될 수 있다. 의지에는 약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됨.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 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 사람들은 아무리 싸우고 살아도 '가정'이란 프라이버시를 좋아하며 그 안에서 자존심과 소유욕의 충족을 찾는다. 과거 수도원들에서 볼 수 있었던 독시주의적 공동생활에서는 그런 문제가 야기되지 않았다. 결국 프라이버시 본능을 초래하는 것은 결혼과 가정이다. 나는 이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 이따금 가스 곤로로 뭘 만들어 먹는 정도 이상의 개별취사가 정말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데 익숙한 사람들을 위해선 자기 가구가 딸린 개인아파트 하나면 족하다. 개인적인 습관을 바꾸기란 언제나 어려운 법. 하지만 독립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바람이 존재하는 한, 점차 더 많은 여성들이 밖에 나가 생계비를 벌어오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며, 그것이 역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본 이런 제도를 바람직해 보이게 만들 것이다.
- 독일의 배상문제가 우리 불행의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연합국측이 미국에 지고 있던 빚도 한 원이이 되었으며, 그보단 규모가 작긴 해도 높은 관세벽이 채무자와 채권자를 갈라 놓고 있어 상품으로 지불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적, 공적인 모든 부채들도 원인이었다. 독일의 배상문제가 불행의 전적인 원인이라곤 결코 할 수 없지만 사고의 혼란이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 가장 극명한 예임에는 분명하다. 우리의 불행을 초래한 사고의 혼란은 소비자의 입장과 생산자의 입장에 대한 혼란이다. 배상금을 부과할 당시 연합국측은 스스로를 소비자로 간주했다. 독일인들이 생산한 것을 소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즐거워했던 것.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이 확립되고 난 후 그들은 자신들 역시 생산자라는 것과 자신들이 요구로 만들어진 독일의 상품들이 유입되면 자신들의 산업이 피해를 보게 되리란 점에 생각이 미쳤다. 대단히 당황한 그들은 그제야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합국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앉아 국제회의란 것을 열어 보아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세계를 다스리는 우두머리들이 너무도 무지하고 어리석어 그러한 문제를 철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과 게다가 자만심이 강해서 도와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하기 위해 연합국측의 한 나라를 한 개인, 이를테면 무인도에 살고 있는 로빈슨 크루소라 가정해 보자.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해 그에게 모든 생필품을 공짜로 제공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가 앞에선 본 강대국과 같은 자세로 나온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오, 나한테 석탄을 가져오지 마시오. 그러다간 장작 줍는 내 산업이 망할 테니까. 빵도 가져오지 마시오. 내 농사가 망쳐질 것이고 원시적이긴 하지만 내가 발명한 제분기도 쓸모 없어질 테니까. 내게 옷을 가져오지 마시오. 내겐 짐승가죽으로 옷을 만드는 초기 산업이 있으니까. 금을 가져오다면 상관없소. 그건 나한테 아무런 해도 주지 않을 테니까. 난 금을 지하실에 넣어 두고 어디에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배상하는 건 그 어떤 것도 받지 않겠소" 가상의 로빈슨 크루소가 이렇게 말했다면 우리는 그가 고독하게 살다보니 정신이 돌아버렸나 보다고 생각할 것임. 하지만 이 이야기는 세계 주도국들이 독일에게 한 말 그대로다. 한 개인이 아닌 한 나라가 정신이 나갔을 땐 마치 산업면에서 대단한 지혜를 발휘한 것처럼 여겨진다.
- 소수가 다수를 능가하는 힘을 획득하는 경우 그들은 어김없이 다수를 지배하는 일정한 미신의 도움을 받아왔다. 고대 이집트에서 일식과 월식현상이 당시 대중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을 때 사제들이 그것을 예견하는 방버을 발견해냈다. 결국 사제들은 다른 방법으론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공물과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왕들은 신성한 존재였고, 따라서 찰리 1세의 목을 자른 크롬웰은 신성 모독의 죄를 지은 것으로 여겨졌음. 우리 시대의 금융업자들은 금을 숭배하는 미신의 도움을 받고 있음. 금 준비금이니, 어음발행이니,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리플레이션, 기타 온갖 전문용어들을 나열하면 보통 시민은 놀라서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 청산 유수로 말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똑똑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느끼면서 그들의 말에 감히 의문조차 품지 못한다. 보통 시민에게 금의 기능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대단히 당황하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금이 차지하는 역할이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막연히, 자기 나라가 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더 안전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금 준비금이 증가했다고 하면 기뻐하고 줄었다고 하면 서운해한다. 일반대중의 이러한 어리석은 면은 금융업자가 민주주의에 구속되지 않고 활동하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다. 물론, 그에겐 여론을 다루는 데 필요한 이점들이 그밖에도 많다. 그는 엄청나게 부자이기 때문에 대학에 재산을 기부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학여론에 가장 큰 영향력 있는 부분을 자신의 편으로 확실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는 금권 정치의 우두머리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찬 정치사상을 가진 모든 이들의 지도자가 된다. 경제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는 전 국가들을 골라잡아 흥망을 분배할 수 있다. 그러나 미신의 도움이 없다면 이러한 무기들 중 어느 것도 충분치 못하다.
- 어느 정도 만연된 회의주의는 지적 원인보다는 사회적 원인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 주요원인은 언제나 힘이 없는 것에 대한 위안이다. 힘을 가진 자들은 냉소적이지 않다. 자신들의 사상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압제의 희생자들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증오란 것은 다른 강한 열정들과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일련의 믿음들을 수반하기 때문. 교육과 민주주의와 대량 생산이 등장히기 전까진 어느 곳에서나 지식인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수뇌들이 쓰러졌더라도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인들은 대단히 달라진 상황에 처해 있다. 선전가가 되거나 법정의 어릿광대가 되어 어리석은 부자들에게 서비스를 팔 마음이 있다면야 좋은 일자리와 높은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결코 힘들진 않다. 대량생산과 초등교육으로 인해 어리석음이 문명의 발흥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 바람직한 것은 복종도 반항도 아니며, 선한 본성과 사람들 및 새로운 사상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의다. 이러한 자질들은 부분적으로 선천적인 기질에서도 기인하지만, 활기찬 충돌들이 저지되었을 때 생겨나는 좌절된 무력감으로부터의 해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이들이 호의적인 어른들로 자라날 수 있기 위해선 자신의 주변을 호의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자면 아이의 중요한 소망들에 어느 정도 공감해 주어야 하고 아이들을 단지 신의 영광이나 국가의 위대함 따위의 추상적인 목적에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또한 가르칠 때도 아이가,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 지식이 진실일 때 말이다. 학생이 적극적으로 협조할 때 학습의 속도는 두 배로 빨라지고 피로감은 반으로 줄어든다. 이 모든것들이 많은 자유가 필요한 명백한 이유가 된다.
- 모든 중대한 혁신은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어쩌다 우연히 살아남는 데서 가능했다. 케플러는 점성술로 살았고 다윈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살았으며, 마르크스는 엥겔스가 맨체스터의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해서 보내주는 돈으로 살았다.
- 부자들의 실업은 또다른 종류의 해악이다. 세상엔 놀고 먹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대개는 여자들인데 그들은 별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돈은 많아서 자만심이 강하다. 또한 돈이 많기 때문에 자신들이 안락을 위해 타인들의 노동력을 바치게 만들 수 있다. 스스로의 진정한 문화 따윈 거의 없지만 그들은 예술의 주요 후원자 역할을 자처한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데도 쓸모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비현실적인 감상주의로 만들기 때문에 활기찬 성실성을 싫어하게 되고 따라서 문화에 개탄스러운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돈을 버는 남자들은 대개 그것을 쓸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쁘기 때문에 부를 키워가는 기술이 있는 남편을 두었다는 것 외엔 존경받을 아무 자격도 없는 여자들에 의해 문화가 크게 좌우되고 있다. 예술하기엔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더 유리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과거의 귀족정치만 생각했지 현재의 금권정치는 생각지 못하고 하는 이야기다. 노는 부자들의 존재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불행한 결과들을 낳는다. 현대의 주요 산업은 작은 기업 여러 개보단 큰 기업 몇 개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이러한 추세에서 벗어난 경우들도 여전히 많음. 런던에 있는 불필요한 작은 가게들을 한 번 생각해 보라. 부잣집 여자들이 쇼핑하는 지역을 가보면 모자 가게가 수도 없이 많다. 주로 러시아 백작부인들이 지키고 앉아 있는 이 가게들은 저마다 다른 가게들보다 좀더 고상한 척한다. 그들의 고객들은 이 가게 저 가게 옮겨다니며 몇 분이면 살 것을 수시간씩 낭비한다. 가게들에게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력과 거기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의 시간, 모두가 낭비되고 있다. 보다 심각한 해악은 다수 사람들의 생계가 무익한 것에 묶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소비는 그에 기생하는 인구들을 다수 양산하게 된다. 그들 자신은 부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상품을 사주는 게으른 부자들이 없으면 자신들이 망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힘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게 의존해 삶으로써 그들은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예술적으로 고통받는다.
- 자신이 속한 문명을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 확실한 수단이 있다. 바로 여행, 역사, 그리고 인류학이다. 그러나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생각만큼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여행자는 자기가 관심 있는 것만을 본다. 예를 들어 마르코 폴로는 중국 여인들의 발이 작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따라 역사적 사건들을 정리한다. 이를테면 로마 몰락의 원인으로 제국주의 기독교, 말라리아, 이혼, 이주민의 유입 등등 여러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되어 왔다 .이 중 이혼과 이주민의 유입은 각각 미국의 목사들과 정치인들이 선호하는 이유들이다. 인류학자는 그 시대의 지배적 편견에 따라 사실들을 선정하고 해석함. 늘 집에 박혀 있는 우리가 미개인에 대해 뭘 알겠는가? 루소주의자들은 그를 숭고하다고 하고 제국주의자들은 그를 정숙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반면 이혼법 개혁주창자들은 그가 자유 연애주의자라고 말한다. 제임스 프레이저 경은 그가 늘 자신의 신을 죽이고 있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종교입회 의식들로 늘 바쁘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이 미개인은 인류학자들의 이론에 따라 무엇이든 되는 친절한 녀석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여행과 역사와 인류학은 그래도 가장 좋은 수단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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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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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 시대는 주요한 두가지 혁명으로 특징지어짐. 하나는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의 전환이고, 또 하나는 농업혁명. 지금가지는 농업혁명이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며 주목받아왔지만, 사실 농업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혁명은 '정착생활을 할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 일정한 거주지에 공동체가 모인 까닭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렇게 모임으로써 사회적 스트레스가 생겨남. 당연히 신석기 시대 이전이라면 모르고 넘어갔을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일단 스트레스 문제를 해결하면, 훨씬 더 큰 공동체가 등장할 가능성이 열렸다. 그때부터 도시형태의 공동체와 올망졸망한 왕국이 등장했고, 결국에는 현대 국가형태의 방대한 공동체를 태어나게 한 전반적인 역사적 진보가 뒤따랐다.
- 의도성 층위가 높은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전전두피질의 안와전두영역이 더 넓다는 점이다. 사회적 뇌는 정말, 진짜로 사치스럽다. 의도성을 발휘하는데 동원되는 신경물질의 부피가 어떤 한 개체가 갖는 의도성 층위와 정비례하므로, 더 높은 의도성 층위에서 정신활동을 해야 하는 종들의 뇌는 더 클수밖에 없다. 물론 전두부위가 유인원 영장류의 뇌에서도 가장 최근에 진화한 부분이고, 이 부위가 가장 큰 종이 가장 복잡한 사회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함. 또한 뇌의 여러 부위 중에서 마지막으로 미엘린구조를 획득한 부위로, 이는 복잡한 사회집단을 운용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학습과 신경적응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 수잔 슐츠와 키트 오피는 매우 정교하게 발전한 통계학적 기법을 이용하여 조상들이 처했던 상황을 추측하고, 사회조직화와 다른 선택압들 사이의 역사적 상관관계를 다룬 가설들을 검증.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상들은 각기 분산된 개체별 영역 안에서 고립적 수렵-채집을 하던 상황에서 일부일처제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복수의 수컷과 복수의 암컷으로 이루어진 군거성 사회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쉽게 말해서 개체별로 독립적 영역생활을 하다가 곧바로 집단의 형태로 모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 추측컨대, 이는 점점 더 (야행성에서 주행성 생활방식으로 전환됨에 따라) 증가한 포식위협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복수의 수컷과 복수의 암컷으로 구성된 초기의 군거성 집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하렘형태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일부일처제를 택하는 것. 하렘기반의 집단을 형성했다가 다시 일부일처제를 택하는 2차 탈출 경로도 생각해볼 수 있음. 한 종이 일단 군거성 집단을 형성한 후에는 반고립적 상태로 회귀할 수는 없었지만, 하렘과 복수의 수컷 상태 사이에는 수시로 전환이 일어났다. 하지만 정말 중대한 발견은 일부일처 혼이 막다른 골목이었다는 사실. 일부일처제에 적응한 후에는 어떤 종이든 그 형식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함. 사실 인구학적 면에서도 그렇지만 인지적 측면에서도 일부일처제는 일종의 종착지인 것처럼 보임. 아마 일부일처 동반자 관계에 대한 인지적 요구가 너무 커진 탓일 텐데, 일단 뇌가 그 요구에 따라 재편성된 후에는 쉽사리 원상태로 돌아가지 못했다. 일부일처혼이 유지되려면 수컷 개체와 암컷 개체가 서로에 대해 매우 관대해져야 하는 한편, 집단 내 다른 동성개체에 대해서는 매우 편협해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일부일처제 형식을 채택한 영장류 집단에서는 일부일처 쌍이 늘 자신들만의 배타적 영역을 차지하면서 세력권을 형성. 동성개체에 대한 편협성은 일부일처제를 채택하지 않은 포유류에서는 꽤 드문 현상임. 동성개체, 특히 성숙기에 이르러 생식능력이 왕성해진 동성개체는 이런 편협성 때문에 함께 어울려 살기가 몹시 어려움. 따라서 몇몇 조류와 포유류의 경우처럼, 의무적 일부일처제는 진화론적으로 매우 특수한 상황임이 분명하고, 이런 상황이 행동과 인지에 주요한 변화를 요구했을 것으로 보임. 이런 의무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은 후에는 원상태로 복귀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행동과 인지적 변화를 무효로 하기 어렵기 때문. 차후에 논의할 남녀 한 쌍 관계의 진화에도 이런 인과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 일부일처제가 진화적으로 매우 특수한 역사를 가진다는 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사회구조로서든 짝짓기 전략으로서든 왜 하필 일부일처제가 발달해야만 했을까? 수년 동안, 포유류의 일부일처제와 관련해서 세가지 가설이 제기됨.
(1) 큰뇌를 가진 후손을 양육하기 위해서 두 부모가 필요하다는 양친양육의 필요성.
(2) 수컷의 짝 보호성향. 특히 암컷 개체가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어서 수컷개체가 한 번에 한 마리 이상의 암컷 개체를 보호할 수 없는 경우, 수컷은 적어도 생식기에 있는 암컷 한마리 만이라도 수태시키려고 그 하나를 독점하고 다른 수컷이 넘보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
(3) 영아살해위험, 즉 암컷 개체가 자신을 괴롭히거나 자신의 새끼를 죽일수도 있는 다른 수컷에게서 자신을 방어해주는 보디가드나 살인청부업자로 이용하기 위해서 수컷개체 하나를 독점한다는 가설. 영장류의 영아살해 위험이 꽤 오랫동안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 까닭은 영장류의 큰 뇌가 결과적으로 번식률을 떨어뜨리기 때문. 다른 수컷에게서 암컷을 빼앗은 수컷이 자신의 후손을 보려면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음. 하지만 수컷이 암컷의 갓 낳은 새끼를 죽인다면 그 암컷은 금방 생식이 가능한 상태로 회복되기 때문에, 수컷은 그 즉시 생식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수컷 영장류에게 영아살해 행위가 강력한 선택압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영장류에서 영아살해가 놀라우리만치 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또한 이 선택압은 영아살해 위험을 완화하거나 줄이기 위한 대응전략에 대해서도 똑같이 강력한 선택압을 일으킬수도 있음
- 요점은 사회적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암컷 개체가 받는 스트레스가 증가했고, 수컷개체는 서로 경쟁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만약 이런 스트레스와 경쟁의 암박을 제거할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새로운 서식지를 점유하기는 커녕 더 큰 뇌를 가진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수도 없을 것임. 특히 기후변화로 인해 호의적이었던 서식지들이 급격히 사라지는 상황에서는 멸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임. 하지만 알다시피, 그들은 살아남았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은 문제를 해결했다. 이 결과에서 우리는 인간 진화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는 두 가지 기본원칙을 추렴할 수 있다. 바로 뇌 크기와 시간예산 분배다. 뇌 크기는 환경조건에 대응한 사회집단의 규모를 결정하고, 집단의 규모와 환경조건은 시간예산을 조정해야 할 요구를 가중한다. 새로운 진화단계로 도약하려면 이런 요구를 충족해야만 했을 것이다.
- 뇌 조직은 오로지 성장기 동안에만 일정한 속도로 발달하기 때문에, 더 큰 뇌를 가지고 싶다면 뇌가 발달하는 시간을 늘리는 수밖에 없음. 지름길은 없다. 다시 말해, 적어도 포유류에서 뇌를 더 크게 진화시키려면 임신과 수요기간을 늘려야 한다는 의미. 그리고 프로그램이 없으면 컴퓨터가 무용지물이 되듯, 뇌가 역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의 미묘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려면 사회화 기간을 더 늘려야 함. 인간을 대상으로 한 뇌 영상연구가 보여주는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뇌가 복잡다단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되기까지는 무려 20년에서 25년이나 걸린다. 뇌는 성장과 유지에 엄청난 비용이 드는 사치품이다. 인간 성인의 경우 매일 섭취하는 전체 에너지의 약 20%를 뇌가 소비함. 우리 몸무게에서 고작 2% 밖에 차지하지 않는 뇌가 전체 열량의 20%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분주하게 처리할 때의 에너지 비용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그저 뇌를 살아있게 만드는 데에만 무게 대비 예상치보다 10배가 넘는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러므로 이런 뇌에 연료를 공급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식량을 획득하려면 효율적인 수렵-채집 전략들이 절실해질 수밖에 없음. 일부 식량은 한 종이 뇌를 더 크게 진화시키기 위한 식량으로 이용하기에는 영양도 빈약하고 소화시간도 지나치게 길다. 즉 식단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특정한 식단이 한 종의 인지활동, 궁극적으로는 사회활동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식물섭취는 일종의 회색천장이라 볼 수 있다. (뇌의 회색물질 부분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원숭이와 유인원은 전전두엽피질 부위에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진화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포유류와는 다름. 신경심리학자 딤 패싱햄과 스티븐 와이즈는 함께 쓴 독창적인 책에서 전전두엽 부위가 유인원 영장류에게만 있는 새롭고 정교한 인지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수시로 일어나는 인과를 비약적으로 추론하는 능력, 행동이 야기할 결과들을 계획하고 비교하는 능력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 개코원숭이 속은 구세계 모든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덜 익은 과일을 소화할 수 있지만, 유인원은 그렇지 못하다. 소화력의 차이 때문에 유인원들은 부득이하게 잘 익은 과일을 공급해줄 지역을 찾아 더 멀리 이동해야 함. 따라서 채집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서식지의 고갈속도가 빨라질수록 유인원은 이동에 더 많은 시간을 분배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개코워눙이 속은 덜 익은 과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 덕택에 자주 이동할 필요가 없어 한 서식지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은 유인원보다 골격구조에 따른 제약도 덜 받으며, 상대적으로 긴 개코원숭이 속의 다리와 발은 육상에서의 빠른 이동에 더 적합하다. 이 두 속이 서로 다른 지역에 분포하는 까닭도 대부분 골격구조와 소화력의 차이에 기인한다. 특히 아프리카 유인원의 분포가 열대 숲과 잘 익은 말랑한 과일이 풍부한 적도 인근의 협소한 지역에 제한된 까닭도 이 때문이다.
- 영장류가 뇌에서 엔돌핀을 활성화하려면 그루밍을 통한 신체적 자극이 필요함. 그리고 이런 엔돌핀 활성화가 유대감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임. 그런데 동시에 몇 명의 사람에게 그루밍을 해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한 가지 행동이 있다. 인간과 대형 유인원은 웃을 수 있다. 유인원의 웃음은(보통 놀이의 맥락에서 웃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날숨가 들숨이 연쇄적으로 반복되는 데 반해, 인간의 웃음은 들숨 없이 날숨만 반복된다. 유인원은 숨을 내뱉은 후에는 반드시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그래야 폐를 비우지 않고, 횡경막과 흉벽 근육에 가해지는 압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간은 웃을 때 날숨을 빠르게 반복하면서 폐를 비우기 때문에 한바탕 웃고 나면 숨이 차다. 수차례의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듯, 웃을 때 흉벽 근육에 가해지는 압력은 엔돌핀을 활성화한다. 따라서 웃음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일종의 그루밍 효과를 냄으로써 한 번에 여러 개체에게 엔돌핀 분비 효과를 유도할 수 있다. 뇌에서 엔돌핀 활성화를 유도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 가운데 특히 전염성이 강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웃음은 완벽한 후보다. 똑같은 코미디 영상을 볼 때도 여러 사람과 함께 보면 혼자서 볼 때보다 30배나 더 많이 웃는다. 실제로 웃음은 매우 본능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이 웃고 있을 때 혼자만 정색하고 있기는 어렵다. 심지어 웃음을 유발한 농담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자연스럽게 따라 웃는다. 웃음은 시쳇말로, 떼창의 원형이다. 웃음이 본능적인 행동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그 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꼭 말로 하는 농담이 아닌 것에도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이유가 웃음의 진화가 시기적으로 매우 일렀음을 방증한다.
- 초기 호모종들은 단순히 침팬지의 습성에서 영역이 더 넓어지고 집단이 확장된 수준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초기 호모종들이 동맹방어를 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초기 호모동들이 충분히 협동하여 방어할 수 있었던 영역을 뇌 크기에 따른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갑자기 더 확장하여 큰 공동체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뚜렷한 동기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동맹하여 짝짓기 영역을 방어하는 침팬지 수컷의 동료애가 언제까지나 마냥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침팬지나 개코원숭이와 같은 난혼 짝짓기 시스템을 가진 집단은, 최고 서열의 수컷이라도 일단 집단 애 다른 경쟁수컷이 다섯 마리가 넘으면 자신의 암컷과 다른 수컷이 짝짓기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한 집단내에 암컷의 수가 얼마이든 상관없이, 경쟁 수컷의 수가 많아질수록 최고 서열 수컷이 암컷을 독점하는 능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집단 내 모든 암컷에 대한 접근을 방어하는 대신, 이 수컷은 발정기에 이른 개별적인 암컷에 집중하려 한다. 만약 동시에 두 마리의 암컷이 발정기에 이르면, 이 수컷은 둘 중 한마리를 다른 수컷에게 바로 인계한다. 침팬지뿐만 아니라 개코원숭이와 마카크원숭이에게도 이런 패턴이 관찰됨. 즉 이 패턴은 이합집산의 사회성이라기보다, 지배 수컷이 신경써야 하는 경쟁 수컷의 숫자에 따른 단순한 결과다. 서열이 높은 수컷이 그 집단 내에서 여러 마리의 수컷을 용인하고 암컷을 기꺼이 공유하는 경우, 여기에는 필시 어떤 강압적 동기가 작용하며, 그 동기는 집단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 분명함. 그 강압적 동기가 포식위헙이 아니라면, 침팬지가 늘 겪던 동종의 습격에 대한 방어이거나 아니면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식량자원에 대한 접근기회일 것이다. 초기 호모종들이 이것 중 어떤 동기 때문에 더 큰 공동체를 이뤄야 했고, 따라서 더 큰 뇌가 필요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초기 호모종들이 일부다처제를 따랐다는 것이다. 성적 이형태성의 수준은 (약 1.25) 대부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속보다 약간 더 낮지만 현생인류보다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며, 일부다처제나 난혼을 따랐을 확률이 매우 높았음을 암시. (침팬지와 개코원수잉의 경우처럼)남성이 생식기에 이른 여성에 대한 접근을 놓고 서로 경쟁했는지 아니면 (겔라다원숭이와 개코원숭이 또 어쩌면 고릴라처럼) 여성이 지배적인 남성이 독점하는 하렘으로 분산되었는지, 성적 이형태성 수준만으로는 확실히 알 수 없음.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경우에도 그랬듯, 어쩌면 이들의 채집집단이 얼마나 크고 분산되었는냐에 따라 짝짓기 패턴이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침팬지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다소 큰 규모의 공동체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부다처제의 양상을 띠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결론인 것 같다.
- 호모에르가스테르(760cc)와 호모에렉투스(930cc)에 이어 뇌크기도 꾸준히 증가해서 하이델베르겐시스에 이르러서는 평균 1170cc까지 커졌다. 네안데르탈인은 1320cc까지, 그리고 우리 종의 화석 구성원에 이르러서는 1370cc까지 증가. 이처럼 극적이면서 빠른 변화가 모두 합해 30만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벌어진 것이다. 결국 이 기간에 뇌 크기를 증가시켜야 하는 강력한 선택압이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뇌 크기의 급격한 증가는 우리가 고고학적 기록에서 발견하는 도구와 물질문명의 종류와 품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이유에서 나도 관행을 따라, 하이델베르겐시스를 필두로 한 나중의 두 분류군만을 인간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이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초기 호모종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해 보이기 시작한다.
- 대개 네안데르탈인을 둔하고 느린 혈거인으로, 가장 미개한 원시인의 상징인양 여긴다. 영리하고 창의적인 현생인류에게 당연히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진화의 낙오자, 인류판 공룡쯤으로 치부하곤 한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은 진화의 낙오자와는 거리가 멀다. 네안데르탈인은 무려 25만년 이상을 (현생인류가 존재했던 기간보다 긴 시간이다.) 동쪽으로 대서양과 면한 우즈베키스탄과 이란까지, 북쪽으로 영국 남부까지, 남쪽으로 레반트에 이르는 유럽을 성공적으로 점유했다. 그들은 빙하기의 혹독한 환경도 잘 헤쳐나갔고, 큰 동물을 사냥하는 기술도 가장 뛰어났다.
-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와 아주 다른 생활방식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유럽 네안데르탈인의 뼈의 콜라겐에서 추출한 질소와 탄소의 동위원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같은 지역에 서식하는 초식동물보다 질소 동위원소 수준이 현저히 높을 뿐만 아니라 현재(북극여우와 늑대 같은) 육식동물의 뼈에 함유된 동위원소 수준과 거의 맞먹었다. 또한 탄소 동위원소 수준도 이들이 주로 육상 포유류를 먹었다는 사실을 보여줌. 물고기나 물새류 같은 물이 많은 환경에 서식하는 종은 별로 선호하는 식량이 아니었다. 레반트 유적지에서 나온 증거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은 무거운 창을 제작했는데, 대부분 르발루아 식으로 다듬은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돌날이 달린 독특한 창이었다. 이런 창은 대개 매복식 사냥에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냥꾼은 사냥감을 가까이 대치하는 상황으로 끌고 가 창으로 찔렀을 것이다. 더 나중에 현생인류가 사용했던 창과 달리, 네안데르탈인의 창은 투창용이 아니라 꼬챙이처럼 찌르는 용도였을 것이다. 현생인류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네안데르탈인의 팔로는 투창하듯 창을 던져도 멀리 높게 날아갈 수 없다. 날아가는 거리나 속도로 짐작건대, 그들에게 투창은 그리 효율적 사냥기술이 아니었다. 대신 네안데르탈인의 다부지고 육중한 몸과 강인한 상체는 근거리 사냥에서 확실히 유리했을 것임.
- 네안데르탈인의 매복사냥 기술에 집약된 협동심의 수준은 달리 말하면, 이들의 인지능력과 관점이 현대인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음. 협동하지 않으면 그런 사냥은 불가능하기 때문. 그리고 그 능력은 곧 그들도 우리처럼, 현생인류의 중요한 행동양상인 친사회적이고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함. 실제로 이란의 샤니다르 유적지에서 발굴된 신체적 장애를 가진 늙은 네안데르탈인의 유골과 프랑스 라 샤펠 유적지에서 발견된 늙은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은 직접 먹이를 사냥하지 못할만큼 신체적으로 몹시 무력했던 것으로 보임. 이런 2차적 증거에 대해 '네안데르탈인이 늙고 병든 동료를 그냥 버리지 않고 보살폈음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호응을 얻음. 물론 고대와 현대의 모든 인간종을 통틀어 가장 큰 뇌를 가진 네안데르탈인이 지적으로 열등하지 않았다는 데는 반박의 여지가 없음. 그렇긴해도 그들의 낮은 이마와 불룩 튀어나온 뒤통수의 혹은 이들에게 틀림없이 뭔가 다른게 있다는 신호로 해석됨. 두개골 안쪽에 남은 희미한 자국을 분석한 결과는 역시 이들의 뇌가 우리의 혈통과 한 라인에서 조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낳았다. 그들의 뇌는 확실히 우리의 뇌와 비대칭성의 패턴도 같았고, 자이리피케이션도 유사했지만, 공처럼 생긴 우리 뇌와 달리 앞뒤로 더 길쭉한 타원형에 가까웠다. 측두엽과 후각망울도 작았으며 전두엽이 차지하는 면적도 작았다.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 차이가 그들의 사회적이고 인지적 삶에 초래한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 네안데르탈인은 같은 지역에서 거주했던 해부학적 현생인류보다 약 20% 정도 더 큰 안구를 갖고 있었다. 고위도 지역의 낮은 조도에서 생활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큰 시각 시스템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의 큰 뇌는 시각에 과도한 노력을 할애하는라 사회적 인지능력을 결정하는 뇌의 전면부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 약 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몸매가 한층 더 날씬한 호미닌 종이 출현. 마침내 해부학적 현생인류 또는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한 것. 다소 단편적인 화석증거로 보건대, 이 새로운 형태의 인간종은 아프리카의 고인류를 매우 빠르게 대체. 10만년 전에 이르렀을 때, 아프리카의 고인류 집단은 모두 사라짐. 물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고인류 집단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음. 하지만 유럽 본토와 아시아의 고인류가 유일한 호미닌 종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는데,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그들이다. 극동에는 호모 에렉투스 집단도 더러 남아 있었음. 늦어도 7만년 전에, 이 새로운 인간종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를 연결하던 육로인 레반트를 가로질러 이동하기 시작. 시기는 각기 달랐지만, 이 종의 일부는 홍해 북쪽을 또 일부는 홍해 남쪽을 가로지르며 유라시아를 향한 이주행렬이 이러진 것. 약 7만년 전에 일어난 아프리카 탈출사건을 지금은 아프리카 기원설이라 부름
- 해부학적 현생인류의 출현은 두가지 중대한 결과를 낳음
(1) 이 종은 지구 곳곳의 살기 적합한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감. 최초로 아프리카를 떠난지 불과 3만년 만인 4만년 전까지 현생인류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점령했고, 늦어도 1만 6천년 전 즈음에는 최북단 진입지점이었던 알래스카에서 대륙 최남단까지 이르면서 말 그대로 아메리카 초대륙 전체를 거침없이 헤집고 다녔다. 현생인류가 이동용 동물을 길들이기도 전에 오로지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점유한 속도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
(2) 4만년 전 현생인류의 유럽 도착이 네안데르탈인의 멸종과 시기적으로 일치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가 러시아 스텝지역에서 동쪽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20만년 이라는 시간동안 유럽과 서아시아를 매우 성공적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그랬던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가 출현한지 10만년 만에 지구에서 사라짐. 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지금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표적 의문이다.
- 만약 현생인류가 더 많은 음식을 요리하는 방법으로 시간부족분을 만회한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시간을 절약했을까? 나는 고인류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집단구성원을 늘리는 동시에 결속을 강화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나는 고인류가 이 방법을 통해 75명 남짓이던 초기 호모종의 전형적 집단구성원 수를 고인류의 전형적 구성원 수인 100명으로 늘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음악과 춤이 지엽적인 공동체의 유대를 강하하는 기능을 했던 것이 분명하고, 이것이 웃음의 유대감 형성효과를 보강하기 위해 발전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언어가 없었다면 함께 모여 춤을 춘들 그것이 더 큰 공동체 규모에서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을 리는 없다. 온전한 언어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구성원을 한자리에 모이게 할 만큼은 복잡한 언어가 있어야 했을 것임.
-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춤추기 가능한 수준의 언어가 있었다면, 150명으로 구성된 대단히 큰 현생인류의 공동체 구성원의 유대감을 높이는 데 필요한 추가시간은 하루 활동 시간의 약 1% 정도까지 줄일 수 있었을 것임. 하지만 이 사실을 기억하라. 영장류의 그루밍 시간은 가까운 친구들에게 집중되지만, 동시에 그 그루밍 시간은 집단 또는 공동체의 전체 규모에 비례한다. 이것은 가까운 동료에게 투자해야 하는 필수시간이 공동체의 나머지 성원에게 받는 스트레스에 비례하기 때문. 함께 모여 춤추기가 공동체의 지엽적 성원에게 투자해야 하는 시간을 줄여줄 수는 있지만, 언제든지 달려와 도움을 줄 수 있을만큼 가까운 동료와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데 필요한 시간까지 줄여준다는 보장은 없다. 유대감 형성 메커니즘으로서의 언어는 그루밍보다 월등한 이점을 갖고 있음. 언어는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기 때문. 언어의 효과를 따져보면, 우선 첫째로 동시에 여러명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음. 둘째, 다른 활동을 하는 중에도 그 효과를 발휘. 셋째, 언어는 사회적 관계망 전반에 대한 정보를 얻게 해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어는 관심을 진작시켜 준다. 이상 네가지는 모두 언어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을 때 얻는 이점들이다. 물론 시간절약 측면에서도 굉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모두 언어의 신생 특성들이다. 즉 일단 다른 여러 동기를 충족하는 언어를 가진 후에 등장하는 언어의 새로운 이용법이라는 말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화한다고 해서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유대감 형성에 매우 중요해보이는 엔돌핀이 저절로 분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 현생인류의 출산과정은 원숭이나 유인원 어떤 종보다 대단히 고달픈 과업이다. 그래서 자연은 불필요하게 작은 산도를 통과해야 하는 지나치게 큰 머리 아기를 위해 고육지책을 마련해야 함. 산모의 골반 양쪽을 이어주는 연골부가 출산하는 동안 유연해지면서 아기가 밀고 나올 때 골반이 벌어지게 한 것. 이것이 여성의 골반이 출산 후에 원래 크기로 회복되지 않는 원인이다. 여기에 더해 아기의 두개골을 이루는 뼈판들도 태어날 때는 떨어져 있다. (5-7세쯤 뇌가 성장을 멈추기 전까지 두개골의 뼈판은 고정되지 않음.) 산도를 통과할 때 압력을 받으면 뼈판이 아주 조금씩 서로의 가장자리로 밀려들어 가면서 압축되는 덕에 아기 머리가 무사히 산도를 빠져나올 수 있다.
- 스토리텔링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상이 누구였고 우리는 누구이며 또 어디서 왔는지, 머나면 지평선 너머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정신세계에는 누가 거주하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공통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관계망 속에 묶어줌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형성함. 특히 스토리텔링은 계속너머 마을사람들을 우리 공동체의 확장된 일부로 간주해야 하는 (또 간주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알게 해주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으로 한정한 150명 관계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심지어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유대감도 형성됨. 감정을 일깨우는 것은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데 상당히 유익한 듯한데, 아마도 감정이 엔돌핀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일 것임. 대부분의 전통사회들이 지키고 있는 성년의식은 고통스럽고 위협적인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의식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평생동안 끈끈한 동지애와 상호헌신이 지속되는 것처럼 보임. 밤에 나누는 이야기가 특별히 더 매혹적인 것도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둠이 주는 공포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이야기꾼이라면 듣는 이들의 감정적 반응을 격앙시킬 수 있기 때문. 하지만 거기에 더해 어둠이라는 장막이 주는, 나머지 세계와 격리된 듯한 기분은 공동체 성원들 간의 애정을 북돋우기도 했을 것이다. 이쯤에서 결론을 내리면, 언어가 실용적 정보교환을 쉽게 해주는 메커지즘으로만 기능한다면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언어는 끊임없이, 매우 빠른 속도로 상호 이해가 불가능한 새로운 방언으로 세분되고 있다. 현재 공식적으로, 영어는 탄생하고 1000년도 채 안되는 동안 완전히 다른 여섯개의 언어로 갈라졌다. 그중 어떤 언어는 고작 몇백년 밖에 안되는 것도 있다. 언어가 협동을 쉽게 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라면 어째서 바로 이웃한 집단의 성원들보차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그토록 비효율적으로 세분되었을까? 다시 말해 왜 방언이 출신지를 나타내는 뻔한 표시가 되어야 했을까? 어쩌면 하나의 방언이 같은 지역 출신 (그리고 현재 적어도 작은 사회 일원이며 서로 관련이 깊을 법한) 사람으로 구성됨 소규모 공동체를 구별하게 해준다는 것이 그 대답일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방언은 매우 빠르게 변화함. 어떤 사람이 쓰는 방언을 알면 출신지뿐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세대를 짐작할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 언어의 존재 이유가 실용적 정보교환이라면, 이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반대로 언어가 소규모 공동체의 배타적 결속을 위해 진화했다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 전 세계 어디나 샤머지즘 종교는 공통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어떤 구멍이나 터널을 통과하고 빛의 폭발을 경험하거나 광휘의 세상을 지나 정신세계로 진입하는 것도 그 한 주제다. 정신세계로의 여행이 너무 험난해서 자비로운 안내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거나, 다시 돌아오는 구멍을 찾지 못하면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는 점도 비슷함. 한 공동체 안에서 이런 가수상태의 춤은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임. 특히 아프리카 남부의 부시먼이라고 불리는 산족은 확장된 공동체 내의 사람관계가 분쟁이나 다툼으로 멀어지면 대개 가수상태의 춤을 춘다. 가수 상태의 춤은 사회적 균형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데, 마치 관계를 오염시킨 불공평과 모욕에 대한 부정적 기억을 완전히 지워주는 것 같다. 가수상태에 빠지면서 공동체는 다시 한번 상호보완적인 관계망을 회복하고, 성원간의 관계도 초기 상태로 회복되는 듯하다. 몇 주 혹은 몇 달이 지나 비열한 모욕이나 불공평이 쌓이면 또다시 춤의 도움을 받는다. 이는 어쩌면 가수상태의 춤이 (가수상태 그 자체가 아니더라도) 엔돌핀의 분비를 엄청나게 촉진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이런 유서깊은 방식을 따르는 것이 개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일수도 있다. 무엇보다 엔돌핀은 정신과 신체건강에 매우 유익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수상태의 춤은 사회적 결속 뿐만 아니라 공동체 성원 전체의 건강에도 이로울 것이다. 종교는 애초에 아주 작은 규모의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결속과 헌신을 강화하려는 방편으로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임. 종교적 부작용 중 하나는 불가피하게 정신적으로 우리 대 그들 또는 내집단 대 외집단의 대결구도를 만든다는 것이다.
- 50명과 150명 규모의 관계망 층 기능에 대한 여섯가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살펴보았다. 포식자에 대한 보호, 영토나 식량자원의 방어, 생식기의 배우자 수호, 환경적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한 거래협정, 자원의 위치에 관한 정보교환 그리고 이웃공동체의 습격에 대한 수비가 그것이다. 수차례 거듭돤 연구에서 우리가 얻은 결론은, 전쟁가설로 알려진 습격에 대한 수비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뇌 가설이 예측한 바, 150명 규모의 관계망 층이 고고학적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때가 약 10만년 전 인구폭발이 시작된 시점과 거의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 집단의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일단 집단생활은 영장류에 엄청난 비용부담을 안긴다. 특히 암컷 개체가 치르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만약 이 비용을 분산시키지 못하면 공동체는 순식간에 와해될 것임. 수렵-채집인은 이합집산(실제로는 넓은 영역에 공동체를 분산시켜 집단규모를 줄이고, 집단생활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를 누그러뜨리는) 전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이합집산 전략이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수렵-채집인의 사회성은 곧 집단생활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흩어져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사이의 타협이다. 이런 압박감을 완화하고 중간규모 공동체의 사회적 결속을 보강하는 기제로 음악이, 그 다음에는 언어기반의 스토리텔링이 마지막으로는 종교가 진화했다. 신석기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인간이 어떻게 농사를 시작하고 식품을 저장하는 방법이나 집 짓는 법을 배웠느냐가 아니다. 사실 이런 일은 당시 인간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비교적 사소한 일이다. 그보다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인간이 방대한 정착지에서 공간적으로 밀집하여 사는 데서 발생하는 파괴적 문제를 해결했느냐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훗날 도시나 도시국가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임. 현생인류가 되는 여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했던 다섯번째 위대한 전환점은 신석기시대 정착지였다. 다만 여기서 방점은 신석기시대가 아니라 정착지에 찍힌다.
- 오늘날 한 개인의 사회적 관계망 층에서 50명 규모의 관계망 층 안에는 불균형적으로 친구가 많지만, 바깥쪽의 150명 관계망 층 안에는 역시 불균형적으로 혈연도가 먼 확장된 가족이 많음. 확장된 가족은 친구보다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안쪽 계측보다 바깥쪽 관계망층을 유지하는 데 따르는 부담이 훨씬 적음. 만약 우리가 바깥쪽 계층에 속한 가족에게 투자하는 것만큼 우정에 투자한다면, 친구라고 해도 지인보다 별로 나을 게 없을 것임. 바깥쪽 관계망 층에 속한 친구와 가족의 비율이 바뀐다면, 유지비용도 엄청나게 들뿐만 아니라 관계망에 대한 헌신과 결속력 수준도 떨어질 것이 분명함. 사실 친구가 50명 규모이ㅡ 관계망 층에 집중된 이유도 이 때문. 바깥쪽 관계망 층에 속한 사람과의 상호작용 빈도는 우정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상호작용 빈도로는 50명 관계망 층에 속했던 친구도 지인 관계망 층으로 속속 빠져나가고 말 것이다.
- 우정을 연구하던 중에 우리는 사회적 관계망이 작동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양성 간의 중대한 차이점을 발견했다. 두 가지 측면이 특히 더 두드러지게 달랐다. 우선 여성은 낭만직인 파트너뿐만 아니라 종종 극도로 친밀한 친구 한명을 별도로 가진다. 물론 남성은 그렇지 않다. 여성보다 남성의 우정은 상당히 데면데면한 편이고, 그렇기 때문인지 친구들이라는 무리의 성원수가 더 많은 편. 이런 차이는 관계 안정성 면에서 여러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음. 여성의 친밀한 우정은 중요한 감정적 지지기반 역할을 하지만, 한편으로 깨지기도 쉽다. 일단 우정이 깨지면 거의 대참사 수준으로 결딴나기 때문에 회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움. 반면 남성의 무심한 우정은깨졌다가도 금세 회복됨. 여성은 친밀한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지만, 남성은 언제든 쉽게 친구들과 멀어짐. 글자 그대로 남성의 친구는 안보면 남이다. 이사를 하거나 직장을 옮긴 후에도 남성은 정착한 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금세 사귄다. 실제로 여성은 일반적으로 아주 돈독한 소수의 친구를 갖고, 남성은 다소 무심한 여러 명의 친구를 가진다. 모든 신변 소지품들에 대한 애호, 유대감을 돈독히 하기 위한 별난 의식들, 더불어 동호회를 좋아하는 남성의 이런 성향은 집단이나 패거리를 쉽게 형성하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임. 어쩌면 이런 성향이 소규모의 사냥 무리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수적으로 큰 무리 속에 쉽게 편입할 수 있고 교회나 군대처럼 대규모 위계조직에 적응을 잘하는 일종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양성간에 나타나는 두번째 큰 차이점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우정에 관한 18개월 추적연구에서 우리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정의 퇴색을 저지하는 메커니즘을 조사. 참가자에게 각자의 친구와 얼마나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친구와 어울려 활동을 하는지 물었다. 여성의 우정 지킴이는 대화였고, 남성의 우정지킴이는 활동이었다. 수다는 결단코 남성의 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우정의 본질에 대한 이 짧고 재미있는 연구에서 얻은 결론은, 150명 규모인 종래의 수렵-채집 공동체에서 더 확장된 커다란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결속을 유지하는 일은 절대 사소하고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뭔가 다른 조치가 필요할 터인데, 이 조치는 틀림없이 인간이 자연스레 우정을 형성하는 방식, 특히 남성의 동호회 형성방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동호회는 한 가지 주제를 기반으로 함. 어쩌면 그 주제만 있으면 다른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지도 모름. 이런 단일한 관심사에 기반을 둔 동호회의 기원은 혈연관계일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혈연관계망 바깥쪽의 관계망 층들은 순전히 언어를 기반으로 한 표면적인 관계망이기 때문. 동호회 다음으로 이 관계망 층을 기반으로 구축된 두번째 본보기는 어쩌면 종교일 것이다.
- 종교를 연구하는 역사가는 오늘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천 가지의 종교에서 발견되는 가장 근본적인 특징을 두 가지로 구별한다. 샤머니즘적 특징과 교리적 특징이 그것이다. 전자는 경험적 종교가 갖는 특징이다. 후자는 성스러운 공간, 이를테면 사원이나 교회 같은 공간과 관련이 있는 종교의 특징이다. 이런 종교는 대개 위계적 성직자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신학, 신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복을 빌고 신을 달래는 공식적 의식을 수행한다. 두번째 유형의 종교는 그 양식과 종교를 수행하는 활동 면에서 샤머니즘적 종교와 매우 다름. 영구적 정착지 형성은 이 두 족요 유형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세계 전역의 유목민과 반유목 수렵-채집인 그리고 목동 사회는 샤머니즘적 종교를 따르는 경향이 있지만, 영구적 정착지를 이룬 사회에서는 교리적 종교를 가진 경우가 많은 것도 그 예라 볼 수 있다.
- 할머니 양육은 여성이 폐경기를 겪는 이유를 설명해줌. 장수하는 다른 종도 폐경기를 경험한다는 다소 설득력 없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성인기기 중분에 이르렀을 때 생식이 완전히 종결되는 종은 우리가 유일함. 만약 여성이 폐경기가 없다면 자신의 생식에서 딸의 생식으로 관심을 바꾸지 못하고 결국 성인기 내내 자신이 낳은 막내 자녀를 돌볼 것이다.
- 호미닌 종들은 진화 역사의 거의 전반에 걸쳐 유인원과 비슷한 일부다처 짝짓기 시스템을 따랐을 것이다.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도 있다. 일부일처제가 진화했다고 해도, 그것은 현생인류에 이르러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도 완전한 일부일처제의 형태를 띠거나 종 전체를 특징으로 결정될 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았을 것임. 일부일처제 표현형 대 난혼 표현형이 거의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미루어보다, 인간은 양성 모두 다양한 형태의 짝짓기가 가능함. 남녀 한 쌍 짝짓기와 난혼 짝짓기 시스템 사이의 차이점을 기준으로 고릴라와 침팬지의 자료를 대조하면, 적어도 고인류에서 줄곧 고릴라와 유사하게 가짜 암수 한쌍 짝짓기를 표방한 일부다처 혼의 형태를 유지하다가 현생인류에 이르러서 보다 강력한 남녀 한쌍 짝짓기 시스템이 우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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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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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이타주의자

인문 2020. 2. 4. 08:11

- 무분별한 선행은 오히려 무익할 때가 많음. 플레이펌프가 대표적인 예다. 트레버필드와 그의 지원자들은 사실관계를 따져보지 않고 감정에 치우쳤다. 아이들이 행복한 얼굴로 즐겁게 놀고 있을 뿐인데도 마을에는 깨끗한 물이 공급된다는 발상에만 도취된 것이다. 케이스 재단도, 로라 부시도, 빌 클린턴도 플레이펌프가 실생활에 유용하다고 납득할 만한 분명한 증거가 있어서라기보다 혁신적인 기술에 매료되 지원한 거였다. 플레이펌프 캠페인의 비판자들이 필드와 그 지원군에게 악의가 있었따고 비난한 건 아니었다. 그들이 아프리카 시골 주민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었따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선의에만 의존하면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플레이펌프가 경솔한 이타주의의 유일한 사례라면 좋겠지만 실상은 훨씬 더 만연한 흐름 속에서 부각된 한 가지 사례에 불과. 우리는 남을 도우려 할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행동으로 옮기곤 함. 숫자와 이성을들이대면 선행의 본질이 흐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 탓에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도 놓치고 만다.
- 효율적 이타주의의 핵심은 오르빈스키처럼 딜레마에 직면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거래를 통해 절충하는 것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즉각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고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한 가지 행위에 더 큰 가치를 두기란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처럼 다양한 이타적 행위를 비교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가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효율적 이타주의의 첫번째 핵심질문이다.
- 남을 도우려 할때 돈을 잘 쓰는 것과 가장 잘 쓰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을 시행하는 게 돈을 잘 쓰는 일일까? 라고 묻는데 그칠 게 아니라 이 사업을 시행하는 게 돈을 가장 잘 쓰는 일일까? 를 물어야 한다.
- 수확체감의 법칙은 어떤 사건이 강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켜 돕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당신처럼 감정에 휘둘려 기부하는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이기 때문. 따라서 재난 사고를 접했을 때는 일단 울컥 솟는 감정을 억누르고 유사한 재난이 항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관심이 온톤 쏠려 있는 곳이 아니라 당신의 돈이 가장 큰 보탬이 될 곳에 기부해야 함. 또한 수확체감의 법칙은 남을 돕고 싶다면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도 보여준다.
- 어떤 행위의 잠재력을 평가할 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다는 이유로 묵살해서는 안됨. 지금은 상식이 된 대다수의 윤리적 관념들도 과거에는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성, 흑인, 비이성애자도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은 불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터무니 없는 주장으로 여겨졌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790년 미 의회에 노예제 종식을 청원하면서 철벽같은 반대에 부딪쳤다. 의회는 이틀간 논쟁을 벌였고 노예제 옹호론자들은 "노예 소유주에게는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인종이 뒤섞이면 미국의 가치와 특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라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결국 노예제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 같은 반대론은 용납하기 어렵다. 여성, 흑인, 성소수자의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해 힘쓴 운동가들은 승리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목표를 이뤘을 때의 보상이 매우 컸기 때문에 활동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
-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경제학자들은 노동착취 공장이 가난한 나라에 득이 된다는 데 의문을 달지 않는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좌파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같은 고용증대 방식이 전 세계 극빈층에게는 반가운 희소식이라는 게 압도적 주류 견해"라 말했다.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제프리 삭스는 "내가 걱정하는 건 노동착취 공장이 너무 많다는 게 아니라 너무 적다는 것"이라 말했다. 경제학자들이 이처럼 입을 모아 노동착취 공장을 옹호하는 건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저임금 농업 위주 경제사회가 더 부유한 산업사회로 나아가는 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 산업혁명기의 유럽과 미국이 100년도 넘게 노동착취 공장의 저임 노동력을 활용했으며 그 결과 생활수준이 훨씬 개선된 게 사실이다. 산업화를 나아가기 위한 기술이 막 도입되던 시대에는 이 단계를 거치는 데 수십년이 걸렸지만 기술이 정착된 21세기에는 이 발전단계를 단기간에 통과할 수 있다. 동아시아 호랑이 경제권 국가인 홍콩, 싱가폴, 한국, 대만이 대표적인 고속성장 살예다. 이 국가들은 20세기 초만 해도 농업사회였지만 20세기 중반들어 제조업 위주 노동착취 공장으로 변모했고 이후 수십 년 만에 산업화된 경제강국으로 부상. 가난한 나라들은 오히려 노동착취 공장이 절실하다. 선진국에서 불매운동을 벌인다면 가난한 나라에 사는 빈곤층의 삶은 더 궁핍해진다. 이는 단순한 가설이 아니다. 93년 아이오와주 신진 상원의원 톰 하킨이 아동노동 착취 제품 수입을 금지하는 내용의 아동노동억제법을 발의할 당시 방글라데시에는 수많은 아동이 기성복 제조공장에 고용돼 있었다. 법안 통과를 우려한 공장 측에서 5만명에 달하는 아동 노동자들을 발빠르게 해고했는데, 알고 보니 이 아동들은 학교로 돌아가거나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대다수 아동이 더 영세한 미등록 하청 의류공장이나 기타 업종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다국적 기업의 하류공장이나 기타 업종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다국적 기업의 하청공장이 현지 하청업체에 비해 임금이 높은 게 현실이다 보니 이들 아동의 생활고는 더 극심해졌다. 유니세프 조사 결과 해고당한 미성년 의류 노동자 다수가 생존을 위한 궁여지책으로 길거리 사기단, 성매매 등에 내몰린 사례까지 있었다.
- 공정무역 인증상표가 처음 등장한 1988년 이후로 공정무역 상품수요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2014년에는 전 세계 공정무역 인증상품 매출이 69억 달러에 육박했음. 타국의 농부가 공정한 보수를 받을 수 있도록 웃돈을 얹어주면서까지 상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은 감동적이다. 그런데 일반 커피보다 몇 달러 더 주고 공정무역 커피를 사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객관적 증거에 따르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첫째,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한다고 해서 무조건 가난한 나라의 빈곤층에 수익이 돌아가는 건 아님. 공정무역 인증기준은 상당히 까다로움. 가난한 나라의 농부들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공정무역 커피산지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멕시코, 코스타리카 등이다. 에티오피아 같은 최빈국과 비교하면 10배나 부유한 나라들이다. 설령 공정무역 제품그입이 농부들에게 더 많은 몫을 되돌려주는 방법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의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최빈국의 비공정무역 상품을 사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소득 수준에 따라 돈의 가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전 세계 경제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떠올려 보자. 코스타리카는 에티욒아에 비해 10배 부유하기 때문에 평균적인 코스타리카인이 체감하는 몇 달러의 가치보다 평균적인 에티오피아인이 체감하는 1달러의 가치가 더 크다.
둘째, 공정무역 제품이라는 이유로 소비자가 추가로 지불한 돈 중 실제로 농부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건 극히 일부다. 나머지는 중개인이 갖는다. 공정무역재단은 소비자가 추가로 지불한 금액 중 얼마가 커피생산자에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진행한 연구를 참고해야 한다. 세계은행 경제자문관 피터 그리피스가 영국 카페 체인점의 의뢰로 수행한 용역연구에 따르면 추가 금액 중 가난한 나라의 커피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1% 미만이다. 핀란드의 요니 발킬라, 페르티 하파란다, 니나 니에미 교수가 공동으로 수행한 연구에서는 핀란드에서 판매된 공정무역커피의 추가 금액 중 11%만 커피생산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나타남. 중앙아메리카경영관리대학원의 버나드 킬리안 교수가 이끈 연구팀은 미국에서 공정무역 커피가 일반 커피보다 파운드당 5불 더 비싸게 팔리고 있지만 커피 생산자가 추가로 받는 돈은 파운드당 40센트라고 밝혔다. 기브디렉틀리에 1불을 기부하면 90센특 수혜자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큰 차이다.
셋째,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그 적은 몫마저 더 많은 임금으로 바뀐다는 보장이 없다. 공정무역 인증은 인증받은 단체가 생산한 제품에 더 높은 가격을 쳐주는 절차이지 해당 단체에 소속된 생산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런던대 크리스토퍼 크래머 교수가 이끈 연구팀이 4년에 걸쳐 에티오피아와 우간다의 공정무역 노동자의 임금을 조사한 결과, 공정무역 노동자들은 비공정무역 노동자들에 비해 임금이 더 낮고 노동조건도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공정무역이 큰 성과로 내세우는 지역공동체 사업에서도 정작 극빈층이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크래머 교수는 "영국인드은 좀더 비싸더라도 공정무역 인증을 받은 커피, 차, 꽃 등을 구입하면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생활이 개선될 거라는 인식을 주입받는다. 하지만 4년 동안 면밀한 현장조사를 시행한 결과 연구대상 지역에서는 공정무역이 임금노동자, 즉 농촌 극빈층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기존 연구들을 종합검토한 보고서에서도 결론은 다르지 않았다. 객관적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공정무역 인증이 농촌에게 공정무역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는 증거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이쯤 되면 공정무역 제품을 살 이유가 없다. 기껏해야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에게 미미한 금액을 보태줄 따름이다. 차라리 더 저렴한 상품을 사고, 그렇게 절약한 돈을 비용효율성이 높은 자선단체게 기부하는 게 낫다.
- 기부를 하면 당신의 돈을 가장 효율적인 사업에만 집중시킬 수 있다. 최선의 활동과 그럭저럭 좋은 활동의 결과가 다르다는 점만 봐도 효율적인 기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윤리적 상품을 더 많이 구입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쓰는 건 목표를 정확히 공략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런데 윤리적 소비와 기부의 차이는 이게 다가 아니다. 윤리적 소비물결이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다고 생각할 만한 까닭이 있다. 바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허가 효과 때문. 이는 착한 일을 한번 하고 나면 이후에 선행을 덜 실천하는 것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경향을 말한다.
- 도덕적 허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착해 보이는 것, 착한 행동을 했다고 인식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보여줌. 에너지 절약 전구를 구입하는 행위로 '내 몫을 했다'고 생각하면 조금 뒤에 잔돈 몇 푼을 훔쳐도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인식이 흔들리지 않는다. 도덕적 허가효과는 결심을 비틀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효율적인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향후 남을 돕는 횟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이타적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면 의미가 없다. 작은 선행에서 출발해 이를 발판 삼아 앞으로 더 효율적인 선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틀을 마련해야 도덕적 허가 효과를 방지할 수 있다. 비효율적인 이타적 행동이 문제가 되는 건 이때문이다.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에 취하면 이후에 이타적 행동을 할 여지가 줄어들 수 있음. 가령 다른 사람에게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라고 권했더니 그보다 효율적인 선행에는 정작 시간과 돈을 덜 쓰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공정무역 제품구매를 장려하는 일 자체가 해로울 수 있다.
- 열정을 따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됨. 어이없는 조언이기 때문이다. '적성에 꼭 맞는' 직업을 찾아야 된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이미 가슴속에 품고 있던 열정을 발견하고 그에 맞는 직업을 찾으라는 건 전적으로 틀린 말이다. 한번 자문해 보자. 열정을 보이는 분야는 직업세계에 들어맞지 않는다. 캐나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열정을 쏟는 분야가 있다고 답한 84%의 학생 중 90%가 스포츠, 음악, 예술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통계 자료를 보면 스포츠, 음악, 예술산업과 관련된 일자리는 3%에 불과. 열정을 갖고 있는 분야가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해당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울 때도 많음. 같은 분야에 열정을 가진 수많은 사람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 유달리 뛰어난 재능을 지닌 (또는 운이 좋은) 소수만 안정적으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는 스프츠 및 음악 분야가 그렇다. 미국 고등학교 운동선수 중 프로로 진출하는 사람은 1000명 중 1명꼴도 안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직업에 대한 열정이 없다. 열정을 따르라는 조언은 그런 사람들을 어설픈 자기성찰로 내몰아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둘째, 관심사는 변하기 마련. 심리학자 조르디 쿠아드박, 대니얼 길버트, 티모시 윌슨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변하며, 따라서 관심사를 과대평가해선 안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10년전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현 관심사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지금 열정을 갖고 있는 분야에만 초점을 맞추면 곧 열정이 식어버릴 분야로 뛰어들 위험이 있다. 이는 열정에만 이끌리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세번째 이유와 직결됨. 직무만족도를 가늠하기 위한 최선의 예측지표는 직무 자체의 성격이지 개인의 열망과 관련된 사항들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현재 관심을 갖게 된 분야에 연연하지 말고 직업의 주된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일을 찾으면 열정은 저절로 솟아나게 마련. 관련 연구에 따르면 직무만족도를 가장 일관성 있게 보여주는 지표는 일 자체의 매력이며, 이는 아래 다섯가지 요소로 이루어짐
* 자율성 : 업무에 대한 주도권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
* 완결성 : 맡은 업무가 전체 업무의 완결성에 얼마나 기여하는가. 최종 결과에 대한 기여도가 단순한 부품 역할에 그치는 게 아니라 눈에 띌 정도로 큰가
* 다양성 : 다양한 역량와 재능이 필요한 폭넓은 활동이 요구되는가
* 평가 :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는가
* 기여도 :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타인의 행복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가
- 열정에 맞는 직업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거라 넘겨짚고 진로를 선택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일 자체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면 열정은 자연히 뒤따라온다.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였다. 잡스는 젊었을 때 선불교에 열성적이었다. 인도를 여행했고, LSD를 자주 복용했으며 삭발을 한 채 법복을 입고 다니는가 하면 승려가 되려고 일본행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잡스가 기술 분야에 발을 들인 건 열정 때문이 아니었다. 올원팜이라는 공동체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기술에 밝은 스티브 워즈니악의 사업을 부업으로 도운 게 계기가 됐다. 애플조차 우연의 산물이었다. 잡스와 워즈니악은 도락가들에게 서킷보드를 판매하다가 어느 컴퓨터 상점 주인이 완전조립된 컴퓨터를 사겠다고 하자 돈을 벌려고 그 일에 뛰어들었다. 애플과 컴퓨터 기술에 대한 잡스의 열정이 불타오른 것도 사업이 관심을 끌고 성공을 거둔 뒤부터다
- 린스타트업은 많은 기업가들이 시험제품이나 아이디어에 혹해서 해당 시장이 있는지 검증하지도 않고 무조건 달려드는 오류를 저지른다는 데 착안한 결과임. 기업이 이런 우를 범하면 대개의 경우 제품은 실패함. 제품을 시험해야 할 시간에 머리만 굴리는 탁상공론에 매몰되기 때문. 리스는 아이디어나 제품을 하나의 가설로 보고 끊임없이 검증하되 최종제품은 잠재고객이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이와 유사한 오류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일찌감치 결정을 내리고는 악착같이 거기에만 매달린다. 다른 가능성을 무시한 채 그 일이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소명을 찾아 융통성 없이 계획을 세울 게 아니라 과학자가 된 것처럼 여러 가설을 검증해야 함. 이를 위해 다음 세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경력을 진행중인 사안으로 봐야 함. 진로를 정해 두기보다 하나의 경력 모델, 즉 새로운 증거나 기회가 나타날 때마다 끊임없이 수정하는 임시적인 목표들과 가설들을 세워야 함. 계획이 아예 없는 것보다야 형편없는 계획이라도 있는 게 낫지만 그것도 계획을 기꺼이 수정할 의향이 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2) 진로선택을 할 때 확신이 서지 않는 부분을 파악해 불확실성을 줄여야 함. 이를 위해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장단점만 저울질하면 안된다. 그보다 이렇게 질문하라. 내가 직업을 결정하는 데 가장 유용한, 결정적인 한가지 정보는 무엇인가? 그 정보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3) 다양한 경로를 시험해 봐야 한다. 과학자들이 가설을 검증하듯 다양한 진로계획을 두고 실험을 해보자. 어떤 직업이 적합한지 사전에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운 만큼 이는 중요한 문제다. 일례로 8만시간에 진로상담을 의뢰한 어떤 사람은 자산관리회사의 인턴으로 사회생활에 첫발을 뗐다. 그 분야에 경험이 없었던 그녀는 자기한테 맞지 않는 일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던 터였다. 막상 일을 해보니 역시나 그 일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였다. 하지만 그 실패 덕분에 오히려 자신감을 갖고 다른 경로로 뛰어들 수 있었다. 실패가 도리어 매우 값진 경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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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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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퇴치법

etc 2020. 2. 4. 08:10

오마하의 현인(賢人)’으로 불리는 투자가 워런 버핏은 성공비결을 따르고 싶다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고 싶은 스물다섯 목록을 작성해 보게. 가운데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다섯 개를 골라 동그라미를 치고, 다섯 개를 실천하기 위한 세부계획을 세워 그것에 집중하게.”

나머지 스무 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동그라미를 치지 않은 순간, 그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목록에 들어간 걸세. 무슨 일이 있든, 최우선 항목 다섯 개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때까지 나머지 일들에 절대 주의를 빼앗겨서는 되네.”

한국경제신문 131일자 B3 기사 미루는 습관이 있는 그대, 게으름이 파고들기 전에 행하라>는 미국의 습관전문가 스티브 스콧이 제시한게으름 퇴치법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가만히 보면 가운데 필요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중요한 것에만 에너지를 집중하면 일을 시간에 해내며 느긋하게 사는 어렵지 않다.”

스콧이 제안하는 훈련법의 핵심은중요한 가지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일에는 신경을 끄라 것입니다. 버핏의 일화에서 ‘25-5 법칙 핵심입니다. 먼저 자신의 핵심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가. 스스로 행복했고, 자랑스러웠고, 만족했던 경험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라.”

그렇게 한다고 게으름이 사라지는 아닙니다.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게으름이 파고들 틈이 없도록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스콧은 ‘7단계 습관 훈련법 제시합니다.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적어본다. ‘25-5’ 법칙에 맞춰 다섯 가지를 추려낸다. 3개월씩 스마트 목표를 세운다. 없는 일은 정중하게 거절한다. 주간 계획표를 만들고 주간 점검을 실시한다. 매일 실천하는 습관으로 게으름이 파고들 틈을 메운다. 지금까지의 실천사항을 꾸준히 진행하며, 미루는 버릇을 완전히 고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야 일을 명확하게 선정하고,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무조건하기 싫은 일부터 먼저 중요한 원칙으로 선택하라. 고비를 넘고 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내달릴 있다.” ‘아이젠하워 매트릭스 게으름 퇴치법으로 요긴합니다. 일을 4분면으로 나눈 다음에 긴급하고 중요한 ,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등으로 나눠 처리하는 것입니다.

즉시 해결할 있다면 당장!” 스콧은 강조합니다. 미적거리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새길 만한 조언이 많습니다. “큰일일수록 잘라서 공략하기, 전력질주가 필요한 순간, 자신의 행동에 적절한 보상을 약속하기 등을 유기적으로 활용할 있다면 게으름을 퇴치하는 효과를 거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이학영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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