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테일의 미래

경영 2020. 2. 20. 08:33

- 미국 쇼핑몰 몰락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이 1인당 쇼핑면적 초과현상. 쇼핑면적의 초과현상이란 쇼핑공간을 선택할 때 소비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음을 의미함. 실제로 1970-2013년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쇼핑몰이 증가하는 속도가 2배나 빨랐음. 에이티커니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1인당 쇼핑면적은 23.5평방피트인 반면, 캐나다는 16.8, 영국은 4.6, 일본은 4.4, 독일은 2.3, 한국은 2.2 평방피트다. 단적으로 미국 국민의 1인당 쇼핑면적은 독일국민의 쇼핑면적보다 10배 이상 넓다. 결국 1인당 쇼핑면적의 초과현상은 오프라인 리테일러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쇼핑면적이 넓은 만큼 스태프가 부족해 소비자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매장 직원을 찾기 힘들어하고, 물품이 도난당하는 경우도 증가했다. 미국 리테일협회에 따르면 물품도난이 리테일러 전체 손실의 36.5%를 차지함. 하지만 충분한 자본을 유치할 수 있는 초대형 몰들은 지속적 투자와 리모델링으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소비경험, 즉 소비자들이 SNS등에 공유할 재미들을 제공함으로써 소비자들을 잡아두고, 더 나아가 일반 쇼핑몰과 백화점의 소비자까지 빼앗아올 수 있었다. 결국 만족스러운 쇼핑경험을 제공하는 리테일러들에겐 소비자들이 몰리는 반면, 그렇지 못한 매장들은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초지역 몰에 입점하려는 브랜드들은 늘었지만 지역몰, 오픈센터, 파워센터들은 입점 브랜드가 줄어들었다. 초지역 몰은 쇼핑몰, 워터파크 등의 다양한 레저시설, 레스토랑 등의 다이닝을 자랑하는데 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몰에서 매장 입점률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엔터테인먼트나 레저기능이 소비자의 쇼핑공간 선택에서 매우 중요해졌다는 의미. 현재의 추세로 미루어보건대, 초지역 몰과 그 외 쇼핑몰의 매출격차는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임. 이런 상황은 아직 영미권을 중심으로 몇몇 국가에서만 나타나고 있지만 쇼핑몰이라는 공간이 갖는 상징성과 파급력에 비추어보면 오프라인 리테일 업계의 위기 시그널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임.
- 스마트 스피커의 급부상은 리테일 비즈니스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소비자들이 상품정보를 습득하고 상품 주문을 하는 쇼핑행동을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 사실 아이폰에 탑재된 시리 같은 경우는 소비자들의 소비행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스마트 스피커에 탑재된 인공지능 기반의 음성비서 알렉사와 구글 어시스턴트는 다르다. 이들은 정보검색이나 음악재생 등의 단순기능은 물론, 소비자가 말하는 문맥과 니즈를 파악하여 상품을 추천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더구나 스마트스피커를 가진 소비자들의 구매량이 그렇지 않은 소비자들보다 많다는 통계도 있다. 17년 컨슈머인텔리전스리서치파트너스가 미국 소비자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아마존의 일반 소비자들은 연평균 1000달러어치를 구매했고, 프라임멤버들은 연평균 1300달러를 소비, 반면 아마존 에코 소유자들은 이들보다 많은 1700달러를 구매. 물론 한 통계가 전체를 대변한다 말할 수는 없지만, 스마트스피커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수치다. 즉 소비자들이 첨단 리테일 테크와 음성으로 소통하는 것은 물론, 간단한 음성명령으로 쇼핑을 완성하는 보이스쇼핑 시대로 진입한 셈
- 도미노피자가 선보인 서비스가 제로클릭의 시초였다. 도미노피자를 주문하기 전에 소비자가 할 일은 딱 한가지, 모바일 앱을 다운받아 피자 프로필을 설정하는 것. 피자종류, 전화번호, 배달주소, 신용카드정보 등을 사전에 입력해 두고 언제든지 피자를 먹고 싶을 때면 도미노피자 앱을 실행시킨다. 그러면 저장된 주문내역이 집근처의 도미노피자 지점으로 자동전송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에러를 수정할 수 있도록 10초간 타이머가 실행된다. 현재는 문자메시지, 트위터, 스마트TV, 스마트워치, 음성주문비서로도 클릭없이 도미노피자를 주문 가능. 심지어 16년부터는 도미노피자의 음서주문 비서 돔이 아마존 알렉사와 결합해 "알렉사, 도미노피자 앱을 실행시키고 이지 오더를 실행해줘"라는 음성 명령으로 주문이 완성되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도미노피자의 가상주문 비서는 매장 직원들의 주문관련 잡무를 처리해주는 한편, 소비자들이 피자 주문상태를 파악할 수 있어 소비자 만족도도 높기 때문에 매장도입이 확산될 예정이다. 이러한 초기 형태의 제로클릭이 한층 더 진화한 것이 바로 스마트 스피커를 통한 상품주문이다. 아마존 알렉사로 상품을 주문할 때는 "알렉사 세탁세제를 주문해줘"라는 명령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 더구나 18년 현재 전 세계에서 약 40억명이 인터넷을, 약 32억명이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가 쇼핑기능까지 탑재하면서 온/오프라인 리테일러의 영역침투가 본격화됐다. 18년 포브스에 따르면 전 세계 리테일러의 25%가 페이스북을 통해 상품을 팔고, 40%가 직간접적으로 SNS를 이용해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답했다. 어느 조사결과 SNS의 추천이 구매행위에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이 23%,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트위터, 스냅챗 등을 통해 상품을 구입하겠다는 응답이 30%에 이름. 블룸버그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SNS로 상품을 구입하는 데는 세대에 따른 차이가 크지 않을 정도로 SNS가 쇼핑의 한 방법으로 자리 잡음. 소비자의 쇼핑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은 물론, 경쟁자가 나이었던 새로운 기업들이 리테일 영역에 진출하면서 리테일 비즈니스가 완전히 다른 경쟁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 일반적으로 밀레니얼 세대는 건강에 관심이 많고 힙한 문화를 선호. 그런데 그들은 건강과 유기농으로 유명한 홀푸드마켓보다 또 다른 마트체인인 알디를 좋아한다고 한다. 바로 가격 때문. 홀푸드마켓은 유기농 식품들을 다채롭게 구비해두고 있고 쇼핑공간도 쾌적함. 그러나 홀 페이체크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가격대가 높은 편임. 밀레니얼 세대는 그러한 홀푸드마켓보다 상품이 많지는 않더라도 가격이 저렴하고 다양한 유기농 옵션이 있는 알디를 선호하는 것이다. 이는 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용감소 등 사호적 불안을 경험했던 탓에 취향과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경제적 측면, 즉 가성비를 중시하는 이 세대의 소비성향을 보여줌.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2000년대 중반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으나 많은 이들이 금융위기로 인해 직장을 잃었다. 또한 물가상승, 집값상승의 시대적 영향으로 결혼을 했음에도 출산을 미뤄야 했다. 이로 인해 사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글로벌 리서치 회사 퓨리서치의 연구를 보면, 밀레니얼 중 19%만이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고 답했음. 이는 베이비부머의 40%, 엑스세대의 31%가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고 답한 것과 비교됨. 또한 정부와 대기업에 대한 불신도 이전 세대들보다 높다. 그러다 보니 로컬 브랜드, 독창성을 가진 소규모 브랜드를 선호하는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 한편 밀레니얼 세대는 선호하는 소비경험도 이전 세대들과는 다름. 맥킨지 분석을 보면, 밀레니얼 세대는 멀티감각적 경험, SNS로 공유될 수 있는 즉시성, 미디어, 게임, 경험을 선호. 이런 특성들은 쇼핑에서도 온라인, 재미, 다양한 경험에 대한 선호로 이어지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경험들은 즉시 SNS로 공유됨. 게다가 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동료그룹, 인플루언서 등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집단이기도 하고, 스스로가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등의 SNS를 통해 마이크로 셀러비리티를 추구하기도 함. 세대내의 소비경험과 관심사의 확산속도가 더 가파르게 증가하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시어스나 메이시스 같은 중저가 백화점들과 일반 쇼핑몰 들은 이런 니즈를 만족시키는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하지 못했따. 기존 리테일 브랜드들이 고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성향과 취향에 어필하지 못했기 때문.
- 앞으로 밀레니얼 세대보다 더 주목해야 할 소비자 그룹이 Z세대다. 밀레티얼 후속 세대라고 하여 '제-니얼'로 불리기도 함. 글로벌 인구구조에서 Z세대가 차지하는 비율이 2010년 중반대부터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Z세대는 흔히 말하는 90년대생 들로, 정확하게는 97년 이후 태어난 세대들을 의미. 이들의 사회, 문좌적 특징은 90년대생을 이해하기 위한 라이프스타일 분석이나 조직경영론에 대한 책들이 여러 권 출간될 정도로 남다르게 부각된다. 05년 서비스를 시작한 유튜브와 함께 자란 핵심유저들로 유튜브 제너레이션이라는 별칭도 붙는다. X세대보다 많은 수이고 베이비부머의 3분의 2에 달함. 07년 탄생한 시대의 아이폰 이후, 스마트폰은 Z세대에게 삶을 같이한 산소같은 존재다. 그러다 보니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대를 잘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함. 그들은 밀레니얼보다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고, 사회적 정의를 더 많이 고려한다. 미국의 총판, 교육기업 피어슨은 최근 '밀레니얼을 넘어: 미래세대'라는 보고서에서 Z세대가 이전 세대에 비해 유튜브와 동영상 채널을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보다 위험을 쉽게 감수하며 이를 재미로 받아들인다. 또한 미래에 대비해 최고의 전문성을 갖추려고 하며 그런 이유로 교육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 80년대생, 즉 바링허우는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하는 중국 사회에서 이전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성장했지만, 이전 세대들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간접적으로 경험했음. 또한 바링허우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부터 대학 등록금이 대폭 올랐고, 이들이 졸업을 하고 취업을 시작할 무렵부터 회사가 집을 마련해주는 제도가 사라졌다. 또한 이들은 이전에는 없었던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문화를 처음으로 겪은 세대이기도 함. 그렇지만 1가구 1자녀 정책으로 인해 부모와 양측 조부무 등으로부터 소황제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특별한 대접을 받은 데다 이전 세대(류링허우)처럼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은 탓에 씀씀이도 클 뿐더러 상향소비를 추구하여 과시적 소비, 특별함 추구, 명품구매, 충동구매 성향이 높은 편이다. 이들의 구매력이 한국 소비자 전체의 3배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음. 경제관념이 전반적으로 뚜렷한 미국 Z세대와 달리 중국의 Z세대 주링허우는 바링허우보다 훨씬 더 주목해야 할 신흥 부유층으로 떠오르고 있음. 현재 중국 인구의 16%를 차지하는 주링허우는 2020년까지 중국 전체소비의 40%를 창출할 것으로 예측됨. 중국의 첫 디지털 세대로 자라난 이들은 특히 데이터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다. 정보의 질과 양 모두를 중시한다. 브랜드, 인플루언서, 가족, 친구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보를 얻어 쇼핑에 적극 이용한다. 위챗, 바이두, T몰 등 SNS 플랫폼에서 주로 생활한다. 이들의 온라인상 구매 패턴은 이전 세대들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하고 쇼핑에서의 편의성과 효율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액센추어 조사결과 중국의 Z세대 중 거의 40%가 당일배송을 원하고, 27%는 반나절 배송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이런 특징들을 간과한 럭셔리 브랜드들은 한동안 중국 시장에서 고전했다. 주링허우를 이전 세대와 비슷한 세대로 간주하고, 비슷한 전략을 썼기 때문. 결국 지금은 이들을 독립된 소비자 그룹으로 분리해서 개별 브랜딩과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SNS와 인플루언서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다. 왕홍같이 트렌드를 이끄는 인플루언서들을 활용해 SNS상에서 적극적인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 키워드별 리테일 테크 적용 영역
(1) 인공지능 쇼핑 비서 : 스마트 스피커, 로봇
* 아마존 알렉사, 알렉사 키즈
* 구글 어시스턴트
* MS 코타나
* 소프트뱅크 페퍼
* 이마트 나오
(2) 신뢰와 예측을 더하는 소비 빅데이터 : 큐레이션, 예측배송, 판매예측
* 아마존 4-스타
* 아마존 온디맨드 쇼핑
* 아마존 예측 배송
* 알리바바 허마셴성의 신선식품 판매 예측
(3) 미래형 오프라인 매장과 언택트 리테일 : 무인매장, 이동식 무인매장, 인공지능 결제로봇
* 아마존 고
* 중국 모비 마트
* 오샹미닛
* F5 미래상점
* X-마트 (중국, 인도네시아)
* 세븐일레븐 스마트 편의점, 인공지능 결제 로봇 브니
(4) 더 섬세하게 연결되는 옴니채널 : 미래/로봇 레스토랑, 차별화된 고객 서비스, 고객맞춤 서비스, 오프라인 매장의 의도적 쇼룸화
* 허마셴성의 로봇 레스토랑 ROBOT.HE
* 징둥 X미래 레스토랑
* 알리바바 럭셔리 파빌리온
* 로레알 비디오 챗 서비스, 화장품 가상시연
* 록시땅의 큐빗 프로 솔루션
* 온라인 남성복 보노보스의 쇼룸이 된 오프라인 매장
(5) AR과 VR로 구현한 가상 리테일 : 상품의 가상경험, 럭셔리 브랜드 경험
* 중국 웨이싱 리빙의 가구 경험 서비스
* 이케아의 모바일 앱 이케아 플레이스
* 웨이페어의 VR을 통한 인테리어 서비스
* 나이키의 SNKRS 앱을 통한 상품경험
* 크리스찬 디올 패션소의 VR 비디오
* 경매하우스 소더비의 VR 기반 상품재현
* 상하이 스타벅스의 로스터리 AR 기반 매장 경험
* 월마트 3D 버추얼 쇼핑투어
(6) 사람이 결제수단인 캐리시르 리테일 : 모바일 결제, 안면 인식결제, VR 페이
* 알리페이
* 위챗페이
* 애플페이, 아마존페이, 페이팔
* 삼성페이, 카카오페이, 토스 등
* 아마존 전용 QR코드, 스마일코드
* 알리바바 VR페이
* 중국 얌 차이나의 스마일투페이
(7) 솔루션을 제공하는 로봇 : 고객맞춤 서비스, 퍼스널 쇼퍼
* 패션 브랜드 에리의 챗봇 킥 메신저
* 이베이의 숍봇
* 월마트의 챗봇 쇼핑 서비스 제트블랙
* 인터파크 톡집사
(8) 경쟁력을 높이는 초저가 자체 브랜드 : PB브랜드
* 알디와 리들의 PB
* 멀티티어 PB 전략의 성장 (미국 크로거, 한국 이마트)
* 이마트 PB전문점
* 월마트와 아마존의 PB 확장
(9) 더 저렴하게, 더 빠르게, 스마트 물류 : 스마트 물류센터, 드론/로봇 배송
* 10만대의 키바로봇을 투입한 아마존의 스마트 물류센터
* 아마존의 스마트 드론 배송 특허
* 중국 차오지우중의 신선식품 드론 배송
* 영국 테스코의 무인로봇 배송
* 징둥닷컴의 자동화 물류센터 '아시아 1호' 등을 통한 당일배송
* 알리바바 차이냐오 스마트 물류센터
* 한국 새벽배송, 두시간 배송
(10) 블록체인을 통한 결제와 공급망 관리 : 공급망 관리, 결제 시스템, 스마트 로열티 프로그램
* 월마트와 샘스클럽의 블록체인을 이용한 상품 이력 추적 시스템
* 오버스탁닷컴, 익스피디아, 쇼피파이 등의 지불결제 수단
* 스타벅스 가상화폐 플랫폼 백트
* 아마존 매니지드 블록체인
* 기프트 지니, 로옐라, 키비 등 블록체인 기반 로열티 프로그램
- 로봇카페, 로봇 레스토랑처럼 사람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서비스하는 방식을 언택트라 함. 미래의 오프라인 매장은 대부분 언택트 형태가 될 것이고, 그런 미래는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2018년 1월 시애틀의 아마존 본사에 오픈한 아마존고는 현재 명실상부한 언택트 리테일의 선두주자다. 오픈 당시 인공지능, 컴퓨터 비전, 머신러닝, RFID 등 첨단 기술이 조합된 미래형 오프라인 매장이라는 타이틀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 언택트 리테일은 미국보다 중국이 훨씬 앞서 있음. 중국의 무인 편의점 시장규모는 22년까지 1조 8105억 위안에 달할 전망. 중국에서 무인매장이 급증하는 이유는 비용절감, 결제환경, 정책지원 때문.
첫째, 중국기업은 운영비를 낮추기 위해 무인매장을 선택한다. 중국에서 무인매장이 급증하는 지역은 상하이, 베이징 등 도심지역임. 임대료와 인건비가 날로 높아져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초기투자비가 많이 들더라도 작은 면적에서 적은 비용으로 운영할 수 있는 무인매장을 선택하는 것임
둘째, 중국에는 무인매장의 필수 요소인 무인결제가 가능한 기반이 완비되어 있다. 2017년 중국에서 발생한 결제 가운데 모바일 결제 비중 은 78.5퍼센트에 달한다. 특히 도심 지역의 모바일 집중 현상이 두드러 진다.
셋째, 중국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무인매장의 확산을 뒷받침한다. 중국 정부는 오프라인 매장에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인텔리전스, 스마트 물류 등 최첨단 기술을 접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이러한 배경을 발판 삼아 중국에는 이미 5000여 개의 무인매장이 영업 중이다. 언택트 매장의 기술 기반은 다양하다. 알리바바의 무인 편의 점 타오카페는 머신 비전 machine vision, 생체 인식, 딥 러닝 기술 등을 활 용해 운영된다. 머신 비전은 컴퓨터와 카메라를 이용해 안면과 행동을 인식하는 기술이다. 타오카페에는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매장에 입장하는 고객의 얼굴을 인식하고, QR코드 스캔으로 알리바바 계정과 연동한다. 이후 머신 비전으로 고객이 매장에서 상품을 고르는 모든 동작을 감지한다. 고객이 물건을 선택하고 매장을 나서면 안면 인 식과 RFID 기술이 구매 제품을 감지한 다음 연동된 고객 계좌로 청구서 를 보내 자동 결제를 마친다. 아직까지는 고객이 매장에 들어설 때 해당 고객을 인식하기까지 10~15초 정도 걸리지만 이런 한계는 머지않아 극복될 것임
- 아마존 고는 1호점의 성공적인 운영에 자신감을 얻고 2019년에 약 50개 매장을, 2021년까지 는 3000여 개 매장을 오픈할 계획이다. 하지만 비용이 발목을 잡는다. 아마존 고 1호점은 최첨단 장비가 완비된 약 165제곱미터 넓이의 슈퍼 마켓으로, 하드웨어 비용만 무려 100만 달러가 들었다. 계획처럼 3000여 개 매장을 열려면 30억 달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아마존 고는 기존 계획을 변경해 매장 크기와 상품 구성을 줄이고 간편식 위주의 편의점 방식으로 확산 중이다. 또한 시간에 쫓 기고 편의성이 중요한 공항 고객들을 대상으로 공항 내에 매장을 열겠다는 계획이다. 덕분에 최근 들어 수익성이 개선되었다. RBC 캐피털 마켓 애널리스트의 가장 최근 분석을 보면, 아마존 고 시애틀 본점의 경우 하루 평균 550여 명이 매장을 방문한다. 이들의 지 출 규모를 평균 10달러로 계산하면 약 150만 달러의 연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본점의 경우이고, 앞으로 오픈할 매장들의 수익 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이다.
- 중국의 무인 편의점 브랜드인 빙고 박스의 경우 2016년에 론칭하고 2017년까지 매장 수를 200여 개로 늘렸다. 2018년 말까지 매장 수를 5000개로 늘릴 것이라고 밝혔으나, 해지 점주가 늘어났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술을 활용해 인건비 등 운영비를 대폭 낮출 수 는 있었지만, 손님이 많지 않아 하루 매출이 한화로 17만 원 선에 불과 했다. 가맹점주들의 라이선스 구입 비용을 고려했을 때 적어도 3~4년 은 운영해야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본 계약 기간이 3년 에 불과해,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고 계산한 점주들은 손해를 무릅쓰고 가맹을 해지했다. 빙고 박스는 새로운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해 업데 이트된 빙고 박스 2.0을 개발하고 있다.
이처럼 언택트 매장이 얼핏 보기에는 비용 절감에 효율적인 것 같지 만 투자비를 고려했을 때는 오히려 적자일 수 있기 때문에 수익 계산을 꼼꼼하게 해야 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하드웨어를 플랫폼으로 제공하는 스타트업이다. 무인화 체크아웃 솔루션 스타트업인 지핑Zippin은 2018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 아마존 고와 매우 유사한, 계산대 없는 매장을 오픈했다. 아마존이 직접 매장을 여는 주체라면, 지핑 은 리테일러들이 쉽게 언택트 기술을 매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솔루션 을 제공한다. 지핑 같은 언택트 리테일 참여 업체가 많아질수록 매장당 투자비가 감소한다. 이처럼 앞으로의 무인매장, 언택트리테일에는 기술뿐만 아니라 가 격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이를 충족하는 새로운 혁신 중 하나로 최근에는 스마트 카트가 주목받고 있다. 2019년 1월, 미국의 인공지능 기반 신생 기업 케이퍼 Caper는 계산대 없이 소비자가 스스로 물건을 결 제할 수 있는 스마트 쇼핑카트를 개발했다. 쇼핑카트 케이퍼는 컴퓨터 비전을 탑재한 AI 기반의 스마트 쇼핑카트다. 이와 유사하게 이마트도 스타필드 하남에 있는 트레이더스 하남점에서 스마트 로봇 카트 일라이를 선보였다. 일라이는 음성 인식 기능이 있기 때문에 고객이 문의를 하면 매장 내의 상품 위치를 검색하여 고객을 해당 위치로 안내할 뿐만 아니라 결제까지 해준다. 반면 케이퍼는 결제 기능 외에도 고객이 지나 치는 코너의 세일 정보를 알려주거나 고객에게 다른 상품들을 제안하기도 한다. 시험 매장의 평가 결과 스마트 카트 덕분에 소비자의 쇼핑 규모는 18퍼센트나 늘었다고 한다. 케이퍼는 현재 두 개 매장에서 테스트 중이지만 2019년 안에 150개 매장에 배치될 예정이다. 또한 카메라와 무게를 감 지하는 센서로 한층 정교화된 기술을 선보일 예정이다. 케이퍼는 아마 존 고처럼 설치 비용과 유지 비용이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언택트 리테 일을 실현하기 위한 가격 저항을 대폭 낮추는 데 큰 의의를 갖는다.
- 전통적으로 오프라인 매장은 세 가지 공간으로 기능해왔다. 첫째, 직 접 상품을 보고 만질 수 있는 공간, 둘째, 상품을 즉시 받게 하여 즉각적 필요를 충족해주는 공간, 셋째, 리테일러와 직접 소통이 가능한 실재하 는 공간이다. 옴니채널의 등장으로 오프라인 매장은 쇼룸 공간뿐만 아 니라 온라인으로 주문한 상품을 픽업하거나 반품하는 장소로도 기능이 확대되었다.
옴니채널의 확장이 결국 리테일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바로 소비자가 리테일러에게 기대하는 눈높이가 높아졌고, 앞으로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소비자들의 인내심은 줄어들었고, 온·오프 라인과 모바일을 넘나들며 최적의 가격뿐 아니라 최고의 경험을 요구 하게 되었다.
- 캐시리스 사회는 리테일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터다. 현금이 통용되던 세상에서는 리테일러가 고객 데이터를 확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모바일 결제가 확산되 면서 리테일러들은 온·오프라인에서 고객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확보 할 수 있게 됐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물건을, 얼마나 샀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데이터는 리테일러가 효율적으로 사업을 운영해나가는 데 매우 유용한 자산이다. 이를 통해 리테일러들은 상품 확보, 물류, 매 가 우영 판매, 재고 관리, 배송의 전 단계에서 최적화를 이룰 수 있다. 또한 광범위한 고객 데이터가 쌓이면서 고객의 특성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모바일 결제의 주 이용층은 밀레니얼 세대와 7세대로, 이들은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큰 미래 고객이다. 머천다이저 merchandiser(MD)는 이들에 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서비스를 디자인하고 프로모션을 진행 해 고객 경험과 만족도를 높이고, 이는 고객 충성도의 향상으로 이어진 다. 고객에게 제공하는 부가 서비스를 다변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알리페이는 고객의 사용 패턴을 점수화해서 알리페이 금융 대출에도 적용할 예정이다.한편 텐센트처럼 결제 시스템에서 더 나아가 상거래 플랫폼을 진화 시키는 경우도 있다. 텐센트는 자사의 결제 서비스인 위챗페이와 SNS 메신저인 위챗을 결합하여, 사용자가 위챗에서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 받을 뿐만 아니라 상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쇼핑 기능을 추가했다. 또한 택시 호출, 레스토랑 예약, 비행기표 구매 등 일상의 거의 모든 구매가 가능하도록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이렇게 물건뿐만 아니라 생활 전 반에 필요한 서비스까지 구매 가능한 상거래 플랫폼을 만들면 고객을 훨씬 넓은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이마트의 경우 초저가 브랜드인 노브랜드 No Brand, 일반 브랜드인 브랜드, 프리미엄 브랜드인 피코크Peacock 등으로 멀티티어 PB 전략을 전개한다. 특히 이마트 노브랜드는 제품의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불필 요한 모든 요소를 제거한다. 이마트 노브랜드는 2015년에 기존 경쟁 제 품보다 가격이 50퍼센트 이상 저렴한 물티슈, 감자칩 등 아홉 개 제품으 로 시작해, 물티슈의 경우 2년 만에 전체 물티슈 매출의 3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노브랜드는 3년 만에 1000여 개 이상의 아이템으로 확대됐고 감자칩, 우유, 생수, 쌀밥, 물티슈 등이 효자 상품으로 자리 잡았 다. 첫해 230억 원이던 매출이 2017년에는 2900억 원으로 1161퍼센트 나 증가해 이마트 실적 향상의 1등 공신이 됐다.
- 스마트 스피커의 확산으로 소비자의 브랜드 선호 경향은 약화되 고, 음성비서가 쇼핑 관련 의사결정에서 교통경찰의 역할을 해주는 방 식으로 진화할 것이다. 아마존 공화국에서 제조사와 도매업자들이 생 존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음성비서의 추천 브랜드에 들어가야 한다. 이 미 많은 기업이 아마존에서 매출을 높이고 구글 검색 결과의 상위에 노 출되기 위해 광고비를 지불하고 있지만, 보이스 쇼핑 환경에서는 쇼핑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개별 브 랜드의 파워는 줄어들고, 고객 충성도를 확보·유지 혹은 증가시키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또한 아마존스 초이스 배지를 달기 위한 브랜드 의 노력과 비용은 더욱 커질 것이다.
- 인공지능 등의 첨단 기술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 이다. 기술 진화는 홍수처럼 지속될 것이다. 단기적인 목적으로, 또는 트렌드라고 무작정 비즈니스에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경쟁자들과 차별화를 꾀할 수도 없고, 투자 대비 효과를 가지기도 어려운, 무모한 투자가 되기 십상이다. 결국 기술은 비즈니스의 전반적인 효율성을 높 이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 마케팅은 결국 소비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혁 신적 기술을 활용해 소비자를 이해하고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기술은 그 과정의 효율성을 높여, 소비자의 니즈에 민첩하게 대응하게 하고, 최고의 고객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이것이 위기의 시대에 기회를 잡기 위 한 보편의 원칙이다.
- 지금까지의 리테일과 앞으로의 리테일
(1) 상품
- 지금까지
* NB중심, 초저가 리테일러들의 PB 중심
* 패키징의 중요성이 적음
* 고객맞춤형 상품 제공이 한정되어 있음
- 앞으로의
* PB 포트폴리오의 적극적 확대(PB전문점, 멀티티어PB, 브랜드 컬래보레이션 중심의 PB)
* 패키징의 중요성 증가
* 고객맞춤형 온디맨드 상품의 증가
* 경험, 체험, 고객가치 자체가 상품화
(2) 가격
- 지금까지
* NB에 기반한 가격정책
* EDLP같은 저가 이미지 중요
* 초저가 리테일의 중요성은 미미
- 앞으로의
* 수직적 통합에 기반한 초저가 전략 또는 초고가 전략의 중요성 증가
* 초저가와 초고가로 양극화
* 실시간 가격 알고리즘 증가
* 가격에서 비용으로 변화
* 인공지능을 이용한 개인맞춤형 가격전략 증가
(3) 프로모션
- 지금까지
* 오프라인과 온라인인 구분된 프로모션은 가격중심
* 글자, 사진에 한정된 고객 커뮤니케이션
* 프로모션 개발과 실제진행의 시간차가 큼
- 앞으로의
* 온라인, 오프라인, 모바일의 경계가 허물어진 환경에서 고객과의 소통에 기반한 고객맞춤 프로모션
* 영상 중심의 프로모션, 챗봇을 통한 1차 고객 커뮤니케이션
* 알리우드 같은 로봇이 동영상으로 상품 정보를 실시간 제공
(4) 입지
- 지금까지
* 제품이 전달되는 매장위치, 즉 로케이션이 매출 승패를 좌우
- 앞으로의
* 물리적 매장위치 중요성 감소
* 입지의 의미가 온라인, 오프라인, 버추얼까지 포함하며 융합, 확대됨
* 편의성이 핵심
* 디지털 시대에는 물리적 입지 안에서 만남과 교감이 함께 어우러져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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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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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없는 세계

경제 2020. 2. 20. 08:32

- 1차대전까지 국제금융의 중심지는 런던. 17세기말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세워진 영란은행은 약 2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영국의 무역금융에 있어 신용의 최종 대부자 역할 수행이라는 다른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음. 그리고, 그 중앙은행 역할의 중심에는 프라이빗 뱅크의 대표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다. 로스차일드에 관한 자세한 서술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니, 두 가지 측면에서 필요한 요점만 살펴보자.
(1)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을 제패했던 시기는 유럽 대륙의 전쟁시기였음. 유럽은 영란은행이 세워진 1694년부터 워털루 전투가 있었던 1815년까지의 약 120년 기간중 약 60년은 전쟁을, 나머지 60년은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음. 로스차일드가는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각국 왕실에 접근해 프라이빗 뱅크의 자금을 채권인수 형태로 공급해주고 다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여 자금을 회수한 후, 전쟁이 끝난 후에 여러 방식으로 인수한 채권을 되파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금융권력을 장악.
(2) 로스차일드 가문이 런던, 파리, 빈, 나폴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대륙 산업의 중심지에 어음인수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증가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이전의 시대에 비해 무역규모가 커졌고 신용거래 규모 역시 이에 비례해 커졌다는 점에서 유럽 시장 전역을 아우르는 어음인수 은행의 운영은 시대의 흐름에 부합했음. 이전까지의 은행이 왕실과 귀족들의 자금을 관리하는 규모에 불과했다면, 무역이 발달하고 민간의 자본이 축적되면서 신용공급자로서의 은행 필요성이 커졌던 것
- 위 두가지 측면의 결과로 로스차일드하는 유럽 왕가들의 자금을 관리ㅎ주면서 쌓인 신용을 바탕으로 유럽대륙의 중심지를 아우르는 규모로 상거래 어음을 인수하고 수금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은행을 운영하면서, 각국의 전쟁자금에 대한 신용을 공급할 수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815년 워털루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이 전비조달을 위해 발행한 국채의 약 60%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후 아예 영란은행 주식을 대부분 사들임. 19세기 초반에 드디어 그들은 영란은행의 채권발행과 인수를 주도하는 중앙은행의 실질적 주인이 됨
- 미국은 연방 국가라는 특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중앙정부, 즉 연방정부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각 주 정부가 견 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남북전쟁 이후 1900년대 초까지 경제에 있 어서 독점의 규제나 중앙은행 같은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경기의 변동에 따라 대출이 급증했다가 경기가 하강하면 급속히 유동성이 부족해 지면서 금융위기가 닥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100년의 기간 동안 14번의 금융위기를 겪었는데, 평균적으로 7년에 한 번씩 위기를 겪었다는 얘기다. 사실 이것이 바로 고도로 집중된 대형 자본이 탄 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위기를 조장하고 위기에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부풀려 탄생한 것이 당시 미국의 신흥 재벌들로 지금도 잘 알려진 모건, 카네기, 록펠러 등이었던 것이다.
- 1907년 미국에 금융위기가 터지고 급속한 유동성 고갈의 위기 상황이 되 어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 닥치자, 신흥 재벌이었던 존 모건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최종 신용 공여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정부와 독점 재벌 모두에게 변화와 타협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 규모를 키울 만큼 키운 미국의 독점 자본들은 서서히 해외 진출을 위해 중앙은행과 같은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대서양 너머 영국은 민간은행들이 상업어음을 거래할 수 있는 충분한 시장-투자자들이 있었고, 그 투자자들 덕분에 시장에 풍부한 유동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일시적으로 자금이 부족해지면 어음을 할인해서 팔아 자금을 마 련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어음을 거래할 수 있는 충분한 규모의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물론 그때까지는 위기를 통해 약육강식의 논리, 즉 독점 자본을 일굴 수 있었다-해외의 투자자들이 자신 들이 축적한 달러 자산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의 입장에서는 너무 거대해진 독점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정부의 영향력하에 있는 중앙은행이라는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 국가의 특성상 독점 자본이 좌지우지하는 경제에 중앙정부가 간섭을 하려고 하는 것조차 주 정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달성되기 어려운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1915년이 되면서 전쟁이 길어질 듯한 기미를 보이자 국채를 발행하고 지폐를 찍어서 전비를 감당하고 있던 영국 금융시장에서 금 대비 파운드의 가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쟁이 1916년까지 이어지자 영국 정부는 미국 정부가 제공한 달러 신용에 점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1918년 전쟁이 끝 나고 나자 파운드화는 달러 대비 30% 이상 평가 절하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런던에서 파운드로 무역 결제를 해왔던 제3국, 즉 남미와 아시아의 무역 업자들은 이제 금에 대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미국 달러가 점점 매력적으 로 보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편 미국이 주로 연합국을 지원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비 조달에서 한계에 봉착한 동맹국은 결국 패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전의 전쟁과는 달 리 수십 년 예산을 단기간에 사용할 정도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 이 세 계대전은 패전국만이 아니라 승전국에서도 기존의 질서를 바꿔 놓았다. 그 들은 모두 미국과 달러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 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질서의 중요한 의미는 바로 사적 금융권력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세기 유럽 대륙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대였다.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빈, 나폴리에 다섯 아들이 은행 지점을 설립하여 한편으로는 독자적으로, 한편으로는 서로 돕는 방식으로 유럽 각국에 가문의 자금을 조달하고 운용했던 이 가문의 방식을 칼 폴라니는 고도금융(Haute Finance / High Finance)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강력한 정부인 영국과 프랑스의 정부조차 로스차일드의 유럽 대륙 금융 네트워크의 독립성을 해칠 수 없고, 어떤 특정 정부에도 종속되는 일없이 모든 정부와 접촉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 고도금융의 특징이었다. 어떤나라의 중앙은행도 이것의 독자성을 해칠 수는 없었으며 동시에 모든 중앙은행은 이것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건과 록펠러가 연방준비제도의 계획을 입안할 때 로스차일드의 고도금융을 모델로 했던 것임은 명백했다. 즉, 중앙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중앙정부가 연방준비은행의 독자성을 해칠 수 없는 형태 말이다. 결과적으로 연방준비제도법은 비록 동상이몽이었을망정 모건과 록펠러가 원했던 바가 충실히 반영된 결과였다는 말이다.
- 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들이 연합국에 패배한 배경에는 전비 조달능력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영국에서 연합국으로 약 100억 달러에 달 하는 자금이 이전된 사실도 포함되었다. 이미 연합국의 전쟁 수행 능력은미국의 신용에 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전시 재정의 핵심 중 개인은 모건 주니어-잭 모건 였다.길어지는 전쟁으로 자금 조달에 차질이 생긴 영국 정부는 1915년 초 J.P. 모건을 전시 자금 조달 및 무기매입 대리인으로 지정했고, 프랑스도 곧 그 뒤를 따랐다. 잭 모건은 남북전쟁 때부터 무기공급 사업을 같이했던 미국 최대의 화학독점기업 듀퐁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공장을 세워 화약류를 대량생산해 유럽에 공급했다. 동시에 미국에서는 전시공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 연합군에 자금을 빌려주고 높은 수수료를 벌어들이는 한편, 이 기 간 중 자신이 조성한 자금으로 연합국의 무기매입 대리인 자격으로 동업자 인 듀퐁 및 계열사였던 US 스틸 등으로부터 화약과 대포 등 각종 군수물자를 독점가격으로 고가에 사들여 연합국에 비싸게 공급하는 등의 방법으로전쟁 특수를 누렸다. 이는 이전에 유럽 대륙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했던 일을 파운드에서 달러로 통화만 바꿔서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 결과적으로 1차 세계대전이 미국과 유럽의 경제에 미친 중요한 영향은 두가지였다. 유럽의 부가 미국으로 이전되면서 유럽의 가문 형태의 사적 금융 권력이 저물고 미국의 합자회사 형태의 사적 금융권력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것과 이전까지 세계 무역금융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달러가 공식적으로 세계 무대에 데뷔했다는 것이 바로 그 두 가지였다.
- 1942년,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니 콜라스 스피크만(Nicholas J. Spykman)은 『세계 정치에서 미국의 전략(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미국이 고립주의를 고 집한다면 반드시 실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는데, 당시 CFR 에서 주도하던 '전쟁과 평화에 관한 연구의 영토분과 위원장이었던 보우먼 (Isaiah Bowman)이 이 책에 대해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들은 향후 20년간 이 책을 1년에 한 번 이상 읽어야 한다”고 높게 평가한 이 유는 굳이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스피크만의 사망 1년 후인 1944년 그의 이론을 통합한 책 『평화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Peace)』이 출간되는데, 여기서 그는 마한의 해양세력론과 맥킨더의 심장부 이론을 종합 하여 미국의 향후 전략적 방향성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 그는 2차 대전 중 미국이 연간 수천 대의 전투기와 전함을 생산하고 운용한 것을 분석한 결과, 전후의 세계는 해양과 항공 수송체계가 맥킨더가 상상했던 것보다 비약적으로 발달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심장 부의 중요성 감소를 의미한다는 것도 말이다. 즉, 해운의 비용효율이 맥킨 더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급격하게 높아지기 때문에 해양세력의 자원과 시장 확보는 맥킨더가 지적한 것만큼 대륙세력보다 불리하지 않다 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도 맥킨더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떨어져 있는 섬으로 유라시아의 자원과 인구는 미국의 그것을 상회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도 맥킨더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 에서 떨어져 있는 섬으로 유라시아의 자원과 인구는 미국의 그것을 상회 며, 따라서 유럽이나 아시아 중 한 세력에 의한 유라시아 대륙의 지배는 경 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미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주어진 조건을 미국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심 장부-구소련-와 주변 해양세력-미국-의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지역을 주 변지역(Rimland)이라고 칭하고, 이들 주변지역이 심장부 (Heartland)가 해운의 중 요한 부동항으로 접근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가 제시한 결론은 이 지역(Rimland)에서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여 대륙세력의 해양으로의 진출을 막고, 해양세력이 우위에 있는 해운과 항공운송 능력을 활용해 자원과 시장을 효율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향후 미국의 이익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주변지역(Rimland)이 향후 오랜 기간 동 안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각축의 공간으로 작동할 것이며, 이 지역을 통 제하는 자가 결국 세계를 통제할 것이라는 것 말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의 전략가들이 지정학적으로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전략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겼다는 것은 실제 역사의 진행 과정을 통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라도 원조를 보낼 것이 라는 백지 수표를 발행하겠다는 선언이 트루먼 독트린이라면, 마셜플랜은 서 유럽을 수취인으로 그 수표에 금액을 써넣은 것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육군참모총장으로 1차,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해 유럽의 상황에 밝았던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경제적으로 강하고 안정된 유럽이 곧 미국의이익에도 부합한다면서 유럽에 대한 원조 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미국은 생산수단이 거의 파괴된 유럽에 수입 대비 거의 7배에 달하는수출을 하고 있었다. 유럽은 당연히 수입 대금을 지불하기 위한 달러가 턱없이 부족했고, 원조된 달러는 어차피 미국의 상품을 수입하는데 사용될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를 공급하지 않으면 미국의 수출 시장 역시 고갈될 것이고, 그것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경기 침체와 공황의 기억을 상기시킬 것이었다. 결국 1948년 4월 우여곡절 끝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서독 · 벨기에 등 서유럽 총 16개국에 원조가 집행됐는데, 대부분의 원조는 미국으로부터의 직접 보조금 형태였다.
- 봉쇄정책의 마지막 단계는 직접적 재군비 정책으로 주변지역 (Pimlant) 전 역에 걸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의 시작이 바로 1949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캐나다, 그리고 여타 서유럽 8개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설립한 것이었다. 마셜플랜을 시작한 미국이, 1940년대 말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달러 부족이 유럽을 미국의 수출 시장으로 삼으려는 미국의 목표에 심각한 장애물임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화폐 경 제적 측면은 그 자체로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달러 유동성 부족이라는 근본적 문제 앞에서 마셜플랜이나 다른 원조 계획은 언 발 에 오줌 누기에 불과했다. 훨씬 포괄적으로 세계에 달러 유동성을 순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이미 CFR을 통해 미국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고 확실한 이윤을 보장하는 군수 산업을 계속해서 성장시키고 싶어 하던 미국의 대기업 집단의 존재, 전쟁이 끝나고 군수물자 생산이 감소하면서 다시 실업률이 상승하고 경제가 불황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국민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의 민주정부에 대한 위협이라는 세 가지 요인은 이 상황에서 세계역사상 평화 시에 가장 대대적으로 무장을 추진하는 정책을 가능하게 만든 삼박자였다. 미국 의회는 1949년 당시만 해도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봉쇄정책의 최초 입안자인 조지 케넌은 유럽에서의 소련 봉쇄는 유럽의 국가들이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마셜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이 된 딘 애치슨(Dean Acheson)-CFR 회원이며 군수업체인 듀퐁의 고문 변호사였던과 국무부 정책실장 폴 니츠(Paul Nitze)-록펠러 가문 산하기업인 스텐다드 오일 집안의 사위는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액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9년 9월 애치슨과 니츠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일이 일 어났다. 미국의 핵무기 독검을 깨트린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그 며칠 후 중 국에서 이뤄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 를 물리치고 중국 본토를 장악한 일이었다. 이들은 이 일들을 계기로 미국이 위기에 처했음을 강조하고, 국방예산 증액의 필요성을 건의하는 NSC68 (National Security Council Report 68)'로 알려진 국가 안보정책 재검토 보고서를
트루먼에게 제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보고서에서 건의한 서독의 NATO 가입과 미군의 유럽 주둔, 국방예산의 증액이 이루어지게 된 직접적 계기는 다름 아닌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훗날 애치슨은 “한국이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고 밝혔다. 미국으로서는 하늘에서 연이어 동아 줄이 내려온 셈이었다. 사실 그들이 NSC-68에서 제안한 정책 노선, 즉 미국과 유럽의 대대적 재무장은 미국 경제 정책의 주요 문제에 대해 뛰어난 해결책을 제공했다. 한국전쟁 중, 그리고 그 후의 대대적인 재무장이 전후 세계 경제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일단 빗장이 풀리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일본이 중국과 소련의 영향 력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1951년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같은 1951년 호주, 뉴질랜드와는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했고, 1954년엔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를 만들어 태국, 필리핀과 반공 군사동맹을 맺어 미국의 동맹국 범위에 포함시켰다. 당시 동남아시아에는 유럽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하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세력이 있었는데, 소련의 자금 지원을 받은 공산당이 이들을 이끄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이 군사, 경제적 지원을 통해 그 지역에 거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를 지지한 미국과 서방세계의 최종적인 합의의 군사적 형태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 되고, 미국의 동맹국은 미국의 군사 활동에 필요한 기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 재건이 시급했던 동맹국에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할 테니, 동맹국은 빠르게 경제를 재건해 함께 공산주의 세력이 넘볼 수 없는 안정된 세계를 건설하자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바뀐 것은 아니었을지는 역사가 평가하는 것을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쨌든 미국은 당시 이 체제에 참여하는 국가들에 미국이라는 큰 시장도 제공할 것이고, 그 시장에 팔 수 있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산업화와 경제 재건에 필요 한 달러 자금도 지원할 것이고, 거기에 더해 다른 동맹국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용을 부담하여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적 보호 활동까지 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이 사실이다. 서유럽의 연합국은 말할 것도 없고, 패전국이었던 서독과 일본은 두 팔을 벌려 환영해도 모자랄 제안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의 원인이 결국 잉여생산물을 판매할 시장과 생산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원 확보 때문이었는데 미국이 판매 시장도, 자원도 모두 확보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보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과 같은 군비 경쟁을 하지 말라는 조건이 붙 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할 필요 자체 가 없었다는 점에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미국의 대기업, 유럽과 아시아의 정부 모두 윈-윈 하는 상황이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런 체제의 성립은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 주변부의 주요 조임목(Choke Point)'에서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석유를 포함한 해운의 안전을 단독으로 책임지는 상황이 수십 년간, 현재까지 지속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마한, 맥킨더, 스피크만의 지정학적 이론의 결정판이 현실에 적용된 것이었다.
- 1950년부터 1971년까지의 약 20년간의 기간은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형태에 서유럽과 아시아 국가 일부가 적응하는 기간이었다. 말 이 좋아 적응이지 사실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더듬어 가보면서 갈 수 있는 길인지,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야 하는지 불안한 상태에서 어둠 속을 헤쳐 나가는 시기였다.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는 것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비록 미국이 주도하긴 했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유럽, 일본 등의 국가들에 있어 사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보이지도 않았던 기간이었다.
- 1950년부터 1971년까지 세계는 자본주의의 황금기(Golden Age)를맞이했다. 비록 미국과 서유럽, 일본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유례없는 장기 호황이었다. 이 시기가 자본주의의 황금기인 이유는 특히 경제 성장이 노동 소득의 높은 분배로 이어져 인류 역사상 최초로 소비력이 있는 중산층의 형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71년 미국의 중산층이 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에 달했는데 이는 대공황 이전대비로는 거의 2배 증가한 것 이었으며, 2015년 대비로도 약 11%가 더 높은 것이었다. 하지만,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군산복합 대기업과 미 국의 CFR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계층이 고안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황금기를 누리는 동안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수혜를 입은 중산층은 증가하고, 그 시스템의 고안에 깊이 관여한 군산복합 대기업을 비롯한 자본가들은 오히려 자본 이동을 통제받고 높은 세율 등 악조건을 그대 로 감수하고 있었다는 것이 뭔가 앞뒤가 안 맞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들은 그 시스템의 A to Z를 다 이해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 그렇다. 사실 그들은 이전 시대와는 달라진 환경에 맞춰 민주주의와 복지 국가라는 겉으로 드러난 체제의 그림자 속에서 충분한 이익을 누리면서 자 본을 키우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 동안 군산복 합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민간 자본이 충분한 이익을 통해 잉여 자본을 축 적할 수 있었던 구조적 이유가 크게 네 가지나 있었다.
첫째는 풍부한 저임금 노동자의 공급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 에 동원된 군인들이 전역하면서 저임금의 노동력이 풍부하게 공급되었고, 산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일자리와 고임금을 찾아 농 촌을 떠난 농민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대기업들은 충분한 저임 금 노동자를 쉽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기술 혁신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2차 대전 동안 각종 군수물자를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충분한 자금 지원을 받은 대기업들 은 이미 기술력과 생산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 레튼우즈 체제에서 유동성 공급을 위해 군수 산업에 대한 지출이 증가하 자 그들의 기술 혁신을 더 가속화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1970년까지 약 20년의 기간 동안 미국의 기술 개발 예산의 절반이 군수 산업과 우주개발산업에 투여되었는데, 이는 산업 전 분야의 기술 혁신을 자극해 내구소비재와 중화학공업의 기술 혁신으로 이어졌다. 냉장고, 세탁 기, TV 등의 가전제품부터 자동차, 항공기, 선박 등 수송기기, 그리고 철강 산업과 석유화학 제품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전 분야에 걸쳐 급속한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론에 기반한 중산층의 확대다. 높은 세 율, 각종 연금제도의 정착 등 사회 안전망의 확보와 함께 성장한 두터운 중 산층 덕분에 민간 소비가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1960년대 말이 되자 전체 가구의 약 87%가 TV를 소유했고, 75%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중산층은 베이비붐 세대를 낳았고 이렇게 형성된 가족은 새로운 소비문화 를 만들어 냈다. 1955년 7월,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는 어린이와 가족을타깃으로 한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다.
네 번째는 이 기간 동안 꾸준하게 유지된 낮은 에너지 가격이다.
- 1950년대 말 미국 의회는 메이저 회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벌어들 이는 이익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 주는 대신, 그 면제분만큼을 사우디아라 비아에 추가 이익금으로 지불하도록 한 협정을 통과시켰다. 사우디의 이익 은 증가하고, 메이저 회사들의 이익은 보존해 주면서 미국의 세수는 감소하 게 되는 이 협정이 통과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미국 정부가 산유국 정부와 메이저 석유 회사들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보조 금으로 서유럽과 일본은 중동산 석유를 저가에 수입해 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고, 중동 국가들과 메이저 석유 회사는 달러를 손쉽게 벌어들일 수 있 었다. 이런 경향은 대체로 1960년대 말까지 유지된다. 국민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소련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오랜 세 월이 지난 지금 그것이 진실이었는지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국민들만이 아 니라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행정부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을 가능 성이 높을 테니 말이다.
- 브레튼우즈 체제가 근본적으로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로 시작했던 이 유는 누차 언급했듯이 2차 대전 직후가 무역불균형을 고민할 상황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오직 미국만이 시장이 될 수 있었고, 오직 미국만이 자본 을 공급할 능력이 있었다. 여타 국가들은 일단 원조를 받아 재건을 해야 그 다음에 무역흑자가 나든 말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년도 되기 전에 이미 무역불균형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미국이 계속해서 과도한 양의 달러를 공급하자 결국 1960년대에 들어서 면서 미국의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물가가 올라가자 환율이 고 정되어 있는 서독, 일본과 같은 수출국의 물건들은 그 덕분에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다. 이는 수출국들의 경상수지 흑자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의 동반 증가로 이어졌다. 그런데, 환율의 고정이라는 요인이 수출국들에 인플레이션을 전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환율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경상수지 흑자가 증가하면서 달러가 유입되고 자국 통화가치가 상승해 국내 금리는 상승하고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은 하락해야 했는데, 고정환율이 그 메커니즘의 작동을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환율을 고정하기 위해 각국의 중앙은행이 나서서 시장에서 달러를 매입하고 자국 화폐를 발행하면 국내 물가가 상승하여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수입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불태화 조치를 취해야 했는데, 이는 국고에서 불필요한 이자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래도 저래도, 미국은 미국대로, 수출국은 수출국대로 불만이 쌓이는 상황이었다.
- 미국은 오랜 기간 전 세계에 과도한 달러 유동성을 공급했고, 그 결과 나타날 국내의 인플레이션을 서유럽과 일본에 수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은 국내 물가 상승을 막을 수 없었고 달러 가치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달러 유동성 공급을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서유럽과 일본은 미국이 공급한 달러 유동성에 기대어 산업을 재건하고 미국 시장에 수출함으로써 경제를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인플레이션의 수입해야 했지만 달러 유동성과 미국이라는 수출 시장을 대체할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닉슨 행정부의 선택은 각자도생'이었다. “달러는 우리의 통화지만 당신들의 문제야” 라는 재무장관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달러 유동 성 공급은 축소하고,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물가를 통제하고 수입을 억제하겠다는 것이 닉슨 행정부의 선택이었다. 서유럽과 일본이 이런 결정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서유럽(서독), 일본의 삼자는 달러 유동성의 공급, 미국으로의 수출은 유 지하면서 미국의 인플레이션 수입은 줄일 필요가 있었다. 반면 미국은 국내 물가의 안정이 달성되어야 달러 유동성의 공급과 수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의 수출은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 내 물가의 안정을 위해서는 공급하는 달러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달러 가치가 하락하지 않을 방법이 필요했다. 마법이 필요했다. 마법을 찾지 못한 닉슨은 결국물러났다. 1973년 삼각위원회를 설립한 록펠러와 브레진스키는 닉슨 행정부의 국무 장관이던 헨리 키신저, 1976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카터를 삼각위원회 창립 멤버로 참여시켰다. 그리고, 1973년 10월 패러다임의 본격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4차 중동전쟁 이 발발했다. 10월 12일 닉슨 행정부는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결정하자 이 에 반발한 중동 국가들은 10월 16일 유가를 17% 인상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0월 19일 닉슨 행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긴급 구호자금 지원 을 의회에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아랍 국가들은 한 발 더 나가 석유 수출 금지 조치(Oil Embargo)를 취했다. 전쟁 시작 전 배럴 당 3달러 선이던 유가는 단 3개월 사이 11달러를 넘었고 1974년 봄이 되어서는 12달러 선을 돌파했다. 이 전쟁은 삼각위원회가 필요로 했던 한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즉각 제공했다. 유가가 수개월 사이에 4배나 폭등하자 서유럽 각국의 달러 보유 고가 산유국으로 급격하게 흡수되면서 고갈된 것이다. 유럽은 필요한 원유 를 수입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다. 비싸진 유가를 감당하기 위해 달러에 대한 수요도 덩달아 높아졌다. 금과 결별하면서 폭락이 예상되었던 달러에 회생의 동아줄이 내려온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후의 결과를 고려해 봤을 때 그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후의 결과를 고려해 봤을 때 그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삼각위원회가 중심에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 그 림은 대략 이렇다. 미국은 계속해서 서유럽과 일본에 대해 수출 시장 역할 을 유지하고, 달러는 서유럽과 일본을 거쳐 원유 수출국으로 유입된다. 원 유 수출국에 달러가 쌓이면 그들이 인플레이션 수입국이 되므로 이는 다시 원유 가격의 상승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원유 수출국이 달러를 다시 역외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원유 수출 국이 만족할 만한 잉여 달러의 투자 방법을 제공해 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러면 원유 가격의 안정, 달러 유동성의 공급, 서유럽과 일본의 수출과 미국의 수입이 모두 달성되는 만족스러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다. 1974년 삼각위원회가 그린 이런 그림을 바탕으로 미국은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상대로 설득에 나섰다. 그해 6월 키신저는 사우디 를 상대로 양국 간 경제와 군사분야의 광범위한 협력에 대한 동의를 이끌 어 냈고, 그로부터 한 달 뒤 닉슨이 직접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결국 1975년 석유의 수출 대금은 달러로만 받는 대신 미국이 무기와 안보, 인프 라 건설 등을 제공한다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합의에 이르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OPEC이 석유 수출 대금을 달러만으로 받기로 하게 된 것이다. 이를 키신저는 페트로달러 재활용(Petrodollar Recycling)이라고 불렀다.
- 금융위기 즈음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쑹홍빙, 윌리엄 엥달의 책들은 '페트로달러라는 말이 대중들에게 널리 익숙해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핵심적인 논리는 이렇다.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있을 무렵 사우디가 석유 수출의 결제를 달러만으로 하기로 합의하는 대신 미국은 사우디에 무기를 제공수출하고 안보를 보장해 주기로 했다. 이 과정은 미국이 패권을 추구하기 위 한 음모의 일환이고 이를 설계하고 추진한 것이 데이비드 록펠러와 헨리 키신저를 중심으로 한 삼각위원회, 빌더버그 회의의 세력들이라는 것이다. 앞장을 모두 읽었다면 이런 음모론적 사건의 구성이 사실 상상과 사실이 취약한 조합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닉슨이 사우디의 국왕과 1975년 조약을 맺을 당시에는 이란과 이라크가 사우디보다 더 친미 성향 국가였다는 점, 닉슨은 삼각위원회 입장에서는 제 거하고 싶은 대상이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은 그들에게 한창 공격당하고 있었다는 점, 정작 사우디아라비아가 스윙프로듀서 역할을 하 게 된 것은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이 미국과 단교하고 이라그와 전쟁을 한 1980년대에 들어서라는 점 등의 사실만으로도 모두 위의 음모론이 제시하 는 가설을 반박할 수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라는 점 등의 사실만으로도 모두 위의 음모론이 제시하 는 가설을 반박할 수 있다. | 이런 정황 외에 유로화 출범의 과정만으로도 음모론이 얼마나 허황된 것 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닉슨의 금태환 정지 선언이 있기 1년 전 인 1970년 이미 유럽에서는 유럽의 단일 통화를 출범시키기 위한 베르너보 고서(Werner Report가 만들어졌다. 달러에 대항할 수 있는 유럽의 단일 통화 에 대한 구상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2차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상승하며 달러가 다시 신뢰를 잃고 금값이 급등하던 1979년에는 유럽통화체제(European Monetary System)가 출범했다. 이것이 말해 주는 바는 독일(서독), 프랑스 등 삼각위원회의 서유럽 회원들이 결코 자발적으로 달러 기축통화 시스템의 구축에 참여했을 리 없다는 점이다. 유로화는 달러의 대항마란 말이다!
- 레이건 시대는 사실상 금에 고정되지 않은 불환지폐, 즉 화폐를 발행하 는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인 신용화폐(Fiat Currency) 시대가 처음으로 시작된 시기다. 항상 처음이 그렇듯이 레이건의 재임기간은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물가와 실업률이 잡힌 것은 실제 임기 후반이나 되어서였고, 복지 를 축소하고 법인세를 낮추면서 재정은 확장하는 것은 정적들의 공격대상 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마침 이를 돌파하기 위한 훌륭한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소련이었다. 소련의 핵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적자 재정을 감수할만한 그럴듯한 이유 가 될 수 있었고, 레이건은 1983년 3월 소위 스타워즈 계획을 발표했다. 요지는 소련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우주 공간 또는 대륙의 상공에서 요격하는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미사일, 레이저, 인공위성 등 첨단 우주 장비를 개발이 필요한 계획에 군수 산업계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국방예산은 다시 한번 급격히 증대되었고 이에 맞춰 본원통화도 술술 풀려나갔다. | 신용화폐를 찍어 내야 할 그럴듯한 이유와 방법은 갖추었지만 이렇게 찍 어 낸 화폐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게 만들 방법도 역시 필요했다. 인 플레이션을 수출할 수 없다면 화폐 가치의 급변동이 나타나고 더 이상 화폐 공급을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브레튼우즈 체제 동안 인플레이 션을 수입했던 유럽과 일본은 삼각위원회를 통해 함께 인플레이션을 수출할 곳을 찾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각국 정부의 지원하에 인 플레이션을 수출할 곳을 찾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닐 민간 거간꾼 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었다. 이 사기 진작의 방법이 바로 감세와 규제철폐라는 공급주의 경제였다. 민 간 거간꾼들은 인플레이션을 수출할만한 인구가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 고 세계 방방곡곡 달러를 침투시켰다. 신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개척이 만만치 않을 경우 정부의 도움을 요청하면, 정부는 주저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보탰다. 브레튼우즈 체제 동안은 국가의 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가 있었지만, 이제 공산권을 제외하면 어느 곳이라도 화수 분에서 막 꺼낸 달러를 아무런 제한 없이 투입할 수 있었다. 화수분 경제와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때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화수분 경제는 애초에 돈을 찍어 내지 않으면 어떤 혼란이 닥칠지 모르던 상황에서 해결책으로 제시된 방안이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시 작될 때부터 이어진 흐름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30여 년간 지속된
방향을 더 확대하는 것에 해당했다. 마치 정지하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자 전거 타기와 같이 끊임없이 돈을 찍어 내서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무게로 붕괴될, 샘솟는 지하수와 같아서 어딘가로 계속 흘려보내지 않으면 스 스로를 서서히 물에 잠기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시작한 것이었다. 여 기서 통화주의는 화수분에서 돈을 꺼내는 속도를 관리하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했고, 규제철폐와 금리인하는 찍어 낸 돈이 흘러갈 곳을 찾아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 수익률 곡선의 역전이 일어났다가 급격한 정상화(Steepening)가 일어난 사례가 1989년, 2000년, 2006년 이렇게 세 차례 있었다. 그런데 위의 그림을 보면 스티프닝(Steepening)에 대한 재밌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수익률 곡선의 역전 후 일어난 스티프닝은 모두 장단기 금리가 함께 하락하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스티프닝이 일어날 때는 단기 금리뿐만 아니라 장기 금리 역시 하락했다는 것이다. 수익률 곡선이 평탄화되는 현상은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고 했다. 돈이 너무 많아서 빌리기가 너무 쉽거나 아니면 빌려봤자 수익을 내기 어려울 정도로 경기가 침체되어 있거나. 그런데, 그린스펀은 평탄화나 역전이 나타날 때마 다 어김없이 금리를 인하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연 침체된 경기를 살린 행위였냐는 것이다. 경기가 살아나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수익 이 크다고 기대할 만한 프로젝트에 자금이 공급되면서 금리가 높은 장기 채권에도 수요가 생긴다. 그런데, 이제까지 스티프닝이라고 불렀던 현상들은 모 두 인위적으로 단기 쪽 수요의 증가를 장기쪽 수요의 증가보다 더 크게 만들 어 생긴 현상이었다.
- 은행들은 예금액이 증가하거나 자본금이 증가하지 않는 한 대출 한도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신용 부도스왑(CDS)이라는 마법의 도구는 은행들이 같은 대출한도 내에서 기업이나 정부와 같은 자금 수요자들에게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을 조달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었다. 시장에 훨씬 많은 채권이 공급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린스펀의 미소가 보이는가? CDS는 보호매수자 입장에서는 보험과 흡사한 구조이지만 신용 위험의 회피 대상이 되는 대출채권에 해당하는 기초 자산을 직접 인수하지 않고도 위험만 인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험과는 구분되었다. 그렇다고 대출이 나 채권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적용할 수 있는 법의 테 두리가 모호했다. 기초 자산을 직접 인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레버리지 효과는 컸고, 유동성이 낮은 채권을 기초 자산으로 할 경우에도 CDS 자체 의 유동성은 컸기 때문에 채권 시장과 투자은행에는 신천지가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갑자기 오랜 친구라며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미 1970년대부터 모기지 채권을 담보로 한 자산유동화 증권은 시장에등장했고, 1980년대에는 다시 이들 유동화 증권을 시장에서 소화하기 쉽 도록 위험 수준에 따라 트렌치(Tranche)를 나눠 만든 신용 구조화 채권(CMO, CDO)이 등장했다. 1990년대에 CDS와 이런 신용 구조화 채권들이 만나 합성 구조화 채권까지 등장하자, 이제 사실상 어디의 무엇이라도 현금흐름만 있다면 이를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 돈을 만들수 있는 방법이 만들어졌다. 물론, 장외파생상품을 돈을 찍는 수단으로만 이해한다면 말도 안 되는 오류다. 이것이 신용 리스크의 효과적 관리 수단의 개발이기도 했던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아시아, 러시아와 남미의 외환위기를 거 치면서 합성 구조화 채권의 운용 경험이 쌓이고,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의 붕괴, 엔론(Enron)과 월드컴(MCI WorldCom)의 파산 등의 사태가 일어났음에 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았던 것은 이런 파생상품들의 공도 컸다. 문제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시장의 시각이 너무 한 방향으로 치우쳤다는 것이다.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는 2002년 CDO, CLO, CDS 등의 신용 파생 상품의 빠른 성장과 적절한 가격 결정이 신용 위험을 잘 분산시켜 닷컴 버 블의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어찌 보면 단 몇 년 후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조금의 단서도 가지고 있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돌아봤을 때, 당시 이들 합성 구조화 채 권의 급격한 성장은 신용 리스크의 관리도구와 신용 창출의 기폭제 역할 중 후자에 더 충실했던 결과였음이 맞아 보인다.
- 중국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자본(Capital)과 기술(Technology)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모두 이를 충분히 이해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소 련이라는 체제 경쟁자에 대한 유용한 펀치라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잉여 자본을 수출할 수 있는 큰 영토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시작해 볼 만한 거래였다. 중국 역시 마오쩌둥의 실패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개혁개방에 대해 더 이상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의 문제로 인식이 변화한 상태였다.
- 클린턴이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간 것은 그들이 미국 내의 여론을 유리하게 바꾸는 데 활동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대규모 사절단은 클린턴의 의도에 맞게 정관계를 설득하는데 적극적으
로 나섰고 여론은 건설적 관여 정책에 점점 호의적이 되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클린턴은 중국의 WTO 가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중국의 상황은 이미 살펴보았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와 장쩌민의 권력 공고화 이후 중국의 보수파의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개혁론자들은 경제 선 진화 전략으로 WTO 가입을 적극 추진했다. 저임금을 활용해 제조업을 키 우고, 수출길을 열기 위해선 중국산 상품의 판로를 개척하고 기술과 자본을 투자받아야 했다. WTO 가입이 지름길이라는 결론이었다.
-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 세대-침묵의 세대(Silent Generation-는 1, 2차 세계 대전을 겪었고 큰 빈부격차, 농촌에서 도시의 교외로 이주한 공업화 1세대 에 해당했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와는 달리 2차 대전이 끝난 후 대공 황, 전쟁과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대가족을 이루는 기쁨 을 맛보았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늘어난 가족, 특히 자녀 세대-베이비 붐 세대에게 안전한 삶, 안정적인 삶, 더 나은 삶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이들 침묵의 세대들은 자녀들인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기본적으로 안정 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대전의 참상을 몸으로 겪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대공황을 직접 겪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침묵 의 세대와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이들의 부모 세대가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1970년대까지는 미국 유권자들의 요구는 '일자리와 복지' 로 요약할 수 있었다. 대공황과 실업의 공포와 공업화의 혜택을 모두 느껴 본 이들 세대는 자녀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가 실업이라는 문제로 고통받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설사 경제 위기가 닥치더라도 말이다. 이런 욕구 는 정부에 대한 복지 증대’ 요구로 이어졌고, 스스로도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높은 저축률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어질 베이비붐 세대와 비교하면 소비 성향은 현저히 낮았고, 저축 성향이 높았으며 확장적 재정정책에 대해 서는 비판적인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1960년대 히피즘의 자유(Freedom)라는 용어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의미했다. 마약, 섹스, 반전 등은 기성세대에겐 금기시되어 있던 것들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 행위였다. 하지만, 이런 탐구를 통해 얻은 결과물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대는 물질적 편안함에 대한 거대한 욕구가 있었다. 부모 세대는 2차 대전 이후 점점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 해도 한 번 형성 된 가치관을 바꾸기 어려웠다. '절약' 말이다. 실제 2013년 영국에서 발행된 영국 베이비붐 세대의 소비 성향과 관련된 연구에는 이것이 잘 요약되어 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직접 만들거나 (Make Do) 고쳐서(Mend) 쓰는 세대였다면 베이비붐 세대는 사서 쓰는 세대였다. 압축적이지만 위의 비교는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자신들이 당장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지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당장 감당할 수 없다면 신용-부채-을 동원해서라도 지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대였다. 절약과 저축에서 소비와 투자'로 사고의 관점이 이동한 것 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저축은 절약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 반면 투자는 소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부모 세대는 죽어 서 상속을 하는 순간까지도 내일을 대비했다. 생존 그 자체를 중시했던 것 이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달랐다. 그들에게 '투자'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 큰 편안함, 편리함을 추구하는 과정이 '투자'였다. 그들의 부모세대는 먹고살기 위해 소비했다면, 베이비붐 세대는 소비-투자를 위해 부채를 일으키는 것을 합리적인 행동으로 여기게 된 세대였다.
- 부모 세대와 아주 큰 사고방식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그들은 겉보기가 어떠했든 부모 세대와 비교해서 근본적으로 미래가 더 밝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지금보다 미래가 더 밝을 것이므로 부채는 미래에 갚을 수 있을 것이며, 적절한 소비는 밝은 미래를 위한 투자로 간주되었다. 자녀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것은 교육에 지출한 비용보다 그 결과 얻게 되 는 소득이 더 높을 것이라는 기대에 기초한 투자, 큰 자동차를 사는 것은 자동차를 타고 더 먼 곳으로 출퇴근하고 더 많은 물건을 실어 나름으로써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투자, 더 크고 좋은 TV를 사는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접해 스스로를 개발하는 투자라는 사고방식에 의해 합리화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다이너스 클럽을 필두로 좁은 지역에서만 사용되면서 나 타난 신용카드업체들이 1970년대가 되면서 미국 전역으로, 그 뒤로 전 세계 로 확장되어 나간 것은 세대의 사고방식의 변화와 때를 같이했던 것이다. 존 레논의 「Imagine」에 열광했던 세대는 처음엔 미래는 더 밝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탐구'로서의 자유(Freedom)'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히피즘이 추구하는 추상적인 밝은 미래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눈치 빠른 젊은이들은 부유한 부모에게 다시 돌아가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최신 지식에 대한 교육을 받고 도시에서 지적인 직업 에 종사하는 것이 진정한 밝은 미래라는 것을 곧 알아챘다. 히피들은 여피 (Yuppie)로 대대적으로 전향했다. 여피족이 추구하는 '자유(Freedom)'는 '자 유로운 자본주의의 자유였다. 어쩌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물질적 풍요의 혜택을 세대 전체가 받았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었던 현상이었다. 이 세대가 부모 세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아 시대의 주류로 나서기 시 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1970년대 후반 무렵부터였다. 1976년 아칸소 주 의 법무부 장관으로 선출되었다가 2년 뒤 불과 32세의 나이로 주지사가 된 이 세대의 선두주자가 1946년생인 빌 클린턴이었다. 1975년 불과 26세에 상품 (Commodity) 선물 트레이딩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자 회사를 설립했던 레이 달리오는 1949년생이다. 1955년생인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가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설립한 것은 각각 1975년과 1976년이었다. 레이 거노믹스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들 세대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다. ERISA는 부모 세대와 이들의 합작품이었지만, 확정기여형(DC) 퇴직연 금은 바로 그들 스스로를 위한 자작품이었던 것이다. | 레이건의 선거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화수분의 돈을 소 비와 투자라는 형태로 흐르게 만들 베이비붐 세대를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 다. 망설이지 말고 풍요를 추구해라. 그것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길이다.
- 본원통화를 공급하고 신용을 창출해도 이로 인한 총수요의 증가가 총공급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금리를 인하해서 신용을 더 창출해서 총 수요를 더 자극해야 했다. 실제로 20여 년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예상대 로 인플레이션이 달성되면 우주는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는 통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필립 스 곡선에 의하면 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지면 실업률이 증가하게 되고 이는 경기가 침체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를 방치하면? 이제까지 발행한 어마어마한 양의 통화가 수축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엄청난 질량이 한 점에 모여 생긴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더 수축하듯이, 멈출 수
없는 디플레이션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할 것이 예상되었다. 디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가 생겨 소비가 감소하고 저축이 증가하면, 이제까지 꾸준히 공급 한 통화에 의해 높아진 자산의 가치가 하 락하고, 이는 신용을 축소시켜 다시 경기를 침체시키고, 다시 물가가 더 하락하는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악 순환 말이다. 좌냐 우냐, 통화정책이냐 재정정책이냐는 사실 오바마의 불평처럼 진정한 쟁점이 아니었다. 지고의 가치는 어떻게든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 었다. 버냉키도, 옐런도, 서머스도, 크루그먼도, 숨 고르고 있는 과거의 탈규제 시장만능주의자들도 이 점에서는 모두 한 팀이었다. 크루그먼은 그런 점에서 특히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신케인스주의자들 중에서도 가장 왼쪽에 가까운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돈도 풀고 이자율도 낮추고, 거기에 더해서 미래에 소비할 여력 까지 다 끌어와서라도 소비를 자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 1980년대 이후로 중산층이 감소하고 소비 여력은 감소했는데 그 원인 중 첫 번째는 바로 통화 공급의 증가와 낮은 이자율로 자본을 조달하기가 쉬워진 상태에서 기술(Technology)이 자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는 것 이다. 공급망을 관리하거나, 신기술을 개발하는 등 반복적이지 않은 숙련 된 기술을 요하는 고숙련 근로자들은 오히려 숙련 프리미엄(Skill Premium)을 인정받아 소득이 더 증가한 반면, 기술의 발달에 의해 추가적인 자본 투입 으로 대체되기 쉬운 반복성이 높은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일자리는 로봇이나 정보통신 기술에 의해 대체되어 오히려 감소했다. 분명한 것은 기술과 자본의 도움으로 근로자 1인당 생산성은 전 영역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는 것이다. 노동 생산성의 증가에 비해 근로자 의 임금이 적게 증가한 것은 자본과 기술의 몫이 투자자와 기업의 몫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급 측면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난 논리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중산층은 감소했고 덕분에 수요의 측면에서 소비 여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 2004년 마이클 둘리와 그의 동료들은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지원으로 '재건된 브레튼우즈 시스템’이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브레튼우즈 시스템은 미국이라는 중심부(Center)와 서유럽과 일본이라는 주변부(Peripheral)를 구조의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중심부 미국이 금에 고정된 기축통화 달러를 주변부로 공급하면 주변부에서 공급받은 달러를 바탕으로 미국이 수출하는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달러가 순환되는 구조였다. 이 구조는 주변부 국가인 일본과 독일의 수출 경쟁력이 미국을 앞서기 시작하면서 흔들리게 되었다. 금에 고정된 달러의 가치가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는 WTO 체제는 어떤 면에서 변형된 브레튼우즈 체제와 흡사했다. 일단, WTO 체제 역시 군사적 측면에서는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경찰 역 할을 하고 있었고 군산 복합 기업들이 건재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체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측면은 어떠했을까? 기본적으로 새롭게 되살아난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경제적 측면 역시 중심부에는 여전히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있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주변부 역할을 해줄 국가가 있어야 했다. 이 보고서에서 지적한 주변부 국가들은 무역수지 흑자국들, 그 러니까 동아시아의 외환 보유고 축적국들이었다. 바로, 중국, 한국 대만 등의 국가들 말이다. 중심부 국가인 미국은 여전히 달러를 주변부로 공급하고, 주변부 국가들은 이 달러로 생산시설에 투자하고 다시 미국으로 달러 를 순환시켰다. 과거에는 미국이 무역 적자국이 되면서 달러를 회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스템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 새로운 체제는 달러를 회수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미국은 소비를 부추기고 있었고 동아시아 국가들은 수출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고 있었다. 양측의 이해관계는 미국 국채라는 매개체를 통해 맞아 들어갈 수 있었다. 주변부 국가들은 달러를 생산능력 확대에 투자했고 이 를 통해 재화를 미국이라는 시장에 수출했다. 주변부 국가들은 수출 경쟁 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급망의 분화를 통한 생산성의 향상 역시 수출 경쟁력 향상 과정에서 벌어진 결과물이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수출 경쟁력 유지를 위해 자국 통화가치가 상승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주변부 의 각국 중앙은행들은 계속해서 기업이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를 사 들이고 자국 통화를 발행해야 했다. WTO 체제하에서 수출 중심의 동아시아 국가가 통화가 절상될 경우 낙오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사들인 달러는 최대한 안전하게 투자되어야 했다. 상상해 보라. 한 차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의 지휘로 피눈물 나는 강제 구조조정을 당하며 알짜 자산을 해외 자본에 빼앗기다시피 했던 경험이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과연 위험 자산에 투자할 배포가 있었겠는지 말이다. 미국 국채는 수출국들에 달러의 유일한, 궁극의 투자처였다.
-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주요 수출국들이 자국의 화폐 가치 절상을 막기 위해 달러를 매입한 것은 결코 룰을 무시하거나 깨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미국 국채에 대한 투 자가 최고의 옵션이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단지 그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주도한 WTO가 구축한 자유무역 시스템은 그렇게 돌아가는 바퀴였다. 바퀴의 축은 중심부 국가였 고, 바큇살은 주변부의 수출국들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에 충실했기 때문에 바퀴가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이다. 화폐 가치의 절상을 막기 위해 달러를 사들이는 만큼 자국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은 자국 물가 상승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미국이 인플레를 주변부로 수출했던 것은 이때도 변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재건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주변부 국가들이 어떻게 자국 물가 의 상승을 억제할 수 있었을까? 뼈를 깎는 공급 측면의 생산성 향상의 노 력이 있었다. 수출국의 국민들은 뼈를 깎아가며 생산성을 향상시켜서 더 싼 달러로 표시했을 때- 값에 물건을 생산했고 미국의 국민들은 수출국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대가로 가만히 앉아서 더 싼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출국들이 미국의 국채에 끊임없이 투자하니 미국은 중동에서의 전쟁 수행이나 복지제도의 개혁에 들어가는 비용을 조달하기 가 수월했다. 정부의 재정을 해외에서 조달할 때 얻어지는 효과는 바로 민 간의 투자 여력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민간 부문은 자금시장에서 정부와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FANNG과 같은 기업들이 모험적인 도전을 시도할 때, 그들은 주변부 국가들과 비교해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가 용이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본받아야 한다는 논리의 한계가 여기 있다. 실리콘 밸리는 정부와 자금을 놓고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전제 조건이 달랐던 것이다. 중국은 조립생산을 담당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경쟁력이었다. 농촌의 유휴 노동력을 도시로 계속 끌어들여 임금 상승을 억제한 것이 바로 뼈를 깎는 노력이었다. 한국이나 대만의 경우 자본 투입을 통해 이룬 기술의 발 달이 노동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뼈를 깎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외환 보유고를 축적 한 수출국들은 미국이 주도한 자유무역 질서가 작동할 수 있게 자국민들의 뼈를 깎는 노력을 제공한 쪽이라고 볼 수 있었다.
- 금융위기 이전까지 중국의 입장은 어땠을까?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와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직접 투자는 명백하게 중국이 재건된 브레튼 우즈 체제로부터 얻고 있는 이득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지불하는 대가 도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첫 번째 대가는 국내적으로 불균형이 쌓여 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생산 공장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낮은 생산비용을 유지해야 했 다. 임금 상승은 억제하면서도 중앙은행이 달러를 흡수하고 시장에 통화를 공급하는 고난이도 곡예 비행을 해야 했다.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거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일본이나 한국이 그러했듯이 공급된 통화를 주로 수출 산업 발달의 자본으로 공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영기업이나 수 출 기업들에 특혜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결과적으로 국내적인 불균형 이 커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과거 산업화 시절에 우리나라의 수출 중심 의 대기업 육성 정책의 결과와 유사했다.
두 번째 대가는 무역을 통해 벌어들여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고로 쌓은 막대한 달러준비금을 미국에 헐값으로 빌려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이렇게 수출국들이 저리로 빌려준 달러가 미국의 거품 생 성에 일조했다는 입장이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 가 있었다. 만약 미국의 국채가치가 하락하거나, 달러 가치가 폭락하는 경 우 공든 탑이 무너져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전까지 후진타오의 중국은 재건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미국 이 중심부, 중국이 주변부 역할에 충실한 것이 서로 호혜적 106 관계라고 받 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위기의 발생 직전까지 중국은 국내적으로 저 두 가지 문제를 감수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공산당 지도부에 부패-미국 기 업자본과의 결탁-가 만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금융위기가 없었다면 중국이 언제까지 저 문제들을 감수하 고 이 체제의 주변부 역할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을까? 수출주도 성장전략이 한계에 도달하게 될 때, 즉 낮은 생산비용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까지 이어갔을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의 추가 공급의 한계점, 그러니까 동쪽 해안의 도시에서 점점 내륙의 도시로 개발을 이어가면서 내륙의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때를 그때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근로자들의 임금 수준이 어느 수준 이상에 도달하여 수출 주도에서 내수 중심으로 경제 성장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 위안화의 가치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개입할 필요성이 없어져 달러를 중앙은행이 흡수해서 미국채에 투자할 이유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그 시기가 오기 전에 산업구조를 안정적으로, 주변국들의 견제를 덜 받으면서, 고부가 가치 산업 중심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간재를 수입하여 조립한 후 최종 수출하는 위치에서 중간재를 수출하는 위치 로 전환시키는 것 말이다. 그런데,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집권하면서 리쇼어링 정책을 천명 하자 중국은 즉각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 미국이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중국도 바빠질 수밖에 없었 다. 새로운 판을 준비해야 했다. 2009년 오바마가 3박 4일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맞이하는 중국의 태도는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클린턴 과 부시가 방중했던 1998년과 2001년에는 구속 중이던 반체제 인사를 석방 하는 유화 제스처가 있었는데, 오바마 방중 당시에는 오히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유혈 사태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전격 단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 2011년 오바마가 실리콘밸리의 주 요 기업인들을 초대해 가진 만찬 자리에서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미국 에서 생산할 수 없겠냐고 요청했을 때 스티브 잡스가 그건 어려울 것 같다. 고 거절을 표시한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트럼프에 앞서 리쇼어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바로 친노동자 성향의 오바마였던 것이다. 하지 만 오바마는 최종적인 문제가 소비’라면 어떤 형태로든 해외에서 수출을 통 해 이익을 잘 내고 있는 미국의 기업들이, 더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미국으로의 회귀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지적을 인정할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헷갈린다면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중국에 하부 공급망을 두고 있는 미 국의 기업들이 미국으로 공급망을 옮기게 되면 미국 노동자의 파이가 커지 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미국이 벌던 파이 전체가 작아지는 것일 뿐임을 오바 마는 부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친기업적이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공화당 소속의 트럼프는, 사실 미국 기업의 이익을 깎아 먹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빼앗긴 노동자들의 몫을 되찾아 오겠다며 과감하게 다자간 자유무역 협정의 틀을 깰 것을 선언했다. 역시 오 바마의 실패를 부각시키고 지지자들에게 세일즈할 수 있는 모양의 행동이었다.
- 2016년 1월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와 카일 배스(Kyle Bass) 등 서양의 헤지 펀드 매니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위안화가 과대 평가되어 있다며 위안화 평가 절하에 베팅하는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 헤지 펀드들이 중국의 내부 권력 투쟁의 결과 자본의 대규모 유출이 일어날 것을 파악했 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상해방은 오랜 기간 서구의 투자자들과 이해관계를공유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해 놓았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사실 이들 헤 지 펀드 공격의 자금이 사실 상해방 그들 자신이 제공한 것이라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시진핑 정부는 2015년 홍콩을 통해 빠져나가는 자본을 급하게 틀어막는데는 성공했지만, 이어서 해외 세력들의 위안화에 대한 공격적인 매도가 지속되자 딜레마에 빠졌다. 당시 중국은 수년에 걸쳐 위안화의 국제화 작업에 공을 들여 왔고, 한창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에 위안화를 포함시키 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위안화의 가치가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국제 거래에서 광범위하고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따라서, 자유로운 거래는 보장하면서도 위안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막아야 했기에 위안화를 직접 매수하는 시장 개입을 무리해서라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2014년 최대 4조 달러를 기록했던 중국 의 외환 보유고(FX Reserves)는 이 과정에서 상해방의 주식 매도 공격 이후인 2015년 말에는 3조 3천억 달러까지 감소했고, 헤지 펀드들의 공격이 이어진 후인 2016년 말에는 결국 마지노선이라 여겨지던 3조 달러 선마저 위협받는수준까지 도달했다.
시진핑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 유출을 억제하 는 통제정책의 시행 말이다. 자유로운 위안화 거래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중국 정부의 목표에는 부합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야장천 위안화 를 매입하는 것은 중국 내부의 부패한 세력들이 합법적으로 자금을 해외 로 빼돌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은 중국 내 비금융기업의 역외기업대출액을 자기자본의 30%로 제한하고, 중 국에서 사업 중인 외국 기업들이 해외송금을 할 경우 당국의 승인을 받도 록 한 규제의 기준을 기존의 5,0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로 낮췄다. 중국 자국 기업은 100억 달러 이상의 해외 투자를 금지하는 한편, 모기업의 주력 사업과 관계없는 10억 달러 이상의 해외 인수합병을 금지하고, 유니온페이 신용 및 직불카드를 통해 홍콩 보험 상품에 가입하는 것을 제한하여 위안화의 홍콩 유출 역시 통제했다.중국 당국의 목표가 어떤 목적을 가진 세력의 의도된 자금 유출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중국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 해외의 투기적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는지는 아마 앞으로도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위안화 환율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헤지 펀드들은 조용히 손을 뗐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헤지 펀드들은 굿만 본 것이 아니라 떡도 충분히 먹었을 것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수십 년간 미국 달러는 기축통화 역할을 해왔다. 송금을 달러로 해야한 다는 규정은 없었지만 가장 많은 송금 거래는 역시 달러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이란을 제재한다는 명목으로 스위프트에서 이란의 은행들을 배제 한다는 것은 이란과 무역을 하는 국가나 기업은 돈, 즉 달러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앞 장에서 언급했던 국가 간 자유무역에 있어 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나 상기해보자. 언어나 문화의 차이 따위는 얼마 든지 극복 가능하다. 하지만 무역을 위해 주고받을 돈의 가치가 안정적이지 못하면 무역은 활성화될 수 없다. 이것은 과거에나 앞으로나 변함없을, 근 본적인 부분이다. 그러니까, 미국이 스위프트에서 이란의 은행을 배제하는 제제가 의미하는 것은 미국이 안정적인 화폐, 즉 기축통화인 달러의 사용에 제한을 둠으로써 전 세계 무역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 줬다는 것이다. 아니 왜 달러 사용을 못 하냐고? 계좌에 달러를 충분히 쌓아 두고 있는 중국이 제재를 무시하고 이란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자. 쿤룬 은 행의 계좌에 쌓아 둔 달러를 스위프트를 거치지 않고 이란 은행에 송금하려 고 한다고 했을 때, 만약 두 은행 간에 서로 계좌 이체를 완료했다고 선언한 들 국제 은행네트워크는 그들의 장부가 바뀐 것을 인정할 수 없다. 달러를 발권하는 중앙은행, 즉 미국의 연준이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은행들 이 인정하려고 한들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은행 간 거래는 단지 장부의 숫자를 동시에 바꾸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장부들의 기 록을 전 세계 모든 은행들이 신뢰할 수 있어야 국제간 결제가 작동하는 것이 다. 그래야 어떤 돈이 생기거나 이동할 수 있다. 바로 스위프트와 국제결제은 행,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그 장부의 신뢰를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중국과 이란 간의 양자 간 거래는 그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스위프트를 거치지 않고 달러로 거래하고자 한다면 가능한 방법은 제3국에 있는 차명 계좌를 이용해 양국이 거래하거나, 아니면 달러 현찰을 물리적으 로 비행기나 선박을 이용해 옮기는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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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한 순간은 순풍에 돛단 듯 잘 나갈 때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우쭐해질 위험이 있으니까.
주류에서 조금 벗어난 길을 걷는 것이 가장 좋다.
한파가 몰아치는 곳이야말로 너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곳임을 잊지 말라.
- 사사키 쓰네오, ‘일과 인생의 기본기’에서

 

인생을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앞이 보이지 않고 벼랑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중에는 성공의 토대가 되어준 경험’들이 많을 것입니다.
고난은 인생의 스승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고난과 좌절은 가혹한 운명이 아니라,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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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이끌면서 다른 사람들을 앞에 내세우는 게 더 낫다.
특히 좋은 일이 있거나 승리를 축하할 때는 더욱 그렇다.
반대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앞에 나서라.
그러면 사람들이 당신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 넬슨 만델라

앞에 설 때와 뒤로 물러날 때를 정확히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앞장서서 헤쳐 나가고,
영광과 축하의 자리엔 뒤로 물러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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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멋진 발견

경영 2020. 2. 18. 12:27

- 레고의 혁신 사례는 매우 흥미롭다. 기업의 빅데이터나 양적 조사결과는 거대하고 완벽해 보이지만, 어린아이들의 숨겨진 욕망까지 읽어내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낡은 운동화에서 아이들이 놀이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읽어내고, 겉ㅇ로 표현하지 못하는 진짜 속마음까지 밝혀내는 것, 그리고 그운동호가 담고 있는 의미를 레고의 숨겨진 기회로 연결하는 것은 결국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마술이다. 이런 결과의 도출은 공감력을 지닌 인간의 경험과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
- 사람들이 실제보다 배송시간을 더 길게 느끼는 것은 절대적인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막연한 기다림과 불확실성이 주는 부안감 대문. 사람들은 예측된 불편함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라 불만의 정도를 훨씬 낮출 수 있다. 누마라 온비르는 경쟁사보다 앞선 물류 트래킹 시스템을 도입해 상품의 배송일을 예측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배송만족도를 높일 수 있었다. 오티느는 과거 엘리베이터 속도가 느리다는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보다 훨씬 강력한 모터와 윤활 시스템을 개발. 그러나 엘리베이터 속도에 대한 불만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이때 한 직원이 엘리베이터에 거울을 설치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뜬금없어 보이는 이 아이디어로 고객불만이 크게 개선됨. 사람들이 거울을 보며 용모를 가다듬느라 느린 속도가 주는 지루함을 신경쓰지 않게 된 것. 택배시간이나 엘리베이터 속도 문제의 해결에는 공통점이 있다. 기존 해결책의 범위와 익숙함의 틀 안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솔루션적 사고대신 완벽하게 고객의 입장에서 본질적인 원인과 해결책을 고민하는 디자인적 사고를 했다는 점이다.
- 음성인식 기술이 발전해도 여전히 버튼을 눌러 작동하는 TV 리모콘은 사라지지 않는다. 버튼 리모콘이 여전히 쓰이는 이유는 기술이 그토록 없애려 하는 불편함을 사람들이 오히려 즐기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음성 리모콘이 주는 편리함이 기존의 질서를 흔들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새로운 기술은 인간에게 자칫 상실감을 안겨줄 수 있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상실이 아나라 상보의 역할을 해야 한다. 서로 보완하고 의지하는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조직의 혁신과 통찰의 변화방향
(1) 산업시대 : 리딩혁신 (뛰어난 리더의 혁신역량과 통찰에 의존)
(2) 정보시대 : 거점혁신 (소수의 혁신 조직이 전체 조직단위로 혁신철학과 방법을 전파)
(3) 창의시대 : 스몰혁신 (다수의 작은 혁신가들이 모든 영영ㄱ에서 혁신과 통찰 역량을 발휘하여 주위로 확산)
-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파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인데 말이오 (영화 관상 중에서)
- 파도가 높이 일면 사람들은 대부분 파도의 물결에 집중한다. 일부는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방향을 읽는다. 반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바람이 왜 생기는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파도가 바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바람이 공간에 존재하는 공기의 온도와 기압의 차이로 발생하는 사후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지 얼마나 오랫동안 불지에 대한 예측도 가능할 것이다.
- 니즈의 세분화
(1) 경제적 니즈 : 스페인 여행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하고 싶다. 여행에 입고갈 만한 청바지를 싸게 사고 싶다
(2) 기능적 니즈 : 공항에서 티케팅을 빨리 마치고 싶다. 캐리어의 무게를 줄이고 싶다. 비행기 영화 스크린의 자막을 쉽게 읽고 싶다
(3) 감성적 니즈 : 아늑한 분위기의 호텔룸을 이용하고 싶다. 절도나 강도의 위험 없이 안전하게 여행하고 싶다. 공항에서부터 스페인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4) 사회적 니즈 : 여행에서 현지인 친구를 사귀어 보고 싶다. 여행에서의 멋진 경험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나의 여행 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5) 문화적 니즈 :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로컬의 이국적 분위기를 맛보고 싶다. 낯선 현지인들에게서 인간적 동질감을 느끼고 싶다. 외국경험으로부터 한국 문화의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 여행가방을 거실에 놓아두는 것은 "나는 해외여행을 자주 다닐 정도로 여유있는 사람이야" 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방식이다. 과거 중국의 대도시 아파트에서는 저녁 시간에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것 역시 자신의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은근히 드러내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또한 거실에 놓이 여행가방은 은근한 자랑이나 허세를 넘어, 해외 여행이 주는 즐거움과 설렘의 감정을 일상에서 느끼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함. 해외여행을 통해 선진국의 새로운 문화와 스타일을 경험하고, 하이패션이나 고가의 화장품 등을 쇼핑하며 느낀 즐거움을 여전히 동경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 이러한 이탈 욕구는 다른 나라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행가방보다 더 흔하게 나타나는 증거물이 냉장고나 현관에 붙은 자석. 이것은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사온 기념품일 경우가 많은데, 쌓여가는 자석을 보며 사람들은 또 다른 여행을 꿈꾸곤 한다.
- 고객파악을 위한 진단질문
(1) 고객가치의 이해
* 자사상품을 이용하는 고객 유형을 세밀하게 정의하고 있는가?
* 자사 주요상품에 대해 고객이 느끼는 핵심가치와 잠재니즈를 파악하고 있는가?
* 1차적인 문제 해결 수준을 넘어 전체적인 고객경험과 혁신적인 상품으로 고객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가?
* 자사는 상품의 품질향상뿐 아니라 상품을 이용하는 고객과의 관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는 명확한 한 줄의 컨셉을 갖고 있는가?
(2) 라이스프타일 트래킹
* 자사 상품 고객군의 라이프스타일 변화를 정기적으로 트래킹하고 있는가?
* 고객 라이프스타일 변화 및 고객 인사이트를 전담하는 조직을 갖추고 있는가?
* 현재의 고객과 미래의 고객에 대한 정의와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는가?
(3) 평가와 피드백
* 상품에 대한 고객만족도를 파악하는 시스템과 관리지표를 갖고 있는가?
* 상품의 문제점이나 개선의견에 대한 고객의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반영하고 있는가?
(4) 인사이트 리더십
* 상품 기획자나 의사결정자들은 자사의 마케팅 데이터로부터 고객 인사이트를 추출할 수 있는가?
* 상품 기획자들은 고객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현장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가?
* 상품 기획자들은 현장에서의 고객관찰이나 인터뷰 등을 수행할 역량을 보유했는가?
* 의사결정자 및 기획자들은 시장 선도제품이나 기술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인사이트를 얻고 있는가?
* 의사결정자들은 고객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현장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가?
(5) 혁신문화
* 구성원들은 사내 고객중심의 혁신문화에 자부심을 느끼는가?
* 자사는 현장조직이나 구성원들로부터 혁신적인 아이디어 및 문제 해결 제안이 활발한가?
* 구성원과 리더들은 직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격 없이 토론하고 문제점을 비판할 수 있는가?
* 고객통찰이나 혁신업무와 관련해 단위 조직간 정보공유 및 협업이 활발한가
* 자사는 고객중심의 혁신과정에서 얻은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고 그것을 자산화하는가?
- 현명한 사람은 바보같은 질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바보는 현명한 답변을 통해 조금만 배운다. (이소룡)
-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바꿔야 한다, 저것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두 가지를 바꿔서는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체 시스템을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 공감기반의 창의적 발상에 유용한 'How might we ~ ?'(HMW)는 '어떻게 함녀 ~ 니즈나 ~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할 수 있다'나,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할 수도 있다'인 이유는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한 것이다. Can 이나 Should 로 시작되는 질문은 그 속에 '진짜로 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할까?' 와 같은 판단이나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문을 might로 바꾸는 순간 판단을 유보하고 다양한 대안과 가능성을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 혁신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결과다. 혁신의 결과물이 기획자나 의사결정자의 창의적 활동으로 우연히 발견된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실제로는 고객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몰입과 열정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 가능한 일인 것이다.
- 인도인들에게 골목에 위치한 이 허름한 찻집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차를 마시면 수다를 떠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이곳은 힘든 하루를 의미있게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리추얼, 즉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그들에게 물으면 그저 차를 마시러 왔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스타벅스와 같은 현대식 카페를 찾는 사람들 역시 같은 욕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하루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지역과 세대를 떠나 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 욕구일 것이기 때문. 낯선 아침 시작하기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어느 곳에서든 관찰렌즈를 끼고 이른 아침을 맞아보자.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삶의 방식과 욕구가 보석처럼 눈에 들어올 것이다.
- 어린시절 특정 대상에 대한 감정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코드가 더 강하게 오랫동안 각인되는데, 특히 구매의 순간 무의식적 선택을 유도한다는 측면에서 기업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에서 수십년 동안 인기를 누리는 과자나 빙과류를 보더라도 오래전에 만들어놓은 코드와 각인효과가 그 비결임을 알 수 있다
- 혁신은 한가지의 발명이 아니라 많은 것들의 우아한 통합에 관한 것이다. (래리 킬리)
- 수십 년 동안 어린이 칫솔은 어른들 칫솔의 사이즈를 축소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다. 그런데 아이들이 양치질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의외의 현상이 발견됐다. 일명 주먹현상. 어른들은 보통 칫솔을 붙들 때 두세 손가락을 쓰지만, 아이들은 주먹을 쥔 채 칫솔을 꽉 잡고 양치질을 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작아 칫솔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이런 관찰결과를 바탕으로 오랄비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칫솔을 내놓음. 어른 칫솔보다 더 굵은 손잡이에, 재질도 말랑말랑한 느낌이 드는 것으로 제작한 것. 그러자 아이들은 이 칫솔을 오래 가지고 놀고 싶어했음. 덕분에 칫솔질을 빨리 끝내던 아이들의 양치시간은 자연스레 길어졌다. 칫솔을 만드는 어른의 눈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 사용하는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게 된 것. 알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익숙해진 틀에서만 현상을 바라보면 이런 행동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는 이노베이터의 관찰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 관찰에서 놓쳐서는 안될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불편함을 찾아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해온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것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현재 솔루션의 범위 안에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함. 따라서 이것은 관찰자가 날카로운 통찰의 눈으로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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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는 두 부류 사람밖에 없다.
주인이냐? 머슴이냐? 주인으로 일하면 주인이 된다.
주인은 스스로 일하고, 머슴은 누가 봐야 일한다.
주인은 힘든 일을 즐겁게 하고, 머슴은 즐거운 일도 힘들게 한다.
- 최양하 한샘 전 회장

 

회사 일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으로 살수도 있고 머슴으로 살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일을 즐기면서 끝없이 학습하고 성장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남이 시켜서,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은 평생 머슴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선택은 내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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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하고 바보 같은 아이디어도 자유롭게 내놓을 수 있을 때
기발하고 천재적인 아이디어도 나올 수 있다.
- 윌리엄 바넷 스탠포드 교수

 

처음 나올 때부터 완벽한 아이디어는 없습니다.
특히나 세상을 놀래킬만한 위대한 아이디어는
처음에는 멍청하고 바보 같은 아이디어로 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에 내 생각에 맞는 아이디어만 수용하다 보면 더 이상 발전은 없습니다.
일탈적 아이디어, 바보 같은, 멍청한 아이디어라도 맘껏 말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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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모리 가즈오(89)는 교세라와 KDDI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내 ‘경영의 신(神)’으로 불리는 기업영웅입니다. 2010년에는 80세를 눈앞에 두고 일본항공(JAL) 회장을 맡아 파산직전에 있던 회사를 기사회생시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에게 “경영철학을 배우고 싶다”는 젊은 경영인들의 요청이 쏟아지자 경영 아카데미 ‘세이와주쿠’를 설립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2월14일자 A26면 <성과 강요하기 전에 직원의 마음을 얻어라> 기사는 이나모리가 세이와주쿠에서 젊은 경영인들에게 들려준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핵심 주제는 ‘사람을 키우는 경영’이다. 이를 위해 네 가지를 주문한다. ①조직을 활기차게 운영하고, ②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③책임감 있는 간부를 육성하고, ④경영자로서 분명한 역할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나모리는 직원들이 꿈을 품고, 그것을 이뤄내겠다는 도전정신으로 뭉치게 하는 것을 리더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꼽습니다. “교세라 창업 초기, 나는 거래처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 제품의 용도는 이러하니, 개발에 성공하면 이렇게 전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자업계 발전에도 크게 공헌할 제품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당시의 교세라에 그런 기술이나 제조설비는 없었습니다. 이나모리는 “그런 상황에서 그 제품을 개발하는 의의와 그 제품에 건 꿈을 필사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회고합니다. 리더가 앞장서서 꿈을 정하고, 마음에 불을 지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내 꿈은 불가능해 보였겠지만, 그럼에도 이런저런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자 어느새 직원들도 내가 품은 꿈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꿈을 실현하려는,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뛰어넘을 강한 의지가 조직 내에 생겨났습니다. 조직의 리더, 특히 최종책임을 맡은 사장은 어느 누구보다도 외롭고 무거운 자리입니다. 이나모리는 그런 중책(重責)을 감내할 만한 ‘그릇’을 키우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그가 평생 실천한 ‘리더 10계명’을 일러줍니다. ①사업의 목적과 의의를 명확히 하고 지시하라. ②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세워라. ③강렬한 바람을 늘 품고 있어라. ④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노력을 하라. ⑤강한 의지를 가져라. ‘리더 10계명’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⑥훌륭한 인격을 갖춰라. ⑦어떤 역경과 마주쳐도 결코 포기하지 마라. ⑧직원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다가가라. ⑨직원들에게 늘 동기를 부여하라. ⑩항상 창조적으로 사고하라. 요컨대 직원들에게 자기희생을 강요하지 말고, 자기 이익 대신 직원의 행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에 비해 자금 설비 기술 등 눈에 보이는 요소들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나모리는 “인간적으로 직원들로부터 마음을 얻어야 제대로 된 경영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직원들이 ‘우리 사장은 참 훌륭해’라고 말할 정도로 사장이 그들을 홀리지 못하면 중소기업은 성공하지 못한다.”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이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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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역사

경제 2020. 2. 17. 12:10

- 금융의 기본요소
* 시간을 넘나들며 경제적 가치를 재할당한다
* 위험을 재할당
* 자본을 재할당
* 이러한 재할당 과정을 접근하기 용이하고 정교하게 만듬
- 가족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 가치를 서로 다른 시점으로 옮기는 제도 중 가장 기본적인 것. 예컨대 부모가 늙으면 자녀가 돌본다는 사회적 약속은 퇴직연금과 마찬가지. 동일하게 가족, 친구,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선물을 받으며 보답한다는 약속은 금융대출과 같은 기능을 함. 하지만 대출과는 달리 미래에 받는 보상이 이자가 아니라 사회적 의무이므로 사회 연결망을 느슨하게가 아니라 탄탄하게 만든다. 이런 약속은 정식 금융계약보다 훨씬 전에 나타났다. 금융은 시점같은 기능을 한다. 하지만 대출과는 달리 미래에 받는 보상이 이자가 아니라 사회적 의무이므로 사회 연결망을 느슨하게가 아니라 탄탄하게 만든다. 이러한 약속은 정식 금융계약보다 훨씬 전에 나타났다. 금융은 시점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한 문화에서 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금융계약은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시점문제를 해결하는 전통방식을 대체하거나 개선하면서 등장하여 기존 균형상태에 도전했다.
- 드레헴 서판은 고대 서남아에서 발견된 금융문서 가운데 가장 흥미로움. 금융 사고방식이 발전한 과정을 거의 모두 보여주기 때문. 이 서판을 보면 늦어도 기원전 제3천년기에는 사업을 상상하고 계량하며 미래가치를 평가하는 기본도구가 전부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구체적 숫자로 예측해야 할 필요가 절박하지 않았다면 드레헴 서판되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 자체에도 가격이 매겨지는데, 그 가격의 근본은 동물의 번식에 기초를 둔 경제라는 근본 통찰이 서판에 담겨 있음. 이 서판은 추상적 금융 사고방식이 낳은 놀라운 결과물이다. 드레헴 서판에 숨은 사업계획에는 소 떼뿐 아니라 소 떼가 떠받치고 있는 사회의 성장과 변화를 예상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 소가 번식할수록 속 지탱하는 사회 역시 성장할 수 있다
- 이웃간의 협동은 공동체에 닥친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인 반면, 대출은 선물에 이자가 붙어 돌아오는 것으로서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빌려준 것을 되돌려 받아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다. 이처럼 암묵적 계약과 명시적 계약이 이루는 대조에는 문명이 대출을 보는 양면적 감정이 숨어 있다. 도시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상호 협동으로 위기에 대응했기 때문에 친구나 이웃에게 이자를 청구하는 행동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인류는 에덴동산이 지척인 곳에서 이자를 발명하면서부터 타락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명시적 계약, 장부기록, 노동력/배급량의 문서화는 공동체를 기본으로 생활하던 이상적 세계와 고대 도시국가를 확실히 구분하는 특징. 도시와 국가의 규모를 키운 것도 이러한 도구임이 분명함.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개인끼리도 금융계약을 했다. 수메르에서 기원전 24세기 중반에 작성된 기록 중 하나는 개인과 신전이 아니라 최초로 개인끼리 맺은 대출계약으로 보임. 문서 내용은 이렇다. "우르가리마는 푸주르에시타르에게 은 40그램과 보리 900리터를 받아야 한다."
- 고대 수메르인은 서로 이자를 매긴다는 발상을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언어학적 근거에 실마리가 있다. 수메르어로 이자를 가리키는 단어인 마시는 송아지를 의미하기도 함. 고대 그리스에서 이자를 가리키는 토코스는 소 떼에서 태어난 새끼를 가리키기도 함. 라틴어로 짐승 데를 일컫는 페쿠스는 '돈과 관련한' 이라는 영단어 피큐니어리의 어원이다. 이집트어로 이자는 수메르어와 비슷하게 므스인데 출산한다는 의미. 이 모든 용어를 살펴보면 이자개념은 가축이 자연히 번식하는 데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소 서른 마리를 1년 동안 빌려준다면 서른 마리보다 많은 소를 돌려받으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소는 번식한다. 따라서 소 떼 주인의 재산은 소 떼가 번식하는 속도와 같은 비율로 자연히 늘어난다. 소가 표준화폐 역할을 했다면 가치가 비슷한 물건을 대여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새끼를 칠 것이라 기대했을 법하다. 수렵, 채집사회와 달리 농경, 목축 사회에서는 이자라는 발상이 자연스레 출현했던 듯하다. 고대 수메르 사회는, 특히 그중에서도 양떼의 도시라 불리기도 했던 우르크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는 관습이 진화할 만한 환경을 완벽하게 갖추었던 셈이다. 드레헴 서판이 바로 그러한 발상을 자세하게 표현한 것이다.
- 밀 문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치가가 될 자격이 없다. (소크라테스)
- 고전 시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서는 금융경제가 화폐와 시장에 기초를 두고 정교하게 발전. 그리스인은 은행, 화폐, 상사법정을 발명했음. 로마인은 이러한 혁신을 토대로 금융을 발달시키는 한편 주식회사, 유한책임 투자와 일종의 중앙은행을 덧붙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는 인근에서 생산한 물건을 재분배하는 데 중심을 두고 이를 장거리 교역으로 보조했지만, 아테네와 로마는 인근의 농업 생산력만으로 뒷받침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하여 주로 해외무역에 의지하게 됨. 아테네는 필요한 밀 대부분을 멀리는 흑해에서까지 수입. 로마는 필요한 곡식을 나일 삼각주의 비옥한 농지에서 얻었다. 이처럼 대담하게 경제를 운영하려면 새로운 금융구조가 필요했음. 아테네와 로마는 곡식이 중앙으로 흘러오게 만들어야 했다. 두 국가의 경제는 해외의 농부들이 곡식을 재배하고 선원과 선장이 목숨을 걸고 곡식을 실어 오며 투자자가 배와 교역품에 투자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한편, 국제무역에 수반되는 불확실성에도 견딜만큼 확고한 결제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해결책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예측 불가한 바다에 대응할 금융기술, 어디서나 통용되는 가치 기준에 기반을 둔 화폐경제였따.
- 고대 우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세계에서도 대출과 해상무역 자금조달로부터 금융이 발전. 그런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코언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에서는 언어와 세계관 모두에 만연한 특유의 이분법 사고방식 덕분에 새로운 금융제도가 출현했다. 예컨대 토지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 가시적 재산은 실제 세계의 일부다. 반면 예치금, 장부, 계약은 추상적 재산이다. 이러한 자산은 법적 권리, 쌍방간 계약, 은행가가 수탁하는 계좌 형태로 존재했다. 코언은 추상적 재산은 고대 우르에서 금융업자가 대출 서판을 보관했던 것처럼 그리스인이 등장하기 전에도 존재했지만, 금융을 개념적으로 사업과 분리하여 가깝게는 장거리 해상교역에 적절하도록, 멀게는 제국의 요구에 부응할 만큼 유연하게 만든 것은 아테네 은행이었다.
- 곡식교역을 위해 흑해로 향하는 항해는 위험했고, 갤리선을 노잡이, 상인, 선장, 선원으로 채우는 비용은 비쌌다.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항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항해비용을 댈 만큼 부유한 사람은 바다 건너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모험을 떠나기보다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아테네에 머무르는 편을 선호했을 것임. 교역에서 20-30%의 이익을 얻으려고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수천 드라크마를 건네주도록 투자자를 유도해 낸 금융제도는 놀라운 발명품이었다. 이는 아테네 경제의 기반 자체였다. 한편 아테네 정부는 재산권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할당하는 수단과 분쟁해결 방법을 이용하여, 항해나 다름없이 위험한 탐사, 채굴 사업에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이러한 유인책 덕에 투자자는 해양항해뿐 아니라 제조사업이나 채굴사업에까지 다양하게 분산투자할 수 있었다. 아테네가 보유한 금융제도는 투자를 촉진하고 위험을 분산했으며, 위대한 도시에 필요했던 복자한 수입기반 경제를 뒷받침했음
- 아테네 민주주의와 금융이 함께 발전하면서 역설적 측면도 나타남. 교역경제는 자본투자를 분산하고, 보이지 않는 손이 곡식교역에 자본을 배분하도록 함으로써 움직였다. 아테네 민주주의에도 통치력을 분산하는 구조가 필요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기꺼이 세금을 내고 공공봉사를 제공할 추상적 기구 앞에 시민을 하나로 묶는 수단도 필요했다. 민주주의는 정치구조일 뿐 아니라 경제구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운영하려면 종교적 상징까지도 포함한 여러 기술이 다양한 계층에서 작동해야 함. 아테네의 화폐제도는 시민이 충성하는 대상을 가문이나 부족 같은 기존 집단으로부터 새로운 구조, 즉 국가로 옮겨냄. 아테네는 아테나를 국가의 상징으로, 돈을 사람들이 국가를 끊임없이 경험할 매개체로 활용. 돈은 보상체계이고 측정체계이자 공동의 부를 저장하는 수단이었다.
- 군주국에서 공화정을 거쳐 제국으로 변하는 내내 로마를 지배한 것은 혈통과 재산으로 획득한 후 계속 존속한 소규모 과두집단이었다. 6천만명이 사는 제국을 지배한 집단은 많아야 약 1만명이었다. 로마를 통치하는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25만 데나리우스를 넘는 재산을 보유하고, 기존 원로원 의원의 표결을 통과해야 했으며, 제정 시절에는 황제에게도 승인받아야 했다. 공화정 시절 로마는 주기적으로 인구조사를 하며 가문의 지위와 부를 평가하고 기록하여 시민의 서열을 매겼다. 재산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원로원 의원 자격이 박탈됨. 원로원 의석을 확보한 가문들은 매년 나오는 빈자리를 자기 가문 사람으로 채우려고 경쟁했다. 원로원 의원이 될 자격을 갖춘 사회계급은 두가지였다. 그중 로마에서 가장 유서깊은 지배가문의 후손인 귀족계급은 가장 배타적인 특권층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기사계급. 이들은 대대로 로마군에 기병을 공급하여 높은 지위를 얻음. 기사계급에 들려면 재산이 10만 데나리우스 이상 있어야 했다. 기사계급이라는 용어대로 말을 소유하거나, 말과 병사 유지비를 내기에 충분한 재원이 있어야 이 정도 재산요건을 맞출 수 있었다. 기사계급에 들려면 처음에는 혈통을 이어받아야 했지만, 나중에는 재산을 모아서도 가능해짐. 로마 사회의 하층에는 평민과 해방노예가 있었다. 이처럼 재산과 계급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금융분야에서 벌어지는 협력, 경쟁, 음모는 정치전략을 이루는 차원 중에서도 특히 중요했음. 그렇다 보니 정치가가 사업을 할 때는 법에 따라 제한을 받았다. 예를 들어 기원전 218년 원로원에서 통과된 클라우디아 법안은 원로원 의원이 소유한 상선이 실어나를 수 있는 물량을 제한. 법안의 의도는 원로원 의원이 정치력을 활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하게 막는 데 있었다. 원로원 의원이 돈을 벌어도 좋은 곳은 땅이었음. 다시 말해 원로원 의원은 넓은 땅에서 밀, 포도, 올리브를 길러 주변에 팔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리고 땅에서 농작물을 거두어도 큰 배가 없기 때문에 수출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기사계급이 일단 원로원 의원이 되면 이론적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교역에 참여하여 큰 이익을 내지 못하게 되지만 대출 같은 간접투자는 할 수 있었다. 원로원 의원은 부유해야 했지만 한편 자본을 굴리는 데도 심한 제약을 받았다. 이는 명시적 자격요건이었다.
- 요약하면 원로원 의원은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재산을 소유해야 했다. 따라서 사업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기위해 금융행위를 위임하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능력이 중요했음. 바로 그러한 기회를 원로원 의원에게 제공하는 제도가 로마 금융체계에서 발달했다.
- 타키투스에 따르면 원로원 의원은 사실상 모두 대부업자였다. 법 때문에 교역을 하지 못하게 된 원로원 의원에게 대부업은 재산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음. 로마사 연구자 네이선 로젠스타인이 원로원 의원의 재산상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농업만으로 재산을 유지할 만큼 큰 이익을 올린 원로원 의원은 많지 않았다.
- 33년 위기를 다룬 역사기록은 비록 짧지만 로마 금융의 일상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처럼 주요 대부자가 서로 관계를 맺은 결과 체계적 위험이 나타났다. 33년에 로마는 이미 여러번 신용위축과 부동산담보대출 채무불이행 때문에 일어난 금융위기를 겪은 경험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상태였다. 위기가 새로 나타나면 통치자는 앞선 위기에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살펴 지침을 얻었다. 그러면 로마 재무 담당자는 미국이 금융위기를 맞을 때 재무부가 해온 방식대로 움직였다. 즉, 대출을 통해 신용부족을 경감하고, 중개기관을 사용하여 해결책을 실행했다. 33년 위기는 고대로마에서 정치와 금융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보여주기도 함. 위기는 정치 불안기에 뒤이어 발생했다. 정치 박해에 이어진 금융박해라는 특징도 엿보임. 그렇다면 복수는 원래 의도한 범위를 넘었던 셈이다. 티베리우스는 위기를 원로원을 공격하는 무기로 썼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국고를 열어 금융이 더 이상 무너지거나 정치까지 붕괴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 고대경제 연구 권위자인 윌리엄 해리스는 서기 33년 위기를 분석하여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을 짚어냄. 엄청난 금액이 오갈 때 은화를 주고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돈은 금융중개인, 즉 은행업자로 이루어진 정교한 체계 안에서 오갔다. 황제가 은행을 통하여 구제금융을 공급했다는 타키투스의 말을 생각해보자. 정부는 여러 은행을 사용하여, 만기 3년에 무이자로 자산가치의 150퍼센트까지 담보대출을 제공했다.
- 투자자가 노예에게 사업자금을 대고 재량권을 주었다면 페쿨리움이라는 계좌를 통해 노예에게 투자한 자본금까지만 책임을 졌다. 채권자는 페쿨리움에서 추심할 수는 있어도, 해당 대출이 주인의 지시에 따라 발생했다고 입증하지 못한다면 노예 소유주의 자산에서 추심할 수 없었다. 로마의 법과 금융에서 나타난 혁신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이러한 제도구조이다. 개별투자에서 발생할 잠재적 피해가 페쿨리움으로만 한정된다면 투자자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 징세인 조합은 왜 사라졌을까? 공화정 시절 로마법은 유연하고 적응력도 뛰어난 체계였으리라고 말멘디어는 주장. 하지만 로마가 빠르게 확장하며 제국으로 변모하자 경제적 수요는 제도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이때 국가가 관료제를 갖추지 않고 필수 서비스를 외주하는 수단이 징세인 조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징세인 조합은 결국 쇠퇴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에서는 관료조직이 징세인 조합을 대체한 것이다. 징세회사는 제국 초기에는 로마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 몰라도 도급계약의 공개입찰이 줄어들면서 점점 사라져갔다. 심지어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가 야심차게 만든 법전에서는 징세인 조합을 관장하는 법이 빠졌다. 법은 금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만, 금융기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면 법으로 뒷받침해 봤자 소용없다. 로마의 법과 금융은 모두 정치, 경제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고대 주식회사를 다룬 울리케 말멘디어의 연구결과를 보면, 금융이 발전해야 했을 때 로마법은 금융발달에 필요한 요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 해리스는 로마경제에 화폐 공급량을 물리적 한계 이상으로 팽창시킨 주체는 은행업과 대부업이었다고 말한다. 계좌통화가 없었다면, 그리고 투자와 장거리 교역을 뒷받침하는 금융제도가 없었다면 로마는 대병력을 주둔시키지도, 바다를 가로질러 상품을 운송해야 할 만큼 광활하게 확장된 제국을 유지하지도 못했을 것임. 한마디로 로마는 화폐제도나 투자, 신용제도 같은 금융기술 덕분에 제국이 되었다. 금융은 로마의 곁가지가 아니라 생명선이었다.
- 로마는 조폐제도, 은행, 해상계약, 담보, 부동산담보대출, 공공금고, 중앙은행 등 이미 존재했던 금융도구를 도입했음. 하지만 이를 사용한 로마의 상황은 독특했다. 재산이 지배계층에 속하기 위한 명시적 조건으로 제시된 로마에서는 부를 창출하고 기록하며 보여주기 위하여 금융체계가 발전. 통치와 직접적 경제 이해관계를 애초부터 법으로 분리했기 때문에 정교한 신용장이 탄생. 원로원 의원도 돈을 빌려줄 수는 있었지만 직접 사업에 관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금융중개분야에는 투자사실을 숨기거나 독립적 관계로 운영하는 등 방법이 다양했다. 문제를 해결할 수많은 방법 중에는 페쿨리움이라는 법적 형식이 있었다. 최근 학계는 특히 금융중개분야에서 로마경제가 얼마나 정교했는지 입증했다. 로마 금융체계는 오늘날 시각에서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친숙해보일 때가 많다. 은행 같은 현대적 기관과 로마시대 기관이 얼마나 유사하냐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계속 일어난다. 하지만 기관의 이름보다는 기능이 중요. 로마처럼 거대한 제국이 상업을 장려하고 수입을 안정시키녀 위기에 대응하려면 화폐, 공공부채, 구제금융, 징세대리 같은 금융도구를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금융구조가 유연했음은 로마의 오랜 역사로 증명됨. 금융경제 실패를 해결하기 위한 금융수단은 채무탕감 칙령에서 화폐가치 절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징세인 조합의 출현은 로마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특히 눈에 띈다. 로마의 부는 대부분 민간에 속했다. 지배계층은 정복활동 덕분에 부유해졌다. 이렇게 얻은 재산은 어디에든 투자되어야 했고, 실제로도 신용체계를 통해 아래로 흘러갔다. 하지만 신용만으로는 차이자와 대부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 채무 불이행과 분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불황이 오면 정치가들은 채무를 탕감하여 안정을 유지하려 했다. 반면 주식회사 구조에서는 모든 주주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이윤을 주식수에 따라 배분한다면 회사의 이익이 늘어나는 데 비례하여 투자자의 재산도 증가. 주식이 공공연히 거래된다면, 특히 무기명으로 소유할 수 있다면 주식은 이해당사자 사이에 벌어질지도 모를 분쟁을 중재하는 도구가 됨. 로마 정치와 연관하여 보면 징세인 조합주식은 원로원 의원, 기사, 황제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황제가 모든 권력을 쥐게 되자 당연히 징세인회사도 쓸모를 잃음. 따라서 주식회사라는 형식이 정치, 경제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처음 등장했다는 결론을 낼 만한 것이다.

- 중국이 최소한 현대 유럽 관점에서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더 일찍부터 발전하지 못한 데는 이처럼 민간부문을 몰아낸 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음. 국가가 약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강했기 때문. 중요한 금융혁신 중에서 국채는 중국보다 서양에서 훨씬 빨리 나타났다. 유럽에서 서로 끊임없이 싸우던 약소 도시국가들은 투자자들에게 돈을 빌리고 나중에 갚기로 약속하는 방법을 터득했음. 12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국채가 등장했고, 13세기에는 온전한 채권시장이 등장. 같은 시기에 중국에는 지폐가 있었지만 채권은 없었다. 이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전에는 각국별로 돈을 빌려 전쟁비용을 조달하곤 했다. 중국에서는 다양한 금융계약을 다루는 기술이 오래전부터 확립되어 있었고, 서기 1000년 전부터 상업분쟁이나 금융재산권 문제를 재판으로 해결했다. 따라서 중국은 국채시장을 운영할만한 기술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가 될 때까지 중국 정부가 국채를 발행한 적은 없었음. 반대로 정부가 신용을 공급한 사례는 가끔씩 나온다. 중국의 정부는 민간 신용기관을 이용하여 국영사업에 돈을 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간 신용기관과 경쟁했던 것이다.
- 인류학자 벤저민 리 워프는 사고가 언어에 영향을 끼치는 것 못지 않게 언어도 사고에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표현방식과 내용은 서로 뗄 수 없다는 이론을 처음 세운 학자이다. 언어라는 기술은 마치 금융과 같이 개념체계로서 기능함. 언어마다 모두 다른 구조를 지니는데, 이러한 구조 안에서 살다 보면 관점도 영향을 받음. 부호가 과연 자기 부장품이 상징하는 새 경제 매체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후에 쓰인 문헌을 보면 중국 지배자들은 돈과 시장이 지닌 잠재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조개껍데기를 나타내는 기호를 한자에 내포했다는 말은 이후 중국식 사고의 구조에 금융이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관자'의 저자는 정부가 상품가격을 통제하는 편을 지지하면서도, 시장가격체계가 엄청난 사회적 이익을 준다는 사실 역시 잘 알았다. 자유롭게 거래하면 모두 더 잘 살게 되기 때문. '관자'에는 '만물이 유통돼야 비로소 변화가 있고, 변화가 있어야 비로소 가격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옴. 다시 말하면, 시장이 있다면 거래가 일어날 것이고, 거래가 자유로워지면 가격은 내려가고, 그 이익은 모든 지역이 나누어 가지게 된다. 오늘날 세계무역기구 고위층도 시장과 가격의 원리를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 고대도시 중에서도 진시황의 중국통일에 맞서 마지막까지 버틴 임치를 살펴보자. 그는 지배자가 편 실용적 경제정책 때문에 흥미를 끈다. 수공업과 교역에 기반을 두고 경제발전을 도모하 임치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사상가로 꼽히는 관중이 활동했다. 관자를 한사람이 썼는지 한 학파가 썼는지는 중요치 않음. 이 책은 돈이 경제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인식하고 보기 드문 수준까지 상징적 가치를 추상화했다. 관자는 돈이란 재화의 공급과 수요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 위한 기본도구라고 파악. 그리고 돈을 국가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라고 인식했음. 관자가 제시한 통화정책은 아마 실제로도 실행되었을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관자는 이윤추구라는 동기가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강조하기도 햇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것은 이윤이라는 동기 때문. 관자가 제시하는 절묘한 도구는 대부분 이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활용한 것이었다.
- 송나라 지폐는 오늘날에도 천연색 책을 인쇄할 때 쓰인느 4색 동판인쇄술로 찍어낸 최초의 인쇄물. 닥종이는 뽕나무를 비단 생산에 사용한 사천 지역에서 발전하고 완성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유통되어도 버틸만큼 튼튼한 최초의 지폐용지였다. 금융혁신이 일어나려면 문서화, 기록, 계약기술이라는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점토 서판을 발명하고 유라시아 대륙 이곳저곳에서 금속화폐가 탄생한 것처럼, 중국은 내구성이 좋은 종이에 금속판으로 인쇄함으로써 금융혁신의 역사에 유산을 길이 남겼다.
- 중국 과학자들은 수력공학을 연구하여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운하망을 만들어냈고, 또한 철광채광과 금속공학에서도 세계 최고였다. 증기력도 알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중국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는 대체 뭘까? 제임스 와트, 로버트 풀턴,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왜 중국인이 아니었을까? 중국은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하여 그토록 앞선 기술을 보유했으면서, 또한 관료제 역시 그토록 발달했으면서 세계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기술변혁인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비틀거렸던 것일까? 단순하게 답한다면 우연 때문이다. 와트, 풀턴, 벨 같은 천재는 드물다. 어쩌면 산업혁명은 특정한 역사의 순간에 천재성이 우연히 한데 모여 생긴 유전자의 장난일 것이다. 이러한 우연이론에 반론들 제기한 사람은 대만 경제학자 저스틴 린(린이푸)이다. 린은 유전자 변이만큼 확률규칙이 잘 들어맞는 것도 드물다고 지적. 엄청난 천재가 태어날 가능성은 인구의 함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송나라 시절에 세계에서 중국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 주장을 확장하여 천재가 태어났더라도 흥미로운 문제에 노출시키며 육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 교육제도는 오로지 평등을 추구했으니, 에디슨이 중국 고전을 외우느라 6년을 보내야 했다면 전기를 갖고 놀 시간이 있었겠느냐는 의문도 품을만 하다. 어쨌든 송나라 시절 중국 도시의 밀도는 창조적 지식이 흘러넘쳐 혁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린은 우연만으로는 차이를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소위 니덤 수수께끼에 매달린 명석한 학자는 수도 없이 많다. 린은 서양의 과학적 실험방법론이 우연에 따른 발견과정을 체계적으로 가속하고 조직하며 최적으로 활용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차이를 만들어낸 요소는 과학적 방법론이다. 중국 문명이 계속 달성했던 성공자체도 또 다른 요소다. 금융해법을 보면 중국은 계획, 자원배분, 위험 최소화 등 수없이 많은 복잡한 문제를 잘 풀어왔다. 자기 나름대로 경로를 밟으며, 화폐를 발행하고, 시장을 발달시키기도 했다. 역사학자 마크 엘빈은 송나라가 높은 균형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 제1 천년기의 농업을 살펴보면 중국은 더 혁신할 필요가 없어 보일만큼 성공적으로 발전. 반면 유럽은 낮은 수준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술을 급격히 바꿔야 할 필요가 더 컸다. 캘리포니아대 케네스 포메란츠 교수는 지리결정론이라는 급진적 사상을 제시. 그에 따르면 중국의 천연자원은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광석은 운송이 편리한 하천과 거리가 먼 곳에 주로 매장되어 있었다. 중국의 집약적 산업화를 막은 것은 바로 지형이었다. 그런데 이런 설명에는 기술발전을 뒷받침하는 금융의 역할이 무시되고 있다. 기술에는 천재성이 필요하지만 도한 자본도 필요함. 철도가 존재하려면 철로를 깔고 열차를 살 자금이 필요. 하지만 투자에 성공하면 수익이 난다. 그리고 사업가에게는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는 대신 모험을 계속할 동기가 있어야 한다. 사업가가 혁신으로 돈을 벌려면 특허 같은 법적 보호수단이 있어야 함. 사업가가 이룬 혁신을 국가가 빼앗아 간다면 인적자본을 투자할 이유가 없어짐. 자본시장과 지식재산권 보호는 사업가의 동기와 자본투자를 지탱하는 보조요인. 중앙집권화한 중구 정부는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는 개인에게 보상할 여력을 갖췄지만, 한편 시장이 새로운 발상에 자금을 대지는 못하게 했다.
- 산업혁명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 중에도 19세기 유럽의 금융제도가 필수적 보조요소였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유럽에서는 소득불균형이 심화하고 소득이 투자자에게 집중됨. 손꼽히는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은 기술을 전문으로 연구함. 그는 영국 산업혁명 시기의 소득 불평등을 연구한 2005년 논문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공장방식을 도입하는 데 드는 자금을 공급하려면 소득이 자본가에게 이전되어야 한다. 이윤배분 폭이 커졌기 때문에 자본수요를 충족하고 산출을 늘리는 데 드는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불평등 심화라는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투자자에게 이윤으로 보상하는 금융체계가 투자를 촉진하고 기술발전을 뒷받침했다. 투자에 보상하는 체계를 개발하는 과정은 주로 유업에서 오랫동안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중국과 서양의 차이는 기술발전에서 벌어지기 전에 금융 발달에서 먼저 벌어졌다는 것이 가장 강력한 근거임. 유럽 금융시장은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생산공정이 기계화될 때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님. 상업은행과 조직화한 증권시장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최소한 2세기전부터 유럽에 존재했음. 19세기에 철도회사가 철로를 깔고 기차를 만들어 자본을 얻으려고 접촉한 폭넓은 투자자 층은 거액을 내고 미래에 돌려받기로 하는 방식에 익숙했다. 당시 서양에는 투자기회를 얻으려는 수요와, 이 수료를 충족하는 상품을 개발할 구조화된 노하우가 존재했다. 반면 중국에는 기술 우위를 지닌 사업체와 자본을 지닌 민간 투자자를 한데 모아 줄 체계적 수단이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중국에는 재화와 상품을 거래할 거대하고 체계적 시장이 있었지만, 자본시장의 발달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 유럽의 금융발달을 핵심단계별로 나누면, 첫째는 금융제도의 출현, 둘째는 증권시장의 발달, 셋째는 주식회사의 출현, 넷째는 주식시장의 갑작스런 폭발, 다섯째는 위험의 수량화, 마지막은 전 세계를 향한 제도전파다. 서기 1000년 이후 유럽 금융구조가 이처럼 급격하게 재편되자 여러 문제가 놀라울 정도로 신기하게 해결되었지만, 이 해결책은 미묘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때때로 사회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 결과 새로운 혁신과 변화가 이어졌다. 제2천년기 동안 유럽은 금융을 시험하는 거대한 실험장이 되었다. 현대금융기술이 발달한 과정은 절대 일직선이 아니었음. 새로운 발상은 제대로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대실패를 겪기도 했다.
- 은행이라는 조직은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하고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함. 그리고 다른 일도 한다. 영업하는 지역의 법적 환경에 적합하다면 지분투자를 하기도 하고, 증권발행을 주선하기도 하며, 회사 경영에 참여하기도 함. 이러한 기준으로 본다면 성전기사단은 어엿한 은행이었음. 성전기사단의 자사을 다른 기사단으로 이전하거나, 기사단을 해산하라고 명령할 권리는 교황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 은행을 최종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카톨릭교회였다. 하지만 이런 소유권에 의미가 있으려면 일단 기사단이 종말을 맞아야 한다. 기사단은 존재했던 대부분의 기간동안 입단과 운영구조 승계규칙을 세심하게 정해 둔 일종의 조합으로 운영되었다. 조직의 사명을 확장하려는 수단으로 기사단의 자산은 기사단원만이 관리할 수 있었다. 성전기사단은 교황에게 조직설립을 인가받았으며, 그리하여 통합된 기관으로서 움직일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음. 이 말은 예컨대 파리 지부가 진 채무는 런던지부의 채무로도 취급되었다는 이야기다. 은행은 공립이든 사립이든 비영리든 두 가지 이점을 누림. 금융전문성이 첫째이고 자본이 둘째다. 금융 전문성은 차입자를 평가하고 채무불이행이 위험을 통제하며,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예금, 출금, 수입, 지출을 평가, 나열, 문서화, 기록하는 능력을 포함함. 이러한 기술을 성전기사단은 처음에 순례자 금융에 진출하며 발달시키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의 사실상 재무담당자로 일하며 완벽하게 갈고 닦았다. 게다가 기사단에는 자본도 있었다. 성전기사단의 최종 자산상태를 기록한 장부는 없지만 서유럽 전역에 소유한 재산이 엄청나게 많다는 말은 돌았다. 이러한 재산은 어떻게 얻은 것일까? 재산 중 일부는 기부형식으로 들어왔다. 독실한 신자가 돈, 땅, 보물을 기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 수도자가 기사단에 입단하면서 가져온 개인재산에서 얻기도 했음. 놀랄만큼 많은 재산이 유산 형태로 들어오기도 했다.
- 양도가능한 봉건적 권리는 이후 유럽 금융구조 전체의 기반이 되었다. 12세기초 국가와 도시는 지대, 농산물, 통행료, 세금, 해상관세, 광업권, 전통적 노역 등 봉건시대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현금화하여 재정을 마련했음. 이런 금융 시스템 덕에 봉건제적 채무를 사용하여 통치자와 지주는 돈을 빌리고, 투자자는 이익을 받고 재투자했다. 성전기사단은 관할권의 제도와 센서스 계약이 출현한 지 오랜 후에야 등장했음에도 이를 다른 진취적 대부자와 마찬가지로 자기자본을 굴리는 데 이용했다. 이러한 계약에는 이를 부여하는 나라나 통치자의 권력을 잠식한다는 위험한 문제가 있었다. 백작, 공작, 도시, 공화국이 이러한 금융방식으로 필요한 현금을 조달하자 국가의 통제력이 감소했을 뿐 아니라 채무불이행 또는 몰수 위험도 커졌다. 대략 1세기 동안 성전기사단은 토지 수천 곳과 복잡하게 얽힌 계약권리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유럽의 주요한 경제세력이 된 동시에 돈이 필요한 군주가 기회를 엿보는 표적이 되었다.
- 돈이 필요했던 유럽 통치자들은 성전기사단의 자산을 분할하고 금융의무(압류하거나 재양도한 재산, 센서스 계약, 왕실 대여금 등)에서 해방되어 잠시나마 한숨 돌렸지만, 성전기사단이 만들어낸 국제적 예치 및 결제체계가 파괴됨으로써 손실을 입은 것은 결국 유럽 전체였다. 성전기사단이 몰락하며 초래된 제도의 진공상태를 메꾼 사람들은 종국에는 이탈리아 은행업자들이었다.
-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성전기사단이 처음부터 은행업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염두에 두고 설립된 것은 아니다. 필요와 기회에 따라 그렇게 발전한 것이다. 역사가 다르게 굴러갔다면 예치와 중개라는 역할은 예컨대 에드워드 1세에게 돈을 빌려준 루카(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민간은행업자가 맡았을지도 모름. 또 역사가 달리 흘러갔다면 신성로마제국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되어, 중국에서처럼 황제가 권력과 재정관리의 중심에 있으면서 유럽 전역을 장악하고 예치와 중개역할을 맡았을 수도 있다. 금융기술은 중복되고 적응하며 때로 변덕스러움. 어떤 제도를 두고 사람들은 절대 침해하면 안되고 필연적이며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역사적 사건이 우연에 따라 귀결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같은 금융문제를 해결하는 제도가 지금과 달리 발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금융혁신이라 시간, 장소, 기회의 변덕이 연속적으로 빚어낸 역사적 우연이다.
- 성전기사단은 안정적이고 수명이 긴 체계를 제공함으로써 미래에 이렁날 결제를 두고 체결한 계약을 신뢰할 수 있게 했다. 기사단은 청빈을 서약한 윤리적 개인을 선별하여 받아들였기에 부정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았다. 게다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영업망 덕분에 시간뿐 아니라 공간을 넘나들며 돈을 송금할 방법도 제공. 하지만 성전기사단을 이상적 금융기관으로 만든 이러한 특징은 동시에 기사단이 실패한 원인이기도 함. 기사단은 소유한 부 때문에 정치적 표적이 되었고, 원래 사명이 없어지자 14세기 초반부터는 카톨릭교회에조차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성지를 잃었으니 성지의 수호자도 불필요해진 것이다. 사실 성전기사단이 지닌 부는 교회 전체가 지닌 재산규모에 버금갈 정도였음. 성전기사단 이야기는 한동안 안정적으로 발달했던 대안기관 금융구조 사례이기에 중요하다. 기사단은 오늘날 중앙은행과 달리 특정 국가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특징 때문에 결국 몰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중앙은행을 성전기사단에 비추어 보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13세기에 고리대금업 금지가 더더욱 강조된 데는 종교뿐 아니라 법과 사상의 영향도 있다. 사상 쪽 뿌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다. 중세 후반에 다시 학문적 주목을 받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따르면 고리대금의 폐해는 다음과 같다.
그 중에서도 고리대금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 되는데, 지당한 일이다. 화폐의 본래 기능인 교역과정이 아니라 화폐 자체에서 이득을 취하기 때문. 화폐는 교역에 쓰라고 만든 것이지 이자를 낳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돈의 증식을 '돈이 낳은 돈'이라는 용어로 가리키는 것은 새끼가 어미를 닮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리대금은 어떠한 재산 획득 기술보다도 자연에 어긋난다.
이 글을 보면 금융의 악덕 중에서도 가장 악한 것은 차입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금융업자가 오만하게도 생명을 창조하여 신에게 도전한다는 것. 금융업자가 지닌 돈은 돈을 낳는다. 돈은 무생물이면서도 자손을 만드는 일좆의 자동인형이자 인간이 신의 특권에 손을 뻗어 만든 괴물이다. 돈은 '죽은 것'이므로 번식하게 두어서는 안된다. 이처럼 금융이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석한 소위 스콜라 철학자들은 금융의 악덕 목록에 한 가지 죄를 덧붙였다. 바로 시간 자체를 도둑질한다는 죄목이다. 기욤 도세르는 1220년에 "고리대금업자는 모든 생명에 주어진 시간을 팔기 때문에 자연법칙을 위배한다"라고 썼다. 금융계약은 주기적으로 이자를 매김으로써 시간에 가격을 매기고, 존재의 흐름을 현금의 흐름으로 전락시킨다. 그러고 보면 베네치아 영구채의 만기는 정말로 신에게만 허용된 시간인 영원이었다.
- 새로 등장한 베네치아 채권과 이를 거래하는 리알토의 2차시장은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중요한 금융기술이었다. 국가에는 미래에서 현재로 자원을 옮겨 자본을 집중하고 군사적 목적에 사용하는 수단이었음. 전략적 위협과 기회에 자원이동으로 대응할 만하게 된 것임. 그리고 미래에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 베네치아에 있는지 채권보유자가 확인할 유인이 생겼다는 부산물도 발생. 베네치아는 국가부채를 늘리고 유지하는 데 시민이 발언권을 가진 자치공화국이었으므로 시간을 넘나들며 돈을 움직이고 궁극적으로 국가자웡늘 유지하고 성장시킬 책임을 공유하는 합작회사이기도 했다. 이처럼 새로운 자본이 등장하자 마찬가지로 새로운 관점에 따라, 즉 시간 자체가 세상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이라 재정의하고 시간을 세속화하게 되었음. 베네치아 리알토의 금융구조는 이탈리아 전체로, 그리고 유럽 각지에 있는 금융중심지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시간에 가격이 매겨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새로 등장한 재산과 투자방식으로 돈을 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리알코의 산자코모 성당에 이상하리만치 큰 시계를 건 것은 의미 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옛날 이탈리아 금융업자는 시계를 보고 시간이 중요한 차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중국에서는 중앙정부가 방대하고 복잡한 관료체제를 통제하려다 보니 회계혁명이 일어난 반면, 유럽에서는 사업이 시간흐름에 따라 어떻게 발전해나갔는지 계산하기 위해 수량화하고 기록하는 수단으로 회계가 출현. 기록수단이 불라에서 서판으로, 파피루스에서 죽간으로, 다시 양피지에서 종이로 변해가는 와중에도 사업과 금융의 근본은 언제나 숫자를 세고 기록하며 특정 시점의 경제가치를 검증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은 절차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결정하다고 정언한 바, 현실이 기술을 만드는 한편 기술도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올바르게 파악했다.
- 민간 소유대 공공 소유 쟁점을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과연 제분회사 소유주가 경영책임을 온전히 위임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 주식회사에서 드러나는 천재성고 동시에 문제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경영자가 제분소에서 나오는 이익을 대부분 가져가고 주주에게 성과를 왜곡해서 보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사상가와 회계 담당자가 옛날부터 제기한 대리인 문제는 공기업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툴루즈 회사는 위임, 경영, 감독 문제를 푸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오늘날 바자클 회사는 현대적 주식회사의 시조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로 시조가 아니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해 시조가 아니라고도 하기 어렵다. 제분소는 중세 후기 유럽 어디에나 있었다. 수력을 활용한 것은 당시 가장 중요한 기술진보였고, 제분소를 제대로 지으려면 상당한 자본을 투자해야 했다. 프랑스 남부에 있던 다른 회사도 틀림없이 주주자본주의, 유한책임, 환금성 같은 발상을 툴루즈에서 빌려왔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툴루즈 회사가 그러한 발상을 빌려왔을지도 모른다. 툴루즈 회사가 알려진 것은 역사기록이 우연히 남았고, 학자들이 이를 근거로 분석하는 데 기여한 덕분임. 사실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여러 사업을 가까이서 관찰하다 보면, 현대 주식회사의 조상일지도 모를 유사한 사업체가 있었다는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독일 광업회사들은 쿡센이라는 주식을 발행했다. 스웨덴의 유서 깊은 회사 스토라엔소는 기원이 13세기까지 올라가는데, 1347년에 받은 칙허장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지분을 나눈 합작 채광회사로 설립된 스토라엔소의 형태은 아마 툴루즈 최초의 제분회사와 비슷했을 것임. 카사 디 산조르조 역시 현대적 주식회사의 특징을 여럿 지녔다는 사실도 앞에서 살펴보았다. 유럽 중세 후기는 사업체의 형태를 다양하게 만들고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실험한 시기였던 듯 하다.
- 이처럼 중세 유럽 이곳저곳에서 주식투자를 통해 자본을 출자받은 제분회사와 채광회사를 살펴보면 자본주의란 역사에 반복하여 출현하는 경제적 해결책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계보는 단선적이지도 유일하지도 않다. 오히려 경제적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고도 흔히 나타나는 돌연변이에 가까움. 앞에서 본대로 로마 공화정 시절에도 등장했다가 황실의 후원제도에 희생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경제를 압돟며 지배한 것이 아니라, 등장했다가 사라지면서도 미약하게 살아남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사실 주주자본주의는 제대로 된 주변환경과 정치적 조건을 갖추어야만 번영 가능한 연약한 제도일지도 모른다. 모택동은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라 보았지만 자본주의 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등장할 수 있는 만큼 사라질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수많은 균형상태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 영국이 탐험 항해를 시작한 초기에는 재정확충이 시급했던 왕실이 사업기회를 제공하여 탐사가 시작된 사례가 대부분이었음.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버지니아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골칫거리였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가 반란에 실패한 후 왕권을 강화하는 등 영국이 강력한 힘을 떨쳤던 시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 재임기 영국의 금융은 취약했다. 국내 자본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는 신용장을 개설하려고 벨기에 안트베르펜 은행업자에게 사절을 보내고, 정부 세수와 왕실의 재산을 담보로 잡히며, 단기 차입금을 만기마다 연장하고, 영국이 채무를 불이행할지도 모른다는 매우 그럴듯한 가능성을 반영하여 점점 높아지는 이자를 물면서도 끊임없이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려가며 연명해야 했다. 영국의 신용도는 형편없었다. 차입금을 새로 들여오려면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는데, 제노바의 카사 디 산조르조 같이 신용도가 좋은 회사 주식의 배당률이 3-4%에 불과하던 시절에 영국 정부는 이자로 14%를 내야 했다. 유럽 대륙에 있는 도시국가와는 달리 영국 도시에는 채권을 발행하던 전통도 없었고, 증권을 사서 거래하려는 투자자층이 국내에 폭넓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영국은 금융발달이 더딘 탓에 전략적 열위에 처했다. 영국 정부에는 대안이 없다시피했다. 세금을 매기거나 차입하거나 혹은 권리를 파는 수밖에 없었는데, 팔 수 있는 권리라면 이미 대부분 팔린 뒤였다. 예컨대 해외무역 대부분을 독점할 권리는 오래전부터 상업모험가 회사 소유였음. 이 회사는 지분을 나눈 회사라기보다는 무역권을 독점하려고 서로 연합한 상인조합에 가까웠으며 따라서 길드 기능을 했다. 회사 구성원은 영국과 저지대 국가 사이 직물교역을 장악하고, 다른 북유럽 항구에서는 독일의 한자동맹과 경쟁하면 무역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상업모험가 회사에 부여한 무역권을 재조정하려다가는 영국의 국제경쟁력에 문제가 생길 위험이 었었다.
- '상업모험가'가 독점한 무역권에는 흥미로운 허점이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까지 영국 상인이 자주 접촉하지 않던 새로운 지역, 사람 항구와 교역할 권리를 다른 회사에 줄 수 있었다. 원한다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역과 독점적으로 교역할 권리를 허가할 수도 있었다. 만약 어떤 영국인이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땅이나, '상업모험가'가 아직 장악하거나 그러려고 시도하지 않은 무력로 또는 항구를 발견했다면 그는 새로 독점권을 가질 수 있었다.
- 캐세이 회사는 모험회사로서 실패했지만, 탐험을 위해 설립된 영국 회사가 살아남아 번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식회사라는 형태는 자본을 사업체로 끌어올 유연한 사업구조를 제공했다. 영국은 비록 캐세이 회사에 실망했어도 계속하여 탐사와 해외무역을 전담하는 회사에 칙허를 내주었음. 예컨대 버지니아 회사는 미국 대서양 해안 중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유명하고, 허드슨만 회사는 지금의 캐나다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영업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동인도 회사는 1600년에 칙허를 받은 후 남아시아 교역에서 영국의 교두보를 마련했고 인도에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데도 앞장섰다. 이 회사들은 모두 설립될 때부터 위험한 사업을 영위했고,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다. 투자자들은 품질이 의심스러운 금광석, 신대륙에서 살아남지 못할 확률, 태평양에서 스페인인과 마주치면 일어날 싸움,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을 상대로 벌이는 경쟁 등 심각한 불확실성과 마주하면서 돈을 쏟아부었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오노르 델 바자클이 설립될 때와 흡사한 방식으로 몇몇 네덜란드 도시의 상인들에게 후원을 받은 여러 무역회사가 합병하여 1602년 탄생. 1600년에 상인들이 한 회사 아래 연합하여 설립된 영국 동인도 회사 사례를 따른 것. 두 회사는 포르투갈과 경쟁하여 이윤이 많이 남는 아시아 향신료 무역에 참여하려고 했고, 마침내 성공. 그 후 2세기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무역을 장악했고,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와 중국무역을 지배. 아시아로 통하는 해양항로과 신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지만 이를 지배한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 VOC와 오늘날 주식회사의 모든 특징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암스테르담에 자본을 거래하는 주식시장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금융혁신이다. VOC는 주식을 거래하는 공개시장 덕에 여러가지가 달성되었다.
(1) 투자자는 주식을 샀다면 팔 수도 있다는 구체적 증거를 시장에서 얻었다. 이제 베네치아 프레스티티 이래 유럽에 존재했던 채권과 마찬가지 권리를 주식도 지니게 되었기 때문에 유동성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2) 시장은 도박하고 투기하려는 인간 고유의 경향을 활용했다. 어떤 매매자는 천성부터 비관적인 반면 어떤 매매자는 천성부터 낙관적이라 묘사한 드 라 베가는, 몇 년 동안 배당을 지급하지 못한 회사의 재산을 두고 자연스레 거래가 이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VOC 주식이 공개발행되자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는 미래 향신료 무역을 예상하는 여론 측정기가 되었음. 바자클 회사 주식은 15세기에도 자유롭게 거래가능했고, 툴루즈 곡식시장은 분명 투기가 벌어지는 장소였지만, 결국 이때까지는 낙관론자와 비관론자가 광란을 벌이는 주식시장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암스테르담 투기꾼들로부터 탐욕을 이끌어 낸 요소는 엄청난 부를 가져올 잠재력과 심각한 재앙을 맞을 위협이 공존하던 사업체, 바로 VOC의 불확실성과 위험 자체였을 것이다.
- 주식회사가 해외교역,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식민지 확장에 적합한 형태였느냐는 문제는 지금도 논쟁 대상임.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우월한 금융기술 덕분에 비교적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목표가 지나치게 많은 (그리고 이를 달성할 자금이 없는) 왕실보다는 카사 디 산조르조와 마찬가지로 상인들이 장악한 통치기관이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전략적 판단을 내리기에 적합했을 것임. 하지만 금을 찾으로 배핀섬 탐험대를 조직하거나, 부유한 부르주아가 지갑을 열 만큼 독특한 향이 나는 씨앗을 가지고 오기 위해 배를 아프리카 너머로 왕복시켜야 하는 회사 주식에 큰 돈을 들이려는 사람들은 무모하리만큼 낙관적이었다. 두번째로 탄생한 주식회사와 주식시장은 신중함과는 거리가 매우 멀어보인다.
- 네덜란드공화국의 국력이 절정에 달한 1687년 11월, 공화국 통령이던 오라녜공 빌럼 3세(윌리엄 3세)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4배 규모에 이르는 함대를 편성하고 영국해협을 건너 데본에 상륙했다. 항해자금은 암스테르담에서 손꼽히던 상인 은행업자들에게 빌려 마련했음. 독일, 스코틀랜드, 스위서, 스칸디나비아 출신 용병으로 조직한 침략군은 저항다운 저항을 겪지 않았다. 사실은 환영하는 이도 많았다. 심지어 영국 육해군이 속속 네덜란드군에 합류하기도 했는데, 이는 카톨릭교도인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민심을 크게 잃었기 때문이다. 여러 도시에서 카톨릭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해 말이 되자 영국 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사실상 증발해 버렸다. 심지어 상류층에 속한 지주조차도 싸워봐야 손해만 보리라고 생각했다. 제임스 2세는 빌럼이 합법적 권력의 마지막 상징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하려고 영국 옥새를 템즈강에 던져버리고 프랑스로 도주했고, 빌럼과 메리 2세는 공동왕으로서 영국을 다스리게 됨. 대부분 개신교도였던 영국 대중은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침략을 환영했고, 정권은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바뀌었지만, 어쨌든 1688년 네덜란드가 영국을 정복한 사건은 두 나라 모두에 깊고 오래가는 충격을 남겼다. 정치사에서는 이를 영국 왕권이 축소되고 의회민주주의가 완전히 자리잡도록 자극한 중요한 단계라 평가한다.
- 금융사에서 1688년은 대영제국이 국제적 금융강국으로 떠오르는 분수령이다. 네덜란드에서 왕을따라 온 은행업자와 금융업자는 개방된 자본시장으로 가는 지침, 채권을 사용하여 정부 운영자금을 대는 방법, 투기심리를 자극할 복권, 불로소득자 계층에게 제공할 종신임차료와 종신연금, 그리고 재정정책 도구로 쓸 만한 중앙은행 등을 망라하는 네덜란드 금융의 유전자정보를 가져왔다. 그리고 영국인은 이런 도구에 넘쳐나는 상상력을 더하여 1688년 이전 영국 사회가 감히 상상하지 못하던 방식으로 적용. 명예혁명은 영국인의 금융 상상력을 해방했다. 대영제국이 들어선 새로운 금융시대를 가리켜 작가이자 사업가인 대니얼 디포는 '기획의 시대'(projecting age)'라 명명
- 영국에서 새로 등장한 회사를 산업별로 보면 광업, 인양, 어업, 임업, 농업, 직조 등 기계를 이용한 제조업, 해외교역, 기반시설 건설업, 부동산, 대여, 금융 등으로 나뉨. 영국이 독점법을 도입한 1623년 이후에는 새로운 발명을 통해 이익을 얻을 독점권이 발명자 몫으로 돌아갔다. 1688년 이후 새로 등장한 금융시장은 창의력과 지식재산권을 자본과 혼인시킨 것이다. 혁신동력이었을 주식회사가 경제에서 지닌 중요성은 다른 구성요소에 비하여 극적으로 커졌다. 역사가 윌리엄 로빈슨 스코트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주식회사는 1695년에 대영제국 국부 중 1.3%를 차지했지만 1720년에는 13%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 주식회사는 무역독점 특권에 의존하는 소수상인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회사 모임에서, 서로 무관한 투기꾼들이 부자가 될 꿈을 꾸며 새로운 발상이나 특허에 열광적으로 투자한 자본이 가벼운 규제만을 받으며 한데 모인 장소로 바뀌었다.
- 일반적 시각에 따르면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중반에 생산공정 기계화와 공업의 분업으로 경제적 전환이 완료되며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윌리엄 로빈슨 스코트는 세 권에 달하는 대규모 연구결과에서, 산업혁명의 씨앗은 그보다 훨씬 앞서 1720년까지 이어진 기획의 시대에 뿌려졌다고 주장. 명예혁명 이후 설립된 회사목록을 살펴본 후라면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기계화, 혁신, 재산권, 자본 등 모든 요소가 그때 존재했다. 기획의 시대에는 이렇게 새로운 회사들이 폭발하듯 출현하는 사건이 왜 네덜란드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17세기가 저물무렵 암스테르담에는 런던이상으로 세련된 금융기법이 있었음. 17세기 초 런던 시장이 등장하는 데는 명예혁명과 함께 들어온 네덜란드 금융업자도 공헌했다. 영국 증권과 은행제도의 기본구조 및 작동방식은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빌려온 것이다. 채권시장, 연금 및 기타 저축 수단이 발달한 네덜란드 등 유럽 대륙 경제권에서는 자본이 공급되면 투자증서 시장이 움직인다는 사실도 이미 입증되었다. 네덜란드인은 VOC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주식시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왜 다이빙벨 계획, 종이회사, 제련사업이 거래되는 주식시장은 없었을까? 아마 명예혁명 자체가 변화의 정신에 촉매역할을 했을 것임. 마찬가지로 왜 90년대에 유럽이나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만 기술주 거품이 일었는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임. 세 시장 모두 금융제도와 활발하게 돌아가는 기술연구 프로그램을 갖추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변혁을 일으킬 가능성, 새로운 마케팅 모형과 통신수단, 옛 기술의 죽음, 이익보다는 클릭수와 판매량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새 시대의 금융 등을 논하며 진정한 열기가 시작된 곳은 분명 미국이었음
-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잇는 그 유명한 삼각무역은 1711년에야 시작됨. 삼각무역은 18세기 서양사회에서 경쟁력이 순환하는 주된 방식이었다. 공업화된 영국 북서부 도시의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은 아프리카로 실려 가 노예와 교환되고, 노예는 악명놓은 중간항로(아프리카 서해안과 서인도제도를 잇는 항로)를 통해 카리브해 섬으로 실려와 조직적으로 억압받으며 본토에 팔 작물을 생산. 그리고 노예를 팔아 남은 이윤으로 구입한 설탕과 사탕수수 같은 상품이 유럽으로 실려왔다.
- 노예무역 분야에서 손꼽히는 역사가 조지프 이니코리는 삼각무역이 활성화된 덕분에 대영제국이 18세기에 기계화, 공업화가 발생했고, 재화와 사람이 멕시코만류를 따라 크게 순환하며 간접적으로 현대 유럽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함. 그 말이 맞을 것이다. 1711년에 남해회사에 투자한 투자자는 이 회삭 교역하여 세계경제를 바꾸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임. 하지만 금과 은과 남아메리카 플랜테이션 농업 이미지를 덧칠하며 맹목적 자국중심주의를 주장한 대니얼 디포의 글은, 영국 정부에 받을 돈이 있는 채권자가 연체되는 채권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누구도 아닌 총리가 설립하고 운영하며 아시엔토까지 소유한 새 회사에 기꺼이 운을 걸게 만들 만했다
- 금융시장의 실수를 기록한 '어리석음을 비추는 위대한 거울'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지혜를 실었다. 여기에 실린 묘사가 서브프라임 위기가 일어난 08년에도 딱 들어맞아 보이는 것도 사실. 하지만 책의 분석결과에는 우의의 언어라는 한계가 있음. 존 로가 낙낙한 옷을 걸치고 하늘에 떠 있는 신들로 묘사될 뿐 상세한 통화정책을 나타낼 수 없었듯이, '어리석음을 비추는 위대한 거울'을 그린 화가들이 쓴 우의의 언어로는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에서 새로 발전하던 주식시장이 대표하는 복잡한 혁신, 도구, 시장, 계약, 그리고 정보흐름을 나타낼 수 없었다. 이 형상들이 그토록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이유는 원형에 호소하기 때문. 우의라는 언어는 수학과 시장의 논리에 비하여 의식의 훨씬 깊은 곳에 박혀 있음. 이성적인 존 로와 그가 만든 시스템이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었듯이 수학적 사고가 저지른 명백한 실수에 맞닥뜨리자 사회는 붕괴를 이해하기 위하여 더 오래된 언어로 되돌아갔다. 지금도 같은 실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최근에 붕괴한 일 주택저당대출 유동화는 손쓸 수 없이 복잡하여 결국 실패한 금융혁신으로 일축되고, 사회는 현대에 일어난 위기를 유명 금융업자가 악당으로 출연하는 단순한 도덕극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원형은 무의식에 보편적으로 호소력이 있기 때문에 위험다. 선출된 공무원들이 유권자와 소통해야 할 민주주의 사회에선 더욱 그러함. 두뇌를 이루는 여러 부분 중에서도 신화와 이야기를 통해 사고하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마치 오래전부터 인간의 행동을 점점 더 많이 장악한 이성적 사고에 불만을 품고 질투하다가 이성이 실패를 겪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 유럽은 1720년에 대규모 주식 거품 붕괴를 겪고 움츠러들었고, 그 후 수십년 동안 금융기술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 거품방지법은 영국에서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지분을 거래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제외한 주식거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스타트 로테르담과 같이 성공을 거둔 회사주식조차 현금화하기 어려웠다. 주식거래는 18세기 말까지 사실상 중단되었다가 1820년대가 되어서야 시장이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주식금융이 죽은 한 세기를 보냈다. 18세기 내내 인가를 받은 회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프랑스에서는 미시시피회사 주식이 계속 거래되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눈에 띌 만큼 활발하게 대중을 상대로 발행되는 주식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주식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법적 규제로 심했던 18세기와 19세기 초반에 산업혁명에 일어나는 사실은 굉장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 미국 독립전쟁 지도자 중 다수는 토지투기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됨. 오하이오 회사를 설립한 버니지아 부자 중에는 조지 워싱턴의 아버지와 형제 두 명이 끼어 있다. 회사는 1748년에 왕에게 인가받고 오하이오 계곡 땅 800제곱킬로미터를 할당받았다. 프렌치-인디언 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이 버지니아 연대를 지휘하여 이름을 알리게 된 듀케인 전투의 전장이었던 지금의 피츠버그가 바로 오하이오 회사가 얻은 부지이다. 프랑스는 이 땅의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써 영국의 지배력뿐 아니라 유명한 버지니아 땅투기꾼의 토지 소유권에도 도전하는 셈이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서부개발에 관심있던 투자자들은 불쾌해했다. 전쟁이 끝난 후 1763년에 의회는 앨러게니산맥 서쪽 땅을 원주민 소유지로 보존한다고 선언한다. 오하이오 회사는 서부지역 토지에 투기하기 위해 설립된 수많은 회사 중 하나였다. 1749년 설립된 로열 컴퍼니 오브 버지니아에는 앞으로 대통령의 아버지가 될 피터 제퍼슨이 연관된다. 이 회사는 1763년 선언문 때문에 프렌치-인디언 전쟁 이후 인허가를 갱신받지 못한다. 서부지역 토지에 관심 있던 식민지인은 버지니아 사람들 말고도 많았다. 1773년에는 저명한 필라델피아 상인들이 원주민의 당을 매입하여 개발하려고 일리노이 회사와 워배시 회사를 설립. 벤데일리아 회사는 현재 웨스터버지니아에 속한 땅을 요구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아들도 이 회사 이사였다. 버지니아인과 펜실베니아인들은 서부 소유권을 두고 험악하게 대립했지만, 서쪽으로 팽창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영국의 정책이 걸림돌이기는 둘다 마찬가지였다.
- 조지워싱턴은 아메리카 토지회사가 설립되던 초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역사학자 바버라 라스무센에 따르면 워싱턴의 월폴 주식회사, 미시시피 회사, 군사모험회사, 디즈밀 습지회사 주식을 통해 보유한 땅은 총 250제곱킬로미터가 넘었다. 이러한 토지회사가 제시한 사업계획은 비옥하고 넓은 땅을 취득하고 여러 구획으로 분할하여 기본 기반시설을 개발한 다음 여기에 정착할 미국인 또는 외국인에게 파는 것이었다. 사실 오하이오 회사의 토지소유권에는 일정 기일 안에 토지에 정착할 의무가 명시적으로 못 박혀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가 소유권 분쟁을 벌여야 하고, 개발에 투자할 경화가 부족하며, 정착민 입장에서도 땅을 취득할 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달성하기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자금제공은 필수였다. 오하이오 지역 정착민에게는 부동산을 담보로 하는 금융조건이 필요했을 것이다. 토지회사가 세운 계획이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신용뿐이었다. 결국 식민지의 부동산담보대출은 토지은행과 마찬가지로 제약을 받았고, 초창기 아메리카 토지회사가 설립될 당시 품었던 희망은 서부개척에 걸린 제약 때문에 꺾였다. 그러니 워싱턴, 애덤스, 제퍼슨, 프랭클린 가문이 왜 독립을 지지할 마음을 먹었는지 이해가 한다.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하면 서부 토지개방, 부동산담보대출, 최적통화정책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었다. 금융은 주식회사를 통한 담보대출이나 부동산 투기와 관계가 밀접하므로 독립을 추진할 중요 요인이 되었다.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의 금융 역시 거품방지법이나 1763년 포고령에서 자유롭게 풀려나 해방된다.
- 마르크스나 엥겔스라면 자본시장이 만들어낸 이 엄청난 숫자를 어떻게 보았을지 잠시 생각해 보자. 1870년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시세를 발표하던 금융자산 가치는 대략 36억 파운드로, 당시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2파운드씩 나누어줄 수 있는 금액이다. 마르크스가 가치평가 척도로 선호한 노동단위로 환산해보면 더 충격적이다. 1860년대 런던에 보통 노동자는 한 주에 20실링, 즉 1파운드를 받았으니 1년에는 52파운드를 번 셈이다. 노동가능기간이 50년이라고치면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던 자본은 노동자 140만명이 평생 일한 만큼과 동일하다.
- 1870년 당시 마르크스는 런던 자본시장이 우선은 노동자에게 노예와 같은 임금을 지급하여 가치를 빨아들인 후 초과이윤으로 바꾸고, 마지막으로는 실체가 없지만 증권거래소에서 매일 가치가 매겨지는 자본증서로 저장하여 엄청나게 많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착취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라면 이러한 가격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인베스터 먼슬리 매뉴얼에 나오는 숫자는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을 법하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현실이란 그 숫자로 들어간 노동이다. 1870년 새해 첫날에 빈에 있는 노면전차 회사 주식을 살지 러시아 철도 대기업 주식을 살지 고민하던 우리의 갑부 친구들은 여러 세대에 걸친 노동자를 착취하여 살아가는 악당일까, 아니면 자신의 경제적 미래를 기꺼이 위험에 빠뜨려 가며 전 세계 기반시설을 현대화하려던 투자자일까? 둘 다 아닐까? 아니면 둘 다 일까?
- 이번에는36억 파운드란 영국 및 기타 국가의 투자자들이 1870년까지 소비하지 않고 아껴 확보한 순저축액이라고 생각해보자. 이 자본은 다른 사람을 착취해서가 아니라 투자자 자신이 노동한 데서 나왔다고 상상하자. 그렇다면 이 금액은 엄청나게 큰 노동의 가치가 시간을 뛰어넘어 전달된 것인 셈이다. 비축한 자본은 런던의 일용직 노동자 임금으로 생각하면 140만명을 50년 동안 부양햘 만한 양이다. 영국 인구는 1870년에 대략 2000만명이었으니 1인당 금융시장 규모는 180파운드가 된다. 동일한 주식과 채권이 암스테르담, 파리, 베를린, 브뤼셀 같은 자본시장에서도 거래되었고, 1870년 유럽 인구는 모두 3억명 쯤 되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숫자에는 속임수가 약간 들어 있다. 그래도 어떤 기준에서 보든, 런던 자본시장이라는 기술은 엄청나게 많이 저장된 인간의 에너지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중개하고 있었다. 주식과 채권을 발행한 나라와 주시고히사는 결국 이렇게 비축한 자본의 현재가치를 증권 소유자에게 약속한 셈이다. 투자자는 자신의 생애주기가 흐름에 따라 그 가치 이상을 소비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자본은 도둑맞은 노동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라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막대하게 모아 둔 비축물자였다. 1870년 런던 증권거래소는 현재에 심은 받침대 위에 올라 과거의 저축과 미래의 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거대한 경제 지렛대였다.
- 17세기와 18세기에 벌어진 무역대국이 국가차원에서 국제무역을 보호하려던 결과이다. 반면 19세기에 주권을 잃게 되는 과정은 차츰 계약 위반의 결과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투자자 권리보호라는 명목은 주권침해를 정당화했다. 금융계약은 역사의 임계점에 도달하여, 이제 정치권력을 재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1차 아편전쟁 전 중국에서 유일한 개항장이던 광저우에서 처음 설립된 서양회사들은 공식허가를 받은 공행을 써야만 했다. 이는 1843년부터 필수요건에서 제외되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국에 있는 무역회사를 크게 좌지우지한 이들 중국인 관리자를 가리키는 역사용어가 매판(comprador)이다. 매판은 무역회사가 속한 중국인 대리인이자, 아편, 비단, 차, 면화 같은 상품교역을 처리하고 수수료를 받는 중개인이기도 했다. 이들은 외국 회사의 핵심 고용인으로 치외법권을 누리는 한편, 중개자라는 처지를 이용하여 스스로 무역하기도 했다. 조약항이 늘어나자 매판자리도 많아졌는데, 이 자리를 채운 사람은 광저우 상인들이었다. 매판의 핵심성격은 신뢰보증, 가문에 기반한 인맥으로 중국 국내 사업체와 접촉하는 접점이었다. 바로 이 인맥에 서양회사가 신뢰할 만하다고 보증해주는 것이 매판의 일이다. 어느 한쪽이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피래를 보는 사람은 매판이기 때문에 보통 높은 보수를 받았다. 매판 중 매우 많은 사람이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금융 노하우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매판은 언어구사에서 두 가지 또는 그 이상 능한 전문가일 뿐 아니라, 두 금융제도에 익숙한 전문가이기도 했다. 이들은 상품과 제조품뿐 아니라 금융기술로도 동양과 서양을 중개했다. 그 형태는 은행업 참여와 중국 자체 증권거래소 설립이었다.
- 중국은 매판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특히 금융 및 기술 근대화를 배우려고 학생을 유학시켜 단 40여년 만에 주식회사 자본주의의 교훈을 흡수했다. 중국 상인과 관리는 주식을 발행하고 은행을 설립하며 철도를 부설하고 국제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하는 방법을 빠르게 배워 나갔다. 외국이 아편전쟁을 개시하고 배상금을 부과하며 치외법권과 조약을 통해 중국 영토와 중국 상업에 대한 주권을 침해하는 와중이었는데도 말이다. 이 이야기는 금융혁신이란 정치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나타나는 결과라고 해석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비교적 보수적인 관점에 따라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중국에서 급격하게 일어난 금융혁신이 놀랍고도 예기치 않은 결과를 불러 왔다고 해석해도 충분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과 18세기 미국 독립전쟁은 예상보다 공통점이 많다. 미국에서도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경제발전을 보던 식민지 관리들이 중앙정부의 통제에 반발했다. 미국에서는 세금, 토지회사, 해외무역 규제가 촉매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는 발전에 깊이 개입하던 중앙정부가 중요 요소였다.
- 공화국이 새로 들어선 후 중국 금융시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 시기에는 장점과 약점이 모두 드러났다.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는 중국 철도권을 국내 투자자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부족한 정부재정을 회복하려면 외국 자본시장에서 돈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13년에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연합체로부터 선후대차관을 도입했다. 미국은 원칙에 따라 참여하지 않았다. 차관조건은 중국 신정부에 매우 가혹했다. 한 마디로 자금을 빌려준 나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과 같았다. 혁명 이후 중국은 소위 군벌시대에 만연한 정치불안에 신음했다. 국채는 대부분 1921년에 채무불이행이 선언되었으나 해상무역 관세로 보증받은 국채의 원리금은 계속 납부되었다. 1939년에는 사실상 모든중국 국채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이 시점에 중국 금융이 죽어가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사람도 있을텐데 그렇지 않다. 39년 당시 상하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금융중심지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하이 와이탄 지역 강변에 금융사 건물로 이룬 위풍당당한 벽이 건설된 시기가 바로 20세기 초이다. 그리고 이때 중국의 주식시장도 번영했다. 중국의 정치와 경제는 혼란에 빠졌어도 상업과 금융기반은 호황을 누렸다. HSBC가 1865년에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얻었고, 룬촨자오상쥐가 설립되면서 1872년 중국인 전용 주식시장이 출범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보자. 중국 회사와 외국 회사의 주식이 모두 활발히 거래되고 영어신문과 중국어신문을 가리지 않고 주가가 실리기 시작한 때가 그 시점이다.
-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1720년 전후에 회사를 만드는 실험을 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한 시기는 1704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1830년까지는 지나친 투기를 우려할 정도로 주식이 거래되었다. 투기열풍은 1869년과 1893년에 불었는데, 이 중 1893년에는 주식담보대출 규제가 완화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따라서 러시아 시장의 역사는 미국 주식시장 발전가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 IMF의 중요한 특징은 국가채무를 보증받는 옛 방식을 없앴다는 데 있다. 예컨대 이제는 채무를 상환받기 위하여 루르 지역을 담보로 잡힐 필요가 없다. 원리금을 직접 상환받기 위하여 채무국 관세나 운하 사용료 징수권을 차압하지도 않는다. 이제 IMF는 거시경제지표를 미래 대출조건으로 설정했고, 부채수준이 심각하다면 체계적인 경제조정을 요구했다. 그 수단은 이기적인 채권보유자 또는 대출은행이 아니라 거시경제학자가 설계한 해결책인데, 재정긴축, 화폐가치 절하, 수출증대, 무역자유화 정책 및 민영화 도입 등 다양했다. 이처럼 IMF로부터 조건을 부여받은 국가들은 조건이 가혹하다거나 처방이 잘못되었다면 불평하기도 했다. 예컨대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 사례를 보자. IMF와 유럽연합이 요구한 대로 재정을 긴축한 그리스 경제는 호전되기는 커녕 실업률 악화 등 고통을 겪었음. 그런데 최근 그리스 채무 불이행 사태를 1898년 그리스 채무재조정 사태와 비교해 보자. 당시 그리스는 크레타섬 영유권을 두고 벌인 전쟁에서 오스만제국에 패하여 지금과 마찬가지로 국제채무를 상환할 수 없었다. 그리스 정부는 IMF와 협상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영국 채권자협의회아 협상했다. 그리하여 구제금융을 얻은 대가로 마치 1878년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했듯 각국이 참여한 위원회가 그리스 금융을 장악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정부수입을 대신 가져가 채권을 상환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패전으로 오스만제국에 지급해야 할 전쟁배상금 재원도 가져가는 결과를 낳았따. IMF는 최소한 국가의 주권은 보전해 준다. 이처럼 새로 등장한 구조를 케인스가 혼자 설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주요 참여자라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 이유는 일찍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경험한 데 있었다. 현대 그리스는 케인스에게 어느 정도 고마워해야 한다. 비록 구제금융을 제공하며 온갖 불쾌한 일을 일으켰지만 최소한 국가로서의 주권은 보전해 준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만약 언제나 순현재가치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투자여부를 결정하다면 새로운 것은 절대 나타날 수 없다. 기술진보가 진행되는 것은어리석게 도박하는 사업가 덕이다. 케인스가 존 로를 얼마나 깊이 알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1720년에 대중의 마음과 자본을 사로잡은 새 기술과 새로운 회사의 꿈과 희망 때문에 거품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이 특별한 해에 투기의 밀도가 높아지자 그동안 잠재해 있던 자연력이 새로 나타나 자본시장이 금융의 관심을 순식간에 극복하고 모든 가능성을 움직였다. 케인스는 이를 경제의 강력한 잠재력으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이 힘을 정부가 길들여 거시경제 균형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경제정책이 대중의 기대를 관리할 수 있다고 통찰했다. 미래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 주면, 사람들은 현재에 지갑을 열고 소비한다. 시장 심리는 사람들이 비이성적 공포를 느낄 경우 경제를 억누를 수 있지만, 제대로 관리되면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올 힘이 된다. 케인스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정부는 호황을 없애는 방식으로 불황을 공격하지 말고, 거품이 절정에 달할 때 개입하고 시장심리를 자극하며 관리함으로써 하방 나선을 멈추게 해야 한다. 케인스의 계획은 경제를 호황 비슷한 상태로 영구히 유지하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투자수익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주가가 하락하며, 투기꾼이 별 도리 없이 판돈을 회수할 수밖에 없고 공장에 주문이 끊기기 시작할 바로 그때, 정부는 당나귀가 척박한 상황을 곱씹고 있지 말고 보상에 눈을 돌리도록 막대기 끝에 매단 당근을 눈앞에 두면 된다는 영리한 생각을 했다.
- 29년 시장붕괴가 미국인에게 금융시장이 불확실하다고 경고했다면, 대공황은 거시경제의 엄청난 위험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위험에 대응할 금융해법이 필요했음. 30년대에 실업가 빈곤이 만연하자 미국이 저축과 사회보장에서 절박한 위기에 직면했따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대공황이 닥치기 전 미국에는 민영보험, 다양한 개인저축상품, 연방/주/시/회사 차원의 퇴직연금제도가 모두 존재했지만, 경제위기가 닥쳐 체계적 충격에 노출되자 이들 모두 취약하다는 사실이 밝혀짐. 20세기 초 미국은 주식회사에 희망을 걸었지만 불황이 오자 수많은 회사가 실패하면서 일자리와 퇴직연금도 같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사를 대신하여 현재와 미래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까? 바로 정부가 그 답이다.
- 후손에게 엄청난 빚을 물려주는 것이 옳으냐는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됨. 반면 할아버지 세대가 현대 인구추세를 무시한 결과를 빤히 내다보면서도 그런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보장 제도의 결손금을 떠넘긴 사람들은 할아버지 세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와 친척이 최소한도로나마 부양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사회보장제도는 보기 드문 금융혁신이다. 그리고 정부가 약속한 배분액보다 부채가 커질 미래가 되면 정부세입을 사용해야 파산을 막을 수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미래 입법자에게는 구조를 수정하여 계속 유지할 책임이 있다. 35년에 설립된 사회보장제도를 살펴보면 금융사의 교훈이 절묘하게 부각된다. 가격을 잘못 산정한 채 종신연금을 발행하여 재정을 충당했떤 18세기 유럽 각국 정부를 떠올려보자. 보험통게는 앞으로 등장할 민족국가의 존속에 그토록 중요한데도 어떻게 철저히 무시당했을까? 20세기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설계과정을 살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가격책정 오류가 일어난 것은 장기비용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치구조 때문에 단기 분쟁 해결에 가중치를 두었던 때문이라고 할 만하다.
- 노동자와 은퇴자 비율이 변하면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연금이 돈줄을 완전히 쥔 상황이라면, 점점 더 많은 세계의 자본은 노년층의 소유가 되어 노년층을 위해 투자되거나 또는 그렇게 약속될 것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다시 말해 자본을 가진 노인과 자본을 가지지 못한 젊은이 사이에 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엄청난 연금 지급준비금을 뒷받침하는 자산이 그저 정부의 약속일 따름인 상황이 더 그럴듯하다. 미국 사회의 보장제도는 운천징수방식을 기본으로 30년대에 설립되었거, 1770년대 프랑스 종신연금제도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기 때문에 파산했다. 역사는 미래를 거의 똑같이 찍어내는 틀이다 수학과 통계로 아물 세세하게 예측한다 한들 제대로 된 연금저축과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맬서스의 예언은 통렬할 정도로 옳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은 금융이 소용없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지금 돈을 받고 미래에 돈을 주겠다는, 금융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계약은 5천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발명된 이래 지금껏 쓰이고 있다. 하지만 퇴직 이후를 관리하는 방법을 전 세계 차원에서 만들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08년 금융위기와 제도구조 재건에 지난 10년 동안 많은 관심이 쏟아졌지만, 세계가 직면한 도전 중 가장 근본에 있는 것은 저축에 관련한 금융 그리고 정치다. 미국에서는 금융실패라는 미래가 이미 다가왔다. 디트로이트시가 파산하자 은퇴자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경찰, 소방관, 교사, 미화원 등 퇴직한 시 공무원은 돈이 가장 필요할 때 디트로이트시가 약속을 파기할 가능성에 맞닥뜨렸다. 프랑스혁명은 기억하는 편이 현명하다. 가장 기본적인 저축기구를 둘러싸고 정부와 시민이 맺은 사회협약을 위반한다면, 정치제도 전체가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금융채무 재조정으로 비칠 행동이 벌어진다면 현재 수혜자인 은퇴자는, 그리고 정부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젊은이는 깊이 영향을 받고, 다양한 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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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쿠스

IT 2020. 2. 17. 12:08

- 인공지능이라는 멋진 단어는 56년도 다트머스 회의에서 처음 등장했고, 이름에 걸맞은 연구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 당시 학자들은 체스를 두는 기계나 미로찾기 알고리즘 같은 것을 구현하기 위해 총력을 쏟아부었다. 초기에는 기호주의 혹은 규칙기반이란 방법론을 통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외부에서 규칙을 컴퓨터에게 주입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기존지식을 잘 활용하여 지식을 추론할 수 있는 전문가 시스템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인간의 신경망을 모방하는 퍼셉트론이라는 인공신경망 컴퓨터가 57년도에 등장. 인공신경망은 기계가 학습한다는 의미의 머신러닝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머신러닝은 전통적 규칙기만 방법론과 함께 인공지능 연구의 양대 축으로 발전.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하여 위 두가지 방법론은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갔지만 결국 각자의 기술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90년대 이후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06년도 딥러닝이라는 것이 갑자기 등장하여 인공지능이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딥러닝은 인공신경망이 진화발전된 것이며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컴퓨터에 이식하면 컴퓨터가 지능을 갖고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뜻 보면 이런 발상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그럴듯하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검색하고 세금을 정산하고 비행 스케줄을 최적화하고 심지어 자동차를 만드는 작업까지 컴퓨터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성능을 자랑한다. 비록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프로그래밍 작업이 선행되지만 어쨌든 컴퓨터는 잘 작동한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나 추론 같은 인간의 고등한 지능을 컴퓨터로 구현하자니 무한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보고 듣고 움직이는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지능의 활동은 애초 그 규칙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널리 회자되는 폴라니의 역설이다. 66년 마이클 폴라니는인간의 인지특징을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라고 요약하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암묵지가 우리 지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반복학습을 통해 자전거를 타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나 타는 법을 모두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개와 고양이를 구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식으로 구별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보면 안다. 이런 지식이나 지능은 말로 도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규칙이나 논리로 변형해서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폴라니의 역설은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지만 '기계가 인간을 모방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되었다. 세상이 모두 놀란 알파고의 등장은 딥러닝이 폴라니의 역설을 돌파했다는 상징을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이 암묵지의 형태로 지식을 흡수하면서 지능이 향상하듯이 이제 컴퓨터는 데이터를 통해서 스스로 학습을 하면서 세상의 규칙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규칙을 손수 컴퓨터에 가르치는 성가신 작업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아기가 말문이 처진 것처럼 딥러닝은 이제 알아서 암묵지를 형성해 나간다
- 예측적 지각 : 우리 시각 시스템은 과거의 정보를 바탕으로 0.1초 이후의 상황을 예측하여 미리 예상 이미지를 생성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음. (인지과학자 마크 창기지)
- 소송 전에 방대한 문서를 분석해야 하는 인간의 수작업 업무는 컴퓨터와 분석기술에 의해 조금씩 대체되고 있다. 전자증거개시제도가 도입되는 시기에 이미 블랙스톤 디스커버리같은 회사가 등장했고, 예츠코딩기술이 퍼지면서 관련 산업이 활성화됐다. 예측코딩 산업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에버로라는 회사 변호사가 원하는 대로 방대한 문서를 검색하고 관련문서를 추출해준다. 광범위한 사용자 제어 기능을 통해 변호사 및 법률 종사자는 검색결과를 60%, 75% 등 사용자가 지정한 예측률 범위내로 설정하여 검토할 수 있다. 에버로 사용자는 최종검색결과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직접 2차 검수한 문서를 바탕으로 검색범위를 좁히거나 확장시킬 수 있다. 한편, 예측기반 법률 시스템은 자료검색과 분류에 탁월한 예측코딩과는 달리 자료분석보다는 예측에 무게중심을 둔다. 예측기반도 본질적으로는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데이터 마이닝 기술에 의존한다. 이 분야의 대표회사는 렉스 마키나다. 이 회사는 09년 설립됐는데, 데이터 마이닝을 기반으로 법률과 판례추이 등을 분석해 어떻게 판결이 날지를 예측하며 세심한 소송전략을 제시해준다. 또한 연방법원 판사들을 모두 분석해서 사건 경험, 평균소요시간, 관련 사건의 기각률, 손해배상 인용액 등의 자세한 판사비교표를 제공하고 있다. 렉스 마키나의 예측 분석 시스템이 큰 성공을 거둔 후 유사한 예측 시스템이 많이 등장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송무와 괄년한 예측분석을 넘어 법률 자체를 예측하는 서비스 모델의 탄생이다. 미국의 피스컬노트라는 회사는 예측분석 기법을 입법으로 확장했다. 이 회사의 핵심 서비스는 연방정부와 50개주에서 발의된 법안을 추적하고 법안 통과가능성을 예측해주는 것이다. 온라인 인상에서 미국 연방정부 법과 50개주 법안, 그리고 법안을 만드는 데 참여한 상하원 의원들과 통과 여부를 확률로 보여준다. 입법 예측은 예측 법률세계에서 예측 본연의 개념에 가장 근접하고 있다.
- 17년 구글의 인공지능 챗봇 2대가 서로 대화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모습이 실시간 방송됐다. 두 챗봇은 각각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재치있는 별명이다.
- 기호주의 혹은 규칙기반 인공지응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이 직접 기호화하거나 규칙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의 측면에서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는 인공신경망 같은 학습기반 혹은 연결주의 방식의 머신러닝 연구도 물밑에서 활발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이런 도전들도 역시 기술적 벽을 넘지 못하고 2차 인공지능 겨울과 함께 시들해짐. 튜링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인류의 꿈은 이렇게 하나의 추억으로 사라졌다가 딥러닝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지금의 인공지능은 오랫동안 축적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 법률은 의료분야와 함께 대표적인 전문지식 영역에 속한다. 두 종류의 전문가 시스템(규칙기반과 사례기반)의 형식을 잘 살펴보면 놀랍게도 법률세계와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법률의 형식과 내용을 보면 그 자체로 이미 규칙으로 표현된 텍스트다. 민법, 형법, 저작권법 같은 법률은 개개의 논리와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엄격한 법적 규칙을 담고 있다. 법률은 그 자체가 컴퓨터 프로그래밍 코드처럼 작동하며 법적 분쟁해결과정도 법률을 기초로 하여 정교한 논리 추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법률가들은 이런 규칙덩어리를 갖고 그 규칙에 따라 연역적 추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일찍부터 법률세계를 주목하면서 규칙기반 법률 시스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법률가들은 법률규칙에 따라 컴퓨터 알고리즘처럼 추론하기도 하지만 유사한 사례를 기억에 떠올려서 귀납적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인지과정은 사례기반 시스템과 잘 어울린다. 결론적으로 법률세계는 규칙기반과 사례기반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법률 전문가 시스템 연구는 규칙기반 시스템이 등장한 이후에 시간이 좀 더 흘러 사례기반 시스템 연구가 시작됐다. 규칙이냐 사례냐 하는 이분법은 오랫동안 대립하면서 격렬한 논쟁을 가져왔다. 법률추론이라는 것이 주로 연역의 과정이라는 관점과 법 이론을 유추하는 과정이라는 관점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법률가의 추론은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면이 있다. 실제 변호사는 법률적 상담을 할 때 의뢰인이 처한 상홍을 분석하여 특징을 잡아낸 후 법률논리에 대입하게 된다. 그러나 법률용어의 추상성과 애매성 등의 이유로 규칙에 의해 일의적으로 분명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는 과거 유사한 사례나 판례를 근거로 유추한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로 사람이 다치면 교통사고특례법, 도로교통법, 형법 등의 관련법을 잘 검토하고 조항 하나하나를 논리적으로 따지면서 추론을 한다. 그러나 변호사는 실제 처리했거나 기억 속에 있는 유사한 판례를 머릿속에서 검색하여 단번에 결론을 내기도 한다. 이런 변호사의 해결전략은 매우 일반적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유추할 수 있는 사례가 부족하고 없다면 법률조항을 하나씩 따져가면서 법률 규칙 알고리즘을 작동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변호사는 연역과 귀납을 동시에 사용하는 셈이다.
- 전문가 시스템 연구는 기존에 존재하는 지식과 인간의 상식을 모두 주입하면 인간 의사나 변호사처럼 추론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전문가 시스템은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능력과는 비교되지 못하며 매우 제한적으로만 작동한다. 전문가 시스템은 형식적으로 인간을 단순하게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실제 인간의 복잡한 인지과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님. 뇌과학이나 신경생물학 같은 학문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우리는 뇌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뇌는 난공불락의 세계다. 인간의 뇌를 모방해서 인공지능을 구현한다는 관점에서는 그 당시 학문 수준으로 인간처럼 추론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형식적으로나마 인간의 인지과정을 모방한다고 해도 지식을 추출하고 규칙을 입력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해야 하기 때문에 무한한 시간과 비용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은 인공지능 구현에 학습개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파이겐바움의 그 원대한 꿈은 끝이 났다. "어려운 것은 쉽고 쉬운 것은 어렵다"는 모라벡의 역설처럼 기계에게 복잡한 계산이나 연산은 쉽지만 걷고 움직이고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물을 보고 인식하거나 상식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기계에게 어떤 규칙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애매하고 막막하다. 우리는 물, 나무, 바람 같은 것들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런 상식은 고도의 지능에 의존하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별 생각없이 반복했던 언어훈련에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것이다. 단어의 상식적 의미나 개념은 다른 단어에 의해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외부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감각적으로 체득되는 면이 있다. 따라서 몸이 없는 기계는 그런 것을 애초 가정할 수 없고 상식을 가르칠 뾰족한 방법도 없다.
- 전문가 시스템은 인간의 지식을 잘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지식의 의미를 잡아내기 위해 또 다른 지식의 표현이 필요한데 이런 식으로 계속 연결하다 보면 상식 수준의 지식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식은 컴퓨터가 그 의미를 직접 잡아내지 못하므로 또 다른 지식이나 단어가 필요하고 끝없는 반복을 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지식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추론지능을 만드는 것은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작업임을 암시한다. 결국 초기의 생각하는 기계는 전문가 시스템으로 진화했지만 이런 본질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머신러닝과 같은 학습기반 인공지능과 융합할 때까지 긴 정체기를 가진다. 법률 전문가 시스템도 이런 운명의 길을 걷는 것은 당연하다. 재미있는 것은 전문가 시스템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훨씬 전인 57년에 이미 컴퓨터를 이용한 법률 자동화연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법률의 자동화는 인공지능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법률정보학, 법률 인공지능, 컴퓨테이션 법률학과 같은 다양한 종파들이 생겨났고 리걸테크라는 새로운 산업을 잉태하게 된다. 법률과 컴퓨터의 성공적 결합은 알고리즘과 컴퓨터를 이용하는 방법론이 세상의 모든 학문과 지식에도 적용가능함을 암시한다. 또한 '생각이 알고리즘이며 알고리즘이 곧 생각'이라는 컴퓨테이션 철학이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 케플러 추측은 위대한 물리학자 케플러가 1611년 제안한 것으로 여러 개의 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쌓는 방법은 과일가게가 오렌지를 진열하는 것과 같은 방법(피라미드식)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도 수많은 수학자가 도전했지만 일반적인 증명에 실패했고 300년이 더 지난 98년도에 와서 수학자 토마스 헤일스와 그의 제자 숀 맥러플린이 케플러 추측을 증명. 그런데 기존 방식과는 달리 증명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헤일즈는 그들의 증명을 수학연보에 제출. 이후 12명의 수학자들이 심사위원으로 투입되어 증명의 오류를 검토하였고 4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헤일즈가 제출한 증명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파일도 있었는데, 심사위원들이 컴퓨터 프로그램 오류를 모두 검증하기 어려웠다. 최종적으로 수학연보는 증명이 참이라는 것은 99% 확신한다고 발표했다. 수학역사에서 보기 힘든 희대의 발표였다. 한편 헤일즈는 지루한 검토과정을 보면서 증명과정을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자동을 검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플라이스펙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03년도에 시작하여 14년에 최종 마무리되었다. 결국 컴퓨터가 등장해서 헤일즈의 증명이 100% 참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컴퓨테이션을 기반으로 증명의 증명, 소위 메타증명의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컴퓨테이션 수학은 이산수학처럼 컴퓨터를 위한 수학에서 나아가 수학자체를 위한 수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바야흐로 컴퓨터는 증명의 검토뿐 아니라 가설을 세우거나 증명을 하는 단계에서 인간과 협업할 준비를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자동계산과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하는 컴퓨테이션은 인간사고의 초절정 영역인 수학의 영역에 소리없이 침투하고 있다. 이제 컴퓨테이션은 수학과 과학을 넘어 인문학, 사회학, 예술, 법률에도 적용되면서 우리의 생각방식을 확장하고 있다. 소위 컴퓨테이셔니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 머신러닝에는 인공신경망 외에도 선형회귀, 로지스특회귀, 의사결정나무, 나이브베이즈, 서포트벡터머신 등 다양한 모델이 있다. 그런데 인공신경망 중에서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딥러닝이다. 우리는 보통 인공지능, 머신러닝, 딥러닝이라는 단어를 구별없이 사용한다. 이들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집합의 포함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간명하다. 즉 인공지능의 부분집합이 머신러닝이고 머신러닝의 부분집합이 딥러닝이다. 새로운 인공지능 시대를 열고 있는 딥러닝은 머신러닝의 일종이며 인공신경망의 후손인 셈이다.
- 초기의 신경망 모델인 퍼셉트론은 입력층과 출력층만을 가지는 간단한 형식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인공신경망은 입력층, 중간층(은닉층), 출력층 등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다층 네트워크 구조를 가진다. 각층은 여러 개의 노드로 이루어져 있고 노드와 노드의 연결에 의해 전체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각 노드는 뉴런의 몸체이며 연결선은 축삭돌기이고 연결자체는 시냅스 연결을 의미한다. 정보의 전달과 연산은 실제 인간의 뉴런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유사하다. 노드는 일정 크기 이상의 자극을 받으면 반응을 하는데 그 반응의 크기는 입력값과 노드 연결선의 계수(또는 가중치)를 곱한값에 비례. 일반적으로 노드는 여러 개의 입력을 받으며 입력마다 다른 계수를 가지고 있다. 이 계수가 바로 각 입력에 대한 가중치가 되며 실제 시냅스의 신호전달 가변성을 대변함. 각 노드는 들어오는 모든 입력값과 각 연결선의 가중치를 곱한 값들을 전부 더한 후 그 값을 입력값과 각 연결선의 가중치를 곱한 값들을 전부 더한 후 그 값을 최종 판결자인 활성함수의 입력으로 보낸다. 활성함수의 결과가 그 노드의 출력에 해당한다. 이런 식으로 노드는 층층이 배치되어 정보입력과 출력을 이어간다. 데이터를 입력받아서 학습한다는 것은 노드와 노드를 연결하는 연결선의 가중치를 변화시키면서 최종응답(출력)의 오류를 최소화하는 과정이다. 학습이 끝나면 이 가중치가 특정 수치로 결정된다. 인공신경망은 보통 2,3개의 중간층을 가지는 신경망 구조로도 좋은 성능을 보이며 학습도 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언어지능이나 시각지능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영역에서는 중간층의 개수가 여러 개인 깊은 구조로 만들어진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다층신경망 혹은 심층신경망) 그러나 무작정 중간층(은닉층)을 많이 늘린다고 좋은 것은 아님. 층이 늘어나면 연산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학습자체가 부족하면 오답을 학습할 가능성이 높아짐. 더 큰 문제는 융통성 없이 학습한다는 것. 주어진 학습 데이터에 기반을 두고 학습하다보니 조금이라도 변수가 생기면 적합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현상을 과적합이라고 하며 실제 데이터에 대한 오차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 다층신경망은 80년대부터 연구가 진행됐지만 실전에서 큰 활약을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 힌튼이라는 영웅이 등장하여 수렁에 빠진 다층신경망을 구해낸다. 힌튼과 그의 동료들이 86년에 발표한 오차역전파 기법에 의해 다층신경망은 기적적으로 회생을 하게 됨. 이것이 바로 1차 신경망 구출작전이다. 극적으로 부활한 신경망은 영상처리, 제어분야, 자연어 처리 등에서 제법 활약을 하는 듯하였지만 과적합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2차인공지능 겨울과 함께 90년대 이후에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2차 인공지능 겨울은 대부분의 학자들과 투자자들이 인공지능을 외면하는 시대였고, 인공신경망은 더욱더 심한 냉대속에 있었다. 이런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도 힌튼은 '인공신경망이 바로 인공지능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불굴의 힌튼과 그의 동료들의 노력에 의해 꺼져가는 신경망의 불씨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06년도에 와서 캐나다의 지원을 받아온 힌튼팀은 한편의 기념비적 논문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딥 빌리프 넷을 위한 패스트 러닝 알고리즘이다. 이 논문은 인공신경망의 고질적인 문제가 데이터의 사전학습 등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을 밝혔고, 인공신경망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힌튼의 2차 신경망 구출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 논문 이후에 딥러닝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 흥미로운 것은 논문제목에서 신경망이란 단어대신 딥 빌리프 넷이 사용된 점이다. 200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논문에 신경망의 neural이란 단어만 들어가도 탈락당할 정도로 신경망은 죽은 분야였다. 이런 참단한 시기에 힌튼은 색다른 단어를 선택해서 악마의 프레임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후 6년의 세월이 지난 2012년 세계 최대의 이미지 인식 경연대회 ILSVRC에 출전한 힌튼 팀은 마치 다른 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압도적 기록으로 우승하면서 딥러닝의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게 된다. 힌튼의 신경망 구출작전이 성공하면서 우리가 보는 지금의 인공지능 시대가 열린 것이다.
- 과일 분류기와는 달리 아파트 가격예측의 경우만 하더라도 결정적 피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일반 상식보다 더 깊은 전문가의 지식이나 경험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좀 더 복잡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암을 판정하는 기계를 머신러닝 방식으로 만드는 경우, 역시 일단 세포에 대한 이미지 데이터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런데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구별할 수 있는 피처(특징)를 어떤 식으로 정의해서 데이터를 모아야 할까? 정교한 의료지식이 없다면 이 단계에서 벌써 막히게 된다. 이제 눈치를 챘겠지만 머신러닝 방식의 결정적 단점은 도메인 특징을 반영하는 피처를 정의하거나 좋은 피처를 찾아내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피처에 대한 감이 온다면 이미지 이식의 경우로 돌아가보자. 사물을 구별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 것 같은데 이미지의 어떤 것을 피처로잡아서 입력으로 사용해야 할지 분명하지가 않다. 이미지의 개별 픽셀 하나하나를 입력으로 해도 되고 털을 먼저 검출하여 그것을 피처로 잡아도 된다. 눈, 코, 입 등을 모듈로 구분하여 피처로 잡아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좋은 성능을 내는 최적의 피처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수작업으로 하나씩 잡아서 모두 검토해야 한다. 또한 하나의 얼굴이라고 보는 각도 등에 따라 수많은 경우가 발생하므로 그것을 모두 반영하는 피처를 설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머신러닝 방식도 고전적인 규칙기반 시스템이 갖고 있는 문제로 수렴한다.
- 여기서 자연스럽게 컴퓨터가 자동으로 피처를 잡아주는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 바로 딥러닝이다. 딥러닝은 피처를 사람이 선택하는 고전적인 머신러닝과는 달리 적절한 피처(입력값)를 스슬 생성해낸다. 딥러닝은 엄청난 양으 데이터를 학습하여 스스로 피처를 만들고 인간이 인식하지 못한 숨은 특징도 찾아낸다. 이런 의미에서 딥러닝을 표현학습 혹은 특징학습이라 한다. 고전적 머신러닝은 이미 만들어진 입력 피처를 받아서 분류기를 학습한다. 그러나 딥러닝은 입력 데이터에서 스스로 피처를 찾아내고 그것을 입력값으로 변환하여 다시 분류기로 넘기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한다.
- 컨볼루션 신경망은 기계적 시각지능을 구현한 일등공신이며 딥러닝의 철학을 만든 장본인이다. 컨볼루션 신경망의 핵심은 피처를 자동을 잡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컨볼루션 신경망은 이미지의 특징이나 피처를 잡아내는 필터의 집합체다. 단계별로 나누어진 필터는 사물의 피처를 잘 잡아낼 수 있도록 학습을 통해 최적화된다. 피카소가 사물의 피처를 멋지게 잡아내서 표현하는 것처럼 기계는 학습을 통해 사물의 피처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고양이와 개를 구별한다고 해서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미지를 분류할 수 있을 뿐이다. 기계는 딱 거기까지 가능하다. 따라서 기계는 모나리자보다 피카소가 만든 얼굴이 더 인간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 이미지 인식의 신기원을 이룩한 컨볼루션 신경망은 입력 이미지에서 자동으로 피처를 뽑아내는 것이 주특기.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하여 피처맵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뽑아내면 어떨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컨볼루션 신경망은 위계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단계별로 피처를 잡아낸다. 이런 피처를 역으로 이용하여 이미지를 복원하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7년도에 들어와 구글 브레인 연구팀은 저해상도의 흐릿한 얼굴 이미지에서 뚜렷한 고해상도 이미지를 생성하는 알고리즘 '픽셀 리커시브 슈퍼 레졸루션'을 발표했다. 흐릿한 8*8 픽셀 사진을 입력하면 컴퓨터는 원본사진을 복원하여 출력으로 보낸다. 이미지 복원기술은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다. 사진을 확대할 때 사진이 깨지거나 일그러지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구글은 이미 고해상도 이미지 변경 기술을 통해 사진을 깨지지 않게 확대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한 상태. 한편 이런 이미지 기술들은 범죄 현장이나 범인의 얼굴을 찍은 CCTV 영상을 깨끗하게 복원하는 데 응용이 될 수도 있다. 최근에 차량 블랙박스의 흐린 이미지를 깨끗하게 복원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뺑소니 사고 등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 컨볼루션 신경망은 자율자동차 개발에도 빠질 수 없다. 자율자동차는 전통적인 자동차 기술뿐 아니라 센서기술, 자동제어 기술, 이미지 인식기술 등 거의 모든 첨단 기술들이 필요. 특히 움직이는 주위 환경을 인식하는 기술은 자율자동차의 생명이다. 급변하는 환경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다른 차와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곧바로 사고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미지를 분류하거나 이미지 속에서 한 객체의 위치를 알아내는 수준으로는 자율자동차에 적용하기 어렵다. 자율자동차의 영상정보에는 다양한 객체들이 다양한 위치에 존재함. 사람, 신호등, 차량, 표지판 등 수많은 객체들이 총 동원되어야 함. 객체의 위치를 특정해서 분류해야 하고(분류 및 구역화), 여러 객체들을 인식해야 하고(객체 탐지), 객체의 윤곽을 잡아서 독립된 파편으로 분할해야 하는(객체 분할) 등 자율자동차 등 거의 인간 수준의 시각지능이 필요하다. 여기서 객체분할은 객체의 윤곽을 잡아내는 것으로 세그멘테이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5년 켐브리지 대학은 이 기술을 자율자동차에 적용할 수 있는 세그넷이라는 시스템을 공개했다. 이 시스템은 컨볼루션 신경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위치추적 시스템을 통한 위치측정과 함께 도로위의 표지판과 도로표지, 거리의 모습, 보행자, 심지어 날씨까지 인식할 수 있다. 세그넷은 지금까지 본 적인 없는 거리의 풍경을 분석하고 도로 및 도로 표지판, 보행자, 건물, 자전거 등 12개의 다른 카테고리 별로 사물과 풍경을 분류한다. 요즘은 이 시스템을 능가하는 모델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자율자동차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컨볼루션 신경망은 자율자동차의 꿈을 실현하는 데 일등공신임에 틀림없다.
- 인공신경망을 트윈모듈로 연결하여 경쟁을 시키는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 모델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기존 신경망과는 달리 실제 자연의 생태계처럼 진화할 수 있는 상호작용 시스템을 구현한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경쟁하는 다중 모듈로 계속 확장한다면 점점 인간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컨볼루션 신경망의 완성자 얀 르쿤 교수가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는 최근 10년간 머신러밍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응용분야가 무궁무진하다.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를 만든 이언 굿펠로우는 대강의 그림만 그려놓으면 나머지는 인공지능이 완성하는 형태의 시스템이 구현가능함을 강조했다. 실제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는 이미지 분야뿐 아니라 음성인식 분야나 예술분야 등으로 계속 응용되고 있으며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의 변종들이 계속 탄생하고 있다. 시각지능은 이제 창조지능이 되고 있다.
- 리걸테크 산업의 종류는 변호사의 업무 영역만큼 다양하지만 서비스 형태를 기준으로 간단하게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능형 법률정보 검색, 변호사 소개 서비스, 법률 데이터 분석 및 예측, 전자증거개시 분석, 법률 프로세스 자동화, 법률문서 자동화 등이다. 결국 인공지능 변호사라는 닉네임을 달고 나타나는 모든 서비스는 하나로 볼 수 있다. 리걸테크는 요즘 갑자기 등장한 것 같지만 그 뿌리는 매우 깊다. 컴퓨터와 법률의 만남 자체가 리걸테크의 시작이며 가시적으로는 법률정보검색 서비스이 형태로 나타났다. 50년대 이후에 컴퓨터는 문헌이나 자료를 검색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로 자리잡았따. 법률 영역은 판례나 법률자료를 검색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분야보다 일찍 컴퓨터가 응용되었다. 60년대에 이미 미국 오하이오 변호사협회는 판례를 검색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이후에 민간영역에서 법률 정보검색 서비스가 본격화되었다. 렉시스 넥시스가 민간영역에서 최초로 법률검색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웨스트로가 방대한 법률문서의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검색 서비스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두 회사가 법률검색 서비스를 거의 독점하면서 리걸테크는 그 자체의 산업으로 다양성을 확보하지는 못하였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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