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넓은 것이든 좁은 것이든 진화심리학은 정신이 단순히 크고 강력한 범용 정보메커니즘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 따라서 어떤 문제에나 일반적인 내용중립적 추론과 지역문호적 추론을 적용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의 경우에는 틀의 문제, 즉 어떤 정보나 추론이 문제에 적절하거나 부적절한지 결정하는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제대로 하기위해 우리 정신은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의 문제에 특별히 관련된 정보를 학습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함. 헨리 플로트킨은 일반적인 견지에서 그 어려움을 설명한다.
세계를 분할하고 기술하고 학습하는 방식은 무한히 많다. 만약 세계에 아무런 제약없이 학습하는 진정한 범융학습장치를 풀어놓는다면, 그 장치는 무한히 넓은 탐색공간에서 무한히 많은 탐색경로들 중 하나를 택해 정보를 얻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제 수명을 다할 때까지 생물학적으로 유용한 것을 학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이 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은 단 하나뿐이다. 무한정한 탐색시간이 확보되어야 하고, 방대한 탐색공간에서 얻은 지식을 선택적으로 보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진화다. 진화는 유기체의 무한한 세대에 걸쳐 세계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여 필요의 기준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존한다.
그 집합적 지식이 종의 유전자 풀에 저장되어 개체에게 분배됨. 그리하여 개체는 특수한 방식으로 특정한 대상만 학습하는 내재적 관념과 성향을 가지고 세계속에 태어난다. 모든 인간, 모든 종의 학습자는 삶을 시작할 때 무엇을 배울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탐색해야 하는 공간은 이미 상당히 좁혀져 있는 것이다. 이 견해를 종 전체 범위에서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가 있다.

- 이야기는 사회적 감사에 대한 커다란 관심에서 생겨났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을 사회적 정보에 집중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그 형태는 한담이 될 수도 있고 픽션이 될 수도 있다. 현대의 수렵채집사회들은 한담을 통해 지위를 추구하려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교훈적 이야기를 통해 평등한 규범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경고함으로써 평등주의를 튼튼하게 유지한다. 어떤 규모의 사회에서든 비상한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기억을 사로잡는다. 또한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고 형벌을 가하거나 보상을 내리는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널리 확산되고 오래 존속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협력 행동을 자극하고 추적하는 강력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종교 이야기는 비밀스런 영혼의 경찰과 같은 역할을 한다.

- 자연선택은 예언이론이다. 다윈주의자는 자신있게 예언할 수 있다. 만약 비버에게 둑을 쌓는 일이 쓸모없는 시간낭비라면 둑을 쌓지 않는 다른 비버가 더 잘 생존할테고, 둑을 쌓지 말라는 유전적 성향을 후대에 전승할 것이다. (리터드 도킨스)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만약 진정으로 예술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예술적 성향이 별로 없고 엄격히 실용적이고 경쟁적인 현실주의자들이 생존과 대량번식에 성공했을 테고, 그 후손들이 오랜 진화를 거치며 예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몰아냈을 것임. 독자적으로 옷, 노래, 이야기를 만들려는 성향이 없는 사회가 그런 성향을 가진 사회를 몰아냈을 것임. 예술이 없는 개인과 집단은 예술을 가진 개인과 집단보다 번영해야 할 것임.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예술이 없는 인간사회는 없으며, 지금까지 성공적인 사회는 예술이 크게 발달한 사회였다.

- 예술이 흡인력을 가지는 이유는 쾌락을 일깨우기 때문이며, 예술이 쾌락을 일깨우는 이유는 놀이처럼 우리의 신체를 미세조정하기 때문. 소규모 사회에서는 모두가 노래와 춤, 직조와 조각, 분장과 의상 등 공동체의 예술에 동참한다. 분업이 상당히 진척된 대규모 사회에서 전문예술가는 고도로 집중된 연습과 노력덕분에 실력이 향상된다. 그런 사회의 경우 유년기가 지나면 성인은 각종 예술의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된다. 생산자에게나 소비자에게나 예술은 권태를 피하게 해준다. 예술은 호기심을 되살려주는 감정이며, 타성에 젖는 것을 막아준다.
인지놀이로서의 예술이 우리의 능력을 높여준 덕분에 우리는 최소한 각각의 예술이 중점을 두는 영역에서 효과적인 견해와 행동을 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소리, 동작, 시각화, 표현의 예술이 생겨나며, 특히 이야기의 경우 우리 자신가 타인의 계획이나 행동을 추측하는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 아기가 유형화된 놀이를 좋아하도록 자극을 주는 어른의 행동은 모성어, 원시대화, 자장가와 마찬가지로 문화에서 옴. 그러나 여러 문화권에 걸쳐 상당히 비슷하고 훈련이 필요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행동이므로 문화적으로 습득된 행동의 견지에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부모는 아기의 신체적 욕구에 대해 종에 적합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진화되었듯이, 인간의 부모는 아기가 예술의 유형화된 인지놀이를 좋아하게 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진화되었다.

- 인간특유의 고도한 정신이론을 지탱하는 토대는 다층적인 능력으로 구성된다. 가장 단순한 것은 최초로 진화한 근본적인 능력으로, 산 것을 감지하는 능력. 더 섬세한 것은 머리와 눈의 방향, 표정과 자세의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더욱 복잡한 것은 그 외적 신호돌을 가지고 목표, 의도, 욕망을 직관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다. 이 단계에서도 빌리고, 움직이고, 제거하고 돌려주고, 바꾸고, 파는 등등의 신체운동을 똑같게 보일 수 있다. 다만 행위자의 목표와의도만 다를 뿐이다. 인간의 고유한 정신이론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중대한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또한 우리는 타인의 욕망과 의도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타인이 알고 있는 것을 추측한다.

- 호혜적 이타주의의 주요한 매력은 온전한 가치를 그대로 돌려받는 데 있는 게 아님. 한담을 나누거나 소식을 전할 때 우리는 대개 정보와 정보를 교환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우리는 한담을 회피해야 할 궂은 일이나 희생이라 여기지 않음. 그보다는 최신 소식을 전하기 위해 경쟁한다. 왜 그럴까?
한담은 개인적 이득과 집단적 이득을 모두 가짐. 집단내의 협력은 비협력자에 대한 징벌에서 이득을 얻는다. 한담은 대단히 중요한데, 주로 타인의 도덕적, 사회적 위반행위에 관한 것이 대부분. 타인의 선행에 대한 한담은 10%에 지나지 않는다. 한담은 타인의 관심을 협력의 위반과 사회적 규범의 훼손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경찰이나 교사와 같은 역할은 한다. 직접적 징벌은 비용이 많이 드는 데 반해 소규모 사회의 경우 한담은 저비용으로도 비협력자무리의 행동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함. 수렵채집사회에서 한담과 조소는 강력한 평등주의 규범을 침해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다. 한담이 사회적 역할을 한다면 (그리고 한담으로 사적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면) 집단의 구성원들은 한담을 귀중하게 여길 것이다.

-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고실험은 현실적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현실에 관한 우리의 사고를 명료히 해야 한다.: 픽션의 사고실험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처럼 사실성에 부합할수도 있지만 이솝우화처럼 사실성에 어긋날수도 있다. 우리가 사마리아인의 따뜻한 마음씨를 배우기위해 사마리아인이 되거나, 예수살렘에서 예리코까지 여행하거나, 길가에서 강도를 당한 여행자를 만날 필요는 없다. 짧은 우화임에도 구성과의미가 명료한 이유는 픽션이기 때문.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교훈적 이야기는 우리가 왜 남을 도와야 하는지 성찰하기 위한 튼튼한 기반이 된다.
이 우화는 짧음, 명료한, 유형화된 구성, 사실성을 통해 기능한다. 절박한 처지에 놓은 나그네는 우리가 얼마든지 직면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반면 이솝의 우화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예상을 거부하고, 인물을 단순화하고, 다른 종을 의인화함으로써 우리 감각에 호소한다. 또한 간결함과 도식적 집중화보다 지속성과 정교한 사실성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섬에 조난을 당할 일은 없겠지만, 그의 인내, 결의, 재주를 본보기로 삼고 배울 수는 있다. 상황의 특이함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우리가 크루소의 처지에 공감하면 그 교훈은 감정적으로 몰입된다. 우리에게는 크루소의 곤경을 보고 느낄 여유가 있다.

- 자비를 요하는 상황, 혹은 아부를 경계해야 하거나 책략과 결의가 필요한 상황을 맞을 때,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솝의 까마귀와 여우 우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인상적인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세부시나리오까지 비슷할 필요는 없다. 
정신은 미래를 발생시킨다. 정신은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견해 행동을 이끈다.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매우 가변적이고 변화무쌍하고 탄력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사적 경험이나 전해들은 경험만이 아니라 가상놀이와 픽션의 사고실험을 이용해 상황을 해석하고 여러가지 시나리오, 행동, 대응을 시험하는 능력이 향상된다면 명백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 모든 이야기꾼은 지위를 얻는다. 이야기를 통해 실제로 일어난 일에 관한 더 깊은 설명을 가능케 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이야기꾼은 더욱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과거에는 신화를 만드는 사람이 그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과학자가 그런 이야기꾼에 해당.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정신적 힘에 의거한 설명은 픽션,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할 뿐 실제의 준거가 없다. 하지만 종교적 신화는 사실이 아닌데도 인류가 문명을 가꾼 이래 많은 사람에게 심층적 표준형태가 되었다. 그런 이야기는 추가 설명을 원하는 우리의 욕망, 행위에 대한 우리의 심층적 독해, 예외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실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제거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직관적 심리학은 우리에게 중요한 인간사의 상당부분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행위적 설명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탓에, 과학이 아무리 성공했다 해도 행위자가 없는 설명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행성운동을 중력의 견지에서 파악한 뉴턴의 설명에 많은 사람이 만족했으나, 신이 없는 우주 혹은 비인격적 신을 허용하고 우주의 시계공이 우리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본다는 이유로 거부한 사람도 많았다. 다윈이 제기한 자연선택에 의한 설계의 관념은 지금도 많은 사람의 뿌리깊은 성향에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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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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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아이는 식탁이라는 현실공간과, 친구들과 소통하는 온라인상의 공간,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 60년대 초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X세대인 부모와 달리, 90년대 이후 태어난 Z세대 아이들은 구글, 트윗, 위키를 하는 세대이고, 위키피디아가 백과사전과 동의어인 세대다. X세대는 정보공간이 안과 밖으로 단절되어 있고 들어갔다 나오면 끝이라고 생각. 하지만 Z세대 아이들은 정보권 바깥의 삶은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접속상태가 초기값이며, 현실세계와 가상세계가 싱크로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의 신체기능은 수술이나 약물, 보철기기와 같은 물리적 수단뿐 아니라 온라인 접속을 통해서도 확장되고 강화되는 것. 우리는 인간이면서 기계에 의해 변형되고, 현실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상공간의 존재이며, 자연과 인공의 성격을 함께 갖는 포스트휴먼이 되어간다.

- 스튜어트 러셀과 피터 노빅의 인공지능: 현대적 접근방식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접근방식으로 인간적 사고, 인간적 행위, 합리적 사고, 합리적 행위의 네가지를 제시함. 인간적 사고는 인공지능을 인간처럼 생각하는 컴퓨터이자 마음을 가진 기계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적 행위는 지금은 사람이 더 잘하는 일들을 컴퓨터가 하게 만들기 위해서, 합리적 사고는 계산모형을 이용하여 컴퓨터가 인지와 추론능력을 갖추게 만들기 위해서, 합리적 행위는 인공지능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 행동을 하게 만들기 위해 설정한 목표다. 이렇게 보면 인공지능에 접근하는 방식은 크게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공지능을 추구하는 방식과, 인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더라도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과를 내놓은 인공지능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인공지능이 개발방향의 대세는 후자쪽이다. 모로 가더라도 서울만 가면 되는 법이니까 인공지능이 굳이 인간지능을 흉내내려 애쓸 필요는 없다.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인간의 뇌라는 견본을 복제하는 것보다 지능에 깔린 원리를 연구하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 흔히 비유하듯, 비행기의 개발목표는 어떤 식으로든 하늘을 나는 물체를 만드는 것이지 새들도 속을 만큼 새와 똑같이 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만큼 인간적인 컴퓨터의 개발을 추구하는 튜링 테스트의 목표는 현재의 인공지능 개발방향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인다. 
러셀과 노빅도 인정하듯, 튜링테스트가 유명하긴 하지만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노력하지는 않는다. 인공지능 연구라고 하면 SF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터미네이터으 스카이넷이나 어벤저스의 울트론처럼 인간 못지 않게 인간적인 인공지능을 떠올리기 쉽지만, 인공지능 연구자 제리 카풀란은 인공지능의 핵심은 실은 인지자동화일 뿐이라고 지적. 그런데 인공지능이라는 용어 때문에 사람들에게 마치 이 분야가 신비스러운 인간정신에 관한 연구과 관련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는 56년 다트머스대학에서 열린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학회에서 채택됨. 카풀란의 말대로 분석적 컴퓨팅 간은 재미없고 지루한 이름을 붙였다면 인공지능 연구가 지금처럼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고 공상과학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못했을 테니, 의도하지 않았어도 마케팅 면에서는 신의 한수였다.

- 09년 뢰브너상 경진대회에 인간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가장인간적인인간상을 받은 브라이언 크리스찬이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되기 위해 사용한 전략은 간단함. 예측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상대가 처리해야 할 정보량을 늘리는 것이다. 기계화와 자동화의 논리는 정보를 빨리 처리하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예외와 변칙을 줄이는 단순화를 선호.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따라잡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기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크리스찬은 우리가 휴대전화로 문자를 입력할 때 쓰는 자동입력기능을 인간이 기계화되는 한 가지 사례로 든다. 내가 다음에 치려는 단어가 자동으로 뜨면 편하긴 하지만, 이 기능에 의존할수록 점점 더 예측가능한 뻔한 내용만 쓰게 됨. 이렇게 가다 보면 우리가 내놓을 답이 너무나 뻔해서 기계의 답과 구분이 안되는 날이 올지도 모름.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의 퇴보덕분에 기계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때 기계또한 발전을 멈출 것임.
우리가 더 인간적인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는 기계와 경쟁해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닮은 기계와 더불어 계속 진화하기 위해서다. 크리스찬은 튜링테스트가 '기술 진보를 측정하는 척도이기에 앞서, 그리고 그것이 제기하는 철학적, 생물학적, 도덕적 물음들에 앞서, 근본적으로 소통행위에 대한 검사"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튜링테스트는 나날이 기계적이 되어가는 우리들과 인간적이 되어가는 기계들이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를 묻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 다른 몸에 의식이 옮겨진 나는 이전의 노쇠한 유기적 신체에 있던 나와 같은 나일까? 나라는 인간의 자아가 내 몸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 있을까? 모라벡은 같은 신체로 유지되어야만 동일한 인격이 보존된다는 시각을 몸동일성 입장이라 부르며 이를 반박하는 패턴동일성 입장을 주장함. 패턴동일성 입장은 자신의 본질을 머리와 몸 안에 있는 정보의 패턴으로 정의하고, 이 패턴이 유지되면 자아가 보존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버려도 되는 젤리에 불과하다고 본다. 내용물이 중요하지 그릇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어느 그릇에 옮겨 담든 나는 여전히 똑같은 나일테고 기왕이면 예쁜 새그릇에 옮겨담는 편이 나으리라. 하지만 내용물만이 아니라 그릇까지 포함한 존재가 나라면? 그렇다면 신체를 바꾸어도 여전히 나의 정체성이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모라벡의 주장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그릇과 내용물이 서로 무관하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우리의 자아정체성은 성격이나 기호같은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뿐 아니라 신체에 대한 자기인식까지 포함한다. 우리가 신체를 통해 접촉하고 감각하는 외부환겨여은 우리의 의식을 구성한다.

- 과학은 17세기 베이컨이 자연을 여성이 비유하며 과학자는 자연을 '관찰하고, 고문하고, 해부해서' 비밀을 토해내게 해야 한다고 말했던 근대 초기부터, 여성과 같은 수동적 대상인 자연을 정복하고 길들이는 남성적 기획이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과학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믿음에 사로답혀 사실은 과학지식도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젠더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간과.
과학사가 토머스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으로 과학의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균열을 냈다. 쿤은 과학연구가 흔히 믿듯이 객관적인 사실에만 기초하지 않고 의외로 연구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되며, 과학지식은 그 사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냄. 과학연구에서는 어느 한 시기를 지배하는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이 있다. 연구자들은 이를 자기연구의 기준으로 삼아서, 연구나 실험결과를 여기에 최대한 맞추든가 도저히 안되겠으면 결과가 비정상이고 잘못되었다고 믿고 폐기처분한다. 이런 식으로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이 한동안 유지된다. 그러다가 이 틀에 맞지 않는 연구결과가 너무 많이 쌓이면 그제야 틀이 문제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감.
과학지식과 기술은 사회관계 안에서 생산되며 사회의 이해관계와 권력의 배치를 반영.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기술자체가 정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의 유명 건축가 모제스가 설계한 뉴욕 존스비치 공원 고가진입도로의사례를 통해 설명함. 이 고가도로는 버스가 통과할 수 없도로 높이를 낮게 설계. 그 결과 자가용을 가진 백인 중산층은 주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가난한 흑인들로 인해 아름다운 해변이 지저분해질 염려 없이 우아하게 여가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 하라리는 알고리즘을 외부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파악하여 해킹학 조종까지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으로 묘사하지만, 대량살상 수학무리를 쓴 수학자 캐시 오닐은 알고리즘에는 인간의 편견, 오해, 편향성이 코드화되어 있다고 지적. 알고리즘은 신탁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투명하고 공정한 논리가 아니다. 알고리즘의 데이터는 우리 인간이 투입한 것이므로,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
오닐은 알고리즘의 데이터 처리과정은 과거를 코드화할 뿐 미래를 창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범죄자의 재범 위험성을 측정하여 판사의 편견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을 줄여보자는 뜻에서 개발된 재범위험성 모형이 있다. 취지는 좋지만, 예를 들어 흑인 청년들의 경우 특별히 잘못을 하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불심검문에 걸릴 확률이 백인 중산층 청년보다 훨씬 높다. 그러다 보면 마리화나 소지 같은 경범죄로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 그러면 재범위험성 모형의 예측에 따라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은 요주의 인물이 되어 더 심한 감시를 받고 범죄를 저지를 경우 가중처벌된다. 이런 식으로 사회에 내재한 인종적, 계급적 편견이 수학모형에 반영되고, 이는 현실의 편견을 더욱 강화하고 확대재생산 하는 피드백루프로 작용하게 됨. 고로 알고리즘을 신으로 떠받들어서는 곤란함. 알고리즘이라는 신은 실은 우리가 만들어낸 신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로 인해 너무 복잡하고 방대해져서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우리 자신조차 까먹어버려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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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2

Quote of the day 2025. 2. 22.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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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푸코는 팬옵틱이라는 전면적 감시를 감시와 처벌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오늘날 타인의 시각에 노출되느냐 마느냐가 범죄예방의 핵심이라고 평가하는 범죄예방 전문가들도 이런 감시에 큰 의미를 둔다. 애덤 스미스는 당대의 도덕적 타락의 원인 중 하나가 도시화가 낳은 익명성이라고 지적. 한 노동자가 자기 마을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으며 스스로 그것을 의무로 여김. 그러한 규범을 어길 경우 마을에서 평판이 나빠지기 때문. 하지만 대도시로 나오면서부터 그는 어둠과 그늘에 파묻힌다. 아무도 그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는 변덕스러운 악과 방종에 놀아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 사람들의 평판은 사회적교류에서 만들어짐. 작은 집단 내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거론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두번째로 나오는 발언으로 결정된다고 함. 다시 말해 처음에 그 사람에 대한 안좋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누가 그 이야기에 맞장구를 친다면 집단 전체는 그 사람을 나쁘게 볼 것임. 반면에 두번째로 말하는 사람이 그에 대해 긍정적 이야기를 하면 맨 처음 이야기한 사람의 부정적 언급은 상당부분 힘을 잃어버림.

- 기원전 5000-3000년전부터 인간집단은 대개 1000명에서 만명 상당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3000-1000년부터 일부 집단은 만명에서 10만명 규모에 이르렀고, 그 후에는 100만명 규모도 훌쩍 넘어버림. 물론 현대사회에서 인간활동의 구조는 사회생활의 탈공간화와 그로 인한 실질적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데 할애하는 시간은 아직도 상당함. 인간들의 교류에서 60%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차지한다고 한다. 사이버 시대에도 사회적 평판은 여전히 시사성 있는 개념이다.

- 당혹감은 수치심이나 죄의식과는 다른 감정. 당혹감은 주로 관습적 규칙(예의범절, 에티켓)을 위반할 때 발생함. 한창 회의중인데 배에서 꼬르를 소리가 남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났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궁정에서 신년회를 거행하던 중에 뒤늦게 바지 앞섶이 열려 있음을 깨달았던 덴마크 헨리 왕자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 보라. 당혹감은 우리의 사회적 이미지가 어긋날 때 비롯되며 일시적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림. 당혹감은 시선을 피한다든다, 말을 더듬는다든가, 맹한 미소를 짓는다든가, 자꾸 자기 얼굴을 만지고 얼굴을 붉힌다든가 하는 모습으로 드러남.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당혹감이 죄의식이나 수치심보다 더 괴롭다.

- 당혹감도 여타의 도덕적 감정들의 그렇듯 사회적 편입의 표식이다. 교수들은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당황해하는 학생을 덜 공격적으로 본다. 당혹감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규범을 어겼는지 의식하고 있음을 타인의 시선을 신경쓴다는 것을 보여줌. 자기가 방금 저지른 일에 당황해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일을 목격한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사과를 한다. 당혹감은 주위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처벌을 완화하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아이가 뭔가 잘못을 하고 당황해하면 부모도 심한 벌을 내리지 않는다. 옆 사람의 바지에 와인을 쏟거나 새치기를 한 사람이 얼굴이 빨개지면 좀더 호감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당혹감의 진정효과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죄의식의 표시로 해석되어 더욱 가혹한 판단을 끌어내기도 한다.
당혹감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회범을 어겼다는 의식이 있음을 의미. 

- 표정의 자동모방은 모방된 표정이 가진 감정을 불러오기 쉽다. 19세기 말 윌리럼 제임스는 그저 어떤 활동을 보고, 생각하고, 상상하기만 해도 그 활동을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관념운동성의 원리를 주창. 그래서 우리는 아이에게 숟가락으로 먹을 것을 떠먹이면서 아이가 입을 벌리면 우리도 따라서 입을 벌리곤 한다. 마찬가지로 성난 표정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도 비슷한 감정을 느낌. 인위적으로 표정을 막아버리면 표정의 피드백 현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음. 예를 들어 보톡스 주사를 눈썹 부위에 놓아서 분노의 표정에 이용되는 근육을 마비시키면, 분노에 관여하는 뇌 영역에서 실제로 그 영향이 나타남.

- 이미 2500년전에 투키디데스도 페스트라는 치명적 병이 사회규범을 어떻게 와해하는지 상세히 기술. 그는 이렇게 썼다.
"병은 도덕적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전에는 숨어서 몰래 하던 일에도 과감해졌다. 순식간에 팔자가 변하는 일이 너무 많앗다. 부자들이 갑자기 죽고, 어제까지 빈털털이였던 사람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사람들은 즉각적인 만족만을 원했고 쾌락을 좇았다. 그들에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 신에 대한 두려움, 법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니 경건하게 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재판을 받고 벌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무서운 위협속에 있었으니까. 모두들 어차피 죽을 텐테 살아 있을 때 재미좀 보려는 것은 당연하다 여겼다."
런던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에도 한 관찰자는 "이 전염병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 잔인하게 군다. 짐승도 서로에게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마르세유에 페스트가 돌자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거리로 내쫓았다. 아이들은 물 한 항아리와 사발만 가진채 가혹하게 버려졌다." 연구자들 역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위험한 성관게를 더 많이 고려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반대로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규범을 더 잘 지키려는 역설적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실험참가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연상을 유도했더니 오히려 규범체계가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면 자선단체에 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집단의 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을 칭찬하며, 규범을 위반한 사람을 더욱 가혹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 공정한 세상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개발된 설문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실험상황에서 피해자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확인됨. 연구자들은 설문을 통해 공정한 세상을 믿는 자들의 프로필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얻었고 그런 믿음이 연령, 성별, 사회계급과 약간은 관련이 있지만 단순히 어떤 보수이데올로기나 종교적 세계관으로 싸잡아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정한 세계관에 대한 믿음은 에이즈 환자, 극빈층, 강간피해자와 노숙자, 실업자, 장애인, 노인에 대한 경멸과도 관련이 있다. 이런 설문측정의 흥미로운 변화중 하나는 개인적 적용과 일반적 적용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 다시말해, 세상이 나에게 공정하다고 믿는가와 세상이 남들에게 공정하다고 맏느냐는 별개다.

- 사회복지사, 의료인, 간병인이나 상담사 등이 그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냉혹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음. 감정이입능력이 뛰어난 의료계종사다들이 제일 먼저 자기 일에 염증을 느끼고 말기 환자들을 회피한다는 보고도 있다. 고통을 치료하는 데 익숙한 의사들은 괴로워하는 환자의 동영상을 보아도 임상경험이 없는 의사들만큼 고통과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의사들은 환자가 당하는 고통을 그렇게까지 힘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감정이입의 패러독스가 있다.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할수록 그를 도와줄 확률은 높다. 일례로 타인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심박이 빨라질수록 신속하게 도움을 제공하려 한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관찰자는 괴로운 상황을 회피하고 피해자와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미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 상황이거나 피해자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라면, 관찰자의 감정이입이 고조될수록 피해자를 도와야겠다는 의욕의 수준도 높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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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1

Quote of the day 2025. 2. 21.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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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다양한 의류와 장신구를 몸에 걸치는 유일한 동물. 아이블 아이베스펠트는 세상의 다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문화가 달라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의류와 장신구의 특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 보고한 바 있다.
그 중 하나가 위엄과 엄숙함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서 몸에 걸치는 의류, 장신구에서 보이는 어깨를 부풀려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현상의 이유로 현존하는 둥물 중 분류학적으로 인류와 가장 가까운 침팬지와 인류가 특정한 자세와 동작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꼽고 있다.
침팬지는 상대를 위협할 때 어깨를 추켜 올리고 어깨에 난 털을 곤두세워 부풀어 보이도록 강조. 오늘날 인류의 체모는 가늘어지고 짧아졌지만, 어깨에 난 털 모양을 분석해보면 침팬지와 동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 가능. 인간의 자율신경이 흥분하여 공격적 기분이 되었을 때, 어깨에 탄 털이 어깨가 부풀어 보이도록 어깨 중심을 향해 곤두선다는 사실이 입증됨.
인류와 침팬지가 공통된 선조에서 갈라져 나온 약 600만년 전부터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중간과정에 존재한 선조 인류종은 권위와 엄숙함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서 어깨 털을 세워 부풀린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어깨를 부풀린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야 하는 인지계는 부풀어 오른 어깨를 보면 상대방은 공격적인 기분이 되었다고 해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덧붙이자면 이 어깨부풀리기 자세를 만드는 운동계와 거기에서 공격적인 기분을 감지하는 인지계는 유전적 프로그램에 따라 발달하는 형질로 여겨지고 있다.
체모가 옅어진 인류 역시 이와 같은 기능을 하는 운동계와 인지계는 남아 있기에, 위엄과 엄숙함을 어필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깨를 부풀려 강조하는 의류, 장신구를 착용하게 되었다.

-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대에게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려고 할 때는 저도 모르게 높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 애인이 서로의 귓전에 친밀하게 속삭일 때도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높아진다고 알려짐. 실수한 부하가 상사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말을 건넬 때 역시 목소리는 높아짐.
한편 상대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을 때 사람은 목소리를 낮게 낸다. 위협하고 을러댈 때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좋은 예. 듣는 사람도 목소리 높이에 따라 상대방은 자신에게 우호적 감정을 품고 있는지, 적의를 품고 있는지를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예를 들어, 워싱턴대 패크리시아 쿨 연구팀의 연구에 의해 촉발된 일련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짐. 미국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부모들은 아기에게 말을 걸 때 목소리의 음정을 일부러 올리는 경향이 있으며, 아기는 높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 웃는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
사실 낮은 목소리가 적의의 신호로 작용하고 높은 목소리가 친근하고 온화한 감정을 드러내는 데 쓰이는 것은 사람말고도 많은 동물에게서 확인되는 현상. 개들도 사랑하는 주인을 기꺼이 맞이할 때는 높은 목소리로 짖고, 낯선 사람에게 적의를 표현할 때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린다.
붉은사슴 수컷은 암컷을 둘러싸고 다른 수컷과 싸움이 붙었을 때 울음소리의 음정을 점점 낮춘다. 그리고 마지막에 상대방이 따라하지 못할 만큼 낮은 음정으로 운 수컷이 승자가 된다. 실제로 뿔을 부딪치며 싸우기 전에 패자가 더 낮은 목소리를 낸 개체가 몸이 크기 때문에 나는 이 개체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 원래 낮은 목소리는 몸이 크지 않으면 낼 수 없다. 몸이 큰 만큼 직접 싸울 때 유리하다는 것을 상대에게 과시하는 의미가 있다.

- 씨름, 야규, 축구와 같은 운동경기에서 관람객이 선수이름을 부르며 응원할 때, 가부키에서 배우 이름을 부르며 환호할 때도 목소리는 높아지는 경향이 있음. 목소리가 아닌 다른 예로는 콘서트장이나 운동경기장에서 응원할 때 삐이, 삐이하는 소리가 나는 호적을 불 때가 있는데, 이 소리 역시 음정이 높다.
박수 또한 친화적 특성인 높은 소리를 발생시킨다. 사람의 피부가 지닌 물리적 특성에 의행 양손바닥이 마주치면 짝! 하는 높은 소리가 난다. 
그렇다면 선수에게 불만이나 적의를 드러낼 때는 어떨까? 신발로 바닥을 치면서 탕탕 하는 낮을 소리를 내거나 우우하고 야유하는 낮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

- 마사타카 노부오 교수 연구팀에 의하면 유아의 음성 중에서도 특히 모음 음성과 억양이 올라가는 음성은 그 효과가 크다고 함. 이 역시 사람이라는 종에는 특정한 패턴의 소리자극을 받으면 그에 대응해 특정한 정보처리를 수행하는 뇌 속 신경회로가 유전적으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
그리고 이런 선천전 인지회로는 영화효과음이나 클래식 음악에도 곧잘 이용됨. 예를 들어 영화의 스토리가 전개되다가 공포가 절정에 달한 장면에서는 비명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절정이 지나고 긴장이 완화되는 장면에서는 음정이 낮아지면서 수그러드는 느낌의 소리가 사용됨.
오르골과, 오키라니 소리도 비슷한 특징이 있다. 바로 어린이가 종알거릴 때 내는 소리의 특징이다. 힘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고 부드러우며 편안한 느낌이다. 리듬은 느린 편이고, 통 하고 튀는 듯한 첫 소리에 이어 평탄한 소리가 이어진다.
어린이가 종알거리는 소리는 그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상대방이 천진난만하고 가녀린 존재라는 느낌, 순수하게 제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마음을 차분하고 편안하게 함. 내 생각에는 느리게 이어지는 오르골이나 오카리나 연주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뇌 속 인지신경회로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 같다.

- 선글라스를 쓰면 눈과 눈 주위의 상태변화가 보이지 않음. 즉 고정된 표정은 '당신은 내가 굳이 에너지를 쓸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메시지를 보냄. 무시하는 것과 비슷. 이것이 선글라스가  건방지다, 공격적이다, 와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도 결국 선글라스를 쓴 얼굴과 비슷한 효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는 곧 팔에서 힘을 빼고 편하게 쉬고 있는 상태.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자세임. 따라서 타인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 행위는 '당신은 내게 있어 에너지를 사용하여 반응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하찮은 사람입니다'와 같은 메시지를 준다.

- 경어, 존댓말, 높임말은 보통 쓰는 말보다 길고, 그만큼 발성하기 위해 여분의 에너지를 쓴다. 그 여분의 에너지 사용이 곧 상대에 대한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많은 에너지를 기꺼이 소비하겠습니다'. '나는 항상 당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I want to...'를 공손하게 말할 때는 'I would like to...'라고 한다. 대체로 존경어가 통상어보다 길게 되어 있다.
물론 사용된 단어나 문장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결과적으로 발화되는 문장이 길게 되어 있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지역과 문화의 차이에 좌두되지 않는 인류 보편의 '발화의 길이-에너지의 크기=상대의 이익을 증대하려는 의도'라는 인지경향이 존재한다는 것, 발화의 길이로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동물에 대한 반응의 남녀차를 만들어내는 주된 요인으로서 내가 생각한 것은 남녀의 수렵채집 생활에 대한 적응이다. 특히 남성의 사냥에 대한 정신적이 적응, 여성의 육아에 대한 정신적인 적응이다.
포유류 같은 동물이 눈앞에 있을 때, 남성은 종종 사냥을 관장하는 뇌의 신경영역이 강하게 활성화되어 동물을 쫓거나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유도하고 싶은 충동이 끓어오른다. 한편 여성은 육아에 관계된 뇌의 신경영역이 더욱 강하게 활성화되어 스킨십을 하거나 보살피고 싶은 충동이 끓어오른다. 이는 충동의 성차가 염소나 햄스터 등에 대한 행동패턴의 남녀차이를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우리가 외부에서 받은 자극을 오감을 통해 정보로서 뇌 속으로 전달할 때는 크게 두갈래 경로가 이용된다. 첫번째는 이를테면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상이라는 곳까지 옮겨진 뒤 대뇌를 경유하지않고 편도체로 보내지는 경로. 두번째는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상이라는 곳까지 옮겨진 뒤 거기에서 일단 대뇌로 보내지고 그 다음에 편도체로 보내지는 경로다. 시각정보가 아니더라도 청각이든, 후각이든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경로가 존재.
첫번째 경로는 그때그대 일어나는 사태에 재빨리 대처하기 위해 갖추어진 경로라고 생각하면 됨. 세부적 정보는 분석되지 않고 대략적 특징만 인식됨. 만약 그 특징이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정볼면, 바로 그 분석결과를 편도체에 보내서 그에 따른 감정을 발생시키고 행동을 일으키거나 행동을 준비하게끔 한댜.
두번째 경로에서는 들어온 정보를 대뇌에서 이제까지의 기억 등을 종합하여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한다. 그리고 그 분석결과를 편도체에 보내는데, 경우에 따라서 편도에체서 긴급하게 발생시키고 있는 감정을 필요없다고 판단하여 소실시키기도 한다. 둘 다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경로다.

- 동물이 포식자 주위에 머무르며 경계행동을 거듭하는 것을 모빙이라 하는데, 조류와 포유류에게서 곧잘 관찰됨. 모빙은 특히 조류의 경우에 잘 발달됨. 예를 들어 둥지 근처에서 여우를 발견한 갈매기는 무리지어 울며 여우 주변을 끊임없이 날아다닌다.
동물학자 한스 크루크의 연구에 따르면 갈매기는 여우 옆에 갈매기 시체가 있을 때 평소보다 더욱 활발하게 모빙을 수행한다고 함. 시체가 있다는 사실은 그 여우가 또 다른 갈매기를 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갈매기는 그 여우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 추측.
자신에게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관찰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익이 되는 행동. 특히 사람이 진화해온 자연환경 속에서는 다른 사람을 습격한 동물, 다른 사람이 먹고 죽을 뻔한 식물, 다른 사람이 사고를 당한 자갈밭과 가파른 언덕 등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생존에 있어 중요한 행동임.
이렇게 생각하보면 우리가 현대사회의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대상, 즉 화재, 싸움, 사고, 살인현장을 보고싶어 하는 충동은 다른 동물의 모빙행위와 동일한 기능(관찰해서 정보를 얻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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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심리 2025. 2. 19. 07:04

-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따라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이야기하건대 언젠가는!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레싱)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이다. 심지어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도 비정상적인 상황, 예컨대 정신병원에 수용된 상태라거나 평소보다 비교적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는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오게 된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역시 그들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반영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어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전형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반응들은 며칠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첫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상대적 무감각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 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할 정도가 된다.
그런 다음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수용자 대부분에게는 줄무늬 수의가 입혀졌다. 허수아비나 어울릴 듯한 넝마같은 옷이다. 수용소 막사와 막사 사이는 오물로 뒤덮여 있었는데, 오물을 치우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오물을 묻혀야 했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화장실을 청소하고 시궁창의 오물을 치우는 일에 배정됐다. 늘 있는 일이지만 땅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오물을 버리러 가는 동안 똥물이 얼굴에 튀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보인다거나 얼굴에 묻은 똥을 닦아내려고 하면 카포가 가차 없이 주먹질을 해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에 대해 정상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 현상이 가속화됐다.

-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밖에 있을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정신적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강제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에서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지니고 있던 전형적인 심리적 특징에 관한 문제를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소개하고, 정신 병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은 인간이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 요인(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이 만들어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 반응이 인간은 주변환경의 영향을 피할수 없다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단 말인가?
이론은 물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통해서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수용초 체험으로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함. 그 진리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으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부족, 식량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없게 되는 것이다.

-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다.

-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고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함. 그 삶의 용감하고, 품위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함.
이런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제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렇게 지고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예만으로도 인간이 지닌 내면의 힘이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해  그 자신의 존재를 높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비단 강제 수용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난다.

-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 완성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현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감각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감자 역시 기이한 시간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이야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시간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평범하고 의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가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앞에서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 연구대상이 됐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 인간의 정신상태(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내 친구의 죽음을 초래한 결정적 요인은 기대했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티푸스균에 대항하던 저항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됐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됐다. 결과적으로 꿈속 목소리가 했던 말이 맞기는 맞았던 것이다.
내가 이 경우를 통해 관찰하고 도출해낸 결론은 후에 수용소 주치의에게 들었던 말과도 일치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44년 성탄절부터 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에 사망률이 증가한 것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 식량사정 악화, 기후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 살아야 할 이유
수용소에서 정신력을 회복시키려면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 기회다.

-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싷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됐다.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깨닫는다.

-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 용어로 이인증이라 한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왔던가! 자유의 날이 와서 석방돼 집으로돌아가고,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아내를 포옹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는 꿈, 그런 꿈을 꾸었다. 오히려 너마나 자주 꾼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그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자유의 날을 맞은 그 꿈도 끝이 나고 만다. 이제 그 꿈이 지금 실현됐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꿈을 믿을 수 있을까?

- 수용소에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나가도 우리가 그동안 겪었던 시련을 보상해 줄 만한 속세의 행복은 없을 것이라고, 당시 우리가 바라던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행복을 바라면서 스스로 용기를 얻고, 우리가 겪는 시련과 희생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행을 견딜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환멸현상은 극복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며, 나같은 정신과 의사도 도와주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낙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작극을 받는다. 
지금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그때를 돌아보며 자기가 그 모든 시련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마침내 해방의 날이 찾아와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꿈처럼 여겨진 것과 같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모든 시련들이 언젠가는 하나의 악몽으로 생각될 날이 올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서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 사람은 어느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던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정신건강에서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던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잠재적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돼야 할 의미가, 다른 극에는 의미를 실현시킬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낡은 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 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할 문제를 제시한다.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된다.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 존재의 본질
로고테라피에서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로고테라피 행동강령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 인간존재가 본질적으로 일회적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로고테라피는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것. 염세주의자는 매일 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에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 뒷장에 중요한 일과를 적어놓고,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있는 풍부한 내용들,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반추해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젊은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잃어버린 자신의 청준에 대해 향수를 가질 이유가 있을까? 무엇 때문에 그가 젊은이를 부러워하겠는가? 그 젊은이에게 놓여 있는 잠재 가능성 때문에? 아니면 그가 지닌 미래 때문에? 천만의 말씀.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 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것. 어떤 상황에서도,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읻. 최선은 라틴어로 옵티멈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 잠재력이 첫째 고통을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둘째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셋째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은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모든 가능성과 모든 희망에 대해 가리지 않고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희망에 적용되는 것은 나머지 두 가지에도 적용되는데,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도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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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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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설계자들

경영 2025. 2. 18. 06:55

- 머스크가 공식적으로 물리학을 전공한 것은 펜시레니아대학에서였지만, 사실 그는 대학시절 훨씬 이전부터 물리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저는 열두 살 혹은 열세 살 무렵 이미 실존적 위기를 겪었어요." 후에 그는 말했다. "왜 우리는 여기 존재하는지,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한지 등등의 의미를 알아내려 낑낑대고 있었죠." 그 위기 한 가운데서 머스크는 자신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어준 공상과학 소설 하나를 발견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였다.
소설의 주인공 아서 덴트는 지구가 파괴돈 후에도 살아남아 마그라테아 행성을 찾기 위한 은하 간 탐사를 시작. 모험 중에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온 초지능적이고 범차원적인 종족이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딥 소우트라는 컴퓨터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답을 찾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시샇며 머스크의 실존적 우려를 덜어주었다. 머스크는 "많은 경우, 질문이 답보다 어렵습니다. 따라서 질무을 적절하게 만들 수 있다면 답은 쉬운 부분입니다.'라고 설명

- 페이팔 고용의 지혜는 나중에 가서야 명확히 드러남. 이미 회사의 성공으로 인해 초기 팀의 구상이 옳았다고 입증된 다음이었다. 당시 창업자들의 논리는 철학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었고, 경험보다는 편의를 따르는 편이었다. "저희는 친구를 영입해야 했어요. 사실 저희를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페이팔 장래 최고운영책임자 데이비드 색스는 후에 말했다.

- X.com이나 콘피니티가 남들은 못 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메일이라는 압도적 물결을 이용해서 플랫폼의 핵심을 이메일로 선택했기 때문. 99년에미국인들은 우편보다 이메일을 더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이메일은 이미 할리우드까지 진출해 있었다. 98년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은 유브갓메일에서 주연으로 등장. 영화는 이메일이 도화선이 되어 사랑에 불이 붙는 로맨스물이었다. 콘피니티는 대놓고 시류에 편승. 페이팔은 상품 소개 이메일에 영화제목을 이용해 현금을 받으세요, 라고 제목을 붙여 보냈다.
물론 X.com이나 콘피니티 어떤 팀도 세계 최고의 이메일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 특정기능은 처음에는 계획조차 되지 않았고, 나중의 개발과정에서 추가됨. 99년 가을 머스크를 위시한 X.com 엔지니어들은 한 이용자에서 다른 이용자에게 이메일을 통해 돈을 보낸다는 아이디어를 논의. 그러고는 이메일 주소가 계좌번호와 마찬가지로 고유식별자 기능을 할 수 있으리라 판단. 엔지니어 닉 캐롤은 그 후 며칠 만에 이 프로그램을 뚝딱 만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머스크도 같은 생각이었다. "자금이체라는 것이 대단치 않은 일이긴 했죠. SQL데이터베이스에 각 계좌의 금액을 저장하고 사용자가 돈을 송금하려고 하면, 프로그램이 송금자 계좌에서 금액을 줄이고 수취자 계좌에서는 금액을 늘리면 됩니다. 정말 간단하죠. 제 아들도 만들었어요. 열두 살인데 말이죠."

- 머스크를 비롯한 주요 경영진은 실패를 출시를 서두르는 데서 비롯되는 필연적 부작용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였다. "한번은 일론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잘못한 일을 고쳐놓기 전에 그 일을 어떻게 망쳤는지 네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 일은 자네가 한 게 아니야'(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네 번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라고 지아코모 디그리골리는 회상했다.
머스크는 이런 생각을 다른 식으로도 설명했다. "두 개의 길이 앞에 있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하나가 다른 길보다 명백히 나아 보인다면, 굳이 어떤 길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지 알아내려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그 하나를 선택해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틀릴 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대체로 그냥 하나의 길을 선택해서 일단 저지르고 보는 편이 선택을 놓고 끝없이 고민하고 주저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내용.)" 그는 03년 스탠퍼드 공개강연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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