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알베르 카뮈 Albert Canus, 사뮈엘 베케트 Samuel Becket는 삶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삶은 하나의 커다란 ‘우주적 장난 Cosmic Gag' 이다. 우리는 이 장난에 웃다가 숨이 막히기도 한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사물과 달라서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다. 예를 들어 재떨이는 담뱃재와 꽁초를 담는다는 '존재의 이유'가 있지만, 인간의 삶에는 객관적인 의미가 없다. 우 리가 담뱃재와 꽁초를 들고 있다고 하면 그것 또한 우리의 선택 이다. 바로 인간 재떨이가 된다는 선택, 인간에게는 선택지도 다양하다. 예컨대 우리는 히피가 될 수도 있고, 변호사가 될 수도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선택을 하는 이유가 “실존이 본질에 우선 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삶의 의미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불가피한 책무다. 사르트르의 선언에는 인간에게 불리한 면도 있다. 원하지 않 을 때에도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좋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자유 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한 객관적인 지침이 없다. 히피가 되는게 나을지 변호사가 되는 게 나을지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인간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진다. 객관적인 지침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선택은 임의성을 띤다. 이건 웃긴 일이다. 솔직히 이거야말로 인간의 실존이 부조리하다. 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안타깝지만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의 수많은 사물처럼 인간 역시 미리 정해진 본질을 가진 객체”라는 생각도 부조리하긴 마찬가지다. 일부 실존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삶의 모든 부조리를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고 어찌 됐든 계속 살아나가자.”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 The Myth of Sisyphos)라는 독창적인 글에서 부조리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실존을 그리스 신화에 나 오는 시시포스에 비유했다. 시시포스는 무거운 바위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 인물이다. 바위가 떨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밀어야 한다. 즐거운 파티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카뮈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이거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다.
-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온갖 것을 다 찾아낸다. 어른들은 온갖 것이 다 있는 데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다.” (레오파르디)
-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자이자 현상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에게 일상성 everydayness'의 문제는 '세계 내 존재 being in the world'의 핵심 특징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의 의미도 모른채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봤다. 그래서 인간은 만족스러운 존재가 되고자 분투하는데, 하이데거는 그것을 기투project라고 불 렀다. 보통은 종교라든가 이데올로기(객관적인 과학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봐야 한다는 견해도 여기에 포함된다)가 기투의 수단이 된다. 
- 쾌락주의자들은 항상 추종자를 잔뜩 끌어 모았다. 쾌락의 극대화를 삶의 목표로 간주했다고 최초로 기록된 철학자 중 하나는 그리스계 리비아인이었던 철학자 아리스티포스 Aristippus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어떤 것이 좋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아리스티포스가 말하는 쾌락에는 예외도 없고 조건도 없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대 그리스의 다른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가 독특하고 새로운 쾌락주의 이론을 제시했다. 그의 쾌락주의는 어떤 쾌락을 피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침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걸 읽고 있노라면 주일학교 수업에 온 기분이 든다.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격언(그는 함축적인 표현의 대가였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면 그의 풍요를 늘려주지 말고 그의 욕구를 줄여라.” 하나 더. “우리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온 세상을 가진 기분일 테고,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그것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집중될 테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쾌락은 바로 앞에 놓여 있으니 눈앞의 쾌락을 실컷 즐겨라. 더 강한 쾌락을 찾으러 떠날수록 우리는 끝없는 갈망의 길에 놓일 것이다. 그러면 하나도 즐겁지 않다.
- '카르페 디엠'의 시작은 호라티우스가 다음과 같은 걸작 시를 썼던 기원전 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명하게 생각하고, 포도주를 마셔라. 
짧은 우리네 인생에 긴 욕심일랑 잘라내라. 
오늘을 즐기고, 내일을 되도록 의심하라.
호라티우스는 고대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던 시대 에 살았다. 당시에는 개인의 정치적 역할이 축소되는 상황에 적 응하기 위해 철학도 인간의 내면을 향했다. 수백 년 전 플라톤이 아테네에 설립한 아카데미에서 호라티우스는 자기조절과 절제 를 중시했던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저서를 접했다. 그 래서인지 호라티우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절제하지 말고 무조 건 오늘을 붙잡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사회에 어떤 여하으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그도 별다른 설명을 하지 못했다. 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호라티우스가 말했던 '카르페 디엠’ 은 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보다 '당장 행동하라'에 더 가깝다. 
- 1920년대에 독일계 미국인이자 게슈탈트 심리학자 Gestalt psychologist(인간은 자신이 본 것을 조직화하려는 기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심리학자-옮긴이)인 카를 던커 Karl Duncker는 인간의 창의성을 연구하던 중에 '기능적 고착functional fixedness' 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기능적 고착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물의 사용법에 대한 고정된 생각 때문에 그 사물을 새롭게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못 하는 현상' 흥 미롭게도 이 정신적인 장애를 가장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5세 이하 아이들이라고 한다. 던커가 기능적 고착이라는 개념을 창안했을 무렵, 현상학자이 자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대표 저서인 《존재 와 시간 Being and Time)에서 '도구적ready to hand' 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하이데거는 개인이 주체로서 세상의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의 특징(둥글다, 회색이다, 딱딱하다 등)을 냉정하게 이성적으 로 파악한다는 전통적인 관념을 부인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본인이 접하는 사물에 감정을 쏟으며 그 사물과 특정한 연계를 맺는다. 각각의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그 사물 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며, 그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가지고 논다. 인간은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거대하게 굴러가는 세계의 일부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세계 내 존재의 상태에서 사물은 도구적이 된다. 사물을 도구적으로 바라보고 관계를 맺을 때의 문제점은 상황이 달라지면 그 특성이 갑자기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과 항상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사물은 숨 쉬기나 눈 깜박이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 계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생각을 못 한다. 라이터 역시 그저 흡연에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다. 우리는 라이터로 맥주병을 따볼 생각은 한 번도 못 해 봤다.
- 고도로 추상적인 헤겔철학은 모든 사물과 사건이 부분적으로만 실재한다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다. 헤겔철학에 따르면 논리학, 예술, 정치, 세계사, 자연 등의 모든 사물 또는 현상의 내부에는 그 자신에 대한 부정이 포함되며, 사물 또는 현상은 그 부정을 거쳐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  이를테면 헤겔은 세계 역사가 전제정치에서 귀족정치로, 귀족 정치에서 다시 입헌군주제로 진화했다고 본다. 역사가 이처럼 진 화한 이유는 역사의 특정한 단계를 거치는 동안 인간의 자유의지 가 서서히 작동하면서 변증법 dialectic'이라는 일종의 대화를 나눴 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현실과 일종의 대화를 나누 며, 그 대화 속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하고 전진 또는 발전 한다.  헤겔의 변증법을 압축해 설명해보자. 헤겔이 제시한 합synthesis'(진 테제)이라는 개념이 다소 특이하고 임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역사 속에서 사회·정치적인 힘이 실제로 어떻게 합을 이뤘는가를 연구했고 실제 일어난 과거를 토대로 이야기한 것이므로 헤겔의 개념이 틀릴리는 없을 것이다.  우선 '정 hesis' (테제)이 있다고 하자(전제정치. 여기서는 전제 군주 한 사람만 자유를 누린다). 이 정은 '반antithesis (안티테제)에 의해 부정당한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지? 더 많은 자유! 우리가 언제 그것을 원하느냐고? 지금!” 이 투쟁의 결과로 합이 탄생한 다. 여기서 합이란 귀족정치인데, 귀족정치 체제에서는 일부 사람들만 자유롭다. 귀족정치는 이제 새로운 정(현재 상태라고도 한다)이 된다. 새로운 정은 다시 새로운 반의 도전을 받는다. “귀족정치를 자유라 고 할 수 있나? 여보게, 우리 입장에서는 자유롭지 않다네. 우리는 귀족정치에 찬성하지 않아. 우리는 더 큰 자유를 원해! 그래서 언제 그것을 원하느냐고? 당연히 지금이지!” 이러한 충돌로부터 새로운 합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합은 입헌군주제인데, 헤겔의 주장에 따르면 입헌군주제에서는 모두가 자유롭다. 하지만 헤겔, 하마터면 당신에게 속을 뻔했어요. 헤겔은 이 변증법이 무한히 반복되다가 끝나는 지점을 절대 정신 absolute spirit 이라고 불렀다. 절대정신은 도덕에도 있고, 예술에 도 있고, 정치에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절대정신이 곧 '신'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였다. 다른 기독교인들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겠지만, 헤겔은 스스로를 기독교 신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 글을 쓰는 작업과 고쳐 쓰는 작업은 독자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의도를 반영한다. 하지만 만약 독자가 텍스트의 단어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낸다면 새로운 의미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의미들 중 어떤 것도 객관적이지 않다. 당신이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보냈는데 잘못 해 석된' 문자 메시지를 모두 떠올려보라.  예컨대 당신이 동거 중인 애인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낸다고 가정하자. “자기야, 나 오늘 늦게 들어갈 거야. 내 걱정 말고 저녁 먹어.” 그런데 애인은 당신의 메시지를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난 오늘 당신이랑 저녁을 먹고 싶지 않아. 그래서 다른 사람이랑 먹을 거야.” 그래서 당신은 메시지를 고쳐 쓴다. “오늘 당신이랑 저녁을 같이 먹고 싶었는데,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하지만 문자를 받는 그는 이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당신이 언짢아할까 봐 당신이랑 저녁을 먹고 싶었다고 말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랑 먹고 싶어.” 이제는 제3자, 예컨대 이혼 전문 변호사가 이 메시지들의 객관적인 의미를 찾아보려 했고, 그 의미는 이혼 사유가 된다고 가정한다
- 외부 세계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론을 형성하기 위해 선험적 추론을 해야 한다는 믿음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사람은 18세기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이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철학 자였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시했다. 사 실 합리주의가 완전히 폐기처분된 적은 없다. 합리주의는 끊임없 이 부활했다. 예컨대 우연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으로 사람 눈동자의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오 늘날의 반다윈주의 이론들처럼(합리주의자들은 불가능' 이라는 표현을 제일 좋아한다). 흄은 “사실과 관찰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시스템은 아무리 섬세하고 독창적이라도 모조리 거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오 늘날의 기준으로 이것은 상식에 가깝지만, 당시에 흄은 이런 주 장을 내놓았다는 이유로 '무신론자'와 '회의론자' 라는 손가락질 을 받았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서는 교수 임용을 거절당했다. 사실 그는 어느 대학에서도 교수직을 얻지 못했다. 흄의 혁명적인 생각들 중 하나는 인간 본성에 관한 과학 연구 가 다른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인간 본성인가? 다른 지식은 인간이 어떤 종류의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며 어떤 종류의 질문이 우리 능력 밖인지 아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험적 추론이 아닌 경험적 관찰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따라서 흄은 인식론자로 알려져 있다. 인식론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회의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며, 외부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험과 관찰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흄의 이론은 아이작 뉴 턴'saac Newton 을 비롯한 위대한 자연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 그리고 흄의 철학 역시 과학의 혁명적 발전에 공헌한 바가 있다.
- 서양 문명 속의 철학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자연법 natural law 에 관해 논의했다. 고대 로마의 키케로 Cicero가 시작해,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가 다시 꺼냈고, 그 후에는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 존 로크 John Locke 그리고 장 자크 루소 Jean Jacques Rousseau가 자연법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자연법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도 등장한다. 선언문에 따르면 모든 미국인은 “자연의 법칙과 자연의 신이 부여한 독립적이고 평등한 지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법 철학의 기본 개념은 인간의 윤리가 타고난 본성에서 우러난다는 것이다. 자연 세계를 창조한 신성한 존재가 인간의 본성을 도덕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론과 분 석을 통해 자연의 법칙이 무엇이며, 이 법칙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토머스 홉스는 자연법과 '자연 상태'를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 했다. 홉스의 견해에 따르면 자연법과 자연 상태는 불가피하게 충 돌한다. 정부와 문명이 부재하던 시절, 인류의 자연 상태는 야비 하고 포악하며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때 인류의 자연법은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류가 자신의 생명을 해치지 않으려면 자연 상태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하며 개개인의 자주권을 권위주의 국가의 통치에 양도해야 했다. 반면 존 로크는 인간의 자연 상태란 대체로 평화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성의 자연법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침해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자연 상태는 불안정하다. 모든 사람이 자연법을 따르 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의 자연 상태에 대해 홉스보다 낙관적인 견해를 지녔던 로크는, 헌법 테두리 안에서 제한된 권한을 행사하는 정부만으로도 평화와 질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크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선호하는 자연법 철학자는 18세기 스위스 제네바의 사회정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다. 루소는 인간의 자연 상태에 대해 한층 순진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정글에 당장 뛰어들어 주위를 살펴보라고 충고했다. 특히 때 묻 지 않은 도덕성을 간직하고 있는 원시인들을 잘 보라고 말했다. 원시인의 도덕은 왕과 지주, CEO와 리얼리티쇼 같은 것으로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썼다. 원시적인 상태의 인간처럼 평온한 존재는 없다. 원시 상태의 인간은 어리석은 야만인과 사악한 지식을 가진 문명인의 딱 중간 지점에 있다." 특히 루소는 문명인이 살아가는 방식보다 원시인이 살아가는 방식이 낫다고 주장했다. 원시인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심통 사나운 활동'에 오염되지 않았고 이기적으로 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군인 계급은 용기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사회 지도자나 수호자에게 요구 되는 미덕은 지혜다. 따라서 사회를 다스리는 사람은 철학하는 군주여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삶의 조용한 즐거움을 추구하려면 정치에서 손을 떼라고 충고했다. “당신은 당신의 집 뜰을 보살피고, 세상은 세상이 스스로 보살피도록 놓아두라.”
마키아벨리는 권력이 한군데로 집중되는 체제를 지지했다. “어떤 왕자가 권력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항상 선한 행동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갈 때는 그 교훈을 실천해야 한다.”
근현대 철학자들 가운데서는 니체가 인간의 권력 의지 will to power'에 주목했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권력 의 지를 긍정하는 일은 건강하고 고귀한 것이며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대중에게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 
20세기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는 권력이 정치 체 제에만 있지 않고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푸코는 생각의 한계를 정하는 일에도 권력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트랜스젠더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점점 변하고 있다면, 그것은 학교와 또래집단 등 공식적 및 비공식적 권력 집단들이 사람들의 태도를 특정한 방향으로 통제하려고 애쓴 결과일 것이다.
- 자유의지냐 결정론이냐.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궁극적인 질문으로 결정한(아니면 그들이 결정했다고 착각한) 순간부터 지 금까지 이 문제는 줄곧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20세기에 시작된 이 논쟁은 정신분석학과 과학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됐다. 하버드대학교의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였던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 Burthus Frederic Skinner는 '급진적 행동주의 radical behaviorism’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조작된 조 건 안에서 일어난 결과”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벌이는 모든 행동 을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보상과 처벌에 대한 반응으로 본 것이다. 스키너는 비둘기들이 부리로 버튼을 누를 때마다 보상으로 먹이를 조금씩 받도록 훈련시켰다. 스키너의 논리에 따르면 결국 우리도 그의 실험에 사용된 비둘기와 다르지 않다. 물론 우리에게는 깃털이 없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스키너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행동과학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고 인간은 결국 환경에 통제당한다고 주장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키너는 모욕적인 의도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단지 사실을 기술하려고 했을 뿐이다. 당연히 스키너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행 동할까? 가만히 앉아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기다릴까? "아니다” 라는 것이 스키너의 대답이다. 자신을 조종하는 환경 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면 된다. 이 부분에서 스키너의 이론은 난해해진다. “자유의지에 의한 내 최초의 행위는 자유의지를 믿는 것이었다” 라는 윌리엄 제임 스의 철학적 명제도 아리송하긴 마찬가지지만. 칸트의 이론에 따르면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주장하는 두 진영 의 주장은 모두 상대편이 이상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모든 것 이 사전에 결정되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우리가 그 정보를 가지 고 무엇을 하겠는가? 가만히 누워 있으란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그리고 이 가정에 따르면 가만히 누워 있는 것 또한 자유로 운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에 따라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 로운 행동을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그것이 100퍼센트 무작위로 이뤄지는 행동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의문이 든다. 으아. 철학은 항상 이런 식이다.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철학의 질문들은 정말 재밌지 않은가?
-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심장이 두근두근했던 시절부터 서양 철학자들은 '사랑'의 여러 가지 의미를 정확히 구별하려고 노력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인간이 경험하는 다양한 사랑의 감정을 여덟 가지 단어로 각기 다르게 표현했다. 여신 에로스와 이름이 똑같은 에로스(우리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에로스에는 육체적인 사랑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진 것을 원하는 모든 사랑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장인을 향한 도제의 사랑도 에로스로 분류된다), 친구 간의 따뜻한 사랑을 가리키는 필리아 phlia (필로소피아 philosophia는 '지혜로운 사랑' 이라는 뜻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스토르게 stroge(예컨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장난이나 게임처럼 즐기는 유희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루두스ludus(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감정),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키는 마니아 mania(에로스와 루두스의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랜 세월 지속되는 사랑인 프라그마 pragma (40년 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의 사랑), 필라우티아philautia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랑의 가장 높은 경지인 아가페 agape(이타적 사랑)가 그것이다.
- 제임스가 살던 시대에 심리학은 철학에서 이제 막 분리되기 시작했으므로 제임스의 《심리학 원리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역시 매우 철학적인 책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제임스는 감 정이란 무엇인가? What Is an Emotion?>라는 에세이에서 육체적 본능과 감정 사이의 인과관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제임스가 예로 들었던 유명한 사례에 따르면 우리는 곰이 보인다, 곰은 무섭다, 그래서 나는 달아난다' 라는 순서로 반응하지 않는다. 실제 순서는 곰이 보인다, 본능적으로 달아난다, 이 생리학적 반응 때문에 나는 무 서움을 느낀다'에 가깝다. 빠르게 앞뒤로 움직이는 다리, 빨라진 심장 박동, 아드레날린의 분출을 의식한 결과가 바로 무섭다는 감정이다. 울음을 터뜨리는 행동과 슬픈 감정도 같은 순서를 따 른다. 프라시노가 그린 새도 동일하다. 이 새는 본능에 따라 노래하며, 노래하기 때문에 행복을 느낀다.
-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서구 사회의 경우 기원전 5세기까지 회의론자는커녕 의심 많은 사람조차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 디아고라스 Dingoras가 무신론이라는 개념을 처음 언급했다.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디아고라스는 철학자였다. 그러니까 말썽을 일으켜야 정상이었다. 디아고라스의 뒤를 따라 무신론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무신론자인 프로디쿠스 Prodicus는 다소 오만한 태도로, '신은 정말 있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원시시대의 인류는 단순한 경외심 때문에 대지가 제공하는 열매를 비롯해 자신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온갖 것을 신격화했음.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시점에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로이트가 환상의 미래에서 프로디쿠스의 심리학적 분서을 심화했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소망 실현 wish fulfilment 이라고 불렀다. 즉 인간은 가공의 현실을 통해 본인의 열렬한 소망을 충족한다. 프로 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는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렬 하며 가장 다급한 소망을 심리학적으로 실현하는 도구다.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렬하고 가장 다급한 소망이란? 바로 영 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떤 믿음의 심리학적 기원을 밝혀냈다고 해 서 그 믿음이 반드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심리 메커니즘을 활용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신은 이런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모세가 나의 존재를 믿게 할 방법은 단 하나, 내가 불타는 덤불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밖에 없어. 에이, 모르겠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지" 그리고 신의 존재를 믿을 때 어떤 심리적 장점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 부수효과일 수도 있다. 마치 사랑의 존재를 믿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이 중 어떤 가설이 옳든 간에, 무신론자가 등장한 이후로 어떤 철학자들은 무신론자들의 말이 틀리고 신이 정말로 존재함을 입증하는 과제에 달려들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다시 존재론적 논증을 꺼내들었다.
- 소크라테스가 끊임없이 철학적 질문을 던져 아테네 청년들의 정신을 오염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였다. 그는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물론 소크라테스를 심판하던 재판관은 그 답변에 감동하지 않 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섀너핸의 만화에 나오는 불쌍한 멍청이의 운명도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더 큰 희망을 주는 답변은 러셀의 에세이 〈철학의 가치 The Value of Philosophy)에 나오는 함축적인 문장이다. “철학의 연구 대상인 세계도 위대하지만, 철학하는 사람의 정신 역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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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은 우리 마음과 비슷한 데가 있다. 쓰이지 못하고 집 안 여기 저기에 박혀 있는 물건들은 심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뭉쳐진 채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과 같다. 제자리에서 벗어나 갈 곳을 잃은 마음은 뭉쳐져서 굳기 마련이고, 굳은 것은 유연성을 잃어버린 채 화석화되어 마음의 성장을 방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집 안을 정리하는 일은 자신의 마음을 풀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 정리를 잘하는 사람은 현재에 집중하면서 살아가지만, 정리를 안 하는 사람은 과거에 중점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건의 기준도 과거형이다. 예전에 입던 옷을 옷장 가득 넣어두고 산다.
- 버리는 일은 선택이다. 선택은 자기 삶의 통제권과 관련되어 있다. 무엇을 갖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얼마만큼 유지할 것인가, 남은 물건을 어떻게 쓸 것이며 이 물건은 왜 필요한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이 생긴다.
-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물건은 과거로 보내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현재라는 시간을 입혀주자. 그러면 지나간 과거, 언젠가 올 미래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 물건을 놓을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자리다. 집에 들어갔을 때 자기만의 자리와 공간이 있다면, 집에 있는 시간이 다른 가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하더라도 집을 좀 더 편안하고 친근한 공간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 견적을 보러 갔는데 방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서 견적을 보기가 힘든 경우가 있다. 문이 3분의 1밖에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작 사는 사람은 문이 조금만 열려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문뒤에 쓰지 않는 물건을 잔뜩 쌓아두고 말이다. 방문이 조금밖에 열리지 않는 집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대화하려는 사람과 비슷하다. 소통이 힘든 사람과 오랜 시간 대화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다시 쏙 들어가고 만다. 때로는 나만 속을 드러내는 것 같아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 방문이 조금밖에 열 리지 않는 집은 왠지 사람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한다. 문을 열어도 활짝 열리지 않으니 살짝 들여다보는 형태가 되어 보는 사람도 계면쩍다.
- 문은 기의 입구라 하여 풍 수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곳이다. 좁고 어두운 문은 기를 억 압해 가족들의 운을 질식시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니 오늘이라도 당장 모든 방문이 활짝 열리도록 정리해보자. 시원하게 마음을 열 듯 집 안의 모든 문이 제대로 열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보람이 있다.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가족의 닫힌 마음의 문도 함께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 집을 정리하는 일은 자기 삶을 스스로 통제하는 힘을 갖는 것과 같다. 물건에 속박당하지 않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사는 양보다 버리는 양이 더 많아야 한다는 걸 항상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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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8년에 빛의 본질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크리스티안 하위 헌스(Christiaan Huygens)는 빛이 파동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프랑스 과학 아 카데미에 제출했다. 하지만 빛이 입자의 흐름이라고 확신했던 뉴턴의 견해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결국 100년 동안 잘못된 생각이 세상을 지배한 뒤에 문제가 해결되었다. 뉴턴이 틀렸고 빛은 파동이다. 1900년경에 물리학자들은 특정한 금속에 빛을 쪼이면 소량의 전류가 발생하는 광전 효과(photoelectric effect)를 발견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빛이 광자(photons)라는 아주 작은 입자의 흐름으로 이루어졌다고 추론했다. 뉴턴의 생각이 옳았다. 하지만 뉴턴의 이론이 폐기된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빛이 파동임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는 실험이 수없이 이루어졌다. 논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빛은 파동인가 입자인가? 궁극의 해답은 '둘 다였다. 빛은 때로는 입자처럼 때로는 파동처럼 행동한다. 이 모두는 대단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곧 몇몇 선구자가 수수께끼를 이해하는 방법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양 자 역학이 탄생했다. 입자의 위치와 입자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가와 같 은 모든 고전적인 확실성이 아원자 수준의 물질에는 적용될 수 없음이 밝혀졌다. 양자의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 게 측정할수록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는 더 모호해진다. 더욱이 입자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만족스러운 답이 없다. 최선은 주어진 장소 에 입자가 위치할 확률을 기술하는 것뿐이다. 양자 입자는 입자도 아니고 단지 흐릿한 확률의 구름일 뿐이다. 물리학자들이 양자의 세계를 더 깊이 탐색할수록 모든 것이 더 흐릿해 졌다. 양자의 세계를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이상한 수학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고 그들은 양자 현상이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작위적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실제로 양자의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이루어진다. 찾아내지 못한 정보나 더 깊은 수준의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입 다물고 계산하라.'가 양자 역학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러니 모든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말라
- 가족 구성원을 엄하게 다룰 때는 실패가 없었다. 처자식이 깔깔대고 재잘거리자 가정 경제가 무너졌다. 《역경》
- 주사위를 던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멀리 던져 버리는 것이다. (16세기 속담)
- 16세기와 17세기에 과학계의 위대한 두 인물이 자연계의 수학적 패턴에 주목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지상에서 구르는 공과 떨어지는 물체의 운동에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천상에서 화성의 궤도 운동을 통하여 수학적 패턴을 발견했다. 그들의 연구 를 기반으로 1687년에 발간된 뉴턴의 저서 《프린키피아》는 자연의 불확실 성을 지배하는 심원한 수학 법칙을 밝힘으로써 자연에 대한 우리의 사고 방식을 바꿔 놓았다. 거의 하룻밤 사이에 밀물과 썰물에서 행성과 혜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연 현상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수학자들 은 재빠르게 뉴턴의 발견을 미적분의 언어로 바꾸고 열, 빛, 소리, 파동, 유체(fluids), 전기, 자기에 유사한 방법을 적용했다. 수리 물리학(mathematical physics)의 탄생이었다. 《프린키피아》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자연이 움직이는 방식 대신 이 를 지배하는 심원한 법칙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칙을 알면 움직임을 추론할 수 있고 주변 환경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여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그러한 법칙은 대부분 형태가 대단히 명확하다. 순간순간 시스템의 상태를 상태의 변화율로 표현하는 미분 방정식이 이에 해당한다. 방정식은 법칙 또는 게임의 규칙을 명시한다. 방정식의 해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에서 자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는 게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구체화한다. 뉴턴의 방정식으로 무장한 천문학자들은 달과 행성의 운동, 일 식이 일어나는 시간, 소행성의 궤도를 매우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신 들의 기분에 지배되었던 천체의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운동이 구조와 작동 방식에 따라 완벽하게 결정되는 거대한 우주의 시계 장치로 대치되었다.
- 역사적으로 혼돈은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공식으로 풀 만큼 단순한 방 정식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앵카레의 기하학적 관점에서는 정지 상태나 주기적인 순환 같은 정상적인 유형의 거동들과 전 혀 다를 바 없이 타당하고 평범한 현상이다. 상태 공간의 일부 영역이 국부 적으로는 확장되지만 경계가 있는 영역으로 제한된다면 나비 효과가 필연 적이다. 2차원에서는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어도 3차원 이상에서는 어렵지 않게 벌어질 수 있다. 혼돈하는 움직임은 신기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물리 시스템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며 특히 다양한 혼합 프로 세스가 작동하는 이유다. 하지만 실제 날씨에서 혼돈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더 까다롭다. 우리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조건이 변하지 않은 상태로 날씨를 다시 한번 돌려 볼 수 없다. 하 지만 보다 단순한 유체 시스템을 이용한 실험은 이론적으로 실제 날씨가 초기 조건에 민감하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로렌츠를 비판한 사람들이 틀렸던 것이다. 나비 효과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모델의 결점이 아니다.  이러한 발견은 기상 예보가 계산되고 제공되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본래의 아이디어는 방정식이 결정론적이므로 관측의 정확도와 현재의 데이 터를 미래로 투사하는 수치 기법을 개선하는 것이 정확한 장기 예보를 얻 는 방법이란 생각이었다. 혼돈은 그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날씨 예측을 수치화하는 기상 예보 분야의 종사자들은 결정론 대신에 범위를 가지는 예보와 예보의 정확도에 대한 추정치를 제공하는 확률 기법으로 전환했다. 실제로 텔레비전이나 웹 사이트에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예보만이 제공되며 흔히 '25퍼센트 강우 가능성' 같은 확률적인 평가가 덧붙는다. 이러한 기본 기법을 앙상블 예측이라 부른다. '앙상블은 수학자라면 집합이라 부를 것에 대하여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멋진 용어다.(열역학에서 나온 용어인 듯하다.) 당신은 하나가 아닌 예보의 집합(앙상블)을 구성한다. 19세기의 천문학자들처럼 현재의 대기 상태를 반복해서 관측하는 방법을 쓰지는 않는다. 그 대신에 당신은 관측 데이터 한 벌을 확보하여 열흘 예보 소프트웨어를 실행한다. 그리고 데이터에 무작위로 작은 변화를 준 뒤에 다시 소프트웨어를 돌린다. 이런 식으로 50번을 반복한다. 무작위로 변화 한 관측 결과에 기초하여 산출된 예측의 50가지 표본을 구할 수 있다. 이 는 사실상 실제로 관측된 수치들에 가까운 데이터로부터 일어날 법한 예 측들의 범위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 뒤에는 비를 예측하는 예보가 몇 개나 되는지를 세어서 확률을 얻을 수 있다.
- 기후학자들이 자신 있게 단언하듯이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가 더워진다면 이렇게 전례 없이 추운 날씨가 계속해서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인간의 행동이 세상을 더 덥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모든 곳이 같은 정도로 더워지는 것은 아니다. 온난화는 가장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북극과 남극에서 제일 심각하다. 북극의 더워진 공 기는 제트 기류를 남쪽으로 밀어냄과 동시에 약화시킨다. 따라서 제트 기류의 위치가 더욱 빈번하게 바뀐다. 2014년에는 이 효과가 미국의 동부 지
역으로 차가운 공기를 보냈다. 동시에 미국의 나머지 지역에는 제트 기류가 S형 꼬임을 형성함에 따라 이례적으로 따뜻한 공기가 유입되었다. 그해 7월은 서부 지역의 워싱턴, 오리건, 아이다호,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의 여섯 개 주에서 가장 따뜻한 열 번의 7월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 정확한 상승률과 상승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는 확실치 않지만 향후 수십 년 동안 온도 상승이 일어날 것이라는 데는 모든 모델의 예측이 일치한다. 지금까지의 관측 결과는 1880년 이래로 이미 0.85도의 온도 상승이 일어났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지구의 온도는 제조업 분야에서 화석 연료가 대량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이래 줄곧 상승. 상승률은 가속화되었으며 근년에는 이전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 다. 지난 10년 동안에는 상승 속도가 느려졌는데, 많은 국가가 부분적으로나마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조치를 취한 덕분이었고 08년 금융위기에 따른 전 세계적인 불경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상승 속도가 다시 빨라지고 있다. 아마도 가장 심각한 위협은 얼음이 녹고 바닷물이 데워지면서 팽창한 결과 나타나는 해수면 상승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밖에도 해빙의 상실, 영구동토층이 녹는 데 따른 메탄(더욱 강력한 온실가스) 방출, 질병을 옮기는 곤충의 지리적인 분포 변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속출한다.
- 기상 시스템에 추가로 투입된 에너지는 또한 공기가 흐르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예컨대 북극 지방이 지구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더워지는 현상은 현재 진행 중인데, 이는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 극 주위로 돌아가는 찬바람인 극소용돌이(polar vortex)의 흐름을 바꾼다. 흐름을 약화시켜 찬 공기가 오래 머물도록 하고 남쪽으로 더 많이 내려가게 한다. 또한 순환하는 찬 공기의 흐름 전체를 남쪽으로 밀어낼 수도 있는데 2018년 초에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지구 온난화가 평년보다 훨씬 더 추운 겨울을 초래할 수 있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현상은 에너지를 추가하여 비선형 시스템을 교란할 때 일어난다. 유럽에서 평년보다 5도 낮은 기온이 유지되는 동안에 북극 지역은 평년보다 20도 높아진 기온 덕에 따뜻함을 즐겼다. 우리가 과도하게 만들어 낸 이산화탄소가 북극이 찬 공기를 수출하도록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기는데, 이는 훨씬 더 나쁜 재앙이 될 수 있다. 남극에는 북극보다 얼음이 훨씬 많다. 과거에는 남극의 얼음 이 북극보다 천천히 녹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극의 얼음이 더 빨리 녹고 있으며 물속 깊이 연안 빙상(coastal ice sheet)의 바닥에 가려 알아 채지 못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매우 나쁜 소식이다. 연안 빙상은 불안정해지기 쉽고 그렇게 되면 모든 얼음이 대양으로 흘러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빙붕(ice shelf)의 거대한 덩어리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극지방의 빙원이 녹는 것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추가로 물이 유입되어 대양의 해수면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북극과 남극 지역의 얼음이 모두 녹는다면 해수면이 80미터 이상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그렇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든 2미터 정도의 해수면 상승은 이미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온난화가 1도에 그친다면 이들 숫자가 더 낮아질까. 그렇지 않다. 평 균 온난화가 단지 1도(산업 혁명 이래 실제로 일어난 온도 상승 폭)일지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온난화가 균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난 화가 가능한 한 작기를 바라는 극지방의 온도 상승률이 온대 지역보다 훨씬 높다. 북극 지역은 평균 5도 더 따뜻해졌다. 남극 대륙의 온난화는 상 대적으로 약해 보여서 덜 위협적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과학자들이 바닷속을 살펴보기 전의 이야기였다. 
- 투기꾼들은 거품을 만들어 정상적인 기업 활동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이 투기의 소용돌이 속 거품이 될 때는 상황이 심각해진다. 국가의 자본 개발이 카지노 활동의 부산물일 때 국가 경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
- “블랙 - 숄스 공식은 금융 분야에서 성서의 위치에 접근해 왔다. 그러나 이 공식을 장기간 사용하면 터무니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공 정하게 말하자면 블랙과 숄스는 이 사실을 잘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들의 충실한 추종자들은 두 사람이 처음 공식을 발표하면서 첨부했던 경고들을 무시할 수도 있다." (워렌 버핏)
- 인간의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신경 세포와 100조 개가 넘는 접합부가 존재한다. 특히 교질 세포(glial cell)를 비롯하여 신경 세포와 거의 비슷한 수의 다른 세포들도 뇌의 작동에 관여할 수 있지만 그들의 기능은 아직까지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65 인간 뇌의 커넥톰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인데 이는 뇌를 모사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미래의 뇌 연구에 신뢰할 만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수학자들이 신경 세포가 열 개인 '뇌'조차 이해할 수 없다면 1000억개의 신경 세포로 이루어진 뇌를 이해하는 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기상과 기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의 해답은 무슨 질문을 하는가에 달렸다. 신경 세포 열 개 정도의 네트워크는 상당히 세부적으로 이해할수 있다. 뇌 전체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복잡하더라도 일부 영역은 헤아릴 수 있다. 이는 뇌가 구성되는 몇 가지 일반 원리를 찾아낸 덕분이다. 이 같은 유형의 요소를 열거하고 연결 방식을 밝힌 뒤에 상향식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전체 시스템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상향식' 접근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뇌의 전반적인 특성과 움직임에 기초한 '하향식' 분석이 가장 명백한 대안이다. 두 가지 접근법을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혼합할 수도 있 다. 실제로 인간의 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신경 세포 네트워크의 연결 방 식, 흐름을 밝히는 기술의 진보, 네트워크의 거동 방식을 다루는 수학적인 아이디어에 힘입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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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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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하는 뇌

심리 2021. 2. 19. 20:36

- “이미 아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일이 이미 소유한 것이 아니라 얻으려 노력하는 일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는 길이 가장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수학자이자 과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지는 뇌가 장기적으로 특정한 종류의 사고와 인지 또는 행동을 취하기 위해 어떻게 상호 연결할지를 좌우한다. 나 이가 들수록 우리는 기존에 학습된 개요나 유형에 더 빨리 접근할 수 있다. 우리의 기억 체계 중에서도 특히 이마 바로 뒤에 자리하는 대뇌 피질이 세세한 내용보다는 요점과 진행 과정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슈퍼마켓, 레스토랑, 도서관에 있는 진열대가 정렬된 방식과 비슷하다. 이렇게 개요를 파악하는 방식은 학습에 매우 효과적이다. 특정 과정이나 장소에 포함된 많은 부수적인 면을 새롭게 저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시를 통해 확인해보자. 회사나 슈퍼마켓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 을 꼼꼼하게 파악하지 않는다. 다만 특이한 일은 알아차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일의 발생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감정적으로 동요한 일이나 특이한 것은 더 쉽게 기억한다. 요컨대 우리가 성인이 된 후 학습을 할 때는 새로운 학습 내용과 기존에 저장된 내용을 오가며 항상 비교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학습 효과를 높이기도 하지 만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편견 없이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안다고 믿는 것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 뇌의 수행 능력은 호기심과 동기 부여가 끈 기를 만나 하나가 됐을 때에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일, 근육을 쓰는 운동, 머리로 깊이 생각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등... 무엇이든 훈련 효과와 긍정적인 결과를 보려면 일정한 시간이 흘러야 한다. 이때 깊이 명심해야 할 개념은 그릿이다. 그릿은 장기 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음에 품은 고집스러운 열정과 이런 열정을 바탕으로 한 끈기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내놓은 전문훈련법에 관한 수많은 연구를 보면 재능과 소질, 지능 지수보다 이런 요소가(인내심을 갖고 버틸 수 있는 능력도) 학습 결과를 더 많이 좌우한다. 한 주제에 오래 매달리려는 의지는 눈앞에 분명한 목표가 있고, 배워야 할 내용이 일상이나 학교, 학업, 직업과 결부되고, 배울 내용이 진 심으로 마음에 와닿을 때 생긴다. 마음이 움직이면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 물론 타고난 지능과 재능, 유전적 특징으로 직장과 사생활 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특정 분야에서 남다르게 빠르고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연코 재능이 모든 걸 결정하지는 않는다. 학교와 직장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공감 능력)과 자제력(의지력), 이들을 바탕으로 하는 끈기, 그릿이다. 목표에 이르고자 인내심을 지니는 자세가 어쩌면 모든 요소 가운데 제일 중요할지도 모른다.
- “사람들은 위대한 지성이 끼치는 영향이 가장 기분 좋게 느껴지고 자신이 질투를 느끼지 않을 만한 곳에서만 천재에 대하여 말한다. 누군가를 '신과 같다'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우리가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들어진 모든 것, 완전한 것은 경탄의 대상이며, 생성 중인 모든 것은 경시된다. 그런데 예술가의 작품은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생성되었는가'를 그 누구도 볼 수가 없다. 이것이 예술가의 유리한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성 과정을 볼 수 있는 경우에는 언제나 조금 냉정해지기 때문이다.” (니체)
- 댄 챔블리스는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 위대한 예술가, 유명한 경제 석학이 이룬 최고 업적에 대한 연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최상의 기량이란 혼자서 배우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배워 익히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가 되어 전체로 움직이도록 심혈을 기울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얻은 결과물로, 이는 작은 능력 의 총체다. 그들에게 비범하거나 초인간적인 면모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꾸준히 정확하게 실행한 동작이 합쳐져 최고의 성취로 이어졌을 뿐이다.”
-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은 채 실패에서 다른 실패로 갈 수있는 능력이다 (처칠)
-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을 생산하는 신경 세포의 수는 많지는 않아도 인간 행동의 기본적 성질에 다양하게 참여하므로 매우 중요하다. 도파민은 우리의 경각심과 주의력을 조절하며, 창의성을 높이고, 자신감을 갖게 해주고, 낙관적으로 만들며, 특정한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그 밖에도 우리에게 긴장감과 기대감을 부여한다. 이것은 신경 세포가 새로운 경험을 할 때, 특히 우리가 목표를 달성했을 때 뇌가 더 잘 기억하게 돕는다. 호기심이 생기면 배우는 일이 쉬워지고, 기억 효과도 높아진다. 도파민은 특히 중뇌의 흑질(흑핵)과 옆에 있는 'A10'이라는 단조로운 이름이 붙은 영역(그림 3과 4)에서 생산된다. 이런 구조는 뇌에서 소위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탐지기를 형성하고, 이로써 미래의 행동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한다. 우리는 뇌 안에서 동기의 횃불이 계속 불타오르게 노력해야 한다.
-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새로움이 들어 있는 낡음이다. 한 줌의 새로 움이 든 낡음.” (윌리엄 제임스)
- 십자말풀이의 개발자인 윌 쇼츠 Wil Shortr는 수십 년 동안 <뉴욕 타임스>의 십자말풀이 편집자로 일했으며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쇼츠는 사람들에게 십자말풀이를 시작할 때 다음과 같이 해보라며 귀띔했다. 그의 조언은 일반적으로 십자말풀이 외에 다른 일을 할 때도 참고가 된다.
1. 확실하게 아는 단어에서 시작하고 그곳에서 다른 문제를 풀어나간다.
2. 두려워 말고 무작정 추측해본다. 즉, 답이 틀려도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내면에서 떠오르는 직감을 믿는다. 뇌는 가끔씩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의식 중에 더 많은 것을 안다.
3. 틀린 단어 지우는 일을 겁내지 않는다. 싫은 일도 하면서 왜 새로운 일은 시작하지 않는가?
- 왜 동시에 적은 일만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작업 기억의 용량이 그토록 작은 이유는 무엇일까? 까다로운 질문에 비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에너지를 아끼려는 목적에서다. 과제는 저장 공간에 영구적으로 비축되어야 한다. 이는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뇌의 에너지 소비량을 높인다. 우리가 중간에 저장한 각각의 모든 과제를 위해 뇌에 있는 뉴런은 온종일 활성화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뇌 피질의 좌우 전두엽에서 일어나는 작업 기억은 우리가 뇌의 어떤 자원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하고, 처리하고, 구상한다. 프랑스의 연구진은 우리가 주요 업무 외에 부차적인 두 번째 업무를 처리하면 양쪽의 대뇌 반구가 두 가지 과제를 똑같이 나누어 일하는 것 을 영상 처리 과정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뇌 는 왼쪽, 오른쪽으로만 나뉘어 있다. 따라서 계속해서 세 번째 업무를 추가해서 처리하려면 뇌는 어쩔 수 없이 연산 공간을 다른 업무를 담당하는 곳과 같이 사용하므로 처리 용량이 절반으로 준다. 나머지 저 장 공간이 이미 사용 중이므로 세 번째 과제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투 자해서 처리할 수밖에 없다.  두개 또는 그 이상의 과제를 나란히 처리하려면, 첫 번째 과제 수행능력이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업무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감소하는 결과를 피하기 어렵다. 이때 가장 필요 없는 제동력이 다른 일에 대한 생 각을 펼친다. 특히 책상 위 스마트폰의 신호처럼 우리의 집중을 분산 시키는 사소한 일은 생각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 이런 완전히 쓸데없 는, 정보를 막는 데 신경을 쓰는 일은 작업 기억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며, 게다가 의지력까지 약하게 만든다. 요약하면 어떤 수단을 써도,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는 멀티태스킹 을 절대 잘 해내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여러 과제를 이리저리 번갈아 가면서 할 뿐이다. 스스로 실험해보면 알겠지만 멀티태스킹에 관여하는 뇌의 영역인 작업 기억은 놀랍도록 작다.
- 일정한 시간에 완전히 주의력을 쏟아부어 머릿속에 딱 두 가지 일만 들어 있게 하면 일을 최상으로, 그리고 가장 생산적으로 할 수 있다. 항상 주시해야 할 두 가지란, 어떤 일을 하면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를 항상 마음속에서 그리는 것과 일 자체다. 미국의 생물화학자인 데 이비드 케인 David Cain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옳은 말이다. “모든 생각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 좋겠지만 그중 제대로인 생각은 몇 가지밖에 안 된다.”
- 창의적으로 사고하기에는 생각 중인 자신을 스스로 방해하지 않게 수시로 생각을 떨쳐내고, 거리를 유지하거나 또한 집중을 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이렇게 거리를 유지하거나 생각을 내면적으로 재구성하는 산만한 시간은 다시 원래의 일로 돌아오기 전에 20분이 넘지 않게 제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런 다음에 다시 본격적으로 한가지 일에 집중한다. 휴식 시간이 이처럼 짧다면 그리 매력적인 제안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학습을 할 때 가장 힘든 훈련 중 한 가지는 오랜 습관을 벗어던지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해내면 뇌는 힘든 훈련을 꾸준하게 향상하는 수행 능력과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보상으로 선사한다. 학습 기간이 좀 더 긴 사람은 최신의 학습 자료를 반복하고, 연습하는 것 외에도 2주 전 또는 2개월 전에 배웠던 내용을 추가적으로 훈련에 집어넣어 뇌를 항상 긴장시키고 놀라게 해야 한다. 이것은 오래 된 학습 내용을 기억하는 데만 좋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에 대한 이해력도 같이 높인다. 뇌가 학습한 내용 사이에서 정답이 될 만한 가능성의 날카로운 경계선을 찾는 일을 돕기 때문이다. 뇌에는 확실하고
- 시험이나 중요한 평가 날까지 준비 기간이 14일 남았다고 가정하자. 공부하는 시간을 12시간이라고 계획했을 때 다음과 같이 학습 시간을 분배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1번째, 2번째, 7번째 날에 각각 3시 간, 그리고 시험 보기 2일 전인 12번째 날에 3시간 동안 공부한다. 이런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2일에 걸쳐 15시간을 공부한 사람과 같은 효과가 있다. 많은 연구들은 이렇게 시간 간격을 두는 학습 방식이 절대 적으로 평가했을 때 시간이 3시간 정도 적게 걸리며, 게다가 공부한 내용이 장기 기억에 남는다는 결과를 얻었다. 다시 말해, 단지 시험에 통과하려고 공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학습은 장기 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앞을 내다보며 구성하고, 원칙을 지켜야 하므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 우리 모두는 대부분 먹는 것을 주제로 이야기할 때 습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우며, 체중을 줄이고 다이어트에 성공해도 빠진 몸무게를 유 지하는 일이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안다. 특히 산업적으로 미리 조리되고, 지방과 설탕 함유량이 높아 칼로리가 심할 정도로 풍부한 음식물을 섭취했을 때 배고픔 음식 섭취→보상 체계의 활성'이라고 구성된 축은 무너진다. 즉석 조리 식품은 보상 체계를 과하게 활성화시키고, 그래서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 렙틴이 식욕을 억제하는 효력을 내지 못한다. 이때 뇌는 특별히 보상을 받을 만하다고 정보가 저장된 특정한 음식을 먹는다. 그래서 칼로리 필요량이 이미 채워졌음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먹는다. 그 뒤에는 또 다른 논리가 숨어 있다. 우리의 뇌는 작은 크기에 비해 하루에 필요한 전체 에너지 양 가운데 20퍼센트라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한다. 식탁에 감자 칩 봉지가 보이면 이를 가져와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는 것과 같이, 한 번 익숙해진 루틴은 다시 고치기 힘들다. 게다가 너무 자주, 많이 먹으면 포만감을 가져오는 호르몬 렙틴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뇌에 들어 있는 보상 체계가 렙틴의 효과에 변화를 가져와 더 이상 배가 안 고픈데도 계속 음식을 먹게 한다. 그러다 보면 렙틴의 효과가 약해져 시간이 지 나서야 늦게 포만감이 찾아오고 뇌의 보상 체계에 도달하는 신호도 매우 약하게 만족감으로 연결된다. 이로 인해 초콜릿 바를 처음 한입 물었을 때 느꼈던 행복함의 세기를 느끼려면 더 자주, 많이 먹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비만이 되는 파괴적인 논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예 상한 만큼 보상이 뒤따르지 않으면 만족감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결과 적으로 더 많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된다. 습관은 더 이상 말을 듣지않고 대신에 도파민이 등장한다. 보상 체계가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이런 기대가 전체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도파민의 분비가 증가한다. 대부분 식사를 하는 곳에서 우리는 배고픔을 느끼기 마련이다. 따 라서 절대로 공부하는 책상 위에서 먹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습관과 루틴이 기억력의 악역을 맡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틴이 오히려 작업 기억의 부담을 덜어주므로 정반대의 효과가 날 때가 많다. 게다가 뇌의 습관 회로는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전두엽보다 더 많은 결정 변수를 다룰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에서도 이른바 자동으로 알아서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돕는다. 산업 현장이나 항공 교통의 안전 훈련과 같은 상황에서 정확하고, 정형 화된 행동을 실행하는 연습이 필수적인 것처럼 말이다. 습관은 우리가 오랫동안 일을 중단하더라도 다시 효과적인 작업 루틴을 찾게 돕는다. 그런데 뇌가 잘 못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 우리 몸 대부분의 기관은 많이 사용할수록 노화가 빨라진다. 하지만 뇌는 예외다. 정반대로 뉴런의 활동이 오히려 신경 세포를 노화로부터 보호한다는 놀라운 증거가 있다! 이는 뉴런이 전기적 특성을 띠며 화학적 신호를 전달할 때 자신을 보호하는 요소도 같이 분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보호 성분은 신경 세포의 수명을 늘리고 우리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거나 학습하면 추가적으로 신경 세포가 성장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쓰거나 잃거나.'라는 모토를 완벽하게 따라 작용한다. 심지어 해마에게는 쓰면 더 많이 얻을 것이다.'라는 말 이 더 잘 어울린다. 새롭고 더 많은 신경 세포가 다른 신경 세포와 연결 된다는 뜻이다. 뇌의 부위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영역은 더욱 복합적 으로 발전하고, 성장한다. 이는 내비게이션 기기가 아직 없던 때의 런 던의 택시 운전사의 예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 실제로 최근에 많은 제약 회사가 학습능력과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물질을 찾고 있다. 현재 시험 중인 몇 가지 물질은 신경 전달 물질인 글 루탐산염의 효과를 돕고, 시냅스를 강화해서 저장 과정을 효율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런 물질이 뇌에 실제로 효능이 있을지 아직까지는 매우 불확실하므로 권장하기 조심스럽다. 약을 처방받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약은 실제로 잠깐 동안 기억력을 높이고 알츠하이머 증상을 줄인다. 다만 아픈 사람에서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알츠하이머병을 완전 히 치료하는 약은 아직 없다. 병든 뇌가 기억력을 회복했다고 건강한 뇌의 수행 능력을 위해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잊거나 늙는 것은 병이 아니다.
- 다수의 제약 회사가 소위 신경 향상제라고 말하는 건강한 뇌 기능 증진 물질을 개발하는 데 매년 1.5억 유로 정도를 투자한다. 회사들의 매출 기대치는 연간 20억 정도를 웃돈다. 최근에는 이와는 관계없이 두뇌 트레이닝 앱이나 혼자서 두뇌 시뮬레이션이 가능 한 기기가 시장에 등장했다. 은행잎 성분이 든 약품이 거두는 연간 매출액은 억 단위에 이른다. 은행잎에는 뇌의 혈액 순환을 개선하고, 짧 은 시간 동안 활기를 띠고, 집중력을 높이는 성분이 함유돼서 커피나 홍차, 녹차에 들어 있는 카페인과 유사한 효과가 있다. 동물 실험에서 도네페질(치매 질환)이나 메틸페니데이트(ADHD), 모다피닐(기면증)과같은 신경계 질환을 막는 성분 덕에 기억력을 높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비교 연구에서는 어떤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성분이 든 제품은 가격이 높고, 부작용이 있으며, 더 쉽게 학습할 것이라는 기대 효과가 입증된 바 없어서 회의적인 반응도 있다.
- “사람들은 행복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 행복을 찾아다닌다. 이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자신에게 집이 있는지도 확실히 모르면서 집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다.” (볼테르)
-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믿든,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믿든 언제나 옳다.” (헨리 포드)
- “우리의 의심은 배신자다. 의심을 하면 시도하는 것조차 감히 두려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도 얻지 못하게 할 때가 많다.” (셰익스피어)
- 내면의 독백은 실제 대화일까?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 코프는 이런 상태를 “우리는 전체 단어가 아니라 단어의 그림자 형태 로 생각할 뿐이다.”라고 묘사했다. 나보코프는 우리가 자신과 대화를 할 때 대부분은 매우 간략하게 압축된 언어 형태를 사용할 뿐, 전체 문장이나 단어 형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내면의 대화 를 하는 사람의 뇌의 활동을 영상 절차를 통해 보면 마치 실제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좌측 대뇌 반구의 동일한 언어 영역이 활발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보코프가 추측했던 것처럼 단축된 언 어의 형태를 사용할 때와 완전한 문장으로 내면의 독백을 할 때도 볼 수 있다. 놀라운 것은 평소에는 다른 사람과 사회적 상황에 함께 있을 때에 한해서 활동을 하는 우측 대뇌 반구의 측두엽과 두정엽 사이에 존재하는 뇌의 영역이 활발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에 재능이 있는 좌측 대뇌 반구와 사회적으로 참여를 하는 우측 대뇌 반구 사이 에서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내면의 대화를 뇌는 실제로 일어난 '진짜 대화라고 여긴다. 간단히 말해, 내가 상상 속의 너와 대화를 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런 내면의 대화를 하면서 사회적 상황을 그린다. 뇌 연구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는 우리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상상의 두 번째 인물과 함께 제대로 된, 절제된(또는 화가 나는) 대화를 나눈다.
내면의 대화가 진화적 측면에서 주는 장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째서 자신과의 대화를 나눌까? 내면의 대화는 창의성을 장려하는 것 과 같이 매우 유용할 때가 많다. 내면의 대화의 능력을 계발하면 우리 는 곧바로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이 없더라도 논쟁을 하면서 아이디 어를 계속해서 발전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관점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새로운 시각에 서 이에 대한 답을 구하고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 두 가지 다 른 입장이 되고, 머릿속의 다른 사람의 시점을 통해 좀 더 쉽게 새롭 고, 창의적인 답을 찾을 수 있다. 게다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또는 자 신을 비추어볼 거울로 내면의 대화라는 수준 높은 예술을 사용할 수 있다.
- 내면의 목소리는 진화 과정에서 검증되고, 훌륭하다고 평가된 수준 높은 기술이다. 다음번에 내면의 대화 공간에 발을 들이면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은 휴대전화의 스크린을 누르면서 방해받지 말고 자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내면의 목소리는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훈련시키고, 경고를 하고, 다른 사람의 관점이나 의견을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든다. 내면의 목소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해줄 말이 많다. 잔소리한다고 투덜대는 대신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보자.
- “우유부단함이 습관화된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없다.” (윌리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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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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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 본능의 미래

인문 2021. 2. 19. 20:34

- 일단 동물 성체에서 줄기세포를 떼어낸다. 자라고 분열해서 지방과 근육이 될 능력을 갖춘 이 세포 를 시작 세포starter cell' 라고 부른다. (칼에 베었을 때 상처를 재생시키는 게 바로 이 세포다.) 처음에는 시작 세포가 아주 조금만 있어도 된다. 참깨 씨앗만큼만 채취해도 상관없다. 원한다면 마취 상태로 살아 있는 동 물에게서 떼어낼 수 있다. 시작 세포를 접시에 놓고 영양분과 성장인 자가 든 용액에 담근 뒤 생물 반응기에 넣고 분열하기를 기다린다. 세 포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고, 마침내 수조 개의 세포가 된다. 그다음에 겔 형태의 틀에 정렬해 근섬유 모양을 이 루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겹겹이 쌓는다. 햄버거 하나를 만들 정 도의 양으로 자라는 데는 약 10주가 걸린다. 하지만 세포 성장이 기하 급수적이기 때문에 햄버거 10만 개 분량을 만드는 데는 12주밖에 걸리지 않는다. (포스트에 따르면, 소 한 마리로 만드는 햄버거는 2,000개이며, 적어도 18개월은 기른 뒤에 도살해야 한다.) 햄버거와 크로켓, 소시지용 고기는 구조랄 게 별로 없어서 비교적 만들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지방 과 연골, 근육을 제대로 된 질감과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 채끝 스테이 크는 상당한 연구가 필요하다. 섹스로봇 시장 때문에 인공지능의 발 전 속도가 빨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직 배양 기술도 고깃덩어리 를 만들 잠재성 덕분에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다. 동물 고기와 달리 깨끗한 고기는 세포 하나하나까지 완전하게 관 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 잠재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동물성 지방이 유발하는 심장병을 줄이기 위해 오메가3 지방산을 늘린 고기, 내장도 없고 도살될 때 두려움에 똥을 지리는(복지시설이 잘된 농장에서도 일어 나는 일이다) 일도 없는 덕분에 대장균이나 살모넬라균의 위험이 없는 고기, 동물 스스로 만드는 게 불가능한 질감과 맛과 형태를 지닌 고기, 강제로 먹이지 않고 만든 푸아그라, 돼지고기 맛이 나는 코셔 (전통 유대교 율법에 따라 선택하고 조리한 음식,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돼지는 코셔에서 제외돼 먹지 않는다 옮긴이) 베이컨 등
- 현재 물고기에만 집중하는 깨끗한 고기 기업은 세 곳뿐이다. 육류 문제보다 어류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다. 고기가 살해라고 한다면, 물고기는 학살이다. 나날이 탐욕스러워지는 상업적 어업을 수십 년 동안 해온 결과 우리 바다에서는 생태적 재앙 이 일어났다. 모든 물고기의 3분의 1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빠른 속 도로 사라졌다. 과도하게 잡아들인 나머지 개체수 회복이 안 되고 먹 이사슬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나머지 60%는 이미 한계에 이를 정도 까지 잡히고 있다. 지금 수준보다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는 없다. 그러면 오직 7%만이 어업의 대상이 되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들은 종종 육지에서 너무 멀어서 상업성이 떨어지거나 정치적인 분쟁이 있는(항해해 들어가면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있는) 해역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바다에서 잡을 수 있는 물고기를 이미 거의 다 잡는 셈이다. 이제 어선들은 더 많은 연료를 태워 더 먼 곳으로 나가서 전보다 더 작은 물고기를 더 적게 잡아온다. 그러고도 상업 어선이 잡는 물고 기의 40%는 그대로 버려진다. 이를 부수 어획물이라 하는데, 의도치 않게 그물에 걸려서 죽은 채로 버려지는, 필요 없는 물고기와 거북, 새, 해양 포유류 등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동물 단백질보다 물고기를 많이 먹으며, 십억 명이 단백질을 물고기에 의존한다. 생존을 위해 어업에 의존하는 가난한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이 생태적 재난의 영향을 우리보다 더 많이 체감하고 있다.  양식이 바다 생태계 파괴에 대한 해결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집중적인 축산업과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좁은 영역에 갇힌 대량의 물고기는 곧 똥으로 가득 찬 거대한 통을 뜻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번 성하는 바닷물이sea lice를 죽이기 위해 살충제와 살균제를 써야 했다. 게다가 상당수의 물고기는 통 안에서 살지 못한다. 블루핀 참치는 아주 많이 돌아다녀야 하는데 통 속에 든 정어리 떼처럼 뭉쳐 있으면 죽고 만다.
- 깨끗한 고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나쁘다. 붉은 고기를 산더미처럼 먹었을 때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는 건 실험실에서 기른 고기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암과 심장병에 걸릴 것이고, 언젠가는 건강에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콜레스테롤 과 지방은 있을 것이며, 섬유질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고기가 깨끗하다'는 말을 마음껏 먹어도 된다는 허락으로 느낄 수 있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러면 식물 유래 고기가 정답일까? 그 피 흘리는 임파서블 버거 와 축축한 비욘드 버거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식물 유 래의 동물 모방 식품은 눈이 아파서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성분 으로 만들어진 고도의 가공식품이다. 내가 먹은 저스트 에그의 성분은 마치 화학 실험 기구 목록을 읽는 것 같다. 각종 분리 성분과 껌기 초제에 오일에 추출물에 착향료, 테트라쇼듐 파이로포스페이트, 트 랜스글루타미나아제, 구연산칼륨 등, 비욘드 버거는 완두콩 단백질 과 코코넛오일로 만들었다고 광고하지만 메틸셀룰로오스, 말토덱스 트린, 식물성 글리세린, 아라비아검, 숙신산 같은 성분도 들었다. 식 물을 동물성 식품 비슷하게 만들려면 건드려야 할 게 아주 많다. 게다. 가 이 모든 성분을 공장으로 운송하려면 먼 거리를 움직여야 하고, 고기인 척하지 않는 채식 요리와 비교해서 무엇이 있고 없고를 떠나 어차피 누구나 뒷마당에서 기른 재료에서 얻을 수 있는 영양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뭐하러 그렇게 바보같이 고생하는 걸까 싶다. 인공고기는 인류에 관한 비관적인 관점에 의존한다. 우리가 식습관을 바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식품이 지구를 대가로 삼지 않도록 확실히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고기에 대한 입맛을 잃는 것뿐이다. 결국, 진짜 문제는 축산업이 아니다. 인간의 식성이다. 
- 깨끗한 고기는 인간의 의미를 바꾸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고기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문화적인 것이라면,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문화를 바꾸는 것도 우리 힘으로 가능하다. 우리 문화는 이미 바뀌었다. 이제는 불을 피우고 죽이는 능력으로 남성성을 정의하지 않는다. 섹 스로봇이 성범죄자에게 진통제 역할을 할지 모른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고기는 우리가 동물을 죽이지 않도록 하는 과도기적 제품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고기 중독을 유지시켜 우리가 얼굴 없는 다국적기업에 의존하게 할 수도 있다. 고기를 포기해 동물을 지배할 힘을 버리는 대신 멀리 있는 기업에게 우리를 지배할 힘을 더 주는 것이다.
- 우리가 계속 고기를 먹는 한 깨끗한 고기는 미래의 여러 가지 가능 성 있는 식품 중 하나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고기를 원하지 않거나 훨씬 적게 원할 힘이 있다. 진짜 힘은 바로 거기, 기술을 익히는 게 아니 라 우리의 욕망에 재갈을 물리는 데 있다. 그렇게 할 때까지 우리는 우리가 먹는 식품이 나오는 곳으로부터 더욱 멀어질 것이며, 책임감도 훨씬 덜 느낄 것이다. 애초에 고기를 둘러싼 이 야단법석을 초래한 사고방식을 영원히 가져갈 것이다.
- 대리모 출산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아무리 대리모가 의욕적 이고, 난임 전문 의사가 뛰어나고, 행정 처리가 빠르다고 해도 대리모 출산은 육체적, 감정적, 법적으로 가장 난잡한 형태의 제3자 생식 행 위다. 그러나 그건 인간이 여태껏 겪어왔던 임신과 출산이라는 문제 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전통적인 대리모 출산은(대리모가 임신한 아이의 유전적인 어머니지만 부모의 권리는 포기하게 되는) 창세기부터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창세기) 16장에  사라와 아브라함이 자손을 갖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이집트인 시녀 하갈과 동침하라며 “내가 혹 그 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라고 말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하갈은 아들인 이스마엘을 잉태했음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의 여주 인을 멸시' 했다. 14년 뒤 스스로 생물학적인 아들, 이사악을 낳은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막으로 내쫓아버렸다. 어떤 형태로든 수천 년 동안 이어져왔지만, 전통적인 대리모 출 산은 불임이라는 금기, 사생아라는 낙인, 이런 방식으로 아기를 만들 기 위해 해야 하는 그 간단한 행위 때문에 대개 드러나지 않았다. 인공수정은 전통적인 대리모 출산의 기분 나쁜 요소를 없앴지만, 나름의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사례는 1884년 필라델피아에서 윌리엄 팬코스트William Pancoast 교수가 불임인 남성과 아내 가 임신하게 도왔던 일이다. 팬코스트는 고무 주사기를 이용해 자신 의 제자 중 가장 잘생긴 남성의 신선한 정액을 클로로폼으로 기절시킨 여성의 자궁경부에 주입했다. 그 여성은 아홉 달 뒤에 아이를 낳았다. 자신이 아이를 갖게 된 과정이나 남편이 아이의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전혀 듣지 못한 채 말이다. 팬코스트가 개척한 기술은 아기를 만든다는 개념을 바꾸어놓았다. 이제는 임신하기 위해 이성과의 성관계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동 성애 커플에게는 매우 좋은 소식이었지만, 남성 동성애 커플은 여전히 아이를 임신하고 낳아줄 여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대리모 출산이 선택지의 하나로 남아 있다. 대리모로 아이를 갖는 가장 저렴한 방법이기도 하다. 게다가 대리모가 부모 예정자 중 누군 가의 친척이라면 아이와 유전적인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장점도 있다.
- 아무리 세계 곳곳의 여러 기꺼워하는 대리모가 다른 사람의 아이 를 대신 낳아 아이를 절실하게 원하는 사람에게 부모가 되는 선물을 안겨줄 수 있다고 주장해도 대리모 출산은 엄연히 여성을 그릇이나 인큐베이터로 사용하는 행위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아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대리모 출산은 대리모 가 스스로 착취당한다고 생각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여성의 임신 능력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2015년 12월 유럽 의회는 여성의 '인간 존엄성을 해친다'며 모든 형태의 대리모 출산을 비난했 고, 그중에서도 생식을 위해 인간의 몸을 착취하고 이용한다'는 이유 로 체외수정 대리모 출산을 콕 집어서 거론했다. 그러나 대리모 출산을 금지한다고 해서 수요가 사라지지는 않는 다.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다. 임신하지 않고도 유전적인 자손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이제 그 문을 간단히 치워버릴 방법은 없다. 사하키안의 고객 목록이 불어난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임신하지 않고 부모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매년 새로 나타난다.
- 부분적인 체외 발생은 향후 몇 년 안에 가능해질 전망이지만, 수정 에서 탄생에 이르는 완전한 체외 발생은 현실적으로 아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수정 이후 몇 주 동안 자궁 밖에서 배아의 생명을 연장 하는 기술이 점점 더 좋아지면서, 점점 더 미성숙한 아기의 생명을 유 지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언젠가 이 두 지점이 만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매년 그 순간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원래 자궁 밖에서는 인간의 배아를 수정 이후 일주일까지만 기를 수 있다는 게 통념이었다. 보통 그 시기에 자궁내막에 배아를 이식했다. 그러나 201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막달레나 제르니카 겟츠 Magdalena Zernicka- Goetz,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이 인간의 배아를 특수 배양액에 담가 길러 인체 밖에서 13일 동안 온전하게 생명을 유지시 키는 데 성공했다. 성장인자를 올바로 섞어주자 접시 바닥에 이식한 배아와 초기 태반 세포가 발달했다.? 과학자들은 체외수정으로 만든 인간 배아의 생명을 14일 동안만 유지할 수 있다. 15일째에 생기는 원시선조(향후 뇌와 척수가 될 부분이 생기기 시작함을 알려주는 세포의 구조)'가 나타나기 전에 연구를 중단해 야 한다는 윤리 규정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연구진도 이 14일 규정 때문에 배아를 죽여야 했다. 실험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아마 한참 더 생존했을 것이다. 인체 밖에서 배아의 발달 과정을 자세히 관 찰할 수 있다면 과학적인 잠재성이 엄청나기 때문에 2016년 이후 이 제한을 21일이나 심지어는 28일로 늘려야 하는지를 놓고 광범위한 논쟁이 벌어졌다. 14일이라는 데드라인은 고작 17개국만이 공식적으 로 준수하는 자발적인 윤리 규정이다. 북한이나 러시아 과학자들이 사람의 배아를 기르고 싶은 만큼 기르는 일을 막을 방법은 없다. 동물 실험으로는 이보다 좀 더 나아갔다. 2003년 코넬 대학교의 생 식의학 & 불임센터 헬렌 훙-칭 리우Helen Hung-Ching Liu 박사가 이끄는 연구진은 생체공학으로 만든 자궁 조직을 올린 장치를 이용해 수 정된 쥐의 배아를 거의 출산에 가까운 시기까지 기르는 데 성공했다. 깨끗한 고기 산업에 연구개발 비용을 계속 쏟아붓는다면, 조직 배양 능력을 자궁 조직을 기르는 데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배아의 발달 방식은 아직 블랙박스 안에 들어 있다. 임신 1분기 (임신 기간을 삼등분한 것, 각 분기는 3개월에 해당한다 - 옮긴이)와 2분기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지금보다 많이 알아야 한다. 하지만 배아를 인체 밖에서 더 오랫동안 기르게 되면서 블랙박스의 뚜껑이 열리고 있다. 생식의학은 야망 있는 의사와 연구자들이 주도하고, 번식하려는 인간 의 강력한 욕구가 뒤를 받치며, 그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고객층이 비용을 댄다. 우리가 더 많이 이 해할수록, 완전한 체외 발생이 실현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일이 일 어나지 않기에는 과학적인, 의학적인, 그리고 역시 상업적인 압력이 너무 크다. 장애물은 기술이 아니라 윤리와 법일 것이다. 체외수정은 한때 SF의 소재였다가 윤리적 난제가 되었고, 이어서 첨단 생식 보조 기술이 됐다. 이제 체외수정은 가정을 만드는 평범한 방식이다. 누구나 알며, 유튜브에서 광고를 할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방법이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도 자궁 밖에서 아기를 만들 권 리를 인정하며, 이 방법으로 생물학적 자녀를 임신하려고 시도하는 부부에게 비용을 지원한다. 한때 부자연스럽게 보였던 일도 쉽게 평 범한 일이 될 수 있다. 비닐팩과 관이 자궁을 대체하기만 하면, 임신과 탄생의 정의는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임신이 여성의 몸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더 이상 여성의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분유가 남성도 똑같이 아기에게 젖을 줄 수 있게 만들었던 것처럼 체외 발생은 임 신과 출산이 더 이상 여성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면 모성의 의미 역시 바뀔 것이다. 영원히..
- 신생아를 돌볼 수 있다는 믿음을 못 주는 엄마가 있다면, 임신을 대체할 방법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 엄마를 믿고 임신하게 할 수 있 을까? 자식을 돌보기에 부적합한 엄마가 애초에 책임감 있는 인큐베 이터가 될 수 있을까? 탄생의 미래가 체외 발생과 자연스러운 임신 사이의 선택을 뜻한다면, 자연스러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완전히 변할 것이다. 이미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곳에서 직원들이 가장 생산적인 시기에 일에 집중하도록 난자 냉동 보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들이 임신과 출 산 기간 내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인공자궁에서 아기를 기르게 해주는 서비스도 지원하는 미래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몸 안에 있는 진 짜 자궁을 이용한다는 건 궁극적으로 하위 계급, 빈곤, 혼란스러운 삶, 계획하지 않은 임신, 혹은 위험의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다산하는 엄마를 뜻하는 표식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임신과 출산에 아무 런 의학적 도움도 받지 않으려 하는 자가 분만 여성'에 대해 생각하 는 것과 똑같다. 자연스러운' 출산 자체가 무책임하고 무모한 선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영국인에게는 죽을 권리가 없다. 자기 살해'는 13세기 중반에 영국 관습법에서 범죄가 되었고, 자살은 1961년에야 비범죄화되었다. 다른 사람이 목숨을 끊도록 돕는 일은 여전히 범죄이며, 감옥에서 최대 14년을 보낼 수 있다. 영국 국민의 84%가 죽을 권리를 원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2015년 의회는 6개월 이하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의사 두 명의 감독하에 도움을 받아 생을 마치게 해주는 법안을 압도적 반대로 거부했다. 그러나 자발적인 안락사(요청에 따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숨을 끊 어주는 것)는 조력에 의한 죽음(요청에 따라 남은 생이 몇 달밖에 되지 않 는 사람이 목숨을 끊게 돕는 것)이든 조력 자살(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든 세계적으로 죽을 권리가 점차 법으로 보장되는 추세다. 스위스는 1942년에 조력 자살을 허용했고, 350명 정도의 영국인이 취리히의 디그니타스 병원에 가서 죽었다. 안락사는 네덜란드에서 2001년부터 합법이었고, 벨기에에서는 2002년부터, 룩셈부르크에서 는 2008년부터 합법이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 니라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까지 대상을 넓혔다. 즉 알코올 중독자나 심각한 우울증을 겪는 사람도 합법적으로 도움을 받아 죽을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약 4%가 안락사다.) 북 아메리카에서는 조력에 의한 죽음이 1997년 오리건주에서, 2008년 워싱턴주에서, 2016년 캘리포니아주와 캐나다에서 합법화됐다. 사람들이 더 오래 살지만 그게 반드시 더 나은 삶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시기, 만성적이고 고통스럽고 몸을 피폐하게 만드는 질환, 치매, 자립 능력과 존엄의 결여를 겪으며 살 가능성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도 큰 노년을 맞이하는 시기에는 부유한 국가에서 죽을 권리를 요구 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도미노 효과로 언젠가는 죽을 권리가 당연해 질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을 권리는 의사와 정신의학자의 승인에 달려 있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들이 권위를 거부하고 전문가에게서 등을 돌리는(기후 변화부터 백신, 브렉시트까지) 시기에 의료계 종사자가 전보다 더 큰 힘을 얻게 된다. 필요한 걸 온라인에서 다 찾 을 수 있는데 굳이 이름에 호칭 몇 글자 더 붙은 사람의 의견에 따를 필요가 있을까?
- 기대수명이 짧고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에는 죽음이 삶의 일부였다. 죽음을 자주 접했다. 1945년에는 대부분의 죽음이 집에서 일 어났지만 1980년에는 17%에 불과했다. 오늘날 우리는 죽음이 다가 오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죽음을 경험할 일이 거의 없는 삶을 산다. 과거보다 죽음이 훨씬 무섭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고통 없고, 품위 있고, 통제된 죽음을 약속할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거대한 시장이 열려 있다. 실제로 제공할 수만 있다면.
- 남성은 기술 산업을 지배했다. 남성이 만든 발명품은 남성의 자아 와 욕망을 반영했다. 반면 섹스로봇이나 인공자궁뿐 아니라 내가 직접 본 모든 기술에 영향을 받는 건 여성이다. 케보키언의 기계를 이용해 죽은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전반적으로 자살은 남성에게 주로 나타나는 현상임에도 도움을 받아 죽는 게 합법인 곳 어디에서도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그 길을 선택했다. 여성은 배우자보다 더 오래 사는 경향이 있고 돌봄을 받기보다 돌보는 데 더 익숙하다. 짐 이 된다는 두려움을 여성이 훨씬 강하게 느낄 가능성이 있다. 또 마크 포스트가 말했듯이 '고기는 언제나 힘과 연관이 있었다. 고기는 '남 자답게 먹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는다. 고기는 남성적이며, 많은 해를 끼치는 왕성한 과잉 섭취로 이어진다. 그 해결책이 실험실에서 기른 고기라면 우리가 한때 자급자족했던 욕구를,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특화된 기술에 의존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도 고기를 향한 본연의 욕구와는 상관 없이 기술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런 혁신은 식품과 섹스에 대한 남성의 기호에 관해, 탄생과 죽음을 통제하려는 남성의 욕망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 모두 무질서와 무력함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환경을, 우리 식품을, 우리 몸과 상대방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섹스로 봇은 인간관계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자율성이 없는, 배우자의 대체 물이다. 깨끗한 고기는 똥과 질병, 우리를 멸종으로 이끄는 오염이 없 는, 동물의 대체물이다. 인공자궁은 고장 나기 쉬운 몸과 엄마답지 못 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없는, 임신부의 대체물이다. 죽음의 기계는 예 측할 수 없고 존엄하지 못한 죽음의 대체물이다. 이들은 우리를 우리 본성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서로로부터 떨 어뜨려 놓는 대용물이다. 우리가 통제한다는 환상을 갖기 위해 식품과 섹스, 탄생, 죽음을 기계에 청부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공감력, 우리의 불완전함, 우리의 능동성, 우리 존재의 우연성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기술은 우리를 비인간화한다. 아무리 지구를 구하자! 조그만 아기를 구하 자! 외로운 사람들에게 반려자를 제공하자! 아픈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자!' 라는 고귀한 의도를 가지고 개발했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발명품이 어떤 사람의 손에 들어갈지, 그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 그게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전혀 모른다. 이 책에서 다룬 혁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애초에 기술 때문 에 생겨났다. 기업형 농업은 동물 고기가 지속가능하지 않게 만들었고, 의료 행위는 여성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임신이 더욱 위험한 것처 럼 보이게 했으며, 의학의 발전은 노화와 질병, 죽음이 끔찍해 보이게 했다. 우리가 기술적인 해결책에 의존할 때마다 우리가 언제나 자연 스럽게 할 수 있었던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차원의 복잡성에 의지하는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잃 는다.
- “지난 세대가 꿈도 꾸지 못했던 계획이 우리의 직계 자손을 집어삼킬 것이다. 무시무시하고 파괴적인 힘이 그들의 손안에 들어갈 것이다. 안락함, 활기, 쾌적함, 즐거움이 그들에게 밀어닥치겠지만,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통찰력이 없다면, 그들의 가슴은 아프고, 삶은 황폐할 것이다.” (처칠, 에세이 50년 후)
- “윤리적인 개혁, 혁명, 폭동이 아니라 기술로 고쳐보겠다고 생각하 면... 기술이 윤리를 대신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학대하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버리는 거죠.” (비건 사회학자 매튜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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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부모라면 놓쳐서는 안 될 유대인 교육법'의 임지은 작가가 쓴 책이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학부모용 책으로 생각될 수 있겠지만, 책 전체를 읽어보면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내용이 실려 있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예를 들어 영업분야라면 3년간 열심히 일 배워서, 20년간 써먹고 은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어림도 없는 말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온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고, 늘 자신을 새롭게 리뉴얼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불과 5년전만 해도 우리의 업무환경 속에 빅데이터나 AI, 혹은 4차산업혁명, 스마트팩토리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것보다 그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과거의 학습방식을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다. 존 듀이의 말처럼 어제 가르친 그대로 오늘도 그대로 가르치는 건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는 짓이다.

책의 부제는 '디지털 금수저를 물려줘라'이다. 얼핏 생각하면 컴퓨터 코딩이나 IT 관련 교육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다. 물론 코딩교육도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기능의 습득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힘,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연습, 건강한 자존감,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서는 회복탄력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구나 같이 일하고 싶어하는 인성을 갖추는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부모가 밥을 떠먹여 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시대다. 그리고, 진짜 위기는 강한 인공지능의 등장이 아니라 배움을 멈추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부모도 스스로 배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책에서 소개한 '부모력' 배양에 힘써야 겠다.
첫째, 아이가 진짜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둘째, 아이의 개성과 강점을 최대치로 이끌어 주고 있는가? 
셋째, 주입식 교육 대신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고 있는가? 배움 의 즐거움을 일깨워 주고 있는가?
넷째, 아이에게 비교와 경쟁 아닌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가? 다섯째, 아이에게 실패를 두려워 않고 도전하며, 끝까지 해내는 힘을 길러 주고 있는가?


* 본 리뷰는 출판사 지원을 통해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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