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 향후 수년간 첨단 칩 제조의 핵심 생산자 지위를 유지하리라는 전망은 거의 모든 반도체 전문가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한국 반도 체 기업은 미국 어딘가에 투자를 늘려 나가겠지만 한국에는 더 많은 투 자를 할 것입니다. 사실 한국 기업이 중국 투자를 줄일 예정이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자국 내에서 생산 역량을 더 확충하지 않을 수 없 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전쟁, 칩 워의 영향은 반도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연장선상에는 전자 제품 생산 업체와 그에 따르는 공급망이 있 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PC와 스마트폰 생산 업체들은 주로 제품의 신 뢰도와 가격에 따라 공급망을 결정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와 안보까지 염두에 두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랩톱컴퓨터와 서버를 만 드는 HP는 중국을 대체할 생산 기지로 멕시코를 물색 중입니다. 애플은 아이폰, 에어팟, 맥북 제조의 비중을 베트남과 인도로 옮기는 중입니다. 이런 변화는 느리지만 분명한 것이며, 한국 기업은 전자 제품 공급망 변 동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칩 워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전자 산업을 넘어 세계의 하이 테크 분야를 둘로 나누는 중입니다.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계속 이 어 나가는 것은 매출 유지에 있어 필수적인데, 그러자면 한국 기업은 중 국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술 수준과 격차를 유지해야만 합 니다. 기술을 선도하기 위한 쉼 없는 노력이 지금껏 삼성과 SK하이닉스 를 이끌어 왔고, 그들을 반도체 산업의 선두에 서게 한 핵심 동력이었습 니다.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한국 기업은 기술 우위를 지켜 나가기 위해 더 노력하는 길뿐입니다.
- 미국, 중국,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아찔할 정도로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다. 이 복잡한 관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2020 년까지 미국의 애플과 중국의 화웨이 양쪽을 최대 고객으로 삼고 있던 그 회사를 만들어 낸 어떤 사람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이다. 모리스 창Morris Chang은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당시 홍콩에서 성장했다. 하버드, MIT, 스탠포드에서 수학한 그는 댈러 스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일하며 미국 반도체 산업의 초기부 터 힘을 보탰다. 모리스 창은 미군의 전자 장치 개발을 위한 극비 의 기밀 정보 취급 허가"를 마친 인물로, 대만을 세계 반도체 제 조의 핵심지로 만들어 냈다. 베이징과 워싱턴의 몇몇 국제 전략가 는 두 나라의 기술 영역을 완전히 떼어 내는 미래를 꿈꾼다. 하지 만 칩 디자이너, 화학 물질 공급, 제조 설비 생산자 등으로 이루어 진 극히 촘촘하고 효율적인 국제 분업 체계는 그렇게 손쉽게 떼어 낼 수 없는 것이며, 모리스 창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다.
물론 그건 뭔가 폭발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중국이 대만을 "재통일"하기 위해 침략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자 베이징 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중국이 상륙작전을 개시한다면 세 계 경제는 반도체발 충격에 크게 휘청댈 것이고, 이는 중국이 벌 일 수 있는 일 중 이보다 더 극적인 일은 떠올리기 어렵다. TSMC 의 최신 반도체 제작 설비를 향한 단 한 발의 미사일 공격 성공만 으로도 스마트폰, 데이터센터, 자동차, 통신망, 다른 기술 영역의 일정 모두에 생산 지연이 생기게 되며 그로 인한 피해는 수천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치적 갈등 상황에 글로벌 경제 전체 가 인질로 잡혀 있는 이 상황은 역사가 낳은 오류처럼 보일 지경 이다. 하지만 대만, 한국, 그 외 동아시아가 최신 반도체 생산 거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부 관료와 기업 경영자들이 내린 일련의 의도적 결정이 이토록 길게 늘어진 공급망을 만들었으며 오늘날 우리는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 저임금 공장 노동자를 찾던 칩 생산자들은 아시아의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에 매력을 느꼈다. 동아시아의 정부와 기업은 더 발전된 기술을 배우고, 궁극적으로 는 국산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외 생산 기지 역할을 자임했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효율을 끝없이 요구하며, 그로 인해 기업은 생 산비 절감 및 합병의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기술 발전은 무어의 법칙에 따라 꾸준히 이루어졌으며, 그에 따라 점점 더 고도의 복합 소재, 복잡한 장비, 까다로운 공정이 요구되었다. 이런 것은 오직 글로벌 마켓에서만 공급과 투자가 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소비자들은 더 많은 연산력을 가진 제품과 서비스를 걸신들린 듯이 소비해 댔다.
-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 일각에서는 일본의 하이테 크 산업을 모두 해체해 버리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끔찍한 전쟁 을 시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항복한 지 몇 년 후, 워싱턴의 국방 관료들은 "약한 일본보다 강한 일본이 더 낮은 리스크'라는 공식 정책을 채택했다. 일본이 핵물리학을 연구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시도가 짧게 있었으나, 그 후 미국 정 부는 일본이 기술과 과학 강대국으로 재탄생하도록 지지해 주었 다." 관건은 일본이 경제를 재건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시스템의 일원으로 포섭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본을 트랜지스터 세 일즈맨으로 만드는 것은 미국의 냉전 전략의 핵심이었다.
- 노동력의 대부분이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던 동부 해안의 전자회사들과 달리,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자리 잡은 새로운 칩 생 산 스타트업들은 대부분 조립 라인을 여성들로 채웠다." 실리콘 밸리의 경제가 과일 통조림 공장에 의존하고 있던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항공 산업이 활발했던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지금 까지도 산타클라라 밸리의 생산 라인에서는 여성들이 일하고 있 었다. 1965년 의회가 이민 조건을 완화하면서 외국에서 태어난 수 많은 여성이 실리콘밸리의 노동력 풀에 합류했다.
칩 회사가 여성을 고용한 이유는 더 낮은 임금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여자는 남자보다 노동 조건 개선 요구가 심하지 않았다. 생산 관리자들은 남자에 비해 손이 작은 여자가 반도 체 조립 및 완성된 반도체를 테스트하기에 유리하다고 믿고 있기 도 했다. 1960년대, 플라스틱 기판에 실리콘 칩을 부착하는 과정 은 이러했다. 칩이 올라가야 하는 위치를 노동자가 현미경으로 확 인한다. 조립 노동자가 두 부품을 고정시키면 기계에서 열과 압 력, 초음파 진동이 가해져 실리콘이 플라스틱 기판과 결합하게 된 다. 칩에 전력을 공급하는 얇은 골드와이어 역시 손으로 붙여야 했다. 마지막으로 칩을 테스트하려면 일종의 미터기에 꽂아야 했 는데 그 역시 손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 해외 제조 공장을 아시아에 연 것은 반도체 기업 중 페어차일드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모토로라, 그 외 다 른 기업도 재빨리 그 대열에 합류했다.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거 의 모든 미국의 칩 제조사들이 해외 조립 설비를 운영했다. 스포 크는 홍콩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간당 임금 25센트는 미국의 10분의 1이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와 비교하면 가장 높은 수준 이었다. 1960년대 말, 대만의 노동자는 시간당 19센트, 말레이시 아는 15센트, 싱가포르는 11센트, 대한민국은 고작 10센트를 받고 있었다.
스포크의 다음 행선지는 싱가포르였다. 중국계가 주류를 이 루는 도시국가는 리콴유라는 상대적으로 계몽된 독재자가 다 스리고 있었는데, 한 전직 경영진의 회고에 따르면 고맙게도 노동 조합이 "사실상 거의 불법인"4" 곳이었다. 페어차일드는 얼마 지 나지 않아 말레이시아의 도시 페낭에 조립 시설을 열었다. 반도체업계는 세계화라는 말을 아무도 쓰지 않았던, 그런 말이 등장하기 10년 전부터 세계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시아 중심 공급망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포크 같은 관리자들이 세계화의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 었던 건 아니다. 만약 비용이 같았다면 메인주나 캘리포니아주에 공장을 지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에는 농촌에서 탈출하 여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수백만의 농민이 있었고, 그로 인 해 당분간은 저렴한 노동력이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워싱 턴의 대외 정책 전략가들에게 홍콩, 싱가포르, 페낭 같은 도시의 중국계 노동자들은 마오쩌둥의 공산주의가 전복될 날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징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포크에게 그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존재로 보였다. 그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우리는 실리콘밸리에서 노동조합 문제를 겪었다. 동양에는 노조 문제가 전혀 없었다. "
- 반도체 공급망이 경제 성장과 정치 안정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나라는 대만뿐이 아니었다. 1973년,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만난 자리에서 싱가 포르의 "실업을 일소하기 위해" 수출에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 다. 싱가포르 정부의 협조 아래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내셔널세 미컨덕터 National Semiconductors는 도시국가 싱가포르에 조립 설비를 건 설했다. 다른 칩 제조사도 그 뒤를 따랐다. 1970년대 말, 미국의 반 도체 기업은 해외에서 수만 명을 고용했는데 그 대부분이 한국, 대 만, 동남아시아에 있었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칩 제조사들과 아시 아의 독재자들, 그리고 많은 경우 아시아 반도체 조립 설비를 채우고 있던 화교 노동자들 사이에 새로운 국제 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 반도체는 아시아 지역에 있는 미국 동반국들의 경제와 정치를 재구성했다. 정치적 극단주의의 온상이었던 도시는 근면한 조 립 라인 노동자들이 완전히 바꿔 놓았다. 실업 상태였거나 보조금 에 의존하는 농부였던 이들이 행복하게도 보다 나은 월급을 받으 며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초, 전자산업은 싱가포 르의 국민총생산GNP 중 7퍼센트, 제조업 일자리의 4분의 1을 담당 했다. 전자 제품 생산을 놓고 보면 60퍼센트가 반도체 소자였고, 나머지도 반도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제품이었다.
- 홍콩에서 전자 제조업은 섬유업을 제외하면 그 어떤 산업 영 역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페낭, 쿠알라룸푸르, 믈라카에서 반도체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말레이시아 노동 자 중 15퍼센트가 반도체로 인해 새로운 제조업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인구가 이동하면 정치적 불안정을 일으키게 마련이지만, 상대적으로 임금이 후한 전자 조립 일자리" 덕분에 말레이시아는 실업률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대만까지, 싱가포르에서 필리핀까지, 반도체 생산 설비를 지도 위에 놓고 보면 마치 아시아 전역에 배치된 미군 기지의 위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미국이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해당 지역의 군사 기지를 철수한 후에도, 태평 양 전역에 흩어진 반도체 공급망은 지속되었다. 1970년대 말이 되자 오히려 공산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시아의 미 국 동맹국은 미국과 그 전보다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 인텔은 창업 후 2년 만에 첫 제품을 출시했다. 다이내믹 랜덤 액세스 메모리dynamic random access memory 혹은 D램이라 불리는 칩이 그것이었다. 1970년대 이전 컴퓨터는 일반적으로 실리콘 칩이 아 니라 전선으로 이루어진 격자에 연결된 작은 금속 링의 행렬matrix 인 자기 코어magnetic core라는 장치를 사용하여 데이터를 "기억"했 다. 링 하나가 자성을 띠면 컴퓨터는 그것을 1로 인식한다. 자성을 띠지 않은 링은 0이다. 얼키고설킨 전선이 링에 자성을 부여하거나 빼앗으며 0과 1을 부여하고, 어떤 링의 자성을 "읽음read"으로 써 1과 0의 신호를 되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1과 0의 기억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음에도 전선과 링의 크기를 줄이 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기 코어 메모리는 부품을 손으로 꿰 어서 만드는 방식이었기에 수작업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작게 만 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컴퓨터 메모리의 수요가 폭증하고 있었지 만 마그네틱 코어로는 그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다.
1960년대, IBM의 엔지니어 로버트 데나드Robert Dennard는 집적 회로가 작은 금속 링보다 더 효율적으로 “기억remember "하게끔 하 는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귀를 덮을 정도로 길고 검은 그의 머리카락은 바깥으로 심하게 뻗쳐서 흔히 떠올리는 괴짜 천재의 모습이었다. 데나드는 작은 트랜지스터를 콘덴서와 짝짓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 결합 소자에 전하가 충전되면 1이고 아니면 0인 것이다. 콘덴서의 전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기 때문에 데나 드는 트랜지스터를 이용해 콘덴서를 주기적으로 충전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이렇게 주기적인 충전을 하는 '다이나믹dynamic' 한 랜덤 액세스 메모리인 D램DRAM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D램은 오늘날까지도 컴퓨터 메모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전류의 도움으로 0과 1을 저장한다는 점에서 D램 칩의 작동 방식 은 구형 마그네틱 코어 메모리와 흡사하다. 하지만 D램 회로는 전 선과 고리를 엮은 게 아니라 실리콘에 새겨 넣은 것이다. 손으로 꿸 필요가 없으니 고장이 날 가능성이 낮고 훨씬 작게 만들 수도 있다. 노이스와 무어는 데나드의 통찰에 새로 만든 회사 인텔의 운명을 걸었다. 반도체 칩은 그 어떤 마그네틱 코어보다 치밀하게 만들 수 있다. 실리콘밸리가 트랜지스터의 크기를 얼마나 줄여 나 갈 수 있을지 파악하려면 무어의 법칙에 따라 그려진 그래프를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D램이 컴퓨터 메모리 산업을 정복할 참이었다.
인텔은 D램 칩 시장을 지배할 계획이었다. 메모리 칩은 기기 에 맞춰 특화될 필요가 없으므로 같은 설계를 수많은 종류의 기기 에 활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메모리 칩을 큰 단위로 생산하는 일 이 가능해진다. 반면에 "기억"이 아닌 "계산computing"을 하도록 되 어 있는 다른 유형의 칩은 모든 기기마다 각기 다른 연산 과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 장비에 맞춰 특별히 설계되어야 한다. 예컨 대 계산기는 미사일의 유도 시스템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것 이므로,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다른 종류의 논리 회로를 필요로 했다. 이렇게 개별화된 수요는 비용 증가로 이어졌다. 그래서 인 텔은 메모리 칩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대량 생산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 밥 노이스는 엔지니어 과제를 풀어야 하는 퍼즐 게임이 보이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메모리 칩에 집중하겠다는 약속을 해서 수백만 달러의 투자를 받아 새 회사를 차렸지만, 바로 새로운 생산 라인을 추가해 버렸다. 1969년, 비지 컴Busicom이라는 일본의 계산기 회사가 노이스에게 최신형 계산기 를 위한 복잡한 칩 설계를 의뢰했다. 최신 컴퓨터 기술의 집약체 가 저렴한 가격에 생산되며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수많은 이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1970년대의 휴대용 계산기는 오늘날의 아이폰과 다를 바 없었다. 수많은 일본 기업이 계산기를 만들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칩 설계와 제작을 실리콘밸리에 의탁 하고 있었다.
신경 회로 연구를 끝으로 학계를 떠나 인텔에 온 테드 호프Ted Hot는 부드러운 말투를 지닌 엔지니어였다. 노이스는 테드 호프를 불러 비지컴의 의뢰를 처리하도록 했다. 인텔 직원은 대부분 물리 학이나 화학 전공자였고 그들은 칩 안에서 전자가 어떻게 돌아다 니는가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 아키텍처 computer architectures 전공자였던 호프는 칩이 아닌 컴퓨터의 관점에서 반도 체를 바라보았다." 비지컴은 호프에게 각각 2만4000개의 트랜지 스터가 탑재된 칩 12개가 필요하며, 그 칩들 모두가 맞춤형 설계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호프가 보기에 이것은 인텔 같은 작은 스타트업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지컴의 계산기를 고민하던 호프는 맞춤형 논리 회로와 맞 춤형 소프트웨어 사이에서 컴퓨터가 맞닥뜨리는 양자택일 문제를 깨달았다. 칩 제작은 개별 기기에 최적화된 회로를 만들어서 제공 하는 주문형 사업이므로 고객은 소프트웨어에 대해 별다른 고민 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텔은 메모리 칩 분야에서 큰 진보를 이 루고 있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성과는 더욱 커질 전망이었 다. 즉 앞으로 컴퓨터는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다룰 수 있을 정도 의 메모리를 갖게 될 터였다. 표준화된 로직 칩logic chip을 개발하고 강력한 메모리 칩을 탑재하여 각기 다른 과제에 맞게 프로그래밍한 소프트웨어를 올린다면 다양한 연산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본 호프는 자신의 판단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아무튼 호프가 아 는 한 인텔보다 강력한 메모리 칩을 만드는 회사는 세상 그 어디 에도 없었다"
인텔은 이 다목적 로직 칩에 4004라는 이름을 붙이고, "칩에 탑재된 프로그래밍 가능한 컴퓨터",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 서microprocessor의 홍보에 나섰다. 새로운 칩은 일반적인 연산 기능 을 제공하며 수많은 다양한 유형의 장비에 사용 가능했다. 사실 인텔의 4004 칩이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주장은 옳지 않 을 수도 있다. F-14 전투기에 탑재되는 칩을 제공한 어떤 군수 납 품 업체가 인텔의 컴퓨터와 매우 흡사한 칩을 이미 생산한 바 있 었다. 하지만 그 칩은 1990년대까지 비밀에 붙여져 있었으므로 1971년 발매된 인텔의 4004가 컴퓨터 혁명을 촉발했다는 말은 거짓도 과장도 아니다.
- 마셜 같은 전략가들은 소련의 양적 우위에 맞서는 유일한 답은 질적으로 더 우수한 무기를 생산하는 것뿐임을 모두 알고 있었 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한가? 마셜은 일찌감치 1972년부터 미국이 컴퓨터에서 "실질적이고 영속적인 우위를 가져갈 필요가 있다 고 적어 두었다. "좋은 전략은 우위를 개발하고 전쟁의 개념을 전 환하여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셜은 거의 완벽 한 정확도로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병기를 그려 보면서 미사일 에 "신속한 정보 수집", "정교한 명령과 제어" 및 "종말 유도"를 구 상했다. 만약 미래의 전쟁이 정확도 싸움이 된다면 소련은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셜은 여기에 승부를 걸었다.
페리는 연산력의 소형화 덕분에 마셜의 미래 전쟁 구상이 머잖아 실현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반 도체 혁신에 친숙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만든 회사의 기기에 인 텔 칩을 사용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에 사용된 수많은 무기 체계 는 진공관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최신형 휴대용 계산기에 사용되 는 칩은 구형 스페로 3 미사일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연산력을 지니 고 있었다. 페리가 볼 때 미국은 이런 칩을 미사일에 탑재함으로 써 소련을 훌쩍 앞질러서 승부를 내야 했다.
페리의 추론에 따르면 유도 미사일은 단지 소련의 양적 우위를 "상쇄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역할도 하게 될 것이었다. 유도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은 엄청난 비용의 미사일 요격 시스 템을 갖춰야 한다. 페리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펜타곤이 배치할 예정인 3000기의 순항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모스크바는 5년에 서 10년, 300억에서 500억 달러가 필요할 터였다.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모든 미사일이 소련을 향해 발사된다면 소련은 날아오 는 미사일 중 고작 절반가량만 요격할 수 있다.
앤드류 마셜이 찾고 있던 기술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방장관 해럴드 브라운Harold Brown과 손을 잡은 페 리와 마셜은 펜타곤이 신기술에 큰 투자를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유도 미사일에 진공관이 아닌 집적회로를 이용하며, 인공위성을 별자리처럼 깔아서 지구 위 어느 지점이건 겨냥할 수 있게끔 하고, 가장 중요한 차세대 반도체 개발의 시동을 거는 등, 그런 작업을 통해 미국이 기술 첨단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페리가 주도하는 가운데 펜타곤은 미국의 마이크로 전자 기 술 우위에 방점을 둔 새로운 무기 체계 개발에 돈을 퍼붓기 시작 했다. 순항 미사일부터 포탄까지 모든 발사체를 유도 무기로 전환 하는 페이브웨이 정밀 무기 프로그램이 발족했다. 소형화된 컴퓨 터가 연산력을 제공하면서 센서와 통신 기술 역시 한 단계 도약하 기 시작했다. 예컨대 적의 잠수함을 탐색하고자 할 때 정확한 센 서를 개발하고 그렇게 수집된 정보를 전에 없이 복잡한 알고리즘 으로 해석하는 문제가 큰 관건이었다. 군의 음향 전문가들은 충분 한 연산력을 확보한다면 먼 거리에서도 고래와 잠수함을 구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었다."
유도 무기는 점점 복잡해져 갔다. 토마호크Tomahawk 미사일 같 은 새로운 체계는 페이브웨이보다 훨씬 복잡한 유도 체계로 작 동하는 것이었다. 레이더를 이용해 지상을 스캔하고 미사일의 컴 퓨터에 미리 입력되어 있는 지형도와 대조하는 방식을 사용했는 데, 이렇게 하면 경로를 이탈한 미사일도 알아서 궤도를 수정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유도 체계 이론은 수십 년 전에 등장했지만, 순항 미사일에 탑재될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강력한 칩이 등장한 후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 1979년 앤더슨이 미국산 칩의 품질 문제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불과 몇 달 전, 소니는 워크맨을 출시했다. 음악 산업에 혁명을 일으킨 휴대용 음악 재생기 워크맨은 소니의 최신 집적회 로 다섯 개를 탑재하고 있었다. 당시 전 세계의 십 대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만이 아니었다. 실리 콘밸리가 개척했지만 일본에서 개발해 낸 집적회로가 워크맨을 작동시키고 있었다. 소니는 전 세계적으로 3억8500만 대의 워크 맨을 팔았다.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소비자용 기기 중 하나였다. 이것이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일본이 만든 혁신이었다.
미국은 전후 세계에서 일본이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으로 변신할 수 있도록 지원해 왔다. 미군정은 트랜지스터 발명에 대한 지 식을 일본 물리학자들에게 전달해 주었고,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 들은 소니 같은 기업이 미국 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일본을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고 미국의 계획은 성공했다. 그런데 이제 미국 일각에서는 그 목 표가 지나치게 잘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 했다. 일본 산업에 힘을 실어 주는 전략이 미국의 경제와 기술 우위를 해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 국방부 관료들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지 키기 위해 반도체가 지니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이 지 니고 있던 전반적인 우위를 상쇄하기 위해 반도체 기술을 사용 하는 것은 냉전을 치르는 미국의 1970년대 중반 이후 전략이었다. 이는 밥 노이스의 성가대 친구 빌 페리Bill Perry가 펜타곤의 연구 및 엔지니어링 분야를 이끌던 때부터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방위 산업체는 새로운 비행기, 탱크, 로켓을 만들 때 가능한 한 많 은 칩을 탑재하여 더 나은 유도, 통신, 명령과 제어가 가능케 하라 는 지시를 받았다. 군사력 증강이라는 측면에서 이 전략은 빌 페리 를 제외한 그 누구의 생각도 뛰어넘을 정도로 잘 먹혀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략에는 단 하나의 약점이 있었다. 페리는 노이스를 비롯한 그의 실리콘밸리 이웃들이 반도체 산업의 꼭대기에 남아 있으리라고 전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1986년이 되자 일본은 반 도체 생산량에서 미국을 추월해 버렸다. 1980년대 말 일본은 세계 리소그래피 장비 공급량의 70퍼센트를 차지했는데 이는 실로 놀 라운 일이었다. 미국의 군사 연구소에서 제이 라스롭이 발명해 낸 리소그래피 장비 산업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1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한 국방부 관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리소그래피는 한마디로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가장 민감한 안보 요소를 생산하기 위해 해외의 제조업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 을 때, 미국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불가능하게 하는 헌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1951년 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후 미국 은 조심스럽게 일본의 재무장을 독려했다. 소련과 맞서기 위한 군 사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이에 동의하기는 했 지만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약 1퍼센트로 국방비를 제한했다. 이 런 조심스러운 행보는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 확장과 전쟁을 본능 적으로 기억하는 주변국을 의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무기 에 큰돈을 쓰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다른 곳에 투자할 여력이 넘 쳐났다. 미국은 경제 규모를 놓고 볼 때 일본보다 다섯 배에서 열 배 정도 많은 국방비를 쓰고 있었다. 일본은 경제 성장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에 미국은 일본을 지켜줘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모든 이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극적인 결과가 나타 났다. 한때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이라고 조롱당하던 나라 일본이 이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미국 군 사력의 사활이 걸린 미국의 산업 분야에도 도전하고 있었다. 미국 은 공산권을 상대로 경제 봉쇄를 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대외교 역을 늘리는 것을 크게 개의치 않고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하지 만 이런 식의 분업은 미국 쪽에서 더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일 본 경제는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도쿄 의 첨단 제조업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마저 위협할 지경이었다. 앞 서가는 일본의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TV나 카메라 산업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반도체에서도 벌어지는 것을 원치는 않 으실 겁니다." 스포크는 국방부를 상대로 말했다. "반도체가 없다 면 군사력의 미래는 오리무중입니다."
- 기술력으로 세계 1등이 된 일본이 과연 군사력에서 2등의 자리에 만족할 수 있을까? D램 칩에서 거둔 성공을 모델로 삼아 미 국이 차지한 거의 모든 유의미한 산업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 들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군사적 지배력을 넘보아서는 안 될 이유란 또 뭐란 말인가? 일본이 그렇게 나온다면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1987년, CIA는 분석가들을 모아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예측해 보았다. 분석가들은 일본의 D램 시장 지배를 "팍스 니포니카"가 시작되는 증거로 보았다. 일본이 주도하는 동 아시아 경제 정치 블록이 출현하리라는 것이었다. 미국이 아시아 에서 행사하는 지배적 영향력은 기술 우위, 군사력, 무역과 투자 등을 통해 일본, 홍콩, 한국,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묶어 놓은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홍콩 구룡만에 페어차일드가 최초의 반도체 조립 공장을 세운 후 집적회로는 아시아 내 미국의 위치와 불가분 의 관계였다. 미국의 칩 제조사들은 대만, 한국, 싱가포르 등에 설 비를 건설해 왔다. 이 지역을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막아 내는 힘은 군사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 역시 그러한 역할 을 하고 있었다. 농촌에서 이탈한 농민을 전자 산업이 흡수함으로 써 가난에 시달리는 농촌 지역이 흔히 그렇듯 게릴라 반군의 기반 이 되는 것을 막고, 아시아의 전직 농민은 전자 제품을 조립하는 좋은 일자리를 얻고 미국의 소비자도 혜택을 보는 구조였다.
미국의 공급망 전략은 공산주의자를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 헌을 했지만, 1980년대에 이르자 그 전략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보 는 건 일본으로 드러났다. 일본의 무역량과 해외 투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아시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도쿄가 차지하는 위 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만약 일본이 반도체 산업을 이토 록 자연스럽게 지배할 수 있다면, 그들이 미국의 지정학적 우위를 빼앗고자 할 때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 실리콘밸리의 부활은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스타트업과 방 만한 조직을 쥐어짜는 구조조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미국은 일본 이 차지하고 있던 D램 거대 기업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통해 일본을 뛰어넘었다. 국제 경쟁에 직면한 실리콘밸리는 무역 을 중단하는 대신에 대만과 한국으로 더 많은 오프쇼어링 offshoring 을 하며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한편 미국의 반도체 산업이 부활함에 따라 마이크로 전자 기술에 승부를 걸었 던 펜타곤의 도박은 다른 그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새로운 무기 체계라는 보상을 돌려주기 시작했다. 미국의 군사력은 1990 년대와 2000년대 동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었는데, 이는 시대의 핵심 기술인 컴퓨터 칩의 지배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 인텔의 새로운 제조 기법은 "정확히 베끼자"로 통했다. 어떤 제조 공정 묶음이 가장 잘 작동하는 것으로 판명되면 인텔은 그것 을 모든 설비에서 복제했다. 그 전까지는 엔지니어들에게 인텔의 공정에 대해 미세 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엔지니 어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하지 말고 모방하라 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건 엄청난 문화적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일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실리콘밸리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공장식 생산 라인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배럿도 인정했다. "저는 독재자처럼 여겨졌죠." 하지만 "정확히 베껴라" 전략은 먹혀들었다. 인텔의 수율은 확연히 향상되었다. 제조 설비는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되었고 비용이 절감되었다. 인텔의 공장은 이제 연구소보다는 미세하게 조정된 기계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로브와 인텔에는 운도 따랐다. 1980년대 초 일본 생산자들 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구조적 상황이 일부 변화하기 시작한 것 이다. 1985년에서 1988년 사이, 미국 달러 대비 엔화의 가치가 두 배 올랐고 미국의 수출가가 저렴해졌다. 1980년대를 지나며 미국 의 금리도 가파르게 내려왔고 인텔의 자본 비용이 낮아졌다. 게다가 텍사스에 본사를 둔 컴팩컴퓨터 Compaq Computer가 IBM의 PC 시 장에 뛰어들었다. 컴팩은 운영 체제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직접 만들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 PC 부품을 플라스틱 상자에 조립하 는 상대적으로 쉬운 방향을 잡았다. 컴팩은 인텔 칩과 마이크로소 프트 운영 체제를 사용한 자체 PC를 출시했는데 가격은 IBM보다 훨씬 저렴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자 컴팩과 다른 회사들이 만드 는 IBM PC "복제품"이 IBM의 오리지널보다 더 많이 팔리고 있었 다. 25 컴퓨터가 모든 사무실과 많은 가정에 설치되면서 가격이 급 격히 내려갔다. 애플 컴퓨터를 제외하고 나면 거의 대부분의 PC 가 인텔 칩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탑재했고, 이 둘은 서로 궁 합이 잘 맞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인텔이 PC용 칩 판매를 사실상 독점한 상태로 개인용 컴퓨터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그로브의 인텔 재건은 실리콘밸리 자본주의의 교과서적 사례 가 되었다. 그는 인텔의 비즈니스 모델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깨 닫고, 인텔의 창업 아이템이었던 D램을 포기함으로써 인텔을 스 스로 "파괴"했다. 대신에 인텔은 PC용 칩 시장의 목줄을 움켜잡 았다. 매년 혹은 2년 간격으로 더 작은 트랜지스터를 적용하고 더 많은 연산력을 갖춘 새로운 세대의 칩을 발표했다. 편집광만이 살 아남는다는 것이 앤디 그로브의 신념이었다. 인텔을 구해 낸 것은 혁신도 전문성도 아닌 그의 편집증이었다.
-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이병철은 도시바나 후지쓰 같은 기업이 D램 시장을 차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반도체 산업에 뛰 어들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국은 이미 미국과 일본에서 만 든 칩의 조립과 패키징을 아웃소싱하는 중요 장소였다. 게다가 미 국 정부는 1966년 한국과학기술원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의 창립에 도움을 주었고, 미국의 최고 수준 대학에서 공부하거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교수에게 훈련받는 한국인 역시 늘어났다. 하 지만 이렇게 숙련된 인력이 있다 해도 기본적인 조립에서 첨단 반 도체 제조로 뛰어넘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삼성은 이전에 단순한 반도체 작업에 손을 댔다가 수익을 내지 못 하고 더 나은 기술을 확보하지도 못하며 고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이병철은 환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실리콘밸리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처절한 D램 경쟁이 그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한국 정부는 반도체를 우선 사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삼성의 미래를 숙고하던 이병철은 1982년 봄 캘 리포니아 여행을 하면서 휼렛패커드의 시설을 방문해 그 회사의 기술을 보며 감탄했다. HP가 팰로앨토의 차고에서 시작해 이토록 거대한 테크 공룡이 되었다면, 채소와 건어물점에서 출발한 삼성 역시 같은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 터였다. "이게 다 반도체 덕분이 죠." 한 HP 직원이 이병철에게 말했다. 그는 IBM의 컴퓨터 공장도 방문했는데, 사진을 찍어도 된다는 사실에 또 한 차례 놀랐다. "당신들 공장에는 비밀이 많이 있을 텐데요." 공장 안내를 해 주는 IBM 직원에게 이병철이 묻자, 그 직원은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비밀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따라 할 수 없으니 까요. 30 그러나 이병철은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정확히 모방하겠 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백만 달러 이상의 자본 확충이 필요한 데 다 아직 제대로 될지 확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병철에게도 그것은 엄청난 도박이었다. 그는 몇 달을 고심했다. 실패하면 그 가 이룬 비즈니스 제국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데 한국 정부가 흔쾌히 재정 지원을 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정 부는 반도체 산업에 4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의 은행은 정부 방침을 따라 더 많은 돈을 빌려줄 것이었다. 그러니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하이테크 기업은 차고에서 태어난 스타트업이 아니었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은행에서 저리로 대 출받을 수 있었던 거대 재벌의 산물이었다. 1983년 2월, 신경이 곤 두선 불면의 밤을 보내던 이병철은 전화기를 들었다. 삼성전자 사 업부를 총괄하던 수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포했다. “삼성은 반도 체를 만들 걸세." 삼성은 적어도 1억 달러를 쓸 준비가 되어 있다 는 선언과 함께 그는 회사의 미래를 건 반도체 도박을 시작했다.
이병철은 노련한 경영자였고, 한국 정부는 그의 든든한 지원 자 역할을 해 주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반도 체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삼성의 도박은 성공으로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메모리 칩 분야에서 일본의 국제적 경쟁 에 맞서는 최선의 방법은 한국에서 훨씬 더 저렴한 공급원을 찾아 내는 동시에 미국의 연구개발 에너지를 이미 상품화된 범용 D램 보다 더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발상이 설득력 을 얻고 있었다. 밥 노이스가 앤디 그로브에게 말했듯이, "한국인들과 함께하면 그들이 일본 생산자들보다 더 저가로 판매할 테니, 일본이 "비용에 상관하지 않고 덤핑을 하는" 전략을 쓰더라도 세계 D램 시장을 독점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일본의 칩 제조사들은 "치명적인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고 노이스는 예측했다.
그리하여 인텔은 떠오르는 한국의 D램 생산자들을 환영했다. 인텔은 1980년대에 삼성과 함께 합작 투자에 합의한 여러 실리콘 밸리 기업 중 하나다. 삼성이 제조한 칩을 인텔의 브랜드로 판매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도움을 받아 실리콘밸리를 향한 일본 의 위협에 대응한 것이다. 더욱이 한국의 생산 비용과 임금은 일 본에 비해 확연히 낮았다. 삼성 같은 한국 기업들의 제조 공정은 일본처럼 완벽에 가깝지도 극도로 효율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럼 에도 일본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 오는 일에는 문제가 없었다.
미국과 일본 간의 무역 갈등 역시 한국 기업들에게 호재로 작 용했다. 워싱턴은 일본이 미국 시장에 D램 칩을 저가로 풀어놓 는 행위, 이른바 "덤핑"을 중단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결국 1986년 도쿄는 D램의 대미 수출량을 제한하며 낮은 가격에 팔지 않겠다 고 약속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더 많은 D램을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미국이 일본과의 협상으로 한국에 이익을 주자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칩을 생산하는 것이 일본을 제외한 다른 누구여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것은 D램 시장만이 아니었다. 기술도 함께 제공했다. 실리콘밸리의 D램 생산은 거의 파탄 나 있었기에, 최고 수준의 기술을 한국에 전수하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이병철은 현금이 부족한 메모리 칩 스타트업인 마이크론에 64K D램용 설계 라이센스 계약을 제안했고, 그 과정에서 창업자인 워 드 파킨슨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아이다호의 칩 제조사는 그 계약
-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PC 시대가 오는 것을 놓쳤다는 데 있다. 일본의 반도체 공룡 중 인텔이 메모 리 칩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전환하고 PC 생태계의 지배자가 된 경로를 따라간 회사는 없었다. NEC 단 한 곳만 유의미한 시도 를 했으나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가져갔을 뿐이다. 앤디 그로브와 인텔에게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서 돈을 버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였다. 반면에 일본의 D램 기업들은 이미 높은 시장 점유율을 누리고 있었고 금융 비용마저 낮았던 탓에,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무시했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늦었다. 결과적으로 PC 혁명의 혜택은 대부분 미국 기업에게 돌아갔다. 일본의 주식 시장이 폭락했을 때 그들의 반도체 지 배력은 이미 잠식되고 있었다. 1993년부터 미국은 반도체를 다시 수출하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한국 기업이 일본을 제치고 D램 의 최대 생산자 자리를 차지했다. 1980년대 말 90퍼센트에 달하던 일본의 시장 점유율은 1998년이 되자 20퍼센트까지" 내려앉았다. 세계 무대에서 당당한 일본이 되자는 야심은 그들이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었는데, 이제 그 토대마 저 흔들리고 있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 이시하라 와 모리타는 일본이 반도체 지배력을 갖춤으로써 미국과 소련 모 두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전 쟁이 터지고 보니, 걸프전이라는 예상 밖의 전장에서 미군이 보 여준 활약은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릴 정도였다. 반면에 디지 털 시대 첫 번째 전쟁에서 일본은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철수 시키기 위해 파견된 28개국 다국적군에 합류하기를 거절했다. 그 대신에 일본은 이라크 주변국과 다국적군을 지원하기 위해 돈을 보내는 방식으로 참여했다. 미국의 페이브웨이 레이저 유도탄이이라크의 탱크들을 날려 버리는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 외교는 초라해 보였다.
- 1990년대는 "세계화"라는 단어가 최초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 시대였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국제 분업과 공급망은 페어차일 드 초창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만은 1960년대부터 의도적으 로 반도체 공급망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국내에 일자리를 제공하 고 더 나은 기술을 획득하며 미국과의 안보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서였다. 1990년대부터 대만의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TSMC의 눈부신 성장 덕분이었다. 모리스 창이 만든 TSMC는 시 작부터 대만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1985년 대만은 전자 분야에 특화된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모 리스 창에게 그 기관을 이끌도록 했다. 당시 대만은 해외에서 만 든 칩을 가져와서 테스트하고 플라스틱이나 세라믹 패키지에 부 착하는 등 반도체 조립에서 아시아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 대만 정부는 미국의 RCA로부터 반도체 제조 라이센스를 받아 1980년 UMC라는 반도체 제조 업체를 설립한 바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업계에 뛰어들었지만 UMC는 첨단 기술에서 경쟁할 역량이 되지 못했다'
대만에는 반도체 산업과 관련해 일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대 만이 가져가는 이윤은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에 서 가장 큰 몫은 칩을 설계하거나 최신 칩을 만들어 내는 기업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대만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다른 곳 에서 설계하고 생산한 칩을 조립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했다. 리궈 딩 장관을 비롯해 대만 관료들이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모리스 창이 대만을 처음 방문했던 1968년, 대만은 홍콩,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 경쟁 중이었다. 이제 삼성과 한국의 다른 거대 재벌이 최신 메모리 칩 생산을 위해 돈을 쏟아부으려던 참이었다. 비록 삼성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싱가포르와 말 레이시아는 한국이 반도체 조립에서 생산으로 나아간 경로를 모 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반도체 공급망의 가장 밑바닥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만은 끝없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 공산당의 지배가 아니었다면 중국은 아마 반도체 산업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적회로가 발명되었 을 당시 중국은 방대한 규모의 저임금 노동력과 잘 교육받은 이공 계 출신 인재 등 일본, 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반도체 제 조 업체들 눈에 들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다. 하지만 1949년 공산 당이 집권한 후 외국과 관계를 맺는 모든 일이 의혹의 대상이 되 었다. 모리스 창 같은 사람이 스탠퍼드에서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 로 돌아갔다면 가난에 시달릴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었고, 어쩌면 구금되거나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공산혁명 이전에 중국에 서 대학을 나온 최고의 인재들은 대만이나 캘리포니아에서 일자 리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렇게 숙적의 전자기술 역량을 키워 주고 만 것이다.
한편 중국의 공산정권은 소련과 같은 종류의 실수를 저질렀 다. 단, 이번에는 훨씬 더 극단적인 형태로 그 실수를 반복했다. 1950년대 초 베이징은 반도체 소자를 과학 연구 우선순위로 확정 지었다. 곧 그들은 베이징대학교를 비롯해 공산혁명 이전에 버클 리, MIT, 하버드, 퍼듀 등의 대학교에서 연구했던 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중국은 1960년에 최초의 반도체 연구 기관을 설립 했다. 중국이 단순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첫 생산하기 시작한 것 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1965년 중국 엔지니어들은 스스로 중국산 집적회로를 만들었다." 밥 노이스와 잭 킬비가 그 일을 해낸 지 5 년 만의 일이었다.
- 마오쩌둥의 극단주의로 인해 해외 투자뿐 아니라 진지한 과학 연구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중국이 최초의 집적회로를 생산한 그해 마오쩌둥은 온 나라를 문화혁명의 난장판으로 만들 어 버렸다. 전문 지식은 특권의 원천이며 사회주의적 평등을 침 해한다는 것이 마오쩌둥의 주장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 나 라 교육 체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수많은 과학자와 전문가가 지 정된 마을에 내려가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냥 살해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마오 주석이 내린 "1968년 7월 21일 교지"는 이렇게 주장 했다. “교육 기간을 줄이고, 교육을 혁명하고, 프롤레타리아 정치 를 실행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다. . 학생들은 실제적인 경험이 있는 노동자와 농민 중에서 선발해야 하며, 몇 년의 학습을 마치 고 생산 현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
- 창의 전략은 단순명료했다. 바로 TSMC가 한 대로 하는 것이었다. 대만에서 TSMC는 눈에 띄는 족족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고용했다. 특히 미국이나 다른 첨단 반도체 기업에서 일한 사람이 우선이었다. TSMC는 동원 가능한 최선의 장비를 갖추었다. 반 도체 산업의 최고가 되기 위해 TSMC는 직원 교육에 혼신을 다했 다. 그러면서 대만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세제 혜택 및 보조금을 누렸다.
SMIC에게 TSMC의 행보는 종교 경전과도 같았다. SMIC는 해외 반도체 기업, 특히 대만 기업의 인재들을 경쟁적으로 데리고 갔다. 설립 후 첫 10년간 SMIC 직원 중 3분의 1이 해외에서 채 용된 사람들이었다. 반도체 산업 분석가 더그 풀러 Doug Fuller에 따 르면 2001년 SMIC는 중국에서 650명의 엔지니어를 고용한 반면 에 주로 대만이나 미국 같은 해외에서는 393명을 채용했다. 그렇 게 10년을 보내고 나니 SMIC의 직원 중 3분의 1이 해외에서 영 입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심지어 채용과 관련한 구호까지 있었다. "옛 직원 한 명이 새 직원 둘을 데려온다." 경험이 풍부한 해외 출 신 직원을 데려와 현지 엔지니어를 교육시키겠다는 방침을 요약 한 것이다. SMIC가 중국에서 고용한 엔지니어들은 빠르게 기술을 습득해 나갔고, 곧 해외 칩 제조사들로부터 채용 제안을 받기 시 작할 정도로 성장했다. 반도체 기술을 현지화하겠다는 SMIC의 목 표는 해외에서 교육받은 인력을 통해서만 달성 가능한 것이었다.
- 중국의 여타 반도체 스타트업이 그랬듯이 SMIC 역시 수많은 정부 보조의 혜택을 누렸다. 5년간 법인세를 면제받았고 중국 내 에서 판매되는 반도체는 매출세 또한 면세였다." 제품의 질보다 정치인 자녀 채용에 초점을 맞추었던 경쟁자들과 달리 창은 제조 역량을 끌어올리고 기술을 첨단 수준으로 갖추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2000년대 말이 되자 SMIC와 세계 최고 기업의 격차는 고작 몇 년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SMIC는 세계 최고 수준 의 파운드리 기업이 되는 궤도에 오른 듯했다. 어쩌면 TSMC를 위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리처드 창은 그의 전 직장이었던 텍사 스인스트루먼트 같은 반도체 업계의 리더로부터 주문을 받아 칩을 만들 수 있었다. SMIC는 2004년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 이제 TSMC가 경쟁해야 할 파운드리 기업이 동아시아에 여러 곳 세워졌다. SMIC뿐 아니라 싱가포르의 차터드반도체, 대만 의 UMC와 뱅가드반도체vanguard Semiconductor, 2005년에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든 한국의 삼성전자까지, 다른 이들이 설계한 반도체 를 만들어 주는 사업을 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들 기업 대부분은 정부 보조를 받고 있었는데, 그 덕에 반도체 가격은 낮 아질 수 있었고, 결국 그 기업에 설계도를 보내는 미국의 팹리스 업체들 대부분이 혜택을 보았다. 게다가 팹리스 업체들은 스마트 폰이라는 혁명적 제품의 출현을 앞두고 있었다. 이는 고성능 칩의 숨 막히는 싸움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했다. 해외 제조는 제조 단 가를 낮추고 더 치열한 경쟁을 불러왔다. 소비자들은 이전에는 상 상도 할 수 없었던 제품을 낮은 가격에 구입하는 혜택을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화의 바람직한 모습 그 자체 아니었을까?
- 몇몇 기업이 PC 시장의 표준이 되어 버린 x86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1990년, 애플은 두 회사와의 협력 하에 영국 케임브리지에 기반을 둔 암Arm이라는 합작 벤처를 설립했다. 인텔이 고려했지만 결국 거절했던 RISC 규칙에 따라 보다 단순한 명령어 집합 구조를 지닌 프로세서 칩을 설계하는 것이 그 회사의 목적이었다. 스타트업인 암은 기존 업무나 고객이 없었으므로 x86을 포기하는 비용이 따로 들지도 않았다. 대신에 암은 컴퓨터 생태계에서 x86 이 차지하는 자리를 대체하고자 했다. 암의 첫 CEO였던 로빈 색 스비 Robin Saxby는 고작 열두 명으로 꾸려진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 지만 그 야심만은 엄청났다. 그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세 계 표준이 될 겁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색스비는 모토로라의 유럽 반도체 분야를 담당하는 자리까지 올라갔었고, 그 후에는 유럽의 한 반도체 스타트업에서 일했지만 제조 공정의 실적이 저조한 탓에 스타트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러니 그는 칩을 자체 제조함으로써 얻게 되는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암의 전략에 대해 초창기에 벌였던 논쟁에서 주 장했다. "실리콘은 강철과 같습니다. 그건 상품입니다. . 내 눈 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직접 반도체를 만들지 않습니다." 대 신 암은 아키텍처 사용권 라이센스를 판매하여 그 아키텍처에 따 라 다른 회사들이 칩을 설계하도록 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는 파 편화된 반도체 산업의 속성을 반영한 새로운 전략이었다. 인텔은 x86이라는 자체 아키텍처를 가지고 다양한 칩을 스스로 설계했다. 색스비는 암 아키텍처 사용권을 팹리스 설계 회사에 팔아 암의 아 키텍터를 이용해 그 나름의 칩을 설계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리고 제조는 TSMC 같은 파운드리에 외주를 주면 되는 것이었다.
색스비의 꿈인 인텔의 경쟁사를 만드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인텔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 내내 암은 PC 시장에서 인텔의 점유율을 빼앗아 오지 못했다. 인텔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운영 체제와 맺고 있는 협력 관계가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의 단순하고 에 너지 효율적인 아키텍처는 머잖아 대중적 사랑을 받게 되었다. 터리 사용을 고려해야 하는 작고 휴대할 수 있는 기기가 대거 등 장했기 때문이다. 가령 닌텐도는 휴대용 비디오게임기에 암 아키 텍처를 도입했는데, 인텔은 이런 작은 시장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인텔은 컴퓨터 프로세서 시장을 과점하면서 엄청난 이윤 을 누리고 있던 터라 틈새시장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텔이 스스로의 패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 무 늦었다. 그저 또 다른 휴대용 컴퓨팅 기기일 뿐이고 틈새시장 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모바일 폰 시장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 모바일 기기가 컴퓨터 시장을 뒤흔들 것이라는 발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칼텍의 선지자였던 카버 미드가 이미 1970 년대 초에 예견한 일이었다. 인텔 역시 PC가 컴퓨터의 최종 진화 형이 아닐 것임은 알고 있었다. 인텔은 1990년대와 2000년대 내내 일련의 신제품을 개발하고 투자했다. 그 중에는 무려 20년을 앞서 나온 줌Zoom 같은 화상 회의 시스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신제품 중 자리 잡은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기술적 이유 에서가 아니라, 인텔의 핵심 사업인 PC용 칩 제조와 비교할 때 너 무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새로운 기기와 분야는 인텔 내에서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 모바일 기기는 1990년대 초 앤디 그로브가 아직 CEO이던 시절부터 인텔 내에서 주기적으로 논의 대상이 되곤 했다. 1990년대 초 인텔의 산타클라라 본사에서 열린 회의, 윌 스워프Will Swope라는 한 임원이 자신의 팜 파일럿Palm Pilot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런 기기들이 성장해서 PC를 대체할 겁니다.” 하지만 PC용 프로세서를 만들어서 벌 수 있는 돈이 엄청났던 당시, 모바일 기기에 돈을 퍼붓는다는 것은 과격한 도박으로 보였다." 그래서 인텔은 모바일 비즈니스에 뛰어들지 않기로 했고, 오판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 많은 이들은 그로브를 지나간 시대의 전형으로 취급했다. 그가 인텔을 만든 것은 한 세대도 더 된, 인터넷이 존재하지도 않았 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로브가 만든 회사는 모바일 폰의 흐름을 놓쳤고 컴퓨터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제품을 생산하는 대신 x86 독점의 과실을 따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2010년대 초 인텔은 경 쟁자보다 한발 앞서 더 작은 트랜지스터가 탑재된 칩을 발매하는 반도체 산업의 선두 주자였다. 고든 무어 시대 이래 꾸준히 같은 호흡을 유지하며 달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인텔과 TSMC나 삼성 같은 경쟁자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 게다가 다른 사업 모델을 채택한 테크 기업들로 인해 인텔의 비즈니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2000년대 초 만 해도 인텔은 세계에서 가장 가치 높은 기업 중 하나였지만, 인 텔 칩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모바일 생태계를 꾸린 애플에 의해 따라잡히고 말았다. 인텔은 인터넷이 경제의 축으로 떠오르는 것 도 놓쳤다. 2006년 창립된 페이스북 Facebook의 시가 총액은 2010년 현재 인텔의 절반에 달했다. 지금보다 몇 배 더 가치 있는 회사가 될지 모를 일이었다. 실리콘밸리 최대의 반도체 제조사는 인터넷 의 데이터가 그들 서버 칩에서 처리되고 그들 프로세서에 의존하 는 PC에서 액세스된다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칩을 만들면서 나오는 이익은 앱에서 광고를 판매하면서 버는 이익보다 낮았다. 그로브는 "파괴적 혁신의 추종자였지만 2010년대 인텔의 비즈니 스는 혁신 없이 파괴되어 있었다. 애플이 제품을 해외에서 만든다 는 그로브의 불만은 누구의 귀에도 가 닿지 않았다.
- 심지어 반도체 업계 내에서조차 그로브의 멸망과 파국의 예언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였다. TSMC 같은 새로 운 파운드리 업체들이 대부분 외국 기업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 다. 하지만 해외 파운드리가 만드는 칩의 상당수는 미국의 팹리스 업체가 설계한 것이다. 외국의 반도체 생산 시설은 미국에서 만 든 제조 장비로 가득 차 있고, 미국에 자리 잡은 반도체 설계자들 에게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한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로 생산 기 지를 이전하는 것은 앤디 그로브의 첫 직장이었던 페어차일드 반 도체가 홍콩에 최초의 해외 생산 거점을 만든 이후 반도체 업계의 비즈니스 모델 핵심 중 하나였다.
그로브는 그런 주장에 설득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상품' 제 조업을 포기하는 것은 내일의 새로운 산업으로부터 문을 걸어 잠 그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로브의 주장이었다. 그는 전기 배터 리 산업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로브는 기고문에서 미국은 "30년 전 소비자 가전제품 생산을 중단했을 때 배터리 산업의 선두 자리 를 빼앗겼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PC용 배터리도 잃었고, 이제 는 전기자동차용 배터리마저 잃을 상황이었다. 2010년의 그로브 가 예언했다. "나는 미국 전기 배터리 산업이 과연 외국을 따라잡 을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 "빨리 달리기"는 단 하나 있는 단점을 제외하고 나면 우아한 전략이었다. 몇몇 핵심 지표를 놓고 볼 때 미국은 빨리 달리는 나 라가 아니었고, 입지를 잃어 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정부 안에서 는 그의 분석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생산 시설 해 외 이전에 대한 앤디 그로브의 우울한 예측은 점점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2007년, 국방부는 전직 펜타곤 장교였던 리처드 반 아타Richard Van Atta와 몇몇 동료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반도체 산업 의 “세계화”가 군의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 었다. 반 아타는 수십 년간 국방용 마이크로 전자 기술을 다룬 사 람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의 성장과 몰락을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했다. 그의 보고서는 경계하며 과잉 대응하는 쪽이 아니었다. 다 국적 공급망 덕분에 반도체 산업이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는 점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매끄럽게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펜타곤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민해야 하는 조직이었다. 반 아타의 보고서에 따르면 국방부가 첨단 칩을 얻기 위해서는 머지않아 외국에 의존할 것이라고 보았다. 너무나 많은 고도화된 제조 시설이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오만에 빠져 있던 단극 시대에서 이런 주장에 귀기 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워싱턴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관계를 알아볼 생각조차 없이 미국이 "더 빨리 달린다"고 믿고 있 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볼 때 미국의 우위가 늘 유지 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은 1980년대 내내 일본 을 앞서지 못했고, 1990년대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역전했다. 리소 그래피 분야에서 GCA는 니콘과 ASML을 능가할 수 없었다. 마이크론은 동아시아 경쟁 업체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D램 생산자였 고, 다른 미국 D램 생산자들은 모두 파산해 버렸다. 2000년대 말 까지도 인텔은 트랜지스터 소형화에서 삼성과 TSMC를 능가하는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격차가 줄어들었다. 인텔의 속도는 느려지고 있었지만, 아직 앞서갈 수 있는 건 처음부터 먼저 뛰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미국은 대부분의 반도체 설계에서 선두를 지 키고 있었지만 대만의 미디어텍 MediaTek은 다른 나라에서도 반도체 설계 회사가 등장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반 아타가 볼 때 미국 이 자신을 할 이유는 많지 않았고 안심할 근거는 단 하나도 없었 다. 2007년 그가 남긴 경고는 다음과 같았다. "미국이 차지하고 있 는 선두 자리는 이후 10년간 심각하게 침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지 않았다.
- 2000년대가 되자 반도체 산업을 세 영역으로 나누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로직 Logic"은 스마트폰, 컴 퓨터, 서버를 운영하는 프로세서를 뜻한다. "메모리 Memory"는 컴퓨 터가 작동하고 있을 때 필요한 단기 메모리인 D램과 장기간에 걸 쳐 데이터를 저장하는 플래시 메모리, 혹은 낸드 메모리로 나누어졌다. 세 번째 영역은 다소 난삽한 것으로, 시각이나 음성 신호를 디지털 데이터로 치환해 주는 아날로그 칩, 휴대전화가 무선 네트 워크와 접속하고 통신할 수 있게 해 주는 무선 주파수 칩, 장비의 전기 사용을 관리하는 반도체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세 번째 영역은 본디 무어의 법칙과 동떨어져 있었다. 매 년 지수함수적으로 성능이 개선되는 분야가 아니었다. 이 영역은 트랜지스터 크기를 줄이는 것보다는 설계를 얼마나 독창적으로 잘 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오늘날 이 세 번째 영역에 속하는 칩들 중 4분의 3은 1990년대 후반에 개척한 제조 기술인 180나노미터' 이상의 프로세서에서 생산된다. 결과적으로 이 분야의 경제 논리 는 로직이나 메모리 칩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기술의 첨단을 유지하기 위해 가차 없이 트랜지스터 크기를 줄여야만 하 는 분야가 아닌 것이다. 이 분야의 칩을 만드는 팹은 일반적으로 해마다 트랜지스터 크기를 줄이기 위해 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 따라서 로직이나 메모리 칩을 만들기 위해 평균적으로 첨단 팹에 쏟아붓는 자본 투자의 4분의 1 정도면 충분할 만큼 훨씬 저렴하 다. 오늘날 가장 큰 아날로그 칩 제조사는 미국, 유럽, 일본에 산 재해 있다.' 대만과 한국에 외주를 주는 일부를 제외하고 나면 대 부분은 생산도 그들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오늘날 가 장 큰 아날로그 칩 제조 업체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로, 이 회사는 인텔처럼 PC나 데이터센터 시장을 독점하지 못했고 스마트폰 생 태계 ecosystem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 2006년, 엔비디아는 고속 병렬 계산이 컴퓨터 그래픽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놓은 소프트웨어가 CUDA였다. 표준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해, 그래픽과는 전혀 무관한 방향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GPU를 활용 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엔비디아가 최고 성능의 그래픽 칩을 찍 어 내고 있는 와중에 황은 CUDA라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 막 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2017년 한 회사의 추산에 따르면 그때 투 입된 돈은 최소 100억 달러였는데, 이렇게 만든 프로그램은 그래 픽 전문가뿐 아니라 엔비디아의 칩을 보유한 어떤 프로그래머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황이 CUDA를 무료로 공개한 것이 었다. 하지만 그 소프트웨어는 엔비디아 칩에서만 작동했다. 그래 픽 업계 밖에서도 쓸 수 있는 칩을 만드는 것은 엔비디아에게 엄 청나게 큰 새로운 시장을 열어 주었다. 계산화학computational chemistry 부터 기상 예측에 이르기까지 병렬 처리를 원하는 수요를 발굴해 낸 것이다." 그 무렵 황은 어렴풋하게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병 렬 처리의 가장 큰 수요처가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 다. 바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l이었다.
- 팹리스 모델 덕분에 혜택을 본 미국 반도체 회사들은 엔비디 아와 퀄컴 외에도 많다. 수십억 달러를 써 가며 자체 제조 시설을 갖추는 대신에 새로운 반도체 설계에만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이 다.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유형의 반도체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런 칩은 팹리스 설계 회사가 실제로 만들 수 없는 것들이었다. TSMC와 일부 파운드리의 힘을 빌어야만 했던 것이다. FPGAField- programmable gate arrays는 각기 다른 목적에 따라 최적화해 사용할 수 있는 적응형 칩으로, 이 분야의 선구자 격인 회사는 자일링스Xilinx 와 알테라Altera인데, 두 회사 모두 설립 초기부터 반도체 제작을 외 주로 맡기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단지 새로운 유형의 칩 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었다.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과 함께 고급 그래픽, 병렬 처리를 가능케 함으로써 팹리스 회사들은 전혀 새로 운 유형의 컴퓨터 세계를 만들었다.
- 창은 TSMC가 경쟁자들을 기술적으로 따돌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회사는 스스로 반도체를 설계하는 반면에 TSMC는 중립적 입장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TSMC의 "연합군” 파트너십이라 불렀다. 반도체를 설계하고, 지식재산 사용권 판매로 돈을 벌고, 소재를 생산하고, 장비를 만드 는 십여 개의 회사와 일종의 동맹 관계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회 사 중 상당수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지만 이들 중 웨이퍼에 칩을 새겨 넣는 일을 하는 곳은 없으며, 설령 시도한다 해도 TSMC를 이길 곳은 없었다. 그러니 TSMC는 이들 사이에서 협업하며 반도 체 산업을 이루는 거의 모든 회사가 따를 수밖에 없는 기준을 설 정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TSMC의 공정과 호환되도록 맞추는 것은 거의 모든 반도체 회사의 작업에 필수적 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팹리스 회사들에게 있어서 TSMC는 제 작 공정의 경쟁력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믿음직한 선택지가 되었 다. 도구, 장비, 소재 공급사에게 TSMC는 가장 중요한 고객이 되 었다. 스마트폰 판매가 날개를 달고 솟아오르기 시작하면서 실리콘 칩의 수요 역시 함께 치솟았고, 모리스 창은 그 중심에서 선언 했다. "TSMC는 모든 이의 혁신을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혁신, 우리에게 장비를 공급하는 업체 의 혁신, 우리 고객의 혁신, 지식재산권 제공자의 혁신, 이것이 바 로 연합군의 힘입니다." 이는 막대한 재정적 함의를 담고 있는 것 이기도 했다. 모리스 창은 자신감 있는 태도로 과시했다. "TSMC 와 우리의 10대 고객이 함께 지출하는 연구개발 비용은 삼성과 인 텔을 합친 것보다 큽니다."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함께 하는 구식 모델은 TSMC를 중심으로 형성된 반도체 업계 전반의 공격 앞 에 고전하고 있었다.
TSMC가 반도체 업계의 우주에서 북극성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었다. 대형 고객이 요구 하는 물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이었다. 그건 결코 적은 비용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금융 위기를 겪는 동안 모 리스 창이 직접 임명했던 후계자릭 차이 Rich Tsai는 다른 CEO가 다 들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직원을 해고해서 손실을 줄이는 것 이었다. 창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자 했다. 창은 40나노 공정을 되살리고 그에 필요한 인력과 기술 투자를 늘렸다. 창은 스마트폰 사업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했다. 특히 2007년 처음 출시되어 TSMC의 최대 숙적 삼성으로부터 핵심 칩을 처음 공급받고 있던 애플 아이폰에 칩을 공급하려면 그에 걸맞은 막대한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갖추어야 했고 투자가 필요했다. 창이 볼 때 손실을 줄이 기 위한 차이의 방향은 패배주의자의 것이었다. 훗날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너무, 너무도 투자가 부족했어요. 우리 회사는 그보다 더 해낼 역량이 있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그러지 못했죠. 정체 상태였습니다. "
그리하여 창은 후계자를 해임하고 TSMC의 조종간을 직접 잡았다. 투자자들은 모리스 창의 복귀와 투자 확대가 불안하다 고 느꼈고 당일 TSMC의 주가는 하락했다. 하지만 창이 볼 때 현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험한 일이었다. 금융 위기가 반도체 산업의 우위 경쟁에서 TSMC를 위협하도록 내버려 둘 수 는 없었다. 무려 반세기 동안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며 1950년대 중반부터 명성을 쌓아 왔던 그였다. 그리하여 금융 위기의 가장 깊은 수렁 속에서 그는 전임 CEO가 해고했던 이들을 다시 고용하고 생산 역량 확충을 위해 투자와 연구개발 비용을 두 배로 늘 렸다.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2009년과 2010년 자본 지출을 수백 억 달러 이상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경우의 수보다는 생산 역량을 초과해서 보유하고 있는 편이 낫다"라는 것이 창의 태도 였다. 파운드리 업계에 끼어들고 싶은 경쟁자가 있다면 우선 전력 으로 맞서는 TSMC의 방어선을 뚫어야 할 터였다. TSMC는 막피 어나기 시작한 스마트폰 칩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진심으로 달리 고 있었던 것이다. 2012년, 반도체 산업 정상에 오른 60년을 맞이 하며 모리스 창이 선언했다. "우리는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 생산 라인 노동자와 달리 스마트폰 속의 칩은 대체하기 매우 까다롭다. 트랜지스터 크기가 줄어들면서 칩 제조는 한층 더 어려 워졌다. 첨단 칩을 제작할 수 있는 반도체 회사 수는 한 줌으로 줄 어든 지 오래다. 2010년, 애플이 첫 번째 칩을 발표했을 때 최첨단 파운드리 업체는 그저 한 줌에 지나지 않았다. 대만의 TSMC, 한 국의 삼성, 그리고 어쩌면 시장 점유율을 회복한다는 전제하에 글 로벌파운드리즈 정도가 전부였다. 인텔은 트랜지스터 크기 줄이 기 경쟁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를 달리며 PC와 서버에 들어가는 칩을 스스로 제작하고 있었지만 다른 기업의 폰에 들어가는 프로 세서를 만드는 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SMIC 같은 중국 파운드리 업체는 선두권을 추격하고자 했지만 몇 년은 뒤처진 듯 보였다.
- 이런 이유로 인해 스마트폰의 공급망은 PC 관련 부품의 공급망과는 사뭇 다른 형태가 되었다. 스마트폰과 PC 모두 대체로 미 국이나 유럽, 일본, 한국에서 설계한 고부가가치 부품을 탑재하고 중국에서 조립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PC의 경우 대부분의 프 로세서는 인텔에서 나왔고 미국, 아일랜드, 혹은 이스라엘에 소재 한 인텔의 팹에서 제작되었다. 스마트폰은 달랐다. 스마트폰에는 (애플 스스로 설계하는) 메인 프로세서뿐 아니라 온갖 칩이 가득했 다. 무선 통신망과 연결해 주는 모뎀과 무선 주파수 칩,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연결을 담당하는 칩,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 적어도 두 개는 탑재되는 메모리 칩, (사용자가 핸드폰을 가로로 돌릴 때 그런 동작을 인식하는) 동작 감지 칩, 배터리, 오디오, 무선 충전 관리 칩 등 다양했다. 이 모든 칩이 모여야 스마트폰 하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반도체 제작 역량이 대만과 한국에 쏠리면서 이들 칩 중 다수 의 제작 역량 역시 두 나라에 집중되었다. 스마트폰의 전자두뇌 라 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는 거의 대부분 대만과 한국 에서 제조해 중국으로 보낸 다음 스마트폰의 플라스틱 케이스 속 에 담겨 유리로 된 스크린을 덮는다. 애플 아이폰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는 오직 대만에서만 생산되고 있다. 오늘날 애플이 요구 하는 제작 역량과 기술을 가진 회사는 TSMC뿐이다. 그러니 모든 아이폰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캘리포니아의 애플 설계. 중국에서 조립"은 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아이폰에서 가장 대체 불가능한 부품이 캘리포니아에서 설계되고 중국에서 조립되는 것 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대만뿐이다.
- ASML의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는 양 산된 공작 기계 중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싼 것이다. 너무도 복잡 한 나머지 전문적으로 훈련된 ASML 직원이 없다면 작동하지 않 고, ASML 직원은 기계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 현장에서 장비를 관 리한다. 모든 극자외선 스캐너에는 ASML 로고가 새겨져 있다. 하 지만 ASML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그 기업의 진정한 역량은 광학 전문가, 소프트웨어 설계자, 레이저 회사, 그 밖에 극자외선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을 지닌 수많은 관계자가 얽혀 있 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조율해 내는 것에서 나온다.
- 언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은 각기 달랐지만 TSMC, 인텔, 삼성 모두 극자외선 장비를 도입해야 한다는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글로벌파운드리즈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28나노미터 공정에서도 수율을 끌어올리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생산 지연으로 인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글로벌파운드리즈는 14나 노 공정을 자체 개발하는 대신 삼성의 기술을 도입하기로 했다.0 자체 연구개발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글로벌파운드리즈는 자사의 최신 설비인 팹 8에 구매하고 설치했던 여러 대의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의 작동을 중단했다. 2018년의 일이었다. 글로벌파운드리즈의 극자외선 프로그램은 취 소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첨단 노드의 제작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극자외선 리소그래피를 통한 7나노 공정에는 이미 15억 달러의 개발 비용이 들었고, 앞으로도 본격화하려면 그 정도 비용 이 더 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글로벌파운드리즈는 그 싸움에서 빠 지기로 했다. TSMC, 인텔, 삼성은 극자외선 장비가 작동할 가능 성에 판돈을 걸고 주사위를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재정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중간 규모의 파운드리였던 글로벌파운드리즈는 스스로 7나노 공정을 가능케 할 정도의 여력이 없다고 판 단했다. 더 작은 트랜지스터의 생산을 중단하고, 연구개발 비용을 3분의 1로 줄이며, 그간 발생했던 손실을 흑자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발표가 뒤따랐다. 첨단 프로세서를 만드는 것은 세 계 최대의 칩 제조사가 아니면 낄 수 없을 정도로 큰 비용이 드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글로벌파운드리즈의 실소유주인 페르시 아만 석유 부자들의 주머니도 그 돈을 메울 수 있을 정도로 깊지 는 않았다. 첨단 로직 칩을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회사의 수 는 이제 넷에서 셋으로 줄어들었다.
- 통합 모델에도 일부 장점이 있을 테니 인텔의 판단이 어느 정도 옳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합 모델에는 분명한 단점이 존 재했다. 다양한 여러 회사의 칩을 제작하고 있던 TSMC는 인텔에 비해 매년 거의 세 배 많은 실리콘 웨이퍼를 찍어 내고 있었는데, 그 말은 제조 공정을 갈고닦을 기회가" 그만큼 더 많다는 것을 뜻 했다. 게다가 인텔은 신생 반도체 설계 업체를 위협으로 보고 있 었던 반면에 TSMC는 제조 서비스를 위한 잠재 고객으로 인식했 다. TSMC의 기업 가치는 단 하나의 분야 즉 효율적인 반도체 제 조에서 나왔기에 TSMC 경영진은 낮은 가격으로 더 많은 최신 반 도체를 생산해 내는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인텔 지도부는 반도체 설계와 반도체 제조 양쪽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둘 다 죽을 쑤고 말았다.
인텔의 첫 번째 난관은 인공지능이었다. 2010년대 초, 인텔의 핵심 사업 영역인 PC용 프로세서 시장은 성장이 정체되었다. 오 늘날은 게이머들을 제외하고 나면 새로운 모델의 CPU가 나왔다 고 해서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는 수요가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컴퓨터 안에 어떤 프로세서가 내장되어 있는지도 잘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에 인텔의 다른 주요 시장인 데이터센 터 서버용 프로세서 판매가 2010년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 마존 웹서비스,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구글 클라우드, 그 외 많은 회사가 거대한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클라 우드"가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연산력을 인텔 칩이 제공한 것이 다. 오늘날 우리가 온라인에서 주고받는 데이터의 대부분이 이런 회사들 중 한 곳의 데이터센터에서 처리되고 있으며, 그 데이터센 터는 인텔 칩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2010년대 초 인텔이 데이 터센터 시장을 정복했을 그 무렵, 컴퓨터의 연산력에 대한 수요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것은 인공지능이었 다. 하지만 인텔의 주요 칩은 구조적으로 인공지능을 위한 계산에 잘 대응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었다.
- AI 알고리즘을 범용 CPU에서 작동시키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AI가 필요로 하는 수준의 연산력을 CPU로 제공하려 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비용이 든다. 단일 AI 모델을 학습시키 기 위해 사용하는 칩과 소비하는 전력의 비용은 수백만 달러에 달 할 수 있다." (컴퓨터가 고양이를 알아보도록 훈련하려면 수많은 개와 고 양이 사진을 보여 주면서 둘의 차이를 배우도록 해야 한다. 알고리즘이 더 많은 동물 사진을 요구할수록 사람은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AI는 매번 다른 데이터를 받아서 같은 계산을 반복적으로 수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AI 알고리즘을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그러 한 계산을 경제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칩을 특화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부분의 회사 알고리즘이 실행되는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아마존이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빅 클라우드 컴퓨팅 회사들은 칩과 서버를 구입하는 데 연간 수백억 달러를 소비한다. 또 이런 데이터센터가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 역시 어마어마하 게 소비한다. 칩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기업들에게 "클라우드" 공간을 파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AI 작업에 최적화된 칩은 더 빨리 작동하면서 데이터센터 공간을 더 적게 차지하고, 그러면서도 인텔의 범용 CPU보다 더 적은 전력을 소비해야 한다.
- 엔비디아의 성공은 보장된 미래라고 볼 수 없었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텐센트, 알리바바 등 대형 클라우드 기업 은 엔비디아 칩을 구입하면서 동시에 인공지능부터 머신러닝까지 그들 각자의 수요에 맞춰 스스로 자체 칩을 설계하기 시작했기 때 문이다. 가령 구글은 구글의 텐서플로우 TensorFlow 소프트웨어 라이 브러리에 최적화된 텐서 처리 장치Tensor processing units, TPU라는 자체 칩을 설계했다. TPU는 아이오와에 소재한 구글 데이터센터에서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는 매달 3000달러만 내면 가장 낮은 사양의 TPU를 사용할 수 있지만, 더 강력한 TPU를 쓰고 싶다면 매달 10만 달러까지 사용료가 높아진다. 클라우드는 마치 천상의 무언 가처럼 들리지만 우리의 모든 데이터는 지상의 실리콘 위에 있으 며 그 위에는 현실적이고도 값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는 셈이다.
- 엔비디아가 됐건 클라우드 센터를 운영하는 대형 IT 기업이 됐건, 그들로 인해 인텔의 데이터센터 시장용 프로세서의 준準독 점 판매 시절도 막을 내렸다. 만약 인텔이 새로운 시장을 발굴했 다면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 생각처럼 심각한 문제는 아니 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텔은 2010년대 초 TSMC와 맞대결을 벌이기 위해 파운드리 시장에 숟가락을 넣었다가 큰 코를 다치고 있었다. 인텔은 자사의 제조 공장을 타사에 개방해 반도체 제조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했는데, 이는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함께하 는 통합 모델이 인텔 경영진의 주장처럼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조용히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텔은 앞서가는 기술력 과 막대한 생산 역량 등 주요 파운드리 기업이 되기에 충분한 요소를 다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파운드리 기업이 되는 것은 엄청 난 문화적 변화가 필요한 일이었다. TSMC는 지식재산권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한 반면에 인텔은 폐쇄적이었고 비밀에 집착했 다. TSMC는 서비스 중심 기업이었던 반면에 인텔은 고객이 인텔 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TSMC는 스스로 칩을 설계하 지 않았으므로 고객과 경쟁할 일이 없었다. 그에 비해 인텔은 거 의 모든 기업을 경쟁 상대로 바라보는 반도체 업계의 거인이었다.
- 중국 기업을 놓고 본다면 SMIC는 상대적으로 성공한 반도체 기업이라 할 수 있었다. 중국이 보유한 다른 파운드리 기업인 화훙과 그레이스는 아주 작은 시장 점유율만 갖고 있었 고, 그나마도 국영 기업 및 지방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사업 영역 의 주문을 통해 나오는 것이었다. 한 중국 파운드리 기업의 전직 CEO에 따르면, 모든 중국 지방 정부 수장은 자신이 관할하는 지 역에 칩 생산 설비를 짓기를 원했다. 겉으로는 보조금을 제시하며 자기 관할에 반도체 공장을 짓도록 하지만 은근한 협박도 잊지 않 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파운드리 기업은 전국 곳 곳에 소규모 시설을 깔아두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해 비효율 이 뒤따랐다. 외국인들은 중국 반도체 산업에 엄청난 잠재력을 보 았지만, 재앙과 같은 기업 지배 구조와 업무 프로세스가 어떻게 든 먼저 해결되어야만 한다. 한 유럽 반도체 기업의 임원은 이렇 게 설명했다. "중국 기업에서 '자회사를 합시다'라고 말하면, 저 는 '돈을 잃어봅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26 중국과의 합작 투자는 대체로 정부 보조금에 중독된 채 제대로 된 신기술은 거의 만들어 내지도 못하는 결말을 맞게 마련이었다.
- 반도체 기업에게 중국은 너무도 탐나는 시장이어서 기술 이전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몇몇 기업은 심지어 중국 지사의 통제권을 통째로 넘길 것을 제안받기도 했다. 2018년, 영국의 반도체 설계 회사인 암은 중국 지사 지분의 51퍼 센트를 투자자들에게 매각하고 49퍼센트를 자사가 보유했다. 그 보다 두 해전 암은 일본 기업 소프트뱅크에 인수되었는데, 소프 트뱅크는 중국 기술 스타트업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소프트뱅크로서는 투자 성공을 위해 중국의 규제 조치 가 자사에 유리하게 작동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프트뱅크는 미국 규제 당국의 정밀 조사에 직면했다. 미국은 소 프트뱅크가 중국과 맺고 있는 관계가 베이징의 정치적 압력에 약해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소프트뱅크는 2016년 암을 400억 달러에 인수했지만 암의 전 세계 매출 중 5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 지사의 지분 51퍼센트를 고작 7억7500만 달러에 팔아 버렸다.
암 차이나를 분리해 버린 결정의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소프 트뱅크가 중국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아 암 중국 지사를 매각했다 는 분명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암의 경영진은 매각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니케이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암의 임원 중 한 사람이 말한 바에 따르면, "중국 군대나 중국의 감시 기구를 위해 시스템 온 칩] 반도체를 만들 때, 중국은 그런 과정이 중국내에서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새로운 합작 회사는 그런 걸 만들 수 있죠. 과거에는 우리가 할 수 없던 일입니다.” 그의 설명이 계속됐다. "중국은 보안과 통제 가능성을 원합니다. 궁극 적으로 중국은 자신들의 기술을 통제하고 싶어 하지요. ... 우리가 가져간 기술을 기반으로 그런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도 혜택을 볼 겁니다." 이 설명에 깔린 상업적 논리는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지 만 국가 안보 차원에서 보자면 소름 끼치는 말이다. 소프트뱅크를 규제하는 일본 관료든, 암을 규제하는 영국 관료든, 암의 지식재 산 중 상당 부분을 관할하는 미국의 관료든, 이 사안에 대해 더 파고들어 간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화웨이는 자사 제품이 필요로 하는 250개의 핵심 반도체를 선별하여 가능한 한 많은 칩을 자체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들 칩은 주로 통신 기지국 구축 사업과 관련 있을 뿐 아니라 화웨이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애플리케 이션 프로세서를 비롯해 스마트폰용 반도체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실제로 제작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고급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애 플이나 다른 선도적인 반도체 회사 거의 대부분이 그렇듯, 화웨이 역시 칩 제작은 외주로 넘기기로 결정했다. 그런 칩을 만들 수 있 는 회사는 고작 두어 개뿐이었고, 자연스럽게 대만의 TSMC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 2010년대 말, 화웨이의 하이실리콘Hisilicon 사업부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스마트폰용 반도체를 설계하는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또 TSMC의 두 번째로 큰 고객이기도 했다. 'OS 화웨이의 스마 트폰에는 메모리 칩이나 다양한 신호 처리기 등 여전히 다른 회사 의 반도체가 들어간다. 하지만 스마트폰 프로세서를 생산해 내는 것은 대단한 위업이라 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내는 칩 설계 산업은 미국이 거의 독점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위기에 놓인 것이다. 화웨이가 한국의 삼성이나 일본의 소니가 수십 년 전에 해냈던 것을 성공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 줄 수 없었다. 바로 첨단 기술 생산 방법을 배우고, 세 계 시장에서 승리하고,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미국의 선도적 테크 기업에 도전하는 일을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화웨이는 모 든 환경에 컴퓨터가 사용되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ubiquitous computing 시대를 앞서갈 수 있는 고지를 이미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차세 대통신 기반 설비인 5G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 화웨이의 기지국 장비는 경쟁사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실리콘을 포함하고 있다. 화웨이의 무선 장치를 일본 신문 《니케이아시아》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110 미국산 반도체에 크게 의 존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필드 프로그램 가능 게이트 어레이 field- programmable gate arrays 반도체는 오레곤주에 위치한 래티스세미컨 덕터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래티스는 칭화유니그룹이 인수하고 나서 몇 년 후 약간의 지분을 매각한 회사다. 텍사스인스트루먼 트, 아날로그디바이시스, 브로드컴Broadcom, 사이프레스Cypress 반도 체 역시 화웨이의 무선 장비에 필요한 반도체를 설계하고 제조했 다. 《니케이아시아》의 분석에 따르면 화웨이의 통신 시스템 가격 중 약 30퍼센트는 미국산 반도체 및 기타 부품이 차지한다. 하지 만 핵심 프로세서 칩은 화웨이의 하이실리콘 반도체 설계 사업부 가 중국 내에서 설계한 것이며, 제작은 TSMC에서 이루어졌다. 화 웨이가 기술 독립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해외에서 생산하는 여러 특화된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으며, 회사 내에서 설계한 칩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TSMC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화웨이가 각 무선 시스템에서 가장 복잡한 전자 기기 중 일부를 만들고 있다는 것, 그 모든 구성 요소를 어떻게 조합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는 사 실 또한 분명하다.
화웨이의 반도체 설계 사업부는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지니 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러니 중국의 반도체 설계 회사들이 실리콘 밸리의 대형 업체들만큼 TSMC의 큰 고객이 될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만약 2010년대 말의 추세가 이어진다면 2030 년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실리콘밸리와 견줄 수 있는 영향력을 갖 게 될 터였다. 이것은 단지 테크 업계와 무역의 이동만 뒤바꾸는 일이 아니다. 군사력 역시 새로운 균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냉전의 승부는 미국 미사일의 유도 컴퓨터 주위를 도는 전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싸움은 전자기파 스펙 트럼 속에서 결판이 날 수 있다. 전자 센서와 통신 장비에 온 세상 의 군대가 더욱 의존할수록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적을 탐지하고 추적하는 데 필요한 스펙트럼 공간에 접근하기 위한 싸움도 치열 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전시에 전자기파 스펙트럼이 어떻게 작 동할지 단지 얼핏 보았을 뿐이다. 가령 2007년 이스라엘이 시리아 의핵 시설을 공습했을 때,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레이더를 교란하 거나 해킹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시리아의 방공 시스 템을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와의 전쟁에서 다양한 레이더와 신호 교란기를 동원하고 있다. 또 러시아 정부는 보안을 고려하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공식 일정이 있을 때 방문지의 GPS 신호를 차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DARPA는 GPS 신호나 인공위성에 의존 하지 않는 대안 항법 체계를 연구 중이다. 123 GPS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미국의 미사일이 목표물을 맞힐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이다.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두고 벌이는 싸움은 반도체에 의한 보 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될 것이다. 레이더, 전파 교란, 통신은 모두 복잡한 무선 주파수 칩과 디지털-아날로그 변환기에 의해 관리된 다. 이들 칩이 개방된 스펙트럼 공간에서 신호를 발산하고, 특정 한 방향으로 보내며, 적의 센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레 이더나 교란기에 담긴 강력한 디지털 칩은 복잡한 알고리즘을 작 동시켜 수만분의 1초 내로 수신한 신호를 해석하고 어떤 신호를 보내야 할지 결정한다. 군대가 전장을 보고 소통할 수 있는지 여부가 달린 문제다. 자율 비행 드론은 스스로 어디 있는지 파악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다.
- 워싱턴과 반도체 업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세계화라는 꿀단지를 끌어안고 단물을 마셔 왔다. 언론과 학자들 역시 세계화를 진짜로 "글로벌 "한 것처럼 전달해 왔다. 기술 확산은 막을 수 없고, 다른 나라의 기술 역량이 발전하면 미국에 이익이 되며, 설령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기술의 진보를 막을 수는 없다는 식 이었다. "반도체 산업이 세계화된 세상에서 일방적인 행위는 점점 더 무의미한 것이 된다"라고 오바마 정권의 반도체 보고서는 주 장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정책은 기술의 확산 속도를 지연시킬 수는 있으나 그 확산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 할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럴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세계화가 아니라 "대만화"였다. 기술은 확산되지 않았다. 대체 불가능한 한 줌의 기 업이 독점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살펴봐도 세계화의 불가피 성이란 틀린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미국의 기술 정책 은 그 흔한 상투적 어구에 인질로 잡혀 버리고 말았다.
- 미국은 제조, 리소그래피. 그 외 다른 영역에서 기술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우위를 헛되이 흘려보냈다. 경쟁의 주체는 기업이며 정부는 그저 평평한 운동장을 깔아 주기만 하면 그만이 라는 생각에 워싱턴이 빠져 있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경제학 교과서와 신문 칼럼에서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그런 주장은 특 히 아시아의 반도체 산업에 정부가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미국의 관료들은 다른 나라가 반도체 산업의 중 요한 부분을 움켜쥐고 있는 현실을 그저 무시해 버렸고, 그러는 사이 미국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 왜 호주와 영국의 사이버 보안 전문가들이 화웨이의 위험에 대해 각기 다른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기술적 요소를 두고 해석 이 달랐다고 볼 근거는 없다. 가령 사이버 보안 문제를 다루는 화 웨이의 태도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은 영국의 규제 당국 역 시 잘 알고 있었다. 진짜 논점은 따로 있었다. 중국이 세계의 기술 인프라에서 더 큰 역할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저지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영국의 신호정보signal intelligence 기관의 장을 역임했던 로버트 해니건Robert Hannigan은 이렇게 주장했다. "서구가 중국의 기술 발전을 억누를 수 있다며 스스로를 속이는 대신에, 우리는 중국이 미래에 세계의 기술 강국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 며 그 위험을 지금부터 관리해야 한다." 많은 유럽인의 생각도 비 슷했다. 중국의 기술 발전은 불가피하며 그것을 막으려고 애쓰는 건 부질없다는 것이었다.
- 화웨이에 대한 공격은 화웨이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러 다 른 중국 기업들 역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미국과의 논의 끝에 네덜란드는 ASML이 극자외선 장비를 중국에 판매하고자 해도 승인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2017년 AMD가 "전략적 파트너"라 불 렀던 중국의 슈퍼컴퓨터 회사인 수곤이 2019년 미국의 블랙리스 트에 올랐다. 그 목록에는 파이티움Phytium, 飛騰도 포함되어 있었 는데, 미국 관료들은 파이티움이 설계한 칩이 탑재된 슈퍼컴퓨터 가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에 사용되었다고 보았고, 이 내용은 《워 싱턴포스트》를 통해 보도되었다. 파이티움의 칩은 미국산 소프트 웨어로 설계되고 대만의 TSMC가 제조했다. 미국과 그 동맹국의 반도체 생태계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파이티움의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파이티움은 외국산 소프트웨어와 제조 역량에 기대고 있었고, 그 결과 미국 제재에 극히 취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볼 때 중국 테크 기업에 대한 미국의 공 격은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최대의 테크 기업 인 텐센트와 알리바바 등은 미국산 반도체를 구입하거나 TSMC 에 반도체를 주문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다. 중국 최고의 로직 칩을 생산하는 SMIC는 첨단 반도체 제작 도구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제재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하지 않았고 여전히 성업 중이다. 심지어 화웨이마저 구형 반도 체 구입은 가능한 터라 4G 네트워크 사업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중국 최고의 글로벌 테크 기업 의 발목을 부러뜨리고 있을 때, 중국이 그 어떤 복수도 하지 않았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미국 테크 기업을 응징하겠다고 여 러 차례 위협하긴 했지만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베이징 은 중국의 안보를 해치는 외국 기업을 "신뢰할 수 없는 기업 명단 unreliable entity list '에 올리겠노라 했지만, 그 어떤 기업도 그 목록에 등재되지 않았다. 화웨이가 미국에 당해서 사라져 버리는 것보다 는 2등 테크 업체가 되더라도 살아남아 있는 편이 낫다는 베이징 의 분명한 계산에 따른 행보였다. 결국 미국은 공급망을 끊음으로 써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화웨이 습격 사건을 두고 이렇게 곱씹었다. "무기화된 상호 의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 미국 안보 관료들 사이에서는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와 제 조 장비의 수출 제한을 무기로 삼아 TSMC를 압박해서, 최신 기술 을 대만뿐 아니라 미국에도 동시에 도입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 과 논의가 강화되고 있다. 혹은 대만에 투입하는 자본 지출에 맞 춰 미국의 애리조나나 일본, 더 나아가 잠재적인 유럽의 신규 팹 에 새로운 설비를 짓도록 TSMC에 압력을 넣어 확약을 받아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전 세계 반도체 생 산의 대만 의존도를 낮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런 압력 이 필요하다 해도 현재로서는 워싱턴이 그것을 실행할 의지가 없 다. 전 세계가 대만에 의존하고 있는 현 구도는, 그러므로, 더욱 심화될 것이다.
- 대만해협의 군사력이 중국 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 는 군사 전문가는 없다. 1996년 발생했던 제3차 대만해협 위기처 럼 미국이 항공모함 전단을 이끌고 대만해협을 항해하는 것만으 로 중국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아득한 과거의 일일 뿐이다. 오 늘날 그런 작전을 수행하면 미국 전함을 치명적 위험에 노출시키 는 셈이 된다. 현재 중국의 미사일은 대만 인근의 미군 함정뿐 아 니라 저 멀리 괌과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까지 위협하고 있다. 중 국이 대만을 상대로 제한적인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자 할 때, 미 국으로서는 힘의 균형을 면밀하게 따져본 후 중국을 몰아내려 힘 을 쓸 필요까지는 없다는 결론을 낼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 다고 할 수 있다.
- 만약 중국이 대만을 압박하여 TSMC의 팹에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혹은 다른 나라보다 더 우선순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미국과 일본은 첨단 장치와 소재 수출에 새로운 제 약을 가하는 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그런 요소는 미국 및 유럽의 동맹국이 쥐고 있는 카드이므로 그 시점에도 활용 가능하다. 하지 만 대만의 반도체 생산 역량을 다른 나라에서 따라잡으려면 몇 년 이 걸릴뿐더러 그동안 세계는 여전히 대만에 의존해야 한다. 그 경우 세계는 중국에 아이폰 조립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아이폰에 들어가는 칩까지 의존하게 된다. 베이징은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적 역량과 생산력을 지닌 유일한 팹 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시나리오는 미국의 경제적, 지정학적 입지에 재앙과도 같은 충격을 준다. 차라리 TSMC의 팹이 전쟁으로 날아가 버리 는 것보다 더 나쁜 경우다. 아시아와 대만해협에 매달려 있는 세 계 경제와 공급망은 이런 아슬아슬한 평화 위에 놓이고 마는 것이 다. 애플부터 화웨이, 심지어 TSMC까지 대만해협 양쪽에 투자한 회사들은 절대적으로 평화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들 회사가 수조 달러를 투자한 설비들이 대만해협과 선전, 홍콩, 푸젠과 타이페이 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모두가 미사일의 쉬운 표적인 것이다. 전 세계의 반도체 산업, 더 나아가 반도체를 쓸모 있게 만들어 주는 전자 제품의 조립까지, 그 모든 것이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연안에 기대고 있으며 그 비중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곳은 실리콘밸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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