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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대부분(조금 똑똑하다는 사람뿐 아니라 엄청나게 똑똑해서 아무리 어려운 과학적, 수학적, 철학적 문제라도 금방 이해라 수 있는 사람 조차도). 자기가 그동안 무척이나 힘들게 쌓아온 결론이 (자기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가르쳤으며 또 자기 삶 전체를 지탱하는 그 결론이) 알고보니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서는, 가장 단순하고 명백한 진실조차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톨스토이)
- 안정애탁은 어린시절에 형성됨. 뭔가 나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때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주고 도와주리라는 것을 알아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안정애착이라는 개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기본적 요소다. 누군가가 나를 잘 지켜보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시도 때도 없이 둘러볼 필요가 없다. 만일 높은 수준의 안정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일종의 이상적 보험에 가입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 보험만 있으면 어떤 문제가 일어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걸어가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법처럼 놀라운 느낌이다. 무엇이든 못할게 없다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예를 들어, 설령 일이 잘 안풀린다 해도 누군가가 나서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또 도움을 주리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사업이든 뭐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넘볼 수 없는 낯선 사람과도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며 낭만적 모험을 시도할 것이다. 자기가 끝내 잘하게 될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는 분야를 두려움 없이 파고들어 공부할 것이다. 기꺼이 새로운 도시로 이사하거나 새로운 직장을 찾을 것이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요컨대, 안정애착은 우리가 모든 일의 긍정적인 면에 더 집중하게 하고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덜 걱정하게 만든다.
- 증오에는 증오의 즐거움이 있다. 그래서 겁에 질린 사람은 공포라는 불행에 대한 보상으로 증오심을 키우기도 한다. 더 많이 두려워할수록 더 많이 증오하게 된다. (C.S 루이스)
-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고 또 그 일이 누군가이 의도에 따라서 일어났다고 생각할 때, 고통은 한층 커짐. 개인적으로 나는 핸런의 면도날이라는 원리를 약간 변형한 버전을 주장한다. 본래 핸런의 면도날은 "어리석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는 포괄적 용어이며, 나는 핸런의 면도날의 본래 의도는 사실 어리석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비합리성 및 인간본성의 오류에 관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원래의 버전을 약간 수정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인간본성의 오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이는 자기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에 내재된 근본적인 이유를 한층 더 깊이 살펴보고 누군가의 의도나 악의가 아니라 실수, 세심함 부족, 충동, 격렬한 감정, 또는 그 밖의 모든 인간적인 특성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 세개의 면도날
악당이 등장하는 복잡한 이야기의 매력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인지상태를 수시로 점검하기 위한 개인용 구급상자에 세 개의 면도날을 넣어두는 게 좋다. 면도날이라는 용어는 불필요한 정보와 복잡성을 신속하게 잘라내서 진실에 더 빨리 도달하도록 돕는 특정한 경험적 또는 인지적 지름길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 핸런의 면도날 변형판 : 인간본성의 오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 오컴의 면도날 : 부적절하다고 입증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가장 간단한 설명을 선호한다
* 히친스의 면도날 : 아무런 증거없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증거없이 기각할 수도 있다. 이는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이며 역발상주의자이기도 했던 확고한 무신론자 크리스토퍼 히친스에서 따왔다.
이 세개의 면도날을 함께 사용하면 잘못된 믿음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는다. 이 세가지 면도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다.
* 어리석음이나 인간적 실수나 우연을 무시하면서까지 악의적인 의도가 있다고 가정하는 태도는 과연 합리적인가?
* 나쁜 의도라는 복잡한 그물망을 제안하는 태도는 과연 합리적인가?
* 그런 예외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는가?
만일 설명하고자 하는것이 이 세가지 면도날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이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설명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야 한다는 신호다.
- 믿음은 힘이 세다. 일단 어떤 믿음이 생기면 그에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이 간헐적 단식습관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는 힘든 노력을 회피하고 오히려 기존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려고 든다. 다큐영화 제작자 애덤 커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힘이나 법을 통해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 권력은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오늘날의 현대적 개인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 현대적인 개인주의 및 디지털 정보흐름의 시대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고 말하겠다.
- 오랜 관찰 끝에 마침내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들은 터무니 없는 추론을 하면서 먼저 마음속에 어떤 결론을 내리는데, 이 결론은 자기가 내린 것이거나 혹은 자신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누군가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확고하게 붙잡고 있는 생각이든 다른 사람이 제시한 생각이든 간에 이를 뒷받침하는 주장은 아무리 단순하고 어리석을지라도 즉각적으로 수용되고 박수를 받는다. 반면, 그 생각에 반대되는 주장은 그것이 아무리 기발하고 결정적이라 해도 경멸과 노여움으로 내쳐진다. 설령 그 주장이 자기를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열정적인 몇몇은 이성을 잃고는 올바른 주장을 하는 사람을 적으로 여기고 그들을 제압해서 입을 다물게 하는 일에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두가지 주요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
- 방어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정찰병이 되어라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특히 어려운 대화를 할 때는 자기것을 지키려는 사고방식으로 일관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면 훨씬 생산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 상대방 또한 그렇게 변화하도록 격려하는 것도 유용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을 바꾸기란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합리적 사고 전문가인 줄리아 갈렙은 자기것을 지키려고 하는 태도를 전투병 사고방식이라고 말한다. 갈렙에 따르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전투병 사고방식을 채택한다는 것은 추론과정을 방어전투의 한 형태로 바라본다는 뜻이며, 이 전투에서 자기의 가치관이 공격을 받아서 위험해지면 방어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대신 정찰병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 자기진영의 영토방어가 임무인 전투병과 달리 정찰병은 적진을 탐색하고 조사하는 역할을 함. 그러자면 개방적이고 호기심이 넘치는 마음이 필요. 즉 전투병은 눈앞의 위협을 물리치는 데 과도하게 집중해야 하지만 정찰병은 무엇이 진실인지 그리고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말. 그러므로 잘못된 믿음에 빠지지 않으려면 전투병이 아니라 정찰병이 되어야 한다.
- 수면마비. 꿈을 꿀 때 사람의 뇌는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행동을 하도록 신체에 명령을 보냄. 앞으로 걸어라. 허리를 굽혀 꽃을 꺾어라. 칼을 뽑아들어라. 차 위로 올라가라. 하늘을 날아라. 그렇다면 왜 사람은 렘수면 중에는 뇌의 명령을 받고도 그 명령을 실제로 실행하지 않을까? 왜 침실을 뛰어다니지도 않고 창밖으로 뛰어내리지도 않을까? 왜냐하면 다행히도 인체는 그런 위험한 상황을 예방하는 방향으로 적응해왔기 때문. 렘수면 중에는 기본적으로 뇌와 신체 사이의 연결성이 끊김. 이때는 신체가 뇌의 신호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의미.
- 그러나 때로는 모든 게 계획대로 작동하지 않기도 해서, 신제를 마비시키는 메커니즘이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뇌가 렘수면에서 깨어나기도 함. 이런 경우,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 사람은 잠에서 어느정도 깨어 있긴 하지만 신체를 움직일 수 없다. 이때 사람들은 외계인 피랍자가 경험한다는 바로 그 느낌(따끔거리는 전기적 자극,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 윙윙거리는 소음. 번쩍거리는 불빛, 그리고 침대 근처를 맴도는 외계인이 모습등)을 경험함.
- 인간은 패턴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이론이 아예 없는 것을 참지 못해서, 차라리 나쁜 이론이나 음모론이라도 찾는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 잘못된 믿음의 깔때기 안으로 떠밀려 내려가는 여정에서 사회적 요소는 강력한 역할을 한다.
따돌림 당한다는 느낌은 잘못된 믿음을 추동하는 강력한 힘이다.
사회적 매력은 최기 몇개 단계에서 밀어주고 당겨주는 역학의 결과로 일어난다. 그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친구와 가족에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느낌에 이끌린다.
사회적 유지는 오신자가 그 깔때기의 한층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 다음에 일어나며, 이때 오신자는 새로운 사회적 집단에서 자리를 잡는다.
사회적 가속화는 오신자가 잘못된 믿음의 깔때기 깊은 곳에 있을 때 일어나며, 다른 오신자에게 느끼는 사회적 유대감은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그 집단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 해결책은 거의 언제나 당신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방향에서 나오죠. 그러니까 그 방향을 들여다보려고 애써봐야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래봐야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더글러스 애덤스, 의심의 연어)



- 약물개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장기적으로는 이득보다 해악이 더 많다는 것을 데이터가 보여준ㄷ면 DSM같은 진단매뉴얼에 의해 광범위하게 촉진되는 과잉의료화 또한 그 자체로 나쁜 정신건강결과에 기여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가 진단을 받음으로써 인정받는 기분을 느꼈다고 보고하며, 그 진단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연구는 우리의 정신적 고통을 정신적 질환, 질병, 혹은 기능장애로 재구성하는 것이 회복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이런 문제를 의학적 문제나 정신질환을로 부르는 관점이 부추기듯,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가 생물학적 이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자신의 문제가 화학적 불균형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런 가설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비해 회복에 대해 더 비관적 시각을 보이며, 더 강한 자기낙인가 자기비난을 경험하고, 더 나쁜 기대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치료가 끝난 이후에 더 많은 우울증상을 경험한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생물유전학적 설명을 수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결과가 발견되었는데, 이런 설명은 많은 경우에 환자들과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낙인화하는 태도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태가 만성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절망감을 가중시킨다.
우리의 고통을 의료화하는 것이 이처럼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이유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정신적으로 아픈 것으로 정체화하게 되면, 스스로를 정상적인 삶에 건강하게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 믿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이들은 이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되며, 이는 그를 다른과 구별하게 되고 정신의학 권위에 장기적으로 의존하게 함.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야망을 다시 생각하거나 심지어 하향조정하고, 주체성의 일부분을 포기하라는 미묘한 암시를 받게 됨.
-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발견한 것은 고통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데 책임을 지는 사회제도들이 경제의 목적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이런 제도들은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진정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 위험한 감정들을 완화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해가 마르크스 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와 주류 사회과학의 일부가 되자, 이런 이해는 정신건강 분야에도 적용되기 시작했고, 80년대부터 여러 새로운 통찰이 등장. 이런 통찰은 우리의 고통이 명백한 경제적 목적을 위해 잘못 해석되고, 부당하게 이용되며, 탈정치화되는 특정 방식들을 드러냈다. 그러한 방식들에 대한 대략적인 목록을 만들어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 현재의 경제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고통을 개념화한다. 다시 말해, 고통의 원인을 사회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인 것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문제가 바뀌어야 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체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 믿게 한다
* 경제의 목적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웰빙을 재정의함. 웰빙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실제로 좋은지 여부와 관계없이, 경제성장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감정, 가치, 행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과 감정을 더 많은 의학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증거로 만든다.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고 교란하는 감정이나 행동은 강력한 금융기관과 엘리트들이 경제적 이득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의료화되고 치료되어야 한다
* 고통을 더 많은 소비를 위한 활발한 시장기회로 삼는다. 대기업이 소위 해결책들을 제조하고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고통은 대기업에게 매우 수익성 있는 시장이 될 것이다. 이 해결책들이란 수익을 늘리고 이윤과 더 높은 주식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들이다.
- 촘스키가 보기에 부채는 학생들을 경제순응주의자로 만들고, 그들이 진입하고 있는 체제의 경제현실에 반대하기보다는 이를 수용하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해, 부채는 신자유주의로 편입시키는 사회화의 강력한 형태로, 젊은이들이 일찍부터 현재의 경제상태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부채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바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견해가 위와 같은 비판을 뒷받침한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권을 축소시킴으로써, 우리가 직접 원하지 않았더 미래의 의무와 활동에 우리를 가둔다.
- 미래의 나를 담보로 돈을 빌린다는 표현은 나의 미래 자유를 담보로 돈을 빌린다는 의미. 내가 오늘 빌린 돈은 오늘의 나를 해방하겠지만, 내일의 나를 옭아맨다. 그에 비해 부채를 지는 것은 너무 쉽게 느껴진다. 종속이 다른 날로 미뤄지면, 단기적으로는 장점만이 느껴진다. 합리적 투자를 위한 부채를 넘어선 부채는 투자와 전혀 관련이 없고, 다만 소비주의 경제에서 합리적으로 기능하거나 생계를 유지하거나 또는 어떤 경우에는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관련된다.
- 08년 경기침체 이후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을 아우르는 부채의 영향은 광범위하게 보도되어 왔다. 그러나 부채는 경제의 더 뿌리깊은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 반창고 붙이기 식의 해결책으로 관리되어 왔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수많은 예시 중 하나. 80년대 이래로 다른 경제적 반창고들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는 단지 임금, 세금, 부채,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우리는 머지 않아 교육, 지방정부, 국민보건서비스, 그리고 물론 정신건강분야를 포함하는 우리의 공공서비스 전반에 걸쳐 경제적 반창고가 활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임. 여기서 소비자부채의 활용과 상응하는 또 다른 반창고 붙이기가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유용한 치료를 보편화한다는 명분하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급속히 확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짐작하다시피 바로 여기서 항우울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80년대 이후로 부채와 약물이 사회적으로 작동해온 방식에는 무언가 기이한 유사성이 있음. 70년대에는 부채의 사용과 약물의 사용 모두가 그리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으나, 80년대 이래 수십년동안 부채와 약물의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부채와 약물의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 그리고 부채와 약물 모두에 합리적 사용처가 있다 할지라도, 가계부채와 약물소비는 대부분 장기적으로 유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부채와 약물소비 모두가 사상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것, 최소한 깊이 있고 지속가능한 의미에서 삶을 개선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려이 없음. 오히려 그것은 부채와 약물이 감추려고 해온, 우리 사회의 깊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채와 약물 모두는 우리 시대의 완벽한 진정제로 거듭났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
하지만 둘 간의 유사성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거대기업들이 수중에 어마어마한 부를 쏟아 넣는 것 외에도, 부채와 약물은 이념적으로도 작용하여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내적 장애로 재분류. 부채를 통한 개입은 우리의 병든 재정건강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경제적 무능함을 표적으로 삼고, 정신의학적 개입은 우리의 병든 정신건강의 저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생물학적 이상을 표적으로 삼음. 부채를 통한 개입과 약물을 통한 개입은 제각기 소위 개인적 결함을 치료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자본주의의 사상, 제도, 정책의 모든인과적 책임을 교묘히 면제한다.
- 대부분 가족에게는 자신이 겪는 고통의 사회적원인을 변화시키기는커녕 그에 대해 고심해볼 만한 시간과 자원조차 부족.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일상적 의무를 처리하느라 바쁘고, 이런 추가적 문제는 전문가가 해결하도록 놔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20세기중반의 위대한 사회학자 피터버거가 말했듯이, 현대적 삶의 복잡성과 부산함은 사회적 삶에 대한 몰이해를 자아에 대한 몰이해로 번안하는 것을 매력적인 선택지로 만든다. 특히 일종의 자기이해, 자기숙달과 안심을 제공하는, 간단하고 믿을 만한 것처럼 보이는 해결책이 제공되고 있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고, 당황스러우며, 심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역학의 힘에 대한 인식을 고양하는 대신, 정신건강 증진도구와 회복탄력성 훈련, 조기개입전략을 택한다.
- 결과적으로 고통의 사회적 원인을 모호하게 만드는 정신건강개입의 힘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함. 어떤 치료법에서건,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더 큰 힘에 대해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인 부분임. 우리는 많은 아이에게 있어 가장 진실되고 효과적인 치료법은 약물이나 상담실, 혹은 교실에서의 개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지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더 가혹한 사회적 힘의 영향을 완화하고자 노력하는 의미있고 애정어린 관계속에 있다.
- 80년대 이래 이루어진 제약업계에 대한 점진적 탈규제화는 정신과 약물이라는 분야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의 주된 원인이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로 이루어진 과잉처방문제의 주된 원인이 되어왔다. 탈규제화는 80년대 이래 영국의 정신과 약물 소비가 400%나 증가해 오늘날 영국 성인의 25%가 매년정신과 약물을 처방받게 된 배경이기도 함. 이런 성공신화는 효과적 신약의 개발이나 정신약학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제약업계가 업계의 이익에 맞는 방식으로 규제제도와 의학계의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준 이데올로기의 부상 때문이었다.
- 팀 카서와 에리히 프롬이보기에 물질주의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주요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질주의는 인간욕구의 결핍과 방치를 보상하기 위한 시도다. 물질주의가 이런 요구를 충족해주기보다는 착취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물질주의가 심리적으로 매우 치명적 효과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삶으리 만족스럽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가치, 활동 및 지지형태와 상충되기에, 물질주의는 우리를 도와준다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해악을 끼친다. 수익성 높은 소비자본주의의 지속적 확산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감정적, 관계적 건강에 반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함. 그리고 이는 물질만능주의가 부상하는 국가에서 불안과 우울 또한 증가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 70년대에 새로운 자본주의가 얼마나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지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새로운 자본주의는 웨스트민스터, 워싱턴, 베를린, 파리같은 서구 자본주의의 강력한 중심에서 얼마 안되는 정치적 지지자를 보유했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이처럼 지지를 받지 못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2차대전 이후 서구를 지배해온 좀더 사회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와 비교해보면, 새로운 자본주의에는 유권자들의 열정과 영감을 지필만한 매력적인 도덕적, 윤리적 비전이 부재한 것처럼 보였다. 전후의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몇십년에 걸쳐 실행되고 검증되었다. 강한 국가는 특히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 사회 전체적으로 자원의 더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는 이상에 실제 현실이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말이다. 국가는 공공기관을 강화하고 장기간에 걸친 공공투자를 진행하며, 동등 임금과 낮은 실업률을 지향하고, 강한 규제를 통해 시장의 탐욕을 억제해야 했다. 강한 국가는 모든 시민의 이익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극단적 부와 가난을 억제하여 더 공평한 중간지대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자본주의는 사회전반에 깊이 동의하는, 이미 존재하는 경제적 이상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부자에 대한 세금을 감축하고, 기업에 대한 규제를 약화하고, 국가를 축소하고, 사회서비스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 새로운 자본주의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의 지배를, 사람들이 성공의 부산물을 갖기 위해 다퉈야 하며 경쟁과 사업이 지배하는 세상을 추구했다.
70년대 중반에 이 비전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은 이러한 비전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볼 사람들, 즉 권력을 갖고 있고, 기업가적이며, 풍부한 자원과 인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전체 유권자중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기에, 새로운 자본주의는 투표에서 패배를 거둘 수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이런 이유로, 70년대에 새로운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유권자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자본주의가 단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유지해줄 것이라고 믿게 만들 최적의 방법을 찾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들은 모든 사회집단이 열정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설득력 넘치는 윤리적 비전, 소수의 철학을 다수의 철학으로 만들 수 있는 비전을 찾아야 했다. "이 새로운 비전은 대체 무엇일까?"가 이들의 질문이었다.
- 밀턴 프리드먼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70년대에 썼던 여러 저술에서 맹렬히 주장했듯, 새로운 자본주의는 서구문화의 중심을 지탱하는 기둥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진정으로 자유를 수호하는 유일한 경제적 비전은 새로운 자본주의뿐이라고 주장. 공산주의국가 소련의 발흥으로 인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프리드먼은 "자유를 위한 투쟁"을 새로운 자본주의가 전하는 경제적 메시지의 핵심에 놓음. 프리드먼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서구적 자유의 마지막 보루이며, 우리의 국경을 위협하는 공산주의를 방어해준다고 주장. 공산주의적 권위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유일한 버전이라는 것. 대중은 바로 이 주장을 이해해야만 했다.
이러한 서사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프리즈먼은 2차대전 이래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채택해온 자유의 관점을 비판. 그러한 자유의 관졈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는 우리 모두가 누리는 자유의 진정한 수호자다. 국가는 사회보장을 제공함으로써 가난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무상의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질병의 우환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불평등으로 인한 형평성의 부재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며, 공교육을 제공함으로써 무지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좋은 삶을 가로막는 요인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우리가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사회악을 척결함으로써 국가는 우리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방한다.
- 하지만 프리드먼을 비롯해 경제적 우파에 속한 사람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자유에 대한 국가중심적 비전은 사람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 차원에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하이에크가 썼던 저술을 들먹이며, 프리드먼은 모든 국가에는 점점 더 많은 권력을 집적하여 그 과정에서 점점 더 확대되고 군림하려 드는 내재적 경향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 이런 일이 일어나면 국가는 점점 더 중앙집권화하고 전체주의적으로 변화해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자유를 완전히 없애버리게 된다는 것. 이런 바탕에서 프리드먼은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내버렫두면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로 진화할 수밖에 엇다고 주장. 이처럼 공산주의로 가는 흐름을 저지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은,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자유시장 버전의 자본주의로 교체해 국가의 야심을 꺾어 버리는 것이다. 프리드먼의 주장이 가진 문제가 무엇이었건 간에 큰 국가를 소련의 공산주의와 연관짓고, 작은 국가를 서구적 자유와 연관짓는 그의 주장은 당대에 만연한 반공주의 정서와 딱 들어맞음. 그의 주장은 작은 국가의 시장근본주의에는 없었던 도덕적 비전을 부여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제는 이 최신 유행의 비전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널리 퍼뜨리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 새로운 자본주의에 필요한 것은 국민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 집단이었다.
- 수년간 나는 직업적 상황에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PHQ-9과 GAD-7같은 검사지를 작성한 경험이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들 중 자신이 거대한 경제 서사시에 조연배우로 출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런 진단도구가 주로 신자유주의의 현재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들의 고통을 재구성하고 민영화하기 위한 수단이라 보지 않았다. 이런 문서가 약탈적 제약기업의 야망 및 과잉처방과 직결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들은 이러한 도구들이 고통을 개인적 결함으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이윤을 축적하기 위한 상품으로 탈바꿈시키고, 감정적 고통을 낳는 뿌리깊은 구조적 원인에 대해 정부가 손을 놓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불평등과 정신적 고통 사이에 이처럼 밀접한 관련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윌킨슨에게 이 질문을 던지자, 그는 진화이론을 바탕으로 대답. "우리는 진화 역사에서 대부분 기간을 조그만 수렵채집사회에서 보냈습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지위가 균등하게 배분되는 평등주의적 삶의 방식에 맞추어 진화해 왔습니다. 예전엔 집단 전체의 협력이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니 협력적인 사람이야말로 곁에 두면 유용한 사람이었죠."
여성은 덜 이기적이라고 생각되는 파트너를 선호했고, 공동체는 집단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의 가치를 높게 샀다. 실제로도 우리는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면 외면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인류가 처한 환경은 관계지향성이나 협조성 같은 친사회적 특징을 선택하게 되었죠.
인류가 생명체로서의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을 보다 평등하고 협력적인 환경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듣고서, 나는 윌킨슨에게 심각한 경제적, 물질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즉 격차와 분리로 가득한 사회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를 물어보았다. "우리는 경쟁과 분열이 급격히 심화되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체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우리 자신의 위치와 우리가 어떻게 판단되는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상당히 가중시킵니다."
- 윌킨슨은 우리의 경제형태가 정신건강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았을까? 그의 답변은 더 결단력 있었다. 정치에서 혹은 미디어에서 정신질환, 스트레스와 자해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이에 대한 반응은 거의 언제나 서비스를 늘리라는 겁니다.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의 수를 늘리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왜 전례없이 높은 수준의 육체적 편안함을 누리는 사회가 이처럼 끔찍한 정신적, 감정적 고통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질문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에 대한 구조적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정신의료 서비스에서 이런 구조적 설명이 대체로 무시당하고 있으며, 이는 정신의료 서비스의 이데올로기가 사회경제적 현 상태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우리가 노동자가 가진 불만의 의료화를 보건, 일터로 돌아가기 위한 심리치료이 증가를 보건, 물질주의적 가치와 치료의 조응을 보건, 실업상태의 병리화를 보건, 경제적 생산성이라는 측면에서 측정되는 회복을 보건, 업계의 이해관계를 가장 우선시하는 의약품 규제를 보건, 진단명이 학교예산 감축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보건, 널리 퍼진 고통의 상품화와 탈정치화에 대해 보건, 우리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이념적 욕구와 필요에 부응하는 시녀가 되어버린 체제를 보게 된다. 이런 굴종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왜 실패하고 있는 우리의 정신건강 시스템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확장을 거듭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코로나가 모든 것을 바꾼 셈이다. 코로나는 새로운 경제생산 체제의 생존가능성과 지속가능성을 변화시켰음. 코로나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켰다. 코로나는 우리가 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무엇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무엇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부분적으로나마 변화시켰다. 근래에 생각되었던 것보다 체계적인 경제적 개혁이 더 가까울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모든 변화가 새로운 정신건강 패러다임이 오래지 않아 승산을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결국 어떤 경제적 패러다임도 영원히 가지는 못했기 때문. 그리고 현재의 패러다임도 그런 역사적 경향을 따를 수밖에 없다. 변화는 도래할 것이며, 변화가 도래했을 때 정신건강 분야에 존재하는 대안적 생각들은 시행될 준비가 완료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을 계속하기만 한다면, 즉 우리가 계속해서 신자유주의의 압력과 유혹에 저항하기위해 노력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신자유주의 교리가 강제하는 율법이 아닌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개입들을 개발한다면 말이다.






- 4.2ka와 2.8ka 사이의 간격은 1400년.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해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의 시간과 거의 일치함. 또 주나라 호왕이 기자를 조선에 보내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런 진술은 기자로 대표되는 중국계 이주민과 단군으로 대표되는 고조선 원주민 세력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고, 결국 단군 그룹이 패배하여 근거지를 옮겼다는 사실을 말해줌. 이후 단군은 아사달로 복귀했으나 숨어지내며 산신이 되었다. 정치적 권력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환웅그룹이 선진적 농경기술을 들고 오자 원주민 무리 가운데 호랑이 부족이 물러났던 역사가 기자그룹과 단군그룹 사이에 재현된 것. 고대 한반도의 역사는 이렇게 기후변화가 가져온 충격을 극복하면서 시작되었다.
- 한 무제가 가장 우려한 시나리오는 흉노가 고조선 같은 주변국과 손을 잡고 한나라를 둘러싸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보다 손쉬운 외교적 방법으로 풀고 싶었는지 한 무제는 일단 고조선에 사신을 파견. 신하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조선 우거왕으로부터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하자 한 무제는 신속하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즉 고조선 정벌고 한사군 설치는 동쪽에서 흉노를 견제하고 고립시키는 대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 정책이었다. 한나라는 고조선 정벌 10년 뒤인 기원전 99년 흉노원정을 재개했고 흉노를 완전히 제압.
- 수나라와 당나라가 엄청난 국력소모를 감수하면서 수차례 고구려를 침공한 배경도 이때와 별로 다르지 않음.
(1) 대륙에 통일국가가 세워지고,
(2) 내부 혼란을 정비하고 나면,
(3) 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반도로 향함.
한반도가 중국 중심의 중화체제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 한 무제 이래 이어진 중국의 대한반도 인식이었다. 시진핑 시대가 공고해지며 한중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 평양에서 한나라 목간이 발견된 일은 두가지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하나는 그 무렵 평양이, 즉 당시 낙랑군이 한나라 행정구역의 일부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낙랑군에서 한나라 본토와 마찬가지로 체계적 인구조사를 실시했다는 것. 인구를 파악하는 것은 세금수취와 밀접함. 다시 말해 이 자료는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계적 행정이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스모킹 건이다. 그동안 무덤이나 발굴품 등을 통해 평양이 낙랑군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해왔지만, 구체적인 문서를 통해 입증된 것은 처음이었다.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북한 학계를 통해서 발표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이 자료의 신빙성에 힘을 더한다. 이로써 한사군 만주설은 힘을 잃게 됨.
- 목간에 따르면 초원 4년(기원전 45년) 낙랑군은 총 25개 현으로 구성됨. 호수는 4만 3845호. 전년보다 584호가 증가했으며, 인구는 28만 여명으로 전년보다 7800여명 증가. 기원전 45년이면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이 약 60년 가량 지난 때다. 인구와 호수가 증가했다는 사실은 고조선이 붕괴된 혼란을 딛고 낙랑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줌.
- 낙랑군의 존재를 외면하면 도리어 고구려의 빛나는 역사가 빛을 잃게 된다. 한반도에서 낙랑군을 축출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사업이 아니다. 선진 문물과 토지를 확보한 낙랑군은 오랜기간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이곳을 탐낸 고구려는 이미 3대 대무신왕을 시작으로 몇번이나 공략하려 했지만, 15대 미천왕 때에서야 낙랑군을 정복할 수 있었다. 미천왕은 낙랑군과 그 아래 있던 대방군까지 정복하면서 중국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 이후 원나라 때 일부를 제외하면 중국은 한반도에 영토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니 고구려의 낙랑군 정복은 한국사의 기념비적 사건이다. 낙랑군이 사라진 뒤 비로소 한반도에는 더 발달한 정치체제가 출현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이 낙랑군을 통해 그런 단계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 교과서에는 국가의 흥성을 주로 중앙집권화의 성공, 귀족등 기득권 세력 억제, 종교를 통한 국론통일 등으로 설명하고는 함.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정치적 시각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 조건대로라면 지금 세계에서 가장 흥성해야 할 나라는 사우디를 비롯한 몇몇 이슬람 국가다. 하지만 이런 국가들이 가장 흥성한다고 보기 어렵거니와 지금 중동의 몇몇 국가들이 부상한 것은 저 세가지 조건을 충족해서가 아니라 검은 황금으로 불리는 석유가 가져다준 부가 원천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가야의 영화, 신라의 부상, 그리고 신라와 가야의 국력역전은 국제 유통망의 변화에서 수반되었다. 길이 어느 쪽으로 바뀌느냐에 따라 이들 국가의 운명도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그 역사적 분기점에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던 신라는 한반도 트로이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나아가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이 길의 변천 그리고 기회를 제대로 이용할 줄 알았던 신라 지도부의 판단력이 만든 결과였다.
-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서 고구려를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강력한 군사력과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을 앞세우는 것이다. 아니면 태왕사신기처럼 온갖 판타지가 겹쳐진 광개토 대왕의 신화적 활약상을 강조함. 하지만 고구려는 군사강국이기에 앞서 외교강국이었다. 고구려=군사강국을 떠올리지만 실은 고구려의 흥망은 돌궐, 설연타, 철륵 같은 북방세력을 다루고 중국 왕조를 상대하는 외교술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고구려는 백제를 고립시키기 위해 수도를 이전해가면서 해상로를 틀어막았고, 거의 매년 중국에 사신을 보냄. 그렇게 얻은 정보를 활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국제정치의 판을 짰다. 중국 왕조의 갖은 위협 속에서도 700년간 만주에서 존속했던 고구려의 저력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 지일파 국왕의 시대
무령왕 그러니까 사마가 태어날 무렵 백제는 건국 이래 최대위기였다. 국가의 기반이 되던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겼고 국왕은 수시로 교체되었다. 고구려에 의해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이 막히는 바람에 외교적으로도 위축되었다. 혼돈을 추스르고 국력을 회복하려면 한강유역을 대신할 땅을 확보해야 했다. 또한 그것은 한강유역만큼 농업생산성을 갖춘 땅이어야 했다. 당시 그런 조건에 부합하면서 백제가 현실적으로 노릴 수 있는 곳이 지금의 전남지역이었다.
전남은 원래 백제땅이 아니었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교과서에도 4세기 근초고왕 때의 전남을 백제영역으로 표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근래 연구들은 전남이 꽤 오랫동안 백제에 복속되지 않고 마한이라는 정치적 독립체를 유지했다는 쪽에 힘을 싣고 있다. 근초고왕 때 일시적으로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곳을 백제 영역으로 완전히 흡수하거나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것. 백제가 한성을 내주기 전까지는 고구려와 경기도, 황해도에서 피터지게 싸웠던 만큼 이 지역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성을 내준 뒤 백제 수도가 웅진(공주)와 사비(부여)로 내려오면서 전남지역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백제에게 중요한 땅이 됨. 하지만 북방에서는 고구려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섣불리 남부로 돌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임. 백제로서는 일본의 지원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
무령왕은 이런 배경에 의해 선택된 군주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과 강한 커넥션을 가진 무령왕이 다스리던 백제에는 일본 출신 인사들이 들어와서 활동할 여건이 충분했음. 실제로 왜계 관료가 백제 조정에서 활동한 기록도 있다. 일본 조정에도 백제출신관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서로 각국 조정에서 친백제, 친왜 여론을 형성하며 가교 역할을 했을 것이다.
- 고려는자유무역 국가였나
고려는 조선과 달리 상업과 무역이 발달해 외국상인이 많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짐. 조선보다 무역이 활발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자유무역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다. 고려는 후삼국 통일 후 반세기가 지난 무렵부터 민간무역을 엄격히 막음. 최승로는 "해상 왕래로 배가 난파되어 사망하는 자가 많고 중국인들이 무역하는 이들을 천하게 여긴다"면서 민간무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종은 이를 따랐다. 하지만 배가 난파되고 중국에서 천하게 여긴다는 건 어디가지나 명분일 뿐, 여기에는 깊은 정치적 고려가 있다.
왕건집안은 해상무역을 통해 일어선 가문. 무역으로 큰 부를 얻고 그것을 기반으로 군사력까지 보유한 군벌세력이 되었음. 그런데 전국에는 외척인 나주 오씨를 비롯해 이런 세력이 많았다. 즉 제2, 제3의 왕건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왕권으르 튼튼히 하려면 이런 위협요소를 제거해야 했다.
다만 개국 초기에는 결혼동맹으로 엮인 왕실의 인척이자 개국공신인 이들의 기반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도리어 왕실이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치 궁예가 왕건의 반란으로 무너졌듯이 말이다. 이 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4대 광종 때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 등으로 중앙집권화의 초석을 마련한 뒤, 6대 성종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민간무역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 명나라가 상업이나 무역을 억누르고 농업을 장려하는 쪽으로 회귀한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1368년, 즉 14세기 후반은 한랭기의 충격이 수십년간 쌓인 때. 그렇기 때문에 급선무는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농업생산성을 회복해야 했다. 그러니 백성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점포에서 주판을 잡기보다는 시골의 농지로 돌아가 호미와 괭이를 들기를 바랐을 것임. 비슷한 시기 개국한 조선도 비슷한 정책을 폈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의 수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동한 것이 삼남지역의 식량생산성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한랭화로 인해 황해도나 평안도, 경기북부에서는 이전보다 벼농사를 짓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식량생산은 남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식량생산지와 수도의 거리를 더욱 좁힐필요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명나라와 조선의 중농억상 정책은 원라아와 고려에 대한 부정일수도 있지만, 기후가 만든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인류문명은 결국 기후와 얼마나 친숙해지느냐에 흥망이 달려 있는 것이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것이 고려말인 이유도 기후영향. 최근 지적되고 있지만 원나라는 목화씨 반출을 막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굳이 이때 목화씨를 고려로 들여온 것은 백성들이 추운 기후에 적응하려면 더 따뜻한 소재가 필요했기 때문.
- 과거 나당전쟁 때 당나라가 신라와의 싸움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서쪽으로 군대를 돌렸던 예가 있다. 수도 장안에서 가까운 토번이 쳐들어왔기 때문. 당에게는 대한반도 전략보다는 대토번 전략이 훨씬 중요했다. 수도가 가깝기 때문. 따라서 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현재의 중국이 대한반도 정책에 얼마나 촉각을 세우고 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방어체계인 사드도입에 맹렳게 반발하는 배경도 마찬가지.
-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비교적 이른시기 참전한 것도 한반도를 빼앗기면 수도 코앞에 일본군이 오기 때문이다. 미중갈등이 증폭할수록 중국은 한국을 포기하기 어렵다. (조영현교수)
- 제임스 팔레 교수는 "인구의 30%가 노예라는 점에서 조선은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 반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한국학자들은 노비가 양인과 결혼할 수 있다는 점이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일정량의 현물만 바치면 되는 납공노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 미국 흑인 노예나 중국과 일본에 있었던 노예보다는 자유로운 처지였다는 점을 강조함. 납공노비는 사실상 양인과 별 차이가 없었고, 그랬기에 양천교혼이 활발. 사실 노비가 양인보다 월등하게 비참한 삶을 살았다면, 자녀가 노비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노비와 결혼한 양인이 많지는 않았을 것. 하지만 매매와 상속이 가능한 재산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노비의 신분은 일반 양인과는 달랐다.
- 노비의 존재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발달하기 어려운 결정적 요인. 근대국가로 발전하려면 산업이 발전해야 하고 산업이 발전하려면 공장이나 도시에서 일할 노동자가 필요. 19세기말까지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 프랑스, 미국, 그리고 아시아의 일본은 신분제의 굴레를 비교적 빨리 벗어던짐으로써 산업화 단계에서 도시와 공장에서 일하는 인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노동력 대부분이 양반집안의 노비로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령 자본가가 있어도 노동자를 구할 수 없었음. 공장을 짓기 어려운 이유다. 월그을 받는 노동자가 없으면 사회전체 구매력도 떨어진다. 구매력이 떨어지면 상업발달에도 한계가 있다. 노비문제는 조선이 20세기초 망할 때까지 농업국가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만든 큰 이유였다.
- 혹자는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조선이 일본에 대해 해금정책을 쓴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이런 해석은 당시 무역질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 조선은 조공무역을 통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확보했다. 이와 함께 명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두고 안보를 보장받았다. 그 대가로 다른 나라와의 자유무역을 포기한 것. 임진란 때 일본에 당한 수모를 떠올림 조선이 명의 체제에 속한 탓에 허약해진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개국부터 임진왜란까지 200년 동안 안정을 누렸다. 이런 상황은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반면에 명나라로부터 조공기회를 얻지 못한 일본은 필연적으로 해외시장진출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해로를 차단한 상황에서 해양국가 일본이 대체시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는 동남아였고, 그 지역을 대상으로 왕성한 무역활동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선택이 옳아 보여도 그것은 당대 각자가 처한 환경에 대한 적응과정이었을 뿐이다. 즉 조선과 일본의 선택은 지정학적 차이, 조공질서에 대한 처지 등이 작용한 것. 이를 두고 조선이 해금정책을 펼쳤다고 비난하는 것은 현재 시각에서 당대를 재단하는 것이다. 활발한 무역을 펼쳤던 고려조차도 중국 외에는 해외시장이 없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반도 국가는 중국 이외의 시장을 개척할 만큼 물산이나 수출품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물론 조선과 달라진 현재의 대한민국은 이때를 반면교사 삼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보는 지혜다.
- 동남아 시장을 개척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중국시장을 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란을 일으킨 이유중 하나가 경제였다. 히데요시는 해안 지역 다이묘들이 밀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지방 다이묘들이 무역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명나라에 정식무역을 제안했음. 하지만 명나라는 조공, 책봉체제를 이탈한 일본과 무역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명에게 무역이란 경제보다는 외교, 안보의 수단이었다. 이런 마찰은 히데요시로 하여금 전쟁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명나라와 마시를 통해 교역한 몽골도 마찬가지. 몽골은 교역을 확대하고자 했지만, 과거 몽골의 지배를 받은 명은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음. 이쪽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 북쪽과 남쪽에서 압박을 받은 명나라의 상황을 북로남왜라 표현하는데,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마찰이 원인. 그러니까 이들은 명나라 조공시스템의 문제아였던 것. 그에 비해 조선은 모범생이었다. 명에 사신을 보내는 기회를 가장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무역문제로 폭력사태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
- 조선도 혹한이 이어지며 1600년대에는 압록강이 얼어붙는 일이 빈번. 청나라 기병들이 언제든 강을 건너 쳐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 그래서 인조실록에는 강이 이미 견고하게 얼어붙어 남북의 경계가 없으니 강 연안의 방비가 급한 것은 이전에 비해 백배나 된다, 라거나 압록강 일대가 얼어붙은 후에는 하나의 평지가 되니, 철기가 달려오는 것이 질풍보다 빠르다, 는 등의 우려섞인 보고가 여러차례 등장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모두 한겨울에 발생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조선 조정도 언제든 후금이 기병을 앞세워쳐들어올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압록강이 얼면 경상, 전라, 충청도의 군사를 국경일대로 이동시켰다가 봄이 되어 압록강이 녹으면 다시 내려보내도록 했다.
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으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언론이나 다수의 군사전문가들은 3월이 되면 러시아의 진격이 무뎌질 거라 예상. 러시아 모스크바부터 우크라이나 키이우까지의 평야지대가 녹아 진흙탕이 되면서 전차들의 진격이 어려워진다는 것. 실제로 봄이 되자 러시아의 전격전은 어려워졌고,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듬. 하지만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 1636년의 청나라군사들은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 청천강, 임진강 등을 전속력으로 건너며 열흘도 안되어 한양을 위협할 수 있었다.
- 소빙기가 대동법을 살리다
격렬한 반대에도 현종 때 대동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는 소빙기와 함께 닥친 경신대기근의 영향이 컸다. 세금부담을 낮추어주지 않으면 험악해진 민심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 않아 세금징수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지도층의 위기감이 팽배해진 것.
대동법은 그런 미증유의 위기에 조선의 지도층이 국가의 존속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친 결과였다.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혁신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당시 기록에 따르면 대동법을 실시하기 전에는 중간상인에게 주어야 하는 커미션 등 때문에 토지 1결당 70-80두 가량을 내야했는데, 대동법이 자리잡으면서 1결당 12두로 고정되어 세금부담이 1/7~1/8 정도로 내려감.
이렇게해서 위기를 넘긴 조선은 18세기에 황금기를 맞이하며 안정을 누림. 18세기 영정도 시대의 안정은 이 대동법 덕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더 있다. 앞서 대동법에 의지를 보였던 효종은 충청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 반대 여론 때문에 확대실시는 후대로 미룬 것. 그런데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성공해 민생이 나아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대가 심했던 전라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그렇게 해서 대동법은 전라도로 확대됨.
- 조선의 역사에서 현종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다. 세종이나 정조같은 성군으로 꼽히는 것은 고사하고, 효종이나 순조처럼 딱히 내놓을 만한 업적이 없었던 임금보다도 인지도가 낮다. 하지만 현종은 조선을 구한 여성 히어로같은 군주였으며, 그의 치세는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17세기 조선은 약 100년에 걸쳐 여러차례의 전쟁과 정변, 참혹한 대기근과 전염병을 겪어야 했다. 경신대기근때는 약 100만명이 사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0%. 백성의 유망, 경작지 황폐화, 국가재정 파탄 등 도저히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현종은 이 모든 악재가 누적된 상황에서 왕위에 오름. 현종시대를 덮친 대기근과 전염병은 그대로 자연재해였다. 같은 시기 유라시아 대륙이 대부분 비슷했다. 유럽도 페스트로 대규모 희생자가 나왔고, 중국과 일본도 비슷한 위기를 겪음. 당시 조선의 시스템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현종은 좌절하지 않고 재난을 극복하려고 노력. 그는 이전까지 왕실이 받아왔던 각종 공물을 줄이고, 조정을 독려해 구휼작업에 나서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온갖 방법을 강구. 그래도 전례없는 대위기 속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자연재해를 군주의 몸가짐이나 정치적 올바름으로 연결지어 해석하던 조선사회에서 이같은 미증유의 재난이 현종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결
- 조선통신사가 남기는 메시지 두가지
하나는 전선을 두개 만들지 않으려 했던 조선왕조의 고민. 조선은 북에서 후금의 위협이 증대하자, 임란을 일으킨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는 선택을 함. 조선의 국력으로 양쪽을 감당할 수 없다고 진단했기 때문. 심지어 일본에서 군수물자인 조총을 수입하려고도 했다. 비록 병자호란으로 무너지긴 했지만, 조선이 이런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이후 중국에서 인삼시장이 닫혔을 때 일본시장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또 다른 교훈은 일본에 대한 관심과 경계다. 조선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통신사를 보내면서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파악. 적어도 통신사가 제대로 기능한 17-18세기에는 양국 국력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고,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위기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통신사는 19세기 중반부터 단절되었다. 이후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 한양집중화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문과급제자의 지역별 비율이다. 과거시험은 조선시대 권력과 재력 그리고 사회적 권위를 획득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니 과거 급제자의 비율을 따지는 일은 요즘 의대나 SKY합격자 수를 지역별로 따져보는 것과 비슷.
급제자를 100명 이상 낸 가문은 1그룹(15개), 40-99명을 낸 그룹은 2그룹(26개), 1-39명을 낸 가문은 3그룹(117개)로 구분. 그런데 100명 이상 급제자를 낸 1그룹 가문중 한양출신은 17세기 전반만 해도 평균 60% 정도였는데, 17세기 후반에는 74%로 늘어나고, 19세기에는 80%를 넘어섬.
우리가 흔히 안동김씨라 부르는 19세기 세도정치가분도 정확히 구분하면 한양에 자리잡은 장동김씨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 선두였던 김상헌의 후예들로 장동 일대에 모여살았다. 이들은 중앙정부의 권력까지 장악해 경화거족이라 불렸다. 장동김씨 외에도 달성서씨, 풍산홍씨, 파평윤씨, 전주이씨, 반남박씨, 청송심씨, 경주김씨 등이 대표적 경화거족으로 꼽힘. 이런 가문에 속한 한양거주집안에서 문과 급제자가 다수 배출된 것.
1789년(정도 13년) 문과 급제자 현황 역시 한양집중화의 한 면모를 보여줌. 당시 서울인구(18만 9153명)은 전국인구(740만 3606명)의 2.6%에 불과했는데, 문과 급제자는 45.9%를 차지. 서울독주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양의 장점은 차고도 넘쳤다. 지금도 강점으로 꼽히는 정보와 교통요소는 이때도 마찬가지.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치르는 정규문과 외에도 별시, 증광시 등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과거시험이 있었다. 한양과 경기도는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었고, 과거를 치르는 장소와 거리도 가까워 시험에 응시할 여건이 좋았다. 반면 한양에서 며칠이나 걸리는 영호남에서는 상대적으로 여건이 나빴다.
- 구한말 역사에서 조선이 국권침탈을 맞이하게 된 가장 결정적 패착은 국제관계에 대한 오판. 중국밖에 몰랐던 조선의 국왕은 열강에 대해 너무 순진하게 접근했다. 그래서 조선의 힘을 키우기보다는 열강을 이용하려 했다. 처음에는 미국에 기대려 했고, 그다음에는 영국과 러시아에, 그리고 필요에 따라 청나라와 일본에도 보호를 기대. 남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면 국제사회의 움직임과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어야 함. 고종은 그럴 능력이 없었고 국권침탈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주요 인재들도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등에 속하거나 소속을 갈아탔다. 당대 조선의 인재로 꼽혔던 민영익, 김윤식은 친청파, 한때 조선의 미래를 이끌고 갈 인물이라 평가받던 김옥균, 박영효는 친일파. 훗날 친일파 거두가 되는 이완용은 을미사변 직후까지만 해도 친러파 핵심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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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만 해도 지리학계에서는 과거 문명의 성쇠가 대부분 기후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이 팽배했음. 이런 시각을 견지한 대표적 학자로 문명과 기후를 쓴 미국 엘스워스 헌팅턴을 들 수 있다. 이후 과거사회를 연구하는 데 환경결정론적 방식은 빠르게 인기를 잃음. 문화, 역사, 지리학자들은 인간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환경결정론적 연구가 갖는 논리적 비약을 경계. 오랜 기간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문제는 고대사회의 부침에 영향을 미친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견해가 전반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가 점차 바뀌고 있음. 기후변화가 고대사회의 성쇠를 결정했다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음. 환경 결정론적 접근이라고 터부시하기에는 무척 정교하다. 결과가 과거보다 정확해지고 다양한 종류의 고기후 프록시 자료가 생산되면서 환경결정론적 해석이 다시 힘을 얻고 있음. 과학기술이 제대로 무르익기 전, 기후의 급격한 변화가 고대사회에 준 충격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을 것임.
- 최종빙기 최성기의 전 세계 평균기온은 산업혁명 이전과 비교할때 대략 6도 낮았던 것으로 추정됨. 전 세계평균 해수면은 현재와 비교할 때 대략 125미터 낮았음. 당시 영구적인 빙하가 지구 표면의 8%, 육상부의 25%를 덮고 있었다. 참고로 지금은 지구표면의 3%, 육상부의 11% 정도가 빙하로 덮여 있음. 빙하가 생성되려면 기온도 낮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강수량이 충분해야 함. 최성기에는 동아시아 지역도 북미나 북부유럽 못지 않게 추웠는데 빙하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베리아와 만주에 있던 강한 고기압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부족했기 때문.
- 최종빙기 최성기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호모 사피엔스는 특징적인 수렵, 채집사회를 형성. 대략 3만년 전부터 동유럽과 시베리아에 나타난 그라베티안 문화와 2만 2000년 전부터 유럽에 들어선 솔뤼트레안 문화는 최종빙기 최성기를 대표하는 구석기 문화. 그라베티안 문화는 대략 2만 2000년 전에 크게 위축되었는데, 이때는 최종빙기 최성기 중에서도 기온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지구의 빙하면적이 최대로 넓어짐. 이 추위로 인해 유럽을 주심으로 주거지수는 현저히 감소.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창의력이 더욱 빛을 발하는 존재다. 이들은 뼈바들의 머리부문에 구멍을 뚫어 바느질의 효율성을 높였다. 구멍이 뚫린 바늘은 의류제작기술을 한차원 끌어올리는 혁신이었다. 바니즐이 편리해지며 옷감을 더 튼튼하게 이을 수 있었고, 가죽과 털을 손쉽게 봉합할 수 있었다. 호모사피엔스의 끊임없는 진보는 혹독한 기후변화 속에서도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였다.
- 유럽에서 최종빙기 최성기의 후반부를 주도한 솔뤼트레안 수렵채집민들도 불리한 기후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사냥기술이다. 그들은 창던지는 방식을 혁신하면서 사냥의 효율성을 대폭 높임. 최근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활과 화살을 사용했을 가능성 또한 대두되고 있다. 이 주장이 맞다면 사냥기술의 일대 혁명이라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창, 활, 화살 등의 사냥무기 덕에 그들은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추운 기후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은 한층 높아짐.
- 토기는 최종빙기 최성기의 혹독했던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남. 당시 부족했던 먹을거리로부터 영양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섭취하기 위해서라도 찌거나 끓이는 요리행위는 수렵채집민들의 중요한 삶의 방식이었다. 토기는 불을 이용한 요리의 편의성을 한단계 높인 획기적 발명품이었음. 또한 식량을 제때 구하기 어려웠던 시기였던 만큼 여분의 식량을 보관할 저장도구도 필요했을 것. 양쯔강 이남은 벼농경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기도 함. 토기를 사용해 식량을 저장하기 시작하면서 정주문화가 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정주생활이 시작된 후에 식량 저장을 위해 토기를 활용했을 수 있다. 혹시 토기 사용이 이곳에서 벼농경이 가장 먼저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닐가.
한편 양쯔강 이북의 수렵채집민은 최성기의 추위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생존에 유리한 해안으로 꾸준히 이동한 것으로 보임. 바다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했던 해안은 최성기에도 온대삼림이 존재했고, 주변에서 어패류의 채집도 용이했기 때문에 지역 수렵채집민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 아메리카 들소가 다른 대형 포유류와 다르게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동물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과학적 추정이 가능. 반추동물이 되새김질을 하는 목적은 식물을 잘게 부수고 분해함으로써 쉽게 흡수하기 위함. 최종빙기 최성기가 끝나고 기온이 꾸준히 상승하면서 툰드라 스텝식생은 북쪽으로 이동하고 빈자리에는 숲이 자리잡았음. 먹읅리가 부족해 많은 대형 포유류가 사라졌지만 반추동물인 아메리카 들소는 예외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음. 그들은 일반적 초식동물이 소화할 수 없는 나뭇잎을 먹으며 어려운 시기를 버텨낸 것이다.
보통 지하부의 뿌리성장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는 초본류와 달리 나무들은 햇빛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에너지의 대부분을 지상부에 집중. 따라서 수목류는 초본류보다 지상부의 생체가 초식동물에 훼손되는 것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초식동물의 공격을 받더라도 초본류는 큰 지장이 없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다. 지상부가 췌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들은 여러가지 진화적 전략을 발전시킴. 그중 하나가 2차화합물을 생산하는 것ㅇ니데, 떫은맛을 내는 탄닌이 잘 알려져 있음. 초식동물은 탄닌을 섭취하는 순간 소화기능을 잃어 영양분을 잘 흡수하지 못하게 되므로 보통 나뭇잎을 먹을거리로 선호하지 않음. 대형 초식동물에게 숲의 확장은 분명 재앙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들소는 그 재앙을 용케 빠져나옴. 그들은 되새김질을 통해 나뭇잎이나 나무껍질의 탄닌을 무력화하면서 갑작스런 환경변화에도 생존.
- 중동지역과 달리 동북아에서는 농경문화가 수렵채집문화를 완전히 대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림. 이는 농경과 수렵채집이 오랜기간 함께 이루어졌음을 의미. 중국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돼지나 닭뿐만 아니라 야생동물(거북, 사슴, 멧돼지 등)의 뼈도 함께 발견되며 도토리도 많이 확인됨. 농경문화의 전파속도 또한 유럽의 경우와 비교해 느린 편이었음. 예를 들어 양쯔강 이남에서 시작된 벼농사가 동남아나 한반도로 전달되기까지 3000년 이상 걸릴 정도로 속도가 더뎠다. 동북아에서는 홀로세 후기에 들어서야 벼농경에 더 많은 비준을 두는 생계방식으로 변해갔는데, 인간의 교란으로 삼림의 훼손이 가속화됨에 따라 야생동식물 자원이 부족해진 것이 주된 이유였다.
- 8.2ka 의 기후악화는 동북아 수렵채집민이 대거 남하하는 계기로도 작용. 한반도에서는 8200년 전에 와서야 해안을 중심으로 토기가 출현하기 시작.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많이 늦은 편. 당시 한반도에 토기문화를 처음 전파한 사람들은 갑작스레 닥친 추위를 피해 남하하던 아무르강(흑룡강) 유역의 수렵채집민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해안뿐 아니라 러시아 극동지역의 해안으로도 움직임. 이후 8.2ka의 추위가 지나가고 홀로세 기후 최적기를 맞아 따뜻해지자 두 지역에서 모두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모습이 나타남.
- 한반도 시기별 주거지수를 복원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략 5600년전에 주거지 수가 빠르게 증가한 후 한동안 그 수가 유지되다가 4800년 즈음에 급감. 홀로세 기후최적기의 풍부한 자원은 정주인구의 증가로 이어졌고, 5500년 전붙 시작된 조, 기장 위주 소규모 원시 농경의 기반이 됨. 그러나 4800년전 한반도의 홀로세 기후최적기가 끝남과 동시에 주거지수가 급감하는 모습이 나타남. 수렵채집민의 생업활동이 최적기말의 기후악화에 타격을 받은 것임. 4800년 전은 중국 북동부 랴오허 유역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던 훙산 문화가 쇠퇴한 시점이기도 해, 이때의 기후변화가 동북아 전역에 광범위한 혼란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됨.
8200년 전의 단기 한랭기와 이후 시작된 최적기의 온난화는 인간사회에 제한적 영향만을 미침. 당시 절대 인구도 많지 않았으르 뿐 아니라 수렵채집민이여전히 전 세계 사회의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 그러나 최적기 후반부로 접어들며 인구증가와 함께 곳곳에서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고대문명들이 나타나기 시작. 홀로세 후기의 기후변화는 이들 고대사회의 성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임. 물론 여전히 관련 증거가 부족하다며 이를 믿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개선된 연구방법을 통해 어느정도사실로 입증된 사례들이 늘고 있다.
- 기후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 중간산 지대의 초지가 도대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그 과정을 여러 학자가 궁금해했다. 화전농업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소규모 화전행위로 중산간 지대에 광활한 초지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일부는 중산간에 초지가 형성된 이유를 몽골군이 여몽전쟁 승리 후 이곳에 설치한 말목장에서 찾기도 함. 몽골군이 13세기에 목장을 설치한 후 중산간 지대의 초지면적이 좀더 늘어난 것은 사실. 그러나 몽골인들이 제조두에 목마장을 설치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이곳의 초지경관이 고향 땅의 초원과 유사하다고 느꼈기 때문. 몽골군대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중산간지대는 제주도에서 살아가던 고대인의 목축활동 때문에 크게 교란된 상태였다. 현재 중산간지대의 독특한 초지경관은 결국 제주도의 초기농경민들이 목축의 가능성을 발견한 오름에서 비롯한 셈이다. 제주도의 오름이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 13세기초는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이 집중된 시가. 동시에 지난 1000년을 놓고 봤을 때 몽골지역에서 가장 강수량이 높은 시기이기도 했다. 초원의 생산성은 최고에 달했고, 말을 먹일 수 있는 풀은 흔했다. 풍부한 사료는 기마병을 주축으로 하는 몽골군대에 큰 힘이 되었다. 사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몽골의 정복활동은 기후악화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견해가 강했다. 가뭄에 시달리다 살아남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었는데, 최근 연구결과들은 정반대의 가설을 지지함. 반면 같은 시기 고려에서는 가뭄과 기근으로 많은 백성이 빈궁한 삶을 견뎌내야 했으며, 불안정한 정치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고려는 물리적 전력에서도 몽골에 현격하게 모자랐지만, 13세기의 가뭄은 고려에게 제대로 맞서 싸울 사기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 기후변화와 왕조교체
기후가 왕조의 성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은 자연과학자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 이웃 중국의 예를 들어보자. 08년 미국 사이언스에 중국왕조의 흥망성쇠와 기후변화가 직결되어 있다는 과감한 글이 실렸다. 저자들은 석순의 산소동위원소 분석결과를 토대로 지난 1800여년간의 동아시아 몬순기후를 복원했다. 그들은 태양활동의 변화, 중국기온의 증감, 고산빙하의 전진과 후퇴 등이 모두 연관되어 있으며 기후악화가 중국 왕조들의 멸망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 당, 원, 명 사회가 불안해지고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모든 순간에 태양활동은 저조했고 몬순은 약해 가문이 들었다는 것. 반면 몬순이 강했던 북송 초기에는 반대로 농경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인구가 급증.
- 홀로세 중기에 접어들며 서남아를 중심으로 우르크와 같은 초창기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 이후 수많은 도시국가의 탄생과 소멸이 이어짐.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시기별로 도시의 사회변동을 유발한 내외부적 요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기후와 연관되어 있었음이 분명. 그중에서도 대략 4200년 전에 발생한 가뭄은 특히 치명적이었다. 이 시기의 가뭄은 북반구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아카드 제국, 이집트 고왕국, 인더스 계곡 문명 등 당시 주변을 호령하던 문명들 중 대다수가 비슷한 시기에 무너짐. 4200년 전의 사회격변은 기후변화가 인간사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 홀로세후기 기후변화는 대략 500년 주기로 반복되었으므로 기후변화에 따른 사회변동이 4200년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님. 그 이후로도 시간을 달리하며 전세계에서 유사한 상황들이 끊임없이 발생
4200년 전의 가뭄으로 큰 혼란을 겪은 서남아와 동지중해 지역은 1000년이 흐른 3200년 전에 다시 한번 가뭄으로 심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임. 그리스 남부 필로스만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이에 존재하던 많은 도시가 갑자기 훼손되고 버려짐. 지중해 연안지역 청동기 후기를 상징했던 거대한 궁들은 가뭄을 겪은 후 고립되고 낙후된 마을들로 대체됨. 사실 에게해와 동지중해 연안헤 산재해 있던 서남아 청동기 문명이 3200년 전 미스터리하게 소멸한 사건은 오랫동안 풀지 못한 지중해 고고학계의 수수께끼였다 주로 지진, 해적, 민란 등이 닷이 청동기 문명의 쇠락을 불러온 원인으로 간주되었으나, 최근 들어 고해상의 기후변화 프록시 자료가 다수 보고되면서 기후변화 또한 유력한 가설 가운데 하나로 대두되고 있음. 기후변화 가설을 옹호하는 측은 3000년간 이어진 대가뭄으로 기근이 발생하고 이주가 빈번해지면서 정치적, 경제적 불안이 증폭되었고, 그 결과 도시사회들이 몰락했다고 주장한다. 무척 건조한 편인 지중해 연안지역 농업생산량은 지금도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한다. 과거에는 아마도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 쇠락의 원인으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동지중해 청동기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철기시대의 도래를 부추긴 요인으로 대가뭄이 자주 언급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 지구온난화에 대한 음모론이 잦아들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짧은 기간의 날씨나 기후변화에 민감하기 때문. 예를 들어 17-18년 겨울에는 지구온난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추위가 미국, 유럽, 중국 등을 덮쳤는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17년 11월 중순부터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이듬해 2월초까지 한파가 지속됨. 1월말에는 철원 기온이 영하 25도 아래로 떨어지는 등 맹추위가 절정에 달했고 동파사고와 한랭질환 환자가 급증. 이렇게 추위를 겪게 되면 지구 온난화라는 말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이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대체로 미국인이 이러한 회의론자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14년 여론조사결과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화석연료 사용 때문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미국에서는 54%에 불과했다. 중국의 93%와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인다.
- 온난화 기세가 주춤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산화탄소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02-13년까지 연평균 기온이 거의 오르지 않았는데, 이는 지구온난화가 소설이라는 회의론자의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로 활용됨. 이 시기를 학계에서는 지구온난화 휴지기라 부름. 회의론자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휴지기 이후 14년부터 전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매년 연평균 최고기온기록을 경신하고 있음. 우리나라도 18년 엄청난 여름철 폭염을 겪음. 19-20년 겨울은 73년 우리나라에서 전국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따뜻한 겨울이었다. 회의론자의 바람과는 달리 지구온난화는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는 중
- 우리는 흔히 여러 온실기체 중 지구대기의 온실효과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기체가 이산화탄소라고 오해함. 그러나 정답은 수증기다. 맑은 날 수증기는 전체 온실효과의 60%를 책임진다. 이산화탄소 기여율 26%보다 두배 이상. 대기에 존재하는 수증기 분자수는 이산화탄소 분자의 수보다 월등히 많을 뿐 아니라 분자 한개의 효과도 수증기가 더 높음. 그런데 온실효과에 있어 수증기의 역할이 훨씬 중요한데도 주지하다시피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것은 수증기가 아니라 이산화탄소다.
왜 그럴까? 지구 온난화로 증발량이 늘어나 대기중에 수증기가 꾸준이 증가하면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양의 피드백이 나타날 수 있다. 반면 수증기의 증가는 구름의 증가로 이어지게 마련이므로 대기의 반사도를 높이는 음의 피드백도 나타남. 그러나 대기중에 포함된 수증기의 변화량을 측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 수증기 증가가 기온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다하기 어려움. 혹여 대기중 수증기량이 증가하더라도 그 영향이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수증기가 흡수할 수 있는 파장대의 지구복사 에너지는 이미 현재 대기중에 분포하고 있는 수증기에 의해 대부분 흡수되고 있기 때문.
반면 대기의 이산화탄소량 변화와 기온간의 관계는 비교적 뚜렷한 편. 1700년대 중반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채굴하고 나무를 벌채해 태우면서 지구의 탄소순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 이전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280피피엠에 불과했다. 지금은 400피피엠을 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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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역이 번성하면서 금융도 따라 번창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상인은 재산을 안전한 환전상 금고에 보관. 당시 상인은 환전상에게 이 계좌에서 저 계좌로 돈을 옮기도록 시켜서 빚을 갚았다. 그뿐 아니라 환전상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리하여 환전상은 자연스레 최초의 은행가가 되었다. 동시에 악독한 고리대금업자도 되었다. 한편 값비싼 화물을 싣고 위험한 바다를 건너야 하는 위험에 대비해 또 다른 분야가 발전했다. 상인이 보험을 개발한 것. 누군가에게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그 대가로, 가령 태풍으로 배가 바다에 침몰한다던지 하는 불운으로 인해 입은 손실을 보상했다.
북적이는 도시로 인해 봉건제가 흔들렸다. 농노가 땅을 떠나 도시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기 때문. 와글거리는 소리에 묻혀 전통적인 교회 가르침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밀라노의 수호성인 암브로시우스가 고리대금업자에게 죽음을 선고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밀라노 도시민이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통해 부유해지는 상황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경제활동이 점점 돈이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전통은 더욱 뒷전으로 물러났다. 수도승조차 대금업이 경제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대금업자가 돈을 돌려받지 않는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사실 아퀴나스도 빌려준 돈에 이자를 붙이는 일도 때때로 용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채권자가 돈을 빌려줄 때 포기해야만 했던 이익을 벌충하기위해서라면 이자를 물려도 괜찮았다. 점차 성직자도 고리, 즉 채무자를 망가트릴 만큼 높게 매긴 이자율과 은행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만큼 합리적으로 붙인 이자율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
11세기가 시작할 무려 교황은 상인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했ㄷ. 12세기가 끝날 즈음 교황은 호모보노라는 상인을 성인으로 추대했다. 신에게 가까이 가려면 가난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취를 감추었다. 예수는 제자에게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살던 시대의 상인은 그럴 수 있따고 믿었다.
1253년 한 이탈리아 회사에서 손으로 쓰는 통장을 개설. 거기에는 '하느님과 영리의 이름으로'라고 쓰여 있었다. 하느님의 섭리가 상업이라는 신세계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 피구가 쓴 저서는 얼마간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책을 쓰던 시기인 20년대와 30년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 어느 경제체게가 최선인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던 때였다. 그런데 피구는 더 협소한 문제를, 개개 시장이 작동하는 원리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었따.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나고 적어도 경제학자에게 커다란 문제가 하나씩 거의 정리되자, 상당수 경제학자는 자본주의가 최선의 경제체제이긴 하지만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정부개입이라는 강력한 처방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 피구는 예를 들어 페인트나 어류나 석유 등 특정 시장의 기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 몇가지를 글에서 제시. 오늘날에도 여러 경제학자가 피구의 이론을 이용해 정부가 세금이나 보조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연구하며 사회자원을 더욱 잘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 피구의 스승은 빅토리아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로 시장에 관한 기초이론을 세운 인물. 이 시장이론은 오늘날에도 여러 경제학자가 즐겨 애용. 마셜은 이 제자를 천재라 불렀다.
피구는 스승이 전개한 이론에서 한단계 더 나아감. 특히 시장이 항상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냄. 경제학자 대다수는, 심지어 자본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경제학자 조차 시장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음. 즉 이따금 시장이 경제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실패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가 커다란 재앙에 맞닥뜨리고 위기에 빠진다는 의미는 아님. 이따금 어류나 휘발유 같은 특정 시장이 실패할 때도 경제 전반이 무너지지 않았다. 피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짚어내며 후생경제학이라 알려진 경제학의 한 분야를 개척. 후생경제학은 사회에 골고루 돌아가는 이익을 살피는데, 이 이익은 사람들이 사고 팔고 일하는 행위에 대해 내리는 결정이나 기업이 생산과 고용에 대해 내리는 결정 등 모든 결정에서 비롯함. 이 내용이 규범경제학 일부를 이루며 경제학의 한 갈래가 되어 경제상황을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시장이 제 기능을 잘 해내는지 아니면 잘못해내는지 가려낼 수 있다.
- 똑같은 기업만 무수히 존재하는 완전경쟁체제처럼 극단적 상황에 맞은 이론이나, 오로지 한 기업만 존재하는 독점상황을 설명하는 이론이 세우기는 더 쉽다.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까다로움. 시장이 완전경쟁으로 내몰리거나 아니면 독점이 될 때 그 양상은 하나다.하지만 시장이 양극단 사이에 존재하면, 즉 불완전 경쟁 속에서 서로 각축을 벌이면 그 형태는 셀 수 없이 많음. 그래서 하나의 이론으로 온갖 가능성을 다 아우르기가 어렵다.
오늘날 경제학자는 게임이론 분야를 이용하는데 이 방법으로 다양한 상황에 처한 기업행동을 면밀히 검토할 수 있다. 게임이론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특정 결과를 낳는 여러 상황을 연구한다. 이 이론은 소수 독점 행동을 연구하는데 특히 유용. 그래서 경제학자는 이 게임이론을 적용해 시장 장악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가리는 기업 사이에서 복잡하게 발생하는 상호작용을 탐색한다.
- 신흥부자는 이익배당금으로 살았으며 별다른 수고없이 재산을 물려받음. 폴리네시아 추장처럼 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여가를 즐긴다거나 명품을 산다거나 하면서 사회적 인정을 받음. 대저택을 구입하고 모피코트를 사고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으로 여행을 떠나는 행위를 베블런은 과시소비라 부름. 이것저것 사면서 자랑하는 셈이다. 이렇게 특권을 누리는 소수에게 베블런은 유한계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한계급에 속한 남자는 연미복을 입고 실크 스카프를 맴으로써 자신은 땅을 일구거나 버스를 모는 생산직 노동에 종사하지 않음을 강조. 그리하여 이런 옷차림이 농부가 입는 수수한 마 셔츠보다 더 아름답다고 여기게 됨. 하지만 베블런은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왜 부자의 에나멜 가죽 구두에서 반짝이는 광택이 빈자의 닳을대로 닳은 겉옷 소맷부리에서 반질거리는 윤기보다 더 아름다워야 하는지를.
여자는 옷찰미이 특히 비실용적이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은 손에 물을 묻혀 감자를 씻거나 창문을 닦지 않는다고 드러낼 수 있따. "우리가 끈질기게 치마에 집착하는 이유는 실제로 다음과 같다. 일단 치마가 비싸고 몸을 돌릴 때마다 거치적거려 쓸모있는 노력을 온전히 기울이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자남편을 둔 아내는 남편재력을 과시해야 했다. 극단으로 흐를 경우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 탓에 실크 드레스 가격이 오를 때조차 수요가 떨어지기는 커녕 도리어 올라갔다. 가격이 높으면 더 소수의 사람만이 살 수 있고, 이때 드레스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수단이기 때문. 그래서 더 부유한 사람이 드레스를 사고 싶어한다.
- 자본주의가 지닌 활기에는 어둠의 씨앗이 숨어 있어 언제든 이 활기가 시들어버릴 수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슘페터는 경제학자로서 보기 드문 일을 했다.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학과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에 대한 논의를 전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미래가 왜 암울한지 경제학 용어로 설명. 자본가가 생산물 가운데 이윤으로 점점 더 챙겨가고 노동자 몫이 점점 더 줄어 체제가 송두리째 무너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슘페터에게 자본주의 경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라면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태도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특히 기업이 점점 커지는 경우에 그 영향력도 비례해서 세어진다.
- 기업가가 성공하면 기업도 따라서 성장. 결국 거대기업이 출현한다. 이들은 한발 앞선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상품을 쏟아낸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종종 기업내 전문 연구부서에서 혁신을 이룰 수 있다. 예를 들어 애플에는 다양한 연구팀이 있다. 어떤 연구팀은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생산하고 어떤 연구팀은 더 빠르고 가벼운 아이폰을 개발한다. 천재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속에나 있던 물건이 이제 기업가에 의해 확실한 검증을 거쳐 현실로 탄생. 경제발전은 기업정책과 위원회 회의를 통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일이 바람직하다. 새 상품 개발은 미리 구상안을 마련하여 예측이 가능하다. 문제는 너무 따분하다는 점. 회사가 거대 조직이 되어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으로 가득찬다. 슘페터가 그리던 기업가는 용감무쌍한 영웅으로 출발했더라도 도착할 즈음에는 학교를 싫어하고 숙제를 내팽개치는 싫증난 10대에 오히려 가까워짐. 넥타이를 매고 일터로 출근하고 지루한 회의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일상을 질색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삶이 무료하고 삭막하게 변하는 모습을 혐오한다. 이제 대개 사업이나 돈벌이를 불신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끝내 반자본주의 지식인이 되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거나 자본주의 비판서를 펴낸다. 이들은 하나같이 정부가 사업가로부터 경제권을 넘겨받아야 하며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슘페터 생각에 이런 경향이 30년대와 40년대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상당수 지식인이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고 정부가 경제운용에 보다 중추적 역할을 맡기 시작한 시기였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고 예견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음. 자본주의는 정부개입을 상당히 허용하면서 오늘날까지 쇠멸에 이르지 않았다. 이를 소위 혼합경제라 한다. 그럼에도 슘페터 덕분에 우리는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경제는 쉬지 않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여기서 슘페터는 마르크스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처럼 사회주의는 피할 수 없다고 주장. 슘페터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좌절한 사회 상류층, 불만 많은 지식인 때문에 최후를 맞는다. 반면 마르크스가 보기에 사회를 전복하는 힘은 불우한 노동자에게서 나온다. 마르크스가 그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실패하기 때문에 도래한다. 그런데 이런 마르크스와 달리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였으며 떠밀리다시피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추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 슘페터는 또한 케인스가 제시한 새로운 이론에 반대했다. 케인스는 30년대불어닥친 유례없는 불황과 같은 파도에 경제가 휩쓸리지 않도록 정부가 막아야 한다고 주장. 자본주의가 변화라면 종착점이란 없다. 이제 겨우 그 성과를 가늠하기 시작했을 뿐. 역사는 흐르기 마련이어서 말을 타고 소식을 전하던 전령은 어느덧 온데간데없고 대신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지 않은가. 정부에게 경제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할 때의 문제는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근시안으로 바라보고 조속히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점. 하지만 슘페터 생각에 그런 해결책은 단지 기업가 정신을 옥죄고 자본주의에 생명유지장치를 달아 잠깐 목숨을 연장해 놓은 것뿐이지 결국 숨통을 끊어놓는 짓과 다름없었다.
- 죄수의 딜레마가 경제학에서는 늘 돌연히 일어난다. 발전소에서 사용하는 터빈 발전기처럼 대형제품을 예로 들어보자. 60년대 미국 제조업을 진두지휘하던 두 회사, 제너럴일렉트릭과 웨스팅하우스는 발전기에 수지맞는 가격을 매기고 싶었다. 한 가지 방법으로는 서로 뭉쳐 발전기를 더 적게 판매하고 가격을 더 높게 부과하자고 합의하면 된다. 이때 문제는 가격이 높으면 두 회사 모두 상대회사를 속여 조금 더 낮은 가격에 발전기를 더 팔아보고자 하는 유혹을 느낀다는 점. 하지만 그리하면 가격이 곤두박질쳐서 양측 모두 이윤이 급격히 낮아지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이들 회사 사이의 균형은 두 깡패가 자백하는 모양새와 같다. 똑같은 문제에 산유국도 부딪친다. 60년대 석유 판매량을 줄여 단가를 비싸게 매기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가격이 오르면서 산유국은 석유를 더 많이 생산해 팔고 싶은 유혹을 다시 받았다.
사업에서도 정치에서도 인생에서도 사람들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한다. 게임이론은 그 얽히고 설킨 관계에 대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언제 서로 힘을 합치고 언제 물고 뜯고 싸울까? 죄수의 딜레마에서 협력은 언제든 깨질 위험을 안고 있다.
- 어떤 게임에서는 유달리 복잡한 전략을 구사한다. 순서대로 결정을 내려야 할때, 즉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고나서 다음에 무엇을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특히 더 그렇다. 만약 상대바잉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한다면 응징을 가할 수 있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70년대 미국 양대 커피회사격인 맥스웰하우스와 폴저스는 미국시장 점유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폴저스가 동부로 시장을 확대해서 사업체 인수를 꾀했는데, 이미 동부는 맥스웰하우스가 주 공급업체로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ㄷ. 맥스웰하우스는 가격전쟁에 돌입했다. 가격을 대폭내려 폴저스를 시장에서 쫓아내려 했다. 일련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 시장에 들어오려 하면 가격을 대폭 내릴 작정을 한다. 이 때문에 상대가 아예 처음부터 시장진입을 미적미적 망설이길 바라면서. 문제는 이런 으름장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런 협박을 실천에 옮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여길 수 있다. 가격을 낮추면 그만큼 수익도 줄어들테니까. 그런데 맥스웰하우스와 폴저스의 경우는 이런 위협이 통했다. 맥스웰하우스가 보기 좋게 성공을 거두어 폴저스는 뉴욕시로 시장을 넓히려던 애초의 의욕을 접고 말았다.
- 빅셀은 정부가 완전히 이타적이며 오로지 공공선을 실현할 수 있는 정책 시행에만 관심이 있다는 생각을 낱낱이 해체했다.
뷰캐넌은 빅셀의 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학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음. 경제학자는 정부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가정. 그런데 정부는 실제로 무엇일까? 뷰캐넌의 주장에 따르면 정부는 관리나 고문이나 장관 등 사람이 모인 집단이다. 이전까지의 경제학이 지닌 문제는 이들 인격이 둘로 나뉘어 있다고 여겼다는 점이다. 품질 좋은 신발을 한 켤레 구하거나 자동차를 얼마에 팔지 계산할 때 정부관리는 합리적 경제인간처럼 행동. 즉 확고하게 자기 이익을 좇으며 득은 최대한으로 늘리고 실은 최소한으로 줄인다.
하지만 관공서로 들어서는 순간 오로지 머릿속은 국익만을 생각하고 사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기존의 경제학은 가정했다. 한 점 의혹 없이 올바르게 정책을 집행하고 책상에서 잠깐 눈 붙이는 일도 없으며 점심 한 끼 먹는데도 세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마치 이기심으로 똘똘 뭋인 경제적 인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정치적 인간이 들어선다. 이 인간은 철저하게 이타적인 인간으로 사회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따져 그대로 행동한다.
이는 모순이라고 뷰캐넌은 주장했음. 사업으로 돈을 벌려고 애쓸 때와 똑같은 태도로 정부활동을 꼼꼼히 검토해야 한다. 정치인도 정부관리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익을 좇는 사람이다. 뷰캐넌이 새로 개척한 경제학 분야를 공공선택이라고 함. 그리고 이를 가리켜 뷰캐넌은 낭만없는 정치라고 표현. 정치인은 이타적 영웅이 아니었다. 뷰캐넌에게 이는 어리석고 감상적인 생각이었다. 실제로 정치인은 지위를 지키는 데 더 혈안이 되어 있고 경제학자가 생각한 이상으로 몹시 추잡하고 매우 이기적이며 못 믿을 족속이었다.
미정부는 60년 내내 흥청망청 써댔고 뷰캐넌은 이론을 통해 이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 비대한 정무는시장이 더 원활하게 굴러가도록 도움을 주기는 커녕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정치인이나 관료와 더 관계가 깊다고 주장. 정부문제는 빅 빌 톰슨 시장이 저지른 황당하고 무분별한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회색양복을 차려입은 공무원이나 워싱턴의 존경받는 정치지도자도 못지 않게 썩었다.
- 지대추구는 소비자에게 해를 끼침. 자동차 시장이나 우산시장이 외국경쟁으로부터 보호받는다면 사람들이 자동차나 우산을 살 때 그만큼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 하지만 문제는 소비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도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이런 보호조치를 막기 위해 소비자단체를 조직하는 일에 시간을 들일만한 가치가 있는지 개개인은 결코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면 생산자는 종종 규모가 크고 눈에 띄지 않는다. 힘이 있어 정부에 압력을 넣어 특혜를 얻는다. 하지만 기업가를 탓해서는 안 된다고 뷰캐넌이 말했다. 문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정부, 이 힘을 이용해 경제에 개입해서 재선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돕는 정부에 있다.
뷰캐넌은 케인스 주의 경제학자에게도 맹공격을 퍼부었다. 이들은 경기가 침체한 시기에는 정부가 나서서 지출을 늘려 경제를 부양해야한다고 주장했음. 이 부양책을 시행하느라 정부예산이 적자로 기운다. 정부가 거두어들이는 세금보다 더 많기 때문. 하지만 케인스주의자에 따르면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유는 부양정책을 실시해 경제가 다시 원만하게 돌아가면 지출을 삭감해서 적자를 없앨 수 있기 때문.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정부지출이 유권자의 환심을 산다는 점. 정치인은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물불 안가리고 지출삭감을 피해서 유권자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지출은 늘고 또 늘어 정부적자 역시 계속 증가해 간다. 이것이바로 6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봤자 문제만 낳는다는 프리드먼의 기본적인 철학은 대처와 레이건 속에, 그 계승자들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케인스가 보기에 경제가 불안정하면 정부가 개입하여 통화량을 투입해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제 체제 내에서 지출이 충분한지, 다시 말해 수요가 충분한지 꼭 확인하라고 충고. 프리드먼은 경제를 그냥 내버려 두면 오히려 더 안정된다고 확신. 불안적, 즉 70년대 고삐풀린 물가상승과 30년대 불경기는 정부가 간섭한 결과. 시장을 그냥 숨쉬게 놔두자. 그러면 경제가 건강해지고 안정을 이룬다. 여기에 이르는 길은 경제가 수요가 아니라 공급을 제고하면 된다. 경제학자가 생각하기에 정부가 법인세를 없애고 시장규제를 풀면 기업이 자극받아 생산을 늘리고 노동자를 더 고용한다. 이런 이론을 공급중시 경제학이라 한다. 그리고 불만의 겨울에 뒤이어 수십년 동안 바로 이런 정책을 정부가 추진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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