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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문화권의 국가에서 사람들이 교육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것은 공자가 학식을 강조해서가 아니라, 2차대전후 토지개혁을 비롯한 여러 정책을 통해 계층이동이 가능해지면서 교육이 계층상승 수단이 되었기 때문. 몇백 년에 걸쳐 유교가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였고, 또 다른 유교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45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추한 직후 한국의 문해율은 22%에 그쳤다. 비슷한 시기에 불교국가 태국의 문해율은 53%(47년), 기독교국가 필리핀은 52%(48년), 이슬람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는 38%(47년)였다.
경제개발 초기, 60년대와 70년대 한국 젊은이들은 과학이나 공학분야 직종을 꺼렸다. 실용적인 일에 대한 편견을 가진 유교문화의 영향.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의도적으로 인문학고 사회과학 계통의 정원과 재정지원을 제한하고, 과학 및 공학분야 학위 소지자의 군복무기간을 대폭 줄이는 특혜를 실시. 물론 과학 및 공학분야 학위소지자가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 일자리가 없으면 고학력 실업자만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많은 개도국에서 그런 현상도 벌어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정부는 적극적인 공공정책을 통해 산업화를 도모. 그 결과 이 분야로 진학한 학생들이 학위를 딴 후 보수도 좋고 지적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일자리들을 만들어냈다.
- 문호가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따라서 그 나라의 경제가 조직되고 발전하는 양상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어불성설. 그러나 문화가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는 흔히 통용되는 단순한 고정관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모든 문화는 복합적이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다양한 부면을 지니고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개인의 경제적 행동과 국가의 경제적 성과를 결정하는 데서 문화는 정책에 비해 그 영향력이 약하다는 점. 그 점은 도토리를 먹는 한국인에게나 도토리를 먹여 키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교도에게나 마찬가지.
-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은 무보수 노동만을 제공한데서 그치지 않았다. 노예는 매우 중요한 자본동원 수단이었다. 매슈 데스먼드는 이렇게 썼다. "노예가 된 인간들은 주택담보대출이 시작되기 몇 백년전부터 대출의 담보로 사용되었다. 땅값이 별로 나가지 않던 미국 독립전... 대부분의 대출은 인간이라는 자본을 담보로 이루어졌다." 데스먼드는 거기에 더해 노예 한명 한명을 담보로 한 대출들을 한데 묶어 만든 채권거래도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현대 금융계에서 수천건의 주택담보대출금과 학자금대출, 자동차대출 상품들을 묶어서 판매하는 자산유동화 증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미국은 이 채권들을 영국과 유럽 금융업자들에게 판매해 국제규모의 자본을 동원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 금융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킬 기회를 얻었다. 노예들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훨씬 더 오랫동안 초보적 금융부문을 가진 전근대적 경제국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 구아노로 인한 페루의 경제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황이 시작된 지 30여년이 지나자 과다채취로인해 구아노 수출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 그러나 1870년 대규모 칠레초석(질산나트륨) 매장지가 발견되며 구아노 수출의 쇠락으로 인한 영향이 한동안 상쇄되었다. 초석은 비료, 화약제조에 사용될 뿐 아니라 육류보존에도 쓰이는 질산염이 풍부한 광물질. 그러나 페루의 번영은 초석전쟁이라고도 부르는 남미 태평양전쟁과 함게 끝이 남.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볼리비아 해안지역 전무와 페루 남부 해안지역의 절반가량을 점령했음. 그 지역에는 대량의 초석이 매장되어 있고 구아노도 많아서 칠레는 엄청나게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1909년 독일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공기중에서 질소를 분리하는 기술을 발명. 고압전류를 사용해 암모니아를 만들고 거기서 인공비료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말하자면 하버가 글자 그대로 허공에서 인공비료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 그 덕에 그는 191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 하지만 1차대전때 사용된 독가스를 개발한 일로 악명이 높아서 그에 게 노벨상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점잖은 자리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음
- 역사를 보면 높은 생활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산업화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시 말해 혁신과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는 주된 근원인 제조업 분야를 발달시켜야 한다는 의미
산업화를 통해 생산능력을 더 높이면 자연이 우리에게 가하는 제약을 마법처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해짐. 칠흑처럼 새까만 석탄에서 선명하기 그지없는 새빨간 염료를 뽑아내고, 허공에서 비료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 않고도 땅을 몇배로 늘리는 것이 마법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기에 더해 이런 능력을 갖추고 나면 긴 기간동안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음. 초석고 같은 재생불가능한 광물 천연자원, 또는 멸치를 먹고 사는 새들의 분비물로 만들어진 페루의 구아노처럼 재생가능하지만 과잉채취로 결국 늘 바닥이 나고야 마는 천연자원과 달리 한번 습득한 기술이나 능력은 고갈되지 않기 때문이다.
- 한국정부는 88년까지 외제차 수입을 전면 금지했고, 일본차는 98년까지 수입을 금지하는 정책을 운용해 현대를 비롯한 다른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클 때까지 보호막이 되어줌. 수십년 동안 한국 소비자들이 품질이 떨어지는 국산차를 견뎌내야 했다는 의미지만, 이런 식으로 보호받지 못하면 한국 자동차 업체들은 성장은 커녕 살아남기조차 힘들었을 것임. 90년대 초까지도 정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현대차를 비롯한 하이테크 기업들, 특히 수출지향적 기업들이 특별 저리융자를 받을 수 있게 보장. 이는 생산적 기업에 대한 대출에 우선순위를 주도록 하는 엄격한 은행규제와 은행부문의 국유화를 통해 이루어짐.
정부정책이 항상 도와주는 성격만을 띤 것은 아니었음. 현대차가 고유모델을 만들겠다는 겻림을 한 것은 사실 정부가 자동차 부문을 국산화하는 프로그램에 착수했기 때문. 73년 정부는 현대차를 비롯한 국내 자동차 업체들에 고유모델을 만들지 않으면 자동차 제조허가를 취소하겠다고 위협. 규제정책과 금융을 이용해 자동차 업체들에 국내생산부품 비율을 높이라는 노골적 압력과 암묵적 압력을 동시에 넣어서 국내 자동차 부품산업 발점을 꾀한 것임.
- 제지공장으로 시작했지만 성장을 거듭해 한때 세계 휴대폰 산업을 리드한 전력이 있고, 이제는 네트워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생산의 주역이 된 노키아도 비슷한 성장역사를 거침. 60년 설립된 노키아의 전자부문이 이윤을 내기 시작한 것은 77년에 이르러서였고, 이미 안착해서 이윤을 내고 있던 노키아 그룹의 다른 기업들로부터 보조를 받는 한편 보호무역, 외국투자 규제, 공공조달 특혜 등의 도움을 받음
자국의 자유기업 체제에 대해 높은 긍지를 보이고 영웅적 기업가를 늘 칭송해 마지 않는 미국마저 현대경제에서 집단적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을 통해 발전한 나라다. 미국이야말로 유치산업론을 발명하고, 19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자국 어린 기업들이 성장할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보호주의 장벽을 높게 둘러쳐서 우월한 외국제조업체, 특히 영국 제조업체로부터 자국기업을 보호한 나라다.
- 주목해야 할 부분은 2차대전 이후 미국 정부가 기초 테크로롤지 개발에 공공자금을 동원해서 기업들을 도운 사실이다. 미정부는 국리보건원을 통해 제약 및 생명공학 연구를 진행하고 자금을 댔다. 컴퓨터, 반도체,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을 비롯한 정보화시대의 기초 기술이 미국 국방부와 군부의 국방연구를 통해 처음 개발됨. 이런 기술이 없었다면 IBM도, 인텔도, 애플도 없고 실리콘밸리도 없었을 것임.
- 개인의 비전으로 성공적 기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신화는 현대 경제학계의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자유시장경제학의 근간이 되고 있음. 자본주의 초기에는 어느 정도 가능했을 수도 있는 시나리오다. 생산규모가 작고 기술이 단순한 시절이었기 때문. 그런 환경에서는 뛰어난 개인기업가가 큰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사실 그 시절에도 기업이 성공하려면 그냥 뛰어난 개인만으로는 부족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규모가 큰 생산, 복잡한 기술, 국제규모의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19세기 말 이후의 환경에서 기업시 성공하기 위해서는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기업리더뿐 아니라 노동자, 엔지니어, 과학자, 전문경영인, 정부의 정책 입안자, 그리고 심지어 소비자의 노력까지 모두 포함됨.
한국과 이탈리아라는 국수에 집착하는 두 나라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를 살펴보면, 현대경제에서 기업은 더 이상 개인의 비전이나 노력만으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적 기업은 집단적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 맞물린 특허가 갑자기 새로운 문제로 등장한 것은 아님. 19세기 중반 재봉틀 산업의 기술적 진보를 마비시킨 것도 이 맞물린 특허문제였음. 당시 재봉틀 산업에서는 다들 특허권 침해로 서로를 고소하기 바빴다. 연관성이 매우 높은 기술들이 많아서였고, 이로 인해 기술발전이 가로막혀 있었음. 이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1856년에 고안된 것이 특허풀이었다. 재봉틀 산업분야의 기업들이 핵심기술에 대한 특허를 모두 공유해서 새로운 기술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온 이 조치를 재봉틀 콤비네이션이라고 함. 연관성이 강한 산업분야에서 특허 풀을 운용한 예를 많다. DVD의 부호화와 압축방식의 국제적 표준인 엠펙2, 휴대전화 전파 식별태그인 RFID 등이 그 예이다.
- 어떨 때는 정부 특히 미국정부가 개입해서 특허풀을 만들기도 했다. 1917년 공중전이 강화된 1차대전 참전준비를 하면서 미정부는 당시 2개의 최대 항공기 제조업체인 라이트와 커티스를 포함한 항공산업부문에서 특허풀을 만들 것을 권장했다. 60년대에는 이미 반도체 초기 연구에 거의 전적으로 돈을 댄 미 해군이 TI와 페어차일드 사이의 특허풀을 명령했다.
황금쌀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맞물린 특허의 문제는 최근 더 많은 종류의 지식, 심지어 유전자 수준까지 파고들어가는 지식이 특허로 보호받게 되면서 더 심각해지고 있음. 이제는 과학자가 중요한 기술적 진보를 일구어 내려면 변호사 부대가 선봉대로 나서서 특허 덤불을 헤쳐 나가며 길을 터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한때 기술혁신의 강력한 촉매가 되었던 특허제도가 이제는 큰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 자유무역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국경을 넘어 이루어지는 거래가 해당정부의 규제나 세금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자유무역 1기(19세기와 20세기초)에 자유무역은 거의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나라들, 다시 말해 식민주의와 불평등 조약 등으로 자국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박탈당한 나라들에서만 행해짐. 국가들 사이에 형식적 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인 현재의 자유무역 2기에서조차 자유무역은 모든 당사사에게 평등하게 혜택을 주지 못함. 국제무역 규칙이 강한 나라들에 의해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만들어지고 시행되고 있기 때문.
국제무역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이해하고, 자유라는 휘황찬란한 단어에 눈이 멀지 않을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무역처럼 논란의 여지 없이 모든 이에게 좋은 거라고 여겨지는 것을 두고 왜 그토록 많은 논쟁과 갈등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임.
- 요즘 미국을 비롯한 부자나라 사람들은 바나나 리퍼블릭을 의류 브랜드 이름으로만 알고 있음. 하지만 이 표현은 원래 부자나라 거대기업이 가난한 개도국을 거의 완전히 장악했던 어두운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 이 의류 브랜드 이름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지만, 굉장히 모욕적이고 불쾌하다. 커피 원두를 갈아주는 힙한 가게를 사탄의 공장이라 부르거나, 고급 선글라스 가게를 암흑의 대륙이라 부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사탄의 공장은 영국 산업혁명 초기에 노동자 착취가 심한 공장을 일컬은 말. 암흑의 대륙은 유럽인이 19세기이전 아프리카를 부르는 표현으로 유럽중심적 무지함이 배어 있다.)
- 결과적으로 다국적 기업이 진출한 나라에는 그 나라의 나머지 경제와 별도로 다국적 기업의 자회사들이 이른바 스크루드라이버 오퍼레이션이라 부르는 조립작업만 하는 방식으로 섬처럼 존재하는 엔클레이브 현상이 벌어짐. 지역기업들에는 거의 하청을 주지 않고 대부분 수입된 부품을 완제품으로 조립하기 위해 그 지역의 값싼 노동력만을 이용하는 것. 이런 경우에도 얼마간의 혜책이 있을 수 있지만, 다국적 기업의 진출로 인해 거둘 수 있는 진짜 혜택(고급기술 이전, 선진적 경영관행, 더 나은 기술을 노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습득하고 훈련받을 기회 등)의 대부분은 현실화되지 않음
엔클레이브 경제의 가장 대표적 사례가 필리핀. 필리핀은 어찌 보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하이테크 경제를 가진 나라다. 세계은행 자료에 의하면 필리핀은 제조업 수출품목의 60%가 전자제품으로 이루어진 하이테크 제품으로 전 세계 최고수준. 이렇게 하이테크인데도 불구하고 필리핀 1인당 소득은 3500불에 불과해 미국 6만불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3만불에도 못미침. 이는 필리핀에서 수출되는 대부분의 전자제품이 엔클레이브에서 스크루드라이버 오퍼레이션을 하는 다국적 기업의 자회사에서 생산되기 때문. 필리핀은 아마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되겠지만 개도국에서 활동하는 다국적 기업의 자회사들은 엔클레이브 안에서 스크루드라이버 오퍼레이션을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다.
- 부자나라들에서조차 신자유주의 정책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부자나라들에서는 시장의 힘을 제어하고 규제하는 데 정부가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던 혼합경제 시대보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기간에 성장률이 더 둔화하고 불평등이 더 늘어나는 한편 금융위기가 더 자주 발생했다.
그러나 개도국들에서 운용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재앙에 가까웠다. 이 정책들이 그들의 필요에 특히 더 맞지 않았기 때문. 무엇보다 개도국들이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보호무역, 보조금, 외국인 투자규제 등을 주도하는 정부의 지원과 보호아래 자국 생산자들이 성장을 해서 생산성이 더 높은 산업부문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신자유주의 전통에서는 완전히 부인하기 때문.
- 좌파는 모든 사람에게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 그래서 개인마다 다른 필요와 역량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함. 반면 우파는 기회의 평등으로 충분하다고 생각. 그래서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개인간의 역량이 어느정도는 균등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함. 이것은 부모세대가 상당한 정도로 결과의 평등을 누려야 가능한데, 그렇게 되려면 소득을 재분배하고, 모든 사람에게 양질의 기초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을 규제해야한다.
채식주의자에게 닭고기 기내식을 주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하는 항공사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승객들의 여러가지 취향과 필요를 모두 맞추어 주는 다양한 기내식을 제공하지만 표가 너무 비싸서 극소수만 이용할 수 있는 항공사 또한 원치 않는다.
- 탈산업 사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스위스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 정도가 높은 나라로, 1인당 제조업 생산량 세계 1위다. 메이드인스위스라 적힌 상품이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은 부분적으로 스위스가 작은 나라여서이기도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생산재라 부르는 기계, 정밀장비, 산업용 화학물질 등 우리 같은 일반 소비자가 접할 수 없는 물건들을 주로 생산하기 때문. 이른바 탈산업사회의 성공담으로 꼽히는 또 다른 나라인 싱가폴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산업화된 국가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스위스 성공의 비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은행이나 고급관광상품이 아니라 세계 최강의 제조업 부문이다. 사실 초콜릿 분야에서 쌓은 높은 명성마자 제조업 부문의 혁신(분유발명, 밀크 초콜릿 탄생, 콘칭 기법 개발 등)에서 기인한 것이지 초콜릿바를 사는 데 은행이 복잡한 할부구매법을 제시하거나 광고회사가 멋진 광고를 하는 식의 서비스 산업 덕부닝 아니다.
스위스가 뜻하지 않게 롤 모델로 제시되는 탈산업사회 담론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고, 최악의 경우 실물경제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그 주장을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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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담긴 지혜를 현대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책이다. 군주론은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로, 수세기 동안 정치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이 책에서는 군주론을 대표하는 42개 명제를 선정하여, 이를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베르나르도 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494년에 메디치 가문이 몰락할 무렵 공직에 입신하여 피렌체의 공화국 10인 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었으며, 외교 사절로서 신성 로마 제국 등 여러 외국 군주에게 사절로 파견되면서 독자적인 정치적 견해를 구축하였다. 그는 1498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의 서기장을 역임했다.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나, 1512년 스페인의 침공으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지배권을 회복하면서 공직에서 추방되어 독서와 글을 쓰며 지냈다. 이때 그는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바치는 〈군주론〉을 저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1513년 발표한 이 <군주론>에서 위대한 군주와 강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더라도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행동에는 종교 및 도덕의 요소를 첨가할 것이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일찍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하나의 명제를 중심으로 사례를 먼저 제시한 후, 마키아벨리의 명제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준다. 명제의 실제적 의미를 체감하게 한 후, 이어서 그 명제에 대한 심층적 해석을 제공한다. 해석 부분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철학적 배경과 함께, 해당 명제가 군주론에서 어떤 맥락을 가지며, 그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설명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명제의 깊은 의미를 더 잘 이해하고,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을 통해 자유롭게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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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아무런 이득도 안되는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인류가 현재처럼 화폐를 사용해 물건을 교환하기 전에는 주고 받는것, 다시말해 증여를 통해 필요한 물건을 조달해왔기 때문.
부족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먹을 것부터 재산, 토지가지 부족간, 씨족간에 주고 받았다. 이런 경제를 증여경제라 함. 물론 증여뿐 아니라 매매나 자급, 재분배도 오래전부터 이루어졌지만 증여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 증여는 단순히 물건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답례의 의무가 있다. 이렇게 선물하고 답례하기를 반복함으로써 사람들은 유대를 돈독히 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
이 증여정신은 지금도 우리 안에 존재함. 이것은 자본주의보다 훨씬 뿌리 깊고 보편적인 인간세계의 기반임
증여는 물건이나 돈을 주는 것을 가리키지만 편지 주고받기, 품앗이, 초대, 보살핌같이 증여로 간주하지 않는 행위도 같은 구조임. 이런 상호작용 전반을 호혜라고 함. 물건이나 돈의 증여와 답례는 이 호혜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다.
- 증여경제라고 하면 모든 사람이 타인을 배려하는 꿈같은 사회를 떠올리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오늘날의 증여도 뇌물의 의미로 주거나 자기 과시를 위해 주는 등, 자기자을 위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 증여 그 자체만으로는 이타적 선행이라 단정할 수 없음.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라는 연회는 그것을 여실히 보여줌. 부족의 수장이 손님을 초대해 개최하는 이 연회는, 상대가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의 선물을 해서 상대의 체면을 짓밟는 장대한 허세싸움. 이를 위해 때로는 귀중한 재산을 눈앞에서 불태우거나 부수고, 노예를 죽이기도 했다. 증여는 지금도 그런 측면을 갖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성선설 따위를 무턱대고 강조하면 본질을 흐린다. 다만 아무리 부정적 측면이 있다해도 선물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물건이나 돈을 내놓는 행위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선물은 오지랖이 넓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넓은 것이다. 세상의 기본이 되는 원리로서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이득이 되지 않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하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매력적.
- 서양에서는 버려진 음식물을 일반인이 수거하기 좋은 환경이 갖춰져 있다. 수확하고 남은 농작물이나 과일을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농장에 가져가도록 하는 유럽의 이삭줍기 전통고 그중 하나. 이삭줍기라고는 해도 떨어진 이삭만 줍는 것은 아님. 유럽에서는 중세부터 근세까지 수확이 끝난 농지나 과수원을 마을의 노인, 과부, 고아, 병자들에게 개방해 남겨진 농작물을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했다. 밀레의 이삭줍기에 그려진 것은 그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지역 가난한 사람들이다.
구약성서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마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마라.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먹도록 남겨놓아라."
- 화폐가 생겨났다고 반드시 금전제일주의 사회로 곧장 향하는 것은 아님. 일보에서는 와도카이친이 만들어졌지만 그후 점점 화폐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쌀이나 비단에 의한 교환이 주를 이룸. 또 도시지역에서 돈을 활발하게 사용해도 사회 전체가 그것을 따르지는 않았다. 에도 시대 농촌지역에 관해서는 화폐가 침투해 특산품 같은 상품생산이 활발해졌다는 것만이 강조되지만, 그래도 주료는 자급자족과 현물경제였다. 물론 조세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이 기본. 다시 말해 돈은 훗날 나타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수적 존재지만, 돈의 등장이 자본주의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님.
- 시장 또는 화폐의 발생이 반드시 원시사회의 경제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19세기의 신화, 즉 화폐의 출현이 시장을 창출하고 분업화의 속도를 급격히 끌어올려 인간이 본디 갖고 있는 거래, 교역, 교환 성향을 개방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사회를 전환시켰다는 주장을 완전히 뒤집는다. (칼 폴라니)
- 이익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경제활동이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함.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물질만능주의는 먼 예살부터 곳곳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매매의 대상이 되는 물건은 상품이라고 하는데, 상품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이익제일주의는 더 멀리 퍼져나감.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이익을 우선하지 않는 것을 예외로 취급하게 된 산업혁명 이후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간주됨. 산업혁명은 18세기유럽에서 시작된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갔으므로 이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도 이 시기 이후에 세계로 번졌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가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 현물경제와 자급자족이 생활의 기본이었던 농촌에서도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어 돈으로 조세를 납부하게 되면서 돈의 중요성이 훨씬 커짐. 물론 지금도 자급자족적으로 생활하는 농가는 존재하지만, 지극히 예외적 현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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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고유전체 자료는 북방계 또한 원래 남쪽에서 출발한 집단임을 시사함. 남쪽에서 올라와 북방에 정착한 사람들이 다시 남진하여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것. 결국 한반도로의 주된 이주의 흐름이 모두 남쪽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셈인데, 이는 알타이산맥 인근에서 몽골을 거쳐 만주로 동진한 집단을 북방계로 본 과거의 추론과는 다르다. 실제 한국인과 몽골인은 유전적으로 꽤 차이가 난다. 한국인은 몽골인보다는 일본인, 그리고 만주족과 같은 중국 북동부 사람들과 가까움.
- 한반도의 농경민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2000년대 초 중국 우익학자들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황허강 문명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황허강 동북쪽에 위치한 랴오허강 유역의 문명에 주목. 당시 국내 사학자들은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중국 학자들의 그런 행동이 동북공정의 일환임을 인지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국은 랴오허 문명을 황허문명 앞에 내세우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우기고 싶었던 것. 만주에 위치한 랴오허 유역이 중국의 핵심 문명지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으면 이런 주장을 하기 더 쉬워짐
그런데 랴오허 문명의 중심인 홍산문화나 샤자뎬 문화를 일궜던 고대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현대인은 한국인이다. 고인골 유전자 자료는 한족보다 한반도인이 랴오허 문명의 주축이었음을 암시. 물론 이는 중국 학계가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동북아 초기 농경민은 한반도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고립도가 높았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평지가 좁기 때문. 그러나 기후변화가 이어지면서 이들은 기존의 선입견을 버리고 진취적 생각으로 무장해야 했다. 기후변화로 5000년 전 이후 동북아 지역은 시간이 흐를수록 건조해지고 한랭해졌으므로 북방민들, 특히 랴오시와 랴오둥 지역 사람들은 농경에 좀더 적합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로 꾸준히 내려왔다. 그중 일부는 일본까지 건너갔다. 일종의 기후난민이었던 셈이다.
-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호모 사피엔스가 대략 4만년전 동아시아에 도착. 이때는 농경이 시작되기 전이다. 수렵채집민 집단은 어로와 사냥이 용이한 초원지대를 거주지로 선호.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가장자리인데다 대부분이 산지여서 그리 인기있는 곳이 아니었음. 하지만 추위가 극심해지자 분위기는 반전됨. 2만 5000년 전 이후 기온이 떨어지면서 많은 북방민이 한반도로 들어옴. 이들은 빙하기가 막판에 다다르면서 기온이 오르자 이번에는 초지를 찾아 북방으로 되돌아감. 홀로세 들면서 한반도는 더욱 온난해짐. 인구는 많지 않았다. 그러다 8200년전 갑자기 추위가 엄습하자 아무르강 하류의 수렵채집민 집단이 추위를 피해 대거 남쪽으로 이동. 홀로세의 양호한 기후로 아무르강 인구가 늘던 와중에 갑작스레 찾아온 저온현상이 식량위기를 불러온 것. 이 한랭기는 200년 가량 지속되다 끝났고, 곧이어 온난하고 습윤했던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찾아옴. 기후가 좋아지며 동식물 개체수는 늘어남. 먹을거리가 풍족해지자 수렵채집민 인구도 증가.
그러나 홀로세 후반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지 동북아 전역에서 다시 이주물결이 거세게 일어남. 4800년전 이후 한반도와 주변 지역 기후는 주기적으로 한랭건조해지는 경향을 보임. 주로 열대 서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떨어지고 흑점수가 감소할 때 그러했다. 기온이 내려가고 가뭄이 닥칠때면 더 나은 땅을 찾아 움직이는 이주민의 거대한 흐름이 생김. 이들의 이동은 보통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남부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넘어가는 경로를 따랐다. 홀로세 후반, 3000년전, 2000년전, 1000년전 등 대략 1000년마다 나타난 온난기에는 동북아 각 지역사회가 번영을 구가. 식량사정이 양호했으므로 내부갈등은 미미했다. 외부인의 유입도 적어 사회는 안정적으로 유지됨. 그러나 그 사이사이 상대적윽로 추웠던 시기에는 북쪽에서 이주민이 내려오면서 한반도 사회는 큰 혼란을 겪음.
- 북방민이 남하할 때마다 한반도 남부사회는 대내외적인 갈등에 휩싸였지만 동시에 이들이 전해주는 선진문물 덕에 지역이 발전하는 순기능 또한 적지 않게 누릴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중기 청동기 저온기(3800-3400년전)에는 벼 농경 문화가, 철기 저온기(2800-2300년전)에는 동검문화와 아마도 원시 한국어가, 중세 저온기(1900-1200년전)에는 철기 기마문화가 한반도 남부에 처음 전파됨. 이런 신문물은 한반도 부족사회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춰 나가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
이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음. 한반도에서 전해진 선진문물 덕에 일본은 고유의 독특한 문화를 일굴 수 있었다. 철기 저온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벼 농경문화와 원시 일본어를 전했고 야요이 문화를 창출. 중세 저온기에 마한, 가야, 백제 등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고훈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열며 야마토 문화를 주도. 가야인들은 고훈 시대에 철기기술을 전파했고, 백제인들은 건축, 학문, 예술, 제도,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아스카 시대의 문화발전을 도왔다.
애초에 호모 사피엔스는 왜 아프리카를 빠져나왔을까? 무엇보다 호모 속 장체가 다른 동물에 비해 행동반경이 월등히 넓다. 호모는 진화의 결고로 몸의 털이 사라지고 땀을 통해 체온을 조절하면서 장거리 이동이 가능해졌다. 이들은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 동물이 지칠때까지 쫓아다니는 사냥전략을 즐겨 사용.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빠져나온 종이 호모 에렉투스다. 유라시아로 진입한 호모 에렉투스가 저 멀리 인도네시아까지 도달한 것만 봐도 호모의 이동능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얼마나 특출난지 알 수 있음. 이후 70만년 전에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감. 유라시아로 이동한 하이델베르겐시스로부터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나옴. 한편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 어물러 있던 하이델케르겐시스에서 분기했다.
호모 사피엔스 또한 호모 에렉투스와 같이 호기심이 많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종이었다. 대략 13만년 전에 마지막 간빙기인 이미안 간빙기가 지구에 도래하면서 아프리카는 습윤해졌고 사하라 사막 면적은 축소됨. 사막이 초지로 변하자 동아프리카의 사피엔스는 새로 생겨난 초원길을 따라 이동하여 북쪽의 시나이 반도 부근 그리고 남쪽의 바브엘만데프 해협에 도착. 당시 해수면은 빠르게 상승중이었으나 홍해 남북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은 여전히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들은 쉽게 아프리카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세차운동으로 대력 2만-2만 5000년 주기로 기후가 습윤해질 때마다 새로운 사피엔스 집단이 초원길을 따라 아프리카를 빠져나감
- 기후변화의 리듬에 따라 다양한 사피엔스 집단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에 진출. 그러나 7만 4000년 전 엄청난 규모의 화산폭발로 기온이 떨어지자 지구상의 사피엔스 수는 급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있던 대형 화산 토바가 폭발한 것. 사피엔스뿐 아니라 다른 구인류들도 큰 피래를 봄. 이후 대략 6만년 전에 상대적으로 화산폭발의 영향을 덜 받았던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사피엔스 집단이 다시 빠져나와 유라시아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그 과정에서 멸종됨. 이 경쟁에서 승리한 사피엔스 집단이 지금 현생인류의 직접적 조상이다.
- 동쪽으로 이동한 집단의 석기문화가 상대적으로 뒤처졌는지 몰라도 이 집단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음. 이들은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면서 동남아와 오세아니아에 자리잡고 있던 선배 사피엔스와 데니소바인 집단을 무력화하며 빠른 속도로 퍼져나감. 농경민과 달리 수렵채집민들에게는 노예가 필요없다. 이동에 방해만 된다. 그들을 살려두면 언제 반격을 가할지 모르는 다른 계통의 수렵채집민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며 전진했다.
- 순다랜드에서 사훌랜드로 건너온 사피엔스가 바다를 건너는 대모험에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유전자 확산 측면에서 보면 이는 패착에 가까웠다. 동쪽으로 이동하여 순다랜드에 도착한 무리 중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올라갔던 사피엔스가 결국 넓은 동아시아 전체를 장악했기 때문. 빙기라는 차가운 시기에 따뜻한 곳이 아닌 추운 곳을 택한 선택이 오히려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 것. 생존이 힘든 환경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혁신을 거듭해야 함. 반면 남쪽으로 내려간 무리는 태평양 연안과 좁은 섬에서 고립되었기에 세력을 넓히고 싶어도 한계가 있었다. 열대의 안락한 환경 속에서 안정적 삶을 영위하다 보니 변화에 대한 이들의 적응력은 차츰 무뎌짐
순다랜드 북부에서 북쪽을 향해 전진한 사피엔스 무리는 동아시아 곳곳에 자리잡은 후 점차 분화됨. 과거 동아시아에서 분기된 여러 무리 가운데 한반도인의 형성과장에서 유전적으로 크게 기여한 몇몇 집단이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티안유안, 조몬, 아무르강 집단이, 신석기 시대에는 아무르강, 랴오허강, 황허강, 양쯔강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 다지역 기원설은 아프리카 기원설가 대척점에 있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주로 유전학자가 주장하는 반면, 다지역 기원설은 고인골 형태를 연구하는 형질인류학자가 지지. 다지역기원설 옹호자들은 호모에렉투스가 대략 200만년 전에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전 세계로 퍼져나간 후 각기 다른 지역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개별진화했다고 주장. 그리고 그 이후 각 지역의 사피엔스들이 활발하게 교잡하여 유전적으로 균질한 지금의 인류가 출현했다고 봄.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과도 교잡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지역기원설 역시 재고할 가치는 있다. 이 두 구인류를 기원이 다른, 즉 아프리카 기원과 관계가 없는 또 다른 호모사피엔스로도 볼 수 있기 때문.
- 농경은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풍족함이 그 배경이었을까? 농경은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인류가 성공한 최초의 혁신이라 일컬어짐. 농경은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게까지 뒤흔든 대변화였음. 여유로움 속에서 해도 안 해도 그만인 몇차례의 실험만으로 그 어려운 혁신이 완성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인과관계를 정확히 알 방도는 없음. 그러나 반드시 성공해야 하다는 절박함이 농경문화의 창출로 이어졌으르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단어가 주는 느낌과 달리 혁신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함.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축적된 상태에서 새로운 사고가 방아쇠를 당길 때 혁신이 일어남. 근동의 나투프인들은 뵐링-알레뢰드기의 풍요로움 덕에 정착생활을 즐겼고, 초기 농경과 관련된 다양한 지식을 체득. 이런 지식은 먼 훗날까지 면면히 이어짐. 그러나 대부분 파편화되어 수천년 동안 영향력이 낮은 단순정보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기후변화의 곤경에 처한 인류가 생존을 갈구하다가 그때까지 전해져 내려오던 단편적 지식을 모아 폭발력 있는 혁신을 이끌었다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 한반도에서는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7600-4800년 전에 도래. 북반구 여러지역에서 초기문명들이 나타나 발전하던 시기와 엇비슷함. 기후가 온난 습윤해지자 전체 산림 면적인 이전 시기에 비해 늘어났고, 나무의 밀도도 높아짐. 최적기의 기후가 뚜렷한 변동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한반도 생태계의 극상종인 참나무 비중이 증가. 대신 교란이 잦은 조건에서 경쟁력을 가진 소나무와 풀은 감소. 온난습윤한 환경 속에서 도토리와 같은 열매, 야생동물, 어패류 등 먹을거리가 풍부해지자 수렵채집민의 이동반경은 줄어듬. 한반도에서는 대략 5500년 전부터 정착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
최적기에는 전체적으로 온난습윤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초기 문명이 발생하고 인구가 늘어남.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나는 순간부터 여러 사회가 뚜렷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이다. 흥성하던 문명과 집단이 갑작스러운 쇠락을 겪고 사회 구성원들이 대규모로 이동하기 시작. 빈번한 이주는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소멸한 기존문화를 대신해 새로운 문화가 들어섬. 중국 양사오 문명화 훙산 문명이 모두 이때 무너짐. 메소포타미아의 우르크가 약해지고 얌나야 유목민이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을 진격하여 농경사회를 제압한 시기도 이때다. 최적기가 끝나고 나타난 기후 악화가 이런 사회변동의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큼. 물론 인구증가, 내부갈등, 전염병, 전쟁 등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사회의 혼란과 이주를 초래한 여러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이와 같은 문제들은 늘 급격한 기후변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 홀로세 후기 기후변동은 대략 500년 주기로 나타났는데, 주기가 항상 500년으로 일정했던 것은 아님. 대략 400-600년까지 차이를 보임. 이유는 홀로ㅗ세 후기의 기후변화를 주도한 것은 저위도 태평양의 해수흐름으로, 이 흐름은 500년 주기의 태양활동이 조절했다. 그런데 여기에 태양활동과는 관계없는, 즉 화산활동, 온실가스, 피드백 등 다른 요인들이 추가로 영향을 미침. 200년의 차이는 이런 연유에서 비롯됨.
약 4600-4700년 전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났고, 약 4200-3900년 전에 전 세계 여러 문명이 동시에 무너짐. 약 3700년 전에는 전차를 보유한 힉소스의 남진으로 이집트 중왕국이 멸망했고, 약 3200년 전에는 해양민족의 침략으로 지중해 동부 청동기 문화가 붕괴. 약 2800-2700년에는 4.2ka 이벤트에 버금가는 기후변동이 발생해 중국이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으로 빠져듬. 약 2300년 전에는 한반도에서 벼농경 문화가 크게 쇠락하였고, 약 1700년 전에는 중국의 한나라가 멸망하고 위촉오 삼국시대의 격변기로 접어듬.
이어 약 1200년 전에는 멕시코 중부 고지대의 테오티우아칸 문명이 가뭄에 큰 타격을 입었고, 약 600년 전에는 유라시아에 흑사병이 돌아 1억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 가장 최근인 150년 전에는 흑점수가 감소하여 북반구 전역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 홀로세 후기에 400-600년 주기로 기후가 악화된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개개의 역사적 사건에 당시 기후변화가 어느 정도로 기여했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려움. 기후변화의 영향력이 컸던 사건도 미미했던 사건도 있을 것임. 어쨌든 기후가 변했을 때 사회변동이 일어났다면 기후변화의 영향을 깊이 있게 실펴보는 것이 맞다. 기후변화가 사회변동을 촉발한 방아쇠였을 수도 있고 사회변동의 속도를 높인 박차였을 수도 있다. 혹은 이미 다른 내부요인으로 무너져가던 사회에 기후변화가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일 수도 있다.
- 유럽, 인더스계곡, 페르시아, 동북아 등 북반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집단이 이동하고 섞이는 과정은 엇비슷했다. 마지막 빙기말 수렵채집민들이 지구 대부분의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감. 추운 빙기가 끝나고 온난한 홀로세로 접어들며 농경이 시작되었고 인구는 증가. 인구압박에 못이긴 농경민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만난 수렵채집민을 인구수를 앞세워 제암. 한편 내륙의 건조한 초원으로 이동한 농경민은 작물재배를 포기하고 유목생활에 집중. 말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유목민은 기후가 나빠져 먹을 것이 부족할 때마다 기동성을 살려 정주사회를 공략하고 무너드림. 점령지에서 유목민은 정주민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고 유목문화는 점차 위력을 잃어감. 이 일련의 과정에서 수렵채집민, 정주농경민, 유목민의 유전자는 복잡하게 섞임.
- 최적기의 따뜻한 기후와 참나무 원시림은 한반도의 수렵채집사회가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수렵채집민들은 도토리와 같은 열매나 야생동물, 어패류 등을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과거와 달리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멀리 움직일 필요가 없다보니 이들의 이동반경은 지속해서 감소하였고, 결국 해안이나 하천을 중심으로 정주하는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 한반도의 탄소연대자료를 모아 시기별 주거지수를 추정한 연구결과는 대략 5700-5500년전부터 인구가 증가하고 정착 수렵채집민의 수가 증가했음을 잘 보여줌
이 때는 북방의 랴오허 유역이나 랴오둥반도에서 한반도로 조, 기장 농경ㅁ누화가 처음 전파된 시기와 가까움. 최적기의 온화한 기후 덕에 정주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수렵채집민 중 일부가 남들보다 먼저 농경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음. 먹을 거리는 풍부했으므로 실패에 대한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조, 기장, 팥, 콩 등 초기농경은 들이는 시간에 비해 얻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야생 먹거리가 부족할 때 보조생계수단으로 요긴했음. 농경이 시작된 후에도 주거지 수가 크게 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최적기에 조나 기장재배가 본격적인 농경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임. 그러나 농경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더해지며 수렵채집민의 삶이 더욱 풍족해졌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
- 최적기가 끝나고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기온과 강수량이 차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 주기적으로 한랭기가 닥칠 때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연쇄적 난민 행렬이 이어졌고 한반도로도 외지인이 들이닥침. 외부 이주민들은 갈등과 혼란을 가져오면서 기존사회의 기반을 약화하는 주범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농경, 야금, 토기제작, 직조술 등 북방 선진문화 또한 전해주었기 때문에 한반도 사회가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됨.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벼 농경이라는 신문물이 도입되어 인구가 급성장하는 때. 다른 한편으로 기후의 전반적 악화로 잦은 이주와 사회갈등으로 점철된 시기이기도 함.
- 북방의 농경집단은 농경뿐 아니라 목축과 수렵채집을 함께 영위하며 제너럴리스트의 삶을 살았다. 저위도에 비해 생산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북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계방식이 요구되었기 때문. 계절별로 기온차이가 무척 큰 대륙성 기후는 적응력과 기동성이 떨어지는 집단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거친 북방땅에서 경쟁력이 처지는 집단은 따뜻한 남쪽 땅을 끊임없이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기후가 악화될 때면 여지없이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쪽에 내려와서는 농경에 집중하면서 제너럴리스트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스페셜리스트의 삶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갔다.
북에서 밀려내려오는 사람들로 한반도의 인구밀도는 차츰 높아짐. 특히 기후가 출렁거릴 때 북방의 이주물결은 세차게 몰려왔고 인구의 섞임은 반복됨. 동시에 제너럴리스트 집단이 엄혹한 북방 땅에서 생존을 위해 일군 여러 혁신 문물이 빠짐없이 남쪽 한반도로 전해짐. 작물, 언어, 말, 금속 등과 관련된 문화는 모두 북에서 비롯하여 한반도로 내려왔고 바다 넘어 일본까지 건너갔다. 북방의 문화는 밝은 햇살이 가득한 남쪽 당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꽃을 피웠다. 차가운 북방문화의 잠재력이 온화한 남방에서 폭발한 것이다. 기후 변화에서 비롯된 인간집단과 문물의 이동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왕조들이 중국 왕조에 크게 뒤지지 않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구축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었다.
- 얌나야 집단에서 시작된 유목문화는 서유라시아에서 히타이트와 스키타이로 이어짐. 이들은 유목민의 장점인 제련술과 기마술을 발판으로 철기 기마민족의 정체성을 발전시킴.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난 4900년 전 이후 사방으로 확장한 얌나야, 3700년전경부터 나타난 중기 청동기 저온기에폰틱-카스피해 초원에서 남하하여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히타이트, 2800년 전경부터 시작된 철기 저온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스키타이는 모두 광활한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다 기후변화에 자극받아 따뜻하고 물이 풍부한 지역을 찾아 이동했다. 얌나야, 히타이트, 스키타이. 대략 1000년 간격으로 출몰하여 유럽과 중동의 정착민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유라시아 기마민족은 이후에도 1000년을 주기로 살벌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1600년 전에 나타난 훈족과 700년 전에 나타난 몽골족이 그들이다.
-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붕괴한 후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250년까지 매서운 추위가 이어짐(2.3ka) 주나라가 멸망한 후 치열한 경쟁끝에 살아남은 진, 조, 위, 한, 제, 연, 초의 전국칠웅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쟁을 거듭하였다. 이른바 전국시대라 불리는 시기. 보통 기후여건이 나빠져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면 내부의 불만화 갈등이 폭증하게 마련. 왕권에 대한 욕심도 있었겠지만 일곱나라 모두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고 내부의 분열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들 가운데 중국 동북부에 터를 잡고 중원 이남 여섯나라와 세를 겨루던 연나라는 배후의 고조선이 항상 꺼림직했다. 고조선은 요동뿐 아니라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점유한 강성한 국가였고 당시 인접국인 제나라와도 외교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나라 입장에서는 입의 가시같은 존재였다.
연나라는 기원전 315-312년 전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망국의 위험에 처한 적이 있어 제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제나라와 제대로 붙어 싸우려면 일단 후방의 군사적 위협부터 제거해야 했다.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전쟁으로 발발연대를 기원전 300-290년 정도로 봄. 연나라는 고조선을 침공하여 제압하는 데 성공. 고조선의 전력으로는 당시 진개라는 걸출한 장수가 이끈 연나라 군에 맞서 싸우기에 역부족. 더구나 연나라는 수년 전 고조선 동북쪽 동호와의 전쟁에서도 이미 승리를 거둬 사기가 높은 상태였음. 고조선은 이때의 패배로 세력이 위축되어 한반도 서북부로 쫓겨났고 동시에 다수의 유민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남쪽 지방에서 부족사회를 이루게 됨.
- 철기 저온기 내내 북방민이 추위와 갈등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한반도 남부에서는 외부인과 토착민의 갈등이 끊이지 않음.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인구는 쉬이 늘지 않았다. 500-600년 간 이어지던 추위가 마침내 끝나고 20200년전부터 기온이 회복되는 추세를 보임. 무엇보다 강수량의 증가가 뚜렷했다. 철기 저온기 내내 감소하던 강수량은 2200년 전을 기점으로 방향을 바꿔 상승하기 시작.
2200년 전에서 200년간 비교적 높은 기온이 유지되면서 한반도 사회는 안정을 되찾는 것으로 보임. 하지만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이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을 배신하고 난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하는 일이 벌어짐. 위만에 밀린 준왕은 바다를 통해 전북 익산지역까지 내려옴. 만경강 유역에 터를 잡고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여 선진문물을 전파. 계층은 분화되고 권력은 집중되었다. 기후 여건 또한 이전에 비해 한결 나아졌기 때문에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
- 한반도에서 전반적으로 기온이 떨어지던 기원 원녕르 전후한 시기와 3세기경 북방에서 소규모 집단들이 남부로 이주하기 시작. 고구려 유민 온조세력은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한강 하류에 자리잡고 위례성을 축조. 또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후 42년경 경남 김해에 일군의 사람들이 도착하여 김수로를 왕으로 옹립하고 금관가야를 세움. 온조집단과 김수로 집단 모두 북방의 선진문물을 앞세워 토착세력을 누르고 어르면서 지역의 지배권을 거머쥐었을 것임. 당시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토착민들은 이전에 내려와 정착한 고조선 유민들의 후손들로 보임. 북방에서 내려오는 이들은 농경이나 전쟁에 유용한 최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토착민과의 경쟁에서 남해안을 중심으로 패총이 확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당시 기온하강으로 농업생산성이 낮아지자 먹을 것을 찾아 내륙에서 해안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기후 여건이 좋지 않을 때는 날씨에 민감한 농사에 매달리기보다 해안가에서 어로나 채집활동 비중을 높여야 먹을 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 문화는 전성기를 향해 달리고 인구는 눈에 띄게 불어났다. 주변 환경이 심하게 교란되며 생태계 회복력이 떨어진다. 이때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의 기후변화가 갑작스레 나타나면, 이동이 쉽지 않은 정착민 집단은 유목민이나 수렵채집민들보다 훨씬 타격이 크다. 기후변화는 곧 식량위기로 이어지고 굶주림은 면역력을 저하시킨다. 집단에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인구가 급감. 인구감소로 사회활력이 급속히 떨어진다. 세금이 걷히지 않으니 사회 안전망이 무너지며 지배층에 대한 불신은 팽배해짐. 물자가 부족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의 것을 약탈하는 제로섬 싸움이 만연. 내부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민란이 연이어 발생함. 마지막까지 버티던 사람들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을 등지고 끝내 떠나고 만다. 예전의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이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땅으로 변한다. 문화가 발달하고 쇠락하는 과정은 지역을 막론하고 유사함. 이는 인간행동양식의 단일성을 보여준다.
지배층이 통찰력과 정치적 감각을 가졌다면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사전에 계획하고 움직이고자 할 것이다. 이때 가장 손쉽게 택하는 방안은 침략이다. 기후변화가 식량위기로 번질 조짐이 보이면 아마 전쟁을 서둘렀을 것이다. 이웃나라로 쳐들어가 우선 부족한 물자부터 확보해야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전에 불씨를 잠재울 수 있다. 과감한 계획이 성공을 거둔다면 위기는 곧 기회로 이어짐. 지배층은 탄탄한 지지를 발판으로 자신의 나라를 강고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전쟁을 통해 국세를 확장하려는 원대한 뜻을 품게 된다.
- 기후변화는 더 나은 땅을 쫓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내부갈등을 일으키며 외부세력과의 전쟁을 유도. 홀로세기후 최적기가 끝난 후 동아시아 각 지역사회는 잦은 기후변화에 시달림. 농경이 집약적으로 이뤄지기 전, 기후가 변화하는 조짐이 보일 때문 수렵채집민이나 유목민뿐 아니라 정주 농경민 역시 과감하게 이주를 감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작물생산량과 노동투입의 선순환으로 농경사회 규모가 확대되자 위기가 빤히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정주민들은 이주를 주저하였다. 기후변화의 충격은 배가될 수 밖에 없었다. 자원을 두고 벌이는 외부집단과의 경쟁은 가열되었고 계층간 내부갈등은 심화됨. 정주생활이 시작된 후 기후위기에 힘겹게 버티는 시간만 조금 늘어났을 뿐 결국엔 역부족이라는 현실을 실감하고 이내 새땅을 찾아 움직이는 일이 반복됨. 지역 부족들이 뭉치고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국가들이 나타나자 기후 변화의 여파는 사람들의 이주로 마무리되지 않았음. 대부분 큰 전쟁으로이어졌다. 전쟁의 패잔병과 난민은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곳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동아시아에 호모 사피엔스가 들어오기 시작한 4만년 전부터 고구려가 남진을 거듭하던 대략 1500년전까지 한반도에서 이주의 물결이 멈춘적은 거의 없다. 그 대부분은 기후변화와 식량위기가 어둡게 그늘을 드리운 곳에서부터 시작.
- 약 8200년전 추위를 피해 아무르강 유역에서 내려온 수렵채집민 집단, 중기 청동기 저온기와 약 3200년 전 산둥, 랴오둥, 랴오시 등에서 이주한 농경민 집단, 철기 저온기에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남하한 점토대토기 문화집단, 중세 저온기에 북방에서 내려온 고조선과 부여 유민이 혼합하여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짐. 여기에 조금 더 덧붙이면 8200년전 아무르강 수렵채집민이 내려올 당시 한반도에는 만빙기 때 북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은 토착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한반도 남부에는 조몬 수렵채집민도 살고 있었다. 홀로세 기후최적기에는 랴오시 지역에서 소규모의 기장 농경민이 한반도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음. 특히 중세 저온기 초반부에 내려온 고저선과 부여의 유민이 현대 한국인에 유전적으로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됨. 고조선의 준왕세력, 황허강 집단의 유전성분이 높은 위만조선의 유민, 선비족과 고구려에밀린 부여 유민이 꾸준히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며 기존의 삼한사람과 섞임. 물론 이외 수많은 인적 이동이 과거 한반도인의 형성에 관여했을 것임.
대부분 중요한 이주는 한랭화가 진행될 때 발생. 그러나 기후변화와 관계없이 움직인 소규모 무리도 분명 존재했을 것임. 기온이 떨어지는데 오히려 북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기온이 온화한 시기임에도 다른 땅을 찾아 더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임.
- 온난화가 계속 이어진다면 결국 지구는 티핑포인트를 넘어 과거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기후조건인 초간빙기로 들어설 것임. 그후 상황은 예측하기 어렵다.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태계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인류의 인구는 큰 폭으로 감소. 생존한 사람들은 고온과 가뭄을 이겨낸 적응력 높은 동물과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함. 저위도 사람들은 중위로로, 중위도 사람들은 갈등을 피해 고위도로 이동하는 도미노같은 이주와 갈등이 이어짐. 저위도의 가난한 나라들은 기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이곳은 곤충이나 파충류의 땅이 될 것임. 본격적을 초간빙기로 향하며 기온이 빠르게 높아지고,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고위도 일부 지역으로 제한됨. 하지만 인류는 이 흐름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 끔찍하지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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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자와 패자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님. 알프레드 마셜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소득이 올라가기 때문에 아무리 교육을 잘 받아도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보통 수준의 유화가 이렇게 싸게 팔렸던 적도, 일류 화가의 그림이 이렇게 비싸게 팔린 적도 없었다"고 했다.
오늘날에는 이런 현상이 널리 퍼져 최고 실력자들이 받는 보상이 엄청난 금액이 됨. 이로 인해 현대산업경제는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아마도 이런 왜국 현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신호가 직업선택에 미치는 영향일 것이다.
- 부정확한 정보에 기반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당연. 그런데 자신의 성공가능성을 정확하게 평가할 때조차도 많은 사람이 무리하게 이 시장에 뛰어든다. 이런 현상은 과도한 환경오염이 발생하는 원인과 비슷. 예를 들어 에어컨을 살지 말지를 결정할 때 사람들은 에어컨을 사서 얻는 편익을 에어컨 운용 비용과 비교한다. 개별 소비자의 입장에서 에어컨 운용비용은 전기요금이다. 그러나 에어컨을 가동시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가비용을 부담시키게 됨. 에어컨을 많이 사용할수록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대기는 더욱 오염됨. 정부의 규제가 없다면 개인은 추가비용을 무시할 수 있으며 대부분 그렇게 한다. 즉, 사람들이 경제적 동기로만 움직인다면 우리는 점차 오염된 공기를 흡입하게 될 것임.
- 작가들이 홍보여행에 나서고 운동선수들이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는 동기는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들이 군비경쟁에 돌입하는 동기와 비슷. 만일 경쟁국은 가만히 있는데 어느 한 나라가 무기를 구입하면 두 나라 모두에게 안 좋은 결과를 초래. 무기의 가격이 비싸므로 두 국가 모두 무기를 사들이면 사지 않았을 때보다 경제적 상황이 더 안 좋아짐. 승자독식 시장은 위치적 군비경쟁을 낳기 마련이며 이는 참가자의 과잉유입에서 생겨나는 손실을 더욱 크게 만듬.
- 옷에 대한 지출 증가가 낭비처럼 보이자만 성형수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 성형수술은 비용도 많이 들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부작용의 위험까지있음. 그런데도 성형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일부지역에서는 이미 일반화됨. 캘리포니아 남주 지역의 장의사들은 턱과 가슴 그리고 엉덩이 확대수술에 사용된 불연성 실리콘팩 때문에 화장이 잘 안된다고 불평.
수술로 외모를 바꿈으로써 개인의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효용이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일단 성형수술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외모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상승할 뿐이다. 한때는 체중이 조금 더 나가거나 머리숲이 다소 적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지방흡십술이나 모발이식술을 받아야 하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퍼지고 있다.
- 누구라도 가장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하려면 그만큼의 보수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변호사라는 직업에 뛰어들어 다른 직업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게 놀랄 일도 아니다. 만일 일종의 지적인 군축협정을 맺어 아이큐 100이상인 사람은 법률관련 직업에 종사할 수 없다는 합의를 이루어 내더라도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장 뛰어난 변홋를 고용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가지 있는 지적자원은 많이 절약될 것이다. (케네스 볼딩)
볼딩은 언젠가 우리 사회가 소송천국이 되리라는 걸 예감하고 이런 허무맹랑한 제안을 하지 않았을까?
-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 경제학자들은 대공황 초기에 선배 경제학자들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화폐공급을 줄일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ㄷ. 물론 지금은 그 처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수십년 동안 연준에서는 경제가 조금만 침체될 기미가 보이면 통화공급량을 확대해 왔다. 그리고 이런 정책이 경제안정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몇십 년 후 경제학자들이 20세기 후반의 경제,사회정책의 기본방향을 알게 되면 우리만큼이나 놀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단순한 경기침체가 아니라 불평등의 심화, 재정적자의 확대, 성장의 둔화 등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요한 정책처방인 중상위 소득계층의 조세감면 등으로는 대공황기의 통화감축 정책이 실패한 것처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조세감면을 옹호하는 사람들 역시 감세정책이 소득불평등과 재정적자를 더욱 악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부정적 영향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같은 낙수효과이론은 이미 승자독식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적용되지 않음.
- 애덤 스미스는 분업과 전문화가 시장의 규모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장이 크면 고도의 전문화가 가능하지만 소규모 시장은 그렇지 못하다.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처럼 황량한 지방에 인가가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지역에서는 농부가 가족을 위해 직접 가축도 잡고 빵도 굽고 술도 빚어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 점진적인 도시화로 인해 노동은 더욱 세분화되었고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기계가 발달. 최근 기술변화는 이 과정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덕분에 시장도 확대되었으며 승자독식시장도 더욱 커지고 심화됨.
- 미국기업이 외부인사를 CEO로 고용한다는 것은 CEO를 회사에 붙들어 두었던 보류조항이 사실상 붕괴되었다는 의미. 아직도 새로 임명되는 CEO의 절반 이상은 내부승진을 통해 발탁되기는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바뀜. 미국에서는 업무실적이 좋은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점차 일반화됨. 유능한 중역을 잡아두기 위해 이사회는 충분한 연봉을 지불해야 함. 프로야구에서 보류조항이 삭제되면서 일류선수들의 연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듯 뛰어난 중역에게는 직장을 옮기는 것이 그와 비슷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개방적 경쟁체제가 CEO의 연봉에 미치는 영향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 더욱 심화됨. 수백만불의 보수를 지급해 본 적이 없는 환경이라면 CEO가 그 정도 연봉을 받을 자격이 있어도 이사회에서 함부로 많은 연봉을 결정하지 못할 것임. 그러나 다른 회사가 그 경영자를 더 많은 연봉을 주고 데려가면 회사는 연봉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비판을 감수하고라도 자신들의 CEO를 잃기보다는 수백만불의 연봉을 지불하고자 한다. 이렇게 한번 선례가 생기면 이후 수백만불의 연봉을 정당화하기는 쉽다.
-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던 시대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대부분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음. 2차대전이 끝난 뒤 시작된 생산성과 임금의 지속적 성장이 이 시기에 하나의 트렌드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전반적으로 소득수준이 상승해 많은 사람이 교외의 단독주택, 자동차 2대, 자녀들의 대학교육을 상징되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함정에 빠져들었다.
74년 이슬람 국가들이 석유수출을 제한하면서 이 모든 것이 끝났다. 그 이후 봉급은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지 못했고, 이런 경향은 중간정도의 교육과 기술을 갖고 있는 남성 노동자들의 경우 더 심해짐. 우리 대부분은 생활수준이 조금씩 올라가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임금수준이 절정을 이루었던 20년 전 수준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뒤로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하면서 남성 노동자들의 손실을 만회해 왔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구당 평균수입은 70년대 초와 비교해서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반면 중산층이 소득수준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졌다. 가구당 소득의 양극화는 중산층의 소득정체 만큼이나 골치아픈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77년부터 89년 사이 발생한 개인소득 증가분의 70%가 소득 상위 1%의 부유층 가구에 돌아갔다고 주장. 레이건 행정부 말기에 이 엘리트 집단의 평균소득은 중산층 가정보다 20배나 더 많았다.
- 어떤 경제든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재능이 가장 큰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근로자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단지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이상적인 인력배치란 재화와 용역의 총가치가 극대화되도록 하는 것. 또한 이런 인력배치는 모든 취업자가 벌어들이는 총소득을 극대화한다. 따라서 승자독식시장이 너무 많은 경쟁자를 끌어들인다는 주장은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경쟁하지 않고 다른 직업을 선택한다면 사회의 총소득이 증가할 것이라는 뜻.
이런 주장에 오해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승자독식시장이 완전히 해로운 경제적 재난이거나 부정적 요소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선 강조하고자 한다. 결국 매우 중요한 일을 맡겨야 할 때 처음에 누가 가장 잘할지 모르겠으면 그런 사람을 찾아내는 장치가 필요한데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그 역할을 승자독식 시장이 하고 있다. 승자독식시장 또는 이와 유사한 기능의 시장이 없었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지난 200년간 엄청난 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읻. 우리가 승자독식시장이 지나치게 많은 경쟁자를 끌어들인다고 주장하는 것은 별로 뛰어나지 못한 재능을 가진 지망생들이 다른 직업을 택하면 우리 사회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
그런데 이런 제한적 주장조차 결코 명백하게 입증된 것이 아님. 90% 이상의 배우들이 자신의 재능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배우 지망생이 지나치게 많다는 주장을 입증하지는 않기 때문. 배우가 되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들의 공연을 즐길 기회가 많아짐. 배우 지망생이 아주 적은 사회가 있다면 그곳에는 딱 배역에 필요한 만큼의 배우 지망생만 있으므로 우리는 형편없는 연기에 만족해야 할 것임.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조금 더 돈을 내더라도 더 나은 오락물을 찾을 것임.
- 경제학에서 자주 연구대상이 되는 직원들의 업무기피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전통적 이론에 의하면 사람들은 일하기를 싫어하므로 그들을 감시하거나 물질적 보상을 주어야만 열심히 일한다고 함. 그러므로 감시비용이 부담돼 제대로 감시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이 경우 승자독식적인 보수체계는 개개인의 노력을 부추겨 효율성이 증가할 것임.
실제로 기업에서는 순전히 승자독식적인 보수체계가 지니는 이런 장점 때문에 의도적으로 토너먼트식 보상체계를 구성하기도 함. 분기마다 판매실적이 가장 뛰어난 대리점에만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경제에서 이런 토너먼트식 급여체계가 개개인의 노력을 부추기는 인위적 장치가 아니라 자연스런 장치라고 생각함. 이 경우 가장 우수한 노동자의 보수가 극단적으로 높다해도 업무기피현상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음.
- 올림픽 체조선수 크리스티 필립스가 손목이 부러진채로 연습을 하기 위해 진통제를 삼키게 만든 것과 같은 승자독식체계가 건재하다면 이런 사례는 계속 나타날 가능성이 높음. 과도한 보상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만 세계경제의 관점에서는 과잉투자지만 개별국가로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컨대 식량과 건강관리에 더 많은 돈을 쓰고 HDTV의 화질개선에는 적은 돈을 쓴다면 전 세계 인류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만 HDTV기술을 개발한 국가의 시민에게는 상황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텔레비전 기술로 세계시장을 장악하면 거기에 들인 연구개발비를 뽑고도 남기 때문.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개별 국가는 군비축소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 대학 서열화로 인해 학문적 잠재력이 대학에 들어간 후에야 드러나는 대기만성형 학생은 기회를 잃게 된다. 앨런 그레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성장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에게 그 기간동안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준다. 그런데 대다수 학생이 여섯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열일곱살 6개월부터 열아홉살 사이에 대학에 들어가도록 제도를 만들어놓고 조숙함에 따라 보상을 줌으로써 이런 자연의 혜택을 던져버린다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일단 학생들의 연령대가 같으면 학문적 보상은... 나이에 비해 유난히 똑똑한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다시 말해 조숙함을 포상해주는 셈인데 이 조숙함이 커서 재능을 보일 전조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으뜸가는 교육적 자본인, 성장하면서 성숙할 시간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 70년대에는 상업적 성공을 포기하고 예술적 작품을 만드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70년대 초와 오늘날의 창작 분위기를 구분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71년에 마지막 영화관으로 명성을 얻었짐나 최근 리버 피닉스 주연의 콜잇러브가 극장 개봉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자 바로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피터 보그다노빛가 오늘날처럼 냉혹하고 수익지향적 분위기에서 영화를 시작할 수 있었을지 자문한다면 그 답은 아마도 아니다, 일 것이다.
- 승자독식의 원리가 언론과 문화에 미친 영향보다 심각한 영향은 우리 사회의 폭력수준이 상승했다는 점. 이는 언론과 문화 시장에서도 처음부터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능력을 최우선으로 삼은 탓이다. 폭력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 왔지만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한 가지 변함이 없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텔레비전 시청자, 영화관객, 독자를 끌어오는 데 오직 섹스만이 경쟁상대가 될 수 있다. 채널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살인장면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채널을 고정하게 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에게는 시청률이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폭력적인 프로그램이 시청자를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신문과 잡지도 폭력적인 내용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 더 많은 부수가 판매된다. 또한 주인공이 악의 세력으로부터 무자비한 도발을 당한 후 마침내 폭력으로 복수하는 영화에는 항상 관객이 많다.
- 변화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지만 현재 등장하고 있는 승자독식시장의 영향을 분명히 파악한다면 그에 맞서는 조치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임. 전통적 통념에 다르면 세상은 하나를 얻으면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하나를 잃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관적 결론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의 최대승자에게 더 큰 세금부담을 지우는 것은 우리 금융시스템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시민이 더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도록 유도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 만약 조세부담이 누진세 형태를 띤다면 절실히 필요한 저축과 투자도 촉진될 것임. 그러므로 승자독식사회의 결점을 보완하는 정책들은 형평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경제성장도 촉진한다. 이는 공짜점심은 아니지만 저렴한 점심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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