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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4.03.18 헤르만 헤세 인생의 말
  5. 2024.03.18 물욕의 세계 1
  6. 2024.03.18 20240318
  7. 2024.03.17 모든 논쟁에서 승리하는 법
  8. 2024.03.17 20240317
  9. 2024.03.16 20240316
  10. 2024.03.15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 11

최소한의 과학공부

과학 2024. 3. 19. 07:16

- 몸의 기능을 연구하는 생리학 physiology에서 파생한 피지션physician은 의사, 특히 내과의사를 뜻한 다. 오랫동안 의사는 곧 피지션이었다. 피지션이 되려면 대학에서 생리학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아야 했다. 피지션은 환자를 주로 약 으로 치료했다. 반면 외과의사를 뜻하는 서전surgeon의 어원은 그리 스어 cheiros (손)와 ergon(일)의 합성어다. 이것이 라틴어로 chirur- gus, 다시 영어로 surgeon이 되었다.' 요컨대 외과의사는 '손 기술 자'란 뜻이다. 수술surgery도 결국 손 기술이란 뜻이다. 서전은 대학 도 나오지 않았고 생리학도 몰랐다. 아버지나 선배로부터 배운 칼 쓰는 기술로 환자를 치료했다. 게다가 그 칼로 면도와 이발도 해 주었다. 그래서 이발사 ·외과의사barber surgeon는 하나의 직업으로 분 류되었다. 서전의 지위는 제빵사나 양조업자와 비슷했다. 당연히 피지션은 서전을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
- 마취제는 일견 사소해 보이나 의학은 물론 사회에도 엄청난 영 향을 미쳤다. 백신, 항생제와 함께 의학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 히기에 손색이 없다. 마취제를 사용하면서 외과의사들은 환자의 고통에 대한 부담과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리스턴의 다리 절단 30초 세계 기록(무슨 올림픽도 아니고)도 별 의미가 없어졌 다. 이제는 복잡한 수술을 얼마나 정밀하게 할 수 있는가가 관건 이 되었다. 요컨대 외과가 마취제를 계기로 현대화한 것이다. 인 체 깊숙이 위치한 복강, 흉강 등은 기존 의사들의 손이 닿지 않던 곳이었다. 마취제를 통해 비로소 이곳들이 의사 앞에 모습을 드러 냈다. 또한 뇌, 장기 이식 등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고난도 수술 도 가능해졌다. 마취가 가져온 효과는 수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수면 내시경의 보편화로 좀 더 많은 사람이 손쉽게 몸 안의 위협 요인을 미리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최근 10여 년 동안 대 장암 사망자 수가 꾸준히 감소한 것은 내시경 검사의 확대와 연관 이 깊다.
- 연합군의 승리 요인으로 페니실린을 빼놓을 수 없다. 인류의 가 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는 이 약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부터 대 량 사용되어 강력한 효과를 입증했다. 물론 약의 원리 자체는 과 학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평상시였다면 이 약이 그토록 단기간에 널리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페니실린의 상용화에는 과학 못지않 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 전장에 공급된 페니 실린은 수많은 부상 병사를 살려 전력 강화에 공헌했다. 페니실린 을 원자폭탄, 레이더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기술 적 요인으로 꼽는 이유다.
- 1941년 플로리와 히틀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정부든 제 약회사든 설득해서 대량생산을 해볼 요량이었다. 이 선택은 그대 로 적중했다. 우선 미국 농무부의 노던 리저널 연구소와 협업해 옥수수 찌꺼기를 배양물질로 써서 생산량을 여섯 배 늘렸다. 이 연구소가 미국 중서부의 넘쳐나는 옥수수를 산업에 응용할 방법 을 연구하는 곳이어서 가능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진주만을 공 습당한 미국이 마침내 참전을 결정했다. 선전포고 5일 뒤 미국 정 부는 페니실린의 긴급 생산 계획을 입안했다. 미국 농무부, 영국 의 연구자들, 그리고 머크Merck&Co.와 화이자fizer 등 제약회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그래도 여전히 대량생산은 어려웠다. 1942년 6월까지 미국의 전체 생산량은 겨우 환자 열 명분에 불과했다.' 너무 귀해서 임상시험 환자의 오줌을 걸러 페니실린을 다시 회수 할 정도였다.
1942년 가을 화이자에서 묘안이 나왔다. 지금이야 화이자가 굴 지의 제약회사지만, 원래는 싸구려 레몬을 수입해 콜라에 넣는 구 연산을 추출하던 업체였다. 1919년 화이자는 설탕을 곰팡이로 발 효시켜서 구연산 제조 원가를 6분의 1로 낮춘 이력이 있었다. 여 기서 힌트를 얻은 엔지니어 재스퍼 케인Jasper Kane은 크고 깊은 발효조를 사용하는 딥탱크deep tank 발효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은 구연산보다 의약품 원료에 더 적합했다. 덕분에 화이자는 제약회사 로 변신했고, 페니실린 컨소시엄에도 참여했다. 화이자도 처음에 는 과학자들에게 배운 대로 소형 플라스크를 써서 푸른곰팡이를 배양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걸로 대량생산은 택도 없었다.
케인은 딥탱크 발효법을 페니실린에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도박이었다. 성공을 장담하기도 어렵지만, 핵심 생산 라인 을 푸른곰팡이 배양에 사용하면 다른 제품에 타격을 줄 것이 뻔 했다. 화이자는 회사의 명운이 걸린 이 문제를 두고 장고했다. 결 국 이사회 표결 끝에 케인에게 개발을 맡겼다. 도박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1944년 3월 브루클린의 옛 얼음 공장에서 페니실린 생산이 시작되었다. 계획의 다섯 배가 넘는 생산량이 쏟아졌다. 미 국 정부는 화이자의 동의를 얻어 이 제조법을 19개 회사에 공유하 고, 지원 물품과 자금을 마구 살포했다. 페니실린이 전략 물자여 서 가능한 일이었다. 옥스퍼드 연구소의 페니실린 생산량은 푸른 곰팡이 1세제곱미터당 1~2단위에 그쳤다. 이것이 1944년 상반기 6840억 단위, 1945년에는 7조 5000억 단위까지 치솟았다. 말 그 대로 '천조국' 미국의 위엄이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 전에 투입된 미군의 90퍼센트는 페니실린을 갖고 있었다. 페니실 린은 폐렴, 패혈증에 의한 사망과 부상으로 인한 사지 절단을 현 격히 줄였다. 그 결과 연합군 병사의 약 12~15퍼센트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 페니실린의 위력은 전쟁 후에도 이어졌다. 일단 대량생산으로 가격이 크게 떨어져 누구나 쉽게 구하는 약이 되었다. 1943년 미 국 정부는 페니실린의 자연 추출을 넘어 인공 합성하는 연구도 추 진했다. 14년 뒤 마침내 합성법이 개발되었고, 페니실린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범용약물로 여러 증상에 맞는 변형체들을 만드 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매독, 임질, 결핵, 폐렴, 괴저 등 답이 없던 질병들이 페니실린으로 극복되었다. 페니실린이 구 한 생명은 1942년 이후 2억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약이 이렇게 많은 생명을 구한 사례는 없었다. 
- 과학사적으로도 페니실린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페니실린으로 거대과학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페니실린 개발사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의 직업적 정체성은 다양하다. 예컨대 플레밍은 과학적 발견에 천착한 과학자였고, 히틀리는 정제 기술을 개발한 엔지니어였으며, 케인은 대량생산을 조직한 기업가였다. 이렇듯 페니실린은 정부, 기업, 재단, 대학 등을 망라 하는 집단작업의 결과였다. 또한 페니실린을 계기로 과학 연구에 서 국가 역할이 부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페니실린 대량생산 의 결정적 순간은 미국 정부가 화이자의 제조법을 (특허 따위는 무시 하면서) 공유하고, 엄청난 자금과 자재를 지원한 데에 있었다. 이는 과학 발전이 국가 규모의 지원이 필요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함의한다. 이후 맨해튼 계획, 아폴로 계획 등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과학과 국가는 불가분의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 왓슨과 크릭이 그저 우연히 프랭클린의 사진을 본 것만으로 DNA 구조를 규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사진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으면 진작에 윌킨스나 프랭클린이 해냈을 것이기 때문이 다. 왓슨과 크릭에게는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친, 그들만의 뛰어 난 역량이 있었다.
첫째로 직관이다. 왓슨과 크릭은 주어진 정보들을 조합하여 창의 적 결론을 도출해 내는 직관력이 뛰어났다. 51번 사진을 보자마자 유레카를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샤가프 본인도 의미를 몰랐던 샤가 프의 법칙을 응용할 수 있었던 것도, 네 종류 염기의 복잡한 결합 구 조를 완벽히 맞춘 것도, 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둘째는 융합이다. DNA 구조 규명은 기존 유전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과업이었다. 예컨대 화학물질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고, X 선 결정학으로 대표되는 물리학적 방법론도 갖춰야 했다. 이 점에 서 왓슨과 크릭은 환상의 콤비였다. 원래 동물학과 유전학을 전 공한 왓슨은 DNA 연구를 하고자 생화학과 물리학도 익혔다. 크 릭은 비슷한 시기 많은 학자가 그랬듯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전 환한 경우였다. 양자역학을 확립한 닐스 보어와 에르빈 슈뢰딩거 는 생명 현상의 물리학적 이해를 강조하여 이러한 전환에 큰 영향 을 미쳤다. 이로써 근본적인 요소에 근거하여 거시적 현상을 해석 하는, 물리학의 환원주의가 생명과학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DNA 구조 규명을 계기로 생명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연구하는, 분 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낸다. 가장 근본적인 유전물 질을 규명함으로써 생명 현상 전반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는 점 에서, 분자생물학과 물리학은 유사한 방법론적 기초를 공유했다.
- 그 과정은 이렇다. 우선 세포 속의 DNA가 어떤 단백질을 만들 지에 대한 정보를 RNA에 전달한다. 이것이 전사transcription다. 이때 전사된 RNA가 mRNA다." mRNA가 세포핵 밖으로 나가면 리보 솜이 부착된다. 그러면 가져온 유전정보에 부합하는 아미노산만 차례로 붙어 사슬(폴리펩티드)을 이룬다. 이를 번역transl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폴리펩티드는 여러 형태로 가공되어 단백질을 만들 어낸다. 비유하자면 RNA는 우리 몸의 설계도(DNA)를 암호화해 서 생산 공장(리보솜)으로 가져가, 몸의 기본 재료(단백질)를 만들어 내도록 복호화한다.
이렇게 DNA의 유전정보가 RNA로 복제되고 단백질 생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생명과학의 중심 원리 central dogma라고 한다. 이때 생성된 단백질은 인체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호르몬과 효소 가 만들어지며, 면역과 대사 등의 활동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 mRNA 연구 60년
mRNA는 1961년 DNA의 단백질 생성 메커니즘을 밝히는 과 정에서 알려졌는데 발견과 함께 의학적 활용 가능성도 크게 주목 받았다. mRNA가 생명 현상의 원초적인 조절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1976년, 헝가리의 한 대학원생이 중요한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mRNA를 바이러스 방어에 이용하자는 발상이었다. 이 대 학원생이 바로 커털린 커리코다. 후일 바이오엔테크의 부사장으 로서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 개발을 이끄는 인물이다.
백신은 후천면역의 기억이라는 특징을 이용한다. 즉 병원체의 전부 혹은 일부를 인체에 사전 노출해서 감염이나 증상 없이 면역 학적 기억이 생기게 만든다. 그러면 실제 병원체가 침입해도 인체 는 그 면역 기억을 살려서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다. 가공된 병 원체가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항원이 되는 원리다. 기존의 백신 발에는 이 항원이 꼭 필요했다.
mRNA 기반 백신은 항원 대신 항원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넣어줌으로써 패러다임을 바꿨다. mRNA가 수행하는 이 설계도 전략의 장점은 신속성과 유연성이다. 병원체의 유전정보, 즉 설계 도만 알면 빠르게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발 플랫폼이 정비 되면 기간은 더욱 단축된다. 초기 개발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들어 서 환자의 수가 적은 병도 대비할 수 있으며, 기존 대비 소규모 설 비로도 생산 가능하다. 안전성도 강점이다. mRNA는 인체 내부의 물질이므로 독성이 없다. 또한 제조 과정에 정제된 효소를 사용하 므로 위험한 물질이 들어갈 우려도 적다. 기존의 어떤 백신보다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물론 실제 개발은 쉽지 않았다. 일단 세포에 존재하는 mRNA를 필요한 만큼 만들어낼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는 1980년대 유전자증폭 기술의 개발로 해결되었다. DNA의 특정 부분을 복제·증폭 하여 mRNA를 대량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합성 한 mRNA를 동물에 주사했더니 또 문제가 생겼다. mRNA가 세포 안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공률이 0.01퍼센트 에 불과했다. 게다가 심각한 면역반응이 일어나 동물들이 죽기도 했다. 10년을 넘게 이어온 개발 과정은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다시 10여 년이 지나서야 한계를 돌파할 기술이 등장했다. 매 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교수 로버트 랭거와 다니엘 앤더슨이 개 발한 지질나노입자라는 물질이다. 이것으로 mRNA를 감싸면 세 포 내부까지 안전하게 도달시킬 수 있었다. 2005년 커리코는 펜실 베이니아대학교 동료 교수 드루 와이스먼과 함께 지질나노입자로 면역반응을 유발하지 않는 변형 mRNA를 개발했다. mRNA 백신 의 기반 기술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 사람, 자본, 지식의 선순환
기술이 확립된 다음부터는 기업의 몫이었다. 스탠퍼드대학교의 박사후연구원 데릭 로시는 커리코와 와이스먼의 논문을 읽고 유레 카를 외쳤다. 그리고 지질나노입자 개발자 랭거를 만나 2010년 벤 처기업을 설립했다. 그게 바로 모더나다. 모더나는 'Modified RNA', 즉인공 RNA의 줄임말이다. 이름에서 보듯 mRNA를 기반으로 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주력 사업이다. 특히 2011년 스테판 방셀이 CEO에 취임하면서 성공 가도를 내달렸다. 방셀은 특유의 사업 감 각으로 벤처캐피털과 글로벌 제약회사들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 고, 미국 연방정부의 연구비 지원도 받아냈다. 모더나는 민관협력 의 구심과도 같은 기업이었던 셈이다. 창업 10년이 채 안 돼 노벨 상 수상자를 비롯한 최정상급 인력과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이것 이 바탕이 되어 mRNA 체내 전달 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커리코와 와이스먼도 연구실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자신들 의 기술에 특허를 내면서 사업화에 뛰어들었다. 2011년 커리코는 변형 mRNA 기술의 사용 권한을 바이오엔테크라는 신생 기업에 넘겼다. 튀르키예 이민자들이 설립한 이 독일 회사는 이를 계기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커리코도 25년간 재직하던 펜실베이니아대학교를 떠나 바이오엔테크의 부사장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2017년 에는 화이자와 협약을 맺고 mRNA 백신 개발을 본격화했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의 '대박'이 원천기술 덕분만은 아니었 다. 기업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돈이다. 특히 스타트업은 초기에 안정적인 투자를 확보하여 런웨이를 늘 려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도 이 과정을 거 쳐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보스턴 근교 케임브리지 의 켄들스퀘어 Kendall Square로 상징되는 혁신 클러스터가 중요했다. 켄들스퀘어는 한마디로 미국 생명과학의 총아다. 하버드, MIT 같 은 명문대학을 필두로 1000개가 넘는 글로벌 제약회사와 벤처캐피털이 모여 있다. 뛰어난 과학자, 의사, 엔지니어, 사업가, 투자가 등이 매일 부대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혁신적 지식 이 나오고, 이것이 곧바로 창업과 투자로 이어진다. 이렇듯 켄들 스퀘어에는 고위험 고수익 high risk, high return 연구와 투자에 거리낌 없는 문화가 존재한다. 어제까지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학생이 갑 자기 창업에 나서고, 듣도 보도 못한 사업 모델에 투자가 몰리는 일은 이곳에서는 일상과 같다. 사람, 지식, 자본으로 이어지는 선 순환이 혁신 산업의 붐을 일으킨 것이다.
- 17세기 인류는 극심한 식량 위기를 겪었고, 사망률도 높아 졌으며, 전쟁도 잦았다는 것이 골자다. 특히 유럽에서는 반유대주 의와 마법에 대한 맹신이 팽배하기도 했다.' 이렇게 흉흉했던 사 회 분위기는 소빙하기의 추운 날씨와도 연결된다. 따라서 온난한 기후는 걱정보다는 바람의 대상이었다. 마침 산업혁명이 본격화 하고 벨 에포크가 도래하면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높아졌다. 지금 이야 따뜻해지는 기후가 부정적 뉘앙스를 띠지만, 당시에는 안락 함과 풍요의 의미가 더 컸을 것이다.
- 킬링은 1960년 남극의 측정치를 근거로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2005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측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 47년 동안 이산화탄소 농도는 평 균 연 2피피엠씩 증가했다. 이 추이를 기록한 그래프, 즉 킬링 곡 선은 그대로 기후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킬링 곡선은 해를 거듭 하며 마치 파도처럼, 지수함수적으로 치솟았다. 이는 세계에 충격 을 던져주었다. 흔히 알고 있는 온난화의 위험, 즉 빙하가 녹고 해 수면이 높아져 도시들이 물에 잠길 수 있다는 예상이 현실의 위협 으로 여겨졌다. 온실효과를 실험으로 입증한 틴들로부터 100년이 넘게 걸려 도달한 결론이었다.
킬링 곡선의 가파른 상승은 과학자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겼다.
이제 기후변화는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75년 《사이언스》에 실린 월리스 브 로커Wallace Broecker의 논문은 기념비적이었다. 이 논문은 1800년부 터 지구 온도의 장기 변화를 추적하여, 산업혁명 이후 온실가스 배출이 바다의 탄소 흡수 능력을 약화시켰음을 논증했다. 브로커 는 뛰어난 과학 커뮤니케이터이기도 했다. 과학의 논리를 대중의 언어로 쉽게 바꿔 설명했다. 일례로 지구온난화는 브로커가 1975 년 논문의 제목으로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브로커는 의회나 언론 에 나가서 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는 사람 들이 온난화를 칵테일 마시는 시간의 호기심 거리로 여긴다며, 기 후라는 변덕스러운 야수가 인간을 파국으로 몰 것이라고 독설을 쏟아냈다.

- 천조국의 위엄
이론적 가능성만 있었던 원자 에너지의 현실적 구현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 과정은 육군이 미국과 캐나다 곳곳에 대규모 실 험 시설을 짓고, 과학자들이 이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반적인 연구소를 만드는 규모를 훨씬 넘어섰다. 오펜하 이머는 집단연구와 보안 유지를 위해 사람이 없는 오지에 인력 을 몰아넣는 방법을 제안했다. 즉 외부와 격리된 실험 단지를 조 성하여 각 프로젝트를 집중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동의한 그 로브스는 미국 전역을 돌며 적당한 부지를 골랐다. 시카고에서는 페르미의 주도로 핵분열 연쇄반응의 제어 장치, 즉 원자로를 만들고 테스트했다. 오크리지에서는 콤프턴이 폭탄의 재료인 우라 늄-235의 대규모 농축 작업을 지휘했다. 버클리에서는 로런스가 사이클로트론으로 우라늄-235 와 플루토늄을 분리했고, 워싱턴주 핸퍼드에는 플루토늄 추출 시설이 들어섰다. 로스앨러모스는 이 를 화룡점정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오펜하이머가 각 프로 젝트의 결과를 종합해 최종적으로 폭탄을 설계하고 조립했다. 이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맨해튼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핵물리학 관련 논문이 아예 사라졌다. 또 계획에 동원된 수만 명 의 인력 중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 다. 원래 살던 주민들은 집 근처에 이런 연구시설이 있는지도 몰 랐다.
- 어떤 방법이 성공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모 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OSRD는 우라늄과 플루토늄 폭탄을 모두 시도하기로 했다. 가장 난제였던 우라늄-235의 분리에는 전자기 분리법, 기체확산법, 열확산법이라는 세 가지 기법이 쓰였다. 효율 성만 따졌을 때는 셋 다 실패에 가까웠다. 들이는 자원과 노력에 비해 결과가 너무 적어서였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모 든 것을 정당화했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결정하기까지는 오 랜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만들기로 한 뒤에는 약간의 가능성만 보 여도 인력과 물량을 쏟아부었다. 난다 긴다 하는 과학자들도 그렇 게 조건 없는 대규모 지원을 받으며 연구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계획은 단 3년 만에 성과를 냈다. 1945년 7월 뉴멕시코 앨라모고도에서 테스트에 성공했고, 한 달 뒤 히로시 마와 나가사키에 두 방의 폭탄이 떨어졌다. 1억 총옥쇄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준비 중이던 일본은 곧바로 항복했다. 3년간 총 13만 명의 인력과 2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된 결과였다. 2023년 기준 330억 달러, 원으로 환산하면 약 39조 9600억 원이다. 그러니까 2023년 한국 국방 예산(약 57조원)의 70퍼센트 정도 된다. 이러한 대규모 물량과 천재적 두뇌의 조합은 맨해튼 계획의 성공,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전 세계에서 오직 '천조국' 미국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 가속기 실험은 입자에 전기장을 걸어서 속도를 빠르게 높이면 서 이루어진다. 이때 가속하는 입자에 따라 장치의 종류와 실험 목적도 나뉜다. 우선 입자가속기는 전자, 양성자, 중입자, 중이온 등을 다른 입자나 물질에 충돌시켜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한다. 양성자가속기는 주기율표 1번인 수소에서 양성자를 분리하여 물질에 충돌시킨다. 여기서 쪼개져 나오는 소립자를 반도체, 소재 연구 등에 활용한다. 중입자가속기는 암세포 사살의 명사수다. 수 소보다 무거운 탄소 입자를 빛의 속도 70퍼센트 정도까지 가속하 여 암세포에 쏜다. 기존 방사능 치료에 비해 암세포를 더 많이 죽 이고 정상세포는 덜 죽인다. 중이온가속기는 우주에 존재하는 수 많은 원소를 연구한다. 무거운 원소(탄소, 우라늄 등)를 이온화하고 가속해서 표적 원자핵에 충돌시킨다. 그럼 핵반응이 일어나고, 알려지지 않았던 희귀동위원소가 생성될 수 있다. 즉 중이온가속기 실험에서 뭔가 나오면 화학 교과서의 주기율표가 바뀐다.
반면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가속하여 빛을 생산한다. 전자는 만들기가 쉽고 무게도 수소의 180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래서 속 도를 빛의 99.9퍼센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렇게 가속한 전자 로 만들어낸 빛은 태양 밝기의 100억 배에 달한다. 이걸로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관찰할 수 있다. 몇 년 전 국내 연구진은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해 물 분자H2O가 만들어지는, 1000조 분의 1(펨토)초 순간을 포착했 다. 방사광가속기가 초고성능 거대 현미경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 러한 특징 때문에 물리학과 화학은 물론 구조생물학, 의약학 등에 도 폭넓게 쓰인다.

- 요컨대 아폴로 계획은 과학이 정치, 경제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 면 어떤 위업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순수하게 과학 연구만 의 목적만 있었다면 아폴로 계획은 시작조차 못했거나, 금방 좌초 했을 것이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시대적 목표 가 있었기에 반대 여론과 천문학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폴로 11호로 목표의 상당 부분을 이뤘기에 더 이상 계속되기 어려웠음을 함의하기도 한다. 원래 아 폴로 계획은 20호까지 계획되었으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17호 로 끝났다. 그리고 냉전 질서가 완전히 해체된 이후, 더 이상 달에 가려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을 이유도 없어져 버렸다.

- 과학과 기술의 연결
요컨대 과학혁명은 과학 자체의 위상과 성격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기존의 과학이 철학에 가까웠다면, 근대부터는 기 술에 훨씬 가까워졌다. 오늘날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당연하게 들 리지만 연원을 따져보면 별로 당연하지 않다. 과학과 기술은 별개 의 전통을 갖기 때문이다. 두 전통이 합쳐지는 것은 과학혁명이 초래한 자연관과 방법론의 변화 때문이었다. 이것이 18세기 산업 혁명의 지적 기반이 되었다. 다만 이 과정이 흔히 생각하듯 과학 적 발견을 기술이 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과학 의 이론적 발전이 산업혁명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는 뜻 이다. 과학과 기술이 한층 가까워진 것은 분명하나, 그 연결의 형 태는 간접적이고 모호했다. 그것은 과학적 방법의 공유와 인적 연결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기술자들이 과학의 방법을 수용했다. 즉 기술자들이 과학 적 연구 방법, 실험적인 분석 태도를 통해 기존 기술을 혁신할 수 있게 되었다.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도 이런 경우였다. 와트가 의 뢰받은 뉴커먼 증기기관을 그저 수리만 했다면 혁신도 없었을 것 이다. 그는 기계의 구조와 시스템을 분석하고, 열효율 문제의 원 인을 파악함으로써, 분리형 응축기라는 기술적 대안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여기에 고도의 수학이나 과학 이론은 필요하지 않았 다. 기존 데이터를 귀납적으로 분석하여 더 효율적인 조합으로 재 구축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기에는 이 정도만으로도 상 당한 기술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과학 지식을 매개로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 등이 활발히 교류했다. 근대과학의 꽃을 피운 뉴턴주의자들은 과학과 기술을 그 렇게 딱 떨어지게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식으로 현실의 개선 을 이뤄야 한다는 베이컨의 과학관에 따라, 이론적 탐구는 물론 기 술의 개발과 혁신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 었던 계몽주의는 바로 이러한 실용적 배경을 두고 있었다. 흔히 산 업혁명의 지적 기원으로 꼽히는 루나 소사이어티가 그 전형이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과학자, 사업가, 교수, 의사, 수리기사 등 다 양한 직업을 가졌지만, 과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매개로 교류했 다. 그리고 여기서 근대를 만든 다양한 발명과 사상들이 나올 수 있 었다. 와트의 증기기관만 해도, 그가 이 모임에서 윌킨슨을 통해 알 게 된 배럴 기계가 아니었다면, 개발이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 서양과 동양의 운명이 갈린 1776년
과학혁명, 산업혁명, 경제성장은 16세기 이후 서양과 동양의 차 이를 가른 핵심 사건들이었다. 이는 아주 긴 시간대를 거치며 진 행되어 단기간에 극적인 변화가 포착되지 않는다. 그만큼 특정 시 점, 또는 계기가 결정적이었다고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떤 기준에서 봐도 1776년이 상징적인 해였음은 분명 하다. 그해 《국부론》이 출간되었고, 개량된 증기기관이 시장에 등 장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세 가지는 서양과 동 양의 가장 큰 차이였던 과학기술과 자유사상의 결정판과도 같은 사 건들이었다. 이로써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불이 댕겨지고, 근대라 는 새 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 그 선구자인 세 사람, 즉 애덤 스미스, 제임스 와트,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루나 소사이어티의 회원이었다는 것. 세 사람은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들의 연대를 상징한 이 모임에서 활동하며 역사를 바꿀 성과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것은 이 모임이 지향한, 새 로운 지식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라는 기조 덕분이었다. 공통의 관 심사로 묶인 이 개인들에게 전공 분야나 국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 았다. 심지어 식민지 출신이었던 프랭클린은 이 모임에서 모국인 영국에 비수를 꽂을 지식체계를 갖추기까지 한다.
둘째는 과학자가 아님에도 과학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 스미스 는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의 부탁을 받고 그 아들의 견문을 넓혀주고자 함께 프랑스를 여행했다. 이때 중농주의 경제학자 프랑수 아 케네를 만났다. 중농주의는 physiocracy라는 영어 이름에서 보 듯 생리학physiology에 기초한 경제학 사조였다. 의사 출신 케네는 체액이 원활히 순환하면 인체가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듯, 정부 통 제를 줄이고 자연법 체계에 경제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감명을 받은 스미스는 과거 《도덕감정론》에서 정립한 이 기심 개념과 중농주의의 자유방임 논리를 결합해서 《국부론》을 저술했다. 수리기사였던 와트도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증기기관 개량의 단서를 얻었고, 프랭클린은 일찍부터 전기에 관심을 가져 번개 실험도 해보았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쓸 때는 <프린키피 아》의 논리 구조를 적용하여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절대적 진리 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보이도록 구성했다.

- 1차 산업혁명이 기술자와 사업가의 혁신으로 이루어졌다면, 2차 산업혁명은 과학의 난제 해결이 산업적 파급력으로 이어졌다는 차 이가 있다. 이때부터 과학은 인류의 진보를 이끄는 학문으로 위상 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초창기만 해도 전자기학이 그렇게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음은 아무도 몰 랐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순수하게 궁금했던 질문, 예컨대 전기와 자기는 다른 종류의 힘인지, 서로 변환될 수 있을지를 탐구했을 뿐 이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패러데이의 실험실로 정부 관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전자기 실험을 보고 물었다. "이 런 걸 어디다 씁니까? 이거 돈이 됩니까?" 패러데이의 답이 걸작 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훗날 이것에 세금 을 매길 수 있을 겁니다."사실 이런 연구가 돈이 되냐는 현대과학에서도 꾸준히 반복되는 질문이다. 하지만 전자기학의 발전 과정 에서 보듯, 과학 연구는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과학자 본인도 대부분 알 수 없다. 그저 시대가 당 면한 난제의 해결에 최선을 다하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인 류의 삶이 진보하기도 하는 것이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전자기 학은 이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준다.

- 코페르니쿠스도 본래는 프톨레마이오스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복잡성 때문에 결국 스승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를 철학적, 심미적 직관에 따라 문제 삼았다. 신이 창조한 우주는 간단명료해야 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영 향을 받은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우주는 신비한 힘으로 충만하고 수학적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아름답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는 80여 개의 원이 난무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이렇게 받아들였을 것이 다. "나의 신이 만든 우주는 이렇게 너저분하지 않아!"
- 코페르니쿠스 필생의 목표는 이 체계를 조화롭게 단순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맞바꾸면 많 은 문제가 해결됨을 깨달았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발상 은 분명 상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생각도 아니었 다.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타르코스가 이와 같은 주장을 했 기 때문이다. 즉 역사 최초의 지동설 제창자는 코페르니쿠스가 아 니라 아리스타르코스다. 하지만 철저한 비주류 견해였고, 프톨레 마이오스가 천문학을 평정하면서부터는 완전히 잊혔다. 그로부터 1700년이 지나서 코페르니쿠스가 묻혀 있던 이 학설을 꺼내어 복 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새로운 '발견'보다는 '선택'에 더 가까웠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훨씬 간결하고 우아해진 지동설 체계 를 선보였다. 이로써 태양계는 각 행성이 조화를 이루며 질서정연 하게 궤도를 돌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오컴의 면도날, 즉 경제성 원칙에 근거한 논리적 추론의 전형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책머리에 교황 바오로 3세에 대한 헌사를 썼다. 다음의 문장이 유명하다.
이는 한 화가가 각각 다른 모델로부터 잘 그려진 손, 발, 머리 등을 모아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나, 그것이 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조각들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으므로 그 결과물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계산한 지동설 체계와 실제 행성 운동 사이에는 오차가 존재했다. 겉보기에 복잡해도 수 학적으로 완벽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는 대비되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도 죽을 때까지 이 문제를 고심했으나 이유를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오차가 누적되자 결국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궤도 보정 장치 (주전원, 이심원) 를 똑같이 가져다 썼다. 그 결과 천동설과 지동설은 태양과 지구의 위치라는 근본 발상만 다를 뿐, 세부 논리와 방법론은 서로 비슷해졌다.
오차는 행성들이 등속원운동을 한다는 잘못된 전제 때문에 발 생했다. 코페르니쿠스도 원이 완벽한 도형이라는 과거의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기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학문으로 서의 과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험 방법론도 정립되지 않았고, 관측에 필요한 망원경도 발명되기 전이었다. 요컨대 천문학이 과 학보다는 철학에 훨씬 가까웠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책에는 과학 연구서로 보기 힘든 요소들이 눈에 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 분이다.
모든 것의 중심은 태양이다. 이 가장 아름다운 신전에서 사방을 비출 수 있는 이곳 말고 대체 어디에 눈부시게 빛나는 이 불빛을 둘 수 있겠는가? ... 그래서 태양은 왕좌에 앉아 그 주위 를 돌고 있는 그의 가족, 즉 행성들을 지배한다."
마치 고대의 서사시 같다. 코페르니쿠스가 고대의 세계관을 완 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코페르니쿠 스의 한계는 그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의 후배들이 극복했다. 요 하네스 케플러는 행성들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 을 밝혀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이용해 지동설의 경 험적 증거를 관측했다. 아이작 뉴턴은 행성 운동의 법칙을 수학으로 정립했다.
이렇듯 코페르니쿠스는 '경계'를 상징하는 학자였다. 중세와 근 대, 철학과 과학, 프톨레마이오스와 뉴턴의 경계에 그가 서 있었 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은 역사에 이런 복합적인 경계들 을 함께 만들어냈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그를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로 규정한 이유이 기도 하다.'

- 중세의 연쇄적 균열
흔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성경에 반하는 내용 때문에 교 회의 탄압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 다. 교회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한 것은 출간 73년 뒤인 1616년이 다. 즉 교회는 꽤 오랫동안 이 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 교회는 출간 훨씬 전부터 지동설을 인지하고 있었다. 1533년 지동 설 강의를 들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추기경들이 코페르니쿠스에 게 출간을 재촉할 정도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평생 가톨릭에 봉직 한 사제로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교황에게 헌정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중세 사상체계의 급소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세의 천문학이 신학, 물리 학, 화학, 의학 등과 구분이 어려울 만큼 통합되어 있었다는 사실 에서 기인한다. 일례로 천상계는 신학의 성경과 곧바로 연결되었 다. 또한 점성술 및 의학에서는 행성이 인간의 기질에 영향을 미 친다고 이해되었다. 행성은 지상의 금속과 관련이 있었고, 인체는 소규모의 우주로 여겨졌다. 코페르니쿠스도 천문학자인 동시에 점성술사였으며 신학자이자 또 의사였다. 그래서 천문학이 한 번 뒤집히자, 사상의 전 체계가 연쇄적으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 다. 천장지제궤자의 혈潰, 작은 개미구멍으로 인해 높 은 둑이 무너지는 모양새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가 뒤바뀌었다는 세계관의 전환을 상징한다. 지구는 천지창조의 중심에서 우주의 변방으 로 밀려났다. 신이 만든 세계에서 보살핌을 받는다고 믿었던 인간 들은 강제로 홀로서기를 당했다. 그리고 각성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물질 중 일부일 뿐이라 고. 이로써 인간은 중세를 지배한 종교적 믿음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근대를 만든 새로운 세계관, 과학적 사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 뉴턴역학에 열광한 것은 과학자뿐만이 아니었다. 철학자들도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당시 절대왕정과 교회의 지배에 맞서 계몽 주의가 퍼지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한 계몽주의자들은 사회계약론과 무신론을 받아들였다. 그럼으로써 오직 이성에 의 해서만 운영되는 사회를 꿈꿨다. 당연히 왕권신수설과 같은 신 중심 세계관과는 대립했다. 계몽주의자들은 구체제를 무너뜨릴 이 론적 무기를 뉴턴역학에서 발견했다. 어떠한 신비나 권위도 인정 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뉴턴역학과 계몽주의는 궤를 같이했다.
이는 뉴턴역학의 일반화 과정이라고 할 만했다. 뉴턴의 후예들 에는 이과생뿐만 아니라 문과생도 있었다. 라플라스와 르 베리에 같은 이과 후예들은 뉴턴역학을 정교하게 다듬어 과학 전반으로 확장했다. 반면 볼테르Voltaire, 존 로크John Locke 등의 문과 후예들은 뉴턴역학의 원리를 적용하여 새로운 사회를 설계했다. 이러한 시 도들은 기존의 가치와 지식 체계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동반했다 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중세의 인류는 이 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로 나아가게 되었다.

- 과학적 사유의 방법
과학혁명, 편지 공화국, 계몽주의, 시민혁명은 뉴턴에서 촉발된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학과 철학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뉴턴의 후예를 자처한 로 크, 볼테르, 벤담, 제퍼슨은 요즘으로 치면 문과생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과학과 철학은 다른 학문이 아니었다. 과학도 자기 전공 의 일부로 여겨 공부하고 연구했다. 물론 이들의 과학 지식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볼테르는 15년 동안 뉴턴을 공 부하고 번역했지만 <프린키피아>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이었다.
다만 자연보다는 인간, 과학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시했 다. 계몽주의자들이 과학에 열광한 이유는 어떠한 권위나 독단 없 이 합리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그 '방법'에 있었다. 이러한 과학적 방법, 과학적 사유는 그들이 설계했던 사회에 꼭 필요한 핵심원 리였다. 근대세계를 만든 청사진에는 이렇게 과학의 지분을 무시 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이에 대한 이해는 문과와 이과처럼 완 벽히 분리되어 있다. 계몽주의는 문과의 세계사에, 뉴턴은 이과의 물리학에 갇혀서 서로 다른 지식으로 기능한다. 어디서 접근하든 반쪽짜리 이해에 머무른다. 인문학과 과학의 통섭을 지식의 확장 보다는 시원으로의 회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다.

- 《종의 기원>으로 다윈은 진화론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다 윈을 진화론과 동일시하는 관념은 다른 각도에서도 볼 필요가 있 다. 첫째로 진화가 다윈만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전에도 생물이 진화한다는 관념은 막연하게나마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 에도 시간에 따른 생물의 변화라는 발상이 있었고, 중세 이슬람에 서는 동물이 생존투쟁을 거치며 변형된다는 이론도 등장했다. 《종 의 기원》 출간 즈음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진화를 연구하고 있었 다. 다윈의 공로는 진화를 자연선택이라는 논리적 설명을 통해 과 학으로 정립한 것이다. 둘째로 다윈은 진화 개념의 사용에 매우 신중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의 오해와 달리 다윈은 《종의 기원>초판에서 evolution(진화)이라는 명사를 쓴 적이 없다. evolved (진화했다)라는 동사를 마지막 문장에서 단 한 번 썼을 뿐이다. 《종의 기 원》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기도 하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 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 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 는,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1859년 초판에 대한 서울대 장대익 교수의 번역이다. 여기서 '전개'로 번역한 원문의 단어가 'evolved'다. 기존 역자들은 '진화' 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다윈은 1872년 6판부터 진화라는 명사를 썼다. 이전까지 다윈이 썼던 표현은 “변이를 수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었다. 진화라는 간단한 명사를 두고 이렇게 여러 단어 를 조합한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진화가 '더 나은 상태로 의 진전'이라는 목적론적 함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즉 진화는 진 보와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윈이 정의한 자연선택은 어떤 목 적이나 진전, 개선을 전제하지 않았다. 자연선택은 특정 종이 우 월해서가 아닌, 우연히 그 환경에 적합해서 이루어진다. 장대익 교수의 번역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 상보성의 개념
플랑크, 아인슈타인, 드 브로이, 슈뢰딩거의 혁신은 어디까지나 고전물리학 내에서 제기된 논점에 고전물리학적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존 체계를 허물고 새 패러다임을 도입하려는 의도 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들 모두는 후일 양자역학에 부정적이었 다. 이들의 연구가 양자역학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을 생 각해 보면 역설적이다.
양자역학이라는 뉴웨이브의 선두에는 보어가 있었다. 보어는 원자핵을 발견한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원자 모델이 가진 오류를 해결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것은 전자의 궤도나 에너지가 정수로 떨어지고 불연속적이라는 양자적 가설을 도입해 가능했 다. 보어는 연구도 잘했지만 리더십도 뛰어났다. 코펜하겐대학교 에 이론물리학연구소를 세우고 많은 학자를 초청했다. 양자역학은 그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일종의 집단연구 성과였다. 이들이 공유한 양자역학의 표준적 해석을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과학에 해석이란 단어는 좀 낯설다. 이는 양자역학의 독특한 성 립 과정을 반영한다. 뉴턴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은 기본이 되는 공 리를 토대로 세워졌다. 한 명의 천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 어서 완결성도 높다. 반면 양자역학은 그렇지 않다. 양자가설이나 광양자가설에서 보듯 기묘한 현상을 이리저리 해석하면서 결과가 짜 맞춰졌다. 완결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장 권위 있고 표준적인 해석이 필요했다. 그걸 체계화한 이들이 보어와 그 무리였기에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보어가 제창한 상보성이 그 핵심 개념이 된다. 원자 내부에는 물체의 여러 상태가 동시에 존재한다. 보어에 의하면 서로 배타적 인 두 명제를 보완적으로 합쳐야 비로소 이러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서로 배 타적인 관계에서 둘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것은 거짓이어야 한 다. 실제로 고전물리학의 논리가 그러하다. 입자와 파동은 상호배 타적 개념이며 하나의 현상에 동시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원자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상식을 버려야 한다. 보어의 설명이다.
처음 보면 이러한 현상이 대조적이겠으나, 원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보편의 언어로 모호함 없이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둘 다 가상보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 "대립적인 것은 보완적이다Contraria sunt complementa." 1947년 보어 가 기사 작위 문장에 직접 써넣은 라틴어 문구다. 과학의 명제가 아니라 철학의 선문답 같다. 장자의 제물론을 생각해 보라. "저것 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서 비롯된다." 만물 어느 곳 이든 도가 있다는 장자의 철학은 기나긴 시공간을 건너 양자역학 과 만난다. 실제로 보어는 주역을 비롯한 동양철학에 관심이 지대 했다. 그래서 위의 문구와 함께 음양을 상징하는 태극 문양으로 기사 문장을 만들었다. 음양론에 의하면 음과 양이라는 대립적 성 질이 균형을 이뤄 만물의 존재 양식을 이룬다. 신기하게도 양자역 학의 입자파동 이중성과 서로 뜻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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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의 법칙

인문 2024. 3. 18. 07:15

- 사실 우리의 삶은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다.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을 움직인 생리적, 심리적 프로세스가 지금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카를 융(Carl Jung))
- 어느 시대건 현자들은 항상 같은 말을 하고, 어리석은 대다수 사람은 하나같이 그 반대로 행동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 반복되는 것이다. (볼테르(Voltaire))

- 역사를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있다. 스토리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대개 알지만 그 스토리의 시작점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무엇이 2008년 금융 위기를 일으켰을까?
그 답을 알려면 먼저 모기지 시장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모기지 시장에는 무엇이 영향을 미쳤을까?
그걸 이해하려면 이전 30년간 금리가 하락한 과정을 알아야 한다.
금리 하락을 초래한 요인은 무엇일까?
그걸 이해하려면 먼저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을 알아야 한다.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은 왜 일어났을까?
그걸 알려면 1970년대의 통화 제도와 베트남전쟁의 영향을 들여다봐야 한다.
베트남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그걸 이해하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을 거치며 미국인들이 공산주의에 공포심을 갖게 된 과정을 알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짚어 올라가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계속된다.
- 흔히들 "미래를 알려면 먼저 과거를 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를 보아 도 미래는 알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세상 모든 일은 예측 불 가능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혼합되고, 그 결과가 증폭되기 때문이다.
운과 우연에 이토록 취약한 세상에서 나는 두 가지를 늘 기 억하려 애쓴다.
하나는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토대 로 예측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의 전제이기도 하다. 앞으로 50년 후에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예측하기는 불가능 하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사람들이 탐욕과 두려움에 지배 당하고, 기회와 리스크, 불확실성, 집단 소속감, 사회적 설득에 반응할 것이라는 사실은 장담할 수 있다.
사건을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후엔 어떻게 될까?"라 는 질문을 건너뛰기 때문이다. "기름 값이 올라가면 사람들이 운전을 덜 할 것이다"라는 말은 얼핏 옳아 보인다. 하지만 그 후엔 어떻게 될까?
기름이 비싸도 어쨌든 차는 몰아야 하므로 사람들은 연료 효율이 높은 차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이 정치가에게 불 만을 토로할 것이고, 정치가는 연료 효율이 높은 차를 구매 하는 사람에게 세금 우대 조치를 제공하는 정책을 실행할 것 이다. OPEC(석유수출국기구)은 석유 공급량을 늘리라는 압박 을 받을 것이고, 에너지 기업들은 기술 혁신을 추진할 것이다.
- 그리고 석유 업계는 호황과 불황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경 향이 있다. 따라서 아마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석유를 생산할 것이다. 그러면 이후 기름 값이 떨어질 것이다. 연료 효율이 높은 차를 가진 사람이 늘어난 상태에서 말이다. 고효율 차량 덕에 통근 비용이 낮아지므로 교외 인구가 늘어날 테고, 사 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이 운전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예측이 쉽겠는가.
세상의 모든 사건은 나름의 후속 결과를 낳고, 이는 또다시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앞일을 예측하기가 지독히도 어려운 것이다. 예측 불허의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연결된 과거 사건들을 보면, 미래 사건을 정확 히 예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접을 수밖에 없다.
내가 기억하려 애쓰는 또 다른 하나는 열린 상상력을 지녀 야 한다는 점이다. 즉 현재 상황을 뛰어넘어 늘 다양한 가능 성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의 세상 모습이 어떻든, 무엇이 당연해 보이든, 내일이 되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작은 우연 때문에 모든 게 달 라질 수 있다. 돈과 마찬가지로 사건도 복리 효과를 낸다. 그 리고 복리 효과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미약하게 시작된 뭔가 가 나중에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는지를 처음에는 직관적으 로 느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 알다시피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형편없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하고 미묘한 차이를 놓친 말이다. 사실 우리는 미 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꽤 뛰어나다. 다만 뜻밖의 일을 예측하 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을 좌우하곤 한다.
언제나 가장 큰 리스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리스크 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므로 아무도 대비할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리고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리스크가 현실이 됐을 때 피해가 엄청나기 마련이다.
-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는 매년 1월 발간 호에 그해에 대 한 예측을 싣는다. 2020년 1월에 발간된 <이코노미스트>에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 2022년 1월 발간 호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게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두 사건 모두 잡지 간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는 알 수 없는 사건이었다. 바로 그것 이 포인트다. 가장 큰 뉴스, 가장 큰 리스크, 가장 중대한 결 과를 초래하는 사건은 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높거나 낮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잠재 리스크를 파악하는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가장 큰 리스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발생했을 때 가장 놀랄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가장 큰 리스크가 뭔지 안다면 뭔가 대비책을 세울 테고, 대비책을 세우면 그 일은 덜 위험한 것이 된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은 곧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리스크를 결코 완전히 정복할 수 없는 것이다.
장담하건대,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향후 10년간 나 타날 가장 큰 리스크와 가장 중요한 뉴스는 지금 아무도 언급 하지 않는 무언가일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때가 몇 년도이든 마찬가지다. 내가 이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 는 이유는 지금까지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다는 속성이 리스크를 위험한 것으로 만든다.

- 대공황은 거대한 사건이었음에도, 그리고 그 재앙이 이미 꽤 진행된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대공황은 1929년에 시작됐다. 하 지만 1930년 미국경제연맹National Economic League의 똑똑한 회원 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 조사에서 미국이 직면한 가장 중 요한 문제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온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1위 - 사법 정의 구현
2위 - 금주법
3위 - 법을 무시하는 세태
4위 - 범죄
5위 - 법 집행
6위 - 세계 평화
그리고 '18위'가 실업률이었다.
1년 뒤인 1931년, 그러니까 대공황이 시작되고 2년이 지났을 때 여론 조사에서 실업률은 금주법, 사법 정의 구현, 법 집 행에 뒤이어 고작 4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공황이 끔찍했던 것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으므로 아무도 대비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 은 재정적으로나(부채 증가) 심리적으로(갑작스러운 손실이 가져 온 충격과 고통)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미래에 대해서뿐 아니라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아는 것은 세 가지다.
1) 사진으로 남은 것
2) 누군가가 기록한 내용
3) 역사학자나 저널리스트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사람들이 한 말
지금껏 일어난 중요한 모든 일 중 몇 퍼센트가 이 세 범주 중 하나에 들어갈까?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아주 극미한 퍼센트일 것이다. 게다가 위의 세 자료는 모두 잘못된 해석, 미 완성, 윤색, 거짓말, 선택적 기억을 겪는다.
세상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과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관 점과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면,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현재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진행 중일 수 있는지, 상상하지 못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를 과소평가하기 쉽다.
- 상상할 수 없는 일의 대비책을 세우기는 불가능하다. 상상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검토했다고 믿을수록, 그 경우의 수 에서 벗어난 일이 발생했을 때 충격만 더 커진다.
하지만 아래 두 가지를 기억한다면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지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리스크 를 바라보라. 그들은 대규모 지진이 언제고 반드시 일어날 것 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강도로 일어날지는 모른다. 비록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구급 대원들이 준비 돼 있고, 어쩌면 지진이 100년 동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만 건물이 지진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나심 탈레브 Nassim Taleb는 말했다. "예측이 아니라 준비성에 투자하라."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정확한 예측이 있어야 대비를 하겠다고 생각할 때 리스크 는 위험한 것이 된다. 오로지 예측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를지라도 리스크가 언제고 반드시 올 것이라 고 예상하고 있는 편이 낫다.
사실 예측은 헛소리이거나 이미 누구나 아는 내용인 경우 가 대부분이다. 예상과 예측은 다르다. 그리고 다가오는 리스크를 알 수 없는 세상에서는 후자보다 전자가 더 유용하다.
둘째, 상상할 수 있는 리스크만 대비하면 상상하지 못한 리스크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니 개인 재정을 관리할 때는 너무 많다 싶은 액수가 적절 한 저축액이라고 생각하라. 저축액은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 가 돼야 한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채 액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선을 어느 정도로 생각했든, 실제로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액수는 그보다 적을 가능성이 크다. 당신의 현재 대비 수준이 합당하게 느껴져서는 안 된다. 세상을 뒤 흔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그 일이 실제로 터지기 전에는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시나리오로만 보였다는 점을 떠올 려보라.
- 몽테스키외 Montesquieu는 275년 전에 말했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 목표는 쉽게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 보다 더 행복해지길 원한다. 이는 언제나 어렵다. 왜냐하면 우 리는 남들이 실제보다 더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페니실린도 자외선 차단제도 애 드빌도 없는 시절을 살았다. 하지만 오늘날 저소득층 미국인 이 대부호 록펠러도 누리지 못했던 애드빌과 자외선 차단제 를 누린다고 해서 록펠러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말할 수는 없 다. 인간의 머리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남들과 비교해 평가한다. 주변 사람 들이 잘살게 되면 사치품으로 간주되던 것이 놀랍도록 짧은 기간 내에 필수품이 된다.
투자자 찰리 멍거 Charlie Munger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탐욕이 아니라 시기심이라고. 

-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중위소득은 외벌이 가구(대개 남편이 돈을 벌고 아내는 전업주부였다)에서 자녀 셋을 키우는 것 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적당한 수준의 주택을 구매하고 최신 모델과 조금 철 지난 모델로 자동차를 두 대 장만할 수 있었다. 또 차를 몰고 휴가를 떠났으며 수입을 잘만 관리하면 저축까지 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삶의 풍경에 대한 이런 그림은 맞다. 실제로 중위 소득 구간의 미국인 가정에는 셋쯤 되는 자녀와 애완견과 공 장에서 일하며 돈을 버는 남편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일 당시의 일반적인 가정이 오늘날보다 더 잘살았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쉽게 논박할 수 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중위가계소득은 1955년에 2만 9,000달 러, 1965년에 4만 2,000달러, 2021년에 7만 784달러였다. <라 이프>는 1920년대 사람들이 1950년대의 부를 보면 놀라 입 을 다물지 못할 것이라고 표현했다. 1950년대와 오늘날을 비 교해도 마찬가지다. 1950년대 사람들은 손자가 자신보다 두 배도 더 넘게 돈을 벌게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득 증가는 노동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여성의 노동 참가율이 늘어났기 때문만도 아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중위시급은 현재 1955년보다 약 50퍼센트 더 높다.
1950년대 사람들이 오늘날 사람들이 경제를 걱정하는 소 리를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1950년에 주택 보유 비율은 오늘날보다 12퍼센트포인트 낮 았다. 당시의 평균적인 주택은 요즘 주택보다 3분의 1 더 작았 다. 그럼에도 그 안에 사는 식구 수는 더 많았다. 1950년 평균 가계 예산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29퍼센트였고 오늘날 은 13퍼센트다.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오늘날의 세 배였다. 그 런 시대를 그리워하다니, 이해가 되는가?

-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사회에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러 큰 흔적을 남겼다. 일례로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는 거의 모든 임금 수준을 미국 전시노동위원회 National War Labor Board에서 정했다. 이 위원회는 평등한 임금 체계를 지향했다. 즉 저소득 노동자와 고소득 노동자의 격차를 줄이고자 했다. 이런 접근법은 임금 규제 시스템이 폐지된 이후에도 계속됐 다. 그러면서 전쟁 전에 존재했던 계층 간 소득 차이가 크게 줄 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역사가 프레더릭 루이스 앨런Frederick Lewis Allen이 밝힌 바에 따르면, 퍼센트로 따질 때 가장 큰 소득 증가를 경험한 것은 소득이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 이었다. 따라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크게 좁혀졌다. "사람들이 1950년대가 좋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고 묻는다면, 그 답의 일부는 적어도 여기에 있다. 나와 주 변 사람 대다수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기대치가 쉽게 높아지지 않는 시대였다. 주변에 나보다 훨씬 더 잘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다수 미국인이 풍족한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자신과 주변 이들을 비교해도 그 풍족함의 수준이 비슷했다. 그것이 1950년대가 다른 시대와 달랐던 점이다. 따라서 오늘 날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소득은 더 적었지만 사람들은 만 족했다. 남들도 역시 그만큼 벌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보다 작은 집도 만족스러웠다. 나뿐 아니라 남들도 그 정도 되는 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의료 서비스가 부족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뿐 아니라 이웃 사람도 같은 상황이니까.
-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사람들이 소셜 미디 어를 이용해 소통하기보다는 서로를 위해 공연을 한다고 지 적한다. 우리는 남들이 모는 근사한 자동차를, 남들이 사는 멋진 집을, 남들이 다니는 좋은 학교를 본다. 요즘은 "나도 저 게 갖고 싶어. 나한테는 왜 저게 없을까? 왜 저 사람은 갖는데 나는 못 가질까?"라고 생각하기가 불과 몇 세대 전보다 훨씬 더 쉬워졌다.

- 98세의 찰리 멍거에게 "당신은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삶에 만족하는 것 같군요. 행복한 삶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행복한 삶을 위한 제1원칙은 기대치를 낮추는 것입니다. 비현실적인 기대치를 갖고 있으면 평생 괴로워집니다. 합리적인 기대치를 갖고, 당신이 맞이한 결과가 좋든 나쁘든 침착함과 평정심을 갖고 받아들이십시오.
- 기대치를 관리해야 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지만 사실 어려움이 있다. 높은 기대치와 동기를 구분하기 힘들 때가 많다. 또 낮은 기대치는 마치 포기를 뜻하는 것처럼, 자신의 잠재력 을 눌러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난점을 감안한다면 다음 두 가지를 명심하는 것이 좋다.
첫째, 부와 행복은 두 가지 요소로 이뤄진 등식임을 항상 기억하자. 두 가지란 당신이 '가진 것'(현실)과 '기대하는 것'(기 대치)이다. 이 둘은 똑같이 중요하다. 따라서 가진 것을 늘리 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을 쏟으면서 기대치를 관리하는 데에 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특히 우리가 훨씬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닌 기대치이므로 더욱 그렇다.
둘째, 기대치 게임의 원리를 이해하라. 기대치 게임은 결국 멘탈 게임이다. 누구나 낙담하고 스트레스를 겪는다. 동시에 모두가 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게임의 규칙과 전략을 알아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자신과 세상을 위해 발전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대개의 경우 사실이 아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은 기대한 것과 실제 결과의 차이를 경험하는 일이다. 즉 우리는 기대한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만족과 성취감을 느 낀다. 그리고 이 등식에서 기대치 부분은 중요할 뿐 아니라 현 실 상황보다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 어떤 한 가지에서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다른 어떤 것에서는 비정상적으로 형편없는 경향이 있다. 주변을 둘러보 면 그런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마치 그들의 뇌는 지식과 감정을 수용하는 용량이 제한돼 있어서, 한 부분에서 비정상 적으로 뛰어난 능력이 발휘되는 대신 성격의 다른 부분이 희 생되는 것 같다.
일론 머스크 Elon Musk를 보라. 어떤 종류의 서른두 살 인간이 GM과 포드Ford, NASA 모두와 맞붙어 경쟁할 생각을 할까?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인간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 반적 한계가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는 인간이다. 오만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트위터 에티켓을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다.
- 사람들은 천재적이고 대담한 비전가로서의 머스크를 좋아 한다. 하지만 사회적 관습과 상식을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행동 하는 머스크는 싫어한다. 하지만 그 두 모습을 분리할 수는 없 다. 그 둘은 리스크와 수익의 트레이드오프 관계와 비슷하다. 존 보이드도 마찬가지다.
천재인 동시에 끔찍한 상사였던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높은 포부 탓에 자신과 관계 맺은 많은 회사를 파산 위기로 몰아넣은 월트 디즈니 Walt Disney도 마찬가지다.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는 언젠가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에게 인간을 달에 보내는 것은 무리한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자 케네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배짱이 없는 사람이라면 40대에 대통령에 출마하지도 못했 을 겁니다."
- 엄청난 성취를 이뤄내는 사람은 엄청난 실패를 가져올 수 있는 리스크를 감수하곤 한다.
어떤 사람이 성공한 기업 또는 위대한 국가의 리더가 될까? 단호하고, 낙관적이고, '노'라는 답을 허용하지 않고, 자신 의 능력을 무조건 확신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무모한 열정으로 도를 넘어서고, 욕심에 휩싸이고, 남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리스크를 무시할까?
단호하고, 낙관적이고, '노'라는 답을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무조건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평균으로의 회귀'는 역사 속에서 대단히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경제, 시장, 국가, 기업, 직업 등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평균으로의 회귀가 일어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누군가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는 그의 성격적 특성이 동 시에 그를 위험에 빠트릴 가능성 또한 높이기 때문이다.

- 포인트는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미래를 바라보는 정확한 관점을 원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확실성이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경기 불황이 시작될 확률이 몇 퍼센트다"라는 말은 고통을 별로 줄여주지 못한다. 어쩌면 오히려 고통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에 경기 불황 이 찾아올 것이다"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꽉 붙잡고 의지할 수 있는 뭔가를 제공한다.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 지금까지 지구에 산 인간은 대략 1,000억 명이다. 그들의 평 균 수명을 약 30세로 잡으면 그들이 산 날의 수는 약 1,100조 일이다. 그 시간 동안 발생 확률이 10억분의 1쯤 되는 놀라 운 사건이 수백만 번은 일어났다.
그런데 오늘날은 끔찍한 재앙을 접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십중팔구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다. 
- 지역 뉴스 매체의 감소는 여러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그중 하나는 뉴스 보도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더 부정적이고 비관 적인 내용이 담길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아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좋은 뉴스보다 나쁜 뉴스가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 나 쁜 뉴스는 사람들을 더 쉽게 끌어당기고, 비관적 뉴스는 낙관적 뉴스보다 더 시급한 무언가로 느껴진다.
*어느 특정한 때에 당신이 사는 동네에 나쁜 사건(사기, 부정부패, 재앙)이 발생할 확률은 낮다. 대상 범위를 전국으로 넓히면 그 확률이 더 높아진다. 대상 범위를 전 세계로 넓히면 어느 때라도 끔찍한 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100퍼센트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이렇다. 지역 뉴스에서는 소프트 볼 경기를 보도하지만, 글로벌 뉴스에서는 비행기 추락 사고 와 집단 학살을 보도한다.

- 찰리 멍거는 1990년대에 '오의 심리학 The Psychology of Human
Misjudgment'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여기서 잘못된 판단을 초래하는 심리적 편향 25가지를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인 '불 확실성 회피 경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의 뇌는 불확실성을 빨리 제거하고 결정을 내리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동물들은 오랜 세월 진화를 통해 불확실성을 신속하게 제거 하는 쪽으로 발달했다. 포식자를 맞닥뜨린 동물에게 전혀 도 움이 되지 않는 행동은 어떻게 할지 결정하느라 오랜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 심리학자 필립 테틀록Philip Tetlock 교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칭 또는 타칭 전문가들의 예측을 연구했다. 이 연구 결과를 보면 상당히 많은 전문가가 정치와 경제를 예측하는 능력이 형편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앞으로는 전문가를 무시하는 쪽을 택할 까? 테틀록 교수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곳이라고 믿고 싶어 한 다. 따라서 그 욕구를 채워줄 것 같은 권위 있어 보이는 이들에게 의지한다."

- 뛰어난 스토리가 승리한다. 뛰어난 아이디어나 옳은 설명, 또는 합리적인 이론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감을 끌어내는 스토리를 들려주는 사람이 대개 성공한다.
탁월한 아이디어도 형편없는 방식으로 전달하면 실패할 수 있고, 낡았거나 엉뚱한 아이디어도 설득력 있게 전달하면 혁 신을 일으킬 수 있다. 중후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목소리를 지 닌 영화배우 모건 프리먼Morgan Freeman은 식료품 목록을 읽는 것으로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지만, 커뮤니케이션 능력 이 떨어지는 과학자는 획기적인 질병 치료법을 발견하고도 그 업적이 묻혀버릴 수 있다.
- 언제나 훌륭한 스토리가 차디찬 통계자료보다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한다.
당신이 옳은 답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당신이 틀린 답을 갖고 있지만 뛰어난 스토리텔러라면 (당분간은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옳은 답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뛰어난 스토리텔러라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100퍼센트다.

- 유발 하라리를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리는 이들은 하라리의 저서에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느라 여념이 없다. 머스크 역시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경멸이 섞인 시선을 받는다.
완벽한 세상에서라면 정보의 중요성이 그 정보 전달자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인내심이 부족하며, 감정에 쉽게 지배당하고, 복잡한 정보가 마치 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이해하기 쉬워지기를 원한다.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자. 정보가 오고가는 어떤 상황에서 든, 즉 제품, 기업, 정치, 지식, 교육, 문화가 있는 곳이면 어디 서든 뛰어난 스토리가 승리한다.
- 모든 책은 무조건 새롭고 독창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모든 기업은 이전에 없던 혁신적 제품을 선보여야 한다고 생 각한다면, 책을 쓰거나 창업을 하기도 전에 좌절부터 맛볼 것 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와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훨씬 더 많은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만드느냐 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이 질문을 던져보라. 중요한 질문이다. 맞는 말을 하고 있지만 스토리텔링이 형편없어서 당신이 귀 기울이지 않게 되는 누군 가가 있는가?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영리한 마케팅 의 결과에 불과한 것은 무엇인가?

- 히틀러는 이성적 인간이 아니었다. 현실과 이성에서 동떨어 져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미치광이였다. 부하 사령관들이 전 투에 사용할 연료를 어디서 구해야 하느냐고 묻자, 히틀러는 미군에게서 훔쳐오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에게 현실은 중 요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즈Stephen Ambrose는 1944년 말 당시 미군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와 오마 브 래들리 Omar Bradley가 전시 전략 수립에 필요한 최고의 이성적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딱 한 가지 디테일을 놓쳤다고 말한다. 그것은 히틀러가 얼마만큼 미치광이였느냐 하는 점이었다.
브래들리의 한 측근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합리적 인간들을 상대로 싸웠다면 그들은 이미 한참 전에 투 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합리적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 고 그 사실, 즉 논리와 이성으로 측정하기 힘든 그 사실이 모 든 것을 좌우했다.

- 운동선수의 기록은 단순히 신체적 능력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뇌가 특정 순간에 리스크나 잠재적 보상을 고려해
얼마만큼의 고통을 기꺼이 견디기로 선택하는가도 선수의 기 록에 영향을 미친다.
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우리의 생존을 돕는 것이다. 따라 서 마치 자동차의 속도 제한 장치처럼, 뇌는 몸이 성능을 최 대치로 발휘해야 할 만큼 중요도나 위험이 충분히 높은 상황 이 아닌 한, 그 최대치를 발휘하게 놔두지 않는다(신체적 힘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녹초가 되면 여러 모로 취약한 상태가 된다). 성능을 최대로 발휘할 경우의 리스크를 정당화할 만큼 잠재적 보상이 크지 않다면, 뇌는 성능 발휘의 '한계'를 그보다 낮은 수 준으로 설정한다.
테스트 트랙에서 발휘되는 달리기 능력의 최대치는 올림픽 결승전에서 발휘되는 최대치와 다를 수 있고, 또 이 후자는 도끼를 든 살인자에게 쫓기고 있을 때 발휘되는 달리기 능력 의 최대치와 다를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자동차에 깔려 목숨이 위험할 때 누군가가 자 동차를 들어 올려 구해내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설 명해준다. 사람의 능력은 그 순간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 투자자 짐 그랜트Jim Grant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보통주의 가치가 순전히 금리와 한계세율을 감안한 기 업 이익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마녀사 냥으로 무고한 이를 화형에 처하고, 충동적으로 전쟁을 벌이 고, 스탈린을 열렬히 지지하고,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했다는 오슨 웰스Orson Welles"의 말을 믿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과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 인간은 늘 감정과 비합리성에 지배당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떤 투자 대상이나 기업이든, '현재의 숫자'에 '미래에 관한 스토리'를 곱한 결과가 그것의 가치다.

- 1920년대는 광란의 황금기였다. 
1930년대는 패닉 그 자체였다. 
1940년대에는 세상이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했다. 
1950년 대와 1960년대, 1970년대에는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반복됐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가득했다. 
2000년대는 마치 TV 리얼리티 쇼를 보는 것 같았다.
수치 데이터와 논리에만 의지해 경제와 사회를 이해하려 는 사람이라면 100년 내내 혼란과 충격에 빠져 허우적댔을 것이다.

- 기업가정신 및 경제학 전문가인 페어 바일런드Per Bylund는 말했다. "경제적 가치라는 개념은 간단하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 들이 원하는 것이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유용성이나 이윤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들이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가 중요하 다. 경제와 관련한 수많은 행동 및 의사결정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은 결국 인간의 욕구와 감정이다. 때때로 그러한 감정 요 인을 분석하거나 예측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측정할 수도, 예측할 수도, 모델을 수립할 수도 없는 그 한 가지가 모든 비즈니스와 투자 활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다. 군에서도, 정치에서도, 직업 선택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통계와 계산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투자 활동에서 종종 목격되는 위험 하나는 맥나마라 같은 접근법에 치우치는 것이다. 즉 통계와 데이터를 최우선시하고 그런 모델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실수나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날 여지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터무니없고 기가 막 히고 설명 불가능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 혼란이 한동안 계속 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 일이 왜 일어났지?"라 는 질문에 늘 합리적인 답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심지 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자신의 예상과 맞아떨어지 는 결과라고 착각한다.
결국 장기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이 세상이 불합리성과 혼란, 골치 아픈 인간관계, 불완전한 인간들로 들끓는 곳이라 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 평화가 혼돈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그런 일은 수시로 일어난다.
우리 삶에서는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가 흔하게 목격된다. 편집증적 불안은 성공을 낳는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경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집증적 불안은 스트레스가 된다. 따라서 성공하고 나면 즉시 그것을 버린다.
성공의 동력이었던 것을 버렸으므로 이제 퇴보하기 시작 한다. 그리고 그것은 훨씬 더 큰 스트레스가 된다.
비즈니스, 투자, 일, 인간관계 등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터질 때까지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것이다.
투자자들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알고 싶어 하는 시장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다 음 두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 시장이 미친 듯이 과열되는 것은 뭔가 고장 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미친 듯이 과열되는 것은 정상이다. 더 미친 듯이 과열되는 것도 정상이다.
몇 년에 한 번씩은 시장이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시장이 투기적 행동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또는 펀더멘탈 지표들과 동떨어진 채 돌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시장은 늘 그래왔다.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 아 니다. 그들은 다른 투자자들이 믿는 스토리의 한계를 확인하 고 싶은 것뿐이다.
둘째, 충분함의 미학을 깨닫자 사인펠드처럼 생각하자. 투 자자 차마스 팔리하피티야Chamath Palibapitiya는 누군가가 최고 수 익을 내는 방법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연간 수익률이 15퍼센트만 되어도 좋겠습니다. 그렇 게 50년이 쌓이면 엄청난 수익이 될 테니까요. 나는 어려움 에 맞서면서 그저 천천히,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 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스타벅스Starbucks는 창업하고 23년 후인 1994년에 매장이 425개였다. 1999년에는 한 해에만 625개 매장을 새로 열었다. 2007년경에는 1년에 매장 을 2,500개씩 열고 있었다. 매장이 약 4시간마다 하나씩 생긴 셈이다.
하나의 결과는 또 다른 결과를 낳았다. 성장 목표 수치를 달성하려는 욕구가 결국 합리적 분석과 판단을 밀어냈다. 스 타벅스 매장의 포화 상태는 도를 넘었다. 경제 호황기였음에 도 동일 매장 매출 성장률이 50퍼센트 감소했다.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는 2007년 경영진에게 보낸 메일에 이렇게 썼다. "1,000개도 안 되던 매장이 1만 3,000개로 늘어 나는 동안 우리는 일련의 결정을 내렸고 지금 되돌아보면 그 결정들이 스타벅스 경험'을 희석했습니다."
- 2008년 스타벅스는 매장 600개를 폐점하고 1만 2,000명의 종업원을 해고했다. 스타벅스 주가는 73퍼센트 떨어졌다. 2008년임을 감안하더라도 끔찍한 하락이었다.
슐츠는 2011년 자서전 《온워드Onward》에 이렇게 썼다. "성장 은 전략이 아니라 전술일 뿐이다. 무분별한 성장이 전략이 되 었을 때 우리는 방향을 잃고 헤맸다."
스타벅스에는 가장 알맞은 규모가 있었다.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그 선을 넘어가면 매출은 증가할지 몰라도 실망 한 고객 수는 더 빠르게 증가한다. 로버트 워들로가 거인이 됐 지만 제대로 걷기 힘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 타이어 재벌 하비 파이어스톤Harvey Firestone은 1926년에 이렇게 말했다.
단번에 시장을 장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첫 째, 대개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많은 비용을 날리게 된다. 둘 째, 설령 가능하다 해도 생산 시설이 감당하지 못한다. 셋째, 설령 가능하다 해도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 너무 단기간에 거 대해진 기업은 하루아침에 큰돈이 생긴 소년처럼 행동하기 십상이다.
- 나심 탈레브는 자신이 연방 차원에서는 자유주의자이고 주 차원에서는 공화당 지지자이며 자신이 사는 도시 차원 에서는 민주당 지지자이고 가족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자라 고 말한다. 집단 크기가 4명에서 100명, 10만 명, 또는 1억 명 으로 커지면 그때마다 사람들이 리스크와 책임을 다루는 방 식은 완전히 달라진다.
기업 문화도 그렇다. 10명 규모의 회사에서 효과가 있는 경 영 스타일을 1,000명 규모의 회사에 적용하면 경영을 망칠 수 있다. 이는 단기간에 빠르게 커진 기업이 종종 깨닫는 아픈 교훈이다.
- 우버 Uber 창립자이자 전 CEO 트래비스 캘러닉Travis Kalanick ick o] 대표적인 예다. 우버 초창기에는 캘러닉만이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었지만, 회사가 성숙해감에 따라 캘러닉이 아닌 다른 누 군가가 필요해졌다. 그것은 캘러닉의 잘못이 아니다. 때로 어떤 것(즉 리더십)은 규모를 확대할 수 없음을, 즉 기업의 성장 단계에 따라 필요한 리더십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자연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숱하게 많다. 좋은 것이라도 무리하게 속도를 내면 문제나 재앙이 초래되곤 한다.
- 대개 어린 나무는 커다란 엄마 나무의 우거진 가지들이 만 든 그늘에서 수십 년을 보낸다. 햇빛을 적게 받으므로 천천히 자란다. 천천히 자라기 때문에 밀도 높고 단단한 나무가 된다. 그런데 만일 탁 트인 들판에 나무를 심으면 얘기가 다르다. 주변에 큰 나무들이 없으므로 어린 나무는 햇빛을 듬뿍 받고 빠르게 성장한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면 무르고 밀도가 낮 은 나무가 된다. 밀도가 높아질 시간이 없는 탓이다. 그리고 이런 나무는 곰팡이류가 잘 번식하고 질병에 취약해진다. "빨 리 자라는 나무는 쉽게 썩으므로 어른 나무로 성장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라고 산림 전문가 페터 볼레벤Peter Wohlleben은 설명 한다. 서두르면 망치는 법이다.
동물의 경우를 보자. 어린 물고기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한 그룹은 비정상적으로 차가운 물에, 다른 그룹은 비정상적 으로 따뜻한 물에 넣는다. 이때 차가운 쪽과 따뜻한 쪽 모두 특정한 온도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발생한다. 차가운 물 속의 물고기는 일반 물고기보다 느리게 자라고, 따뜻한 물 속의 물 고기는 일반 물고기보다 빨리 자라는 것이다. 그런 뒤 두 그룹 의 물고기를 다시 정상 온도의 물에 넣으면 결국에는 모두 정 상적인 어른 물고기로 성장한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어린 시절에 일반 물고기보 다 느리게 성장한 물고기는 평균 수명보다 30퍼센트 더 오래 산다. 반면 일반 물고기보다 빨리 성장한 물고기는 평균 수명 보다 15퍼센트 일찍 죽는다. 이는 글래스고대학교 생물학자 들이 발견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별로 복잡하지 않다. 연구팀의 설명은 이렇다. 인위적 성장 촉진은 조직 손상을 가져올 수 있고 "손상된 생 체 분자의 관리 및 회복에 쓰일 자원이 대신 빠른 성장에 사 용될 수 있다”고 한다. 반대로 느리게 성장한 경우에는 "관리 및 회복에 할당되는 자원이 증가한다.
연구팀의 일원인 닐 멧칼프Neil Metcalfe는 이렇게 설명했다. "급하게 만든 기계는 신중하게 공들여 만든 기계보다 더 빨리 고장 나는 법이다. 우리의 연구 결과는 생명체의 몸도 마찬가 지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성장은 좋은 것이다. 왜소하고 약한 개체는 결국 강자에게 잡아먹힐 테니까. 그러나 강제적인 성장, 지나치게 빠른 성장, 인위적인 성장은 역효과를 내기 십상이다.
로버트 그린은 말했다. "창의성 발현을 막는 가장 큰 장애 물은 조급함이다. 중간 과정을 신속하게 끝내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결과물을 빨리 내놓고 싶은 그 불가피한 욕망 말 이다."
이번 장을 끝내며 이것만은 꼭 말해두고 싶다. 사랑이든 일 이든 투자든,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이 두 가지가 있어 야 가치 있는 뭔가가 된다. 인내심과 희소성이다. 인내심을 지 녀야 그것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고, 희소성이 있어야 그것의 소중함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다.

- 나심 탈레브는 말했다. "역경에 과잉 반응할 때 분출되는 엄청난 에너지가 혁신을 만들어낸다."
고통은 평화와 달리 우리의 집중력을 발휘시킨다. 늑장과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는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우리의 턱밑 에 들이밀어 당장 그리고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한 미국 병사가 신문 기자의 인터뷰에 응했다. 전투 중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자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계속 두려움에 떨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 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리고 경솔한 실수를 막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것에도 적용 가능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 1930년대는 미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암울한 시기였다. 1932년에는 미국인의 거의 4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주식 시장은 89퍼센트 폭락했다. 1930년대와 관련해서는 늘 이 두 가지에 관심이 쏠린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의 언급되지 않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1930년 대가 미국 역사상 가장 생산성이 높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10년 이라는 점이다. 그 시기에 수많은 문제를 해결했고 물건을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잊혔다. 이 잊힌 스토리는 이후 나머지 20세기 동안 엄청난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 몇 가지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다. 1930년대의 총요소생산성 total factor productivity(자본, 노동, 에너지, 원재료, 서비스 등 모든 투입 요 소를 고려한 생산 효율성 지표)은 전무후무하게 높은 수준이었다. 경제학자 알렉스 필드Alex Field의 말에 따르면 1941년 미국 경제는 1929년에 비해 노동 시간이 거의 증가하지 않았음에 도 40퍼센트 더 많은 산출물을 생산했다. 한마디로 생산성이 월등히 높아진 것이다.
1930년대에 일어난 몇 가지 일에 주목해보자. 그것들이 생산성 증가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1920년대는 자동차의 시대였다. 미국 도로 위의 자동차 수 는 1912년에 100만 대였지만 1929년에는 2,900만 대가 되었 다. 하지만 도로는 다른 얘기였다. 1920년대에 자동차가 판매 되는 속도는 도로가 건설되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그러다 1930년이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뉴딜 정책이 실시 되면서 공공사업청 Public Works Administration의 주도 하에 수많은 도로가 건설되었다.
도로 건설에 지출하는 비용은 1920년에 GDP의 2퍼센트였지만 1933년에는 6퍼센트가 넘었다(오늘날은 1퍼센트 미만이다).

- 제품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공장은 처참한 매출 수치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결과 많은 공장이 헨리 포드Henry Ford가 과거 자동차 생산 에 도입했던 조립 라인을 갖추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공장의 시간당 생산량이 21퍼센트 증가했다. 프레더릭 루이스 앨런은 이렇게 썼다. "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 나 시간제로 가동됐던 1930~1940년 대공황 시기에는 효율성 과 경제성에 대한 큰 압박을 받았다. 결국 생산성이 41퍼센트 나 향상됐다."
경제학자 로버트 고든Robert Gordon은 말했다. "대공황의 트라 우마는 미국이라는 혁신 기계의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오히려 혁신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또 1930년대에는 지식 노동이 크게 증가했는데, 취업이 힘 들어 달리 할 일이 없는 젊은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많 아졌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 기간에 고등학교 졸 업률은 1960년대가 되기 전까지는 보기 힘든 수준으로 치솟 았다.
이 모든 것, 즉 생산성이 높아진 공장과 새로운 혁신 아이 디어, 교육받은 인력은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해 연합국의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핵심 엔진이 되는 데에 결 정적 역할을 했다.
- 여기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대공황이라는 비극이 없었더라도 1930년대에 기술적 도약이 일어났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만큼의 도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심각하게 망가진 경제를 살려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뉴딜 같은 정책을 끝까지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힘들다. 줄줄이 파산하는 회사를 목격하지 않았다 면 기업들이 그토록 절박하게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제가 호황이고 장밋빛 전망이 가득할 때는 경영자가 직원들에게 "새로운 걸 시도해봐. 정해진 매뉴얼 따 위는 갖다 버려. 상관없으니까"라고 말하지 않는 법이다.
- 필요에 의해 절박해져야 거대하고 신속한 변화가 일어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에는 말 탄 기병이 싸웠 지만 마지막인 1945년에는 핵폭탄이 투하됐다.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하고 얼마 안 있어 1958년 NASA가 설립되었으며, NASA는 불과 11년 후 인간 을 달에 보냈다. 두려움이라는 동기가 작동하지 않으면 이런 단기간 내의 혁신은 일어나기 힘들다.
민간 항공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행기가 무엇보다 안전 한 교통수단이 된 것은,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는 강력한 프로세스가 가동되어 미래에 비슷한 사고 가 일어날 가능성을 낮췄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들은 프랑스 남부 해안이나 미국의 뉴포트, 팜스프링스, 팜비치 같은 유명 휴양지를 쫓아 다니는 사람들이다. 밤이면 파티를 즐기고, 낮에는 골프를 치 고, 흥청망청 마시고 떠들며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 은퇴하고 아무 목적의식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누군가는 내 말에 격하게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 다. “백만장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거야말로 최고의 인생이지!" 날마다 일할 필요가 없다면, 그저 낚시나 사냥, 골 프, 여행이나 하며 산다면 최고의 인생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한다.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목적의식이기 때문이다. 목표, 치열한 싸움, 고군분투이기 때 문이다. 설령 승리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 좋은 일은 시간이 걸리지만 나쁜 일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워런 버핏은 평판을 쌓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그것이 무너지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세상의 많 은 일이 그렇다.
좋은 일은 작고 점진적인 변화가 쌓여 일어나므로 시간이 걸리지만, 나쁜 일은 갑작스러운 신뢰 상실이나 눈 깜짝할 새 에 발생한 치명적 실수 탓에 일어난다.

- 만일 내가 "50년 후에 평균적인 미국인들이 지금보다 두 배 부유해질 가능성이 얼마일까?"라고 묻는다면 가당찮은 얘기 로 들릴 것이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대단히 낮아 보인다. 지 금보다 '두 배'나 부자가 된다고? 재산이 '절'로 늘어난다고? 너무 야심 찬 목표 같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50년 동안 평균 연간 성장률 1.4퍼 센트를 달성할 가능성이 얼마일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비 관론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1퍼센트? 고작?"
그러나 위 둘은 똑같은 얘기다.
우리는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모두를 지혜롭게 다루기는 꽤 어렵다. 비관론은 낙관론에 비해 지적인 관점에서 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리므로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또 리스크에 미리 대비하게 하므로 생존을 위해 중요하다.
하지만 낙관론도 똑같이 중요하다. 당장은 상황이 암울해 보일지라도 앞으로 분명 나아지리라는 믿음은, 단단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일부터 장기적인 투자를 하는 일에 이르기 까지 삶의 모든 부분에서 꼭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발전을 위해서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공존해야 한다.

- 최고의 재정 전략은 비관론자처럼 저축하고 낙관론자처럼 투자하는 것이다.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현재에 서 그 미래로 가는 길에서 실패와 절망, 충격을 끊임없이 만날 수밖에 없는 현실. 이 둘의 조합은 역사 곳곳에서 그리고 삶 의 모든 영역에서 목격된다.

-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극단적 낙관론자가 있다. 이들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생각 하며, 모든 부정적 태도를 성격적 결함이라고 본다. 또 자신감 이 너무 강해서 일이 잘못될 리 없다고 믿는다.
다른 한쪽 끝에는 극단적 비관론자가 있다. 이들은 모든 것 을 부정적으로 보고, 모든 일이 망할 거라고 생각하며, 모든 긍정적 태도를 성격적 결함이라고 본다. 또 자신감이 너무 낮 아서 일이 잘될 리 없다고 믿는다. 이들은 극단적 낙관론자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극단적 낙관론자와 마찬가지다.
둘 다 똑같이 위험하다. 낙관론과 비관론을 흑백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이성적인 판 단이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 중간이다. 나는 그것을 합리 적 낙관론자라고 부른다. 합리적 낙관론자는 인간의 현실이 언제나 문제와 절망과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그런 장애물도 결국엔 발전을 막을 수 없다고 믿으며 낙관적 시각을 유지한다.
어쩌면 위선자나 변덕쟁이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대개 그들은 남들보다 훨씬 더 멀리 내다보고 있다.

-  "큰 수익을 내는 것보다 재정적 파산을 겪지 않고 버티는 힘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힘을 키우면 가장 큰 수익을 얻게 된다. 복리 효과가 기적을 일으킬 만큼 오랫동 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닫는다. 장기적으로는 대개 좋은 결과에 이르고 단기적으로는 대개 나쁜 상황을 겪 는다는 사실이다. 단기적 역경과 장기적 관점을 균형 있게 관 리하는 법을 깨달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그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대개 결국 비참한 비관주의자가 되거나 파산한 낙관 주의자가 된다.

- 많은 이들이 효율적인 삶을 살려 애쓴다.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아모스트버스키Amos Tversky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 다.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는 비결은 항상 조금씩 덜 일하는 것이다. 몇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 결국 몇 년을 낭비하게 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해변을 오래 산책한다.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다. 연구가 풀리 지 않을 때는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머릿 속 상태를 마음속에 시각적으로 그려본다.
모차르트도 비슷한 말을 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할 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산책할 때, 밤에 잠이 오지 않아 그냥 누워 있을 때, 그럴 때 가장 뛰어 난 음악적 영감이 가장 풍부하게 찾아온다.
- 유용한 비효율성에 관한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기업의 운영 프로세스에서 약간의 느슨함을 허용하는 것이다. 적시 생산시스템Just-In-Time은 제품 생산에 필요한 부품을 미리 쌓 아두지 않고 제조라인에 투입하는 시점에 맞춰 그때그때 납 품받는 방식이다. 이것은 지난 20년간 효율적인 경영 방식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하자 공급망은 붕괴했다. 거 의 모든 제조 기업이 부품 조달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2022년 소비 경기가 아주 양호해진 후에도 자동차 회사들은 칩과 브레이크, 도료가 부족하단 이유로 공장을 가동할 수가 없었다. 적시생산시스템에만 맞춰진 그들은 부품 공급의 차질 이란 변수에 대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기업들의 '목표'는 오류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것 이었다. 그리고 이는 완전히 역효과를 냈다. 공급망 전반에 약 간의 비효율성이 허용됐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오류의 여지를 허용하는 것은 종종 비용을 발생시키거나 사업을 지체시키는 요인, 또는 비효율적인 전술로 여겨지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큰 이로움을 가져올 수도 있다.
투자에서도 비슷하다. 현금은 강세장에서는 비효율적인 짐이지만 약세장에서는 산소만큼 소중하다.
레버리지 투자는 수익을 극대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지만 모든 것을 잃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집중 투자는 수익을 극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분 산 투자는 수익을 낼 수 있는 종목을 소유할 가능성을 높이 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잘 생각해보면 약간의 비효율성을 허용하는 것이 이상적임을 알 수 있다.
- 사인펠드는 말했다. "그렇다면 필요 없습니다. 효율적으로 돌아간다면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힘든 길이 옳은 길입니다. 그 시트콤이 성공한 것은 내가 모든 걸 챙기며 관리했기 때문 입니다. 모든 대사, 장면, 편집, 캐스팅까지 전부 말입니다." '효율적으로 돌아간다면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직관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지름 길의 위험성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성공에 비용 이 따른다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제프 베이조스는 현실적인 관점으로 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자기 직업에서 하는 일의 절반만 즐길 수 있어도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다. 모든 것에는 비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게 현실이다. 어떤 일에든 싫은 측면이 있기 마련이다. 대법원 판사도 자기 일에서 싫은 부분이 있다. 대학 교수도 참석하기 싫은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모든 직업에는 싫은 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직업의 일부다.
그렇다. 그것도 직업의 일부다. 사실 모든 것의 일부다. 베 이조스의 말은 직업 이외에 다른 많은 영역에도 똑같이 적 용된다.

- 당연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법칙이 있다. 목표로 삼을 가치가 있는 것 중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모든 것에는 비용이 따르며, 대개 그 비용은 잠재적 보상 의 크기와 비례한다.
하지만 가격표가 달린 경우는 드물다. 비용을 현금으로 치 를 수 없다는 얘기다. 목표로 삼을 가치가 있는 것은 대부분 스트레스, 불확실성, 까다로운 사람 상대하기, 관료주의, 나와 상충하는 타인의 인센티브, 귀찮고 번거로운 일, 부조리한 상황, 기나긴 시간, 끊임없는 회의감 등의 형태로 우리에게 비용을 청구한다. 그것이 발전과 성공을 위한 비용이다. 많은 경우 그 비용은 치를 가치가 있다. 그러나 에누리 없이 반드시 전부 치러야 하는 비용임을 기억하라. 여기에는 쿠폰도 없고 할인도 없다.

- 생물체의 몸 크기는 투자의 레버리지와 비슷하다. 이익을 증가시키지만 손실도 증가시킨다. 한동안은 별문제가 없지만, 이익이 있더라도 손실이 치명적인 수준에 이르는 시점이 되면 커다란 역효과가 발생한다.
부상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몸집이 큰 동물은 부상에 취약 하다. 개미는 자신의 키보다 1만 5,000배 높은 곳에서 떨어져 도 죽지 않는다. 쥐는 자신의 키보다 50배 높은 곳에서 떨어 지면 뼈가 부러진다. 인간은 자신의 키보다 10배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코끼리는 자신의 키보다 2배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물풍선처럼 터져버릴 것이다.
또 큰 동물은 단위 개체당 서식지 면적이 더 많이 필요하 다. 이는 서식지가 부족해지면 가혹한 특징이 된다. 큰 동물 은 작은 동물보다 단위 몸무게당 먹이도 더 많이 필요하므로 기근이 닥치면 큰 몸집이 결정적 단점이 된다.
큰 동물은 쉽게 숨을 수 없다. 움직임도 느리고 번식도 느 리다. 먹이사슬 최상위에 위치하므로 대개 적응과 변화가 필 요 없지만, 그것이 필요한 때가 되면 그런 적응 능력 부족이 생존에 불리한 특성으로 작용한다.
- 가장 지배적인 종이 몸집이 더 큰 경향이 있지만, 가장 오 래 견디는 종은 크기가 더 작은 경향이 있다. 티라노사우루 스보다는 바퀴벌레가, 바퀴벌레보다는 박테리아가 생명력이 더 끈질기다. 역설적이게도 진화는 개체의 크기가 커지도록 부추겨놓고선 이젠 크다는 이유로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삶의 많은 영역에서 목격되는 현상과 도 일맥상통한다. 경쟁 우위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경쟁 우위를 얻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잃지 않는 일이다. 

- 때로 성공은 마침 그 시기에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덕분에 찾아온다. 성공을 경험하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그것이 행운 덕이었다는 사실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누군 가는 그런 깨달음 앞에서 겸손해지고, 누군가는 그런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제자리라도 지키려면 '계속 달려야 하는 것, 그것이 진화의 원리다. 삶에서 대부분의 것도 그렇지 않을까? 비즈니스도? 제품도? 일도? 국가도? 인간관계도? 맞다. 전부 그렇다.
진화는 가차 없고 냉혹하다. 앞서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이 아니라 뒤처지는 것을 멸종시킴으로써 가르침을 준다. 두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 한 시대를 지배하는 무언가가 다음 시대에 사라지더 라도 놀라지 마라. 그것은 역사에서 늘 반복된 스토리다. 기 업도, 제품도, 음악가도, 도시도, 작가도 수십 년 넘게 정상을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경우(비틀스, 리바이스, 스니커즈, 뉴욕시)는 극히 예외에 속한다.
둘째, 계속 달려라. 이미 거둔 성공에 마음 놓고 안주해도 될 만큼 확실한 경쟁 우위란 없다. 오히려 그렇게 보이는 경쟁 우위가 대개는 몰락의 씨앗을 품고 있다.

- 대다수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두려움을, 마음속 불안함을, 정말로 행복한지 아닌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남들에게 결점이 나 실패를 솔직하게 밝히는 경우도 거의 없다. 대개는 멋지게 꾸민 모습만 타인에게 보여준다.
전문가는 언제나 다른 지역 출신이라는 말이 있다. 성경에 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그 누구도 자기 고향에서는 선지자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앞의 말에는 다른 더 깊은 의미 도 있지만, 어쨌든 이 두 말에는 공통적으로 중요한 포인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이 나의 특별하지 않은 모습과 못난 구석을 눈치채 지 못한다면,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매 우 쉽다는 사실이다. 일이나 사업, 개인적 삶에서 당신 자신을 남들과 비교할 때 이 점을 기억하길 바란다.

-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깊이 알고 나서야, 특정 분야에서 뛰어나면 다른 분야에서는 서투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특별한 재능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과 그의 의 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둘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오렌지를 먹을 때 껍질은 버려야 한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누구나 이런저런 문제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당신이 상대방을 깊이 알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잊지 말고 당신 자신과 타인에 대 해 더 너그러워지길 바란다.

- <월스트리트저널>의 칼럼니스트 제이슨 츠바이크는 전업 작가가 걷는 세 가지 길을 이렇게 말한다.
1. 거짓말을 듣고 싶은 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2. 진실을 듣고 싶은 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면 먹고살 수는 있다.
3. 거짓말을 듣고 싶은 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면 깡통을 차게 된다.

- 역사가 스티븐 앰브로즈Stephen Ambrose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자신감과 허세로 가 득한 채 신병 훈련소에서 나온 군인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전선에 투입됐다. 그러나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해보면 모든 게 바뀐다.
앰브로즈는 "훈련으로 실제 전투에 대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라고 썼다. 훈련으로 총 쏘는 법과 명령을 따르는 법은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기관총 사격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파편 세례를 맞으며 공포와 무력감에 압도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가르칠 수 없다."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 나는 엄청난 성공을 이룬 뒤 남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성공이 자부심이나 만족 감,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성공한 뒤에 느끼는 것, 그리고 자신의 반응은 성공하기 전에 상상한 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배우 짐 캐리Jim Carrey는 말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꿈꾸던 걸 이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그게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테니까요."
성공과 명예를 얻은 뒤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기 힘든 것 도, 반대로 리스크가 현실이 됐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 하기 힘든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에서다. 직접 겪어보기 전까 지는 그 상황 안에서 일어날 감정적, 심리적 반응을 완벽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호화 저택에 사는 사람도 독감에 걸리고, 건선에 시달리고, 소송에 휘말리고, 배우자와 싸우고, 불안감으로 괴로워하고, 정치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어느 때라도 이런 것들이 물질적 부에서 오는 만족감을 밀어낼 수 있다.
우리는 미래의 성공과 행복을 상상할 때 현실적 측면은 쏙 빼놓고 이상적인 그림만 그린다. 그러나 실제로 삶에서는 언 제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여 공존하면서 우리에게 영향 을 미친다.
당신은 어떨지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직접 경험하고 나면 '아,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닫는다. 상황은 당신이 생각한 것보 다 훨씬 더 복잡하다. 요컨대, 겪어봐야 안다.

- 장기적 목표는 자신하기 쉽지만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투 자나 일, 인간관계에서 장기적 전략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대 다수 사람이 안다. 그러나 "장기 전략으로 갈 거야"라고 말하 는 것은 에베레스트산 밑에서 정상을 가리키면서 "저기에 올 라갈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음, 멋진 생각이다. 그리고 이제 수많은 시험과 고난이 시작된다.
장기전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또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안겨준다.

- 뭔가를 장기적으로 계획하거나 실행할 때는 다음을 기억해 야 한다.
장거리 달리기는 당신이 견뎌야 하는 단거리 달리기들의 집합이다.
당신이 투자 기간을 10년으로 잡는다고 해서 10년 동안 일 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누 구나 경기 침체와 하락장, 대폭락, 뜻밖의 사건, 또는 밈 같은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를 겪어야 한다.
따라서 장기적 목표를 세우면 단기적 예측 불가능성과 위 기를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대신, 이런 질문을 던져 라. "끝없이 나타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견 딜 수 있을까?"
- 장기적 사고는 기만적인 안전 담요가 될 수 있다. 즉 사람들 은 장기 전략을 세우면 고통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단기적 사 건을 피해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오 히려 반대다. 투자 기간이 길수록 더 많은 재앙과 비극을 경 험하기 마련이다. 야구 선수 댄 퀴즌베리Dan Quisenberry는 말했 다. “미래는 현재와 매우 닮았다. 단지 더 길 뿐이다."
장기적 계획과 실행을 위해서는 단기적 리스크도 간과하지 않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 세상은 계속 변한다. 따라서 생각을 바꾸는 일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때로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는 일은 어렵다. 자신을 속여 틀린 생각을 믿는 것이 실수를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기 때문 이다.
장기적 전략은 잘못 생각하고 있음에도 그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과거에 옳았지만 세상이 변해서 더는 옳지 않은 무언가를 계 속 붙들고 있으면서 "아직 초반이라 내 견해가 옳다는 게 증 명되지 않고 있을 뿐이야" 또는 "나만 빼고 전부 잘못 생각하 고 있어”라고 말한다.
- 진정한 장기적 사고를 하려면 인내심과 고집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그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이 것이다. 당신의 업계에서 절대 변하지 않을 소수의 것들을 파 악한 뒤, 그 외의 나머지는 전부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수정이 필요한 대상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렇게 파악된 변하지 않 는 것들이 장기 전략을 적용할 대상이 된다. 그 외의 나머지 에는 유통 기한이 있다.

-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영속성 지식과 소멸성 지식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한 리스크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답은 영속성 지식이고, "마이크로소프 트는 2005년 2분기에 얼마의 수익을 냈는가?"에 대한 답은 소 멸성 지식이다.
소멸성 지식은 그 가치에 비해 더 많은 관심을 받는데,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런 지식은 도처에서 등장해 우리의 주의력을 빼앗으려고 애쓴다.
둘째, 우리는 그런 지식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의미 없는 정보가 돼버리기 전에 최대한 이용하려 애쓴다.
- 영속성 지식은 발견하기가 더 어렵다. 시끄러운 신문 헤드라인이 아니라 책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는 이로움은 어마어마하다. 영속성 지식은 유효 기간이 없 으므로 축적될수록 그 가치를 발휘한다.
또 영속성 지식은 당신이 이미 가진 지식과 합쳐지고 상호 작용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일종의 복리 효과를 낸다. 소멸 성 지식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말해주지만, 영속성 지식 은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또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지를 말해준다. 그 이유가 당신이 지닌 다른 주제들에 관한 지식과 영향을 주고받을 때 지식의 복리 효과가 발생한다.

- 컴퓨터 과학자 에츠허르 데이크스트라Edsger Dijkstra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진실은 단순함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 지식 노동자인 우리는 그 사실을 더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복잡한 것에 병적으로 끌린다. 학계 종사자들로 이뤄진 청중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운 강연을 하 면 청중은 실망해서 강연료가 아깝다고 느낀다. ......씁쓸한 진실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복잡한 것이 더 가치 있고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 존 리드John Reed는 저서 《석시딩Succeeding》에서 이 렇게 말했다.
 어떤 분야를 처음 공부할 때는 어마어마한 양의 지식을 암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필요가 없다. 당신이 해 야 할 일은 그 분야의 토대가 되는 핵심 원칙(일반적으로 3~12 개 정도다)에 주목하는 것이다. 당신이 외워야 한다고 생각한 그 수많은 것은 그 핵심 원칙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조합한 결 과일 뿐이다.
- 마크 트웨인은 아이들에게서 가장 솔직하고 흥미로운 정보 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는 것만 말한 뒤 입을 닫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그 능력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또는 새로운 기술을 획득한다. 온갖 복잡하고 장 황한 언어로 말을 꾸미는 기술 말이다.
스티븐 킹 Stephen King은 그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On Writing》 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짧다. 글쓰기에 대한 책은 대개 헛소리로 가득하 기 때문이다. 나는 책이 짧을수록 헛소리도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다.
- 우리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기분, 두려움, 희망, 원망, 목표, 동기, 기대는 그럴 수 없다. 부분적으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역사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 이다.

- 사람들은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대개 나쁜 경험도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과거에 배운 교훈도 곧 잊어버린다. 그러 나 강렬한 고통과 스트레스는 흉터를 남긴다.
눈앞의 비극을 마주한 채 '내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하는 뭔가를 경험하고 나면, 기대치와 목표 가 완전히 재설정되고 이전까지 당연한 듯 몸에 뱄던 행동 방 식이 바뀔 수 있다.

- 미국 연방 대법관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liver Wendell Holmes Jr. 는 "새로운 경험에 의해 확장된 정신은 절대 과거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말했다. 대공황을 경험한 세대는 돈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평생 더 열심히 저축했 고, 부채를 덜 만들었으며, 리스크를 신중하게 경계했다. 이런 변화는 대공황이 끝나기 전에도 나타났다.
역사가 프레더릭 루이스 앨런은 1936년도 <포춘 Fortune> 기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운명론적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위 험한 모험을 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지출을 피하고, 자존감을 잃지 않고, 힘든 시기를 묵묵히 견딘다. 평균적으로 볼 때 그 들은 신중하고 차분하며 모험하지 않는 세대다.

- 개인이나 집단 간의 견해 및 시각 차이로 인한 충돌은 역사에서 늘 있어온 인간의 기본적 행동 패턴이다.
"왜 저 사람은 나와 의견이 다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수히 많다. 저 사람은 이기적이니까, 멍청하니까, 분별력이 없으니까, 무식하니까 등등.
그러나 대개는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현명하다. “저 사람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런 견해를 갖고 있 을까? 만일 저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한다면 나도 저렇게 생각 하게 될까?"
대부분의 경우 이 질문은 의견 차이가 발생하는 진짜 이유를 일깨워준다. 하지만 이 질문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 대부분의 경우 이 질문은 의견 차이가 발생하는 진짜 이유를 일깨워준다. 하지만 이 질문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가 내 견해를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 은 심리적 불편함을 초래한다. 내가 무지하고 뭘 제대로 모른 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와 의견이 다 른 사람은 나보다 생각이 짧은 것이라고 믿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속 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의견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의견 충돌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해질지 모른다. 기술 트렌드 분석가 베니딕트 에번스 Benedict Evans가 말했듯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더 많이 접할수록 사람들은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더 분노하기" 때문이다.
의견 충돌은 사람들이 가진 지식이 아니라 경험과 더 크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경험은 언제나 다르기 마련 이므로 의견 충돌도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기 전날 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내 엘리너Eleanor에게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알 수 없는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했다. "나이 예순에 아직도 불확실성이 끔찍하게 싫다는 게 참 우습지 않아요?"
맞는 말이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 일반적으로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것으로 바꾸고 싶어서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앞을 응시한다. 더 많은 데이터 로, 더 정확하게, 더 똑똑하게 미래를 예측하려 애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은 사실 그 반대다. 뒤를 돌아보고 넓은 시야를 갖는 것이다.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알아내려고 하는 대신, 과거의 역사가 피해가지 못한 굵직하고 중요한 일 들을 공부하는 것이다.
십여 년 전 나는 역사를 더 많이 공부하고 예측 자료를 덜 읽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 결정은 내 인생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알면 알수록 미 래에 대한 불안감이 줄고 편안해졌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것들 에 집중하면, 불확실한 앞날을 예측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대 신 세월이 흘러도 유의미한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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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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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사람
장난감을 선물 받아
그걸 바라보고, 껴안고, 이내 망가트리고,
다음 날이면 이미 그걸 준 사람을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당신은 내가 건넨 나의 마음을
예쁜 장난감처럼 작은 손 안에서 가지고 놀면서 
괴로움에 경련하는 나의 마음을 눈여겨보지 않네

- 자신이 인생에서 이룬 일, 쌓아 올린 일, 행한 일에 대해 다른 훌륭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버리게나. 또 세상의 기준에 맞춰 점수를 매기는 것도 그만두고, 자신이 행한 일은 자기만의 척도로 재어야 한다 네. 항상 그렇게 하면 남을 흉내 낸 것이 아닌 자 신의 진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1949년의 편지)
- 너는 불안하니?
불안하다면, 그건 지금의 자신을 진짜 자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야.
언제나 진짜 자신으로 있으면 불안 따윈 싹트지도 않겠지. 그러니 진짜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일치 하도록 살아가면 돼. (데미안)
-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스스로에게 지나치 게 관대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사랑하는 일 이며, 당연히도 그건 자신의 운명까지 사랑하는 일이다.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까지 사랑 해야 한다. 설령 지금은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없다 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거 부하지도 멀리하지도 뒷전으로 돌리지도 말고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며 미소를 띠고 사랑하라. (사랑의 길)
- 젊은이가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진지하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낯빛을 살피지 마라. 정치가의 말 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이름 말고 직함을 대며 대단한 인물인 척하는 어 른에게서 영향을 받지 마라. 유명인이나 백만장자 가 되는 것을 목표로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자를 무시해라. 정의를 내세우는 집단이나 단체에 휘말 리지 마라. 자기네처럼 살면 반드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종교에 속지 마라. 돈 때문에 비굴하게 움 직이지 마라.
그 누구도 따르지 마라. 하지만 자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따라라. 그 목소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면 그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대가 자신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차라투스트라의 귀환)
-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아무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고요한 산장 같은 장소를 준비해둬라.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자신의 길을 확인해야 할 때, 그곳으로 돌아가 참 된 자신의 마음과 천천히 대화를 나눠라
그곳은 너만의 신비로운 피난처이며, 네가 다시 새롭게 태어날 소중한 장소다. (싯다르타)
- 두꺼운 줄기를 가진 나무처럼 살아라. 혹은 저 의연한 산처럼 살아라. 또는 고고한 야수처럼 살아라.
때로는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처럼 살아라.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든, 늘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라. (클라인과 바그너)
- 나도 마찬가지다. 너처럼 수없이 도끼로 베였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아 고뇌했다.
그럼에도 참나무여, 너처럼 포기하지 않고 새 잎을 틔웠다. 이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이 세상을 여 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 <베인 참나무)
- 고독해져라. 거리의 화려함에서 벗어나 혼자가 되어라. 웃음소리와 흥청거림, 달콤한 유혹에서 멀 리 떨어져 그대 자신이 되어라. 부모로부터도 멀 리 떨어져라. 지금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말 해두겠다. 고독은 외로운 것이 아니다. 그대가 진 실로 고독해졌을 때, 그대는 자기 운명의 빛나는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제야 그대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발 견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스스로를 알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어른이 되는 일이다. (고독에 대해)
- 고뇌하고 있군. 슬픈 일이 많군. 가슴이 자주 아프 기도 하겠지.
하지만 기뻐하세. 기쁨은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갑 자기 경사스러운 일을 가지고 올 때 샘솟는 감정 이 아닐세.
기쁨은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지금의 자 신을 꾸밈없이 순순히 인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감정이라네. 그러니 고뇌해도, 슬퍼해도, 그것에 자 신이 동의한다면 기쁨은 저절로 솟아날 걸세. (1922년의 편지)
- 자신의 일이나 생활이 앞으로 영원히 편안해지는 건 있을 수 없다.
마음의 평온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마음이 이제부 터 쭉 편안해지는 경우는 없다. 마음 하나를 평온 하게 만드는 것도 일일이 싸워서 얻어내야 한다. 심지어 그 싸움은 매일 이어진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지금 이 눈에 보이는 것, 지금의 이 현실, 이는 자신이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것과 똑같다.
이미 마음속에 없는 현실이란 존재할 수 없다. (데미안)
- 아무리 애를 써도 낫지 않는 우울에 잘 듣는 약이 있다. 그 약은 바로 이것이다.
노래하는 것. 신 혹은 거대한 존재가 이 세상에 숨 어 있다고 믿는 것. 와인을 조금 마시고 음악을 듣는 것. 기쁨의 시를 짓는 것. 걸어서 멀리까지 나가 보는 것. (흐린 하늘)
- 그렇게 격렬하게 원하면 원할수록 너는 그걸 찾지 못할 거야. 만약 운명의 장난으로 우연히 그것 을 접한다 해도, 완전히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금 세 놓아버리겠지. 바라는 것을 쉽게 찾아내는 이 는 격렬하게 욕망하는 사람이 아니야. 전혀 격렬 하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누구에게나 무 엇에나 자신을 열어놓는 사람이지. 또한 '이게 아 니면 안 된다' 하는 식의 조건 따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손톱만큼의 고집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야. (싯다르타)
- 당신은 자신의 그것을 뭐라고 부릅니까? 성격? 인격? 캐릭터? 개성? 아니면 자기다움?
어느 쪽이든 간에 그것은 당신이 족쇄를 차고 수감되어 있는 감옥입니다. (황야의 이리)
- 진실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여태 의지해온 마법의 지팡이를 버려라. 다시 말해 시간이라는 관념 을 깨끗이 버려라.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야. 아직 내일이 안 됐잖아. 벌써 이렇게 시간을 낭비해버렸어. 이 나이에 뭘 또, 이런 생각들을 낳는 시간을 가장 먼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이 지금 해야 하는 일에 만 집중해라. (클라인과 바그너)
- 젊었다느니 늙었다느니, 그런 감각과 사고방식은 엇비슷한 나날을 지루하게 살아가는 흔해빠진 사 람들의 전유물일세.
적잖이 재치 있고 세련된 사람은 그때그때에 맞춰 젊어지거나 늙는 법이지. 마치 경우에 따라 기쁨이나 슬픔이 솟아나는 것처럼. (1930년의 편지)
- 젊었다느니 늙었다느니, 그런 감각과 사고방식은 엇비슷한 나날을 지루하게 살아가는 흔해빠진 사 람들의 전유물일세.
적잖이 재치 있고 세련된 사람은 그때그때에 맞춰 젊어지거나 늙는 법이지. 마치 경우에 따라 기쁨이나 슬픔이 솟아나는 것처럼. (1930년의 편지)
- 사람의 일생이란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홀로 걷는 것이다. 그 길 끝에는 완전한 자신이 서 있다.
하지만 누구나 거기까지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데미안)
- 여행의 참맛은 다름 아닌 길 위에 있다.
서둘러 목적지로 돌진하지 마라. 방랑해야 한다.
방랑의 달콤함을 맛봐야 한다. 그것은 청춘의 나
날의 기쁨이다. 인생의 나날의 기쁨이다. (시 <여행>)
-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일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네. 그야말로 일을 신처럼 숭배하지.
또 어쨌든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되도록 많은 돈 을 얻기 위해 고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부자 가 되는 것을 인생의 성공이라 부른다네.
한데 정말로 그런 일이나 돈이 우리에게 필요한 가. 우리에게 부족한 건 바쁜 스케줄이나 돈벌이 에 허덕이는 일상이 아닐 걸세. 일테면 그것은 아 주 소소한 무언가를 그때그때 즐기는 마음이 부족 한건 아닌가.
또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을 성가신 트러블로 여겨 피하지 않고, 달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운명이 어떻게 굴러가든 조금도 주춤거리지 않고, 인생에 대한 신뢰를 굳건히 유지하는 것. 그런 것이 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게 아닌가. (1925년의 편지)
- 어른의 마음속에도 있는 천진함을 계속 소중히 여기게. 그것이야말로 청춘이기 때문이지.
그 천진함이 앞으로 인생을 훨씬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걸세. (1912년의 편지)
- 인생에는 엄숙한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늘 감동
적인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는 웃을 일이 아주 많이 끼여 있다. (페터 카멘친트)
- 처음에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다음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나아가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다 정한 것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고 향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이윽고 껄끄러 운 사람까지 사랑하며, 게다가 이 인생도 완전히 긍정하고 사랑하듯이, 우리는 결국 죽음까지 사랑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죽음은 마침내 인생 최대의 행복이 된다. (《황야의 이리>)
- 자신의 인생이 마치 카오스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하찮은 잡무나 고민거리, 또는 자신에게 전혀 맞 지 않는 일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거나 정신을 빼 앗기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인생을 그런 혼돈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음악의 감성이 필요할 겁니다. 즉 자신이 주로 관계해야 할 일에 몰두할 때, 마치 서로가 공명하는 듯한 감 각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 감각을 알고 나면, 일테면 자신의 일을 할 때는 조화가 절로 이루어져서 일이 나를 흔쾌히 받아들 여준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는 순풍에 돛단배입니다. 인생은 그 쾌감을 중심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이 단단한 심으로 지탱되어 외부의 소음에 괴로워하지 않게 됩니다. (1910년의 편지)
-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에 감명받았다 한들 실 제로 자신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하 는 사람은 드물다네. 또 시인과 철학자, 사상가의 사고방식에 감동을 받아봤자 자신의 생활 방식을 조금이나마 바꾸려 하는 사람도 없지.
그런데도 약간의 돈이나 이익, 명예를 위해서라면 무언가를 곧장 찬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전쟁도 그런 식으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일세. (1929년의 편지)
- 아이들은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새로운 영혼을 지 니고 있다.
그러나 부모들은 그 사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한 다. 그러기는커녕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로 영혼도 대대로 이어진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아이가 자신들과 너무 다르게 생각하거 나 행동한다고 느끼면 그것을 어린애의 천진함이 나 격세유전, 혹은 단순한 우연 탓으로 치부해버린다. 부모들은 그것이 새로운 영혼의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다. (《크눌프》)
- 여자들이 너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고?
그야 그렇겠지. 원인은 너한테 있어. 네가 여자들
한테 지나치게 많은 약속을 했기 때문이야. (크눌프)
- 이 세상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이름 없는 무수한 소시민이라는 작자들은 어떤 경우라도 여하 튼 본인만 안전한 장소와 위치에 있으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적당한 것만 가지며, 본인한테 유 리한 환경에서만 산다.
그들은 만사에서 극단적인 것을 피한다. 그러니 사실은 예술이 뭔지도 모르고, 성스러운 것에 대 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며, 건전한 사람에게도 이따금 생겨나는 타락이나 방탕조차 자신과 인연 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주제에 권력을 한 조각이라도 손에 쥐고 싶 다는 욕심으로 다수결 제도를 만들었다. 또 자기 안의 폭력을 권리로 정당화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었고, 저 자신은 책임을 지기 싫기 때문에 투표 제도를 만든 것이다. (황야의 이리)
- 이른바 멀쩡한 사람이란 재능이 없는 자다. 그들은 건전하고 정상적인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가 가진 광기가 없으며, 오히려 광기를 꺼림칙하게 여긴다.
본디 재능과 광기는 처음부터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채로운 공상)
- 예술가는 자신이 파멸하기 바로 직전까지 창조의 힘을 쥐어짜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그것은 매우 냉혹한 혼자만의 전쟁터에서 벌이는 싸움과 비슷하다. 그런 창조의 나날은 사람다운 생활의 평온함과 행복을 희생시켜야 할 정도로 가 혹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게르트루트)
- 단체를 만들어서 무리 짓는 사람들. 단체로 뭉치고 결속을 맹세하는 사람들. 뭉쳐서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왜 모이고, 얼굴을 맞대고, 서 로의 동향에 신경 쓰는 걸까. 사실 그 이유는 한심 한 것이지. 그들은 서로가 두려운 거야. 그래서 뭉 쳐 있으면서도 마음은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를 진 심으로 믿지 않아. 또 자신이 시대에 뒤처진 폐물 이라는 사실을 내심 알고 있기도 해. 그러니 적어 도 모여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같은 소리라도 내 지 않으면, 작은 의견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거야. (데미안)
- 어른이 된다는 건 사회제도가 정해놓은 나이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 이다. 어린 시절을 버리는 것이다. 고독해지는 것 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중대한 첫걸음을 제대로 내딛지 못한다. 한쪽 발만 앞으로 내밀고 다른 한 발은 뒤편에 남겨둔다. 내심 언제까지나 가족과 고향,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싶은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귀환)
- 아름다운 것을 보려면, 가장 좋은 것을 느끼려면, 사랑을 만나려면 대가가 필요하네.
그 대가란 돈이 아닐세. 자네의 마음을 써야 하지.  (어떤 이에게 보내는 편지)
- 두 사람이 힘을 합칠 수는 있다. 추운 날 둘이서 바짝 붙어 있을 수도 있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영혼을 하나로 녹여서 섞을 수 는 없다. 각각의 영혼은 그대로 각자의 것이다. 그 것은 괴로운 일일까? 비극일까?
꽃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꽃과 맺어지기 위해 향 기와 꽃가루를 바람에 실어 날릴 수는 있다. 하지만 뿌리는 원래의 땅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 뿌리가 꽃의 영혼이다. (크눌프)
- 사랑은 왜 존재하는 걸까.
사람을 행복한 기분에 젖게 하려고? 아니,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는 행복 같은 게 아니다.
고뇌하고, 고통받고, 번민하고, 슬퍼하고, 헐떡이 고, 계속 참고,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똑똑히 가르쳐주기 위해 존재한다. (페터 카멘친트)
- 오래된 사랑은 고요한 숯불과도 같다.
더는 격렬한 열정의 불꽃을 내뿜는 일 없이, 지금은 그저 가만히 타고 있다. 그 따스함이 마음에 약간의 젊음을 부여하며, 겨울밤에는 손끝을 살짝 덥혀준다. (페터 카멘친트)
- 이 사랑이 저를 행복하게 해주냐고요? 설마. 그런 말은 좀 이상하네요. 원래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 게 해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사랑은 행 복하고는 관계없는걸요.
그게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얼 마나 깊게 고뇌할 수 있는지, 얼마나 인내심이 강한지를 사무치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페터 카멘친트)
- 마음의 깊은 아픔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릴 듯한 아름다움을 만나둬라. 예술이든 자연이든 상관없고, 찰나라도 좋으니 아름다운 것을 봐둬 라. 이 인생에는 반드시 비애가 있다. 비참함도 있 다. 그들은 소나기처럼 다가왔다가 떠난다.
하지만 그대가 본 아름다운 것은 그대 안에 오래도록 남아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의 지속)
- 독서의 최고 단계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가. 더없이 자유롭고도 거칠 것 없이 책을 읽게 된다. 그렇 게 된 누군가가 동화 한 편을 읽는다면 어떤 때는 그 동화를 심오한 철학서로 읽을 테고, 또 어떤 때 는 우주론으로, 또 다른 때는 향기롭고 에로틱한 문학으로 읽을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침대를 눈 덮인 산이나 바위 동굴, 드넓은 정원이라고 상 상하며 끝없이 노는 것처럼. 요컨대 그는 모든 연상을 총동원해서, 세상을 통째로 그곳에 전개시키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독서에 대해)
- 노인이여. 미련 없이 땅에 묻히시게.
힘이 없어도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서 그대가 지금껏 쭉 앉아 있던 자리를 흔쾌히 젊은이에게 양보하시게. 그리고 먼지만큼도 겁내지 말고 조용히 눈을 감으시게. (시 <봄의 말>)
- 이 세상을 개선하자는 멍청한 소리는 하지 말기 바란다.
세상은 정치가나 당신들의 장난감이 아니며, 애초 에 지금 세상이 좋니 나쁘니 하는 판단 자체가 터 무니없이 오만하지 않은가.
어린아이나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들을 개선시키자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이 말하는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세상의 틀에 집어넣고 강제로 짓누르는 게 정말로 좋은 일인가. 젊은이들이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 개선이라느니 개량이라느니 큰 소리로 외치는 바보들이여. (차라투스트라의 귀환)
- 세상에는 화가 나는 일이 가득한 법이지. 추악함도 셀 수 없이 많고, 너무나 하찮은 것, 비열한 것 도 넘쳐난다네. 그렇다고 그것을 비난하거나, 경 멸하거나, 그 때문에 일일이 불쾌해져서 어쩔 셈 인가.
그런 것도 분명 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 하세.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은 아니지. 흐름 속에 는 혼탁한 부분도 있기 마련일세. 그러니 그런 것에 구애되지 말고, 차라리 웃어넘기세 (평범한 이에게 보내는 편지)
- 행복했던 때를 돌아보면 저절로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런데 어째서 어린 시절일까.
행복을 느끼려면 시간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아야 하고, 두려움이나 소망에도 지배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을 만족시켰던 것이 우리의 어린 시절이다. (행복)
- 자신이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 묻는 동안에는 아직 행복해질 수 없다.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전부 손에 넣었다 해도 여전히 행복해지지는 않을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하거나 그것을 떠올리는 동 안에는 안 된다.
원하는 것이 있는 동안에는 행복의 평온에 도달할 수 없다.
그대의 소망이 전부 휘발되어 행복이라는 말조차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을 때, 모든 일이 있는 그대 로 발생하며 그것이 완벽한 자연의 도리로 보일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그대의 영혼은 행복의 끝없는 평온 속에서 잠시 눈 붙이겠지. (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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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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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의 세계

심리 2024. 3. 18. 07:12

- 도파민은 중추신경계에 존재하는 신경전달물질로, 아드 레날린 전 단계 물질이고 흥분을 일으킨다. 즉 도파민은 최 고의 행복 호르몬으로, 우리가 보상을 기대할 때 분비된다. 이를테면 어떤 일을 감행한 뒤 즐거움을 느끼거나, 등반할 때의 두려움이 순수한 쾌감으로 바뀌는 것은 도파민 때문이 다. 그리고 나쁜 예로는 도박이 있다. 그땐 이길 가능성이 있 다는 기대만으로도 흥분이 되고, 이 기대 때문에 카드를 계 속 뽑아들게 된다. 사람들이 중독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 을 딸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우리도 쇼핑하러 갈 때 보상을 기대하거나 스스로에게 보 상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구입 가능한 세일 상품, 즉 보상을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이것은 쇼핑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킥에 중독될 수 있다. 도파민은 최고의 행 복 호르몬으로, 규칙적인 성생활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 도파민 체계는 우리가 돈을 절약하려는 것을 방해한다. 이것이 뇌의 교활한 점이다. 예를 들어 특정 신발을 살까 말 까 고민할 때 우리는 지금 구입하는 것이 이성적인 행동인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반면 무의식은 훨씬 전부터 준비 태세를 갖추고, 그 신발을 신을 때 어떤 기분이 될지를 미리 느낀다. 트래킹화를 신고 돌로미트에 가서 해돋 이를 보며 감탄하는 모습이나, 섹시한 하이힐을 신고 캔들라 이트 디너에 앉아 있는 모습을(그곳에서는 일어설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아, 하이힐!) 상상한다. 만약 기분이 좋다면 도파민 이 야기한 행복감은 상식과 절제와 통장 잔고를 이기고, 결 국 우리는 그 신발을 사게 된다. 우리는 그 순간에 느끼는 기 분에 따라 물건을 구입하며, 그럼으로써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려고 한다.
- 말하자면 이러한 킥은 이미 쇼핑 전부터 자동적으로 시 작되고 재현된다. 연구자들은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인 간의 뇌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쇼핑을 할 때 (카운터에서 돈을 지불할 때가 아닌 상점에서 구경할 때부터 이미) 대뇌 변연계의 측좌핵이 매우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했 다. 그곳은 우리의 보상 체계를 담당하는 뇌 영역으로, 중 독일 때도 마찬가지로 활성화된다. 연구자들은 이런 사실 을 이미 1950년대에 발견했다. 그들은 쥐의 뇌에 전극을 이식한 후 단추를 누를 때 보상 중추가 자극받을 수 있게 했다. 그다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쥐들은 단추를 누를 때마다 최상의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배웠고, 이후 중독되 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쓸데없는 물건을 사게 되는 원인은 이러한 직접적인 충족감 때문이다. 
- 나는 우리를 쇼핑으로 이끄는 생화학적 과정을 추적하던 중 흥미로운 것을 하나 더 발견했다. 신경과학자 브라이언 넛 슨(Brian Knutson)'은 한 실험에서 어떻게 구매 결정이 이루 어지는지를 연구했다. 참가자들이 제품 사진을 보고, 이어서 가격을 보는 동안 뇌파가 측정되었다. 그런 다음 그 제품을 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 실험에서 제품을 볼 때는 뇌의 보상 센터가, 가격을 볼 땐 뇌의 전혀 다른 영역인 뇌섬(insula, 뇌섬엽)이 자극을 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뇌 섬은 몸에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곳으로, '아프다'는 신 호를 보낸다. 실험 참가자들의 구매 결정은 행복과 고통 사이 의 균형 잡기였다. 만약 제품을 볼 때 느끼는 행복이 가격을 보았을 때 느끼는 고통보다 크다면 우리는 그것을 산다.
- “동독 출신의 한 할머니가 이야기하기 를, 옛날 구동독에서 셀룰라이트는 전혀 이야깃거리도 아니 었다고 했다. 여성은 누구나 셀룰라이트가 있고, 추하거나 예쁘다기보다는 단순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러다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정은 달라졌다. 안티셀룰라이트 크림 광고가 동독 땅에 들어오자 지금까지 자신의 정상적 상태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여성들이 대부 분 자기 허벅지를 결점으로 보기 시작했다(그리고 당연한 말이 지만 수많은 여성이 그 크림을 샀다).  즉 광고를 통해 셀룰라이 트의 존재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약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 사사키 후미오는 자신의 저서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2015)에서 비싼 물건이 더 행복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 점을 매우 근사하게 기술했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100유로의 반지를 사든, 500유로 혹은 3,000유로의 반지를 사든 상관없다. 행복의 크기는 매번 똑같다. 500유 로 하는 반지가 이보다 싼 반지보다 다섯 배 더 행복하게 만 들어주진 않는다. 우리는 다섯 배 더 많이 웃지 않고, 다섯 배 더 오래 행복하지 않다. 사치품의 가격에는 상한선이 없 지만 행복감은 한계가 있다. 만약 500유로 반지가 100유로 반지보다 다섯 배 더 행복하게 해준다면, 행복에 이르는 길 은 돈과 소유를 통해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부자가 되고 아무리 많은 물건을 쌓아놓고 있더라도 당신의 소유물이 당신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는 못할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쁨에는 한계가 있다."
- 불안 광고는 1920년대에 '발명'되었다. 기민한 광고업자들은 구매 전에 불안을 조장하는 말을 들려주면 물 건이 훨씬 더 잘 팔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여성들 에게 가장 쉽게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 은 바로 나이들어 가며 추해지고 매력을 잃는 자신의 모습이 다(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외모와 더불어 여성에게 관심이 있 는 것이 대체 뭘까?). 여성들은 얼굴에 생긴 주름, 뱃살 그리고 셀룰라이트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는 말을 들었다. 안티링 클 크림과 수상한 체중 감량 제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소비를 이 렇게 핵심적으로 요약했다. “소비는 고도의 외로운 활동으 로, 지속적인 유대감을 형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외 로울지도 모를 활동을 통해 소속감을 구입한다. 아이폰이나 브랜드 청바지, 프라이탁 가방도 우리의 내적 공허와 친밀 감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바 우만은 관계 자체도 점점 교환이 가능하고 구매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말했다(데이팅 앱 '틴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유감스럽게도 이 철학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 다). 2017년 작고한 바우만은 냉정하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소비주의 문화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부수적 인 피해는 바로 사회적 연대다."

- 슈퍼마켓 실험
*모든 것은 매장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고객이 구입할 물 건을 담는 쇼핑카트와 장바구니의 크기는 지난 몇 년 사이 계속 커졌다. 여기엔 심리학적 트릭이 숨어 있다. 단지 두세 가지만을 사는 고객의 쇼핑카트는 텅 빈 것처럼 보이고, 이 렇게 빈 공간은 아직 사야 할 것이 더 남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을 마케팅 전문가 마틴 린드스트롬도 책 『바이올 로지(Buyology)』에서 언급했는데, 쇼핑카트를 두 배 더 크게 만든 후에 조사한 슈퍼마켓의 매출액은 19퍼센트나 증가했다
*슈퍼마켓 입구에는 소위 '스토퍼(stopper)'가 놓여 있는 경우 가 흔하다. 매장 입구에 세워둔 탁자나 선반을 가리키는데, 이 때문에 걸음 속도를 늦추고 거기 진열된 상품들을 둘러 보게 된다. 도시의 소형 매장의 경우, 손님들은 가게 안쪽까 지 잘 들어가지 않고 늘 가던 방향으로 가서 물건을 산다. 하지만 보행 속도가 느려질 때 상품에 대한 주의력은 높아 진다.
*매장에서 풍기는 냄새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업체도 점점 늘고 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얼마나 더 매출을 늘리고 다른 품목의 매출까지 증가시키는지를 실험한 연구들이 있다. 냄 새는 식욕을 돋우고 침샘을 자극한다. 이는 왜 호퍼(Hofer)36 가 지난 몇 년간 새로 빵 코너를 설치해 매장에서 직접 빵을 굽고 있는지의 확실한 이유가 된다(냉동 생지든 매장에서 직접 만든 빵이든 별 상관없다. 일반 사람들은 냄새로 구분하지 못한다). 가 고플 때 쇼핑하는 사람은 더 많이 사게 되고, 무엇보다 더 충동구매를 한다. 슈퍼마켓은 고객들이 "머리가 아닌 배 로 쇼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마케팅 연구자 파코 언더 힐(Paco Underhill)은 그의 책 쇼핑의 과학(Why We Buy)』(2021) 에서 매우 멋지게 표현했다.
*무료 시식은 판매율을 높인다. 현장에서 시식을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맛본 상품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와인이나 냉동식품 같은 제품에서 특히 성공적이다.
*수많은 슈퍼마켓에는 음악이 흐른다. 심지어 오스트리아에 는 오직 대형 유통업체 레베(Rewe) 그룹의 자회사 이를테 면 메르쿠르(Merkur), 빌라(Billa), 페니(Penny), 비파(Bipa)- 에서만 들을 수 있는 자체적인 라디오 방송이 있다. 또 슈퍼 마켓 체인 슈파(Spar) 역시 이곳에서만 들을 수 있게 편성한 자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혼잡한 시간대, 즉 아주 많 은 손님이 일시에 몰려드는 시간대에는 빠른 템포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오전과 이른 오후에는 느린 음악이 매장에 흐른다. 여기엔 다 이유가 있다. 대개 보행 속도는 음악을 따라간다. 빠른 음악이 나오면 발걸음도 빨라지고, 느린 음악 을 들으면 매장 입구의 스토퍼와 동일한 효과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좀 더 느리게 걸으며 29퍼센트 이상 더 구매한다.
*슈퍼마켓의 선반 높이는 그 자체로 과학이다. 상품 배치도 그렇다. 눈높이에 진열된 상품들이 가장 잘 팔린다(제조업체 들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돈을 더 낸다). 가장 안 좋은 자리는 머리 위쪽이다. 고객들은 대부분 진열대 위쪽에 놓인 제품 에 손이 닿을 정도로 키가 크지 않다. 어린 꼬마 고객은 엄 두조차 못 낼 것이다. 진열대 높은 곳에 있는 상품은 마진이 별로 크지 않다. 사고 위험을 막기 위해 중량이 가벼운 상품 들이 그곳에 배치된다. 가장 주목을 받는 품목은 언제나 눈 높이 선반에 안착된다. 낮은 선반에 진열된 상품보다 사람 들의 관심을 35퍼센트 이상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또 당연한 말이지만 슈퍼마켓에 커다란 마진을 가져다주는 제품도 그곳에 자리잡는다. 세일 상품을 찾는 고객이라면 시선을 아래에 두는 것이 좋다. 종종 그곳엔 저렴한 상품들이 진열 돼 있고, 이는 꼬마 손님들에게도 반가운 일이다.
*상품 배치도 우연이 아니다. 몇몇 제품은 의식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서로 연상된다. (바질로 만든) 페스토 소스와 스파게티 소스는 항상 누들 선반 바로 옆에 있고, 치약 옆자리는 늘 칫솔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최상의 결합을 어느 이탈리아 슈퍼마켓에서 보았다. 그곳엔 수많은 종류의 다이어트 제 품이 다양한 초콜릿너트 크림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이것 이 의도한 게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의도한 것이라면 존경을 보낸다!). 마찬가지로 나는 늘 비파(Bipa) 에서 오로팍스 귀마개 옆에 매달려 있는 콘돔을 보면서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 역시 비파는 이웃들도 생각한다.
*이에 반해 정말로 중요한 품목, 다시 말해 가장 잘 팔리는 상품들은 나란히 배치하지 않고 매장 곳곳에 진열해놓는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흔히 누들에서 맥주 코너로(수요가 많은 이 두 제품은 식료품 카테고리에 같이 모여 있다) 이동하려면 온 매장을 가로질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냉장 장치는 대개 매장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업체는 고객들이 되도록 매장 구석구 석을 돌아다니며 가능한 한 많은 제품을 볼 수 있게 배치한 다. 이렇게 하면 경우에 따라 더 많은 충동구매를 하게 된다.
*색깔은 우리의 구매 행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자세히 들 여다보면 상품의 세일, 품절 표지판이라든가 특별 세일을 알 리는 광고는 모두 빨간색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붉은빛을 볼 때 좀 더 빠르고 활기차게 반응 하기 때문이다. 태고 이래로 색은 우리에게 경고 신호로 자 리잡았고, 우리의 주의력을 높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 도 흥미진진한 것은, 파란색이 믿음과 신뢰를 주는 색으로 간 주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은 이 컬러를 자주 사용한다. 초록색은 좀 의외로, '친환경과 건강'을 연상시키는 색이다.
*쉽게 쓰고 버리는 일회용 사회(throwaway society)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포장 상품은 지난 몇 년 새 엄청나게 증가했다. 정육점 판매원이 소시지를 직접 기계로 정교하고 깔끔하게 썰어주는 것보다, 마트 냉장고에서 플라스틱 용 기에 포장된 소시지를 사는 것이 더 위생적이라는 느낌이 든 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위생적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다. 플라스틱 포장의 경우, 저온 유통이 중단되면 기름과 외부 열의 노출로 인해 우리 몸의 호르몬 체계를 교란하는 화학 물질(연화제)이 용기에서 분해되어 나와 포장 음식에 들어간 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재활용 포장 상자도 사정은 다르 지 않은데, 이 역시 포장재에 함유된 인쇄용 잉크에서 나온 미네랄 오일이 음식물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심을 받는다.  포장은 여러 이유에서 도입되었다. 그중에 몇몇은 관련이 있고(예를 들어 식품 보존상), 그외 다른 이유는 대부분 적절치 않은 것들이다(이를테면 내용물은 적게, 포장은 크게 하는 과대 포장이 그렇다. 나는 새로 산 티백 상자 안이 반이나 비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놀란다)
*조명은 구매 행동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드럭스토어 매장 안은 매우 밝은데, 조명은 최대한 일광과 비슷해야 한다. 이와 달리 슈퍼마켓에선, 특히 과일과 채소 같은 신선식품 코너의 경우 부드러운 노란색 조명을 설치하는데, 색온도와 컬러 필터가 과일과 채소를 더 싱싱하고 신선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반면 육류 진열대는 붉은색 비율이 높은 필터가 삽입된 조명을 쓰고, 생선은 오히려 냉백색 조명을 사용한다.  특히 뉴욕의 고급 슈퍼마켓들은 과일과 채소 를 마치 무대 조명처럼 눈부시게 밝은 빛 아래 진열해놓고 그 주위는 살짝 어둡게 조절한다. 나도 이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틸로 보데(Thilo Bode)는 소비자의 권리와 식품의 질을 둘러 싼 문제를 다루는 비정부기구(NGO) 푸드워치(foodwatch)의 설립자로, 2009년 출간한 책에서 대부분의 슈퍼마켓은 진열 대를 주기적으로 재정비하는 것을 지침으로 하고 있다고 밝 혔다. 그 이유는 "고객이 구매하려는 것뿐 아니라 다른 제품들도 발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구매 행동을 통해 자신의 현재 사회적 위치와, 자신이 속하고 싶은 사회 집단을 드러낸다. 독일 경제학자 니코 패히 (Nico Paech)도 이렇게 말했다. "인 간으로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이 되고 싶고, 또 어 떻게 인정받고 싶은지를 표현하기 위해 소비를 필요로 한 다. 물질적 형태의 모든 기본 욕구들은 이미 수없이 충족되 었기에, 물질적 과잉이 지배적인 세계에서는 상징적 표현을 위해 물건을 산다."
-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는 1970년대 말에 프랑스인들의 정치 성향과 예술 취향을 포함한)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했다. 이 경험적 연구 결과는 그리 놀 랍지 않다. 자본의 다양한 형태, 즉 경제, 사회, 문화 자본은 개인이 속한 사회 계급을 정의한다. 부르디외는, 취향은 개 인적이며 개인이 활동하는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개인이 속한 계급은 그가 어떤 교육 과정을 밟았고, 어떤 문 화적 경험을 했고 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얼마나 돈이 많은지를 결정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무엇에 돈을 지출하는지 또한 결정한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무척 흥미를 느낀 지 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사는 것을 통해 어떤 사 회 계급에 속하는지 그 신호를 남들에게 보낸다.
- 면화 재배는 까다롭다. 목화는 매우 예민한 식물로,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필요할 때도 있고 한 방울도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추정상 99.5퍼센트가 유전자 조작 종자이며 한 해살이 식물이다. 즉 해마다 농부들은 새로운 씨앗을 사야 한다. 95 전 세계 살충제 생산량의 30퍼센트는 목화 재배에 사용된다. 이렇게 해서 목화는 수확 전에 바싹 마르고 섬유 질 많은 꽃봉오리는 더 쉽게 분리될 수 있다. 또 다량의 글 리포세이트glyphosate, 제초제의 주성분를 함유할 수밖에 없다. 심 지어 탐폰에서 글리포세이트가 검출된 일도 있다.
연구자들은 살충제 사용량이 총생산량(살균제와 제초제 포함) 의 20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목화 재배 면적은 농 업에 사용되는 총면적의 약 2.5퍼센트에 달하는데, 여기에 전 세계에서 생산된 살충제의 20퍼센트가 살포된다. 이러니 면 제품은 얼마나 깨끗할까!
- 옷을 버리는 대신 기부하는 것도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 이 유는 첫째, 기부 장소는 옷들로 넘친다. 둘째, 활용자 수가 지나치게 많다. 그들은 유럽에서 더 이상 팔기 어려운 옷들 을 묶어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팔고, 그곳 사람들은 옷 꾸 러미들을 열어보지도 않은 채 닥치는 대로 중고 시장에 내 다 판다. 그 후폭풍은 이렇다. 한때 크게 번창하던 동아프 리카의 섬유 산업은 곤두박질쳤다. 엄청난 양의 기부 옷(마 찬가지로 점점 늘고 있는 중국에서 수입된 매우 값싼 옷들)과 더 이상 경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마음챙김 운동은 이미 트렌드가 되 고 있다. 당신이 충분히 마음챙김을 연습하고 당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차린다면, 그리고 사물과 세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 라고 말한다. 성공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 문제에 대해 서는 전적으로 개인의 성격적 특성에 달려 있다고 여긴다. (중략) 실제로 사람들도 그것을 경영인 혹은 성공한 엘리트 들이 찾고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극단적인 예로 '사람들을 해고하고 양심의 가책과 많은 어려움을 겪은 뒤 마음챙김을 수행하고 훨씬 편안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사람들이 보는 것은 마음챙김 논리의 기능화다. " 우리는 이 모든 마음챙김 소란 덕에 인간 상호 간의 책임감 있는 교제를 윤리적으로 잊어버렸다.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비즈니스 스쿨 경영학 교수인 로 널드 퍼서(Ronald Purser)는 더 극단적으로 본다. 그는 저서 『마음챙김의 배신 (McMindfulness)』 115의 서두에서 바로 설 명하고 있다. "나는 회의적이다. 우리가 사는 불공평한 사회 에서 이를 변화시키려는 노력 없이 성공을 보여주는 것은 혁명적이지 않다. 단지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게만 유익할 뿐이다. 하지만 이는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정치, 경제적 기본 조건에 과감한 조치를 요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퍼서 교수는 이렇게도 말한다. "사 람들은 마음챙김을 그만둬선 안 되고, 이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모두 세속을 벗어났다고 말할 수도 없다. 물론 목표는 언제나 개인의 스트레스나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또 마 음챙김과 요가를 통해 이를 달성하는 것도 좋다.” 훌륭한 말 이다! 다만 개인의 스트레스는 대개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회와 정치 시스템에서도 시작되어 야 한다는 것 역시 알아야 한다.
산업이 마음의 평안을 원하는 인간의 바람을 이용하는 것 은 마땅히 비난받을 만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은 부 조리하다. 우리가 쇼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며, 자신을 증 명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임금은 점점 줄어들어 우 리는 일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서는 점점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진실은, 우리 모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업계에서는 그것이 오롯이 우리 책임이며 완전히 혼자 힘으로 비참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설득한다. 이를 위해 향 혼합물을 사서 피우고 복식호흡을 해서 해결할 수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간단할까? 마음챙김의 방법들은 대 부분 불교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지금은 불교 승려들조차 매우 언짢게 생각한다. 미국 승려 빅쿠 보디 (Bhikkhu Bodhi) 는 불교가 의심 없이 소비주의를 받아들였다며 이렇게 경고 했다. "날카로운 사회 비판 없이 이루어지는 불교 수행은 현재 상태를 정당화하고 안정화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이 렇게 해서 손쉽게 소비자본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 
나는 정말 소름이 돋았다. 진정 우리가 모두 잘 살기 위해 서는 이제 '나'만의 관점에서 빠져나와 공동체를 생각하고, 좀 더 인도적이고 공정한 경제 시스템을 위해 노력해야 하 지 않을까?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정치학자 웬디 브 라운(Wendy Brown)은, 연대감 없는 개인화로 인해 정치적 통합은 더 이상 없고 오직 “개인 사업가와 소비자 집단”만  존재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꼬집었다.
- 설문지에서 늘 발견하는 것은, 사람들이 공정한 방식으로 생산된 제품을 사기 위해 몇 퍼센트 더 비싼 가격을 치를 수 있다는 응답이다. 또 내가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패스 트 패션 소비가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에 있는 동일한 연령 의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야기할 때에도 반 응은 언제나 똑같다. 그들은 다시는 패스트 패션을 사지 않 겠다고 말한다. 또 탄소발자국과 관련해, 몰디브행 비행기를 딱 한 번 타는 것만으로 평생 해온 쓰레기 분리 배출이며 자전거 타기, 비건 식사 등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비행기라는 교통수단이 환경에 그렇게 나 쁜지 몰랐다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면서도 주말을 이용 해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간다.  사람들이 양심과 윤리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소비를 할 것이라고, 또 실제로 실행한 다고 확실하게 증명한 연구는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130
이런 모순과 인지부조화는 어디서 오는 걸까? 그 답은 다 시 뇌의 생화학 작용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본래 기분 좋은 것을 찾는다. 그리하여 소위 '가치 행동 격차 (value- action gap)'라는 것이 발생한다. 우리는 빈병 보증금 반환 제도가 환경을 위해 매우 좋다고 생각하지만, 계산대 앞에 있는 500밀리리터짜리 플라스틱 병에 든 물을 산다. 빨리 갈 증을 해소해줘서 간편하기도 하고, 마신 후 처리를 크게 신 경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건을 사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도파민 킥을 주기 때문이다.
방금 언급한 모순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예가 있다. 1월에 마트 과일 코너에서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딸기가 그것이다. 딸기는 멀리, 사람들이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남아메리카 의 어느 나라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딸기를 1월에 멀리 떨 어진 나라에서 사가지고 오는 것을 정신 나간 일이라고 여기 는 사람도 많다. 여름이면 이 땅에서 수확할 수 있는데, 굳이 플라스틱 용기에 셀로판지에 둘둘 말아서까지 들여와야 하 냐며 못마땅해 한다. 하지만 마트에 나온 딸기를 보자마자 입 안 가득 풍미를 맛보고 싶어지고 한겨울에 여름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겨울에 운전자 들이 추위 때문에 정차 중 자동차 엔진을 끄지 않는 것을 보고 화를 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 인지부조화는 매일 일어난다. 사람들은 대부분 끊임없이 해명하고, 무엇보다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해 내적으 로 다그친다. 두 가지 행동이 서로 모순이라는 것을 인정하 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한다. '딸기를 산 것은 예외다, 단지 여름을 느껴보고 싶어서다, 어찌됐든 딸기는 사라고 있는 것이니 상하기 전에 사야 하지 않느냐'라고 해명한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그 자리를 합리화가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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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메흐디 하산은 21년부터 23년까지 MSNBC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메흐디 하산 쇼의 앵커로 활동한 경험이 있으며, 각종 언론매체를 거치며 최고의 독설가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2013년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다 라는 주제로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진행된 토론에서 찬성 측 연설자로 나서서 승리를 거두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트럼프 정권의 핵심인사 에릭 프린스와 마이클 플린,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던 존 볼턴 등과 거침없는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책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을 전체 16개 챕터에 걸쳐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논쟁은 피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도 있지만, 이와 벌이게 된 논쟁이나 토론이라면 이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논쟁에 뛰어들게 되었다면 우선 청중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논쟁을 벌이는 상대방이 아니라 청중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청중에게 시선을 맞추고, 뻔한 칭찬이라도 해야한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사적인 이야기로 청중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좋다.
청중을 내 편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머다. 일단 사람들을 웃게 만들면 사람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당신은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게 된다. 유머는 청중과 친밀함을 쌓고, 심각한 주제를 가볍게 전달하고, 상대편을 제압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논쟁에서 이기겠다고 철저하게 논리로만 무장하면 안된다. 팩트(로고스)보다 감성(파토스)이 우선이다.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려 한다면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마음은 단순히 이성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파토스를 숙달하기 위해서는 스토리 텔링에 능해야 한다. 어휘 선택에 있어서도 청중의 감성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한다. 이를 위해서는 토론자 스스로 감정을 보여줘야 하고, 그 감정을 청중과 공유해야 한다.

보통 논쟁에서는 그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논거와 그의 이론을 공격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에토스를 공격하는 것이 실전에서는 매우 효과적이다. 상대방의 인격이나 자격, 혹은 과거 주장이나 발언을 공격하는 것은 꽤 효과적이다. 말하는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선량함이 설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화자의 성품은 그가 지닌 가장 강력한 설득 수단이다. 

토론이나 논쟁에서는 말만 잘 한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다. 잘 들어야 한다. 어차피 대화에서 말하는 시간은 반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나머지 반을 잘 들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논쟁에서는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유도의 전략이 유용하다.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나약함을 상징으로 여기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강함과 확신의 상징이다. 상대의 주장을 인정하는 행위를 통해 청중은 당신이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논쟁이나 연설같은 재능을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연설가였던 처칠이나 마틴 루터 킹같은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끝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연설가가 되었다. 처칠은 연설 전체를 원고로 작성한 뒤 잠시 말을 멈추어야 하는 부분까지도 미리 계획해서 적어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걸 적어 놓았다고 해서 원고를 그냥 줄줄 읽는 것이 아니었다. 처칠이 원고 리허설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지 연설 중에는 간혹 원고를 슬쩍 쳐다보기만 할 정도였고, 청중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 이후 자유롭게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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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유전 변이를 분석한 결과 작물화가 꽤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됐 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전에는 작물 대다수가 야생 식물에서 한 차례 작물화가 일어나 퍼진 뒤 지역이나 문화에 맞게 재래종이 확립되고 때 로는 이들 사이에서 교잡이 일어나곤 했다는 시나리오를 따른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작물과 야생 근연종의 유전자 또는 게놈을 비교하자 작 물화 과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앞의 시나 리오를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다수는 다음 세 가지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먼저 야생 식물 한 종에서 한 차례 작물화가 일어난 뒤에도 야생식 물과 작물 사이에 교잡이 일어나 유전자를 주고받는다는 시나리오다. 벼와 밀, 기장과 조, 사과와 토마토 등 많은 작물이 이 시나리오를 따른 다. 이처럼 야생 식물과 작물이 서로 유전자를 주고받다 보니 기장처럼 진짜 야생 식물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야생 식물 한 종에서 두세 차례 독립적으로 작물 화가 일어나고 그 뒤 작물 품종 사이 또는 야생 식물과 작물 사이에 교 잡이 일어났다는 시나리오다. 보리와 수수, 코코넛, 강낭콩 등의 작물 이 이런 과정을 겪었다.
끝으로 두 종의 야생 식물에서 잡종이 나오고 여기서 작물화가 일 어나거나 작물 두 종의 교잡으로 새로운 작물을 얻는 시나리오다. 감귤류와 바나나, 땅콩, 딸기 등의 작물이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 태 어났다.

- 아시아벼의 학명은 분류학의 아버지 칼 린네가 지었다. 속명 'Oryza'는 쌀을 가리키는 라틴어이고 종소명 'sativa'는 재배한다는 뜻 이다. 그런데 린네는 벼를 꽤 다른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서구에서 벼는 주요 작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상태로 150년 이 흘렀다.
1920년대 일본의 저명한 육종학자 가토 시게모토 박사는 북방 계 벼와 남방계 벼가 생김새도 꽤 다를 뿐 아니라 교잡해도 자손이 불 임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관찰로부터 둘을 별개의 아종으로 봐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에서 주로 재배하는 북방 계 벼에는 자포니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인도와 동남아에서 주로 재배 하는 남방계 벼에는 인디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둘 다 꽤 재배하는 중 국은 애매해 대신 인도를 택한 것 같다. 중국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작명이지만 이미 정해진 거라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인도식당에서 몇 번 인디카 쌀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밥알의 생 김새가 길쭉하고 서로 달라붙지 않고 나풀거려 식감이 꽤 달랐다. 인도 정통 카레에는 인디카 쌀로 지은 밥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에도 오늘날 인디카 벼 재배 면적이 더 넓고 쌀 생산량도 자포니카 의 두 배가 넘는다.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 쌀은 전체 생산량의 30%가 채 안 된다.
- 흥미롭게도 쌀 뿐 아니라 다른 곡물도 찰기가 많은 종류가 있고 쌀 과 마찬가지로 앞에 '찰'을 붙인다. 찰보리, 찰기장, 차조, 찰수수, 찰 옥수수가 있다. 곡물의 찰기는 녹말을 이루는 두 고분자인 아밀로오스 amylose와 아밀로펙틴amylopectin의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
아밀로오스는 포도당 분자 수백~수천 개가 일렬로 붙어 있는 고 분자다. 반면 아밀로펙틴은 포도당 24~30개당 하나꼴로 곁사슬이 난 고분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해 먹는 멥쌀은 아밀로오스가 15~20%이고 아밀로펙틴이 80~85%다. 반면 찹쌀은 거의 아밀로펙틴 이고 아밀로오스는 0~2%에 불과하다.
멥쌀은 아밀로펙틴 사이 공간에 아밀로오스가 박혀 있어 단단한 녹 말 과립이 형성된다. 반면 찹쌀의 녹말 과립은 물이 침투하기 쉬워 녹 말이 풀어지며 찰기가 커진다. 한편 우리가 먹는 멥쌀보다도 찰기가 덜해 밥알이 따로 노는 인디카 멥쌀은 아밀로오스 함량이 25%를 넘는다.

- 보리는 옥수수, 밀, 쌀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이 생산되는 곡물임에도 연간 생산량이 1억 5,700만 톤(2020년)으로 2, 3위권인 쌀과 밀에 한 참 못 미친다. 게다가 옥수수와 마찬가지로 주식으로서 소비되는 보리 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아 전체 생산량의 5%에 불과하다. 보리 생산량의 75%는 가축 사료이고 나머지 20%는 맥아, 즉 엿기름의 형태로 변형 돼 쓰이는데 주된 용도는 맥주와 위스키 양조다. '몰트 위스키malt whisky' 의 몰트가 바로 맥아를 뜻하는 영어다.
식혜를 만들 때는 엿기름을 걸러낸 용액의 아밀레이스가 익은 쌀알 표면의 녹말을 맥아당(엿당)으로 분해해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것이라 면 맥주를 만들 때 몰트는 아밀레이스가 보리 알곡의 배젖 주성분인 녹 말을 맥아당으로 분해하는 것이다(따라서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린 다). 맥아당은 포도당 두 분자로 이루어진 이당류다. 그 뒤 효모가 맥아 당을 먹고 배설물로 에탄올을 내보낸다. 바로 알코올 발효다. 홉을 더 한 상태에서 발효해 얻는 게 맥주이고 홉 첨가 없이 발효해 얻은 술을 증류한 게 위스키다.
- 보리의 부활을 꿈꾸며
1965년 우리나라 사람 1인당 연간 보리 소비량은 36.8kg로 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곡물이었지만 한 세대가 지나는 사이 급감해 1998 년에는 1.5kg에 불과했다. 보리는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서 재배 면적이 가장 가파르게 줄어든 작물이다. 대신 그 자리의 태반을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곡물인 밀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보리가 건강 곡물로 재인식되고 있다. 보리의 식이섬유 함량은 16%로 쌀의 열 배에 이른다. 그 결과 수분을 많이 흡 수해 장의 활동을 돕는다. 특히 수용성 식이섬유로 저밀도 콜레스테롤 LDL을 흡수해 혈중 수치를 낮추는 효과가 있는 베타글루칸 함량이 5%나 된다. 고지혈증과 비만, 당뇨 등 대사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쌀밥만 먹 는 것보다 보리를 섞어 먹는 게 좋다. 

-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논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앙리 파브르)
- 글 앞에 인용한 파브르의 말은 육천 년 빵의 역사』 1장에서 야콥이 인용한 글귀다. 1장에는 '풀들의 경쟁'이라는 절이 나오는데 저자는 여 기서 밀의 작물화 과정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풀 가운데 기장이 가장 먼저 작물이 됐고 뒤이어 보리가 선택돼 기장을 밀어내고 사 랑받다가 마침내 밀이 작물화된다. 보리와 밀은 다정하게 공존했으나 고대 이집트에서 밀가루로 효모(이스트) 발효 빵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 하면서 밀은 '곡식의 왕이 됐고 그 지위를 오늘날까지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밀에는 글루텐이 풍부해 반죽에 효모를 넣고 숙성시키면 효모가 토 해내는 이산화탄소 기체가 글루텐 막을 빠져나가지 못해 반죽이 부푼 다. 이를 오븐에 구우면 보들보들한 빵이 나온다. 반면 보리는 딱딱한 빵만 만들 수 있다. 참고로 반죽이 부풀어 부드러운 빵을 만들 수 있는 건 밀과 호밀뿐이다. 참고로 호밀빵이 다소 부푸는 이유는 다른 성분이 기체를 잡아주기 때문이다.
책에는 밀의 재배 과정도 소개돼 있다. 야콥은 “이집트에서 재배한 밀은 오늘날 미국, 캐나다,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들판을 뒤덮고 있는 밀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초기 재배종인 엠머밀emmer wheat이었다"라 며 “고대 로마인은 이 최초의 밀과 다른 밀을 교배하여 얻은 개량품종 을 이집트 전역에 심었다”고 쓰고 있다.
우리가 밀이라고 알고 있는 작물이 이 개량품종으로 보통밀common wheat 또는 빵밀bread wheat 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엠머밀은 거의 재배되지 않고 거기서 유래한 듀럼밀durum wheat이 재배되고 있는데 주로 파스타용 으로 쓰이기 때문에 마카로니밀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듀럼밀은 카 로티노이드가 들어 있고 단단해서 스파게티 면은 빵밀로 만든 면과 달리 색이 노르스름하고 더 오래 삶아야 한다. 듀럼밀은 전체 밀 생산 량의 5%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95%는 차지하는 게 빵과 면, 과자를 만드는 빵밀이다. 야콥 의 설명과는 달리 빵밀은 엠머밀의 개량품종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 른 종으로 엠머밀과 염소풀의 게놈이 합쳐져 생겨났다. 90년 전 우장 춘 박사가 발견한 '종의 합성', 즉 배추와 양배추 게놈이 합쳐져 유채라 는 신종이 나온 것과 같은 원리다. 사실 엠머밀도 다른 종의 밀과 다른 종의 염소풀의 게놈이 합쳐서 생겨난 신종이다.
오늘날 밀의 경작 면적은 2억 2,000만 헥타르로 작물 가운데 가장 넓다. 한반도 면적이 2,200만 헥타르이므로 10배에 해당하는 넓이다. 밀의 수확량은 7억 6,100만 톤으로 11억 톤이 넘는 옥수수 다음으로 많고 쌀과 비슷하다.
- 이 엠머밀과 듀럼밀은 이배체 밀(AA)과 이배체 염소풀(BB)의 게놈 이 합쳐서 생겨난 사배체 신종(AABB)이다. 빵밀은 엠머밀과 다른 이 배체 염소풀(DD) 사이 잡종에서 전체게놈중복이 일어난 육배체 신종 (AABBDD)이다.
식물 게놈이 하나둘 해독되면서 식물의 진화 과정에서 전체게놈중복 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것으로 밝혀졌다. 속씨식물의 경우 10만 번에 한 번 꼴로 다배체가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게놈중복이 일어나 면 유전자도 중복되므로 세대를 거치며 점차 소멸한다. 이 과정에서 염 색체가 재배열하기도 한다. 그 결과 다시 이배체로 돌아가는데, 이 과 정을 '이배체화diploidization'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배체 게놈을 지닌 식물 도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다배체 조상을 만난다는 말이다."
- 글루텐의 두 얼굴
미국의 저술가 마이클 폴란은 2007년 펴낸 책 『요리를 욕망하다」에 서 빵밀을 이렇게 평가했다.
"에이커당 더 많은 칼로리를 생산하고(옥수수, 쌀) 재배가 더 쉬우며(옥수수, 보리, 호밀) 영양소가 더 많은(퀴노아) 곡물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밀의 세계정복은 믿기 어렵고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성공 비결이 뭘까? 바로 글루텐이다.”
폴란이 말한 밀은 물론 빵밀이다. 사실 빵밀이 듀럼밀에 승리를 거두 게 된 데 기여한 또 다른 요인도 바로 글루텐gluten이다. 글루텐은 밀가루 를 반죽하는 과정에 형성되는 단백질 네트워크로 반죽을 탱탱하면서도 유연하게 만든다. 우동 면발의 쫄깃함이 바로 글루텐 덕분이다. 쌀이나 메밀 같은 곡물의 가루로 반죽을 빚어 면을 만들면 뚝뚝 끊어지지만, 밀가루 면은 글루텐 네트워크로 형태를 유지한다.
한편 밀가루에 효모라는 발효 미생물을 넣고 반죽한 뒤 숙성하면 효 모가 증식하며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글루텐 네트워크에 갇혀 반죽이 부풀어 올라 구우면 폭신한 빵이 된다. 쌀은 물론 같은 밀족인 보리에 서도 불가능한 현상이다. 오늘날 빵밀이 곡물의 왕이 된 건 효모를 만 났기 때문이다.
글루텐은 7세기 중국 승려들이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속세 시절 고 기 맛을 못 잊어 식물성 식재료로 고기의 촉감을 낼 수 없을까 고민하 다가 우연히 밀가루 반죽을 찬물 속에서 주무르자 녹말이 빠져 나오면 서 고무 같은 덩어리만 남았던 것이다. 이 가운데 글루텐이 70~80%나 된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콩고기나 버섯고기의 핵심 재료도 알고 보면 글루텐이다.
밀알도 다른 씨앗처럼 배와 배젖으로 이뤄져 있다. 배는 식물체로 자 랄 부분이고 배젖은 싹이 광합성을 할 때까지 영양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밀알의 배젖은 탄수화물(녹말)과 저장단백질이 엉겨 있는 상태로 싹이 트면 이들을 분해하는 효소가 활성화돼 영양분으로 쓰인다. 밀의 저장단백질은 글리아딘aladin과 글루테닌olutenin 두 종류다.
물론 다른 곡류의 배젖도 비슷한 방식으로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저 장해 공급하지만, 종마다 저장단백질 종류가 다르다. 예를 들어 쌀의 배젖에는 글리아딘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반면 밀 족 곡식인 호밀과 보리의 배젖에는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있다.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하면 글루테닌 단백질이 서로 결합해 스프 링처럼 되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글리아딘이 그 사이에 들어가 완 충재 역할을 한다. 바로 글루텐이다. 반죽을 치댈수록 글루텐 네트워크 가 더 치밀해져 탄성이 커진다.

- 쌀, 보리, 기장, 조, 콩(대두),
우리 조상들이 주식으로 여겼던 오곡이다. 쌀의 파트너였던 보리 와 된장, 간장, 두부의 재료인 콩은 수긍이 가는데 기장과 조는 뜻밖이 다. 기장과 조는 낟알이 너무 작아 도무지 주식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좀스러운 사람이나 행위에 조의 낟알인 '좁쌀'이라는 은유를 쓸까. 기장과 조 대신 밀이나 수수 또는 팥이 오곡에 들어가야 어울릴 것 같다. 다만 옥수수는 한반도에 들어온 역사가 짧아 어색하다.
사실 일반인은 기장과 조의 낟알을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기장이 조보다 확실히 더 크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이 둘에 전혀 다른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만큼 두 작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기장과 조는 한자어처럼 보이지만 둘 다 순우리말이다. 흥미롭게도 영어에 서는 둘뿐 아니라 작은 낟알을 지닌 여러 볏과 작물을 아울러 'millet'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수수조차 'great millet'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과학문헌에서는 포함하지 않는다. 번역가가 영어 원서에서 millet를 만나면 앞뒤 문맥을 파악해서 적당한 번역어를 골라야 할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식량에서 기장과 조의 비중이 달라서였을 것이다. 즉 서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지금도 주식인 밀과 보리가 최초의 작물이라 뒤에 들어간 기장과 조의 중요도가 낮았다. 반면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작물화 된 곡식이 바로 기장과 조다. 앞서 1장에서 벼를 가장 먼저 소개하는 이 유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주식 작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벼가 주 식이 된 것은 수천 년 동안 기장과 조를 주식으로 먹고 난 뒤의 일이다. 이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식량작물로서 기장과 조의 비중은 워 낙 낮아 연간 생산량이 각각 500만 톤에 불과하다. 쌀과 밀의 1%도 안 되는 양이다. 조의 상당 부분은 새 모이로 쓰인다. 기장과 조에 다른 작 은 낟알 곡물millet을 다 합쳐도 연간 생산량은 3,000만 톤이 채 안 된다. 참고로 수수는 6,000만 톤으로 보리에 이어 생산량 5위인 곡물이다. 

-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기장과 특히 조는 중국과 한국의 주식 작물이었다. 그러나 벼농사 기술과 벼 품종 향상으로 쌀수확량이 급증하고 밀을 수입하면서 사람들이 기장과 조, 수수를 외면하자 재배 면적이 급 감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이들 세 작물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고 있다. 당뇨, 심혈관계질환 등 성인병에 좋은 곡물이라는 인식이 퍼지며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실제 기장과 조, 수수에는 쌀(백미)에 비해 각종 미네랄과 비타민, 피토케미컬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특히 기장은 쌀과 궁합이 잘 맞아(기장밥) 수요가 많이 늘었지만, 아직은 국내 생산량이 턱없이 모자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다행히 수년 전부터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기장을 재배하기 시작해 2019년 1,257헥타르에서 1,265톤을 생산했다. 이는 전국 재배 면적의 70%에 이르는 넓이다. 기장은 재배 기간이 짧아 무, 양배추, 당근 같은 월동 채소의 사이 작물로 적합하다(이모작). 지난 수년 사이 제주 지역 에 적합하고 수확량이 많은 한라찰, 올레찰 등 신품종이 잇달아 개발됐 고 시험재배를 거쳐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될 계획이다. 한국인 의 소울푸드 기장이 많은 가정과 식당의 식탁에 다시 오르기를 바란다.

- 하지만 왜 다른 작물은 안 심고 옥수수와 콩만 심는가?
"우리는 이곳에서 산업적 음식사슬의 맨 밑바닥에 있어요. 이 땅에서는 대부분 동물에게 먹일 단백질과 에너지(탄수화물)를 생산하고 있죠. 옥수수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고, 콩은 단백질을 생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죠." (마이클 폴란, 잡식동물의 딜레마)
- 전이인자 transposable element 또는 transposon는 염색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특정한 염기서열을 지닌 DNA 조각으로 다른 위치로 이동하거나 사본 을 만들어 다른 위치에 들어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전이인자 자체 는 개체의 생존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는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지 않 다. 따라서 게놈에 무임승차하고 있는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전이인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매클린톡이 발견한 DNA 트랜스포존DNA Transposon으로, 염색체에 박혀 있다가 활성화되면 빠 져나가 다른 위치로 옮겨 들어간다.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용어로 '잘라 붙이기 cut and paste'인 셈이다. 따라서 전이 자체로 전이인자 수가 늘어나 는 건 아니다.
- 다음으로 레트로트랜스포존retrotransposon은 '복사해 붙이기 copy and paste' 방식이다. 즉 염색체에 박혀 있는 DNA 조각을 주형으로 해서 RNA 복사본이 만들어지고 이를 주형으로 다시 DNA 복사본이 만들어진 다. DNA 주형에서 RNA가 만들어지는 게 전사이므로 RNA 주형에서 DNA가 만들어지는 건 '역전사retrotranscription'라고 부른다. 레트로트랜스포 존에서 레트로는 역전사를 뜻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DNA 조각은 게놈에서 특정한 염기서열을 인식해 그 사이에 끼어 들어간다. 원본 DNA 조각은 그대로 있으므로 레트로 트랜스포존이 활성화될 때마다 수가 늘어나고 따라서 게놈도 커진다. 대다수 생물체의 게놈에서 레트로트랜스포존이 차지하는 비율이 DNA 트랜스포존보다 크다.
- 게놈에서 전이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그 결과 게놈 크기도 큰 차이를 보인다. 같은 볏과 작물임에도 보리와 밀 게놈이 벼나 조 게놈보다 열 배 이상 큰 것도 전이인자 때문이다. 식물 에 따라 게놈에서 전이인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이처럼 다른 이유는 아 직 잘 모른다. 다만 어떤 환경의 변화가 전이인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으 로 보인다. 특히 잡종이나 전체게놈중복처럼 게놈에서 큰 변화가 일어 났을 때 이런 경향이 크다고 한다.
전이인자는 한동안 게놈에 존재하는 일종의 '기생체'로 여겨졌다. 하 는 일도 없으면서 '숙주인 게놈에 자리하면서 세포분열 과정에서 게놈 이 복제될 때 무임승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 게놈의 45%를 차지하는 전이인자를 없앨 수 있다면 게놈 크기가 31억 염기에서 17억 염기로 줄어든다.
게다가 전이인자가 자리를 옮기거나(DNA 트랜스포존) 복사본을 끼 워 넣을 때(레트로트랜스포존) 자칫 숙주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생존에 중요한 유전자 중간에 들어가 유전자를 망가뜨리거나 유 전자 발현 조절 영역에 들어가 전사가 안 되거나 지나치게 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숙주 게놈은 전이인자가 날뛰지 못하게 비활성 화하는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고 그 결과 전이인자 대다수는 비활성 상 태다.
그럼에도 전이인자의 활동이 숙주에 꼭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 니다. 드물게는 생존이나 번식에 더 유리한 특성을 갖게 만들 수도 있 고 이런 개체가 선택돼 우점종이 되거나 새로운 종으로 분화할 수 있 다. 야생 식물의 작물화 과정에서 트랜스포존이 기여한 예도 발견되고 있다. 옥수수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옥수수
- 잡종 작물 시대 열어
20세기 100년을 거치며 곡물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화학비료로 작물의 성장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농약을 써서 병충해 손실을 줄 인 것과 함께 새로운 품종을 개발한 덕분이다. 특히 옥수수는 단위면적 당 수확량이 100년 사이 8배나 늘었다. 여기에는 앞의 요인과 함께 잡 종 옥수수를 개발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잡종 옥 수수 재배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 재배되는 옥수수는 대부분 잡종이다. 밀 등 다른 작물에서도 잡종이 개발돼 널리 재배되고 있다.
잡종 옥수수는 '잡종강세hybrid viger'라는 현상을 이용해 수확량을 늘린 옥수수다. 품종이 다른 암수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의 몇몇 특성이 부모의 중간이 아니라 부모 양쪽보다 더 우세하거나 양쪽의 장점만을 지닌 경우가 종종 나타나 이를 잡종강세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수확량이 많 은 A품종과 병해충 저항성이 큰 B품종 사이에서 나온 1세대 잡종(F1) 은 수확량이 A보다 더 많으면서 병해충에도 강한 식이다.
다만 잡종 작물은 재래종이나 순계 품종과 달리 농부들이 해마다 종 자회사에서 씨앗을 사서 심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잡종 작물에서 열 린 씨앗(2세대 잡종(F2))은 먹을거리로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감수분 열 과정에서 염색체 재조합이 일어나 게놈 조성이 제각각이다. 즉 재배 한 잡종 작물에서 얻은 씨앗을 이듬해 심었다가는 농사를 망치게 된다. 종자회사가 씨앗을 매년 팔아먹으려고 일부러 이런 유전적 조작을 했 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잡종 작물의 본질적인 문제다.

- 곡물의 파트너 작물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콩과 식물이 작물화된 데에는 크게 두 가 지 이유가 있다. 먼저 콩은 작물 가운데 단백질 함량이 단연 많다. 수렵 채집 대신 농사를 택한 인류는 사냥을 나갈 여유가 없어졌지만 그렇다 고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을 대규모로 키울 수도 없어 육류 섭취가 부 족해졌다. 따라서 고기를 대신할 단백질 공급원인 콩이 탄수화물(에너 지) 공급원인 곡물(물론 단백질도 약간 들어 있기는 하지만)의 파트너 로 함께 작물화된 것이다. 서아시아에서는 밀, 보리와 함께 렌틸콩과 병아리콩이 작물화됐고 동아시아에서는 벼와 대두가, 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와 강낭콩이 짝이었다.
다음으로 땅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보통 같은 자리에 작물을 반복 해 심으면 토양 영양분이 고갈돼 수확량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콩과 작물은 토양미생물과 공생으로 질소고정을 하는 능력이 있고 그 결과 땅을 비옥하게 한다. 따라서 다른 작물과 콩을 번갈아 심으면 땅 심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농사법을 윤작 또는 돌려짓기라고 한다. 콩 의 단백질 함량이 높은 것도 질소 원소가 단백질 구성단위인 아미노산 의 뼈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콩과 작물 게놈이 해독됐지 만 여기서는 콩과 작물 생산량에서 압도적인 1위이면서 원산지에 한반 도가 포함된 대두의 게놈을 주로 다룬다.
- 질소고정 박테리아는 토양에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다. 주변에 콩과 식물이 없어도 자연계에서 식물들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유다. 그럼 에도 토양이 척박해 질소고정 미생물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면 질소 화합물이 부족하고 그 결과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 질 수 있다.
그런데 속씨식물의 진화 과정에서 대략 1억 년 전 몇몇 식물이 질소 고정 박테리아와 공생하는 길을 찾았고 그 결과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 에 유리한 지점에 올라섰다. 물론 식물도 거저먹는 건 아니고 박테리아 를 위해 뿌리조직까지 변형시켜 미생물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뿌리혹 을 줄줄 달고 있고 그 안에 사는 박테리아에게 지상부의 잎이 광합성으 로 만든 영양분을 운송해 공급한다. 식물과 박테리아 사이에 탄소화합물과 질소화합물을 물물교환하는 셈이다.
때로 콩과 식물만이 질소고정 능력이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 있는 데, 실제로는 10개 과의 식물들이 질소고정 능력이 있다. 다만 콩과 식물은 종이 워낙 많고 구성원 대다수가 질소고정 능력이 있지만, 나 머지 9개 과는 일부 속의 종들에서만 질소고정이 일어난다. 공생하는 질소고정 박테리아의 종류도 다른데, 콩과와 삼과(장미목) 식물은 그 램음성균인 리조비아hizobia이고 나머지 8개 과는 그램양성균인 프란키 아Frankia다." 아무튼 380여 과로 이뤄진 속씨식물 가운데 10개 과에서 만 질소고정을 할 수 있는 식물이 존재하므로 여전히 예외적인 능력인 셈이다.
- 뜻밖에도 질소고정 관련 유전자 대다수가 질소고정 능력이 없는 속 씨식물의 게놈에도 존재한다. 즉 앞서 4개 목의 공통조상 식물에서 질 소고정을 위해 새로운 유전자들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유전자들이 새로운 기능을 갖거나 새로운 네트워크를 이뤄 질소고정 박테리아와 공생할 수 있게 진화한 것이다. 이 역시 C4 광합성과 비슷한 패턴이다.
지난 2019년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콩과 식물 뿌리혹의 진화적 기원 을 유전자 네트워크 차원에서 밝힌 연구 결과가 실렸다." 토양에 질소화 합물이 충분하면 콩과 식물도 굳이 뿌리혹을 만들지 않는다. 이들과 공 생관계를 맺는 박테리아인 리조비아rhizobia도 토양에서 혼자 살 수 있다. 그런데 질소화합물이 부족해지면 식물 뿌리에서 유인물질을 내보내 고 이를 감지한 리조비아가 이동해 뿌리털에 감염한 뒤 노드 인자Nod factor를 내보내 뿌리털에서 뿌리 피질세포로 이어지는 관인 감염사infection thread를 만들게 하고 피질세포의 일부가 분열해 혹원기 nodule primordium를 만 들게 유도한다. 감염사를 따라 이동해 혹원기를 이루는 세포의 내부로 들어간 리조비아는 일종의 세포소기관으로 자리잡고 질소 분자를 암모 늄으로 바꾼다. 혹원기가 커지면서 뿌리혹root nodule 이 된다.

- 고구마와 감자가 구황작물이라지만 한반도에서 재배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고구마는 18세기 중반 일본 대마도에서 들어왔고 감자는 이보 다도 늦어 19세기 초반 청나라에서 들어왔다. 즉 이들이 우리 조상들에 게 구황작물 역할을 한 건 100여 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 이전 수천 년 동안은 메밀이나 조, 마 같은 작물로 배고픈 시기를 버텼을 것이다. 고구마와 감자 모두 중남미가 원산지이자 작물화된 곳으로 15~16 세기 유럽인들이 가져갔고 아시아로 퍼졌다. 중국에서 고구마는 감저 藉 또는 감서'로 불렸다. 여기서 서와 저는 마를 뜻한다. 마는 동북 아시아가 원산인 식물의 이름이자 그 덩이줄기 이름이다. 즉 고구마의 생김새가 마와 비슷하면서 단맛이 특징이라 감저, 즉 직역하면 '단마'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사실 한반도에 처음 고구마가 도입된 시기는 18세기 후반이 아니라 17세기 초 광해군 시절로 보인다. 다음 왕인 인조 11년(1633년) 고구 마를 보급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효과적인 재배 법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된 것 같다. 고구마의 원래 이름이 감자였다는 사실이 이 역사를 뒷받침한다. 감자는 한자어 감저가 한글화된 이름이 다. 지금도 고구마를 감자 또는 감저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소설가 김동인인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감자의 감자는 사실 고구마다.
한편 감자는 중국어로 마령서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북감 저라고 불렀다. 그 뒤 지역에 따라 감저 또는 감자로 부르면서 혼란 이 생겼다. 그러다 고구마보다 재배가 쉽고 저장성이 좋으면서 채소로 쓸 수 있는 감자가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 이름 까지 빼앗은 것이다. 대신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리키는 일본어 '고코사실 한반도에 처음 고구마가 도입된 시기는 18세기 후반이 아니라 17세기 초 광해군 시절로 보인다. 다음 왕인 인조 11년(1633년) 고구 마를 보급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효과적인 재배 법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된 것 같다. 고구마의 원래 이름이 감자였다는 사실이 이 역사를 뒷받침한다. 감자는 한자어 감저가 한글화된 이름이 다. 지금도 고구마를 감자 또는 감저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소설가 김동인인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감자의 감자는 사실 고구마다.
한편 감자는 중국어로 마령서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북감 저라고 불렀다. 그 뒤 지역에 따라 감저 또는 감자로 부르면서 혼란 이 생겼다. 그러다 고구마보다 재배가 쉽고 저장성이 좋으면서 채소로 쓸 수 있는 감자가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 이름 까지 빼앗은 것이다. 대신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리키는 일본어 '고코이모'가 우리말화돼 쓰이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 고구마의 당분이 4%라지만 생으로 먹으면 그렇게 달지는 않다. 그런 데 요리를 하면 꽤 달아지고 특히 군고구마는 더 달다. 이 역시 베타- 아밀레이스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고구마의 베타-아밀레이스 효소 활 성은 5°C에서 가장 높고 75°C가 넘으면 열로 변성되면서 활성을 잃는 다. 따라서 조리 과정에서 베타-아밀레이스가 녹말과립 표면의 녹말 상당량을 맥아당으로 분해해 단맛이 강해진다. 맥아당의 단맛은 설탕의 3분의 1 수준이다. 고구마를 구울 때는 찔 때보다 고구마 내부의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므로 효소가 더 오래 작용해 더 달다.

- 감자를 재배할 때 씨가 아닌 씨감자를 쓰는 이유도 상동염색체 사이 의 차이인 이형접합성이 이렇게 크기 때문이다. 감수분열 과정에서 염 색체 재조합이 일어나면서 게놈 구성이 제각각인 생식세포가 얻어지므 로 이형접합성이 클수록 이게 수정해서 맺히는 씨앗의 편차 역시 크다.
게다가 오늘날 재배되는 감자는 대부분 동질사배체, 즉 상동염색체 두개가 아니라 네 개가 쌍을 이루고 있어 이런 경향이 더 심하다.
수천 년 전 남미 안데스 산지에서 감자가 작물화될 때부터 농부들은 식물체의 특성을 유지하는 무성생식 방법, 즉 씨감자로 다음 해 농사를 지었다. 씨감자에서 나온 싹은 모체와 게놈이 동일한 클론이므로 매년 같은 특성의 감자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씨감자 농사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먼저 씨에 비해 씨감자는 덩치가 훨씬 크므로 수확량에서 손실을 보기 마련이다. 또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에 감염된 상태가 다음 개체로 이어질 위험성도 크다.
- 싹이 난 감자를 먹으면 안 되는 이유
제철 감자가 싸다고 상자로 사서 두고 먹다 보면 어느 순간 싹이 난 감자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이 부분을 칼로 도려내지 않으면 맛 도 쓰지만 몸에 안 좋고 많이 먹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솔라닌 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지속 식물은 잎과 열매에 글리코알칼로이드glycoalkaloid 라는 구조의 피토케미컬을 지니고 있다. 감자에는 솔라닌solanine과 차코닌chaconineo 있고 토마토에는 토마틴tomatine이 있다. 이 가운데 감자의 덩이줄기에도 존재하는 솔라닌이 널리 알려져 있다. 솔라닌은 1820년 역시 가지속 식물인 까마중(학명 Solanum nigrum)의 열매에서 처음 분리돼 이런 이름을 얻었다.
가지속 식물이 만드는 글리코알칼로이드는 이를 먹은 동물의 세포막 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을 분해하는 효소의 작용을 방해한다. 그 결과 소화계와 신경계를 교란시키고 고농도로 섭 취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다만 글리코알칼로이드는 맛이 쓰기 때 문에 보통은 치사량을 먹기 전에 피하기 마련이다.
식물의 작물화 과정에서 맛이 쓰거나 독성이 있는 피토케미컬은 농 도가 낮아지는 쪽으로 선별이 이뤄졌다. 따라서 작물 감자와 토마토 역시 야생 식물에 비해서는 글리코알칼로이드 함량이 꽤 낮지만, 감자처럼 상황에 따라서는 많이 만들어져 독성을 띨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감자를 빛에 노출한 채 보관하면 싹이 나면서 껍질에서 솔라닌 합성이 활발해지고 엽록체가 많아져 녹색을 띤다. 이때 껍질째 감자를 요리해 먹으면 다량의 솔라닌을 섭취할 수 있다. 참고로 솔라닌 은 안정한 분자라 웬만한 열로는 분해되지 않는다. 의학사를 보면 소위 '솔라닌 중독'으로 불리는 사례가 여럿 보고됐는데, 2,000여 명의 발생 사례 가운데 사망자가 30명이나 된다.
토마토 역시 잎과 열매에서 글리코알칼로이드인 토마틴이 만들어진다. 다만 작물화 과정에서 열매의 토마틴 함량이 크게 줄었을 뿐 아니라 열매 가 성숙하면서 토마틴이 인체에 무해한 라이코페로시드lycoperosides와 에 스큘레오시드 esculeosides로 바뀌기 때문에 감자처럼 위험하지는 않다.

- 2017년 사이언스에는 현대 상업 품종 토마토의 향미가 떨어진 이 유를 밝힌 논문이 실렸다." 향미 lavor는 맛과 향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오늘날 토마토 열매가 과일이 아니라 채소로 취급되는 건 단맛과 함께 향기도 약해졌기 때문이다.
상업 재배품종과 야생종, 재래종 등 398가지 토마토를 분석한 결과 상업 재배 품종에서 향미와 관련된 휘발성 분자 13종의 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들쩍지근한 토마토 특유의 향을 부여 하는 2-메틸-1-부탄올2-methyl-1-butanol nol과 바나나 향인 3-메틸-1-부탄
-3-methyl-1-butanol, 은은한 꽃향기인 베타-아이오논-ionone 같은 화합물이다. 생산량과 저장성, 질병 저항성 등에 집중해 개량하다 보니 이런 대 사산물을 만드는 유전자 네트워크가 부실해져도 방치한 결과다. 연구 자들은 관련된 유전자들의 변이를 야생 또는 재래종 형태로 되돌린다 면 향미가 풍부한 토마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새 술은 새 포대에
2018년 학술지 네이처 생명공학에는 맛과 향이 진한 토마토를 만드는 새로운 전략을 소개한 논문 두 편이 나란히 실렸다. 즉 기존 상업 재배품종 토마토에 잃어버린 유용한 특성을 복구시키는 대신 야생 토 마토에 게놈편집기술로 작물 토마토의 특성을 부여해 향미는 유지하면 서 열매 크기 등 단점은 개선한 작물로 만드는 것이다. 지난 수년 사이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 일어난 게놈 변이가 많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 런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시간은 줄일 수 있을지 몰 라도 재배 품종에 야생 토마토를 교배하는 전통 육종법과 같은 결과물 이 나오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게놈 차원에서 보면 기존 육종법은 염색체가 재조합되 는 과정이고 이때 표적이 되는 유전자에 가까이 있는 여러 유전자들도 같이 바뀐다. 그 결과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게놈편집 기술을 쓰면 원하는 유전자만 콕 집어서 바꿀 수 있으므로 이런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
- 연구자들은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 이는 유전자 6개를 바꾸기로 했다. 즉 3세대 게놈편집기술인 크리스 퍼/캐스을 써서 족집게 분자육종을 시도한 것이다. 식물체의 성장에 관여하는 SP 유전자와 열매 모양에 관여하는 유전자, 열매 크기에 관여하는 FAS 유전자와 FW2.2 유전자, 열매 개수에 관여하는 MULT 유전자, 영양분(라이코펜lycopene)에 관여하는 CycB 유전자를 작물형 또 는 바람직한 특성을 띠는 변이형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야생종에 비해 열매 크기가 3배가 됐고 개수는 무 려 10배가 됐다. 즉 식물 한 개체 당 열매가 양으로 30배 더 달린 것이 다. 게다가 라이코펜 함량도 두 배로 늘었다. 이는 시장에 나와 있는 토 마토의 라이코펜 함량의 5배에 이르는 농도다. 라이코펜은 항염증 작 용이 있고 심혈관계질환 및 암 위험성을 낮춰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라이코펜 관련 유전자인 CycB는 라이코펜을 베타카로틴으 로 바꿔주는 효소를 지정하고 있다. 기존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는 이 유전자의 활성이 강화돼 라이코펜 함량이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방울 토마토의 라이코펜 함량은 60~120mg/kg인 반면 야생 토마토는 최대 270mg/kg에 이른다. 그런데 게놈편집으로 이 유전자를 아예 고장내 자 라이코펜 함량이 500mg/kg까지 올라갔다. 이 경우는 기존 작물화 와 반대 방향으로 바꾼 것이다.
- 수입 관세 때문에 법적 다툼
토마토가 채소든 과일이든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1893년 미국에서는 이 문제가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한때 뉴욕 관세청장 을 지내기도 했던 미국 21대 대통령 채스터 아서는 관세를 낮춰 달라는 여론에 1882년 관세 인하 검토를 지시했다. 그 결과 위원회는 10% 인하 안을 의회에 제시했으나 보호론자들의 입김으로 이듬해 관세법을 평균 1.47% 인하하는 데 그쳤다.
- 이 과정에서 수입 과일은 무관세가 돼 서민들의 부담을 꽤 덜어줬다. 반면 수입 채소에는 여전히 10%의 관세를 매겼다. 이때 토마토는 과학보 다는 관습(상식)에 따라 채소로 분류됐고 그 결과 관세 대상이 됐다. 이 에 수입업자들이 불만을 품었고 이 가운데 뉴욕에서 가장 큰 과채류 수 입업체였던 존닉스&컴퍼니가 뉴욕항 세관 책임자 에드워드 헤든을 상대 로 재판을 걸어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다. 원고측은 열매인 토마토가 식물학적으로 엄연히 과일이므로 틀린 분류 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사전까지 갖고 가 들이밀었지만, 법정은 "어떤 단 어가 무역이나 상업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일상의 의미 로 쓰여야 한다"며 사전을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판결을 맡은 그레이 판사는 “토마토는 덩굴식물에 열리는 열매이지만 디저트보 다는 주요리에서 주로 먹기 때문에 채소로 봐야 한다"며 "호박과 오이. 완두, 강낭콩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일은 목본 식물의 열매에 한정하고 초본 식물의 열매 는 채소로 본다. 채소는 먹는 부위에 따라 엽채류(잎)와 근채류(뿌리), 과 채류(열매)로 나뉜다. 토마토는 고추, 호박, 오이, 참외, 수박과 함께 과 채로 분류된다. 완두나 풋콩은 씨앗이지만 과채류로 본다.

- 후추와 마늘도 그렇지만 양념 작물이나 기호 작물의 정체성은 해당 작물이 만드는 이차대사물secondary metabolites에서 온 다.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같은 영양분, 즉 일차대사물primary metabolites. es을 섭취하려고 먹는 음식에 맛을 돋우기 위해 넣는 양념 작물은 종류에 따 라 독특한 이차대사물 프로파일을 지니고 있다.
이차대사물은 대부분 식물이 각종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분자다. 특히 식물체를 공격하는 생물체에 대항하는 무기 로서 이차대사물은 식물의 진화 과정에 따라 특화돼 있다. 고추속 식물 은 캡사이시노이드capsaicinoid로 불리는 알칼로이드 합성 전문가들이다.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분자로 알려진 캡사이신capsaicin은 대표적인 캡사 이시노이드다. 한편 알칼로이드alkaloid는 질소를 함유한 염기성 유기화 합물을 가리킨다.

- 토마토와 고추의 차이
토마토와 고추는 가짓과 식물로 가까운 사이이지만 열매가 익는 과 정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토마토는 전형적인 열매의 길을 걷는 것이므로 고추 열매가 별난 경우다. 식물이 씨방을 부풀려 영양분이 들 어 있게 하는 건 씨를 퍼뜨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씨가 여물기 전까지 는 열매가 딱딱하고 타닌과 유기산이 많아 맛도 떫거나 시고 색도 녹색 이다. 씨가 성숙하면 열매의 세포벽이 약해지고 떫은맛과 신맛 대신 당 분이 올라가 단맛이 난다. 여기에 달콤한 향이 더해지고 색도 빨갛거나 노랗게 바뀐다. 동물들에게 빨리 와서 먹으라고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토마토 열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 최 교수는 "토마토씨를 본 적이 있느냐?"며 고추씨보다 작은데다 미 끌미끌한 젤에 싸여 있어 포유류가 씹어 먹어도 거의 파괴되지 않고 장 을 통과할 때도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대변에 섞여 온전하게 빠져나온 다고 설명했다. 반면 고추씨는 상대적으로 크고 노출돼 있어 설치류 같 은 작은 포유류가 씹어 먹게 되면 십중팔구 상처를 입고 장의 소화 작 용으로 파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열매를 진 화시켰다.
고추에서는 씨가 여물면 열매의 색이 녹색에서 붉게 바뀌기는 하지만 세포벽이 약해지지도 않고 캡사이신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포유동 물이 먹기에는 여전히 꺼리는 상태다. 반면 새들에게는 먹기 좋은 열매 다. 빨간 열매가 녹색 잎과 보색대비를 이뤄 눈에 잘 띄고 새들은 캡사이신의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고추 열매를 먹은 새들 이 어디론가 날아가 배설을 하면 배설물 속의 소화되지 않은 씨앗이 발 아해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 고추가 새를 선택한 것
생태계 현장 조사 결과 이 가설이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추의 원산지인 중미와 북미 남서부에 사는 새인 굽은부리쓰래셔(curve-billed thrasher. 지빠귀와 비슷하게 생긴 앵무과의 새)는 고추를 즐겨 먹는데 배설물을 조사해 보니 온전한 고추씨가 들어 있었고 그 결과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실제 발아율이 70%에 이르렀다. 반면 이 지역에 사는 소형 설치류인 숲쥐나 선인장쥐는 야생 고추를 외면하고 심지어 캡사이신이 없는 재배 품종 고추를 줘도 망설이며 조금밖에 먹지 않는다는 발견이 지난 2001년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포유류와 조류는 거의 3억 년 전에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 따라서 둘 의 TRPV1 역시 지난 3억 년 동안 각자 진화하며 구조도 꽤 달라졌을 것 이다. 예를 들어 조류는 체온이 포유류보다 4°C 정도 높은 40~44°C이기 때문에 TRPV1이 활성화되는 온도도 그만큼 더 높아야 한다. 실제 조류 의 TRPV1의 활성화 온도를 측정해 보면 46~48°C로 그만큼 더 높다. 세 팅 온도의 차이는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반면 토마토와 고추는 약 2,000만 년 전에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 즉 고추의 조상이 이차대사물인 캡사이신을 발명한 역사는 2,000만 년이 안 된다는 말이다(아마도 수백만 년일 것이다). 결국 고추 조상은 포유류 로부터 씨앗을 물리적으로 보호하는 대신 열매 자체를 못 먹게 화학적으 로 지키는 전략으로 시행착오를 거쳐 포유류의 TRPV1에만 달라붙는 구 조의 화합물, 즉 캡사이신을 만드는 생합성 유전자 네트워크를 진화시켰 다는 말이다.

- 프룩탄은 소장에서 소화가 잘 안 되는 탄수화물인 가용성 식이섬유로 대장으로 넘어가서 장내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즉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로 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섭취하면 문제를 일 으키기도 한다. 미생물 발효가 왕성해지면 배에 가스가 차고 복통, 설 사 같은 증상이 생길 수 있다. 프룩탄을 포함해 소화가 잘 안 돼 장내미 생물 발효로 문제를 일으키는 물질을 가리켜 포드맵FODMAP이라고 부른 다. FODMAP은 '발효가 되는 올리고당류, 이당류, 단당류 및 폴리올 fermentable oligosaccharides, disaccharides, monosaccharides, and polyols'의 머리글자다.
개인에 따라 포드맵이 소장에서 소화되는 정도와 대장에서 발효되는 정도가 다르다. 예를 들어 우유에 들어 있는 이당류 젖당(유당)도 포드 맵이지만, 소장에서 젖당분해효소가 충분히 나오는 사람에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반면 효소를 전혀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우유를 조금 만 마셔도 배탈이 난다.
마늘에는 프룩탄이 많이 들어 있지만, 양념으로 먹는 양으로는 별문 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늘이나 양파를 즐겨 먹는데 평소 속이 더부룩하다면, 섭취를 줄일 때 속이 편해지는가를 살펴보는 게 좋다. 참 고로 프룩탄은 밀에도 들어 있다. 빵이나 면 같은 밀가루 음식을 먹고 나서 속이 안 좋다면 역시 포드맵에 민감한 체질이 아닌가 의심해 볼 만하다. 한편 쌀에는 프룩탄이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이 주식 은 잘 정한 것 같다.

- 종의 합성은 오늘날 용어로 이질배수성allopolyploidy이라고 부르는 현상으로 당시로는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앞서 3장 밀의 게놈에서 설명했듯이, 오늘날 많은 작물의 등장에는 이질배수성이 한몫했다. 엠머빌과 빵밀도 이질배수성, 즉 종의 합성으로 생겨난 작물이고 앞으로 나올 딸 기와 인삼 등 많은 예가 있다.
종의 합성은 단순한 잡종과는 다른 얘기다. 배추와 양배추 사이에서 잡종이 종종 나오지만 생식력이 없다. 배추는 염색체(2n)가 20개, 양배 추는 18개라 그 사이의 잡종은 염색체가 19개다. 부계 생식세포의 염 색체(n) 10개(또는 9개)와 모계 생식세포에서 9개(또는 10개)가 수정돼 합쳐진 결과다. 그런데 1세대 잡종 개체가 생식세포를 만들려고 하면 짝이 안 맞아 감수분열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불임이 된다. 그런데 드물게 감수분열 없이 염색체 19개를 지닌 상태 그대로 생식 세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우연히 이런 생식세포 둘이 만나 수정되면 염색체 38개로 이뤄진 세포를 지닌 개체가 나온다. 바로 유채다. 이경 우 배추와 양배추 염색체를 온전히 지니고 있고 감수분열의 결과인 생 식세포는 염색체 19개를 갖고 있다. 배추와 양배추 두 종의 게놈이 합 쳐져 새로운 종인 유채가 나왔으므로 종의 합성이라고 부른다. 우 박사 는 오래전 자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실험실에서 재현해 증명했다.

- 작물화로 쓴맛이 많이 지워졌지만...
가끔 오이를 먹다가 특히 꼭지 쪽에서 꽤 쓴맛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눈치를 보는 자리가 아니라면 씹던 음식을 뱉어낼 정도다. 예 전에 참외를 먹다가도 이런 '쓴맛을 본 적이 있다. 오이나 참외뿐 아니 라박과 식물에는 공통으로 이처럼 쓴맛이 강하게 나는 물질인 큐커비 타신cucurbitacin이 들어 있다. 분자 이름도 박과cucurbitaceae에서 따왔다. 큐 커비타신은 탄소원자 30개로 이뤄진 트리테르펜triterpene으로 몇 가지 종 류가 있다. 오이는 큐커비타신C, 멜론은 큐커비타신B, 수박은 큐커비 타신E를 지니고 있다.
쓴맛이 나는 다른 피토케미컬과 마찬가지로 큐커비타신은 동물을 쫓 아내는 방어물질이다. 대부분의 식물에서는 씨앗이 여물면 열매가 익 으면서 쓴맛이나 신맛이 나는 물질은 사라지고 대신 조직이 물러지고 단맛이 올라가지만 박과 식물의 열매는 익어도 쓴맛이 남아 있다. 이는 쓴맛에 둔감한 대형 포유류만을 끌어들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열매를 대충 씹어 넘기면 손상되지 않은 씨앗이 장을 통과해 똥에 섞여 빠져나와 발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과 식물의 작물화 과정에서 중요한 개량 포인트가 바로 열 매에서 큐커비타신의 쓴맛을 최대한 줄이는 것으로, 수박에서는 완전 히 성공했지만 오이속 작물인 오이와 참외에서는 완벽하게 없애지 못 했다. 최근 당뇨에 좋은 걸로 알려져 찾는 사람이 늘고 있는 여주(학명 Momordica charantia)는 예외인데, 작물화됐음에도 여전히 쓴맛을 꽤 지닌 채 몇몇 요리에 식재료로 쓰이거나 술을 담글 때 들어간다.
- 박과 식물이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분자인 큐커비 타신cucurbitacin은 미량 존재해도 과육이 굉장히 쓰다. 따라서 작물화 과정에 서큐커비타신생합성을 억제하는 쪽으로 선별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오이 와 참외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반면 수박을 먹다가 쓴맛을 느낀 적은 없을 것이다. 큐커비타신 생합성 경로가 완전히 막혀있기 때문이다.
게놈 분석 결과 이런 변화는 에구시수박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번에 분석한 16개 유전자원 가운데 12가지에서 쓴맛이 없었는데, 큐커비타 신생합성 경로를 조절하는 Bt 유전자 변이가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 다. 그리고 달콤한 수박의 경우 전부 변이형 Bt 유전자였다. 작물화 초 기 일찌감치 쓴맛이 없는 형질이 고정됐다는 말이다.
작물화 과정에서 열매가 커지고 방어물질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면 식 물은 각종 병충해에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수박도 예외는 아니어서 덩굴쪼김병(곰팡이), 흰가루병(곰팡이)이나 선충의 공격에 시달린다. 또 가뭄 같은 스트레스에도 취약하다.
육종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생 식물의 유전자를 이 입introgression하는 전략을 즐겨 쓴다. 달콤한 수박 역시 이 목적으로 쓴사 과수박이나 시트론수박과 교잡을 한 흔적이 이번 게놈 분석을 통해 드 러났다(267쪽 그림). 즉 이들 종에서 여러 스트레스 저항 유전자들이 이입된 것이다.

- 와인의 역사가 수천 년에 이르다 보니 세계 각지에서 재배되는 포도 (비니페라)의 품종이 7,000가지에 이른다. 비록 한 종이지만 수천 년, 수백 년 동안 따로 재배된 결과 서로 게놈이 꽤 다르다. 최초로 해독되 는 품종이 포도 참조 게놈이 될 것이므로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대표적인 와인용 포도 품종을 잠깐 살펴보자. 앞서 언급했듯 이 프랑스 서남부의 보르도 지방과 중북부의 부르고뉴는 자웅을 겨루 는 와인 산지다. 보르도를 대표하는 적포도주 품종인 카베르네소비뇽 Cabernet Sauvignon은 독특하고 강한 향과 짙은 색, 타닌의 떫은맛이 조화된 남성적인 와인을 만든다. 와인용 포도의 왕이라고 할 만하다.
반면 부르고뉴 일대에서 재배되는 피노누아Pinot Noir는 화사한 꽃이 연상 되는 향과 투명한 붉은색으로 우아한 여왕이 떠오른다. 타닌도 적어 어 찌 보면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을 블렌딩한 것 같다. 그런데 실제는 그 반대다. 카베르네소비뇽은 떫은맛이 강해 향이 풍부하면서도 타닌이 적 은 메를로Merlot 품종과 종종 블렌딩하지만, 피노누아는 너무 섬세해 다른 품종이 섞이면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에 100% 피노누아로 술을 빚는다. 카베르네소비뇽 와인은 저가에서도 잘 고르면 꽤 괜찮은 맛을 찾을 수 있지만 피노누아는 싼 게 없을뿐더러 고가 제품에서야 제대로 된 맛 과 향을 느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 향에 관여하는 유전자 많아
과일이 다 그렇지만 포도는 특히 향이 풍부하다. 다른 술에 비해 와 인에서 향을 중요시하는 것도 원재료 덕분이다. 냄새 분자는 종류도 많고 구조도 다양하지만 꽃이나 과일 향기의 많은 부분은 모노테르펜 monoterpene이라는, 탄소원자 10개를 기본골격으로 하는 분자들이 기여한 다. 포도의 경우 장미가 연상되는 꽃향기가 나는 제라니올과 리날롤을 비롯해 시네올, 알파-테르피네올 등이 주성분이다.
- 포도 게놈에는 테르펜합성효소TPS 유전자가 89개로 30~40개 수준 인 애기장대나 벼, 포플러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이 가운데 모노테르펜 합성효소가 40%나 돼 15%에 불과한 애기장대의 대여섯 배에 이른다. 참고로 분자 골격이 탄소원자 10개 단위인 화합물을 테르펜이라고 부 른다. 10개는 모노테르펜(1×10), 20개는 디테르펜diterpene (2×10), 30 개는 트리테르펜riterpene (3×10)이다.
한편 프랑스 사람들이 비슷한 식단인 영미권에 비해 심혈관계질환에 덜 걸리는 게 와인에 들어 있는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 때문이라는 얘기 가 널리 알려져 있다. 포도 껍질에 많이 들어 있는 레스베라트롤은 폴 리페놀의 일종인 스틸벤bene이라는 기본 구조를 지닌 분자로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다.
포도 게놈에는 스틸벤합성효소STS 유전자가 43개나 있다. 물론 사람 건강에 좋으라고 포도가 레스베라트롤을 만드는 건 아니다. 흥미롭게 도 포도에 노균병을 일으키는 난균류를 감염시키면 STS 유전자 20개 가 발현된다는, 게놈 해독 이전의 연구 결과가 있다. 즉 레스베라트롤 은 병원체가 침입했을 때 방어물질 역할을 한다.

- 복숭아의 맛과 향이 뛰어남에도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과피에 까끌 까끌한 솜털이 나 있기 때문이다. 과피에서 떨어진 솜털이 몸에 묻거나 제대로 씻지 않은 복숭아를 껍질째 먹으면 피부가 벌겋게 되거나 입술 이 부풀어 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기도 한다.
복숭아 과피의 솜털은 전문용어로 트리콤trichome이라고 부르는데, 표 피세포가 변형된 구조로 외부 스트레스에서 식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 트리콤은 잎 표면에 많은데, 특이하게도 복숭아는 과피에도 존재한다. 일부 사람들에게 복숭아 트리콤에 있는 단백질이 항원으로 작용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 이런 사람들이나 솜털이 난 복숭아가 먹기 번거로운 사람들이 찾는 게 바로 천도복숭아로 과피에 솜털이 없다. 그뿐 아니라 맛과 향도 다 소 달라 천도복숭아는 백도나 황도와는 다른 종인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영어로 천도복숭아는 nectarine으로 복숭아peach와 전혀 다른 이 름으로 불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복숭아와 자두 사이의 잡종 같기도 하다.
그러나 천도복숭아는 복숭아의 한 종류일 뿐으로 자두와는 관계가 없다. 교배 실험을 통해 천도복숭아가 솜털이 없게 한 유전자 변이는 열성으로 밝혀졌다. 즉 대립유전자 둘 다 변이형이어야 과피에서 트리 콤이 생기지 않는다. 천도복숭아는 2천여 년 전 이미 중국에서 알려져 있었는데, 앞의 황도처럼 변이지, 즉 체세포 돌연변이로 생겨났을 것이 다. 참고로 천도복숭아도 과육 색에 따라 백도와 황도로 나눌 수 있다.

- 탐스러운 사과는 곰의 작품?
사과 50여 종의 열매는 체리나 살구 크기에 시큼한 맛이지만 유독 시에비르시만은 자그마한 사과 크기까지 자라고 단맛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에비르시의 자생지에 그 답이 있다. 우즈베키스탄과 중국 의 국경지대에는 동서로 텐산산맥이 펼쳐져 있는데, 지형적인 영향으 로 토지가 비옥하고 수량도 충분해 각종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과일나무가 많은데 사과만 해도 여러 야생종이 자생한다. 이들은 크기 도 제각각이고 맛도 차이가 많다.
이들 사과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 다. 큼직하고 달콤한 종, 즉 재배사과의 조상인 시비르시와 체리만한 사과가 열리는 다른 야생종의 유전자가 매우 비슷했던 것이다. 이들의 관 계를 연구하자 이 일대에 사는 불곰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밝혀졌다.
불곰은 나무에 올라가 달린 열매를 먹거나 땅에 떨어진 열매를 갈퀴 같은 발톱으로 긁어모아 먹는다. 원래 육식성이었다가 잡식성으로 진 화한 불곰의 턱은 과일을 씹기에는 여전히 비효율적인 구조다. 대충 어 석어석 씹어 삼킨 사과는 위 소장 대장을 거쳐 과육은 소화되고 씨는 배설물과 함께 땅에 뿌려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크기가 작은 사과 는 제대로 안 씹혀 거의 온전한 채 배설된다. 사과를 비롯해 많은 열매 에는 씨앗이 붙어 있는 자리인 태좌에 씨가 발아하는 것을 억제하는 물 질이 함유돼 있다. 따라서 온전한 채 배설된 사과에서는 씨가 발아하지 않는다. 한편 체리나 살구만한 열매는 주로 새나 작은 포유류가 먹고 씨를 퍼뜨리므로 발아에 문제가 없다.
불곰이 먹을 때는 열매가 클수록 제대로 씹혀 과육과 태좌가 소화되 면서 씨가 노출돼 배설된 곳에 싹을 틔웠다. 이런 식으로 열매가 큰 사 과의 씨가 발아될 확률이 높았으므로 점차 알이 굵어졌다. 한편 곰은 단것을 무척 좋아해 배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달콤한 열매가 열리는 사 과나무만 골라 공략했을 것이다. 결국 곰이 많이 사는 이 일대에서 오 랜 세월에 걸쳐 열매가 크고 달콤한 사과나무가 진화했다. 
- 한국 능금의 씁쓸한 역사
한반도에 자생하는 사과속 식물은 2종으로 야광나무(학명 M. baccata)와 능금나무(학명 M. asiatica)다. 이 가운데 능금은 달콤하고 살구 크기라 먹을만했다. 그래서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능금나무를 재 배했다.
그러다 17세기 후반 중국에서 빈과로 불리는 사과가 한반도에 소 개됐다. 숙종은 북악산 뒤 자하문 밖 일대에 빈과나무를 심게 했고 다 른 곳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다. 구한말 자하문 밖 과수원에 봄이 오면 빈과나무 20만 그루에서 핀 사과꽃으로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그렇다 면 빈과의 실체는 무엇일까.
- 앞서 말했듯이 재배 사과는 톈산산맥 일대에 자생하는 시에베르시 와 서아시아의 코카서스사과, 유럽의 유럽꽃사과 사이에 태어난 잡종 이다. 그런데 실크로드를 따라 톈산산맥 동쪽으로 간 시에베르시는 중 국 각지에 분포한 야광나무와 만났고 잡종이 태어났다. 대략 2,000년 전 중국인들이 이 잡종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바로 빈과다. 즉 유럽에 서 완성된 재배 사과와 마찬가지로 중국 재배 사과 역시 시에베르시의 후손들이다.
과일의 관점에서 빈과가 능금보다는 나았지만 오늘날 상업 품종의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조상 대다수는 여전히 능금을 재배하고 즐겨 먹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서양 선교사들이 서구의 개량 품종 을 하나둘 들여오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 농민들이 한반도에 본 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서구의 재배 사과를 도입했다. 그 결과 빈과와 능금 재배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사라졌다.
이때 일본 사람들이 들여온 사과 품종들 가운데 대표적인 게 바로 홍 옥과 국광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부사에 밀려 지금을 볼 수 없거 나 가을에 잠깐 시장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후지라는 일본 이름으로 더 알려졌던 부사는 국광과 레드딜리셔스Red Delicious라는 품 종을 교배해 얻어진 품종이다.
1930년대 말 일본 아오모리현 후지사키의 농림수산성 과수시험장에 서 만든 후지는 1962년 시장에 나왔고 그 뒤 승승장구해 오늘날 '사과 의왕'이 됐다. 레드딜리셔스를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국광물이 많아 시원하다)과 레드딜리셔스(달콤한 맛과 향)의 장점만이 발현된 품 종이 부사인 것 같다. 국광의 경우처럼 더 뛰어난 개량 품종에 밀려 사 라지는 건 과일뿐 아니라 작물의 숙명 아닐까.

- 세계로 눈을 넓히면 바나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과일이다. 바 나나의 연간 생산량은 1억 6,000만 톤이 넘어 1인당 소비량이 20kg이 나 된다. 특히 더운 지방에서는 수백kg에 이르는 곳도 많다. 실제 지구 촌에서 4억 명이 바나나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과일을 어떻게 밥으로 먹는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먹는 바나나가 바나나의 전부는 아 니다.
바나나는 먹는 방식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디저트 바나나이고 다른 하나는 요리용 바나나다. 보통 바나나는 과일로 생 식하는 디저트 바나나를 뜻하고 요리용 바나나는 플랜틴plantai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플랜틴은 디저트 바나나에 비해 당 함량이 낮고 녹말 함량이 높다. 따라서 생으로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워 쪄먹거나 요리 재료로 쓴다.
연간 생산량을 나누면 디저트 바나나가 1억 1,983만 톤이고, 플랜틴 이 4,312만 톤이다(2020년), 플랜틴의 주요 생산국은 콩고민주공화국, 카메룬, 가나, 우간다, 나이지리아 등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나라 들이다. 이 지역에서는 플랜틴이 주식, 즉 식량작물이라는 말이다.
사실 바나나와 플랜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생김새는 둘 다 바나 나로, 다만 플랜틴이 좀 더 크고 생김새가 각진 경향이 있다. 당도와 녹 말 함량이 어중간한 경우 바나나로 부르건 플랜틴으로 부르건 관계없 이 생으로 먹기도 하고 요리해서 먹기도 한다. 식물 분류학의 관점에서 는 디저트 바나나 사이의 다양성이 오히려 더 크다. 즉 플랜틴은 바나 나의 몇몇 계열에서 나온 저당 고녹말 품종들의 별칭이다.
- 밀과 감자, 딸기 등 많은 작물이 다배체 식물이지만 삼배체인 바나나 처럼 홀수인 경우는 드물다. 기본염색체 세트가 홀수일 경우 감수분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제대로 된 성세포가 나오기 어렵고 따라서 수정 이 일어나 씨가 맺힐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연히 삼배체 식물이 나오 더라도 자손을 보지 못해 사라진다는 말이다.
다만 유성생식과 함께 무성생식 수단을 진화시킨 식물에서는 삼배체 로 유성생식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더라도 무성생식, 즉 복제 식물체인 클 론clone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바나나도 이런 경우로, 땅속에 저장조 직인 알줄기com가 있고 여기에서 흡근sucker이라고 불리는 새순이 나온 다. 바나나 농사는 이 새순을 베어내 옮겨심는 방식으로 이어 나간다.
- 바나나 게놈에서 가장 관심이 많은 건 병해충 방어 관련 유전자와 숙성 과정과 관련한 유전자로 각각 바나나 재배와 유통에서 중요한 변수 다. 숙성 관련 유전자를 먼저 살펴보자. 산지인 열대 또는 아열대 지역 에서는 수많은 종류의 바나나가 재배되고 있지만 세계 각지로 수출되 는 바나나는 거의 캐번디시 계열로 전체 바나나 생산량의 40%가 넘는 다. 캐번디시의 대성공은 과일에서 중요한 요소인 맛과 향이 좋아서라 기보다는 오랜 운송 기간을 버텨내고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수출용 바나나는 껍질이 녹색인 덜 익은 상태에서 수확해 운송된 뒤 식물 호르몬인 에틸렌을 처리해 어느 정도 숙성시켜 밝은 노 란색으로 바뀐 상태(끝에 연둣빛이 여전히 남아 있다)에서 마트에 오 른다. 이때 바로 바나나를 먹으면 당도가 덜하고 약간 떫은맛도 느껴 지며 과육이 다소 단단하다. 일단 숙성이 시작되면 과일 스스로 에틸 렌을 만들어 숙성 속도가 빨라진다. 그 결과 며칠 지나면 식탁에 둔 바나나가 샛노랗게 바뀌고 군데군데 짙은 갈색 점인 소위 '슈가 스팟 sugar spot'이 보인다. 이때가 바나나를 먹기에 최적인 상태로, 달콤한 맛 과 향에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다. 이처럼 바나나는 후숙, 즉 덜 익 은 상태에서 수확한 뒤 익어가는 과일로 이 과정의 유전자 네트워크 를 이해하면 맛과 향은 뛰어나지만 숙성 속도 조절이 어려워 운송과 유통을 버티지 못하는 다른 여러 품종의 저장성을 개선하는 데도 도 움이 될 것이다.
숙성 과정에 따른 유전자 발현 패턴, 즉 전사체를 분석한 결과 597 개 유전자의 발현량이 바뀌었다. 세포벽을 허무는 효소의 발현이 크게 늘어났고 (그 결과 육질이 부드럽게 된다) 녹말 합성효소 유전자 발현은 줄고 녹말을 당으로 분해하는 효소인 아밀레이스 유전자의 발현은 늘었다. 식탁 위의 바나나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달콤해지는 이유다.
- 그런데 바나나는 무성생식으로 재배하므로 특정 품종의 모든 개체가 클론, 즉 복제 식물체다. 게다가 대규모 상업 재배는 주로 그로미셸 한 품종이고 특히 수출용은 99%를 차지했다. 따라서 그로미셸에 치명적 인 병원체가 등장하면 세계 바나나 산업 자체가 휘청거릴 위험성이 있다. 20세기 들어 파나마병이 등장하면서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됐다.
당시 중남미에서 바나나 농장을 운영하던 미국 기업들은 파나마병이 생긴 농장을 폐쇄하고 숲을 개간해 새 농장을 여는 방식으로 수십 년 동안 대응했지만, 범위가 점점 넓어지며 한계에 이르렀다. 결국 파나마 병에 저항성이 있는 기존 품종을 찾거나 새 품종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 었다. 지역 재래종 가운데는 저항성을 보이는 종류가 꽤 있었지만, 수 출용으로 적합한 특성도 지녀야 했고 그 결과 찾은 게 캐번디시다.
캐번디시 역시 그로미셸에 비해서는 상품성이 떨어졌지만 대안이 없 었다. 1953년 스탠더드프루트(1964년 돌Doll로 사명을 바꿨다)가 캐번 디시를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했고 1970년이 되자 수출용 바나나 농장 은 거의 모두 캐번디시를 심었다. 오늘날은 몇몇 지역에서만 그로미셸 이 재배되고 있다. 만일 파나마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로미셸을 먹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가롭게 그로미셸을 아쉬워할 때가 아니다. 꿩 대신 닭 이라고 생각하며 먹는 캐번디시 역시 파나마병으로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로미셸을 공격한 건 푸사리움 옥시스포룸 쿠벤스 가운데 열대종1Tropical Race1 (이하 TR1)이고 이에 대해서는 캐번디시가 저항성이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초 동남아시아에서 캐번디시를 비롯해 TR1 저 항성이 있는 여러 품종을 공략할 수 있는 새로운 변종인 열대종4TR4가 등장한 것이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호주, 서아시아, 아프리카 모잠비크까지 퍼 진 TR4는 2019년 마침내 남미 콜롬비아에 상륙했다. 중남미는 캐번 디시 최대 생산지로 수출 바나나의 85%를 차지한다. TR4 역시 마땅한 농약이 없어 농장마다 철저한 격리와 검역을 통해 확산 속도를 늦추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캐번디시도 그로미셸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그 전에 TR4에 저항성을 띠는 대안을 찾아야 바나나가 세계인 의 과일로 남을 수 있다.

- 사탕수수 생산량 1위 작물로서 연간 수확량이 18억 6,970만 톤에 이른다(2020년). 2위인 옥수수가 11억 톤이니 큰 차이다. 물론 사탕수 수 생산량은 수숫대 무게이므로 산물인 설탕으로 따지면 옥수수는 물 론 쌀과 밀에도 밀린다. 설탕의 연간 생산량은 1억 8,500만 톤(2017 년)으로 이 가운데 80%를 사탕수수에서 만들고 나머지는 사탕무, 단수 수 등에서 얻는다.
최근 화석연료가 고갈되고 이산화탄소 배출로 지구온난화가 심각해 지면서 사탕수수가 재생가능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탕수수 수액을 발효시켜 만든 에탄올이 휘발유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 제 오늘날 바이오에탄올의 40%를 사탕수수 발효에서 얻는다. 사탕수 수 연간 생산량이 7억 5,710만 톤으로 세계 1위인 브라질에서 에탄올 자동차 보급률이 높은 이유다.
품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설탕 1톤을 얻으려면 대략 수숫대 9톤이 있어야 한다. 만일 사탕수수가 좀 더 빨리 자라고 더 높은 농도로 수액 을 저장할 수 있다면 재생가능 에너지원으로서의 가치는 좀 더 올라갈 것이다.

- 인삼이 약초의 왕 자리에 오른 건 진세노사이드라는 유효성분 때문 이다. 진세노사이드는 사포닌saponin의 일종으로 탄소원자 30개로 이뤄 진 스테로이드 골격이 배당체에 붙어 있는 구조다. 흥미롭게도 인삼속 식물만이 진세노사이드를 만들 수 있고 종류는 150가지가 넘는다.
만병통치약을 뜻하는 라틴어가 학명일 정도이니 많은 과학자들이 인 삼의 약리효과를 검증했고 실제 여러 질병에 유효하다는 사실이 드러 났다. 즉 종양 억제, 고혈압 완화, 항바이러스 활성, 면역조절 활성 등 의 효과가 보고돼 있다.
물론 다른 식물처럼 인삼 역시 사람의 건강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진세노사이드를 만들게 진화한 것이다. 진세노사이드는 뿌리의 안쪽인 수질medulla보다 바깥쪽인 주피periderm와 피질cortex에 더 높은 농도로 존재해 병원체로부터 식물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세노사이드는 꽤 복잡한 분자이고 종류도 많아 생합성에 관여하 는 효소 유전자가 무려 5,000개에 가깝다. 전체 유전자의 10% 가까이 가 투입된 셈이다.
인삼 제품을 보면 '6년근'을 강조하는 문구가 많다. 6년은 재배해야 약성이 제대로 나온다는 말인데 일리가 있다. 인삼은 나이가 들수록 진 세노사이드 함량이 올라가기 때문에 적어도 4년근은 돼야 쓸만 하다. 유전자 발현 패턴을 분석한 결과 이는 진세노사이드 합성이 아니라 수 송이 활발해진 결과다. 진세노사이드는 지상부(잎과 줄기)에서 합성돼 뿌리로 이동해 축적된다.

- 커피나무가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두 종으로 나뉘듯이, 차나무는 한 종이지만 중국 변종(Camellia sinensis var. sinensis)과 아삼 변종(var. assamica)으로 나뉜다. 중국 변종은 나무가 작고 잎도 작은 대신 상대 적으로 추위에 강하다. 향과 맛이 섬세하고 카페인 함량이 낮은 중국 변종은 녹차와 홍차 등 다양한 차로 만든다. 녹차를 즐겨 마시는 우리 나라에서 재배하는 차나무가 바로 중국 변종이다.
인도 북동부와 중국 남서부 등지에서 재배하는 아삼 변종은 나무가 크고 잎도 크지만 추위에 약하다. 그 자체로는 중국 변종에 비해 품질 이 좀 떨어지지만 카페인 함량이 높고 홍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향미가 살아나므로 대부분 홍차용으로 쓰인다. 중국 변종이 아라비카라면 아 삼 변종은 로부스타인 셈이다.
- 음료에 들어 있는 카페인 함량을 나타내는 자료를 보면 커피가 차 보다 두 배 이상 많고 코코아는 미미하다(대신 다크초콜릿에는 꽤 들 어 있다). 커피도 종이나 추출방식에 따라 카페인 함량이 다르듯이(로 부스타가 아라비카의 2배이고 드립커피가 에스프레소보다 1.5배 정도 다), 차도 변종과 추출조건에 따라 다르다.
즉 아삼 변종이 중국 변종보다 카페인 함량이 높고 추출할 때 물의 온도가 90°C 이상인 홍차에서 80°C 내외인 녹차보다 카페인이 더 많이 우려진다. 즉 아삼 홍차는 우전 녹차에 비해 카페인 함량이 서너 배나 돼 커피에 육박한다. 홍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카페인이 걱정된다면 오 후에는 중국 변종으로 만든 다즐링Darjeeling을 추천한다.
- 커피 향에는 약 655가지, 차에는 467가지 휘발성 성분이 들어 있다. 딸기에는 약 360가지, 토마토에는 400가지 향기 분자가 존재한다. 심지어 냄새가 약한 쌀에서도 100가지 화합물이 발견된다. 감자에는 140가지가 있다. - A. S. 바위치, 「코가 뇌에게 전하는 말 
- 아라비카 커피는 아버지인 로부스타 커피에 비해 향이 섬세하고 카 페인 함량이 적다. 반듯이 그런 건 아니지만 아라비카가 부계와 모계의 중간 특성이라면 어머니인 유게니오이데스 커피는 향이 더 섬세하고 카페인 함량이 더 적은 걸까.
오늘날 유게니오이데스(EE 게놈)는 케냐와 우간다 등 동아프리카에 자생하고 있다. 아마도 수만 년 전에는 에티오피아에서도 자랐을 것이 고 이때 로부스타(CC 게놈)를 만나 수정이 일어나 가끔 잡종 나무(CE) 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잡종에서 감수분열 오류로 사배체인 아라 비카(CCEE)가 태어났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아라비카의 특성 가운데는 정말 로부스타와 유게니오이 데스의 중간인 경우가 있다. 나무 키를 보면 부계인 로부스타가 10m에 이르고 모계인 유게니오이데스가 2~3m인데 아라비카는 4~5m다. 원 두의 카페인 함량 역시 로부스타가 2.7%이고 유게니오이데스가 0.6% 인데 아라비카는 1.5%다. 그리고 유게니오이데스 원두로 내린 커피의 맛과 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유게니오이데스는 상 업 작물이 되지 못한 걸까.
무엇보다도 생산성이 너무 낮다. 유게니오이데스는 나무가 작을 뿐 아니라 열매도 적게 열리고 그나마 원두 크기도 아라비카의 절반 수준 이다. 그 결과 나무 한 그루에서 불과 320g의 원두를 수확할 수 있다. 몇몇 커피 농장에서 유니오이데스를 재배해 아는 사람들에게 고가에 공급하고 있지만 웬만한 커피 마니아도 맛볼 기회를 얻기 힘들 것이다.

- 카카오 열매가 익으면 수확해 카카오 콩이라고 부르는 씨앗을 빼 내 발효시킨 뒤 말린다. 그리고 껍질을 벗겨내고 빻아 코코아 매스cocoa mass를 얻는다. 코코아 매스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 혼합물로 지방 이 약 50%를 차지한다. 코코아 매스에서 분리한 지방이 바로 코코아 버터 cocoa butter다. 나머지가 코코아 가루cocoa powder로 흔히 코코아라고 부 른다. 코코아에는 여전히 지방이 남아 있어 함량이 14% 수준이다. 오 늘날 카카오 콩과 코코아의 연간 생산량은 각각 580만 톤과 370만 톤 에 이른다(2020년).
씨의 배젖 세포에 저장된 중성지방인 코코아 버터에도 초콜릿의 향 과 맛을 내는 성분이 일부 녹아 있지만 대부분은 코코아에 들어 있다. 화이트 초콜릿이 초콜릿 느낌이 날 뿐인 것도 코코아매스 없이 코코아 버터로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 한편 코코아에 많이 들어 있는 플라보노이드flavonoid는 식물이 만드 는 이차대사산물로, 페놀 고리(C6) 두 개와 헤테로사이클릭(탄소 원 자 외에 다른 원자가 포함된 고리) (C3) 하나로 이뤄진 기본 골격(C6- C3-C6)을 지닌 구조다. 플라보노이드는 분자에 따라 식물체에서 여러 기능을 하는데, 특히 스트레스 대응에 관여하는 종류가 많다. 즉 해충 이나 병원체에 대해 독성을 지니고 있거나 세포에 해로운 자유 라디컬 이나 자외선을 흡수한다. 어떤 종류는 유익한 공생 생물이나 수분 동물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카카오 씨에 많이 들어 있는 프로안토시아니딘proanthocyanidin은 플라보 노이드 여러 개가 결합된 고분자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심혈관계나 신 경계 건강에 좋고 암 화학요법의 부작용을 줄이는 작용을 한다는 보고 도 있다. 코코아 함량이 높은 다크초콜릿이 건강에 좋은 이유다. 게
- 테오브로민은 카페인에 비해 각성 효과가 약하지만 혈관 확장 효과가 있고 이뇨 작용도 한다. 과량 복용하면 심박수 증가, 두통, 속쓰림 같은 부작용이 있지만 초콜릿에서 섭취하는 양 정도로는 별문제가 없다. 그 런데 동물, 특히 개와 고양이가 먹게 되면 큰일이 날 수 있다. 사람과는 달리 이들은 테오브로민을 제대로 대사하지 못한다. 단맛을 못느끼는 고양이가 초콜릿을 먹을 일은 거의 없지만 개는 그럴 위험성이 있어 조 심해야 한다. 소형견은 다크초콜릿을 5g만 먹어도 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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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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