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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4.03.06 금융 오디세이 2
  8. 2024.03.06 최강의 반도체 투자 2
  9. 2024.03.06 20240306
  10. 2024.03.05 부의 세계사 14

이 책은 현재 푸청 심리상담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심리상담가 쑤쉬안후이가 지은 책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심리케어와 치료에 관련된 24권을 책을 저술했으며, 각종 교육강좌 및 워크샵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온갖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기도 하고, 부모형제가 세상을 떠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기도 하고, 친구나 직장동료와의 관계가 나빠지기도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과 타인에게 잘 대응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인간관계의 규칙을 찾아보려한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제도와 생존을 위해 순응하며 살아가다 보면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독에 갖히게 된다. 이런 불필요한 두려움은 우리의 심신과 영혼을 갉아 멍그며 여러가지 질병을 일으킨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고되고 피로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들을 살펴보면 타인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의 경계선이라는 말에서 사용되는 경계선은 일종의 범위이자 거리이다. 2명 또는 다수의 인원 사이에 필요한 개인공간과 거리를 뜻하며, 이는 관계의 멀고 가까움, 친밀함과 소원함, 그리고 개인의 상태에 근거해 조정되는 것이므로 탄성과 신축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여러 관계와 환경속에서 인간관계의 경계선은 서로 원하는 것을 이해해주는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래야 평등한 관계 속에서 존중할 수 이는 것이다. 이 책은 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이야기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그들의 생각이나 관점, 기준, 감정에 휘둘리다 보면 정작 나의 감정과 생각은 어떤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때로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흡수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고 사회적 기준에 맞춰 영혼없이 살아가기 쉽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고, 외면적인 것을 더 중시하고 겉모습을 화려하게 포장하느라 정작 나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는 외면하고 만다. 

이 책을 통해 우리의 경계선이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그러면서 타인과 나의 관계가 무너지는 함정은 어떤 것이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내면을 치유해보고 견고한 관계의 경계선을 구축하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내면의 질서와 안정적인 주체감을 찾고, 당신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누리며, 매 순간 무탈하게 보냈으면 한다.

이 책에서 소개한 '게슈탈트 기도문'을 곱씹어 보면 좋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당신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나는 당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나의 희망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다.
우리가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서로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 이후, 자유롭게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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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오디세이

경제 2024. 3. 6. 07:25

- 돈의 가치를 지키는 데 있어서 이 세상에는 그리스가 아닌 로마의 후예가 훨씬 많았다. 화폐경제가 시작된 이래로 무수한 사람들이 돈을 위조하거나 함량을 속이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이처럼 돈의 물리 적 가치를 낮추는 조작을 '디베이스먼트debasement'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디베이스먼트 기술은 클리핑 clipping 과 스웨팅sweating이다. 클리핑은 주화의 주변을 살살 깎아내는 방법 이고, 스웨팅은 주화를 가죽 부대에 넣고 마구 비벼대어 금화와 은화 가루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클리핑 여부를 눈으로 확인하 기 위해서 주화 테두리를 톱니 모양으로 만들었다. 스웨팅을 막기 위 해 이탈리아에서는 금전거래가 끝나면 금화를 곧장 주머니에 넣고 밀 봉한 다음, 주머니까지 통째로 주고받았다. 이탈리아어로 품질보증을 의미하는 '피오리노 디 수겔로ñorino di suggello'는 원래 '밀봉된 금화' 라는 뜻이다.
- 오스트리아학파를 대표하는 카를 멩거 Carl Menger는 화폐이론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화폐의 기원>에서 "화폐는 거래 편의를 위해 개인들이 고안해낸 것" 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대부 분의 교과서에서 유일한 정설처럼 전수되 고 있다. 화폐는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것이라는 일종의 진화론적 사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자유시장을 옹호하고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오스트리아학파 의 대가들이 한마디로 말해서 상위 0.1 퍼 센트에 속할 정도의 부자였다는 점이다
- 멩거의 경우 유명한 변호사와 대부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부르주아였다.
오스트리아학파의 한 사람인 미제스도 마찬가지다. 나치를 피해 미 국으로 이주하기 전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손꼽히게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의 수제자인 하이에크 역시 남부럽지 않게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자기 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부호 가문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는 육촌관계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가의 중요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오스트리 아학파의 철학은 그들의 출신 성분에서 유래된 자연스러운 결론이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해체된 오스트 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최상위 0.1퍼센트로 살다 보면 '국가보다는 개 인, 정부보다는 시장'이라는 생각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극도의 무정부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철학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한 축을 이루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사상은 결국, 남들이 누리지 못했던 당대 최고의 교육을 통해 터득한 지식으로 자신들의 우월적 존재 기반을 고상하게 방어하는 논 리에 불과할 것이다.
- 중국 사람들이 비단을 팔고 왜 금이 아닌 은을 받았는지는 여러 학 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유럽보다 중국에서 은의 상대가 치가 더 높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유럽에서는 금과 은의 교환비 율이 1대 12~15 정도였지만, 중국에서는 1대 10이라는 관념적인 생 각이 지배했다. 중국이 은의 상대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그래서 유럽 상인들은 중국 물건을 수입할 때 금 대신 은을 지급하고, 유럽 안에서는 중국 수입품을 금화로 거래했다. 환율 차이를 이용해서 이익을 남긴 것이다.
- 반짝거리지 않더라도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든지 돈으로 쓰일 수 있다. 인류 최초의 법정화폐를 발행한 칭기 즈 칸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종이돈을 혐오한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과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그것을 몰랐다(10장 참조).
앤드루 잭슨보다도 50년 뒤에 태어난 카를 마르크스는 미국 대통 령들의 오류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그는 돈에 관해 설명하면서 "왕 이 왕인 이유를 왕에서 찾기보다는 백성과 신하의 눈에 왕으로 보이 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고 비유했다. 한 사회에서 돈이 존재하는 근 거를 왕과 마찬가지로 대상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사회구성 원 간의 관계(네트워크)에서 파악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 나라(경 제권)에서 돈이 존재할 수 있는 궁극적인 기반은 사회구성원 간의 관계를 지켜주는 국가의 주권이다(돈이 지닌 이런 측면을 강조한 것이 화폐국정설인데, 이에 대해서는 2장을 참조하라).
돈에 관하여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결론에 이르게 되면 돈을 다루 는 대금업이나 은행업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 대금업자 나 은행가들이 비난받는 것은 순전히 오해의 산물이다. 시인 장 콕도 Jean Cocteau는 시인의 가장 큰 비극이 오해 때문에 칭송받는 것이라 고 했지만, 은행가의 가장 큰 비극은 오해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다.
- 은행업의 원조는 비밀리에 운영되던 대금업이다. 처음에는 유대인들 이 독점했지만, 사업의 이윤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르네 상스 시대가 열리기 직전부터는 각국의 일반 시민들도 대금업에 뛰어 들었다. 길거리에서 테이블을 깔고 호객하던 메디치 가문이 그 예다(7 장 참조).
메디치 가문의 사업이 그 이전 유대인들이 담당했던 대금업과 다 른 것은 국제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처음에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사업은 무역과 유통업이었다. 방대한 사업망을 통해 무역을 주력 사 업으로 유지하면서 부수적인 사업으로서 은밀하고 교묘하게 여수신 업무를 실시했다.
은밀한 것은 재량예금의 수신이고, 교묘한 것은 외화표시 건식어음의 할인이었다. 재량예금의 창구는 오직 통치자, 귀족, 성직자 등 지 배계급에만 열려 있었다. 외화표시 건식어음은 어음을 할인받는 차입 자에게 받아내야 할 이자를 환율로 전가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럼 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이자 없는 그림자금융을 당당하게 운영할 수 있 었다.
초기의 은행가들은 건식어음을 할인한 뒤 만기가 되면 해외지점이 나 해외 동업자를 통해 외국 화폐로 원금을 돌려받았다. 독립채산제 로 움직이는 본점과 지점은 일정 절차에 따라 나중에 어음 실물을 맞 춰보면서 서로의 채권과 채무를 정산했다. 이처럼 근대 은행업은 처 음부터 국제금융에서 출발했으며, 그 핵심은 본점과 지점 간 어음의 청산과 결제 즉 지급결제 업무(환업무)였다. 다시 말해 근대 은행업의 뿌리는 국제금융과 지급결제 업무에 있었다."
- 중앙은행이 없었던 시절에는 동업자끼리 서로 예금을 해 두고 그 돈(상대방에게 맞겨 놓은 금화)으로 결제했다. 지금도 국제적으로는 중 앙은행이 없기 때문에 해외송금 업무에서는 동업자은행끼리 코레스 (correspondent) 계약을 맺고 서로 지급을 대행하는 편의를 봐주는데, 이럴 때는 미리 예금을 맡겨놓거나 신용한도(credit line)를 정해둔다. 한편, 국내에서 동업자들끼리 서로 예금을 주고받는 것도 귀찮아지 자 은행의 집합장소인 어음교환소(clearing house)에 각자 지급준비금 을 맡겨 두었다. 그것이 나중에 중앙은행으로 옮겨가 지급준비제도로 진화했다. 오늘날 은행간 채무관계는 중앙은행에 맡겨놓은 지급준비금을 통해 정산된다. 은행들이 지급준비금을 이용하여 고객들을 위해 자금을 주고받는 일을 지급결제업무라고 한다. 과거에는 환(換)업무라 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은 지급결제 업무는 미리 맡겨놓은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급결제 수단의 하나인 수표(check)를 인출증(draft)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한편 중앙은행에 맡겨놓은 돈이 없는 보험사, 증권사, 저축은행, 금고, 신협 등은 지급결제 업무 면에서 일반 개인과 차이가 없다. 이들 제2금융권 금융기관들은 은행의 고객에 불과하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중앙은행에 예치한 정부예금을 근거로 국고 수표를 발행하고 전 국 각지로 재정 집행 자금을 뿌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정부의 재정자 금방출 활동은 개인의 송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한나라의 지급결제 시스템에서 정점은 정부가 아니라 중앙은 행이다. 중앙은행이 없었던 시절에는 어음교환소가 그 자리에 있었지 만, 지금은 중앙은행이 있다. 중요한 사실은 근대 은행시스템에서 지 급결제 업무, 지급준비금, 그리고 중앙은행은 삼위일체라는 사실이다.
- 19세기 말 일본은 유럽의 금융 시스템 속에 숨어있는 이런 사실 을 발견했다. 송나라 때부터 있었던 중국의 금융업자 전장이나 일 본의 금융업자 료가에는 단독 플레이어들이었다. 이에 비해 유럽 의 은행(bank)들은 매일 한자리에 모여 어음이나 수표를 집단적으로 결제(차액결제)했다. 이런 특징을 보고 일본인들은 'bank'라는 단어를 '은행'이라고 번역했다. 남북전쟁 중이던 1863년 링컨 대통령이 만든 '국가 은행법(National Bank Act)'을 읽고 1872년 메이지 정부가 '은행 조례'라는 법을 만들 때 탄생한 단어다.
은행이란 처음에 '은화 취급업자 일행 (association of silversmith)'이 라는 뜻이었다. 당시 일본은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으므로 은 행은 결국 '돈을 다루는 기관의 모임'이라는 집합명사다. 이 말 뒤에는 개별 기관보다는 집단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는 사물이 아닌 사실의 총합, 즉 세계는 사물 간의 관계로 이루어졌다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생각과 똑같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의 인식은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 정부 수 준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 정부는 지급결제 업무에 관해서 은행 과 비은행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업협동 조합법, 신용협동조합법, 산림조합법, 상호저축은행법, 새마을금고법 등 1970년대 제정된 여러 법률에는 지급결제 업무가 해당 기관의 고 유 업무인 것처럼 언급되고 있다. 이들 기관은 중앙은행에 지급준비 금을 맡기지 않아서 지급결제 업무 자체가 불가능한데도 그렇게 법률 이 만들어져 있다. 일종의 입법 오류이며, 지급결제 업무에 대한 무지 의 반증이다.
- 2008년 소위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을 만들 때 증권사들까지 지급결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법제화했다. 2020년부터는 카카오나 토스 등 IT 업체가 은행업 허가를 받지 않고 '종합지급결제사 업을 할 수 있도록 전자금융거래법(전금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지급결제는 중앙은행과 지급준비금이 전제되는 서비스라는 것을 전 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예로, 한마디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중국의 알리페이나 위쳇 등은 은행업 허가를 받고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 공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통법이나 전금법이 추구하는 것처럼 은행이 아닌 금융기관들이 지급결제제도에 참여하는 것은 위험하다. 1907년 미국의 금융공황이 그 예다. 은행과 신탁회사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뒤섞여 지급결제 업무를 수행하다가 신탁회사들이 파산하여 발생한 미국 역사상 최악의 금융위기였다. 사람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J. P. 모건이 나서서 최종대부자 역할을 수행해서 가까스로 수습될 수 있었다(11장 참조).
지급준비금도 없이 지급결제 업무를 수행토록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닫고 1913년 세운 것이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다.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1970년대 미국의 저축은행들이 규제 완 화를 앞세우며 지급결제제도 참가를 요구했을 때 미 의회는 이를 수 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1980년 통화관리법을 통해서 저축은행에도 은행과 똑같이 지급준비의무를 부여했다.
어찌 되었든 지급결제 업무의 필요충분조건은 중앙은행과 거기에 맡겨둔 지급준비금이다. 금융의 역사나 생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 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나라 공무원은 모른다. 부끄러운 일이다.
- 소비임치계약이란 물건을 맡은 사람이 일단 소비하고 나중에 동종동량으로 갚는 계약을 말한다. 창고업 같은 통상적인 임치계약에서는 물건을 맡은 사람이 소비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소비임치는 소비가 허용된다.
'소비임치'라는 속성을 강조하면서 예금을 특수한 금융상품으로 보는 것은 역사의 산물이다. 대금업이 금지되던 시절, 메디치를 포 함한 개인 은행들이 재량예금이라는 말을 고안해 냈다(7장 참조). 정해 진 이자를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재량적으로 준다는 점을 표시하기 위해 '재량'이라는 말을 붙였고, 은행은 단순히 돈을 보관하는 것이라 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치(라틴어로 depositum)'라는 단어를 고른것이다. 다만 예치된 물건은 은행이 소비할 수 있어야 하므로 '소비임치계약'이라는 속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했다.
그런데 1515년 교황이 연 5퍼센트 이하의 이자 수취를 허용한 데 이어서 1545년 영국이 그 상한을 10퍼센트로 인상하면서 기독교 세 계에서 이자 수취가 합법화되었다. 그러면서 재량예금이라는 부자연 스러운 이름이 사라지고 고정금리를 지급하는 '예금'이라는 말로 대 체되었다. 예금이 소비임치계약임을 강조할 이유도 사라졌다.
- 1811년 영국의 판례를 시작으로 관습법을 따르는 나라에서는 예 금거래를 통해 고객이 맡긴 돈의 주인은 은행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 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예금은 소비임치계약'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한 다. 이자 수취가 금지되던 시절 대금업자들의 선전술이 남긴 유산임 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금과 채권(은행채)의 차이를 유난스레 강조한다.
그렇다면 예금은 무엇인가? 금본위제도 시대에는 예금의 개념이 분명했다. 고객이 상업은행에, 상업은행이 중앙은행에 맡겨둔 금화 가 예금이었다. 화폐(금화)와 예금이라는 개념이 중앙은행보다 선행 했다.
그러나 불태환제도 시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중앙은행이 있어야 화폐가 발행되므로 중앙은행이 화폐를 선행한다. 중앙은행은 지급준비율과 함께 지급준비의무의 적용대상(예금)을 정한다. 예금이 무엇인지는 중앙은행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행들이 취급하는 수많은 금융상품 중에서 어디까지를 예금으로 보고 지급준비의무를 적용하느냐를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그 판단을 중앙은행에 맡긴다. 지급결 제 업무는 통화정책 운용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각국 중앙은 행들은 예금의 범위를 비교적 넓게 설정하고 낮은 수준의 지급준비율 을 적용한다. 예외를 적게 만들어야 빠져나갈 구멍이 줄어들기 때문 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정기예금과 채권(은행)을 구별하지 않고 동 일하게 지급준비의무를 부과한다.
-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은행이 예금의 범위를 정하는 것을 허 락하지 않는다. 한국은행이 예금의 범위를 넓히면 상업은행들의 지급 준비의무 부담이 커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극히 통화주의적 발상 이다. 통화주의적 관점에서는 지급준비제도를 규제 차원에서만 본다. 그래서 '지급준비세(reserve tax)'라는 말이 생겼다.
상업은행들은 지급준비금이 있으므로 지급결제 업무를 수행한다. 평소 중앙은행과 예금거래를 하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대출도 받는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투자은행들이 스스로 상 업은행으로 전환한 뒤 지급준비의무를 흔쾌히 부담한 이유는 중앙은 행과의 예금거래가 투자은행(증권사)가 누릴 수 없는 특혜이자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급준비의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1년 지급준비의무 적용대상을 넓히기 위 해 한국은행법 개정 방안이 논의될 때 정부는 물론 은행 노조까지 나 서서 반대했다.
금융위원회는 지급준비의무를 무력화시키는 조치를 남발한다. 외 국이라면 예금에 해당하여 지급준비의무가 적용되는 공탁금, 주식청 약증거금, 신탁계정차, 콜머니, 환매조건부채권매매 등을 희한한 이 름으로 분류하여 지급준비의무를 배제한다. 결국 한국은행의 통화정 책이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이런 문제를 애써 외면한다. 은행업의 기본인 예금에 대한 인식이 이러하니 한국은행 금융통화위 원회가 과연 은행업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 도 공무원보다 은행업을 잘 안다고 하기 어렵다.
- 네덜란드 경제학자 부이터Buiter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이제 중앙은행들이 최종대부자를 넘어서 '최종 시장조성자(last resort of market maker)'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행만 살릴 것이 아니라 금융시 장 전체를 살리라는 주문이다. 정부도 감당할 수 없는 숙제를 중앙은 행에 맡기면서 은행들에만 특혜를 베풀지 말고 온 국민에게 혜택을 확대하라고 주문한다. 과연 옳은 말일까?
중앙은행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 위기 때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평상시에도 논란이 되기 충분하다. 이제 상당수 선진국 중앙은행들 이 지급준비금에 이자를 지급한다. 그러다 보니 금융자산의 가격이 폭락하고 있는데도 은행들은 기업들을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 히 앉아 중앙은행에 거액의 지급준비금을 묵혀 두면서 이자만 받는 다. 21세기 '3-6-3 룰'이라고나 할까?
- 그 결과 주요국에서는 돈이 잘 돌지 않는 가운데 초과유동성만 넘 쳐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실물경제는 엉망인데도 은행의 영업이익 은 엄청나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나서서 배당을 억제하고 은행원의 급여와 보너스 수준까지 통제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이런 모습에서 시민들은 분노하지만 은행들은 태연하다. 그리고 금융규제 강화 움직임에 대해서 공공연히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 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렇게 비양심적인 은행들 이 위기에 처했을 때 세제 혜택과 발권력을 동원해서 살려둔 것은 정 부와 중앙은행의 잘못일까?
- 경제학이 세속 철학인 이유
이렇게 케인스는 떠났지만, 케인스가 흔들어 놓은 경제학의 정체성 문제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경제학 은 규범과학인가, 실증과학인가? 경제학은 법학, 수학, 철학과 같은 선험적·연역적 학문인가, 의학, 생물학과 같은 경험적·귀납적 학문인 가? 경제 제도와 원칙을 정해두고 그에 따라 정책을 운용해야 하는가, 달라진 현실에 맞추어 제도와 규범을 그때그때 바꿔야 하는가? 경제 학은 객관적 실체를 다루는 학문인가, 주관적 가치를 다루는 학문인가? 경제 체제의 위기 관리는 수리모형이 동반되는 과학인가, 직관이 동원되는 예술인가?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학문의 정체성을 넘어 경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정체성 문제로 이어진다. 다른 학자들에 비해서 경제학자들은 도대체 심지가 없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출범할 때 환율 안정의 중요성을 입 모아 칭송하던 경제학자들은 1971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금태환 중단을 선언하자 "그것도 옳다"면서 일제히 변동환율제도의 장점과 가능성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온 갖 계량 분석을 통해 환율의 안정성은 포기하더라도 자유로운 자본 이동은 보장해야 한다는 결론을 수없이 내놓았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브라질식의 자본 통제나 토빈세Tobin's tax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도 속출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모습은 더욱 황당하다. 후진국들이 경제 위기를 맞았을 때는 절약과 긴축을 강조하던 IMF는 미국에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선진국들의 재정 확대와 금리 인하를 바람직하 다고 두둔했다.
IMF의 수석이코노미스트로서 후진국들이 경제위기를 맞았을 때 절약과 긴축을 강조하던 학자(올리비에 블랑샤르)는 요즈음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충고한다. 얼마 전까지 세계 경제 가 구조적 장기침체를 맞았다고 비관론을 설파하던 학자(로렌스 서머 스)는 코로나19 위기 이후 돌변하여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경고하기 바쁘다. 이것이 미국식 주류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현주소다. 케 인스의 말대로 “사실이 바뀌면 생각이 바뀐다"는 말로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울 정도로 경박해 보인다.
이렇게 엉성하고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경제학과 경제학자 들을 향해 더 가혹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경제학은 도대체 원칙과 영 혼이 존재하는 학문인가, 시류에 따라 지배자의 논리만 대변하는 시들의 궤변인가? 엄격한 법률가 존 애덤스가 살아 있다면,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학문의 법정에 설 것인가, 거부할 것인 가? "저는 사실이 달라지면, 생각을 바꿉니다. 선생님은 어떠십니까?"라는 케인스의 발 빠른 사상 전향은 학문의 법정에서 통할 수 있을까?
젊었을 때는 자유무역과 자유방임을 주장하다가 늙어서는 관세청장 에 올라 세금을 걷었던 '도덕철학 교수' 애덤 스미스의 이율배반성(경 제학에서는 이럴 때 '동태적 비일관성'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에둘러 말한다)은 진리의 법정에서 어떤 판결을 받을 것인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세계는 정부의 개입이 강조되는 케인스 시대로 다시 접어들었다. 하지만 2010년 유럽의 재정 위기와 2011년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같은 일을 고려하면, 정통 케인스주의가 통하 기도 어려워 보인다. 한마디로 케인스가 한바탕 체질을 바꿔놓은 제학은 지금 좌표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 오죽하면 정치인들이 현대 화폐이론(MMT)을, 컴퓨터 엔지니어들이 탈중앙화 금융(DeFi)을 시끄 럽게 떠드는데, 경제학자들은 이렇다 할 설명과 반론을 내놓지 못하 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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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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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를 살펴보면 미국이 패권 전쟁에서 항상 성공하는 방정식이 있다. 무역으로 도발하고, 기술로 압박하고, 금융으로 제압하는 것이 다. 미중 패권 전쟁도 이런 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는 기술 패권을 가진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정부가 가진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반도체 관련 국내외 기업들에 첨단 반도체 기술과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중 국이 절대로 반도체 기술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다.
이제 경제 발전의 기초 원자재는 원유에서 반도체로 옮겨왔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모든 제조 분야에 반도체가 들어간다. 트랙터 같은 농기계에도 이미 자율주행 기술이 접목되고 있다. 과거 제조업에서는 원가 중 반도체 비중이 1% 수준에 불과했지만 향후 10%까지 점진적 으로 증가하리라는 것이 상당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지금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이 더욱 가속화한다면 반도체 수요는 폭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0년간 반도체 시장 성장률은 전체 경 제 성장률에 비해 부진했다. 2000년 대비 최근 세계 증시 시가총액은 4배 늘었지만, 반도체 산업 시총은 2배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4 차 산업혁명 본격화로 앞으로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 반도체 굴기에 나선 자유시장경제의 수호자
아마도 미국의 반도체 굴기를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세상 곳곳에 전파하던 미국이 시장경제를 훼손 시킨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960 년대에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유치 산업 전략을 시행한 바 있다.
- 이 시기는 소련과 우주 경쟁을 벌이던 때다. 소련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주항공과 반도체 산업을 육성해야 했다. 당 시 반도체는 너무 비싸서 일반 기업들은 도저히 살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 국방부는 지속적으로 자국산 반도체를 구매했다. 이렇게 해서 인 텔, 페어차일드 같은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다. 1980년대 일본과 반도체 전쟁을 벌일 때도 미국 국방부와 실리콘 밸리 간 협력 사업이 매우 활발했다. 당시 개발된 원천 기술들은 지금 도 굉장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인터넷도 '알파넷ARPA net'이라는 국방 통신에서 유래한 기술이다.
일본과 독일을 제압한 후 20년간 미국은 유치 산업을 보호할 필요 가 없었다. 이미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였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중 국과 공존하면서 성장하는 골디락스Goldilocke' 경제가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시진핑 정권이 '일대일로'와 '중국제조 2025中國 Baans'를 개시하면서 잠자던 거인을 다시 깨웠다.
미국 반도체 굴기의 특징은 중국 기업을 제외하고는 차별하지 않는 기조를 보이는 것이다. 인텔이든, 삼성전자든, TSMC든 똑같은 혜택을
-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이 정부 자금 투입으로 크게 성장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세계 패권에서 자신을 배제하고 독주하려는 중국을 제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미국은 유럽과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해 ASML의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노광 장비가 중국 땅으로 들어가 지 못하게 했고, AMAT, 램리서치, KLA 등 미국 업체의 장비 수출도 점차 더 노골적으로 막고 있다. ASML에 레이저 소스를 제공하는 핵 심 업체 사이머가 바로 미국 기업인데, 사이머 외에도 미국이 네덜란 드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는 무수히 많다.
10나노미터 이하 공정을 시행하려면 반드시 EUV 장비가 필요하 다. 최근 미국은 대중국 반도체 미세공정 기술 수출 금지 대상을 10나 노미터에서 14나노미터로 확대했고, 16나노미터로 제재를 강화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일부 심자외선DUV, Deep Ultraviolet 장비도 중국으로 공급되지 못하도록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술 제재의 범위도 시스템 반도체에서 메모리로 확대되고 있다.
- 최근 미국 정부는 14나노미터 이하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의 대중국 수출을 금지하면서 18나노미터 이하 D램과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기술 수출도 함께 막았다. 미국 의회의 압박으로 중국 YMTC 낸드플 래시를 아이폰14에 적용하려던 애플의 계획도 잠정 중단되었다. 앞으 로 중국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기업에 대한 수출은 별도로 미국 상무 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에 중국에 생산 공장을 둔 삼성전자, SK 하이닉스 등 우리 기업들의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다행히 이런 조처의 적용을 1년 동안 유예받게 되었다.
- YMTC의 필살기, 엑스태킹
엑스태킹xTacking이란 YMTC가 2018년에 소개한 기술로, 자사 낸드 플래시 양산에 적용된다. 통산 낸드플래시는 한 장의 웨이퍼에 주변 회로와 메모리 셀 어레이를 형성해 만들어진다. 이에 비해 엑스태킹은 두 장의 웨이퍼에 주변회로와 메모리 셀어레이를 각각 만든 후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로 붙이는 방식을 구사한다.
현재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은 서버 CPU central Processing Unit(중앙 처리 장치) 등 HPC High Performance Computing (고성능 컴퓨팅) 칩에 주로 쓰이는데, YMTC는 특이하게 낸드플래시에 처음 적용했다. YMTC가 낸드플래 시에 하이브리드 본딩 장비를 본격 도입한다면 한미반도체, 이오테크 닉스 등 국내의 장비 업체들이 수혜를 볼 가능성이 커진다. 현재 하이 브리드 본딩 장비를 독점 공급 중인 네덜란드의 BESI는 시스템 반도 체 관련 수요만 해도 감당이 어렵기 때문이다.
엑스태킹 공법으로 만든 낸드플래시는 입출력 속도가 빠르다. 제품 의 생산 시작부터 인도가 완료될 때까지 소요되는 리드 타임lead time 단 축 효과와 함께 공정 가속화 효과도 좋은 편이다. 저장 용량을 좌우하는 데이터 셀 밀도도 높다. 그러나 치명적 단점이 있는데, 바로 낮은 수율과 비싼 생산 원가다. 낸드플래시가 D램에 비해 상당히 저렴한 메 모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YMTC의 행보는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 는 격이다.
YMTC는 엑스태킹 낸드플래시로 초당 3기가비트 속도를 구현해 기존 제품 대비 2배 가까운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전송 속도를 지원하는 컨트롤러를 만들면 굉장히 빠른 SSD를 만들 수 있다 고 주장한다. 세계적으로 SSD 컨트롤러를 제대로 설계하는 업체는 삼 성전자, 인텔(SK하이닉스가 해당 사업 부문 인수) 정도다. 아무리 낸드플래시 가 좋아도 컨트롤러, 펌웨어 조합이 안 좋으면 SSD 성능이 크게 떨어 진다. 가뜩이나 지난 5~6년 사이 3D 낸드플래시와 SSD 아키텍처가 복잡해져 컨트롤러 설계 난이도가 굉장히 높아졌다.
현재 YMTC는 파이슨, 실리콘모션 등과 협력해 턴키 SSD, 자체 브 랜드 SSD를 만들고 있는데, 이제 막 컨트롤러 개발 협력에 착수한 상 태다. 결론적으로 YMTC의 기술 발표에는 상당한 과장이 들어가 있다 는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MTC의 기술 진보 속도는 놀라운 수 준임이 분명하다.
한편, 이에 비해 D램에 주력하고 있는 또 다른 중국의 반도체 기업 CXMT는 기술 개발 속도가 떨어지는데, 17나노미터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고객사의 품질 테스트나 납품 계약 도 아직 진행된 건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낸드플래시에 비해 D램은 진입 장벽이 훨씬 높다는 반증이다.
- 자율주행차, 메타버스향 반도체 수요는 아직 정확한 추정조차 하기 어렵다. 자율주행차는 128기가바이트 D램을 탑재해야 제대로 된 기 능을 구현할 것으로 전망된다. 소프트웨어 기술이 부족한 기업들은 하 드웨어를 넉넉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용 D램 시장은 현재 새로 형성되는 중이다. 차량용 반도체는 추위와 더위에 잘 견디고 내진동성 등 내구성이 좋아야 하는데, 지금 은 모바일 D램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향후 특화된 시장이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차량용 반도체는 신뢰성 제품이어서 마진율이 굉장히 좋을 것으로 기대된다. 자동차는 경기 흐름이 좋을 때 연간 약 1억 대가 거래되는 시장이다. 자율주행차에 16기가바이트 반도체 만 적용해도 스마트폰을 뛰어넘는 거대 시장이 새로 생기는 셈이다. D램 공급이 쉽게 늘어나기는 어렵다. DDR5는 DDR4 대비 넷 다이 Net Die(웨이퍼당 생산 가능한 칩 수)가 15%가량 감소한다. 칩 다이 크기가 15% 커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급이 줄어드는 것이다. 삼성전자 화성캠퍼스의 13라인과 SK하이닉스의 이천 팹 M10은 D램 라인에 서 CISCMOS Image Sensor(이미지센서) 혹은 파운드리 라인으로 전환하고 있 는데, 이렇게 D램의 공급이 축소되면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세계 최초로 플래시메모리와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해낸 업체 는 일본의 도시바다. 그러나 도시바는 이 귀중한 연구 개발물의 가치 를 알지 못했다. 도시바의 실수가 삼성전자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도시바의 연구원 마쓰오카 후지오舛岡富士雄 는 플래시 메모리와 낸드플래시 개발의 주역인데, 연구 개발에는 천재 적이었지만 사회성은 극도로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밤새 일에 몰두하 고 특허를 쓰고 일과 시간에는 낮잠을 자고 낮술을 마시기도 했다.
도시바 연구소에 새로운 소장이 부임하자 마쓰오카는 미운털이 박 히게 되었다. 전임 소장은 그의 능력을 잘 알고 배려했지만 신임 소장 은 달랐다. 마쓰오카는 부하 연구원들이 없는 부서로 발령받아 혼자 근무하게 되었다. 그가 개발한 기술 또한 홀대받았다. 도시바는 플래 시메모리 기술은 인텔에, 낸드플래시 기술은 삼성전자에 거의 그냥 넘기다시피 했다. 마쓰오카는 조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도시바를 떠나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도시바를 상대로 발명 보상금을 달라며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도시바의 결정적 오판으로 삼성전자에게는 뜻하지 않은 행운이 넝 쿨째 굴러 들어왔다. 이후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기술 개량에 매진하 고, 아이팟용 HDD 대체 메모리를 찾던 애플을 설득해 낸드플래시 시 장을 크게 확장했다. 현재 삼성전자는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점유 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한일 간 국운은 이 렇게 엇갈리게 되었다.
- IBM이 쏘아올린 인텔의 전성기
1981년, IBM은 ‘IBM 퍼스널 컴퓨터 5150'(보통 'IMB PC'라고 부른다) 이라는 이름의 신제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IT 역사를 바꾸는 변곡점이 된다. 이 컴퓨터는 성능 자체로 봤을 때는 그렇게 특 별할 것이 없었지만, IBM이 출시와 함께 내린 결정은 그야말로 세상 을 바꾸는 파급 효과를 불러왔다.
IBM이 이 제품을 출시하기 전까지는 컴퓨터 업체마다 아키텍처 architecture(컴퓨터 시스템의 설계 방식)가 달라 호환성이 없었다. 하드웨어는 물론이고 소프트웨어도 각 컴퓨터에 맞게 따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IBM은 IBM PC의 아키텍처를 공개하여 다른 제조사들이 그와 호환이 가능한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인텔 8088(x86계열) CPU와 마이크로소 프트 MS-DOS를 채택한 것도 주효했다. HP, 컴팩 등 경쟁사들이 IBM 표준을 활용하면서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 중심으로 소프트웨어 생 태계가 재편되었다. 이렇게 해서 IBM PC는 오늘날 개인용 컴퓨터의 표준 규격을 만들어냈다.
당시 애플은 IBM에 앞서 PC 시장에 진출해 있던 상태였고 기술력 도 앞서 있었지만, 호환성을 내세운 IBM에 밀리게 된다. '빅 브라더' 로 불릴 정도로 강력했던 IBM의 영향력은 286 컴퓨터 (인텔 80286 탑재)PC XT와 PC AT까지 이어졌다. 그 뒤 상황은 IBM이 전혀 의도치 않 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호환 PC들이 IBM 제품을 추월하기 시작한 것 이다. IBM은 1987년에 386컴퓨터(인텔 80386 탑재) PS/2 를 내놓았지 만 예전 위치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이후 인텔은 CPU를 기반으로 소 프트웨어 생태계를 장악하고 PC 산업의 주도권을 틀어쥐게 되었다. IBM이 PC 하드웨어 표준화 관련 설계자산 등록에 소홀했던 것도 추락을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운영체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 도우즈가 대세로 자리매김했고 '윈텔(윈도우즈+ 인텔)' PC 표준화로 소 프트웨어 회사들의 덩치는 빠른 속도로 커졌다. 애플은 PC의 상용화 측면에서는 최초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시장에서는 윈텔에 밀려 조연 에 만족해야 했다.
- 인텔은 2년마다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2배씩 높아지는 '무어의 법 칙 Moore's Law' 20을 통해 고객사들이 이탈하는 것을 막았다. 경쟁사가 가 성비 좋은 새로운 반도체를 만들어도 인텔을 넘어설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인텔보다 좋은 제품이 나와도 조금 기다리면 인텔이 더 나은 CPU를 내놓을 것이라고 개발자들이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미 윈텔체 제가 컴퓨터 생태계에 잠금 효과를 내고 있었던 셈이다.
인텔은 초기 CPU를 생산할 때 자체 팹도 활용하고 외주도 같이 쓰 는 투트랙Two Track 전략을 구사했다. 외주처로는 일본 NEC 등을 선택 했다. 하지만 곧 외주 물량을 끊고 자체 팹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인텔 주도의 혹독한 환경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CPU 회사가 바로 AMD 다. 인텔은 외계인을 고문해 기술을 뽑아낸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앞선 기술력을 자랑했다. 이른바 '틱톡Tick-Tock 전략'으로 한 해는 설계 를 바꾸고, 이듬해는 미세공정을 진전시켜 칩 성능을 높였다. 이런 방 식으로 인텔은 설계부터 공정까지 초격차를 유지할 수 있었다.
- 인텔 제국, 쇠락의 길로 접어들다
인텔의 생태계는 강력했고 영원할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원가 절감을 목적으로 R&D 연구원을 포함한 직원들을 대거 해고하는 등 치명적인 오판을 내리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IT 산업의 다른 한쪽에서는 과거의 강자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 2007년,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모바일 AP를 핵심 반도체로 부상시켰다. 한편, 인텔이 내놓은 모바일 AP 아톰은 저전력 구현 에 실패해 스마트폰 시장에서 존재감을 확보할 수 없었다.
스티브 잡스는 한때 아이폰의 두뇌로 인텔 CPU를 검토했지만, 15 와트 이하의 전력 제품 라인업이 없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인텔 CPU 대신 AP를 쓸 경우 새로운 언어로 소프트웨어를 처음부터 개발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저전력 구현을 위해 이를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아이폰은 휴대폰 배터리를 쓰기 때문에 1~2와트 수준의 저전력 칩이 필요했던 것이다.
- 애플의 스마트폰 출시 이후 모바일 혁명이 본격화되었고, 소프트웨 어 생태계 주도권은 PC에서 모바일로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그나마 모바일 시대를 맞아 트래픽이 증가하면서 서버 시장이 급성장한 것은 인텔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인텔은 서버 CPU 분야에서는 여전 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텔은 모바일 시대에 대응하 는 데 실패하고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듯 틱톡 전략을 수정하는 최악 의 수를 두고 만다.
매년 공정이나 설계를 진보시키는 기존 틱톡 시스템 대신 'P(제조공 정)-A(아키텍처)-O (최적화)'라는 PAO 시스템을 들고 나온 것이다. 창업자 가 주창한 무어의 법칙은 이미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미세공정에 따 라 노광 장비의 가격 상승 등 공정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진 것도 영향 을 미쳤다. 틱톡 전략 폐기로 인해 인텔의 미세공정은 무려 7년 동안 14나노미터에 정체된다.
- 인텔의 잦은 악수 이면에는 경영진 문제가 있었다. 제6대 CEO 브 라이언 크르자니크Brian Krzanich가 구조조정을 단행했던 일이 기술 개발 의 원동력을 산산조각 내고 회사를 어려움에 빠뜨리는 자승자박의 결 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때 핵심 인력들이 대거 이탈했는데, 이들이 애플, 엔비디아, AMD 등 경쟁사로 들어가 반도체 설계 능력을 한층 진전시켰다.
인텔은 FPGAField-Programmable Gate Array21 2위 업체 알테라와 자율주행 칩셋 업체 모빌아이를 인수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지만, 근본적인 경쟁 력 하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사이 당시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 던 만년 2등 CPU 기업 AMD는 설계 경쟁력을 크게 키우게 된다. 인 텔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AMD는 혁신을 거듭했다. 공정부문을 따로 떼 글로벌파운드리스로 매각하고, TSMC 파운드리를 이용해 7나노미터 칩을 내놓았다. 그리고 PC 시장뿐 아니라 서버 시장 에서도 인텔 시장 점유율을 뺏어오기 시작했다.
인텔은 14나노미터에 7년 동안 머무르면서 TSMC, 삼성전자 등 파 운드리 업체에 미세공정 기술 측면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2021년, 애 플은 맥북에 사용하던 인텔 CPU를 빼고, 자체 설계한 M1 칩을 적용 했다. M1은 인텔의 칩보다 성능이 월등하고 전력 소모도 훨씬 적었다. 현재 인공지능 산업이 가속화하는 것도 인텔에게는 적대적인 환경 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세돌 9단과 바둑 대결을 펼친 인공지능 알파고가 크게 성공한 이후, 인공지능 반도체의 주류가 CPU에서 GPU로 완 전히 넘어갔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와 암호화폐 채굴 수요까지 더해 져 GPU 수요는 급증했고, 이렇게 GPU 전성 시대가 도래하면서 엔비 디아가 급부상했다. 이제 엔비디아마저 인텔의 CPU 시장을 노리고 있는데, 인텔은 인공지능 시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 는 상황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인텔은 엔지니어 출신 팻 겔싱어Pat Gelsinger를 새 로운 CEO로 영입해 부활을 노리고 있다. 설계, 소프트웨어 쪽 인력도 상당 부분 보강하고 있다. 오픈소스 Risc-V(리스크파이브)를 개발한 팹리 스 사이파이브 설립자들도 영입했다. 애플 AP A 시리즈, 테슬라 FSD Full Self Driving (완전자율주행) 칩 등의 '괴물 반도체' 탄생에 핵심적 역할을 한짐 켈러Jim Keller를 영입해 엘더레이크에 10나노미터 미세공정을 적 용하고, 빅리틀 기술을 AP가 아닌 CPU에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인텔의 공정 전문가 수는 여전히 부족한 상태라 는 평가다.
-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진출은 성공할 것인가
팻 겔싱어가 제8대 CEO로 취임한 이후 인텔은 기술 주도권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 진출 선언도 기술 리더십을 회복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인텔은 미국 애리조나주 소재의 2개 신규 팹 구축에 200억 달러(22조 원)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IBM과 차세대 로직 반도체, 패키징에 대한 공동 연구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에 안착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텔은 지난 2016년에도 파운드리 시장 진출을 계획했다가 포기 한 바 있다. ASML로부터 EUV 장비를 조달하는 문제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텔은 칩을 설계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등 플랫폼 업체들과 경쟁 관계다. 애플이 AP 생산을 삼성전자에 전량의 존하다 TSMC로 옮긴 것도 스마트폰 시장과 AP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경쟁 관계에 있다는 이유가 컸다.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팹리스 기업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할 충분한 유인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는 의견도 많다. 무엇보다 인텔은 '갑'의 위치에 익숙해져 있다. 하락세 에 접어들었다 해도 여전히 30% 수준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 중 이기도 하다. 파운드리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서비스 마인드와 수평적 인 조직 문화가 중요한데, 인텔이 이런 변화를 잘 감내할 수 있을 것인 지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 파운드리에서 생산되는 칩은 ARM 코어를 기반으로 저전력 설계 기법을 적용한다. 그러나 인텔은 x86계열 CISC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er(복합 명령 기반 컴퓨터) 프로세서를 생산한 경험뿐이다. 이 때문에 인텔이 ARM 코어 아키텍처에 기반한 칩을 제대로 생산할 수 있을지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설계자산과 셀라이브러리 cell library22와 같은 칩리스 생태계를 구축해야 하는 숙제도 해결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하려는 인텔의 의지는 뚜렷하다. 반도체 굴기를 완성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인텔을 독려한 것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인텔로서는 그동안 주요 고객 사였던 빅테크들의 최신 트렌드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도 TSMC에 빅테크 고객사를 다 뺏기는 것은 매 우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엔지니어 출신인 팻 겔싱어 CEO를 포함한 인텔 '올드보이'들의 귀환으로 공정기술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 이라는 기대감도 있다. 한편, 인텔의 10나노미터는 TSMC와 삼성전자 의 7나노미터 못지않은 트랜지스터 밀도를 자랑한다.
- 1999년, 엔비디아 지포스256을 처음 선보이며 '세계 최초의 GPU'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이전까지 그래픽 처리 장치는 영상 전환 어댑터 수준에 불과했지만, 엔비디아의 GPU가 등장하고 나서 CPU와 같은 프로세서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현재 엔비디아는 PC 게이밍 시장에서부터 슈퍼컴퓨팅, 자율주행차, 데이터센터 시장에서까지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자동차에도 GPU가 상당량 장착되지만 데이터센터에 훨씬 더 많은 GPU가 들어간다.
디지털 트윈 기술의 메타버스 '옴니버스'는 엔비디아가 자사의 GPU를 쓰는 고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자사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기존 고객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잠금 효과를 노린 것이다.
엔비디아는 게임 업체들에 자금을 지원하며 적극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했고, 그 결과로 '친 엔비디아' 성향의 게임들이 대거 나오면서 제품 판매를 위한 생태계가 조성되었다. 엔비디아는 이렇게 게임 GPU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앞으로 엔비디아가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시장에서도 게임 시장에 서와 같이 성공하게 된다면, 그 요인 중 하나는 생태계 조성 능력이 될 것이다. 지금도 엔비디아의 전체 매출에서 게임향 판매 비중은 절반을 넘는다. 이에 비해 산업용 GPU 쿼드로는 15%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 다. 엔비디아는 2023년부터 GPU에 5나노미터 미세공정을 본격 적용 할 계획이다.
- CPU를 잡을 엔비디아의 무기 GPGPU
엔비디아의 쿠다가 출시되기 전까지 프로그래밍은 그래픽 언어를 공부한 사람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쿠다가 나오면서 상황이 달라졌 다. C/C++ 등 일반 컴퓨터 언어를 공부한 사람도 GPU에 프로그램 설 계를 쉽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일도 가 능해졌다. 엔비디아는 쿠다의 생태계 조성에 뚜렷한 강점을 보이고 있 으며, 앞으로 인공지능의 표준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더욱 굳건히 자리 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CPU 기반에서 GPU 기반 서버로 전환하는 회사가 증가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 덕분에 엔비디아의 데이터센터 분야 매출 비중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2015년에 7%에 불과했던 비중은 2020년에 27%로 증가했다. 자율주행차 분야에서도 엔비디아는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자동차에 고성능 GPU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자율주행차를 개발하려면 엔비디아의 영토를 밟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엔비디아의 GPU는 암호화폐 채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암 호화폐 시세가 좋을 때는 GPU 공급이 부족해 난리가 난다. 그러나 가 격이 떨어지면 중고 GPU가 시장에 쏟아진다. 암호화폐 폭락 때 엔비 디아는 재고 소진에 3분기라는 시간이 걸릴 정도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비트코인은 ASIC(주문형 반도체)로 채굴이 이뤄지고 있지만, 이더 리움 채굴에는 엔비디아의 GPU가 많이 쓰이는 추세다.
- GPU는 여전히 CPU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 이에 따라 엔 비디아는 연산 능력을 강화한 범용 그래픽 처리 장치 GPGPUGener- al-Purpose computing on Graphics Processing Units를 출시했다. CPU를 넘어설 GPU 인 셈이다. GPU는 코어가 수백 개에서 수천 개 배치된 칩으로, 데이터 를 병렬로 처리한다. 이에 비해 GPGPU는 코어의 그래픽 처리 능력은 낮추고 연산 능력을 극대화하여 CPU를 대신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GPGPU는 향후 인공지능 연구에 큰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외장 GPU 시장
최근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산업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사가 바로 엔비디아다. 기존 완성차 업체들은 자율주행차 시대에 테슬라에 대항 하기 위해서는 엔비디아 AP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모바일 혁명 때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와 퀄컴 AP 역할을 향후 엔비디아가 담당할 것이란 관측이다.
배터리에 이어 전장 부품까지 내재화한 중국의 BYD도 AP는 엔비 디아 칩을 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중국의 전기차 업체 대부분이 엔비 디아의 '드라이브 하이페리온'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성능 컴 퓨팅과 센서 아키텍처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연기관 자동차 업체들은 엔비디아 기술을 빨리 탑재하지 않는다면 모바일 시대의 노 키아나 모토로라처럼 될 수 있다는 공포에 빠져 있다. 중국의 인공지 능, 자율주행차 산업을 꺾기 위해 미국 정부가 엔비디아 칩 수출을 금 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 스마트폰의 두뇌,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AP는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로서 현재 쓰이는 반도 체중 미세공정 수준에서 가장 앞서 있다. CPU, GPU, NPU, ISPImage Signal Processor(이미지 시그널 프로세서), BPbaseband processor (통신 프로세서) 등 여 러 기능이 SoCsystem on a chip(시스템 온 칩)"로 하나의 다이 위에 구현되어 있는 형태다.
AP 관련 대표적인 브랜드는 삼성전자의 엑시노스 시리즈, 퀄컴의 스냅드래곤 시리즈, 애플의 A 시리즈, 미디어텍의 헬리오 시리즈 등이 있다.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한 기린 AP 시리즈도 한때 세계 10위권 순위에 들었지만, TSMC의 첨단 파운드리 서비스가 끊기면서 몰락했다.
AP 성능이 좋아질수록 D램과 낸드플래시 성능도 개선되는 특징이 있다. 현재 AP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칩은 애플 A 바이오닉 시리즈다. 아이폰14 프로 시리즈에 적용된 A16 바이오닉 칩셋에는 애플이 자체 설계한 CPU, GPU, NPU가 적용되었다. 이 칩셋은 TSMC 4나노미터 공정으로 만들어진다.
애플은 2010년에 독자 설계한 AP A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CPU 설 계를 내재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어 2014년에는 GPU 세미커스텀 을 시작하여 CPU에 이어 GPU 설계까지 내재화하게 되었다. 2017년 에 애플은 CPU, GPU, NPU 등 3개 프로세서 블록을 독자기술로 설계 했다. 이후 모바일 시장에서 애플 AP 성능을 따라잡은 팹리스 업체는 없다. 경쟁사들 입장에서 다행인 점은 애플 A 시리즈의 칩이 자사 제품에만 쓰인다는 것이다.
안드로이드 계열에서는 퀄컴이 가장 강력한 AP 설계기술을 보유하 고 있다. 스냅드래곤 시리즈는 삼성전자 갤럭시S22 같은 프리미엄 스 마트폰에 주로 채택되고 있다. 현재 퀄컴은 8세대 스냅드래곤 제품에 주력하고 있다.
삼성전자 엑시노스 시리즈는 초기 갤럭시S 시리즈에서는 강력한 성능을 자랑했지만, 점점 힘이 약해지고 있다. 10나노미터 이하 공정 부터 발열 문제를 잡지 못한 탓이다. 이번 갤럭시S22에 적용된 엑시노스2200은 AMD의 RDNA2 GPU 설계까지 채택하면서 부활을 노렸 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고성능 게임 가동 시 자동으로 성능이 다운그레이드 되는 GOS Game Optimizing Service 문제로 인해 크로스 플랫폼 긱벤치의 벤치마크 테스트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다. 퀄컴의 스냅 드래곤 8세대와 엑시노스2200는 모두 삼성전자 파운드리 5나노미터 공정에서 만들어졌다. 엑시노스2200은 NPU를 채용하고 있지만, 스 냅드래곤은 다른 반도체가 NPU 역할을 담당하는 차이점이 있다.
대만의 미디어텍은 주로 저가용 AP를 설계하는 업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당한 전성비(전력 대비 성능)를 보이 며 약진 중이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비중은 2020년 16% 에서 2021년 37%까지 증가했다.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하이실리콘이 몰락한 반사이익도 톡톡히 누리고 있다. 한때 35%의 점유율로 세계 AP 시장 1위를 달성하기도 했고, 2021년 5월에는 시총 약 70 조원으로 TSMC에 이어 대만 증시 시총 순위 2위에 올랐다.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하는 AP인 기린은 2020년 화 웨이의 메이트40에 마지막으로 적용된 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7 나노미터 공정을 담당하던 TSMC 파운드리 이용이 막힌 탓이다. 자국 SMIC에서 14나노미터 핀펫 공정을 적용한 기린 AP를 개발 중인데, 중국인들의 애국심에 기댄다고 해도 재기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구글 이 화웨이 스마트폰에 대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업데이트 서비스를 중단함에 따라 자체 개발한 하모니 운영체제를 사용 중인 것도 문제 점이다.
- 차량용 반도체 설계에 착수한 현대차
현대차도 차량용 반도체 설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내재화에 착수 했다. 현대모비스는 2021년 3월 현대오트론으로부터 1332억 원에 반도체 부문을 인수했다. 우선 기술 난도가 낮은 PMIC와 MCU 국산 화를 시도하고 있다. ADASAdvanced Driver Assistance Systems(운전자 지원 첨단 시 스템) 반도체와 SoC인 인포테인먼트용 AP는 장기적인 계획으로 개발 을 진행할 예정이다.
현대차가 차량용 반도체 내재화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파운드리 문제 해결이 관건이다. 삼성전자는 10나노미터 이하 고성능 파운드리 에 집중하고 있으며, 일반 차량용 반도체 생산라인에 투자할 가능성은 낮다. 현재 세계 차량용 반도체 파운드리의 70%를 TSMC가 담당하고 있는데, 공급 부족 사태 때는 팹리스들이 거의 줄을 서 있을 정도였다. 현대차로서는 TSMC에 맡기려 해도 가격 협상이 어려울 수도 있다. 의뢰할 물량 자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현대차가 DB하이텍 인수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 오고 있다. DB하이텍이 보유한 8인치 파운드리와 현대차의 설계 능력 이 시너지 효과를 낸다면 차량용 반도체의 내재화 가능성은 좀 더 높 아질 것이다.
- SiC 반도체는 실리콘 반도체 대비 10배의 전압과 2배 이상의 고열에서도 작동한다. 또 전력 손실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SiC 반 도체는 6인치가 메인 웨이퍼로, 몇몇 업체들이 생산을 담당하고 어 공급 자체가 제한적이다. 이런 점으로 SiC 반도체 사용이 확산된다 면 해당 업체들은 매우 크게 수혜를 입을 수 있다. 현재 SiC 반도체는 스마트 그리드, 친환경 전력 생산, 송배전 시스템에 필수적이다. SiC 반도체의 또 다른 수요처로 주목하는 시장은 전기차다. 이것을 전기차 전력변환 모듈에 쓰면 배터리 효율을 10%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 또한 실리콘 반도체 기반 인버터를 SiC 반도체 기반으로 바꾸면 부피와 무게 모두 축소할 수 있다. SiC 반도체를 채택한 테슬라 인버 터가 대표적 예다. 이런 장점으로 SiC 반도체는 전기차, ESSEnergy Storage System (에너지 저장 시스템) 수요가 확실하다는 판단이다. 이뿐 아니라 신재생에너지, 산업 시스템, 통신 인프라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SiC 반도체를 의미있게 공급하는 업체는 울프스피드, 온세미컨덕터, ST마이크로, 투식스 등 4곳 정도다. SK실트론이 SiC 웨 이퍼 사업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편이다.
한편, 도요타는 덴소와 공동으로 SiC 전력 반도체를 개발해 현재 하이브리드 자동차 PCU(파워 컨트롤 유닛)에 적용하고 있다. 이렇게 해 서 10% 연비 개선과 5분의 1 수준의 부피 소형화에 성공했다. 이들 은 1989년부터 히로세 공장에서 차량용 반도체를 직접 생산해왔는 데, 2013년에는 SiC 전용 반도체 클린룸을 확장했다. 세계 자동차 업 체 중 반도체 설계 역량과 생산 공장을 보유한 유일한 회사인 만큼, 도요타의 핵심 무기를 전고체 배터리와 SiC 전력 반도체 두 가지로 꼽기 도 한다.
이와 같이 화합물 반도체는 전기차, ESS 등 열과 전압이 많이 걸리 는 영역에 주로 쓰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마트폰 등 IT 디바이스 는 발열 문제가 그리 큰 이슈가 아니었고 서버는 냉각 시스템이 워낙 잘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기차, 신재생에너지 등 새로 부각되는 산업 은 열과 전압이 굉장히 높아졌다. 현재 이 시장은 인피니언, 온세미컨 덕터, 로옴 등이 주도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8인치 웨이퍼 상업 화에 돌입한 상태지만, 국내 업체들은 아직 6인치 생산을 시도하고 있 어 국내외 기업 간의 기술 격차가 존재한다. 화합물 전력 반도체 활용 시 국내에서만 연간 5기가와트시의 전력량을 절감할 수 있는 만큼, 그 앞으로 사용 확대가 기대된다.
- 포스코가 SiC 웨이퍼 소재를 개발 중이고, 현대차는 SiC 전력 반도 체를 설계해 파운드리에 맡길 계획에 있다. 현재 아이오닉 5에 적용된 인버터 파워모듈은 인피니언이 공급하고 있는데, 현대차는 향후 독자 개발한 SiC 반도체를 적용할 계획이다. 실질적인 개발은 현대차의 자 회사 현대오토에버에서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화합물 반도체 웨이퍼를 생산할 수 있는 곳이 SK실트론이다. 2020년 SK실트론은 듀폰으로부터 관련 사업부를 인 수했다. SiC 기판 시장은 미국 크리가 40%, 일본 로옴이 35%를 차지 하고 있다. 예스파워테크닉스는 한국전기연구원이 개발한 트렌치 구 조 SiC 반도체 'MOSFET' 기술을 이전받아 보유하고 있다. 현재 SiC 반도체는 6인치 웨이퍼가 주력인데, 2025년쯤 8인치 전환이 유력한 상황이다. 이때가 되면 전력 반도체가 본격적으로 성장기에 진입할 것 으로 보인다.
- SiC는 고전력 분야, GaN은 고주파 전력 분야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SiC는 자동차, 고속철도, 우주항공, 군사 등에, GaN은 5세대 이동통신 기술이나 LED 분야에서 사용될 수 있다.
두 소재는 실리콘으로 반도체를 만들던 기존의 공정을 그대로 이용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다른 소재들을 제치고 차세대 반도체 재료 로 조명받는 이유다. 차세대 반도체는 아직 확실한 주도권을 가진 곳 이 없다. 실리콘 웨이퍼보다 제작 과정이 훨씬 더 까다로워서다. 물론 지금도 두 소재로 만든 반도체가 있지만 생산이 어려워 상용화와 보급은 더딘 상황이다.
- 최근 서버에서 D램 원가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고성능 컴퓨 팅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통상 서버 한 대에 CPU 2개, 250기가바 이트 이상 D램이 채택된다. 1테라바이트 이상의 용량이 요구될 때도 있다. 심지어 이것도 부족해 외장 D램 CXL 512기가바이트를 더 부착 하기도 한다. 인공지능용 데이터 처리 시 병목 현상을 줄이기 위해서 다. 서버가 'D램 덩어리'라고 불리는 이유다. 삼성전자가 D램에서 벌 어들이는 수익만 해도 TSMC의 전체 이익을 넘어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저평가되는 이유는 뭘까? 바로 변동성 때문이다.
과거 슈퍼사이클 때 20조 원가량 수익을 내던 SK하이닉스가 사이 클이 하락세에 접어들자 이듬해 이익이 8분의 1 토막 나기도 했다. 하 지만 이번 DDR5 교체 사이클은 과거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 다. 우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행보가 달라졌다. 최근 두 회사는 팹이 완성되어도 설비를 바로 채우지 않는다. 수요가 증가했다고 해서 공급을 늘리다가 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메모리 업체들이 돈을 버는 중에 투자를 결정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D램 가격이 떨어지면 투자 결정을 서두르지 않는데, 이는 메모리 반도체의 가격 변동성이 축소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데이터센터를 위한 차세대 인터페이스 CXL D램
현재 D램은 DDR이라는 인터페이스를 사용 중이다. 서버 구조상 1 개의 CPU에 최대 16개 D램 모듈만 쓸 수 있다. 최신 제품에 속하는 PCIe 4.0은 초당 64기가바이트, PCIe 5.0은 초당 128기가바이트 속 도가 한계다. 인공지능, 고성능 컴퓨팅 시대가 도래하면서 서버가 감 당해야 할 데이터 양은 폭증함에도 D램 용량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 는 셈이다.
CXL Compute Express Link(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 D램은 CPU와 함께 가속 기, 메모리, 저장 장치 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안된 인터페 이스로, 확장성을 최대 장점으로 한다. 이것은 이기종 메모리 간 공유 는 물론 테라바이트급까지 용량 확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기존 서버를 교체하지 않고 인터페이스 개선만으로 시스템 내 D램 용량을 크게 늘 릴 수 있다. CXL D램은 SSD와 유사한 모양새다. SSD 생산에 쓰이는 폼팩터를 사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  고대역 메모리 HBM의 장단점
D램 칩을 HBM으로 실장할 경우 최대 97%까지 면적을 줄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큰 장점으로 꼽힌다. 삼성전자의 HBM2는 초당 307기가바이트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기존 DDR5 D램 대비 9.6배 빠른 속도다. GDDR6에 비해서도 4.3배 큰 대역폭을 자랑한다. 전력 소모에서도 유리하다. TSV(실리콘 관통 전극) 기술을 사용해 칩을 적층해야 하므로 제품이 두껍고, 기존 D램 대비 2~3배 비싸다는 것이 단점이다.
현재 HBM은 그래픽 D램 시장에서 7%의 비중을 차지한다. 향후 인공지능, 빅데이터 시장 확대에 따라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보이는 데, 가격 하락폭이 커질 경우 더욱 빠른 점유율 상승이 따를 것이다. HBM1은 AMD와 SK하이닉스가 개발했지만, HBM2부터는 시장의 패러다임을 엔비디아와 인텔 등 고객사가 주도하고 있다. HBM3도 인텔이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CPU, GPU 등 프로세서는 점점 멀티 코어화되고 있다. 작동 속도 향상에 발맞춰 메모리 성능 향상이 요구되는데, 메모리 병목 상태를 보이는 폰 노이만 구조의 한계 때문이다. 반도체 업체들은 공정 미세화의 한계로 후공정 기술에 관심을 보이 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DDR5, HBM3, 3D 크로스포인트 등이 나 왔다. HBM은 작은 폼팩터를 갖추고 전기 소모가 적은 고대역폭을 구 현할 수 있다. D램 다이를 여러 개 적층해 TSV와 마이크로 범프Micro Bump(전도성 미세돌기)로 연결한다. 실리콘 인터포저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 2008년에 AMD는 그래픽 병목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기술 개발 을 시작했고, 결국 인공지능, 슈퍼컴퓨터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당시 AMD는 사실 기술 제안만 했을 뿐 TSV 패키징 기술, 수율 등 핵심적 인 문제는 반도체 업체가 떠맡았다. 삼성전자는 당초 시장 진입을 꺼 릴 정도로 HBM에 부정적이었고, 2013년 SK하이닉스가 먼저 8기가 비트 HBM 양산을 시작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2016년 HBM2부터 시 장에 진입했다. 마이크론은 HBM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고 10나노 미터 GDDR6 쪽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인텔과 P램 기반 3D 크로스 포인트로 협력하다가 포기한 것도 시장 진입이 늦었던 이유다.
- 드플래시 시장 구도 재편은 호재
현재 낸드플래시 생산 업체로는 삼성전자, 키옥시아, 웨스턴디지털,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인텔 등 6개사가 있다. 이 중 웨스턴디지털과 키옥시아는 합병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키옥시아는 자금이 부 족해 도쿄증시에 상장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로 19%의 시장 점유율로 점프업했다.
낸드플래시 시장이 D램처럼 과점체제로 바뀌면 국내 업체들이 수 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D램 시장 변동성은 굉장히 컸지만, 치 킨게임을 거친 후 과점체제로 바뀌면서 변동성이 대폭 줄었다. 특히 다운사이클 때 하락폭이 크게 완화되었는데, 공급 업체들이 가격 하락 기에 생산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현재 낸드플래시 는 6개의 업체가 경쟁하는 탓에 변동성에 취약한 편인데, 4개 업체로 재편된다면 다운사이클 변동성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 사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노광 장비는 니콘, 캐논 등 일본 업 체들이 선점한 시장이었고, 당시 ASML은 벤처 기업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ASML은 자체 기술만 고집하지 않고 협력을 강화하는 전략을 통해 성장했다. 독일의 칼 짜이스에 렌즈 생산을 의뢰하고, 미국의 레 이저 광원 회사 사이머를 인수하는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지식 네트워 크를 만들어나갔다. EUV 장비를 개발할 때는 삼성전자, 인텔,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투자를 해주기도 했다.
ASML이 한 해에 생산하는 EUV 장비 수량은 40~50대 수준에 불과하다. 생산량 중 절반은 TSMC 차지고, 25% 정도는 삼성전자에 할당 된다. 현재 삼성전자 파운드리 라인은 월 10K(10000장)당 EUV 2대가 필요하다. 14나노미터 D램은 10K당 한 대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25%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인텔,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의 업체들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인다. 최근 중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미 국의 제재 탓에 단 한 대도 구매하지 못했다. 앞으로 미국은 네덜란드 정부와의 논의를 통해 ASML의 대중국에 판매 규제 품목 확대를 추진 할 것으로 보인다.
ASML은 한국과 긴밀한 협력을 하는 반도체 장비 업체다. 1996년 설립된 ASML 한국지사에는 현재 1800명 정도의 직원이 있는데, 조 만간 2000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핵심 고객 이 있는 만큼 한국과 좀 더 깊은 수준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지속하려 는 의지다. 최근 ASML은 한국 내 투자를 결정하고 2400억 원 이상을 투입해 화성시에 노광장비 재제조 센터와 기술센터를 지을 계획이라 고 밝혔다.
- 공정에 파티클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마스크를 오래 쓰기 위해 서는 펠리클이 필요하다. EUV는 모든 물질에 흡수되는 특성을 가지 며 심지어 공기에도 흡수된다. 그래서 공기 중이나 마스크에 먼지 한 톨이라도 있으면 빛이 굴절되고 만다. 마스크 위에 펠리클을 씌우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마스크에 파티클이 묻으면 세정을 할 수는 있지만, 2~3번 정도 세 정하게 되면 손상으로 폐기해야 한다. 하지만 파티클이 펠리클에 묻으 면 세정하거나 버리면 된다. 펠리클은 EUV에 오래 노출되면 녹아버 리기 때문에 원래 사용 기간이 2주 정도다. 일반적으로 마스크는 장당 가격이 5억~10억 원에 달하지만, 펠리클은 장당 약 2000만~3000만 원으로 알려져 있다.
- 반도체 제국을 꿈꾸는 '애플 실리콘' 전략
애플은 2010년에 독자 AP 설계에 나서며 '애플 실리콘' 전략의 시 작을 알렸는데, 이 전략의 일환으로 자체 모바일 CPU를 설계하여 A 시리즈가 탄생했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천재 반도체 설 계 엔지니어 짐 켈러다. 이전까지 애플은 삼성전자로부터 설계뿐만 아 니라 파운드리 서비스까지 제공받았다.
2014년, 애플은 GPU 세미커스텀semicustom"을 시작했다. GPU 설계 역량 내재화에 돌입한 것이다. 그리고 3년 뒤 CPU, GPU, NPU 등 세 가지 프로세서를 모두 독자 설계한 AP를 선보였다. 이때 애플의 AP 설계 역량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애플은 이런 모바일 AP 개발에 그치지 않고 고성능 반도체 설계기 술 확보에도 집중한다. 그 결과 맥북용 괴물 반도체 M1이 탄생했다. M1의 특징은 기존 CPU의 성능을 월등히 뛰어넘는데 전력 소모가 굉 장히 적다는 것이다. 애플은 애초에 머신러닝을 염두에 두고 M1을 설 계했다고 알려졌는데, 그 배터리는 무려 20시간이나 지속 가능하다. M1은 고성능 코어인 파이어스톰 4개, 저전력 코어인 아이스스톰 4 개를 사용하며, GPU 16코어, 메모리 대역폭 초당 200기가바이트를 지원한다. M1을 채택한 맥북은 D램을 SiP로 내재화했다. 업그레이드가 안 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칩 간 통신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맥북을 열면 바로 동작을 시작할 정도다. 팬이 없어 소음이 적을 뿐만 아니라 기존 모델 대비 전성비(전력 대비 성능) 3.5배, 그래픽 처리 속도 6배에 달한다.
M1 맥스에는 파이어스톰 8개, 아이스스톰 2개가 적용되었다. 성 능은 M1에 비해 70% 개선되었다. GPU 32코어, 메모리 대역폭 초당 400 기가바이트를 지원하는데, 이런 스펙은 사실상 인텔이나 AMD 데스크톱 CPU의 성능을 완전히 압도하는 수준이다.
맥북이 노트북 PC인데 이런 고성능, 저전력을 실현하니 경쟁사들이 아연실색할 만도 하다. DDR4 메모리 대역폭은 초당 50기가바이트 수준이다. 뉴럴 엔진, 미디어 엔진, 4K 30개, 8K 7개를 멀티 스트림으 로 지원해서 전문가용으로 쓰기에 손색이 없고, 일반 사용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틱톡이나 유튜브 쇼츠 등의 처리에도 최고 성능을 구현한다. M1 출시 이전까지 애플은 PC 및 노트북 PC용 CPU로 인텔 제품을 썼다. 이런 점 때문에 아이폰, 아이패드와 달리 PC는 생태계 통합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제 M1이라는 자체칩을 출시했으니, 진정한 통 합 생태계를 구현한 셈이다.
현재 PC 시장에서 애플의 점유율은 8%에 불과하지만, 애플 실리콘 전략 이후 비중이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아이폰12 이전까지 스 마트폰 점유율은 소폭 떨어지고 서비스 매출이 늘어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애플 실리콘을 내놓은 뒤 하드웨어 보급량이 늘어나고 서비스 매출도 올라가는 선순환 고리가 이어지고 있다.
- 설계자산을 제공하는 ARM
빅테크들이 자체칩을 설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설계자산이 ARM 코어다. 애플, 퀄컴, 삼성전자, 미디어텍 등 AP 업체들도 대부분 ARM 이 제공한 설계자산을 받아서 제품을 만든다. ARM은 CPU, GPU 등 필요한 설계자산만 제공하는 칩리스 업체여서 고객사마다 유연한 대 응이 가능하다.
ARM은 회사 이름이자 아키텍처의 이름이다. 원래 ARM은 1983년에 '아콘컴퓨터'라는 이름으로 탄생했지만, 1990년부터 ARM Advanced RISC Machine으로 사명이 바뀌었다. 이때 ARM은 애플, 아콘컴퓨터, VLSI 테크놀로지 등 세 회사의 조인트 벤처로 영국에서 설립되었다. 영국의 컴퓨터 문맹 퇴치 프로그램 '뉴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ARM은 저전력 위주 SoC 타입 CPU 설계에 집중했는데, 모바일 시 대가 열리면서 아키텍처를 독점하는 기업이 되었다. 현재 ARM 코어 기반 스마트폰 AP는 전체 시장의 95%를 넘어서는 비중을 차지한다. ARM은 '라이선스 비용 X 판매한 칩 수'로 로열티를 받는다.
ARM 코어 생태계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초기에는 단순 웹서핑 등의 기능만 제공하면 되었지만, 스마트폰 고도화로 AP에 요구되는 기능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ARM은 스마트폰 업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업체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최적의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이런 오랜 기술적 노하우와 고객사들과의 협력적인 방식 은 경쟁 업체의 시장 진입을 막는 높은 벽이 되었다.
ARM은 태생부터 애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애플은 휴대용 기기의 저전력 구현을 위해 과감하게 ARM 아키텍처 중심의 생태계 를 새로 만들어버렸다. 기존 AMD의 X86계열 칩으로는 배터리 사용 이 2시간을 넘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애플의 도전은 대성공을 거두 었고, 이는 스마트폰 생태계 조성으로 이어졌다. 이런 변화에 따라 대 다수 모바일 AP 업체들이 ARM 아키텍처 설계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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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세계사

역사 2024. 3. 5. 07:07

- 근대가 시작된 이래로 당대의 기술적 진보가 독특하고 혁명적이라는 자만심은 항상 있었다. 물론 우리의 시대도 예외가 아 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착각이다. 과학의 진보가 인간사에 미친 완전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그 120년 동안에 일어나서 사회구조의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 기 술의 폭발로 눈을 돌려야 한다. 순식간에 이동 속도가 열 배로 증가했고 거의 즉각적인 통신이 이루어졌다. 19세기 초만 해 도 토머스 제퍼슨이 몬티첼로Montichello에서 필라델피아까지 여 행하는 데 열흘이 걸렸고 상당한 비용, 육체적 고통, 위험이 수 반되었다. 1850년에는 증기기관차의 등장으로 같은 여행을 이전보다 훨씬 적은 비용, 불편함, 위험으로 하루 만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스티븐 앰브로즈stephen Ambrose의 『불굴의 용기undaunted Courage』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생각해보라.
1801년의 세계에서 중요한 사실은 말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 직이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 제조된 물건, 밀, 쇠고기, 편지, 정보 또는 그 어떤 명령이나 지시도 말보다 빠르지 않았 다. 제퍼슨과 동시대 사람들이 알기로 말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었다.
- 1837년에 영국에서 윌리엄 포더길 쿠크William Fothergill Cooke 와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 이 전신을 발명하면서 즉각적 인 통신이, 금세기에 비행기와 컴퓨터에 의해 일어난 변화가 왜 소하게 보일 정도로, 경제·군사·정치적 문제의 면모를 갑작스 럽게 바꾸어 놓았다. 전신이 나오기 전에는 원시적 통신기술이 일상적으로 크고 작은 비극을 낳았다.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이 1815년에 뉴올리언스에서 영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것은 헨 트Ghent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된 지 2주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1850년 이후에는 기술이 진보하는 속도가 가속되지 않고 느려 졌다. 1950년에 생존했던 서구 세계의 평균적 거주자는 2000 년의 기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반면 에, 1800년에 살았던 사람은 50년 후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혼 란을 겪었을 것이다.

- 통화에 관한 간략한 설명
모든 금융의 역사가 그래야 하듯이, 이 책은 당시의 통화-몇 가 지 예를 들자면 영국의 파운드pounds, 스페인의 페소pesos, 베네 치아의 두카트ducats, 피렌체의 플로린florins, 프랑스의 리브르 livres를 다룬다. 나는 모든 금액을 현대의 통화로 바꾸는 항상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작업으로 글을 어지럽히지 않기로 했다. 이에 관한 정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음의 대략적인 근사 치가 도움이 될 것이다. 유럽의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 국가에서 통화의 표준 단위는 1/8온스ounce (무게의 단위, 1온스는 28.35그램-옮긴이)짜리 작은 금화- (1파운드보다 약간 더 나가는) 영국의 기니 guinea, 리브르, 플로린, 두카트 같은였고, 이는 오늘날의 기준 으로 약 40달러의 가치에 해당한다. 1500년과 1800년 사이에 영국 신사의 연간 생활비는 총액 300파운드 정도였고, 농부와 노동자는 15~20파운드로 꾸려나갔다. 그러나 통화 가치의 하 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근사치조차도 아주 빈번하게 매우 부정 확하게 측정된다.
주된 예외는 기니와 리브르의 약 절반 정도 가치를 지닌 네 덜란드의 길더guilder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드라크마drachma는 대략 노동자나 농부의 하루 임금과 대략 비슷했다.

- 번영은 단순히 수력 댐, 도로, 전화선, 공장, 비옥한 농지, 심지어 거액의 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제 인프라의 핵심 요소를 이전하 는 방법으로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번영을 이식할 수도 없다. 가장 예외적 인 경우를 제외하고 국가의 번영은 물리적 대상이나 천연자연의 문제가 아니 다. 상호작용하고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하는 제도와 관행 institutions의 문제다. 1부에서는 이러한 제도와 관행이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 관되어 있는지를 설명한다.
경제성장의 전제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제도와 관행이 부각된다.
*안전한 재산권. 여기에는 물리적 재산뿐만 아니라 지적 재산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가 포함된다-시민권
*세계를 탐구하고 해석하기 위한 체계적인 절차-과학적 방법
*새로운 발명품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한 광범위하고 개방적인 자금원-현대적 자본시장
*중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고 사람과 재화를 운송하는 능력

- 네 가지 요소-재산권, 과학적 합리주의, 효율적인 자본시장, 그리고 효율적인 운송과 통신-가 모두 갖추어지기 전에는 국 가가 번영할 수 없다. 네 요소는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잠시 합 쳐졌으나 영어권 세계에서는 1820년경까지 안정적으로 자리 를 잡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머지 세계로 확산 하기 시작했다.
이들 요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경제 발전과 인간의 복지가 위태로워진다. 네 개의 다리 중 하나만 걷어차더라도 국가적 부 의 기반이 되는 플랫폼이 전복되는 것이다.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를 당한 18세기의 네덜란드, 재산권이 상실된 공산주의 국 가들, 자본시장과 서구적 합리주의가 없는 여러 중동 국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가장 비극적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 서는 여전히 네 가지 요소 모두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 여러 세기에 걸친 경제 발전을 측정하고 싶다면 먼저 최저 생활 수준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를 물어야 한다. 매디슨은 1990년의 저개발 국가에서 연간 약 400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했다. 다음으로, 경제사학자들은 가 용한 모든 데이터를 사용하여 이 수준에서 살아가는 인구의 비 율을 결정한다. 인구의 거의 10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농 산물의 상당 부분을 수출하지 않는 사회는 정의에 따라 연간 400달러의 생계 수준에 매우 근접하는 삶을 살아간다. 매디슨 처럼 1인당 400달러의 GDP 를 1세기 초의 유럽, 1950년의 중 국, 또는 오늘날의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에 일률적으로 할당하는 것은 대단히 임의적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최소한 경제성장을 비교하고 측정하는 기준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은 '도시화 비율urbanization ratio', 즉 인구 1만 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율을 살펴 봄으로써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리 스와 로마의 전성기에도 인구가 1만 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사 람의 비율이 극히 미미했다. 1500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큰 도 시가 15만 명의 주민이 있는 나폴리였다. 86만 5000명의 유럽인, 다시 말해서 대륙 인구의 약 1퍼센트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고 6퍼센트는 인구 1만 명 이상의 소도시에서 살 았다. 따라서 중세 시대에는 유럽인의 90퍼센트 이상이 농업에 종사했다. 중세기에 유럽보다 훨씬 발전한 아시아의 위대한 문 명권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100퍼센트에 더 가까웠 고, 극소수 지배 엘리트의 막대한 부가 이 지역의 전반적 번영 의 수준을 높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1500년 이전에는 전 세계의 1인당 GDP가 매디슨이 정의한 400달러 의 생계 수준에 근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 미국에서는 1820년까지도 70퍼센트에 달하는 노동 인구가 농장에서 일했다. (미국은 농산물의 상당 부분을 수출했기 때문에 낮은 도시화 비율이 시사하는 것보다 생활 수준이 훨씬 더 높았다.) 1998년에 이 수치가 2퍼센트로 떨어졌다. 농장 생활을 낭만적으로 바라 보는 사람들은 현대 세계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빈곤의 강력한 지표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문명의 여명기에 는 상황이 반대였다. 인류는 훨씬 덜 생산적인 수렵과 채집에 종사하는 유목 민의 삶에서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정착된 농부의 삶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아 마도 당시의 수렵채집가들은 농부의 부드럽고 새롭고 영혼이 없는 삶의 방 식을 한탄했을 것이다.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농업은 여자들의 일로 업신 여겨졌다.)
- 아주 긴 역사적 발자취를 조사하는 일의 유리한 점은 성장 에 관한 커다란 불확실성까지도 '씻겨나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00년이라는 기간에 대하여 1인당 GDP의 시작이나 끝 을 두 배로 과대평가하더라도 연간 성장률에는 0.07퍼센트의 오차밖에 발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세계 1인당 GDP 성장률이 예컨대 0.5퍼센트 정도까지 높을 수 없었다. 성장률이 0.5퍼센트였다면 1인당 GDP가 오늘의 달러 가치로 400달러에서 2000년에 860만 달러로 늘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간의 대부분 동안 성장이 실제로 0에 매우 가까웠다고 확신할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극단적인 낙관적 추정치조차도 서기 1년부터 1000년까지의 기간 동안 세계 1인당 GDP의 두 배 또는 세 배 성장을 시사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서 1820년 이후 172년 동안에는 세계 1인당 GDP가 여덟 배로 성장했다. 같은 172년 기간에 영국의 1인당 GDP가 10배, 미국은 20배로 늘어났다.
- 5000년 전에 돈이 처음으로 등장하기 전에도 인간은 빌려주 고 빌렸다. 수천 년 동안, 빌려준 곡물과 가축에 이자가 붙었다. 겨울에 빌린 곡식 자루나 송아지를 수확기에 두 배로 갚아야 했 다. 이러한 관행은 저개발 사회에서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
고대 신용시장의 역사는 광범위하고 깊다. 비옥한 초승달- 수메르, 바빌론, 아시리아-지대의 초기 역사기록에서 많은 부 분이 돈을 빌려주는 일에 관한 기록이다. 함무라비의 유명한 바 빌로니아 법전-최초로 알려진 포괄적 법전도 상업적 거래를 다뤘다. 몇 가지 작은 예를 들면 충분할 것이다. 기원전 3000년부터 1900년까지 수메르에서 보리를 빌려주는 통상적 금리는 33퍼센트, 은을 빌려주는 금리는 20퍼센트였다. 두 금리의 차 이는 보리를 빌려주는 것이 은을 빌려주는 것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반영했는데, 후자는 소비되거나 부패할 수 없고 은 수확 silver crop이 흉작일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35
그런 금리는 장기적 프로젝트의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이자율이다. 연 20퍼센트의 이자율이면 4년도 안 되어 빚 진 돈이 두 배가 된다. 분별 있는 사업가나 기업이라면 그렇게 엄청난 미래의 부담을 지면서, 대규모의 상업적 시도가 대부분 그렇듯이, 5년 또는 10년 동안 수익을 내지 못할 프로젝트에 자 금을 대려고 돈을 빌리지 않을 것이다.
- 경제사학자 리처드 실라Richard Sylla에 따르면 이자율이 사회 의 건전성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이자율 도표는 사실상 사회의 열 곡선fever curve 이다. 불확실한 시기에 는 공공의 안전성과 신뢰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자율이 상승 한다. 광범위한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의 모든 주요 문명에서 U 자형 금리 패턴이 나타났다. 역사의 초기에는 이자율이 높았고 문명이 성숙하고 안정되면서 서서히 낮아졌다. 이는 발전의 정 점에서의 낮은 성장률로 이어졌고 마침내 문명이 쇠퇴함에 따 라 이자율이 다시 상승했다. 예를 들어 서기 1세기와 2세기 로 마 제국의 절정기에는 이자율이 4퍼센트 정도로 낮았다. 이러 한 과정은 장기적 ·평균적으로만 유지되고 단기적 변동이 심하다. 1세기와 2세기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절정에 달했을 때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단기적으로 이자율이 12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로마의 몰락(전통적으로 서기 476년으로 보는) 이후에 제국의 이 자율이 급상승했다. 약 2세기 후에 서구의 상업 활동은 무함마 드의 헤지라 Hejira(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하여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옮긴이)와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장악한 아랍제국의 부상 으로 또 한 차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지브롤터 해협의 통제 권을 확보한 아랍인들이 지중해 무역을 실질적으로 차단했다. 이자율의 역사적 흔적은 로마시대 후기에 홀연히 사라졌다 가 거의 1000년이 지난 뒤에야 영국에서 다시 나타난다. 12세 기 영국에는 40퍼센트를 훨씬 넘는 이자율의 기록이 있고, 이 탈리아에서도 같은 세기 후반의 평균적 이자율이 약 20퍼센트 였다. 보다 합리적인 미래를 예고하는 최초의 희미한 빛은 일찍 이 1200년경에 이자율이 8퍼센트까지 떨어진 네덜란드에서 나 타난다.
- 그렇게 높은 이자율은 자본시장의 실질적 부재를 의미했고, 수 세기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상업적·경제적 구속복이 되었다. 종교적 교리가 지적 진보의 목을 조른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시 장의 부재가 일상적 상업 활동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금전 대 출에 대한 기독교의 금지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금지의 기원은 출애굽기 22장 25절로 시작하는 성경 구절이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고리대금업자 행세를 하지 말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상업 활동 자체가 사악하다"고 생각했고, 성 히에로 니무스는 "상인이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견해 를 밝혔다. 
- 1500년 이전에는 평균적인 인간의 웰빙이 정체되어 있었다. 지금쯤은 그 침체의 근원이 명백해져야 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부의 창출에 따르는 인센티브가 없었다. 봉건 귀족, 국가, 교회, 또 는 일반 범죄자의 약탈로부터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로 어떤 유럽인도 감히 창의적이나 과학적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의 창조자가 종종 이 세상과 다음 세 상에서 비난을 받고 잊혀졌기 때문이다. 셋째로 부를 창출하는 발명과 서비스를 구상하더라도 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구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발명품이 대량 생산되더라도 발명가 가 자신의 제품을 광고하고 멀리 떨어진 도시의 소비자에게 저 렴하게 운송할 수 없었다.
- 농업으로의 전환을 '1차 경제혁명 (2차는 산업혁명)'이라 부른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더글러스 노스Douglas North는 말한다.
1차 경제혁명은 인간의 주요 활동이 수렵과 채집에서 정착 농 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었다. 그러한 변화가 상 당수 인간에게 인센티브의 변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혁명이 었다. 인센티브의 변화는 두 시스템의 서로 다른 재산권에서 나왔다. 자원에 대한 공동재산권이 존재할 때는 우월한 기술과 지식을 확보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
- 근대적 번영의 네 가지 기반재산권, 과학적 합리주의, 자본에 대한 손쉬운 접근, 효율적인 운송과 통신중에 재산권이 가장 먼저 생겨났고, 재산권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고대 세계에서 처 음으로 빛을 보았다. 현대 세계에서도 재산권이 네 가지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하다. 위대한 경제학자 P. J. 오루크가 말하듯이, "99퍼센트의 문자 해독률과 훈련되고 근면한 사회를 갖춘 북한 의 1인당 GDP는 900달러다. 문자 해독률이 43.7퍼센트이고 온 종일 커피를 마시면서 양탄자를 사라고 관광객을 성가시게 하 는 모로코의 1인당 GDP는 3260달러다."
그와 동시에 재산권만으로는, 다른 세 가지 요소를 갖추지 못했던 그리스와 로마의 정체 및 쇠퇴가 보여주듯이, 경제성장 을 촉진하기에 충분치 않다.
- 왜 우리는 고대 세계의 작은 지역-문화적 영향력이 있었더라도에서 잠시 재산권이 꽃을 피운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세 가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재산권에는 독립적인 사법 체계가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참정권이 부여된 시민권이 사회의 생산성에 매우 중요하다.
*재산권만으로는 활기차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기에 충분치 않다.
- 고대 그리스인은 진보한 사람들이었지만, 경제성장에 필요한 다른 세 가지 조건, 즉 적절한 과학적 프레임워크, 정교한 자본시장, 효율적인 운송과 통신을 갖추지 못했다. 네 가지 조 건이 모두 융합하여 인류가 지속적인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2000년 후의 일이었다.
- 고대 세계에서는,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채무불이행이 가혹 하게 다루어졌다. 로마에서는 아무리 작은 빚이라도 갚지 못하 면 채무자의 전 재산을 압류하여 경매에서 매각할 수 있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채무자가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혔는 데 이러한 관행이 서구 세계에서 채무자의 감옥debter's prison 으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채무불이행은 단지 법적 구제 책만이 아니고, 단순한 정의 구현의 요구를 훨씬 능가하는 처벌 방식이기도 했다. 가혹하기는 하지만, 노예제도로 채무불이행을 처벌한 그리스의 관행보다는 크게 개선된 방식이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형태의 개인적 보증을 요구하는 것은 혁신 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모든 새로운 벤처사업은 상 당한 실패 가능성을 수반하고, 유능한 기업가는 그런 사업에 내 포된 위험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실패한 사업에서 재산을 잃는 것만 해도 충분히 나쁜 일인데 그 과정에서 자유까지 잃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1500년 이후에 영국에서 채무자의 감옥이 폐 지되고 유한책임회사가 탄생한 것은 자본시장의 상황을 크게 개선하고 세계의 경제성장을 촉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17세기는 코크가 관습법으로 왕실의 특권을 무력화한 것으 로 시작하여 영국 의회의 우위를 불러온 처참한 내전의 여파 속 에서 끝났다. 코크의 사법적 우위가 1688년 의회의 내전 승리 의 희생양이 되기는 했지만, 이는 왕실의 몰락으로 인한 이익에 서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않았다.
다음 세기는 존 로크와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사법권 과 의회 권력이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나머지 서구 세계로 전파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국가 권력을 세 개의 가지 행정 부, 입법부, 사법부로 분할하고 제한하는 거의 연속적인 과정에 따라 자유와 재산에 대한 개인의 권리가 강화되었다.
17세기 중반의 영국 내전 당시에 영국인의 재산은 인류 역사 상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했다. 그렇지만 다른 세 가지 요소가 충 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번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 진 200년 동안에 영국은 나머지 세 요소를 확보했고, 19세기의 증기기관과 전신의 발명으로 절정기에 이르렀다. 그 시점에서 영국과 영국의 딸 국가daughter nations들의 이점은 그들을 이전의 세대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의 번영으로 이끌게 된다.
- 1800년경 이전에는 재산이 토지와 동의어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가용한 토지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나 로마제국이 불안정하게 된 것은 그때문이었다. 토 지가 부족하고 비싸짐에 따라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인구가 점 점 더 적어졌다. 이는 사회의 복지에 이해관계가 있는 지주 시 민의 기반을 축소했다. 국가가 번영하려면 상당수의 시민이 재 산을 소유함으로써 국가의 정치적 프로세스에 개인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바로 이해당사자 효과stakeholder effect다. 근대 이전 세계에서 토지가 고갈되어 이해당사자의 기반이 약해진 국가는 종말이 멀지 않은 국가였다.
반면에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는 농업의 집중화로 인하여 불안정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공황 이후의 미국에서 개별 농장의 수가 크게 줄었다는 것-크기는 늘어나고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구조사국이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한 1870 년부터 1935년까지 농장의 평균적 규모가 155에이커였지만, 1987년에는 세 배인 462 에이커로 늘어났다. 1900년에 미국인 의 9퍼센트가 농장을 소유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비율이 1퍼센 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가 한 세기 전보다 덜 안정적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 다. 이유는 간단하다. 후기산업사회의 경제는 시민을 이해당사 자로 만들기 위하여 토지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 무제한적인 비 실물 자산과 자본의 소유권이 토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현대의 자본 소유는 20만 에이커에 불과한 경작지가 25만 인구에게 가용했던 아티카에서 달성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큰 비율의 인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토지의 소유에는 한계가 있지만 자본의 소유에는 한계가 없다.
서구의 근대적 시스템은 주로 영국의 관습법에서 유래하여 1000년 동안 서서히 고통스럽게 조립되었고, 영국의 식민지 개 척의 칼끝에서 그리고 미국의 혁명적 이상주의의 날개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오늘날, 현대 세계 번영의 원천으로서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의 으뜸가는 중요성 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1700년 이전의 중요한 기계적 발명의 목록은 길지 않다.
풍차, 수차, 인쇄기 정도가 거의 전부다. 1700년 이후에는 끊임 없이 증가하는 발명의 급류가 흘러서 인류의 부를 쏟아냈다.
이러한 혁신의 폭발에 박차를 가한 것은 서구인이 자연계를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방식 자체의 혁명이었다. 서구 인과 서구문화 자체가 이러한 과학적 합리주의의 탄생으로 정 의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 혁명은 과학이, 또는 당시에 알려진대로 자연철학이 교회의 뿌리에서 단절될 것을 요구했 다. “인류는 영성과 세속성을 분리하고, 성령의 의도는 우리에 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지, 하늘이 어떻게 움 직이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라는 갈릴레오의 신조를 받 아들이기까지 번영하지 못했다.'
- 서기 1500년까지 수많은 지적인 관찰자들이 프톨레마이 오스 시스템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파도바에 서 그중 한 사람, 프톨레마이오스 시스템의 여러 심각한 결함 을 밝혀낸 도메니코 노바라Domenico Novara를 만났다. 폴란드로 돌아온 코페르니쿠스는 여러 해 동안 의사로 일하다가 마침내 폴란드의 프라우엔부르크Frauenburg에 정착하여 당시의 원시적 인 도구로 하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태양 중심 모델의 장점 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된 그는, 1530년에 완성했지만 사망하기 직전인 1547년까지 출간되지 않았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volutionibus Orbinum Coelestium』에서 태양 중심 우주론을 지지하는 주장을 제시했다.
현대의 믿음과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심각한 결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큰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우선 그 모델은 저자가 사망한 해가 되어서야, 당연히 라틴어로, 출간되었다. 라틴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성직자와 상인 엘리트뿐이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교회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게다 가 필멸의 운명이 곧 코페르니쿠스를 종교재판의 손이 닿지 않 는 곳으로 보냈다. 코페르니쿠스의 조수 안드레아스 오시안더 Andreas Osiander는 자신의 안전을 우려하여 책의 내용이 순전한 가 설임을 선언하는 익명의 서문을 썼다. 그는 지구가 실제로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정함으로써 더 정확한 천문 학 계산이 가능하다고 했다.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행성의 운동, 특히 수성과 금성이 지 구 궤도 안쪽에 있기 때문에 태양에서 각각 28도와 48도 이상 은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프톨레마이오스 모델보 다 더 잘 설명했다.
-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만큼이 나 우아하지 못했다. 문제는 두 모델 모두, 나중에 케플러가 발견 했듯이, 실제로는 타원인 궤도를 완벽한 원형으로 가정했기 때 문에 주전원이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 시스 템에는 세 세트의 궤도와 주전원이 필요했다. 설상가상으로, 코페르니쿠스는 각각의 구체가 내·외부의 이웃과 밀접하게 접 촉하고 전체 우주가 그들의 집합적 두께로 구성된다는 프톨레 마이오스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는 우주에 광대한 공허가 존 재할 수 있다는, 한 세기도 더 지난 뒤에야 토머스 디거스Thomas Digges라는 영국인에 의하여 제안된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지구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서 벗어난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은 프톨 레마이오스 시스템보다도 더 복잡하고 어설픈 시스템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은 실제로 대부분의 천문학 역사에서 자 세하게 설명하지 않을 정도로 복잡했다. 결국 두 모델 모두 동 일한 결함이 있었다. 두 모델의 유연성은 거의 모든 데이터를 수용할 수 있었고 반증이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했다.
과학적 모델에 가치가 있으려면 반증가능 falsifiable 해야 한다. 즉 모델과 모순되는 증거를 쉽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 든지 새로운 데이터에 맞춰서 원과 주전원이 조정될 수 있는 두 모델 모두 그렇지 않았다.
- 16세기의 평범한 유럽인은 1000년 동안 진정한 사회적, 지 적, 또는 과학적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고, 인간의 상황이 보편적으로 정적이라고static 생각했다. 베이컨의 놀라운 천재성은 세 가지를 깨달은 데 있었다. (1) 실 제로 문제가 있었고, 중세인의 상황이 전혀 자연적이 아니라는 것, (2) 연역적 체계가 잘못되었다는 것, (3) 자연계에 대한 지식 과 그에 따른 인류의 복지가 지속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것. 인류의 운명을 개선하려면 낡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를 선 입관 없이 사실을 모은 뒤에 분석하는 귀납적 체계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베이컨은 인간의 상황을 개선하는 다른 방법 - 유용한 지식의 획득을 통한-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아는 것이 힘 이었다. 1603년과 1620년 사이에 그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지 적 동원령intellectual call to arms이 되는 『신기관The New Organon』의 초 고를 완성했다.
『신기관』 1권은 과학에 큰 해를 끼친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다소 장황한 비난이다. "그들은 믿음을 유도하는 데 성공함으 로써 효과적으로 탐구심을 억누르고 멈춰세웠다." 베이컨에 따 르면 문제가 간단했다. 자연의 미묘함이 논증의 미묘함보다 몇 배 더 크기 때문에 실험 데이터와 분리된 빈약한 이론이 현실 세계를 설명하는 일을 해낼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의 관찰 도구 는 심각한 결함이 있고 다양한 유형의 우상idols에 지배된다.
*부족의 우상 idols of the Tribe. 베이컨은 부족을 인류 자체로 정의했다. 이 우상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즉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하는 불량거울 false mirror 이다.
*동굴의 우상 idols of the Cave. 이 우상은 개별적인 남성과 여성이 물질 세계를 인식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다. 여기서 그 는 좀 떨어진 곳에 모닥불이 있는 플라톤의 동굴을 떠올린다. 동굴과 모닥불 사이로 사물이 지나가고, 사람은 동굴 벽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의해서만 그들의 본성을 안 다. 큰 그림자를 본 아메리카 인디언은 들소를 생각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캥거루를 생각한다. 이는 “한 사람의 신성한 암소가 다른 사람의 빅맥Big Mac이다"의 17 세기 버전이다.
*시장의 우상idols of the Market. 이 우상은 서로 간의 교류와 연 합으로 형성되는 아이디어다." 여기서 베이컨은 시간에 따른 단어의 의미 변화를 말하고 있다. 17세기 매사추세 츠에서 마녀라는 단어의 영향력은 오늘날과 달랐다. 간단 히 말해서 유행fashion.
*극장의 우상 Idols of the Theater. 이가장 흥미로운 우상은 비현 idols실적이고 보기 좋은 나름의 방식으로 창조된 수많은 무대연극으로 받아들인 시스템received system의 결과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 시스템이 주된 표적이었겠지만, 베이컨 이 세계의 종교도 겨냥했다는 추측 또한 유혹적이다.
*마지막으로 인간 본성의 결함을 우상의 지위로 올려놓지 는 않았지만, 베이컨은 인간에게 세계에 자신이 발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질서와 규칙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현대 행동심리학의 개념을 3세기 앞서서 홀륭하게 예견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연관성 을 찾아내고 음모를 의심하는 특출난 능력을 갖춘, 패턴 을 찾는 영장류에 지나지 않는다.
『신기관 2권에서 베이컨은 귀납적 추론이라는 자신의 새로 운 방법을 제시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수단 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측정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잘못된 해석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되는, 인간의 감각을 사용하는 일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자에게는 서로 다른 관찰자의 손에서 도 동일한 데이터를 낳는 방법과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일식의 경로에 대한 핼리의 정확한 예측이 대중을 전율시켰다. 그것은 관찰하고 가설을 세운 뒤에 검증하는 베이컨의 귀납 적인 과학적 방법의 승리를 알리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새로운 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추론 체계 를 완파했고, 그에 따라 과학 분야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들 게 되었다.
종교와 과학이 완전히 분리되기까지는 적어도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당시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핼리와 뉴턴은 전능하신 분이 천체 운동의 법칙을 예정해 놓았다고 믿었던 독 실한 신자였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진 실을 믿었다. 예를 들어 핼리는 지구와 혜성의 근접 상봉이 대 홍수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종류의 행성 충 돌이 대홍수의 원인이라 믿었던 뉴턴은 핼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1700년대에 뉴턴의 루커스Lucasian 수학교수직을 계 승한 윌리엄 휘스턴william Whiston은 런던의 대규모 청중에게 천 문학적 사건과 성서적 사건의 연관성에 관하여 강연했다. 뉴턴 조차도 중세기 미신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직 업적 삶과 글의 대부분이 연금술과 관련되었던 뉴턴은 결별하 기 전의 후크와 존 로크를 포함한 과학적 계몽주의의 저명인사 들과 연금술의 비밀에 대하여 활발하게 서신을 교환했다."

- 초창기 경제학자들은 이자율의 중요성을 잘 이해했다. 영국 에서 가장 오래된 경제 옵서버 중 한 사람인 조시아 차일드Josiah Child 경은 1668년에 "오늘날의 모든 국가는 돈의 비용으로 얼마 를 지불하는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얼마를 지불해왔는지에 정 확하게 비례하여 더 부유하거나 가난하다"고 지적했다. 차일드 에게 그러한 관계는 수학적이었다. 기업가가 정해진 금액의 이 자를 감당할 수 있다면, 이자율이 3퍼센트일때 6퍼센트일 때보 다 두 배의 자본이 가용하게 된다. 역사학자 T. S. 애슈턴Ashton은 말했다.
18세기 중반경에 경제 발전의 속도가 빨라진 단일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낮은 이자율에 주 목해야 한다. 깊은 광산, 튼튼하게 지어진 공장, 잘 건설된 운 하, 산업혁명의 집이 비교적 저렴한 자본의 산물이었다.
- 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된 내전이 끝나고, 초청된 영국인 총독stadholder 빌럼 3세willem III가 오렌지 공 윌리엄 william of Orange으로 영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총 독은 지명되고 때로는 세습되는 네덜란드의 통치자라는 네덜란드의 특이한 직위였다.) 빌럼(윌리엄)은 영국에 혼자 오지 않았다. 세계 금융의 수도로서 암스테르담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감지한 베어링 Barings 가문과 호프 Hope 가문을 비롯한 금융 엘리트들이 그를 따 라 북해를 건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에 쫓겨서 포르투갈을 거 쳐 네덜란드로 갔던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인도 집단 으로 런던에 도착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리카도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포르투갈 계 유대인 이민자였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네덜란드인의 아이디어도 왔다. 영국인들은 열광적으로 네덜란드 금융을 복사했고, 17세기의 파괴적인 내전 이후 불과 수십 년 만에 영국의 자본시장이 네덜란드를 능가하게 되었다. 당연히 기존의 금융업자와 신참자 사이의 마찰도 생 겼다.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는 불평하는 시를 썼다.
우리는 왕이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비난하네
낯선 사람들, 독일인, 위그노 교도, 네덜란드인
자신의 공정한 국사에 대하여
영국의 의원들과는 거의 소통하지 않고
- 명예혁명 이후에 영국의 재정 상황이 빠르게 개선되었다. 첫째로 왕실이 의존하던 단기 부채가 이자지급과 원금상환이 소비세로 뒷받침되는 네덜란드식 장기 정부부채로 대체되었 다. 다음으로 영국 재무성이 투자 대중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지 는 (즉, 이자율을 가장 낮출 수 있는) 부채를 결정하기 위하여 다양한 종류의 부채를 실험하면서 은행업계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의 회의 우위는 신뢰를 회복했다. 성공적인 사업가들이 하원을 가 득 채웠다. 정부의 채무불이행으로 피해를 입을 의원들로 구성 된 의회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마 지막으로 1749년에 헨리 펠럼 Henry Pelham 재무장관이 잡다하고 혼란스러운 정부대출을, 베네치아의 강제대출과 네덜란드의 영구연금처럼 만기가 없고 영구적으로 이자가 지급되는, 콘솔consols이라는 유명한 채권으로 통합했다. 콘솔은 오늘날에도 런 던에서 거래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국가대출이 상업대출과 무관하게 보이지만, 정부부채의 건전한 시장은 실제로 기업의 자금 조달에 필수적 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정부의 신용도가 널리 알려져 있고 부채의 거래량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정부부채는 가격을 책정하고 판매하기가 가 장 간단하다. 상업자본의 가격 책정과 판매의 메커니즘이 정부채권 및 어음과 동일하므로, 상업적 부채시장이 원활 하게 기능하기 전에 성공적인 정부부채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근대 이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정부부채가 기업가 에게 자본을 공급하기 위한 보조 바퀴training wheel 역할을 했다.
*정부 부채는 위험이 없는risk-free 투자에 대한 필수적 벤치 마크를 제공한다. 활발하게 거래되는 정부채권과 어음이 상인과 기업가에게 완벽하게 안전한 사업에서 요구되는 수익률의 지속적인 척도를 제시한다. 이것이 위험 할증 risk premium, 즉 대출의 위험성 때문에 이자를 추가로 요구 할 수 있는 기준선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펠럼이 정부 부 채를 통합했을 때 콘솔의 이자율은 3퍼센트였다. 이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차용인, 즉 1688년 이후의 영국 왕실에 제공할 수 있는 최저 금리에 해당했다. 따라서 다소 위험 한 상업적 벤처사업에는 6퍼센트, 투기적 사업에는 10퍼 센트 이상의 이자율이 요구될 수 있었다. 위험이 없는 대 출에 대한 손쉽게 관찰할 수 있는 이자율(정부 채권의 금리) 의 존재는 기업가에 대한 대출의 가격 책정을 더 쉽게 만 든다.
- 그렇다면 왜 네덜란드인,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은 이자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저축을 은행으로 가져갔는데 프랑스인, 독 일인, 인도인, 그리고 터키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배젓은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한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국가적 거버넌 스governance의 근대 이전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터키의 자본시장과 재산권의 결핍 때문에 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자신의 재산을 손 닿는 곳에 둘 수밖에 없었음을 상기하 라. 오스만제국의 부패,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보편적 상황, 오 늘날 다수의 비서구권 국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개인 재산의 보호가 없었거나 없는 곳에서는 혁신에 대한 인센티브가 없다. 설령 그런 미개한 땅 어딘가에 가슴이 뛰는 발명가가 있더라도 자신의 창조물을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는데 필요한 자본이 존 재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모든 자본이 매트리스 밑에서 얼 어붙거나 금은 보석 장신구로 착용되고, 가장 중요하게는, 개인 금고 특히 황제의 금고에 보관된다.
이슬람의 이자 금지는 투르크인의 추가적인 약점이 되었다. 이자가 없으면 대출도 없고, 대출이 없으면 투자도 없다. 알리 파샤가 최후를 맞은 레판토 해전 당시에 서구에서는 이러한 제 한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무슬림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서 구에 비해 저조한 경제 상황이 주로 재산권과 자본시장의 초보 적 상태에 따른 결과였다. 터키 최초의 은행이-유럽인에 의하 여-설립된 1856년 이전의 오스만제국에는 우리가 아는 사유재투르크인에 대한 역사의 판단은 아마도 레판토 해전에 참전 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을 세르반테스의 말로 가장 잘 요약된다. "투르크인이 천하무적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전 세계가 알게 되었다." 투르크인은 그런 운명을 겪은 국가의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꺽이지 않을 것 처럼 보였던 다른 국가-17세기의 스페인과 소비에트 연방이 빠르게 떠오른다들이 자유 시민권과 기능을 발휘하는 시장의 부재로 인하여 결국 쇠락함에 따라 세르반테스의 말이 시대를 관통하는 메아리가 되었다.
- 증기기관에 의한 운송량의 증가는 기본적인 세 가지 경제적 투 입물-토지, 자본, 노동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시장을 평준화 equilibrate 하기 (균형을 맞추기)에 충분했다. 상품과 노동력이 쉽게 이동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국가 간에, 심지어 이웃한 도시 간 에도 상품 가격과 임금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 이는 불균등한 토지 가격을 낳고, 효율적인 통신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 에는, 투자의 수익까지도 장소에 따라 크게 달라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가격 불균형이 적절한 해상 운송 수단이 부족했던 1870년 이전 세계의 경제 상황이었다. 영국에는 토지가 부족하 고 미국에는 풍부했기 때문에, 토지 가격과 그에 따른 식량의 가격이 영국에서 훨씬 더 비쌌다. 반면에 영국에는 노동력이 풍부 하고 미국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의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이 미국의 노동자보다 훨씬 적었다. 따라서 임금이 낮고 물 가가 높은 영국에서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구매력이 미 국의 노동자보다 훨씬 낮았다. (자본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자본이 미 국보다 훨씬 더 풍부했기 때문에 영국 자본의 수익률이 미국보다 낮았다.)
증기선의 출현이 미국과 영국 사이의 가격과 임금 차이를 평준화했다. 1870년에 런던의 쇠고기 가격이 신시내티보다 93 퍼센트 더 높았지만, 1913년에는 차이가 18퍼센트에 불과했다. 두 시점 사이에 토지의 임대가 미국에서 171퍼센트 증가했고, 영국에서는 똑같이 극적인 토지 가격의 하락과 함께 50퍼센트 감소했다.
두 나라의 상품 가격, 토지 가격, 임대료가 평형상태에 도달 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 임금도 균형을 이루었다. 이는 단순히 미국의 값싼 식품 가격의 결과가 아니었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더 쉽게 미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영국 현지의 노동시장이 위축 된 결과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더 나은 정보와 운송 수단이 더 수익성 높은 해외 투자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영국 자본의 수익률이 개선되었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 는 임금과 상품 가격이 국가 간에 균일하게 수렴하는 경향이 있 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런 방향으로의 첫 번째 거대한 발걸음은 증기 동력이 세계의 대양을 가로질러 상품과 인력을 대량으로 이동시킨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
- 1825년부터 1875년까지 반세기 동안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 식에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더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의 시대가 유례없이 급속한 기술적 변화 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진실에서 멀리 떨어진 생각은 없 을 것이다. 두 세대 전의 평균적인 시민이라면 컴퓨터, 제트 여 객기, 심지어 인터넷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서 1820년대부터 1875년까지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 은 반 세기만에 이루어진 철도 여행의 빠른 속도와 즉각적인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을 목격하고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인류 는 1825년 이후의 수십 년 동안과 같은 힘과 속도로 미래로 들 어선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 무엇이 19세기 초의 혁명적 변화와 이후 200년 동안 휴식의 신호도 없이 꾸준하게 지속된 부의 성장을 촉발했을까? 비유를 확장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나는 1800년까지의 서구 경제가 점점 불어나는 잠재력이 축적되는 저수지의 댐dam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 저수지reservoir에는 마그나 카르타에서 시작하여, 에드워드 코크와 후계자들의 탁월함에 힘입어 확대되고, 독점 권과 특허를 관장하는 법령과 판례법으로 보강된 영국의 관습 법이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과학적 계몽시대의 눈부신 지적 진 보와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영국인이 이루어낸 자본 시장의 순차적인 개선도 있었다.
이러한 성취가 실제로 개인의 웰빙을 개선했지만, 그 속도는 빙하의 움직임처럼 느렸다. 1500년과 1820년 사이에 평균 적인 서유럽 국가의 1인당 GDP가 연평균 약 0.15퍼센트의 비 율로 성장했다. 재산권의 강력한 보호가 장인들을 혁신으로 이끌었고, 과학적 합리주의가 그들이 작업할 도구를 제공했으 며, 자본시장이 그들의 경이로운 발명품을 개발하고 생산할 자 금을 공급한 것은 사실이다. 부족했던 것은 공장을 가동하고 상 품을 운송하기 위하여 필요한 물리적 동력과 전체 프로세스를 조정하는데 필요한 통신의 속도였다.
증기기관과 전신의 발명은 말하자면 댐에 구멍을 뚫어서 유 례가 없는 경제성장의 급류를 풀어놓았다. 그 댐은 결코 재건될 수 없고, 서구의 성장도 가까운 미래에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이제 1500년 이후 네덜란드의 놀라운 번영의 원천이 분명해진다.
*영국인에만 비견될 수 있는 강력한 재산권을 누린 국민. 
*종교개혁에 힘입어 네덜란드인이 교회의 도그마에서 벗 어난 것. 네덜란드의 종교적 관용성이 초기의 여러 개신 교 국가, 특히 독일에 상처를 준 과도한 분열주의에서 네 덜란드를 구해냈다.
*낮은 이자율과 강력한 투자자 보호로 활성화된 네덜란드 자본시장의 풍부한 투자 자금.
*쉽고 저렴한 수상 운송의 이점이 있는 평탄한 지형.
- 네덜란드가 쇠퇴한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복잡하다.
첫째, 이미 살펴본 것처럼, 네덜란드인은 1인당 기준으로 막대한 부를 소유했지만, 경쟁국의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인구 증가율이 덩치 큰 경쟁자보다 훨씬 낮았다. 1700년에 네덜란드 인구가 190만에 불과했던 반면에 프랑스는 2150만, 영국은 860만이었다. 적은 인구 때문에 네덜란드의 총 GDP는 영국의 40퍼센트나 프랑스의 20퍼센트를 한 번도 넘지 못했다. 10
둘째, 네덜란드의 국내외 상업 활동에 관한 모든 논의에 반 드시 독점이라는 단어가 포함된다. 네덜란드인은 동인도의 향 신료 무역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당시의 가장 악명높은 외교적 분쟁의 하나가 암본Amboina 섬(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의 영국인 정착 지 파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네덜란드인이 영국인 정착민을 고문한 사건이 수십 년 동안 영국과 네덜란드의 관계를 악화 시켰다. 네덜란드 자체에서도 독점이 상업 활동을 방해했다. 예 를 들어 네덜란드 정부는 단일한 회사에만 항해 지도를 제작할 권한을 부여했는데, 그러한 조치가 1880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셋째, 네덜란드의 번영은 근대 서구의 거대한 부를 창조한 엔진인 기술 발전에 의존하지 않았다. 주마다 특허 시스템이 있 었지만 현저하게 활성화되지 못한 시스템이었다. 그 기간에 조 선 업체들이 플루트 선박fluit ship 같은 실질적 기술 발전을 이루 기도 했지만, 네덜란드의 기술 혁신은 대체로 산발적이었다. 17 세기 중반 황금시대의 절정기에 정부가 1년에 10여 건의 특허 를 부여했고, 1700년 이후에는 해마다 몇 건의 특허밖에 인가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무역, 특히 환적을 위한 곡물과 새로운 풍력 제재소에서 가공할 목재를 공급한 발트해 지역 의 무역에서 비롯되었고 수익성 높은 동인도 무역이 현금의 흐 름을 보충했다.
넷째, 네덜란드의 금융은 약간 지나치게 성공적이었다. 정부 가 아주 쉽게 자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었던 네덜란드는 18세 기에 빚더미에 파묻히게 되었다. 정부가 소비세로 차입을 뒷받 침했기 때문에 세율도 상승했다. 인상된 소비세율이 물가와 금의 상승으로 이어졌고 네덜란드 상품과 서비스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의 정치 체제는 위험한 대륙의 가장자리에 있는 느슨한 정치연합에 속한 7개국의 반자치 국가로 분 열된 체제였다. 강력한 중앙은행과 활기찬 국가 특허 시스템의 부재가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분명했다. 미국 건국의 아 버지들은 이러한 교훈을 잊지 않았다. 18세기 네덜란드의 분권 화된 기구와 그에 따른 애석한 정치적 운명이 미국의 헌법 논쟁 에 참여한 연방주의자들에게 객관적인 교훈을 제공했다. 그들 은 네덜란드가 정부의 무능, 주 사이의 불화, 외국의 영향력에 따른 수모, 위태롭게 유지된 평화,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특별 한 재난에 시달린 것을 보았다."
18세기 네덜란드 경제는 일방적(opsided인 경제였다. 활기차 고 수익성 높은 무역 부문에서 국내 경제가 흡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창출된 자본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술 발 전과 독점에 따른 제한으로 인하여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 결과 남아도는 막대한 투자 자금이 꾸준하게 국내의 이자율을 끌어 내리고, 네덜란드 제조업이 국제적 경쟁력을 잃을 정도로 국내 의 물가와 임금을 끌어올렸다.
네덜란드는 가발 periwig 사회가 되었다. 주로 투자소득으로 연 명하고 생산을 거의 하지 않는 인구의 비율이 점점 늘어났다. 잉 여 자본의 상당 부분이 해외, 특히 미국에 투자되어 미국 독립전 쟁 부채의 10~20퍼센트를 네덜란드인이 보유하게 되었다." 국가로서의 세계적 중요성이 끝나가는 작은 나라가 나머지 세계에 그렇게 많은 자본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8세기 말에 네덜란드가 외채 수입에 의존하게 된 것은 저 주와도 같았다. 미국의 부채 상환이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겨우 보장되었지만 다른 채무국 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포함한 여러 국 가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서 네덜란드의 손실이 눈덩이처 럼 불어났다.
- 모든 국가에는 수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수입을 확보하는 방식이 종종 국가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오늘날에도 아프리 카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공직과 독점권의 판매가, 그에 따르는 경쟁과 성장의 저해와 함께, 너무도 손쉬운 정부의 수입 원을 제공한다. 근대 이전 시대의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러한 함 정에 곤두박질쳤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영국과 네덜란드도 조달하는 자 금과 독점권을 교환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들은 시간이 가면서 모두에게 부과되는 소비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1700년 이후의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부로 향하는 길이 더 이상 정부 부서를 거치지 않았다. 시민들은 제조업, 상업, 또 는 무역에 종사함으로써 점점 더 부유해졌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무역회사는 독점적 지위의 혜택을 누리 는 특권의 대가로 상당한 위험을 부담했다. 제한적 독점권을 부 여하는 오늘날의 특허법도 발명가가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수반한다. 어쨌든 1624년의 독점법이 영국에서 왕실이 자의적으로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행을 거의 종식시켰다. 반면에 프랑스 는 혁명 이후까지도 독점권을 축소하지 않았다. 이 두 사건 사 이에 있는 174년의 간격이 프랑스의 경제적 번영이 뒤처진 이 유를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 엄밀한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지주와 소작인으로 이루어진 소유권 시스템은 매우 효율적이다. 농업 생산을 개선하려는 지 주의 인센티브가 자작농의 인센티브와 동일하다. 게다가 지주 에게는 토지를 개선하기 위한 자본이라는 월등한 자원이 있다. 지주가 지배하는 체제에서 일본의 농업 생산성이 유신 이후에 급속하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는 일본의 소작인과 지주의 갈등이 재앙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이 더 부 유해졌다. 지주 계급이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기반을 형성한다고 믿었던 맥아더의 점령군은 지주 계급의 파괴에 착수했다. 대 지주의 토지가 전쟁 이전 가격으로 보상되었다. 전후에 만연한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떨어진 엔화로 지급된 토지 보상은 몰 수나 다름없었다. 평균적 농장의 규모가 2.5에이커인 국가에서 10에이커 이상을 소유한 사람은 모두 대지주로 간주되었다.) 7475 소작인과 소작농 이 부유한 지주보다 우리의 동정을 더 많이 이끌어낼 수는 있지 만, 맥아더의 토지개혁이 부동산 시스템에 실질적인 폭력을 가 한 것도 사실이다. 라이샤워가 신랄하게 말했듯이, 혁명적인 개혁은 남의 나라에서 하기가 더 쉽고 재미있다." 일본의 토지개혁은, 사회적·정치적 결과가 무엇이었든 간에, 결국 경제적으 로 중요하지 않았다. 점점 더 산업화하는 국가에서는 토지의 소 유구조가 중요성을 잃는다.
맥아더가 일본인에게 남긴 마지막 교훈은 자유민주주의 체 제에서 법치주의가 발휘하는 놀라운 힘을 자신도 모르게 보여 주게 된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그를 해임 했다. 일본인들은 보잘것없는 민간 지도자의 신랄한 편지가 그 토록 강력하고 존경받는 전사를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의 군사적 우산 덕분에 일본이 GDP의 1퍼센트만을 국방비로 지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의 첫 40년 동안의 자본과 인력에 대한 압도적인 군사적 요구 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가 성장한 것은 진정한 일본의 기적 이었다. 군국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난 일본의 경제는 2차 세계 대전의 잿더미 속에서도 힘차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요약하자면, 전후의 급성장은 여러 가지 평범한 요인의 필 연적인 결과였다.
*일본인은 나머지 세계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30년간의 전 쟁과 경제적 재앙을 겪은 궁핍한 상태였다. 용량을 훨씬 밑도는 수준으로 산업이 돌아가고, 자본이 소비로부터 공장과 장비를 복구하고 현대화하기 위하여 전용되어야 할 때, 그 결과는 활발한 경제성장이 된다.
*미군의 주둔이 강대국을 가장 확실하게 탈선시키는 악마 의 손아귀 -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서 일본을 해방시켰다.
*맥아더가 도착하기 70년 전에 일본인들은 원시적이지만 적절한 재산 제도를 확립하고 서구식의 과학, 자본시장, 운송과 통신을 채택했다.
근면, 절약, 문해 능력을 강조하는 일본의 문화와 맥아더가 수입하기 전에 50년이 넘는 의회민주주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 도 도움이 되었다.
- 떠오르는 태양
1980년대에는 일본이 세계를 지배할 때까지 일본의 경제성장 이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1960년대에 나머지 선진세계가 전후 일본의 기적의 독일판인 라인강의 기 적을 초조하게 지켜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진지한 가능성이 결 코 아니었다. 첫째, 일단 재산권과 법의 지배가 확립되면 침체된 경제가 저절로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경 제의 성장이 지속되기는 훨씬 더 어렵다. 둘째, 제도의 축복은 일회성이다. 재산권과 법의 지배가 확립되고 나면 다른 영역에 서 성장을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부유한 일본의 방위 를 보조하는데 빠르게 지쳐가고 있다. 머지않아 일본은 자국의 군사적 필요를 적절하게 충족하려는 열망을 되찾을 것이다. 일본이 다시 한번 지나치게 잘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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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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