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과정이다.
겨우 네 번째 계단에 이르러서 제일 높은 곳에 왔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더 높이 올라갈 기회를 잃은 것이다.
다섯 번째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네 번째 계단을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 틱낫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 가진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기존 지식이 새로운 지식에 이르는 길의 장애물이 되기 십상입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기존에 알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기꺼이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더 큰 것을 얻게 됩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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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성공이란 곧, 자금의 흐름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임. 사업을 막 시작했을 때는 기대했던 것처럼 돈이 들어오지 않을수도 있음. 따라서 사무실에 첨단시설과 멋진 비품을 갖추거나 불필요한 인력을 고용하는 일은 철저하게 피해야 한다. 앞으로 그런 비품과 인력을 가질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멋진 비품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사업체는 계속 생존할 수 있지만, 온갖 멋진 비품이 가득 찼어도 사람이 없는 사무실은 경매를 기다릴 뿐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됨
- 공동구매에 있어서는 가장 치열한 경쟁업체도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최상의 협력업체가 될 수 있다. 주변의 경쟁업체들은 한번 찬찬히 살펴보라. 이들과 협력하면서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까?
-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때 항상 큰 업체부터 찾는 일은 피해야 함. 그 대신 같은 물품을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는 중소업체를 찾아봐야 함. 사무용 문구류 구매에서 대형업체보다는 중소규모 업체의 문구류 값이 훨씬 저렴함
- 추장은 많은데 따르는 인디언은 별로 없다. 빈둥거리면서 결재나 하는 간부나 중역은 많은 대신, 실제로 바깥에서 발로 뛰는 직원들은 별로 없는 그런 회사나 사업체를 비꼬는 말이다. 이런 조직은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관리단계가 층층이 겹쳐 있어 의사결정도 더디다. 의사결정 단계에 있는 간부들이 저마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거나 정당화시키기 위해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발언권을 행사하려들기 때문. 만약 사업체의 관리단계가 너무 두텁다면 이를 축소하는 것이 마땅함
- 고객업체의 신용상태를 알아본 결과 외상거래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면 거래가 끊기더라도 당연히 외상거래를 해서는 안됨. 나중에 겪을 골치아픈 일이나 추가비용부담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거래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런 고객과 거래를 했다가 결과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결국 수금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게 되고, 그런 비용이 거래했을 때의 실제 이익보다 큰 경우가 많기 때문. 따라서 이런 고객과는 거래를 포기하고 제때 결제할 수 있는 고객을 찾는 데 시간과 경비를 들이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지금가지 수금하기 어려운 부실채권인 쌓여 기업이 부도났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고객의 외상거래 요구를 거절하는 바람에 기업이 망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 사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호화스런 생활을 해야 하는가? 상당수의 성공한 기업들은 여전히 소박하고 수수한 모습을 간직하면서도 뛰어난 제품을 생산하고 남다른 서비스를 제공하여 더욱더 높은 이윤을 얻고 있다. 치장하지 않으면 비용은 줄어든다. 즉 추한 것이 이윤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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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놈들이 온다

경영 2020. 7. 27. 19:54

- 대중에게 더 많은 물건을 팔기 위해 우리 모두를 보편적인 정상의 범주로 몰아넣는 선택은 비효율적이고 방향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이 핵심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기회를 잡으려면 튀는 자를 지원하고, 튀는 자에게 물건을 팔고,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도 튀는 자, 즉 변종이 되어야 한다.
- 지금 우리에게 처한 싸움은 남녀 사이의 싸움이 아니다. 좌파와 우파 간의 싸움도 아니다. 양키스와 레드삭스 간의 싸움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세대에서 벌이고 있는 대대적인 싸움은 대중의 현상 유지와 변종의 끊임없는 쇄도 사이의 싸움이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기란 어렵다. 대중과 현상 유지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쪽을 선택해 그 속에서 자기 위치를 잡고자 노력하든가, 아니면 그 같은 탐색을 피하고 튀는 자들을 상대로 시장을 개척하고 이끌면서 더 좋은 기회와 성장이 있음을 깨닫던가,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 20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개념은 다른 무엇보다도 대중이었다. 대 중은 우리에게 효율성과 생산성을 선사했다. 대중은 (일부의)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대중은 우리에게 거대한 국가를 제공했고, (일부의) 우리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대중은 권력자들에게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만들어주었고, (일부의) 우리에게 통제권도 허용했다. 그런데 지금 대중이 죽어가고 있다. 종종 대중이 대화, 상업, 정치를 장악하기 위해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반격하는 모습을 목격하 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은 실패할 것이다. 반드시 실패해야 한다.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우리 문화를 이끄는 엔진이었던 대중은 이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중을 찾아다니고, 대중이 사용하는 물건을 만들고, 대중을 상대로 제품을 판매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중의 종말 현상을 대단히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종말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대중이 사라진다고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다. 단지 하나의 거대한 변화일 뿐이다. 우리는 대중의 종말에 대한 선언을 통해서 그것이 의미하는 또 다른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정말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마케팅 전략은 '가져가거나 말거나'다. 가난하다는 것은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상품 제공자의 손에 달려 있다. 가난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상품은 생필품이므로 마케팅의 방향은 전적으로 '이거 갖고 싶지?'로 좁혀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쌀과 콩밖에 살 수 없다면, 쌀과 콩 이외에는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없다. 우리가 변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을 여유가 많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가난한 나라가 부유한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는 방법도 달라졌다.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제아무리 가난한 나라라 할지라도 선택권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즉 '가난' 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도 자기 일과 자기가 일하는 방식에 대한 통제권을 원한다. 선택권이 주어지면 사람들에게 여유가 생긴다. 국제 개발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이 개발도상국 사람들도 당연히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들이 선택권을 원한다는 데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말과는 정반대다. 그들이 가장 쉽게 취하는 반사적 행동은 가난한 나라가 필요한 것을 결정하고 나면 구호품을 대형 컨테이너로 실어 보내거나 트럭으로 신고 가서 나눠주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선택권이 주어지면 선택한다. 이러한 모습은 더 많은 곳에서 발견된다.
- 변종의 특성이라는 불꽃이 피어오르면, 마케터는 부채질을 해 그 불꽃을 키운다. 불꽃은 다시 시장으로 옮겨붙는다. 그러면 시장은 더욱 변종을 위한 곳으로 확장되고, 이는 또다시 마케터를 자극하게 된다. 이러한 순환은 계속된다. 이를테면 미국의 오디오 전문잡지인 <스테레오필>에는 미터당 1,000달러인 3미터짜리 스피커 케이블 광고가 실렸다(물론 한 쌍 가격 이지만 그래도 비싸다). 광고주는 오디오 마니아인 변종들과 그들의 이 해할 수 없는 값비싼 취미에 관한 기사가 가득한 잡지에 광고료를 낸다. 잡지기사는 독자의 취미를 더욱 유별난 방향으로 부추기며, 오디오 제조업체는 더 이상한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반응한다. 중고품 시장에서도 이러한 순환은 이어진다. 오디오곤닷컴은 주머니 사정은 궁한 편이지만 유별난 기호에 대한 열정은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음악 마니아들을 위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신제품 가격의 절반으로 중고기기를 거래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자유게시판에서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 성공의 공식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바뀌었다. '틈새'라고 부르는 것을 찾아 연료를 공급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성공한다. 미국의 대형 음반 판매 체인점 타워 레코드Tower Records는 다양성을 향한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결국 영영 사라졌다.
- 우리가 누구한테 가장 큰돈을 지불하는지, 누구를 고용하고자 하는지, 누구를 칭찬하고 따르고 모방하는지 생각해보라. 그들 은 모두 아웃라이어로 성장한 사람들, 즉 다름 아닌 변종들이다. 그들이 학창 시절에는 정상에 속하는 학생이었다가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 스스로 변신해서 첼리스트 요요마, 창조 경영의 아이콘이며 버진그룹의 창업자인 리처드 브랜슨 같은 인물이 되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수많은 아웃라이어들은 놀랍도록 공통점이 많다. 그들은 학교에서 강요하는 순응적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싸우고, 감내하고, 마침내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은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있다.
- 내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간단하다.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몰아붙이는 데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대신, 아이들이 가진 특출한 재능을 찾아내어 격려하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아이에게 맡기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 행복과 가장 관련성이 높은 것은 무엇일까? 돈인가? 사주팔자인가? 아니면 매력인가?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논문에 따르면, 행복과 가장 상관관계가 높은 요소는 변종이 될 수 있는 능력, 선택의 자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능력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얼마를 벌고 어디에 살며 어떤 인종이든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면 더 행복해진다. 청바지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반드시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곳에 살고, 자기가 느끼는 것을 말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사람들을 더 기쁘게 만들어준다.
- 지난 수천 년 동안 리더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순응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자신들의 규칙을 강요해왔다. 고대 신화 속 이야기들은 강력한 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신은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다. 인간은 목숨을 내놓지 않는 이상, 신을 무시할 수 없다. 지도자들이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다음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대중에게 '정상'을 수용하도록 강요하고 규칙에 순응하라는 사회적 압력을 조장한다. 만일 효율적 인 사회라는 것이 권위를 따르는 시민들이라고 정의된다면,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극소수의 권력자가 만든 규칙을 따를 때 비로소 보상을 받는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황제와 군주, 루이 16세 같은 왕들은 '정상'의 개념과 '내부자'가 되는 개념을 내세우며, 사람들이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 권력과 명령, 규칙과 순응의 장점을 발견한 마케터들도 비슷한 길 을 걸었다. 그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만 실행함으로써 (곡선의 중간에 속한 사람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사회를 중앙으로 몰아붙이는 낡은 개념을 고수했다. 민주주의가 지도자들에게 권력의 지위를 넘겨주자 새롭게 당선된 지도자들도 똑같은 일을 했다. 그들은 중간에 속한 사람들을 상대로 선거 운동을 펼쳤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몰아붙여 보상을 얻었다. 오늘날 탈공업화 시대와 인터넷은 다른 종류의 권력을 키웠다. 다양한 사일로와 규모는 작지만 더 견고해진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이제는 집단화되는 대신 세분화될 때 보상을 받는다. 또한, 선택권이 주어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기회를 붙잡고 있다. 즉, 이제는 누구나 변종이 될 수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 물론 곡선의 중심부에는 아직도 과거의 낡은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기준에 순응하던 시절로 돌아가자고 사회를 향해 외치고, 강요하고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자기 눈에 이상해 보이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범죄라고 선고하는 대법관도 존재한다.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내는 직원을 해고하는 회사도 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을 만한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독재자도 존재한다. 하지만 똑같은 기준에 순응하기를 강요하는 반동가들은 지금 힘든 싸움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1492년 스페인의 토르케마다 Tomas de Torquemada(유대인 등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화형에 처한 스페인의 초대 종교 재판소장)가 될 수 없다. 아이디어가 쉽게 확산하고, 이동수단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마케터들이 대중이 아닌 틈새시장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이 시대에 엄격한 현상 유지를 강행하는 일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혁명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다. 그중 매우 중대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대중이 중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있는 개념이다. 개인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렌즈를 생각해보자. 이제 우리는 없다. 대중도 없다. 중심도 없다. 우리 문화는 부족들의 집합체이며, 각 부족은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커뮤니티다. 구성원들끼리 잘 지내는 부족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부족도 있다. 우리는 모두 의사소통 방법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동일한 서너 개의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똑같지 않다. 우리는 다양한 선택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전까지는 오로지 선택권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권에 변화를 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틈새시장은 없다. 대중도 없다. 부족에 합류하거나, 부족을 키우거나, 부족에게 물건을 팔 사람들을 찾느라 애쓰는 부족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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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력 르네상스는 기후변화에 대응하여 이산화탄소 감축 의무를 손쉽게 달성하려는 정치적 주장에 불과하다. 실제로 전 세계적 으로 원자력 증가율은 둔화되고 있다. 원자력산업이 다시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 반세기 전 원자력에 열광하게 만들었던 원자력의 무한에너 지 신화가 다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즉 원자력 르네상스가 아닌 바로 원자력 신화의 르네상스이다.
- 1950년대 핵에너지가 제시하는 무한에너지에 대한 꿈은 1960년대 서구 선진공업국을 중심으로 원자력발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차 츰 무너져갔다. 반세기 전에는 인류가 직면한 모든 에너지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았던 원자력이 지금은 전력 생산의 일부 2008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약 16%만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단지 31개국에 서만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원자력 설비 용량 상 위 6개국 미국, 프랑스, 일본, 독일, 러시아, 한국이 전 세계 원자력 용량의 73%를 차지한다.
- 원자력 신화가 만들어내는 위험은 바로 공급 위주의 에너지 정책을 더욱 고착화시켜 에너지 수요관리, 즉 에너지 절약 및 에너지 효율성 향상과 신재생에너지에 기반한 에너지전환을 어렵게 한다는 데 있다. 정치학자 레온 린드버그는 공급 위주의 경직된 에너지 정책이 에너지 위기의 원인이며, 이러한 에너지 위기가 세계경제의 불안을 초래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에너지 위기는 외부적으로 우연히 발생 하는 충격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공급 위주의 에너지 정책이 예견하지 못한 당연한 결과이다. 에너지 소비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공급을 지속 적으로 증가시키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 이른바 '에너지 신드롬' 이다. 이 에너지 신드롬으로 인해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하는 데 막대한 자본 을 투자함으로써 경제적 효율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고 한정된 예산 하에서 다른 공공부문에 투여될 공적 자금을 감소시킨다. 또 공급 위주의 에너지 정책은 에너지의 수요관리와 에너지 절약의 필요성을 약화시켜, 에너지 자원이 고갈되고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는 상황에서도 에너지 소비 감소를 어렵게 만듦으로써 경제적 불안정성을 더욱 가중시킴
-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과 관련해 이야기되고 있는 '원자력 르네상스'는 그 실체가 없다. 발전업체가 신규 원자력 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현 실이야말로 원자력산업이 다시 부흥한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원자력산업의 르네상스가 아니라 오 히려 원자력 '신화' 의 르네상스이다. 원자력은 미래에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할 것이라는 50년 전의 원자력 신화가 4세대 원자로, 핵융합, 원자 수소라는 옷을 입고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신화는 현재 원자력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직시 하지 못하게 하며, 오히려 기후변화에 대한 현재의 대안적인 전략 구상 을 위협한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공급 위주의 에너지 정책을 더욱 고착화시켜 에너지 위기를 가중시킬 위험이 크다.
- 세계원자력협회 World Nuclear Association의 전략 및 연구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스티브 키드Steve Kidd(2005) 조차도 향후 원자력을 확대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난관은 바로 신규 원전 건설을 위한 재정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원자력이 동일한 규모의 열병합발전과 비교할 때 경제성이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선진공업국에서 신규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즉, 원자력에 대한 정치적 반대 여론, 발전소 건설 지연에 따른 비용초과 문제, 발전소부지 확보와 관련된 소송, 핵폐기물 처리 문제 등 이른바 원자력에 대한 나쁜 평판이 신규투자를 어렵게 하고, 이로 인해 민간 자본시장에서 원전 신규 투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높은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한다. 그래서 스티브 키드는 원자력에 따라붙는 나쁜 평판을 없애기 위해 핵폐 기물 처리 문제에 대해 국가 책임규정을 보다 명백하게 만들고, 원자력 발전소 건설 지연을 막기 위해 건설 허가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제도를 보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스티브 키드의 제안대로 제도를 보완하 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핵 확산, 테러, 핵폐기물 처리 문제와 관련된 위험을 고려한다면, 온실가스를 20% 감 축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도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원자력을 확대해서 기후 변화에 대응해야 할 만큼 우리에게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 세계원자력협회의 스티브 키드가 원자력 쇠퇴의 원인을 경제성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제도라고 주장한 반면, 미국의 저명한 에너지학자 인 아모리 로빈스Amory Lovins는 급변하는 전력 시장에서 원자력의 가장 큰 도전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원자 력은 마이크로 발전인 분산형 신재생에너지와 열병합발전, 그리고 네 가와트 수요관리를 통한 에너지 절약와 같은 에너지소비 효율을 증대시키는기술과 비교할 때 경쟁력이 떨어지는 에너지원이라고 주장한다(Lovins, 2005), 아모리 로빈스에 따르면, 대부분의 원자력 옹호론자들이 신재생 에너지나 효율적인 전력소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필요 성을 여전히 대형 발전소를 보완하는 기능으로 국한시키고 있다. 또 그들은 분산형 소형 발전이나 네가와트negawait 기술은 여전히 규모가 작 고 불확실하며 시장에서 성장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지배적인 에너지원이 될 수 없고, 세계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중앙 집중적인 대형 발전소가 필요하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 원자력이야말로 대규모로 깨끗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발전원이라고 주장한다. 아모리 로빈스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소형 발전소가 원자력보다 더 빠른 추세로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원자력 옹호론자 들은 이 사실에 눈을 감고 있다고 말한다.
- 화석에너지, 핵에너지에서 에너지체제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함 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독일의 헤르만 셰어는 자신의 저서 『에너지 주권』에서 기존의 거대 에너지원(화석연료, 핵에너지)은 그동안 많은 특혜 를 받아왔으며, 재생에너지로의 전환과정은 이들 기득권 에너지원과의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에 회의적이고, 그 경제성 에 의심을 갖는 많은 이들은 그동안 화석에너지와 핵에너지가 기득권 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가 있었는지를 간과하고 있다고 함께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발전차액지원제도(재생에너지로 발전 했을 때 기존 전기생산액과의 차액부분을 정부가 보존해주는 것)와 같은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은 매우 당연하며, 원자력발전과 화석에너지가 갖고 있지 못한 지속가능성을 갖고 있는 재생에너지를 지원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밝히고 있다. 원자력발전의 연구개발 비용은 흔히 원자력발전의 경제성을 평가할 때 고려하지 않는 비용이다. 민간기업이 연구개발한 기술을 적용할 때 연구개발 비용 등을 포함시켜 건설비용 등을 설정하는 것과 달리 국가 주도의 연구개발로 이루어진 원자력발전은 그동안 특혜를 받아온 것이다. 즉 원자력발전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기술을 획득하는 비용이 원가에 반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법은 우리나라와 같이 전력산 업이 거의 독점되어 있으며 정부 주도의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이루어 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원자력산업에 대한 특혜를 포함하지 않았기에 공정한 계산은 아닐 것이다(현재 발전시장은 자유로워졌으나 전체 발전량의 93.5%(2008년 기준)가 한국전력공사의 자회사인 6개 회사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 민간 발전사업자가 원자력발전소를 건설, 운영하고 있는 경 우, 사고의 위험성, 사후처리비용의 부담감이 발전사업자에게 큰 부담이 되며, 이 비용이 원자력발전 비용에 계산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 전문가들은 식품 내에 방사능 물질이 함유될 경우, 다른 화합물과의 불안정한 화학반응이 일어나 독성물질이 생길 수 있고, 지용성 비타민의 파괴, 방사선 조사 특이화합물이 생겨 암을 유발시킬 우려도 있다고 지적. 실제로 방사선을 씐 결과 발생하는 특이 방사선 물질 중 강한 독성이 밝혀진 물질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물에서 변한 과산화수소이다. 물의 분자식은 HO 인데 여기에 강한 방사선을 쬐게 되 면 분자구조의 변형이 일어나 H2O2, 즉 과산화수소로 변한다. 과산화 수소는 산화력이 강해서 접촉되는 물질을 쉽게 산화시킨다. 그 산화력 때문에 식품을 구성하는 세포가 파괴되므로 방사선 조사는 건조 및 반건조 식품만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 또 다른 예로 요오드를 들 수 있다. 요오드는 인체에 꼭 필요한 영양 성분으로 특히 갑상선 세포들이 이를 주로 흡수한다. 일반적인 분자량은 126인데 방사선 처리를 강하게 하면 분자량 131인 방사성 동위원소로 변할 수 있다. 자연 상태의 요오드인 I-126은 우리 몸에 필수 영양 성분이지만, I-131은 세포를 파괴시키는 독성이 강한 물질이다. 이를 갑상선 암 등을 치료하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정상 상태의 갑상선 세 포는 I-126은 받아들이지만 I-131은 독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다. 하지만 2~3개월 동안 요오드가 함유된 식품을 먹지 않는 제거식 을 철저히 하게 되면 갑상선 세포가 요오드에 굶주리게 된다. 그래서 정상 상태라면 받아들이지 않던 동위원소인 131을 먹게 되고, 갑상선 세포가 독성 때문에 파괴된다. 이러한 원리를 치료에 적용해 갑상선 암세포를 제거할 수 있게 된다. 각종 해산물과 마늘, 버섯, 참깨, 시금치 등에도 요오드가 함유돼 있 는데 이런 식품을 방사선 처리하게 되면 그 안의 요오드가 세포독성물질로 변할 수 있고, 갑상선 세포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될 우려도 있 는 것이다.
- "핵산업의 '르네상스'는 거의 공상에 가깝다. 핵에너지는 지구 온난 화에 대한 다른 재생가능한 방법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 다. 핵발전소의 건설과 채굴, 보호, 처리단계에서 온실가스 배출이 늘어날 것이고 확산과 테러리즘, 사고 같은 계량 불가능한 위험도 수반 한다. 핵폐기물은 1,000여 년간 유해한 상태로 유지될 것이다. 미래의 핵국가는 중앙집중화되고 치안이 삼엄할 수 있다. 핵무기가 오랜 기간 세계 안보에 대한 틀린 해법이었듯, 핵발전 역시 지구 온난화에 대한 그릇된 해결책일 것이다." (개번 매코맥 Gavan McCormack 호주국립대 명예교수)
- 미국 연방정부 차원에서 원자력 발전 확대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주정부 차원에서는 다양한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음. 최근 전력부족 사태를 맞은 캘리포니아주는 원자력이 전력 생산의 13%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소 신규 건설을 거부하고 있다. 2008년 4 월 민주당이 다수당인 주의회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제시한 원자력발 전 확대방안을 거부하였다. 에너지비용, 온실가스 저감 그리고 원자력 발전을 둘러싸고 캘리포니아주에서 진행된 일련의 논쟁 및 법안 상정 과정은 공급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강조하는 공화당과 시민 참여를 통 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강조하는 민주당의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공화당의 원전 추진론자들은 온실가스가 기후를 위협하고 지구온난 화에 실질적인 원인이라는 민주당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설사 민주당의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온실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발 전은 추진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원전 추진론자들은 원자력 확대를 거부하는 환경주의자들과 민주당이 기후변화와 지구환경 문제 에 대한 걱정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전 반대론자들의 친 환경주의는 실제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정책의제를 선점하고 정국의 주 도권을 갖고자 하는 속셈이 있다고 여긴다.
- 일본의 대표적인 반핵 시민과학자인 다카기 진자부로(2000)는 다음과 같이 일본이 갖고 있는 원자력의 의미와 집착에 대하여 역설하고 있다.
"원자력 개발에 있어서 그것은 불행한 출발이었다. 사람들은 안전성이라든가 인간 생명에 대한 영향이라든가, 또 거기서 생기는 갖가지 방사성 물질이 지구환경이나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 을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거대한 힘을 손에 넣고 보자는 데 혈안이 되 었으며 우선 파괴력으로서 이러한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개발의 동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게다가 계획 자체가 핵무기 개발이라 아 주 특수한 비밀의 장막에 가려진 채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공개된 논의나 정보 공개 없이 극비리에 사업이 추진됐다는 사실도 불 행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원자력이 이후의 발전과정에서 수 정할 수 없는 이러저러한 굴절을 남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원자력 정책에 관한 경제적 · 정치적 가설
1. 에너지 경제학적 가설
1.1. 원자력의 소유 및 운영 형태가 원자력의 확대 및 폐쇄 여부를 결 정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원자력 폐쇄 정책을 결정한 모든 국 가에서 사기업이 원자력발전소를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와 반대로 현재 신규원전 건설이 진행 중인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원자력발전을 전략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즉 국가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경우 사기업 형태의 발전업체나 민간 투자자의 입장에서 원자력은 경제적으로 결코 매력적인 사업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계획 단계에서부터 건설되기까지 10년 이상의 장기간이 소요되고 초기 자본 비용이 많이 드는 원자력발전소는 전력 수급 변화에 유연하 게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에, 자유화된 전력시장에서 원자력발전에 대 한 민간 투자를 유치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무엇보다 원자 력발전소의 신규 부지 확보와 방사성폐기물 처리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발전소 건설 지연에 따른 건설 비용 상승은 원자력에 대한 투자 입지를 더욱 좁힐 것이다.
1.2. 원자력이 전력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수록 원자력 기술에 대한 경로의존성' path dependency은 더욱 커진다. 기술은 그 기술을 지원하는 다른 사회경제적 제도와 함께 발전하는 사회제도적 복합체제이기 때문에, 어떤 기술이 선택되면 이 선택된 기술과 서로 다른 사회제도적 기반을 요구하는 기술은 시장에서 선택되기 어렵다. 아모리 로빈스가 원자력과 같은 중앙집중적인 거대 규모의 에너지원과 재생가능에너지 같은 분산적 중소 규모의 에너지원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즉 두 에너지 원은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제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또 원자력발전 과 같이 거대 규모의 기술은 발전용량이 커질수록 발전소를 폐쇄할 때 중소 규모의 에너지원으로 대체하기 어렵다. 원자력 폐쇄를 정치적으 로 결정한 스웨덴과 벨기에의 경우 원자력이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46%와 54%로 매우 높다. 이들 국가에서 계획대로 원자력 폐 쇄를 진행하기 힘든 것도 전력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원자력 의존도를 쉽게 탈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3.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계획 및 건설 기간이 길기 때문에 잘못된 전력 수요 예측에 따른 낭비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원자력은 10년 이상의 계획 및 건설 기간이 소요되는데, 10년 이후의 전력 수요 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발전업체는 수요관리보다는 공급을 증가시키는 계획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일단 거대 용량의 발전소가 건설되면 저장할 수 없는 전력의 속성상 전력은 스스로 수요를 창 출하여 전력 낭비를 유도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경우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바로 한국의 1980년대 이후 원자력발전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착공된 원자력발전소가 1980년대 들어 완공되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중반 전력설비공급 예비율이 50% 이상 상승했는데, 이 러한 전력설비공급 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심야전력 제도를 도입하여 전력을 싸게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후 전력 수요가 증가하여 전력 공급 예비율이 10%대 이하로 떨어지면서 다시 원자력 설비를 증 대하는 방향으로 전력 공급이 이루어졌다. 즉 과잉 공급이 수요를 창출 하고, 증가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다시 공급 설비를 증가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한국은 거대 규모의 발전원에 기초한 공급 위주의 전력 정책을 고수 하고 있다. 지난 참여정부 시절에 국가에너지위원회 산하 갈등조정위 원회의 한 분과에서 원자력의 적정 비중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으며, 현재 이명박 정부에서 기후변화 대응책으로 원자력 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2030년에 원자력이 전력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59%까지 증가시키고자 한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원자력의 비중이 높아지면 기저부하의 과잉으로 인해 중소 규모 발전원을 시장에서 몰아내고 전력 낭비 구조를 심화시킬 가 능성이 크다.
2. 원자력 정책에 관한 정치학적 가설
원자력은 상용화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 되는 에너지원으로, 현대 산업사회의 대표적인 사회갈등을 야기하는 분야 중 하나이다. 다른 에너지원과 달리 왜 원자력은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는가? 원자력은 현대 산업문명의 '풍요' 를 대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사회' 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기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자력에 대한 견해는 현대 산업사회의 풍요로움'과 '위험'에 대한 서로 다른 세계관을 반영한다.
원자력을 찬성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기술 발전에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며, 기술은 순수하게 중립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현대의 기술 문명으로 발생한 문제는 또 다른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원자력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지라도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자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원자력이 라는 에너지원을 선택하는 문제는 단순히 기술을 선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거대기술이 만들어내는 문제를 또 다른 기술로 해결하려고 할 때, 또 다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문제에 봉착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리고 양적인 경제성장보다는 질적인 경제발전을 강조하며 원자력과 같은 중앙집중적 거대 기술의 비민주성을 비판한다. 이렇게 기술과 경제발전에 대한 서로 다른 가치관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원자력 문제는 정치적 갈등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원자력을 둘 러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결국 한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구조나 정치문화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제도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제도이다. 모든 정치의 보편적 언어는 '갈등' 이며, 이 갈등이 사회화되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 과정이기 때문이다(Schattschneider, 1960).
- 근대역사학의 확립자인 랑케 Leopold von Ranke는 “역사가는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 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역사적 사실 자체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에 콜링우드 Robin G. Collingwood는"모든 역사를 현대의 역사" 라고 규정함으로써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 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해석되는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역 사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의 경우에는 과 거에 중심을 두는 역사관과 현재에 중심을 두는 역사관을 포괄하는 입 장을 취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란 “과거 사실과 역사가 사이의 부 단한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정의될 수 있 다. 따라서 역사는 과거 사실 자체뿐 아니라 현재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원자력 정책사 역시 과거 사실 자체가 아니라 현재 상황 속에 서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원자력 정책과 관련해서 지금의 상황이 과거 1960~1970년대 또는 1980~1990년대와 어떤 측면에서 다른지 또 어떤 맥락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특히 원자력 정책을 둘러싼 국내외의 상황이 기후변화라는 지구적 환경문제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급격히 변해가고 있다. 국제적으로 는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 사양산업으로 전락했던 원자력이 2004 년부터 시작된 신고유가와 기후변화협약으로 인해 르네상스를 맞이했 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이준웅, 2009), 국내에서도 원자력을 저탄소 녹색성장의 대표주자로 전면에 내세워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계 획이 발표된 상황이다. 이와 같이 고유가와 기후변화라는 새로운 맥락하에서 과거 한국의 원자력 정책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 뒤에야,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 영광군수는 원자력발전소 입지로 인한 각종 사고의 위험을 호소하며,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불편과 고통이 너무나 크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원자력발전소가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수력원자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 같은 원자력발전소 주변지역 주민들이 겪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전기 요금에 일정 비율(3.7%)을 전력산업기반기금으로 조성하고, 전력기반 조성사업센터를 통해 원전사업 및 발전소 주변지역을 지원하는 일에 기금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2008년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 사업에 사용된 돈은 1516억 1600만 원이다(전력기반조성 사업센터, 2008). 이 돈은 가동 · 건설 중이거나 건설 예정인 발전소의 발전기로부터 5km이내의 읍·면·동 지역인 발전소 주변 지역을 대상으로 소득 증대 사업, 공공시설 사업, 주민 복지 사업 등에 사용된다. 발전소 지역 주민들이 각종 개발 제한과 환경문제 등의 피해를 입기때문에 직접보상을 하는 것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정부와 발전사업자가 전력기금을 가지고 발전소 입지에 따른 온갖 사회문제를 무마하고자 회유 사업의 당근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양이원영,2009). 실제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자력발전 관련 민원이나 입지갈등 문제를 보상금 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의존해 왔으며, 원자력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들도 이런 방식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발전소 입지만 아니라 2005년 방폐장 부지 선정 과정에서도 정부는 유치지역에 '3천억+처리비용수입'을 제시한 사례가 있음. 원자력발전 관련 입지를 지원금과 보상을 중심으로 무마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방식이 아님.
- 정부와 한국전력은 1980년대 원전 설비 과잉으로 인한 여유전력을 해소하기 위해 인위적인 전력 수요 확대정책을 펼쳤다. 정책의 핵심은 전기요금 인하였다. 정부는 1980년대 원자력발전소 준공에 따른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모두 9차례의 전기요금 인하정책을 펼쳤다. 특히 영광, 울진 원전이 연이어 준공된 1987년, 1988년에는 2년 동안 네 차례나 전기요금을 인하했다(석광훈, 2006), 전기요금 저가정책은 결 국 전력 소비 증가를 가져왔다. 1987~1997년 사이 연평균 전기소비 증가율은 12.8%에 달했다. 같은 기간 연평균 GDP 성장률 8%에 비해 훨씬 높은 비율로 증가한 것이다. 이 시기에 정부나 한국전력이 에너지 절약이나 효율 정책을 펼칠 필요가 없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가 남아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5년 한국전력은 전기요금 인하에 이어 심야전력제도를 도입했 다. 심야전력제도는 수요가 없는 밤 시간대 원자력발전소 잉여전력을 소비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밤에는 전기를 낮시간 요금보다 저가로공급하는 것이다. 심야전력 도입으로 전력 수요는 급격하게 증가했고, 1990년대 이후 전력 부족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력부족은 다시 원자력발전소 건설의 명분이 되었다. 놀라운 것은 1986년 국내 전력공 급 예비율이 55%로 과잉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미국의 GE 사와 영광 원자력발전소 3,4호기 발주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이다. 1986년은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정부는 원자력이 불러온 여러 재앙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원자력발전 선호정책을 펼쳤다. 또한 1980년대의 원전 설비 과잉은 소규모 분산형 발전설비가 확대되는데도 악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다양한 전력수급을 위해 원래 계획되어 있던 LNG 등 중소형 발전소 설비 계획이 취소되었다.
- 값싼 전기요금 때문에 발생하는 국민들의 에너지 과소비가 문제인가? 사실 2008년 기준 전체 전력사용량에서 주거용은 15%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나머지 85%는 공공 서비스 업무용과 산업용에서 소 비하는 것이다. 전력요금은 용도별로 다르게 책정되어 있다. 전기를 쓰 는 시간대와 전압의 차이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양이원영, 2009). 전체 전력사용량의 절반을 산업 부문에서 소비하는데, 산업용 전기요금은 kWh당 80.50원에 불과하다. 산업용 전기는 원가 이하로 판매될 뿐만 아니라 밤 11시부터 오전 9시까지 심야에 판매되는 산업용경부하요금 은 kWh당 최저 38.1원 이다. 산업용 경부하요금 제도는 부하가 적은 심야에 공장을 가동하는 경우에 전기요금을 주간요금의 절반 정도로 할인해주는 제도이다. 한국 전력은 산업용 전력을 발전원가의 90% 수준에서 공급하고 있으며, 경 부하요금은 그 절반 수준, 즉 원가의 50% 미만으로 공급하고 있다(2007 년 기준), 산업용 전력 수요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부하전력은 1차 금속과 석유화학산업 등 특정 업종에 혜택이 집중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전기요금의 원가를 가격에 반영했을 때, 일반 국민들이 특정 기업체가 사용하는 전기요금을 대신 내는 것과 같은 교차보조 문제를 발생시킨다. 산업용 전력요금 저가정책은 산업부분의 전력소비를 부추긴다. 고 유가와 같이 다른 에너지원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라가게 되면, 산업 부분의 에너지원을 전력분야로 전환시켜 전력 수요를 더욱 높이는 현 상이 발생한다. 2008년 추경예산에 반영된 1조 2250억 원의 공기업(한국전력공사, 한국 가스공사) 손실분에 대한 예산지원도 결국 원가 이하로 판매된 산업용 전기에서 발생한 손실분을 국민들이 세금으로 메워준 셈이다. 기업이 전기용광로를 돌리는 데 사용한 전기요금을 국민들이 부담한다는 얘기 다. 지식경제부는 2008년 11월 전기요금 인상에 이어서 2009년 6월에도 전기요금을 평균 3.9% 인상했다. 주택용 · 농사용 요금은 동결하고, 산업용 · 교육용 · 가로등용을 상대적으로 인상했다. 그러나 일반용을 제외한 전기요금은 여전히 원가 이하로 책정되어 있다. 전기요금이 싸 면 당장은 좋지만, 저렴한 요금정책으로 전력 수요 관리에 실패하고 에너지 과소비가 발생하면 결국 부담은 국민들 몫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전기요금 인상에 대해 지속가능성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먼저 주택용이나 일반용 전력소비자가 산업용과 심야전력 전기요금을 교차보조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 1985년 한국전력은 심야전기요금제도를 도입했다. 심야전기요금제도 는 밤 시간에 원자력발전으로 남아도는 전기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이다. 2007년 심야전기요금은 동절기 kWh당 52.1원, 기타 계절에 37.9원으로 공급되었다. 고유가가 지속되면서 값싼 심야전기를 이용해 난방을 하는 가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심야 전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결국 남아도는 전기를 값싸게 공급한다는 심야전력의 본래 취지와 달리, 값비싼 LNG복합발전이나 중유발전으로 전기를 추가로 생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2008년에만 심야전력 부하초과 로 LNG 발전을 돌리기 위해 지출한 비용만 1억 7,000달러에 달한다. 낮은 원가회수율(62.9%)로 심야전력에 교차보조한 금액은 3640억 원 (2008)에 달한다. 심야전기 과다사용으로 인한 추가비용을 일반 산업체 와 가정이 부담하는 셈이다. 주택용 전력의 경우 전체 1300만 가구의 5%인 70만 심야전기 이용가구가 전체 주택소비전력의 26%를 사용하고 있다. 전기난방은 에너지 효율로 보면 엄청나게 호사스러운 일이다. 가스불로 압력밥솥에 밥을 하면 가스를 직접연소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효 율이 높다. 반면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게 되면 멀리 떨어진 발전소에서 석탄이나 석유, 우라늄으로 생산되고 송배전망을 통해 집으로 송전된 전기를 다시 열에너지로 전환해 사용하는 셈이다. 하물며 긴긴 겨울 밤 전기로 난방을 하는 것은 더욱 비효율적인 일이다. 전력 발전효율이 30~40%이므로 전기로 난방을 하면 석유나 가스, 석탄 등에 비해 효 율이 떨어진다(원종률, 2009). 등유난방은 리터당 7,160kcal의 열량을 내는 데 비해 전기난방은 리터당 3,380kcal로 열효율이 47.2%밖에 되지 않는다(지식경제부, 2009).
-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해법은 기존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제를 전환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 일이 힘들다고 좀 더 쉽거나 에둘러 가려고 할 때, 인류는 원자력의 함정에 빠지기 쉽 다.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은 에너지 수요관리이다. 우리처럼 에너지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면서 동시에 저탄소 사회를 지향할 때 가장 손쉬운 선택이 바로 원자력에너지인데,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대안은 말 그대로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부는 먼저 에너지 수요관리를 위한 목표와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에너지다소비 산업구조를 전환하고, 에너지 가격구조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신재생에너지 산업을 활성화시켜, 우리 사회의 에너지 체제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대전환해야 한다.
- 사회문제가 복잡해지면서 입법부의 정책형성 능력이 행정부의 전문 지식에 미치지 못하는 행정국가 가 된 이후로는 대의민주주의 의사결정과정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졌거나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특권화된 전문가와 전문지식이 의사결정을 지배함으로써 시민 다수의 선호가 반영되기 어렵고 정치적 비주류의 가치가 대변되지 못한다.
- 세계 각국의 원자력 정책에 영향을 미쳤던 첫 번째 요인이 원자력발전 사업체의 소유 및 운영 구조였듯이 한국에서도 한국수력원자력의 소유구조가 원자력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의 전력산업은 현재 국가 소유의 공기업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전력산업 구조개편 기 본계획이 수립되었던 1999년 당시에도 한국수력원자력만큼은 국가가 직접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한 적이 없으며, 지금은 발전회사의 민영화가 중단되면서 전력산업의 국가소유구조가 전반적으로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한국은 원자력과 관련해서 단 한 번도 국가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포기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국가이다. 그렇다면 원자력을 국가가 소유할 경우 어떤 문제가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정부는 원자력이 가장 경제적인 에너지라고 주장 한다. 전력산업 수급계획도 가장 저렴한 에너지원인 원자력이 기저부하를 담당하도록 수립되어져 있다. 그렇지만 원자력발전을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나라에서는 원전건설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기업이 참여를 꺼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원자력의 경제성에 대한 반박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원자력산업에 감춰진 비용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경제성과 관련해서 이처럼 왜곡된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원자력으로 인한 핵폐기물처리장 건설비용, 고압 송 전선로 건설비용, 원자력사고에 대한 보험비용, 원자력문화재단 운영 비용 등이 국가에 의해 감춰진 비용들이다. 이처럼 한국 정부는 원자력 과 관련된 각종 비용들을 감춰놓은 채 국가 독점적인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 발전차액지원제가 에너지원별 매입 가격을 제시함으로써 발전사업 자들이 자유롭게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이라면, 의무할당제는 정부가 한국전력이라는 발전사업자에게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강제로 배정함으로써 목표를 달성하는 정부 주도형 정책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한국전력 중심의 신재생에너지 의무할당제가 도 입될 경우 시민단체와 민간이 주도하는 소규모 에너지 자립형 발전사 업이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발전차액지원제를 채택한 독일과 스페인이 의무할당제를 실시한 영국보다 신재생 에너지 공급을 더 성공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에서조차 소규모 발전사업에 한해서 발전차액지원제를 새로 도입한 상황이다. 한국의 경우 원자력에 대한 국가의 독점구조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국가 독점구조를 깨뜨리기는 쉽지 않 겠지만, 결국 소비자 주도형 에너지 수급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 심야전력은 양수발전과 충돌되는 정책일 뿐만 아니라 에너지낭비를 조장한다는 측면에서도 대표적인 정책실패 사례다. 처음에는 원자력에 의해 생산된 잉여전력을 소비한다는 목적으로 수립된 정책이었지만, 심야전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값비싼 천연가스 발전소까지 가동시켜야 겨우 공급을 충당하는 사태로 발전하고 말았다. 이렇게 급증한 심야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다시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어야 하는 악순환의 대표적인 연결지점이 바로 심야전력이다. 심야전력 소비가 늘어나면서 과거에는 여름철 냉방기 사용에 의한 첨두부하 대비 예비 전력 확보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중앙정부는 최근 들어 겨울철 난방기 사용에 의한 첨두부하 발생이라는 에너지 소비패턴의 변화마저 걱정해 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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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바라는 그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행복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행복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우러난다.
오늘 내가 겪는 불행이나 불운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남을 원망하는 그 마음 자체가 곧 불행이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서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만들어간다.
- 법정 스님, ‘홀로서는 즐거움’에서

 

행복은 조건이 아닙니다. 노력과 연습이 행복을 만듭니다.
행복은 새를 닮았습니다. 억지로 잡으려고 하면 달아나 버립니다.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할 때 누구나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행복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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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로 산다는 것

경영 2020. 7. 22. 20:56

- 그리스 신화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자 순간의 신이다. 그는 앞머리를 주렁주렁 길게 늘어뜨린 반면, 뒤통수에는 숱이 하나도 없다. 이는 기회를 앞에서 잡아야지, 뒤에서 잡으려고 해서는 소용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회는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 능력은 있는데 기회가 없다라는 한탄은 무의미하다. 기회를 알아볼 안목이 없 고, 기회를 낚아챌 준비가 없을 뿐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기회는 준비가 행운을 만났을 때 생긴다”라고 말했다. 아무 준비 없이 기회만 기다려서는 미래가 없다. 충분히 준비하고 행운을 기다릴 때만 기회가 만들어진다.
- 가동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제한적인 중소기업은 정말 잘할 수 있는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인이자 살아 있는 경영 교과서라고 불리는 잭 웰치Jack Welch는 “회사에 그 사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전에는 절대 지갑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일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시 장과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만들 수는 없다. 사업을 제대로 이해하는 인재가 없는 사업은 포기하고, 인재가 사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싶다. 그래야 회사도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율보다 공정별 직행률을 들여다봐야 한다. 하나의 완제품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단계의 중간품 공정이 필요하다. 단계마다. 중간품의 일부에서는 불량품이 나온다. 불량품은 수리와 조정으로 되살려 다음공정에 투입한다. 중간품 공정에서 불량이 계속 발생해도 수리 조정을 열심히하면 수율은 높아진다. 그러니까 중간 단계에 얼마나 많은 수리 조정이 발생했는지 반영하지 않은 총수율은 사실상 허수에 불과하다.
- 품질은 성실성이 아니라 불량인자를 분석하여 JIG*로, 시스템으로, 프로세스로 재발 방지 대책을 구축해야 할 문제다.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어야 품질이 향상되고, 안정적인 품질이 뒷받침되어야 제조업체의 경쟁력이 확보된다. 성실성으로 접근해서는 품질을 안정화할 수 없다. 품질부서의 관리도 문제다. 꽤 많은 중소기업에서 생산본부장이 품질부서까지 관리한다. 나는 품질 문제를 경영자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산과 품질은 설립 목적 자체가 완전히 다르므로 하나의 부서로 묶일 수 없다.
생산부서의 본질 업무는 생산성 향상이다. 작은 문제는 임기응변으로 처리해서라도 생산을 지속시키는 게 그들의 일이다. 생산부서는 바늘의 허리에 실을 묶어서라도 바느질이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제조라인이 어떻게든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 중소기업 대표로 합류할 당시 그 회사는 창고에 무려 15억 원 정도의 재고를 직접 보관하면서 출하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제품을 직접 보관하고 출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제품은 안성의 공장에서 외주로 생산했다. 완성된 다음에는 회사가 있는 대전의 창고로 내려왔다가 주요 고객사인 수도권 공장으로 납품되었다. 일단 만들어지면 남하했다가 주문을 받으면 북쪽으로 올라가는 식이었다. 위아래를 오가는 운송비도 불합리했지만, 창고에 쌓아두었을 때의 비용도 부담스러웠다. 창고 임대료는 기본이고, 도난과 화재보험 에 가입하고 적정 온도와 습도를 맞추기 위한 비용까지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나는 경기도 안성의, 반도체 전용 창고를 가진 외주 협력사와 VMI Vendor Management Inventory, 공급자 재고관리 계약을 체결했다. 그 회사 창고의 여유 공간을 임대해서 보관하고, 출하할 때 재고를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출하 시점에서 위탁가공제품을 매입하다 보니 재고비용이 눈에 띄게 줄었다. 1년 내내 작동시켜야 했던 냉방시설을 가동하지 않으니 전력비도 절감되었다. 이후 고객사의 요청이 있으 면 제품은 안성에서 바로 출고되었다. 쓸데없이 도로를 오가며 운송비를 낭비할 필요도 없었고, 반도체 전용 창고였으므로 온도와 습도 문제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물류비와 관리비는 물론 시간까지 절감되는 효과가 발생했다.
- 결론적으로, 나는 중소기업에는 하이브리드 ERP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설비 자동화가 원가절감을 불러온다고 하지만, 저렴한 인건비 등 가격경쟁력을 가진 중국 기업은 완전 자동화가 오히려 비용 증가의 원인이라고 경계한다. 인건비가 싼 부분은 매뉴얼로 관리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자동화해서 잘 조합되어야 효율이 극대화된다. 중국의 하이브리드 설비 자동화처럼 중소기업도 ERP 시스템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삭제해야 한다. 나는 ERP 시스템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데이터에는 서명하지 않는다. 처음 얼 마 동안은 나나 직원 모두 불편했지만, 안정화되기 시작하면서 스피드와 데이터의 투명성이 달라져 갔다. ERP 시스템을 구축해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성패는 CEO와 부서 리더의 강력한 톱다운 방식의 의지에 달려 있다.
- 페널티킥 상황에서 골키퍼는 슛 이전에 몸을 날려야 한다고 한다. 키커가 어디로 찰지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두지 않고, 공을 차는 순간 움직여서는 이미 늦다 는 것이다. CEO도 항상 촉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잡고, 문제가 생겼을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생각이 많으면 악수를 남긴다라는 말처럼 장고 끝에 시장과 소비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 번지점프를 잘하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그냥 뛰는 것이다. 생각이 많을수록 시간만 가고, 그 시간이 번지점프의 질을 높여주지는 않는다.
- 중소기업의 CEO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군분투해 어느 정도 기업을 성장시 키고 난 뒤 초심을 잃는 것을 종종 본다. 이들은 경영을 임원에게 맡겨두고 바깥으로 나돌거나 감투에 매료되어 교만해지고, 사치를 부리고, 나태해져 힘들게 성공시킨 기업을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이는 좋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새벽시장 까지 쫓아다니며 맛집으로 유명해진 식당주가 돈을 원 없이 벌게 되면 어느 순간 재료 장만과 음식을 종업원에게 맡기고, 자신은 최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골 프나 치러 다니다 망하는 케이스와 같다. 이런 사람들은 애당초 기업가정신, 즉 음식에 승부를 건 것이 아니라 돈이 목적이었을 뿐이다.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니 목표마저 없어진 것이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식구와 그들의 미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잘 나갈 때일수록 초심을 잃지 않고 조직의 긴장감을 가지고 지속가능한 성장기업을 만들어야 한다.
- 맥도날드는 철저한 기획과 시험을 거쳐 햄버거의 맛을 결정한다. 맥도날드의 햄버거 패티는 지방이 19% 이하인 쇠고기를 지름 3.875인치의 1,6온스 크기로 뭉쳐 만든다. 양파도 0.25온스로 규격화되어 있다. 이런 디테일이 맥도날 드처럼 아주 큰 기업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스시로지 라는 회전 초밥 프랜차이즈도 아주 섬세하게 상품을 기획했다. 이들은 소비자가 원하는 회전초밥 컨베이어의 회전 방향, 속도, 메뉴별 접시의 연속성 등을 철저히 연구했다. 먼저 회전초밥은 소비자의 수렵본능과 경쟁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에 고정식에 비해 1.5배 많이 소비된다. 회전 방향은 오른손잡이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는 시계 방향이 유리하다. 컨베이어 벨트는 실험 결과 소비자의 먹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데 가장 적당한 초당 4cm의 속도로 회전한 다. 이런 디테일에 힘입어 스시로는 맥도날드의 평균인 5~6달러보다 높은 10달 러 이상의 객단가를 올리고 있다. 500개 이상의 프랜차이즈에서 올리는 연매출 은 2조 원 이상으로 우리나라 대기업 수준이다.
- 해외 공장에 얼마나 많은 주재원을 배치했는지 살펴보면 현지 공장에 대한 관리능력이나 원가경쟁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업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제조업 해외 공장의 현지 주재원은 7인 정도가 알맞다고 본다. 내가 맡을 당시 우리 회사의 베트남 공장에는 14인의 주재원이 있었다. 나는 이 숫자를 6으로 줄였다. 인건비 절감이 표면적이고 직접적인 이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층적인 이유가 있다. 과도한 주재원의 수는 업무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이다. 일단 직접적인 비용 문제부터 살펴보자. 직원 한 명을 주재원으로 파견하면 교육과 주거 지원 등으로 인건비보다 훨씬 높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대략 국내 에서 지급하던 임금의 3배 정도가 필요한 것 같다. 저렴한 현지 물가와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커진다. 주재원 한 명에 소요되는 비용은 현지 고급 간부 10인 이상 의 인건비에 맞먹는다. 국내에서의 같은 직급 직원이나 현지 고급 간부 어느 쪽의 임금과 비교해도 어마어마한 지출이다. 문제는 이렇게 투입한 지출이 현지에 뿌리내리지 않을 비용이라는 데 있다.
- 내 기준으로 바람직한 주재원의 수는 7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지에서 관리해야 할 업무가 7가지인 까닭이다. 먼저, 현지 법인의 대외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필요하다. 본사와의 방향성을 조율하며 현지의 세무, 노무, 통관, 대정부 업무는 물론 현지 인맥과의 교류도 책임질 법인장이 첫 번째 주재원이다. 다음으로는 생산을 총괄하여 전체적인 안살림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 공장장이 두 번째 주재원이다. 그리고 구매, 품질, 수주관리, 생산, 재무관리의 다섯 기능을 책임질 주재원들이 있어야 한다. 그 외에는 모두 현지인 간부에게 권한을 이양해야 한다고 본다.
- 성공적인 팀의 주기는 4년 정도라고 보고 끊임없이 선수들을 관찰하고 측정하 면서 조직을 재구성해야 한다. 때로는 잘하는 선수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지 만, 다른 선수의 성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퍼거슨 감독)
- “경영관리 부서는 CEO의 귀가 되어야지 입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나는 늘 강조해 왔다. 그런데 경영관리 부서가 꼭 집단주의 사회의 비밀경찰처럼 구는 경우가 있다. 동독과 소련의 비밀경찰이 전화를 도청해서 정보를 독점하듯, 사업 기획과 인사 정보를 무기처럼 휘두른다. 월급과 상여금에 대한 정보와 알량한 예산을 가지고 동료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 이들이 고압적이고 사무적으로 나서면 회사 안에서 소통은 사라진다. 완전히 결정되지도 않은 인사 정보가 미리 새어 나가서 분열이 조장되기도 한다. 사람이 많지도 않은 중소기업에 파벌까지 만들어져서 구성원들이 따로 놀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조직의 미래가 예측가능한 상태일 때 직원들은 신뢰감을 갖고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몰입이 가능하다”고 했 다. 리더는 조직의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때 우리 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려줘야 한다. 개혁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직원들의 희생만 강요하는 것이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회사와 개인의 이익에 어떻게 부응하는지 공감대를 먼저 형성해야 하는 것 같다. 매출과 손익이 늘고, 회사가 유명해져도 회사에 관련된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지 않고 억지로 끌고 가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진심어린 소통, 그리고 기준과 결과에 대한 믿음이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시간을 두고 쌓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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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경제사

역사 2020. 7. 22. 08:18

- "식물은 흙과 물과 돌과 바람과 빛으로 스스로를 만들고, 나아가 흙을 모든 동물이 생명을 의존하는 음식으로 변형시킨다. 식물은 이후 자신을 보호하고 친구를 피기 위해서 색깔과 맛과 향을 가졌다. 우리가 채소와 과일과 곡식과 향신료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 존재를 가능케 만든 음식, 우리 인생 앞 에 감각과 쾌락의 만화경 세상을 열어젖힌 그 음식 들을 먹는 것이다.” (해럴드 맥기 Harold McGee)
- 애덤 스미스는 중국을 한심하게 보았다. “중국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것 같다. 그들이 법률과 제도적 본질에 어울리는 부를 갖춘 것은 아마 오래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법률과 제도 때문에 이러한 부는 가능한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반면 유럽은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해운으로 국가 간 교류를 해 왔다. 기후와 토양을 가리는 밀의 속성 때문에 유럽의 먹거리는 동양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특히 단단한 밀의 씨앗을 고운 가루로 만들기까지는 상당한 기술 발전이 필요했다. 완벽한 제 분은 시계 공업이 발달한 스위스인이 증기기관을 이용하기 시작한 1800년대에나 가능했다.
- 동양의 곡창지대에 견주어 한참 북쪽에 있는 유럽은 편서풍 의 영향으로 연중 비가 내리는 서안해양성기후를 보인다. 이런 기후에서는 풀이 잘 자라므로 유럽은 목축으로 곡식 부족을 충 당했다. 그러나 밀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쌀에 견주어 낮기 에 강력한 왕권 국가를 설립하기 어려웠으며 백성들의 국가 개 념도 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은 프랑스에 있는 영국 귀족의 땅 때문에 시작된 것인데, 프랑스 백성은 누가 자 기가 사는 땅을 다스리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농노였기 때문이다.
- 수천 년 동안 동양의 국가들은 너무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역사의 흐름이 멈추어 버렸다. (마르크스)
- 비가 내리지 않아도 잘 자라는 밀과 보리가 주식인 유럽과 중동에 견주어 동양은 우기와 장마 때 내리는 비로 한 해 농사가 좌우된다. 동양과 서양이 신 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뭇 달랐다. 동양의 지배층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에게 투사되도록 많은 장치를 고안했다. 계급이 처음 등장한 청동기시대에 통치자와 제사장이 일치한 것도 이런 이유다. 왕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황금 장신구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피지배 층을 세뇌했다.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농사에는 물이 필요하므로 모든 문명은 강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관개는 지금도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대규모 사업이다. 인간의 노동에 의존하던 때 관개 사업은 강력한 왕권에서 비롯되었다. 곡식농사는 채집이나 수렵과 달리 강제 혹은 착취가 동원되었다. 사유재산과 노예제도도 여기서 나온다. 고대의 왕은 여러 씨족공동체를 무력으로 통합한 뒤 이들을 노예로 부려, 원가가 거의 들지 않는 많은 양의 곡식을 생산했다. 이렇게 축적한 자본은 피라미드 건설 같은 일에 퍼부어졌다. 황허강과 양쯔강 사이에 있는 중국은 놀라운 자본축적에 성 공했다. 황허강 위로는 밀을, 아래에서는 쌀을 재배했으며, 쟁기 · 시비법 · 이앙법 등 첨단 기술을 재빠르게 도입했다. 7세기 초반 건설한 중국의 대운하는 유럽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진시황 이후 중국 황제들이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 로, 그리고 자신을 '왕 중의 왕'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벼농사의 높은 생산력 덕분이었다.
- 20세기 이전까지 질소를 농작물에 공급하는 방법은 뿌리혹박테리아로 질소를 공급받는 콩과 식물을 길러서 썩혀 퇴비로 주는 것과 번개가 치는 것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번개는 삼중결합으로 단단히 밀착되어 있는 공기 중의 질소 분자를 질소원자로 분리해 질소화합물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질소비료가 나오기 전부터 질소를 공급받을 수 있었던 쌀은 천혜의 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동양의 농부는 씨앗을 파종해 묘판에서 모를 키우는 이앙법을 도입했다. 이앙법은 풀을 뽑는 데 들어가는 노동력의 80퍼센트를 절감해 수확을 2배로 늘려주는 혁신적인 기술이었 다. 이앙법은 당나라 때 고안되어 송나라 때 정착되었다. 게다. 가 중국 남부의 아열대몬순기후에서는 1년에 2번 벼를 재배할 수 있다. 1,000년 전 중국에서는 이런 농업혁명이 차근차근 진 행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서양은 1200년경 시비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휴경 지로 지력을 살리는 방법이 고작이었다. 쌀의 우월한 생산력 때문에 동양 국가들은 안정적인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로마가 지주들의 토지 독점과 토지 황폐화 때 문에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쌀은 밀이나 보리에 견주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쌀은 1헥타르당 생산량이 밀(820킬로그램)에 견주어 1.7배나 많 은 1,440킬로그램이다. 옥수수의 생산량인 860킬로그램보다 도 많다. 인류가 보리와 함께 가장 먼저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 수수의 생산량(1헥타르당 400킬로그램)에 견주면 무려 3.6배나 차이가 난다. 쌀을 키우는 민족은 빠르게 고대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 한반도의 쌀 생산력은 아열대몬순기후부터 냉대기후대에 퍼져 있는 중국과 비교하면 정말 작은 규모다. 통계청 국제통계연감 2017년 자료를 보면, 중국의 쌀 생산량은 전 세계 쌀 생산량의 28.5퍼센트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생산량은 0.8퍼센트로, 무려 35.6배 차이가 난다. 이런 낮은 생산량 때문에 우리 조상은 쌀 가운데 찰기가 있는 단립형 자포니카japonica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쌀의 전분은 퍼석한 느낌을 주는 아밀로스amylose와 찰기가 많은 아밀로펙틴 amylopectin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밀로스가 많은 쌀이 장립형 인디카(일명 안남미)다. 떡을 만드는 찹쌀은 아밀로스가 아예 없다. 아밀로스를 만드는 유전자가 우성이다. 3대 1로 인디카 쌀이 많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아밀로스가 없는 열성유 전자 쌀을 고른 것이다. 우리 조상이 찰기 있는 쌀을 선택한 이유는 밥이 주는 포만감 때문이다. 자포니카와 인디카 2가지 쌀을 모두 재배해온 중국인들이 이름도 알기 힘든 수많은 요리와 함께 인디카 쌀을 먹는 것은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뜻이다. 향신료로 만드는 인도의 카레나 볶음 요리가 많은 동남아시아 요리에는 인디카 쌀이 잘 어울린다. 반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식단이 유독 밥 중심인 것은 낮은 쌀 생산량을 고려한 조상의 선택으로 보아야 한다.
-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밀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장 앙리 파브르)
- 역사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열쇠는 신이나 '보이지 않는 손'같은 형이상학적 힘,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이었고 사회 시스템이 이런 욕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 서양은 동양보다 훨씬 빠른 중세 때 이미 이런 욕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반면 동양의 지배층은 이 욕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일부 이슬람 세력과 북한 등은 지금도 이를 인정하길 꺼리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신념이나 영도력은 초기 확산 속도는 빠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지속력이 떨어진다. 진秦나라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불과 15년 만 에 망했다. 스페인의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했 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잊고 노예무역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반면 자기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경제활동에 대한 상공인의 자유의지는 꾸준한 방향성으로 역사를 움직였다. 농민들은 늘 배가 고팠던 까닭이다. 개인의 생각을 만드는 기초는 먹거리다. 우리가 황혼 녘 밥짓는 냄새를 맡으면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하고 뭉클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우리 민족이 1만 년 가까이 한반도에서 쌀을 먹으면서 삶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곡식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한다. 밀도 마찬가지다. 호메로스Homeros는 『오디세이아Odysseia』 에서 밀과 보리를 '인간의 골수'에 비유하기도 했다.
- 배고픈 유럽인의 살길은 땅을 떠나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 다. 물고기를 잡거나 무역을 해야 했다. 이렇게 살길을 찾은 대표적인 나라가 고대 그리스다. 그리스는 빙하가 깎아놓은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바위가 많다. 게다가 석회암이 많아서 흙이 기름지지 않다. 그리스인의 주식은 보리였다. 보리에는 탄성을 만드는 단백질인 글루텐이 없어 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죽 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에게는 바다밖에 없었다. 뱃사람은 농사짓는 사람 에 견주어 거칠 수밖에 없다. 땅의 가혹함은 굶주림이지만 바 다의 가혹함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거칠었고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셈에 밝았다. 보리죽을 먹던 그리스 인에게 새의 얼굴을 한 이집트의 신과 종교는 우스꽝스러웠겠지만, 그들이 만드는 기기묘묘한 모양의 빵은 기적처럼 보였을 것임.
- 기원전 6세기 솔론Solon의 개혁으로 평 민의 참정권이 보장되었으며, 이후 모든 시민이 참석하는 직접 민주주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시민들이 재판에 참석하는 배심원 제도도 이때 도입되었다. 하지만 로마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농사꾼들로 이루어진 평민회의 대표에게 최고 권력 자리인 호민관을 내주었다. 로마 가 이 같은 혁신을 채택한 것은 귀족과 평민의 화합으로 번영 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로마가 번영하려면 빵이 필요했고 이 빵은 이탈리아의 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지중해 무역을 로마보다 앞서 개척한 이웃 나라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페니키아와 맞서야 했다.
- 밀 외에 보리와 귀리도 있지만 이미 빵 맛을 알게 된 로마인은 보리를 가축이나 노예가 먹는 음식쯤으로 여겼다. 검투사를 로마에서는 호르데아리 hordearii라고 불렀는데 이는 ‘보리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검투사는 보리죽에 고수를 띄워서 먹었다. 로마에서는 문제가 있는 군인과 관리에게는 밀 대신 보리를 급여로 지급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근대까지 유럽에 남아 있었다. 로마는 지중해의 밀 생산 지대를 차지해야 했고 그러려면 다른 나라와 경쟁이 불가피했다. 살아남으려고 로마식 정치 혁신을 선택한 것이다. 로마의 선택은 옳았다. 로마는 주변 나라를 차례차례 격파하고 100여 년이 넘는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두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로마가 얼마나 카르타고에 이를 갈았는지는 카르타고를 정복 이후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다. 로마는 카르타고 남자를 모두 학살하고 카르타고의 곡창지대에 소금을 뿌려 영원히 밀을 키우지 못하도록 했다. 그만큼 밀은 로마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제 북아프리카와 이스파니아의 곡창지대도 로마의 것이었다. 로마는 로마 시민을 먹여 살릴 빵 창고인 이집트마저 정복했다. 그러고는 이집트의 화학책을 모두 불살랐다. 로마인이 보기에는 마법 같던 이집트 빵 기술을 독점하려는 생각이었다. 로마는 드디어 서양 세계의 빵을 독점했다.
- 유럽에서 경쟁의 주체는 귀족이나 왕족처럼 권력과 토지를 독점한 자가 아니라 상인과 장인이었다. 12세기 유럽은 낮은 농업생산력을 무역과 기술 혁신으로 메워나가고 있었다. 유럽의 상인과 장인은 동업조합인 길드를 만들어 지배 세력에 맞서 자치권을 확보했다. 이들은 영주가 갖고 있던 경제행위에 대한 통제권은 물론이고 사법권 행사와 행정관리 선출에도 직접 개 입했다. 길드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로 유럽의 작은 도시들에는 활력이 생겨났고, 농노들은 종교 공동체인 장 원을 빠져나와 도시에서 자유인으로 살기 시작했다. 영주와 종교인도 일부 권리를 상공인에게 넘기면 훨씬 사치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13세기에는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 같은 대대적인 혁명은 아니었지만, '연성 원시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에너지 혁명의 전조가 감지되었다. 1185년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발명된 풍 차는 영주와 교회의 소유이던 수력 장치와 경쟁하는 평민의 에너지'였다. 풍차 설비 1대는 20명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방아의 가장 중요한 기술적 진전은 회전운동을 왕복운동으 로 바꾸어주는 캠cam이었다. 방아 덕분에 양모를 천으로 바꾸는 가공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유럽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간파한 상공인들은 풍차와 수력 장치를 소유했고 어느덧 평민의 에너지 총량은 기득권층의 에너지 총량을 넘어섰다. 중세 기사도를 숭배한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중세의 풍차와 수차에 대해 연구한 역사학자 린 화이트 Lynn White는 중세에 이미 산업혁명이 준비되었다고 진단했다. “15세기 후반 유럽은 그 이전의 어떤 문화권보다 훨씬 다양한 동력원 뿐만 아니라 그 에너지를 포착하고 전달하고 이용하는 데 필요 한 일단의 기술 수단까지 갖추었다. 1492년(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전개된 유럽의 확장은 상당 부분 에너지 소비의 증가와 그에 따른 생산성 향상, 경제력 · 군사력 증강에 기초한다.” 에너지와 기술 수단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 역시 혁신적으로 진화 중이었다. 이는 중세 도시가 서로를 의식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던 탓인데 그리스와 로마,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밀을 비롯한 무역권을 놓고 경쟁하던 것과 비슷하다. 13세기 이탈리 아의 피렌체 · 피사 · 베네치아 · 제노바는 부와 권력을 키우려고 이웃 도시와 전혀 다른 정책을 채택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각종 창의적인 정책의 풀pool이 형성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이 실험 끝에 내린 결론은 제조업과 무역 이 번영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 1112년 세워진 피렌체공화국은 은행업과 양모업 등 21개 길드의 대표 자가 운영하는 시뇨리아signoria를 통해 다스려졌다. 1532년 메 디치가가 세습군주제로 피렌체를 다스리기 전까지 이 대의 기구는 계속 운영되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화정을 만든 점은 로마와 닮았 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피렌체는 로마와 달랐다. 피렌체는 귀족을 혁신의 걸림돌로 보고 대주주와 귀족이 정치 세력이 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견제했다. 심지어 피렌체는 지주를 영구적인 위협 세력 혹은 적과 내통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지주를 견제하는 대신 비봉건 사회의 특징인 예술인을 우 대해 예술의 번영을 일구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이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 밀은 유럽인을 배고프게 만든 대신 그들에게 분석력이라는 눈을 선사했다. 서양인은 작은 개체를 낱낱이 파헤친 뒤 원칙을 세워 나머지를 묶어내는 분석 능력이 동양인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관찰과 경험을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야말로 진정한 실체다”라고 말했다. 서양인에게 집단은 개체가 모인 것인 반면 동양은 개체보다 관계와 전체를 중요시했다. 서양의 면도날 같은 분석 전통은 학문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정치가는 사회를 이루는 주체들을 각각의 변수로 놓고 이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제도와 법규 같은 시스템을 조율했다. 동양의 세계관이 부모와 왕과 국가(혹은 신)의 관계를 강조해 선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것이었다면 서양의 세계관은 입체적이고 역동적이었다는 분석을 하는 이유다. 어쩌면 이런 차이는 쌀보다 훨씬 제분이 어려운 밀의 속성에서 온 것인지 모른다. 밀은 쌀에 견주어 껍질은 단단하지만 속살(배젖)은 부드럽다. 껍질을 까면 밀은 쉽게 깨져버린다. 따라서 밀은 쌀과 보리와 달리 도정精 대신 분쇄를 해야 했다. 속도 차를 이용해 고운 가루를 내는 3중 분쇄 기술은 1800년에나 개발되었을 정도로 밀의 분쇄는 까다로운 일이었다. 서양인이 생산력의 열악함을 뛰어넘어 자본주의와 함께 그 대안인 사회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저력은 작지만 쉽게 제 몸을 내어 주지 않는 밀알을 좀더 치밀하게 깨려는 그들의 오랜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 유라시아인들이 식칼을 만들어 서로의 땅을 빼앗으려고 혈 안일 때 농업생산력이 높은 아즈텍인과 잉카인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왜 이들은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을까? 학자들은 옥수수의 기적적인 생산 조건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옥수수는 밀이나 쌀처럼 노동 집약적 곡식이 아니다. 심지 어 쟁기질도 타작도 도정도 필요 없다. 심는 법도 단순하기 그 지없다. 남자 농민이 큰 막대기로 땅에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에 부인이 씨앗을 심는다. 1년에 2번 씨앗을 심으면 50일 안에 열매가 열린다. 옥수수는 빨리 익을 뿐 아니라 익기 전에도 낱알을 먹을 수 있다. 1알을 심으면 보통 150알 이상을 거둘 수 있으며 심지어 800알을 얻기도 한다. 이것은 계절에 따라 7~8일 정도만 일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약적 노동의 자유로움이 결국 지나치게 전제적인 신정국가에 이르게 한 것이다.
- 아메리카의 옥수수는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전혀 다른 역사를 일구었다. 호기심 많은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간 옥 수수는 감자와 함께 근대적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두 식물의 가장 큰 공은 빠른 식량화를 통한 인구 팽창이었다. 페스트 확산으로 급감했던 유럽 인구는 17세기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이후 2억 명가량이던 인구는 1650년 약 5억 명으로 2배가량 늘었고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 1850년 에는 10억 명을 기록했다. 중국의 인구 증가도 옥수수가 전파 되었던 17세기 청나라 때부터였다. 유럽에서 최초로 옥수수에 주목한 나라는 전쟁광 스페인이 아니라 전통의 부호 이탈리아였다. 중남미의 인신 공양 행위를 유럽 최초로 지켜보고 기록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불길한 음식으로 취급해 아예 먹지 않으 려 했다. 그러나 무역으로 부를 일군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달랐다.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노동력 대비 높은 옥수수의 생산성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시칠리아에 옥수수를 키워 식량으로 삼고 대신 옥수수에 견주어 2배 이상 비싼 밀을 시장에 팔았다. 17세기 베네치아는 생산된 곡물의 15~20퍼센트를 수출한 반면 프랑스는 2퍼센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곡물을 소비했다.
- 아즈텍제국 멸망 후 멕시코로 건너온 스페인 사람들은 현지에서 앓던 설사와 고열 등의 병을 목테수마의 복수'라고 불렀다. 목테수마는 아즈텍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아직 GM 농산 물의 폐해가 구체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보건기구 WHO가 2015년 10월 가공육을 석면과 같은 1급 발암물질로, 붉 은 살코기를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판 목테수마의 복수는 옥수수를 통해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 그리스인은 기원전 8세기부터 페니키아인에게 배운 대로 식 민지의 광산을 개발해 화폐를 만들었고 곡물을 비롯해 특산품 을 본국으로 나르거나 다른 나라에 파는 삼각무역에 눈을 떴다. 따지기 좋아하고 매사 삐딱한 그리스인은 적성에 꼭 맞는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들은 보리로 된 빵 마자maza가 아니라 밀로 된 빵 아르토스artos를 먹을 수 있었 다. 기원전 6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르토스는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우리나라 서민들이 평소 보리밥을 먹다가 명 절 때 소고기 국에 쌀밥을 먹던 것과 비슷했다. 폴리스 가운데 아테네는 상업 활동이 가장 활발한 도시였다. 특히 아테네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하던 폴리스였다. 인류 최초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사유재산을 인정한 덕분이었다. 2,000여 년 뒤 로크가 비로소 정리하고 옹호한 사유재산의 개념을 아테네가 이렇게 빨리 도입했던 것은 게오르고스georgo' 로 불리던 소농들 덕분이다. 소농들은 땅 부자인 귀족이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아테네 외곽 아티카 언덕의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거기에 보리를 키워 가족을 부양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와 땅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프로테스탄트처럼 끊임없이 참정권과 재산권을 요구했다. 미국이 1776년 독립전쟁으로 세계 최초로 귀족을 배제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한 헌법을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테네의 소농은 진정한 혁신가였다. 그리스 공동체들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중동의 패권 국가 아시리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중장 보병 밀집 전술을 도입해 발전시켰다.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어깨를 맞댈정도로 밀집한 뒤 원형 방패로 몸을 최대한 가리고 3미터에 이르는 긴 창과 긴 칼을 들고 전진하는 방식이다. 팔랑크스phalanx 로 불린 전투 대형은 등껍질이 단단한 거북이가 긴 창을 꽂고 전진하는 모양새다. 팔랑크스는 전진 속도가 느렸지만 앞에 있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지나갔다. 그게 적이건 귀족이건 말이다. 팔랑크스는 『일리아스(lias』에 묘사되었던, 귀족이 주도하고 평민은 시종으로 따라나서던 전쟁을 평민 주도의 전쟁으로 바꾼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스 폴리스들은 이 전술을 앞다투어 도입했다. 그만큼 죽거나 다치는 병사도 많았다. 전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폴리 스를 위해 목숨을 건 대가로 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폴리스 간 의 경쟁이 치열했던 상황이어서 귀족은 이를 들어줄 수밖에 없 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것은 고된 노동과 목숨을 건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소농을 포함한 시민들이었던 그리스 보리밭에서 자라난 민주주의 셈이다.
- 17세기 유럽에는 1,000개의 국가가 존재했으나 200년이 지난 뒤에는 40~50개로 통합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 기 지중해 인근의 정세와 비슷하다. 영국은 이 시기 아테네식 의 정치·경제개혁으로 유럽에서 가장 앞서 나갔다. 그러나 영국인은 아테네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스파르타의 정신을 이식했다. 기숙학교를 만들고 학생에게 럭비를 시켜 진 흙탕에서 뒹굴게 했다. 그들이 먹던 음식은 스파르타처럼 맛이 없었다. 지금도 유럽에는 “지옥의 요리사는 영국인" 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실제 영국은 스파르타처럼 쾌락보다는 절제 와 명예를 존중하는 전통을 강조해왔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 가는 물론 중국과 같은 반봉건 국가들에도 영국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낯선 여러 국가는 스파르타의 전통에 경도되었다.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가 대표적이다. 사회주의국가인 스탈린 시대 소련과 지금의 북한도 스파르타와 닮았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식 자본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도 스파르타의 전통이 강하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획일화된 학교 교육, 고루한 서열 문화 등은 찬란한 아테네보 다는 칙칙한 스파르타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수능이나 토익 따위에 청춘을 소진하는 젊은이들은 전사가 되기 위해 집단생활에 내몰린 스파르타 젊은이들과 닮았다. 먹는 것도 비슷하다. 잡코리아 등이 취업 준비생 1,147명을 대상으로 2017년 6월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취업 준비생은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들이 가장 자주 사 먹는 식사 메뉴는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 김밥(23.7퍼센트)이었다. 조모스와 딱딱한 보리 빵을 먹던 스파르타 전사의 한 끼를 떠올리게 한다.
- 나는 폴리비우스가 조영관(로마 지방의회 관리)으로 뽑혔으면 좋겠다. 그는 우리에게 맛있는 빵을 공급해준다. (폼페이 유적 낙서)
- 로마의 실체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전재 국가였 다. 전쟁에 승리해 전리품과 노예가 확보되면 노예의 노동력을 토대로 다시 전쟁을 벌였다. 대부분 농민이던 로마의 시민군은 수백 년 동안 이 지겨운 무한 반복을 묵묵히 따랐다. 동맹국과 속주屬州의 시민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은 애국심으로 무 장한 '전쟁 기계'였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황당한 현실이 었다. 시민이 전쟁에 나간 사이 귀족이 시민의 토지를 독점했다. 토지 독점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민회와 원로원이 절대왕정을 견제하기 위한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가던 기원전 2세기 공화정 때였다. '강성 대국'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토지를 잃은 농민들 이 로마로 밀려들었다. 로마 시민의 99퍼센트는 빈민이었고 굶 주림을 걱정해야 했다. 이게 로마제국의 민낯이다.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불안해지는 것이 로마의 숙명이었다. 노예제와 귀 족정, 군사독재라는 최악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로마 정부는 개혁에 나서지 않고 시민에게 공짜 빵을 돌렸다. 시민들은 정치인이 던져준 공짜 빵을 짜고 냄새나는 생선젓인 가룸garum에 찍어 먹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해 전갱이 · 고등어 등 지중해에서 흔히 잡히는 생선으로 만들었다. 가룸은 오늘날 이탈리아 지역에서 즐겨 먹는 올리브유와 소 금에 절인 안초비anchovy와는 다르다. 오히려 냄새가 짙은 동남아시아의 생선젓과 비슷했다. 가룸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값싼 음식의 하나로, 서민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 말기부터 공짜 빵에 값싼 가룸을 찍어 먹으며 영광스럽던 로마의 붕괴를 지켜보아야 했다. 빵과 가룸은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라 로마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러나 구수한 빵과 냄새나는 가룸의 역할은 묘하게 달랐다. 빵은 무상이었지만 가룸은 돈을 내고 사먹어야 했다.
- 서양의 식탁에 단백질 공급원인 가축의 살과 우유가 풍족하게 공급된 시기는 유럽에서조차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세 기 말일 정도로 고기와 우유는 귀한 음식이었다. 게다가 척박 한 석회암 토양의 지중해 인근에서는 염소나 양처럼 작고 생명력 강한 가축을 키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배고픈 로마인은 자신보다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 빛나는 문 명을 만든 그리스인의 식탁에서 영감을 얻었다. 보리의 나라 그리스는 밀을 대부분 수입했다. 그리고 바다에 무궁무진한 어패류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선은 쉽게 상한다. 그리스인은 생선을 소금에 절인 액젓 가로스garos를 만들었다. 가로스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로마인은 그리스 신화에 기초해 로마 신화를 만들었듯이 가로스를 토대로 가룸을 만들었다. 가룸은 멸치를 비롯한 각종 생선에 소금을 넣어 만들었다. 주로 여름철에 3개월 정도 햇빛 에 노출해 발효시켰는데, 엄청난 냄새로 악명이 높았다. 발효 뒤 맨 위에 뜬 맑은 갈색 액체를 걸러낸 것이 가룸이다. 가룸을 따르고 남은 생선 찌꺼기를 알렉allec이라고 불렀는데, 알렉으 가장 값싼 서민 음식이었다. 가룸은 지중해 사람들의 지혜가 만든 지중해 경제의 산물이었다.
- 영어 케첩의 어원은 중국 푸젠성 방언으로 '생선으로 만든 소스'를 의미하는 꿰짭姓에서 유래했다. 17세기에 등장한 케첩은 굴·생선·계란 흰자 등을 넣고 발효시킨 일종의 생선젓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버섯 · 호두 등을 이용한 새로운 소스가 등장했고 이 소스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실용적인 영국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이 소스를 발견하고는 이를 이용하면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 다. 그래서 이 소스를 유럽에 전파했다. 유럽에서는 토마토를 이용한 새로운 케첩이 만들어졌다. 기름진 요리를 즐겨 먹던 19세기 미국에서 토마토케첩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지금은 마치 케첩이 미국의 소스인 것처럼 생각할 정도다. 중국에서 는 미국이 표준화시킨 토마토케첩을 양가장洋書·번가장語市書 이라는 별도의 말로 부른다. 토마토케첩의 재료는 제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토마토 과육에 정향clove · 계피·후추·고추·마늘·육두구 등을 넣고 조린다. 제품에 따라 많게는 17종이나 되는 향신료를 쓰기도도한다. 서양인에게 이런 향신료는 대항해시대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토마토 역시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케첩은 소아시아의 생선젓에 취향대로 허브와 향신료를 넣 고 참치와 고등어로 만든 로마의 가룸과 많이 닮았다. 로마는 지중해를 통해 얻은 빵과 가룸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지중해는 로마의 젖줄이었다. 서양인들은 로마가 어디서 어떻게 젖과 꿀을 얻었는지 잊지 않았고, 가룸을 부활시켰다.
- 수도원에는 중세에 보기 드문 잉여생산물이 쌓이기 시작했 다. 로마 시대에는 콜로세움보다 큰 식량 창고를 능수능란하게 만들었으나 그런 건축 기술이 없었던 중세 수도원은 잉여생산물이 변질되거나 손실되기 전에 가공해 팔아야 했다. 그들의 선택은 맥주였다. 그러나 빵을 액체로 만든 맥주는 보름도 안 되어 변질되기 일쑤였다. 중세의 도로 환경을 고려하면 그들은 맥주의 보존 기간을 늘려야 했다.수도사들은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다가 늪지대에서 자라 는 뽕나뭇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홉을 찾아냈다. 9세기 수도사 들은 홉을 넣으면 맥주의 맛이 상큼해질 뿐 아니라 보존 기간도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수도원은 홉을 넣은 맥주를 유럽의 방방곡곡에 팔기 시작했다. 로마 시대 이후 흔적만 남았 던 유럽의 길이 수도원 맥주를 실은 수레를 따라 다시 모습을드러냈다.
- 봉건제가 정착되고 이민족 침입이 잦아들면서 11세기에는 배 고픔에 대한 공포가 현저하게 누그러졌다. 넉넉해진 먹거리 덕 분에 인구도 급등했다. 볼로냐 ·케임브리지 · 파리 · 마인츠 등 에 대학이 생겨났다. 대학은 아랍인들만 읽었던 그리스·로마 의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500여 년간의 암흑 끝에 빛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교회는 암흑을 택했다. 중세 초기에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설파했던 교회가 변심했다. 중세 교회가 누려온 열매가 너무 달콤했던 탓이다. 교회는 1077년 이탈리아 카노사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굴복시키며 유럽 최고의 정치권 력임을 증명했다. 그들의 욕심은 정치에만 미치지 않았다. 교 회는 왕보다 넓은 토지를 가진 대지주이자 유럽에서 보기 드문 지속 발전 가능한 상공인이었다. 중세 교회는 규모가 작을 뿐이지 20세기 등장한 스탠더드오일이나 포드자동차 같은 독점기업과 유사했다. 수도원은 청빈의 삶을 버리고 농노들과 소작 계약을 맺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곡식을 빻고 빵을 만들고 술을 빚는 일도 교회가 독점하기 시작했다. 로마법에 따라서 물레방아는 토지를 가진 사람의 소유였다. 방앗간 주인은 물레방아를 교회나 영주에게 바친 뒤 고용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재산을 빼앗긴 방앗간 주인은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곡식의 양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모래를 섞기도 했다. 종교가 앞장서서 지역 사회에 뿌리 깊은 불신을 조장한 셈이다. 장터를 여는 이권 역시 교회가 영주와 함께 독점했으며 다리나 성문을 지나는 사람 에게 통행세를 걷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전리품으로 타락했다가 결국 이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갈취로 돈을 벌던 중세 교 회도 비슷했다. 외부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페스트가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것이다.
- 유럽인이 청어를 많이 먹은 데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양인이 고기를 손쉽게 접하게 된 것은 19세기 냉동선이 발명되면서다. 그전까지 붉은 고기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게다가 유럽은 후추 등 향신료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 요리는 지금과는 다 른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염장 육류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염 장 생선은 위도 탓에 낮부터 컴컴해지는 북유럽의 겨울철을 지 탱해주는 긴요한 음식이었다. 발효를 하면 원래보다 풍부한 맛 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염장하면 맛이 없어지는 육류와 큰 차 이였다. 지금도 스웨덴에서는 수르스트뢰밍 sutstromming이라는 염장 발효 청어를 즐겨 먹는다. 이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냄새가 고 약한 음식으로 선정되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발효 가스의 폭 발 위험 때문에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의 비행기 반입을 금지하 기도 했다. 그래도 스웨덴 사람들은 빵에 수르스트뢰밍을 올려 별미로 즐겨 먹는다.
- 청어의 수요 증가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다. 부활절 등 각종 종교적 행사를 앞두고 소고기나 가축의 육식을 금지하던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통 탓에 염장 청어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청어의 수요 증가는 필연적으로 소금 거래량을 늘렸다. '배 위에 올라오면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등 푸른 생선을 오래 두고 먹으려면 염장이 필수기 때문이다. 청어 염장에 사용된 최초의 소금은 폴란드 등 동유럽 내륙지역에서 나는 암염이었다. 이 암염을 나르면서 북유럽의 교역로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교역로는 남유럽의 해상 무역로와 함께 유럽의 주요한 상업 루트가 되었다. 이 상업 루트는 이슬람 제국의 무역로와 연 결되면서 북유럽 국가에 중국·인도 등 다른 대륙의 상품을 전 달했다. 암염의 무역로를 따라 북유럽의 핵심 상품인 모피·목재·구 리 등이 유럽 시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금과 청어가 생존 필수품이라면 모피는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동양의 비단이나 도자기에 견줄 수 있는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이 때문에 모피 는 유럽 왕과 귀족의 주요 자금원으로 사용되었다. 유럽의 시장은 이슬람 시장과 연계되었다. 바그다드 시장에서 북유럽의 모피를 살 수 있었고 북유럽에서도 아랍의 향신료와 설탕, 동 양의 도자기와 비단을 구입할 수 있었다.
- 초기 자본주의 네트워킹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영국인은 자국 상품을 사지 않던 중국에 마약을 팔았고 영국보다 면사를 잘 만들던 인도 기술자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피해 국가가 항 의하면 전쟁을 선포했다. 은행이 후원하고 국회가 인준하는 전 쟁에서 영국을 비롯해 유럽은 승승장구였다. 18세기까지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었던 중국과 인도조차 이들을 당해낼 수 없 었다. 중국과 인도가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유럽 국가를 제외 하면 유럽 국가의 오만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는 이 야기다. 세계대전으로 불린 유럽 국가 간의 엄청난 전쟁은 자본주의 초기부터 예정되어 있던 셈이다.
- 중세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변곡점은 스페인의 1492년 아메리카의 발견이었다(인류사 혹은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페인의 침략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는 경제사의 관점에서 발견이라고 쓰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 품 시장이라는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전 지 구적인 경제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인은 본의 아니게 몇몇 권역별로 운영되던 세계경제를 하나로 묶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발생한 상공업 혁명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그 계기는 우연처럼 보인다. 포르투갈의 형님 격인 스페인 역시 새로운 무역로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기꾼처 럼 보이는 벤처 사업가 한 명이 찾아왔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 스페인 왕실에서 투자를 해달라고 했 다. 그는 영국 왕 헨리8세Henry III에게도 투자 설명회를 열었는 데 거절당했다. 그래서 스페인에 온 것이다.
- 영국은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경제를 선보이고 19세기에는 세계의 공장' 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업이 발달했지만 경제 구조는 스페인의 노예무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은 1807년 인권을 이유로 세계 최초로 노예무역을 철폐했다. 흑인 인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서구 열강이 너도나도 플랜테이션 농업에 나서면서 설탕 가격이 떨어진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에서 나오는 설탕 · 향신료·차·고무·면화를 독점으로 싼값에 확보해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기계로 가공해 공급하는 식민지 의존 경제 시스템이었다. 말이 공업 국가였지 영국 경제의 기초는 식민지형 플랜테이션 농업 생산물이었다. 바다를 지배한다는 자만감은 16세기 스페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눈을 가렸고 영국의 자본가들은 혁신을 등한시하는 부자의 저주에 빠졌다. 반면 미국과 독일 같은 후발 국가들은 식민지가 거의 없었 다. 그들은 영국처럼 식민지 플랜테이션에 의존한 경공업 대신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석유 기반 내연 기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쫓아낸 넓은 국토에 미친 듯이 철도를 깔았다. 영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미국 철도에 투자했고 미국은 철강과 기계 산업을 발 전시켰다. 중공업 중심으로 발전한 미국의 공업 생산량은 19세기 말 이미 영국을 초월했다. | 미국과 독일이 유럽 귀족들이 장난감 취급했던 내연기관 자 동차를 만들려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국은 자동차는 마차보다 빨라서는 안 된다는 '붉은 깃발법Locomotiv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말도 안 되는 법은 무려 30년간 지속되었다. 이 법안은 내연 기관 분야에서 영국이 미국이나 독일에 비해 뒤처지게 했다. 후추와 설탕 같은 아열대 식민지 농업에 의존한 초기 자본주 의경제는 대량생산 · 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자본주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유럽 국가들이 깨달은 것은 두 차례 의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영국·프랑스·스페인 · 네덜란드 등 의 지배에 신음하던 제3세계 식민지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뒤 대부분 해방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국가가 폭력으로 이식된 자본주의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저개발국가로 남아 있다. 후추와 설탕이 밀고 끈 자본주의가 마냥 달콤하지 않은 이유다.
- 광고는 미국 노동자 계층에게 자동차와 집을 소비하기만 하면 중산층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19세기 싱어 재봉틀이 최초로 고안한 할부 제도는 이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환상의 최전선에 있 던 전위부대는 코카콜라였다. 코카콜라 역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1920년대 미디어에 의해 탄생한 스타들과 비슷한 존재였다. 코카콜라는 남아메리카의 코카잎과 아프리카의 콜라잎으로 만 든 미국 남부 지역의 민간 약품 중 하나였다. 코카잎에 든 마약성분이 진통이나 피로 해소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의약품에 매기는 세금을 음료수에 매기는 세금보다 높 이자 코카콜라는 코카잎 성분을 빼버렸다. 그리고 '진통’, ‘강장' 대신 '상쾌함', '행복'이라는 단어로 슬로건을 바꾸었다. 본질은 가고 거죽만 남은 셈인데 미국 대중은 본질과 상관없 이 코카콜라에 열광했다. 광고 덕분에 물로도 풀 수 없는 갈증을 콜라가 풀어준다고 소비자가 '욕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가치가 없는 코카콜라에 다른 소다수에 없는 상쾌함이 있다는 신화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기업이 코카콜라의 마케팅 기법을 바이블로 삼게 된 이유다. 코카콜라의 광고에 대한 집착은 오랜 전통이었다. 1886년 코카콜라를 만든 존 펨버턴 John Pemberton은 한 해 뒤 동업자와 상의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한 뒤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2만 5,000달러가 있다면 2만 4,000달러를 광고비로 쓰고 나머지로 콜라 원액을 생산할 거야. 그렇게 하면 부자가될 수 있어.”
- 다이아몬드가 영원한 사랑을 뜻하게 된 것은 1947년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의 광고 때문이다. 미국 청년이 1,500만 명 이나 파병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적으로 결혼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드비어스는 그런 예비부부에게 다이아몬드를 판매하고 싶었다. 광고를 맡은 회사는 '다이아몬드 영원한 사랑의 증표'라고 콘셉트를 잡았고, 이 광고는 미국 젊은이뿐 아니라 전세계의 젊은이에게 기존에 없던 욕망을 만들어냈다. 다이아몬드 반 지가 결혼식에 쓰인 유래는 1477년 오스트리아 막시밀리안 대 공(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다)이 부르고뉴의 마리 공주에게 청혼하면서부터였다. 마리는 프랑스 일부와 벨기에·네덜란 드·룩셈부르크에 이르는 영토의 상속인이었다. 미모도 상당 해 당시 유럽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다. 이런 세기의 결혼식을 후원했던 사람은 유럽 광산업의 큰손이었던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이었다. 500년 동안 대중은 전혀 몰랐던 유럽 왕족의 결혼 관습을 미국의 광고가 확산시킨 것이었다.
- 지금 우리는 과학의 초기 성공이 가져다준 기분 좋은 술기운이 아니라 다음 날 아침에 찾아온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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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세대유감

사회 2020. 7. 22. 08:14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마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니체)
- 우리는 사실 두 종류의 도덕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하나는 입으로는 외치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하지만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 너도나도 힘들었던 IMF 체제 시기를 나름의 능력과 운으로 헤쳐간 게 386세대다. 나라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 이들은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단이나 그 바로 위의 대리급이어서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했다. 회사마다 연봉 높은 선배, 임원들은 잘려나가고 신입직원은 뽑지 않으며 허리띠를 졸라 매던 시절에 386세대는 수년간 큰 어려움 없이 조직 내 위상을 키워갔다. 그 무렵 386 벤처 키즈도 대거 등장했다. 1996년 코스닥시장 개설과 1997년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 여기에 1980년대 벤처 1세대 선배들이 닦아놓은 토양 위에 이른바 '군단' 을 이뤄 등장했다고 당시 언론은 설명한다. 김범수(카카오, 66년생), 김정주(넥슨, 68년생), 김택진(엔씨소프트, 67년생), 안철수(안랩, 62년생), 이동형(싸이월드, 65년생), 이재웅(다음, 68년생), 전제완(프리챌, 63년생) 등이 대표선수로, 지금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 1990년 전후 과외 및 학원 허용, 수능시험 도입 바람을 타고 논술이나 입시학원, 유학원 등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거머쥔 이들도 대체로 386세대다. 널리 알려진 이들만 꼽 아도 손주은(메가스터디, 61년생), 이범(메가스터디, 69년생), 박정(박정 어학원, 62년생), 정봉주(외대어학원, 60년생), 정청래(길잡이학원, 65년 생) 등 적지 않다. | 심지어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Sports Screen Sex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독재정권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기 위해 쓴 우민화 정책) 중 하나로 프로스포츠가 태동(프로야구 82년, 프로축구 83년, 농구대잔 치 83년)한 덕을 본 스포츠 선수들 대부분도 386세대에 속한다. 선동열(63년생), 황선홍(68년생), 허재(65년생)와 같은 ‘전설’들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선수로, 감독으로 30년 넘게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음
- 문제는 30대, 40대의 그들에게 주어졌던 자리가 지금의 30대, 40대에게는 대물림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력 중의 권력 이라 할 수 있는 청와대를 살펴보자. 2003년 출범한 참여정부의 국정상황실장은 37세의 이광재(65년생)였다. 눈여겨봐야 할 것 은 참여정부에서 비서관, 행정관을 했던 인사들이 15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다시 비서관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에서 첫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을 지낸 백원우 (66년생)는 참여 정부에서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재직한 바 있다. 두 번의 청와 대 경력 사이에는 17, 18대 국회의원 경력도 있다. 2007년 참여 정부 대통령비서실 행사기획비서관으로 청와대를 나와 8년 동안 서울시 성북구청장을 지낸 김영배 (67년생)도 현재 백원우 후임인 민정비서관직에 있다.
- 386세대가 오롯이 자신들의 희생만으로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쟁취했다고 믿는 것은 오만한 채권자적 태도다. 1987년 거리에는 80년대 학번을 가진 20대 대학생만 있지 않았다. 명동 성당에 갇힌 시위대를 위해 도시락을 모아 건넨 계성여고 학생들 이 있었고, 시위대를 물심양면 도운 사제들이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행진을 벌인 아저씨들이 있었으며,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동참한 택시기사들과 흰 손수건을 흔드는 시민의 물결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김대중, 김영삼과 같은 정치계 거물도 있었다. 무엇보다 목숨을 빼앗긴 박종철과 이한열이 있었다. 민주화는 살아남아서 현재의 사회 중심 세력이 된 386만의 전 리품이 아니다. 기성세대의 지원과 시민들의 저항, 죽음으로써 역사가 된 적지 않은 386 동료들이 함께 모여 거둔 성공이다. 그러므로 20대가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눈감는다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왜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연봉 높은 대기업 정규직 취직에 열을 올리는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아직 386세대는 먼저 나서서 보여주거나 손을 잡 아주지 않았다. 그저 '청년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거나 '청년들이 교육을 잘못 받았다'고 말할 뿐이다. '청년을 위한 정치'는 정치 적 수사일 뿐이다. 청년을 위한 예산은 이름만 거창하게 붙었다. 결국 쪼그라들고, 정치 신인조차 키우지 않고 있다.
- 망탈리테란 사회를 특징짓는 신념이나 관념, 관습의 총체 또는 한 인간 집단의 습관적 사고 양식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집단 심성을 통해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행동을 꿰뚫어 볼 수 있다. 386세대가 강렬한 경험을 공유하며 망탈리테와 같은 공통의 성질을 타고난 듯 지니게 됐다면, 이를 '386 DNA'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386세대에게 DNA와 같이 새겨진 집단적 심성은 80년대 주류 트렌드가 되어, 당시 20대의 나이로 세상을 익혔던 모두에게 유행처럼 퍼졌다. 그저 30여 년 전, 돌아가는 나라 꼴에 한마디씩 섞었던 그들이라면 '민주화'를 입에 올리지 않 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그들 모두는 자칭 타칭 민주화 세력이 되어버렸다.
- 연령대에 따라 생각과 행동은 유사한 패턴을 밟는다. 10대 때 는 부모의 잔소리가 싫어 어떻게든 집을 떠나고 싶고, 30~40대 에는 성공에 급급해 가정을 돌보지 못하다가, 다시 50~60대에 는 자식들에게 잔소리하는 낙으로 하루를 보낸다. 젊어서는 혁명 을 꿈꾸는 진보주의자였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변화가 두려운 보수주의자로 바뀌곤 한다.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나이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이면 머리가 없는 것”이라는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의 지적은 예나 지금이나 들어맞는다. 나이가 듦에 따라 특정한 경향성을 보이는데, 이를 연령 효과 (age effect)라 한다.
- 이와 다른 코호트(cohort: 동년배) 효과도 있다. 코호트는 고대 로마 군대의 세부 조직 단위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들이 함께 훈련하고 생활하고 전쟁하는 과정에서 높은 내부적 동질성을 가졌 듯이 같은 시기를 살아가며 특정 사건을 함께 겪은 사람들의 집합을 뜻한다. 젊은 시절 특수한 경험을 공유한 세대는 그만의 고 유한 특징을 평생 안고 간다. 한창 정체성이 형성되던 때에 일제 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세대는 일본에 대한 반감과 익숙함을 동 시에 품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게 된다. 한국전쟁을 치렀던 세대 라면 누구라도 전쟁과 가난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386세대에게 그런 코호트 효과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이뤘다는 자부심을 꼽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배양된 조직화 능력, 함께 어깨를 걸고 밀어붙이면 끝내 이뤄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도 빠뜨릴 수 없다. 반면에 괴물과 싸우면서 닮아간 권위주의, 자부심이 변질돼 나타난 우쭐함과 함께, 실행보다 말이 앞서는 공허함도 386세대 안에서 풍겨 난다. 앞서 말한 교조적 성향도 코호트 효과에 따라 드러난 특징이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따로 있다.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오랜 기간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20세의 나이 로 대학생이 돼서 한국 사회의 한 축이 된 이들이 현재는 50대가 되었다. 그러한 386세대에겐 198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또 2000년대에 와서도 늘 스피커가 쥐어져 있다. 사회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낸 것을 넘어 사실상 오늘의 한국 사회를 설계해왔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386에 의한, 386을 위한, 386의 나라임. 도무지 늙지 않는 불로세대의 최장기 집권, 이것이 코호트 효과 관점에서본 386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 386세대에 대한 견제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점은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이들의 선배 격으로, '58년 개띠'로 상징되던 한국판 베이비붐 세대가 정년을 넘겨 사회에서 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눈치를 볼 대상마저 없어진 상황에서 386세대는 명실공히 한국 사회의 좌장이 되었다. 한데 안타깝게도, 이들에게는 반갑게도, 386세대의 퇴장을 채근할 후배 세대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들의 바로 아랫세대가 X세대쯤인데, 이 세대명이 된 'X'가 뭐라 정의하기 어렵다는 뜻일 정 도로 세대 존재감이 없다. 그 후는 1포, 2포, 3포로 이어지며 포기를 거듭하다가 이제는 N포가 된 세대로, 이들 세대의 영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어 있다. 세상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386세대를 위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1930년에 태어났으니까요. 태어난 그 순간에 나는 복권에 당첨된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워렌 버핏)
-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가 앞선 세대보다 더 많이 알고, 다음 세대보다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 (조지 오웰)
- 박정희 정권 아래서 보릿고개를 청산한 산업화세대에게 나름의 자부심이 있듯이 386세대에겐 '혁명적 낙관주의'가 있다. 전 쟁 피난민이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고군분투하여 끝내 가정의 번영을 이루었다는 영화 <국제시장)의 감동 코드와, 평범한 시민 들이 압제에 맞서 혁명을 이뤄냈다는 영화 〈1987>의 감동 코드 는 맞닿은 측면이 있다. 반면에 확연히 차이 나는 점 또한 있다. 바로 조직화다. 386세 대는 개인의 근면이 아닌 결집을 이룬 조직의 힘으로 승리감을 맛보았다. 특히 전쟁과도 비견될 만한 반정부 투쟁에서 대열을 정비해온 조직은 군대를 방불케 했다. 최루탄이나 쇠파이프 같은 무기가 서로를 겨누는 가운데 상대 진영의 정보를 빼오려는 프락치들의 첩보전조차 일상적이었다. 처음 접하는 상대에게는 경 계를 풀기 어려웠고, 같은 편으로 엮이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어 떻게 연결되는지 확인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러한 습성은 이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는데, 386세대의 인사법은 대개 “몇 학번이세요?”로 시작한다. 그렇게 상대방과 나 사이의 족보가 완성되면 이후엔 복잡한 일도 전화 몇 통화로 해결되고 만다. 오죽하면 학번이 없는 이에게도 그래 도 몇 학번쯤 되지 않겠느냐'며 있지도 않는 연결고리를 만들려 할 정도다.
- 1991년쯤부터 학생운동은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 운동을 주도했던 청년 학생들의 DNA는 분명 386세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90년대 이후 학생들은 승리의 경험을 맛보지 못했고 선배 세대가 구축했던 조직도 유지해내지 못했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이제는 존재감도 없이 대학을 다닌 이들의 미약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바꿔 말하면, 학생운동의 몰 락을 비껴간 386세대에게 비춰진 후배 세대는 '지질한 무리일뿐이다. 만약 누군가 1981년에 대학에 입학해 1990년 전후에 졸업했다면 그는 전형적인 386이다. 여유 있게 대학에 들어와보니 선 배들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기세등등하게 조직을 갖춰 학교 밖으로 영향력을 키웠으며, 마침내 민주화까지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새로 마련된 헌법에 따른 대통령 직선을 경험하고 우리 나라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을 관람하고 나니 대학생활이 끝나갔다. 바통을 넘겨받은 후배들이 판판이 깨지며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우리 땐 말이야...”로 시작하는 잔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386세대의 우월감은 그 어떤 세대와도 비교할 수 없다.
-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386에 묶인 이들은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로 함께 접어들며 동질감을 높여왔다. 젊었을 때는 경험을 공유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이가 들면서는 이익까지 공유 했기 때문이다. 이익을 공유하게 되자 세대 안의 차이는 시야 밖 으로 사라졌고 다른 세대와의 차이점은 눈에 띄게 부각됐다. 다 른 세대와 견줘보면 '우린 결국 한 배'라는 배타적 공동체성은 더욱 강화되어갔다. 모두가 한통속이라는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 는다. 눈앞의 불의에 항거하느라 젊음을 바치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 속에 고통스러워하는 386세대의 일원도 분명 있다. 민주화 과정에 한 획을 긋고도 잊힌 채 그때의 뜻을 반추해 살아가는 영웅들이 있는가 하면, 한껏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대학생 대열에 끼지 않았어도 묵묵히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수많 은 이들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80년대 뜨거운 젊음을 보낸 대개의 60년대 출생자에게는 그 차이를 상쇄하는 공통의 DNA가 넓게 퍼져 있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는 말이다. 자부심을 넘어 우월감 짙은 눈빛 속에 386 DNA가 담겨 있다. 수시로 편 가르기를 하다가도 끼리끼리 붙어다니는 그들의 문화 속에도, 능력에 상관없이 너무나 오랫동 안 자리를 보전하는 그들의 수완에도, 386 DNA는 숨어 있다.
- 사회운동이론의 대가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사회운동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대중의 동의(동원)'를 든 다(Tilly, 1978/1995).27 대중적 동의나 동원 없이 운동에 나서면 백전백패라는 설명이다. 틸리가 말하는 '동원의 역량'을 1987년 한국 상황에 대입해보면, 민주화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수파를 형성할 만큼 저항 세력의 자원 동원력이 향상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70년대 재야 운동가들이나 80년대 학생운동권의 힘, 혹은 몇몇 단체의 연합만으로는 6월항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뼈아프게 기억하는 이 들이 '밀면 종국에는 밀린다'는 확신으로 '전진'만 외칠 수도 없 었던 상황이다. 결국 또 다른 비극을 막고 형식적이나마 독재에 종언을 고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동의가 광범 위하게 형성된 데 기인한다.
- 경제 호황 속에서도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던 대학 졸업자들은 학원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반 (反)체제 정서를 품었던 대학 졸업생 중 일부는 정부나 공공기관에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 공무원이 되거나 민간 회사에 입사해 회사원이 되는 것을 좀처럼 내켜 하지 않았고, 그러한 기관들 역 시 이들을 맞기 거북해했다. 그런 이들에게 후학을 가르칠 수 있는 '학원'이라는 곳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춘 직장이 돼주었다. 전교조의 해직 교사들에게도 학원은 피난처였다. 1989년 전교조가 창립한 뒤 이듬해까지 파면이나 해임 등의 이유로 학교에서 등 떠밀린 전국 교사들 수는 1,519명에 이르렀다. 전교조 는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합법 노조가 됐지만 그사이 많은 해직교사들이 자의든 타의든 사교육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80년 7·30 교육개혁조치 이래 10년 만에 다시 문을 연 학원들은, 체제를 정비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유능하고도 준비된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도 학원 성행에 일조했다. 88서 울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너머 넓은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어 해이 자유한되자 미국이나 동남아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하나둘 생겼다. 시장에 돈까지 풍족했던 때 아닌가. 문제는 언어였다. 세계 공통어라는 영어만 해도, 그저 쓰기와 읽기로 구성된 학문 정도로 알던 이들에게 회화(會話)는 생소하기만 했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머리가 아파질 무렵, 다행히 이들의 두통을 진정시켜줄 곳들이 생겨났다. 영어회화 학원이었다. 지금에야 시골학교에도 원어민 선생님들이 있다지만 당시에는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름도 생소한 동아시아 반도의 나라 강단에 설 다른 피부색의 강사가 존재할 리 없었고, 역시나 대학을 졸업 한 사회 초년생들이 학원에서 환영받았다. 학원이 동네 공부방 수준을 벗어나던 그때를 기점으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사교육은 점차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사교육시장은 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 사교육 시장에 투신했던 일부 386세대의 반성도 있었지만 항 변의 목소리 또한 작지 않았다. 개인의 안위를 위해 학원에 발을 담근 게 아니라고 했고, 사교육 시장은 자신들이 키운 게 아니라 의도치 않게 '커진 것이라고도 했다. 또 공교육에서 찾지 못 한 희망을 사교육에서 일군 측면도 있지 않느냐고 변명했다. 하 지만 386세대와 종종 비교되는 프랑스의 68세대가 대학 서열 화를 혁파해 보편적 교육 기회를 넓힌 것을 떠올려보자. 사교육 시장의 성장에 발맞춰 병세가 깊어진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에 386세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 자식의 혀를 절제하고, 우리말도 서투른 아이를 해외로 돌리 며, 부른 배를 잡고 출산에 임박해 아예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이 들의 연령대를 헤아려보니 공교롭게도 386세대다. 1980년대 대 학생활을 하고 1990년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뒤 수년이 흘러 가정을 일구고 아이를 낳고 기른 이들의 새로운 목표는 '더 잘난 자식 만들기'로 수렴된 것이다. 조기유학의 유행 속에 부인과 자녀를 해외로 보내고 홀로 남아 돈을 버는 '기러기 아빠'도 이때부터 하나둘씩 등장했다. 2004년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그해 4월까지 해외의 가족이나 친척에 게 보낸 증여성 송금 등의 규모는 5조 원을 넘겼는데, 이는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20% 이상 늘어난 수치다. 조기유학과 기러기 아빠 현상은 더는 경제력이 있는 일부 특권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 파란 눈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한 프랑스인 지리학자 발레리 줄 레조(Valerie Gelezeau)의 『아파트 공화국』(2007)에는 아파트를 통해 부를 축적한 표준적인 한국인의 방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터뷰 대상자 중 누구도 본인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고 증언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이 재산을 불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는 사실에 모두들 깊이 공감한다. 물론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386세대 이전에도 있었다. 40~50 년대생 역시 서울 강남과 목동, 상계동 등의 신시가지 개발을 자 산 증식의 호재로 활용했다. 하지만 그 기회는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개발 정보가 권력과 그 주변부 위주로 돌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세대 내 양극화를 심화하는 한 원인이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가 가운데 최고의 노인 빈곤율, 그리고 최고의 노인 자살률이 이를 방증한다.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운 좋게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바로 386세대다. 그들은 균질화한 부동산 개발 정보를 이용해 앞선 세대보다 더욱 기민하고 대담하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추월차선에 올라탔다. 다른 세대와 달리 386세대 구성원들은 차별 없이 아파트 구입에 나설 수 있었다. 점차 투자와 투기의 경계도 모호 해졌다. 386세대가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 때쯤 시장은 이미 과 열되어 있었지만 아직은 베팅을 해볼 만한 게임판이었다. 이들의 생애 주기에 맞춰 정권은 사탕발림을 하듯 이들에게 게임판의 VIP 입장권을 선물 꾸러미로 안겨줬기 때문이다. 이 200만 호의 주인을 가릴 '아파트 게임'에 새로 입장한 386 세대는 선배 세대들과 비교해 유리한 두 가지 무기를 손에 쥐었 다. 바로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주택청약제도(아파트 분양제)와 주택금융규제 완화정책이다. 청약제도는 1977년 도입된 이후 현재까지 4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나라 아파트 정책의 근간이 돼왔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 에서 서울의 과밀화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주택 문제 해소는 정권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딱 관심까지였다. 저소득층의 주택문제를 해소하려면 대규모 공공임대주택 건 설이 정공법이지만 여기에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 다른 꾀가 필요했다. 정권은 민간의 주머닛돈을 눈여겨봤다. 우선 집을 사고 싶은 국민들에게 매달 일정한 액수의 청약저 초을 강제했다. 정부와 주택은행은 그 청약저축액을 모아 국민주택기금을 만들고 기금 일부는 토지공사 (토공)에게 건네져 개발용지의 기초 공사를 하는 데 쓰인다. 또 나머지 기금의 일부는 주 택공사(주공)와 건설사가 저금리로 빌려 아파트를 짓는 자금으로 사용한다. 국민들은 청약통장으로 아파트 분양을 신청해 당첨을 받는다. 무주택자일수록 당첨 확률은 높다. 당첨자는 계약금, 중도금, 잔금이란 명목으로 아파트 건설 비용을 연이어 지불한다. 건설사는 그 돈으로 차례차례 아파트를 올린다. 아파트 실물은 한참이 지나야 보인다. 국민들로선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집에 적지 않은 목돈을 오랜 시간 주기적으로 태 워야 한다. 불안할 수도 있지만 분양가가 주변의 시세보다 저렴 하다면, 주판알 튕길 필요도 없이 무조건 남는 장사다. 이것은 분 양가 상한제가 베풀어준 은전이었다. 도시연구자 이은은 “한국인 들이 아파트에 열광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순전히 경제적 이유" 라면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아파트를 분양받은 가구는 중간 계급으로 편입되고 체제의 수호자가 된다”고 설명한다. 1990년대 중반, 386세대는 정부로부터 두 번째 선물을 받았 다. 주택금융규제의 완화다. 분양가 상한제가 있다 해도 아파트 는 여전히 종잣돈이 있어야만 덤벼들 수 있는 대상이었다. 밑천 이 변변치 못한 이가 아파트를 장만하고 싶다면, 미래의 소득을 당겨야 하는 수밖에 없다. 빚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미래 소득을 당겨 땅과 아파트에 묻을 수만 있다면, 빚의 부담을 상쇄 하고도 남을 열매가 맺혔다. 이를 가능케 할 부동산 담보대출규제 완화는 외환위기를 1년 앞둔 1996년에 이뤄진다.
- 386 세대의 부동산 불패 신화가 독재정권의 정책 덕분이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박정희 정권이 만든 청약제도와 분양가 상한제, 그리고 노태우 정권의 주택 200만 호 건설정책과 1기 신도시 계획의 합작품이 386세대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제적토대가 되었다. 그 과정에 누군가 돈이 부족하다면, 주택금융규제의 완화 흐름이 이를 보완해주기도 했다. 부동산 정책의 3종 세트인 공급과 금융, 세제 가운데 세제를 제외한 나머지 2개는 특혜에 가까웠다.
- 전세는 공적 주택금융시장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적 주택금융시장이 먼저 발달해 나온 결과물이다. 전세는 임대인에게 주택가격 상승에 따른 이익과 인플레이션에 따른 위험 감소라는 이득을 준다. 임차인으로서는 보증금을 손실할 위험이 적고 높은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점이 매력적이다. 이 때문에 소득 대비 주택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이 안정돼 있고, 시중금리가 매우 높았던 시절에는 장점이 부각되는 상품으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주택가격이 고공행진하면서 전세가격이 매매가의 50~70% 수준으로 형성되는 요즘은 상황이 다르다. 임차인은 전세금마저 구하기 어려워 아등바등하는데, 임대인은 임차인이 가까스로 마련한 돈을 0%의 이자율로 빌려 그 집을 산 격인 까닭이다. 결과적으로 윗세대가 아랫세대로부터 공짜로 돈을 빌려 부동산 시세차익을 보고 있는 셈이다. 젊은 세대는 평생 주택시장의 주변부만 맴돌지 모른다. 이른바 '세대 간 젠트리피케이션’이다.
- 고용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년층과 청년층은 동병상련의 처지 다. 그럼에도 '질 낮은 일자리라도...’가 공통의 목표가 되어버린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분노의 총구가 맞춰져 있다. 자기가 처한 여건이 열악하니 만만한 상대만을 골라 얼마 안 되는 몫이라도 더 챙겨보려는 심산과 다르지 않다. 이 아귀다툼에서 386세대는 비교적 한 발 떨어져 있었다. 취업시장에 나왔을 때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있지도 않았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취업을 시작했고 다른 세대와 비교해보면 IMF 외환위기 때도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 다. 현재까지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는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거나 현 시점에서 봐도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 노동자를 쉽게 쓰고 버릴 수 있게 된 건 IMF 외환 위기 당시의 고육지책 때문이었다. 이후 경제 사정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했지만 노동시장 유연화의 흐름만은 한 방향으로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다. 불가역적이다. 이 정도로 노동시장 이 유연해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사회안전망이 갖춰져야 하지 만, 그러지 못했다. 결과는 질 낮은 일자리의 양산, 그리고 더 나 은 계층으로 올려주는 사다리의 붕괴로 이어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비정규직 비중은 법과 제도의 둑이 뚫린 뒤 2001년 26.8% 2003년 32.6%, 2005년 36.6%로 차오른 뒤 현 재도 30%대 중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엔 이른바 ‘중'규직이라고 불리는 무기계약직은 빠져 있다. 쉽게 잘리지 는 않으나 급여와 복지혜택, 승진에서 기존 정규직 직원에 비해 크게 차별을 받고 있어,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이들이다. 민 간은 물론 공공기관까지 무기계약직 채용을 확대하고 있어, 이 들까지 포함할 경우 '질 낮은 일자리'의 실제 비중은 훨씬 늘어 난다. 이러한 현실은 각 세대에게 공평하게 적용됐을까. 한국노동연 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3년 당시 50대의 비정규직 비 율은 40%였다. 그러나 2018년 현재 386세대가 중심이 된 50대 의 비정규직 비율은 34%로 떨어졌다. 반면 그 윗세대나 사회 초년생의 비정규직 비율은 과거보다 더 높아졌다. 60대 비정규 직 비율은 2003년 65.9%에서 2018년 67.8%로 올랐고, 30세 미만의 비정규직 비율 또한 2003년 31.8%에서 2018년 34.6%로 오른 것이다. 귀천이 나뉜 노동의 비뚤어진 그림자는 스멀스멀 바닥을 넓혀왔지만 세대에 따라 그 짙음의 정도는 달랐다. 여기에 더해 2009년 공공기관 개혁 바람 속에 오로지 신입사원들 초임만 깎인 사례, 그리고 최근 불붙은 정년 연장 논의까지 떠올린다면 386세 대가 누린 '다행은 단지 우연히 주어진 것만은 아닌 듯하다.
- 인생은 선도 악도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선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악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미셀 드 몽테뉴)
-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 (율리우스 카이스르)
- IMF로부터 금융지원을 받은 1997년을 기점으로 기존 체제에 올라탄 자들과 체제에서 떨궈진 자, 올라타보지 못한 자들이 나뉜다. 체제에서 떨궈진 어떤 자들은 직장을 잃고, 집을 담보 잡혀 빼앗기고, 가정을 잃었다. 주로 베이비부머라 불리는 1950년대생이 큰 타격을 입었다. 올라타보지 못한 자들은 바로 이들의 자 식 세대인 1980년 언저리에 태어난 이들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여름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은 역대 최악의 청년 실업률 앞에서 좌절했다. 고등학생 10명 중 7명이 대학에 가던 이 당시 '대졸 실업자' 이슈는 2000년대 초반까지 언론의 단골 소재였다. 수년 만에 기존 체제에 올라탄 이들의 후배가 되기는 했지만 기업들의 허리띠 졸라매기는 채용 규모 대폭 축소와 비정규직 확대로 이어졌다. 우석훈과 박권일은 2000년대 중반에 비정규 직을 전전하는 20대들을 가리켜 '88만원 세대'라 명명했다. 이들 의 문제제기에 한국 사회는 '88만원 세대 동정론'으로 응답했지 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나쁜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의 몫을 갉아먹는다.
- 행안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19년 현재 386 세대에 해당하는 50대가 865만 명가량으로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비대하다. 50대를 꼭짓점으로 40대 843만, 30대 719만, 20대 681만으로 줄고 있으며, 60대 인구도 한국전쟁과 전후 보 릿고개의 영향으로 607만 수준이다. 1960년도에 태어나 1980년대 대학 학번을 얻은 이들은 865 만 가운데 293만가량이며, 이 가운데 187만 명은 4년제 대학을 나왔다. 1970년대 학번을 가진 사람들이 4년제 종합대학과 2년 제 전문대학을 통틀어 89만에 불과한 것에 비교해볼 때 3배나 많은 수의 대졸자가 386세대의 중심부를 차지했다. 이들은 자연 스럽게 1970~1980년대 경제호황기를 거치며 늘어난 일자리의 일부분을 차지했다. 꼭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던 곳을 서서히 대졸 386세대가 채워갔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은행에 들어가던 시절이 막을 내린 게 바로 386세대가 사회로 나오 던 1980년대 중후반부터다. 이때부터 시작된 대졸자 중심 경제는 이후 세대가 대학을 통 한 '개천의 용'을 꿈꾸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학은 사실상 '필수재'가 되다시피 해 2005년에는 대학진학률이 82% 까지 올랐다. 2005년을 정점으로 서서히 내림세를 보여 2018 년에는 69.7%까지 내려왔으나 60% 초반대의 캐나다, 일본이나 45% 이하의 독일, 프랑스 등에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대학이 취업을 보장하고, 취업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되는 인 생 공식이 무너지자 대학진학률도 함께 떨어지고 있다. 취업이라는 고리가 약해진 까닭이다. 대학진학률이 30%대에서 80%대에이르는 20년 사이 취업준비생들의 능력과 욕구는 상향 평준화됐지만 이른바 화이트칼라 직장,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져 능력과 보상 간 괴리가 커지고 있다.
- 털끝만큼의 권력이라도 있다면 한 톨도 낭비할 수 없다는 집 착,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경계가 흐릿한 지대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염치, 결국 불의보다 불이익에 민감해진 우리 사회 양심의 모습을 386세대는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정도쯤이야' 하는 허술한 양심의 벽은 지난 30년간 시대가 부여해준 호의와 그 속에서 이룬 성공스토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건 반칙이야 라고 외치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 역사적 성공의 반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에서 비롯되었고, 역사적 실패의 반은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아놀드 토인비)
- 10년간의 처절한 사회적 전쟁의 결과, 한국의 60대 주류는 태 극기로 상징되는 극우파 세력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30대에 이미 여러 사회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금의 50대, 그리고 그 핵심에 있는 386은 바야흐로 인생의 절정을 맞고 있다. 한국이 50대에서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맞도록 설계된 사회라서 그런 가? 젊은 세대는 누리지 못하는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제가 결합한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준 절정이다. 연공서열제의 효과를 온전히 누린 집단은 지금의 50대와 60대 정도다. 그 뒤로는 종신고용이 보장되는 직장 자체가 줄고, 임금피크제가 도입되면서 클라이맥스 시점 자체가 다르다. 게다가 비정규직의 전면화 때문에 20~30대가 살아가야 하는 경제 여건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르다. 지금까지 경제 발전의 수혜를 본 유신세대와 386이 서로 경쟁 하며 견제하던 시기였다면, 이제 그 축 가운데 하나가 사실상 붕 괴한 상태다. 좁은 의미든 넓은 의미든, 80년대 대학을 다녔고, 운동권이었고, '엘리트' 역할을 했던 386은 위쪽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라고 말하는 것의 상당 부 분은 이념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박정희를 좋아하거나 전두환을 싫어하는 것이 정치적 성향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엄청나게 이념적이고 정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문화적인 속성이 강하다. 그러나 위쪽에서 생겨나던 견제가 사실상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지금, 아래쪽에서 견제의 힘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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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일본

사회 2020. 7. 21. 08:25

- 과거 일본의 경제성장기에는 불평 없이 묵묵히 일만 하고 조직에 충성하는 이러한 일본인의 민족성이 미국과 경제패권을 두고 경쟁할 정 도로 강력한 제조업의 일본을 건설케 한 원동력이었지만 지금의 글로 벌 경제에서는 완벽함보다는 스피드, 경직된 조직보다는 유연한 조직, 아무 표현도 안 하는 것보다는 강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그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일본 경제의 장래는 밝지 않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일본인의 민족성을 갑자기 변화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꽤 장기간 일본 경제의 암흑기는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일본에서 회의를 많이 하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목적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무리 옳다고 생각하는 기획안에 대해서도 그 기획이 실패했을 경우에는 누구든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일본의 조직 문화는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에 실패 에 대한 책임회피'는 일본인 누구나 가지고 사는 필수 생존스킬이 된 것이다. 회의를 하게 되면 적게는 두세 명, 많게는 수십 명이 모이게 되고 회 의를 통해 대단한 결론을 도출해내지 못해도 의논했던 안건이나 기획 안에 대해서는 회의 참석자 전원이 책임을 나눠 가지게 된다. 형식적인 회의라고 할지라도 회의 소집자의 기획안은 여러 사람이 모여 회의를 거친 기획안이 되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실패해도 그 실패의 책임을 자기 혼자 지게 되는 일은 피할 수 있다. 일본인에게 회의는 사소한 책임조차 나 혼자 지지 않겠다는 의지표명인 셈이다.
-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아도 사무라이 칼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해왔던 일본인은 언제 칼에 베여 죽더라도 누구를 원망해서도 안 되고 누구에게 하소연해서도 안 된다는 ‘감정의 침묵'을 강요당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죽는 것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고 아무런 죄를 짓지 않 아도 죽게 되는데 슬퍼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는 사람이 칼에 베여 죽임을 당해 슬픈 감정을 드러내봤자 재수 없으면 나까지 죽을 수 있다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슬퍼하는 데에 에너지를 소비해봤자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무라이 사회 속에서 뼈저리 게 깨닫고 무의미한 감정소비를 안 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한다.
- 일본인은 오랫동안 사무라이 문화의 살벌한 칼날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언제든지 신속하게 태도를 전환하 는 것에 익숙한 민족이다. 신으로 숭상받는 천황이 항복을 발표하고 맥아더 장군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면 이는 재빠르게 태도 전환을 시도하기에 충분한 시그널이 된다. 일본인은 천왕의 태도를 보고 이제부터 '미국 사마(님)는 갑, 일본은 을'이라는 명제가 머릿속에 재빠르게 인 식되었고 뿌리 깊게 박혀버린 것이다. 그리고 7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국을 가장 높은 '갑'으로 모시고 있다.
- 일본인이 책을 커버로 덮고 다니는 행위에는 마치 남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내가 남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모두 차단하고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자신만의 보이지 않는 보호 막을 쳐놓고 아무도 그 보호막을 넘어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잘못 흘러가고 있는 사회를 바꾸려는 의지도 없고 바꿀 필요성도 못 느끼며 단지 자신의 사생활만 침해받지 않는다면 족하다는 인상을 준다.
- 일본인은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대단하지 않은 것을 대단한 것으로 신격화하여 포장하는 것에 능숙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최고의 초밥 장인으로 알려진 오노 지로 씨라도 신선하지 못한 싸구려 생선과 오 래된 정부미 같은 쌀을 가지고는 최고의 초밥을 만들 수 없다. 아무리 천하의 초밥 장인이 와도 회전초밥 체인점 주방에서 질 낮은 재료로는 '스키야바시 지로의 초밥 맛을 구현해낼 수 없다. 초밥의 맛을 결정하 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식재료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한국 요리는 품질이나 신선도 면에서 조금 떨어지는 식재료를 가지 고도 훌륭한 요리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조금 질긴 고기는 칼집을 내거나 파인애플, 사과 등에 숙성시켜 육질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 뻣뻣한 채소는 소금에 절여 숨을 죽이고 부드럽게 해서 사용한다. 신선도가 떨어진 생선에 식초를 뿌려 탱탱한 식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국 요리는 다양한 요리법과 요리사의 개인 역량에 따라 같은 식재료라도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요리는 좋은 식재료 없이는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없다. 모든 게 식재료의 신선도에 따라 달라지는 초밥을 생각해볼 때 초밥 장인은 반쪽짜리 요리사가 아닐까.
-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일본 군인을 죽이고 죄 없는 일본 시민 을 핵폭탄으로 희생시킨 미국은 일본 역사상 가장 저주해야 할 국가인 데도 일반 일본 시민은 물론이고 아베 총리까지 미국에 굽실대며 충성 한다. 일본이 경제적으로 잘나가던 시절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 호황 기를 구가하던 일본 경제를 붕괴시키고 이후 수십 년간 최악의 불경기를 겪게 했으며 장기 불황의 단초를 제공한 원흉 미국을 일본은 절대로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이 아닌 일본에게 아무 나쁜 짓도 한 적 없는 애꿎은 한국만 비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대규모 반미 데모가 일어난 역사가 없다. 이는 일본이 미국에 철저하게 굴복했기 때문이다. 핵폭탄 두 발의 위력에, 신처럼 모시던 천황폐하 앞에서 한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거만하게 악수를 청하는 미국 맥아더 장군의 모습에, 철저하게 굴복당한 것이다. 미국은 철저하게 '우리가 갑' 이라는 인식을 뼛속까지 일본인에게 각인 시켰고 일본은 그에 맞게 복종했다. 일본인에게 친절을 베풀지 마라. 친절을 베푸는 순간 당신은 '을'의 위치에 놓이게 되고 평생 당신을 우습게 여기고 이용만 할 것이다. 우리는 일본에게 있어 100여 년간 '을' 이었고 지금도 '을'이다. 이것이 과거의 한일문제를 둘러싼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사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또 이것이 우리가 불매운동을 끝까지 지속해야 하고 일본 산업으로부터 독립을 이뤄내야 할 이유이다. 우리 국민은 애국심으로 단 결하여 일본 경제 종속에서 벗어나고 통일 경제를 통해 일본을 압도하는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면 일본은 우리가 요구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우리 후손에게 '을의 역사'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든 국력을 모아 싸워나가야 한다.
- 이제는 일본 제조업의 정신이자 일본 경제를 이끌어온 모노즈쿠리 정신이 빛을 바래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과거에는 일본인의 건축이나 제품설계 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복잡한 구조를 지향하여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조차도 일부러 복잡하게 설계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는 일본인의 정신구조가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생산라인이나 기능 면에서 복잡한 사고방식이 투영된 설계는 효율적이지 못하고 예측 불가능한 불편함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은 현재 사회 여러 분야에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복잡함에 자신들이 불편함을 겪고 있는 자승자박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다.
-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큰 난관에 봉착하여 전혀 진전되지 않을 때 그 문제 자체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제기하거나 그 문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완전 새롭게 전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들을 강구한다. 예를 들어 학교시험에서 말도 안 되는 문제가 출제되었다면 우리는 문제 자체가 이상하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새로운 제품개발 도중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히면 원점으 로 돌아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인은 주어진 조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특성이 강하다. 아무리 문제 가 많은 과제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때론 바보처럼 그 문제에 파고들어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과거 일본이 개발한 소니의 워크맨, CD 플레이어, 캠코더 등은 모든 부품을 축소하여 개발한 제품이지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다. 나는 일본인의 주어진 조건 안에서 답을 찾는 습성과 평생 한 가지에만 파고드는 집요한 국민성이 노벨상을 받기에 특화된 일본인의 종특(종족 특성) 이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일본인이 엄청나게 뛰어나고 우수한 민족 이어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에 반해 한국인은 주어진 문제를 끝없이 파고드는 것보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에 재능을 보이는 민족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난방 문화인 온돌을 수천 년 전부터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 인류 최고의 문자체계인 한글의 창제,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음악 청취 개념을 바꾼 MP3 플레이어, 전 세계 여성들의 화장 문화를 바꾼 쿠션 팩트, 세계 최초의 PC방,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CDMA 통신방식, UHD 공중파 방송, 5G 이동통신, 페이스북보다 한참 앞선 네트워크형 인맥 블로그 싸이월드' 등은 한국인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실용화하 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앞으로도 한국인의 종특이 발현하는 시기가 오면 인류에 공헌하는 세계 최초의 제품을 다수 창조해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 아베 신조 씨의 인생은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의 힘으로 이룬 성과가 없다. 대부분 인생이 아버지, 할아버지의 배경을 등에 업고 총 리까지 오른 인물에 불과하다. 입시, 진학 등 누구나 겪게 되는 인생의 역경조차 자신의 의지로 돌파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유약한 정 신을 가진 인물이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헌법을 개정하고 군국주의 일 본을 만든다고 해서 한국에게 과연 어떤 위협을 줄 수 있겠는가. | 아베 총리는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비책 이 있는 것도 아닌, 순간순간 잔머리를 굴려 위기를 모면해가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일본의 어리석고 약해빠진 지도자가 우민화한 국민을 선동하여 전쟁을 하자고 해도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지금 이 그들을 밟고 도약할 큰 기회인 것을 인식하고 우리 내부의 결속에 집중하고 애국심으로 온 국민이 똘똘 뭉쳐 대응해나간다면 과거 일본이 누렸던 영광을 우리가 그대로 누릴 수 있는 미래가 도래할 것이다.
- 1960년대쯤에 건설된 고속도로, 터널, 교량 등 인프라의 보수·교체 작업과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경기장 및 부대시설 건설 등에도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고 있다. 게다가 초고령화 문제로 인한 고령자 연금 및 의료복지 비용, 후쿠시마 방사능 처리 비용, 쓰나미 피해 지역 재건 비용에도 막대한 세금이 투입되어 끔찍할 수준의 세수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이런 현실에 세계 최고의 부채국가인데도 일본중앙은행에서는 막대한 돈을 계속 찍어내고 있지만, 급수관 교체까지 적극적으로 손을 대기는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아직도 납 급수관을 통해 수돗물을 섭취하고 있는 지역이 많다. 또한 납 급수관 이외에도 사용연한 40년을 초과한 일반 주철로 만들어진 수도관도 시급히 교체해야 하지만 역시 세 수 부족으로 손조차 못 대고 있다. 아무리 정수시설에서 완벽한 수준의 정화 규정에 의해 정수한 물이 라고 하더라도 이 노후한 수도관을 통해 녹이 수돗물에 흘러 들어가면 최종 소비자에게 도착한 물은 녹과 납 성분을 함유한 위험한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녹을 방지하기 위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수도관도 많이 사용해왔는데 알루미늄 성분은 뇌 속에 축적되어 '알츠하이머, 일 명 '치매'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일본은 치매환자 비율이 2.33퍼센트로 OECD 평균 1.44퍼센트를 크게 넘어서며 세계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다. 싱가포르나 덴마크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약 600만 명의 치매환자가 현재 일본 사회를 짓누 르고 있다. 약 30년 후에는 치매환자 수 1,0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측되는 심각한 상황이다.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치매 발병이 결정되 겠지만 뇌에 축적된 알루미늄 성분에 의해 치매가 발병하는 비율도 상 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일본이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납과 녹, 그리고 알루미늄 성분뿐만 아니라 일본의 수돗물이 절대로 안전하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일본에서는 수돗물을 정수하는 과정에 서 대량의 염소無성분을 사용한다. 수돗물 정수과정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염소 성분을 사용하는 것이 일본이다. 또 일본은 수돗물 잔류 염소량이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최소 3배 이상이고 독일에 비하면 최소 30배 이상의 염소 잔류량이라 매우 충격 적인 수치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각 나라에서는 수돗물 정화 시에 사 용하는 염소의 사용량 상한치가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일본에는 그러한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 왜 일본인은 자국민이 먹는 식품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식품첨가물을 다량으로 사용하는 것일까? 이 또한 같은 이유를 들 수 있다. 오랫동안 '칼의 문화'에 지배되어온 일본인은 눈앞에 보이는 제품 자체만 좋아 보 이면 문제가 없다. 이러한 농약이 많이 사용된 농산물, 식품첨가물로 범 벅된 식품은 먹을 때는 예쁘고 맛있지만 그 악영향은 한참(수십 년 이상) 지 나서야 드러나고 그때가 되면 그 결과가 자신들이 사용한 농약과 식품첨 가물이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렇다.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게 가능한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건강에 나쁜 것도 사용 할 수 있다.
- 일본인은 평균수명이 세계 1위이지만 병상에 누워서 보내는 시간이 남성은 9.13년, 여성은 12.68년으 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80세까지 사는 일본 여성은 67세부터 병상에 누워서 약 13년을 보내고 난 뒤에야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병상에 눕기 전까지의 수명이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건강수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에 평균수명만 길다고 해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고 알츠하이머(치매)환자의 발병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일본에게 있어 '건강한 장수국가'라는 이미지는 이제 버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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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의 품격

인문 2020. 7. 21. 08:23

- 1937년 나폴레온 힐 Napoleon Hill의 저서 『부의 비밀』에 처음으로 소개된 '퍼스널 브랜드’ 개념은 1997년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에 실린 경영 전문 가 톰 피터스(Tom Peters의 칼럼 당신이라는 브랜드를 통해서 대 중적으로 알려졌다. 사실 비즈니스 이미지와 평판은 언제나 중요했지만 소셜 미디 어가 확산되면서 전에 없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과거에는 긍 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사람의 브랜드가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 히 제한적이었고,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혹은 직장 동료를 제외 하면 알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아주 세세한 정보도 온 세상에 공개되는 오늘날에는 부정적인 브랜드가 미치 는 파급력이 그야말로 엄청나게 커졌다.
- 지금 당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 감정을 얼마나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찬찬히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라. 다음 으로는 지금 그 감정이 내일도, 다음 달에도, 5년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라. 만약 아니요'라는 대답이 나왔다면 이제 그만 그 감정을 놓아줄 때다. 만약 상황을 개선 할 방법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되, 그렇지 않다면 신경 을 끄는 것이 훨씬 건강한 해결책이다.
- 샘 월턴은 '사업을 일으키기 위한 열 가지 원칙’ 중 두 가지를 커뮤니케이션 관련 항목에 할애할 만큼 원활한 소통의 힘을 중요시하던 인물이었다. 그중 두 가지를 소개한다.
원칙 1. 사업 파트너와 소통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소통하라. 정보가 많을수록 사업 이해도가 올라가고, 이해도가 올라갈수록 사업에 신경을 쓰게 된다. 일단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다.
원칙 2. 모든 구성원의 말을 경청하라. 그리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줄 방법을 찾아라. 조직의 위부터 아래까지 책임감 을 전파하고 싶다면, 그 안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솟아오르 게 만들고 싶다면, 구성원들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야 한다.
- 다른 사람과의 적절한 거리
첫째,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는 상대방에게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 45센티미터 정도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나눌 상대는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이므로 눈 맞춤을 포함한 비언어적 신호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근접 한 거리에서 직업적인 대화를 시도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적 인 공간을 침해당했다고 느낄 것이다.
둘째, 개인적인 거리Personal Distance는 45~115센티미터 사이가 적절하다. 친구 혹은 친한 동료와 악수를 나누거나 대화를 나누 기에 좋은 거리다. 관계에 따라서는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인사를 나누거나 자기소개를 하고 대화가 시작 되면 상대방에게서 조금 떨어진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지면 점 점 다시 가까워진다. 개인적인 거리에서는 상대방의 비언어적 신호를 명확히 읽을 수 있다.
셋째, 사교적인 거리 혹은 직업적인 거리social or Professional Distance는 115~335센티미터 사이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거리를 결정하는 가장 큰 기준은 당신의 지위와 역할이다.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동료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이 범주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지만, 회의를 진행할 때는 가장 먼 거리를 선택하는 편이 훨씬 낫다.
넷째, 공적인 거리 Public Distance는 335~425 센티미터 사이로 다수를 상대로 연설을 할 때 가장 많이 활용된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설자들은 발언에 힘을 싣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사용한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이 당신에게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관찰해보라. 만약 당신이 일부러 다가가거나 멀어진다면 상대방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여서 가장 편안한 거리를 찾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사교적·직업적 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기준인 115센티미터 정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 눈 맞춤 훈련법
시선을 들되 상대방의 몸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눈빛에 친근 함이나 개인적인 감정을 담지 말고 프로다운 시선으로 상대의 눈을 바라보아라. 대화를 할 때는 5초에서 7초 정도 시선을 마주한 뒤 잠깐 다른 곳을 보고 다시 눈을 마주치는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그러 면 상대를 의도적으로 관찰한다는 인상을 주는 대신 순수하게 대 화에 집중한다는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 만약 눈을 직접적으로 쳐다보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다면 이마 아래쪽이나 콧날을 바라 보아도 된다. 대화 시간의 절반 정도는 눈을 마주쳐라. 만약 직접 말을 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상황이라면 눈 맞춤 시간이 절반보다 더 길어져도 상관없다.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너무 길면 공격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짧으면 소심한 사람으 로 비칠 것이다.
- 적절한 단어와 거의 적절한 단어의 차이는 번개의 빛과 반딧불이의 빛만큼이나 다르다. (마크 트웨인)
- 사람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공격성이다. 원시시대에 는 공격성이 식량을 얻고 영토를 지키며 자식을 낳아줄 배우자를 획득하게 해주는 귀중한 능력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는 위협적인 성향에 불과하다. (스티븐 호킹)
- 기술은 좋은 하인인 동시에 나쁜 주인이다. (그레첸 루빈, 작가)
- 당신에게 고급회계학 강좌와 테이블 매너 강좌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망설이지 말고 후자를 택하라. (하비 맥케이, 작가)
- 사람들 대부분이 무시하는 사소한 매너를 지키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행동 덕분에 부자가 된다. (헨리 포드 시니어)
- “입을 열기 전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지금 하려는 말은 친절 한가? 꼭 필요한가? 진실한가? 침묵보다 가치 있는가?” 이 기준 에 미치지 못하는 말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사이 바바, 인도 성인)
- 나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과 행동은 잊어도 그때의 기분은 절대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마야 안젤루, 시인이자 소설가)
- 직문화는 그 조직의 리더가 용인하는 최악의 행동들이 모여 형성된다 (토드 휘태커와 스티브 그루너트, 인디애나 주립대 교수)
-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온다. (링컨, 미국 16대 대통령)
- 당신의 매너는 언제나 평가받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예상치도 못한 심사위원에게 큰 보상을 받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기준이 된다. (랠프 월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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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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